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7-40 to 27-82: 배반자와 하늘

배반자와 하늘
1969.11.23 (일), 한국 전본부교회

27-40
배반자와 하늘
고린도전서 3:16

[기 도]

아버님, 오늘은 이달을 맞이해서 네번째 맞는 안식일이옵니다.

이 아침 전국에 널려 있는 자녀들 위에 당신의 긍휼과 자비와 사랑을 내려 주시옵고, 그들을 통하여 당신이 소원하시는 뜻을 성취하시옵소서.

저희들이 참된 효자 효녀가 되어 아버지를 만국의 중심으로 받들어 모시기 위해서는 충성을 다해 뜻과 이상을 갖추어 나가야 한다는 것을 알고있사옵니다.

개인의 생활을 통하고 생애의 노정을 거치면서 저희에게 남겨진 사명은 오직 인류를 위하여 사는 것이며, 그것만이 보람있는 일임을 다시 한번 느끼고 깨달을 수 있는 이 시간 되게 하여 주시옵소서.

통일의 자녀들이 가는 길에는 기쁨만 있는 것은 아니라는 것을 알고 있사옵니다. 슬픔으로 시작된 역사를 거슬러 올라가야 하고, 수습해야 할 저희들 앞에는 안팎으로 모든 원한의 요건들이 남아 있고, 그것에 둘러 싸여 있는 것을 알고 있사옵니다. 아버지, 저희들이 어떠한 어려움이 있더라도 이것을 밀고 나가 복귀의 탕감노정을 승리하여 넘어가게 허락하여 주시옵소서. 아버지, 간절히 바라옵고 원하옵니다.

이 아침, 여기에 모인 당신의 소수의 자녀들을 기억하여 주시옵소서. 저희들은 현재 누구를 위하여 있는 자신인가를 알아야 되겠습니다. 나는 어디를 향하여 가고 있고, 어느 위치에서 무엇을 모색하고 있으며, 어떤 인연을 따라 어떤 길을 갈 것인가를 스스로 알게 하여 주시옵소서. 그리하여 아버지께서 요구하시는 자리에서 새로운 명령을 받고 마음속 깊이 아버지를 사모하는 효성의 마음이 저희 마음에 싹트게 하여 주시옵기를 간절히 바라옵고 원하옵니다.

저희들이 아버지를 관념적으로 생각해서는 안 되겠습니다. 저희들이 아버지를 실체의 존재로서, 생활하는 모든 면에 절대적인 주체로 모셔야 한다는 것을 확실히 알게 하여 주시옵소서.

저희들이 생활하는 가운데에서 말하고 생각하는 모든 것은 상대적 관계를 추구하기 위한 것임을 알게 될 때, 모든 사정을 누구보다도 만우주의 주체요 절대자이신 아버지와 더불어 나누고, 아버지와 더불어 관계를 맺고, 아버지와 더불어 환경의 모든 인연을 펼치는 참다운 아들딸이 되어야하겠습니다.

아버지께서 저희들에게 부탁하시고 싶은 내용이 무엇인가를 알아야 되겠사옵니다. 그것을 저희들이 알고 거기에 책임감을 가중하여 저희들이 해야 할 사명에 불타는 효성의 마음, 충성의 마음을 갖게 하여 주시옵기를 간절히 바라옵고 원하옵니다.

저희들이 생활하는 가운데서 가깝던 아버지가 멀어질 때도 있습니다. 너무 멀어 저희 자체까지도 잊어버릴 때가 많았사옵니다. 하오나, 아버지는 저희들의 곁을 떠나신 것이 아니옵고, 저희들 주위에서 지키시고 계셨사옵니다. 이처럼 가까운 자리에 계시는 아버지를 도리어 멀리 떠나버린 아버지처럼 잊어버린 때가 많은 것을 용납하여 주시옵소서.

어떤 것이 저희들의 시야에서 가까우면 가까울수록 그 자체를 식별하지 못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저희들은 가까이 계시는 아버지를 알지 못하고 도리어 멀리 계시는 것처럼 모색하다가 무언지 모르는 거와 같이, 가까운 자리에서 아버지를 배반할 때가 많았다는 것을 신앙생활 가운데에서 체험할 줄 아는 자녀들 되게 허락하여 주시옵기를 간절히 바라옵고 원하옵니다.

아버님께서는 먼 상대의 세계에 계신 것이 아니었습니다. 우리의 마음 가운데 계시고 우리의 몸을 에워싸고 계셨사옵니다. 우리 주위에 공기가 있으되 있는지 없는지 모르는 것처럼, 아버지께서 저희들의 생애 전체를 덮고 계시는 데도 알지 못했다는 것을 저희들이 깨달아야 되겠습니다.

저희들을 둘러싸고 있는 그 힘을 받을 때에는 무한한 힘이 거기에 동하는 것이요, 그 힘을 흡수하게 될 때에는 영원한 힘으로써 저희들에게 새로운 충격과 새로운 자극을 주심을 아옵니다. 이렇듯 언제나 가까이 계셔서 생명을 일으켜 주시고 저희들을 충만케 해 주시는 아버지의 실존을 체득할 줄 아는 아들딸이 되어야 되겠습니다. 그런 자리에서 아버지의 자녀로 성장하고, 그런 자리에서 아버지와 더불어 생애노정을 의논할 줄 아는 사람이 얼마나 귀한 사람인가를 저희들이 깨달아야 되겠사옵니다.

이 땅 위에 수많은 사람들이 천운을 바라고 또는 일신의 여명을 바라고 있으나, 그들은 상대적인 어떤 거리를 두고 바라고 있다는 것을 저희들은 알고 있사옵니다. 그러나 저희들은 그들과는 달리 가장 가까운 자리에서 생애의 모든 권한도 생명의 중심 되시는 아버지로부터 시작되고, 모든 영광도 앙모의 중심 되시는 아버지로부터 시작된다는 것을 확실히 알게 허락하여 주시옵소서. 그러기 위해서는 아버지께서 저희들의 마음 깊이 함께 계시고 가까이 계시어, 저희들의 모든 일체를 주관하심으로서 저희들의 생명의 원동력이 되시옵고 모든 감정의 기원이 되시어야 한다는 사실을 저희들이 깨달아야 하겠습니다. 그런 자리에서 넓고 깊고 높고 귀하고 무한한 가치의 주체이신 아버지를 모실 수 있는 자녀가 얼마나 귀하고 그 가치가 얼마나 큰 것인가를 저희들이 알게 허락하여 주시옵고, 그 기준을 천만 번 혹은 억만 번 증명해 나아가게 될 때 천주를 주관할 수 있고 하늘의 모든 내용을 흡수할 수 있는 자체적인 권한이 성립된다는 사실을 저희들이 알아야 되겠사옵니다.

자기의 욕망에 끌려 나가다 외적인 조건 앞에 사로잡혀 자신을 잃어버리고, 육신의 욕망 가운데 사로잡혀 떠돌다가 외적인 욕망의 사람으로 바꾸어지게 될 때에 그 자신과 아버지와는 먼 거리에 놓여지게 된다는 사실을 저희들이 확실히 알아야 되겠사옵니다.

저희도 아버지의 마음과 더불어 동행하고자 하오니, 마음 깊이 스며드는 생명의 호소를 들을 줄 알아야 되겠사옵고, 복귀의 노정을 가시는 아버지의 음성을 들어야 되겠사옵고, 아버지께서 분부하시고 마음 깊은 곳에서 뿜어내시는 새로운 명령의 말씀을 들을 줄 아는 아들딸이 되어야 되겠사옵니다.

이 아침, 저희들이 남달리 여기에 모인 것은 아버지의 음성을 듣고, 아버지의 권고를 듣고, 아버지께서 제시하는 새로운 운명길을 찾기 위해서였사오니, 초초한 모습을 기억하여 주시옵소서. 외로운 모습을 기억하여 주시옵소서. 한없이 슬픈 모습을, 아버지, 마음에 기억하여 주시옵소서.

아버님의 자비로우신 마음이 저희 마음속에서 우러나오게 될 때, 아버님이 소원하시는 것을 이루어 드리기 위해 저희가 이날을 지키게 될때, 사망의 선을 아버님과 더불어 넘고 싶어하는 흠모의 심정이 불타게 될때, 저희는 생명의 원천이신 아버님을 찾아갈 수 있고, 아버님은 전능하신 능력을 갖춰 준비하고 계실 줄 알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저희들은 사랑을 갖추어 당신의 심정을 체휼할 수 있고, 거룩하게 할 수 있는 당신의 자녀들이 되어야 되겠사옵니다.

특별히 오늘 이 시간은 역사적인 거룩한 시간이옵니다. 흑암의 세계에서 생명의 빛을 기다리는 아름다운 소녀의 마음과 같이, 소망에 불타 아침을 기다리고 소원하는 목동의 마음과 같이, 그 고요한 아버지의 모습을 기다리며 아버지의 한날을 맞이하기 위해 새벽부터 남몰래 준비하는 그 자체를 아버지는 얼마나 아릿다와할 것인가를 생각하면서, 이 시간 아버지 앞에 찾아와 귀하고 높고 무한한 가치로써 찬양할 수 있는 자신을 그리워하면서 모인 형제들 되게 허락하여 주시옵기를, 아버님, 간절히 바라옵고 원하옵니다.

저희들이 가냘픈 목소리로 아버지를 부르지만, 나를 위하여 내가 행복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민족과 세계를 살리기 위해서 부르게 될 때, 그런 마음으로 부르짖는 그 음성에 아버지는 기필코 내 앞에 계시고 내안에 계신다는 것을 저희들이 알아야 되겠사옵니다. 힘이 부족하더라도 아버지께서 소원하시는 뜻을 저희들이 책임지고 그 소원을 성취해 드리겠다고 몸부림치며, 아버지 앞에 힘을 보충해 달라고 할 때에는 아버지의 뼛골에 움직이는 힘이 저희들과 같이한다는 사실을 알게 허락하여 주시옵소서.

저희들로 하여금 외로운 자리에서 심정을 기울여 가지고 민족의 한과 세계의 한과 천하의 한을 해원하게 하시옵소서. 또한, 악한 권세를 대해 죽음길을 달려 나가는 그들을 쌍수를 들어 가로막고 싶고, 자기의 위신과 체면을 잊어버리고 그들을 구하기 위해 미치고 싶고, 몸부림치고 싶은 마음을 가지게 하시고, 연약한 자신을 탄식하면서 힘을 단련하게 하소서. 그럴 수 있는 자신이 되겠다고 울부짖는 곳에는 아버지는 언제나 돕고 계신다는 것을 알고 있사옵니다. 그렇기 때문에 하늘길을 간 사람들은 편안 사람들이 아니었사옵니다.

이 몸은 강한 것을 추구하지만, 이 몸은 무한한 약한 면도 가지고 있사옵니다. 그렇기 때문에 예수님도 이 땅에서 이와 같이 되라고 하셨사옵니다. 우리가 부모를 보게 될 때 부모는 전체의 소원이요, 그리움의 표상이요, 행복의 기원이었사옵니다. 동기도 되고, 과정도 되고, 결과도 되는 것이 부모였사옵니다. 부모와 자식의 인연을 생각해 보게 될때, 동기도 아버지요, 과정도 아버지요, 결과도 아버지옵니다. 아버지를 보고 싶어하고 아버지를 소원하고, 아버지의 뜻을 그리워하고, 아버지를 사랑의 기원으로 삼고, 아버지와 더불어 화동의 인연을 맺는 그 거룩한 자리에 우리를 품을 수 있는 아버지의 심정이 있다는 것을 저희들은 알아야만 되겠사옵니다.

그리하여 아버지를 대하여 말할 수 없이 반기는 그 모습, 아버지의 품이 그리워서 아버지의 심정을 파고드는 아들딸을 얼마나 원하셨는지를 저희들이 알아야만 되겠사옵니다. 아버지의 품에 품기고 어머니의 품에 품기어 아버지 어머니의 생명의 양식을 자식이 고스란히 받고, 그 아버지 어머니의 마음자리와 소망자리를 상속받고, 자식을 통하여 미래를 바라볼 수 있는 자리가 아버지께서 찾아 나오신 부자의 인연이 맺어지는 자리라는 것을 알아야 되겠사옵고, 그 거룩한 자리를 저희들은 추구해야만 되겠사옵니다.

저희들이 진정 아버지를 부르면서, 그리운 아버지를 놓지 않고 그 아버지의 뺨에 내 뺨을 대고, 아버지의 눈물과 아들의 눈물이 하나되는 가운데 회개하고, 하나의 세계를 찾기 위하여 호소하며 가는 그 희생의 발걸음을 그 누가 막을 수 있겠사옵니까? 사탄도 여기에는 굴복해야만 되고, 사탄도 이 자리에 참여해야 하는 것이 본래의 창조의 원칙인 것을 알고 있사오니, 그럴 수 있는 아들과 그럴 수 있는 딸이 되게 허락하여 주시옵소서.

그처럼 아버지를 그리워해야 할 저희들이 쌀쌀한 북풍한설을 맞은 동삼삭과 같은 마음 가지고 있어서는 안 되겠습니다. 마음 가득히 찾아드는 봄볕과 더불어 찾아드는 춘삼월과 같은 한날이 저희 심정 동산에 기필코 있어야 되겠사옵니다.

또한 이 마음이 아버지를 향하여 활개를 활짝 펴고 쏟아지는 한 줄기의 빛을 받아 죽었던 생명이 부활하고, 새롭게 꽃이 피고, 향기가 풍겨 나비가 날아들고, 천지와 화동할 수 있는 기쁨의 동산이 저희 자신들을 통해서 피어나게 할 수 있어야 하겠습니다. 그리하여 아버지께서 기뻐하시며 안고 살아갈 수 있는 아들딸의 모습을 얼마나 그리워하셨는가를 알아야 되겠사옵니다.

저희 자신들도 또한 아버지의 품에 안기어서 눈물을 닦고 환희의 성원을 받을 수 있고, 아버지로부터 내 아들이라고 칭송받을 수 있어야 하겠습니다. 그 기쁨이 세상 천지의 그 무엇과도 비교할 수 없는 무한한 가치로운 것인 줄 아는 아들딸이 되어야 하겠사옵니다. 그런 아들딸이 있다 할진대 어찌 아버님을 잊을 수 있사오며, 어찌 아버님께 죄지을 수 있사오며, 어찌 아버님의 주관권내에서 벗어날 수 있겠사옵니까? 이런 사실을 확실히 아는 아들딸들이 되게 하여 주시옵기를, 아버지, 간절히 바라옵고 원하옵니다.

아버님이여, 1969년도 저물어 가고 있사옵니다. 저희들에게 남아진 40일을 기하여 이해를 다시 한번 밟고 넘어가야 되겠사옵니다.

아버지, 저희들에게 분부하고 싶은 소원이 무엇인가를 다시 한번 알아서 새로이 출발해야 되겠사옵니다. 새로운 70년대를 맞이하여 아버지께서 원하시는 뜻 앞에, 지난날의 지루하던 겨울절기를 보내고 봄절기를 맞이하게 해 가지고 화기애애한 모습으로 아버지를 찬양할 수 있는 거룩한 모습을 그리워하면서, 나는 기필코 그런 모습이 되겠다고, 아버지의 새역군이 되겠다고 결의할 수 있는 당신의 아들딸이 되게 허락하여 주시옵기를, 아버님, 간절히 바라옵고 원하옵니다.

이 아침, 다시 한번 아버지 앞에 아뢰옵니다. 통일의 자녀들에게 힘을 주시옵소서. 아버지의 뜻을 따라 나오다가 지쳤사옵니까? 아버지께서는 지치지 않았습니다. 뜻을 따라 나오다가 자기를 생각했사옵니까? 아버지께서는 자리를 생각한 때가 없었습니다.

아버지시여! 당신은 주체이시고 저희들은 대상입니다. 주체와 대상이 하나되어야 함에도 불구하고 저희들이 이렇게 먼 자리에 있어서는 안 되겠사옵니다. 이것은 어디까지나 저희들의 잘못이요, 저희들의 부족이요, 저들이 죄의 자리에 있기 때문이라는 것을 깨달아야 되겠습니다. 아버지의 거룩함과 아버지의 승리를 찬양하면서 아버지와 보조를 맞추고, 아버지를 모시고 갈 줄 아는 당신의 자녀들 되게 허락하여 주시옵기를 간절히 바라옵고 원하옵니다.

당신의 품에 안기어 영원히 안식할 수 있는 아들딸 되게 하여 주시옵소서. 아버지, 통일교단을 통하여 당신이 자랑할 수 있는 아들딸이 많게 허락하여 주시옵기를 간절히 부탁드리옵고 원하옵니다.

세계에는 수많은 교단과 나라가 있사옵니다. 또한 대한민국에도 삼천만이 살고 있사옵니다. 그러나 이와 같은 자리에서 아버지 앞에 기억되고, 아버지 품에 안기어 사랑받을 수 있는 자녀들이 어느 곳에 얼마나 많은가에 따라서 세계의 운세가 좌우될 수 있고, 그 나라의 운세가 좌우된다는 것을 알게 허락하여 주시옵소서. 이와 같은 자리에서 저희들이 정성들이고 아버지를 위로해 드려야 할 세계사적이요, 천주사적인 사명이 있다는 것을 아는 참다운 아들딸이 되게 허락하여 주시옵소서. 참부모의 이름으로 아뢰었사옵나이다. 아멘.

27-46
말 씀
오늘은 `배반자와 하늘’이라는 제목을 가지고 말씀드리겠습니다.

27-46
일반사회와 신앙세계에서의 좋고 나쁨의 판단
우리의 일상생활 가운데에서 좋고 나쁘다는 관념은 어느 누구에게나 있습니다. 내가 `좋다’하는 것도 여러 관점에서 달리 생각해 볼 수 있는 것입니다.

사업의 종류에 따라서 그 사업을 추진해 나아가는 데 있어서도 좋고 나쁜 것이 있으며, 나라를 중심삼고 보더라도 좋고 나쁜 것이 있을 수 있다는 것입니다.

또 `나’라는 존재를 중심삼고 대외적 관계에 있어서 천태만상의 일이 있을 것입니다. 거기에는 국가 세계가 다 포함됩니다. 대외적으로 볼 때 나를 중심삼고 상대세계 가운데에서도 좋고 나쁜 것이 있을 수 있고, 그 반면에 주체적인 입장에서 대내적으로 자기 자신의 양심을 두고 볼 때에도 좋고 나쁜 것이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상대세계에 있어서, 내가 대하는 것 중에는 반드시 부딪쳐 가지고 어떠한 과정을 통하여서 식별되어진 결과에 의해 좋고 나쁜 것이 결정되는 일이 많습니다. 무슨 사업을 하더라도 처음에는 좋기를 바라고 시작했지만 그 결과가 나쁘게 나타나는 것을 우리는 왕왕 볼 수 있습니다.

여러분 개인생활에 있어서도 하루를 시작할 때에 이러이러한 일을 해야겠다든지, 어떤 목적이 있으면 그 목적을 중심삼고 저녁까지 지내는 가운데 되어지는 모든 일들이 뜻하는 대로 되어지지 않게 될 때에 우리는 반드시 나쁘다고 하는 것을 느낍니다. 이렇듯 나타난 결과가 좋고 나쁨을 결정하는 축이 되어 있습니다.

그 다음에 우리의 양심을 중심삼고 생각해 보아도 그렇습니다. 여러분이 이런 것을 많이 느낄 것입니다. 특별한 신앙생활을 하는 사람들이나 신령한 생활을 추구하는 사람들은 대번에 느끼는 것입니다. 어떤 사람을 대하게 될때에 그 사람과는 초면이지만 척 대하면 그 사람이 좋다. 혹은 나쁘다 하는 것을 알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것은 어떤 일을 놓고 보다 양심을 중심삼고 사람을 대하면 과정을 거치지 않고 그것을 느낀다는 것입니다. 대하는 그것이 처음인데 좋고 나쁘다는 결과를 알 수 있습니다. 여러분도 신앙생활을 하면서 이런 것을 체휼할 때가 많을 것입니다. 영적인 체험을 한 사람들에게는 그런 것이 있는 것입니다.

이와 같이 어떤 일보다도 좋고 나쁜 것을 가장 빨리 결정지을 수 있는 것이 대인관계입니다. 사람과 사람들 사이에서 좋고 나쁜 것이 빨리 판단되는 것입니다.

이처럼 선악의 결과를 결정하는 것은 반드시 어떤 자연이라든가, 혹은 외적인 세상의 일을 중심삼고 되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이것은 사람과 사람 사이의 관계에서 마음에 의해 결정되는 것입니다. 그렇지만 일반 사회는 대내적이 아니라 대외적이며, 주체가 아니라 대상의 입장에서 결과를 놓고 좋고 나쁜 것을 결정합니다. 이것은 반드시 과정을 거쳐 가지고 나타난 결과에 따라서 좋고 나쁜 것이 결정되어진다는 것입니다. 물론 여기에서는 영적인 체험을 한 사람들도 그 결과에 대한 전망은 할 수 없습니다. 그것은 그렇게 심각하고 책임 있는 관계를 맺게 되어 있지 않습니다.

27-48
인간이 추구하는 최고의 기준
사람은 반드시 대내적 관계와 대외적 관계를 갖고 있습니다. 그런데 대내적 관계는 어떤 관계인가 하면 인간과의 관계요, 대외적 관계는 세상과의 관계입니다. 이런 관계를 맺고 있는 것이 사람들이라는 것입니다.

왜 그러냐? 그것은 인간이 이성성상적 존재이기 때문입니다. 우리 창조원리로 보면, 인간은 대외적 관계, 즉 만물세계와의 관계와 나라를 어떻게 해야 한다든가, 세계를 어떻게 해야 한다든가 하는 관계와 대내적 관계, 즉 인간과의 관계를 가지고 있습니다. 이 두 가지는 가는 방향이 다르다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가 좋고 나쁘다는 문제를 결정하는데 있어서도 대외적 관계와 대내적 관계가 있는 것을 알게 됩니다.

그러면 원수란 무엇이며, 어떻게 생겨나는가? 자기의 소원을 가로막으며, 내가 기필코 성사하려는 일을 전면적으로 파탄시키는 것은 반드시 원수로 나타나는 것입니다. 이것은 대외적 관계에서도 그렇고 대내적 관계에서도 그렇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성성상으로 계시는 하나님을 닮은 피조물이기 때문에 우리 자체는 내성적인 것과 외형적인 것을 갖추고 있습니다. 즉, 우리는 내성적인 것과 외형적인 것이 있어서 서로 주고 받는 가운데 존재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모든 사람들은 무엇을 동경하는 것인가? 인격자를 동경합니다. 또한 출세하기를 바라고 있습니다. 성공을 바란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사람이 성공했다고 해서 그 사람의 마음이 특별히 넓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특별히 커지는 것도 아닙니다. 그의 권세가 커지고, 혹은 영광의 환경이 넓어지고, 그가 돈을 많이 벌어 가지고 한국의 제일 가는 거부가 되었다 하더라도 그 자체의 보퉁이가 커진 것은 아닙니다. 마음 자체가 커지는 것은 아니라는 것입니다. 커지긴 커졌는데 무엇이 커졌는가? 외적으로 커졌을 뿐이지, 그 사람 자체가 근본적으로 커진 것은 아닙니다.

그러면 우리 개체가 추구하는 것이 무엇인가? 인격자를 추구합니다. 그 인격자의 최고 기준은 무엇인가? 그것은 양심을 중심삼고 최고 꼭대기를 기준으로 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양심의 최고 꼭대기는 무엇이냐? 양심은 반드시 선을 추구하며, 그 선을 추구하는 최고의 주체적인 신, 즉 인격적인 면을 갖추고 우리 인간에게 필요한 이상적인 형태를 갖춘 그분을 찾아 올라가다 보니 신의 관념이 생기는 것입니다.

우리가 인격을 추구하는 그런 사고방식을 가진 입장에서 볼 때, 그 최고의 기준을 향하여 올라가다 보면 인간만으로는, 인격만으로는 만족하지 못하는 것입니다. 일상생활 속에서 평면적인 관계에서 오는 감정 가지고는 만족하지 못하게 되어 있다는 것입니다. 평면적인 세계가 아니라, 입체적인 세계에서 만족을 느낀다는 것입니다. 인격을 중심삼고 최고의 꼭대기를 찾아 올라가는 입체적인 세계의 자극을 받게 되면 거기에서 행복을 느끼는 것입니다.

행복은 생명 이상의 인격적인 내용을 겸하는 데서 오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인간이 인격을 추구하는 최고 기준은 평면적인 기준이 아닙니다. 그것을 초월하여 입체적인 기준에서 인격을 찾아 나오기 때문에 철학이나 종교라는 관념이 생기게 되었던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신의 존재유무에 관한 문제가 생기게 된 것이며, 인류가 걸어 온 역사는 부정당할 수 있을망정, 신은 부정할 수 없는 운명길에 서 있는 것이 현실의 인간들이라는 것을 알아야 되겠습니다. 이렇듯 우리 인간은 최고의 기준을 추구해 나가는 것입니다. 그 다음에는 이상을 추구합니다. 그러면 그 이상을 추구하는 꼭대기와 끝은 어디냐? 하나의 세계를 추구하는 것입니다. 결국은 인간이 추구하는 최고의 기준은 하나님이라는 것입니다.

27-49
배반자와 승리자로 나누어지는 기점
여기에서 신의 개념이 나오는 것입니다. 인간은 신을 추구해 나왔습니다. 6천년 역사를 거쳐 오면서 하나님과 떨어진 것이 아니라 접근해 나왔습니다. 여기에서 하나는 플러스(+), 하나는 마이너스(-)가 되어야 합니다. 플러스와 플러스가 만나서는 안 됩니다. 또 마이너스와 마이너스가 만나서도 안 됩니다. 플러스와 마이너스 관계를 가져야 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천지’라는 말이 필요합니다. 상하, 전후, 좌우라는 말이 필요한 것입니다. 그러면 천지란 누구를 중심삼은 말인가? 나를 중심삼은 말이라는 것입니다. 또한 상하 좌우 전후라는 말도 전부가 나를 중심삼고 하는 말입니다. 결국 모든 것이 나를 중심삼고 되어 있습니다. 이처럼 인격의 최고 기준을 추구하고, 하나의 세계를 추구하는 것은 하나님께서 추구하는 것이 아니라 내 자신이 추구하는 것입니다. 그러니 인간이 우주의 중심이 되는 것입니다. 그렇기때문에 신인일체가 되고, 그와 동시에 신의 소원과 인간의 소원이 일체가 되는 것입니다. 신에게도 소원이 있습니다. 이 소원이 무엇이냐? 하나의 기점입니다. 결국은 마찬가지입니다. 그래서 천지인(天地人)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이런 길을 인간이 기필코 가야 됩니다. 여기에 배반자와 승리자가 있게 됩니다.

그러면 배반자는 어떤 사람인가? 내가 돈을 좀 가지고 있다고 해서 배반자입니까? 내가 아무리 돈을 가지고 있다 하여도 그 돈을 대한민국에 남아 있는 것입니다. 비록 배반을 했다 해도 그 돈은 대한민국에 남아 있다는 것입니다. 이렇게 보면 돈의 주인은 누구입니까? 내가 아닙니다. 대한민국이 주인입니다. 나는 다만 잠시 관리하고 빌어 쓰다가 가는 사람입니다. 내가 대한민국에 태어났으면 대한민국 땅에 살다가 가는 것이지, 이 땅을 내가 가지고 와서 살다가 가는 것이 아닙니다. 그러니까 자기로부터 시작하는 것이 아니라, 어디까지나 죄다 빌어 쓰는 것입니다.

빌어 쓰는 데 있어서 그 빌어 쓰는 사람이 자기를 위해 쓰느냐, 대한민국을 위해 쓰느냐가 문제입니다. 나를 위해서 돈을 빌었는데, 대한민국을 위해서 쓰겠다고 빼앗아 가면 그 사람이 배반자입니까? 여러분 생각은 어떻습니까? 여기에는 사고방식과 관념에 따라 차이가 벌어지는 것입니다.

그래서 인간이 소원하는 것은 무엇인가? 최고의 인격과 하나의 세계를 소원하고 요구합니다. 즉, 절대적인 인격자와 절대적인 세계, 이 양면을 누구나 추구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여러분은 사람을 의지하고 사는 것입니다. 직장을 의지하고 사는 것이 아닙니다. 남자는 여자, 여자는 남자, 서로 사람을 의지하고 사는 것입니다. 그래서 각 개인은 세계인을 의지하고 사는 대표자 격입니다. 그 둘이 서로 의지하며 사는 것은 세계의 사람들이 서로 의지하고 사는 것을 나타내는 것입니다. 여기에서 세계에 널려 있는 사람들과 얼마만큼 관계에 맺느냐에 따라 출세가 좌우됩니다. 이러한 근본 가운데 배반자니 은혜자니 하는 말이 나오는 것입니다.

27-51
심정의 배반자가 되지 말라
이런 관점에서 볼 때, 배반자 가운데도 두 종류가 있습니다. 그렇지요? 외적으로 나타나는 세계의 배반자와 내적으로 나타나는 세계의 배반자, 이렇게 두 종류의 배반자가 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외적 세상의 일은 천갈래 만갈래로 갈라집니다.

대한민국을 보면, 거기에는 행정부서가 있고 그 밑에 조직체, 사업체 등 여러 갈래로 갈라져 있습니다. 이런 부서의 책임을 진 사람들도 일을 해나가는 데 있어서 나름대로 배반을 당하기도 합니다. 그런데 그것은 책임자가 무식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어떠한 방법으로 처리해야 하느냐가 문제입니다. 그래서 배반한 그 사람이 진짜 배반자냐 하는 문제가 생깁니다. 외적인 상대적 세계에 있어서의 배반자는 이렇습니다.

그렇지만 마음 세계에 있어서의 배반자는 어떻게 할 도리가 없습니다. 마음속의 배반자라는 것은 물질적 조건이 아니라 심정적 조건이나 생명적인 조건에 의한 배반자입니다. 하늘은 지금가지 어떤 길을 주장해 나왔느냐 하면, 심정적 조건과 생명적 조건을 중심삼고 주장해 나오고 계십니다.

자기의 마음을 다하여 어떤 사람을 위해서 베풀었는데도 불구하고 그것을 알아주지 않을 때, 말 한마디로써 배반자가 될 수도 있습니다.

물질세계에서는 그렇지 않습니다. 몇백만 원, 몇천만 원, 몇억 원을 가지고 일하는 데 있어서 몇십만 원을 좌우하는 일 가지고 그 사람을 배반자라고 낙인찍지 못하는 것입니다.

그렇지만 정신적인 세계, 생명의 인연에서 그것은 절박한 것입니다. 말한마디가 지금까지 가까왔던 사람과의 인연을 전부 다 끊어 버리고 쉽게 배반자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것은 심각한 것입니다. 결국 내적인 것이 심각한 정도가 넓고 깊고 높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두 종류의 배반자를 두고 볼 때, 우리는 어느 면에서 배반자가 되지 말아야 하느냐? 심정세계에 있어서 배반자가 되어서는 안 됩니다. 외적인 배반자의 낙인이 찍혔더라도, 마음의 세계에서 하나된다면 외적인 세계를 추구하는, 세상적인 배반자의 내용은 얼마든지 넘어갈 수 있습니다. 심정만 같이한다면 몇백만 원 몇천만 원짜리 사업체 하나 파탄시켰다고 해서 배반자가 될 수 없습니다. 같은 입장에서 거지노릇을 하더라도 배반자가 될 수 없다는 것입니다.

여기에는 외적인 것은 심각하지 않습니다. 그것이 문제가 아닙니다. 내적인 심정을 연결한 참다운 사람들끼리의 관계가 문제입니다. 믿는 사람끼리 심정을 중심삼고 절대적인 인격을 추구해 나가다 만일 틀어지는 날에는 영원히 헤어지게 됩니다. 그 이상의 정신적인 내용, 그 이상의 심정적인 내용, 그 이상의 생명적인 내용을 갖추지 않고는 만날 수가 없습니다.

부모에게 효성을 다해 효자문까지 세워질 정도의 효자라도 그가 부모에게 불경스런 말 한마디를 하면 그럴 수 없는 아들로 알고 있는 부모의 가슴에 영원히 못자국을 남기는 것입니다. `아! 내가 몰랐구나’ 하고 천지가 뒤집히는 이상 놀라는 것입니다. 마음의 세계에 있어서는 그렇다는 것입니다.

27-52
인간이 하나님의 원수가 된 근본 원인
여러분의 신앙생활에서도 문제가 무엇인가 하면, 생명과 심정적인 것입니다. 따라서 사람에게 제일 귀한 것은 무엇인가? 결론적으로 말하면 외적 세계가 아닙니다. 자기 생명과 심정이라는 것입니다. 여기에서 효라는 말, 충이라는 말, 기쁨이라는 말이 나오는 것입니다. 생명의 부활을 받는 기쁨, 생명의 환희의 한 날을 맞이하는 기쁨, 심정적인 면에서 보다 높고 보다 귀한 것을 발견하는 기쁨, 이러한 행복, 이러한 즐거움이야말로 외적 세계의 어떠한 기쁨보다 낫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인간의 본연의 자세를 갖추어 가야 할 길이라는 것입니다.

사람의 원수라는 것은 참으로 애매합니다. 그렇지요? 백만장자끼리 같이 사업을 하다가도 서로가 대결하고, 서로의 생명을 빼앗는 일이 많습니다. 대부분의 나라의 역사를 두고 보더라도 서로 죽이고 죽이는 싸움의 역사가 엮어져 내려오고 있습니다. 외적인 면에서 보면 땅 빼앗기 싸움을 하는 것이지만, 내적인 면에서는 사랑 빼앗기 싸움을 하는 것입니다. 이 두 싸움이 역사를 엮어 나왔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슬픔과 기쁨의 감정은 어디에서 나오느냐? 이 두 형태의 싸움에서 나온다는 것입니다.

그가 망했다 하면 어떤 면에서 망했느냐? 망했다고 하는데도 그는 늠름하게 `나는 내일의 소망을 가지고 더 큰 일을 할 수 있다. 이것을 하나의 자극으로 삼고 하나의 계기로 삼아서 내일의 희망찬 승리자가 될 수 있다’ 했을 때 망한 사람입니까? 그는 망하지 않았습니다. 그것은 도리어 새로운 동기와 새로운 출발이 됩니다. 독립을 하게 하는 하나의 자극에 지나지 않는 것입니다. 즉, 새로운 출발을 위한 하나의 과정에 지나지 않습니다. 망한 것이 아닙니다. 따라서 그렇다고 보는 사람은 망한 사람이요, 그렇지 않다고 보는 사람은 망하지 않은 사람이라고 할 수 있는 것입니다. 역사는 이렇게 흘러 나왔습니다.

그러면 이런 사회에서 우리는 어디를 향해 가야 하느냐? 생명 문제와 정신적인 문제는 심각합니다.

하나님과 인간은 어디서부터 원수가 되었는가? 선악과라는 하나의 물질을 따먹은 것이 원수의 기원이 되었겠느냐?

만약 몇천만 원, 몇억 원을 가진 대한민국의 갑부가 자기가 가지고 있는 재산을 한꺼번에 전부다 잃어버리고 한푼 없는 거지가 되었다 하더라도 그냥 넘어갈 수 있습니다. 내적인 내용을 갖추게 되면 넘어갈 수 있다는 것입니다. 잃은 그것이 문제가 되지 않고 그것을 넘어갈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과 인간과의 관계에서 배반자의 한이 맺혀졌는데 그 한은 어디서부터 생긴 것인가? 심적 관계에서 생겼던 것입니다. 보고 따먹을 수 있는 과일로 인해 천지를 판가름할 수 있는 배반자의 기원이 된 것이 아닙니다. 그러면 그것은 무엇인가?

그러면 주체적인 입장에서 하나님께서 희망하는 것은 무엇인가? 그것은 보다 새롭고, 보다 기쁘고, 보다 보고 싶고, 보다 사랑스러운 것입니다. 하나님은 그럴 수 있는 인간을 요구하는 것입니다. 그런 사람은 어디까지나 생명 문제에 있어서나 정신적인 면에서 어떤 내용을 가지고 있어야 합니다. 외적인 물질은 그런 내용을 갖고 있지 못합니다.

인간은 하나님과 심정적인 문제에서 부딪쳤던 것입니다. 역사상 처음으로 부딪친 것입니다. 하나님으로부터 지음 받은 인간으로서는 꿈에도 그럴 수 없는 입장이고, 생각조차 할 수 없는 입장인데도 불구하고 배반해 버린 것입니다. 그런데 그들이 부딪치기를 바라서 그렇게 했겠습니까? 꿈에도 생각지 않았는데 이런 일들이 생긴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것을 찾아가야 합니다.

이런 관점에서 볼 때, 타락은 우리 통일교회가 말하는 대로 심정적인 면에서 잘못된 것이 아니겠느냐! 이것은 귀납적으로 봐도 그렇고, 사회 현상을 두고 보아도 그렇게 되어 있는 것입니다.

27-54
정신이 먼저냐, 물질이 먼저냐
그러면 이 세상은 지금 내적인 세계와 외적인 세계 중에서 어디를 찾아 가고 있느냐? 외적인 세계와 내적인 세계는 점점 하나의 세계를 이루어야 합니다. 외적인 세계와 내적인 세계의 모든 문제는 인간에게 결부되어서 해결되어야 합니다. 이것은 하늘의 문제요, 땅의 문제라는 것입니다. 그러니 하늘과 땅이 하나되어 하나의 외적인 세계를 이루고, 그래서 내적인 하나의 인격과 상봉해 가지고 비로소 하나님께서 추구하였던 본연의 세계의 모습을 갖추어야 합니다. 에덴 동산에 아담 해와를 지어 놓기 전에 소망하였던, 상처를 입지 않은 본연의 모습을 갖춘 내적인 인격체를 인간 세계에서 찾는 것이 하나님의 소원이었습니다.

이런 관점에서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하는가? 여기 신앙자로서 대사회생활의 문제가 나오는 것입니다. 출세를 중요하게 여길 것이 아니라, 궁극적인 뜻을 지니겠다는 사고방식을 갖는 것이 중요하다는 것입니다.

앞으로의 세계는 젊은이들에게 달려 있습니다. 통일교회에 들어온 사람들이 모두다 잘 아는 것 같지만, 선생님이 물어보면 모르는 것이 많습니다. 어떤 사람은 `유난스럽게 그럴 필요가 있나’ 하겠지만 그렇지 않습니다.

여러분의 마음세계는 여러분이 태어나기 전부터 시작된 것입니다. 또한 여러분의 대외적인 세계도 여러분이 태어나기 전부터 시작된 것입니다. 그러면 이 우주가 아무런 생각없이 그냥 그렇게 생겨났단 말이냐? 아닙니다. 여기에 있는 이 피아노가 생겨나기 위해서도 여기에는 그럴 수 있는 내용이 있었기 때문에 생겨난 것입니다. 어떻게 해서 생겨난 것인지 모르지만, 어떠한 조화의 힘이 작용했기 때문에 생겨난 것임에는 틀림없습니다. 즉 어떤 힘이 작용했기 때문에 결과로서 나타난 것입니다. 따라서 물체라는 것은 원인이 아니라 결과입니다.

여러분이 태어날 때 마음적 기원이 먼저인가, 물질적 기원이 먼저인가? 내가 태어나 보니 이 세상도 있었고, 내 마음도 있었습니다. 그러면 어느 것이 먼저인가? 물질이 먼저다 하는 것은 있을 수 없다는 것입니다.

27-55
외적인 배반보다 내적인 배반이 더 크다
이런 문제를 중심삼고 사상과 철학의 2대 사조를 이루어 `정신이 먼저다’ `물질이 먼저다’라고 하면서 서로가 옳다고 주장하고 있습니다.

그러면 여러분은 정신이 없는데 `내가 간다’ 할 수 있어요? 없습니다. 생각을 먼저 하고 그 다음에 행동하는 것입니다. 그렇게 되어 있습니다. 그렇지 않아요? 밥을 먹는 데 있어서도 그냥 `나는 먹는다’ 할 수 있습니까? 먹어야 되겠다는 생각을 한 다음에 먹는 것입니다. 이것을 볼 때 어느 것이 먼저냐? 내적인 것, 즉 생각하는 것이 먼저라는 것입니다.

그러면 여러분은 몸의 욕망이 큽니까, 마음의 욕망이 큽니까? 몸의 욕망이란 밥을 한 그릇 더 먹으면 양이 차듯이 한계가 있습니다. 그러나 마음의 욕망은 한계가 없습니다. 그러면 어느 것이 큽니까? 마음의 욕망에 한계가 있어요? 물질적 욕망, 즉 몸의 욕망에는 한계선이 있습니다. 그러나 그 한계선을 넘어 요구하는 것은 마음의 욕망입니다. 이것은 여러분의 생활 가운데에서 분명히 알 수 있는 것입니다.

이런 관점에서 볼 때, 동물적인 생리작용을 하게 하는 것은 외적인 물질세계가 아니라 그것을 작용시킬 수 있는 보다 높은 기원의 존재, 즉 무형의 존재가 있다는 사실을 부정할 수 없는 것입니다.인생의 근본문제도 이렇게 보면 풀리게 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내가 태어나서 무엇을 좋아합니까? 물론 먹는 것도 좋아합니다. 애기가 태어나면 어머니의 젖을 먹는 것을 좋아합니다. 그러나 어머니의 젖을 먹는 것만을 좋아하는 것은 아닙니다. 어머니의 젖을 먹는 것도 좋아하지만, 어머니를 보고 좋아하는 것입니다. 결국은 어머니를 보고 좋아하기 위해서 젖을 먹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어머니도 애기가 자기를 보고 좋아하기 때문에 젖을 주어도 아깝지 않다는 것입니다. 인연이 그렇게 되어 있습니다.

어머니로서는 무한히 주었기 때문에 보고 싶은 것입니다. 자기의 생명과 정성을 퍼부었기 때문에 퍼부은 그만큼 나를 따라올 것이라고 하는 절대적 관계에서 그 애기를 대하는 것입니다. 애기를 중심삼고 보면 물질적인 조건으로 관계 맺어진 것 같지만, 어머니를 중심삼고 볼 때는 그 반대라는 것입니다. 그러면 어느 쪽이 주체인가? 어머니가 주체입니다. 물질도 줄 수 있는 위치에 있는 어머니이니까 어머니가 주체인 것입니다. 전부 다 그렇게 되어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인간은 두 작용의 욕망 중에서 보다 높은 경지에 있는 욕망을 중심삼고 인생길을 가야 됩니다.

외적인 세계의 욕망은 참된 욕망이 아닙니다. 내적 세계의 욕망이 참된 욕망입니다. 외적인 세계의 욕망은 더 편하자는 것입니다. 이것을 한 단계 끊고 넘어가는 것이 내적 세계의 욕망입니다. 외적 세계의 욕망은 어디까지나 분파적입니다. 내적 세계의 욕망이 전체적입니다. 몽땅입니다 몽땅. 그렇지 않아요? 여러분, 사람들이 `몽땅 내 사랑’이라는 말을 하지 않습니까? 이것이 하나님을 중심삼은 욕망입니다. 하나님은 전체의 중심이기 때문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배반자라는 것도 외적인 입장에서의 배반자보다도 내적인 입장에서의 배반자가 더 큰 배반자가 아니겠느냐? 그러면 인간이 어디에서 죄를 저끄러뜨렸느냐? 외적인 입장에서가 아닙니다. 기독교에서 알고 있듯이 선악과라는 물질로 된 과일을 따먹은 것이 죄가 아닙니다. 그것이 여태까지 지속되겠습니까? 생명의 문제와 정신적인 문제에서 비롯된 것입니다. 여러분도 이것을 부정할 수가 없을 것입니다.

여러분, 남자에게 있어서나 여자에게 있어서 제일 원수는 자기 생명을 노리는 것입니다. 그렇지요? 그러면 대한민국의 원수는 누구인가? 대한민국의 생사문제, 생명을 노리는 자들입니다. 그 다음에는 무엇입니까? 다음에는 대한민국의 욕망을 빼앗으려는 자들입니다. 세계를 살리려는 욕망을 갖고 가는 것을 막으려는 자들이 원수입니다. 그리고 대한민국이 제일 사랑하는 것을 막는 자들입니다. 그러면 대한민국의 원수는 누구냐? 여러분, 이북에서 선전하는 것이 무엇입니까? 남한은 착취한다고 합니다. 그런데 대한민국이 하려고 하는 것은 무엇입니까? 백성을 사랑하려고 합니다. 그런데 그들은 백성을 사랑하려는 것이 아니라 착취하려고 하기 때문에 우리의 원수라는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우리 개인을 두고 볼 때, 내 원수는 누구인가? 내 생명을 노리는 자가 원수입니다. 그 다음에 내가 좋아하는 것을 가로채는 자입니다. 그런데 그것이 금덩이입니까? 그것은 어디까지나 사람입니다. 어머니가 시집올 때 가지고 온 패물이나 혹은 몇 대조 조상으로부터 물려받은 패물을 가지고 있는데, 지식이 금방 죽게 되어 당장 병원에 입원시켜야 하고 남은 것이라고는 그 패물 하나밖에 없다고 할 때 `아들은 죽어도 좋다. 이 패물을 보관해야 돼’ 하는 사람이 있습니까? 그때에는 그까짓 패물이 문제가 아닙니다. 이렇듯 인간에게는 생명 문제와 사랑 문제가 더 크게 작용한다는 것입니다.

27-57
사탄은 어떤 존재냐
인간이 그렇다면 하나님은 어떠할 것인가? 하나님은 누구를 닮으셨을까? 우리 인간이 하나님의 아들딸이라면 하나님은 결국 우리 인간을 닮은 것이 아니겠습니까? 그러면 하나님의 원수는 어떤 존재인가? 하나님의 실존을 위협함과 동시에, 하나님이 사랑하는 아들딸의 생명을 위협하는 존재가 하나님의 원수입니다.

어떤 것이 사탄이냐? 천국에 들어가야 할 사람을 지옥으로 끌고 가려고 생명을 위협하는 동시에, 자유인을 감옥에 가두어 생명을 위협하는 존재가 바로 사탄이라는 것입니다. 또 사탄은 하나님의 사랑하는 아들딸을 위협하는 존재입니다. 이것이 원수라는 것입니다. 원수는 이 두 가지입니다. 그렇겠어요? 안 그렇겠어요?

하나님은 절대자이시기 때문에 그분의 생명은 위협하지 못한다 하더라도, 그 절대자의 아들딸의 생명을 위협하고, 그 아들딸의 사랑을 위협하는 자가 있다면 그것이 하나님의 원수가 되는 것입니다. 그렇지요? 그 아들딸의 원수가 부모의 원수요, 부모의 원수는 아들딸의 원수인 것입니다. 어머니 아버지가 죽으면서 자식들에게 `내가 죽거든 원수를 갚아다오’ 하고 유언하는 경우가 있지요? 만약 아들을 죽인 원수가 있으면, 아버지는 원수를 갚습니다. 이 모두가 생명을 위협하고 사랑을 위협하는 데에서 문제가 되는 것입니다. 이런 모든 것을 두고 보면, 그래서 그렇게 되었구나 하는 것을 느끼게 됩니다.

그러면 하나님의 배반자는 누구입니까? 사탄입니다. 그래서 이 사탄을 알아야 됩니다. 그 다음의 배반자는 누구입니까? 인간입니다. 여러분들 기분이 좋지 않죠? 왜 인간이 하나님의 원수가 되었느냐? 아까 말한 것과 같이, 인간이 심정적 문제에 있어서 하나님과 관계를 맺지 못하고 사탄과의 관계를 맺어 사탄의 자식으로 태어났기 때문인 것입니다. 하나님의 아들딸이 되지 못하고 사탄의 자식이 되었다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 얘기하겠습니다. 여러분, 민며느리가 무엇인지 알아요? 재산이 넉넉하지 못한 집안에 아들이 하나 있는데, 마음대로 장가 보낼 형편이 못되어 가난한 집 처녀를 어릴 적부터 데려다 자기 울타리 안에서 길러 때가 되면 자기의 아들과 짝지어 주는 며느리가 민며느리입니다. 그런데 민며느리 감으로 잘 키워서 때가 되어 둘을 맺어 주려는데, 그 남자를 버리고 동네의 다른 총각과 눈이 맞아 가지고 도망가 버렸다면 원수가 되겠습니까, 안 되겠습니까? 원수가 된다는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하나님도 그렇게 되었습니다. 하나님의 아들과 하나 될 짝이 없어졌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중심삼고 인류의 조상이 될 여자는 한 사람밖에 없었습니다. 여기에서 해와는 민며느리 입장인데 천사장 누시엘이 민며느리인 해와를 빼앗아 간 것입니다. 아담은 누구냐 하면, 하나님의 몸입니다. 고린도전서 3장 16절에 “너희가 하나님의 성전인 것과 하나님의 성령이 너희 안에 거하시는 것을 알지 못하느뇨”라고 하신 것과 같이, 우리의 몸은 하나님의 집이라는 것입니다. 아담이 성숙하여 세상을 헤아릴 수 있는 때가 되면, 즉 하나님의 집이 다 지어지면 하나님께서 그 집에 들어가시게 됩니다. 그러면 하나님과 아담은 일체가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지으신 천지집 안에서 말입니다.

27-59
창조주와 피조물이 하나될 수 있는 자리
하나님께서는 땅도 지으셨고, 상대적 세계도 지으셨고, 인간도 지으셨습니다.그러면 우리의 소원은 무엇입니까? 최고의 사람이 되는 것이지요?그리고 최고의 세계를 이루는 것이지요? 그것은 또 누구의 소원입니까? 하나님의 소원입니다. 다시 말해서, 우리가 바라는 최고의 인격의 기준은 누구의 소원이냐 하면, 하나님의 소원이요, 우리가 바라는 세계는 곧 천지만물을 창조하신 하나님의 소원이 아니겠습니까? 이런 것을 받아 가지고 태어나야 할 본연의 사람이기 때문에 우리들도 하나님께서 바라시던 사람, 즉 아담 해와의 인격을 완성해야 할 목적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최고의 인격을 추구하는 것입니다. 또한 그 인격을 중심삼고 상대적 세계로 지으신 것이 만물세계이기 때문에 만물세계를 주관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하나님의 소원입니다.

그런데 아담 가운데 하나님이 들어가면 하나님의 소원과 아담의 소원이 둘이 됩니까, 하나가 됩니까? 「하나가 됩니다」 그렇게 되는 거예요. 아담의 소원이자 하나님의 소원이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최고 인격적 존재와 하나되어 이 피조세계를 주관하는 것, 즉 만물을 자기 품에 품기를 소원하시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 인간도 최고의 인격자와 하나되는 것이요, 최고의 세계와 하나되는 것입니다. 이렇게 하나될 수있는 주체적인 자리에 들어가게 되면 상대적인 세계가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여기에서 천지합동이란 말이 나오는 것입니다. 천지합동, 창조주와 피조물이 하나될 수 있는 자리는 그것밖에 없습니다. 이렇게 하나되려면 안팎의 모든 소성이 맞아야 하나되지요? 안팎이 맞아야 하나되는 것입니다. 만일에 모양은 비슷하지만 한 쪽이 약간이라도 두껍다면 영원히 같이할 수 있겠습니까? 이것이 합하여 같이하더라도 하나는 무거워서 떨어져 가는 것입니다. 깔려서 떨어지게 되어 있지, 같이 올라가게 되어 있지 않습니다. 그러나 운동에 있어서 둘이 똑같으면 평행을 취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하나되기 위한 뜻으로 인간을 지으셨다면, 하나님이 절대자이시기 때문에 절대자의 몸을 쓰고 태어난 사람은 절대자이신 하나님을 지탱시킬 수 있는 상대적 기준을 세워야 됩니다. 그럴 수 있는 것이 사람의 마음입니다. 사람의 마음은 하나님을 업고 다닐 수 있는 것입니다. 사람의 마음은 그런 능력이 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얼마든지 모시고 다닐 수 있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마음이 좁아요, 넓어요? 마음의 생김새를 여러분 자신은 잘 모르지만, 마음은 무한히 큰 것입니다. 그러면 그 마음이 얼마나 좋으냐? 세계의 30억 인류 한 사람 한 사람에게 몇 백억 원씩 주고도 또 주고 싶은 것이 마음입니다. 그래요, 안 그래요? 마음은 이렇게 멋진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인간은 무한한 사랑, 무한한 희망의 꽃으로 피어날 수 있는 것입니다. 그건 왜 그러냐? 무한한 하나님의 성품을 닮았기 때문입니다. 마음과 몸을 보게 되면, 마음은 크지만 몸은 작습니다. 이처럼 마음과 몸은 언제나 상대적 관계를 맺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래야 서로가 자극을 줍니다. 그래서 내가 기쁨이라든가 슬픔을 느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상대적 관계를 맺지 않으면 안 되게 되어 있습니다.

27-60
순수한 종교인이 가야 할 길
민며느리인 해와가 어떻게 되었다구요? 종과 관계를 맺었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타락입니다. 종과 관계를 맺었다는 것입니다. 타락한 인간의 후손인 우리는 사탄의 피를 받았습니다. 기가 막히다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오늘날 하나님 앞에 배반자가 누구인가? 사탄인 동시에 사탄의 후손들입니다. 그러면 하나님의 입장에서 원수를 갚으려면 어떻게 해야 하겠는가? 원수의 목을 잘라야 되지 않겠습니까? 그래야 되겠지요?

그러면 누구의 목부터 잘라야 되겠습니까? 「사탄이요」 사탄의 목을 자르고 다음에는 사람의 목을 잘라야 되겠지요? 원수인 사탄과 인간의 목을 자르지 못하면 오히려 하나님이 망한 것이니 목을 잘라야 되겠지요?

그런데 하나님의 입장에서 실제로 원수를 갚아야 되겠습니까, 안 갚아야 되겠습니까? 이것이 걱정입니다. 판이 이렇게 벌어져 있다는 것입니다.

여기에서부터 순수한 종교인이 가야 할 길이 나오는 것입니다. 그러면 순수한 종교인이 가야 할 길은 무엇인가? 종교인은 어떻게 가야 되는가? 원수를 갚고 가야 되느냐, 원수를 용서해 주고 가야 되느냐? 이것이 문제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서 그런 입장에 딱 부딪쳐 계십니다.

하나님께서는 온갖 정성을 다해서 희망찬 대업을 꿈꾸며 우주를 창조하셨는데, 그 모든 대업과 생명과 이념의 모든 조건이 일시에 파탄되어 망하게 될 때 천지가 캄캄했다는 것입니다. 여기에 원수로 등장한 것이 천사장 누시엘이었습니다. 이 누시엘을 때려 잡아야 되겠나, 안 때려 잡아야 되겠나? 하나님께서 가장 사랑하던 뼈중의 뼈요 살중의 살인, 아들딸을 누시엘이 자기의 아들딸로 삼은 것입니다. 이러한 원수의 목을 잘라야 되느냐, 그대로 놔 두어야 되느냐? 이런 문제를 놓고 역사 이래 처음으로 고심한 분이 하나님입니다.

오늘날 인간 세상에서 자기들을 중심삼은 생명의 위협자, 사랑의 위협자와 같은 원수가 문제가 아닙니다. 역사상 최초에 그런 슬픔을 당하셨고, 고통을 당하셨고, 그 역사의 비참함을 당하시면서 이 환경을 타개하기 위하여 몸부림친 최초의 존재가 누구냐? 하나님이시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칼을 드느냐, 용서의 법을 택하느냐 하는 기로에 계십니다. 그렇겠지요?

칼을 들어 죽이면 그 후에 억천만 년의 후한이 남는다는 것입니다. 그렇게 하면 결국 내 아들딸을 내가 죽이는 것이 되는 것입니다. 원수의 피를 받았지만 세상 자식들과는 다르다는 것입니다. 아버지는 그 딸을 어릴적부터 고이 길러 며느리 삼으려고 애지중지 길렀는데, 난데없는 깡패와 관계를 맺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 딸은 좋아 죽겠다고 하면서 별의별 짓을 다 벌이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이것이 더 분하다는 것입니다.

최초의 아들딸이요, 자기의 몸입니다. 아담 해와는 하나님의 몸입니다. 실체세계를 이루기 위해 그들을 미래의 신으로 지으셨던 것입니다. 하나님은 그 세계를 자기 혼자 이루는 것이 아닙니다.

여러분은 혼자 있으면 기쁘겠습니까? 그래 사람의 마음이 혼자 가만히 있으면 기뻐집니까? 또 남자면 남자 혼자 있으면 기뻐집니까? 상대자가 있어야 됩니다. 하나님은 왜 천지를 창조하셨느냐? 상대자를 구하기 위해서 창조하셨습니다. 기성교회도, 그 어떤 종교도 이런 대답을 못하고 있습니다. 결국은 하나님께서 기쁨의 생활을 하기 위해 천지를 창조한 것입니다.

그러기에 아담은 하나님의 몸입니다. 그러면 해와는 누구냐? 아담의 부인이기 때문에 하나님의 대상이라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아담 해와는 전체의 창조의 기원이 되고, 전체의 생명의 기원이 되는 것입니다. 그러니 이것을 위협한 장본인인 사탄에 대해 원수를 갚아야 합니다.

이 사탄은 으뜸가는 배반자입니다. 배반자 중에도 배반자요, 일류로 달리는 배반자입니다. 이 사탄이 지금가지 세계를 마음대로 하고 있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 원수를 갚아 주기 전에는 마음대로 할 것입니다.

하나님의 아들딸이 변하여 원수의 아들딸이 되었습니다. 이처럼 사랑의 관계를 잘못 맺으면 반드시 핏줄이 달라지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핏줄을 이어받기 전에 사탄의 핏줄을 이어받았다는 것입니다. 이렇게 된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원수의 자식들로 태어났습니다.

27-62
하나님이 재림사상을 중심삼고 섭리해 나온 이유
우리의 본심은 본래 사탄과 인연을 맺기를 바라지 않았습니다. 하나님과 인연 맺기를 바랐습니다. 그런데 몸이 이것을 벗어났습니다. 그래서 몸은 사탄과 짝을 맺게 되었고, 마음은 하나님과 짝을 맺으려고 하는 것입니다. 인간은 이 두 갈래 길에 놓여 있습니다. 삼팔선, 즉 경계선에 놓여 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 경계선에서 작용하는 힘의 3분의 2가 몸이고, 3분의 1이 마음입니다. 그러니 마음과 몸이 싸우면 몸이 번번이 이긴다는 것입니다.

왜 그러냐? 마음은 아직까지 하나님을 중심삼고 사랑을 맺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즉, 마음이 하나님을 중심삼고 상대를 갖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알겠어요? 왜 몸이 더 강하냐? 하나님과 마음의 사랑을 맺으려고 했는데 그러지 못하고, 먼저 몸의 사랑을 맺었기 때문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몸은 마음보다 더 강하다는 것입니다. 아직까지 마음의 사랑은 맺지 못했습니다.

이와 같이 마음의 사랑을 맺기 위하여 찾아 나온 것이 하나님의 섭리역사요 종교의 역사인 것입니다.

신랑 신부의 마음의 사랑, 새로운 신랑 신부의 마음의 사랑의 기원을 역사에 제시해 놓기 위해서 종교가 그것을 추구해 나온 것입니다. 그러니 마음의 사랑을 중심삼고 완전히 자리잡은 하나의 남자가 나오지 않고는 완전한 하나의 여자가 나올 수 없습니다. 그래서 지금까지 하나님은 그런 하나의 남자를 찾아 나오신 것입니다. 지금까지의 역사는 하나님과 마음의 사랑, 즉 본심의 사랑의 인연을 찾아 그것과 완전히 관계를 맺어 절대적 기준에 연결될 수 있는 하나의 남성을 찾아 나온 역사입니다. 이것이 메시아 대망사상(待望思想)입니다.

기독교에서는 재림주님이 온다고 하고, 불교에서는 미륵보살이 온다고 하고, 유교에서는 진인이 온다고 하는 등 고차원적인 종교에는 재림사상이 있습니다. 거 이상하지요?

하나님은 이런 내용을 중심삼고 섭리해 나오시는 것입니다. 우리가 이렇게 이론적인 면에서 보더라도, 인류역사는 하나님의 그러한 하나의 남자를 찾아 나오시는 역사인 것을 알 수 있습니다.

27-63
하나님이 찾아 나오시는 남자
세계의 모든 문화권은 이렇듯 이상적인 하나의 남성에 의한 이상적인 사상권을 목표로 하고 형성돼 나오고 있습니다. 다시 말하면, 하나의 절대적인 사상권을 중심삼고 나온다는 것입니다. 결국 사상은 하나의 절대적인 이념권을 중심삼고 나온다는 것입니다. 그 사상은 하나의 남자로부터 나오는 것입니다. 지금까지의 역사는 남자가 이어 나왔습니다. 여자는 생각지도 못했습니다. 그렇지요? 이와 같이 역사는 한 남자를 찾아 나오는 역사인 것입니다.

그러면 그 남자는 누구인가? 본심의 사랑을 중심삼고 하나님과 사랑의 인연을 맺는 최초의 사람입니다. 그러나 이것을 못 이루었기 때문에, 몸의 사랑을 희생시키지 않고는 마음의 사랑을 갖지 못하는 것입니다. 아담 해와가 이율배반적인 내용을 중심하고 사탄에게 끌려감으로써 마음의 사랑이 몸의 사랑에 눌렸다는 것입니다. 마음의 사랑을 통하여 몸이 사랑을 받아야 할 것인데, 오히려 몸의 사랑을 중심삼고 마음의 사랑이 눌렸다는 것입니다.

이런 입장에 있는 사람은 3분의 2는 사탄세계에, 3분의 1은 하늘세계에 속해 있는데, 마음의 힘을 가하여 3분의 2를 점령하고 있는 몸을 끌어내야 합니다. 마음이 몸을 반드시 때려 잡아야 하는 것입니다. 원수를 때려 잡아야 합니다. 이 싸움을 하며 6천년 역사를 이어나온 것입니다. 그러기에 마음의 사랑의 중심이 나오지 않고는 이 싸움은 끝날 수 없습니다.

몸적 사랑이 마음적 사랑보다 강합니다. 몸적 사랑의 상대가 마음적 사랑의 상대보다 강하다는 것입니다. 무슨 말인지 알겠어요? 요컨대 마음의 사랑의 상대가 하나님이라는 것을 모르고 있습니다. 마음의 소원이나 바람보다 몸의 소원이나 바람이 더 강하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여기에서 마음적 사랑의 상대를 확실히 알게 되면 몸적 사랑은 문제가 되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은 이것을 확실히 제시할 수 있는 마음의 사랑을 중심삼고 재창조하시는 것입니다.

아담 해와를 창조했지만 타락했기 때문에 없는 것으로 여기고, 다시 만들어 수습하신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마음적 사랑의 주체를 대표한 남성을 찾아 나오시는 것입니다. 그러한 역사적인 대표자가 누구라구요? 메시아입니다.

메시아는 생명을 중심한 마음의 사랑과, 생명을 중심한 최고의 인격의 표준이 되는 분입니다. 이분을 하나의 모델로 하여 지금까지 사탄세계에서 이어받은 신념이나 사랑의 감성을 모두 매장하여 무의 상태로 만들어야 합니다. 그리하여 본래 타락하지 않은 아담의 몸과 같은, 본성인 마음의 사랑을 중심삼고 백 퍼센트 화합할 수 있는 몸의 상대를 찾아야 됩니다. 그리하여 본연의 마음의 사랑을 실체 몸뚱이와 결부시켜 타락의 인연을 벗어난 하나의 남성이 되어야 하고, 하나님의 몸, 즉 내적인 성전을 이루어 하나님과 하나되어 등장할 수 있는 하나의 남성이 되어야 합니다. 이런 남성이 메시아입니다.

메시아란 무엇인가? 인류 최초로 하나님의 사랑을 중심삼고 태어난 사랑의 조상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이나 다시 오시는 주님은 본연의 마음을 중심삼은 사랑의 세계의 아버지, 우주의 사랑의 아버지가 되는 것입니다. 내 몸과 마음은 서로 떨어질 수 없습니다. 몸은 마음의 사랑을 받아야 하는 것입니다. 마음과 몸이 하나된 입장에 서 있지 못한 인간은 그러한 입장에 서 있다 하는 조건을 세워 하나님으로부터 접붙임을 받아야 됩니다. 접붙임을 받되 줄기를 잘라 접붙임을 받아야 됩니다. 메시아와 타락한 인간은 씨가 다르기 때문에 줄기를 잘라서 접붙임을 받아야 된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지금까지의 복귀섭리 경로입니다.

27-65
원수를 용서해 주고 사랑하라
하나님은 무엇을 찾아 나오셨느냐? 한 남성을 찾아 나오셨습니다. 하나님은 창조가 끝나지 않았다고 생각하시고 지금까지 재창조해 나오셨습니다. 인간이 어떻게 되었기에 그래야 되느냐? 창조이상이 완성되어야 하는데, 아직까지 미완성 단계에 있기 때문에 이것을 다시 수습하자니 그래야 되는 것입니다. 미완성 단계에 있으니 완성을 향해 올라가는 조건을 세워야 합니다. 창조원칙에 위배되지 않으면서 재창조과정을 밟아 올라가는 것이 지금까지의 구원섭리 노정입니다. 알겠어요?

자, 그럼 다시 생각해 봅시다. 하나님은 칼을 드셔야 하느냐, 용서를 하셔야 하느냐? 용서하기가 쉬운 일입니까? 여러분들, 한번 생각해 보십시오. 용서하기가 쉬운가. 이것은 철천지원수인데…. 그런 원수를 대하는 마음이 어떻겠습니까? 만일에 여러분이 그런 원수를 대한다면 마음이 어떻겠습니까? 말이 나오겠습니까, 안 나오겠습니까? 가슴이 막힌다는 것입니다. 자기의 아들딸을 전부 다 잡아 죽인 녀석이요, 안팎의 세상을 전부 다 엉망으로 만들어 버린 것입니다. 그런데, 이런 원수를 대하여서도 그런 일이 없는 것같이 대해야 할 입장에 계신 분이 하나님이십니다. 그렇게 대하지 않고는 복귀역사를 못 하는 것입니다. 원수진 일이 없는 것 같이 생각하지 않고는 구원 역사를 못 하는 것입니다. 원수가 아닌 것같이 대하지 않고는 용서했다 하는 자리에 설 수 없습니다.

그런 자리에서 `원수를 사랑하라’는 말이 나오게 된 것입니다. 원수를 사랑하라는 것입니다. 알겠어요? 비로소 역사에 없었던 새로운 법도가 나온 것입니다.

그러면 우리는 어떤 마음을 가져야 되느냐? 원수진 일이 없는 것 같은 마음을 가져야 합니다. 원수를 사랑한다는 하나님도 할 수 없는 일을 해야 합니다. 알겠어요? 사탄은 자신은 하나님 앞에 원수인데도 불구하고 하나님이 자신을 사랑한다는 것을 알기 때문에 하나님 앞에 굴복하게 되는 것입니다. 여기에서 구세주 사상이 나오는 것입니다.

그래서 `당신이 가는 길은 천리원칙이요, 내가 몽땅 바치고 싶어 해도 받을 수 없는 당신이며, 이 원칙을 따라가지 않으면 풀 수 없는 것이 당신의 사정이기 때문에, 나는 그 원칙에 따라 당신을 따라갈 것입니다. 당신의 천리원칙을 찾아갈 수 있는 사람이 나오면 나를 바치겠습니다…’ 이런 조건하에서 복귀역사가 출발했던 것입니다. 알겠어요? 그렇지 않으면 본연의 세계로 돌아갈 길이 없는 것입니다. 달리 돌아갈 수 있겠어요?

원수를 용서해 주는데 무엇으로 용서해 주느냐? 칼 가지고 용서해 줄 수 있습니까? 없습니다. 이런 관점에서 생각해 보게 볼 때, 우리들이 소위 원수라고 하는 그 원수를 무엇으로 용서해 주겠습니까? 하나님은 창조과정을 파고 들어 우주 전체의 수천만 존재들을 일시에 파탄시킬 사탄을 용서해 주셨습니다. 꿈에도 생각할 수 없는 원수인데도 용서해 주었습니다. 그뿐만 아니라 사랑을 해야 하는데 어느 정도 사랑해야 하느냐? 원수가 되지 않았을 때 사랑했던 것 이상으로 사랑하지 않으면 안 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아담 해와를 사랑하던 마음, 옛날에 아담 해와를 대하던 그 사랑의 마음 정도 가지고는 복귀할 수 없습니다. 그렇지요? 원수의 자식이 되었는데, 타락하기 전에 아담 해와를 사랑하던 그 마음 가지고 구원할 수 있겠습니까? 그래 가지고는 구원할 수 없습니다. 아담 해와를 사랑하던 그 이상으로 원수를 사랑하고, 원수의 자식을 자기 자식 이상의 마음을 가지고 사랑할 수 있는 동기를 갖추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하나님의 아들이라면 어떤 모습이 되어야 하느냐? 역사상의 그누구도 그런 내용을 중심삼고 살아야 한다는 것을 몰랐습니다. 어떤 성현현철도 `원수를 용서하라’ 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고맙게도 단 한 분 그것을 아는 사람이 있었습니다. 그분이 바로 예수님입니다. 예수님은 십자가상에서 운명하면서 `저들이 지은 죄를 알지 못하나니 아버지여 용서 하시옵소서’라고 하셨습니다. `저들의 죄를 용서해 주옵소서’라고 기도하면서 자기의 원수를 사랑하겠다는 하나의 깃발을 들고 자신의 생명과 자신의 소원이 완전히 막히는 자리에 들어갔습니다. 그런 자리에서도 만민을 구하고 원수를 사랑하는 마음이 앞서서 죽어갔기 때문에, 그 마음과 원수를 사랑해야 했던 하나님의 마음이 하나로 연결되었던 것입니다. 또 예수님은 하나님의 아들이 되었던 것입니다. 거기서부터 새로운 문화가 출발되었고, 기독교가 세계적인 종교가 되지 않을 수 없었다는 사실을 알아야 되겠습니다. 그렇겠지요? 「예」

원수를 사랑하지 않고는 하늘나라에 가지 못합니다. 하나님의 아들딸이 되려면 그와 같은 고비를 넘고, 그 마음의 세계에 동행자가 되고, 그 마음은 하나님을 대신한 대변자가 되어 진리와 뜻을 중심삼고 싸워서 실적을 남겨야 합니다. 그러지 못하는 사람은 하나님 나라에 갈 수 없습니다.

27-67
복귀노정의 철칙
그런 사람이 이 땅에 없었습니다. 다만 그런 남자되는 한 사람이 이 땅에 나왔었지만, 한 여자가 나오지 못했기 때문에 그분은 돌아가셨던 것입니다. 만일 하나님과 같은 입장에서 원수를 사랑할 수 있는 한 여성이 있었다면, 그분과 그 여성이 하나되어서 천지에 새로운 역사의 부모, 마음 세계의 부모가 되어 천지를 새로운 세계로 복귀할 수 있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의 남자로 오신 예수님 앞에 하나의 여자가 없었습니다. 이스라엘 민족을 대신한 남자는 있었으나, 이스라엘 민족을 대신한 여자는 없었다는 것입니다. 천성의 인연을 본심으로 알아서 모실 수 있는 한 여성을 고대했지만, 그러한 여성이 없었다는 것입니다. 전부가 자기를 중심삼고, 자기의 소원을 중심삼은 사람들이었습니다. 천륜을 중심삼은 천국 이념이 중심이 아니라 자기 뜻, 자기 소원, 자기 욕망을 중심삼은 사람들이었다는 것입니다. 그 욕망은 세속과 더불어 이미 타락한 인간의 욕망을 벗어나지 못하고 있었으니 하나님과 인연 맺을 수 없었던 것입니다.

본연의 법칙에 의해 재출발해야 합니다. 마리아부터 재출발해야 됩니다. 예수님을 둘러싼 무리가 여쭙기를 `당신의 모친과 동생들이 당신께 말하려고 밖에 섰나이다’ 했을 때, 예수님은 `누가 내 모친이며 동생들이냐? 누구든지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대로 하는 자가 내형제요, 자매요, 모친이니라’고 하셨습니다. 그러면 그들이 하나님 뜻대로 했다는 것입니까? 못 했다는 것입니다. 그걸 알아야 돼요.

그러면 하나님의 뜻은 무엇인가? 세계적인 원수들을 구원하는 길을 닦아 가야 할 예수님 앞에, 하나님의 원수를 사랑하고 넘어갈 수 있는 신앙을 갖고 그런 결의를 가지고, 하나님을 모시고 하나님의 심정과 사정을 품은 자가 되어 예수님을 도운 사람이 있었습니까? 이스라엘 민족을 사랑하겠다고 몸부림친 남자나 여자가 있었습니까? 없었습니다. 오히려 하늘의 뜻을 소홀히 하여 그 뜻을 품고 왔던 사나이를 쫓아 버렸습니다. 예수님을 십자가에 내몰아버린 것입니다. 어째서 예수님이 죽기 위해서왔습니까?

그러면 오늘날 통일교회 문선생은 어떻게 할 것인가? 이런 말 하면 여러분이 이상하게 생각할지 모르지만, 나에게는 원수가 많습니다. 가인을 굴복시키지 않고는 하늘나라에 못 가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적어도 세사람 이상 굴복시켜야 됩니다. 그러기 위해서 예수님께서도 베드로, 요한, 야고보, 이 세 제자를 선택했던 것입니다. 열두 제자, 그중에서도 베드로, 요한, 야고보가 예수님이 죽기 전에 먼저 생명선을 넘어가야 했던 것입니다. 예수님과 제자들은 아버지와 아들의 관계입니다. 그러므로 아버지가 죽기 전에 먼저 아들이 죽겠다고 나서야 된다는 것입니다.

초조한 하나님 앞에 아담 해와가 죽는 한이 있더라도 그 뜻을 세우려고 했더라면 타락하지 않았을 것이 아닙니까? 그와 같은 관계에 있는 것이 예수님과 제자들입니다. 즉, 예수님은 아버지의 입장이고, 제자들은 아들의 입장입니다.

아들의 입장인 아담이 부모인 하나님을 배반한 것이 타락입니다. 이것을 복귀하기 위해서는 반대의 경로를 거쳐야 하기 때문에, 부모가 죽을 수밖에 없는 길을 자식이 먼저 죽겠다고 나서야 된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복귀노정의 철칙입니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예수님을 죽음의 자리에 내어 놓고 세 제자는 자기들의 살길을 찾았던 것입니다. 그러나 결국은 모두 죽었습니다.

27-69
하나님을 점령하려면
이 길을 따라감에 있어서 하나님은 칼을 들었느냐? 아닙니다. 베드로가 말고의 귀를 자를 때, 예수님이 어떤 말씀을 하셨습니까? 원수를 갚으라는 것이 아닙니다. 그런 비참하고 추하고 억울한 자리에서 가라지 같은 추한 악당들의 입장에 부딪쳤으니 생각하면 천지가 아득해지는 사연이 많았지만, 당장 세계가 망하는 그런 사연보다도 하나님에게는 본연의 사람을 어떻게 찾을 것인가, 타락한 인간을 어떻게 하여 본연의 아들딸로 복귀시키느냐 하는 사연이 더 중했습니다. 그런 사연에 입각하여 예수님께서 하나님과 보조를 맞추어 상대적 관계를 갖추고 돌아가셨기 때문에, 여기서부터 역사의 새로운 이념이 출발했다는 사실을 알아야 됩니다.

그러면 통일교회가 가는 길은 어떤 길이냐? 통일교회가 가는 길 앞에는 원수가 많습니다. 개인의 원수, 가정의 원수, 종족의 원수, 민족의 원수, 국가의 원수, 세계의 원수가 있습니다. 내 가는 길 앞에는 전부가 원수였습니다. 내가 하늘을 이용할 수 있는 기백도 있고, 용기도 있는 사람입니다. 하지만, 그것은 억천만년 생애를 두고 보면 생각할 수 없는 일입니다. 내 원수를 갚아 달라고 기도하게 되면 그 사람은 걸립니다. 지금 내가 누구보다도 분한 마음을 품고 하늘의 불이라도 있다면 그것을 가지고 불살라 버릴 수도 있을 것입니다. 그러니 그런 것을 하나님이 보게 된다면 복줄 생각이 안 날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편은 맞고 빼앗아 오는 작전을 하시는 것입니다. 사랑의 마음을 뿌려서 사랑의 수확을 거두시는 것입니다. 그 마음 깊이 사랑의 씨를 뿌려 가지고 추운 바람이 부나 폭풍우가 몰아치나 당신의 생명의 피살을 전부 다 바쳐 지금까지 원수를 사랑하기에 몸부림치고, 뼛골이 녹아나는 안타까운 심정으로 같이해 주셨던 것입니다. 그런 방향에서 원수들을 위해 사랑의 철칙을 붙들고 나오셨기 때문에, 지금까지두 세계가 점점 하나의 세계로 통일되어 나간다는 것입니다. 알겠습니까? 「예」

이런 관점에서 통일교회 교인들을 보면 하나님이 바라시는 식구가 얼마나 될 것인가 하는 생각이 듭니다. 또 여기에 할머니들이나 오래된 사람들을 보게 되면 서로가 자기는 어떻게 되나 염려하고 있습니다. 자기만이 귀하다는 거예요.

`통일교회가 잘 되기 위해서는 내가 잘 되어야지. 선생님이야 고생하더라도 내가 편해야지’ 하는 사람이 있을 것입니다. 그래 그 사람이 잘 되나 두고 보십시오. 그 사람의 얼굴은 점점 좋아지겠지만 그 사람의 마음은 점점 내려간다는 것입니다. 땅 속으로 들어가는 것입니다.

종교가 가는 길과 세상이 가는 길은 다릅니다. 그래서 지금까지의 기독교는 맞고 빼앗아 왔습니다. 희생의 길, 순교의 길을 걸어왔다는 것입니다. 맞고 빼앗는 작전을 해 왔습니다. 사탄은 때리고 빼앗는 작전을 하지만, 하나님은 맞고 빼앗아 오는 작전을 합니다. 그러면 누가 이기느냐? 결국에는 맞고 빼앗아 오는 사람이 이기게 되어 있습니다.

그건 왜 그러냐? 우리들 가정에서 보게 되면, 철이 없고 약해 보이는 아이인데도 형제끼리는 서로 생각해 주는 아우가 있습니다. 그런데 항상 형제들에 의해 어려움에 몰립니다. 그러면 그 편에 누가 섭니까? 여기에는 부모가 서게 된다는 것입니다. 이렇게 부모가 점령당합니다. 이와 같이 하나님도 점령당한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나아가는 목적이 세상을 점령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점령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점령해야만 이 세계를 점령할 수 있고, 영계도 점령할 수 있는 것입니다. 이런 기준에 들어가는 것은 하나님을 점령하는 것입니다. 세상 만사가 문제가 아닙니다. 하나님을 점령하려면 하나님의 골수의 마음을 끌 수 있는 입장에 서야 됩니다. 그것이 무엇이냐? 희생봉사입니다. 그러면 그 작전은 무엇이냐? 무한히 용서하는 것입니다. 무한히 용서하고, 사탄을 사랑하는 법도를 세워 나가는 길밖에 없습니다. 이렇게 살아가는 사람은 망하지 않습니다.

동네에서 양심 있고 순하다는 사람도 여러 번 억울한 입장에 몰리면 폭발하게 됩니다. 그렇게 되면 동네 사람 전부가 그 사람편에 서는 것입니다. 그 사람이 억울하게 맞으면 동네 사람 모두가 그 사람편에 섭니다. 본심이 그렇다는 것입니다. 여기에는 사탄도 꼼짝 못하는 것입니다. 그것은 왜 그런가? 천도가 그렇게 되어 있기 때문이며, 하나님께서도 그렇게 섭리해 나오시기 때문인 것입니다.

27-71
우리의 갈 길은 어떠해야 할 것인가
여러분의 마음의 원수를 용서로 갚으라는 것입니다. 하늘 사람이라면 원수가 죽었을 때 원수를 갚겠다는 마음이 드는 것이 아니라 `네후손들에게는 원수를 갚지 말아야지’ 하는 마음을 갖게 될 것입니다. 그런데 `잘 죽었다, 그래도 싸지. 내가 그럴 줄 알았다’ 한다면 하나님의 아들딸이 될 수 있습니까? 그러므로 여러분은 원수가 많은 이 세상에서 원수를 대하여 용서하는 마음을 가지면 그 원수가 자기를 증거하게 됩니다. 그러므로 원수를 갚기 위해서 칼을 들고 나올 것이 아니라, 원수를 사랑하라는 것입니다.

기독교 사상이 위대한 것이 바로 이런 것입니다. 칼도 아무것도 가지지 않고, 벌거숭인 채로 매맞고 피 흘리고 죽어가는 길에서도 원수를 사랑하라는 것입니다. 그래야 하나님께서 세계를 주관하신다는 것입니다. 통일교회 여러분도 마찬가지로 그래야 된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생각해 보십시오. 하나님께서 사탄과 인간에게 배반을 당하셨습니다. 사탄보다도 인간이 더 많이 배반했습니다. 지금까지 하나님을 얼마나 많이 배반했습니까? 사탄보다도 훨씬 더 많이 배반했습니다. 사탄은 그럴 수 있는 환경에서 한 번 배반했습니다. 그런데 인간들은 역사를 통해 볼 때, 아담 가정에서부터 노아 가정, 아브라함 가정, 그리고 지금까지 6천년이라는 역사를 거쳐오면서 번번이 배반했습니다. 하나님의 심정을 알아주지 못했던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사랑의 심정을 가지고 섭리하시며, 보냈던 예수님을 십자가에 쫓아 버린 이스라엘 민족을 대해서 그렇게 원한에 사무쳤는데도 불구하고, 그것을 또 잊어버리고 인간을 사랑하는 아들딸로 만들겠다고 하시는 것입니다. 여러분 입장을 바꾸어 놓고 생각해 보십시오. 그럴 수 있겠습니까?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아무리 못났어도 그런 아들딸을 만들겠다고 하시는 것입니다.

그런 하나님이시라는 것을 안 우리의 갈 길은 어떠해야 할 것인가? 그 길을 가는 데 돈이 문제입니까? 아니면 명예가 문제가 됩니까? 외적인 것은 문제가 되지 않습니다. 세상의 그 어느 것도 문제가 될 수 없습니다. 그것은 내적인 문제입니다. 생명문제와 자기 심정문제에 있어서의 안위의 터전을 마련하는 데에는 외적인 문제 가지고는 해결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을 품어야만 해결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렇지 않겠어요?

그렇다면 이 경계선, 배반자와 하늘 사이의 경계선을 어떻게 타개하고 넘어갈 것인가? 원수를 사랑해야 합니다. 그런데 원수를 사랑할 수 없는 입장에서도 하나님의 원수를 사랑해야 하는 깊은 사연과, 안타깝고 억울하고 분한 사연을 넘을 수 있는 사랑을 위해 몸부림쳐 나온 예수가 얼마나 불쌍하겠습니까? 생각해 보세요? 얼마나 불쌍합니까?

그렇기 때문에, 우리 통일교회에서는 아벨이 되려면 가인을 복귀시켜야 한다고 합니다. 세상이 하나님의 원수가 되었으니, 하나님의 입장에 서서 소망의 아들딸을 찾기 위해 원수를 때려잡는 것이 아니라, 원수를 사랑하자는 것입니다. 그런 입장에 서지 않고는 복귀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가인 아벨을 중심삼고 볼 때에, 우리 통일교회 교인들은 아벨된 입장에서 가인 입장에 있는 세상 사람들의 한을 풀어 주고, 그들을 사랑함으로써 따라올 수 있게끔 만들어 놓아야 됩니다. 그러지 않고 먼저 들어왔다고 영웅시하면 망하는 것입니다. 그런 마음을 가지면 망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나는 통일교회 선생이지만 그런 생각을 안 했습니다. 지금까지 여러분에게 나를 모시라고 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세상 사람들은 통일교회 문선생은 독재자라고들 합니다. 선생님이 독재자 하고 싶어서 합니까? 선생님이 명령해서 여러분이 나를 모십니까? 여러분들의 마음이 그렇게 하려고 한 것입니다. 내가 언제 그렇게 하라고 했습니까? 또 여러분들이 여기에 모이라고 해서 왔습니까? 누가 오라고 해서 온 것이 아니라, 자기가 자꾸 오고 싶어서 온 것입니다. 왜냐하면, 사람의 마음은 지혜롭기 때문입니다. 사람의 마음은 사랑이 있는 곳을 찾고 있습니다. 누가 말하지 않더라도 그렇다는 것입니다.

그건 왜 그러냐? 마음은 생명과 같아서, 하나님을 중심삼고 사랑의 새로운 싹이 튼다는 것입니다. 얼음산은 봄이 되어 햇볕이 따뜻해지면 추운 겨울의 인연을 버리고 봄을 맞이한다는 것입니다. 추운 겨울을 배반한다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여러분에게 누가 오라 가라 할 필요가 없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나는 `너희들은 전부 다 나를 반대하지만, 너의 2세들은 내 종이 된다’고 말합니다. 내가 어떻게 이처럼 자신 있는 말을 할 수 있느냐? 나는 혼자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왜? 사탄이 내 앞에 있지만 그 2세들을 하나님께서 복귀하는 것이 원칙이기 때문에, 내가 그럴 수 있다는 것입니다. 나에게도 그 공식이 적용된다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나는 굶어 죽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내가 굶게 되면 여러분이 밥을 못 먹게 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도 밥을 잘 먹는 사람은 통일교회 교인이 아닙니다. 그렇게 되어 있다는 것입니다. 그것도 내가 그렇게 하라고 해서가 아니라, 여러분 마음이 그래서 그런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문제가 되는 것입니다.

27-73
선생님이 걸어온 길
그렇게 된 동기에 대해서는 여러분은 잘 모릅니다. 내가 어제도 얘기했지만,선생님은 참으로 좋기도 하지만 무서운 사람입니다. 나를 개인적으로 반대했던 사람도 망했고, 가정적으로 반대했던 사람도 망했습니다. 또, 반대한 단체도 망했으며 반대한 정권도 망하지 않았느냐? 또 이 세계도 이렇게 망해가지 않느냐는 것입니다. 하나되지 않으면 망합니다. 공식적으로 그렇게 되어 있습니다. 나는 친구도 없는 지극히 외로운 사람입니다. 하나님은 외로운 분이며 고독의 왕입니다. 그러니 하나님을 추구하는 사람은 고독의 왕자가 되어야 합니다.

아무튼 우리는 누구보다도 민족을 사랑하고, 세계를 위해서 피눈물 나는 투쟁을 해야 합니다. 여러분이 하늘 앞에 나서게 될 때, 즉 통일교회에 들어올 때 세계가 나서고 삼천만 민족이 나서게 되면 여러분이 통일교회 문선생을 따라가겠습니까? 거기에는 하나님께서 얼마나 역사를 하시는지 모릅니다. 별의별 역사를 다 했습니다. 안 가면 들이치면서 가라 했으며, 징계를 주는 역사도 하셨던 것입니다. 내가 오기 싫어하는 여러분을 오라고 유인했습니까? 여러분이 산바람이 나서 그렇게 따라온 것입니다. 마음이 그렇게 한 것입니다.

봄날이 오면 꽃이 피고, 꽃이 피어 향기가 나면, 나비가 날아오기 마련입니다. 천지 조화가 그렇게 되어 있습니다. 이렇게 지금까지 나왔습니다. 세상이 아무리 반대해도 나는 망하지 않습니다. 나를 감옥에 가두어도 내 마음과 내 이념은 가두지 못합니다. 나를 치라는 것입니다. 치면 지금까지 내가 하나님 앞에 걸어 나온 길과 하나님이 닦아 나오신 길과 연결된다는 것입니다. 그러니 원수를 사랑할 수 있는 마음이 얼마나 강한지 감정하라는 것입니다. 칠 테면 치라! 내가 너를 미워하는가, 안 미워하는가? 매를 맞고 피를 토하면서도 `아! 잘 맞았다. 역사적인 모든 원한의 인류를 대신해 맞았다. 내가 맞고 잊어버리고, 내가 이것을 기억하지 않겠다’ 하면서 `하나님이시여! 이들을 용서하소서’라고 했다면 이것이 얼마나 멋집니까? 그 자리를 지나가야 되는 것입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나를 죽이는 자리에 세워야 합니다. 그러면 간단하다는 것입니다.

왜정 때, 내가 12시간 가까이 고문을 받고 피를 토한 적도 있었고, 15분 동안 사람을 미치게 하는 평생 잊지 못할 그런 고문도 받았습니다. 이것을 12시간 받으면서도 기적적으로 살아 나왔습니다. 맞으면서도 뒤로 벌렁벌렁 나자빠지고, 죽은 피가 주루룩 쏟아지도록 매를 맞으면서도 `쳐 봐라! 그 몽둥이가 부러지나, 내 뼈가 부러지나’ 하며 견뎌냈습니다. 그것은 하나의 큰 시련이었습니다.

그렇지만 나는 그들을 원수같이 대하지 않았습니다.그들에게 복을 빌어 주고 가야 할 책임이 내게 남아 있기 때문에, 그들의 무엇을 보고 복을 빌어 줄 것인가를 연구하였습니다. 그 감방에서 고민하고 연구한 것입니다. 그러나 사람은 양심이 있으니, 아침에 사람들이 다 나간 뒤에 아무도 모르게 사과합니다. 그것이 사람인 것입니다. 그것을 보면, 인간은 누구나 같다는 것입니다. 그들도 양심은 속이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27-75
여러분이 하나님의 심정에 얼마나 접해 봤느냐
거기서부터 일은 시작되는 것입니다. 이런 길을 유린하고 욕을 하게 되면 망한다는 것입니다. 내가 망하지 않게 하기 위해서라도 하나님께서는 어떤 때는 사랑을 주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그런 면에서 선생님이 좋을 때는 한없이 좋지만, 무서울 때에는 한없이 무서운 사람입니다.

선생님이 가만히 보면, 어떤 때는 유명한 사람에 대해 거 안 되겠는데 하는 생각이 들어요. 참으로 너무 하는구나 하는 생각이 들면, 그 사람은 7개월이 되기 전에 죽어가는 것입니다. 선생님이 그런 길을 걸어왔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내가 누구를 미워하면 안 된다는 것입니다. 이렇게 살아가고 있습니다.

통일교회 교인들 중에 선생님이 편한 생활을 한다고 생각할지 모르지만 그렇지 않습니다. 오늘도 새벽 두시 반에 일어났습니다. 잠을 자도 한 시간 정도 지나면 깨어나곤 합니다. 빚을 지고서는 못 사는 사람입니다. 이런 생활을 하면 통일교회는 절대 망하지 않습니다. 세계가 망하는 한이 있어도 통일교회는 망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만일에 여기에서 섭리가 연장되고 지지부진해도 그것을 한꺼번에 이루기 위한 하나의 작전입니다. 많은 피해를 입히지 않기 위한 하나의 작전으로 알고 있지, 통일교회가 발전하지 못한다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내 자신이 망하지 않기 때문에 망한다는 생각을 하지 않습니다.

내가 생명의 빚을 안 지고, 되레 빚을 지우고 삽니다. 여러분은 선생님에게 생명의 빚을 졌으니, 빚을 갚아야 할 입장에 있습니다. 그런 관점에서 오늘날 세계에서 하나님을 위해 죽은 사람이 얼마나 되느냐 할 때, 엘리야가 말한 것처럼 `나만 남았나이다’라는 그 말밖에는 할 수가 없습니다. 천지 가운데 이런 아버지의 마음을 중심삼고 타락한 세상의 구원의 터전을 넓혀 나온 곳이 이렇게 비참하고 초라한 청파동 1가 71의3 통일교회인 것입니다. 이곳을 바라보시며 6천년의 한을 풀겠다고 나오신 하나님이 얼마나 불쌍합니까?

그런 내 자신을 들여다보면 눈물이 고인다는 것입니다. 여러분이 하나님 이상으로 침울한 자리에서 그러한 경지에 들어가게 되면 눈물이 쏟아진다는 것입니다. 여러분이 그런 심정에 얼마나 접해 봤느냐 하는 것이 문제입니다. 정적인 통일교회에서 이러한 심정을 바쳐서 하나님을 대할 수 있느냐는 것입니다. 여러분이 지금까지 그것을 생각하지도 못하고 있었다는 것입니다. 천대받는 자리를 넘어 소원을 이루어 드리고 안식해 드려야 할 하늘의 사정을 모르고, 그 고개만 바라보면서 여러분은 자신을 중심삼고 별의별 생각을 다 하고, 별의별 경거망동을 하지 않았느냐는 것입니다. 이런 여러분이 하늘의 아들딸이 되었으니….

그런 관점에서 하나님 앞에 여러분이 얼마나 배반된 행동을 했는지를 알아야 됩니다. 하나님께서 소원하신 기준과 대치되는 나를 중심삼고 하늘을 끌고 가려 했던 사실이 얼마나 미천하고, 얼마나 불쌍한 짓이었다는 것을 여러분이 생각해야 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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뜻길을 감으로 인해 겪었던 온갖 일들
그렇기 때문에 역사의 배반자된 후손으로 태어난 것이 한이 된 것입니다. 하나님은 배반자의 후손인데도 불구하고, 소망의 아들딸로서 품을 수 있는 그 하나의 모습을 그리워하면서 우리에게 해방을 가져다 주기 위해서 수고해 나오셨습니다. 그러니 당신이 원하시는 원수의 경계선을 넘을 수 있는 아들딸이 되겠다고 몸부림쳐야 하나님의 원수를 갚을 수 있는 내자신이 되지 않겠어요? 여러분은 이것을 잘 알아야 되겠습니다. 무슨 말인지 알겠습니까? 「예」

그러기에 여러분들을 대해서 나타나는 원수가 많습니다. 통일교회에 들어와 보시오. 통일교회에 가려고 하면 반드시 못 가게 하는 일이 벌어집니다. 처녀 총각들에게 애인이 생긴다든가, 바람피우던 영감도 교회에 가기 전날에는 집에 들어와 못 가게 한다는 것입니다. 반드시 그렇습니다. 이것은 공식입니다. 그러나 원수를 사랑하고 가야 합니다. 알겠어요?

선생님이 요즈음 청평에 땅을 조금 사 가지고 뭘 하려고 하는데, 그것을 막는 사람이 문가입니다. 남한에서 선생님과 처음 싸움을 한 사람도 문가입니다. 문씨 성을 가진 사람이 많이 나타나야 합니다. 그렇게 되어야 합니다. 그렇게 안 되면 거짓말입니다. 예수님도 그렇게 반대받고 돌아가셨습니다.

하나님과 그 아들딸에 있어서 원수가 누구입니까? 아들딸이 원수가 아닙니다. 마지막 발판을 밟고 올라서 심판하고 넘어가려는데 원수가 나서지 않으면 안 됩니다. 그렇기 때문에, 통일교회에 아들딸이 나간다고 그 아들딸을 칼로 위협하는 사람이 많았습니다. 아버지에게 칼 맞은 사람이 없는 줄 압니까? 그러니 부인들이 남편에게 머리채를 잡히는 것은 보통이었습니다. 뼈가 부러지는 것도 보통이었습니다. 개 끌고 다니듯 하면서 별의별 짓 다 하는 것을 내 눈으로 보아 왔습니다. 억울했습니다. 내가 힘으로 해도 그들을 한 손으로 다 막을 수 있습니다. 그 누가 갖지 못한 그런 힘을 가지고 있다 이겁니다.

어디든지 가라! 세상을 잡으려면 끝날 때까지 해 봐라. 그러나 이것이 어느 고비를 넘는 날에는 세계가 내편이 된다는 것입니다. 내가 당하던 것의 7배 이상 원수를 갚게 될 것입니다. 내가 7배 이상 복수하더라도 항의 하지 못하는 것입니다. 나는 천법이 무엇인지를 알고 지금까지 이런 일을 해나왔습니다. 때가 될 때까지 극복해야 합니다. 그때까지 고난을 피해서는 안 됩니다.

선생님은 억울한 일도 당해 봤고, 비참한 일도 당해 봤고, 참기 어려운 것도 참아 봤습니다. 어떤 때는 주물공장의 주형틀에 갇혀서 답답한 경지를 차고 나가야 하는 어려움도 많았습니다. 이처럼 빠져 나올 구멍을 찾을 수 없는 길을 거쳐 나가야 할 때도 있었던 사나이였습니다. 하나님도 그런 때가 많았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이러한 길을 닦아 나온 통일교회의 선생님인 것을 여러분이 알아야 됩니다.

여러분이 이 길을 지키고, 가야 할 바른 자세는 무엇인가? 만일에 그런 길을 가야 하는 것이 사실이라면, 여러분은 뜻 앞에 순결한 입장에서 그 길을 가야 됩니다. 그러기에 영계를 통해서 선생님을 보면 불쌍한 사람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나 세상의 그 누구도 나를 알아주지 않아도 하나님은 알아줍니다. 세상을 다 잃어버리고, 어머니 아버지 처자식까지 잃어버렸지만 내적인 기준에 있어서 하나님이 같이해 주셨다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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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알아야 할 것들
선생님이 한국 땅에 살고 있지만, 소문을 듣고 영계를 통하는 사람들이 기도해 보면, 선생님이 이러이러한 사연을 갖고 있다는 것을 안다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그것을 알고 있습니까, 모르고 있습니까? 아는 사람 손들어 보세요. 그것은 여러분도 잘 알 것입니다. 이것이 문제라는 것입니다. 이것이 엄청난 내용이라는 것입니다. 꿈같은 사실이 벌어지는데도 불구하고, 이것이 상식화되어 그렇게 여기지 않는 여러분입니다.

이것이 여러분과 무슨 관계가 있습니까? 하나님께서 그것을 관계 맺기 위해서 얼마나 수고하셨습니까? 원수의 고빗길을 참고 넘어와서, 한 사람을 통해 그렇게 명령할 수 있는 기반을 닦기 위해서 얼마나 수고하셨느냐는 것입니다. 해원성사의 뜻을 중심한 억천만세의 한이 깃들어 있는데도 여러분은 그것을 보통으로 생각하고 있습니다.

애국심이 강한 사람들 중에서 통일교회와 관계 맺은 사람이 아주 많습니다. 선생님은 그 사람이 어떤 영계에 인연되어 있는지 모두 알 수 있습니다. 그들은 내가 지금까지 한 일을 따라서 하는 것입니다.

지금 우리는 세계를 복귀해야 하기 때문에 영통하는 사람은 다 품어 주어야 되는 것입니다. 그렇게 하려면 수단 가지고는 안 됩니다. 그가 진지할 때 나는 그보다 더 진지해야 합니다. 이 싸움을 지금까지 해 나온 것입니다. 여러분은 영통한다 하는 사람을 보면 그저 꺼벅 죽어버리는데, 그래서는 안 됩니다. 마음이 그래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영통이라는 것은 간단한 것입니다.

이런 관점에서, 우리는 세계적인 뜻을 중심삼고 나아가야 되겠습니다. 하나님은 그런 사람들을 대신하여 복귀의 일선을 가는 우리를 위해서 얼마나 준비해 왔습니까? 원수의 자식을 사랑하기 위해서 얼마나 몸부림치셨는가를 알아야 합니다. 이러한 가치를 알고 하나님의 그 숭고한 희생의 수고를 염려하는 아들이 되면, 아무리 어렵더라도 불평할 수 없습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이 4천년 역사를 중심삼고 배반하는 이스라엘 민족의 배후에서 얼마나 수고하셨겠는가, 이만큼 지원하기 위해 얼마나 수고하셨을 것이냐 하는 것을 알았고, 자기를 대하여 소원이 큰 것을 알았기 때문에, 아들된 입장에서 불평할 수 없었다는 것입니다. 결국은 아버지편에서 그들을 용서해 달라고 구하는 입장이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효자였다는 거예요. 그런 남자가 예수님밖에 없었습니다. 그런 여자가 하나도 없었다는 것입니다. 그러니 예수님은 다시 오셔서 그런 여자 하나를 찾아야 된다는 것입니다. 그런 결론이 맺어지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과 인간의 마음이 사랑의 인연으로 맺어지는 그런 가운데에서 실체의 새로운 아들딸이 나타난다는 것입니다. 거기서부터 창조본연의 사랑을 중심삼은 하나님의 세계가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그래서 원수를 사랑하라고 하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원수를 사랑했어요? 또, 좋아할 수 있어요, 없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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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반자를 참되게 하기 위해서는
그렇기 때문에 예수님은 세 제자를 찾아 세우고 열두 제자를 찾아 세웠으며, 이스라엘 민족을 세워 원수의 자식들을 사랑의 힘으로 다스리려 했던 것입니다. 그래야 배반자라는 이름이 이 지구상에서 없어집니다. 배반자가 없는 곳이 천국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여러분이 언제나 선한 마음 앞에서 악의 길을 풀어 갈 것이냐 악을 추방할 것이냐 하는 것이 문제입니다. 우리는 악한 사람을 구해 주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내가 병든 사람을 구하러 왔지 건강한 사람을 구하러 온 것이 아니다. 의인을 구하러 온 것이 아니라 죄인을 구하러 왔다’고 하신 것입니다.우리가 죄인의 입장을 동정할 수 있는 마음을 갖지 않고 어떻게 원수의 자식을 사랑할 수 있겠습니까? 그러므로 언제든지 상대방의 입장에 서서 생각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예수님도 그런 입장에서 생각해야 했던 것입니다. 그러니 얼마나 기가 막혔겠습니까? `인자가 하나님의 아들이 아니었느냐? 본래는 내가 하나님의 자녀의 자리에 있어야 되지 않느냐? 그런데 왜 이렇게 되었노? 본래 내가 하나님의 아들이 아니었던가? 그런데 왜 이렇게 되었노?’ 예수님은 그것을 다시 검토해야 했습니다. 예수님이 그런 세계를 잃은 것을 알고 얼마나 한탄하였던가를 알아야 할 텐데, 여러분은 그것도 모르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것을 모르고 있으니 가르쳐 주어야 할 책임이 나에게 있다는 것입니다. 다 가르쳐 주었는데 배반하면 배반자이지만, 가르쳐 주지 않아 모르는 입장에서 배반했다면 그것은 배반이 아닙니다. 그러니 가르쳐 주지 못하는 것이 죄입니다.

대한민국이 배반한다 하는 것도 원리를 모르니까 그럴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가르쳐 주고 나서 배반한다고 해야 합니다. 그런데 잘못 가르쳐 주면 안 됩니다. 똑똑히 가르쳐 주었는데도 배반하게 되면 심판을 받게 됩니다. 가르쳐 줄 때까지 사랑해야 됩니다. 자신보다도 더 사랑해야 됩니다. 하나님이 자신까지 이런 섭리역사를 해 나오신 것입니다.

예수님이 이스라엘을 통해서 죽어 갔기 때문에 다시 비참한 이스라엘로 찾아가신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이스라엘 편에 서서 끌고 나왔던 이스라엘이 틀어졌으므로 예수님은 또다시 이스라엘로 올 수 밖에 없다는 것입니다. 즉, 제2이스라엘인 기독교를 중심삼고 다시 올 수 있는 터전이 남아 있다는 것입니다. 이 땅의 모든 것을 버리고 갔다면 오지 못합니다.

따라서 여러분이 인류의 소망인 이런 내용을 알고 있기 때문에 우리는 절대 망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이 섭리의 뜻을 거두어 들이면 망하겠지만, 그러지 않기 때문에 우리는 절대 망하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상대방의 입장에 서서 백 퍼센트 걱정해야 합니다. 상대방이 하는 일에는 다 이유가 있다는 것입니다.

내가 감옥에 들어가 있을 때, 사형선고를 받은 죄수들과 같이 있어 봤습니다. 그들과 얘기를 해보면 모두가 자기 나름대로 비참한 입장에서 그랬었다는 것입니다. 그럴 수 있는 것입니다. 인간이란 자체를 두고 보면, 그럴 수 있습니다. 그렇지만 그것은 방향이 달랐던 것입니다. 방향이 다르게 된 그 입장만 밝혀 놓으면 돌아설 수 있는 것입니다.

이런 내용을 여러분이 알고, 배반자를 참되게 하기 위해서 마음속으로 사랑의 입장에 선 참부모의 심정을 가지고 참아들의 입장에서 상대방의 입장을 이해할 수 있는 여러분이 되어야겠습니다. 그렇게 함으로 말미암아 배반자의 자리를 벗어날 수 있다는 것을 여러분이 알고 앞으로 그런 면에서 정성들이며 나가야 되겠습니다.

원수를 사랑하는 것이 여러분에게 있어서는 최대의 싸움입니다. 전도를 하더라도 그런 마음을 가지고 해야 합니다. 그것을 넘어선사람은 절대로 망하지 않습니다. 만일 그런 사람을 밥을 굶게 만든다면, 그 동네는 망하는 것입니다. 한편 그런 사람이 가는 데는 반드시 원수가 나타나게 됩니다. 그 사람이 진짜 그런 사람인지 아닌지 시험을 한다는 것입니다. 그 시험을 통과하게 되면 그는 선한 사람이라는 것이 밝혀지는 것입니다.

통일교회에 들어오게 되면 개인 원수, 가정 원수, 종족 원수, 민족 원수들이 있습니다. 그리고 요즈음은 세계가 원수입니다. 미국 행정부에는 지금 선생님이 문제가 되어 있습니다. 세계적으로 문제가 되어 있습니다. 일본이라든가, 세계 각국이 전부 다 나를 문제시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선생님의 문제의 사나이가 되었습니다. 이것이 외적으로는 그들에게 걸릴지 모르지만 내적으로는 안 걸립니다. 외적으로 나타나는 결과의 세계를 아무리 원수시해도 그것은 흘러가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들이 아무리 뭐라 해도 심정적 세계에서는 그들이 망하지, 내가 망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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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탄세계에서 하늘세계로 이사하라
이것이 틀림없기 때문에, 선생님이 백악관 앞에서 그런 의미에서 기도했던 것입니다. 무슨 말인지 알겠습니까? 그 기도 내용을 말할 수 없지만, 미국이 망하라고 기도한 것은 아닙니다.

여러분이 이 길을 가려면 여러분을 어떻게 정비해야 하는가 하는 것이 문제입니다. 여러분의 마음을 다시 한번 수습해 가지고 싸워 나가야 됩니다.

이사를 가려면 짐을 정리한 후 보따리를 싸서 이사가게 되지요? 마찬가지로 모든 것을 정리하여 이사가야 된다는 것입니다. 죽음의 세상에서 사는 사람은 망하는 것입니다. 그러니 이사가야 됩니다. 어디로 이사가야 됩니까? 사탄세계에서 하늘세계로 가야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 나라에는 시시한 것은 모두 버리고 좋은 것만 가지고 가야 되는 것입니다.

시집을 가는데 남편이 싫어하는 것을 가지고가면 되겠습니까? 남편이 좋아하는 것을 가져 가야 된다는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이사를 갈 때도 좋은 것만 가지고 가야 되는 것입니다. 그래야 배반자의 역사를 뒤로 하고 하늘나라에 가서 아주 즐겁게 살 때가 온다는 것입니다.

27-82
기 도
아버지, 나와 당신이 멀리 떨어져 있기를 원치 않는다는 것을 아옵니다. 우리가 여기 있을 때 당신도 여기에 계시기를 원하시고, 우리가 저기로 갈 때 당신도 저기에 가고 싶고, 언제나 같이 있고, 같이 살고, 같이 죽고 싶은 것이 당신의 마음인 것을 저희들은 알고 있사옵니다. 이것은 인간이 자기 자식과 같이 있고 싶고, 살고 싶고, 죽고 싶어하는 마음과 같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저희들의 그런 마음이 아버님으로부터 시작된 것이니, 저희들도 그래야만 되겠사옵니다.

아버님이여! 저희들이 언제 아버님이 그리워 최고의 정성을 들이고, 있는 힘을 다하여 팔을 벌려 아버지라고 절규해 본 적이 있었사옵니까? 없었다면, 저희들은 부끄러운 자식들이옵니다.

내가 바쁘고 바쁘게 두 발을 구르면서 아버지의 뜻을 위하여 달려 봤습니까? 그러지 못했다면, 저희들은 부끄러운 자식이옵니다. 저희들이 아버지의 뜻을 위해 가슴을 조이며 소망의 길을 찾을 수 없어 쓰러지는 경지에 들어가 아버지의 뜻을 품고 얼마나 몸부림쳐 보았나이까? 그러지 못했다면, 아버지 앞에 죄인된 자신을 발견해야 되겠사옵니다.

저희가 언제 아버지를 사랑하기에 미친 듯이 세상의 모든 것을 다 저버리고, 또는 다 저주해 버리고 차 버리면서 사랑해 보았으며, 언제 아버지의 사랑이 그리워서 밤잠을 이루지 못하며 몸부림쳤사옵니까?

아버님은 저희들이 그러기 전에 저희들을 찾기 위하여 얼마나 몸부림쳐셨는가를 이제야 알았사옵니다.

알고 보니 세월이 많이 흘러갔습니다. 알고 보니 저희들은 염치없는 신세가 되었습니다. 알고 보니 그 복귀의 사연을 다시 아버님께 권고 받아야 할 입장에 있사오니, 용납하여 주시옵소서.

민족을 대하는 당신의 사정을 민족과 더불어 싸움으로써 배웠고, 세계와 더불어 싸움으로써 실감하게 되었사옵니다. 그런데 알고 보니, 제일 불쌍하신 분은 아버지이시며 제일 외로운 분도 아버님이시라는 것을 알았사옵고, 천번 만번 죽음의 길을 걸으신 분도 역시 아버님이시었다는 것을 알았사옵니다. 그런 아버지 앞에서 저희들이 억만 번 죽고 억만 번 밝히며, 억만 번 쫓기고 억만 번 억울한 자리에 있더라도 아버님을 모셔야 된다는 것을 알았사옵니다.

이제까지 이렇듯 높고 귀하신 분이 우리의 부모 형제들보다도 더 가까운 자리에 계신 것을 저희들이 몰랐사옵니다. 아버지께서 그 누구보다도 생명의 중심으로 계신다는 것을 알게 될 때, 아버님으로 말미암은 아버님의 영광의 한날을 위해서 모든 것을 바치고 가야 하는 자신을 발견하는 그 기쁨을 알게 허락하여 주시옵소서.

이것이 인생의 보람 있는 생활이요, 이것이 인생의 가치 있는 생활이라는 것도 알게 허락하여 주시옵소서.

세상이 아무리 저희들을 조롱하고 모욕을 주어도 그것은 한때 지나가는 것이옵니다. 그 조롱하는 사람들이 스스로 굴복하여 머리를 숙여 회개의 마음으로 돌아서는 그날을 바라보며, 아버님의 아들로서의 자세를 갖추어 나가겠다고 몸부림치는 통일의 자녀가 되어야 되겠사옵니다.

이 아침 여기에 모인 당신의 아들딸이 무엇을 찾겠사옵니까? 무엇을 바라겠사옵니까? 그것은 아버지의 편에 서는 것이요, 아버지의 뒤를 따라 아버지의 옷자락을 붙들고 험한 길을 가더라도 아버지의 품에 안겨 가는 것이요, 죽을 길을 가더라도 아버지의 품에 안겨 죽는 것이 소원이 아니겠사옵니까? 저희들은 그 길을 위하여 가야 되겠사옵니다.

민족을 위해 가는 길에 아직 원수가 가로막고 있사옵니다. 민족을 사랑하지 못한 저희들의 죄를 회개해야 되겠사옵니다. 세계를 향하여 가야할 길 앞에 담벽이 가로 놓여 있사옵니다. 세계를 위하여 희생하고 몸부림치지 못한 자신을 발견하여, 그 길을 가야 한다는 것을 알게 하여주시옵소서.

원수를 사랑하면서 당신의 마음세계를 더듬어 가는 저희들의 길은 외로운 길이라는 것을 알았사옵니다. 그 길에는 눈물이 그치지 않고, 원수의 화살촉이 끊이지 않으며, 조롱과 비난과 비소가 끊이지 않는 길이라는 것을 알았사옵니다. 이것은 아버지가 그렇게 헤쳐 나오신 역사이기 때문에, 저희들도 응당 당해야 한다는 것을 알게 허락하여 주시옵소서.

곱게 맞고, 곱게 억울함을 당하고, 곱게 슬픔을 당하고, 곱게 분함을 느끼면서, 당신의 마음세계를 찾아들 수 있는 아들딸이 되기 위하여 노력하는 모습들이 되게 하여 주시옵기를 간절히 바라옵고 원하옵니다.

아버님이시여, 이제 1969년은 저물어 가고 있사옵니다. 1970년은 제2차 7년노정의 세번째 해이옵니다. 여기에 모인 당신의 자녀들이 책임을 다해야 되겠사옵니다.

아버지로부터 진 빚과 선조로부터 진 빚을 자기 일대에 청산지어 이것을 횡적으로 열매를 맺고 전개시켜야 할 책임이 종족과 민족 앞에 남아 있는 것을 저희들이 알고, 엄숙히 그 사명을 다하기 위해서 노력하는 당신의 자녀들 되게 허락하여 주시옵기를 간절히 부탁드리고 원하옵니다.

남아진 뜻 앞에 충성을 다하는 청지기가 되기를 다시 한번 다짐하는 자녀들 되게 허락하여 주시옵기를 부탁드리오면서, 모든 말씀 참부모의 이름으로 아뢰었사옵나이다. 아멘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