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1-61 to 31-84: 아버지와 함께

아버지와 함께
1970.04.19 (일), 한국 전본부교회

31-61
아버지와 함께
[기 도]

이 통일교회의 무리를 특별히 사랑하사 수난의 역사시대를 거치게 하신 아버지의 깊으신 경륜을 생각할 때에, 그 모든 지난날들에 대해 감사드리옵니다. 아직도 이 민족이 뜻을 알지 못하는 가운데 오늘도 수난의 길을 걸어가는 당신의 자녀들을 기억하여 주시옵기를 간절히 바라옵니다.

아버님, 저희들이 금후에 가는 길 앞에 어떠한 어려움이 있더라도 그 길을 헤쳐 갈 수 있게 허락해 주시옵소서. 영계의 수많은 영인들과 현재의 영통인들과 연결시키시옵고, 이 나라가 나갈 참된 길과 참된 모습을 바라며 나온 무리들을 축복하여 주시옵기를 갈절히 바라옵고 원하옵니다.

이와 같은 역사적 인연을 수습하기 위해서 보잘것없는 저희들을 불러 모으신 당신의 거룩하신 뜻이 있음을 아옵니다. 저희들은 자신들의 모습이 아무것도 아닌 것같이 보이지만, 이 역사적이고 시대적인 사명 앞에 아버지께서 특별히 자신들을 불러 주신 것을 감사할 줄 아는 당신의 자녀들이 되게 하여 주시옵소서.

아버님, 저희들은 아버지 앞에 벌거벗은 어린애와 같아서 당신께서 입혀 주셔야 되겠고, 당신께서 먹여 주셔야 되겠사오며, 당신의 품안에 품어서 키워 주셔야 되겠사옵니다. 하오나, 저희들은 아직까지 그러한 아들딸의 모습으로서 아버지를 대할 수 있는 한때를 갖지 못하였사옵니다. 이러한 저희들의 마음과 몸이 그런 자리에 서게 해주시고, 저희들이 아버지의 아들이 되고 딸이 될 수 있도록 축복하여 주시옵소서.

저희들은 이 세상에서 가진 것이 없고, 무엇 하나 갖춘 것이 없는 모습이요, 그 무엇을 들고 자랑할 것이 없는 모습들이지만, 당신의 품에 안겨 자랄 수 있는 아들과 딸의 인연을 갖고 있는 것을 감사합니다. 이러한 인연은 승리의 권한을 대신할 수 있는 특권인 것을 알고, 여기에 감사할 줄 아는 저희 자신이 되어야 하겠사옵니다.

저희들은 보기에는 아무것도 아닌 모습이지만, 아버지께서 자랑스럽게 여길 수 있고 귀하게 느낄 수 있는 아들딸이 되게 허락하여 주시옵소서.

저희가 어려운 길을 가더라도 아버지와 더불어서 가고, 슬픈 일을 당하더라도 아버지와 더불어서 당하면서 어려운 자리에 서더라도 아버지를 위로할 수 있게, 아버님, 이끌어 주시옵소서. 희망과 소망의 한날을 더더욱 저희 가슴 깊이 품고, 내일을 향하여 전진에 전진을 가할 수 있는 아버지의 참다운 아들들이 되고, 딸들이 되게 허락하여 주시옵소서.

저희가 가는 길이 아무리 험하다 하더라도 당신이 가야 할 길 앞에 절대로 짐이 되지는 않겠다는 새로운 결의를 갖게 하여 주시옵소서. 저희들은 아버지를 알았고, 아버지의 가시는 방향을 알았습니다. 때문에, 상처를 입고 가중된 십자가의 길을 간다고 하더라도 당신을 위로해 드릴 수 있는 때는 한때밖에 없다는 것을 알고 정성을 다 모아 가는 당신의 자녀들이 되게 허락하여 주옵기를 간절히 바라옵고 원하옵니다.

아시아의 일각에 있는 불쌍한 이 민족을 지금까지 수많은 시련을 거쳐 오면서도 망하지 않게 아버지께서 특별히 지켜 주신 것을 감사드리옵니다. 이제 이 민족이 금후에 가야 할 길을 알도록 아버지께서 일깨워 주시옵소서. 사방에 둘러싸인 국가적인 난시(難時)가 저희 앞에 다가오고, 어려운 시점이 이 민족 앞에 다가오는 것을 염려하게 되옵니다. 저희에 대한 아버지의 경륜의 인연을 연장해 주시옵소서.

저희들이 꿋꿋한 모습을 갖추어 흰옷을 입고 제단을 쌓아 경배를 드리면서 아버지 앞에 복귀의 사명을 다하여야 할 엄숙한 책임을 지고 있다는 사실을 생각하게 되옵니다. 이것은 누구에게 맡길 것도 아니요, 그 누구에게 부탁할 것도 아니요, 오로지 심혈을 다하는 모습으로서 내 마음을 다 바치고 내 몸을 다 바치고 내 뜻을 다바쳐서 책임 다해야 할 것이옵니다. 그래서 아버님의 사랑과 동정이 나타날 수 있게 해야 되겠습니다. 그런 인연을 중심삼아야만 이 민족이 넘어야 할 골고다의 어려운 난관을 극복할 수 있다는 것을 알아야 되겠사옵니다. 지금이 그러한 때인 것을 저희들이 알고 있사옵니다.

오늘 4. 19를 회상하고, 이 민족이 걸어온 모든 수난의 길들이 아버지의 뜻으로 말미암은 길이었다는 사실을 생각하면 할수록 아버지께서 남기신 역사적인 사명을 책임지겠다고 선서하고 나선 저희들은 아버지가 바라시는 모습들이 되어야 되겠습니다. 또한 세상에 자랑하실 수 있는 모습들이 되기를 바라는 아버지 앞에 또다시 슬픔을 가중시키는 불쌍한 무리들이 되지 않게 하여 주옵기를, 아버님, 간절히 바라옵고 원하옵니다.

역사과정에서 그 누구도 아버지를 알지 못했사옵니다. 당신의 소원이 무엇이고, 당신의 뜻이 무엇이고, 당신의 심정이 무엇이고, 당신의 사정이 무엇이며, 당신의 이념이 흥할 수 있는 방향은 어느 방향인가를 알지 못했습니다. 그럴지라도 오늘날 저희는 아버지의 모든 것을 헤아릴 수 있고, 긍휼과 자비의 심정을 갖고 계신 아버지를 그리워할 줄 아는 참다운 아들 딸이 되게 허락하여 주옵소서. 간절히 바라옵고 원하옵니다.

이 아침, 삼천리 반도에 널려 있는 외로운 통일의 무리들이 무릎을 꿇고 아버지 앞에 간구하고 있을 줄 알고 있사오니 그곳에 같이하여 주시옵고, 두터우신 아버지의 사랑의 인연을 그 가운데에 연결시켜 주시옵소서. 시련의 줄을 묶어 잡아당기더라도 당신과의 인연만은 끊기지 않아야 되겠사옵니다. 모든 것은 제해 놓더라도 당신의 사랑만은 남겨 주시옵고, 모든 것은 제쳐놓는 한이 있더라도 당신의 권능만은 남겨 주시옵소서. 그러한 날을 갖지 못하는 저희들이라 할진대는 이 민족 앞에 찾아오는 해방의 날을 아무리 맞으려 해도 맞을 수 없을 것입니다. 또한, 내일의 희망의 한날을 품었다고 할지라도 뜻 앞에 결코 세워지지 못한다는 사실을 아는 당신의 자녀들이 되게 허락하여 주시옵소서.

이 아침에 저희의 마음을 아버지 앞에 다 터놓고, 자신이 더듬어 온 발자취를 다시 한번 면밀히 비판해 보아야 되겠습니다. 자신이 누구에게 속하여 있었으며, 누구를 위하여 싸워 나왔는가를 비판하게 하여 주시옵소서. 지금까지 살아온 자기 자신의 모습을 받아들여서는 안 되겠사옵니다. 어디까지나 출발이 아버지로 말미암아 되어졌기에 결과도 아버지 앞에 귀속시켜 드려야 할 것을 생각하게 될 때에, 죽어도 아버지요 살아도 아버지라는 생각을 가지고 움직여야 되겠습니다. 이렇게 모든 인연을 아버지앞에 결속시켜 갈 줄 아는 자신이 되어야 되겠사옵고, 내일의 희망을 다짐해 나가야 되겠사옵니다. 그런 자리에 서야만 아버지께서 같이하시는 것이요, 아버지와 인연이 맺어진다는 사실을 확실히 알게 허락하여 주옵기를 간절히 바라옵고 원하옵니다.

저희 자신의 미숙함을 스스로 깨닫게 될 때, 아버지 앞에 자신의 모습을 보여 드릴 수 없는 부끄러움에 사무쳐 한없이 땅을 치며 통곡하고, 심정을 다하여 속죄의 눈물을 흘릴 수 있는 모습이라도 되지 않으면 안 된다는 사실을 느끼게 하여 주시옵기를 간절히 바라옵고 원하옵니다.

저희들은 아버지를 수없이 불러 왔습니다. 이제는 아버지가 기쁨의 아버지인지 슬픔의 아버지인지 확실히 알고 그 아버지를 부를 줄 아는 성장한 자녀들이 되어야 하겠사옵니다. 저희들은 지금까지 복을 주시는 아버지, 위로해 주시는 아버지, 자신을 어려운 시련 가운데서 구해 주시는 아버지로서 알아왔사옵니다. 하오나, 아버지를 위로해 드리고 구해 드리고 아버지 앞에 세상을 맡아 드려야할 책임이 저희에게 있다는 사실을 알게 하여 주시옵소서. 그리하여 어렵고도 불쌍한 입장에 계신 아버지를 바라볼 적마다 동정의 눈물을 흘리고, 외로운 아버지를 동정하기에 자기 스스로를 잊어버릴 줄 아는 자녀들이 되어야 하겠사옵니다. 이것이 자신의 생활철학이요, 자기의 생애노정이라고 인정하면서 갈 줄 아는 자녀들이 되게 하여 주시옵소서. 이러한 아들딸이 있거든 당신의 깊고 후덕한 사랑을 가하여 주시옵고, 남은 복귀의 사연을 나눌 수 있는 아들딸이라 칭송하여 주시옵길 간절히 바라옵고 원하옵니다.

지금까지 저희들은 슬플 때에 자신을 중심삼고 슬퍼할 때가 많았사옵니다. 그러나 이제는 자신의 슬픔이 극하거든 자신의 극한 슬픔을 대신하여 아는 당신의 아들딸들이 되게 허락하여 주시옵기를, 아버님, 간절히 바라옵고 원하옵니다.

내일의 소망이 아무리 좋다고 하더라도 현재의 입장에서 아버지와 나 사이에 맺어진 공고한 인연이 없다고 하면 아무리 좋은 소원과 아무리 좋은 이념을 갖고 있다 할지라도 그것만 가지고 저희들이 앞으로 소망을 걸 수 없다는 것을 알게 하여 주시옵소서. 나를 찾아오신 아버지에게 슬픈 사연이 있고 나와 아버지와 맺어진 인연이 있다면, 그 아버지의 슬픔의 십자가를 나 자신이 대신 져야 된다는 사실을 아는 당신의 아들들이 되고, 딸들이 되게 허락하여 주시옵기를 간절히 부탁드리고 원하옵니다.

이제 1970년을 맞이했사옵니다. 아버님, 이 해를 맡아 주시옵소서. 이 해를 수난의 해가 아니라 영광의 해가 되게 허락하여 주시옵기를 간절히 바라옵고 원하옵니다.

저희를 앞서가신 당신의 뜻은 높고 귀한 줄 알고 있사오니, 70년대 이 기간에 어떠한 시련도 극복할 수 있도록 심정을 다하는 동시에 최후의 힘과 생명을 다하여 적진을 격파하여야 할 사명이 저희가 분부받은 사명인 것을 알면서 가고 또 갈 수 있게 하시옵소서. 그러한 자기 자신을 정비하기에 모든 것을 아끼지 않는 자녀들이 되게 허락하여 주옵기를, 아버님, 간절히 바라옵고 원하옵니다.

오늘 당신의 이름을 찬양하고, 당신의 무릎을 그리워하고, 당신의 깊은 심정의 품을 그리워하는 당신의 아들딸들을 부디 버리지 마시옵고 품어 주시옵소서. 그리하여 영광의 한날, 영광의 한시간, 은사의 한시간, 부활의 한때를 이룰 수 있는 거룩한 날이 되게 허락하여 주시옵소서.

지금 때가 봄절기인 것과 마찬가지로, 70년대는 통일교회의 봄절기가 되게 하시옵소서. 그리하여 영광이 무성할 여름절기를 향하여 전진하게 하여 주시옵소서. 그것을 위해 새로운 각오를 갖는 자녀들 되게 허락하여 주시옵기를 간절히 바라옵고 원하옵니다.

소수의 무리들이 모여 있습니다. 이들은 그 누구를 위하는 길을 가기 위해서 온 것이 아니옵고, 당신께 가까이 나가고 당신의 남은 사명을 분담받기를 원해서 모였사오니, 이들을 축복하여 주시옵기를 간절히 부탁드리고 원하옵니다.

해외에 널리어 수고하는 자녀들도 보호하여 주시옵소서. 부디 역사적인 크나큰 책임을 짊어진 일본 교회가 가는 길을 인도해 주시옵소서. 금후에 일본에서 치러야 할 여러가지 행사와 이곳에서 저희들이 계획하는 전체의 행사 위에 당신의 가호의 손길을 같이하여 주시옵길 부탁드리오며, 모든 말씀을 참부모의 성호 받들어서 아뢰었사옵나이다. 아멘.

31-66
말 씀
우리 타락한 인간들은 하나님이 보내 주신 부모로부터 태어나지 못한 것을 알고 있습니다. 이 타락세계의 부모들은 하나님과 상응할 수 없는 입장에 있고, 그 자녀들 역시 하나님과의 인연을 따라갈 수 없는 입장에 서 있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타락의 응보요 결과라는 것을 우리들은 알고 있습니다.

31-66
자아 해방을 위해 우리가 찾아야 할 것
하나님께서는 온 천지를 인간을 위해 지으셨고, 하나님이 기뻐하시기 위해서 지으셨습니다. 그렇지만, 지으신 이 온 천지는 우리 인간과 하나님의 뜻이 일체화할 수 없는 입장에 있습니다. 이것이 비참한 사실인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만물이 탄식해 왔고 인류 역사가 비참하게 엮어져 나왔다는 것을 우리는 알고 있습니다.

이러한 역사적인 유산, 하나님이 원치 않은 유업을 상속받은 입장에 있는 것이 현재의 인류라는 것입니다. 우리는 그런 입장에 있는 나라는 존재를 존중시하고 있지만 자기를 생각하는 입장에 서면 설수록 가치적인 나가 아니요 도리어 슬픔과 원한을 하나님 앞에 돌린 나라는 것을 느끼게 됩니다. 이러한 것을 느끼면 느낄수록 역사적인 사명 앞에 분발해야 되겠다는 것을 생각하기 보다는 오랜 역사를 거쳐온 수난의 노정을 회상하면서 도리어 자기의 위신과 체면을 세울 수 없는 부끄러움에 잠겨야 할 자신이라는 것을 생각해야 됩니다.

그러한 부끄러움을 모르고 살고 있는 것이 오늘의 인류요, 그러한 생애 노정을 걸어온 우리의 생활이었다는 거예요. 또 이와 같은 입장에서 아직까지 그런 환경을 청산짓지 못한 우리 자신인 것을 생각해 볼 때에, 자기라는 관념을 갖고 일체를 생각하는 그런 주관적인 관념이 하나님 앞에 얼마나 체면이 없고 부끄러운 것인가를 우리는 알아야 되겠습니다.

그러면 우리 자신들이 이제 찾아야 할 것은 무엇이냐? 무엇보다도 역사적인 가치의 존재를 찾아야 하겠습니다. 또, 우리에게 소원이 있다면, 인류를 대신해서 미래를 걸어 놓고 그 소원 이상의 것을 찾아야 하는 것입니다. 이렇게 하지 않으면 우리는 역사를 대신해서나 미래를 대신해서 현재의 입장을 결정지을 수 없는 것을 알아야 되겠습니다. 이러한 것을 생각하게 될 때 `나’라는 존재가 얼마나 엄청난 존재인가를 느껴야 되겠습니다. 좋은 의미에서가 아니라 슬픈 의미에서 얼마나 무거운 짐을 짊어지고 있는 자신인가를 알아야 되겠습니다.

우리는 자고로 수많은 선지 선열들이 자아 해방을 위하여 얼마나 많은 수고를 해 나왔는가를 알고 있습니다. 또, 선의의 뜻을 품고 왔다 갔던 성인 현철들이 역사적인 자기를 발견하기 위해서 수난의 길을 걸어갔고, 당대에 있어서 승리하고, 미래에 있어서 세움받을 수 있는 자기를 추구하는 도상에서 온갖 심혈을 기울이며 희생해 갔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지금까지 과거 현재 미래를 놓고, 또 천주 앞에 당당히 나를 세워 주장할 수 있고, 나를 중심삼아 가지고 역사와 더불어 같이 사랑을 나눌 수 있고, 현재와 더불어 같이 사랑을 나눌 수 있고, 미래와 더불어 사랑의 인연을 맺고 살 수 있다고 주장할 만한 사람이 역사상에 한 사람도 없었다는 것을 우리들은 알고 있습니다.

이와 같이 성인 현철들 가운데에도 그러한 사람이 없었다는 것을 생각하게 될 때에, 그러한 역사의 인연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고, 시대의 환경 가운데 에워싸여 있는 자신을 주장한다는 것이 얼마나 부끄러운 일인가를 우리는 알아야 됩니다.

31-67
나 하나 때문에 하나님과 선열들이 수고하셨음을 알아야
우리가 오늘 복귀섭리 역사를 진지하게 관찰해 볼 때, 과거의 역사는 세계를 복귀하기 위한 하나님의 뜻의 역사였지만 그 세계를 구하는 기점은 우리 각 개인입니다. 이 개인을 상실하고서는 세계를 구할 수 없는 것이 원칙입니다. 세계를 구할 수 있는 하나의 기점이 나 자신이라는 것을 생각할 때, 나에 대한 소망의 기준이 얼마나 큰 것인가? 우리들은 이것을 원리를 통해서 알고 있습니다.

나 하나 때문에 하나님은 지금까지 수난의 길을 걸어오셨고, 나 하나 때문에 이스라엘 나라는 역사적인 제물이 되어 나왔습니다. 그것은 누구를 위해서 희생한 것이 아니요, 그 어떤 무엇을 위해서 희생한 것이 아닙니다. 결국은 `나’라는 하나의 존재를 결정적인 승리의 기반 위에 올려놓기 위해서입니다. 이를 위해 섭리의 뜻을 좇아 수많은 사람이 수고해 나왔고, 하나님도 수고해 나오셨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사실을 두고 볼 때, 그러한 희생의 기반 위에 서 있는 내가 어떻게 선의 선조들과 하나님 앞에 체면을 세우느냐 하는 것이 지극히 큰 문제가 되지 않을 수 없다는 것입니다.

우리 자신은 그런 역사와 천의에 의한 사명을 짊어지고 지금까지 해방의 한날을 추구해 나왔지만, 하나님이 뜻하시고 인류가 소망하는 기점에 서 가지고 스스로를 자랑할 수 있는 자신이 되었느냐고 할 때에 그렇지 못하다는 것을 우리들은 잘 알고 있습니다. 그렇지 못한 나 자신인 것을 깨닫고 사람은 이렇게 살아야 된다고 과거의 사람들을 비판도 하고, 현재의 인류 앞에 새롭게 가야 할 하나의 목적과 방향을 제시해 줄 수 있는 내가 되었다 하더라도, 나를 내세워서 자랑할 수 있는 자신이 되어 있느냐 하면 못 되어 있다는 것입니다.

그것은 왜 그러냐? 인간은 무엇을 가지고 자랑해야 할 것이냐? 외적으로 자기의 얼굴이 잘났다고 그것을 자랑한다는 것은 가당찮다는 것입니다. 또, 자기 스스로 어떤 특정한 환경에서 몇 사람의 추앙의 대상이 된다고 해서 복귀섭리역사 앞에, 혹은 천주앞에 자랑하기에 부족함이 없다고 생각한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입니다.

이것은 왜 그러냐 하면, 우리 자체가 자랑할 수 있는 가장 귀한 것을 잃어버렸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내가 가야 할 방향을 알았다 하더라도 아는 것으로서 끝나는 것이 아니라, 가야 할 방향을 알고 인간으로서 가야 할 길을 다 가야 합니다. 그래야 나의 가치를 천지가 영원히 앙모하고, 혹은 그 가치 앞에 자기 스스로 끌려들어갈 수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그럴 수 있는 경지에까지 나가야 됩니다. 그런 가치의 내용이 될 수 있는 것이 무엇인가 하는 문제를 두고 볼 때에, 우리의 외적인 모습이라든가 환경에 접해 있는 모든 인연은 자랑할 것이 못 됩니다. 이것들은 그런 가치와는 너무나 동떨어져 있다는 겁니다.

31-69
인간이 바라는 구주는 어떤 분인가
그러면 그러한 귀한 가치를 지니고 있는 것은 무엇이냐 하면 불쌍한 입장의 자기를 구해 줄 수 있는 사람입니다. 그래서 그런 사람을 내가 동경하는 것입니다. 또, 지금까지 종교를 믿고 나오는 사람들은 메시아나 구주라고 하는, 자기의 생명과 재산 그밖의 모든 인연을 구해 줄 수 있는 하나의 중심존재를 앙모해 온 것입니다. 그러한 분을 우리는 심정의 중심되는 절대적인 가치의 중심존재로 믿고 신봉하면서 신앙생활을 하고 싶어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우리가 신봉하고 싶은 그 절대적 가치의 존재는 어떤 분이냐? 우리가 원하는 그분과 나와의 관계를 따져 볼 때에, 나는 타락한 입장에 있고 그분은 타락하지 않은 정상적인 입장에 있기에 나를 구해 줄 수 있다고 할 수 있는 구주냐? 아닙니다. 우리는 이보다 더 깊은 관계를 가질 수 있는 입장에 선 구주를 요구할 것입니다. 다시 말하자면, 일가친척과 같은 구주보다도, 자기 혈족의 어떤 형님보다도 더 가까운 입장에서 자기를 위해 줄 수 있는 구주를 요구할 것입니다. 이런 구주를 찾고 싶은 심정을 가진 우리 인간이 아니겠습니까?

이러한 관점에서 모든 가치의 내용을 상실한 우리가 구원을 받기 위해 원하는 구주의 모습은 어떠한 가치의 중심으로 나타나기를 바라느냐 하는 문제를 두고 볼 때, 인간이 찾아 들어가는 최후의 종착점은 부모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부모 이상 귀한 것은 없을 것입니다. 친척이나 형제, 세상의 그 누구보다도 귀한 것은 부모입니다.

부모는 어머니 아버지를 말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내가 수난을 당하는 입장에 처하면 반드시 길이 필요한 것이요, 그 모든 억센 환경을 극복하기 위해서는 부모가 필요한데, 어머니보다도 아버지가 더 필요하다는 것을 우리가 절감하게 됩니다. 즉, 홍수가 나거나 자신의 몸이 소용돌이치는 탁류에 휘말려 들어가려 하는 순간에, 자신의 생명이 경각에 달리는 순간에 자신을 구해 줄 수 있는 분으로 다급하게 부르는 소리는 대개 `아버지’입니다. 어머니를 부르는 사람이 있을지도 모르겠지만, 그런 자리에서는 대개 아버지를 부를 것입니다.

그런데 자기의 부모도 자신을 구해 줄 수 없을 때는 어떻게 하느냐? 하나님을 부를 것입니다. 우리 인간이 지금까지 역사과정에서, 비참한 운명길에서 구도의 마음, 구도의 심정을 가지고 최후의 유언으로 남길 수 있었던 말이 무엇이냐? `아버지!’ `하나님!’ 하는 말입니다. 이 이상 더 필요한 말이 없을 것입니다.

31-70
안타까우신 아버지에 대해 우리가 취해야 할 태도
우리는 그런 입장에 처해 있는데도 불구하고 그러한 입장에 있는 자신을 발견하지 못한 채 살고 있습니다. 그리고 자신의 생명이 경각에 달려 있고, 자신이 위태로운 운명길에 처해 있는데도 불구하고 이런 시점에 서 있는 자신을 자랑하고 중요시하고 있다는 것을 우리는 알아야 됩니다.

아버지로부터 부양받아야 할 우리는 `당신의 사랑을 저에게 베풀어 주시옵소서’ 라는 말을 할 필요가 사실을 없는 것입니다. `당신의 손길이 필요합니다’ 라는 말이나 서로의 인연을 따지는 그런 말은 필요치 않다는 것입니다. 이런 관점에서 볼 때, 아버지와 우리는 함께 살아야 할 관계요, 아버지께서 내 아들이라고 하면서 직접 대해 주실 수 있는 관계인 것입니다. 그러나 여기에는 천만사의 사연이 담겨 있는 것이요, 그 누구도 벗어 날 수 없는 슬픔의 구렁텅이가 엇갈려 있는 것입니다. 현재의 우리 자신을 제삼자의 입장에서 직관해 볼 때, 어머니도 만날 수 있고 아버지도 만날 수 있는 인연을 갖고 있는 우리인데도 불구하고, 경각에 달린 자기의 운명을 중심삼고 손도 내밀 수 없는 하나님과 우리 자신들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면 우리는 어떠한 입장에 서야 하는가? 만일에 역사적인 죽음의 인연을 갖고 나온 그 모든 구렁텅이를 다 메우지 않으면 나를 구할 수 없는 입장에 선 아버지이신 것을 느낀다면, 나를 위하여 간곡한 마음을 가지신 아버지, 자기의 생명이 경각에 달렸을 때 갖는 시급한 마음보다 몇배나 더 초조한 마음을 가지고 나를 구하고 싶어하시는 아버지를 바라보며 여러분은 어떠한 태도를 가져야 할 것인가? 보통 사람들 같으면 어서 와서 구해 달라고 하겠지만, 생각이 깊은 사람은 염려하지 마시고 걱정하지 마시라고 도리어 하나님을 위로해 드릴 것입니다. 우리는 그런 효자 효녀가 되어야 할 것입니다. 비록 타락한 후손일망정 아버지께서 구원의 손길을 펼래야 펼 수 없는 딱한 사정을 이해하고, 부디 자신에 대해서 염려하지 마시라고 위로해 드릴 수 있는 아들딸이 되어야 하겠습니다.

그런 아들딸이 있었느냐? 죽어가는 아들딸을 보면서도 손도 벌리지 못하고 바라만 보고 있는 부모가 있다면, 천 사람이면 천 사람, 만 사람이면 만 사람이 다 그 부모의 딱한 사정을 모르고 그 부모를 대해 반박하고 욕할 것이며, 부모가 아니라고 결단을 내리고 결국에는 이별할 것입니다. 이것이 지금까지 타락한 인간들이 해 왔던 습관이 아니겠습니까? 복귀의 행로에는 그러한 일이 많았다는 것을 여러분이 알아야 됩니다.

예수님은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시게 될 무렵 “내 아버지여, 만일 할 만하시거든 이 잔을 내게서 지나가게 하옵소서. 그러나 나의 원대로 마시옵시고 아버지의 원대로 하옵소서(마 26:39)”라고 하였습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그러한 사정을 헤아릴 수 있었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최후로 `아버지시여 어찌하여 나를 버리시나이까’라고 할 때, 얼굴을 돌릴 수밖에 없었던 하나님의 그 입장이 어떠하겠느냐? 또, 하나님이 그런 자리에 계시다는 것을 아시는 예수님의 심정은 어떠했겠습니까? 그렇게 죽음의 길을 가는 아들의 마음보다도 그 아들의 손을 펴서 구해 주고 싶은 마음이 천만 배나 더 강렬하게 솟구치는 것이 어버이의 마음인데도 불구하고, 동정하고 싶지만 동정할 수 없는 역사적인 사연의 구렁텅이가 남아 있고, 심정의 골짜기가 엇갈려 있는 것을 바라보는 아버지의 마음, 아들을 죽음길로 보내는 아버지의 마음은 얼마나 아플 것이냐! 죽음을 당하는 아들보다도 몇천 배 더 딱한 입장에 설 것이 아니겠어요?

통일교회를 믿고 따른다고 하는 무리 가운데에서도 그런 입장에 부딪치게 되면 번번이 하나님을 원망하고 따라온 길을 후회하는 사람들이 있는 것을 볼 수 있었습니다. 그러니 아버지와 함께할 수 있는 그 자리가 어디냐 하는 문제가 대두됩니다. 아버지와 함께 할 수 있는 아버지의 딸이요, 아버지의 아들이라고 주장하는 내 자신이 언제 아버지와 함께 할 수 있는 진정한 인연을 맺을 것인가 하는 문제는 심각한 문제라는 것입니다.

오늘 타락한 나 자신은 아버지와 함께 갈 수 있는 인연을 되찾아야 됩니다. 그 인연을 되찾아가는 길은 슬픔의 길도 아니요, 고통의 길도 아닙니다. 그리고 낙망이라든가 절망이라든가 비애라든가 역사의 모든 환멸을 느끼지 않는 길입니다. 그런 것을 느낄 수 없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불의의 요건들이 나를 에워싸고 있고 내가 천애의 고아의 신세에 처하게 된 것은 아버지와 함께 있지 못하게 하려는 악의 세력 때문입다.

31-72
하나님을 부모로 섬기려면
우리는 이와 같은 환경을 타파해 버리고 아버지와 함께 있을 수 있는 귀한 자리가 있다면, 세상의 그 무엇을 하더라도 찾아야 합니다. 이것이 우리 타락한 인간이 해방받을 수 있는 단 하나의 길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원수의 피를 받은 타락의 후손인 우리는 죽음의 길을 거슬러 올라가지 않으면 안 됩니다. 그것도 한 번만 죽음의 길을 거쳐서는 안 됩니다. 세 번 이상 죽음을 당하는 것 같은 시련을 거치지 않고는 부모를 부모로 섬길 수 없습니다. 이것이 복귀의 길입니다.

그러면 어찌하여 세 번이냐? 이것은 역사과정에 있어서 구약시대를 거치고, 신약시대를 거쳐서 성약시대를 맞아야 하기 때문입니다. 또한 이것은 아담의 죽음의 길을 격파하기 위한 것이요, 예수님의 십자가의 수난길을 부정시키기 위한 것이요, 오시는 주님이 지금까지 걸어온 수난의 행로를 정상의 행로로 바꾸기 위한 것입니다. 이것이 우리 인류가 가야 할 길입니다. 이렇게 3시대의 죽음길을 일생을 걸어놓고 생애를 바쳐 걸어야 할 것이 끝날에 처해 있는 우리 인간입니다.

묵시록에도 나와 있는 것과 같이 이때는 사람들에게 있어서 처음 사랑이 점점 식어가는 때입니다. 그러나 끝까지 처음 사랑을 붙들고 참아 나가는 사람은 구원을 받는 것입니다.

그러면, 참음으로 남아지는 자리는 어떤 자리냐? 끝까지 아버지와 함께하는 자리입니다. 오늘날 세상 사람들이 말하는 것처럼 어렵게 말하지 않더라도 알 수 있는 것입니다. 부모와 자식이, 즉 아버지와 아들, 아버지와 딸이 함께 심각한 자리에 들어가게 되면 끝까지 남아질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자식에 대해 사랑을 버리지 않는 다는 것입니다. 이 세상의 타락한 부모도 자식에 대해서는 사랑을 버리지 않습니다. 여든살된 노모가 예순살된 아들에게도 유아를 대하던 심정으로 대하는 것이 인간세계의 상정이 아니겠습니까? 그러한 관점에서 미루어 볼 때, 부모는 자식을 한시도 버리지 않는 것입니다. 버릴 수 없는 거예요. 사랑의 마음은 변할 수 없는 것입니다.

그러면 `끝까지’라는 말은 누구에게 해당되는 말이냐? 하나님에게 해당되는 말이 아닙니다. 부모에게 해당되는 말도 아닙니다. 자식들에게 해당되는 말입니다. 다시 말하면, 이 말은 오늘날 심판받아야 할 전인류에게 해당되는 말입니다.

31-73
하나님이 제시하시는 제물
앞으로 인간들은 생사의 교차로에서 부딪칠 것입니다. 자기는 아버지라고 알고 있는 데도 불구하고 그 아버지께서는 자기의 사연을 들어줄 수 없고, 자기의 아버지가 되어 줄 수 없는 그러한 때가 온다는 것입니다. 이런 문제를 두고 볼 때, 오늘날 우리는 이 구렁텅이를 메워 갈 수 있는 하나의 방안, 이러한 구렁텅이를 해소시킬 수 있는 하나의 대책을 세워야 하는 것입니다. 앞으로 그런 때가 올 것인데 부모의 입장에 계신 하나님은 이것을 무책임하게 수수방관하시지는 않는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이것을 준비하기 위해서 오랜 행로를 거쳐 나오셨습니다. 이러한 행로가 곧 복귀의 행로입니다. 이것을 수습하는 데 있어서의 조건물이 무엇이냐 하면, 제물입니다. 그리고 이것이 탕감복귀의 내용이라는 것을 알아야 됩니다. 이러한 사망의 구렁텅이를 메울 수 있고 이것을 밟아 치울 수 있는 역사적인 제물, 현재적이며 미래적인 승리의 기점이 될 수 있는 하나의 방편으로 제시된 것이 탕감의 제물입니다. 다시 말하면 탕감조건입니다. 탕감의 조건이예요.

그러면 탕감조건은 무엇으로 나타나겠습니까? 하나님께서 우리를 사랑하신다면 그 조건을 무엇으로 나타나게 하시겠느냐는 것입니다. 그것은 우리가 마음대로 취급할 수 있는 제물이 아닙니다. 원래 양을 잡아 놓고 제물을 드리는 데 있어서, 여기에 참여한 사람들은 죽은 한 마리의 양 앞에서 정성을 다 기울여 속죄의 경배를 드려야 합니다. 완전굴복해야 되는 것입니다. 그 완전굴복의 한계점은 무엇이냐? 내가 죽더라도 불평하지 않고 순종하는 것입니다. 죽음까지 극복할 수 있는 자세를 가져야 합니다. 이것이 바로 제물이 취해야 할 자세인 것입니다. 자세를 그렇게 가져야 됩니다.

그런데, 오늘날 하나님이 탕감조건으로 제시하고자 하는 제물은 어떤 물건이 아닙니다. 그러면 무엇이냐? 현재의 인류와 후손들이 필요로 하고 후대에 등장할 수 있는 것입니다. 구원의 사연을 맺어 가지고 서로서로 손에 손을 붙들고 호응하게 할 수 있는, 그런 인연을 맺어 주는 것입니다. 그것은 바로 아버지 어머니의 손길이라는 것을 여러분이 알아야 됩니다. 즉, 참부모의 인연입니다.

이 참부모는 오늘날 통일교회에서 주장하고 있는 것입니다. 오늘의 역사과정에서 잠깐만 생각하게 되면, 타락이라는 것을 긍정으로 생각하게 되면 이것은 그 누구도 생각할 수 있는 것입니다. 거기에 자기의 생각의 근원을 파헤쳐 들어가 고민하는 입장이 되면, 우리에게 참다운 부모는 왜 없느냐 하는 것을 여실히 알 수 있습니다. 이렇게 쉬운 일이지만 지금까지 오랜 역사를 거쳐오면서도 해결하지 못하였던 그 문제를 오늘 통일교회에서 들고 나온 것입니다. 이것은 우리가 있기 전에 있었던 문제입니다. 또한 우리가 그러한 인연 가운데서 살 수 있는, 생명의 근원이 되는 심각한 문제라는 것입니다.

참부모는 인류가 찾아야 할 참된 부모입니다. 그 참부모가 있음으로 말미암아 참된 선이 성립되는 것입니다. 그러면 그 참부모는 어떤 분이냐? 아버지와 함께 갈 수 있는 하나의 발판이 되는 분입니다. 하나의 제물의 입장에 선 분이 참부모입니다. 즉, 제물이라는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참부모는 인간과 하나님과의 간격과 구렁텅이를 메우기 위한 하나의 제단이요, 사망세계를 넘어설 수 있는 다리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이런 관점에서 볼 때, 그 자리는 하나님과 내가 같이할 수 있는 자리요, 하나님과 부자의 인연을 맺을 수 있고, 하나님과 일체를 이룰 수 있는 하나의 초점입니다. 즉, 타락으로 말미암아 갈라졌던 하나님과 다시 하나될 수 있고, 갈라졌던 두 경계선이 일치될 수 있는 하나의 기점이 되고, 탕감제물의 입장에 서신 분이 누구냐? 참부모라는 것입니다.

우리가 절박한 입장에 서 가지고 하나님을 부를 때, 하나님이 천년 사연을 다 잊어버리고 나와 인연을 맺을 수 있는 자리가 있다면 그 자리는 세상의 그 무엇을 주고도 바꿀 수 없는 자리입니다.

구원이 필요한 우리 자신에게 있어서 아버지와 함께할 수 있는 단 하나의 인연, 아버지와 함께할 수 없고 아버지와 인연맺을 수 없는 인류가 자유스러운 환경에서 아버지와 인연맺을 수 있게 되기 위해 아버지께서 보내 주신 인연이 무엇이냐? 참부모의 인연입니다.

31-75
참부모와의 인연에 대해 얼마나 감사드렸는가
그러면 참부모의 인연이 하나님으로부터 나 자신에게 무조건 주어진 이 영광을 무엇으로 감사할 것이냐? 여러분은 얼마나 감사를 드렸습니까? 그리고 여러분이 구원받을 수 있게 해 준 그 은혜에 대해 환희의 모습을 갖추어 가지고 천지에 승리를 다짐할 수 있게 된 자신이란 것을 얼마나 생각해 보았습니까? 무한한 소망을 가지고 무궁한 가치를 지니고 재출발 한다는 생각을 얼마나 해 보았습니까? 이것이 문제입니다.

그러면 아버지께서는 어떠하셨느냐? 아들딸을 찾아 나오신 아버지의 역사적인 소원이 이 땅에 오시는 참부모를 통해서 이루어진다는 것을 아시는 아버지께서 그 참부모를 얼마나 동경해 오셨던가! 그런데, 아버지께서 동경하시는 그 기준과 사망세계에 있는 여러분이 구원을 받기 위하여 동경하는 기준을 비교해 본다면, 우리는 아버지보다 더 소중히 생각하고 아버지보다 더 귀하게 여기고 아버지보다 더 가치있게 느껴야 할 텐데도 불구하고 지금까지 그러지 못했습니다. 그러한 우리 자신들이라는 것을 생각해 볼 때 우리는 반성해야 되겠습니다.

아버지와 함께할 수 있고, 아버지와 인연맺어질 수 있고, 아버지와 상봉할 수 있는 자리를 인간이 기대하듯, 하나님도 얼마나 기대하시겠습니까? 그런 자리를 내가 가겠다고, 그런 승리의 기반을 내가 닦겠다고 할 수 있어야 합니다. 어떠한 어려움이 있더라도 그 어려움을 극복하고 그 자리를 내 모든 생애의 가치를 좌우하는 전환점으로, 또 그 인연을 내 생애의 원동력으로 만들겠다고 얼마나 다짐했느냐가 중요합니다. 이런 견지에서 볼 때에, 오늘날 우리의 신앙의 자세가 얼마나 거짓되고, 흘러가는 바람결처럼 자리를 못 잡고 방황했는가 하는 사실을 깨달아야 되겠습니다.

아버지와 함께할 수 있는 우리들이 되어 있느냐? 아버지께서 함께할 수 있는 내가 되어 있느냐 하면 그렇지 않다는 것입니다. 구주가 필요하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그 구주는 어떤 분이냐? 참부모의 인연을 갖춘 분입니다. 이렇게 볼 때 이 참부모의 인연이 얼마나 놀라운 인연입니까? 참부모로 말미암아 내 참다운 일생이 시작되는 것이요, 새로운 생명의 인연이 출발되는 것입니다. 이 생명의 인연으로 말미암아 새로운 가정이 출발되는 것이며, 새로운 우리의 사회와 국가와 세계가 출발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2천년의 모든 생사의 길을 해결지을 승리의 요건이 시작된다는 사실을 여러분이 다시 한번 깨달아야 되겠습니다.

거기에는 내가 없는 것입니다. 하나님도 타락한 세계를 구하기 위해 수난의 길을 걸어와야 할 분이 아닙니다. 타락한 세계를 대해야 할 하나님이 아닙니다. 새로운 사랑의 인연을 들고 나오시는 분입니다. 새로운 희망과 새로운 복귀의 터전을 마련해 가지고 오시는 분입니다. 그러한 자리에서 아버지와 나와의 인연이 맺어지는 것입니다. 사방이 일치화될 수 있는 인연이 한 기점에서 연결되어 가지고 사망의 세계를 폭파하고 새로운 광명의 천주의 기반을 갖게 되는 것입니다. 이렇게 부모와 자식간의 인연이 실현됨으로 말미암아 세계는 새로운 출발을 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31-76
승리의 결정적 기반이 되는 참부모
참부모와 여러분과 맺어진 인연은 그 어떠한 칼이나 어떠한 권력을 가지고도 끊을 수 없고 사탄의 힘으로도 끊을 수 없습니다. 왜? 이 인연은 순간적인 오늘의 모든 문제를 돌파하여 인간들을 구할 수 있는 승리의 특권을 갖고 있는 인연이요, 인간들이 역사적으로 소망해 온 힘이 결집되어 있는 본거지이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어느 한 시대적인 힘을 결집시켜 가지고는 역사적인 힘이 결집된 이 관계를 끊을 수가 없는 것입니다. 이렇게 모든 악한 것을 제거하고 새로운 인연을 갖추어 승리의 출발을 하기위해 하나님이 역사적인 제물로 내세운 분이 참부모라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지금까지 기도하는 가운데 그냥 천국에 와 있는 것과 같은 입장에서 아버지를 불렀지만, 아버지가 심각한 자리에 계시고 아버지가 딱한 사정에 계시듯이 나도 딱한 사정에 있어야 하고, 서로서로가 마음에 표현은 못하지만 아버지의 딱한 사정이 나의 사정으로 느껴져야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아버지, 내게 어떠한 슬픔이 있더라도, 어떠한 어려움이 있더라도 걱정 마시옵소서’라고 하면서 자식으로서의 도리를 다해 위로해 드릴 수 있어야 합니다. 그러한 한 사람이 이 땅 위에 나오지 않고는 역사적인 문제를 해결할 길이 없습니다.

우리는 지극히 어려운 입장에 서더라도 하나님 앞에 동정을 바랄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동정해 드릴 수 있는 입장에 서야 합니다. 그러한 인연을 따라 역사시대를 거쳐서 쌓고 쌓아 나온 결정체가 예수님이었습니다. 그렇지만 예수님이 뜻을 이루지 못했기 때문에 다시 오시는 주님이 그 뜻을 이루어야 합니다. 그리고 다시 오시는 주님이 가야 할 길도 그 길입니다. 즉, 참부모의 길입니다. 참부모는 역사적인 소원의 집약체입니다. 하나님이 전체를 대신한, 역사적인 조건적 실체로 내세운 분이 참부모인 것입니다.

31-77
아버지와 인연이 맺어지는 자리
이제 앞으로 여러분은 막연하게 기도해서는 안 되겠습니다. 타락한 인간은 하나님 앞에 직접 갈 수 없습니다.

이런 의미에서 볼 때 하나님도 여기에 응해야 되고, 인류도 여기에 응해야 되고 해결 기점도 여기에 응해야 되는 것입니다. 이 3자가 일치될 수있는 기점이 참부모라는 것입니다. 참부모에게는 하나님의 사랑이 깃들어 있습니다. 지금까지 우리가 생각도 하지 못하고, 꿈에도 생각할 수 없었던 그러한 하나님의 사랑이 깃들어 있습니다. 하나님의 사랑을 중심삼고 부자의 인연이 연결되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여러분이 기도하는 데에 있어서는 하나님을 직접 부를 것이 아니라 참부모를 통해야 됩니다. 여러분이 기도할때 마지막에 참부모의 이름으로 기도한다고 하는데, 그것이 간단한 것이 아닙니다. 습관적으로 느끼는 그런 간단한 내용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러면 참부모는 어떻게 사랑하기를 바라겠습니까? 역사적으로 사랑하지 못했던 것을 해원하고 싶은 역사적인 소원의 진액을 집약시켜서, 수난길을 몸부림치며 싸워 찾아 나온 그 모든 해원성사의 마음을 다 뽑아 가지고 흠뻑 취하여서 사랑하기를 바라십니다. 또, 그 사랑 가운데에 한번 흠뻑 빠져 들어가고 싶은 것이 오늘 타락한 인간의 절대적인 소원이라고 하겠습니다.

그리고 그러한 내용이 이루어지는 하나의 기점은 천상이 아니고 지상이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지상에서 새로운 천지가 벌어진다는 것을 여러분이 알아야 됩니다. 참부모와의 인연은 영계와 같은 막연한 세계에서가 아니라 지상에서부터 연결된다는 것입니다. 참부모는 실체를 갖추어 지상에 오신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참부모는 내가 부르면 대답을 할 수 있고, 내가 어려운 자리에 있으면 동정해 줄 수 있는 것입니다. 이렇게 평면적인 도상에서 참부모를 만날 수 있다는 것은 인간들에게는 얼마나 복된 일인지 모릅니다.

하나님은 지금까지 역사시대에 어떠한 어려움이 있었어도 그 모든 것을 극복하여 이런 내용을 중심삼고 결정적인 승리를 하려고 하셨던 것입니다.

그런데 나 자신을 놓고 볼 때 내가 하나의 승리의 왕자가 되느냐 못 되느냐 하는 것이 문제가 됩니다. 그 심정 앞에 일체가 되어서 뗄래야 뗄 수 없는 나 자신이 되었다고 할 수 있어야 됩니다. 다시 말하자면, 아버지와 같이 있다고 하는 신념, 참부모와 더불어 있다고 하는 신념이 여러분의 생애 노정의 축이 되어야 합니다. 그래서 여러분이 가는 방향에서 동요함이 없이 천년 만년 지탱할 수 있는 자아가 되어야만, 지상천국과 천상천국이 연결되는 것입니다. 곧, 천상의 주인으로 임하는 것이요, 지상의 주인으로 임하는 것입니다. 여기서 비로소 천상천국과 지상천국이 열리는 것입니다.

이러한 관점에서 볼 때, 이러한 인연은 편안한 자리에서 맺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제일 극난한 자리, 그 이상 없는 심각한 자리, 죽느냐 사느냐 하는 와중, 가일층 모험하는 자리에서 맺어지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성경을 보면 `죽고자 하는 자는 살고, 살고자 하는 자는 죽는다’고 하였습니다. 이것은 예수님이 시대착오적인 말을 한 것 같지만 이렇게 사는 것이 복귀의 길을 가는 데에 있어서, 심정의 세계를 밟아가는 데 있어서 정상적인 자세요, 정상적인 태도라 하겠습니다. 이러한 경지를 추구해 가는 자신임이 분명할진대, 그 길은 참된 노정이 되는 것입니다.

31-79
선생님의 책임
여러분, 오늘이 4월 19일인데, 4·19의거가 일어난 때가 10년 전이지요? 이 나라가 수난의 길을 걸어온 지난 10년을 놓고 여러분에게 한 가지 말하고 싶은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우리 통일교회가, 또 선생님이 지금까지 세계사적인, 천주사적인 책임을 짊어지고 나오면서 고심하던 것이 무엇이냐면, 이 민족과 기성교회와 우리가 하나되는 그 한날을 어떻게 맞을 것이냐 하는 것이었습니다. 이 민족과 기성교회와 우리는 하나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지금까지 복귀섭리에 있어서 하나님이 시대적 사명을 짊어진 사람들을 보낼 때는 항상 어떻게 기성종교와 나라를 수습하여 하나되는 기점을 세울 것이냐 하는 것이 문제였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으로부터 보내심을 받은 사람들은 언제나 기성종교로부터 핍박을 받았습니다. 또는 기성세력으로부터 핍박받았습니다. 그러면, 신흥종교가 그 기성종교로부터 핍박받지 않을 수 있는 길은 무엇이냐? 기성종교 앞에 환영받을 수 있는 하나의 방향을 모색해 주어야 됩니다. 그래서 하나되어야 합니다. 그러한 자리에 서지 않고는 기성세력이나 기성주권 앞에 절대로 환영받을 수 없습니다.

우리 통일교회도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기성교회가 우리를 환영했더하면, 우리는 기성세력을 무난히 흡수할 수 있었습니다. 기성세계를 무난히 흡수할수 있었다는 것입니다. 간단한 것입니다. 말로는 몇십 초 이내에 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 내용은 역사가 증명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중심삼고 이스라엘 나라와 유대교가 예수님과 하나되어 예수님의 길을 따라갔더라면, 오늘날 이 세계는 이같이 되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또한, 예수님은 십자가에 죽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리고 기독교는 죽음의 길을 이어나오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러면서도 2천년 동안에 세계를 이렇게 발전시켜 놓았는데 예수님이 죽지 않고 뜻을 이룰 수 있는 기반을 닦아 놓았더라면, 세계가 얼마나 빨리 복귀되었을 것인가. 당시에 로마를 굴복시키고도 남았을 것입니다.

이러한 관점에서 볼 때, 선생님도 역시 큰 사명을 짊어지고 있습니다. 선생님도 가인을 굴복시켜야 됩니다. 기독교가 바로 선생님의 가인의 입장에 있습니다. 기독교와 하나된 입장에서 보면 가인의 입장에 있는 것이 이방종교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기독교와 이방종교와 나라를 목표로 해서 가야 합니다. 이방종교를 규합해 가지고 아벨의 입장에 선 다음에 국가를 규합해 가지고 나가야 합니다. 이것이 그때에 예수님이 해결해야 할 사명이었습니다. 마찬가지로 오늘의 선생님에게도 똑같은 책임이 있습니다.

그런데 국가는 물론이요, 전체의 종교가 반대했습니다. 옛날의 요셉과 같은 입장, 죽으라고 원수에게 팔아 넘겨진 것과 마찬가지의 입장, 백방으로 길이 막혀진 입장에 섰었고, 한군데도 뚫린 데가 없이 사방을 다 밀폐해 버리고 뚜껑을 해 덮어 내리누르는 것과 같은 운명길을 갔습니다. 그러한 이 나라 이 땅 위에서는 살 길이 없으니 딴 곳으로 가야 했던 것입니다. 예수님이 태어날 때의 운명이 그러하였고, 자랄 때도 그랬고, 그의 생애 전체가 그랬습니다. 사방을 막고 뚜껑까지 덮어 가지고 내리누르는 것과 같은 입장에 처하기 때문에 감쪽같이 피신하지 않으면 안 되는 운명길을 가야 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복귀를 책임지고 왔다 갔던 사람들이 가는 길이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죽음의 길이 편하냐, 이 길을 가는 것이 편하냐를 두고 볼 때에, 뜻을 성사해야 된다는 문제를 제거한다면 오히려 죽음길이 편하다는 것입니다. 살 길보다 죽음길이 편하다는 것입니다. 그렇지만 짊어진 책임이 있기에 죽을래야 죽을 수 없습니다. 죽으래야 죽을 수가 없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정성을 얼마나 들여야 되겠는가? 죄악 역사의 수많은 사탄과 격투를 해야 됩니다. 촌음도 방심할 수 없는 자리에 서서 해방의 문을 열기 위해 필생의 힘을 경주하여 틈을 넓혀 가야 됩니다. 복귀의 책임을 짊어진 사람들은 그렇게 걸어왔다는 것입니다.

31-81
초교파 운동은 원수를 사랑하자는 운동
여러분의 입장이 그렇다는 거예요. 아직도 반대받는 우리 통일교회는 이 민족 앞에 겹겹이 싸여 있습니다. 오늘날 국가가 우리를 반대하고 있고, 모든 종교가 그러하고, 수많은 가정이 그러하고, 수많은 개인이 그러하여 어디에 얼굴을 들고 마음놓고 갈 수도 없고 볼 수도 없는 입장입니다.

이런 입장에서 뚫고 나가야 합니다. 그러니 거지의 입장에서부터 출발해야 됩니다. 친구가 누구냐? 전부다 세상 사람들로부터 눈밖에 난 사람들입니다. 눈밖에 난 사람들 외에는 우리와 더불어 출발할 사람이 없었습니다. 이렇게 우리들은 수난의 길을 걸어 나왔습니다. 이 길은 얻어먹는 길에서부터 출발했다는 것입니다. 남루한 옷을 빌려 입는 자리에서부터 출발했다는 것입니다. 거지의 가정에 찾아 들어가 귀하다는 옷을 선물로 받아 입고, 어서 내 대신 싸워 달라는 부탁을 받고 나온 대표자로서 나서서 걸은 걸음이 지금까지 이 길을 개척해 나온 걸음이 아니겠습니까! 오늘날 통일교회는 지금까지 수십년의 역사를 거쳐왔지만 갇힌 자와 몰리는 자들의 편에 서서 싸워 나왔습니다.

그러면 최후의 문제는 무엇이냐? 우리들이 원수를 찾아가서 복귀시키는 것입니다. 수난을 당하던 역사적인 그 모든 한을 풀 수 있는 만반의 준비를 해 가지고, 한 칼을 높이 뽑아 들고 원수들을 찾아나서는 우리들이 되어서는 안 됩니다. 그럴 수는 없는 것입니다. 우리는 그 원수앞에 복수심을 가졌던 것을 버리지 않으면 안 됩니다. 이것이 복귀의 길을 가는 사람들이 취해야 할 입장입니다.

그러면 지금까지 놀아나던 그 원수들은 기진맥진하여 안팎으로 몰리게 됩니다. 원수들은 이제 갈래야 갈 수 없고, 피할래야 피할 수 없는 절박한 궁지에 몰리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리하여 옛날에 쫓김받던 사람과 쫓는 사람의 자리가 바뀌는 것입니다. 주객이 전도된다는 것입니다. 그와 같은 시점에서 출발해야 합니다. 그래야 그러한 개인, 그러한 가정, 그러한 사회, 그러한 교파가 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렇게 나가고 있는 것이 지금의 한국의 실정입니다. 그러한 때가 올 것을 알았기 때문에 지금 초교파 운동을 벌이고 있는 것입니다.

초교파 운동은 모든 교회를 때려잡자는 운동이 아닙니다. 원수들을 만났으니 복수를 해야 되겠다는 것이 아닙니다. 이것은 그들을 구해 주기 위한 것입니다. 그 옛날에 동생을 쳐 죽인 인연을 복귀해야 합니다. 즉 가인을 복귀해야 합니다. 아벨이 잘못 치면 또 망하는 것입니다. 사랑으로 품어 주어야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통일교회 운동입니다. 그래서 선생님이 빚을 지면서까지 그 운동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종교를 어떻게 규합하느냐 하는 것이 문제입니다. 이것이 우리의 과제입니다. 여기에는 여러분이 모르는 고충이 있는 것입니다. 거기에 돈이 필요하게 되면 내가 빚을 져서라도 발판을 닦아야 됩니다. 그리고 나의 자녀를 사랑하기 전에 그들을 사랑으로 굴복시켜야 합니다. 그러지 않고는 나의 자녀를 사랑할 수 없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사랑하는 자식을 뒤로 하고 원수를 위해 주어야 됩니다. 나의 자식보다도 원수를 더 사랑했다는 입장에 서야 합니다. 그러면 사탄이 그렇게 한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에 대해서 반박을 하겠거든 하나님이 사랑하던 거와 같이 네 아들딸을 사랑하라는 조건이 사탄에게 제시되는 것입니다. 사탄이 자기권내에 있는 아들딸을 진실로 사랑하게 되면 하나님 편으로 돌아가야 됩니다. 진실로 사랑하는 날에는 하나님께로 돌아간다는 것입니다. 본심의 작용이 끌고 간다는 것입니다. 해방의 문이 열리는 것입니다. 통일교회는 지금까지 이것을 위해 노력해 왔습니다.

여러분이 알다시피 우리 교회는 지난 4월 15일을 기해서 종교협의회에 가입하였습니다. 물론 우리가 종교협의회를 만드는 데 많이 노력했지만 여기에는 7대 종교가 가입해 있습니다. 이 과정에서 처음에 3개 종파가 분열되었습니다. 그래도 우리는 반대하겠으면 반대하라는 식으로 쭉 끌고 나오다 보니 반대했던 종파들 전체가 돌아오게 됐습니다. 그래서 7대 종교와 인연을 맺게 되었고, 우리 교회는 여덟번째로 들어가게 됐습니다.

이것이 이번 1970년 4월 15일 오후 4시에서부터 6시 사이에……. 우리는 이 협의회를 어떤 일이 있어라도 부각시켜서 이 협의회를 통해 대사회 활동을 전개시켜 나가야 되겠습니다.

31-83
새로운 출발을 아버지와 함께
4월 16일은 우리 통일교회와 경기도가 수택리 중앙수련소의 준공식을 중심삼고 상봉하는 새로운 한때를 맞이할 수 있었습니다. 본래는 17일이 부활절이기 때문에 그날 준공식을 하려고 했습니다. 그런데 그 일을 중심삼고 기도하는 중에 16일에 해야 된다는 것을 알아 가지고 부랴 부랴 16일에 했습니다. 알고 보니 하나님은 이렇게 하루를 두고 외적 내적으로 즉 나라와 교회와 만나게 하셨습니다. 그런 다음에 부활절을 맞이하였습니다. 모든 것이 이렇게 들어맞을 수 있는 한 기간이 우리 교회 역사에 있었다는 사실은, 이것이 세계사적인 기간이었다는 것을 말합니다. 선생님은 그렇게 보았습니다.

그런데 이번 부활절에 일본 식구들에게 말씀을 해 주었습니다. 원래는 그전에 간다는 것을 내가 못가게 해 가지고 동구능에 데리고 가서 얘기를 해 주었습니다. `오늘은 이러한 날이다’하는 것을 역사적으로 비판하고 분석해 가면서 얘기를 쭉 해 주었습니다.

이러한 때가 우리에게 왔다는 사실은, 대한민국과 여러 종파와 70년대를 맞아 하루 이틀 사흘 기간에 모일 수 있는 인연이 갖추어졌다는 것은 놀라운 일입니다. 결국 하나님은 수리적인 하나님이요, 원리적인 하나님임을 말해 주는 것입니다. 또, 그날의 사흘 후가 오늘인 4월 19일입니다. 그리고 내일 4월 20일을 중심삼아 가지고는 특별수련회가 개최됩니다.

지금까지는 4월이 수난의 기간이었습니다. 4월, 5월, 6월은 언제나 핍박의 달이었습니다. 통일교회에게는 공식적이었습니다. 이 기간 중에서도 4월은 더욱 수난의 달이었습니다. 그러나 이제 4월 20일 이후 역사적인 새로운 소망의 세계가 도래합니다.

그런 의미에서 볼 때, 오늘 아침에도 얘기했지만, 이제 우리가 돌보아야 할 것은 우리 자신입니다. 여러분은 재물과 더불어 가려 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사랑하는 사람과 더불어 가려고 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물론 그것도 필요하겠지만, 재물과 더불어 가려고 하기 전에 아버지와 함께 가려고 해야겠고, 사랑하는 사람과 가려고 하기 전에 아버지와 함께 가려고 해야 되는 것입니다. 여기서부터 새로운 출발이 벌어지게 됩니다. 통일교단에서부터 새로운 출발이 벌어집니다.

아버지와 함께 가자는 것이 선생님의 생활철학의 기초입니다. 그래서 오늘 여러분에게 `아버지와 함께’라는 제목으로 말씀을 하는 것입니다. 아버지와 함께, 아버지와…….

그 아버지와 함께 가다 보니 한 순간이나마 수많은 종교와 나라와 더불어 만날 수 있었던 것은 나로서는 넘어가야 할 고개를 넘은 것입니다. 여러분도 그럴 수 있는 자신이 되어야 합니다. 그렇지 못한 입장에서 하나님 앞에 인정받으려 하고, 공인받으려 하는 것은 이중의 수치라는 것을 여러분이 알아야 되겠습니다. 그래서 그야말로 아버지와 함께 새로운 출발을 할 수 있어야 합니다. 참부모의 인연을 중심삼고 천지를 조화시켜서 새롭게 출발해야 되겠습니다.

여러분이 기도할 때도 선생님의 심정을 통해서 기도하려고 하면 하늘이 도와줍니다. 이것이 제일 빠른 길입니다. 그와 더불어 몸부림치고, 그를 대할 때에 내 가슴이 녹아지고, 그의 사연을 생각할 때 죽음도 개의치 않고 나설 수 있는 마음이 생기는 것입니다. 여러분이 이런 마음을 가지고 움직인다면 세계를 요리할 수 있는 문이 열린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이것이 오늘날 이 땅위에 살고 있는 우리들에게는 하나밖에 없는, 역사 시대에 그 누구도 가질 수 없었던 귀한 선물 중의 선물이요, 생명의 원천인 것을 여러분이 알아야 됩니다.

31-84
기 도
아버님, 흘러간 역사를 생각하게 될 때에, 그 누구도 헤아릴 수 없는 당신의 사연을 더듬으면서, 지금까지 굶주리고 쫓기는 신세를 피하지 않고 그 인연을 따라 이날까지 남아지게 된 것도 당신의 수고와 은덕으로 말미암은 것임을 알게 되었습니다.

오늘의 통일교회가 있는 것은 당신이 살을 찢고 뼈를 깍아 희생한 대가인 것을 기억해야 되겠사옵니다. 오늘 통일교회가 지닐 수 있는 품위가 있다면, 그것은 수많은 선지선열들이 흘린 피의 대가인 것을 알아야 되겠사옵니다. 그것을 생각할 때에 몸서리가 쳐지는 이 자리인 것을 느끼게 되옵니다. 그러기에 지금까지 몸부림쳐 왔고, 참고 참아왔고, 하고 싶은 말을 하지 않고, 혀를 깨물어 튀쳐 나오는 말을 막으며 통분의 역사시대를 거쳐 나왔사오나, 아버지, 보잘것없는 저희를 품기 위해 찾아오신 아버지의 그 수고 앞에 그 무슨 할말이 있겠사옵니까?

`아버지시여, 할 수만 있으면 이 잔을 내게서 지나가게 하시옵소서’라고 기도하던 예수님의 그 비참한 자리가 오늘 우리의 자리인 것을 느끼옵니다. 비록 힘든 자리에 간다고 할지라도 아버지 앞에 인정받을 수 없는 자신을 발견한 그날부터 지금까지, 아버지 앞에 온전히 저희의 모습을 드러내어 담판짓지 못하고 기도하지 못하는 입장에서 나왔습니다. 하오나 당신이 저희 대신 막아 주시고 싸워 주신 것을 생각하게 될 때에, 아버지 앞에 감사를 드릴 뿐이옵니다.

아버지, 이제 대한민국을 사랑하여 주시옵소서. 대한민국의 내적인 사명을 하여야 할 수많은 성도들을 사랑하시옵소서. 그들이 통일교회 앞에 하나되어 통일교회와 손을 잡고 형제의 인연을 맺은 것을 자랑하고, 같은 민족이라고 자랑할 수 있는 자리에 선 것을 볼 때에, 이때는 아버지께서 찾아와 주셔서 한때를 맞는 역사적인 봄절기인 것을 알고 있사옵니다. 지금까지 꽃을 피울 수 없는 사연이 있었다는 사실을 놓고 볼 때에, 금년의 이때가 피울 수 없었던 꽃이 피는 봄절기인 것을 연상하게 되옵니다. 당신의 경륜과 더불어 활짝 피어날 수 있고, 참의 향기가 풍길 수 있는 봄날이 삼천리 강산에 찾아오게 허락하여 주시옵소서.

만민의 마음 가운데 새로운 봄을 맞을 수 있는 거룩한 자세를 갖추게 하시어서 이 민족과 수많은 종단들이 아버지를 향하여 저희와 함께 나아가게 하여 주시옵소서. 이 70년대를 그러한 기간으로 받아 주시옵기를 간절히 바라옵고 원하옵니다. 이 기간을 사탄세계를 대하여 영원한 승리를 했다는 기간으로 세워 주시옵길, 아버님, 간절히 바라옵고 원하옵니다.

이제 내적인 제2의 4·18의거를 필요로 하는 이 민족에게 해방의 한날을 허락해 주시옵고, 내적인 제2의 5·16혁명이 필요한 이 민족에게 해방의 한날을 허락해 주시옵소서.

저희들이 가야 할 길 앞에 당신의 보호를 바라기에 앞서, 저희들이 당신을 위하여 충효의 도리를 할 것을 다짐하고, 죽음의 길을 가기 위해 스스로를 잊어버릴 줄 아는 아들딸의 모습이 되지 않으면 안 된다는 사실을 확실히 알게 하여 주시옵소서.

그리하여 이 70년대를 힘차게 맞아 그 무엇에도 지침 없이 수난의 길에서 승리하겠다고 다짐하고, 그 누구보다도 내가 이것을 책임지겠다고 솔선수범하여 하늘의 상을 받을 수 있는 아들딸이 되게 허락하여 주시옵소서. 아버님이 무조건 사랑을 주었기 때문에, 무조건 그 위업을 받아야 할 저희들은 무조건 자기의 생명을 던지지 않으면 안 된다는 사실을 알고 나설 줄 아는 당신의 아들딸이 되게 허락하여 주옵길 간절히 부탁드리고 원하옵니다.

아버지, 오늘 이 하루를 축복하여 주시옵소서. 삼천리 반도에 있는 자녀들, 세계에 널려 있는 자녀들, 뜻을 위하여 외로운 자리에서 온갖 풍상을 겪어 가며 선교의 책임을 짊어지고 있는 그들을, 아버지, 나를 지키시듯 지켜 주시옵소서.

하늘과의 깊은 인연을 갖고 있기 때문에, 그들은 정녕 망하지 않는다는 것을 내가 알고 있사옵니다. 내 마음 가운데 아버님이 임하여 왕래하는 그 오고 가는 두터운 인연이 가중될수록 민족 해방의 터전이 넓혀질 것이라고 생각하게 될 때, 이제 70년대로부터 통일의 역군을 부르시옵소서. 여기에 세계적인 `승리적 통일전선’을 펼치시옵소서.

하늘의 정병들을 모집하여야 할 때는 되었사옵니다. 거룩한 승리를 찬양할 때도 되었사오니, 당신이 뜻하신 경륜과 더불어 받아 주시옵길 간절히 부탁드리옵니다.

아버지, 지금까지 보호해 주신 것을 감사하옵니다. 같이 싸워 주신 것을 더욱 감사드리옵니다. 이 자리에 남게 하여 주신 것을 또한 감사드립니다. 이제야 말로 저희가 아버지께 효성을 할 수 있는 때가 오도록 허락하여 주시옵소서.

자기의 혈족을 거느리고 아버님이 추구하신 환경을 찾아 놓고, 또다시 저희가 아버지 앞에 효도할 수 있는 한날을 그리워한다는 것을 당신이 알고 있을 줄 아옵니다. 탕감의 사연 가운데 있어서 그늘 아래 사는 사나이가 되어서는 안 될 것을 알고 있사옵니다. 아버지, 그럴 수 있는 환경과 그럴 수 있는 조건으로 지금까지 아버님을 슬프게 만들었던 사탄세계를 칠 수 있는 때가 온 것도 알고 있사옵니다.

나로 말미암아 수많은 사람이 채찍을 맞고, 원수의 철망과 올무 가운데 갇혀 있는 사람이 있을까를 염려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아버지, 이제 선악을 분별할 수 있는 때가 왔음을 알고 있사옵니다. 양지가 변하여 음지가 되었던 타락으로 인한 원한이, 이제 그 음지가 변하여 양지가 될 수 있는 최후의 한날이 우리 통일시대 앞에 가까이 온 것을 생각할 때, 저희는 아버지께 효도하기 위해서 피눈물을 개의치 않고 계속 충성을 해야 되겠사옵니다.

탕감복귀 도상에서의 수고가 아닌 기쁨과 소망에 넘치는 내일을 위한 수고를 해야 할 날이 저희 앞에 다가오고 있기 때문에 또다시 바쁜 길을 가겠다고, 이러한 생애를 살겠다고 약속하는 이 시간 되게 허락하여 주옵기를 간절히 부탁드리고 원하옵니다.

남아진 생애를 아버지 앞에 드리오니 후손들이 당신의 품에 품길 수 있는 자유의 천국으로 당신이 직접 인도하여 주옵기를 바라옵니다. 저희의 모든 것을 맡기오니 맡아 주시옵소서. 참부모의 성호 받들어서 아뢰었사옵나이다. 아멘.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