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2-123 to 32-148: 우리의 자세

우리의 자세
1970.07.05 (일), 한국 전본부교회

32-123
우리의 자세
[기 도]

저희를 사랑하시는 아버지! 오늘은 7월 들어 첫번째 맞이하는 안식일이옵니다. 이 아침의 새로운 각오와 은사가 저희들 위에 머무르게 하시옵소서.

땅 위에 한번 왔다가 가야 할 운명을 지니고 있는 인간들이 이 지구상에서 여러 가지 탕감의 노정을 가지 않으면 안될 생애적인 책임도 짊어지고 있는 것을 저희들이 알고 있습니다. 어떤 사람은 동으로, 어떤 사람은 서로, 어떤 사람은 남으로, 어떤 사람은 북으로 각자의 방향에 따라 주어진 운명길을 개척해 가는 생애마당에 있어서 자신을 중심삼고 허덕이며 살아가는 사람들이 대다수인 것을 저희들이 알고 있습니다.

당신과 더불어 자기의 갈 길을 의논하며 가려 가는 사람이 없는 이 땅에서, 당신은 저희를 붙들고 그 방향을 따라다니면서 지금까지 개인과 가정과 종족과 민족과 국가와 세계를 거쳐 나오셨다는 사실을 저희들은 알았습니다.

그 아버님을 대하여 역사상에 왔다 간 선조들이 푸대접하였던 것을 저희들의 당대에 모두 탕감하지 않으면 안 되겠습니다. 당신이 바라는 그런 후손이 되어야 할 사명이 남아 있다는 사실을 다시 한 번 느껴야만 되겠습니다.

지금까지 그 엄청난 수고로운 길을 참고 나오셨으면서도 또 참음의 투쟁을 할 수밖에 없는 아버지여, 수난의 십자가의 길을 개척해 나오시면서도 그런 사정을 말할 수 조차 없는 아버지의 입장을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그와 같은 입장이 저희에게 연결되어야 할 뿐만이 아니라 수많은 민족에게까지, 또한 현재 뿐만이 아니라 미래에까지 연결되어져야 할 것이기에 지금까지 수난의 역사의 중심적 책임자로서 나오셨다는 것을 알고 있사옵니다.

그런 아버님을 대하고 있으면서도 이 땅 위에 타락의 후손으로 태어난 저희들은 어려움이 있으면 당신의 것으로서 맡기려 하고, 기쁨이 있으면 자기의 것으로 상속받으려 하고 있습니다. 그러한 것을 생각해 볼 때에, 아버지 앞에 용납받을 수 있는 자신인가를 다시 한 번 반성하고, 불효의 선대를 가진 후손이면서도 스스로 불효된 입장임을 깨닫지 못하는 자신들을 다시 한 번 훈련시키지 않으면 안 된다는 것을 각자가 알아야 되겠사옵니다.

수고로우셨던 아버지의 그 내심 가운데에 잠겨 있는 한이 얼마나 크시다는 것을 저희들이 느껴야 되겠고, 짊어진 십자가의 길을 개척해 나오시는 아픔이 얼마나 크셨겠는가를 체휼해야 되겠습니다. 우리가 그러한 자리에 서게 될 때 그 아버지의 이름 앞에는 눈물이 어릴 수 있는 역사의 흐름이 있었고, 생사가 엇갈려 나가는 곡절이 있었던 것을 알게 되옵니다.

저희들은 아버지라는 이름만 들어도 자신을 가눌 수 없는 부끄러움을 느껴야 할 모습들이옵니다. 입으로는 아버지를 부르고 아버지의 소원이 나의 소원이라 하지만, 아버지의 전체적인 내용에 들어가서는 책임지지 않는 입장에서 번번해 아버지를 부를 때가 많았습니다.

아버지의 아들이라면 그 아버지의 전체를 계승받아서 아버지가 계시지 않더라도 대신 책임질 수 있어야겠습니다. 하오나 아들의 인연을 가졌다고 하면서도 모든 십자가를 넘겨 주기에 부족함이 없고, 믿을 수 있는 아들이 되지 못했다는 것을 생각할 때에, 아버지라는 그 이름이 너무도 서글픈 입장의 이름인 것을 저희들은 체휼해야 되겠습니다.

저희들이 하늘에 계신 아버지라고 부르게 될 때 그 아버지는 얼마나 얼마나 수난을 당해 오셨고, 이 땅을 살리기 위하여 억천만사에 수많은 선지선열들을 죽음길로 내보낼 적마다 그들 이상의 고통을 참아 나오신 아버지라는 것을 알아야 되겠습니다. 저희들은 배울 줄 알아야 되겠사옵니다. 원한에 사무친 원수라 하더라도 그 원수를 대하여 원수로서 갚을 수 없는 아버지의 사연이 있고, 잃어버린 아들딸을 찾기 위한 아버지의 간곡한 노정이 있었다는 것을 알아야 되겠습니다.

아버지! 이 아침에 모인 당신의 어린 자녀들을 기억하여 주시옵소서. 자기 자신의 모습이 어떤 모습인가를 다시 한 번 반성해야 되겠습니다. 과거는 이렇게 살아온 자신이요, 현재는 이러한 입장에 선 자신이요, 미래는 이렇게 될 수밖에 없는 자신이라고 아버지 앞에 한계선을 확실히 하지 않으면 안 될 것을 알아야만 되겠습니다.

과거에는 슬펐던 자기 자신이지만, 현실에 있어서는 당신이 소망의 일념을 지니고 기뻐하시며 기대라도 하실 수 있는 그 무엇이 없어서는 안 되겠습니다. 그러한 내용을 지녀서 아버지께서 소망과 기대를 걸고 이러이러한 사명을 맡아 달라고 분부하실 수 있는 나 자신이 되었는가를 생각해 볼 때, 자기 자신은 어떠한 자리에 있는가를 다시 한 번 인식하게 하여 주시옵기를 간절히 바라옵니다.

그리하여 내가 아버지의 편에서 동서남북중 어떠한 일방에 서 있다 하더라도 아버님이 그 방향을 바라 볼 때, 나를 기억하고 바라보시게 되면 거기에 있어서 소망의 한 길이 열릴 것입니다. 또 아버지의 소망의 마음이 거기에 머물 것입니다. 그런 위치를 당신께서 허락할 수 있는 나 자신을 찾기 위해 우리는 노력해야 되겠습니다. 나 자신을 세우기 위해 노력해야 되겠습니다.

자기 자신은 아버지를 사랑한다고 하면서도 아버지를 중심삼고 살아가지 못하는 자신이 되어서는 안 될 것이요, 아버지를 위한다고 하면서도 나 자신을 중심삼고 위하는 자리에 있어서는 안 된다는 사실을 확실히 깨닫게 하여 주옵기를, 아버님, 간절히 바라옵고 원하옵니다.

예수가 베드로 앞에 나타나서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네가 이 사람보다 나를 더 사랑하느냐?’고 물었을 때, 베드로는 `주여 그러하나이다. 내가 주를 사랑하는 줄 주께서 아시나이다’고 대답했습니다. 그러나 또 재차 예수가 물었을 때 베드로의 마음 가운데에 주저함이 일지 않을 수 없었으며, 예수의 세 번째의 물음에 그는 부끄러운 마음이 앞을 가려 얼굴을 들 수 없는 입장이었습니다.

이와 같이 예수를 떳떳이 바라볼 수 없는 부끄러운 자리에서 다시 대답하지 않으면 안 되었던 베드로의 모습을 회상해 보면서 저희도 때때로 그러한 입장에 서게 되는 것을 생각하옵니다. 아버지께서 `아무개야, 나를 사랑하느냐’ 하실 때 내가 아버지를 사랑하는 줄을 당신이 아신다고 대답하지 못할 자신의 입장인데도, 아버지께서 묻기에도 부족하고 찾아 기억하시기에도 부족한데도 불구하고 자신을 사랑해 달라고 몸부림치며 아버지 앞에 기도할 때가 얼마나 많았사옵니까?

나를 사랑하느냐는 당신의 물음에 당신을 사랑한다고 떳떳이 대답할 수 없는 자신의 입장이면서도, 아버지 앞에 나를 사랑해 달라고 몸부림치면서 아버지의 입장을 망각하고 자기를 중심삼은 자리에 섰던 불효의 자식된 저희 모습들인 것을 깨달아야 되겠습니다. 내 모습이 어떠한 입장에서 있든 간에 아버지의 마음을 염려할 수 있어야 되겠습니다.

아버지의 염려하는 마음을 알아야 되겠습니다. 나는 망하더라도 아버지의 슬픔의 길을 막기 위하여 자기의 사정을 넘어설 수 있고, 죽음의 고개도 넘어설 수 있는 효자는 못되더라도 효자의 흉내라도 내는 길을 가겠다고 할 수 있는 아들딸이 되지 않고는 안 된다는 것을 이 시간 다시 한 번 느끼게 하여 주옵기를 간절히 바라옵고 원하옵니다.

이 자리는 통일교단이라는 엄청난 이름을 가진 자리인 것을 내가 알고 있습니다. 사람이 많아서 엄청난 것이 아니라, 아버지의 심정의 닻줄이 내려질 수 있는 자리이기에 엄청난 것이옵니다. 여기는 생사를 판가름할 수 있고, 생명의 기원을 작정할 수 있는 귀중한 자리이기에 엄청난 자리라고 말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을 저희들이 알아야 되겠습니다.

아버지, 법정에 선 죄수가 생애의 모든 심정을 다 기울인 심각한 입장에서 판사가 판결하는 말 한마디를 기다리는 것과 마찬가지로, 이 자리에 모인 당신의 아들딸 중에 그와 같은 심정을 느낄 줄 아는 아들딸이 얼마나 되옵니까? 뜻을 대해서 얼마나 심각하며, 아버지를 대해서 얼마나 심각하였느냐는 물음에 나는 이렇다고 대답할 수 있는 아들딸이 얼마나 되느냐는 사실로써 앞으로 교단이 가는 길이 어떠한 길일 것인가가 측정된다는 것을 생각하면, 한 사람이 지니고 있는 입장과 처하고 있는 이자리가 얼마나 두려운 자리인가를 알아야 되겠습니다.

아버지, 이 아침에 저희의 마음을 가누어 주소서. 저희는 당신의 거룩하신 은사의 품에 품어 달라고 아뢰올 수조차 없는 부끄러운 모습들이옵니다. 그러한 저희에게 당신께서 거룩하신 은사를 베풀어 주시지 않았더라면 저희들은 사망의 세계에서 혜택을 받을 수 없었을 것이며, 사망권과 고난의 자리에서 벗어날 수 없었을 것입니다. 그러한 사실을 생각해 볼 때 죽더라도 아버지를 불러야 되겠고, 망하더라도 아버지를 불러야 되겠고, 매를 맞으면서도 아버지의 손길을 붙들어야 할 저희인 것을 알게 하여 주옵소서.

부모가 사랑하는 자식을 채찍으로 치게 될 때에, 그 채찍이 무서운 것이 아니라 거기에 사랑과 사랑이 엇갈려 있다는 사실이 무서운 것임을 매를 맞는 자식은 몰랐습니다. 번번히 책망 받는 입장에 섰던 사람들이 그 본체의 마음을 알지 못함으로 말미암아 역사에 무수한 반역을 남겼다는 것을 생각하게 될 때에, 그러한 자리에서도 부모의 사랑의 마음을 이어받아야 하는 것이 타락한 선조의 후손인 저희들이 갖추어야 할 자세라는 것을 아옵니다. 이것을 생각하면 그 자리에 순응하여 천만 번이라도 매를 달가이 맞을 수 있는 모습들이 되지 않으면 안 되겠습니다.

아버님께서 하늘 가정의 외로운 십자가를 대신 짊어질 아들이 누구며, 딸이 누구냐고 소리내어 외치게 될 때에, 흰옷을 입고 겸손히 나서서 피뿌리는 거룩한 제물이 되겠다고 나설 수 있는 아들과 딸이 얼마나 되겠습니까? 아버지께서 그렇게 묻게 될 때, 내가 지금까지 그럴 수 있는 길을 찾아 나왔다면서 서슴지 않고 나서는 하늘의 아들딸이 여기에 많게 하여 주옵기를 간절히 바라옵고 원하옵니다.

그 수가 많고 적음이 문제가 아니라, 효자 한 사람이 불효 자식을 가진 부모의 마음을 위로해 드릴 수 있는 길도 있다는 것을 아옵니다. 그러하오니 아버지, 저희 통일가를 당신의 안식하실 수 있는 거룩한 심정의 터전으로 취하시옵소서. 이것이 아들이 바라는 소원이요, 아들이 원하는 길이옵니다.

아버지, 여기에 모인 당신의 아들딸들을 아버지께서 거룩하다 할 수 있는 자리에 세워 주시옵소서. 천상 세계의 천천만 성도들이 협조하지 않을 수 없는 내용을 가지고 역사를 짊어지고 나가는 아들딸들이 되게 하여 주시옵소서. 그러기 위해 공적인 입장에서 온갖 희생을 각오하고 온갖 어려움을 대신 짊어지고, 아버지를 위하여 제물될 수 있는 아들딸들이 되게 하여 주옵기를 간절히 바라옵고 원하옵니다.

이제 1970년도의 전반기를 다 지냈사옵니다. 오늘은 남아진 후반기를 향하여 출발하는데 있어서 7월 들어 첫번째 맞이하는 안식일이오니, 지난날 아버지를 대하지 못했던 부끄러운 자세를 거두고 과거에 아버지 앞에 불효했던 자신을 다시 한 번 회개해야 되겠습니다. 다가오는 후반기에는 당신이 믿을 수 있는 아들딸이 되겠다고, 당신의 심정적 사연을 통고받을 수 있는 아들딸이 되겠다고 할 수 있어야겠습니다. 모두가 못 한다고 해도 우리만은 하겠다고 아버지 앞에 부복하여 몸부림치며 애구애절하게 정성들일 수 있는 당신의 아들딸들이 되게 하여 주시옵기를, 아버님, 간절히 바라옵고 원하옵니다.

세월은 덧없이 흘러간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수난의 길을 걸었던 1960년대는 다 지나갔사옵고, 1970년대 또한 절반이 지나갔사옵니다. 이 한해를 중심삼은 저희들의 출발이 귀하다는 것을 알고 있사옵니다. 우리는 이 한해를 통하여 1970년대 전체를 움직일 수 있는 힘의 원천을 결속 시켜야 되겠고, 모든 선의 동기되는 실체를 지녀 가지고 1970년대에는 해마다 선한 결실을 맺지 않으면 안 되겠사옵니다. 그러한 책임이 저희에게 있다는 것을 생각할 때, 남아 있는 이 1970년대를 당신이 맡아주시옵고, 저희의 마음에 하늘을 향한 그리움이 사무치게 하여 주시옵고, 아버지를 만나지 않고는 견딜 수 없어 울부짖고 싶은 마음이 폭발되게 하여 주옵기를 간절히 바라옵고 원하옵니다.

서로 만나기를 간곡히 고대하는 자리에서 서로 나누기를 시작할 수 있다는 것을 아옵니다. 만날 수 있는 인연이 두터워지면 주고 받는 인연이 두터워진다는 것을 알고, 끝날에는 서로 서로 만나기에 힘쓰라고 하신 아버님의 가르침을 저희들이 확실히 알게 하여 주시옵소서.

자기 자신을 망각하고 대신 많은 사람을 생각하는 사람이 그 사람들의 중심이 되는 것이 역사의 전통적인 인연이요, 선을 찾아가는 전통적 노정인 것을 생각하게 될 때에, 공적인 자리에서 많은 사람을 위하여 희생하고, 많은 사람을 위하여 공을 쌓을 줄 아는 당신의 아들딸들이 되게 하여 주옵기를, 아버님, 간절히 바라옵고 원하옵니다.

이날, 이 아침, 세계에 널려 있는 통일교회의 무리들이 대한민국의 중심은 서울을 향하여 마음을 모아 축도를 드리면서 다시 만날 날을 고대하고 있을 것이오니, 그들 위에 무한한 사랑이 같이하여 주시옵소서. 거리의 제한을 받고 있고, 물질적으로 제한을 받고 있는 그들이지만, 마음만은 제한받지 않아서 사무치는 간절함을 가지고 있사옵니다. 그러나 이런 막혀버린 여건 때문에 만날래야 만날 수 없는 사정을 서러워하며 아버지 앞에 눈물짓는 식구가 있거든 당신이 나타나시어서 친히 위로해 주시옵고, 그들에게 분부하시옵소서. 남아 있는 수난의 길을 극복해 나가는데 있어서 어려움이 많을 줄 알고 있사오니, 그들이 그 길을 가려 가서 안식의 모금자리를 찾아 영광의 자녀로 설 수 있게끔 아버지, 그들을 고이 인도하여 주시옵기를 간절히 바라옵고 원하옵니다.

아버지, 그들은 복귀의 길을 가는데 있어서 인류 앞에 놓여진 크나큰 사망권과 싸우지 않으면 안 되었습니다. 이것이 싸워서 제거되지 않으면 입으로 물어 뜯어서라도 없애야 될 책임이 생애 노정에 맡겨져 있는 것을 생각해 볼 때, 불쌍히 여기지 않을 수 없는 무리이오니 당신이 기억하여 주옵기를 간절히 부탁드리고 원하옵니다.

남한 각지에 널려 있는 당신의 아들딸들 중 오늘 이 아침에 서울을 향하여 마음 모아 아버지의 거룩함을 흠모하고, 아버지와의 인연을 그 마음에 다짐하면서, 내일에 빛날 수 있는 영광의 한때를 아버지와 더불어 갖고 싶어 몸부림치면서 호소하고 정성들이는 아들딸들이 있거든, 천배 만배 축복하여 주시옵기를 간절히 바라옵고 원하옵니다.

바라보고 있는 자리는 지루한 자리였습니다. 기도하는 자리는 수난의 길이었습니다. 아버지께서도 이것을 잘 알고 계시오니, 그들의 편이 되시옵소서. 그들의 사연과 소원을 성취하는 데 당신의 사랑을 가하시어서 이루어 주시옵기를 간절히 바라옵니다. 뿐만 아니라 당신이 직접 현현하시어 그들을 손으로 쓰다듬는 자리에 세우시어서 각자의 생애에 있어 기쁜 한때를 가졌다고 자랑할 수 있는 인연 가운데에 연결시켜 주시옵고, 아버지께서 면접하시어서 직접 지도하여 주시옵기를 간절히 부탁드리고 원하옵니다.

이 아침 이곳을 그리워하면서도 참석하지 못한 아들딸이 있사오면 같은 복을 베풀어 주시옵고 남은 시간 위에 당신의 거룩하심이 동반하여 주시옵길 간절히 바라옵고 원하옵니다.

저희들이 나라를 위하여 기도하고, 세계를 위하여 기도하고, 아버지와 더불어 가야 할 이 제단의 노정을 위하여 기도하고, 당신의 사랑하는 아들딸들을 위하여 기도하는 모든 전부를 당신이 기뻐하시는 가운데 받아주시옵소서. 저희들이 특별히 기도하고 있는 그 내용을 아버지께서 잘 아시오니, 당신이 원하시는 뜻대로 성취시키시어서 이 땅에서 기필코 영광의 한때를 맞을 수 있게 허락하여 주시옵기를 간절히 부탁드리고 원하옵니다.

오늘 이 시간에 당신의 아들딸들이 모여 있는 곳곳마다 당신의 영광과 가호의 은사가 그들의 마음 몸에 연결되게 하여 주옵기를 간절히 부탁드리옵니다. 모든 전체를 친히 주관하여 주시옵소서. 참부모의 성호 받들어서 아뢰었사옵나이다. 아멘.

32-130
말 씀
오늘날 우리들은 타락의 후손이 되어 있다는 것을 잘 알고 있습니다. 사회의 한 개인이 그러한 자리에 머물러 있고 가정과 종족과 민족과 국가와 세계가 그러한 자리에 머물러 있는 것이 사실입니다. 이러한 환경을 거슬러 올라가야 하는 것이 오늘날 도의 길을 찾아가고 있는 우리의 생활인 것도 잘 알고 있습니다.

32-130
신앙자가 가야 할 길
그러나 우리 앞에 놓여 있는 환경 가운데는 우리와 화합하여 우리의 희망을 가해 줄 수 있는 아무런 내용도 없습니다. 우리가 그 가운데서 살고 있지만 서로 화합하고 혹은 마음을 펴고 살 수 있는 환경이 못 된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타락한 연고인 것을 우리가 알고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 가운데 태어나서 그 가운데서 살다가 그 가운데서 죽어가야 할 우리 인간들이기 때문에 불쌍하다고 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러나 불쌍한 운명을 지니고 있지만 불쌍한 길을 불쌍하지 않게 갈 수 있는 인생길을 모색해야 할 것이 오늘날 우리가 가야 할 도의 길인 것입니다. 이처럼 불쌍한 환경에 있지만 이 모든 불쌍한 내용을 넘어서서 나 자신은 불쌍하지 않다는 결의를 할 수 있겠느냐는 것입니다.

오늘날 우리가 삶에 있어서 새로운 소망이나 혹은 희망이 있다 할진대 그 희망이 불쌍한 희망이 되지 않고 행복한 희망이 되기 위해서는 불쌍한 자기를 극복하고 행복할 수 있는 자아의 인연을 스스로 세울 수 있어야 합니다. 그렇지 않고는 그 소망과 희망은 기쁨으로 나타날 수 없는 것입니다. 인간이 자기 스스로 환경을 어떻게 극복하고 초월하느냐 하는 문제는 우리 인생살이에 있어서 개인에게만 국한된 문제가 아니라 사회의 문제로서 등장하고 더 나아가서는 세계의 문제로 등장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것이 현재의 정세인 것입니다.

정치를 하는 사람들은 그 정치를 중심삼고 국가의 불행한 운세를 어떻게 하면 행복한 운세로 전환시키느냐 하는 문제를 놓고 고심합니다. 그리하여 모색된 인연이 있으면 그것이 행복의 내용이 되기를 바라면서 몸부림을 치는 것입니다. 종교면 종교의 지도자도 역시 마찬가지입니다.불행한 세계 환경 가운데에서도 자신은 불행하지 않다는 그런 각성된 입장에서 행복을 추구하고 소망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현재의 모든 정세와 환경을 부정하고 자아를 새롭게 인식시켜서 그 인식된 자아가 행복의 여건과 어떻게 접하느냐 하는 이런 경계선에서 싸움을 계속하고 있다는 사실을 우리들은 잘 알고 있습니다.

그러한 싸움을 통하여 한 순간에 있어서 어떠한 인연을 중심삼고 기쁠 수 있는 조건을 세웠다 하더라도, 그 인연이 자기의 생애와 전체의 역사를 대신하지는 못합니다. 그 인연은 환경과 비교해 보면 너무나 작은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 작은 인연을 통하여 얻어진 기쁨은 다시 환경으로부터 침식을 받고, 또 환경의 인연으로 말미암아 번번히 점령되어 버리는 사실을 우리는 매일 매일의 신앙생활 가운데에서 체험하고 있습니다. 그러기에 타락한 인간들은 참을 찾아가는 노정에서 몸부림을 치지 않을 수 없다는 결론이 나오는 것을 여러분이 잘 알고 있을 것입니다.

그러면 이 불행한 환경을 어떻게 해야 나 자신의 생애 가운데 행복의 여건, 또는 소망의 여건으로 남길 수 있으며 내 생활의 중심으로 유지시킬 수 있느냐 하는 것이 문제입니다. 이것이 신앙자에게 있어서 그 무엇보다도 중요한 문제라는 것을 여러분이 알아야 됩니다.

하나님이 이 땅 위에 안식할 수 있는 자리를 찾아 오시려 할 때 불행한 자리로 찾아올 수 없는 것입니다. 또한 천운이 이 땅을 찾아 온다 할 때, 그 천운 역시 불행스런 환경을 찾아올 리 만무합니다. 이 땅 위에 행복이 깃들어 있고 희망이 깃들어 있다 할 때 그 깃들어 있는 행복과 희망이 한순간 뿐만이 아니라 그 생애를 넘어서 영원히 깃들 수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러한 인연의 바탕이 있을 때, 영원의 터전 위에 영존하시는 하나님께서 그 행복의 터전을 향하여 찾아 오시는 것입니다. 그 영원의 중심을 중심삼은 천운 또한 그러한 조건이 성립되어야 찾아올 수 있다는것입니다.

32-132
변치않는 마음을 가져야 하는 신앙인
이러한 것을 생각해 볼 때, 신앙의 길은 마음을 중심삼고 가는 길이기 때문에 어느 종교든지 신앙자에게 마음이 변하라고는 가르치는 법이 없습니다. 변치않는 마음을 가져야 된다고 가르치는 것입니다. 10년 전에 품은 마음이 10년 후에 변해서는 안될 것이요, 세월이 흘러서 설령 생애가 끝나더라도 그 마음만은 변치 않고 남아져야 된다는 것을 가르치는 종교가 있다면 그 종교는 참된 종교인 것입니다.

변할 수 없는 마음의 바탕이 있어야 합니다. 변하지 않는 그 마음의 바탕, 변하는 것을 위해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변할 수 있는 그 무엇을 목표로 삼고 바라는 것이 아니라 변하지 않는 것을 위하여 존재해야 되고 변하지 않는 목표를 바라보며 나갈 수 있어야 합니다. 그럴 수 있는 마음의 바탕을 어떻게 갖추느냐 하는 것이 신앙자에게 있어서는 무엇보다도 중요한 문제인 것입니다. 그러한 마음의 바탕은 신앙인에 있어서 는 무엇보다도 중요한 문제인 것입니다. 그러한 마음의 바탕은 신앙인에 있어서 그 무엇을 주고도 바꿀수 없는 생애의 기원이 되는 것입니다. 여기서부터 신앙인은 신앙생활을 하는 보람, 즉 본연의 자세가 갖추어진다는 것을 여러분이 알아야 됩니다.

그러한 인연이 자기 한 사람만을 중심삼고 하나로서 맺혀질 것이 아니라, 그런 자신을 중심삼고 환경을 넓혀야 합니다. 거기에 몇 배를 가속해 가지고 사방으로 그 인연을 넓혀 나가야 합니다. 자기로 말미암아 영원한 행복의 여건으로 그 환경이 얼마나 개척했느냐 하는 것이 천상세계에 가 가지고 그 사람이 지닐 수 있는 복의 터전이 되고, 행복의 기원이 된다는 것은 두말할 바가 없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이 길을 개척해 가는 데에 있어서 오늘날 세상의 인간들이 추구하는 행복의 길에서는 그러한 행복이 찾아질 수 없습니다. 그것은 가망이 없다는 것입니다. 왜냐 하면, 이 세계가 사망권이기 때문에 사망권에 있는 이 세계와 호흡을 같이하여 추구되는 모든 소원이란 것은 본연의 자세를 기원으로 해서 추구하는 영원과는 근본적으로 배치되기 때문입니다.

우리들이 외적으로 호흡할 수 있는 환경이 넓어지면 넓어질수록, 그 외적인 호흡의 영향은 우리가 찾아야 할, 영원히 남아질 수 있는 내적이고도 본질적인 행복의 터전과는 근본적으로 배치되는 것입니다. 따라서 외적인 여건이 커지면 커질수록 내적인 것은 거기에 반비례해서 작아진다는 것을 알아야 됩니다.

우리들이 타락으로 말미암아 생긴 이 사망권을 벗어나기 위해서는 외적인 환경을 완전히 끊어버려야 합니다. 그리하여 전체적으로 바라는 권을 어떻게 만드느냐, 영원히 남아질 수 있는 내적인 인연을 어떻게 발전시키느냐 하는 것이 문제가 되기 때문에 신앙자가 가는 길에 제재가 많은 것입니다. 감당하기 어려운 여러 가지 제한이 많다는 것을 알아야됩니다.

그러나 이 제한은 우리를 구속하기 위한 것이 아닙니다. 그 제한의 앞면과 뒷면에는 차이가 있습니다. 그 앞면에서는 사망의 물결이 몰아치고 있지만, 그 뒷면에서는 생명의 물결이 일기 시작한다는 것입니다. 그 바깥에서 억세게 휘몰아치는 사망의 크나큰 물결과 그 안에서 은은히 일기 시작하는 생명의 물결과는 천양지판의 차이가 있다는 것을 알아야 됩니다.

그렇기 때문에 사망의 물결을 방비하여 살아가려니, 이는 외로운 사람이 아닐 수 없습니다. 이는 불쌍한 사람이 아닐 수 없다는 것을 여러분이 알아야 됩니다.

그렇지만 외롭다고 해서 외로운 그 자리를 망각하고 회피해 갈 수 없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 외로운 자리를 사수해야 되고, 고생스러운 자리를 사수해야 되는 입장에 놓여 있다는 사실을 알아야 됩니다.

만일, 이 입장을 떠나게 될 때에는 그 외로움을 삼키려는 노도와 같은 사망의 물결에 밀려 생애의 물결은 일순에 흔적도 없이 사라져 버릴 것입니다. 이런 것이 오늘을 사는 인간들의 전면과 이면의 싸움인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들의 마음은 일순간도 쉬지 못하고 공포의 싸움 세계에서 떨고 있는 것을 느낄 수 있습니다. 진정으로 하늘의 길로 가기를 원하는 마음이 강해지면 강해질수록, 자기의 깊은 마음 가운데 하늘의 소원이 강하게 싹이 트면 틀수록 그 마음은 무한한 공포에 사로잡히는 것을 느낄 것입니다.

이러한 마음에 상대적인 하나의 실체상이 나타나게 될 때 거기에 역사를 유린한 사탄의 형상이 나타나기도 하는 것입니다. 그렇게 되면 사망권과 생명권의 싸움이 벌어집니다. 그 자리에서 우리가 모르는 가운데 싸워 나가다가 그것을 느끼고 전체의 생애를 기울여 다짐하며 나서게 될 때에는 그것이 형상적으로 나타나 영적인 체험이 벌어지는 것입니다.

32-134
하나님을 붙들어야 할 내 자신
여기서 나는 지극히 연약한 자리에 있고 반대로 악은 지극히 강한 자리에 있습니다. 선의 자리는 오로지 한 점에 불과하다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 말하면, 수면에다 한 점을 손가락으로 찍었다가 손가락을 빼면 그 손가락을 빼자마자 그 자리는 다시 물에 의해 점령을 당하게 됩니다. 이와 마찬가지로 우리의 마음속에 생겨난 기쁨의 바탕은 물 속에 손가락을 넣은 것과 같은 한 점에 불과합니다. 물에서 손가락을 빼자마자 일시에 물이 그 자리를 점령해 버리는 것처럼, 그 하나의 선의 기준을 중심삼고 일시에 점령하려는 악의 세력이 사방에서 공격한다는 사실을 영적인 생활을 하는 사람은 체험할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 선의 기준을 나 자신이 잃지 않으려면 마음을 다하고 뜻을 다하고 성품을 다해야 합니다. 그러지 않고는 안 되는 것입니다. 모든 것을 다하는 자리에서 영원이 시작되는 것이지 적당히 하는 중간의 자리에서 영원이란 절대로 있을 수 없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가 계속 중간 형태에서 머무르다가는 사망권 내에서 끝날 수밖에 없습니다. 이 사망권에 속하는 중간입장을 넘어서서 자신의 모든 것을 다해야 한다는것입니다.

다하는데 있어서는 우리가 타고난 본능성이나 체력의 한계권 내에서 다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것을 넘어서서 다했다 할 수 있는 조건을 필요로 하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이여! 나를 도와주시옵소서. 내 힘과 능력만으로는 부족하오니 하나님이여, 나를 도와주시옵서’라고 하는 자리에 서야 합니다. 그러면 하나님이 도와주는 힘이 있기 때문에 그 힘과 더불어 자기의 모든 것을 다함으로 말미암아 내가 지닌 힘의 한계선을 넘어설 수 있는 것입니다. 그래야만 하나님께서 우리의 여생을 걸어 놓고 새로운 출발을 한다는 것을 여러분이 알아야 됩니다.

예수님이 이 땅에 오셔서 복음을 선포할 때 혁명적인 말씀을 하셨습니다. 그것이 무엇이냐? 그 누구보다도 나를 더 사랑하라는 것입니다. 네 자식보다도 아내보다도 나를 더 사랑하지 않고는 나의 제자가 될 수 없고 나에게 합당하지 않다는 것입니다. 또한 자기의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르지 않고는 제자가 될 수 없다는 것입니다. 자기의 십자를 져야 된다는 것입니다.

그 십자가는 어떤 십자가냐? 그 십자가는 양면의 십자가입니다. 사망의 물결에 휩쓸리는 고립된 입장에 서서 하나님을 붙들고 큰 것에 대항하여 작은 것이 싸워야 한다는 것입니다. 사망권의 인연으로 말미암아 큰 것을 막아 내고 내 작은 자신을 유지하기 위해서는, 지금까지 사망의 물결을 막아 나오던 하나님이 나를 믿어줄 수 있는 담벽과 같은 힘이 배경이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렇지 않고서는 나 자신이 여지없이 밀려나가기 때문에 하나님을 철석같이 붙들어야 된다는 것입니다.

내 조그만 움직임을 동기로 삼고 후퇴하는 것이 아니라 사망선을 뚫고 나가게 될 때 하나님은 나를 밀어 주는 힘을 앞세워 가지고 따라 나오면서 나로 말미암아 악의 인연을 점령해 나오는 것입니다. 이러한 인연을 가려 나오는 길이 복귀의 길입니다. 타락을 인간이 했기 때문에 복귀도 인간이 한다는 기준을 그렇게 해서 세워 나오는 것임을 여러분이 알아야 되는 것입니다.

태풍이 불어 올 때, 바다에 한 번 가 보십시오. 풍랑으로 인해 바다의 물결을 한 고비 한 고비 넘어가는 배가 있다 할 때, 그 배를 탄 사공이 얼마나 마음 졸이겠는가를 생각해 보라는 것입니다. 그와 같은 경지를 가려 나가는 것이 신앙길입니다. 넘어 온 한 고비가 내 생명을 위협하는 마지막 고비인 줄 알았더니 연속적으로 더 높고 큰 물결이 가해 오는 것을 볼 때, 육지에서 멀리 가면 갈수록 생명의 위협을 느끼지 않을 수 없고 공포를 느끼지 않을 수 없는 것입니다. 신앙길을 가는 신앙자는 노도 가운데 파선의 운명을 면하기 위해 마음 졸이며 배를 몰고 가는 사공의 입장과 같지 않겠습니까? 오늘 우리가 가는 신앙길이 그런 길인 것을 여러분이 알아야 됩니다.

여러분이 하나님의 복귀섭리를 말로 할 때는 간단한 것 같습니다. 이 한국에는 하나님의 복귀섭리의 손길이 연결되어 있습니다. 그 뿐만이 아니라 세계 각국에도 하나님의 복귀섭리의 손길을 미쳐져 있다는 것입니다. 오늘날 한국을 중심삼고 볼 때, 한국은 세계의 여러 국가 가운데에서 하나의 점에 지나지 않습니다. 이러한 입장에 있는 한 나라를 중심삼고 복귀섭리 해 나가려면, 그 나라는 수많은 악의 나라가 침범해 들어오기 때문에 그런 파동에 휩쓸릴 수밖에 없는 인연의 한때를 가져야 된다는 것입니다.

32-136
영장이 될 수 있는 사람
대한민국을 중심삼고 볼 때, 대한민국에는 수많은 종족이 있습니다. 이 수많은 종족 가운데에는 수많은 개인이 있습니다. 나는 그 수많은 개인 가운데의 한 사람이라는 것입니다. 오늘날 밖으로부터 몰아치는 세계적 악의 운세는 역사적인 한계선을 놓아 두고 몰아쳐오는 것이 아니라, 오늘 우리의 생활권내에 있어서 하루의 인연을 중심삼고 파동을 치는 것입니다. 그러한 때가 바로 지금입니다.

이러한 가운데 대한민국의 어느 한 종족에 인연되어 있는 나 자신을 두고 볼 때, 내가 거쳐 가야 할 승리의 세계, 소망의 세계가 얼마나 먼가를 생각해 보라는 것입니다. 오늘날 내가 이 자리에서 그냥 살면 되겠다고 해서는 안 됩니다. 그 길을 가는 우리가 해야 할 일은 하나님의 아들로서온 천주를 주관할 수 있는 만물의 영장의 권한을 갖추는 것입니다.

그러면 만물의 영장이라는 말이 무슨 말이냐? 만물의 영장이 누구냐? 오늘날 사람이라고 말하고 있지만 만물의 근본된 영장은 하나님입니다. 그렇지 않아요? 여러분은 영(靈)이 있다는 것을 알 것입니다. 인간에겐 그 영이 있습니다. 인간은 그 영(靈) 중의 장(長)이기 때문에 결국 하나님과 직결시켜서 영장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만물의 영장이라고 하는 것은 인간 그 자체만으로는 될 수 없습니다. 인간도 피조물인데 어떻게 만물의 영장이 되느냐는 것입니다. 피조물이란 상대적 결과체입니다. 피조물만 되어가지고는 원인을 통할 수 없고 원인을 점령할 수 없는 것입니다. 피조물은 원인으로 말미암아 점령당하게 되어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결과적 존재임이 틀림없습니다. 영장하게 되면 장(長)은 영(靈) 가운데 중심이라는 말입니다. 이 말은 암암리에 본래 하나님과 인간이 하나된 관계를 두고 하는 말인 것을 여러분이 알아야됩니다.

오늘날 대한민국이 얼마나 복잡한 입장에 있습니까? 여기에 있어서 여러분 개체가 안식할 수 있는 곳이 대한민국의 경계선 안쪽이냐는 것입니다. 그곳이 어디겠느냐? 일본이겠어요, 아니면 중국이겠어요? 이 문제가 큰 문제라는 것입니다. 여러분이 안식할 수 있는 터전이 어디냐 할 때 대한민국 안이냐는 것입니다. 대한민국 안만 가지고는 안 됩니다. 새롭게 변혁시켜 가지고 하늘 편으로 복귀된 입장에서는 대한민국은 필요하지만, 현재 대한민국 자체가 세계의 승리적 복귀의 터전, 안식의 터전이 되느냐 하면 못 된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세계 복귀를 위한 안식의 터전을 갖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되느냐? 세계적인 수난길을 극복해야 된다는 사실을 여러분은 알아야 됩니다.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의 아들딸이 되겠다는 사람들은 대한민국 권내의 아들로서 정성들인 수도를 가지고는 안 됩니다. 그런 사람은 대한민국의 도면 도, 군이면 군 권내에 있어서의 하나님의 아들딸은 될지언정 하나님 나라 정체 앞에 대표로 나설 수 있는 아들딸은 못 된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영장은 하나님과 통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인간이 만물의 영장이라고 해서 모두가 영장이 아닙니다. 영장될 수 있는 사람은 따로 있다는 것입니다. 그 영장될 수 있는 클럽에 가입할 수 있는 자격자는 적어도 개인을 위해 사는 사람이 아닙니다. 전체를 위해 사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그러한 사람을 중심삼고 그 소원을 이루려 하시는 것입니다. 그렇게 되면 누구의 천국이 되느냐? 하나님의 천국이 아니라 그 사람의 천국이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오랜 역사과정을 거쳐 오시며 복귀섭리를 추진시켜서 오늘 대한민국의 통일교회를 찾아오신 것은 대한민국 안에 있는 통일교회에 머물기 위해서가 아닙니다. 그러니 이 교단을 이끌고 대한민국의 중심이 되어야 할 것은 물론이요, 세계의 중심의 자리까지 가야 되는 것입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파동이 쳐 오는 사망의 물결들을 전부 다 극복하고 나가야 합니다. 그리하여 저쪽에 건너가더라도 이쪽을 방비할 수 있는 모든 비법 및 장비를 갖추어 놓아야만 사망권내에 남아질 수 있는 천국의 기원이 되는것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아직 그 목적하는 곳에 가 보지 못한 채 강을 건너 가야 할 입장에 놓여 있기 때문에, 강이 노도나 폭풍에 시달리면 그 강을 건너는 우리 자체 역시 시달리는 것입니다. 여기에는 영원한 안식이 있을 수 없습니다. 예수님은 그런 입장에서 이 땅에 왔다 갔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다시 와야 된다는 것도 이런 의미에서 의의가 있는 것입니다.

32-138
영육을 중심삼고 승리해야 하는 통일교회
예수님께서 사망권내에서 희생당하셨지만 부활함으로 말미암아 생명권의 기원을 만들어 놓았습니다. 그 기원이 세계적인 한계선을 넘어서 하늘나라와 연결되게 될 때, 연결된 그 인연을 따라 신부를 맞이할 수 있는 그런 내용을 지니고 사망세계에 다시 와야만 영광이니 승리니 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 때에는 그렇게 되지 못한 것입니다. 그러면 오늘날 기독교가 바라는 것은 무엇이냐? 즉, 오시는 주님을 바라는 것은 무엇을 위해서냐? 결국 천국을 맞기 위해서입니다.

오늘날 대한민국의 통일교회에 속한 사람은 개인의 입장이지만 그 개인은 통일교회를 대표할 수 있고, 대한민국을 대표할 수 있고, 세계를 대표할 수 있습니다. 그 개인은 세계적인 사망권을 극복할 수 있는 가치 이상의 내용을 가져야 합니다. 그렇게 되면 그 사람이 머무는 곳은 어디나 천국인 것입니다. 어디나 천국이예요.

여러분이 지금까지 통일교회를 중심삼고 신앙길을 가면서 믿고 가는 길 앞에 무엇인지는 모르지만 무정하고 공포스러운 크나큰 노도가 휘몰아쳐 오는 것을 느낄 것입니다. 이것을 어떻게 극복하고 넘어가느냐 하는 것이 문제입니다. 이 몰려오는 노도 앞에 우리가 그냥 속수무책일 때에는 열이면 열 전부다 파손되는 것입니다.

그러면 여기에서 우리가 지녀야 할 것이 무엇이냐? 우리에게 필요한 것이 무엇이냐? 어떠한 안식처, 즉 보금자리에 닻을 내릴 수 있는 그 무엇을 지녀야 되는 것입니다.

내가 아무리 왔다 갔다 할 수 있다 하더라도 현재의 입장에서는 좌우로만 왔다 갔다 할 수 있을 뿐 전후로는 왔다 갔다 할 수 없습니다. 전진은 할 수 있지만 후퇴는 할 수 없는 운명길에 서 있다는 것입니다. 후퇴할 수 없을 뿐만 아니라, 시간이 가면 갈수록 전진할 수 있는 인연을 갖지 못한 사람은 밀려오는 공포를 극복할 길이 없다는 것입니다. 여기에서 두렵다고 해서 그 두려움 속에서 염려할 것이 아니라 그 두려움을 잊어버리고 살 수 있는 생명줄을 당기는 데 있어서 생명의 여력을 가져야 됩니다. 그래 가지고 그것을 소망의 자극으로 삼아서 공포심을 능가할 수 있어야 합니다. 그렇게 될 때, 가는 길 앞에 소망이 시작된다는 것을 여러분이 알아야 됩니다. 그러면 그것을 바라보시는 하나님께서도 그에 대해서 다시 한 번 생각해 볼 것이 아니겠습니까?

신앙의 길은 후퇴하는 길이 아니라는 것을 여러분이 알아야 합니다. 신앙의 길은 후퇴하는 길이 아니라 좌우로 합해서 가야 할 길이기 때문에, 혼자 갈 수 없고 응원해 줄 사람이 필요한 것입니다. 혼자서 알 수 없으므로 가르쳐 주는 친구가 필요하고 스승이 필요하다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앞에 가는 사람이 누구인가를 알아야 되고, 옆에서 동지로서 의지하며 갈 수 있는 사람이 누구인가를 알아야 됩니다. 옆에서 위로해 줄 수 있는 동지를 못 가진 사람은 외로운 사람이요, 앞에 먼저 가서 옳다 하고 뒤를 바라보며 가르쳐 줄 사람을 못 가진 사람도 지극히 불쌍한 사람인 것입니다.

그러면 역사상에 이 땅 위에 와서 인류의 사망의 물결을 가르고 간 분이 있다면 그분이 누구겠느냐? 하나님의 독생자라라고 하며 왔다 갔던 이스라엘의 메시아가 아니라, 세계의 메시아인 예수님이 아니겠느냐는 것입니다. 영육을 중심삼아 가지고 실체로서 수난의 고비를 넘기 위해서 왔음에도 불구하고 역사적인 국가의 사망권이 예수를 삼켜 버렸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영적으로만 역사적인 사망권을 넘어서서 그 나라의 승리의 왕자로서 영적인 사망세계에서 파도치는 험악한 바다를 건널 수 있는 길을 닦았던 것입니다. 그러니 그를 따라 가기만 하면 영적인 행복의 세계에 갈 수 있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지금까지의 기독교 사상인 것입니다.

그러나 오늘날 우리 통일교회는 그것 뿐만이 아니라 영육을 중심삼고 피를 뿌려 찾는 승리의 곳, 안식의 보금자리를 향하여 가야 합니다. 이것이 오늘도 내일도 그리워하면서 가야 할 통일교회의 운명길입니다. 여러분도 같은 운명길에 있습니다.

32-140
생명을 구할 수 있는 단 하나의 길
그러면 여러분은 어떻게 가야 되느냐? 여러분은 생명줄이 무엇인가를 확실히 알고 그것을 단단히 붙들어야 합니다. 이것만은 놓쳐서는 안 된다고 할 수 있어야 합니다. 여러분들이 이것을 명심해야 합니다. 아니 갈래야 아니 갈 수 없는 길, 안 가려고 하면 야단납니다. 일시에 위협이 찾아오는 길, 이러한 길이 하나님과 사탄이 판가름하는 길인 것을 여러분이 알아야 되겠습니다.

여러분은 이것을 단단히 붙잡아야 됩니다. 이것은 손으로만 붙잡아서는 안되고 내 몸에다 얽어매야 됩니다. 그리하여 이 생명줄을 잡아당겨야 합니다. 그 생명줄을 잡아당겨도 전진하지 못할 때는 눈을 똑바로 뜨고 방향만이라도 직시해야 됩니다. 그러지 않으면 안 됩니다. 그러면서 그곳으로부터 어떠한 신호가 있을 때까지 기다리라는 것입니다. 거기에서 어떠한 명령이 있기를, 하나님의 은혜가 내리기를 바라는 간절한 마음을 가져야 합니다. 사무친 마음을 가지고 하나님 앞에 구해 달라고 울부짖는 최후의 자리에서 하나님은 새로운 신호를 내려 주시는 것입니다.

그런 자리에서 어떠어떠한 대책을 취하라고 하시는 하나님의 명령을 따르는데 있어서는 시험같은 것은 생각할 여지가 없습니다. 여기에는 실천밖에 없다는 것입니다. 오직 실천만이 사는 길입니다. 실천하는 것만이 생의 원칙에 접촉할 수 있는 동기가 된다는 것을 알아야 됩니다. 이러저러한 사정이 문제가 아닙니다. 너와 나의 인연이 문제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이 길이 하나님의 명령과 더불어 바로 갈 수 있는 길이라는 결단을 짓고, 다른 것은 생각지 않고 혼자서 실천하는 길만이 그의 생명을 구할 수 있는 단 하나의 길이 아니겠느냐는 것입니다. 우리가 이런 운명권에 서 있다는 것을 알아야 됩니다.

여러분, 비가 올 때나 혹은 태풍이 불어올 때를 한번 생각해 보세요. 남자들은 한 번쯤 배를 타고 가다가 태풍을 만나 봐야 합니다. 생각하면 참 근사하거든요. 바다에서 태풍으로 인해 누가 죽음을 당하게 되면 불쌍하긴 하지만 어린애들이 볼 때는 참 재미있거든요. 그렇지만 그것이 얼마나 마음 졸이는 일이겠습니까? 불쌍하다는 마음을 가지고 보게 되면 마음이 졸이지만, 아주 근사한 구경거리라는 것입니다. 배가 파도를 타고 슈웅 하고 파도 꼭대기까지 올라갈 때는 배 밑까지 보이지만, 배가 파도와 함께 슈웅 하고 내려갈 때에는 돛대 끝도 안 보인다는 것입니다. 그럴 때 배가 안 나오면 어쩌나 하고 마음을 졸이고 있는데 또다시 배가 슈웅하고 올라오면 휴우 하고 한숨을 내쉬게 됩니다. 그것이 구경거리 중에 최고로 근사한 구경거리라는 것입니다.

그렇지만 그것을 당해 보고 또 그 사연을 잘 아는 사람은 그것을 구경하라고 해도 구경을 못합니다. 모르는 사람은 구경할 수 있어도 그걸 당해 보아서 알고 있는 사람은 구경 못하는 것입니다. 생각해 보세요. 큰물결 꼭대기에 배가 치솟아 올랐다가 내려가서 보이지 않게 되면 배가 넘어져 버렸나 하면서 간이 콩알만해진다는 것입니다. 그러다가 또 그 배가 올라가게 되면 `아이구 하나님이 보호하사 올라간다 올라간다’하고 저절로 소리지르게 되는 것입니다. 그렇다는 거예요.

그때가 언제인가, 아마 1959년도나 1960년도쯤일 것입니다. 선생님이 성혼식 하기 전이니까 그때쯤입니다. 오팔호라는 배를 타고 서해에 낚시질을 하러 갔는데 그 배를 가만히 타고 있으니까 무슨 흉조가 있는 것 같았어요. 배가 떠날 때부터 아주 기분이 좋지를 않았습니다. 기분이 좋지 않을 때는 후퇴를 해야 되는데 그냥 갔어요. 낚시질을 해서 문어 한 마리를 잡았는데도 기분이 별로 좋지를 않았어요. 그래서 고기잡이고 무엇이고 그만두고 배를 몰고 바닷가로 나왔는데, 아니나 다를까 비가 오기 시작했습니다. 나까지 여섯 사람이 갔었는데 바닷가에 있다 해도 밤이라서 안되겠다 싶어 두 사람은 내가 데리고 나오고 세 사람은 바닷가에 그냥 남았습니다. 그 나머지 세 사람은 해안가까지 나왔으니 걱정이 없다는 것입니다. 거기에 나와 있으면 평지에 와 있는 것과 마찬가지이기 때문에 자기들은 걱정이 없다고 해서, 그들을 그냥 배에 남겨 두고 우리들만 육지로 나왔습니다.

그런데 갑자기 태풍이 불기 시작했습니다. 밤이라 배는 보이지 않고 해서`다 죽었겠구나’ 생각했지요. 새벽이 되어서 나와 보니 다행히도 배는 물 위에 떠 있었습니다. 그렇지만 파도에 크게 출렁이고 있었습니다. 같이 낚시를 하던 사람들을 남겨 두고 와서 바라보는 입장이 다르더라는 거예요. 큰일이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이 배가 낡은 배인데 밤새 밧줄 하나에 매달려 출렁거렸으니 그 밧줄이 탁 끊어질 텐데, 그렇게 되면 배가 바람이 몰아치는 대로 돌아다니게 될 것 아니예요? 그렇게 되면 왼쪽에 있는 큰 벼랑산의 절벽에 부딪치게 되는 것입니다. 또 그 다음에 어려운 것이 무엇이냐? 배가 파손되면 바닷가로 헤엄쳐서 올라오면 될 것이 아니냐고 하겠지만 천만에요. 기어 나올 수가 없다는 것입니다. 물이 쏴 하고 밀려왔다가 다시 밀려가게 되면 밧줄로 잡아채는 힘보다 더 강해서 해변으로 올라오지 못하고 밀려 내려간다는 것입니다.

32-142
죽음을 각오한 자리에서 얻는 부활권
그렇기 때문에 파선당해서 육지에 도달했더라도 바위가 있게 되면 못 올라 오는 것입니다. 평지라면 올라와서 살 수도 있지만 그렇지 않으면 못 올라옵니다. 왜냐? 밀려왔던 물결이 사람을 사정없이 휘어감아 때리기 때문입니다. 그렇게 되어서 죽은 사람들을 보며 살려고 발버둥해서 손톱이다 닳고 뼈다귀가 불거져 있는 것입니다. 살기 위해서 그렇게 발버둥친다는 것입니다.

파도가 배를 몰아치게 되면 배와 반석이 실력으로 대결해 보자는 듯이 서로 맞부딪쳐서 배가 풍비박산 나게 됩니다. 그런데 그때 이 배가 어떻게 되었느냐? 한 5미터 가량 되는 곳에 산줄기가 양쪽으로 갈라져서 물줄기가 흐르는 골짜기가 있었는데, 하나님이 보호하사 파도가 이 배를 그곳에 들이박았던 것입니다. 그 골짜기는 한 번 들어박히게 되면 잘 나오지 않게 되어 있습니다. 파도가 치면 더 들어가기는 하지만 나오지는 않게 되어 있습니다. 그렇게 되어서 그들이 살아나게 된 것입니다.

그래서 그 사람들을 구하기 위해 산으로 뛰어가는 데 태풍으로 인해 세차게 몰아치는 모래알 같은 빗방울이 따끔따끔하게 들이 때리는 거예요. 아주 따끔 따끔해요. 그렇지만 그런 것을 생각할 여지가 있어요? 생각할 여지가 있느냐는 것입니다. 낚시를 가기 위해 하루만 품을 빌리자고 해서 같이 갔던 사공도 지금 죽을 지경에 처해 있는 그들을 구하기 위해 뛰어가는 입장인데, 구경만 하고 있게 되어 있지 않다는 것입니다. 아프고 터지고 싫고, 그런 것을 생각할 겨를이 어디 있어요. 나 자신을 잊어 버리고 뛴다는 것입니다.

그런 입장에서 `내가 저 사람들 하고 아무 관계도 없는데 왜 이럴까’ 하고 생각해 볼 때에 하나님은 그 이상의 염려를 하실 것이라고 생각하면서 내가 거기서 기도했던 생각이 나요. 이런 데서는 내가 이럴 수 있는 것이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러면 그 사람들의 마음은 어떠했을까? 구원해 주려는 사람이 어서 빨리 가까이 와 주기를 바랬을 것입니다. `아이구 나 죽는다, 아이구 나 죽는다’ 하면서 그들은 자기 생명이 경각에 놓여 있기 때문에 마음으로 몇천 번 죽음을 의식했을 것입니다. 그런 자리에서 다시 삶의 환희가 벌어졌기 때문에 새로운 생명력이 묻어 나오는 것입니다. 알겠어요? 백번 죽고 천번 죽는, 죽음을 느끼던 그 자리에서 새로운 구원을 받아 가지고 부활하여 손을 들고 기뻐하는 그 자리는 그렇다는 것입니다. 죽을지 살지 모르는 자리에서 역사적인 생명력을 끌어 가지고 사망의 구덩이면 그 구덩이 이상가는 구덩이도 메우고 뻗어 나가면 여기에서 부활권이 생겨나게 되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예수님도 십자가를 앞에 두고 겟세마네 동산에서 죽을지 살지 모르는 심각한 자리에서 기도하셨던 것입니다. 자기 한 사람 죽는 것은 문제가 아니었습니다. 그러한 심각한 자리에서 죽음을 넘어 부활의 권에 섰기 때문에 거기에서 새로운 역사적인 부활의 역사가 벌어지게 되었던 것입니다.

여러분들도 한복 바지를 뒤집는 것을 보았을 것입니다. 옛날에 솜바지를 입고 살 때, 우리 어머니가 헌 솜바지를 뒤집어서 솜을 걷어내 버리고 바느질을 다시 한 번 하니 새 바지가 되는 것을 보았습니다. 그와 마찬가지로 뒤집는 그것이 바로 부활권입니다.

예수님이 말씀하시기를 목숨을 위하여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무엇을 입을까 염려하지 말고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고 하셨습니다. 이렇듯 의를 구하는 사람이 나라를 차지할 수 있는 부활한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먹는 것보다도 입는 것보다도 마시는 것보다도 더 강한 삶의 인연을 찾아야 합니다. 그러지 않고는 아무리 잘 먹고 잘 입는다 하더라도 모두 헛된 삶이라는 것입니다.

여러분들도 전부다 부두가에 줄을 매 놓고 있는 배와 같은 입장입니다. 자기도 모르는 가운데 줄을 매 놓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인간들은 그런 것도 모르고 왔다갔다 하면서 살고 있습니다. 그러다 보니 매어 놓은 줄이 얼크러지게 되는 것입니다. 매어 놓은 줄이 있기는 있는데 그것이 어떤 족에 매어져 있는지를 모르기 때문에 이리 돌고 저리 돌고 해서 전부다 얼크러져 있다는 것입니다. 어떤 사람은 옆으로 서 있고, 어떤 사람은 저쪽으로 향하고 있고, 또 어떤 사람은 거꾸로 서 있고, 전부다 줄이 있는지 없는지도 모르고 살고 있습니다.

32-144
서둘러 가야 할 신앙길
여러분은 생명줄이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생명줄이 있다는 것입니다. 즉, 여러분은 핏줄에 의해 인연된 줄에 매여 있는 것입니다.

그러면 여기서 우리가 알아야 할 것은 무엇이냐? 그 줄에 매여 있지 말아야 됩니다. 그 줄을 나 자신이 타야 된다는 것입니다. 그 생명줄을 발견하게 될 때 얼마나 좋겠습니까? 이것이 새로운 인생길에 들 수 있는 신앙길입니다. 그러나 이 생명줄을 발견했으니 이제 바삐 서둘 게 뭐 있느냐? 내일도 있고, 모레도 있으니 아무 때라도 가면 되지 않겠느냐 하고 있으면 안 됩니다. 그럴 수 없는 것입니다.

우리는 갈 길이 멀기 때문에 순간이 바쁘다는 마음을 가지고 신앙생활을 해야 합니다. 또 그래야 할 신앙길인 것을 알고 여러분은 항상 영차 영차하면서 그 줄을 잡아당겨야 합니다. 찬송하며 박자를 맞추는 것도, 기도하면서 아버지를 부르는 것도 그 놀음 하는 것입니다. 나 살려 주소 하는 것도 그 놀음이어야 합니다. 그러나 잘못하면 다 틀어지고 맙니다.

보채는 자식에게 젖을 준다는 말이 있잖아요? `아버지! 나 죽소, 살려 주어야 될 것이 하나님 아니요?’ 그렇게 욕을 해도 살려 준다는 것입니다. (웃음) 우리가 그러한 일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들도 그런 실감이 날 것입니다. 생명줄을 허리에 끼어야 되는데 그것을 알지 못하고 등에 지고 일생 동안을 살다 보니 돌부리에 자꾸 걸리고 출렁거리기 때문에 생명줄이 끊어지게 되는 것입니다. 그 끈이 끊어지면 틀림없이 지옥으로 떨어집니다. 그렇지만 이 생명줄을 붙잡고 가게 되면 떨어지더라도 지옥의 맨 밑창에 가지 않고 중간쯤에서 걸리게 되는 것입니다. 거기가 중간 영계입니다. 이것을 여러분이 알아야 되겠습니다.

우리는 옆에 누가 무엇을 하든, 먹고 있거나 쉬고 있거나 상관없이 그길을 가야 됩니다. 저 앞에 수천 명이 한결같이 다 가고 있다는 것입니다. 쉬지 않고 당기면서 정성들이고 몸부림치면서 가게 되면 다른 사람들도 그 줄을 감아 주는 것입니다. 그러다가 수많은 사람들이 거기에서 떨어지는 것도 느끼게 되는 것입니다. 마라톤 대회를 하는 것과 같습니다. 뛰다 보면 1등도 생기고 2등도 생기는 것입니다. 역사가 그렇습니다. 지금까지 수천년 동안 수많은 영인들이 그 줄에 매여 가지고 나왔습니다. 그 가운데서 일등을 해서 저 나라에 가서 그 감는 장치와 인연맺어 가지고 통째로 감아 쥐게 되면 영계가 복귀되는 것입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그것을 통째로 감아 쥘 수 있는 콘크리트를 만들어야 합니다. 다시 말하면 그 배 전체를 감아 쥐더라도 떨어지지 않을 부두를 만들어야 된다는 것입니다. 알겠어요? 그렇게 만들어진 국가가 있다 하면 그 국가는 주님이 지상에 찾아와서 다스릴 국가가 될 것입니다.

대한민국이 주님이 오실 국가라면 세계의 모든 나라를 전부다 감아 쥔다고 하더라도 흔들리지 않을 그런 나라가 되어야 합니다. 그러한 부두가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러려면 얼마나 강하게 만들어야 되겠습니까? 여기에는 시멘트와 자갈, 모래 그리고 철근이 필요합니다. 부두를 만드는 데 있어서 콘크리트를 강하게 하려면 먼저 철근을 엮어야 합니다. 철근은 곧 무엇을 말하느냐 하면 사람을 말합니다. 사람 중에서도 강한 사람입니다. 누가 꺾을래야 꺾을 수 없고 찌를래야 찌를 수 없는 강한 사람이 있어야 합니다. 그러한 지조와 절개를 내포하고 있는 신앙자들을 중심삼고 줄을 매어야 합니다. 그리하여 스위치만 누르면 한꺼번에 구원할 수 있는 장치를 해 놓아야 합니다. 그런 역사적인 사명이 우리에게 있는 것입니다.

통일교회가 이런 엄청난 사명을 감당하기를 바란다면 콘크리트를 하는데 있어서 여러분은 무엇이 될 것이냐? 철근이 될 것이냐, 모래가 될 것이냐, 자갈이 될 것이냐? 여러분은 어느 것이 되겠습니까? 생각해 보자구요. 철근이 되라는 것입니다. 자갈도 못 되겠거든 모래알이라도 되라는 것입니다. 또 모래알도 못 되겠으면 다른 것을 위해 주는 물이라도 되라는 것입니다. 물이라는 것은 어디든지 흡수되는 것입니다. 전부 얽어 매질 수 있는 것도 물의 작용에 의해서입니다. 여러분이 그것을 알아야 됩니다.

그렇게 되면 하나님이 앞으로 새로운 민족, 새로운 국가, 새로운 세계를 구할 수 있습니다. 생명의 등대를 만들어 가지고 사망이 파도치는 흑암세계 앞에 있어서 구원의 등대로서 역할을 해야 하는 것입니다. 생명의 등대를 만들어야 할 것이 우리의 사명인 것을 알아야 하겠습니다.

32-146
올바른 지도자를 따라야 하는 것이 종교인의 도리
그리고 여러분이 얼마나 강하고, 얼마나 더 보탬이 되느냐 하는 것이 문제입니다. 여기에서는 자기의 위신과 체면, 자기의 과거가 문제가 아닙니다. 통일교회에 들어오면 다같은 운명인데 잘나고 못나고가 어디 있습니까? 학박사가 들어오든 장관을 지낸 사람이 들어오든 대통령이 들어오든 다 마찬가지입니다. 자기 자신이 가야 할 공식노정을 가야 하는것입니다.

여러분이 이런 것을 알고 여기에서 해야 할 것이 무엇이냐? 밤이든 낮이든 그저 각자가 갈 길을 가야 합니다. 나를 더 올바른 방향으로 인도해 주고 지도해 주는 사람이 있으면 그저 그 사람을 따라가야 합니다. 그가 산으로 가면 산으로 따라가고, 바다로 가면 바다로 따라가고, 시궁창으로 들어가더라도 팔을 붙들고, 옷 자락을 붙들고 따라가야 합니다. 그럴 수 있는 인연을 맺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런 인연을 맺지 못하면 곤란합니다. 그 인연을 자기의 생명 이상으로 중요시하면서 잃지 않기 위해 떨어지지 않고 따라가야 합니다. 그것이 종교의 도리입니다.

그래서 기독교에서는 예수님은 신랑이요, 신자들은 신부의 입장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신랑, 신부 참 좋은 말입니다. 제일 가까운 관계거든요. 신랑이 가는 곳이면 신부도 어디든지 가야 되는 것입니다.신부는 신랑이 동으로 가면 동으로 따라 가고, 서로 가면 서로 따라가면서 밤낮을 가리지 않고 생애를 같이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같이 먹고 같이 사는 그러한 운명을 지니고 가야 할 길이 신앙길이기 때문에 그 길을 걸어야 할 지도자와 피지도자 사이에 신랑 신부라는 말은 참 좋은 말인 것입니다. 그것을 보더라도 하나님은 참으로 지혜로우신 분입니다. 지혜의 왕이시기 때문에 이런 명칭을 내놓고 부모의 도리를 행사하시어서 오늘날의 기독교 문화권을 형성했다는 것을 여러분이 알아야 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이 길을 위해서는 가다가 죽더라도 굴하지 않고 갈 수 있는 것입니다. 기독교가 이러한 절개와 충절의 인연을 점점 더 넓히며 승리의 한 외적인 천국을 향해 지금까지 발전해 나온 것을 알아야 됩니다.

오늘날 통일교회도 마찬가지입니다. 선생님 자신도 그렇다는 것입니다. 지금 그 길을 향하여 가고 있다는 것입니다. 오늘 이 시간에도 가고 있고 이 날에도 가고 있고, 이 달에도 가고 있습니다. 이렇게 가고 있다는 것을 여러분은 알아야 되는 것입니다.

그렇게 가는 입장에서 우리는 앞에서 지도하는 친구와 앞에 가는 사람들의 마음 전체를 자기의 것으로 받아들여서 알아 가지고 그것을 자기의 재산으로 삼고 따라가야 합니다. 그것을 자기의 생명과 엇바꾸는 한이 있더라도, 나 자신이 죽는 한이 있더라도 그의 말을 붙안고 죽어야만 거기에 살아 있는 사람은 그를 책임지고 부활시켜 준다는 것입니다.

알겠어요, 무슨 말인지? 그의 말을 듣다가 죽으면 불쌍하다고 동정이라도 받을 수 있을 것이 아닙니까? 영계에 가 가지고 그 사람을 위해 기도라도 해준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제자들이 예수님의 말씀을 들었어요, 안 들었어요? 안 들었지요? 안 들었는데 그런 상태로 그냥 가게 되면 관계가 끊어지기 때문에,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도 할 수 없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예수님이 부활하신 후에 베드로에게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네가 이 사람들 보다 나를 더 사랑하느냐?(요 21:15-17)’ 고 물었던 것입니다. 그것은 예수님의 말씀을 베드로가 들었다는 조건, 사랑했다는 조건을 세워주기 위해서였습니다. 그렇지 않으면 베드로의 성격으로 보더라도 제일 먼저 도망갔을 것입니다. 그가 죽더라도 예수를 믿고 죽었다, 예수의 말을 듣고 죽었다는 말을 남겨야만 천상세계에서 그를 위해 기도라도 해줄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한 하나님의 사랑이 있었기 때문에 그랬다는 것을 생각하고, 그러한 운명길에 선 여러분은 생명의 밧줄을 감아 쥐어야 하겠습니다. 그 줄을 바꿔 쥐어야 할 입장에 있다면 바꿔 쥐어야 하겠습니다. 그리하여 해방의 한 날에 안식의 한 곳을 가기 위해 온갖 정성과 온갖 생명력을 아낌없이 투입해야 됩니다.

그것을 투입하는 데 있어서 그 무엇을 주고도 바꿀 수 없는 가치의 결과를 맺기 위해 다짐하는 여러분이 되어야만 올바른 신앙인으로서의 자세를 갖추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지 않고는 사망권을 벗어날 수 없다는 사실을 여러분이 알아야 되는 것입니다.

32-148
기 도
아버지, 나와 너의 인연은 형제의 인연인 것을 저희들이 알았습니다. 한 부모의 혈육을 이어받고 태어난 저희들이기 때문에 아버지께서 원하시는 효성의 도리를 다해야 되겠습니다. 그 효성이 어머니 아버지에게만 하는 것이어서는 안 되겠사옵니다.

효자를 가진 어버이가 그 효자만을 가지고 기뻐하면 그들에게는 나라가 없는 것이나 마찬가지입니다. 아버지여, 효자를 보고 기뻐할 때는 나라까지 품고 기뻐해야 되는 것을 알았습니다. 그래야만 그 효자가 나라 앞에 천적인 충의 인연을 세울 수 있는 중심 존재가 되는 것이며, 그러므로 말미암아 그 나라가 효자의 나라가 되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아버지께서 효자를 찾고 계신 것은 물론이고 그 효자를 세우시어서 효자의 나라를 찾고자 하셨기 때문에, 효자의 나라를 찾는 첫 번째 효자로서 예수를이 땅에 보내셨던 것을 아옵니다. 그렇기 때문에 예수를 독생자라 했습니다. 예수는 자신이 역사시대를 대표하여 처음으로 하나님의 사랑의 인연을 갖고 태어난 독생자임을 알았기 때문에, 하나님의 사랑을 중심삼고 유대 민족 앞에 독생자란 말을 선포했던 것을 알고 있습니다.

그 독생자는 아버지의 품에서 효성을 다하는 효자가 되는 것이 소원이었으나 그 효자만 되어 가지고는 안 되는 것이었습니다. 효자가 되었다 하더라도 효자의 나라를 갖지 않고는 원수 앞에 침범을 받을 수밖에 없는 것을 아옵니다. 효자의 나라를 마음으로 그리면서 효자를 사랑하셨던 아버지의 심정인 것을 몰랐습니다. 그래서 아버지의 마음과 아들의 마음이 달랐기 때문에 `아버지여, 할 만하시거든 이 잔을 내게서 지나가게 하옵소서’ 라는 기도를 함으로써 효자인 나만으로서 되지 않느냐는 입장에 섰던 것입니다.

나뿐만이 아니라 나라와 민족을 위하시는 아버지의 마음을 중심삼고볼 때에, 더 높고 더 영원할 수 있는 것은 아버지의 마음의 나라인 것을 알았사옵니다. 그 나라를 중심삼고 예수를 죽음길로 내 세우신 것은 아버지 앞에 효성적인 국가를 세우기 위한 것이었음을 저희들이 알아야되겠습니다.

저희 자신이 구원받는다는 것은 내 자체의 구원에 한한 것이 아니옵니다. 당신께서 나를 구원하시는 것은 나 한 사람만을 구원하시기 위해서가 아니라, 내가 처하고 있는 나라를 구원하시기 위해서임을 알게 하여 주시옵소서.

나 자신의 부활과 더불어 나라가 부활되고, 나 자신의 효성과 더불어 나라의 효성을 찾는 것이 아버지의 소원인 것을 저희들은 알고, 오늘의 어려움을 극복하기 위해서는 아버지가 머무르실 수 있는 효성의 국가를 이루기 위해 대신하여 나설 수 있어야겠사옵니다. 그러한 아들의 권한을 주시기 이해 아버지께서 수고로운 길을 친히 닦아 나오신다는 사실을 저희들이 알아야 되겠습니다.

이와 같은 도리의 인연을 저희 앞에 남겨 주시고, 깊고 오묘하신 당신의 뜻에 저희를 인연지어 주셨지만, 그 무한한 가치와 깊은 인연을 저희들이 소홀히 하고 경솔히 다룬 때가 얼마나 많았사옵니까? 저희들은 이런 사실을 다시 한번 회개해야 되겠습니다.

당신은 자비와 사랑의 터전 위에서 지금까지 참아 나오셨기에 타락한 아담의 후손들이 거쳐온 수천년의 역사 과정 가운데 오늘날까지 아버지의 두터운 심정의 인연이 남아 있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이 남아 있는 것만 가지고라도, 천년의 사연을 다하여 회개하고 감사해도 갚을 수 없다는 것을 느낄 줄 아는 당신의 아들딸이 되어야 하겠습니다.

아버지께서 나를 구해 주시는 것은 민족을 구하기 위한 길을 나에게 가르쳐 주시기 위해서라는 것을 알았사오니, 민족은 이렇게 해야만 살 수 있다는 것을 따라 오는 후손들 앞에 가르쳐 주고, 또한 같은 환경에 처해 있는 형제들 앞에 가르쳐 주어야 하겠습니다. 그래야만 효자를 가진, 혹은 다른 형제들을 가진 부모로서 효자의 영광을 되살려 주실 것이 아니겠습니까? 우리 통일교회 식구들은 오늘도 내일도 그러한 효자의 책임을 다할 줄 아는 아들딸이 되어야 되겠습니다.

오늘날 저희들은 전후 좌우에서 사망의 물결이 몰아치는 환경 가운데에 있사옵니다. 밝은 낮이 아니라 방향조차 알 수 없는 암흑 가운데에서 저희들이 아우성치고 있사옵고, 생명이 수난의 운명을 짊어지고 절규하는 찰나에 광명한 햇빛을 비추어 주면서 길과 방향을 제시해 주는 은사가 있다면, 천년 만년 생명을 다 기울여도 보답할 수 없는 은사인 것을 알고 죽을 자리에 있던 사람은 응당 그 마음을 모두 드려야 될 것이 아니겠사옵니까?

오늘날 저희들은 뜻 가운데서 광명한 길을 제시해준 아버지 앞에 감사하는 마음을 가졌지만, 생명을 다하여 그 감사의 인연을 높이 아버지의 것으로 돌려드리지 못한 자신들이옵니다. 아직 그렇게 되지 못한 자신을 생각하여 슬퍼하는 이들이 있사오면 아버지여, 슬픈 그 마음을 강하게 하여 주시옵고, 다시 회개할 수 있게 인도하여 주시옵길, 아버님, 간절히 바라옵고 원하옵니다.

저희들은 이러한 타락권내에서 벗어나 공포의 시대권을 넘어가야 되겠습니다. 영적인 하늘이 찾아오게 될 때는 강한 입장의 하늘이 아닌 가냘픈 입장의 하늘로서 공포의 환경을 중심삼고 노도와 같은 치열한 전투의 시기를 거쳐가야 합니다. 이런 사실을 저희들은 망각하지 말아야 되겠습니다. 그런 것을 두려워하지 않고, 그런 것을 우리들이 가야 할 본연의 행로인 줄로 알고 저희들이 맞이할 수 있는 길을 고이고이 닦게 하여 주시옵소서.

그런 도상에서 자기가 갈 방향을 안내하고 가르쳐 주는 지도자가 있거든, 천상세계에서나 지상세계에서나 모든 것을 다 드려 감사할 수 있는 자기 자신이 되어야 한다는 것을 알아야 되겠습니다. 그리하여 오늘도 감사하고, 내일도 감사하고, 금년에도 감사하고, 새해에도 감사하며 감사 감사로 바쳐드릴 수 있는 생애를 남기겠다고 노력하는 당신의 아들딸이 되어야 하겠습니다. 그러한 무리는 절대 망하지 않는다는 것을 확실히 알게 하여 주시옵소서. 아버지, 간절히 바라옵고 원하옵나이다.

이제 우리의 자세가 어떠해야 된다는 것을 알고, 새로운 자기의 운명길을 개척해 가는 데 있어서 동지의 말과 스승의 가르침을 받들어서 자기가 처해 있는 환경을 혁명하고 변혁시켜야겠습니다. 자기를 따를 수 있는 환경권을 갖추어 행복과 안식의 터전, 천국의 보금자리를 향하여 온 생명력을 다 기울여 돌진할 수 있는 아들딸들이 되게 하여 주시옵길 간절히 부탁드리고 원하옵나이다.

이제 후반기에 들어선 이 7월 이후의 전체의 해를 맡으시옵소서. 오늘은 이 은혜의 한 해에 있어서 후반기를 출발하는 첫 주일이오니 복을 주시옵고, 이 해가 끝나는 그날까지 영광을 가하여 1970년도가 복이 있었던 해라고 스스로 자기 생애의 절정기로 삼아 기념할 수 있게 하여 주시옵길 간절히 부탁옵나이다.

아버지 오늘날 저희가 중차대한 사명을 가려가는 이 길을 친히 맡아 주관하여 주시옵소서. 복귀섭리 노정에 있어서 이 1970년도가 얼마나 귀한가 하는것이 역사상에 드러나게 하여 주옵길 간절히 부탁하면서, 모든 말씀 참부모의 성호 받들어 아뢰었사옵나이다. 아멘.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