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9-07 to 29-27: 추억의 날

추억의 날
1970.02.15 (일), 한국 전본부교회

29-07
추억의 날
[기 도]

아버지, 지금 이 시간은 전국에 널려 있는 당신의 자녀들이 당신의 제단 앞에 예배드리는 시간이옵니다. 미래와 현실을 책임지고 이 나라, 이 민족을 대신하는 세계를 대신하여 당신께 경배드리는 시간이오니 당신만이 주관하여 주시옵소서.

이 복잡다단한 세계에 처해 있는 저희들, 진정 당신이 좌정하시고 싶은 자녀들이 되어 있습니까? 저희들은 당신과 함께하기 위해 얼마나 가까운 자리에 처해 있습니까? 그런 자리에 서지 못한 저희들을 보시고 슬퍼하시는 아버지인 것을 이 시간 느낄 수 있게 허락하여 주시옵소서.

저희들은 아버지의 명령을 받고 하나의 목적지를 향하여 나아가는 노정에 있어서 하늘의 입장을 취하지 않으면 안 되겠사옵니다. 이 시간은 수많은 천군천사와 천천만 성도들이 당신의 존전에서 당신의 영광을 찬양하는 시간이옵고, 저희들이 남겨진 복귀의 사명을 완수하겠다고 다짐하면서 아버지 앞에 기도하는 시간이옵니다.

아버지, 영원토록 승리의 찬양과 존귀와 영광이 같이하시옵소서. 당신이 주관할 수 있는 승리의 터전은 이 땅의 인간을 통해야만 이루어진다는 사실을 그 누구도 알지 못하나 저희들은 알고 있사옵니다. 그러나 이 사실을 알고 있는 저희들이 이것을 목표로 삼고 수고하는 싸움의 노정에서 승리하지 못하게 될 때에 영계의 수많은 영인들이 불쌍하다는 것을 저희들은 느끼지 않을 수 없사옵니다.

땅 위의 인간들은 이것을 극복할 수 있는 한날을 갖추어서 세계를 붙안고 나가야 할 것이요, 이것이 우리가 청산지어야 할 최후의 사명인 것을 절감할 수 있어야 되겠습니다. 그래야 당신이 소원하시는 한날이 올 것입니다. 이런 것을 생각할 때, 이런 결과적인 터전을 한 사람 한 사람을 통하여 심정적인 인연으로 연결시키지 않고는 성취될 수 없다는 것을 저희들은 알았사옵니다. 이와 같은 입장에 있는 저희들은 그 사명이 얼마나 지중하다는 것을 다시 한번 느껴야 되겠습니다.

남이 알지 못하는 복귀의 길을 더듬어 오시면서 수고하신 아버님, 피어린 투쟁의 역로를 더듬어 온 영계의 수많은 선열들이 제시한 그 길을 반겨 줄 수 있는 내 마음이 어떠한지 스스로가 발견하지 못한 것을 후회하고 탄식하지 않으면 안 된다는 것을 저희들은 깨달아야 되겠습니다.

아버님이여, 저희들은 이제 당신이 원하시는 목적을 향해 나가는 무리가 되어 이 땅에 남아져야 되겠습니다. 그리하여 당신이 안식할 수 있는 한날을 마련하여 선의 이름과 참의 이름으로 당신 앞에 영원히 찬가를 불러 드릴 수 있는 하늘의 실체와 하늘의 가정이 되어야겠습니다. 그래야 된다는 사실을 저희들은 배워서 잘 알고 있습니다. 그 실체가 다름 아닌 저희 자신임을 느끼게 될 때에 저희들은 저희 자체를 이겨야 되겠습니다.

그런 자신의 모습을 저희들은 마음으로 흠모하고 소망하였습니다. 아버지 앞에 승리의 터전을 마련하기 위한 하나의 발판이 되는 가정을 저희들이 얼마나 그리워했습니까? 그 나타나는 모습이 비록 초초하고 비참한 자리에 섰다 하더라도, 저희들은 당신으로 말미암아 출발하였으니, 당신과 더불어 인연 될 수 있는 하나의 개체와 가정적인 터전으로 이 땅에 남아져야 되겠습니다.

이 땅이 당신이 임재하실 수 있는 발판이 되고, 당신이 거동하실 수 있는 공고한 터전이 될 때에는 망해도 이는 망하는 것이 아니요, 슬픈 자리나 비참한 자리에 처한다 하더라도 이는 비참한 자리가 아니라는 것을 저희들은 아옵니다. 그 슬픔과 비참은 아버지의 위로의 대상이 되고 힘의 원천이 되어 금후에 뜻을 위하여 달려갈 수 있는 기틀이 된다는 사실을 저희들은 아옵니다.

아버님께서 찾아오신 노정의 해결점이 여기서부터 풀리기 시작한다는 것을 생각하게 될 때에, 여기에서 망하더라도 쌍수를 합하여 아버지 앞에 생축의 제물이 될 뿐만 아니라 부활의 생명체가 되기를 원하옵니다. 그리하여 거룩한 역사의 제물이라고 천지가 머리 숙일 수 있는 저희들의 모습이 되겠사옵니다. 하오나 그러지 못한 자신인 것을 저희들은 발견하지 않을 수 없사옵니다.

아버님, 그러지 못하였던 저희들, 이 시간 다시 한번 그럴 수 있는 자신들이 되겠다고 마음의 결의를 하게 하여 주시옵소서.

아버지께서는 불쌍한 저희들을 버릴 수 없는 인연 때문에 지극히 처참하고 지극히 처량한 길을 걸어오셨다는 것을 저희들은 알았사옵니다. 저희들은 이 땅 위에서 아무리 억울하고 아무리 비참하더라도, 그 도를 느낄 수 없는 한계선에 계시면서도 승리하신 기쁨을 가지고 지금까지 지내오신 아버지 앞에 자발적으로 겸손하게 엎드리고 경배드리는 모습들이 되어야겠사옵니다.

저희들의 마음이 울적해서 눈물로써 아버지를 부르며 경배하게 될 때에, 당신은 얼마나 마음으로 그리워했던 하늘의 아들딸이라고 눈물로써 대하고 싶었사옵니까? 당신의 품에 안고, 당신의 손에 잡고, 당신의 사정을 말할 수 있는 아들딸을 얼마나 그리워하셨습니까? 천명을 받아 이 원수의 세계에서 본되는 가정이 되어 달라고 하는 것이 아버님의 소원이라는 것을 생각하게 될 때, 천국에 가기 위해서는 가정을 통하지 않고는 가지 못한다는 것을 저희들은 알아야 되겠습니다.

씨족과 종족을 거치고 민족과 국가를 거쳐서 세계의 노정까지 나아가 아버지의 사랑의 동산, 영원한 세계인 천국으로 가야 할 저희들이옵니다. 이 모든 단계적인 과정을 거쳐야 되겠습니다. 저희 앞에 고행의 길이 가로막혀 있다 하더라도 그 고행의 길을 개의하지 않고 여기에 동참하는 무리가 되어야겠습니다. 아무리 험한 가시밭길이 있다 하더라도 아버지가 가시는 그 길을 따라가야 할 자식으로서의 도리를 다해야 되겠사옵니다. 저희들은 발바닥을 상처가 나서 아무리 고통스러워도 개척자의 입장에서 가야 할 길을 대신 더듬어 헤치고 나가시는 아버님을 격려해 드리고, 아버님을 염려하고, 아버님을 위로해 드리면서 눈물을 흘리며 아버님의 뒤를 따라가야 할 자신들인 것을 알게 하여 주시옵기를 간절히 바라옵고 원하옵니다.

원수들이 북적거리는 세상의 환경 가운데서 모든 것을 저희들에게 찾아 주시기 위하여 아버지께서는 사탄과 싸우고 계신다는 것을 꿈에도 생각하지 못한 불효막심한 저희들이라는 것을 느끼게 하여 주시옵소서.

아버님께서 사탄세계와 싸우는 데 있어서 지치고, 또한 수난을 당하셨사옵니다. 그러했기에 저희들을 찾아오셨던 그 걸음이 더욱 험하였겠지만 저희들은 그렇게 찾아오시기까지의 아버지의 서글픈 심정을 꿈에도 생각하지 못한 것을 생각하게 될 때, 참으로 어리석은 저희들이라는 것을 깨닫게 되옵니다.

아버님께서 그런 운명길에 계신 것은 당신이 잘못해서가 아니라, 저희들의 잘못 때문이옵니다. 아버지께서 지금까지 원통하고 분한 자리에 선 것이 아버지의 실수가 아니라 인간이 잘못함으로 말미암아 그렇게 되었다는 것을 저희들은 아옵니다.

저희들은 그에 대해 몇 백 배의 책임을 감당하면서 몇 천 배의 희생의 대가를 치르더라도, 그 잘못을 타개해 버리고 저희들이 가야 할 본연의 동산의 문을 열고 들어가는 그날까지 가야 되겠사옵니다. 거기에는 생명의 터전이 있다는 것을 다시 한번 느끼게 하여 주시옵기를, 아버지, 간절히 바라옵고 원하옵니다.

아버지, 이제 저희의 마음이 누구를 향하고 있으며 저희의 몸이 어느 곳에 처하여 있는지 스스로가 깨달아야 하겠습니다. 아버지를 향하여 가고자 하는 애달픈 마음에 사무쳐 아버지라 부를 수 있는 저희들의 심정이 되게 하여 주시옵소서.

아버지 앞에 전부 죄인된 위치에서 사무친 마음으로 아버지를 부를 수 있는 저희의 모습이 되어야겠사오며, 아버지를 그리워하는 마음에 사무쳐 가지고 엎드려 눈물 흘려야 되겠사옵니다. 수난길을 가신 아버지의 십자가를 대신 지고, 십자가의 행로에서 처참하게 피 흘리는 예수님을 치는 채찍을 가로막고 대신 맞을 수 있는 저희들이 되어야겠습니다. 죽음의 고빗길을 넘어가는 아버지의 운명 앞에 내 생명을 발판으로 삼아 아버지를 모실 수 있는 자리에 서야겠사옵니다. 그리하여 천상세계를 이루어 가야 할 저희들에게 기념할 수 있는 역사를 남기게 허락하여 주시옵소서.

아버지, 저희들은 물질을 다 버리고서라도 세계를 책임져야겠사옵니다. 아버님이 현현할 수 있는 길을 만들고 스스로 아버님의 품에 안기어서 아버지께서 걸어가시는 그 길을 동참해야겠사옵니다. 하오니 수고하신 아버지 앞에 저희들이 현재 어떤 위치에 있는 것을 알고, 지금까지 저희들을 위하여 참아 나오신 아버지의 심정이 얼마나 외로웠고, 얼마나 비참하였는가를 알게 하여 주시옵소서. 아버지 앞에 저희의 몸을 맡기고 자신을 잊어버릴 수 있는 저희들이 되어야 하는데도 불구하고 저희들은 아버지를 몇 번이나 배반했습니까? 너무나 당돌하였습니다. 너무나 가인적인 입장에서 아버지를 불렀사옵니다. 이런 것을 생각해 볼 때, 저희들이 아무리 잘났다고 하더라도 위신과 체면을 세울 수 없는 자신들이라는 사실을 알게 하여 주시옵소서.

오늘은 거룩한 안식일이옵니다. 아버님이여, 이곳에 모인 당신의 아들딸을 기억하여 주시옵소서. 하늘을 위하여 뜻길을 가는 길이 외롭고 슬프지만, 당신의 뜻길을 가서 하늘의 전통을 세우겠다고 몸부림치는 당신의 자녀들이 있사오니, 그들을 기억하여 주시옵소서. 그들의 외로움과 그들의 어려움을 당신께서 같이하여 주시옵소서. 그들의 외로운 자리에서 싸울 때 당신이 같이 싸워 주시고 격려해 주신다는 사실을 생각할 때, 남 모르는 세계에서 외롭게 가는 그들을 위해 당신이 얼마나 수고하고 계시다는 사실을 저희들은 알지 못하였사옵니다.

아버지! 세계에 널려서 한국을 향하여 참부모님이 사는 나라라고 하면서 무릎을 꿇고 정성을 들이는 자들이 있사오니, 그들을 부디 잊지 마시옵소서. 이것이 참사랑의, 정의 터전이라는 것을 확실히 깨달아야 되겠습니다.

아버지, 그들이 비참한 자리에 처해 있다는 것을 저희들은 잊지 말아야 하겠습니다. 만약 그랬다면 부끄럽게 생각할 줄 알아야 되겠습니다. 통일교회 본부에 있는 저희들이 그 길을 가기 위해 몸부림치고 있지만, 민족과 나라와 세계를 넘어야 할 안타까움에 몸부림치는 자신들이 불쌍하옵니다. 그러나 지금 외국에서 뜻을 위해 싸우고 있는 그들 앞에 면목없는 자신인 것을 느낄 줄 아는 당신의 자녀들이 되게 하여 주시옵기를 간절히 바라옵고 원하옵니다.

오늘은 거룩한 안식일이옵니다. 지금부터 만 2년전 잊을 수 없는 추억의 한날이 남아져 있는 것을 저희들이 알고 있습니다. 당신은 저희들을 이땅에 세우시기 위하여 그 누구도 알지 못하는 시련의 도상에서 수고하셨던 분이라는 것을 저희들은 알고 있습니다. 오늘 이 한 시간, 역경의 그 노정을 생각할 수 있게 해주심을 감사드립니다. 저희들이 감사하는 마음으로 그날을 기념할 수 있고 지금까지 저희들을 찾아 주신 아버지의 수고하심과 그 은사에 감사할 수 있는 이 시간을 갖게 하여 주심을 아버지 앞에 진실로 감사드리옵니다.

당신이 주신 교훈이 흘러가는 것 같지만 이 땅 위에 남아져서 역사 위에 쌓이고 쌓여 이 민족과 세계 앞에 승리의 터전이 된다는 것을, 아버님께서 친히 주장하신 것을 이 시간에 다시 한번 감사드리고, 쌍수를 들어 만세를 불러드립니다. 당신의 뜻을 전하고자 눈물 흘리며 기도하는 이 시간, 복을 빌어 주시옵기를 간절히 바라옵고 원하옵니다.

사람은 언제나 자기를 중심삼고 생활하기 쉽사옵니다. 외로운 길을 피하고자 하는 것도 자기를 중심하기 위한 것임을 저희들은 알고 있사옵니다. 나를 생각지 않고 남을 생각할 수 없는 인간이지만 나를 생각하지 않는 자리에 서 가지고 아버님을 생각해야 되겠사옵니다. 아버님과 거리가 있고, 처지가 다르지만 저희들은 언제나 아버지 앞에 전체적인 입장에 서기를 간절히 원하옵니다.

저희들이 뜻 앞에서 부끄러운 모습을 가릴 수 없다는 것을 생각할 때마다 반성할 줄 아는 당신의 아들딸이 되게 하여 주시옵기를, 아버님, 간절히 바라옵고 원하옵니다. 이날이 새로운 한날을 탄생시키기 위하여 필요했듯이, 오늘날 우리도 새로운 한 세대를 원하면서 세상이 필요로 하는 실체적인 무리가 되게 하여 주시옵기를 간절히 부탁드리옵고 원하옵니다.

오늘도 전세계에 널려서 활동하고 있는 당신의 아들딸들에게 친히 같이 하여 주시옵기를 간절히 부탁드리면서, 모든 말씀 참부모의 이름으로 아뢰었사옵니다. 아멘.

29-12
말 씀
이 땅 위에서 살고 있는 사람은 어느 누구를 막론하고 자기 일생에 있어서 환경이나 혹은 나라와 세계를 두고 자랑할 수 있는 한 때를 남기기를 원합니다. 이것이 땅 위에 살고 있는 인간의 상정인 것입니다.

철이 안 든 어린아이에서부터 어른에 이르기까지 그와 같은 생각을 가지고 살아가고 있습니다. 그리고 이것이 인간생활의 시작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면 자기가 가질 수 있는 추억의 날들이 과연 어느 때에 생길 것이냐? 그것은 지극히 비참할 때, 괴로울 때, 기쁠 때 등 여러 순간에 나타날 것입니다.

29-13
추억의 날을 남기고 싶어하는 것은 인간의 상정
세계를 위하여 수난의 길을 가고 있는 사람이 있다면 그 길을 가는 과정에서 비참한 일이 일어난 날이 그 사람에게는 추억의 날로 남게 될 것입니다. 또, 행복한 생활을 하는 사람에게는 그 행복한 생활 가운데 가장 행복했던 날이 그 사람의 추억의 한날이 될 것입니다.

그런데 대부분의 일반 사람들은 수난의 날들을 추억의 날로 생각하지 않을 것입니다. 자기 생애에서 기쁨과 행복의 순간들을 잊을 수 없는 추억의 날로 생각하고 있을 것입니다. 이것은 오늘날 이 땅에서 살고 있는 사람뿐만 아니라 앞으로 살아가야 할 사람들도 그런 입장일 것입니다.

오늘날 많은 사람들은 추억의 날을 남기기 위해서 노력을 한다고 하지만, 타락한 시대에 살고 있는 우리들은 새로운 세계를 모색해야 할 현세의 입장에서, 과연 기쁨의 터전을 남길 수 있는 추억의 날을 가질 수 있겠는가? 이것은 흘러가는 시조를 두고 보더라도 불가능한 것입니다.

현재의 세계가 혼란된 세계라는 것은 누구나 알고 있습니다. 인간은 가야 할 방향을 잃어버리고 자기 자체까지도 확실히 규명할 수 없는 현실에 처해 있습니다. 이런 것을 보더라도 오늘 이 현실 무대에서 자기 생애를 통하여 기쁨으로 남길 수 있는 추억의 날은 있을 수 없다는 것입니다. 인간이 이런 환경에 처해 있다는 사실은 그 누구도 부정할 수 없습니다. 이런 관점에서 볼 때, 오늘날 역사적인 이 시점에 있어서 아무리 좋은 환경을 자랑하는 한날을 가졌다고 하더라도, 그날을 기쁨을 중심으로 한 추억의 날로서 세계무대나 국가무대에 남기기에는 불가능하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인간이 가야 할 행로 가운데 있어서 오늘날의 인류가 공히 맞이할 수 있는 추억의 날이 있다면 그날은 어떤 날일 것이냐? 행복의 날을 노래하는 것보다도 전체가 하나되어 비참한 한날을 맞아야 할 환경에 처해 있는 것을 우리들은 부정할 수 없습니다.

29-14
하나님을 중심하고 역사성을 띤 추억의 날을 가져야
그러면 그 비참한 날이 누구를 위하여 맞이할 수 있는 추억의 날이 되어야 할 것이냐? 이것이 문제가 되는 것입니다. 그날을 대한민국을 위한 추억의 날로 맞이할 것이냐, 수많은 국가를 위한 추억의 날로 맞이할 것이냐, 그렇지 않으면 하나님을 중심삼은 추억의 날로 맞이할 것이냐?

작게 봐서는 나를 중심삼고 추억의 날이 남아질 것이지만, 나를 중심한 추억의 날이 남아졌다 해도 그날은 국가가 추억할 수 있는 날이 있다 하더라도 그날은 세계가 추억할 수 있는 날 앞에는 자랑할 것이 못 된다는 것입니다. 더 나아가 세계가 자랑하는 추억의 날이 있다 하더라도 그날이 하나님을 중심삼고 천주가 추억할 수 있는 날 앞에서는 아무런 가치도 없이 사라질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이 우주 가운데에서 지금까지 흘러나온 역사는 한때를 제시하고 한때를 남기고 가야 할 운명에 처해 있습니다. 그러면 그렇게 남길 수 있는 추억의 날은 어떤 날이 되어야 하겠는가? 이런 문제를 생각할 때, 자기를 중심삼은 추억의 한 인연을 세계에 남기고 싶은 사람이 많이 있을 것입니다.

그렇지만 나 자신을 중심삼은 추억의 날을 남겼다 하더라도, 그날을 국가와 세계와 천주가 가지고 있는 엄청난 추억의 날과는 관계를 맺을 수 없습니다. 다시 말하면 자기 자신을 중심삼은 추억의 날을 가지려고 하는 사람은 세계적인 추억의 날을 모색하는 과정에 있어서는 도리어 슬픔의 조건만 된다는 것입니다. 이런 문제를 두고 볼 때, 자기 자신만을 중심하고 무엇을 남기고 추억의 날을 갖고자 한다면 그 사람은 어리석은 사람이라는 결론을 내릴 수밖에 없습니다.

이런 점에서 볼 때, 역사시대에 있어서 혹은 이 세계와 우주 가운데 있어서 온 인류와 하나님이 그야말로 합작으로 승리를 기념할 수 있는 날이 있다면 그날은 어느 때일 것이냐? 영원토록 귀한 그 추억의 한날은 어느 날 대번에 올 것이냐, 아니면 어떤 인연의 과정을 통하여서 올 것이냐? 그날은 대번에 오지 못합니다.

하루의 추억을 가하고, 일년의 추억을 가하고, 십년의 추억을 가하고, 혹은 자기 일생의 추억을 가하고, 더 나아가 수많은 종족의 추억, 민족의 추억, 국가의 추억, 세계 만민이 추억을 가할 수 있는 터전을 넘어서야 만이 영원히 역사를 대표하고, 시대를 대표하고, 미래를 대표할 수 있는 추억의 날이 천지에 남아지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면 그날이 누구를 중심삼고 인연 맺어져야 되겠느냐? 인간만 중심해서는 안 됩니다. 오늘 현시대에 살고 있는 30억 인류를 중심해서도 안 된다는 것입니다. 세계 30억 인류가 공히 기뻐할 수 있는 추억의 날을 결정했다 하더라도 그것이 역사성을 띠지 못하는 한 그냥 흘러가 버리게 되고 맙니다. 역사적인 추억의 날로 할 수 없는 날을 추억의 날로 자랑하는 사람들이 있다면, 그 무리들은 도리어 역사적인 추억의 날 앞에 심판 받을 수밖에 없다는 것을 우리들은 알아야 됩니다.

오늘날 우리가 알아야 할 것은 역사와 더불어 추억의 날을 남겨야 된다는 것입니다. 일개의 민족을 중심삼은 추억의 날이 아니라 세계와 더불어, 뿐만 아니라 흘러가는 역사를 중심삼은 추억의 날을 남겨야 되겠습니다. 이런 문제를 우리가 알아야 하는 것입니다. 따라서 인간이 역사와 더불어 추억의 날을 남길 수 있는 길을 따라가야 한다는 것을 부정할 수 없습니다.

인류역사가 기념할 수 있는 추억의 날을 남기는 것이 뜻을 따라가는 우리의 운명길입니다. 그러면 인간만을 중심한 추억의 날이 영원히 남아질 수 있는 추억이 될 수 있느냐? 여기에는 절대적인 어떤 주체자가 있어야 합니다. 그 주체자가 하나님이라 할 때 그 하나님은 오늘날 인간을 중심삼고 흘러가는 역사 앞에 반드시 개재하신다는 것입니다. 나타나신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인간이 역사에 남을 수 있는 추억의 한날을 가졌다 하더라도 그것이 절대적인 하나님을 중심삼고 역사적인 시대와 연결시킬 수 있는 내용을 갖지 못하고서는 영원히 남아지지 못합니다. 그러므로 제아무리 인간을 대표하여 역사적인 추억의 한날을 가졌다고 자랑하더라도, 하나님과 관계 맺는 추억의 한날 앞에서는 심판의 대상이 될 수밖에 없다는 것을 우리들은 알아야 되겠습니다.

여기에서 중요한 문제가 되는 것은 개인이나 가정에 있어서 혹은 사회, 국가, 세계에 있어서 하나님을 중심삼고 맺어질 수 있는 추억의 터전을 남기는 것입니다. 이것이 무엇보다도 중요하지 않겠느냐 하는 것입니다. 그러한 터전을 남길 수 있는 한날을 추구하기 위해서 자기의 생애를 걸고 싸워 나온 사람이 역사상에 나타난 성현들인 것입니다. 그래서 그들의 가르침은 하나님을 소개하고 하나님의 품격을 소개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들은 인간의 소망을 하나님의 소망에 연결시키기 위해서 수고의 길을 간 사람들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들이 성현의 반열(班列)에 남아질 수 있었다는 것을 우리들은 알아야 되겠습니다.

29-16
추억의 동기가 될 수 있는 것
그런 추억의 터전을 닦아 나아가는 길은 오늘날의 사업도 아니요, 정치나 문화도 아닙니다. 종교입니다. 종교라 하면 사람들이 대개 싫어하지만, 그 종교의 배후에 있는 터전을 찾아 나오는 것이 하늘땅이 기념할 수 있는 추억의 한 날로 남아지는 것을 우리는 생각지 않을 수 없습니다.

여러분이 가정을 두고 볼 때, 집이 좋고 그 주위환경이 좋다고 해서 좋은 것이 아닙니다. 반대로 아무리 환경이 나쁘고 집이 초라하더라도 그것을 안식처로 삼고, 거기에 자기의 사연과 생애와 생활의 모든 기준을 인연 맺고자 하는 가정이 좋은 가정인 것입니다. 거기에는 부모와 자식간에 서로 위해 주는 심정이 있습니다. 이것이 추억의 본향이요, 모든 생활의 동기가 되기 때문에 우리 생활에서 행복을 좌우하는 기초가 되는 것입니다.

그것은 왜 그러냐? 부모와 자식간의 그 누구도 침범할 수 없는 단 하나의 사랑과 인연과 부모와 자식간의 단 한번밖에 없는 혈통적인 사랑의 인연이 있기 때문입니다. 거기에는 부모와 형제의 사랑이 동기가 되어 있기 때문에 우리의 생활에 그리움의 대상으로 연결되는 것입니다. 그러니 그 사랑을 동기로 하는 거기에서는 기쁘면 그 기쁨이 전체의 기쁨으로 나타날 것이요, 슬프면 그 슬픔이 전체의 슬픔으로 나타날 것입니다. 일시에 전체 분위기가 통일될 것입니다. 그런 자리가 모든 사람이 추구하는 대상인 것입니다.

따라서 그런 자리에서 기뻐하고, 그런 자리에서 슬퍼하고, 또한 그런 자리에서 새롭게 결심한 그 결심이야말로 그 사람에게 있어서 새로운 결과를 빚어낼 수 있는 동기가 될 수 있는 것입니다. 비참한 시련의 도상에서도 원수에게 승리할 수 있는 터전을 넓힐 수 있는 것입니다. 이 모든 사실은 우리가 역사시대를 거쳐오면서 사회에 나타난 현상과 생애를 통해서 알 수 있습니다.

이런 관점에서 볼 때, 가정은 외적으로, 즉 환경적으로 추구할 수 있는 추억의 내용을 갖고 있지 않으면 안 되는 것입니다.

그러면 추억의 동기가 될 수 있는 것은 무엇이냐? 부자의 관계를 중심으로 한 사랑의 인연이 추억의 동기가 될 수 있는 것입니다. 그 가정에서의 기쁨은 나 홀로의 기쁨이 아니라 전체의 기쁨이요, 비참한 것이 있다 할 때 그 비참은 전체가 청산짓고 넘어가야 하는 비참인 것입니다. 그것이 영원히 남아질 수 있는 추억의 요건이 되는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부모에게 원수가 있으면 자식이 일생을 통하여 그 원수를 갚기 전에는 자기가 가야 할 길을 가지 못하는 것이요, 자기 자신의 생활을 할 수 없는 것입니다. 그러한 생활을 한 것이 심정에 가장 가까운 터전으로 맺어진 추억이라는 것입니다. 비록 하나에서 맺어졌지만 전체의 운명과 생애를 좌우할 수 있는 내용이 깃들어 있다는 것을 여러분들은 알아야 되겠습니다.

오늘 하나님과 우리 인간과의 관계를 중심삼고 볼 때, 우리는 하나님의 의도에 부딪치고 있습니다. 이런 자리에서 나라와 세계를 대표하여 하나님의 이념을 가지고 눈물 흘릴 수 있는 사람이 있다면 그는 하나님이 영원히 잊을 수 없을 것이요, 인간들도 영원히 잊을 수 없을 것입니다. 더구나 하나님을 중심삼아 가지고 목적의 세계를 추구해 나가는 그 과정에는 필시 그런 사람이 걸어온 역사가 추억의 날로 남아질 것이라는 사실을 우리는 부정할 수 없는 것입니다.

29-18
추억의 날을 간직한 기독교 역사
그러면 종교라는 것은 무엇이냐? 오늘날 이 세계에 있어서 가정의 형태를 대신하기위해서 나타난 것이 종교입니다.

여러분은 성경에 탕자의 비유를 잘 알고 있을 것입니다. 세상에서도 불효를 하는 자식들을 많이 볼 수 있을 겁니다. 그런 불효 자식들이나 탕자를 회개시킬 수 있는 길이 있다면, 그 길은 무슨 길이겠느냐? 부모가 돈을 많이 가지고 탕자를 그 돈 앞에 굴복하게 해서 회개시킬 수는 없습니다. 탕자가 회심을 할 수 있고, 새로운 인간으로서 개심할 수 있는 하나의 길이 무엇이냐 하면 끊임없는 부모의 사랑에 부딪히게 하는 것입니다. 끊임없는 그 사랑이 하늘땅보다 더 높고 깊다는 것을 느끼고, 부모가 살아 있다는 것을 느끼면서 거기에서 사랑의 본연의 가치를 느끼게 될 때, 비로소 탕자가 회개할 수 있는 것입니다. 여기에서 운행되는 사랑은 기쁨이 되는 것입니다.

여기에서 새로운 인간으로 모색되는 것이요, 여기에서 새로운 가정이 출발할 수 있는 것이요, 새로운 국가와 새로운 세계가 현현할 수 있는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하나의 새로운 운동이 일어남으로 말미암아 하나의 새로운 가정을 이룰 수 있는 동기가 되는 것이요, 그 새로운 가정이 생겨나면 하나의 종족이 되고, 그 종족이 커지면 민족이 되고 국가가 되며, 국가가 커지면 세계가 되는 것입니다.

이러한 역사적인 인연을 오늘날 이 현실에 나타난 정치사회가 인간의 역사에 남긴 것이 아니라 종교가 인간의 역사에 남기게 한 것입니다. 자기 개인의 생명을 넘어 동지를 위하여 죽음길을 가더라도 먼저 달려가고, 뜻을 위하고 교회를 위해서 죽음의 길도 자처하고 나설 수 있는 것은 종교에서만 찾아볼 수 있는 것입니다. 이것은 우리가 역사를 통해서 알 수 있듯이 부정할 수 없는 사실입니다.

종교라는 것은 인간에게 있어서 인간 행로의 동기가 되어 주었고, 새로운 문화창건의 기원이 되어 주었습니다. 이렇게 모든 역사적인 사실을 미루어 볼 때 종교는 모든 것의 동기가 아닐 수 없는 것입니다. 오늘날 세계 문화사의 배경을 보더라도 종교사상을 중심삼아 가지고 그 나라의 역사를 창건해 나왔고, 그 나라의 역사를 지탱해 나왔다는 것을 우리는 알 수 있습니다. 심정적인 추억의 인연의 내용이 여기에 깃들어 있음으로 말미암아, 역사는 이 터전 위에서 세계형태를 갖추어 나왔다는 것을 우리는 알아야 하겠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오늘날 세계 만민들은 종교 지도자들이 진리의 길을 추구하다 당했던 그 비참함을 참된 희생으로 알고, 또 그날을 세계의 날로 모시고 싶어하는 것입니다. 부모와 자식간에 있어서 부모의 뜻을 위해서 희생한 아들이나 딸이 있다면 그 부모에게는 아들딸의 희생을 추억의 한 장면으로 얼마나 남기고 싶어하겠습니까?

하나님에게도 그러한 마음이 있고 그러한 요구가 있습니다. 그러므로 종교가 역사과정에 있어서 추억과 추앙의 대상으로 남아 있다는 것을 우리들은 부정할 수 없습니다. 더욱이나 기독교는 다른 종교보다도 순교하는 역사의 길을 엮어 나왔습니다. 순교하는 데는 무엇을 중심삼고 순교를 했느냐? 자기를 중심삼고 순교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을 중심삼고 순교한 것입니다. 인간이 최후에 모색해야 할 하나의 세계를 위하여, 하나님께서 이 땅에 평화의 닻을 내릴 수 있는 터전을 위하고 본연의 인류 평화를 위하여 수많은 사람들이 순교의 피를 흘렸던 것입니다.

29-19
하늘과 땅이 공인하는 추억의 날을 가지려면
이러한 관점에서 볼 때, 이 종교역사 가운데에서 추억할 수 있는 것이 무엇이냐 하면 그 종교의 목적을 위하여 죽어간 수많은 충신열사들입니다. 이것에 의해서 종교가 발전해 나오는 것이요, 그 목적을 이루어 나오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발전해 나오는 그 과정에 있어서 희생된 그들을 추억으로 남기지 않을 수 없다는 것입니다.

기독교 역사로 두고 볼 때, 스데반은 무식한 사람이었습니다. 그 당시에는 누구도 예수님을 따를 수 없는 시대였습니다. 그런 환경에서 쫓기고 몰리는 예수를 위해서 단 하나밖에 없는 자기 목숨을 초개와 같이 버렸던 것입니다. 그러나 스데반의 죽음 그 자체는 위대한 것이 아닙니다. 그 생명의 핏줄이 끊어진 것은 아무것도 아니지마는 그 죽음이 하나님의 심정과 결부되었고, 역사와 연결되었다는 점에서 스데반의 죽음이 위대한 것이라고 보는 것입니다. 이렇게 역사적 인연과 심정적 내용을 중심삼아 가지고 피를 흘림으로 말미암아 그것이 역사에 물들게 되었고, 하나님의 심정에 물들게 되었던 것입니다. 그러기에 이 피를 씻지 않고는 가지 못할 인간이므로 하나님께서도 이 길을 보여 주고 땅의 인간도 이것을 추모하지 않으면 안 된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것을 알아야 되겠습니다.

그러면 우리가 이 세계사에서 추모할 수 있는 하나의 사람을 가졌느냐, 혹은 하나의 나라를 가졌느냐, 하나의 가정을 가졌느냐? 그렇지 않으면 그럴 수 있는 하나의 개인이 되어 있느냐? 이것이 문제입니다.

우리는 추억을 남길 수 있는 자리를 원해야 되겠습니다. 나 개인보다도 가정을 붙들고 추억을 남길 수 있다면 그는 보다 행복한 사람입니다. 그리고 가정보다도 민족을 중심삼아 가지고 추억의 한 시간을 남길 수 있다면, 그는 가정에 추억을 남긴 사람보다 더 위대한 사람인 것입니다. 더 나아가서 국가를 넘고 세계를 넘어 하늘땅이 인정할 수 있는 추억을 남긴다면, 그는 성현의 반열에 동참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 사람은 이 땅위에서 아무리 비참하게 쓰러져 간다고 하더라도, 또 아무런 근거를 남기지 않고 간다 하더라도 세계와 더불어 있게 되면 망하지 않는 것입니다.

29-20
예수님은 추억의 날을 어떻게 남겼는가
여러분, 예수님을 한번 생각해 보세요. 그는 갈릴리 해변에서 어부와 같은 입장에 있었습니다. 그는 마을 마을을 거쳐 다니면서 얻어먹는 생활도 했습니다. 뿐만 아니라 동네의 뭇 사람들에게 손가락질을 받고 좋지 않는 평을 받는 사나이였습니다.

그가 갈보리 산상에서 십자가에 죽는다는 것은 있어서는 안 될 일입니다. 그런데 그가 죽은 것이 어떻게 되었기에 오늘날 20세기 문명을 지배하는 민주세계를 이룩하는 데 있어서 하나의 터전이 되었느냐? 이것이 문제라는 것입니다. 누구라도, 피 뿌리며 죽는 사람은 많이 있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에게 있어서 단 하나 다른 것은 예수님이 인류가 공히 추모하는 하나의 추억의 결정으로서 죽었다는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하나님의 심정을 그 누구보다도 많이 가지고 갔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아들인 예수님이 피를 흘리며 죽어갔으나 그가 남긴 길을 찾아보니, 하나님을 중심삼은 예수님의 이념의 내용이 역사성을 띠고 있다는 사실이 여실히 드러났다는 것입니다. 그러한 예수님의 심정적 터전이 역사의 원천이 되었기 때문에, 지금까지 인간들이 그 원천을 그리워하게 되었던 것입니다.

이것이 역사의 누룩이 될 수 있는 터전으로 남아졌기 때문에 이후에 하나님을 중심삼고 한 방향으로 가는 인간이 그 터전에 접하게 되면 자동적으로 감화를 받게 되었고, 그 목적을 재차 수습하는 일이 개인에서 종족, 종족에서 민족, 민족에서 국가의 형태로 넓혀졌던 것입니다. 그리하여 오늘날 기독교를 중심한 예수님의 사상이 세계적인 문화권을 창조했다는 사실을 여러분들은 알아야 됩니다.

예수님의 죽음이 아무것도 아닌 것 같지만 그로 인해 예수님은 역사상에 없었던 하늘땅을 연결시킬 수 있는 심정의 최고봉에 서시게 되었던 것입니다. 하나님을 자기의 아버지라 했고, 자기는 하나님이 독생자라고 했습니다. 이것이 위대하다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아들된 도리로서 아버지의 뜻을 위하여 효(孝)를 다하고 그 나라를 위하여 충(忠)을 다하고 갔던 것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은 인류역사상 하나님 앞에 있어서 더할 수 없는 효자요, 하나님께서도 비로소 독생자라고 선포할 수 있는 주인공이신 것입니다. 예수님은 효라는 것을 통하여 승리의 출발을 하겠다는 일편의 이념을 남겼던 것입니다.

오늘날 예수님을 믿지 않는 사람들은 예수님이 2천년 전에 이 땅에 왔었는지 안 왔었는지를 알려고도 하지 않지만, 예수님을 믿는 사람들은 예수님의 죽음을 애도하고 그의 생애를 추모합니다. 주님이 인류를 위해 희생하였다고 하면서 눈물을 흘리며 그를 진정으로 추모하는 현실이 아닌가!

그러면 예수님은 왜 역사가 미치지 못하는 자리, 혹은 시대가 미치지 못하는 자리에 서시게 되었던고? 다시 말해서 그 국가의 주권자도 나가지 못하는 자리에 서셨던고? 그것은 단 한 가지 하나님을 아버지라 하였고 자기는 그의 아들이라고 하면서 하늘 가정을 추구하는 자리를 원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그 뜻과 더불어 추억의 내용을 남겨 놓았습니다.

모든 종교에는 그와 같은 추억의 터전이 남아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어느 한 종교의 추종자가 그 뜻을 위해서 자기 몸을 바쳐 희생할 수 있는 내용이 깊고 넓고 클수록 그 종교는 세계적인 종교가 된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오늘날 전세계 인간들은 삶의 역경이 휘몰아치는 경각에 처해 있습니다. 그러나 이 세계는 그렇더라도 우리 인생에는 추억을 남길 수 있는 하나의 기점이 있어야 합니다. 다시 말해서 복잡다단한 사망의 물결이 소용돌이 치는 경계선에 처해 있는 이 현실세계에서는 깊은 마음의 터전에 안식을 바랄 수 있는 종교가 있어야 되지 않겠느냐는 것입니다. 이렇게 볼 때, 오늘날 인간인 우리들은 앞을 바라보는 그 과정에 있어서 어차피 현실을 부정하지 않으면 자신의 존재를 찾을 수 없는 입장에 처해 있는 것입니다.

29-22
진정한 의미에서 현실을 부정하라
이와 같은 환경에 있는 청소년들도 앞길의 행복을 이루기 위해서는 현실을 부정하지 않으면 안 됩니다. 그러면 부정하는 데는 가치있는 것을 위하고 추억의 한 내용을 남기기 위해서 부정하느냐? 아닙니다. 이들은 방향을 모르는 메뚜기 떼와 같습니다. 초원에서 날지 못하고 사막에서 사막으로 날으는 메뚜기 떼와 마찬가지입니다. 뜻 앞에 있어서 안내자가 없으면 초원을 발견하지 못하고 날다가 한꺼번에 다 쓰러지는 메뚜기 떼와 마찬가지라는 것입니다.

그러니 그들이 살고 있는 그 자리에서 추억이 될 수 있는 그 무엇을 남길 수 있고, 금후의 세계에 있어서 추억을 남길 수 있는 터전을 만들기 보다는 그런 현실을 모두 부정하는 입장에 서야 된다는 것입니다.

종교인들은 과거에서부터 지금까지 현실을 부정해 왔습니다. 자기 나라도 부정해 왔습니다. 자기의 종족이 있더라도 그 종족을 자기 종족으로 사랑할 수 없었습니다. 자기 가정이 있더라도 그 가정을 자기가 안식할 수 있는 터전으로 만들 수 없었습니다. 또한 자기 한 개인의 인격으로 하여 온 우주를 지닐 수 있는 권위를 갖추지 못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종교는 완전한 부정에서부터 출발한 것입니다.

그러나 종교인은 그 부정과 인연을 맺지 못하였습니다. 그 부정에서 이상의 가치를 찾아 거기에서 행복의 요인을 모색해야 할 텐데도 불구하고, 습관적인 부정권에 들어가 있었기 때문에 행복의 터전과 하나되지 못했던 것입니다. 그러나 진정한 의미에서 부정을 하고 나설 수 있는 기준만 세워지면 종교에서는 새로운 방안이 모색될 것입니다.

이런 의미에서 오늘날 통일교회는 현실적인 이 세계에 공헌을 해야 되겠습니다.

오늘 이 추억의 날이라는 제목을 두고 생각해 볼 때, 지금부터 만 21년전 5월 20일이 생각납니다. 이날은 어떤 날이냐 하면, 평양 내무서에 잡혀가서 재판을 받고 흥남감옥으로 이송되어 간 날입니다. 이런 것을 볼 때 여러분은 뜻을 아는 사람이니 여러분이 뜻과 더불어 선생님과 일치되기 위해서는 무엇을 찾아 들어가야 되느냐? 보통의 생활이나 평범한 생활에서 나온 이념으로 찾아가면 그것은 그냥 흘러가 버리게 되고 맙니다.

통일교회가 지금까지 통일교회로서 나타날 수 있는 하나의 기원을 남겼다면 그 배후에 깃들어 있는 그 추억의 날이라는 것은 어떤 날이냐? 여러분들이 통일교회에 들어와서 남긴 추억의 날이 아닙니다. 여러분은 그것을 알아야 됩니다. 이 추억의 날은 반드시 통일교회와 더불어 남을 수 있는 날이어야 합니다. 자기를 중심삼은 추억의 날이 아니라 통일교회와 더불어 남을 수 있는 추억의 날이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통일교회가 역사를 가지고 있다고 할 때, 그 역사의 배후가 어떻게 되어 있는가? 그 배후에 어떤 입체성이 있으며 어느 누구도 부정할 수 없는 추억의 내용을 가졌는가? 이것이 중요한 문제입니다. 여기에 금후의 세계를 움직일 수 있느냐 없느냐 하는 문제가 달려 있는 것입니다. 또 아무리 제한된 환경일지라도 어떤 대표자가 그 제한된 환경을 넘어서서 세계를 하나님 앞에 어떠한 내용으로 결속시키느냐 하는 문제가 있는 것입니다. 이것이 앞으로의 통일교회 후대들 앞에 추억의 모체가 되는 것입니다.

그러면 여러분은 행복한 통일교인으로 걸어갈 것이냐? 나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습니다. 통일교회 자체를 생각할 때 통일교회에 들어오면 잘먹고, 잘살고, 누구보다도 복을 많이 받고 산다고 할지 모릅니다. 그러나 그렇지 않습니다. 인류의 심정을 밝히고 새로운 인간으로 재창조할 수 있는 폭발적인 원동력을 보여줄 수 있는 추억의 역사를 지닐 수 있어야 합니다. 그것이 개인에게 인연됨으로 말미암아 그 개인이 새로운 결심을 하고 새로운 다짐을 하여 새로운 목적을 향하여 갈 수 있는 하나의 모체가 되어야 합니다.

29-24
통일교회가 남긴 추억의 날
통일교회에는 언제나 푸르른 봄날만 있는 것이 아닙니다. 봄이 가면 여름이 오고, 여름이 가면 가을이 오고, 가을이 가면 겨울이 오는 것입니다. 봄날에는 새싹이 나고 여름에는 꽃이 활짝 피게 되는데,이것 자체가 완성이 아닙니다. 여기에서 옆으로 뻗어나가는 가지가 있다면 그것을 꺾어 놓아야 합니다. 뻗어나가는 운세를 꺾어 놓아야 결실과 더불어 가을절기가 오는 것입니다. 퍼져나갔던 것을 부정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사위기대를 이루어야 합니다. 존재세계는 번식을 해야 합니다. 또, 발전을 했으면 반드시 축소되는 것입니다. 그것은 마치 가을이 가면 추운 동삼삭 같은 동절기를 맞는 것과 같습니다.

통일교인은 외적으로 침범해 들어오는 그 어떤 것도 몰아낼 수 있는 힘을 가져야 합니다. 그래야 천지의 권한을 품고 천지의 조화와 더불어 봄날을 맞게 되는 것입니다. 그리하여 생명을 이룰 수 있는 힘을 다지게 될 때에는 내적인 모든 아픔을 터뜨리고 외적인 승리를 할 수 있습니다. 통일교회가 기쁠 수 있는 이 한날의 추억은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되어지는 것입니다. 이것은 우리만이 할 수 있는 것입니다.

내가 고맙게 생각하는 것은, 지금까지 통일교회가 걸어온 길이 비참하였지만, 이 비참한 극에 도달하는 자리에서도 이것을 회피하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그 고생을 전면적으로 받아들였다는 것입니다. 그것도 그냥 받아들인 것이 아니라 천지와 더불어 받아들였다는 것입니다. 여기에 의의가 있는 것입니다.

부자관계의 자리에서 눈물을 머금고 새로운 나라를 위해 서로서로 붙들고 결의하였습니다. 이 자리는 망하는 자리가 아닙니다. 내일의 희망이 찾아들고 새로운 생명이 출발하는 자리입니다. 통일교회가 가는 노정이 비참하다 해도 통일교회는 망하지 않습니다. 그 자리에 비참함이 가중된다 하더라도 이 나라, 혹은 세계를 붙안고 내일의 희망을 결속할 수 있는 제물이 됨으로써, 여기에 생명력이 개재되어 우리들은 망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우리에게 무엇이 없다고 해서 비관해서는 안 됩니다. 역사는 그런 자리에서부터 새로운 방향으로 출발되는 것입니다.

29-25
역사상에 어떠한 추억을 남기기를 원하느냐
지금까지 수천년의 역사를 거쳐왔지만 인류에게는 마음 놓고 기뻐할 수 있는 날이 없었습니다. 자기가 행복하다고 기뻐 춤출 수 있는 한날을 못 가졌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역사를 움직일 수 있는 추억의 모체를 남겨야 하겠습니다. 이런 문제를 두고 볼 때 우리들은 기쁨의 내용보다도 슬픔의 내용 가운데서 하나님의 가슴을 부여안고 하나님의 내심으로 들어가 몸부림치면서 금후에 인류가 가야 할 길 앞에서 결의를 해야 합니다. 원수의 세계가 망해 가는 현실을 응시하면서 내일의 희망인 천국을 향해 가는 것이 통일교회가 가지고 있는 사무친 추억될 인연이요, 또 그 자리는 천지를 주고도 바꿀 수 없는 고귀한 자리인 것입니다. 이 인연이 없어 가지고는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천지를 주셔도 우리는 상속받을 수가 없습니다. 이렇듯 이것은 무엇보다도 귀한 것입니다.

그러면 여러분은 지금까지 걸어 나오면서 역사상에 어떠한 추억을 남기기를 원하느냐? 어떤 한 여인이 있다면 그 여인과 더불어 기뻐할 수 있는 추억을 남길 것이냐? 혹은 형제와 더불어 기뻐할 수 있는 추억을 남길 것이냐, 아니면 인간 끼리끼리의 평면적인 추억을 남길 것이냐? 아닙니다. 입체적인, 영원을 중심삼고 영원을 모색할 수 있는, 그 한 가지 목적만을 위한 추억을 남기기를 원해야 합니다. 내가 이날을 잊어버리고 기억하고 있지 않더라도 하나님께서 이날을 기억하라고 할 수 있는 추억의 날을 남겨야 합니다. 이것이 문제입니다. 자기 생애의 모든 날들을 다 잊어버리더라도 하나님이 자기를 통해서 그날을 기억해 달라고 권고할 수 있는 그 한날을 남겨야 하겠습니다. 그렇다면 그는 망하지 않습니다.

그런 사람은 천만을 지배하고 있는 군왕보다 더 위대한 사람입니다. 그것은 군왕은 지나가더라도 그런 사람의 역사는 남아지기 때문입니다. 그 나라의 군왕은 지나가더라도 역사에 남을 수 있는 추억을 가진 애국자는 남아져 역사를 지배하는 것입니다.

이렇게 볼 때 천지의 주인 되시는 하나님, 혹은 만왕의 왕이 되시는 하나님 앞에 있어서 기념할 수 있는 추억의 한날을 가진 한 사람이 있다면 하나님은 그 사람을 역사과정에 남게 할 것입니다. 그 사람은 역사상에 기념될 수 있는 하나의 중심이 아닐 수 없습니다. 그 사람은 영원히 망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망할 수 있는 요건이 있다 하더라도 반대로 흥할 수 있는 요인으로 바꿔진다는 것을 우리들은 알아야 하겠습니다.

그러면 오늘날 통일교회 신도인 여러분들은 여러분의 생애 가운데에 있어서 여러분 자신이 자랑할 수 있는 추억의 날을 남길 수 있느냐? 이것은 지극히 중요한 문제입니다. 남기는 데에는 하나님께서 기념할 수 있는 추억의 날로 남아지게 해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아무리 많은 날을 여러분 스스로 추억의 날로 기념한다 하더라도 하나님이 여기에 협조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그날은 그냥 흘러가 버리게 되는 것입니다. 그렇지만 여러분 자신이 잊어버리더라도 하나님이 그날을 추억의 날로 세워 줄 수 있는 날을 남겼다면, 여러분은 그날과 더불어 절대 망하지 않게 되는 것입니다.

29-26
하나님이 함께하는 추억의 날을 남기라
선생님이 지금까지 걸어오면서 어떠어떠한 것을 축하하고 기념하는 날들을 맞아 염려하는 것은 무엇이냐? 이날들이 그냥 흘러가 버릴 날들이 아니라 진정으로 내가 기념하기 전에 하나님이 기념할 수 있는 날들일 것이냐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지금까지 기쁜 자리에 계시지 못했습니다. 비참한 역사를 엮어온 하나님은 누구보다도 비참한 자리에 계셨습니다. 그러기에 여러분이 하늘길을 가는 데 있어서 추억의 한날을 남기려면 그보다 더 비참한 자리에서 남길 수 있어야 합니다. 그 사실을 여러분이 알아야 하겠습니다.

여러분은 앞으로 어떤 시련과 고통이 다가오더라도 응당 그것을 물리치고 가야 합니다. 부딪혀야 할 그 길이 타고난 본연의 운명길로 알고 그것을 전면적으로 맞아 줄 수 있는 여러분이 되어야겠습니다. 여러분이 가는 생의 노정에서 부디 하나님이 함께하시는 추억의 한 날을 남길 수 있기를 부탁하는 마음에서 이 말씀을 드리는 것입니다.

이것은 하나님을 중심삼은 아버지의 아들딸로서의 사명을 느껴야만 남길 수 있는 것입니다. 아버지가 기쁜 날이 있으면 그날을 아들의 기쁜 날로 세워 주고 싶고, 아들이 기쁜 날이 있으면 그날을 아버지의 기쁜 날로 돌려 드리고 싶은 것입니다. 그날은 몽땅 아버지의 것도 아니요, 아들의 것도 아닌 우리 만민의 것으로서 추억의 한날이 되는 것입니다.

그러니 여러분은 천국을 창건하는 그날까지 부딪쳐 오는 시련과 고통을 극복해야 합니다. 그러면 땅에서 죽더라도 여러분은 이 땅과 더불어 영원히 남아질 수 있는 것입니다. 역사와 더불어 길이길이 남아진다는 것입니다. 이런 길이 우리 앞에 국가적으로 가까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될 때, 우리는 승리의 때를 하나님과 더불어 남길 수 있는 추억의 날이 복귀의 길에 남아져 있다는 것을 알아야 되겠습니다.

29-27
기 도
아버지, 삼천리 반도에 삼천만이라는 사람이 살고 있사옵니다. 이 사람들을 줄이고 줄이고 또 줄이게 될 때에 삼천만 대표하여 하늘 앞에 설 수 있는 사람은 두 사람도 아니요, 단 한 사람인 것을 알게 되옵니다.

교파들이 무수히 많지만 그 교파 가운데 어느 교파가 당신이 가장 바라시는 교파입니까?

아버지께서 세운 민족으로서 주고 싶은 참된 민족이 두 민족이 아니라 한 민족이었습니다. 이렇게 볼 때 저희는 한 사람이 그립고, 하나의 혈통을 정상적으로 이어 받을 수 있는 역사적인 하나의 민족이 그립사옵니다.

그리하여 아버지를 모실 수 있는 참된 민족을 맞기 위해서는 모험과 투쟁을 무릅쓰고 준비를 해야 되겠습니다. 그런 가운데 아버지의 모습을 사모해야 되겠고, 무한히 그리워해야 되겠사옵니다. 그곳을 향해 돌아가기를 기도해야 되겠습니다.

거기에는 첩첩 태산준령이 남아 있고, 십자가의 고빗길이 가로놓여 있다는 것을 저희들은 알고 있사옵니다. 이것을 정상화시키려면 아버지가 원하시는 사람이 되어야 하겠습니다. 저희들은 아버지께서 원하시는 한 사람, 한 가정, 한 민족, 한 국가를 대표할 수 있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는 것을 저희들이 알게 하여 주시옵소서.

저희들은 번번히 그곳으로 돌아가려고 하고 있습니다. 가는 데에는 나를 중심삼고 평화를 찾고 나를 중심삼고 행복을 찾으려 했사옵니다. 그러나 행복이나 평화로 돌아가는 길은 나타나지 않았사옵니다.

국가를 대표한 그 하나의 삼천만을 대표한 하나이기 전에 가정의 중심도 될 수 있는 것이요, 어떤 단체의 중심도 될 수 있는 것입니다. 중심은 오로지 하나밖에 없는 것이므로 그 자리에 설 수 있는 것도 하나라는 것을 저희들은 알아야 되겠습니다.

지금 아버지의 마음은 어떠한 것이며, 아버지께서 처한 환경은 어떠한 자리인가를 생각할 때, `이러한 마음이여, 이러한 자리일 것이다’라고 스스로 깨달을 수 있는 당신의 아들딸이 되게 허락하여 주시옵소서.

당신과 더불어 행복을 찾아 나서는 자녀들이 되어야겠사옵니다. 저희들이 아버지의 아들이 되게 위해 아버지 앞에 불효의 인연을 남기지 않으려면, 불행했던 당신보다 더더욱 불행한 길을 찾아가야 되겠습니다. 그리하여 아버지의 자리에 대신 서서 아버지의 매를 대신 맞을 수 있는 자녀가 되어 아버지와 같이 남을 수 있는 추억을 가질 때, 그것이 효 중의 효요, 충 중의 충이 아니겠사옵니까? 그러한 길을 향하여 저희들은 직행해야 되겠습니다.

아내가 이 길을 막거든 아내를 버리고라도 가야 되겠으며, 자식이 이 길을 막거든 자식을 버리고라도 가야 되겠습니다. 또한 친척, 종족, 민족, 국가가 이 길을 반대하더라도, 이들을 버리고 가는 저희들이 되어야 하겠사옵니다.

통일교회가 역사적인 승리의 날을 찾게 될 때, 저희들은 아버지 앞에서 수없이 감사를 드려야 하겠습니다. 저희들은 이 길을 위해서 죽을 것을 각오하고 나왔습니다. 그런 저희들을 지금까지 이끌어 온 아버지의 은사 앞에 감사를 드립니다.

이제 망할래야 망할 수 없는 터전을 이미 아버지께서 만들어 놓았습니다. 이런 아버지의 수고의 터전 위에 나를 중심삼은 불행으로 말미암아 아버지의 마음에 짐이 되는 것을 바라지 않습니다. 저희들, 당신 앞에 있사오니, 이 자리에서 당신의 마음을 기쁘게 해 들리 수 있는 추억의 조건을 남겨야 하겠사옵니다. 당신이 십자가를 지면 그 십자가를 대신 지겠다고 몸부림칠 수 있는 효의 모습과 충의 모습을 갖추게 하여 주시옵고, 자신의 생명을 잃어도 감사하는 자리로 연결되게 하여주시옵소서.

저희들은 생명을 바쳐 아버님 앞에 효를 하겠다고 하는 자리에 있었고, 아버지께서는 그런 효하는 아들딸을 찾겠다고 지금까지 몸부림쳐 오셨사옵니다. 저희들이 아버지를 대하여 충의 도리를 다하겠다고 생명을 바치기를 원하면 아버지께서 그 길을 개척해 주신다는 것을 알게 하여 주시옵소서.

아버지께서 죽음의 고비에서 저희들을 이끌어 주시기에 저희들도 죽음을 각오해야 한다는 것을 알아야 되겠습니다. 아버지께서는 저희들이 스스로 제물 되는 자리에 나가 주기를 원하시옵니다. 저희들은 그 자리가 부자의 관계에서 사랑을 붙들고 나오는 나리라는 것을 알아야 되겠습니다. 자식이 죽을 자리에 있을 때 아버지가 먼저 죽고자 하는 것이 사랑의 도리인 것을 알고 있사옵니다.

그러한 자리에 남아지게 될 때, 아버지께서는 그런 추억의 날을 영원히 기억하실 것입니다. 그럴 수 있는 한날이 통일교회 무리를 중심삼아 가지고 이루어질 것이니 남아진 그 날을, 아버지여, 잊어버리지 마시옵소서.

추억의 날로 남기기 위해 싸움을 하는 이들은 그날이 길이길이 남아지기를 바라고 있사옵니다. 그 아들이 나가는 길을 전통삼아 상속받고자 하는 당신의 자녀들도 있사옵니다. 그 자리의 인연을 상속받을 수 있는 아들과 딸이 되게 하여 주시옵소서.

복귀노정에 있어서 영원히 아버지와 함께 할 수 있는 추억의 날을 아버지 앞에 바쳐 드리지 않고는 충신의 인연으로 아버지의 나라에 가지 못하고, 아버지의 아들딸로 결정될 수 없다는 것을 저희들은 알고 있사옵니다. 하오니 효의 도리를 세워 가지고 아버지 앞에 추억의 한날을 남길 수 있는 아버지의 아들이 되고 딸이 되게 하여 주시옵소서. 그런 자리에서 저희들이 추억의 인연을 남길 수 있다면, 객사하는 한이 있더라도 그 자리는 기쁜 자리요, 아버지 앞에 보탬이 될 수 있는 자리인 것을 알게 하여 주시옵기를 간절히 바라옵고 원하옵나이다.

어떤 자리가 인간으로서 생각해야 할 자리이며, 어떤 길이 인간으로서 확실히 가야 할 길인가를 저희들이 깨달았사옵니다.

이제 아버지와 아들이 하나된 추억의 인연을 세계보다도 더 높일 수 있는 추억의 날로 한 자리에 길이 남길 수 있는 당신의 자녀들이 되게 하여 주옵기를 간절히 부탁드리면서, 모든 말씀 참부모의 성호 받들어서 아뢰었사옵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