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2-07 to 32-36: 정지와 전진

정지와 전진
1970.06.14 (일), 한국 전본부교회

32-07
정지와 전진
[기 도]

아버지, 남기신 복귀의 노정을 살피면서 현재의 자신의 위치를 가름하는 이 싸움터에서 자기 중심삼고는 아무것도 해결할래야 해결할 수 없는 자신들의 미약함을 깨닫고 홀로 하늘을 우러르며 당신의 거룩한 손길을 바라는 부족한 자녀들의 모습이 있는 것을 기억하여 주시옵소서.

아버지, 얼마나 많은 우리의 선조들이 하늘을 우러러보면서 능력의 주체이신 당신께 자신들을 구해 달라고 갈구하였사옵나이까? 이러한 선조들의 모습을 회상하면서 오늘 저희 자신의 초초한 모습을 가다듬고, 정성을 들여 당신을 아버지라 부를 수 있는 자신이 되어 있지 못한 것을 다시 한번 깨달을 수 있는 이 시간 되게 허락하여 주시옵소서.

온갖 정성을 다 기울여서 하늘을 하늘로 모시고, 아버지를 아버지로 알고, 자신이 하늘 앞에 세워진 자녀의 입장인 것을 확실히 깨달아야 하겠습니다. 저희가 진정 아버지를 아버지라 부르고 당신께서 저희를 자녀라 부를 수 있는 그 자리가 자신을 통하여 이루어졌으며, 또 이루어져 가고 있는가를 생각해 볼 때 마냥 부족한 자신이요, 아버지를 아버지라 부를 면목조차 세울 수 없는 자신인 것을 깨닫게 되옵니다.

아버지시여, 이 아침에 저희들을 불러 모으셨사오니 아버지께서 개개인을 살피시옵소서. 지금까지 저희의 선에 대한 갈구심과 아버지에 대한 흠모의 마음이 어떠한가 하는 것이 문제였음을 깨닫게 될 때, 아버지여, 부족한 저희들은 다시 한번 아버지께 용납을 구하지 않을 수 없사옵니다.

언제나 슬픔의 노정에서 살아야 하는 타락의 후손이 된 것이 얼마나 얼마나 불행하고 얼마나 얼마나 한스러운 일인가를 깨달아야 할 것임에도 불구하고 그와 같은 생각조차 하지 못하는 자신인 것을 탄식해야 할 자체인 것을 다시 한번 느껴야 되겠사옵니다. 내가 그런 자리에 서지 못하게 될 때는 아버님이 또다시 그런 입장에 서셔야 한다는 것을 깨닫지 못해서는 안 되겠습니다. 내가 안타까와하지 않으면 아버님이 안타까와 하실 것이며, 내가 슬퍼하지 않으면 아버님이 슬퍼하실 것이며, 내가 노력하지 않으면 아버님이 노력하셔야 하고, 내가 싸우지 않으면 아버님이 싸우셔야 한다는 것을 알아야 하겠사옵니다.

아버님과 나는 상응적인 입장에 있는 것이 아니라 상반적인 입장에 있어서, 내가 좋다 하는 자리에 있을 때에 아버님은 슬픈 자리에 있을 수 있으며, 내가 슬픈 자리에 있을 때에 아버님은 기쁜 자리에 있을 수 있다는 사실을 알고, 이러한 역설적인 운명의 노정을 개척해야 할 자신을 다시 한 번 주시하면서, 내일의 나를 비판할 줄 아는 당신의 아들딸들이 되게 하여 주시옵소서. 아버님, 간절히 바라옵고 원하옵니다.

아버지, 이 아침 전국에 널리어 하늘을 우러러보면서 눈물짓는 당신의 아들딸들이 있사옵니까?그 자리에는 당신의 자비가 깃들 것이며, 그 자리에서부터 선이 출발될 것이며, 그 자리에서 당신의 심정의 인연이 싹틀 것으로 알고 있사옵니다. 그러기에 타락한 인간은 눈물의 길을 가지 않으면 안 된다는 것을 저희들은 확실히 알아야 하겠습니다. 슬픔과 싸우고 외로움과 싸우고 고통을 받으면서도 참고 간 길이 하늘을 향해 수많은 도인들이 간 길이요, 선한 선조들이 남긴 역사적인 길인 것을 깨닫고, 그와 같은 노정에 자신을 투신하여 이 시간부터 매일매일을 거쳐 생의 노정을 가지 않으면 안 될 운명길이 우리를 기다리고 있다는 사실을 알아야되겠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저희들의 행로에는 기뻐할래야 기뻐할 수 없는 역사적인 죄상이 나를 얽어매고 있다는 것을 알아야 되겠습니다. 시대적인 모든 여건이 나를 구속하여 내일의 해방을 막고 있다는 것을 알아야 되겠습니다.

그리하여 이 모든 여건을 격파하고 돌파하기 위해서는 온갖 노력이 필요하다는 것을 이들이 알게 하여 주시옵기를 간절히 부탁하고 원하옵니다.

당신이 부르시는 그 소원의 터전 앞에, 당신이 걸어오신 그 슬픔의 노정 앞에 부름받은 저희들은 아버지를 위로해 드릴 수 있는 참다운 효자효녀가 되지 않으면 안 될 자신의 모습을 발견하게 허락하여 주시옵소서. 또한 당신이 소망하시는 나라의 충신이 되어야 할 자신의 모습을 발견하게 하여 주시옵소서. 그러지 않고는 아버지 앞에 가까이 갈 수 없는 자신인 것을 다시 한 번 깨닫고 다시 한 번 명심하게 허락하여 주옵기를, 아버님, 간절히 바라옵고 원하옵니다.

세계에 널려 있는 당신의 자녀들이 이 한국 땅, 이곳을 그리워하고, 이곳을 향하여 정성을 들이고 있는 입장이 얼마나 외롭겠사옵니까? 불쌍한 그들을 당신이 기억하여 주시옵기를 간절히 바라옵고 원하옵니다. 이곳을 그리워하며 눈물짓는 자녀들이 있다 할진대 당신께서는 지금까지 인류를 찾아오시면서 눈물지으신 당신의 입장과 비교하시어서 그들을 동정하시리라 믿사옵니다. 그러한 나날을 보내기를 바라며 생활하고 있는 저희 생활의 사연을, 아버지, 긍휼히 보아 주시옵소서.

당신이 아니 계시다면 저희들이 이와 같은 자리에서 이와 같은 생활을 하면서 하늘 앞에, 인류 앞에, 그리고 역사시대 앞에 참고 나가는 것이 무가치하다는 것을 알고 있사오니, 이와 같은 생활이 연속되는 자리에, 아버님이여, 찾아오셔서 같이하여 주시옵고 축복하여 주시옵소서. 간절히 바라옵고 원하옵니다.

아버님, 전세계에 널려 있는 자녀들과 저희들은 육적인 세계는 먼 거리를 두고 있사오나, 마음의 세계에서는 한 시점을 중심삼고 움직이고 있다는 사실이 얼마나 고귀한 것인가를 깨달을 수 있게 하여 주옵기를 간절히 바라옵고 원하옵니다. 그와 같은 사연을 통하여 오늘도 승리하고 내일도 승리하고 일생토록 승리할 수 있게, 아버님이시여, 보호하여 주시옵고, 부디 붙드시어서 놓지 말아 주시옵기를 간절히 바라옵고원하옵니다.

그들이 원하는 세계가 저희가 원하는 세계인 줄 아오니, 하루하루의 생활에서 느끼는 모든 감각과 감정마저도 동료의 자리에서 같이 느끼게 하여 주시옵소서. 또한 그들과 우리가 느끼는 심정적 사연이 당신의 사연과 일치될 때에 참다운 형제의 인연이 맺어진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가인과 아벨의 인연이 땅의 끝에서 끝까지 맺어지게 될 때에 세계는 복구의 터전이 갖추어진다는 사실을 저희들이 알게 허락하여 주시옵기를 간절히 바라옵고원하옵니다.

그러기에 수많은 사람들은 역사과정을 거쳐오면서 인류를 대신하여 박애의 심정을 부르짖었사오며, 자기 일개의 민족뿐만 아니라 세계 동족애를 부르짖었사옵니다. 그러나 진정 그러한 자리에서 아버지와 심정적으로 일치되어 사랑하며 살았던 무리는 없었사옵니다. 그러한 역사시대의 슬픔을 아는 저희들에게 오늘의 이와 같은 인연을 맺어 주신 당신의 은사를 고맙게 생각하고 있습니다.

그들의 슬픔이 저희의 슬픔이요, 그들의 소원이 저희의 소원이옵니다. 그들이 바라는 모든 뜻이 당신의 뜻과 일치될 수 있었다는 사실이 얼마나 가치있는 것인가를 이들이 알게 허락하여 주시옵기를 간절히 바라옵고 원하옵니다. 그들의 슬픔은 그들 자체만의 슬픔으로 끝나는 것이 아님을 아옵니다. 동의 슬픔은 서로 연결되고, 서의 슬픔은 동으로 연결되고, 지상의 슬픔은 동서로 연결되어 천상의 슬픔과 연결되어야 한다는 것을 아옵니다. 또한 저희의 슬픔보다 더 큰 아버지의 슬픔을 풀지 않고는 한 발도 전진할 수 없는 것이 복귀섭리의 노정임을 아옵니다. 이와 같은 눈물을 흘려야 할 인류의 사연을 긍휼히 보시는 아버지시여, 당신도 그런 사연과 더불어 눈물을 흘려 왔다는 사실을 저희들이 이 아침에 다시 한 번 깨닫게 하여 주시옵길, 간절히 부탁하고 원하옵니다.

머리를 숙인 당신의 자녀들 가운데 당신의 마음과 더불어, 당신의 심정과 더불어 일치될 수 있는 아들이 있고 딸이 있거든, 남자가 있고 여자가 있거든, 그들 사이에 연결되는 심정의 일치점이 당신이 활동할 수 있는 터전이 된다는 사실을 알아야 되겠습니다. 그것을 축소하여 개인으로 볼때는 몸과 마음이 일치점을 찾아야 된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이렇게 서로 주고 받을 수 있는 일치점을 연결시켜서 개인으로부터 가정, 종족, 민족, 국가, 온 세계의 남성과 여성, 나아가 지상과 천상 세계 전체가 당신과 일치점을 갖추지 않고는 생명의 인연도 가질 수 없다는 사실을 저희들이 확실히 알게 허락하여 주시옵소서.

인간끼리 인연된 것은 인간 자체에서 끝나는 것이지 영원한 생명과 연결될 수 없다는 사실을 알고 있사옵니다. 이런 것을 아는 저희들은 인간만으로 시작되고 인간만으로 연결되고 인간만으로 끝나는 것을 원치 않사오니, 아버지께서 중심이 되시어 출발과 과정과 목적과 결과까지 갖출 수 있게 허락하여 주시옵기를, 아버지 간절히 부탁하고 원하옵니다.

아버지, 저희의 마음이 얼마나 아버지를 그리워하고 있사옵니까? 저희의 몸이 얼마나 간절히 아버지 앞에 부복하였사옵니까? 저희의 몸과 마음이 아버지를 부르고 싶은 사연에 얼마나 사무쳐 있사옵니까? 자신의 모든 전체를 아버지 앞에 바쳐 드리고 싶은 마음이 얼마나 간절하옵니까?

그러지 못한 사연이 있거든 용서해 주시고, 아버지께서 이들의 마음을 간절하게 하여 주시옵고, 이들로 하여금 일체가 되기 위해 노력하게 하여 주옵기를 간절히 바라옵고 원하옵니다. 그러한 인연이 여기에 나타나지 않으면 사망의 터전밖에 될 수 없다는 것을 확실히 깨닫고 있사오니, 이부족한 자신들을 살피시는 아버지시여, 저희들을 사망세계에 버려 두지 마시옵고 찾아 주시옵소서. 간절히 바라옵고 원하옵니다.

아버지, 저희들은 당신의 생명의 인연권내에 흡수될 수 있는 모습이 되어야 되겠습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자신이 없어져야 되겠사옵니다. 저희자신들이 완전히 무의 경지에 들어가서 당신이 원하시는 소원의 일념만이 저희 마음에서 우러나와 당신의 움직이심에 흡수될 수 있는 요건을 갖출 수 있게 허락하여 주옵기를, 아버님, 간절히 바라옵고 원하옵니다.

앞으로 보내실 당신의 아들딸이 있사오면 보내시옵소서. 뜻의 세계를 이루시옵소서. 당신이 소원하시는 뜻이 이루어지지 않으면 안 될 것을 알고 있기에 뜻이 이루어질 그날을 향하여 전진하기를 원하고 있사오니, 아버지, 권고하시옵고 부축하시어서 타락으로 인한 이 원한의 구렁텅이를 넘게 하여 주시옵길 간절히 부탁드리고 원하옵니다.

오늘은 안식일이오니 당신이 이날을 주관하시옵고 일체를 당신이 관리하시어, 선한 결과의 자리에 도달하게 하여 주옵기를 간절히 부탁드리고 원하옵니다. 참석한 자녀들을 굽어 살피시옵소서. 몸과 마음이 하나되고 이 전체 청중이 하나되어 당신이 주도하시는 그 모든 소원 앞에 일치될 수 있는 거룩한 인연이 맺어지게 허락하여 주옵기를 간절히 부탁드리면서, 모든 말씀 참부모의 성호 받들어서 아뢰었사옵나이다. 아멘.

32-12
말 씀
우리 인간들이 살아가는 데 있어서는 정지와 전진이 성패를 결정하는 동기가 됩니다. 또한 그것들이 성하게 하느냐, 혹은 망하게 하느냐 하는 전체적인 문제를 좌우하는 것을 우리는 생활주변에서 왕왕 보게 됩니다.

32-12
하나님과 인간이 바라는 최고의 전진의 한계선
사람은 어느 누구나 흥하기를 바랍니다. 망하기를 바라는 사람은 없습니다. 누구나 자기가 앞으로 앞으로 발전해 가지고 환경에서 드러나기를 바라는 것입니다. 개인은 물론이거니와 가정도 그러합니다. 가정이 그러하기 때문에 가정이 연결되어서 이루어진 한 국가도 그와 같은 것을 바라는 것입니다. 국가가 그러니 세계도 그렇다는 것은 두말할 필요조차 없는 사실입니다. 또, 우리 인간이 이러하니 인간을 지으신 하나님도 역시 마찬가지일 것입니다.

하나님이 인류 역사를 움직여 나가시는 데는 그 움직여 나가시는 역사의 실황이면 실황, 상황이면 상황이 정지하는 것을 원치 않으실 것입니다. 정지하는 것을 넘어서 전진하거나 발전하기를 바라시는 하나님이라는 사실을 우리는 알아야 합니다.

그러면 전진의 한계선, 앞으로 나아갈 수 있는 최고의 한계선은 어떤 자리가 될 것이냐? 하나님과 인간이 분립된 자리가 되어서는 안 될 것입니다. 전진하는 그 최고의 한계선은 반드시 하나님과 우리가 보다 강하게 합할 수 있고, 보다 강하게 하나될 수 있는 자리임에 틀림없습니다. 그곳이 어떤 곳이냐 하면 하나된 세계인 것입니다.

그러면 무엇을 중심삼고 하나된 세계가 되어야 하느냐? 하나님의 사랑을 중심삼고 하나되어야 한다는 것은 두말할 것이 없습니다. 이 세상에 아무리 좋은 것이 있다 하더라도 그것은 자기와 관계를 맺지 않으면 가치가 없습니다. 아무리 귀한 것이 있다하더라도 소용없습니다. 그것은 자기와 관계를 맺어야 비로소 빛이 나는 것입니다. 또, 그 귀한 것이 자기와 관계를 맺었다 하더라도 그 관계가 일시적인 것이 아니라 영원해야 됩니다. 아무리 가치 있는 존재라도 영원할 수 있는 내용이 없으면 그것은 무가치한 자리로 떨어지지 않을 수 없는 것입니다. 귀한 것이 있어서 나와 하나되었다고 해도 그 가운데 영원성이 내포되어 있지 않으면 아무 소용이 없다는 것입니다. 시간적인 한계선을 넘어서 영원을 중심삼아 가지고 보다 더 사랑할 수 있고, 보다 더 고차적인 사랑의 인연을 찾아볼 수 있고, 보다 더 고차적인 사랑의 내용이 연결될 수 있어야만 거기에서 비로소 무한한 가치의 존재로 인연이 되는 것입니다.

세상에서는 흔히 사랑하는 자녀들을 최고로 귀한 것으로 표준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사랑이라는 것을 중심삼고 볼 때에 부모가 자식을 향한 사랑의 한계점은 어디일 것이냐? 부모는 자식이 어릴 때에만 사랑해 주려고 하는 것이 아니라 생애를 통해서, 더 나아가 영원을 통해서 사랑하고자 하는 것입니다. 사랑함으로 말미암아 보람을 느낄 수 있으며 사랑함으로 말미암아 더욱 가치를 느낄 수 있는 부자관계가 맺어진다면, 무한한 힘과 무한한 자극과 무한히 새로운 그 무엇이 그 관계권내에서 발생한다는 것입니다. 그와 같은 인연이 갖추어지지 않은 부자의 관계는 어느 한때에 반드시 중단되고 마는 것입니다.

이처럼 참된 것으로서, 지극히 좋은 것으로서, 무한한 가치의 것으로서 인연되었던 관계가 중단되게 될 때에는 그것을 뒷받침할 수 있는, 그 이상의 것을 대신 바꾸어 갖지 않는 한 관계되었던 그 가치라는 것은 도리어 슬픔의 조건이 되고 마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귀한 가치의 것을 품거나 가지고 있을 때에 그것을 어떻게 해서 그보다 더 귀한 가치의 것으로 발전시키느냐 하는 것이 문제가 됩니다. 귀하고 무한한 가치의 것은 인간 세상의 물질적 혹은 외적인 어떤 인연을 가지고는 얻을 수 없습니다. 그보다 귀한 내용을 가지고 있는 사랑의 인연이 아니고는 안 되는 것입니다. 이 사랑의 인연도 제삼자를 통해서 맺어질 것이 아니라 직접적인 관계로 맺어져야만 무한한 가치를 느낄 수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과 인간이 바라는 최고의 전진의 한계선은 어떤 곳이냐? 이제 말한 바와 같이 사랑을 중심삼고 하나되는 곳입니다. 하나되는 데도 어떠한 시점, 어떠한 한계권내, 혹은 어떤 시간권내에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시간을 넘고 넘어 더욱더 발전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 사랑은 그러한 요인을 갖추지 않고는 무한한 행복을 느낄 수 없는 것입니다. 만일 그런 한계선에 도달하지 않고 행복을 주장한다면 그것은 한계선 이하의 행복이 아닐 수 없습니다. 하나님이 인간과 더불어 찾기를 원하는 최고의 한계점이라는 것은 무한한 사랑을 중심삼아 가지고 무한히 자극시킬 수 있는 한 점을 넘는 것입니다. 이러한 기준이 전진의 최고 기준이 되어야 된다는 결론이 나오는 것입니다.

이러한 표준을 중심삼아 가지고 우리 자체를 비판해 보게 될 때에 그럴 수 있는 자신이 되었느냐 하는 것이 문제입니다. 그럴 수 있는 자신은 되지 못하였더라도 그럴 수 있는 자신이 되기 위해서 노력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렇게 되기 위한 노력도 하지 않고 있다면 그렇게 하려고 준비라도 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렇게 하기를 바라는 마음조차 없다면 반드시 정지라는 문제에 부딪히게 된다는 것을 우리들은 알아야 합니다.

32-14
사랑에는 반드시 생명의 인연이 투입되어야
일을 하다가 잠깐 쉰다는 의미에서의 정지는 좋지만, 갈 길을 남겨 놓고 가려고 준비도 하지 않고 노력도 하지 않으면서 그냥 그대로 정지한다면 그런 사람은 거기에서 끝장이 나는 것입니다. 자기가 아무리 잘났다고 하더라도 정지된 자리에서는 모든 만상이나 어떠한 존재세계와 관계를 맺으려 해도 존재세계 자체들이 관계를 맺으려고 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사실을 우리들은 생활주변에서 발견할 수 있습니다.

여러분이 친구를 사귀려 할 때에는 발전할 수 있는 친구냐 그렇지 않으면 소망이 없는 친구냐 하는 것이 문제가 됩니다. 소망이 없는 친구와 관계를 맺으면 맺을수록 자기에게 점점 무가치한 결과가 나타날 수밖에 없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보다 나은 친구와 관계를 맺고 보다 나은 내일을 위하여 준비하고 노력해야 되는 것입니다.

그러면 무엇으로 그러한 노력을 해 나갈 것이냐? 사랑하는 마음을 가지고 노력해 나가야 합니다. 그래서 그 사랑하는 마음이 얼마나 투입되느냐 하는 것이 문제가 되는 것입니다.

사랑은 홀로 이루어질 수 없습니다. 생명이 투입되지 않고는 사랑이 성립되지 않는 것입니다. 부자 관계의 사랑을 두고 보더라도 거기에는 생명의 인연이 깃들어 있는 것입니다. 이처럼 생명의 인연이 남아 있는 한, 생명의 인연 속에서 소원을 갖고 있는 한 거기에는 반드시 사랑의 인연이 남아지는 것입니다. 생명의 인연을 떠나 가지고는 사랑의 관계를 맺을 수없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사랑에는 반드시 생명의 인연이 투입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또, 생명을 얼마만큼 투입해 가지고 사랑하느냐에 따라 보다 가치있게 느끼느냐 안 느끼느냐 하는 문제가 결정되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 말하면, 자식에 대한 부모의 사랑은 그냥 그대로 생활적인 인연만을 통해서 하는 사랑이 아니라, 뼛골에서 우러나오는 사랑인 것입니다. 잊을래야 잊을 수 없고 끊을래야 끊을 수 없는 사랑의 마음을 부모는 가지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생명의 여력이 남아 있는 한 부모는 자식을 사랑하는 것입니다. 자식과 생명의 인연이 맺어져 있다는 것을 느낄때, 부모에게서는 자식을 사랑하는 마음이 자연적으로 우러나오는 것입니다. 저 애는 내 아들이니까 사랑하겠다는 의식적인 마음이 앞서서 사랑하는 것이 아니라, 그 마음보다도 그 인연보다도 앞선 자기의 생명력이 자식과 연결되어 있기 때문에 사랑하지 않을래야 않을 수 없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사실은 우리들이 가정생활에서 잘 느끼고 있는 것입니다.

부부의 사랑도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어떠한 인연이 있기 때문에, 저 사람과 나는 부부의 인연이 있기 때문에 사랑한다고 하는 것은 사랑이 아닙니다. 아내면 아내, 남편이면 남편에게 자기의 생명을 투입하고, 자기 스스로를 넘을 수 있는 생명력이 서로서로간에 사랑을 자극시킬 수 있는 입장에서 주고 받는 사랑이라야 그 부부의 사랑은 영원히 지탱할 수 있는 것입니다.

한 나라를 사랑하는 것도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나라를 사랑한다는 말, 애국자라는 말 가운데는 반드시 생명이 관계를 맺고 있는 것입니다. 충신이면 충신도 역시 생명을 초월하고 나서야 결정됩니다. 충이니 효니, 혹은 사랑이니 하는 등의 귀하다고 하는 내연 가운데는 반드시 생명이 결부되어 있는 것입니다. 또 생명과 결부된 인연의 도수가 얼마만큼 되느냐에 다라 가치있는 것이냐 무가치한 것이냐, 혹은 영원한 것이냐 시한적인 것이냐 하는 것이 결정되는 것입니다.

이러한 관점에서 볼 때, 하나님이 인간을 사랑하는 것도 마찬가지입니다. 무한하신 하나님의 사랑이, 혹은 하나님의 무한하신 생명이 내 자체에 얼마나 미쳐져 있느냐에 따라 나 자체가 무한한 가치를 지녔느냐 안 지녔느냐 하는 것이 좌우된다는 것입니다. 이것을 우리는 알아야 합니다.

오늘 우리가 전진하는 데 있어서도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생명이 없는 사랑은 한정된 시간권내에 포위되고 맙니다. 우리에게는 시간권내에 포위되는 사랑은 필요치 않습니다. 즉, `어느때까지만 사랑한다’, 그리고 `나는 그의 아들로 태어났고 그는 나의 부모이기 때문에 부모가 살아 있을 때까지만 사랑한다’, 혹은 `내가 살 때까지 사랑한다’는 등의 한계선을 정해 놓고 하는 사랑은 사랑이 아닙니다. 그 한계선을 고의적으로 넘겠다는 마음을 가지고 사랑하는 것이 아니라 내 생명력에 의해 자연적으로 사랑해야 됩니다. 나의 의식을 넘어서 이미 생명의 인연이 연결된 자리에서 사랑을 해야 비로소 영원한 인연이 맺어지는 것입니다.

32-16
지금까지 종교인들이 해결하려고 했던 문제
하나님께서 세계를 사랑한다고 함은 어떤 특정한 개인을 중심삼아 가지고 보더라도 그의 일생 동안, 즉 70년이면 70년, 80년이면 80년 그가 사는 기간 내에서만 사랑하는 것이 아닙니다. 수많은 선조를 거치고 현재의 인류를 거쳐서 그 개인을 사랑하시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의 후손까지 영원히 사랑하시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이 사랑이 필요한 것입니다. 또, 그 사랑은 그 사랑만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그 첨단에는 반드시 생명의 인연이 연결되어 있기 때문에 하나님의 사랑이 필요하다는것입니다.

하나님의 사랑과 부딪치는 곳에는 반드시 하나님의 생명이 동반되는 것입니다. 생명이 동반하는 입장에 섬으로 말미암아 그 생명과 더불어 하나님도 좋아하고 자신도 좋아할 수 있는 하늘의 사랑이 연결된다는 사실을 우리들이 알아야 합니다.

친구지간에도 서로 좋아한다는 친구지애가 있다 하면 거기에 서로 생명을 나눌 수 있는 인연이 얼마만큼 내포되었느냐에 따라 우정의 대소를 가릴 수 있는 것입니다.

이렇게 볼 때, 전진하는데 있어서 표준삼고 있는 한계선은 생명과 사랑이 결부된 최고의 자리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한 자리가 아니고는 전진의 목적도 전진의 가치도 바랄 수 없는 것입니다.

오늘 이 시점에서 인류가 발전이나 전진해야 되겠다는 소망을 가지고 있다 할진대 그 소망의 한계선이 어디일 것인가? 나를 중심삼아 가지고 어떠한 민족과 하나되는 것보다도 나를 중심삼아 가지고 세계가 하나되는 자리입니다. 또 나를 중심삼고 세계가 하나되는 것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사랑과 하나님의 생명의 인연이 나와 더불어 세계에 연결되는 자리입니다. 우리 인류가 그런 자리에 설 때 비로소 전진이 한계점에 도달했다고 볼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런 기준에 도달하게 되면, 거기에서 내가 기뻐하는 것은 내 기쁨으로만 끝나는 것이 아닙니다. 또, 하나님의 기쁨으로 끝나는 것도 아닙니다. 하나님과 내가 기뻐하면 이 환경권내에 존재하는 모든 것도 반드시 기쁨에 사무치는 것입니다.

여러분 자신을 두고 볼 때도 내가 기쁘다 할 때 그 기쁨은 내 마음에만 느껴지는 것이 아니라 몸과 마음 전체에 걸쳐서 느껴지는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하나님과 우리 인간 사이에 사랑의 인연이 맺어지면 거기에서 하나님의 사랑과 하나님의 생명이 맞부딪쳐 가지고 무한한 가치의 사랑을 느끼는 것입니다. 그것은 하나님과 인간 자체만의 것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존재하는 전체의 생명력이 될 수 있고 사랑이 될 수 있다는 사실을 우리들은 알아야 합니다.

그러한 인연이 맺어지면 그 가운데는 모든 전체의 생명의 인연이 발동하게 되는 것입니다.그것이 주체와 대상의 상대적 관계에서 직선상으로 주고받는 인연이라고 하더라도, 거기에는 평면적이고 입체적인 내용이 개재되어 그 환경이 전부다 사랑권내와 생명권내로 부활된다는 것입니다.

이렇게 볼 때 그 권은 우주사적인 생명과 우주사적인 사랑이 넘쳐나는 무한한 가치를 체험할 수 있는 경지가 아니겠느냐는 것입니다. 그 이상의 가치의 자리는 없다 할 수 있는 최대의 자리인 것입니다. 최대의 소망의 한계점이요, 무한한 가치를 느낄 수 있는 자리입니다. 그런 자리가 우리 인간에게 있어서는 가장 귀한 자리인 것을 우리들은 알아야되겠습니다.

그러면 어떻게 해서 그런 자리를 찾아 나가느냐 하는 것이 수많은 종교 인들과 도의 길을 가는 사람들이 해결하고자 했던 문제였습니다. 그러한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그들이 지금까지 수고한 것이 아닙니까? 이러한 한계점을 앞에 놓고 여러분 자신이 오늘 어떠한 자리에 처하여 있는가를 다시 한 번 규명해야 되겠습니다.

여러분은 인류를 사랑하는 마음을 가진 적이 있습니까? 혹은 인류를 사랑하는 마음이 없다면 민족을 사랑하는 마음이 있습니까? 민족을 사랑하는 마음이 없다면 자기의 종족, 친척을 사랑하는 마음이 있습니까? 친척을 사랑하는 마음이 없다면 형제를 사랑하는 마음이 있습니까? 그렇다면 그 사랑 가운데에는 반드시 자기 자신의 생명이 기울어져 있고, 자기의 뼈살이 투입되어 있다는 것을 느낄 수 있어야 되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것과 인연이 끊어지게 될 때는 아픔을 느껴야 됩니다. 슬픔을 느껴야 됩니다. 슬픔이라는 것은 자기 자체에서 소모되는 감정에 비례하여 그 크고 작음이 결정되는 것입니다. 서로 사랑하는 사람을 갈라놓으면 생명을 져버리고라도 그 인연을 회복하려고 하는 원인이 어디에 있겠습니까?

그것은 생명을 연결시킨 이상의 자리에 있는 것이 사랑이기 때문입니다.

32-18
우리는 오늘 어떤 입장에 있는가
그러면 오늘 여러분들은 자신을 중심한 생활권내에서 생명의 인연을 넘어선 사랑의 마음을 갖고 사느냐, 또는 내일의 소망세계를 향하여, 내일의 하나님의 사랑세계를 향하여 움직여 나가고 있느냐, 즉 발전도상에 있느냐 정지된 입장에 있느냐하는 것이 문제입니다.

여러분은 습관적인 생활권내에서도 왕왕 이런 것을 체험할 줄 알고 있습니다. 그런데 아무 자극도 받지 않고, 이런 것이 있는지 없는지 모르는 생활을 하는 사람들이 많은 것을 우리는 알고 있습니다. 아침에 일어났으니 세수를 하고 아침밥을 먹고 회사에 나가는, 이런 습관적인 생활을 하는 사람은 무가치한 사람입니다.

그런 사람은 나라를 사랑하는 애국자가 될 수 없습니다. 그들의 생활은 자신도 사랑하지 못하면서 살고 있는 것임을 우리들은 알아야 되겠습니다. 하루의 생활을 하는 데에 있어서, 그리고 사회생활을 하는 데에 있어서 회사면 회사, 기관이면 기관내에서 대인관계, 혹은 사업관계에 자기의 사랑과 생명을 결집시킨 내용을 얼마만큼 투입하느냐에 따라 보람된 사회생활을 하는 사람이냐 보람없는 사회생활을 하는 사람이냐 하는 것이 좌우되는 것입니다.

이런 관점에서 현재 우리 개체 개체가 어떤 입장에 있느냐 하는 것이 문제입니다. 더욱이나 신앙생활을 하는 입장에서는 이것이 더 큰 문제가 될 수도 있습니다. 영원한 생명의 세계를 추구하는 것이 신앙생활입니다. 영원한 하나님의 사랑을 추구하는 것이 신앙입니다. 영원한 생명과 더불어 영원한 사랑과 일치되기 위해서 하나님의 기쁨과 나의 기쁨이 만나 둘의 기쁨이 아니라 하나의 기쁨으로 느낄 수 있는 결착점을 찾아 나가는 것이 신앙의 길입니다. 그러므로 신앙생활을 하는 우리 개체가 얼마만큼 전진적 사랑과 생명력을 지니고 사느냐 하는 것이 무엇보다도 중요한 문제가 아닐 수 없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오관을 통하여 느끼는 감각의 일체를 통합하여 이 생명, 또는 사랑과 어느 정도로 관계를 맺고 사느냐 하는 데에 따라 인간으로서 얼마만한 가치를 지니고 있느냐 하는 문제가 좌우되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들은 우리 자신들이 생명력과 가중된 사랑의 마음을 가지고 대인관계를 맺고 사회생활을 해 나왔느냐 하는 문제를 다시 생각하지 않을수 없는 것입니다. 만일에 그런 자리에서 있지 못한다 할진대 그것은 정지하는 것이 아니면 후퇴하는 것임을 알아야 합니다.

후퇴는 어느 누구도 환영하지 않습니다. 후퇴하는 자는 누구도 친구가 되어 주지 않고 합하려고 하지도 않는 것입니다. 전진하는 자리에서만이 합하고자 하고 친구가 되고자 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오늘 우리 자체는 정지하고 있느냐? 혹은 전진하고 있느냐? 그렇지 않으면 후퇴하고 있느냐? 그 무엇보다도 이것이 우리가 생각해야 할 문제입니다.

오늘 우리는 신앙생활을 하는 데 있어서도 뜻을 안 그날부터 지금까지의 생활이, 어떤 사람은 일년이 되었고, 어떤 사람은 십년이 되었고, 혹은 반평생을 뜻과 더불어 살아온 사람도 있을 텐데 그동안의 생활이 정지된 입장이었는가 아니면 전진하는 입장이었는가, 그렇지 않으면 후퇴하는 입장이었는가 하는 것이 문제가 됩니다. 여러분은 이중의 어디에 속하는가 하는 것을 반드시 명시하고 넘어가야 되겠습니다. 아무리 과거에 전진했다고 하더라도 오늘 정지해 있으면 거기에 하나님의 생명력이 있을수 없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의 인연이 있을 수 없는 것입니다. 과거에는 전진하면서 무한한 가치와 무한한 생명력과 무한한 사랑의 힘을 지니고 살았다고 해도 현재 정지된 자리에 있다면 하나님과 이별해 있는 것임을 알아야 합니다.

그러면 여기에 참석한 여러분은 어떠한 자리에 있습니까? 정지해 있습니까, 전진하고 있습니까? 그렇지 않으면 후퇴하고 있습니까? 과거에는 후퇴하거나 정지해 있었지만 오늘 이 시점에서는 전진하고 있다, 아니면 과거에는 전진하였지만 오늘 이 시간은 정지하고 있거나 후퇴하고 있다고 운명의 저울이 여러분을 달고 있다는 사실을 알아야 됩니다.

정지는 후퇴와 가까운 것이요, 전진이라는 것은 목적지점에 가까운 것입니다. 정지한 자리는 후퇴에 가깝기 때문에 사망선에 가까운 것이요, 정지된 입장을 극복하고 전진하게 될 때는 생명선에 가까운 것입니다. 이 두 경계선에서 생명을 이끌고 자기의 생애노정을 걸어가고 있는 것이 우리의 인생사인 것입니다.

32-20
영원히 전진하는 하나님의 사랑
그러면 하나님의 사랑은 어떠하냐? 무한한 하나님의 사랑이 역사시대에 있어서 정지해 있느냐? 전진하고 있느냐? 아니면 후퇴하고 있느냐? 하나님의 사랑은 무한한 사랑이요, 하나님의 생명은 무한한 생명이라 할진대 그러한 지점에 도달할 때까지 그 생명과 그 사랑은 정지할래야 정지할 수 없는 것입니다. 그 사랑과 생명이 정지할 수 없는, 무한히 뻗어 나갈 수 있는, 전진할 수 있는 힘을 갖고 있다 할진대 하나님의 섭리노정에는 발전만이 있을 수 밖에 없지만, 그 사랑과 생명력이 정지된다면 하나님의 구원섭리도 한계선 이하로 떨어질 수 밖에 없는 것입니다.

그렇지만 하나님의 섭리는 지금까지 발전해 나왔다는 역사적 사실을 우리들은 알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사랑의 세계에 정지라는 것은 있을 수 없다는 결론을 내릴 수 있습니다. 따라서 하나님의 생명력이 정지되어 있다는 말은 부정되어야 될 것입니다. 인간이 타락한 그날부터 지금까지 역사를 이끌고 나오신 하나님의 섭리도상에는 하나님의 생명력이 정지된 때가 없었던 것이요, 하나님의 생명력이 정지되지 않았으니 하나님의 사랑의 정지된 때가 없었던 것입니다.

이러한 역사의 소망을 바라보고 나아가는 천륜 앞에, 지금까지 끊길 줄 모르고 나온 하나님의 사랑과 하나님의 생명 앞에 오늘 우리 개체가 정지해 있다면, 하나님 앞에 이 이상의 반역이 없다는 사실을 우리들은 알아야 되겠습니다. 수천년 동안 쉬지 아니하시고 생명력과 사랑으로 오늘 우리 자체를 찾아 세워 가지고 목적세계의 한계점까지 끌고 나가기 위한 하나님의 섭리의 손길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나 자신이 그 손길을 망각해 버리고, 그것을 부정하고 정지한다면 나는 하나님 앞에 용납받을 수 없는 자체가 되는 것입니다. 불효라면 그 이상의 불효가 없는 것이요, 불충이라면 그 이상의 불충이 없는 것이요, 악이라면 그 이상의 악이 없다는 것을 우리들은 알아야 되겠습니다. 하나님의 생명력과 사랑은 정지하지 않는데 어찌하여 나 자신은 정지하기 일쑤인가 하는 생각이 드는 사람이 있다면 그는 말할 수 없는 회개를 하지 않으면 안 됩니다.

신앙생활을 하는 데 있어서 여러분의 마음 가운데 폭발적이고도 자극적인 힘을 가지고 뜻의 세계를 향하여 끊임없이 가고자 하는 여력이 있습니다. 그런 마음이 있다면 그것은 하나님이 여러분과 같이하신다는 증거인 것입니다. 반면에 그런 힘이 없다면 하나님이 여러분과 분리되어 있다는 증거입니다.

여러분에게 인류를 사랑하는 마음이 솟구치고 인류와 더불어 자기의 생명을 나누고 싶어하는 마음이 끊이지 않는다는 것은 자신이 하늘에 속해 있음을 증거하는 것이로되, 자체를 위주한 사랑과 자체의 가치를 자랑하는 생명력으로서 끝난다면 자신에게서 이미 하나님은 이별하고 있다는 사실을 증거하는 것임을 알아야 합니다. 그런 사람의 갈 길은 하늘이 아닙니다. 그런 사람은 자기를 위주한 한계점에 도달할 것입니다. 나를 중심삼은 한계의 세계는 하나님의 뜻의 세계와는 다른 것입니다.

여러분은 자신이 천국에 갈 수 있는 사람인가, 혹은 지옥에 가야 할 사람인가, 혹은 중간 영계에 머물러야 할 사람인가 하는 것을 비판해야 될 것입니다. 이것은 정지와 전진이라는 관점에서 보면 확실히 알 수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에게 생명력과 더불어 사랑하는 마음이 충만하여 자기일신을 망각하고 민족과 인류를 사랑한다면 천국을 향하여 갈 수 있는 하늘 백성임에 틀림없고, 세계를 향하여 갈 수 있는 하늘 백성임에 틀림없는 것입니다.

그러나 민족이니 뜻이니 하는 것을 다 망각해 버리고 나를 중심으로 하는, 나를 한계점으로 삼는 사람은 정지상태에 있게 됩니다. 그러므로 그에게서 천국은 떠나갈 것입니다. 자기를 위주한 한계권내의 천국은 필요 없는 것입니다. 자기권내에 들어오는 천국은 필요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사랑권내에, 하나님의 생명권내에 들어가 살 수 있는 천국이 되어야 합니다. 그 천국은 어디까지나 세계를 넘은 천국인 것입니다. 자기를 위주한 천국을 모색하는 사람은 자기를 중심삼은 권내의 천국을 주장합니다. 그런 주장대로라면 그 권내에 하나님이 들어와 살아야 된다는 말입니다. 그러니 그러한 천국은 있을 수 없습니다.

32-22
신앙생활은 회개 없이는 할 수 없다
우리는 보다 큰 세계가 그런 사랑권내에 임재할 수 있는 천국을 바라고 있는 것입니다. 자기의 답답한 문제를 스스로 해결하지 못하여 고민하는 자기권내에서, 한계점에 정지된 입장에 있는 사람을 중심삼은 천국은 있을 수 없는 것입니다. 그 이하의 자리에 속한 사람은 지옥에 속한 존재인 것을 부정할 도리가 없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정지라는 말은 지극히 두려운 말임을 여러분이 알아야 될 것입니다.

여러분이 교회생활을 시작할 때, 즉 뜻을 따라 이 길을 출발할 때에는 민족복귀라는 거룩한 표제를 갖고 나왔습니다. 그 민족복귀가 한계점에 도달하면 그 한계선을 넘어 세계복귀라는 새로운 깃발을 들고 나설 수 있는 그날을 소망하면서, 갖은 역경을 돌파하고 갖은 환경을 극복해 나가는 사람, 그런 역량을 가진 사람은 천국으로 직행하는 사람입니다. 그렇지 못하고 정지하는 입장에 있는 사람이나 후퇴하는 사람, 즉 민족적 천국권내에서 전진하던 발걸음을 돌이켜 개체의 소원 세계를 향하여 나가는 입장에 있는 사람은 지옥을 향하여 가는 사람임에 틀림없습니다.

오늘날 우리의 생활권내에서 어떤 책임자가 `뜻을 위하여 가자’고 명령을 하거나 지시를 할 때 `갑시다!’ 할 수 있는 힘이 여러분 자체내에 없다고 하면 그것은 여러분이 이미 정지해 있음을 증명하는 것이 됩니다. `목적을 향하여 총진군하자’는 명령이 내렸는데도 불구하고 그 명령 앞에 무감동하고 자기의 생명의 감동이 거기에 연결되지 않는다면 그는 이미 정지상태에 있는 것입니다.

이와 같이 정지상태에 있는 사람들을 어떻게 할 것이냐 하는 것에 대해 생각해 봅시다. 아무리 권고하고 아무리 자극을 주어도 그것은 나와 상관이 없다고 하는 사람은 재기할래야 재기할 수 없는 입장에 떨어진 사람입니다. 그런 사람들을 다시 일으키기 위해서는 막대한 소모전을 펴야 될 것입니다. 열만한 힘을 주었는데도 무감동한 사람에게는 백 이상의 힘을 가중시키지 않고서는 움직여 낼 수 없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그런 사람들 스스로 움직여 나가게 하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하느냐? 하나님을 중심삼아 가지고 손해를 입히지 않고는 다시 일어나게 할 수 없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그런 사람은 하나님 앞에 손해를 입혔기 때문에 그 손해의 대가를 치러야 한다는 것을 스스로 느껴야 되는 것입니다. 그런 자리는 무한히 슬픔을 느껴야 하는 자리일 것입니다. 그런데 그런 자리에 있으면서도 슬퍼하는 마음마저 잊어버린 사람은 영원히 소망이 없는 사람일 것입니다.

여러분들의 가슴속 깊은 곳에서 이러한 기준을 중심삼아 가지고 뜻과 더불어, 혹은 세계와 더불어, 혹은 하늘과 더불어 가고자 하는 마음이 용솟음치느냐, 그렇지 못하냐 하는 것이 문제입니다. 친구와의 인연 때문에 할 수 없이 교회를 나가고, 친구의 권고를 이기지 못해 가지고 뜻길을 간다고 하는 사람, 횡적인 제삼자에 의해 움직이는 사람은 자신이 생명력을 지니고 있지 못하다는 것을 증거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지금 여러분은 전진하고 있습니까? 정지해 있습니까? 후퇴하고 있습니까? 이런 문제가 여러분이 이제부터 해결해야 할 문제입니다. 만일 지금 전진하고 있는 사람이 있으면 전진의 박차를 늦추지 말라는 것입니다. 개인을 대해 사랑하는 마음이 불타오르면 그것을 개인을 향한 마음으로만 끝내서는 안 됩니다. 그 마음을 어떻게 해서 민족과 세계 인류앞에 연결시키느냐 하는 문제를 생각해 보아야 됩니다. 만약에 개인을 사랑하는 마음이 세계를 사랑하는 마음으로 연결되지 않는다면 어떻게 해서든지 연결시켜야 합니다. 나아가 그 마음을 어떻게 해서 하나님의 사랑과 하나님의 생명에 접촉시키느냐 하는 것이 문제입니다.

타락한 우리가 하나님의 생명권과 사랑권내로 들어가기 위해서는 반드시 회개가 필요합니다. 선조로부터 지금까지 백이라는 양의 죄를 지었으면 그이상의 노력을 하고 회개를 해야 됩니다. 그렇게 때문에 신앙생활에서 회개를 빼놓을 수 없다는 것입니다. 우리들은 천대 만대의 선조들을 통해서 태어났습니다. 그 선조들이 선한 선조들이면 나는 자동적으로 하나님의 생명권내에 접할 수 있는 가까운 거리에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악한 선조들이라면 하나님의 생명권과 먼 거리에 있는 것입니다. 먼 거리에 있는 사람이 하나님의 생명권과 인연을 맺으려면 선조들이 악하였던 모든 양을 넘어설 수 있는 회개의 기간이 절대 필요하다는 것입니다. 이것을 채우지 않고는 자기 이상의 생명력의 세계에 접촉할 수 없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신앙길에는 반드시 회개의 눈물이 필요하다는 것을 여러분이 알아야 하겠습니다.

32-24
하나님께서 인간에게 주신 최고의 사랑의 선물
스스로 회개하며 전진할 수 없다면 반드시 신앙의 동지가 있어야 합니다. 나를 붙들어 줄 수 있는 사람이 있어야 합니다. `당신이 가야 할 곳이 세계를 넘은 천국이라면 그 세계에 가기 위해서는 나를 사랑해야 되는 것이 아니냐’ 하고 요구해야 되는 것입니다. 이것은 응당한 요구입니다.

자기가 사랑하는 친구 가운데 선한 친구가 있거든 그를 꼭 붙들고 가야 합니다. 자기의 생명 이상 그를 존중하면서, 그의 말에 절대 복종하는 마음을 가지고, 그가 지시를 하면 그것을 따르기 위해서 갖은 수고를 해 나가게 되면 그 사람으로 말미암아 자신의 현재의 입장을 모면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 사람이 백만한 자리에 있으면 자기도 그 백만한 자리에 갈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천만한 자리에 있는 사람이 있으면 누구든지 그 사람과 하나되고 싶어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들은 보다 좋은 친구, 보다 좋은 스승을 요구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인간이 동반자를 필요로 한다는 것을 아시기 때문에 누구보다 귀한 메시아를 보내지 않을 수 없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인류를 사랑하시기 때문에 인류와 접할 수 있는 하나의 대표적인 존재, 친구와 같고 스승과 같고 더 나아가서는 아버지와 같은 입장으로 가장 귀한 하나의 대표적인 존재를 보내야 된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대표적인 존재가 누구냐 하면 메시아입니다.

그 메시아는 우리 인간에게 둘도 없는 친구요, 둘도 없는 스승이요, 둘도 없는 아버지인 것을 알아야 합니다. 단 한 분밖에 없는 최대의 존재로서 이 땅 위에 보내진 사명자가 메시아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 메시아를 붙들고 눈물짓고, 그 메시아를 위하여 생명을 투입하고, 그분을 자기의 생명처럼 사랑하면 세계사적이고 천주사적인 하나님의 생명권과 사랑권내에 돌입할 수 있는 것입니다. 이것이 하나님께서 인간에게 주신 최고의 사랑의 선물인 것을 알아야 되겠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지금까지 기독교를 중심삼고 예수님을 믿는 수많은 성도들은 예수님을 위하여 생명을 투입했던 것입니다. 생명만 투입한 것이 아니라 자기의 모든 사랑까지 투입했습니다. 그렇게 죽어간 사람들은 죽음과 더불어 죽어지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의 사랑과 더불어 예수님의 생명과 더불어 부활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하나님께서 사랑하시는 기독교를 통한 부활의 은사라는 것을 알아야 되겠습니다.

여러분 자신들은 메시아를 위하여 자기의 생명을 투입할 수 있어야 합니다. 그런 사람은 지혜로운 사람입니다. 자기의 생명뿐만 아니라 자기의 사랑까지 전부 투입할 수 있는 사람이 있다면 그는 지극히 지혜로운 사람입니다.

그건 왜? 인류는 지금까지 세계를 사랑할 수 있는 하나의 주체적인 존재, 혹은 하늘땅을 사랑할 수 있는 하나의 주체적인 존재가 되기 위해 전진, 전진의 행로를 추구해 왔습니다. 그런 존재가 되는 것이 인간의 전진의 행로를 추구해 온 목적이었습니다. 그 목적을 일시에 달성할 수 있고 혹은 일대에 달성할 수 있는 단 하나의 길은 그분을 맞아 자기의 생명과 자기의 사랑을 다 투입했다는 인연을 남기는 것입니다. 그러면 그것으로써 끝나지 않습니다. 다 주었기 때문에 다 받을 수 있는 자리에 서게 됩니다. 그럼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의 영광의 자리에, 그리스도의 생명과 사랑권 세계에 부끄럽지 않은 모습으로 일시에 도달할 수 있는 특권이 부여되는 것입니다.

32-26
후퇴하는 입장에서 재차 전진하려면
그러면 오늘 우리 타락한 인간이 가야 할 길은 어떤 길이냐? 회개의 길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회개의 길을 찾아 나서야 된다는 것입니다. 회개하지 않는 자가 나라를 사랑한다는 말은 있을 수 없고, 회개하지 않는 자가 세계를 사랑한다는 말도 있을 수 없습니다.

그러면 회개할 수 있는 인연은 어디서부터 찾느냐? 그것은 사람을 통해서 찾습니다. 사람을 통해서 찾으려니 메시아가 필요한 것입니다. 그분은 친구 중의 친구요, 스승 중의 스승이요, 어버이 중의 어버이로서 나타나시는 분입니다. 그분을 몽땅 사랑하는 것은 그분이 사랑할 세계와 그분이 사랑해야 할 하늘땅을 사랑할 수 있는 권내에 돌입하는 것이 됩니다. 그분과 더불어 인연을 맺지 않고는 사랑할래야 사랑할 수 없는 것이 우리 타락한 후손들임을 명심해야 하겠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이러한 길을 모색하기 위해서 하나님은 수많은 종교 지도자를 이 땅에 보내신 것입니다. 그 종교 지도자 가운데서 아버지의 이름과 더불어, 최고의 스승의 이름으로, 최고의 친구의 이름으로 오시는 분이 메시아입니다. 그 메시아를 만나는 것은 타락한 인간에게 최대의 행복이요, 그분을 만나는 자리는 최고의 영광의 자리라는 것을 알아야만 되겠습니다.

그래서 인류 역사는 그곳을 향하여 찾아나왔습니다. 세계를 찾기 전에 그분을 모셔야 되는 것입니다. 가정이 그분을 모시고 생활하면 그 가정은 천국권내가 될 수 있는 것입니다. 나라를 중심삼아 가지고 그분을 모시고 충의 도리를 하게 되면 그 충의 인연을 통해서 나라를 찾을 수 있는 것입니다. 그분을 중심삼고 세계와 더불어 하나님 앞에 효의 도리와 충의 도리를 하게 될 때에 세계는 찾아진다는 사실을 우리들은 알아야하겠습니다.

그런 분이 있다면 그분을 얼마나 똑똑히 아느냐, 또 그분이 명령을 하면 그 명령을 내가 얼마만큼 받아들이고 따를 것이냐 하는 것이 문제입니다. 그분이 백만한 가치의 명령을 하면 그것은 백이라는 가치의 자리에서 명령하는 것이 아닙니다. 천만한 가치를 지니고 명령한다는 것을 알아야 됩니다. 그리고 그 명령에는 사랑의 마음과 생명력이 들어 있습니다. 그런데 그 명령에 따라 움직이지 못하고 그 명령과 더불어 전진하지 못하면 말할 수 없는 불행의 요건이 앞길을 막는다는 사실을 알아야 되겠습니다.

어떤 명령이 내려졌는데 그것을 실천하지 못하면 그 실천하지 못한 것이 그와 관계를 맺고 그와 가야 할 모든 길을 막아 버린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그분이 백만한 가치의 명령을 했더라도 천만한 가치를 지니고 명령을 했기 때문에 그것을 불신하고 불순종한다면 크나큰 손해를 입게 되는 것입니다. 이 손해를 메우기 위해서는 그 명령을 지키지 못한 것에 대해 무한히 회개해야 합니다. 그러지 않으면 그 이상의 길을 갈 수 없습니다. 이것은 정당한 이치입니다.

뜻길에 들어선 여러분들이 지금 어떻게 해서 기진맥진하게 되었으며, 정지 이하의 후퇴의 일로에 서게 되었느냐? 그 원인이 어디 있느냐? 선생님이 백만한 가치의 지시를 할 때에는 백만큼의 가치를 가지고 지시한 것이 아니라 더 고차적인 천만한 가치를 지니고 지시했는데도 불구하고 그것을 배반하게 되면 그 이상의 은사는 막혀 버리는 것입니다. 그리고 무한한 하나님의 생명력은 떠나지 않을 수 없다는 것을 여러분은 알아야 합니다.

이러한 입장에 선 자신인 것을 깨달은 우리는 어떻게 해야 되느냐? 잃어버린 이상의 자리로 가야 합니다. 그런데 이 자리를 어떻게 나가느냐 하는 것이 문제입니다. 하나님께서 백만한 자리에서 나에게 명령했는데 내가 실천하지 못하였을 때는 어떻게 해야 될 것이냐? 하나님께서 백 이상의 자리에서 명령할 수 있는 곳을 찾아가야 됩니다. 그래 가지고 과거를 회개하고 백 이상의 자리를 소망으로 삼아 거기에 자기의 생명과 자기에게 있는 온갖 사랑을 퍼부어야 합니다. 그래야 영원한 하나님의 생명과 사랑의 세계로 재차 전진할 수 있는 길이 생기는 것입니다.

여러분이 뜻의 길에 들어섰던 과거를 한번 생각해 보십시오. 맨 처음 뜻을 알았을 때에는 죽을지 살지 모르고 따라 나왔습니다. 그때는 명령이 내리기 전에 갔고, 생명을 버려야 할 곳에 향하여 `가라’ 하면 생명을 투입할 수 있는 마음을 가지고 갔습니다. 그때에는 자기의 생명 이상으로 뜻을 사랑하고 흠모하였기 때문에 하나님이 같이하신 것입니다. 생명 이상 뜻을 중요시하지 못하는 입장에 서면 하나님은 떠나십니다. 왜? 하나님이 뜻에 영원한 생명을 투입하고 영원한 사랑을 투입하셨기 때문입니다. 영원이라는 것은 한계선이 있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이 뜻에 한계선을 넘은 사랑과 생명을 투입하신 것입니다. 사랑과 생명의 내용을 가진 뜻의 길을 연결시켜야 하는 하나님은 인간이 그 뜻과 일치되지 못한 자리에 서면 찾아오실래야 찾아오실 수 없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예수님은 `쉬지 말고 기도하라’고 하셨던 것입니다. 기도하더라도 웃으면서 하라는 것이 아닙니다. 민족과 세계를 붙들고 눈물을 흘리며 하라는 것입니다. 백 정도의 자리에서 기도하여 하나님이 받아 주셨다 하더라도 그 다음에는 또 그 자리에 들어가서 기도해 가지고는 받아 주실 수 없는 것입니다. 백 정도의 자리에서 정지하실 수 없는 하나님이시기에, 전진해야 할 하나님이기 때문에 백 이상의 자리에서 정성들여야 합니다. 그러면 하나님으로부터 더 높은 생명력과 사랑의 힘이 우리에게 자연히 온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여러분들 중에 은혜를 잃어버리고 하나님과 먼 거리에 있는 감이 드는 사람이 있다면 옛날에 충성하던 그 시대를 다시 한번 회상하고, 정성을 기울이던 그 자리를 다시 한번 회상하고, 그 싸움터를 다시 찾아가 그 이상의 정성과 그 이상의 생명력을 투입하고 사랑을 투입해야 합니다. 그런 자리를 찾아가기 전에는 전진적인 생명력, 발전적인 은사권을 차지할 수 없는 것입니다.

32-29
통일교회는 전진하고 있는가
그러면 오늘 우리 통일교회가 전진하고 있느냐, 정지해 있느냐, 후퇴하고 있느냐? 우리가 통일교회 자체를 분석해 봅시다. 통일교회가 전진하고 있다면 그 전진할 수 있는 내용을 누가 제시하고 있느냐 하는 것이 문제가 될 것입니다. 여러분들이 이것을 제시하면 고맙거니와 그렇지 못하면 이것을 책임진 자가 제시해야 됩니다.

민족복귀시대에는 가정복귀시대에 들이던 정성 이상의 정성을 들일 수 있는 사람이 통일교인 가운데 없다고 할진대 책임을 짊어진 책임자가 정성을 들여야 합니다. 그러지 않으면 통일교회는 민족적인 운명을 남겨 놓고 그 한계선을 넘어갈 수 없는 것입니다. 만일에 한 사람이라도 그 한계선을 넘어가 가지고 하나님의 무한하신 생명력을 투입하듯이 자기의 생명을 투입하고 온갖 사랑의 마음을 투입하는 한, 단 한 사람이라도 투입하는 한 통일교회는 그로 말미암아 발전할 것입니다. 그러나 그런 사람이 없을 때는 정지해 있거나 후퇴할 것입니다.

그런데, 오늘 여러분 자체들은 정지하거나 후퇴하는 입장을 모면하지 못하고 있는데도 불구하고 통일교회는 발전하고 있습니다. 이렇게 통일교회가 발전하는 데에는 반드시 그 배후에 발전하게 하는 동기가 있는 것입니다. 즉, 통일교회를 국가와 민족을 넘어 세계로까지 끌고 가기 위해 자기의 생명력을 투입하는 사람이 있을 것입니다. 그 사람이 누구인지 여러분은 알아야 됩니다. 생명력뿐만이 아니라 온갖 사랑을 투입하고 희생하는 사람이 있어야 합니다. 그런 사람이 없어 가지고는 세계로 발전할 수 있는 통일교회가 될 수 없습니다. 이것은 원리적인 입장에서 볼 때 당연한 이치입니다.

뜻길을 따라나온 여러분은 자기의 생명력과 사랑의 힘을 민족을 넘고 세계를 넘어 그 이상의 자리까지 투입해야 합니다. 여러분이 투입하는 생명력과 사랑의 힘이 교회발전의 행로를 개척하는 요인이 되는 것입니다. 그러면 여러분은 여기에 협조적인 입장입니까, 아니면 반대적인 입장입니까? 반대적인 입장에 있다고 느끼는 사람은 천년 만년의 사연을 품고 눈물로 회개해야 합니다. 땅 위의 슬픈 사연을 품고 부딪쳐 가는 통일교회의 운명을 안고 몸부림치는 사람들이 있다면, 그들을 위해서 온갖 정성을 들이고 감사와 치하를 드려도 부족할 텐데도 불구하고, 자기를 중심삼아 비판하고 자기와 관계가 되어 있지 않다고 무관하게 대해 버린다면 거기에서 마지막이라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여러분은 통일교회가 발전하는 사실을 바라보고 무한히 고마움을 느낌과 동시에 자신의 부족함을 느껴 가지고 `오늘은 이렇지만 나에게도 힘을 주소서’ 해야 합니다. 가을절기면 가을절기로 끝내고, 겨울절기면 겨울절기로 끝낼 것이 아니라 나의 깊은 속에 깃들어 있는, 내일의 봄날을 맞이하여 활짝 피어날 수 있는 생명력과 사랑의 힘을 찾지 못하면 여러분이 가는 길은 끝장이라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자신이 그런 입장에 있거든 세상에 가장 귀한 것을 한꺼번에 잃어버린 불쌍한 자신인 것을 다시 한번 느껴야 되겠습니다. 그런 자신인 것을 깨닫게 될 때 자식이 죽어 슬퍼하는 것 이상, 혹은 남편이나 아내가 죽어 슬퍼하는 것 이상, 자기 가정이 파탄되어 슬퍼하는 것 이상, 또 국가가 세계가 파탄되어 슬퍼하는 것 이상 슬픔을 느끼고, 최대의것을 잃어버렸다고 말할 수 없는 슬픔을 안고 ‘하늘이여 이 불쌍한 사람들 동정하여 주시옵소서’하는 자리, 그 동정을 구하는 모습이 누구보다도 처량하고 비참한 자리에 가야만 합니다. 그래야만 자기가 대하던 기준에서 떠났던 하나님이 다시 찾아올 수 있는 것입니다.

32-30
차든지 덥든지 하라
그러면 여러분은 얼마나 슬픔을 느끼고 있습니까? 여러분은 하나님의 동정을 구할 수 있는 자리에 서 있습니까? 말로 다 표현할 수 없는 자극을 느끼고 있고, 내일에 대한 소망을 가지고 자기 자체의 생활을 영위하고 있으며, 하늘과 보조를 맞출 수 있는 자리에 서 있느냐는 것입니다. 그런 자리에 서 있어야만 생명의 인연권내에 있다는 말을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이것도 저것도 아닌 중간상태에 있어서는 안됩니다. 중간상태는 폭파시켜야 합니다. 이것도 아니요, 저것도 아닌 자리는 정지상태에 있는 자리입니다. 그런 자리에 있으면 스스로 망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성경 계시록 3장에 `미지근하지 말고 차든지 덥든지 하라’고 한 것입니다. 뜨거워 가지고 하나님의 사랑과 인연을 맺든지, 아주 차가와 가지고 말할 수 없이 냉정한 자리에서 자탄하며 눈물을 흘리고 피를 쏟든지 하라는 것입니다. 극과 극의 자리를 거치지 않고는 하나님의 동정을 받을 수 없습니다. 중간상태는 하늘이 원하지 않습니다.

자기가 정지권내에 서 있다는 것을 알았으면 회개의 자리를 찾아가야 합니다. 기도의 자리를 찾아가야 합니다. 그리고 곰곰이 생각해야 합니다. 기도의 자리를 자리를 찾아가야 합니다. 그리고 곰곰히 생각해야 합니다. 나는 누구를 중심삼고 출발하였으며 누구를 중심삼고 결과되어야 하느냐? 인간인 나를 중심삼고 출발하여 나를 중심삼고 결과를 맺으면 이것은 지옥입니다. 왜? 타락이 나를 중심삼은 것이기 때문입니다. 인간은 나를 중심삼고 타락했고, 나를 중심삼고 죄악의 역사를 엮어 왔습니다. 그러므로 이것을 개혁하고 혁명하려는 것이 복귀섭리입니다. 하나님의 구원섭리는 이처럼 나를 중심삼은 것을 타파해 버리고자 하는 것입니다. 나로부터 출발되고 나에게서 종국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으로부터 출발하여 하나님으로 종국되어야 합니다.

32-31
하늘을 중심삼고 출발하여 하나님을 중심삼고 결실해야
오늘날 통일교회 신도들이 생각해야 할 것은, 하나님을 중심삼고 출발해서 나를 중심삼고 결과를 맺어서는 안 됩니다. 이것은 나로부터 출발하여 나에게서 결과를 맺는 것보다 더 나쁘다는 것입니다.하나님으로부터 출발해서 나에게 끝나는 것이 나로부터 출발해서 나에게서 끝장을 보는 것보다 더 나쁘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가롯 유다에게 `차라리 나지 아니하였더라면 좋을 뻔하였다’고 한 것은 그런 이유에서입니다. 차라리 몰랐으면 더 좋았을 것이 아니냐는 것입니다. 출발은 하나님으로부터 하였다가 자기를 중심삼고 끝을 보면 자기 일신뿐만이 아니라 자기의 일족까지 망하게 합니다.

하나님께서 나를 찾아오시는 것은 나 개인만을 위해 찾아오시는 것이 아닙니다. 그 민족과 그 나라를 위해 찾아오시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 나라와 그 민족을 찾아오신 하나님을 자기를 중심삼고 찾아오신 하나님으로 대하는 것은 그 나라를 팔아먹는 것이요, 그 민족을 팔아먹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어떠한 입장에서 나를 찾아오셨느냐? 나에게 세계적인 책임을 지워 주기 위해서 찾아오셨느냐? 그렇다면 나는 세계적인 출발을 해야 하는 것인데, 내가 가다가 세계를 부정하고 나를 중심삼은 결실을 맺는다 할진대, 세계적인 심판을 모면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으로부터 출발하였다면 하나님을 중심삼고 끝을 맺어야 하는 것입니다. 문제는 거기에 있습니다.

타락이 무엇이냐? 우리 인간이 하나님으로부터 출발하지 못한 것입니다. 또 하나님으로 말미암아 끝을 맺지 못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의 소원은 하나님으로부터 시작하여 하늘을 중심삼고 끝을 맺는 것입니다.

그런데 오늘날 땅 위에 태어난 우리를 보면 출발이 하나님으로부터 되어진 것이 아닙니다. 우리는 땅에서부터, 나에게서부터 출발되어진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과거를 많이 지닌 사람은 그만큼 많은 회개를 해야 되는것입니다.

어떤 사람은 신앙생활은 나이가 많이 들어서 하겠다, 죽을 때가 다 되어 가지고 믿고 천당 가겠다고 합니다. 그러나 천만의 말씀입니다. 그래가지고는 천당 갈 수 없어요. 언제 하나님을 중심삼고 출발을 하겠느냐 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죽을 때가 다 되어서 출발했다면 그 전생애의 대부분은 하나님을 배반하는 자리에 있었다는 것이 됩니다. 그렇기 때문에 거기에 비례하여 그 이상의 회개를 해야 합니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나이 들어서 믿고 천당 가겠다고 말하는 사람은 어리석은 사람입니다.

32-32
알고 범한 죄는 용서받기 힘들다
여기서 우리는 무엇을 어떻게 생각해야 할 것이냐? 하나님을 중심삼고 재출발해야 합니다. 나에게서 출발한 여기에 하나님이 연결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것은 내가 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연결시켜 주어야 합니다. 하나님이 연결시키는 거예요 그런데 그렇게 해서 재출발했는데도 불구하고 하나님을 중심삼은 결과를 맺지 못하면 하나님이 연결시켜 주신데 대한 책임은 남아지게 되는 것입니다. 그 책임은 여러분을 영원히 추궁하는 것입니다. 이것을 알아야 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여러분은 나로부터 출발해서 나를 중심삼고 다시 출발해서 나에게서 맺히면 뜻만 손해를 보는 것입니다. 그것은 도리어 안 믿었으면 좋을 뻔한 것이요, 몰랐으면 좋을 뻔한 것입니다.

영계에 가 보면 그렇습니다. 잘못되면 신앙한 사람들이 양심의 가책을 더 받습니다. 그때는 회개할 길이 없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냥 그대로 세상의 습관대로 산 사람은 양심의 가책을 안 받기 때문에 용서받을 수 있는 거리는 가깝다는 것입니다. 그렇지만 신앙생활을 하던 사람들이 잘못되게 되면 양심의 가책을 받습니다. 그것도 뼛골에 사무치도록 받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알고 범한 죄는 용서받을 수 없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내용이 있다는 것을 여러분이 알아야 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신앙의 길은 가면 갈수록 점점 더 가중된 짐을 느끼는 것입니다. 가면 갈수록 더 외롭고, 가면 갈수록 더 많은 책임감을 느끼게 됩니다. 가면 갈수록 더 눈물을 흘리고, 가면 갈수록 더 회개해야 하는 것이 신앙길입니다. 십년 전과 십년 후를 비교할 때 십년 전보다 십년 후가 뜻에 대해서 해이하면 반드시 세상으로 돌아갑니다. 십년 전보다 뜻을 대해 더 간절한 마음으로 정성을 들이면 하늘로 가는 것입니다. 이것은 결정적입니다.

그러면 여러분은 어떠한 권내에 있느냐? 여러분은 정지와 전진의 두 문제를 다시 한번 생각해 보아야 합니다. 어떠한 사람은 지방에 나갔다가 후퇴한 사람이 있습니다. 그런 사람 앞에는 그로 인해 철문 같은 것으로 막혀 버리는 것입니다. `나는 어느 때 어느 지방에 갔다가 후퇴했다’는 생각은 잊어버릴 수 없습니다. 절대로 잊어버릴 수 없는 것입니다. 그러한 내가 그이상의 자리에 나가려면 그 이상의 십자가를 져야 합니다.

대한민국내에서 활동하다 잘못하여 양심의 가책을 받는 사람은 대한민국내에서는 그 양심의 가책을 벗어날 도리가 없습니다. 그 조건을 중심삼고 외국에 선교라도 갔다 와야 풀리는 것입니다.

신앙길에 들어선 사람들은 자기를 중심삼고 화내는 것이 제일 무섭습니다. 그러니 화내지 마십시오. 화내지 말아요. 하나님을 믿고 나가는 데 있어서 자기의 욕심을 중심삼고 화를 냈다가는 몽땅 걸려 버립니다. 여러분은 생애노정에서 이러한 문제 등으로 엎치락뒤치락하면서 나가고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자신이 정지하고 있는가, 전진하고 있는가, 아니면 후퇴하고 있는가 하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이것을 확실히 알고 여러분들이 다시 한 번 노력해야 되겠습니다.

그러면 여러분은 옛날에 뜻을 중심삼고 안타까와하며 전진했던 그 이상의 마음을 어떻게 연결시킬 것이냐? 그것은 별거 아닙니다. 반대의 자리에 찾아가면 됩니다. 여러분들이 지금까지 생활했던 그 반대의 길로 가라는 것입니다. 자기를 중심삼고 십년동안 나왔으면 자기를 부정하는 놀음, 자기를 제물로 삼는 놀음을 십년 이상 해야 합니다. 그러지 않고는 그 자리를 넘어설 수 없는 것입니다.

32-34
표준을 달리 세워 재출발하라
오늘날 때가 가까운 이 시점에서 여러분들이 새로이 출발해야 되겠습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보내신 메시아의 사명을 하는 사람과 하나되어야 합니다. 그의 고충을 나의 고충 이상으로 느끼는 자리, 그의 슬픔을 나의 슬픔 이상으로 느끼는 자리에 서야 합니다. 그리고 나의 참된 생명과 참된 사랑을 그와 더불어 나누어야 합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누구보다도 나를 더 사랑하라’고 한 것입니다. 누구보다도 그를 더 사랑하는 자리, 누구보다도 그를 위해 모든 것을 투입하는 자리에 서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것은 자체는 잃어버리는 것이지만 그것이 그에게 심어져 싹이 나고 열매를 맺을 때에는 천하에 하나밖에 없는 귀한 열매가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누구보다도 나를 더 사랑하라’고 한 것입니다.

이런 관점에서 여러분은 자신을 냉정히 비판해야 합니다. 전진이냐, 정지냐, 후퇴냐 하는 문제를 생각해야 되겠습니다. 뜻길을 가는 우리 통일 교회가 전진이냐 정지냐, 후퇴냐 하는 것을 언제나 생각해야 합니다. 선생님도 언제나 통일교회가 전진이냐, 정지냐, 후퇴냐 하는 것을 생각하고, 그리고 전진하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되느냐 하는 것을 생각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기도의 제목이 과거와 달라지는 것입니다. 개인을 위해 정성들이는 것이나 민족을 위해 정성들이는 것이나 정성들이는 것은 마찬가지입니다. 그러므로 백의 정성을 들이더라도 기도하는 표준이 달라야 합니다. 바라보는 목표가 달라야 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같은 정성을 들이더라도 그 목표를 위해서 들이던 정성은 남아지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신령한 생활을 하면 벌써 기도의 내용이 달라지는 것입니다. 기도하는 범위가 점점 넓어지는 것입니다. 사람이 정성을 들이는 것이나 사랑을 하는 것의 그 모양은 다 마찬가지입니다. 개인이 서로를 사랑하는 것이나 전체를 사랑하는 것은 마찬가지라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정성들이고 사랑하는 표준이 달라져야 된다는 것입니다.

통일교회를 믿고 나가는 여러분은 신앙생활을 하는 데 있어서 표준이 달라져야 합니다. 여러분은 개인복귀, 가정복귀, 종족복귀, 민족복귀, 국가복귀, 세계복귀, 천주복귀라고 말하지만 그것은 습관적인 말이 아닙니다. 단계가 달라지는 것입니다. 이 단계를 넘어설 때에는 반드시 탕감조건을 제시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것을 제시할 때는 뒤넘이치는 것입니다.

이렇게죽느냐 사느냐 하는 판가리 싸움을 하면서 통일교회를 발전시켜 나왔다는 것을 여러분은 알아야 합니다. 선생님 가정에서나 선생님 자신이 탕감을 치르지 않으면 통일교인들이 반드시 탕감을 치렀습니다. 책임 맡은 사람이 가든가 해 가지고 반드시 탕감을 치렀습니다. 이런 것을 볼 때에 탕감법은 무시할 수 없는 것입니다.

대한민국이 발전하느냐, 정지하느냐, 후퇴하느냐? 미국이 발전하느냐, 정지하느냐, 후퇴하느냐? 공산당이 발전하느냐? 정지하느냐, 후퇴하느냐? 이런 모든 것은 이 탕감법으로 보아 가지고 판단할 수 있습니다. 그러면 미국은 왜 후퇴하느냐? 세계를 자기 나라 이상 사랑하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세계를 나라 이상으로 사랑하는 나라는 미국을 능가하게 됩니다.

공산당이 왜 후퇴하느냐? 슬라브 민족을 중심삼고 소련을 위주로 한 공산권을 만들기 때문입니다. 소련을 넘어서 세계를 사랑할 수 있어야 후퇴하지 않는 것입니다. 민족, 종족을 초월한 주의, 계급을 넘어설 수 있는 기반을 가진 주의는 세계를 지배하게 되는 것입니다.

통일교회를 상속받을 수 있는 사람은 누구냐? 통일교회 교인들이 안되겠다 싶으면 그 이상으로 뜻을 사랑하는 사람들에게 통일교회는 상속될 것입니다. 만일 통일교회가 나라를 사랑하지 못하면 통일교회 이상 나라를 사랑하는 자리를 통해서 하늘의 뜻은 발전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여러분이 이러한 것을 알고 때에 따라서 정성들이는 표준을 달리 세워야 합니다. 종족복귀면 종족복귀, 민족복귀면 민족복귀, 국가복귀면 국가복귀, 세계복귀면 세계복귀를 위해서 정성을 들이면, 그 목적과 내용이 다르게 정성을 들이면 정성의 그 모양은 비슷해도 남아지는 무리가 된다는것입니다.

이것을 확실히 알아 가지고 금후의 70년대에 민족을 넘고 국가를 넘어서 세계로 나가는 데 있어서 뜻 앞에 보다 충성할 수 있어야 되겠습니다. 그러한 때가 가까이 오는 것을 여러분이 알고 모든 정성을 들여주기를 바랍니다. 기도합시다.

32-36
기 도
아버지, 복귀의 도상에 남아진 불쌍한 인류를 아무도 돌보지 않는다면 얼마나 비참하겠습니까? 이 인류를 한 순간도 잊지 않으시고 응하시며 배후에서 수많은 문제들을 수습하시는 아버지가 계시다는 사실을 생각할 때, 역사를 기울여 감사를 드려야 되겠습니다. 우리는 그 아버지를 쌍수를 들어 환영하고 맞아들여야 하겠습니다. 내 생명을 다 드리고 내사랑을 다 퍼부어 아버지께 속할 수 있는 한날의 기점을 찾기 위해 자기를 망각하는 시점을 무난히 돌파하도록, 아버님이여, 저희들을 격려하여 주시옵소서.

봄이 오지 않으면 꽃이 필 수 없는 것이오니 저희의 마음세계에 봄이 찾아와야 하겠습니다. 그런데 그 봄은 저희가 오게 할 수 있는 것이 아니옵니다. 봄은 자연법칙에 의해 오는 것이요, 그 자연법칙은 아버님께서 그렇게 만든 것임을 아옵니다. 저희가 봄을 만들 수 없기 때문에 저희가 봄을 맞이하기 위해서는 자연을 통해야 하고 아버님의 법도를 통해야 한다는 것을 알게 하여 주시옵고, 또한 아버님의 법도는 언제나 저희들 생명의 배후에서 저희가 봄을 맞이하기를 요구하고 있다는 것을 알게 하여 주시옵소서.

지금까지 봄의 환경을 개척하기 위해서 끊임없이 수고하신 아버님이 계시다는 사실을 생각할 때, 저희들은 아버님께 무한히 고마워하고 무한히 반가워하면서 나의 생명과 사랑 전체를 몽땅 옮겨 드릴 수 있는 자신이 못 된 것을 탄식할 줄 아는 아들딸이 되어야 되겠습니다. 저희가 새로운 봄을 맞이하기 위해서는 내 생명이 동화될 수 있는 인격을 갖추어 가지고 거기에 완전히 흡수되어야 한다는 것을 알아야 되겠사옵니다. 또, 그래야 비로소 봄을 맞이하여 꽃을 피울 수 있다는 사실을 알아야 되겠사옵니다. 너의 일생에서 어느 한때에 봄을 맞이한 적이 있느냐고 물을 때 그렇다고 대답할 수 없는 봄을 맞이하지 못하고 간 불쌍한 영이 되어서는 안 되겠습니다. 하나의 꽃이 피어나서 열매를 맺기 위해서는 여름과 가을을 지내야 하듯이 저희도 하나의 열매로 맺어지기 위해서는 일생 가운데에서 그런 과정을 거쳐야 되겠사옵니다.

하나의 생명이 투입되어서 열매가 맺혀지기까지는 여름절기를 지내며 그 뿌리와 줄기와 가지 전체에서 생명의 요소를 흡수해야만 완전한 생명력을 지니고 제2의 생을 출발시킬 수 있는 하나의 결실이 된다는 사실을 생각하게 됩니다. 마찬가지로 이 몸은 죽더라도 그 마음 가운데 새로운 세계에 다시 태어날 수 있는 생명의 기운이 부풀어 오르고, 결실의 열매가 남아져 있느냐 하는 문제를 스스로 살필 줄 아는 아들딸이 되어야 하겠습니다.

세월이 아무리 지나가고 폭풍우가 아무리 거세게 치더라도 내적인 생명력은 그 환경의 침범을 받지 않고 꾸준히 발전의 노정을 가야만 봄을 맞이하여 다시 뿌려질 수 있는 제2의 생명의 모체인 씨가 될 것임을 아옵니다. 마찬가지로 저희가 생활하는 데 있어서나 생애 노정에 있어서 그 모습은 처량하지만, 무한한 생명력을 집약시킬 수 있는 모체요 결실체로서 다시 무한한 세계에 심어질 수 있는 보람있는 생명의 진가를 지닌 사람이 있다면, 그는 외적으로 볼 때 아무리 비참하더라도 비참한 사람이 아니라는 것을 생각하옵니다. 그 외적인 모습이 비참해지면 비참해질수록 내적인 가치는 더더욱 충실해지는 것이 보장된다는 사실을 저희들이 알게 허락하여 주시옵길 간절히 바라옵고 원하옵니다.

아버지여, 정지하느냐 전진하느냐 하는 문제가 저희에게 있어서는 절박한 문제이옵니다. 아버지여, 통일교단이 정지해 있사옵니까? 그렇거든 채찍을 들어 치시옵소서. 전진하거든 그 힘에 박차를 가하여 봄을 맞이할 수 있게 하여 주시옵고, 무한한 가치의 결실을 맺으면서 가을을 향해 힘차게 뻗어 나갈 수 있게 허락하여 주시옵소서.

지금까지 동절기를 지내 온 통일교단입니다. 이제 봄절기를 향하여 또 여름절기와 새로운 가을절기를 향하여 용약하는 모습, 참감람나무 열매를 아버지께 바쳐 드릴 수 있고 제2의 생을 자랑할 수 있는 그곳을 향하여 용진하는 모습이 많이 나오기를 아버님께서는 통일교단을 통하여 바라고 계심을 아옵니다. 그러나 그 누가 지금 그렇게 전진하고 있는가를 생각하면 생각할수록 아버지께는 슬픈 사연이 많은 것을 느끼게 되옵니다. 그러나 `나만 남았나이다’하면서 외로운 제단을 놓고 당신 앞에 몸부림치는 하나의 아들과 하나의 딸이 있거든 그들을 굽어 살피시옵소서. 그들이 사랑하는 교단이기 때문에 이 교단이 망할 수 없는 입장에 선다는 사실을 그들이 알게 하여 주시옵소서.

이 나라 이 민족을 대신하여 당신의 뜻과 더불어 눈물짓는 하나의 남자와 하나의 여자가 있거든, 또 그런 가정이 있거든 아버지께서 그 가정을 사랑하여 주시옵소서. 사랑하는 나라를 안고 아버지께서 소망하시는 그 세계를 향하여 제물 되기를 바라면서 하소연하는 부부가 있다면 그 부부로 말미암아 망해 가는 국운을 막아 낼 수 있다는 사실을 저희들은 알아야 되겠습니다.

무한한 당신의 생명력과 무한한 당신의 사랑을 집약시킬 수 있는 하나의 가정이 민족을 붙들고 남아지지 않으면 그 민족은 망하게 된다는 것을 알아야 하겠습니다. 세계를 붙들고 울부짖는 가정이 없으면 세계는 망한다는 것을 알아야 하겠습니다.

지금까지의 6천년 역사는 아버님께서 가정을 찾아나온 역사였음을 아옵니다. 그러니 하나의 남자와 하나의 여자가 아버님의 사랑을 중심삼아 가지고 아버님을 모시며 사는 단 하나의 가정이라도 있어야 되겠사옵니다. 금후에 통일교단이 나가는 데 있어서 밑거름이 되고, 아버님으로부터 생명의 인연을 유도시키고, 하늘의 사랑의 인연을 결집시킬 수 있는 단 하나의 부부라도 있어야 되겠사옵니다. 망운에 접한 이 민족을 바라보고 망운의 소용돌이 속에서 사망권으로 넘어가면서 허우적거리고 있는 이 세계를 바라보고 울부짖으며 정성들이는 아버지의 아들딸이 있다면, 그들로 말미암아 세계가 구원될 수 있고 민족이 해방될 수 있기 때문에, 그럴 수 있는 거룩한 가정의 터전이 삼천리반도 어느 곳에 있는가 아버지께서는 더듬어 찾고 계시다는 사실을 알아야 되겠습니다.

그러한 가정이 없거든 그러한 남자들로서 그러한 여자들로서 소망을 남길 수 있는 의인의 무리가 있어야 된다는 것을 저희들이 생각하옵니다. 교회의 이름을 찬양하는 의인은 많았지만 교회가 져야 할 십자가를 짊어지는 의인이 없는 것이 탄식할 일이옵니다. 교회의 십자가를 책임질 수 있는, 의인을 찾고, 나라의 십자가를 책임질 수 있는 의인을 찾고, 세계의 십자가를 책임질 수 있는 의인을 찾으시는 아버지의 소원 앞에 그럴 수 있는 무리가 없기에 통일교회를 책임진 당신의 아들에게 책임을 지워야 할 당신의 마음을 생각하게 될 때, 그 슬픈 아버지의 마음을 동정해 드리는 저희들이 되어야 되겠습니다.

때가 가까우면 가까울수록 얼굴을 들고 살아갈 것이 아니라 양손과 양발을 펴고 땅에 엎드려 민족을 붙들고 세계를 붙들고 통곡하면서 눈물지어야 할 것이 지금부터 통일신도들이 가야 할 길임을 알게 하여 주시옵소서.

그들이 이 길을 가지 못하면 책임진 스승이 가야 하는 것을 알고, 그 길을 감소시키고 그 십자가를 덜어 주기 위하여 하루의 생활을 부모의 한과 더불어 사는 사람이 있다면, 그는 망하지 않는다는 것을 저는 알고있사옵니다.

자기의 생을 저버리고 아버지의 한을 품고, 한 시간이라도 아버지를 위해 생명과 사랑을 기울여 사는 사람은 한 시간을 살고 가더라도, 그는 망하지 않고 그 후손은 망하지 않는다는 것을 알고, 그러한 무리가 되기 위해서 모인 이들이 되게 허락하여 주시옵기를 간절히 바라옵고 원하옵니다.

아버지, 당신이 소원하시는 그 뜻을 기필코 이루어 드려야 되겠습니다. 어떠한 희생의 대가를 치르더라도 저희들이 이 길을 가야 되겠습니다. 천만 번 채찍이 가하여지는 길이라 할지라도 저희들은 눈을 감고 죽음을 각오하고 가야 되겠습니다. 그럴 수 있는 때가 가까와 오면 가까와 올수록 아버지의 뜻 앞에 있어서 정성을 모으고 옷깃을 여미며 쌍수 합장하여 겸손히 `제물이오니 받으시옵소서’할 수 있는 아들딸이 많게 하여 주시옵기를 바라옵니다.

그렇지 못하면 가는 길 앞에 십자가와 저주받은 슬픔의 길이 남게 된다는 것을 알고, 오늘도 그것을 넘기 위해 노력하고 내일도 모레도 그 길을 가기 위해 노력하는 당신의 아들딸들이 되게 허락하여 주옵기를 간절히 부탁드리고 원하옵니다.

아버지, 저희는 정지하더라도 통일교회는 정지해서는 안 되겠습니다. 저희 자신들은 망하더라도 이 교회는 망해서는 안 되겠습니다. 이 나라는 망하더라도 아버지의 뜻은 망해서는 안 되겠습니다. 아버지의 뜻은 세계를 구하기 위한 것이기에 세계는 망하더라도 뜻은 망해서는 안 되는 줄 알고 있사옵니다. 그것을 아는 저희들은 천만 번 망할 길을 가더라도 감사히 갈 줄 알고, 효의 도리를 다하고 충의 도리를 하고 마지막까지 절개와 지조를 지킬 줄 아는 당신의 아들딸이 되게 허락하여 주옵기를 간절히 부탁드립니다.

오늘, 이 아침 여기에 모인 이들의 마음과 몸이 어디에 결실하고자 하옵니까? 그 생명력이 누구와 더불어 인연맺기를 원하옵니까? 그 생명이 다할 수 있는 사랑의 인연을 누구와 더불어 이 땅에 파묻고 싶어합니까? 아버지와 더불어 파묻고 가야 되겠습니다. `나는 하늘과 더불어 이렇게 갔으니 너희들도 이렇게 오라’고 후손 앞에 유언을 남기고 가야 되겠습니다. 그럴 수 있는 자격자들이 되기 위하여 이 아침에 모이 무리들이 되게 허락하여 주옵기를, 아버님, 간절히 바라옵고 원하옵니다.

아버지, 이제 이 교단을 맡으시옵소서. 저희가 가야 할 길을 간다고 하더라도 아버지께서 저희와 더불어 같이 가 주시지 않으면 안 되겠사오니 맡아 주옵소서. 아버님께 맡기기에는 너무나 부족하옵니다. 너무나 상처가 많고 너무나 흠이 많아 모습조차 드러낼 수 없는 부끄러운 교단을 아버지 앞에 맡기기에는 염치가 없다는 것을 느끼지 않을 수 없사옵니다. 그렇지만 남은 것이 이것밖에 없기 때문에 아버지께서는 맡지 않을 수 없는 입장이 아니옵니까? 부디 맡으시어서 심장이 고동치는 그 뜻 앞에 부끄러운 눈물을 머금고라도, 아버지, 참고 사랑할 수 있는 아들이라고 권고할 수 있는 자리에 붙들어 주시옵기를 간절히 부탁드리고 원하옵니다.

저희들은 정지냐, 전진이냐, 후퇴냐 하는 이 두려운 말씀을 들었사옵니다. 나를 찾아오시던 아버님이여, 슬픈 사연이 나에게 남아 있사오면 용납하여 주시옵소서. 열의 자리에서, 백의 자리에서, 천의 자리에서, 혹은 만의 자리에서 억천만년의 한을 가하여 가슴 조이는 마음으로 분부하시는 아버지께서는 그 말씀 한마디 한마디를 발언하기에 얼마나 어려웠사옵니까? 이들이 그러한 아버지의 사연을 생각하게 해주시옵소서. (이하는 녹음이 되어있지 않음)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