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3-71 to 33-121: 심정과 절대적인 신앙

심정과 절대적인 신앙
1970.08.09 (일), 한국 부산 동명장여관

33-71
심정과 절대적인 신앙
[기 도]

사랑하는 아버님, 저희의 모든 것을 당신이 길이 기억하시어 당신의 품에 남아지게 허락하여 주시옵소서. 저희들의 생명의 근원도 당신이옵고, 저희들이 사는 생활도 당신으로부터이옵고, 저희들이 찾아 가는 선의 결과도 당신에게 귀일되어야 된다는 것을 확실히 느끼게 하여 주옵소서.

이 세상에 많은 사람이 있다 하더라도 당신과의 확실한 관계가 명시되지 않고는 그 사람들을 대표할 수 없다는 것을 저희들은 느끼게 되옵니다. 그런 의미에서 예수님은 당신과 일체 되기 위해 부단히 노력하였고, 누구보다도 높고 깊은 인연을 찾기 위해 무한히 애썼다는 것을 저희들은 알고 있습니다.

그러기에 하나의 생명이 우주보다도 더 귀하다는 말씀을 설파하신 것을 아옵니다. 우주의 중심이요, 전체의 근원이 되시는 아버지와 일체 된 자리에서 영원을 두고, 무한을 두고 끊을 수 없는 입장에서 자각된 자신의 가치를 체득하게 될 때, 그 가치는 영존하신 아버지의 무한한 가치와 대등하다는 것을 알았사옵니다. 장담코 온 우주보다도 더 크고 높고 귀하다는 것을 저희들은 알고 있사옵니다.

그런 자리에서 아버지의 무한한 사랑과 무한한 능력과 무한한 생명의 힘이 저희 자신과 결탁되어 옮겨 갈래야 옮겨 갈 수 없는 완전 일체의 경지에 도달하였을 때에 아버지라 부르는 아름다운 모습, 그 모습을 바라보고 아버지께서 저희들을 아들이라 부를 수 있는 그 자리가 얼마나 고귀하다는 것을 저희들은 다시 한번 느껴야겠습니다. 예수님이 이 땅위에 남기고 가신 내정적 심정의 세계를 한없이 그리워하면서 남겨진 생애의 전부를 바쳐 그곳으로 돌진해야 할 각자의 사명이 있는 저희들임을 뼛속 깊이 사무치게 느낄 수 있도록, 이 아침에 저희들을 회심시켜 주시옵기를 간절히 바라옵고 원하옵니다.

아버지의 사랑이 없는 세계는 그야말로 지옥이요, 절망의 세계요, 낙담의 세계라는 것을 저희들이 알게 하여 주시옵소서. 하루의 생활을 하면서도 당신의 사랑이 나와 같이하고 있다는 것을 무한히 느낄 수 있어야겠고, 또한 당신의 무한하신 가호가 언제나 보호하고 계시다는 것을 체험할수 있어야겠습니다. 이러한 고귀한 아들의 권한을 가질 수 있고, 딸의 권한을 가질 수 있는 그 자리가 억천만세의 그 무엇보다도 귀한 가치를 지니고 있다는 것을 저희들은 느껴야 되겠습니다.

인간의 생활이 아버지를 대신하고, 인간이 움직이는 모든 거동에서 아버지의 모습을 느낄 수 있어야겠사온대, 아버지께서 사랑하지 않을래야 않을 수 없는 아들딸이 이 땅 위에 없다는 것을 저희들은 알고 있습니다. 이런 세상에서 저희들만이라도 마음을 다하고 몸을 다하여 아버지와 더불어 일체가 되고 당신이 남기신 영원한 뜻과 화합할 수 있는 자각된 자리에 처하게 하여 주시옵기를, 아버님, 간절히 바라옵고 원하옵니다.

전국에 널려 있던 당신의 외로운 아들딸들이 여기에 모였사옵니다. 저희들이 이 자리에 모인 것은 세상 사람들과 같이 흘러가는 세월과 더불어 이 더운 계절을 보내기 위해 모인 것이 아니옵니다. 이 환경을 뚫고 나가서 당신의 깊고 높으신 마음 세계에서 흘러 넘치는 무한하신 사랑에 접하기 위해서입니다. 하오니 그것을 소화시키고 체득할 수 있도록 아버지께서 저희들의 마음과 환경을 지켜 주시옵기를 간절히 바라옵고 원하옵니다.

당신께서 이 자리를 거룩하다 인정하실 수 있고, 당신께서 서슴지 않고 찾아 오실 수 있는 이 자리가 되어야겠습니다. 아버님의 아들이 있고 딸이 있는 자리, 아버님께서 응당 자유롭게 찾으실 수 있는 이 자리가 되게 허락하여 주시옵기를 간절히 바라옵니다.

사흘째를 맞는 이날도 당신이 분부하시고 싶은 것을 저희들에게 분부하시옵고, 당신의 내정의 인연을 무한히 그리워하게 하여 주시옵고, 당신과 통할 수 있는 이번 기간이 되게 허락하여 주시옵기를 바라옵고 원하옵니다.

허공을 바라보면서 반응이 없는 울부짖음을 외치다 지치는 사람들이 되어서는 안 되겠습니다. 죄악의 경계선을 밟고 넘어가야 되겠사옵니다. 이러한 저희를 안타까운 손길로 붙드시는 아버지의 감촉을 느끼면서 아버지라고 외칠 수 있는 기쁨의 한날을 맞게 하여 주시옵소서. 아버지의 심정을 가지고 온 천하를 몽땅 끌어안고 사랑하면서 스스로 취할 수 있는 경지를 저희들에게 허락하여 주시옵기를 간절히 바라옵고 원하옵니다.

이 아침 아버지께서 저희들의 부족한 정성을 묶으시옵소서. 아버지께서 동쪽을 향하면 저희도 동쪽으로 아니 움직일래야 아니 움직일 수 없고, 아버지께서 중심이 되면 중심을 향하여 아니 설 수 없는 스스로의 모습이 되게 하여 주시옵소서. 아버지께서 동하면 저희들도 동하고, 아버지께서 정하면 저희들도 정하게 하여 주시옵소서. 아버지께서 친히 같이하여 주시옵기를 간절히 바라옵고 원하옵니다.

이제 이 시간을 지내는 동안, 과거 저희들이 통일의 인연을 처음 맺었던 그 시간서부터 지금까지를 반성해 보아야 되겠사옵니다. 아버지가 그리워 자기 자신을 망각한 한때가 있었사옵니까? 무한한 가치와 무한한 생명의 인연이 처음 찾아온 그때의 심정을 지금도 지니고 있사옵니까? 그 마음속 깊이 새겨져서 파내고 또 파내어도 그 무엇으로 부정할 수 없는 자극이 아직까지 스스로의 마음 가운데 남아 있다면, 이는 내일의 소망을 상속받기에 부족함이 없는 아들딸들인 것을 저희들이 깨닫게 하여 주시옵소서.

아버지! 흠모의 심정에 불타오르는 간곡한 마음과 더불어 저희들이 자신의 의지대로 아버지라고 부를 수 있는 자연스러운 환경을 허락하여 주시옵소서. 모든 만상과 더불어 저희의 고귀함을 찬양해 달라고 권위를 가지고 아버지 앞에 자랑하고 싶사옵니다. 모든 것을 저희를 위해 지으신 줄아옵니다. 고귀한 모습을 가지고 은연 중에 아버지를 부를 수 있는 자리에 당신의 아들딸을 연결시켜 주시옵기를 간절히 바라옵고 원하옵니다.

지난날 아버지를 위하여 울부짖었던 과거지사를 오늘날 저희들이 아득히 바라만 보아서는 안 되겠습니다. 과거의 모든 내용이 현실의 재료로 등장하게 하시옵소서. 그리하여 오늘의 모든 사연들이 현실과 미래를 연결시키고, 과거 그 자체가 오늘을 증거할 수 있게 하시옵소서. 그리하여 아버지를 모실 수 있는 아들딸들이 되게 하여 주시옵기를 간절히 부탁드리고 원하옵니다.

오늘은 8월을 맞이하여 두 번째 맞는 안식일 아침이옵니다, 이 자리가 어떤 자리인지 알고, 이곳을 향하여 기도하는 당신의 자녀들 위에 무한하신 자비의 은사를 같이하여 주시옵고, 넓고 깊으신 당신의 후대하신 사랑을 베풀어 주시옵소서. 끝날에 내려질 높고 크신 당신의 분부가 저희들과 더불어 인연맺을 수 있게 역사하여 주시옵기를 간절히 바라옵고 원하옵니다.

삼천리 반도에 널려 뜻을 위하여 싸우고 있는 당신의 자녀들 위에 복을 빌어 주시옵고, 하절기에 나가 싸우고 있는 당신의 자녀들 위에도 복을 빌어 주시옵소서. 세계에는 수많은 당신의 자녀들이 널려 있사옵니다. 그들이 있는 곳곳마다 당신께서 친히 같이하여 주시옵고, 내일의 평화의 세계를 향하여 오늘의 수고로움을 보람으로 느끼면서 개척자의 소신을 가지고 끝까지 극복하면서 투쟁하여 나가는 하늘의 용사들이 되게 하여 주시 옵기를, 아버님, 간절히 바라옵고 원하옵니다.

저희들이 며칠 동안 여기에 머무는 가운데 아버지의 깊으신 사랑의 인연에 스스로 접할 수 있게 하여 주시옵소서. 그리하여 내일의 내 모습은 이래야 된다는 자신을 확정지어 삼천리 반도를 향하여 새롭게 출발하는 자식으로서 아버지께서 믿을 수 있고, 아버지께서 세워서 자랑하기에 부족함이 없는 그런 아들딸이 되어야 하겠사옵니다. 이 기간이 그 준비기간이 되게 하여 주시옵기를 간절히 부탁드리고 원하옵니다.

전체를 맡으시어 거룩히 보호하여 주시옵기를 간절히 부탁드리며, 모든 말씀 참부모의 성호 받들어 아뢰었사옵나이다. 아멘.

33-74
말 씀
우리는 타락한 입장에 있지만 남달리 새로운 뜻을 품고 새로운 세계관을 모색해 나가고 있습니다.

그 새로운 뜻이라는 것은 지금까지의 기존 가정이면 가정에서, 혹은 사회에서 누구나 흔히 느낄 수 있는 그런 내용이 아니요, 사정에 얽매이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는 이 땅 위에 확실한 하나의 과제를 앞에 놓고 이 타락한 세상을 판가리할 수 있는 내용을 제시하며 이 세상에 없는 새로운 것을 추구해 나가고 있습니다. 내 개인에 있어서도 그러해야 되고, 내 가정에 있어서도 그러해야 되고, 어느 사회, 어느 국가, 혹은 세계에 있어서도 그러해야 된다고 할 수 있는 참된 내용을 중심삼고 참된 개인, 참된 가정, 참된 사회, 참된 국가, 참된 세계를 모색해 나가야 됩니다.

33-75
참과 사랑
참이라는 것은 둘이 아닙니다. 동에서나, 서에서나, 남에서나, 북에서 볼 때 그 방향은 다를지라도 그 모습은 누구나 공통적으로 인정할 수 있는 하나의 모습인 것입니다.

그 참된 하나의 모습을 어디에서 발견할 수 있을 것이냐? 외형적으로 나타난 자기의 모습이나 우리가 생활하고 있는 환경적인 내용을 가지고 참된 모습이라고 말할 수 없습니다. 참이라는 것은 영원한 것이요, 변하지 않는 것입니다. 진실 중의 진실로서 모든 것을 규합할 수 있는 절대적인 하나의 표준이 되지 않고는 참이 될 수 없습니다. 그러면 그 참이 정착할 수 있는 자리가 어디냐? 이것이 문제입니다. 그 자리는 ‘나’라는 관념을 초월한 자리입니다. 그러기에 내 몸과 마음은 수시로 참을 그리워 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참이 현실적으로 결정될 수 있는 자리는 어디냐? 그 자리는 우리가 흔히 바라듯이 넓고 넓은 세계를 중심삼고 결정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또, 사회나 가정을 중심삼고 결정될 수 있는 자리도 아닙니다. 가정이 있기 전에 먼저 내가 있는 것이기 때문에 참이 정착하는 결정적인 자리는 ‘나’라는 것입니다. 그러면 나 가운데 있는 무엇을 정착점으로 삼겠느냐? 막연하나마 사랑이라는 명제를 제시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러면 그 사랑은 어떠한 사랑이어야 되느냐? 영원히 지속될 수 있는 사랑이어야 됩니다. 그 사랑에 접하게 될 때 영원한 행복이 깃들고, 그 사랑과 관계를 맺게 될 때 어떠한 거리와 환경도 초월하고 시간성을 넘어서 연결될 수 있는 내용을 가질 수 있어야 합니다. 그러한 사랑이어야 합니다. 또한 그 사랑은 절대적 사랑이어야 됩니다. 역사적으로 어떤 시대도 그 사랑을 옮길 수 없는 그런 절대적인 것이어야 합니다. 과거도 옮길 수 없고, 현재도 옮길 수 없으며, 미래도 옮길 수 없는 그런 사랑이어야 됩니다. 그렇기 때문에 옮길 수 없는 그 자체와 상봉하려던 어떤 한계를 느끼는 사랑으로는 안 되는 것입니다. 무한한 사랑이어야 되는 것입니다.

봄절기를 품고 남을 수 있을 정도로 여유가 넘쳐 흐르는 사랑, 차고 냉랭한 겨울절기에 있어서는 눈과 얼음을 녹일 수 있는 사랑, 높이로 보나 넓이로 보나 우리가 측량할 수 없는 무한한 사랑이어야 합니다. 그런 사랑이 나와 관계를 맺어 나에게서 영원히 떠나지 않고 안정된 중심의 자리를 결정해야 합니다. 그런 사랑이 무한히 감촉되고 감각될 때 그 사랑이야말로 우주와 겨루고도 남음이 있는 것입니다. 세상의 그 어떤 가치도 그 사랑을 떠나서는 찾을 수 없습니다. 시작과 끝이 동일한 절대적인 사랑을 내 심지의 복판에 정한 사람이 있을진대, 그 사람은 비록 개인이로되 세계와 겨룰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만일 그런 사랑을 느끼고 가졌던 사람이 그 사랑을 잃어버렸다면 그것은 슬픔 중의 가장 큰 슬픔일 것입니다. 그것을 잃어버린 슬픔 이상의 슬픔이 없는 것입니다. 또, 불행 중의 제일 큰 불행은 무엇이냐? 그 사랑을 가졌다가 잃어버려서 그 사랑을 다시 찾을래야 찾을 수 없는 입장에 있는 것입니다. 이런 것을 우리가 생각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오늘날 우리가 그런 사랑을 나 자신과 어떻게 결부시키느냐 하는 것이 문제가 되는 것입니다.

그러면 그 사랑이 이 우주 가운데 지극히 높은 자리에 있겠느냐, 낮은 자리에 있겠느냐? 다시 말하면, 고기압권내에 있겠느냐 저기압권내에 있겠느냐 하는 것이 문제입니다. 만일 이 사랑이 고기압권내의 중심된 자리에 있다면 그 자리에 도달하기 위해서 여러분 자신이 고기압권을 형성해야 합니다. 그러지 않고는 거기에 찾아갈 수 없는 것입니다. 대등한 고기압권을 갖추지 않고는 접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 사랑을 흡수하고 이 사랑과 관계를 맺기 위한 단 하나의 방법은 고기압권을 만드는 것입니다.

그러면 그것을 어떻게 만드느냐? 마태복음 5장 3절을 보면 가난한 자가 복이 있다고 했습니다. 그 가난한 자가 없는 자 중의 없는 자를 도와 주면 무한한 사랑을 받을 수 있는 입장에 서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런 사람은 부모의 사랑이라든가, 부부의 사랑이라든가, 혹은 자녀의 사랑이 라든가 하는, 인간들이 흔히 그리워할 수 있는 그런 사랑에서 행복을 느끼는 것이 아니라 말할 수 없는 불행을 느끼는 것입니다. 그 사람들이 본질적이고 고차원적인 사랑을 그리워할 수 있는 마음의 바탕을 가지고 있다 할진대는, 그들은 현실의 모든 것을 부정하고 새로운 길을 모색하지 않을 수 없는 것입니다. 새로운 인연이 맺어질 수 있는 단 하나의 길이 있다면 그렇게 하는 수밖에 없다는 것입니다.

33-77
신앙의 목적
모든 종교는 어떠한 길을 찾아가고 있느냐? 민족을 중심삼은 사랑의 길을 찾아가는 것이 아닙니다. 민족을 초월하여 천정의 인연을 찾아가는 것입니다. 그 길은 평탄한 길이 아니요, 모든 사람들이 환영하는 자유로운 길이 아닙니다. 그 길은 험한 골짝길이요, 고독의 길입니다. 또한 슬픔과 더불어 비장하게 투쟁하는 길이라는 것을 우리들은 알아야 합니다.

돈이 없어서 그런 길을 가는 것이 아닙니다. 먹을 것이 없어서 그런 길을 가는 것도 아닙니다. 단 한 가지, 내 마음을 충분히 채워 줄 수 있는 우주적인 사랑이 그리워서 그런 길을 가는 것입니다. 거기에 접할 수 있는 단 하나의 다리를 찾아 그 사랑만이 전부일 수 있는 경지에 들어가서 절대자로부터 공인을 받기 위해서 그런 길을 가는 것입니다. 절대자의 사랑을 체득할 수 있는 그런 경지가 있다면 그 경지는 둘의 경지가 아니라 하나의 경지일 것입니다. 동이라든가, 서라든가, 남이라든가, 북이라든가 하는 방향이 문제가 아니라 어떤 것을 찾느냐가 문제인 것입니다.

지금까지 나 스스로 빈 것을 느끼고 나 스스로 충만되지 못한 사실을 느끼던 마음을 가득 채워 줄 뿐만 아니라 넘쳐 흘러서 우주와 더불어 상관 되게 할 수 있는 주체적인 인식을 가져야 합니다. 그리하여 그런 무한한 가치를 가진 존재로서 무한한 가치를 지닌 평화를 느낄 수 있는 경지에 도달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러려면 반드시 절대적인 사랑과 일대일로 접해야만 되는 것입니다.

그런 경지에서 우주를 바라보게 될 때 그 우주는 자기 품을 떠날 수 없는 것입니다. 너와 내가 서로 먼 거리에 있다 하더라도 먼 거리에 있는 것이 아니라 직접적인 상관관계에 있다고 느낄 수 있는 그런 무한한 사랑이 이 땅 위에 있다면 그 사랑은 얼마나 귀하겠습니까? 그 사랑은 역사가 지배하지 못하는 것입니다. 현시대가 지배하지 못하는 것입니다. 앞으로 올 미래도 그 사랑을 지배하지 못하는 것입니다. 이러한 사랑의 경지가 우리에게 필히 있어야 됩니다.

오늘날 도의 길을 가는 사람들의 목적이 무엇이냐? 흔히 말하기를 자아 완성이라고 합니다. 즉, 인생을 완성해야 된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인생을 완성해서 뭘 할 것이냐? 완성한 사랑과 접해야 됩니다. 완성한 사랑과 접한 다음에는 뭘 할 것이냐? 자신이 무한한 행복의 요인을 가질 수 있는 그런 자리에 들어가야 됩니다. 무한한 행복의 요인을 나 자신이 갖는다는 것은 무한한 사랑과 끊을 수 없는 자리에 서게 된다는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절대자 하나님의 사랑권내에 들어가야 된다는 것입니다.

부모의 사랑을 받는 자식은 부모와 멀리 떨어져 있다 하더라도 그 사랑을 잊어버릴 수 없습니다. 아무리 복잡한 환경에 가거나, 아무리 극한 기쁨의 자리에 가더라도 그 사랑을 잊어버릴 수 없는 것입니다. 세상의 그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부모의 사랑이 마음에 지워지지 않는 한 그 자식의 마음은 딴 데로 갈래야 갈 수 없습니다. 항상 그 부모의 품에 있는 것이요, 그 부모의 자식이 아닐 수 없는 것입니다.

이와 마찬가지로 우리가 어떤 환경에 처하더라도, 어떠한 자리에 가더라도 단 하나밖에 없는 무한하신 하나님의 사랑을 자신의 모체로 삼고 일생을 살아간다 할진대 하나님과 더불어 사는 것입니다.

부모의 사랑을 받는 아들딸이 기쁘나 슬프나 혹은 어려운 환경에 있더라도 그 사랑을 중심삼고 생각하고, 그 사랑을 중심삼고 내일의 희망을 자극시켜 가면서 그 모든 것을 극복해 나가면, 부모와 자식간의 그 사랑의 인연은 무엇으로도 끊을 수 없게 됩니다. 하나님을 중심삼고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가 하나님과 절대적인 사랑의 인연을 맺었으면 어떤 환경에 가더라도 그 사랑에 대한 고마움을 느끼고, 그 인연을 중심삼고 모든 것을 재고, 그 인연을 중심삼고 느끼고, 그 인연을 중심삼고 살 수 있어야 합니다. 그런 사람은 하나님의 사랑권내에서 떠날 수 없는 것입니다. 이런 사람이 비로소 하나님을 증거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런 사람의 입을 통하여 하나님의 사연을 말할 때 그 사연은 하나님의 내정과 통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런 자리를 찾아가는 것이 도의 길입니다.

33-79
하나님의 사랑을 가장 잘 느낄 수 있는 때
그러면 도의 길 가운데에서 그런 자리에 제일 가까울 수 있는 때가 어느 때냐? 철모르는 유아시기냐, 철이 든 장년시기냐. 혹은 장년시기를 지나 가지고 세상 안팎의 모든 것을 헤아릴 수 있는 노년시기일 것이냐? 과연 그때가 어떤 때냐 하는 것을 두고 볼 때에, 그때는 사춘기시대와 같은 때라는 것입니다.

사춘기 때는 꽃을 보더라도 보는 것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감정을 연장시켜서 전체의 꽃을 자신과 관계맺고 싶어합니다. 또, 특정한 나무면 나무를 감상하더라도 그것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그 감상한 인연을 전체의 인연 즉, 모든 자연과 인연지어 가지고 감상하고자 합니다. 그런 내심이 우러나오는 때가 사춘기입니다. 그 중에서도 무엇인지 모르게 내 전체가 흠뻑 좋아질 수 있는 하나의 사랑의 대상을 그려 가는 때가 사춘기인 것입니다.

도의 세계에서 인격완성이란 표준이 어디에서 나올 것이냐? 사랑에서 나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무한하고 절대적인 사랑을 중심삼고 인격완성이 되는 것입니다. 이 사랑의 인연이 어느때에 맺어져야 되느냐? 사춘기 시기와 같은 그런 때에 맺어져야 합니다. 도의 생활권내에 있어서 사춘기적인 감정이 떠나게 될 때는 무미건조한 사람이 됩니다. 그렇게 되면 어느 한때에 도의 생활이 끝날 것입니다. 그런 사람이 가는 길 앞에는 반드시 한계선이 나타나게 되어 있습니다. 그런 한계선이 나타나지 않는 사람이 되어야 무한한 세계를 보장받을 수 있고 확고화시킬 수 있는 것입니다. 이렇게 할 수 있는 동기가 바로 사랑입니다.

사춘기 때의 소녀들을 보면 나뭇잎이 떨어지는 것을 보고도 웁니다. 왜 웁니까? 거기에는 무엇인지 모르게 자기 나름대로 흠뻑 젖어들 수 있는 내용이 담겨져 있기 때문입니다. 거기에 무한한 새로운 인연이 개재되어 있다는 것을 느끼기 때문입니다. 그것이 하나의 상징적이요, 형상적으로 나타난 것이지만 그 가운데 무한한 사랑의 인연이 있는 것을 느끼기 때문에 자기도 모르게 그러한 감정표시를 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여러분 심정에 새겨두어야 할 문제입니다.

바닷가에서 바닷물이 파도치는 것을 보게 될 때도 그 파도가 나를 치는 것 같고, 자연을 바라 볼 때도 자연이 전부다 호흡하는 것 같고, 자신에게 환희를 가져다 주는 것같이 느끼게 됩니다. 기쁠 때 바라보면 최고의 기쁨을 상징하는 것으로 나타나고, 슬플 때 바라보면 그 슬픔을 자극시켜 가지고 도리어 슬픔 가운데에서 다른 새로운 각도의 희망을 자극시켜 줄수 있는 대상이 되는 것입니다.

그런 경지에서 사는 사람, 그런 심정을 가지고 무한한 인연을 추구해 나가는 사람이 있다면 그 사람은 무미건조한 사람이 아닙니다. 그가 외로운 자리에 나가면 거기에서도 외롭지 않을 무한한 인연이 봄절기같이 나타나는 것입니다. 이런 경지의 세계가 하나님의 사랑의 세계라는 것입니다.

여러분이 영적으로 이런 것을 체험할 때도 있을 것입니다. 그 뭐라 할까요? 봄철에 아지랭이가 피어 오르는 꽃이 핀 동산에서 사방에 뭉게뭉게 떠 있는 구름과 꽃에 싸여 가지고, 그 분위기에 무한히 품겨 들어가면서 무한한 가치를 음미하며 스스로 취하는 그런 경지에 들어가 보는 때가 있을 것입니다.

그럴 때에 틀림없이 우주의 동적이고 정적인 맥박과 심장에서 피를 뿜어내는 듯한 무한한 힘에 접하는 그런 경지를 느낄 것입니다. 한계지어진 몸이라도 그 한계지어진 경지에서 무한한 경지에 접해 갈 때, 거기에서부터 생명과 인연된 것을 느낄 수 있을 것입니다. 그 자리에서 스스로 삶을 느낀다는 것입니다. 그 자리에서 비로소 스스로 행하는 것에 대한 독자적인 감정을 느낄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한 독자적인 감정을 느끼는 그 자리가 완성의 자리가 아니겠습니까? 하나님은 인간이 이러한 자리에 있는 것을 보시고 기뻐하실 것입니다.

그래서 석가모니는 완성의 자리를 절대적인 유아독존의 경지라고 했습니다. 최고의 신념을 가지고 독자적인 행동을 하면서 ‘내가 하는 모든 것은 절대적으로 보장받을 수 있는 가장 귀한 것이다’라고 할 수 있는 자리에 서게 될 때 제2의 주체적인 가치를 지닐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런 자리로 나아가는 것이 우리 인간에게 있어서 가장 보람된 것입니다.

33-81
전체를 대신하는 사랑을 이루어야
그 자리는 무슨 지식이나 인식을 통해서, 혹은 외적인 관념을 가지고 넘어갈 수 있는 자리가 아닙니다. 사랑의 경지가 아니고는 못 넘어갑니다. 여러분 그렇잖아요? 누군가를 그리워하는 사람의 눈은 다릅니다. 그리워하는 눈은 평면적이 아니라 입체적입니다. 그런 눈을 보게 되면 대번에 알 수 있습니다. 그러한 상대적인 요인이 맞아 떨어지는 사람은 자기 스스로의 인식을 초월한 사람입니다. 이처럼 우리가 느끼는 감각권내에 있어서 자기 스스로의 인식을 초월할 수 있는 동기의 밑바탕이 되는 것은 정서적인 것입니다.

여러분들은 이런 정서적인 것을 중심삼은 사고방식을 가져야 됩니다. 내 손이 움직이면 단지 힘이 소모된다고 생각하는 것보다 내 손이 움직이는 것도 하나의 심정적인 것을 추구하기 위해서라고 생각해야 합니다. 또 내가 사는 것은 무엇 때문이냐? 보다 가치 있는 심정적 목표를 추구하기 위해서라고 생각해야 하는 것입니다.

이렇게 볼 때 신앙생활을 하는 데 혼자 있다고 해서 외로운 것이 아닙니다. 또, 많은 사람이 있다고 해서 그들이 전부 친구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나와 마음이 맞는 사람은 한 사람밖에 없는 것입니다. 그렇지 않아요? 사람이 찾아가는 길은 하나밖에 없습니다. 갈 길은 하나밖에 없는데 전체를 중심삼고 하나되었다 할 때는 그 전체에게 자랑하고 싶어지는 것입니다. 그렇지요? 세상에서 찾을 수 없는 사랑의 대상을 찾았다 할 때는, 그야말로 천상천하에 하나밖에 없는 사랑의 대상을 찾았다 할 때는 그것을 무한히 드러내고 싶은 것입니다. 드러내는 데는 어디까지 드러내느냐? 하늘 끝까지, 무한정의 세계에까지 영원히 드러내고 싶다는 것입니다. 그런 마음의 바탕은 사랑을 갖지 않고는 있을 수 없다는 것을 여러분들이 알아야 됩니다.

어느 한 사람만 사랑하게 되면 그 사랑은 일방적이요, 편파적인 사랑입니다. 하지만 서로 하나되었다 할 때는 전체를 대신할 수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이런 관점에서 오늘날 축복받은 가정이나 뜻 앞에 세움받은 개인이 ‘내가 아무개를 사랑한다’ 또는 ‘내가 아무개 자식을 사랑한다’ 할때 그 사랑은 일방적인 사랑입니다. 그렇지만 둘이 서로 사랑한다고 하면 전체를 대신할 수 있는 입장이 되는 것입니다. 그래야 그 세계에서 통일이 벌어지는 것입니다. 그러지 않고는 통일이 벌어지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여러분의 가정을 중심삼고 보더라도 김 아무개면 김 아무개, 박 아무개면 박 아무개가 자기 나름대로 사랑의 대상을 찾을 때까지는 일방적인 입장에 서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일방적인 입장으로 끝나서는 안 됩니다. 일방적인 입장에서 하나되었다 할 때는 전체를 대신해야 됩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전체의 중심된 하나의 사랑을 이루어야 됩니다. 여러분이 그래야 된다는 것입니다.

33-82
인간에게 가장 필요한 것
우리는 10년이면 10년이란 세월을 덧없이 지내고 있습니다. 교회에 처음 들어온 그때부터 지금까지의 여러분을 생각해 보십시오. 여러분이 선생님을 어떻게 대했습니까? 선생님을 한갓 하나의 남자에 지나지 않는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니 선생님을 통해서 무엇을 얻을 수가 있겠습니까? 선생님이 아무리 여러분의 마음을 품고 얘기를 해도 선생님은 이러이러한 분이라고 외적으로 평가합니다. 우리에게 어떤 한 분야에 해당하는 진리를 가르치시는 분이라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인간으로 태어나 이길 이상 찾아갈 길이 없는 한계점에 온 입장에서 선생님이 이야기를 하면 무엇이 어쩌고 어쩌고 하며 불평을 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렇게 선생님을 인간적인 면으로 보아서는 안 됩니다.

우리 인간들은 하나님을 중심삼고 볼 때 단순한 하나의 작은 점에 불과합니다. 또, 모래로 말하면 한 알밖에 안 되는 것입니다. 그렇게 전체를 대신할 수 없는 것입니다. 그렇지만 무한한 전체를 대신할 수 있는 입장에 서야 합니다. 그러려면 사랑의 뒷받침이 있어야 되는 것입니다. 이런 사랑이 없다면 여러분이 아무리 선생님에게 가르침을 받았더라도 후임자 밖에 안 되는 것입니다. 선생님이 여러분을 가르쳐 주는 스승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그렇게 되면 가르쳐 주는 것을 다 배우고 나서는 선생님과의 인연이 끝나버리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기에 내 마음에 가장 고귀한 봄절기와 같은 사랑의 인연이 있어야 합니다. 이것이 떠날래야 떠날 수 없도록 끌어당길 수 있는 힘이 있어야 합니다. 끊을 수 없는 그 무엇이 여러분 자신과 선생님 사이에, 또는 선생님 자신과 하나님 사이에 관계되어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만일 그것이 없다면 거기에는 변혁이 일어나게 됩니다. 무한한 분립이 벌어지는 것입니다. 원래 분립이라는 것은 발전을 하기 위해서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렇지 않은 상태로 간다는 것입니다. 문제는 여기에 있습니다.

그러면 오늘날 선생님은 여러분에게 무엇을 제시해 주었느냐? 통일교회 원리의 내용이냐? 선생님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습니다. 죽음의 길에 들어가서도 그 죽음의 고통을 극복할 수 있는 하나님의 사랑을 제시해 주었다는 것입니다.

선생님이 유효원 협회장을 두고 심각하게 생각했던 것이 뭐냐면, 그럴 수 있는 내용을 갖고 갔느냐 하는 것입니다. 그는 선생님을 따라 나오는 데 있어서 나를 위해 고생을 많이 했습니다. 그중에서도 선생님이 감옥에 있을 때 선생님을 많이 생각해 주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선생님이 유협회장을 생각하면 ‘그는 이러이러한 사람이었다’ 하고 생각하게 되는 것입니다. 감방에 누워 있다가 새벽이면 만나고 싶은 그 정에 이끌렸고, 전해 받은 쪽지 하나까지도 생명의 가치로 받아들일 수 있을 만큼 내연의 뒷받침이 그에게 있었습니다. 그런 협회장이었던 것이 기억납니다.

그러면 오늘날 사망세계에 널려 있는 우리들이 죽음 길을 극복하면서라도 어차피 가야 할 본연의 세계를 찾아가는 인생 길에 있어서 자신에게 제일 필요한 것이 무엇이냐? 무엇을 많이 아는 것이 문제가 아닙니다.

여러분, 후광(後光)이라는 말을 알지요? 심정세계의 후광과 같은 인연이 중심이 되어 비칠 수 있는 나 자체가 못 되거든 후광의 반사체라도 갖추어야 됩니다. 반사체의 입장에서 그는 이렇고 나는 이렇다 하는 입장에 서면 그것은 가짜입니다. 하나가 되어야 합니다. 완전히 하나되었다 하는 경지에 들어가야 합니다. 어떠한 거울이 빛을 받아 완전히 반사되려면 그 거울에 티가 없어야 합니다. 그래야 완전히 반사되는 것입니다. 그 반사된 후광은 심정적인 후광체가 되어야 됩니다. 그리하여 언제나 원래의 빛에 내 마음의 모든 방향이 완전히 일치될 수 있어야 합니다. 그러한 상대적 자리에 서게 되면 그것은 둘이 아닙니다. 그렇게 반사된 빛은 직접적인 빛과 마찬가지라는 것입니다.

33-84
인간을 영원하게 하는 것
여러분들이 생애를 거쳐가는 데 있어서 그 생애의 추구점이 있어야 됩니다. 그물로 말하면, 벼리가 있어야 된다는 말입니다. 인생에 있어 그물의 벼리와 같은 것이 뭐냐? 그것은 하나님의 사랑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이 나에게 닻을 내리게 되면 무한한 세계까지 들락날락할 수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들이 이러한 심정을 느끼려면 기도해야 합니다.

여러분이 기도할 때, 한국에서 기도하더라도 세계에 널려 있는 식구들을 위해서 기도해야 됩니다. 하나님의 심정을 느끼는 경지에 도달하면 누가 설명해 주지 않아도 어떤 사람이 어떤 심정을 가지고 있는지 알게 되는 것입니다. 알려고만 하면 그것이 전파같이 전해 들어온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내적인 조건이 성립된 위에서만 가능한 것입니다. 상대적인 인연을 통하여 오는 것은 영속적이 아닙니다. 주체적인 내용을 통해서 흘러가야 영속적이라는 것입니다. 그 주체적인 내용을 결정지어 주는 것은 상대적인 내용이 아니라 주체적인 본연의 인연이 될 수 있는 사랑인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여러분은 죽더라도 하나님의 사랑을 추구해 나가야 합니다. 여러분들이 인생길을 가는 데 있어서 지금까지 추구해 나오는 하나님의 인격의 중심이 무엇이냐? 진리가 아닙니다. 그 중심은 심정입니다.

그 심정의 극을 초월할 수 있는 자리에 들어가야 합니다. 그 자리에 들어가면 내 죽음의 고통이 생각되지 않는 것입니다. 죽음이 찾아오는 순간이라 해도 그 죽음의 고통을 잊고 아버지의 사랑의 품에 품겨서 잠들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럴 수 있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그렇게 최후를 마치는 사람이 있다면 그는 이 땅에 왔다 간 사람으로서 그 누구보다도 최고의 선물을 안고 가는 사람입니다.

예수님이 십자가를 앞에 놓고 “아버지여 만일 할 만하시거든 이 잔을 내게서 지나가게 하옵소서. 그러나 나의 원대로 마옵시고 아버지의 원대로 하옵소서(다 26:39)”라고 기도할 수 있었던 그 경지는 최고의 경지인 것입니다. 모든 고통을 하나님의 사랑으로 극복할 수 있는 경지입니다. 이 땅 위의 사망권을 극복할 수 있는 힘에 접하는 그런 자리를 어떻게 모색할 것이냐? 이것이 문제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여러분은 밥을 먹을 때나 잠을 잘 때나 일을 할 때나 무엇을 하든지 그것을 생각해야 합니다. 이런 사람은 언제나 봄날을 노래하는 사람입니다. 일생 동안 봄날을 노래하면서 사는 사람이라는 것입니다. 자기 자신이 나이가 많아도 나이가 많다는 인식을 안 한다는 것입니다. 물론 어느누구나 다음은 다 그렇습니다. 백 살 살기가 힘들다는 말이 있지만 마음은 그렇지 않다는 것입니다. 여러분의 마음도 그렇잖아요? 나이 많은 할아버지와 할머니도 처녀 총각의 마음이라는 거예요. 자기 마누라가 쪼그랑 할머니지만 할머니라고 부르고 싶지 않다는 것입니다. 언제나 꽃 피웠던 그런 시절을 표준으로 생각하는 것입니다. 부부로 맺어졌던 그날을 중심삼고 죽을 때까지 그대와 나는 하나라고 하는 그런 마음으로 살고자 한다는 것입니다.

현재 늙었다고 해서 밉게 보는 것이 아니라 옛날의 그 인연을 중심삼고 일생 동안 그 느낌을 간직하며 모든 것을 포용하고, 그것으로 서로의 생애를 감싸 주고자 하는 그런 사랑을 가진 부부는 행복한 부부입니다. 쭈그러졌더라도 내 사랑하는 사람이라는 그러한 마음이 있어야 합니다. 그런 마음이 없으면 그 부부는 적막한 부부입니다. 있으나 없으나 한 부부 라는 것입니다. 꽃을 볼 때, 동백꽃이면 동백꽃은 변할 수 없는 것입니다. 동백꽃으로서의 변할 수 없는 본질을 가졌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늙는다는 것은 뭐냐? 인간을 중심삼고 볼 때, 늙는다는 것은 새로운 봄의 세계를 향해 찾아가는 것입니다. 육체는 비록 늙었지만 그 내심에 피어 오르는 근본적인 사랑, 그 사랑은 외적인 것보다 더 멋있는 것입니다. 인간이 그런 사랑을 가져야만 행복할 것입니다.

부자지간의 인연도 그렇습니다. 아들딸들이 어렸을 때에는 무릎에 앉혀 놓고 귀여워하면서 애지중지 기르지만 그 자식이 나이가 많아지면 그렇게 하지 못하는 것입니다. 그렇지만 부모의 사랑은 자식이 나이가 많다고 해서 끊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그 사랑은 더욱더 입체적으로 나타나는 것입니다. 자신의 생애와도 바꿀 수 없는 내용을 중심삼고 정성을 들이는 가치는 날이 가면 갈수록 나타나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러한 부모의 사랑의 가치를 발견할 수 있는 아들이 된다면 효자라는 이름을 갖지 않더라도 효자입니다. 그것으로 말미암아 선을 추구하고, 그것으로 말미암아 자신이 젊었을 때 이상으로 내일에 대한 소망을 가질 수 있게 될 때는 그 자식이 곧 효자가 되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33-86
심정의 길 사랑의 길
이와 마찬가지로 여러분들이 일생을 포괄하고도 남을 수 있는 심정적 요인을 어떻게 발전시키느냐 하는 것이 문제입니다. 그렇게 되면 영어의 몸이 되어 감옥의 철창 안에 있다 해도 문제가 안 됩니다. 죽음의 교차로가 나타나도 문제가 안 됩니다. 여러분들은 언제나 그것을 잘 알아야 합니다. 그런 사랑을 그리워하며 찾아가는 데는 그냥 가게 되어 있지 않습니다.

주체와 대상이 주고 받는 자리에 하나님이 임재하시게 되면 번식이 벌어집니다. 거기에 절대적인 능력의 영이 개재하지 않고서는 번식이 벌어 지지 않는 것입니다.

여자와 남자, 즉 부부가 서로 사랑을 하게 되면 자식이 생겨납니다. 자식은 어떤 때에 생겨나야 되느냐? 생리적인 모든 감정뿐만 아니라 심정적으로도 완전히 일치된 자리에서 생겨나야 됩니다. 그렇게 되면 틀림없이 선하고 좋은 아들딸이 태어날 것입니다. 그런데 오늘날 타락세계에서는 그것이 안 되었습니다. 지금까지 하나님을 중심삼고 나라와 세계를 사랑하는 심정이 내면적으로 일치된 자리에서 자식을 낳은 사람이 있었습니까? 이와 같이 생리적인 일치점과 내면적인 심정의 일치점을 중심삼고 태어난 아들딸들은 천운을 타고 태어나는 것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내가 여러분들은 축복해 주면서 한 말이 있습니다. 여러분들의 아들딸을 보면 여러분들이 하나님 앞에 얼마나 충성하고 하나님의 사랑을 얼마나 받고 사는 가 하는 것을 알 수 있다는 것입니다. 여러분의 아들딸이 증거한다는 말입니다. 그러니 여러분들은 하나님 앞에 효자 효녀가 되고 충신이 되어야겠습니다. 또한 열남 열녀가 되어야겠습니다.

여러분들이 충신이 되기 위해서는 충신 이상의 심정적인 인연을 세워 놓아야 합니다. 또, 효자가 되기 위해서는 효자 이상의 심정적인 인연을 세워야 합니다. 은연 중에 자기의 마음에서 우러나 가지고 해야 되는 것입니다. 그렇게 하려면 그런 인연을 갖고 있어야 됩니다. 선조들로부터 선한 천품을 받고 나와야 된다는 것입니다. 충효를 할 수 있는 사람이 되는 것은 자기 일대에 결정되는 문제가 아니라, 수십 수백대의 선조들과 인연되어진 내용을 중심삼고 결정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심정을 두고 볼 때도 이와 마찬가지입니다.

여러분들이 이 뜻을 알고 얼마나 기뻐했느냐? 미칠듯이 기뻐해 봤느냐는 것입니다. 기뻐해 보지 못했으면 여러분의 진리에 대한 갈구의 심정이 어느 한계선에 머물러 있는 것입니다. 어느 한계선을 넘어서야지 한계선을 느끼게 되면 안 되는 것입니다.

이 우주에는 무한한 힘이 운동하고 있습니다. 이 세계는 무한한 힘이 있기 때문에 움직이고 있다는 것입니다. 여러분들이 볼 때에는 바람이 안부는 것 같지만 바람은 항상 불고 있습니다. 우리가 바람이 부는 것을 느끼지 못하지만 바람이 불지 않는 날이 없는 것입니다. 딱 정지해 있는 날이 없다는 것입니다. 각각의 분야 분야에 보충하는 작용을 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고요할 때 문을 열게 되면 그 문을 통해서 공기가 들어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정지하지 않고 움직이고 있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어떤 곳이든 공기가 채워져 있으면 거기에는 플러스와 마이너스가 작용하게 된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그렇게 작용하는 조그만 모양들이 자꾸 자꾸 모여 우주적인 큰 태풍권을 형성하게 되는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이 우주권도 어떤 한 방향을 갖추어 가지고 움직이는 것입니다. 이렇게 우주권이 움직여 나가는 것도 하나의 작은 끝을 중심삼고 움직여 나가는 것입니다. 이런 것을 여러분이 느껴야 됩니다.

여러분은 생리적인 작용을 할 수 있는 힘의 한계선을 넘어서 무한한 세계와 관계를 맺어야 합니다. 그렇게 되면 자신의 한계선이 없어지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여러분들에게는 인간의 생리작용에 의한 힘보다 더 강한 힘이 있어야 합니다. 그렇게 되면 역사가 벌어집니다. 인간이 그것을 감당하지 못하게 되면 그 힘이 인간을 치기 때문에 기울어지게 되는 것입니다.

이 세계에 하나님의 사랑이 있을 것입니다. 즉, 우리의 이상처럼 영원히 계속될 수 있는 영속적인 요소가 있다는 것입니다. 그것이 없으면 하나님께서는 인간을 영원한 사랑을 중심삼은 대상자로 만들 수 없었을 것입니다. 그러한 하나님의 사랑과 오늘날 우리 인간이 관계를 맺어 연결될 수 있는 하나의 길이 있다면 그 길은 진리의 길도 아니요, 소망의 길도 아닙니다. 그 길은 심정의 길이라는 것입니다.

도의 길이 어떤 길이냐? 신의 세계에 대한 그리움에 사무쳐서 인간 세계의 그리움을 박차고 가는 길입니다. 사람을 좋아하는 이상, 자기 부모를 좋아하는 이상, 자기 처자를 좋아하는 이상으로 신의 세계를 좋아해야 되는 것입니다. 그것이 도의 길입니다. 그러면 얼마만큼 좋아해야 하느냐? 이것 이상 좋은 것이 없다고 할 정도가 되어야 합니다.

도의 세계에서의 느낌은 이렇습니다. 은혜받은 사람, 하나님의 사랑을 받는 사람은 아름답게 보이는 것입니다. 사랑을 받으면 아름답게 보인다는 거예요. 얼마나 아름답게 보이느냐? 빛과 같이 보입니다. 그러기에 빛을 발할 수 있는 것입니다. 이와 마찬가지로 모든 존재가 그러한 빛을 발하게 되면 잘나지 않은 사람, 즉 못난 사람이 없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세상 사람들 중에서 어떤 부부를 보면, 영 어울리지 않는 사람이 있지요? 저런 미남이 어떻게 저렇게 못생긴 여자와 같이 살 수 있을까 하고 생각되는 사람이 있을 수 있습니다. 그렇지만 그 남자 눈에는 그 여자가 최고의 미인으로 보이는 것입니다. 첫사랑의 인연을 가진 사람, 첫사랑을 자기에게 백 퍼센트 부어 준 그 사람 이상의 상대를 못 찾았기 때문에 그 남자는 그 이상으로 행복하게 살 수 있는 여자는 없다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 이상으로 자기에게 사랑을 줄 수 있는 사람을 찾았다면 그 사람을 찾아갔을 것입니다. 무슨 말인지 알겠어요?

33-89
통일교회가 타교회와 다른 점
우리 통일교회가 세상과 다른 것이 뭐냐? 세상보다 더 귀하고 가치있는 사랑을 입체적으로 퍼부을 수 있는 인연을 제시해 주었다는 것입니다. 자기 사랑하는 남편이 문제가 아니고, 또는 아내가 문제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여러분들이 지금까지 진짜 사랑하는 마음을 얼마나 지니고 있었고 선생님의 사랑을 얼마나 느껴 봤느냐? 그거 생각해 봤어요? 그것은 오늘날 인간들이 가지고 있는 이성적인 사랑이 아닙니다. 이성적인 사랑은 그림자 같은 사랑입니다. 주체적인 사랑을 가지고 있느냐? 이것이 문제입니다.

그리워하다가도 또 그리운 경지, 이런 경지를 알겠어요? 죽자 살자 좋아하는 그런 자리에서도 또 그리워할 수 있는 사랑을 가져야 합니다. 그 사랑은 무한히 주는 사랑입니다. 부딪치고 또 부딪쳐도 끝이 없다는 것입니다. 무슨 말인지 알겠어요? 부딪친다고 끝나는 것이 아니라 좋아 죽겠다고 계속 파고들어가는 그런 사랑이라는 것입니다. 그러한 사랑의 완성의 경지가 있지 않겠습니까?

우주의 본원적인 하나님의 사랑, 세계주의적인 사랑, 그 하나님의 사랑이 타락 이후 오늘날까지 살아 나오는 인간 개개인에게 찾아 들어가 절충 되었다면 영원한 한날을 중심삼고 올라가도 사랑이요, 떨어져도 사랑이요, 자빠져도 사랑이다 할 수 있는 경지가 있을 것이 아닙니까?

그러면 그 경지에서는 인격의 귀함이 어디에 있을 것이냐? 그 사람은 말을 잘해서 좋다거나, 그 사람의 눈이 비둘기 눈 같아서 좋다거나 하는 것을 초월한다는 것입니다. 어디를 보아도 잘못된 것이 없다는 거예요. 그와 관계되어 있는 모든 것은 전부 향수 냄새가 난다는 거예요. 그래야 될 거 아닙니까? 하나님이 창조하신 것은 전부다 하나님의 형상으로 볼때에 하나님의 분신이요, 하나님과 인연되어 있지 않는 것이 없다고 하는 그런 심정을 가지고 보면 전부다 친구인 것입니다.

그러한 심정적 인연을 중심삼고 자녀의 입장에서 기도하면 대번에 안다는 것입니다. 가만히 생각하면 영적인 안테나를 통해서 들어온다는 거예요. 여러분이 그러한 생활을 하려면 아직 멀었습니다.

여러분은 잠을 잘 때 아버지가 자기 머리를 쓰다듬어 주는 감촉을 느껴 봤어요? 아들딸을 사랑하며 그렇게 고이 키워 주는 느낌을 느껴 보았습니까? 그런 것을 느끼는 자리에서 아버지라고 부르는 그 인연은 말로 형용할 수 없는 입체성과 신비적인 내용을 지닌 것입니다. 그런 느낌을 많이 느끼는 사람일수록 어떤 자리에 가서 그런 것을 요구하는 사람을 보면 자기도 모르게 좋다는 것입니다. 꽃을 바라보면 꽃을 따라 아름다와지고, 꽃의 향취를 맡으면 모든 생리적인 감정이 동요되듯이 인간은 언제나 끊을래야 끊을 수 없는 사연을 중심삼고 인연을 맺어 나가야 합니다. 그런데 여러분이 다 끊어 버린다는 것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영계에서 그 작용을 대신해 주는 것입니다. 그렇지만 영계에서 그런 작용을 해주는 것이 좋은 게 아닙니다.

만일 여러분이 하나님의 사랑을 느낄 수 있는 경지에 들어가게 되면 모든 것을 통할 수 있는 것입니다. 이런 점에서 선생님을 중심삼고 볼 때 우리 통일교회가 위대하다는 것입니다. 모든 것을 초월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근원적인 사랑의 감정을 중심삼고 모든 것을 초월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우리가 타교회와 다른 점입니다. 현재 전 영계가 선생님을 중심삼아 가지고 세계 도처에서 역사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여러분들은 조건적으로 하나님의 심정을 체휼해서는 안 됩니다. 환경권을 넘어서서 내가 태어난 것도 그분을 위해서 태어났고, 그로 말미암아 자랐다는 인식이 들어와야 합니다. 그런 심정을 체휼해야 합니다. 하나님과 인연된 근본 뿌리를 뽑아 버리고 다른 어디로 갈 수 없다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자기도 모르게 그런 느낌을 가져야 합니다.

여러분들에게 있어 가장 어려운 문제는 어떻게 완성을 향해 가느냐 하는 것입니다. 내가 지금까지 지내 보니까 그렇다는 거예요. 어떤 때는 기도를 하려고 원리를 중심삼고 글을 적어서 놓고 보면 틀림없이 잘 쓰여져 있지만, 이것을 해서 뭘 할 것이냐 하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원리를 주고 뭘 바꿀 거예요? 원리는 전도하기 위해 있는 것이 아닙니다. 사랑의 주체적인 입장에 서기 위해서입니다. 여러분은 이것을 언제나 생각해야 됩니다. 여러분들이 그런 감정이 느껴지지 않을 때는 전도하기 위해 입을 열지 말라는 것입니다. 기도할 때도 그렇습니다. 제일 수준 높은 것을 체험할 때 제일 안타까운 것이 바로 그런 것입니다. 봄절기면 봄절기 기분이 느껴져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런 기분을 느끼려면 체험 단계에 들어가야 합니다.

33-91
사랑 없이는 완성이 있을 수 없다
내가 수난을 당할 때 그 골짜기를 찾아오신 하나님의 심정을 생각하면서 기도해야 합니다. 기도는 그렇게 하는 거예요. 선생님은 기도할 때 그런 기도를 합니다. 내가 외로울 때 하나님이 심정적 사연을 가지고 어느 한때에 나를 하나님의 심정에 연결시켰느냐 하는 것을 생각하면서 옛날에 대한 연상을 오늘의 시점에 연결시키는 것입니다. 심정의 세계는 시간권을 초월합니다. 6.25동란 때 진짜 고생했던 사람 이라면 지금도 그때 얘기를 하면 눈물을 줄줄 흘려야 하는 것입니다. 진짜 억울한 사람이라면 그럴 것입니다. 또, 사랑하는 자식을 둔 부모는 늙어 죽을 때까지도 자기 자식을 생각하면 눈물이 나오는 것입니다. 그 경지는 겸손을 초월하는 경지입니다. 인간의 한계적인 모든 것이 문제가 되지 않는 것입니다. 그런 것을 초월해야 된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여러분들이 단에 서든가 말씀을 전하는 데 있어서 무엇을 통해 말씀을 전해야 하느냐? 박 아무개면 박 아무개를 통해서 말할 것이 아니라 심정을 통해서 말씀을 전해야 합니다. 그것이 제일 중요한 것입니다. 기도를 할 때 ‘아버지’ 하는 말 한 마디에는 억천만 가지의 심정적인 차이가 있는 것입니다. 심정에 있어 억천만 가지의 차이가 있다는 것입니다.

여러분이 소금을 먹으면 그 맛이 어때요? 짜지요? 그러면 그 짠 맛을 느끼는 감정이 전부다 같습니까? 성격에 따라 다르다는 것입니다. 백이면 백 전부다 짜다고만 하게 되어 있지 않다는 것입니다. 거기에는 정도의 차이가 있는 것입니다.

이렇게 생각할 때에, 완성은 사랑 아니면 안 됩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 통일교회에서 제시하는 것이 사랑입니다. 또한 우리 통일교회에서 심정을 들고 나오는 것은 심정이 모든 것의 모체이기 때문입니다. 그 심정 세계의 기원이 무엇이냐? 심정이 무엇입니까? 하나님의 사랑입니다. 절대적이고 무한한 하나님의 사랑입니다. 한계적인 내가 하나님의 무한한 사랑을 갖추게 될 때는 하나님의 사랑을 다시 비출 수 있는 반사경이 되는 것입니다. 제2의 주체적인 입장에 설 수 있는 자리는 하나밖에 없습니다. 반사경에서 반사된 햇빛이 뜨거운가요, 안 뜨거운가요? 직접 비치는 햇빛이나 마찬가지라는 것입니다. 순수하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 인간을 대하시면서 그리워하는 얼굴이 있을 것입니다. 모두가 그리워하고 좋아하는 얼굴이 있을 것입니다. 그러면 모든 사람이 좋아하고 하나님께서도 그리워할 수 있는 그런 내 모습이 되었느냐? 이것을 여러분들이 한 번 생각해 보라는 거예요.

하나님은 6천년 동안이나 아들딸을 잃어버렸습니다. 진짜 잃어버렸어요? 대답해 보세요. 잃어버렸어요, 안 잃어버렸어요? 인간은 부모를 잃어버린 고아와 같은 신세입니다. 부모를 찾아갈래야 찾아갈 수 없는 황막한 천지 가운데 몸을 둘 곳이 없는 인간입니다. 있는 힘을 다해서 어디엔가 부딪쳐 죽어 버려야 할 입장에 있는 인간이 아니냐는 것입니다. 그러기에 내 세포와 신경을 완전히 뭉쳐 가지고 한꺼번에 들이쳐서 옥살박살을 내든가 하는 최후의 결판을 봐야 할 그런 운명권내에 들어가 봤느냐는 것입니다.

말은 하나님께서 6천년 전 잃어버렸던 아들딸을 찾아야 한다고 하는데, 찾았어요? 문제가 여기에 있는 것입니다. 그러면 오늘날 우리가 어떻게 해야 되겠느냐? 그것을 해결하기 위해 나온 것이 통일교회입니다. 통일교회 선생님이 꿈이나 꾸면서 적당히 해 나온 줄 알아요? 천만에요. 그렇게 백 날 천 날을 해도 되지 않습니다. 절대 그렇게 간단하지 않습니다. 오늘날 여러분이 원리를 알듯이 그렇게 간단하지 않다는 것입니다.

여러분이 자식을 영영 잃어버렸다고 생각해 보십시오. 어린 자식이 낯선 넓은 시장 같은 데 가서 부모를 잃어버렸다고 생각해 보십시오. 그 마음이 어떻겠어요? 만일 돈이 있다면 그 돈을 생각하겠어요? 엄마가 사준 것 생각이나 하고 있으면 부모를 찾을 도리가 없습니다. 관심을 다른 데에 두면 부모를 찾을 도리가 없다는 것입니다. 시장이 떠들썩하도록 소리를 질러대야 합니다. 그렇게 하지 않으면 찾을 수가 없다는 것입니다.

정 급하면 사람을 다치게 해서 소문을 내어 찾는 방법도 있습니다. 그럴 수도 있잖아요? ‘아무개가 어머니를 찾다가 찾다가 못 찾아 가지고 화가 나서 사람을 다치게 했다’ 하는 소문을 통해서 부모를 찾을 수도 있다는 것입니다. 나쁜 길을 통해서라도 부모를 찾으려고 하는 그런 마음으로 인해서 죄를 범하게 될 때는 용서받을 수도 있는 것입니다. 사랑의 세계에서는 그럴 수 있다는 것입니다. 안팎을 보완할 수 있는 그런 경지가 벌어진다는 거예요.

33-93
진정으로 하나님의 심정을 느끼고 있는가
여러분들이 진정으로 부모를 잃어버렸다면 그런 경지에 들어가서 부모를 찾기 위해 가슴 조이고 밤을 새워 몸부림치면서 소리 중에 제일 큰소리로 불러도 보고, 또 몸뚱이로 바위를 들이받아 옥살박살 깨지는 한이 있더라도 그렇게 한 번 해보십시오. 세상을 전부 공으로 돌려 버릴 수 있는 나 자신이 한 번 되어 보자는 것입니다. 그래 가지고 부모를 찾을 수 있는 길이 있다면, 그렇게 해서라도 하나님을 찾을 길이 있다면 한 번 부딪쳐 보라는 것입니다. 여러분들은 그렇게 해봤어요?

아담 해와가 타락했나요, 안 했나요? 아담 해와가 타락했다는 것을 진짜 느낄 수 있어요? 타락했는지 안 했는지 알아요? 물론 다 알 것입니다. 아담 해와가 타락 직후에 고개를 들 수 있었겠습니까? 그 부끄러움이 얼마나 컸겠습니까? 내가 세상 사람들에게 별의별 소문과 욕을 먹고 있지만 그 부끄러움은 아무것도 아닙니다. 내가 협회장하고 형무소에 들어갔을 때 기성교인들에게 조롱을 당하던 그 부끄러움은 문제가 아닙니다. 그까짓 것은 아무것도 아니예요. 하나님 앞에 범죄하고 난 아담 해와의 부끄러움과는 비교도 안 되는 것입니다. 그 부끄러움을 가려 가기 위해서는 세상에 대한 모든 것을 포기해야 합니다. 여러분들은 그런 부끄러움을 느껴 봤습니까? 자기의 책임을 못하고 아차 하는 순간에 아담 해와는 타락을 했습니다. 여러분들은 눈앞이 캄캄해지는 그 경지를 생각해 봤어요? 그런 경지는 생각도 못해 봤을 것입니다. 기가 막힐 일인 것입니다.

그런 것을 알고 원리적인 내용을 생각해 보면 우리가 해야 할 일이 얼마나 많은지 모릅니다. 그런데도 뭐가 어떻고 어떻고 하는 자는 건달 중의 상건달입니다. 내가 보기에 그렇다는 것입니다. 선생님에 대해서 뭐 어떻고 어떻고 하지만 여러분들이 어떻다고 하는 그런 척도에서 놀아나는 선생님이 아닙니다. 여러분들의 차원이 선생님의 경지에까지 올라가야 됩니다. 선생님은 내가 아버지를 위해서 있다 하는 그런 무엇을 갖고 있기 때문에 세상의 어디를 가도 걱정을 안 합니다. 이 마음을 중심삼고 선한 생활을 출발하게 하신 분이 당신이기 때문에 모든 결과를 어떻게 맺느냐 하는 것도 당신으로 말미암아서입니다. 당신을 위해서 이 몸뚱이도 지고 다니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이런 마음을 가지고 있습니다.

열녀라고 해서 다 열녀입니까? 옥중에서의 춘향의 절개는 뭡니까? 그 붉은 마음에 어느누구도 흔적을 낼 수 없었습니다. 그것이 바로 절개가 아닙니까 ?

여러분들은 아담 해와가 타락했다고 말들은 잘합니다. 천번 만번 말들을 해봐야 무슨 소용이 있습니까? 그런 사람은 레코드나 마찬가지입니다. 여러분의 영원한 생명과 무슨 상관이 있습니까? 한낱 나팔꾼밖에 못 됩니다.

여러분은 내가 아담이라고 해야 합니다. 여자들도 ‘나는 해와입니다. 이 세상을 수난 가운데 떨어뜨린 여성의 어머니입니다. 다시 해산하는 수고를 해야 할 책임을 져야 되겠습니다. 내 부끄러움을 벗기 위해서는 억천만세의 수난의 길도 감당하고 달게 지고 가야 되겠습니다’ 하는 이런 마음으로 나라에 대한 문제, 세계에 대한 문제뿐만 아니라 개인의 핍박 시련 고통을 달게 져야 되겠습니다.

내가 복받기 전에 모든 시련의 보따리를 내게 맡기라고 해야 됩니다. 인간의 보따리를 다 받고 하늘의 보따리까지 다 받아 나가는 길이 내 부끄러움을 모면할 수 있는 오직 하나의 길이라고 생각해야 되는 것입니다.

내가 민족 앞에 배반당하고 세계 앞에 몰리면서 걸어온 기가 막힌 사연을 어제도 얘기했지만, 자기들을 위해 은덕을 베풀어 주었는데도 불구하고 선생님을 모해하고 선생님을 이용하려고 합니다. 그런 녀석들을 볼 때마다 갈가리 찢어 가지고 독수리 밥을 만들고 싶은 마음이 있지만 인간 세상에서 내가 못박힐 자리가 어디 있겠느냐 하면서 그 부끄러움과 수치에서 벗어나기 위해 그 모든 보따리를 내가 대신 맡아 주는 경지에서 몸부림치는 것입니다.

33-95
심정을 중심삼고 가야 할 복귀의 길
설령 내가 대한민국 사람들에게 어떠한 욕을 먹고 거리에서 객사하는 한이 있더라도 그것은 수치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하나님 앞에 자기가 갖추어야 할 아들의 모습을 상실했을 때의 그 부끄러움 그 수치를 무엇으로 가릴 것이냐? 그것은 청천백일하의 그 무엇으로도 가릴 수 없는 것입니다.

우리들의 부끄러움은 하나님께서 가려 주셔야 됩니다. 하나님의 사랑의 마음만이 내 허물을 다 가리고도 남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나를 사랑할수 있는 하나의 동기가 맺어져 있기 때문에 그 동기로 말미암아 하나님께서 나를 사랑하신다는 것입니다. 그 동기는 타락한 아담을 대하던 이상의 동기입니다. 이처럼 하나님이 허물을 가려 주시기 위해서는 여러분 자신이 아담 이상으로 하나님을 그리워하고 해와 이상으로 하나님을 좋아해야 됩니다. 그래야 되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원리강의를 여러 번 들어 봤을 것입니다. 그 원리가 무슨 원리냐? 복귀원리라는 것입니다. 이것은 타락한 인간들이 하나님을 찾아가는 공식입니다. 그 공식은 무엇을 통해서 가느냐? 말을 통해서 가는 것도 아니요, 아는 것을 통해서 가는 것도 아닙니다. 심정을 통해서 가는 것입니다. 아담 가정을 두고 볼 때 가인 아벨의 자리도 심정으로 결정됩니다. 하나님을 누가 더 사랑하느냐는 것이 문제이지, 하나님의 사랑을 누가 더 많이 받느냐는 것이 문제가 아닙니다.

그렇기 때문에 세계를 가졌다가 잃어버린 심각함을 느껴야 됩니다. 그래서 그것을 찾아 나가는 노정에서 나라를 위해야 하고 때가 가까우면 가까울수록 더 분발해야 합니다. 지치기는 왜 지칩니까? 여러분, 지쳤어요, 안 지쳤어요? 「안 지쳤습니다」

지난번의 진도(珍易)사건을 알지요? 「예」 한 부인이 신앙으로 해서 두 아이를 죽인 일이 있었지요? 남편만 우리 교회에 들어오고 그 부인은 아직 기성교회에 다니고 있는 입장에서 행한 일이었는데 그 얘기를 들었을 때, 일면 보아서는 안되었지만 참으로 심각한 장면이라 생각했습니다.

그 부인이 진정 하나님의 사랑을 알고 하나님의 뜻을 알고 행한 일이라면 얼마나 큰 가치의 일이겠습니까? 그 사건이 나에게 큰 교훈을 주었습니다.

요즘 내가 수택리에 자주 가지만 수택리 공장에 있는 그녀의 남편에게 한마디의 말도 하지 않았어요. 며칠 전에는 그 남편이 내게 와서 자기 아내를 데려와야 되겠다고 하기에 공장장하고 의논해서 잘하라고 했습니다.

자기 자식을 죽인 것은 나쁜 것이지요? 그러나 진정 하나님을 위해서 그랬다면 그 자신은 모르겠지만 복귀도상에 있어서 큰 공헌을 했다고 봅니다.

나도 실제로 하나님을 위해 내 자식을 죽일 수 있는 자신이 돼 있는가 하는 것을 생각해 보았습니다. 자식을 죽인 다음의 그 마음이 어떠했겠습니까? 그러나 그 부인이 아버지를 부르며 통곡하고, 천년 만년 하나님의 한을 풀 수 있는 사랑의 제물이 되게 해 달라고 울부짖었다면 얼마나 고귀한 일이었겠습니까? 만일 그런데 그 부인의 마음이 그렇지 않았을 경우, 집안과 자식들을 두고 생각해 볼 때 심각한 문제라는 것입니다.

이런 관점에서 원리의 길을 생각하면, 창창한 바다 가운데 떨어진 모래알 줍는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여러분 그럴 때가 한두 번이 아닙니다. 과연 어디서부터 닻을 내려야 되나를 생각해 보십시오. 앞으로는 내가 그런 것을 여러분들에게 교육할 것입니다. 여러분들이 지금까지는 다들 심부름꾼밖에 안 되었어요. 종같이 심부름이나 했지 진짜 효도를 못 했다는 것입니다. 나는 그런 사람을 크게 보지 않아요. 지금까지 여러분들은 효도를 한 것이 아니라 종살이를 했다는 것입니다.

여러분을 축복해 준 것은 양자의 입장에 세워 놓고 축복을 해준 것입니다. 축복은 세 번을 받아야 됩니다. 그런 말 들어 봤지요? 「예」 그 말이 어떤 마음에서 한 얘기인지 여러분들이 모르면 저나라에 가서 선생님의 얼굴을 못 봅니다. 그것이 무엇이냐를 놓고 고심을 하라는 것입니다. 온실 안이 봄날이라고 바깥까지도 언제나 봄날이 아닙니다. 그 온실의 비닐만 벗겨버리면 겨울 날이기 때문에 그 안에 있는 식물은 당장에 쓰러지는 것입니다. 인간이 이와 마찬가지 아니냐는 것입니다. 이런 것을 여러분이 알아야 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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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이 좋아하는 사람
완성은 많이 안다고 해서 되는 것이 아닙니다. 선생님은 많이 안다고 하는 사람은 두렵지 않습니다. 남을 위할 줄 알고 남을 위해서 봉사하는 사람을 아주 존경합니다. 하나님은 안다고 하는 사람을 찾지 않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어떤 사람을 택하시느냐? 자기가 많이 알고 있지만 외적으로 드러내지 않고 감추려고 하는 사람입니다. 나야 뭐 아무것도 아니라고 하면서 자꾸자꾸 감추려고 하는 그런 사람을 하나님은 택하시는 것입니다. 도의 가르침이 바로 그것입니다. 높고자 하는 자는 낮아지고 낮고자 하는 자는 높아진다는 그것이 도의 가르침 아닙니까? 자신을 자꾸 묻으려고 해야 합니다. 나 역시 자꾸 묻으려고 합니다. 그런데 그렇지 못한 사람이 있습니다. 그런 사람을 위해 주다가는 둘 다 깨집니다. 그렇기 때문에 상대적 관계를 잘 맺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타락하기 전 인간 조상을 대하시던 본연의 마음을 가지고 우리를 그리워하십니다. 그런데 나는 타락한 입장에서 타락한 마음을 가지고 하나님을 그리워한다면 하나님과 상봉할 수 없지 않겠습니까? 그러면 어떻게 해야 본연의 마음을 가지고 하나님을 그리워하는 나 자체가 될 수 있느냐? 내가 없어야 됩니다. 절대 자기를 중심삼고 생각해서는 안됩니다. 자기를 중심삼고 생각하는 사람은 절대 천국에 못 갑니다. 절대로 못 간다는 것입니다. 자기를 중심삼고 천국에 갈 수만 있으면 가보라는 거예요. 자기 스스로 갔다고 생각하겠지만 저나라에 가서 다시 훈련을 받아야 됩니다. 내가 알고 있는 영계나 내가 지금까지 걸어 나오는 이 길에 있어서는 그렇더라는 것입니다.

오늘날 내가 통일교회를 지도하는 책임자의 입장에 있지만 누가 ‘당신은 책임 다 했소? ‘ 하고 묻는다면 얼굴을 못 드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뜻 앞에서 책임을 다 했느냐고 할 때 책임을 못 했다는 것입니다. 나 스스로 책임 못 했기에 큰소리하지 않는 것입니다. 그런 심정입니다.

효자는 좋은 일이 있으면 먼저 부모를 생각하고, 충신은 좋은 일이 있으면 먼저 군왕을 생각하며, 열녀는 좋은 일이 있으면 먼저 남편을 생각 합니다. 좋은 일이 있을 때 자기만을 생각하고 자기를 내세우는 사람이 효자 충신 열녀의 반열에 동참할 수 없는 것입니다.

그러면 이름도 없이 농촌에 틀어박혀서 나라를 위해 제일 비참하게 산 사람은 불쌍하지 않느냐는 것입니다. 불쌍한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공평하시기 때문에 이 땅 위에서 못 받으면 저나라에 가서 받는 것입니다. 이 시대에 못 받으면 후대에 받는 것입니다. 지나가던 중이라도 그 아들딸을 데려다가 하늘의 복을 받게끔 길러주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러니 자기를 동정해 주지 않는다고 불평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자기를 알아주지 않는다고 화내지 말라는 거예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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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초창기가 그리워지는가
이런 모든 것을 생각해 볼 때, 심정적인 기준이 문제라는 것입니다. 심정은 그리움이 끊이지 않는 것입니다. 선생님은 원필이를 데리고 범냇골에서 살던 때가 좋았다고 생각합니다. 그때가 좋은 때였다는 것입니다. 학교시절은 어느 때가 제일 좋으냐? 유치원이나 국민학교 시절이 제일 좋은 것입니다. 왜? 엄마 아빠가 자기를 찾아와 주기도 하고 자기를 기다려 주기도 하며 자기를 위해 주는 시간의 여유가 어느때보다 많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그때가 그 어느때 보다 좋다는 거예요. 중고등학교에 들어가면 그저 무심하게 ‘너 왔니’ 하면 끝난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그렇지 않아요 ?

여러분들도 60년대가 좋았다고들 말합니다. 그때에 무엇이 좋았습니까? 욕을 잔뜩 얻어먹고, 선생님이 끌려 다니고, 매일같이 동서남북으로 숨어 다니다가 누군가가 문전에서 아무개를 찾으면 가슴이 철렁하는 것을 느끼고 복장이 다 녹아나던 그때가 좋긴 뭐가 좋아요? 그런 것을 느껴 봤어요? 그건 그렇지만 그때는 서로서로가 위해 주는 마음이 살아 있었습니다. 그런 것을 느꼈기 때문에 그때가 좋았다는 것입니다. 그때가 왜 좋았느냐? 선생님을 중심삼고, 뜻을 중심삼고 심정적인 유대가 그 어느 때보다도 좋았기 때문에 그때가 좋았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지금은 왜 안 좋으냐는 것입니다. 여러분들이 나가서 전도를 해보라구요. 얼마나 좋아요. 열두 시가 지나고 날이 밝아서 닭 울음 소리가 나는 것이 문제가 아닙니다. 여러분은 그것이 얼마나 재미있고 좋은지 모릅니다. 부모가 자식 기르는 그 맛을 알려면 자식을 길러 봐야 합니다.

여러분들은 그때 기뻐했는데 선생님이라고 기뻐하지 않았겠어요? 초창기에는 밤을 새우는 것이 보통이었습니다. 보통 새벽 세 시나 네 시쯤 되어야 잠을 잤기 때문에 평균 두 시간밖에 못 잤습니다. 그러니 좋을 것이 뭐가 있었겠습니까? 그러나 그때가 좋았다는 겁니다. 거기에는 경계선이 없었습니다. 그 누구도 침입할 수 없는 하나의 순수한 인연으로 뭉쳐져 있었습니다. 그렇지 않아요?

선생님이 지방에 순회를 가서, 그렇다고 말은 하지 않지만 척 가서 대충 보면 다 압니다. 전부다 지금 사람이 없어서 고생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앞으로는 사람 사태가 날 때가 올 것입니다. 여러분들은 사람이 얼마나 귀하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6천년 동안 사람을 얼마나 귀하게 여기면서 찾아 나오고 계시는지를 느껴야 합니다. 그 한계선에 여러분이 아직까지 도달하지 못하고 있다는 것을 걱정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러기에 사람이 문제입니다.

요즈음은 통일교회보다 몇십 배, 몇백 배 되는 단체의 책임자들이 선생님을 만나고자 합니다. 여러분들은 잘 모르지만 누군가를 통해서 그들을 만나고 있습니다.

선생님에게는 사람이 필요합니다. 대한민국이면 대한민국을 움직이고 남을 수 있는 사람이 필요한 것입니다. 오늘 우리들에게는 하나님이 개인을 찾고, 종족을 찾고, 민족을 찾고, 국가를 찾아 나오는 데 있어서 사람을 필요로 하는 마음을 어떻게 느끼느냐 하는 것이 문제입니다. 사람이 어리숙해서 그것을 못 느끼게 되면 다 놓쳐 버린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심정을 느낄 수 있는 심정적 바탕이 되어 있어야 합니다.

33-100
절대적인 믿음의 중요성
참부모라고 하는 것이 무엇입니까? 어떤 사람이 참부모가 되는 것입니까? 밥을 많이 먹는 사람입니까? 세상에 권세가 등등한 그런 사람입니까? 참부모는 심정적인 바탕 위에서 참된 하나의 가정을 이룰 수 있는 사람입니다. 여러분이 그럴 수 있느냐 하는 것이 문제입니다.

내가 어제도 얘기했지만 어머니는 나이로 보면 선생님의 딸과 같은 사람입니다. 그 어머니를 대해 가지고 딸과 같이 느낄 수도 있고, 누나같이 느낄 수도 있고, 또한 어머니같이 느낄 수도 있고 아내같이 느낄 수도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께서 아담 해와를 지으셨는데 아담 해와가 누구예요? 하나님의 아들딸입니다. 그렇지요? 그 다음에는 무슨 입장이겠어요? 동생의 입장입니다. 또, 그 다음에는 무슨 입장이냐? 하나님 자신의 입장입니다. 즉, 하나님 자신과 하나라는 거예요. 문제는 여기에 있는 것입니다.

참가정이란 어떤 가정이냐? 이것을 복귀도상에서 선생님이 먼저 세워 가고 있습니다. 어머니는 여러분들이 모르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선생님이 어머니에게 지금 노력하라고 한 것이 무엇이냐면 지금까지 잘한 일에 대하여 생각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여러분도 마찬가지입니다. 여러분의 잘잘못이 문제가 아니라, 여러분 자신이 하나님 앞에 순응할 수 있는 절대적인 신앙을 갖고 나갈 수 있느냐하는 것이 문제입니다. 실적을 못 갖고 있으면 희망이라도 가지라는 것입니다. 희망을 갖기 위해서는 절대적 신앙을 갖는 것은 물론이요, 실천적 과정을 닦아 나오지 않으면 안 됩니다.

선생님은 이 땅 위의 남성을 대표하고 그 누구보다 더한 투쟁의 역사를 거쳐 나가야 됩니다. 선생님은 영계와 육계로부터 공인받을 수 있는 권한을 갖고 나왔지만 여러분들은 그렇지 않습니다. 실적이 없으면 믿음으로 넘어가면 되는 것입니다. 그 믿음은 어떠한 믿음이어야 되느냐? 나 좋을 수 있는 그런 믿음으로는 안 됩니다. 그런 믿음으로는 뜻을 이루었다 하더라도 자기만이 좋아하는 뜻이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좋아하시지 않는 것입니다. 자기 마음대로 하는 그런 일은 하면 할수록 하나님과도 선생님과도 멀어지는 것입니다. 내가 좋아야 하지 싫으면 안 한다고 하면 안 됩니다.

안창성이도 그런 무엇이 있지? 그런 것은 순진한 면으로 통할는 지 모릅니다. 그러나 믿음이란 순진과는 다른 것입니다. 자기가 그렇다 하는 것을 다른 사람이 공인을 하지 않으면 그 사람은 바보 천치가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자기의 실속이 문제인 것입니다.

자기 아들딸들이 좋아하고 자기를 따르는 사람들이 좋아한다고 해서 됩니까? 하나님께서 좋아하셔야 됩니다. 문제는 여기에 있는 것입니다. 나 자신도 그렇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자기가 실천적인 생활을 못하더라도 절대 믿으라는 것입니다. 믿으면 되는 것입니다.

선생님이 어머니를 교육하는 것도 그것입니다. 어머니가 좋아하는 하늘 나라가 아니라는 겁니다. 어머니가 좋아하는 남편이 되기를 바라지 말라는 것입니다. 또 내가 좋아하는 어머니가 되라고 하지도 않았습니다. 하나님이 좋아하고 인류가 좋아할 수 있는 그런 어머니가 되라는 것입니다. 밤낮을 가리지 않고 누가 찾아오더라도 그 사람 이상의 실적을 갖추지 못했을 때는 그를 부정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33-101
우리가 절대시해야 할 것
여러분도 마찬가지입니다. 누가 자꾸 찾아오면 귀찮다고 생각하겠지만 그 사람을 누가 보냈는지 아느냐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보냈는지 다른 누가 보냈는지 아느냐는 거예요. 그 사람 이상 실천한 실적을 갖지 못하고는 그 사람을 대해서 귀찮고 피곤하다고 할 수 없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협회장도 3년 8개월 동안 강의하면서 고생을 많이 했습니다. 나 자신도 그래요. 내가 지도하는 데도 문 아무개의 주관을 가지고, 문 아무개의 욕심대로 지도하려고 하지 않습니다. 여러분이 그런 것을 알아야 합니다.

여러분, 원리책은 무서운 책입니다. 원리책을 협회장이 썼다고 해서 경시하는 사람이 많습니다. 만일 이 책을 내가 썼다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다 걸려드는 것입니다. 두말할 것도 없이 대번에 걸려 버린다는 것입니다. 영계에 가 보라는 거예요. 만일 잘못 써 놨더라도 경시하면 걸리는 것입니다. 무엇 때문에 그렇게 썼는지를 알아야 합니다. 알겠어요, 무슨 말인지?

경서는 절대시해야 하는 것입니다. 뻔히 틀린 것 같은데 왜 그렇게 썼느냐고 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것은 전체를 두고 볼 때 그렇게 쓰게끔 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그렇게 써야 할 다른 사정이 있었고 비약하지 않을 수 없는 내용이 있었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그렇게 생각해야 합니다. 그것을 이해하지 못하고 자기가 모르는 것은 틀렸다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위대한 사람들은 유모어로 자기 사정을 잘 말합니다. 그래서 그 유모어가 확실히 맞는 것이면 그 유모어가 자기에게 사실로 부딪쳐 올 것이요, 안 맞는 것이면 그냥 흘러가는 것입니다. 악한 세상에는 그럴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원리는 천년이 가도 변하지 않는 것입니다. 내가 요즈음 얘기하지만 앞으로 선생님이 원리를 쓰게 되면 인간들이 몇천 년이 가도 알지 못할 나만이 알고 있는 내용을 중심삼고 몇 권 더 남겨 놓고 싶습니다. 기도하면서 뼛골이 우러나도록 정성을 들여 써 가지고 남기고 싶습니다. 왜냐? 역사에 거룩한 후대를 남기고 정성들이는 후대를 남기기 위해서입니다. 그것을 영원히 보관할 수 있는 사람이 누구겠습니까? 이러한 견지에서 선생님이 앞으로 새로운 각도에서 원리책을 쓰려고 합니다. 협회장이 쓴 원리책에 대해서 시정할 것이 없잖아 있는 것을 내가 알지만 그가 정성들여 썼기 때문에 아무런 얘기를 안 했습니다.

선생님이 지시한 대로 하지 않으면 그것이 영계에 가서는 참소조건이 됩니다. 그래서 그가 영계에 가기 전에 내가 어머니와 최선생하고 함께 하나하나 꼽아가면서 눈물을 흘리며 하나님께 용서를 구하는 기도를 했습니다. 선생님은 협회장에 대해서 3년 전부터 모든 것을 느끼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2년 전에는 인사이동을 하기 위해 내심으로 두 사람을 결정해 놓기도 했습니다. 왜 그랬느냐? 선생님이 몇 번씩 진지한 입장에서 교회 치리 방법에 대해서 지시를 했는데도 불구하고 그는 그것을 그냥 다흘려 버렸다는 것입니다.

여러분들은 잘 모르겠지만, 어떤 때는 협회장이 앞으로 지나가는 것까지도 싫었습니다. 걸어가는 것까지 싫었거든요. 그것은 여러분이 잘 모를 것입니다. 모든 일은 하나님이 중심이 되어야 합니다. 옛날에 선생님과 밤을 새워 가면서 눈물바다를 이루도록 울면서 기도하고, 선생님이 변소에 가면 변소에까지 따라와서 기다리던 그 자세는 어디로 갔느냐는 것입니다. 이것이 문제입니다.

그러면 선생님은 그때보다 후퇴했느냐? 발전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정성의 도수를 더 높이 들여가고 있습니다. 문선생은 발전합니다. 여러분은 쉬고 있을는지 모르지만 선생님은 발전해 나가고 있다는 것입니다. 영계와 지상세계에 널려 있는 하늘의 사람들을 규합에 나가고 있습니다.

그런데 여러분은 ‘선생님은 뭐가 어떻고’ 하면서 말이 많다는 것입니다. 선생님이 여러분의 친구예요? 여러분들이 평하는 것이 절대적일 수 있느냐 이거예요. 여러분이 선생님에 대해서 얼마나 알고 있습니까? 여러분이 선생님을 진짜 알고 있느냐는 것입니다. 공장에서 일하는 녀석들처럼 머리나 긁적긁적하고 흐지부지하는 사람은 두고 보라구요. 그 말로가 어떻게 되는가.

33-103
현실을 직시하고 각성하라
선생님이 있었기 때문에 이만큼이라도 끌고 나올 수 있었던 것입니다. 내가 없었으면 발전하지 못했습니다. 교회만 보더라도 그렇습니다. 교회를 협회장이 지도한 것이 아닙니다. 부장들이 모여 앉아 가지고 뭐가 어떻고 어떻고 하면서 전부다 허수아비 만들어요? 전부다 허수아비 만들어 놓고 복귀역사가 이루어질 것 같아요? 말도 말라는 것입니다. 여러분들에게 맡긴 권한이 아닙니다. 월권을 바라지 말라는 거예요. 선생님도 아직까지 말하지 못하고 이 길을 개척하는 과정에 있는데 여러분들이 짐을 들어 주지는 못할망정 그렇게 해서 되겠습니까? 동냥을 못 주면서 쪽박을 깨면 안 된다는 것입니다. 그러니 야단났다는 것입니다.

여러분들이 교회를 염려하는 데 있어서 선생님 이상으로 심각하게 염려해야 합니다. 여러분들은 심각한 자리에 있다는 겁니다. 이 나라의 운명을 중심삼고 복귀역사를 하는데 이 나라 사람들이 비웃고 있기 때문에 선생님은 구보끼 같은 외국 사람을 세워 일하고 있습니다. 한국 식구들 중에는 일을 시킬 만한 사람이 없다는 것입니다. 말을 믿지 못합니다. 선생님이 어디를 가게 되면 자기들 마음대로 합니다. 이제는 여러분들이 새로이 각성해야 되겠습니다.

여러분들이 뜻을 위해서 산다고 말은 하지만 진짜 뜻을 위해서 살아요? 말이야 선생님보다도 더 잘 하지요. 선생님은 지금 심각합니다. 선생님의 얼굴을 보라구요. 심각하게 생기지 않았나. 선생님이 요즈음에는 잠도 못 잡니다. 선생님의 눈을 좀 보세요. 심각한가 심각하지 않은가. 내가 무슨 일을 결단 내릴 때에는 전후 좌우 사방에 있어서 어긋나지 않는 결단을 내리기 위해 아주 심각하게 생각을 합니다.

그런 가운데에서 하나님을 모셔 나오면서 여러분들이 어떠한 잘못을 하더라도 내가 지금까지 하나님 앞에 일언반구도 하지 않았습니다. 여러분 들이 열 번을 잘못했더라도 내가 아무런 반응을 나타내지 않았습니다. 왜냐? 하나님을 찾아가는 길은 직선길을 가는 것처럼 쉬운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올라갈 때가 있으면 내려갈 때도 있는 것입니다. 그런 때가 얼마나 많겠습니까? 통일교회가 소수를 가지고 망하지 않고 이만큼 버텨 나온 것은 선생님의 작전만 가지고 된 것이 아닙니다. 선생님은 몰리고 쫓기면서 이 일을 해 나왔습니다.

선생님한테 책임을 못했다고 하는 사람이 세상에서 자기의 자리를 잡았으면 얼마나 잡았겠습니까? 조직을 중심삼고 움직이려면 그 조직에 대해서 관심을 가져야 됩니다. 선생님은 공산당 조직에 대해서도 연구한 사람입니다. 일을 하는 과정에서는 조직이 좋습니다. 그렇지만 게릴라 작전을 할 때는 조직이 필요 없는 것입니다.

그때는 하루하루의 생활이 천차만별입니다. 점심 때는 뭘 먹고, 저녁 때는 뭘 먹고 그렇게 미리 계획할 수 없습니다. 뱀도 잡아먹어야 되고, 개구리도 잡아먹어야 되고, 나무 열매도 따 먹어야 되는 천태만상의 상황이 벌어진다는 것입니다. 영적으로도 게릴라 전법을 써야 됩니다. 이 지옥에서 작전지휘를 하는 자는 책임자인 것입니다. 지금은 게릴라 전법을 쓸 때입니다.

회사도 마찬가지입니다. 회사의 체제를 완전히 갖추려고 생각하지 말라는 거예요. 한 가지 일을 하더라도 체제를 갖추어서 하면 여러 사람을 통해야 됩니다. 많은 사람이 필요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게릴라 전법을 적용하면 많은 사람이 필요 없습니다. 몇 사람이면 다 할 수 있는 것입니다. 밤을 새워 가면서라도 다 한다는 것입니다. 선생님은 공장에 가면 시간 관념이 없습니다. 시간 관념을 초월해야 됩니다. 일하는 사람이 뭐 아홉 시니 열두 시니 하고 시간을 따지며 식사시간이니 밥을 먹자고 작업 하다 말고 나오면 되겠습니까? 나는 이런 것을 싫어합니다. 왜 이런 얘기를 하느냐? 심정을 중심삼고 다시 재편성해야 된다는 것입니다.

33-105
바로 알고 신앙하라
여러분들이 선생님을 얼마나 좋아하느냐? 얼마나 사랑하느냐? 또 하나님을 얼마나 좋아하느냐? 문제는 여기에 있습니다. 여러분이 밤이나 낮이나 아버지의 이름으로 열심히 살아서 ‘나는 이렇게 살아왔습니다’ 하고 당당히 주장할 무엇을 가지고 있어야 합니다. 아무리 하늘이 반대하더라도 ‘이렇게 해야 됩니다’ 하면서 나갈 수 있는 그런 무엇이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자기가 정성을 들여서 가는 길이 천도(天道)입니다. 기도하는 사람의 말은 선생님이 책임지고 들어주게 되어 있습니다. 여러분, 선생님이 기도 하고 정성들인 사람의 말을 안 듣는 것을 본 적이 있어요? 정성을 안 들인 사람의 말은 듣지 않습니다.

여러분이 교회를 염려한다면 눈물 콧물까지 흘려가면서 기도해야 되는 것입니다. 이러한 심정의 세계에 사는 사람이 행복한 사람입니다. 밤이나 낮이나 잠을 자다가도 일어나서 아버지 앞에 엎드려 기도하라는 겁니다. 이 길은 눈물 없이는 찾아갈 수 없는 길입니다. 선생님은 지금까지 그러한 길을 걸어왔습니다. 내가 어떤 때 아버지 앞에 심각한 문제를 걸어 놓고 기도를 할 때는 아주 체면을 세울 수 없는 지경에 들어가게 될 때도 있습니다. 그러나 앞으로는 위신을 찾아 세워야 할 때가 올 것입니다.

선생님은 외롭다면 누구보다도 외로운 사람입니다. 이 세상에 친구라곤 그 누구도 없습니다. 내 사정을 알아줄 친구를 가진 사람이 아니예요. 가정이 있고 식구들이 있지만 언제나 외로운 사람입니다. 통일교회 식구들이 이러한 사정을 모르기 때문에, 외부에 있는 영통하는 사람들이 선생님을 위해서 밤을 새우며 기도하는 것입니다. 그런 사람이 수십 명 됩니다. 여러분들은 모르지만 그런 사람이 수십 명 된다는 것입니다.

그들은 선생님 만나기를 고대하며 정성들이고 있습니다. 어떤 사람은 일년 이상 정성들이면 10월에 선생님을 만날 수 있다고 영계에서 가르쳐 주니까 온갖 정성을 들이면서 나를 만날 그날을 기다리고 있다는 것입니다. 여러분들은 그런 것을 배워야 합니다. 선생님을 만날 그 시간을 위해서 목욕재계하고 밤 열두 시부터 새벽 네 시까지 밤을 새우면서 기도한다는 것입니다. 그런 사람들 앞에 여러분의 체면이 설 것 같습니까? 내가 지금까지 살아오면서 누구에게도 빚을 지려고 하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여러분들을 위해서 정성들이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선생님을 사랑하시는 모양입니다.

이 나라가 선생님을 반대하면 세계 사람이 몰려 들어올 것입니다. 대한민국이 반대하면 멀지 않아 세계 사람들이 몰려 들어온다는 것입니다. 선생님이 제일 염려하는 것이 뭐냐면, 선생님이 누구는 이래야 되고 누구는 저래야 된다는 것을 결정하는 것입니다. 결정해야 할 때가 되었을 때는 참으로 거북하다는 것입니다. 무슨 말인지 알겠어요? 이해가 됩니까? 여러분들이 출발할 때에도 다 같은 입장에서 출발했고, 일도 같은 입장에서 해 나가고 있으니 기왕이면 같은 자리에 가서 다같이 하나님을 모시고 살면 좋겠지만 그럴 수 없는 때가 다가오고 있다는 것입니다.

앞으로는 영계를 통하는 수십 명 수백 명의 사람들이 직접 선생님을 모시고 살 때가 옵니다. 그때 가서 여러분들은 어떻게 하겠습니까? 그때 가서는 그 사람들의 말을 들어야 되는 것입니다. 그것이 얼마나 창피한 일입니까? 앞으로 그런 부끄러운 때가 온다는 것입니다.

내가 천상세계에 가기 전에 여러분들에게 천법을 지도해야 됩니다. 여러분들이 천법을 몰라서 될 것 같아요? 내가 여기에 대한 말은 안 하지만 여러분이 거기에 대한 내적인 인격을 갖추고 있지 않으면 안 됩니다. 그렇기 때문에 여러분들은 잘 모르지만 선생님이 어느 것도 그냥 두지 않습니다. 그냥 보고 넘어가지 않아요. 그저 무심하게 사는 것 같아도 그렇지 않다는 것입니다.

그것은 어머니가 잘 알아요. 어머니가 선생님과 10년을 같이 지내면서 보니까 선생님이 엄격하다는 것입니다. 추호도 빈틈이 없다는 거예요. 선생님 가정을 모시고 있는 처녀들은 잘 압니다. 선생님이 엄격한 사람이라는 겁니다. 결코 시시한 남자가 아니라는 거예요.

일면, 외적으로 보는 사람들은 선생님에 대해서 이러고저러고 말들을 하지만 선생님을 가까이에서 모시는 처녀들은 선생님을 존경합니다. 자기 들을 대하는 것 등 모든 것을 두고 볼 때에 세상적인 생각으로 대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엄격하다는 거예요.

여러분, 함부로 웃고 행동하고 그래 가지고 뜻이 이루어질 것 같아요? 세상에서 하는 것과 같이 그렇게 해 가지고 될 것 같은가 생각해 보라구요. 도둑놈 심보 가지고 될 것 같아요? 슬쩍 도둑질해 가지고 될 것 같아요. 여러분들이 이런 말을 하는 선생님의 뜻을 알고 따라 나왔다면 오늘보다 내일이 더 값질 것입니다.

여러분, 아담 해와가 타락할 때의 그 부끄러움을 알아요? 다말이 시아버지와 관계를 맺어서 애기를 낳았던 그것은 아담 해와의 타락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닙니다. 무슨 말인지 알겠어요? 다말은 그런 경지에서 인간을 중심삼은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중심삼고 고차적인 입장으로 승화했던 존재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 후손이 복을 받을 수 있었던 것입니다. 세상에 그런 법이 있어요? 며느리가 시아버지와 관계를 맺을 수 있는 법이 세상에 있어요? 참다운 후손을 위해서 그렇게 해야 할 그 무엇이 있었다는 것입니다.

33-107
우리가 이 길을 끝까지 가야 하는 이유
내가 여러분을 대해서 염려하는 것은 이 땅 위에 나타나는 사실을 보고 선생님을 대하지 않을까 하는 것입니다. 그러지 말라는 것입니다. 선생님은 세계의 군왕 중에서도 최고의 군왕의 영광을 가지고 이 땅 위에 왔습니다. 선생님이 이 땅 위에 와서 지금까지 고생한 것만 해도 하나님은 원통하시다는 것입니다. 선생님은 수난의 길을 가기 위해서 온 사람이 아닙니다. 영광의 길을 가기 위해서 왔습니다. 내가 이제까지 핏자국을 남긴 것이 하나님의 뼛골에 사무쳐 있다는 것입니다.

그렇지만 나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습니다. ‘하나님, 걱정하지 마십시오. 내가 좋아서 하는 일인데 왜 그러십니까? 이것이 내 생리에 맞기 때문에 가는 길인데 왜 그러십니까? 걱정하지 마십시오’ 하고 하나님을 위로해 드리면서 가는 것입니다.

만일에 여러분이 여러 자식 중의 한 아들에게 좋은 옷을 사 주고, 집도 사 주고 해서 잘살게 만들어 주었는데 그 아들이 그것을 전부다 팔아서 형제들을 도와 주기 위해 나누어 주었다고 하면 ‘야, 이놈의 자식아’ 하면서 벌을 주겠어요? 마찬가지라는 것입니다. 내가 좋아서 하는 일이기 때문에 동정을 안 받겠다는 겁니다. 나를 동정하지 말라는 거예요.

탕감시대에 싸워 나갈 때에는 하나님 앞에 기도를 하지 않습니다. 여러 분이 그것을 알아야 됩니다. 앞으로 어려운 때가 올 것입니다. 아주 심각할 때가 올 것입니다. 그렇지만 자기에게 그러한 때가 오는 것이 예상될 때는 기도할 생각을 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그런 때일수록 세계를 위해서 싸우라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성경에서도 “무릇 자기 목숨을 보존하고자 하는 자는 잃을 것이요 잃는 자는 살리라(눅 17:33)”, “누구든지 자기를 높이는 자는 낮아지고 자기를 낮추는 자는 높아지리라(마 23: 12)”라고 가르치는 것입니다. 그 말씀이 진리입니다.

인간은 나 자체를 위하여 살게 되어 있지 않습니다. 내가 아버지 앞에 돌아갈 때는 어떻게 되겠어요? 모든 것이 다 드러날 것이 아니겠어요? 선생님이 사기를 쳤으면 저나라에 가서 사기친 것이 다 드러날 게 아닙니까? 백주같이 환하게 드러날 거 아니예요? 내가 이 땅 위에 왔다 간 성인현철들 앞에 책임진 것이 있기 때문에 고생하려고 하는 것입니다. 수많은 종족과 민족을 구원해 주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번에 축복을 해주는 데에도 다 그러한 이유가 있습니다.

그런데 외국 사람들은 ‘선생님은 그렇게 축복을 안 해주시더니, 이번에는 또 한국에 와서 축복받으라고 하시다니, 한바퀴 빙 돌면서 해주시면 쉬울 텐데’ 하고 불평하는 말들을 합니다. 그러나 그렇게 하는 데는 그들이 생각하는 것보다 차원 높은 이유가 있는 것입니다. 한국에서 하는 것이 과거에 영계에 간 영인들과 현재 그리고 미래에까지 연결된다는 것을 모르고 있다는 것입니다.

세계에 있는 수많은 국가들 중에 뜻을 알아주는 국가가 몇이나 있느냐? 또 몇 개 국가가 있다면 그 몇 개 국가를 중심삼고 어떻게 나갈 것이냐? 이런 문제를 중심삼고 금후에 가야 할 길이 남아 있습니다. 이러한 금후의 갈 길에 대해서 의논하는 사람들이 되어야 합니다.

그 길은 내가 가야 할 길입니다. 그래서 선생님이 아직까지 세계적인 십자가를 지고 가는 것입니다. 여러분이 여기에서 머물면 여러분을 남겨 놓고라도 가야 하는 것입니다. 선생님이 그렇게 하는 것은 왜냐? 저나라에 가서 하나님 앞에 섰을 때의 부끄러움을 모면하기 위한 것은 물론이지만 저나라에 가 있는 수많은 영인들 앞에 책임을 못 하는 부끄러움을 모면하기 위해서입니다. 그래서 이러한 고생길을 가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여러분은 뭐가 어떻고 어떻고 하는데 그런 사람은 철없는 사람입니다. 그런 여러분의 모습이 저나라에 갈 때도 그냥 그대로 통할것 같습니까? 천만에요. 절대로 통하지 않는 것입니다. 재교육을 받고 들어가야 하는 것입니다.

33-109
그리움과 간절함을 얼마나 느껴 보았는가
문제는 뭐냐? 참이라는 것, 즉 참부모라는 것입니다. 참부모가 무엇이냐? 참부모란 말이 그리 간단한 말이 아닙니다. 제일 무서운 말입니다. 그 말이 얼마나 무서운 말인지 모릅니다. 이 참부모라는 말 한마디 때문에 역사가 좌우됩니다. 이 말을 찾아 세우기 위해서 지금까지 수많은 선열들이 희생의 길을 갔습니다. 연속적인 피의 투쟁을 거치고 몸부림치며 절규하면서 소망을 품고 찾아 세운 이름이 참부모라는 거룩한 이름입니다.

참부모 앞에는 참자녀가 있어야 됩니다. 그래, 여러분들이 참자녀가 되었습니까? 생각해 보십시오. 여러분이 참자녀예요? 참이란 과거에도 현재에도 미래에도 변하지 않는 것입니다. 그래, 여러분들이 참자녀입니까?

아이들이 밖에 나갔다가 들어오면 누나나 무슨 아줌마 먼저 부르는 것 봤어요? 다른 식구들이 다 있어도 어머니 아버지가 없으면 ‘아무도 없구만’ 합니다. 형제들이 바라보며 ‘너 왔니’ 하는데도 ‘아무도 없구만’ 한다는 것입니다. 그래 정말 아무도 없어서 그러는 거예요? 그것이 무슨 말이냐? 그 말은 부모만이 자기를 충만하게 채워 줄 수 있는 존재라는 뜻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부모가 없으면 아무도 없는 것같이 느껴진다는 것입니다. 여러분들이 그런 부모와 같은 사람이 되었습니까?

뜻을 중심삼고 생활하는 데 있어서도 ‘무미건조하고 성의가 없구만’ 하는 말을 듣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 사람은 하나님을 모시지 않는 생활을 하는 것입니다. 그러니 재미가 있어도 없는 것입니다. 이것을 여러분이 생각해야 됩니다. 그렇기 때문에 여러분들의 심정에 봄절기와 같은 사춘기의 마음을 가지고 있어야 됩니다.

여러분들 중에 선생님이 보고 싶어서 눈물 흘려 본 사람 손들어 보십시오. 선생님이 그리워서 눈물을 흘려 보지 못한 사람이 있다면 그 사람은 가짜입니다. 선생님은 하나님이 보고파서 눈이 물크러지도록 울어 본 적도 많습니다. 그래서 눈을 잘 뜰 수가 없어서 햇빛을 못 볼 때도 있었습니다. 그렇게 해서 도의 길을 열어 나온 것입니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기성교회에서는 물론이지만 통일교회 본부에 속해 있는 사람들까지도 선생님이 뭘 하는 지 잘 모르고 있습니다.

지금도 선생님이 제일 잊지 못하는 사연이 있습니다. 여러분들은 그런 사연을 갖지 못했을 것입니다. 내가 흥남 감옥에 있을 때에 한 달에 한번씩 미싯가루를 받아 먹었습니다. 감방에 한 30여 명이 있었기 때문에 그것을 많이는 나누어 줄 수 없어서 신문지 조각에 한 숟갈씩 퍼 가지고 쭉 나누어 주었습니다. 이렇게 미싯가루를 나누어 주는 날은 잔칫날입니다. 그것은 쇠갈비가 문제가 아닙니다. 거기에서의 콩 한 알은 바깥 세상의 황소 열 마리보다도 낫다는 것입니다.

아무리 체면을 차리고 위신을 내세우는 사람도 콩 하나가 떨어지면 손을 쓱 내밀게 되어 있습니다. 20여 명이 한꺼번에 손을 내밀어 서로 콩을 집으려고 한다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아마 그런 경지를 모를 것입니다. 상상할 수도 없을 거예요. 간유에다가 물을 부어서 먹지만 고소하기가 이루 말할 수 없습니다. 그건 왜 그러냐? 몸에 그만큼 기름기가 부족하다는 거예요. 또 생콩을 먹는 데도 얼마나 고소한지 모릅니다. 그만큼 몸에 지방질이 부족하기 때문에 흡수력이 강한 것입니다. 그게 그렇게 맛이 있다는 것입니다. 흡수력의 강한 정도에 따라 맛도 달라진다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콩한 알이 떨어지게 되면 대번에 그걸 집으러 갑니다. 그것은 생리적 본능입니다. 거의가 굶주린 사람들이기 때문에 그것을 집으려고 엉금엉금 기어가는 것입니다. 20여 명이 그 콩 한 알 가지고 싸우는 것입니다. 선생님은 그런 걸 많이 보았습니다.

그러니 거기에서 한 숟가락씩 나누어 주는 미싯가루를 얼마나 귀하게 여기겠습니까? 자기가 가지고 있는 억천만 가지의 재물이나 대문이 아홉개 달린 기와집보다도 귀하다는 것입니다. 선생님이 미싯가루를 나눠 주는 날이 바로 잔칫날입니다.

선생님은 그것이 아깝다고 해서 혼자 먹지 않습니다. 절대 혼자서는 안먹습니다. 이 미싯가루를 이겨 가지고 미싯가루 떡을 만들어서 신문지에 싸서 작업장에 가지고 나갑니다. 먹고 싶은 것을 참고 점심 때까지 금식을 하는데 먹고 싶은 마음이 얼마나 간절한지 모릅니다. 그래도 그것을 나눠 먹고 싶어서 참는 것입니다.

그 전날 저녁에도 굶고 아침이 일어나서도 굶었으니 땀을 흘리며 일하면서도 종일 그 생각밖에 안 난다는 것입니다. (웃음) 그러다가 점심시간을 알리는 종이 ‘ 땡’ 하고 울리기가 바쁘게 사람들은 재빠르게 달려가는 것입니다. 그 공장은 크기 때문에 제 1작업장과 제 2작업장으로 나누어져 있고, 큰 비료산이 몇 개씩 있습니다. 작업시간에는 거기에서 일을 하지만 쉬는 시간 15분 동안만은 거기가 천국입니다. 그 세계의 생활이라는 것은 체험해 보지 않은 사람은 모릅니다. 이러한 체험은 억천만금을 주고도 바꿀 수 없습니다. 그것은 피눈물로 얼룩져 있기 때문입니다. 자기 생애의 모든 것을 투입해야 하는 세계가 바로 그 세계입니다.

선생님이 그때의 일을 생각해 보면 아직도 우리 통일교회는 그러한 심정으로 활동해 보지 못했습니다. 여러분과 내가 그렇게 하면서 살아 보지 못했다는 것입니다. 그렇게 못 살아 봤으니 살아 봐야 되는 것입니다. 천리길도 멀다 하지 않고 아버지의 뜻을 위해 싸워 나가야 합니다. 아버지의 뜻을 위해 일생의 수고도 일순간에 잊어버릴 수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럴 게 아니예요? 그러지 못하면 섭리역사가 6천년으로 연장되고 6만년으로 연장될 수도 있다는 것입니다.

6천년 동안 인류를 대해서 수고해 나오신 아버지의 심정의 뒷면에 무엇이 감추어져 있느냐? 이것을 풀어 놓고 줄 수 있는 아들이 있다면 아버지의 기쁨이 얼마나 크겠습니까? 천국은 거기에서부터 이루어져 나가는 것입니다.

여러분들은 언제 그런 입장에서 선생님을 위해 봤습니까? 선생님이 형무소에 있을 때에 선생님을 찾아다니던 일을 생각해 보세요. 그때는 서로가 면회를 하겠다고 줄을 지어 가지고 야단이었던 것입니다. 그런 마음을 늘 가져야 합니다. 사실 감옥이 어떤 곳인가를 생각해 보면 결국 이세상도 자연적인 형장이라는 것입니다. 세상 사람들은 전부다 사형선고를 받은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그러므로 오늘날 뜻길을 가는 우리 통일교회 신도들에게는 뒷받침이 든든해야 합니다. 그렇지 않고서는 발전할 수 없습니다.

나는 지금까지 여러분 앞에 무엇을 잘해 줄까 하는 것을 놓고 노력해 나왔습니다. 선생님은 여러분 앞에 빚을 안 지려고 합니다. 옛날이나 지금이나 여러분 앞에 줄 수 있는 자세를 갖추고자 하는 것이 선생님의 기도 제목입니다. 기도를 할 적마다 빚지는 사람이 되지 않겠다고 다짐합니다.

하나님께서 한 많은 세대를 거쳐 나를 찾아 전체적인 책임자로 책정해 세우셨으니, 내 생애노정에 있어서 결코 남한테 빚지지 않겠다고 몇 번이고 다짐했습니다. 이 나라한테도 빚지지 않고 있습니다. 선생님은 여러분에게 빚졌다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빚을 여러분한테 지웠다고 생각합니다. 한번밖에 없는 생애인데 왜 빚을 지고 삽니까?

어느 때든 남에게 빚을 지우면 지웠지 빚을 지지는 않습니다. 그래야 천군이 될 수 있고 천부가 될 수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도 그런 심정을 가져야 합니다. 앞으로는 세상 사람들에게 이러한 심정을 심어 주어야 합니다.

33-113
사랑이란 우둔하고 미욱한 것
선생님이 어디에 간다고 할 때는 여러분들이 천리길도 멀다 않고 잘 걸어 다녔지요? 3개월 전에 집에서 쑥떡을 만들어 가지고 그 떡이 더러움을 탈까봐 풀지도 않고 본부까지 지고 와서 선생님 드린다고 보란듯이 풀어 보니 떡이 쉬어 시퍼런 곰팡이가 슬어 있었던 적도 있었지요? 그렇게 떡에 시퍼런 곰팡이가 피고 구더기가 생겨도 좋다는 것입니다. 그 떡은 먹지는 못해도 억천만금에 해당하는 것입니다. 그럴수록 정이 든다는 것입니다.

또 영도에 사는 어떤 영감이 있었습니다. 거기에서 자갈치 시장을 가려면 배를 타야 합니다. 그래서 그 영감이 자갈치 시장에 가기 위해서 배를 타고 가다가 큰 배를 보면 ‘아 저 배에다 선생님을 모시고 세계를 유람하면 얼마나 좋을까’ 하면서 앞으로는 그렇게 될 것이라고 생각한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싱싱한 생선을 보게 되면 그 생선 꼬리를 붙들고 울어도 봤다는 것입니다. 그런 마음이 필요하다는 것입니다.

그런 환경에서도 그럴 수 있다는 것은 참사랑을 가지고 있기 때문입니다. 기질적으로 그런 영감에게는 미욱하게 보이는 경향이 있습니다. 사리에 맞지 않는 갈고리 같은 성격을 가지고 있다는 것입니다.

사랑이란 것은 우둔하고 미욱한 것입니다. 아무런 형편도 모르는 것입니다. 그렇지 않아요? 진정으로 사랑한다면, 옆에서 누가 보든지 말든지 상관 않는다는 겁니다. 누가 볼 것을 의식하는 사랑은 한계권내의 사랑이라는 것입니다. 누가 보든 말든 의식하지 않을 수 있는 그러한 경지의 사랑이 얼마나 우직하고 미욱하냐는 것입니다.

어떤 때에는 두메 산골에서 캔 도라지를 선생님 앞에 가져와 가지고 눈물을 흘리는 것입니다. 그런 것이 영계에 가서 그 영감을 해방시킬 수 있는 좋은 재료가 되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선생님을 대하는 데 있어서 세상 사람을 대하듯이 대하는 때가 많습니다. 본래는 이렇게 이렇게 해야 하는데도 불구하고 자기들 마음대로 행동한다는 것입니다.

어떤 때는 내가 누구한테 전화를 하면 벌써 영적으로 다 보이는 데도 집에 없다고 합니다. 내가 말은 안 해도 다 알고 있는데 그런 것도 모르고 아주 대담하게 거북한 얘기를 하는 것입니다. 옆에 앉아서 없다고 하라고 손짓하는 것을 다 보고 있는데도 거짓말을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선생님이 ‘이놈의 간나 같으니라구, 옆에 무슨 옷을 입고 앉아 있는데 뭐라고’ 하면서 호통을 치는 것입니다. 그러면 전화 안 받을 수 있어요? 그러면 그 사람이 곤란한 입장에 있으니까 ‘당신하고 나하고 무슨 상관이 있소’ 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전화를 끊고 생각해 보는 겁니다. 상관이 없다고? 내가 누구를 중심삼고 얘기를 했느냐는 것입니다. 선생님은 그 사람의 앞길을 가려 주고자 염려하는 순수한 마음으로 대했다는 것입니다. 그러한 것을 생각해 보면 내가 다른 사람들한테 이용을 많이 당했다는 것입니다. 여러 번 당했어요.

내가 돈이 좀 필요해서 부득이 아무개의 집에 찾아가서 돈을 좀 빌려 달라고 하면 돈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성경에 나오는 아나니아 부부같이 행동합니다. 돈을 좀 빌려 주라고 하면 내 집을 보고 빌려 주겠다고 하는 것입니다. 아주 기분이 나쁩니다.

그러면 선생님은 그만두라고 하면서 그냥 나옵니다. 선생님은 그런 사람입니다. 식구들 가운데 그런 사람이 많다는 것입니다. 가까운 사람 가운데서 가끔 그런 사람도 있습니다. 하여튼 몇 번만 그렇게 하면 그 사람에게는 아무 말도 하지 않습니다. 얘기를 해주더라도 달갑게 받아들이지 않는 것입니다.

그런 사람에 관한 얘기는 안 하는 게 더 낫습니다. 나중에 영계에 가서 청산하자는 것입니다. 이야기를 하는 것이 도리어 하지 않는 것만 못하다는 생각이 들어 이야기를 못할 때가 참 많이 있습니다. 그런 것을 보고 여러분은 ‘선생님의 입장에 있으면서 왜 말씀을 안 해주십니까? ‘ 하고 묻는데, 얘기를 해주면 되겠지만 그럴 수 없는 입장이기 때문에 얘기를 해주지 않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런 내용을 모르는 사람들은 ‘선생님이 알고 있었으면 그때 하지 말라고 왜 알려주지 않았습니까? ‘ 하는데 그때 그런 말을 했다가는 피해가 있는데 그것을 어떻게 선생님이 말해 주겠습니까? 그렇기 때문에 알면서도 모르는 체하고 눈감아 버리는 것입니다. 그렇다고 해서 거기에서 끝내려고 하는 것이 아닙니다. 거기서부터 그 일을 청산지으려고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선생님이 무섭다는 것입니다. 선생님은 무서운 사람입니다.

나 자신도 나를 무서워합니다. 어떤 때에는 말 한마디를 하면 그것이 그대로 실현이 됩니다. 어떤 때는 이렇게 기도해야 되는데 그 반대의 말이 나오는 때도 있습니다. 그럴 때는 이를 악물고 기도를 안 합니다. 기도하면 그렇게 되는 걸 어떡합니까? 여러분이 모르는 그런 무엇이 있기 때문에 내가 선생님의 입장에 서 있는 것입니다. 무슨 말인지 알겠어요?

그렇기 때문에 어떤 도인이라도 선생님을 만나게 되면 무릎을 꿇게 되어 있습니다. 여러분들은 윤청정심이라는 사람을 알 것입니다. 그 사람은 선생님 앞에서도 당당한 사람입니다. 장관을 옆에 두고도 반말을 하고, 장관 부인들을 자기 종같이 부리는 사람입니다. 무엇이 정통인지도 다 알고 있는 사람입니다. 그런 사람이 선생님을 보면 응당 얘기를 다 해야 할 텐데도 불구하고 자기의 책임을 다 할 때까지는 얘기를 안 한다고 합니다. 그런 면에 있어서는 훌륭하다는 것입니다.

또 엊그제 만난 어떤 사람은 자기 휘하에 200만 명이 있다고 합니다. 그 제자들은 한마디로 하라는 대로 별의별 일을 다 한다는 것입니다. 그 사람은 선생님을 예전부터 알고 있는 사람이 아닙니다. 그 사람은 보지도 않고 선생님의 가까운 제자들을 다 알고 있었습니다. 통일교회 협회장이 어떤 사람인지, 승공연합 이사장이 누구인지, 어떻게 해서 입교한 사람인지, 심지어는 생년월일까지도 다 알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선생님은 그런 사람한테 지지 않습니다. 선생님은 하나님을 사랑하는데 있어서는 누구에게도 지지 않습니다.

33-115
하나님의 뜻과 소원을 중심삼고 움직이면 외롭지 않다
여러분들은 선생님이 어떻게 생각하실까를 생각하지도 않고 뭐를 해 달라고 조릅니다. 그렇지만 나는 여러분이 모르는 재료를 가지고 있습니다. 알겠어요? 하지만 지금은 그런 얘기를 못 합니다. 시시한 통일교회 껄렁패들에게 그런 것을 가르쳐 주면 무슨 소용이 있겠어요? 옛날에는 아무나 들어오지 못했어요. 정성들인 사람이라야만 들어올 수 있었습니다.

옛날 인민군 보안서에서도 형사들 일곱 여덟 명이 내가 요술을 하는 사람이라며 내 뒤를 따라다녔습니다. 그러한 사람이에요. 지금은 내가 통일교회의 선생님이 돼서 그런 표시를 안 내지만, 지금도 그때의 사람들이나 도인들을 만나게 되면 그들이 뒷걸음질을 치는 것입니다.

그런 사람들은 어떤 상좌에 있는 사람이라 해도, 박대통령의 고문이라고 해도 무서워하지 않는 사람입니다. 요전에 내가 그런 어떤 사람을 만나 가지고 얘기했는데 그가 얘기하는 것을 들으면서 들이쳤습니다. 선생님이 상하로부터 사방팔방으로 들이치니까 ‘아이쿠’ 하면서 훌쩍 털고 일어서려고 했습니다. 그 사람의 위신이나 체면을 거북하게 만들어 주었습니다. 통일교회 문선생은 아무도 당할 수 없습니다.

선생님은 결코 외롭지 않습니다. 여러분은 외로워요, 외롭지 않아요? 진태, 외로운가, 안 외로운가? 「외롭습니다」 왜 외로워 ? 외로우면 안 되는 것입니다. 선생님은 왜정 때부터 감옥에 들어가서 고문을 많이 당해 봤습니다. 머리가 터지고 몸이 피투성이가 되도록 별의별 고문을 다 당해 봤습니다. 그럴 때마다 하나님께서는 견뎌낼 수 있는 비법을 가르쳐 주셨습니다. 알겠어요? 한번은 열네 시간 동안 취조를 당하고 고문을 당해 가지고 기어서 이십 미터도 가지 못할 만큼 되고, 몇 번씩 죽었다 깨어나는 그러한 과정이 반복되었어도 나는 입을 열지 않았습니다. 사탄이 세계를 점령하고 하늘의 비밀을 캐내려 했지만 나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습니다. 모든 것이 내 말 한마디에 달려 있기에 죽더라도 절대로 입을 열 수 없었던 것입니다. 각목으로 소름끼치는 고문을 당할 때도 말하지 않았습니다. 의리를 지킬 줄 알아야 되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그걸 알아야 합니다. 한번 약속을 했으면 자기가 망하더라도 지켜야 됩니다. 이렇게 고문을 당한 후에 하룻밤만 지나면 그날은 슬픈 날인 동시에 잊을 수 없는 날로 남아지는 것입니다. 요즈음에도 가끔 그때 생각이 납니다. 거기에 대해선 여러분이 모르는 것입니다.

나는 이십대 시절에 하나님 앞에 이 민족을 구하겠다고 다짐을 했습니다. 일본 국민이 천황을 위하는 마음보다도 내가 삼천만을 대신한 입장에서 하나님을 사랑하는 마음이 더 강하다고 믿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일본은 망한다고 믿었습니다. 일본이 선을 먼저 쳤으니까 그들은 망할 수밖에 없다는 것입니다. 거짓이 참을 치면 남아지는 법이 없습니다. 그렇기에 나는 속으로 ‘치고 싶은 대로 다 쳐 봐라. 더 이상 칠 수 없는 날에는 뒤집어질 것이다’하고 생각했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일본을 내 손아귀에 집어넣겠다는 철석 같은 신념을 가졌습니다.

한국도 몇 해만 지나면 그렇게 될 것이고, 일본도 몇 해 이내에 그렇게 될 것입니다. 그때 기도한 것이 틀림없이 이루어질 것입니다. 선생님은 오직 하나님의 뜻과 하나님의 소원을 중심삼고 움직이는 것입니다. 미국의 백악관 앞에 가서도 이러이러한 일을 할 것이라고 기도를 한 적이 있습니다. 그 기도 내용을 중심삼고 앞으로 ‘하나님 뜻대로 하소서’ 하면서 미국을 다시 찾아갈 날이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것이 무슨 말이냐 하면 하나님의 뜻을 이루기 위해서 싸워 나가겠다는 뜻입니다.

나는 감옥에서도 하나님을 사랑했고, 쫓겨 다니면서 산비탈에서 바위를 붙들고 통곡하면서도 하나님을 사랑하는 길을 걸어 나왔지만. 세상의 어느누구나 좋아하고 부러워할 수 있는 큰 궁전에서는 하나님을 사랑해 보지 못했습니다. 이것이 내가 품고 있는 슬픈 한입니다. 그렇다고 해서 내가 이 뜻을 못 이룬다는 것이 아닙니다. 내가 뜻을 못 이루고 죽더라도 이 뜻은 틀림없이 이루어진다는 신념을 갖고 있습니다. 그리고 이런 마음으로 나라를 위하고 세계를 위해서 하나님을 부여안고 기도하는 사람이 한국사람 중에서 나타나기를 기도했습니다. 그리고 여기가 새로운 세계를 위하고, 하나님을 위하고, 하나님을 사랑하고, 또 하나님의 사랑을 보유하는 세계의 중심 본부가 되기를 기도했습니다. 그런 마음으로 나가고 있습니다.

33-117
새시대에는 새로운 방법을 써야
이런 전반적인 문제를 중심삼고 보면 참부모도 하나의 영원한 사랑, 참가정도 하나의 영원한 사랑을 중심한 것입니다. 참사랑이 뿌리가 되어 줄기가 나고 가지와 잎이 나서 하나의 나무가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여러분의 눈에서 눈물이 말라서는 안 됩니다. 지구장의 눈에서 눈물이 말라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생각해 보십시오. 선생님에 대해서 바르게 알고, 진정으로 선생님을 생각한다면 눈에 눈물이 마를 수 있겠어요? 선생님은 고생할 사람이 아닙니다. 때를 잘못 만났고 이 민족이 책임을 못해서 이렇게 고생을 하는 것입니다.

오늘날 하나님은 대한민국에 찾아오시려고 하는데, 삼천리 반도에서는 부끄러운 일이 자꾸만 벌어지고 있습니다. 이러한 입장에서 생각해 볼 때, 우리 교회나 식구들은 아직까지 책임을 벗을 수 없습니다. 하나님이 바라시는 입장에 서지 못한 우리들임을 생각해 볼 때에 하나님 앞에 면목이 없습니다. 무릎을 꿇고 눈물을 흘리면서 하나님의 긍휼을 바라야 할 입장에 있다는 사실을 자각해야 되겠습니다.

이번에 김영휘가 협회장이 됐지만, 지금은 옛날과는 다릅니다, 그렇지요? 김영휘(金榮輝), 그 이름이 좋아요. 이름대로 그렇게 됐으면 좋겠어요. 여러분들도 그렇게 됐으면 좋겠지요? 효원(孝元)이도 이름이 좋습니다. 갈 때까지도 영원히 영원히 변치 않는 다고 그랬지요.

내가 어제도 얘기했지만 이제 개인전도시대는 지나갔습니다. 앞으로는 단체적으로 전도활동을 해야 합니다. 한 개척지나 교회에 열 사람씩 지정하여 배치하는 것입니다. 그래 가지고 거기에서 50명이면 50명, 60명 이면 60명, 100명이면 100명이 찰 때까지 밤낮을 가리지 않고 활동한 후에 다른 지역으로 이동을 시킬 것입니다. 이런 팀이 100팀이 되면 천 명이 됩니다. 이렇게 천명쯤만 동원해 가지고 이런 활동을 시키려고 합니다.

이제부터는 옛날과 전도하는 방법이 달라야 합니다. 그래서 이번에는 3차까지 전도를 내보내려고 합니다. 여러분이 1960년도부터 지금까지 전도해 온 것이 1차입니다. 후년 겨울까지 하게 되면 1969년부터 1970년과 1971년까지 3년간을 실행하는 것입니다. 알겠어요? 이 3년간을 가정을 중심삼고 전도한다는 것입니다.

그 다음에는 열 사람을 한 팀으로 만들어서 지역이면 지역, 지구면 지구에 보내려고 합니다. 우선 지구부터 할 것입니다. 그래서 그 지구에 필요한 고정 멤버를 만드는 것입니다. 열 사람씩을 전도해야 산다는 것을 알고 밤낮없이 기도하면서 전도를 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 대신에 내가 보리쌀이라도 사먹을 수 있는 돈을 보내 주겠습니다. 잘먹으면 안 돼요. 본부에서 지원을 해서라도 이런 활동을 해야 되겠습니다.

이렇게 하여 그 수가 많아지면 많아질수록 공고한 기반이 닦아지는 것입니다. 이 기간에 열 사람이 정성들이며 인연맺은 사람들한테는 언제든지 시간만 있으면 심방을 할 수가 있는 것입니다. 이런 작전으로 단체 부흥 활동을 전개시키려고 하는 것입니다. 이렇게 하면 3차 전도가 끝나는 것입니다. 알겠어요? 이 3차 전도를 내보내는 것은 지금까지 여러분 가정들이 실수한 것, 책임 못한 것을 용서해 주기 위함입니다.

어저께 저녁에도 곽정환이에게 이야기했지만 옛날에 우리는 못먹고 못살았어요. 우리가 지금 공장을 운영하고 있지만 사업부에서 힘들어하고 있습니다. 그렇지만 선생님은 포기하지 않습니다. 선생님은 하루에 공장을 세 번까지 간적이 있습니다. 하루에 두 번 간 적은 부지기수여서 셀수도 없습니다. 여러분은 이러한 것을 선생님으로부터 배워야 됩니다. 이렇게 해 온 생활이 벌써 15년 가까이 되었습니다. 만약에 어디에 갔다 돌아와서 시간이 없더라도 30분, 혹은 한 시간만 있으면 어떻게든지 갔다 오려고 합니다. 그것은 왜 그러느냐? 어젯밤에 가 본 공장인데 아침에 다시 가 본다고 해서 공장이 밤새 달라지는 것은 아니지만 정성을 들여야 하기 때문입니다. 내가 이 길을 출발할 때에 ‘이 기반을 통해서 한국에 새로운 것을 만들어야 되겠다’ 이렇게 기도한 것이 힘이 되었습니다. 기도는 무서운 것입니다. 맹세한 것은 꼭 이루어지기 때문입니다. 10년이 걸린다 하더라도 하루같이 정성을 들여야 합니다. 어떠한 세계적인 사업 가보다도 하나님이 기억할 수 있는 정성을 들여야 그것이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33-119
가정이 하나되어 충효의 도리를 다하라
이제 이 70년도부터는 가정을 중심삼고 정성들여야 합니다. 지금까지는 개인 입장에서 정성들였습니다. 그래서 내가 협회장의 아들딸이나 총무부장의 아들딸을 한 번도 안아 주지 못했습니다. 효원이 아들도 한 번 안아 주지 못했고, 손목도 한 번 잡아 주지 못했습니다. 성진이한테도 그렇게 못 해봤습니다. 그런 면에서 성진이가 불쌍하고 처량합니다. 그러나 선생님은 불쌍하다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왜냐? 아직 때가 안 됐기 때문입니다.

여러분이 공적인 입장에 있으니까 아들딸이 ‘아! 우리 아빠 엄마’ 할 수 없는 것이 한이 아닙니까? 선생님도 예진이를 중심삼아 가지고 그런 한을 풀어야 되겠기에 매일같이 그 애가 자는 시간에 가서 뽀뽀를 해주었습니다. 지금도 될 수 있으면 그렇게 하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얼마나 수고하시고, 또 나 자신이 얼마나 수고로운 길을 거쳐 가지고 낳은 아들딸인가? 그러기에 그 아들딸은 공적인 아들딸이라는 것입니다. 이제는 그 아들딸에게 ‘우리 아버지는 세계에 있는 어떤 아버지보다도 훌륭한 아버지다’ 하는 인식을 어떻게 심어 주느냐 하는 것이 문제입니다. 이제 그럴 수 있는 때가 됐습니다. 예진이 나이가 금년으로만 아홉 살입니다. 열 살이 되어 가는 것입니다.

이것을 볼 때에 70년대에는 가정을 위한 새로운 체제를 형성해야 되겠습니다. 이제 가정은 가정을 믿고 정성을 들여야 하는 때라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무슨 말인지 알겠어요? 그런 의미에서 지구를 만들어 주겠다는 것입니다. 지역을 만드는 것은 가정들이 해야 하는 것입니다. 거기에 쓰이는 돈은 무서운 돈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내가 가정을 위주로 하여 재차 자리를 잡아 주는 일을 이제부터 해야 되겠다는 것입니다. 선생님 말을 알겠어요? 그 기간이 그렇게 길지 않습니다.

이제 우리는 새로운 시대로 넘어갈 수 있습니다. 옛날에는 개인시대로서 개인을 대하는 때였지만, 이제는 가정을 대할 때입니다. 따라서 앞으로는 가정이 얼마나 충신 효자 노릇을 하느냐 하는 것이 문제입니다. 그 가정의 아들딸이 얼마나 뜻 앞에 하나되느냐? 이러한 문제들을 중심삼고 볼 때에 개인 표창을 기다릴 것이 아니라 가정 표창을 받을 길을 찾아야 합니다. 그러니 애기를 업고라도 나가서 전도하라는 것입니다. 그리하여 전부 다 모자협조를 완성시켜야 합니다.

이제부터는 선생님이 여러분들이 활동하는 데를 자주 찾아가 볼 것입니다. 그러면 좋겠지요? 「예」 고속도로로 다닐 수 있기 때문에 활동범위가 상당히 넓어졌습니다. 대구도 세 시간 가까이 걸리니까 도착하더구만. 이제 어느 곳이든 불쑥 나타날 수 있는 것입니다. 이제 올라가면 그렇게 할 것입니다. 선생님이 여러분에게 돌아가면 순회한다고 얘기했지요?

이제는 내가 공장에 못 가더라도 내적인 면에서, 개인적인 면에서 외적인 경제적인 문제가 뜻적으로 처리되어 돌아오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내 책임은 그만큼이면 하지 않았느냐 보고 있는 것입니다. 이제는 남의 신세를 지지 않더라도 먹을 수 있고 활동할 수 있는 최소 단위의 명맥을 이어나갈 수 있는 기반이 되었다고 보는 것입니다.

이제 나는 공장에 대해서 신경 쓰지 않을 것입니다. 그렇다고 해서 여기 있는 사업부장들, 선생님이 떠난다고 생각하지 말아요. 알겠어요? 「예」 그대신 여러분이 지금보다 더 책임을 져야 됩니다. 그리고 내가 매일 공장에 갔듯이 하루에 한 번씩 가서 격려해 주어야 됩니다. 공장의 그 기계 하나를 붙들고 얼마나 하나님을 불러 보았습니까? 또한 얼마나 하늘의 형제를 불러 보았습니까? 그 기계를 우리가 사놓고 기뻐했듯이 하나님 앞에 기뻐하는 마음을 가져야 됩니다.

그렇지 않고 월급을 받아야 좋아하고, 자기가 잘 되어야 한다고 하는 사람이 있다면 그 사람은 세상 사람입니다. ‘이 공장이 잘 되어야 된다. 전체를 위해서 잘 될 수 있는 기반을 만들어야 된다’는 생각을 해야 됩니다. 선생님도 그렇게 하고 있습니다. 알겠어요? 그리고 나름대로 자기 지구를 위해서도 정성들여야 합니다.

여러분은 이런 것을 알고 사업장이나 혹은 가정에서 선생님과 심정적인 유대를 공고히 맺을 수 있어야 됩니다. 70년대에 그런 환경을 만들어 봤으면 하는 것이 선생님의 소원입니다. 참부모와 참아들딸의 인연, 즉 참가정의 인연을 이 땅 위에 어떻게 공고화시키느냐 하는 것이 문제입니다. 심정을 중심삼고 연결시키지 못하고서는 우리나라와 우리 세계와 우리의 천국을 이를 수 없다는 것을 결론적으로 말씀드립니다.

33-121
기 도
사랑하는 아버님, 한없이 불쌍한 자신을 저주할 때가 한두 번이 아니었습니다. 어떤 때는 지나친 욕망을 중심삼고 기도하는 불쌍한 모습들이었습니다.

그러한 저희의 머리 위에 묵묵히 눈물을 떨어뜨리시면서 빨리 장성한 아들이 되기를 고대하시는 아버지의 그 심정을 저희들은 알아야겠습니다.

아버지여, 어린 자녀들이 이렇게 찾아왔습니다. 불쌍한 신세를 가눌 수 없는 부끄러운 자신의 입장에서 부르는 아버지가 전체인 줄 알고 나오던 것과, 이 바닷가에서 지낸 것이 생의 전체인 양 느낀 그런 자신을 다시 한 번 개탄해야 되겠습니다. 무한히 넓고 높은 당신을 마음에 품고 그 인연으로 이 세계를 위해 보람있는 생애를 걸어갈 수 있는 당신의 아들딸이 되게 허락하여 주시옵소서.

오늘은 안식일이옵니다. 전국에 널려 있는 당신의 자녀들, 비록 먼 자리에 흩어져 있지만 마음은 한 뜻 안에서 기꺼이 아버지를 모시고 살 수 있고, 아버지에 대한 그리움을 간직하고 사는 자녀들 되게 하여 주시옵소서. 그리하여 환경을 움직일 수 있는 아버지의 은사가 사랑하는 식구들의 가정과 이 땅 위에 내리기를 고대하는 아들딸 되게 하시옵소서. 또한 외국에서 외로운 개척자의 사명을 하고 있는 불쌍한 당신의 아들딸이 있사옵니다. 그들은 외로운 자리에서 아버지를 붙들고 나가고 있사옵니다. 제가 그러할 때에 위로해 주시던 당신이 살아 계시는 줄 아옵니다. 그 자리에 같이하여 주시옵소서.

멀지 않은 장래에 살아 계신 아버지께서 거동하실 수 있는 날이 저희의 목전에 다가온다는 것을 감춰 가면서 한 순간을 참고, 하루를 참고, 한달을 참고, 일년 십년을 참아 넘기어 당신이 소원하시는 그 나라에서 칭찬 받을 수 있는 아들딸이 되게 하여 주시옵고, 또 당신의 무한한 자비와 사랑의 인연을 맺게 하여 주시옵기를 간절히 부탁드리옵니다.

이번에 우리 교회에 이와 같은 자리를 마련하여 주신 아버지의 은사에 대해 진정으로 감사를 드리옵니다. 저희가 활개를 펴고 삼천리 반도 앞에, 삼천만 민족 앞에, 30억 인류 앞에 새로운 천국의 이상을 제시하고 있는 소망의 천국이 저희 앞에 다가온 것을 알았사옵니다.

저희는 가일보 전진하는 생활권내에 있으며, 가일층 발전할 수 있고 내일을 보장받을 수 있는 입장에 있사오매, 그러한 자신이라는 것을 깨달아 다가오는 시련이 아무리 치열하더라도 그것이 낙망의 요건이 되어서는 안되겠습니다. 그런 환경에 부딪칠 때는 아버지에 대한 그리움이 사무쳐 모든 것을 잊어버리고, 자기 체면과 위신을 망각하는 자리에 서서 아버지를 위하는 스스로의 모습을 존중시할 수 있는 가치적인 아들딸이 되도록 하여 주시옵길, 나의 아버님, 간절히 바라옵고 원하옵니다.

오늘은 아무것도 모르는 사람들이 수택리 수련소로 모여들 것이오니 여기에 당신께서 같이해 주시옵소서. 사람이 중심이 된 모임은 싸움으로 끝나는 것이로되 당신을 중심한 모임은 결의와 맹세로 끝난다는 것을 알고 있사옵니다. 이것이 바로 당신께서 가시는 길이기에 불쾌하고 불순한 마음으로 왔던 사람들도 평화로운 마음으로 돌아간다는 것을 알고 있사옵니다. 이 일을 움직이는 사람은 몇 사람에 지나지 않는 다는 것도 알고 있사옵니다.

수많은 수고의 노정에 희생된 선조들의 피의 공적이 거기에 깃들어 있다는 것을 망각하지 말게 허락하여 주시옵소서. 책임진 당신의 어린 아들 딸들이 부디 자기 자신을 내세우는 자리에 서지 말게 하여 주시옵고, 만약 그런 자리에 섰다면 눈물로써 아버지 앞에 반성하게 하여 주시옵소서. 이러한 사연을 대할 때마다 마음과 몸을 다 바쳐서 당신께 돌려드릴 수 있는 아들딸이 되게 허락하여 주시옵소서. 이 나라를 염려하고 세계에 새로운 깃발을 들고 나설 수 있는 저희들이 되게 허락하여 주시옵고, 새로운 역사 창조의 일원으로 죽어갈 수 있는 저희들이 되게 허락하여 주시옵소서. 그러기에 수련소를 지을 때에 다짐했던 그 마음을 소장 이하 거기에 속한 사람들 전체가 가질 수 있게 인도하여 주시옵소서.

아버님, 그 자리에 이 몸이 참석하지 못하더라도 거기에 같이하여 주시옵소서. 그들의 마음을 묶으시어 이 나라 이 민족과 이 백성을 위하여 충성을 다할 수 있는 통일의 역군의 자세를 갖게 하여 주시옵고, 새로운 생명을 세울 수 있는 거룩한 운동이 벌어지게 하여 주시옵소서.

아버님, 그 곳의 책임자는 최창림이 아니라 아버지시옵니다. 아버지의 심정이 깊이 깃들어서 새로운 생명의 운동이 거기에서 일어나게 하시옵소서. 마음에 담아진 것이 무엇인지 확실히 모르지만 소망에 부풀어 오는 그 마음으로 이 민족을 사랑하게 하시고 소망의 나라를 창건하는 데에 이바지하게 허락하시옵소서. 그리하여 이 나라 이 민족을 움직일 수 있는 역군으로 삼아 주시옵기를 간절히 바라옵고 원하옵니다.

외적으로 움직이는 일도 당신의 뜻과 더불어 해야 되겠지만, 내적으로 움직이는 일에 더욱더 열렬해야 되겠사옵니다. 외적인 것만을 바라보고 위안받는 사람들은 가을이 되면 끝이 난다는 것을 알고 있사옵니다. 그러나 내적인 것을 중심삼고 위안받게 될 때에는 영원해지는 것이요, 무한해진다는 것을 아오니, 내적인 당신의 사랑을 더욱더 그리워하는 사람이 되고 아버지의 사랑과 더불어 하나될 수 있는 자리를 찾아나서는 사람이 되어야겠사옵니다.

아버님, 당신의 아들딸들이 보다 거룩한 신앙생활을 위하여 고차적인 가치를 제시할 수 있고, 그러한 활동을 위한 새로운 계기로 삼을 수 있는 이 시간이 되게 하여 주시옵고, 새로이 맹세와 결의를 할 수 있는 시간이 되게 하여 주옵기를 간절히 바라옵고 원하옵니다.

오늘 곳곳마다 모여서 이곳을 향하여 정성들이는 수많은 당신의 자녀들 위에 무한한 자비와 사랑을 내려 주시옵소서. 모든 말씀 참부모의 성호 받들어서 아뢰었사옵나이다. 아멘.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