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8-253 to 28-273: 나는 이렇게 했습니다

나는 이렇게 했습니다
1970.02.08 (일), 한국 전본부교회

28-253
나는 이렇게 했습니다
[기 도]

아버지, 저희들은 하나된 몸 마음을 중심삼고 가정을 이루고, 그 가정을 중심삼고 엄청난 6천년 복귀역사의 노정을 해결해야 되겠사옵니다. 이 문제가 해결되기를 하루같이 바라시는 아버지, 그 복귀의 뜻 앞에 부름받은 모습으로서 저희는 진정 참된 자신이 되었는지 스스로 바라볼 줄 알아야 하겠사옵니다. 저희 자신이 머물러 있는 이 자리가 아버지께서 기뻐하실 수 있고 축복하실 수 있고 명령하실 수 있는 자리인지, 또한 당신이 바라보시는 저희 자신이 당신의 기쁨의 대상이 되어 있는 지, 다시 한번 생각해 봐야 되겠사옵니다. 저희 스스로의 위치를 확정지어야 할 책임이 아버지께 있는 것이 아니오라, 오늘날 이 땅 위에 사는 저희 자신에게 있다는 사실을 알아야 되겠사옵니다.

천국은 영원한 곳이온데, 그 천국에 들어갈 수 있는 가 하는 것은 땅 위의 인간 스스로가 노력하고 행한 것, 또 그 심정이 문제라는 사실을 저희는 역사과정을 보아서, 신앙생활을 통해서 확실히 알고 있사옵니다.

뜻을 알고 난 몸으로서 뜻을 향해 가야 할 걸음이 되지 못할까봐 스스로 염려하면서 하루하루를 하늘과 더불어 살지 않을 수 없고, 땅과 더불어 살지 않을 수 없는 저희들이옵니다. 하오나 아버님께서는 이러한 저희 들의 마음을 통하여 생활 속에 나타나시고자 한다는 것을 저희는 잘 알고 있사옵니다. 그러기에 선과 악이 저희 자신 속에서 판결되어진다는 사실을 알아야 되겠습니다.

이와 같이 서글픈 인생의 행로를 따라 그 무엇을 바라보며 넘어가고 있는 저희들에게 있어서 아버님을 빼놓고서는 소망을 가질 수 없는 타락의 후손임을 자인하지 않을 수 없사옵니다. 그러한 저희들에게 있어서 하늘 만이 선이요, 하늘만이 전체가 되지 않을 수 없다는 사실을 알고, 하늘과 더불어 살고 하늘과 더불어 죽을 수 있는 그러한 용기를 가진다는 것이 얼마나 보람있는 일이며, 얼마나 인간다운 모습인가를 평가해 보고 반성해 보는 이 시간이 되게 하여 주시옵소서.

역사과정에 선한 사람으로서 위인이라는 이름을 남기고 성현이라는 이름을 남긴 사람들은 인간 세상에서 한 개인으로서의 생활 목표가 오직 인류와 더불어 사는 것이었고 아버님과 더불어 사는 것이었기에, 그들의 이름이 거룩하게 남아진 것을 아옵니다. 그들은 모든 세계인과 더불어 하나님과 함께 살기 위한 생애노정에서 지치지 않고, 시작과 더불어 끝을 맺기 위하여 무한한 투쟁의 노정을 걸어갔다는 것을 저희들은 알고 있습니다.

역사과정에 왔다 갔던 수많은 사람들도 그러하였는데, 오늘날 역사의 총결산을 지어야 할 복귀섭리의 책임을 짊어진 하늘의 아들딸이라는 이름을 가진 저희들이 어떻게 가야 한다는 것은 이미 결정된 사실임을 알게 하여 주시옵소서 .

아버님께서 이렇게 저희를 부르신 것은 저희 자신들이 합당해서 부르신 것이 아니라, 배후에서 역사 전부터 아버님이 소원하시던 창조이념을 세우기 위해 타락 이후 한 많은 6천년의 개척의 노정을 통하여 소인의 실체로서 부르신 것을 아옵니다. 이러한 저희들임을 생각하게 될 때, 한스러운 복귀의 심정을 가지신 아버님의 외로움과 처참함을 다시금 느끼지 않을 수 없사옵니다.

옷깃을 여미며 당신을 아버지라고 부를 수 있는 진정한 자신이 되지 못한 것을 채찍질하여 주시옵고, 하늘 부모를 모실 수 있는 거룩한 정성의 터전을 갖추지 못한 것을 책망하여 주시옵소서. 세상의 그 어떠한 예물보다도 저희 자체가 당신의 소원하심에 제물로 드려질 수 있는 완전한 예물이 되어야 함에도 불구하고, 이것을 망각할 때가 얼마나 많은지 말로 다할 수 없사옵니다.

세상적인 어떠한 여건이나 외모와 같은 외적인 조건이 문제가 아니오니, 가슴속에서 우러나와 하늘을 위하여 살고 싶고, 하늘을 위하여 간증하고자 하며, 하늘을 위하여 몸부림치고자 하는 그러한 간절한 마음으로 전생애노정을 걸어갈 수 있게 하여 주시옵소서. 저희들이 이런 마음으로 생활해 나가지 못하게 될 때에, 아버님은 저희와 더불어 살 수 없는 먼 자리에서 홀로 뜻을 일으키셔야 할 입장에 서게 되어, 아버님의 슬픔과 저희의 슬픔이 소용돌이친다는 사실을 확실히 알아야 되겠사옵니다.

아버지, 오늘 이 아침에 여기 모인 당신의 아들딸들을 굽어살피시옵소서. 개개인의 마음 마음에 아버지께서 같이하시어서 각자의 마음의 바탕이 어디에 근거하여 움직이고 있는지를 알게 하여 주시옵소서.

사적인 문제와 공적인 문제에 대하여 당신께서 저희들의 환경을 통해서 가르쳐 주셨사옵기에 저희들이 잘 알고 있사옵니다. 그러나 공적인 기준을 쌓아가야 할 인생의 행로를 남겨 놓고, 사적인 기준 앞에 져서 넘어갈 때가 얼마나 많은지 말로 다할 수 없사옵니다. 이 자리에 자기 한 자체만이 아버지 뜻 앞에 가까이 가기 위한 것보다도, 이 민족이 아버지 앞에 가까이 나갈 수 있는 다리가 되어 주고, 험한 길을 개척하여 그 길을 넓혀 주기 위하여 나온 자녀들이 몇 명이나 있사옵니까? 있다면, 아버지, 그들에게 복을 베풀어 주시옵소서. 그러한 아들딸을 당신께서 찾고 계신 다는 것을 알고 있사옵니다.

이 자리에 나와서 아버지의 사정을 알고, 스스로의 모습을 정비한 후에는 민족을 위하여 가야 할 사명과 세계 인류를 위하여 공헌해야 할 사명이 자신들에게 있는 것을 알게 하옵소서.

나를 위한 사명은 남아져 있지 않사옵니다. 나를 넘어서서 국가와 세계를 위하여, 하늘땅을 위하여 걸어가야 할 사명이 있다는 사실을 생각하게 될 때, 저희가 이 사명에 대한 책임을 다하기 위해 얼마나 골몰해 보았고 얼마나 몸부림쳐 보았사옵니까? 아버지의 슬픔의 동역자가 되기 위해 저희가 처량한 모습으로 얼마나 몸부림쳐 보았사옵니까? 이제껏 그러하지 못한 자신인 것을 생각할 때 이 이상 비탄스런 일이 없고, 이 이상 부끄러운 일이 없다는 사실을 알게 하여 주시옵고, 이러한 사실을 알지 못하였던 자신들인 것을 다시 한번 발견하게 하여 주시옵길, 아버님, 간절히 바라옵고 원하옵니다.

새해 벽두부터 저희 마음은 조급하였지만, 그런 저희 마음보다도 아버지의 마음은 더 조급하였다는 사실을 알고 있사옵니다.

금년이 아버지 앞에 기억될 수 있는 해가 되게 허락하여 주옵기를 간절히 바라옵고 원하옵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자신을 낮추고 아버지를 높이 고자 하는 간절한 마음이 싹터야 되겠사옵고, 아버지와 더불어 절규할 수 있는 간절한 심정이 폭발되어야 하겠사옵니다.

아버님, 여기 모인 자녀들을 기억하여 주옵기를 간절히 바라옵고 원하옵니다. 제아무리 이 땅 위에서 천년 만년의 행복을 꿈꾼다 하더라도 그러한 행복의 터전을 다 닦은 사람은 이 땅 위에 아무도 없었사옵니다. 그 행복의 터전이 갖추어졌다 하더라도 당신 앞에 재차 평가를 받아서, 그것이 진정한 행복의 여건이 못 된다면 다시 찾을 수밖에 없다는 사실을 생각 하게 됩니다. 비록 아버지를 위하여 사는 모습이 때로 처량하고 외롭고 쓸쓸하고 적막한 자리에 처해 있는 것 같지만, 아버지 앞에 평가받았을 때에는 아버지의 것으로 결정된다는 사실을 저희들이 알아야 되겠사옵니다. 이것이 우리가 가야 할 본연의 길이요, 인간이 추구해야 할 본래의 욕망인 것을 알고, 저희 스스로 그와 같은 자리에 설 것을 다시 한번 다짐하게 허락하여 주옵기를, 아버님, 간절히 바라옵고 원하옵니다.

전국에 널려 있는 자녀들을, 아버지, 기억하여 주시옵소서. 아버님이 가시는 길은 그렇게 외롭고, 그렇게 불쌍하고, 그렇게 처참했다는 사실을 알게 하여 주시옵소서.

끝날에 있어서의 통일의 역군들은 그러한 아버님의 굶주림의 동반자요, 헐벗음의 동반자로서 몰리고 추방당하고 몸부림치는 그러한 자리에 있는 것을 생각하면, 한스러운 아버님의 사연이 그들과 더불어 또다시 남아지지 않을 수 없음을 생각하게 될 때에, 더더욱 불쌍하신 아버지임을 느끼게 되옵니다.

하오나 아버지시여, 당신 앞에 그러한 사연을 통고할 것밖에 없는 모습 들이기에, 아버님을 향하여 통곡하는 그들의 갈급한 사연을 들어주시옵기를 간절히 바라옵고 원하옵니다.

저희들이 그러한 자리에 있는 것을 비난하고 조롱하는 것이 사탄세계의 상례이오나, 저희들은 그것을 극복할 수 있어야 되겠사옵니다. 참고 넘어가야 되겠사옵니다. 한 번 참는 것이 어렵거든 백 번도 더 참아야 할 미래가 남아 있는 것을 생각하면서 참아 나갈 수 있고, 백 번도 참기를 바라는 하늘 앞에 그렇게 할 수 있는 당신의 자녀들 되게 하여 주시옵소서.

내가 백 번 참을 때, 아버지는 천만번 참아야 하는 사정을 알았사옵기에, 눈물과 더불어, 한숨과 더불어, 통곡과 더불어, 메이는 가슴을 억제 하지 못하는 외로운 자리에 있어도, 그 자리가 당신의 아들딸이 될 수 있는 자리인 것을 생각하면 도리어 행복하다는 것을 깨달았사옵니다. 이것을 이미 알았기 때문에, 당신께서 남기신 복귀의 한스러운 길을 지켜 가려고 몸부림치고 있사옵니다.

삼천리 반도와 세계에 널려 있는 통일의 무리가 이와 같은 절개를 갖춘 당신의 자녀들이 되게 허락하여 주옵기를 간절히 바라옵고 원하옵니다.

그들은 외로울 때면 예도를 갖추고 참부모의 거룩한 승리의 소망의 한 날을 고대하고 있사오니, 아버지여, 그러한 그들을 위로하여 주시옵소서. 비록 참부모의 인연을 갖추기를 소망하는 그들의 모습이 불쌍할지라도, 그들은 하늘 부모의 인연을 찾는 것이 더 좋은 길임을 알고 있사오니, 그 인연을 따라 아버님의 영광의 세계에 영원한 자녀로서의 명분을 남기기 위해 굳건히 붙들고, 굳건히 싸우고, 굳건히 지키며 나가는 당신의 자녀 들이 되도록 이끌어 주시옵기를 간절히 바라옵고 원하옵니다.

남아진 세계의 한을 맡을 자가 그 누구이옵니까? 그 누가 민족의 원한을 책임질 수 있겠사옵니까? 통일의 역군 외에는 없사옵니다 통일의 역군 가운데서도 그 누가, 그 누가 할 수 있겠사옵니까? 어머니이옵니까? 아버지이옵니까? 형제이옵니까? 그 누가 할 수 있겠사옵니까?

이 한스러운 제단을 지키고, 제사장의 직분을 해야 하는 그 일을 누구도 좋아하지 않는 다는 것을 아옵니다. 이것을 생각하면서 이 자리에 모인 자녀들에게 누가 그 책임을 지겠느냐고 물었을 때, ‘천년 사연의 간곡한 아버지의 심정을 붙들고 몸부림치면서 아버지가 남겨 주신 사명을 완수하기 위해 저의 모든 것을 바쳐 나가겠습니다’ 하며 책임지고 나설 수 있는 당신의 아들딸이 몇 명이나 있겠사옵니까? 많은 사람이 앞을 다투어 서로 제가 지겠다고 하며 나서기를, 아버지, 얼마나 얼마나 고대하셨사옵니까?

저희들은 부족하옵니다. 지금까지 저희들은 땅 위에서 자기를 중심삼고 영원한 사망의 터전에 자신을 매장시키는 터를 닦아 나왔다는 것을 폭로 시켜 주시옵소서.

아버지, 새로운 이 한 해에는 복되고 거룩한 자녀의 모습을 갖출 수 있게 허락하여 주시옵소서. 그리하여 하늘 앞에 서슴지 않고 버젓이 나타날 수 있는 당신의 자녀들이 되게 허락하여 주옵기를 간절히 바라오며, 모든 말씀 참부모의 이름으로 기도하였사옵나이다. 아멘.

28-258
말 씀
참이라는 것은 변하지 않는 것입니다. 모든 피조물은 과거에도 그런 모습이었고, 현재에도 그런 모습이고, 또 미래에도 그런 모습일 것입니다. 그 가치에 있어서 변치 않는 다는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참된 사람은 변하지 않는 사람이라야 하기 때문에 과거에도 그러해야 했고, 현재에도 그러해야 하고, 미래에도 그러해야 되는 것입니다.

28-258
인간이 추구해야 할 정도(正道)
그러면, 오늘날 뜻을 따라나가는 여러분들은 어디로 갈 것이냐? 이것이 중요한 문제입니다. 지금 여러분 자신은 무엇인지 모르게 마음의 갈피를 못 잡고 있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자기가 정해 놓은 목표가 없다고 그냥 정지해 있을 수는 없는 것입니다. 역사는 정지상태를 허용하지 않습니다. 어쨌든 가야만 하는 운명에 놓여 있는 우리 인생입니다.

이 사회와 세계의 역사는 우리 인간들로 말미암아 엮어진 것임을 우리는 알고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역사는 지금까지 움직여 왔고, 지금도 움직이고 있으며, 미래에도 움직이지 않으면 안 될 운명인 것입니다. 이것이 역사입니다. 그 역사의 수레바퀴 속에서 같은 운명을 지니고 가는 것이 바로 우리의 인생행로인 것입니다. 그러니 가야만 됩니다. 가야만 해요. 어차피 가야 할 운명이기 때문에, 오고 가는 이 가운데에 있어서 자나 깨나 좋으나 나쁘나 가야 됩니다. 가는 데에 있어서 이것을 어떻게 개척하느냐 하는 문제를 규명하고 결정짓기 위한 것이 우리 인간 생활이어야 합니다.

그런데 결정이라는 문제를 생각해 보면, 어떤 문제가 제기되어 가지고 당장에 결정되는 그런 것이 아닙니다. 그럴 수도 있겠지만, 우리는 그런 것을 원치 않습니다. 그 결정된 사실은 양으로 보나 질로 보나 국가적이요, 세계적인 내용이어야 합니다. 그러면, 그 내용에 비례한 그런 과거가 있을 것이며, 그런 현재가 있을 것이며, 그런 미래가 있게 될 것입니다. 그러면 그러한 결정을 하는 데에 있어서 누가 동기가 되어야 하느냐? 거기에 나타난 어떠한 상황이나 어떤 물건이 동기가 되는 것이 아니라, 우리 인간 자신이 그 동기가 되지 않으면 안 됩니다.

그런 면에서 볼 때, 여러분이 지금 이 자리에 참석한 것도 역시 흘러가는 역사와 더불어 목표를 향하여 가는 운명을 해결짓기 위해 모인 것임에 틀림이 없습니다. 그런데 여러분이 백 명이면 백 명의 마음이 뜻을 중심 삼고 한 목적 기준을 중심삼고 한 방향으로 통합되어서, 그 목표를 향하여 가야 할 것인데도 불구하고, 여러분이 가는 데에 있어서 천태만상의 차이가 벌어질 수 있는 것입니다.

한 목적의 방향을 중심삼고 하나의 직선으로 상하관계가 성립되어야 할 것인데, 그것이 이 땅을 중심삼고서 여러가지 방향과 천태만상으로 나타났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어떻게 하기를 바라시느냐? 종교를 통해서, 처음부터 중간과정을 거쳐 끝을 맺을 때까지 다른 방향으로 치우치지 않고, 출발점에서부터 그 목적점에 이르기까지 직행하기를 바라시는 깃입니다. 이것이 정도(正道)입니다.

하나님은 그런 길을 가기를 바라신다는 것입니다.

역사가 변하고, 환경이 변하고, 사정이 변하더라도 가는 방향을 바꿀 수 없는 길이 하늘이 가는 길이요, 그 길이 바로 우리 인생이 추구해야 할 정도인 것입니다.

그래서 오늘날 우리 인간생활에 있어서 여러분이 직접 생활하고 있는 현실적인 무대를 두고 볼 때, 신앙이라는 이 엄숙한 과제를 앞에 놓고, 가야 할 목적을 향해 각자가 상하·전후·좌우관계에 있어서 하나의 기준을 중심삼고 거기에 맞추어서 가려고 애쓰고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 입장에서 이것을 맞춰 가기란 참 어렵습니다. 이 관계가 크면 클수록, 멀리 벌어지면 벌어질수록 어렵고 헛된 것이 되고 맙니다. 그렇기 때문에, 마음을 중심삼고 본래의 천륜이 가는 길 앞에 일치되어야 할 그 기준을 어떻게 접선시키느냐 하는 것이 문제입니다.

28-260
어떤 사람이 지혜로운 사람인가
그래서 예수님도, ‘네 마음을 다하고 뜻을 다하고 성품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라, 이것이 첫째 계명이라’고 했던 것입니다. 이런 성경 말씀을 볼 때에,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도 막연하게 사랑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가시는 정도를 알아서 사랑할 수 있어야 됩니다. 이것이 보다 더 구체적인 사랑의 내용인 것입니다.

예수님도 말하기를 ‘나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다’라고 했습니다.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다 하는 것은 무슨 말이냐? 참의 길을 가야 한다는 말입니다. 길을 가는 데는 진리의 길을 가야 되고, 또한 생명을 지니고 가야 된다는 것입니다. 생명을 지닌 것은 살아 있기 때문에, 날이 가면 갈수록 시들어 가는 것이 아니라 발전하게 됩니다. 그래서 생명력은 주위 환경에 영향을 미치게 되는 것입니다. 천 사람이면 천 사람, 만 사람이면 만 사람 앞에 무엇인가 영향을 미치고 가야 된다는 것입니다.

그러니, 하나님을 사랑하는 데는 인간 앞에 있는 많은 길 중에서 하나님을 중심삼은 그 길이 결과적인 존재로 태어난 인간이 가야 할 필연적인 길이라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가야 할 그 목적을 마음속으로 추구해 나가지 않으면 안 될 인생이요, 마음뿐만이 아니라 실제에서 그 마음이 원하는 길을 추구하여 완결지어 놓아야 할 것이 인생 행로임을 알아야 됩니다.

이런 입장의 나인 것을 생각할 때, 여러분이 어디에 처해 있느냐? 그런 입장에 일치되어 있느냐 하게 될 때, 거기에 일치되어 있다 할 때는 문제가 달라진다는 것입니다.

예수님도 첫출발은 태어나면서부터 하나님의 보호 가운데 했습니다. 그러나 이스라엘의 민족을 구원하기 위해서는, 이스라엘 민족권내에 들어가 고아와 같은 자리를 거쳐 가지고 중심적인 하나의 결실을 갖추어야 했습니다. 그래서 이것을 본연의 기준까지 끌어 올리기 위해 30여 생애노정을 거쳤지만, 그 결과는 십자가의 죽음이었고, 또 그 죽음으로라도 이것을 해결하려 했지만 완전히 해결하지 못하고 갔던 것입니다.

이렇듯 하나님의 아들인 예수가 이스라엘 민족 전체의 해원성사를 하기 위해 민족의 갈 길을 개척하면서 생애를 바쳤지만, 이것을 이루지 못한 사실을 두고 볼 때에, 오늘날 타락권내에서 태어나서 하나님과 인연도 없는 우리는 얼마만큼의 노력을 해야 되겠느냐는 것입니다. 이것은 문제가 크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어떻게 하는 것이 지혜로운가? 어떻게 하는 사람이 지혜로운 사람인가? 어떤 조그마한 공적이 있으면 이것을 전체적인 것에 연결시켜 백방으로 나타날 수 있게끔 수습하는 사람이 지혜로운 사람입니다. 이 말이 무슨 말이냐? 예를 들어, 여기에 백 사람이 모여 있는데, 그 백 사한 개개인이 맺어 놓은 어떤 선한 결실이 있다 할 때, 그 맺어 놓은 결과에 천태만상의 차이가 있다 하더라도 그것을 뿔뿔이 놓아 두지 않고 하나로 묶어서 전체적으로 선한 결과를 가져올 수 있게끔 할 수 있는 사람이 지혜로운 사람인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백 사람이 갖춘 그 모든 가치를 자기 가치와 함께 거두어 가지고 하늘 것으로 연결시킬 수 있는 길을 가는 사람이 지혜로운 사람이라는 것입니다.

오늘날 많은 사람들은 배우려고 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공부를 합니다. 어떤 분야에 전심전력을 다하여 학구적인 면에서 세계적인 학자가 되기 위해 공부를 하고 노력을 합니다. 여기에서 그 노력이라는 것이 무엇이냐? 자기의 전공분야에 있어서 지금까지 역사상의 많은 사람들이 남겨 놓은 관념과 그 내용을 어떻게 해서든지 단시일내에 자기 것으로 소화시켜 가지고, 자기가 이용할 수 있는 것으로 대치시킬 수 있는 사람이 공부 잘하는 사람입니다.

이러한 관점에서, 우리가 6천년의 복귀섭리 노정을 어느 정도 헤아릴 수 있는 입장이라 할 때, 그 길을 전부다 따로따로 떼어놓은 입장에서 가는 사람보다도 그 길을 전부 집약시켜 가지고 이것이 최고의 가치, 즉 ‘세계에서 최고다’ 할 수 있어야 합니다. 그리하여 그것만을 역사과정에서 빼내 가지고 갈 수 있는 사람, 다시 말하면 이미 지나온 6천년이지만, 그 과정에서 중요한 노정을 전부 빼내서 한꺼번에 묶어 가지고 최고의 골인지점에 갈 수 있는 사람, 그런 사람이 지혜로운 사람이라는 것입니다.

오늘날 탕감복귀역사를 거슬러 나가는 우리에게 있어서도 역시 이런 문제가 대두됩니다. 어차피 가야 할 운명길인데, 가는 데는 어떻게 갈 것이냐? 갑이 가고, 을이 가고, 수많은 사람이 가고 있는 데 그들이 가고 있는 모양에 보조를 맞춰 가지고 갈 것이냐, 그렇지 않으면 모든 핵심적인 가치를 집약시켜 가지고 내 일대에 연결시켜 어떤 효율적인 결과를 갖추어 나갈 것이냐 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신앙생활에서도, 우리 일상생활에 서도 역시 필요한 것입니다.

28-262
‘나는 이렇게 했습니다’ 할 수 있는 사람이 되어야
그러면 여러분이 ‘나는 이렇게 했습니다’ 할 수 있는 자리에 섰다 할진대, 그 자리는 이제부터 역사를 이끌고 결정지어 갈 수 있는 터전이 될 것입니다. 그래서 모든 시대는 이 하나의 핵심의 귀결점이 되는 것이요, 하나님의 입장도 이 자리에서 결정되는 것입니다. 현재는 이 자리에서 빛나는 것이요, 미래도 이 자리를 거쳐 새로운 방향으로 나감으로써 과거와 현재를 입증시킬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럴 수 있는 자리가 참이라는 것입니다. 즉, 참이라는 것은 역사를 수습할 수 있는 내용이어야 되고, 현재를 입증할 수 있는 내용이어야 되며, 미래의 기원이 될 수 있는 내용이어야 됩니다.

여러분은 그러한 자리에서 ‘나는 이렇게 했습니다. 나는 이렇게 하면서 일생을 살았습니다’ 할 수 있어야지 ‘나는 이렇게 할 것입니다’ 하는 말은 여러분과는 아무 관계가 없는 말입니다. 아무리 좋고, 아무리 위대한 그 무엇이라도 ‘나는 할 것이다’ 할 때 그것은 여러분과는 관계가 없는 미래의 것에 불과하다는 것입니다. ‘하겠다’ 할 때는 아직까지 결정이 나지 않은 상태인 것입니다. 그것은 잘할 수도 있고, 못할 수도 있다는 것입니다. ‘했습니다’ 하는 자리에서 선한 사람이냐 아니냐 하는 문제가 결정되는 것이지, ‘하겠습니다’ 하는 그 자리에서는 아직까지 선한 사람이 될 것인지 안 될 것인지조차도 모르는 것입니다. 더우기 미래와는 아무런 관계를 맺을 수 없는 것입니다.

이제 우리는 인생행로를 통해서 ‘나는 이렇게 했습니다’ 할 수 있어야 합니다. 민족 앞에 나서서 ‘나는 이렇게 했습니다’ 할 수 있고, 세계 인류 앞에 나서서 ‘나는 이렇게 했습니다’ 할 수 있고, 하늘 앞에 나서서 ‘나는 이렇게 했습니다’ 할 수 있어야 합니다. 그래야 세계의 사람들이 머리를 숙이며 ‘옳소이다’ 하게 되며, 그렇게 되면 세계 만민이 추구하는 영광의 자리에 올라가지 않을 수 없는 것입니다. 민족 앞에서 ‘나는 이렇게 했습니다’ 했을 때, 그 민족이 모두 ‘우리들도 그렇게 해야 되겠습니다’ 할 수 있는 내용을 갖춘 자가 있다면 그는 민족의 앙모의 대상이 되지 않을 수 없다는 겁니다.

섭리 역사상에 있어서의 과거 현재 미래의 모든 인간들이 기필코 가야할 그 행로를 찾아 그들 앞에 ‘나는 이렇게 했습니다’ 할 수 있는 분이 있다고 한다면, 그분은 하늘땅 앞에 앙모의 대상이 되지 않을 수 없는 겁니다.

그러나 오늘날까지 역사과정에서 인류 가운데 누군가가 지상에 하나님을 모셔 놓고 ‘나는 이렇게 했습니다’ 할 때, 하나님께서 ‘오냐, 네가 한 것이 과연 내가 한 것과 마찬가지의 것이로다’ 하실 수 있는 그런 사람이 있었느냐 하면 없었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이 땅 위에서 보낸 30여년의 생애를 볼 때, 그가 ‘나는 이렇게 했습니다’ 하는 그 내용이 하나님이 소원하시던 그 소망의 기준 아래에서 소망이 으스러지고 문드러져 가는 것을 막아 지탱시키기 위한 일면이 될지는 모르지만, 그것이 본래 하나님이 추구하시던 목적이 이루어져 기뻐하실 내용은 아니었습니다. 또다시 있어서는 안 될 십자가의 죽음길이었기 때문에, 그것은 해서는 안 되는 일을 했다는 조건은 될는지 모르지만, 그것이 승리적 기반이 되어서 영광과 더불어 찬양을 받을 수 있는 그런 일은 못 되었다는 것입니다.

이런 것을 생각해 볼 때 ‘나는 이렇게 했습니다’ 라고 할 수 있는 그 내용이 무엇이 되어야 되겠느냐? 어느 한 가정의 가장으로서 자기 아들딸 앞에 ‘이렇게 했노라’ 하는 것은 하나님과는 아무런 관계가 없다는 것입니다. 자기 가정의 아들딸을 중심삼고 ‘이렇게 했노라’ 하는 것은 나라와는 상관이 없는 것입니다. 혹은 한 남자의 아내의 입장에서 ‘이렇게 했습니다’ 하는 것은 그 일족에 있어서는 그것을 필요로 하고 자랑할 수 있는 조그만 조건이 될는지 모르지만, 나라와는 상관이 없는 일이라는 것입니다. 아들딸의 입장에서 자기 부모 앞에 효를 했다 하더라도 그것이 그 가정에 있어서 평면적인 효의 기준으로 남아질지는 모르지만 입체적인 세계, 즉 국가의 운명이라든가, 미래의 국가 이상을 놓고 볼 때는 하등의 관계가 없다는 것입니다.

‘이렇게 했습니다’ 하는 그 내용이 고차적인 내용이라야만 거기에 반드시 역사적인 사건이 남아지게 된다는 것입니다. 가정을 갖고 있어서 가정을 책임지고 있는 사람은 그 가정을 넘어서서 민족을 걸어 놓고 민족을 위해서 ‘나는 이렇게 했습니다’ 할 수 있어야 되는 것입니다. 먼저 가정에 대한 책임을 전부 해 놓고 그 다음에 보다 큰 것을 위하는 것이 순차적인 원리이겠지만, 보다 작은 기준인 가정을 버리고 민족을 위해 살아 가지고 승리했다 할진대는 가정을 버린 것이 마이너스가 아니라, 도리어 가정을 버리고 민족을 위해 살았다는 데에서 그 사람은 보다 큰 인격자로서 추앙받게 되는 것입니다. 이러한 사실을 여러분이 알아야 합니다.

28-264
보다 더 큰 것을 위하여
사람은 누구나 가정의 일도 다 하면서 민족을 위하고 국가를 위해서 살아가기를 바라는 것이 사실입니다. 하나님도 그리기를 바라시는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양자 택일해야 하는 운명에 처해 있는 것입니다. 즉, 타락한 우리 인간은 보다 큰 선을 추구해 나가야 할 급박한 운명권내에 있다는 것입니다. 가정을 위한 선의 실적보다도 국가와 민족을 위한 선의 실적이 더 크기 때문에 하나님도 그것을 더 추구하고 계신다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인격자가 되겠다는 사람들은 자기 가정이나 종족을 위주한 인격자가 되겠다고 하지 않습니다. 그래도 민족을 넘어서서 세계적인 인격자가 되고자 한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무엇을 의미하느냐? 우리 자체는 보다 큰 분야에서 공헌할 수 있는 중심적인 인물을 소원하고 추구하고 있다는 사실을 부정할 수 없습니다.

이러한 내용은 하나님 또한 보다 큰 것을 추구하고 있다는 사실을 뒷받침해 주는 것입니다. 하나님도 마찬가지라는 말입니다. 가정이 선하기를 바라실 것이냐, 국가가 선하기를 바라실 것이냐? 국가가 선하기를 바라 시는 것입니다. 더 큰 세계가 선하기를 바라시는 것입니다.

이런 관점에서 생각해 볼 때 ‘나는 이렇게 했습니다’ 할 수 있는 그 자리에 서기 위해 내 개체는 그 중심을 어디에 세울 것이냐? 어디를 목적으로 하고 설 것이냐 하는 것이 문제입니다. 또한 그 목적과 더불어 나는 어떻게 살았느냐 하는 것이 문제입니다. 만약에 살았다 하는 그 사실이 평범하지 않고 ‘이렇게 하겠습니다’ 했던 그 목적 기준에 도달했을 때에는, 지나온 그 모든 것이 비참한 타락의 여건으로 나타나는 것이 아닙니다. 비참했던 모든 과거지사가 도리어 그날에 있어서는 영광의 조건이요, 자극적인 상징의 여건으로서 역사와 더불어 길이길이 남지 않겠느냐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예수님이 십자가에 죽었다는 사실, 만민의 구세주로 오셔서 피흘렸다는 사실은 그 자체로 보아도 처참한 사실이요, 하나님의 입장에서 보아도 비참한 사실입니다. 물론 세계를 위해서 가는 길 앞에 있어서도 비참한 내용이었지만, 그 비참한 내용이 오늘날 기독교를 발전시킨 원동력이 되었던 것입니다. 그러니 우리는 하는 일이 비참하고 가는 길이 어렵다는 사실을 놓고 통탄할 것이 아니라, 이것을 어떻게 해야 하느냐 하는 문제를 놓고 숙고하지 않으면 안 된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이런 관점에서 볼 때, 오늘날 우리 통일교회가 가야할 길을 놓고, 통일 교회는 어떻게 할 것이냐? 통일교회 자체가 ‘이렇게 했습니다’고 할 수 있어야 됩니다. 어떤 단체가 크면 클수록, 구성요원이 많으면 많을수록 ‘국가와 민족을 위해서 이렇게 했습니다. 아시아를 위해서 이렇게 했습니다. 세계를 위해서 이렇게 했습니다’ 할 수 있어야 합니다. 거기에는 진실 그 자체만을 거쳐 나왔고, 그 자체가 결과가 될 수 있는 길을 거쳐 나왔어야 됩니다. 과거에도 그러한 참된 길을 걸어 나왔고, 현재도 그러하며, 미래에도 그럴 수 있는 그 무엇이 있어야 된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여러분들은 ‘이렇게 했습니다’ 할 수 있는 그 날을 맞이하기 위해 지금 그렇게 하고 있습니까? 나는 그렇게 가고 있느냐는 것입니다. 현재 저는 그렇게 하고 있느냐’ 할 때, ‘옳소이다. 틀림없이 그렇게 하고 있습니다’ 하고 자신 있게 답변할 수 있어야 합니다. 그럴 수 있는 자기 자신이 되지 못했다 할 때는 부정적인 입장을 제시할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28-266
복귀의 도상에 서라
그렇기 때문에, 우리의 하루 생활은 심판의 생활이 아닐 수 없는 것입니다. 우리의 하루 생활에 대해서는 누구한테 변명할 필요도 없습니다. 나 하나를 이기지 못한 것을 변명할 필요도 없다는 것입니다. 자기 자신이 결정짓고 가는 것입니다. 그 나타난 결과를 놓고 ‘어떤 사람이 어떻게 해서……, 그 사람 때문에……’ 하는 것은 다 변명에 지나지 않습니다. 세상에 잘못하고 나서 변명하지 못하는 사람이 어디 있느냐는 말예요. 잘한 사람 중에는 자랑할 줄 모르는 사람은 있을지 모르지만, 잘못한 사람 중에 그 잘못한 것에 대해 변명할 줄 모르는 사람은 없다는 것입니다. 변명 가지고는 통하지 않습니다. 솔직한 사람이 지혜로운 사람입니다. 지혜로운 사람은 비교의 대상이 될 수 있는 사람입니다. 추구의 대상이 될 수 있는 사람입니다. 평을 받아야 할 입장에 있는 사람이 아닙니다. 비교해서 비판받아야 할 입장에 있는 사람은 추구의 대상이 될 수 없습니다. 입으로 자기는 ‘뭐가 어떻고 어떻고’ 하면서 변명이나 하는 그런 사람이 많습니다. 그러나 말보다도 행동이 앞서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우리 통일교인들은 말하기를 ‘하나님의 뜻은 엄청난데 그 엄청난 뜻 앞에 선 나 자신이 부족하니, 내적인 모든 것을 갖춰 가지고 하겠다’고들 합니다. 천 사람 만 사람이 다 거룩히 바라는 것, 그 바라는 것을 갖추려면 10년이 걸릴지 누가 알아요? 일생이 다 지나도록 가다가 말지, 어떻게 알아요? 그런 사람은 통일교회와는 상관이 없는 사람입니다.

문제는 ‘이렇게 했습니다’ 할 수 있는 결정적인 자리에서 양심의 가책을 받지 않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전후 좌우로 왔다갔다하면서 방향을 잡지 못하고 빙빙 돌아가는 사람이 되어서는 안 됩니다. 시계 바늘이 돌아가는 것처럼 틀림없는 방향으로 가야 합니다. 여기에서 행로의 차이가 반드시 벌어지게 되고, 가치적 내용이 결정되는 것입니다. 이렇게 해야 될 통일교회의 우리가 아니냐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루어 놓은 모든 것이 비판 받을 수 있는 요인이 아니라, 다른 사람들이 추구할 수 있는 요인이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렇지 않고는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지지 않습니다.

복귀도상에서는 누구의 협조도 받게 되어 있지 않습니다. 인간이 책임을 완수하며 가야 하는 5퍼센트의 노정에 있어서는 절대로 남의 협조를 받게 되어 있지 않다는 것입니다. 그건 선생님이 다년간 걸어온 길입니다. 협조 받는 자리에서는 탕감복귀가 이루어지지 않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 누구의 협조를 받지 않은 자리에서 온 우주, 만 천하 앞에 당당코 ‘이렇게 했습니다’ 할 때 이의가 없게 되는 것입니다. 동역자의 협조를 받아 가지고 서로 눈치를 보면서 ‘이렇게 이렇게 했지’, ‘그래 그렇게 해야 된다’ 해가 지고는 안 됩니다. 스스로 ‘이렇게 했습니다’ 하는 자리에 서야 합니다.

뜻을 아는 여러분이 잠자리에 들어가서 가슴에 손을 얹고 생각해 보면, 자신의 마음에 가책을 받고 이래서는 안되겠다고 할 때가 있을 것입니다. 그 자리는 사망과 생명이 뒤넘이치는 자리인데, 생명의 권한을 가지고 정리하지 못하는 자리에 있으니, 그런 생활이 습관화하게 되면 그는 사망권내를 벗어날 도리가 없습니다. 제일 무서운 자리가 그 자리입니다. 원수가 쳐 놓은 죄악의 철망의 자리입니다. 그러니 사망의 결정적인 요인을 밟고 일어선 사람이 되어 자신있게 ‘이렇게 했습니다’ 할 수 있어야만 결정적 승리를 가질 수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들의 지난날을 회고해 보면, 맨 처음에는 열심히 합니다. 그 열성이 몇 해나 갈까 하고 선생님이 가만히 분석해 보면, ‘성격이 이렇고 욕망이 이렇고 또 태도가 이러니 틀림없이 몇 달밖에 못 갈 것이다’ 하면, 아니나 다를 까 제대로 가야 몇 달 갑니다. 그러나 몇 달 가지고는 안됩니다. 몇 년 가지고도 안 되는 것입니다. 생각해 보세요. 하나님이 아담 하나를 찾기 위해 6천년이나 걸렸습니다. 하나의 남성을 찾기 위해 6천년을 거쳐 나왔다는 것입니다. 그러니 하나의 여정을 찾기 위해서도 6천년에 플러스해서 여성을 찾아야 하는 것입니다.

지금까지 이 후보자를 찾기 위해서 많은 집단을 세워 나왔습니다. 그래서 후보자를 결정하는 투표를 했다고 합시다. 그래서 후보자가 결정되면 싫든 좋든 결정된 그 중심을 통해서 가야 합니다. 그 중심을 통하여 가지 않고는 갈 길이 없습니다. 결정났으니 그렇게 해야 됩니다. 그를 통하지 않고는 갈 길이 없다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자기 자신의 책임을 짊어지고 당당히 헤쳐 나온 과거가 있습니다. 그런데 그것은 지나간 과거인데, 오늘날에 있어서 어떻게 해야 할 것이냐? 어떤 집을 짓는 데도 짓다가 말려거든 아예 짓지 말라는 것입니다. 안 지은 것보다 더 못한 것입니다. 집을 짓다가 말고 일년쯤 지나게 되면 이것이 부서지고 부식되어서 다시 뜯어고쳐야 되는 데, 그것은 집을 새로 짓는 것만 못하다는 것입니다.

28-268
책임분담을 하는 데 있어서의 마음가짐
그렇기 때문에, 신앙길에서는 어느 한계선까지는 넘어서야 되는 것입니다. 내 일체의 것을 회생하는 한이 있더라도 어느 한계선까지 넘어가서, 이제는 내가 죽더라도 이 이상 내려가지 않는다고 자기 스스로 마음에 다짐하게 될 때에 자신을 가질 수 있는 자리에 갈 수 있는 것입니다. 그때 까지는 마음을 못 놓는 것입니다.

자고 싶으면 자고, 먹고 싶으면 먹고, 가고 싶으면 가고, 오고 싶으면 오고 하는 것이 아닙니다. 확실한 실적을 가지고 그것을 현실에 투입시킬 수 있어야 됩니다. 즉. ‘했습니다’ 하는 그 사실이 그때의 것으로만 남아질 것이 아니라, 영원한 것으로 남아져야만 그것이 영원한 세계에서 자기의 재산이 될 수 있는 것입니다.

자기가 집을 짓다가 말고 다른 사람에게 인계해서 완성을 시켰다면, 누가 지었느냐 할 때는 나중에 완성시킨 사람이 지은 것이 된다는 것입니다. 집을 짓는 데에 백 사람이 동참했다 하더라도, 맨 나중에 완성시킨 사람의 것이 되지 않을 수 없다는 것입니다. 하다가 그만둔 사람들은 모두다 삯군밖에는 안 됩니다. 그러니 문제라는 것입니다. 그런 일이 흔히 있을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자나깨나 나는 이렇게 합니다’ 할 수 있어야 합니다. 백만장자, 천만장자가 되는 것도 현실에서의 생활태도가 문제입니다. 여러분 신앙자들이 흔히 현실을 부정하다 보면 나중에는 허무 해지고 맙니다. 현실적인 가치추구를 망각해 버리고 미래적인 가치만을 추구하면 그것이 다 무슨 소용이 있겠느냐는 말입니다. 다 흘러가 버리는 것입니다.

원리를 알고 보면, 원리관은 현실을 부정하는 그런 것이 아닙니다. 가르침이 이렇기 때문에 ‘나는 이렇게 해 나왔다’ 할 수 있는 실적이 필요 합니다. 거기에는 변명할 필요가 없습니다. 누가 봐 주어서 하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협조도 받으면 안 되게 되어 있습니다. 하나님이 100퍼센트 협조해 준다 해도 인간 책임 5퍼센트는 비어 있는 것입니다. 그 비어 있는 5퍼센트를 중심삼고 사탄이 인간을 치려고 하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자기 운명을 결정하는 데는 하나님의 협조도 바라지 않아야 합니다. 독자적으로 가야 하는 길입니다. 이것은 창조의 능력을 갖고 최고의 절대적 승리의 권한을 우리에게 부여하고자 하는 하나님의 창조원칙이 있기 때문에, 거기에 아무리 하나님의 능력이 투입되었다 하더라도 내가 하는 것입니다. 부모도 소용없고 자식도 소용없어요. 다 내가 하는 것입니다. 그런 마음이 필요합니다. 그래야 부모 앞에 할 말이 있고, 자식한테 할 말이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부모와 자식이 무슨 일을 할 때 부모가 자식한테 ‘이녀석아 네 맘대로냐’ 하고, 또 자식은 부모에게 그러면 부모 마음대로인가요’ 하며 서로 욕심꾸러기같이 그래서는 안 됩니다. 책임을 분명히 해야 합니다. 자기 자신만이 홀로 남아졌을 때에도 협조받으려고 하지 않아야 됩니다. 선생님은 그런 사람을 찾고 있습니다. 지금도 찾고 있어요. 협회장, 누구, 누구, 다 있지만 그런 사람이 어디 있느냐는 것입니다. 이런 문제가 있는 것을 여러분이 알아야 합니다.

28-269
자기 중심에서 떠나라
여러분들 중에는 통일교회는 말씀은 좋지만, 누구 누구 지도자들이 틀려 먹었다고 말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지도자가 문제입니까? 길이 문제인 것입니다. 지도자가 자격이 있든 없든, 길가에서 누가 싸움을 하든 말든, 도둑질을 하든 말든, 사기를 하든 말든 무슨 상관입니까? 그 길이 옳으냐 하는 것이 문제인 것입니다. 시시한 말 말라는 것입니다. 그런 말 하는 녀석들치고 잘 하는 녀석이 없습니다. 이렇고 저렇고 하는 녀석치고 끝까지 잘 가는 녀석이 없다는 거예요.

현재 여러분은 이런 엄청난 길을 가고 있습니다. ‘내가 처음에는 그런 일을 했었는 데…’, ‘그런 일을 하겠습니다’ 또는 ‘하고 있습니다’ 이런 것 가지고는 끝이 안 납니다. ‘했습니다’ 할 수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개인을 중심삼고 이렇게 했습니다. 가정을 중심삼고, 민족을 중심삼고 이렇게 했습니다’라고 할 수 있어야 합니다. 그것이 길이길이 빛날 수 있는 승리의 결정적인 근거가 되어, 그 사람의 인격에 있어서나 행동에 있어서나 승리감이 넘치게 하는 것입니다. 그러니 여러분은 미래에 다가오는 시련을 앞에 놓고 피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그때를 위해서 힘을 축적 해야 합니다. 자신의 능력에 비례해서 큰 시련이 오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을 회피해서 가게 되면 결과만 나쁘게 벌어지는 것입니다.

공(功) 없이는 선이 찾아지지 않습니다. 공과 비례되는 가치로서의 선이 찾아오는 것입니다. 수고는 안 하고 좋은 결과만 바라서는 안 됩니다. 그런 것이 어디 있어요? 그럴 수가 있어요? 악한 세상에서는 소모전이기 때문에 열을 투입해도 절반인 다섯을 찾을까 말까 한데, 열을 투입하고 열 다섯을 찾겠다고 하면, 그게 말이 됩니까? 그것은 안 되는 것입니다.

영계에는 이런 사람이 있습니다. 머리에 공상만 가득 들어 가지고 공상 속에서 살다가 원칙적인 노선을 무시하고 가려고 하니, 갈 수가 있어요? 「없습니다」 무슨 발판이 있어야지요. 그렇기 때문에, 여러분은 어디까지나 현실에 충실해야 됩니다. 그래서 ‘현실에서 이렇게 했습니다’ 할 수 있는 승리적 기반을 갖추어야 됩니다.

여러분이 각 교회에서 활동을 하면서 기도를 할 때에 ‘아버지여, 내 편이 되어 주시고, 내 업적을 통해서 복도 주시옵소서’ 또는 ‘나는 아무개 집 외동딸로 태어나 육체적으로 피곤해서 어쩌고 저쩌고…’ 또 ‘내 아들 딸을 이렇게 해주시오’ 하지요? 그건 자기 뜻입니다. 자기 중심인데, 하나님이라고 해서 상관할 수 있겠어요? 그건 자기 뜻이라는 것입니다. 자기 뜻을 놓고 아무리 기도해 보라 이겁니다. 아무리 밤을 새워 기도를 해도 하나님과는 상관이 없는 것입니다.

한 세상을 부정하고, 한 세상을 붙들고, 그 세상을 위해서 가야 됩니다. 그 말은 무슨 말이냐? 예를 들면, 가정을 부정하고 나라를 붙들라는 것입니다. 더 큰 것을 위하는 것, 그것이 공적입니다. 그래야만 남아지는 것입니다. 자기 욕심 중심삼고, 가정 중심삼고 가는 것, 그것은 나중의 일입니다. 보다 큰 목적을 중심삼고 가야 된다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신앙자는 보다 큰 것을 위하여 공적인 기도를 하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것을 횡적으로 어떻게 전개시키느냐 하는 문제를 중심삼고 볼 때 그것을 공상하는 것으로 그칠 것이 아니라, 행동의 결실로 나타내기 위해 창조적인 모험을 하라는 것입니다. 그러니 신앙자는 현실의 환경과 부단히 투쟁을 해서 이상을 현실화시키기 위한 모험의 생활을 해야 합니다. 그래서 신앙생활은 최고의 개척자의 생활이요, 최고의 투쟁 자의 생활이요, 최고의 전도자의 생활인 것입니다. 그런 결과로 나타나야 최고의 승리자가 될 수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그러한 신앙생활을 해야 됩니다.

28-271
사탄보다 더 적극적인 자리에 서라
그러면 통일교회는 무엇을 했느냐? 이 민족 앞에, 이 세계 앞에 무엇을 했느냐? 그리고 ‘통일교회는 이 세계 앞에 이렇게 했습니다’ 할 수 있는 그 무엇을 어떻게 제시할 것인가? 선생님은 그 문제를 중심삼고 지금까지 나왔습니다. 여러분이 협조하고 안 하고가 문제가 아닙니다. 통일 교회를 지도해 나갈 책임을 지고 있는 선생님은 그 문제를 중심삼고 원대한 일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 관점에서 금년의 표어가 정해진 것입니다. 여러분이 협조하고 싶거든 협조하고, 말고 싶으면 말라는 것입니다. 여러분이 협조하지 않으면 선생님 혼자서라도 이 표어 앞에 부끄럽지 않게끔 책임을 다 할 것입니다. 아무 문제 없다는 것입니다.

여러분이 대한민국을 위해, 세계를 위해 맹세하고 투쟁해 나갔을 때 여러분은 죽어 없어지더라도, 여러분이 남긴 것은 대한민국 백성의 소망으로서 그 가슴에 남아질 것입니다.

그것을 위업으로 남기기 위해 정성을 다했을 때 대한민국이 잘될 수 있는 것이요, 그러한 것은 하늘나라에서도 절대 필요한 것이기 때문에 그 시대만이 아니라 두고두고 만인의 가슴에 남아질 것입니다.

그러니 뒤돌아보면서 내가 무엇을 했는가를 생각해 보라는 것입니다. 누군가가 무엇을 했느냐고 물으면, ‘하긴 뭘해. 통일교회에서 선생님 줄줄 따라다녔지’ 이렇게 대답하겠습니까? 생각해 보세요. 여러분만 선생님을 따라다니는 것이 아닙니다. 사탄도 선생님을 따라다니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선생님이 원하는 목적을 위해서 따라나오지만, 사탄은 반대하는 입장에서 따라오는 것입니다. 누가 더 적극적이냐 하는 문제를 두고 볼 때, 여러분보다 사탄이 더 적극적입니다. 적극적이라는 면에서는 여러분이 모자란다는 거예요. 그렇지 않아요? 그러므로 여러분은 사탄보다도 더 적극적이지 않고서는 사탄세계의 한계선을 못 넘습니다. 여러분이 그런 적극적인 입장에 서서 언제든지 자신있게 대처해 나가야 됩니다.

28-272
과거의 실적을 가지고 자기를 자랑하지 말라
여러분 각자가 나라를 위해서, 민족을 위해서, 세계를 위해서 살아야 됩니다. 그런데, 과거에 그렇게 좀 살았다고 하면서 현재에 자기를 알아 주지 않는다고 트집을 잡는 사람들은 자기를 전부다 팔아먹는 꼴이 되고 맙니다.

그러니까 저당잡힌 격입니다. ‘내가 과거에 이렇게 했는데, 교회에서는 알아주지도 않는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있는 데, 그래서는 안 됩니다. 자기가 한 일은 자기 재산으로 남아지는 것입니다. 누가 알아주라고 하는 것입니까? 자기 소유요 자기 재산인데, 남이야 알아주든 몰라주든 자기가 알고 있으면 됐지, 꼭 누가 알아줘야 합니까? 많은 사람들이 자기를 알아주기를 바라는 사람은 도둑놈 심보를 가진 사람입니다. 자기를 알아 주기를 바라면서 그저 자랑하고 다녀 보라는 거예요. 전부다 빼앗겨 버리는 것입니다.

다른 사람들에게 몽땅 빼앗겨 버리는 것입니다. 자기가 이제껏 뜻 앞에 해 나왔던 모든 것을 자기보다 앞장서서 하겠다는 사람에게 몽땅 빼앗긴 다는 것입니다. 무슨 자랑을 하겠다는 겁니까? 자랑하려면 모든 것을 다해 놓고 난 훗날에 가서 지나간 것을 자랑해야 하는 것입니다. 몇 단계가 지난 후에 해 놓은 것을 자랑하면 모르지만, 하고 있는 일을 자랑하는 것은 어리석은 짓입니다. 그것은 도둑을 불러들이는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이걸 보면, 통일교회 패들 입들이 불길합니다. 자기 자랑으로만도 부족해 서, 선생님이 뭐 어떻고 어떻게 해주었다고 한다는 것입니다.

여러분들은 선생님 세워 자랑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여러분이 선생님을 자랑해서 뭘 하겠느냐 말입니다. 자랑함으로써 하나님이 기뻐하신다면 또 몰라요. 그런 여러분들 때문에 선생님이 지금까지 욕을 먹고 있다는 것입니다. 지금까지 욕을 먹고 있다는 거예요. 시시하게 오고 가는 사람들에게 말해 가지고 욕먹게 만들어 놓지 않았느냐 말예요. 안 그랬어요?

자기가 말한 것은 책임을 져야 합니다. 영원히 영원히 여러분이 말한 것에 대한 책임을 져야 합니다. 만약 그 말을 들은 사람이 있을 때는 부정할 도리가 없는 것입니다. 자기가 말한 것을 부정하는 것은 심판정에 들어가서 심판관을 모욕하는 것입니다. 그렇잖아요? 공판정을 모욕하는 것입니다. 판검사를 모욕하는 거예요. 주권자를 모욕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자기가 말한 것은 반드시 책임을 져야 됩니다.

28-273
거리낌없는 생을 살라
그러니 여러분 마음에 맺힌 것을 다 풀어야 됩니다. 풀지 않고는 갈 수가 없습니다. 다른 길로는 갈 수가 없으니, 풀지 않으면 안 된다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선생님에게 걸리지 말라는 것입니다.

걸리지 않는 사람은 내일을 향해 갈수 있지만, 걸려 있으면 못 가는 것입니다. 그렇잖아요? 걱정거리가 있으면 다른 일이 잘 됩니까? 안 되지요? 그렇기 때문에 내 마음에 천국을 가지라는 것입니다. 완전히 가려면 ‘마음에 꺼릴 것 없는 완전하고 자유스런 환경’을 지녀야 됩니다. 그러한 천국이 되어야지요. 내 자신이 완전하게 가고 싶은데, 그러자면 걸리는 것이 없어야 됩니다. 그렇기 때문에 신앙자들은 걸리지 않아야 됩니다.

전도할 때에도, 여러분은 하겠다는 마음만을 가지고 자신만만하게 해야 합니다. 그러나 나라를 사랑한다고 하는 그 마음만 가지고는 안 됩니다. ‘했다’ 할 수 있어야 됩니다. ‘하늘땅 앞에 부끄럽지 않게 했다’고 할 수 있어야 합니다. 지금까지 그렇게 했기 때문에 세계를 사랑하고 세계권내에 있는 모든 나라를 사랑하게 되는 것입니다.

여러분들, 신령한 기도를 한번 해 보라는 겁니다. 하늘적인 내용을 가지고 기도를 하게 되면 기도 제목이 차차 달라져 갑니다. 무슨 기도를 하게 되느냐? 그 기도의 범위가 점점 넓어지거든요. 좁아지는 법이 없습니다.

앞으로 우리 통일교회는 이 청파동 본부로부터 시작해서 민족을 규합하여 세계를 위해서 가야 되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세계를 위해서 얼마나 많은 공을 세울 것이냐? 민족을 위해서 가지 못하는 사람은 세계를 위해서 갈 수 없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그러니 그런 여러분을 그냥 두어 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책임자가 있어야 갈 수 있는 것입니다. 그리 하여 그 책임자와 합심해서 ‘나는 이렇게 했습니다’라고 할 수 있어야 된다는 것입니다.

‘나는 이렇게 했습니다’ 하는 그 말은 죽을 때도 갖고 가야 됩니다. 그래서 아버지 앞에 섰을 때 ‘너는 누구냐’ 하게 되면 ‘아무개입니다’ 할 수 있어야 합니다. 세계의 모든 사람들이 그 자리에 불려 올 게 아니예요? 미국 사람도 있을 것이고, 소련 사람도 있을 것이고, 세계 사람이다 있을 것입니다. 그런 가운데서 하나님과 문답을 하는 것입니다. ‘너는 누구냐’ 하면 ‘아무개입니다’ ‘어디서 왔느냐? ‘ ‘한국에서 왔습니다’ ‘어떻게 살다가 왔느냐? ‘ ‘이렇게 이렇게 통일교회 믿다가 왔습니다’ 이렇게 자기도 모르는 가운데 통일교회 믿었다는 것을 자랑하는 것입니다. ‘그래 믿었으면 어떻게 믿었느냐’ ‘어떻게 믿긴 뭘 어떻게 믿었겠습니까? 그저 교회에 들락날락했지요’ 하는 사람도 있다는 것입니다. 통일교회 교인들 천태만상이라는 것입니다. ‘그래 믿었으면, 통일교회의 뜻이 무엇 이냐? 너 하나 구하기 위한 것이냐, 세계를 구하기 위한 것이냐? ‘ 했을 때 ‘세계를 구하기 위한 것입니다’ 하면 ‘그럼 잘 믿었구만’한다는 것입니다. 이렇게 되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여러분은 자나깨나 이 민족, 이 나라를 구하기 위하여, 세계를 구하기 위하여 아버지 앞에 ‘당신이 찾고자 하시는 이 나라 이 민족이 이렇게 가야 할 것이 아니옵니까? 제가 이 민족을 인도해 나가야겠기에 나는 현재 이렇게 하고 있사옵니다. 이 목적을 이루기 위해서는 제힘이 백이 되어야 할텐데, 아흔 다섯밖에 안 되오니 다섯은 어디서 보충 해야 되겠사옵니까? 아버지께서 보충을 못 해주신다면 제 동지와 제 혈족에게서 보충시켜 가겠사옵니다’ 이렇게 기도하며 나아가야 합니다.

복귀의 길은 민족에게서 보충시키는 것이 아닙니다. 자기의 피살을 가해 주고, 자기를 부정하는 자리에서 자기의 혈족을 재구성하여서 보강해 나가야 됩니다. 그럼으로써 자기 혼자 가는 것이 아니라, 자기 가정이 갔다는 조건이 세워지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사랑인 것입니다.

그리고 나서는 세계를 위해서 가야겠다는 것입니다. 이 민족을 아버지 뜻 앞에 세웠으니, 이 민족을 희생시켜서라도 세계를 살려야 되겠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거기에 민족이 감사하면서 가게 될 때는 , 그 민족은 세계를 지배하는 민족이 될 것입니다. 한 나라의 충신열사로서 역적의 모함을 받고 매를 안 맞은 사람이 있었습니까? 그 모함에 걸리게 되면, 그것이 오히려 그의 이름을 빛낼 수 있는 조건이 되었던 것입니다. 그러니 뜻 앞에 있어서 제물되는 입장에 섰다고 해서 섭섭하게 생각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자신의 그런 생각들을 어떻게 승화시키느냐 하는 문제를 중심삼고 걱정하고, 그것을 하늘과 연결시키지 못한 것을 놓고 용서를 빌고, 다시 시작할 수 있는 사람이 될 때에 그는 망하지 않습니다. 제단이 무너지고 제물이 도적 맞더라도, 그 터전을 다시 찾아올 사람이 나타나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정성을 들이라는 것입니다. 지성이면 감천이라고 했습니다.

그런데 여러분에게 정성들인 핏자국이 있습니까? 여러분이 제물로서 나아가게 되면 그것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영원히 남아지는 것입니다.

그러면 여러분이 ‘이렇게 해야 되겠습니다’ 하는 것과 ‘이렇게 합니다’ 하는 것과 ‘이렇게 했습니다’라는 문제를 놓고, 어떻게 해야 될 것인가? 여러분이 생명을 걸어 놓고 지금 가야 할 길이, 이 민족을 구하는 길인 것을 알아야겠습니다. 알겠지요? 「예」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