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6-314 to 36-340: 뜻을 품은 예수

뜻을 품은 예수
1970.12.20 (일), 한국 전본부교회

36-314
뜻을 품은 예수
[기 도]

아버지, 저희들은 고난과 역경 속에 지금 가고 있는 수고의 행로와 앞으로 다가올 시련과 핍박의 행로를 극복하고 가야 할 자신들인 것을 생각하면 할수록 아버님과 인연을 맺을 수 없는 자신이 되는 것처럼 불쌍한 것이 없다는 것을 느껴야 되겠사옵니다.

부모는 사랑하는 자식을 바라보며 자식의 소원이 그의 일생을 통하여 이루어지기를 바라옵니다. 이것이 변함없는 부모의 사랑이라는 것을 저희들은 아옵니다. 하오나 그와 같은 부모의 사랑 가운데서 자라고 있는 자식들은 부모가 소망의 마음을 가지고 자기들을 위하여 생활을 염려해 주신다는 것을 잘 모르고 있듯이, 저희들도 아버지께서 무관심했던 자신인 것을 느끼게 되옵니다.

저희 생애노정은 물론이요 미래의 생애노정까지, 더 나아가 저희뿐만 아니라 후손에게까지 세계를 통할 수 있는 인연을 중심삼고 크고 높으신 당시의 소원이 같이하고 있음을 알고 사는 사람이 있다 할진대, 과거에서부터 수고의 행로를 개척해 나오신 아버지요, 현재의 고심 가운데서 승리의 한 기점을 모색하고 계시는 아버지요, 다가오는 시간 시간에서 미래의 승리의 기점을 찾고 계시는 아버지인 것을 알고, 마음을 다하여서 그 아버님의 심정과 일치화시키고자 하는 사람이 있다 할진대, 저희들은 무심했사오나 아버님은 무심할 수 없었다는 것을 알게 되옵니다.

외로운 가운데 내일의 희망이 절벽에 부딪쳐 하루하루를 고난 속에서 살더라도, 그 배후에 잊을 수 없고 버릴 수 없는 사연과 미래의 소원을 붙들고 걸어오시는 한스러운 아버님이 계시다는 것을 아는 사람이 있다 할진대는, 그 사람은 당신이 기뻐하실 수 있는 결과를 가져올 것이요, 그렇지 못한 사람은 당신 앞에 슬픈 결과를 가져 온다는 것을 저희들이 알게 하여 주시옵소서.

아버지, 이 아침 여기에 참석한 자녀들을 긍휼히 보시옵소서. 저희들은 아버지께서 부르신 뜻 앞에 어떤 입장에 처해 있는 모습인가 하는 것을 알아야만 되겠사옵니다. 아버지, 이 자리에 모인 소수의 무리들, 이들은 각자가 처해 있는 위치도 다르고, 앞으로 거쳐 나가야 할 인연도 다르다는 것을 저희들이 알고 있사옵니다. 내가 남보다 못한 자리에 있다고 하여 낙심할 바도 아니요, 현재 남보다 좋은 자리에 있다고 해서 자랑할 바도 아니라는 것을 저희들은 알아야만 되겠사옵니다.

역사는 상호 좌우로 순환하면서 발전한다는 사실을 생각할 때, 오늘의 기쁨은 영원한 기쁨이 될 수 없고, 오늘의 슬픔 또한 영원한 슬픔으로 고착되지 않는다는 것을 느껴야 하겠사옵니다. 그러므로 저희들은 생애노정에 있어서 아버님의 슬픔과 염려와 더불어 동행하는 사람이 되어야 되겠사옵니다. 그런 사람이 있다 할진대, 그는 결코 불행한 사람이 아닐 것이옵니다. 그 사람의 마음 가운데는 언제나 아버님께서 같이하시는 것이요, 그 사람의 생활을 언제나 아버님께서 붙들고 계시다는 것을 알고 사는 저희들이 되어야만 되겠사옵니다.

아버지, 이 아침 여기에 모인 당신의 자녀들을 굽어살피시옵소서. 당신이 부르고 싶은 마음대로 부르시옵소서. 당신께서 소망의 마음으로 사랑하는 내 아들아, 내 딸아 부를 수 있는 자녀들이 있다 할진대는 이 자리는 결코 외로운 자리가 아니옵니다. 이 자리는 황무지와 같은, 음산한 사탄의 골짜기가 되지 않는다는 것을 저희들은 알고 있사옵니다. 여기에는 새로운 희망이 깃들 것이요, 아버지의 은혜가 맺혀질 것을 아옵니다. 이와 같은 입장에 처해 있는 한 식구와 친분을 갖고 있는 사람들도 그로 말미암아 당신과 인연을 맺을 수 있다는 놀라운 사실을 저희들은 알아야만 되겠사옵니다.

아버지, 저희들은 이 아침에 적나라한 저희 자신의 모습을 다시 한 번 발견해야 되겠습니다. 과연 아버지가 나를 사랑했느냐 안 했느냐, 오늘 이 시간에도 아버지께서는 나를 사랑하고 있느냐 하는 것을 느껴야 되겠습니다. 그리고, 과연 미래의 내 행복을 위하여 아버지께서 가호의 손길로 같이하고 있는가, 오늘보다도 더 큰 은사의 손길로 같이할 것인가, 내일의 소망의 터전을 중심삼고 아버지께서 나를 크게 고대하고 계시는가 하는 것을 생각해야 하겠습니다. 비록 오늘과 나 자신이 부족할지라도 낙심하지 않고 내일의 소망의 가치를 그리면서 희망에 벅찬 하루의 생활을 더듬어 나가는 당신의 아들딸이 되게 하여 주시옵소서. 그러한 아들딸이 있다 할진대 그에게는 남이 알지 못하는 전진이 있을 것이요, 그는 오늘 갖지 못하는 인연을 가질 것이옵니다. 또한 그는 내일의 창건자로서 아버님과 더불어 동행할 수 있는 거룩한 자녀가 될 것이옵니다.

아버지, 이 자리에 부복한 저희들을 긍휼히 보시옵소서. 마음속 깊은 곳에서 솟구치는 마음이 당신의 방향과 일치되게 하시어서 개인은 물론이요, 나라와 세계와 뜻이 지향하는 목적지와 일치되게 하시옵소서. 그런 자리에서 당신을 모셔야 되겠사옵니다. 생활을 수습하기 위해 책임을 진 자리가 아무리 어렵다 하더라도 원망하지 말아야 되겠습니다.

아버지, 저희 각자를 친히 지켜 주시옵소서. 저희들은 알지 못하였지만 저희들의 배후에는 지금까지 지켜 주신 아버지의 사랑이 있었다는 것을 알아야만 되겠습니다. 또한 저희가 지금까지 살아온 것도 아버지께서 지으신 만물의 혜택권내에서 신세를 졌기 때문인 것을 알아야 되겠습니다. 부모의 보살핌 밑에서 나라의 국민으로서 살아온 자기 자신을 다시 한 번 돌아보고 앞으로 자기가 가야 할 행로에서 뜻과 더불어 결과적인 인연을 찾아 나갈 수 있는 당신의 아들딸들이 되게 축복하여 주시옵기를, 아버님, 간절히 바라옵고 원하옵니다.

오늘은 1970년 12월 20일, 이달 들어 세번째 맞는 안식일이옵니다. 이해도 다 기울어 가고 있사옵니다. 남은 열흘 동안에 저희들은 새로이 반성해야 되겠고, 앞으로 남아진 날들을 저희들이 지켜야만 되겠사옵니다. 1970년도는 남들은 알지 못하지만 당신의 뜻을 중심삼고는 지극히 귀한 해였습니다. 하오니 저희들은 그 누구도 상상할 수 없는 내적 인연이 이해에 연결되어 있다는 사실을 알아야 되겠습니다.

저희들은 정초에 ‘승리적 통일전선’이라는 엄청난 과제를 걸어 놓고 지금까지 지내왔습니다. 저희들은 먼저 내 몸과 마음이 하나될 것을 바라고 나왔습니다. 예수님이 ‘사람이 만일 온 천하를 얻고도 제 목숨을 잃으면 무엇이 유익하리요’ 하고 말씀하신 것처럼, 무엇에도 비할 수 없는 가치를 지닌 생명은, 사탄세계를 통하여 빚어진 것이 아니라, 당신이 수고한 복귀의 터전 앞에 불리워진 아들딸의 가치를 두고, 무한한 영광 가운데에서 자랑하기에 부족함이 없는 이러한 아들딸의 가치를 두고 말하는 것임을 아옵니다.

저희들은 그러한 가치를 지닌 모습을 그리워하면서 이 자리까지 나왔사오니, 아버지여, 각자 불러서 일으켜 주시옵소서. 이 아침을 다시 한번 마음 깊이 새로이 약속하는 계기로 삼게 해 주시옵소서.

저희들은 과거를 반성하고 현재를 직시하면서 미래의 개척자로서의 소명을 받기에 부족함이 없는 아들딸이 되겠다고 아버지께 새로이 다짐하는 이 시간이 되어야만 되겠습니다. 세월은 덧없이 흘러가나 그 흘러가는 세월 가운데에 남아지는 천륜의 가치와, 무한하신 아버지의 사랑과 더불어 인연맺을 수 있는 인격을 추구해야 된다는 것을 알고 있사오니, 저희들의 모든 것을 아버지 앞에 바쳐 드리는 이 시간이 되게 허락하여 주시옵기를, 사랑하는 아버님, 간절히 부탁드리고 원하옵니다.

당신께서는 지금까지 사랑으로 저희들을 지도해 나오셨사옵기에, 저희들은 무한히 후덕하신 당신의 사랑권내에 있는 이 자리가 귀한 것을 알아야 되겠습니다. 또한 이 자리에 있는 저희들의 마음 가운데에 아버지께서 바라시는 소망의 한계점이 있다는 것을 알아야 되겠습니다.

저희들은 어떤 자리에 처해 있더라도 그 한계점을 중심삼아 오늘의 생활과 내일의 생애를 준비하고, 또한 그 자리가 어떤 자리인가를 직시하면서 스스로 분별하고 스스로 개척하여 나가는 참다운 아들의 모습, 딸의 모습을 갖추어서 아버지 앞에 바쳐질 수 있는 생축의 제물들이 되어야만 되겠습니다.

아버지, 1970년 12월 20일, 이날은 뜻을 중심삼고 전국에 널려 있는 당신의 딸들이 새로운 개척지를 향하여 출발하는 날이옵니다. 하오니 저희들은 남이 모르는 가운데 뜻을 염려하고 아버지와 깊은 사연을 나눌 수 있어야 하겠습니다. 이 아침, 남들은 어떠한 자리에 있다 하여도 나는 당신이 명령하시는 곳을 향하여 가겠다고 스스로 마음과 몸을 준비하는 사람이 있거든 친히 같이하여 주시옵기를 간절히 바라옵고 원하옵니다.

당신은 언제나 외로운 자리에서 개척자의 실적을 거두어 오신 것을 알고 있사옵니다. 남 모르는 가운데 눈물 흘리며 아버님을 염려하는 마음을 갖고, 그 생활을 스스로 책임지며, 죄없는 모습들이 죄 있는 자들을 대신하여 아버지를 위해 정성들이며 나가는 그 길 앞에는 당신이 소원하는 천국이 그들과 같이하는 것을 알고 있사오니, 그럴 수 있는 자리에서 뜻을 위하겠다고 다짐하는 당신의 아들딸이 있거든, 친히 같이하여 주시옵기를 간절히 바라옵고 원하옵니다.

후덕하신 당신의 사랑이 이 자리에 임하여서 당신께서 소원하시는 그 세계를 이루어 찬양할 수 있는 하늘 나라의 충신 충녀들이 될 수 있게 하여 주시옵기를 간절히 부탁드리고 원하옵니다.

더우기 당신의 사랑하는 딸들이 가정을 비우고, 자녀들을 떼어 놓고 일선에서 뜻을 품고 싸우고 있사오니, 그들 위에 친히 같이하여 주시옵기를 간절히 바라옵고 원하옵니다.

지금까지 자기 자신이 어떤 자리에서 아버님을 모셔왔는지 스스로를 완전히 알 수 있는 때가 왔습니다. 남편을 사랑하듯이, 자녀를 사랑하듯이 아버님을 사랑하였는가를 스스로 저울질해 볼 수 있는 좋은 기회가 되게 하여 주시옵소서. 그리하여 그들은 아버님의 사연을 중심삼고 눈물지어야 겠습니다.

남편이 그리울 적마다, 예수님을 중심삼고 신랑 신부의 재회의 한 날을 소원하시던 아버님의 심정을 체휼하게 하여 주시옵고, 자녀들이 그리울 적에는 6천년 동안 자녀를 그리워하면서 찾아 나오신 아버님이 계시다는 것을 망각하지 말게 하여 주시옵소서. 또한 오늘의 내가 있는 것은 역사를 지탱시키고, 역사를 재건시키기 위하여 있는 것임을 깨닫게 하여 주시옵고, 아들딸을 품고 남편을 모시면서 살지 못하고 이런 자리에 서 있는 것은, 나라를 잃어버린 망명객의 아내이기 때문이라는 것을 잊지 말게 하여 주시옵소서. 그리하여 그 나라를 찾아야만 남편과 안식할 수 있는 것이요, 자녀들이 무한한 희망 가운데서 자랄 수 있는 것을 알게 하여 주시옵소서.

에덴 동산에서 해와가 간곡한 사모의 심정을 가지고 당신을 향해 아버지라 부르지 못할 사연이 있는 것을 아오니, 이번 기간을 통하여 당신의 사랑하는 딸들이 눈물어린 사모의 심정에 사무쳐 아버지라 부를 수 있고, 아버지의 그 깊은 심정을 더듬어 살필 수 있게 허락하여 주시옵소서.

그 누구도 갖지 못하는 감사의 심정, 그 누구도 갖지 못하는 흠모의 심정으로 흘리는 눈물이 있다면 그 눈물은 당신의 위로를 받을 수 있는 눈물이 되어야 되겠습니다. 또한 외로운 모습이 있거든 당신이 찾아오셔서 자비와 긍휼의 위로를 베풀어 주실 수 있는 딸의 자리에 서게 하여 주시옵소서. 그럴 수 있는 아내, 그럴 수 있는 어머니의 자리에 선 딸들이 있거든 당신이 부모의 입장에서 친히 같이하여 주시옵소서. 그리하여 그 자리가 위로할 수 있고 위로받을 수 있는 자리가 되게 하여 주시옵기를, 아버지, 간절히 바라옵고 원하옵니다.

이제 1970년도는 다 기울었습니다. 1971년도가 저희 앞에 다가오고 있사오니, 이제 저희들이 70년대를 새로이 출발하여 이 10년간을 어떻게 당신께 바쳐 드릴 것인가를 다시 한 번 생각해야 되겠사옵니다. 그리하여 슬펐던 1960년대를 회고하면서 기쁠 수 있는 1970년대를 맞이해야 되겠사옵니다. 하오나 저희들이 기쁘기 전에 그 기쁨을 아버지 앞에 돌려드리는 마음으로 효성을 다하겠다고 몸부림치는 통일의 무리들이 되어야 하겠습니다.

기쁨의 때가 왔다고 자기 자신을 단장하고 자기 자신을 높일 것이 아니라, 오직 아버지의 나라와 아버지의 세계를 단장하고 아버지를 단장시켜 드리기 위해서 자신의 피곤함도 잊은 채, 이것이 내가 바라던 소원이라고 하며 아버님을 높이고 모든 것을 아버님을 위하여 바치며 감사할 수 있는 효자 효녀들이 되게 하여 주시옵기를, 아버님, 간절히 바라옵니다.

가중되는 채찍 아래서, 눈물이 연결되는 자리에서 마음을 졸이시던 당신의 사정을 다 잊어 버리고, 소원하시던 천국, 승리의 한날을 맞아 당신을 모시고 찬양할 수 있는 저희들이 되어, 아버지와 더불어 기뻐할 수 있고 아버지를 위로해 드릴 수 있는 승리의 70년대가 되어야만 하겠습니다.

아버님, 특별히 이 민족을 지켜 주시옵소서. 민족을 위하여 사명을 다하지 못했던 유대교, 이스라엘 나라를 대신하여 예수님의 일족이 거친 슬픔과 비애의 운명길, 십자가의 행로, 있어서는 안 되었던 탄식의 행로를 걷어차고, 이 한민족이 수많은 종교인들과 하나되어 소망의 천국을 향하여 승리적인 제 3 이스라엘권을 갖추지 않으면 안 되겠습니다.

이러한 엄청난 뜻을 아는 통일의 무리들은 강하고 담대해야 되겠습니다. 여기에서 새로운 결심을 해야 되겠습니다. 여기에서 새로운 자아를 다시 한번 발견해야 되겠습니다. 하오니 내일의 건설자로서 가져야 할 위신을 잃지 말게 하여 주시옵고, 당신의 상속의 인연이 같이한 거룩한 이 시간임을 잊지 말게 하여 주시옵기를 간절히 부탁드리옵고 원하옵니다.

아버지여, 이 시간을 지켜 주시옵소서. 이곳을 향하여 기도하는 수많은 자녀들이 있사오니 그들 위에도 당신께서 같이하여 주시옵소서. 수많은 나라의 자녀들이 아시아의 일각에 있는 한국을 향하여 기도하고 있는 줄 알고 있사옵니다. 그러니 이 자리가 얼마나 두터운 자리인가를 저희들은 느껴야 되겠습니다. 세계에 널려 아버지를 부르는, 사무친 심정과 더불어 본향 땅인 한국을 그리워하면서 눈물짓는 당신의 자녀들을 지켜주시옵소서.

개척자의 외로운 길을 가고 있는 당신의 자녀들도 있사오니, 당신께서 외로울 때 친구가 되어 주었던 그 사연과 더불어 그들을 지켜 주시옵기를 간절히 바라옵니다. 그 누구도 알지 못하는 이 길을 개척하는 과정에서 당신께서 지켜주신 은혜를 가치화시켜서 살아계신 아버님을 증거하는 저희들이 되게 하여 주시옵기를 간절히 바라옵고 원하옵니다.

본부에 있는 무리들이 빚을 져서는 안 되겠습니다. 정성을 들이는 그들 앞에 부끄러운 조건을 남기는 수치스러운 무리들이 되어서는 절대 안 된다는 것을 알고, 이 자리를 지키고 이 자리를 거룩하게 만들 수 있는 자신이 되지 않으면 안 될 것임을 알아야 되겠습니다.

조그마한 행동 하나라도 아버지의 그 소원 앞에 거슬리지 않게 조심하고, 아버님을 모신 사람으로서 말 한마디라도 예법을 갖춘 말을 해야 하겠습니다. 생활 전체가 당신을 모시는 사랑의 아들이요 사랑의 딸이라고 자랑하기에 부족함이 없는 생활이 되게 하여 주시옵기를 간절히 부탁드옵고 원하옵니다.

이 시간도 친히 같이하여 주시옵기를 바라오며, 오늘 하루도 아버지의 거룩한 뜻 가운데서 보호하여 주시옵기를 간절히 부탁드리옵니다. 모든 말씀 참부모의 성호 받들어서 아뢰었사옵니다. 아멘.

36-321
말 씀
이 세상에는 예수님을 믿는 사람들이 많다는 것을 우리들은 알고 있습니다. 한국에만 하더라도 3백만 신도가 있다고 말을 합니다.

36-321
새로운 환경을 개척하기 위하여 몸부림치신 예수님
예수님의 뜻은 하나이기 때문에 그를 믿는 사람들도 그의 뜻과 더불어 하나되어야 합니다. 아울러 예수님이 바라던 그 나라도 그를 믿는 사람들이 바라는 나라가 되어야 할 것이며, 예수님이 소원하던 그 세계도 역시 그를 믿는 사람들의 소원이 되어야 하는 것은 두말할 나위가 없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당신에 소원하던 나라와 세계가 있었을 것이고, 또 하나님을 모시고 살고 싶은 생활환경이 있었을 것입니다. 그 생활환경은 예수님이 이스라엘 나라에서 30여년간을 살던 그런 환경이 아닌 것은 두말할 필요도 없습니다.

다시 말하면 예수님은 그 환경에서 그냥 그대로 사는 것이 아니라 그 환경을 거쳐 나가 새로운 소망의 터전이 될 수 있는 새로운 환경을 그리워했다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예수님은 이러한 생활환경을 개척하기 위해서, 그 당시의 생활환경과는 반대되는 행동과 반대되는 선교 활동을 했다는 것을 우리들은 알고 있습니다. 예수님의 말씀은 그 당신의 고착된 사회 환경에서 자리잡고 살기 위한 말씀이 아니었습니다. 당신의 환경을 혁신하고 내일의 소망의 터전이 될 생활환경을 갖추려고 했던 예수님이었던 것을 우리들은 성경을 통해서 알 수 있습니다.

성경을 보면 예수님은 언제나 외로운 생활을 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예루살렘을 바라보며 “예루살렘아 예루살렘아, 선지자들을 죽이고 네게 파송된 자들을 돌로 치는 자여, 암탉이 제 새끼를 날개 아래 모음같이 내가 너희의 자녀를 모으려 한 일이 몇 번이냐. 그러나 너희가 원치 아니하였도다(눅 13:34)”하는 말씀을 통해 보더라고 그 당시의 예수님의 환경을 잘 알 수 있습니다.

그 당시의 이스라엘 나라와 하나님을 신봉하는 유대교의 소망은 메시아를 맞이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러한 입장에서 예수님을 소원의 결실로 맞아들여야 할 유대교와 이스라엘이 예수님의 생활환경과는 하등의 관계도 없는 입장에 서게 되었습니다.

그러니, 거기에서 벌어지는 환경이 처참하면 처참할수록 그 환경은 예수님에게 위안이 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내일의 개척자인 예수님 앞에 큰 짐이 되었던 것이요, 어려운 환경을 타개하기 위한 내적 결의를 다짐하지 않으면 안 될 내적인 고충의 환경밖에 되지 않았다는 것을 우리들은 알아야 합니다.

이러한 입장에 있던 예수님이기에 자기 일신의 행복을 바라는 그러한 기도를 할 수 없었던 것입니다. 그 당시에 예수님이 살던 환경, 즉 로마의 속국으로 있는 이스라엘 나라와 유대교를 예수님은 소망의 터전으로 삼지 못하고 안위의 한 터전으로 삼을 수 없었다는 것입니다. 여기에서 내심으로 몸부림치며 결의했다 할진대 그 내용은 현재 환경을 어떻게 헤쳐 나갈 것인가 하는 내용이었습니다. 예수님은 그때의 환경을 타파해 버리고 미래에 상속시켜 줄 수 있는 새로운 터전을 거기에 제시하고 싶었던 것입니다. 이것이 그 당시의 예수님의 생활이었다는 것을 우리는 성경을 통해서 엿볼 수 있습니다.

그런 관점에서 예수님은 이스라엘을 속국으로 하여 이스라엘 민족을 박해하고 피를 빨아먹는 로마의 악정권과 지도자 입장에 있었던 유대교의 교법사들에 대해서 제어할 수 없는 분함과 반항의 마음이 폭발되지 않을 수 없었다는 사실을 알아야 됩니다. 뿐만 아니라 유대 나라를 다스리고 있던 모든 족장들에 대해서도 어떤 미련을 갖고 대한 것이 아니라, 어느 한 계기에 그들을 모두 타파해 버리고 후손들에게 새로운 환경을 물려주기 위한 터전을 마련하고자 했던 것입니다. 그러한 새로운 내일의 환경을 개척하기 위하여 순간 순간 내적 결의를 다짐했다는 사실을 우리들은 성서의 기록으로 미루어 알 수 있습니다.

36-323
모든 생활환경에서 혁명을 해야겠다고 느끼신 예수님
예수님은 철이 들면서부터 모든 생활환경에서 혁명을 해야 된다는 것을 느끼지 않을 수 없었던 것입니다. 의붓 아버지인 요셉과 마리아를 중심한 그 가정이 예수님이 소원하던 가정이 되지 못했기에, 그 가정에서 부모를 대하는 예수님은 안위의 심정을 갖지 못했던 것입니다.

그러기에 예수님은 어렸을 적부터 내적인 고충을 느꼈다는 것입니다. 마리아나, 요셉, 혹은 요셉에게서 태어난 그의 동생들을 통해서라도 안위받을 수 없었고, 부딪치는 모든 일들이나 생활 환경을 통해서도 안위받을 수 없었습니다. 때문에 아무리 자신의 가정이라 해도 타파해 버리고 새로운 혁명의 기준을 제시하지 않으면 안 되겠다고 느꼈던 것입니다. 그러한 책임감을 느끼지 않을 수 없었던 예수님인 것을 우리들은 알아야 됩니다.

개인적으로는 부모를 모신 가정이요, 어릴 적부터 대해 온 사회요, 교회요, 이스라엘 나라였지만, 예수님에게는 안위의 마음을 가질 수 없었고 소망을 둘 수 없었던 이스라엘 나라요, 유대교요, 가정이었던 것입니다. 이런 환경에 몰리면 몰릴수록 이것을 밀고 나가기 위한 힘이 필요하고, 자극이 필요하며, 결의가 필요했던 것입니다.

이러한 힘과 자극과 결의를 어디에서 보급받느냐 하는 것이 문제가 아닐 수 없었습니다. 이것들을 보급받을 수 있고, 스스로의 자각과 더불어 내적 의지의 기반, 그리고 힘의 기반을 어떻게 유지시키느냐 하는 것이 예수님 자신에 있어서 무엇보다도 중요한 문제가 되지 않을 수 없었던 것입니다. 목수일을 하는 요셉의 조수로서, 생활을 협조하는 협조자로서 살아 나온 예수님의 30여 년의 생애는-예수님은 비록 묵묵히 입을 다물고 사는 초라한 모습이었지만-남이 알지 못하는 내적 결의를 다짐한 생애였다는 것을 알아야 됩니다. 예수님은 그가 바라보는 이스라엘 나라는 이런 나라가 되어서는 안 된다는 것을 몇 번이고, 몇백 번이고, 몇만 번이고 다짐했던 것입니다. 이런 숨은 준비기간이 있었던 것입니다. 또한 이스라엘 나라뿐만 아니라 부패한 유대교를 바라보면서도 저들과 대결하여 싸우지 않으면 안 된다는 것을 절실히 느꼈던 것입니다.

오직 때가 오기만을 바라며 남모르는 가운데에서 내적인 정성을 다하던 준비 기간이었다는 것입니다. 그 뿐만 아니라 예수님은 가정이 협조하지 않을 것을 생각했을 것이며, 또한 종족은 물론이요, 민족 국가 전체가 반대할 것이라는 것도 생각했을 것입니다.

예수님은 요셉의 조수로서 생활하는 가운데 어려움이 가중되어도 그 가중되는 어려움은 예수님에게 문제되지 않았습니다. 예수님에게는 오직 이스라엘 나라와 유대교를 혁신하고, 이스라엘 민족이 중심이 되어야 했던 축복받은 요셉 가정의 모든 비행을 타파해 버리고, 새로운 민족과 더불어 새로운 국가를 창건하고 새로운 세계를 창건하는 것이 문제였던 것입니다. 그런 세계를 마음으로 바라면서 예수님은 참기 어려운 시간 시간들을 보내며 준비하고 다짐하며 나갔다는 것을 우리들은 알아야 됩니다.

36-324
잠시라도 뜻을 잊은 적이 없는 예수님
예수님은 까뀌질이나 대패질, 혹은 끌질을 하면서도 한낱 나무토막을 만지는 일만 생각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모든 도구를 통해서 하는 일자체를 이스라엘 나라를 대신하여 앞으로 이루어질 소망의 세계, 소망의 나라, 소망의 교회를 만든 일이라고 생각했을 것입니다. 하는 일은 비록 나무를 깎는 일이요, 나타난 환경은 처참한 환경이라 할지라도 그 일자체는 거룩한 이스라엘 나라와 유대교를 대신하여 정성들이던, 이런 기간이었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30년 준비 기간은 덧없이 흘려 버린 기간이 아닙니다. 누구보다도 심각한 기간이었습니다. 뼛골에 사무치는 슬픔의 교차로에서 다짐하던 기간이요, 부모 앞에 사정도 못한 채 땀을 흘리며 묵묵히 일하는 자리에서 다짐하던 기간이었습니다. 어려움이 가중되는 환경과 부딪칠 적마다 그 이상의 어려운 환경 가운데서도 민족과 세계를 개척하기 위해 이것과 대결해나가야 할 자신이라는 것을 발견하는 둘도 없는 귀한 기간이었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예수님이 처한 환경은 하나님께서 바라보실 때 기뻐하실 수 있는 환경이 이었지만 예수님의 내적인 생활태도와 마음으로 결의하는 그 자체에 대해서 하나님은 미래의 모든 소망을 걸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이것이 예수님 자신의 입장이요, 예수님이 생활하고 있던 환경인 것을 알아야 됩니다.

예수님에게는 목수의 조수로서 일하는 그 자체가 생활의 전부는 아니었습니다. 그 일을 통해서 이스라엘 나라와 유대교를 혁신하여 바라던 새로운 나라를 이루겠다고 다짐했던 것입니다. 그러한 다짐과 목수일과는 상관이 없었지만 그 일을 통해서 내적인 것을 다짐할 수 있었기 때문에 하나님께서는 그 일도 어여삐 볼 수 있었다는 사실을 여러분은 알아야 되는것입니다.

예수님은 눈을 뜨는 순간부터 잠자리에 드는 순간까지 어느 한때도 이스라엘 나라와 유대교를 잊어본 적이 없었고, 이스라엘 민족을 대신한 요셉 가정이 뜻 앞에 일치되지 못하고 배치(背馳)된 입장에 서 있는 것을 염려하지 않은 적이 없었습니다. 단 한 시간이라도 뜻을 잊은 적이 없었다는 것입니다.

예수님 앞에 수없이 부딪쳐 오는 어려움은 어려움이 아니라, 이스라엘을 건국하고 유대교를 혁신해야 할 새로운 시대를 위해서 자신의 힘을 배양할 수 있는 하나의 동기와 자극이 되었던 것입니다.

36-325
예수님의 뜻을 알지 못한 제자들
예수께서 내심으로 그리던 이스라엘 나라와 유대교, 그 이스라엘 나라와 유대교를 수습하기 위해서 제자들을 규합하던 예수님의 진지한 태도를 그 당시에 예수님을 따르던 제자들은 알지 못했습니다. 배에서 그물을 깁고 있던 베드로에게 “나를 따라 오너라 내가 너희로 사람을 낚는 어부가 되게 하리라(마 4:19)”고 말씀하여 베드로가 모든 것을 버리고 예수님을 따랐지만, 예수님은 단지 베드로 한 개체를 두고 부른 것이 아닙니다. 그를 바라보면서 이스라엘을 그리워하며 불렀던 것이요, 그를 바라보면서 유대교를 회상하며 불렀던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그를 부른 것은 유대교를 사랑하고 싶고 이스라엘 나라를 사랑하고 싶었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그를 부른 목적은 미래에 남아지지만 부름 그 자체에는 유대교와 이스라엘 나라를 대신하여 사랑하고 싶은 마음이 있었기 때문에 불렀다는 사실을 그때의 베드로 자신은 몰랐을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내용은 개인의 생활을 중심삼은 내용이 아닙니다. 내가 살아야 할 나라는 이런 나라가 아니다, 내가 찾아야 할 교회는 이런 교회가 아니라고 생각했던 예수님이었습니다. 즉, 그 시대의 환경으로부터 환영받는 교회가 아니고 그 시대의 환경에 안주하는 이스라엘 나라가 아니었다는 것입니다. 새로운 교회와 새로운 이스라엘 나라를 바라고 있었던 예수님이었습니다.

예수님은 그런 관점에서 제자들을 교육했던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내가 있음은 오늘의 이스라엘 나라를 위해서 있는 것이 아니요, 부패한 유대교를 위해서 있는 것이 아니다. 내가 온 것은 현재 교회의 한 일원으로서 온 것이 아니다. 나는 미래의 소망하는 이스라엘 나라와 유대교와 요셉의 족속을 위해서 있다’는 것을 어느 한 순간에도 잊은 적이 없었습니다. 예수님은 그러한 관점에서 말씀을 했고, 그런 감정을 제자들에게 느끼게 해주려고 했다는 것을 알아야 됩니다. 그러나 예수님을 모시고 있던 제자들은 그것을 알지 못했기 때문에 동문서답하는 생활을 계속해 나갔던 것입니다.

이스라엘 나라를 사랑하고 싶은 마음이 간절하면 간절할수록 유대교를 혁신시켜서 아버지께서 기뻐할 수 있는 제단으로 만들 것을 다짐하였습니다. 그럴수록 예수님의 내심은 그 누구에게도 비할 수 없이 초조했을 것입니다. 그러한 예수님의 안타까움을 당신의 무지몽매한 제자들은 알지 못하였습니다.

성경 가운데에서 예수님과 제자들이 문답한 내용을 보더라도 제자들의 목적이라든가, 생활환경이 예수님과 상충된 것이 많이 있었음을 엿볼 수가 있습니다. 이를테면, 요한의 형제들은 예수님을 중심삼아 가지고 자기들이 출세할 것을 말하였습니다. 그때 예수님은 얼마나 기가 막혔겠습니까? 혁명의 기치를 들어 현재의 입장을 폭파시키지 않고는 바라던 새로운 이스라엘 나라를 형성할 수 없다는 것을 느끼고 있는 예수님이 자기들의 출세를 꿈꾸는 그들을 바라볼 때에 얼마나 기가 막혔겠느냐는 것입니다.

그러한 제자들을 바라보면 바라볼수록 예수님은 외로움에 사무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물론 요셉 가정에서 서러움을 겪었을 때도 억울하였지만 소망의 뜻을 펴기 위한 하나의 동지로, 하나의 위안자로 불러서 키워 나온 제자들의 그러한 모습을 바라보게 될 때는 더 기가 막혔다는 것입니다. 그러기에 예수님은 3년이라는 기간 동안 그들이 행하여야 할 모든 시범을 보였던 것입니다. 제자들의 발을 씻겨 주면서 서로서로 사랑하라고 권고하는 장면은 얼마나 기가 막힌 장면입니까?

베드로는 베드로 나름대로, 다른 제사들은 그들 나름대로 자신들을 중심삼고 예수님을 생각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예수님은 여기에서 열두 파로 갈라진 것을 느낀 것입니다. 예수님은 이래 가지고는 이스라엘 나라를 새로이 세울 수 없고, 유대교를 새로이 형성할 수 없다는 것을 느꼈고, 그러한 것을 느끼면 느낄수록 대하는 사람들이 안위의 대상이 아니라 기가 막히게 하는 비참의 대상이었다는 것을 느꼈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럴 적마다 예수님은 ‘내가 베드로 야고보 등을 사랑하는 것은 어느 개인으로 사랑하는 것이 아니라 이스라엘 나라, 유대교를 사랑하는 마음으로 그들을 사랑하는 것이다’라고 몇 번이고 몇번이고 다짐했을 것입니다. 그들을 사랑하다 보면 그들이 예수님의 마음에 말할 수 없는 타격을 주는 때도 많았을 것입니다. 아무것도 모르는 철부지한 제자들에게 예수님은 그 누구도 느끼지 못하는 슬픔을 느꼈을 것입니다.

하지만 아무리 그런 슬픔을 느껴도 그 분풀이를 제자들에게 할 수도 없는 것이 예수님의 사연이었습니다. 그 분한 마음을 억제하고 도리어 그들을 위로하지 않으면, 그들 나름대로 현재의 입장마저도 취해 나갈 수 없다는 것을 예수님은 얼마나 가중되는 괴로움과 외로움을 느꼈을 것인가? 우리들은 이것을 다시 한 번 생각해 봐야 됩니다.

이렇듯 그들을 위로해 주고 권고해 주어야 할 예수님이었습니다. 이런 관점에서 예수님보다 불쌍한 사람이 어디에 있겠느냐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철이 들면서부터 뜻을 펴기 위해 그 누구한테도 말할 수 없는 외로움을 품었었고, 제자들을 규합하여 가르치는 과정에서 정성을 다 들였지만, 스승의 마음을 헤아리지 못하고 번번히 상반된 행동을 하는 제자들을 바라볼 때에, 내심으로 말할 수 없는 괴로움이 사무칠 때가 한두 번이 아니었을 것입니다.

36-328
도리어 예수님에게 고통을 안겨 준 제자들
그러면 예수님은 그러한 어려움을 무엇으로 극복할 수 있었느냐? 틀림없이 ‘미래의 이스라엘 나라를 이루고 사랑해야 할 사람들로는 그래도 이들이 저들보다 더 낫지 않겠느냐’ 고 생각하며 그 어려움을 극복했을 것입니다. 예수님이 눈물 흘릴 때면 같이 눈물을 흘리는 시늉이라도 하고, 산고개를 넘어갈 때는 같이 따라가려고 하고, 외로운 표정을 짓게 되면 말로라도 위로해 주려고 하는 그러한 제자들을 생각할 때, 그래도 가야할 길은 이 길밖에 없다고 느꼈을 것입니다. 또, 그러한 것을 느낄 적마다 무지한 제자들을 바라보면서 하나님 앞에 얼마나 많은 기도를 했겠습니가?

예수님은 제자들을 어느 한 개인으로 사랑하신 것이 아니라 이스라엘의 열두 지파를 대하는 마음으로 사랑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예수님과 제자들 사이에는 외로운 마음이 맺혀져 있었다는 사실을 여러분은 알아야 됩니다. 예수님은 이렇게 가기를 바라는데 제자들은 저렇게 가기를 바랐습니다. 다시 말해서 예수님과 제자들이 바라는 것이 상치되고 상반되었기 때문에, 예수님은 이것을 수습해서 자신이 바라는 방향으로 돌이키기 위해 끊임없는 생각을 했고, 또 생활을 통해서 그들을 감화 감동시키기 위해 얼마나 노심초사했겠습니까? 우리는 이것을 알아야 됩니다.

자기 자식도 마음대로 하지 못하는 판국인데 아무런 인연도 없고 관계도 없는 사람들을 제자로 모아서 자기와 더불어 생사를 나눌 수 있는 자리에까지 이끌어 가지고, 하나님께서 소원하시던 교단과 하나님께서 소원하시는 나라를 형성해야 하니, 그 길이 얼마나 망망한 길이요, 외로운 길이었겠습니까?

그렇지만 4천년 동안 하나님께서 참고 참아 나오신 이스라엘 민족, 하나님을 믿어야 할 그 이스라엘 민족이 하늘을 배반하고 불심함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이 얼마나 애달퍼하셨는가 하는 그 역사적 사실을 생각하고, 하나님이 지금까지 참아오신 것을 표준삼아 스스로 위안받으며, ‘내가 이것이 싫다고 하게 되면 새로운 이스라엘은 어떻게 세울 것이며, 새로운 유대교를 어떻게 형성하겠느냐’고 생각하며 예수님이 얼마나 참아 나왔던가를 우리들은 생각해 보아야 됩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이 알 수 있게끔 백방(百方)으로 가르쳐 주었고, 암시해 주었으며, 직접 행함으로써 제자들에게 새로운 뜻을 깨우쳐 주려 했습니다. 그러나 제자들은 그러한 예수님의 내심을 알지 못했던 것입니다. 이와 같이 그 당신의 환경은 원수의 환경이었습니다. 제자들이 잘못을 저지르면 전체의 책임을 져야 하는 입장에서 제자들을 거느린 예수님은 비정상적인 환경에 둘러싸인 원수권내에서 새로운 인연을 조성하려고 했습니다. 이러한 입장에서 예수님은 가중된 핍박의 환경이 기다리고 있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이렇듯 예수님의 생활은 그 누구도 알지 못하는 고충을 느끼는 생활이었다는 것을 우리는 알아야 됩니다.

성경 가운데 예수님께서 ‘화 있을진저,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이여!’ 라고 말씀하신 내용을 보더라도 예수님의 심정에 외로움과 괴로움이 얼마나 사무쳤는가를 알 수 있습니다. 3년 공생애 기간 동안 찾아 놓은 제자들까지도 예수님의 그런 마음을 위로해 주지 못했다는 것입니다. 제자들마저도 예수님을 위로해 줄 수 있는 대상이 못 되었기 때문에 결국 십자가의 길을 가게 될 때에 다 배반자가 되었다는 것입니다.

36-329
인간적인 고뇌를 이겨내신 예수님
예수님이 사랑하는 제자들도 예수님의 사정을 몰랐지만, 예수님을 사랑하는 부모도 예수님의 사정을 몰랐습니다. 요셉도 몰랐으며 요셉 가정을 중심삼은 종족도 역시 예수님의 사정을 몰랐습니다. 이스라엘 민족과 유대교까지도 역시 예수님의 사정을 몰랐습니다. 이러한 입장에 처한 예수님이기에 사연을 나눌 수 있는 사람이 한 사람도 없었다는 것입니다.

“내가 아직도 너희에게 이를 것이 많으나 지금은 너희가 감당치 못하리라(요 16:21)”, “내가 땅의 일을 말하여도 너희가 믿지 아니하거든 하물며 하늘 일을 말하면 어떻게 믿겠느냐(요 3:21)” 하는 이러한 예수님의 말씀을 통하여 보더라도 말할 수 없이 고독한 예수님이었다는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러면, 예수님을 그러한 고독의 자리에 몰아넣은 장본인이 누구냐? 그것은 유대교인들임에 틀림없다는 것입니다. 그러한 유대교인들을 대표하는 족속, 곧 사가리아 가정이요, 요셉 가정이라는 것입니다.

괴로움이 사무칠 때 인간적으로 생각하면 반항심이 스쳐갔을 것입니다. 이스라엘 나라에 대한 반항심, 유대교인에 대한 반항심, 사가리아와 요셉 가정에 대한 반항심, 더 들어가서는 자신이 태어날 때 하나님이 보내시어 황금과 유향과 몰약을 가지고 와서 경배했던 동방박사 세 사람에 대한 반항심과 예수님의 탄생을 찬양했던 천사들에게까지도 반항심을 가졌을 것입니다. 이 모든 것이 반향의 대상으로 남아질 수 있는 고독한 때가 한두 번이 아니었다는 것을 성경을 통한 그 당시의 환경에서 엿볼 수 있습니다.

그 당시는 오늘날과 같이 자기 마음대로 말할 수 있는 민주주의 시대도 아니요, 자신의 정견을 발표하여 정당을 편성할 수 있는 시대도 아니었습니다. 그러니 누구한테 말을 하지 못하고 혼자서만 마음속으로 하나님의 뜻을 다짐하지 않으면 안 되었던 예수님이었으니 얼마나 비참했겠습니까?

예수님이 이루려 했던 뜻은 일조일석에 이루어질 수 있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세상의 타락된 환경에서 먹고 마시고 놀면서 동반자를 규합할 수 있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 뜻을 이루기 위해서는 그런 환경을 분별해 가지고 하나님께서 기뻐하실 수 있는 환경으로 만들어 동반자를 규합해야 되는 것이었습니다. 이런 입장에 처해 있던 예수님의 괴로움은 역사시대에 있어서 어떤 성현의 괴로움보다 더 컸다는 것을 여러분은 알아야 됩니다.

예수님은 그런 환경에 몰릴 때마다, 하나님께서 바라시는 단 한 사람이 자기 자신이라는 것을 생각하고, 또 4천년 동안 괴로운 개척의 노정을 거듭해서 걸어오신 하나님이 계시다는 것을 느끼면서 자신이라도 효성의 도리를 다해야겠다고 다짐했던 것입니다. 그러면 그럴수록 예수님은 외로움에 사무치지 않을 수 없었던 것입니다.

세상에 대한 원망이 가중되면 가중될수록 하나님을 위해서 더욱 더 효의 도리를 하지 않으면 안 될 자신이라는 것을 느꼈다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효의 도리를 다한다는 것은 나만 가지고는 안 되는 것이 아닌가? 하나님이 나를 보내신 것은 한 개인으로서 남아지게 하기 위하여 효의 도리를 하게 하신 것이 아니라, 이스라엘 민족과 유대교를 거느리며 효의 도리를 하도록 보내신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을 했던 것입니다. 이러한 것은 아는 예수님은 하나님 앞에 있어서 자신의 고독을 생각할 때마다 하나님 앞에 체면을 세울 수 없는 입장이었던 것입니다.

36-331
뜻을 무서워하신 예수님
하나님이 예수님을 보내신 것은 예수님이 이스라엘 나라와 유대교를 규합해 가지고 새로운 이스라엘 나라와 유대교의 터전을 마련하고, 예수님의 명령에 따라 하나의 목적의 세계를 향하여 투쟁의 대열을 지어 길을 출발하기를 바라셨기 때문입니다. 그것이 하나님의 소원이요, 기대였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과 상충되고 고립된 입장에 선 예수님의 외로운 심정을 그 누가 알아주었느냐는 것입니다.

이 어려운 환경을 개척해 나가기 위한 힘을 하나님에게서 밖에 보강받을 수 없었던 예수님은 하나님 아버지를 부를 때마다, 하나님 앞에 면목없는 자신이요, 세상에 대해서는 책임을 못한 자신인 것을 깨달았다는 것입니다. 이렇듯 예수님은 그 누구도 알지 못하는 슬픈 눈물을 흘려야만 하는 생활을 계속하지 않을 수 없었다는 사실을 여러분들이 알아야 됩니다.

예수님은 새로운 아침을 맞을 적마다, 어제는 외로운 입장이었지만 오늘은 새로운 일이 벌어져서 내가 가야 할 길의 동조자가 되고 내가 개척해야 할 행로에서 시범자가 될 수 있는 사람을 바랐지만 예수님의 막막한 사정을 모르는 철부지한 제자들은 그런 사람이 되지 못했습니다. 그러니 예수님은 기가 막혔을 것입니다. 그들은 배가 고프면 사막이나 어디거나 배가 고프다고 투정을 했고, 목이 마르면 목이 마르다고 투정을 했으며, 옷이 남루하면 옷이 남루하다고 투정을 했습니다. 그들이 예수님을 따르던 3년동안 그러한 투정을 얼마나 많이 했겠느냐는 것입니다. 이것을 볼 때마다 예수님은 기가 막혔을 것입니다. 당신의 인간들은 하나님의 왕자로 이 땅위에 왔던 예수님을 그렇게도 고독하게 해서 보냈던 것입니다. 이것이 예수님의 행로였다는 사실을 여러분은 알아야 됩니다.

뜻을 품은 예수였기 때문에 뜻 때문에 외로와 했고, 뜻 때문에 눈물을 흘렸고, 뜻 때문에 죽음길도 각오했던 것입니다. 뜻 때문에 부모를 배척하지 않으면 안 되었고, 뜻 때문에 형제를 원수로 취급하지 않으면 안 되었던 예수님의 사정을 우리들은 알아야 됩니다. 사랑하는 어머니 마리아에게까지 “여자여 나와 무슨 상관이 있나이까(요 2:4)”라고 말하지 않을 수 없었던 예수님의 딱한 사정이 무엇이었겠습니까?

예수님의 의붓 아버지 요셉은 예수님의 소원과 기대를 저버렸습니다. 또한 예수님의 동생들도 예수님에게 ‘아 형님이 세상에 드러나기를 바란다면 초막절에 예루살렘으로 올라가지, 왜 올라가지 않습니까?’하고 빈정댔습니다. 이와 같이 동생들까지도 예수님 앞에 빈정거렸다는 것은 요셉 가정에 있어서 요셉이 책임 못했음을 말하는 것이요, 마리아가 책임을 못했음을 말하는 것입니다.

사랑해야 할 부모를 배신하고 원수의 입장에 서서 반항의 언사를 하지 않으면 안 되었던 고독한 예수님이고, 유대교를 사랑해야 함에도 불구하고 유대교를 지도하는 교법사들을 대하여 ‘화 있을진저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이여’ 하고 책망하지 않을 수 없는 예수님이었던 것입니다. 사랑해야 할 입장에서 그런 입장으로 변한 것은 무엇 때문이냐? 뜻이 무섭기 때문입니다. 뜻을 안 예수님이었기 때문에, 그 뜻길을 따라가야 할 예수님의 행로였기 때문에 이스라엘 민족과 유대교에 대하여 반항하지 않을 수 없었고 저주를 할 수밖에 없었던 것입니다.

사랑해줘야 할 이스라엘, 그 이스라엘 나라를 대신한 예루살렘에 대하여, 그 나라의 모든 교권과 주권의 중심지인 그 도시를 향하여 ‘예루살렘아, 예루살렘아! 네가 하늘까지 이르고 싶으냐, 음부에 떨어질까봐 조심하라’고 저주의 발언은 해야만 했던 예수님의 딱하고 처량한 사정을 그 누가 알았습니까? 이는 죽기보다도 더 괴로운 일이요, 죽는 것보다도 더 어려운 일이지만 그러지 않을 수 없었던 예수님의 품은 뜻을 누가 알았으며, 그러면 예수님의 사연을 그 누가 알았겠느냐는 것입니다.

그러면 예수님은 무엇 때문에 민족의 반역자로 몰리게 되었느냐? 뜻 때문이었습니다. 만일 예수님이 하나님의 뜻을 몰랐다면 십자가의 고난이라는 말은 없었을 것입니다. 하나님의 뜻이 없었더라면 아버지와 어머니의 사랑을 못 받는 자리, 친척들에게 바알세불 신이 씌웠다며 몰림을 받는 곤욕스런 자리에 서지 않았을 것입니다.

36-333
하나님과 예수님의 뜻을 이루어 드려야 할 통일교인
왜 그런 비참하고 곤욕스러운 자리에 몰리게 되었느냐? 하나님의 뜻을 알고, 그 뜻을 품었기 때문입니다. 그 뜻은 이스라엘 나라를 주고도 바꿀수 없는 뜻이요, 유대교를 주고도 바꿀 수 없는 뜻이요, 사랑하는 어머니 아버지를 주고도 바꿀 수 없는 뜻입니다. 자기의 친척은 물론이요, 당시의 세계를 주고도 바꿀 수 없는 뜻이었기에, 예수님은 뜻을 이룬 승리한 자신의 모습이 되기를 언제나 그리워했다는 것입니다.

그런 관점에서 볼 때 의인은 없나니 한 사람도 없다는 말씀은 예수님 자신을 중심삼고 한 말입니다. 뜻을 중심삼고 볼 때 예수님은 의인이 못 되었던 것입니다. 뜻을 중심삼고 볼 때 고독한 사람이었습니다. 이 땅을 원망하고 저주할 수 있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뜻을 중심삼고 성경을 다시 음미해 보아야 하고, 오늘날 기독교를 다시 바라보아야 됩니다. 예수님의 뜻은 둘이 아닙니다. 하나입니다. 예수님은 오직 뜻 때문에 몰림을 당했고 항상 외로왔으며 십자가에서 피를 흘리며 죽음길을 갔습니다. 뜻을 중심삼고 그 죽음길을 가면서도 다시 오겠다는 약속의 말씀을 남기고 갔던 것입니다. 만일 하나님의 뜻이 없었다면 이러한 모든 일들은 예수님과는 하등의 관계가 없는 것입니다. 그러면 그 뜻은 어디에 남아지고, 어디에서 거두어져야 되느냐? 기독교를 통해서 남아져야 되고 기독교를 통해서 거두어져야 됩니다. 이것이 문제라는 것입니다.

그러면 예수님이 부르짖으며 찾고자 하던 뜻, 예수님이 중심삼고 싸워 나왔던 그 뜻을 오늘날 예수님을 믿고 있는 기독교인들 가운데서 찾을 수 있느냐? 오늘날 기독교가 예수님을 그리던 유대교와 같이 되었느냐 하면 못 되었다는 것입니다. 또, 오늘날 기독교인들이 예수님이 찾고 있던 이스라엘 나라를 가졌느냐? 못 가졌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그리워하던 그런 가정을 가졌느냐 할 때 못 가졌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축복해 주고 싶었던 부부, 부모, 신랑 신부의 인연을 가졌느냐 할 때 못 가졌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사랑하고 싶었던 그런 동생과 누나 형제들을 가졌느냐 할 때 못 가졌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사랑하지 않을 수 없는 그런 부모를 가졌느냐 할 때에도 못 가졌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현재 기독교의 입장을 볼 때 오늘날 통일교회는 어떻게 해야 되느냐? 예수님이 품었던 뜻과 더불어 사랑할 수 있는 형제와 가정을 가져야 되고, 사랑할 수 있는 종족을 가져야 되고, 사랑할 수 있는 교회를 가져야 되며, 사랑할 수 있는 나라를 가져야 됩니다. 다시 말해서 예수님을 중심삼아 가지고 예수님이 기뻐할 수 있는 나라와 교회와 가정을 가져야만 된다는 것입니다. 그래야 오늘날 예수님이 소원하시던 뜻의 결실을 거둘 수있는 것입니다.

이처럼 추구해야 할 입장에 있는 기독교가 오늘날 그럴 수 있는 마음자세를 가졌느냐 하고 묻고 싶은 것이 하나님과 예수님의 마음이 아니겠느냐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여러분들은 예수님을 십자가의 죽음길로 몰아냈던 이스라엘 민족의 죄상을 넘어서 가지고 예수님을 시봉할 수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또한 그것이 우리의 소원이 되어야 합니다. 그리하여 예수님 앞에 나아가 ‘당신이 찾던 가정이 이런 가정이 아닙니까? 당신이 찾던 교회가 이런 교회가 아닙니까? 당신이 사랑하고 싶었던 나라가 이런 나라가 아닙니까? 이 모두를 거두어 당신에게 드리오니 받으시옵소서’라고 할 수 있어야 됩니다.

예수님을 믿는다는 수억의 사람들보다 그럴 수 있는 한 사람이 자랑스러운 것입니다. 믿는 사람의 숫자가 문제가 아니라 하나의 결실을 맺는 사람이 문제인 것입니다. 그러나 지금까지의 수많은 기독교인들 가운데에는 그런 사람이 없었습니다.

36-334
하나님과 예수님의 뜻이 무엇인가를 알아야
오늘날 성경을 그냥 그대로 믿고 있는 기독교인들의 소원은 천국에 가겠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소원이 ‘아버지여, 내가 당신을 믿고 천국가겠습니다’라고 하는 것이었습니까? 그것이 예수님의 소원이었어요? 예수님의 소원은 천국가겠다는 사람들을 천국에 보내는 것이었습니다. 지옥가야 할 불쌍한 무리들을 붙들어 가지고 천국에 보내려고 한 것이 예수님의 소원입니다. 예수님 자신은 지옥에 가더라도, 죽음길을 가더라도 인류를 천국에 보내야 되겠다 하는 것이 예수님의 소원이었다는 것입니다. 인류를 살려 주는 것이 예수님의 소원이 아니겠느냐는 것입니다. 그런 길을 통하지 않고서는 예수님이 바라던 나라와 예수님이 자라던 교회는 나오지 않는 것입니다.

우리는 차제에 신앙의 본질을 다시 한 번 규명하여 기독교의 전통적인 사상이 어떻게 분열되어 왔느냐 하는 것을 분석 비판해 보아야 됩니다. 즉, 오늘날의 기독교인들 가운데에 예수님을 따르던 사도들과, 예수를 배척하던 그 나라와 유대교인 그리고 교법사들을 넘어서서 예수님 앞에 안위의 대상이 될 수 있는 신자들이 얼마나 되느냐는 생각을 해 보자는 것입니다.

그러면 오늘날의 기독교에 예수님의 뜻이 남아 있느냐? 오늘날 예수님을 믿는다는 사람들은 ‘오! 주여 오시옵소서’, ‘신랑 되신 주님이여! 나를 찾아 오시옵소서’ 하는데 실제로 오신다면 어떻게 하겠다는 것입니까? 그 당시에 뜻을 이루지 못했기 때문에 다시 오시는 것인데, 다시 오시는 주님이 즐거워하실 수 있는 오늘의 환경과 생활 터전이 되어 있느냐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모시기 위한 준비를 했느냐, 내가 하나님의 뜻을 통해서 예수님을 바라보고 있느냐 아니면 나를 통해서 예수님을 모시려고 했느냐, 내 이용물로서 하나님을 모시려고 했느냐 하는 것이 문제가 된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오늘날 우리 통일교인들은 뜻을 품은 예수의 사정을 알아야 됩니다. ‘예수님은 이스라엘 나라를 이렇게 사랑하고 싶었을 것이다. 유대교를 이렇게 사랑하고 싶었을 것이다. 자기의 가정과 족속을 이렇게 사랑하고 싶었을 것이다’ 하는 내용을 알아야 된다는 것입니다. 자기의 아버지와 어머니까지 규합해 가지고 유대교와 이스라엘 나라를 사랑하게끔 하는 것이 예수의 소원이라는 것입니다. ‘나는 당신의 아들로서 아버지와 어머니와 집밖에 모르는 아들이 되겠습니다’가 아닙니다. 가정을 저버리더라도 이스라엘 나라와 유대교를 구하겠다고 하는 것이 예수님의 주의였습니다. 그래야 될 게 아닙니까?

‘하나님의 뜻이고 뭐고 다 저버리고 살고 있는 그대로 아버지 어머니에게 효도나 하면 된다’ 하는 것이 예수님의 뜻이예요? 예수님은 처해 있는 생활 환경을 버리고 그 자리에서 새로운 나라를 이루겠다는 뜻을 품었기 때문에 생활 환경 전부가 예수님과 상치되고 상반되는 자리에 부딪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예수님은 집을 구해서 수리해 가지고 그냥 살려고 한 것이 아니라 전부다 허물어 버리고 다시 새로운 집을 지어서 살려고 한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사람의 원수가 자기 집안 식구리라(마 10:36)”고 하셨던 것입니다. 가정을 중심삼고 볼 때는 부모가 원수요, 나라를 중심삼고 볼 때는 그 나라의 주권자가 원수요, 교회를 중심삼고 볼 때는 교법사들이 원수라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원수는 남편이요, 주권자요, 교역자라는 것입니다. 이러한 입장에서 가는 것입니다.

36-336
자진해서 뜻 일선에 서자
그러면, 통일교회 교인들을 두고 볼 때에 누가 원수냐? 부인이 통일교회를 믿으면 남편이 원수가 되고, 남편이 통일교회를 믿으면 부인이 원수가 되는 것입니다. 그 다음에는 나라가 원수요, 기성교회가 원수가 되는 것입니다. 이렇게 세 부분이 원수가 될 수 있는 자리에 서지 않으면 기쁨의 길을 나오지 않습니다. 심은 대로 거두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그렇게 심었으니 거둘 때에도 그러한 자리에서 거두는 것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이 세 가지를 볼 때 통일교회는 합격입니다. 부인이 통일교회에 다닌다고 남편이 얼마나 반대를 했습니까? 선생님은 별의별 것을 다 봤습니다. 머리가 깨지지를 않나, 다리가 부러지지를 않나, 얼굴이 터져 오지를 않나, 옷이 찢겨 오질 않나, 별의별 것을 다 보았다는 것입니다. 그래 가지고도 교회에 와서 선생님에게 사정을 하는데, 선생님이 욕을 할 수 있겠어요? 뜻의 길을 가는 데는 그런 일도 겪게 되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그런 길을 갔기 때문에 우리도 그런 처지에 부딪치는 것입니다. 그러지 않고는 안 될 운명이기 때문에, 예수님을 중심삼고 벌어진 일들을 수습해야 할 책임을 하다 보니 이제는 통일교회가 훌륭하다는 소문도 많이나 있습니다.

가정이 반대하면 반대할수록, 나라가 반대하면 반대할수록, 교회가 반대하면 반대할수록 거기에 부각되는 것은 예수님의 뜻, 예수님의 뜻입니다. 나라를 잃어버리더라도 ‘예수님의 뜻!’, 교회를 잃어버리더라도 ‘예수님의 뜻! ‘, 부모와 가정 전체를 잃어버리더라도 ‘예수님의 뜻!’이라고 해야 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뜻에 귀결됨으로 말미암아 잃어버렸던 가정의 기반을 다시 찾을 수 있는 것이요, 잃어버린 교회를 다시 찾을 수 있는 것입니다. 나아가 나라와도 새로운 인연을 맺고 출발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그런 자리에 몰아넣는 것입니다. 그러니 여러분들이 그런 자리에 서지 않고서는 뜻길을 가지 못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 통일교인들은 자진해서 그 길을 가야 됩니다. 하나님께서 몰아내서 가는 것보다도 자진해서 가자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이 책임을 못해서 서러웠으므로 우리는 자진해서 책임을 하자는 것입니다. 자진해서 가정을 떠나고, 자진해서 교회를 떠나고, 자진해서 나라를 멀리하게 되면 그것이 곧 뜻을 위해 싸우는 일선이 되는 것입니다. 그것은 지금의 이 나라를 위하고, 이 교회를 위하고, 이 가정을 위해서 가는 것이 아니라, 새로운 나라와 새로운 교회와 새로운 가정을 위해서 가는 것입니다.

따라서 여러분이 일생을 통해 그런 자리에 서게 되면 뜻을 품은 예수님의 사정을 알게 됩니다. 그러나 그런 자리에 서려면 오늘날의 이러한 교회 가지고는 안 됩니다. 지금까지 내가 믿던 신앙 가지고는 안 됩니다. 뜻을 중심삼고 부락을 사랑하고, 뜻을 중심삼고 새로운 교회를 편성하고, 뜻을 중심삼고 새로운 제자를 규합하는 그러한 운동이 벌어져야 합니다. 그렇게 되어야 예수님의 사정을 잘 알게 된다는 것입니다.

예컨대 아이를 낳아서 길러 봐야 부모의 심정, 어머니의 심정을 느끼는 것처럼 자신이 당해 봐야 안다는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다른 교회에게 배척을 받아 보고, 부모에게도 배척을 받아 보고, 나라에게 쫓김도 받아 봐야 ‘아, 예수님의 외로움이 이렇구나’하고 실감한다는 것입니다.

지금까지 통일교회가 걸어온 수십년의 고난과 핍박의 역사는 통일교회를 망하게 하는 것이 아닙니다. 물론 그 기간 안에는 마이너스가 되었을는지 모르지만, 정상적인 전통을 세우는 데에는 없어서는 안 될 중요한 고난과 핍박이라는 것을 여러분들이 알아야 합니다.

그 동안 여러분들이 뜻을 중심삼고 얼마나 눈물지었느냐 하는 것이 예수님과 가까와질 수 있는 조건입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 돌아가실 때에 죽자 살자 믿고 따라나오던 제자들이 전부 다 도망갔던 거와 마찬가지로 여러분도 여러분을 통하여 전도되어 죽자 살자 뜻을 믿고 따라 나오던 사람이 일조일석에 뜻을 버리고 가면, 가슴이 메어지고 뼛골에 사무치는 서러움을 느끼게 될 것입니다. 그런 것을 느끼면 그저 떼 눈물이 쏟아질 것입니다.

그거 이상하지요? 그들과 하등의 상관도 없는데 왜 눈물이 나오느냐 하면 뜻을 중심삼았기 때문입니다. 뜻을 중심삼아 가지고 그를 붙들고 사정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내 부모에게 효도하는 것과 같이, 나라님과 하나님을 모시는 것같이 모시겠으니 제발 이 길을 같이 가자고 사정하게 되는 것입니다. 원수의 입장에서 용서를 구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그런 마음으로 그 한 사람을 붙들고 사정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 때는 부활 후 40일 동안을 사정하며 제자들을 다시 찾아갈 수밖에 없었던 예수님의 사정을 알게 됩니다.

자식을 많이 길러 본 부모는 악한마음을 가질 수 없는 것입니다. 이러한 관점에서 볼 때, 우리는 그런 자리에서 하나님에게서 자신이 죽더라도 원수를 맺어 놓고 갈 수 없는 심정적인 사연을 발견할 수 있는 것입니다.

36-338
예수님 이상의 자리에까지 나아가야 할 우리
예수님 자신은 갔지만 하나님의 뜻은 간 것이 아닙니다. 역사가 흐르면 흐를수록 그 뜻은 이루어져 나올 것입니다. 그 이루어져 오는 뜻을 우리는 대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여러분들은 그 뜻을 여러분들이 뜻으로 대해서는 안 됩니다. 어디까지나 예수님의 뜻을 그대로 세워서 성취해야 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대신자가 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오늘날 기독교에서는 통일교회 선생님을 놓고 ‘문 예수’어쩌고 저쩌고 하는데, 여러분들도 전부다 예수가 되어야 합니다. 예수님은 씨앗입니다. 씨를 뿌리면 열매를 맺는 것처럼 여러분은 예수님의 씨를 뿌려서 거둔 열매가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예수를 믿으면 그래야 된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옛날 유대교 앞에 배척받던 그러한 예수가 되어서는 안 됩니다. 배척받던 예수의 자리에서 우리들은 환영받는 자리까지 나아가야 된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슬퍼하면서 갔지만 우리들은 기뻐하면서 가야 됩니다. 뜻의 성과를 놓고 볼 때 예수님이 보지 못한 것을 우리들은 보고 가야 된다는 것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우리들은 예수님보다 낫다는 것입니다.

지금은 민주주의 시대입니다. 그러니 통일교회 교단을 만든다고 해서 반대하는 사람 있어요? 내가 지금 나가서 전도를 한다고 해서 내 생명을 노리는 사람이 있어요? 이런 환경을 두고 볼 때 지금은 예수님이 복음을 전하던 그 시대보다 나은 시대입니다. 우리들은 예수님보다 훨씬 나은 시대에 살고 있다는 것입니다. 이런 시대적인 혜택을 받고 있는 우리들은 심정적으로 맺힌 것을 반드시 풀고 넘어가야 됩니다. 예수님이 품었던 그 뜻을 여러분 자신들이 상속받아야 됩니다.

예수님은 형님, 오빠와 같은 입장에서, 혹은 아버지 어머니와 같은 입장에서 뜻을 품었기 때문에 여러분은 예수님의 뜻을 상속받아야 된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부모와 마찬가지입니다. 또한 형제들의 대표자요, 가정의 대표자이며, 그 나라의 대표자입니다. 결국은 우리 인간이 갖추어야 할 모든 요건을 갖춘 분이기 때문에 그분의 뜻을 그냥 그대로 인계받아야 된다는 것입니다. 그것을 인계받지 않고서는 그 나라에서는 상속자가 못 되는 것입니다.

따라서 여러분들은 예수님이 30년의 사생애 노정, 3년의 공생애 노정을 거치면서 십자가를 지고 뜻길을 가던 처량한 장면을 다시 한 번 상상해 봐야 됩니다.

예수님은 당시에 사랑하지 못했던 이스라엘 나라를 사랑하기 위하여 사랑할 수 있는 한날이 오기를 얼마나 기다렸던가? 또 교회를 사랑하지 못했기에 그 사랑을 실현시키기 위해 얼마나 기다리고, 형제를 사랑하며 살 수 있는 한날이 오기를 얼마나 기다렸던가? 그러나 우리는 예수님이 그렇게 바라던, 형제를 사랑하는 마음, 교회를 사랑하는 마음, 나라를 사랑하는 마음을 가지고 있으며 거침없이 사랑할 수 있는 교단도 갖고 있고 또한 통일교회 식구라는 이름을 가진 형제도 있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통일교회는 대한민국이면 대한민국의 어느 누구보다도 선두에 서서 사랑할 수 있는 입장에 있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제 3 이스라엘 나라를 상속받을 수 있는 새로운 제 3 이스라엘 교단, 이 교단이 새로운 가정을 편성할 수 있는 놀라운 자리에 우리들이 서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에게는 지금이 최고의 정성을 들여야 할 때입니다. 이것은 모든 것을 미루어 보아 알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여러분들이 이때를 놓치게 되면 다시는 이런 때를 갖기가 어렵습니다.

삼팔선을 넘어 보지 못한 사람은 삼팔선이 어떻다는 것을 모릅니다. 따라서 우리들은 이런 시점에 처해 있는 것을 알고, 예수님이 품었던 그 뜻을 중심삼고 이 시대에 탕감복귀할 수 있는 가정적인 환경, 종족적인 환경, 교단적인 환경, 국가적인 환경을 안팎으로 얽어매 가지고 넘어가야 됩니다. 즉, 예수님이 고대하던 것을 이룬다는 기쁨을 가지고 현재를 잘 수습해서 예수님의 뜻을 상속해 나가는 여러분들이 되지 않으면 안 된다는 것입니다.

36-340
기 도
사랑하는 아버님, 자기가 죽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하는 그 순간에도 죽음은 엄습해 올 수 있다는 것을 저희들은 알아야 되겠습니다. 죽는다 죽는다 하다가 죽는 사람은 없다는 것을 저희들이 알고 있습니다. 하오니 죽지 않는다고 생각하는 그 순간에 죽음이 엄습해 오더라도 당황하는 저희들이 되어서는 안 되겠습니다.

예수님은 겟세마네 동산에 올라가 “아바 아버지여 아버지께서는 모든 것이 가능하오니 이 잔을 내게서 옮기시옵소서. 그러나 나의 원대로 마옵시고 아버지의 원대로 하옵소서(막 14:36)”라고 했습니다. 이와 같이 예수님의 뜻과 아버지의 뜻과는 상거(相距)가 있었다는 것을 저희들이 알고 있습니다. 예수님은 가정을 바라보고, 제자들을 바라보는 입장이었지만 당신의 뜻은 세계와 이스라엘권을 바라보는 입장이었으므로 여기에는 상거가 있었다는 것을 저희들은 알고 있습니다.

사는 것이 현재의 괴로운 나를 위한 것이 아니라, 미래의 이스라엘 나라와 세계를 위한 것이 되어야 한다는 것을 아시는 예수님이었기에 겟세마네 동산에 올라가 그런 기도를 했다는 것을 저희들은 알고 있습니다.

아버님이여, 여기에 모인 통일의 자녀들도 그와 같은 운명길에 들어섰사오니, 저희의 뜻대로 마시옵고 당신의 뜻대로 하시옵소서. 통일교회의 뜻대로 마시옵고 당신의 뜻대로 하시옵소서. 저희들이 자칫 잘못하다가는 통일교회의 뜻이 있을 수도 있사오니, 통일교회의 뜻이 있지 말게 하여 주시옵소서. 당신의 뜻을 위주로 하여 따르는 통일교회가 되어야 되겠습니다. 그러한 자리에 서지 않고서는 통일교회도 흘러가 버린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아버지여, 여기에 모인 당신의 자녀들을 기억하여 주시옵소서. 현재 저희들은 주류와 비주류를 생각하게 되옵니다. 그러므로 내가 어느 길로 가야 되느냐가 문제되는 것이옵니다. 아버님, 당신께서 수십년 동안 이 교단을 붙들고 싸워 나오신 것을 저는 잘 알고 있사옵니다. 제가 눈물짓던 장면 장면마다 당신의 외로움을 풀어 드리는 길은 이 길밖에 없다는 것을 알았기 때문에 오늘날까지 극복해 나왔나이다.

아버지여, 대한민국을 사랑하여 주시옵소서. 이북에 있는 5도를 아버지의 품에 품을 수 있는 날이 어서 속히 와야 되겠습니다. 통일의 새로운 방안은 오늘날의 어떤 정치인의 손을 통해서 될 것이 아니라는 것을 아옵니다. 아버지의 사랑, 아버지의 손에 의해서만 된다는 것을 아옵니다. 저희들이 남북을 넘어서 사랑할 수 있는 승리의 아들딸의 모습을 갖추어 이 나라 이민족을 넘을 수 있게 되면 통일이 이루어질 것을 알고 있사옵니다.

아버지여, 가인 아벨의 분립의 역사가 오늘날 대한민국을 중심삼고 남북으로 갈라지는 운명으로 나왔습니다. 이스라엘 나라와 유대교가 갈라졌던 그 비운의 역사가 오늘날 대한민국에 재현되었사옵니다. 세계적인 발판을 총합한 대한민국의 판문점을 중심삼고 민주세계와 공산세계로 갈라져 있사옵니다. 즉 사탄이 하나님과 담판하여 참소의 조건을 제시하는 곳으로서 세계적인 선이 그어져 있는 곳이 오늘의 판문점인 것을 저희들이 알고 있습니다.

이런 문제를 두고 볼 때에 이제 대한민국은 마치 아폴로 11호가 지구를 기지로 하여 달나라에 갔던 것처럼 이 지구를 기지로 하여 솟구쳐 올라가 새로운 세계의 창건자가 되고 새로운 역사의 기수가 되어야 하겠습니다. 그러한 사명이 이 민족에 있는 것을 이 민족은 알지 못하오나 보잘것없는 통일의 무리들은 잘 알고 있사옵니다.

이제 저희들은 아버지의 거룩한 성상 앞에 엄숙히 엎드려 진정한 의미에서 아버지에 대해서 알고 나서 아버지를 불러야 되겠습니다. 저희들은 참된 아버지의 이름을 불러야 되겠습니다. 그리고 아버지와 심정이 통할 수 있는 참된 효자가 되고, 효녀가 되어야 하겠사옵니다. 저희들은 양자 양녀가 되기를 원하지 않사옵니다. 당신의 슬픈 심정을 뼛속 깊이 체휼할 수 있는 당신의 직접주관권내에 서기를 바라고 있사옵니다.

그럴 수 있는 아들딸이 되기 위하여 저희들은 가정도 버렸고, 교회도 버렸으며, 나라도 버려 아무것도 없는 공수(空手)로써 당신의 뜻만을 품고 나왔사옵니다. 저희가 아버지의 뜻을 품었기 때문에 하늘에는 개인이 있는 것이요, 가정이 있는 것이요, 종족·민족·국가·세계가 있다는 것을 저희들이 알았습니다. 당신과 하나됨으로 말미암아 거기에서 빚어질 수 있는 새로운 개인, 새로운 가정, 새로운 종족, 새로운 민족, 새로운 국가, 새로운 세계의 주체자가 되기를 바라며 나아가는 과정에 있는 저희들이옵니다.

아버지여, 이들이 서 있는 자리를 공고히 지키게 하여 주시옵소서. 처해 있는 환경에 지배를 받을 것이 아니라 주체성을 가지고 그 환경을 지배하지 않으면 안 될 것을 알아야 되겠습니다. 이것이 바로 새로운 뜻을 중심삼고 나아가야 할 통일의 무리인 것을 저희들은 알았습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당신의 뜻을 품은 사람으로서 여자 남자 할 것 없이 강하고 담대한 자리에서 민족의 새로운 얼을 중심삼고 자주성을 가져야 되겠습니다. 뿐만 아니라 자주력을 가져야 되겠고, 새로운 개척자가 되어야 하겠고, 새로운 일선의 장병이 되어야 하겠습니다. 이것을 결의하는 당신의 아들딸이 되게 하여 주시옵소서. 열두 사도와 같은 비굴한 모습이 아니라, 누가 명령하지 않아도 스스로의 길을 가는 사람이 되어야겠습니다. 스스로 지켜야 할 장소를 지키고, 개척지의 책임자가 될 수 있는 아들딸이 되어야겠사오니, 그런 자리에서 당신의 뜻을 품고 실천하는 아들딸이 되게 하여 주시옵소서.

예수님은 뜻을 바라보면서 죽어갔습니다. 오늘 저희들은 저희들이 뜻을 중심삼아 실천하지 않고서는 예수님의 한을 풀어 드리지 못한다는 것을 배웠습니다. 그러므로 저희들은 뜻의 실천자가 되어야 되겠습니다. 이제 저희들은 소망의 제 3이스라엘 나라를 흠모할 수 있는 무리가 되고, 제 3이스라엘의 교단을 사랑할 수 있는 예수님의 소원의 실체가 되어야 되겠습니다.

예수님에게 당신의 모친과 동생이 찾는다고 할 때에 ‘내 모친과 동생이 누구냐, 아버지의 뜻대로 행하는 자가 내 모친이요 동생이다’라고 말씀하시던 예수님의 입장을 넘어서서, 내 모친과 동생이 여기 있노라고 자랑할 수 있는 통일의 무리가 되어야 되겠습니다. 아버지, 그러기 위해서는 민족을 사랑하고, 교회를 사랑하고, 나라를 사랑해야 되겠습니다. 그러지 않고서는 그러한 자리에 서지 못한다는 것을 저희들은 알아야 되겠습니다.

이제 남편은 아내에게 나를 사랑하기 전에 이스라엘 나라를 사랑하고, 이스라엘 교단을 사랑한 다음에 나를 사랑해 달라고 해야 할 것입니다. 이것이 예수님의 뜻인 것을 저희들은 알아야 되겠습니다. 또한 아내도 남편에게 이스라엘 나라와 이스라엘 교단을 사랑한 다음에 나를 사랑하는 것이 예수님의 소원이 아니냐고 물을 수 있는 그러한 아내가 되어야 되겠습니다. 더 나아가 부모에게도 아버지 어머니는 이스라엘 나라를 사랑하고, 이스라엘 교단을 사랑한 다음에 저희들을 사랑해 달라고 말할 수 있는 그런 아들딸을 가져야 되겠습니다.

이러한 자리에 서지도 못하면서 사랑을 요구하고 아버지의 간호를 바라는 것은 자기를 중심삼고 하늘을 규합하고자 하는 것이 되어 아버지께서도 그러한 사람을 원치 않는다는 것을 저희들이 알아야 되겠습니다.

예수님의 뜻을 이룬 자리에서 나라와 민족을 품고 자기의 가정을 자랑하고, 자기의 상대를 자랑할 수 있는 무리가 되기 위해서는 개척자의 길을 가야 한다는 것을 알고 있기에 당신의 딸들이 이 길을 가고자 하옵니다.

저희가 외로움을 느끼며 아버지 앞에 호소할 수밖에 없는 운명길에서 이 하늘의 길을 가지 않으면 안 된다는 것을 생각할 때마다, 이것이 바로 당신이 바라는 소원의 한때를 맞이하기 위한 것이라고 아버지께서 분부하신 것을 알게 되옵니다. 그러한 자리에서 끝까지 싸우는 사람은 망하지 않을 것이며, 그의 남편과 자녀들 또한 결코 망하지 않는다는 것을 저희는 알고 있습니다. 당신께 맡겼기에 염려하지 않아도 당신께서 더 큰 사랑으로써 그들을 보호해 주신다는 것을 알고 있사옵니다.

이번 기간을 중심삼고 1972년도까지 민족의 운명을 결정지어야 할중차대한 시점이 저희들 앞에 다가오고 있습니다. 남북이 새로운 아시아의 정세에 휘몰아 들어가고 있는 이 때, 당신이 기뻐할 수 있는 새로운 터전을 마련해야 할 이런 시대적 사명을 저희들이 이 기간에 결정짓지 않으면 안 된다는 것을 알고 있사옵니다. 하오니 앞으로 통일교단이 해야 할 책임이 얼마나 큰것인가를 저희들이 잘 알아야 되겠습니다.

저희들은 죽는 한이 있더라도, 이 민족을 위하여 제물되는 한이 있더라도 이것을 완수하지 않으면 안 될 통일교단의 길인 것을 알고 있사옵니다. 이 민족이 뭐라 해도, 기성교단이 뭐라 해도, 아버지를 믿는다는 사람들이 뭐라 해도 가짜 사람이 아니라 진짜 사람이 되기 위해서 저희들은 이 길을 가야 되겠습니다.

저희들은 뜻을 품은 예수님의 후계자가 되고, 또 상속자의 도리를 다하기 위하여 몸부림쳐야 되겠습니다. 예수님의 죽음을 바라보면서 도망갔던 열두 제자와 같은 사람이 되는 것이 아니라, 목숨을 걸어 놓고 예수님 앞에 날아오는 화살을 대신 맞고 창칼을 대신 맞겠다고 하며 나설 수 있는 책임을 다하는 아들딸이 되어야 하겠사옵니다. 그런 절개와 지조를 가지고 우리나라를 사랑하고, 우리 교회를 사랑할 수 있는 당신의 아들딸들이 되어야 하겠사옵니다.

저희에게는 이 시대뿐만이 아니라 앞으로의 후손도 사랑해야 할 세계사적인 거룩한 인연이 있기 때문에, 이 터전을 공고히 하기 위하여 싸워 나가는 당신의 아들딸들이 되어야겠사옵니다.

이제 1970년도 마지막 고비에 접어들었습니다. 남은 기간 동안에 저희들이 무엇을 바라겠사옵니까? 뜻 앞에 불충했던 것을 회개하고, 자신을 중심삼고 뜻을 받아들였던 사실에 대해 애통해 하며 회개하야 되겠사옵니다. 그리하여 새로운 마음으로 역사적인 1971년도를 맞이하여 이 1971년도를 기쁨의 해로서 아버지 앞에 영광을 돌려 드리기 위해 효성의 도리를 다하여야 하겠습니다.

저희들은 만민을 대신하여 희생을 함으로써 아버지의 영광을 찬양하고 기쁨의 눈물을 흘리지 않으면 안 될 통일의 무리인 것을 알고 있습니다.

아버지, 슬픔을 품고 가슴 조이는 하루 하루의 생활을 겪어가는 이들 앞에 자유와 해방의 날이 있어야 되겠습니다. 자유스런 모습으로 우리 아버지가 바라던 한날이 왔다고 목놓아 감사의 눈물을 흘릴 수 있는 날이 와야만 되겠사옵니다. 그러한 날이 바로 민족의 통일을 이루는 날이요, 승리의 영광을 다짐할 수 있는 날이기 때문에, 그러한 때가 오기까지는 저희들이 십자가를 벗을 도리가 없다는 것을 알아야 되겠습니다. 또한 그러지 않고서는 이 나라가 세계복귀의 터전이 되지 못한다는 것도 알아야 되겠습니다.

저희들은 아담 국가를 이루어야 된다는 원리의 가르침을 알고 있사옵니다. 그렇기 때문에 저희들은 있는 힘을 다하여 일편단심 정성을 모아 가지고 아버지께서 내디딜 수 있는 이스라엘의 창건자로서 사라질 수 있는 통일의 무리가 되기를 바라고 있사옵니다. 지금까지 이런 마음을 가지고 싸워나왔습니다. 여기에 공이 있다면 당신의 공밖에는 없는 것이요, 자랑할 것이 있다면 당신밖에 자랑할 것이 없는 것을 알고 있사옵니다.

그러나, 가야 할 길이 남아 있기 때문에 지친 다리를 끌고라도 기어이 가야 되겠사옵고, 피곤한 몸을 가누면서라도 제사장의 자리를 지켜야 되겠사옵니다. 이것을 잊을 때에는 당신이 채찍을 가해서라도 경책(警責)하시옵소서.

민족과 세계의 소원에 있어서 당신으로부터 받는 선물을 더럽게 받는 무리들이 되지 않게 허락하여 주시옵소서. 공손히 받아서 깨끗한 것으로 후대에 남겨주고, 역사적인 전통을 세우는데 있어서 새로운 기원을 마련할 수 있게 하여 주시옵소서. 하늘의 마음과 땅의 마음이 연결되고, 아버지와 자녀의 마음이 연결될 수 있는 거룩한 승리의 제단을 만들어야 되겠사오니 당신이 주관하여 주시옵기를 간절히 바라옵니다.

저희들이 수는 적더라도 먼저 당신의 참다운 아들딸이 되어야 되겠사옵니다. 세계에 널려 있는 당신의 가정들을 지키시옵소서. 사정과 환경 가운데서 지탄을 받고 있는 이들을, 아버지, 긍휼히 보시어 친히 인도하시옵소서. 당신이 소망하시던 천국의 행로를 따라 직행할 수 있는 무리들이 되게 하여 주시옵기를 간절히 바라옵니다.

나라를 사랑하지 않고는 가정을 사랑할 수 없으며 나라를 찾지 못하고서는 교회를 사랑할 수 없는 운명길이 저희들 앞에 남아 있사오니, 이것을 다해야 충의 도리, 효의 도리를 했다고 할 수 있다는 것을 알고, 그 길을 가기 위해 굳건히 다짐하면서 하늘의 용자로서의 모습을 갖추어 개척자의 사명을 더디하지 말게 하여 주옵기를 간절히 부탁하옵니다.

오늘은 거룩한 날, 이곳을 위하여 기도하고 마음 모으는 무리들이 있사오니, 당신의 뜻을 위하여 염려하는 그들의 마음 위에 당신의 자비가 같이하여 주시옵고, 동정의 마음이 같이하여 주시옵기를 간절히 부탁하옵니다.

이 시간에 친히 같이하여 주심을 감사드리오며 모든 말씀을 참부모의 이름으로 아뢰었사옵나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