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9-314 to 29-325: 소생의 환희

소생의 환희
1970.03.13 (금), 한국 통일산업(구리시 수택리)

29-314
소생의 환희
사람을 중심삼고 볼 때, 많은 사람과 관계를 갖고 많은 것을 계획하는 것은 자기의 기쁨의 대상을 만들기 위해서라는 것을 우리는 알고 있습니다. 여기서 우리는 창조주가 계시다면 그 앞에 지음 받은 피조만물도 창조주의 기쁨의 대상으로 지어졌다는 결론을 내릴 수 있는 것입니다.

29-314
환희는 어떤 때에 생기는가
`소생의 환희’ 라는 내용을 놓고 먼저 하나님께서 만물을 창조하신 과정을 쭉 살펴보면, 단계적으로 지으시려고 생각하신 때가 있었을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처음에는 관념적인 때가 있었다는 것입니다. 창조하려는 전체의 우주를 당신의 마음 속에 미리 그려 놓고 앞으로 현현할 대상의 세계, 즉 실체세계를 순차적으로 창조해 나가려고 생각한 때가 있었다는 것입니다.

성경을 보면 하나님께서 피조만물을 말씀으로 창조하셨다고 되어 있습니다. 그렇지만 생각하는 단계에서 말씀으로 창조하는 단계로 간다는 것은 비약이 아닐 수 없습니다. 생각이라는 것은 여러 가지 내용으로 할 수 있겠지만 그 생각이 체계화되어서 하나의 목적을 지향하고 말씀의 형태로 나타나려면, 거기에서 새로운 무엇이 가해지지 않고는 거기에서 더 이상 발전할 수 없는 것입니다.

또 말씀만으로는 이 모든 것이 이루어지지 않습니다. 말씀과 일치될 수 있는 실체적인 내용이 있어야 합니다. 다시 말하면 말씀에 입각하여 실체를 구성할 어떠한 힘이 가해져야 된다는 것입니다. 말씀을 중심삼고 볼 때에 이 실체라는 것은 보다 발전적인 소생의 형태가 아닐 수 없습니다. 이러한 실체가 나타난 자리에 비로소 기쁨이 생깁니다. 또 기쁨이 생기면 거기서부터 화동의 역사가 벌어집니다. 그리하여 나타난 실체가 어느 단계까지 발전과정을 거치면 거기에 비로소 사랑이라는 것이 가해지는 것입니다.

이것이 하나님께서 피조만물을 창조하신 과정의 형태입니다. 먼저는 생각이 있었고, 거기에 말씀이 플러스되어 실체를 이루고 그 실체 위에 사랑이 가해진다는 것입니다.

이와 같은 창조과정을 통해서 만물이 생성되었다는 것입니다. 생각하는 단계에서 체계적인 말씀의 단계로 갔을 때, 즉 이렇게 이렇게 창조해야 되겠다고 막연히 생각하는 단계에서 구체적인 내용을 첨부시켜 하나의 이론적 체계를 갖춘 말씀의 형태를 이루었을 때 거기에 말할 수 없는 기쁨이 생기는 것입니다.

어떤 작가가 자기가 구상하던 것을 작품에 표현했을 때 완성된 작품을 보면 기쁨이 생기는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나아가서 그 작품이 영화화되거나 극화되어 그것을 자기가 보게 되면 거기에는 보다 큰 환희가 생기는 것입니다.

마음으로 생각했던 것이 이론적으로 체계화되고, 체계화된 그 이론을 기반으로 하여 실체가 갖추어지고, 그 실체가 전체와 관계를 맺을 수 있게 되어 전체가 바라는 기쁨의 내용이 된다면, 그 실체는 가정 귀한 존재가 되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오늘날 우리 인간을 두고 볼 때, 하나님께서 천지창조의 이념을 중심삼고 사람 하나를 창조하시기 위해 무한히 애썼다는 것을 생각할 수 있습니다. 어떠한 과정을 통하여 어떤 모양으로 지을 것인가 하는 것을 생각하셨다는 것입니다. 인간 역시 말씀으로 창조하셨습니다. 그래서 이상하신 대로 사람은 이런 형태로 짓는다고 작정해 가지고, 눈은 이렇고, 코는 이렇고, 손은 이렇고, 발은 이렇게 지은 것이 사람입니다. 사람을 짓기 전에 사람의 모양이 이렇다고 설명할 수 있는 체계를 모색한 후 그 기반 위에 실체적인 만물과 연결시켜서 인간을 창조하셨다는 것입니다.

이처럼 하나의 실체로 창조된 인간이 전체 만물 앞에 중심 존재로 서게 될 때 하나님께서는 보다 크게 기뻐하실 수 있지 않겠습니까? 거기서 하나님께서 기뻐하실 수 있는 가치의 내용은 결정되는 것입니다. 아담이 바로 그런 입장에 섬으로써 그 기반 위에 해와를 지은 것입니다. 여기에서 비로소 사랑이라는 것이 생기는 것입니다. 사랑은 반드시 횡적인 기반을 통해서 상대적인 가치의 내용이 결정된 자리에서 성립된다는 것을 우리는 잘 알고 있습니다.

29-316
하나님 앞에 갈 수 있는 가장 빠른 길
이런 것을 생각할 때 우리가 만물을 대함에 있어서 하나님 앞에 갈 수 있는 길은 어떤 길일 것인가? 사회면 사회, 가정이면 가정을 중심삼고 하나님 앞에 가까이 갈 수 있는 길은 어떤 길일 것인가? 막연하게 하나님 앞에 가까이 가려고 하기보다는 하나님께서 지금까지 걸어오신 길을 더듬어 가는 것이 제일 빠른 길입니다. 만일 사람이라는 존재가 이 땅에 없다면, 생각을 가진 `자기’ 라는 존재가 땅 위에 없다면 하나님께서 인간을 지으시기 위해 생각하시던 그 입장을 어떻게 증명할 수 있겠습니까?

하나님은 당신의 생각을 체계화하고 이론화해서 그것을 중심삼고 바라시던 형태대로 사람을 지으시고 그 사람에게 비로소 하나님의 사랑을 부어 주고자 하셨던 것입니다. 이런 관점에서 볼 때 타락한 인간은 자기 자신을 복귀시키지 않으면 안 될 입장에 있다는 것을 알아야 되겠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들에게 가장 문제가 되는 것은 내가 무엇을 실천하는 것 보다 자신이 어떠한 존재인가를 아는 것입니다. 오늘날까지 `인간은 어떤 존재냐’ 하는 문제를 해명하지 못한 채 역사는 흘러 나왔습니다. 인간은 어디서 와서 어디로 가느냐? 도대체 나 자신이 어떤 존재나 하는 문제를 해명해야 됩니다. 그것을 해명하려면 하나님의 말씀을 찾아서 본래의 인간 모습을 재현시켜야 되는 것입니다. 우리는 지금 그 단계를 찾아 올라가고 있습니다.

오늘날 가장 문제가 되는 것은 인간들이 추구하고 있는 이상세계, 유토피아적인 이상세계를 이루는 것보다도 인간이 어떤 존재냐 하는 것을 해명하는 것입니다. 타락한 우리에게 있어서 가장 큰 문제가 `나 자신’이 어떠한 존재나 하는 것을 해명하는 것입니다. 이것을 해명하는 데 있어서 어떻게 말씀으로 표현해야 하느냐 하는 것이 문제라는 거예요. 그렇게 해명하는 것이 지금까지 철학이나 종교가 추구해 온 최고의 목적입니다. 인간의 존재를 해명하여 만천하에 드러낼 수 있는 말씀의 형태를 어떻게 갖추느냐 하는 것이 문제입니다.

인간 시조가 타락함으로 말미암아 인간은 하나님의 생각에서부터 말씀의 형태를 갖추어 실체화된 인연을 잃어버린 입장에 있기 때문에, 여러분은 다시 말씀을 찾아 들어가야 됩니다. 찾아 들어가는 데는 어디까지 찾아 들어가야 되느냐? 하나님의 생각의 바탕까지 찾아 들어가야 됩니다. 다시 말하면 말씀을 통해서 하나님께서 생각하시던 관념권까지 찾아 들어가야 된다는 것입니다. 그리하여 `하나님께서 생각하시던 것이 이것이었구나’ 할 수 있는 경지에 도달해야 합니다. 그 길이 가장 빠른 길입니다.

하나님의 생각권까지 찾아 들어가서 하나님의 생각에서부터 하나님의 말씀을 통하여 하나님의 실체를 쓰고 다시 나와야 하는 것입니다. 그러지 않고 타락한 실체를 쓴 입장에서 이상적인 세계를 이룰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여러분은 하나님께서 피조만물을 창조하실 때 말씀으로 창조하셨으니, 그 말씀의 내용을 자신에게 재현시켜 가지고 내 자신 속에서 모든 실체세계와 관계맺을 수 있는 말씀의 형태와 체계를 스스로 찾아야 합니다. 그러면 말씀의 체계를 찾는 데서 끝날 것이냐? 아닙니다. 한 단계 더 들어가 말씀이 출발한 하나님의 생각, 즉 하나님의 관념권까지 찾아 들어가야 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문제가 되는 것입니다.

불교에서 참선을 하는 것도 마음의 근본을 찾기 위해서 하는 것입니다. 그러기에 자기의 존재의식을 부정하고 무(無)의 상태를 추구하는 것입니다. 무의 상태, 즉 인간으로 태어난 자체의 존재 의식을 완전히 상실한 권에 들어서게 되면, 다시 말해 의식의 경계선을 넘게 되면 거기서부터는 하나님의 생각권과 관계를 맺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 경지에 도달함으로 말미암아 비로소 내가 아닌 새로운 관념이 소생한다는 것입니다. 그렇게 새로이 소생한 나의 관념은 지금의 생각보다도 더 좋다는 기준일 것입니다. 이런 것을 추구하면서 참선을 한다는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여기서 여러분에게 필요한 것이 뭐냐? 이러한 내용들을 알았다는 것으로 끝날 것이 아니라 마음의 바탕, 즉 생각의 바탕에 접해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현실적인 모든 것을 넘어서지 않으면 안 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외적으로 뻗어 나가는 것보다도 정신을 통일해서 내적으로 깊이 추구해 들어가는 길을 모색해야 됩니다. 이것이 오늘날 기독교에서 말하는 기도생활이 아니겠어요? 여러분이 목적을 세워 놓고 그것을 성사시키려는 기도보다도 하나님의 생각에 접해서 하나님께서 하고 싶어하시는 말씀을 체휼하여 그것을 실천하겠다는 기도가 더 귀한 것이 아니겠습니까? 그렇기 때문에 기도를 하기 위해서 조용한 곳을 찾아가는 것입니다.

29-318
새로운 나로 소생하기 위한 근본문제
이제 여러분들은 지금까지의 모든 의식을 초월해서 하나님과 관계를 맺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하나님과 관계맺을 수 있는 범위가 얼마나 클 것인가? 만일 하나님께서 천지를 창조하시기 전에 생각을 하시던 경지에 도달하게 되면 그 범위는 무한점에 접할 것입니다. 그리고 그것은 온 세계를 포괄하고도 남을 수 있는 바탕으로 하고 새로운 자각을 일으키는 것이 창조의 출발이고 소생의 원점입니다.

하나님께서 `이렇게 한다’ 라는 결정적 기준을 세우시고 인간을 소생시켰던 것과 마찬가지로 우리도 무한한 경지를 추구하는 자리에서 `나는 이렇다’할 수 있는 자각 기준을 세우고 체계적인 말씀을 통하여 `나 자신은 이렇게 해야 된다’는 결정을 지어야 합니다. 거기서부터 새로운 제2의 내가 소생하는 것입니다.

이러한 기반에서 자신을 발견하고 이러한 기준에서 자신의 존재의식을 느끼게 되면, 그때의 자신은 지금까지의 자신의 모습과 다릅니다. 즉, 거기에서 하나님께서 생각하시는 입장에 동참할 수 있는 관념이 생긴다는 것입니다.

여러분이 지방에 전도 나가서 말씀을 전하게 될 때에 자기도 모르는 말이 나오는 것을 경험했을 것입니다. 사람의 몸은 마치 텔레비젼이나 라디오와 같아서, 공명될 수 있는 상대적인 여건만 갖추게 되면 반드시 파장을 받아 공명된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공명하려면 그 파장에 완전히 주파수를 맞출 수 있는 속성을 갖추어야 됩니다. 그래야 공명되는 것입니다.

그러기에 우리들 자신에게 그런 경지, 다시 말하면 순수하고 깨끗하고 고요한 경지에 이르겠다는 마음의 자세가 필요한 것입니다. 그렇게 되면 하나님께서 창세 전에 생각하셨던 그 관념과 일치될 수 있는 경지에 들어가게 되고, 거기서부터 하나님의 관념의 파장이 자신에게 찾아와 자신이 거기에 공명하게 되는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자신이 공명적인 요소를 갖춘 본질에 통하게 된다면 공명적인 결과가 반드시 나타난다는 것입니다. 이러 입장을 자각하여 하나님께서 바라시는 우주 창조의 목적관을 갖고 나서게 된다면, 이 사람은 실체 세계의 역사에 있어서 새로운 인물이 되지 않을 수 없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에게 있어서 가장 중요한 것은 말씀의 배후, 즉 말씀의 바탕이 되어 있는 하나님의 생각권내를 어떻게 추구해 들어갈 것이냐 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오늘날 우리에게 무엇보다 중요한 문제입니다.

여러분이 지금까지 말씀을 들었으면 들은 그날부터 말씀대로 행동해 나가야 됩니다. 통일교회면 통일교회의 원리말씀을 중심삼고 통일교회에서부터 복귀노정을 따라 움직여 나가야 한다는 것입니다. 말씀의 배후에 있는 하나님의 생각을 체휼하여 말씀이 중심을 잡고 설 수 있는 자리에서부터 출발해야 됩니다. 그런데 그런 내용을 갖추어 하나님과 관계맺는 자리가 아니라 하나님과 간격을 두고 한 단계 떨어진 입장에서, 즉 하나님과 관계맺지 못한 입장에서 전도를 나가기 때문에 돌아오게 되면 환희를 느끼는 것보다도 오히려 감소감을 느끼고 실적이 저조함을 느끼는 것입니다. 그런 사람은 오래 못 가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창조의 법도, 즉 창조과정을 보아도 하나에서 둘을 창조할 수 있는 인연이 되어서 둘이 창조되었을 때에 하나님께서는 보다 큰 기쁨을 느꼈습니다. 하나를 창조했을 때의 기쁨보다도 둘을 창조했을 때의 기쁨이 크다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자신이 전한 말씀을 통하여 감동 받는 실체를 보았을 때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듯이 기뻐하며 그 실체들을 대할 수 있겠습니까?

여러분 스스로가 갖추고 있는 실력 기반을 중심삼고 말씀을 전하고 나면 점점 감소감을 느끼게 됩니다. 그것이 가면 갈수록 환희의 세계로 발전되는 것이 아니라 점점 끝을 바라보는 입장에 부딪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다가 맨 나중에는 자신을 가눌 수 없는 경지에 다다르게 됩니다. 자기가 지금 그런 경지로 가고 있다는 것은 본연의 자세, 즉 그 당시의 말씀을 시작하시던 하나님의 생각과 일치된 자세를 갖추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필연적으로 그런 귀결점에 이르게 되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여기에서 문제가 뭐냐? 말씀을 들고 밖으로 나가기 전에 말씀을 안고 말씀의 내면을 찾아 들어가서 하나님의 마음 바탕에 일치되기 위해서 노력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가장 큰 문제입니다. 그런 다음에 그것을 바탕으로 실천할 수 있는 분야에 나가 움직여야 합니다. 이렇게 열이 움직이게 되면 그 열은 열로 소모되는 것이 아니라 백에 해당할 수 있는 실체적인 권한을 창조하는 창조능력의 역사로 연결되어 나갈 것입니다.

예컨대 발전소에서 전기를 일으켜 송전소를 통해 가정으로 보낼 때 전구까지 선이 연결되어야만 언제든지 빛을 낼 수 있는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여러분도 근원에 접선되지 않고는 힘을 발휘할 수 없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의 근본문제는 근원과 어떻게 연결되느냐 하는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우리에게 가장 큰 문제가 되는 것은 하나님의 심정이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타락한 인간은 하나님의 심정과 일치될 수 있는 결과적 입장에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떠나서 하나님과 배치되는 자리, 하나님과 상극되는 자리에서 일치점을 모색하는 입장에 있습니다. 그러면 어디에서 하나님과 일치할 것이냐? 말씀에서 일치해서는 안 됩니다. 즉 말씀만 일치되는 것이 아니라 말씀의 근원이 되는 마음에서부터 일치되어야 합니다. 이것이 이제부터 여러분이 추구해야 할 문제입니다.

29-321
하나님의 마음바탕을 느낄 수 있는 경지에 가려면
그렇게 하려면 어떻게 해야 되느냐? 거기에는 기도가 필요합니다. 여러분에게 기도생활이라는 것은 그런 의미에서 가장 중요한 것입니다. 기도생활을 하면 형용할 수 없는 기쁨이 오는 것입니다. 그 경지가 창세전 하나님의 생각의 경지입니다. 여러분이 그러한 경지에서 `이렇다’ 하는 내용을 갖고 설명할 수 있는 입장에 서게 된다면, 그 입장이 바로 하나님께서 천지만물을 창조하시던 입장이 아니겠습니까? 하나님께서 말씀으로 피조물을 창조하시던 입장이 아니냐는 것입니다. 그러한 경지에서 말씀을 선포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사람들도 반드시 그 말씀과 접하려고 하는 것입니다.

사랑의 핵심은 반드시 본성에 공명될 수 있게끔 되어 있기에 본심이 감동되는 날에는 대상은 반드시 거기에 일체화하려고 합니다. 이렇게 되어 대상이 주체 앞에 실체로서 다시 지음 받고자 하게 될 때 비로소 발전이 있는 것입니다. 거기에서부터 하나님을 중심삼은 발전이 가능한 것이지 말씀 그 자체만 가지고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여러분은 지금까지 말씀을 받고서 그냥 좋다는 입장에서 그 말씀의 뿌리를 찾지 못한 채 살아왔던 것입니다. 그러기에 해가 가면 갈수록 발전하는 것이 아니라 도리어 점점 점점 퇴보해 왔습니다. 계속 그렇게 나가면 나중에는 하나님까지도 잃어버리고, 또 그 말씀이 진짜 하나님으로부터 나온 것인지도 모르게 되고, 그 말씀과 내가 어떻게 관계되어 있는지조차 모르는 입장이 되어 버릴 것입니다. 그렇게 되면 망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왜 이렇게 되느냐? 하나님은 무한한 힘의 모체이시기 때문에 그 모체와 연결되어 있는 것에는 반드시 창조적 역사가 벌어져야 할 텐데, 그렇지 않은 원인이 어디에 있느냐? 그것은 우리들이 원칙적인 기준에서 일치되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그러기에 타락한 인간은 지금까지 하나님의 말씀을 찾아 나왔습니다. 지금까지의 인류사는 진리를 추구해 나온 역사입니다.

여기서 우리 통일교인들은 진리의 배후, 즉 하나님의 마음 바탕에 접근해야 합니다. 그러한 자리에 들어가게 되면 무한히 신비로운 경지가 여러분 앞에 펼쳐질 것입니다. 그리고 거기에서는, 말로는 형용할 수 없지만 세상의 모든 것을 초월하는 세상의 모든 능력 이상의 힘이 느껴질 것입니다. 그러니 하나님이 계시다는 것입니다. 안 계시는 것이 아닙니다. 여러분이 그런 경지에 갈 수 있느냐 없느냐 하는 것이 문제입니다.

그러한 자리로 가는 데는 갈라져서는 갈 수 없습니다. 반드시 하나되어야 갈 수 있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정신이 통일이 되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도 천지만물을 창조하실 때에 말씀보다도 먼저 정신을 통일시킨 후 하나의 목적을 두고 이념세계를 추구하셨던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여러분도 그런 생활을 통해서 하나님의 상대적인 입장에서 하나님의 마음 바탕에 접해 수수작용을 하는 가운데 기쁨을 얻을 수 있는 것입니다.

29-322
기도하는 생활과 기쁨
그것은 한꺼번에 강하게 느껴지지 않는 것입니다. 있는지 없는지 모르는 상태에서 감각, 즉 영감에 의해 느껴지는 것입니다. 예를 들면 겨울과 봄의 경계선이 어디서부터냐고 하면 입춘이라고 하지만 입춘날에도 겨울절기에서 봄절기로 넘어가는지 잘 모르는 것입니다. 무심해 가지고는 모른다는 것입니다. 어제와 오늘의 차이를 모르는 것처럼 모른다는 것입니다. 그렇다고 같은 것도 아닙니다. 거기에는 분명히 차이가 있는 것입니다.

그와 마찬가지로 여러분들도 영적인 어떤 모체가 있으면 그 영적이 모체를 중심삼고 그 바탕과 접하여 관계맺을 수 있는 속성을 갖추어서 발육시켜야 됩니다.그것을 완전히 발육시켜서 하나님의 심정과 주고받을 수 있는 관계를 맺어야 됩니다. 그러기 전에 먼저 그런 영적인 모체가 있는지 없는지를 잘 느껴야 합니다. 그 감각이 지극히 미약한 것일지라도 우리는 그것을 중심삼고 나가야 됩니다. 그런 느낌을 절대 잊어버려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어제 무엇을 느꼈으면 오늘은 그 느낌을 중심삼고 오늘의 느낌을 플러스(+) 시켜야 되겠습니다. 365일을 중심삼고 춘하추동 사계절이 돌아가는 것과 같이 마음세계도 하나님의 창조의 과정을 거치며 돌아가는 것이 당연한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처음에 느낀 것이 있으면 그 감각을 절대 잊어버리지 말라는 것입니다. 그것은 자기의 생활권내에 있어서 무엇보다도 절대적인 것이기 때문에 그 느낌을 기원으로 하여 발전할 수 있도록 노력을 해야 됩니다. 그러기에 기도하는 시간이 필요한 것입니다. 그런 경지에서 기도를 하다 보면 기도가 잘 됩니다.

여러분들이 기도를 해보면 알 수 있어요. 기도가 잘 되는 때가 있다는 거예요. 인간의 마음에는 마음의 눈, 즉 심안이 있는데 하나님의 마음의 눈과 자신의 마음의 눈이 상대적으로 딱 맞을 때가 있다는 것입니다. 그때는 자기도 모르게 은혜가 옵니다. 그 신비로운 경지에서의 느낌을 자료삼아 거기에 어떤 느낌을 어떻게 플러스시키느냐 하는 것이 문제입니다.

만일 여러분들이 기도를 통해 그런 느낌을 받게 된다면 하루 기도할 것을 이틀 하고 싶어하고 이틀보다 사흘을 기도하고 싶어할 것입니다. 한 시간 기도하는 것보다 두 시간 기도하는 것이, 두 시간 하는 것보다 세 시간하는 것이 더 나을 것입니다. 이처럼 깊이 들어가면 들어갈수록 그 기쁨이 크게 느껴질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기도하는 때가 계절에 따라서 다른 것이요, 사람들의 소성에 따라 전부 다른 것입니다. 기도하는 시간이 새벽 한 시인 사람이 있고 반대로 낮인 사람이 있습니다. 사람에 따라 다르다는 것입니다. 그러기에 여러분은 자기의 마음이 하나님의 마음 바탕에 공명될 수 있는 경지를 찾아가야 합니다. 그리하여 거기에서 파장되어 들어오는 느낌을 절대시하고 세상의 그 무엇보다도 귀하게 여겨 그것을 붙들고 새로운 기쁨을 찾을 수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완전한 주체는 완전한 대상을 창조하는 것이 원리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내가 사적인 입장이 아닌 순수한 공적인 입장에서 생명을 구하게 되면 대상들이 증거하게 되어 있습니다. 그러므로 대상은 자신이 아무리 어려운 고개를 넘어가더라도 주체를 그리워하게 되어 있습니다. 오늘날 세계의 젊은 통일교인들이 선생님을 사모하는 것도 그 때문입니다. 즉, 공적인 주체의 입장에 있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기도가 필요하다는 것을 알아야 되겠습니다. 알겠지요? 「예」 여러분이 기도할 때는 자기의 사욕을 중심삼고 해서는 안 됩니다. 보다 더 공적인 하나님의 입장에서 하나님을 위해 기도해야 됩니다. 여러분이 힘들더라도 그래야 합니다. 우리가 기도를 하다 보면 문득 자기도 모르는 말을 할 때도 있는데 그것은 하나님께서 만물을 통해서 가르쳐 주시는 것입니다.

29-324
재창조역사의 환희를 맛볼 수 있는 사람이 되라
여러분이 하나님의 일을 하게 될 때는 새가 날아다니고, 토끼가 뛰어놀고, 바람이 불고 하는 것이 모두 하나님의 가르침이 된다는 것입니다. 그 때는 모든 것이 일률적으로 하나님의 가르침이 됩니다. 그러한 천지를 뭐라고 표현할 수 있을까요? 이를테면 그림 같은 먼 산을 바라보고 시공을 초월하여 무한한 세계로 날아가는 느낌을 받는 그런 세계를 어떻게 표현하겠습니까? 그러한 경지에서 흘러가는 물을 바라보면 그 물이 언제 어디서부터 흘러온 것인지 알 수 있는 것입니다. 물방울들이 모여 냇물을 이루는 이치를 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세계는 시간과 공간을 초월한 세계입니다. 그에 반해 역사는 현실적인 감각권내에 나타나는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피조세계에서 아무리 크다 하는 것이라도 현실적인 감각권내에 있는 것입니다. 그렇지만 천태만상의 내용들, 우리가 보고 느낄 수 있는 것들은 무한한 것입니다. 따라서 여러분이 그러한 감정을 느끼려니 기도가 필요한 것입니다. 여러분은 이것을 알아야 합니다.

예수님은 기도할 때 무엇보다도 어떻게 하나님편으로 넘어가느냐 하는 문제를 놓고 기도했습니다. 여러분도 그렇게 넘어가려면 본연의 세계에서 슬퍼하시는 하나님의 마음 바탕을 찾아 들어가야 됩니다. 그리하여 거기에서 비로소 구체적인 내용, 즉 말씀을 가지고 실천해야 됩니다. 그런데 여러분, 말씀을 중심삼고 실천했어요? 여러분이 하나님의 마음 바탕에 연결되어서 말씀을 중심삼고 실체를 갖추게 되면, 하나님과 같은 입장이 되기 때문에 재창조의 역사가 벌어지는 것입니다. 알겠어요? 재창조의 역사가 벌어지게 되면 사랑이 번식됩니다. 그렇기 때문에 제물이 필요한 것입니다.

예를 들면 한 시간 이내에 죽을 수밖에 없는 환자가 생겼는데 의사가 주사를 놓아서 그 환자가 죽지 않고 깨어나게 되면 그 의사는 거기에서 보람과 환희를 느끼게 됩니다. 한 사람의 환자가 죽음에서 해방되는 것이 의사에게 있어서 커다란 기쁨이라는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높고 낮은 차이는 있을지 몰라도 그러한 의미에서 한 사람의 위정자에 의해 나라가 살아나는 일도 벌어질 수 있는 것입니다.

문제는 여러분이 말씀을 알았지만, 하나님께서 마음의 기쁨, 즉 자녀가 나타난 것에 대한 환희와 기쁨을 못 느껴 보셨다는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말씀에 대한 환희는 느꼈지만 마음으로 환희를 느껴 보지 못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여러분에게 기도의 생활이 필요하다고 하는 것입니다. 말씀은 갖추어져 있으니 이제 하나님께서 창조하시고 느끼시던 마음의 환희를 여러분이 느껴야만 재창조의 역사가 나타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천지를 주관할 수 있는 그 사랑의 힘이 바로 창조과정에서 나타난 환희의 본질입니다. 여러분들이 이 원칙을 떠나서는 앞으로 부활의 시간을 기대할 수 없다는 것을 알아야 되겠습니다.

여러분 자신으로 말미암아 다른 사람들이 부활되었을 때 느낄 수 있는 환희를 맛보아야만 비로소 완전히 복귀된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않겠지요? 「예」

29-325
기 도
아버님, 당신의 무한히 넓고 깊으신 심정에 저희들이 접하여야 되겠사옵니다. 있으면서도 없는 듯한 당신의 마음 바탕에 접하여 무한한 세계의 중심으로서 신비로운 경지를 체험하는 그 한날을 갖지 못한 저희들을, 아버지, 불쌍히 보시옵소서. 말씀을 통하여 스승 된 자리에, 한 중심에 있지만, 당신의 자녀들을 종횡으로 당신과 연결시키지 못 했다는 것을 생각하면 생각할수록 지금까지 저희들이 활동한 것이 너무나 허무하다는 것을 느끼게 되옵니다. 자기를 중심삼고 출발하여 책임을 하지 못한 실체는 반드시 허무하게 된다는 것을 알았사옵니다.

오랫동안 움직이고 보니 스스로 마음이 지쳐서 더 이상 갈 수 있는 여력이 없는 자신들을 바라볼 때에 이와 같은 모습을 바라보시는 아버님이 얼마나 슬퍼하실 것인가를 생각하게 하여 주시옵소서.

아버지께서는 6천년이란 기나긴 세월을 통하여 준비해 오신 역사적인 인연을 품고 저희들을 찾아 오셨사옵니다. 아버지를 알아 모시고 부활의 역사를 일으켜야 함에도 불구하고, 환경적 사위기대를 갖추어 내적인 기반을 닦아야 함에도 불구하고 아버지를 저버리고 지금까지 자기를 중심삼고 움직여 나온 저희들의 너무나 허무하고 어리석고 유치한 소치들을 용납하여 주시옵소서.

저희가 고요한 심야에 홀로 앉아 있더라도 거기에 아버지께서 함께 하시어서 가까운 형제나 친구보다도, 그 누구보다도 더 친밀하게 아버지와 더불어 기쁨의 심정을 나눌 수 있는 자녀들이 되게 허락하여 주시옵소서. 실체의 권한을 가진 저희들이 사명을 완수하려면 자신의 입을 열어 말씀을 전파하고 어려운 순간들을 수습해서 부활의 권을 이루고 재창조의 역사를 일으켜야 한다는 것을 확실히 아는 자녀들이 되게 허락하여 주시옵소서. 또한 지금까지 말씀을 전하고도 말씀의 권위가 얼마나 큰 것인가를 몰랐던 저희 자신들임을 깨닫게 하여 주시옵소서.

통일의 운세가 얼마나 강하다는 것을 알고, 당신께서 얼마나 이곳에 자유스럽게 임재하고 싶어하시며 실질적인 내용을 갖춘 저희들에게 다짐받고 싶어하시는가 하는 것을 저희들이 알게 하여 주옵기를, 아버님, 간절히 바라옵고 원하옵니다.

철이 없던 저희들인 것을 알고 있습니다. 지금까지는 어린아이와 같았사옵니다. 이제 참된 사람의 모습을 갖추어야 되겠습니다. 타락의 인연을 무시하고 새로운 인연을 맺을 수 있는 것이 커다란 축복이라는 것을 알게 허락하여 주시옵소서.

아버지, 이제부터는 아버지의 마음부터 찾아가야 되겠습니다. 그러하오면 저희의 걸음에 아버지께서 같이하실 줄 아옵니다. 아버지께서 동정하시지 않을 수 없는 경지에서 아버지를 향해 나가야 되겠사오나 그러지 못한 것을 용납하여 주시옵소서.

저희들이 굶더라도 아버지께서 굶으신 것 이상의 배고품을 느껴야 되겠고, 저희들이 외로운 자리에 있더라도 그 이상 외로운 자리에 계시는 아버지를 위해 정성을 들어야 되겠사옵니다. 아버지의 동정을 받을 수 있는 자리에 있는 사람은 망하지 않는다는 것을 저희는 알고 있사옵니다.

누가 알아주는 것이 도리어 무서운 사실이요, 누가 가까이해 주는 것이 도리어 무서운 사실임을 알게 하여 주시옵소서. 누가 알아주기 전에, 누가 가까이해 주기 전에 아버지께서 알아주시고 아버지께서 가까이해 주시는 것이 행복 중의 행복이요, 희망 중의 희망이라고 느끼는 한 때를 갖지 않고는 이 귀한 자리에 설 수 없다는 사실을 알게 허락하여 주시옵기를, 아버님, 간절히 바라옵고 원하옵니다.

아버님, 오늘 저희들이 말씀을 듣고 소생의 환희를 느꼈사옵니다. 이제 다시 아버지의 마음 바탕을 중심삼고 무궁무진한 소생의 환희를 느껴야 되겠사옵니다. 그리하여 천지만물을 창조하시던 당신의 심정을 체휼하여, 저희들이 말씀을 전하지 않을래야 않을 수 없는 입장에 서야 되겠사옵니다. 스스로 입이 열려 말씀이 나오는 자리에서는 기필코 창조의 역사가 벌어진다는 것을 체험하는 자녀들이 되게 하여 주시옵소서.

그리하여 모든 것이 소생하는 창조의 역사를 체험한 사람이 되어야겠습니다. 그 누가 뭐라 하고 그 무엇이 가로막더라도 이 길을 안 갈 수 없다는 것을 알았사옵고, 이 이상으로 가치 있는 길이 다시 없다는 것을 알았사오니, 이 길을 행복의 기원으로 삼고 전체 중심의 가치로 찬양하며 나아갈 수 있도록 인도하여 주시옵소서.

저희들은 지금까지 하나의 중심을 잃어버리고 우왕좌왕하면서 가야 할 방향을 찾지 못하고 살아왔사옵니다. 자기를 중심한 타락의 내용을 벗지도 못하고서 하나님의 섭리역사를 완결짓겠다고 생각한 어리석은 저희들인 것을 다시 한번 느끼게 하여 주시옵소서. 아버님, 간절히 바라옵고 원하옵나이다.

이번 기간 동안 아버지와 하나되겠다는 마음 자세를 갖고 당신을 따라 갈 수 있게 하여 주시옵고, 지금까지 환경에서 느끼지 못한 것들을 느낄 수 있게끔, 아버지, 체험시켜 주시옵소서. 저희가 그러한 생활을 하게 되면 당신께서 동정하지 않을래야 않을 수 없다는 것을 알게 하여 주시옵고, 전체적인 생활권내에서 저희들이 가는 곳에 아버지를 중심한 창조의 실적을 남기지 않으면 안 된다는 사실을 이 시간 확실히 깨닫게 하여 주시옵기를, 아버님, 간절히 바라옵고 원하옵니다.

이번 기간에 당신의 아들딸들을 여기에 모이게 하신 특별한 뜻이 있다는 것을 알고 있사오니, 지금까지 아버지의 신비로운 내적인 깊은 심정을 깨닫지 못하고 모시지 못한 것을 용서하여 주시옵기를 바라옵니다.

사탄세계의 물결에 흘러가는 자들이 되어서는 안 되겠사옵니다. 오히려 세상의 횡적인 모든 것을 모아서 종적인 하나의 중심과 연결 지을 수 있는 기점을 마련하기 위하여 자기 스스로가 그러한 기반이 되고, 중심이 되어야만 하늘의 인연이 같이한다는 사실을 망각하지 말게 하여 주시옵소서. 그것을 망각하면 망할 수밖에 없다는 것을 확실히 깨닫게 허락하여 주시옵기를, 아버지, 간절히 바라옵고 원하옵니다.

통일교회가 지금까지 걸어온 길이 바로 이러한 길이옵니다. 여기에 서서 말하는 스승의 생활철학도 이것이옵니다. 이제까지 병이 채 나기 전에 아버지 앞에 쓰러져 호소한 사람이 있었사옵니까? 당신을 모실 수 있는 환경의 인연과 당신을 중심삼고 승리할 수 있는 내용을 알았기에, 따라갈 수밖에 없는 입장에서 지금까지 나왔사옵니다. 당신을 드러내고 당신으로부터 동기가 된 창조 원칙에 의해서 나아가게 되면, 당신께서는 언제든지 현실적인 방편을 제시하신다는 것을 저는 알았사옵니다. 이러한 사실을 알았기에 원수들이 조롱하고 원수들이 앞을 막았지만 그 길을 타개하여 오늘날까지 통일의 참뜻을 펼쳐 나왔다는 것을 이들이 알게 하여 주시옵기를 간절히 바라옵고 원하옵니다.

사랑하는 자녀나 아내를 앞에 놓고 기뻐하는 것보다도 더 기쁠 수 있는 것은 아버지를 위하여 기도하고 아버지와 더불어 가까이하는 것임을 느끼는 자녀들이 되어야 하겠습니다. 세상적인 호화찬란함이나 육적인 향락을 그리워하는 것보다 아버지와 조화를 이루고 아버지의 품에 안겨 아버지의 사랑권내에서 아버지의 동정을 받을 수 있는 그 자리가 더 귀하다는 것을 알아야 되겠사옵니다. 당신의 동정의 인연으로 생애를 출발하게 될 때에는 당신의 아들딸이 될 수 있고 당신의 가정이 될 수 있다는 사실을 확실히 알게 허락하여 주시옵기를 간절히 바라옵고 원하옵니다.

마음세계의 무한한 경지에 계시는 거룩한 아버지를 모시고 거룩한 참부모의 인연을 중심삼고 아들의 자리를 추구하는 것이 그 무엇보다도 가치 있다는 것을 느끼는 자녀들이 되게 하여 주시옵소서. 그렇게 되면 기필코 창조의 역사가 다시 벌어질 줄 알고 있사오니, 저희들이 그런 사명을 감당하게 하여 주시옵소서.

지금까지 무지했던 자신들을 청산짓고 창조 본연의 인연을 따라 말씀을 실천하는 자녀들이 되게 하여 주시옵기를 간절히 부탁드리고 원하옵니다.

이번 기간을 특별하게 여기시어서, 저희들이 새로운 관심을 갖고 70년대를 훨휠 날아 기쁨의 봄동산을 이룰 수 있게 하여 주시옵고, 그것을 터전으로 발전하기 위하여 달려갈 수 있게 하여 주시옵기를 간절히 바라옵고 원하옵니다.

아버님, 친히 주시옵소서. 참부모의 성호 받들어 아뢰었사옵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