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5-194 to 35-207: 새로운 생명과 수난

새로운 생명과 수난
1970.10.14 (수), 한국 통일동산(구리시 교문동)

35-194
새로운 생명과 수난
일본에서 오신 여러분! (박수) 오늘은 날씨도 좋고 여러분의 기분도 매우 좋아 보입니다.

오늘은 10월 14일 경사스러운 날입니다. 이렇게 주위 환경도 좋고 날씨도 좋은 이 날을 맞이하여, 이날을 축하해야 하겠지만 이 날이 지닌 의미에서 본다면 그다지 기쁘지만은 않은 기념일입니다. 오늘은 기쁘고 즐거운 날이지만 그 배후의 선생님이 치른 감옥생활을 연상해 볼 때 일면은 기쁘고 일면은 쓸쓸한 날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오늘은 여러분에게 ‘수난과 재생’, 즉 ‘새로운 생명과 수난’이라는 제목으로 말씀드리겠습니다.

35-194
수난기가 있게 되는 이유
1917년 이후, 제1차 세계대전 이후 60년 기간, 더 나아가 70년 기간은 세계적인 격동의 시대라 볼 수 있습니다. 이 기간은 수난의 길을 가지 않을 수 없었던 역사적인 운명의 기간이었던 것입니다.

이 기간에 선생님도 태어났습니다. 선생님은 이 기간에 지금까지 계속 수난을 당하며 지내 왔습니다.

그러면 이 역사의 중대한 수난기, 격동의 수난기라는 것은 무엇을 목적으로 해서 있게 되었는가? 수난을 당하는 배후에서 망하느냐 재생하느냐의 두 가지 내용을 역사는 언제든지 결정해 나왔습니다.

세계적인 격동기인 이 60년, 나아가 70년이라는 기간은 세계적인 수난의 기간입니다. 이 수난의 기간을 사람들은 싫어하면서도 아직까지 계속 해서 더듬고 있는 것입니다. 그렇게 하면 이 기간에 근심의 역사의 결말을 짓겠느냐, 그리고 새로운 이상세계 재생의 출발의 동기를 만들겠느냐? 이 기간은 이 두 가지 문제를 결정짓지 않으면 안 되는 역사적인 운명의 기간인 것입니다.

이러한 입장을 하늘 아버지가 아신다면 그 인류를 멸망으로 인도할 수는 없는 것입니다. 어떠한 수단과 방법을 써서라도 우리 인간들을 구하지 않을 수 없다는 거예요. 이것을 생각할 때, 이 기간은 하나님의 특별한 섭리의 기준을 이 지상에 세우는 중대한 기간이 되지 않을까 생각하는 바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역사를 고난 속에서 끌고 밀어 나감과 동시에, 그 배후에서는 새로운 하늘 섭리의 기반, 발전의 기반을 재생시켜 오셨음이 틀림없습니다. 그러한 입장에서 봤을 때 그것은 그렇게 되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리고 이 지상의 어떤 곳에서 어떤 사람들을 통하여 그러한 기반을 만들어 나오신 역사과정이 없어선 안 된다고 하는 결론에 도달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없었더라면 이 고난은 반드시 멸망의 결과를 가져오고 말 것입니다. 이것을 극복하기 위해 새로운 세계를 향하시는 하나님은 반드시 그 새로운 세계의 섭리의 기반을 이끌고 극복해 가는 내적 준비를 할 것임에 틀림없습니다. 이렇게 생각할 때 그 섭리의 준비의 중심에 설 수 있는 국가는 세계의 어떠한 국가보다도 고난의 길을 가지 않으면 안 된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 나라는 중심적, 핵심적인 수난의 위치에 서지 않으면 안 됩니다.

그리고 그 내부에 새로운 섭리의 닻을 내리고 거기서 새로운 섭리의 세계적인 발전의 길을 개척하는 그러한 일방의 새로운 가치가 없어서는 아니 된다는 것을 생각해 볼 때, 60년부터 70년에 걸쳐서 한국이 세계적으로 중요한 정치적 정점에 올라왔다는 것은 역사적인 사실입니다. 이 기간 동안에 한국 민족은 지금까지 고생을 했습니다. 그리고 이 고생한 한국민족 가운데에서도 가장 몰리고 박해받아 온 무리가 있습니다. 그것은 말 할 것도 없이 통일교회예요.

35-196
고난 가운데서 발전해 온 통일교회
통일교회는 지금까지 수난의 길을 걸어 왔습니다. 통일교회 자체도 그 수난의 결과로서 망하느냐 아니면 다시금 재생의 길을 더듬어 가느냐 하는 두 가지 중에서 하나를 선택하지 않으면 안 됩니다. 만약 수난의 결과 선의 입장에 선다면 이것은 하나님의 섭리권에 흡수되는 것이고, 그렇지 않고 악의 입장에 선다면 이것은 틀림없이 망할 것입니다. 그런 결론이 됩니다.

지금 통일교회는 한국 민족으로부터 박해를 받고 있고 수난의 핵심의 위치를 지키면서 역사과정을 통과하고 있지만, 그 고난의 역사과정을 통과하면서 그 모습이 지워지는 입장이 아니라, 그 고난의 모습을 타고 넘었고, 고난의 환경을 밀어내고 가정 씨족 민족 국가까지 타고 넘었고, 나아가서는 세계까지 타고 넘어서 10개 국의 젊은이들이 모여 왔다는 것은 민족을 넘고 세계를 넘어섰다 하는 산 증거입니다.

이것을 볼 때 지금까지 환경에 얽매여 온 그 고생이 우리들의 멸망을 재촉한 것이 아니고, 그것이 새로운 방향으로 우리의 뒤를 미는 힘의 원천이 되고 타오르는 원동력이 되어졌다고 한다면, 그 고생에 대해 우리는 하나님께 감사하지 않으면 안 됩니다. 그러한 결과가 되는 것입니다.

그와 같이 우리 통일교회가 지금까지 해 온 고생이 하늘이 인정하는 선의 위치에 섬으로써 지금의 이러한 상황을 충족시킬 수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지금까지 한국내에서 통일교회가 고생한 그 고생은 통일교회의 체제를 결정할 뿐만 아니라 이 고난으로 인해 하나님의 섭리를 중핵의 인연이 내려지고 있다면 그 고생은 세계를 재창조하는 원동력이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지금 일본 식구라든가 미국 식구라든가 세계에 널려 있는 통일교회 식구들의 심경을 본다면, 그것은 잘못된 것입니다.

통일교회가 한국에 있어서 박해를 받은 것은 비단 한국내에 국한된 것이 아닙니다. 그것은 국경을 넘어 일본에서 당하는 박해를 대신한 것도 되고, 미국에서 당하는 박해를 대신한 것도 됩니다. 우리 선교부가 있는 세계 각국에서, 그 선교부를 중심으로 활동하고 있는 통일교회의 식구들이 그 나라에서 당하는 박해와 같은 가치를 갖고 있습니다. 그런 결과가 되었습니다.

그러므로 이렇게 생각해 보면, 하나의 특정한 위치에서 특수한 고생의 길을 간 그 기준은 그것이 멸망을 초래하지 않고 하늘의 위치에 섰을 경우에는 그 선한 기반은 세계적인 것이 됩니다.

그래서 한 사람이 제물로서 고생 끝에 서서 고생의 운명길을 갔다고 한다면, 그 한 사람이 세계가 바라는 선한 기반 위에서 희생되고 죽어갔다면 그것은 한 사람의 사명을 수행하는 것이 아니고, 그 운명을 통해서 어떠한 장소에 있어서도 부활의 봉화를 울리는 원동력이 되는 것입니다. 이렇게 생각할 때 고난이라는 것이 인간에게 있어서 나쁜 것이 아닙니다.

그 고난의 배후에 하늘의 섭리와 연관을 가지고 있고, 선한 횡적 환경을 포옹하는 내용을 가지고 있다는 입장에 서서 보면 멋진 것이라는 거예요. 이것은 지금까지 우리 통일교회가 자라 나온 역사과정의 사실을 우리들이 생각할 때에 부정할 수 없는 결과인 것입니다.

통일교회는 고난 가운데서 발전해 왔습니다. 박해 속에서 우리들은 진전해 왔습니다. 개척해 왔습니다. 싸움을 거듭하는 가운데서도 박해의 고개를 넘어서 이만한 기반을 닦았습니다. 이것은 인간 개인의 욕망에 의해서 이루어졌다고는 절대 할 수 없습니다. 역사상에 나타난 영웅이나 위인은 많이 볼 수 있습니다. 개인의 욕망을 가지고 세계를 재패했다면, 개인적인 소원을 가지고 출발하여 고생의 과정을 거쳤다고 하더라도 하나님의 입장에 서서 고생하지 않은 그러한 사람이라면 반드시 그는 역사적으로 비판을 받습니다. 그 길은 사면 팔방으로 막히게 됩니다. 그것은 도리어 악에 접근해서는 안 된다고 하는 것을 경계하는 교육의 교재가 됩니다. 그러한 일이 있으면 있을수록 악을 방비하는 하나의 조건이 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선에 입각한 고생은 그것이 만민의 양심이 인정하는 입장에 섰을 경우에는 그것을 하늘의 목표의 계율(戒律)을 표준으로 해서, 혹은 사회적인 협력을 바탕으로 해서 역사적인 중심으로, 또는 세계적 사상의 중심으로 세우려고 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우리의 양심의 작용으로 재어 볼 때 부정할 수 없는 것입니다. 이러한 것을 생각해 볼 때 통일교회는 지금까지 수난의 길을 통해서 발전의 도리를 더해 온 것입니다. 이것이 얼마만한 발전을 하고 있는가 하는 것은 금후의 문제인 것입니다.

35-198
승리의 영광은 하나님께 돌려야
통일교회가 가는 길에는 한때 고난이 몰려옵니다. 그 고난은 개인에서부터 가정, 사회, 국가, 세계적인 고난입니다. 세계적인 고난에 직면할 우리들은 그것을 무난히 넘을 자신을 가지고 있습니다. 싸워 내면 승리는 반드시 우리에게 돌아온다는 절대적인 신념을 가지고 있습니다. 거기에 배가하는 어떠한 박해가 있더라도 그 박해를 뛰어넘고도 남음이 있다는 신념을 가지고 있는 것입니다. 이것은 우리들로서 기쁨이 아닐 수 없습니다.

이것이 있음으로써 재생의 기반을 세계적으로 확장할 수 있는 것입니다. 세계적으로 확장될 수 있는 기쁨을 맞이했다 하더라도 그 기쁨은 우선 자신의 기쁨으로 받아들일 수 없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것이 행복입니다. 그 기쁨은 우선 선조와 선배들의 것입니다. 먼저 가신 형제들의 수고를 생각할 때 그 승리의 영광은 자신의 영광으로서 맞을 수 없다는 것입니다.

그것을 선조나 선배에게 돌린다고 하는 것은 참으로 아름다운 것이에요. 악을 중심으로 한 것은 자신에 의해 시작해서 자신에게 돌아가는 것입니다. 그런 입장을 넘을 수 없지만 우리들은 역사적인 선조들의 수고의 공을 알고 있는 이상 역사적인 선조들에게 감사할 수 있고, 모든 영광을 돌릴 수 있는 것입니다. 우리가 그런 입장에 선다는 것은 역사가 환영하는 그러한 인격을 갖추고 있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일반적으로 횡적으로 위하면서 사는 사람이 있다면 그러한 사람을 양심적이라고 하고 인격자라고 할 것입니다. 그 사람은 역사적으로 영인체의 환영을 받을 것이고, 하늘의 기쁨의 환영의 대상이 될 것은 틀림없습니다. 지상에 있는 만민의 숭앙받는 원천이 된다는 거예요. 이러한 입장에 서 있는 단체나 혹은 민족이 있다면 그 민족은 무한한 섭리노정을 이어받을 수 있는 것입니다.

지금까지 기독교는 역사과정을 통하여 발전해 왔습니다. 어떤 때는 지상에서 박해를 받으며 기도로써 어떤 구원의 기반을 만들어 감사할 때도 있었습니다. 그 감사의 대상은 무엇이었던가? 먼저 수고하신 하나님입니다. 선의 주체이신 하나님께 영광을 돌린다고 하는 그 고귀함, 그리고 박해를 받아 희생이 된 선배들에게 돌리는 입장에 선 기독교는 발전해 왔습니다.

그러나 기독교를 중심으로 하더라도 민족이면 민족 주체성을 지닌 국가가 탄생하였을 때에는, 기독교를 중심해서 이룩한 영광을 그 나라의 것으로 했다고 할 경우에는 그 나라를 중심으로 한 승리는 거기서부터 그림자가 지워지지 않으면 안 되는 운명이 된다는 것입니다. 민족적인 기독교를 국교로 해서 승리를 얻었다고 해도 그 영광을 하나님에게 돌려야 합니다.

그리고 기독교의 발전을 위해 멸사적(滅私的)인 희생의 길을 걸은 자기의 선배들에게 돌려야 합니다. 그들을 위하는 것은 정해진 일개 국민의 영광에 국한되지 않습니다. 이것을 확장시켜 세계적인 영광으로까지 넓혀나가지 않으면 안 됩니다. 그러한 입장에 서서 결속한다고 하는 국민이라면 그 국민은 미래의 세계 끝까지 발전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만약 그와는 반대의 입장에 서서 자기들을 주체로 한 영광으로 하고, 자기들을 그 영광의 소유자로서 한정한다고 한다면, 역사는 거기에서 끊어지고 맙니다. 지금 우리들은 777쌍의 세계적인 합동결혼식을 올리기로 되어 있습니다. 그런 입장을 생각해 볼 때, 이 영광을 통일교회 자체의 영광으로 할 것인가 하는 것을 생각하지 않으면 안 됩니다. 그러면 이 기쁘고 즐겁고 감사할 일을 통일교회의 문선생에게 돌리는 것으로 그칠 것인가. 선생님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습니다. 이것은 창조 이래 아직까지의 하나님의 소원인 것입니다. 하나님은 그 소원을 이루시기 위해 지금까지 희생해 오셨습니다. 숭고한 하나님의 수고에 대해서, 그 은혜에 대해서 어떻게 감사를 표시할 것인가. 이러한 환경을 앞에 놓고 잔치를 벌이고 만민의 찬양을 받을 수 있다고 할 때, 어떤 한 사람이 하늘을 타고 넘어 그 영광을 자신의 영광으로 한다면 그는 하나님이 지금까지 수고해 오신 모든 것을 배반하는 자가 됩니다. 그러한 자는 역사에 남지 않습니다. 좋은 일이 있으면 우선 그것을 하나님께 돌려야 하는 거예요.

35-200
역사와 함께 남아지는 사람
그리고 지금까지의 역사과정에서 실패의 역사는 세우고 왔지만 책임을 졌던 사람들이 그 누구도 실패를 원한 사람은 하나도 없었어요. 모두들 완성, 성취, 승리를 원했지만 자신이 원하지 않았던 운명의 끈에 걸려 그러한 결과가 되어진 거예요. 그런 결과가 되었다고 하는 것은 그 자체에서 보면 슬픈 일입니다. 뿐만 아니라, 하나님께서 그 섭리를 해 나오셨다고 하면 하나님도 불쌍하시다는 거예요.

그렇게 생각해 볼 때, 우리들은 기독교를 중심으로 복귀노정을 더듬어 온 수많은 선조들에 대해서 그들이 실패했다 하더라도 내심에 있어서는 동정하는 마음을 가지고 그들이 영광의 자리에 참석할 수 있도록 해주는 여유 있는 마음을 갖지 않으면 안 됩니다. 이러한 기쁜 일이 있을 때 잘못된 선조들의 실수를 용서하시도록 빌어줄 수 있는 그러한 사람, 그러한 단체가 있다면 이는 또 역사와 함께 남을 것입니다. 그러나 자기 혼자에 의해서 이루어졌고, 자기의 공로에 의해서 이러한 결과가 되었다고 하는 입장, 그 공로를 자기에게 돌리는 입장에 선다면 이것은 하늘에 대해서, 혹은 천적인 희망을 품고 고생하며 살다 간 선조에 대한 반역의 입장이기 때문에, 만일 영계가 있다면 그 사람의 갈 길을 완전히 봉쇄해 버릴 것입니다.

그런 것을 생각할 때 지금까지 우리들이 당한 고생은 1세기 내의 고생이 아니라 몇십 년 내의 고생인 것입니다. 그러나 기독교가 지금까지 걸어온 고난의 길은 몇천 년이었습니다. 인류역사가 더듬어 온 수고의 길은 몇천, 몇만 년인 것입니다.

이렇게 생각할 때, 그 과정에 있어서 하늘의 뜻을 위해서, 혹은 양심적으로 하늘을 향해서 일심으로 노력한 사람이 있다면, 그런 권의 모든 사람들에게 이 기쁨을 돌린다는 그런 사람이 있다면, 영계에서는 금후에 그들이 가는 길을 보호하고 발전의 길을 열어 줄 것입니다. 그런 뜻을 위한 통일교회라면 통일교회 사람이 가기 전에 먼저 영계가 동원하여 개척하고 싶다는 마음을 가지게 되는 것입니다. 양심을 가진 영인체인 이상에는 그러한 마음을 가지지 않을 수 없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의 금후의 결혼식은 세계적입니다.

우리는 통일교회의 권(圈)에 새로운 기권을 만드는 것입니다. 가정 편성이라고 하는 문제를 중심으로 해서, 즉 결혼이라고 하는 문제를 중심으로 해서 새로운 가족을 만든다고 하는 것을 섭리적으로 볼 때, 이것은 새로운 지역에 우리들이 들어가는 것입니다. 이것은 우리들만의 영광이 아니라 영원한 하나님의 영광입니다. 우리들이 모르는 , 여러분이 태어나기 몇천, 몇만 대 선조 이전부터 창조의 수고를 해 오신 하나님의 은혜로부터 시작된 것입니다. 그러므로 그 영광은 하나님께 돌려드려야 합니다. 그 영광은 선한 선조들에게 돌려드려야 하는 거예요. 그것을 자신이 받는 이상 기뻐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35-201
고생하더라도 선의 입장에서 해야
완전히 하늘과 영계와 일치가 되어, 영계를 주체로 해서 영계에 이끌려 가는 입장에 서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러한 입장에 서서 가는 사람이 있다면 어떠한 박해가 있더라도 그 박해는 반드시 허물어지게 됩니다. 선생님이 지금까지 계속해서 수십 년간 투쟁해 온 이유는 여기에 있습니다.

만일 십자가의 길이 있다면 그 길은 하나님의 영광에 반(反)하는 것입니다. 선조가 지금까지 더듬어 온 한(恨)을 놓고 장래에 탄식 소리와 함께 그 수고의 길을 가기를 원했던 사람은 한 사람도 없었던 것입니다. 고생의 목적에 부합된다면, 그리고 그 고생을 하나님과 관련맺지 않고 하였는데 결과적으로 하나님과 관련이 맺어진다면, 그는 완전히 신뢰받을 수 있는 입장에 서는 것입니다. 선한 선조와 관계를 맺지 않으면 그 고생은 아무리 역사적인 고생일지라도 자기가 담당하지 않으면 안 되는 것입니다. 여기에서 역사적인 죄악도, 그리고 새로이 가해지는 것도 방비할 수가 있는 것입니다.

이렇게 생각할 때 실로 그런 각오를 가진 한 사람의 남자가 나타난다면, 그는 세계적인 고생의 표적에 서는 것입니다. 영계도 원조하지 않습니다. 지상에서도 원조하지 않습니다. 사탄도 원조하지 않습니다. 그는 최고로 고독한 입장에 선 고독의 왕자(王者)이고 고생의 왕자인 것입니다. 그것이 자기를 위해서 그렇게 되었다면 동정할 사람은 한 사람도 없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것이 역사를 돌이켜 고생의 역사를, 그리고 고독의 역사를 탕감하기 위해 하는 고생이라고 하면 현세와 미래는 차치하고라도 역사과정에 있어서 뜻과 인연을 가졌던 영인체는 거기에 동원하여 원조하지 않으면 안 되는 것입니다. 그 수고는 만민을 위해서 해야 합니다. 이 현세의 지상의 사람들은 반대하지만, 어차피 양심적 지식을 통하게 되고, 또 그 지식을 통해 몇대 뒤에는 그분을 환영하지 않으면 안 되는 결정적인 운명의 입장에 서게 된다는 거예요. 반드시 세계는 환영하지 않으면 안 됩니다.

그 현세의 사람들이 만약 반대하는 입장에 선다면 그 반대한 가치에 비례해서 영계는 그들을 심판합니다. 더구나 미래의 후손들을 중심으로 십자가를 짊어지고 간다고 하면 그 십자가를 짊어졌던 사람은 절대로 망하지 않습니다.

그 역사적인 후손들은 반드시 그 숭고한 정신을 이어받지 않으면 안 됩니다. 그렇게 되지 않으면 하나님도 하늘도 아무것도 없는 것입니다. 그러한 세계적, 혹은 천주적인 고독의 왕자, 수고의 왕자로 서서 자기 스스로 모든 것을 담당하여 책임지고 해결하는 남자가 있다면, 거기에서 세계는 새로운 방향으로 재출발하지 않을 수 없게 됩니다.

그런 점에서 볼 때 선생님이 고생하였다는 것은 떠올리고 싶지도 않습니다. 그것은 당연한 입장입니다. 큰 것을 원하고 선한 목적관념이 넓으면 넓을수록, 그 입체성이 크면 클수록 그것은 당연한 일입니다. 타락세계에 있어서는 더구나 그런 입장에 서지 않을 수 없는 것입니다. 그것은 정해진 이치입니다.

우리들이 바라는 것은 고생을 점령하고 고난과 더불어 정면 충돌하는 것입니다. 고생길에 벗이 없다고 해서 탄식하지 말아요. 혹 내심의 결의없이 탄식하는 이가 있다면 그는 역사를 위해서 책임수행을 할 수가 없습니다. 이런 의미에서 예수님의 기도를 볼 때 ‘내 뜻대로 마옵시고 당신의 뜻대로 하옵소서’라는 기도는 있을 수 없는 것입니다. 통일교회 식구들의 정신의 근저(根底)는 이러한 입장에 서서 세계 어디에 가더라도, 고생과 박해를 받는 환경에 있어서는 그 내심의 기준을 확보하고 쓰러지더라도 망하지 않는 다는 것입니다. 다시 그 깃대를 들어 올리는 사람이 몇십 명, 몇백 명, 몇천 명이 생겨날 것입니다. 여러분은 오늘 이 의의있는 날을 맞이함에 있어 이 일을 잊어서는 안 되겠습니다.

그 과정에서 수많은 사람들이 반대를 받고 박해를 받았습니다. 혹은 유치장에 끌려가서 고문을 받았습니다. 그 고문의 극한이라는 것은 생사의 문제를 걸고 추궁하는 것이었습니다. 이 두 가지 중 어느 한 가지 길을 가지 않으면 안 됩니다. 그 목적을 위하여 선한 목적을 위하여 자기 자신의 육신은 망하더라도 강한 정신은 망하지 않습니다. 그럴 경우 그 부활의 길은 남습니다.

악의 입장에 선 사람은 자기의 육신이 망함과 동시에 정신도 공히 망합니다. 악을 행한 사람이 ‘아아, 악을 행한 이것은 언젠가 선으로서 나타날 것이다. 나라가 반대하고 세계가 반대하더라도, 네가 육신은 점령할지 모르지만 정신은 점령할 수 없다’고 할지 모르나 그렇게는 안 됩니다. 악의 벌을 받을 때에는 정신도 당연히 죽게 되는 것입니다. 아무것도 안 남습니다. 그것은 그것으로써 끝장입니다.

35-203
통일 정신
그러나 선의 입장에 설 경우에는 생사의 경지가 연결된다는 것입니다. 살아 남는 것입니다. 아무리 제압한다 해도 또 남습니다. 세계를 제패하는 것입니다. 역사과정을 통해서 강력하고도 견고한 정신적인 기준을 남기고 죽는다고 하면 그는 절대 망하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선한 것은 강한 것입니다. 역사에 굴복되는 것이 아닙니다. 역사를 굴복시키는 것입니다. 이것을 알지 않으면 안 됩니다.

개인을 두고 생각해 볼 때에 양심적이다, 틀림이 없다고 할 때에는 부모가 뭐라고 해도 자신만만합니다. 나라가 뭐라 한다 해도 자신만만합니다. 하나님이 뭐라고 해도 자신만만합니다. 그러나 잘못했을 경우에는 ‘어이!’ 하는 한마디로써 완전 함락됩니다. 그것은 망합니다. 그것은 망해요. 역사는 이러한 두 가지 내용의 인연을 중심으로 하고 교차하면서, 상하 반복운동을 하면서 발전해 오고 있다는 사실을 여러분은 알아야 합니다.

우리 통일 정신은 일본 사람이면 일본 사람을 중심삼고 일본을 위주한 국가를 세우기 위한 정신이 아닙니다. 세계, 아니 천주인 것입니다. 나아가서는 하나님의 해방이요. 그러면 하나님의 해방은 무엇을 중심으로 한 해방이냐? 사랑을 중심한 해방입니다. 절대적인 신념과 목표를 가지고 있다는 것은 멋진 것입니다. 아무리 죽는다 하더라도 이 정신은 자기에게서 빼어낼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것이 하나님이 바라시는 정신일 경우에는 하나님은 협조하지 않으면 안 되는 거예요. 원조하지 않으면 안 되는 거예요.

만일 공격하는 자가 있다면, 그 공격하는 자는 반드시 그 민족을 탕감할 수 있는 제물로 세워지는 조건이 됩니다. 그것을 반대하는 자는 그것이 정의로 세워질 때에는 그 자신만이 아니고 자식이면 자식, 손자면 손자 3대가 한꺼번에 굴복하는 영광의 장면은 반드시 우리 앞에 현현할 것입니다. 이러한 신념을 우리들은 가지고 있습니다. 거기에 있어서 죽는 다든가 고생한다든가 하는 것은 당연한 일입니다. 악의 세계에 있어서는 가는 곳마다 필연적으로 부딪치는 현상입니다. 그것은 자연현상과 같은 현상인 것입니다.

그것을 돌이켜서 우리가 가는 길에는 그런 박해를 받지 않고 가는 , 박해가 없는 인류를 맞이하고 박해할 수도 없는 국가를 맞이하는 자유스런 지구성을 우리들은 목표로 하고 해방운동의 기치를 들고 출발한 것이 우리 통일교회입니다.

우리들은 그것을 이룰 때까지 가는 것입니다. 아무리 죽음이 연달아 올지라도 우리들은 가는 것입니다. 일본의 젊은이도 가고, 미국의 늙은이도 갑니다. 남녀노소 할 것 없이 누구나 기뻐하며 갈 수 있는 길이 있다면 그 길은 최후까지 남아질 길인 것입니다.

지금까지 종교는 무엇을 목적으로 해 왔는가. 자신의 구원이라고 하는 문제를 중심으로 해 왔습니다. 그런 종교는 반드시 멸망합니다. 끝이 옵니다. 지금은 아무리 세계적으로 되어 있다 하더라도 그것은 반드시 다시 한 번 부활하지 않으면 안 됩니다. 자기 한 사람의 생명을 구하기 위한 종교와 기독교를 믿는 신자들의 목적이 어디에 있는 가? 자신이 구원받아 천국에 간다고 합니다. 그래서는 안 됩니다. 천국에 가는 데는 혼자 가서 무엇을 하겠어요? 만민을 데리고 가기 위해서 신앙을 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전도하지 말라고 해도 전도하지 않을 수 없는 것입니다. 선을 행하지 말라고 해도 행하지 않을 수 없는 것입니다. 그런 신앙, 그것은 자신을 의식한 구원이 목적이 아니고 민족을 위하여 자기는 이러한 신앙을 하고 세계를 위하여 이러한 신앙을 하는 것입니다. 더 나아가서는 하나님을 위하여 신앙을 하는 것입니다. 입장이 다른 것입니다. 입장이 달라요.

인간을 놓고 본다면 인간은 몇 억조도 되는 것입니다. 자신이라는 것은 몇 억조의 하나예요. 역사를 따라가면 따라갈수록 자신은 점점 작아지는 것입니다.

35-205
참된 신앙
그렇게 답답스러운 자기를 내세워서 그것을 구원할 목적으로 신앙을 한다니 그것은 누구에게도 바람직한 것이 못 된다는 거예요. 그보다도 세계를 위해서 해야 해요. 세계는 점점 발전해 가고 있어요. 지금은 36억이지만 때를 따라서 늘어갑니다. 점점 더 큰 무대가 전개되는 것입니다.

이런 것을 볼 때에, 선이라는 것은 자기가 후퇴해 가는 곳에서는 절대 안 됩니다. 자기가 대중을 위해 희생하고, 자기 스스로 수난의 길을 가고 자기 생애를 걸고 가는 사람은 남게 됩니다.

하나님의 그러한 수난의 환경을 자기에게 돌려 주지 않더라도, 자기 스스로 하늘을 위해서 고생의 짐을 짊어지고 가는 한 사람이 있다고 하면, 그 사람은 반드시 번영하게 됩니다. 오늘의 영광 오늘의 입장은 자기에게 주어진 절호의 환경이니까 자기 의지로 준비합시다. 거기서부터 망하지 않게 됩니다.

역사적으로 운명의 판단 기준이 그렇게 되어 있습니다. 망하는 기준은 자기보다 이하이고, 번영하는 기준은 자기보다 이상입니다. 그렇게 선한 입장에 설 때에 한하여 번영합니다. 이것은 철칙입니다.

오늘 이 말씀을 각자 내심에 확실히 하였다면, 그러한 마음을 가지고 이날을 맞이한다고 하는 사람은 이날을 축하할 자격을 가진 사람입니다. 그렇지 못하다면 이날을 축하할 자격이 없는 사람입니다.

선생님은 감옥에 끌려갈 때 ‘이제부터다. 나의 실력은 이제부터 나타난다’라고 하면서 내심으로 이러한 박해의 때를 바라보며 정면으로 부딪쳐 왔습니다. 그러한 모습이었습니다. 감옥에 들어가 몇 년간 복역을 하는 것이 문제가 아니라, 그것을 맞이하기 이전이 더욱 중대한 문제인 것입니다. 그 후의 모습은 어떻게 될 것인가. 그때 나는 ‘너는 천적인 재생의 동기를 바라고 멸망의 모습이 되지 않으면 안 된다’고 다짐했습니다. 그것은 역사를 위해서요, 시대를 위해서요, 또한 미래를 위해서입니다.

저쪽에서 원해서 하는 것이 아니라, 저쪽에서 원하든지 원하지 않든지 나는 이것을 담당해 간다고 하는 사람을 역사가 원하는 것은 당연합니다. 역사가 원하지 않아도 스스로 결정해서 그렇게 했을 경우, 이것은 천주에 받아들여지는 것입니다. 무슨 얘긴지 알겠어요?

자기 자신의 목적을 위해 이것을 했다면 그것은 받아들여지지 않습니다. 그러한 신념을 갖고 부딪쳐 간 결과에는 반드시 이런 결과가 옵니다. 이것은 여러분의 생애에 있어서도 이러한 운명의 길을 벗어날 수 없다는 거예요.

그것은 가정에 있어서도 그렇고, 민족 국가 세계의 주의에 있어서도 그렇습니다. 공산주의와 민주주의를 두고 볼 때, 다소 영토가 큰 국가가 승리한다 할지라도 그것을 결했을 때에는 역사상에 아무리 견고한 모습을 나타내더라도 그것은 역사 위에서 그 모습이 지워지고 맙니다.

이렇게 역사 진단의 표준을 확실히 알아서 여러분들은 지금부터 생애의 목표를 세워 가지 않으면 안 됩니다. 개인의 활동과 생활도 그렇지만 뜻길을 가는 데 있어서도 그렇게 가야 합니다. 그렇게 가는 사람은 절대 망하지 않습니다.

감옥에서도, 그보다 더한 깊은 속에 갇힐지라도 거기에는 무한한 하나님의 위로가 있습니다. 고독하고 고독해서 불쌍한 입장, 외적으로 보면 누구 하나 관심도 가져 주지 않는 입장이지만, 무한한 영계와 무한한 희망의 세계의 모든 주체의 원동력이 자신과 함께하고 싶어한다는 것을 체험하는 것입니다. 이러한 멋있고 절대 망하지 않는 역사의 기준이 우리들이 알지 못하는 역사의 배후에서 지금도 면면히 미래를 향해 움직이고 있는 것은 이것밖에 없는 것입니다. 그러한 견해에서 선생님은 지금 통일교회를 이끌고 있습니다.

내가 큰 문제를 해결하지 않으면 안 된다 할 때는 ‘아, 미스터 문은 그런 재능이 있으니까 쉽겠지’ 하겠지만 함부로 결정할 수 없는 거예요. 중대한 일이 있으면 있을수록 더욱 신중하게 해야 하는 것입니다. 조용한 밤중에도, 혹은 숨이 막히는 그 속에서라도 최후의 숨이 끊어지는 그 순간에라도 하나님의 섭리의 손길은 뻗쳐지고 있는 것입니다. 그 속에서 가만히 떠오르는 하나님의 지시는 언제나 있는 것입니다. 언제나 일신의 신념에 넘쳐서 자기도 모르게 눈물을 머금는 심각한 입장에 서서 무엇이든지 문의하는 마음으로 하나님에게로 나아가면 어느샌가 벌써 해결의 한계를 넘은 자신을 발견하게 되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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통일 정신을 가지고 싸워 나가라
이렇게 나가는 그 노정은 다른 사람들이 볼 때는 실패한 것처럼 보일 것입니다. 누가 보더라도 성공 못한다고 할 것이고, 그건 무모한 일이 될것이라고 하겠지만 그러나 그것은 반드시 이루어집니다. 기간의 장단의 차이는 있겠지만 반드시 그 결정은 천지의 도수가 잘못되지 않는 한, 이것은 반드시 이루어지고도 남습니다.

그러한 결의를 했을 경우 그 결의를 향해서 자신의 생명을 걸어야 합니다. 생명을 걸어도 이루지 못했을 경우, 자기 자손을 세워 유언이라도 하고 간다, 몇십 대, 몇백 대로 연장되더라도 이것을 이루고 만다고 하는 유언, 혹은 가르침, 혹은 어버이, 스승, 또는 주의가 있다면 그러한 주의는 미래의 세계를 창조하고도 남습니다.

자기 중심한 세계는 생겨나지 않습니다. 왜냐? 타락의 후손에 있어서는 그것은 몽상이고 공상인 것입니다. 이것을 생각할 때, 우리들은 이러한 고난의 시기에 있어서 부활의 일로를 개척하는 개척시대의 선각자라는 권위를 잊어서는 안 되겠습니다.

일본에 가더라도 일본 국민을 보면서 일본의 천황보다도 수상보다도 하나님이 일본 사람을 사랑해 주십시오 해야 합니다. 그들도 하나님에 의해서 사랑을 받지 않으면 안 됩니다. 사랑을 받아서는 안 될 사람이 사랑한다는 것은 참사랑이 아닙니다.

그런 입장에서 생각할 때 하나님은 이러한 심정에서 사랑할 것임에 틀림없습니다. 그렇다고 그런 입장에 서서 일본을 사랑한다고 한다면 일본의 중심자, 즉 정계, 재계, 일본 국가가 반대하더라도, 일본은 망하더라도 그런 입장에 서서 사랑한 그 주의는 남아집니다.

그러므로 금후에 일본에 있어서 통일주의는 반드시 문제가 된다는 신념을 가지고 있습니다. 왜냐? 이런 원점에 입각해 있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반드시 남습니다. 적이 공격해 오면 올수록 때가 왔다는 표시입니다. 환경이 무르익으면 무르익을수록 그것은 때가 왔다는 것을 나타냅니다. 여기에 있어서는 아이를 가진 어머니의 고통, 배에 들어 있는 아이를 낳을 때의 고통을 느낍니다. 그러나 그것을 지난 후에는 생각조차 못 했던 기쁨의 새세계가 전개되어 옵니다. 만일 어머니가 아이를 낳는 것과 같은 고통을 체험하지 못하는 사람은 기쁨을 백 퍼센트 받을 자격이 없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역사를 통해서 한 시대는 지나가고 새로운 한 시대가 신생이 시대로서 찾아오지 않으면 안 되는 것을 여러분은 너무나 잘 알고 있을 것입니다. 여기에서 누가 하나는 보내고 하나는 맞이하는 기수, 중심자가 되고 혹은 그러한 가정, 그러한 씨족, 그러한 민족, 그러한 국가가 되겠느냐 하는 것이 문제인 것입니다.

그것을 하늘에 돌리고, 만민에 돌리고, 미래를 위해 돌린다고 하는 주의를 가지고 자신을 그 속에 묻고 그 자체의 생활, 그 자체의 희생을 기뻐하는 사람이 있다면, 이는 죽어도 세계를 손에 쥐고 죽는 다는 것입니다.

죽은 그 사람의 정신은 누가 이끌어 가느냐? 이것은 자기가 끌어가지 않더라도 하늘이 끌어갑니다. 그러면 그 사람이 원하는 모든 환경은 언젠가는 그 사람의 주관권에 들어갑니다. 이렇게 해서 섭리의 발전의 도를 더해 왔다는 것을 여러분은 확실히 알았을 것입니다.

여러분은 일본에 돌아가서, 그리고 다른 나라 사람들은 각각 자기 나라에 돌아가서 이 정신의 기준을 중심삼고 싸워간다면, 수가 문제가 아닙니다. 선생님은 그 수를 바라는 것이 아닙니다. 그러한 한 사람, 한 가정, 한 씨족이 문제입니다. 그리고 한 국가가 문제입니다. 그런 하나의 국가가 있다면 세계는 어차피 거기에 포용될 것입니다.

우리는 그런 원대한 희망을 가지고 있습니다. 어디에 가더라도 외롭지 않습니다. 자신의 갈 길은 공식적으로 정해져 있습니다. 막상 죽는 다고 하더라도 그 죽음에 굴복하지 않습니다. 이러한 자신을 가지고 갈 것 같으면 어떠한 수난의 길도 우리에게 절대로 손상의 조건이 되지 않습니다. 그것이 도리어 약이 된다는 것입니다.

병을 앓아 본 사람은 병에 걸리는 것을 두려워하게 되어 있습니다. 한번 병에 걸려 본 사람은 병에 걸리지 않도록 주의를 한다는 거예요. 그런 것과 같이 수난을 겪은 사람이 오히려 그것이 약이 되었을 경우에는 그것을 자신의 새로운 인생의 인격으로 되살려 제2의 가치 있는 세계로 나아갈 수 있는 것입니다.

이런 사실을 기억에 남겨 앞으로의 시간을 잘 싸워 나갈 것을 부탁하는 바입니다. 특히 수난과 재생에 대해서 기억해 주기 바랍니다. (박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