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0-247 to 30-269: 하늘편의 내적 슬픔

하늘편의 내적 슬픔
1970.03.29 (일), 한국 통일산업(구리시 수택리)

30-247
하늘편의 내적 슬픔
우리는 우리의 생활 전역에 슬픔이 미쳐져 있는 것을 체험하면서 살고 있습니다. 이 슬픔 가운데 사는 개인이나 가정이나 혹은 민족이나 국가 모두가 그 슬픔을 위로받을 수 있는 어떤 조건만 있으면 그것을 통해서 새로운 희망을 얻는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그 조건이 희망을 가지게 할 수 있는 동기가 되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슬픔 자체가 나쁜 것이 아닙니다. 그 슬픔을 통하여 새로운 목적을 지향해 나갈 수 있는 직접 간접적인 원동력을 출발시키는 일이 우리 생활 주변에 많다는 사실을 알게 됩니다.

30-247
슬픔을 희망의 동기로 삼은 이스라엘 민족
역사를 두고 보더라도 피압박 민족 가운데 뚜렷한 목적을 가진 민족은 압박을 받는 기간이 길면 길수록 망하는 것이 아니라 더욱더 단결해 나왔습니다. 이런 사실을 우리는 역사를 통해서 엿볼 수 있습니다.

비근한 예를 들어 보면, 이스라엘은 아무리 어려운 시대와 환경을 거치더라도 자기들이 선민이라는 의식을 잃어버리지 않았습니다. 가는 곳마다 핍박과 서러움이 언제나 그들을 맞아 주었지만 그들은 그 서러움을 통하여 한날의 희망을 표준하고 나갔던 것입니다. 그 서러움이 그들을 낙망하게 한것이 아니라 도리어 그들을 단결하게 하고 어려운 환경을 타개하게 하는 역사적인 투쟁과정을 남기게 되었다는 사실을 우리는 알고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슬픔이라는 것은 낙망의 조건이 될 수도 있지만, 목적을 지니고 가는 사람에게는 도리어 그것이 목적을 성사시킬 수 있는 내적인 힘을 결성하는 조건이 된다는 사실을 우리들은 알아야 되는 것입니다.

그러면 이스라엘 민족이 염원한 것은 무엇이냐? 유일신을 중심삼고 국가와 민족이 심정일치된 이념권내에 서는 것이었습니다. 그것을 추구해 나오면서 그들은 죽더라도 그것을 마음에 품고 죽었습니다. 그 뜻을 이루지 못한 것을 한으로 남겼습니다. 그들이 죽을 때 부모로서 혹은 어떠한 지도자로서 후손 앞에 그 뜻을 이룰 것을 유언으로 남겼습니다. 이런 것을 두고 볼 때, 슬픈 역사과정을 거쳐온 민족일수록 그 역사과정을 통하여 세계적인 승리의 터전을 맞이할 수 있다는 사실을 우리는 미루어 생각할 수 있는 것입니다.

이러한 점에서 볼 때, 타락한 권내에서 나라 없는 민족이 슬픔을 품고 나오더라도 목적의식이 강하게 될 때는 그 슬픔이 도리어 희망을 가져 오게 하는 동기가 되는 것입니다. 만일에 이스라엘 민족이 자기 나라를 가지고 있으면서 민족권내에서 슬픔을 느꼈더라면 그 슬픔은 어느 때인가 흘러가 버렸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들은 나라 없는 가운데 슬픈 운명에 부딪히면 부딪힐수록, 자기 민족에게 나타나는 환경을 바라보면 바라볼수록 언제나 국가 관념을 가졌고 동족애를 더하여 갔던 것입니다. 그 슬픔에 부딪히게 됨으로 말미암아 새로운 국가를 추구하게 되었고, 현재 자기들의 구속된 환경을 타파해 버리고 해방된 새로운 환경을 추구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그 슬픔이 곧 그러한 동기가 되었다는 것입니다. 그러한 민족은 어느 때에 가서 반드시 승리의 한때를 맞는다는 것을 우리들은 알아야 됩니다.

슬픈 환경으로 휘몰아침을 당했을 때 거기에서 낙망하는 것이 아니라 도리어 더더욱 단결하여 민족애와 국가애를 폭발할 수 있는 민족이 있다면 그 민족은 앞으로 기필코 세계사를 움직일 수 있는 힘을 일으키게 된다는 것을 우리는 생각해야 됩니다.

30-249
어려운 환경에 처할 적마다 희망을 품으신 하나님
복귀섭리역사를 두고 보면, 하나님은 지금까지 슬픈 역사를 엮어 왔습니다. 그 슬픈 역사라는 것은 죽음을 당하는 길이었다는 것입니다. 어느 시대든지 하나님의 뜻이 세워지는 곳에는 반드시 피를 흘리지 않으면 안 되었습니다. 그러지 않고는 하나님의 뜻이 세워지지 않았습니다. 다시 말하면 죽음의 길을 자초해 나오지 않으면 안 되었다는 것입니다.

그러한 죽음의 길을 걸어 나오면서 하나님은 어떠한 마음을 가졌느냐? 거기에서 해이되는 마음을 가진 것이 아니라 새로운 목적을 이루기 위한 조건을 세워 나왔다는 사실을 우리들은 알아야 되겠습니다.

아담 가정에서 아벨이 희생하는 자리에 나갔을 때 그것을 바라보시는 하나님은 하늘편이 희생당하면 그것으로서 끝나는 것이 아니라 그 희생한 것으로 말미암아 희생을 당한 인간편에 더더욱 가까이 서 가지고 원수세계와 직접 부딪칠 수 있고 직접 행동할 수 있는 동기의 내용으로 삼았던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아벨이 죽음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이 타락한 후손들을 가까이 접할 수 있는 동기로 삼았다는 사실을 알아야 합니다.

지금까지 하나님은 슬픔 가운데서 죽음의 고비를 당할 적마다 인간에게서 멀어져 간 것이 아니라 인간과 더불어 그 고비를 극복하고 소망의 나라를 창건할 한때를 바라보시며 투자해 나오셨다는 사실을 알아야 됩니다.

또한 하나님은 죽음의 길뿐만 아니라 노예생활을 피하지 못했습니다. 하나님은 원수세계에 자기의 판도를 넓혀 나오셨기에 언제나 원수로부터 농락당해 나왔습니다. 노예의 운명을 피하지 못했을 뿐만 아니라 감옥생활을 피하지 못했습니다. 더 나아가서는 종의 신세를 피하지 못했습니다. 다시 말하면 하나님이 지금까지 걸어온 길은 죽음길이요, 감옥 생활이요, 노예 생활이요, 종의 신세를 피하지 못한 서러운 길이었습니다.

이렇게 죽음길을 걸을 적마다 하나님이 추구했던 것이 무엇이냐 하면 죽음을 뛰어넘어 애국애족할 수 있는 한때와 그런 사람을 찾고자 했던 것입니다. 옥중생활의 서러움에 부딪힐 적마다 추구했던 것이 무엇이냐 하면 승리할 수 있는 강한 한 나라와 한 민족과 한 개체를 찾는 데 주력했다는 사실을 알아야 되겠습니다. 또한 노예와 같은 생활을 하는 입장에서도 모색했던 것이 뭐냐 하면 그 나라와 그 민족과 그 국토를 중심삼은 하나의 주권국가를 이루는 것이었습니다.

외적 환경에서 서러움을 당하면 당할수록 그 환경에 자기의 입장을 양보하는 것이 아니라 그 환경을 밀고 나가 내일의 희망찬 소망을 품고 희망찬 국가관, 희망찬 민족관을 가지고 부딪쳐 나온 것입니다. 종의 신세에 처하게 될 적마다 그 종의 신세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그와 같은 환경에 부딪치면 부딪칠수록 더더욱 소망을 가중시켜 나왔던 것입니다. 그런 길을 개척하지 못하고는 원수의 세계에서 복귀섭리를 추진시킬 수 없다는 사실을 우리들은 알아야 됩니다.

이런 관점에서 볼 때 하나님이 지금까지 걸어온 전체 역사노정은 사탄세계가 하나님 앞에 갖다 준 죽음길이요, 옥중생활이요, 노예생활이요, 종의 생활인 것입니다. 그 길을 가면서 낙망에 부딪쳤고 슬픔에 부딪쳤고 억울함과 분함에 부딪쳤지만 그 마음 가운데에서 항시 잊어버릴 수 없었던 것은 그 억울함보다도, 그 슬픔보다도, 그 고역보다도 나라에 대한 생각이었습니다. 그러한 환경에 부딪칠 때마다 소망의 그 나라로 언제 갈 것이냐? 소망의 나라에 같이 갈 수 있는 동지, 혹은 동포를 어떻게 가질 것이냐? 그 동포를 규합해서 하나의 나라를 세우고 주권을 갖추어 지금까지 원수의 입장에서 대해 나오던 원수 국가를 어떻게 정복하느냐 하는 것이었습니다.

이러한 내심적인 결의를 가지고 외적인 환경으로부터 가중되는 핍박의 고개를 넘어서 언제나 앞서가는 입장에 서지 않으면 안 되었습니다. 만일 그러지 않았더라면 지금까지 역사적인 모든 수난의 길을 참고 넘어온 섭리역사가 뜻이 없었을 것이라는 사실을 우리는 생각하지 않을 수 없는 것입니다.

오늘날 신앙의 길을 가는 우리 개체를 사탄세계는 환영하지 않고 있습니다. 그뿐만 아니라 하늘편에 속한 우리 앞길에는 하나님이 지금까지 걸어 나오셨던 개척의 노정과 마찬가지로 죽음의 길이 가중되어 나왔던 사실을 우리들은 알아야 됩니다. 또한 옥중 생활이 기다리고 있고, 노예 생활, 종의 생활이 우리를 기다리고 있다는 사실을 알아야 합니다. 이것은 뜻이 이루어질 한날을 찾아가는 사람들에게 있어서는 원수 국가로부터 받게 되는 불가피한 시련인 것을 여러분이 알아야 됩니다.

잃어버린 국가를 찾아서 복귀하고자 하는 애국심을 가진 충신이 있다 할진대 그가 가는 길 앞에는 죽음이 기다리고 있을 것이요, 감옥이 기다리고 있을 것이요, 노예 생활이 기다리고 있을 것이요, 종의 생활이 기다리고 있을 것입니다. 이러한 사실을 우리들은 확실히 알아야 되겠습니다.

지금까지 하나님 앞에 시대적 사명을 짊어지고 왔던 사람들이 그 사명을 위해 출발하기 전에 무엇이 기다렸느냐 하면 원수의 총칼이 있는 죽음길이 그들을 기다렸다는 것입니다. 혹은 감옥생활이 그들을 맞이할 준비를 하고 있었고, 노예와 같은 입장의 억울한 포로생활이 그들을 기다리고 있었고, 자기 권위와 입장을 상실한 종의 생활이 그들을 기다리고 있었다는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하늘편에 서서 뜻을 중심삼고 나왔던 수많은 사람들의 앞길에 그러한 운명이 기다리고 있었다는 사실을 우리들은 알아야 되는 것입니다.

30-251
개척자의 사명을 지고 홀로 싸우신 하나님
이러한 운명권에서 섭리해 나오신 하나님을 중심삼고 볼 때 하나님의 섭리는 사랑하는 자녀를 찾기 위한 섭리요, 사랑하는 종족을 세우기 위한 섭리요, 사랑하는 민족을 복귀하기 위한 섭리요, 사랑하는 하나의 국가를 창건하기 위한 섭리였습니다.

이런 섭리를 책임지고 추진하시는 중심인 하나님은 자신을 따르고 있는 사람들만 그런 입장에 세우려고 하신 것이 아니었습니다. 사랑하는 자녀들 앞에 죽음길이 오기 전에 먼저 그 죽음길을 타개해 주어야 할 책임을 갖고 있는 것이요, 그들 앞에 놓여진 감옥의 생활을 타개해 주어야 할 책임을 짊어지고 있는 것이요, 그들 앞에 놓여진 노예와 같은 고역의 생활을 타개해야 할 책임을 짊어지고 있는 것이요, 그들 앞에 놓여진 종의 입장을 타개해야 할 책임을 짊어지고 있는 것입니다. 이러한 행로를 개척해 놓지 않고는 죽음길을 피할 수 없는 것이요, 감옥생활을 피할 수 없는 것이요, 노예의 길, 종의 길을 피할 수 없다는 것을 우리는 알아야 되겠습니다.

어느 한때에 하늘의 소망을 이룰 수 있는 승리의 아들딸을 찾고 승리의 민족과 승리의 나라를 찾기 전까지 이런 운명을 직접 맞이해서 개척자의 사명을 지고 홀로 싸워 나와야 하는 입장에 계신 하나님인 것을 우리는 알아야 되겠습니다.

오늘날까지 인간들은 그와 같은 내용을 알고 하나님을 믿고 따라 나온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믿으면 복을 받고, 하나님을 따라 나가면 반드시 행복이 온다고 믿고 따라 나왔습니다. 그런 사람들 앞에 불행과 슬픔의 요건들이 겹겹이 쌓여 있는 것을 바라보시는 하나님은 그 시대의 책임자들이 당하는 것보다도 더더욱 슬픔을 당하고, 더더욱 고통을 느끼며, 그들이 당하는 죽음길보다도 더더욱 힘든 죽음길을 거쳐 나오셨다는 것을 우리는 잊어서는 안 됩니다. 그렇게 해서 죽음길을 피하게 하고, 감옥길을 피하게 하고, 노예의 길을 피하게 하고, 종의 길을 피하게 한 것입니다. 이것이 지금까지 하나님의 내적인 슬픔인 것을 우리들은 알아야 하겠습니다.

오늘날 복귀의 길을 가고 있는 우리들 자신을 두고 볼 때, 언제 나 자신이 죽음길이라는 필연적인 운명의 길을 가기 위하여 결심한 때가 있었으며, 언제 자신이 감옥생활과 같은 생애의 노정을 가더라도 응당히 이 길을 가야 되겠다고 스스로 그런 자세를 가져 보았으며, 자기 일생 동안 노예생활을 하고 자기 일생뿐만 아니라 자기 종족이 몇 대를 거쳐서 노예 생활을 하더라도 이 길을 가지 않으면 안 된다는 것을 느껴 보았으며, 종의 생활로 몇 세기의 과정을 거쳐 가더라도 응당히 가야 되겠다는 그런 여러분이 되어 있느냐? 하나님을 믿는 추종자들 가운데 그런 사람들이 있었느냐 하면 그런 사람은 한 사람도 없었다는 것입니다.

지금까지의 종교는 믿으면 반드시 인간이 해방받을 것을 약속하였고 인간에게 행복을 가져다 줄 것을 약속했기 때문에 사람들은 믿는 그날부터 행복을 고대했고 자유와 해방을 고대하는 입장에서만 믿고 나왔지 시련과 고통과 죽음의 교차로에서 하나님을 믿고 추구해 나온 종교가 없었던 것입니다. 이런 것을 생각할 때, 하나님은 이제까지의 종교의 이면에서 그런 기반을 닦을 때까지 수많은 희생으로써 탕감의 대가를 치르지 않으면 안 될 불가피한 입장에 처해 있었던 사실을 알게 됩니다. 이 탕감의 내용을 누가 책임지겠습니까? 하나님이 책임지지 않을 수 없었다는 사실을 우리는 알아야 됩니다.

그렇기 때문에 수많은 개인, 수많은 가정, 수많은 종족, 수많은 민족 전체가 하늘편에 서서 일치단결하여 죽음의 길을 기꺼이 맞을 수 있어야 합니다. 그러한 한날을 맞지 않으면 민족의 해방을 가져 올 수 없습니다. 또 감옥과 같은 그런 환경을 도피하기 위해 노력하는 사람들 앞에는 국가가 찾아질 수 없는 것입니다. 노예의 길이나 감옥의 길, 혹은 종의 길이 응당히 감수하면서 가야 할 탕감의 노정이라는 것을 알고 자진해서 가야 합니다.

만일에 우리가 탕감해야 할 그 책임을 짊어지지 않게 되면 하나님이 재차 탕감시켜야 한다는 것을 알아 가지고 효(孝)하고 충(忠)해야 할 입장임을 알아야 되겠습니다. 이러한 문제를 기쁨으로 해결할 수 있는 개인, 가정, 종족, 민족, 국가가 이 땅 위에 나오지 않고는 하나님께서 복귀하고자 하시는 국가와 민족을 찾을 수 없다는 것입니다.

이스라엘 민족은 4천년 역사를 통하여 메시아 사상을 중심삼고 기나긴 수난의 역사를 참고 견뎌 나왔습니다. 그렇지만 그들 앞에 메시아가 온 그날부터 세계를 대신하여, 세계를 구하기 위하여 더 큰 수난의 길을 걸어야 한다는 사실을 깨닫지 못하였기 때문에 오신 메시아를 죽음길로 몰아냈다는 사실을 우리는 알아야 되겠습니다.

30-253
우리가 감당해야 할 책임
이렇듯 복귀섭리는 기필코 이런 역사과정을 거쳐온다는 사실을 미루어 볼 때 오늘날 우리 통일교회가 가야 할 길도 이러한 운명길을 피할 수 없다는 사실을 알아야 되겠습니다. 오늘날 우리가 찾아가는 길은 나라를 찾기 위해 가는 길이요, 민족을 찾기 위해 가는 길입니다. 이것을 찾아 가지고 승리한 하늘편의 한 주권 국가를 성립시키지 않고는 하나님께서 이 땅 위에 국가의 관념을 중심삼은 판도를 조성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지금까지 하나님은 기나긴 6천년의 역사과정을 거쳐오면서 개척자의 사명을 가지고 죽음의 대가를 치러서 오늘날 비로소 횡적인 무대에 하나님과 심정이 통할 수 있는 길을 만들어 나왔습니다. 이러한 내용을 우리 자신이 알고 그 나라와 그 백성을 찾기 위해서는 죽음길도 자처해서 가겠다는 신념을 갖지 않으면 안 되겠습니다. 감옥 생활도 개의치 않고, 노예 생활도 개의치 않고, 종의 생활도 개의치 않아야 합니다.

이것이 한때, 내 일생에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수십 대의 후손에게 연결된다 하더라도 응당히 가지 않으면 안 되는 나의 길이요, 우리의 길이라는 것을 각오할 수 있어야 합니다. 그런 개인, 그런 가정, 그런 종족, 그런 민족의 형태를 갖추지 않고는 새로운 국가를 세울 수 없다는 사실을 알아야 되겠습니다. 그러지 않고는 국가가 가야 할 죽음길을 타개할 수 없는 것이요, 감옥생활의 운명을 벗어날 수 없는 것이요, 개인 해방을 추구할 수 없는 것이요, 노예생활과 같은 고역도 피하지 못할 것이요, 종의 생활도 피하지 못한다는 것을 우리들은 알아야 하는 것입니다.

이러한 점에서 볼 때 우리가 감당해야 할 책임은 무엇이냐? 하나님은 내적인 책임을 짊어지고 우리를 희생의 자리에 내세웠습니다. 그러기에 우리들은 지금까지 하나님 자신이 자처해서 당해 나오시던 그 모든 수난의 길, 다시 말하면 죽음의 길과 감옥의 길과 혹은 노예의 길과 종의 길을 이 땅 위에서 상속받아야 합니다. 그럴 수 있는 개인이 필요하고, 가정이 필요하고, 종족이 필요하고, 민족이 필요하다는 것입니다.

이 민족이 그러한 것을 느끼고 하나의 국가를 찾기 위하여 민족 전체가 결속해 가지고 죽음의 길도 개의치 않고, 감옥의 길도 개의치 않고, 노예의 길도 개의치 않고, 종이 되는 길도 개의치 않고 총진군할 수 있는 그날이 오게 될 때 거기에서 비로소 국가가 죽음길에서 해방될 수 있는 것이요, 감옥의 길에서 해방될 수 있는 것이요, 노예의 길에서 해방될 수 있는 것이요, 종의 길에서도 해방될 수 있다는 사실을 우리들은 알아야 되겠습니다.

지금까지 기독교의 역사가 그러했듯이 이 시대에 우리가 그러한 결실을 맺기 위해서는 역사를 대신해서 죽음길을 통하여 그 열매를 찾아야 된다는 것입니다. 감옥생활을 통하여서 그 열매를 찾아야 된다는 것입니다. 또한 노예생활을 통하여서 지금까지 사탄편으로 인해서 맺혔던 한을 복귀해야 된다는 것입니다. 그 다음에는 선한 편이 지금까지 종의 입장을 피치 못하고 나왔던 억울함을 전부다 탕감복귀해야 된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일을 하지 않으려고 도피하는 무리가 되어 가지고는 하나님의 나라와 하나님의 뜻을 이룰 수 없다는 사실을 우리들은 알아야 되는 것입니다.

아담 가정에서부터 노아 가정, 아브라함 가정을 거쳐 모세와 예수님 시대에 이르기까지의 역사가 탕감복귀역사였고, 그 이후부터 지금까지 2천년의 역사과정에서 선지선열들을 통하여 나오는 기독교의 역사도 탕감복귀역사였습니다. 그들은 죽음의 대가를 치른 자리에서도 낙망과 절망을 느낀 것이 아니라 죽임을 당하면서도 내일의 국가를 위하는 마음과 내일의 국민을 위하는 마음과 내일의 주권을 사랑하는 마음을 가졌다는 것입니다.

30-255
보다 큰 목적을 이루기 위해
그러한 마음이 앞서 가지고 죽음길을 넘어간 그 사람들은 틀림없이 아버지의 나라에 가 가지고 하늘편의 중심이 될 수 있을 것이로되 자기 개인이 구원받기 위하여, 또는 자기 가족을 구원해 주기 위하여 죽어간 희생자나 순교자는 개인권내나 가정권내밖에 머물지 못한다는 사실을 알아야 되겠습니다.

하나님의 목적은 어디까지나 개인을 찾는 것보다도 하나님의 나라를 찾기 위한 것이요, 개인을 사랑하는 것보다도 하늘이 종족을 사랑하기 위한 것입니다. 그것을 위해 하나님은 지금까지 역사를 소모시키면서 나오셨던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 나라를 위하고 그 백성을 위하여 온갖 충성을 다하는 입장에서 하늘의 뜻을 대하는 사람을 하나님은 지금까지 고대해 나오셨던 것입니다. 자기 개인의 구원과 가정의 행복을 위한 목적으로 하나님 앞에 나서는 사람들은 도리어 하나님 앞에 이중적인 십자가, 이중적인 고역, 이중적인 슬픔을 가져다 주는 입장에 서게 된다는 사실을 우리는 생각해야 되겠습니다.

이러한 관점에서 볼 때, 지금까지의 종교를 믿었던 사람들은 내가 구원받고 내 일족이 잘되기 위해서 믿었던 것입니다. 야곱을 중심삼고 보더라도 하나님이 그에게 축복을 한 것은 이스라엘의 선민권을 만들기 위해서 축복하였지만 그 보다도 자기 족속을 위한 축복으로 알았습니다. 다시 말하면 아브라함의 하나님, 이삭의 하나님, 야곱의 하나님이라 하여 하나님을 자기 종족을 중심삼고 축복해 주는 분으로 생각했던 것을 우리는 성서를 통해서 알 수 있는 것입니다.

이렇듯 자기의 민족보다도 자기의 대를 직접 이을 수 있는 자를 더 사랑했다는 사실을 우리가 생각하게 될 때, 나라를 사랑하는 것보다도 자기의 족속을 사랑하고, 나라를 사랑하는 것보다도 개인을 사랑하는 민족에게는 민족적인 수난의 길이 남아지게 되는 것이요, 국가적인 수난의 길도 남아지게 되는 것입니다.

이스라엘이 실패의 역사를 거듭한 것은 그 종족이 단결하지 않아서 실패한 것이 아닙니다. 그 종족에게는 민족을 중심삼고 하나로 단결해야 할 과제가 남아 있었던 것입니다. 뜻을 중심삼고 민족이 하나되어야 할 과제가 남아 있는데, 종족을 중심삼고 하나된 것으로써 민족의 복을 받겠다고 하며 나서게 되면 민족을 중심삼고 넘어야 할 그 기준이 도리어 장벽이 되고, 시련과 고통의 원인이 될 수 밖에 없었다는 사실입니다. 다시 말하면 탕감시켜야 할 조건이 이들 앞에 남아 있기 때문에 이 탕감조건을 세우기 전에는 민족을 중심삼은 고개를 넘지 못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민족을 사랑하는 마음이 없어 가지고는 안 된다는 것을 알아야 되겠습니다.

민족을 중심삼고 고개를 넘었다고 하더라도 민족보다도 국가를 더 사랑하는 마음이 없어 가지고는 국가의 기준을 넘을 수 없습니다. 국가를 사랑하는 마음보다도 세계를 사랑하는 마음이 더 강하지 않고는 세계의 주도권을 가질 수 없습니다. 세계의 주도권을 갖기 위해서는 국가보다 세계를 더 사랑했다는 공적인 터전을 쌓아서 그것을 인정받아 주체적 국가의 자리를 차지해야 합니다. 그렇게 되기 전까지는 세계적인 탕감의 노정이 남아 있다는 것을 알아야 됩니다.

지금까지 종교를 믿고 나온 목적은 개인이 복을 받기 위해서였습니다. 자기 일족이 복을 받기 위해서였습니다. 자기 종족이면 종족, 문중이면 문중이 복을 받기 위해서 종교를 믿었습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본래의 뜻과는 너무도 배치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민족을 찾는 것은 국가를 위한 것이요, 종족을 찾는 것은 민족을 위한 것이요, 가정을 찾는 것은 종족을 위한 것이요, 개인을 찾는 것은 가정을 위한 것입니다. 더 큰 목적을 앞에 놓고 그것을 이루기 위해 하나님은 역사적 과정을 통하여 섭리의 판도를 넓혀 나왔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가나안을 향하여 복귀노정을 걷던 이스라엘 민족이 생각해야 했던 것은 민족이 당하는 수난의 길보다도 앞으로 다가올 국가가 당해야 할 수난의 길을 염려해야 했던 것입니다. 그리하여 민족이 당하고 있는 수난을 응당히 당해야 할 것으로 감수했더라면 민족의 수난의 길을 넘어서 국가를 중심삼아 가지고 원수와 부딪쳐 싸워 국가적인 수난을 해결 지을 수 있었을 것입니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그러지 못했기에 원수를 보지도 못한 채 광야에서 쓰러져 간 것을 우리들은 알아야 되겠습니다.

30-257
고차적인 목적관에 일치될 수 있어야
복귀섭리역사라는 것이 무엇이냐 하면 원수를 갚는 것입니다. 지금까지 원수한테 죽임을 당하고, 감옥생활을 하고, 노예생활, 종의 생활을 하는, 그런 억울한 생활을 한 것이 원수 때문이었다는 것입니다. 그러기에 그 원수를 갚아야 되겠다는 것입니다. 원수를 갚기 위해서는 원수를 굴복시켜야 합니다. 그러지 않고는 원수를 갚을 수 없다는 사실을 알아야 됩니다.

이러한 점에서 오늘날 우리 한국을 보면 한국은 원수와 원수가 대결하는 입장에 놓여 있습니다. 종교를 중심삼고 보더라도 종교와 종교가 대결하는 입장에 놓여 있습니다. 기성교회는 지금까지 자기 교파를 위주해 나왔고, 신자들은 자기 개인의 행복을 신앙의 목표로 세워 나왔으며 자기 가정이 복받기 위해서 믿고 나왔습니다. 그러나 우리 통일교회는 개인을 구원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나라를 구하기 위해서 믿는 것입니다. 자기 가정이 복받기 위해서 믿는 것이 아니라 나라를 복받게 하기 위해서 믿는 것입니다. 자기 나라만 구하기 위해서 믿는 것이 아니라 세계를 구하기 위해서 믿는 것입니다. 이런 고차적인 이념, 통일된 이념을 갖고 나오는 것이 통일교회를 믿는 신앙자의 입장인 것을 확실히 알아야 되겠습니다.

우리 자신은 내가 이 뜻길을 감으로 말미암아 나 자신이 복받는다는 관념을 갖기에 앞서 내가 애국애족하면 나라가 복받는 것이요, 비참한 이 민족이 해방의 날을 맞는 다는 마음을 가져야 합니다. 그러면 이 나라가 해방의 날을 맞이하는 것이요, 이 민족이 해방의 날을 맞이할 것입니다. 우리 앞에는 죽음의 길을 타개해야 할 운명이 가로놓여 있습니다. 이 죽음의 길을 타개할 수 있는 길은 자기를 사랑하고 자기의 종족을 사랑하고 자기의 민족을 사랑하는 기준을 넘어 국가를 사랑하는 기준에 서야 합니다. 그 길만이 국가의 운명을 극복할 수 있는 길인 것입니다. 그러니 우리는 전체가 하나의 목적관을 중심삼고 철두철미하게 일치단결해야 합니다.

여러분이 무슨 일을 할 때에도 `내가 이렇게 함으로 말미암아 어떠한 축복을 받는다. 혹은 내가 이렇게 함으로 말미암아 지역장에서 지구장이 될수 있다’ 또는 `선생님께 인정을 받을 수 있다’ 고 하는 생각으로 하면 안 됩니다. 그것은 전부가 자기를 위한 입장이라는 것을 알아야 됩니다. `내가 이렇게 하는 것은 나라를 구하고 나라가 축복받게 하기 위한 것이요, 나라가 축복받게 하는 것은 세계를 해방시키기 위한 것이요, 세계를 해방시키고자 하는 것은 하나님을 해방시켜 드리기 위한 것이다’ 라고 해야 합니다. 이런 고차적인 목적관에 일치될 수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우리 앞에 이러한 큰 목적이 놓여 있느니만큼 거기에 비례하여 수난의 길이 기다리고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이러한 큰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우리 앞에 놓여 있는 역사시대에 없었던 죽음의 길을 넘어야 한다는 것을 알아야 되겠습니다. 감옥 생활이 우리를 기다리고 있다는 것을 알아야 되겠습니다. 노예의 쇠사슬이 우리를 기다리고 있는 것을 알아야 되겠습니다. 종의 멍에가 우리를 기다리고 있다는 것을 알아야 되겠습니다. 이러한 길을 우리 자신이 응당히 가야 되겠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내 필생의 과업이요, 타고난 생애의 목적으로 알아야 되겠습니다.

만약 그 길을 다 가지 못하여 그날을 맞지 못하고 그때를 보지 못하고 죽더라도, 마음으로는 소망의 천국과 소망의 백성을 그리워하고 사랑하는 마음을 가져야 합니다. 이 민족이 가야 할 최후의 종착점이 아버지를 주권자로 세운 국가라는 유언을 하고 갈 수 있는 여러분이 되어야 하겠습니다. 그러한 통일의 무리가 되지 않고는 이 엄청난 복귀섭리의 뜻을 직접 계승하는 자리에 설 수 없다는 사실을 알아야 되겠습니다.

이스라엘 민족은 하나님이 그들을 선민이라고 보호해 준 것에 대하여 고맙게 생각해야 했습니다. 광야의 노정을 출발할 때 바로의 수중에서 해방시켜 준 것에 대하여 고맙게 생각하고 그 목적을 알아야 했습니다. 하나님이 그들을 해방시켜 준 목적은 이스라엘 나라를 창건하기 위해서였습니다. 이스라엘 나라를 해방하기 위해서였습니다. 여러분은 그것을 알아야 됩니다. 이스라엘 민족을 해방시키기 위해서가 아니요, 이스라엘 민족을 창건하기 위해서가 아니었습니다. 그것은 어디까지나 이스라엘 나라를 창건하게 하기 위한 것이요, 이스라엘 나라를 해방시키기 위한 것이었던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그 목적을 위해 그들을 해방시키셨고 그들을 목적지까지 이끄시는 책임을 짊어지셨던 것입니다. 그렇지만 그 민족은 소망하던 본향 땅 가나안을 찾아가는 도중에서 그 본향에 대한 흠모심이 희박하게 되었습니다.

30-259
큰 목적에 비례한 수난의 길
가중되는 핍박과 어려움이 극심할지라도 그들이 소망하였던 의지가 꺾일 것이 아니라 도리어 자극된 마음을 가지고 부딪쳐 오는 시련과 고통을 극복할 수 있는 원동력으로 삼았더라면 이스라엘 민족은 수난의 길을 피할 수 있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그러한 자리에서 국가를 염려하는 마음보다 현재의 자기 입장과 자기 가정을 염려하고 현재 이스라엘 족속이 처해 있는 처참한 환경을 염려하는 마음이 앞섰기 때문에 나라를 찾기 위한 목적이 사라지고 말았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들을 책임지고 수고하셨던 하나님께서는 거기에서 떠나게 되었던 것입니다. 그들과 관계를 맺으신 하나님께서 떠나게 되니 사탄이 여기에 개재하게 되었고, 사탄이 그 민족을 지배하지 않을 수 없게 된 것입니다. 그러기에 하나님은 그 민족이 광야에 쓰러져 망하기 전에 먼저 쳐서 그 후손이라도 재차 갈 수 있는 길을 남기기 위해서 60만 대중을 광야에서 독수리 밥이 되게 하셨던 것입니다. 그렇게 할 수밖에 없었던 하늘의 슬픔을 우리들은 알아야 되겠습니다.

오늘날 우리 통일교회가 현재 처해 있는 환경을 바라볼 때, 우리들은 여기에 머물러서는 안 되겠습니다. 이것은 내일의 시련과 고통을 극복하게 하기 위한 하나의 자극적인 환경이요, 내일을 준비하기 위한 훈련장이라는 것을 명심해야 되겠습니다.

그러한 관점에서 볼 때 1960년대는 개인과 가정을 중심삼고 나오던 탕감기간이었습니다. 개인을 탕감하지 않고는 나라를 찾을 수 없고, 가정을 탕감시키지 않고는 나라를 찾을 수 없는 것입니다. 그러니 1960년대는 개인과 가정을 위주한 탕감시대였습니다. 이러한 탕감조건이 성립되지 않고는 나라를 찾을 수 있는 소망을 하나님이 주실 수 없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그러면 1960년대와 1970년대가 다른 점이 무엇이냐? 1960년대는 개인과 가정을 중심삼은 탕감노정을 청산짓는 기간이었습니다. 그러나 이제 1970년대에는 민족과 국가를 중심삼은 탕감기간을 설정하지 않으면 안 된다는 사실을 알아야 되겠습니다. 그러므로 개인과 가정은 민족을 위해서 희생해야 되고, 씨족과 종족도 민족을 위해서 희생해야 됩니다. 이런 관이 여러분의 생활 전체를 지배하는 내적인 기반으로 여러분의 두뇌 속에 담겨지지 않고는 금후에 승리의 노정을 남길 수 없다는 사실을 알아야 되겠습니다.

이런 관점에서 볼 때, 우리는 어느 누구보다도 이 나라 이 민족을 더 사랑하는 자리에 서야 됩니다. 사탄보다 더 이 나라 이 민족을 사랑하는 입장에 서지 않으면 안 된다는 것입니다. 삼천만 민족을 사랑하는 마음이 현주권자인 위정자들보다도 앞서야 되겠습니다. 우리의 주권을 보호하는 데 있어서 그 누구보다도 앞서야 되겠습니다.

우리가 거쳐 나가야 할 민족적인 해방, 국가적인 해방, 세계적인 해방을 하나님께서는 고대하고 계시는 것입니다. 그러기에 민족을 사랑하는 것은 나라를 찾기 위한 것이요, 나라를 사랑하는 것은 세계를 찾기 위한 것입니다. 이런 입장에 서서 하나님께서는 지금까지 슬픔을 안고 나오셨다는 것을 알아야 되겠습니다.

그러면 하늘편의 내적 서러움이 무엇이냐? 하나님이 개인을 찾아 나서게 될 때 그 개인 앞에 가정의 십자가가 있다는 것을 개인은 몰랐습니다. 가정을 찾아 세우기 전에는 개인이 당해야 할 탕감노정을 먼저 거쳐야 하는 것입니다. 개인이 탕감노정을 거쳤다 할지라도 개인 자체가 승리한 기준을 가지고는 가정을 세우지 못하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께서는 개인적인 탕감노정을 세워 나오실 때 반드시 가정적인 탕감노정을 준비해 나오시는 것입니다. 그렇지만 가정적인 탕감노정을 준비하시는 내적 슬픔을 이 땅 위의 그 누구에게도 통고하실 수 없다는 사실을 알아야 되겠습니다.

또한 가정을 찾아 세우게 되면 그 가정을 중심삼고 종족적인 환경의 터전을 마련하기 위한 수난의 길이 남아 있다는 것을 알아야 되겠습니다. 그렇지만 종족이면 종족, 가정이면 가정 그 자체가 이러한 내적 사정을 모른다는 것입니다. 이런 사람들을 해방시키기 위하여 하나님께서는 가중된 십자가를 짊어지고 이들의 갈 길을 준비해 나오셨다는 것을 확실히 알아야 되는 것입니다.

30-261
승리의 귀결점
야곱 일파가 자리를 잡기 위해서는 외적인 민족의 수난의 길을 가야 했습니다. 아브라함이 하늘 앞에 제물을 바치는 데에 실수하지 않았더라면 이스라엘 땅에서 그 수난의 길을 갈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아브라함이 실수함으로 말미암아 원수의 땅에 가서 그 길을 거쳐야 했던 것입니다. 그렇지만 야곱이나 요셉이 애급에서 감옥생활, 노예생활, 종의 생활을 하면서 죽음의 교차로에 부딪칠 적마다 하나님께서는 번번이 책임을 지고 해방시켜 주셨습니다.

하나님께서 요셉을 해방시켜 주신 것은 요셉 개인만을 구하기 위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요셉을 죽음길에서 구원해 주실 때 요셉 일파를 구할 수 있는 기반을 준비하고 계셨다는 사실을 알아야 됩니다. 그렇기 때문에 요셉의 열두 형제를 중심삼은 일가족이 원수의 국가 애급에서 발을 붙일 수 있는 기반이 조성되었던 것입니다.

이렇듯 하나님의 섭리의 뜻을 대해 나오는 개인이나 가정이 시련과 고통을 당하는 것도 비참하고 불쌍하지만, 그것을 준비하시고 이끄시는 하나님께서는 내적인 입장에서 더 가중된 십자가를 짊어지고 그들보다 더 비참하고 불쌍한 자리에 계신다는 것을 알아야 됩니다.

통일교회의 선생님에게 있어서도 마찬가지입니다. 내 개체가 탕감할 수 있는 길을 잘 가게 하기 위해서 하나님께서는 내 가정이 가야 할 탕감의 노정을 준비하고 있는 것을 나는 알고 있습니다. 내 개체가 완성할 수 있는 탕감의 한계점에 이르게 될 때 하나님께서는 가정을 복귀할 수 있는 안팎의 여건을 갖추어 가지고 내가 가는 길에 맞게 협조해 주신다는 것도 알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어려운 탕감조건을 거친 다음 가정을 형성하는 데 있어서 여러분이 상상할 수 없는 환경을, 그것도 하나가 아니라 셋 이상을 준비해 주신 것을 나는 직접 경험하고 목격했습니다.

개인이 극한 환경에 부딪칠수록 망하는 것이 아닙니다. 종의 자리, 노예의 자리, 감옥의 자리, 죽음의 교차로까지 가더라도 그 자리에서 낙망하지 않고, 자기를 위하여 염려하지 않고, 그 나라와 그 뜻을 위해서 염려하게 될 때 반드시 승리할 수 있는 터전이 마련되는 것입니다. 개인이 생명을 각오하고 나서는 자리에서 가정적 출발이 형성된다는 사실을 나는 알고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종의 길을 거쳐야 되는 것입니다. 노예의 길을 거쳐야 되는 것입니다. 감옥생활을 거쳐야 되는 것입니다. 십자가의 죽음을 각오해야 되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아바 아버지여, 할 수만 있으면 이 잔을 내게서 피하게 하시옵소서. 그러나 내 뜻대로 마시옵고 아버지의 뜻대로 하옵소서’ 하신 것과 같이 죽음을 걸고 담판을 지을 수 있는 교차로를 거쳐야 된다는 것입니다. 그런 길에서 뜻을 위하여 죽게 될 때는 절대 망하지 않습니다. 그 자리가 개인이 해방될 수 있는 자리가 되는 것입니다. 그뿐만 아니라 개인이 수난을 당한 대가의 보응으로 가정이 해방을 맞이할 수 있는 터전을 하나님께서 부여해 주신다는 사실을 나는 알고 있습니다.

가정을 중심삼고 가는 길에는 가정이 거쳐야 할 수난길이 남아 있습니다. 그러므로 여러분에게 안팎으로 부딪쳐 오는 시련과 고통이 가중되더라도 쓰러지거나 낙망하지 말아야 합니다. 자기와 가까운 사람이 원수의 입장에서 칼을 들고 나서더라도 거기에 낙망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절망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그 가정을 이끌고 종의 신세를 달게 받고, 노예의 신세를 달게 받고, 죽음길도 달게 받을 수 있는 터전을 마련하게 되면 하나님께서는 그 종족이 갈 수 있는 해방의 터전을 마련해 주시는 것입니다.

시련이 닥치고 가중된 십자가의 죽음길에 부딪친다 하더라도 낙망하고 탄식할 것이 아니라 어떻게 뜻을 중심삼고 소화시킬 것이냐 하는 것을 생각해야 합니다. 이것이 승리의 귀결점인 것을 여러분이 알아야 됩니다. (녹음이 잠시 끊김)

30-263
복귀의 길과 원리의 길
공산세계는 타락의 경로대로 민주세계를 적화하고 있습니다. 소련이 중공을 끌고 있고, 중공을 중심삼고 북한이 하나되어 있습니다. 그래 가지고 하늘편의 아담 국가에 참부모의 내용을 가지고 거짓 흉내를 내고 있다는 거예요. 그래서 지금 북한에서 김일성을 아버지라 부르고 있는 것입니다. 중공은 무엇을 갖고 있느냐? 사람을 갖고 있습니다. 8억에 가까운 사람을 갖고 있는 것입니다. 물질을 갖고 있는 부자가 아니라 사람을 갖고 있는 부자입니다. 또 소련을 무엇을 갖고 있느냐? 현대의 물질문명을 갖고 있습니다.

그러면 중공과 소련 중 어느 나라가 북한에 더 가까우냐? 중공이 더 가깝습니다. 남한을 침범한 것은 어느 나라냐? 아담 해와가 천사장에 의해 타락한 거와 마찬가지로 사탄권을 대표한 아담 해와의 입장에 있는 북한과 중공이 합작하여 소련의 후원을 받아 가지고 남한에 공세를 폈던 것입니다. 이것이 사탄편 삼위기대 국가의 형태입니다.

여기에 맞서려면 한국을 중심삼고 아시아에 반공전선을 만들어야 됩니다. 이런 사명을 우리가 감당해야 되기 때문에 승리적 통일전선이라는 말이 나오게 된 것입니다. 이것을 알고 교파적인 면, 국가적인 면, 세계적인 면에 있어서 아벨적인 책임을 감당해야 됩니다. 그렇게 하기 위해서 우리는 어떻게 해야 되느냐? 그런 신념을 중심삼고 국가를 앞세워 세계 앞에 신뢰를 받아야 하고 세계의 생활감정과 국가감정을 바로잡아야 됩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나라가 문제가 되기 때문에 나라에 대한 직접적인 문제를 해결해 나가야 됩니다. 다시 말하면 애국애족해야 된다는 것입니다.

그 다음에는 우리가 기성교회를 사랑해야 됩니다. 기성교회 목사들보다 우리가 더 사랑해야 된다는 것입니다. 이것을 한 시점에 갖고 나서느냐 못 나서느냐 하는 문제가 세계사적인 문제를 청산짓느냐 창산짓지 못하느냐 하는 문제를 좌우한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이것이 현재 우리가 처해 있는 입장입니다.

지금까지 선생님은 여러분을 이끌고 책임진 입장에 있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선생님은 여러분이 가정적인 탕감노정을 청산하기 전에 종족적인 시련 고통을 해방하는 책임을 져야 됩니다. 여러분보다 한 단계 한 시대를 앞서서 가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가르쳐 줄 수 없는 것입니다. 복귀의 노정은 가르쳐 주고 갈 수 없는 것입니다. 복귀되지 않고는 가르쳐 줄 수 없는 운명이기 때문에 타락한 장본인이 복귀되지 않고는 그것을 가르쳐 줄 수 없는 것입니다. 원리의 길은 밟아가는 길이요, 복귀의 길은 찾아가는 길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원리적인 측면에 기반을 닦아 놓지 못하면 원리세계의 내용을 전부다 제시할 수 없는 것입니다. 지금까지 하나님께서는 이것을 가려 나오셨다는 사실을 여러분이 알아야 되겠습니다.

이런 것을 생각할 때 6천년이 지난 오늘날까지 개인복귀섭리도 완결짓지 못하신 하나님이 얼마나 불쌍합니까? 하나님께서 개인을 찾고 계시지만 그 감정은 나라와 세계를 찾기 위한 심정권내로 뒤넘이치고 있다는 것을 우리는 알아야 합니다. 그런 입장에서 하나님께서는 한 사람을 찾아 세우기 위해 6천년 동안 섭리해 나오신 것입니다.

6천년 동안 한 아들을 찾아 세우기 위해 애타게 부르시는 아버지의 내적 슬픔, 하늘편의 내적 슬픔은 우리로서는 상상할 수도 없는 고충인 것입니다. 우리 자신이 희생해서 그런 아들이 될 수 있다면 천만번이라도 희생하고 싶은 마음을 가져야 됩니다. 감옥생활이 문제가 아니고, 노예생활이 문제가 아니고, 종살이가 문제가 아닙니다. 그런 고생을 해야 해결될 수 있다면 우리는 만사를 제쳐 놓고 자처하고 나설 수 있어야 합니다. 그러나, 그러고 싶어도 그럴 수 없었던 하나님이 얼마나 슬펐겠는가를 알아야 됩니다.

이런 것을 생각하면서 현시점에서 1970년대를 맞는 우리들은 재각성해야 되겠습니다. 마음을 굳게 다지고 `우리에게는 원수가 없다. 미운 것이 없다. 전부다 좋은 것뿐이다’ 라고 생각해야 합니다. 그러면 우리 앞에는 원수가 없고 슬픔이 없어지는 것입니다. 슬픔 그 자체가 행복인 것입니다. 왜? 내 개인적인 슬픔이 극에 달하여 죽음의 교차로에 나서게 되더라도 그것을 극복하면 가정적인 희망의 문이 열리기 때문입니다. 마찬가지로 우리 통일교단에 교단적인 슬픔이 극하더라도 거기서 죽지 않고 넘게 될 때는 민족적인 문이 열리게 되는 것입니다. 먼저 이것을 알아둬야 됩니다.

우리가 부딪치는 슬픔은 무엇이냐? 행복입니다, 행복. 슬픔을 느끼면 느낄수록 행복의 순간이 가까이 다가오고 있다는 사실을 알아야 합니다. 행복과 불행 가운데 하나는 꺾여 나가고 하나는 성장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하늘편을 위해서 가야 합니다. 하늘편의 슬픔을 극복시켜야 할 입장에 있으니 슬픔을 슬픔으로 남겨서는 안 됩니다. 소망과 희망과 행복의 열매로서 그 자리를 극복하고 소화시켜야 됩니다. 우리가 이런 내적 외적 준비를 다 갖추게 될 때 세계는 우리 앞에 완전히 굴복하는 것입니다. 이런 민족이 되어 국가를 형성하게 될 때 세계는 그 국가 앞에 완전히 굴복한다는 것입니다.

30-265
인간을 해방시켜 주기 위해 절규하시는 하나님
오늘날 세계를 주름잡고 있는 국가는 미국입니다. 선생님이 미국의 50개 주를 순방하면서 하나님께서 잘 준비해 놓으셨다는 것을 느꼈습니다. 지금부터 300여년 전 그 나라를 지배했던 인디안들이 지금까지 지배하고 있다면 어떻게 되었겠습니까?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퓨리턴들을 통해 기독교사상을 중심삼고 자유와 평등이 있는 거대한 부국을 만들었습니다. 이제 어느 한때가 되면 하나님께서는 미국이 자국을 위하는 것보다 가인적인 국가 세계를 위하여 공헌할 수 있는 한 때를 만드실 것입니다. 반드시 그럴 수 있는 때가 올 것입니다. 그러니 미국을 순방하는 이 사나이의 책임이 크다는 것입니다.

백악관 앞에서 선생님이 기도할 때도 그런 내용을 가지고 기도했습니다. 미국을 위해 기도했습니다. 선생님은 그 길을 위해 달려가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이 길을 피해 가더라도, 내가 영어의 신세가 되더라도 가야 하는 것입니다. 우리 인간을 해방시켜 주기 위해 절규하고 있는 하나님의 아픔을 인간의 심정에 연결시키시려니 사람을 찾고 있는 것입니다.

선생님이 여러분을 다시 내보내는 것은 국가를 위하는 길이요, 민족을 위하는 길인 것을 알아야 되겠습니다. 아무리 가혹한 길이 자신에게 있다 하더라도 그것은 응당 천륜에 의한 우리 생애의 목적이라 생각하고 가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런 길을 본분의 길로 맞아야 합니다. 그렇지만 우리는 옛날 사람들과는 다른 권내에 있지 않느냐? 역사상에 없었던 하나의 종족 관념을 초월하고 민족 관념을 초월해서 하나의 혈족을 편성하는 기반을 세계적으로 갖고 있지 않느냐? 승리는 이미 우리 앞에 있는 것입니다.

승리를 좌우할 수 있는 칼이 우리에게 들려졌습니다. 그 들려진 칼을 무엇을 위하여 빼야 되느냐? 민족을 위하여, 나라를 위하여, 세계를 위하여 빼야 되는 것입니다. 자기 욕심을 갖고 움직이면 망하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신념을 갖고 슬픈 하늘편에 서서 슬픈 눈물을 흘려야 됩니다. 자기 개인의 해방을 위해서 슬퍼할 것이 아니라, 민족과 국가와 세계를 해방시키기 위해서 슬퍼해야 합니다.

만약 이스라엘 민족이 자기 개체를 위해 슬퍼했다면 회개해야 합니다. 예루살렘 성으로 돌아오려면 역사적인 죄를 회개해야 되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죽인 죄를 회개해야 되는 것입니다. 그 다음에 책임하지 못한 자신들을 하나님이 긍휼히 보아 주시기를 바라야 되는 것입니다. 가나안 7족을 앞에 놓고 여리고성을 바라보던 모세와 같은 심정으로 하늘과 의논할 수 있는 이스라엘이 되지 않고는 망한다는 것입니다.

아랍권에 있다고 망하지 않습니다. 그 환경에서도 하나님을 진정으로 모시면 하나님과 완전히 하나될 수 있는 거예요. 그렇게 되면 제 2차적인 세계적 가나안 복귀노정을 갈 수 있는 것입니다. 여기에 희망의 불길만 붙여 놓는다면, 새로운 목적관만 세워 놓는다면 이 민족을 통하여 세계를 복귀할 수 있는 근원이 마련된다는 것입니다. 앞으로 한국이 복귀되는 날에는 이스라엘과 같은 환경을 만들어야 된다는 책임이 있는 것을 알아야 됩니다.

이스라엘은 전세계에 종족권을 가지고 있습니다. 오늘날 세계에 이름난 정치가, 경제가, 혹은 세계적인 영광을 누리고 있는 사람들을 보면 유대인들이 비율적으로 많습니다. 그들은 외적으로 그런 권위를 갖고 있습니다. 내적인 한국의 통일교회가 그런 기반을 닦게 되는 날에는 이스라엘을 흡수할 수 있는 주체적 입장에 서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가인적인 책임을 갖고 있는 그들을 복귀한다면 세계적인 종족권이 자동적으로 복귀된다는 거예요. 또한 세계적인 문화권도 자동적으로 복귀될 수 있는 것입니다.

30-267
세계를 복귀할 수 있는 방안
이런 관점에서 볼 때 앞으로 우리들이 가야 할 세계는 우리 목전에 다가와 있습니다. 우리는 세계복귀를 할 수 있는 방안을 가지고 있습니다. 종교적인 면에서 기성교회를 굴복시켜야 합니다. 또한 현재 대한민국을 중심삼고 남한이 아벨 입장이 되어서 가인 입장인 북한을 굴복시켜야 합니다. 이 가인을 굴복시켜 하나의 완전한 국가가 되는 날에는 세계적인 아벨 국가로 등장하게 되는 것입니다. 원리가 그렇게 되어 있습니다. 그런 국가가 되면 세계는 자동적으로 우리의 판도가 되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이스라엘 민족을 중심삼고 승리의 국가 기준을 세웠다면 세계의 판도가 예수님 앞에 돌아갔을 것입니다. 그와 마찬가지로 우리가 이북 5도를 굴복시켜 승리의 국가 기준을 세운다면 세계의 판도가 우리에게 돌아오는 것입니다. 그러면, 우리가 이북 5도를 어떻게 굴복시키느냐? 남한에 있는 가인적인 종교인 기독교와 아벨적인 종교인 통일교회가 하나되어야 하는 것은 물론이요, 아벨이 되어야 합니다.

그리하여 대한민국을 위하고 이 민족을 위하여 나섭시다. 희생합시다. 이것이 말로써 안 되면 힘으로라도 해야 하는 것입니다. 통일사상을 무장해 가지고 삼팔선을 철폐하자고 해야 합니다. 그런 여건과 환경이 준비되어 있지 않으면 안 됩니다. 유엔총회 결의에 의해 남북한 총선거가 실시되면 남북한을 하나님 뜻 앞에 세울 수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공산국가를 삼켜 버릴 수 있는 능력을 가졌으니 세계통일은 가능하다’ 고 할 수 있는 하나의 기반을 형성한 것은 무엇이냐? 하나님께서 6천년 동안 수고하신 것입니다. 이것을 생각할 때, 우리들은 그런 터전을 슬픔으로 맞이할 것이 아니라 감사한 마음으로 맞이할 수 있어야 합니다. 이러한 기반을 만들기 위해 6천년이 걸렸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저 북녘 땅을 바라보면서 우리를 세계로 보내기 위한 공식적인 과정을 거치시는 하나님의 내정적인 슬픔이 거기에 깃들어 있다는 것을 생각해야 됩니다. 이것을 알지 못하고 있는 남한 백성들을 생각할 때, 그들을 바라보시는 하나님은 얼마나 슬프시겠습니까? 그렇지만 우리가 있습니다. 통일교회가 있고 문 아무개가 있습니다.

나는 아버지의 서러움 앞에 내 서러움을 일치시키면서 살아가고 있습니다. 여러분도 여러분의 서러움이 여러분 자체의 서러움이 되어서는 안 됩니다. 아버지의 서러움에 일치시켜야 합니다. 아버지의 서러움에 여러분의 서러움을 일치화시킬 수 있는 곳에서만이 세계적인 해원성사를 할 수 있고, 전체적 탕감을 조성할 수 있는 기반이 닦여지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이것을 알고 그야말로 용사 중의 용사, 정예부대 중의 정예부대가 되어 천주사적인 사명을 감당해 내지 않으면 안 됩니다. 이러한 사명이 여러분에게 있는 것을 알아야 되겠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기쁨으로 바라보시는 것이 아니라 아슬아슬한 내적 슬픔을 지니고 바라보고 계십니다. 만약 이들이 실패하면 어떻게 할 것이냐? 이들의 후손은 어떻게 될 것이며, 제 2의 작전은 어떻게 할 것이냐? 하나님은 이러한 것을 생각하고 계십니다. 하나님께서는 이것을 복구할 수 있는 작전 계획을 세우고 계십니다. 여러분은 이것을 생각해 봤어요? 36가정, 72가정, 120가정이 전부다 거꾸러지게 되는 날에는 어떻게 할 것이냐? 이런 극한 슬픔이 우리의 주위를 감싸고 있는 것입니다. 또한 우리가 접하고 있는 생활 투쟁권내에서 이것이 뒤넘이치고 있다는 사실을 생각해야 됩니다.

다 망해도 우리만은 망해서는 안 됩니다. 이것을 보장하기 위해서 하나님께서 승리적 아벨권을 만들어 주신 것을 우리는 고맙게 생각해야 합니다. 그 긍지와 권위와 자세를 갖추고 주체적인 권한을 상실하지 않는 우리 자신들이 되어야 됩니다. 이때만이 하나님의 슬픔을 해원해 드릴 수 있는 때라는 것을 알아야 됩니다. 이때만이 역사를 대신하여 하늘 앞에 효할 수 있고 충할 수 있는, 효와 충을 한꺼번에 성사시켜 아버지 품에 안길 자리를 마련할 수 있는 것입니다. 역사적인 슬픔을 일시에 해원성사 할 수 있는 효자가 될 수 있고 충신이 될 수 있는 길이 오늘 우리가 가고 있는 길 앞에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하겠습니다. 여러분은 이러한 사명을 감당할 수 있는 제사장이 되기를 바랍니다.

여러분이 제사장이 되었는데도 몰라보는 사람이 있게 될 때는 어떻게 해야 되느냐? 가르쳐야 됩니다. 종이 되어 가르쳐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노예의 신세를 피치 못할 자리, 구석진 환경을 피치 못할 자리에서 죽음을 각오하고 나서야 합니다. 그러한 자리에 서면 죽고자 하는 자는 살고 살고자 하는 자는 죽는다는 말이 실감이 나는 것입니다.

자기 집안 식구가 원수라고 했습니다. 그 원수를 갚아야 됩니다. 그렇지만 원수를 갚으면 완전복귀가 안 되는 거예요. 사랑으로 굴복시켜야 되는 것입니다. 그렇게 함으로써 하나님의 내적 슬픔을 완전히 청산지어야 합니다. 그래야 비로소 평면적인 자유해방을 맞이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사탄세계가 무너짐으로 말미암아 우리의 종의 입장이 철폐되는 것이요, 노예의 입장도 피할 수 있는 것이요, 영어살이도 피할 수 있는 것이요, 죽음길도 피할 수 있는 것입니다. 완전히 해방되는 것입니다. 이것을 위해서 우리는 죽음도 두려워하지 않고 필히 가겠다고 하는 결의를 해야 되겠습니다. 아시겠지요? 「예」

30-269
기 도
아버지, 저는 이 길을 나서게 될 때에 제일 무서운 것이 부모인 것을 알았습니다. 또 무서운 것이 자기 종족이요, 자기 민족이요, 자기 국가라는 것을 알았습니다.

이와 같이 가까운 자리에 원수가 있다는 것을 알았기 때문에 그 원수의 한계를 가정으로 말미암아 넘어야 할 길이 있는 것을 알았고, 종족으로 말미암아 넘어야 할 길이 있는 것을 알았고, 민족, 국가로 말미암아 넘어야 할 길이 있는 것을 알았습니다.

하늘편이 아닌 가인적인 입장에 선 대한민국의 주권자를 바라볼 적마다 그들로 인해 지금까지 대한민국이 자유스러운 한날을 갖지 못하였다는 것을 느꼈습니다. 아버지께서 원수의 세계를 대하던 심정을 느끼면서 슬픔의 자리를 저는 체험해 나왔습니다. 양지에서 살아 나오시지 못한 아버지의 슬픔을, 음지에서 역사하신 아버지의 사정을 저는 알았습니다. 오늘날까지 그런 생활 속에서 어느 한때 아버지를 반박하고 아버지를 원망하는 자식이 될까봐 초조해하면서 나왔습니다. 또한 당신께서도 초조한 입장에서 그런 저를 찾아오신 것을 저는 알고 있습니다.

아버님께서는 제가 서러운 이상 더 서럽고, 제가 괴로운 이상 더 괴로운 자리에서 당신의 책임을 느끼면서 갈 길을 준비하고 계신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그러기에 저는 몰리고 쫓기는 자리, 쇠고랑이 양손을 죄는 영어살이, 노예의 신세, 종의 신세를 거치더라도 절망하거나 아버지께 낙심을 가져다 드리지 않겠다고 결의했습니다. 그렇게 결의한 그 시간부터 오늘날까지 죽지 않고 아버지 앞에 남게 해주신 은사를 감사드립니다.

이와 같은 모습을 세우시기 위해, 아버지, 얼마나 수고하셨습니까? 제가 가야 할 길을 위해서, 제가 가야 할 가정을 위해서 얼마나 희생하셨습니까? 제가 거느려야 할 종족을 위해서 얼마나 수고하셨고, 제가 거느리고 지도해야 할 민족과 나라를 위해서 얼마나 수고하셨습니까? 이 나라 이 민족이 지도해야 할 세계를 위해서 얼마나 수고하고 계십니까?

우리의 동정맥이 24시간 끊임없이 움직이는 것과 마찬가지로 아버지께서는 그 이상 일을 하고 계신다는 사실을 알고 난 후부터는 자다가 눈을 떠도 죄인인 양 용서해 달라고 아버지께 빌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밥을 먹다가도 숟가락을 멈추고 눈물로써 아버지께 과거의 잘못에 대해 용서를 구하지 않을 수 없었사옵고, 피로한 몸을 가누지 못해 자리에 누울 적마다 당신을 염려하는 마음을 가지지 못한 자신을 책망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그러한 과거 생활을 긍휼히 봐 주시옵소서.

지금까지의 수많은 원수들을 제거시키시기에 아버지께서는 얼마나 많은 수모를 당하셨습니까? 얼마나 많은 억울함을 당하셨습니까? 쫓김받고 몰림받던 비참한 무리, 죽음길에서 탄식과 절규 가운데 몸부림치던 무리들을 이렇게 가꾸시기에 얼마나 수고하셨습니까? 저희들을 민족을 대하고 국가를 대하고 세계를 대하여 머리를 들고 바라볼 수 있는 시간권내에 이끄시기에 얼마나 수고하셨습니까? 이러한 저희 모습이 되기까지 당신의 내적 슬픔이 컸었다는 사실을 천번 만번 죽는 한이 있더라도 잊어버리는 저희들이 되어서는 안 되겠습니다.

아버지, 통일가가 망하더라도 저희들의 마음만 망하지 않는다면 통일가는 또다시 형성될 수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습니다. 이와 마찬가지로 통일의 나라를 갖지 못했다 할지라도, 나라를 사랑하는 마음이 있게 되면 통일의 나라는 이루어지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제가 바로 이런 것을 알기 때문에 지금까지 전통을 중요시하면서 세계적인 전통의 기반을 닦아야 된다고 몸부림쳐 나온 것을 여기 있는 이들도 알고 있습니다.

아버지께서 수고하신 터전으로 인해 저희들이 그렇게 할 수 있는 한계권내에 있사오니, 이러한 때를 맞이한 왕자로서 뜻을 대하여 칼을 뽑지 못하면 억천만세까지 한을 남기게 되는 것이요, 천년 만년 탄식과 절망의 구렁에서 벗어나지 못한다는 것을 알게 하시옵소서. 이제 그럴 수 있는 우리의 때를 맞이했으니 밤이나 낮이나 온갖 충성을 다하여 적진을 흡수하고 적의 무리를 제압할 수 있는 모습이 되게 하시옵소서. 그리하여 다시 더 큰 적을 치기 위하여 정진할 수 있는 아버지의 아들딸들이 되도록 인도하여 주시옵기를 간절히 바라옵고 원하옵니다.

하늘편의 내적 슬픔을 중심삼고 볼 때 불쌍한 분은 아버지입니다. 아무리 통일교회 문 아무개가 불쌍하다 하더라도 그것은 아무것도 아닙니다. 당신이 얼마나 불쌍하시다는 것을 저는 알았습니다. 오늘 통일교회를 따르고 있는 자녀들이 아무리 불쌍하다 하더라도 아버지의 슬픔에 비할 수 없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이런 것을 생각할 때 아버지의 가중된 은사를 받을 수 없어 천번 만번 옷깃을 여미고 천번 만번 경배드리면서 긍휼된 마음으로 사죄를 구해야 할 자신인 것을 알게 되옵니다.

이러한 모습이 될 때는 저희들이 망하지 않는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자기를 중심삼고 가는 길은 망하는 길이요, 세계와 나라를 위하고 자기 종족과 자유세계의 만민을 위하여 자기 자신을 희생하는 길은 부활하는 길이라는 것을 알게 하시옵소서. 자기가 희생한 이상의 부활권을 준비하고 계시는 아버지임을 알고 강하고 담대한 마음을 갖고 원수를 향하여 직행할 수 있는 당신의 아들딸이 되게 허락하여 주시옵길 간절히 바라옵고 원하옵니다.

전국에 널려 있던 지구장들이 여기에 모였습니다. 지구장은 도(道)를 책임진 도의 장(長)입니다. 이들은 제사장으로서 아버지의 내적 슬픔을 대신하여 아버지와 더불어 염려하고 아버지를 위로해 드릴 수 있는 아들의 사명과 충신의 사명을 해야 할 모습들이오니, 각자 그러한 책임이 남아있는 것을 절감하게 하시옵소서. 이제 1970년대에는 이 민족과 이 세계를 복귀할 수 있는 중차대한 세계사적인 탕감기간을 당당히 받아넘길 수 있는 당신의 아들딸들이 될 수 있게 허락하여 주시옵길 간절히 부탁드리고 원하옵니다.

이제 제 3회 수련회도 다 끝나 가옵니다. 이번 기간에 이곳을 거쳐가는 사람들은 1970년대에 가야 할 길을 위해 내외로 재차 무장해야 되겠습니다. 그리하여 민족복귀와 세계복귀를 위하여 제물된 입장을 사수하면서 하나님의 보호를 받을 수 있는 입장에서 제사장이 되어 산제물로 바쳐져 세계를 복귀할 수 있는 승리의 터전을 갖추게 허락하여 주시옵기를 간절히 부탁드리고 원하옵니다.

남은 시간을, 아버지, 맡아 주시옵소서. 남아진 달과 남아진 해를, 남아진 70년대 이 시대를 책임져 주시옵기를 간절히 부탁드립니다. 모든 말씀 참부모의 이름으로 아뢰었사옵나이다. 아멘.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