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7-112 to 37-115: 복귀의 한계점

복귀의 한계점
1970.12.23 (수), 한국 전본부교회

37-112
복귀의 한계점
하나님은 타락한 인간들을 다시 소망의 한 시점까지 끌어 올리기 위하여 마음을 돌이켜 손을 대셔야 할 불쌍한 입장에 계십니다. 어떠한 역사과정을 거치더라도 하나님이 손을 대셔서 인간들로 하여금 본래 이상하셨던 창조 본연의 가치를 그대로 지니게 하시지 않으면 안 되기 때문에, 여기에는 하나님의 내적인 고통이 무한히 깃들어 있다는 사실을 우리들은 알아야 되겠습니다.

37-112
희생의 대가로 하나님을 아버지라 부를 수 있게 된 인간
인류의 시조로부터 오늘날까지 수많은 역대의 선조들이 걸어오는 동안 우리 조상들은 맨 처음에 하나님이 인간을 대할 때의 슬픔보다도 몇 천 배 몇만 배의 슬픔을 하나님께 가중시키며 나왔습니다. 그러한 조상의 핏줄을 이어받고 태어난 현재의 나 자신임을 생각하게 될 때, 나 자신 역시 하나님 앞에 당당히 설 수 있는 아무런 내용을 갖고 있지 못하다는 것을 여러분이 알아야 되겠습니다.

우리가 하나님 앞에 서기에 부족한 입장이라는 것은 말할 나위도 없고, 하나님께서 우리를 생각해 주시는 것만으로도 고맙게 여기지 않으면 안 될 우리의 입장인 것을 생각하게 될 때, 이러한 우리를 이끄시어 당신의 아들 딸로, 더 나아가 둘도 없는 하늘나라의 왕자 왕녀로 회복시켜야 할 하나님의 고충이 얼마나 크시겠는가를 우리들은 생각할 줄 알아야 되겠습니다.

인간은 언제나 모든 것을 자기를 중심삼고 관계지어 생각하기 쉽습니다.자기가 기쁠 때에는 세상이 다 기쁜 것처럼 생각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이 기쁠 때에는 이 세상이 기쁨의 대상으로 나타나는 것이요, 반면에 하나님이 슬플 때에는 이 세상이 슬픔의 대상으로 나타나지 않을 수 없는 것입니다. 우리 인간이 그러하듯이 하나님도 그럴 수밖에 없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우리 인간을 대해 나오시는 역사과정에서 기쁨의 한때를 가져 보았느냐 하는 것을 생각해 볼 때 그런 한때를 갖지 못하셨다는 것은 명백한 사실입니다. 하나님은 슬픔의 자리에서 그 슬픔을 극복하면서 기쁨의 한 날을 소원하시며 지금까지 싸워 나오십니다. 이것이 우리 선조들을 중심삼고 계속해 나온 하나님의 섭리노정입니다.

개인적인 섭리노정을 거쳐 가지고 가정적인 섭리노정으로 확대시키고, 종족적인 섭리노정, 민족적인 섭리노정, 국가적인 섭리노정을 거쳐 가지고 세계적인 섭리에서 승리할 수 있는 터전을 닦아야 합니다. 뿐만 아니라 이 세계적인 승리의 터전을 통해서 이 천주를 창조본연의 모습으로 원상 복귀할 수 있는 터전을 구상함과 동시에 전피조세계를 복귀하여 거기에 하나님이 영원히 사랑할 수 있는 아들딸을 찾아 세워야 하는 것입니다. 이러한 하나님의 노정은 생각하면 생각할수록 엄청난 수난의 노정이요, 몸부림치지 않을 수 없는 고통의 노정이라는 사실을 우리들은 알게 되는 것입니다.

이러한 심정을 갖고 나오신 하나님인데도 우리 선조들 가운데는 그러한 하나님을 더 슬프게 한 선조도 있을 것이고 덜 슬프게 한 선조도 있을 것입니다. 이러한 우리 선조의 역사를 살펴 볼 때, 지금까지의 우리 역사의 배후에서 하나님 앞에 슬픔을 가중시키고 슬픔의 조건을 남겨 놓은 것은 틀림없는 사실입니다. 또한 오늘날 한 생명체로서, 한 인생으로서 미래를 바라보고 출발하려는 여러분 자신은 과연 하나님이 기뻐하실 수 있는 입장에 있느냐 할 때 그렇지 못하다는 사실을 알아야 하겠습니다.

여러분은 하나님이 6천년 동안 수고하신 공적의 터전과 수많은 선지선열들이 희생의 대가를 치러 쌓아 가지고 남겨 상속해 준 선의 실적으로 말미암은 승리적인 터전 위에 선 입장이기에, 하나님을 대해 아버지라 부를 수 있게 된 것입니다. 이러한 영광된 자리에 설 수 있게 된 사실에 대해 여러분은 진실로 하나님 앞에 감사드려야 됩니다.

37-114
과거의 나와 현재의 나는 얼마나 달라졌느냐
과거의 나와 현재의 나는 역사적으로 현격한 거리를 두고 있습니다. 그 거리는 심정세계에서 6천년 역사 이상에 해당할 수 있는 거리입니다. 지금까지의 세계는 기쁨의 역사를 영위해 나온 세계가 아니라 슬픔의 역사, 비극의 역사를 극복하며 거쳐 나온 세계였습니다. 이러한 6천년이라는 기간은 하나님의 심정세계에서는 몇 천년 억만년에 해당하는 기간이라는 것을 생각할 때, 과거의 우리의 개체와 현재의 우리의 개체와는 현격한 차이가 있다는 것입니다. 얼마나 차이가 있느냐? 여기에는 천지의 차이가 있다는 사실을 여러분이 알아야 되겠습니다.

그러면 여러분이 통일교회에 들어오기 전과 들어온 후의 모습을 두고 볼 때, 달라진 것이 무엇이냐? 스스로 자신의 입장을 보게 될 때 그 모습은 전과 같은 모습이요, 마음도 전과 같은 마음으로 변함없는 것 같지만 그 안팎의 내용에 있어서는 천지의 차이가 있다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과거의 나에 비해서 현재의 나는 이렇게 달라졌는가 하는 것을 알아야 하겠습니다.

과거의 나와 현재의 내 가치의 기준을 비교해 볼 때, 현재는 그 무엇을 주고도 바꿀 수 없는 가치의 기준 위에 섰다는 것을 느껴야 되겠습니다. 그것을 느끼는 자극이, 그 느낌의 정도가 얼마나 크냐에 따라 금후의 여러분의 생활을 올바른 방향으로 이끌어 갈 수 있느냐 없느냐 하는 문제가 결정될 것입니다.

과거의 내가 현재의 내가 되기까지는 순탄한 노정만 거친 것이 아닙니다. 여기에는 말할 수 없는 탕감노정을 거쳐야 했습니다. 그 노정은 나에게 있어서는 극복의 노정이요, 수난의 노정이요, 슬픔의 노정이요, 곡절의 노정이었던 것입니다.

설혹 여러분 자신에게는 그런 곡절과 수난의 노정이 없었다 할지라도 현재 여러분의 가치의 기준에 차이를 가져오기까지에는 역사적인 비극과 역사적인 고통이 개재되었던 것입니다. 그 비운의 역사를 여러분이 어떻게 처리하느냐 하는 것이 중요한 문제라는 것을 알아야 겠습니다.

여러분은 그러한 체험을 통하여 얻어진 가치에 대해서 탄식할 것이 아니라 감사하는 마음을 가져야 합니다. 지금까지 하나님의 은사를 받았지만 금후에 있어서도 변함없는 하나님의 은사와 가호의 손길이 자신에게서 떠나지 않도록 노력해야 됩니다. 이와 같은 현재의 내 가치 기준이 과거에 비하여 높아지게 된 것을 느끼면 느낄수록 내일에는 오늘보다도 현격하게 높아진 자리에 서고 싶은 마음이 여러분의 생활에서 떠나지 않게 될 것입니다. 그렇게 될 때에는 여러분은 정당한 하늘길을 갈 수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복귀섭리의 표준을 향하여 직행해 갈 수 있는 노정을 유지해 나갈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렇지 못하게 될 때에는 자신으로 말미암아 흐려지는 마음의 방향을 따라 난데없는 딴 목적의 결과에 부딪치게 된다는 것은 두 말할 바 없는 사실입니다.

37-115
인간이 추구하는 최고의 가치 기준
그러면 복귀노정에 있어서의 한계점은 어디일 것이냐? 이것이 문제입니다. 우리 인간은 내 개체의 가치 추구의 한계권내에 머물고 싶어하지 않습니다. 개체의 가치의 한계권을 넘어 환경에 적응하고, 환경뿐만 아니라 민족이면, 민족, 국가면 국가, 더 나아가 세계에 적응하여 세계적인 가치를 추구하고 싶어한다는 것입니다. 이렇게 보게 될 때 인간이 표준으로 하고 있는 가치 추구의 기준은 절대선에 가까운 기준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면 우리 마음이 바라는 인생 최고의 기점이 어디일 것이냐? 이는 천지를 창조한 창조주, 즉 절대자가 있다면, 그 절대자와 상봉할 수 있는 기준까지 바란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내가 절대자와 상봉했다고 해서 모든 일이 끝나는 것이냐? 그렇지 않습니다. 절대자와 나와 영원한 관계를 맺음으로써 끊을래야 끊을 수 없는 하나된 자리에까지 추구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러려면 어떻게 해야 되느냐? 하나님의 하나밖에 없는 사랑을 독차지 해야 합니다. 그 사랑을 독차지하는 데에서 우리 인생이 추구하는 욕망이 비로소 달성되는 것입니다. 그것을 달성하기 전에는 우리의 마음에는 언제나 바람이 남아 있는 것이요, 따라서 우리 인간 개체의 가치는 미완성으로 남아진다는 것을 알아야 하겠습니다.

그러면 인간의 가치 완성과 욕망 추구의 한계점, 그 목적점은 어디에가서 맞이할 수 있느냐? 절대자이신 하나님과 상봉하는 것은 물론, 하나님의 하나밖에 없는 사랑을 점령하여 그 사랑이 나와 더불어 있고, 그 사랑이 하나님의 것이 아니라 내 사랑이라고 할 수 있는 자리에까지 나가야 비로소 인간이 최고의 욕망을 완성할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37-116
선과 악으로 갈라지게 하는 것
오늘날 이 땅 위의 수많은 인간들은 마음이 무엇인가를 모르고 살고 있습니다. 다시 말해서 마음 자체가 하나님의 사랑을 중심삼고 안식하기 위한 내 인격 형성의 바탕이라는 것을 모르고 산다는 것입니다. 마음은 위대한 것입니다. 마음은 무한히 광대하고 엄청난 것입니다. 이 마음 가운데는 하나님도 모시어 들일 수 있는 여유가 있습니다. 어떠한 사람이라도 올바른 마음을 가지게 되면 만민을 일시에 평화의 왕궁으로 옮겨 놓고 싶어하는 것입니다.

그것의 방향과 방법에 따라 선의 방향도 생겨나게 되는 것이요, 악의 방향도 생겨나게 되는 것입니다. 그 마음의 바탕을 중심삼고 바라는 목적은 엄청난데 그 목적을 이루는 데 있어서는 어떤 방향과 어떤 방법으로 나가느냐에 따라 선의 방향과 악의 방향이 각각 달라지게 된다는 것입니다.

악한 사람도 우리와 별반 차이가 없습니다. 그들이 행한 방법이 우리와 조금 틀릴 뿐이라는 것입니다. ‘나 자신은 이렇게 해야 목적을 빨리 달성 할 수 있겠다고 생각하여 그런 방법을 취했을 뿐이지 목적은 같다’라고 주장하는 사람들을 형무소 같은 데 가면 얼마든지 만나 볼 수 있는 것입니다. 이처럼 그 방향과 방법에 따라 선과 악으로 갈라지게 되는 것입니다.

이제부터 여러분은 투쟁의 노정을 거쳐 가야 합니다. 차원 높은 경쟁의 마당으로 들어가야 할 여러분이 승리의 표준을 바라보고 영광의 가치를 추구하는 입장의 나 자체를 제3자의 입장에서 냉정하게 직시해 볼 때, 과연 나는 어떠한 길로 가야 하느냐, 어떠한 행로를 선택해서 어떠한 방향을 취해 갈 것이냐 하는 것이 문제가 되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이것을 알아야 하겠습니다.

37-117
자신이 어떻게 되어 있느냐를 알아야
오늘날 여러분은 여러분 자신을 두고 나 자신이 어떻게 되어 있느냐 하는 문제를 다시 한 번 생각해 보아야 되겠습니다. 내가 어떠한 방법으로 어떠한 방향을 거쳐 갈 것이냐 하는 문제보다도 나 자신이 어떻게 되어 있느냐 하는 문제를 먼저 알아야 됩니다. 여러분 자신은 혼자가 아닙니다. 둘입니다. 여러분 자신의 몸과 마음이 서로 다른 목적을 중심삼고 싸우고 있는 것을 여러분이 알 것입니다. 이게 문제라는 거예요.

내 마음도 나요 내 몸도 분명히 나지만, 거기에는 진짜 `나’와 가짜 `나’가 있다는 겁니다. 나에게 필요한 `나’가 있고 필요치 않는 `나’가 있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뭐냐? 하나는 마음의 사람이요, 하나는 몸의 사람입니다. 마음의 사람이 가는 방향과 몸의 사람이 가는 방향이 다르다는 겁니다. 여러분은 이러한 경계선에 서서 둘 중에 어느 사람을 따라가야 되는가를 결정지어 가지고 하나의 방향을 잡아 가야 하는 운명길에 서 있는 것입니다. 이것이 타락한 우리 인간이 가야 할 길이라는 것을 알아야 되겠습니다. 이 길은 싫든 좋든 하루 하루를 생활하는 가운데 보조를 맞추어 걸어가야 하는 자신의 과정인 것을 부정할 수 없습니다. 이것이 타락한 우리 인간의 운명인 것입니다.

천지를 창조하신 하나님이 한 분이므로 그분이 구상하신 모든 창조물도, 창조로 말미암아 이루어진 가치도 하나가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가 되지 못하고 둘이 된 결과를 가져왔습니다. 이것이 타락된 자리에 있음을 입증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여기에서 마음의 사람을 따라가느냐, 몸의 사람을 따라가느냐, 어떠한 방향과 어떠한 방법을 취해가느냐 하는 것이 문제가 되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틀림없이 마음의 사람의 방향을 따라가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되느냐? 다른 하나를 극복해야 합니다. 제거해야 된다는 겁니다. 둘 다 좋게 해서는 이것도 안 되고 저것도 안 되는 것입니다. 반드시 하나는 부정하고 하나는 긍정해야 됩니다. 여러분은 긍정해야 할 것과 부정해야 할 것을 공히 갖고 있는 자신인 것을 확실히 알아야 됩니다.

말을 하는 데 있어서도 내게 필요한 말이 있는 것이요, 필요치 않은 말이 있는 것입니다. 보는 것도 내 본연의 가치를 이루는 데 있어 절대 필요한 것이 있는 반면에 그 반대되는 것이 있는 것입니다. 듣는 데 있어서도 그런 것이요, 생각하는데 있어서도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여러분이 아침에 일어나 새로운 인식을 하는 그 순간 영원히 잊혀져야 할 인식과 영원히 잊혀져서는 안 될 인식을 지니게 되는 것입니다. 그 방향의 결과에 따라, 나와 관계되는 방향의 결과에 따라 선과 악이 결정된다는 것을 알아야 되겠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선생님은 아침에 일어나면 제일 먼저 하나님 앞에 선한 인사를 하고 첫 출발을 합니다. 내 일체에 선한 것을 남기고 악한 것은 제거해야 하는 것입니다.

37-118
하루하루의 생활이 자신의 운명을 결정한다
그러면 내 생활 방편은 어떻게 취해야 하느냐? 선한 것으로부터 출발해야 하는 것입니다. 자기가 인식을 하게 되면 하루의 출발을 새로운 인식과 더불어, 하나님과 더불어 하기 위한 인사를 갖추어야 되고, 아울러 오늘 하루는 이러이러한 일을 하겠다는 계획을 세워 가지고 출발해야 하는 것입니다. 아침에 이런 다짐으로 출발하여 저녁에는 그 계획에 일치된 하루로서 지냈는가를 비판해 보아야 합니다. 잠자리에 들 때에는 이렇게 하루를 반성하고 청산지을 줄 알아야 되는 것입니다.

그것이 한달이면 한달, 일년이면 일년, 십년이면 십년을 살아가는 동안 선의 양과 악의 양 중에서 어느 쪽이 더 많았는가, 다시 말해서 마음세계의 목적을 위했던 양과 몸세계의 목적을 위했던 양 가운데 나에게 있어 어느 쪽이 더 많았는가에 따라 내가 그 동안 선을 남겼느냐 악을 남겼느냐 하는 것이 결정되는 것입니다. 일생 동안 이렇게 가중해 나가면 자신의 일생에 선한 기준을 더 많이 남겼느냐 악한 기준을 더 많이 남겼느냐 하는 문제가 여러분의 복귀의 운명을 결정하는 데에 결정적인 요인이 된다는 것을 생각해야 되겠습니다.

그러므로 여러분은 아침에 눈을 떠서 하루의 생활을 시작하게 될 때, 전체를 이어받고 선악의 분별점을 찾아 나가야 됩니다. 내 개체는 두 목적을 가진 존재이기 때문에 언제나 양보를 하지 않습니다. 이렇게 싸움의 운명을 피할 수 없으니 평안이 있을 수 없는 존재입니다. 여기서부터 `인생은 고통’이라는 말이 나온 것입니다. 그러기에 나 자신은 이자택일을 해야 합니다. 그리하여 택일한 그 면을 절대시하며 밀고 나가겠다고 새로이 결의해야 되는 것입니다.

37-119
종교의 길
내 마음의 방향을 따라가는 데 있어서 반대되는 것이 몸뚱이이기 때문에 그 몸뚱이의 방향에 브레이크를 걸어서 마음의 방향과 일치시키기 위한 싸움은 여러분이 죽을 때까지뿐만 아니라 영계에 가서까지도 계속되는 것입니다. 그러면 이 한계점을 살아 생전에 어떻게 넘을 것이냐? 복귀의 한계점을 어떻게 넘을 것이냐는 것입니다. 종교는 이러한 입장에서 추구해 나가기 때문에 마음의 사람편이 되어 몸의 사람을 원수시하는 것입니다.

그러기에 종교는 복종의 길을 가는 것입니다. 순응의 길이 아니라 복종의 길입니다. 그 노정은 순리적인 노정이 아니라 역설적인 노정입니다. 긍정적인 노정이 아니라 부정적인 노정입니다. 부정의 일면을 개재시켜 가지고 긍정의 면을 확대시키고자 하는 노정입니다. 그래서 기독교에서는 온유겸손하라, 희생봉사하라고 가르치는 것입니다. 우리 인간들은 온유겸손하기를 싫어합니다. 자기 마음대로 하려고 합니다. 천하를 내 마음대로 했으면 한다는 것입니다. 또한 인간은 누구에게도 머리 숙이고 싶어하지 않습니다. 높아지고 싶어합니다. 이것이 바로 타락성근성입니다.

자기의 위치를 지키지 않고 하나님과 같이 높아지기 위하여, 하나님의 최고 목적을 바라며 점핑해 오르려는 입장에서 인류 시조가 타락했기 때문에 우리가 이것을 복귀하기 위해서는 점핑해 내려가야 됩니다. 여기에는 부정의 결정적 요인이 필요합니다. 그러면 그것을 언제 하느냐? 언제 하느냐가 문제입니다. 일년 후에나 십년 후에 하겠다고 미루게 되면 안 됩니다. 해야 된다고 생각한 지금 해야 됩니다. 이 때를 놓치게 되면 상습화되기 쉬운 것입니다.

여러분이 그러한 부정적인 입장을 결정지으려면 매일매일의 생활에서 하나님을 모시고, 하나님 편에 서서 양심과 의논하고 양심의 편이 되어 몸과 더불어 직행해야 되겠습니다. 결론적으로 말하면, 마음이 좋아하는 면은 일체 용허하고 마음이 좋아하지 않는 면은 일체 용허하지 않아야 됩니다. 몸이 좋아하는 것은 전부 거부하라는 것입니다. 몸뚱이는 잘먹이면 먹일수록 더 좋은 것을 먹고 싶어하고, 잘입히면 입힐수록 더 좋은 것을 입고 싶어하는 겁니다. 위함을 받으면 받을수록 더 받고 싶어한다는 겁니다.

37-120
선악의 결정
그러면 선악은 어디에서 결정되느냐? 선과 악은 다른 데에서 결정되는 것이 아닙니다. 여러분들은 말하기를 `사회가 그렇기 때문에……’ 합니다. 오늘날 세계적으로 문제되는 것이 청소년 문제인데 그것은 어디에서 나왔느냐? 환경이 악하기 때문에, 환경이 내 마음에 맞지 않기 때문에 나온 것이냐?

인간은 자유를 추구하고 자유롭게 살려고 합니다. 그러나 이 자유는 어떠한 한계선이 없는 자유가 아닙니다. 법칙을 떠난 자유는 있을 수 없습니다. 만일 눈이 자유롭겠다고 해서 뛰쳐 나오면 되겠느냐는 겁니다. 눈은 눈으로서 인연되어 있는 법칙을 떠나서는 존속할 수 없는 것입니다. 법칙을 떠나게 되면 그 가치를 잃어버리는 것입니다. 이런 것을 여러분은 알아야겠습니다.

선악은 대사회에 있는 것이 아니요, 대세계에 있는 것이 아닙니다. 바로 여러분 자신 속에 있는 것입니다. 나 자신 속에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한 개체들이 36억이나 모여 사는 것이 오늘날 세계입니다. 문제는 여기에 있습니다. 그러면 악의 기원은 어디에 있느냐? 가정도 아니요, 사회도 아니요, 나라도 아니요, 세계도 아닙니다. 그 악의 기원이 어디에 있다구요? 악의 기원은 나 자신에게 있습니다. 선생님이 여러분 같은 연령에는 이것을 철저히 믿었던 것입니다.

이렇듯 내 마음에 선과 악의 두 사람이 있는 것을 보게 될 때 두 사람이 만나면 네 사람이 되는 것이요, 36억 인류는 72억 인류가 되어 싸우는 것입니다. 지금까지 세계는 이와 같이 몸과 마음이 싸워 나오기 때문에 몸을 위주로 한 몸의 목적의 세계와 마음을 위주로 한 마음의 목적의 세계, 이 두 세계가 기필코 나오게 되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끝날, 추수 때가 되면 그 전체가 결실로 나타나게 되는데 그것이 오늘날의 유심사관과 유물사관인 것입니다.

여기에서의 공존은 상대를 서로 부정하려는 싸움이 계속되는 상태에서의 공존입니다. 싸움을 떠난 상태에서의 공존은 있을 수 없습니다. 서로가 평화를 유지하며 좋아하는 상태에서의 공존은 있을 수 없다는 겁니다. 이런 관점에서 유심사관과 유물사관의 투쟁은 근본에서부터 해결해야 되는 것입니다. 이것을 해결하려면 선을 어느 위치에 세우느냐? 먼저 원칙적인 기준을 확고히 세운 후에 그 기준을 중심삼고 나중된 입장을 처리해야 되는 것입니다.

사람은 마음이 중심이므로 유심사관을 중심삼고 유물사관을 처리해야 됩니다. 그것을 처리할 수 있는 결정적 요인이 뭐냐? 먼저 어느 것이 옳고 어느 것이 그른가를 가르쳐 줘야 합니다. 어느 것이 위고 어느 것이 아래인지, 어느 것이 남아져야 되고 어느 것이 없어져야 되는지를 확실히 가르쳐 줘야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 가르침이 공산주의보다 민주주의보다 더 귀하다는 것을 확실히 알게 될 때에 그것은 반드시 시정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것을 확실히 알려 주지 않게 될 때에는 시정되지 않는 것입니다.

오늘날 이 선악의 세계는 개인에서 뿌려진 것이 점점 확대되어 가지고 세계로 열매 맺혀진 것이기 때문에 결국 나 하나를 전개시켜 놓은 것입니다. 오늘날 이러한 사회환경 속에서 우리는 살고 있습니다. 우리는 이러한 울타리권내에 살아가고 있는 것입니다. 이게 인생입니다.

여기에서의 내 범위가 얼마나 크냐가 문제입니다. 혹자는 이렇게도 가고, 혹자는 이와 반대로 가기도 할 것입니다. 여러분은 또한 자신의 선조들이 엮어 온 길을 가는 것입니다. 그것이 악 쪽으로 가는 것은 몸을 따라가는 것이요, 선 쪽으로 가는 것은 마음을 따라가는 것입니다. 그러면 여기서 개인이 출발해 가는 데 있어 100을 기준으로 할 때 마음을 중심한 선이 50을 넘어 60만큼에 해당하게 되면 그 종족을 통해서 세계는 지배될 것입니다. 종교는 지금까지 뭘 해 나왔느냐? 이 세상에서 정복해야 할 일이 단 한 가지 있으니 그것은 가정을 정복하는 것이 아니요, 민족을 정복하는 것이 아니요, 세계를 정복하는 것이 아닙니다. 바로 나를 정복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종교는 나를 정복하기 위해 나왔습니다. 여러분은 이것을 알아야 되는 것입니다. 언제나 나 자신은 선악의 경계선에 있다는 것입니다.

37-122
마음이 곧으면 선악을 분별할 수 있어
그러면 여러분이 여기서 출발하는 데 있어서 어떻게 가야 되느냐? 각자가 지향하는 양이 100이라 할 때, 거기에서 몸과 마음이 50대 50이면 안 됩니다. 그런 사람은 중간 영계에 머물게 됩니다. 완충지대에 머문다는 것입니다. 알겠어요? 만일 몸이 60이면 틀림없이 지옥에 갑니다. 지옥은 어떤 곳이냐? 그늘진 곳입니다. 천국은 어떤 곳이냐? 빛나는 곳입니다. 그렇게 알면 되는 거에요. 그런 사람은 반드시 그늘진 곳으로 간다는 것입니다. 이곳은 내려가면 갈수록 캄캄해집니다.

그렇기 때문에 여러분은 항상 `나’라는 존재는 선악의 모체라는 것을 생각해야 됩니다. 선생님도 여러분과 같은 연령일 때 이런 내용으로 고심했었습니다. 그래서 선생님이 내세운 표어가 뭐냐 하면 `우주주관 바라기 전에 자아주관 완성하라’는 것입니다. 이것이 신앙생활에 있어서 제1조입니다. 이런 면에서 자아를 완성하여 자아를 주관할 수 있게 될 때, 즉 내 몸을 제어하고 극복할 수 있는 자주성을 갖게 될 때부터는 내 몸과 마음의 상충이 없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한 경지에서 1년 혹은 몇 해 동안을 계속 생활하게 되면 영적인 체험을 하게 되는 것입니다. 자동적으로 그렇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 생활을 계속하게 되면 영적으로 상당히 민감해집니다. 선악을 분별할 줄 알게 되는 것입니다. 이런 생활을 하게 되면 마음이 곧게 되는 것입니다. 마음이 곧으면 어떻게 되느냐? 전파가 90도 각도로 오면 곧바로 90도 각도로 반사시킬 수 있는 겁니다.

다시 말해서 마음이 곧으면 오는 전파를 순수하게 그대로 반사시킨다는 것입니다. 전파가 45도 각도로 오면 틀림없이 45도 각도로 반사시킵니다. 전파가 90도 각도로 오면 90도 각도로 100퍼센트 다 반사시키는 것입니다. 그러나 마음이 찌그러져 있으면 45도 각도로 들어오는 전파를 그대로 반사시키지 못하고 30도 각도나 되게 흘러가 버린다는 거예요. 그렇기 때문에 그런 생활을 하게 되면 영적인 느낌이 자동적으로 마음에 그렇게 반응되어 들어오는 것입니다. 여러분이 이러한 재미를 알아야 합니다.

여러분은 자신이 기도를 하든가 정성을 들이게 되면 무엇인지 모르게 힘이 생기는 것을 느낄 것입니다. 여러분을 초월한 힘이 여러분을 찾아온 다는 것입니다. 방송국에서 보내는 전파를 안테나를 통해 수신하는 것과 같이 그것이 자기 마음에 와서 접선되는 것을 느끼게 되는 것입니다. 마음이 순수하면 순수할수록, 마음이 곧으면 곧을수록 들어오는 각도와 같은 각도로 반사시키는 겁니다.

이렇게 마음이 반사작용을 함에 따라 몸도 같이 반사작용을 해야 소모가 벌어지지 않습니다. 전파가 들어왔는데 그 들어오는 전파를 몸이 가로 막으면 반사가 되지 않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이 전파가 들어온 그대로 통할 수 있게 되면 우리의 몸은 진동하는 거와 마찬가지의 작용을 하기 때문에 영적인 체험은 자동적으로 오는 것입니다. 여러분, 영적 체험을 하고 싶어요? 하고 싶어요, 안 하고 싶어요? 「하고 싶습니다」 하고 싶어요? 「예」 갑자기 체험하게 되면 부작용이 벌어집니다. 자연적으로 체험해야 되는 것입니다.

봄이 되면 자연적으로 나무에서 꽃이 피는데, 나무가 꽃을 피우려면 꽃을 피울 수 있을 만큼 자라야 됩니다. 이제 겨우 싹이 트는데 거기에서 꽃을 피울 수 있겠어요? 꽃이 피기를 바라면서 빨리 커야 한다고 나무를 잡아당기면 되겠어요? 뽑혀지면 그것으로 끝이예요. 꽃은 자연적으로 피어나야 합니다. 그러므로 신앙길은 조급하게 가지 말라는 것입니다. 천년사를 창조해 내는 길이기에 조급하게 가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37-124
극복해야 할 의식주의 문제
그러면 지금 여러분에게 문제가 무엇이냐? 양심을 강화시켜 가지고 그 강화된 양심이 몸을 치리할 수 있는, 즉 마음이 몸을 이끌어 갈 수 있는 기준까지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우리 몸뚱이의 한계점은 어디까지냐? 마음이 몸뚱이와 싸울 때 제일 이기고 싶은 것이 무엇이냐? 그게 있을 겁니다. 그것이 뭐냐? 식욕입니다. 먹는 것입니다. 종교 생활을 하기 위해서는 식욕을 어떻게 극복하느냐 하는 것이 문제입니다. 여러분 밥 먹고 살지요? 「예」 밥은 먹어야 되지만 인간은 밥 때문에 살아서는 안 됩니다.

예수님도 40일 금식기도를 하실 때 사탄으로부터 “네가 하나님의 아들이어든 명하여 이 돌들이 떡덩이가 되게 하라(마4:3)”는 시험을 받았습니다. 그런데 거기에 대한 예수님의 대답이 걸작이었어요. “사람이 떡으로만 살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입으로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살 것이라(마4:4)”고 하셨던 것입니다. 뭘로 산다고요? 말씀으로 산다는 겁니다. 말씀으로 산다는 것은 진리로, 즉 이치대로, 법대로 산다는 말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이 사탄에게 하신 그 말씀은 너는 왜 하나님의 법도를 어기면서 사느냐고 때리신 말씀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제일 문제되는 것이 뭐라고요? 먹는 것입니다. 먹는 게 원수라는 것입니다. 이렇게 해야 실감이 날 것입니다. 첫째의 원수는 먹는 것입니다. 그 다음의 원수는 뭐냐? 입는 것입니다. 그 다음은 뭐냐? 사는 것입니다. 의식주가 문제라는 거예요. 몸은 까딱 잘못하면 여기에 굴러 떨어집니다. 몸은 좋은 음식이 있으면 두말없이 먹으려고 합니다. 또 좋은 옷이 있으면 입으려고 합니다. 원칙이 그렇게 되어 있습니다. 본래부터 창조가 그렇게 된 것입니다.

그러나 인간이 타락했기 때문에 먹고 싶은 것을 마음대로 먹어서는 안되는 것입니다. 3분의 2만 먹어야 됩니다. 3분의 1은 취해서는 안 됩니다. 3분의 3을 전부 취해서는 안 된다는 겁니다. 또 옷을 입되 좋은 것, 최고의 것을 입어서는 안 되는 겁니다. 왜냐하면, 그렇게 되면 사탄 세계의 완성품을 입는 자리에 서게 되는 것입니다.

37-125
마음을 중심으로 먹고 입고 살라
몸은 사는 것도 언제나 제일 좋은 자리에서 살려고 하는 것입니다. 그런 반면 마음은 어떠하냐? 먹되 좋은 것은 혼자만 먹지 않고 같이 먹자는 거예요. 마음은 그렇다는 것입니다. 갑과 을이 있으면, 마음은 내가 조금 더 먹으면 네가 덜 먹지 않느냐며 조금만 더 먹어도 양심의 가책을 느낍니다. 형제간에도 양심적인 형제는 하나 더 먹었어도 내가 하나 더 먹었다고 자랑하지 않습니다. 이것을 자랑하다가는 사고가 생기게 되는 거에요. 아이들 세계에서도 그런 일이 많습니다. 서로 좋은 것을 가지려고 하는 것입니다. 그런 아이 교육시키는 것이 큰 문제입니다.

사람은 입는 것도 좋은 것을 입고 싶어합니다. 그러나 순전히 양심적인 사람은 좋은 옷을 입으면 부끄러움을 느끼는 것입니다. 마음은 좋다고 생각하지 않는 거예요. 그건 왜냐? 같이 좋은 옷을 입지 못한 것을 안됐다고 생각한다는 것입니다. 마음은 그렇게 가르쳐 주는 겁니다. 그렇지요?

또한 사는 것도 세상에서 제일 좋은 집에서 살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그러나 마음은 그게 아닙니다. 나만 그렇게 살아서는 안 된다고 생각하는 겁니다. 마음은 다른 사람을 전부 좋게 해주고 난 다음에 내가 좋은 집에서 사는 것은 괜찮지만 그러지 않고 나만 그래서는 안 된다고 생각하는 거예요. 이것을 부정하는 날에는 마음의 사람에서 몸의 사람으로 떨어져 내려가는 것입니다.

대한민국에 일등 부자가 있다면 그가 일등 부자로 오래 갈 것이냐 오래 가지 못할 것이냐 하는 것은 무엇으로 알 수 있느냐? 돈을 자랑하기 위해서 버는 사람은 오래 가지 못합니다. 돈도 그런 사람한테는 있기를 싫어한다는 거에요. 알겠어요? 그것은 왜냐? 본래 만물은 사람에게 지배받게 되어 있는데, 사람의 중심은 마음이기 때문에 돈도 마음 앞에 지배 받기를 좋아한다는 겁니다. 돈이 그 사람에게 들어가긴 했지만 물질을 제일시하는 그런 사람과는 돈도 이별하려고 한다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런 사람은 말로가 비참하다는 겁니다.

그러나 돈을 버는 데에 있어서 자기를 위해서 버는 것이 아니라 나라를 위해서, 혹은 세계를 위해서 벌면 어떻게 될 것이냐? 내가 돈을 벌어서 그 돈을 나를 위해 쓰는 것이 아니라 나라를 위해서 공적으로 쓰겠다고 하면 어떨 것이냐? 그런 사람을 돈이 좋아하겠어요, 좋아하지 않겠어요? 나를 위해서는 천만 원을 쓰고 남을 위해서는 한푼도 안 쓴다 할 때는 어떠하겠어요? 반면에 나를 위해서는 한푼도 안 쓰고 남을 위해서는 천만 원을 쓴다 하면 어떠하겠어요? 돈이 슬퍼하겠어요, 좋아하겠어요? 좋아해요? 「예」

밥을 먹는 데도 나는 나쁜 밥 먹고 남에게는 좋은 밥을 주어야겠다고 하면 마음이 싫어하나요, 좋아하나요? 그렇게 남에게 주고 난 기분은 내가 좋은 밥 한 그릇 먹고 난 기분보다 더 좋다는 거예요. 여러분이 해보라구요. 실제로 그렇다는 겁니다. 주게 되면 몇 사람이 좋아하느냐? 받는 사람도 좋아하고 주는 나도 좋아한다는 겁니다. 좋아할 뿐만 아니라 그는 내 앞에 머리를 숙이게 되는 것입니다. 주는 사람이 지배하게 되기 때문에 받는 것보다 주는 것이 더 기쁜 것입니다. 여러분 생활에서도 실제로 느낄 수 있다는 것입니다.

37-126
선은 서로가 위하는 데에서 생긴다
큰 단체가 깨지는 것은 어떤 자리에서 깨지느냐? 가깝던 친구관계가 깨지는 것은 어떤 자리에서 깨지느냐? 서로가 위해 주는 자리에서 깨지느냐, 아니면 서로가 위해 달라고 하는 자리에서 깨지느냐? 어떤 자리에서 깨집니까? 큰 단체도 서로 위하는 자리에서는 발전하지 말래도? 「발전합니다」 알긴 다 아는구만. 그러나 서로 위하려 하지 않을 땐 망하지 말래도? 「망합니다」 문제는 간단한 것입니다. 서로가 위하는 데에서는 선이 발생하는 것이요, 서로 위하지 않는 데에서는 악이 발생하는 것입니다. 서로 위하는 데에서는 흥하는 것이요, 서로 위하지 않는 데에서는 망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한 나라가 발전하기 위해서는 그 나라 백성이 자기 개인보다 전체를 위하는 백성이 되어야 합니다. 그러한 국민성을 가진 나라는 흥하고 전체든 뭐든 내가 제일이라는 국민성을 가진 나라는 망하는 것입니다. 거기에 대한민국의 민족성을 적용시켜 볼 때 대한민국 국민 한 사람 한 사람은 세계의 어떠한 민족에게도 뒤지지 않는 우수한 민족입니다. 그러나 모래알과 같다는 것입니다. 그럼 모래알 같은 민족은 어떻게 되겠습니까? 흥하겠습니까, 망하겠습니까? 「망합니다」 후진국을 모면할 길이 없는 거에요. 그렇지만 서로 위하는 운동이 벌어질 때에는 흥하게 되는 것입니다.

몸과 마음을 가진 인간이 위한다는 것은 혁명입니다. 위대한 혁명입니다. 생각해 보세요. 몸이 마음을 위하고 있어요, 반대하고 있어요? 「반대하고 있습니다」 또 마음이 몸을 위하고 있어요, 반대하고 있어요? 「반대하고 있습니다」 마음은 위하려고 하는데 몸이 반대한다는 거예요. 그러면 어떻게 됩니까? 몸은 마음을 완전히 부정하고 나옵니다. 전혀 위하려고 하지 않는 거예요. 자기식대로 하려고 한다는 겁니다.

마음이 몸을 한 번 위해주고 두 번 위해 주고 세 번 위해 주게 될 때 몸이 한번이라도 마음을 위해 주어야 위해주는 것이 계속될 수 있을 텐데, 몸이 마음을 한번도 위해 주려고 하지 않는다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이런 사람은 고독한 사람이 됩니다. 고독이 흥하게 되면 깨져 버려야 됩니다. 끝장이 나야 된다는 것입니다.

37-127
화합하는 사람이 발전한다
한국 사람들을 가만히 보면 좋아도 `아이구 죽겠다’ 나빠도 `아이구 죽겠다’ 합니다. 또 맛있어 죽겠다, 재미있어 죽겠다, 가고 싶어 죽겠다, 보고 싶어 죽겠다고 합니다. 이걸 보면 한국 민족은 참 기가막힌 민족이라는 거예요. 말끝마다 전부 죽겠다고 합니다. 여러분도 그렇게 말하지요? 세계 어느 나라의 말에도 그런 말은 없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그렇게 말하는 자체는 뭐냐? 한국 민족은 우수한 민족이지만 큰일날 민족이라는 겁니다. 모래알 민족이라는 거예요. 하나로 화합하지 못하면 죽는 것입니다. 깨지는 거예요. 그렇지요? 「예」 그러니 죽을 수 있는 운명길에 가까이 서 있는 민족이 한국 민족이라는 것을 여러분이 알아야 됩니다. 각 개인을 보면 전부다 영웅이예요. 앉아 있는 모습을 보아도 그렇습니다.

기쁨도 자기를 잊어 주고 받아야 기쁨이 있는 것입니다. 자기라는 것이 있으면 웃어도 처량하게 웃는다는 거예요. 그래 가지고 기쁠 수 있어요? 자기를 잊어버리고 기뻐할 수 있는 자리에 들어가야 할 텐데 자기를 딱 세워 놓고서 호호호호 한다고 기쁠 수 있어요? 기쁠 수 없다는 겁니다.

이런 관점에서 대한민국 백성의 민족성을 어떻게 개조하느냐 하는 것이 선생님이 제일 걱정하는 문제입니다. 이 민족성을 어떻게 개조하느냐? 이것이 큰 문제라는 겁니다. 여러분들도 남의 말을 듣기 싫어하지요? 좋아해요, 싫어해요? 「싫어합니다」 남의 말을 듣기 싫어하는 사람은 발전이 더딥니다. 그런가 안 그런가 보라구요. 그러나 남의 말을 듣기 좋아하는 사람은 발전하는 겁니다. 더구나 좋은 말이라면 전부다 들으려고 애쓰는 사람은 무한히 발전합니다.

그런 면에 있어서 서양 사람이나 일본 사람은 발전이 상당히 빠릅니다. 그러기에 이들은 세계가 수백 년 동안에 발전시켜 놓은 것을 백년 기간에 걸쳐 전부다 흡수하고도 남을 수 있는 실력을 갖추게 된 것입니다. 어떤 면에서는 모방 민족이라고 할 수도 있겠지만 좋은 것은 모방해야 합니다. 공부도 하나의 모방입니다. 그렇지요? 배우는 민족이라고 하는 것은 모방하는 민족이라는 겁니다. 어느 기준에 일치되기 위해서는 모방해 나가야 하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모방하기를 싫어하는 사람은 발전하지 못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화평케 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하나님의 아들이라 일컬음을 받을 것임이요(마5:9)”라고 했습니다. 이렇듯 화목은 좋은 겁니다. 가화(家和)는 만사성(萬事成)이라 했습니다. 가화는 뭐라고요? 「만사성입니다」 가화는 만사성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여러분 자신이 주의해야 할 것이 무엇이냐? 나 자신에게는 하나될래야 하나될 수 없고, 화합할래야 화합할 수 없는 부정적인 요소가 있다는 것입니다. 마음은 위하려고 하는데도 불구하고 몸은 위하려고 하지도 않고, 위해 주는 것을 순순히 받지도 않는다는 거예요. 이것이 고질통이라는 거예요. 이 몸뚱이가 고질통이라는 겁니다. 그러니 이것을 때려 잡아야 된다는 겁니다.

그래서 종교는 몸을 때려 잡는 운동을 하는 것입니다. 금식을 해라, 잠을 자지 말라, 거지 노릇을 하라고 하는 것입니다. 도의 길을 가려면 얻어먹는 생활부터 시작해야 되는 것입니다. 그 다음엔 방랑생활을 하라는 거에요. 정처없이 떠돌아다녀 봐야 된다는 것입니다. 이렇게 몸을 때려 잡는 운동을 하는 것이 종교입니다. 몸뚱이, 즉 외적인 세계를 완전히 부정하고 나서는 종교일수록 고차적인 종교입니다.

예수님이 말하기를 `전부를 부정하고 나를 사랑하라’고 하셨습니다. 그것이 무슨 말씀이냐면 예수님이 절대적인 사랑에 접해 있기 때문에 너희가 나를 사랑하면 너희들도 절대적인 사랑과 관계맺을 수 있게 된다는 말씀입니다.

37-129
항상 온유겸손하고 법도대로 살라
마음 역시 자기 자신에게 있어서는 절대적인 것입니다. 마음은 자기 뜻대로 하고 싶어합니다. 그래서 자기의 말을 들으라고 몸에게 명령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지금까지는 마음이 왔다갔다했습니다. 마음이 방향을 못 잡았다는 거예요. 가야 할 방향이 동쪽인지 서쪽인지를 몰랐다는 겁니다. 마음이 가야할 곳은 세계입니다. 마음은 의식작용을 일으킬 수 있는 바탕이기 때문에 마음이 있음으로 말미암아 방향을 정할 수 있고, 마음이 있음으로 말미암아 목적을 성사시킬 수 있고, 마음이 있음으로 말미암아 옳고 그른 것을 판단할 수 있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 이것은 완전 주관하는 데 있어서 절대 필요한 요건을 마음이 지니고 있다는 뜻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마음은 무엇을 주관하려고 하느냐? 세계를 주관하려고 합니다. 주관하는 데는 어떻게 주관하려고 하느냐? 강제로 하는 것이 아니라, 화합하고 타협하고 순응하고 서로 주고받으면서 주관하려 한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몸과 다르다는 거예요. 선악은 여기에서 벌어진다는 것을 여러분이 확실히 알아야 되겠습니다. 따라서 사회가 악한 것이 아니요, 나라가 악한 것이 아닙니다. 악한 것은 바로 여러분 자신입니다.

그러면 타락이 무엇이냐? 선이 올라가야 할 텐데 반대로 내려온 것이 타락입니다. 악이 올라간 것이 타락입니다. 선이 먼저 출발해야 되는 데도 불구하고 악이 먼저 출발했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먼저 출발한 악이 요구하는 목적은 뭐냐? 언제나 자기를 중심삼고 자기를 높이려고 하는 것입니다.

양심은 양면, 즉 몸과 마음의 경계선에 있는 것입니다. 선과 악의 중간에 양심이 서 있다는 것입니다. 악은 자기 스스로가 높아지기 위해서 출발한 것입니다. 이것이 사탄의 본성인 교만입니다. 이 교만은 둘 다 망하게 하는 것입니다. 그래, 교만한 사람을 친구 삼으려고 하는 사람 있어요? 교만한 사람은 때려 잡아야 합니다. 사람은 누구나 겸손한 마음을 가져야 되는 것입니다. 알겠어요? 겸손한 마음을 가져야 된다는 거예요.

타락은 악이 먼저 출발하여 올라간 것이므로 악을 끌어내리고 선을 끌어올리는 작전을 해야 됩니다. 이 작전을 하는 데는 어떻게 해야 하느냐? 그걸 알아야 됩니다. 먼저 교만를 때려 잡아야 됩니다. 타락은 하나님을 제쳐놓고 자기가 높아지고자 한 데서 되었습니다. 사탄의 본성이 거기에서부터 출발했다는 것입니다. 그렇지요? 「예」 자기만 높아지겠다는 것, 환경이야 어떻든 질서야 어떻든 법도를 무시해 버리고 자기만을 주장하는 것이 교만입니다. 거기에는 의리도 없고 법도도 없다는 것입니다.

법도를 따라 법대로 사는 사람을 어떻다고 합니까? 교만하다고 해요, 뭐라고 해요? 그렇게 사는 사람을 정직한 사람이라고 합니다. 그렇지요? 정직은 바를 정(正)하고 곧을 직(直)입니다. 바르고 곧다, 똑바르다는 거예요. 법이라는 것은 뭐냐? 똑바른 것을 세우는 것입니다. 그러면 선과 악은 무엇으로 가르느냐? 법으로 가르는 것입니다. 교만은 법도를 무시하는 겁니다. 법도를 무시하고 위치와 환경을 무시하며 행동하는 것을 꺾어 놔야 합니다. 교만을 제어하고 겸손을 지녀야 하는 것입니다.

겸손한 사람은 올라가는 것입니다. 학교 친구들 가운데도 돼먹지 않게 자기의 위치와 처지도 모르고 까딱까딱하고 다니면서 주먹질이나 하는 녀석들이 있지요? 이런 패들이 많다는 것입니다. 그렇지만 겸손한 사람, 자기가 실력이 있어도 교만을 부리지 않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런 사람은 아무도 함부로 터치할 수 없다는 겁니다. 알겠어요? 무엇인지 모르게 그에게서 위압감을 느낀다는 것입니다. 그에게는 주관성이 깃들어 있다는 거에요. 여러분의 친구들 가운데도 그런 사람이 있지요? 가까이 하고 싶지만 그는 가만히 있어도 왠지 무섭다는 것입니다. 친구들 가운데도 그런 사람이 있다는 것입니다.

37-131
교만과 고집은 사탄의 본질
선생님도 옛날에 그런 무엇이 있었습니다. 선생님이 학생시절에는 말을 잘 하지 않았습니다. 학교에 가서도 절대 재잘재잘 얘기하지 않았습니다. 하루 종일 얘기를 하지 않는 날도 있었어요. 그래서 동급생들이 나를 참 어려워했습니다. 학교 선생님보다 더 어려워했습니다. 그렇다고 내가 그들에게 공갈이나 협박을 한 것도 아니고 주먹질을 한 것도 아닙니다. 그런데도 그들은 내게 함부로 하지 못했습니다.

심지어는 어떤 일까지 있었느냐 하면 학교 변소에서 친구들이 소변을 보려고 기다리다가도 내가 가게 되면 자리를 내주는 것입니다. 또 고민이 있으면 전부 나에게 와서 의논을 했습니다. 주먹질을 한다고 해서 그렇게 되는 것이 아닙니다. 겸손하게 되면 그들의 마음을 전부 점령할 수 있는 자리에 서게 되는 것입니다. 그렇게 되는 겁니다. 고로 겸손한 자는 남아지고 교만한 자는 꺾어지는 겁니다. 오래가는 것은 겸손이요, 오래 못 가는 것은 교만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기독교에서는 온유겸손하라고 가르치는 겁니다. 더 나아가서 희생봉사하라고 가르치는 겁니다. 그러면 온유겸손한 사람과 희생봉사하는 사람 중 어떤 사람이 출세가 빠를까요? 「희생봉사하는 사람입니다」 알긴 아는구만. 온유겸손한 사람보다 희생봉사하는 사람이 더 적극적입니다. 선을 세우는 데 있어서 희생봉사하는 것이 적극적이고 온유겸손한 것은 소극적입니다.

기독교는 선을 세우는 데 있어 적극적인 방법을 내세워야 되겠기 때문에 희생봉사하라고 가르치는 것입니다. 생명까지도 바치라고 가르치는 것입니다. 그것이 기독교의 도리입니다. 생명을 누구를 위해 희생하느냐?

자기 때문에 희생한다면 그것은 아무 가치가 없는 겁니다. 자기 때문에 자살한다는 말이 있어요? 온유겸손하기 위해서 자살하고 희생봉사하기 위해서 자살한다는 말이 있어요? 자살은 그런 것과 아무런 관계가 없다는 것입니다. 그것은 도리어 파탄을 가져오는 것입니다. 나라를 망치게 하는 것입니다. 그렇지만 남을 위해서 자기가 희생하는 것은 나라를 구하고 나라를 흥하게 하는 원칙이라는 것입니다. 알겠어요? 「예」

교만은 원수입니다. 교만과 고집은 사탄의 본질이요, 사탄의 요소입니다. 그러니 우리는 교만 대신 겸손, 고집 대신 화합을 해야 합니다. 그렇지요? 화이유친(和而有親)입니다. 화동하는 사람, 이 사람도 좋게 해주고 저 사람도 좋게 해주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그렇게 되면 여기에서부터 모든 일이 통하게 되는 겁니다. 이 사람 저 사람 둘이 하나가 되지 않으면 더 큰것이 나오지 않는 거예요. 화합하지 않으면 그렇게 되는 겁니다. 여러분들은 그것을 알아야 됩니다. 사탄의 본질에는 시기와 질투 같은 것들도 있지만 지금은 이것만 알아두라구요. 교만과 고집은 우리에게 용허할 수 없는 것입니다.

고집부리는 사람도 자신의 마음은 알고 있는 것입니다. 마음은 자신이 잘하는지 못하는지 다 안다는 거예요. 그러기에 마음세계에는 교육이 필요없는 것입니다. 마음세계는 자기가 해 놓은 일에 대해서 잘했는지 못했는지 다 안다는 겁니다. 여러분은 알겠던가요, 모르겠던가요? 안다는 거예요. 거기에는 설명이 필요없습니다. 그런데도 떼를 쓰며 고집을 부리게 될 때에는 어떻게 된다구요? 거기에는 사탄상속이 진행되고 있는 것입니다. 무슨 말인지 알겠어요? 독사가 와서 물고 있다는 거예요. 독사가 물고 있는 데도 가만히 있겠어요? 그러나 그것은 독사에게 물리는 것보다 더 무섭다는 거예요. 독사에게 물리면 자기 일대만 망하지만 마음세계가 잘못되면 수천만대가 망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만하면 선악이 어떻게 벌어지는지 알겠지요? 「예」

사람이 웃는 데도 가짜 웃음이 있고 진짜 웃음이 있습니다. 있어요, 없어요? 「있습니다」 알긴 아는구만. 말하는 데도 진짜 말 가짜 말이 있어요, 없어요? 「있습니다」 행동하는 데도 진짜 행동 가짜 행동이 있어요, 없어요? 「있습니다」 그러면 어떤 것이 진짜고 어떤 것이 가짜냐? 그것을 무엇으로 재느냐? 이것을 확실히 알아야 됩니다. 자기는 손해보더라도 남을 위주로 하고 남이 잘되기를 바라는 것은 진짜입니다. 무슨 말인지 알겠어요? 「예」

37-133
진짜 행동과 참된 교육
자기는 손해보더라도 남을 위해서 하는 말은 진짜 말이고, 자기는 손해보더라도 전체의 이익을 위해서 하는 행동은 진짜 행동입니다. 나를 희생시키더라도 전체를 위해서 말하는 것은 진짜인 것입니다. 그렇지요? 반대로 나를 위주로 하고, 전체를 부정하면서도 나를 위해서 말하는 것은 가짜입니다. 진짜와 가짜는 여기에서 구별되는 것입니다.

남에게 속닥속닥 얘기해 가지고 좋은 것을 살짝 빼가는 사람을 진짜 사람이라고 합니까, 가짜 사람이라고 합니까? 그런 사람은 사기꾼입니다. 사기꾼. 재간이 비상하여 상대방이 눈뜨고 있어도 사바사바해 가지고 좋은 것을 싹 빼가는 겁니다. 그것이 전라도 사람들의 인심인지 모르지만 말이예요. (웃음) 전라도 사람들이 그렇다는 겁니다. 뻔히 눈뜨고 있는데도 속닥속닥해 가지고 빼가고 나서 네가 잘못했느니 내가 잘못했느니 한다는 겁니다. 눈뜨고 당했는데 누구 잘못이냐는 거예요. 전라도 사람들이 이 말을 들으면 섭섭할지 모르지만 그런 데는 소질이 있습니다. 그러나 통일교인들은 달라야지요. (웃음) 여러분은 이런 모든 면에 있어서 빨리 깨달아 가지고 관이 뚜렷이 서 있어야 될 텐데 그것이 희미하다는 것입니다.

이렇듯 여러분이 하는 말에도 진짜 말과 가짜 말이 있다는 것을 알아라. 알겠지요? 「예」 행동하는 데에도 진짜 행동과 가짜 행동이 있는 것을 알아라. 알겠어요? 「예」 공부를 하는 데에도 진짜 공부와 가짜 공부가 있는 것을 알아라. 전도하는 데에도 진짜 전도와 가짜 전도가 있다는 것을 알아라. 진짜와 가짜를 알겠어요, 모르겠어요? 「알겠습니다」 확실히 알겠어요? 「예」 나를 희생시켜서 전체의 이익을 추구하는 것은 진짜요, 전체를 희생시켜서 내 이익을 추구하는 것은 가짜라는 것입니다. 진짜와 가짜는 그렇게 결정되는 거예요.

그러면 여러분이 받고 있는 교육중에 참된 교육이 뭐냐? 진짜 교육, 참된 교육은 남을 위해서 죽으라고 가르치는 교육입니다. 그 이상 최고의 교육이 없습니다. 그래요, 안 그래요? 「그렇습니다」 그래서 통일교회는 이런 교육을 하는 겁니다. 여기에 찬성이에요, 반대예요? 「찬성입니다」

37-134
참되면 흥하고 거짓되면 망한다
여러분이 형제를 위해서 한번 희생해 보라는 겁니다. 희생할 때는 어렵지만 희생하고 난 후에 오는 기쁨을 맛보라는 겁니다. 알겠어요? 희생하고 난 후의 기쁨을 맛보기 전에는 희생하는 것이 싫을 것이지만 희생하고 나서는 사방을 돌아봐도 부끄러움이 없는 겁니다. 하늘땅을 둘러봐도 꺼릴 것이 없는 거에요. 남을 위하고 전체를 위해 희생했을 때는 어깨가 올라가는 거예요. 날개깃이 비상천(飛上天)하는 거에요. 어떤 환경에 휘저어 들어가더라도 거칠 것이 없는 겁니다. 그러나 나를 위해 전체가 희생되기를 바라는 사람은 땅으로 찾아 들어가 할 수 없이 버티고 있게 된다는 거예요. 이게 지옥입니다. 그 고통은 이루 헤아릴 수 없는겁니다.

여러분들은 이제 길을 떠나야 됩니다. 그러니 진짜와 가짜, 참과 거짓, 선과 악, 흥하고 망하는 것이 어디에서부터 성립되는가를 확실히 알아야 되겠습니다. 진짜는 가만히 두어도 흥하게 되고 가짜는 가만히 두어도 망하게 됩니다. 자기만을 위해 사는 사람이 앞을 지나가게 되면 사람들은 할수없이 인사를 하지만 그가 지나가고 나면 `저놈의 영감, 언제 죽을는지…’ 하는 겁니다. (웃음)

사람의 마음도 그러한데 천운은 어떻겠습니까? 사람의 마음은 천심을 대신한 것입니다. 천운을 중심삼고는 어떻냐? 들이친다는 거예요. 그러면 사람이 꺾여 나간다는 겁니다. 그래, 동네 사람들이 그 사람의 아들딸을 보게 될 때 `그놈 참 잘생겼다’고 그러겠어요? `저놈의 자식, 또 누굴 녹여 먹으려고 저렇게 얼굴이 뻔뻔하고 뻔질뻔질하게 생겼나’ 그런 다는 거에요. 그러겠어요, 안 그러겠어요? 「그럽니다.」 틀림없이 그런다는 거예요.

여러분 중에 망하고 싶은 사람 손들어 보세요. 한 사람도 없구만. 그러면 흥하고 싶은 사람 손들어 보세요. 욕심들은 많구만. 흥하는 방법은 다른 것이 아닙니다. 간단한 거예요. 참되면 흥하는 것입니다. 왜 흥하느냐? 전부가 그 사람편이 되어 주니까 흥하는 것입니다. 전부를 위해 주겠다고 하니까 흥하는 거예요. 그러면 망하는 것은 왜 망하느냐? 전부가 뜯어 가려고 하고 깎아 내리려고 하니까 망하는 것입니다. 자기를 위주로 해 가지고 설치게 되면 오래 못 갑니다. 반면에 남을 위주로 해서 나가게 될 때는 오래 가게 되어 있습니다. 그래요, 안 그래요? 여러분 생각은 어때요? 틀림없이 그렇지요? 「예」 그래서 통일교회에서는 여러분에게 그런 행동을 하도록 교육시키고 있는 것입니다. 선악의 기원은 여기서부터 갈라지는 것입니다.

37-135
공적인 의식이 몸에 배어 있어야
이것을 단적으로 결론 맺어 말하면 남을 위하고 전체를 위하는 것은 공적이요, 자기를 위하는 것은 사적입니다. 알겠지요? 틀림없지요? 「예」 공적인 것은 선한 것이요, 사적인 것은 악한 것입니다. 공적인 것은 흥하는 것이요, 사적인 것은 망하는 것입니다. 망할 자식 될 사람 손들어 보세요. 한 사람도 없어요? 그러면 흥할 사람 손들어 보세요. 다 드는구만. 여러분은 이것을 확실히 알아야 합니다.

여러분의 몸뚱이에 이것이 배어야 합니다. 여러분이 아침에 어디에 가려고 한 발을 척 내디딜 때 그 발걸음이 사적인지 공적인지를 대번에 생각해야 됩니다. 사적인 것이면 손도 내밀지 말고 발도 내밀지 말라는 겁니다. 그렇다고 사적인 것을 완전히 거부하면 그것도 안 됩니다. 반드시 사적인 일은 공적인 일 때문에 해야 하는 것입니다. 이럴 때에는 괜찮은 거예요. 알겠어요? 내가 지금 돈을 버는 것은 공적인 것이 아닙니다. 지금 당장 돈을 버는 것은 사적인 관계에서 버는 것이지만 돈을 벌어서 그 돈을 어디에 쓰느냐? 공적인 목적을 위해서 사용하는 것입니다.

공적인 목적이 무엇이냐? 이 나라의 아들딸을 위해서 쓰는 것입니다. 자기 아들딸은 곧 이 나라의 아들딸입니다. 자기 아내도 자기 아내만이 아니라 이 나라의 딸이요, 인류의 딸입니다. 이 나라를 대신한 아들딸이요, 인류를 대신한 아들딸이기 때문에 이들을 위해서는 생사의 고개를 넘어서라도 진실되게 돈을 벌어야 하는 것입니다. 내 마음과 뜻을 다해서 돈을 벌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리하여 이렇게 번 돈을 그들을 위해서 쓰고 나라를 위해서 써야 하는 겁니다.

사적인 입장이지만 이런 공적인 마음을 가지고 돈을 버는 사람은 망하지 않습니다. 또한 이것은 전체의 이익을 위한 공적인 일이기 때문에 부정이 있을 수 없습니다. 부정이 뭐냐? 사적인 것이 부정입니다. 자기의 둘도 없는 아내와 아들딸, 즉 나라를 대표하고 세계를 대표한 아내와 아들딸에게 부정된 마음을 가지고 갖다 먹이는 것은 독약을 먹이는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그러니 양심의 가책을 받는 자리에서는 절대 움직이지 말라는 겁니다. 친구들하고 말을 할 때도 절대 선을 말을 하라는 겁니다. 선한 말이 어떤 말인지 알아요? 그것은 전체에 이익될 수 있는 말입니다. 행동도 그렇게 해야 됩니다. 그 범위가 크면 클수록 보다 공적인 것입니다. 개인보다 가정이 더 공적인 것이고 가정보다는 종족이 더 공적인 것입니다. 종족보다는 민족, 민족보다는 국가, 국가보다는 세계가 더 공적인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국가를 위하는 사람은 충신이요, 가정을 위하는 사람은 효자인 것입니다. 그렇게 되는 겁니다.

37-136
인간은 무엇을 위해 살아야 되느냐
그러면 인간은 무엇을 위해 살아야 되느냐? 세계를 위해 살아야 됩니다. 성현의 도리는 세계를 위해 살라는 가르침입니다. 세계 뿐만이 아니라 세계 가운데에서 하나님을 모시고 하나님을 위하면서 살라는 가르침입니다. 이런 내용을 갖추지 않은 성인은 없습니다. 그래서 종교의 종주들이 성인이 되어 있는 것을 알아야 됩니다.

이런 관점에서 볼 때 우리 통일교회는 무엇을 위해서 살아야 되느냐? 천주를 위해서 살아야 됩니다. 천주주의라는 것입니다. 차원이 높지요? 차원이 높다는 것은 무슨 말이냐? 보다 높은 공적인 것이라는 말입니다. 이 땅 위의 그 무엇보다도 공적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니 그들은 지금까지의 어느누구보다도 공적인 삶을 살고 있다고 결론지을 수 있게끔 해야 되겠습니다. 알겠어요?

통일교회 부인들이 가정을 버리고 전도 나가는 것은 가정을 위하는 것보다 민족을 위하는 것이 더 공적인 일이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악이예요, 선이예요? 「선입니다」 흥하는 거예요, 망하는 거예요? 「흥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앞으로 한국 문화사에 반드시 기재하고 넘어가야 할 역사적인 커다란 사건입니다. 이미 벌어졌습니다. 이 운동사는 이 민족이 남아지는 한 천년 만년 민족과 더불어 길이 남아질 것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우리는 보다 공적인 역사를 창조하고 있는 겁니다.

대학을 갈 수 있도록 팔자에 타고 난 사람이 대학을 가게 되어 있는 데도 대학까지 포기하고 꽃다운 청춘시대, 자기의 모두를 나라를 위해서 희생한다면 그것이 공적이예요, 사적이예요? 「공적입니다」 공적인 일을 하고는 후회하지 말라는 겁니다. 그런데, 대학을 포기하고 한 1년쯤 임지에서 전도활동을 하고 나서는 `내 친구들은 지금 대학 2학년 3학년이 되어 내년이면 졸업할 텐데 난 뭐냐, 옛날에는 옷도 좋은 옷을 입었는데 이제 남은 것은 누더기 보따리밖에 없구나’ (웃음) `옛날에는 그렇게 사랑해 주시며 따뜻한 밥을 해주시던 어머니도 이제는 나의 원수가 되었으니 난 뭐냐, 사랑하던 형제, 친구도 다 없어지고 외톨이가 된 난 뭐냐, 아이구 나 죽는다’ 하는 사람이 있다면 그런 사람은 가서 죽으라는 것입니다. 그런 사람은 죽어 자빠지라는 것입니다. 공적인 기준을 가졌으면 공적인 결과가 나타날 때까지 기다려야지 왜 야단이냐는 겁니다.

만약 대학을 갔다면 대학을 나와서 뭐가 되겠다는 겁니까? 어디 가서 몇만 원짜리 월급쟁이가 되겠어요, 아니면 고등학교 선생님이 되겠다는 거예요. 여러분은 대학을 못가서 고등학교 선생님이 못 되었을 망정 여러분의 아들딸은 대통령이 될 수도 있다는 겁니다. 그렇게 생각 안 해요?

여러분은 일대를 위해서 사는 사람입니까, 수천 대를 위해서 사는 사람입니까? 여러분은 수천 대를 위해서 사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선생님 말이 맞아요, 안 맞아요? 「맞습니다」 그렇다고 대학을 가지 말라는 것이 아닙니다. 대학 가고 싶으면 가라는 겁니다. 앞으로 선생님이 대학 나온 사람들은 전부 다 아프리카 같은 데로 개척 전도를 내보낼 겁니다. 보다 세계를 위하려니 남이 가기 싫은 데도 가야 된다는 겁니다. 가서 개척해야 됩니다. 앞으로 그런 시대가 오는 것입니다. 통일사상으로 말미암아 틀림없이 그렇게 되는 겁니다.

37-138
공적 생활의 한계선
앞으로 이민은 누가 가야 되느냐? 공적인 일을 위해서 학교를 포기한 사람들이 가는 것이 아닙니다. 대학 나온 사람들이 가는 겁니다. 지금 현재는 공부도 못하고 지지리 못난 사람들이 이민을 가지요? 남의 나라에 가서 신세를 지고 살면 망하는 것입니다. 그 나라가 자신의 신세를 지게끔 하면서 살아야 하는 것입니다. 그래야 하는 겁니다. 모든 사고 방식이 이렇게 벌어지는 거예요. 알겠어요?

그렇기 때문에 예수님은 `네 마음을 다하고 뜻을 다하고 성품을 다하라’고 하신 것입니다. 그러면 `다한다’의 한계가 어디냐? 여덟 시간 일하게 되어 있는데 그 여덟 시간의 일을 다했다고 해서 내 마음을 다하고 뜻을 다하고 성품을 다했다고 할 수 있어요? 다하는 데 있어서의 한계점이 어디냐? 공적인 일을 하는 데 있어서의 한계점이 어디냐? 어디에서 끝을 맺을 것이냐? 이것을 확실히 알아야 복귀의 한계점을 알 수 있는 것입니다. 그 한계점은 생명을 바치는 것입니다. 목숨을 내놓는 것입니다. 알겠어요? 「예」

예수님 말씀이 참 진리라는 거예요. `죽고자 하는 자는 살고, 살고자 하는 자는 죽는다’는 이 말이 무슨 말입니까? 공적인 것과 사적인 것을 놓고 하신 말씀입니다. 공적인 일을 하기가 쉬워요, 어려워요? 「어렵습니다」 얼마나 어려워요? 죽기만큼 어렵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공부하기가 쉬워요? 어려워요? 「어렵습니다」 얼마나 어려워요? 공부도 죽지 못해 하는 것입니다. 진짜로 공부를 한다면 죽기만큼 어려운 것입니다. 그렇지 않아요? 모든 것을 극복해야 합니다. 잠도 제대로 못 자고 놀 것도 못 놀고, 이것도 부정, 저것도 부정, 모든 걸 부정해야 한다는 겁니다.

`따뜻한 봄날을 맞아 남들은 전부다 소풍을 가는데 난 혼자 방에 앉아서 이 놀음을 해야 하니 이게 무슨 팔자야’ 할 것입니다. 그런 것을 다 극복해야 됩니다. 극복하지 않고서는 공적인 목적이 성사되지 않는 것입니다.

그러면 어느 정도까지 극복해야 되느냐? 내 생명의 한계까지도 극복해야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아바 아버지여, 할 수만 있다면 이 잔을 내게서 옮기시옵소서. 그러나 내 뜻 대로 마시옵고 아버지 뜻대로 하시옵소서’라고 했습니다. 여기에서 내 뜻은 사적이고 아버지의 뜻은 공적입니다. 예수님의 이 말씀은 딱 그렇게 되어 있습니다.

공적인 한계선이 어디라고요? 생명을 다하는 것입니다. 생명을 다하는 데는 대한민국 안방 구석에서 바느질하는 아주머니에게까지도 통합니다. 세계 끝까지도 통합니다. 마음을 다하는 데는 다 적용됩니다. 평등입니다. 여기에는 절대 높고 낮음이 없다는 겁니다.

나무를 두고 볼 때 나무에는 뿌리가 있고 잎이 있습니다. 이 중에 어느 것이 더 중요해요? 「뿌리가 중요합니다」 뿌리가 아무리 잘났다고 해도 잎이 없는 겨울에 자라요, 안 자라요? 안 자랍니다. 왜 안 자라요? 나무는 잎이 없으면 자라지 않습니다. 나무가 자라기 위해서는 아무것도 아닌 것 같지만 잎이 있어야 되는 겁니다. 그러므로 나무가 자라는 데는 뿌리가 중요해요, 잎이 중요해요? 어떤 것이 중요해요? 「똑같이 중요합니다」 뿌리가 중요한 것 같지만 잎이 없으면 안 되는 거예요. 대등하다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서로 생명을 걸고 있는 거예요. 뿌리도 잎도 생명을 유지하기 위해서 서로 대등한 입장에 서 있는 것입니다.

만약 뿌리가 잎사귀와 서로 상관이 없다고 관계를 맺지 않으면 어떻게 됩니까? 살아요, 죽어요? 「죽습니다」 망하는 거예요. 그렇기 때문에 서로 평등한 것입니다. 생명을 같이 걸고 있는 데는 높고 낮음이 없다는 겁니다.

그러면 여러분의 눈과 머리카락 중에 어느 것이 더 중요합니까? 「똑같이 중요합니다」 왜 똑같이 중요해요? 머리카락은 몇개 뽑아도 관계없지 않아요? 그러나 머리카락이 없으면 머리속이 열을 받지요? (웃음) 하나님은 인간을 참 잘 만드셨다는 겁니다. 그 열을 막는 작용을 해야 되지 않아요? 그러니 머리카락이 없으면 곤란하다는 거에요.

생명을 다하는 데는 뭐라구요? 평등합니다. 아무리 깊은 골짜기의 안방에서 바느질을 하고 있더라도 공적인 입장일 때에는 높고 낮음이 없습니다. 나라를 위하는 마음으로 생명을 다해서 가는 사람은 나라의 중책을 진 좌정승 우정승이 못되고 충신의 칭호를 받지 않더라도 당당히 충신과 대등한 가치를 지니게 되는 것입니다. 알겠어요? 그렇다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이것을 확실히 알아야 되겠습니다. 이것을 모르면 앞으로 이 길을 가는 데에 있어서 위험하다는 겁니다.

37-140
모든 것을 공적인 눈으로 보라
이제 여러분은 선과 악을 완전히 정리해야 됩니다. 알겠어요? 「예」 무엇을 볼 때에도 공적인 눈으로 보라는 겁니다. 어떻게 하면 나라와 연결시키고 세계와 연결시키고 하나님의 뜻과 연결시킬 수 있느냐를 생각하라는 것입니다. 내가 하는 모든 일은 반드시 이것은 나를 위해서가 아니라 나라를 위하고 세계를 위하고 하나님을 위해서 하는 것이라고 생각해야 합니다. 공부할 때도 마찬가지입니다.

선생님은 책 한 페이지 가지고 몇 달 동안 연구하고, 한 제목 가지고도 몇 달 동안 생각하며 들여다본 적도 있습니다. 중요한 인생의 근본문제, 실존문제를 놓고 그랬습니다. 그런 문제는 생명을 다해 가지고 대들어야 합니다. 이것이 해결되면 내 개체 뿐만 아니라 만민이 해방될 수 있고 하늘땅의 해원성사가 벌어질 수 있다는 것을 생각하면서 죽는 한이 있더라도 생명을 걸고 하는 것입니다. 거기에서 죽는다 하더라도 그 죽음은 탄식의 죽음이 아니라 멋지고 영광된 죽음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여러분들은 전후좌우를 가려서 참된 결과가 어디에서부터 결정될 것인가를 확실히 알고 신념을 가지고 대들라는 것입니다. 이렇다는 것을 알겠어요.

눈으로 무엇을 볼 때도 그렇게 보아야 됩니다. 총각들, 예쁜 처녀가 지나가면 눈이 그쪽으로 쏠려 가지고 그 처녀 내 색시 만들면 좋겠다고 생각하지요? (웃음) 사회적으로 물의가 되든 말든 수단 방법을 가리지 않고 그렇게 해야 되겠다는 생각을 하는 것은 선이예요, 악이예요? 「악입니다」 공적이예요, 사적이예요? 「사적입니다」 그런 마음을 가져 보는 것도 괜찮습니다. (웃음) 그러나 그럴 때에는 그 여자가 나를 좋아해서 따라오게끔 하라는 겁니다. 무슨 표시를 해서 그렇게 되는 게 아니예요. 진실된 마음을 통해서 그런 결과가 나오도록 해야 하는 겁니다. 그 여자가 말은 안 하지만 지나가면서 자기도 모르게 인사할 수 있는 그런 자기 자신을 갖추어야 됩니다. 무슨 말인지 알겠어요? 그러면 자연히 그 여자가 따라오게 되는 것입니다.

한 동네에 살더라도 처녀가 그런 진실된 총각 앞을 그냥 성큼 못 지나가는 거에요. 동네에서 서로 점잖게 인사를 주고 받으며 위안을 받을 수 있는 경지에 들어가게 되면 그 처녀는 고개를 숙이고 지나간다는 겁니다. 고개를 숙이고 지나간다는 것은 망하라는 거예요, 흥하라는 거예요? 잘 모시겠다는 거예요, 침을 뱉겠다는 거예요? 「모시겠다는 것입니다」 그렇게 해야 되는 거라구.

그런데 남자가 얼마나 못났으면 여자 궁둥이나 따라다니면서 휘파람을 불며 뭐 어쩌고 저쩌구 합니까? 못된 녀석들. 그런 녀석들은 때려 죽여야 됩니다. 앞으로 그런 때가 온다는 겁니다. 남자의 체통이 있지. 그렇지 않아요? 우주보다도 큰 자격을 가진 남자인데 한낱 여자들을 대해서 뭐 어쩌고 저쩌고 하는 것을 보면 시시하다는 것입니다. 우리 통일교회 남자들은 안 그럴 것입니다. 그렇지요? 「예」

남자로서, 총각으로서 공적으로 당당히 나가 보라는 겁니다. 동네 처녀들이 홀딱 반해 가지고 혈서를 쓰고 나 살려 달라고 법석을 떨고 영감에게 아줌마에게 다리 놓아 달라며 분주살스럽게 돌아다니게끔 해야 한다는 거에요. 여러분들은 그렇게 당당하고 권위있게 해야지, 절대 시시한 짓은 하지 말라는 거에요. 알겠어요? 「예」 그런 도깨비 같은 생각은 하지도 말라는 것입니다. 아가씨들도 마찬가지입니다. 아가씨들은 웃을 때 원숭이 같이 헤헤헤 웃지 말아요. 또 남자들은 그런 웃음에 속아 넘어가지 말라는 거예요. 그게 진짜 웃음이예요, 가짜 웃음이예요? 그것이 진짜 웃음인지 가짜 웃음인지 알려면 한 번 더 시켜 보는 거예요. 그러면 이 사람이 싸구려감인지 어쩐지 대번에 알 수 있는 겁니다.

여러분들은 언제나 `나는 공적인 몸이다. 태어나면서부터 공적인 몸이다’라고 생각해야 됩니다. 보는 것도 그래야 됩니다. 공부하는 것도 무엇을 만드는 것도, 느끼는 것도 그래야 된다는 겁니다. 음악감상을 하는 데도 그렇게 해야 합니다. 자기가 험난한 투쟁을 하면서 공적인 수난의 길을 걸어갔다면 내가 싫다고 해도 만민이 나를 끌어다가 영광된 자리에 서게 하는 것입니다.

선생님에게 있어서도 그렇습니다. 그렇지만 선생님은 될 수 있으면 공석에는 나가지 않습니다. 수많은 군중이 환영하는 자리는 무서운 자리요, 심판의 자리인 것입니다. 정성을 다해서 환영하는 자리는 무서운 자리라는 거예요. 그들을 이용하려고 하면 나설 수 있겠지만 하나님은 바라지 않는다는 거예요. 공적인 자리에 서면 나타내지 않으려고 산골에 있어도 산골에까지 찾아와 모시려고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지금 세상을 보게 되면 그렇지 않습니다. 요전에도 우리가 교수들을 중심삼고 무슨 모임을 갖는데 그 프로그램 목록을 주니까 `왜 우리 학교 이름이 맨 나중이냐? 왜 내 이름이 맨 나중에 나와 있느냐? 축사는 누가 하느냐? 윗자리는 누가 앉느냐’ 하면서 싸우는 거예요. 선생님이 보기에는 시시하다는 거예요. 그게 인생의 끝이 아니라는 겁니다. 그렇지요? 여러분들도 이제 어느 것이 사적이고 어느 것이 공적인가를 확실히 알아야 되겠습니다. 알겠어요? 「예」

37-142
결혼도 공적으로 해야
여자가 시집을 가는 데도 공적으로 가느냐, 사적으로 가느냐? 본래는 남편을 고르는 데도 공적인 기준을 두고 골라야 합니다. 누구를 위해서 시집을 가느냐? 대답해 보세요. 김 아무개, 이 아무개 자신을 위해서 가는 거에요? (웃음) 결혼식장에서 웨딩마치를 울리는 그 순간은 하나님을 위해서 당신들이 찾던 상대를 만나는 순간인 거에요. 그 얼마나 멋진 일입니까? 그렇게 만나기 위해서 수천년의 역사를 그리워하는 인연의 길을 따라 골짜기를 올라가고 내려가고 돌아가는 등 수천만사의 사연을 거쳐서 부부로서 인연이 되어 가지고 축복을 받게 되는 것입니다.

통일교회 축복은 선생님 중심삼고 하지요? 세상 사람들에게는 욕을 먹고 있는 선생님이지만 여러분에겐 귀한 선생님이죠? 「예」 여러분은 선생님이 진짜 귀한 줄을 알아요? 선생님이 여러분에게 교만하지 말라고 가르쳤는데, 이렇게 말하면 선생님이 교만하다고 할지 모르겠구만. (웃음) 그렇지만 선생님을 통해야 천국에 갈 수 있다는 것을 생각하면 기가 막히다는 거에요. 이러한 사실이 있을 수 있느냐는 겁니다. 꿈같은 사실이라는 것을 여러분이 알아야 됩니다.

이렇게 놀라운 뜻을 가진 선생님 앞에 그 은혜를 갚을 수 있는 길이 있다면 여러분은 그 길을 가야 합니다. 십년 이십 년이 아니라 몇십 년이 걸리더라도 그래야 됩니다. 만약 몇년 이내에 갚을 수 있는 길이 있다면, 며칠 이내에 탕감할 수 있는 길이 있다면 그 길이 죽음의 길일지라도 우리 모두가 고생하면서 가야 되는 것입니다.

이런 문제를 두고 볼 때 여러분은 그럴 수 있기를 간절히 기도해야 합니다. 그래도 탕감할 수 없는 입장에 서게 될 때에는 아들딸을 길러서라도 선생님 앞에 충성할 수 있게 해 달라고 하나님앞에 간절히 기도해야 합니다. 그러면 그 부모의 모습은 형편없더라도 목숨을 바쳐가며 정성들여 간절히 소망하는 그 부모의 지성을 하나님은 알고 계시기 때문에 하늘의 복을 가진 아들딸을 주신다는 겁니다. 알겠어요? 그것은 얼굴을 보면 알 수 있는 겁니다.

선생님은 아기들에 대해 관심이 많습니다. 그 집이 망할 것인가, 흥할 것인가는 그 집의 아들딸을 보면 알 수 있습니다. 그 집의 종자들이 좋은 종자인지, 좋지 않은 종자인지 그 아들딸을 보고 판단해 보는 거에요. 그 집안의 가계를 모르면 안 되는 것입니다. 부모의 죄를 후대의 자손들에게 물려주는 것은 부모로서의 책임을 못한 것입니다. 부모가 진 빚을 자식에게 물려주는 것은 천지에 용납받을 수 없는 죄인 것입니다. 그러면 부모가 잘못하여 지은 용납받을 수 없는 죄를 무엇으로 청산지을 것인가?

지금까지 아담 해와의 후손들은 수천년 동안 아담 해와를 원망하고 저주했습니다. 그들은 저주받아야 되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결혼도 공적으로 해야 하는 겁니다. 결혼하는 데 있어서 미인은 미남과 결혼하는 것이 공적이라고 할 수 있어요? 예를 들어 미남이 흔히 남들이 말하는 추녀를 사랑한다고 합시다. 그 추녀를 대하여 미남이 `아 사랑하는 그대여’ 하면서 이상적인 남편 노릇을 잘 할 수 있겠다고 할 때 하나님께서는 짝이 기운 것을 아시겠어요, 모르시겠어요? 「아십니다」 사람의 눈으로 봐도 알 수 있는데 하나님이 보시면 모르시겠어요? 그런데도 그 남자가 변함이 없다면 쓸 만한 사람이라는 거예요.

그들에게서 아이가 태어난다면 절대 어머니를 닮지 않습니다. 아버지를 닮는다는 거예요. 왜 그러냐? 굵은 수도 파이프와 가는 수도 파이프가 있는데 물이 흐른다면 어디로 흘러가겠습니까? 가는데로 흘러갑니까, 굵은 데로 흘러갑니까? 「굵은 대로 흘러갑니다」 굵은 데로 흘러가는 것이 자연의 이치입니다. 마찬가지라는 거예요.

하나님은 큰 데로 통하려고 할까요, 작은 데로 통하려고 할까요? 「큰 데로요」 그러니 그 남자는 얼마나 보람을 느끼겠습니까? 그렇지요?

마찬가지라는 것입니다. 이런 관점에서 볼 때에 얼굴이 잘나고 못난 것은 상관이 없다는 결론이 나오는 거에요. 역사를 두고 볼 때 그렇다는 겁니다. 그렇기 때문에 사람이 좋고 나쁘다는 결론을 현재 입장에서 함부로 내리지 말라는 것입니다. 역사를 두고 보아야 된다는 거예요. 알겠어요? 「예」

37-144
탕감이 벌어지는 자리
선생님은 사람들의 얼굴을 보면 그 선조가 좋은지 나쁜지 대개 압니다. 어떤 사람은 좋은 선조가 있어서 복을 받는가 하면 어떤 사람은 나쁜 선조가 있어서 지지리 고생만 한다는 것입니다. 그런 사람은 전도하러 임지에 나가서도 지지리 고생만 합니다.

인간들은 세상을 볼 때, 기껏 보았자 몇십 년밖에 못 내다봅니다. 그러니 그저 복작거리며 사는 거에요. 그런 자신을 돌아보게 되면 자신이 비참하게 생각되는 것입니다. 그렇지만 하늘은 영원합니다. 시간을 초월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니 영원이자 순간입니다. 영원한 세계에서의 십년 백년은 똑딱하는 순간입니다. 천년 2천년도 똑딱하는 순간보다는 조금 긴 몇 초밖에 안 된다는 거예요.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은 인간 세상의 몇천년을 한꺼번에 내다본다는 거예요.

역사는 그렇게 돌아가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그렇게 보시는 것입니다. 이것을 좁게 바라보면 얼마나 복잡하고 답답할 것인가 생각해 보세요. 그러면 앞으로 좋은 때를 맞으려면 어떻게 해야 되느냐? 좋은 때를 맞으려면, 좋은 운세를 타려면, 몇천 년 동안의 나쁜 운세, 희생하는 운세를 거쳐야 합니다. 밟히는 운세를 거쳐야 된다는 것입니다.

대한민국은 반만년에 가까운 4천년의 역사를 지니고 있습니다. 그런데 지금까지 세계를 한 번이라도 다스려 보았어요? 아직까지 못해 보았다는 겁니다. 이제 4천년 역사를 거쳐 올라가는 운세를 타자는 거예요. 그러면 그 올라가는 운세가 몇 천년이나 계속되어야 하겠어요? 4천년 가다가 또 4천년을 내려가야 되겠어요? 「영원히 가야 합니다」 영원히 가려면 어떻게 되어야 하느냐 이 나라가 바로 서야 됩니다. 직선으로 가야 한다는 말입니다.

직선으로 갈 때는 무엇엔가 닿지 않으면 영원히 가는 것입니다. 이 나라가 직선으로 가는데 그 운세가 돌아갈 수 있어요? 그것 역시 선회할 수 없습니다. 직선으로, 정직(正直)으로 갑니다. 그런데 이것이 없었다는 것입니다. 그래, 안테나에서 나가거나 들어오는 전파가 곡선으로 움직여요? 그러지 않는다는 겁니다. 직선으로 작용한다는 것입니다. 알겠어요? 천주주의는 이러한 직선주의입니다. 이것은 영원히 망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몇 대만을 중심삼고 보면 불쌍하지만 세계를 중심삼고 보면 다 공평하다는 것입니다. 그러니 여러분도 탄식하지 말라는 거예요. 우리 선조들은 몇천 년 전부터 잘살았으니 지금 내려가는 때에 처해 있는 우리는 조금 못사는 것이라고 생각하면 된다는 겁니다.

예를 들어 감옥에 들어가고 몰리는 입장에 있다 할 때, 그것은 옛날에 선조들이 다른 사람들을 감옥에 집어 넣고 그렇게 한 보응으로 가는 사람이 있고, 또 하나는 민족이 감옥에 들어가야 할 것을 대신 탕감하는 입장에서 가는 사람이 있는 겁니다. 이렇게 두 종류가 있습니다. 하나는 자기의 보응으로 말미암아 받는 것이요, 하나는 하늘이 관여해 가지고 민족을 살려주기 위한 탕감으로 받는 두 종류가 있다는 것입니다.

오늘날 우리 통일교회는 어느 길을 가자는 것이냐? 자기 죄로 말미암아 벌을 받는 보응의 자리를 피해서 천운을 따라 전체를 대신한 탕감의 보응법을 찾아 나가자는 것입니다. 이것이 통일교회의 방법입니다. 이것을 탕감하고 나면 어떻게 되느냐? 그때부터는 직선으로 나가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면 여러분들이 나가는 데 있어서 복귀의 한계점이 어디냐? 여기에서 여러분이 선악의 한계점을 확실히 알지 않고는 복귀의 한계점을 확실히 알 수 없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이제 선악의 한계점이 어디에 있는가를 알았지요? 누구에게 있다고요? 자기 자신에게 있다는 겁니다. 또 선과 참은 어디를 목표하고 나가는 데서 나타난다고? 공적인 것을 목표하는 데에서 나타나는 겁니다. 간단한 거예요. 따라서 나에게 선악의 기점이 있고, 선은 공적인 것에서부터 출발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탕감은 어떠한 자리에서 벌어지느냐? 반드시 죽고 사는 자리에서 벌어집니다. 죽음과 삶의 교차로에서 탕감이 벌어지는 것입니다. (도표 설명하심) 싸인 곡선에서 보게 되면 교차점에서 탕감이 벌어지는 것입니다. 어떤 때에 벌어지느냐? 계속적으로 내려가던 운세가 올라가기 위해서는 밑에서 올라갈 수 있게 부추겨 주는 힘이 있어야 됩니다. 그때 반드시 탕감이 필요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역사가 격동하는 시대에는 반드시 탕감법이 찾아온다는 것을 알아야 됩니다. 세계에 혼란이 벌어질 때에는 어디에서 인연되어 나오는지는 잘 모르지만 무자비한 탕감의 역사가 뒤넘이친다는 것을 알아야 되겠습니다. 알겠어요?

이렇게 뒤넘이치는 역사의 탕감법을 통일교회 문선생이 컨트롤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선생님이 60년대에는 이 세계가 새로운 역사시대로 들어간다고 말했지요? 세상은 모르지만 이렇기 때문에 여러분에게 그렇게 된다는 논법을 가르치는 것입니다. 이 1970년도를 중심삼고 1974년도까지 세계는 새로운 방향으로 전개되어 넘어갑니다. 공산주의도 기울어 가고, 민주주의도 기울어 갑니다. 알겠어요? 미국이 지금 아시아에서 자꾸 후퇴하는 것은 미국이 기울어 가는 것을 의미합니다. 중공과 소련이 지금 싸우는 것도 공산주의가 자꾸 기울어져가는 것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또 미국과 소련이 손 잡는 것도 서로 망해 가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러나 여기에서 공산세계는 망해도 민주세계는 남아집니다. 모든 탕감이 그러한 입장에 맞게 벌어지는 것입니다.

37-147
탕감법에 걸리지 않고 갈 수 있는 길
오늘날 통일교회도 이러한 길을 가고 있습니다. 통일교회에 있어서 60년대와 70년대는 다릅니다. 그러면 60년대와 70년대 시대권을 두고 볼때, 통일교회는 어느 정도에까지 올라왔느냐? 종족권에서 승리하고 민족권을 세워서 탕감시켜야 할 시대권내에까지 들어왔다는 것입니다. 멀지 않았다는 거예요. 빠른 길을 갈 수 있는 권내에 들어왔다는 겁니다. 이것은 원리 내용이기 때문에 다르게 이야기할 수도 없지만 그런 권내에 들어왔다는 것입니다.

이제 여기에서 여러분들이 복귀의 한계점을 중심삼고, 개인적인 선악의 기점을 중심삼고 출발하는 데 있어서 여러분 자신들이 걸어 나온 공적인 노정은 어느때든지 탕감법에 적용될 수 있는 자연적인 형태라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무슨 말인지 알겠어요? 공적인 길을 가는 것은 여러분 일생에 있어서의 탕감법을 적용시켜 나가는 일입니다.

그러면 탕감법이 왜 필요하냐? 사탄편에서 하늘편으로 돌아가려니 필요하다는 것입니다. 사탄편에 그냥 그대로 있으려면 탕감법이 필요해요, 필요하지 않아요? 필요하지 않아요? 「예」 탕감은 희생의 대가를 치르지 않고는 성립되지 않습니다. 그러나 공적인 자리는 언제나 탕감의 대가를 치르는 자리인 것입니다. 알겠어요?

공적인 사람은 공적인 것을 중심삼고 사는 사람입니다. 공적인 것에 생애의 목적을 두고 가는 사람은 탕감법에 걸리지 않고 갈 수 있는 길이 있습니다. 주님이 올 때에는 새로운 역사시대를 맞기 위한 탕감이 있어야 됩니다. 그렇지만 이러한 원칙이 있기 때문에 하나님이 원하시는 뜻을 중심삼고 세계를 위한 공적인 기준에서 살아온 사람은 주님이 오실 때에도 탕감이 없이 주님을 만날 수 있는 것입니다.

공적인 생활을 하는 사람은 탕감의 역사를 무사히 넘어갈 수 있습니다. 탕감받는 길을 피해갈 수 있다는 것입니다. 만약 천만한 가치의 공적인 뜻을 품고 생애의 목적을 정하고 나가는 사람이 탕감법에 적용되는 날에는, 그 천만한 가치가 하나의 선과 같은 가치로서 적용되는 것이 아니라 입체적인 가치로서 적용되는 것입니다. 무슨 말인지 알겠어요? 개인으로 볼 때, 하나의 선과 같은 입장의 사람이지만 입체적인 가치를 지니게 된다는 것입니다.

이렇듯 천만한 공적인 생활을 하는 사람이 탕감법에 적용될 때에는 천과 같은 입체적인 환경권이 구원을 받는 것입니다. 그렇게 되는 거예요. 알겠어요? 그러니 공적인 사람은 이래도 흥하고, 저래도 흥하는 것입니다. 탕감을 받아도 복이요, 받지 않아도 복이라는 것입니다. 이러한 사람이 선한 사람입니다.

그렇다면 통일교회 선생님 말씀을 듣고 따라 나가는 사람들은 모든 면에서 전부 같아야 될 게 아니겠어요? 그렇지만 여러분의 그릇이 다르다는 것입니다. 자기 선조의 공적에 따라 웬만큼 자란 사람도 있고 자라지 못한 사람도 있다는 것입니다. 다시 예를 들면, 산 위의 맨 꼭대기에 우뚝 선 사람이 있고 평지에 선 사람이 있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산 위에 서 있으면 태양 빛을 남보다 먼저 받을 수 있지요? 산 아래 평지에 있는 사람보다 먼저 빛을 받는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은사를 중심삼고 볼 때도 마찬가지로, 선조가 선한 사람은 공적인 높은 자리에 있기 때문에 탕감법이 적용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지금 우리 통일교인들이 고생을 하고 있지만 고생을 안 해도 모든 노정이 술술 잘 풀리는 사람이 있다는 겁니다. 만일 이런 사람이 전도를 나갔는데 그 동네에서 핍박을 받고 희생되는 날에는 당장 그 동네는 망하게 됩니다. 그 사람을 반대하고 핍박하면 대번에 일이 벌어진다는 것입니다. 그렇지만 여기에서 하나님은 참으시면서 그 사람이 핍박받은 것을 중심삼고 망할 수 있는 사탄세계에 벌을 주는 것이 아니라 반대로 입체적인 탕감의 양을 많이 세워 놓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될 수 있는 대로 선한 사람의 후손들을 세워서 개척을 시켜야 합니다. 그렇게 할수록 빨리 탕감된다는 것입니다.

37-148
개인의 죄를 탕감복귀할 수 있는 길
선은 언제나 용서합니다. 공적인 것은 언제나 용서해 준다는 것입니다. 탕감을 한다고 나쁜 것이 아니고, 안 한다고 나쁜 것이 아닙니다. 언제나 사탄세계에서 승리적인 기반을 가질 수 있는 입장이 공적인 입장이기 때문에 사람은 공적인 길을 가야 된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공적인 길을 가는 데 있어서의 한계점은 어디냐? 그것은 아까 생명을 다하는 것이라고 했지요? 생명을 다하는 데는 어떻게 다 하느냐? 개인적으로 생명을 다하는 데는 개인적으로 세계를 대신하여 공적인 길을 가야 되는 것입니다. 알겠어요? 그러면 개인의 입장에서 공적인 길을 가는 것으로 전세계를 거쳐나갈 수 있느냐 하면 그렇지 않다는 것입니다. 사람은 가정이 있어야 됩니다. 사람이 세계적으로 가는 데에는 개인의 입장에서 공적으로 가는 길도 있지만 가정을 공적인 입장에 세워서 가는 길도 있습니다. 개인이 세계적으로 가는 길이 있고, 가정이 세계적으로 가는 길이 있다는 겁니다. 그 길이 다릅니다. 개인이 가는 길은 단조롭지만 가정이 가는 길은 복잡하다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이런 내용을 알아야 되겠습니다.

공적인 길에는 개인이 가는 공적인 길이 있고 공적인 길을 가는 사람끼리 만나 부부가 되어 가지고 그들의 아들딸까지도 공적인 길을 가는, 즉 가정적으로 가는 공적인 길이 있습니다. 또 가정 중에도 보다 공적인 길을 가는 가정이 있습니다. 여기에서 공적인 길을 가는 그 목적은 누구에게나 마찬가지입니다. 나라를 위하고, 세계를 위하고, 하늘땅을 위한다는 그 목적은 같다는 것입니다.

개인적으로 공적인 길을 가지 못한 사람이라도 가정적으로 공적인 길을 가게 될 때에는 개인적으로 공적인 길을 가지 못한 것을 탕감복귀할 수 있습니다. 왜 그러냐? 개인보다는 가정이 보다 공적이요, 개인보다 가정이 더 어렵기 때문입니다. 보다 어려운 것이 더 공적인 것입니다. 덜 공적인 것은 보다 공적인 것에 흡수되는 것입니다. 무슨 말인지 알겠어요?

지금까지 세상에서 깡패로 살아온 사람이 통일교회에 들어왔을 때, 그 사람 개인으로는 아무리 잘해도 과거의 잘못을 탕감복귀할 수 없는 것입니다. 용서받을 수 없다는 것입니다.

그렇지만 축복을 받아 가지고 가정을 이루어 뜻을 중심삼고 완전히 하나되고 화합하게 될 때에는 과거의 모든 죄를 탕감복귀할 수 있는 것입니다. 세상 사람들도 과거에는 못됐던 사람이 지금은 참 훌륭하게 변했다고 칭찬해 줄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런 사람도 가정을 통하여서 탕감복귀 할 수 있는 길이 열리는 것입니다.

37-150
가정, 종족, 민족의 죄를 탕감복귀할 수 있는 길
그 다음엔 가정만으로는 탕감복귀할 수 없는 가정이 있습니다. 축복을 받아 가정은 이루었지만 자기들만 위하고 싸움이나 하고 짓궂기 한이 없는 그런 가정이 있다면 어떻게 해야 되느냐? 그런 가정은 종족을 통해야만 탕감복귀할 수 있는 길이 있는 것입니다. 종족은 뭐냐? 자기 가정을 중심삼고는 부부가 자기 주장을 하며 생활했지만 한 부락 전체가 활동하는 데 있어서는 거기에 순응하며 전체 앞에 본이 되고, 민족 앞에 공신이 될 때에는 가정이 탕감복귀할 수 있는 하나의 길이 열리는 것입니다. 알겠어요?

또 악한 종족이라 하더라도 이 종족이 민족의 해방을 위해서 보다 큰 공적인 길에서, 그 민족이 공적인 혜택을 받을 수 있는 자리에서 활동을 하게 되면, 민족 복귀와 더불어 그 종족은 탕감복귀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민족이 잘못했더라도 그 국가의 주권자가 민족을 대표해 가지고 세계의 어떠한 민족보다도 어떠한 주권 국가보다도 하늘의 뜻을 받들고 충성을 다하게 될 때에는 그 주권자 한 사람으로 말미암아 민족이 잘못한 죄도 탕감복귀할 수 있는 길이 열리는 것입니다. 알겠어요?

그러므로 한 사람을 중심삼고 국가면 국가를 탕감할 수 있는 길이 있다면 그것은 주권자로부터 시작되는 것입니다. 그 주권자를 통해서 나라를 찾을 수 있다는 것입니다. 물론 종족의 족장이 잘함으로써 그 종족 전체가 혜택을 받을 수도 있지만 그보다 한 나라의 주권자가 책임을 다하느냐 못 하느냐에 따라 민족의 과거지사가 전부다 청산되느냐, 못 되느냐가 좌우된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왜 나라에서부터 하나님의 뜻이 문제되느냐? 그것은 나라의 주권자 한 사람에게 나라 전체의 운명을 좌우할 수 있는 특권적인 권한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주권자로, 만왕의 왕으로 세상에 오셨던 것입니다. 여기서부터 문제가 벌어지는 것입니다. 이 주권자가 세계의 나라를 대표한 주권자 가운데에서 으뜸이 되게 될 때에는 세계의 수많은 주권자들은 반드시 그 주권자 앞에 머리를 숙이게 되는 겁니다. 그렇게 되는 겁니다.

37-151
국가 복귀의 중요성
세계를 움직이는 주권자는 불과 몇 사람밖에 안 됩니다. 세계를 움직이는 사람은 열 명 이내라는 것입니다. 그 중에서도 세계를 요리하는 사람은 서너 명 정도입니다. 이 서너 명을 중심삼고 일곱 명 정도가 세계를 움직여 나오는 것입니다. 그렇잖아요?

대개 대표적인 선진국가 몇 나라가 주동이 되어 몇 개국이 합해 가지고 세계적인 문제를 다루어 나오지요? 그건 많은 수가 하는 것이 아닙니다. 세계 30억 인류가 가담하는 게 아니라 몇 사람의 주권자가 세계를 움직여 나오고 있는 것입니다. 왜 그렇게 되느냐? 복귀역사에 있어서 제일 힘든 것은 국가기준까지의 복귀입니다. 이 국가기준까지 복귀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 다음엔 복귀된 주권자가 세계적인 자격자면 되면 세계는 그 주권자로 말미암아 수습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예수님이 이 땅에 올 때 로마의 황제로 올 필요가 없다는 것입니다. 한 나라, 이스라엘의 주권자의 자리에 등장해 가지고 그의 주장과 방향이 세계의 주장과 방향을 대신할 수 있게 되기만 하면 세계는 자동적으로 흡수된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오늘날 대한민국의 복귀에는 세계 복귀를 내적인 면에서 결정할 수 있는 특권이 개재되어 있는 것을 여러분이 알아야 되겠습니다. 무슨 말인지 알겠어요?

그러면 우리 복귀의 한계점은 어디에 두어야 하느냐? 물론 세계에 두고 천주에 두어야 하겠지만 제일 중요한 문제, 즉 하나님이 지금까지 6천년 역사를 두고 한계점으로 세워 나온 것은 국가의 복귀입니다. 이 국가만 복귀되면 세계는 돌아가게 되어 있습니다. 그것은 왜 그러냐? 세계가 1일생활권내로 들어옴으로써 만민이 좋아할 수 있는 일이 있을 때에는 그것을 가르쳐 주지 않아도 돈을 내고서라도 배워 가려는 때가 되었기 때문입니다.

세계의 각 국가가 이렇게 문화교류가 이루어질 수 있는 1일생활권내에 접어들었기 때문에 참된 승리적 주권 국가, 하나님을 중심삼은 선민이 되게 될 때에는 탕감된 섭리의 기반은 전세계에 공통적으로 적용될 수 있는 것입니다.

이렇게 볼 때, 만약 대한민국이 복귀의 사명을 책임진 나라라 할 때에는 대한민국의 복귀는 세계의 복귀보다 더 힘들다는 것입니다. 세계 복귀보다도 대한민국의 복귀가 더 힘들다는 거예요. 대한민국 복귀가 제일 힘들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대한민국은 현재 얼마나 올라와 있느냐 하면 능선으로 치면 7부 능선, 8부 능성에 올라와 있다는 것입니다. 얼마나 올라와 있다고요? 8부 능선에 올라와 있다는 겁니다. 알겠어요? 「예」 이런 때에 여러분이 젊은 시절을 맞이해서 정열을 다 바쳐 충성한다는 것은 지극히 의의가 있는 일입니다. 1부 능선 때 하는 것보다도, 2부 능선 때 하는 것보다도 승리를 결정지을 수 있는 이때에 하는 것이 더 의의가 있는 것입니다.

이것은 릴레이와 마찬가지입니다. 처음 사람이 아무리 잘 뛴다 하더라도 마지막 사람이 잘 뛰느냐 못 뛰느냐에 따라 승패가 결정나기 때문에 마지막 사람이 잘 못 뛰면 지게 되는 거와 마찬가지입니다. 8부 능선, 9부 능선을 오르고 있는 여러분이 어떻게 10부 능선에 골인하느냐 하는 문제가 오늘날 복귀의 한계점을 해결짓는 데에 있어서 중차대한 문제인 것을 알아야 되겠습니다. 이러한 시점에 있는 것을 알고 여러분은 이를 위해서 총력을 기울여야 하겠습니다.

37-152
본향으로 돌아가려면
그러면 다시 돌아가서 우리의 본향땅이 어디냐? 생각해 보세요. 인간은 본래 본향땅에서 태어났지만 타락함으로 말미암아 본향땅을 잃어버렸습니다. 그럼 우리가 다시 본향땅으로 돌아가려면 어떻게 해야 되느냐? 옛날에 아담 해와가 타락하지 않고 부부가 되어 가정을 이루고 부모가 되었다면 가정의 가장이 되는 것이요, 종족의 족장도 될 수 있는 것이요, 민족의 지도자도 될 수 있는 것입니다. 또한 나라의 지도자도 될 수 있는 것이요, 세계의 지도자도 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아담의 사상이 세계적인 사상이 되었을 것입니다. 그렇지요?

본향땅은 어머니 아버지를 중심삼은 사랑을 천지의 어디에도 서슴지 않고 펼 수 있는 곳입니다. 그것은 타락하지 아니 한 인간 앞에 부여해 준특권적인 권한입니다. 그 곳이 우리 본향땅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면 오늘날 우리 통일교회가 참부모를 중심삼은 사랑을 세계에 펼 수 있는 권이 되어 있느냐 할 때 못 되어 있다는 것입니다. 앞으로 통일사상을 중심삼고 그렇게 해야 하는데 그럴 수 있는 기반이 어디냐? 대한민국이 그럴 수 있는 곳이 되어 있느냐? 대한민국은 지금 정치적으로 여당, 야당으로 갈라져 있고, 종교도 수많은 종교가 수많은 종파로 갈라져 있습니다. 또한 나라도 남북으로 갈라져 있어 세계에서 제일 복잡합니다. 대한민국은 이렇게 복잡해야 된다는 겁니다. 이렇게 제일 복잡한 가운데서 제일 천대받고 있는 통일교회가 무거운 짐을 다 짊어지고 이런 환경을 다 수습해서 앞으로 모든 종교의 주체적인 입장에 서서 나라를 주도할 수 있는 입장에까지 거슬러 올라가야 되는 것입니다. 지금 그럴 수 있느냐 없느냐를 테스트하는 과정에 있습니다.

여러분은 이렇게 자리잡아 가지고 하나의 부부가 되어야 하고, 부모가 되어야 합니다. 나아가 종족의 족장이 되고, 민족의 족장이 되어 주권자를 대표한 세계의 중심적인 존재가 되어야 합니다. 그래 가지고 세상 만민들이 그 품에 품길 수 있어야 그곳이 세계적인 본향땅이 될 수 있는 것입니다. 오늘날 우리들은 이러한 세계적인 본향땅을 창조해야 할 책임이 있다는 것입니다. 알겠어요? 「예」

이렇게 하기 위해서는 여러분은 참부모를 천지에 둘도 없는 부모로서, 만민이 모실 수 있는 부모로서 모셔야 합니다. 또 모든 주권자가 이 부모앞에 굴복할 수 있고 주권자의 권한을 가질 수 있는 터전을 이루어야 하는 것입니다. 이러한 터전을 대한민국에 이루어 놓지 않고는 이상적인 본향의 천국은 이루어지지 않는다는 것을 여러분이 알아야 되겠습니다. 또한 이것이 현재 우리 통일교회가 가야 할 운명길이요, 단 하나밖에 없는 복귀의 한계점인 것을 알아야 되겠습니다.

만일 이것이 결정되면 그것을 중심삼고 무엇이 벌어지느냐? 여러분, 아기를 낳게 되면 입적을 시키지요? 「예」 마찬가지로 주권국가가 없어 가지고는 입적을 할 수 없는 겁니다. 또 민족들만 있게 되면 서로 싸움이 끝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그렇지만 주권자가 결정되면 싸움은 끝나는 것입니다.

그 민족권내에서 주권자가 나오기 전에는 상대권을 벗어날 수 없지만 주권자가 나온 다음에는 상대권으로부터 벗어나 절대적인 자리에 설 수 있는 것입니다. 그렇게 되기 전에는 여러분도 입적이 안 되는 것입니다. 세상에 태어나긴 태어났지만 태어나지 않은 사람과 마찬가지 입장이라는 것입니다. 이름은 가졌지만 그 이름을 공인받을 수 없는 것입니다. 태어나긴 했지만 그 생명의 가치를 공인받을 수 없다는 것입니다.

에덴 동산에서는 아담 해와 둘이만 있었을 뿐 그 배후에는 아무도 없었기 때문에 그들이 어머니 아버지가 되면 세계적이요 천주적인 것이 되었겠지만 오늘날 통일교회에 있어서는 아직까지 세계적이요 천주적인 것이 안 되었다는 것입니다. 수많은 주권국가가 있기 때문에 그렇게 안 된다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이러한 내용을 세계적으로 탕감해 가지고 대한민국에 있어서 하나의 본향땅을 중심삼은 부모와 종족장과 민족장과 나라의 주권자를 결정지어 가지고 세계 전체가 우러러볼 수 있는 절대적인 하나의 기준을 세워 놓아야 되는 것입니다. 그래야만 여기에서부터 새로운 나라, 새로운 종교, 새로운 민족이 편성될 수 있는 것입니다. 이것이 오늘날 우리에게 부여된 사명이요, 통일교회가 가야 할 복귀의 한계점인 것을 확실히 알아야 하겠습니다.

37-154
우리의 절대적인 사명
선생님은 이 일을 위해서 싸워 나가고 있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총칼을 가지고 싸우는 것이 아닙니다. 선의 실적을 쌓아 가지고 공적인 가치를 보유함으로 말미암아 민족의 공인을 받아서 자동적으로 올라가야 되는 것입니다.

그러면 여러분들이 이러한 뜻을 받들어서 뭘 해야 되느냐 하면 나라가 없기 때문에 나라를 편성해야 합니다. 지금 여러분에게 전도하라는 것은 나라를 편성하는 데 있어서의 족장이 되라는 것입니다. 족장이 되어 세상 사람들의 출생신고를 다시 하게 하는 것입니다. 그것은 총을 갖고 모병을 하는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등록을 시키는 책임자 역할을 하라는 것입니다. 그 등록이 나중에는 입적이 되는 것입니다. 호적에 오른다는 것입니다. 입적 알지요? 여러분, 다 입적되었어요? 안 되었으니 그 족보에 따라서 입적을 해야 하는 것입니다.

우리 통일교회도 아직까지 입적이 되지 않았습니다. 입적을 하려면 주권이 있어야 합니다. 주권 국가가 성립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입적을 못 할 때에는 자리를 못 잡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국가 복귀를 해야합니다.

우리는 남북으로 갈라져 있는 대한민국을 통일시켜야 합니다. 통일하는 데는 우리의 피와 땀을 대가로 치르지 않으면 안 됩니다. 이것이 우리의 절대적인 사명인 것을 확실히 알아야 하겠습니다. 우리 스스로가 통일교회의 이름을 떼어버릴 수 있는 때도 통일된 그때부터입니다. 따라서 통일교회가 해야 할 최상의 복귀의 한계점은 주권복귀인 것입니다.

남북으로 갈라져 있는 대한민국을 통일하여 하나님을 중심삼고 하나의 주권자를 세워서 새로운 법도를 통해 새로운 사회질서, 새로운 교육방식등 새로운 제도가 형성될 때에야 비로소 우리의 뜻이 세계적인 모국의 뜻으로서 등장할 수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이 여기에 공헌한다는 것은 역사시대에 한번밖에 없는 전무후무한 일입니다.

여러분이 살아 생전 이러한 뜻의 환경권에서 공헌할 수 있는 둘도 없는 이 좋은 시기를 잃어버리지 않기를 바라는 바입니다.

37-155
기 도
사랑의 아버님, 여기 있는 당신의 젊은 자녀들이 산지사방하여 본향을 찾기 위해 개척하지 않으면 안 될 사명이 있는 것을 이제야 알았사옵니다.

이들은 나라 없는 백성이 얼마나 불쌍한가를 잘 모르고 있사옵니다. 나라가 없기 때문에 민족이 우거할 수 있는 장소가 없는 것이요, 민족이 우거하지 못하기 때문에 종족과 가정과 개인이 안식할 수 있는 한치의 땅도 갖지 못한다는 것을 생각할 때, 지금까지 그러한 역사시대를 거쳐 오면서 남아진 종교단체인 것을 알게 되옵니다.

더우기나 우리 통일교회가 그렇게 비참한 역사과정을 거쳐온 걸 생각하면, 이제 저희들의 소원은 이 나라, 이 민족의 복귀라는 것을 확실히 알아야 되겠사옵니다. 아버님의 소원도 이것이요, 예수님의 소원도 이것이요, 통일교회를 지도하는 스승의 소원도 이것이요, 통일교회 교인의 소원도 이것이요, 만민의 소원도 이것이라는 것을 저희들이 알아야 되겠사옵니다.

이 나라를 복귀하기 위해 지금까지 수많은 생명들이 희생되어 나왔습니다. 많은 인간들이 그 소원을 바라보며 절규해 나왔지만 그 한계점을 꿈 가운데 그리면서 그때가 언제인지 알지 못하는 자리에서 희생의 대가를 치러 나왔습니다. 하오나 오늘날 저희들은 이 한계점을 목전에 두고 싸울 수 있는 가장 귀한 때에 처해 있다는 사실을 확실히 알아야만 되겠사옵니다.

이제 저희들의 몸 마음이 공적인 실체로서 아버지 앞에 바쳐져야 되겠사옵니다. 서로 화합하지 않으면 안 되고, 자기 중심삼은 것을 완전히 버리고 전체를 위하여 가지 않으면 안 될 저희들인 것을 알았사오니, 여기에 남아진 당신의 아들딸들이 이제부터는 그런 생애노정을 갈 수 있게 하여 주시옵소서. 또한 이 시점에서 망하느냐 흥하느냐 하는 문제가 저희들 스스로 결정해야 할 중대한 문제인 것을 알게 하여 주시옵소서.

망하는 것은 사적인 입장에 서는 것이요 흥하는 것은 공적인 입장에 선다는 것을 알았사오니, 이제 흥할 수 있는 공적인 나라를 찾아야 되겠고, 공적인 주권을 찾아야 되겠사옵니다. 이 공적인 하나의 주권국가는 개인으로부터 가정·종족·민족·국가를 넘어 세계적인 중심국가가 된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그 하나의 중심국가가 세워지는 과정에서 지금까지 세계적인 탕감의 내용을 내포하고 발전한 것을 생각하게 될 때, 여기에 당신의 눈물과 예수님의 희생의 핏줄기와 수많은 선지선열들의 죽음의 고빗길과 지금까지 역사과정을 통해 내려온 우리 선조들의 혈통적인 인연들이 연결되어 가지고 오늘의 저희들 앞에 상속된 것이오니, 이 전통을 저희들이 진실된 입장에서 받아들여 가지고 스스로가 이 전통을 상실하지 않고 보다 가치있게 빛낼 수 있는 당신의 아들딸들이 되게 하여 주시옵기를, 아버님, 간절히 바라옵고 원하옵니다.

삼천만 민족의 바람도 이것이요, 이 나라 삼천리 동산의 바람도 이것이요, 지금까지 역사상에 왔다 갔던 수많은 선지선열들의 바람도 이것이오니, 이문제 해결의 주인공은 다름아닌 저희들이라는 것을 깨달을 줄 아는 당신의 아들딸이 되게 하여 주시옵기를 간절히 바라옵고 원하옵나이다. 그리하여 저희들이 내일의 승리를 다짐하고 만민 해방의 기치를 들고 세계적으로 제2해방, 제3해방을 부르짖지 않으면 안 될 때가 되었다는 것을 확실히 깨닫고, 그 선봉에 선 기수들이 되게 하여 주시옵기를 간절히 바라옵고 원하옵니다.

저희들의 젊은 가슴에 아버지를 위하고자 하는 마음이 간절하게 하여 주시옵소서. 공적인 세계 인류를 찾기 위하여, 이 나라 이 민족을 하나의 대표적인 주권 국가로 세우기 위하여 전체를 수습할 수 있는 하나의 기반을 만들어야 하는 중차대한 시기에 있사오니, 사적인 자기를 희생시켜 아버지께서 원하시는 생명과 아버지께서 원하시는 자기 자체를 아버지 앞에 바쳐드리는 생축의 제물들이 되게 하여 주시옵기를 간절히 부탁드리고 원하옵니다.

이제 이번 기간을 통하여서 저희들이 깨닫고 느낀 모든 것들을 실천궁행해야 되겠사옵니다. 선한 것은 영원히 저희들이 짝해야 될 것이고 악한 것은 영원히 저희들이 분별시켜 나가야 한다는 것을 알게 하여 주시옵고, 모든 언행심사에 있어서 선악의 분기점을 갖고 선악을 분별해 가지고 선한 이 나라의 본향땅, 세계의 본향땅을 창건해야 할 사명을 책임지고 자기의 모든 일체를 투입하여 희생하면서 갈 줄 아는 당신의 자녀들이 되게 하여 주시옵기를 간절히 부탁드리고 원하옵니다.

다시 만날 때까지 이들을 보호하시옵고, 영광 가운데 양육하여 주시어서, 이들에게 보람된 아들딸이라는 긍지를 세워 주시옵소서. 금후의 모든 전체도 맡아 주관하여 주시옵길 간절히 부탁드리고 원하오며, 모든 말씀 참부모의 성호 받들어서 아뢰었사옵나이다. 아멘.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