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8-68 to 28-98: 뜻이여 성취하소서

뜻이여 성취하소서
1970.01.04 (일), 한국 전본부교회

28-68
뜻이여 성취하소서
하늘에 계신 아버님이나 땅 위에 살고 있는 사람들이나 아직까지 뜻을 성취하지 못한 채, 역사는 흘러가고 있다는 것을 우리들은 알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 뜻을 성취하지 못하게 된 것은 하나님 때문이 아니라, 우리 인간 때문이라는 사실을 여러분도 잘 알고 있을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아담 해와가 타락한 연고로 이 뜻이 실패하게 됐다는 것입니다.

28-68
뜻 성사와 책임 수행
그렇기 때문에 실패한 이 뜻을 수습해서 본래의 뜻으로 성취할 수 있는 그 날을 위해 하나님께서 수고하시며 내려오시는 것이 지금까지의 역사과정이요, 섭리노정이라는 것을 우리는 잘 알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 뜻이 이루어지려면 뜻을 이룰 수 있는 사람이 필요하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오랜 역사시대를 거쳐오면서 아담 가정으로부터 노아 가정, 아브라함 가정, 모세 가정, 요셉 가정을 택해 뜻을 받들 수 있는 사람을 세우셨습니다. 만일 세움받은 그 사람이 하늘의 인연을 땅에 연결시키는 책임을 못 하게 될 때에는 뜻을 성취시킬 수 있는 방향조차 갖추지 못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런 사실을 우리는 섭리노정을 통해서 잘 배웠습니다.

오늘날 우리 통일교회를 중심삼고 보면, 통일교회가 뜻을 품고 나아가는 행로에 있어서 이 뜻을 성취시키느냐, 못 시키느냐 하는 것이 문제입니다. 뜻이라는 것은 개인에게 해당되는 뜻도 있고 전체에 해당되는 뜻도 있기 때문에 개인에 해당되는 뜻을 대할 수 있는 사람들과 전체에 해당 되는 뜻을 대할 수 있는 사람들이 없어 가지고는 뜻을 성사할 수 없습니다. 아무리 뜻이 성사될 수 있는 때를 맞이했다 하더라도 그 사람이 책임 수행을 하지 못하게 되면 뜻을 성사할 수 있는 한때도 잃어버리게 됩니다.

28-69
뜻을 이루기 위해 필요한 조건
뜻을 성사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사람이 필요하고, 그 다음엔 때가 문제가 됩니다. 언제든지 때라는 것이 문제가 되는 것입니다. 그와 동시에 때와 사람 사이에 관계되어서 뜻을 성취시킬 수 있는 조건이 반드시 필요합니다.

이런 관점에서 ‘뜻이여! 성취하소서’ 라는 제목으로 말씀드리겠습니다. 인류가 오랜 역사과정에서 얼마나 이것을 고대했겠습니까? 오늘날 우리만이 이것을 고대하는 것이 아니라, 역사시대에 선을 추구하며 하나님편에 서서 악한 세계와 대결해 나섰던 수 많은 사람들은 누구나 ‘뜻이여! 성취 하소서’ 하는 마음을 가졌다는 것입니다.

그렇지만 뜻이 성취된 때를 아직까지 맞이하지 못하였습니다. 뜻을 성취시키려고 수 많은 사람들이 왔다 갔지만 그 뜻을 성취할 사람, 다시 말하면 뜻의 목적을 완전히 성사시켜 가지고 하늘 것으로 혹은 우리 인류의 것으로 만든 사람과 그런 때가 아직까지 이 지구상에 나타나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통일교회는 이런 엄청난 역사적인 과업을 중심삼고 현현했습니다. 그러니 현재의 통일교회 식구들 전체는 물론이고, 앞으로 들어올 수 많은 사람들까지 뜻이 성취되기를 바라야 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직면한 과제로 우리에게 남아 있는 것을 알아야 됩니다.

이런 관점에서 볼 때, 오늘날 우리 통일교회 사람들은 지금까지 뜻을 중심삼고 왔다 간 수많은 선지자들과 같아 가지고는 안 되겠다는 것입니다. 역사과정에서 그 시대의 환경에 그냥 그대로 휩쓸려서 뜻을 대하다가 흘러가 버린 사람들과 같은 사람이 되면 현시점에서 뜻을 성취한다는 것은 불가능할 것입니다.

그러면 어떻게 해야 되느냐? 과거에 뜻을 대하려고 했고, 또 뜻을 대해 나오던 수많은 사람들보다도 오늘날 우리가 뜻을 대하는 모든 면에 있어서 월등해야 합니다. 뜻을 대하는 마음 자세라든가 생활 태도 등, 전면적인 분야에 있어서 그들보다도 월등한 자아를 뜻 앞에 세워 놓지 않고서는 뜻을 성취시킨다는 것은 불가능할 것입니다.

그러면 개체 개체를 두고 볼 때, 옛날 사람과 지금 사람은 무엇이 다르냐? 사람은 다 마찬가지입니다. 그러나 과거의 사람들은 그들의 생활환경이라든가 세계정세, 혹은 여러가지 사회제도 등으로 볼 때 단순했습니다. 반면에 우리는 복잡하게 살고 있습니다. 그만큼 우리는 산만된 환경에 처해 있다는 것을 자인하고 있는 것입니다.

과거의 단순한 시대에 뜻을 대하며 일편단심으로 온 힘을 기울였던 그 시대의 환경을 중심삼고 보면 그들이 결코 오늘 우리보다도 위에 섰다고 보지는 않습니다. 그들은 단순한 입장에서도 뜻을 대해 온 힘을 기울여 나왔지만 그것을 이루지 못했습니다. 그렇다면, 오늘날 산만된 환경에서 뜻을 대하는 우리들은 그들보다 배가의 노력, 배가의 충성을 하지 않고는 뜻 성취가 불가능하다는 사실을 우리들은 알아야 되겠습니다.

28-70
예수님 이상의 심정을 소유하고 정성들여야 뜻을 이룰 수 있어
과거의 사람들 중에는 자기 혼자 뜻을 이루겠다고 하는 사람이 없었습니다. 뜻을 이루기 위해서는 반드시 하나님의 협조를 바랐습니다. 자기가 부족하면 부족할수록 하나님의 협조를 바랐던 것은 두말할 것도 없는 사실입니다.

마찬가지로, 우리 자신들도 이 뜻을 이루기 위해서는 하나님의 협조를 바라고 있습니다. 그러면 협조를 바라는 데 있어서도 우리는 과거의 사람들보다 정성을 배가해야 되겠습니다. 다시 말하면 과거의 사람들이 백만큼의 정성을 들였으면 우리는 천만큼, 만만큼의 정성을 들여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렇게 하나님의 협조를 바라는 데 있어서도 그들보다 월등한 내적인 면과 외적인 면을 갖추지 않고는 뜻 성사는 불가능하지 않겠느냐 하는 문제를 생각지 않을 수 없습니다.

역사시대에 왔다 갔던 수많은 선지선열들이 있었지만 그 중에서도 예수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아들로서 이 땅에 왔다 갔습니다. 그런 그가 30여년의 생애를 거쳐서 십자가를 향해 가는 최후의 순간에 “내 아버지여 만일 할만하시거든 이 잔을 내게서 지나가게 하옵소서. 그러나 나의 원대로 마옵시고 아버지의 원대로 하옵소서(마 26 ; 39)”라고 담판 기도하던 그 심각한 자리에서의 심정적 기준보다도 우리들이 월등하지 않으면 안 된다는 결론이 나오는 것입니다.

그러면 예수가 하나님 아버지를 대하던 것과 오늘날 우리가 하나님 아버지를 대하는 데에는 무엇이 달라야 하는가? 예수가 하나님을 대하던 내정적 심정과 오늘 우리가 하나님을 대하는 내정적 심정이 달라야 됩니다. 다시 말하면, 예수의 심정보다도 이 시대에 살고 있는 우리의 심정이 우위에 설 수 있는 인연을 가지지 않고는 안 된다는 사실, 이런 결론을 내리지 않을 수 없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내 자신은 예수님이 겟세마네 동산에서 하나님 앞에 간곡히 기도하던 그런 심정을 지니고 있느냐? 이것이 문제가 되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 다음에는 예수님이 기도하던 입장을 생각해 봐야 합니다. 예수님께서 자기에게 다가올 죽음이 두려워서 그렇게 기도한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찾아온 이스라엘 민족과 국가를 잃어버릴 입장에 있었기 때문에 그런 기도를 할 수 밖에 없었던 예수의 사연을 알아야 합니다. 이것은 슬픈 사연이요, 딱한 사정이었습니다. 돌이킬래야 돌이킬 수 없는 극단적인 입장에 처했던 예수님의 사정을 우리는 여기에서 엿볼 수 있는 것입니다.

오늘날 우리는 자신의 민족보다도 민족과 국가와 나아가 세계의 문제를 대하는 마음자세를 가져야 합니다. 이것을 자신이 수행해야 할 사명이요, 감당해야 할 시대적 책임으로 알고 몸부림쳐 나가야 합니다. 그리하여 내 자체가 예수의 심정적 인연 이상의 자리에 도달해야 합니다. 이것이 문제인 것입니다.

‘뜻이여! 성취하소서’, ‘아버지 뜻대로 하시옵소서’ 하는 여기에는 소원이 미래에 남아지는 것입니다. 현재와 미래의 간격을 메우기 위해서는 피의 대가를 치르는 탕감의 길을 가야 하며 십자가로 말미암은 죽음의 길을 가야 합니다. 그러지 않고는 메울 수 없는 구덩이가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우리 시대에 이 엄청난 뜻을 앞에 놓고 ‘뜻이여! 성취하소서’ 하는 소원을 가지고 뜻을 대하는 우리들 자신에게 있어서 예수님이 겟세마네 동산에서 기도하던 그 이상의 심정을 어떻게 체득하느냐 하는 것이 문제입니다.

이스라엘을 대한 하나님의 4천년 섭리역사를 염려하면서, 이스라엘이 자신을 잃어버리면 이스라엘의 운세는 기울어지고 하나님의 축복이 이방으로 옮겨질 것을 알면서 전체를 책임지고 있던 예수님의 입장이 얼마나 심각했겠는가? 이런 심각한 자리에서 몸부림치던 예수님의 심정을 능가하는 우리 자체가 되어야 합니다. 그러지않고는 예수께서 ‘뜻이여 ! 성사하소서’ 하면서 가신 죽음길을 우리가 해원성사하기에는 너무나 부족하다는 것입니다. 그러니 뜻을 성사시킬 수 있는 참다운 사람이 되는 데 있어서 그것이 문제입니다.

28-72
하나님의 뜻과 우리의 자세
여러분 자신이 일을 중심삼고 뜻을 따라 나감에 있어 ‘뜻이여! 성취하소서’ 하는 데는 내 개체가 성취하겠다는 것이 아닙니다. ‘성취하소서’ 하는 데 있어서 주체는 하나님이고 우리는 상대적 입장에 있는 것입니다. 그 주체와 일체화되어야 할 상대적인 입장에 있는 자신입니다. 그렇지만 뜻은 하나님과 우리가 합해 가지고 이루어야 될 것이기 때문에, 이 뜻을 기필코 성취해야 할 것이 하나님의 요구요, 우리에게 남아져 있는 사명입니다.

하늘의 뜻과 우리의 사명을 어떻게 연결시키느냐 하는 문제를 중심삼고 볼 때, 우리 개인만 가지고는 안 됩니다. 예수님이 십자가를 앞에 놓고 최후의 담판기도를 하면서 ‘아버지 뜻대로 하시옵소서’ 하고 호소하던 그 내적 심정이 오늘 우리에게도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여러분 개인의 뜻과 하나님의 뜻은 다릅니다. 개개인을 중심삼고 볼 때, 개개인이 처해 있는 환경이 다 다릅니다. 자기가 처해 있는 사정이라든가, 혹은 역사적 배경이라든가, 시대적 환경이 모두 다르니만큼 그 다른 내용을 중심삼아 가지고 나름대로 소신을 갖고 있습니다. 이런 개인의 뜻과 전체적 복귀섭리를 중심삼은 하나님의 뜻과는 백이면 백 전부가 화합할 수 없는 내용들입니다. 그 내용이 많으면 많을수록 뜻을 성취할 수 있는 가능의 도수가 점점 떨어진다는 것입니다.

이런 점에서 볼 때, 뜻을 성취시켜야 할 우리들은 나의 뜻이라는 자기를 중심한 모든 요인을 무시해 버리고 하나님을 중심한 전체의 요인을 표현화시키는 생활을 해야 합니다. 그러한 생활을 어떻게 하느냐, 하늘 전체의 인격을 자기 자신을 중심삼고 표현시킬 수 있는 인격적 기준을 어떻게 세우느냐 하는 것이 문제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나는 뜻을 위해 태어났다, 뜻을 위해 산다, 그것 외에는 일체 다른 것을 요구할 수 없다고 하는 마음 자세를 가져야 합니다. 다시 말하면 예수께서 ‘아버지여 내 뜻대로 마시옵고 아버지 뜻대로 하시옵소서’라고 했던 그런 기도의 요건으로 담판지을 수 있는 자리를 항시 우리 생활권내에 간직해야 합니다. 그리하여, ‘내 자신이 뜻을 이룰 수 있는 입장에 섰사오니, 뜻을 주관하시는 아버지여, 뜻을 놓고 나에게 지시하고 명령하시옵소서’ 할 수 있어야 합니다. 그런 자리를 어떻게 하여 내 생활권내에, 내 생애노정에 전개시키느냐 하는 문제가 뜻을 성취시켜야 할 입장에 선 우리에게 가장 중요한 문제가 아니겠습니까?

‘내 뜻대로 마시옵고, 아버지 뜻대로 하옵소서’ 하는 여기에는 내 뜻이 있을 수 없습니다. 내 뜻이 조금도 있을 수 없다는 것입니다. 여러분이 그것을 알아야 됩니다. 아버지의 뜻이 이루어짐으로 말미암아 내 뜻은 전체가 완성이 되는 것입니다. 나 하나를 중심삼은 내 뜻이라는 것은 국민이면 국민권내에서 이룰 수 있는 뜻의 한계선을 못 넘는 것입니다. 국가면 그 국가권내에서 뜻을 이룰 수 있는 한계선을 넘기 힘들다는 것입니다. 또한 이 세상이면 세상에 있어서의 한계선을 넘기 어려운 것입니다.

그렇지만 아버지를 중심삼은 뜻은 역사성을 초월하는 것입니다. 시간과 공간을 초월한 뜻이기 때문에 그 뜻권내에 서 있는 사람은 이미 자기의 뜻을 이룬 자리에 서게 되는 것입니다. 이렇게 되는 거예요. 내 뜻은 이미 이루어진 자리에 서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본래의 내 뜻이 무엇이냐? 내 뜻은 하늘로부터 나고 하늘로부터 살고 하늘로부터 목적을 부여받을 수 있는 것이어야 합니다. 우리는 담판 기도를 하지 아니하고도 ‘뜻을 이루었다’ 할 수 있는 자리에 설 수 있어야 합니다. 그런 관점에서 겟세마네 동산에서 담판 기도하던 예수님이 이상했던 그 뜻을 중심삼고 그러한 요건을 넘어설 수 있는 내 자신을 발견하고, 그 뜻으로 말미암아 영속할 수 있는 내 자신을 발견해야 합니다. 그리하여 내가 뜻 앞에 세워졌다는 자각심과 주체의식을 가져야 합니다. 이것을 어떻게 체득하느냐 하는 것이 중요한 문제가 아닐 수 없습니다.

28-74
때를 잘 맞이해야
그렇지만, 그런 사람이 되어 있다 하더라도 뜻을 이룰 수 있는 때가 되지 않으면 뜻은 이루어지지 않는 것입니다. 아무리 뜻을 이룰 수 있는 사람이 되어 있다 하더라도 때가 되지 않으면 안 된다는 것입니다. 하루의 때도 아침이 있고 낮이 있고 저녁이 있고 밤이 있는 것과 마찬가지로 뜻을 이루어 나가는 과정에 있어서도 반드시 아침의 때, 낮의 때, 저녁의 때, 밤의 때가 있는 것입니다. 그 때가 반대로 되어서는 안 됩니다.

아무리 뜻을 이룰 수 있는 훌륭한 사람이 되어 있다 하더라도 때에 대한 시점을 올바로 맞추지 않고는 뜻을 이루지 못합니다. 예수가 왜 뜻을 이루지 못했느냐? 그 때가 예수와 박자를 맞출 수 있는 때가 못 되었던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환경의 인연을 갖추지 못했다는 것입니다.

때가 무르익어 가지고 거국적으로 상하좌우의 모든 국민이 일치되어 예수를 전적으로 맞이할 수 있는 환경의 때가 되지 못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그 때를 맞기 위해서 3년노정이라는 기간을 지내면서 때를 조정했던 것입니다.

그러나 때를 맞추기 위한 예수님의 3년노정이 틀어져 나감으로 말미암아 예수는 영영 그 때를 맞지 못하고 2천년 역사를 거쳐 우리가 이루어야 할 때로 남겨 놓고 갔다는 것입니다. 이렇게 된 거예요.

그러면 오늘날 우리 통일교회는 어떠했느냐? 통일교회도 마찬가지입니다. 그 때를 맞지 못했습니다. 대한민국에 있어서 통일교회가 출발할 때와 대한민국 교계가 하나님의 뜻을 대할 수 있는 때가 평행선상에서 서로가 상응할 수 있는 기준에 서 있지 않았습니다. 여기서 반발이 벌어지고 상충이 벌어짐으로 말미암아 우리는 많은 때를 놓쳐 버렸습니다. 수없이 많은 때를 놓쳐 버리고 1970년대를 맞이하였던 것입니다.

그러면 이렇게 때가 흘러가는 과정에서 어느때가 뜻의 종말을 볼 수 있고, 뜻의 성취를 볼 수 있는 제일 적절한 때냐 하는 것입니다. 그 때가 우리 통일교회 노정에 반드시 있어야 됩니다. 물론 ’60년대도 뜻을 이루는 시대요, ’70년대도 뜻을 이루는 시대로 남아질 것입니다. 그러나 그 가운데서 어느때가 더 귀중하냐 하면, ’60년대보다도 ’70년대가 더 중요한 시기입니다.

28-75
’60년대는 기초시대, ’70년대는 실천시대
뜻적으로 보면, ’60년대까지는 교회의 기반을 닦기 위한 기간이었습니다. 교회의 기반을 다지기 위한 기간이었다는 것입니다. 이 말이 무슨 말이냐 하면, 지금까지 기독교가 반대했지만 그것을 극복하여 반대하지 않게끔 외적인 환경을 갖추는 시기였다는 것입니다.

본래 6천년 역사를 중심삼아 가지고 기독교가 열매맺었어야 했습니다. 그런데 기독교가 반대함으로 말미암아 우리 통일교회 자체가 때를 맞기 위한 노정을 개척해 나온 것입니다. 이 시대가 ’60년대라는 것을 알아야 되겠습니다. 다시 말하면, 이 시대는 우리들에게 있어서 탕감시대였다는 것입니다.

6천년의 역사적 탕감시대를 결실맺어야 할 기독교를 중심으로 이상적인 뜻을 이루려 하였으나 그 뜻을 이루지 못했기 때문에 이것을 횡적으로 재탕감하는 기간이 있어야 합니다. 그 기간이 지난 ’60년대였다는 것입니다. 이 기간에는 눈물로 대가를 치러야 했고, 피로 대가를 치러야 했고, 혹은 다른 모든 희생으로 대가를 치러야 했습니다.

이러한 대가를 치렀지만, 그 대가가 하나님으로부터 자신있게 보답받을 수 있는 대가는 아니었습니다. 그렇다고 영영 없어질 대가로 치러진 것은 아니었습니다. 천 사람이 대가를 치르면 천 사람이 받을 수 있는 결실을 가져오는 것이지만, 우리가 ’60년대에 치른 대가는 통일교회가 하나의 때를 맞이할 수 있는 조건이 되었을 뿐 때의 완성을 이룰 수 있는 그런 결과는 가져오지 못했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70년대는 어떤 때냐? 우리가 희생을 하면 그 희생한 만큼 대가를 받아 올 수 있는 때라는 것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60년대와 ’70년 대는 시대가 다르다는 것입니다. 무슨 말이냐 하면, 어떤 일을 하더라도 반드시 기반을 닦는 때가 있고, 실천하는 때가 있으며, 그 다음에는 성사 하는 때가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기반이 닦아지지 않고는 실천할 수 없으며, 실천하지 않고는 성사를 할 수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 통일교회에 있어서 ’60년대는 터전을 닦는 때였습니다. 다시 말하면, 종교라는 간판을 붙이고 나와서 통일교회로서의 기반을 닦는 시대였습니다.

이제 ’70년대는 통일교회에 있어서 실천하는 시대입니다. 성취라는 것은 반드시 실천과정을 거치지 않고는 이루어지지 않는 것입니다. 기반이 닦여졌다 하더라도 기반만 가지고서는 성취가 되지 않는 것입니다. 그 기반 위에 어떻게 이것을 시행해 나가느냐, 또는 어떻게 실천하느냐 하는 실천 시기가 더 중요한 것입니다.

봄이 되어서 농부가 씨를 뿌리는 때가 있고, 뿌린 씨가 싹이 나서 자라는 때가 있고, 그것을 결실하는 때가 있는 것입니다. 이와 마찬가지로 씨를 뿌리기 위해 터를 닦는 시기와 자라는 시기, 즉 실천의 시기가 있는 것입니다. 이 실천시기가 모든 것이 좌우되는 가장 중요한 때입니다. 그러기에 이 시기에 잘해야 됩니다. 우리 통일교회에 있어서 ’70년대는 실천의 시기입니다. 무엇을 위해서 실천해야 할 시기냐? 뜻의 성취를 위해서 실천해야 하는 시기입니다.

그러면 우리가 실천하는 모든 것이 역사와 더불어 없어지는 것이냐? 없어지는 것이 아니라 뜻을 성취하기 위한 결실을 가져온다는 것입니다.

씨를 뿌려 그 씨가 자라면 씨는 없어지는 거예요. 그렇지만 없어진 씨의 대가로 하나의 새로운 생명이 싹트는 것입니다. 그 씨와 생명과는 절대로 다릅니다. 그래서 벼라면 벼가 이 생명을 중심삼고 결실을 맺기까지는 주인의 갖은 수고가 가해져야 됩니다. 비료를 주어야 되며 천지 자연의 모든 혜택이 가해져야 결실로 맺어지는 것입니다.

그와 마찬가지로, 우리가 ’60년도에 수고한 모든 것으로 말미암아 통일교회라는 하나의 싹이 나왔습니다. 오늘날 이 땅에는 수많은 종교가 있습니다. 곡식에 비유하면 밭이나 들에 수많은 곡식이 심어져 있는 것과 같습니다. 벼라든가 조, 혹은 옥수수 등 오곡이 심어져 있는 거기에 비로소 통일교회라는 하나의 싹이 터서 그 존재성을 가지고 푸른빛을 나타내기 시작했다는 것입니다.

28-77
세상에 영향을 미치는 자가 되라
그러면 이제부터의 문제는 무엇이냐? 이것을 어떻게 완숙시켜 가지고 하나님이 바라시는 완전한 결실을 맺느냐 하는 것입니다. 자연의 법칙을 놓고 볼 때, 중요한 시기에 임해 있다는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뜻을 성취시킬 수 있는 실천시기로서 가장 귀한 시기에 당도해 있다는 것입니다. 과거에 그런 기반을 닦은 터전 위에 올해부터 실천시대에 들어가기 때문에 더 귀중하다는 것입니다.

1974년까지 2차 7년노정이 끝나게 됩니다. 또, 1975년부터 81년까지가 3차 7년노정 기간입니다. 그래서 이 ’70년대가 우리 통일교회에 있어서 2차 7년노정과 3차 7년노정이 마지막 고비까지 연결되는 가장 중요한 시기입니다.

때는 이미 무르익어 우리가 바라던 실천시대를 맞이할 환경이 되었습니다. 이러한 실천시대가 왔는데도 불구하고 실천할 수 있는 사람은 어떠한 입장에 있는가? 때는 뜻을 성취시킬 수 있는 환경적 요건을 갖추어 우리의 목전에 다가왔는데, 이 때를 중심으로 실천해야 하는 우리 자신은 어떠한가? 이것이 문제가 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이제 기독교나 세계의 모든 정세를 바라볼 때 우리를 반대하는 사람들이 우리를 밟고 올라서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그들이 우리의 움직임에 영향을 받을 수 있는 권내에 들어왔다는 것입니다. 이것을 하루로 비교하여 보면 그들은 석양을 맞이한 것이요, 우리는 아침을 맞이한 것과 마찬 가지입니다. 석양의 햇빛은 시간이 가면 갈수록 점점 황혼이 깃들어 밤이 될 것이요, 아침의 햇빛은 시간이 가면 갈수록 그와 반대로 환한 대낮이 될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그야말로 중대한 실천과정의 시기에 이르렀다는 것입니다.

이제 여러분들이 때가 이른 것을 알았으면 인간으로서 실천해야 할 것을 다해 세상에 영향을 미쳐야 하는 것입니다. 만약 영향을 못 미치게 되면 참소를 받을 것입니다. 그렇게 되는 거예요.

이스라엘 민족은 예수를 중심한 때를 맞춰 주지 못함으로 말미암아 그때를 회생시키기 위해서 2천년 동안 유리고객했습니다. 기반을 닦는 때에 있어서도 그랬는데, 오늘날 우리는 성취할 수 있는 과정에 있으면서도, 뜻 성사를 바라보는 입장에서 이것을 실천할 수 있는 환경에 있으면서도 이 때를 맞추지 못한다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기반을 닦는 시대에 때를 못 맞추었던 이스라엘 민족이 회생할 수 있는 한때를 맞기 위해 2천년 수난의 역로를 거쳤다면, 우리 통일교회나 대한민국에 닥쳐올 운명은 그보다 더 비참할 것이 아니겠어요?

이런 입장에 있다는 것을 생각할 때 우리 통일교회 식구들은 일치단결하여 갖추어진 이 한때, 다시 말해 실천할 수 있는 좋은 이 때를 중심삼고 백방으로 그 효과를 발휘해야 합니다. 이것이 금후의 ’70년대를 중심한 통일신도들이 해야 할 책임이 아니겠습니까? 이런 문제를 여러분이 명심하지 않으면 안 되겠습니다.

28-78
탕감복귀완성의 3대 절대요인
그러면 성취할 수 있는 때와 사람이 갖추어졌다 할 때 여기에는 무엇이 필요하냐? 반드시 조건이 필요합니다. 아무리 사람이 잘났다 하더라도, 아무리 때가 갖추어졌다 하더라도 제시할 수 있는 조건을 갖추어야 됩니다. 이 조건을 갖추는 것은 여러분 각자 각자가 다릅니다. 타고난 천품이 다르고, 각자의 소성이 다르니만큼 각자가 가야 할 탕감의 노정이다 다르다는 것입니다. 탕감복귀완성에는 사람이 필요하고, 기간이 필요 하고, 조건이 필요합니다. 이것은 절대 요인입니다. 그래서 그 일을 해야 하는 우리가 각자의 소성은 다르지만, 이제는 인격을 갖추었고 때를 맞이 했으니 여기에 조건이 필요한 것입니다. 이 조건은 무엇이 되겠느냐? 여기에는 반드시 방향을 바로 갖춰야 됩니다.

여러분의 본성과 여러분 자체가 가야 할 방향이 하나님이 보시는 기준과 서로 일치되어야 합니다. ‘아바 아버지여 내 뜻대로 마시옵고 아버지 뜻대로 하시옵소서’ 하는 그 순간까지는 방향이 일치가 안 돼 있다는 것입니다. 아버지의 뜻과 내 뜻이 일치가 안 돼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니 방향이 일치되어야 되겠다는 것입니다. 방향이 일치된 자리에서 조건을 제시해야 된다는 것입니다. 가령 하나님은 동쪽을 바라보고 계시는 데 서쪽을 바라보면서 조건물을 제시하면 통할 수 없는 것입니다. 하나님과 일치된 자리에서 조건물을 제시해야 되겠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그 조건물이란 무엇이냐? 에덴 동산에서 아담 해와가 잃어버린 조건물입니다. 그들은 말씀을 잃어버렸고, 실체를 잃어버렸고, 심정을 잃어버렸습니다. 다시 말해서, 3대 제물이란 것도 이것을 찾기 위한 것입니다. 그러면 3대 제물이 무엇이냐? 결국은 아들딸을 찾는 것입니다. 3대 제물은 그거예요.

40일 기간이면 그 40일 기간을 중심삼고 무엇을 하자는 것이냐? 40일 기간에 있어서 3대 조건물은 3대 아들딸을 찾는 것입니다. 즉, 세 사람을 찾는 것입니다. 이 세 사람은 구약시대, 신약시대, 성약시대의 세 아들 형(型)입니다. 또한, 이 조건물은 세 천사에 해당되는 것이요, 이 조건물은 3대(代)를 대신한 것도 됩니다. 이를 테면 아브라함, 이삭, 야곱의 대신이 되는 것입니다. 그것이 또 나에게 있어서는 내 아버지와 나와 내 후손도 됩니다. 그렇게 되는 거예요.

그것은 또한, 횡적인 면에서 나를 중심삼고 보게 되면 사위기대의 대표적인 형도 됩니다. 이 조건물을 다 복귀하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되느냐? 말씀과 일체가 되어야 합니다. 그 말씀과 일치된 사람이 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말씀과 일체가 된 사람이라 하더라도 심정이 하나님과 일치되지 않으면 안 되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방향을 갖추는 데는 하나님이 지향하고 바라시는 그 말씀과 일치되는 방향, 하나님의 인격과 일치되는 방향, 하나님의 심정과 일치되는 방향을 갖추어야 합니다. 여기에서 우리는 탕감조건이 되는 믿음의 아들딸을 복귀할 수 있는 것입니다.

예수께서 세 제자를 데리고 겟세마네 동산에 올라가 기도할 때 예수님과 세 제자 사이에는 방향이 일치가 안 되었습니다. 세 아들의 조건과 형태는 갖춘 것 같았지만 예수님의 뜻과 제자들의 뜻은 달랐던 것입니다.

하나님의 뜻과 예수님의 뜻이 차이가 있었고, 또한 예수님의 뜻과 제자들의 뜻이 차이가 있었습니다. 하나님의 뜻이자 예수의 뜻이요, 예수의 뜻이자 제자들의 뜻이 되었어야 했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중심삼고 위로는 하나님이요, 아래로는 땅을 대표할 수 있는 입장에서 소생, 장성, 완성이라는 3대권과 일치할 수 있는 방향을 중심삼고 하나의 기준으로 총합된 목표를 향하여 나가야 했던 것입니다. 그런데 서로 상충된 입장에서 몸부림쳤던 것이 겟세마네 동산에서의 기도였습니다. 세 번씩이나 기도한 내용이 그렇다는 것입니다. 한번만 기도하면 됐지, 무엇 때문에 세 번씩이나 기도를 했겠습니까? 여기에 문제가 있는 것입니다.

이런 관점에서 볼 때, 아버지의 뜻과 여러분의 뜻과 여러분이 앞으로 복귀할 믿음의 아들딸의 뜻이 일치가 되어야 합니다. 이 3대의 뜻이 종적으로 하나되어, 이것을 중심으로 하나님과 여러분과 여러분의 믿음의 아들딸이 하나되어야 합니다. 종적인 것을 횡적으로 탕감하여야 되겠기 때문에 반드시 세 아들이 아니면 안 된다는 거예요. 그런 입장에서 조건물을 제시해야만 됩니다.

그러므로 때가 일치되고 사람이 일치되고, 방향이 일치된 자리에서 조건을 제시하지 않고는 뜻이 어루어지지 않습니다. 아무리 ‘뜻이여, 성취 하소서’라고 기도해도, 기도해서 아무리 큰 은혜를 받았다고 해도 일치하지 않은 입장에서는 그 은혜가 자기의 것이 되지 못합니다. 은혜는 반드시 때를 만나서 그 시점을 통과해야 됩니다. 때를 맞이한 그 자체만 가지고도 안 됩니다. 하나님이 바라시는 뜻과 내 뜻이 일치된 자리에서 하나님이 바라시는 조건물과 내가 제시한 조건물이 일치되었을 때, 비로소 뜻이 성취되는 것입니다.

28-81
3대가 하나되어 사위기대를 이루어야
’70년대를 바라보는 입장에서 선생님은 선생님대로의 책임을 느끼고 있습니다. 책임이 있는 것을 내가 알고 있습니다. 우리는 ’70년대에 들어오면서부터 이미 하나님께서 준비해 놓은 때를 맞아들일 수 있는 입장이 되었습니다. 그러니, 여기에 일치될 수 있는 조건물을 제시해야 되는 것입니다. 제시해야 할 조건물에는 선생님 자신이 드려야 할 조건물도 있지만 통일교회로서 드려야 할 조건물도 있습니다.

다시 말하면 하나님의 뜻과 예수의 뜻과 그 제자들의 뜻이 일치되어야 되는 것과 마찬가지로, 하나님의 뜻과 통일교회를 중심한 뜻과 선생님의 뜻이 일치가 되어야 됩니다. 또한, 선생님의 뜻과 선생님을 대하는 여러분의 뜻도 일치가 되어야 됩니다.

일치되는 데는 일직선으로 일치가 되어야 합니다. 각각 떨어진 자리에서는 일치가 안 됩니다. 자기를 중심으로 일치시키려고 하면 되지 않는 다는 것입니다. 일직선으로 서로 일치시켜 가지고 나가야만 됩니다.

그렇기 때문에 예수는 하나님의 뜻과 자신의 뜻을 일치시켜야 했습니다. 그런 다음에는 다시 제자들의 뜻과 일치시켜야 했던 것입니다. 그런데 그것이 안 되었던 것입니다. 그렇게 되면 자기의 갈 길을 가려 해도 못 가는 것입니다. 십자가가 아닌 그 이상의 어떠한 길도 가지 못하는 것입니다. 그런 길을 결정하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뜻을 이루기 위해서는 이미 길을 결정해 놓고 결정적인 기반 위에서 ‘나는 이제 간다’ 할 수 있는 입장에 서야 합니다. 다시 말해서 하나의 목적과 방향을 중심삼고 하나님의 뜻에 일치시켜 나가야 한다는 것입니다. 일체가 안 되어 가지고는 안 되는 거예요.

통일교회를 믿다가 떨어져 나간 사람들 중에는 ‘통일교회 말씀은 좋은데, 그렇다고 해서 꼭 교회에 나가야 되나? 교회에 나가지 않더라도 그 말씀대로 살면 되지’라고 말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건 그렇게 안 되는 것입니다. 종적인 역사를 횡적으로 탕감해야 하기 때문에 여러분은 교회에 나와야 하는 것입니다. 원리에 딱 나와 있어요.

그러면 우리 통일교회 자체를 두고 보면, 하나님의 뜻과 선생님의 뜻과 여러분의 뜻이 일치가 되어야 합니다. 우선 그것이 되어야 됩니다. 그런 다음에 방향을 잡고, 그런 다음에 조건물을 제시해야 합니다. 그것이 일치되지 않고는 아무리 때가 무르익었다 하더라도 뜻 성사는 절대 불가능한 것입니다. 이 3대가 합해져서 하나의 제물과 마찬가지의 입장에 서야 하는 것입니다. 우주사적인 전체를 중심삼고 볼 때 하나되는 길밖에 없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지금까지 하나님이 수고한 것이 무엇이냐? 하나님의 뜻과 일치되는 사람을 세워서 그 사람을 중심으로 그 후손과 일치되게 하신 것입니다. 이렇게 일치를 이루는 것이 사위기대입니다. 가정을 보게 되면 3대입니다. 하나님을 중심삼고 아담과 그의 자녀까지 해서 결국 3대입니다. 그렇지요? 왜 사위기대를 필요로 하느냐? 이것이 이루어지면 뜻이 이루어지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사위기대가 완성되지 않으면 종횡이 일치되는 세계는 이루어지지 않습니다. 사위기대라는 것은 3대가 일치되는 것을 말합니다.

예수님 시대에 있어서 하나님을 중심삼고 예수님과 사위기대를 이루어야 할 사람들이 베드로, 야고보, 요한이었습니다. 그런데 그들이 하나되지 못했습니다. 하나되지 않으면 뜻이 성사될 수 없는 것입니다. 그럼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고통은 하나님의 고통대로 남아졌고, 예수의 고통은 예수의 고통대로 남아지게 되었으며, 제자들의 고통은 제자들의 고통대로 남아졌던 것입니다.

그 고통 역시 갈라져서 일치가 되지 않았습니다. 서로가 한마음으로 일치된 입장에서 고통을 받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하나님대로 고충을 느끼고, 예수는 예수대로 고충을 느끼고, 제자들은 제자들대로 고충을 느꼈던 것입니다.

그러면 이 3대의 고충이 어느때에 결속되느냐? 죽음의 고개를 넘지 않으면 결속되지 않겠기 때문에, 베드로, 야고보, 요한은 예수님으로 말미암아 죽음의 고개를 넘는 자리에 서게 된 것입니다. 그럼으로 말미암아 비로소 예수의 뜻과 일치되고 하나님의 뜻과 일치될 수 있었던 것입니다. 그러지 않고서는 일치될 수 없는 거예요.

하나님께 고충을 주었고, 예수님께 고충을 주었던 제자들은 영원히 영원히 구속받을 길이 없었으나, 죽음의 길을 넘어감으로 말미암아 심정적 기반과 실천적 기반을 갖추게 되었던 것입니다. 이로 인해서 뜻의 방향에 반대되었던 자신들을 뜻과 일치되는 입장에 세워 놓았던 것입니다. 이렇게 보는 거예요.

28-83
문제는 여러분 자신
하나님의 뜻은 막연한 것이 아닙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의 뜻이 구체적으로 어떻게 되어 있느냐? 오늘날 이 민족을 대하는 하나님에게는 분명히 뜻이 있습니다. 이러한 하나님의 뜻을 책임지고 나갈 수 있는 여러분이 되어야 합니다. 그러한 개인이 된 다음에는 그러한 가정이 되어야 하며, 그러한 씨족·민족·국가가 되어야 합니다. 이것을 책임질 수 있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그래서 사람이 중요하다는 거예요.

그렇기 때문에 천지의 중심이 무엇이냐? 바로 내 자체라는 겁니다. 여러분 개개인이 없어 가지고는 뜻을 못 이룹니다. 내가 없어 가지고는 가정의 뜻도, 종족의 뜻도, 민족의 뜻도, 국가의 뜻도, 세계의 뜻도 못 이룬다 이겁니다. 그렇기 때문에 내가 문제인 것입니다.

따라서 나를 중심삼고서 하나님의 뜻을 이루어 나가야 됩니다. 내 자신이 후손들 앞에 승리의 모체가 되어야 된다는 것입니다. 그러니 나 하나가 방향이 틀어지는 날에는 전부 깨져 나갑니다. 우리 통일교회를 중심삼고 보면, 선생님은 하나님과 여러분들 사이에서 양쪽을 모두 책임지고 왔다 이겁니다.

이런 관점에서 뜻 성사라는 것을 중심삼고 볼 때, 우리에게 있어서 지금 이 1970년대는 기반이 닦여진 터 위에서 그야말로 뜻을 성사시킬 수 있는 실천시대라는 것입니다. 그러면 이 실천시대를 우리가 어떻게 가느냐? 꼬불꼬불 가느냐? 직행하느냐? 꼬불꼬불 가면 거리가 멀어지는 것입니다. 그러니 직행해야 됩니다. 문제는 여기서부터 벌어지는 것입니다. 먼 길로 가게 되면 천년이 걸릴 수도 있습니다. 잘못 가면 그렇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리면 어떻게 직행하느냐? 혼자서는 직행하지 못합니다. 하나님을 모시고 같이 가야 됩니다. 그렇기 때문에 ‘성취한다’가 아니라 ‘성취하소서’ 했던 것입니다. 하나님을 모시고 가야 합니다. 하나님이 앞장서서 가는 것이 아닙니다. 사람이 타락했기 때문에 사람이 앞장서야 합니다. 여러분이 앞장서야 된다는 것입니다.

그 다음에는 자기와 닮을 사람을 이끌고 가야 됩니다. 어디까지나 그 사람은 부모와 일치되어야 됩니다. 예수님의 세 제자는 예수님과 일치되어야 했었습니다. 예수님이 죽음의 자리로 나가기 전에 먼저 죽을 수 있는 세 제자가 되어야 했던 것입니다.

예수는 맞아서는 안 될 사람입니다. 죽임을 당하더라도 내적인 뼈가 꺾여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제자들은 외적인 살의 입장입니다. 그러니 뼈인 예수가 맞기 전에 살의 입장인 제자들이 먼저 맞아야 하는 것입니다. 그러기에 죽임을 당할 때에 제자들이 먼저 죽는 책임을 해야 하는 것입니다.

오늘 통일교회 교인들과 선생님의 입장을 두고 분석해 보면 지금까지 선생님을 맞게 했던 사람들이 누구냐? 통일교회 교인들이라는 것입니다. 전부 외부 사람들이 친 것이 아닙니다. 통일교인들이 맞게 했던 것입니다. 그러니 원수가 누구냐 하면 집안 식구라는 겁니다. 부모의 가슴을 아프게 하고, 염려를 끼치고, 가는 길을 복잡하게 만든 사람들이 누구냐 하면 세상 사람들이 아니라 통일교인 여러분들이라는 거예요, 세상도 하늘도 전부 망치는 그런 일들을 여러분들이 했다는 것입니다.

그런 일을 한 장본인이 누구겠습니까? 타락한 천사장이 그렇게 했습니다. 사탄이 세상도 망치고 하늘도 망친 거예요? 그런 입장에서 보게 된다면 여러분과 딱 맞아 떨어진다는 것입니다. 그러니 제일 문제가 되는 것이 뭐냐? 바로 여러분 자신들이라는 것입니다.

28-84
죽음길로 가는 길이 뜻을 이루는 길
‘뜻이여! 성취하소서’, 그것을 위해서 하나님을 여러분이 모셔야 되겠습니다. 하나님을 여러분 마음에 모셔야 되겠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마음에 모시고 자녀들을 올바로 교육시켜야 되겠다는 것입니다. 그래야 됩니다. 자녀들을 올바로 교육시켜야 되겠습니다. 책임을 지고 있는 사람은 적당히 하라고 해서는 안 됩니다. 그런 것이 부모입니다.

자기 자식에게 그릇되게 가르치는 부모는 없습니다. 스승은 제자에게 그릇되게 가르칠 수도 있습니다. 원수의 입장에 있는 스승이라면 망하게 가르칠 수도 있는 것입니다. 스승은 두 종류가 있을 수 있습니다. 형제도 두 종류가 있을 수 있어요. 그렇지만 부모는 오직 하나입니다. 아무리 악한 부모라 하더라도 자식에게는 올바로 가르쳐 주는 것입니다.

따라서 하나님과 나와 내 자식이 하나되어야 됩니다. 그것이 어디에서 하나되어야 하느냐? 영계에 가서 하나되는 것이 아닙니다. 땅에서, 이땅에서 하나되어야 합니다. 그 하나되는 장소가 어디냐 하면 편안한 안식 처가 아닙니다. 십자가 도상입니다. 십자가 도상에서 하나되는 거예요. 다시 말하면, 하나님과 사탄이 대치하는 최일선에서 일치가 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금년에는 그런 일선에서 하나되어야 되겠습니다. 일선에서 하나 되겠다는 마음 자세를 갖춰 가지고 ’70년대를 넘어가야 합니다. 이런 마음을 가지고 ’70년대를 넘어가게 될 때 뜻을 성취시킬 수 있는 근본 내용이 결정되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여러분이 지방에 나가 전도하면서 어려운 일을 당하게 되면 반드시 거기에 하나님이 같이 하십니다. 십자가를 짊어지고 진지한 입장에서 하나님을 위하여 자기 생명과 모든 것을 바치는 자리에 들어가면 하나님은 반드시 가르쳐 주십니다 예수님이 겟세마네 동산에서 “아바 아버지여, 만일 할 만하시거든 이 잔을 내게서 지나가게 하옵소서. 그러나 나의 원대로 마시옵고 아버지 원대로 하옵소서(마 26:39)”라고 했을 때 하나님이 거기에 간섭하여 모든 문의의 대상이 되어 결정적인 권한을 가지고 나타나셨던 것과 마찬가지로 여러분이 그런 입장에 서면 하나님은 반드시 가르쳐 주신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하나님은 왜 그런 일을 하시느냐? 하나님의 심정에 일치시킬 수 있는 아들딸을 찾기 위해서입니다. 하나님이 지금까지 수난의 길을 걸으시면서 복귀섭리를 하시는 것은 무엇 때문이냐? 아들딸을 찾기 위해서 입니다. 그것을 위해 그런 일을 하시는 거예요. 아들딸, 곧 아담 해와를 찾기 위해서입니다. 그러면 사람들이 지금까지 하나님을 중심으로 수고하는 것은 왜냐? 자기의 아들딸을 찾아서 사위기대를 이루기 위해서입니다. 그렇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 관점에서 볼 때, 하나님께서 남자면 남자, 여자면 여자 각 한 사람을 대하여 찾아 나오시는 데는 이중의 목적을 갖고 계시다는 것입니다. 즉, 아담 해와를 복귀하는 것만이 아니라 그의 아들딸들까지 복귀하여 사위기대를 복귀하기 위한 것입니다.

그러면 사위기대는 누가 복귀시키느냐? 여러분 각자가 복귀시켜야 됩니다. 내가 해야 된다는 것입니다. 나 자신이 하나님과 일치되고 또한 아들딸과 일치되어야 됩니다. 믿음의 아들딸을 찾아 교육해서 죽음길을 대신 갈 수 있는 신앙의 아들딸로 세워 놓아야 되는 것입니다. 그래야 비로소 하나의 완전한 안식의 터전이 마련되는 것입니다. 자기 일대에 이 기준만 결정해 놓게 되면 예수님보다도 더 위대한 자리에 나갈 수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죽음길을 가게 되었을 때, 베드로, 야고보, 요한은 모두 예수님을 버리고 도망갔습니다. 그러나 만일 여러분 자신이 죽음길에 나가게 되었을 때 여러분 자신이 뜻을 중심하고 찾아 세운 아들딸이 대신 죽겠다고 나서게 된다면 거기서부터 천국이 벌어지는 것입니다. 만약 예수님의 제자들이 그랬다면 예수님이 거기서 죽었어도 지상에 부활할 필요가 없다는 것입니다. 지상에 기준이 서게 되면 예수와 성신이 일체가 되어서 지상작전을 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영적인 사위기대라도 그러한 터전이 서게 되면 지상에서 싸울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가 제자들과 일치되지 못하고 죽음으로 말미암아 신랑이신 예수는 하늘로 올라가고, 신부이신 성신은 땅에 내려오게 되어 아들딸들은 공중에 떠 있는 입장이 된 것입니다. 그렇게 되어 있어요. 아버지 되시는 예수님은 하늘로 올라가고, 어머니 되시는 성신은 땅에 내려오고, 아들딸은 공중에서 빙빙 떠돌아 다니고 있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지상에 평면적인 터전이 갖추어지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28-87
말씀·인격·심정의 일치와 완성실체
그러면 우리가 소원하는 것이 무엇이냐? 이 평면적인 기반 위에 영육을 중심삼은 실체적인 터전을 만드는 것입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하나님을 중심한 사위기대를 이루어야 합니다. 그리하여 여기서부터 하나님의 뜻을 성사시켜 나가야 합니다. 이것이 결정되는 날에는 예수가 이루지 못하였던 것을 이룬 자리에 서게 되는 것입니다. 그렇게 되면 아버지의 뜻과 내 뜻이 서로 다른 것이 아니라 아버지의 뜻이자 내 뜻이 되는 것입니다. “아바 아버지여 할 만하시거든 이 잔을 나에게서 지나가게 하소서 그러나 나의 원대로 마옵시고 아버지 원대로 하옵소서(마 26 : 39)”라고 기도한 그 자리를 넘어선다는 것입니다.

그러니 결국 그 자리가 성사한 자리라는 것입니다. 여러분 자신들이 뜻을 성취시키기 위해서는 반드시 하나님의 말씀과 일치되어야 됩니다. 그 말씀과 일치되어 가지고 실천하지 못하면 안 됩니다. 또, 하나님의 인격과 일치되고 하나님의 심정과 일치되어야 됩니다.

아담이 타락한 것도 하나님의 말씀과 일치되지 못하였기 때문입니다. 말씀과 일치되지 못함으로 인해 말씀의 목적인 완성 실체가 되지 못했습니다. 인격 기준이 하나님 앞에 바쳐지지 못했다는 것입니다. 그럼으로 말미암아 완전한 하나님의 사랑이 완성된 인격기준과 관계를 맺지 못했던 것입니다. 결국 말씀은 실체를 만들기 위한 것입니다. 따라서 사랑도 실체가 완성되지 않고서는 성립이 안 되는 것입니다. 완성실체가 되지 않고는 화합의 길이 없는 것입니다.

이런 관점에서 사랑과 말씀과 인격을 중심삼고 볼 때, 아담은 어떤 울타리 권내의 사람이 아닙니다. 그는 세계적인 사람입니다. 아담 해와는 만국의 중심이라는 겁니다. 그렇기 때문에 여러분은 ‘내가 가진 말씀은 세계적인 말씀이요, 만국을 대표한 말씀이며, 세상에 나타난 나 자신은 세계를 유린한 사탄과 대결하기 위해 나타난 것이요, 내가 하는 사랑은 하나님의 심장에 연결된 동맥에서 흘러 나오는 피의 움직임과 같은 사랑이다’ 하는 실감을 가져야 합니다.

말씀은 에덴 동산에서 잃어버린 아담 해와를 재창조하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 말씀과 일치되는 입장에 서게 될 때에는 사탄도 굴복시킬 수 있는 것이요, 사탄을 굴복시키고 나면 하나님의 사랑은 자동적으로 오는 것입니다.

인격 완성이란 사탄을 굴복시키는 그 기준을 말하는 것입니다. 그러니 인격의 완성은 사탄을 굴복시키지 않고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인격은 사탄이 개재됨으로 말미암아 파탄이 되었기 때문에 사탄을 완전히 제거하지 않고는 인격완성이 안 되는 것입니다.

여러분이 사탄을 제거하기 위해서는 하나님과 사탄이 대치하고 있는 일선에 나가야 합니다. 그러지 않고는 사탄을 굴복시킬 수 있는 길이 없습니다. 후방에서는 불가능하다는 것입니다. 그러니 일선으로 가야 합니다.

그래서 예수님도 십자가 선상을 찾아갔던 것입니다. 죽음의 교차로를 향해서 찾아가야 하는 거예요. 그곳이 하나님과 사탄이 대결하는 최고의 일선이기 때문에 그곳으로 가야 합니다. 사탄을 굴복시킬 수 있는 길은 그 길, 한 길밖에 없다는 것입니다. 그것을 여러분들은 알아야 됩니다. 다시 말해 뜻 성취는 어디서부터 되어지느냐? 사탄이 있는 일선지대부터입니다. 모든 문제의 해결기점이 여기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지금까지 우리 통일교회가 걸어온 길, 선생님이 걸어온 길은 언제나 일선이었습니다. 언제나 최일선이었다는 것입니다. 일선을 지키는 장병들은 어느 순간이라도 쉴새가 없는 것입니다. 방심할 수 없는 것입니다. 언제 적이 나를 습격할 지 모른다는 거예요. 이런 생활을 개인으로부터 가정 종족 민족 국가라는 한계선까지 해 나가야 하는 것입니다.

28-88
찾기 위해서는 모두 버려라
예수님은 이 땅에서 이스라엘 민족과 그 민족을 지도하는 유대교단을 거느리고, 로마제국에 대항할 수 있는 터전을 조성하여 세계를 복귀해 나가려 했던 것입니다. 이런 입장이었던 것을 두고 볼 때, 오늘날 우리는 이스라엘을 수습할 단계, 곧 민족적인 숙원을 해원성사해야 할 시대에 들어왔다는 것입니다. 나라를 찾느냐 못 찾느냐 하는 엄중한 입장에서 예수님이 소망하였던 그런 기준을 우리가 찾아 넘어가야 할 시점에 놓여 있다는 것입니다.

개인을 찾기 위해서는 개인의 모든 것을 희생해야 합니다. 가정을 완전히 찾기 위해서는 가정의 모든 것을 다 희생해야 합니다. 던져 버려야 된다는 것입니다. 그래야 되는 겁니다. 종족을 완전히 찾기 위해서 종족 자체를 완전히 잃는 자리에 들어가야 합니다. 죽고자 하는 자는 산다는 말은 이런 것을 두고 하는 말입니다. 민족을 찾기 위해서는 민족을 완전히 하나님의 뜻 앞에 버릴 수 있는 마음 자세를 가지고 가야 합니다.

‘내 것이다’라고 하는 그것이 내 것이 아닙니다. 통일교회도 통일교회를 주도하는 문선생 것이 아닙니다. 모든 것은 나라의 것입니다. 그러니 어떻게 해서든지 빨리 나라에 바쳐야 되겠다는 것입니다. 빨리 바칠 수 있는 길을 찾아 나가자는 것입니다. 또, 대한민국은 세계의 것이니 이 세계에 빨리 바칠 수 있는 길을 가려 나가는 작전을 하자는 것입니다. 여러분 개인은 가정의 것입니다. 그러니 가정을 위해서 빨리 바쳐질 수 있는 길을 찾아 나가라는 것입니다. 그래야 되는 거예요.

사탄세계는 그와 정반대입니다. 자기 자신을 중심삼고 가정을 희생시키고 자기 가정을 중심삼고 자기의 친척을, 또한 자기 친척을 중심삼고 민족을, 그리고 자기 민족을 위주로 하여 나라를 움직여 왔던 것이 지금까지의 관례입니다. 그러나 우리 통일교회에서는 이와 반대입니다. 관(觀)이 다르다는 거예요. 우리나라는 세계를 위한 나라요, 우리 민족은 나라를 위한 민족이요, 우리 종족은 민족을 위한 종족이요, 내 가정은 종족을 위한 가정이요, 나 개인은 가정을 위한 나라는 것입니다.

자기가 일생 동안에 어디에 어느 정도 영향을 미치고 갈 것이냐? 여러분이 자기 가정에서부터 종족, 민족, 국가, 세계에 얼마만큼 영향을 미치고 가느냐 하는 것이 저나라에 가서 인격 기준이 되는 것입니다. 저 나라에 가서 부활의 기준이 된다는 것입니다. 이런 것을 볼 때 나 자신이 문제라는 것입니다.

때는 이미 무르익어 실천할 수 있는 좋은 때에 접어들었습니다. 여러분이 공을 들이면 공을 들인 것만큼 결실이 거두어지는 때가 왔습니다. 옛날과는 다릅니다. 지난날은 탕감시대였기 때문에 아무리 공을 들여도 그것이 거두어지지 않았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중요한 것은 나 자신과 때와 제시할 조건이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뜻, 즉 하나님의 방향과 내 방향과 자녀의 방향이 서로 일치되는 기준을 갖지 않고는 뜻을 성취시킬 수 없습니다. 혼자서는 안 되는 거예요. 3대를 합하지 않고는 뜻 성취가 안 되는 것입니다. 알겠어요? 또한 3대를 합했다 하더라도 그 합한 것이 일선지대에 있어야 합니다. 일선지대라야 합니다. 알겠어요? 그렇게 되어 있어요, 안 되어 있어요? 「그렇게 되어 있습니다」 후방이 아니예요.

그러면 통일교회가 가는 길에 최고의 일선은 어디인가? 대한민국이면 대한민국의 최고의 일선이 어디냐? 거기에 선 사람들이 뜻을 중심삼고 하나만 되면 뜻은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그렇지 않아요? 그러면 세계의 최고 일선이 어디냐? 아프리카가 아닙니다. 세계를 지배하고 있는 사람들이 최고 일선에 선 사람들입니다. 그렇게 되는 거예요. 사람으로 보면 그래요.

이런 관점에서 볼 때, 예수가 기도하는 일선에 나타난 실체의 원수는 누구냐? 그 나라의 권력을 잡은 사람들입니다. 그렇겠지요? 예수를 끌어다가 죽이기 위한 원수로 나타난 사람이 누구냐? 그 당시의 위정자라든가, 교법사, 제사장이라는 사람들입니다. 그렇게 되는 거예요.

그러면 우리의 일선은 어디냐? 대한민국이 일선입니다. 물론 이북의 김일성이겠지만, 대한민국을 복귀하는 데 있어서는 현정부에서 지도하고 있는 위정자들이 문제라는 것입니다. 이들을 어떻게 감복시켜서 뜻 앞에 굴복시키느냐 하는 것이 문제로 남아 있다는 것입니다.

28-90
선생님과 하나되어 변치 않는 자가 되라
이 문제점을 풀면 세계적으로 문제가 벌어지게 됩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것이 어려운 문제인 것입니다. 어려운 문제예요. 우리는 이러한 문제를 풀기 위해 지금까지 지방에서부터 일해 나온 것입니다. 그러니 우리는 그런 실적을 가지고 나가야 되겠습니다. 선전보다도 실적이 앞서야 됩니다. 선전보다 실적이 앞질러 나가게 되면 그 길에는 반드시 승리가 있는 것입니다.

그러기 위해서 사람이 있어야 되고, 때가 맞아야 되며, 조건이 있어야 됩니다. 반드시 때가 맞아야 되고 여러분이 거기에 나아갈 자세가 되어 있어야 됩니다. 그 다음은 무엇이냐? 조건물이 갖추어져야 하는 데, 조건물은 3대(代)가 일치되어 가지고 일선지대에서 결정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금년에는 선생님이 양면 작전을 하려고 합니다. 상부에 대한 작전과 지방의 말단에 대한 작전을 동시에 펴 가지고 이것을 결정하려는 것입니다. 금년부터 이 작전을 펴 나가려고 합니다.

뜻을 이루려면 혼자서는 안 되므로 여러분 자신은 하나님을 모시고 자녀를 복귀하여 3대를 중심한 사위기대를 이루어야 합니다. 그러지 않으면 뜻은 성취되지 않는 것입니다. 이것이 6천년의 역사요, 지금까지 하나님이 복귀섭리해 나오는 싸움의 노정입니다.

그러면 여러분이 하나님 앞에 내 세울 수 있는 사위기대는 뭡니까? 아무리 자기 자신이 국가적으로 뜻을 성취했다 하더라도 사위기대를 이루지 못하면 불구자라는 거예요. 사위기대를 결정해 놓고 국가에 영향을 미치는 기반까지 닦아야 됩니다. 아시겠지요? 「예」

그러니까, 우리 통일교회 교인들은 선생님과 하나되어 가지고 이 나라 어디에라도 전도하러 가라 하면 갈 수 있어야 합니다. ‘어디로 가라’ 하면 ‘아이구, 나 지금 무슨 사정이 있어서 못 갑니다’ 한다고 해서 그것이 통합니까? 통합니까, 안 통합니까? 「안 통합니다」 세상의 일로 인한 사정은 통하지 않습니다. 학교때문에 안 된다고 하는 것도 통하지 않습니다.

사람 대 사람의 문제입니다. 그렇죠? 인간 대 인간의 문제지 인간 대 사회의 문제가 아닙니다. 먼저 문제가 되는 것은 선생님하고 여러분 개체가 문제라는 것입니다. 여기에 간접적인 다른 일들을 들이대지 말라는 거예요. 학교 때문에, 집 때문에, 남편 때문에, 아내 때문에, 아들 때문에 하는 그런 문제는 여기에 관계되는 것이 아닙니다. 선생님과 여러분 일대 일의 문제입니다. 그렇잖아요?

예수와 베드로·요한·야고보는 각기 일대 일의 관계였습니다. 그런 절대적인 관계로 여러분이 선생님과 하나된 기반 위에 서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아담 해와에게 완전히 하나된 후에 만물을 주관하라 했지 않아요? ‘생육하고 번식해서 땅을 주관하라’ 했으니 먼저 생육하고 번식해야 된다는 것입니다.

문제는 실체가 되는 것입니다. 시시하게 ‘뭐가 어떻고 어떻고’ 하는데 앞으로는 나에게 그런 얘기 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가정의 문제가 어떻고 아들딸이 어떻고 하는 그런 것들은 여러분들끼리 얘기하는 것이지 그것을 선생님한테 물어 오면 내가 무슨 대답을 하겠어요? 나도 딱하다는 거예요. 선생님과 여러분, 일대일의 관계입니다. 선생님은 일대일의 문제로 취급하는 것입니다. 여기에는 그 외의 아무것도 개재되지 않는 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선생님 자신에게 있어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선생님이 여러분에 대해서 다른 목적을 가지고 있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 아버지의 뜻을 중심삼고 여러분을 참아들딸로 만들어 주려는 그 목적만 있는 것이지 여러분을 이용해서 무엇을 해먹겠다는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어떻게 참다운 아들딸로 만드느냐 하는 것에 목적이 있을 뿐이지, 여러분들을 중심으로 다른 무슨 목적을 두고 있는 것이 아닙니다. 이러한 관계를 기억하지 않으면 안 됩니다.

그런 것을 알고, 앞으로 수난길이 있거든 여러분이 대신해서 걸을 각오를 해야 하고, 죽음길이 있거든 여러분이 대신 죽겠다는 입장에 설 수 있어야 합니다. 여러분이 그럴 수 있어요. 없어요? 「그럴 수 있습니다」 말이야 잘 합니다. 베드로는 얼마나 대답을 잘 했어요? 몇 번씩이나 대답했어요? 한번도 아닙니다. 세 번! 세 번씩이나 대답했던 것입니다. 그것도 귓속말로 했습니까? 아닙니다. 베드로는 ‘선생님, 남들은 다 배반해도 나는 배반 안 합니다’라고 호언장담했던 것입니다. 그럴 수도 있다는 것입니다. 그렇지만 그 때는 시험기간이었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여러분들도 언제든지 그런 입장을 고려해야 됩니다. 그러지 않으면 안 되는 것입니다.

28-92
3대를 택하시기 위한 하나님의 섭리
하나님과 아담과 해와와 그의 자녀가 사위기대를 이루어야 합니다. 여기에서 사위기대의 대표자는 하나님입니다. 그 다음 대표자는 아담이지요? 그 다음은 아들입니다. 이렇게 3대를 거치지 않으면 안 된다는 것입니다. 뜻이 안 이루어져요. 이것은 절대적입니다.

그것을 선생님을 중심하고 보면 어떻게 됩니까? 하나님과 선생님과 여러분이 3대입니다. 그렇지요? 또, 여러분을 중심삼고 보면 어떻게 됩니까? 여기에서 횡적으로 벌어지는 것입니다. 선생님이 1대고, 여러분이 2대고, 여러분의 아들이 3대입니다. 여기에서 여러분이 선생님과 일치가 되어 가지고 여러분의 아들과 일치되어야 합니다. 이렇게 해야 통일이 벌어지는 것입니다.

이것이 어긋나게 되면 안 됩니다. 잘못된 것을 뜯어 고쳐 가지고 다시 수습해야 천상세계와 관계를 맺을 수 있는 것입니다. 이것을 확실히 알아야 합니다. 이것이 연결되지 않으면 지상천국은 절대 불가능한 것입니다. 아버지의 뜻이자 내 뜻이요, 내 뜻이자 선조의 뜻이요, 선조의 뜻이자 만민의 뜻이 되고, 만민의 뜻이자 하나님의 뜻이 되어야 됩니다. 그 뜻이 갈라져서는 안 됩니다. 전부다 뜻을 중심삼고 일치가 되어야 됩니다.

그렇기 때문에 실체가 문제입니다. 하나님과 예수와 제자, 이 실체가 문제입니다. 남자로 보게 되면, 하나님과 아담과 아담의 아들, 이들이 하나되어야 됩니다. 이들이 틀어져서는 뜻이 이루어지지 않는 다는 것입니다.

선생님이 지금까지 고생한 것도 세 아들딸을 찾기 위해서였습니다. 이들이 세워지지 않고는 평면적인 발전을 이루지 못하는 거예요. 하나님께서는 여기에 대비하여 여러가지 여건을 준비하셨으며 여기에 반대되는 여건을 제거하기 위해서 백방으로 노력하시면서 섭리해 오셨습니다. 한 사람을 택하기 위해서 세 사람 이상 준비해 주시는 것입니다.

여러분이 사심을 떠나서 하나님의 뜻을 위해서 예수같이 뜻대로 살겠다는 마음을 가지게 되면 반드시 상대자가 나타나게 되는 것입니다. 그것이 거짓말인가 두고 보라는 거예요. 어떤 동네를 가게 되면 벌써 몽시를 받고 와서 인사하는 사람이 생겨난다는 것입니다. 사된 마음을 가지고 자기 나름의 꿍꿍이 생각을 하면서 하니 안 되는 것이지, 완전히 뜻과 일치된 자리에서 사위기대를 복귀할 수 있는 믿음의 아들딸을 택하겠다는 마음으로 나가게 되면 반드시 하나님이 역사하시는 것입니다. 정말 그렇다는 거예요.

하나님과 아담이 하나되면 아들은 자연히 생겨나는 것입니다. 그리하여 사위기대는 자연히 이루어지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니, 여러분이 하나님과 일치가 되면 하나님은 미리 창조적인 준비를 해주시는 것입니다. 여러 분이 그와 같은 입장에 서게 되면 영계에서 가르쳐 준다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언제나 그것을 생각해야 됩니다.

예전에 선생님을 보기를 했나요, 만나기를 했나요? 한번도 만나 보지 않은 사람이 수십년 전, 또는 선생님이 태어나기 전부터 선생님을 모시는 사람이 있다는 것입니다. 그거 참 이상하지요? 선생님보다도 훨씬 나이가 많이 든 사람이 선생님이 나기 전부터 이미 선생님을 보고 모시는 것입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예정으로 인해서 그럴 수 있는 것입니다. 중심된 한사람을 세상에 내보낼 때는 , 성상적으로나 형상적으로나 같은 기준을 중심삼고 역사해야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선생님이 나기 전부터 선생님의 형상을 가지고 역사하셨던 것입니다. 지금도 그래요. 지금도 영계를 통하는 많은 사람들이 훈련을 받고 있습니다. 그건 왜 그러냐 하면 일치시키기 위해서입니다. 즉, 하나되어 모든 시련을 대신 질 수 있게 하기 위해서입니다.

28-94
이제는 여러분이 나서서 일할 때
이런 입장에서 통일교회를 볼 때, 지금까지는 선생님이 여러분을 끌고 나왔습니다. 그렇지요? 여러분이 싫어하든 좋아하든 끌고 나온 것입니다. 선생님이 끌고 와서 이만큼 이루어 놓았습니다. 그러나 여러분이 이제는 철이 들어 알 만큼 알 수 있는 때가 왔다는 겁니다. 이제야 비로소 죽지 않은 예수님과 같은 입장에서 베드로·야고보·요한과 같은 제자들에게 일을 시킬 수 있는 때가 왔다는 것입니다. 알겠어요?

예수님이 열두 제자를 왜 택했느냐? 무엇 때문에 택했겠어요? 이스라엘 민족을 위해 일 시키려고 택한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이 열두 제자를 데리고 일을 해봤습니까? 못 해보았습니다. 예수님이 죽은 다음에 일하느라고 전부다 이리 끌려 다니고 저리 쫓겨 다니고 했지 예수님이 살아 계셨을 때 일을 못 해보았던 것입니다.

오늘날 통일교회 교인들도 선생님을 중심하고 지금까지 일한다고 했지만 선생님이 끌고 나왔지 여러분이 선생님을 모시고 나왔습니까? 지금까지는 선생님이 여러분을 끌고 나왔습니다. 그렇지만 이제부터는 여러분이 이 민족을 위해서 예수의 열두 제자를 대신한 입장에서 선생님을 모시고 민족을 위해 일할 때가 왔습니다.

지금까지는 탕감해 나왔습니다. 탕감은 여러분이 할 수 없었습니다. 선생님이 탕감의 대가를 치렀지 여러분이 탕감의 대가를 치른 것이 아닙니다. 환경적으로 연결은 지어졌지만 그 대가를 직접 내가 치러 나왔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대가를 다 치렀기 때문에 이제는 여러분이 직접 여러분 자신의 것으로서 상속받을 수 있는 때가 왔다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이제는 여러분을 앞에 내세워 일할 때가 왔다는 것입니다. 아시겠어요?

그렇게 알고 ’70년대부터는 ‘뜻이여! 성취하소서’ 하는 마음을 가지고 일선을 향해서 달려가야 되겠습니다.

요전에 선생님이 청평에 갔을 때의 일입니다. 우럭산(현 선인봉)이라고 하는 높은 산에 올라가서 바위를 한번 굴려 보았습니다. 다섯 사람이 큰바위를 밀어서 그 바위를 굴렸는 데 굉장하더구만요. 그 산의 경사가 아주 가파르기 때문에 아마도 그 바위가 떨어지는 속력이 시속 100킬로미터 가까이 되었을 거예요. 그 바위가 산을 진동시키면서 굴러가다가 강물에 첨벙하고 빠지는 데 얼마나 멋진지…….

그런데, 그 큰 바위가 풍비박산이 나면서 떨어지더군요. 여러분들은 그래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눈이 왔을 때 높은 산에서 눈 한 덩어리를 굴리면 이것이 점점 커져서 집덩이같이 되는 것처럼 이제 여러분도 불어 나기 시작해야 합니다.

여러분 자체를 깨뜨려 버리는 때가 ’60년대였습니다. 그때는 벼랑에서 바위가 굴러 떨어지는 것과 같은 때였습니다. 그래서 지금의 통일교회는 뼈다귀만 남은 것입니다. 여러분 얼굴에 윤기가 있어요? 보라구요. 얼굴들을 보면 모두 앙상한 뼈다귀만 남았습니다.

그렇지만 이제는 그런 때와는 다르다는 것입니다. 눈 한 덩어리가 집채만한 눈덩이로 커지는 것처럼 이제 우리도 구르기 시작하면 그처럼 커지는 거예요. 여기 산골에서 사는 사람은 알 거예요. 애초에는 산 위에서 주먹만한 눈덩이를 굴렸는데 그것이 불어나서 집채만한 큰 눈덩이로 변해저 밑 산골짜기에 들이 박힌다는 것입니다. 그와 마찬가지로, 여러분의 수고가 여러분의 소유로, 여러분의 뜻으로 거두어질 수 있는 시대를 맞이 하였으니 이제 여러분이 수고한 만큼 불어나기 시작하는 것입니다. 알겠어요?

이것이 개인에서 가정으로, 가정에서 종족으로, 종족에서 민족으로, 민족에서 국가로 그 영향을 미칠 수 있는 때가 왔으니, 이 시대를 맞이하여 우리가 실천함으로 말미암아 뜻의 성사를 국가적 한계권내에까지 이루자는 것입니다. 이것이 ’70년대의 소원입니다.

이제부터 모두가 한 3년만 움직여 보자는 것입니다. 알겠어요? 여러분들은 그저 선생님의 말만 잘 들으면서 곰처럼 살라는 겁니다. 곰 알지요? 곰은 나무에 올라가 한번 떨어져서 아프면 다시 올라가서 아프지 않을 때까지 떨어져 본다고 하잖아요? 아픈데다가 두 번, 세 번 올라가서 또 떨어지면 더 아플 텐데 아프지 않을 때까지 떨어진다니 결국 죽고 만다는 것입니다. 그 곰과 같은 마음이 필요하다는 것입니다.

28-96
하늘나라를 이루기 위해 총진군하자
그렇게 하면 믿음의 아들딸과 하나되어 사위기대를 이룬 터전을 중심삼고 뜻이 이루어집니다. 이러한 뜻의 성사를 위하여 여러분은 지금부터 ’70년대를 힘차게 출발하기 바랍니다. 그런데 그 출발을 하는 데 있어서 내려가서는 안 됩니다. 정초의 결심은 좋았는데 여러 날이 지나가면서 낮아 져서는 안 되겠다는 것입니다. 계속해서 올라가야 되겠습니다.

이제 선생님도 되도록이면 여러분과 같이 지방으로 나가려고 합니다. 그래서 될 수 있으면 지방에서 활동하는 여러분을 만나 보려고 합니다. 그리고 금년 작전은 기동대를 조직해서 활동하게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주로 부흥회를 많이 열고 그 다음은 반공활동을 강화시키려고 해요. 이런 뜻에서 전국적으로 조직을 편성하여 일년 사시절을 전부 기동대를 중심으로 이 두 분야의 작전을 병행하려고 합니다. 그러니 여러분들은 여기에 전체적으로 협조해 주기를 바랍니다 선생님이 이미 모든 코오스를 짜 두었습니다. 어디서 무엇을 한다 할 때 될 수 있으면 그곳에 연락을 해주기 바랍니다.

지금까지는 선생님이 공장에 대해서 상당한 관심을 가지고 거기에 많은 시간을 투입했어요. 그럼으로 인해서 교회 발전에 지장이 있었던 것도 사실입니다. 그렇지만 금년만 지나게 되면 어느 한계를 넘지 않겠느냐고 보고 있습니다. 그래서 이제 ’70년대를 중심삼고는 교회의 발전을 위해서 일선에서 여러분을 자주 만나야 되겠다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60년대까지는 탕감시대였습니다. 그 시대에 하나님 앞에 효성은 다했다고 할 수 있지만 아직까지 하늘나라를 이루지 못했습니다. 종교적인 기반을 닦아 나왔지만 하늘나라를 이루지 못했다는 것입니다. 정신과 같은 종교적인 기반은 이루어졌지만 몸과 같은 땅에 기반이 서 있지 않다는 것입니다. 우리의 목적이 무엇이냐 하면 하늘나라를 이루기 위해서 싸우는 것입니다. 그렇지요? 하늘나라의 종교를 위해서 싸우는 것이 아닙니다. 여러분은 늘 그것을 생각해야 됩니다. 우리는 하늘나라를 이루기 위해서 싸우는 것이지 하늘나라의 종교를 위해서 싸우는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어디까지나 현실적인 문제는 땅입니다.

지금까지는 통일교회를 중심삼고 탕감시켜야 했습니다. 종교가 탕감해야 되기 때문에 국가 앞에 종교가 탕감하는 데에 통일교회가 선봉에 섰던 것입니다. 선생님은 그 탕감하는 시대에 있어서 하나님 앞에 효성은 했다고 할 수 있을지 모르지만 하나님이 기뻐할 수 있는 시대를 아직까지 이루어 드리지 못했습니다. 그렇게 되었어요.

그런 관점에서, 여러분이 선생님과 같이 하나님께 효성을 다할 수 있는 시대권내에 동참하는 혜택을 갖게 된 것을 무한한 영광으로 알고 서울은 서울대로 지방은 지방대로 거국적인 활동을 전개하여 전국민 앞에 영향을 미쳐야 하겠습니다.

이제 우리는 한 3년 동안 최대한의 노력을 해서 뜻을 위해 싸워 나갈 것을 각오해야 합니다. 남녀노소를 막론하고 ‘뜻이여! 성취하소서’라는 목적을 이루기 위해서 총진군하지 않으면 안 된다는 것을 알고 이 아침에 확실히 결의해야 되겠습니다. 알겠어요? 「예」

28-98
기 도
아버님! ’70년대를 앞에 놓고 아버지와 더불어 인연맺을 수 있는 거룩한 이해의 첫달 첫 안식일을 맞이하였사옵니다. 아버지시여! 이날에 수많은 민족과 수많은 자녀들 위에 복을 베풀어 주시옵소서.

뜻을 찾아 나오던 수많은 선지선열들이 고대하던 한때와 한 시기를 저희가 맞이할 수 있다는 사실을 진정 감사드려야 하겠습니다. 그리하여 저희 자신의 일대에 스스로 몸과 마음을 다 투입해서 하늘과 땅을 대신하고 과거와 현재와 미래를 대신하여 공의의 터전을 남겨야 되겠습니다. 이러한 엄청난 시점에 서 있는 것을 감사하게 생각하며 보람 있게 일을 해 갈수 있도록 허락하여 주시옵소서.

이때를 놓치게 되면 하늘도 잃어버리는 것이요, 땅도 잃어버리는 것이요, 인류 전체를 잃어버리는 것이옵니다. 한번밖에 없는 전무후무한 이 시점에서 자기 자신을 중심삼고 아버지께서 안착하실 수 있는 기반을 닦아 땅 위에서 이 뜻을 필히 이루고 아버지 앞에 갈 수 있는 자녀들 되게 허락하여 주시옵소서.

아버지, 앞으로 수많은 안식일들을 이 ’70년대를 통하여 맞이하게 되겠사오니, 저희들의 뼈살에 간곡히 사무칠 수 있는 당신의 은사로써 이 날들을 묶어 주시옵소서. 부디 부디, 타락하는 사람과 낙망하는 사람이 없이 아버지께서 소원하는 그 목적을 향하여 직행하는 무리들이 많게 허락 하여 주옵기를 간절히 부탁드리고 원하옵니다.

세계에 널려 오늘 이 아침, 이 곳을 향하여 마음 모아 기도하는 당신의 수많은 외로운 자녀들을 지켜 주시옵소서. ’70년대를 중심한 축복의 손길이 그들과 더불어 같이하시어서, 많은 실적을 거두어 아버지 앞에 바칠 수 있는 승리의 역군들이 되게 하여 주옵기를 간절히 바라옵고 원하옵니다.

당신의 사랑하는 자녀들이 오늘 지방으로 돌아가게 되오니, 지방에 가서 ’70년대의 새로운 출발을 보람 있게 할 수 있게 아버지께서 힘을 주시옵고, 끝까지 참고 싸워서 승리하여 영광된 아들딸의 자리에 동참할 수 있게 허락하여 주옵기를 간절히 부탁하고 원하옵니다.

통일가와 통일의 무리들을 아버지께서 지켜 주시옵소서. 저희들은 이 민족에게 보람 있는 하나의 새로운 길을 제시하고, 남북통일을 모색하여 아시아에도 영향을 미칠 수 있는 통일전선을 갖추어야 하는 입장이오니, 저희들이 이 일을 성취하게 허락하여 주시옵기를 간절히 바라옵고 원하옵니다.

금년에는 ‘승리적 통일전선’ 이라는 엄청난 표어를 세워 놓고 나가고자 하옵니다. 모든 일의 동기는 아버지께서 되시고, 저희는 거기에 상대적 기준을 조성해서 절대 순종하여 아버님과 저희와 이 민족이 제 3대상 기준을 성취시킬 수 있게끔, 아버지, 협조하여 주옵기를 간절히 부탁드리고 원하옵니다.

남아진 날들과 저희들이 다시 맞이하게 될 성일들 위에 축복하여 주옵기를 간절히 부탁 드리옵니다. 영계에 있는 수많은 영인들이 저희들과 일치되고 앞으로 태어날 후손들도 저희와 일치되어서, 모두가 아버지와 더불어 화할 수 있는 하나의 새로운 세계가 어서 속히 오게 하여 주옵길 간절히 부탁드리면서, 모든 말씀 참부모의 성호 받들어서 아뢰었사옵니다. 아멘.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