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9-151 to 29-180: 아버지와 아들

아버지와 아들
1970.02.27 (금), 한국 통일산업(구리시 수택리)

29-151
아버지와 아들
하나님께서 만일 이 땅의 만물을 자신만을 위해서 창조하셨다면, 그런 입장에 계신 하나님은 행복하실 수 없습니다. 또한,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만물을 자신의 것으로만 영원히 보관하고자 하신다면, 행복하실 수 없는 것입니다.

29-151
하나님께서 만물을 창조하신 목적
여러분이 무엇인가를 정성스럽게 만들었다면 그 물건을 자신이 갖겠다는 마음보다도 환경적인 인연을 중심삼고 누군가에게 주겠다는 마음을 가져야 합니다. 이처럼 누군가를 위하여 만든다는 것에 더 의의가 있는 것입니다.

그러면 누군가를 위하여 물건을 정성스럽게 만든다고 할 때 그 누구는 어떠한 사람이냐? 사랑하는 사람을 위하여 만들 때에는 사랑하는 그 가치 이상의 것을 만들고 싶고, 그 가치 이상의 것을 주고 싶은 마음이 앞서게 됩니다. 그러한 마음에서 물건을 만들 때 우리는 행복감을 느끼게 되는 것입니다.

이런 관점에서 볼 때, 하나님께서도 천지만물을 하나님 자신을 위하는 마음을 가지고 창조하신 것이 아니라 사랑하는 사람을 위하여 주고 싶은 마음을 가지고 창조하셨다는 데 더 큰 의의가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따라서 하나님께서 천지 만물을 창조하신 것은 누구를 위해서였느냐? 사랑하는 아들딸을 위해서 만드셨다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만물을 창조하신 창조주는 인간을 어떤 자리에 세워 놓고 주고 싶어하실 것이냐? 그 자리는 아들의 자리요, 딸의 자리가 아닐 수 없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아들딸에게 모든 창조물을 고스란히 넘겨 줌과 동시에 자신의 사랑하는 마음까지 플러스(+) 시켜 가지고 주고 싶어하는 마음이 부모의 마음이 아니겠어요? 또한 사랑하는 사람들의 마음이 아니겠어요?

사랑하는 사람끼리 작은 손수건이면 손수건 하나를 주고 받았을 때, 그 하나의 손수건이 귀한 것이 아니라 그 손수건을 통하여 전달되어지는 사랑이 귀한 것입니다. 그 손수건에 전체적 가치를 대신한 사랑이 연결되어 있기에 그것은 무한한 가치를 지닌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아무리 하나님께서 기쁨 가운데에서 이 우주를 창조하셨다고 해도 그것을 사랑하는 자에게 주지 못한다면 하나님은 불쌍한 입장이 되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은 사랑하는 자녀들을 세워 그들에게 당신의 생명 전체와 사랑을 첨부시켜서 창조하신 만물을 몽땅 주려고 하신다는 것입니다.

29-152
하나님의 모든 것을 상속받지 못한 인간
이러한 입장에서, 하나님께서 인간을 대하실 수 있는 한때가 있었다는 것을 생각해 보게 될 때, 진정한 의미에서 우리 인간들이 하나님께서 그렇게 정성들여 지어 주신 만물을 받았느냐? 또, 우리 인간들이 하나님의 품격을 대신할 수 있는 실체 즉 하나님께서 바라시는 실체의 기준을 이루었느냐? 또, 하나님께서 우리 인간에게 주시고자 하셨던 사랑을 받았느냐? 이러한 문제를 두고 볼 때에 오늘날 타락한 우리 인간들은 이 세 가지를 전부 받지 못한 자리에 있습니다. 즉, 우리 인간은 하나님께서 지으신 피조세계를 상속받지 못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피조세계의 중심으로 지어진 우리 인간이 하나님께서 소원하시던 완성의 기준을 넘어서서 하나의 완전한 남자가 되고 하나의 완전한 여자가 되면, 그 인격 앞에 서로를 상대적인 존재로 세워 주고 싶으셨습니다. 그와 동시에 영원히 끊어질래야 끊어질 수 없는 하나님의 사랑을 첨부시켜 주고자 하셨던 것입니다. 그렇지만 인간은 이 모든 것을 받지 못하였습니다.

이것이 한이 되었기 때문에 이것을 수습하기 위해서 우리 인간은 탕감의 조건을 세워 나오는 것입니다. 만물을 받지 못한 인간이었기에 이것을 다시 수습하여 받으려니 제물적인 조건으로 물질을 세워야 됩니다.

그 다음에는 인격적인 조건을 세워야 됩니다. 아담이 타락함으로써 하나님으로부터 피조세계를 완전히 상속받지 못하였기 때문에 아담을 대신한 존재가 나와야 됩니다. 그런데 이것을 상속받는 데는 그냥 받을 수 없습니다. 탕감조건을 세워야 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예수님이 오셔서 인류를 대표하여 탕감의 제물이 되었다는 사실을 알아야 됩니다.

그 다음에는 인간 조상이 하나님의 사랑을 받지 못했기 때문에 이 땅 위에 참부모로 오시는 분도 하나님의 사랑을 받기 위해서는 하나님 앞에 제물을 드려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런 책임이 남아 있다는 것을 우리들은 알아야 됩니다.

우리들은 만물을 상속받고, 실체를 상속받고, 상대적인 인격을 갖추어서 하나님의 사랑까지도 상속받아야 할 텐데도 불구하고 이 모든 것을 상속받지 못했습니다. 이 모든 것을 상속받지 못한 것이 우리의 서러움이요, 원통함인 것을 알아야 된다는 것입니다.

29-153
상속의 자리를 찾아가려면
우리는 어차피 이것을 상속받아야 됩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서든지 이것을 상속받을 수 있는 자리를 찾아가야 되겠습니다. 하나님께서 영광 가운데에서 기쁘게 주고 싶고, 당신의 사랑을 첨부시켜 주고 싶어하는 그 자리를 찾아가야 되겠습니다. 그 자리를 찾지 않고는 상속을 받을 수가 없기 때문에 그 자리를 찾아가야 된다는 것입니다.

그 자리를 찾아가려면 어떻게 해야 되느냐? 만약 그 자리가 기쁜 자리라면 우리도 기쁜 마음을 가지고 찾아가야 되는 것이요, 그 자리가 슬픈 자리라면 우리 자신도 슬픈 자세를 갖추고 찾아가야 되는 것입니다. 그러지 않고는 그 자리를 찾을 수 없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주고 싶어하시는 그 마음 앞에 받을 수 있는 한 상대자를 찾아 기쁨으로 주고 싶어하셨지만 받을 수 있는 한 상대자가 없어 그 자리가 슬픔의 자리가 되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다시 우리가 그것을 얻기 위해서는 하나님 앞에 슬프게 했던 그 이상의 기쁨의 조건을 제시하지 않으면 안 됩니다. 그러지 않고는 받을 자격이 없는 것입니다.

생명의 가치를 자랑하면서 스스로 살아가는 만물을 사랑하는 자녀들에게 상속해 주고 싶은 것이 하나님의 마음입니다. 그런데 그런 자리를 잃어버렸기 때문에 만물도 쪼개야 하는 일이 벌어졌습니다.

만물을 상속받는 그 실체는 만우주의 중심이 되는 것입니다. 또한 주체인 남성 앞에는 그의 대상으로서 여성까지도 주시는 것입니다. 그리하여 그들이 주고받는 자리는 최고의 기쁨의 자리요, 그 부부는 말할 것도 없고 만물까지도 전부 기뻐하는 자리인 것입니다. 그런데 이 자리를 우리 인간은 상실해 버렸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오늘날 우리 인간은 그 자리에서 느낄 수 있는 기쁨에 비례되는 슬픔, 그 이상의 슬픔을 느끼지 않고는 받을래야 받을 수 없는 운명에 처해 있습니다. 이것이 한스러운 복귀노정인 것을 우리가 알아야 되겠습니다. 그 뿐만 아니라 하나님의 사랑을 우리가 무한히 기쁜 자리에서 받아야 하는데도 불구하고, 이것을 무한히 슬픈 자리에서 받지 않으면 안될 운명에 놓여 있는 것입니다. 기뻐하는 자리에서 받고 기뻐하는 자리에서 서로 감사하면서 관계를 맺어야 할 인연을 상실한 우리는 그 자리를 찾아가야 합니다. 그런데 그 자리는 그 반대의 입장에서 찾아가지 않으면 찾을 수 없다는 것을 여러분이 알아야 됩니다. 그렇기 때문에 기나긴 역사과정에 있어서 그 시대시대마다 인간 앞에 나타났던 수많은 제물이 있었습니다. 그 제물들은 어떻게 되었느냐? 그 제물들은 비참하게 희생되어 갔던 것을 여러분이 알아야 되겠습니다.

그러면 제물을 바치는 사람이 제물과 하나되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되느냐? 제물을 바치는 그 자리에서만 하나된다고 되는 것이 아닙니다. 여러분은 이것을 알아야 됩니다. 제물을 둘로 쪼개어 바치는 그 자리에서 뿐만 아니라 제물이 나서 자라 가지고 죽는 그 자리에서까지 완전히 하나되어야 됩니다. 제물이 당하는 아픔, 죽음의 고통을 자기가 당하는 고통으로 느끼지 않고는 제물과 하나될 수 없습니다. 제물을 중심삼고 그 제물이 느끼는 모든 고통을 느끼는 자리에 서지 않고는 자신이 제물되어 고통받았다는 조건이 세워지지 않는 것입니다. 그런 고통을 받아 하나님 앞에 승리의 제물로 바쳐지는 자리가 제물의 자리인 것입니다.

29-155
신앙자들이 넘어야 할 고개
예수님과 인간을 두고 볼 때도 마찬가지입니다. 예수님은 이 땅 위의 인간을 대신하여 제물되어 갔습니다. 그러니 오늘날 우리 인간이 제물된 예수님을 중심삼고 구원을 받느냐 못 받느냐 하는 것은 예수님이 제물될 때까지의 노정 전체를 우리가 체휼하느냐 못 하느냐에 달려 있습니다. 이것을 체휼하느냐 못 하느냐에 따라 완전한 제자가 되느냐 못되느냐, 또는 완전한 믿음의 아들딸이 되느냐 못 되느냐 하는 문제가 결정된다는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예수님의 아픔을 예수님의 아픔으로만 받아들일 뿐 자기 자신과는 관계없는 분립된 입장에 서서 감상만 하는 자들은 자신이 제물되었다는 입장에 서지 못하기 때문에 완전히 구원을 받을 수 없는 것입니다. 제물되신 예수님의 아픔을 자기의 아픔으로 느끼고 제물과 하나된 자리에 선 자만이 구원을 받을 수 있는 것입니다.

더 나아가서는 사랑을 유린당하셨던 하나님의 아픔을 생각하게 될 때, 우리가 하나님의 그 아픔, 그 사랑의 심정을 체휼해야만이 그 하나님의 사랑을 중심삼고 복귀될 수 있는 것입니다. 이러한 인연을 우리들은 알아야 되겠습니다.

그런데 지금까지 예수님을 중심삼고 신앙생활을 해 온 수많은 기독교신도들을 두고 볼 때, 과연 서럽게 태어나서 십자가의 길까지 갔던 예수님의 심정을 체휼했느냐 하는 것입니다. 십자가상에서 만민을 대신하여 피를 흘리면서도 원수를 대하여 복수의 심정을 갖지 않고 오히려 그들을 위하여 기도하지 않으면 안 되었던 그 심정의 아픔이 얼마나 컸겠어요? 예수님이 우리에게 주고 싶었던 것을 완전히 우리가 받으려면 반드시 예수님이 가졌던 아픔 이상의 자리에 서야 됩니다. 그러지 않으면 안됩니다. 우리가 그러한 자리에 서지 않고는 그것을 받을 수 있는 존재가 못 된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우리에게 주려고 했던 것을 우리가 받지 못했기 때문에 예수님은 원한에 사무쳤습니다. 그러면 이것을 받을 수 있는 조건이 무엇이냐? 그것은 원한에 사무친 그분에 대한 동정심입니다. 그럴 수 있는 인연을 자아내지 않고는 받을 도리가 없는 것입니다.

그러면 예수님의 죽음을 중심삼고 볼 때에, 예수님이 누구를 위해서 돌아가셨는가? 만민을 위해서 돌아가셨습니다. 오늘날 우리 자신을 위해서 돌아가셨습니다.

그러면 그분이 우리를 위해서 돌아가시게 된 동기는 무엇이냐? 배반의 역사를 엮어 왔고 천륜 앞에 용납 받을 수 없는 입장에 선 우리이기 때문에 그런 우리를 대신해 돌아가신 것입니다. 그렇게 우리 대신 돌아가신 그분의 아픔을 우리는 동정해야 할 것이 아닙니까? 그러면 우리가 지은 죄를 넘고 나서 그분을 동정할 수 있고, 또 죄를 넘고 나서 우리가 동정 받을 수 있는 자리가 어디냐? 제물이 되지 않고는 승리의 자리, 기쁨의 자리는 우리 앞에 있을 수 없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신앙자들이 넘어야 할 고개요, 제물 드리는 자로서의 가야 할 내정적인 일치점이라는 것을 여러분들은 확실히 알아야 되겠습니다.

29-156
종적인 역사를 일시에 횡적으로 탕감해야 할 우리
우리 축복가정을 중심삼고 볼 때, 부부는 하나님의 사랑을 중심삼아 가지고 하나되어야 된다는 것입니다. 부부로 축복해 주신 것은 사랑을 중심삼고 연결된 것, 하나님이 줄 수 있는 최고의 것을 주신 것입니다. 이런 것을 두고 볼 때에, 그것을 완전히 우리의 것으로 받을 수 있는 자리는 어떠한 자리인가? 다시 말하면, 하나님의 기쁜 마음으로 주고 싶었던 그 자리는 어떠한 자리인가?

아담 해와가 타락한 것이 기쁨으로 줄 수 없었던 동기가 된 것을 생각하게 될 때, 우리는 그들 이상의 자리에 나가서 `너희는 아담 해와보다 낫다’는 말을 들을 수 있는, 동정을 받을 수 있는, 긍휼히 여김을 받을 수 있는, 다시 생각할 수 있는 인연을 그 가정에서 이루어 놓아야 됩니다. 그렇게 되면 그것이 비로소 하나님의 사랑을 재차 유발시킬 수 있는 동기가 된다는 것을 우리는 알아야 하겠습니다.

이러한 입장에서 신앙이라는 문제를 앞에 놓고 복귀의 길을 더듬어 가야 하는 오늘날의 우리들은 종적인 역사를 횡적으로 탕감해야 합니다. 6천년 역사를 한 시대의 시점에서 일시에 탕감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지금까지의 소생 2천년, 장성 2천년, 완성 2천년의 3단계로 이어온 종적인 역사를 오늘날 우리 시대에서 횡적으로 탕감해야 합니다. 그러면 무엇으로 종적인 역사를 횡적으로 탕감해야 합니다. 그러면 무엇으로 종적인 역사를 횡적으로 탕감할 것인가? 이것이 중요한 문제입니다.

6천년 역사는 하나님을 중심삼고 제물을 드리기 위한 역사입니다. 만물을 제물 드리게 했고, 아들을 제물 드리게 했고, 자신의 실체를 제물 드리게 했던 그런 역사입니다. 이러한 일을 6천년 동안 거듭해 왔기 때문에 평면 도상에 있는 오늘날의 우리 자신과 우리 가정을 어떻게 아담 개체와 아담 가정과 같은 입장의 인연으로 결속시키느냐 하는 것이 문제가 되는 것입니다.

인간들은 반드시 가정을 가져야 됩니다. 가정을 중심삼고 보면, 가정에는 부모가 있고, 자식이 있고, 물질이 있습니다. 그러면 구약시대, 신약시대, 성약시대에 있어서의 종적인 역사 전체를 횡적으로 전개시켜서 대신할 수 있는 실체가 무엇이냐? 만물과 자녀와 부모입니다. 즉, 부모와 자식과 그들의 소유물입니다. 이것들은 가정의 울타리 안에서 필요한 것들입니다.

그러면 우리가 역사과정에서 하나님 앞에 바쳤던 제물 전체를 총합한 그 이상의 제물을 어떻게 바쳐 드릴 것이냐? 이것이 문제입니다. 다시 말하면 여러분 자신이 지금까지 소유하고 있는 물건을 어떻게 구약시대로부터 지금까지 수많은 사람들이 하나님 앞에 바쳤던 제물 전체를 총합한 그 이상의 가치로서 하나님 앞에 바쳐 드리느냐? 우리가 있기 전부터 역사를 통해 제물을 드려 나오던 그 이상의 제물을 우리가 하나님 앞에 돌려 드리지 않고는 그것을 다시 받을 수 없습니다. 우리 인간으로 인하여 하나님이 이것을 잃어버리게 되셨기 때문에 드려 가지고 다시 받아야 됩니다. 드리지 않고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29-158
하늘 앞에 제물되는 자리
그 다음은 어떻게 자신의 몸뚱이를, 혹은 자기의 아들딸을 하나님이 만민을 구하기 위하여 예수 그리스도를 이 땅 위에 보내어 희생시킨 것과 같은 입장에서 바쳐 드리느냐 하는 것입니다. 또, 지금까지 역사상에서 수많은 사람들이 도의 길을 가기 위해서 제물적 입장에서 희생되어 사라져 간 그 이상의 가치로서 하나님 앞에 바쳐 드리느냐 하는 것입니다. 여러분들은 자기 가정 자체를, 자기의 아들딸을 그렇게 바쳐 드릴 수 있는 자신들이 되어야 합니다. 뜻을 위해서 바칠 수 있는 아들딸을 만들어야 되겠습니다.

여러분은 하나님이 에덴에서 아들딸을 키우던 것과 마찬가지의 입장에서 자기의 아들딸을 키워야 됩니다. 그 아들딸이 타락할 때의 아픔이 얼마나 컸겠는가? 자기 생명의 대신이요, 자기 전체의 존재 가치를 대신하는 아들딸인데 그들이 꺾여 나갔으니 그 비참과 억울함이 얼마나 컸겠습니까? 이런 모든 사연을 전부 해원성사하겠다는 심정과 하나님께 그 해원의 실체로서 바쳐 드리겠다는 마음을 가져야 합니다. 그뿐만 아니라 하나님 앞에 아담 해와가 실체를 드리지 못하였던 것을 탕감하겠다는 마음으로 자기 부부를 실체로 바칠 수 있어야 되겠습니다. 불륜의 사랑으로 부부의 인연을 맺은 것이 원한이 되었으므로, 오늘날 우리는 새로운 하나님의 사랑을 중심삼고 부부의 인연을 갖추어서 그 실체를 하나님 앞에 다시 바쳐 드려야 할 운명에 서 있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그리하여 자기가 소유하고 있는 물질과 자기의 아들딸과 자기 부부가, 즉 가정 전체가 6천년 동안 하나님이 찾아오시던 소원 전체를 부활시킬 제물적 실체가 되어야 합니다. 이 실체의 가치는 현재적인 중심 가치를 대신한 제물이 아니라 역사시대를 대신하고, 미래를 대신한 것입니다. 전체의 제물적인 중심 가치를 대신해서 이 모든 것을 일시에 몽땅 하나님 앞에 바쳐 드릴 수 있는 가정이라야 합니다. 그래서 그러한 가정을 어떻게 만드느냐 하는 것이 문제입니다.

하나님은 이것을 만들기 위해서 예수 그리스도를 메시아로 이 땅 위에 보내셨던 것이요, 이러한 가정을 이루어 하나님께 바쳐 드렸다 하는 한날을 결정짓기 위해서 지금까지 섭리해 나오신다는 것을 여러분들은 알아야 됩니다.

그러면 오늘날 여러분들이 통일교회를 대표해서 지방에 나가 어떠한 책임을 해야 되느냐? 아버지와 아들의 관계를 다시 세워 놓아야 됩니다. 아버지와 아들의 관계를 확실히 알고 다시 세워야 되겠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문제입니다. 여러분은 어느 한때 자기의 소유물을 만유를 대신한 제물적인 가치의 것으로 생각하고 아버지 앞에 바쳐 드렸습니까? 하나님이 지금까지 가인과 같은 인류를 구하기 위해서 자기 아들딸을 희생시켰던 것처럼 여러분의 아들딸을 잡아서 제물 드리는 자리에 섰었습니까? 그뿐만 아니라 여러분 자신이 제물이 될 수 있었습니까? 남자면 남자, 여자면 여자로서 각각 제물이 되는 것이 아니라 부부가 함께 제물 될 수 있었습니까? 가정 전체가 책임을 중심삼고 하나님 앞에 `저희 가정 전체를 아담이 타락한 것을 해원성사 할 수 없는 것이요, 가정적으로 타락한 것을 해원성사 할 수 없는 것입니다. 이것이 탕감의 원칙입니다. 그러면 여러분이 어느 한때에 이런 내용을 가지고 가정을 아버지 앞에 바쳐 드렸습니까? 이러한 문제를 두고 볼 때에 아직까지 바쳐 드리지 못했습니다. 제물로 바쳐 드리지 못했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제물로 바쳐 드리는 그 자리는 어떤 자리라야 되느냐? 아담 해와가 타락하던 당시 하나님이 느꼈던 슬픔 이상의 슬픔을 느껴 하나님으로부터 동정받을 수 있는 내용을 만들어 놓는 자리입니다. 여러분은 그런 자리에 서야 합니다. 그러지 않고는 그 가정이 돌아올 수 없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원칙 아니겠습니까?

이런 관점에서 볼 때 우리 축복가정들이 그러한 입장에 서 있느냐? 또 참부모의 자녀로서 참부모에게 소유권이 있는 그 나라와 그 세계를 위하여 기쁨으로 바쳐질 수 있는 제물이 될 수 있느냐 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문제입니다.

여러분들이 지방에 나가 전도할 때도 자기를 위하여 전도해서는 안됩니다. 왜? 여러분은 제물적인 존재이기 때문입니다. 이런 인생길을 가는 우리 인간이므로 자기라는 것을 생각해 가지고는 안 됩니다. 자기 관념이 개재하면 하나님이 절대 임재할 수 없는 것입니다.

참부모 앞에 설 수 있는 자녀가 되기 위해서는 그 가정 전체가 어떠한 입장에 서 있느냐 하는 것이 문제입니다. 그 가정의 범위가 개체 중심이냐, 민족 중심이냐, 국가 중심이냐, 세계 중심이냐 하는 것을 중심삼고 볼 때에 부자의 인연은 세계성을 띠었을 때 맺어지는 것입니다.

29-160
자기가 없는 자리에 서려면
그러한 관점에서 자기 자신은 `참부모를 중심삼은 자녀의 입장` 에 서기 위한 제물을 입장에 서 있다는 것을 어떻게 자각시켜 나가느냐 하는 것이 문제입니다. 여러분이 자기 자신을 앞세우는 자리에 서게 되면 부모를 배반하게 되는 것입니다. 만일 제물이 되는 자신의 입장을 생각하게 되면 제물 드리는 사람을 배반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면 자신을 생각하지 않는 절대적인 자리는 어디인가? 죽는 자리입니다. 희생하는 자리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제물의 입장에 서려면 죽는 자리에 서야 합니다. 예수님도 제물이 되어 죽었습니다. 누구를 위해서 죽었느냐? 자신을 위해 죽은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위해 죽은 것입니다. 이 자리가 십자가의 자리입니다.

예수님이 겟세마네 동산에서 "내 아버지여 만일 할 만하시거든 이 잔을 내게서 지나가게 하옵소서. 그러나 나의 원대로 마옵시고 아버지의 원대로 하옵소서(마 26:39)"라고 기도했습니다. 여기서 `아버지의 원대로 하옵소서` 라고 한 것이 위대하다는 것입니다. 자기라는 것이 없었습니다. 이런 자리에 섰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제물로 받아들일 수 있는 기준이 세워진 것입니다. 여러분들은 이것을 확실히 알아야 됩니다.

여러분에게 혹 어려움이 있거나 외로움이 있거든 혼자서 눈물 흘리지 말아야 됩니다. `아버지는 어찌하여 이와 같은 한스러운 입장에 서게 되셨으며, 나를 깨워 이 비참한 자리에 세우고 눈물을 흘리지 않을 수 없는 운명에 서 계시는가` 하고 생각해야 합니다. 또, 여러분이 어렵고 분한 자리에 들어서면 `어찌하여 하나님은 이렇게 분한 자리에 들어서지 않으면 안 되었던고? 누구 때문에 이렇게 되었던고? 아들 때문에 그렇게 되었으니 결국은 나 때문에 그렇게 되지 않았는가? ` 이렇게 생각하면서 전체의 책임을 짊어지고 하나님을 모시고 나가야 합니다. 이것이 아담 해와의 사명을 대신하여 탕감하는 자리에 설 수 있는 인연이 아니겠느냐? 여러분들은 이러한 생각을 해야 됩니다.

29-161
소유관념을 초월하라
이제 여러분들이 여기를 떠날 날이 멀지 않았습니다. 3월 초하루부터 재출발해야 되겠습니다. 그런데 여러분이 가는 길에 누구를 모시고, 어떤 모습을 지니고 갈 것인가 하는 것이 문제입니다.

개인을 중심삼고 보면 지금까지 6천년 역사는 아담을 복귀하는 역사입니다. 그러니 여러분 개인은 제물의 입장에 서야 됩니다. 자기가 제물의 입장에 서지 않으면 안 됩니다. 그렇기 때문에 뜻길을 가는 데에는 자기의 피와 땀과 눈물을 다 투입해서 가야 됩니다.

여러분이 과거에 사탄 세계에 있을 때 사랑하는 사람과 선물을 교환한 일이 있으면 그것은 부끄러운 일입니다. 또 자기 조상으로부터 귀한 것이라고 상속받은 것이 있다면 그것도 부끄러운 상속입니다. 그렇찮습니까? 그것은 도둑질해다가 나누어 준 것과 같은 것입니다. 우리 아버지가 도둑질해 온 물건을 자기가 상속받아 가지고 좋아할 수 있어요? 그러므로 이것은 부끄러운 상속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자기가 소유하고 있는 모든 것을 몽땅 불살라 버릴 수 있어야 합니다. 그렇게 해도 시원치 않은 물건을 뜻을 알고 나서도 `이것은 우리 아버지 어머니로부터 상속받은 건데` 하고 귀하게 여기면서 꽁무니에 달고 다니고 자기 품에 품고 다니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여러분은 이런 것에 대해서 확실히 모르고 있습니다. 엄벙덩벙 이래도 좋고 저래도 좋다고 해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그러한 소유물이 문제가 되지 않으면 우리가 가지고 있는 무엇이 문제가 되겠는가? 그러니 우리 자신들의 소유물은 응당히 뜻을 위하여 몽땅 바쳐야 하는 것입니다. 자기 부모가 자기에게 상속해 준 물건이 도둑질한 물건이라는 사실을 알았다면 그 물건을 그 부락이면 부락, 마을이면 마을의 사람들에게 나누어 주기라도 해야만 용서의 길이 열릴 것 아니겠어요?

여러분은 소유관념을 초월해야 됩니다. 오늘날의 이념권내에 있어서의 개인 소유를 완전히 부정시키고 공동소유를 완전히 부정시켜서 그것을 하늘의 소유로 돌려드리는 일을 해야 합니다. 그 일을 위해서 누가 와야 되느냐? 진실된 사람이 와야 됩니다.

오늘날 민주주의는 개인 소유를 말하고 공산주의는 공동 소유를 주장하고 있습니다. 그것들을 하늘의 것으로 바쳐 드려야 할 텐데도 불구하고 하늘은 제쳐 놓고 사람 앞에 바치고 있습니다. 사탄에게 바치고 있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소위 공산주의인 것입니다. 개인 소유를 부정하는 입장에서, 진실된 자리에서 하늘 앞에 바쳐 드려야 할 텐데 공산주의는 여기에 반대입니다. 개인 소유를 부정하기는 하지만 진실된 자리에서 부정하는 것이 아니고 거짓된 자리에서 부정하면서 공동 소유를 요구하기 때문에 공산주의는 망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이것을 망하게 하는 방법은 무엇인가? 진실된 자리에서 개인 소유를 부정하고 세계 인류를 위한 공동 소유로 만들 수 있는 사람이 있어야 합니다. 그런 사람이 있게 될 때, 그때부터 천국화되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그런 자리에 서야 합니다.

29-162
제물의 도리
그러면 우리의 부모는 누구냐? 아담입니다. 우리 자신은 타락함으로 말미암아 죄를 지은 장본인인 아담의 아들딸로 태어난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아벨의 입장에 처해 있습니다. 부모를 복귀시켜 주어야 할 입장에 있는 우리이기 때문에 아벨의 사명을 해야 되는 것입니다. 아벨의 사명은 가인의 책임을 다시 해야 하는 것입니다. 가인이 피를 뿌렸기 때문에 피를 뿌린 자리로 나가야 합니다. 그러려면 존재의식을 부정하고 소유관념을 초월해야 됩니다. 이것이 원리적으로 본 제물된 도리가 아니겠습니까?

여러분은 존재의식을 부정하는 자리에 찾아가야 됩니다. 부정하는 자리뿐만 아니라 피를 뿌리는 자리에까지 가야 됩니다. 즉, 제물되는 자리에까지 가야 됩니다.

하나님이 채찍을 들고 우리의 몸을 치고 나서 받아들이게 되면 우리는 동정을 받을 수 없습니다. 그렇게 되면 우리가 살길이 없다는 것을 알아야 됩니다. 우리가 제물된 입장에서 잡히게 될 때에 하나님이 쳐서는 동정을 받을 수 없다는 것입니다. 그렇게 되면 망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누가 쳐야 되느냐? 사탄이 치는 자리에 서야 되는 것입니다. 그것이 중요합니다.

우리가 하늘의 제물로서, 사탄이 치고 사탄이 받는 자리에 들어가게 되면 하나님께서 부활시켜 주시는 것입니다. 사탄이 때려 죽인 이상의 가치를 첨부하여 부활시켜 주시는 것입니다. 그 예가 예수의 부활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이 친 것이 아니라 사탄이 친 것입니다. 이렇게 해서 예수님이 부활된 제물로 등장한 것과 같이 부활된 제물로 바쳐진 것이 기독교입니다.

그러면 여러분들은 어떻게 해야 되느냐? 자신을 제물삼아 제사를 드려야 합니다. 이삭이 아브라함에게 잡혀서 제물로 드려진 것과 같은 입장에서야 합니다. 여기에는 동정이 없는 것입니다. 제물이 되어서 부활될 수 있을는지는 모르지만 당장에 살아날 길은 없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제물이 되어 바쳐지기 전에 하늘을 위하여 사탄에게 우리가 맞는 자리에 들어가야 되는 것입니다. 그렇게 되면 사탄세계는 무너지는 것입니다. 즉, 탕감조건을 세우기 전에, 조건적인 제물을 바칠 때가 되기 전에 사탄이 손을 대면 사탄세계는 무너지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면 오늘날 우리 통일교회는 어떤 작전을 하자는 것이냐? 여러분이 하늘 앞에 제물로서 완전히 바쳐지기 전에 사탄세계로부터 맞는 놀음을 하자는 것입니다. 사탄은 하늘편의 제물을 받을 도리가 없고, 잡을 도리가 없기 때문에 만약에 이것을 침범한 것이 부락이면 부락이 걸려들고, 나라면 나라가 걸려드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지금까지의 기독교 역사는 기독교를 희생시켜서 전체를 복귀해 나오는 역사입니다.

타락의 동기는 하나님으로 말미암은 것이 아닙니다. 타락한 장본인이 사탄이므로 복귀를 할 때도 사탄편에서 동기를 만들어야 됩니다. 그래서 이 일을 하자니 고생시키는 것입니다. 그 일을 실체 아담을 대신한 예수님이 오시기 전까지는 못 했습니다. 예수님이 오신 후부터 기독교를 중심삼고 세계를 빼앗아 오는 싸움을 해 나오는 것입니다. 무슨 말인지 알겠어요?

그러면 이런 싸움을 하는 데에 누가 도구가 되었는가? 기독교인들입니다. 그들이 죽음길을 걸어서 순교라는 거룩한 피의 대가를 치름으로 말미암아 이 온 세계를 빼앗아 찾아올 수 있고, 사탄세계를 무너뜨릴 수 있는 동기가 되었다는 것을 우리는 알아야 됩니다.

29-164
탕감의 제물이 되어야 할 통일교인들
오늘날 통일교회도 이와 같은 작전을 해야 되겠습니다. 어찌 여러분들을 사지(死地)에 내보내서 숱한 수난길을 걷게 하고 싶겠습니까? 그렇지만 선생님이 그러한 원칙을 알고 있기 때문에 그렇게 하는 것입니다. 그래야 여러분이 제물로서 바쳐질 그날이 다가오지 않겠느냐는 것입니다. 그날은 제물로서의 잃어버렸던 모든 면을 찾게 되는 날입니다.

그 한날을 맞이하기 위해서는, 여러분이 축복이라는 한 날을 맞이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제물적인 과정을 거쳐야 됩니다. 그 자리는 어떠한 자리냐 하면, 무한히 외로운 자리입니다. 왜냐? 하나님이 무한히 외로운 자리에 계시기 때문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 통일교인들이 전부 다 외로운 자리에 있는 것입니다. 가진 것이 없거든요. 돈이 있으면 복잡한 것입니다. 지갑에 든 백 원이 총재산이고 십 원이 총재산이면 거기에 생명을 걸게 됩니다. 어려우니까 하나되는 것입니다.

자기가 가진 십 원을 자기 소유의 전체로 생각할 수 밖에 없는 입장이지만 하나님과는 부자지간이라는 신념을 가지게 될 때 하나님을 대해서는 무한한 가치를 지닌 존재가 되는 것입니다. 이런 마음을 가져야지, 시시한 기준을 바라 가지고는 탕감의 제물이 안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여러분은 가진 것이 없는 자리에서 적어도 3년 동안은 지내야 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3년 공생애노정을 걸을 때 모인 무리들이 배고파하자 제자들에게 가진 것이 무엇이냐고 물은 적이 있습니다. 그러자 제자들이 물고기 두 마리와 보리떡 다섯 개 뿐이라고 했습니다. 그러면 예수님이 지갑에 돈을 넣어 두고 그런 말씀을 하셨겠습니까? 만일 지갑에 돈을 넣어 두고 그렇게 말씀을 하셨다면 예수님은 메시아가 될 수 없습니다. 그렇게 말씀하시기까지 예수님은 지갑을 털어 보면서 이때 돈이 있었으면 하고 얼마나 바라겠습니까? `내게 돈이 있다면 이때에 쓸 수 있을 것을….` 하면서 얼마나 안타까와 했겠습니까? 과거에 돈을 쓴 데가 있었으면 그 돈을 썼던 과거를 후회하면서 이러한 때에 쓰지 못하는 것을 얼마나 안타까와 했겠습니까? `이런 때에 돈을 쓰지 못하면 과거도 현재도 미래도 영원히 후회될 것이다` 하는 그런 한스러운 마음을 품고 하나님 앞에 호소했기 때문에 거기에 새로운 역사가 벌어졌던 것입니다.

29-165
하나님의 아들이 되려면
이와 마찬가지로 이제 여러분도 이적의 역사를 할 수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이 한 조각의 빵을 대해서도 하나님의 아들로서의 가치를 지니고 어떻게 인연을 맺게 할 것이냐? 그렇게 하기 위해서는 굶주리라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그것을 알아야 됩니다.

예수님이 40일 금식을 하는 동안에 사탄이 나타나 `만일 네가 하나님의 아들이거든 돌로 떡이 되게 하라’고 한 것은, 물질의 가치를 얼마나 아느냐, 네 자신의 가치를 얼마나 아느냐, 너를 대하는 하나님과 너와의 관계의 가치가 얼마나 되어 있느냐 하는 것을 시험했던 것입니다.

하나님의 아들이 되려면 물질도 초월해야 하고 자기도 초월해야 됩니다. 다시 말하면 상대적인 모든 요건을 완전히 부정할 수 있어야 됩니다. 하나님만을 사랑해야 복귀의 원칙을 통과하는 것입니다. 하나님만을 생각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런 자리에서 하나님과 예수와의 인연이 맺어졌던 것입니다.

그뿐만 아니라 그 자리는 배고파 굶주릴 때에 떡을 요구하던 그 간절한 마음을, 에덴 동산에서 아담 해와가 타락하던 그때의 욕망을 넘어선 자리라는 것입니다. 또 아담과 해와가 타락하던 당시에 애탔던 그 마음을 넘어선 자리라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온 신경이 곤두서 가지고, 온 몸과 마음이 거기에 견제를 받기 때문에 정신이 아찔할 정도로 심각한 자리에서 40일 금식을 했다는 것입니다. 그 입장이 얼마나 심각했겠습니까? 빵 한 조각이 세상의 그 무엇과 비할 것인가? 여러분들도 금식해 보았으면 알겠지요?

그러니 사탄이 이러한 외적인 모든 환경을 중심삼아 가지고 `하나님의 아들이라면 아들의 특권으로서 무한한 가치와 절대적 권한을 갖고 있지 않느냐’ 할 때, 죽음길 망할 길도 응당히 가야 할 자기 앞에 있어서 빵이 무엇이며 자기 자신이 무엇이냐는 것입니다. 오직 하나님 앞에 자신이 어떻게 서 있느냐 하는 것이 문제라는 것입니다.

이런 입장에서 사탄이 `하나님의 아들이거든 어떻게 하라` 는 것은 `하나님의 아들이거든 그렇게 하지 말아라` 하는 말인 것입니다. 즉, `하나님의 아들이거든 돌로 떡을 만들어 먹어라` 하는 그 말은 하나님의 아들이거든 그렇게 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것을 안 할 수 있겠느냐고 한 것이 시험입니다.

그와 마찬가지로 여러분은 자신의 가치와 물질에 대한 가치를 두고 어떻게 할 것이냐? 천하를 주고도 바꿀 수 없는 나, 하나님과 부자의 관계에 있는 자기 실체와 물질을 놓고 어떻게 할 것이냐는 것입니다.

굶주림 앞에 돈 십 원, 빵 한 개는 세상의 그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것입니다. 이 빵 하나를 놓고 아버지 앞에 눈물을 흘리며 기도할 것은 뭐냐면, `아버지께서 복귀의 도상에서 인류를 찾아 나오시기에 얼마나 얼마나 서러우셨사옵니까? 그 물질이 제물의 입장에 있사오니 그것을 제가 먹고 제가 대신 제물된 입장에서 제 실체를 바치니 이 몸뚱이를 아버지께서 받아 주시옵소서` 라고 할 수 있어야 합니다.

`만물은 인간을 위해서 있는 것이요, 인간은 아버지를 위하여 있는 것이 아닙니까? 하오니 제가 이렇게 물질을 좋아하듯이 아버님도 그렇게 제 몸뚱이를 좋아하시옵소서. 잘 자라서 아버님이 원하시는 힘의 원천이 되어 가지고 그 모든 소망을 성취하는 데 원동력이 되기 위해 저 자신을 몽땅 바쳐 드려야겠사오니 그럴 수 있게 하시옵소서` 라고 할 수 있어야 합니다.

굶주릴 때에 빵을 그리워하는 그런 마음으로 하늘이 나를 그리워할 수 있는 자리에 내가 서야 합니다. 에덴 동산에서 하나님이 아담 해와에게 주시고자 하셨지만, 그들이 타락함으로서 받지 못했던 그 사랑 이상의 사랑을 받을 수 있는 자리에서 내가 출발하게 될 때, 비로소 복귀의 사연이 맺어지는 것입니다.

그런 자리를 찾아가지 않으면 안 됩니다. 그것이 내가 가야 할 길이요, 고빗길입니다. 내가 배고플 때에 빵을 그리워하는 그 이상으로 하나님이 나를 그리워할 수 있는 자리에 서야 됩니다. 그렇지 않고는 복귀가 안 되는 것입니다.

그러려면 어떻게 해야 되느냐? 아버지를 위해서 살아야 합니다. 내가 과거에는 죄인이 아니었는가? 그렇지만 자식을 사랑하시는 아버지이시기 때문에 이 불효자식을 대하는 그 마음이 얼마나 아프셨겠는가? 아버지의 그 아픈 마음을 하염없는 눈물로 적셔 드리면서 이제 다시는 그런 아들이 되지 않겠다고 다짐할 때, 아버지의 아픔은 없어질 것입니다.

과거에 지었던 모든 죄상을 잊어버릴 수 있는 동기를 만들지 않고는 아버지와 아들의 인연을 다시 맺고자 하는 그 소망은 이룰 수 없는 것입니다. 이것은 인간 세상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29-167
나는 어떻게 제물될 것인가
이것을 생각하게 될 때에, 타락의 후손으로 태어난 우리 자신이 복귀의 길을 가는 데 있어서 옷을 잘 입지 못한다고 슬퍼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잘 먹지 못한다고 슬퍼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원수에게 채찍을 맞는다고 슬퍼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그 모든 여건이 처량하고, 엄청나게 반대적인 것이면 그럴수록 그것이 하나님의 아들로서 엄청난 하나님의 심정과 관계맺는 유발점이 된다는 것입니다. 그런 슬픔을 당하는 일이 없으면 하늘의 기쁨과 관계를 맺을 수가 없는 것이요, 그런 십자가의 길이 없으면 평화의 왕자로서 갈 태평로가 생겨나지 않는 것입니다. 전부 이렇게 반대의 현상으로 인해 인연이 맺어진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여러분 자신들도 어느 한 때에 자기 몸 전체를 제물로 드리지 못하였거든, 어떻게 하면 내 자신의 한 가지 한 가지를 제물로 바치는 자리를 거쳐갈 것인가를 생각해야 됩니다. 제물의 길을 거쳐가야 하는 것입니다. 내 손을 어떻게 제물로 만드느냐? 내 발을 어떻게 제물로 만드느냐? 내 머리를 어떻게 제물로 만드느냐? 뜻을 생각하기를 머리가 깨지도록 생각해야 되고, 무엇을 연구할 때는 그것을 위해 자기가 정성들이던 이상 머리가 터지도록 심각하게 생각해야 됩니다. 이 몸이 뜻을 위해서 얼마나 제물 되었는가? 내 이 미모가 뜻을 위해서 어떻게 제물 될 것인가? 이렇게 내 개인의 한 가지 한 가지를 전부다 드려도 부족하거든 한꺼번에 몽땅 바쳐 드릴 수 있는 자리는 없겠느냐는 말입니다.

그런 자리가 있거든 만민들을 대표해서 그런 것을 알고 있는 내가 먼저 자신을 제물로 드려야 합니다. 그런 자리에 서게 될 때에 여기에서부터 역사적인 새로운 세계가 창조되고, 새로운 하나님의 섭리역사가 발전된다는 것을 여러분은 알아야 됩니다.

이것이 오늘날 탕감복귀섭리의 뜻을 아는 통일의 신도들이 가야 할 노정이요, 하늘의 아들딸이 가야 할 정상적인 노정인데도 불구하고, 오늘날 우리들이 살아온 생활 기준과 하늘이 걸어가는 길이 얼마나 먼 거리에 있는가 하는 것을 우리들은 알아야 되겠습니다. 다시 말하면, 하늘 앞에 내 자신을 몽땅 바쳐 드리자는 것입니다.

여러분들, 부부가 살아가는 데 있어서 가진 것이 없다고 한탄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그것을 바라보는 하나님은 더 안타깝고 더 한스러워하시는 것입니다. `너희가 누구 때문에 못사느냐? 네가 힘이 없어 못하는 것이 아니요, 능력이 없어 못하는 것이 아니요, 노력을 안 해서 못사는 것이 아니다. 그 능력과 노력을 오직 나를 위해서 바치며 살기 때문에 못하는 구나! ` 하실 것입니다. 이것이 복이요, 이것이 무한한 가치입니다. 이것이 있음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이 동정하신다는 것입니다.

하늘의 동정을 받지 않고는 복귀의 길을 갈 수 없습니다. 그러니 1970년 3월부터 출발해야 할 여러분의 생활노정에서는 어떻게 하면 하늘의 동정을 받는 자리에 찾아가느냐 하는 것이 문제입니다. 이 자리를 찾지 못하면 아버지와 아들의 인연을 맺을 수 없습니다. 이것을 여러분이 확실히 알아야 되겠습니다.

29-169
아벨이 가는 길
그런 동정의 인연으로 말미암아 한 도(道)에 있어서 하늘의 운이, 혹은 국가의 운이 찾아오게 되면 그 동정의 인연을 남긴 사람을 통하여 그 도민들은 복을 받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복이 아니겠습니까? 한 나라의 운도 마찬가지입니다. 대한민국이면 대한민국을 수습해 가지고 삼천만 민족을 이끌고 갈 수 있고, 하늘로부터 삼천만 민족이 받는 동정 이상의 동정을 받을 수 있는 사람이 있으면 그 사람으로 말미암아 삼천만 민족이 구원받을 수 있는 것입니다. 온 세계 30억 인류를 다 잃어버리더라도 거기에 대표적인 한 사람이 있어서 하늘로부터 30억 인류가 받을 수 있는 동정 이상의 동정을 받는다면 그때부터 30억 인류는 구원받을 수 있는 길이 열리는 것입니다.

메시아가 가는 길, 아담의 사명을 책임진 사람들이 가는 길은 이러한 책임, 이러한 사명을 하기 위해 수고하며 가는 길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수난의 길을 가라는 것입니다. 하나님도 그래서 우리를 아벨이 죽은 경계선까지 몰아넣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노아에게 120년간 수난의 길을 걷게 했던 것입니다. 그것은 왜? 노아의 전체의 생애 가운데 어느 때 보다도 귀중한 하나의 동정심을 남기기 위함이었습니다. 그래서 수난의 길을 내몰았던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아브라함도 정든 고향 산천 갈대아 우르를 떠나게 해서 나그네 신세로 내몰았던 것입니다. 그런데도 어젯날의 행복을 노래하기 이전에 오늘 최고의 불행한 기점에서 서서, 그 행복의 여운을 하늘 것으로 받들고, 그 가치와 더불어 스스로 길을 개척해 가지고 행복을 노래하는 것에 일치화시키는 싸움의 노정을 감사히 가겠다는 아브라함이었습니다. 이 노정에서 비로소 아브라함이 믿음의 조상으로 결정되었던 것입니다. 동정의 내용이 그만큼 많았다는 것입니다.

국경을 넘나드는 외로운 자리에 서게 되었을 때에 나라를 잃어버린 하나님의 외로움을 느낄 수 있었을 것이요, 외국 땅에서 나그네 신세가 되었을 때 하나님이 사탄세계인 외국 땅에서 섭리하시는 서글픔을 느낄 수 있었을 것입니다. 그렇지 않겠습니까?

그러면, 그런 노정을 걸어 나오신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아들딸들이 그런 자리에 나서는 것을 보게 되면 자기를 걸어 놓고, 명예를 걸어 놓고, 당신의 모든 이념을 걸어 놓고 여기에 동정심을 가지지 않겠습니까? 그것이 부모의 입장에 선 하나님의 책임의식인 것을 생각하면, 하나님께서 우리를 수난의 길로 내모는 것은 결코 우리를 망하게 하기 위함이 아니요, 우리의 모든 것을 빼앗아 버리기 위함도 아닙니다. 그것은 동정의 인연을 공고히 하여 그 위에 찾아올 영원한 위업을 상속시키기 위한 하나님의 사랑인 것입니다.

이것을 생각하게 될 때에 수많은 우리의 선조들은 당시의 살아 있는 순간적인 과정만을 중심삼고 생각한 나머지 하나님 앞에 패배의 길을 남겼던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순간적인 역사과정을 넘어 몇 천 년, 몇만 년 이전의 역사를 바라보실 뿐 아니라 그 이후의 역사과정까지 바라보시고 영원한 복을 준비하신다는 것입니다. 이런 것을 망각했던 수많은 조상들은 하나님을 배반했다는 사실을 우리는 알아야 됩니다.

29-170
하나님의 동정을 받으려면
그러면 타락한 조상의 자손된 우리는 우리가 가는 길에 동정의 길을 어떻게 만들 것인가? 내가 물질을 가졌더라도 하나님께서 `내게 물질이 있으면 더 주고 싶다` 고 할 수 있는 입장에 서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하겠는가? 그러기 위해서는 자기가 소유한 것을 다 투입하고, 빚을 지면서라도 하나님의 뜻을 위하고 싶어해야 합니다. 수단 방법을 따져서가 아니라 진정으로 빚을 졌더라도 그 빚은 하나님이 갚아 주시는 것입니다.

자기의 일신을 중심삼고 볼 때, 어려움을 극복하려고 몸부림치고 있고 쓰러질 자리에 있더라도 하나님은 이 이상의 비참한 자리에서 참아 오셨다는 것을 생각하면서 오히려 그 불쌍한 아버지를 위로해 드리고 해원해 드리겠다고 몸부림쳐야 됩니다. 또한 쓰러지는 자리에서도 한 발자국이라도 더 나가고자 몸부림칠 때에 하나님께서 거기에 현현하시게 된다는 것입니다.

동정이 크면 행동이 전개되는 것입니다. 그러면 하나님께서 행동을 전개할 수 있고 출동할 수 있는 경계선이 어디냐? 최고의 동정을 받는 자리에 있으면서도 침범받고 희생당하는 자리에 서게 되면 하나님은 그 자리에 붙들려서 역사하시는 것입니다. 또한 그자리에서 하나님께서 부탁을 하시는 거예요.

통일교회의 초창기 역사는 그런 역사였습니다. 수많은 사람들이 반대했습니다. 나 홀로 남았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수많은 사람들이 반대하면 할수록 하나님께 감사하면서 내가 하나님을 위로해 드리겠다고 몸부림쳤습니다. 그랬는데도 그 자리를 사탄이 침해하려 할 때 하나님께서는 승리의 역사를 일으켰던 것입니다.

여러분은 생애노정을 가면서 얼마만큼이나 동정을 받을 수 있겠습니까? 자기 동네를 넘어서 가지고, 하나님의 동정을 받는 입장에 선 사람은 그 동네를 지도할 수 있는 하나님의 아들이 되는 것이요, 면이면 면, 군이면 군을 중심삼고 하나님으로부터 그 면, 그 군을 넘어서서 동정받는 입장에선 사람은 그 면민, 그 군민 모두가 그를 스승으로 모시지 않을 수 없는 것입니다.

대한민국을 중심삼고 볼 때에 하나님께서 `대한민국을 다 잊어버려도 너만은 잊어버릴 수 없다. 삼천만 민족을 다 미워하더라도 너만은 미워할 수 없다` 하는 동정심을 불러일으킬 수 있는 사람이 있으면, 그 한 사람으로 말미암아 삼천만 민족이 구원될 수 있는 것입니다.

하늘땅을 다 저주하고 싶은 입장에서도 하늘땅을 대표하여 하나님의 동정을 남기겠다고 몸부림치며, 최후의 자리에서 제물이 되어도 좋다고 하면서 춤을 추며 달려가는 아들이 있다면 그 아들은 이 모든 천지를 구하고도 남음이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여러분이 그런 동정의 인연을 어떻게 만드느냐? 그것을 하려면 도면 도를 편답(遍踏)하라는 것입니다. 여러분이 살아 있는 동안 자기가 책임지고 있는 지역의 방방곡곡, 골짝골짝을 가지 못하면 한이 됩니다. 혹 몸이 피곤하여 쉴 때는 `아버지여! 제가 가야 할 곳이 많아 바쁜데 피곤하여 할 수 없이 쉬고 있는 것이 원통합니다` 하고 눈물 흘리며 기도하는 마음을 가지고 살아 보십시오. 그러면 그 사람이 가는 길은 일취월장(日就月將)할 것입니다. 그런 사람이 가는 길에는 사탄이 절대 침범할 수 없습니다. 침범했다가는 몇 배로 배상해야 된다는 것입니다.

이런 견지에서, 70년대를 맞이한 여러분은 금년 3월부터 이 일을 시작해야 되겠습니다. 우리 인간은 부모를 배반했던 타락한 탕자의 모습이기에 부모 앞에 동정받지 않고는 돌아갈 수 없는 것이 복귀의 운명길입니다. 그러므로 오늘날 여러분은 필히 그런 길을 가지 않으면 안 된다는 것을 알아야 되겠습니다. 그래 가지고 하나님의 동정을 받아야 된다는 것입니다.

29-172
하나님의 소원
그러면 하나님은 어떤 자리에서 주고 싶어하시는가? 인간이 행복해하는 자리에서 주고 싶어하신다는 것입니다. 그것이 하나님의 본래의 소원입니다. 에던 동산의 아담 해와가 타락하지 않았다면 천지가 화동하는 영광의 자리에서 우주의 상속을 받았을 것입니다. 그뿐만 아니라 하나님의 사랑을 몽땅 받았을 것입니다.

그런데 타락하여 하나님과 인연이 끊겨 버린 우리 인간은 어디서부터 하나님과 인연을 맺어야 되는가? 영광의 자리에서는 절대 안 됩니다. 아담 해와가 타락함으로 말미암아 하나님과 눈물로 헤어졌기 때문에 눈물로 상봉해야 되는 것입니다. 그 자리는 눈물로 헤어지는 자리요, 또 삶과 죽음이 교차되는 자리였습니다. 그러므로 만나는 데도 삶과 죽음이 교차되는 자리에서 만나야 되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겟세마네 동산에서 피땀 흘려 기도하던 것과 같이 피땀을 흘리고 피눈물을 흘리면서 만나지 않으면 안 됩니다. 그런 회개의 마음을 가지고 역사적으로 지어진 모든 죄상을 전부 폭로시키고 그 이상의 죽음길로 달려가겠다는 마음으로 가지 않으면 안 된다는 것입니다 아담 해와는 타락함으로 말미암아 죽게 되었지만 후손인 우리들은 아담 해와의 십배 백배 이상의 죽음길도 피하지 않겠다는 마음을 갖고 나가야 합니다. 그러면 빨리 복귀됩니다.

그런 의미에서 생각해 볼 때, 예수님이 `아바 아버지여 할 수만 있으면 이 잔을 나에게서 지나가게 하옵소서. 그러나 내 뜻대로 마옵시고 아버지의 뜻대로 하옵소서` 라고 기도했지만, 이 죽음을 기쁨으로 맞이하겠다는 그런 아들이 되었다면 어떻게 기도했을까? 선생님은 이것을 생각해보았습니다. 그런 아들이 되었다면 마땅히 죽어야 할 몸을 놓고 ‘나에게서 지나가게 하옵소서’라는 그런 기도를 할 수 있었겠느냐? 그럴 수 없다는 것입니다. `당신의 뜻을 위해서 태어난 몸, 뜻을 위해 가고 뜻을 위해 죽어야 할 몸이오니, 제가 무슨 이의가 있겠습니까? 저는 이 죽음길을 기쁨으로써 맞기 위해서 태어났고, 이 죽음길을 가기 위해서 생활했습니다. 이 길을 가기 위해 이 자리에 서 있지 않습니까?` 라고 했을 것입니다.

그런 마음을 가짐으로써 하나님의 동정의 인연을 남겼다면 어떻게 되었겠습니까? 그랬다면 과연 무슨 일이 벌어졌을 것인가? 하나님께서 그런 입장에 서 있는 아들을 대할 때 어떠했을 것인가? 기가 막혔을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그 아들을 바라보시면서 `오냐 내 뜻을 몰랐던 에덴의 아담에게 본이 되는구나. 처음도 아버지요, 중간도 아버지요, 끝도 아버지라고 하는 너, 오직 아버지밖에 모르는 너는 타락권과의 절대적인 인연이 끊어진 자리에 있는 것이 아니더냐? 그러니 사탄세계의 침범을 받아서는 안 돼` 하셨을 것입니다. 그렇게 되었다면 거기에서 가룟 유다 일당을 하늘이 칠 수도 있었을 것이 아니겠습니까? 그럴 수도 있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그것까지 생각해 볼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니 여러분도 이런 자세를 가지고 나가야 됩니다.

하나님께서 인간에게 주고 싶은 마음이 얼마나 간절하겠습니까? 에덴 동산에서 아담 해와가 타락하기 전에 주고 싶었던 그 마음과 타락하고 난 후에 주고 싶었던 그 마음에 거리가 있었다면 복귀를 못 합니다. 그것을 알아야 됩니다. 에덴 동산에서 아담 해와가 타락하기 전에 주고 싶었던 그 마음보다도 타락하고 난 후에 주고 싶은 마음이 오히려 더 강해졌다는 것입니다.

인간들도 그렇지 않아요? 부잣집 자식이 불효해서 상속을 받을 수 없는 입장에 떨어졌다면, 그 부모는 `네가 이러지만 않았더라면 이 모든 것을 몽땅 너에게 상속해 줄 수 있었을 것인데…’하는 마음이 더 솟구친다는 것입니다. `앞으로 너보다 더 나은 아들이 나오면 그 아들 앞에 더 멋지게 상속해 주겠다` 는 마음이 솟구친다는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하나님께서 에덴 동산에서의 아담 해와에게 자율적인 법도를 통해서, 순리적 법도권내에서 모든 것을 주려고 하셨는데, 아담 해와가 타락함으로 말미암아 그보다도 더 심각한 자리에서, 더 빛난 자리에서 주고 싶은 마음이 생기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은 부모의 마음속에서 그 불효자식에 대한 생각을 잊어버리게 할 수 있는 효자를 찾아 지금까지 나오셨습니다. 그 불효자식 이상의 아들을 맞기 위해 모든 역사과정에 있어서 억센 사탄의 시련도, 하늘에 대한 반대도 개의치 않고 그 모든 것을 극복해 나오셨던 것입니다. 그러한 사실을 우리는 알아야 되겠습니다.

29-174
아버지 앞에서 우리가 취해야 할 바른 태도
그러니 어떻게 하면 그런 아들이 될 것인가? 틀림없이 불효할 수 밖에 없는 그런 여건을 만들어 놓고, 나에게 아무리 불효를 하라고 하더라도 그럴 수 없다고 해야 합니다. 백 번을 그런 자리에 몰아 넣어도 그럴 수 없다고 해야 합니다. 만 번을 그래도 그럴 수 없다고 해야 합니다. 제아무리 사랑이니 무엇이니 하는 것을 전부 갖다 준다고 하더라도 천륜을 배반할 수 없다고 해야 합니다. 혹은 내가 가진 모든 것을 빼앗아 간다 하더라도 그럴 수 없다고 해야 합니다.

그러면 그럴 수 있는 자리는 어떤 자리냐? 하나님을 믿는 자리입니다. 꿈에도 상상하지 못했던 사랑의 보물을 갖다 준다고 하더라도 `나는 천륜앞에 어긋날 수 없습니다` 할 수 있는 그런 자리가 타락한 아담을 부정하는 자리요, 천사장을 치는 자리인 것입니다. 자기가 사랑하는 모든 것을 몽땅 빼앗아 간다 해도 천륜을 배반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자리가 그런 자리입니다. 온 천지를 다 빼앗아 가고 아들딸을 다 빼앗아 가도 아버지만은 거기에 끌려갈 수 없다는 것입니다. 나는 그럴 수 없다 하는 아버지의 그 마음을 어떻게 체득하느냐? 여러분은 이것을 체득해야 됩니다.

그렇기 때문에 내 사랑하는 부모를 빼앗아 간다 하더라도 내 사랑하는 처자를 다 빼앗아 간다 하더라도, 나에게서 그 무엇을 빼앗아 간다 하더라도 나는 그럴 수 없다고 해야 합니다. 천지가 무너지고 천지가 바뀐다 하더라도 나는 오직 하늘을 위해 태어났고 하늘을 위해 죽어가겠다고 해야 합니다.

그런 나를 하늘이 알아주든 몰라주든 상관하지 않고 가겠다고 해야 합니다. `다행히 하늘이 알아주면 영광의 자리에서 죽을는지 모르지만, 하늘이 알아주지 않는 가운데 어느 시궁창에서 객사하는 몸이 될지라도 그런 길을 찾아가겠습니다` 할 수 있는 아들이 있으면 하나님은 그를 축복해 주시는 것입니다. 영광의 왕국, 에덴의 왕국 뜰에 그 아들의 무덤을 남기고 싶어하실 것입니다. 그것이 부모의 마음 아니겠습니까?

어떤 일이 있다 해도 천륜을 배반할 수 없다고 해야 합니다. 아버지가 그럴 수 없는 운명을 지니고 나오셨기 때문에 자식된 우리들도 그럴 수 없다는 것입니다. 그런 자리에서 주고 싶은 것이 아버지의 마음이 아니겠습니까?

그러한 아버지의 마음 앞에 사랑받을 수 있는 아들의 모습을 그려 나가기 위해 오늘날 복귀도상에서 효의 도리와 충의 도리를 찾아가겠다고 몸부림쳐야 합니다. 그것이 우리들이 취해야 할 바른 태도가 아니겠습니까? 하나님께서는 그 자리에서 주고 싶어하시는 것입니다.

주신다면 무엇을 주실 것인가? 아버지의 모든 것을 주신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는 아버지의 모든 것을 받는다는 것입니다. 내가 아버지 앞에 과거의 슬픔을 말하려 하면 아버지께서 먼저, `얘, 그런 말은 그만 둬라. 내가 너의 사연을 다 알고도 남지’하시면서, `이제는 미래에 있을 좋은 일만 얘기하자. 네가 어떻게 해야 내 아들의 자리에 서고, 네가 어떻게 해야 아버지를 잘 모실 수 있는지 알겠느냐’ 하는 말을 들을 수 있는 아들이 되어야 합니다.

이런 자리에서 선 사람은 망하지 않습니다. 하늘이 남아지는 한 그는 망하지 않는 것입니다. 그를 죽으라고 감옥에 몰아넣으면 몰아넣은 사람이 도리어 죽는 것입니다. 나라가 그를 치게 되면 그 나라가 망하지, 그는 망하지 않습니다. 세계가 그를 몰아치게 되면 그는 망하지 않고 오히려 세계가 망하는 것입니다.

왜 그러냐? 그의 자리는 하늘을 대신한 자리이기 때문입니다. 하늘을 대신한 자리이기 때문에 그는 망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그가 망하면 하나님의 운세, 하나님의 복귀섭리는 이룰 수 없다는 결과가 초래됩니다. 그렇기 때문에 여러분들도 그런 아들딸이 되어야 합니다.

29-176
하나님이 행복을 느끼시는 자리
선생님이 이 길을 걸어오면서 피를 흘렸지만 아직도 피는 남아 있습니다. 아직 선생님의 기력은 남아 있습니다. 선생님은 하나님께 `타락한 불효자식과 불충한 천사장을 맞이하였던 아버지의 서글픈 마음을, 천사장과 효자를 일시에 잃어버린 아버지의 그 원한을 제가 어떻게 풀어 드려야 하옵니까? 제가 충신의 반열에 서겠다는 것이 아닙니다. 제가 죽어서 충신이 나올 수 있다면 그것을 위해 저는 죽겠습니다’ 라고 했던 것입니다. 충신을 낳고 싶어하는 아버지의 마음을 갖지 않으면 하나님의 아들이 될 수 없는 것을 여러분은 알아야 됩니다. 지금까지 효의 마음, 충의 마음을 갖고 나온 아버지였기 때문에 우리도 그러한 마음을 가져야 됩니다. 이렇게 될 때에는 하나님께서 동정하지 않을 수 없다는 것입니다.

자신의 불쌍한 처지를 말하는 사람을 붙안고 목놓아 우는 것이 인간의 정이 아니었던가? 그러니 불효와 불충으로 말미암아 슬펐던 아버지의 사정을 내가 대신해서 그 슬픔을 이기겠다고 나서면 아버지가 그의 목을 안고 자신의 모든 것을 나누어 주시며 기뻐하시지 않겠습니까?

`저는 효도할래야 효도할 수조차 없고 충성할래야 충성할 수조차 없는 몸이오나, 할 수만 있다면 아버지를 위해 죽겠습니다` 하는 마음을 가진 사람이 있다면, 하나님은 지친 자리에서도, 혹은 아버지가 아들의 자리에 내려오고 아들이 아버지의 자리에 올라간다 해도 좋아하신다는 것입니다. `저는 당신을 위해서 태어났습니다` 할 때, 아버지는 `나는 너를 위해서 있다` 고 하시는 것입니다. 이렇게 아버지와 아들의 그 심정이 교차될 수 있는 인연을 여러분은 갖추어야 되겠습니다.

아버지는 그런 자리에서 우리에게 주고 싶은 마음을 가지고 지금까지 섭리해 나오신 것입니다. 그러한 아버지의 내정적인 심정을 알고 아버지가 슬퍼하기 전에 내가 슬퍼하고, 아버지가 기뻐할 일이라면 내가 기뻐하기 전에 아버지를 먼저 기쁘게 해드릴 수 있는 아들이 되어야 합니다. 우리가 그런 입장에 서게 되면, 하나님이 비록 타락으로 인한 원한에 사무쳐 있을지라도, 주고 싶을 때 줄 수 있는 환경이 벌어진다는 것을 알아야 됩니다.

이렇게 하나님이 주고 싶을 때 줄 수 있는 환경이 벌어지면 그때 비로소 행복을 느끼실 것입니다. 또, 나는 하나님이 주는 것을 받을 수 있으니 행복하다는 것입니다. 에덴 동산에서 주고 받을 수 있는 터전을 잃어버렸던 인간 세상 앞에 주고 받을 수 있는 제 2의 터전이 마련됨으로 말미암아, 여기에서부터 새로운 천국이 인연된다는 것입니다. 이런 것을 여러분이 알고 주고받을 수 있는 자리를 찾아가야 합니다. 아버지는 그런 자리에서 주고 싶어하시는 것입니다.

29-177
참부모의 인연을 전수받으려면
여러분은 그런 자리에 서서 아버지에게 받을 수 있어야 합니다. 그 뿐만이 아니라 내가 받은 그것을 내 것으로 갖고 있을 것이 아니라, 사탄세계에 있는 내 형과, 내 동생, 모든 가인적인 사람들, 원수세계에 있는 사람들에게 주어야 합니다. `아버지여, 당신이 저를 사랑하시어 저에게 기쁨으로 주신 것을 제가 다시 그들에게 기쁨으로 주겠사오니, 이 물건이 가는 곳곳마다 기쁨의 인연을 맺어 주시옵소서’ 할 수 있어야 합니다. 그것이 복음의 도리요, 우리 통일교회가 남겨야 할 사상이 아니겠습니까?

이것을 영원히 남기고 가야 됩니다. 내가 받았던 이 기쁜 것을 남기고 가야 됩니다. 이 세계가 복귀되어서 모든 한이 풀릴 때까지 후대 손손에까지 이것을 남기고 가야 됩니다. 내가 받은 복을 고스란히 줘야 합니다. 거기에 하나님으로부터 받은 것만이 아니라 내 사랑까지도 첨부해서 줘야 된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내가 준 것을 보관할 수 있는 터전이 무엇인가? 통일 종족이 되고, 통일 민족이 되고, 통일 국가가 되고, 통일 세계가 되어야 합니다. 이것이 우리 통일의 무리가 가야 할 길인 것을 여러분이 알아야 되겠습니다.

이것을 이루어 놓음으로 말미암아 아버지의 슬픔이 다 탕감하고, 한으로 점철돼 온 인류역사를 탕감하고, 아벨의 책임을 다 하게 되면, 그러한 나로 말미암아 자손 만대에 승리의 기점이 마련된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역사적이고 우주사적인 책임이 우리의 어깨에 지워져 있다는 것입니다. 이런 입장에서 두 세계를 대신하여 그 십자가를 슬픔으로 질 것인가, 기쁨으로 질 것인가 하는 것이 문제입니다. 기쁨으로 질 것인가, 슬픔으로 질 것인가? 우리는 예수와의 달리 십자가를 기쁨으로 질 수 있는 아들이 되어야 하겠습니다. 생명을 걸고 아버지를 모시겠다고 해야 하겠습니다. 그러면 통일교회는 절대 망하지 않는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선생님이 지금까지 이런 신념을 가지고 나왔기 때문에 여러분이 뜻을 받들지 않을지라도, 선생님이 영계에 가는 한이 있더라도 땅 위에 인연을 재차 세울 수 있는 터전이 마련되는 것입니다. 절대적인 주체가 있으면 절대적인 상대를 창조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런 법칙이 있기 때문에 절대적인 심정의 인연을 이 땅 위에 세워 놓고 가면, 이 땅 위에서 아무도 안 믿는다고 하더라도 믿지 않는 세상을 믿게 하여 상대적 여건을 만들 수 있습니다.

여러분은 뜻을 알았습니다. 그러니 여러분이 선생님이 사랑하는 뜻, 그 뜻을 중심삼고 참부모의 인연을 전수해 나가려면 참부모의 사랑의 마음을 가지고 몽땅 주고 싶어하는 마음을 가져야 됩니다. 여러분에게서 그런 마음이 떠나는 날에는 통일교회는 망하는 것입니다. 더 이상 발전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여러분은 자신의 생명과 재산과 전체를 다 투입해서 여기에 가해 줘야 한다는 책임을 느껴야 합니다. 그러려면 그의 가치를 어떻게 받느냐, 또 받은 다음에 여러분의 후손 앞에 남기는 데는 어떻게 남기느냐가 문제입니다. 귀한 것을 가하고 내 사랑의 살을 붙여서 남겨야 하는 것입니다. 사랑의 살로 커 가는 것이 통일교단이요, 통일교회 여러분인 것을 알아야 됩니다.

여러분이 죽어갈 때 여기에 자기의 피와 땀을 다 기울이고 뼈와 살을 다 기울이고 사랑까지도 붙여 가지고, 한 점이라도 더 살이 되고 세포가 될 수 있게 하여 키워 놓고 가지 않으면, 하늘의 백성이 될 수 없고 하늘나라와 인연이 될 수 없다는 것을 여러분은 똑똑히 알아야 되겠습니다.

29-179
종족적인 메시아의 사명
여러분이 받기 위한 책임자가 되어서는 안 됩니다. 만일 하나님이 받기 위해서 섭리해 나오셨다면 이 땅은 망하는 것입니다. 주기 위해서 나오신 아버지 앞에 설 수 있는 아들을 고대해 오신 아버지의 심정을 풀어 드려야 합니다.

이런 문제를 두고 볼 때 우리가 죄 지은 자를 어떻게 동정하느냐 하는 것이 문제입니다. 그가 지은 죄를 나무라기보다 그를 동정하는 마음이 앞서서 그 죄를 잊어버리는 자기까지 어떻게 나가느냐 하는 것이 문제입니다. `저 여자는 무엇을 잘못했다’고 말하거나 `저 남자는 어떻지` 하고 결점을 들추기 전에 먼저 불쌍한 마음이 앞서는 심정적 자세가 갖추어지면 하늘의 역사는 발전합니다. 이것을 여러분이 알아야 됩니다. 이것이 인류를 대하시는 아버지의 마음이기 때문에 여러분도 그런 마음으로 불쌍한 자를 구해 주어야 합니다. 이것이 책임자의 사명입니다.

구해 줄 때에는 구원받는 사람의 힘보다도 내 힘을 더 소모시키고, 그 사람의 소원보다도 내 소원을 더 가중시켜야 합니다. 그리하여 구해준 후에 내가 보람을 느낀 것을 상속해 주어야만 구원받은 사람도 산 보람을 느끼는 것입니다. 이것이 종족적인 메시아의 사명인 것을 알아야 합니다.

선생님이 부탁하고 싶은 것은, 어떠한 자리에 가든지 부디 아버지의 아들딸이라는 것을 명심하라는 것입니다.

아들이 타락하여 효의 자리를 잃어버린 것과 천사장이 타락하여 종의 자리를 잃어버린 것을 동정하는 마음을 가지고 수습해서 이것을 다시 복귀시키는 여러분이 되어야 합니다.

그리하여 여기에 여러분 자신들의 사랑의 마음과 하나님이 지금까지 사랑할 수 없었던 그 사랑의 마음을 가중시켜서 하늘 것으로 바쳐 드리겠다고 할 수 있어야겠습니다. 이렇게 가는 여러분이 되면, 여러분은 앞으로 정상적인 발전을 하게 될 것입니다. 그 자리에서 아버지와 아들의 인연을 맺지 않으면 안 된다는 것을 확실히 알아야 되겠습니다. 알겠지요? 「예」

29-180
기 도
아버님, 지금까지 아버지 앞에 걸어 온 걸음이 면목없는 것이었사옵니다. 아담이 남긴 죄가 후손들을 통하여 수많은 사람들을 걸고 아버지의 마음에 못을 박게 했사옵니다. 이러한 역사적인 죄상을 저희들이 도맡아 가지고 70년대를 맞이했습니다.

이것을 청산하기 위해서 저희들은 어떤 길을 가야 되겠사옵니까? 인간 조상인 아담이 효의 자리를 잃어버렸으니 효의 길을 가야 되겠사옵고, 충의 자리를 잃어버렸으니 충의 길을 가야 되겠습니다. 저희들은 먼저 나라를 위해 희생해야 되겠습니다. 지금까지 저희들은 나라를 위해, 세계를 위해 싸워 왔습니다. 이제는 부모를 모시고 있기 때문에 효할 수 있는 길이 생겨났습니다. 아버지, 효를 다하고 난 그 길을 계승하여 충의 인연을 세울 수 있는 저희들이 되어야겠사옵니다.

저희들이 형제들을 위해 가는 길은 불행한 길이 아니옵니다. 저희가 가진 것이 없어서 세례 요한과 같이 약대 털옷을 입는 신세가 되더라도 불쌍한 사람이 아니옵니다.

저희가 가지고 있는 모든 것은 언제나 아버지 앞에 바쳐 드릴 수 있는 것이옵고, 저희들은 몸도 언제나 아버지 것으로 바칠 수 있는 것이옵니다. 저희들의 이런 자리가 기쁨의 자리인 것을 알고 과거를 살펴 보니 저희들이 너무나 부족하였습니다. 철부지한 저희들을 떼어버리지 않고 이끌어 주신 은사를 진심으로 감사드리옵니다. 하오나 복귀의 고개를 넘기 전에는 가르쳐 줄 수 없는 사연들이 너무도 많은 것을 생각하면, 정말 아버님은 불쌍하신 분인 것을 아옵니다.

오늘날, 타락한 이 땅 위에서 저희들이 이만큼이라도 헤아릴 수 있는 입장에서 당신을 대하여 아버지라 부를 수 있고, 남모르는 당신의 심정을 느끼면서 눈물지을 수 있게 허락하여 주신 은사에 어떻게 감사드려야 할지 이루 다 말할 수 없사옵니다.

수많은 죽음이 제물되어 이루어진 터전 위에, 수많은 원한의 피를 모아서 이루어진 터전 위에 서 있는 저희들인 것을 생각할 때, 무섭고도 두렵다는 것을 느껴야 되겠습니다. 저희가 망하면 저희 하나만 망하는 것이 아니라 민족이 망하고 세계가 망한다는 것을 생각하면, 어느 한 초점, 어느 한 실체를 중심삼고 한 순간이라도 자기 자신의 위치를 잊어서는 안 될 저희들인 것을 알아야 되겠습니다.

오늘 여기에 모인 당신의 사랑하는 아들들은 이런 중심적인 사명을 책임지고 있는 지구장이요, 지역장들이옵니다. 그들 각자의 그 중심이 변하지 말게 하여 주시옵소서. 그 중심이 사탄세계 앞에 뭉그러지지 말게 하여 주시옵소서. 그 중심이 사탄에게 점령당하지 말게 하여 주시옵소서. 아버지를 위한 효의 일편단심, 나라를 위한 충의 일편단심이 민족을 위한 중심이요, 세계를 위한 중심이요, 더 나아가서는 아버님의 사랑을 위한 중심이라는 것을 알고 있사옵니다.

아버지께서 아들아 딸아 하실 수 있고, 만세계에 자랑하실 수 있는 가정을 저희들이 마련해야 된다는 것을 알았사옵니다. 축복의 손길을 거친 저희 가정들이 그 사명을 다할 수 있게 하여 주시옵길, 아버님, 간절히 바라옵고 원하옵니다.

저희들이 미래의 일을 중심삼고 이 70년대에 처음 가진 모임이옵니다. 이들이 이 모임을 마침에 있어서 그간의 모든 것을 다 잊어버려도 좋습니다. 그러나 아버지와 아들의 인연만은 잊어서는 안 되겠습니다. 다른 것은 다 잊어버리더라도 이것만은 잊어버리지 말게 하여 주시옵소서. 아버지여, 불초한 모습이 아버지를 대하는 마음을 따르는 이들도 이어받아서 충의 도리, 효의 도리를 다하게 하여 주시옵소서.

마가복음 14장에 쓰여 있는 것처럼 기도하시던 예수님의 내정을 제자들은 몰랐습니다. 그러나 오늘날 저희들은 예수님의 그러한 내정적 심정을 말할 수 있는 자리에 서게 된 것을 생각하면 옛날 사도들보다도 행복한 자리에 있다는 사실을 알아야 되겠습니다.

그들은 우리보다 불행한 자리에 있으면서도 십자가의 죽음의 길을 기쁘게 갔거든, 행복한 자리에 있는 우리들은 이 복을 나누어 주기 위해서 찢기고 밟히는 길을 가더라도, 죽음길을 가더라도 기쁨으로 갈 수 있어야 되겠사옵니다. 저희가 죽는 한이 있더라도 예수와 같이 `아바 아버지여 할 수만 있다면 이 잔을 나에게서 옮기시옵소서`라는 기도는 하지 않고 이 길을 기쁘게 가겠다고 몸부림치는 당신의 아들들이 되게 허락하여 주옵기를, 아버님, 간절히 바라옵고 원하옵니다.

아버님이여, 이 자리를 찾아올 적마다 나라와 세계를 찾고자 하는 이들의 마음이 변함없게 하여 주옵길 바라옵고 원하옵니다. 이들을 생각할 적마다 세계를 동정하시는 그런 마음으로 이들을 동정하여 주시옵소서. 당신은 이들을 넘어 나라를 부르고 계시며, 나라를 넘어 세계를 찾고 계시며, 세계를 넘어 당신의 사랑을 세우고자 하시옵니다. 그러한 당신이심을 생각하면, 저희들은 그 동기를 마련하기 위한 제물적인 과정을 감사히 맞아들여야 되겠습니다. 감사히 소화시켜야 되겠습니다. 그럴 수 있는 아들들이 되게 하여 주시옵기를, 아버님, 간절히 바라옵고 원하옵니다.

이제 이들은 어디로 가야 합니까? 이들이 갈 수 있는 길은 아버지께로 가는 길과 자기를 중심삼은 사탄세계로 가는 길, 단지 두 길밖에 없습니다. 나를 위한 길은 사탄편에 속한 길이요, 나를 버리는 길은 하늘편에 속한 길입니다.

이 원통하고 비참한 사실이 어찌된 일이옵니까? 타락의 동기가 그러하였사옵기에 저희도 그것을 달게 받고 넘어가게 하여 주시옵소서. 자신과 자신의 가정을 제물삼고 하늘을 위하여 감사의 눈물을 흘릴 수 있는 순간을 추구해 나오는 이 무리들은 거룩한 무리가 아니옵니까? 아버지, 당신의 사랑의 심정을 몽땅 퍼붓고 싶은 동정의 터전이 아니옵니까? 여기에 축복받은 가정들이 있거든 그런 가정을 사모하고, 그런 가정을 사랑하고, 그런 가정을 위하여 태어났고, 그 가정에서 태어나는 아들딸을 보기 위하여 살고 있는 자신임을 발견하게 해주옵기를 간절히 부탁드리고 원하옵니다.

이제 아버지와 아들의 인연을 맺고 억천만세를 두고 잊을 수 없는 한 때를 각자가 가져야 되겠사옵니다. 이 기간이 그랬습니까? 그럴 수 있는 인연을 갖고 돌아가게 하여 주옵기를 간절히 부탁드리고 원하옵니다.

남아진 모든 생애는 이미 아버지 앞에 바쳐진 것이오니, 불평하지 않고, 원망하지 않고, 그저 묵묵히 걸어가면서 충성하고 효도하는 생애가 되게 하여 주옵소서. 후대에 사랑의 행로를 유물로 남기기 위해 모든 것을 희생시키면서라도 몸부림치는 당신의 아들딸이 되게 하여 주옵기를 간절히 부탁드리오며, 이 모든 말씀 참부모의 성호 받들어 아뢰었사옵나이다.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