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8-151 to 28-178: 일심통일

일심통일
1970.01.11 (일), 한국 전본부교회

28-151
일심 통일
[기 도]

오늘은 새해를 맞이하여 두번째 맞는 안식일이옵니다. 이 아침 당신의 자비와 긍휼이 저희들 머리 위에 같이하여 주시옵소서.

새해에 저희들은 이미 ‘승리적 통일전선’을 표어로 내세우고 1970년대의 새로운 출발을 하였사옵니다. 저희가 가는 이 노정이 당신의 목적과 일치되게 허락하여 주시옵고, 당신의 마음과 당신의 뜻과 당신의 섭리노정에 일치되게 허락하여 주시옵소서.

지금까지 저희들은 하늘을 중심삼고 승리할 수 있는 그 날을 바라고 나왔사옵니다. 아버지께서도 그날을 바라시고 추구해 오셨다는 사실을 아오니 저희가 온전히 아버지와 하나가 되어야 되겠습니다. 아버지께서 소원 하시는 한날, 승리를 다짐할 수 있는 그날과 그때를 기필코 저희 통일교회를 통하여 이루시려는 뜻이 있기 때문에 오늘도 저희들은 그 길을 향하여 달려가야 할 운명에 놓여 있음을 아옵니다.

비록 작은 개체라 할지라도 저희 개체를 바쳐 큰 목적을 완결하기 위해서는 너와 나의 운명이 공동 운명이 되지 않으면 안 된다는 것을 저희들은 이미 알고 있사옵니다. 당신이 원하시는 뜻을 위해서 저희들은 모였사옵니다. 저희들이 가는 길이 당신이 바라는 소원과 일치될 수 있게 하옵소서. 그것이 저희의 소원이 되게 하여 주옵길, 아버지, 간절히 바라옵고 원하옵니다.

이 아침에도 전국에 널려 있는 당신의 자녀들이 서울을 향하여 당신 앞에 기도를 드리고 있사옵니다. 금년 이 한 해와 ’70년대를 위하여 정성들이고 있는 곳곳마다 당신의 긍휼과 자비의 손길이 떠나지 마시옵소서. 남은 은사의 터전을 지키는 데 있어서 하늘의 대신자가 되고, 하늘의 대역자가 되게 허락하여 주옵기를 , 아버님, 간절히 바라옵고 원하옵니다.

아버지여, 이달에는 저희들이 크나큰 행사를 앞에 두고 있습니다. 저희 들이 경륜하는 모두가 아버지께서 원하시는 뜻과 일치되게 허락하여 주시옵소서, 당신이 백방으로 바라시는 소원을 이루어 드리기 위해, 목적하신 그곳까지 가기 위해 여러 가지 방향을 통해서 역사적인 일을 하지 않을 수 없는 입장임을 아버지께서는 아시오니 저희들이 하려는 모든 대회를, 아버지, 친히 주관하여 주시옵길 간절히 부탁드리옵니다.

시작도 당신이 하셨사오니 과정도 당신이 맡으시옵고 끝도 당신이 맺어 주시옵소서. 이 모든 것에 선을 투입시켜서 그 결과 승리의 한날을 맞이하려는 것이 아버지의 뜻인 것을 저희들이 알고 있사오니, 당신이 바라시는 소원 앞에 저희들이 선의 재료가 되고, 선의 공동체가 되어야 되겠습니다. 전체를 아버지 앞에 맡기어 승리의 터전을 향하여 줄달음칠 수 있게 허락하여 주시옵길, 아버님, 간절히 바라옵고 원하옵니다.

세계에 널려 있는 당신의 자녀들을 모두 기억하여 주시옵소서. 한국을 바라보면서 조국이라고 마음으로 흠모하며 정성들이는 모든 것이 헛되지 말게 허락하여 주시옵소서.

남은 복귀의 터전을 향하여 세계의 무대를 밟고 나서는 저희의 행보가 아버지의 자랑이 되고, 아버지의 마음속에 영원히 기억될 수 있도록 하여 주시옵고, 저희도 생애에 있어서 당신의 보호권을 떠나지 않는 자녀들 되게 허락하여 주옵길 간절히 바라옵고 원하옵니다.

금년을 통하여 저희들이 해야 할 큰 사명이 세계 무대에 남아 있는 것을 알고 있사오며, 40개국의 선교지가 저희들을 기다리고 있는 것을 알고 있사옵니다. 아버지여, 저희의 길을 열어 주시옵고, 이 길을 지켜 주시옵소서. 아버지께서 명령하시는 뜻을 기필코 성사시키려는 저희들에게 존엄하신 아버지께서 같이하고 계시다는 사실을 증거할 수 있는 금년 이 한해가 되게 허락하여 주옵길, 아버님, 간절히 바라옵고 원하옵니다.

이제 저희들이 아버지 존전에 엎드렸사옵니다. 엎드린 저희 자신이 다시 한번 맹세해야 되겠습니다. 저희가 어디로 와서 어디로 갈 것인가를 스스로 발견하게 하여 주시옵소서. 기원이 당신이었으면 그 기원을 통한 과정도 당신이어야 되겠고, 그 목적하는 바의 결과도 당신이어야 되겠습니다. 당신으로부터 인연되었던 인간이 당신과 더불어 영원히 있을 수 없는 입장에 서게 된 것은 타락 때문임을 알고 있사옵니다.

당신과 더불어 기원이 된 역사노정이기에 당신과 일치되게 하기 위하여 저희들이 복귀노정을 중심삼아 가지고 사탄이라는 대원수를 앞에 놓고 투쟁의 과정을 거치지 않으면 안 된다는 것을 아옵니다. 이러한 원한의 운명을 저희들이 밟고 넘어서 당신이 목적하시는 바와 일치되어 영원한 시작과 영원한 과정과 영원한 목적 성사라는 이 엄청난 승리의 결정점을 저희들 생애를 통하여, 저희들의 모임을 통하여, 이루어 드릴 수 있게 하여 주옵길 간절히 바라옵고 원하옵니다.

이제 저희 자신들이 귀하다고 느끼는 것은 아버지께서 저희와 함께 계시기 때문이며, 저희 자신들이 가치 있다고 느끼는 것도 아버지의 뜻에 일치하기 때문인 것을 아옵니다. 이와 같이 아버지의 뜻에 참여하여 영광의 존재로서 살 수 있는, 당신의 아들의 권위와 일치되는 그러한 자리에 있는 것을 저희들이 알아야 되겠습니다.

저희들을 품어 주시는 아버지여! 저희들은 아버지께서 얼마나 얼마나 긍휼의 마음과 사랑의 마음과 동정의 마음과 자비의 마음을 갖고, 몇백번, 몇천번, 몇만번이나 품어 주셨다는 사실을 알아야만 되겠사옵니다. 시간도 저희를 품고, 저희를 위하고, 저희를 사랑하고 계시는 것을 알고 있사옵니다. 당신의 소원의 목적을 흠모하며 당신이 원하시는 뜻 앞에 일치될 수 있는 저희 자신들이 되게 하여 주시옵소서. 저희 자신을 아버지 앞에 몽땅 생축의 제물로 드릴 수 있게 허락하여 주시옵길 간절히 부탁드리고 원하옵니다.

전국에 널려 있는 자녀들을 다시 한번 기억하여 주시옵소서. 지금 남한 각지에 나가서 싸우고 있는 당신의 어린 자녀들 위에 친히 같이하여 주시옵소서.

금년 이해로 말미암아 ’70년대에 새로운 평화를 주시고, 통일의 전선에 서는 승리의 결과를 다짐할 수 있고 싸움에서 승리의 깃발을 든 선각자들이 되게 하여 주시옵길 간절히 부탁드리고 원하옵니다.

모든 남아진 은사를 고대하고 있는 그곳 위에 임하여 주시옵소서. 저희들이 일치 단결하게 하여 주옵길 간절히 부탁드리며, 이 모든 말씀 참부모의 성호 받들어 간절히 아뢰었사옵나이다. 아멘.

28-154
말 씀
오늘은 1월 들어 두번째 맞이하는 안식일로 금년에 있어서 중요한 한날이 되겠습니다. 우리는 10일 후면 열릴 제1회 아시아 승공대회를 앞두고 전체가 동원하지 않으면 안 될 시점에 놓여 있습니다. 무슨 일이든 처음의 출발이 잘 되어야 그 일이 잘 성사된다는 것을 우리들은 알고 있습니다. 시종여일이라는 것은 언제나 우리 사회가 요구하는 것입니다. 역사과정에서도 이러한 과정을 거쳐야 보다 나은 성과를 가져올 수 있었다는 것을 우리의 만사를 통해서 보아도 미루어 알 수 있는 것입니다.

28-154
목적하는 바를 이루기 위해서는 한마음이 필요
‘일심통일’, 즉 ‘한마음으로 하나의 통일을 이루자’라고 하는 것, 이것은 어떤 국가의 주권자가 있으면 그 주권자도 원하는 것이요, 어떤 단체가 있으면 그 단체도 원하는 것입니다. 또한, 이것은 어떤 제도를 실행하려는 사람이 있으면 그 사람도 원하는 것입니다. 마음이 통일되지 않고는 그 제도를 통해 성사시키려고 하는 일이 성사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이 일심통일은 우리 인생에 있어서 하루의 생활에서부터, 일년의 노정, 더 나아가서는 일생의 노정, 전역사노정을 두고 보더라도 반드시 어떤 목적을 향하여 진행하는 과정에 절대적으로 필요하다는 사실을 우리는 부인할 수 없습니다.

개개인이 하루의 생활을 영위하는 데 있어서도 아침에 집을 나설 때는 하나의 마음이 있는 데 저녁에 돌아올 때는 두 마음으로 변해 있다면 하나의 목적을 성사할 수 없는 것입니다. 이렇게 보게 될 때, 오늘날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사회, 지금 여러분 자신이 접하고 있는 생활환경이 일심(一心)된 환경을 갖추고 있느냐? 그렇지 못한 것을 우리는 알고 있습니다. 여러분 자신도 하루에도 마음의 방향이 여러 방향으로 달라지는 것을 느낄 것입니다.

마음이 달라지기 때문에 가는 방향이 달라지는 것이요, 가는 방향이 달라지기 때문에 목적이 달라진다는 것입니다. 마음이 달라져 가지고 하나의 목적을 달성한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입니다. 마음이 하나되어도 목적을 이루기 힘든데 두 마음을 가지고 하나의 목적을 성사시킨다는 것은 더더욱 있을 수 없는 일입니다.

이렇게 모든 일을 보게 볼 때, 한마음이 필요한 것입니다. 아침의 마음과 낮의 마음과 저녁의 마음이 하나되어야 하고, 초년 시대의 마음과 중년 시대의 마음과 말년 시대의 마음이 하나되어야 합니다. 이렇게 누구든지 하나의 마음을 가지고 시작하고, 하나의 마음을 가지고 그 과정을 개척하고, 하나의 마음을 중심삼고 결속된 결과를 추구하는 그 기간이 길면 길수록 그 사람의 바라는 목적도 클 것입니다.

우리는 하나의 마음을 가져야 합니다. 어떤 목적을 추구하는 데 있어서도 하나의 마음을 가져야 합니다. 하나의 마음을 떠나서는 그 목적을 이룰 수 없다는 것입니다. 이런 것을 보게 될 때 하나님께서 천지를 창조하실 때에 두 마음을 가지고 창조하시지 않았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하나의 마음에서부터 시작되어 하나의 목적을 달성하기 위하여는 하나의 방향을 갖춘 과정을 거치지 않으면 안 되게 되어 있는데도 불구하고 오늘날 인간들은 하나의 마음 형태를 갖추지 못하고 있습니다.

대한민국이면 대한민국 사람들이 살아가는 방향이 다르고, 각 나라의 정책이 다르고, 그 사회의 사조가 다르고, 오늘날 현세 사회를 구성하는 사상이 다릅니다. 이 모든 것이 하나가 되어 있지 못합니다. 천태만상의 배후를 중심삼고 그 인연을 통하여 현실적인 사회환경이나 제도가 갖추어 졌다는 사실을 두고 볼 때, 그 결과가 천태만상이 아닐 수 없는 것입니다. 이렇게 수많은 동기로 말미암아 수많은 결과가 맺어졌기 때문에 반드시 역사는 그 결과의 일치점을 추구해야만 하고 그래야 역사의 목적이 이루어질 것은 당연한 결론입니다.

이렇게 역사는 반드시 하나의 목적을 지향해 나오기 때문에 수많은 주의 사상이 수습되어 가지고 하나의 목적하는 바의 세계로 귀결되는 것은 필연적인 결과가 아닐 수 없는 것입니다.

그런 하나의 목적의 세계로 귀결되어지는 것은 우연한 결과로 이루어질 수 없는 것입니다. 이것은 어느누구도 그 형태를 변형시킬 수 없고, 그 방향을 돌이킬 수 없는 하나의 원인과 하나의 과정을 통해서 하나의 목적하는 바의 세계가 이루어진다고 보는 것이 정상적인 관이 아닐 수 없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의 세계를 추구하는 그 배후에 있어서는 절대적인 요인과 하나의 일치점이 반드시 성사되지 않고는 하나의 세계를 이룰 수 없습니다. 즉, 일치된 그 기원으로 말미암아 과정을 거치고, 그 과정이 세계화될 수 있는 인연을 거쳐 가지고 하나의 세계를 이룰 수 있다고 우리는 결론을 내릴 수 있는 것입니다.

28-156
행복하기 위해서는
그러면 오늘날 세계사조를 대별(大別)해 볼 때 어떤 세계관으로 되어 있느냐? 물질적 세계관과 정신적 세계관으로 되어 있습니다. 다시 말하면 유물사관과 유심사관이 대립되어 있습니다. 이 물질적인 면과 마음적인 면이 대립된 입장에서 하나의 중심으로 갈 수 있겠느냐? 그건 불가능한 것입니다. 우리 사람을 두고 볼 때도 몸과 마음으로 되어 있습니다. 마음이라는 것은 우리가 현실적인 것을 가지고 분석하고 처리할 수 없는 것입니다. 물질적인 환경이나 내용으로 관측해 가지고는 하나의 결과를 내릴 수 없는 것이 마음의 세계인 것을 우리가 알고 있습니다.

이 마음의 세계가 구체적인 내용을 갖고 있지 않은 것 같지만 그것이 물질적인 세계를 관할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런 것을 볼 때, 고차적인 내용을 갖춘 내적인 원칙을 통해서는 물질세계를 분석할 수 있으되, 물질적인 것 가지고는 그 차원이 미급하기 때문에 마음세계를 분석하거나 해결 지을 수 없다는 것을 우리들은 알고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현재 대한민국에서 ’70년대를 중심삼고 물질적, 즉 경제 부흥을 다짐하는 현시점에 있어서 물질적인 것만을 강조해서는 안 됩니다. 여기에는 뒷받침될 수 있는 정신적인 일면이 더 고취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이런 관점에서 볼 때에 이 세계는 두 세계로 나뉘어져 있습니다. 그러면 두 세계로 나뉘어진 채로 영속할 수 있겠느냐? 만약 인류가 두 세계로 나뉘어진 상태로 영속하게 된다면 비참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이것이 하나의 귀결점을 갖지 않으면 하나의 목적을 달성할 수 없습니다. 하나의 목적을 달성하지 못하는 한 그 사람이나 그 나라나 그 세계에 있어서 행복, 혹은 평화는 있을 수 없습니다. 둘 사이에 상충적 요인을 남겨 놓고는 행복이란 있을 수 없습니다.

한 가정을 중심삼고 볼 때도, 가정에서 부부가 서로 상반된 입장을 고수하고서는 그 가정에 평화가 있을 수 없습니다. 반드시 주체적인 입장인 하나의 중심을 기준으로 하여 그 중심과 상대가 하나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주체와 대상 관계에 있어서 누가 중심이 되어야 하느냐? 어느 쪽이 중심에 서야 하느냐? 주체가 중심이 되어야 합니다. 대상은 주체를 중심삼아야 하고 주체 앞에 자신을 연결시켜야 합니다. 그래야 자신이 대상으로서의 목적을 이룰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주체가 대상의 입장에 서가지고 왔다갔다하면 하나의 목적을 성취할 수 없는 것입니다. 이런 것을 볼 때 한 가정에서 목적을 이루려면 그 가정의 내외가 하나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하나가 되는 데는 무엇을 중심삼고 하나되어야 하느냐? 남편이면 남편, 혹은 아내면 아내를 중심삼고 하나되어야 합니다. 세계로 갈 수 있는 마음과 일치되는 사람을 중심삼고 그것에 가까이 서면 설수록 그 가정은 세계 역사에 남아질 수 있는 것입니다. 그렇게 되면 그 가정은 그 나라의 운명과 민족의 행운을 다짐하는 기원이 될 수 있다는 거예요. 이런 것을 볼 때, 둘이 상극 상충되는 입장에서는 행복이라는 것이 있을 수 없다는 사실을 알게 됩니다.

사회가 하나의 형태를 갖추지 못한 것을 염려하겠지만 그것은 근본적인 문제와는 먼 거리에 있는 것입니다. 가정이 하나의 형태를 이루지 못한 것도 직접적인 문제는 되겠지만 근본적인 문제는 아닌 것입니다. 그보다도 더 근본적인 문제는 어디에 있느냐? 자기 자신에게 있는 것입니다. 자기 자신이 하나의 마음을 따라서 태어났느냐 하는 것이 문제입니다. 자기 자신은 하나의 마음을 따라서 과거부터 살아왔고 이 시대를 살아가고 있느냐, 또 미래에까지도 하나의 마음을 지니고 살 수 있겠느냐 하는 것이 문제가 되지 않을 수 없다는 거예요.

여러분이 행복하다는 말을 할 때, 행복이라는 그 말은 승리한 과거를 가지고 있을 때 할 수 있는 말입니다. 현실에서는 중심적인 자리를 결정하여 세계면 세계 앞에 영원히 남아질 수 있고, 만존재 앞에, 혹은 만유의 존재 세계 앞에 중심으로 세워지기에 부족함이 없다고 할 수 있는 데서 행복이 보장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현실에서만이 아니라 미래에 있어서도 영원한 기쁨이 될 수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과거, 현재, 미래에 있어서 일치된 내용임을 보장받을 수 있는 데에서 비로소 행복의 기원이 될 수 있는 것입니다.

과거의 승리의 결정적 기준을 갖지 못하게 되면 과거로부터 지금까지 엮어 온 모든 사연들이 상충 요인으로 남아지는 것입니다. 그 상충 요인이 현재 자기가 서 있는 자리보다 크고 범위가 넓게 되면 그것이 언제나 주체적인 요건이 되는 것입니다. 현실에 있어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중심보다 상대적인 환경과 모든 여건이 우세하게 될 때는 그 중심은 우세한 것에 흡수되어 버리고 맙니다. 또, 미래의 기원을 마련해야 하는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미래의 세계의 내적인 핵심이 될 수 있고 중심이 될 수 있는 확고한 기틀을 마련하지 않으면 안 됩니다. 미래의 세계가 현재 행복의 기준으로 바라보는 그것보다 더 크게 될 때, 그 행복은 완전한 것입니다. 과거의 마음, 현재의 마음, 미래의 마음이 왔다갔다하게 되면 그 목적이 이루어질 수 없는 것입니다.

28-158
참의 성립
우리는 어떤 사람을 볼 때 그 집안이 좋은 집안 같다고 평합니다. 그것은 그가 과거를 보장받을 수 있는 입장에서 태어났기 때문입니다. 그 사람을 보고 그 집안을 평할 수 있고, 또 그 사람을 보고 현재를 평할 수 있고, 그 사람을 보고 미래를 관망할 수 있는 것입니다. 이런 관점에서 자기 자신은 과거의 연장이요, 현재의 집약체요, 미래의 출발체가 되는 것입니다.

이런 점에서 볼 때, 행복이라는 것이 과거의 승리의 중심이 되고, 현재의 승리의 중심이 되고, 미래의 새로운 출발이 되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행복하게 되기 위해서는 과거도 하나요, 현재도 하나요, 미래도 하나가 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런 의미에서 참이라는 것을 추구한다는 것입니다.

역사상에 나타난 성현들은 역사과정에 왔다 갔던 그 누구보다도 참된 사람입니다. 그러면 참이란 것은 어디에서 성립되느냐? 참이라는 것은 미래에서만 성립되는 것이 아니고, 현재에서만 성립되는 것도 아닙니다. 참이라는 것은 과거에도 참이어야 하고, 현재에도 참이어야 하고, 미래에도 참이 될 수 있어야 됩니다. 참이라는 것은 환경을 초월한 것입니다. 참된 사람은 과거에도 중심이요, 현재에도 중심이요, 또 미래에 있어서도 중심인 것입니다. 이런 자리에서 참된 사람이 성립되는 것입니다.

그러면 인간 세상에 참에 가까울 수 있는 것이 무엇이냐? 지금까지 수많은 사람들이 왔다 갔지만 가장 참에 가까운 것이 무엇이냐 할 때 상대적으로 나타난 스승보다도, 부모보다도, 참의 모체를 이룰 수 있는 존재는 바로 자기 자신입니다. 그러면 자신에게 제일 가까울 수 있는 참의 상대는 무엇이냐? 그것은 자기 자신의 마음, 곧 양심입니다. 우리는 곧잘 ‘그 사람 양심적이다. 그 사람 마음이 곧다’고 합니다. ‘마음이 곧다’는 것은 무엇이냐? 역사는 직행합니다. 그러기에 과거도 곧고 현재도 곧고 미래도 곧아야 된다는 것입니다.

과거가 구부러졌기 때문에 현재도 구부러지고 미래에도 구부러질 수 있습니다. 우리는 그러한 인연들을 혁신해 버리고 마음이 직행할 수 있는 곳으로 가야 합니다. 직행은 두 점을 중심삼고 연결되는 선입니다. 그 두점이 뭐냐? 원인과 결과입니다. 그 원인은 무엇으로 되어 있느냐? 하나의 마음으로 되어 있습니다. 그러면 그 결과는 무엇이냐? 하나의 마음일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하나의 마음 바탕을 통해 하나의 목적을 그려 가는 과정의 현상적인 표시가 하나의 직선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행복도 참의 자리에서 성립되는 것이요, 하나님의 섭리도 참의 자리에서 진행되는 것입니다. 그러니 이 참이 문제입니다. 이 참 가운데서는 참된 자기가 필요합니다. 그 참된 자기가 되지 못했기 때문에 교육을 통해서 수양이니 하는 것을 해 나오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오늘날의 제반 교육제도는 인간개조라는 문제를 중심삼고 짜여진 것이요, 그것을 중심삼고 지금까지 혁신운동을 해 나오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 참의 자리가 아직까지 결정되지 못했다는 것입니다.

그 참을 결정지을 수 있는 것이 무엇이냐? 그것은 우리 인간이 요구하는 피상적인 목적과는 상반되는 것입니다. 피상적인 것이 아닙니다. 절대적인 것인 동시에 중심적인 내용인 것입니다. 그것이 무엇이냐? 돈이냐? 아닙니다.

행복은 경제적인 것만 가지고서는 논위될 수 없습니다. 아무리 세계를 한 주먹에 통일한 영웅이 있다 하더라도 그가 행복을 노래할 수 있으려면, 권위를 갖추고 자기가 이루어 놓은 세계적인 무대를 바라볼 때 그의 마음에 넘쳐 나는 기쁨이 세계의 이상이 될 수 있어야 합니다. 그러지 않고는 행복을 노래할 수 없습니다. 그 기쁨이 자기 혼자만의 기쁨이 아니라 반드시 제일 가까운 사람들이 그 목적 성사를 자기 이상으로 좋아할 수 있는 입장에 서게 될 때에 비로소 행복이 벌어지는 것입니다.

지금까지의 역사과정을 두고 보면 역사는 투쟁사였습니다. 한 나라를 두고 볼 때에 위정자가 각료면 각료를 중심삼아 가지고 나라의 정책을 잘 수립하여 목적을 성사한 자리에 임하게 될 때, 전체가 그 정책이 성사된 것을 중심으로 위정자 이상 기뻐할 수 있는 기준이 되어 있느냐, 그 나라에 있어서 그 정책이 성공한 것을 찬양하고 기뻐할 수 있느냐 할 때, 그 나타나는 현상은 천태만상이라는 것입니다.

오늘날 양당 정치를 하는 소위 민주주의 국가를 볼 때 여당이 무엇을 제안했다 하면 야당은 무조건 반대합니다. 이런 것은 행복의 요건이 될 수 없습니다. 행복의 요건은 외적인 입장에서 추구할 것이 아닙니다. 그 사람이 이룬 행복을 자기 이상의 행복으로 생각할 수 있는 상대적 환경이 사방으로 갖추어지게 될 때, 그 행복은 영원히 보장될 수 있는 겁니다.

28-160
부모의 사랑이 필요한 이유
그러한 자리는 무엇으로 성립되는 것이냐? 외적인 것으로 되는 것이 아닙니다. 사회 제도에 의해서 되어지는 것도 아닙니다. 그것은 심정, 즉 사랑에 의해서 되어집니다. 그 사랑은 돌변적으로 나타나는 것이 아닙니다. 과거로부터 나온 것입니다. 그 사랑은 현재에 연결되어 미래에까지 연결되는 것입니다. 그러면 그 사랑의 절대적인 중심은 누구냐? 사람이 아닙니다. 사람은 절대적인 중심이 될 수 없는 겁니다. 사람들은 절대적인 선을 바라기 때문에 절대적인 중심에 놓여질 수 있는 사랑을 추구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우리는 이것을 하나님의 사랑이라고 합니다.

세상에서도 외적으로 아무리 못난 자식을 데리고 있더라도 부모는 그 자식을 사랑하는 것입니다. 좋고 나쁜 외적인 조건을 초월하는 것이 부모의 사랑입니다. 아무리 병신 부모라 하더라도 자식을 사랑하는 것은 절대 적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부모의 사랑은 필요한 거예요.

그러면 왜 부모의 사랑이 필요하냐? 그것은 부모가 과거의 인연을 대신할 수 있는 사랑의 터전이기 때문입니다. 그 터전 위에 서야만 자기가 사랑의 아들이 되고, 또한 사랑에 접붙일 수 있는 입장에 들어가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사람이 부모를 갖지 못한 것은 불행하다는 거예요. 다시 말하면 부모의 사랑으로 말미암아 과거의 인연과 승리의 자리를 우리가 부모로부터 인계받을 수 있다는 거예요. 부모의 사랑을 흠뻑 받았다고 하는 것은 과거의 것을 그냥 그대로 지닐 수 있다는 말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부모의 사랑을 받은 자식이 있다면, 그는 늙어 죽을 때까지 부모의 사랑과 운명을 같이하는 거예요. 부모로부터 상속받은 유물이 있다 할 때 그 유물은 늙어 죽도록 같이하는 것이 아니예요. 그런 외적인 것은 스러져 버리고 마는 것이요, 다 없어지고 말지만 부모로부터 인연된 사랑이라는 것은 영원한 것입니다. 외적인 입장이 비참하면 비참할수록 그 속으로 파고들어 더 깊어질 수 있고, 더 하나될 수 있고, 그 이상의 인연을 가질 수 있는 것이 무엇이냐? 사랑입니다.

과거의 승리를 결정할 수 있는 것은 무엇이냐? 그것은 세상의 권위도 아니요 물질도 아닙니다. 그것은 반드시 부모의 사랑입니다. 그러기에 부모의 사랑을 받은 사람은 무엇인지 모르게 현실에 있어서 흠뻑 피어날 수 있습니다. 현실에 있어서 만발할 수 있습니다. 자연스러운 동시에 축복의 손길이 있게 됩니다. 반면에 무엇인지 모르게 내적 결함, 즉 심정적 결함을 가지고 자랐고 위축된 환경에서 자란 사람은 사방으로부터 존경을 받을 수 있는 충신 열사가 될 수 없습니다.

그러면 오늘날 전반적인 세계의 정세를 볼 때, 전세계에 나타난 결함의 원인은 어디에 있느냐? 오늘날 이 문화세계를 창건한 이 사회 조직에 결함이 있어서만도 아니요, 이것을 움직이는 사람들에게 결함이 있어서만도 아닙니다. 그러면 무엇 때문이냐? 심정적인 결함 때문입니다. 심정적인 결함이 사회에 미쳐지는 영향으로 말미암아 결함이 형성된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자타가 공인하는 바입니다.

이런 관점에서 우리 자체들을 중심삼고 볼 때, 어떻게 부모들이 우리를 사랑하던 그 사랑과 일치될 수 있는 자녀가 되느냐 하는 것이 문제가 됨을 알 수 있습니다. 이러한 문제가 가정의 행 불행을 결정지을 수 있는 절대적인 요인이 됩니다. 부부가 행복하게 살았다 하더라도 그 자식이 부모의 심정과 일치되지 않을 때는 불행이 조성될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아들과 딸이 있다 할 때, 아들만 부모의 심정과 일치되어서는 행복할 수 없습니다. 딸도 일치되어야 됩니다. 이렇게 되어 있는 것입니다.

그러면 과거 현재 미래가 연결될 수 있는 최소한의 기준이 무엇이냐? 그것은 가정입니다. 가정은 세계의 축소체와 같습니다. 거기에서는 과거와 현재와 미래가 연결되는 것입니다. 그 말이 무슨 말이냐 하면, 가정에는 할아버지와 아버지와 아들이 공존한다는 말입니다. 아버지가 할아버지의 입장에 올라가게 되면 자기가 아버지의 입장에 올라가서 아들딸을 갖게 됩니다. 할아버지로부터 아버지, 자기의 3대가 하나되어야 됩니다. 즉 과거, 현재, 미래 이 세 인연이 하나되어야 됩니다. 그러한 가정은 세상이 아무리 요동한다 해도 요동하는 사회의 침범을 받지 않고 행복의 터전을 가질 수 있습니다.

28-162
한마음을 이룰 수 있는 곳
그러면 내 개체는 어떤 존재냐? 자기가 자기 자신을 창조해 가지고 태어나지 않았다는 것은 누구도 부정할 수 없습니다. 이것을 따지고 들어가게 되면 우리의 부모, 그 부모의 부모, 또 그 부모의 부모, 맨 나중에는 종지 부모까지 올라가게 됩니다. 즉, 인간조상 아담 해와에게까지 올라가게 됩니다. 아담 해와 자체를 두고 볼 때에 아담 해와 자기들이 나고 싶어서 난 것이라면 자기가 자기 자체를 창조한 것이 될는지 모릅니다. 그러나 그런 존재가 아니기 때문에 어디까지나 자기는 결과적인 존재입니다.

인간 개체를 두고 볼 때 마음과 몸은 상대적인 관계로 되어 있지만, 마음은 몸을 주관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과 우리 마음이 하나되어야 합니다. 이것이 문제입니다. 이것이 통일교회에서 말하는 3수의 일치입니다.

이런 관점에서 성경에 아브라함의 하나님, 이삭의 하나님, 야곱의 하나님이라고 한 것입니다. 우리 원리로 보게 되면 제1아담, 제2아담, 제3아담을 통해야만 완성됩니다. 과거, 현재, 미래를 통할 수 있는 그 기준에 서야 합니다. 과거의 승리를 결정하고, 현재의 승리를 결정하고, 미래의 승리의 터전을 완비해야 여기에서 하나의 새로운 세계가 출발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지금까지 흘러온 역사는 어디로 갈 것인가? 여러분이 밀고 가느냐 지나가느냐 하는 것이 문제가 되는 거예요. 또, 앞으로 올 세계는 어떻게 될 것이냐? 여러분이 넘어가느냐, 밀고 가느냐? 이것이 큰 문제가 되는 겁니다. 흘러가는 역사과정에서 이 세계를 따라가느냐, 즉 이 세계를 중심삼고 가느냐, 미래의 세계를 중심삼고 가느냐 하는 것이 문제가 됩니다. 이 세계를 중심삼고 가게 되면 소망이 없는 것입니다. 물질 만능주의니 현실주의니 하는 것으로는 안 됩니다. 그런 것으로는 세계를 수습할 수 없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잘못된 역사과정을 탈피해야 되겠습니다. 그것을 탈피하는 데 있어서는 인간 스스로 할 수 없습니다. 그럴 수 있는 동기가 있어야 합니다. 그럴 수 있는 동기는 누가 되어야 되느냐? 인간이 될 수 없습니다. 거기에는 본래 원인되시는 분, 즉 하나님이 동기가 되어야 합니다. 그러면 원인되시는 그분과 오늘날 우리 인류와의 일치점이 어디냐? 이것이 종교가 추구하는 목적이고 또한 양심이 소원하는 목적인 것입니다. 그 일치점이 어디냐? 미국과 소련이 일치되는 곳이냐? 아닙니다.

그러면 그 일치점이 어디냐? 자기 개체, 즉 개인으로 돌아가는 거예요. 개인으로 돌아가면 개인의 일치점이 어디냐? 심정 문제로 들어가는 거예요. 그 심정의 골짜기로 파고 들어가면 부모의 심정을 거쳐 가지고 조상 대대로 내려오면서 사랑하고 남기고 싶었던 기준이 있습니다. 그 사랑하고 남기고 싶었던 것이 무엇이냐? 자기의 생명체입니다. 자기의 생명이 연속되는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아들딸을 중심삼아 가지고 직계로 이어지는 것입니다. 직계를 분석해 보면 무엇으로 이어져 있느냐? 같은 피와 살로 이어져 있습니다. 같은 피와 살만 이어져서는 안 됩니다. 같은 정을 이어받아야 됩니다. 문제는 이것입니다.

그러면 같은 정을 이어받은 자리는 어디냐, 같은 피와 살을 이어받고 같은 정을 이어받은 자리는 어디냐 하는 것이 문제입니다. 이것을 상실한 것이 역사적인 한입니다. 이것을 찾아내는 것은 우주적인 과업입니다. 이 과업을 해결하기 위해서 해 나온 것이 하나님의 섭리요, 이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서 예수님이 신랑신부의 이념을 설파한 것이 아니겠느냐는 것입니다.

그러면 여러분 자체에 있어서 하나님과 인연될 수 있는 곳은 어디냐? 이 역사의 중심입니다. 여러분은 역사의 중심에 들어가 가지고 하나님과 인연되어야 될 것입니다. 그래서 앞으로 올 세계를 자기 자신이 몽땅 맞을 수 있는 , 나아가 세계가 자기를 향해서 오게 할 수 있는 입장에 서야 됩니다. 오는 세계와 가는 세계가 부딪치게 될 때, 오는 세계가 흘러가는 세계를 수습해야 됩니다. 그렇다면 문제는 어디에 있는 가? 심정적인 일치점입니다. 오늘날의 복잡다단한 이런 환경에서 일치점을 어디서 가질 것이냐? 한마음을 어디서 이룰 것이냐? 그것은 모두 심정에서입니다.

28-164
하나님의 사랑을 체휼한 사람
그런 의미에서 오늘날 통일교회가 심정철학을 제시하는 것입니다. 철학에는 별의별 분야가 있지만, 하나님의 심정은 그 전체적인 분야를 내포하고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타락한 인간들은 돌아가야 하는 데 어디로 돌아가야 하느냐 하면, 하나님의 심정으로 돌아가야 합니다. 현재의 입장이 부정확한 입장에 있기에 돌아갈래야 돌아갈 수 없는 것입니다. 그러나 갈 수 있는 단 하나의 길이 어디냐? 현재의 입장에서 볼 때 모색 가능한 길은 미래를 향해 가는 길보다도 과거로 돌아가는 길이 더 빠릅니다. 미래는 가면 갈수록 태산준령이 첩첩이 가로막고 있기 때문에 늦어집니다. 돌아가는 데는 어디로 돌아가느냐? 옛날의 부모의 품으로 돌아가야 하는 겁니다. 자기가 어렸을 때 아무것도 모르고 철없이 어머니 아버지 품에 안겨 사랑받던 그 시절, 그때에는 만사가 형통되는 것입니다.

그런 자리로 돌아가기 위해서는 우리 인류 조상의 심정을 거쳐 하나님의 심정을 찾아 들어가야 하는 것입니다. 그 하나님의 심정은 어떤 것이냐? 참된 심정입니다. 그것은 과거를 이어받을 수 있고, 현재를 이어받을 수 있으며, 미래를 상속해 줄 수 있는 것입니다. 그 자리가 어떤 자리냐 할 때, 거기는 주체적인 사랑이 있는 곳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위대한 분들은 사랑을 가르쳤습니다. 위대한 분들은 하나님의 사랑을 중심삼았습니다. 하나님의 사랑을 중심삼아 가지고 살지 못한 사람은 역사적인 성현이 되지 못했습니다. 이렇게 되는 것입니다. 인간사회를 중심삼은 사람들은 그 시대에 있어서 위인전에 기록될 수 있을 정도의 위인은 될는지 모르지만 성현은 되지 못했습니다. 성현은 반드시 천지인(天地人)을 중심삼아 가지고 사랑을 논위할 수 있는 사람만이 되는 거예요. 이만하면 여러분은 ‘아! 그는 그래서 성현의 자리에 있구나’ 하는 것을 알 거예요.

그러면 하나님이 인간을 어떻게 사랑했느냐? 하나님을 중심삼고 그분의 사랑을 받았다고 주장하는 사람이 있느냐? 하나님의 진짜 사랑을 받았다고 하는 사람이 있다면, 그 사람은 하나님의 아들임에 틀림없는 거예요. 그렇게 되면 역사를 부정하면 부정했지 그 사실만은 부정할 수 없다는 거예요. 현실 이상의 사실로써 주장할 수 있는 내용을 가졌느냐? 하늘나라에 갈 수 있고 이상세계에 갈 수 있는 이념을 가진 종교는 어떤 종교냐? 그 사랑의 내용을 중심삼고 현실을 심판할 수 있고, 현실을 밀고 나갈 수 있는 주체성을 지녔느냐? 그 사랑, 즉 하나님의 사랑을 중심삼은 체휼적인 내용을 가졌느냐? 이것을 갖지 않고는 현실화된 종교라도 영원히 이 세상에 남아지지 않습니다. 이 현실을 능가하고 이 현실을 소화시킬 수 있는 사랑을 체휼하지 않으면 하나님의 사랑을 받을 수 없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볼 때, 우리 통일교회가 보다 진보적인 입장에 있는 것입니다. 통일교회에 처음에 들어올 때 여러분은 마음이 어떠했습니까? 새로운 말씀을 듣게 될 때, 자기도 모르는 힘에 싸여 가지고 생활환경을 잊어버리고 생활역경을 박차고 나설 수 있는 새로운 신념이 과거의 어느 때보다도, 현재의 어느 때보다도, 어느 일보다도, 내일의 어떠한 소망보다도 강했습니까? 그런 것을 체휼했습니까? 그런 것을 체휼한 실체가 되어야 됩니다. 종교인은 종교의 목적을 이룰 수 있어야 됩니다. 종교의 목적을 이룰 수 있는 사람은 하나님의 사랑을 체휼한 사람입니다.

여러분이 통일교회에 가고 싶다는 마음이 원리 말씀을 듣고 한 3년 동안은 계속됩니다. 가고 싶고, 보고 싶고, 살고 싶어지는 것입니다. 무엇 때문에 가고 싶어지느냐? 밥을 먹어서요? 아닙니다. 무엇을 보고 싶으냐? 누구 얼굴이 보고 싶어서입니까? 무엇 때문에 살고 싶습니까? 이것은 전부다 정서적인 문제입니다. 가고 싶고, 보고 싶고, 살고 싶은 내용이 있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언제나 그럴 수 있는 입장에 설 수 있다는 것은 영원히 뻗어 나갈 수 있는 내용이 있기 때문입니다. 통일교회가 지금까지 걸어온 과정에서는 그런 내용이 있었던 것입니다.

그러면 여러분이 하나님의 심정을 중심삼고 언제 하나님을 사랑했느냐? 또, 하나님은 누구를 사랑하셨겠느냐? 역사과정에 있어서 누구를 사랑하셨겠느냐? 하나님의 사랑은 영원한 것이기 때문에 그 사랑받은 것은 영원히 남아져야 됩니다. 우리 마음이 그리워할 수 있는, 즉 다음 세계에 있어서 흠모의 대상이 되고 오래 남아질 수 있는 존재가 되어야 합니다. 그 남아질 수 있는 것이 무엇이냐? 물질적, 외적 문제를 중심삼고 주장해 나온 권력이 아닙니다. 오랜 역사과정에 수많은 권력자들이 있었지만 남아지지 못했습니다.

28-166
종교가 사랑을 찾는 이유
그러면 남아진 것은 무엇이냐? 역사는 변천하고 발전해 나왔지만 종교는 그렇지 못했습니다. 기독교에서는 ‘초대교회로 돌아가자, 예수시대로 돌아가자’고 합니다. 그리고 다른 종교에서도 그 종교를 세운 도주면 도주, 창시자면 창시자의 의도와는 다르게 가고 있다. 그러니 종교의 제도를 믿지 말고 종교의 주창자를 믿자고 합니다. 이렇게 오랜 동안 역사의 모든 모순된 환경을 타개해 오면서 세계 인류의 마음의 방향이 되고, 흠모의 대상으로서 지금까지 남아져 내려온 것이 유심사관을 중심삼은 기독교입니다.

예수님을 하나님이 사랑했기 때문에 기독교가 지금까지 남아진 것입니다. 그러면 어떻게 사랑했느냐? 이런 문제를 가르쳐 주는 것이 통일교회의 원리입니다. 이렇게 볼 때, 하나님과 여러분이 일치되는 데 있어서는 사랑을 중심삼아야 하는 것입니다. 부모와 자식에게 있어서 부자지애를 중심삼고 부모와 자식이 하나가 됨으로써 합동의 목적을 이룰 수 있는 것입니다. 동포애를 중심삼고 보더라도 서로가 동포를 사랑하는 마음이 있어야 하나가 된다는 겁니다.

자유당 때 이박사는 ‘뭉치면 살고 흩어지면 죽는 다’고 말했습니다. 뭉치면 무엇으로 뭉치느냐? 동포애입니다. 동포애는 무엇이 모여서 되느냐? 가정애입니다. 그 가정애는 무엇에서 연유하느냐? 자기애입니다. 자기 개체의 살이 되고 피가 되고 뼈가 된다는 이런 실감을 느낄 수 있는 입장에서 사랑을 해야 하는 것입니다. 먼 동네 사람과 자기 세포가 연결될 수 있고 자기 촉감이 인연될 수 있는 동포애, 그 사랑은 부모의 사랑, 부자의 사랑이 확대된 것입니다. 그러한 영역이 횡적으로 넓혀지고, 그 동기로 말미암아 엮어질 수 있는 그러한 동포애를 주장하는 민족은 발전합니다.

그러면 부모애의 원천은 어디에 있느냐? 하나님의 사랑 안에 있습니다. 하나님의 사랑이 밑바탕이 된 부모가 되고 사회가 될 때, 정상적인 진로를 거쳐 가지고 원인과 목적이 이탈하지 않은 이상세계로 갈 것이 아니겠느냐? 이것은 정당한 이치입니다. 여러분들을 가만히 보면 누가 자기를 사랑해 주었으면 합니다. 대개 사랑을 받으려고만 합니다. 남자나 여자나 받으려고만 합니다. 문제는 여기에 있습니다. 여기에서 사고가 생기는 거예요. 사랑을 받으려고만 하는 바람에 세계는 망해 가는 거예요.

타락의 기원을 보게 될 때 무엇을 하려다 타락했느냐? 불륜한 사랑을 하려다가 타락한 것입니다. 우리 인간은 사랑을 받으려고 야단인데 타락의 기원을 보게 되면 불륜한 사랑을 하려다가 타락했습니다. 반대지요? 아담 해와가 하나님을 모시고 사랑을 했으면 타락하지 않았을 텐데 사랑을 잘못 받고 잘못 했기 때문에 타파한 것입니다. 그렇게 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사랑을 잘 받겠다고 하는 것은 인간의 본연의 마음입니다. 결국 결과가 달라진 거예요.

타락은 사랑하겠다고 하다가 했는데 태어난 우리는 사랑을 받겠다고 합니다. 결과가 이중이 된 것입니다. 그러면 우리 인간이 사랑받겠다고만 하는데, 인간 조상인 아담 해와가 사랑하겠다고 하다가 사랑을 잘못 받고 타락한 것을 볼 때, 이것은 파괴적인 사랑입니다. 이 사랑은 하면 할수록 파탄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 인간 세상에 있는 사람은 누구든지 사랑을 받겠다고만 합니다. 그렇게 요구하는 것은 나쁜 것입니다. 본연의 마음은 그런 것이 아닙니다.

인간이 언제 하나님의 사랑을 받아 보았습니까? 부모의 사랑을 못 받아 본 사람은 부모의 사랑을 한번 받아 보고 싶어합니다. 그것이 생애에 있어서 필연적인 요구가 아니겠어요? 그 사람이 천년 살았다면 천년 동안 그 일을 잃어버리지 않고 살았을 것이요, 만년 살았다면 만년 동안 그 마음을 갖고 살았을 것입니다. 그와 마찬가지로 아담 해와가 사랑을 못 받은 본심이 연결되었기 때문에 사랑을 받고 싶어하는 것입니다. 타락은 뭐냐? 사랑을 잘못 받았다는 것입니다.

잘 받았다면 인간이 왜 받고 싶어하겠습니까? 잘못 받은 인간이기 때문에 잘 받을 수 있는 곳으로 돌아가야 되겠다고 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정상적인 입장이라는 것입니다.

28-168
부자 관계의 사랑
그러므로 자기가 사랑을 주고 받고 하는 것이 옳으냐 그르냐 하는 문제를 재분석하지 않으면 안 됩니다. 여기에는 새로운 인륜도덕이 필요합니다. 자기가 사랑을 하고 그 사랑을 받는 것이 정상적이냐? 마음의 본향을 중심삼고 볼 때, 이것은 그 안에 있는 것이냐, 이탈된 것이냐? 이탈된 것이기 때문에 종교는 참된 사랑을 중심삼고 가정의 제도도, 사회의 제도도, 개인의 인격도 무시하는 겁니다. 전반적인 모든 관습을 왜 무시하느냐? 그것들에는 참된 사랑의 기원이 성립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그것들은 무시당해야 되는 겁니다.

그러면 무시할 수 있는 그 주체는 무엇이냐? 사랑만이 무시할 수 있는 자리에 있는 겁니다. 그 사랑은 무엇이냐? 하나님의 사랑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의 사랑이 문제입니다. 그 하나님의 사랑의 발굴지는 어디냐? 형제지간에 서로 사랑하는 거기에서 하나님의 사랑이 나오느냐? 아닙니다. 남녀가 사랑하는 그 사랑을 중심삼아 가지고 하나님의 사랑이 세워지는 것도 아닙니다. 그 하나님의 사랑은 부자 관계의 사랑에 의해서 세워집니다. 아까도 말했지만 피와 살이 연결되어야 된다는 것입니다. 전통으로 남기고 영원히 남기기 위해서는 피와 살이 연결되어야 됩니다. 종적 관계가 성립되어야 된다는 거예요.

그 종적 관계는 부모의 사랑을 받아야 하는 것이기 때문에 부자의 사랑 이외에는 없다고 보는 것입니다. 이 사랑에는 거리가 없습니다. 이 종적 관계에 있어서는 하나의 중심이 있어야 됩니다. 중심은 하나밖에 없습니다. 중심은 제일의 자리에 있는 것입니다. 중심이 둘이면 세상에서는 싸움이 벌어집니다.

이런 관점에서 보면 변증법이라는 것은 근본적으로 파탄되는 것입니다. 중심은 하나밖에 없습니다. 그 외의 것은 전부 하나의 중심을 보조하기 위한 것에 불과합니다. 그것은 반드시 흡수하든가 흡수되든가 해야 합니다. 그런 두 가지 경우밖에 없습니다. 여기에서 존재의 필연적인 환경이 성립되는 것입니다. 공산당은 투쟁함으로 말미암아 발전한다고 합니다. 전쟁이 있어야 발전한다는 논리입니다.

피와 살을 따라가는 중심은 종적입니다. 자기로부터 아버지, 할아버지 이렇게 올라가는 것은 종적입니다. 이런 식으로 쭉 내려오면 결국은 수천의 사람들이 하나인 것입니다. 부모가 자식을 사랑하는 마음, 여기에 발전이 있고 변천이 있을 수 있습니까? 이것을 혁명할 수 있습니까? 혁명할 수 있다고 봅니까? 여기에는 발전이나 변천이나 혁명이 있을 수 없습니다. 그것은 동물세계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생명이 직계로 연결되는 자리는 그 자리 뿐입니다. 어머니가 자식에게 자신의 피와 살을 나누어 주면서도 좋아하는 자리도 그 자리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 자리가 우주의 중심인 것입니다. 안 그렇겠어요?

우주는 실체세계요, 절대자의 상대적 세계라는 겁니다. 물질세계의 중심이 무엇이겠어요? 부모의 사랑입니다. 그러면 부모의 사랑은 어디서부터 시작되었는가? 하나님으로부터입니다. 이러한 하나님의 사랑이 표면화되고, 그 내정적 실상이 부자의 관계에 그냥 그대로 표면화되는 가정이 있다면 거기에 하나님이 임재하시지 않을 수 없다는 것입니다. 이렇게 되는 것입니다. 다른 데에 계실 수 없다는 것입니다. 하나님도 사랑을 해주셔야지 별수 있습니까? 하나님이 인류의 아버지가 되시기 위해서는 그래야 되는 것입니다. 동기가 되기 위해서는 목적과 일치되어야 합니다.

하나님을 중심삼고 하나되게 될 때 천태만상으로 돌게 되는 겁니다. 그러므로 형제간의 사랑을 하는 것도 부모가 자식을 사랑하는 것을 본받아서 형은 동생을 사랑해야 되는 거예요. 그렇게 사랑하며 일원화된 가정은 가정애가 꽃필 수 있습니다. 이것이 또 사회애가 될 수 있습니다. 이것이 더 나아가 민족을 사랑하는 민족애가 됩니다. 이와 같이 사랑하면 세계애가 되는 거예요. 그런데 오늘날 이것이 막연하다는 것입니다.

성경에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저를 믿는 자마다 멸망치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요 3:16)”고 했습니다. 여기서 결론이 뭐냐? 독생자를 주셨으니 그와 하나되라는 거예요. 이런 관점에서 종교를 중심삼고 볼 때, 기독교는 어디에 일치되어야 하느냐? 사도와 일치되어야 한다. 혹은 마리아와 일치되어야 한다고 하는 말은 다 허풍선이에요. 베드로고 누구고 다 믿을 수 없는 것이 예요. 마리아도 믿을 수 없습니다. 어디에 일치되어야 된다구요? 기독교를 중심삼고 보면 어디에 일치되어야 된다구요? 중심에 일치되어야 됩니다.

28-170
신앙의 중심
오늘날 통일교회를 따르는 사람 가운데도 통일교회 간부를 따르는 사람이 있을 거예요. 통일교회 교인들은 어디에 일치되어야 하느냐? 중심이 누군지 모르지만 중심에 일치되어야 됩니다. 여자들이건 남자들이건 모두 이 중심에 일치되어야 됩니다. 선생님이 중심이라면 선생님과 일치되어야 합니다. 그러면 선생님은 독재자가 아니냐고 생각할지 모릅니다. 그러나 독재자라 해도 할 수 없습니다. 여러분이 통일교회에 와서 믿는다면 누구를 믿겠어요? 선생님을 믿어야지 별수없는 거예요. 선생님이 때로는 욕도 잘하지만 별 수 없습니다. 좋아하면 누구를 좋아하느냐? 나폴레옹 같은 사람이 아닙니다. 선생님밖에 없다는 것입니다.

교회에 가고 싶은 것은 무엇 때문에 가고 싶으냐? 보고 싶은 것은 무엇 때문에 보고 싶으냐? 그것은 부모의 사랑이 있기 때문입니다. 부모의 사랑을 완전히 점령하면 세계를 완전히 점령한다는 겁니다. 그러면 자식에게 부모를 취하겠느냐, 세계를 취하겠느냐고 하면 부모를 취하는 것입니다. 부모에게 세계와 자기 아들딸 중에 어느 쪽을 취하겠느냐고 할 때, 부모는 세계를 버리고 자기 아들딸을 취합니다. 왜 그렇게 되느냐? 그것은 중심적인 흐름이 그 가운데 있기 때문입니다.

대한민국이면 대한민국에서는 위정자를 따르라, 주권자를 따르라고 하고 있습니다. 또, 세계면 세계에서는 공산주의와 민주주의가 서로 왔다갔다하고 있습니다. 왔다갔다하다가는 발전도 못하고 서로 기진맥진해지는 것입니다. 씨름판에 나가 한판 씨름해 가지고 결정해야 할 텐데도 불구하고 돌아가기만 하면 서로 맥이 빠지는 거예요. 왔다 갔다 밀치고 밀리고 하면 서로 맥이 빠지는 것입니다. 끝장이 나야 됩니다. 기진맥진하게 되면 다른 마음이 들지요? 다른 마음이 들면 망할 때가 오는 것입니다. 민주세계도 공산세계도 다른 마음을 먹게 되면, 두 패로 갈라지게 되면 망하는 겁니다. 망할 징조라는 거예요. 이것은 불가피한 일입니다. 그러면 이 세계의 인류는 무엇을 해야 하느냐? 어디 가서 일치될 것이냐? 이것이 문제입니다.

통일교인들은 ’70년대가 되면 좀 나아질 줄 알았더니 이건 더 피곤하게 되었어. 언제는 축복해 주시며 아들딸 낳고 잘살라고 하더니 아들딸 낳고 자리잡고 살려고 하는 데, 이제는 자식들 다 떼놓고 여편네들 또 전도나가라구 야단이야. 무슨 불한당 괴수처럼……’ 이렇게 말할 것입니다. 그런데 왜 그렇게 해야 하느냐? 우리 원리를 사회화시켜야 하기 때문입니다.

여러분을 사랑해주던 부모의 그 사랑의 마음을 가지고 여러분이 삼천 만을 사랑하라는 거예요. 그렇게 해야 나라를 주관할 수 있는 소망의 터가 넓어지는 거예요. 그것이 원칙적인 지도방법이 아니겠어요? 여러분은 삼천만의 한 일원이 아니라 삼천만의 어버이가 되라는 거예요. 삼천만의 어머니 아버지가 될 수 있는 그런 아들딸이 되라는 겁니다.

자기의 위치만 생각하는 그런 입장이 되어서는 안 됩니다. 남편은 아내에게 자기만 사랑해 달라고 하면 그 부부는 10년도 못 가서 싸움이 벌어지는 거예요. 또, 아내는 남편에게 자기만 사랑해 달라고 하면 30년은커녕 3년도 못 가서 갈라지는 거예요. 자기를 돌보지 않고 상대를 위해서 전체의 생명을 투입시키는 길이 사랑의 길이 아니겠어요? 그렇지요? 부모는 자기 자식만을 위해서 전체의 생명을 투입하는 것입니다. 자기를 위해서 자기의 전체를 투입하는 것이 아닙니다. 피와 살을, 뼈와 살을 전부 투입하는 것이 사랑입니다. 거기에 행복이 있고, 거기에 희망이 있고, 거기에 자기의 소망이 깃드는 거예요 그것이 사랑의 법칙이기 때문에 통일교회에서는 ‘부모의 사랑을 가지고 종의 몸을 쓰고 눈물과 피와 땀을 흘리라’는 것입니다. 전체를 다 투입하라는 겁니다. 거기에는 이유가 있을 수 없습니다. 조건을 초월하는 것입니다.

28-172
부모와 동반할 수 있는 자리
삼천만이 수난길에 있으면 그 수난의 삼천만 민족을 보고 부모가 자식이 수난을 당하는 것을 보고 애절히 여기는 이상의 애절한 마음을 가지고 통곡하는 사람들이 있다 할진대, 삼천만의 이 민족은 그들로 말미암아 수습되는 것입니다. 세계의 30억의 인류를 중심삼고 그러한 마음으로 불철주야 노력하는 무리가 있다면 40년만 넘어가게 되면 세계는 그들 앞에 수습되는 것입니다. 역사가 그렇게 되어 있습니다. 그것은 틀림없는 철칙입니다. 이러한 관점에서 선생님이 관망한 결과가 틀림없는 것을 알았기 때문에 여러분을 무자비하게 내보내는 것입니다. 사랑은 무자비한 길을 통해 가는 것입니다. 그렇지 않아요? 생사의 경각(頃刻)을 초윌해서 가는 겁니다.

죽음과 연속시켜 가지고, 죽음의 피와 살을 여기에 퍼부어 가지고 그 목적의 세계로 나가려는 단 하나의 종교가 있어야 됩니다. 그 종교가 순교의 길을 걸어 나온 기독교입니다. 기독교는 순교의 피와 살로 이어 나왔기 때문에 하나님의 사랑을 논위할 때 어떠한 종교보다도 가까운 거리에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명실공히 세계적인 종교가 된 것입니다.

그러면 여러분이 얼마나 이 민족을 자기 피나 살과 같이, 자기 몸과 같이 여기면서 이 민족을 위해 목을 놓아 통곡했나요? 아무리 불의한 자식이라도 그가 법망에 걸렸다든가, 혹은 그 나라 법의 제재를 받는 운명에 처해졌을 때 그 부모가 ‘잘됐다 이 자식아! 그래도 싸다’고 하는 부모가 있습니까? ‘네가 그렇게 된 것은 나하고 하나가 되지 못했기 때문이다. 이 자식아! 왜 내 말을 안 들었느냐’ 하며 꾸짖기는 해도 자식에게 사랑이 흘러가는 것이 막힌 부모는 없는 것입니다. 그렇죠?

오늘날 우리들은 그런 관점에서 일심의 세계를 중심삼고 한마음이 되어야 합니다. 한마음을 그리기 전에는 한마음의 결과가 통일되지 않는 거예요. 한마음의 목적을 이루지 않고는 통일을 이룰 수 없습니다. 통일을 이루지 않고는 주관 못 하는 거예요. 즉, 거느리고 가지 못하는 거예요. 거느리는 것은 중심을 결정해서 가는 것입니다. 여러분이 이 기준을 통과하기 위해서는 수단이나 방법 가지고는 안 됩니다. 애기가 배고플 때는 어머니 젖을 먹여야 되지 물을 먹이는 방법 가지고는 안 되는 것입니다. 피와 살이 연결되어야만 사랑을 가지게 되고, 심정이 연결된다는 것을 여러분은 알아야 되겠습니다.

오늘날 이 세계를 바라볼 때 세계가 아무리 넓다 하더라도 돌아가야 됩니다. 부모의 사랑도, 부부의 사랑도 완전하지 못하기 때문에 어디로 돌아가야 되느냐? 하나님에게로 돌아가야 된다는 것입니다. 그러기에 하나님의 심정이라는 말이 필연적으로 출현했던 것입니다. 이 심정이 없어서는 안 됩니다. 자기 뼈와 살이 하나님의 사랑에 들어가고 우러나와야 됩니다.

이런 관점에서 볼 때, 겟세마네 동산에서의 예수님의 기도는 심각했던 것입니다. ‘아바 아버지여! 할 수만 있다면……내 뜻대로 마시옵고 아버지의 뜻대로 하시옵소서’ 라고 기도했습니다. 그것은 무조건이었습니다. 하나님은 사랑의 주체이기 때문에 하나님으로부터 사랑을 받고자 하는 예수님은 무조건 순응했던 것입니다. 하나님이 요구하는 것이 있다면 무엇이든지 다 드리겠다고 했던 것입니다. 그렇게 기도하신 것은 하나님 앞에 몽땅 드리면 몽땅 받게 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내 뜻대로 하는 것보다 아버지의 뜻대로 함으로 말미암아 승리의 자리에 설 수 있기 때문에 예수님은 그렇게 기도를 하신 것입니다. 하나님의 모든 것을 갖고 다시 태어날 수 있는 가치를 바라보면서 예수님은 돌아가셨기 때문에 죽음의 지옥세계를 탈피해 가지고 부활권을 가진 것입니다.

부모가 가야 할 사랑의 길은 어떤 길이냐? 열 형제가 있다면 그 열 형제 가운데서 제일 불행한 자식과 동반할 수 있는 생활입니다. 그 자리가 어떤 자리냐? 불구자의 동생이 있으면 그 동생과 더불어 살라는 것입니다. 알겠어요? 그런 사람은 형제들 중에서 상속자가 되는 거예요. 부모의 사랑과 같이 동반할 수 있는 자리는 어떤 자리냐? 잘먹고 잘사는 자리가 아닙니다. 부모 앞에 열 형제가 있다 할 때, 그 열 형제 가운데 제일 못난 사람과 더불어 있게 되면 그는 부모의 사랑 세계의 계대를 잇는 자가 될 것입니다.

그러면 하나님의 사랑이 대한민국을 찾아올 때 하나님의 사랑과 가까이 서는 자리가 어디냐? 비참한 자리에서도 나라를 사랑하고, 불행한 자리에서도 나라를 염려하며, 불행한 사람들과 친구가 되고, 그들을 붙안고 자기의 생명을 바치는 자리가 아니겠느냐? 거기가 부모가 같이하는 자리이기 때문에 우리는 도시를 떠나 농촌의 농민을 중심삼아 가지고 활동하는 것입니다. 잘사는 사람과 사귀는 것보다 어렵고 가난한 사람과 사귀는 것을 기뻐할 수 있는 마음을 가져야 합니다. 하나님이 아흔 아홉 마리의 양보다도 잃어버린 한 마리의 양을 더 찾고 싶어하시는 것과 같아야 합니다. 그러므로 여러분이 전도할 때 ‘저 사람은 내게 필요한 사람이니까 전도해야겠다’고 하지 말라는 거예요. 그것은 조건적인 사랑입니다. 여러분은 그러한 관을 가져서는 안 됩니다. 부모는 불행한 자식이기에 자기에게는 필요하지 않은 자식이지만 그 불행한 자식에게 더 많은 사랑을 주고 싶은 거예요.

그러면 일심의 인연을 거쳐서 부모의 사랑과 동반할 수 있는 그 심정의 자리는 어디냐? 불행한 자식에게 마음을 두고 염려하는 것이 부모의 사랑의 마음인 것과 마찬가지로 하나님도 부모의 마음의 종지조상이기 때문에, 근본이기 때문에 그 마음이 쉬실 수 있는 곳, 그 나라를 향하여 찾아 가야 되겠습니다. 더 나아가 그 마음이 계실 수 있는 세계를 찾아가야 되겠습니다.

그러한 곳을 흠모하고 찾아가자고 하는 것이 통일교회의 주장인 것입니다. 일년, 혹은 십년, 백년, 천년 계속 그것을 주장할 때 우리들이 역사과정에서 다 쓰러질지라도, 지금 죽더라도 한이 없는 거예요. 왜냐? 여러분은 천년 후에라도 그 세계를 차지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오늘날의 시간 관념으로 볼 때, 천년의 수가 이 세계에서는 먼 거리로 보이지만 영계는 시간을 초월하는 곳이기 때문에 먼 거리로 보이지 않습니다. 천년이라는 시간이 하늘세계에서는 문제가 되지 않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바울은 “생각컨대 현재의 고난은 장차 우리에게 나타날 영광과 족히 비교할 수 없도다(롬 8:18)”라고 했던 것입니다.

28-175
우리가 제시하는 내용
일심은 어디서 얻어야 되느냐? 하나님의 마음에서 얻어야 됩니다. 그러면 자신이 하늘편에 있느냐 없느냐? 하나님의 사랑의 마음 가운데 있느냐 없느냐 하는 것이 무엇으로 증거되느냐? 이것이 문제입니다. 하나님의 사랑과 가까운 자리가 어디냐? 막연하다는 거예요. 그러면 그것은 무엇으로 알 수 있느냐? 불행한 자식을 더 염려하는 것이 부모의 사랑입니다. 그러한 부모의 염려를 알고 부모 대신 동생들을 염려할 수 있는 맏아들이라면 그는 아벨이라 할 수 있습니다. 기독교가 이러한 것을 가졌기 때문에 장자의 기업을 이어나온 것입니다. 사랑의 세계에 있어서는 장자의 주권을 갖고야 주인이 될 수 있고 새로운 세계를 창건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면 앞으로 우리는 동서남북 어디로 가야 되느냐? 하나님이 보시기에 제일 염려하는 곳이 어디냐? 가야 하는 데 못 가는 곳입니다. 거기에는 담벽이 있습니다. 여러분이 남한과 북한 중에서 어디를 더 사랑해야 되느냐 하면 북한을 더 사랑해야 됩니다. 북한을 더 사랑하려면 그 사랑의 훈련을 남한에 있는 사람들을 통해 해야 됩니다. 그렇게 하면 틀림없이 북한을 지배합니다. 오늘날 기독교가 왜 망해 가느냐? 자기들 끼리끼리 사랑하다가는 망하게 되어 있습니다. 기독교의 밖에 있는 사람을 기독교내에 있는 사람이상으로 사랑하겠다는 운동을 해야만 절대 망하지 않을 것입니다. 통일교회도 망하지 않으려면 어떻게 해야 되느냐? 통일교인들 끼리끼리 사랑하는 힘이 국민을 사랑하는 힘보다 강하게 될 때, 통일교회는 국가에 필요한 단체가 못 되는 겁니다. 일시적으로 필요한 단체는 될는지 모르지만 영원히 필요한 단체는 못 된다는 거예요. 망해 버린다는 겁니다. 점점 시일이 지남에 따라 없어져 버린다는 거예요.

그렇기 때문에 통일교회가 망하지 않으려면 우리끼리 사랑해서는 안 됩니다. 저 원수 세계를 넘어가 불구자와 같은, 죽음의 교차로에 있는 불행한 사람들을 우리 교인보다 더 사랑하기 위해 몸부림치고 모든 정력을 거기에 투입하는 운동을 하게 될 때 통일교회는 망하지 않습니다. 그런 사람이 한 사람도 없다면 망하지만, 그런 사람이 두 사람만 있더라도 망하지 않습니다. 이것이 기필코 민족을 다시 찾을 수 있는 길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선생님은 다년간 그렇게 여러분을 지도해 나온 것입니다. 물론 여기에 상처받은 사람도 있을 것이고, 기진맥진한 사람도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것이 문제가 아닙니다. 그것을 헤치고 넘어서 가지고 민족을 더 품고 사랑할 수 있는 마음의 방향을 지니고 있는 사람이 있다면, 그를 통해서 역사는 발전될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일심은 부모의 마음을 더듬어 일심해야 합니다.

불행한 여건을 넘어 가지고 하나의 형태를 갖추게 될 때 통일이 되는 것입니다. 거기에서 비로소 자기가 주인이 되는 거예요. 그렇지 않아요? 여러분도 그렇게 할 수 있어야 합니다. 그래야 통일이 된다는 것을 여러분은 확실히 알아야 됩니다.

오늘날 통일교회가 이러한 부모의 심정을 중심삼아 나가는 데 있어서 역사 이래 섭리적으로 이루어야 할 소원이 이러한 데에서 나온다는 사실을 우리들은 알아야 합니다. 그러면 통일시킬 수 있는 비결은 무엇이겠는가? 부모의 심정을 따라서 열 형제중 불행한 자식을 더 사랑하는 것과 같은 입장에 서야 됩니다.

미국과 같은 나라가 이러한 입장에 서야 할 텐데 그러지 못했기 때문에 아시아에서 고아와 같은 입장, 보따리를 싸야 할 입장에 있습니다. 왜? 자신의 이익을 위해서 갔기 때문입니다. 빼앗기 위해서 갔다가는 망하는 겁니다. 이런 관점에서 오늘날 우리가 제시하는 내용은 심정통일, 생활통일, 행동통일입니다. 알겠지요?

28-177
이 나라, 이 민족 앞에 남아지려면
일심은 어디에서 시작됩니까? 「마음에서 시작됩니다」 일심은 마음에서 시작되는 거예요. 여기에는 피와 살이 연결되는 것입니다. 부모가 슬퍼하면 자식이 슬퍼하는 거예요. 그렇지요? 부모가 슬퍼하는데 부모가 잘못했으니 그렇지 하는 자식은 자식이라고 할 수 없는 거예요. 또, 자식이 잘못하여 벌받을 때, ‘그 놈의 자식 그래도 싸다’ 하는 부모는 부모의 자격이 없습니다. 사랑의 마음이 앞서 가지고 사랑을 주려고 하지 않고 원한의 마음을 가지고 ‘싸지’ 하는 것은 부모의 마음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지금까지 주려고 했습니다. 하나님은 사랑을 주려고 하시는 데 사람들은 ‘내 그 사랑 안 받고 지옥 가지’라고 합니다. 그런 사람들은 하나님 앞에 얼굴을 들 수 없다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여러분의 뼈와 살, 피와 살이 연결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떡과 포도주를 ‘내 살과 내 피’라고 하신 것은 그런 입장에서 얘기한 것입니다. 피와 살, 뼈와 살이 연결되어야 됩니다. 그래서 통일의 길은 부모의 마음으로 가는 길입니다. 불행한 입장에 있는 형제가 있으면 이것을 염려할 수 있는 사람은 반드시 오래지 않아 중심적인 자격자가 될 것입니다. 이와 같이 통일교회가 이 나라, 이 민족 앞에 남아질 수 있는 교단이 되기 위해서는 통일교회 식구끼리만 사랑해서는 안 되겠습니다. 무슨 말인지 알겠지요? 「예」

지금 여러분은 자기 형제를 교회내에서는 사랑하지 못하지만 이것을 넘어서 자기 형제 사랑하는 이상으로 이 민족을 사랑해야 됩니다. 이것이 이 나라 이 민족을 사랑하기 위한 훈련과 같은 것입니다. 보호하기 위한 훈련이요, 사랑하기 위한 훈련입니다. 우리는 형제를 사랑하는 이상 이 민족을 사랑할 수 있는 길을 모색해야 되겠습니다. 이렇게 되면 바야흐로 민족의 중심이 되는 거예요.

지금까지 통일교회처럼 배척받고 밟히던 단체 중에 망하지 않은 단체가 없습니다. 그래도 통일교회가 남아진 것은 왜 남아졌느냐? 이 작전을 했기 때문에 남아진 것입니다. 부모의 사랑을 실천한 거예요. 그래서 하늘은 그러한 길을 따라오지 않을 수 없었던 거예요. 얼마나 순결한 것이며, 얼마나 열과 성을 가지고 한 것이냐에 따라 하늘이 함께하는 거예요. 하늘과의 일치점을 가지게 될 때, 자연히 세계의 중심이 되고 그로 인해 이땅에 하늘의 주권이 이룩되는 것입니다.

이런 입장에서 70년대의 표어인 ‘승리적 통일전선’을 중심삼고 무엇을 할 것인가? 이것은 무기를 갖고 하는 것도 아니요, 주먹을 갖고 하는 것도 아니요, 사람이 하는 것도 아닙니다. 마음의 바탕이 불탈 수 있는 심정적 주체를 갖고 이 민족을 어떻게 대해 나가느냐 하는 것이 문제입니다. 이 나라의 위정자보다도, 이 나라의 어떤 종교 지도자보다도 그러한 마음을 갖고 생활에 접어들어 환경을 파헤치며 들어갈 수 있는 무리가 통일교회에 있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통일교회를 위주로 한 대한민국의 수습은 시간문제입니다.

여기에서 일심통일의 이념으로 말미암아 부모의 인연 가운데 태어난 형제를 부모의 사랑 가운데 품길 수 있는 환경으로 일원화시켜 가지고 국민 앞에 베풀게 될 때 삼천만은 우리에게 품겨 올 것입니다. 이런 관점에서 여러분이 일심통일을 잊지 말고 다시 진격해 나갈 수 있어야 되겠습니다. 여러분, 할 수 있겠지요? 「예」

28-178
기 도
아버님, 지난날의 역사과정에 있어서 아버님은 보잘것없는 저희들을 사랑해 오셨습니다. 아버님은 언제나 새로운 마음을 가지고 저희들을 대해 나오셨습니다. 어제보다 오늘이 새롭고, 오늘보다도 내일이 새로울 수 있는 마음을 가지고 나오셨습니다. 그것은 절대적인 동기를 가지고 과정을 초월해서 결과의 세계를 하루바삐 촉구하시려는 아버지의 마음이 새로운 하나의 결과를 촉구하는 입장에 계시기 때문인 것임을 아옵니다. 새로운 모습을 가지고 어젯날을 잊어버리기 위해 애쓰시며 고난의 노정을 걸어오신 아버지였사옵나이다.

천만사에 잘못한 사연이 있다 할지라도 오늘에 기쁠 수 있는 한 조건을 보시고 거두어 주시는 거룩한 아버지의 사랑을 저희들이 마음을 다해 찬양할 수 있는 모습들이 되지 못한 것을 용납하여 주시옵기를 간절히 바라옵고 원하옵나이다.

아버지! 1970년대를 맞이하여 ‘승리적 통일전선’이라는 엄청난 과제를 걸고, 아버지, 저희들은 하나되어야 되겠습니다. 한마음이 되어야 되겠습니다. 아버지의 마음을 중심삼아 가지고 하나가 되어야 되겠습니다. 아버님의 사랑 앞에 저희들은 하나의 형제이옵니다. 형제를 사랑하는 데 있어서는 형의 자리에서나 동생의 자리에서나 사랑을 주고 받을 수 있는 형제가 되어야 되겠습니다.

이럴 수 있는 일심의 모습을 갖추어서 상처받은 이 삼천만 민중과 앞으로 세워 나갈 민족을 위하여 염려하는 마음을 가져야 되겠습니다. 깨어서 제사장의 흰옷을 입고 아버지 앞에 눈물을 뿌리는 자들은 역사과정에 망하지 않았다는 사실을 알았기 때문에 오늘 통일의 무리들은 이 길을 자처해 나왔습니다. 민족이 가는 서글픈 운명에 제물 되겠다고 몸부림치는 이들을 긍휼히 보아 주시옵소서.

피어린 수난 길에서 낙망하지 않은 것은, 단 하나의 모습이 있다 하더라도 이로 말미암아 천운이 깃들고 기필코 이것이 한 사람의 뱃속에서 태아로서 이 땅 위에 옥동자로 출발할 수 있는 한 날이 있다는 것을 알았기 때문이옵니다.

기나긴 10개월을 참아 하나의 왕자가 태어나듯이 이 땅 위에 필연코 아버지께서 기뻐할 수 있는 소망의 주체권이 이뤄질 것을 믿고 지금까지 싸워 나오는 통일의 길 앞에 아버지께서 마음을 졸이며 수고의 길을 걸어오셨다는 사실을 생각하게 될 때, 황공하옵니다.

아버지! 이제 더더욱 이 민족을 품고 우리의 권위를 자랑할 수 있는 시대가 저희 앞에 가까워졌습니다. 민족을 규합하여 세계를 사랑하기 위하여 몸부림치는 자리에 서지 않을 수 없기 때문에 탕감이라는 엄청난 과제를 갖고 섰습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저희들이 원수를 보다 더 사랑할 수 있는 여유를 가져야 되겠습니다.

그 세계에 있는 사람까지도 사랑하고 품고 갈 수 있는 하나의 사랑, 부모의 마음을 지니고 가지 않으면 안 될 것을 저희들이 알고 갈 수 있게 허락하여 주시옵길 간절히 바라옵고 원하옵니다.

아버지! 저희는 북한에서 유린당하고 있는 동포들을 생각해야 되겠고, 또한 철의 장막 가운데 있는 수많은 인간들을 생각해야 되겠습니다. 그 백성들을 지배하고 있는 이들은 악하고 나쁘다 할지라도 그들에게 지배받고 있는 백성들을 사랑할 수 있는 마음이 불타야 되겠사오니, 그 민족과 그 나라를 사랑할 수 있는 마음이 앞설 수 있는 저희들이 되게 허락하여 주시옵길, 아버님, 간절히 바라옵고 원하옵나이다.

당신이 가고자 하시는 길은 어디입니까? 저희 집을 거치고 저희가 살고 있는 나라를 거치고 세계를 거쳐서, 아버지, 본향의 자리에 기필코 승리의 깃발을 꽂고 영세무궁토록 행복과 희망에 벅찰 수 있는 날을 찾아가기 위한 것이 당신의 복귀노정이라는 것을 저희들이 알고 그러한 과정에 처해 있는 오늘의 저희 자신들인 것을 망각하지 말게 하여 주시옵소서.

부모의 심정은 영원한 것이기 때문에 저희는 그 심정을 추구하고 그 피와 살을 이어받아, 그 심정을 실체 권한 세계에 결속시키는 저희 자체가 되어야 되겠사옵니다. 때문에 그 원인 되시는 아버지를 현재의 저희 마음에 끌어들일 수 있고 미래의 세계에 끌어들일 수 있을 때 그 마음 가운데에는 미래도 있는 것이요, 현실에도 그 원인이 있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그렇게 과거, 현재, 미래가 일치될 수 있는 나의 기쁨의 모습을 발견하고 기뻐할 수 있는 통일의 무리들이 되게 허락하여 주옵길, 아버님, 간절히 바라옵고 원하옵니다.

‘일심통일’이라는 제목을 중심삼고 저희들 이 시간 말씀을 들었사옵니다. 이 말씀은 그 누구를 위한 것이 아니라 아버지의 심정을 따라 아버지와 영원히 존재하기 위한 말씀이었사옵니다. 오늘 하신 말씀을 중심삼고 새로운 이해에 있어서 저희들이 선두에 선 기수가 되어서 이 기수의 명예와 면목과 체면을 세우는 데 온갖 정성을 다 투입하게 허락하여 주시옵소서. 저희의 피와 살을 여기에 쏟지 않고는 안 된다는 사실을 새로이 결심할 수 있는 이 시간되게 허락하여 주옵기를, 아버님, 간절히 바라옵고 원하옵니다.

오늘은 거룩한 날이오니, 아버님, 지켜 주시옵소서. 전국에 널린 제단 제단 위에, 아버지, 긍휼과 사랑으로 친히 같이하여 주시옵소서. 또한 세계에 널려 있는 당신의 자녀들에게 같이하여 주시옵고, 수많은 종교인들과 수많은 인간들을 품으시어서 당신의 나라로 끌어들이게 허락하여 주시옵기를 간절히 부탁드리고 원하옵나이다.

당신께서 원하시는 뜻이 이 땅 위에서 어서 속히 이루어지기를 원하옵니다. 거기에 완전한 제물이 되고 책임을 지는 저희들이 되게 허락하여 주시옵길 간절히 부탁드리면서, 이 모든 말씀 참부모님의 성호 받들어 아뢰었사옵나이다. 아멘.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