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9-330 to 29-348: 아버지의 목전에서

아버지의 목전에서
1970.03.14 (토), 한국 통일산업(구리시 수택리)

29-330
아버지의 목전에서
[기 도]

아버님, 당신께서 역사과정에서 인류를 복귀하기 위하여 얼마나 많은 눈물을 뿌렸사옵니까? 선조로부터 이어받은 타락의 모습이 이처럼 천추에 한을 남기게 되었다는 것을 저희들은 알았사옵니다. 또한 인류의 시조 아담 해와로부터 뿌려진 슬픔의 사연에서 벗어날 수 없는 원한의 쇠사슬에 얽매인 비통한 자리에서는 저희들이 아물 당신이 소원하시는 한날과 권고하시는 한날을 고대한들 그런 날을 맞을 수 없다는 것도 알았사옵니다. 응당 처벌해야 할 우리 인류를 지금까지 연결시키시어 거룩한 복귀의 사명을 이루는 구원의 한날을 바라보면서 버리지 못하고 찾아 나오신 아버지라는 것을 저희들이 완전히 깨닫게 하여 주시옵소서.

여기에 모인 당신의 아들들을 사랑하여 주시옵소서. 저희들은 어느 누구를 위하여 여기에 모인 것이 아니옵니다. 먼저는 자기를 위한 것이요, 그 다음에 자기의 선조와 후손을 위한 것이요, 횡적으로는 연결되어 있는 종족을 위한 것이요, 더 나아가서 민족과 국가를 위함과 동시에 세계를 위하여 이 자리에 온 것이옵니다.

암흑세계에 살고 있는 사람들 중에서 보잘것없는 저희들을 먼저 불러 주신 은사를 진심으로 감사드려야 되겠습니다. 저희들에게는 그 감사 이상으로 해야 할 사명이 있고 책임이 있다는 것을 더듬어 볼 때에 가야 할 바쁜 생활이 저희를 재촉하고 있다는 것을 느끼는 아들들이 되어야 하겠사옵니다.

인간은 이 땅 위에 왔다가 언젠가는 가야 할 몸이옵니다. 무엇을 하다가 무엇을 남기고 어떠한 자리에서 갈 것이냐 하는 문제를 생각하게 될 때, 저희들이 아버지 앞에서 살고 아버지 앞에서 죽을 수 있는 몸인지를 생각하게 하여 주시옵소서. 당신 앞에 돌아갈 때 저희가 가지고가야 할 내용이 무엇인지를 알게 하셔서 과거엔 이렇게 이렇게 최선을 다하였으며 현실을 부정하였고 미래에 하늘 앞에 염려의 대상이 될까봐 염려하였다고 하늘을 향하여 호소할 수 있는 자신이 되게 하여 주시옵소서. 수많은 사람들이 탄식과 절망 가운데서 살아가고 있지만 당신의 부름을 받은 저희들은 그 와 같은 모습으로 살아서는 안 된다는 것을 통감하게 하여 주시옵길, 아버님, 간절히 바라옵고 원하옵니다.

저희들이 진정 아버지를 뵈옵기 위하여 아버지라 부를 수 있는 인격과 아버지의 모습을 바라보기 위해 그리움에 사무친 인연을 가지고 당신의 심정을 바라볼 수 있게 주시옵소서. 그리하여 당신의 한없이 슬픈 심정의 터전을 바라보면서 그 심정에 연결되는 아들의 모습을 갖출 수 있도록 허락하여 주시옵소서. 그래서 자신의 모든 것을 넘어 아버지를 위해 태어났고, 아버지를 위해 죽겠다고, 아버지의 소원을 이루어 드리는 아들이 되겠다고 몸부림치는 아들의 모습이 그리워 이 자리에 모인 저희들이 되게 하여 주시옵기를, 아버님, 간절히 바라옵고 원하옵니다.

당신이 불러 주는 고요한 음성을 듣고 저희들을 소망의 마음으로 덧없이 바라보고 계시는 당신의 사정이 얼마나 딱한가를 아는 아들이 여기에 있사옵니까?

당신은 진정한 의미에서 아버지이시옵고, 저희들은 진정한 의미에서 아들이옵니다. 그러나 저희들은 아들된 도리와 심정을 알지 못하는 자리에서 당신의 아들이라고 하며 당신을 찾아가지 않으면 안 될 입장에 있사옵고, 당신은 저희들에게 아버지라고 설명하지 않으면 안 될 입장에 계시니 이 얼마나 원통하고 비통한 사실인가 하는 것을 알게 하여 주시옵소서.

당신이 인류의 부모라는 것을 증거할 수 있는 한 사람이 없었기에 내가 인류의 아버지요, 너희들의 부모라고 말할 수는 있어도 이것을 증거할 수 있는 환경이 없었기에 그것을 인식시키기 위해서 재차 죽음의 길, 희생의 길을 걸어 나오셨다는 것을 아옵니다. 저희들이 그것을 위하여 천주의 중심이 되지 않고는 안 된다는 사실을 알게 하여 주시옵소서.

삼천만 민중이 이 길을 바라보고 있사옵고, 30억 인류가 이 나라를 바라보고 있습니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하나님을 대신해서 후세의 자랑으로 세울 수 있는 아들이 없는 것이 아버지의 슬픔인 것을 알고 있사옵니다. 또한 지금까지 저희들이 아버님을 사랑하고 아버님을 모신다고 하였지만 타의에 의해서 사랑하고 타의에 의해서 모셨사옵니다.

아버지의 뜻 앞에서 훌륭하지 못했던 과거를 다시 한번 뉘우치기 위하여 이와 같은 모임을 가졌사오니, 통일의 운명이 이들에게 좌우된다는 사실을 절감하는 아들들이 되게 하여 주시옵소서. 아버지의 뜻 앞에 자기 하나 희생하게 되면 이 민족이 희생하였다는 조건이 되고 자기 하나가 부족하다면 그 종족과 그 가정이 아버지 앞에 용서받을 수 없다는 것을 느끼면서, 자기의 책임을 감당하기에 온갖 정성을 다하는 당신의 아들들이 되게 하여 주시옵길, 아버님, 간절히 바라옵고 원하옵니다.

부족한 실적 위에라도 당신이 찾아주시어 현현하시는 그러한 자리를 그리워하오니, 부디 저희 마음 가운데 임하여 주시옵소서. 자기의 마음에 가치 있었던 사실, 혹은 영광의 한 터전이 되었던 사실, 승리의 자리를 갖고 있었던 사실들을 스스로 다시 한번 느낄 줄 아는 당신의 아들딸이 되게 허락하여 주시옵길 간절히 바라옵고 원하옵니다.

1970년을 맞이하여 지금보다 한층 더 바삐 가야 되겠사옵니다. 밥을 먹을 때나 잠을 잘 때에도 바쁘게 생활을 해야 한다는 의식 가운데에서 아버지를 위하여 찬송하고 눈물지으며 가는 모습들이 되어야겠사옵니다. 보다 가치있는 자리에 가려면 보다 수난이 뒤따른다는 것을 잊지 말게 하여 주시옵소서.

지금까지 저희들이 걸어온 길을 놓고 수고했다는 생각조차도 하지 말게 하여 주시옵소서. 그런 생각보다는 아직도 가야 할 길이 바쁘고 책임지고 해쳐 나가야 할 길을 감당해야 되겠다고 자기 스스로가 다짐할 줄 아는 아들들이 되게 하여 주시옵길, 간절히 바라옵고 원하옵니다.

앞으로 저희 협회에서 하는 모든 일들을 당신이 맡아 주관하여 주시옵소서. 세계에 널려 있는 자녀들이 이곳을 향하여 우러러볼 적마다 당신이 그들의 중심이 되시어 통일의 자녀들이 모여지도록 허락하여 주시옵고 사망의 세계와 선의 세계가 통일의 세계로 연결될 수 있게 하여 주시옵기를 간절히 부탁드리옵니다.

이 모임으로 인하여 저희들이 당신의 이념과 새로운 희망을 품을 수 있고 저희의 생애가 빛날 수 있는 능력을 갖추는 중대한 계기가 되게 하여 주시옵기를 간절히 부탁드리면서, 모든 말씀 참부모의 이름 받들어 간절히 아뢰었사옵나이다. 아멘.

29-333
말 씀
인간은 자기가 지금 살고 있는 자리가 선과 악을 중심삼고 선편이냐 악편이냐 하는 것을 결정지어야 할 중간 입장에 있습니다. 또 내가 선한 방향으로 가느냐 악한 방향으로 가느냐 하는 것도 제 3자의 힘을 빌어서 결정하는 것이 아니라 자기 스스로의 판단에 의해서 결정해야 하는 것입니다. 이것을 우리는 잘 알고 있습니다. 더욱이나 책임분담을 감당하지 못하여 타락한 인간의 후손이 된 우리는 반드시 이것을 결정하지 않으면 안 될 중대한 기로에 있다는 것을 알아야 되겠습니다.

29-333
선과 악을 분별하여 새롭게 태어나야 할 인간
아담이 책임분담을 감당하지 못했기 때문에 오늘날의 우리들은 책임분담을 감당하는 데 있어서 어느 누구의 협조를 받아서는 그 사명을 완수할 수 없는 입장에 있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최후의 결정은 우리 자신이 하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선한 사람이 되느냐, 악한 사람이 되느냐 하는 결정은 하나님께서 해주시는 것이 아니라 우리 자신들이 해야 된다는 것입니다.

우리 인간의 생애의 목표, 생활의 표준은 무엇이냐? 이것은 선입니다. 이 선의 중심은 하나님입니다. 즉 아버지라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선의 중심되시는 분을 중심삼고 선한 내가 되느냐, 아니면 악한 내가 되느냐 하는 것을 선별하는 이는 다른 사람이 아니라 바로 자기 자신이라는 사실을 우리들은 알아야 되겠습니다.

그러므로 오늘날 우리 인간은 아버지를 중심삼고 새로이 태어나야 되겠고, 새로이 자라 가지고 생애노정을 거쳐가야 됩니다. 다시 말하면 아버지로 말미암아 태어나서, 아버지로 말미암아 살다가, 아버지로 말미암아 죽어야 된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아버지와 더불어 영원한 세계에서 살아야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오늘날 우리 인간들이 가야 하는 길이요, 금후에도 또한 가야 할 운명의 길입니다. 이러한 것을 볼 때, 타락한 우리는 선한 자리에 있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 인간은 타락으로 말미암아 선의 반대인 악한 입장에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지금까지의 나는 악한 나임에 틀림없습니다. 따라서 태어난 것도 악의 혈통에서 태어났고, 지금까지 살아온 것도 악의 환경권에서 살아왔다는 것입니다. 이렇듯 우리는 과거, 현재가 악하기 때문에 미래도 악할 수밖에 없는 운명의 길에 있습니다.여기서 벗어나기 위해서는 선의 본체를 중심삼고 새로운 생의 출발을 하지 않으면 안 된다는 것입니다. 즉 새로이 태어나야만 된다는 것입니다. 그리하여 우리의 생애노정을 선과 악으로 분립하여 선한 목표를 향하여 가는 내 자체가 되어야 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가 지금 가는 길에서 좌측이 악이고 우측이 선이라면 선을 중심삼고 우측으로 가지 않으면 안 될 입장에 있는 것입니다.

그리하여 과거에 악하게 태어나 살아오던 때 보다도 현재 선을 중심삼고 새로 태어난 자신이 더 가치 있고 귀하다는 것을 느껴야 합니다. 이렇게 선하게 살 수 있는 날을 가지게 되면, 금후에 그렇게 살아야 할 생애 노정을 걸어 놓고 볼 때 과거에 있었던 죄상을 탕감해야 할 운명이 남아 있다는 것입니다.

`나’ 라는 개체는 현실의 이 자체로만 빚어진 것이 아닙니다. 역사적으로 수많은 선조들의 핏줄을 받아서 태어났기 때문에 2차적인 유물과 같은 것입니다. 그러한 과거의 인연을 이어받고 태어난 `나’ 자신이 이제 새로운 생명의 인연을 가진 선의 입장으로 돌아가기 위해서는 선조들의 핏줄의 인연을 밟고 넘어설 수 있는 새로운 결의와 각오가 없어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그런 자리가 어떤 자리냐? 악을 부정하고 선을 긍정하는 힘이 강하여 그 민족의 기원이 되는 과거 전체를 부정하고도 남을 수 있는 힘이 있는 자리입니다. 그러한 자리에서만이 새로운 생의 인연을 찾을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런 인연을 통하여 관계 맺는 생활을 하게 될 때에 거기서부터 선이 발생하고 선의 기대가 넓어지는 것입니다. 이렇게 선의 기대를 넓히기 위한 생활이 뜻을 안 우리들의 생활이요, 금후에 우리가 가야 할 길이라는 것입니다. 이것을 알아야 되겠습니다.

29-335
선한 인연을 맺는 사람이 되어야
오늘의 자각된 `나’ 는 과거의 `나’ 와는 다르다는 것을 여러분이 알아야 됩니다. 과거에 인연이 되어 있던 형제 친척 혹은 국가나 세계나 인류보다도 오늘의 자각된 나를 중심삼고 빚어지고 갖추어질 수 있는 인연은 보다 가치 있는 인연이어야 합니다. 즉 선한 부모의 인연, 선한 형제의 인연, 선한 종족의 인연, 선한 민족의 인연, 선한 국가의 인연, 선한 세계의 인연을 맺어야 된다는 것을 우리들은 자각해야 됩니다. 또 그것을 자각했더라도 나를 위한 생활을 해서는 선이 안 됩니다. 자각은 자기가 했지만 그 생활은 나를 위해서는 안 됩니다. 이런 것을 느낀 사람은 과거를 위해서 사는 사람이 되어야 하고, 현실을 위해서 사는 사람이 되어야 하고, 미래를 위해서 사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자신의 가정만 위하는 사람이 아니라 역사적인 수많은 가정을 위해서 사는 사람이요, 금후에 올 나라를 계승할 수 있고 세계를 계승할 수 있는 가정을 위해 사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그런 사람이 필요합니다. 또 민족과 국가를 대신해 살되 자기의 민족과 국가를 위해 사는 것이 아니라 금후에 올 민족과 국가를 위해 살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렇지만 그것은 뚜렷하게 현실로 나타나지 않았습니다. 우리로부터 시작되는 입장이기 때문에 자각된 나를 중심삼고 선한 생활, 즉 공적인 생활을 하지 않으면 선한 세상에 인연을 맺을 수 없는 우리의 입장이라는 것입니다.

왜 그러냐 하면, 지금까지 우리는 악의 인연으로 갖추어져서 악의 생활 가운데에 젖어 있었기 때문에 자기 스스로를 중심삼고 이 악의 인연을 넘어 그보다 넓어질 수 있는 하나님의 창조의 인연을 남겨야만 탕감복귀 할 수 있는 것입니다. 탕감이라는 것은 어떤 것은 어떤 것에 희생의 조건을 대신 세워가지고 넘어가는 것입니다. 열만큼의 손해를 입었으면 어떠한 조건을 세워서 열 이상의 이익을 가져 와야 탕감이 되는 것입니다. 지금까지 우리들이 해온 탕감은 조건적인 탕감이었습니다.

탕감조건이라는 것은 우리에게는 고마운 은사가 아닐 수 없습니다. 95퍼센트는 하나님이 책임이고 5퍼센트는 인간의 책임이라는 것입니다. 이것을 마치 공식같이 생각하겠지만 우리가 조건적인 탕감을 한다는 것이 지극히 슬픈 사실입니다. 그 조건적인 탕감을 조건적 탕감이 아닌 기준까지 올려 놓기 위해서는 그 배후에 하나님의 수고와 노고가 개재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우리가 타락된 선조의 후손으로 태어났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하나님 앞에 면목을 세우기에는 너무나 부족하다는 것을 느낄 줄 아는 여러분이 되어야 합니다. 그리하여 백 퍼센트 이상 탕감의 길을 모색하는 생애노정을 가겠다고 노력하는 사람이 있다면 이 사람은 탕감조건을 두려워하지 않고도 하나님 앞에 책임적인 발판을 남기는 생활을 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런 사람은 언제나 나라와 세계를 위해서 자기 몸을 바칠 수 있고 희생할 수 있는 사람입니다. 다시 말해서 가정에 대해서는 효성의 마음을 가지고 사는 사람이요, 나라에 대해서는 충성의 마음을 가지고 사는 사람이요, 온 세계에 대해서는 성현의 마음을 가지고 사는 사람이라는 것입니다. 그런 사람은 어떤 목표를 가지고 사느냐? 현재의 자기를 중심삼고 승리의 한날을 바라보며 사는 것이 아니라, 국가와 세계의 승리를 찾아가며 살아가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현실의 민족을 위해 사는 것이 아니라, 미래의 민족을 위해 산다는 것입니다. 미래를 위하여 산다는 것은 현실을 위해 사는 것과는 상충적인 생활이기 때문에 그런 사람은 현실에서 배척 받는 것이요, 고독한 것이요, 손해를 보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것을 응당히 자기가 당해야 하는 것으로 알고 생활하는 사람은 무리 어려운 탕감조건이 가로놓이더라도 넘어갈 수 있습니다. 이런 사실을 우리들은 알아야 되겠습니다.

예수님의 30여년의 생애를 두고 볼 때 비록 짧은 생애였지만, 그는 역사를 위하여 일하고 세계를 위하여 일하며 살았던 것입니다. 승리의 기를 높이 드는 그날을 소망하면서 역사와 더불어 살고 세계와 더불어 살았기 때문에 만민이 추앙하지 않을 수 없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그러한 것을 알았기에 아무리 어려운 환경이 가는 길을 가로막는다 하여도 좌절하지 않았던 것입니다.

선은 악을 영원히 주관할 수 있지만 악은 선을 영원히 주관할 수 없습니다. 악이 선을 기만이나 강압적으로 주관할 수 있을지는 모릅니다. 그러나 그것은 일시적인 것입니다. 선은 결코 악에게 영원히 지배 받을 수 없습니다. 만일 선이 악에게 영원히 지배를 받는다면 하나님의 복귀섭리는 불가능한 것입니다.

29-337
아버지의 목전에 있는 자신을 자각해야
하나님의 복귀섭리를 두고 보면 한때에 하나님을 반대하던 악이 우세했다 하더라도 그 악은 반드시 열세해져서 결국은 선에게 우세했던 기반을 넘겨주지 않으면 안 되었던 사실을 우리는 지금까지의 역사과정을 통해서 알 수 있습니다. 마찬가지로 지금 당장은 선이 악에게 지배를 받더라도 영원히 지배 받지는 않는다는 것입니다. 결국에는 선이 악을 영원히 지배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악을 지배하는 절대적인 발판은 누구가 되느냐? 이것은 하나님도 아니요, 사탄도 아닙니다. 이것은 우리 인간입니다. 바로 나입니다. 이러한 `나’를 하나님께서는 지금까지 찾아 나오고계신다는 것을 여러분들이 알아야 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찾으시려는 `나’ 는 공적인 `나’ 이기 때문에 하늘에 속하는 사람이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여기에서 비로소 아버지와 아들의 관계가 성립되는 것입니다. 즉, 하나님께서 생각하시는 것이 내가 생각하는 것이요, 하나님께서 하시는 일이 내가 할 일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을 위해 생각하는 것이 결국에는 나를 위해 생각하는 것이 되고 그를 위한 일이 나를 위한 일이라는 사실을 절감하는 입장에 서게 될 때에 하나님께서 좋아하실 수 있는 인연을 가진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군왕이 염려하는 것을 신하가 대신하여 염려하며 그 일을 해결하려는 마음을 가지고 그 일이 내 일이라고 하는 사람은 충신이 될 수 있는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아버지와 나를 중심삼고 볼 때, 아버지가 나를 위하여 염려하고 계신다는 사실, 즉 아버지가 내 일을 하고 계신다는 것을 내가 어떻게 자각하느냐 하는 것이 문제입니다. 그것을 자각하게 될 때 아버지와 나는 하나의 자리에 설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렇게 되면 아버지와 나는 목적도 하나요, 생활도 하나요, 원수에 대항하여 싸우는 싸움도 한 자리에서 할 수 있는 것입니다. 이런 자리에 서지 않고는 선한 하나님과 더불어 살 수 없는 것입니다. 따라서 이제부터 우리는 아버지의 목전에 서 있는 사람으로 이제 새로 태어났고 이제부터 새로 살아가는 생애를 가야 할 자신이라는 것을 자각해야 되겠습니다.

29-338
감사하는 신앙생활
지금까지 하나님께서 수고하신 것은 결국 나를 위해서 한 것이요, 이제부터 가야 할 세계적인 개척노정의 95퍼센트의 사명도 나를 위해 하고 계신다는 것을 생각하면 우리들은 하나님께 감사하지 않을 수 없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신앙생활의 본질은 무엇이냐? 하나님께 감사하는 마음인 것입니다. 그러한 마음이 있을 때에 그것이 하나님과 내가 타락한 인연을 넘어 하나의 인연으로 맺어질 수 있는 바탕이 되는 것입니다.

내가 이 세상에서 좋은 입장에 처해야만 감사해야 하는 것이냐?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지금까지 좋은 때만 우리를 위해 수고해 나오신 것이 아닙니다. 어려운 때일수록 더욱 수고하실 것을 다짐하고 나오셨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오늘날 우리 자신들도 하나님을 내 아버지로 모시기 위해서는 나 대신 일하시며 싸워 나오신 하나님을 좋은 자리에서 감사하는 것보다도 어려운 자리에서 더욱더 감사해야 하는 것입니다. 따라서 과중한 십자가 도상에서도 하나님께서 감사할 수 있는 것도 이런 원칙을 이해하게 될 때 가능한 것입니다.

이 땅에 사는 수많은 사람들 중에서 진정한 의미로 하나님께 감사드리는 가까운 거리에 있는 사람이 누구겠느냐? 문명국가나 문화생활을 하는 사회에서 수난의 길을 가는 사람들보다 저개발국가의 형편없는 생활환경 가운데서 수난의 길을 가는 운명에 있으면서도 하나님을 모시고 생활하는 사람입니다. 그와 같은 자리에서도 하나님을 모시고 사는 사람이 있으면 그는 불행한 사람이 아닙니다. 거기에서 비로소 하나님과 심정적 인연이 맺어지는 것입니다.

기쁨과 슬픔의 눈물이 엇갈려 남아질 수 있는 자리는 놀고 뛰는 자리에서 만들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비참하게 피를 흘리고 죽어가는 자리에서 만들어지는 것입니다. 말할 수 없이 처참한 모습으로 상봉할 수 있는 자리, 눈물이 교차되는 자리에서도 감사할 때, 하나님과 인연이 맺어진다는 것입니다. 새로운 혁명의 봉화도 새로운 혁신운동도 그런 자리에서 역사를 중심삼고 엮어져 나온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도 하나님께 감사할 수 있는 자리를 찾아 나가게 될 때, 우리가 지금 생활하는 이상의 자리에서 감사하는 것보다도 그 이하의 자리에서 감사할 수 있는 용기가 있어야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지금까지 나를 구원하는 입장에 계시기 때문에 나보다도 더 불쌍한 분입니다. 나보다도 하나님이 더 불쌍한 입장에 계신다는 것입니다. 자식이 부모 앞에서 죽어간다면, 물론 자식도 불쌍하지만 그 자식을 바라보는 부모가 더 불쌍하다는 것입니다. 만일 자식이 죽어가는 자리에서도 부모를 위로하고 부모에게 무한한 감사를 드리며 효를 다한다면, 부모의 서러움, 부모의 고통, 부모의 비참함을 메울 수 있는 것입니다.

그와 마찬가지로 하나님과 나를 중심삼고 볼 때도 나보다도 더 불쌍한 분은 하나님이 아니겠어요? 언제 하나님께서 나에게 감사할 수 있는 날이 있을 것이냐? 하나님께서 나에게 감사할 수 있는 날을 갖지 못하고는 우리가 하나님 앞에 아무리 감사를 드린다 하더라도 그 감사는 나에게서만 끝나는 감사이지, 하나님과 하나의 목적을 중심삼은 감사로서 열매를 맺을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그러면 나보다도 하나님께서 감사할 수 있는 자리는 어떤 자리인가? 그것은 효하는 자리밖에 없습니다. 그러면 효라는 것은 어떤 것이냐? 부모가 슬퍼하는 일에 대해서 자식이 먼저 슬퍼하는 것입니다. 그때에 부모는 그 자식을 무한한 소망의 실체, 자기의 모든 생명을 대신한 가치의 존재로 세우고 싶은 것입니다. 그러면서 부모는 자식에게 감사하는 것입니다. 환경이 어려우면 어려울수록 부모는 필요 이상의 감사를 느낄 것입니다.

이런 문제를 두고 볼 때, 아버지의 목전에서 어떻게 하면 아버지가 우리에게 감사할 수 있느냐를 생각해야 합니다. 그런 나 자신이 되느냐 하는 것이 중요한 문제입니다.

우리가 생활하는 하루의 낮 저녁 밤을 절기로 보면 춘하추동을 축소시킨 것입니다. 아침은 봄에 해당하는 것이고, 낮은 여름에 해당하는 것이고, 저녁은 가을에 해당하는 것이면, 밤은 겨울에 해당하는 것입니다. 이처럼 일년사시를 대신할 수 있는 이 하루를 어떻게 생활하면 아버지가 나에게 감사할 수 있는 생활이 될 것이냐? 이것이 우리가 아버지의 목전에서 해야 할 효의 도리요, 충의 도리가 아니겠는가?

이와 같은 입장에서 우리들은 새벽에 일어나면 인류를 대신한 존재인 나의 하루 생활이 아버지 앞에 감사의 실체가 되게 해 달라고 기도하면서 꽃이 피어 있는 봄동산처럼 자유스런 동산에서 아버지께서 나를 세워 섭리하실 수 있는 소망의 결실체가 되겠다고 하고, 낮이 되어 일터에 나가면 소망의 결실체가 자라나는 여름절기와 같이 자기가 한 발 더 발전하여 하나님께서 같이하실 수 있는 가치로 나타날 수 있는 존재가 되겠다고 해야겠습니다. 또 저녁이 되면 모든 전체를 집약시켜서 하나의 결실을 아버지 앞에 바칠 수 있는 가을절기와 같은 때이기 때문에 제물될 수 있는 자리에 서겠다고 하고, 겨울절기에 해당하는 밤이면 생명력을 지녀서 하나님과 내재적인 부자의 인연을 맺어 모든 기를 받아들일 수 있는 자신이 되겠다고 해야 합니다. 그렇게 1년 365일을 승리의 날로 만들면서 감사하는 생활을 하는 사람이 있다 할진대, 그 사람은 아버지와 관계를 맺고 사는 생활을 하는 사람은 그런 경험을 할 것이 틀림없기 때문에 일생을 감사하는 생활로 보낼 수 있습니다. 이러한 사람이 죽음의 자리에 처하더라도 하나님 앞에 감사하는 마음은 남아지는 것입니다.

하루를 그렇게 살아야 하고, 1년을 그렇게 살아야 하고, 우리의 일생 동안도 그렇게 살아야 합니다. 우리 일생에도 소년시대, 청년시대, 장년시대, 노년시대가 있습니다. 이것은 하루의 아침 낮 저녁 밤, 일년의 춘하추동과 마찬가지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일생을 그렇게 살고 간 사람이라야 하나님께서 인간을 창조하신 그 창조 본연의 목적에 합격된 하나의 승리적 실체가 되는 것입니다.

그러면 그와 같은 승리적 기반을 어디에서부터 닦아야 되겠느냐? 하루를 두고 볼 때, 아침은 봄과 유아시대를 대신한 것이요, 낮은 여름과 청년시대를 대신한 것이요, 저녁은 가을과 장년시대를 대신한 것이요, 밤은 겨울과 노년시대를 대신한 것이요. 이와 같은 생애를 감사하며 일생 동안 사는 사람이 있다 할진대 그는 하나님에게서 떠날래야 떠날 수 없는 사람인 것입니다. 그런 사람은 하나님의 시야에서 벗어날래야 벗어날 수 없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보호하시는 환경을 떠날래야 떠날 수 없는 사람이 아니겠느냐 하는 문제를 중심삼고 우리는 생각해야 되겠습니다.

29-341
하나님께서 수난길을 가게 하시는 이유
그러므로 우리들은 감사의 생활을 해야 되겠습니다. 내가 소원하는 것을 아버지를 중심삼고 다시 한번 비판해 보아야 되겠고, 그 소원이 아버지의 뜻과 더불어 아버지가 기뻐하실 수 있는 것인가 생각해 봐야 되겠습니다. 그것이 아버지의 입장과 상충되는 것이어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아버지의 입장과 상충되지 않는 자리를 이루기 위해서는 탕감복귀역사를 거슬러 올라가야 하기 때문에 많은 수난의 길을 가야 하는 것입니다. 이 수난의 길을 누가 메워야 하느냐? 하나님께 메우게 할 것이 아니라 우리가 메워야 하는 것입니다. 내 자신의 힘으로 부족하면 가정을 동원하고, 가정의 힘으로 부족하면 종족을 동원해야 되겠습니다. 동원한 가정과 종족의 힘을 합해서라도 내가 해야 할 책임을 이들과 더불어 다하겠다고 노력하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이런 사람은 이 땅에서 아무리 비참한 생활을 하고 갔다 하더라도 아버지를 중심삼고 생활한 것이 틀림없기 때문에 아버지 앞에 영원히 설 수 있는 효자가 되고, 충신이 될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이것을 여러분이 알아야 되겠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오관을 통하여 느껴지는 모든 감각과, 마음으로 느껴지는 직관까지 합하여 감사하는 마음으로 생활할 수 있는 나 자신이 되어야 합니다. 그래서 아버지로부터 태어났으니 아버지를 모시고 살다가 아버지 앞에 가겠다고 해야 합니다. 이러한 문제를 중심삼고 언제나 아버지 앞에 서 있다는 것을 자각하면서 살지 않으면 안 된다는 것입니다. 여러분들이 살아가면서 어느 누구에겐가 묶인다는 것은 어려운 일입니다. 이런 어려운 고비에 처하게 되더라도 거기에서 결코 사탄에게 묵임을 당하지 말고, 하나님에게 묶임을 당해야 합니다. 그리고 그 고통당하는 것을 하나님께서 나에게 준 것으로 알고 기쁨으로 맞아들이라는 것입니다. 고통을 피하려고 하지 말고 정면으로 대결하라는 것입니다. 이 수난의 길은 아버지가 나에게 아버지가 나를 사랑하기 위해서 준 예물로 알고 감사히 받을 줄 알아야 합니다.

이것은 내 생활에서 더이상 어려운 일이 오기 전에 내가 완전히 하나님 앞에 묶여진 자가 되어 새로운 세계로 출발할 수 있는 동기가 되는 것입니다. 이 고통을 넘게 되면 하나님은 더 큰 승리적 터전을 부여하려고 합니다. 그 승리적 터전을 자기와 관계 맺게 하려면 탕감조건이 필요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것과 관계 맺으려면 거기에 해당되는 슬프고 어려운 환경을 또다시 뚫고 나가야 합니다.

이것은 더 넓은 환경을 나에게 상속해 주기 위한 하나님의 작전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어떠한 고통이라도 기쁨으로 맞아들일 수 있는 생활을 해야 되겠습니다. 그런 자리가 내게 다가올수록 아버지와 내가 하나되기 위해서 이런 시련이 오는 것이라는 신념을 갖고 헤쳐 나가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그런 사람은 무서운 사람입니다. 세상에 무서운 사람이 있다면 이 이상 무서운 사람이 없습니다. 역사를 대신하여 이 이상 더 사탄세계에 반역하는 사람이 없다는 것입니다. 여기서부터 사탄세계는 굴복되는 것이며, 하나님의 터전은 넓혀져 나가는 것입니다.

이런 관점에서 앞으로 통일교회가 가야 할 수난의 길이 어떤 길인가를 알아야 됩니다. 이제 가정을 중심삼은 수난의 시대는 지나갔습니다. 오늘 우리는 통일교인끼리 종족적인 환경의 터전을 마련한 입장에 있기 때문에 우리끼리 가야 할 수난의 길은 벗어났다는 것입니다. 이제 우리 앞에는 악의 세력을 대표해서 이것보다 더 큰 세력이 부딪혀 온다는 것입니다. 그것은 현존하고 있는 국가요, 현존하고 있는 세계입니다. 이 국가와 세계가 우리 앞에 부딪혀 올 것입니다. 우리는 부딪혀 오는 수난의 길을 피하지 말고 정면으로 맞아들여 그것을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예물을 주기 위한 최후의 결정적인 조건으로 알고, 이 수난의 길을 환희의 심정으로 받아들일 수 있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이것을 그 누구에게도 맡기지 않고 나 자신이 책임지겠다고 하는 입장에서 싸워 이긴 사람이 있다면 그 기반 위에는 그 사람 이외에 아무도 있을 수 없습니다.

그러나 비굴하게 도망가고 싶은 것을 참고 어쩔 수 없이 싸워서 승리권내에 선다면 하나님은 축복의 인연을 그 이상 더 줄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이와 내가 당하는 일이므로 그것을 기쁨으로 맞이하여, `그 이상 어려움이 있다 할지라도 나는 간다. 싸운다. 책임을 진다’ 하며 가야 합니다. 그리고 하나님 앞에 감사의 마음을 가지고 `내일은 천 배, 만 배, 더욱 큰 시련을 가하여 당신의 수고의 길을 내 앞에 맡기시옵소서. 당신이 나에게 이 일을 맡길 때는 미안한 마음을 가지고 맡기는 것이 아니옵니까’ 하고 이 일을 성사해 낼 때 아버지께서 감사해 할 수 있는 기원이 벌어지는 것입니다. 이렇게 함으로 말미암아 아버지께서 감사해 할 수 있는 한날을 갖추는 영광의 자리가 내 앞에 찾아오는 것입니다. 그런 사실을 알아 가지고 전심전력을 다하여 그 수난을 해결할 때 효의 인연, 충의 인연이 결정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러한 자리에 부딪혔을 때 마지못해 맡는 사람은 환경적으로는 승리권을 만들었다 해도 더 큰 축복을 상속해 주기 위한 제 2 차, 제 3 차의 탕감조건, 수난의 길이 있게 되면 실패하고 맙니다.

29-343
하나님께서 필요로 하는 사람이 되라
우리는 이미 뜻을 위하여 죽음을 각오한 몸입니다. 그러면 어떤 자리에서 죽을 것이냐? 개인을 위하는 자리에서 죽으면 서러운 것입니다. 가정을 위하는 자리에서 죽는 것도 서러운 것입니다. 종족을 위하여 죽는 것도 서러운 것입니다. 민족을 위하는 자리에서 죽는 것도 서러운 것입니다. 이왕 뜻을 위하여 죽을 바에야 세계를 위하는 자리에서 죽는 것이 우리가 바라는 소원이 아니겠습니까? 그렇게 할 수 있는 거리가 멀리 떨어져 있다면 이 거리를 축소시키기 위해서 이 세계를 우리의 생활무대로 끌어들여야 합니다. 그런 책임을 해야 할 입장에서 온갖 지성을 다 바치고 나가는 사람이 있어야 하겠습니다.

개인을 찾지 못한 하나님은 나를 의지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이요, 가정을 찾지 못한 하나님은 나를 의지할 수밖에 없는 것이요, 종족·민족·국가를 찾지 못한 하나님은 나를 의지할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이와 같이 하나님께서 나를 의지할 수 있는 입장에서 한 가지라도 해냈다 할 때에는 하나님과 나의 인연은 공고해진다는 것입니다.

수난의 길을 슬픔으로 넘을 것이 아니라 기쁨으로 넘을 수 있는 자신을 어떻게 갖느냐 하는 것이 여러분에게 중대한 문제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아버지의 목전에서 선 나는 어떻게 할 것인가를 생각해야 되겠습니다.

지금 내 눈은 누구를 위해서 바라보고 있느냐? 아내를 바라보는 것은 자유로운 세계에서 아내를 바라보기 위해서이고, 자식을 바라보는 것은 해방천국에서 자식을 바라보기 위해서이고, 오늘날 세상을 바라보고 싸우는 것은 내일의 세상을 바라보기 위해서이고, 지금 노력을 하고 희생을 하는 것은 내일의 행복과 승리로 바꾸기 위해서라는 것입니다.

내가 자는 것도 아버지를 위해서, 잠에서 깨어나는 것도 아버지를 위해서, 내 일체의 중요한 모든 요건이 아버지를 위해서이어야 합니다. 나는 세계를 위해서 살아가는 자리에서 아버지께 감사하며 살아가야 할 몸…. 여러분은 그런 입장에서 살아가야 된다는 것입니다.

그런 자리에서 나만 감사해 할 것이 아니라, 아버지께서도 감사해 할 수 있기 위해서는 탕감조건을 치러야 합니다. 여기에는 개인적인 탕감조건 보다 더 가중된 가정적인 탕감조건을 짊어져야 할 것이 아니겠습니까? 이것을 치러야 하나님께서 감사해 할 것입니다. 가정적인 탕감조건을 치르고 나면 하나님은 민족 혹은 국가적인 탕감조건을 짊어 지워 줄 것입니다. 그것을 내가 감당해 내면 하나님께서 나에게 또 감사해 할 것입니다. 그리고 세계적인 탕감조건을 내게 짊어 지울 것입니다. 그것은 왜 그러냐 하면 선악을 결정하는 것은 사람이기 때문입니다. 아버지께서는 사람이 필요하기 때문에 세계적인 모든 문제를 나에게 의탁하지 않으면 안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나를 내세울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그 자리를 그리워함은 물론 그 자리에서 사명을 다하는 그날을 고대해야 하는 것입니다.

여기에서 나에게 세워지는 자리가 크면 클수록 사명도 커지므로 그 큰 범위에 비례하여 슬픔이 오는 것이요, 아울러 탕감도 그 범위에 비례하여 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러한 탕감내용을 기쁨으로 맞이하고 감사하며 맞는 자신이 되지 않고는 하나님 앞에 세워져서 칭찬 받는 아들이 될 수 없다는 사실을 여러분은 알아야 됩니다.

39-345
제물이 되어야 할 통일교회
오늘날 우리는 통일교단 가운데 인연이 되었습니다. 그러면 통일교회는 무엇을 위해 싸우는 곳이냐? 통일교회 자체를 위해서 싸우는 교회가 아닙니다. 여러분이 그것을 알아야 돼요.통일교회는 여러분을 위해서 싸우는 교회요, 여러분이 가정을 위해서 싸우는 교회요, 여러분의 국가를 위해서 싸우는 교회요, 앞으로 올 세계를 위해서 싸우는 교회입니다. 다시 말하면 제단 위에 놓여진 제물과 마찬가지입니다. 이 제단과 제물은 누구를 위하여 있는 것이냐? 이것은 앞으로 올 소망의 세계를 위해서 있는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죄 지은 사람을 용서해 주기 위해서 세워진 것입니다. 통일교회는 제물과 같기 때문에 사망세계의 모든 잘못을 용서해 주기 위해서 있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죄가 없는 사람으로서 죄 지은 사람 이상의 억울함을 당해야 된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탕감의 비결입니다. 죄가 없는 순결한 사람으로 죄 지은 사람의 탈을 쓰고 죄인인 양 희생해야 합니다.

여기에서 희생하는 것이 사탄 때문이라면 희생의 결과가 누구에게 돌려 지느냐? 사탄에게 돌려지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목적을 이루어 드리기 위해서 희생했으므로 자기 자신에게 먼저 거두어집니다. 이럴 때에 자기 자신이 부활되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바로 그런 자리에 선 분입니다. 예수님은 제물의 입장에 서서 민족을 위해서 희생했고, 죄인을 위해서 희생했습니다. 그리고 그 희생한 결과로 하나님의 뜻이 거두어졌습니다. 예수님의 희생이 거두어질 수 있었던 절대적 기준은 예수님이 하나님의 것으로 부활되었으며 부활과 더불어 하나님 것으로 거두어졌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자신의 실체만 부활한 것이 아닙니다. 가정·종족·민족·국가·세계를 거둘 수 있는 내용을 갖추었기 때문에 예수님으로 말미암아 새로운 가정, 새로운 종족, 새로운 민족, 새로운 국가, 새로운 세계가 탄생되었던 것이 아니겠습니까?

그러면 오늘날 통일교회는 무엇이 되자는 것이냐? 교단적인 입장에서 제물이 되어야 합니다. 제물이 되었다 하는 날에는 문제가 달라집니다. 그러면 그 자리까지 나가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되느냐? 하나님께서 통일교회를 내세워 자랑할 수 있는 조건이 있어야 됩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마지못해 하는 것이 아니라, 기쁘고 감사하게 하나님의 일을 해야 합니다. 여러분 앞에 오는 시련을 민족과 국가와 세계를 위해서 당한다는 생각을 해야 됩니다. 그런데 내가 이 수난의 길을 도피하겠다면 나는 하나님의 아들이 될 자격이 없는 것입니다.

29-346
감사하는 마음으로 70년대를 바라보고 나아가자
그러면 감사할 수 있는 나 자신을 어떻게 발견하느냐? 어떠한 부락에서 어떠한 어려움이 자기에게 부딪혀 온다 해도 그것을 감사하게 여기고 3일노정이 있었던 것처럼 3년 고비를 넘어야 합니다. 여러분이 어떤 부락에서 반대 받지 않는 입장에서 3개월만 열심히 하면 반드시 그 부락이 여러분에게 감사할 것입니다.

내가 부락이 맞아야 할 수난의 길을 도맡아 가지고 감사한 마음으로 책임지고 넘어가야 승리한다면 그 승리권내에 있는 사람들은 나에게 머리를 숙이게 되어 있습니다.

이와 같은 원칙에서 생각하면 70년대를 바라보고 나아가는 우리에게는 수난의 역사가 끝나고 통일교회 운세의 시대가 도래하고 있으니 감사할 줄 알아야 합니다. 또 과거에 감사한 적이 없는 사람은 이제부터 밤이건 낮이건 모든 전부를 희생하면서라도 이 새로운 운세의 시대를 맞이하는 때에 하나님이 나를 세우실 수 있는 자랑스런 모습이 되겠다고 노력해야 합니다.

나에게는 영광이 필요없습니다. 지금까지 수난의 길을 하나님께서 닦아 왔으므로 이제부터라도 나의 일생을 바쳐 수난의 길을 가더라도 감사하며 가겠다고 동분서주하는 사람이 있다면 그 사람은 망하지 않는 것입니다. 그 사람은 기필코 하나님께서 내세워 자랑하실 것입니다.

만일 그가 국가를 위해서 움직였다면 그 국가가 찾아지는 날 그는 국가 앞에 자랑할 수 있는 자녀가 될 것이요, 세계를 위하여 움직였다면 세계를 찾는 날 세계 앞에 자랑할 수 있는 자녀가 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내세워 자랑하실 것입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아버지께서 여러분에게 감사할 수 있어야 합니다. 여러분이 감사하기 전에 하나님께서 먼저 여러분 이게 `고맙다’고 할 수 있는 입장에 설 때 하나님은 그 사람에게 신령한 사람이나, 선한 선조가 있으면 그들을 동원하여 그 사람을 받들라고 하게 되어 있고, 그에게 감사하고 머리 숙이게끔 만드는 것입니다. 이것이 복귀의 내용이라는 것을 여러분이 알아야 됩니다.

이런 관점에서 오늘날 한국 기독교의 신흥종파 중에서 정석온의 어머니인 김성도를 중심한 감사 집단이 나타났던 것입니다. 이런 사실은 오늘날 우리들의 신앙생활에 경각심을 높이고 있습니다. 필히 감사의 생활을 이수해야 할 절대적인 한 집단을 대표하여 그들이 나왔다는 사실을 알아야 됩니다. 그러니 이래도 감사 저래도 감사해야 합니다.

그럴 수 있는 여러분이 되어 아버지 앞에 생애를 다 바치겠다고 할 때에는, 하나님은 여러분이 죽음 가운데에 있다 하더라도 부활시켜서 천상세계에 내세워 자랑하실 것입니다.

세상에서 인정을 못 받고 세상의 일을 못 이룬다고 한탄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우리는 영원한 뜻을 중심삼고 가기 때문에 영원한 뜻 앞에 탕감의 조건을 필요로 하는 하나님을 대신하여 우리가 감사히 탕감조건을 세워 하나님이 소원하시는 일을 감당해야 합니다. 그러므로 말미암아 아버지께서 감사할 수 있는 인연을 남길 수 있다면 절대 망하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여러분들이 이런 것을 알고 지방에 돌아가서 이런 생활을 하지 않으면 안 될 것입니다.

여러분이 단에 나설 때는 감사하는 마음으로 나서야 합니다. 또 총판매를 한다 하더라도 감사하는 마음을 가지고 판매에 임해야 합니다. 내가 지금 어려우니까 이렇게 이렇게 하면 되겠지 하는 조건은 통하지 않습니다.

여러분들은 하나님께서 편안하기 전에는 여러분이 편안할 수 없는 운명을 갖고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그리고 아버지를 모셔야 할 입장에 있기 때문에 아버지보다 더 고통받아야 하는 것이 원칙입니다. 이런 관점에서 보면 오늘날 지구장이나 지역장들이 책임하지 못한 것이 많습니다.

우리는 언제나 아버지의 목전에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내가 아버지의 목전에 있으므로 아버지께서 지금 내가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가를 다 알고, 무슨 일을 하려고 하는가도 다 알고, 느끼는 모든 감각까지도 관찰하고 계신다는 것을 자각하면서 가야 합니다. 여기에서 감사의 기준만 남기면 여러분의 갈 길은 일취월장할 것입니다.

그런 관점에서 과거를 반성하고 앞으로 70년대를 향하여 재출발할 수 있는 좋은 동기로 하나의 인연을 남겨 주기를 바랍니다.

29-348
기 도
아버님! 저희들이 아버지의 정성을 아는 아들이라면 잠을 자다가 일어나도 죄인의 부끄러운 모습을 가릴 수 없는 민망한 마음으로 엎드리지 않을래야 않을 수 없을 것이옵니다.

아침 밥상을 대하는 자리에서 내가 이 밥을 먹고 무엇을 할 것인가를 스스로 묻는 자신이 되게 하시옵고, 점심 밥상을 대할 때에는 지금까지 내가 무엇을 남겼는가 하는 물음에 부끄러운 모습으로 자책하는 자신이 되게 하여 주시옵고, 저녁 밥상을 대할 때에는 하루를 청산짓기에 부족함이 없는 하루를 보냈는가를 자문할 수 있는 자신이 되게 하여 주시옵소서.

아버지의 것으로서 하루를 시작하여 아버지의 것으로서 이 시간까지 왔는가, 또 아버지께서는 나에게 얼마나 관심을 가지고 계시는가를 생각하게 될 때, 가치있게 지내야 할 하루를 아무것도 남기지 못한 빈 몸을 가지고 세상의 마음을 지닌 하루가 아니었나를 생각하며 침상에 누워 아쉬워하며, 아버지 앞에 눈물로써 사죄하고 침상에 누울 줄 아는 자녀들이 되게 허락하여 주시옵소서.

저희들은 감사하는 생활을 해야 되겠사옵니다. 매를 맞는 자리에서도, 피를 토하는 자리에서도 감사의 생활을 해야 되겠사옵니다. 수많은 선조들이 그러한 자리에서 아버님을 배반했기 때문에 그런 역사적인 서러운 한의 심정을 품고 오신 아버지에게 효(孝) 중의 효의 도리와 충(忠) 중의 충의 도리를 다해야 할 저희들인 것을 아옵니다. 여기에서 내가 원망과 불평을 가지고는 그 자리에 설 수 없다는 것을 알게 하여 주시고, 그러한 자신을 발견할까 두려워하는 모습이 되게 하여 주시옵소서. 세상에서는 불쌍하고 약한 사람이지만 이런 사람 이상 무서운 사람이 없다는 것을 알게 하여 주시옵소서.

아버지의 동정에 여운을 남겨 놓고 거기서 살 수 있는 아들이 되어, 아버지께서 영계의 수많은 선조를 통하여 아무개를 사랑하고 권고할 수 있는 정도의 동정을 받지 않고는 타락의 탈을 벗고 아버지 앞에 나설 수 없는 운명의 길에 서 있는 것을 아옵니다.

그러므로 감사하는 마음으로 모든 것을 맞을 수 있고, 내 몸이 지쳐 지탱할 수 없을 정도의 자리에 있을지라도, 아버님께서는 이 보다 더 심한 수난의 길을 극복해 나오시면서 나를 그리워했다는 사실을 생각하면서, 내가 이 수난을 넘고 나올 수 있어야만 아버지의 슬픈 과거를 위로해 드릴 수 있는 아들이 된다는 사실을 발견하고 가야 할 자신으로 성별하여 아버지 앞에 제물로써 완전히 바쳐지는 아들이 되어야겠습니다.

저희들은 감사하며 생활하는 것밖에 없습니다. 한 남자 앞에 맺어진 아내가 부족할지라도 생애를 통하여 봉사할 수 있는 그 무엇이 있기 때문에 그 아내를 주신 것을 감사해야 되겠고, 혹은 자식이 나에게 십자가의 일생을 주어도 그럴 수 있는 자리를 마련해 주신 것을 감사해야 되겠으며, 환경이 나에게 생애를 가눌 수 없는 절망의 구렁텅이에 몰아넣더라도 그것을 어떠한 조건을 세워서라도 감사의 인연으로 남기고 쓰러지겠다고 할 수 있는 아들이 되고, 아버님의 사람이 되게 허락하여 주시옵기를 간절히 바라옵고 원하옵니다.

저희들에게는 민족을 앞에 놓고 가야 할 책임이 있습니다. 또한 가정이 당하는 수난 이상의 길이 있는 것을 아옵니다. 내 생활이 어려운 것은 그때뿐인 줄 아옵니다. 아직도 국가적인 수난의 길이 남아 있다는 것을 생각하게 될 때, 이것을 극복하기 위해서는 늠름한 자세를 갖추어야 되겠사옵니다.

우리 앞에 감당해야 할 국가적인 수난의 길을 넘으면 그보다 몇천 배의 세계적인 수난의 길이 기다리고 있지만 이 길을 가야만 하는 것이 저희들의 운명이기에 살아서 못 가면 죽어서라도 가야 한다는 것을 저희들은 알아야 되겠습니다. 하오니 어떠한 수난이라도 항상 감사하며 맞을 수 있는 아들의 자세를 갖추게 하여 주시옵소서. 그러지 않으면 아버지께서는 나를 대하여 통곡의 눈물을 더할 수밖에 없음을 아옵니다. 내가 천대받고 죽음의 길을 밟아 가는 한이 있더라도 아버지를 위해 드리고 가는 아들이 되고, 충신이 되게 허락하여 주시옵기를 간절히 부탁드리고 원하옵니다.

아버지, 1970년 이해를 축복하여 주시옵소서. 통일의 자녀들이 이제부터 마음으로 감사하게 허락하여 주시옵고, 위로부터 어떠한 명령이 있더라도 그 명령에 따라 달려가고 달려가다 쓰러지는 자리에서도 감사하는 마음을 가지게 하시옵소서. 저희들이 아버지를 붙들고 기도하는 자리는 생명의 그 무엇을 주고도 살 수 없는 명예의 기점이라고 자랑하면서 감사할 수 있는 자녀들이 되게 하시옵소서.

70년대에는 하늘의 운세를 맡기기에 부족함이 없는 아들이 되게 하시옵고, 그 아들 위에 딸을 세워 그 가정이 아버지의 복을 받는 가정이 되게 허락하여 주시옵기를 간절히 부탁드리고 원하옵니다.

이번 기간이 저희들에게 특별한 기간이 되게 하시어서 내일의 새로운 약속의 계기를 마련하게 하시옵고, 아버님의 영광을 위해 하늘의 정병이 되어 승리의 방패를 들고 용맹하게 달려가는 하늘의 역군이 되게 허락하여 주시옵기를 부탁드리면서, 모든 말씀 참부모의 성호 받들어서 아뢰었사옵나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