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0-39 to 30-68: 복귀의 기점

복귀의 기점
1970.03.15 (일), 한국 전본부교회

30-39
복귀의 기점
[기 도]

아버님, 1970년 3월 15일, 새로운 하루를 맞이했사옵니다. 오늘은 이달 들어 세 번째 맞는 안식일이옵니다. 이 아침에도 당신의 자비와 긍휼과 보호하심으로 여기에 같이하여 주시옵길, 아버님이여, 바라옵니다.

전국에 널려 있는 당신의 자녀들이 이곳을 흠모하면서 아버지 앞에 간구하고 있사옵니다. 그런 곳곳마다 당신의 동정을 베푸시옵고, 그들의 몸과 마음을 덮으시사 위로하시옵고 권고하시옵고 축복하여 주시옵기를 바라옵니다.

세계에 널려 있는 당신의 자녀들에게도 당신께서 영원한 사랑과 칭찬으로 같이하여 주시옵고, 당신께서 사랑하는 아들딸의 모습이라고 증거하여 주시옵기를 간절히 바라옵고 원하옵니다.

한국의 삼천만 민족을 대신하여 통일의 자녀들이 오늘 이 아침에 당신 앞에 경배드리오니, 이 경배가 당신 앞에 진정한 자랑이 될 수 있고, 기억이 될 수 있는 경배가 되게 허락하여 주시옵길, 아버님, 간절히 바라옵고 원하옵니다.

이 민족을 중심삼고 만민이 아버지 앞에 회개하고 수많은 인류가 당신을 부르고 만나기를 고대하는 그 소원의 일치점이 저희들만으로써 연결되는 것이 아니라, 아버지를 중심삼고도 연결될 수 있는 것을 아오니 그럴 수 있는 한때를 맞게 허락하여 주시옵소서.

그러한 과정에 있어서는 통일의 역군들이 수많은 탕감의 노정을 거쳐 가야 할 것을 아옵니다. 아버님, 그 노정 앞에 저희들은 충실해야 되겠습니다. 솔직한 자신을 가지고 수많은 사람들과 아버지를 상봉시키는 최후의 사명을 다짐하는 아들딸이 되어야 되겠사옵니다. 그리하여 아버님을 모시고 아버지와 두터운 사랑권내에서 참의 인연을 맺어 자랑하게 해주시고, 인류와 형제의 인연을 맺어서 탕감복귀시켜야 하는 저희들의 책임을 감당해 낼 수 있게 허락하여 주시옵기를, 아버님, 간절히 바라옵고 원하옵니다.

저희들이 아무리 아버지를 부른다 하더라도 아버지께서 저희들을 부르시지 않으면 저희들은 아버지와 인연될 수 없다는 사실을 알고 있습니다. 기나긴 역사과정을 통하여 간절한 마음을 가지고 처참한 자리에서, 혹은 고생의 자리에서 저희들을 몇 번이고 몇 번이고 부르신 아버지인 것을 저희들이 다시 한번 심중으로부터 느껴야 되겠사옵니다.

그 아버지 앞에 합당한 아들의 자세를 갖추지 않고는 아버지라 부를 수 없는 것을 생각할 때, 그런 아들의 모습을 당신은 얼마나 그리워했습니까? 그리움에 사무쳤던 아들을 만나 당신의 노정 가운데에 있었던 사연을 나누는 자리를 당신은 얼마나 고대했습니까? 당신의 모든 사명을 분부할 수 있는, 최후의 통첩을 할 수 있는 자리를 당신은 얼마나 바라고 나오셨습니까?

저희들이 그럴 수 있는 한 자리를 마련해야 되겠사옵니다. 그리하여 당신의 그 모든 명령 일체에 순응할 수 있는 자신이 되어 `아버지여! 뜻대로 하시옵소서’ 할 수 있는 아들딸이 되고, 역사시대에 있어서 탕감의 사명을 짊어졌던 선조들의 기백을 상속받기에 부족함이 없는 아들딸이 되어야 되겠사옵니다.

이 시대에 당신이 칭찬하고 자랑하실 수 있는 아들의 모습, 딸의 모습을 얼마나 그리워하셨습니까? 아버지, 당신은 내적으로 약속하시고 축복하시며 명령하셨지만 역사과정에 왔다 갔던 저희 선조들은 번번이 당신의 마음에 못을 박고, 아버지를 고독의 자리로 추방시킨 일이 한두 번이 아닌 것을 저희들은 알게 될 때에, 저희들이 아버지의 아들이 될 수 있는 인연은 기쁜 일이오나, 사명적인 면에 있어서는 슬픈 내용이 깃들어 있다는 것을, 저희들은 선조들이 걸어간 복귀의 한스러운 길을 더듬어 볼 적마다 생각하지 않을 수 없사옵니다.

저희들이 내적으로는 아버지라 부를 수 있지만 동시에 외적으로는 아버지로부터 책임을 명령받아야 한다는 것을 알고 있사옵니다. 그리고 당신은 기쁜 자리에서 저희들에게 그 책임과 사명을 명령하시고 분부하시는 것이 아니라, 슬프고 외로운 죽음의 교차로에서 명령하시고 분부하셔야 하는 처참한 입장에 계신다는 것을 저희들이 생각하게 됩니다.

그 아버지를 만나기 위해서는 그 아버지의 그 처참함을 치유해 드리지 않고는 만날 수 없는 것이요, 아버지와 상관(相關)하기 위해서는 세상의 모든 인연을 넘어서지 않고는 상관할 수 없는 것을 알게 하여 주시옵소서. 이와 같은 인연이 누구로 말미암아 되어졌는가를 생각할 때, 아버지로 말미암아 되어진 것이 아니라 우리 인류의 조상, 인간으로 말미암아 되어졌다는 사실을 깨닫게 될 때 부끄러움을 느낄 줄 아는 당신의 아들딸이 되어야 되겠사옵니다.

그리하여 천번 만번 죽어 마땅한 저희 자신을 아버지 앞에 통고하게 될 때 지금까지 불쌍했던 아버지의 사정과 통할 수 있고, 그 모양이 같을 수 있는 자리에 서거나 그보다도 더 비참한 자리에 있게 될 때 슬펐던 아버지께서 우리를 위로해 줄 수 있는 것이요, 그런 한때가 있다면, 여기서부터 아버지와 인연이 맺어질 수 있는 것을 아옵니다. 저희들이 아버지를 부르고 아버지에게 요구하는 입장에서 인연이 맺어지는 것이 아니라, 당신이 저희들을 붙들고 사연을 나눌 수 있는 입장에서 인연이 맺어진다는 것을 알게 하여 주시옵소서.

아버님, 부족하고 불초한 저희들이 아버지 앞에 나타날 적마다, 영광의 실체로서 만우주를 주관하시는 당신의 그 거룩한 모습을 사모하느냐 할 때, 비천하고 부족한 자신임을 통회(痛悔)하면서 직고하지 않을 수 없는 저희들을 용납하여 주시옵소서.

내일의 소망과 희망이 저희들 앞에 약속되었다는 벅찬 사실을 느끼면 느낄수록 저희들은 오늘의 불초한 자신의 모습을 붙들고 시달리지 않으면 안 될 입장에 있는 것을 깨닫게 되옵니다. 이러한 저희들이 아버님으로부터 기쁨의 동정을 받기 위해서는 사망의 혈통을 받고 태어난 우리들은 사망의 길에서 쓰러져 가야 한다는 것을 아옵니다. 그러나 사망의 혈통을 이어받은 저희들을 당신은 버리실 수 없어서 인류의 배후에서 역사와 더불어 지금까지 싸움을 해 나오셨습니다.

그런 아버지인데 반해 저희들은 이 싸움터를 회피해 가고자 했습니다. 그 누구에게 의지하여 가고 싶어했습니다. 그러나 아버지께서는 회피할 길이 없었사옵고, 의지할 존재가 없었사옵니다. 아버지께서는 도리어 회피하고자 하는 무리를 수습해야 할 입장이었사옵고, 의지하고자 하는 무리들을 지켜야 할 입장에 계신 불쌍하신 아버지였사옵니다. 그런 아버지라는 것을 알게 될 때 아버지께서는 언제나 참혹한 길을 걸어왔사옵고, 언제나 불쌍한 자리에 서서 모든 것을 빼앗기고 모든 것을 희생하면서 나오셨사옵니다. 그런 아버지라는 것을 저희들이 알게 하여 주시옵소서.

저희들은 아버지의 복귀의 심정과 아버지의 내정이 이러하고 아버지의 사연이 이러하고 아버지의 자세가 이러하다는 것을 알고, 이제 자세를 갖추어 당신의 경륜 앞에 설 수 있는 아들딸이 되어야 되겠사옵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를 앞에 놓고 겟세마네 동산에서 최후로 “아바 아버지여 할 수만 있으면 이 잔을 내게서 옮기시옵소서. 그러나 나의 원대로 마옵시고 아버지의 원대로 하옵소서(막14:36)”라고 절규하며 최후의 몸부림과 더불어 당신의 심정에 자기 자신을 접붙이기 위한 일념으로 찾아 헤맸던 것과 같이, 저희들도 아버지 앞에 저희의 내심 전체를 통고하고 아버지의 내심 전체를 통고받을 수 있는 아버지의 아들딸이 되게 허락하여 주시옵기를 간절히 바라옵고 원하옵니다.

1970년대를 맞이했습니다. 1970년도 3월을 맞이했습니다. 이해도 4분의1이 지나려 하는 고비를 바라보고 있습니다. 아버지께서는 이해에 저희들에게 무엇을 요구하시옵니까? 저희 자신을 몽땅 산제물로 바치기를 고대하고 계시옵니까? 그렇다면 저희 자신을 산제물로 바쳐 드려야 되겠습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안팎으로 일체화되어야 되겠사옵니다. 그리하여 저희 자체를 드림에 있어서도 아버지께서 기쁘게 받으실 수 있도록 바쳐 드려야 되겠사옵니다. 그러나 그러지 못한 저희 자신들임을 알고 후회하는 자신으로서, 통탄하는 자신으로서 아버지 앞에 봉헌될 수 있는 저희들 자체가 되어야 되겠사옵니다. 부족한 것을 부끄러워하며 저희 자체를 바칠 수 있는 아들이 되고 딸이 되어야 할 줄 알고 있사오니, 그렇게 몽땅 바칠 수 있는 저희들이 되게 허락하여 주시옵기를, 아버님, 간절히 바라옵고 원하옵니다.

전국에 널려 있는 당신의 자녀들이 이 아침에 정성을 들이고 있사옵니다. 아버지, 그들에게 천배 만배 복을 베풀어 주시옵고, 세계에 널려 있는 뭇 자녀들이 한국 땅을 바라보면서, 혹은 스승을 바라보면서 생명을 걸고 싸우고 있사오니 그들 앞에 당신의 가호의 손길을 같이하여 주시옵소서. 저희들이 그들에게 뒤떨어져서는 안 된다는 것을 알아야만 되겠습니다. 하루의 생활도 그들에게 본이 되어야 하는 것이 저희들의 책임이요, 그들을 아버지와 연결시켜 주어야 하는 것이 저희들의 책임임을 아옵니다.

불쌍하신 아버지여, 불쌍한 아들딸들을 지켜 주시옵소서. 저희들은 불쌍한 아벨의 모습으로 그들을 붙들고 사정하지 않으면 안 된다는 것을 알게 하여 주시옵소서. 그와 같은 입장에 선 자가 가인을 대신한 아벨이요, 타락한 아담을 복귀하기 위한 아벨임을 아옵니다. 하오니 두 세계의 사람들을 구원하기 위하여 제물로서 바쳐지게 허락해 주시고, 그 자리에서부터 아벨의 피살, 죽음의 고비가 시작되었사오니 뒤넘이쳐 가야 할 복귀의 한을 저희들이 상속받게 하여 주시옵소서. 이 민족에 남아진 한, 이 세계에 남아진 한을 풀어드릴 줄 아는 아들과 딸이 되게 하여 주시옵소서.

저희들은 아버님으로부터 버림받은 자식이 되었습니까? 혹은 담 너머에서 아버지를 부르는 자식이 되었습니까? 혹은 문전에서 아버지를 부르는 자식이 되었습니까? 혹은 아직 쫓겨 나가지 않고 아버지의 무릎 앞에서 아버지를 부르는 자식이 되었습니까? 자신이 어떠한 자리에 있는가를 스스로 깨닫고, 아버지의 그 귀하고 영광된 가치를 몰랐던 것을 재인식하지 않으면 안 될 입장인 것을 알고, 아버지를 부를 줄 아는 저희들이 되게 하여 주시옵소서.

그리하여 아버지께서 저희의 모든 환경을 지켜 주시고 저희 전체를 덮으시사 승리의 한날을 이룩할 수 있게 하여 주시옵소서. 저희 자신을 위하여 일하시는 아버지이심을 알고, 아버지의 대신 실체로서 원수 세계 앞에 강하고 담대한 하늘의 정병이 되어, 그 나라의 권위와 그 나라의 모습을 높이 드러낼 수 있는 하늘편 사람이 되고 아들딸이 되게 허락하여 주시옵기를 간절히 부탁드리고 원하옵니다.

이날 모든 전체를 아버지 앞에 부탁하오니 축복하여 주시옵길 바라면서, 참부모의 성호 받들어 아뢰었사옵나이다. 아멘.

30-43
말 씀
`복귀’라는 말이 타락으로 말미암아 생겨났다는 것을 우리들은 잘 알고 있습니다. 우리 인간은 타락함으로 말미암아 우리를 지으신 창조주를 잃어버렸습니다. 그 창조주를 잃어버림으로 말미암아 인간은 참된 부모를 잃어버리게 되었고, 참된 부모를 잃어버림으로 말미암아 참된 형제와 가정과 국가와 세계를 잃어버리는 결과를 초래했습니다. 이처럼 우리는 인간으로서 가장 귀하다고 하는 것을 모두 잃어버린 것입니다.

그러기에 우리들이 찾아야 할 것이 무엇이냐? 나 자신의 영광을 추구하고 자신의 목적을 성사시키려 해서는 안 됩니다. 우리에게 있어서 기본적인 것, 제일 중요한 것을 찾아야 하는 것입니다. 나 개인의 목적보다도 이 나라, 이 세계가 좋을 수 있는 목적을 성사시켜야 된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30-43
인간이 가져야 할 참된 소망
우리 대한민국을 중심삼고 보면 대한민국은 현재 두 나라로 되어 있습니다. 이북과 이남이 삼팔선을 경계로 하여 갈라져 있습니다. 이와 같이 둘이 된 입장에서 바라는 것은 무엇이냐? 둘이 되기 전의 입장으로 돌아가는 것입니다. 즉 하나가 되는 것입니다. 이것은 대한의 나라에서 살고 있는 이 민족, 남이나 북에 살고 있는 사람들이 바라는 공통된 소망이 아닐 수 없습니다.

그러면 대한민국을 중심삼고 볼 때 남북이 통일되었다고 해서, 즉 민족의 바람이 이루어져 화해하여 하나되었다 하더라도 그것으로 끝나는 것이 아닙니다. 아무리 남북이 하나되었다 하더라도 세계가 하나되지 못했기 때문에 세계를 중심삼고 하나되든가 하나되게 하든가 해야 합니다. 다시 말하면 주체의 입장에 서든가 대상의 입장에 서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러지 않으면 통일된 하나의 국가가 되더라도 내일의 소망을 품고 세계를 향하여 전진할 수 없는 것입니다.

나아가 대한민국을 중심삼고 세계를 하나로 만들었다 하더라도 그것으로 끝나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는 육계(肉界), 즉 이 현실 세계뿐만이 아니라 내재적인 세계가 있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다시 말해, 지상세계가 있는 동시에 천상세계가 있다는 것을 우리들은 알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세계를 하나 만들었다 하더라도 그 다음에 추구되는 것은 무형세계와 유형세계가 하나되는 것입니다.

그러면 유형세계와 무형세계를 하나 만들었다고 해서 그것으로 끝날 것이냐? 아닙니다. 아무리 하늘과 땅, 통일교회의 용어로 말해서 천주(天宙)를 하나 만들었다 하더라도 거기에 주인되는 하나의 중심을 모시지 못하는 한 갖추어진 하나의 나라, 하나의 세계, 하나의 천주도 하나의 중심과 더불어 일체화되는 입장에 서지 못하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온 피조만물은 지음받은 존재이기 때문에 지어 준 중심존재와 일치되는 입장에 서지 않고는 즉 완전한 중심과 완전한 상대가 결정되지 않고는 우리가 바라는 최후의 세계는 현현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중심 자리에 있는 그분의 영원한 상대가 되어 그 이상을 성사시킬 수 있는 자리에 있게 될 때, 비로소 하나님과 관계가 맺어지지 않겠느냐 하는 것을 생각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지금까지 기나긴 역사과정에서 복귀섭리의 사명을 담당하고 왔다 갔던 수많은 사람들이 바라던 소원이 무엇이었느냐 하면, 개인이 하늘과 일체화되는 것이었습니다. 그 다음에는 이 바람의 기준을 확대시켜 가정이 하나님과 하나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가정이 하나되었다 하더라도 그것으로 끝나는 것이 아닙니다. 절대적인 중심의 상대가 된 후에는 제 2의 주체의 입장에서 자기의 종족을 거느려 가지고 영원한 중심과 일체화시켜야 할 문제에 부딪치게 되는 것입니다.

이와 같은 입장에 섰던 가정이 야곱 가정인 것을 우리가 알고 있습니다. 야곱 가정 하면 거기에는 야곱의 부모가 들어가는 것이요, 야곱의 형제가 들어가는 것이요, 야곱의 아들딸이 들어가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야곱을 중심삼고 70여명의 친척 기반을 중심삼은 하나의 민족 형태를 갖추기 위해 그 종족을 키워 나오신 것입니다.

그것은 절대적인 하나님과 일체될 수 있는 야곱, 야곱과 하나될 수 있는 가정, 가정과 하나될 수 있는 종족의 관계를 맺지 않고는 민족을 일체화시킬 수 있는 기준을 세울 수 없겠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이 개인을 찾아 세우시는 것은 가정을 찾아 세우기 위함이요, 가정을 찾아 세우시는 것은 종족을 찾아 세우기 위함이요, 종족을 찾아 세우시는 것은 민족을 찾아 세우기 위함이요, 민족을 찾아 세우시는 것은 승리한 이스라엘 나라를 찾아 세우기 위함이었습니다. 이러한 하나님의 섭리역사를 우리들은 잘 알고 있습니다.

지상에서 하늘나라의 주권을 대신한 나라의 권위를 가진 것이 이스라엘 나라요, 온 세계 인류를 대표하여 하나님으로부터 선택받은 선민의 입장에 선 것이 이스라엘 백성입니다. 이 둘이 하나되어야 합니다. 하나되는데는 국토를 중심삼고 하나되어야 하는 데, 그러기 위해서는 국토가 둘로 갈라져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이렇게 땅이 하나되어야 하고, 서로 화합하는 백성이 돼야 합니다. 그래서 하나님과 하나될 수 있는 주권 국가를 이루어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서 하나님께서는 4천년 동안 복귀섭리를 해 나오신 것입니다. 이렇게 해서 이루려고 한 것이 제 1이스라엘 나라라는 것을 우리들은 알고 있습니다. 이스라엘은 온 세계를 자기들의 휘하에 넣고 마음대로 거느릴 수 있기를 바라왔지만, 섭리적인 내용으로 볼 때 그런 것이 아니기 때문에 이스라엘 나라는 지상에서 사라져 갔다는 사실을 우리들은 알아야 되겠습니다.

30-45
예수님의 사명
그러면 이스라엘 나라를 대신하여 왔던 예수님은 어떻게 해야 했느냐? 이스라엘 주권과 이스라엘 백성과 이스라엘 땅을 일체화시킨 자리에서 하나님과 일치되어야 했습니다. 하나님과 일치되는 데 있어서는 예수님이 이스라엘 나라를 거느리는 입장에 섰다 하더라도 그것만 가지고는 안 됩니다. 그 다음에는 가인적인 입장에 있는 나라를 원리적 기반에 입각한 수를 갖추어 가지고 승리의 터전을 마련하지 않고는 하나님께로 돌아갈 수 없는 것입니다. 이것이 예수님의 입장이었습니다. 이것이 이 땅에 보내심을 받은 예수님의 사명이었다는 사실을 우리들은 알아야 되겠습니다.

한 나라의 유지는 그 나라만으로는 되어질 수 없습니다. 큰 원수를 앞에 놓은 국가는 그 한 나라만으로는 지탱해 나갈 수 없는 것입니다. 하나의 나라가 유지되기 위해서는 이웃 나라와 협력해야 합니다. 이웃 나라들과 하나되지 않으면 안 됩니다. 그리고 한 국가의 발전도 연합의 형식을 갖추어 가지고서야 되는 것입니다.

하늘의 세계를 이루는 것도 마찬가지라는 것입니다. 아무리 아벨적인 이스라엘이 국가기준을 갖추었다 하더라도 가인적인 국가권을 굴복시켜 수습하지 않고는 돌아갈 수 없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부모로서 이 땅위에 등장하기 위해서는 아담 가정에 있어서 가인과 아벨이 하나되어야 합니다. 가인과 아벨이 상충된 자리에서는 부모를 복귀할 수 없습니다. 부모를 복귀하려면 아벨 혼자 해서 되는 것이 아닙니다. 아벨이 가인을 거느려야만 복귀할 수 있는 것이 원리의 내용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아벨적인 이스라엘 나라에 오신 예수님은 가인적인 나라를 굴복시켜야 하는 것입니다. 그가 굴복시키는 나라가 크면 클수록 세계는 빨리 복귀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지금까지 하나님께서 복귀해 나오는 원칙입니다. 그러면 이스라엘 나라를 주관해 가지고 일시에 로마제국을 굴복시키게 되면 세계는 단번에 굴복시킬 수 있는 길이 열리지만, 굴복시키지 못하게 될 때는 복귀도상에 세계적인 싸움이 남는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스라엘 나라가 예수님을 중심삼고 이것을 하지 못했기 때문에 예수님은 가는 곳곳마다 세계적인 원수와 싸워 그 고개를 넘지 않으면 안 되었던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기독교가 가는 길은 죽음을 각오하고 가는 길이었다는 것입니다. 그것을 여러분은 알아야 되겠습니다.

30-46
가인에게 모든 것을 주어야 할 아벨
오늘 말씀의 제목이 `복귀의 기점’인데, 이 `복귀의 기점’이라는 것이 무엇이냐? 이스라엘이 아무리 세계를 복귀할 수 있는 국가가 되었다 하더라도 그 국가만 가지고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원리를 통해서 가인 아벨의 실체 복귀시대, 즉 실체기대라는 것을 알고 있을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찾아진 이스라엘 국가를 중심삼아 가지고 가인적인 국가, 즉 천사장형 국가를 굴복시켜야 됩니다. 그것은 무력으로 하는 것이 아닙니다. 아벨이 형인 가인에 의해 죽었기 때문에 죽는 자리, 즉 맞는 자리에 들어가서 죽지 않고 살아서 그들을 굴복시킬 수 있는 인연을 갖추지 않고는 복귀의 기점이 나타나지 않는다는 사실을 우리들은 알아야만 되겠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야곱은 21년 동안 수고한 결과로 찾아진 자기의 종이나 모든 재산을 그의 형인 에서 앞에 바치기를 원했던 것입니다. 야곱은 `내생명과 재산은 형님에게 속한 것이다’라고 하면서, `나는 형님의 종입니다’라고 하면서 자기의 모든 재물을 형인 에서에게 바치자 에서는 야곱의 모든 제물을 받아들인 것입니다. 그가 예물을 받은 것은 야곱을 받아들이는 것이요, 야곱을 받아들이는 것은 야곱가정을 받아들이는 것이요, 또한 가정을 받아들이는 것은 이스라엘 민족을 받아들이는 것이요, 이스라엘 민족을 받아들이는 결과는 이스라엘 나라를 받아들일 수 있다는 표시인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가인 앞에 모두 주었다가 다시 찾자는 것입니다. 이것이 복귀의 원칙입니다. 하나님과 사탄의 입장은 아벨과 가인의 입장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지금까지 사탄에게 다 주었습니다. 개인을 주었고, 가정을 주었고, 종족을 주었고, 민족을 주었고, 국가를 주었고, 세계를 주었습니다. 다 주었습니다. `세계를 네 마음대로 해라’할 수 있는 입장까지 다 주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까지도 부정할 수 있는, 하나님은 죽었다 할 수 있는 자리까지 주었습니다. 다 주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완전히 부정을 당했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이 역사상에 나타났다는 사실은 무엇이냐? 완전히 부정당한 그 배후에는 완전한 긍정의 출현이 내재되어 있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사실을 알아야 되겠습니다.

역적과 충신의 입장도 마찬가지입니다. 충신이 충신으로서의 권위를 갖추기 위해서는 완전히 부정당하는 자리에 서야 하는 것입니다. 그래야 역사과정에 드러날 수 있는 충신의 대열에 참여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예수님도 그와 같은 운명길을 걸어가야 된다는 것입니다. 완전히 부정당해야 하는 것입니다. 누구한테? 사탄세계 앞에 부정당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부정당하는 것은 무엇이냐? 전체를 넘겨 주는 것입니다. 그렇다고 해서 원수시 하거나 치게 되면 깨져 나가는 것입니다. 돌아갈 수 없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예수님이 십자가에 달려 가지고 기도한 것이 무엇이냐? “아버지여 저희를 사하여 주옵소서. 자기의 하는 것을 알지 못함이나이다. (눅23:34)”라고 하셨습니다. 그 `용서하시옵소서’하는 자리는 자기 자신의 모든 소유를 원수에게 넘겨 주는 자리입니다. 그건 싫다 하더라도 넘어가게 되어 있다는 겁니다.

하늘로부터 가져온 귀한 모든 것, 4천년 역사를 통하여 희생의 대가를 치러 가지고 찾아 세운 이스라엘 나라가 당장 넘어가는 것을 바라보고 있는 예수님은 분하고 원통함이 극에 달했지만, 여기에서 `저들의 죄를 용서하여 주시옵소서’라고 한 것입니다. 이것은 전부다 원수 앞에 넘겨 주고 또다시 찾을 수 있는 하나의 길을 모색하는 작전이었다는 것입니다. 만일 그들의 죄를 용서하지 않으면 사탄에게 넘어가 물건이 돌아올 길이 없습니다. 그들이 용서받을 수 있는 길을 터놓지 않고는 그때까지 수고하여 찾아 세운 이스라엘 나라를 완전히 잃어버리는 것입니다. 복귀의 기점이라는 것을 찾을 수 없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예수님은 비참한 자리에 있었지만 도리어 원수를 위해 기도했다는 것입니다. 이 사실은 두 세계의 인연을 완전히 굴복시킬 수 있는 하나의 동기가 되었습니다. 하나는 하나님의 본연의 권위를 잃어버리게 했던 원수를 사랑할 수 없는 자리에 있는 하나님이시지만 사랑할 수 있는 길을 열어 놓은 것이요, 또 하나는 망할 수 밖에 없는 원수들이 소생할 수 있는 길을 터놓은 것입니다. 여기에서부터 기독교가 발전해 왔다는 것을 우리들은 알아야 되겠습니다.

30-48
스스로를 버리는 길
이와 같은 관점에서 볼 때 오늘날 통일교회가 가는 길이 틀림없는 길이라면, 우리들이 가는 길도 그때와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이 원수에게 전부다 빼앗겼다가 다시 찾을 수 있는 입장에 서신 것같이 오늘날 통일교회가 가는 길도 그렇다는 것입니다. 오늘 우리 통일교회가 이 나라 이 민족 앞에 환영받으며 가면 좋겠지만 그렇게 되면 사탄세계의 것을 그대로 받아들이는 입장이 됩니다. 그렇기 때문에 여기에는 반드시 부정당하는 일이 벌어지지 않으면 안 됩니다. 아벨이 가인을 부정하든가 가인이 아벨을 부정하든가 둘 중의 하나는 부정해야 된다는 거예요.

그 말이 무슨 말이냐 하면, 통일교회가 어느 민족에게 환영받더라도 그 민족을 그냥 그대로 사랑할 수 없는 것입니다. 사랑을 하려면 다른 민족에게 가서 환영받을 수 있는 조건을 갖추고 와야만 그 민족 그 나라의 백성을 사랑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그 민족이 그냥 그대로 환영을 받는 입장을 취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환영을 안 받았기 때문에, 즉 반대를 받았기 때문에 복귀의 기점을 중심삼고 볼 때 하나님 앞에 가까이 설 수 있고, 하나님과 같이 설 수 있는 역사적인 복귀의 인연을 이 땅에서 갖출 수 있는 자리에 서게 됐다는 것을 우리들은 알아야 되겠습니다.

이런 입장에서 나온 지난날의 역사는 어떠했느냐? 그 자체로 보면 비참한 역사였습니다. 모든 것을 잃어버린 역사였습니다. 어차피 잃어버려야 하는 것입니다. 그러지 않으면 빼앗기게 되어 있습니다. 줘야 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사탄에게 모든 것을 넘겨 주었듯이 우리들도 모든 것을 넘겨 주어야 합니다. 그와 같은 자리에서 다시 완전히 찾아왔다 하는 기준을 세워야 하는 것입니다. 여기에서 새로운 복귀의 인연이 맺어지는 것입니다. 이렇게 본연의 자세를 중심삼고 복귀해 나가는 것이 복귀의 운명길이므로, 오늘날 우리들이 가야 할 길도 불가피하게 수난의 길을 가지 않을 수 없는 것입니다. 이것은 지극히 타당한 논리입니다.

그러면 우리 자신들은 어떻게 해야 하느냐? 스스로 버리자는 것입니다. 스스로 버리는 데 누구를 위해서 버려야 하느냐? 이 나라를 찾아야 하므로 이 나라를 위해서 버리자는 것입니다.

만일 예수님 자신이 강제로 자기의 생명을 버렸다면 구주가 될 수 없었을 것입니다. 물론 예수님은 겟세마네 동산에서 “아바 아버지여 아버지께서는 모든 것이 가능하오니 이 잔을 내게서 옮기시옵소서”라고 기도하셨지만 “그러나 나의 원대로 마옵시고 아버지의 원대로 하옵소서 (막 14:36)”라고 하셨습니다. 이렇게 아버지의 뜻을 중심삼고 최후의 죽음길을 넘어감으로 말미암아 여기서부터 문제가 달라진 것입니다.

자기 자신을 자기가 스스로 버렸다는 것입니다. 누구에 의해 강제적으로 희생한 것이 아니라 자기 스스로가 희생한 것입니다. 스스로 희생하지 않고 누구에 의해 강제로 희생당해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아벨은 가인 앞에서 스스로 희생한 것이 아닙니다. 강제로 희생된 것입니다. 아벨이 희생된 자리는 기쁨으로 희생한 자리가 못 되고 슬픔으로 희생되었기 때문에 복귀문제가 뒤따르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복귀하는 데 있어서는 강제로는 안 됩니다. 스스로 자기 자신을 부정해야 됩니다. 어느 시대에 있어서나, 혹은 하나님의 섭리권을 벗어난 사탄세계에 있어서도 역시 이런 길을 가는 그 사람들을 중심삼고 역사는 방향을 갖추어 나가는 것입니다. 양심적인 사람, 선한 사람, 아무 이유없이 대중에게 버림을 당하는 사람, 또 권한이 갖추어졌다 하더라도 그 권한을 행사하지 않고 아무 대가도 없이 희생하는 사람, 이런 사람은 어떠한 세계에서도 남아집니다. 악한 사탄세계에서도 남아지는 것입니다. 선한 세계에 있어서도 그 사람은 남아지는 것입니다. 그 자리를 추구해 볼 때 그것은 스스로를 버리는 자리라는 것입니다. 여러분이 이것을 알아야 되겠습니다. 우리 통일교회가 걸어온 길도 그러한 길이었습니다.

30-50
내적인 것부터 버려야
그러면 어디서부터 버릴 것이냐? 외적인 것부터 버리는 것이 아닙니다. 외적인 것은 누구든지 버릴 수 있습니다. 내적인 것을 버려야 됩니다. 외적인 것은 물론이거니와 내적인 것까지도 버려야 됩니다. 그러면 내적인 문제가 무엇이냐? 자기를 중심삼은 심정적 인연관계입니다. 여기에는 자기의 형제가 문제입니다. 형제를 붙들고 그냥 복귀할 수 있으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그러나 그렇게는 안 되는 것입니다. 부모를 붙들고 그냥 복귀할 수 있으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그렇게는 안 되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처자를 붙들고 그냥 복귀할 수 있으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그러나 그렇게는 안 되는 것입니다. 자기가 가지고 있는 모든 만물을 붙들고 그냥 복귀할 수 있으면 얼마나 좋겠느냐? 그러나 그것도 그렇게는 안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문제입니다.

여기에서는 외적으로 내적으로 버려야 됩니다. 버리지 않으면 반드시 빼앗아 갑니다. 그러지 않으면 하나님께서 역사를 할 수 없습니다. 내가 버리든가 빼앗기든가 둘 중의 하나는 해야 합니다. 아벨은 자기 스스로가 택한 자리가 아닐지라도 빼앗기는 자리에 섰기 때문에 하나님이 그의 편이 되는 것입니다.

오늘날 우리들도 그런 입장에 있습니다. 복귀해 가야 할 운명길에 서 있는 우리 자신, 우리 가정, 우리 민족, 우리 국가, 우리 세계가 그런 운명에 처해 있습니다. 그러니 세계를 하나 만든다 하더라도 최후의 문제가 남아 있는 것입니다. 하나된 그 세계에 그냥 그대로 들어가 행복하게 살 수 있는 나 자신이라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이 땅 위에 천국이 찾아왔으니 천국 살림을 하자고 할 때 그럴 수 있으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그러나 그럴 수 없게 되어 있다는 것입니다. 여기에는 반드시 청산지어야 할 여건들이 남아 있습니다. 그것은 안팎으로 남아 있는데 외적으로는 그 세계와 그 나라와 그 민족과 그 만물이 있는 것이요, 내적으로는 자기를 중심삼아 가지고 부모와 처자와 형제가 있는 것입니다. 이것들을 청산지어야 됩니다. 그러지 않고는 돌아갈 수 없다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자신의 어머니에게 “여자여 나와 무슨 상관이 있나이까(요 2:4)”라고 하신 이 말은 그냥 그대로 지나가는 말로 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 말은 자기의 생사를 결정짓는 심각한 말이었습니다. 부모를 사랑하지만 그 부모를 그냥 그대로 사랑할 수 없는 처지였습니다. 청산지어야 할 내용이 있다는 것입니다. 형제를 그냥 그대로 붙들고 사랑할 수 있으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하지만 그럴 수 없는 것입니다. 본연의 자리로 돌아와 가지고 사랑해야 됩니다. 돌아오려면 부정해야 됩니다.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님은 자기 모친이 우는 것을 보고, 요한을 가리키면서 “여자여 보소서 아들이니이다. (요 19:26)”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자신을 위하여 울고 있는 어머니에게 그런 말을 한다는 것은 세상에서는 있을 수 없는 일입니다. 요한이 당신의 아들이고 자기는 당신의 아들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돌아와 가지고 어머니를 맞을 수 있는 자기 자신이 못 된다는 것을 잘 알았기 때문에 그랬던 것입니다.

예수님의 부활 직후에 막달라 마리아가 예수님이 현현하신 것을 바라보고 `랍비여!’ 하면서 예수님을 붙들려고 할 때에 자기의 몸을 붙들지 못하게 했던 것입니다. 그건 왜? 아직까지 청산지어 가지고 만날 수 있는 자리에 못 섰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마리아가 `주여! 내가 당신을 사랑하오니…. ‘라고 했지만 마리아가 예수님을 사랑하기 위해서는 자기 부정의 과정을 거쳐서 다시 긍정받을 수 있는 자리까지 돌아와야 되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그런 자리에 돌아가지 않은 마리아에게 그런 말씀을 하신 것은 당연한 것입니다. 완전히 버리는 자리에 서지 못했던 마리아를 보고 예수님은 그럴 수밖에 없었다는 사실을 우리들은 알아야 됩니다.

30-52
내가 부정하지 않으면 부정당한다
이런 입장에서 복귀의 기점이라는 문제를 중심삼고 볼 때에 오늘날 우리가 나라를 하나로 만드는 것도 필요하고, 세계를 하나로 만드는 것도 필요하고 다 필요합니다. 또, 우리는 그렇게 되기를 소원하면서 나아가고 있습니다. 그러려면 하나님을 중심삼고 하나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하나 되기 위해서는 현실적인 환경 그 차체로서 그냥 그대로는 안 됩니다. 하나님을 중심삼고 통일된 국가가 있다 하더라도 그 국가 앞에 내가 그냥 하나될 수 없는 것입니다. 이 공식은 여전히 남아 있는 것입니다.

그러기에 사탄세계와 반드시 이별해야 합니다. 사탄세계에 처해 있는 자기 나라와 이별을 해야 됩니다. 자기가 가장 귀하게 여기고 사랑하던 모든 물질이나 이 땅에서 자기가 목표로 삼고 추구하던 권위라든가 영광의 조건이라고 자부해 나오던 모든 것을 부정해야 됩니다. 부정을 안 당하려면 먼저 부정해야 됩니다. 내가 먼저 부정해 놓으면 사탄의 시험을 받지 않습니다. 원수의 공격을 받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만일 원수가 이것을 공격하는 날에는 원수 자체가 파괴되는 것입니다.

이러한 것을 볼 때에 오늘날 `나’라는 사람은 지극히 단순한 존재이지만 역사과정에 있어서는 하나의 기점인 것입니다. 여러분이 있어야 여러분의 가정이 있는 것이요, 여러분이 있어야 나라가 있는 것이요, 여러분이 있어야 여러분이 살 수 있는 세계가 있는 것이요, 또한 여러분이 있음으로 말미암아 우주가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이 없으면 모든 것이 필요없습니다. 세계 복귀도 필요하지만 제일 문제가 되는 것은 자기 자신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면 여러분 개체를 중심삼고 볼 때, 내가 무엇을 사랑하느냐? 내가 무엇을 좋아하느냐? 내가 무엇을 원하느냐? 외적인 것이냐, 내적인 것이냐 하는 것을 두고 볼 때에 세상에서도 내적인 것을 바라지 않느냐? 부모와 처자, 다시 말하면 내적인 가정이 아니냐는 것입니다. 그래서 내적인 가정이 피해를 받는 입장에 설 때는 외적인 것은 아무리 귀한 것이라도 전부다 버리고 이것을 보호하려 할 것입니다. 이것이 오늘날 타락한 세계에 있어서 우리들이 알고 있는 정상이 아닙니까?

그러면 이것이 귀하다고 해서 그냥 붙들고 돌아갈 수 있느냐? 타락은 혈통적으로 했고 사탄의 거짓 사랑으로 되었던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냥 그대로 돌아갈 수 없습니다. 그냥 그대로 돌아갈 수 있으면 6천년이 걸리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럴 수 있으면 야곱이 수난의 길을 가지 않았을 것입니다. 노아 할아버지도 120년간 수난의 길을 가지 않았을 것입니다. 예수님도 돌아가실 필요가 없었을 것입니다. 요셉 가정 그것으로 다 되는 것입니다. 자기의 형제들, 그것으로 다 되는 것입니다. 교회가 필요없는 것입니다.

새로운 나라가 건설되기 위해서는 새로운 가정이 있어야 되는 것입니다. 그것으로써 그냥 그대로 된다면 즉, 가정도 그냥 그대로, 종족도 그냥 그대로, 민족, 국가, 세계도 그냥 그대로 된다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그것은 누구나 바라는 것입니다. 그렇게 된다면 별나게 할 필요가 없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복귀도상에 있어서는 그렇게 안 됩니다.

30-53
하나님의 보호를 받으려면
오늘 여기에 서 있는 내가 누구보다 못나서 이런 일 하는 것이 아닙니다. 욕먹고 싶어서 욕먹는 것이 아닙니다. 하고 싶어서 이런 일 하는 것이 아닙니다. 가는 길이 그렇게 되어 있기 때문에 아니 갈래야 아니 갈 수 없는 것입니다. 이 자리는 비참한 자리입니다. 자기 나라가 있으나 사랑할 수 없습니다. 우리나라 애국가를 보면 `동해물과 백두산이 마르고 닳도록 하나님이 보우하사…. ‘하는 가사가 있는데 하나님이 보우하시느냐? 보우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더 큰 원수가 부딪혀 하나님 앞에 충의 도리를 하고 효의 도리를 할 때는 하나님의 보호를 받을 수 있지만 그 도리를 못 할 때는 보호를 못 받는다는 것입니다.

대한민국이 더 큰 나라에게 맞는다면, 다시 말하면 더 큰 원수에게 약한 자가 되어 맞게 되면 하나님이 편들어 주시는 것입니다. 그건 왜? 맞는 편에 복귀의 우선권이 주어지기 때문입니다. 가인보다도 아벨이 선한 편에 섰기 때문에 아벨을 하나님이 보호해 주시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런 자리에 서지 못할 때는 내가 맞는 것입니다. 대한민국이 원수로부터 맞는 입장에 서지 않게 될 때는 하늘로부터 맞는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대한민국이 원수로부터 맞을 수 있는 입장에 서게 될 때 누가 맞아야 되느냐? 내가 맞아야 됩니다. 대한민국 백성들이 맞아야 됩니다. 백성은 나라를 위해서 핍박을 받아야 됩니다. 그 민족이 나라를 위해서 핍박을 받아야 됩니다. 그러지 않고는 하나님으로부터 보호받을 수 없고, 동정받을 수 없다는 것입니다.

이렇게 볼 때 민족 가운데 있어서는 가정이, 가정 가운데 있어서는 개인이 몰리는 자리에 서야 하나님의 동정을 받을 수 있습니다. 다시 말해서 국가에서는 민족이, 민족에서는 종족이, 종족에서는 가정이, 가정에서는 개인이 몰리는 자리에 서야 됩니다. 왜냐하면 자기 앞에 더 큰 원수를 가진 입장에 선 사람들을 하나님이 보호해 주시기 때문입니다.

그런 입장에서 예수님을 중심삼고 보게 되면, 예수님은 세계적인 내용을 가지고 홀로 등장했습니다. 예수님은 세계는 나와 더불어, 이스라엘 나라는 나와 더불어, 이스라엘 민족, 종족, 가정, 사람들까지 전부다 나와 더불어 있다는 생각을 하셨습니다. 그것이 관념적이 아닙니다. 사실적으로 그렇다는 것입니다. 그런 예수님 앞에 가정이 반대하면 가정이 원수가 되는 것이요, 종족이 반대하면 종족이 원수가 되는 것이요, 민족이 반대하면 민족이 원수가 되는 것이요, 국가가 반대하면 국가가 원수가 되는 것이요, 세계가 반대하면 세계가 원수가 되는 것입니다. 더 큰 원수가 문제라는 것입니다.

따라서 그런 원수와 싸울 수 있는 자신을 가지고 나가게 되면 싸우다가 죽더라도 그가 상대한 국가면 국가가 망할 때까지 하나님은 그 사람의 편이 되어 주시는 것입니다. 전세계를 대해서 싸웠으면 세계가 망할 때까지 편들어 주시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국가를 넘어 세계를 중심삼고 싸웠기 때문에 그 세계가 굴복할 때까지 하나님은 예수님을 편들어 주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기독교가 명실공히 세계적인 종교가 된 것입니다.

오늘날 통일교회에서 당하고 있는 것이 그런 입장입니다. 이런 입장을 서러워하는 사람들은 세계로 가는 길을 막아 버리는 사람들입니다. 이런 입장을 도피하려는 사람들은 세계로 직행할 수 있는 길을 피해 가는 사람들입니다. 여러분이 이것을 알아야 돼요.

30-55
하나님은 내 아버지라는 자각
현재 우리가 모든 환경을 갖추었다 하더라도 이것은 내일을 위한 방편입니다. 오늘을 위한 방편이 아니라 내일을 위한 방편입니다. 더 큰 전쟁을 하기 위해서는 준비가 필요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것은 내일을 위해서 있는 것입니다. 오늘을 위해서 있는 것으로 생각하는 사람은 그 이상의 세계를 못 넘어갑니다. 다시 말해서 자리를 잡지 못합니다. 하나님께서 자리를 잡을 때까지 자리를 잡지 말라는 것입니다.

이스라엘 민족은 하나님께서 자리를 잡은 기준에서 메시아를 보내시는 것으로 알았지 자리를 잡아야 할 입장에서 보내신다는 것을 몰랐던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이스라엘 나라까지 잃어버린 것입니다. 오늘날 우리들은 이것을 알아야 됩니다.

외적인 세상 것을 가지고 그냥 그대로 갈 수 없는 운명의 길에 들어선 우리들입니다. 하나님은 절대자요, 그 절대자는 우리의 아버지요, 그 아버지는 천지의 주권자이십니다. 이것을 다시 보면, 그 절대자는 나를 중심삼고는 아버지요, 세계를 중심삼고는 주권자요, 하늘의 중심이십니다. 그렇기 때문에 아버지라는 명사는 고귀한 것입니다. 영계를 통합시킬 수 있는 제일 가까운 자리에 있는 것도 그 명사요, 세계를 통합시킬 수 있는 제일 가까운 자리에 있는 것도 그 명사입니다. 나와 그가 통일될 수 있는 가장 가까운 자리에 있는 것도 그 명사밖에 없습니다. 영계에서나 육계에서나 그 명사 이외에 더 가까운 것이 없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인간은 어디에 있느냐? 타락이 뭐냐? 절대자이신 하나님과 내가 하나되지 못한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세계의 중심인 하나님과 하나되지 못한 것이 바로 타락입니다. 우리들은 `하나님만이 절대자이시다. 그분으로 말미암아 인간들이 생겨났고, 그로 말미암아 우주가 생겨났다. 그러기에 여기에 대치되는 일체의 것은 제거당해야 된다’고 하는 신념을 가져야 합니다. 그런 자신을 가져야 합니다. 신념을 가지려면 믿음이 있어야 합니다. 자신을 가지려면 하나님을 대신할 수 있는 자격자가 되어야 합니다. 피조물을 하나님 대신 주관하려면 사랑의 마음을 가져야 됩니다. 사랑이 없이 주관하는 것은 있을 수 없습니다.

인간 시조가 에덴 동산에서 저지른 타락의 동기가 무엇이냐? 나를 중심삼은 것입니다. 그랬기 때문에 하나님의 아들의 자리에서 아들이 되지 못한 것이요, 하나님의 딸의 자리에서 딸이 되지 못한 것입니다. 그래서 사탄의 침범을 받았습니다. 침범을 받았기 때문에 다 잃어버렸습니다. 침범을 받는 것을 피하게 되면 아들이 되는 것이요, 딸이 되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절대적인 하나님은 내 아버지이시다’라고 하는 자각이 아담보다도 강해야 됩니다.

그 아버지는 천상세게의 중심이요, 지상세계의 중심입니다. 그러므로 그 아버지와 하나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럼으로 말미암아 나는 절대적인 중심과 하나되는 것이요, 천지를 주관하시는 절대적인 주관자와 하나 되는 것입니다.

이것을 어떻게 자각하느냐 하는 것이 문제입니다. 그 가치가 얼마나 절대적인가를 확실히 알기 전에는 청산할 도리가 없다는 것입니다. `아버지와 나와의 가치, 그 가치가 얼마나 귀하냐! 그 아버지는 세계의 주권자 이시다! 그 아버지는 세계를 주고도 바꿀 수 없는 것이요, 온천하를 주고도 바꿀 수 없는 것이다! 나는 그 아버지의 아들딸이다! 틀림없는 아들딸이다!’하는 자각을 해야 되는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타락하기 전의 아담 해와 이상의 자리에 서야 합니다.

그래 가지고 그런 아버지와 하나된 나는 그런 아버지와 더불어 하나된 가정이 필요할 것이 아니냐? 이것이 본연의 가정입니다. 또한 절대적인 자리에 있는 종족이 필요하고, 민족이 필요하고, 국가가 필요할 것이 아니냐? 이것이 하나님께서 소원한 뜻입니다. 그런데 오늘 이 현실은 그 반대입니다. 그러니 돌아가야 됩니다. 오늘날 우리는 타락한 후손으로서 부모를 갖고 있습니다. 형제를 갖고 있습니다. 종족, 민족, 국가, 인류를 갖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 종족, 그 민족, 그 국가, 그 인류는 하늘편에서 온 것이 아닙니다. 절대적인 하나님을 중심삼아 가지고 자각된 자리에서 출발한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과 절대적인 자리에서 관계를 맺어 가지고 출발한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염려하고 슬퍼하는 자리에서 출발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이 슬픔을 벗어나기 위해서는 이 모든 것을 부정하지 않으면 안 되는 것입니다.

30-57
복귀의 기점은 우리 자신
원리적인 관점에서 볼 때 아담 해와가 어떻게 해서 타락했느냐? 하나님을 불신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소원하시는 실체가 되지 못했습니다. 이것이 타락입니다. 누구로 말미암아 불신했느냐? 사탄으로 말미암아 불신했습니다. 왜 하나님의 실체가 되지 못했느냐? 사탄이 붙잡아 두었기 때문입니다. 무엇 때문에 영원한 사랑을 할 수 있는 기회를 가지지 못했느냐? 사탄을 중심삼은 기만적인 사랑 때문이었습니다. 여러분이 이런 입장에 있기 때문에 응당 이 사탄을 잘라 버려야 됩니다.

그러므로 여러분들이 사회의 어떤 지위나 계급, 대학교수면 교수로서의 권위, 혹은 그 나라의 주권자면 주권자로서의 그 권위를 그냥 그대로 가지고는 복귀의 길을 못 갑니다. 사탄과의 관계를 청산짓지 않으면 안 됩니다.

그렇기 때문에 복귀의 기점은 여러분 자신이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여러분 자신에서부터 해결되어야 됩니다. 그 자신 가운데에는 누가 있어야 하느냐? 절대자 하나님만이 계셔야 합니다. 이 세계의 중심 주권자인 하나님을 모실 수 있는 자리에서부터 출발되는 것입니다. 세계의 그 무엇이 이것을 부정한다 하더라도 이것이 확고하게 여러분의 마음속에 심어져 있느냐 하는 것이 문제입니다. 그러지 않고 부정해 봐야 그 부정은 거짓입니다.

아버지를 대신한 아들의 입장에서 `하나님과 하나되는 것은 세계와 하나되는 것이요, 그분과 하나된 자리는 세계를 통일시킬 수 있는 자리다!’ 하는 자리에 서야 부정도 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런 자리에서 부정하면 하나님은 반드시 동정해 주십니다. 여러분이 그냥 그대로 있으면서 부정해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그것은 사탄세계에 그냥 그대로 있는 것입니다. 그래 가지고는 하나님과 전혀 관계가 없는 것이 됩니다. 그러므로 자각된 자리에서 부정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권위를 나타내기 위해서 부정해야 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권위를 나타내는 데 부합되지 않는 일체의 모든 것은 부정해야 됩니다. `사탄세계에서의 어떠한 욕망, 어떠한 권세, 자기 스스로가 바라던 어떠한 것도 부정할 수 있다! 그런 것은 아무런 문제도 안 된다!’할 수 있어야 됩니다. 이런 것이 문제가 되어 가지고는 하나님 앞에 동정을 받을 수 없습니다.

오늘날 소위 통일교회를 믿는다는 사람들 가운데에도 그런 것이 문제가 돼 있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젊은 청년들이 세상에 애인이 있고, 뭐 어떻고 저떻고 하는데, 그런 생각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그건 세상 생각입니다. 그런 것을 완전히 부정해야 합니다. 그런 것은 문제가 아닙니다.

30-58
아벨의 책임
여러분들, 생각해야 합니다. 복귀는 누가 해야 하느냐? 아벨이 해야 합니다. 그러면 아벨은 무엇을 해야 되느냐? 가인을 굴복시켜 복귀해야 하고, 부모를 복귀해야 됩니다. 이 둘을 복귀하지 못하면 돌아가지 못하는 거예요. 아벨의 책임이 무엇이냐? 아벨은 중심이기 때문에 그에게는 부모를 복귀해야 할 책임이 있고, 가인을 복귀해야 할 책임이 있습니다. 그래야 돌아갈 수 있습니다. 아벨이 가인과 하나되면 부모는 자동적으로 복귀되는 거예요.

그리고 아벨이 부모와 하나되면 가인이 복귀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시일이 오래 걸립니다. 아벨이 세계를 대해서 싸우면 세계의 싸움이 끝날 때까지 그대로 있는 것입니다. 역사가 그래요. 예를 들어 보면 예수님은 아벨의 입장이요, 하나님은 부모의 입장이며, 세계는 가인의 입장입니다. 여기서 문제가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과 예수님이 완전히 하나되어 가지고 세계를 자연굴복시킬 수 있는 입장에 서야 됩니다. 예수님은 언제나 뜻을 이룰 수 있는 가능권내에 있는 거예요. 그래서 예수님은 30대에 역사하기 시작하셨습니다. 그 자리는 새로운 출발을 하는 자리, 새로운 민족을 대신해서 가는 자리입니다. 여기서 예수님은 외적인 기반, 즉 자기 가정만 갖추면 세계는 그 가정을 중심삼고 자동적으로 복귀되는 것입니다. 그건 왜? 예수님은 아담을 대신한 입장이죠? 그러니 다음엔 아내와 아들딸, 이것만 갖추어 가지고 하나님과 하나되면 세계는 자동적으로 굴복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것도 틀어졌고 이것도 틀어졌다는 것입니다. (칠판 판서 후 지적하시면서 말씀하심) 그래서 하나님께서 같이하실 수 없었다는 것입니다.

야곱도 아벨의 입장이었습니다. 야곱이 에서를 복귀하기 위해서는 어머니의 협조가 필요했던 것입니다. 그래서 어머니와 짜고 거짓말을 했습니다. 거짓말을 했지만 야곱과 어머니가 하나되었기 때문에 아버지까지 복귀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야곱이 21년동안 외로운 자리에 있었지만 부모는 언제나 야곱을 생각했던 것입니다. 그러나 에서와의 문제가 해결되지 못했습니다. 그런데 야곱이 가정을 갖추고 나니 해결되었던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가정을 중심삼고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 자신이, 부모 자신이 마음대로 할 수 없는 것입니다. 인간이 타락함으로 말미암아 하나님께서는 서러운 입장에 계시는 것입니다. 서러운 심정을 가지고 계시다는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슬픈 자리에서 탄식하고 계시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이렇게 된 것을 복귀하려면 어떻게 해야 되느냐? 천사장을 굴복시키고, 형제끼리 하나되어야 합니다. 그러지 않고는 복귀가 안 됩니다. 예수님이 하나님의 뜻을 이루기 위해서는 이스라엘 나라와 하나되어야 됩니다. 하나되는 데는 가정을 중심삼고 하나되어야 했습니다. 그랬다면 나라가 복귀되는 것은 시간문제입니다. 유대교도 하나되어 들어오게 되는 것입니다. 그렇게 되었으면 하나님은 자동적으로 주인이 되시는 것입니다. 그런데 여기에서 싸움이 벌어졌기 때문에 예수님도 돌아가시고 이것도 망한 것입니다. 이것만 하나되면 부모가 복귀되는 것입니다. 가인의 입장에 있는 장자가 세계를 자기 것 만들겠다고 하면 안 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지금까지 하나님은 아벨을 세워서 상속받게 해 오셨습니다. 아벨의 정성의 도수가 차면 상속을 받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기에 장자는 상속자(아벨)가 나오려고 할 때마다 그를 쳤던 것입니다. 이것이 지금까지의 역사의 배경이었습니다.

그러면 오늘날 통일교회에 있어서 60년대는 어떤 시대냐? 가정을 중심삼고 하나님과 하나되는 시대입니다. 이것만 이루어지게 되면 선생님이 나타나지 않더라도 뜻은 발전해 나간다는 것입니다. 그 대신 가인적인 세계에서 나라면 나라의 어떤 주권자보다도 나라를 더 사랑하라는 것입니다. 세계의 어떤 주권자보다도 세계를 더 사랑하라는 것입니다. 그러면 세계는 복귀된다는 것입니다.

30-60
오늘날 통일교회가 해야 할 일
그러면 오늘날 통일교회 식구들을 중심삼고 볼 때 제일 문제되는 것은 무엇이냐? 자신에 대한 자각입니다. `하나님을 중심삼고 새로운 아들딸로 태어났다! 이 아들딸로 태어난 것은 천하를 주고도 바꿀 수 없다. 그러므로 왔다갔다 할 수 없다! 겨울이 가고 봄이 오듯이, 계절이 바뀌어지듯이 내 마음이 변할 수 없다! 사시사철은 변하더라도 나는 원칙에서 벗어나지 않겠다’고 할 수 있어야 합니다. 외형적인 모양은 다르더라도 내심, 중심을 통해서 돌아가는 데는 철석같아야 합니다.

자기를 부정하는 이유가 무엇이냐? 가인이 칠 수 있는 공격 대상을 처리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전법 중에 최고의 전법입니다. 다시 말하면 그들이 공격을 하기 전에 앞서 나가자는 것입니다. 앞에 나아가서도 그들의 본이 되자는 것입니다. 그들보다 낫자는 것입니다. 그들보다 못해 가지고는 복귀가 안 되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지금까지 역사를 바로잡아 온 모든 사람들은 그들이 살던 시대의 사람들보다도 낫기 위해서 싸운 사람들입니다. 그들이 바로 성현들이라는 것을 여러분이 알아야 됩니다.

70년대를 맞이한 현재의 입장에서 오늘날 통일교회가 해야 할 일은 무엇이냐? 국가를 중심삼고 볼 때 우리는 남북을 통일해야 할 입장에 있습니다. 70년대는 통일의 시대라고 말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그러면 통일을 하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되느냐? 이북에 대해 공세를 취하는 반면 그들을 위해서 눈물을 흘리며 기도하는 마음을 가져야 됩니다. 다시 말하면 우리 자신들이 하나님을 중심삼고 새로운 자각을 해야 합니다. 그 하나님을 위로는 하늘의 주권자로서, 아래로는 땅의 주권자로서, 내 아버지로서 모셔야 합니다. 나는 그분을 위해 있고, 그 나라를 대신해 있다는 입장에 서야 됩니다. 그런 입장에 서게 될 때에 그 자리는 예수님이 섰던 자리와 같은 자리입니다. 즉, 아벨의 자리입니다. 하늘을 대신해서 선 자리요, 땅을 대신해서 선 자리입니다. 아벨적인 자리라는 것입니다. 그런 자각을 하지 않고는 아벨이 될 수 없는 것입니다. 이 목적이 성사되면 모든 것을 문제없이 넘을 수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외적으로는 세계로부터 나라와 자기 자신이 가지고 있는 물질까지 부정해야 됩니다. 이것은 공식입니다. 지금 현재의 입장에서는 나라를 사랑할 수 없습니다. 나라를 사랑하기 위해서는 하늘편으로서, 새로운 자각과 더불어 사랑해야 됩니다. 그리고 부정을 하지 않고는 안 됩니다. 자기 자신까지도, 외적인 입장은 다 잃어버리는 자리에 서야만 하나님이 사랑할 수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 기도해 보십시오. 기도를 해 가지고 맨 처음 은혜를 받게 되면 자기 어머니도 못 만나게 한다는 것입니다. 그런 느낌이 있어야 됩니다. 그런 느낌이 있다는 것은 하나님과 그만큼 가까와졌다는 거예요. 또 지금까지 사랑하던 남편이나 아내도 영적인 체험을 할 때에는 뱀과 같이 보입니다. 보기만 해도 기분 나쁘다는 것입니다. 그런 것이 느껴진다는 거예요. 그렇게 느껴지는 것이 나쁜 것이 아니예요. 그 배후에는 하나님과 가까와지는 것을 안다는 것입니다. 또 옛날에는 자기 아들딸들이 배가 고프다고 하면 먹을 것을 갖다 주고 그저 좋아 가지고 죽을 지경이더니 이제는 보기 싫다는 것입니다. `이놈의 자식아. 배고파 봐라’하는 마음이 든다는 것입니다. 그러한 것을 느끼지 않고는 해방의 날을 맞이할 수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오늘날 통일교회에 들어오면 가정이 파괴된다고 하는 것입니다. 이러한 부인들이 들어오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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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의 복귀
타락은 불신으로 말미암은 것입니다. 불신함으로 말미암아 실체를 잃어버리고 참된 사랑을 잃어버렸습니다. 그러면 사랑은 몇 종류가 있느냐 하면 부모의 사랑, 부부의 사랑, 자녀의 사랑, 이 세 사랑이 있습니다. 이것을 복귀해야 됩니다. 이것을 한꺼번에 복귀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여러분이 이런 내적인 모든 문제를 부정할 수 있는 권내에 들어가면 어떻게 되느냐 하면 `나는 하나님의 아들딸’이라고 느끼게 됩니다. 그걸 느껴야 됩니다. 완전히 느껴야 됩니다. 아들로서 혹은 딸로서 하나님의 사랑을 받는 것을 느껴야 된다는 것입니다. 그런 기간이 지나면, 다음은 상대적 관계입니다. 부자의 사랑, 그 다음엔 부부의 사랑을 느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기독교는 어떤 사명을 해야 되느냐? 아들딸의 사명을 해야 하고, 그 다음에는 신랑 신부로서의 사명을 해야 하고, 그 다음에는 아버지로서의 사명을 해야 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30여년의 생애 동안 사명을 했지만 하나님과의 관계는 부자의 관계였습니다.

예수님의 30여년의 생애는 아들의 사명을 한 생애였습니다. 그 다음에 지금까지의 기독교 역사는 부부의 사랑을 찾기 위한 역사라는 것입니다. 부부의 사랑이 찾아지면 부모의 사랑이 성립되는 것이요, 그 사랑이 성립된 후에는 하나님을 대신하여 자녀를 사랑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것을 나를 중심삼고 보면 자녀의 사랑, 부부의 사랑, 부모의 사랑, 이렇게 거꾸로 올라가는 거예요. 하나님을 중심삼고 그런 사랑을 느끼지 않으면 복귀가 안 된다는 것입니다. 이 세 사랑을 느껴야 되는 것입니다.

그러면 우리 통일교회 교인들을 원리를 중심삼고 볼 때에, 남자들에게는 좀 안 됐지만 남자는 뭐냐? 타락했기 때문에 천사장격입니다. 또 여자는 뭐냐? 천사장 부인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가 복귀하여 하나님 앞에 가려면 타락 직전 아담 해와의 자리까지 올라가야 되는 거예요. 타락하지 않았다면 어떻게 되느냐? 천사장 부인이 본래는 아담 부인이 되는 거예요. 천사장에게는 결혼하는 것이 허락되지 않기 때문에 없어지는 것입니다. 종이 되는 것입니다. 알겠어요?

그렇기 때문에 통일교회에만 들어오면 남편이 원수같이 생각되는 것입니다. 아내가 통일교회에 들어오면 남편이 천사장의 입장에서 아내를 끌어내리려고 한다는 것입니다. 또 남편이 통일교회에 들어오면 아내가 타락한 해와의 입장에서 남편에게 따먹으라고 하는 것과 마찬가지 입장에 선다는 것입니다. 그런 과정을 통과하지 않고는 복귀가 안 됩니다.

그런데 해와는 어떤 입장에 있었느냐? 해와는 두 남자를 섬겼습니다. 두 남자를 섬기는 입장은 타락한 입장입니다. 통일교회에 들어온 부인들은 두 남자를 대해야 하는 입장에 서 있는 것입니다. 가정이면 가정에 있어서의 남자, 통일교회면 통일교회에 있어서의 남자…. 이런 입장에 서있는 것입니다. 여기서 어디로 가느냐 하는 것을 결정해야 합니다. 이것을 누가 결정하느냐? 누가 결정해야 복귀되나요? 여러분, 자신이 해야 됩니다. 그래서 지금까지 통일교회는 뭐 어떻고 어떻고 하는 것입니다. 자기들이 불이 나 가지고 야단들입니다. 그러나 여러분, 기도를 해 보십시오. 그래서 영적으로 알아 보라는 거예요. 남자들은 3년 동안 잘 믿는 아내만 따라가면 완전히 구원받는다는 것입니다. 3시대를 대신한 3년동안 부인 말만 잘 들으면 구원받는다는 것입니다. `암탉이 울면 집안이 망한다’는 말이 있지요? 그것은 타락한 세계의 암탉이기 때문에 망하는 것입니다. 복귀노정에서는 반대로 되어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복귀시대에는 여자가 울어야 된다는 거예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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효의 도리
통일교회에 있어서 70년대는 여자가 그렇게 해야 할 때라는 거예요. 그것은 제2차 세계대전 이후부터 70년대까지를 보면 알 수 있어요. 여자가 활동적이면 남자가 출세하는 거예요. 대한민국에서도 그렇지요? 그러므로 그저 `임자 부탁하네’ 해야 되는 거예요. 요즈음 남자들 시세 있어요? 남자는 어디 가서 취직하기도 힘들어요. 그렇지만 여자는 미인이기만 하면 어디든지…. 공부를 못 해도 좋다는 거예요. 남자는 대학을 나와도 `당신 어느 대학 나왔어? ‘ 하지만 여자는 그런 것이 없다는 거예요.

이런 때에 우리 통일교회에서는 가인세계를 복귀하기 위해서 쫓겨다니며 고생하는 현상이 벌어지는데 세상에서는 타락하던 모양 그대로 벌어지는 것입니다. 에덴 동산에서 아담 해와가 청소년 시기인 만 16세 때에 그런 일이 생긴 것입니다. 나무 그늘 아래에서 타락했던 것과 마찬가지로 세계는 난장판이 벌어진다는 것입니다. 그렇지만 우리는 이 질서를 바로 잡아가야 합니다. 노인으로부터 장년, 청년, 소년들까지 질서를 바로 잡아가야 하는 것이 우리의 사명이기에 이런 일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들이 통일교회에 척 들어왔다 하면 무엇인가 심정적으로 이상하다는 거예요. 전부다 부정하고 싶다는 겁니다. 부정하고 싶은 동시에 모든 것을 사탄세계에 갖다 주고 싶어하는 것이 아니라 선생님에게 갖다 주고 싶어한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외국 사람이나 한국 사람이나 모두 마찬가지라는 것입니다. 안 그러면 통일교인이 아닙니다. 좋은 집이 있으면 선생님이 저 집에서 사셨으면 하는 생각이 들어간다는 것입니다. 자기 마음이 먼저 그렇게 된다는 거예요. 안 그러면 통일교인이 아니예요. 그러지 않고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그 마음을 통해 누구를 세우느냐 하면 아버지를 세우는 것입니다. 통일교회에 있어서 현실적인 입장에서 아버지에 대한 자각을 하게 할 수 있느냐 하는 것이 문제인데 그것은 그럴 수 있다는 것입니다. 좋은 것이 있으면 `저거 선생님께 한번 드려 봤으면…. ‘ 하고 생각한다는 것입니다. 이런 마음이 자기도 모르게, 이런 말이 자기도 모르게 나와야 된다는 것입니다. 그것이 정상적인 것입니다. 그러면 자기를 완전히 부정하는 것이 됩니다. 사탄은 나를 위해서 그런 집, 그런 차 등을 가지려고 합니다. 그러나 통일교회 교인들은 근본적으로 다르다는 거예요. 전부다 아버지를 위해서 한다는 자각이 자체에서 자동적으로 벌어진다는 것입니다. 나라에 있어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제일 좋은 자리, 이런 모든 것은 내 것이 아니라 아버지 것이라고 해야 합니다. 이것이 효의 도리입니다. 이것이 통일교회 교인들의 현실 생활권내에 가능할 때 통일교회는 망하지 않습니다. 이런 것이 아버지에 대한 자각이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직접 대할 때는 아버지이지만 영계에서는 주권자이십니다. 무한한 가치로써 여러분의 마음을 점령하고 생활감정까지 주관하고 계십니다. 이것을 느낄 수 있는 사람은 사탄세계의 사람이 아니라 하늘세계의 사람입니다. 즉, 자기 자신을 중심삼은 현실 세계를 완전히 부정한 자리에 있는 사람입니다. 자기 남편, 혹은 자기 처자까지도 부정한 자리에 있는 사람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통일교회 아주머니들 가운데에서는 남편을 버리고 나온 사람도 있습니다. 선생님이 나오라고 그러지 않았어요. 선생님이 나오라고 하지 않았는데 자기가 버리고 나왔습니다. 자기 자식을 버리고 나온 사람도 있습니다. 자기 자식을 고아원에 맡기고 나온 사람이 있다는 거예요. 그게 누구 때문입니까? 선생님 때문이예요? 자기 때문에 그랬다는 거예요.

그것은 누구 때문이냐? 결국은 자기 때문입니다. 자기 갈 길을 가기 위해서입니다. 선생님도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나는 사랑하는 부모를 버린 사람입니다.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자식을 죽여 제물로 드리라고 했을 때 아브라함은 그렇게 했는데, 너는 부모를 죽여서 제물로 바치라고 하면 어떻게 할 것이냐? 그러면 나는 목을 내놓고 한다는 것입니다. 세상에 그런 법이 있을 수 있어요? 그런 법이 없습니다. 자식을 잡아 제물 드리는 그런 일은 없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자식을 제물로 드려야 한다는 것입니다. 왜? 아담 해와가 하나님을 불신하고 타락했기 때문에 그것을 용서받으려면 말씀대로 제물 드려야 하는 것입니다. 그렇다고 그것은 버리는 것이 아닙니다. 둘 다 살리는 겁니다.

30-65
복귀의 기점을 만들려면
선생님은 지금까지 친척에 대해서는 관심을 갖지 않았습니다. 이것은 솔직한 고백이에요. 그러나 1970년대에 들어오면서 친척에 대한 관심이 조금 달라졌습니다. 그렇다고 내가 친척이라 해서 뒤에 가서 사정을 봐주고 하는 그런 사람이 절대 아닙니다. 그렇지만 1970년대에 들어와서는 내가 친척들에 대해서 해야 할 책임이 있어요. 왜냐하면 싸움의 방향이 이미 바꿔졌기 때문입니다. 이사를 가야 하는 때입니다. 고향을 떠나려 할 때는 고향에 가서 친척들을 만나는 것이 세상의 법도가 아닙니까?

이제는 통일교회도 자리를 잡았습니다. 70년대는 통일교회의 운세권으로 들어서는 때입니다. 영통하는 사람들에게 물어보라는 겁니다. 그런가 안 그런가…. 왜 그러냐 하는 것은 지금 설명할 시간이 없어요. 선생님 가정을 중심삼아 가지고 그렇게 되게 되어 있습니다. 그걸 다 설명할 수가 없습니다.

그러니 이제는 친척들도 구해 주어야 된다는 것입니다. 지금까지 선생님은 친척보다도 여러분을 더 사랑했습니다. 틀림없이 그렇습니다. 지금까지 살아오면서 부모, 형제, 처자에게 무슨 예물을 해준 적이 없습니다. 지금까지 어머니가 나를 위해서 그렇게 정성을 들였지만 손수건 하나 안 사주었습니다. 선생님에게 식구들이 무엇을 사주게 되면 `이것을 다른 사람 줘야 할 텐데’ 하면서 주었습니다. 법도적인 생활을 안 할 수 없는 것입니다.

이런 일을 해온 사람입니다. 부모도 처자도 다 버리고 나왔습니다. 그러니 나라도 버려야 됩니다. 나라를 버렸다가 다시 찾겠다고 하니 그 나라가 반대하는 것입니다. 그 가정이 반대한다는 것입니다. 이런 길을 가지 않고는 복귀의 기점을 찾을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아벨은 가인을 복귀해야 되고 부모를 복귀해야 합니다. 오늘날 선생님에게 책임이 있다면 대한민국을 복귀해야 하는 것이요, 그 다음에는 하나님을 대한민국에 모셔야 할 책임이 있는 것입니다.

이 책임을 하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되느냐? 더 큰 것을 하나님의 것으로 찾기 위해서는 작은 것을 버려야 합니다. 통일교회 교인은 선생님의 친척입니다. 종족입니다. 그렇지요? 그러니까 종족을 사랑해서는 안 됩니다. 여러분을 쳐야 됩니다. 여러분이 수고해야 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지금까지 이스라엘 나라를 세워서 이방을 찾으려고 하셨습니다. 이와 같이 아벨적인 집단은 가인적인 집단을 복귀해야 선생님이 해방되는 거예요. 그렇지요? 이것은 불가피한 원칙입니다. 이런 원칙을 중심삼아 가지고 복귀의 사연이 엮어져 나가고 있습니다.

그러면 복귀의 기점은 어디서부터 시작되느냐? 아벨에서 부터입니다. 아벨은 부모를 복귀해야 되고 가인을 복귀해야 됩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은 이스라엘 나라를 복귀해야 되고 하나님을 이스라엘 나라에 모셔야 했던 것입니다. 그와 마찬가지로 선생님의 책임은 무엇이냐? 대한민국 삼천만을 복귀하여 거기에 하나님을 모시는 것입니다. 남북통일은 우리의 책임인 것입니다. 대한민국이 하는 것이 아닙니다. 현 정부가 통일할 수 있느냐? 못 한다는 것입니다. 앞으로는 통일교회가 아니고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협조하시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남북을 통일시켜야 합니다. 남북이 통일되면 아시아가 통일될 수 있는 기원이 마련되는 것입니다.

아벨적인 개인, 아벨적인 가정, 아벨적인 국가는 반드시 가인을 복귀하여 그 환경 위에 하나님을 모실 수 있는 것입니다. 이것이 복귀의 기점이라는 것을 알고, 이것을 여러분의 생활에 적용하여 생활해야 되겠습니다. 이 원칙을 벗어나서는 하나님 앞에 갈 수 없습니다. 이것은 공식입니다.

여기는 자기를 내세우는 것이 아닙니다. 어디까지나 남을…. 자기를 내세우고 자기를 주장하는 것이 타락이기 때문에 반대로 자기를 부정하고 `하나님만이 계시옵소서’ 해야 합니다. `하나님만이 내 개체의 중심이 되시옵소서’ 해야 합니다. 여러분은 하나님의 심정을 중심삼아 가지고 가인을 굴복시켜서 가야 할 입장에 있습니다. 복귀의 기점을 중심삼고 나가야겠습니다.

결론을 지읍시다. 세계를 하나 만들 수 있다 하더라도 그 세계를 하나 만들기 전에 자기 자체가 하나되지 않으면 안 됩니다. 그것은 세계가 하나되어 그 세계권내에 내가 산다 하더라도 그 세계는 나와 관계를 맺을 수가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여러분 개인이 아버지의 품에서 다시 태어나야 된다는 거예요. 다시 태어나기 위해서는 모든 것을 부정하는 자리에 들어가지 않고는 안 된다는 거예요.

그 다음에는 자각이 필요합니다. 자기 자신에 대한 자각, 자신의 환경에 대한 자각, 국가에 대한 자각, 세계에 대한 자각을 해야 합니다. 이렇게 새로운 세계관을 중심삼아 가지고 새로운 자각을 해서 모든 것을 청산짓고 넘어가는 자리에서 아벨의 자리가 결정되는 거예요. 아벨의 자리를 결정지었으면 가인을 반드시 굴복시켜 가지고 하나님을 모셔야 합니다. 그럼으로 말미암아 여러분들이 천국에 갈 수 있는 개인이 될 수 있고, 하늘 가정, 하늘 국가, 하늘 세계, 즉 천국을 이루는 개인이 될 수 있다는 것을 확실히 알아야 됩니다. 이것이 복귀의 기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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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 도
아버님, 한 많았던 1960년대를 지내고 보니 그것은 짧은 생애노정이었습니다. 그 기간 동안에 내심적으로 느껴진 모든 사연들은 그 누구에게도 말할 수 없는 사연이었사옵니다. 보잘것없는 불초한 이 몸을 지켜 주심을 감사드리옵니다. 아버지께서는 지금까지 말할 수 없는 사연을 품으시고 나오시면서 그 사연을 얼마나 토로하고 싶으셨사옵니까? 만국가와 더불어 승리를 찬양할 수 있고, 찬양과 더불어 영광을 높일 수 있는 그날이 오기를 바라며 참아 나오신 아버지 앞에, 오늘도 저희들이 겸손한 자세로써 아벨의 모습을 찾아 나섰사오니 기억하여 주시옵소서.

아벨은 그 마음 전체에 오직 아버지를 모시는 것만이 목적이옵고, 형님인 가인을 복귀시키는 것만이 목적이라는 것을 알았사옵니다. 여기에서 필요한 것이 자기에 대한 자각이 아니라 아버지에 대한 새로운 자각이요, 세계에 대한 새로운 자각이라는 것을 알았사옵니다. 아버지는 절대적인 분이요, 세계의 중심인 것을 아옵니다. 그러나 아벨이 가인을 굴복시키지 않고는 아버지께서 세계의 중심의 자리에 설 수 없는 것을 알았사옵고, 자각된 자리에서 아버지를 세계의 중심으로 모실 수 있는 동기를 아벨이 만들지 않으면 안 된다는 사실을 저희들은 알았사옵니다. 이것이 복귀의 기점이라고 하였습니다.

아버님, 통일교단이 이 민족 앞에 있어서 아벨적인 자리에 서 있사옵니까? 이제 저희들은 저희 교단을 중심삼은 의식보다도 아버지를 위하겠다는 의식이 강해야 되겠습니다. 교단을 위하는 의식보다도 나라를 위하겠다는 의식이 강해야 되겠습니다. 그리하여 저희들이 아버지와 그 나라를 마음에 모실 수 있을 때 가인도 굴복시킬 수 있는 것이요, 아버님도 모실 수 있다는 사실, 이것이 복귀의 기점이라는 것을 저희들은 알아야만 되겠사옵니다.

가인이 주관하는 이 세계를 바라보게 될 때에, 아버지여, 세계는 갈 길을 잃어버렸습니다. 민주세계의 첨단에 서서 이 세계를 지도하고 있는 미국도 갈 길을 잃어버렸습니다. 선진국도 그러한 처지에 놓여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세계는 청소년으로부터 장년 노년에 이르기까지 중심을 잡지 못하고 삼분오열되는 장벽에 부딪혀 있습니다. 여기에서 우리가 아벨적인 새로운 신념의 주체가 되어 가인을 자연 굴복시킬 수 있어야 하겠사옵니다. 이런 환경이 세계에 찾아오고 있는 것을 알게 될 때에 아버지께서는 새로운 세계관을 가진 아벨의 모습을 보면 무척이나 기뻐하신다는 것을 알게 허락하여 주시옵소서.

저희들이 이 아벨과 하나되게 허락하여 주시옵소서. 내 개인이 아버지와 하나되고, 내 가정이 아버지와 하나될 때 가인세계는 굴복된다는 것을 알았기 때문에, 통일교단은 축복이라는 명사를 걸어 놓고 개인을 아버지 앞에 결속시키고 가정을 아버지 앞에 결속시켜 하늘편이 되게 하기 위해서 지금까지 싸워 나왔사옵니다. 이 가정들이 아버지와 하나될 때 사탄세계는 자동적으로 굴복될 수 있으며, 이 가정을 중심삼고 하나의 이스라엘을 창건하기 위해 깃발을 들고 나설 때 세계는 자동적으로 굴복할 수 있사옵니다.

저희들은 찾고 있습니다. 하늘의 사람을 섬길 수 있는 때가 왔습니다. 하늘의 가정을 만나고 싶어하고 있습니다. 하늘의 나라를 세우고 싶어하고 있습니다. 가인을 자연 굴복시킬 수 있는 환경이 우리 목전에 도달했사오니, 여기서 저희들이 낙망해서는 안 되겠사옵니다. 저희들은 자기 자신의 자각은 물론이요, 가인 세계까지 자각시킬 수 있는 자체가 되지 않고는 세계를 하나로 만들 수 없다는 사실, 이것은 절대적인 사실이라는 것을 확인할 수 있는 저희들이 되어야겠사옵니다. 이것이 아벨의 입장인 것을 알아야 되겠사옵니다.

아벨에게는 밤을 세워 가면서 가인을 위하여 눈물흘려야 할 사명이 있사옵니다. 예수님은 30여년의 생애에 있어서 자신을 원수시하던 이스라엘 나라를 부정하지 않았습니다. 이스라엘 나라를 긍정하기 위해서 먼저 자기를 부정하려고 노력했던 것입니다. 이런 인연으로 말미암아 긍정적인 새로운 이스라엘을 창건해 나온 것입니다.

이와 같은 사실을 아는 저희들에게 아벨이 지녀야 할 긍지와 아벨이 찾아야 할 권위, 아버지와 더불어 동거할 수 있는 자리가 어떤 자리인가를 알게 하여 주시옵소서.

자각된 자아로서 절대적인 아버지, 세계의 중심인 아버지를 모시기 위해서는 가인이 문제가 아니라 아벨이 문제이옵니다. 이 아벨이 가인을 굴복시키는 데는 총칼로써 하는 것이 아니라, 사랑의 힘으로 굴복시켜야 한다는 것을 저희들은 아옵니다. 부모의 심정을 지니고 종의 몸을 쓰고 땀은 땅을 위하여 눈물은 인류를 위하여 피는 하늘을 위하여 뿌리는 길밖에 없다는 것을 알았기 때문에 지금까지 통일교단은 이것을 표어로 세워 나왔사옵니다.

여기에 서서 아버지 앞에 아뢰고 있는 이 자식도 이 길을 가기 위하여 섰사옵니다. 저 자신을 위해서 저희 권한을 자랑한 때는 한 번도 없었사옵니다. 아버지 앞에 저 자신을 자랑하고 싶은 마음이 드는 때가 있었지만 아버지를 그런 자리에 세워 드리고 사랑하는 자녀들을 그런 자리에 세우려고 했었습니다. 그런 자리가 아벨적인 자리임을 아옵니다. 사랑하는 자녀들을 그와 같은 자리에 높여 주고 위해 줄 수 있는 자리에 서야 그들을 굴복시킬 수 있는 기준이 된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저희들은 그런 전통을 받아 가지고 그런 길을 거쳐 이 민족을 구해야 할 책임이 있기에 수난의 길을 가고 있사옵니다.

눈물은 나를 위해서 흘리는 것이 아니옵고, 이 민족을 위하여, 이 세계를 위하여 흘리는 것이옵니다. 아버지여, 저희들의 눈물이 탕감의 눈물로서 바쳐지기를 바라고 가는 길이기에 아버지는 저희들을 떠날래야 떠날 수 없다는 것을 아옵니다. 그러기에 통일교단이 가고 통일의 말씀이 전해지는 곳곳마다 아버지의 뜻이 이루어질 것을 알고 있사옵니다.

70년대를 맞이해서 저희들이 기도하고 정성들이며 수고하는 모든 것은 야곱과 에서가 상봉하던 것과 같은 인연이 갖추어지는 환경을 넘어가는 것이 되어야 되겠사옵니다. 가인적인 세계 인류와 아벨적인 저희들이 상봉할 수 있고, 기성교단과 만날 수 있는 세계적인 시점을 갖춘 70년대를 맞이하였사옵니다. 아버지여, 천운을 맞아들일 수 있는 이때에 본부에 있는 저희 자신들이 문제인 것을 알게 하여 주시옵소서. 다음에는 스승의 자리에 있는 제가 문제가 된다는 것을 아옵니다. 그 다음에는 아버지가 문제 된다는 것을 아옵니다.

이런 인연을 생각할 때에 저희들은 자각된 자리에서 아버지를 모시고, 기독교가 세계의 중심인 로마제국을 굴복시킨 것과 마찬가지로, 세계의 첨단을 걷고 있는 문명국가와 모든 청소년들을 아버지 앞에 굴복시켜야 할 사명을 저희들이 하지 않으면 안 된다는 것을 각자가 절감할 수 있게 하여 주시옵소서. 이 세계를 복귀하기 위하여 모든 것을 다 바쳐 돌진할 수 있는 하늘의 용사들이 되게 하여 주시옵기를 간절히 부탁드리옵니다.

그리하여 저희들이 복귀의 기점을 자각하고 천국을 창건하는 데 있어서 공신이 되겠다고 할 수 있고, 자기의 영광을 위해서가 아니라 그 나라의 영광을 위하여, 아버지의 영광을 위하여 모두다 이 길을 달려갈 줄 아는 아들이 되고 딸들이 되게 하여 주시옵기를 간절히 부탁드리옵니다.

오늘은 안식일이옵니다. 아침부터 저녁까지 이것을 바라며 모여서 정성 드리는 곳곳마다 당신의 일률적인 축복을 하여 주시옵기를 간절히 부탁드리면서, 모든 말씀 참부모의 성호 받들어 아뢰었사옵나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