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232 to 15-267: 구원의 목적

구원의 목적
1965.10.17 (일), 한국 전본부교회

15-232
구원의 목적
요한복음 3:16-17

[기 도(Ⅰ)]

자비로우신 아버시시여! 당신의 소망과 뜻하시는 것을 하늘과 땅 위에 이루시옵소서.

수많은 인간들이 아버지의 품을 떠나 지금까지 불효를 계속하고 있으며 오늘도 그 환경에서 벗어나지 못한 채, 사망의 골짜기에서 신음하고 있는 것을 매일같이 보고 슬픔을 느끼는 환경에 저희들이 처해 있는 것을 생각할 때, 아버지 앞에 민망하여 무어라 말할 수 없는 자신인 것을 자각하게 하여 주시옵소서.

아버지! 당신께서는 수많은 인류를 품으시고 당신의 자녀라고 명명할 수 있는 기쁨의 한 날을 목표로 지금까지 섭리해 나오셨사오나, 오늘날 이 땅 위에는 당신의 사랑을 대할 수 있는 자녀들이 지극히 적사옵고 당신 앞에 충성을 다하여 당신의 복귀섭리 전체를 상속받을 자가 없사옵니다. 이런 것을 생각할 때 오늘도 아버지의 슬픈 노정이 저희들 앞에 남아 있다는 것을 깨닫게 되옵니다. 하오니 이 시간 저희들이 다시 자책하며 나가지 않으면 안 될 자신들임을 발견하게 하여 주시옵소서.

악하고 처참한 세상, 황폐한 이 땅 위에서, 아버지의 섭리의 뜻을 새로운 방향을 거쳐 아버지께서 뜻하신 그 세계로 기필코 이끌어내는 것이 아버지의 소망인 동시에, 땅 위에 살고 있는 전인류의 소망인 것을 알고 있사옵니다. 아버지와 이 땅 위의 전인류가 하나 될 수 있는 기준을 모색하지 않고는 이 전체의 뜻과 사명을 완결지을 수 없다는 것도 알고 있사옵니다. 아버지께서 오늘 저희들을 내세워 이 민족 앞에 새로운 종교의 길을 개척하게 하시고, 세계노정 앞에 새로운 역사적인 면을 제시하여 인생의 과거와 현재와 미래를 연결시키기 위하여 평면도상의 세계적인 모든 탕감조건을 세우려 하시는 당신의 노고와 수고 앞에, 몸 구부려 민망함을 느낄 줄 아는 저희들이 되게 하여 주시옵기를 간절히 바라옵니다.

오늘은 안식일이옵니다. 이 땅 위에 수많은 사람들이 당신의 이념을 찬양하고, 당신의 뜻하신 목적을 바라보면서 소망을 품고, 매일 당신께서 원하시는 전체적인 뜻을 바라보고 있는 것을 긍휼히 보시사 그들이 모이는 곳곳마다 당신의 사랑의 손길이 떠나지 말게 하시옵소서. 긍휼의 마음을 더하시사 아버지를 대신하여 각자가 짊어진 책임과 사명을 완수하고 원수의 세계에 승리의 터전을 가꾸어 아버지 앞에 드릴 수 있는 뭇 자녀들이 되게 하여 주시옵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당신의 이념과 당신의 뜻을 품은 수많은 교파들 위에 축복하여 주시옵고, 더우기 수많은 도인들 위에도 축복하여 주시옵소서. 오늘 이 시간에도 방향을 잡지 못하고 신음의 노정을 가고 있는 불쌍한 무리들이 많사오니 그들 위에 아버지 친히 함께 하시어서 그들의 방향을 잡아 주시옵소서. 그리하여 뚜렷한 목표를 바라보고 도의 길을 가는 사람들이 되게 하여 주시옵기를 간절히 바라옵니다.

오늘 여기에 모인 당신의 자녀들을 기억하여 주시옵소서. 이들은 사망의 골짜기에서도 당신 앞에 충성을 다할 것을 다짐하였사옵고, 당신을 위해 세상의 모든 것을 저버렸사옵니다. 아버지의 뜻 앞에 충성과 효성을 다할 것을 다짐하고, 아버지께서 원하시는 뜻성사를 위해 생축의 제물이 되고자 맹세한 무리들이오니, 이 시간 당신의 존전에 모든 것을 다 펼쳐 놓고 어제와 오늘과 내일을 염려하는 마음으로 당신 앞에 가까이 가서 당신의 심정과 진정으로 연결될 수 있는 이 한 시간이 되게 하여 주시옵기를 간절히 바라옵고 원하옵니다.

지방에 널려 이 시간을 기억하고 이날을 아버지 앞에 찬양드리는 많은 자녀들 위에도 친히 같이하여 주시옵소서.

여기에는 각양각색의 사람들이 모였사오나 이들의 마음과 심정은 오로지 아버지만을 향하게 하여 주시옵소서. 아버지의 뜻과 아버지의 소망을 품고 아버지 앞에 엎드리는 이 시간 되게 하여 주시옵소서. 악의 세계와 악이 활동할 수 있는 모든 요건들을 제거하시고, 이 청중을 친히 장중에 쥐시어 당신이 뜻하시는 방향과 목적지까지 이끌어 주시옵소서. 그리하여 이날이 거룩함을 나타내시옵고, 저희들의 마음과 몸으로 승리의 감격을 느낄 수있게 하여 주시옵기를 , 아버님, 간절히 바라옵고 원하옵니다.

이제 부족한 저희들이 정성을 모아 아버지 앞에 경배를 드리고자 하오니, 하나님의 보좌를 둘러싼 천천만 성도들과 이 땅에 우거하고 있는 당신의 자녀라는 명분을 가진 이들 전체가 당신을 에워싸고 경배드릴 수 있게 하여 주시옵소서.

여기에 모인 저희들이 아버지 앞에 겸손히 나아가 탄원을 드리어 모든 역사적인 죄를 용납받을 수 있는 당신의 아들딸이 되게 하여 주시옵고, 제사장의 입장을 대신하여 시대적으로 부족한 모든 것에 대한 속죄의 은사를 당신 앞에 간구할 수 있는 , 당신께서 사랑하지 않을 수 없는 아들딸이 되게 하여 주시옵기를 간절히 바라옵니다.

이 시간 전체를 아버지 앞에 맡기오니 친히 주관하여 주시옵소서. 모든 말씀을 주의 이름으로 아뢰었사옵나이다. 아멘.

15-234
기 도(Ⅱ)
아버지! 이 지구상에 살고 있는 30억 인류가 언제 당신의 품에 안길 수 있겠사옵니까? 저희 선조의 한 날의 실수가 이렇듯 엄청난 역사적인 곡절을 엮어냈다는 것을 생각할 때, 당신의 심정에는 슬픈 눈물과 복통할 사실밖에 맺혀져 있지 않음을 깨닫게 되옵니다.

‘나’라는 한 생명을 구하기 위해 6천년이란 기나긴 세월을 하루같이 잃은 자식을 찾으시려는 심정을 가지고 역사노정을 거쳐 오신 아버지, 오늘의 저희들을 부르시는 당신의 심정을 붙들고 통곡하는 심정으로 당신의 존전에 서 있는 저희의 불쌍하고 외로운 모습을 긍휼히 여겨 주시옵소서. 저희들은 벌거숭이들이옵고, 무엇 하나 아버지 앞에 나타낼 아무것도 가지고 있지 않사옵니다. 다만 당신을 그리워하며 어떠한 어려움이 있더라도 당신이 계신 곳을 가겠다는 일념으로 이 자리에 나왔사오며, 당신의 억울하신 역사적인 사정을 배웠기에 그러한 사정의 터 위에서 쓰러지지 않고 당신을 배반하지 않을 참다운 모습을 그리워하면서 이 자리에 피곤한 몸을 이끌고 나와 당신 앞에 부복하였사오니, 긍휼의 아버지, 저희들을 사랑하여 주시옵고, 저희의 마음을 위로하여 주시옵소서.

연약한 저희들을 권고하여 주시옵고, 낙망의 궁지에서 당신을 원망하던 자신들을 발견하고 눈물이 아니면 슬픔의 아버지를 알 수 없고 당신을 대할 수 없는 부족한 자신들임을 발견할 수 있는 시간이 되게 하여 주시옵소서. 또한 이 민족의 처참상을 대신하여 저희들이 제물이 되지 않으면 안 될 자신들이라는 것을 발견하게 하여 주시옵소서. 만민을 대신하여 아버님이 찾아오시는 그 길의 선봉에 서서 원수 사탄과 대결하는 하늘의 용사가 되지 않으면 안 될 것을 깨닫게 하여 주시옵기를 간절히 바라옵고 원하옵니다.

이 시간, 각자의 몸을 자신들의 몸으로 생각하지 말게 하여 주시옵고, 자기를 중심삼고 생각하지 말게 하시며, 오로지 하늘과 땅을 생각하고 남아진 복귀의 뜻을 책임져야 할 자신들임을 발견할 수 있게 하여 주시옵기를, 아버님, 간절히 바라고 원하옵니다.

자기 자신의 목적을 추구하는 자리에 서지 말고 공적인 목적을 추구하여 당신의 뜻을 대신하고 당신의 전체적인 사명을 감당해 낼 수 있게 하여 주시옵소서. 아버지의 거룩한 존전에 속죄의 분향을 드리는 제사장을 대신하는 거룩한 자들이 되게 하여 주시옵기를 간절히 바라옵고 원하옵니다.

아버지의 그 깊은 심정을 더듬어 들어가려 할 때에는 억천만 사탄들이 저희의 갈 길을 막고 저희의 마음과 몸을 노린다는 것을 이들이 깨닫게 하여 주시옵소서. 그리하여 단연코 그 사탄들을 제거시키고 아버지의 역사적인 한을 풀어 드리는, 그리하여 아버지의 품에 안길 수 있는 당신의 아들딸들이 되게 하여 주시옵기를, 아버님, 간절히 바라옵고 원하옵니다.

아버님이시여! 오늘 저희들이 다시 만날 수 있는 시간을 허락하여 주신 것을 감사드립니다.

많은 날과 많은 지역을 거쳐오면서 당신의 뜻이 얼마나 큰 것인지, 세워 놓은 민족을 대한 아버지의 슬픔이 얼마나 큰 것인지를 절실히 느꼈사옵니다. 이제 다시 이 땅을 수습하여 당신 앞에 생축의 제단을 쌓고 민족적인 승리의 터전을 갖추지 않으면 안 될 중대한 시기가 저희들 앞에 찾아오고 있는 것을 알고 있사옵고, 이와 같은 환경에서 저희들 전체가 하나되어 하나의 마음, 하나의 뜻, 하나의 심정으로 하나의 목표를 향하여 행동하지 않으면 안 될 최후의 싸움터가 남아 있다는 것을 알고 있사오니 이시간, 아버지 친히 모든 청중을 장중에 쥐시어 이들 전체가 당신이 원하시는 마음을 가진, 당신이 원하시는 사람들이 되게 하여 주시옵소서. 그리하여 당신만이 거룩한 이들을 주관하여 주시옵기를 간절히 바라옵니다. 이들 모두가 당신의 아들딸이오니 당신의 아들딸로서 합당한 천적인 인연을 맺고, 당신께서 명령하실 수 있는 이 시간이 되게 하여 주시옵기를, 아버님, 간절히 바라옵고 원하옵니다.

이날, 수많은 민족에게 아버지, 복을 베풀어 주시옵고, 수많은 교단을 친히 사랑하여 주시옵고, 수많은 자녀들이 남한 각지에서 눈물어린 피의 노정을 걷고 있사오니 그들을 기억하시어 남아진 최후의 싸움터에서 낙오자가 되지 말게 하여 주시옵고, 패잔병이 되지 말게 하여 주시옵소서. 영광된 승리의 한 날, 승리의 개가를 당신 앞에 돌려드리면서 당신의 기쁘심과 영광된 거룩한 자리에 참여할 수 있는 수많은 무리가 되게 하여 주시옵기를 간절히 바라옵고 원하옵니다.

이 시간을 오로지 당신 앞에 맡기오니 친히 주관하여 주시옵소서. 간절히 부탁드리면서 모든 말씀 주의 이름으로 아뢰었사옵니다. 아멘.

15-236
말 씀
오늘 여러분들에게 말씀드릴 제목은 ‘구원의 목적’입니다. ‘구원의 목적’이란 제목을 가지고 말씀드리겠습니다.

15-236
일생을 걸어놓고 해결하지 않으면 안 될 중대한 문제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세상이 선한 세상이 아니라는 것을 우리는 잘 알고 있습니다. 이런 세상 가운데 살고 있는 우리 개체를 보더라도 우리 개체 내에 싸움의 요인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부정할 도리가 없습니다. 즉, 우리의 몸과 마음이 싸우고 있다는 것입니다. 환경적으로 볼 때 죄악된 세상임을 부정할 수 없고, 우리들 자신의 입장으로 볼 때는 어떠한 중심을 세우기가 지극히 곤란한 시대라는 것을 부정할 수 없는 것입니다.

그러면 어찌하여 이 세상과 우리 인간이 이렇게 되었는가?

하나님이 계시다면 하나님은 천지의 대주재요, 중심 중의 중심일 것입니다. 우리 인간은 그 중심에 의해 지음받았으니 지음받은 그 환경을 거치고 과정을 거쳐서 목적의 세계까지 중심을 잃지 않고 가야 할 것인데도 불구하고 오늘날 우리 자신들은 중심을 세울 수가 없습니다. 이러한 사실은 어떠한 곡절로 말미암아 빚어진 사실이라는 것을 시인하지 않으면 안 되게 되어 있는 것입니다. 이것을 종교적인 명사를 빌어 말하면 타락이라 합니다. 여기에서 이 땅 위에 살고 있는 수많은 인간들은 타락권내에서 자기들의 생을 이끌어 가고 있다는 결론을 지을 수 있습니다.

그러면 이러한 타락된 자리에서 우리가 영속적으로 머무르는 것을 우리의 몸과 마음과 환경이 바랄 것인가? 절대 그렇지 않습니다. 이 타락권을 타개하여 본연의 절대적인 중심을 통해 살기를 원하는 것입니다. 내 마음과 환경이 아무리 악하더라도 그것을 넘고 넘으면서 어떤 목적을 향하여 일관된 방향으로 나아가야 하는 자신을 발견하지 않으면 안 됩니다. 이것은 우리들이 일생을 걸어 놓고 해결하지 않으면 안 될 중대한 문제인 것입니다. 이것은 인간이 타락되었기 때문에 생긴 문제입니다.

그러면 도의 길이나 종교라는 것은 어찌하여 나오게 되었는가? 타락된 인간을 타락하기 이전의 본연의 인간으로 돌이키기 위해서입니다. 그러면 여기에서 구원이란 무엇인가? 병이 나기 전의 상태로 돌아가는 것입니다. 이것은 복귀하는 명사로 대비시킬 수 있지요. 그러므로 구원이 곧 복귀입니다.

타락은 무엇인가? 자기 본연의 가치를 잃어버린 것입니다. 그러면 그 가치를 최고의 중심은 누구인가? 하나님입니다. 때문에 타락이란 하나님을 잃어버린 것을 말함이요, 하나님이 언제나 일체화된 자리에서 대할 수 있는 참다운 인간의 가치를 잃어버린 것입니다. 또한 인간이 살아가는 사회환경에서 가치적인 터전을 잃어버린 것입니다. 이 환경적인 터전을 수습할 수 있는 인간의 가치, 그런 인간을 주관할 수 있는 하늘의 가치를 다시 찾아 본연의 자리를 결정짓기 위해 나온 것이 구원의 개념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면 타락의 내용을 구체적으로 살펴봅시다. 인간이 타락할 때 어떤 단계에서 타락했는가? 태초에 에덴 동산에는 하나님이 계시고, 하나님께서 창조목적을 중심삼고 지으신 인류의 시조, 죄짓기 전의 아담 해와가 있고, 그 본연의 아담 해와를 중심삼고 하나님의 일을 협조하던 천사들이 있었습니다.

그러면 그 하나님의 목적, 아담 해와의 목적, 천사들의 목적은 무엇이었는가? 그것은 천사들만이 기쁘게 살 수 있다고 달성되는 것이 아니요, 아담 해와만이 기쁘게 살 수 있다고 달성되는 것도 아니며 하나님만이 기쁘게 계실 수 있다고 완성되는 것 또한 아닙니다. 하나님과 아담 해와와 천사들이 모두 공동적인 목표 아래 그 목적을 달성했을 때는 천사들도 기뻐할 수 있고, 아담 해와도 기뻐할 수 있으며, 하나님도 기뻐하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어느 한쪽만이 기뻐해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전체적인 내용을 갖추어서 이 천지의 중심이신 하나님과 하늘땅을 대표한 아담 해와와 환경을 대표한 천사들 모두가 기뻐할 수 있어야 된다는 것입니다. 그리하여 인간을 창조한 목적이 완결되어야만 구원의 목적, 즉 창조본연의 목적을 달성할 수 있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 목적이 깨어져 버린 것입니다. 그 기준이 떨어져 버린 거예요. 떨어질 때에 어떤 순서로 떨어졌는가? 하나님부터 떨어진 것이 아닙니다. 반대적 입장에서부터 떨어지기 시작한 것입니다. 맨 처음에 천사세계의 천사장이 하나님을 중심삼은 뜻 앞에서 멀어지기 시작했고, 그것을 동기로 아담 해와가 타락하게 되었으며, 하나님 역시 이 모든 세계의 공동 목표를 중심삼고 피조물을 창조하신 원칙이 있는 연고로 그 목적을 이루기 위해서는 타락한 아담 해와의 슬픔을 책임지지 않을 수 없는 입장으로 떨어진 것입니다. 이것이 타락의 순서입니다.

15-238
타락된 것을 복귀하기 위해서는
이런 순서로 타락했으니 이것을 복귀하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될 것이냐? 반대경로에 의해서 섭리노정을 맞추어 나가야 하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은 지금까지 역사노정에서 진정으로 하나님의 심정을 가지고 하나님의 사정을 느끼면서 하나님과 일치된 소원을 갖고 나오는 사람을 찾아 나오시는 것입니다. 그와 같이 이 땅에 하늘 세계의 참다운 천사장을 대신할 수 있는 충신을 찾아 나오시는 복귀의 길인 것입니다.

그러면 천사는 어떤 존재인가? 종의 입장에서 하나님 앞에 충성의 도리를 다하고 아담 해와의 울타리가 되어 주어야 하는 존재입니다. 만세토록 하늘 세계에 영광된 분위기를 만들어 가지고 하나님의 사랑을 중심삼고 아담 해와와 함께 행복하게 살아야 했던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천사장은 아담 해와를 위해서 창조된 거예요. 아담 해와의 아버지이신 하나님께서 천사를 창조한 목적은 아담 해와를 위해서였다는 것입니다. 그것이 천사장이 창조된 목적인 것입니다.

그러나 타락함으로 말미암아 그 울타리가 깨져 나가고, 아들딸이 깨져 나갔으며 하나님께서도 주관권을 침범받게 되어 버렸으니 이것을 다시 수습해 나가야 합니다. 아담 해와가 타락한 사실이 결정적인 죄악으로 결실된 것이 가인이 아벨을 죽인 것입니다. 이것을 다시 수습하기 위해 하나님은 지금까지 기나긴 역사노정을 거쳐 섭리해 나오시는 것입니다. 여기에서 맨 나중에까지 남아져야 할 것이 무엇이냐? 영계가 하늘만을 위주할 수 있는 천사세계와 같은 세계로 재정비되고 이 땅에 하늘만을 위주할 수 있는 가인과 아벨을 중심삼은 새로운 부모가 설정되어야 합니다.

이 땅 위에는 수많은 인간들이 살고 있습니다. 그러나 인류는 하나님을 잃어버렸고 참부모를 잃어버렸으며, 아직도 하나님을 중심삼은 참다운 형제의 인연을 맺지 못했습니다. 그러니 그것을 재차 복귀하자는 것입니다. 그러기 위해서 하나님은 외적으로 역사의 발전을 지향하고 내적으로는 종교를 세워 나오셨습니다. 그리하여 외적인 세상은 종교와 결렬된 입장에서 투쟁하면서 외적인 환경을 발전시켜 나오고, 내적인 종교는 심정을 강조하며 세상과의 인연을 끊고 하나님만을 위해 나오는 것입니다. 이것이 가인적인 세계형과 아벨적인 세계형입니다. 하늘이 그렇게 만들어 놓은 것입니다.

‘만물을 주관하라’고 하신 것은 하나님께서 당신의 아들딸인 아담 해와에게 내리신 축복입니다. 즉, 하나님께서 사람에게 축복하신 내용인 것입니다. 아담 해와의 아들딸로 태어난 인류는 반드시 그 축복의 목적지를 향하여 나가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세상의 끝날이 되면 가인과 아벨의 세계관이 나타나는 것입니다. 그리하여 모든 곡절을 수습하고 가인과 아벨이 하나 되어야 합니다.

그러면 가인과 아벨이 하나 되어서 무엇을 할 것이냐? 부모를 모셔야 되는 것입니다. 아담 해와가 타락했기 때문에 타락한 그대로는 하나님 앞에 설 수 없습니다. 가인과 아벨의 싸움과정을 거쳐 아벨을 세워 가지고 가인의 모든 것을 상속받아, 그것을 부모 앞에 드림으로써 떨어졌던 부모의 자리를 복귀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천적인 원칙이기 때문에 끝날인 현재의 이 세상에는 가인과 아벨의 세계관이 나타남과 동시에 참부모를 중심삼은 세계관이 나와야 되는 것입니다. 또 그와 동시에 참다운 하나님의 심정을 중심삼은 심정의 세계관이 나와야 합니다. 타락 당시의 내용이 오늘날, 사회적, 역사적인 이 끝날에 다시 나타나지 않으면 안 된다는 것입니다.

15-240
예수님이 완결해야 했던 목적과 사명
그러면 지금까지 종교는 어떤 책임을 지고자 하는 것인가? 천사장적인 책임을 완결하자는 것입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종의 자리에서부터 책임을 완결짓고 그 기준에서 천사장 누시엘이 못한 책임을 완결하여 하나님 앞에 하늘땅을 대표한 충신으로 나타나야 합니다. 그리하여 그를 중심삼고 하나님의 아들딸의 인연과 연결시켜야 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은 이 땅 위의 인류 앞에 구세주를 보내 주시기로 약속하셨습니다. 그러면 그 구세주는 어떤 존재인가? 먼저 하나님의 아들의 사명을 가지고 와서, 그 사명을 완결지은 다음, 이 땅 위에서 참다운 조상의 자리까지 나아가야 합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이스라엘 선민권을 세우시고 악한 사탄세계와 대결할 수 있게 하셨던 것입니다. 이스라엘 민족을 세우신 목적은 무엇인가? 사탄세계에서 하나님 앞에 충성을 다할 수 있는 천사장격인 국가를 세워 가지고, 사탄세계와 대결해 사탄을 쳐부수고 승리의 기반을 마련하도록 하기 위해서입니다. 하나님을 배반하지 않고 충성을 다할 수 있는 천사장격 국가의 터전 위에, 즉 이스라엘 민족의 내용 전부를 상속받은 후, 아담이 타락하기 전단계의 기준으로 끌어 올리려 하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은 하나님의 아들의 사명을 가지고 이 땅 위에 오셨던 것입니다.

그러면 그 당시의 이스라엘 민족은 어떻게 해야 했는가? 하나님의 아들 예수님을 중심삼고 죽든지 살든지 그와 일치되어 하나님의 소망하시는 세계를 이룩하는 데 전체적으로 하나 되어 협조해야 했습니다. 그것이 선민을 택하신 하나님의 본연의 목적이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스라엘 민족은 예수님과 하나 되지 못하고 분립되어 4천년 역사노정을 최후의 판가리 싸움에서 사탄에게 패함으로 말미암아 예수님은 십자가를 지지 않을 수 없게 되었습니다. 그리하여 제1이스라엘을 중심삼고 이루려던 섭리의 재연장해서 제2이스라엘 창건이념을 중심삼고 기독교는 지금까지 역사적인 사명을 감당해 나오고 있습니다. 그러면서 이 세상을 끌고 나오는 것입니다. 여기서 우리는 기독교를 중심한 세계적인 문화권을 만들어서 천사장 사명을 완결하는 동시에, 재림의 한 날을 맞이하여 아들은 아버지 앞에 효성을 할 수 있는 터전을 준비하고, 백성은 하나님 앞에 충성을 다 할 수 있는 충성의 터전을 마련해야 합니다. 그것이 끝날에 이루어야 할 최후의 목적점입니다. 그리하여 아들의 사명을 완결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그후에는 어떻게 해야 될 것인가? 하나님이 본래 아담 해와를 지으시고 선포하신 친자식이라는 선포를 받아야 합니다. 천주의 대주재이신 하나님으로부터 ‘너는 내 아들이다, 천지를 주관할 수 있는 내 아들이다’라는 심정으로 우러난 말을 들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런 심정적인 일치점을 연결하여 어느누구도 유린할 수 없는 절대적인 기준 위에 연결해야 됩니다. 인간이 타락함으로 말미암아 아직까지 한번도 그 자리에 못나간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막연한 소망을 가지고 사랑이라는 것을 내세워 지향하시는 목적의 기준을 향해 오늘날 종교, 특히 기독교를 지도해 나오신 것입니다.

그러면 아들의 사명을 완결하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되는가? 아담 해와가 타락하지 않았더라면 이 세상은 악한 세상이 되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런데 아담 해와가 타락하여 자기를 중심삼고 하나님이 원치 않는 타락된 부모가 되었으니, 그것을 깨뜨리고 하나님을 위주한 부모의 자리를 결정하지 않으면 안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예수님이 가지고 온 최대의 목적이요 사명이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예수님은 신랑 신부의 이념을 가지고 오셨던 것입니다. 그러면 신랑이라는 명사는 무엇입니까? 태초에 하나님이 아담 해와를 중심으로 천지만물을 창조하신 그날부터 소망해 오신 소망의 전체를 완결지을 수 있는 내용이 이 신랑이란 명사 속에 들어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아담 해와도 하나님 앞에 그들의 목적을 이룰 수 있는 신랑 신부의 기준을 소망하지 않을 수 없는 것입니다. 예수님 당시에 그러한 기준이 결정되었더라면 오늘날 이 세상에는 이러한 슬픔의 역사가 지나가고 세계적으로 새로운 역사가 출발되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그 기준이 결정되지 못했기 때문에 하나님은 또 다시 소망의 한때를 바라보시며 인류의 역사를 끌고 나오시는 것입니다.

15-242
복귀섭리의 최고 중심
때문에 오늘날의 역사는 부모를 찾아야 하는 역사적인 방향으로 흐르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계시다면 그 하나님을 중심삼고 창조의 목적을 완결지을 수 있는, 즉 구원의 목적을 완결지을 수 있는 참다운 부모가 있어 가지고 그 참다운 부모가 하나님 앞에 효성을 다해야 합니다. 동시에 천사들은 또 그 참부모의 아들딸을 중심삼고 충성의 도리를 다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본연의 창조원칙인데 그것이 깨져 나간 것입니다. 그러니 우리는 그것을 재현시켜 가지고 탕감해야 합니다. 잃어버렸으면 잃어버린 그 모양대로 찾아야 하는 것입니다.

영계에 있고 지상이 있는 데 영계는 어떤 세계인가? 타락 전 아담시대의 천사세계에 해당합니다. 오늘날 끝날에 처해 있는 이 땅의 인류는 어떤 입장에 있는가? 타락한 아담 해와의 세계와 타락하지 않은 아담 해와의 세계를 연결시켜야 할 과정에서 뒤넘이치고 있습니다.

이 두 세계를 연결시키기 위해 예수님이 찾아오셨던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오자마자 복음을 전파할 수 있는 길을 출발할 수 없습니다. 왜냐 하면 타락한 세상과 타락하지 않은 하나님 본연의 세상, 이 두 세상을 연결해야 할 책임이 예수님께 있었기 때문에 예수님이 타락한 세상의 모든 것을 상속받지 않고는 타락하지 않은 세상으로 출발할 수 없었던 것입니다. 이 세상을 사탄이 먼저 주관하였으니 사탄을 때려 눕히고 그 주관권을 모조리 빼앗아오는 것이 아니라 사탄을 자연굴복시켜 가지고 그로 하여금 기뻐하는 가운데서 모든 권한을 하나님 앞에 바쳐 드릴 수 있게 하는 기준을 세우지 않고는 타락하지 않은 본연의 세계로 출발할 수 없는 것입니다.

이와 같은 기로에서 예수님은 이스라엘 민족을 이끌고 하나님이 섭리하는 참다운 세계, 즉 지상의 타락한 세계에서 타락하지 않은 세계로 넘어가야 했습니다. 그리하여 이스라엘 민족은 영원히 승리적 기반 위에 선민족이라는, 하나님께서 택한 나라라는 결정을 받아야 했던 것입니다. 그런데 그 소망을 남겨 놓고 예수님은 십자가에 돌아가셨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최고의 중심은 신랑 신부이며, 그 신랑 신부의 내적인 의의는 참부모입니다.

여러분이 원리를 통해서 알고 있겠지만, 인간은 타락함으로 인하여 진리를 잃어버렸습니다. 신앙을 잃어버렸습니다. 그리고 인격을 잃어버렸고 심정을 잃어버렸습니다. 인간은 본래 하나님과의 영원불변한 심정의 터전위에서 떨어질래야 떨어질 수 없는 관계였습니다.

하나님이 내 아버지라는 인식만 갖추어지면 세상이 아무리 부정해도 하나님은 우리의 아버지인 것입니다. 세상 그 누가 자기 부모를 부모가 아니라고 설명해서 굴복시킬 수 있습니까? 없지요. 마찬가지로 아담 해와가 타락하지 않았다면 ‘하나님은 바로 내 아버지다. 그분은 나를 중심삼고 계신다’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이 땅 위에 그런 기준만 선다면 거기서부터 천도가 자리를 잡고 출발하는 것입니다.

15-243
복귀해야 할 부모의 기준, 자녀의 기준, 천사장의 기준
세상에서 사람이 어떻게 되어야 행복한가? 돈이 많다고 행복한 것이 아니요, 환경이 복되다고 해서 행복한 것이 아닙니다. 심정의 발판이 세워진 환경에서 영원히 변치 않는 중심을 갖추게 될 때에, 거기서부터 행복이 출발되는 것입니다. 그 심정의 기준이 영원한 세계를 움직일 수 있는 기준이라면 영원한 행복권내에 있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니 심정의 기준이 일시적인 것이라면 어서 그 권내를 넘어서야 합니다.

본래 우리의 인간 시조는 하나님을 중심삼고 하나님의 심정과 사랑을 중심삼고 하나님과 완전히 하나 되어야 했습니다. 또 하나님은 심정의 목적을 완결짓기 위해 천지를 창조하셨기 때문에, 이 심정의 대상인 천지 만물을 사랑하는 아들딸한테 사랑을 중심삼고 상속해 줘야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천지만물을 창조하신 것은 하나님을 위해서가 아니라 아담 해와를 위해서였기 때문에, 기쁨 또한 하나님 자신으로 말미암아 생기는 것이 아니라 아담 해와로 말미암아 생기는 것입니다. 여러분, 세상의 부모들도 자식을 보고 기뻐하잖아요? 기쁨이란 대상으로 말미암아 생기는 것입니다.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의 사랑이 아담 해와에게 상속됨으로 말미암아 천하만물 전체가 그 인연을 벗어나서는 존재할 수 없게 되었더라면, 그 인연을 가진 아담 해와를 중심삼고 횡적인 이 세계에 살고 있는 천추만대 후손들에게 하나님의 심정이 연결되었더라면, 오늘날 이 세상이 이토록 악한 세상이 되지 않았을 것입니다. 영계가 있는지 없는 지도 모르는 세상이 되지 않았을 거예요. 타락 전의 아담 해와가 천사와 일문일답하고 하나님과 일문일답했듯이, 우리도 그럴 수만 있다면, 오늘날 이 끝날의 수많은 사람들이 하나님을 몰라 보고 하나님이 없다는 말을 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과 심정적으로 연결되어 있기 때문에 하나님이 슬퍼하시면 인간도 슬픔을 느끼고 하나님이 기뻐하시면 인간도 기쁨을 느낀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여러분이 영적 체험을 하면 대번에 알 수 있습니다. 자기가 아무리 좋아서 춤출 수 있는 환경에 있어도 하나님이 슬퍼하시면 그럴 수 없는 것입니다. 하나님과 동심 동정으로 하나 되어 환경이 거기에 맞춰 움직일 수 있는 터전이 되었더라면 타락은 있을 수 없었을 것입니다.

아담 해와를 중심한 신랑 신부의 인연이 하나님으로부터 출발하지 못하고 사탄으로부터 출발했기 때문에 우리는 그것을 복귀해야 합니다. 천지창조 이후 지금까지 숱한 역사가 지나갔지만, 아담 해와는 아직까지 하나님을 위주한 본연의 신랑 신부의 자리에 나가지 못했습니다. 본연의 신랑 신부의 자리에 나가게 되면 어떻게 되는가? 선한 조상이 생겨나고 선한 자녀가 생겨날 것입니다. 그런데 타락됨으로 말미암아 본연의 선한 부모의 기준과 본연의 선한 자녀의 기준 그리고 본연의 선한 천사장의 기준이 깨져나가 버린 것입니다. 그러니 그것을 복귀해야 합니다.

15-245
세례 요한의 격위(格位)와 사명
오늘날 기독교 신자들은 예수님이 천사장의 나팔 소리와 함께 구름 타고 다시 오신다고 하는데, 그렇지 않습니다. 그러기 전에 이 땅 위에 천사장의 사명을 완결지을 수 있는 하늘의 충신이 나와야 됩니다. 그리하여 ‘내가 온 것은 내 뜻을 위해서가 아니라 하나님의 아들의 뜻을 위해서다’라고 선포하는 자가 나와야 하는 것입니다. 그와 같은 일이 예수님 당시에도 벌어졌었습니다. 그 사명의 대표적인 중심 존재가 세례 요한이었지요. 그래서 그는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왔나니! 내가 온 것은 나를 위해서가 아니라 그를 증거하기 위해서다’라고 했습니다.

그 세례 요한은 종으로 와서 이스라엘 나라 전체를 대표하여 타락한 직후의 아담의 자리를 복귀해야 했습니다. 타락 직후의 아담의 자리, 타락하지 않은 아담의 자리로 연결될 수 있는 그 자리를 복귀해야 했던 것입니다. 타락한 이 세상에서 타락하지 않은 아담의 자리를 복귀하여 세상의 모든 권한을 그에게 상속해 주기로 약속해야 할 대표자가 세례 요한이었던 것입니다.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왔다’는 말은 세례 요한 개인의 말이 아니었습니다. 그것은 전 이스라엘 역사를 대표하고, 이스라엘 민족을 대표한 말이요, 4천년 역사를 대표하고, 이 지구상에 살고 있는 전인류를 대표하는 말이었던 것입니다. 또 세례 요한이 예수님께 세례를 준 그 자리는 역사적인 모든 책임을 상속하는 자리였습니다. 그 다음부터 예수님은 출발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것이 무엇입니까? 이 땅에 아직까지 하늘의 충신이 나오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충신이 나오려면 이 땅 위에 참다운 하나님의 아들이 나와야 됩니다. 천사장은 그 하나님의 아들을 모심으로서 하늘 앞에 충신의 도리를 다해야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아들을 사랑함으로 말미암아 충신의 기준이 결정되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역사적인 이 종말시대에 기필코 하나님이 사랑하실 수 있는 아들이 나와야 됩니다. 그래야 충신이 결정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세례 요한을 불러 세우신 것은 그때까지 4천년 동안 하나님과 대결해 온 사탄의 괴수 천사장, 하나님을 배반한 그 천사장 말고 하나님을 위해 충성을 다짐하고 나서는 천사장의 입장을 대신하게 하기 위해서였습니다. 예수님께 충성을 다하고, 예수님을 위하라는 것이었습니다. 예수님의 어려움을 자기의 어려움으로 알고 그것을 헤쳐 나가기 위해 있는 힘을 다하라는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세례 요한이 그러한 책임을 다하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역사적인 슬픔은 더욱 가중되지 않을 수 없었던 것입니다. 세례 요한의 제자들은 예수님의 제자가 되어야 했고 세례 요한은 예수님의 세 제자 가운데 들어가야 했던 것입니다. 세례 요한을 환영하던 수많은 무리들은 예수님을 환영하는 무리가 되어야 했습니다. 그리하여 세례 요한은 신랑 신부의 본연의 이름을 갖춘 하나님의 아들딸 앞에 충성한 천사세계의 대표적 실체로 나타난 자로서 천사세계를 이끌고, 실체 사탄세계를 방비해야 했던 것입니다. 하나님이 찾아오실 수 있는 천사장의 실체목적을 완결한 세례 요한이 되어야 하는데, 그가 그 사명을 완결하지 못했기 때문에 예수님이 그 사명까지 책임지지 않으면 안 되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종 되는 도리가 생긴 것입니다. ‘내가 섬김을 받으러 온 것이 아니라 섬기러 왔노라’고 했지요. 하나님의 아들이 그러는 법이 어디 있습니까? 신랑으로서 있을 수 없는 일이었습니다. 그러기에 영광 가운데 출발해야 했던 예수님은 슬프고 원통한 종의 멍에를 쓰고 출발하지 않으면 안 되었던 것입니다. 그런 역사적인 과정이 남아 있기에 그 고개를 넘기 위해 나온 것이 기독교의 2천년 역사입니다.

그러면서 하나님은 민족적 섭리를 세계적 섭리로 끌고 나오신 것입니다. 역사를 이끌고 나가는 데는 역사의 내부를 전부 청산해야 합니다. 청산하는 데는 개인적으로, 가정적으로, 국가적으로, 세계적으로 전부 청산해야 합니다. 본래는 만민이 받들어 발전시켜 나가야 하는 것이 하늘의 섭리임에도 불구하고 인간들이 그 책임을 못했기 때문에 역사는 점점 점점 발전해 나온 것입니다. 하나님은 그러한 외적인 역사에 보조를 맞추면서 내적으로는 역사의 목적과 때를 이루기 위해서 준비해 오셨습니다.

기독교에서는 ‘끝날에는 주님이 오셔야 된다’고 하지요. 주님이 누구입니까? 잃어버린 참부모입니다. 부모는 영적 기준만으로는 안 됩니다. 예수님이 죽음으로 말미암아 영육을 중심삼은 참부모의 심정적 터를 마련하지 못했으니, 우리가 그 터전을 마련해서 하나님의 축복권내에서 예수님을 중심한 참다운 혈족이 되어야 합니다. 그런데 오늘날 기독교에서는 그저 믿고 천국 간다고 합니다. 가보라는 것입니다. 그것은 불가능합니다. 믿어지지 않거든 기도해 보십시오.

15-247
중심축에 들어가면
만일 하나님과 뗄래야 뗄 수 없고, 사탄이 부정할래야 부정할 수 없는 하나님의 직계의 혈족이 있다면, 그들은 하나님의 혈족이요 예수의 혈족인 것입니다. 그러나 그 혈족이 없기 때문에 심정적 정점이 성립되지 못한 것입니다. 아직까지 하나님의 직계 혈족이 중앙에 자리를 잡지 못하고 사방으로 돌아가고 있기 때문에 사방에서 사탄이 침범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 중심축에 들어가게 되면 하나님이 직접 주관하시기 때문에 사탄이 침범할 수 없습니다. 축에 들어가서 돌리기 시작하면 그 힘을 사탄은 막을 길이 없는 것입니다. 그런데 인간이 아직까지 축에 들어가지 못하고, 전부다 축의 주위를 돌고 있기 때문에 하나님도 주관 못하고 사탄도 주관 못하는 것입니다. 인간이 사탄편으로 가면 사탄이 마음대로 움직이고, 하나님편으로 가면 하나님이 주관하시게 되는 것입니다. 이런 가운데서 하나님은 지금까지 중심을 결정하기 위한 섭리를 해 나오고 계시는 것입니다.

그러면 지금 현세는 어떠한 때냐? 아벨의 입장에서 보면 가인과 아벨이 대립한 때요, 가인의 입장에서 보면 아벨을 죽였던 것과 같은 역사적인 때입니다. 아벨을 환영한 가인이 어디 있습니까? 이것은 현하 예수님이 아벨이라면 예수님을 따르는 사람들을 횡적으로 보면 예수님을 위한 가인입니다. 이 가인들이 어떻게 해야 되느냐? 사탄을 쳐부숴야 합니다. 그래야 세계의 악한 것이 없어지는 것입니다. 이러한 사명을 해야 할 책임이 오늘날 기독교에 있는 것입니다.

이 세계는 사탄편 세계인 공산세계와 하늘편 세계인 민주세계, 즉 유물세계와 유심세계로 나누어져 있습니다. 여기에서 이제 나올 것은 기독교를 중심삼은 세계관입니다. 하나님이 바라시는 것은 아담 해와의 뜻을 배반하고 아벨을 배반하는 가인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뜻을 환영하고, 아담 해와의 뜻을 환영하고, 아벨의 뜻을 환영하는 가인입니다. 그런 세계형이 민주세계입니다. 이것을 반대로 치고 넘어가려는 것이 진짜 사탄입니다. 그러나 거기에서 가인이 아벨을 협조하여 세계적으로 참다운 아벨적인 사명을 다하게 하기 위해서는 아들의 사명을 해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부모의 자리에 못 올라갑니다. 아들의 자리를 결정하지 않고는 부모의 자리로 못 올라가는 것입니다. 왜? 아담 해와가 타락하여 가인과 아벨을 낳은 것은 하나님의 아들이라 인정할 수 없는 일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아들딸로 결정될 수 없었다는 것입니다. 그런고로 복귀시대에는 하나님의 아들딸이라는 기준을 세우지 않고는 부모의 자리에 올라갈 수 없습니다.

15-248
아벨적인 존재가 가야 할 길
그러니 전세계의 기독교인들은 어떠한 자리에 있느냐 하면 하나님을 반대하던 가인 말고 하나님의 뜻을 따르는 가인, 아벨의 뜻을 위하는 가인이 되어야 할 자리에 있습니다. 그래야 세계적인 아벨의 중심자로 주님이 오시는 것입니다. 그런데 오시는 주님은 신랑으로 못 오십니다.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로서 이 땅 위에 와서 책임을 다하지 못했기 때문에 그 책임을 다하고 가인적인 세계를 통합하고 난 후에야 비로소 하나님 앞에 신랑 신부의 자리로 올라갈 수 있는 것입니다. 복귀의 원칙이 그렇습니다.

현재는 어떤 때인가? 가인과 아벨이 싸우는 때입니다. 이러한 때에 기독교는 가인을 위주하고 하나 되어야 합니다. 민주세계는 또 아벨로 오시는 주님과 절대적으로 하나 되는 기준을 세워야 됩니다. 옛날 아담 가정에 벌어졌던 것이 돌고 돌아 역사적인 최후의 종점에 가서 그와 같은 현상이 벌어지면, 여기에 하나님을 중심삼고 심정적인 터전을 마련해 나가면서 참부모의 인연을 결정지으려 하는 것이 하나님의 뜻입니다.

그러니 이 세계에서 개인적인 아벨이 나와야 하고, 아벨적인 가정이 나와야 되고, 아벨적인 종족이 나와야 하고, 아벨적인 국가가 나와야 합니다. 그러면 아벨 국가는 어떤 국가인가? 미국인가? 아벨이 가인을 굴복시키기 위한 싸움의 터전 위에 있는 정성을 다하여 하나님 앞에 제사드리는 나라, 죽느냐 사느냐 하는 문제를 걸고 자기의 모든 것을 하나님 앞에 바치는 나라, 오늘날 민주세계에 있어서 제일 비참한 나라, 제일 복잡한 나라가 아벨 국가입니다.

외적인 문제도 그렇지만 내적인 문제도 마찬가지입니다. 아벨적인 개인, 아벨적인 가정, 아벨적인 종족, 아벨적인 민족, 아벨적인 국가가 나오면 세계는 문제가 아닙니다. 그런 자리가 어디냐? 여러분, 우리 나라에 판문점이 있지요? 판문점은 세계에 하나밖에 없습니다. 하나님과 사탄이 동시에 참소할 수 있는 곳이지요. 천지의 법도에 어긋나면 거기서 참소하는 것입니다.

한국은 3·8선을 중심으로 남과 북이 딱 갈라져 있습니다. 원리를 통해서 볼 때, 제물은 쪼개야 되지요? 그래서 한국의 경제 상태는 극난(極難)하게 되는 것입니다.

여러분, 제사장이 제물을 드릴 때는 상하를 막론하고 다 제단 앞에 머리를 숙이는 것입니다. 속죄의 제물 앞에는 그 나라의 군주도 머리 숙이고 민족 전체가 머리 숙일 수 있는 기준을 닦는 것입니다. 그것을 못하면 통일교회 사명은 완결되지 못한다고 선생님은 생각합니다.

제물이란 무엇인가? 죽음 길을 준비하는 것이 제물입니다. 살 길을 준비하는 것이 아니예요. 어느 한때에 민족을 위하여 속죄의 제단에 깨끗이 오를 수 있는 준비를 하는 것입니다. 그가 잘 입는 것도, 잘 먹는 것도 거룩히 바쳐지기 위함이요, 살아 있는 것도 그 생명을 거룩히 바치기 위해 살아 있는 것입니다. 제물은 환경이 좋으면 좋을수록 생명을 바칠 길, 죽을 길을 찾아야 하는 것입니다. 대접을 잘 해주면 잘 해줄수록 죽을 날이 가까와 오는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이 세계에 그런 운명의 제물 길을 가는 민족이 있어야 됩니다. 통일교회가 그 제물의 역할을 해야 합니다. 그러므로 여러분은 죽을 준비를 해야 됩니다.

오늘날 통일교회가 어려움을 많이 당해서 차후에 삼천만 민족이 당할 어려움의 고비를 먼저 넘어가야 합니다. 그것이 제물의 길입니다. 죽을 수밖에 없는 민족을 제물이 희생함으로써 살릴 수 있고, 속죄할 수 있는 것입니다. 제물된 자가 어려운 고개를 넘으면서 먼저 맞고 먼저 희생하여 하나님 앞에 피를 뿌림으로 말미암아 그 은사를 받아서 민족이 복귀될 수 있는 것입니다. 또 그럼으로써 제물된 자는 은사를 받아 회생(回生)할 수 있는 것입니다. 우리 통일 신도들은 그런 길을 가야 합니다. 이러한 사명은 젊은 사람들이 해야 하는 데 싫다고들 합니다.

이번에 선생님이 민주세계를 중심삼고 전세계를 순회할 때, 무엇을 보았는가? 다른 것 보지 않았습니다. 어느 나라에 하나님이 계실 수 있느냐? 어느 민족을 하나님이 사랑하실 수 있느냐? 하는 것을 생각하면서 보았습니다. 어느 민족이든 하나님을 사랑하지 않으면 안 됩니다. 지금은 환경적으로 하나님을 잃어버리기 좋은 사회적 여건들입니다.

15-250
제물의 자격과 그 길
제사 드리는 자리에서는 부모라는 관념을 가져서는 안 됩니다. 자식이라는 관념도 가져서는 안 됩니다. 만일에 제사장의 아들이 죄를 지었는데 그 제사장이라는 사람이 ‘그는 내 아들이니 하나님, 나를 보고 내 아들의 죄를 용서해 주십시오’ 하는 기도를 해서 되겠습니까? 그런 사람은 제물이 아닙니다. 자식의 관념, 부모의 관념, 이 친족 전체, 즉 형제라는 관념, 종족이라는 관념이 남게 되면 제물 될 자격이 없습니다.

제물은 공적이어야 합니다. 제물이란 나라의 물건이지 어떤 종족이나 어떤 개인의 물건이 아닙니다. 그렇기 때문에 공동 목적을 대신해야 합니다. 제물의 입장에서 ‘내 가정의 죄를 속죄해 주시오’라고 기도해서는 안 됩니다. 반드시 공동 목적을 대신한 제물이 되어야 합니다. 제물이 ‘내 민족을 속죄해 주시오’라고 기도해서 되겠습니까? 안 됩니다. 제물된 자는 크게 ‘민족의 죄를 용서해 주시고 세계의 죄를 용서해 주십시오’라고 기도해야 합니다. 나아가서 ‘세계의 수많은 불쌍한 사람들을 용서해 주십시오’라고 기도해야 합니다. 그래 가지고 용서를 받게 되면 자연히 자기 가정이나 종족도 용서를 받게 되는 것입니다. 그것이 제물의 길입니다.

복귀섭리를 추진해 가는 데 있어서는 반드시 제물이 필요합니다. 가인 아벨의 싸움터에서는 제물이 없으면 탕감할 수 없습니다. 가인과 아벨을 중심삼고 탕감복귀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제물이 있어야 해요. 6천년 전 아벨은 아벨대로 가인은 가인대로 하나님 앞에 지성을 다한 제물을 드리면서, 환경을 개척하여 아담이 하나님 앞에 설 수 있는 부모의 위치를 결정지을 수 있는 발판을 닦아 드려야 했음에도 불구하고, 가인과 아벨은 그런 제물을 드리는 과정을 거쳐 부모의 위치를 결정지을 수 있는 터전을 마련하지 못했던 것입니다. 그리하여 끝내 승리적인 부모의 터전은 이루어질 수 없었던 것입니다.

이렇게 볼 때 오늘날 기성교회 지도자들이 어떤 입장인지 압니까? 제사장의 입장입니다. 그러면 제사장은 어떤 입장에 서야 되는가? 제사장은 제사 드릴 양이 죽을 때 심정이 동하여 눈물 흘려야 됩니다. 절대적으로 양과 같은 공동 소유의 자리에서 하나님 앞에 민족을 대신하여 속죄의 제물을 드려야 합니다. 자기 몸의 피의 값 대신 양을 드린다는 것을 느껴야 합니다.

제물이 무엇이냐 하면 제사장 자신의 몸뚱이인 것입니다. 제사장 자체가 제물이라는 것입니다. 처참한 자기의 모습을 민족을 대신하여 하나님 앞에 바쳐야 할 책임이 제사장에게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제사장이 그 책임을 못하면 망합니다. 또 거기에 참여한 사람도 구원받지 못합니다. 그러니 어차피 해결점을 찾아야 합니다.

15-251
3년 반의 고비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실 수 있겠습니까? 몇몇 사람들을 만나 봐도 하나님의 심정세계를 아는 사람은 없습니다. 내가 생각하기에 통일교인들은 축복받은 사람들입니다. 내가 통일교회 선생이라서 이런 말 하는 것이 아닙니다. 이 민족은 앞으로 우리 통일교회가 나가는 방향을 취하지 않고는 살 도리가 없습니다. 두고 보십시오. 그때가 오면 가다가 돌아서야 하는 데 그때 뒤에서 안내할 사람이 없으면 그 민족은 망합니다. 그 안내자에게는 민족이 잘못 가면 바른 길로 인도해야 할 책임이 있습니다. 인도하는 대로 따르지 않으면 어차피 돌아설 때가 있을 것이니 뒤로 돌아설 때 뒤에서 나를 따르라고 지도할 수도 있어야 합니다. 이렇게 양면의 지도자를 가질 수 있는 종교단체가 나와야 합니다.

최고의 자리에서는 하나님의 아들딸의 책임을 다하고, 최하의 자리에서는 종의 책임을 다하여야 합니다. 이렇게 양면에서 하나님의 심정을 알아 드리기 위해서 우리는 어떻게 해야 될 것이냐? 이것을 위해서 선생님이 여러분 뒤에서 지도하고 있는 것입니다. 앞에 서서 지도할 수 있는 능력이 없어서 돌아설 때에, ‘내가 이렇게 걸어왔으니 너희들도 그대로 걸어오면 산다’ 할 수 있는 지도 이념체제를 갖추어 놓아야 합니다. 만일 이 민족이 그 길을 따라가면 살 것이요, 따라가지 못하면 돌아서게 될 것인데, 어느 때라도 지도할 수 있는 양면적인 지도자를 하나님 대신 반드시 세워 놓아야합니다.

그러기에 우리 통일교회 이념으로 보게 될 때 책임이 지극히 큽니다. 또 행동면으로 보아도 지극히 큰 책임이 있는 것입니다.

우리 교회가 비약적으로 발전을 못 하는 것은 젊은 사람들 때문입니다. 대학 다니는 청년들 때문이요. 지금 우리 교회가 개척하는 과정에서는 대학 가는 것이 문제라고 할 수 없습니다. 희생하고 제물 되는 이 길은 공부할 것 다하고 가는 길이 아닙니다. 지방 식구들은 이런 것을 알고 학교도 다 집어치우고 전부 나가서 뜻을 위해 싸워 왔습니다. 그래 가지고 1년, 2년, 3년 정도는 잘 지내는 데 7년 고비를 넘기가 힘듭니다. 한 3년 반쯤은 뭐가 뭔지 모르는 상태에서 잘 지냅니다. 세계를 위하고 민족을 위한다고 하며 잘 지내요. 그러다가 3년 반만 지나면 자기를 생각하게 됩니다. 처음 3년은 제물을 드리는 때입니다. 이 제물 드리는 시기는 잘 지내고 나서는 자기를 중심삼고 바라보게 되는 데 바로 그때 떨어져 나가는 것입니다. 이것은 과정에서 생긴 부작용인데 모면할 수 없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7년기간을 넘어야 하는 것입니다.

가인과 아벨을 바꿔치는 것입니다. 그런데 참다운 가인이 있습니까? 참다운 가인이 어디 있는가? 가인적인 참다운 개인과 가인적인 참다운 가정과 가인적인 참다운 족속, 가인적인 참다운 교단이 어디 있는가? 하나님을 위해 충성하고 앞으로 오시는 주님을 위해 천번 만번 회개하고 기도한 준비된 사람이 없다는 것입니다.

그러니 우리 통일교인들이 아벨적인 입장이기에 사탄세계에 들어가서 참다운 가인을 세워 가지고 가인이 우리의 뜻을 따를 때까지, 즉 참다운 아벨의 자리를 인계받을 때까지 우리가 가르쳐 주고 아벨의 뜻을 상속시켜야 합니다. 그래서 아벨의 자리로 다리를 놓아서 넘어가야 합니다.

그러려면 눈물과 땀과 피를 흘려야만 합니다. 이것은 우리 통일교회의 표어와 같습니다. ‘물은 인류를 위하여, 땀은 땅을 위하여, 피는 하늘을 위하여’흘려야 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지금까지는 눈물을 잘못 흘렸습니다. 땀을 잘못 흘리고, 제사를 잘못 드렸다는 것입니다. 그러니 이것을 다시 수습해야 합니다. ‘부모의 심정을 지니고 종의 몸을 쓰고 눈물은 인류를 위하여 땀은 땅을 위하여 피는 하늘을 위하여’ 흘리자는 것입니다. 역사노정에서 하나님이 하신 것과 같이 그대로 하자는 것입니다. 여러분이 마음으로 걱정하는 것이 세상적이어서는 안 됩니다.

15-253
자연굴복이라는 절대적인 조건
오늘날 아벨의 책임을 짊어진 우리는 아벨을 대할 수 있는 천적인 가인이 없으니 가인을 양육해야 합니다. 아벨을 때려 죽이는 가인 말고, 아벨을 위하여 생명을 바칠 수 있는 가인을 양육해야 합니다. 이것이 현하의 우리의 사명입니다.

타락함으로 말미암아 이 세상의 모든 권세는 사탄이 가져 갔습니다. 그리하여 세상 나라의 왕도 주권자도 모두 사탄편이 되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사탄이 가진 모든 것을 다시 빼앗아 와야 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빼앗아 오는 데는 자연굴복이라는 절대 조건을 세워야 합니다. 자연굴복시켜야지 강제굴복시켜서는 안 됩니다. 왜? 아담이 말로 유인당한 것은 강제굴복당한 것이 아니라 따라간 것입니다. 그러니 반대로 가인적 입장에 있는 사람들이 아벨 앞에 자연굴복하게 만들어야 됩니다. 타락한 아담 해와의 모든 것을 모두 상속받은 것과 마찬가지로 복귀시대에 있어서 가인은 아벨 앞에 자연굴복하여 이 세계의 모든 것을 아벨적인 것으로 상속받아야 하는 것입니다. 몽둥이로 쳐서 굴복시키는 것이 아닙니다. 맞고 빼앗아 나오는 것이 하나님이십니다. 자고로 역사에 이름난 사람은 그 시대에 맞는 것입니다. 그러나 지나고 나면 인정받게 되는 것입니다.

예수님도 마찬가지입니다. 2천년이 지난 오늘날 역사가 증거하는 예수님을 누가 못 믿겠습니까? 그러나 2천년 전 당시대에 제물의 입장으로 처참하게 피흘리실 때 예수님을 따른 사람은 없었습니다. 죄다 도망쳤거든요. 지금은 믿기가 쉬운 것입니다.

이런 환경에 처해 있을 때 아벨이 해야 할 일은 가인을 굴복시키는 것입니다. 강제굴복이 아니고 자연굴복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가인을 완전히 굴복시키기 위해 사랑하는 독생자까지 보내신 것입니다. 가인을 완전히 굴복시키기 위해서 하나님께서는 당신이 가장 사랑하는 더욱 완전한 아들을 보내셨다는 것입니다. 가인이 자연굴복하지 않으면 아벨은 제물이 되는 것이 원칙입니다. 가인이 자연굴복하지 않으면 아벨이 제물되는 것은 철칙이에요. 가인이 자연굴복하면 아벨은 죽지 않습니다. 이스라엘 민족 앞에 아벨로 나타난 예수님은 이스라엘 민족이 자연굴복하지 않았기 때문에 죽을 수밖에 없었습니다. 천도가 그렇기 때문입니다.

맞고 빼앗아 나오는 것이 하나님의 작전입니다. 한 사람을 빼앗기 위해, 한 사람을 구하기 위해 하나님은 가정을 치십니다. 그래야 사탄이 참소를 못합니다. 여러분 이거 알아야 합니다. 세상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만약 남의 아이와 자기 아이가 싸웠다고 합시다. 자기의 아들이 잘못한 것이 틀림없는데, 남의 아들이 잘못했다고 그 아이를 때리게 되면 매맞은 아이의 부모로부터 참소받게 됩니다. 그러나 남의 아들이 잘못한 것을 뻔히 알면서도 자기 아들을 때리면 그 부모는 참소하지 못합니다. 이렇게 역사는 진행되어 왔습니다. 역사노정에서 하나님을 위해 나왔던 수많은 사람은 피를 흘리지 않으면 안 되고, 눈물을 흘리지 않으면 안 되고, 억울한 생애의 노정을 가지 않으면 안 되었습니다. 이건 왜 그러는가? 가인적인 세상을 자연굴복시키지 않으면 복귀되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새로운 이념과 새로운 진리의 이 길을 탐구시켜서 그 진리가 보편화됨에 따라 그 진리를 추구할 수 있는 역사적인 환경을 개척해 나온 것입니다.

세계를 지배할 수 있는 진리! 참된 진리가 나와서 참된 사람, 참된 사랑, 참된 인격, 참된 심정을 찾아야 합니다. 인간은 어치피 그런 것을 찾아가기 때문에 참된 진리 앞에는 머리를 숙이게 되어 있습니다. 또, 참된 진리를 말하는 사람 앞에 자연굴복하게 되어 있는 것입니다.

이러한 진리 말씀과 인격을 갖춘 사람을 정해서 역사를 수습하여 가지고 심정적인 하나님의 내적 기준과 맞추어서 하나님 쪽으로 넘어와야 됩니다. 왼쪽에서 오른쪽으로 넘어와야 된다는 것입니다. 이 세계의 탄식권을 넘어야 됩니다. 넘어가는 그 고개가 십자가의 길이요, 죽음의 길입니다.

도의 길이란, 살아서 죽음의 길을 청산하고 가는 길입니다. 그 길을 넘어가기 위해서는 골고다를 거쳐가야 하는 것입니다.

15-255
아벨의 이중 사명
아벨은 그 고개를 넘어가기 위해서 이중의 사명을 해야 합니다. 가인을 굴복시키고 그를 하나님 앞에 세워 드려야 하는 것입니다. 이러한 아벨은 하나님과 가인의 중간 입장에서 위로 하나님을 모시고 아래로 가인을 굴복시켜야 합니다. 아벨이란 존재는 가인을 굴복시켜야 하는 데 강제굴복이 아니라 자연굴복을 시켜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 피와 눈물을 흘리고 무한히 주어야 하는 것입니다. 사탄세계의 축복권을 빼앗기 위해서는 심정적으로 무한히 주고 전부 감싸주고 진실한 마음을 주어야 합니다. 사탄에게 준 그것이 자기의 물질보다 가치 있는 것일 때는 그것이 울타리가 되어 자연 굴복하게 되는 것입니다. 아벨은 가인을 굴복시켜야 됩니다. 그리하여 가인으로부터 상속받은 전부를 하나님 앞에 드려야 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제사장 입장과 제물 입장을 탕감하는 것입니다.

제물은 원래 사람이어야 하는 데 그럴 수 없으니 이스라엘 민족은 사람을 대신할 수 있는 양을 잡아서 제물로 드렸던 것입니다. 그 양은 제사장의 몸과 같고 제사장 자체는 제사장의 마음과 같은 것입니다. 즉, 제사장은 아벨의 입장이기 때문에 가인적인 입장에 있는 사람들을 전부 자연굴복시켜 가지고, 하나님의 심정과 연결시킬 수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그런 아벨적 사명을 띠고 이 땅에 오셨습니다. 그러니 민족을 수습하여 자연굴복시켜 가지고 하나님 앞에 드려야 했는데 그러한 책임을 못했기 때문에 제물이 되었던 것입니다.

오늘날 복귀시대에 우리들은 자처해서 아벨이라고 하며 민족적인 아벨의 사명을 해야 되겠고, 세계적인 아벨의 사명을 해야 되겠다고들 합니다. 그러기 위해서 우리 통일교인들은 민족적으로 반대하라고 해야 합니다. 반대하다가도 참 길을 가는 무리에게 자연히 굴복되어 들어오게 되어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이 개인적인 시대에 개인적 입장으로 나갈 때는 그들이 굴복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여러분이 아벨적인 입장에서 가정적인 기준을 갖고 맞서게 되면 개인이 굴복하는 것이요, 종족적인 기준에서 맞서게 되면 가정이 굴복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니 언제나 한 단계 앞서 나가 맞서야 되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아벨적인 입장에 선 사람에게는 지금이 민족적인 주의시대인 동시에 세계적인 주의시대인 것입니다.

여러분에게는 민족을 대표해서 가인을 굴복시켜야 할 책임이 있는 동시에 세계를 수습하여 하나님 앞에 바쳐야 할 책임이 있습니다. 세계를 붙들고 민족을 구하여 하나님 앞에 바쳐야 할 책임이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민족을 구하기 위해서는 세계적인 제물의 과정을 거쳐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하나님 앞에 민족을 바칠 수 없습니다. 그것이 이중의 십자가입니다. 알겠습니까? 아벨에게는 선조로부터 지은 역사적인 죄를 짊어지고 이것을 세계적으로 전부 수습하여 하나님 앞에 바쳐야 할 입장에 있는 것입니다. 그와 같이 큰 사명을 책임지고 이중의 사명을 감당하지 않고서는 아벨의 책임을 완결지을 수 없다는 것입니다.

15-256
피와 땀과 눈물과 심정으로 자연굴복시켜야
예수님은 그런 아벨의 입장에서 민족 앞에 호소하였는데 그 민족 가운데에는 가인이 없었습니다. 수습된 가인이 없었던 거예요. 그러니 세 제자를 데려다 놓고 겟세마네 동산에서 예수님은 ‘죽든 살든 너희는 나와 하나가 되자. 내 아픔을 너희가 대신하고, 너희의 어려움을 내가 대신하여 죽음의 길도 같이 가자’ 하였던 것입니다.

겟세마네 동산에서의 세 제자는 과거, 현재, 미래의 3시대를 대표한 인간상이었습니다. 아담 가정의 가인 아벨 셋을 상징하고, 노아 가정의 셈 함 야벳을 상징하고, 아브라함의 하나님 이삭의 하나님 야곱의 하나님과 사울왕 다윗왕 솔로몬왕을 상징했으며, 또한 1차 아담 2차 아담 3차 아담을 상징했던 것입니다.

그런 세 제자는 역사적인 기간을 횡으로 축소시킨 겟세마네 동산에서 예수님을 절대적으로 모시고, 사탄이 쳐들어오면 쳐부수는 하늘의 충신의 사명을 해야 했던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예수님이 맞기 전에 대신 맞을 수 있는 심정적 기반을 마련하지 못하고, 예수님이 세 번씩이나 하나님 앞에 담판기도를 하는 동안에도 끄덕끄덕 졸았던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어둠의 때가 되었다, 너희 갈 데로 가라’고 분부하셨던 것입니다. 이것이 예수님이 역사적인 사탄의 침범을 당했음을 알려 주는 말씀인 것입니다.

인간 세상에 아직 가인적인 승리의 터전이 결정되지 않았기 때문에, 오늘날 기독교를 중심삼고 그 역사를 연결하여 영적인 가인 세계를 이끌고 나와 영적인 재림 이념을 바라고 나온 것이 기독교의 사상입니다. 그런데 영적인 재림만 해 가지고 되겠어요? 영 육 아우른 완전한 재림을 할 수 있는 이념을 갖추지 않으면 안 되는 것입니다. 오늘날 이런 면에서 통일교회는 한 단계 진보하고 있습니다.

그러면 오늘날 우리 통일교회 식구들은 어떤 입장인가? 예수님이 넘어 가신 십자가의 자리를 넘어서야 합니다. 민족 앞에 몰리고 쫓기는 자리를 넘어서야 하는 입장인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 통일교회는 많이 몰렸지요. 삼천만 민족이면 누구나 통일교회와 선생님을 욕합니다. 그러나 우리는 예수님이 가신 서러운 고빗길을 안 갈 수 없습니다. 여러분은 겟세마네 동산에서 민족을 대신하여 제사장적인 입장에 서셨던 예수님 앞에 제물이 되어야 할 입장에 있습니다. 그래서 여러분은 지방에 나가서 피눈물을 흘려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이 민족적인 속죄의 사명을 완결짓지 못합니다. 선생님은 그런 일 안 하고 여러분에게만 그런 일을 시키는 것이 아닙니다. 선생님도 그런 일을 다 했습니다.

아벨의 입장은 어떤 입장입니까? 두 사명을 완결시켜야 하는 입장입니다. 주먹으로 때려 가지고 강제굴복시켜서는 안 됩니다. 피와 눈물과 땀으로, 심정으로 굴복시켜야 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심정세계는 창조되어 가는 것입니다. 심정을 갖고 나가면 따라가지 않을 수 없는 것입니다.

제자들로부터 열번 백번 배척받던 예수님의 억울한 심정을 우리는 잘 알아야 됩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죽게 되었을 때 도망가던 제자가 아니라 십자가를 가로막고 내가 달리겠다고 할 수 있는 제자가 되어야 합니다. 베드로는 나중에야 십자가에 거꾸로 달려 죽었지만, 미리 좀 그렇게 했으면 예수님이 부활하실 때 같이 부활했을 것입니다. 그랬으면 오늘날 기독교가 2천년씩이나 안 가는 것입니다. 여러분들, 이런 것 생각해 봤어요.

15-258
대한민국의 갈 길
오늘날 기독교인들이 ‘오! 베드로는 수제자였다’라고 하는 데 베드로가 무슨 수제자입니까? 예수님이 다시 찾아가서 세워 주었으니 수제자지요. 그녀석 거 되먹었습니까? 스승이 생명을 걸고 담판 기도하는 그 자리에서 잠만 자고 있었고, 스승이 죽게 되었을 때 도망간 자가 무슨 수제자 자격이 있습니까? 불쌍한 예수님입니다. 그런 베드로를 다시 찾아가야 했던 처량한 예수님이에요. 예수님이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네기 이 사람들보다 나를 더 사랑하느냐? (요 12 : 15)” 하고 물을 때 “주여 그러하외다. 내가 주를 사랑하는 것을 주께서 아시나이다(요 12 : 15)” 하고 베드로가 대답하였으나, 세 번씩 되풀이해서 물을 때의 예수님의 복장은 뒤집어졌을 것입니다. 그러니 우리에게 세 고개가 남아 있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민족을 대표한 아벨의 입장에서 아벨적인 가인 국가인 이스라엘을 수습하여 완전한 아벨적인 국가로 연결시켜야 했는데 그 사명을 완결짓지 못했습니다.

그러니 영육이 분단된 예수님의 한이 풀리기 전에는 재림역사가 이루어지지 않습니다. 하나님이 안식할 수 없어요. 예수님의 한이 풀리지 않았는데 어떻게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질 수 있겠습니까? 하나님이 편할 수 있겠습니까? 아들이 죽으려고 하는데 ‘너 잘한다! 좋구나’ 할 아버지가 어디 있겠습니까? 예수님의 이러한 곡절이 있는 한을 풀고 하나님의 한의 곡절을 풀기 전에는 이 한의 고개를 못 넘어가는 것입니다. 왜? 부모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오늘날 우리들은 어떤 사명을 해야 하는가? 예수님에게 아벨적 입장에서 이스라엘 민족을 가인적인 국가로 세워서 하늘편 아벨 국가로 상속하여야 할 책임이 있었는데, 민족이 그를 따라 주지 않았기 때문에 예수님은 그 책임을 못하고 죽어 갔으니, 이 끝날의 우리들은 무엇을 어떻게 해야 되느냐? 다시 오시는 주님은 민족을 중심삼고 세계적인 뜻을 펴 나가야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기독교는 지금 세계적인 발판을 닦아 나가고 있는 것입니다. 형태는 민족적인 형이로되 뜻은 세계를 위하여 펴 나가야 하는 거예요. 세계를 소망하면서 민족까지 이끌고 나가야 되는 것입니다.

탕감역사는 청산짓지 않으면 안 됩니다. 그러므로 민족을 대신한 아벨적인 기준이 반드시 민족과 규합되어 나와야 됩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그런 나라가 있어야 합니다. 내가 고맙게 생각하는 것은 한국이 옛날부터 하나님을 모셔 왔다는 것입니다. 이제 한국은 하나님을 찾지 않으면 나아갈 길이 없습니다. 정치적인 면, 경제적인 면, 어느 면이든 나아갈 길이 없는 것입니다. 남의 힘을 이용해서는 안 됩니다. 어느 나라든 남의 원조를 받아 가지고는 살 수 없는 것입니다. 원조를 해주는 것은 전부다 미끼입니다. 미끼예요. 그러므로 그런 것을 박차고 자력을 길러 놓아야지 그렇지 않으면 피 뿌리는 일이 벌어집니다.

여러분, 우리는 아벨적인 나라로서 아벨적인 생활을 해야 되겠습니다. 아벨적인 나라의 책임을 해야 되겠습니다. 복귀노정에 있어서 구원을 이루는 것이 우리가 기필코 달성해야 할 목적입니다. 그러므로 그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서는 가인을 자연굴복시켜야 합니다. 민족적인 가인 국가를 아벨적인 국가 앞에 자연굴복시켜 가지고 그 국가를 자기네가 주관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 드리며 ‘이 민족을 세계의 국가를 대표한 제물로 바치오니 받아 주시옵소서’ 해야 됩니다. 그래야 받으시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러지는 않고, ‘아! 대한민국이 아벨적인 국가의 사명을 다했으니 하나님이시여, 이제 이 나라를 세계적인 대표 국가로 세워 주소서’ 한다면 하나님도 받을 도리가 없는 것입니다. 천법이 그렇게 안 되어 있어요. 대한민국이 아벨적인 국가의 사명을 다해 가지고 하나님께 바칠 때는 ‘하나님, 이 국가를 세계를 위한 제물로 바치옵니다’ 해야 합니다. 세계 만방의 수많은 나라들이 바라보고 조공을 드리며, 머리 숙이도록 하기 위해 바치는 것이 아닌 것입니다.

15-260
뚫어진 구멍을 막으려면
아벨로서의 책임을 지고 오셨던 예수님은 이스라엘 민족을 수습하여 하나님 앞에 바치며 ‘이 민족을 세계의 국가를 구할 수 있는 제물로 드리오니 받아 주시옵소서’ 했어야 합니다. 만약 예수님이 그런 입장에서 이스라엘 민족을 세계를 위한 제물로 하나님 앞에 바쳤더라면 세계적인 싸움의 노정을 넘어갔을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이 그 뜻을 이루지 못하고 영적인 기준만을 세우고 가셨기에 오늘날까지 기독교를 중심삼고 그 남아진 해결점을 찾아서 내려온 것입니다. 그런 이념적인 발판 위에 나온 우리 통일교회의 책임은 아벨적 입장에서 하나님과 가인 사이의 중간적인 사명을 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러려면 가인을 굴복시켜서 하나님께 바쳐 드려야 됩니다. 복귀도상에 있어서 우리 통일교회를 민족과 세계를 위한 제물로 바쳐야 되는 것입니다. 알겠어요?

통일교회가 가는 길은 어렵고 힘든 길입니다. 그저 기성교인들처럼 다니려고 생각하면 안 됩니다. 통일교회를 다니려면 대단한 각오를 해야 합니다. 이 길이 어렵고 힘들지 않다면 통일교회는 거짓인 것입니다.

오늘날 다방에 가고 술 마시던 사람을 교회에 가자 해서 데리고 교회에 가서 믿는다고 그냥 천국에 갈 수 있다면 오죽 좋겠습니까? 하지만 하나님은 그런 일은 안 하십니다. 곡절이 있습니다. 구멍이 뚫어졌으니 그 뚫어진 구멍을 막을 수 있는 것을 만들어야 됩니다. 그런 것을 복귀섭리라 할 때, 세계를 뚜드려 가지고 일시에 만들 수 있는 하나님, 전능하신 하나님이 왜 구원섭리를 하는 데 6천년 동안 섭리를 하셨겠습니까? 구원이란 억지로 해서 되는 것이 아닙니다. 세상에 구멍이 뚫렸으니 하나님의 아들딸이 새 것을 갖고 와서 갈아 넣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선한 사람이 맞고 희생하는 것입니다.

그리하여 새 것으로 뚫린 곳을 막으면 그것이 연결되므로 중심이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새 것을 중심삼고 하는 것이 복귀역사입니다. 여러분이 그런 중심의 입장에 서야 하는 것은 틀림없습니다.

오늘날 남자 여자를 막론하고 여러분은 어떤 입장에 있는가? 하나님의 복귀섭리역사를 거슬러 올라가면 무엇이 나올 것인가? 천사장이 나오고 아담과 해와가 나오고 맨 나중에 하나님이 나옵니다. 그러면 그 하나님이 목적하시는 것은 무엇인가? 천사장도 아니요, 아담 해와도 아니요, 참아들딸인 것입니다. 아담과 해와가 천사장과 타락한 결과가 무엇입니까? 사탄의 아들딸이 된 것이었습니다.

하나님이 오늘날까지 아담 해와를 대신할 사람을 보낼 수 없어서 복귀섭리를 못하신 것이 아닙니다. 아담 해와의 사명을 대신할 사람을 또다시 보낼 수는 있으나, 그 결과가 하나님이 바라시는 소망대로 안 되고, 아담 해와가 소망하는 대로 안 되고, 타락전 천사장이 소망하던 세계가 안 된다면, 그 이후는 보내더라도 복귀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여러분, 이것 잘 알아야 됩니다.

15-261
하나님의 축복을 받으려면
아담이 원하던 것도 아들딸이요, 해와가 원하던 것도 아들딸이요, 하나님이 원하시는 것도 아들딸입니다. 그런데 타락함으로 말미암아 그 소망이 깨져 버리고 죄악의 역사가 벌어졌으니, 그것을 박차 버리고 참다운 혈통의 인연을 복귀해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서 여러분은 유전법칙을 통하여 사탄으로부터 이어받은 사탄의 피를 청산해야 됩니다.

그렇기 때문에 종교는 부정으로부터 시작되는 것입니다. 그 시대의 사회적 환경을 부정하는 거예요.

무엇을 부정하는가? 자신을 부정하는 것입니다. 먹는 것, 잠자는 것, 정욕 등을 억제하라는 것입니다. 그 단계를 넘어서지 못하고는 하늘 앞에 상대의 인연을 가질 수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고차적인 종교, 불교―불교도 고차적인 종교입니다―의 스님이나, 천주교의 신부나 수녀들이 전부 혼자 사는 것입니다. 세상을 전부다 부정하는 거예요. 그리하여 매를 맞아 하늘 앞에 제사를 드려서 제사장으로서의 승리적인 기준을 이루어야 비로소 하나님의 축복을 받을 수 있는 것입니다. 이것이 복귀입니다.

그러나 아직까지 천주(天宙)교회가 안 나왔습니다. 하나님이 공인하고 천리법도를 주관할 수 있는 종교가 안 나왔어요. 하나님의 심정과 일치된 부모의 기준을 세우지 못했습니다. 그러므로 그 기준을 세워 나가는 것이 복귀의 길입니다. 그러니 예수님이 말씀하신 신랑 신부란 말은 딱 들어맞는 것입니다. 주님은 신랑으로 오지만 부모가 되기 위해서 신부를 찾아야 하는 것입니다. 또 신랑 신부만 갖추면 되는 것이 아닙니다. 아들딸이 있어야 됩니다. 예수님이 세 제자를 찾아가서 뭐라고 하신 줄 압니까? 그러니 여러분은 세 아들딸을 찾아야 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겟세마네 동산에서 기도하실 때 예수님을 배척하던 세 제자 같은 자들 말고 그 이상의 제자들을 찾아야 합니다.

그래 가지고 그 기준을 넘어서야 합니다. 그리하여 아담 해와의 타락전 단계로 넘어가야 되는 것입니다. 아담 해와가 타락해서 하나님 앞에 시험받던 그런 자리가 아닌 아벨에게 제물을 드리게 할 필요가 없는 단계로 넘어가는 것입니다.

오늘날 여러분들은 아벨적인 국가의 사명과 세계의 사명을 앞에 두고 국가적인 제물의 과정을 거쳐 나가 하늘이 인정해 주실 수 있는 세계적인 제물의 과정을 거쳐야 할 운명에 놓여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알겠어요? 「예」

오늘날 아벨 된 우리의 사명은 어떤 것인가? 민족적인 사명을 대신하여 제물이 되고 세계적인 사명을 대신하여 ‘나를 제물로 세워 주시옵소서’ 해야 합니다. 제물이 되는 데 죽으면 안 됩니다. 양을 잡아서 제사를 지내는 대신 몸은 양을 대신한 제물이 되고 마음은 제사장의 입장에서 제사를 드려서, 속죄의 권한을 부여받아 가인을 자연굴복시켜 가지고 아벨적인 자리로 끌고 가야 합니다. 그리하여 아벨적인 자리에서 그들과 하나 되면 아들이 되는 것입니다.

아담의 아들이 누구입니까? 참다운 아들은 가인이 아닙니다. 그러니 아벨이 되어야 합니다. 아벨이 되어야 해요. 그래야 아담을 해방시킬 수 있는 기준이 세워지는 것입니다. 아벨적인 입장에서 가인을 굴복시켜 가지고 가인을 아벨의 자리에 세워 놓고 아벨은 부모의 자리로 올라가야 합니다. 그때에야 비로소 축복을 받을 수 있는 것입니다.

15-263
새 천지가 열리는 자리
아담 해와가 하나님 앞에 책임을 다했으면 하나님이 축복식을 해 주셨을 것입니다. 축복을 받으면 거기서부터 선이 출발되는 것이며 진리의 일체화, 실체의 일체화, 심정의 일체화가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진리의 일체화란 하나님께서 ‘이렇게 하라’ 하시면 ‘예’ 하고 하나님의 말씀대로 다 이루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뜻으로 본 아담 해와는 원래 둘이 아닙니다. 아담이 해와에게 이끌려 천법을 어겼으니 둘이 되었지 원래는 하나인 것입니다. 진리의 일체화, 실체의 일체화가 된 다음에는 심정의 일체화가 되어야 합니다. 그렇게 되면 하나님과 일체화가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그렇게 될 날을 바라보고 나오시는 것입니다.

이 세 가지가 일체되지 않으면 선한 아들딸을 낳을 수 없습니다. 여러분 선한 아들딸을 낳을 자신이 있어요? 예수 안 믿고도 천당에 갈 수 있는 아들딸을 낳을 자신이 있어요? 아이를 낳자마자 예수를 믿어야 구원을 얻는 다는 그러한 법도가 어디에 있습니까? 하나님은 그렇게 부족한 분이 아닙니다. 인간이 죽지 않았으면, 타락하지 않았으면 구주가 필요없습니다. 기도가 필요없고, 신앙이 필요없는 거예요. 타락했기 때문에 구주가 필요한 거지요. 구주가 필요하게 된 것은 타락의 보응입니다.

하나님을 믿지 못하고 타락했으니 믿고 구주를 따라가야 됩니다. 따라가서는 뭘 할 것이냐? 사랑의 보금자리를 마련해야 합니다. 간단하잖아요? 그리고는 신랑되신 예수님과 실체적으로 일체화하고 심정일체화해야 합니다. 그래서 복귀해야 합니다. 그리하여 하나님과 참부모와 참자녀가 상봉하는 자리, 즉 하나님이 태초에 소망하신 그 자리가 이 천지간에 벌어지면 거기서부터 새 천지가 열리는 것입니다.

지금 이 세상의 모든 것은 하나님의 곁을 떠나온 것들입니다. 그러니 우리는 어차피 탕감의 과정을 거쳐야 합니다. 오늘날 이러한 와중에서 통일교인들이 중차대한 입장에 있음을 알아야 합니다. 우리들이 잘함으로 말미암아 민족을 살리고, 세계를 살릴 수 있는 것입니다. 지금까지 우리가 희생해 나온 것은 민족적인 제단을 마련하기 위함이었습니다. 이제는 세계적인 제물이 되기 위해 또 나아가야 합니다. 두 사명을 해야 하는 것입니다.

이 민족이 민족적인 사명과 세계적인 사명을 다하겠다고, 한국이라는 민족적인 제단의 기준을 넘어서 세계적인 제단을 우리가 세우겠다고 할 수 있어야 합니다. 그리하여 그런 기반을 닦아 놓은 다음에야 비로소 통일교인들이 쉴 때가 온다고 선생님은 생각합니다. 통일교회의 가는 길이 그런 길입니다.

15-264
구원받기 위해서는
구원의 목적이 무엇입니까? 오늘날 믿는 사람들의 대부분은, ‘오! 하나님이시여, 나를 구해 주시옵소서’ 하는데, 혼자서는 아무리 빌어도 천당 못 갑니다. 자기를 중심삼고 구(求)해서는 구원이 안 되는 것입니다. 내가 구원받으려면 내가 머물러 살 수 있는 가정이 있어야 됩니다. 가정이 구원받으려면 종족이 있어야 하고, 종족이 구원받으려면 민족이 있어야 되고, 민족이 구원받으려면 국가가 있어야 되고, 국가가 구원받으려면 세계가 있어야 됩니다. 그렇지 않으면 구원을 받을 수 없습니다. ‘하나님이시여! 나만 구원해 주시옵소서. 옆에 사람이야 구원을 받든 말든 모르겠습니다’ 하면 죽어도 구원 못 받습니다. 이런 관점에서 생각할 때 오늘날의 개인, 가정, 종족, 민족, 국가, 세계는 모두 틀려 먹었습니다. 그러니 전부다 깨뜨리고 혁신해야 됩니다. 이것이 오늘날 우리가 해야 할 일입니다.

구원을 받기 위해서는 가정을 구원할 수 있는 환경을 만들어서 가정을 구원하고 ‘나를 구원하자’ 해야 합니다. 이것이 구원받는 길인데 사람들은 이것을 모르는 것입니다. 하나님 앞에 기도들은 열심히 잘하고 집에 돌아가서는 그저 매일 ‘이놈아! 나 살려라’ 하며 싸우면 되겠습니까? 가정적인 구원의 기준을 마련하기 전에 개인 구원이 있을 수 없는 것입니다. 이 땅에서 가정적인 구원을 못 이루면 영계에 가서라도 가정구원 역사를 해야 되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오늘날 우리의 신앙의 표준은 나를 구하기 전에 가정을 먼저 구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리하여 하나님께 ‘당신의 뜻이 이런 것이 아닙니까? ’ 하면 하나님께서 옳다 하실 것입니다. 그렇지 않겠어요?

선이 가는 길은 위하는 길입니다. 더 큰 것을 위하는 길입니다. 그것이 선이 가는 길입니다. 종족을 위하여 가정을 희생하는 것이 선이요, 민족을 위하여 종족이 희생하는 것이 선이요, 국가를 위하여 종족이 희생하는 것이 선입니다. 선의 법도가 그렇게 되어 있습니다. 이것이 가인 아벨의 연관된 연대 책임인데 사람들은 이것을 모릅니다. 여러분은 이거 똑똑히 알아야 됩니다.

‘아! 내가 구원을 얻어야겠다’ 해 가지고 통일교회에 들어와서 ‘뜻을 위해 충성하면 틀림없이 하나님 앞에 갈 수 있을 것이다’ 할지 모르지만 자기의 환경, 자기의 가정을 그냥 그대로 두고 혼자서는 구원받을 수 없는 것입니다.

천국은 혼자서 가는 곳이 아닙니다. 아버지, 어머니, 아들딸 전부 함께 가는 곳이 천국입니다. 본래 하나님의 창조목적으로 본 천국은 그런 곳이에요. 어머니는 지옥에 가서 ‘야! 아무개야 나 좀 살려다오’ 하고 있는데, 혼자 천국에 있을 수 있겠습니까? 또 아버지가 지옥에 가서 죽겠다고 하는데, 혼자 천국에서 ‘야 좋다’ 하면서 ‘아버지는 거기 있어도 싸지요’ 하는 곳이 천국이겠습니까? 하나님의 창조이상인 천국은 부모와 처자와 더불어 가족 전부가 같이 가는 곳입니다. 가정만 가서도 안 됩니다. 친척도 같이 가야 되고, 민족도 같이 가야 됩니다. 나라 전체가 가는 곳이요, 세계 전체가 가는 곳입니다.

천국은 아담 혼자서 가는 곳이 아닙니다. 아담의 아들딸과 천추만대 후손들과 모든 족속들이 다같이 가야 하는 곳입니다. 타락하지 않았으면 세계인류 전체가 아담의 아들딸이요, 아담의 후손이요, 아담의 족속이니 모두가 천국에 있었을 것입니다.

오늘날 이 세계는 공산주의도 아니고 민주주의도 아닌 아담주의 세계여야 합니다. 주의라 하는 것은 길잡이, 즉 지팡이입니다. 그 주의 자체는 실체가 될 수 없는 것입니다. 그것은 길을 갈 때 지팡이 역할밖에 못 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아담주의 세계는 어디에 있는가? 이 세계는 타락한 아담주의 세계입니다. 타락한 아담주의 가정, 타락한 아담주의 종족, 타락한 아담주의 민족, 타락한 아담주의 국가는 수둑룩한데 타락하지 않은 본연의 아담주의 세계는 없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하나님의 뜻을 완성하여 심정을 중심삼고 천하가 그 영역에서 벗어날 수 없는 천륜의 대법도를 세울 수 있는 참다운 아담주의 가정, 참다운 아담주의 종족, 참다운 아담주의 민족, 참다운 아담주의 국가, 참다운 아담주의 세계는 어디 있느냐? ’라고 하실 때 ‘여기 있습니다’ 하면 하나님이 어떠하실 것 같습니까? 그러한 천지가 지상천국인 것입니다. 그래서 여러분이 가야 할 길에는 곡절이 남아 있는 것입니다.

아담의 세계, 타락하지 않은 본연의 아담 세계, 우리 인류의 참부모요, 참조상으로서 천륜의 법도와 전통을 이어받아 하나님의 뜻에 일체화될 수 있는 그 세계, 그 세계가 못 되었기 때문에 지금까지 수많은 도인들이 그 세계를 개척하기 위해 새로운 선민을 통해 섭리해 나온 것입니다.

선민이라는 말은 무슨 말입니까? 다 죽어 넘어져 있으니 아담을 보호할 수 있는 울타리의 가정, 종족, 민족, 국가를 만들자는 것입니다. 그래서 아벨을 위하여 충성을 다할 가인적인 국가, 가인적인 세계형을 갖추자는 것입니다. 민주 세계는 가인적인 세계입니다. 공산세계는 사탄주의세계지요. 하나님이 없다고 하는 사탄주의입니다. 여기서 아벨이 나와야 되는 것입니다. 아벨은 예수같은 분입니다. 우리 통일교회의 논리가 틀림없다면 세계와 만민을 위하여, 한 분 하나님의 심정을 중심한 아벨이 나타나서 아들의 사명을 완결짓고 가인적인 입장에 있는 세계인류를 자연굴복시키고 영계 구원까지도 책임져야 되는 것입니다. 영계가 아직까지 지옥에서 벗어나지 못했지요? 그러니 영계까지 구원해야 되는 것입니다.

그러면 다시 오시는 재림주가 해야 할 일은 무엇인가? 세계인류 앞에 아벨적인 승리의 기준을 세워서, 이 인류를 하나님 앞에 바치는 것입니다. 세계 인류를 행복하게 살도록 하기 위함입니다. 영계에 간 우리 선조들은 지옥 간 사람들이 많습니다. 그러므로 ‘영계의 지옥까지 책임지고 구원하겠습니다’ 해야만 하나님의 뜻 앞에 본연의 기준을 세울 수 있는 것입니다.

구원을 하는 데는 아들딸을 구원하기 전에 먼저 천사장을 구원해야 됩니다. 그러면 논리적인 모순이 없어지지요. 그래서 천사장의 나팔 소리와 함께 주님이 오신다고 하지요? 그것이 무슨 말이냐 하면 천사장의 책임부터 완결해야 주님이 오셔서 세계인류를 구원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인류가 귀먹고 눈멀어서 암만 봐도 모르고 아무리 외쳐도 듣지를 못하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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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의 종말에 나타날 최후의 주의
여러분, 우리 민족이 어떠한 자리에 서 있습니까? 민족이 천국에 들어가기 위해서는 세계가 가인적인 입장에 서야 됩니다. 반대하는 가인 말고 아벨의 뜻이 따르는 가인의 입장에 서야 하는 것입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제물을 드려야 됩니다. 이러한 고비가 남아 있다는 것을 똑똑히 알아야 되겠습니다.

이번에 선생님이 세계를 돌아보고 돌아오면서 마음으로 깊이 느낀 것이 있습니다. 오늘날 세계가 어떻고 어떻다고 말하는 사람이 많아요. 그러나 그런 것은 문제가 안 됩니다. 하늘이 뜻하신 목표가 중요하지요. 그러니 우리는 하늘이 소망하시는 자리에 서 가지고 아벨적인 기준에서 가인을 대신하여 제물이 되고 민족적인 책임과 세계적인 책임을 다하는 세계적인 제물이 되어야 합니다. 나라를 위해서 가인을 굴복시키고, 세계를 위해서 제물이 되겠다는 입장에 서야 됩니다. 그래야 천국이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그런 사명을 하기 위해 애쓰다가 끝내 못하고 세계를 바라보며 죽어 간 것입니다. 물론 민족을 위해 희생한 것입니다. 실체로는 민족을 위해 희생하여 탕감받았지만 그 마음과 사상은 세계 인류를 위하여 제물이 된 것입니다. 예수님은 그와 같이 죽음으로써 승리하였지만, 그것을 실체화하여 오늘날 이 세계적인 종말시대의 신도들은 세계적인 무대와 영계의 무대까지 연결시켜야 합니다. 그리하여 영계까지도 구하겠다는 책임을 짊어져야 하는 것입니다. 그래야 이 세계에 탕감조건을 세울 수 있는 것입니다. 알겠어요? 그런 가운데 오시는 주님도 참부모의 자리에 서야 되는 동시에 우리들 자신도 그런 자리에 서야 합니다. 복귀역사에 있어서는 언제든지 그런 과정을 거쳐야 하는 것입니다.

오늘날 세계의 국가 형태를 가만히 보면 참 재미있습니다. 민주주의의 말로(末路)는 무엇으로 알 수 있는가? 민주주의 국가는 앞으로 개별적인 제국주의 사상 형태로 떨어지게 됩니다. 그것이 민주주의의 말로가 되는 것입니다. 떨어지는 데는 저개발국가로부터 떨어집니다. 그래서 차츰차츰 민주주의 세계 전체가 제국주의 형태로 떨어지는 것입니다. 또 공산주의는 국제공산주의 형태에서 씨족공산주의 형태로 떨어져 나가는 것입니다.

그리하여 나중에는 공산주의도 민주주의도 아닌 무슨 주의가 나오느냐 하며 부모주의가 나오는 것입니다. 지금까지는 만민형제주의요, 박애주의였지만, 앞으로는 부모주의, 심정주의가 나오는 것입니다. 이것이 역사의 종말에 나타날 최후의 주의입니다. 통일교회 들어와서 그런 일을 못하겠거든 보따리 싸가지고 나가십시오. 심정적인 기준에서 그런 것이 발견되지 않거든 가고 또 가야 됩니다. 그리하여 기필코 찾아야 합니다.

만민형제주의가 아닙니다. 부모를 중심삼고 심정을 중심삼고 부모의 법도와 전통을 따라야 합니다. 부모를 사랑하고 나서 형제를 사랑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래야 천도가 설 것이 아닙니까? 형제의 사랑만으로는 안 됩니다. 먼저 부모를 사랑하고 나서 형제를 사랑해야 하는 것입니다.

지금까지 가인과 아벨은 형제는 형제로되 제사를 드리지 않은 형제였습니다. 그러니 누가 와서 제사를 드려야 하느냐? 주님이 오셔서 제사를 드려야 합니다. 그래야 비로소 부모를 맞이할 수 있는 형제가 되어 새로운 역사세계로 들어가는 것입니다. 무슨 말인지 알겠어요? 지금까지는 가인과 아벨이 역사적인 죄를 탕감하는 제물을 드리지 않았습니다.

아담 해와가 부모의 자리를 잃어버렸기 때문에 다시 부모의 자리를 찾기 위해서는 가인 아벨이 싸워서 아벨의 승리했던 것처럼 오늘날 이 세계에 가인과 아벨과 같은 기준이 부모를 중심삼고 다시 벌어져서 가인을 굴복시켜 가지고 아벨적인 자리로 들어가야 됩니다. 그래야 비로소 부모의 자리가 복귀되는 것입니다. 이것은 공식적인 길입니다.

그러니 오늘날 우리들은 어떤 입장에 서야 되느냐 하면 민족을 중심삼고 예수님의 사명을 연결시키는 입장에 서야 합니다. 그래서 여러분이 지금 민족을 사랑하는 이상 세계를 사랑해야 하는 것입니다.

오늘날 어떤 사람은 통일교회가 세계적으로 발판을 넓혀 가니, ‘통일교회의 문선생은 대통령감이야!’ 하는데, 한국의 대통령이 문제가 아닙니다. 기성교회에서는 ‘통일교회가 뭐 어떻게 하려 한다’ 하며 비방하지만 이제 그런 말은 지긋지긋합니다. 세계를 살려야지요. 세계를 살려야 해요. 그러려면 우리가 민족적인 책임을 다하고 세계적인 기준에서 가인 아벨의 책임을 다하고, 예수님을 대신할 수 있는 책임자적인 사명을 다해야 한다는 것을 알아야 되겠습니다. 알겠지요? 여러분이 그러한 역사적인 입장에 서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예수님은 누구인가? 예수님은 주님이 아니라 여러분의 형님이요, 오빠입니다. 이런 말을 하면 기독교인들은 나가자빠질 것입니다. (정전으로 이 이후의 말씀은 녹음이 안 되었음.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