DP. Part 1. Chapter 4. The Messiah: His Advent and the Purpose of His Second Coming 2-3 THE FAITHLESSNESS OF JOHN THE BAPTIST – 세례 요한의 불신

Ⅲ. 세례 요한의 불신
3 . THE FAITHLESSNESS OF JOHN THE BAPTIST

위에서 상론(詳論)한 바와 같이, 당시의 제사장(祭司長)이나 전 유대인들이 세례 요한을 숭경(崇敬)하던 마음은, 그를 메시아로 생각하는 데까지 이르렀던 것이다(누가복음 3 장 15 절, 요한복음 1 장 20 절).
Many among the Jewish leadership and people of Jesus’ day had the highest respect for John the Baptist; some even thought of him as the Messiah.

따라서 만일 세례요한이, 자기가 바로 예수님이 증언하신 그대로의 엘리야라는 것을 선포하고 나섰더라면, 메시아를 맞기 위하여 엘리야를 고대하고 있었던 전 유대인들은, 이러한 세례 요한의 증언을 믿게 되어 모두 예수님 앞으로 나왔을 것임에 틀림없다.
Had John the Baptist announced that he was Elijah, as Jesus had testified, those who were eagerly waiting for the Messiah would have readily believed John’s testimony and flocked to Jesus.

그러나 끝내 자기는 엘리야가 아니라고 주장한 세례 요한의 하나님의 섭리에 대한 무지는 유대인들이 예수님 앞으로 나아갈 수 없었던 주요한 원인이 되었던 것이다.
Instead, John’s ignorance of God’s providence, which led him to insist that he was not Elijah, became the principal reason why the Jewish people did not come to Jesus.

세례 요한은 일찍이 자기는 물로 洗禮를 주지만, 자기 뒤에 오시는 이(예수님)는 불과 성령(聖靈)으로 세례를 주시기 때문에, 자기는 그의 신을 들기도 감당치 못하겠다고 증거하였다(마태복음 3 장 11 절).
John the Baptist testified to Jesus at the Jordan River: I baptize you with water for repentance, but he who is coming after me is mightier than I, whose sandals I am not worthy to carry; he will baptize you with the Holy Spirit and with fire. —Matt. 3:11

분만 아니라 요한복음 1 장 33 절을 보면 나도 그를 알지 못하였으나 나를 보내어 물로 세례를 주라 하신 그 이(하나님)가 나에게 말씀하시되 성령이 내려서 누구 위에든지 머무는 것을 보거든 곧 성령으로 세례를 주는 이(그리스도)인 줄 알라 하셨기에 내가 보고 그가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증거 하였노라고 한 세례 요한의 고백이 기록되어 있다.
I myself did not know him; but he who sent me to baptize with water said to me, “He on whom you see the Spirit descend and remain, this is he who baptizes with the Holy Spirit.” And I have seen and have borne witness that this is the Son of God. —John 1:33-34

이와 같이 하나님은 예수님이 메시아라는 것을 세례 요한에게 직접 교시(敎示)하셨고, 세례 요한 자신도 또 그렇게 증거하였으며, 한편 요한복음 1 장 23 절을 보면, 자기는 그의 길을 곧게 하기 위한 사명을 가지고 왔다 고까지 말하였던 것이다.
God had directly revealed to John that Jesus was the Messiah, and John bore witness to this revelation. Moreover, he said, “I am the voice of one crying in the wilderness, ‘Make straight the way of the Lord,’” (John 1:23 )

뿐만 아니라 요한복음 3 장 28 절에는, 자신이 그리스도에 앞서 보내심을 받은 자임을 언명(言明)한 기록이 있다.
and declared that he was the one who had been sent before the Christ. (John 3:28)

그러므로 세례 요한은, 응당 자기가 엘리야라고 하는 사실을 스스로의 지혜로써도 알았어야 할 것이었다.
Therefore, John should have realized through his own wisdom that he was the returning Elijah.

설혹 세례 요한이 그 사실을 미처 지각하지 못하였다 하더라도, 이미 하늘로부터 예수님이 메시아이심을 증거 받아 알고 있는 위에(요한 복음 1 장 33 – 34 절),예수님이 친히 자기를 엘리야라고 증언하셨으니, 자기도 그 말씀에 순종하여 자기가 바로 엘리야라고 하는 것을 뒤늦게라도 선포하는 것이 마땅한 도리였다.
Even if John did not realize this fact, since God had revealed to him that Jesus was the Messiah, he should have accepted the testimony of Jesus and, in obedience, proclaimed himself to be Elijah.

그러나 그는 하나님의 뜻앞에 무지하여(마태복음 11 장 19 절)
However, John was ignorant of God’s Will.

이미 예수님의 증언을 부인했을 뿐만 아니라(요한복음 1 장 21 절)
He negated Jesus’ testimony concerning him; moreover,

그 후에도 섭리의 방향과 길을 달리하고 있었으니,
he separated from Jesus and went his own way.

이러한 세례 요한을 바라보시는 예수님이나,
We can imagine how sorrowful Jesus must have been as these events unfolded.

또 이렇듯 난처한 입장에 놓인 예수님을 보시는 하나님께서는 얼마나 서러우셨을 것인가?
How sorrowful must God have felt as He looked upon His Son in such a difficult situation.

사실상 세례 요한이 예수님에게 세례를 주고 그를 증거 함으로써, 그의 증거 자로 서의 사명은 다 끝난 것이었다.
In truth, John the Baptist’s mission as a witness ended when he baptized Jesus and testified to him.

그러면 그 후에 있어서의 그의 사명은 무엇이었을 것인가?
What should his mission have been after that point?

그의 부친 사가랴는 성령(聖靈)에 감동되어 아직 복중(腹中)에 있었던 세례 요한을 두고서 종신토록 주의 앞에서 성결과 의로 두려움이 없이 섬기게 하리라(누가복음 1 장 75 절)고, 그의 사명을 분명히 예언하였던 것이다.
At the time of John’s birth, his father Zechariah, filled with the Holy Spirit, had prophesied concerning the mission of his son to serve the Messiah, saying: “grant us that we . . . might serve him without fear, in holiness and righteousness before him all the days of our life.” (Luke 1:74-75)

그러므로 세례 요한은 예수님을 증거한 후에는, 그 앞에 하나의 제자의 입장에서 그를 모시고 섬겨야 할 것이었다.
In this light, after John the Baptist bore witness to Jesus, he more than anyone, should have served Jesus with ardent devotion as a disciple for the rest of his life.

그러나 그는 그 후에 예수님과 분리되어서 따로 세례를 주고 다녔기 때문에, 누가복음 3 장 15 절을 보면 유대인들은 도리어 세례 요한을 메시아로 혼동하였고,
However, John left Jesus and went about baptizing independently. It is no wonder that the Jewish people were confused to the point of even supposing that John was the Messiah. (Luke 3:15)

한편 또 요한복음 1 장 20 절을 보면 제사장까지도 그렇게 혼동하였던 것이 사실이다. Their leaders were confused, too. (John 1:19-20 ) What is more, in one incident, a Jew who followed Jesus and the disciples of John

그뿐만 아니라 예수님을 따르는 사람과 세례요한의 제자가, 서로 자기의 선생이 세례를 많이 준다고, 결례(潔禮)를 중심하고 다툰 일까지 있었다(요한복음 3 장 25 절).
the Baptist quarreled with each other over whose teacher was giving more baptisms. (John 3:25-26)

그리고 요한복음 3 장 30 절에, 세례 요한이 그는 흥하여야 하겠고 나는 쇠하여야 하리라고 말한 것을 보더라도,
We can also discern from John’s statement, “He must increase, but I must decrease,”( John 3:30 )

그는 예수님과 흥망성쇠(興亡盛衰)의 운명을 같이하지 않았다는 것을 우리는 분명히 알 수 있는 것이다.
that in his heart John did not regard himself as sharing the same destiny as Jesus.

세례 요한이 전적으로 예수님과 운명을 같이할 수 있는 처지에 섰었다면, 어찌하여 예수님이 흥(興)할 때에 그가 쇠(衰)할 수 있을 것인가?
If John the Baptist and Jesus were walking side by side and sharing the same destiny, how then could John ever decrease as Jesus was increasing?

사실상 예수님의 복음(福音)은 누구보다도 먼저 세례 요한 자신이 전해야만 할 것이었다.
Indeed, John the Baptist should have been Jesus’ foremost apostle, zealously proclaiming the Gospel of Jesus.

그러나 그는 무지로 인하여 이 사명을 다하지 못하였고,
Yet, due to his blindness, he did not fulfill his mission.

마침내는 예수님을 위하여 바쳐야 할 그의 목숨마저 별로 가치도 없는 일에 희생하고 말았던 것이다.
His precious life, which was meant to be offered for Jesus’ sake, was eventually lost over a relatively insignificant affair.(Mark 6:14-29)

세례 요한은 그 중심이 하늘편에 있었을 때는 예수님을 메시아로 알고 증거 하였다.
When the mind of John the Baptist was focused on God, he recognized Jesus as the Messiah and testified to him.

그러나 그에게서 영적인 역사(役事)가 끊어지고 인간 세례 요한으로 돌아오게 되자, 그의 무지는 더욱 더 예수님에 대한 불신을 자아내게 하였던 것이다.
Later, when the inspiration left him and he returned to a mundane state, his ignorance returned and exacerbated his faithlessness.

자기가 엘리야라고 하는 사실을 자각하지 못하고 있었던 세례 요한은,
Unable to acknowledge that he was the return of Elijah,

특히 옥중(獄中)에 들어가게 된 후부터 다른 유대인들과 같은 입장에서 예수님을 대하게 되었다.
John began to regard Jesus in the same disbelieving way as other Jews viewed him, particularly after he was imprisoned.

따라서 예수님의 모든 언행(言行)은, 인간 세례 요한의 눈에 하나같이 이해할 수 없는 것으로 비쳐질 뿐이었던 것이다.
Jesus’ every word and deed seemed to him only strange and perplexing.

그뿐 아니라, 그도 역시 엘리야가 오기 전에 나타난 예수를 메시아로 믿을 수 없었기 때문에, 결국 자기의 제자들을 예수님께 보내어 오실 그 이가 당신이오니이까 우리가 다른 이를 기다리오리이까(마태복음 11 장 3 절)하고 질문하여 그 의심을 풀어 보려 하였다.
At one point, John tried to resolve his doubts by sending his disciples to Jesus, asking, “Are you he who is to come, or shall we look for another?”(Matt. 11:3) When Jesus was confronted with this question from John, he answered indignantly, with an air of admonition:

이러한 세례 요한의 질문을 받게 된 예수님은, 마태복음 11 장 3 절 내지 19 절에 기록되어 있는 바와 같이, 분개심에 격한 경고의 내용을 가지고 대답하셨던 것이다.
Go and tell John what you hear and see: the blind receive their sight and the lame walk, lepers are cleansed and the deaf hear, and the dead are raised up, and the poor have good news preached to them. And blessed is he who takes no offense at me. —Matt. 11:4-6

세례 요한은 예수님을 섬기기 위하여 복중(腹中)에서부터 택함을 받았고(누가복음 1 장 75 절), 그의 앞길을 예비하기 위하여 광야에서 고난 어린 수도생활(修道生活)을 하였다.
John the Baptist had been chosen while still inside the womb for the mission of attending Jesus. He led an arduous, ascetic life in the wilderness, building his ministry in order to prepare the way for the coming Messiah.

그리고 예수님이 공생애노정(公生涯路程)을 출발하실 때에, 하늘은 누구보다도 먼저 그에게 예수님이 누구시라는 것을 가르쳐 주셨고, 또 그것을 증거하게 하셨던 것이다.
When Jesus began his public ministry, God revealed the identity of Jesus to John before anyone else and inspired John to bear witness to him as the Son of God.

그러나 이러한 하늘의 은사를 제대로 받아들이지 못하고 있는 세례 요한으로부터 그러한 질문을 받으셨을 때,
Yet John did not properly receive the grace that Heaven had bestowed on him. Therefore, when confronted with John’s doubting question,

예수님은 새삼스럽게 자기가 바로 메시아라는 대답을 하시지는 않았다.
Jesus did not answer explicitly that he was the Messiah;

그는 너희가 가서 듣고 보는 것을 요한에게 고하되 소경이 보며 앉은뱅이가 걸으며 문둥이가 깨끗함을 받으며 귀머거리가 들으며 죽은 자가 살아나며 가난한 자에게 복음이 전파된다 하라(마태복음 11 장 4 5 절)고 완곡한 대답을 하셨다. 물론 세례요한이 예수님의 이러한 기사와 이적을 모르고 있었을 리가 없는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수님이 이와 같이 구구하게 말씀하신 것은, 자신이 하시는 일을 세례요한으로 하여금 다시 한번 상기케 하심으로써, 자기가 누구시라는 것을 알려 주시기 위함이었다.
he instead answered in this circuitous way.Certainly, John the Baptist must have known about Jesus’ miracles and signs. Despite this, Jesus gave a veiled answer, reminding John of the works that he was doing, with the hope of awakening him to his true identity. We should understand that when Jesus said,

가난한 자에게 복음을 전한다고(마태복음 11 장 5 절) 하신 말씀에는, 세례요한과 유대인들의 불신에 대한 예수님의 비감한 심정이 어리어 있다는 것을 우리는 알아야 하겠다.
“the poor have good news preached to them,” he was expressing his deep sorrow over the disbelief of John the Baptist and the Jewish leadership.

선민(選民)으로 부름을 받았던 유대민족, 그 중에서도 특히 세례요한은 하늘의 사랑을 넘치도록 받은 부요(富饒)한 자였던 것이다.
The prepared Jews, and John the Baptist in particular, were the rich people who had been blessed with an abundant wealth of God’s love.

그러나 그들은 모두 예수님을 배반하였으므로, 예수님은 부득이 갈릴리 바닷가를 헤매시고 사마리아땅을 두루 도시면서 가난한 자 가운데서 복음을 받을 수 있는 자들을 찾으셨던 것이다.
Yet because they all rejected Jesus, he had to roam the seacoast of Galilee and the region of Samaria to search among the “poor” for those who would listen to the Gospel.

불학무식(不學無識)한 어부들과 세리와 창녀들은 모두 이처럼 가난한 자들이었다.
These poor ones were uneducated fishermen, tax collectors and prostitutes.

사실상 예수님이 찾고자 하셨던 제자들은 그러한 자들이 아니었다.
The disciples whom Jesus would have preferred to find were not such as these.

지상천국(地上天國)을 건설하러 오신 예수님이었으니 그에게는 따라다니는 천명보다도 먼저 천명을 영도(領導)할 수 있는 한 사람이 더욱 필요했던 것이다.
Since Jesus came to establish the Kingdom of Heaven on earth, he was more in need of one leader who could guide a thousand than a thousand who would follow a leader.

그러므로 예수님은 하늘이 예비한 능력 있는 무리들을 찾으시려고, 제일 먼저성전으로 들어가 제사장(祭司長)과 교법사(敎法師)들에게 복음의 말씀을 전하시지 않았던가!
Did he not first preach the Gospel to the priests and scribes in the Temple? He went there in search of prepared and capable people.

그러나 예수님이 친히 말씀하신 바와 같이, 예비한 잔치에 청함을 받은 손님들은 하나도 응해 오지 않았기 때문에, 하는 수 없이 거리에 나가 방황하는 거지떼를 불러 모아야만 하셨다.
Nonetheless, as Jesus indicated in a parable, because the guests who were invited to the banquet did not come, he had to roam the streets and byways to gather the poor and maimed, the blind and lame. (Luke 14:16-24) Faced with the miserable situation of having to offer the riches of his banquet to the uninvited outcasts of society,

이처럼 불청객(不請客)들을 맞으러 나선 예수님의 서러운 심정은, 드디어 누구든지 나를 인하여 실족하지 않는 자는 복이 있도다(마태복음 11 장 6 절)라고 하는 심판(審判)의 말씀을 토하시고 말았다.
Jesus expressed his sorrow in these words of judgment: “Blessed is he who takes no offense at me.” (Matt. 11:6)

세례 요한은 당시의 유대인들이 혹은 메시아, 혹은 엘리야, 혹은 선지자라고 생각할 정도로 훌륭한 사람이었다(누가복음 3 장 15 절, 요한복음 1 장 20 – 21 절). 그러나 아무리 훌륭한 사람이라 할지라도 누구든지 자기(예수)로 인하여 실족(失足)하면 무슨 복이 있겠느냐고 하는 간접적인 표현을 통하여서, 세례 요한의 운명을 심판하셨던 것이다.
Though John was greatly admired in his day, Jesus judged John’s life by saying obliquely that one who took offense at him would not be blessed, no matter how great he might be.

그러면 세례 요한은 어떠한 실족을 하였던가? 위에서 이미 언급한 바와 같이 바와 같이 그는 종신토록 예수님을 모시고 섬겨야 할 사명을 다하지 못했던 것이다.
John took offense and thus failed in his mission to attend Jesus devotedly for the whole of his life.

질문하러 왔던 세례 요한의 제자들이 떠나간 뒤에 예수님은, 사명적인 면에서 보아, 세례 요한이 본시 가장 위대한 선지자(先知者)로 왔으나, 이제 맡겨진 바 그 사명을 다하지 못하는 입장에 있다는 것을 지적하시어,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하노니
After the disciples of John the Baptist finished questioning Jesus and left, Jesus remarked that although John may have been the greatest of all prophets, he failed to complete the mission God had entrusted to him:

여자가 낳은 자 중에 세례 요한보다 큰 이가 일어남이 없도다 그러나 천국에서는 극히 작은 자라도 저보다 크니라(마태복음 11 장 11 절)고 말씀하셨다.
Truly, I say to you, among those born of women there has risen no one greater than John the Baptist; yet he who is least in the kingdom of heaven is greater than he. —Matt. 11:11

천국에 있는 모든 사람들은 일찌기 여인의 몸에서 태어나, 지상생활을 거쳐 간 사람들이다.
Everyone in heaven was born of woman and lived an earthly life. One would expect that since John was the greatest among all those born of women,

그러므로 여인이 낳은 사람 중에서 가장 큰 사람일라면, 천국에서도 가장 큰 자가 되지 않을 수 없을 것인데,
he should also have been the greatest in the kingdom of heaven.

역사상 가장 큰 자로 지상에 태어난 세례요한이 어찌하여 천국에서는 지극히 작은 자만도 못할 것인가?
Why was John less than even the least in the kingdom?

과거에 왔다 간 수 많은 선지자들은, 장차 오실 메시아를 바라보며 시간적인 먼 거리를 두고 간접적으로 이를
증거 하였었다.
Numerous prophets in the past had borne testimony to the Messiah indirectly,
across the expanse of time.

그러나 세례요한은 메시아를 직접적으로 증거할 사명을 띠고 왔었던 것이다.
John, on the other hand, had the mission of testifying to the Messiah directly.

그러므로 메시아를 직접적으로 증거하는 것이 선지자의 사명일진대, 증거적인 처지에서 보아, 메시아를 직접적으로 증거 하는 세례 요한은 간접적으로 증거한 그 어떠한 선지자보다도 위대했던 것이다.
If testifying to the Messiah was the main mission of the prophets, then John the Baptist was surely the greatest of prophets.

그러나 메시아를 모신다는 점에서 볼 때에는 그는 가장 작은 사람이 아닐 수 없다.
Nevertheless, in terms of attending the Messiah, he was the least of all.

왜냐하면 천국에서는 아무리 작은 자라도 이미 예수님을 메시아로 알고 모시고 있는데, 누구보다도 메시아를 가까이 모셔야 할 자리에 부름을 받은 세례 요한은 (누가복음 1 장 75 절), 도리어 예수님과 엇갈린 길을 걷고 있었으니,
Everyone in the kingdom of heaven, no matter how lowly, knew that Jesus was the Messiah and served him with devotion. Yet John the Baptist, who had been called upon to serve the Messiah more closely than anyone else, separated from Jesus and walked his own way.

이로써 그는 천국의 지극히 작은 자보다도 예수님을 모시지 못하는 처지에 있었기 때문이다.
In terms of his devotion to Jesus, therefore, he was less than even the least in the kingdom of heaven.

다시 그 다음 절에는 세례 요한의 때부터 지금까지 천국은 침노를 당하나니 침노하는 자는 빼앗느니라고 기록되어 있다.
Jesus continued, “From the days of John the Baptist until now the kingdom of heaven has been forcefully advancing, and forceful men lay hold of it.”( Matt. 11:16-19)

메시아를 위하여 복중에서부터 택함을 받았고, 광야에서 그렇게 어려운 수도생활(修道生活)을 하여 온
John the Baptist was chosen from before his birth and led an arduous ascetic life in the wilderness.

세례 요한이 예수님을 잘 모시기만 했더라면, 그는 틀림없이 예수님의 수제자(首弟子)가 되었을 것이다.
Had he attended Jesus with a sincere heart, the position of Jesus’ chief disciple was surely reserved for him.

그러나 그는 모시는 사명을 다하지 못하였으므로, 예수님의 수제자의 위(位)는 침노한 베드로에게 빼앗긴 바 되었다.
However, because he failed in his mission to serve Jesus, Peter, a “forceful man,” laid hold of the position of chief disciple.

여기에 세례 요한의 때부터 지금까지라고 시간적인 한계를 지은 것을 보면, 그 아래 기록되어 있는 말씀은,
We can deduce from the expression “from the days of John the Baptist until now” that Jesus spoke the verses that follow (Matt. 11:16-19 )

일반인을 두고 하신 말씀이 아니라 바로 세례 요한을 두고 하신 말씀인 것을 알 수 있다.
in reference not primarily to the people in general but specifically to John the Baptist.

예수님은 결론적으로 지혜는 그 행한 일로 인하여 옳다 함을 얻느니라고 말씀하셨다.
Jesus concluded, “Wisdom is justified by her deeds.” (Matt. 11:19 )

세례 요한이 지혜가 있어서 지혜롭게 행동하였다면, 예수님의 무릎 밑을 떠나지 않았을 것이요, 따라서 그의 행적은 영원히 의(義)로서 남아질 것이었는데, 불행히도 그는 무지하였기 때문에, 자신은 물론이어니와 유대인들이 예수님 앞으로 나아가는 길마저 모두 막아버리고 말았던 것이다. 우리는 이로써 예수님이 십자가의 죽음 길을 가게 된 큰 요인이 세례요한에게 있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Had John acted wisely, he would not have left Jesus, and his deeds would have been
remembered forever as righteousness. Unfortunately, he was foolish.He blocked the Jewish people’s path to Jesus, as well as his own path. Here we have come to understand that the main reason why Jesus had to die on the cross was the failure of John the Baptis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