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6-91 to 36-137: 전진과 후퇴

전진과 후퇴
1970.11.22 (일), 한국 전본부교회

36-91
전진과 후퇴
[기 도]

사랑하는 아버지, 오늘은 11월 22일, 이달 들어 네 번째 맞이하는 안식일이옵니다. 이제 저희들은 당신이 지금까지 저희들을 위하여 경륜하신 모든 것이 드러나야 할 때가 가까와 온다는 것을 알고 있사옵니다.

전체의 복귀의 뜻을 중심삼고 그러한 때가 가까와 온다는 것을 생각하게 될 때, 최후의 결실을 바라보고 수고하시는 아버지 앞에, 또한 당신의 소원과 노고 앞에 저희 자신들이 얼마나 보람있는 소망의 실체가 되었느냐 하는 것을 다시 한 번 생각하게 되옵니다. 과거의 자신은 이러이러하였고, 오늘의 자신은 이러이러하니 내일의 자신은 이러이러해야겠다는 입장에서 스스로를 비판하고 반성하는 이 시간이 되어야만 되겠사옵니다.

흘러가는 역사시대의 한 기간을 담당하고 있는 저희들의 모든 생활은 나 하나를 완성시키기 위한 생활이 아니면 안 된다는 사실을 생각하게 될 때, 보람을 느끼는 참된 나를 얼마나 흠모하였고 스스로 자신을 거룩한 자리에 머물 수 있게 하기 위하여 얼마나 간절한 생활을 했는가를 생각하면서, 다시금 아버지께서 요구하시는 그 모습이 될 것을 다짐하는 저희들이 되어야만 되겠습니다.

아버지, 이 아침에 모여든 당신의 자녀들을 그냥 버려 두지 마시옵소서. 이들을 불러 모으신 배후에는 당신의 높고 귀하고 보람있는 생의 가치가 깃들어 있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당신의 영원하신 생명이 연결되어 있고, 당신의 무한하고 후덕하신 사랑이 생명의 줄로 감아져 있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하오니 저희들을 그 높고 귀하신 당신의 터전 위에서 태어나 그 가운데서 존속하고 그 가운데서 당신과 인연 맺을 수 있는 아들이 되고 딸이 되게 하여 주시옵길 간절히 부탁드리고 원하옵니다.

아버님께서는 많은 날들을 통하여 저희들이 새로운 결실을 추구하기를 바라 나오셨다는 사실을 생각하게 될 때, 저희는 하루를 지내고 나서는 아버지 앞에 면목이 없음을 느끼고, 한달을 지내고 나서는 부끄러움을 느끼는 자신들이 되어야겠습니다.

저희들을 위하여 수고하며 슬픔을 품고 오신 아버지가 계시다는 생각을 하게 될 때, 저희 자신들이 아버지 앞에 영광의 실체가 되지 못하고 거룩한 아들딸의 모습을 갖추지 못한 것을 부끄러워해야 되겠사옵니다. 당신에게는 그러한 저희들을 버릴래야 버릴 수 없는 딱한 사정이 있다는 것을 아는 아들이 되고 딸이 되게 하여 주시옵기를, 아버님, 간절히 바라옵고 원하옵니다.

이제 부복한 저희들의 무릎이 거룩한 무릎이 되게 하락하여 주시옵고, 저희의 몸 전체가 아버지의 사랑의 품에 안기게 허락하여 주시옵소서. 저희가 태어난 것도 아버지의 사랑 때문에 태어났고, 사는 것도 그 사랑을 위하여 살고 있사오니 죽을 때도 그 사랑을 다시 찾기 위하여 죽을 수 있는 당신의 아들딸이 되어야 하겠습니다. 이러한 자녀들이 되어 당신의 사랑과 칭찬을 받기에 부족함이 없게 하여 주시옵고, 더 나아가 당신이 기뻐할 수 있는 자녀들이 되게 허락하여 주시옵기를 간절히 부탁드리고 원하옵니다.

이 아침에 남한 각지에 널려 있는 당신의 아들딸들이 당신을 위하여 더욱더 간절한 심정과 사정에 사무치게 하여 주시옵소서. 그 누구의 권고로 따라가는 길이 아닌 것을 알았고 그 누구의 뒤를 따라가는 길이 아닌 것을 알았기에 스스로 솔선 궁행(躬行)하지 않으면 안 되고, 스스로 당신 앞에 나타내지 않으면 안 된다는 것을 발견하며 나아가는 당신의 자녀들이 되게 하여 주시옵소서.

당신을 위하여 정성을 다하고, 당신을 흠모하는 심정이 가득찬 아들딸이 있거든, 그에게 당신의 무한하신 사랑이 깃들게 하시옵고, 후덕하신 당신의 은사가 그 생명의 골짝 골짜기까지 머무르게 하시옵소서. 그리하여 당신의 생명의 힘과 더불어 새로운 생명체로 부활할 수 있게 하여 주시옵고, 그 부활된 모습을 보시고 감격하는 당신의 즐거움이 저희들 앞에 머물게 하여 주시옵길 간절히 부탁드리고 원하옵니다.

이들이 바라고 있는 그 길은 당신의 소원이 길이요, 이들이 싸우고 있는 그 길은 당신이 지켜주시는 길이 되어서 이들이 사는 생활이 당신의 사랑과 은사가 넘쳐 흐르는 사랑의 생활이 되게 하여 주시옵소서. 이러한 것을 바라면 바랄수록 넓고 높고 깊으신 당신 앞에 인정받고 사랑받고 칭찬받을 수 있는 아들딸들이 되게 허락하여 주시옵길 간절히 바라옵고 원하옵니다.

저희들이 엎드려 아버지를 부르는 것은 물론 저희 자신의 부활을 간곡히 원하는 것이겠지만, 저희들의 배후에 있는 사랑하는 형제와 종족과 민족의 부활도 간곡히 원해야 된다는 사실도 잊어서는 안 되겠습니다. 아버지가 저희들을 사랑하시는 것은 저희가 살고 있는 나라를 구하기 위함이요, 저희가 땅을 위하여 태어났기 때문에 그 땅을 위함이요, 저희가 당신으로 말미암아 인연되었기에 당신을 위함이라는 것을 아는 당신의 자녀들이 많게 하여 주시옵기를, 아버님, 간절히 바라옵고 원하옵니다.

저희들이 어린애와 같은 마음을 갖지 않으면 아버지 앞에 갈 수 없다는 것을 알게 하여 주시옵소서. 모든 것을 다 바쳐 당신의 품에 안기는 것만이 저희의 소원이며, 당신의 곁에 있는 자신만이 무한히 행복된 자신임을 아는 자녀들이 되게 하여 주시옵기를, 아버님, 간절히 바라옵고 원하옵니다.

외국에 널려 있는 당신의 자녀들을 기억하여 주시옵소서. 이 땅을 사모하며 눈물짓는 외로운 자리에 아버지의 깊으신 심정이 나타나게 하시옵고, 그들 개인을 찾아가셔서 당신의 내적인 인연을 통고시키시어 당신의 아들이 되고 딸이 되었다는 것을 증거하여 주시옵소서. 아니 움직일래야 아니 움직일 수 없고, 아니 사모할래야 아니 사모할 수 없는 당신의 인연이 여기에 개재되어야 되겠사옵니다. 아버지를 중심삼고 동서고금의 역사가 연결되고, 개인 개인이 연결되고, 사정 사정들이 연결되어 사망의 세계가 광명의 빛을 바라볼 수 있는 승리의 땅이 되게 하여 주시옵기를, 아버님, 간절히 바라옵고 원하옵니다.

이곳 수택리에는 일본에서 찾아온 수백 명의 당신의 자녀들이 오늘 이 아침에도 아버지 앞에 무릎을 꿇고 있사옵니다. 이들이 조국에 온 보람을 느끼면서 이 땅을 그리워하고 있던 마음을 다 풀어 놓고 아버지를 부를 수 있게 하여 주시옵소서. 이들이 아버지의 은사에 흠뻑 잠길 수 있게 당신의 사랑과 은혜를 가하여 주시옵길 간절히 바라옵고 원하옵니다.

이번에 왔다 가는 걸음이 헛된 걸음이 되지 않게 하여 주시옵고, 이번 기간이 기필코 없어서는 안 될 중요한 기간이 되게 허락하여 주시옵소서. 이들을 보내 놓고 염려하는 일본식구들 위에도 친히 같이하여 주시옵소서.

한국과 일본이 합하여서 앞으로 아시아에 새로운 빛이 되고, 새로운 영광의 터전을 넓혀야 하는 중차대한 책임이 저희들에게 있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과거의 역사적인 일을 넘고, 사망의 혈육적인 한의 관계를 넘어서 당신의 고귀하신 사랑과 당신의 고귀하신 인연으로 묶여진 인연을 존중하면서 이 영광의 사명을 감당하고 남음이 있게 하여 주시옵기를, 아버님, 간절히 바라옵고 원하옵니다.

여기에 모인 당신의 자녀들을 굽어살피시옵소서. 여기에는 뜻 앞에 있어서 전진 또 전진하기 위하여 몸부림치는 자도 있을 것이고, 스스로 고독 앞에 사로잡힌 자도 있을 것이며, 스스로 자탄 가운데 머물러 있는 자도 있을 것이옵니다. 그뿐만 아니라 식구들의 염려의 대상이 되는 자도 있을 것이며, 당신의 염려의 대상이 되는 자도 있을 것이옵니다. 이러한 모습들을 일체가 될 수 있게 모든 것을 당신의 사랑으로 메우시옵고, 당신의 은사로서 메우시어서 하나의 기쁨의 자리에 안길 수 있는 당신의 아들이 되고 딸이 되게 하여 주시옵길, 아버님, 간절히 바라옵고 원하옵나이다.

저희들이 누구를 만나기 위해 이 자리에 왔는가 생각하게 될 때, 아버지의 존전이 그리워 이 자리에 오게 되었다는 것을 알게 하여 주시옵소서. 당신의 성상 앞에 기억될 수 있으며, 당신의 성상을 대하여 엄숙하고 고귀하신 아버지의 가치를 느낌은 물론 그러한 자신의 가치도 느낄 수 있는 이 시간이 되게 하여 주시옵소서.

이후의 시간도 아버지의 은사 가운데에 있게 하여 주시고, 저희의 전체를 맡아 주시옵소서. 남아진 전체의 시간 시간들이 자랑이 되고 생명의 인연이 될 수 있게끔 보호하여 주시옵고, 지켜 주시옵고 지도하여 주시옵길 간절히 부탁드리면서, 이 모든 말씀 참부모님의 이름으로 아뢰었사옵나이다. 아멘.

36-95
말 씀
사람은 누구나 오늘보다는 내일이 낫기를 바라고, 과거보다는 미래가 낫기를 바라고 있습니다. 여러분 자신을 두고 보더라도 처한 환경이 과거보다는 현재가 낫기를 바라고 오늘 현재의 입장보다는 미래가 낫기를 바랄 것입니다. 얼마만큼 나아지기를 바라느냐 하면 시간을 초월하고 공간을 초월하여 무한까지 미쳐지길 바랄 것입니다. 이것이 우리 인간의 소원인 것을 알고 있습니다. 그 소원을 이루기 위해서는 무가치하게 전진할 것이 아니라 무한히 빛날 수 있는 가치와 더불어 전진해 나가야 하는 것입니다.

36-95
인간은 보다 나아지기를 바라는 존재
인간이 이러하므로 인간을 지으신 절대자가 계시다면 그 절대자도 현시점보다 미래의 시점을 더 빛내고 싶으실 것입니다. 또한 우리 모습을 보시면서도 오늘의 우리 모습보다 더욱더 빛나는 내일의 우리의 모습을 요구하시리라는 것을 우리는 생각할 수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 인간이 전진을 하고, 보다 나은 결과를 대하게 될 때는 기쁨을 느낄 것이지만 현재보다도 환경적인 여건이 낙후되는 입장에 서게 될 때는 슬픔을 느끼실 것입니다. 이것은 틀림없는 사실입니다.

우리 인간이 그가 관계되어 있는 모든 내용과 사정으로 말미암아 그 사람을 분석해 낼 수 있는 것과 마찬가지로 절대적인 중심이 되시는 하나님도 우리 인간의 모습을 넘어서는 생각할 수 없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더 나은 가치를 추구하는 마음은 우리 인간은 물론 하나님도 갖고 계시다는 것입니다. 이처럼 하나님도 보람있는 가치를 추구해야 한다는 생각을 할 때, 오늘보다 나을 수 있는 내일, 지금보다 나을 수 있는 금후를 어떻게 형성하고 개척하여 보람있는 세계와 보람있는 인생길을 걸어가느냐 하는 생각을 하지 않을 수 없는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정지 상태에서는 보람있는 나를 추구할 수 없다는 사실을 생각해야 됩니다. 어제의 ‘나’와 오늘의 ‘나’가 아무런 차이가 없다면 거기에는 진전이나 발전은 있을 수 없다는 것입니다. 어제보다는 오늘이 낫고, 오늘보다는 내일이 나은 자아를 발견할 수 있고, 진전해 나가는 자아의 가치를 스스로 느낄 수 있는 자리에 서야만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어제보다 오늘이 못하고, 오늘보다 내일이 못하다면 정지가 아니면 후퇴의 운명을 면할 수 없는 것입니다.

사람이라면 어느누구를 막론하고 현재의 자기보다 더 낫기를 바라는 것입니다. 더 낫다는 것은 반드시 현상태에 덧붙이는 것을 말하는 것이요, 못하다는 것은 현상태보다 결여되어 있다는 것을 말하는 것입니다. 낫다는 것은 흥한다는 사실을 말하는 것입니다. 하나의 추가 좌우를 가름하고, 전후를 가름하는 것처럼 우리 인생도 나를 중심삼아 가지고 우로 기울어지느냐 좌로 기울어지느냐, 혹은 앞으로 기울어지느냐 뒤로 기울어지느냐에 따라 바뀌는 운명길에 서 있다는 것을 우리는 잘 알고 있습니다.

이러한 인생길에서 자신이 우로 기울어지거나 앞으로 기울어지기 위해서는 어떠한 힘의 작용이 있지 않고는 그렇게 될 수 없는 것입니다. 그러기에 오늘보다도 내일이 빛나기를 바란다면 가중된 그 무엇을 플러스시켜야 하는 것입니다. 그런 자리에서만이 진전이 성립되는 것이며 그래야 현재의 정지된 입장을 극복하고 새로운 방향으로 행진해 나갈 수 있는 것입니다.

전진을 한다는 것은 운동을 한다는 것이므로 그 자체내에 있어서 힘이 소모됩니다. 이러한 현상이 벌어지는 것은 당연한 이치인 것입니다. 어떠한 작용이 벌어지려면 반드시 거기에는 힘의 소모가 있게 되는데, 그때에 소모되는 힘을 자체내에 유지되어 있는 힘으로만 사용하여 다 소모한다면 정지된 환경을 움직일 수 없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제3의 힘을 끌어들여야 하는 것입니다. 이 제3의 힘으로 말미암아 정지된 현재 입장보다 나아진다면 스스로 노력해야 한다는 문제가 생기는 것입니다.

그때의 노력은 자기 자체를 중심삼고 목적을 추구하는 노력이 아니라 제3점의 목적 추구라는 시점에서부터 노력해야 하는 것입니다. 이처럼 새로운 목적의식을 자극할 수 있는 데서부터 출발해야 된다는 것을 우리는 생각지 않을 수 없는 것입니다.

국민학교 1학년은 1학년에 머물기 위해 공부하는 것이 아니라, 2학년으로 나아가기 위해서 공부하는 것이요, 2학년은 3학년으로 나아가기 위해서 공부하는 것입니다. 이와 같이 우리의 인생도 현재의 자기 가치를 보다 보람되고 가치있게 하기 위해서 현재의 자기 입장보다 차후의 보다 나은 자기 입장을 생각하면서 그것을 추구하는 자리에 서야 되는 것입니다. 그런 생활 환경에 선다면 전진하는 양상이 배가될 수 있다는 것을 알게 되는 것입니다.

36-97
열의는 전진을 위한 노력에 앞서 필요한 것
그러면 전진은 어디서부터 될 수 있느냐 하는 문제를 두고 볼 때, 현재의 정지되어 있는 상태보다 제3의 목적에 대한 추구력이 얼마나 가중해 나가느냐에 달려 있습니다. 그것이 자기의 입장을 변모시키는 동기가 된다는 사실을 생각해야 되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인간이 발전하기 위해서는 정지된 현재의 입장에 그냥 있을 것이 아니라 새로운 모습을 지니기 위해 노력해야 되는 것입니다. 우리들 자신의 모습을 변모시키기 위해서는 끊임없이 노력이 필요합니다. 그리고 끊임없는 열의가 필요합니다. 열의가 문제가 됩니다. 열의가 없어 가지고는 안 됩니다. 무엇보다도 열의가 문제가 됩니다. 목적을 정해 놓고, 그 누가 말하지 않더라도 가야 할 것을 아는 사람에게 있어서는 노력에 앞서서 필요한 것이 무엇이냐 하면 열의입니다. 열의에 찬 노력, 이것이야말로 현재 입장을 변모시키는 중요한 요인이 아닐 수 없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열의가 있어야 되겠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 열의는 상대적인 열의이기보다는 자주적인 열의이어야 되겠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우리는 열의에 찬 사람이 무한한 세계를 추구하고, 빛날 수 있는 인생의 가치를 추구하는 가치있는 사람으로 등장할 수 있다는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얼마나 환경을 제압할 수 있고 얼마나 현재의 고착된 입장을 타파할 수 있느냐 하는 문제가 여러분 자신에게 사무쳐 하나님이 필요로 하는 열의로 나타나게 될 때에는 그것이 여러분이 생각하지도 못했던 제3의 목적에 도달하는 거리를 단축시킬 수 있는 요인이 된다는 것을 여러분은 알아야 합니다.

인간은 누구나 이러한 열의를 가진 사람을 동경하는 것입니다. 열의를 가지고 직행하려는 사람은 그 앞길에 모험이 가중되어 오더라도 그것을 타파시킬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열의가 없는 노력은 중단되기 쉬운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전진을 바라는 우리에게 있어서 가장 필요한 것은 내 자체가 어떻게 영속적으로 전진을 지속시킬 수 있는 열의를 보급받느냐 하는 것이 문제입니다. 열의가 없으면 자극을 받을 수 없는 것입니다. 또한 열의가 없는 자극은 필요없는 것입니다. 강한 자극이라는 것은 강한 열의에 의해 인연되어진다는 사실을 생각하게 될 때, 열의에 찬 환경, 열의에 찬 개체, 열의에 찬 상대를 추구해야 하는 것입니다.

완성된 인격, 무한한 인격을 추구하는 우리 인간에게는 무한한 열의가 없어 가지고는 안 되는 것입니다. 무한한 인격을 추구하는 우리 자체를 두고 볼 때, 언제나 연속적으로 그 열의를 추구할 수 있는 자체가 되어 있느냐, 그렇지 않으면 그러한 열의를 갖고 목적을 달성시키려 하는 내 자체가 되어 있느냐가 중요한 문제입니다. 이러한 두 입장 중의 어느 한 입장을 취하지 않고는 완성된 인격을 추구할 수 없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추구하는 우리들에게 있어서 신앙생활을 중심삼고 볼 때에 신앙길에는 반드시 모험이 뒤따릅니다. 그것은 환경과 더불어 이것을 해결지어야 할 싸움의 노정이 남아 있기 때문입니다. 그런 길을 강한 신념을 갖고 간다면 그 신념에 비례되는 만큼 소모전이 벌어지게 됩니다. 그때에 그 소모전을 극복해 내고도 남을 수 있는 열의가 없게 될 때는 그 환경에서 전진은 커녕 도리어 후퇴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렇게 되지 않으려면 그러한 열의를 보급시킬 수 있는 힘이 자체내에 있든가 아니면 상대적으로 그러한 모체가 되는 하나님과 인연을 맺어 그 열의를 보급받을 수 있어야 합니다. 그러지 않고는 전진을 할 수 없는 것입니다.

36-99
열의의 주체이신 하나님의 열의를 보급받으려면
그러면 하나님은 언제나 그러한 열의에 사무칠 수 있는 자리에 계시느냐 하는 문제를 두고 볼 때, 응당 하나님은 그러한 자리에 계셔야 합니다. 그래야 그러한 자리에 있지 못한 인간을 그 길로 몰아갈 수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전지전능하신 분이요, 능치 못함이 없는 주체이시기 때문에 열의에 있어서도 주체가 되시는 것입니다. 그러나 아무리 하나님이 열의의 주체가 되어 계신다 하더라도 나 자체가 스스로 열의를 받아들일 수 있는 바탕이 되어 있어야 한다는 것을 우리들은 알아야 합니다.

그러면 우리가 하나님의 열의를 보급받기 위해서 필요한 것이 무엇이냐? 하나님은 순수하기에 우리 자체도 순수해야 되겠습니다. 여기에서 제3의 목적을 추구하게 될 때, 그 목적은 나와 더불어 영원한 인연으로 맺어지는 것을 우리는 절감해야 되겠습니다. 다시 말하면 그것은 삼각관계에 있지만 내 안에 있을 수 있는 것이요, 나와 더불어 있을 수 있다는 것입니다.

우리의 자체 내에 있는 그 목적의식을 얼마만큼 자각할 수 있느냐 하는 그 자각의 감도가 열의로 화하여 열의의 본체 되시는 하나님을 유도할 수 있는 도화선이 되어야 합니다. 그런데 나 자신이 무력하여 열의의 도화선이 되는 길이 없게 될 때는 하나님과 나와의 관계를 일치화시킬 수 없을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하나의 동맥이 있으면 하나의 정맥이 있어야 되고, 한 곳에서 주면 한 곳에서 받아야 되며, 백을 주면 백을 받아들일 수 있는 나 자체가 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열의를 유발시킬 수 있는 그 동기는 무엇이냐? 순수해야 합니다. 사(邪)된 것이 있어서는 안 됩니다. 백이 들어오게 되면 백으로써 순수하게 반영시킬 수 있어야 되겠습니다. 이것이 문제 되는 것입니다. 또 그 열의라는 것은 어디서부터 발생하느냐? 순수한 것을 터전으로 해서 발생하는 것입니다. 그 순수한 터전을 중심삼아 가지고 열의를 얼마나 추구하느냐, 얼마나 필요로 하느냐 하는 것에 따라서 발생되는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얼마나 사모하고 얼마나 흠모하여 나 자체가 그 무한한 열의의 주체 앞에 나타날 수 있겠느냐 하는 것이 문제된다는 것입니다. 거기에는 그리움이 앞서야 되고, 간절함이 앞서야 되는 것입니다. 간절함이 있는 그 이면에는 반드시 열의가 연결되어 있다는 사실을 우리는 생각해야 되겠습니다.

그 주체가 하나님이라고 생각하게 될 때, 우리는 하나님을 보고 싶고, 만나고 싶고, 같이 있고 싶을 뿐만 아니라 하나님의 사랑을 받고 싶고, 사랑을 받으면서 그 사랑 가운데에서 살고 싶고, 그 사랑 가운데에서 끝을 맺고 싶은 흠모의 심정이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바람의 마음이 간절한 데서부터 순수한 바탕을 중심삼아야 하나님의 그 사랑의 인연이 나와 더불어 관계를 맺는 것입니다. 이러한 생각을 하게 될 때, 우리 자신이 얼마나 하나님을 그리워하느냐 하는 문제가 생기는 것입니다.

얼마나 하나님을 흠모하고 사모하였느냐? 현재의 내 입장을 전부다 잊어버리고 하나님 앞에 몽땅 바쳐드릴 수 있는 입장에 서 있느냐 하는 문제, 다시 말하면 완전한 플러스 앞에 완전한 마이너스가 될 수 있느냐 하는 문제가 생긴다는 것입니다. 그 완전한 마이너스가 완전한 플러스 앞에 대할 수 있는 그런 경지에 들어가게 되면 완전한 플러스는 완전한 마이너스에 대해서 직행해 오는 것입니다. 순수한 직행의 행로를 통하여서 그 완전한 플러스는 완전한 마이너스를 향해 돌진해 온다는 것입니다. 거기에서 마이너스는 새로이 후방에서 밀어주는 반대의 작용을 일으킬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직행하는 힘을 정지의 모양으로 만들려면 직행하는 힘에 반대되는 하나의 힘이 있음으로써 직행하는 힘을 밀어내는 작용체가 있어야 되는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완전한 플러스가 나를 향하여 직행하여 내 순수한 바탕 앞에 부딪치게 될 때, 내가 완전한 마이너스의 입장을 지니게 된다면 그 방향은 그 마이너스의 뒤를 따라올 것이 아니냐 하는 것입니다. 이렇게 되어 제3의 힘의 작용이 미쳐짐으로 말미암아 현재 입장에서 전진적인 상태로 나아갈 것입니다. 이것은 작용체에 있어서나 운동법칙에 있어서 불가피한 현상인 것을 생각하게 될 때, 우리가 이런 자리를 추구하지 않고는 새로운 열의에 접할 수 있는 길이 없다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에게는 기도가 필요한 것이요, 정성이 필요한 것입니다. 기도라는 것은 자기 자체의 무한한 가치를 정지시키거나 고착시키고자 하는 것이 아니라, 정지된 입장에서 연속적인 전진을 추구하고자 하는 것입니다. 그리하여 절대자 앞에 기여하는 바탕을 추구하자는 것입니다. 이러한 자리가 기도하는 자리요, 정성들이는 자리라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36-101
얼마나 하나님을 사랑하고 사모했느냐가 문제가 돼
나 자체가 절대적인 힘 앞에 있어서 끌려들어가든가 밀려들어가는 자리에서만이 전진의 현상이 있다는 것을 우리가 인정할 수 있는 것입니다. 이렇게 생각할 때 정성들이지 않을 수 없는 것입니다. 정성들인다는 것은 나 자체를 무의 경지에 몰아넣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완전한 플러스라면 그 존재 앞에 완전한 마이너스의 형태로 몰아넣는다는 것입니다. 이것을 우리가 알게 되는 것입니다.

고기압권에 하나의 저기압권이 생겨나게 되면 거기에 있던 고기압은 다른 곳으로 옮겨지게 됩니다. 저기압권에 의해 고기압은 다른 어딘가에 생겨나는 것입니다. 그 어딘가에 생겨난다는 것입니다. 저기압권이 커지면 커질수록 고기압권은 이에 비례하여 다른 곳에서 형성된다는 것입니다. 저기압이 진공상태에 들어가면 들어갈수록 한편으로는 끌어들이는 작용을 한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이것은 방출 현상이 벌어지는 동시에 흡수현상이 벌어지는 것입니다. 이렇게 흡수되고 보급 보충되면서 여기에서 전진적인 결과가 나타나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종교에서 희생 봉사하라고 가르치는 것입니다. 무한한 인생의 가치를 추구함에 있어서 인간은 누구나 마찬가지 입장이지만 희생하고 봉사하라는 것은 기압으로 말하자면 저기압권 형성을 추구하라는 것입니다. 희생 봉사하는 데 있어서 나 자체를 완전히 주고 나면 저기압의 경우와 같은 진공상태가 될 것입니다. 그렇지만 진공이 생겨나면 우주는 내가 지녔던 양에 비례한 만큼의 가치를 반드시 보급해 주게 되어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절대자, 즉 하나님이 계시느냐 안 계시느냐를 염려할 필요가 없다는 것입니다. 참다운 모습으로서 줄 수 있는 환경을 갖추게 될 때는 하나님께서 반드시 보충 보급을 해주시는 것입니다. 그러기에 마음을 다하고 뜻을 다하고 성품을 다하라고 하신 것입니다.’네 마음을 다하고 뜻을 다하고 성품을 다하라’는 말씀은 누구에게 해당하는 것이냐? 하나님께 해당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에게 해당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여기서 다하는 것이 극에 달하게 되면 결과가 어떻게 나타날 것이냐? 상대 앞에 있어서 사랑의 힘으로 나타날 것입니다. 상대를 자극시킬 수 있는 하나의 작용으로 나타날 것입니다. 그런 작용이 하나님 앞에 미치게 될 때는 하나님의 사랑이 나에게 미쳐 오는 것입니다.

‘마음을 다하고 뜻을 다하고 성품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라’고 하신 대로 그 사랑을 다하게 되면 아무것도 남지 않을 것입니다. 마음도 영이요, 뜻도 영이요, 정성도 영일 것입니다. 그러면 영의 자리에서 사랑하라는 말이냐? 아닙니다. 영되는 입장에까지 나가게 되면 더 큰 사랑을 얻게 되는 것입니다.

이렇게 하는 것이 사랑의 작용의 요인이라는 것을 생각하게 될 때, 우리에게는 오늘날 얼마나 하나님을 사모했느냐 하는 문제가 생기는 것입니다. 사모하는 데, 자기의 인격관을 중심삼고 그 관을 채우기 위해서 사모한다면 자기의 영속적인 발전을 상실할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스스로 그 한계선에 머물고 마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나 자신을 잊어버리고 무한하신 하나님을 추구하면서 무한히 정성들이고, 무한히 그리워하고, 무한히 흠모해야 하는 것입니다. 이렇게 심정이 가중되는 자리에 들어가게 되면 반드시 하나님으로부터 인연되어 오는 자극적인 열의가 생겨나는 것입니다. 그 열의를 가지고 작용을 하게 되면 하나님의 사랑이 나에게 미쳐지는 것입니다. 그것이 힘으로 나타나는 것이요, 환경을 타개시킬 수 있는 절대적인 요인으로 나타나는 것입니다. 이러한 자리에 있는 사람은 틀림없이 전진 발전할 것입니다. 이것이 힘이 존속하는 원칙이며, 힘이 작용하는 원칙이라는 것을 우리는 생각해야 될 것입니다.

자동차를 두고 볼 때, 자동차가 달리는 그 이면에는 달릴 수 있는 힘을 보급시키는 영속적인 그 무엇이 있다는 것입니다. 받고자 하는 일면에 주고자 하는 작용을 계속해야 자동차가 달릴 수 있다는 것입니다. 피스톤이 한번 흡입작용을 하게 되면 진공상태가 되어 연료를 보급받게 됩니다. 그렇게 하여 피스톤은 왕복운동을 하는 것입니다. 이러한 작용을 통해 엔진이 움직이고 그 움직이는 엔진을 통하여 새로운 열의에 찬 진전이 있는 것입니다.

우리 개체도 마찬가지입니다. 그 열의로 말미암아 자극을 느끼는 것입니다. 사람에게 있어서 제2의 목적이 현실보다도 크다면, 그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서는 끊임없는 자극이 반드시 필요한 것입니다. 이 자극을 어떻게 영속적으로 보급받아 자신을 유지시키느냐에 따라서 그 사람이 목적한 바를 성사시키느냐 못 시키느냐 하는 결과가 좌우된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것을 생각하게 될 때, 얼마나 순수한 바탕 위에서 하나님을 위하여 희생하였고, 또한 하나님을 흠모하고 사모하였느냐 하는 것이 문제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그리워 나 자신을 망각할 수 있는 자리, 눈물을 흘리되 내가 눈물을 흘리고 싶어서흘리는 것이 아니라 자기 입장을 망각한 입장에서 하염없이 눈물흘릴 수 있는 자리, 그 자리는 나와는 관계가 없는 자리같지만 나를 형성할 수 있는 절대적 요인이 된다는 것을 알아야 하는 것입니다.

36-103
무아의 경지에서 받는 신의 감각이 발전의 원동력
인간은 태어날 때 자기가 태어나고 싶다 하는 의식이 있어서 태어난 것이 아닙니다. 의식 이전에 하나님의 힘으로 말미암아 태어난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발전도 그 자체의 의식기반에서 비롯되는 것이 아닙니다. 자기 스스로를 망각하는 자리, 의식이전의 작용적인 결과가 다짐되는 거기에서 보람있고 가치있는 내 자체의 형성이 시작되는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내의식에 앞서 하나님이 여기에 먼저 존재(存在)할 수 있는 동기의 바탕이 인연됨으로써 보다 나을 수 있는 내 자체가 형성된다는 것입니다.

이런 문제를 두고 볼 때, 자기 자체가 ‘나는 이걸 느끼기 위해서 기도하였더니 느낀다’고 하는 자리는 정지되고 고착된 환경을 넘어서지 못한 자리입니다.

스스로 정성을 들이면서도 자기가 정성들이는 것을 잊어버릴 수 잇는 자리, 나 스스로 기도하면서 감사의 눈물을 흘리더라도 스스로 감사하다는 생각을 해서 눈물을 흘리는 것이 아니라 무엇인지 모르게 생각하기 이전에 오관이 먼저 작용을 해서 눈물지을 수 있는 자리, 그러한 자리에 있어야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의식하기에 앞서서 목적을 추구하는 것보다도, 의식에 앞서 목적을 추구시켜 주는 인연이 나와 더불어 관계되어 있다는 사실을 발견하는 사람은 발전하게 될 것입니다.

만일 예언하는 사람이 자기의 의식 기관을 중심삼아 가지고 예언을 한다면 그것은 자기의 한계선을 넘을 수 없는 것입니다. 그렇지만 자기를 바탕으로 하되 무한한 힘의 모체가 그 사람의 오관을 통하여 나온다면 거기에는 새로운 예언이 등장할 가능성이 있는 것입니다.

자기를 동기로 해서는 그러한 가능성이 없다는 것입니다. 무한하신 하나님의 은사에 접하는 경지에 들어가면 들어갈수록 ‘나’라는 관념은 쇠약해지는 것입니다. 그런 무아의 자리에 들어가야 되는 것입니다. 무의 자리에 들어가서 유의 입장에서 느끼던 이상의 힘의 자극을 받게 된다면 거기에서 재창조적인 하나님의 새로운 역사가 계속되고 있다는 사실을 느낄 것입니다. 그런 자리에서만이 강한 자극을 느낄 수 있는 것이요, 현실의 나보다 전진되는 나를 발견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주위 환경을 의식하는 자리에서는 신비스러운 기도를 할 수 없는 것입니다. 과거의 인상이 또렷또렷하게 남아지는 자리에서는 아무리 열심히 기도를 하더라도 현재의 환경을 초월할 수 없는 것입니다. 무아경을 찾아 들어가야 하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순수한 자아를 발견하려고 노력해야 합니다. 거기에는 사된 모든 요인을 제거시키고 순수한 선의 요소만이 존재해야 합니다. 존재하는 모든 것을 선의 본 방향에 일치될 수 있는 요인으로 만들어야 합니다. 이러한 바탕을 마련하는 것이 기도하는 사람들이 모색해야 할 중요한 요인이라는 것을 느껴야 됩니다.

안테나를 예로 들어본다면 안테나는 스스로 찾아가 진동하는 전파를 느끼는 것이 아닙니다. 주위에서 오는 전파를 느끼는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인간도 신의 무한한 감각을 흠모하며 그 선의 감각을 받을 수 있는 완전한 자리에 설 때 진동하는 감각을 느낄 수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러한 감각을 느끼게 될 때 진동하는 현상이 벌어지는 것입니다. 기도하는 사람이 이와 마찬가지의 입장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여러분들은 고요한 자리에서 무한히 신의 감각을 받을 수 있는 안테나와 같이 자기의 입장을 잊어버리고 신으로부터 오는 감각을 느껴야 합니다. 무한히 높고 높은 데에 장치되어 있는 안테나와 같이 높이고 높여서 무한히 순수하고, 무한히 가치있고 보람있는 자아를 인식하면서, 천길 만길 무한한 경지의 자리로 나아가게 될 때는 거기에서 자기도 모르는 제3의 힘이 자기에게 접속해 들어온다는 것을 느끼게 될 것입니다. 그러한 경지를 찾아 들어가는 것입니다.

36-105
발전하려면 과거를 청산해야
그렇기 때문에 지금까지의 나의 생각이 사된 생각이었으면 그것을 회개해야 됩니다. 또 내 과거의 인식이 남아져 들어오거든 그 인식을 완전히 포착해서 그것이 사된 것이냐, 혹은 옳은 것이냐를 가려내어야 합니다. 그리하여 그것이 옳은 인식이었다면 그것을 현재에 플러스시킬 수 있어야 하고, 그것이 사적인 인식이었면 그것을 완전히 제거해 버리는 방법을 모색해야 합니다. 이렇게 보람있는 과거의 인연을 현재에 플러스시키지 못한다면 아무리 과거의 좋은 인연이었다 할지라도 그 인연은 자기가 추구하는 미래상에 하등의 관계를 맺을 수 없는 것입니다.

또 현재의 입장에서 생각하는 사실, 의식이 선하냐 악하냐 하는 문제를 중심삼고 볼 때, 그것이 선 앞에 있어서 보탬이 되지 못하는 의식이면 완전히 회개하여 청산지은 후에 순수하고 선한 인연으로 남아질 수 있는 것만을 보탤 수 있어야 합니다. 그래야 전진적인 요인이 될 수 있는 것이지 그냥 그대로 안 된다는 것입니다.

미래에 대해서도 자기가 생각하는 것이 순수하냐, 순수하지 못하냐, 선하냐, 악하냐 하는 문제를 두고 자기가 의식하는 미래상에서 선한 요소만을 가려서 거기에 보람되고 진일보할 수 있게 해야 합니다. 그러지 않고는 보다 나은 전진을 추구할 수 없는 것입니다.

그리하여 선으로 과거와 현재와 미래를 채워 선으로 충만된 자리에 들어가야 합니다. 이러한 자리에 들어간다면 무한한 힘의 그 중심에 존재 한다는 것을 체휼할 수 있을 것입니다. 이때에 새로운 신비의 창조적 역사는 나타나는 것입니다.

왜 그러냐? 무한히 선으로 충만되었다 할진대 그 중심은 반드시 선의 주체 되시는 하나님이시기 때문입니다. 나 자체가 그런 자리에 들어간다면 마음 가운데 하나님이 임재하고 계시다는 것을 발견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것을 통과함과 동시에 그 충만하게 차 있는 선이 내것이라는 인식을 느껴야만 새로운 우주관을 체휼할 수 있는 것입니다.

과거의 의식에 고착되어 있고, 현재의 의식에 집착되어 가지고 자기 나름대로 구상한 미래의 의식을 가진 그 자리에서는 하나님을 모실 수 없는 것입니다. 오직 선한 의식만을 남기고 악한 모든 요인을 제거할 수 있는 선의 바탕이 되어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예컨대 반사경에 90도로 빛을 비추면 빛이 왔던 방향으로 그대로 반사됨으로 말미암아 빛을 보냈던 주체가 그 빛을 느낄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무슨 말인지 알겠어요? 이 90도 된 반사경에 직행해 오는 빛은 반발하는 것입니다.

빛은 입사된 각도에 비례해 가지고 반사되는 것이므로 빛이 수직의 각도를 이루며 반사경에 부딪치게 될 때는 그 부딪친 것이 그냥 그대로 반사되는 것입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반사경이 순수해야 됩니다. 만약 어떠한 불순 부분이 남아있게 될 때는 그것이 순수하게 반사된 빛으로서 그 모체를 자극하지 못할 것입니다. 완전한 반사경일 때는 순수하게 반사된 완전한 빛으로서 그 모체를 자극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순수해야 되는 것입니다. 그러면 하나님은 기뻐할 것입니다.

36-106
순수한 선의 입장
발전은 우리에게 가장 필요한 것입니다. 그러나 그 발전을 추구하기 전에 자기 자체내의 순수성을 어떻게 조성하느냐 하는 것이 더 문제입니다. 그래서 여러분에게는 기도하는 시간이 필요한 것이요, 정성들이는 시간이 필요한 것입니다. 정성은 그냥 들여서는 안 됩니다. 과거를 청산하고 들여야 됩니다. 과거의 의식이 남아 있다면 그 의식이 나를 어디로 끌고 가겠느냐 하는 생각을 해야 됩니다. 과거의 의식에 내가 도취하여 얼마나 강한 입장에 서 있느냐 하는 문제를 두고 과거가 순수했느냐고 비판해야 된다는 것입니다. 순수한 입장에 처했었다면 선했느냐 하는 것을 비판해야 되고, 현재 그런 입장에 서 있느냐 하는 것을 비판해야 됩니다. 또 내가 바라는 소원이 순수하냐 하는 것을 비판해야 된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순수한 선의 입장이란 무엇이냐? 자기를 위하는 데 있어서는 순수한 선은 존속할 수 없습니다. 선은 자기를 강화시키는 데는 존속하지 않는 것입니다. 왜 존속하지 않느냐? 선이라는 것은 하나님을 모시기 위한 하나의 바탕이기 때문입니다. 선 가운데서 하나님을 모신다는 것은 선의 주인으로 하나님을 모시는 것입니다. 선의 주인은 타락된 인간이 아니라 하나님입니다.

그러므로 선을 중심삼고 볼 때, 나를 높이고 나를 빛내기 위한 자리에서 선을 추구하면 그것은 하나님에게 반역하는 자리이지 하나님을 모셔드리는 자리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런 자리에는 ‘나’라는 것이 도착해 있는 자리이기 때문에 하나님은 선의 중심으로 임재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선은 보다 큰 것을 추구하는 것입니다. 은혜를 받고자 할 때에도 내 개인이 부활되는 은혜를 받고자 해서 원하는 것이 아니라, 세계를 구하고도 남을 수 있는 은혜를 받고자 해서 원해야 하는 것입니다. 보다 큰 선을 추구하면 추구할수록 자기의 의식이 고착된 자리에 있어 가지고는 안 되는 것입니다. 자기 의식 자체가 선을 중심삼고 이동할 수 있는 보다 가치적인 입장의 자체가 되어야 됩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자기를 희생시켜야 합니다. 자기를 완전히 주어야 합니다. 이렇게 해야만 새로운 보급로가 형성되는 것입니다. 완전한 마이너스가 생겨나면, 이 마이너스를 작용시킬 수 있는 완전한 플러스는 벌써 임재해 있다는 것을 느끼게 되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여러분이 은혜의 자리에 나가게 되면 하나님이 언제 오셨느냐 하는 것을 알 수 없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같이하는 자리에서 여러분은 하나님이 벌써부터 계셨다는 것을 느껴야 하는 것입니다. 그 하나님은 나로서는 미칠 수 없는 인연을 갖고 계신다는 것을 인정하여야 하는 것입니다. 자기의 의식관념을 초월한 자리에 하나님이 임재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선을 추구하는 데 있어서 제한된 한계선에서만 충족시킬 것이 아니라 그 한계선을 넘은 자리에서 충족시키라는 것입니다. 거기서부터 하나님은 내적인 자리를 잡으시는 것입니다. 그것이 형태와 형상으로 나타나지는 않지만 만약 형태와 형상으로 나타나게 된다면 그것은 절대적인 인격을 형성하는 요인으로서 나타나는 것입니다. 그렇게 될 때 비로소 인간은 의식기관을 통해서 하나님이 자기에게 임재해 계시다는 것을 자각하는 것입니다. 그런 경지가 있다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순수해야 되겠습니다. 얼마나 순수해야 되느냐 하면 거울로 말하면 평면경처럼 순수해야 되겠습니다.

36-108
웃고 계셔야 하는 하나님인데
그러면 순수한 울음은 어떠한 것이냐? 세포와 모든 신경기관이 일치되는 자리에서의 울음이 순수한 울음입니다. 일치되었다는 것은 충만했다는 것을 말합니다. 울음에는 기쁨으로서 충만될 수 있는 인연이 있어야 되는 것입니다. 또 기쁨을 느끼면 그 기쁨으로 충만할 것이 아니라 기쁨을 자극시킬 수 있는 슬픔도 있어야 되는 것입니다.

항상 기쁨만을 자극시켜 주면 나중에는 기쁨을 못 느끼게 됩니다. 기쁨이 있는 반면 그 기쁨을 자극시킬 수 있는 슬픈 일면도 내재해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 슬픈 일면이 빠르게 이동됨으로 말미암아 우리 의식기관으로는 잘 느끼지 못하지만 절대적인 선자체 앞에, 기쁨 앞에 있어서는 슬픈 일면은 넘어갈 수 있다는 것입니다. 빛이 있으면 어두움이 있고, 높은 곳이 있으면 낮은 곳이 있는 거와 마찬가지입니다. 기쁨만을 느낄 수 있는 경지는 기쁜 경지가 아닙니다. 그런 경지가 방향을 바꿔 가지고 반대의 현상이 될 때에는 슬픔을 느끼는 것입니다.

웃는 모양은 우는 모양과 비슷합니다. 여러분, 웃는 모양과 우는 모양에는 어떤 차이가 있습니까? 생각해 보세요. 어떤 사람은 웃는 모양이 꼭 우는 것 같습니다. 얼굴 변화를 보면 웃을 때도 눈이 작아지고 얼굴에 주름살이 잡히고, 울 때도 마찬가지입니다. 여러분은 웃을 때는 공적인 것을 드러내는 것이요, 울 때는 사적인 것을 드러내는 것이라고 생각하면 됩니다.

웃을 때에는 공적인 것을 드러내는 것입니다. 옛말에 웃는 얼굴에 침 못 뱉는다 라는 말이 있습니다. 이것은 웃는 사람에게 나쁘게 하면 벌 받는다는 말이요, 웃음을 반대하는 사람은 용서를 못 받는다는 뜻입니다. 웃는 얼굴에 침 못 뱉는다는 것은 바로 그런 노릇을 해서는 안 된다는 의미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웃는 것은 무한히 공적인 것입니다.

그러면 하나님은 웃고 계실 것이냐, 울고 계실 것이냐 하는 것을 생각해 볼 때, 하나님은 공적인 분이기 때문에 울고 계셔서는 안 됩니다. 웃고 계셔야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언제나 입을 벌리고 웃고 계시는 것은 아닙니다. 충만한 웃음을 웃고 계셔야 하는데, 까딱하면 폭소가 벌어질 것이요, 까딱하면 폭소의 반대되는 폭비(爆悲)가 벌어질 것입니다. 그러한 분이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슬픈 면을 알게 되면 그 슬픔 앞에서는 내 슬픔은 사라지기 때문에 기쁨이 나오는 것입니다. 슬픔이 지나면 기쁨이 오는 것입니다. 은혜의 자리도 그러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회개할 때는 눈물 콧물을 흘리고, 창자가 끊어지고 숨이 끊어지는 듯한 경지까지 들어가야 됩니다. 이렇게 한바탕 울고 나면 기쁨이 오는 것입니다. 알겠어요?

하나님은 어떠한 분이냐? 기쁨에 충만해 계시는 반면, 무한한 슬픔이 폭발되어 나올 수 있는, 안팎으로 두루 충만함을 갖춘 분입니다. 그래서 그 슬픈 일면을 찾아 들어가 끝에 가게 되면 기쁨으로 화하는 것입니다. 또 기쁜 일면을 찾아 들어가게 되면 슬픔의 경계선이 점차 드러나는 것입니다. 이것이 교차되어 하나를 이루고 만족을 느낄 때 폭발적인 만족을 느낄 것입니다. 그렇잖아요? 여러분, 뜨거운 것과 찬 것이 부딪치게 되면 어떻습니까? 폭발되지요? 그렇지요? 그러나 뜨거운 것끼리 부딪치면 폭발하지 않습니다. 이렇게 조화를 이루며 형성되어 있는 절대적인 주체가 하나님이심을 여러분은 알아야 하겠습니다.

사람들은 친구를 원할 때 눈물이 있는 친구를 원합니다. 그렇다고 하루 종일 울고, 찔찔 짜는 그런 친구를 원하는 것은 아닙니다. 눈물이 있는 반면 웃음이 충만한 사람을 원하는 것입니다. 사람이 언제나 찡그린 얼굴을 해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그런 가운데서도 넘치는 희열을 발견할 수 있어야만 되는 겁니다. 그렇기 때문에 복받는 사람은 어떤 사람이냐? 남이 울 때 같이 울어 줄 수 있는 사람이 복 받는 사람입니다. 그런 거예요. 복이라는 것은 영원히 떠나고 싶지 않는 자리에 찾아오는 것입니다. 그렇지 않겠어요?

그 복받는 자리는 어떤 자리냐? 영원히 떠나고 싶지 않은 자리에 복은 찾아오기 때문에 복받을 수 있는 자리는 부자의 관계와 같은 자리일 것입니다. 어떤 부모가 자식이 슬퍼하는 데 자기와는 관계없다고 하겠습니까? 아무리 그렇게 다짐하여도 다짐하는 그 의식을 넘어서 먼저 눈물이 앞서는 것입니다. 이렇게 되는 것이 부모의 심정인 것입니다.

36-110
기도는 솔직하고 순수하게
그러면 부모의 사랑과 자식의 사랑의 차이는 어디에 있느냐? 부모의 사랑은 주고 나서도 잘못 줬다고 후회할 수 있는 마음이 바탕이 되는 사랑입니다. 그러나 효도하는 자식이 있다 하면 ‘나는 부모 앞에 효도하고 있다’ 하는 것을 생각하는 입장이 됩니다. 이것이 부모에 대한 자식의 사랑이라는 것입니다. 알겠어요? 이렇게 차이가 있다는 것입니다. 효도하고 있다는 것을 자기 자신이 안다는 것입니다. 스스로 인정한다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자식의 사랑은 부모의 사랑보다 낮은 것입니다. 낮은 것이기 때문에 부모의 사랑을 필요로 하고, 부모를 요구하는 것입니다. 이렇게 차이가 나는 것입니다.

그러기에 하나님을 찾아가는 사람, 무한히 순수한 바탕을 찾아가는 사람이 있다면 그 사람은 눈물이 없어 가지고는 그 자리에 못 들어갑니다. 용서받을 수 없는 죄를 지었다면 자기의 과거를 생각하며 어떠한 형벌을 받아도 당연하다는 자신을 발견함과 동시에 그런 자신을 미워해야 합니다. 그 후에 기쁨의 소리가 찾아오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순수한 목적을 추구해 나가는 사람들은 앞으로 가더라도 천국에 갈 수 있는 것이요, 뒤로 가더라도 천국에 갈 수 있는 것입니다.

선한 자리는 앞으로 가나 뒤로 가나 어디나 천국입니다. 우리 인간들이 그런 자리를 잃어버렸기 때문에 그 바탕을 다시 회복해야만 영원한 진전과 발전을 이룰 수 있는 것입니다. 이러한 사실을 여러분은 생각해야 되겠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기도할 때는 과거를 회개하고 현재를 회개해야 합니다. 솔직해야 된다는 거예요. ‘나는 과거에 이러이러한 사람이었습니다. 이러한 때도 있었고 이러이러한 때도 있었습니다’라고 회개해야 됩니다. 그리고 이런 죄악된 내가 오늘 이 자리에 세워진 것에 대하여 감사의 마음을 가져야 되겠습니다. 과거의 잘못된 것을 생각할 때, 감사의 눈물이 앞서 가지고 자기 자체를 자책하면서 하나님의 가혹한 심판의 채찍이 있더라도 그것을 달갑게 받고 자기 스스로를 하나님 앞에 제물로 바쳐 드리겠다는 마음을 가져야 됩니다. 이러한 자리에서만이 하나님의 용서를 받을 수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그래서 과거를 용서받고, 현재를 용서받고, 미래를 보장받을 수 있어야 합니다. 과거의 악이 끌어당기는 양이 많고, 현재의 악이 얽어매는 그 구속이 많아 가지고는 진정한 해방이 맛볼 수 없습니다. 과거가 선으로 영위되고, 현재가 선으로 영위되고, 미래에도 선으로 남아질 수 있는 자신이 되기 위해서는 선을 영위하기 위한 자기 자신의 욕구가 강해야만 되는 것입니다.

그 강한 것이 무엇으로 나타나야 하느냐? 흠모의 마음 바탕을 중심삼은 열의로 나타나야 됩니다. 그 열의가 환경에 부딪쳐 갈 때, 그 환경에서는 재창조의 현상이 벌어지는 것입니다. 그리고 내 자체에서는 인격이 완성되는 것이요, 내 자체의 인격을 중심삼고 상대적인 목적의 세계를 향하여 나아갈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한 자극을 받아 가면서 나아가면 기필코 선한 결과가 창조될 것이며, 필연적으로 진전의 현상이 나타날 것입니다.

이렇게 되기 위해서는 여러분이 지금까지 생활하던 그대로의 모습 가지고는 안 됩니다. 여기에는 보다 순수하고, 보다 순결한 바탕을 만들어 놓을 수 있는 작용이 있어야 됩니다. 이 작용을 무엇으로 하느냐? 이것이 기도라는 것입니다. 순수한 기도가 필요합니다. 여러분들이 순수한 마음으로 기도하면 힘이 나오는 것입니다. 자기의 욕망을 중심삼은 자리에서는 하나님은 절대 움직이지 않습니다. 여러분이 해보면 알겠지만 자기 욕망을 중심삼아 가지고 기도하면 하나님은 절대 움직이시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36-112
자기 발견과 자아 완성
사람은 자기를 위해 있는 것이 아니라 세계와 우주를 위해 있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세계와 우주에까지 미쳐 나갈 수 있는 인연이 없어 가지고는 무엇을 위해서 존재한다는 말은 거짓말이 됩니다. 위하려고 존재한다면 그 위할 수 있는 힘이 보급되는 것입니다. 그것은 순수하고 선한 인간을 중심삼고 보급되게 되어 있습니다. 여러분들이 그리움에 사무치게 될 때는 그러한 경지를 느끼게 되는 것입니다. 여러분 일생에 언제 한번 신경이 굳어지고 눈이 굳어지듯이 하나님을 보고 싶어하고 그리워해 봤느냐는 것입니다. 그 이상 감각적일 때 그것은 나의 의식적인 감각이 아니라 초의식적인 감각에 들어가는 것입니다.

양전기면 양전기, 음전기면 음전기의 수억 볼트가 합해지면 그 힘이 커지는 것입니다. 커진 힘끼리 합해진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여러분도 모든 신경기관이 산만해 가지고는 안 됩니다. 통일이 되어야 합니다. 완전히 하나되어야 높아질 수 있는 정상이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 정상은 자기를 위주한 정상이 아닙니다. 더 높아질 수 있는 정상이기 때문에 자기가 있어 가지고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순수한 공적인 바탕에서 시작되는 그런 경지를 모색해야 하고, 나 자체를 그런 경지의 순수한 바탕으로 유입시킬 줄 알아야 합니다. 이렇게 하지 않고는 영원한 생명의 인격을 갖출 수 없고, 보다 가치적인 인격을 추구할 수 없다는 사실을 여러분은 알아야 됩니다.

그렇기 때문에 문제는 어디에 있느냐? 상대에게 있는 것이 아닙니다. 제삼자에게 있는 것이 아니라 바로 자기 자신에게 있는 것입니다. 자기 자신을 놓고 눈물 흘릴 줄 모르는 사람은 상대를 위해서도 눈물 흘릴 줄 모르는 사람이요, 자기를 놓고 웃을 줄 모르는 사람은 상대를 위해서도 웃을 줄 모르는 사람입니다. 그가 웃었다 해도 그 웃음은 순수한 웃음이 아니요, 만민에게 필요한 웃음이 아닙니다. 그것은 자기를 내세우기 위해 웃는 웃음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자기가 문제라는 것입니다.

이런 점에서 나 자신을 중심삼고 우주주관을 바라기 전에 자아주관을 완성하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다른 데 있는 것이 아닙니다. 자기에게 있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예수님이 말하기를 ‘천국은 네 마음에 있다’고 한 것입니다. 현재 입장을 자극시켜 가지고 미래의 입장을 변혁시킬 수 있는 그런 요인이 필요합니다. 그런데 그 바탕은 어디까지나 순수해야 됩니다.

기도할 때 선령과 악령은 어떻게 가리느냐 하면 자기의 마음이 수직으로 비추는 빛을 반사하는 순수한 반사경처럼 되어야 합니다. 자기 마음이 그래야 된다는 것입니다. 선악이 가려야 할 입장일 때는 절대 자기의 욕망을 먼저 생각하여서는 안 됩니다. 아무것도 없는 영의 자리에 들어가야 됩니다. 순수한 자리에 들어가 가지고 ‘나는 참에서 태어났고, 참에서 살고, 참으로 움직이는 것이다’ 하는 경지에 들어가야 합니다. 그런 경지에 들어가게 되면 선악을 대번에 알게 되는 것입니다. 설명이 필요없다는 거예요.

악과 선의 바탕은 언제나 서로 반발하는 요소로 되어 있다는 것입니다. 악은 자기 자체에서 또 다른 자체를 세우려 하기 때문에 선은 여기에 반발하는 것입니다. 악은 파탄시키는 작용을 하기 때문에 순수한 마음을 갖게 되면 자기에게 악이 침범해 들어온다는 것을 대번에 아는 것입니다. 기분으로도 알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오늘날 우리가 심령상의 전진을 가져오기 위해서는 보다 순수한 마음을 갖추어야 됩니다. 제일 기준이 되는 그 경계선은 순수한 바탕입니다. 순수하다는 것은 순수한 자기를 중심삼고 시대를 넘어서 누구나 좋아할 수 있는 공적인 것입니다. 어린애와 같은 자리가 순수한 자리입니다. ‘누구든지 어린애와 같지 않으면 천국에 들어가지 못한다’는 말이 거기에서 생겨난 것입니다. 그것을 여러분은 흠모하고 그리워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사람은 배고플 때 먹을 것을 그리워합니다. 선생님은 옛날 감옥에 있을 때 그런 경험을 많이 해봤습니다. 육신이 배고플 때는 얼마나 먹고 싶은 마음이 간절한 지 모릅니다. 그럴 때 먹을 것을 바라는 그 간절한 마음보다도 하나님을 더 간절히 그리워할 수 있는 마음을 어떻게 발견하느냐, 그것이 문제입니다. 아무리 어렵고, 서럽고, 억울하고 배고픈 자리에 있더라도 자신을 발견하지 못하면 자기 완성이란 있을 수 없는 것입니다.

그러면 어렵고 서럽고 억울하고 배고픈 것들을 바탕으로 해 가지고 그 이상의 것을 어떻게 느낄 수 있느냐? 서럽고 어려운 일을 아무리 무시해도 그것은 나한테서 떠나지 않는 것입니다. 더 높은 곳을 위하는 마음을 보충시켜 가지고 그 마음으로 서글픈 자리를 전부 채우고 남아 기쁨을 느끼는 자리에 서야만 기쁨이 영주하는 것입니다. 그러지 않고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기도할 때 슬픔으로 시작해서 슬픔으로 끝나서는 안 됩니다. 슬픔으로 시작해서 무한한 기쁨으로 끝나는 자리, 즉 전진하는 자리가 되어야 합니다. 또, 기쁨으로 시작했으면 자기 자신을 중심삼고 기뻐할 것이 아니라 더 큰 나를 중심삼고 그렇게 되지 못한 것에 대해 슬픔을 느끼는 자리가 되어야 합니다. 그러한 자리는 새로운 열의를 갖고 출발해 나오는 자리입니다. 무슨 말인지 알겠습니까? 지금 자기를 중심삼고 기쁨으로 출발했다 하더라도 그 자리는 더 큰 문제를 중심삼고 본다면 말할 수 없이 슬픈 자리가 된다는 것입니다. 그런 자리에서 그 슬픔을 붙안고 나오는 데는 상상도 못할 열의에 충천되는 새로운 출발의 동기를 안고 나와야 합니다. 그러므로 그런 자리는 하나님과 더불어 짝을 이루는 자리가 아니면 안 됩니다.

36-114
기도로써 커지는 열의
인간은 제한된 존재입니다. 여러분의 인격은 제한되어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그 무한한 작용의 영역에 어떻게 들어가서 접선하느냐 하는 문제를 놓고 볼 때 고착된 의식 관념을 가지고는 자아주관이 불가능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불교를 믿는 사람들은 참선을 통하여 무의 경지로 들어가려고 하는 것입니다. 그러기에 사람이 무엇이냐 하는 것을 생각하기 전에 마음이 무엇이냐 하는 것을 먼저 자각해야 합니다.

내가 무엇이냐 하는 것보다도 마음이 무엇이냐 하는 것이 더 큰문제입니다. ‘나’라고 하면 몸과 마음이 합해 있는 것입니다. 그러면 그런 ‘나’ 가운데서 몸을 떼어버린 마음은 무엇이냐? 그러나 그것이 무엇이다 하는 인식이 나로 말미암아 의식된 것이라면 완전한 것이 아닙니다. 무아경인 순수한 자리에서 ‘내가 이렇다’라고 인식된 것이어야 완전한 것입니다. 그런 초자아적인 경지에 들어가야 하는 것입니다.

그런 경지에 갈 수 있는 사람은 예언을 할 수 있는 것이요, 미래를 투시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런 사람은 타락한 자리에 갖다 놓아도 스스로 뛰쳐나와 생명을 주관해 가지고 기쁨의 자리에 생명을 이을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한 무한히 진전할 수 있는 인격관이 있는 것을 여러분이 알아야 되겠습니다.

그 바탕은 순수한 것입니다. 여러분이 그곳에 도달하기 위해서는 열의가 있어야 합니다. 그 열의는 지금까지의 그런 열의가 아니라 새로운 열의의 내용이어야 합니다. 그러므로 여러분은 그걸 길러야 되겠습니다. 그것은 무엇으로 말미암아 길러지느냐? 기도로써 길러지는 것입니다. 알겠어요?

내가 어제 저녁 수택리에 가서 이요한 목사가 하는 말을 들었는데, 이요한 목사가 하는 말이 오전에 강의할 때는 은혜가 있는데 오후에 강의할 때는 은혜가 없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정성을 덜 들였느냐 하면, 오전과 마찬가지의 정성을 들였다는 것입니다. 그는 오전과 오후의 입장이 다르다는 것을 몰랐던 것입니다. 은사의 계열이 다르다는 것을 몰랐다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오후에는 ‘하나님, 오전과 다른 어떤 은사를 주십시오?’ 라고 기도를 했어야 했습니다. 많은 기도를 안 해도 하나님께서 무엇을 주실 것인가를 사모하고 그리워하며 강의를 했다면 그 자리는 은사의 분위기로 화했을 것입니다. 이렇게 되는 것입니다. 그것은 여러분이 심령생활에서 많이 체험을 해야 됩니다.

설교를 할 때도 제목을 정해 가지고 나와서 설교해서는 은혜가 없는 것입니다. 그렇게 해서는 생명을 새롭게 변혁시킬 수 있는 설교가 안 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그 한계권내의 하나님으로밖에 활동할 수 없는 입장이 된다는 것입니다. 그렇지 않아요?

그것은 자기 계획대로 했기 때문입니다. 설교를 할 때는 어디까지나 순수한 안테나와 같은 입장에서 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늘에서 땡하고 치면 같은 소리를 내는 공명체가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음차를 보면 땡 하고 치는 것이 있으면 그 치는 것에 자극되어 윙 하는 소리가 나는데, 그것과 같아야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설교하는 사람은 순수한 안테나처럼 되어야 합니다. 설교자가 사심없이 단에 나설 때, 그 자리에서부터 하나님은 임재해 오는 것입니다. 여러분이 공적인 지도자 생활을 하게 되면 이것을 많이 느끼게 될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 자리에서는 얼마나 심각해야 되고, 얼마나 공적이어야 되고, 얼마나 순수해야 되느냐 하는 것이 문제가 됩니다. 그 자리는 그야말로 초조한 자리입니다. 그런 자리에서 하나님과 연결되면서부터 새로운 인간의 재창조가 벌어진다는 것을 부정할 수 없습니다. 그런 자리에서 자신의 입을 통하여 나오는 말은 영원히 잊을 수 없는 음성으로 들리는 것이며, 자신이 은혜를 받는 것입니다. 그런 경지가 필요하다는 것을 기도생활을 조금이라도 한 사람들은 아는 것입니다.

36-116
하나님을 모시는 자리에 들어가려면
여기 원생금씨 왔어요? 원생금씨가 엊그제 수택리에 가서 수련생들에게 강의를 했다고 합니다. 무뚝뚝하기가 이를 데 없고 말의 조리가 없더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사람들이 볼 때 말이 안 되는 것 같아도 거기에는 사랑이 있더라는 거예요. 그러므로 기도 많이 하는 사람은 다르다는 것입니다. 거기에는 자기만이 있지 않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꼬리가 들어 있다는 것입니다. 그 꼬리가 휘젓기 시작하면 심령이 커질 수도 있고 작아질 수도 있다는 것입니다. 여러분에게도 그것이 필요합니다. 그것이 없어 가지고는 발전하지 못하는 것입니다.

그런 경지에서 신념을 다하여 열심히 기도를 하면 기도하고 나서 자기가 어떤 내용으로 기도했는지 모릅니다. 그렇다면 그 기도는 자기가 한 기도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나’를 통해서 기도를 하신 것입니다. 하나님이 내 입장에 들어와서 했지만 그 기도는 아무개가 땅에서 했기 때문에 땅 위에 은사권이 시작되는 것입니다.

본래 사람은 하나님의 몸입니다. 복귀역사는 하나님의 몸을 복귀하는 역사이기 때문에 하나님이 임재하셔 가지고 복귀되는 것이 원칙이라는 것입니다. 여러분들이 기도생활을 하면서 자기도 모르게 어떤 사람을 놓고 ‘그놈의 자식’ 이렇게 욕이 나올 때가 있습니다. 또 ‘그놈의 자식 안되겠는데’ 라고 욕이 나올 때는 욕의 대상이 되는 사람에게 벼락이 떨어지는 것입니다. 그 사람은 오래 못 간다는 것입니다.

그것은 누가 한 것입니까? 자기가 한 것입니까? 그것은 자기 의식을 초월해서 한 것입니다. 그렇게 욕하는 것은 하늘이 예고해 해주고, 통고해 주는 것입니다. 마이크 장치와 마찬가지로 내가 관계되어 있으니 나를 통해서 알려 주는 것입니다. 방언도 마찬가지 이치로 벌어지는 것입니다. 방언이 그냥 나오는 것이 아닙니다.

그런 자리에 가려면 나 자신이 직선이 되어 있어야 합니다. 진동폭이 순수해야 합니다. 여기에 오나 저기에 가나 90도 각도로 수직이어야 됩니다. 순수하면 자연히 수직이 되는 것입니다.

양심을 바르다고 합니까, 찌그러졌다고 합니까? 순수함은 기구(氣球)와 마찬가지라는 것입니다. 가스를 가득 채운 기구의 줄은 똑바로 되지 말라고 해도 똑바로 되는 것입니다. 자연히 곧아지는 것입니다. 기구의 줄은 구불구불할 수가 없습니다.

수직이 된 거기에는 반드시 무한한 음파, 영적인 파장이 조성되어 가지고 영파를 일으킵니다. 그 영파를 인간이 오관으로 느끼는 것, 그것이 영감(靈感)입니다. 그런 경지에 들어가는 것이 필요합니다. 그러한 자극을 끊임없이 받는 데서만이 진전이 벌어지는 것입니다.

그런데 통일교회 자체가 그런 자극을 어떻게 보급받느냐? 이것이 문제입니다. 그러한 열의를 어떻게 불러일으키느냐 하는 것입니다. 열의를 불러일으키기 위해서는 자신을 자아의 인생관보다 우주관에 접선시켜 놓아야 합니다. 그러면 자동적으로 되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목적의식에 철두철미하라는 것입니다. 일상생활에 철두철미한 사상을 불어 넣어 주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가는 길만 알게 되면 거기에는 반드시 열의가 차 들어오는 것입니다. 가고 싶다, 해야 되겠다, 하고 싶다 하는 마음이 자기 생활을 넘어서 움직이는 것이요, 자기 자체를 넘어서 움직여야 하는 것입니다. 이처럼 자동적인 활동으로 벌어져야만 하늘에 공적인 실적으로 남아지는 것입니다. 명령에 따라 할 수 없이 끌려가는 사람은 아무리 해봤자 하나님과 관계 없다는 것입니다.

이제 여러분들 중에는 전도를 나갈 사람이 있을 것입니다. 그런 점에서 볼 때, 언제나 공적이고 순수한 입장에서 ‘나는 세계를 위하고 아버지를 위하여 이 생명을 다 바치겠다’며 나가는 사람에게는 발전이 있을 것입니다. 하늘은 그들을 밀어줍니다. 자기라는 것이 없기 때문에 발전이 벌어지는 것입니다.

오늘날 원리를 많이 알고, 통일교회 교인으로서 틀이 박힌 사람이 전도를 나가서 아무리 얘기를 해도, 사람들은 그 얘기를 흘러가는 말로밖에 안 들을 것입니다. 아무리 해봐야 사람들의 마음에 움직임이 없는 것입니다. 그러나 순수한 소년 소녀들이 자기를 망각한 자리에서 눈물을 흘리면서 하나님의 뜻을 중심삼고 전도를 하면 부흥이 벌어지고, 발전이 벌어진다는 것입니다. 대학을 나온 사람들을 전도 보내면 갔다가 그냥 돌아오는 일이 많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기도가 필요한 것입니다.

36-118
하늘의 신경작용
남을 위해서 주고 남을 위해서 희생하게 되면 그 공적의 터전이 높아진다는 것입니다. 보이지 않지만 안테나가 높아진다는 것입니다. 그렇게 되면 그 안테나권내에서 벌어지는 그 음파는 다 잡히게 되는 것입니다. 그 환경의 상대적인 세계는 그 자장권내에서 전부다 놀아난다는 것입니다. 그 자장권내에 있는 전체가 은혜를 받는다는 것입니다. 이런 내용을 갖추어야 합니다. 이러한 내용을 갖추지 않고는 전진이 있을 수 없습니다. 오히려 후퇴하는 것입니다.

통일교회 교인들이 맨 처음 통일교회에 들어왔을 때는 누구나 한바탕 좋아했던 때가 있었습니다. ‘왠지 모르게 교회에 오고 싶어서 죽겠다. 교회 가고 싶어 죽겠다’ 고 하는 것입니다. 어떤 때는 교회 문을 닫아버려도 문을 타고 넘어 오는 사람이 많았습니다. 교회 구석에서라도 하룻밤 자는 것이 소원이었다는 것입니다. 이들을 쫓아내면 엉엉 울며 쫓겨나가 가지고 대문을 닫아 놓으면 죽어도 못 가겠다고 하며 대문을 타고 넘어 오는 것입니다. 대문을 타고 넘어오는 사람들은 만약 도둑놈인 줄 알고 때려서 죽였다면 그 사람은 분명히 천당으로 직행할 것입니다.(웃음) 그런 때가 있었다는 것입니다.

또 교회에서 밥을 먹으면 밥이 왜 그렇게 맛있는지 모르겠다는 것입니다. 도깨비가 붙은 것도 아니고 다른 밥과 똑같은 밥인데 별미라는 것입니다. 시금털털한 김치 깍두기도 입체적인 맛이 난다는 것입니다.(웃음) 교회에 와서 밥을 먹으면 맛있다는 것은 왜 그렇겠습니까? 사랑하는 부모가 정성들여 지은 밥이 맛있다고 하는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거기에는 그리움이 넘쳐서 상대적 존재까지도 거기에 결실될 수 있는 자체로 있기 때문에 나쁜 것도 좋은 것으로 느끼게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것이 나하고 관계를 맺어 상대적인 가치로 등장하기 때문에, 좋은 것으로 나타나고 맛없는 것도 맛있는 것으로 나타난다는 것입니다.

그것은 다 신경작용입니다. 그렇지요? 맛이라는 것은 신경작용에 의해서 알게 됩니다. 그런데 하늘의 신경작용은 초자연적인 작용입니다. 전체를 합해 가지고 주관하는 입장에 있기 때문에, 거기에는 나쁜 것이 없다는 것입니다. 여러분들이 은혜에 취해 보세요. 세상이 왕궁으로 보인다는 겁니다. 시궁창 안에 들어가 있어도 그 자리가 왕궁으로 느껴지는 것입니다. 구더기들이 노는 것을 봐도 그것이 세계의 일등 무희들이 춤추는 것같이 보인다는 것입니다. 정말 그렇게 보인다는 거예요.

그것은 오늘날 인간 자체의 감정 가지고는 그렇게 느낄 수 없지만, 초자연적인 감정의 주체성을 가졌기에 그렇게 느껴지는 것입니다. 그래서 거기서 보이는 것은 모두 희열의 대상으로 보이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영계에는 나쁜 것이 없다는 결론이 나오는 것입니다.

그런데 ‘교회에 가봐야 그저 그렇지, 오늘은 또 누가 설교를 하겠구나’ 하면서 집에 있고 싶다고 한다면 국가 복귀가 되겠습니까? 될 수 있어요? 그 사람이 해야 할 일은 한 나라를 찾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아담 해와에게 하늘땅을 주관하고, 나라 이상의 것을 주관하라고 축복해 주었지만, 그들은 축복의 자리에 나가지 못했습니다. 그와 마찬가지로 한나라를 찾아야 할 사명이 있는 여러분들이 주일에 교회를 안 가고 안방에 앉아서 나라를 구할 수 있습니까? ‘교회 가고 싶지 않으니 차라리 집에 있는 것이 낫다’ 이러는 사람은 망합니다. 이런 사람들은 구할 도리가 없는 것입니다.

그러나 ‘집에서 자는 것보다 교회 가는 것이 낫다’ 이렇게 생각하고 교회에 와서 친구를 만나면 자극을 받게 되는 것입니다. 사람들은 자극을 필요로 합니다. 설교를 통해서 책망을 받고 분함을 느끼기도 해야 합니다. ‘저 설교는 나 때문에 하는구나’라는 자극을 받아야 합니다. 이렇게 자극을 받아 분해 죽겠다고 그러다가도 깨달을 수 있는 것입니다. 교회에 오면 간접적인 자극이 아닌 직접적인 자극을 받는다는 것입니다. 그러니 집에 있는 것보다 교회에 가는 것이 낫다는 것입니다.

36-120
하늘 뜻을 따르는 맛
공부하고 싶어서 학교 가는 학생이 어디 있겠습니까? 전부다 처음에는 할수없어서 다니는 것입니다. 더우기나 국민학교 학생들은 엄마 아빠 무서워서 할수없이 다니는 것이지, 공부하고 싶어서 다니는 애들이 있습니까? 맨 처음에는 다 그렇다는 것입니다. 할 수 없이 다니다가 보면 나중에는 그 맛을 알아 가지고 배우기 위해서 다닌다는 것입니다. 그렇게 되면 엄마 아빠가 놀라게 되는 것입니다. 그 맛을 느낌으로 말미암아 그런 자극적인 내용이 거기에 있다는 것을 알게 될 때는 공부하는 데에 재미를 붙이게 되는 것입니다. 그 재미라는 한 자체를 두고 볼 때는 나쁜 것입니다. 그렇지만 상대적으로 공부해 보니 내가 마음대로 할 수 있는 범위가 넓어지기 때문에, 거기에 맛을 들여 가지고 공부하는 것입니다. 공부하는 것 자체를 좋아하는 사람은 한 명도 없습니다. 잠자기 좋아하는 사람은 있어도 처음부터 공부하기 좋아하는 사람은 없다는 것입니다. 공부함으로써 자기가 활동할 수 있는 범위가 넓어지기 때문에 좋아하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통일교회 믿는 것이 재미있습니까? 아무 재미도 없을 것입니다. 싫은 것이 원칙입니다. 싫은 것이 원칙이지만 믿어 보면 점점 달라진다는 것입니다. 옛날의 친구들이 자그마하게 보인다는 것입니다. 옛날에 자신이 꼴등할 때 일등하던 그 친구를 만나 보면, 옛날에는 하늘같이 느껴졌는데 이제는 통일교회 사상을 알고 얘기해 보니 높게만 느껴졌던 친구가 저만치 뒤져 있더라는 것입니다. 이런 맛이 있기 때문에 통일교회를 믿는다는 것입니다.

그뿐만 아니라 조금 더 들어가서 하나님께 ‘여보!’ 하면 ‘그래 그래’ 라고 대답을 듣는 듯한 기분이 된다는 것입니다. 세계의 대통령이라 하더라도 우리 손아귀에서 놀아날 수밖에 없다는 것을 알게 되면 기분이 좋아서 믿는 것입니다. 선생님 자신도 그렇습니다. 지금까지 핍박받는 것이 좋아서 이 일을 한 것이 아닙니다. 욕먹는 것이 좋아서 이 일을 한 것이 아닙니다.싫지만 싫은 맛보다도 더 좋은 맛이 있기 때문에 이 일을 해온 것입니다.

영계에 한번 행차하게 되면 어느 누구도 부럽지 않은 그런 맛이 있기 때문에 이 일을 하는 것입니다. 이 뜻의 맛을 알고 이 세계를 몽둥이로 치면 산산조각이 나고, 왕창왕창 깨지는 실감이 나기 때문에 이 일을 하는 것입니다. 사람이 항상 기분 나쁜 걸 참을 수 있습니까? 여러분들은 선생님은 본래 몸이 철같이 태어났기 때문에, 건강하기 때문에 그렇게 한다고 생각할지 모르지만, 천만에요. 싫은 일을 어떻게 합니까? 일년이나 이년만 해보라는 것입니다. 죽고 말 것입니다.(웃음) 그렇게 하더라도 그것이 좋기 때문에 견뎌 내는 것이지, 피곤하고 못 살겠다 할 것 같으면 견뎌 낼 것 같아요? 이것을 다하고 나면 멋진 그 무엇이 있기 때문에 이 일을 할 수 있는 것입니다.

장사를 해서 손해를 보면 끝장이 나지만 이익을 남기면 끝장나지 않습니다. 마찬가지로 선생님도 십년, 이십년, 일생을 두고 계속 이 일을 하면서 손해 안 보고 이익을 보았기 때문에 끝장이 안 난 것입니다. 그래서 지금까지 이 일을 하고 있다는 거예요. 그렇지 않아요? 모든 것이 다 장삿속이라는 겁니다, 장삿속.(웃음) 장사를 할 때 원금이 천원이면 천원을 자기 것이라고 투자하지 않는 사람은 그 천원으로 말미암아 죽고 사는 것입니다. 무슨 말인지 알겠어요? 장사하려는 사람은 그 천원을 투자해야 되는 것입니다. 그래야 그것이 더 많은 이익을 남겨 가지고 돌아올 수 있는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여러분 자체에도 장삿속이 있는 만큼, 현재 그대로에 만족하여 투자를 하지 않는 사람은 망한다는 것입니다. 장사가 안 됩니다. 자기가 가지고 있는 원금은 투자해야 이익이 남는 것입니다. 현재의 나 자체보다도 미래에 이익되는 나 자체가 틀림없다 할 때는 투기사가 되어 생명까지 집어 던지고 해보는 겁니다.

눈이 쌓인 산 꼭대기에서 솔방울 하나를 굴리게 되면 눈이 뭉치고 뭉쳐져서 큰 바위처럼 되어 집도 무너뜨리는 일이 벌어진다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여러분도 이 솔방울처럼 계속 구르게 되면 남의 것이 내 것이 되고, 내 것이 남의 것이 될 수 있는 동기가 되어 전체가 나로 말미암아 있다는 그런 생각을 가지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 자체를 보게 된다면 다 장삿속이라는 것입니다. 손해나면서 이런 일을 할 사람이 있겠어요? 선생님을 보세요, 그렇게 생겼는가 보라는 거예요?

여러분도 상당히 피곤한 때가 있을 것입니다. 낮이고 밤이고 돌아다니다 보면 피곤에 취할 때가 있습니다. 피곤에 취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술을 마셔보지 않은 사람이 술에 취한 맛을 모르듯이 피곤에 취한 그 맛이라는 것은 피곤해 보지 않은 사람은 모릅니다. 뜻을 위해서 살아온 생애노정에서 피곤함을 느낄 때는 그 취한 가운데서 하나님이 얼마나 가까운 가를 느끼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 취하는 자리가 있든 거예요, 그런 자리가 있기 때문에 이 일을 하는 것입니다.

36-122
회생의 길
통일교회에 들어왔던 사람이 통일교회 안 나오게 된다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사람은 징역을 살고 있는 죄수라도 감방에만 있는 것보다 외출생활을 해야 하는 것입니다. 무슨 말인지 알겠어요? 성공할 사람은 집에 붙어 있지 않습니다. 외부 출입이 잦습니다. 물론 외부 출입이 잦아서 욕을 먹기도 하고, 혹은 몽둥이 들고 따라와 가지고 파탄시키는 사람도 있긴 하지만, 자기 집에 자기보다 나은 사람들이 드나들게 되면 그 사람은 성공한 사람입니다. 그러니 통일교회를 다니다 교회를 안 나오고도 사는 길은 무엇이냐? 교회와 보조를 맞추는 것입니다. 교회가 하지 못하는 것을 자기가 집을 중심삼아 가지고 하는 사람은 교회가 망하더라도 그 사람은 망하지 않는 것입니다. 이것이 사는 길입니다.

그러나 그것도 안 하고 자기 집에 틀어박혀 있는 사람은 이미 망한 사람입니다. 그런 사람은 있던 것도 까먹는다는 거예요. 만원어치 은혜를 받았는데 그것을 꼭 쥐고서 ‘이것 가지고 먹고 살아야지’ 하면 되겠어요? ‘아이구, 백원어치라도 없어지면 안 되는데’ 하면 안 된다는 거예요. 마음이 자꾸 그러면 안 된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가진 것마저 빼앗긴다는 것입니다. 장사 밑천까지 까먹는다는 거예요.

그렇게 일년쯤 지나고 보면 밑천이 떨어지게 됩니다. 그때에 식구를 찾아가도 옛날에 반겨 주던 그런 맛이 없다는 것입니다. 당연히 맛이 없게 되어 있습니다. 옛날에는 좋아하던 사람이었는데 그 사람의 모습을 한번 훑어보고는 산송장이 왔다고 하니 기분이 나쁘다는 것입니다. 그러니 자기가 변한 줄은 모르고 통일교회 교인들은 변덕도 많다고 하는 것입니다.옛날에는 좋아하더니 이제 와서는 문전박대한다고 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자기 반성하라는 예고인 줄 모르고 토라져 가지고 통일교회 사람만 나쁘다고 자꾸 깎아 내리다가는 모가지도 잘리고, 사지도 잘리고, 자기 몸뚱이만 남아 가지고 천당간다고 한다는 것입니다. 가긴 어딜 가겠습니까? 뒤죽박죽 살다가 망해 버리는 겁니다. 그런 사람들이 많습니다.

그것은 정지 아니면 후퇴입니다. 그런데 정지가 오래되면 쓸 수 있는 물건이 없습니다. 후퇴되는 것이 기정 사실입니다. 그러니 전진이 필요합니다. 사람이 사는 길은 의욕이 있어야 합니다. 열의가 있어 가지고 자극을 시켜야 됩니다. 정지된 입장에 있어서는 안 되겠기 때문에 선생님이 몽둥이로 후려쳐서라도 전진시키려는 폭탄 작전을 지금 하는 것입니다. 이렇게 하니 그 자리에서 더 이상 붙어 있을 수가 없기 때문에 그 자리를 떨쳐버리고 할 수 없이 보따리 싸 가지고 이리저리 돌아다니며 억울함도 당하고, 천대도 받는 것입니다. 그때는 ‘내가 잘못했구나. 옛날의 그 좋던 은혜를 놓쳐 버렸구나’ 하며 거기서 비로소 잃어버린 그 자리를 다시 찾으려고 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때서부터 다시 회생의 길을 찾아 나간다는 것입니다.

회생의 길은 서럽고 외롭게 탄식하는 지경에서부터 시작하는 것입니다. ‘아이구 아버지, 제가 이제 죽게 되었습니다. 힘도 없습니다. 아무것도 없습니다’ 이렇게 지극히 서러워하며 회개하면 살 수 있는 것입니다. 눈물 콧물 흘리며 입은 옷이 다 벗겨지더라도 ‘아이고 나 죽소’ 하고 매달리면 살 길이 생긴다는 것입니다.

‘저 사람은 미쳤다. 낮도깨비다’ 하는 소문이 날 정도로 분주하게 돌아다니며 전도하면 살 수 있는 것입니다. 이집 저집 분주스럽게 돌아다녀 보라는 것입니다. 은혜가 떨어지면 은혜를 높이는 데 기도보다 더 좋고 빠른 방법이 있습니다. 두 집을 왔다 갔다 하던 것을 은혜가 떨어졌다면 네 집을 왔다 갔다 해보라는 것입니다. 네 집을 다니며 전도해 보라는 거예요. 떨어진 은혜가 다시 올라갈 것입니다. 그 방법이 기도보다 더 낫다는 것입니다.

또 네 집 다니던 사람은 여덟 집을 돌아다녀 보라는 것입니다. 다리가 아프고, 욕을 먹고, 매를 맞았더라도 그것은 자기를 위한 것이 아니고 남을 위해서 했기 때문에 할 말이 있다는 것입니다. 그때 기도하게 되면 ‘옛날에는 자기만을 위해 살더니, 이제는 남을 위해서 매를 맞았으니 나아졌구만’ 하는 생각이 들 것입니다. (웃음) 결국은 그것이 다 자기를 위한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모든 사람에게 그런 자극이 필요한 것입니다.

그래서 이번에는 36가정, 72가정을 내보내려고 합니다. 이 가정들이 자리잡아 가지고 어제도, 오늘도 그냥 무의미하게 보내는 것같아 이번에 내보내기로 했습니다. 내가 한번 이들이 어떻게 사는지 구경가려고 합니다. 3위기대가 오는 것도 좋아하지 않는 사람이 있다고 합니다. 여자 셋만 모여도 싸움이 벌어지는데, 여자들 열이 모여 싸움이 벌어지게 되면 모두 망하는 것입니다. (웃음) 이번에 36가정, 72가정은 모두 보따리 싸 가지고 나가야 하는 것입니다.

36-124
주도적인 역할을 하는 사람
새로운 문화는 이동하는 데서 발전하게 되어 있습니다. 새로운 혁명은 현재 입장을 파탄시키면서부터 시작되는 것이 아니겠어요? 이것은 언제나 그렇습니다. 선생님도 보통 생각하기에 엉뚱하다고 하는 일을 할 때가 있습니다. 그래야 힘이 보충되는 것입니다. 그것은 나를 위한 것이 아니라 하늘땅을 위하는 것입니다. 여러분들도 그래야만 합니다. 누구나 순수한 입장에서 공적인 목적을 바라면서 나아가야 하는 것입니다. 그렇게 되면 힘이 나는 것이요, 힘이 보충되는 것입니다. 그렇게 되면 천하가 뒤집어 지더라도 한번 휙 잡아채면 나가떨어진다는 것입니다. 그러한 힘과 그러한 작용이 우리 배후에 있다는 것입니다. 그런 사람들은 매일 매일이 다르게 보입니다. 기분이 다르다는 것입니다. 사람의 마음이 그렇다는 거예요.

그러한 것은 현재의 여러분 자체의 입장에서는 안 되겠으니 여러분은 고착되고 정지된 입장을 타파할 수 있는 일을 해야 됩니다. 후퇴는 하지 말아야 됩니다. 그러니 그런 일을 하기 위해서는 별다른 행동을 계속해야 되겠습니다. 순수한 입장을 찾기 위해서 기도를 한 후에 행동을 하게 되면 여러분에게는 열의가 그칠 수 없다는 것입니다.

오늘 아침에도 예배가 시작될 때에는 몇 사람 안 왔더니 시간이 좀 지난 후에야 많이 왔습니다. 이왕에 오려면 일찍 오지, 왜 늦게 오느냐는 것입니다. 그것은 조금만 부지런하면 되는 것입니다. 늦을 것 같으면 그 시간만큼 일찍 자면 되잖아요. 그것도 생각하지 못해요? 일찍 온 만큼의 시간은 하나님을 위해 바친 시간이기 때문에 천금 만금을 주고도 살 수 없는 가치가 있는 것입니다. 그 시간만큼은 하나님께 바치는 시간이기 때문에, 그 시간에 늦게 나온다는 것은 하나님을 도둑질 하는 것이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제시간에 나와야 하는 것입니다. 그럼으로 말미암아 그만큼 못 잔 것을 탕감할 수 있고 하나님 앞에 면목도 세울 수 있는 것입니다. 그렇게 되면 어제보다도 나은 마음을 가져 가지고 하늘 앞에 가까이 갈 수 있지만, 늦게 오게 되면 기도할 때도 눈을 끔벅끔벅거리면서 선생님이 무슨 말씀 하실까 하고 앉아 있다는 것입니다. 그렇게 앉아 있는 모습을 보면 처량하기 짝이 없어 보입니다.

주도적인 역할을 하는 사람은 차분하고 얌전한 사람이 아니라 열의에 찬 사람입니다. 그런 사람이 주도자가 되는 것입니다. 이건 틀림없다는 것을 여러분은 알아야 합니다. 현재에 정지되어 있는 사람은 망하는 것입니다. 정지된다는 것은 ‘망운(亡運)’이 나하고 결혼한다는 것입니다. 무슨 말인지 알겠습니까?

전진하느냐 정지되느냐 하는 문제를 두고 볼 때, 전진하고 있다 하는 자신이 없는 사람은 정지되어 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망도깨비와 결혼했다는 것입니다. 자신이 정지해 있는 사이에 일년, 이년, 세월을 보내는 동안 뜻은 개인적인 섭리시대에서 가정적인 섭리시대, 종족적인 섭리시대, 민족적인 섭리시대로 자꾸 올라갑니다. 그렇게 되면 따라갈 수 있어요?그리고는 하는 말이 ‘통일교회 들어온 지는 제일 오래 되었는데 나의 가치를 몰라 준다’고 하는 것입니다. 가치는 무슨 가치입니까, 속이 훤히 들여다보이는 말입니다. 썩은 냄새만 난다는 거예요. 그런 사람은 내버려도 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도 그런 사람을 필요로 하지 않습니다.

선생님은 지금도 나 자신을 통일교회 선생님으로 생각하지 않습니다. 통일교회를 새로 찾은 식구와 같은 감정을 가지고 매일같이 싸우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지금도 발전하고 있는 것입니다. 알겠어요? 여러분이 정지하게 되면 무엇과 결혼하는 거라구요? 「망도깨비하고 결혼하는 것입니다」 그 사람이 갈 곳이 어디겠어요? 천당이겠습니까, 지옥이겠습니까? 안 가려고 해도 자꾸 지옥으로 끌려갈 것입니다.

36-126
활동하는 사람이 전진하는 사람
그러면 통일교회에 들어오기 전보다 후퇴했느냐 전진했느냐 할 때 여기 아주머니들은 어떻습니까? 「전진했다고 생각해야지요」 그 말은 어쩔 수 없어 하는 말이고 (웃음) 전진했어요, 후퇴했어요? 「전진했습니다」 (웃음) 여러분, 나무로 말하면 살아 있는 나무는 자꾸 크는 것입니다. 다른 나무는 다 크는데 크지 않는 나무가 있다면 그 나무는 죽어 가고 있는 것입니다. 죽어 간다는 것은 시간이 지나게 되면 죽는다는 말입니다. 그러므로 문제는 우리가 이동하는 운명권내에서 싸우고 있다는 것을 알아야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누구를 탓하며 교회에 안 나오는 시시한 사람들도 있습니다. 유효원 협회장이 영계에 갔지만, 유효원 협회장 눈을 보면 소 눈 같아서 보기 싫어 못 나오겠다는 둥 별의별 소리를 다 들었습니다. 보기 싫은 사람들이 버티고 앉아서 뭐가 어떻고 뭐가 어떻고 하는 것이 보기 싫어 교회에 잘 안 나오는 사람들이 있다는 것입니다. 통일교회 문선생님 보기 싫어서 안 나오겠다는 사람은 없지만, 까닭없는 유효원 협회장을 걸고서 보기 싫어서 못 나오겠다고 하는 것입니다. 그런 사람들 핑계는 좋습니다. 자기 잘못은 모르고 다른 사람에게 핑계만 대는 것입니다.

살인강도도 형무소에 들어가면 ‘내가 왜 살인강도야. 나는 새사회를 계획하고, 내 나름대로 세계를 만들기 위해서 하다 보니 그렇게 된 것인데 이해 부족이라구. 나라가 작기 때문에 그렇게 된 것이지 내가 왜 죄인이야’ 그러면서 당당하게 헌법 뜯어고칠 생각을 하고 있다면 어떻겠습니까? (웃음) 마찬가지로 통일교회에서 나간 사람들이 통일교회를 뜯어고칠 생각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런 사람들은 ‘내가 생각한 대로 이렇게 교회를 고치면 교회 나가지’ 하지만 천만의 말씀입니다. 자기만큼 생각 못해서 이 일을 하는 줄 알아요?

이제 통일교회에서 전도하려 나간다 하는데, 나간다 하는 것은 후퇴예요. 전진이예요? ‘전도 나간다’ 하는 것은 앞으로 나간다는 말입니다. ‘나간다’ 하는 것은 발전한다는 것을 말하는 것이요, 전진한다는 것을 말하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전도 나가지 않고는 발전도 없고, 전진도 없는 것입니다. 전도 나가서 일하는 사람을 흉보며 앉아 있는 사람은 망합니다. 그렇게 흉보다가는 비렁뱅이가 되어 손을 벌리게 될 것입니다. 그런가 안 그런가 두고 보라는 것입니다.

예전에 이북 사람들이 서울에 와서 벽돌담을 쌓아 놓고 살고, 물장사를 해서 살았습니다. 이들을 보고 서울 사람들이 ‘아이고 오랑캐 사촌, 함경도 평안도 갈 밭고랑에서 닭이나 잡아먹던 패들’ 이라고 흉을 보았습니다. 평안도 여자들이 말하는 것을 보면 정줄 데가 하나도 없다고들 했습니다. 여자가 몸빼를 입고 다니면서 고기 장사를 안 하나, 머리에 이고 다니는 장사를 안 하나, 아뭏든 그들을 보면서 서울 사람들은 저 사람들은 벌받아도 싸다고 말했습니다. 심지어는 ‘저런 사람들이나 그런 일을 하지, 우리같은 양반집 아주머니가 그런 일을 할 수 있나. 밥을 얻으러 오면 동냥이나 주지’라고 말할 정도였습니다. 그러나 6·25동란이 일어나 후퇴하고 보니 결국 그들은 앞선 사람이 되는 것이었습니다. 평안도나 함경도 이북 사람들이 전진한 사람들이었다는 것입니다. 다같이 후퇴는 후퇴인데 후퇴하고 나서 같은 입장에서 보니 그들은 전진해 있었고 서울 사람들은 떨어져 있는 것을 발견했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때에는 별 수 있겠어요? 그 사람들을 찾아가서 장사를 어떻게 하느냐고 하며 배웠던 것입니다. 그러니 그들이 욕을 하고 주먹질을 해도 참고 따라갔다는 것입니다.이처럼 보따리가 바뀌어지는 운세가 벌어졌던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활동하는 사람은 전진하는 것이요, 활동하지 않고 가만히 정지해 있는 사람은 후퇴한다는 것입니다. 활동하는 사람은 흥하고 정지되어 있는 사람은 망한다는 거예요.

이런 원칙을 볼 때 통일교회 문선생님이 식구들에게 ‘영원히 영원히 그곳에 정지해 가지고 콧노래만 부르면서 살지어다’ 한다면 좋겠어요? 그 콧노래가 무슨 노래인지 알아요? 망조가 들 노래라는 것입니다. 그러니 발길로 차서라도 활동을 시키려고 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통일교회의 지도 방법입니다. 알겠어요? 할머니들도 활동을 시켜야 되겠습니다. 70, 80세가 되는 노인들도 전도 활동을 해야 되겠다는 것입니다.

입회원서를 받을 때는 방 안에서만 받지 말라는 것입니다. 입회원서를 받기 위해서는 산꼭대기에라도 가라는 것입니다. 이웃의 이 집 저 집을 다니면서 받으라는 것입니다. 그렇게 할머니들이 다니면 그들이 미안해서라도 입회원서를 써 주고 교회에 나오게 된다는 것입니다. 자연히 그렇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집안에만 가만히 있어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선생님이 이번 12월부터 전도 내보내려 하는 것이 잘 하는 거예요, 못하는 거예요? 개인적으로 볼 때는 못 하는 것이라 생각할 수도 있을 것입니다. 장마로 인한 홍수로 곱게 기른 한송이 꽃이 꺾어질 수도 있습니다. 그렇지만 홍수로 말미암아 메마른 땅에 물이 채워져 그것에 의해 농사짓는 방법을 개혁할 수도 있는 것입니다. 내가 이번에 여러분의 부인들을 전부다 빼앗아 오려고 합니다. 빼앗아 오기는 무슨…. 내가 얻어 주었으니 빌려 오는 것입니다.

이것이 발전하기 위해서 그러는 것이겠습니까, 후퇴하기 위해서 그러는 것이겠습니까? 「발전하기 위해서입니다」 그렇게 해 가지고 발전할 수 있을 것 같습니까? 「예」 그럴 수 있다면 가야 됩니다. 그러면 그게 선생님에게만 좋고 여러분들에게는 안 좋은 것입니까? 「아닙니다」 그러면 여러분도 좋고, 선생님도 좋고, 신랑들에게도 좋은 것입니다. 자식들에게도 좋다는 것입니다. 이렇게 누이 좋고 매부 좋고, 다 좋기 때문에 사정 보지 않고 내모는 것입니다.

36-129
왜 전도를 해야 하는가
만약에 여러분의 할머니가 배가 고파 허기증이 나서 길을 못 가고 앉아 있다면 어떻게 하겠어요? 할머니를 모시고 가야지요? 그럼 모시고 가는데는 어떻게 모시고 가느냐? 길잡이가 되어 가지고 모시고 가야 됩니다. 그런데도 못 걸어가시면 업고서라도 가야 합니다. 이것이 효도라는 것입니다. 거기에는 예법이 없다는 것입니다. 고개를 넘어가는 데 있어서 업고서라도 그 고개를 넘게 되면, ‘고맙다’ 이렇게 얘기하지, ‘이놈의 자식아 할머니를 업고 가는 법이 어디 있어?’ 할 사람은 없습니다. 그래 가지고 고개만 넘어 가면 다 좋아지는 것입니다. 그것이 싫다면 차라리 죽는 것이 낫습니다.

여러분들은 정지해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여러분이 자동적인 자극과 자발적인 열의를 갖지 못하고 있으니, 피동적인 자극과 피동적인 열의라도 갖게 하기 위하여 선생님이 때려 모는 것입니다. 내몰아 가지고 민족이 따라오지 않을 수 없게 될 때, 이 민족은 날로 발전할 것입니다. 한나라의 주권자가 선두에 나와 가지고 자극을 받지 못하면 그 민족은 부끄러운 내일을 맞는 겁니다. 주권자가 새로운 활동 체제를 거국적으로 전개시키면 그 나라는 부흥이 벌어지는 것입니다.

만약 새로운 활동 체제를 반대하는 주권자가 나와 망하게 되면 사람들은 혼자 망하려고 안 합니다. 주권자를 깔고 망하려고 합니다. 마찬가지로 통일교회가 망하게 된다면 자기 혼자 망하려고 안 할 것입니다. 선생님을 깔고 망하려고 할 것입니다. ‘통일교회를 몰랐으면 안 그랬을 텐데 통일교회를 알았기 때문에 이렇게 됐다. 통일교회 문선생이 안 나왔으면 내가 이렇게 안 되는데, 통일교회 문선생이 나와서 내가 이렇게 됐다’고 하면서 선생님을 깔고 망하려고 할 것입니다. 선생님은 그런 입장에 서고 싶지 않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선생님은 여러분을 내모는 것입니다.

그러니 여러분은 전도하러 나가겠어요, 안 나가겠어요? 「나가겠습니다」 여러분은 지금 할 수 없으니까 ‘나가지요’ 하고 있습니다. 지금은 할 수 없어서, 마지못해서 나가겠다고 하지만 그 길을 가고 나서는 ‘아이고, 내가 살 길이 이 길이구나. 이 길이 좋은 길이구나’고 할 것입니다. 그러니 피동적인 결과를 통하고, 간접적인 자극을 주어서라도 현재의 입장에서 벗어나 이동시켜 놓는 것이 여러분을 살려주는 방법입니다.

나가서 그렇게 하다가 죽은 사람들은 후회를 안 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것마저 못해본 사람들은 죽을 때 ‘한번 해볼껄’하고 후회한다는 것입니다. 그래도 하다가 죽으면 ‘하다 죽으니 할 수 없지’ 할 수 있습니다. 그러면 갈 곳을 갈 수 있습니다. 그러나 ‘한번 해볼껄’ 하다가 죽어서 후회하는 사람은 갈 곳을 가지 못하여 유리(流離)하는 영이 되고 마는 것입니다.

그러니 통일교회 문선생님이 필요합니까, 필요하지 않습니까? 여러분이 다 되어 있다면 선생님이 필요없습니다. 그렇게 되어 가지고 선생님은 안방에서 할아버지 노릇하면서 살고 싶은데, 팔자가 사나운지, 여러분들을 잘못 만났는지, 그렇게 살지 못하고 있습니다. 신하가 잘못하게 된다면 임금이 어질 수 있습니까? 따르는 사람이 잘해야 되는 것입니다. 선생님이 가만히 있다가는 망하겠으니 여러분들을 몽둥이로 때려서라도 일을 하게 하려는 것입니다. 여러분들 찬성합니까? 찬성이요, 찬성 아니요? 「찬성입니다」

나는 지금까지 감옥살이 등 별의별 경험을 다했습니다. 그것들을 지금 지내고 보니 하나님께 감사한다는 것입니다. 결국은 나 하나를 키우기 위해서 하나님이 그렇게 수고하셨다는 것입니다. 지금까지 거친 그 과정들은 절대로 나한테 마이너스되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얻은 것이 많았습니다. 배가 고플 때의 밥 한알이 얼마나 귀한지 지금도 정신이 번쩍듭니다. 밥 한알이 그렇게까지 온 신경을 자극할 수 있다는 것을 느끼고 그것에 대한 무한한 가치를 느낄 수 있었습니다. 배가 고파 그 밥을 그리워하면서도 그것을 잊으려고 애쓰면서 하나님을 더 그리워하고자 눈물을 지었습니다. 또 불쌍한 사람들을 보면 남이 모르는 가운데 눈물지으며 그들을 위해 기도했습니다. 이러한 마음에는 하나님이 같이하시는 것입니다. 선생님은 지금도 그때가 그립습니다.

선생님은 평범한 것을 좋아하지 않습니다. 사람에게는 자극이 필요합니다. 자극을 보급받기 위해서는 어떠한 충격적인 방향성을 갖추어 가지고 자기가 움직여 나갈 수 있는 열의가 있어야 합니다. 그래서 친구들도 칭찬해 주는 친구보다 책망도 하고 미래의 나에 대한 새로운 목적관을 제시해 주는 친구를 좋아했습니다. 그저 놀자고 하고 맛있다고 먹자꾸나 하는 친구는 좋아하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의논을 하다가 얼굴을 붉히며 싸워서라도 문제를 해결하는 놀음을 좋아했지, 얌전하게 앉아 있는 것을 좋아하지 않았습니다.

36-131
열의는 상대적 관계가 조성되어야 생긴다
사람은 자극이 없으면 발전을 못 합니다. 사람에게는 자극이 필요한 것입니다. 현재 입장에서 자극을 못 받는 사람은 발전하지 못하는 것입니다. 자극을 받으려면 새로운 열의가 있어야 하는데, 그 열의는 혼자 있으면 안 생겨납니다. 상대적 관계가 되어 있지 않으면 안 생겨나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그걸 반드시 알아야 합니다. 주체와 대상의 관계를 갖지 않고는 열의를 가질 수 없는 것입니다. 처녀 총각이 서로 사랑을 속삭이게 될 때는 열의를 갖지 말라고 해도 열의를 갖게 되는 것입니다. 애착심을 갖지 말라고 해도 애착심을 갖는다는 거예요. 그것은 왜 그러냐? 상대적인 관계, 즉 ‘그와 나는 하나이며, 그와 나는 뗄 수 없는 필연적인 운명이다’라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마찬가지로 여러분도 ‘이것은 필연적인 운명이며 천적인 운명이다’ 하는 입장을 갖추지 않고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이것을 알아야 합니다.

우리는 뜻을 위해 전진해야지 후퇴나 정지는 할 수 없습니다. 전진을 위한 일시적인 정지는 있을 수 있고 정비하기 위한 정지는 있을 수 있으되, 정지하기 위한 정지는 있을 수 없는 것입니다. 우리는 전진해야 되겠습니다. 통일교회는 전진해야 되겠다는 것입니다.

가만히 생각해 보면 금년은 참 복잡한 해였습니다. 금년 들어서 통일교회는 상당히 발전했습니다. 그럼 12월이 되니 이제 그만 둘 것이냐? 아닙니다. 또 전진해야 합니다. 지금 기성교회가 통일교회 때문에 죽겠다고 야단하고 있습니다. NCC(기독교협의회)를 중심삼고 통일교회 때문에 야단났다고 빠득빠득하고 있습니다. 그렇다고 그들에게 후퇴하라는 거냐? 아닙니다. 통일교회 때문에 기성교회가 모두 자극을 받아 가지고 전진하라는 것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선생님은 하나님과 기성교회 앞에 공헌하고 있다는 것을 자부하고 있습니다.

또 종교협의회가 이단 통일교회를 가입시켰기 때문에 사회 문제가 벌어졌다고 그러지만, 기성교회는 나와 통일교회에게 자극받았기 때문에 옛날의 종교보다도 새로운 종교로 전진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경제적인 소모는 있었지만 좋은 일을 하고 있다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아무리 떠들어 보라는 것입니다. 귀한 손님이 올 때는 개가 더 짖는 것입니다. (웃음) 그러기에 기성교회가 떠들어댄다고 정지할 것이 아니라 더욱 더 전진해야 합니다.

이번 26일부터 아카데미하우스에서 열리는 원리공청회에 서울에 있는 기성교회의 이름있는 목사 이백여 명에게 통일교회 협회장 이름으로 초청장을 보냈습니다. 그 사람들은 통일교회라고만 해도 나가자빠질 텐데, 통일교회 협회장 김아무개의 이름으로 보냈으니 나가자빠지지나 않을는지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사람은 만나보게 되면 너나 나나 마찬가지입니다.

요전에 어느 대학의 학장을 만났는데, 그 사람이 말하기를 통일교회 문선생님을 만날 생각을 해 보니 착잡한 생각이 앞서서 마음을 진정할 수가 없더라는 것입니다. 선생님에 대해서 모르는 사람은 충분히 그럴 수 있습니다. 그러나 선생님은 그런 사람을 만나면 평범해집니다. 농담도 잘하고, 말을 할 때도 앞뒤를 가려 가지고 합니다. 그러니 그 사람이 소문으로 듣던 것과는 다르다는 겁니다. 만나고 나서는 들리는 말과는 전혀 다른 맛이 난다는 것입니다. 그러니 하루에 몇 번이라고 전화로 불러서 만나고 싶다는 것입니다. 십년지기처럼 가깝게 느껴져 앞으로 사냥하러 가게 되면 같이 가자고 부탁까지 하는 것입니다. 다 그런 것입니다. 사람은 다 마찬가지라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별나게 굴지 말자는 것입니다. 평범한 데에서 특수한 것이 생기는 것이지 특수한 데에서 평범한 것이 나오는 것이 아닙니다. 그러므로 안전한 작전이 평범한 작전입니다. 자기 스스로 잘났다고 꼭대기에 버티고 서 있는 사람은 오래 못 가는 것입니다. 잘났지만 평범한 사람이 오래가는 것입니다. 그렇지요? 더우기나 난시(亂時)나 전시(戰時)에 있어서는 어디서나 환영받는 사람이 그 나라를 수습할 수 있습니다. 알겠어요? 한편에 치우쳐 가지고는 안 되는 것입니다. 여기에서도 좋아하고 저기에서도 좋아할 수 있는, 그러면서 더 좋은 것을 모색할 수 있어야만 새로운 일을 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번에 기성교인들 모아 가지고 원리공청회를 하는 것입니다. 앞으로는 이화여대 대강당을 빌려 가지고 집회를 하려고 합니다. 그렇게 할 수 있으면 좋겠지요? 그럴 수 있는 방법이 있습니다. 그것은 지금 이화여대를 원조해 주고 있는 미국의 감리교 재단의 총회장을 불러다가 통일교회 부흥회를 시키면 되는 것입니다. 못 할 것 같지만 나는 그것을 생각하고 있습니다. 할 것입니다. 하는 것은 정해진 이치인데 시간적 차이는 남아 있는 겁니다.(웃음) 그 마음은 변치 않아요. 십년이 지나고 이십년이 지나도 그 마음은 변치 않을 것입니다.

36-133
간접적인 자극이라도 받아야
나는 대한민국의 신세를 지면서 살지 않습니다. 이것이 나의 철학입니다. 내가 대한민국에서 신세를 지우고 산다는 것입니다. 신세를 지우는 통일교회가 되었으면 되었지, 대한민국의 신세를 지고 살지는 않는다는 것입니다. 요전에 문공부에서 예산편성을 해 가지고 통일교회에 배정해 주었습니다. 고맙기는 고맙지만 받고 싶어서 받은 것이 아닙니다. 그들이 주고 싶어서 주는 것을, 그 성의를 안 받으면 벌받을까 봐 받았다는 것입니다. (웃음)

선생님 사고방식이 그렇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내가 도움받았다고는 꿈에도 생각하지 않습니다. 저번에 경기도를 중심삼아 가지고 수련회를 할때도 경찰국에서는 예산이 부족하다고 하며 싫어하더라는 것입니다. 진짜 나라를 사랑한다면 돈이 문제가 아닙니다. 돈이 없으면 내가 돈을 돌려줄 수도 있습니다. 간접적으로나마 자극을 주면 그 사회는 그냥 안 있는 것입니다. 형제 중에 공부를 못 하는 사람이 있으면 독려해 주고 자극을 주어야 됩니다. 형제들이 새벽에 일어나 가지고 공부를 속닥속닥 재미있게 하게 되면 공부 못하는 녀석도 후다닥 일어나 가지고 새로운 결심을 하고 공부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여러분도 이젠 간접적인 자극을 한꺼번에 보급받을 수 있게끔 몸둥이로 쳐서라도 현재의 입장에서 이탈시켜야 되겠습니다. 현재의 환경을 바꾸는 것이 여러분은 훈계하는 방법입니다. 그것이 이치에 맞습니까, 안 맞습니까?(맞습니다) 여기 아주머니들 맞아요, 안 맞아요? 이치에 안 맞는다고 생각되면 죽으라는 겁니다. 전부 다 산송장이라는 거예요. 휘발유를 붓고 불에 타 죽으라는 거예요.

우리는 전진해야 되겠습니다. 정지해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전진하기 위해서는 여러분 자체에 열의가 있어야 하고 자극을 받아야 합니다. 그것이 없게 될 때는 간접적인 열의와 자극이라도 필요한 것입니다. 그렇게 해서라도 가야 되겠습니다.

그러므로 여러분은 순수한 입장에서 기도를 많이 해야 됩니다. 어떠한 부락에 전도하려고 하면 새벽에 일어나 그 부락을 바라보면서 그 부락이 죽어가는 어린애와 같고 누이동생과 같고 자기 아들딸과 같이 느껴져야 합니다. 그리하여 밤새도록 그 부락을 붙들고 통곡할 수 있는 마음을 가지고 전도해 보라는 것입니다. 그렇게 했는데도 전도가 안 되면 선생님이 책임을 지겠습니다. 선생님이 과거에 이 길을 나올 때 그렇게 했습니다. 청소년 시절에 서울을 바라보며 많은 눈물을 흘린 사람입니다. 지금은 내가 한국을 위해서 기도할 때가 아닙니다. 한국을 위해서 기도 안 한다는 겁니다. 이제는 한국에 대해서는 책임을 다 했습니다. 한국에 대해서 염려를 안 해도 내가 바라던 기준, 하나님이 바라던 기준을 기필코 넘어갈 것을 알기에 다른 나라를 위해 기도하는 것입니다.

이번에 일본식구가 왔는데 그들을 보면 ‘너희들 일본식구지? 왜정 때 우리들을 고문하던 사람의 후손이 왔구만, 복수해야지’라고 생각하는 사람도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이런 생각은 꿈에서도 하지 말아야 합니다. 원수를 사랑해야 하기 때문에 한국에 있는 통일교회 교인보다 이들을 더 사랑해야 된다는 것입니다. 선은 자기를 희생시켜 가지고 남을 위하는 것입니다. 한국을 희생시켜서 다른 나라를 위하는 것은 국가적인 선이 성립되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나라를 위하여 통일교회를 희생시키는 것은 당연한 이치입니다.

36-135
교회활동은 간접적인 자극을 받기 위한 것
여러분, 선생님이 휴양이나 하고 유람이나 하면 좋겠습니까? 아니면 뜻을 위하여 여러분의 꽁무니를 따라 다니며 때려몰면서 못살게 굴면 좋겠습니까? 어떻게 하면 좋겠습니까? 선생님 생각 같아서는 전부다 꽁무니에 줄을 달아가지고 휘발유를 뿌려서 불붙이면 좋겠습니다. 또한 몇 만년 코를 꿰어 가지고 끌고 다니면 좋겠습니다. 그것이 벌받을 짓이요, 좋은 일이요? 그것은 나를 위해서 그러는 것이 아닙니다. 뜻을 위해, 결국 여러분을 위해 전진하자는 뜻에서 그러는 겁니다. 여러분들은 뻔히 알면서도 움직이지 않는 것입니다. 안 그래요? 알 만한 사람들이 머뭇거리고 있습니다. 그래서 통일교회는 껄렁껄렁하고 시시한 사람들이 아예 나오지 말라는 것입니다. 귀찮습니다. 와 가지고 자리나 채우고 냄새나 피우는 것이 싫다는 것입니다.

이번에는 부인들을 전부다 전도 내보내고 남자들은 동원하지 않으려고 생각했습니다. 그랬더니 남자들은 안 나간다고 배만 내밀고 있는 걸 보니 기분이 영 나쁩니다. 그러나 두고 보라는 겁니다. 아주머니들이 전부 다 전도 나가고 나면 울어 대는 애기도 봐야 하고, 엄마가 해야 할 뒷치닥거리를 전부 다 남자들이 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 다음부터는 ‘야! 우리 마나님이 이런 힘들 일을 하는 줄 몰랐구나’하며 그때서야 부인이 훌륭하다는 것을 느낄 것입니다. 울어 대는 애기를 한번 달래 보라는 것입니다. 기가 막히고 환장한다는 것입니다.(웃음) 남자들은 참지 못하는 것입니다. 그렇다고 ‘나는 모르겠다’고 할 수 있어요? 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그러니 사돈의 팔촌 아주머니라도 전도해서 모셔 들이게 될 것입니다. 틀림없이 모셔 들인다는 것입니다. 걱정 안 해도 그리 된다는 것입니다.(웃음) 40일 이내에 이 일이 완전히 해결된다는 것입니다.

선생님이 일년 미만 된 아기가 있는 가정에는 매달 천 오백원씩 대준다고 말했지만, 그거 안 대줘도 괜찮은 것입니다. 내가 미안하니까 대준다고 그랬지만, 한 달쯤 줘 봐 가지고 안 대줘도 괜찮을 것 같으면 그 다음부터는 안 대줄 것입니다. 그 돈으로 전도하러 나간 엄마들을 도와주면 더 좋을 것이 아니겠습니까? 아들딸이야 어떻게 해서라도 먹고 살 수 있는데, 돈을 대주면 버릇만 나빠지고, 공돈 생긴다고 자기가 해야 할 일은 안 하고 공상만 하게 됩니다.

40일만 지나고 나면 전부 다 깨끗이 정비될 것입니다. 애기를 자기의 모친에게 데려다 주든지, 외가집에 데려다 주든지, 사돈의 팔촌 아주머니한테 데려다 주든지 해서라도 다 해결한다는 것입니다. 걱정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걱정이 되면 아들딸과 함께 얻어먹으라는 겁니다. 돈벌이를 못하겠으면 동네를 돌아다니며 얻어먹으라는 것입니다. 그렇게 하기 싫으면 자기의 할 일을 하라는 겁니다. 다 하게 되어 있습니다. 40일 이내에 다 해결되는 것입니다.

해결하고 난 다음에 남자들을 동원하면 어떻게 하겠습니까? 부인들도 했는데 동원 안 할 수 있습니까. 그렇게 되면 여자가 전진함과 더불어 남자도 전진하는 것입니다. 여자는 서부로 가게 하고, 남자는 동부로 가게 해서 여자와 남자중 누가 이기나 한 번 싸움을 붙여 보자는 것입니다. 여기에서 둘이 안 지겠다고 서로 싸움하게 되면, 이것은 망하는 싸움입니까, 흥하는 싸움입니까? 전쟁은 전쟁인데 망하자는 거예요, 흥하자는 거예요? 「흥하자는 것입니다」 알기는 아누만. 이렇게 해서 서로가 자극받게 되면 자신들에게도 좋은 것입니다.

남자들은 선생님이 그런 작전하는 것을 기분 나쁘게 생각할 지 모르지만, 지금 우리에게는 열의와 자극이 필요하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직접적 자극을 못 받으면 간접적 자극이라도 보충받지 않고는 발전하지 못한다고 누차 말했습니다. 직접적 자극은 기도하는 방법이요, 간접적 자극은 돌아다니면서 식구들과 같이 은혜의 말씀을 듣고, 또 들은 것을 베풀어 주고 실천하는 것입니다. 이렇게 하는 데에서 자극을 받고 발전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틀림없는 사실입니다. 그것은 여러분이 오랜 신앙 생활에서도 체험했을 것입니다. 그런 관점에서 여러분 자체의 발전을 위해서 자주적인 입장을 보강할 수 있기 바랍니다.

36-137
기 도
아버님, 당신의 높고 귀하신 은덕에 진실로 감사를 드립니다.

저희들이 가야 할 최후의 종착역이 오늘의 이 자리가 아닌 것을 저희들은 아옵니다. 저희들이 나아갈 길은 개체의 완성을 표방하고 가정의 완성을 바라고, 가정 완성을 표방하여 종족의 완성을 바라고, 종족 완성을 표방하여 민족의 완성을 바라고, 나아가 완성될 국가와 세계를 바라고 나아가는 것입니다. 이렇게 바라고 나아가는 저희들의 행로에 당신이 함께 하여 주실 것을 바라옵고 원하옵니다.

개인 완성을 하더라도 가정을 위한 십자가를 지지 못하면 정지 아니면 후퇴만이 있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개인적인 승리의 터전을 쌓아 가정의 십자가를 짊어지고 가정을 위한 메시아적 사명을 감당하고자 하는 사람에게는 아버지께서 무한한 사랑과 끊임없는 열의로써 자극시켜 줄 것이지만, 그렇지 못할 때는 정지의 길 위에 서서 자기 스스로의 모습을 자탄하는 입장에 떨어지고 만다는 이 엄연한 천륜의 공식을 저희들은 느끼게 되옵니다. 하오니 오늘의 자기 자신을 잘 알아 가지고 내일의 소망에 머무를 수 있는 자아의 보람있는 그 노정 앞에 어떠한 어려운 환경이 가로놓여 있을지라도 헤치고 나갈 수 있는 열의에 찬 사나이들이 되고 아낙네들이 되게 하여 주시옵소서.

오늘날 통일교회의 많지 않은 무리들을 규합하여 민족복귀와 국가복귀라는 엄청난 과제를 걸어 놓고 모든 정성과 지성을 다하고, 내적인 결의와 외적인 자극을 통하여 가야 할 길을 정진해 나가야 한다는 것을 알았사옵니다. 이제 12월 초하루를 중심삼고 저희들이 동원하고자 하오니, 이러하나 모든 계획이 전진도상에 있어서 절대적으로 필요한 요인이 되고 터전이 되게 하여 주시옵기를 간절히 바라옵고 원하옵니다.

아버님, 저희들은 정지하거나 후퇴해서는 안 되겠습니다. 후퇴하면 사망이 깃드는 것이기에, 우리에게는 후퇴와 정지와는 인연이 없고, 오직 전진과 인연이 있게 허락하여 주시옵소서. 전진의 인연만이 있는 곳을 찾아 나서게 하여 주시옵기를 간절히 바라옵고 원하옵니다. 또한 거기에서 보람을 느끼고 자극을 느끼면서 내일의 소망의 중심이 되기를 다짐하는 저희들이 되게 하여 주시옵기를 간절히 바라옵고 원하옵니다.

오늘은 안식일이오니 남한 각지에 널려 있는 당신의 자녀들을 기억하여 주시옵시고, 부디 후덕하신 은덕으로 그들을 품어 주시옵소서. 그리하여 당신이 소원하시던 본연의 동산에 서서 승리의 월계관을 상속받을 수 있게 하여 주시옵고, 그리하여 당신이 사랑하고 칭찬하기에 부족함이 없는 당신의 아들딸들이 되게 하여 주시옵기를 간절히 부탁드리옵니다.

다가오는 국운과 아시아의 운세 전체를 당신이 가려서 지켜 주시옵소서. 통일의 역군들이 가야 할 행보 앞에 전체의 운세가 상충하는 입장에 있어서는 안 될 것이오니, 당신이 전후좌우를 옹호하시어서 저희의 갈 길을 지켜 주시옵소서. 그리하여 아시아에 있어서 해방의 기치를 드높이 들고 만민 앞에 세운 등대의 그 빛을 높이어, 만민이 하나로 수습되는 소망의 그 세계가 빨리 오게 하여 주시옵소서. 그러기 위해서는 저희가 희생해야 되겠으며, 온갖 지성을 다하고 충성을 다하여 저희가 가야 하는 노정을 달려가야 되겠사오니, 이러한 아들딸들이 되게 하여 주시옵기를 간절히 부탁드리옵니다.

전체가 당신의 사랑에 인연 맺게 하여 주옵기를 부탁드리면서 모든 말씀 참부모님 이름으로 간절히 아뢰었사옵나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