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7-90 to 27-131: 신앙자의 각오

신앙자의 각오
1969.11.30 (일), 한국 전본부교회

27-90
신앙자의 각오
[기 도]

아버님, 이 아침에도 당신께서는 여기에 모인 자녀들과 더불어 같이 있고 싶고, 같이 가고 싶은 마음이신 것을 저희들이 이 시간 체휼하게 허락하여 주시옵소서.

아버님께서 저희 인류의 시조로 말미암아 슬픔을 당한 그 시간부터 오늘날까지 끊임없이 복귀의 행로를 더듬어 찾아 나오신 그 수고를 저희들은 다시 한번 회상해야 되겠습니다.

아버님께서 그토록 그리워하시고 소원하시던 아들딸이 당신의 마음을 얼마나 상심시켰으며, 얼마나 당신의 몸을 쳤으며, 얼마나 당신을 불쌍한 자리로 내몰았던가를 다시 한번 생각해야 되겠습니다.

아버지여, 당신께서 그렇게 억울하고 분통한 자리에 처하게 된 것은, 아버지, 당신으로 말미암은 것이 아니고 자녀의 인연을 가진 이 땅 위의 인간들로 말미암은 것임을 생각하면 생각할수록 원통하옵니다. 그러한 가운데서도 아들딸을 버릴 수 없었던 아버지의 마음, 그러한 가운데에서도 아들딸을 잊어버릴 수 없었던 아버지의 사정을 생각하옵니다. 기필코 그 아들딸을 상봉하시어 당신의 뜻을 성취하시고 해원성사하시옵소서.

그 아들딸은 만유 앞에 찬양의 조건으로써 내세워져야 할 모습이요, 그 아들딸은 쌍수를 들어 당신의 높고 귀하심을 찬양하고 환성을 올리며 영광의 은사 앞에 보답해 드려야 할 모습임을 알고 있사옵니다. 만민이 그러한 아들딸이 되는 것이 아버지의 소원이요, 아버지의 뜻임을 또한 알고있사옵니다.

아버님, 수고의 노정을 걸어오시면서 찾아 나오신 당신의 자녀들을 만나 최후의 승리를 다짐할 수 있는 그 한 순간이 역사상에 기필코 있어야 될 것을 생각할 때, 그 승리의 순간은 개인뿐만이 아니라 가정과 종족과 민족과 국가와 세계와 천주라는 엄청난 문제를 걸어 놓고 기뻐할 수 있어야만 된다는 것을 알게 되옵니다. 또한 안다는 것은 그것을 위한 책임을 수행해야 하는 것을 말한다는 것도 알았습니다.

여기에 모인 당신의 어린 자녀들을 기억하여 주시옵소서. 저희는 아무것도 갖추지 못한 벌거숭이들이옵니다. 당신이 저희의 마음과 저희의 몸에서 떠난다 할진대 너희는 한푼어치의 가치도 없는 자들로서 땅 위의 마른 흙과 마찬가지요, 마른 막대기만도 못한 부족한 자들이옵니다. 살아봐도 삶의 가치를 지닐 수 없는 부족한 자들인 것을 저희들은 자인해야만 되겠사옵니다.

이렇게 부족한 저희들에게 당신께서 임하시어서 저희들로 하여금 무한한 가치와 존귀와 영광을 차지할 수 있는 은사권내에 잠기게 하여 주신 것을 진정으로 감사드리옵니다. 사탄세계에 있어서 원수와의 관계를 뗄 수 없고 당신과 관계를 맺을 수 없는 자리에 있는 인간들임에도 불구하고 높고 거룩한 당신의 아들딸의 자리에 동참할 수 있도록 세워 주신 그 특권적인 혜택에 또한 감사드리옵니다. 하늘을 보나 땅을 보나 그 무엇을 보더라도 감사드리고 자랑할 수 있는 가치의 존재요, 가치의 자리에 있는 것을 저희들은 알아야 되겠사옵니다.

아버님, 저희들의 마음속에는 항상 뗄래야 뗄 수 없는 당신의 사랑이 깃들어 있기를 바라고 있습니다. 그 사랑의 마음은 저희들의 생활권을 온전히 지배하고 싶어하는 간절한 마음인 것을 아옵니다. 영원한 세계의 역사와 더불어 아버지의 뜻이 머무는 자리에 저희들이 동참하기를 원하시고, 저희들의 생활노정에 같이 임하시어서 저희를 주관하고자 하시는 당신의 마음과 사정을 저희가 알아야 되겠사옵니다. 당신은 영원히 뗄래야 뗄 수 없는 인연 때문에 희생을 무릅쓰고 복귀섭리 노정을 찾아 나오고 있사오나, 저희들은 아버지와 일치되지 못한 자리에 있기에 경험하지 못하는 것이 얼마나 많은지 이루 말로 다 할 수 없습니다.

이와 같은 자기 자신을 거부하고 아버지와 일체화되어 남기신 최후의 승리의 기점을 향하여 달려갈 줄 아는 당신의 아들딸이 되어야겠습니다.

아버님이시여, 이제 분부하실 명령이 있사오면 분부하여 주시옵소서. 최후의 결전장을 향하여 나아가야 할 저희들이 져야 할 책임이 있사옵니까? 아버지 앞에 생명을 다 바치고 나갈 수 있는 하늘의 용사들이 되게 허락하여 주시옵소서. 이 땅에 내세워야 할 당신의 새로운 분부와 약속이 남아 있습니까? 저희들은 가기로 결심한 몸으로서 아버지 앞에 나서기를 주저하지 않는 당신의 자녀들이 되어야 되겠사옵니다. 저희의 마음이 아버지와 더불어 하나되고 저희의 몸이 아버지로 말미암아 움직이기를 원하오니, 아버지의 은사 앞에 저희들이 중보자의 역할을 하는 당신의 자녀들 되게 허락하여 주옵기를, 아버님, 간절히 바라옵고 원하옵니다.

이 아침, 남한 각지에 널려 있는 당신의 자녀들을 기억하여 주시옵소서. 이들이 누구를 만나기 위하여 여기에 참석하였겠사옵니까? 그 무엇을 찾기 위하여 나왔겠사옵니까? 당신을 만나고 당신을 찾기 위함이었사옵니다. 당신의 높고 귀한 마음과 가치의 기준을 저희 마음에 모셔 들이기 위함이었사옵니다. 하오니 저희의 마음이 아버지를 간절히 흠모하게 하여 주옵고, 저희 사정이 아버지의 뜻과 일치될 수 있도록 하여 주옵기를, 아버님, 간절히 바라옵고 원하옵니다.

아버지여, 한국과 일본과 미국과 독일, 이 4개 국을 중심삼고 세계 복귀의 역사를 일으키시옵소서. 그리하여 40개 국에 널려 있는 120개 소의 성지를 택정한 이 모든 은사의 터전 위에 영계에 가 있는 수많은 영인들을 땅 위에 집결시키시어 그 후손들과 직접 연결되게 하여 주시옵소서. 그 성지를 지키기 위하여 이 시간 기도하고, 이 나라를 흠모하면서 이 나라를 향해 기도하는 당신의 자녀들을 기억하여 주옵기를 간절히 바라옵고 원하옵니다. 그들을 홀로 버려 두지 마시옵기를 간절히 바라옵고 원하옵니다. 아버지여, 그들의 모든 소원이 당신의 소원과 동일하게 하여 주시옵고, 그들의 사정이 당신의 뜻과 일치되게 하여 주시옵소서. 이 땅위에 최후로 남아진 복귀의 사명을 앞에 놓고 마음으로 아버지를 사랑하고, 아버지의 실체로서 태어날 수 있는 당신의 자녀가 되게 허락하여 주시옵길, 아버지, 간절히 바라옵고 원하옵니다.

이 아침, 모인 곳곳마다 친히 같이하여 주시옵고, 이곳을 위하여 염려하고 기도하는 당신의 자녀들, 천배 만배 복을 내려 주시옵길 간절히 바라옵고 원하옵니다.

영계에 있는 수많은 영인들이 저희들과 더불어 일체가 되게 하시옵고, 땅위에서 당신의 뜻을 따라 지금까지 나온, 준비된 수많은 도인들을 당신의 품에 품으시옵소서. 축복받은 가정들을 비롯한 당신의 자녀들이 영광을 찬양할 수 있는 그날이 올 수 있게 허락하여 주시옵기를, 아버님, 간절히 바라옵고 원하옵니다.

오늘은 1969년 11월 30일, 이달의 마지막 안식일이옵니다. 아버지, 다시 만날 수 없는 이날을 축복하여 주시옵고, 이해의 끝을 향해 나가는 이 시간 위에 같이하여 주시옵소서. 60년대를 넘어 70년대를 향해 나가는 하나의 결전장에 섰사오니, 인간을 통하여 남기신 당신의 뜻이 불변하게 하여 주시옵고, 당신의 영광의 은사가 이 땅에 자리잡아 사탄세계에 자랑할 수 있는 터전을 공고히 하게 하여 주시옵기를 간절히 부탁드리고 원하옵니다.

이 아침부터 오늘 하루를 아버지 앞에 맡기오니 친히 주관하여 주시옵소서. 당신만이 주도하시옵고 당신만이 임재하시옵길 간절히 부탁드리고 원하옵니다. 남아진 시간 위에 친히 같이하여 주시옵기를 간절히 부탁드리면서, 이 모든 말씀 참부모님의 성호 받들어 아뢰었사옵나이다. 아멘.

27-93
말 씀
땅 위에 살고 있는 인간들 중에는 자기 스스로 영원히 승리할 수 있다는 자신을 가진 사람이 많지 않다는 것을 우리는 알고 있습니다. 하루의 생활을 두고 보더라도 자기도 모르는 가운데 무엇을 바라면서 믿고 사는 인생이라는 것 또한 우리는 잘 알고 있습니다.

27-93
우리가 믿고 바라는 것
아침에 우리가 직장이나 책임 부서를 향할 때에는 반드시 비는 마음, 바라는 마음을 가지고 하루의 생활에 임하게 됩니다. 하루가 그렇거늘, 한달이 그럴 것이고, 일년이 그럴 것이고, 우리의 생애노정이 또한 그러할 것입니다. 우리는 그런 바라는 마음, 원하는 마음을 갖고 생활을 하며 지내고 있는 것입니다.

이런 관점에서 볼 때, 한 개인이 그렇거늘 한 나라와 세계도 역시 마찬가지인 것입니다. 개인이 연결되어 하나의 나라를 이루고 세계를 이루는 것이기 때문에, 우리의 개인생활이 그 무엇을 원하고 그 무엇을 바라는 마음을 갖고 나가는 것을 보아서, 한 나라면 나라도 그러할 것이요, 세계면 세계도 그러할 것임을 알 수 있는 것입니다. 인간만이 아니라 이 천지를 창조한 절대자가 있다면 그 절대자 역시 마찬가지일 것입니다. 우리 인간뿐만 아니라 천상세계에 계시는 하나님도 역시 무엇을 바라고 원하는 마음을 지니고 계신다는 것입니다.

현시점을 중심삼고 보게 될 때, 인간이나 하나님이 바라고 고대하는 그 자체는 무엇인가 하면, 무엇을 추구하느냐 하면, 현실보다 더 낫기를 바란다는 사실을 우리는 부정할 수 없습니다. 이 시간까지보다도 차후에 찾아오는 그 시간이 더 낫기를 바라고, 지금의 입장보다도 앞으로의 입장이 더 낫기를 바라고 있다는 것입니다. 여기에서 신앙이라는 문제가 등장되는 것입니다.

우리가 믿고 바라는 것은 현실적인 것이 아닙니다. 금후의 문제입니다. 소원하는 자체는 현실적인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반드시 시간이라는 과정을 거친 후에 나와 부딪칠 문제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소원하는, 혹은 믿고 바라는 모든 마음은 현실의 자기 입장보다도 더 나을 수 있고, 현재의 자기 입장에 무엇인가 플러스시킬 수 있는 것을 추구하는 것이 사실입니다.

그러므로 내가 현재에 열만큼의 힘을 가지고 있으면서 열 이상의 가치의 것, 열 이상의 위치를 바란다고 한다면 내가 추구하는 그곳에는 열 이상의 힘이 있어야 되는 것입니다. 만일 내가 열의 입장에서 백을 바란다면 90을 어떻게 성취하느냐가 문제입니다. 10의 입장인 나에게 90이라는 힘을 플러스시키지 않고는 바라는 소원을 성취할 수 없는 것입니다. 이것은 틀림없는 사실입니다.

오늘날 우리 인간에게는 여러 가지가 제한되어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 인간은 생사문제나 행.불행의 문제를 자유로이 가려 나갈 수 없는 것입니다. 행복하기를 바라지 않는 사람이 어디 있으며 비참하게 최후를 마치고 싶은 사람이 어디 있겠습니까? 그렇지만 그 운명길이라는 것은 자기 스스로 해결지을 수 없는 것입니다. 행복이라든가 불행이라든가 혹은 생사 등의 전체적인 문제는 물론 인간을 중심삼고 벌어지고 있지만 인간 자체가 그 모든 문제의 해결 요인이 될 수는 없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사실을 두고 사망선이나 불행의 고비를 어떻게 타개하느냐 하는 문제를 생각해 볼 때, 그 불행이라는 것은 자기가 서 있는 현시점보다도 낮은 위치, 혹은 열이라는 힘을 지니고 있다면 그 열이라는 힘을 지니고 있는 현재의 입장보다 더 낮은 위치에 처할 수밖에 없는 것이기 때문에 결국 자신에게 손해가 되는 것입니다. 이것을 피해가기 위해서는 열이라는 힘에 플러스될 수 있는 요인을 어디서 보급받느냐 하는 것이 문제입니다. 이것이 우리 생활 가운데에서 요구되는 절대적 요건이 아닐 수 없는 것입니다.

27-95
신앙자가 바라보아야 할 기준
자기가 바라는 소원을 믿고 나가기 위해서는 그 소원보다 더 큰 원동력을 가져야 합니다. 그러지 않고는 그 소원을 이룰 수 없습니다. 이렇게 볼 때 우리가 불행한 환경이나 죽음의 고비를 밀고 나가서 행복한 환경이나 영원한 생명을 갖는다고 하는 것은 그렇게 간단한 문제가 아닙니다. 제한된 한계권내를 벗어나지 못하고 있는 인간의 모습을 가지고 그 이상의 것을 추구하게 될 때는, 모든 것의 동기가 되어 있지 않기 때문에 모든 전체를 해결 지을 수 있는 동기의 힘, 어떠한 동기의 요소, 어떠한 동기의 중심을 바라지 않을 수 없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소원을 이루기를 바라기 전에 우리의 소원을 성사시켜 줄 수 있는 그 무엇을 바라는 것인데, 그것은 자신과의 상대적 기준이 아니라 그 이상의 기준으로 추구되는 것입니다. 우리 마음 세계에 있어서나 우리 일상생활에 있어서 요구되는 그러한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 신앙이라는 문제가 등장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면 우리들이 이러한 신앙의 기준을 중심삼고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 새로운 결의를 하고 새로운 각오를 가졌다고 했을 때, 우리의 입장은 이미 그 전의 입장이 아닌 것입니다. 우리가 지금까지 살아왔고, 또 지금도 살고 있는 환경과 상대적 관계를 맺고 있는 입장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현재의 입장을 초월하고 상대적인 입장을 넘어 어떠한 절대적 기준을 중심삼은 입장에 서게 되는 것입니다. 여러분이 그런 입장에 설 때 거기서부터 새로운 출발을 볼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신앙자가 바라보아야 할 기준은 절대자이신 하나님인 것입니다. 상대적인 우리가 아니예요. 하나님편에서부터 신앙자의 각오는 시작되는 것입니다. 그러한 절대적인 기준을 갖지 않고는 행.불행의 요건을 가려서 우리가 바라는 이상을 향해갈 수 없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한 나라를 책임진 위정자면 위정자, 세계를 책임진 정치가면 정치가의 입장에서 자기가 관리하고 주관하는 현실의 국가라든가 세계를 바라볼 때, 그 세계의 내용이 복잡하면 복잡할수록 자기의 한계를 느끼고 자기의 힘으로서는 어떻게 할 수 없다는 사실을 알게 됩니다. 큰 일을 맡으면 맡을수록 자신의 주변과 능력만으로 하겠다고 자신을 갖는 사람은 그리 많지 많습니다. 그러므로 무엇인지 모르지만 자기에게 힘이 될 수 있는 상대적인 요인, 어떠한 절대적인 힘의 상대적 기준을 스스로 추구하게 됩니다. 그리하여 그 힘이 현시점에 있는 자기의 힘 이상으로 나타나길 바라는 것입니다. 그 결과가 현시점 이상의 것이 되기를 바란다는 것입니다. 그러한 입장은 피할 수 없습니다. 자기의 환경을 넘어서서 찾은 것이 동기가 되고, 그로 인하여 결과를 맺어야만 새로운 소원, 새로운 승리적 쾌감을 느낄 수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현실적 기준 이상의 동기와 현실적 기준 이상의 결과를 추구하는 입장, 즉 현실보다 더 나은 것을 바라고 또 추구하는 입장이 바로 신앙자의 입장입니다. 다시 말하면 신앙자의 생활방법입니다. 이렇게 볼 때 신앙자의 생활방법이란 결국은 무엇이냐? 그것은 자기 이상의 힘, 자기 이상의 동기, 자기 이상의 자리에서 상대적 결과를 가져오게 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문제입니다.

오늘날 제한된 환경에 처해 있는 자신으로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그 제한된 권내를 초월해야 되는 것입니다. 초월하기 위해서는 자기 힘만으로는 안 됩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런 입장에 부딪치면 부딪칠수록 거기에는 정성이 필요한 것입니다. 신앙자의 각오를 중심삼고 볼 때, 그 신앙자의 각오를 하는 데 있어서도 정성이 없어서는 안 됩니다. `나는 이제 한다’라는 그 결정 자체, 즉 신앙자로서 목표를 중심삼고 결정하는 그 자체에도 정성이 없으면 안 된다는 것입니다. 그 정성은 지금까지의 상습적인 생활 환경권의 내용만 가지고는 안 되며, 그 이상의 기준이어야 되는 것입니다.

27-97
신앙자의 생활방법
그러려면 어떻게 해야 되느냐? 우리의 모든 감각을 거기에 집중시켜야 됩니다. 그리고 상습적인 생활을 해 가지고는 안 됩니다. 그 이상의 생활을 해야 합니다. 즉, 이목구비와 촉각 등의 모든 감각기관 전체를 한 중심에 집중시켜야 됩니다. 통일적인 형태를 갖추어서 거기에 집중시킬 수 있는 기원을 마련하지 않으면 현재의 입장을 초월할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성경 말씀에도 “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라(눅 12:30)”고 하신 것입니다. 그`다하라’는 말에는 천주적인 내용이 있는 것입니다. 다하는 데는 또 어느 분야에서 다하느냐 하는 것이 문제가 됩니다. 한 가정에 있어서 아내가 남편에게 마음을 다하는 것은 아내의 입장에서 다했다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때 그 아내의 입장이 전체를 대표할 수 있느냐? 아니라는 것입니다. 전체의 일부분일 뿐 전체를 대표할 수는 없는 것입니다. 그것은 절대적이 아닙니다. 한 아내로서 절대적인 입장에 서기 위해서는 하나님이 임재하시고 하나님이 소원하시는 기준, 즉 하나님의 절대적인 기준과 일치될 수 있는 상대적인 입장까지 올라가야 되는 것입니다. 그런 입장에서 마음을 다하고 뜻을 다하고 성품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라는 것입니다.

이것이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첫째 계명입니다. 이 계명은 우리의 소원, 즉 바라는 것을 성취시킬 수 있는 절대적인 요인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신앙인들이 `믿고 간다’ 하는 그 자리는 오늘날 여러분의 생활권내에서 비판받을 수 있는 사정을 결정될 수 있는 자리가 아닙니다. 그 자리는 체휼적, 초월적인 경지에서 인연되는 자리라는 것을 우리는 알아야 되겠습니다.

그러기에 우리가 신앙자로서의 새로운 각오를 한다. 그리하여 그 각오 밑에서 살아간다고 하는 것이 간단한 문제가 아닙니다. 그 자리는 최고의 자리요, 절정을 이루는 자리입니다. 즉, 분수령과 같은 자리인 것입니다. 그 최고의 자리를 향해 가는 데는 좌우로 치우치지 말고 전후를 비교하면서 가야 되는데 전보다 내려가는 것이 아니라 올라가야 되는 것입니다.

27-98
신앙자가 취해야 할 입장
신앙자의 입장은 단순하다면 지극히 단순한 것이요, 복잡하다면 최고로 복잡한 것입니다. 단순하다고 말할 수 있는 것은 어떤 목표를 향해 한 길로 곧장 가기 때문입니다. 그렇지만 잘못해 떨어졌다 하게 되면 천태만상의 곡절이 벌어지는 것입니다. 그러기에 복잡하다면 말할 수 없이 복잡한 것입니다.

지금 우리 신앙자가 가는 길은 절정을 향한 길입니다. 여기서 그 절정을 향하여, 즉 그 목표를 향하여 직행하게 될 때는 단순한 것입니다. 목표를 향하여 직행하는 데 필요한 것 이외에는 모든 것을 다 일소해 버리고 오직 그 목표만을 위해서 갈 때에는 단순하다는 것입니다. 그렇지만 그 바라는 것이 절대적인 것이 아니라 상대적인 것이라면 수습하지 못할 문제가 벌어집니다. 거기에는 무한한 복잡성이 개재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신앙인은 언제나 그 경지를 바라보고 가야 합니다. 아침에 나설때, 자기의 마음과 하루의 목표는 어디를 향할 것이냐 하는 것을 생각하고 나서야 합니다. 그리하여 출발하는 아침보다도 저녁에 돌아올 때, 혹은 하루를 지내고 나서 잠자리에 들게 될 때 `나는 오늘 좋았다. 오늘은 다행했다. 뜻 앞에 내 면목을 세울 수 있었다. 오늘이야말로 이 한달을 대신할 수 있고 이 한해를 대신해서 자랑할 수 있다’ 할 수 있는 자리에 서야 합니다. 치열한 투쟁이 없이는 그런 자리에 설 수 없는 것입니다.

여러분이 지금 호흡을 하고 있지만 평상시에는 그것을 잘 못 느낍니다. 또 자기의 가슴에 맥박이 뛰고 있다고 하는 것이 여실한 사실이요, 부정 할 수 없는 사실임에도 불구하고 평상시에는 그것을 느끼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또한 여러분이 눈이 깜박거린다는 것을 평상시에 느끼느냐? 물론 고의적으로 깜박거리는 것은 느끼지만 평상시에는 생각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이 모든 것들이 그 자체내에서 부정할 수 없는 사실임에도 불구하고, 느끼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우리 가운데 계신다고 한다면 그것을 인정할 수 있겠는가? 부정할 수 없는 진실된 사실들이 나를 둘러싸고 있어도 그것을 인식하려고 해야 느껴집니다. 또 하나님이 내 마음속 깊은 자리에 계신다는 것을 느낄 수 있겠는가? 눈에 보이고 느낄 수 있는 것도 있다고 생각하고 생각을 집중해야 느낄 수 있거늘, 보이지도 않는 하나님의 마음속 깊이 계신다는 것을 인식할 수 있겠느냐는 것입니다. 정신을 가다듬지 않고는 좀처럼 인식하지 못합니다. 그렇다고 하나님이 존재하지 않는 것이냐? 아닙니다. 분명히 존재하십니다.

27-99
신앙생활과 양심
하나님은 우리를 불행의 길로 안내하고자 하시는 것이 아니라 최대의 행복의 길로 안내하고 싶으실 것입니다. 여러분의 사지백체 가운데 어느 한부분이라도 괴로운 자리로 가고 싶어하는 것이 있겠습니까? 없습니다. 사지백체 모두는 편안한 입장에 있기를 바라고 거기에 부합될 수 있게끔 작용하는 것입니다. 때문에 불편한 자리에 들어가면 대번에 압니다. 공기가 탁한 자리에 가게 되면 대번에 아는 것입니다.

그와 마찬가지로 하나님을 찾아가는 길 앞에 있어서 좋지 못한 일이 있으면 대번에 아는 것이 있습니다. 그것이 바로 양심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양심의 가책을 받으면서 신앙 생활을 해도 된다고 하는 종교는 있을 수 없습니다. 마음이 기쁘고, 마음이 편안하고, 마음이 좋고, 마음의 해방을 제시할 수 있는 그런 내용을 중심삼아 자극을 받고 관계를 맺으라고 가르쳐 주는 종교의 교리는 있을 수 있으되, 그 반대의 입장에 서라고 가르치는 종교는 있을 수 없는 것입니다.

마음이 편안하고 기쁠 수 있는 자리에 서기 위해서는 현실적이고 평범한 삶의 환경을 초월해야 됩니다. 보통 사람들과 달라야 한다는 것입니다. 현 사회의 제반 여건과 상대적 관계를 갖고 화합하라는 것이 아닙니다. 그것을 초월하라는 것입니다. 초월하여 거기에서 자신이 주체가 되어야 됩니다. 그리하여 사람들을 끌고 나가야 합니다. 새로운 주체가 되라는 것입니다. 새로운 주체가 되기 위해서는 마음이 주도할 수 있는 기준을 세우지 않고서는 안 됩니다.

그러므로 신앙자의 출발점이라는 것은 외적인 세상이 아니라 자기 자신의 양심입니다. 그러기에 자기의 양심을 중심으로 그 이상의 문제를 논의하기 위해서 신앙이 필요한 것이지 그 이하의 문제를 논의하기 위해서 신앙이 필요한 것이 아닙니다.

여기에서 그 이상의 자리라고 하는 것은 어떠한 한계선을 두고 말하는 것이냐? 개인이면 개인으로서 갈 수 있는 한계선이 있습니다. 남자면 30억 인류 가운데 15억에 가까운 남자로서 갈 수 있는 한계선이 있고, 여자면 또 여자로서 갈 수 있는 한계선이 있습니다. 또한 남자와 여자가 합해서 가정을 이루면 그 가정으로서 갈 수 있는 한계선이 있습니다.

그런 고개들이 있을 것입니다. 개인이면 개인으로서 가야 할 고개가 있다는 것입니다. 여러분에게도 그렇게 넘어야 할 고개가 있을 것인데 그 고개는 평지가 아닙니다. 최고의 정점인 것입니다. 그 곳을 향해서 가는 데있어서 곧바로 고개를 넘어가려 할 것이 아니라 산맥을 타고 따라가야 됩니다.

27-100
신앙자에게 가장 필요한 것
여러분, 저 삼각산도 최고봉을 중심삼고 작은 봉우리들이 사방으로 솟아 있고 작은 산맥들이 사방으로 뻗어 있습니다. 여러분 각 개인도 그 작은 산봉우리와 같습니다. 산에 올라가는 사람의 소원은, 어렵다고 하더라도 그 산의 상상봉을 정복하는 것입니다. 그것을 위해서 정성을 들이는 것입니다. 그러나 내려가겠다고 소원하는 사람은 없습니다. 내려가겠다고 정성들이는 사람은 없다는 것입니다. 그런 사람 있어요? 있을 수 없는 것입니다. 내려가겠다고 정성들이는 사람은 한 단계 더 올라가기 위해서 그러는 것입니다. 자기 나름대로 찾아 올라가야 할 산봉우리를 향해서 산맥을 타고 올라가는 데 있어서, 올라가기 위해서 내려가는 거예요. 그런 사람은 지혜로운 사람입니다.

여러분, 신앙생활에 있어서도 그런 일이 많습니다. 기도를 하더라도 어떤 때는 무한히 은혜될 때가 있습니다. 계속적으로 쭉 기도를 해도 계속적으로 무한히 은혜가 되는 때가 있어요. 신앙생활을 해 나가다 보면 틀림없이 그럴 때가 있습니다. 그것은 왜 그러냐? 우리의 마음이, 하루 가운데에도 아침이 있고 낮이 있고 저녁이 있고 밤이 있는 것과 마찬가지로, 일년에 춘하추동이 있는 것과 마찬가지로 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아침은 봄과 마찬가지요, 낮은 여름과 마찬가지요, 저녁은 가을과 마찬가지요, 밤은 겨울과 마찬가지입니다. 또한 사람 사람의 형도 전부 다릅니다. 봄 절기에 해당되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겨울 절기에 해당되는 사람도 있습니다. 겨울 절기에 해당되는 사람이 여름 절기와 같은 상대적 기준과 만나면 은혜가 오는 것입니다. 겨울 절기형인 사람이 겨울 절기와 같은 입장에 서면 눈이 녹지 않습니다. 은혜를 받을 수 없다는 것입니다.

그와 마찬가지로 사람들은 모두 그 소성이 다르다는 거예요. 동서남북, 사방을 두고 볼 때, 인간도 동서남북 그 각 방향에 위치할 수 있는 각각의 타입이 있다는 거예요. 그러므로 그 사람 나름대로 기도하는 데 있어서 은혜되는 시간도 다른 것입니다. 꼭 밤이나 새벽에만 기도하는 데 있어서 은혜를 받게 되는 것이 아닙니다. 어떤 사람은 낮에, 어떤 사람은 오전에, 어떤 사람은 오후에 기도해야 은혜를 받습니다. 이와 같이 그 은혜되는 시간이 서로 다릅니다. 또한 계절에 따라서도 달라지는 것입니다. 왜그러냐? 그것은 이 우주의 모든 존재는 돌면서 존재하기 때문입니다. 돌기 때문에 방향이 달라지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남쪽에 있다고 생각했는데 동쪽에 있고, 동쪽에 있다고 생각했는데 북쪽에 있고, 북쪽에 있다고 생각했는데 서쪽으로 돌아갑니다. 이렇게 입장이 달라지는 환경에 따라 기도하면 기도의 힘이 달아지는 것입니다. 개개인의 기도하는 입장이 전부 다르다는 것입니다. 그런 자리에서 기도하는 것은 내려가기 위한 것이 아닙니다.

신앙자에게 가장 필요한 것은 뚜렷한 목표입니다. `나는 기필코 이 길을 가겠다’ 하는 뚜렷한 목표예요. 이 목표가 흐려질 때 신앙자의 생활은 무너지는 것이요, 아무리 결의를 하고 각오를 해도 목적과는 하등의 관계가 없게 되는 것입니다. 목적도 없이 백번 각오하면 뭐 합니까? 목표를 뚜렷이 정해 놓고 백번 결의해야 목표 안에 한 걸음이라도 더 가까이 가지는 것이지 목표가 희미해 가지고는 아무리 결의를 한다 해도 아무런 소용이 없는 것입니다.

27-102
목적 달성과 절대적인 믿음
여러분 개인 개인은 하나의 작은 산봉우리와 마찬가지입니다. 그 산봉우리는 반드시 그 동기가 되어 있는 산맥을 통해서 뻗어 있습니다. 자기가 모든 산맥을 거느릴 수 있는 주봉이라면 모르지만, 그렇지 않고 절대적 입장이 되어 있지 못하면 언제나 상대적 입장에서 무엇을 추구하는 입장, 즉 절대적인 그 무엇을 찾는 입장이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자기는 주봉이 아닌 하나의 산봉우리임에 틀림없기 때문에 주봉을 찾아가야 되는 것입니다. 주봉을 찾아가는 데 있어서는, 올라가면 올라갈수록 시야가 달라집니다. 지금까지는 그 골짜기에 있는 마음밖에 안 보였던 것입니다. 자기가 처해 있는 봉우리에서 더 높은 저쪽 봉우리에 대해서는 깜깜 무소식이었어요. 알려고 해도 알 도리가 없었습니다. 그 봉우리에 대해서 알려면 그 봉우리로부터 가르침을 받아야 됩니다. 그 가르침을 받기 위해서는 절대적으로 순응해야 합니다. 절대적으로 믿어야 합니다. 절대적으로 믿기 전에는 가르쳐 주어도 알 수 없는 것입니다.

여러분, 학교에 가서 공부할 때, 대학교면 대학교에서 교수가 강단에 서서 이것은 이렇다고 강의를 하면 학생들은 그것을 실험해 보지 않았지만 그 교수를 믿기 때문에 그 교수의 강의 내용을 백 퍼센트 다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그것을 받아들이는 데 있어서 모든 장애 요건을 제거한 입장에서, 교수가 가르치는 내용을 전부 자신의 것으로 만들겠다고 하는 결의 밑에서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만약에 자기가 그 교수의 강의 내용을 받아들이지 못하겠다고 한다면, 즉 그 교수를 믿지 못한다면, 그것을 자기가 모두 검토하고 실험하여 수십년 동안 강단에서 지내온 교수 정도가 되어야 비로소 알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낮은 봉우리의 입장에 있는 사람이 높은 봉우리의 사정을 알려면 높은 봉우리를 절대적으로 믿어야 합니다. 여기에서 비판해 가지고는 현재의 자리에 벗어나지 못할 것입니다. 발전할 수 없는 거예요. 그 이상을 넘어가려면 무한한 투쟁을 해야 합니다. 다시 말하면 환경이 갖추어져 있는데, 길이 모두 닦어져 있는데, 그 닦여진 길을 가면 될텐데도 불구하고 그 길을 가지 않고 자기 스스로 알아서 가겠다고 한다면 무한한 투쟁을 해야 하고, 그래도 그것은 거의 불가능합니다.

그러면 우리 인생길을 중심삼고 볼 때 우리가 찾아가야 할 그 목적, 우리가 소망하는 최후의 기준은 얼마나 큰 것이냐? 그것은 대한민국이라고 하는 국가적인 기준이 아니요, 현재 우리가 살고 있는 세계적인 기준도 아닙니다. 그것은 자그마치 역사성을 초월한 기준입니다. 그 기준이 바로 우리 통일교회에서 말하는 천주주의입니다. 즉, 하늘땅 전체를 합한 내용을 지닌 인간의 가치를 추구하는 것입니다. 그 높고 귀한 가치를 추구하는 입장에서 그것을 믿지 못하여 자기가 전부 다 실험해 보고 알아 가지고 가려고 한다면 못 갑니다. 믿어야 합니다. 믿는 데는 상대방이 주장하는 바를 내가 주장하는 것 이상으로 믿어야 합니다. 그러면 만약 그 주장하던 사람이 쓰러지는 날에는 자신이 주인이 되는 것입니다. 선생님은 이런 싸움을 지금까지 해 왔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마음을 다하고 뜻을 다하고 정성을 다하라는 것입니다. 여기서 `다하라’는 한계점이 어디냐? 그것은 역사성을 초월하는 것입니다. 절대 권한에 가까운 기준을 중심삼고 일치될 수 있는 자리, 즉 최후의 기점과 연결될 수 있는 그 자리를 중심삼고 다하라는 것입니다. 그 자리는 하나님이 바라시는, 하나님에 대한 상대의 자리입니다. 통일교회에서는 그러한 자리, 그러한 기점을 하나님의 심정이라고 합니다.

27-103
신앙의 주봉(主峰)
신앙자는 앞으로 앞으로 전진해야 하는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하나의 산맥을 따라 주봉을 향하여 가야 하는 것입니다. 그 주봉을 향하여 가는 데는 여러 길이 있을 것입니다. 하나의 큰 산이 있으면 그 산의 주봉을 중심삼고 사방으로 산맥이 뻗어 있을 것입니다. 어떤 산맥을 중간에서 절벽이 되어 도저히 갈래야 갈 수 없는 산맥도 있을 것입니다. 형형색색의 모양을 지닌 천태만상의 산맥이 뻗어 있을 거예요. 그렇거늘, 오늘날 우리는 어디로 가야 할 것인가?

자신이 지금 가야 할 길이 막혔을 경우, 아무리 억지를 써서 가려 해도 그 길은 지나갈 수가 없습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하느냐? 현재의 그 골짜기를 넘어 다른 봉우리를 타고 가야 합니다. 다른 봉우리를 타고 가려면 지금까지 자신이 갖고 있던 관념이나 생활적인 습관, 전통적인 내용 등을 전부 부정하고 청산지어야 합니다. 그래 가지고 주봉을 향해 직행할 수 있는 하나의 길을 모색해야 합니다.

지혜로운 사람이라면, 생각이 있는 사람이라면 주봉을 향해 가는 데 제일 가까운 길을 찾을 것입니다. 그 길을 찾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되느냐? 자기 혼자서 알아 가지고 가겠다고 하면 안 됩니다. 물어 봐야 하는 것입니다. 산에 올라가는 사람이 있으면 물어 봐야 합니다. 자기보다 앞서 가는 사람이 있으면 `당신이 가는 길은 어떻게 되어 있소?’ 하고 물어 봐야 합니다.

주봉으로 가는 길에는 동으로 뻗은 산맥, 서로 뻗은 산맥, 남으로 뻗은 산맥, 북으로 뻗은 산맥, 여러 산줄기가 있습니다. 그러나 제일 가까운 줄기는 하나밖에 없습니다. 그 길을 중심삼고 주봉을 향해 가는 데있어서는 내려간다고 해도 내려가는 것이 아닙니다. 주봉을 향해서 가는 것이기 때문에 올라가는 거예요. 거기에는 시련 고통이 있고 죽음의 교차로가 있을 것입니다. 그렇지만 그것은 망하게 하기 위해 있는 것이 아니라 부딪쳐 나감으로 말미암아 연단시키기 위해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그것을 극복하는 날에는 주봉을 찾을 수 있는 것입니다.

주봉을 향해 가는 데는 그런 고비가 많이 있습니다. 그런 고비가 많을지라도 주봉에서 뻗은 산맥을 타고 가는 사람은 순순히 가면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만약 동쪽으로 가야 하는데 서쪽으로 가고 있는 사람은 돌아가야 됩니다. 180도 반대 방향으로 돌아가야 하는 것입니다. 그걸 못하겠다면 안 됩니다. 서쪽에 있는 사람이 동쪽에 있는 사람이 가는 방향을 보고 `저 사람이 저리로 가니 나도 그렇게 가야지’ 하고 가다 보면 결국 내려가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반대의 환경으로 가게 되는 것입니다.

여기에서 가장 큰 문제는 무엇인가? 주봉을 아는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가야 할 목적지, 신앙의 중심 목적기준을 알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확실히 알아야 됩니다. 하나님이 있는지 없는지 확실히 알아야 됩니다. 이것도 모르고 신앙길을 간다고 하는 사람은 어리석은 사람입니다.

27-105
신앙을 하려면 목적지와 중심을 확실히 알고 가야
여러분, 백운대만 올라가더라도 조난당하는 사고가 벌어지곤 하는데 신앙길은 어떤 길입니까? 신앙길이라는 것은 복잡한 길입니다. 제일 겁나는 길입니다. 한번 가다가 실수하면 후퇴해서 다시 갈 수 없는 길입니다. 그것으로 마지막입니다. 한번 출발했으면 끝까지 가야 할 길입니다. 가다 말다 하면서 갈 수 있는 길이 아닙니다. 한번 떨어지는 날에는 크나큰 타격을 받게 됩니다. 신앙생활을 하다가 한번 기운을 잃어버린 사람은 다시 회생하기 어렵습니다. 보통 길은 가다가 절벽이 앞을 가로막고 있으면 다른 길로 피해 갈 수 있지만 신앙의 길은 가다가 떨어지면 대절벽이기 때문에 소생할 길이 없습니다.

여러분, 고대 문화국가들을 생각해 보십시오. 종교를 중심으로 새로운 문화를 창건했던 민족이 망했을 경우에 어떻게 되었습니까? 그 민족은 새로운 종교의 힘을 찾기 전에는 재기할 도리가 없었던 것입니다. 그들이 세계를 호령할 수 있는 문화를 그 목적의 한계선으로 삼고 나아갈 때, 그 목적을 달성하기까지는 발전할 수 있을는지 모르지만 일단 그 목적을 달성한 자리에서, `이젠 됐다’고 하는 자리에 서면 떨어지는 것입니다. 그래서 떨어지기 시작하면 다시는 수습할 수 없는 것입니다.

기독교를 중심삼은 현재의 문명권이 지금 그러한 한계점에 와 있습니다. 이것이 떨어지면 재기할 도리가 없는 것입니다. 무엇으로 세계 인류가 재기할 수 있겠습니까? 그러기 위해서는 새로운 방향의 신앙이 필요합니다. 그것이 없이는 현시점의 세계를 수습할 수 없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앞으로 우리 통일교회가 바라고 나가는 최고의 자리가 어떤 곳이냐 하는 것이 문제가 될 것입니다. 그러니 그것을 확실히 알아야 합니다. 다시 말하면 우리 통일교회가 바라보는 신앙의 목적지가 어디냐? 그 목적지를 향하여 가는 데 있어서 중심이 무엇이냐 하는 것을 확실히 알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러지 못하고 희미한 신앙을 가진 사람은 언제든지 교회를 팔아먹을 수 있고, 언제든지 배반하고 그 길을 망칠 수 있는 것입니다. 자기 혼자만 망하는 것은 괜찮지만 따르고 있는 많은 사람들에게까지 피해를 입히고는 용서받을 수 없는 존재가 되어 버리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여러분은 중심에 대한 확실한 신념을 가져야 합니다. 중심이 없는 신앙관은 아무 소용이 없는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아까 말한 것과 같이 산맥을 타고 `나는 저 주봉을 향해 가겠다. 내 일생을 두고 가겠다. 어떠한 어려움이 있어도 극복하고 가겠다’고 하면서 가야 한다는 것입니다. 또, 그렇게 나섰으면 밤이나 낮이나 그것을 위해 준비해야 합니다. 그리하여 나섰을 때는 거기에 준비한 모든 전체를 투입해야 하는 것입니다. 투입하는 데 있어서도 있는 정성을 다해 가지고 투입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래도 계속적으로 갈 수 없을 경우에는 거기에 천막을 치고 제2차 훈련을 해 가지고라도 가야 되겠다고 해야 합니다. 그런 길이 신앙길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오늘날까지의 문화와 역사도 수많은 종교를 중심삼고 이렇게 수습되어 나오는 것입니다.

27-106
어느 길이 주봉으로 직행하는 길이냐
어느 길이 주봉으로 직행하는 길이냐 하는 것이 문제입니다. 이것을 모르고 사는 인생은 어떤 골짜기나 산봉우리, 혹은 어떤 7부 능선, 5부 능선, 2부 능성의 어느 한 곳에서 태어나 거기서 살다가 가는 인생에 지나지 않습니다. 그리고 `이렇게 사는 것이 내 소원이야. 이렇게 사는 것이 내게는 보람 있는 생활이야’라고 생각하고 생활하는 사람은 결국 그러한 사람밖에 될 수 없는 것입니다.

그러나 최고의 산맥을 추구하고 최고의 영봉을 점령하여 거기에서 바라보이는 모든 것을 관조하면서 무한한 가치를 느끼기 위해서는 그 이상을 희망해야 됩니다. 그러면 여러분이 통일교회를 믿고 나오고 있는데, 여기에 뭐가 있습니까? 여러분의 목표는 무엇입니까? 대한민국입니까? 이 목표가 희미하면 안 됩니다. 하나님은 어떤 분입니까? 하나님은 절대적인 분입니다. 그 하나님에게는 절대적인 하나의 기준이 있는데 그러한 하나의 기준 앞에 상대자로서 나타날 수 있는 기준도 하나인 것입니다. 만 우주를 대표한 하나입니다. 둘일 수 없습니다. 그래야만 하나님과 상대적 관계를 맺을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한 절대적인 하늘과 상대적 관계를 맺기 위해서는 싸워야 됩니다. 싸워야 돼요. 그 싸움은 아직 끝나지 않았습니다. 오늘날 통일교회가 종교를 중심삼고 싸움을 끝낼 수 있느냐? 그런 무엇이 있느냐? 우리가 바라는 신앙의 중심은 싸움을 끝낼 수 있는 자리입니다. 그야말로 절대적인 자리입니다. 절대적인 하나님을 추구하는 데 있어서 하나님이 한 분이시므로 하나의 자리를 추구하는 것입니다. 자기라 둘, 셋 있으면 싸워야 합니다. 거기에는 누구도 못 따라옵니다. 문제는 거기에 있습니다.

오늘날 수많은 교파가 있습니다. 이 수많은 교파 가운데 어떤 교파가 그 절대적인 하나일 것인가. 열 교파 가운데 최고의 교파일 것이냐? 아닙니다. 자그마치 `수많은 교파 가운데 최고다. 나아가서 이 시대 앞에, 더 나아가서 하나님 앞에 최고다’ 할 수 있는 교파이어야 합니다. 그래서 우리 통일교회는 그 수많은 교파를 하나로 통일하자고 하는 것입니다.

통일하는 데 있어서 우리가 통일당하는 것이 아니라 통일시키자는 것입니다. 통일시키기 위해서는 상대적 입장에 있어서는 안 됩니다. 그렇기 때문에 싸워야 합니다. 그러면 싸우는 데 있어서 무엇을 가지고 싸울 것이냐? 무엇을 가지고 그 일을 실천해야 하느냐? 말씀을 가지고 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 말씀은 절대자 앞에 상대가 될 수 있는 말씀이어야 하고, 그 인격은 절대자 앞에 상대가 될 수 있는 인격이어야 하고, 그 심정은 절대자 앞에 상대가 될 수 있는 심정이어야 합니다. 그렇지 못하다면 문제가 되는 것입니다. 이러한 모든 것을 합해서 지니고 나가야 합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말씀하시고 싶으면 나와 말씀하시고, 하나님이 일하시고 싶으면 나와 일을 하시고, 하나님이 사랑하기고 싶으면 나와 사랑하실 수 있는 자리까지 나가야 됩니다. 그런 의미에서 하나님은 절대자이십니다. 뭐 시시하게 너도나도, 누구든지 보따리 싸 가지고 끌고 다니면 되는 줄 아세요?

27-108
마음만 가지고는 안 되고 각오가 필요하다
지금 통일교회에도 시시껄렁한 패들이 많습니다. 지금까지 별의별 꼴을 다 보았습니다. 그런 녀석들, 얼마나 가나 보겠습니다. 마음으로야 전부 다가고 싶을 것입니다. 그러나 마음만 가지고는 안 됩니다. 그렇기 때문에 신앙자에게는 각오가 필요합니다. 그것도 자기 입장에서가 아니라 하나님의 입장에서 각오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믿는 자에게는 능치 못함이 없다’고 하는 것입니다. 이 말은 하나님께서 이끌어 주신다는 말입니다. 다시 말하면 하나님의 등에 업힌다는 말입니다. 그것은 절대적입니다.

그 길을 가는 데에는 모험이 따릅니다. 오늘날 우리가 가고 있는 길은 세상적으로 볼 때는 정상적이 아니라 비정상적인 길입니다. 거기에는 비(非)자가 몇천 개 몇만 개 들어간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그것을 정상적으로 만들려면 몇천만 번 싸워야 됩니다. 이 싸움의 길을 초월하려면 절대적으로 믿어야 합니다. 우리가 상대적인 내용을 가지고 기준을 세우려면 불가능한 것입니다. 그렇지만 믿은 마음이 있을 때에는 그 자리에 올라갈 수 있는 것입니다.

내가 마음속으로 세계의 대통령이 되고 싶다고 하면, 아니 세계의 대통령이 되겠다라고 하면, 그리고 그에 상응한 노력을 하면 실제로 대통령이 될 수 있습니다. 마음 세계가 그런 것입니다. 그러한 입장에서 이적 기사가 벌어지는 것입니다. 그런 입장에서는 초월적인 힘이 나와서 상대를 눕혀 버릴 수 있는 것입니다.

우리 통일교인들 가운데에도 자기 나름의 무엇을 해 가지고, 즉 누더기 보따리를 지고 다니는 거지패들이 많습니다. 통일교회에서 동냥해 가지고 그것을 다시 팔아먹겠다는 거지패들이 많다는 것입니다. 그런 패들과 어울려 다니는 껄렁껄렁한 것들, 어디 두고 보라는 것입니다. 어떤 명승지를 가게 되면 그 가는 길목에 불량배들이 많이 있습니다. 자기가 그 지방의 전체 책임자인 양 오고 가는 사람들을 옆으로 빼 가지고 돈을 우려 내려고 하는 패들이 많이 있는데 그런 패들과 같습니다.

27-109
적그리스도를 조심하라
여러분은 통일교회에 들어왔으면서도 선생님에 대해서 자신있게 알고 있지 못하고 있습니다. 선생님이 도대체 어떤 사람인지에 대해 모르고 있다는 것입니다. 지금 우리 통일교회 원리 가지고 밥벌이하는 사람이 많습니다. 소위 도인이라 해 가지고 별의별 짓을 다 하는 사람이 있다는 것입니다. 그들이 바로 용서할 수 없는 적그리스도입니다. 밥벌이를 하면 세금을 바쳐야 하는데 세금도 안 바칩니다. 이런 자들이 영계에 가면 사탄까지도 참소하게 됩니다. 그런 자를 성경에서도 주의하라고 했습니다. 그런 자가 미혹하는 사람입니다.

그런 사람은 자기 동무가 동쪽에 있으면 `이리로 가야 해. 이렇게 가는게 너하고 나하고 제일 가깝지 않느냐’ 하면서 곁길로 끌고 가는 사람입니다. 끌고 가는 사람은 곁길로 가는 것을 빤히 알지만, 따라가는 사람은 모르는 거예요. 이러한 일이 많이 일어납니다.

하나님께서 지금까지의 복귀노정에서 수많은 적그리스도를 대하신 것과 마찬가지로 통일교회가 이만큼 자라는 데 있어서도 적그리스도가 많았습니다. 여자 적그리스도도 한 사람만이 아니었습니다. 자기가 제일이라고, 자기가 인류의 어머니라고 하는 적그리스도가 많았습니다. 입은 쪼글쪼글하고, 이빨은 빠지고, 머리카락은 하얀 80세된 할머니가 세계에 없는 아들딸을 낳고, 인류의 어머니가 되겠다고 하는, 기가 막히는 일도 있었습니다. 젊은 사람이 그런 얘기를 하면 누구든지 믿을 수 있지만 팔다리가 불편한 노인임에도 불구하고 머리 들고 나오는 거예요. 별의별 꼴을 다 보면서 지금까지 나왔습니다.

왜 그런 일이 생기느냐? 물론 복귀도상에서는 그런 마음을 가질 수 있는 것입니다. 대통령 선거를 하기 전에 출마하겠다면 누가 뭐라 합니까? (웃음) 욕하는 사람이 더 이상한 거예요. 투표하기 전까지는 자신이 대통령이 되겠다고 생각하는 거예요. 지금이 그런 때입니다. 그러나 자신이설 때 못 설 데를 알지 못하고 눈을 뚱그렇게 뜨고는 이것 붙들고 저것 붙들고 하면 망하는 것입니다. 자기 혼자 곱게 망하는 것은 괜찮지만, 자기로 인하여 문중 전체를 망하게 하고, 나라까지 망하게 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런 것이 과거의 신앙체제에서는 괜찮았지만 지금은 세계의 사조가 전부 최고봉을 향해 가는 때이기 때문에 안 되는 겁니다.

27-110
신앙은 확실히 알고 해야
그래서 지금은 자기의 정체를 전부 폭로하는 때입니다. 공산당도 이제까지는 세계 제패라는 붉은 야욕을 숨기고 나왔지만 지금은 전부 폭로하는 때인 것입니다. 민주주의면 민주주의, 신앙자면 신앙자 모두 폭로할 때라는 거예요.

그렇다고 해서 자기 자신이 `나는 이렇소’ 하고 나타낼 수는 없는 거예요. 통일교회 문선생이 아무리 위대하다고 해도 내 자신이 그렇다고 하면 되나요? 배경이 맞아야지요. 정상적인 뿌리를 갖추어야 되는 것입니다. 뿌리없이 물 위에 뜨는 부평초와 같아서는 안 되는 거예요. 정상적인 기준에 뿌리를 박고 올바른 줄기를 뻗어, 사방에 그 형태가 드러나야 되는 것입니다. 다른 나무 뿌리에 포도나무 가지를 접붙여 놓지도 않고 포도나무라구요? 그래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신앙자의 자세는 그래서는 안 돼요. 신앙자는 목표에 대한 인식이 확실해야 됩니다. 누가 뭐라 해도 자신의 생명을 투입해 가느니 만큼, 그 목표를 자기 생명 이상의 가치로 인정해야 합니다. 중심에 대한 확실한 신뢰를 가져야 되는 거예요. 아무리 자기를 지도하는 지도자라 할지라도 그를 감별해야 됩니다. 그리하여 확실한 신념을 가져야 됩니다. 그렇게 될 때 거기서부터 통일교회에 대한 신념을 갖게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믿으려면 하나님에 대해서 확실히 알아야 됩니다. 하나님이 있는지 없는지 알아야 돼요. 예수님을 믿으려면 예수님에 대해서 확실히 알아야 됩니다. 소설이나 세계적인 명작을 쓰는 사람이 성경을 읽게 되면, 훌륭하다고 할 수 없습니다. 문장도 그렇고 내용도 그렇다는 거예요. 뭐 밤 도깨비와 낮 도깨비가 함께 춤추는 것 같은 거예요. 성경에 체계가 있나요? 뭐가 있나요? 그냥 이랬느니라, 저랬느니라만 늘어 놓았지요. 그렇지 않아요? 문학적 두뇌를 가진 사람이라면 까짓 것 몇 달 동안에 만들어 낼 수 있는 내용입니다.

예수님을 믿으려면 예수님에 대해서 확실히 알아야 됩니다. 예수님이 2천년 전에 있었는지 없었는지 알게 뭡니까?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인지 아닌지 알게 뭐예요. 이스라엘 민족을 전부 자기 수중에 넣기 위한 꿍꿍이속을 갖고 `내가 하나님의 아들이다’라고 했는지, 또한 절대적인 자리에서 자신을 신봉시키기 위해서 그랬던 것인지 알게 됩니까? 그런 것을 다 감정해야 되는 겁니다. 덮어놓고 믿고 덮어놓고 교회에 간다고 하는데, 그래 가지고 안심하고 천당 가겠어요? 그래 가지고는 지당도 못 갑니다. 천당이 무엇입니까? 남이 믿고 간다고 해서 자기도 가는 곳이예요? 남이 믿고 가니까 자기도 믿고 간다는 사람은 장애벽에 부딪치면 다 깨져 나갑니다. 아무리 나라가 반대해도 그 이상의 신념을 갖고 있으면 남아질 수 있으되 그러한 신념을 갖지 못하고 있으면 깨져 나가는 겁니다. 깨져 나가게 되어 있어요.

27-111
확실한 각오가 필요한 이유
우리가 바라는 신앙의 중심이 이 세계의 어떤 사조나 어떤 권력 앞에 밀려 나가서는 안 됩니다. 그러한 존재를 믿고 나가는 것이 우리가 바라는 최고의 신앙의 기준이 아닙니다. 그러한 자리는 절대적인 자리가 아닙니다.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에 대한 인식이 확실해야 됩니다.

그러고는 `나는 간다. 틀림없이 간다. 하나님이 바라시는 세계는 이러한 세계다. 다른 어떤 기준이 있을 수 없다’고 할 수 있는 확실한 신념으로 가져야 합니다. 세월이 흘러 죽어 가는 일이 있더라도 그 신념이 변해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지상에서 이루지 못할 때는 영계에 가서라도 하나님이 바라시는 세계를 개척해 가야지 이대로 지체할 수는 없다는 신념을 갖고 죽어야 저 나라에 가서도 지상에 재림하여 협조할 수 있는 것입니다. 어영부영 이것도 아니고 저것도 아닌 생활을 하다가 죽어 보십시오. 지상 재림을 할 줄 압니까? 지상재림하는 것을 안다고 해서 누구라도 지상재림할 수 있는 줄 아세요. 그런 것은 여러분보다 영계에 있는 영인들이 더 잘 압니다. 그런데 그 영인들이 왜 못 오느냐? 그것은 그들이 땅 위에서 그러한 신념을 갖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여러분은 신앙의 중심에 대해서, 그리고 목표에 대해서 확실히 알아 두라는 것입니다. 그것은 초월적인 존재여야 됩니다. 신앙생활을 하는 것은 자기의 현재의 입장보다 더 낫기를 바라기 때문에 하는 것입니다. 그 절대적인 요구의 기준에 도달하기 위해서는 절대적인 내용을 지닌 처음의 신앙의 중심 기준이 불변해야 된다는 겁니다. 춘하추동 사시가 변하는 것도 일년권내에서 변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아무리 환경이 변한다 할지라도 자신의 목표 아래에서 놀아야 되는 것입니다. 자신의 신념 아래서 놀아나게 해야 되는 것입니다. 신념이 왔다갔다해서는 아무것도 안 됩니다. 신념이 확실하지 않으면 아무것도 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각오가 무엇입니까? 결심입니다. 그럼 결심을 할 때 무엇을 갖고 합니까? 자신만을 믿고 결심합니까? 대상을 두고, 중심을 추구하고 하는 것입니다. 즉, 중심을 위해 `나는 한다’고 하면서 하는 것입니다. `한다’고 하는 것은 `했다’와 다릅니다. `한다’는 미래와 결부되는 것입니다. 이것은 시간성을 넘은 것입니다. 그러면 왜 해야 되느냐? 하는 여하에 따라 그 사람의 인격이 나타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격위도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그 창조물의 가치가 인정될 때 나타나는 것입니다. 그때 하나님의 가치가 결정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아직까지도 그 가치가 결정되지 못했기 때문에 복귀라는 사명을 중심삼고 창조물의 가치를 결정짓기 위해 지금까지 걸어 나오신 것입니다. 그것이 하나님의 구원섭리입니다.

그러므로 여러분은 신앙의 목표에 대해 확실한 신념을 가져야 됩니다. 그것을 갖지 않으면 아무리 각오를 하고 결심을 한다 해도 그것은 다 흘러가는 것이 됩니다. 자기 나름대로 아무리 각오와 결심을 했다 하더라도 누구든지 다 흘러가는 것입니다. 자기는 아무리 꽁꽁 싸 매 놓아도 도둑질해 갈 것은 다 해 갑니다. 이와 마찬가지예요.

천주교가 신교를 반대하던 중세사회를 보더라도 신앙을 중심삼고 죽어간 자들이 많았습니다. 그 순교의 반열에 동참한 자들은 나의 하나님이라는 확신을 가졌습니다. 그 누구도 느끼지 못하는 깊고 깊은 체휼을 통하여 세상 사람들이 반대해도 그것을 넘었습니다. 그 이상의 가치를 가졌던 것입니다. 자신의 생명을 투입하더라도 손해보는 것이 아니라 그것으로 말미암아 선의 결과가 맺어진다는 확신을 가졌던 것입니다. 그런데 그와 같은 확신을 갖지 못하고 막연히 내가 이렇게 죽으면 천국 데려다 주겠거니 하는 사람은 천국 못 가는 거예요. 가다가 걸리는 겁니다. 지금도 마찬가지입니다.

여러분이 통일교회의 일을 하기 위해서는 새로이 신앙자의 각오를 가져야 됩니다. 중심에 대한 확실한 신념을 갖지 않으면 안 됩니다. 그 중심을 세계 이상의 중심으로 알기 전에는 세계를 요리할 수 있는 신앙생활을 할 수 없는 겁니다. 신앙의 인격을 가려 낼 수 없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여러분은 신앙의 중심에 대해 확실한 신념을 가져야 합니다. 여러분에게는 그게 제일 문제입니다.

27-113
신앙자가 가져야 할 바른 태도
앞에서 말한 산의 주봉에 올라가길 바란다면 밤이나 낮이나 그것을 중심삼고 가야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마음의 세계에서 천번 만번 가 보고 옳은 길이라고 느꼈을 때 비로소 행동할 수 있습니다. 마음속으로 그렇게 하지 않고서는 행동이 안 되는 것입니다. 마음속으로 천번 만번 다짐하고 나서 가야 하는 겁니다. 스스로 다짐하고 나섰기 때문에 가다가 어떠어떠한 위험이 닥칠 때 그 위험을 해결하기 위해 재료를 수습하는 것이 신앙생활인 것입니다. 무슨 말인지 알겠어요?

신앙생활은 그냥 하는 것이 아닙니다. 신앙생활이란 것은, 주봉이면 주봉을 정복하기 위하여, 상상봉이면 상상봉을 정복하기 위하여 거기에 필요한 재료를 수습하는 것과 같습니다. 그러므로 여러분은 어려운 고비가 닥치면 그 고비를 피해 돌아갈 것이 아니라 헤치고 나아가야 됩니다. 지금 당하고 있는 어려운 일보다도 더 어려운 일을 당하게 될지라도 나는 거기서 망하지 않는다고 하는 진지한 입장에서 그 어려움을 내것으로 소화시킬 수 있는 주체적인 자아를 발견하기 위해서 노력해 가야 됩니다.

그렇게 할 때 내 앞에 닥쳐오는 어떠한 시련이나 폭풍우는 문제가 안됩니다. `시련이나 폭풍우야 오너라. 나는 여기에서 내일의 승리를 다짐할수 있는 빛나는 재료를 수습해야 되겠다’고 하며 나아가야 합니다. 그런데 통일교회에 들어와서 별의별 짓을 하는 녀석들이 많습니다. 뭐가 어떻고 어떻다고 하는 말에 덩덜아 춤추고 놀아나는 패들이 많습니다. 그것은 신앙자의 태도가 아닙니다.

신앙자에게는 `제일 험하다’는 말, `어렵게 간다’는 말, `나쁘다’는 말이 필요합니다. `제일 쉽게 간다’는 말, `좋다’는 말은 필요하지 않습니다. 나쁘다는 말을 들어야 해요. 그런 말이 자신을 망하지 않게 하는 관건이 될 수도 있습니다. 좋은 것은 누구나 다 좋은 것이지요. 그런 것은 필요없는 거예요.

대한민국이 부흥하는 데 동정할 게 뭐 있어요? 대한민국이 망할 수 있는 부패의 요인이 있으면 그것을 제거하는 데 주력해야 되는 거예요.

요즘 처음 들어온 사람들을 보면 사냥개처럼 냄새를 맡으려고 합니다. 냄새를 맡아도 정상적으로 맡는 것이 아니라 주둥이를 끌고 다니면서 똥개처럼 똥 냄새만 맡으려고 합니다. 통일교회에 들어왔으면 선생님을 중심삼고 문제를 해결해야지 시시한 껄렁패들과 어울려서 무슨 일을 하겠어요? 그런 시시한 껄렁패를 대하는 자체가 시시한 거예요. 선생님이 이런 말을 하는 것은 1969년도가 이미 저물어 가고 있기 때문입니다. 새로운 자세를 확립해야 할 때가 오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여러분이 신앙자로서, 통일교회의 신자로서 가져야 할 새로운 자세를 가져야 합니다. 여기에서 가장 중요한 문제는 중심에 대한 확고한 신뢰를 갖는 겁니다. 그러한 신념을 갖기 전에는 아무리 각오를 해도 아무 소용이 없는 것입니다. 이 길을 감에 있어서 어떠한 일에 부딪치게 되면 나는 어떻게 될 것이냐? 자문자답해 보십시오. 이 길을 가다보면 여러분 앞에 그 누구보다도 가까운 사람이 여러분을 유인할 것입니다. 달콤하고 귀가 솔깃한 말을 할 것입니다. 여러분의 가는 길을 가로막고 여러분을 그 자리에서 끌어내기 위해 별의별 짓을 다 할 것입니다. 그럴 때 여러분은 어떻게 할 것이냐? 자기 얼굴을 보고 물어보라는 것입니다. 그때 여러분은 `비켜라 이 요물아. 나는 밤이나 낮이나 이 길을 갈 것이다’라고 해야 됩니다. 그거 얼마나 멋집니까?

27-115
시험을 통과하기 위해서도 굳은 각오가 필요
여러분, 역적의 종자가 따로 있는 게 아닙니다. 배반자의 종자가 따로 있는 것이 아닙니다. 그 사람이 얼마만큼 심각한가 하는 그 도수에 따라 누구든지 80퍼센트 90퍼센트 백퍼센트 배반자가 될 수 있습니다. 왜? 배반자의 혈통을 타고났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배반자의 혈통을 타고났기 때문에 본래부터 배반자인 것입니다.

이제는 정녕 그런 것을 시험당할 때가 올 것입니다. 그것이 원수로부터 올 때 나는 자신있다고 하겠지만 하나님으로부터 온다면 어떻게 할것입니까? 하나님으로부터도 온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 문선생이 들이친다면 어떻게 하겠습니까? 여러분이 참것을 알았으니 여러분을 용광로에 집어넣어 볼 것입니다. 그러면 그때 여러분은 어떻게 할 것입니까? `아이고! 이럴 줄은 몰랐다’고 할 것입니까? 그럴 줄 몰랐다고 할 수 있는 그 일이 벌어지면 어떻게 하겠어요? 여러분은 각오를 단단히 해야 합니다. 통일교회 자체가 껄렁껄렁한 것이 아닙니다. 선생님은 지금 그렇게 생각하고 있습니다. 여러분은 깨달아야 합니다.

여러분이 나라를 위해 맹세했다면 진짜인지 테스트를 한번 해보아야겠습니다. 선생님도 지금까지 그러한 시련과 테스트를 당해 나왔습니다. 참인지 아닌지는 딱 부딪쳐 보아야 합니다. 어떤 것이 굳은 것이고 어떤 것이 무른 것인지는 부딪쳐 보아야 할 수 있습니다. 굳은 쇠를 감정하는 데에는 그것이 제일 간단한 방법입니다. 그와 마찬가지로 사람은 굳은 자인지 무른 자인지 조금만 고생시켜 보면 대번에 알 수 있습니다.

굳은 것이라면 망치로 때려도 차이가 안 납니다. 그렇지만 무른 것은 조금만 힘 주어 때려도 금방 표시가 납니다. 감별법은 간단해요. 그렇게 굳은 것과 무른 것을 감별하는 곳이 통일교회입니다. 그 시험조건이 원리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여러분을 원리가 심판하는 겁니다. 복귀노정을 가는 데있어서 여러분의 길목을 원리가 바라보고 있는데 그것이 시험 문제인 것입니다.

그러면 통일교회 문선생은 어떻게 했느냐? 이 시험을 통과했습니다. 원리를 알고 보면 시시한 말은 들을래야 들을 수가 없습니다. 어제 저녁만 해도 통일교회 문선생이 뭐 어떻고 어떻고 하는 소리가 들려 왔습니다. 동대문 어디인가로부터는 선생님 외에 뭐가 나와야 된다느니 하는 별의별 말이 다 들려 왔습니다. 별 도깨비가 다 나오고 있습니다. 얼굴들을 보면 도둑 같은 얼굴을 해 가지고 뭐가 어떻고 어떻다고 야단입니다.

그러면 자기들이 어디서부터 출발했나요? 통일교회에서 출발했으며 통일교회 선생님이 인정하는 자가 되어야지요. 선생님이 축복을 안 해주면 하나님의 아들이 될 수 있어요? 세례 요한도 하나님으로부터 축복받고서야 유대교의 전통을 상속받지 않았습니까? 예수님도 세례 요한으로부터 요단강에서 세례를 받고서야 메시아로 나섰잖아요? 증거를 해주어야 됩니다. 자기가 주인 노릇을 해먹으려면 선생님이 증거를 해주어야 되는 거예요. 그런데 선생님이 증거를 해주지도 않았는데 어떻고 저떻고 합니다. 그런 자들을 어떻게 증거해 줍니까?

지금까지 별의별 사람들이 많았습니다. 그 가운데는 여자들도 많았습니다. 그러나 얼마 가지 못했습니다. 언젠가는 그런 사람들 데려다 간증을 시키려고 합니다. 그렇게 돌아다니다가 다시 통일교회에 들어 왔으면서도 부끄러운 줄도 모르는 못난 사람이 있습니다. 그러나 선생님은 그들이 몰라서 그랬기 때문에 아무말도 하지 않습니다. 선생님이 데리고 있는 협회의 사람을 평하는 것은 선생님을 평하는 것입니다. 시시한 자들이 협회장이 어떻니 간부가 어떻니 물고 늘어지지 말라는 것입니다. 그런 자들은 싸구려 넝마주이입니다. 고급 물건은 아무나 못 가집니다. 무슨 부흥 강사니 무슨 장로니 하는 관점에서 선생님을 보면 안 됩니다. 그들 자신은 자신이 싸구려라고 느끼지 못합니다. 그들처럼 선생님은 공석에 안 나타나기 때문에 통일교회 문선생을 봤다는 사람은 많지 않습니다. 선생님은 싸구려 넝마주이가 아닙니다. 그러나 지금 때가 왔기 때문에 여러분을 모아 얘기하는 것입니다.

통일교회는 선생님으로 말미암아 시작된 것입니다. 그러니 밥을 얻어 먹으려면 자기가 거지라는 간판을 붙이고 얻어 먹으라는 것입니다. 밥을 얻어다 놓고 부자 행세하며 잔치하지 말라는 겁니다. 아무것도 모르는 사람들은 따라가게 되어 있습니다. 이런 것을 생각할 때 아무리 떠돌아 다니는 말이라 하더라도 선생님이 직접 한 말이 아니면 믿지 말아야 합니다.

27-117
나는 시시껄렁하게 이 길을 출발하지 않았다
선생님을 잘 몰라 가지고는 안 됩니다. 여러분, 선생님을 알아요? 여기, 선생님 안다는 사람 있으면 손들어 보세요. 얼굴이야 알지요. 선생님의 가는 길을 알아야 합니다. 여러분의 갈 길이 바쁘니만큼 여러분은 선생님이 움직이는 것을 연구대상으로 삼아야 됩니다. 선생님은 적어도 이 길을 출발할 때는 누구 말처럼 시시껄렁하게 출발하지 않았습니다. 길거리에서 얻어먹고 할 일이라면 시작하지 않았습니다. 그렇게 데데하게는 시작하지 않아요. 그렇게 데데하게 시작했다면 벌써 깨지고 말았을 것입니다. 이제까지 깨어질 고비를 수없이 겪어 왔습니다. 지금처럼 이러쿵 저러쿵 소문을 내고 말이 많았던 자들은 한꺼번에 도망가는 것입니다.

지금까지 수십 수백 고개를 넘어왔습니다. 만나러 가는 중심의 자리를 향한 확고한 신념이 선생님에게 있었습니다. 그러한 선생님의 신념은 세계가 바뀌어진다 하더라도 바뀔 수 없는 것이었습니다. 이 길을 가는데 있어서 선생님은 그런 절대적인 입장에서 그런 절대적인 신념을 갖고 있습니다. 여기에는 추호의 의심도 없습니다. 배고플 때 밥 먹는 것보다 더 간절한 것입니다.

그러한 각오로 가는 것입니다. 그러한 각오로 가도 부작용이 많은데 이건 데데해 가지고 꽹과리 들도 두드리는데 박자 맞추고 춤추면 다 되는 줄 알아요? 그런 것을 보면 기분 나쁠 때가 많습니다. 호랑이 새끼를 만들려고 했는데 삵괭이 새끼가 되어 있기 때문이예요.

여러분의 눈과 여러분의 마음이 누구를 믿습니까? 무조건 믿을 수 없는 거예요. 통일교회 문선생도 무조건 믿지 마세요. 무조건 믿는 것을 나는 원치 않아요. 믿으려면 분석해 보고 진짜로 믿으세요. 영계에 들어가서 담판을 짓고 나와서 믿으세요. 그것이 내가 주장하는 바입니다.

통일교회 문선생님이 어떤 사람이라고 내가 직접 설명하지 않았습니다. 여러분이 어떠한 사람이라고 증거했습니다. 나는 나를 위해 믿으라고 강조하지 않습니다. 영계가 강조하는 거예요. 영계에서 알려주기 때문에 여러분이 여기에 붙어 있는 것이지요. 그렇지 않으면 붙어 있을 게 뭡니까? 그런데 요즘에 통일교회에 들어온 사람은 그것도 없어요. 그런 마음 기대를 갖고 있지 않다는 것입니다.

신앙길을 가는 데 있어서 내게는 나로서의 각오, 즉 통일교회 선생님으로서의 각오가 있는 것입니다. 그렇지 않겠어요? 세계적인 사명을 감당하기 위해서 세계적인 시련과 고통이 도래한다 할지라도 극복하겠다는 각오가 서 있다는 것입니다.

끌려가는 꼬리가 머리를 끌 수는 없는 것입니다. 거꾸로 끌면 되지 않겠느냐고 할지 모르지만 그런 법은 없는 거예요. 기차도 맨 앞에 있는 기관실에서 끌게 되어 있는 것이지 맨 끝 찻간에서 끌게 되어 있지 않다는 것을 알아야 됩니다.

27-118
중심에 대한 확고한 신념
그러므로 여러분이 알아야 할 것은 확고한 신념이 있어야 된다는 것입니다. 중심에 대한 확고한 신념이 있어야 됩니다. 나는 이렇게 할 것이라는 확고한 신념이 있으면 10년이 문제가 아닙니다. 언제까지라도 나는 이 길을 가겠다고 딱 정하라는 겁니다. 나는 제1차 노정에서 이러한 정신으로 나가겠다는 프로그램을 짜라는 겁니다. 처녀의 몸으로서 그런 결심을 하려 했을 때 `아 나는 3,40대가 되어도 결혼을 못 하는 것이 아닌가?’ 할지 모르지만 그런 것을 걱정해서는 안 됩니다. 통일교회에 결혼하기 위해서 들어왔다면 데데한 것입니다. 결혼이 문제가 아닙니다. 죽음이 문제가 아닙니다. 중심에 대한 확고한 신념을 갖고 있으면 하나님의 선물로 갖다 주시는 것이 결혼입니다. 그래야 자기가 사는 것입니다.

그래 가지고 출발해야 할 길이 이 길입니다. 그런데 처음부터 길을 가다 말고 뭐가 어떻고 어떻고 떠들고 다니더니 얼마 안 되어 시시하게 누더기 보따리 쓰고 이러구(제스쳐하심) 앉아 있으니 기가 막힌다는 겁니다. 얼마나 기가 막힙니까? 그 자신 한 개체만 망하는 것은 괜찮지만 잘못하면 자기 선조 70대까지 걸리는 겁니다. 선한 선조라고 했던 그 선조들이 지금에 와서 후손의 잘못으로 인해 전부 걸려 들어간다는 거예요.

영계는 평면적인 세상처럼 되어 있지 않습니다. 아주 심각한 것입니다. 여러분의 선조들이 영계에서 여러분이 처음 이 길을 나설 때는 좋다고 자랑했지만 여러분이 얼마 안 되어 시시하게 이러쿵 저러쿵 하면 여러분의 선조들은 사탄으로부터 `너의 몇대 손자 손녀 꼴을 봐라 처음에는 잘 되어 가더니 저게 뭐냐’ 하는 조롱을 받게 되는 것입니다. 복귀섭리를 위해서, 즉 아담과 해와가 이루지 못했던 것을 이루기 위해 몸부림쳐야 할 것이 통일교인인데 만약 옛날 아담 해와처럼 또 사탄의 종새끼가 되면 아담 해와보다 더 나쁜 입장에 떨어지게 되는 것입니다. 이러한 엄청난 문제가 벌어진다는 것입니다.

이런 것 저런 것을 다 알고 있기 때문에 내가 지금까지 이러한 일을 해 나온 것입니다. 여러분도 생각해 보세요. 선생님이 여러분보다 못해서 이런 일을 하는 것입니까? 내가 여러분을 데려간다고 해서 잘 될 게 있습니까? 내가 여러분을 도와주고 피땀 흘려 여러분을 구원하려고 이 일을 하는 것이지, 여러분의 신세를 지려는 것이 아닙니다. 여러분은 그걸 알아야 됩니다.

이 길을 걸어 나오는 데 있어서 벌써 숱한 수난의 고비를 거쳤습니다. 예수님처럼 30대에 죽는 것은 간단한 것입니다. 우리의 죄를 위해 십자가에서 피흘리고 죽었다는 것을 생각하고 옛날에는 불쌍하다고 동정도 했지만 지금은 동정하지 않습니다. 신앙세계에서 그것이 뭐가 힘듭니까? 그만한 각오를 못해 가지고 큰 뜻을 이룰 수 있겠습니까? 나는 그러한 각오 밑에서 이 길을 개척해 나왔습니다.

27-119
심판의 고개를 넘어서려면
그런데 소위 축복을 받았다는 자들 가운데 뭐가 어떻고 하며 말이 많은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렇게 하라고 축복해 준 것이 아닙니다. 앞으로 두고 보라는 거예요. 그러지 않기 위해서 여러분이 알아야 할 것은 신앙의 중심에 대해 확실한 신념을 가져야 된다는 것입니다. 그 신념이 얼마만큼 철석같으냐에 따라 오늘의 내 자신의 각오가 성립되는 것입니다.

통일교인들 가운데에도 누구에게는 이렇게 해주고 나에게는 이렇게 해줬다고 섭섭해 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나는 그런 사람들을 제일 싫어합니다. 그런 것을 들고 나오는 사람들은 가인 아벨의 원리를 모르는 사람들입니다. 가인 아벨의 원리를 안다면 어떻게 그렇게 해 달라고 할 수 있겠습니까? 결국 그러한 자는 가인의 입장이 아니겠어요? 하나님께 `아버지, 왜 아벨의 제물은 받고 내 제물은 안 받아 줍니까?’라고 불평하는 가인과 같다는 것입니다. 그런 사람은 통일교회의 정상적인 전통을 중심삼고 볼 때 전부 배역자입니다. 배역자예요.

그래서 내가 일부러 그럴 때도 있습니다. 선생님은 공장에서도 어떤 사람을 쓰고 싶으면 그 사람을 제일 어려운 자리에서 3년간 생활해 보게 합니다. 그래서 3년간은 그 사람을 주시만 하고 얘기도 안 합니다. 어떻게 하나 보기 위해서지요. 그런데 잘 나가다가 2년 8개월쯤 되면서부터 고개를 들기 시작합니다. 여러분은 전부 다 그러한 입장에 있습니다.

큰일을 책임지고 큰일을 해 나가려면 그런 인격을 갖추고 있어야 합니다. 여러분은 어떠한 마음으로 움직이고 있습니까? 나는 지금까지 많은 사람을 지도해 왔기 때문에 사람에 대해서는 전문가입니다. 아무리 변명을 해도 그 사람의 마음을 벌써 파악하는 것입니다. `지금 너는 이렇게 가고 있구나’ 하고 아는 거예요. 그러나 알면서도 말하지는 않습니다.

여러분이 가진 신념이 최고라고 생각하면 한번 해보라는 것입니다. 데데한 싸구려는 되지 말라는 겁니다. 그러려면 신앙의 중심에 대한 확고한 신념을 가져야 합니다. 그것은 부끄러운 것이 아닙니다. 부끄러워 가지고는 하늘 앞에 서지 못합니다. 천도를 바로잡지 못합니다. 여러분이 그러한 신념 밑에서 각오를 하면 그 각오는 몇해를 갑니다. 결국 무슨 말이냐면, 자신이 잘살겠다거나 잘되겠다고 생각하지 말라는 거예요. 우리는 타락한 선조의 후손으로 태어났기 때문에 신앙생활을 해서 자기가 잘되겠다거나 복받겠다는 생각을 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복받겠다고 자꾸 고대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그것은 잘못된 생각입니다. 신앙생활을 해서 어떻게 하면 잘 죽을 것인가, 또 잘 망할 것인가 하는 것을 생각해야 합니다.

하늘이 지금까지 역사해 나오신 것은 이 사탄 세계를 망하기 하기 위한 것이었습니다. 사탄 세계의 개인을 망하게 하기 위한 것이요, 사탄 세계의 가정, 사탄 세계의 종족, 사탄 세계의 민족, 사탄 세계의 국가, 나아가 사탄 세계 전체를 망하게 하기 위한 것이었습니다.

그러므로 여러분이 이 고개를 넘어가기 위해서는 어떻게 하면 뜻을 중심삼고 잘 죽을 것인가를 생각해야 합니다. 문제는 그것입니다. 어떻게 죽을 것이냐 하는 것이 문제라는 거예요. 본래 타락이 사망권에서 출발했기 때문에 거기에서 벗어나기 위해서는 죽음을 해결하고 나서야 합니다. 영계의 지옥에 가서 고생해야 할 것을 현실 지옥에서 탕감하자는 것이 통일교회의 탕감법입니다.

27-121
신앙길과 하나님의 동정
통일교회는 아무나 오는 곳이 아니요, 아무나 믿을 수 있는 교회가 아닙니다. 특정한 사람, 즉 그 나라의 운명을 좌우할 수 있는 사람이나 그 나라의 충신 열녀의 혈족으로 태어난 후손들만이 들어오게 되어 있는 곳입니다.

그러므로 여러분은 자부심을 가지세요. 나는 세상 사람들과 다르다는 신념을 가져야 합니다. 그 신념을 중심삼고 생사를 걸어 놓고, 행불행을 걸어 놓고 주체와 나와의 문제를 해결짓고 나서야 합니다. 하나님과 우리 자신 가운데는 불행의 요건이 감돌고 있습니다. 사망의 물결, 사망의 파도, 사망의 성벽이 가로놓여 있습니다. 이것을 어떻게 타개하느냐가 문제입니다. 이 불행의 요건을 타개하기 위해서는 지금보다 더 불행한 자리로 가겠다고 해야만 하늘이 동정하게 됩니다. 죽음의 고개를 넘기 위해서는 백번을 죽겠다고 해야 하나님으로부터 한번 동정받을 수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으로부터 동정받을 수 있는 인연을 갖지 못하면 이 길을 못 가는 것입니다. 남아질 수 없다는 것입니다.

오늘날까지 통일교회는 그토록 많은 시련과 고통을 겪어 나왔지만 나는 지금도 하나님이 동정하실 수 있는 자리를 잃지 않고 지키기 위하여 밤낮으로 투쟁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이 동정하실 수 있는 나, 하나님이 동정하시지 않을 수 없는 내가 되기 위해서는 어려운 것을 선두에 서서 책임지고 갈 수 있어야 합니다. 여기에는 물론 어려운 것도 있고 싫은 것도 있습니다. 또 따르는 사람들이 부족해서 짐을 되는 경우도 있습니다. 그러나 내가 져야 할 짐은 통일교회만의 짐이 아닙니다. 삼천만의 짐을 져야 되고 30억 인류의 짐을 져야 하는 것입니다. 져야 할 짐이 많아요.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이와 같이 많은 짐을 달갑게 지기 위해 훈련을 받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신앙 생활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또 그렇게 생각하기 때문에 우리는 불평하지 않고 지치지 않는 것입니다.

여러분에게는 새로운 각오가 필요합니다. 주체에 대한 새로운 인식, 새로운 결의, 새로운 신념을 더 강하게 가져야 합니다. 그것을 갖지 않으면 아무리 힘을 내려고 해도 안 되는 것입니다. 아무리 이 길을 가려고 해도 갈 수 없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여러분은 마음속에 그러한 확실한 신념을 결정하고 내일의 희망을 바라보고 나가야 합니다. 민족이나 국가, 세계, 그 어느 것이든지 자신의 역량에 맞는 기준을 세우면 되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자기 나름의 목적을 세워 놓고 그것을 위해 자신의 능력의 한계권내에서는 어느 누구에게도 뒤지지 않겠다고 해야 합니다. 나는 이 이상은 할 수 없으니 이 한계권내에서 제일이 되겠다고 해야 돼요. 그리하여 시간을 투입하는 데 있어서나 정성을 들이는 데 있어서나 누구에게도 지지 않는 최고의 역량을 발휘해야 하는 것입니다.

1년, 2년, 10년, 30년, 40년, 혹은 죽는 순간까지도, 내가 못하면 몇대의 후손에게까지라도 유언을 하여 그 정성의 도수를 채우겠다고 생명을 걸고 나가는 사람 앞에서는, 아무리 크게 떠드는 사람이라 하더라도 다 쓰러지게 됩니다. 하나님은 그런 사람에게 복을 주시어 그 몇백 배, 몇천 배의 자리까지 끌고 가려 하십니다. 거기에서 힘이 부족하고 그 자격이 부족할 때는 하나님이 대신해서 역사하심으로서 그 길을 타개해 제2의 목적의 후계자로 세우신다는 사실을 여러분은 알아야 되겠습니다.

27-122
빚은 안 지겠다는 것이 선생님의 철학
그렇기 때문에 통일교회에 들어왔으면 통일교회가 망한 다음 통일교회를 장사 치르고, 3년상을 지낸 후 떠나겠다고 하는 사람이 될 때 그는 통일교회의 후계자가 될 수 있는 것입니다. 무슨 말인지 알겠어요? 그러므로 여러분은 선생님 이상의 신념을 가지고 실천해야 합니다.

지금까지 여러분은 가인의 입장이고 선생님은 아벨의 입장이니만큼 선생님의 말에 절대 복중하고 믿어야 합니다. 가르쳐 주는 사실을 믿으라는 것입니다. 이것을 분석 감정하려면 일생 동안 해도 못합니다.

불가능해요. 여러분이 복귀원리를 보십시오. 선생님이 지금까지의 역사를 축소시켜 현실적인 무대에서 사실적으로 탕감노정을 걸었다는 것은, 원리를 실천했다는 사실은 간단한 것입니다. 여러분은 십년 전이나 지금이나 마찬가지이지만 통일교회 문선생은 그렇지 않습니다. 밤이나 낮이나 발전하고 있어요. 그렇기 때문에 통일교회는 망하지 않는 것입니다. 밤이나 낮이나 나만은 발전한다는 것입니다.

복귀의 길은 모두가 안 가려고 합니다. 완전한 개인 가정 종족 민족 국가 세계 천주에 있어서 중심은 가정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의 복귀 섭리 역사에 있어서도 노아 가정, 아브라함 가정, 야곱 가정, 모세 노정, 예수님 가정 등의 가정이 세워졌던 것입니다. 중심 가정은 많은 가정이 아니라 한 가정이면 됩니다. 종족을 대신할 수 있고, 민족을 대신할 수 있고, 국가를 대신할 수 있고, 세계를 대신할 수 있고, 천주를 대신할 수 있는 한 가정이면 돼요. 하나님의 심정을 중심삼고 일치된 한 가정이면 되는 것입니다. 그러한 의미에서 선생님은 양보하지 않습니다. 개인으로서도 나은 자가 되어야겠고, 가정으로서도 나은 가정을 만들어야겠습니다.

어느 누가 이렇고 저렇고 해도 선생님이 말 세 마디만 하면 머리 숙일 수 있는 내용을 갖고 있습니다. 오늘날 세계를 다스리는 어떠한 주권자의 가정 앞에서도 나는 뜻을 중심삼은 이러이러한 내용을 갖고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세계의 그 누구도 머리 숙일 수 있는 내용을 갖고 있어요. 부정할 수 없는 하나님의 동정적 내용을 갖고 있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누구도 점령하지 못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남아 있을 수밖에 없으며, 또한 통일교회는 세계를 정복할 수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가정을 중심삼은 이 천주 이상의 씨가 지금은 얼어붙은 얼음 안에 있기 때문에 아직까지 싹은 트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결코 죽지는 않았습니다. 봄이 되기만 하면 보자는 것입니다. 봄철만 되면, 새로운 때가 오기만 하면 활짝 피어날 수 있는 생명력을 갖추고 있다는 것입니다. 세계로 뻗어 나갈 수 있는 생명의 원천적인 내용을 구비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세계가 망하면 망했지 통일교회의 문선생은 망하지 않습니다.

지금까지 나는 누구에게도 빚을 지지 않았습니다. 정성을 들이는 데있어서도, 기도를 하는 데 있어서도 빚을 안 지는 것입니다. 빚을 안 지겠다는 것이 선생님의 철학입니다. 절대 여러분에게 빚을 지지 않습니다. 선생님은 편한 생활을 하려고 하지 않습니다. 이런 면에 누구보다도 신경을 더 많이 씁니다. 우리 통일교회의 어느 누구보다도 시간적인 비율에 있어서나 정성의 퍼센트에 있어서나 몇 배가 되는 내용을 뜻을 위하여 투입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 면에 있어서 여러분에게 빚을 안 진다는 것입니다.

선생님이 이제까지 말한 것이 세계적으로 이루어지고 있습니다. 왜 그렇게 되는 것이겠습니까? 그렇게 안 되면 안 되게 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여러분 가운데 생각 있는 사람 같으면 뭘 좀 아는 사람 같으면 선생님이 말씀하는 것을 쭉 보게 되면 뜻에 대해 확실히 알 수 있을 것입니다.

27-124
탕감복귀의 길에서 반대받는 것은 당연한 것
세계적으로 볼 때 금후에는 한국이 문제가 아니라 통일교회 미스터 문이라는 사람이 문제입니다. 지금 미국의 국무성에서는 선생님에 대해 연구하고 있습니다. 아무리 연구해 봐야 알 게 뭡니까? 내용을 모른다는 것입니다. 통일교회에 와서 배워야 해요. 또 일본 정부도 나름대로 연구하고 있습니다. 전적으로 통일사상이 무엇인지 연구하고 있습니다. 연구는 하고 있지만 배워야 하는 것은 불가피한 것입니다. 연구해 보면 나쁜 것 같기도 하고, 좋은 것 같기도 하겠지요. 그렇게 되어 있습니다. 소문이 나쁘게 나는 것도 한편으론 좋은 것입니다.

한참 격전이 벌어질 때는 적군의 시체도 방어진지가 됩니다. 냄새 나는 시체도 방어진지가 된다는 거예요. 그럴 때는 죽어 쓰러진 시체 뒤에 엎드려서라도 공격을 해야 되는 것입니다. 통일교회에서는 그와 같은 작전을 하는 거예요. 사탄이 나쁘다고 제시하는 모든 조건을 갖고 공격하는 겁니다. 공격의 재료가 거기에 있습니다. 그래서 선생님은 소문 잘 내놓았다고 생각합니다. 그렇게 소문을 내 놓음으로 말미암아 우리가 연막을 뿌리고 작전을 할 수 있는 좋은 담벼락이 마련되는 것입니다.

통일교회 문선생이 어떻다고 신문에 실리고 있는데 얼마든지 기사화돼도 괜찮다는 것입니다. 때릴 테면 때리라는 것입니다. 선생님은 신문을 무서워하는 사람이 아닙니다. 선생님은 신문사를 무서워하지 않는 사나이예요. 그러니 그런 의미에서 선생님이 세계 최고일 수밖에 없습니다. 신문에 내려면 내라고 해요. 신문에 내 보았자 이제는 지금까지 낸 것을 우려먹는 수밖에 더 있어요? 이제 낼 것은 좋은 것밖에 없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미국에서도 먼저 통일교회가 좋다고 소문나지 말고 나쁘다고 소문나기를 바랍니다. 일본도 마찬가지입니다. 좋다고 소문나면 탕감복귀가 안 되는 것입니다. 좋은데 나쁘다고 소문이 나야 탕감이 되는 것입니다.

에덴 동산에서 아벨은 좋았지만 소문은 어떻게 났습니까? 나쁘게 났지요? 그 소문은 누가 냈습니까? 가인이 낸 것입니다. 여러분이 통일교회가 진짜인지 아닌지 무엇으로 알 수 있느냐? 통일교회 원리가 진짜고, 통일교회가 아벨적 입장이라면 반드시 가인이 생겨납니다. 알겠어요? 통일교회 말씀을 듣고 나서 가인이 생기나 안 생기나 두고 보세요. 가인이 생겨나면 통일교회 원리가 진짜요, 하나님이 자기를 이끌고 계신 것으로 알라는 것입니다. 통일교회가 확실하다는 것을 알고 또 자신이 아벨적인 입장에서 축복받을 수 있는 자리에 섰다는 것으로 알라는 것입니다.

더우기 부인들이 통일교회에 나오려고 하면 반드시 사고가 납니다. 첩을 얻었던 남편이 당신이 아니면 못 살겠다면서 다시 찾아 들어오는 것입니다. 또 처녀들이 통일교회에 나오려고 하면 옛날에 관계를 맺었던 사람이 갑자기 나타나기도 합니다. 교회에 나오려고 새로운 결심을 하려면 틀림없이 무슨 일을 벌어지는 것입니다. 그것은 전도를 해보면 확실히 알 수 있습니다. 이런 것을 볼 때 하나님이 얼마나 과학적인가 하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이 목사가 와서 `지금도 통일교회를 반대합니다. 이제는 옛날처럼 하나님이 역사를 해주시지 않습니다. 또, 뭐가 좀 될 만하면 사탄들이 불러갑니다’ 하더군요. 통일교회를 나오려고 하면 못 가게 하려고 반대가 나타납니다. 먼저는 부모가 반대하고, 그 다음은 부부간에 서로 반대합니다. 즉, 아내가 나가려면 남편이 반대하고 남편이 나가려면 아내가 반대하는 것입니다. 또 제자들이 반대한다는 것입니다. 종새끼들이 반대한다는 겁니다. 자기 손아래 사람들이 전부 반대하는 입장이 됩니다. 자기를 도와 주어야 함에도 불구하고 도리어 망치려 듭니다. 에덴 동산에서 타락이 그렇게 되었기 때문에 오늘날 그러한 일이 벌어지지 않으면 안 되는 것입니다.

27-126
통일교인들이 가야 할 길
이러한 것을 아는 통일교회 신도로서 신앙길을 가기 위해서는 새로운 각오가 필요합니다. 주체에 대한 확실한 신념을 가져야 합니다. 알겠어요? 「예」 그렇다고 해서 확실한 신념만으로 되는 것은 아닙니다. 그 주체를 대신한 제 2 주체의 입장에서 하나님을 내가 이렇게 믿으니 나는 하나님 대신 부모 노릇을 하겠다고 해야 합니다. 그것이 통일교회에서 말하는 부모의 심정입니다. 부모의 심정으로 종의 몸을 쓰고, 눈물은 인류를 위하여 땀은 땅을 위하여 피는 하늘을 위하여 뿌리자는 것입니다. 이것이 통일교인들이 가야 할 진정한 길입니다.

여러분이 이러한 원칙에 의해 이 길을 따라 나가게 되면 가는 길 앞에 어떠한 시련 고통이 있다 하더라도 그것은 문제가 안 됩니다. 여러분이 시련 고통을 당하게 될 때 혼자 당한다고 생각하지 마세요. 선생님은 이미 마음세계에 있어서나 외적인 세계에 있어서 그러한 시련 고통을 다 당하고 거쳐 나온 사람입니다. 그러므로 여러분이 통일교회에 들어온 그날부터는 통일교회 선생님이나 통일교회의 지도자의 생활 방법을 그대로 계승하려고 하지 말아야 합니다. 여러분에게는 탕감노정이 남아 있기 때문입니다.

선생님은 요즈음에 세상을 알기 위해서 극장 같은 곳엘 가끔 갑니다. 영화를 보면 요즘 사회상이 어떻게 되어 있나 하는 것을 알 수가 있기 때문입니다. 여자에 대해 비참한 영화, 혹은 남자에 대한 비참한 영화를 보면 그 사회의 조류를 알게 됩니다. 또 호화찬란한 상류사회를 묘사한 영화, 또 중류사회를 묘사한 영화 등, 3편 정도만 보면 사회상을 대개 짐작할 수 있습니다. 선생님은 그것을 탐지 하기 위해서 영화관에 갑니다. 그렇다고 여러분도 통일교회 들어오자마자 `선생님도 영화관에 가시는데….’ 하면서 영화관에 가려고 하겠지만 그래서는 안 됩니다. 선생님이 그런 자리에 갈 수 있는 것은 선생님 나름대로 기준을 세웠기 때문입니다. 그 전에는 영화관 앞으로 다니지도 않았습니다. `어떠한 입장에 몰리는 한이 있더라도 나는 이러한 현실사조에 휩쓸리지 않는다’ 하는 기준을 세워 놓고 그것을 절대시하고 사탄세계를 부정할 수 있는 신념을 갖기 위한 싸움의 기간을 거쳤습니다. 그런 다음에 들어가서 부딪쳐 보았지요. 그래 가지고 자신을 가졌기 때문에 자유로이 영화관도 가는 겁니다.

그런데 어떤 사람들은 통일교회에 들어오자마자 통일교회는 그런 곳이구나 하면서 그저 그렇게 하면 된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그것은 잘못된 것입니다. 통일교회에 들어왔으면 여러분, 영계에 대해 체험을 해보세요. 통일교회에 처음 들어오면 세상의 모든 것을 끊어 버려야 합니다. 자기의 어머니 아버지를 만나러 가는 것도 하나님의 지시를 받고 가지 않으면 책망받는 거예요. 그것은 그들이 아직 갓난아이와 마찬가지라 잘못하면 상처받기 쉬운 입장에 있기 때문입니다. 상처받으면 하늘의 손해가 많습니다. 한번 상처받으면 3배 이상을 투입하지 않으면 복귀되지 않습니다. 그래서 맨 처음에는 상당히 구별시키는 것입니다. 어떤 사람을 대하게 되면 징계를 받습니다. 그것은 영적으로 체험한 사람은 알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처음에는 꽉 조이다가 3년 이상, 혹은 7년, 혹은 한 10년 이상 지나야 비로소 3분의 1쯤 해방해 주는 것입니다. 적어도 10년은 지내야 되는 겁니다. 그런데 10년도 못 가서 인간 중심으로 말해 버리면 은혜를 다 잃어버리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영계에서 가르쳐 주면 주체가 영계인데도 불구하고 영계를 중심삼고 해결지으려는 생각은 하지 않고, 인간을 중심삼고 해결지으려고 하면 다 잃어버린다는 것입니다.

하늘이 자기에게 가르쳐 준 것은 어느 한때에 쓰기 위해서, 미래에 인격을 갖추게 하기 위해서, 지시해 주고 명령해 주시는 것이니 그것을 꽁꽁 싸서 보관하다가 그것을 재료로 삼아 가지고 하늘 앞에 책임을 완수하기 위하여 사용해야 함에도 불구하고 전부 다 털어 버리고 전부 빼앗겨 버리면 안 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주신 은혜보따리를 자기 마음대로 풀어놓아서는 안 됩니다. 여러분에게 선생님이 지금 말을 함부로 하는 것 같지만 선생님에게는 선생님으로서 여러분이 모르는 비밀이 있습니다. 무슨 말인지 알겠어요?

여러분이 아무리 알려고 해도 알 수 없는 뿌리가 있는 것입니다. 뿌리도 아주 곧은 뿌리입니다. 이 곧은 뿌리를 누가 들추어낼 수 있겠어요? 그것을 들추어내면 뽑히는 겁니다.

27-128
강한 신념과 소망을 가지고 가라
사도 바울이 영계의 3층천 세계를 보고 체험한 것은 그가 14년 동안 꾸준히 선교활동을 할 수 있는 원동력이 되었던 것입니다. 알겠어요? 그러한 체험이 있어야 되는 거예요. 선생님도 그와 마찬가지입니다.

선생님에게도 바라는 기준이 있습니다. 여러분에게 말하지 않았으나 `이렇게 할 것이다’ 하는 곧은 뿌리가 있는 거예요. 알겠어요? 선생님은 이러한 신념을 갖고 끝까지 밀고 나갈 것입니다. 좀 더 나가면 선생님은 아시아를 정면적으로 들이칠 것입니다. 일본이면 일본, 어떤 회사의 사장이면 사장까지도 나에게 다 걸릴 것입니다. 대한민국도 마찬가지입니다. 부패한 대한민국을 두고 우리는 후퇴할 수 없는 것입니다. 배짱으로 밀고 나가는 거예요. 이러한 어려움을 앞에 두고 결단짓기 위해 나가는 것인만큼 시시하게 굴지 말라는 것입니다. 남이 얻어먹는 부스러기나 주워 먹고 다니지 말라는 겁니다.

이 일을 시작한 나는 지금까지 생명을 걸고 결사적으로 싸워 나왔습니다. 그렇게 생명을 걸고 결사적으로 싸워 나오면서 죽을 고비를 몇차례나 거쳤습니다. 그렇게 싸워서 지금까지 남아진 것입니다.

선생님은 비록 영어의 몸이 되어 쇠고랑을 차고 마루바닥에 누워 자는 한이 있더라도 낙망하지 않았습니다. 희망에 불탔습니다. `원수! 너희가 채찍으로 치려면 어디 한번 맘껏 쳐 봐라. 네 채찍이 얼마나 강한가 보자. 채찍으로 세계를 요리하는 악의 세력과 권한이 어디까지이냐? 한계선이 어디인지 보자. 쳐 봐라’ 이러면서 지금까지 이 길을 걸어 나왔던 것입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 돌아가신 것도 문제가 되지 않습니다. 간단한 것입니다. 생사의 기로를 결정짓고 나선 길이 통일교회가 가는 길입니다. 그러니만큼 여러분이 신앙 중심의 절대적인 신념을 얼마만큼 소화할 수 있는가를 테스트하는 것이 좋습니다. 알겠어요? 각오된 신념을 중심삼고 나는 이러한 신념을 가진 사람이라고 하면서 생활을 통하여 그 각오와 신념의 가치를 테스트하는 것입니다. 신념이 문제입니다. 여러분, 어때요? 자신 있어요? 「예」 지방에 나가라 하면 꽁무니 빼지 않을 거예요? 선생님이 지방 나가라 해서 꽁무니 빼는 사람은 시시한 사람입니다. 여러분이 지혜로운 사람들이라면 선생님의 명령을 잘 따를 것입니다. 선생님이 작정하고 명령하는 대로 따르면 여러분 앞에 복 받을 수 있는 길이 열린다는 거예요. `선생님이 왜 나에게 명령하셨을까. 명령한 목적이 무엇일까. 이렇게 나가서 어떻게 하라는 것일까’ 하며 모든 것을 궁금하게 여겨야 합니다. 잘 싸우라는 것입니다. 잘 싸워서 무엇을 할 것인가? 자기 가치를 인정하자는 것입니다. 목적은 거기에 있는 것입니다.

27-129
실천과 승리
사람이란 자기 혼자 잘났다고 해서 모든 일이 잘 되는 것이 아닙니다. 반드시 상대적 세계와 관계를 맺어서 상대적 환경을 갖추어야만 거기서 자기 인격적 가치가 드러나는 것입니다. 남이 하지 못하는 일을 하면 그만큼의 가치가 드러난다는 것입니다.

결국 그렇게 하여 무엇을 할 것이냐? 통일교회의 이름으로 정수분자들을 선출하자는 것입니다. 간단합니다. 그러나 이러한 명령에 움직이지 않는 사람은 정수분자가 못 되는 거예요. 그들은 잎이 되는 것입니다. 나뭇가지는 못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잎사귀는 어느 한 때, 그 나무가 자랄 때까지는 보탬을 줄 수 있지만 잎의 사명을 다하면 떨어지고 마는 것입니다. 그 잎은 가지가 크는 데 작용을 하고 줄기가 자라는 데 작용을 할 뿐 그 잎 자체는 떨어지고 만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결국 통일교회는 발전합니다.

그러면 여러분은 잎이 되어야 하겠습니까, 가지가 되어야 하겠습니까? 가지가 되어야 합니다. 가지가 되지 않으면 열매가 맺혀지지 않는 거예요. 그렇지요?

그러면 신념을 가져 가지고 뭘 할 것입니까? 생활을 통하여 실천해야 합니다. 여러분, 진짜 죽음을 각오하고 가겠다는 신념을 가졌습니까? 국경선을 넘어 보아야 되는 거예요. 사탄세계에 대하여 항거를 해보아야 되는 것입니다.

제재를 받아 보아야 하는 거예요. 그 나라의 주권자들로부터 탄압을 받아 보아야 얼마만큼 심각하고 얼마만큼 분한지 알 수 있습니다. 탄압을 안받아 보고는 모르는 것입니다. 원수 앞에도 고문을 당해 보고, 그 아들한테도 당해보고 해야 합니다. 아들과 원수와는 또 다릅니다.

여러분이 아무리 신념이 있다 하더라도 실천하지 못하면 아무 소용이 없는 것입니다. 그러면 실천하는 데는 무엇이 필요하냐? 자기의 몸뚱이가 필요하고 시간이 필요하며 정성이 필요한 것입니다. 다시 말해 내 마음을 다하고, 뜻을 다하고, 정성을 다해야 되는 것입니다. 생명을 걸고 싸워야 된다는 것입니다. 세계적인 승리라는 것은 생명을 걸지 않고는 해결이 안됩니다. 여러분은 그것을 알아야 합니다.

이러한 입장에서 볼 때 중심에 대한 확고한 신념을 가지고, 실천생활을 함으로써 자꾸 부딪치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내가 주체로 남아지느냐 하는 게 문제입니다. 즉, 누룩과 같은 작용을 할 수 있겠느냐는 것입니다. 그 신념이 희미해져서 그 관계줄이 끊어져 버리면 그 사람은 그 이상은 못합니다. 아예 그렇게 될 가망성이 있으면 거기서 나아가지 말고 한 단계 낮추어 가야 됩니다. `아 나는 그렇게 못하겠구나’ 하고 느꼈으면 그러한 책임을 놓아 두고 한 단계 범위를 낮추어서 거기서부터 제1차 수련장으로 삼아서 성과를 거둔 다음 내가 가야 할 길을 바로 가겠다고 하면서 가야 됩니다. 그런 신념으로 자기 기반을 쌓으면서 올라가야 합니다.

그런데 이런 것은 생각하지 않고 욕심 많게 한꺼번에 올라가다가는 뚝떨어져 국물도 없이 박살나는 겁니다. 이런 관점에서 볼 때 신앙자의 각오가 얼마나 심각한지 알 수 있습니다. 신앙자로서 굳은 각오를 하고 중심에 대한 신념을 갖고 그것을 자기 것으로 남기려면 반드시 생명을 걸고 투쟁하여 성과를 얻어야 합니다. 그러지 않고는 영원한 자기 것이 되지 않는다는 것을 여러분은 알아야 되겠습니다.

27-131
기 도
아버지여, 1969년 11월 30일이옵니다. 지나간 세월의 노정 위에 많은 사람을 보아 왔습니다. 수많은 형상을 가지고 몸부림치던 수많은 사람들이 가엾게도 많이 흘러갔습니다. 이것을 생각하게 될 때, 신앙의 길을 지도하는 사람은 아버지의 마음에 어릴 수 있는 상심의 내용을 지금도 체험하지 않을 수 없다는 사실을 느끼게 되옵니다.

아버님! 6천년간 얼마나 얼마나 많은 사람 앞에 상심을 당하셨사옵니까? 당신이 소망의 기점으로 바라보던 그 모습은 사라져 버리고, 그로 인해 남아진 절망의 한 페이지와 쓰라린 심정을 극복하셔야 했던 아버지의 사정이 얼마나 심각하였을까를 생각하옵니다.

오늘날 통일교단이 이만큼 나오기까지 수많은 피눈물의 사연이 흘러갔습니다. 또한 수많은 억울한 형상의 그림자가 수없이 지나갔습니다. 혹자는 `여기에서 나는 이렇게 살겠다’고 맹세하기도 했습니다. 아버지! 그 모습을 잊을래야 잊을 수 없습니다. 나는 이렇게 태어나고, 이렇게 죽기 위해서 스승을 만나기 전부터, 혹은 수십년 전부터 준비했다고 자처하던 사람들의 말과 내용은 남아 있사오나, 그 모습은 사라져 갔습니다.

그걸 보게 될 때, 믿었던 모든 과거의 인연들이 슬픔을 가할 수 있는 조건으로 남아진 것을 생각하고 한 많은 복귀의 길을 더듬어 온 아버지가 얼마나 불쌍하다는 것을 느끼옵니다. 또한 그런 자리를 지나고 보니 아버지의 불쌍하심을 더더욱 강하게 느끼게 되옵니다.

아버님, 그러나 통일의 교단은 남아질 것을 알고 있습니다. 당신을 위해 해야 할 사명의 뜻이 남아 있는 것을 알고 있기에, 이 시간 아버지 앞에 엎드리고 과거를 회고하옵니다. 아무것도 아닌 부족한 저희들을 세워 놓고 아버지께서 얼마나 염려하셨나를 저희는 잘 알고 있습니다.

아버지, 당신 앞에 배역자의 모습으로 흘러가는 사나이가 되지 않겠다고 결심한 것을 당신은 알고 계시옵니다. 고요한 심정을 더듬어 아버지의 거룩하심을 찬양하고 싶은 마음은 시간을 넘고 생애를 넘어 우러나고 있사옵니다. 칭찬받고 자랑할 무엇이 있을 때 거기에는 당신의 마음이 어려있다는 것을 알고 있사옵니다.

아버지여, 통일교회를 세워 자랑할 것이 있사오면 그것은 당신의 수고와 피눈물과 희생의 대가이옵니다. 그러하기에 저희들은 그것을 사랑하고 싶사옵니다. 역대의 수많은 배도자들까지도 붙안고 홀로 책임지시고 지금까지 지치지 않고 나오신 아버지의 늠름한 자세를 자랑하고 싶사옵니다.

슬퍼하는 자녀들을 붙들고 다시 권고해 주시는 아버지를 자랑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러한 아버지의 진정한 의미의 아버지로 모시지 못한 불효 막심한 자식들이 되어서는 안 되겠습니다. 그 높고 귀하신 아버지를 저희에게 있는 모든 것을 다하여 찬양하고 모셔야 되겠고, 정성을 다해 봉사해야 할 책임이 저희에게 있는 것을 알게 하여 주옵소서. 아버님, 간절히 바라옵고 원하옵니다.

아버지, 신앙자의 각오가 얼마나 귀하다는 것을 저희가 알아야 되겠습니다. 아버지를 위한 그 책임과 사명을 중심삼고 나는 얼마만큼 각오가 되어 있는가 하는 것은 지금 밝혀 놓아야 되겠습니다. 나는 이렇게 결심했기 때문에 이렇게 가겠다고 하는 당신의 아들딸이 되어야겠사옵니다. 그 누가 보아 주는 것이 문제가 아니고, 그 누가 따르는 것이 문제가 아니라 내 갈길이 바쁘다는 것을 느낄 줄 아는 당신의 아들딸이 되어야되겠사옵니다.

하루의 아침이 지나면 낮이 오고, 낮이 지나면 저녁이 오고, 저녁이 지나면 밤이 오듯 자연의 순환 법도가 변치 않고 가고 있는 것을 바라보고, 아버지를 위하여 반하지 않는 자연의 모습을 닮아 아버지 앞에 변하지 않는 효성의 모습으로 나타날 수 있게 하여 주시옵소서. 그리하여 자연적으로 아버지의 영광과 아버지의 무한하신 가치를 상대적으로 드러낼 수 있는 아름다운 모습이 되어야겠사옵니다. 그럴 수 있는 아들과, 그럴 수 있는 딸이 되어야 할 것을 확실히 알게 하여 주시옵소서. 아버지, 간절히 바라옵고 원하옵니다.

이 아침에 참석한 당신의 자녀들을 기억하여 주시옵소서. 이제 1969년, 이 슬픈 해가 지나가고 있습니다. 이 한해에 저희들 가슴속에 한 맺힌 모든 사연들을 다 흘려 버려야 되겠습니다. 이제 이 60년대를 밟고 넘어서 70년대를 맞이해야 되겠습니다. 원리적 수자로 7수의 새로운 시대권을 맞이해야 되겠습니다.

이제 저희들이 다시 서울을 중심삼고 계획한 모든 것을 당신이 아시오니 그것을 뒷받침 할 수 있는 마음의 새로운 각오를 가져야 될 때가 오고 있는 것을 이들이 알게 하여 주시옵소서. 아버님, 간절히 바라옵고 원하옵니다. 아버님, 저희들을 찾아오신 아버지 앞에 저희들이 효성의 모습을 갖추고 아버지를 위안해 드리고 아버지께 기쁨을 돌려 드리는 아들딸들이 되어야 되겠사옵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저희들이 가야 할 탕감노정이 있는 것을 알게 하여 주옵기를 간절히 부탁드리고 원하옵니다.

오늘날 이것을 위해 염려하고, 이것을 위해 기도하는 수많은 자녀들을 축복하여 주시옵소서. 또한 해외에 널려 있는 수많은 외국 식구들이 이곳을 흠모하고 있다는 것을 저희들이 잊지 말게 하여 주시옵소서.

또한 이 자리가 얼마나 귀하냐 하는 것을 알고 이곳을 당신이 얼마나 주시하시는가 하는 것을 아오니, 오늘 여기에 참석한 자녀들이 스스로의 가치를 다짐할 줄 아는 당신의 자녀들 되게 하여 주옵기를 간절히 바라옵고 원하옵니다.

참되고 확실한 신념을 중심삼고 그것을 생활 무대에서 밀고 나갈 줄 알고, 그것을 원동력으로 삼고 나갈 줄 아는 저희들이 되게 하여 주시옵기를 간절히 바라옵고 원하옵니다. 아버지, 새로운 길 앞에 옹졸한 자세를 취하지 말고 늠름한 용자의 모습을 갖추어 아버지께서 보시기에 믿음직한 아들딸이 되게 하여 주시옵기를 간절히 부탁하옵니다.

내일의 싸움터에 당신이 믿고 보내기에 부족함 없는 아들딸 되게 하여 주시옵소서. 모든 말씀 참부모의 이름으로 아뢰었사옵나이다. 아멘.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