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1-25 to 31-56: 개척자의 길

개척자의 길
1970.04.12 (일), 한국 전본부교회

31-25
개척자의 길
[기 도]

지금까지의 수많은 인간들은 역사노정을 거쳐오면서 방향도 모르고 흘러왔습니다. 이 땅을 거쳐간 선지선열도 한의 노정을 남기고 갔다는 사실을 알게 되옵니다. 그런 가운데서도 아버지의 사랑의 마음을 붙들고 아버지의 사정과 더불어 가야 할 인간들이었지만 그런 인간들이 없었다는 사실을 알게 될 때, 아버지의 입장은 고통을 피할 수 없는 입장이요, 땅 위에서 그 무엇을 잃어버린 것 이상의 처량한 모습이 아닐 수 없다는 사실을 저희들이 깨닫게 하여 주시옵소서.

아들을 잃어버린 서러움을 당하지 않은 사람은 아들을 잃어버린 부모의 마음을 알 수 없는 것이요, 딸을 잃어버린 서러움을 당하지 않은 사람은 딸을 잃어버린 부모의 서러움을 헤아릴 수 없는 것입니다. 그러지 않고도 `아버지여! 나를 부르시옵소서’하는 자식이 되어야 되겠사옵니다. 그런 생각, 그런 자식을 잃어버린 서러움은 일시에 사라지는 것이 아니옵니다. 그것은 흘러가는 것이 아니라 세월과 더불어 이 땅 위에 남아진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아버지께서는 그런 딱한 사정에 얽매여 가장 비참한 자리에 계신다는 것을 느끼게 되옵니다.

오늘날 이 땅에는 아버지를 따르고 믿는다는 사람이 많사옵고, 아버지를 모신다는 종교는 많사오나, 그 아버지와 더불어 살기를 바라고 아버지와 고통을 같이하기를 바라는 자는 없사옵니다. 자기의 모든 고통을 아버지에게 넘겨 주고 자신은 고통으로부터 해방된 자리에서 아버지를 모시겠다는 이런 철없는 마음을 갖고 종교를 믿고 있는 무리가 많은 것을 저희들은 잘 알고 있습니다. 저희들은 그와 같은 무리가 되어서는 안 된다는 것을 이 시간 다시 한번 깨닫게 하여 주시옵소서.

아버지의 상한 마음을 붙들고, 아버지의 목을 끌어안고 아버지를 위로 할 수 있는 아들이 어디에 있었습니까? 그러한 딸이 어디에 있었습니까? 이런 것을 생각하게 될 때, 아버지는 외로운 분, 불쌍하고 처량한 분, 어느누구에게도 의지할 수 없는 마치 막바지 가을절기와 같은 자리에 계신 아버지요, 절망의 기로에서 그 누구도 동정하지 않는 처절한 자리에 계신 아버지요, 생사가 엇갈리고 피를 토하는 그런 비통하고 억울한 자리가 바로 아버지가 처해 있는 자리가 아니겠느냐고, 그 누가 묻더라도 그렇다고 대답할 수밖에 없는 아버지인 것을 저희들이 알게 되옵니다. 그 아버지의 아들이 되고 딸이 되겠다고 자처하는 무리가 이 땅에 있어야 하겠습니다. 아버지를 대함에 있어서 눈물없이 대할 수 없는 것을 알고 나가야 할 것이 자녀의 명분을 갖추고 가는 모습이 아니겠사옵니까?

진정으로 아버지의 마음을 알고 뜻을 알아서 앞으로 주어진 사명을 완수하기 위해 준비하는 자녀와 현재의 자리에서 아버지가 처한 입장을 대신하여 해결방안을 찾는 자녀를 대하여 명령하고 싶은 아버지의 마음이 있다 할진대, 그렇지 못한 인간을 볼 때 얼마나 비참하고 처절하옵니까? `얘 아무개야 아무개야 이 일을 어쩌면 좋으냐’ 하시면서 이 일을 감당하고, 이 일을 원수와 싸워 승리하여 해결지어야 할 한 사람을 이 땅 위에서 찾지 못한 불쌍한 아버지를 이 시간 저희들이 위로해 드려야 하겠습니다.

그 아버지 앞에 승리의 이념을 세우겠다고 다짐하는 그런 무리가 땅 위에 있었사옵니까? 못다 이룬 하늘의 뜻을 이루어 내기 위해 원수의 세계에서 십자가를 지고 선두에 서서 싸우는 하늘의 용사와 아들딸들이 있사옵니까? 역사시대에 이러한 일을 감당할 수 있는 무리가 없었사옵니다. 이제 이를 감당할 수 있는 무리가 통일의 무리인 것을 아옵니다. 이를 바라보는 당신의 소원이 이들과 같이하지 않을 수 없는 입장이요, 당신이 소망하시는 그 나라가 이들과 같이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을 알게 될 때, 아버지가 얼마나 불쌍한 분인가를 다시 느끼게 되옵니다.

그 일을 인간들에게 맡기시고 바라보시며 안위의 한 날, 사랑의 한 시간을 가질 수 없는 아버지의 신세가 얼마나 처량하고 불쌍하신 처지였겠습니까? 저희들은 그러한 과거가 있음을 알았사옵고, 그러한 현재와 그럴 수 있는 미래가 다가오고 있음을 알았기에 아버지 앞에 면목없는 모습들이나마 드러내기에 부끄러움을 느껴야 되겠사옵니다. 아들이라는 생각, 딸이라는 생각을 하면서도 아버지 앞에 자세를 갖추고 나설 수 없는 부족한 모습이요 불효의 모습이라는 것을 다시 한번 살필 줄 아는 자가 되어야 되겠사옵니다.

아버지, 저희들의 마음을 아시고 저희들이 가야 할 길을 지켜 주시옵소서. 저희들이 소망하는 그 나라를 찾으시옵소서. 이것이 당신의 목표요, 당신이 가야 할 길이라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여기에는 기관차와 같은 것이 있어야 되겠사옵고, 석탄과 같은 것이 있어야 되겠사옵고, 기관사와 같은 것이 있어야 되겠사옵니다. 그러나 이러한 길에서 지금까지 기관사가 되겠다는 사람은 많았사옵니다. 기관차가 되겠다는 사람도 많았사옵니다. 그러나 석탄이 되겠다는 사람이 없었사옵니다. 오늘날 저희들은 이 세 가지가 다 되어야 되겠사옵니다.

연료가 되어야 할 자기 자신을 어떻게 찾을 것이냐? 이 땅을 움직이기 위해서는 희생되는 연료와 같은 자녀들이 필요한 것을 알았사옵니다. 그 자체가 하나의 목적이 되어 방향을 알아 가지고 가는 기관차가 되어야 되겠습니다. 기관사가 되어야 되겠습니다. 그 누가 무엇을 가지고 이것을 감당할 것이냐를 생각할 때, 오늘날 암흑 같은 이 사망의 세계에 궤도를 깔아야 하겠고 그 궤도 위를 달려갈 기관차를 만들어야 되겠습니다. 또 한 기관사를 찾아야 되고 연료를 만들어야 하겠습니다. 이것이 통일교회의 사명인 것을 저희는 이미 알았사옵니다.

아버님, 여기에 같이하여 주시옵소서. 저희 자체가 궤도가 되어야 되고, 연료가 되어야 되고, 기관차가 되어야 되고, 기관사가 되어야 된다는 사실을 알았사옵니다. 이런 자리가 아버지와 하나될 수 있는 자리인 것을 알게 하여 주시옵소서. 아버지께서는 그러한 자리를 찾아오신다는 것을 저희들이 알아야 되겠습니다.

아버님, 사망의 세계에서 저희들이 가야 할 길을 닦기 위해 얼마나 수고하셨사옵니까? 준비한 궤도를 달려갈 수 있는 기관차와 같은 기독교를 세우기 위해 얼마나 수고하셨사옵니까? 여기에 인류의 희생과 피땀이 사무쳐 있다는 사실을 저희들이 망각하지 말게 하여 주시옵소서.

당신은 그것을 잊지 아니하시고 이 모든 것을 움직이시기 위하여 선각자를 보내셨사옵니다. 그러나 이 땅에 살고 있는 인간들은 그들이 이끄는 데로 가지 못하였습니다. 궤도는 궤도대로, 기관사는 기관사대로, 기관차는 기관차대로 갈라져 나왔다는 사실을 저희들은 알았습니다. 이제 이것을 규합할 수 있는 통일교단을 세우셨사옵니다. 그러니 저희 통일교단 가운데에는 아버지께서 갈 수 있는 궤도가 되어 있어야 되겠습니다. 연료가 저장되어 있어야 되겠습니다. 완전한 기관차가 되어 있어야 되겠습니다. 기관사가 되어 있어야 되겠습니다.

그리하여 이 모든 종교를 움직여 아버지께서 원하시는 목적지를 향하여 힘차게 달려갈 수 있는 통일교회가 되게 허락하여 주시옵기를 간절히 바라옵고 원하옵니다. 이 시간부터라도 내일의 목적지를 향하여 멈출 줄 모르고 달려가는 당신의 아들딸들이 되게 하여 주시옵기를 간절히 바라옵고 원하옵니다.

아버지, 한국과 일본을 기억하여 주시옵소서. 그리하여 연결시켜 주시옵소서. 오늘도 여기에 참석하지 않은 형제들의 마음에 싸움이 벌어지고 있사옵니다. 아버지, 지켜 주시옵소서. 기억하여 주시옵소서. 한국이 갈 길과 저희들이 갈 길을, 아버지, 지켜 주시옵소서.

저희들은 포로와 같은 입장에 놓여 있사옵니다. 저희들이 가야 할 운명길을 가기 위해서는 영육을 다하여 싸워야 할 것을 알고 있사옵니다. 또 다른 뜻 세계의 행로를 개척하지 않으면 안 될 운명길이 저희들 앞에 놓여 있사오니, 이 길을 다 갈 수 있게끔, 하늘이여! 힘을 가하여 주시옵소서. 간절히 바라옵고 원하옵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저희들이 제물된 자리에서 넘어가야 한다는 것을 알았사옵니다. 아버지께 모든 것을 맡기고, 모든 것을 의지하고, 모든 것을 다하고, 모든 것을 믿고 따라갈 줄 아는 당신의 자녀들 되게 허락하여 주시옵기를 간절히 바라옵고 원하옵니다.

오늘은 잊을 수 없는 한날이옵니다. 1960년도에 그날이 있음으로 말미암아 새로운 역사의 분기점을 마련할 수 있었고, 그 분기점을 넘을 수 있는 한날이 되었다는 사실을 생각할 때, 이날은 잊을 수 없는 역사적인 한 수난의 고비였던 것을 저희들은 알고 있사옵니다. 그때부터 만 10년을 맞는 오늘까지 당신이 얼마나 수고하셨습니까? 이제 다시 후반기를 맞는 70년대를, 아버지, 지켜 주시옵소서.

이 나라의 운명과 아시아의 운명이 직결되어 있다는 것을 아옵니다. 원수가 아무리 강하다 하더라도 그 원수의 팔다리를 꺾고 저희들의 갈 길을 마련해 주신 아버지를 저희가 아옵니다. 이래도 아버지를 믿고, 저래도 아버지를 믿고 오직 아버지의 뜻을 위하여 아버지와 일체를 이루어 행동하고 의논하면서 가는 길만이 저희들의 살 길인 것을 알게 하여 주시옵소서.

그러므로 저희들은 아버지와 하나되어야 되겠사옵니다. 저희들을 통하여 아버지는 안식할 수 있는 가정을 찾기를 바라시고 종족과 민족을 찾기를 바라시고 계신다는 것을 알고 있사옵니다. 지금까지 싸워 나온 당신의 자녀들이 지쳐 떨어지는 무리가 없게 하여 주시옵기를 간절히 바라옵니다. 통일교회 스승을 대하여 자기를 또다시 구원해 달라고 하는 불쌍한 무리가 없게하여 주시옵고, 이왕 나선 길, 그 걸음을 옮길 때마다 아버지와 더불어 가야 된다는 것을 알게 하여 주시옵소서.

저희들은 부모의 심정을 지니고 종의 몸을 쓰고 피와 땀과 눈물, 모든 것을 인류와 이 천주, 하늘땅을 위해서 이 길을 가겠다고 통일교회에 들어온 몸들이오니, 어떠한 기점에서 출발하였으며 어떠한 과정을 거쳐 어떠한 결과를 맺어야 하는가를 여기서 깨닫게 하여 주시옵소서. 저희들이 가야 할 방향에 어긋나 있거든 스스로 방향을 갖추어 가지고 희망찬 내일을 위해 달려갈 줄 아는 당신의 자녀들 되게 하여 주시옵기를 간절히 바라옵고 원하옵니다.

4월달, 저희들이 갖추어야 할 모든 준비를 다 해놓게 하시옵고, 이해에 저희들이 원리원칙을 중심삼고 행군하는 모든 곳을 지켜 주시옵길 간절히 바라옵니다. 금년에 아시아를 중심삼고 세계를 향하여 가야 할 길을, 아버지, 지켜 주시옵소서.

남아진 그날까지 저희들이 온갖 정성과 충성을 다바쳐 당신의 뜻을 이룰 수 있게 하시옵소서. 저희들이 가지고 있는 잘못된 것을 제거해 주시고 오로지 아버지의 뜻을 중심삼고 기쁨의 날만을 남기기 위해 일취월장(日就月將)할 수 있게 하여 주시옵소서.

1971년도까지 넘어가야 할 국가의 운명길이 남아 있고, 저희들이 넘어가야할 운명길이 남아 있는 줄 알고 있사오니, 아버지, 지켜 주시옵기를 간절히 부탁드리옵니다.

5월부터 저희들이 새로이 담판기도를 해야 되겠습니다.

아버지, 저희들에게 힘을 주시옵소서. 정성을 합하게 하여 주시옵소서. 아버지가 바라시는 제물된 자리에서 나라를 위하여 있는 정성 다 들이고 당신의 깊은 심정 가운데서 절대순종하는 아들딸이 되게 허락하여 주시옵기를 간절히 바라옵고 원하옵니다.

오늘은 거룩한 날이옵니다. 아버지, 이곳을 흠모하는 당신의 자녀들 위에 같이하여 주시옵소서. 더우기 남한 각지에 널려 있는 형제들과 일본, 미국, 독일을 중심삼고 세계 각국에 널려 있는 자녀들을 친히 기억하여 주시옵고, 아버지의 은사를 느낄 수 있는 자녀들 되게 허락하여 주시옵길 간절히 부탁드리옵니다. 모든 말씀 참부모의 이름으로 아뢰었사옵나이다. 아멘.

31-30
말 씀
사람들은 생활해 나가는 가운데서 어떠한 날도 우연히 맞는 날이 없습니다. 그러기에 보람있는 하루를 맞기 위해서는 아침이면 아침에 그날의 계획을 하고 그 계획을 실천해야 합니다. 계획을 실천하려면 자기의 뜻과 일치시킬 수 있는 환경을 가져야 합니다.

31-30
일생을 승리로 이끌려면
우리가 살고 있는 사회, 국가, 세계는 내 뜻에 부합되는 환경이 돼 있지 못하기에 여기에는 온갖 고충이 벌어지는 것이요, 선악의 분기점이 엇갈리게 된다는 것을 우리들은 알고 있습니다. 내가 나가고자 하는 그 방향을 따라서 어느누구도 나를 대신해서 가줄 수 있는 사람은 없는 것입니다. 백이면 백 사람 전부가 각기 자기 나름대로의 하루의 생활을 영위하기 위해서 환경과 투쟁하지 않으면 안 되고, 그 환경을 밀고 나가지 않으면 안 됩니다. 그러기에 아침에 계획한 하루의 일을 그 누구도 자신할 수 없는 것을 우리는 하루의 생활 가운데서 잘 느끼게 됩니다.

더우기나 그 환경이 자신의 하루의 생활을 가로막고 있는 것을 느끼면 느낄수록, 또 그 환경의 범위가 사회라든가 세계와 같이 크면 클수록 자신의 하루의 생활을 승리로 결과짓기 위해서는 그것에 비례해서 그 큰 기준을 넘어설 수 있는 결의와 추진력을 가져야 됩니다. 그러지 않고는 그날이 승리의 날이 될 수 없다는 것을 우리들은 일상생활에서 잘 느낄 수 있습니다. 그런 하루하루가 더해져서 한 달이 되는 것이요, 한 달 한달이 더해져서 일년이 됩니다.

그 한 달을 중심삼고 볼 때에, 한 달은 하루를 30번 더하면 한 달이 되지요? 그 한 달도 우리가 계획한 대로 살 수 있는 환경이 되어 있지 않습니다. 여기에서 우리가 한 달의 승리를 가져오기 위해서는 그 한 달의 환경에 갖추어진 복잡한 모든 사연들, 계획한 갈 길을 가로막고 있는 모든 여건들을 타파할 수 있는 추진력과 결의가 있어야 됩니다. 그것이 없어 가지고는 한 달의 계획을 승리로 끝맺을 수 없다는 것입니다.

또한 일년을 중심삼고 볼 때에, 일년은 열 두 달, 365일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이러한 일년의 승리를 다짐하기 위해서 어떤 목표를 그 해의 원단(元旦)에 정한 사람이 있다 할 때, 그 일년 동안의 모든 시련과 기타 사정을 헤쳐 나갈 수 있는 여건이 자기와 일치 안 되면 거기에 반발적이요, 배척적이요, 파멸적인 환경이 나타나게 됩니다. 이러한 일년을 밀고 나가기 위해서는 삼백 예순 날 이상을 극복할 수 있는 투지력, 혹은 추진력을 갖추어야 합니다. 그러지 않고는 일년을 승리로 장식할 수 없다는 것을 우리들은 잘 알고 있습니다. 이런 1년에 10년이 가해지고, 20년, 혹은 30년이 가해진 날들을 지나가고 있는 것이 우리들의 인생길입니다. 이것을 여러분이 알아야 됩니다.

31-31
누가 승리자라고 자신할 수 있는가
일년을 두고 볼 때, 거기에는 벗어날 수 없는 어려움이 그치지 않을 것입니다. 이런 일년과 마찬가지의 일생을 살아 가지고 `나는 이렇게 해서 승리했다’ 할 수 있는 날을 가졌느냐? 그런 사람이 역사상에 없었다는 사실을 알아야 됩니다. 성현이나 위인들도 그들이 자기들의 생애 가운데서 `내가 인류 앞에 개척자의 입장에 서서 승리했다’ 혹은 `희생의 자리에서 승리했다. 온 인류가 소망하는 것이 이것이다’하는 인생을 가졌느냐? 아직까지 그 누구도 갖지 못하였다는 사실을 우리들은 알고 있습니다.

그러한 역사과정을 거쳐왔고, 오늘날 우리도 그러한 역사시대에 접어들어 그런 역사를 엮어 나가고 있다는 사실을 생각할 때, 우리가 싸워 나가야 하는 생애노정이 얼마나 어려운 것인가 하는 것을 알아야 됩니다. 우리가 계획을 세워 가지고 승리를 다짐하고 나서는 걸음 앞에서 이 역사적인 패자의 서러움, 역사적인 미완성의 환경을 생각하면 생각할수록 나서는 그 모습이 현실적으로 얼마나 초라하고 불쌍한 것인가를 알게 됩니다.

여기에서 어떤 사람이 새로운 결의와 새로운 희망을 품고 `나는 이렇게 가겠다’고 하며 나선다면 지금까지의 역사는 그를 비웃을 수 밖에 없을 것입니다. `네가 과연 그럴수 있겠느냐. 네가 그렇게 해낼 수 있겠느냐? ‘고 묻지 않을 수 없다는 것입니다. 그런 역사의 물음 앞에 `억년을 두고 나는 자신 있습니다’ 할 수 있는 사람, 그 사람이 어디에 있느냐? 인간세계의 그 어디에도 없었다는 것입니다. 절대자 외에는 없을 것입니다.

31-32
아직도 개척자의 길을 가시는 하나님
그러면 절대자이신 하나님의 복귀섭리노정을 두고 볼 때, 복귀섭리노정의 하루, 몇 년, 혹은 세기 세기를 거쳐오면서 하나님 자체와 그 명령하신 모든 뜻이 승리의 한날을 가졌느냐? 이렇게 묻게 될 때에, 하나님도 역시 역사적 운명을 거쳐간 수많은 선조들과 같은 운명에서 벗어나지 못하였다는 사실을 우리들은 알고 있습니다.

이렇게 절대자이신 하나님도 역사시대에 승리의 한 기점을 마련하지 못한 것을 오늘날 우리가 상속받아 가지고 가야 된다는 것은 너무도 엄청난 일입니다.

여러분의 일생을 놓고 가만히 생각해 보십시오. 하나님은 6천년이라는 기나긴 세월을 거쳐오셨습니다. 성경상으로 보아서 6천년이지 이것은 수백만 년, 수억 년에 해당할 수 있는 기나긴 세월입니다.

하나님이 지금까지 그런 역사를 엮어 나오셨습니다. 하나님께서도 어느 한날 승리하고 싶지 않은 날이 어디 있었겠습니까? 원수와 싸워 가지고 그 진영을 격파하고 거기에 승리의 초석을 쌓아 안식할 수 있는 한날을 하나님께서는 얼마나 추구하셨겠습니까? 그러나 아직까지도 그날을 갖지 못하고 싸움의 행로를, 개척자의 행로를 가지 않으면 안 될 입장에 계신 하나님이십니다. 이런 것을 생각할 때, 오늘날 그 뒤를 따르고 그 사명을 상속받아 나서겠다는 사람이 있다 할진대는, 얼마나 결의해야 되고 얼마나 맹세해야 되겠습니까?

지금까지의 과거를 돌아보면 시련의 역사가 엮어져 왔고, 현실을 바라보면 삭막한 세계가 광대하게 펼쳐져 있습니다. 이러한 시점에서 미래의 암담한 세계를 바라보게 될 때, 자신의 옷깃을 여미고 `하나님이시여, 저를 믿으시옵소서’ 할 수 있는 사람이 있겠느냐 하는 것이 문제가 아닐 수 없는 것입니다. 그렇다고 해서 모든 것을 포기할 수 없는 하나님의 입장이요, 필시 이것을 해결지어야 할 책임이 있는 것을 아는 하나님이시기에 이 길을 어떻게 돌파하여 가느냐 하는 것이 문제가 아닐 수 없습니다.

이런 관점에서 볼 때, 지금까지 하나님은 기뻐하며 걸어 나온 날이 없었습니다. 왜 그러냐? 패자의 서러운 마음을 품고 나오신 걸음이기 때문입니다. 제1차 약속도 인간들로 말미암아 실패했고, 제2차 약속도 인간들로 말미암아 실패했으며, 제3차, 제4차, 혹은 역사시대를 거쳐오면서, 수많은 민족들의 배후를 더듬어 오면서 인간들로 말미암아 실패를 거듭하신 입장에 계신 하나님입니다. 오늘은, 이해는 내가 승리한다고 다짐할 수 있는 하나님의 입장이 되지 못한 것을 생각할 때에, 이 전체의 책임을 짊어진 하나님이 얼마나 불쌍한 분인지를 우리들은 알아야 되겠습니다.

그것은 무엇을 보아서 알 수 있느냐? 우리들의 하루의 생활을 보아서 알 수 있고, 일년의 생활을 보아서 알 수 있으며, 또한 일생을 보아서 알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오늘날 영생을 희구하고 있는 수많은 인간들을 이끌고 있기에 영생의 노정을 향하여 나가는 하나님의 고통은 거기에 비례되는 고통으로 남아 있습니다. 이것을 찾아가야 할 하나님에게 영생적인 고통, 영생적인 슬픔이 개재되어 있지 않겠느냐 하는 문제를 우리는 생각하지 않을 수 없는 것입니다.

31-34
점점 가중된 십자가를 지셔야 하는 하나님
그러면 오늘날 우리들의 일생을 하나님과 관계를 맺고 간다는 입장에서 두고 볼 때, 내가 하나님 앞에 짐이 된 입장에 있느냐 그렇지 않으면 하나님의 짐을 내가 대신 맡을 수 있는 입장에 있느냐? 이런 것을 생각할 때, 우리는 오늘도 번번이 하나님께 짐이 되는 운명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습니다. 하나님께는 그 수가 많아지면 많아질수록 기쁨보다 슬픔이 더 가중될 것이 아니겠느냐? `가지 많은 나무에 바람 잘 날이 없다’는 격언이 있듯이 자식이 많은 부모는 쉴 날이 없습니다. 그와 같은 책임을 가진 하나님에게 있어서도 그 수가 많아짐에 따라 얼마나 비참하겠습니까?

오늘날 우리 통일교회 자체를 보면 10년 역사를 지내 왔습니다. 그 10년 역사 가운데는 평탄한 길이 없었습니다. 눈물의 골짜기에서 다짐하던 그런 때만이 기억에 남아 있습니다. 우리의 기억에 남는 것은 눈물을 흘리던 그때, 처량하고 심각하던 그때뿐입니다. 그 외의 것은 전부다 망각해 버리는 것입니다. 천 사람이면 천 사람이 심각하던 때가 있었으면 그날들이 전부다 같지 않습니다. 심각하던 한날이 있을 것입니다. 그 한날을 우리는 기억하고 있습니다. 그날이 우리 개체에게는 한날이로되 하나님에게는 천 날이 아니겠느냐? 이런 문제를 두고 볼 때에, 우리의 수가 많아짐에 따라 하나님에게는 기쁨보다도 슬픔이 더 가중된다는 사실을 우리들은 생각하지 않을 수 없는 것입니다.

개체의 수가 많아지면 많아질수록 그 모양이 점점 더 알록달록해지는 것입니다. 이런 모양도 생기고, 저런 모양도 생긴다는 것입니다. 그 모든 것이 합하여 하나의 형태를 갖춘다 하더라도 그 형태가 전부 하나님의 소망의 실체가 될 수 있느냐? 될 수 없습니다. 그 실체가 되기 위해서는 가중된 십자가를 짊어지고 하나님이 고난의 길을 넘든가 인간이 고난의 길을 넘든가 해야 됩니다. 어느 한편이 이것을 넘지 않고는 수가 많은 것이 기쁨으로 나타날 수 없는 것입니다.

그러면 그것을 누가 책임져야 될 것이냐? 하나님이 책임져야 되느냐, 우리가 책임져야 되느냐? 하나님은 아무리 힘이 들더라도 책임을 져야 되는 것입니다.

왜냐? 하나님은 부모의 입장이기 때문입니다. 자신이 힘들다고 자식에게 책임을 전가하는 부모는 없습니다. 그와 마찬가지로 하나님은 힘이 들면 들수록 그것을 하나님이 책임질 것입니다. 만일에 책임진 것을 해내지 못할 때, 하나님은 자신을 두고 자탄할 것입니다. 자기가 자기를 쳐야 할 입장에 계신 하나님인 것을 여러분이 알아야 됩니다.

오늘날 우리들은 어려움이 있으면 `하나님이시여, 저의 어려움을 맡아 주시옵소서. 제가 어려운 길, 개척자의 노정을 가고 있사오니 제 아픈 모든 사연을 맡으시옵소서’라고 기도합니다. 우리는 번번이 이런 기도를 하는 것이 아니냐? 우리들은 그 기도의 이면에 하나님의 슬픔이 가중되어 가고 있다는 것을 알아야 되겠습니다.

그런 것을 생각하게 될 때, 아버지라는 말이 얼마나 두려운 말인가를 여러분들은 느껴야 되겠습니다. 아버지라는 그 말 가운데는 천지의 사연이 엉클어져 있다는 사실을 우리들은 알아야 되겠습니다. `하늘에 계신 아버지여, 저희들과 같이하시옵소서’ 라는 이 말은 하나님께서 수천 수만의 십자가를 우리와 같이 져 달라는 말이요, 나를 위하여 종의 자리에 서달라는 말이요, 나를 위하여 죽어 달라는 말이라는 것을 우리들은 생각해야 되겠습니다.

31-35
하나님 앞에 설 수 있는 효자
하나님께서 주체적인 입장에서 책임을 짊어지고 지금까지의 역사를 수습해 나오셔서 그나마 오늘날과 같은 역사를 맞이할 수 있게 됐습니다. 이 역사는 미래를 향하여 나아가야 될 입장에 있기 때문에 현시점에서 정지되어서는 안 됩니다. 그러면 오늘도 그렇거니와 미래도 그럴 수 있는 하나님의 십자가의 길을 누가 대신 책임질 것이냐? 여기에 내가 책임지겠다고 나서는 사람이 있다면 그가 하나님의 한도 책임져야 되겠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일년의 십자가도 극복하기 어려운 것을 알고, 일년의 생활 가운데서도 수많은 한을 체험하면서 살고 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인류를 구원하기 위하여 6천년의 역사노정을 거쳐오셨습니다. 그간 얼마나 많은 슬픈 사연이 맺혔겠으며, 외로운 고빗길이 많았겠는가? 인간으로는 헤아릴 수 없고, 상상할 수도 없는 불쌍한 처지에 계신 하나님이 아니겠는가? 이런 사실을 여러분이 알아야 되겠습니다.

이런 것을 생각하면 생각할수록 기도하기가 무서운 것입니다. 아버지라는 이름을 부르기가 무서운 것입니다. 내가 가중된 십자가를 남겨 놓게 된 입장에서 아버지를 부른다는 것이 체면이 없는 일임을 발견할 수 있을 때에만 하나님은 우리에게 희망을 가질 수 있습니다. 아버지 앞에 당당코 자세를 갖추어 가지고 `하나님이여! 저를 자랑하고, 제가 모든 책임을 짊어지고 있으니 이 책임과 더불어 저를 지켜 주소서’ 하는 자리에 있기 보다는, 그 내심적인 십자가를 염려하면서 하나님 앞에 나타나기를 부끄러워할 줄 아는 자신이 되어야 합니다. 입을 가지고도 자신의 사연을 통고할 수 없고, 자기 모습을 드러낼 수 없는 부끄러운 자신이라는 것을 알고 마음속으로 열 번을 부르다가 자기도 모르게 입으로 튀어나온 아버지라는 그 한마디가 평범하게 기도하는 천만 가지의 기도보다도 더 귀하다는 사실을 여러분이 알아야 되겠습니다.

그런 자리에서만이 하나님은 `내가 짊어진 십자가가 있더라도 네 십자가라면 내가 책임지고 해결하겠다’ 하실 것입니다. 오로지 그 길만이 하나님이 나설 수 있는 길이라는 것입니다. 이런 것을 생각할 때, 오늘날 우리 통일교회가 아버지의 뜻을 대해 가지고 나가는 길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가 그런 자세를 갖추었다고 아버지 앞에 나아가 뻔뻔스럽게 `당신이 사랑하는 통일교회 교인이요, 당신이 사랑하는 통일교회가 아닙니까?’라고 기도하는 자신이 된다면, 그 자리는 하나님께서 임할 수 있는 소망의 자리가 못 된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사실을 여러분들이 알아야 되겠습니다.

그러므로 여러분이 통일교회를 자랑하고 싶은 마음이 있거든 가중된 십자가를 지고 나오시는 아버지를 헤아리고 자식된 도리를 다하는 입장에서야 합니다. 자기를 위하여 수고하시는 부모 앞에 효의 도리를 다하기 위해서는 먼저 눈물로써 부모를 위로하고, 짊어진 십자가를 당당하게 지고 가야 합니다. 당신이 걸어온 십자가의 길은 자식을 위하기에 비참하였다는 사실을 통고하는 마음을 가지고 `아버지여, 더 이상 고생하지 마시옵소서. 아버지여, 저를 위하여 더 이상 염려하지 마시옵소서’할 수 있는 자리에 서야 합니다. 이것이 지금까지 슬픔을 당하면서 나오신 부모되시는 하나님 앞에 설 수 있는 효자의 모습이 아니겠는가? 이러한 것을 생각할 때, 오늘 우리들은 하나님 앞에 너무나 뻔뻔스러웠고 너무나 도도했다는 사실을 발견하게 됩니다.

31-37
하나님 앞에 도도했던 인간들
오늘날 우리가 도도하고, 자신을 가진 이 자리는 아직까지 하나님과 같이 갈 수 없는 자리인 것을 여러분이 알아야 되겠습니다. 나를 바라보는 하나님 앞에는, 즉 아버지와 나 사이에는 메꾸어야 할 구렁텅이가 남아 있는 것을 알아야 됩니다. 저 나라의 백성이 되기 위해서는 또다시 시련 고통을 당하지 않으면 안 될 개척자의 노정이 남아 있는 것을 여러분이 알아야 되겠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세상의 어떤 개척자보다도 복귀섭리역사에서 개척자의 사명을 거듭하셨다는 사실을 오늘 인간세계에서는 그 누구도 알 수 없을 것입니다. 여러분이 영계에 가면 그 사실을 알 수 있을 것이지만, 현실에서는 알 수 없다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이 땅에서 그 누가 세계를 위하여, 혹은 역사를 자기가 책임져 가지고 자기 자체를 본받으라고 주장하는 사람이 있다 할진대 그는 망령된 사람으로 보지 않을 수 없다는 것입니다. 자기 보다도 하나님을 본받으라고 통고해야 된다는 거예요.

예수님도 그와 같은 사실을 알았기 때문에 `아버지, 내 뜻대로 마시옵고 당신의 뜻대로 하시옵소서’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여기서 내 뜻은 이스라엘 민족을 중심삼고 당장에 아버지 앞에 돌아가고 싶은 마음이지만, 아버지의 뜻은 그것을 돌이키기 위해 십자가의 길을 가야 된다는 것입니다. 그것을 앞에 놓고 가려 가는 데에 하나님을 염려한 나머지 자기 일신을 투입하여 해결할 수 있는 위로의 터전이 있다면, 자기 일신을 찢어 버리고, 자기 일신이 십자가에서 사라지는 한이 있더라도 응당 가야겠다고 결의한 자리가 겟세마네 동산이었다는 사실을 여러분이 알아야 되겠습니다.

오늘날 이 땅 위의 한 나라면 한 나라에는 그 나라를 개척한 개척자가 있고, 혹은 지역이면 지역에도 그 지역을 개척한 개척자가 있다고 합니다. 그러나 인간이 무엇을 개척하는 데 인간 자체가 주동이 되었던 것같이 보이지만, 그 배후에는 하나님이 관계되지 않은 일이 없다는 것을 여러분은 알아야 됩니다.

세상만사가 하나님권내에서 하나님의 주관을 받아야 하고, 역사가 그러해야 하고, 시대가 그러해야 하기 때문에, 시대에 남을 수 있고 역사에 남을 수 있는 새로운 일을 주장하는 사람들은 그 시대에 그 분야의 개척자이지만, 그 개척자가 나타나기까지의 배후에는 하나님이 개척자의 행로를 수없이 왕래했다는 사실을 알아야 되겠습니다.

천 번 개척해 놓고 한 번 내세우기를 주저하는 하나님인 것을 알아야 됩니다. 천 번 수고하여 쌓은 승리의 터전을, 한 번 잘못 내세우면 천 번 수고한 것이 일시에 다 깨어져 나가 버리고, 이것을 다시 수습하려면 몇 천 번 가중된 개척자의 행로를 다시 더듬어 가야 한다는 것을 알고 이 땅위에 한 가지 일을 맡겨서 개척하도록 하기 위해서는 수없이 가중된 십자가의 길이 하나님 앞에 놓이게 된다는 사실을 생각해야 되겠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하나님께서 지금까지 이런 개척자의 노정을 걸어오셨다는 것을 알아야 되겠습니다.

여러분이 개척자, 혹은 선각자로서 선두의 자리에 섰을 때 여러분 자신이 섰다고 생각해서는 안 됩니다. 내가 그 자리에 서기 전에 먼저 하나님께서 몇백 번 몇천만 번 섰다는 사실을 알아야 합니다. 내가 개척자의 입장에 서기 전에 하나님이 몇천만 번 개척자의 입장에 섰고, 내가 선각자의 입장에 서기 전에 하나님이 몇천만 번 선각자의 입장에 섰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어느 한 날 개척자로서 승리를 했다고 자랑해 보지 못한 하나님이요, 선각자의 입장에서 새로운 시대를 앞놓아 가지고 그 척도를 좁혀 나오며 싸웠지만 자랑해 보지 못한 하나님이십니다. 이러한 하나님을 선각자적인 입장에서 생각해 보게 될 때, 오늘날 타락한 세상의 인간들은 너무나 도도했다는 사실을 우리들은 알아야 되겠습니다. 이러한 하나님이라는 것을 우리는 생각해야 되겠습니다.

31-39
인내와 극복
개척자는 인내심이 없이는 그 길을 갈 수 없습니다. 오늘이라는 이 시점 자체가 모험이 필요한 시점이기 때문에 거기에서 부딪치는 모든 것은 전부다 생소한 것들이요, 전부다 새로운 손길을 가해야 된다는 것입니다.

오늘날 역사와 문화를 헤아려 가지고 어떤 나라나 민족이 문화민족이라고 칭송을 받는 경우가 있습니다. 그런 민족이 남겨놓은 유물이나 유적들을 보면, 그것은 수많은 모험을 거쳐 가지고 이루어진 것이요, 수많은 어려움을 극복하고서 만들어진 유물들이요 유적이라는 것을 우리는 알게 됩니다.

이와 같이 이 땅에 역사시대의 한 문화권을 형성하는 데에도 그러하거든 하물며 하늘세계를 창건하기 위해 인류 구도의 노정을 개척하시는 하나님의 노정은 얼마나 엄청나겠습니까? 그 길을 개척하기 위한 하나님의 입장은 말할 수 없는 인내를 가지고 고난을 극복하지 않고는 이 길을 갈 수 없었다는 사실을 우리가 알아야 되겠습니다. 그 길이 얼마나 참아야 하는 길이냐? 죽음의 고비가 연이어 나가는 한이 있더라도 이것을 참고 극복해야 할 길이 하나님께서 걸으신 길인 것을 여러분이 알아야 되겠다는 것입니다.

여기에 원수가 없으면 모르거니와 원수가 있어 가지고 공격하고 있다는 사실, 어느때 원수의 습격을 받아 지금까지의 천년 공사(千年功事)가 일시에 파탄을 당할지 모르는 길에 하나님이 계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그런 초초한 심정을 지니고 수난의 길을 극복해 나오는 이 순간에도 원수들은 칼을 들고, 화살을 겨누고 있다는 사실을 알아야 됩니다.

그야말로 하나님은 기진맥진한 자리에서 흑백을 가릴 수 있는 소망의 한때를 바라보면서 나오고 있는 때까지도 원수들은 하나님을 향해 총칼을 겨누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렇게 지칠 수 있는 자리요, 쉬고 싶은 자리에서도 원수를 맞아 가지고 최후의 결단을 내려야 할 입장이니, 어느 한날 마음놓고 안심할 때가 있었겠느냐? 그러기에 하나님이 불쌍하시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인내와 극복이 그 분의 생활의 전부요, 희생이 그 분의 생활의 전부가 아니겠느냐. 그 투쟁은 습관적으로나 역사적으로 되풀이되는 투쟁이 아니라 범위가 넓어짐에 따라 더욱 더 복잡다단하고 광범위한 투쟁이 사방에서 가해져 나왔다는 것입니다. 그런 역사시대를 거쳐 오시는 하나님이 얼마나 힘드시겠는가를 여러분이 생각해 봐야 합니다.

우리 동양이 밤이 되어 쉬는 시간이면 서양은 낮입니다. 동양 사람들이 밤이 되어 쉬는 시간에 서양 사람들은 하나님께 기도하는 사람이 있을 것이고, 하나님을 중심삼고 투쟁하는 사람도 있을 것입니다. 이런 지구를 바라보시는 하나님께서 24시간 어느 한 순간이라도 쉴 수 있겠는가? 하나님을 배제하고는 이 세상의 일이 해결될 수 없다고 볼 때, 한 가지에서부터 천만사에 이르기까지 전부 관여해 가지고 선의 결정권을 내려야 하는 입장에 계신 하나님이라는 것입니다. 그러기에 하나님은 지극히 불쌍한 분이 아니겠느냐?

그런 것을 생각하게 될 때, 자기를 중심삼은 복잡한 문제를 놓고 기도하려다가 기도할 수 없어 입을 다물고 눈물을 흘리는 자리, 그러한 자리가 여러분의 신앙생활 가운데 몇 번이나 있었느냐 하는 것이 문제가 된다는 것입니다.

31-40
하나님이 소원하는 아들딸
`내가 어려움을 당하는 것은 하나님을 위해 당하는 어려움이니, 그 대가를 반드시 내 아들딸들 앞에 돌려주소. 내가 이렇게 수고하는 것은 통일교회를 위해 하는 것이니, 그 수고의 대가를 통일교회에 돌려주소!’ 하는 입장에서 믿고 일하는 사람은 많지만, 진정으로 하나님의 내심을 부여안고 수난의 노정을 극복하는 사람이 얼마나 되겠습니까? 투쟁의 역경을 품고 내일의 소망을 잃어버려서는 안 된다고 몸부림치는 신세가 지금까지의 역사를 지탱해 온 하나님의 신세가 아니겠느냐는 것입니다.

이 무겁고 힘든 십자가를 짊어지고 역사를 지탱하면서 나온 하나님의 생활이 얼마나 역경의 생활이었겠는가? 그렇지만 이것을 포기할 수 없는 것은 잃어버린 아들딸을 찾아야 할 부모의 심정이 남아 있기 때문입니다. 전지전능하기에 나만이 책임질 수 있다고 하며 하나님만이 다짐할 수 있는 길이 복귀의 길이라는 것입니다.

제한된 시대권에 있는 한 사람이 자기의 일생노정을 통하여 이 일을 책임져 줄 것인가 하는 것을 하나님은 꿈에도 생각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즉, 이 일은 하나님만이 전지전능하기 때문에 역사의 시작부터 끝까지 하나님 자신만이 책임질 수 있는 일이지, 인간은 그 누구도 책임질 수 없다는 것이 하나님께서 알고 계시는 복귀의 노정인 것입니다.

여기서 문제되는 것은, 인간 자신이 그런 입장에 계신 하나님이신 것을 알고도 일생을 사는 가운데서 하나님 앞에 십자가를 가중시키는 생활을 하지 않을 수 없음이 비참한 것이요, 불쌍한 것입니다. 그러면 그 불쌍한 것이 왜 생겨났느냐? 인간시조의 타락 때문에 생겨났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내가 넘어가야 할 것은 선을 중심삼고 원수가 침범할 수 있는 악의 요소를 어떻게 박멸할 것이냐 하는 것입니다.

살아가는 데에는 잘사는 것이 목적이 아닙니다. 못살더라도 하나님께 자기의 십자가를 남겨 주지 않고가는 그 자체가 하나님 앞에 효가 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이 땅에 왔다 가는 수많은 사람들이 그들의 일생 가운데에서 하나님 앞에 가중된 십자가의 행로를 남기고 가지만, 나만은 내 일생에서 아무리 수난의 길을 가고, 아무리 어려운 역경에 부딪친다 해도 하나님 앞에 내십자가를 남겨 놓지 않겠다’고 하며, `내 것은 내가 책임지겠다’고 몸부림치는 아들딸을 하나님은 보고 싶어하시는 것입니다.

`내 십자가는 내 것이기에 하나님 앞에 남겨 두지 않고 내가 책임지겠다’고 하는 그런 아들딸이라도 하나님은 그들을 효자라고 할 것입니다. 또한 `당신이 짊어진 짐은 우리 인류를 위한 짐이요, 우리 조상들이 잘못하여 짊어진 짐이니, 내가 그 짐을 책임지겠다’고 말이라도 그렇게 하고 행동이라도 그렇게 하는 사람이 있다면, 그 사람이 그 일을 못 하여 그 사람에게 책임을 지울 수는 없다 하더라도 그 사람을 붙들고 역사적인 사연이 담긴 말을 하고 싶은 것이 하나님의 내심이 아니겠는가?

오늘날 우리들은 철부지한 과거의 신앙노정을 다시 회상하면서 1960년 이전부터 지금까지 습관적이거나 관례적으로 하나님을 위주로 해 나왔던 신앙관을 벗어버리고 70년대에는 우리가 체면만이라도 지켜 가지고 하나님 앞에 자기의 십자가를 남겨 주지 않는 자신이 되고, 통일교회가 되어야 되겠습니다. 이것만을 책임지고 간다 하더라도 하나님은 지금까지 인류 역사 과정에서 그 누구도 행하지 못했고, 감당하지 못했던 개척자의 사명을 하고 있다고 칭찬하실 것입니다. 그러고 싶은 것이 하나님의 마음이라는 것을 여러분이 알아야 됩니다.

31-42
두 가지 십자가를 책임지고 있는 나
여기에서 우리는 하나님께서 역사과정의 모든 십자가를 짊어지고 나오셨다는 사실을 알았습니다. 그것은 하나님이 잘못해서가 아니라 인류가 잘못해서입니다. 그 인류는 우리의 조상이요, 우리와 친척의 인연을 갖고 있습니다. 나는 그 인연을 집약할 총합실체로서 태어난 것입니다. 결국 나를 위하여 하나님께서 대신 짊어진 역사적인 모든 책임을 짊어지고 하나님 앞에 정성들이는 무리가 있다면, 그들은 먼저 어떤 기도를 해야 되느냐? 회개의 기도를 해야 됩니다. 선조로부터 이어 나온 잘못된 역사를 해결할 수 있는 사람이 되지 않고는 안 된다는 거예요. 눈물과 피땀으로 메워 나오시던 골짜기를 청산하지 못해 한이 맺힌 하나님을 회개의 눈물로서 위로해 드릴 수 있어야 합니다. 그런 한때를 갖지 못하고는 현실 세계에서 하나님 앞에 자기가 책임을 다한다고 할 수 없는 입장이라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오늘날 우리 통일교인들은 자기 자신을 중심삼고 회개하기보다 역사를 놓고 회개해야 된다는 것입니다. 통일교인들은 역사를 책임졌기 때문에 역사를 놓고 회개해야 되고, 또한 현시대를 책임졌기 때문에 이 시대를 놓고 회개해야 된다는 것입니다. 과거와 현재의 모든 인류를 대신한 입장이기 때문에 제물된 입장에 서야 된다는 것입니다.

이 자리는 지금까지 실패의 역사를 거듭해 왔던 수많은 선조들과 실패의 역사를 거듭하고 있는 현재 30억 인류를 대신한 서글픈 자리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 사연을 알고 하나님 앞에 실낱 같은 위로의 길이라도 개척하여 땅 위에, 혹은 역사시대에 관계를 맺게 해주는 사람이 있다면 이 시대에 살고 있는 사람은 그에게 감사해야 되고 또한 역사시대에 왔다갔던 수많은 선지선열들도 기필코 그에게 감사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여러분 일생에서 그럴 수 있는 한때를 어느때에 남길 것이냐? 그 일생을 통하여 그런 한때를 남길 수 있을 것이냐, 없을 것이냐 하는 문제가 현재 신앙생활을 하고 있는 우리들이 해결해야 할 중대한 문제인 것을 알아야 합니다. 그런 면에서 나는 역사의 배반자냐, 아니면 역사의 지휘자냐? 또 시대의 배반자냐 시대의 지휘자냐? 이런 생각을 해 볼 때, 하나님은 역사를 지휘하기 위해서 싸워 나왔고, 시대를 지휘하기 위해서 싸워 나오셨습니다. 그런 하나님 앞에 내가 지지를 받기 위해서는 먼저 역사의 지지를 받을 수 있는 한 순간, 시대의 지지를 받을 수 있는 한 순간을 가져야 합니다. 그러한 한 기점을 갖지 않고는 하나님 앞에 설 수 있는 자신이 못 된다는 것입니다.

그런 자리는 내가 이러이러한 각오를 하고 이러이러한 입장에 섰기 때문에 응당 이렇게 해야 된다고 하면서 자기 자신을 나타내는 자리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런 것은 순간이요, 한때 밖에 못 되는 것입니다. 그 순간을 연속시켜 일년을 거쳐야 되고, 일년을 연속시켜 10년, 그 10년을 연속시키기 위하여 일생을 가야 하는 것이 신앙길입니다. 그런 순간의 승리의 기점을 하루로, 그 하루를 한 해로, 그 한 해를 10년으로, 그 10년을 생애로 어떻게 연결시키느냐 하는 것이 문제입니다. 여기에서 마음을 공고화시키고 심정을 공고화시켜 가지고 나아가는 길이 신앙자의 길인 것을 여러분이 알아야 합니다.

자기를 중심삼고 자탄하는 자리에서는 신앙길이 성립되지 못하는 것입니다.

아무리 내게 어려움이 가해져 온다 해도 피하지 말아야 합니다. 나에게 가해져 오는 십자가를 피하려 하면 이중의 십자가가 남아진다는 것입니다. 왜 그러냐? 내 자신이 역사의 산물이요, 시대의 산물이기 때문에 과거의 선조들이 책임하지 못한 짐들이 나에게 가중되어 오는 것이요, 현시대가 책임하지 못한 짐이 나에게 가중되어 오는 것입니다. 이처럼 나는 두가지 짐을 짊어지고 있는 것입니다.

여기에서 내가 그 십자가를 피하게 되면 나에게 상속되었던 역사적 십자가, 시대적 십자가를 하나님 앞에 돌려 버리는 결과가 됩니다. 그런 고로 이중적인 십자가를 짊어지고 가는 놀음이 오늘날 우리들의 신앙길이 되고 있습니다.

이처럼 `나’라는 존재는 역사를 지탱하고 시대를 지탱하고 있기 때문에 나 자신은 역사를 탕감해야 하고 시대를 탕감해야 하는 입장에 있다는 것을 알아야 됩니다. 이런 관계가 있음으로 말미암아 재림역사가 가능하다는 거예요. 현실은 이중적인 역사성을 띠고 있기 때문에, 현실의 승리는 역사적인 승리를 가져올 수 있으며, 현실의 실패는 역사적인 실패를 가져올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책임을 회피하게 되면 우리가 지고 있는 이중의 십자가를 하나님에게 가중시키게 된다는 사실을 알아야 되겠습니다.

이것은 우리가 하나님 앞에 돌려 버려서는 안 될 사실이요, 하나님으로 하여금 당하게 해서는 안 될 사실입니다. 그것이 부모의 참상이 된다는 것을 여러분이 생각하고 자기 일대에 이것을 막아내는 싸움을 해야 합니다.

31-44
하나님에 대한 바른 자세
그러면 이러한 입장에 있는 우리 자신들은 어떻게 하나님을 대해야 하는가? 언제나 하나님으로부터 긍휼을 받을 수 있는 자세를 갖추어야 됩니다. 내가 뜻을 이루기 위해 책임을 졌다 해도 `하나님이여, 왜 당신은 내가 책임진 것을 몰라줍니까?’라고 해서는 안 됩니다. 나는 그런 기도를 해보지 못했습니다. `내가 이만큼 기도했고 노력했기 때문에 앞으로 다가올 상급은 내 것이다’ 하는 이런 마음을 갖고 출발해서는 안 됩니다. 문제는 어떻게 하나님의 동정을 받을 수 있게 하느냐, 어떻게 하나님이 나를 생각해 줄 수 있는 자리에 임하느냐 하는 것입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자기 자신이 갖추고 있는 것을 드러내어 자랑하기 보다는 너무나 부끄러움을 느끼면서 얼굴을 들지 못하는 자세를 가져야 합니다. 언제나 하나님 앞에 자기를 내세울 수 없는 입장인 것을 알면 알수록 하나님의 심정적인 동정을 받을 수 있는 자리가 넓어진다는 것을 알아야 되겠습니다. 왜? 하나님이 수난의 길에 처해 있는 것을 알기에 하나님께 우리의 사정을 통고할 수 없는 것입니다.

그러면 내가 질 수 있는 십자가의 길이 이만하다면, 민족이 질 수 있는 십자가의 길은 이보다 훨씬 크지 않겠는가? `그 십자가를 제가 지겠습니다’ 할 수 있어야 됩니다. 그런 마음을 가지면 현재의 편안한 자리가 도리어 고통으로 느껴지는 자리가 아니겠는 가? 이렇게 느끼고 생활하는 사람들이 가는 길은 하나님이 가실 길을 대신해서 가는 길이라는 것입니다.

자신이 편안한 자리에서 무엇을 이루었다고 그 하루를 좋다고 찬양하고, 기쁨의 날로 여기기 보다 더 어려운 미래의 자리가 남아 있는 것을 알고, 그 자리에서 미래의 십자가의 길을 걸어 가지고 미래의 십자가를 감소할 수 있는 조건으로 받아 달라고 기도할 수 있는 사람이 하늘길을 가는 사람이요, 하나님과 동고(同苦)하며 가는 사람입니다. 이런 것을 두고 보면, 이 땅 위에서 하나님을 위한 길을 가는 사람들은 불쌍한 사람들이라는 결론이 나오는 거예요.

웃음이 자기 가슴을 헤치고 나오려 할 때에도 세계적인 웃음을 바라는 마음이 앞서지 않으면 안 됩니다. 또한 하나님이 기뻐하며 웃을 날을 생각하지 않으면 안 됩니다. 내 웃음보다도 세계가 웃을 수 있는 날을 바라는 것이 하나님의 소원임을 알게 될 때, 웃고 나서 좋아하던 것에 대해 부끄러움을 느끼며 가는 길이 신앙길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승리를 다짐할 수 있는 자리에 있더라도 미래의 승리를 위해 다시 결의하지 않으면 안 되겠습니다. 이렇게 미래의 승리를 위해 다시 결의하며 가는 길이 하나님을 모시고 가는 정상적인 신앙길이라는 것입니다.

그런 길을 가는 사람은 눈물의 개척자요, 고통의 개척자요, 제물의 개척자인 것입니다. 그런 마음이 앞서 가는 자리가 인간 세상에서 하나님이 인정할 수 있고, 인간 세상에서 하나님 대신 개척자의 명분을 갖고 나타날 수 있는 자리입니다. 이런 것을 여러분은 알아야 합니다.

오늘날 우리는 기도할 때 번번이 개척자라는 말을 많이 합니다. 그리고 선각자라는 인식을 갖고 있습니다. 그런데 선각자나 개척자는 이제 말한바와 같이 자신이 영광된 자리에 서더라도 도리어 송구함을 느끼고, 민족이 영광의 날을 맞이하지 못했기 때문에 그것을 그날을 위한 재료로 삼으려는 사람입니다. 또 자기가 어떤 승리를 다짐하는 싸움터에서 어떤 책임을 느낄 때에도 이것을 미래에 어떤 책임을 지기 위한 훈련이라는 마음을 가지고 임하는 사람입니다. 이런 사람이라야 하나님께서 이 땅에서 개척자의 행로를 걸을 수 있다고 인정해 줄 수 있는 것입니다.

그 입장에 서게 되면 틀림없이 하나님께서 같이하십니다. 그가 죽음의 교차로에 봉착하게 되더라도 그에게는 그것이 죽음길이 아니라 하나님이 내 대신 승리의 길을 개척해 주신다는 것을 느끼게 된다는 거예요. 이것이 신앙자가 가야 할 본질적인 행로라는 것을 여러분이 알아야 합니다.

31-46
정상적이고 본질적인 신앙길
여러분이 일생 동안에 편안한 날을 갖기를 원합니까? 그것은 꿈에 지나지 않는 거예요. 나는 일생 동안 행복할 것이다고 생각합니까? 그것은 공연한 꿈이라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지금까지 행복하지 못했기 때문에 자기가 행복했다가는 행복한 것이 도리어 하나님의 채찍을 맞을 수 있고 하나님과 멀어질 수 있는 동기밖에 안 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주는 자는 받는 자보다 복되다, 즉 받는 자보다 주는 자가 더 복되다고 하는 거예요. 내가 좋아하는 것은 어디까지나 받는 자리요, 내가 희생하려고 하는 자리는 어디까지나 주는 자리입니다. 그러기에 희생하는 자리가 복받는 자리라는 것입니다. 그럼 왜 희생하는 자기가 복받는 자리냐? 하나님께서 지금까지 희생해 나오셨기 때문이요, 그 자리가 하나님편에 설 수 있는 자리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지금까지 비참한 개척자의 행로를 걸어오셨습니다. 때문에 그러한 하나님 앞에 당당해서는 안 되겠습니다. 자기가 쌓은 실적이 있더라도 그것은 더 큰 실적을 위한 재료요, 미래에 하나님과 더불어 기뻐할 수 있는 재료로 삼을 수 있는 태도를 가져야 합니다. 그러한 태도가 신앙의 본질적인 태도요, 신앙자가 가야 할 행로라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여러분이 기도 가운데 부르는 `아버지’라는 말은 제일 부르기 어려운 말이라는 것을 알아야 되겠습니다. 그 아버지라는 말 가운데는 역사의 사연이 깃들어 있고, 역사의 슬픔이 깃들어 있고, 역사상의 십자가를 짊어지고 그 모든 수난을 극복해 온 곡절이 서려 있다는 것입니다. 여러분이 아버지 앞에 기도할 때, 그런 마음을 어떻게 체휼해야 하느냐 하는 것이 문제입니다.

31-47
새로운 역사를 창건하는 개척자가 되라
오늘 우리는 새로운 역사를 창건하는 개척자가 되어야 되겠습니다. 그런데 하나님 앞에 자신만만해 한다거나 `내가 아버지의 뜻을 위해서 이렇게 하지 않았습니까, 왜 나를 몰라주십니까?’ 라고 해서는 안 됩니다. 이러한 사람은 개척자가 될 수 없습니다. 이런 사람은 어디까지나 하나님앞에 십자가를 가중시키는 사람이요, 자기 스스로의 십자가도 감당 못 하는 사람입니다. 오늘 우리는 개인이 가야 할 길을 가야 하고, 가정이 가야 할 길을 가야 하고, 종족, 민족, 국가가 가야 할 길을 가야 합니다. 이것이 우리 통일교인들이 가야 할 길입니다.

이처럼 개인이 가야 할 생애노정에 남아 있는 십자가의 단계가 많은 데도 불구하고 그 노정에서 나 개인이 한 것을 칭찬해 달라고 하는 사람, 칭찬을 안 해주면 얼굴을 찡그리는 이런 사람들을 어떻게 믿겠느냐? 어떻게 믿겠느냐는 거예요. 엄청난 역사를 책임지고 나오시는 하나님의 입장에서는 그런 사람들은 믿을 수 없다는 것입니다. 이와 같이 하나님이 믿을 수 있는 사람이 없었기 때문에 지금까지의 역사시대에서 그 누구도 하나님의 내적 사연을 알지 못하고 갔다는 것입니다. 이런 사실을 여러분이 알아야 합니다.

자기 자신을 생각하는 현재의 입장에서는 개척자의 책임을 할 수 없습니다. 왜? 이것은 사탄편에서 태어난 자신의 인식권을 넘어서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사탄의 피와 뼈와 살을 받아 태어난 몸이기에 그 몸자체가 어느 한계선을 넘지 못한 자신이라는 것입니다. 그런 습관적인 생활을 하면서 통일교회에서 하나님의 뜻길을 간다고 `내가 하나님의 아들딸이다’ 해서는 안 됩니다. 그런 사람은 소용없습니다. 그런 자리는 어디까지나 하나님께 자기의 십자가를 더 가중시키는 자리라는 것입니다.

`나는 하나님 앞에 절대 빚을 안 진다. 내 책임은 내가 지겠다. 그 누구의 협조도 원치 않는다’하는 신념을 가져야 합니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여러분은 어려울 때 번번이 자기를 몰라준다고, 통일교회 교인들이 나를 몰라준다고, 기성교회보다 못 하다고 원망하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그것은 뜻길을 몰라서 그래요. 각자가 가야 할 길이 바쁩니다. 자기가 가야 할 길이 바쁘다는 것입니다. 내가 하나님 앞에 십자가를 가중시키는 이런 생활에서 어떻게 벗어나느냐? 이것이 급선무입니다.

그러므로 내 집안이 당하는 십자가는 내가 짊어져야 되겠습니다. 내 민족이 당하는 십자가는 내가 짊어져야 되겠습니다. 나라가 당하는 십자가를 내가 짊어져야 되겠습니다. 내가 그것을 책임지고, 내가 당해야 되겠습니다. 그런 사람이 있다면 하나님께서는 그를 그 나라의 제1 소망자로 인정하실 것입니다. 그런 사람들에게 그 나라를 맡기고 싶어하시고 그 나라와 인연맺고 싶은 하나님이라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이것을 알아야 됩니다. 오늘 여러분 각자가 정상적인 편안한 자리에서 뜻길을 간다면 그것은 하나님을 위한 길이 아닙니다. 그 자리는 오히려 하나님 앞에 자기의 십자가를 가중시키는 자리라는 것을 여러분이 망각해서는 안 됩니다. 이것을 생각할 때, 하나님 앞에 얼굴을 들 수 없고 미안하고 황송한 마음, 어떻게 자기의 심정을 가눌 수 없이 부끄러운 마음, 이러한 마음이 여러분들의 주위를 휩쓸어 여러분의 생활을 이끌고 나가야 합니다. 그런 자신이 되지 못한 자리는 하나님 앞에 십자가를 짊어지우는 자리임이 틀림없습니다. 이러한 자리에 자신이 서 있음에도 불구하고 `나를 몰라준다, 나를 알아봐 달라’ 하니 그 얼마나 경거망동한 일이요, 얼마나 큰 불효예요? 그러니 하나님께서 이 사망세계에서 새로운 개척자가 나오기를 얼마나 고대하겠습니까?

31-48
하나님이 우리를 고난의 자리에 세우시는 이유
그러면 어디서부터 이러한 비극이 벌어졌느냐 하는 것이 문제입니다. 따라서 `내가 과거로부터 현재에 이르기까지 지내온 역사시대를 책임지고 하나님 앞에 승리해야 되겠다. 승리는 내 것이다’ 할 수 있어야 합니다.

`나’라는 존재는 역사적인 죄의 인연을 가지고 있으니, 그것을 벗어나려면 역사를 대신해서 회개해야 합니다. 또한 이 시대의 산물이니 시대를 대신하여 회개해야 합니다. `과거의 아담 가정, 노아 가정, 아브라함 가정, 모세노정에 있었던 잘못된 모든 사실들이 저희 자신에게 있어서는 안되겠습니다. 저는 그렇게 하지 않겠습니다. 저희 가정만은 그렇게 하지 않겠습니다. 하나님께서 협조해 주시지 않아도 저는 그런 길을 안 가겠습니다. 하나님이 저를 불쌍하게 생각하셔서 협조해 주신다고 해도 저의 짐은 제가 지겠습니다’라고 하는 다짐을 해 봤어요?

하나님은 그런 조건을 세우시기 위해 여러분을 십자가의 노정으로 몰아 내는 것입니다. 3일노정은 어느때나 있습니다. 이 3점이라는 것은 반드시 중심을 가운데 세워야 합니다. 직선은 안 됩니다. 꺾어져서 넘어가야 합니다. 이 자리는 하나님의 협조 없이 혼자 가야 됩니다. `아버지, 저만이 갑니다’ 해야 합니다. 이것이 새로운 역사시대의 출발을 예고하고 나서는 신앙길입니다. 그런데 많은 사람들이 하나님의 협조를 받아 가지고 가기를 바랍니다. 지금까지의 신앙길은 그랬습니다.

그래서 이중의 십자가를 짊어져야 하는 것입니다. 아담 해와가 하나님을 배반하고 나온 걸음이 아니냐? 그러니 `하나님이여, 저를 배반하시옵소서’라고 해야 합니다. 그래야 탕감복귀하는 거예요. `저를 모른다 하시옵소서. 최후의 수난의 때까지 당신이 저를 몰라본다 하더라도 저는 효의 도리를 다하겠습니다. 이 길은 응당 제가 가야 할 길입니다’라고 하는 결의로 나서야 합니다. 그런 사람이 있다면 하나님이 그를 안 도와주더라도 그의 후손은 영원히 도와주고 싶은 거예요. 심정의 세계가 그렇다는 거예요.

여러분은 어려울 때면 번번이 `아버지!’ 하고 매달립니다. 그러면 이 책임을 어떻게 해야 될 것이냐? 여러분은 어려움을 당하면 당할수록 입을 다물고 나를 용서하시는 아버지 앞에, 내 환경을 지켜 보시는 아버지 앞에 수치스러운 꼴을 어떻게 보이겠느냐 하면서 `제가 이것을 책임지고 가겠습니다’ 할 수 있는 자신이 되어야 합니다. `담판을 지어서라도 틀림없이 가겠습니다. 꼭 갑니다’ 할 수 있어야 합니다. 그럴 때 하나님은 `오냐 너 갈거야? 그럼 어디 가 봐라!’ 하실 겁니다. 사탄의 공격을 받아라 이겁니다. 그런 자리에서 극복하고 가야 합니다. `응당 받아야지요’ 하면서 가야 한다는 겁니다.

하나님은 지금까지 복귀도상에서 아들딸을 책임지고 나오셨습니다. 그러니 이제는 응당 내가 받아야지요. 하나님이 우리를 협조하기 위해서 그렇게 책임지고 나오셨으니, 우리가 하나님의 아들이 되기 위해서는 응당 사탄의 공격을 받아야 됩니다. 원수의 고문틀에 매여 채찍을 맞는 자리, 그러한 자리에 들어가도 `아버지여, 걱정마시옵소서. 제가 참아 남아지는 날에는 이것을 천배 만배 갚아 드리겠습니다’ 할 수 있어야 합니다. 또한 하나님의 깊은 심정의 골짜기를 거쳐 새로운 결의와 새로운 교육을 받는 자리에서도 `아버지 걱정마시고 진정하시옵소서’ 할 수 있어야 합니다. 그런 길을 넘지 않고는 인간 세상에 새로운 개척의 동기가 나올 수 없다는 것입니다. 세상이 그냥 그대로 해결 안 된다는 거예요. 그렇기 때문에 인간들이 신앙을 통해서 나온 것입니다. 이런 신앙의 관점에서 볼 때, 오늘날 수많은 종교는 반드시 끝이 와야 된다고 하는 것입니다.

31-50
하나님이 내세우시는 개척자
그러면 오늘날 통일교회가 이런 말세를 맞이한 신앙행로에서 어떻게 해야 되느냐? 새로운 길을 향해 저편으로 넘어가기 위해서는 우리의 생활태도가 달라져야 됩니다. `나는 새로운 개척자로서 개척의 자리에 들어가 성공하겠다’고 다짐해야 합니다.

지금까지 수많은 사람들은 어려우면 도와 달라고 아우성쳤지만 통일교회가 가는 길은 그렇지 않습니다. 우리가 승공연합을 창설할 때, 기관에 있는 사람들이 말하기를 `왜 저렇게 미욱할까? 슬쩍슬쩍해 가지고 다 앞에 내세우면 얼마든지 할 수 있는데….’ 라고 했습니다. 그러나 나는 그런 것을 원하지 않아요. 하나님께서 수고하신 기반 위에 내가 가야 할 개척노정이기 때문에 내가 책임을 지고 하겠다는 거예요. 있는 정성을 다 투입하겠다는 것입니다. 밤이든 낮이든…. 내가 할 수 있는 최고의 정력을 다 기울인다는 것입니다.

제1차 계획에서 실패하면 제2차 계획을 세우는 것입니다. 거기에는 배가의 노력을 할 것입니다. 제2차 계획도 실패하면 또다시 제3차 계획을 세워서 하는 것입니다. 3배의 가중한 노력을 할 것입니다. 실패를 거듭하면 할수록 그 실패의 요인으로 말미암아 내가 낙오자가 되고 패자가 되는 것이 아니라, 도리어 여기서 더 가중된 결의와 각오를 하고 나가겠다는 것입니다.

그래야 지상에 천국이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지상에 천국이 오는 것이 아니라 지상에 천국을 만들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러려면 새로운 개척자가 되어 이 땅을 움직여야 합니다. 하나님도 이 땅에 개척자를 내세우려 하시는데 어떤 개척자를 세우느냐? 하나님 앞에 짐을 지우는 그런 자는 쓸데없다는 것입니다. 자기의 짐은 물론 하나님의 짐까지 맡아 질 수 있는 사람이어야 합니다. 여러분이 지금까지 걸어 나온 것은 개인 구원받기 위해서였습니다. 여러분 개인을 위해서였지 국가를 위해서가 아니었습니다. 전부가 개인의 테두리 안에서 시시하게 편협한 인생관을 가지고 꺼떡꺼떡하고, 뭐가 어떻고 저떻고…. 메스꺼운 패들이 많다는 거예요.

여러분에게 얘기했는 지 모르지만, 내가 감옥에 들어가서 매를 맞아 피를 토하고 쓰러지는 자리에서도 나를 위해 하나님 앞에 기도하지 않았습니다. 이것보다 몇백 배의 수난을 당하며 나오신 하나님이시기에 그 하나님 앞에 기도를 할 수 없었습니다. 미래의 수난길을 책임지고 있는 사람이 현재 고난을 당한다고 해서 얼굴을 들고 기도할 수 없었습니다. `응당 맞아야지요! 응당 몰려야지요! 응당 죽어야지요!’ 하는 마음을 가졌습니다. 자기의 십자가는 자기가 책임져야 합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아무든지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좇을 것이니라(마 16:24)”하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자기 십자가를 하나님께 맡기겠다고 하면 하나님께서 동정을 안 해주십니다. 오늘날까지 대부분의 신앙자들은 자기의 십자가를 하나님께 맡기려고 했습니다. 하나님께 무엇을 남겨 드릴 것인가 하는 것은 생각하지 않고 하나님의 뼈까지 깎아 먹으려고 하는 기생충과 같은 신앙자들이었습니다. 그러면 천국에 못 간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나라, 즉 하나님의 집에 못 간다는 것입니다.

아무리 부모 앞에 불효하는 자식이라 하여도 자기 부모가 죽도록 고생한 것을 알면 돌아서서 통곡을 하고 회개하는 것입니다. 자식이 그러한 자리에 서게 될 때 효자도 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 인간들은 아직까지 그러한 자리에 서지 못했습니다.

그러므로 역사시대에 없었던 그러한 효자의 모습, 하나님이 동정할 수 있는 모습이 되어 하나님께서 소망을 가지고 `내가 너에게 바랄 수밖에 없구나’ 할 수 있는 한때를 내가 언제 마련할 것이냐? 지금까지의 종교 형태를 가지고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새로운 형태를 모색해야 돼요.

여기에서 통일교회가 보는 관은 다르다는 거예요. 내가 기도해 가지고 내 자신이 복받겠다는 것이 아니라, 내가 하나님의 짐을 덜어주기 위해서, 하나님 앞에 복을 돌려드리기 위해서, 하나님의 어려움을 내가 책임지기 위해서 기도하자는 겁니다. 또한 수난을 당하더라도 그 수난이 내게 과중한 것이 아니라 오히려 그것이 적어 하나님 앞에 부끄럽다고 하는 마음을 가져야 합니다. 그뿐 아니라 `당신은 저를 염려하기 보다도 먼저 나라를 위해 짊어진 십자가를 벗어야 할 입장이 아닙니까? 저는 죽더라도, 이 나라, 이 민족은 망하는 한이 있더라도 세계를 위해 짊어진 십자가를 벗어야 될 당신의 입장이 아니겠습니까?’ 할 수 있어야 됩니다. 하나님이 이러한 입장에 계시기 때문에 자기의 자식, 일족, 종족을 고생의 자리, 굶주리는 자리, 헐벗는 자리로 몰아내더라도. 그러한 자리에 서서 나라를 위하는 사람이 충신이 아니겠느냐는 겁니다.

31-52
새로운 개척자의 길을 모색해야 할 우리
여러분은 새로운 효의 길을 모색해야 되고, 새로운 충의 길을 모색해야 되고, 새로운 개척자의 길을 모색해야 됩니다. 그 기원이 어디에서부터냐? 그 자리는 자기를 인식하고 자기를 중심삼아 `하나님이시여, 나를 알아주시옵소서’ 하고 자기를 주장하는 자리가 아닙니다. 여러분들은 그것을 알아야 돼요.

여기에서부터 새로운 개척자의 길이 다시 시작되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자신을 도와주는 하나님에게 민망한 마음을 갖고 개척자의 길을 가야 합니다. 그런 여러분이 어떠한 자리에서 기도하여 하나님의 은혜가 같이했다면 하나님이 얼마나 불쌍하시냐? 얼마나 불쌍하시냐 이겁니다. 영계와 수많은 투쟁을 하여 길을 트고, 이제까지 관계를 맺고 찾아가는 그 마음이 여러분의 신앙생활 가운데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민족을 위하여 고생하는 길을 가야 합니다. 세계를 위하여 고생하는 길을 가야 합니다. 내가 살아있는 동안 내 눈에 흙이 들어가기 전까지는 가야 합니다. 내 일생에 있어서 개인 복귀, 가정 복귀, 민족복귀, 국가 복귀, 세계복귀를 해야 할 운명이 남아 있는 것이 아니냐? 그러기에는 너무 짧은 인생이 아니냐? 70, 80년밖에 살 수 없지 않은가?

그렇기 때문에 이것을 축소시켜 오늘 이 세계를 위하여, 이 나라를 위하여, 이 민족을 위하여 살 수 있는 생활을 해야 합니다. 그리고 `아버지, 제가 당하는 이 시련을 이 민족과 세계를 위하여 맞는 것으로 인정하여 주시옵소서. 아버지가 당하신 시련이 그런 시련이었기 때문에 그 아버지의 마음을 알고 싶어하는 것이 자식의 도리가 아니겠습니까?’라고 하는 자신이 되어 가야 됩니다.

여러분, 하나님이 언제 기뻐해 보셨습니까? 오늘날 신령한 사람들이 기도해 보고는 선생님이 불쌍하다고들 하지요? 그렇지만 선생님은 불쌍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이 불쌍하십니다. 나보다 몇천만 배 더 불쌍한 분이 하나님 아버지입니다. 나는 불쌍하지 않습니다. 내가 원하는 것은 여러분의 동정이 아닙니다. 여러분의 동정보다는 민족의 동정을 원합니다. 그래서 여러분을 희생시키는 것입니다.

그것은 왜? 민족적인 여러분이 되게 하려고 그럽니다. 그렇게 하지 않고는 복귀의 길을 개척할 수 없는 것입니다. 때문에 하나님 앞에 가까운 통일교회라 할진대 짊어질 수 있는 십자가를 지고도 `하나님이시여, 저를 세우시옵소서’ 할 수 있어야 됩니다. 이것이 효의 자리입니다.

그러기에 다리를 펴고 편히 잠을 잔 사람이 있다면 눈을 뜨는 그 순간부터 부끄러움을 느껴야 되겠습니다. 옷을 입고 나서는 때에도 부끄러움을 느껴야 되겠고, 밥을 먹고 나서도 부끄러움을 느껴야 되겠습니다. 눈물의 길을 버리고 떠날 수 없는 것이 신앙길이라는 것입니다.

거기서부터 하나님이 제시한 개인 복귀의 노정을 개척해야 하는 것이요, 가정복귀의 노정, 혹은 통일가의 개척노정, 민족 복귀의 개척의 노정, 국가 복귀의 개척노정이 벌어지는 것입니다. 이런 것은 날이 가면 날이 갈수록 절대 망하지 않습니다. 내가 망하면 하나님도 쓰러지는 거예요.

31-54
심정세계의 개척자가 되어야 할 통일교인
여러분, 그렇지요? 아무개에게 아들이 몇 있는데 그 중의 한 아들이 먹을 것이 있으면 그저 형제들에게 나누어 주기 일쑤고, 그저 부모를 염려하고 그러는데, 잘못하여 그 아들이 죽었다면 그 부모의 마음이 어떻겠어요? 그 부모는 말할 수 없이 슬플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그런 심정의 자리에서 살고 죽자는 것이 통일교회입니다.

그러므로 여러분들은 심정세계의 개척자가 되어야 합니다. 그 개척자가 가는 길은 극복과 인내만이 있을 뿐입니다. 그것이 생활철학입니다. 그런 자리는 누구도 이해하지 못합니다. 힘들고 고달픈 자리예요. 기진맥진할 정도로 고달플 때가 많다는 겁니다. 그렇지만 `저 개인 하나 쓰러지는 것은 좋지만, 아버지여! 이 땅 위에 저와 같은 사람이라도 없다면 당신은 얼마나 불쌍하시겠습니까? 제가 제1의 소망이 되지 못할 때, 제2, 제3의 소망이 될 수 있는 그러한 아들딸이 없는 것을 느끼면 느낄수록 당신은 얼마나 불쌍하신 분인가를 알게 되옵니다.’라고 해야 합니다. 여러분은 그런 마음을 가져야 합니다. 그리하여 통일교회라는 새로운 종교를 중심삼고 개척자의 깃발을 세워야 하겠습니다.

그런 개척자의 사명을 하고 나서도 부끄러움을 느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또 같이하셨구나’ 하는 것을 느껴야 된다는 것입니다. 사지(死地)의 교차로를 거칠 적마다 나는 이미 버려진 몸이라 생각하는데 하나님은 그런 나를 더 염려해 주시고 가누어 주십니다. 여러분이 기도하는 것보다 하나님은 여러분을 더 염려하신다는 거에요. 그러니 기도할 필요가 없다는 것입니다. 심정의 세계에서는 기도할 필요가 없습니다. 효도하는 길은 부모에게 요구하는 길이 아닙니다. 가는 그 길이 효를 증거하는 길이 되어야 합니다.

그러면 그 자리가 어떤 자리냐? 지금까지의 잘못된 신앙태도를 버리고 자기의 십자가를 하나님 앞에 돌리지 않고 자기가 감당하는 자리입니다. 자기의 힘이 부치지 않으면 민족의 십자가, 세계의 십자가로 연결시킬수 있는 그 길을 내가 책임지겠다고 몸부림치며 가야 합니다. 그런 입장에서 `아버지여! 저를 보내주시옵소서. 저를 치시옵소서. 저를 보아서라도 이 민족을 구하여 주시옵소서. 제가 이 민족을 생각하는 것은 아버지께서 이 민족을 구하기를 원하시기 때문입니다.’라고 해야 합니다. 이런 심정을 가지고 기도하면 그 기도는 하나님 앞에 상달될 것입니다.

그런데 전부다 뭐 개인을 위해 기도해요, 개인을 위해…? 여러분이 뭐 선생님을 위해 기도해요? 말도 하지 말아요. 나를 위한 기도는 내가 원하지 않아요. 여러분 자신을 위해서도 기도해서는 안 됩니다. 여러분이 무엇을 해 놓고 내가 뭘 했는데 선생님이 몰라주고, 협회장이 몰라준다고 합니다. 몰라주는 것이 정상적입니다. 알아주는 것은 무서운 거예요.

선생님은 이 길을 개척하면서 가장 어려운 때에 부딪치더라도 누구한테 그 어려움을 얘기하지 않았습니다. 지금도 그렇습니다. 내가 가야 할 길은 협회장과도 의논하지 않아요. 내가 가는 길이 첫번째 가는 길이기 때문에 내가 가야 하는 것입니다. 내가 맞고 가는 것입니다. 나는 아직까지 쉬어 본 적이 없습니다. 외적인 입장에서 보면 엣날보다 나을지 모르지만 그렇다고 여기에서 안심할 수 없습니다.

이것이 복귀섭리를 이끌고 오신 하나님 앞에 타락한 인간이 갖추고 나가야 할 본연의 자세인 것입니다. 가다가 쓰러지는 사람이 있으면 그것까지 지고 가야 합니다. 그러나 그 십자가를 져주려 하는 것이 부자의 관계를 가진 부모의 마음이 아니겠느냐 하는 것입니다. 이런 것을 생각할 때 그런 하나님의 동정과 인연을 가지고 내 길은 내가 가야 하겠습니다.

그러면 내가 가야 할 길은 어디냐? `야 아무개야! 이런 내 십자가를 네가 대신 짊어질 수 있느냐? ‘하고 부탁받을 수 있는 자리가 더더욱 선한 가치의 자리인 것을 알고, 책임을 지기 위해 충성을 다하겠다고 맹세할 수 있어야 합니다. 여기서부터 이 땅 위에 새로운 개척자의 길이 시작되는 것입니다.

그렇게 살아온 사람은 역사에 남지 않으려 해도 기필코 남게 됩니다. 여기서부터 새로운 종교, 새로운 민족, 새로운 세계가 형성되는 것을 알아야 되겠어요. 아시겠어요? 「예」

31-56
기 도
아버님, 세상의 많은 사람들을 대할 적마다 저는 아버님앞에 지극히 못난 모습이었사옵니다.

오늘도 아버지의 모습을 생각하게 될 때, 저 자신을 내세우기에 부끄러운 모습인 것을 느끼게 되옵니다. 그런 자리에서 시련과 은사를 대할 적마다 아버지 앞에 통고할 수 없어 몸부림치는 모습을 보고 천만번 눈물로써 대해 주신 사실을 생각하게 될 때, 인생에 있어서 축복된 자리는 그 자리밖에 없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오늘 통일가를 기억하시는 아버지여, 지금까지 저희들을 기억하여 주신 것을 감사드리옵니다. 저는 그들의 행복보다는 민족의 행복을 위하여, 아버지, 공을 들이고 기도를 했습니다. 그들이 자기를 위하여 당하는 시련을 극복하는 것보다도 그들을 내세워서 민족과 세계의 시련을 극복하게 하려는 것이었습니다. 신앙의 전통적인 노정이 이와 같은 길에서 개척되어져야 한다는 사실을 저희들이 깨달아야 되겠사옵니다.

과거와 현재를 통해서 아버지 앞에 십자가를 남기고 나온 역사적인 슬픔, 시대적인 슬픔이 있다는 것을 알았사옵니다. 선조들이 책임 못한 개척의 길, 복귀의 길을 저희가 아버지를 대신하여 사탄세계에서 헤쳐 나가면서 눈물의 골짜기를 메워 나가야 되겠사옵니다. 이 시대 가운데 피할 수 없는 현실을 바라보며 심판의 비수를 가해야 할 자신의 입장을 느끼면서 아버지가 없더라도 저희가 책임지겠다는 마음을 갖고 나오는 당신의 아들딸들이 되게 하여 주시옵소서.

바라지 않는 그 자리가 말할 수 없이 어려운 자리인 것을 생각할 때마다, 저희가 맞고 있는 자리가 죽을 수 없는 자리라는 것을 생각할 때마다, 당신은 죽는 자리에 저희를 내세울 수 없었다는 것을 저희가 알았사옵니다. 망하는 자리에 내세울 수 없는 것이 아버지인 것을 저희가 느꼈습니다. 체험하였습니다. 아버지, 황공하옵니다.

금후에도 아버지께서 통일교회를 사랑하고 싶거든 저희에게 채찍을 가하여 내몰아 치시옵소서. 거기에서 아버지를 보고 기뻐하는 무리가 되면 사랑하여 주시옵기를 바라는 것이 스승의 마음인 것을 이들이 알고, 기념할 수 있는 날, 즉 10년 전 이때를 그리워하면서 다시 한번 이들이 마음속으로 이 말씀을 기억하게 하여 주시옵소서.

10년 전 성혼식을 한 그때에도 저는 가정을 위한 남편이 되겠다고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가정의 행복을 위해서 복을 비는 자가 되지 않겠다고 다짐하면서 지금까지 싸워 나왔습니다. 또한 민망하고 부끄러운 자세를 감추지 못하고 아버지를 대할 적마다 가슴을 졸이는 날들을 보냈다는 사실을 당신은 알고 계시옵니다.

제게 어려움이 있다면 그 모든 어려움은 아버지의 거룩함과 인연맺기 위한 것이요, 아버지의 지고하신 성품과 인연맺기 위한 것입니다. 또한 거기에 당신의 사랑이 깃든 것을 생각하게 될 때, 저는 그것을 원망하거나 불평하는 마음을 갖지 않습니다. 과거나 현재에도 그런 마음을 갖지 않은 것을 당신은 아시옵니다.

여기에서부터 통일가의 심정적인 전통이 갖추어져야 되겠습니다. 여기에서부터 통일가의 개척자의 사명이 시작되어야 되겠습니다. 세계의 복을 받기 위해서 자신의 입을 벌리고, 팔을 벌리고 몸부림치는 사람보다도 자기 스스로가 당할 수 있는 십자가를 홀로 지고 민족의 십자가까지 책임지겠다고 입을 벌리고, 팔을 벌리고 몸부림치는 사람이 되어야 하겠습니다. 그런 사람이 나오기를 당신은 얼마나 바라셨습니까?

자기를 중심삼고 아버지를 이용하기 위해 당신의 제단 위에 머리숙인 무리가 있다면 그 무리들은 언젠가는 민족의 십자가를 짊어지고 가는 사람들에게 흡수된다는 사실을 알아야만 되겠습니다.

이제 하늘의 분기점, 하늘의 정상의 자리를 향해 나선 저희들, 이 70년대를 맞이하여 이 국가와 민족, 아시아의 정세를 바라볼 적마다, 저희들앞에 또다시 십자가의 노정이 가중되어 들어오는 것을 알게 됩니다. 그럴때일수록 탕감시대가 가까와 오기 때문에 `나만 남았나이다’ 하는 자리에 서서 자기 스스로의 책임을 어떻게 하느냐 하는 문제를 놓고 다시 반문하지 않으면 안 될 것을 알아야 되겠사옵니다.

너는 민족을 위하여 무엇을 생각하였으며, 너는 아시아를 위하여 무엇을 생각하였으며, 너는 세계를 위하여 무엇을 생각하였느냐 하는 문제를 두고 볼 때, 민족관념을 초월하여 아버지의 심정을 민족간에 연결시켜야 할 사명이 저희에게 있는 것을 알았습니다. 지금까지 이 사명을 다하겠다는 마음을 먹고 싸워 나왔기 때문에 원수의 나라들과 서로 손을 잡고 형제의 인연을 맺을 수 있게 되었던 것을 생각할 때, 그 아버지의 공로를 찬양하지 않을 수 없사옵니다.

통일가에서 그런 일이 벌어지는 것은 문선생이 잘나서 그렇게 된 것이 아니옵니다. 아버님께서 가시는 심정길이 그렇기 때문에 그러한 것이었습니다. 저희가 죽더라도 아버지의 심정길을 따라 오는 수많은 후손들은 이와 같은 인연의 역사를 창조해낼 것이요, 시대를 넘고, 환경을 밟고, 죽음길을 넘어서라도 그러한 역사는 재건될 것이옵니다. 그런 역사시대의 개척자의 실권이 다시 출발된다는 사실을 아는 당신의 아들딸들이 되게 하여 주시옵기를 간절히 바라옵고 원하옵니다.

아버지의 비참함을 밤을 새워 생각하면서 흐느껴 울어도 울어도 끝이 없는 서글픈 자리, 그러한 자리에서 기진맥진하여 잠이 든다면 거기가 하늘왕궁에 들어가 무한한 사랑을 받을 수 있는 단 하나의 길인 것을 이들은 몰랐습니다. 아버지, 이번 기회를 통해 그러한 내용을 이들이 체험하게 하여 주시옵소서. 그러한 길을 전통적으로 본받을 수 있게 하여 주시옵소서. 아버지께서 가하는 그 채찍은 자식에게 드높은 미래의 희망을 약속하기 위한 부모의 채찍이요, 직선을 긋는 사랑인 것을 알게 허락하여 주시옵소서.

통일가에서 십자가의 노정을 가지 않겠다고 한다면 망한다는 것을 알게 하여 주시옵소서. 통일교회가 가는 길 가운데서 이 민족의 짐과 세계의 짐을 벗어나겠다는 무리가 있다면 그 무리는 멸족된다는 사실을 알게 하여 주시옵소서. 민족을 위한 짐, 세계를 위한 짐을 지겠다는 무리가 많이 나와야 되겠사옵니다. 그것이 충의 길이요, 효의 길이라는 것을 알게 하여 주시옵소서. 그러한 무리가 아버지가 기억할 수 있는 무리인 것을 알고 있습니다.

저는 그런 무리가 되기를 바라고 있사오나 따라오는 무리들은 그렇지 못한 것을 볼 때, 아버지, 역사시대에 찾아온 무리들의 모습과 같다는 것을 다시 느끼게 되옵니다. 그러나 불쌍하신 아버지의 심정을 제가 알았기에 이와 같은 일을 바라보며 낙망하지 않고 아버지의 심정을 위로할 수 있는 한때를 위해 가겠다고, 지금까지 아버지 앞에 간구하면서 나온 것을 당신은 알고 계십니다. 그런 처지를 거쳐온 아버지이시기에 그런 처지에서 짧은 생애를 살아 나온 저의 모습을 동정하시는 것을 생각할 때에 황공하고 망극할 따름이옵니다.

당신의 거룩한 옷깃을 붙들고, 당신의 영광되고 찬란한 모습을 바라보게 될 때, 웃음과 기쁨으로 만복을 가지고 세계 인류를 품고 축복할 수 있는 그날이 오기를 얼마나 바라셨습니까? 그것이 아버지의 소원인 것을 생각할 때, 저희들은 그 나라와 세계를 위하여 십자가를 지겠다고 몸부림쳐야 되겠습니다. 피투성이의 몸이 되더라도 그 싸움을 책임지겠다고 나설 수 있는 무리가 되어야 할 것을 알고 있습니다.

저희들은 3년전도라는 깃발을 들고 나섰습니다. 저희들은 벌거벗은 몸으로서 홀연히 나선 어린애와 같은 모습이옵니다. 이것을 자처하고 나선 것은 모험 중의 모험이옵니다.

그러나 저는 이 판가리 싸움에서 저희들이 승리할 것을 바라지 않습니다. 당신의 소원대로 하시옵소서. 저희들이 흘릴 바의 눈물을 다 흘리고, 충성할 바의 충성을 다하고, 이것을 저희 자신들의 책임으로서 얼마나 감수했느냐는 문제가 승패의 관건이 된다는 사실을 저희들이 잘 아옵니다. 그러기에 승리를 바라면 안 되는 것이옵니다. 이것을 자기의 책임으로 알고 노력하면서도 얼마나 부끄러운 마음이 가중해 있느냐? 아버지가 달려와서 책임지고 해결하고 싶은 마음이 얼마나 가중되느냐? 그러한 환경이 되어 있느냐 그렇지 못하야 하는 문제가 승패의 요인이 된다는 사실을 확실히 알게 하여 주시옵기를, 아버님, 간절히 바라옵고 원하옵니다.

오늘 여기에 참석한 자녀들이 무엇을 가지고 돌아가겠사옵니까? 이런 마음을 가지고 돌아가야 되겠사옵니다. 처량한 아버지를 모시고 아버지앞에 불효의 모습이 되지 않겠다고, 아버지 앞에 불충의 모습이 되지 않겠다고, 아버지 앞에 남아 있는 짐을 저희가 대신 책임지겠다고 몸부림치며 생애를 다바쳐 이 길을 가는 것이 저희들의 본분인 것을 알고 그러한 길을 가겠다고 결의할 수 있는 이 아침이 되게 허락하여 주시옵소서. 그리하여 새로운 민족의 개척자, 새로운 세계의 개척자가 될 수 있게 하시옵소서.

아버지, 이러한 통일가의 자녀들이 아버지께 기억되고, 세계에 기억되어, 우리가 가는 길을 보고 세계 사람들이 자청해서 따라올 수 있는 무리들이 많게 하시옵소서. 하나님을 찬양할 수 있는 그날까지 저희들은 가야겠사옵니다. 지칠래야 지칠 수 없고, 쉴래야 쉴 수 없는 고달픈 이 노정, 그러나 아니 갈래야 아니 갈 수 없는 인생길이기에 그 길을 가려 하는 이들 앞에, 아버지여, 동정의 마음을 베풀어 주시옵소서.

이제 이 4월을, 이해를, 그리고 생애를 아버지와 더불어 같이하고 싶어하는 이들이 책임진 것을 잊지 말게 하여 주시옵소서. 자기의 책임은 자기가 짊어지겠다고 선두에 서서 몸부림치며 싸워 나가는 당신의 아들딸들이 되게 허락하여 주시옵기를 간절히 부탁드리오며, 모든 말씀을 참부모의 성호 받들어 아뢰었사옵나이다. 아멘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