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4-120 to 34-146: 본을 삼자

본을 삼자
1970.08.30 (일), 한국 전본부교회

34-120
본을 삼자
[기 도]

아버님 ! 오늘은 1970년 8월 30일, 이달의 마지막 안식일이옵니다. 내일은 8월의 마지막 날이오매 아버지께서 지금까지 저희를 보호하여 주신 것을 감사드리옵니다.

이해의 3분의 1을 남기고 있는 9월, 10월, 11월, 12월 이 기간에 있어서 저희들이 계획하는 모든 일들이 아버지의 뜻과 일치되게 하여 주시옵소서. 저희는 아버지의 섭리의 뜻에 남을 수 있고 도움이 될 수 있게끔 한마음 한뜻이 되어야 할 줄 알고 있사옵니다. 하오니 아버지께서 경륜하시는 뜻을 성취할 수 있게끔 저희들을 이끄시고 격려하여 주시옵소서.

아버지, 이 아침 여기에 모인 자녀들을 기억하여 주시옵소서. 남한 각지에 널려 있는 당신의 자녀들이 이곳을 향하여 마음을 다하고 있사옵니다. 당신의 뜻과 섭리의 내용을 중심삼고 당신이 소원하시는 뜻이 성취되게 하기 위하여 정성들이는 그들 앞에 당신의 자비와 사랑과 긍휼을 더하여 주시옵소서. 또한, 해외에 널려서 뜻을 위해 싸우고 있는 당신의 외로운 자녀들을 항상 지켜 주시옵소서.

마음으로 계시는 아버지께서 그들의 전체를 주관해 주셔야 되겠사옵니다. 영으로 계시는 당신께서 그들의 생명의 중심이 되시옵소서. 아무리 어려운 입장에 섰을지라도 당신과 함께하게 될 때는 그 어려운 환경을 극복할 수 있고, 모든 것을 성사하고야 말겠다는 신념을 가지게 됩니다. 그것을 생활에서 실감하고 아버지를 모시며 지낼 수 있게 허락하여 주옵길, 아버님, 간절히 바라옵고 원하옵니다.

이 아침 여기에 모인 당신의 자녀들을 기억하여 주시옵소서. 더우기 40일노정을 중심삼고 전도를 나갔던 사랑하는 딸들이 여기에 모였사옵니다. 저희들은 남달리 아버지의 뜻을 알았기 때문에 이 민족은 잠들어 있을지라도 저희들은 깨어 있지 않으면 안 될 것이옵니다. 이 민족은 쉬고 있으나 저희들은 노력하지 않으면 안 될 것이요, 이 민족은 자기를 위해 살지만 저희들은 공적인 일을 위해 살지 않으면 안 될 것이옵니다. 또한 이 민족은 이 나라 이 땅에 속해 있지만, 저희들은 아버님의 나라에 속해 있어야 되겠사옵니다.

어느 누가 아버지와 관계를 맺고, 선과 관계를 맺고 있다 하더라도 어느 곳에서든지 당신의 뜻을 증거하는 자가 되지 않고는 이 땅에 살 수 없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소수의 통일의 무리가 희생함으로 말미암아 민족이 살고 세계가 산다는 엄청난 사실을 알았기 때문에, 저희들이 남다른 생활을 하지 않으면 안 될 입장에 있는 것을 아옵니다.

한번밖에 없는 젊은 시절을 온갖 행락을 누리며 자기의 만족을 위해 살고 있는 저희들은 이런 꽃다운 시절에 당신의 뜻을 알았기 때문에 남과 같은 입장에 서지 못하고 남과 같은 길을 갈 수 없는 그런 생활을 하지 않으면 안 되는 당신의 아들딸 위에 당신의 무한한 자비와 사랑이 같이하여 주시옵소서.

아버지를 위하여 하는 일들은 효과가 즉각 나타나지 않는 것을 압니다. 아버지를 위하여 가는 길은 외로운 길이지만, 가면 갈수록 좁아지는 것이 아니라 가면 갈수록 넓어지는 길이요, 사망으로 인도하는 길은 반대 현상으로 나타난다는 것을 저희들이 알아야 되겠습니다. 지금 당장은 그 길이 무한히 행복스러워 보이고 무한히 넓어 보이지만, 그 길은 가면 갈수록 좁아진다는 것을 저희들이 알아야 되겠습니다. 그와 같은 사실을 아는 저희들 위에 당신이 축복하시옵소서.

여기에 참석하지 못한 자녀들도 있습니다. 전국에 널려서 뜻을 위해 이 시간도 수고하고 있는 당신의 아들딸을 기억하여 주옵소서. 더우기 이 시간에 당신을 향하여 온갖 정성을 다 바치면서 무릎을 꿇고 눈물을 흘리며 호소하는 기도를, 아버지, 들으시옵소서. 그 기도는 자기를 위하여 하는 기도가 아니라 민족을 위하여, 세계를 위하여, 당신을 위하여 하는 기도 이옵니다. 애절한 마음으로 호소하는 당신의 자녀들이 있거든 그 자리에 당신이 친히 같이하여 주옵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그들에게 당신의 소원을 분부하시옵고, 그들에게 당신의 은사를 나타내시옵고, 그들에게 당신의 실적을 남기시옵기를 간절히 부탁하고 원하옵니다. 아버지를 위해 효성의 도리를 다하는 것이 보람된 생활이요, 자랑스러운 일인 것을 느끼며 살 줄 아는 당신의 자녀들이 되게 하여 주옵길, 나의 아버지, 간절히 부탁드리고 원하옵니다.

이 아침 전체를 당신이 주관하여 주옵기를 부탁드리면서 참부모의 성호받들어 아뢰었사옵나이다. 아멘.

34-122
말 씀
세상 만사는 보다 나은 것을 위해서, 보다 가치 있는 것을 위해서 노력하고, 또 그것을 위해서 발전해 나가고 있는 것을 우리는 생활주변에서 많이 보게 됩니다.

34-122
하나님·인간·만물이 대하고 싶어하는 사람
여러분 자신을 두고 보더라도, 좀더 가치 있는 것을 갖기 위해서 가치 없는 것을 버리게 됩니다. 둘 가운데 어느 것이 좋으냐고 묻게 될 때, 즉 좋고 나쁜 것을 가리게 될 때에는 보다 가치 있는 내용이 어떤 것에 더 많이 개재되어 있느냐 하는 문제를 두고 선택하게 되는 것입니다. 물건을 선택할 때도 그렇게 합니다. 사람을 대하는 것도 마찬가지입니다. 친구 중에서도 어떤 사람과 가까이하려 하고, 혹은 어떤 사람과 인연을 맺으려고 하느냐? 자기보다 가치 있고, 보다 선하고, 보다 높고, 보다 넓은 내용을 지닌 사람에게 접근하려고 합니다. 또, 그 사람이 가진 내용을 어떠한 인연을 통해서라도 갖고 싶어하는 것이 우리 인간의 마음입니다.

이렇게 볼 때 하나님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 인간이 물건을 대하는 데에 있어서나 사람을 대하는 데에 있어서 보다 가치 있는 것을 중심삼고 자기가 거기에 순응하고 일치되고자 하는 이런 마음을 가진 것처럼, 우리 인간을 지으신 하나님도 역시 마찬가지라는 것입니다. 보다 가치 있는 것을 중심삼아 가지고 하나님의 사랑이 집중되고, 하나님의 소원이 집중되고, 하나님의 모든 뜻이 집중된다는 것은 두말할 필요도 없습니다.

여기에 있는 여러분들이나 선생님도 같은 입장이지만, 이런 입장에 있는 우리들도 보다 나을 수 있는 가치를 지닌 사람, 즉 만민이 요구하는 보다 넓고 깊고 높은 안팎의 내용을 지닌 사람이 있다면 그 사람에게 가까이하고자 할 것이고, 하나님도 그 사람에게 가까이하고자 하실 것입니다. 하나님도 가까이하고 싶어하시고 인간도 가까이하고 싶어한다면, 인간을 위해 지은 만물도 그에게 가까이하지 않을 수 없다는 사실을 우리들이 알 수 있습니다. 이렇게 보게 될 때 인간은 만물의 영장이라고 말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면 전체 앞에 본을 삼을 수 있는 중심적인 존재는 얼마나 가치 있는 존재가 되어야 하느냐 하는 문제를 두고 볼 때, 그는 무한히 가치 있는 존재가 되지 않으면 안 됩니다. 하나님이 계시다면 하나님 자신도 본이 되는 그 사람을 취해 가지고 그와 더불어 하나되지 않으면 안 되는 것입니다. 그러니 그 사람은 절대적인 가치를 포괄하고도 남을 수 있는 존재가 되지 않으면 안 된다는 것입니다.

이렇게 볼 때 하나님도 그 인간과 더불어 하나되고, 모든 만물과 우주도 그 인간과 더불어 하나될 수 있는 그런 본이 되는 사람이 어떠한 사람일 것이냐 하는 것입니다. 그 참된 사람이 바라는 이상적인 표준, 그 참된 사람의 생활, 그 참된 사람의 인격을 이루는 기준, 혹은 우리 사람으로서 바라는 이상적인 모든 내적인 요소를 지닌 그 사람의 기준이 무엇이냐 할 때, 그것이 슬픈 것이 아닌 것은 분명합니다.

34-123
본이 되는 자리
누구나 슬픈 것은 싫어합니다. 식구나 어려움이 자신과 관계 없기를 바라는 것입니다. 우리는 어떤 가정이 환난을 당하는 것을 보면 그 가정을 동정하게 됩니다. 동정이라는 것은 자신의 것을 그들에게 주는 것입니다. 만약 어떤 사람이 불행하다 할 때, 그가 불행하지 않은 입장에 가기 위해서는, 그 불행한 요건을 제거하기 위해서는 주위의 도움을 받아야 하기 때문에 그런 자리는 원치 않는 것입니다.

그러면 진정 행복한 자리는 어떤 자리냐? 언제나 줄 수 있는 자리입니다. 주는데 슬픔들 주는 것이 아니라, 언제나 기쁨을 줄 수 있어야 합니다. 이것은 모두가 바라는 것입니다.

만유의 중심이 될 수 있는 본이 되는 사람이 있다 할진대 그 사람은 어떠한 자리에서 본이 될 것이냐? 슬픈 자리는 아닐 것입니다. 또, 악한 자리도 아닐 것입니다. 그러면 어떤 자리일 것이냐? 참된 자리요, 기쁜 자리일 것입니다. 또한 그 자리는 무한히 행복한 자리일 것입니다. 그 행복은 유한권내의 한계선내에서의 행복이 아니라, 무한한 자리에서의 행복이어야 된다는 것입니다. 그러한 가치의 내용을 지닌 사람이 이 땅에 있었느냐 하게 될 때 없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아들로 이 땅에 오셨던 예수님 자신은 어떠했느냐? 물론 만유의 본이 될 수 있는 분이라 하더라도 악한 세상에 처해 있었기 때문에 주어야 할 입장이었습니다. 예수 자신이 상대하고 있는 세상이 슬픈 것이기에 언제나 주어야 하는 것입니다. 주고 나면 높던 입장이 낮아지게 됩니다. 물이 한 동이 가득 있더라도 퍼주고 나면 줄어드는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아무리 높은 입장에 있는 예수님이라 하더라도 슬픈 환경을 대하게 될 때는 주어야 하는 것입니다. 주고 나면 어떻게 되느냐? 그 자체가 기쁜 환경에 처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예수님 자신은 왜 기쁠 수 있는 자리에 서지 못했느냐? 주고 나면 반드시 어려운 환경에 부딪히고 기쁠 수 있는 내용이 감소되기 때문입니다. 이 감소된 것을 어떻게 보충하느냐가 문제입니다. 만약에 이것을 보충하지 못하게 된다면 그는 말할 수 없는 불행을 느낄 것이요, 말할 수 없는 고독을 느낄 것이요, 말할 수 없는 고충을 느낀다는 것입니다.

주고 나서 이것을 보충할 수 있는 단 하나의 길은 무엇이냐? 슬픈 사람을 위로해 주고 그 사람과 하나되어서, 그 사람에게 자기가 도움을 줌으로 말미암아 그를 슬픈 자리에서 보다 좋은 자리로 올려 주고 좀더 나은 자리로 끌어 주는 것입니다. 주고 난 후에 자기가 준 것을 보충받을 수 있다면, 그는 행복한 사람입니다. 행복은 거기서부터 시작되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 말하면, 10 만한 자리에 있던 어떤 슬픈 사람이 자기로 말미암아 20 만한 자리로 올라왔다면 자기 자신은 10의 내용이 감소되었지만, 그 사람은 10만큼의 올라온 내용을 지닌다는 것입니다. 이렇게 감소된 것이 보강되면, 그 10이라는 내용은 자기로 말미암아 발전되는 것입니다. 자기를 중심삼고 손해나 감퇴가 아니라, 자기를 중심삼고 발전 현상이 벌어지게 될 때에는 그만큼 기쁨이 찾아온다는 것입니다.

또, 100 만한 일을 계획했다고 해서 그 일이 한꺼번에 이루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10만큼이 이루어지고, 20만큼이 이루어지고, 30, 40, 50, 60, 70, 80 이렇게 해서 100까지 그 이루어지는 가능성이 높아짐에 따라 소망하던 것이 점점 가까와지게 되고 그걸 보고 사람들은 기쁨을 느끼는 것입니다. 이런 점에서 볼 때, 우리가 말씀의 제목처럼 본을 삼을 수 있는 사람이 될 수 있느냐 하는 것이 문제입니다.

34-125
본이 되는 사람의 인격 기준
그러면 본이 뭐냐? 본이 될 수 있는 사람은 어떤 사람이냐? 낮은 것을 높여 주고 자기 자신도 높아질 수 있는 자리에 서는 사람입니다. 그러지 않고는 본이 되지 못하는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본이 될 수 있는 사람은 상하에도 필요한 사람이요, 좌우에도 필요한 사람이요, 전후에도 필요한 사람입니다. 이쪽에도 보강해 줄 수 있고, 저쪽에도 보강해 줄 수 있는 사람입니다. 보강해 주고 마는 것이 아니라, 보강해 주고 나서 보충받을 수 있는 입장입니다. 이런 입장에 서지 못하게 되면 그 사람은 본이 되지 않는 것입니다.

본이 될 수 있는 그 기준이라는 것은 동양에서만 본이 되는 것이 아니라 서양에서도 본이 되어야 됩니다. 또, 지상세계에서만이 아니라, 하늘나라에서도 본이 되어야 됩니다. 한때나 혹은 어느 환경내에서만 본이 되는 것이 아니라 전체를 대신한 입장에서 본이 되어야 됩니다.

그러면 본이 될 수 있는 사람은 어떤 사람이냐? 상대에게 영향을 미치고 그것으로 손해보는 것이 아니라 도리어 하나를 더 받을 수 있는 사람입니다. 이런 점에서 볼 때 우리 인간들보다도 더 높은 가치와 연결되어 있어야 된다는 것입니다. 나무를 예로 들어 보면, 나무에는 뿌리가 있고 줄기가 있고 가지가 있습니다. 굵은 가지는 뿌리로부터 많은 영양분을 받기 때문에 수많은 가지가 뻗어 나가고 수많은 잎이 피는 것입니다. 이렇게 굵은 가지는 가지 중의 중심 가지로서 나타나는 것과 마찬가지 이치인 것입니다.

여러분 자신을 중심삼고 많은 사람과 인연을 맺었을 때, 그들이 여러분의 본을 받아 가지고 여러분이 좌하면 좌하고, 우하면 우하고, 동하면 동하고, 정하면 정할 수 있는 입장에 서야 됩니다. 그러나 그것으로 끝나서는 안 됩니다. 일시적이 아니라 영속적인 내용을 지녀 가지고 자기의 영향을 전체 앞에 미칠 수 있고, 자기 자신도 영향을 받을 수 입는 입장에 서야 됩니다. 그렇게 되면 무한히 발전하지 않을 수 없는 것입니다. 그런 입장에 있는 나무라면 그 나무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자기가 상대하고 있는 존재들이 높아져야만 자기도 상대적 영향을 받아서 존재가치가 높아지는 것입니다. 이러한 입장이 되면 반드시 참된 인연이 점점 발전하게 되는 것입니다.

34-126
하나님은 여러분이 슬픈 사람들의 위로의 대상이 되길 바라신다
타락한 인간들은 악한 세상에 살고 있고 슬픔 가운데에 있는 것을 우리는 알고 있습니다. 그러면 뜻을 중심삼고 사는 여러분들은 슬픔을 갖고 있는 그 사람들 앞에 무엇을 갖고 본이 되어야 하느냐? 슬픔을 위로할수 있는 내용을 주지 않고는 기쁨을 줄 수 없는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슬퍼하고 있는 상대의 기준이 10이라면 그 10의 기준 이상인 11, 12 혹은 20의 기준으로 채워 주게 되면 그 슬펐던 사람은 기뻐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이 슬픔을 제거시키기 위한 하늘의 섭리를 추진해야 할 여러분이 제일 문제시해야 할 것은 무엇이냐? 여러분이 하나님과 얼마나 가까이 있고, 또 하나님을 모시는 데 있어서 언제나 기뻐하실 수 있도록 모시느냐 하는 것입니다. 나로 말미암아 하나님이 슬퍼하시는 것이 아니라 나로 말미암아 하나님이 기뻐하셔야 된다는 것입니다. 내가 느꼈던 어떠한 슬픔보다도 고독을 느끼고 서글픔을 느꼈던 하나님께서 그것을 푸시기 위해 하나님 스스로 보충하시려 할 때, 내가 그것을 대신 보충시켜 드릴 수 있는 위로의 대상이 된다면 이는 하나님 앞에 절대적으로 필요한 사람이 아니겠느냐는 것입니다.

여러분이 슬픈 사람들에게 있어서 위로의 대상이 된다면 그것이 얼마나 가치 있는 일이겠습니까? 그렇기 때문에 ‘천국은 네 마음에 있다’고 했습니다. 천국은 다른 곳에 있는 것이 아니라 내 마음 가운데 있는 것입니다. 천국을 소유한 사람은 슬픔으로 사는 사람이 아니라 기쁨으로 사는 사람입니다. 또한 유한한 가치를 추구하고 사는 것이 아니라 무한한 가치를 추구하고 사는 것입니다.

우리는 끝이 있는 생애노정을 가고 있지만 끝이 있는 생활을 하는 것이 아니라 끝이 없는 생활을 하는 것입니다. 횡적인 생활에 있어서도 횡적인 생활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반드시 종적인 깊은 내용과 상관되어야 합니다. 종적인 깊은 내용이 수시로 횡적 환경에 영향을 미침으로써 환경을 보다 빛낼 수 있는 입장에 서게 될 때에, 그 사람은 반드시 그 환경에 있어서 생활적으로 중심이 되는 것입니다.

이러한 의미에서 우리가 이 슬픈 세상, 사탄 세상, 악한 세상을 보다 나아지게 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주어야 됩니다. 그러면 여기에서 여러분이 무한히 줄 수 있는 보급로를 가지고 있느냐 하는 것이 문제가 됩니다. 만약에 본이 되는 것이 있다면 그 본은 어느 한 곳에만 적용되는 것이 아닙니다. 절대적인 내용을 가지고 모든 환경을 초월해서 표준이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것을 중심삼고 금을 긋고, 그것을 중심삼고 형태를 이루어서 그것에 일치시키기 위해 노력해야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도 여러분을 중심삼아 가지고 그와 같이 본이 되는 사람이 되어 주길 바라시는 것입니다. 악하면 악할수록 그 환경에 있어서 그런 가치를 지닌 사람을 더 요구하는 것입니다. 왜냐 하면 슬픈 환경일수록 본이될 수 있는 그 무엇을 더욱 필요로 하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자체가 되어서 환경을 순화시켜 중심 존재가 기뻐하게 되면 그 환경에 처해 있는 사람들도 본이 되는 사람을 중심삼고 기뻐할 수 있게 됩니다. 어제보다도 오늘이 기쁘고, 오늘보다도 내일이 기쁠 수 있는 내용을 그 중심으로부터 전해 받을 수 있다 할진대 이는 하나님이 사랑하고 하나님이 같이할 수 있는 인간으로서 만인 앞에 있어서 본이 되는 사람이 아닐 수 없는 것입니다.

34-128
외적으로 단조로우나 내적으로 깊고 높은 생활을 하신 예수
예수님을 볼 때, 예수님의 생활은 단조로왔습니다. 30여년 동안 목수인 요셉 가정에서 조수로서 협조하던 그의 생활은 아주 단조로왔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외적으로는 변화무상(變化無常)한 생활을 하지 않았지만, 단조로운 생활의 이면에 있어서 그는 그의 모든 환경을 극복하고도 남을 수 있는 복잡하다면 복잡하고, 넓다면 넓고, 깊다면 깊은 내용을 지니고 살았던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수난의 길과 고독의 길도 그 내적인 깊은 생활로 메우고도 남을 수 있었던 것입니다. 자기의 고통만을 메우는 것이 아니라 남의 고통까지 메워 줄 수 있는 내적인 영향력을 지녔기 때문에 하나님은 새로운 역사를 창조하는 데 있어서 그를 본이 될 수 있는 인물로 세우지 않을 수 없었다는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예수님은 외적으로는 단조로운 생활을 했지만, 내적으로는 복잡하고 깊고 높은 생활을 했다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이것을 알아야 됩니다.

예수님의 외적인 생활은 요셉 가정이란 제한된 환경을 벗어날 수 없었고, 또 그 일터에서 벗어날 수 없는 생활이었지만 내적으로 요셉 가정을 넘고 이스라엘 민족을 넘고 세계를 넘고 더 나아가서는 천국에서 살 수 있는 넓고 높고 깊은 내용을 지닌 생활을 하였던 것입니다. 이렇게 외적인 단조로운 생활을 메우고도 남음이 있는 생활을 해 나온 연고로, 하나님은 예수님을 어떠한 인간보다 본이 될 수 있는 인간으로서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도 예수와 관계를 맺지 않을 수 없었고, 예수님을 협조하지 않을 수 없는 입장에 선 것입니다. 그러므로 말미암아 예수님은 그 누구도 느끼지 못하고, 그 누구도 깨닫지 못한 깊고 넓고 높은 새로운 세계관을 중심삼고 출발하게 되었던 것입니다.

그러면 예수님이 그와 같은 자리에 서기 위해서 어떻게 했느냐? 일상 생활에 있어서 외적인 생활 즉 횡적인 생활만 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과 깊은 관계를 맺기 위한 종적인 생활까지 한 것입니다. 그 누구도 하지 못하는 이런 이중적인 생활을 했다는 것을 여러분이 알아야 됩니다. 다시 말하면, 줄 수 있는 생활만 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으로부터 그 높고 큰가치를 영원히 보급받을 수 있는 기반이 있었기 때문에 어려운 환경, 슬픈 환경을 감당하고도 남을 수 있었다는 것입니다.

34-129
본 되는 사람이 되면
우리 통일교회 교인들은 교회에 들어와서 맨 처음에 뜻을 대했을 때는 기쁨 가운데서 출발했습니다. 세상의 모든 것이 나를 중심삼고 생겨났다고 느꼈을 것입니다. 은혜를 받으면 받을수록 자기를 중심삼고 모든 것이 부활되고, 자기를 중심삼고 모든 것이 관계를 맺게 된다고 느꼈을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자기가 기뻐하면 만물도 기뻐하는 것으로 느끼고, 자기가 슬퍼하면 만물도 같이 슬퍼한다고 느낀 때가 있었을 것입니다.

그런 때에는 아무리 악한 세상이라도 악한 세상으로 보이는 것이 아니요, 아무리 슬픈 세상이라 하더라도 슬프게 보이는 것이 아닙니다. 그 슬픈 세상에 기쁨이 깃들 수 있는 것을 바라보고 내일의 희망과 내일의 책임을 다짐하는 생활을 하게 되는 것입니다. 여러분들은 과거에 그러한 것을 체험하였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때의 그 기준과 지금과는 다릅니다. 다를 수밖에 없습니다. 그때 느꼈던 감각이라는 것은 평면적으로 느껴지는 감각이 아니라 입체적인 감각이었던 것입니다.

사람을 대하더라도 그 사람의 나쁜 점을 보는 것보다도 좋은 점을 보는 눈이 더 밝아지고, 느끼는 데에 있어서도 나쁜 면을 느끼는 것보다도 좋은 면을 느끼는 감각이 빨라지는 그러한 체험을 한 사람이 많습니다. 그러한 생활을 기반으로 해서 더 높고 더 넓은 내용을 중심삼아 가지고 살아가야 할 텐데도 불구하고 사회생활이나 신앙생활에 있어서 과거에 하던 행동을 습관적으로 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감별기능을 전부 상실하게 됐다는 것은 심히 안타까운 일이 아닐 수 없는 것입니다.

혼자 뜻을 대해 나가는 도중 은혜로운 자리에 임하게 되면 혼자 기쁨을 느끼는 것입니다. 남들이 볼 때 이해하지 못하리만큼 기쁨이 찾아오게 된다는 것입니다. 봄날을 맞이하여 모든 초목이 꽃을 피어 향기를 풍기는 것과 같은 때가 있다는 것입니다. 혹은 가을에 모든 곡식이 무르익어 주인의 손길을 바라고 있을 때, 그것을 추수하는 기쁨을 흠뻑 느끼는 것과 같은 때가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한 때를 갖지 못한 사람은 불쌍한 사람입니다.

하나님과 가깝게 되고 하나님과 하나되는 가치적인 자리에 나가면 나갈수록 그는 영원히 본이 될 수 있는 사람인 것입니다. 그 본이 될 수 있는 중심이 결정되는 날이면 만유의 존재가 그와 더불어 화동하고, 그와 더불어 즐거이 상응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런 자리에 나가면 나갈수록 슬픈 세상일지라도 슬프게 보이는 것이 아닙니다. 내가 대하는 모든 슬픈 것이 나를 지배하는 것이 아니라 슬픔을 초월하여 그 슬픔 가운데서 유발되는 기쁨이 나를 지배하는 것입니다. 그런 자리가 인간에게 있어서 본이 될 수 있는 자리가 아니겠느냐, 그런 자리가 내 마음에 천국을 소유했다는 자리가 아닐 것이냐 하는 것입니다.

여러분, 여기에 부인들이 많이 있습니다만 여러분 자신의 마음이 그래야만 여러분의 가정도 그런 가정으로 이끌 수 있는 것입니다. 만약 여러 분이 푸른 안경을 끼고 세상을 보면 세상의 모든 만상이 푸르게 보일 것입니다. 좋고 나쁜 결과는 상대로 말미암아 나타나는 것이 아니라 나 자신의 마음에 따라 나타나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이것을 지탱할 수 있고, 주관할 수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34-130
진정으로 선한 사람이 되려면
이러한 점에서 볼 때, 진정으로 선한 사람은 어떤 사람이냐? 악한 사람이 있으면 그 사람의 악한 점을 꼬치꼬치 캐고, 악이 열만큼 있으면 열만큼 미워하는 사람은 선한 사람이 아닙니다. 그 악을 잊어버리고 그 악가운데에 깃들어 있을 선의 가치를 악 이상으로 평가해 낼 수 있는 사람이라야 합니다. 그래야만 그 악한 사람을 선한 입장에서 상대하여 새로운 입장으로 인도할 수 있고, 새로운 입장에서 그에게 행복의 요건을 제시할수 있는 것입니다. 그럼으로 말미암아 그 사람이 나를 본으로 삼고 따라올 수 있는 것이요, 나를 중심삼고 관계를 맺게 되는 것입니다.

상대가 악하다고 해서 ‘악(惡)’ 그 자체를 저주하고, 악이 열만큼 있으면 그 이상으로 악하게 평가해 가지고 저주하는 입장에 서 가지고는 이땅 위에 ‘선(善)’ 그 자체가 있을 수 없다는 것을 여러분은 알아야 됩니다. 그렇기 때문에 선한 사람은 어떤 사람이냐? 악한 사람도 사랑하고 슬픈 사람을 대하면 그 슬픔을 그 사람의 것으로서 두어 두는 것이 아니라 자기 슬픔같이 느낄 수 있는 사람입니다. 자기가 그 슬픈 자리에 들어가 슬픔을 탕감해 주고 자기의 기쁨을 그 슬픈 사람에게 줄 수 있는 입장에 서게 된다면 그 사람은 어떠한 환경에서도 본이 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면 그런 사람이 되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되느냐? 평면적인 습관이나 관념을 초월해야 됩니다. 다시 말하면 ‘나는 저 사람을 위해서 태어났으니 저 사람을 위해서 제물이라도 되겠다’ 또 ‘나는 악한 사람을 선한 사람으로 만들기 위해서 태어났다’고 생각해야 합니다. 사는 것도 그들을 위해서 산다는 관념을 가지고 생활하는 사람이라면, 그 환경에 어려운 문제가 있을 때 그 문제를 그냥 그대로 남겨 두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자신의 필생의 사업으로 생각하고 모든 악을 제거시켜 선하게 만들 것입니다.

선하게 되기 위해서는 악을 남의 것으로 생각하는 것이 아니라 자기의 아픔으로 느끼고 밤을 새워가며 그들을 위해 눈물로 기도해 주고, 그들의 죄를 위하여 속죄의 제사를 드리는 마음을 갖고 살아야 됩니다. 그런 사람은 악한 사람의 본성의 중심 존재가 되지 않을 수 없는 것입니다.

34-131
우주적 본이 되셨던 예수 그리스도
이런 입장에 섰던 사람이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평면적인 입장에서 시대적인 구주일 뿐만이 아니라, 역사시대를 거쳐 과거의 구주이고, 과거뿐만이 아니라 미래의 구주입니다. 그러므로 앞으로 올 인간의 역사적인 모든 순간들을 보게 될 때 과거의 사람도 이런 슬픔을 가졌고, 현재의 사람도 이런 슬픔을 가지고 있고, 미래의 사람도 이런 슬픔을 가질 것이어늘 하면서 인류의 슬픔을 몸소 체험하셨던 것입니다.

그런 인류을 위해서 내적 중심과 외적인 중심의 자리에 서서 그들을 이해하고 그들을 동정하고 그들의 모든 어려움을 자기의 어려움으로 여겨 눈물을 지으면서 몸부림치던 분이 예수 그리스도가 아니었느냐는 것입니다. 우리 인간들은 그런 자리에 선 사람을 중심삼고 기필코 하나가 되려고 하는 것을 우리는 알고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좋은 사람, 즉 선한 사람은 어떤 사람이냐? 자기를 희생하면서 남을 도와 주고 남을 용서해 주고, 남에게 어려움이 있으면 그 어려움을 자기의 어려움으로 생각하는 사람을 우리는 흔히 선한 사람, 또는 좋은 사람이라고 평하는 것입니다. 그런 사람에게 접근하고 싶어하는 것이 우리의 마음이 원하는 길이요, 우리의 마음이 찾아가는 길인 것을 알아야 됩니다. 그런 본이 되는 사람이 있다면 그 사람으로 말미암아 선은 발전하는 것입니다.

왜 자식이 부모를 좋아하느냐? 부모는 자식이 아무리 나쁠지라도 그대로 내버려 두는 것이 아니라 그 자식을 끌어서 좋은 자리로 옮겨 주고자 하기 때문입니다. 나쁜 자식으로 내버려 두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그 마음이 나쁜 자리에 있는 자식보다도 더 간절하기에 부모를 좋아하는 것입니다. 이렇듯 부모는 자식 앞에 있어서 선한 입장인 것입니다.

이와 마찬가지로 인간이 하나님의 본을 받아 가지고 하나님을 절대적인 선의 중심으로 추구하고, 또 하나님과 더불어 모든 것을 수습하고 모든 것을 결정받고자 하는 것은 하나님이 부모의 입장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자식인 인류가 슬퍼하면 그 인류를 그냥 놔 두는 것이 아니라, 슬퍼하는 골짜기까지 파고 들어가서 그 슬픔을 자기의 슬픔으로 바꿔 자기가 대신 슬퍼하고자 하는 입장에 서려는 분이기 때문에, 우리는 그분을 본을 삼아서 그분과 완전히 하나가 되어 함께 살고 싶어하는 것입니다. 그분과 떨어지고 싶지 않은 거예요. 영원히 영원히 같이 살고 싶은 것입니다.

34-132
본 되는 사람이 되려면 하나님과 가까운 자리에 서야
하나님과 가까우면 가까울수록 문제는 단조롭습니다. 하나님과 나 둘밖에 없는 것입니다. 그러나 단조로운 그 내용을 분석해 보면 그것은 전체를 대신할 수 있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것은 만우주의 본이 되고, 천사람, 만사람을 대할 수 있는 내용이 되기 때문입니다. 선을 발판으로 하여 사방으로 관계를 맺을 수 있는 내용이 있기 때문에 나 자체가 거기에 파고 들어가면 파고 들어갈수록 무한한 자극을 느낄 수 있고, 무한히 새로운 면을 접할 수 있는 것입니다. 인간은 거기에서 행복을 느낄 수 있는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추구하는 이유는 그러한 하나님이기 때문입니다.

오늘날 학자라든가 문학인, 혹은 세계적인 인물들은 그러한 종적인 입장이라든가 아니면 인간의 본성 앞에, 본이 되는 중심 앞에 가까이 가면 갈수록 입체적인 감각을 느낄 수 있는 사람들입니다. 그 감각을 직접 느끼게 되면 그 내용을 확실히 표현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렇게 해서 표현된 것은 세계적인 문학 작품이 아니 될 수 없고, 세계적인 학설이 아니 될 수 없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본이 될 수 있는 참된 자리에 서기 위해서는 하나님과 가까운 자리에 서지 않으면 안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영원한 존재이며 무한한 존재이기 때문에 그 참다운 본성과 함께 무한한 내용을 지녀야 됩니다. 그리하여 주고 나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천번 만번 주고도 또 줄 수 있는 마음을 지녀야 됩니다. 이러한 것이 문제 되는 것입니다.

여러분들이 신앙생활을 하는 데 있어서, 하나님을 찾아가는 노정에 있어서 본으로 삼을 수 있는 사람, 즉 ‘그는 본이 될 수 있는 사람이다’라고 할 수 있는 사람은 어떠한 사람일 것이냐? 내가 서러움을 당할 때 그 서러운 것을 해소해 줄 수 있는 사람일 것입니다. 또 기쁨을 보다 영원히 남길 수 있는 사람일 것입니다. 그래야 본이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그렇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중심삼고 느낀 기쁨은 일시적인 것이 아닙니다. 언제까지나 남아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이 은혜 가운데서 느낀 기쁨, 몽시라든가 계시, 혹은 하나님을 믿는 사람들과 같이 기뻐하던 그것은 일시적인 것이 아닙니다. 그것은 일생 동안 잊혀지지 않는 것입니다. 그것은 왜 그러냐? 참에 가깝기 때문입니다. 참일수록 영원합니다. 참일수록 본이 되는 자리 이기 때문에 전체와 더불어 관계를 맺을 수 있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잊을래야 잊을 수 없는 것입니다.

우리가 신앙생활을 하는 데 있어서 하나님이 보시기에 우리 통일교회 교인들은 등불과 같은 입장입니다. 암흑 같은 세상에서 중심적 등불이 되려면 그 등불의 빛이 얼마나 밝으냐 하는 것이 문제 됩니다. 일시적으로 켜졌다가 꺼지는 등불이 되는 것이 아니라, 날이 가면 갈수록 더 큰 불빛으로 나타날 수 있는 존재가 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런 존재가 되기 위해서는 본 되는 주체를 중심삼고 상대적 관계를 맺어야 합니다. 주체와 상대적 관계를 맺어 가지고 둘이 합쳐서 서로 주고 받으면 더 밝은 빛을 발할 수 있는 것과 마찬가지로, 주고 받을 수 있는 인연이 넓으면 넓을수록 감퇴되는 것이 아니라 보다 가치적인 빛을 발할 수 있는 존재가 되는 것입니다.

신앙생활을 하는 데 있어서 하나님은 신앙생활이 해이해지고 후퇴하는 사람을 바라는 것이 아니라 점점 높아질 수 있는 사람이 되기를 바라실 것입니다. 그러니 여러분은 내적인 심정의 세계, 외적인 생활에 있어서 넓고 높아 가지고 하나님의 친구가 되고, 하나님이 임재하실 수 있는 하나의 성전이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이런 참된 중심이 되는 입장에 서게 되면 찾아오신다는 것입니다.

여러분이 부부생활하는 데 있어서 남편이 외적인 면에서 본이 되는 사람이라 할 때 외적인 입장에서는 행복할는지 모릅니다. 그러나 부부 사이의 모든 것이 외적인 입장으로 끝나는 것이 아닙니다. 외적인 행복의 요건을 요구하는 것도 물론이지만, 내적인 행복의 요건을 아내에게 미칠 수 있어야 합니다. 그런 남편이라면 좋은 남편이 아닐 수 없습니다. 아내도 내적인 면에서만 칭찬받을 수 있는 아내로 끝나서는 안 됩니다. 외적인 면에서도 칭찬받을 수 있는 아내가 되어야 됩니다. 부부는 서로 본이 될수 있는 입장을 취해야 된다는 것입니다.

34-134
외적 생활과 내적 생활을 잘 병용하라
그 본이 될 수 있는 것을 생각해 봅시다. 외적인 생활은 단조롭습니다. 여러분이 아침을 먹고 나서 일을 하고, 점심을 먹고 나서 또 일을 하고, 그리고 저녁을 먹고 잠을 잡니다. 이렇게 단조롭습니다. 그 다음에는 아이들을 기르는 일입니다. 이것도 되풀이하는 것이기 때문에 단조로운 것입니다. 그러나 그것이 단조로운 것으로 끝나는 것이 아닙니다. 인간의 외적인 생활은 단조롭지만 그 외적인 생활의 이면에는 넓고 높고 깊은 복잡다난한 내적인 생활의 일면이 있습니다. 외적인 모든 단조로운 환경을 자유자재로 움직이며 밀고 나갈 수 있는 내적인 역량을 가진 사람이 아니고는 틀림없이 그 환경에서 낙망하고 절망하게 될 것입니다.

외적인 생활에 있어서 어느 정도 기반이 잡혀졌다고 해서 그것으로 행복해 하는 부부는 본이 될 수 없는 부부입니다. 외적인 생활이 행복하다 하더라도 그 외적인 생활을 보다 빛내고 보다 행복스러운 것으로 나타내기 위해서는 넓고 깊은 내적인 인연을 가져야 됩니다. 이것이 필요한 것입니다. 안팎이 갖추어져야 된다는 것입니다. 일면만 가져서는 안 됩니다. 혹은 평면만 가져서도 안 됩니다. 입체적인 내용을 가져야 된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문제가 되는 것입니다.

우리의 하루 생활을 볼 때 열두 시간 이상 눈을 뜨고 활동합니다. 24시간 중에 여덟시간 정도 잠을 잔다고하면 나머지 열여섯 시간은 무엇을 위해 사느냐는 것입니다. 전부 다 외적인 문제를 중심삼고 생활한다면 내적인 것은 무엇으로 보강하느냐? 외적 생활을 움직여 나갈 수 있는 내적 인연을 무엇으로 보강할 것이냐는 것입니다.

단조로운 생활이 습관화되어 가지고, 그것이 인간의 삶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은 세상에 속한 사람에 지나지 않는 것입니다. 그 속된 생활환경을 개척하고, 그 속된 환경에 보다 고차적인 가치의 내용을 부여하는 생활을 할 수 있어야 합니다. 그래야만 악한 세상에서 선의 입장을 결정지을 수 있는 것입니다. 외적인 생활을 지배하는 생활을 하지 못하는 사람은 신앙인이라고 할 수 없습니다. 하늘의 사람이라고 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외적 생활은 단조로왔지만, 내적으로는 민족을 위하고 세계인류를 위하는 생활을 했습니다. 그러한 내적 삶의 가치를 품었고, 그것을 느꼈고, 또 그것을 체험하면서 살았다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그런 넓고 깊고 높은 내적인 생활을 하셨기 때문에 역사시대에 있어서 인류의 친구가 될 수 있었고, 인류역사에 본이 되어 가지고 자기를 닮아 나오게끔 수천년의 역사를 감화시켜 나온 것입니다.

내가 어떤 말을 하고 어떤 행동을 하면서 사느냐 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가정이면 가정에서 어머니로서 자녀를 대하는 생활과, 아내면 아내로서 남편을 모시고 사는 것은 어떤 생활이냐? 그 생활이라는 것은 일반화된 생활입니다. 모두가 일반화된 코스를 여러분은 밟고 있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선입니까? 선이 될 수 있습니까? 이러한 우리 인간의 생활은 본을 삼을 수 없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것이 하나님과 더불은 것이고, 그것이 보다 가치 있는 것이라면 본이 되는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보다 가치 있고 본받을 수 있는 생활을 할 수 있는 것은 하나님과 더불어 가까이 있는 것입니다.

34-136
사탄세계 앞에 본이 되는 가정이 되라
하늘편 사람은 어떻게 살아야 되느냐? 가정에 있어서 아내가 남편을 대할 때 평면적으로만 대해서는 안 됩니다. 내적인 생활을 기반으로 해서 대해야 됩니다. 남편이 아내를 대하는 것이 어제보다 좀 달라졌다고 해서 아내도 남편에게 좋지 않게 대해 주어서는 안 됩니다. 차이가 있어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좋게 대해 주면 나는 보다 높은 내정적인 자극을 느껴야 되고, 나쁘게 대해 준다고 해도 그것을 비판하기보다 그 나쁜 것을 보충해 줄 수 있는 자체가 되어야 합니다. 그런 아내는 남편 앞에 필요한 아내입니다. 남편도 역시 아내 앞에 그럴 수 있는 사람이 되어야만 그 가정이 발전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서로 물어 뜯고, 흠잡고, 반목 질시하는 가정은 퇴보하게 되고 파괴되는 것입니다. 즉, 헤어지지 않을 수 없다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이것을 알아야 됩니다.

그러므로 가정을 중심삼고 본이 될 수 있는 기준은 부부가 내적인 인격을 중심삼고 서로 가치적인 내용을 인정하고 모자라는 점을 보강해 주면서 살아가는 것입니다. 그래야만 그 가정이 외적인 사탄의 세계에 본이될 수 있다는 것을 여러분은 알아야 됩니다. 자기 남편을 그렇게 대하는 아내, 아내를 그렇게 대하는 남편으로서 끝날 것이 아니라 날이 가면 갈수록 범위를 넓혀 가지고 입체화시켜야 합니다. 자기 가정의 기뻤던 것을 만인간이 필요로 한다는 것을 알게 되면 그것을 세계 앞에 번식해서 발전 시키기 위해 노력하는 입장에 서야만 하나님을 대신한 선의 중심, 선의 본이 될 수 있는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이것을 알아야 됩니다.

이러한 생활을 하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되느냐? 자기의 생활 전체를 하나님과 결부시켜야 합니다. 나쁜 일이 있으면 그것을 인간끼리 해결 지으려고 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하나님과 더불어 해결지으라는 것입니다. 신앙으로 해결지으라는 것입니다. 또, 좋은 일이 있을 때 자기를 중심삼고 좋아해서는 안 됩니다. 하나님과 더불어 좋아할 수 있어야 합니다. 나와 너 사이에 수수(授受)가 시작되었지만 언제나 하나님과 나와의 사이에서 먼저 인연이 되고 동기가 되었다는 생각을 해야 합니다. 그렇게 모든 문제를 하나님과 더불어 관계를 맺고, 하나님과 더불어 청산지으려고하는 생활체제를 세워 나가는 사람은 반드시 발전할 것입니다.

34-137
사탄도 피해 가는 사람이 되자
우리 생활 가운데는 탕감의 시대가 있습니다. 정상적인 생활에서나 비정상적인 생활에 있어서 불행한 자리도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 불행을 불행으로 소화해서는 안 됩니다. 불행한 처지에 부딪쳤을 때 나 혼자 그것을 해결지을 것이 아니라, 하나님과 관계를 맺어 가지고 소화해 나가야 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나에게 불행한 일이 있게 되는 것은 무엇 때문이냐? 하나님이 탕감의 역사를 해 나오시기 때문입니다. 탕감의 역사는 민족과 세계를 걸어 놓고 하는 것입니다. 탕감의 역사를 하는 데는 선한 사람이 제물이 되지 않고는 탕감할 수 없습니다. 그것이 복귀의 내용인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선한 나 자신이 불행한 자리에 섰다면, 그것은 내가 만민을 살리기 위해 짐을 진 것으로 알아야 합니다. 나 자신이 이런 짐을 지는 것은 하나님의 사랑에 대한 응당한 도리입니다.

이렇게 하나님과 더불어 생활하고 하나님과 더불어 소화시켜 나가는 사람이 있다면, 그가 대하는 모든 일은 하나님과 함께 시작되는 것이요, 하나님과 함께 끝을 맺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 사람은 무한히 주고도 남을 수 있고, 언제든지 무한한 관계를 맺을 수 있는 주체가 되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이것을 생각해야 합니다.

오늘 하루가 좋다고 해서 ‘하나님, 오늘은 참으로 감사합니다’ 해서는 안 됩니다. 또 슬프다고 해서 ‘하나님, 오늘은 참으로 슬펐습니다’ 이렇게 해서도 안 됩니다. 좋으면 좋은 대로 감사하고, 나쁘면 나쁜 대로 감사해야 합니다. 나 자신에게는 마이너스가 될는지 모르지만 공적인 분야에 있어서 전체 앞에 좋을 수 있다면 전체를 위해서 좋아해야 됩니다. 나로 말미암아 전체가 좋을 수 있다면 좋아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렇듯 선은 전체 앞에 좋은 것을 주는 것입니다. 보다 귀하고 보다 넓은 범위의 것을 주고자 하는 것이 선이기 때문에, 나는 비록 외롭고 고통스러운 자리에 있다 하더라도 감사할 줄 알아야 됩니다. 상대의 세계에 선을 주기 위해서는 그런 고통도 감사할 줄 알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여러분도 알다시피 정석온씨의 모친이 김성도씨인데, 김성도씨와 정석온씨는 감사하는 패들입니다. 이래도 감사하고 저래도 감사하는 패들입니다. 가만히 생각해 보면 그것이 옳은 것입니다. 감사할 줄 아는 사람에게는 사탄이 침범하지 못합니다. 사탄이 침범했다가도 도망가는 것입니다. 설사 사탄의 침범을 받더라도 ‘전체를 탕감시키기 위해서 하나님이 나에게 시련을 주었구나’ 이렇게 생각하는 것입니다. 그런 사람을 한 번 대하고, 두 번 대하고, 세 번 대하고…, 대하면 대할수록 자신이 망하는 것이기 때문에 사탄은 대하라고 해도 안 대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것을 피해 가려고 하면 할수록 사탄은 그를 따라가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본래 좋은 것만을 대하시는 하나님이셔야 할 것인데도 불구하고, 인간 시조가 타락함으로 말미암아 슬픈 입장으로 바뀌어졌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이 인간들과 하나되기 위해서 그 슬픔을 몽땅 도맡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슬픈 표정을 짓지 않고, 슬프지 않다 하는 입장에 서지 않고는 선한 하나님, 기쁨의 하나님이 될 수 없습니다. 기쁨의 출발을 가질 수 있는 하나님이 될 수 없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은 지금까지 슬픈 이 땅을 위해서 수고로운 노정을 걸어오신 것입니다. 그렇지 않고 수고스럽고 고통스러우니 못 갈 길이라고 생각했다면 선은 출발하지 못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아무리 힘들고 어렵더라도 이 길이 선을 위해서 가는 길이요, 보다 빛나는 선의 가치를 찾기 위한 길이기 때문에 이 길을 가셨다는 것입니다. 이 길이 죽음의 길이라도 거기에서 무한한 행복을 찾고, 영원한 기쁨을 찾으며 갔던 것입니다. 출발이 기쁨의 출발이 되지는 않았지만 슬픈 내용을 기쁨으로 감싸고 기쁨으로 소화시켜 나아갈 수 있는 하나님을 중심삼지 않고는 기쁜 천국을 이룰 수 없었던 것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은 자신의 기쁨이나 행복을 위한 기도는 하지 않았습니다. 겟세마네 동산에서 기도할 때 ‘아바 아버지여 할 수만 있으면 이 잔을 내게서 지나가게 하옵소서. 그러나 내 뜻대로 마시옵고 아버지 뜻대로 하시옵소서’라고 하셨습니다. 아버지의 뜻이 무엇이냐? 만민의 슬픔을 도맡으라는 것입니다. 만민의 죽음과 고통을 도맡으라는 것입니다. 예수가 희생되더라도 만민에게 행복을 제시하고자 하는 것이 아버지의 뜻이라는 것입니다.

이런 아버지의 뜻 앞에 있어서 무한히 고통스럽고 무한히 두렵고 최후의 장벽에 부딪쳤을 때는 절망스럽지만 그 자리에서 절망할 것이 아니라 그 절망을 넘어서서 희망을 가지라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자신이 가는 길이 망하는 길이 아니라 새로운 출발의 세계를 위해서 고개를 넘는다는 신념을 가지고 그 고개를 넘었기 때문에, 거기서부터 새로운 기쁨의 기독교 역사가 출발되었던 것입니다.

34-139
나쁜 것을 흡수하여 생명의 요소로 바꾸자
여러분의 생애 가운데서 3분의 2 이상이 말할 수 없는 비참한 생활, 말할 수 없는 고통의 생활이라면 그 3분의 2의 생활을 모두 떼어버릴수 있느냐? 안 됩니다. 떼어버릴 수 없는 것입니다. 이것은 반드시 따라다니는 것입니다.

우리는 타락한 후손이기 때문에 선조로부터 죄악에 대한 보응의 결실로 태어났습니다. 그러므로 우리의 생애에는 높고 낮음이 있는 것입니다.

그러면 우리가 낮은 것은 버리고 높은 것만 취할 수 있느냐? 그럴 수는 없습니다. 모든 것을 응당히 내 운명으로 받아들여 가지고 높은 것에 기쁨이 있다면 그 기쁜 내용을 중심삼아 가지고 절망에 떨어진 슬픔을 끌어 올려야 됩니다. 그럴 수 있는 기쁨의 여력, 소망의 여력을 지닐 수 있어야 됩니다. 그러한 입장에서 신앙생활을 해야 하는 것이 오늘날 타락한 우리 인간의 생의 노정입니다.

여기서 여러분이 알아야 할 것은 ‘나는 사랑의 본을 세워야 되겠다. 생활의 본을 세워야 되겠다. 생명의 본을 세워야 되겠다. 인격의 본을 세워야 되겠다. 내 가정의 본을 세워야 되겠다. 혹은, 사회와 국가에서 본을 세워야 되겠다’고 할 때, 거기에는 좋은 것만 있는 것이 아니라 좋은 것보다는 나쁜 것이 더 많다는 것입니다. 3분의 2 이상이 나쁜 것입니다. 좋은 것은 나타나지 않습니다. 신문의 사회면을 보더라도 좋은 기사 보다는 나쁜 기사가 많다는 것입니다. 거의가 나쁜 기사만 집어넣는다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이 세상을 소화하고 선한 세계를 이루겠다는 사람들이 이러한 것에 밀려 다니고, 이러한 것에 쫓겨 다니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것을 삼켜서 소화해 가지고 영양으로 삼을 수 있어야 합니다. 그래 가지고 태연자약한 하나님의 내적인 선을 심어 가지고 악의 요소들을 거름으로 하든가, 영양소로 하든가 해서 발전할 수 있는 동기로 삼아야 합니다. 그래야 생명력을 가질 수 있는 것입니다.

더러운 것은 나쁜 것이지만, 생명이 자라는 데 비료로서 흡수하게 될때는 그 더러운 것도 필요한 것입니다. 더러운 거름을 뿌린 곳에 씨앗을 심어도 씨앗에게는 상관이 없기 때문입니다. 이 씨앗이 더러운 잿더미면 잿더미, 거름더미면 거름더미에 뿌리를 박아 가지고 그것을 흡수하여 생명력을 지니게 될 때는, 그 거름이 생명체를 성장하게 하는 요인이 되는 것입니다. 이처럼 여러분에게도 시련과 고통이 있다 하더라도 그 시련과 고통을 소화시킬 수 있는 주체적인 역량만 갖춘다면 만고에 빛나는 인격체가 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오늘날 우리 통일교회도 악한 세상을 향해서 가는 노정에 있습니다. 그길 가운데에는 통일교회의 행복이 있고, 통일교회의 선한 기준이 있지만 그 행복과 선한 기준은 먼저 나타나지 않습니다. 그것은 반드시 탕감의 길을 가야 하고 책임과 사명의 길을 가야 하기 때문에 먼저 좋은 것으로 나타나는 것이 아니라 악하고 슬픈 것으로 나타나는 것입니다. 좋은 것만으로 나타난다면 누구나 다 갈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기에 슬픈 것으로 나타나는 것입니다.

그 슬픔은 교단적인 슬픔이지만 민족을 대신할 수 있는 슬픔이요, 세계를 대신할 수 있는 슬픔입니다. 그 슬픔이 크고 높고 넓을수록 통일교회를 세계화시키기 위한 탕감인 것입니다. 통일교회를 망하게 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이렇듯 모든 것을 소화시킬 수 있는 주체적인 역량을 갖고 고개를 넘는 날에는 통일교회는 세계적인 기반을 닦을 수 있는 것입니다.

34-141
세상에 본이 되어야 할 통일교회
여러분에게 늘 극복하라고 하는 이유는 어디에 있느냐? 참고 넘어가면 소망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참고 넘어가는 데 있어서 울고 불고 하며 넘어가는 것이 아닙니다. 극복이라는 것은 어렵더라도 어렵지 않는 모습으로 넘어가는 것입니다. 슬프더라도 슬프지 않는 모습으로 넘어가야 된다는 것입니다. 그것이 참된 극복입니다. 마지못해 넘어가는 것이 아니라 참고 넘어가는 것입니다. 이를 악물고 참고 넘어가는 것입니다. 외롭고 슬프고 고통스럽더라도 기쁨으로 소화하고 넘어갈 수 있어야만이, 악한 것도, 지옥도 천국화시킬 수 있는 것입니다. 그래야 참된 신앙인으로서 본이 될 수있는 것입니다. 또한 세상의 개인적인 본이 될 수 있는 기반이 된다는 것입니다. 더 나아가 단체적인 기반이 될 것이 아니냐 하는 것을 여러분이 알아야 합니다.

여러분이 70년 내지 80년을 산다고 볼 때 그 가운데 3분의 2가 슬픈 생활이라고 한다면, 이 3분의 2를 어떻게 해야 될 것이냐? 하나님을 중심삼고 기쁜 생활로 만들어야 됩니다. 천국화시켜야 된다는 것입니다. 천국은 주면서 사는 곳입니다. 하나님도 주어야만 되는 것입니다. 부모는 자식에게 주어야만 되는 것입니다. 좋은 것을 주고 나서도 더 좋은 것이 있으면 그것을 또 주고 싶어하는 것이 부모의 마음입니다. 그렇지 않아요? 애기들에게 아무리 때때옷을 왜 입히고, 아무리 좋은 것을 먹였다 하더라도 그것으로 만족하는 것이 아니라 더 좋은 것을 해주었으면 하는 것입니다. 주고 나서 더 좋은 것을 주고 싶어하는 것이 부모의 마음이자 하나님의 마음입니다. 그러므로 여러분의 생애에 있어서 3분의 2가 불행한 것이라고 할 때, 이것을 어떻게 소화할 것이냐 하는 것이 문제라는 것입니다. 사람에게는 누구나 고개가 있습니다. 그 고개를 무너뜨려 가지고 소화시킬 수 있는 자격을 갖추었느냐 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만약에 하나님이 여러분에게 상금을 주신다면, 상금을 주는 그 자리가 어디일 것이냐? 만민이 보는 자리에서 상금을 주실 것이냐? 아닙니다. 물론 거기에서도 줄 수 있습니다. 하지만 그 반대의 자리에서도 줄 수 있는 것입니다. 수많은 사람들이 좋다고 하면서 따라가는 그런 자리보다는 최후의 자리에서 주신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에게는 하나밖에 없는 보물이라면 혼자에게만 주고 싶은 것입니다. 모든 사람이 따라오면 싫어한다는 것입니다. 모든 사람들이 떨어져 나가더라도 살아 남은 자, 죽음의 고비에서도 살아 남은 사람에게 주고 싶어 하신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이 상금을 어디에서 받을 것이냐? 여러분이 이 문제를 결정해야 합니다. 자기에게 고통이 온다고 해도 절망해서는 안 됩니다. 기쁜 자리에서 상금을 받는 사람도 있을 것이고, 슬픈 자리에서 상금을 받는 사람도 있을 것입니다. 기쁨을 느끼면서 은혜를 받는 사람도 있을 것이고, 슬픔에 들어감으로 말미암아 은혜를 받는 사람도 있을 것입니다. 그것은 할 수 없는 것입니다. 상하관계 전후좌우관계가 어우러져 있기 때문에 모두가 같지 않다는 것입니다.

어떠한 책을 읽었을 때도 갑이라는 사람은 무한한 감명을 받고 그것을 절대적인 가치로 알았는데 을이라는 사람은 ‘그거 뭐 그저 그렇구만’ 하고 아무 감동도 느끼지 못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것은 왜 그러냐 하면 감각의 방향이 다르기 때문입니다. 읽는 처지가 다르기 때문에 그 책이 아무리 좋다고 해도 감동이 안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대하는 데에도 어떤 사람은 기쁜 자리에서 하나님을 대할 수 있고, 어떤 사람은 슬픈 자리에서 하나님을 대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은혜도 여러 가지가 있는 것입니다. 성신도 불 같은 성신, 물 같은 성신, 구름 같은 성신, 비단 같은 성신이 있다고 하지요? 모두가 다르다는 것입니다. ‘갑이라는 사람은 행복하게 생활을 하는데 나는 왜 이렇게 고통을 당할까’ 하고 생각하겠지만, 고통을 당한다고 해서 불행한 것은 아닙니다. 도리어 얼마든지 더 행복할 수가 있는 것입니다. 어느누구보다 더 나을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럴 수 있다는 거예요.

지금은 우리 통일교회가 수난의 길과 고통의 길을 가고 있지만 이것은 불행한 것이 아닙니다. 도리어 기성교회보다 행복한 것입니다. 그들보다 한 발 앞섰기에 그러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 악한 세상에 있어서, 혹은 미래의 세계에 있어서는 본이 될 수 있다는 것입니다. 또한 만인에게서 숭앙을 받을 수 있다는 것입니다.

고통스러운 가운데에서도 행복을 느끼면 그 사람이 제일 행복한 사람입니다. 그것은 고통을 당하는 것이 아닙니다. 행복스런 자리에서 좋아하는 사람은 고통스러운 자리에 들어가게 되면 타락하기 쉽고 떨어지기 쉽지만 아예 밑으로 내려가서 행복을 찾아 나오는 사람은 떨어질래야 떨어질 수 없는 것입니다. 이런 사람들에게는 가면 갈수록 행복이 찾아드는 것입니다. 그렇게 알고 여러분은 어려운 생활을 하라는 것입니다. 어려운 생활을 하는 가운데서도 ‘아이구 좋다’ 할 수 있어야 합니다. 사탄은 항상 좋은 자리에 들어가는 것이기에 좋은 것은 순간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어려운 자리, 슬픈 자리를 소화시켜 나갈 수 있는 역량을 가진 생활이 신앙생활을 하는 데 있어서 은혜로운 생활, 건강한 생활이라는 것을 여러분이 알아야 됩니다.

34-143
탕감은 은사의 자리에 옮겨 주기 위한 것
그렇기 때문에, 슬픈 일을 당하더라도 그 슬픔을 슬픔으로 소화하는 것보다도 하나님과 더불어 기쁨으로 소화하는 것을 당연한 일로 알아야 된다는 것입니다. 국가와 세계를 위해 탕감의 노정을 간다고 생각하면, 어떠한 어려움을 당하더라도 기쁘게 됩니다. 세계의 탕감을 위해 하나님이 나에게 내려 주신 은사의 자리라고 하게 된다면, 그 사람이 세계와 직접 관계 없다고 하더라도 국가와 세계적인 가치의 자리에 들어가는 것입니다. 국가와 세계를 위해 눈물을 흘리면서 기도하고, 말없이 어려움을 극복하면서 감사하게 되면 국가와 세계적인 가치의 자리에 들어간다는 것입니다.

은혜를 주지 않아도 은혜를 차지할 수 있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일을 잘하게 하기 위해서 은혜를 주었는데도 불구하고 그 일을 하지 못하면 도리어 은혜를 잃어버리는 것입니다. 그러나 은혜를 받지 못한 사람이 자기가 은혜를 받은 것으로 소화해 가지고, 세계를 위하여 자기 생명을 걸고 일을 하고 하나님 앞에 감사하게 되면 은혜는 그 사람에게 옮겨지는 것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죽고자 하는 자는 살고 살고자 하는 자는 죽는다’고 한 것입니다.

남의 것을 빼앗는 자리는 웃고 춤추는 자리가 아닙니다. 보다 가치 있는 내용을 공급받는 자리는 웃고 좋아하는 자리가 아니라 긴장해야 하는 자리라는 것입니다. 긴장하는 자리. 그러면 긴장하는 자리는 어떠한 자리냐 하면 슬픔과 고통이 엇갈리는 자리입니다. 모든 것을 맺고 끊는 자리인 것입니다.

예수님이 죽어서 어디에 갔었습니까? 이 땅에서 십자가에 죽은 것만으로도 억울한데, 죽어서 3일 동안 어디에 갔었습니까? 지옥에 갔었습니다, 지옥. 그것이 시험입니다. 인간에게는 죽음이 최고의 공포인데, 예수님에게는 지옥에 가는 것이 최고의 공포의 대상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면 예수님은 그 지옥에서 공포의 주인이 되었느냐, 아니면 행복의 주인이 되었느냐 하는 문제를 두고 볼 때 예수님이 3일 동안 지옥에 가서 무엇을 했겠습니까? 지옥의 고통을 극복할 수 있는 자신이 되는 것을 문제시하였다는 것을 여러분은 알아야 됩니다.

이런 점에서 볼 때 신앙하는 사람들은 악한 세상, 혹은 슬픈 세상에서 그 악과 더불어 흘러가지 않아야 되고 그 슬픔과 더불어 흘러가지 않아야 됩니다. 도리어 그 악을 막고 그 슬픔을 가로막아서 여기에 기쁨의 조건을 제시할 수 있어야 합니다. 거기에 있어서 악한 사람들이 우리를 필요로 하기 때문에 그 환경에서 중심적인 존재가 되면 본이 되는 사람이 될 수 있다는 것을 여러분은 알아야 됩니다.

그런 의미에서 하나님은 우주의 본이 되는 중심존재라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만민의 고통을 탄식하며 절망된 모습으로 바라보고 계시는 것이 아니라, 그 고통을 다 극복하고 새로운 소망의 주인으로 나타나실 수 있는 분이시기 때문에 인류의 본이 되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이것을 알아야 됩니다.

34-145
하나님을 본받아 나가자
여러분이 신앙생활을 하는 데 있어서 자기에게 제일 좋은 것을 빼앗길 것입니다. 그러나 그것을 빼앗긴다고 해서 불행한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제물이 필요하시다면 제일 좋은 것을 드려야지요? 제일 좋은 것을 제물로 드려야 되기 때문에 제일 좋은 것을 빼앗긴다는 것입니다. 왜 빼앗기느냐 하면 여러분이 제물을 드릴 줄 모르니까 하나님이 대신 제물로 삼기 위해서 빼앗아 갈 수가 있다는 것입니다.

이렇게 생각하게 되면 어려움을 어려움으로써 끝내는 것이 아니라, 그 어려움을 기쁨으로 맞이할 수 있는 동시에 그 기쁨이 떨어지지 않고 공고한 토대가 되어서 하나님 앞에 남아질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그 기쁨의 출발을 보기 위해서 자기에게 어려운 고비가 온다는 것을 여러분이 알아야 됩니다.

말을 할 때 맺고 넘어가야 된다고 하는데, 무엇을 맺고 넘어가야 되느냐? 그 맺는 것이 어려운 것입니다. 맺으려면(판서해 놓고 설명하심) 이 꼭지가 저 꼭지로 가고, 저 꼭지가 이 꼭지로 와야 합니다. 반대로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래야 맺어지는 것입니다. 그렇지요? 마찬가지입니다. 나쁜 것 같지만 좋은 것이 열매 맺는다는 것입니다. 교체되는 것입니다. 엇바뀌는 거예요. 사탄이 하나님편에 가고, 하나님이 사탄편에 가게 된다는 것입니다. 바꿔치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맺는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닙니다. 그러나 엇바꾸기 위해서는 할수없는 것입니다.

여러분의 생활에 있어서 맺는 때가 있습니다. 여러분은 어떤 원형을 그리게 된다는 것입니다. 몇 대, 혹은 수십 대, 수백 대, 수천 대를 통해서 맺고 가는 것입니다. 선조가 악하면 악할수록 매듭이 많은 것입니다. 매듭이 작으면서 많다는 것입니다. 그렇지만 선조가 선하면 선할수록 매듭이 크고 많지 않습니다. 그 매듭은 자기를 위한 것이 아니라, 민족을 위하고 국가를 위한 제물적인 매듭이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는 반드시 그렇게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천국은 어디에 있느냐? 천국은 네 마음에 있다고 했습니다. 내 마음속에 천국이 들어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닙니다. 천국은 반드시 생활의 역경과 사탄세계를 무너뜨리고 나서야 내 마음 속에 들어오는 것입니다. 그래서 사탄의 세계를 무너뜨리기 위해서 탕감의 역사가 벌어지는 것입니다.

여러분이 그것을 알고 뜻을 중심삼고 나아가는 데 있어서 슬픔을 기쁨으로 소화시켜 나가야 하겠습니다. 하나님께서 만민에게 본이 되셨던 거와 마찬가지로 우리들도 슬픔과 악을 소화하여 기쁨과 영광의 모습이 되어야 겠다는 것입니다. 또한 우리 앞에 나타나시기 위하여 수난의 길을 극복해 나오신 하나님이기 때문에, 우리들도 그 하나님을 본을 삼아 가지고 그와 같은 입장에 서서 신앙생활을 해 나가야 되겠다는 것입니다. 그렇게하여 세상에 증거함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아들딸이 될 수 있다는 것을 여러분은 알아야 되겠습니다.

34-146
기 도
아버지, 신앙하는 사람들의 생활은 이중적인 싸움을 지속하는 것이옵니다. 횡적인 싸움뿐만이 아니라, 종적인 싸움도 해야 할 가중된 길이 신앙인의 길인 것을 저희들은 알고 있습니다.

아버지, 저희의 일생 중에서 슬프고 외롭고 고통스러운 고빗길이 아무리 많다 하더라도 저희들은 아버지와 더불어 이 길을 극복해 나가야 되겠습니다. 슬픔으로 출발하였던 것을 아버님 앞에 기쁨으로 수습할 수 있는 자체가 되지 않고는 선의 결과를 가져올 수 없음을 아옵니다. 슬픔으로 시작한 길이 고통의 결과를 초래했다면, 그 슬픔으로 인하여 모든 것이 청산되지만 그 슬픔 끝에 기쁨이 남아진다면, 결국은 기쁨으로 출발할 수 있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슬픔과 기쁨이 엇바뀌는 내 생의 싸움터에 있어서 최후에 남겨야 할 것은 이 기쁨이옵니다. 이 기쁨을 남기지 않고는 천상세계에 계시는 아버지 앞에 갈 수 없다는 것을 저희들이 알아야 되겠습니다. 최후까지 슬픔으로 남아지게 되면 아버지 앞에 갈 수 없다는 것을 생각하게 될 때, 모든 악을 극복하고 소화시킬 수 있는 주체적인 역량을 가지고 살지 않으면 안된다는 것을 저희는 확실히 알아야 되겠습니다.

단조로운 외적 생활이 행복한 것이 아님을 아옵니다. 하오니 단조로운 그 모든 외적인 환경을 극복하고 개척할 수 있는 선의 주체력을 저희 자신에게 보강시켜 주시옵소서. 아버님, 저희들은 모든 일을 아버님과 의논하고, 아버님과 동행하고, 아버님과 더불어 싸우면서 가야 하겠습니다. 또한 그 길이 신앙생활을 하는 길인 것을 저희들은 아옵니다.

교회에 있는 것만이 아버님 앞에 가까이 하는 것이 아니라 도리어 사회에 나가 싸우는 것이 아버님과 가까이 하는 것임을 알아야겠습니다. 즉, 내 사적인 생활에 있어서 아버님과 같이 사는 생활을 하지 않고는 오늘날이 땅 위에 천국을 건설할 수 없다는 것을 저희들이 확실히 알아야 되겠습니다.

아버님은 지금까지 역사시대를 거쳐 오면서 사망의 세계, 슬픔의 세계, 수난의 세계를 대하여 슬퍼하시는 아버지가 아니셨습니다. 당신께서는 그 모든 것을 극복해서 그 가운데 소망을 심고, 그 가운데 내일을 약속할 수 있는 희망의 자리를 다짐해 나오셨사옵니다. 또한, 남아지는 그 자리에 기쁨의 동기를 심어 놓음으로 말미암아 기쁨이 출발할 수 있는 기원을 마련하는 일을 역사과정을 통해 거듭해 나오셨다는 사실을 저희들은 알아야 되겠습니다.

아버지께서 새로운 역사를 출발하게 될 때는 슬픔으로 출발하는 것이 아니라, 모든 것을 극복하고 난 후 여기에 가치 있는 내용을 가지고 기쁘게 출발하신다는 사실을 두고 볼 때, 저희들 신앙자의 생활도 그래야 되겠사옵니다. 아버지를 닮아야 되겠기 때문에 수난의 고빗길이 찾아올 때 저희들은 그 수난의 고빗길을 슬픔으로 대하는 것이 아니라, 이것이 왜 나에게 왔는가를 생각해 보고 이것이 나를 위해 찾아온 것인가를 알게 될때는, 나를 중심삼고 완전히 소화하고 나를 중심삼고 완전히 일치시켜야 되겠습니다. 그리하여 모든 것을 완전히 하늘 것으로 바꿔칠 수 있는 최후의 조건이 되어야 하겠습니다. 열만큼의 슬픔이 있으면 그 열만큼의 슬픔을 나의 손해로 생각하는 것이 아니라, 열만큼의 기쁨을 유발할 수 있는 자극적인 동기가 되고, 자연적인 동기가 될 수 있도록 해야 된다는 것을 저희들이 알아야 되겠습니다.

우리의 입장에서 아버님을 중심삼고 무한히 받을 수 있고, 아버지를 중심삼고 무한히 줄 수 있어야 되겠사옵니다. 주는 데는 악한 사람에게까지도 다 주어서 그 준 것들을 선의 결실로 모을 수 있는 자신이 되어야 된다는 것을 알고 있사옵니다. 주어서 메꾸어야 할 구렁텅이가 아무리 크다 하더라도, 고통과 수난의 양이 아무리 많다 하더라도 감사의 마음과 기쁨의 마음으로 모으고 남을 수 있어야 하겠사옵니다. 그리하여 그 슬픔이 끝나는 날, 기쁨의 출발을 했다는 흔적이라도 남겨 두지 않고는 아버님의 것으로 출발할 수 없는 것을 확실히 알아야 되겠사옵니다.

이와 같이 생활하는 사람은 선한 사람은 물론이요, 악한 사람도 그를 좋아할 것입니다. 이런 분이 바로 타락한 인간을 대해 나온 본연의 중심 이요, 본이 되시는 주체인 아버지이신 것을 저희들이 알아 가지고 사망의 세계인 슬픈 이 땅에서 아버지와 같은 모습으로 살아갈 수 있는 당신의 자녀들이 되게 하여 주시옵기를, 아버님, 간절히 바라옵고 원하옵니다.

아버지를 본을 삼아 가지고 복귀의 기원이 되는 본을 남겨야 되겠사옵니다. 본이 될 수 있는 생명의 길을 가야 되겠사옵니다. 또한 아버지의 심정을 본삼는 아들이 되고 딸이 되어야 되겠습니다. 악한 세상에 하늘의 가정을 이루기 위해서는 그러한 아들딸이 살 수 있는 가정환경을 만들어야 되겠습니다. 그러려면 저희들이 그러한 아들을 본삼아서 식구에게 영향을 미치게 하고, 종족에게 영향을 미치게 하고, 민족에게 영향을 미치게 하고, 국가, 세계에까지 영향을 미치게 하여 그 형태를 넓혀 가지 않으면 천국이라는 것을 생각할 수 없다는 사실을 알고, 매일 본이 되는 생활을 해야 되겠사옵니다.

모든 사람이 볼 때는 슬픈 자리이지만, 거기에는 끊임없는 기쁨의 내용이 있는 것을 아옵니다. 비록 슬픈 일면이 있다 하더라도 기쁨으로 보장할 수 있고 고통이 오더라도 그 고통이 기쁨을 감소시키게 하는 것이 아리라, 그 고통으로 하여금 기쁨을 보강할 수 있게 해야 되겠습니다. 그리하여 한 고비를 넘을 때에 기쁨이 연속될 수 있는, 이러한 천적인 내적 심정을 개재시킨 하늘의 중심자들이 되게 하여 주시옵기를 간절히 부탁하고 원하옵니다.

통일교회가 가야 할 길에 슬픈 십자가의 길이 있사옵니까? 통일교회 교단은 그것을 가지고 슬퍼하지 말게 하여 주시옵소서. 수난의 길이 있사옵니까? 이 수난의 길을 피해 가려고 하지 말게 하여 주시옵소서. 그것을 소화하여 극복할 수 있게 하여 주시옵소서. 그것을 소화하는 데는 울고불고, 할수없이 하는 것이 아니라, 늠름하고 자신있게 그것을 책임지고 소화할 수 있어야 건전하게 발전하는 하늘의 단체가 된다는 것을 알고 있사옵니다.

국가가 지금 시련과정에 있사옵니다. 현시점에 있어서 어려운 대한민국의 운명을 아버지께서 기억하여 주시옵소서. 이 현실을 바라보고 저희들이 낙망해서는 안 되겠습니다. 아버님과 더불어 이 나라의 시련을 기쁨으로 소화하고 극복해 나갈 수 있는 일치된 민족적 정기를, 아버지여, 허락하여 주시옵소서.

이 민족과 이 세계의 인류 앞에 자랑할 수 있는 역사적인 계기를 만들기 위해서 이 민족에게 주어진 한 시련인 것을 생각하게 될 때에, 이것은 둘도 없는 행복의 기틀과 만복을 받을 수 있는 시대적인 혜택인 것을 저희들이 알고 있습니다. 아버지께 감사할 수 있는 무리로서 십자가를 짊어지게 해 달라고 할 수 있는 무리가 통일교회 교단이라고 할진대, 아버님과 더불어 기쁨을 이 민족 앞에 남겨 주고 세계 만민 앞에 남겨 줄 수 있는 통일교단이 되어야 하겠사옵니다. 또한 이러한 교단이 새로운 기쁨의 출발을 맞이할 수 있는 기틀이 된다는 것을 저희가 확실히 알아야 되겠습니다.

이 세계를 책임지고 가야 할 통일교회라 할진대, 세계적 시련을 전면적으로 받아들일 수 있고, 어떠한 수난도 맞아들일 수 있는 자신을 가진 저희들이 되어야 하겠사옵니다. 이것을 피해서는 안 되겠습니다. 슬픔과 고통의 와중에 뛰어 들어가서 아버지의 권능을 가지고 그것을 해소하고 소화시킬 수 있어야 하겠사옵니다.

악한 요건을 소화하지 못해 그 악한 요건으로 인하여 사라지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소화해 가지고 하늘 것으로 출발할 수 있는 자리까지 극복해 나가는 단체가 되게 하여 주옵시기를 간절히 바라옵고 원하옵니다.

저희들이 각오하고 나서게 될 때는 민족적인 수난의 길도 문제없는 것이요, 세계적인 수난의 길도 문제없을 것이옵니다. 다시 말해서 세계 앞에 본이 되지 않을 수 없으며, 오늘의 이 민족 앞에 본이 되지 않을 수 없다는 사실을 확실히 알게 허락하여 주시옵기를 간절히 바라옵니다. 지금까지 기독교인들이 걸어온 길이 그랬었사옵니다. 아무리 철옹성 같은 적진이 앞을 가로막아도 그것을 넘어 400여 년의 수난의 길도 뚫고 나왔습니다. 죽음의 고비를 넘고 순교의 피를 흘릴 때마다 낙망하거나 절망하는 것이 아니라, 내일의 희망을 품고 이웃 사람들에게 새로운 희망을 자극시키고, 새로운 승리를 자극시키어서 하늘과 연결시켰던 것입니다. 이런 것을 느꼈기 때문에, 기독교는 하늘 것으로써 로마 제국을 수습하여 출발한 것을 저희들은 알고 있사옵니다.

그런 강하고 담대한 믿음을 가지고 아버님께 승리의 기쁨을 돌려 드림으로 말미암아 아버님의 영광의 표상으로 나타날 수 있는 단체가 되고, 통일교회 교인들이 되게 하여 주시옵기를 간절히 바라옵고 원하옵니다.

이와 같은 자리에 선 사람이 될 때는 한 사람의 교인으로서 수많은 사람과 친분을 가질 것이고, 이와 같은 가정이 될 때는 수많은 가정의 본이될 수 있을 것이며, 이와 같은 단체가 될 때에는 수많은 단체로부터 추앙의 대상이 될 것이옵니다. 또한 이와 같은 국가가 될 때에는 세계가 우러러볼 것이고, 천적인 모든 것을 상속받을 수 있는 행복한 나라가 될 수 있을 땐 만민의 추앙의 대상이 된다는 사실을 저희들이 알아야 되겠습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두 세계를 점령하고도 남음이 있어야 하겠사옵니다. 그래야 아버지의 아들딸이 된다는 것을 확실히 알고, 스스로가 본이 될 수 있는 자녀들이 되게 허락하여 주옵시기를 간절히 부탁하면서, 이 모든 말씀 참부모의 성호 받들어서 아뢰었사옵나이다. 아멘.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