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1-07 to 31-23: 고개를 넘자

고개를 넘자
1970.04.08 (수), 한국 전본부교회

31-07
고개를 넘자
우리가 일생 동안 살아가는 데에는 많은 고개가 있습니다. 하루를 생활하는 데에도 고개가 있는 것이요, 젊은 청춘시대면 청춘시대에도 고개가 있는 것입니다. 또 가정을 가져서 가정을 이끌고 나가는 데에도 고개가 있고, 사회생활을 하는 데에도 역시 고개가 있습니다. 즉, 개인에서부터 사회 그리고 국가가 가는 길 앞에는 그 운명을 결정지을 수 있는 고개가 있다는 것입니다. 세계를 두고 봐도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31-07
인류 역사의 성공과 실패가 결정되는 기준
이런 관점에서 볼 때, 만사는 하나의 정상이라는 고개를 중심삼고 인연지어 나간다는 것을 여러분이 알아야 합니다. 우리는 흔히 누구는 성공했고, 또 누구는 실패했다는 말을 합니다. 그러면 성공했다고 하는 사람은 어떤 사람이냐? 자기가 목적한 고개를 넘은 사람입니다. 실패했다고 하는 사람은 어떤 사람이냐? 그 고개를 넘지 못한 사람입니다. 우리의 일생을 두고 봐도 생애노정에서 자기가 목적한 바를 성취하면 인생에 성공한 사람이요, 그것을 성취하지 못하면 실패한 사람인 것입니다.

이것을 역사에 적응시켜 볼 때, 역사노정을 통해 역사가 바라는 목적 기준에 도달하지 못할 때는 실패하게 되는 것이요, 그 기준을 넘어설 때는 승리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와 같은 관점에서 하나님의 섭리를 두고 보면, 하나님 자신이 목적하시는 바를 성사시키게 될 때는 승리권에 처할 수 있는 것이요, 성사시키지 못하게 될 때는 실패권에 처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이렇게 볼 때 복귀섭리 즉, 다시 돌아가는 섭리는 실패권에서 필요한 것이지 승리권에서 필요로 하는 명사가 아닌 것입니다.

타락한 인간이란 무엇이냐? 이는 패자의 후손들입니다. 그러면 이 후손들이 패자의 서러움을 어떻게 극복하느냐? 이 문제는 우리가 태어나면서부터 생명이 다할 때까지 투쟁하여 극복해야 할 생활의 과제요, 생애의 과제가 되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러니만큼 이것을 더 크게 보면 사회의 과제요, 국가의 과제요, 세계의 과제요, 또한 인류가 영원을 두고 해결해야 할 과제인 것입니다. 이 과제를 해결하느냐, 못 하느냐에 따라 인류 역사가 성공하느냐, 실패하느냐가 결정되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하나님께서 섭리의 뜻을 이루느냐, 못 이루느냐 하는 문제가 좌우된다는 것을 우리들은 알아야 되겠습니다.

31-08
6천년 복귀의 고개를 오늘 우리는 어떻게 넘을 것인가
오늘날 우리 개체를 두고 볼 때에, 우리 개체가 어떠한 입장에 처해 있는가를 생각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오늘 성10회로서 수료증을 받는 이 마당에 있어서 나는 뜻이 지향하는 목표에 비추어 볼 때에 어떤 입장에 처해 있느냐를 생각해 보아야 합니다. 뜻이 지향하는 정상을 바라보며 달리고 있지만 그 길은 천태만상입니다. 혹자는 이렇게 가고, 혹자는 저렇게 가고, 또 나와 제일 가까운 친구는 저렇게 가려고 하고, 나는 이렇게 가려 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이렇게 벌어진 환경을 두고 볼 때, 정상을 향해 달려가는 노정에 있어서 나는 어떠한 길을 가고 있느냐 하는 문제를 놓고 비판해 보아야 됩니다.

그런 길을 가는 데 있어서 가야 할 방향을 명시함과 동시에 자기가 처해 있는 입장을 확정짓지 않는 사람은 지극히 위험한 존재입니다. 그런 사람은 앞으로 다가올 정상의 고개를 대해 보지도 못하고 패자의 서러움을 당할 것입니다. 또 어디로 간다는 목표도 알지 못한 채 쓰러져 버릴 것입니다.

그러면 그 정상의 고개를 어떻게 넘을 것이냐? 이것이 문제입니다. 이 고개를 돌파함으로 말미암아 통일교회를 믿고 따라 나온 그 목적이 성취되는 것입니다. 우리는 지금까지 수년 동안 수고한 공적의 터전 위에 서서 오늘 이 날을 맞이한 것입니다. 이런 관점에서 여러분 자신이 지금 어떠한 입장에 있느냐 하는 것을 회고해 보고 제3자의 입장이 아닌 자기 자신의 입장에서 다시 한번 자세를 확정지어야 합니다. 이러한 중대한 문제에 직면하고 있다는 것을 여러분은 알아야 되겠습니다.

31-09
선열들이 넘지 못했던 고개가 우리 앞에 다가오고 있다
복귀섭리 노정을 관찰해 볼 때, 여기에는 개인이 넘어야 할 고개가 있습니다. 지금까지의 6천년 역사는 잃어버린 아담 하나를 찾기 위한 역사입니다. 하나의 완성한 남성을 찾기 위하여 6천년이 걸려 나온 것입니다. 이렇게 나오면서 한때를 결정하여 한 개인이 완성하고 개인적으로 승리했다는 그 고개를 넘어야 비로소 새로운 인연을 맺을 수 있는 때를 맞이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 때가 바로 오늘날 인류가 바라는 소망의 시대입니다. 또한 하나의 완성한 남성으로서 이 땅에 오셔야 할 분이 만민이 바라는 구세주요, 이런 사상이 구세주 사상, 메시아 사상이라는 것입니다.

지금까지 역사노정을 통하여 온 복귀도상에 있어서 개인이 넘어가야 할 고개가 얼마나 많았는가? 종의 종 시대로부터 종의 시대, 양자의 시대, 아들의 시대를 거쳐서 이 땅 위에 예수님이 오셨지만 뜻을 이루지 못하고 가셨습니다. 가신 그날부터 2천년 동안 피눈물나는 투쟁이 계속되어 나왔습니다. 그뿐만이 아니라 피를 뿌리지 않고는 개척할 수 없는 죽음의 행로를 더듬으면서, 개인이 가야 할 고개를 넘기 위해서 하늘과 땅과 인류가 총동원되어 나왔습니다. 그런 길을 걸어나오는 데 있어서 정상을 바라보는 기막힌 순간을 찾아야 할 인류의 운명길이 얼마나 심각하겠는가?

이 고개는 인간들이 좋거나 싫거나 역사를 걸고, 영원을 걸고 넘어가야 할 정상의 고개입니다. 이 고개를 못 넘게 될 때에는 천년 만년의 한이 내 앞에 가로 놓일 것이요, 또 내가 소망하는 것에 비례되는 흑암권세가 나를 억누를 것입니다. 이렇게 무서운 역사적인 고개가 있다는 것입니다.

이 고개의 정상을 향하여 수많은 선지선열들은 자기의 정체를 감추고 피를 뿌리며 죽음의 혈투 가운데에서 자기의 존재를 잊어가면서도 오직 그 일념을 갖고 외치고, 혹은 죽어갔지만 뜻을 이루지 못했습니다. 그 뜻을 이루지 못한 채 남긴 그 고개, 그 고개가 우리 앞에 다가오고 있다는 사실을 여러분들은 알아야 됩니다. 하나님께서 6천년 동안 넘고 싶으셨던 그 고개가 역사의 종말시대인 오늘날 우리에게 다가오고 있다는 것입니다.

31-10
가정 구원을 표방하는 통일교회
지금까지의 종교는 개인을 구원하기 위한 종교였습니다. 이것이 역사 이래 지금까지 종교가 넘고자 한 하나의 고개였습니다. 그러면 이 개인의 고개를 넘고 나면 어떤 고개가 있느냐? 가정의 고개가 있는 것입니다.

오늘날 통일교회는 어떤 교회냐? 통일교회는 개인구원을 목표로 하는 교회가 아닙니다. 6천년 동안 개인 구원을 위주로 하던 종교 형태에서 벗어나 가정을 구원하기 위한 종교가 되어야 합니다. 이것이 금후에 통일교회가 해결해야 할 역사적인 과제입니다.

오늘날 국가에서는 개인을 표창하고 있습니다. 충신열녀나 효자효녀를 표창하는데, 이것은 어디까지나 개인을 표창하는 것이지 가정을 표창하는 것이 아닙니다. 지금까지 가정을 중심삼고 표창한 국가는 없었습니다. 종교도 마찬가지로 가정 구원을 목표로 삼고 나온 종교가 없었습니다.

지금까지 역사과정을 거쳐 나온 수많은 종교는 국가를 세울 수 있는 자리에 올라서지 못했습니다. 왜? 구원의 목적이 개인 구원이었기 때문입니다. 사회 구원을 목적으로 한 것도 아니요, 국가 구원을 목적으로 한 것도 아니었습니다. 단지 개인 구원을 종교의 목적으로 삼고 나왔던 것입니다.

지금까지의 종교는 6천년 동안 개인을 중심삼은 승리적 고개를 넘기 위해서 노력해 나왔습니다. 하지만 우리 통일교회가 가야 할 길 앞에는 가정의 고개가 있습니다. 이 가정의 고개를 넘는 데는 자기 혼자 넘어서는 안 됩니다. 반드시 둘이 같이 넘어가야 합니다. 같이 넘어가는 데에는 전후관계에서 가는 것이 아니라 좌우관계에서 가야 됩니다. 왜냐하면 따라감으로 말미암아 타락이 벌어졌기 때문입니다. 다시 말해서 해와는 천사장을 따라가다가, 아담은 해와를 따라가다가 망했던 것입니다. 이와 같이 따라가는 입장에서는 구원이 성립되지 않습니다. 좌우로 같은 입장, 평등한 입장, 동등한 입장에서 가야만 상대적인 구원이 성립되는 것입니다.

이런 관점에서 볼 때, 남성으로 오시는 주님이 이 땅에 오셔서 해야 할일이 무엇이냐? 자기를 따라올 수 있는 상대를 구해 가지고 천국 이념을 펼치는 것이냐? 그것 가지고는 안 됩니다. 상대와 동조동고해 가지고 좌우의 평행선상에서 둘이 하나님 앞에 나서서 같은 보조로 나가야 합니다. 그럴 수 있는 일남일녀가 나오지 않고는 본연의 자체로 복귀할 수 없는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그런 인간 즉, 남성과 여성이 나오지 않으면 가야 할 정상의 고개를 넘어설 수 없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나는 신랑이요 너희는 신부다’ 라고 하신 것입니다.

31-11
어떠한 대열을 갖추어 탕감고개를 넘어야 하는가
신랑 신부는 전후관계로 가는 것이 아니라 좌우관계로 가는 것입니다. 혼인식을 거행할 때에는 반드시 주례자가 있습니다. 신랑 신부는 그 앞에 평행하게 나아가는 것입니다. 이것이 신랑신부가 가는 길입니다.

지금까지의 역사도상에서 하나의 남성과 하나의 여성이 하나님 앞에 평행하게 간 시대가 있었느냐? 없었습니다. 이것이 역사도상에 비로소 다시 나타났으니 바로 오늘날 남성과 여성이 넘어가야 할 최후의 고개인 것입니다. 이 고개를 넘고 나면 역사상에 없었던 평화로운 가정, 역사상에 없었던 새로운 가정이 출발되는 것입니다.

그러한 가정을 이루게 되면, 다음에는 부부를 중심삼고 가정이 갈 길을 가야 합니다. 그 가정에는 부부를 중심삼은 아들딸이 있을 것입니다. 이 아들딸들도 역시 부모를 따라가는 입장에 있어서는 안 됩니다. 아버지 편, 어머니 편으로 갈라서서 하나님 앞에 나아가는 데에도 평행을 갖추어서 나아가야 합니다. 이것이 하나님이 바라시는 창조의 목적이라는 것입니다.

이렇듯 개인이 넘어가야 할 고개, 부부가 넘어가야 할 고개, 가정이 넘어가야 할 고개가 있는 것입니다. 가정들 전체가 그 고개를 넘어 완성한 가정이 된다면 세계의 수많은 가정들이 하나님을 중심삼고 좌우관계를 맺어 횡적인 대열을 갖추게 될 것입니다. 그리하여 하나님 앞에 각자 주장할 수 있는 가정들이 생겨날 것입니다. 그렇게 될 때 하나님은 그 가정들을 같은 축복, 같은 환희로써 맞이하실 것입니다. 그러나 전후관계에 있을 때에는 반드시 그 차이에 해당하는 만큼 슬픔이 개재된다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금후에 이상적인 가정을 이루려면 하나님을 중심삼고 횡적으로 맞춰 갈 수 있는 남성과 여성이 필요하다는 것을 여러분들이 알아야 됩니다. 그러면 그런 부부가 자녀를 어떻게 좌우의 횡적인 직선상에서 거느리고 가느냐 하는 것이 문제입니다. 이들이 하나의 가정을 이루고, 하나의 종족을 이루고, 하나의 민족을 이루고, 하나의 국가를 형성해야 합니다. 세계 만민이 이와 같은 입장에서 가게 된다면 그런 나라가 하나님께서 이상하셨던 나라가 아니냐? 모든 사람이 직선상에 같은 모양으로 나타나는 것이 하나님께서 이 땅 위에 창조하신 최고의 목적 기준이라는 것입니다.

이런 관점에서 우리들의 마음과 몸을 보더라도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마음이 몸을 끌고 가는 사람은 하나님 앞에 서지 못합니다. 이런 사람은 탕감역사를 이루지 못합니다. 그러면 내 마음과 몸을 횡적인 직선상에서, 좌우의 입장에서 거느리고 갈 수 있는 자신을 어떻게 만들 것이냐? 이러한 자신을 만들기 위한 싸움을 해야 합니다. 이 싸움이 여러분들이 개인 노정을 개척하는 데 있어서 중요한 싸움이 아니겠습니까? 그러기에 그 고개를 어떻게 넘을 것이냐 하는 것이 문제입니다.

그러면 오늘날 하나님께서 선생님을 이 땅 위에 보낸 뜻이 있다 할진대, 선생님 뒤에 일직선으로 따라오는 무리를 맞기 위한 것이 하나님의 목적이겠느냐? 아닙니다. 그런 무리들은 어느 한때에 이리떼와 같은 무리들에게 습격당할 것입니다. 그들은 관찰할 수 있는 시야에서 이미 벗어난 것입니다. 내가 직접주관할 수 있는 곳은 뒤가 아닙니다. 뒤는 주관 못하는 것입니다. 뒤를 주관하려면 다시 돌아서야 됩니다. 돌아서려면 방향 전환을 해야 되는 것입니다.

그러니 180도 권내에 서야 보호권이 생기게 됩니다. 180도에서부터 관리하게 되어 있는 것입니다. 우리의 손을 보더라도 180도 권내를 주관하게 되어 있습니다. 눈도 뒤를 바라보게 되어 있지 않습니다. 눈이 정면을 바라볼 때는 그 각도가 점점 좁아지는 것입니다. 우리의 콧날도 그렇습니다. 이 모든 것은 정상으로 직행할 수 있는 선을 표시한 것입니다.

이런 관점에서 통일교회를 믿는 신자, 더우기 오늘 성10회를 수료하는 여러분 자체를 두고 볼 때, 여러분들은 어떻게 가고 있느냐? 뒤를 따라가고 있느냐? 평행선상에 서서 가고 있느냐?

31-13
8단계의 고개를 넘어야 할 우리
인격자는 누구와 약속한 것이 있으면 그것을 이행하고 실천합니다. 이것은 네가 주장해서 약속한 것이기 때문에 나는 이것을 따라가지 않겠다고 하는 사람이 있으면 그는 인격자가 아닙니다. 법은 공적인 기준을 중심삼고 약속한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 법의 약속권내에 있는 모든 사람들은 그 법을 지켜야 합니다. 약속한 사람이 그 법을 못 지킬 때에는 공동적인 법도에 의해서 제재를 받아야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법을 준수해야 할 사람들의 책임입니다.

누가 주장했든지 간에 세워 놓은 약속은 실천해야 합니다. 실천하지 않으면 낙오자가 됩니다. 약속이라는 것은 약속한 기준, 즉 선이면 선, 점이면 점을 중심삼고 모든 것이 일치되어야 합니다. 거기에는 전후관계가 있어서는 안 됩니다. 그러므로 `몇 시 몇 분에 회합을 한다’ 할 때 몇 시 몇 분 그 자체에 전부 통일되어야 합니다. 그 정점에서는 누구든지 같은 입장에 서야 합니다. 거기에서부터 새로운 역사가 시작되는 것입니다. 그것은 전후관계에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마찬가지로 오늘날 통일교회를 중심삼고 볼 때에, 통일교회가 넘어가야 할 고개가 많습니다. 개인으로 넘어야 할 고개가 있는 것이요, 가정으로 넘어가야 할 고개가 있는 것이요, 종족으로 넘어가야 할 고개가 있는 것이요, 민족으로 넘어가야 할 고개가 있는 것이요, 국가적으로 넘어야 할 고개가 있는 것이요, 세계적으로 넘어야 할 고개가 있는 것입니다. 천주 복귀라는 엄청난 뜻 가운데에는 개인에서부터 8단계의 고개를 넘어가야 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이 고개를 어떻게 넘어갈 것이냐? 여러분 자신들이 넘어갈 수 있는 자세를 얼마나 확실히 갖추고 있느냐 하는 것이 문제입니다. 가라 가라 해도 못 가는 사람은 결국 못 가는 것입니다. 또 와라 와라 해서 못 오는 사람도 역시 못 오는 것입니다.

그러면 여러분이 믿고 있는 이 통일교회는 누구의 교회냐? 이것은 선생님의 교회가 아닙니다. 여러분의 교회요, `내’ 교회입니다. 통일교회의 이념은 누구의 이념이냐? 선생님의 이념이 아닙니다. 이것이 선생님만의 이념이라면 만민 앞에 죄를 짓는 것입니다. 이것은 만민의 이념인 동시에 대한민국 국민의 이념입니다. 따라서 그런 이념을 추구하는 나라는 자기 할아버지만의 나라가 아닙니다. 자기 아버지의 나라도 되는 것이요, 내 나라도 되는 것입니다. 이것은 어디까지나 평행적인 것입니다. 그 누구의 것이 아닙니다.

이런 관점에서 여러분들은 현재 젊은 사람으로서 통일교회에서 어떤 입장에 서 있느냐 하는 것을 확실히 알아야 합니다. 나는 개인적으로 간다 하는 입장이냐? 가정을 대신해 간다 하는 입장이냐? 가정을 대신해 간다면 그 가정을 수습해 가지고 직선으로 갈 수 있게끔 해야 됩니다. 혹은 자기의 문중을 위해서 간다 할 때는 그 문중을 수습해 가지고 같은 방향을 향해 가야 합니다. 도리어 가정이면 가정, 문중이면 문중을 자기 앞에 내세워 가지고 넘어가야 되는 것입니다.

여러분이 예수님을 양치는 목자, 혹은 선한 목자로 비유하는 말을 들었을 것입니다. 평화시기에는 목자가 양을 몰고 갈 때 선두에 서서 이끌고 가지만, 위험한 시기에는 양을 앞세워서 몰고 갑니다. 오늘날 우리들은 사탄 세계를 뒤에 두고 싸우기 때문에 그들을 앞에 세워 몰고가야 된다는 것입니다. 이럴 수 있는 입장에 서지 않는 사람은 결코 하늘편이 될 수 없습니다. 이렇게 해서 우리는 개인이 넘어야 할 고개를 넘어야 되겠고, 가정이 넘어야 할 고개를 넘어야 되겠습니다.

그러면 오늘날 통일교회는 무엇을 위해 가느냐? 개인적인 고개를 넘고, 가정적인 고개를 넘고, 종족적인 고개를 넘고, 민족적인 고개를 넘고, 국가적인 고개를 넘자는 것입니다. 지금까지는 어떠했느냐? 종족을 규합해 가지고 민족적인 고개를 넘고, 국가적인 고개를 넘자는 입장이었습니다.

그러면 여러분 자신들이 거기에 보조를 맞출 수 있는 방향을 갖추고 있느냐? 만일 여러분이 이 길을 가다가 못 가고 패배하게 될 때에는 개인적인 패자의 서러움만 당하게 되는 것이 아니라, 국가적인 패자의 서러움까지 당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 사람이 영계에 가게 되면 차라리 몰랐던 것보다도 나쁘고, 후회막심할 것입니다. 지옥에 가 있는 영인들은 아예 몰랐기 때문에 단념할 수 있습니다. 그렇지만 하나님께서 우리들에게 국가적인 탕감복귀의 고개를 넘어갈 수 있는 최후의 때로 마련해 놓았는 데도 불구하고, 책임을 못하고 이 때를 놓쳐 버린다면 큰 문제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통일교회는 아는 것만으로 끝나는 것이 아닙니다.

만일 국가적인 탕감의 고개를 넘어가기 위해 전체가 노력하고 있고 자기도 거기에 협력할 수 있음에도 불구하고, 거기에 가담하지 않았을 때는 그에게 있어서는 국가적인 고개가 마지막이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여기에서 충성하여 국가적인 고개를 넘는 자리에 서게 되면 그 교회가 가는 길, 그 뜻이 가는 길이 세계의 노정을 넘어 천주의 노정을 가더라도 따라갈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국가적인 고개를 넘어야 할 시기에 처해 있음에도 불구하고 못 가게 되면 세계나 천주로 갈 수 있는 길을 개척할 수 없습니다. 혜택을 받을 수 없다는 것입니다.

31-15
먼저 그 나라와 그 의를 구하라
여러분은 교회에 들어온 연한이 길면 길수록 더 많은 인정을 받아야 합니다. 그런데 교회에 들어온 연한이 긴 데도 불구하고 하나님과 보조를 덜 맞추게 되면 책임감이 점점 희박해져 가게 되는 것입니다. 그렇게 되면 차라리 새로 들어온 사람보다도 못하다는 것입니다.

여러분들은 살다가 언제 죽을지 모릅니다. 국가적인 섭리시대에 있어서 이 섭리의 뜻을 알고, 하나님께서 제시한 그 책임을 수행해야 할 이런 환경에서 넘어야 할 고개를 못 넘고 죽게 된다면 그것으로 마지막이라는 것입니다. 아무리 노력을 해도 국가적인 고개 이상의 세계로 갈래야 갈 수 없는 것입니다. 국가의 울타리권내에서 막혀 버리게 되는 것입니다.

자고로 수많은 사람들이 평면적인 입장에서 살다 갔지만 그들이 공적인 것을 중심삼고 살다가 갔느냐 하는 것입니다. 그 공적이라는 것은 나라만을 위하는 것이 아닙니다. 나라만을 위하는 공적인 기준은 나라가 망하게 되면 없어져 버리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성현의 도리를 따르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어떠한 사람들이 성현이냐? 나라보다도 세계를 위해 사는 사람이 성현입니다. 또 성현의 도리, 성현의 가르침은 뭐냐? 세계적인 공적 기준을 중심삼고 사는 방법을 가르치는 것입니다. 왜? 나라가 망하더라도 세계는 남아지기 때문입니다.

이런 관점에서 오늘 우리 통일교회는 하늘과 땅을 위해서 살자는 천주주의 교회입니다. 역사를 대표한 교회입니다. 통일교회가 지금까지 그렇게 살았다 할진대는 문제가 다르다는 것입니다. 그 세계 가운데는 나라도 들어가 있는 것이요, 그 세계 가운데는 민족도 들어가 있는 것이요, 그 세계 가운데는 종족도 들어가 있는 것이요, 그 세계 가운데는 가정도 들어가 있는 것이요, 그 세계 가운데는 개인도 들어가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세계를 위해서 산 사람은 전체를 일시에 자기의 가치기준으로 인정받을 수 있는 것입니다.

어떠한 등산가가 많은 산을 오르지 못하고, 많은 고개를 넘지 못했다 하더라도 세계에서 최고 높은 에베레스트 산 정상을 오르게 되면 그 하나로써 모든 것은 해결되는 것입니다. 그가 지금까지 많은 산을 올라 보지 않았더라도 그 한 번의 행동으로 말미암아 세계의 많은 산을 오른 수많은 등산가들과 동등한 자리에 설 수 있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예수님은 “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라(마 22:37)” 하셨으며, 그 다음에는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무엇을 입을까 염려하지 말라. 먼저 그 나라와 그 의를 구하라(마 6:31-32)”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면 그 나라는 어떠한 나라냐? 하나님을 사랑하는 마음을 가진 나라, 하나님이 사랑하고 싶은 나라입니다. 그 나라는 세계를 말하는 것입니다. 그 의는 무엇이냐? 정해진 노정에 어긋나지 않게 사는 도리입니다. 그러면 이런 복귀도상에 있어서, 또한 여러분들의 인생행로에 있어서 넘어야 할 고개가 많은데 이 고개를 어떻게 넘을 것이냐? 이것이 금후에 여러분들에게 주어진 과제입니다.

31-17
지금은 마지막 결단을 내려야 할 때
오늘날 우리 교회가 지향하는 입장은 어떤 것이냐? 한 번밖에 없는 최후의 결전을 하는 입장입니다. 그런데 그런 한때를 앉아서 잃어버리고, 자기 생각을 중심삼고 살다가 잃어버리고, 자기 나름의 행동으로 말미암아 잃어버려서는 안 되겠습니다. 그것을 잃어버린다면 이 역사과정에서 무한한 가치를 지니고 있는 현재의 시점을 무의미하게 상실하는 어리석은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이런 사람은 영광된 승리의 한날을 차지하지 못할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하나님의 섭리노정에서 고개를 넘은 승리의 용자로서 하나님으로부터 세움 받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들은 목적관이 뚜렷해야 됩니다. `나는 죽더라도 이 길을 가다가 죽는다. 이 길을 가고야 말 것이다. 세상이 아무리 뭐라 해도 옆에서 그 누가 뭐라 해도 나는 갈 길이 바쁘다’하며 가야 됩니다. 밤이나 낮이나 쉴새없이 가도 갈지 말지한 길입이다. 그러니 바쁜 길입니다. 피곤해도 가야 합니다. 지쳤더라도 또 가야 합니다. 자기만 가는 것이 아니라 환경에 영향을 미쳐 가지고 자기를 따르는 사람을 거느리고 가야 합니다. 그런 책임을 짊어진 사람일수록 하나님께서 기억하는 사람이 될것입니다.

그러면 그런 고개를 개인만이 넘는 것으로써 끝나는 것이냐? 아닙니다. 개인만 넘었다면 그 사람은 외로운 사람입니다. 가정을 넘겨 놓아야 되는 것입니다. 복귀의 운명길을 남기고 있는 우리들은 어차피 그 고개를 넘어가야 합니다. 남이 대신 넘어 주지 않습니다. 누가 구해 주는 것이 아닙니다. 내가 넘어가야만 되는 것입니다. 주어진 5퍼센트의 권한을 자신이 결정해야 된다는 것입니다. 내가 그 고개를 넘어가서 내게 속한 것을 찾아야 됩니다.

그렇기 때문에 예수님이 십자가에 돌아가신 것입니다. 이것은 하나님께서 구원을 못해 주셔서 돌아가신 것이 아닙니다. 거기에는 예수님이 넘어 가야 할 고개가 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에게는 신부를 택하기 위해서 자신이 넘어야 할 고개가 있었습니다. 예수님이 신부를 맞이하여 하나의 가정을 이루었다면 그 가정이 넘어가야 할 고개가 또 있게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가정이 하나님 앞에 세움을 받았다면 가정을 중심삼고 종족을 연결하여 넘어가야 할 고개가 남아 있는 것입니다. 이렇듯 가중적인 탕감의 환경이 우리 앞에 기다리고 있다는 것입니다. 이것을 생각하게 될 때에, 여러분들 가운데 지금까지 놀이삼아 구경거리삼아 가고 싶으면 가고 말고 싶으면 마는 입장에서 복귀섭리의 정상의 고개를 넘겠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있다면 그 사람은 지극히 어리석은 사람입니다.

31-18
선한 편에 서려면
여러분들은 비장한 각오를 해야 됩니다. 왜 그래야 하느냐? 선악이 무엇이냐? 선은 하늘편이요, 악은 사탄편입니다. 오늘날 복귀도상에서 하나님을 따라가는 우리들은 선한 편에만 서야 됩니다. 그렇게 되어야만 합니다. 악한 편에 서서는 안 됩니다. 오늘날 타락한 이 땅을 두고 볼 때에, 내가 태어나기를 선에서 태어났느냐? 아닙니다. 내가 살기를 선에서 살고 있느냐? 아닙니다. 먹고 사는 모든 동작, 언행심사 모든 일체가 악을 동기로 하는 여기에 생애를 묻고 살아가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면 여기에서 선의 기준은 얼마나 크냐? 티끌만합니다. 하늘편에 선 사람이 되려면 선의 기준이 악의 기준보다도 커야 됩니다. 그러면 하나님이 관리하실 수 있는 때는 어느 때냐? 선이 작을 때는 하나님께서 관여 하실수 없습니다. 그러니 완충지대권내에 선과 악의 비중이 비슷해야 하나님도 관리하실 수 있는 권리가 생겨나는 것입니다. 이것이 원리의 가르침입니다.

선악과는 해와요, 해와는 두 세계의 모체가 되었습니다. 그건 무엇을 말하는 것이냐? 선과 악의 중간 입장이 되었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선악의 방향을 누가 결정해야 되느냐? 자기 자신이 결정해야 합니다. 그러려면 악을 쳐부수고 사탄을 쳐부수고 하나님을 붙들어야 합니다. 사탄을 치는 것보다 몇 배 이상 강하게 하나님을 붙들어야 합니다. 악을 치기 위해서는 전신의 힘을 기울여야 됩니다. 그와 동시에 그 이상의 힘으로 하나님을 붙들어야 된다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복귀노정은 탕감노정이요, 탕감노정은 소모전입니다. 사탄이 백을 요구하면 백에 해당하는 힘을 가해서 쳐야 됩니다. 친 다음에는 백 이상의 힘으로 하나님을 붙들어야 합니다. 이렇게 하는 데는 우리 인간의 힘만으로는 불가능한 것입니다. 절대적인 하나님께서 95퍼센트 협조해 주시는 은사가 있음으로 말미암아 가능하다는 것입니다.

여기에는 모험이 있어야 합니다. 모험을 해 가지고 이 길을 돌파하고 나가야 됩니다. 이것이 마지막이라 생각하고 생명을 던져서 사탄을 치고 나아가는 그 자리에 하나님은 언제나 같이하신다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그런 것을 모를 것입니다. 마지막에 모험을 하는 최후의 종결점에 다다랐을 때에 하나님은 반드시 같이하십니다. 그런 자리가 아니고는 하나님께서 같이하시지 못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원리로 보는 관입니다.

오늘날 한반도는 삼팔선을 중심해서 남북으로 갈라져 있습니다. 여러분 이박사 시대에 포로를 해방한 사실을 알지요? 중간 입장에 세워 놓고 너희들 마음대로 선택해 가라고 했던 것입니다. 그 선택권을 누가 가지고 있느냐? 이북도 아니고 이남도 아닙니다. 그것은 오직 자기 자신들이 가지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면 여러분들은 그와 같이 한 세계에 더 비중을 차지할 수 있는 자신들이 되어 있느냐? 지금 여러분 자신은 이것도 아니고 저것도 아닙니다. 이런 자신을 수평 저울에 올려 놓고 선이 되는 오른쪽이 강한가, 악이 되는 왼쪽이 강한가를 달아봐야 합니다. 왼쪽이 무거우면 사탄편입니다. 또 내 눈이 세상을 바라보느냐, 하늘을 바라보느냐? 세상을 바라보고 있다면 그것도 사탄편입니다. 그 눈은 썩어져야 합니다. 그 몸뚱이도 썩어져야 합니다. 사탄의 밥이 되어야 합니다. 하늘을 바라보는 내가 이겨야 되는 것입니다.

그러면 오늘 우리가 고개를 넘자 하는 데 고개를 넘는 출발의 기준는 어디냐? 그것은 선의 비중이 크냐 작으냐 하는 것에서부터 출발이 결정되는 것입니다. 아직까지 이것을 가리지 못한 사람은 전부다 사탄편입니다. 그것은 문제도 되지 않는다는 거예요. 그러면 여러분들은 어느 자리에 서 있느냐? 이걸 생각해 봐야 됩니다. 어느 자리에 서 있느냐?

물질을 중심한 세상에 태어났기 때문에 완전부정에서부터 출발해야 하는 것이 종교가 가야 할 정상적인 길입니다. 그러면 여러분은 무엇을 완전부정해야 하느냐? 자기 부모에서부터 자기 형제, 사회, 나라, 세계까지 전부 부정해야 됩니다. 그렇게 하지 않으면 사탄과 분립시킬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나를 완전히 부정하게 될 때 선편에 설 수 있는 제2의 내가 생겨나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그러한 경지에 들어가야 합니다.

31-20
출발과 정상 정복
사랑하는 부모를 끊을 수 있는 그 이상의 가치를 느끼고 나서게 될 때에는 하나님과 그만큼 가까워진다는 것입니다. 자기의 나라를, 이 세계를, 자신을 위한 모든 욕망을 하나님을 위한 욕망으로 바로잡을 수 있는 입장에 서야만 하늘편이 출발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지 않고는 넘어야 할 복귀의 정상을 향해 갈 수 없습니다. 출발도 못한다는 것입니다. 출발했다 하더라도 나아가지 못하고 돌게 되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이런 관념을 생활권에서 확실히 해야 됩니다. 내가 무엇 때문에 학교에 가느냐? 무엇 때문에 공부하느냐? 목적이 확실해야 합니다. 세상 사람들은 대학을 간다면 자기의 생활을 해결하기 위해 가는 것이요, 자기가 세상에서 출세하기 위해 가는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목적이 다르다는 것입니다. 우리들은 좀더 많이 알아 가지고 뜻을 위하고, 이 나라와 이 민족을 복귀시키기 위한 하늘의 용사가 되기 위해서 해야 합니다. 하늘의 용사로서 안팎을 방비하기 위해서 공부하는 사람은 하나님께서 돌보아 주시는 것입니다. 그러지 않고 먹고 싶은 것 다 먹고, 놀고 싶은 것 다 놀고, 하고 싶은 것 다 하면서 흥청거리고 이것도 좋다 하고 저것도 좋다 하면 둘 다 안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둘 다 품고 노는 자리에 있는 사람에게는 절대 협조하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양자 가운데 택일해야 합니다.

지혜로운 사람은 어떤 사람이냐? 사리 판단을 잘하는 사람이 지혜로운 사람입니다. 통일교회 교인들은 지혜로운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여러분들이 원리를 알면 각자가 가야 할 길을 확실히 알게 되어 있습니다. 이 때가 어떤 때인가를 확실히 알게 됩니다. 막연하게 아는 것이 아니라, 공식적으로 확실히 알게 되어 있습니다. 여러분들이 서 있는 이 자리는 시시한 자리가 아닙니다. 이렇게 확실히 알고 나서 새로운 출발을 해야 하는 것입니다. 출발했으면 하나님이 지항하는 목표를 향하여 직행해야 합니다. 다른 길을 생각해서는 안 됩니다. 그러지 않고는 넘을 수 없는 고개들이 많다는 것을 여러분들이 알아야 됩니다.

만일에 여러분이 뜻길을 가다가 실패하면 다시 준비해 가지고 가겠다고 생각한다면 그 생각은 틀린 생각입니다. 최후의 결전장에 나선 선수가 어떤 대회에서 낙오했다면, 그 대회가 세계적인 대회일수록 그 다음에는 누구도 그 선수를 추천하지 않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일단 출발했다 하면 심각해져야 하는 것입니다. 생명을 걸지 않고는 안 되는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여러분들이 앞으로 살아가는 데 있어서, 또는 신앙길을 가는 데 있어서 다가올 고개를 어떻게 넘을 것이냐 하는 것이 문제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고개를 넘어야 되겠습니다. 넘는 데는 따라가지 말라는 것입니다. 선생님이 명령을 해야 움직이고, 욕을 해야 궁둥이를 들고 일어나는 사람들은 저나라에 가서도 다를 바 없습니다. 그저 바라만 보고 사는 사람인 것입니다.

우리에게는 개인복귀노정, 가정복귀노정, 종족복귀노정, 민족복귀노정, 세계복귀노정이 남아 있습니다. 만일 우리 앞에 나라를 위해 충성할 수 있는 길보다도 세계를 위하여 충성할 수 있는 길이 있다면 세계를 위하여 충성해야 되는 것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선교사들은 세계적인 축복을 받을 수 있는 가까운 거리에 있다는 것입니다.

이런 관점에서 볼 때, 여러분들이 앞으로 어떤 고개를 넘어갈 것이냐? 또 지금 어떤 고개를 넘고 있느냐? 어디에 도달해 있느냐? 아니면 그 고개를 바라보고 있느냐? 아니면 그렇지도 않느냐? 과연 내가 어떤 입장에 있는가를 확실히 명시해야 합니다.

고개를 넘기 위해 출발하려면 선악을 분립하지 않고는 안 됩니다. 선악을 분립해 가지고 `나는 죽어도 선한 입장에서 하늘편인 오른쪽에서 죽겠다’할 수 있는 자아의 생활 기반을 닦고 결의를 해야 합니다. 이렇게 하여 새로운 목표를 가지고 나서게 될 때에, 하나님이 제시한 개인이면 개인적인 고개를 정상적으로 넘어갈 수 있는 것이요, 가정이면 가정적인 고개를 넘어갈 수 있는 것이요, 민족이면 민족적인 고개를 넘어갈 수 있는 것입니다. 여기서는 자기가 정한 결의 여하에 따라 그 고개를 넘을 수도 있고 넘지 못할 수도 있다는 것입니다. 이처럼 여러분들이 그 고개를 어떻게 넘어갈 것이냐 하는 문제가 벌어지는 것입니다.

31-22
성화 출신자로서 그 사명을 다하라
여러분들이 물론 지금까지 뜻을 따라 나왔지만 금후에 나아가야 할 길이 더욱 중요합니다. 성화학생이라는 말 자체가 우리 교회의 역사를 대신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한 기반이 크면 클수록 문제가 크다는 것입니다. 여러분들이 가고 있는 그 모습이 후대에 따라오는 수많은 사람들 앞에 영향을 미칠 것입니다. 고개를 넘어야 할 입장에 있는 데도 불구하고 넘지 못하고 책임을 수행하지 못할 때에는 십 배 혹은 천 배의 가중된 심판을 받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선생님도 지금까지 성화출신이라도 낙오자, 문제의 인물들은 믿지 않습니다.

성화출신들은 교회를 대표한 사람들입니다. 이번 축복 대상자들 가운데에서도 성화 출신자냐 아니냐 하는 것이 문제가 되었습니다. 여자나 남자나 서로가 성화 출신이냐고 묻는 것을 많이 보았습니다. 그래도 성화 출신자를 믿으려 하는 사람이 많은 것을 볼 때에, 여러분이 처해 있는 자리가 얼마나 심각한 자리인가를 재인식해야 합니다.

앞으로 교회가 넘어가야 할 고개에 짐이 되지 않고 교회에 보탬이 될 수 있는 여러분들이 되어야 합니다. 그래야만 여러분에게 앞으로 민족과 국가, 혹은 세계로 갈 수 있는 길이 있을 것입니다. 그런데 짐이 되었다 할 때에는 국가와 세계의 고개를 넘어가는 사람들이 짐을 달고 가고 싶어 하지 않을 것입니다. 고개를 넘어 가는 데 있어서 짐이 되는 사람은 떼어 놓고 가는 것입니다.

이런 관점에서 가야 할 각자의 고개를 넘는 여러분이 되어야 합니다. 이것이 교회의 뜻이고 복귀노정이니만큼 이제부터 여러분 각자가 새로운 결심을 하고, 자기가 어떤 입장에 있는가를 명시해 가지고 재출발하지 않으면 안 된다는 것을 기억해 주길 바랍니다. 알겠지요? 「예」 기도합시다.

31-23
기 도
아버지, 오늘도 당신의 섭리의 뜻은 지나가고 있사옵니다. 당신의 뜻을 세포에 느끼고, 그 누가 뭐라 해도 당신이 원하시는 정상을 향하여 참다웁게 한걸음 한걸음 걸어가야 할 책임을 짊어진 자기 자신이 되어야겠사옵니다. 이러한 자신이라는 것을 망각할 때가 많은 것을 저희들이 아옵니다.

아버지, 성10회 수료자 40여 명이 여기에 참석하였사옵니다. 이들 중에 아버지 마음 가운데 꼽을 수 있는 사람이 몇 사람이나 되옵니까? 저 사람만은 믿을 수 있으리라고 기대하시는 사람이 있사옵니까? 자기 자신마저도 믿을 수 없는 처량한 모습으로 이 자리에 참석했다면 그 자체가 비참한 것이요, 우리 교회에 있어서도 지극히 불쌍한 일인 것을 저희들이 느끼지 않을 수 없사옵니다. 아버지, 용납하여 주시옵소서.

필시 인간은 가야만 되는 것이옵니다. 개척의 노정을 거치지 않고는 갈 수 없는 복귀의 길이라는 것을 저희들이 아옵니다. 이제 남기신 개인의 고개, 가정의 고개, 종족의 고개, 민족의 고개, 국가의 고개까지 죽을 힘을 다해서 넘어가야 할 통일교회의 식구로서 그 사명을 감당하는 데 있어서 이들이 짐이 되지 말고 보탬이 될 수 있는 입장에 서게 하여 주시옵소서. 교회가 `가자’하기 전에 먼저 나서서 가야 하는 것이 정상적인 행로의 걸음걸이인 것을 알고 뜻 앞에 순응하는 자녀들이 되게 허락하여 주시옵기를 간절히 바라옵고 원하옵니다.

지금까지 참고 남아진 당신의 자녀들을 기억하시사, 그 마음 가운데 내일의 소망을 위해 다시 다짐하게 하여 주시옵고, 인생행로에 있어서 앞으로 다가올 고개 고개를 뜻과 더불어 힘차게 넘을 수 있는 아버지의 아들딸들이 되게 허락하여 주시옵기를 간절히 부탁드리옵니다. 그리하여 최후의 승리의 자리에서 다시 상봉하여 아버지의 기쁨이 되고, 아버지께서 내세워 놓고 자랑할 수 있는 아들딸이 되게 복을 빌어 주시옵기를 간절히 부탁드리고 원하옵니다.

오늘의 모든 것을 당신이 맡아 주시옵고, 금후의 모든 생애 또한 당신이 맡아 주시어서 당신께서 주도하시는 역사적인 그 고개를 넘어 갈 수 있는 자녀로 삼으시옵기를 부탁하올 때, 모든 말씀 참부모의 성호 받들어 아뢰었사옵니다. 아멘.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