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7-300 to 27-317: 최후의 순간

최후의 순간
1969.12.28 (일), 한국 전본부교회

27-300
최후의 순간
[기 도]

아버님, 오늘은 1960년대의 마지막 안식일이옵나이다.

아버지께서 수많은 민족을 넘고 넘어 이 삼천리 반도와 한민족을 찾아오셔서 수난의 노정을 걸으신 60년대의 서글픈 역사가 지나가려 하고 있습니다.

이제까지 많은 자녀들이 거룩한 안식일들을 보냈사옵니다. 이제 당신의 무한한 사랑과 자비의 은사를 마음으로 그리며, 복귀의 행로를 개척해온 이 60년대의 마지막 안식일을 보내야만 되겠습니다.

이 기간에 저희들은 많고 많은 수난을 겪어 왔사옵니다. 복귀의 역로를 저희들이 더듬으면서 하루같이 승리의 표준만을 향하여 전진해 나오던 60년대가 지나가려 하는 이 순간이옵니다. 아버지여, 이 순간에 지난 일들을 회고하시옵고거든, 슬펐던 과거지사는 잊어 주시옵소서. 불쌍한 이민족의 한도 아버지께서 망각해 주시옵소서. 이 민족이 아버지께 범한 모든 그릇된 죄상을 잊어 주시기를 바라옵나이다.

통일의 어린 자녀들이 하늘의 기수로서 이 민족 앞에 등장했을 때, 이 민족은 당신이 사랑하는 이 아들딸을 높이 세워 당신의 지고하심을 찬양하고, 당신의 수고에 마음 모아 경배드려야 했음에도 불구하고, 당신 앞에 반기를 들었사옵니다. 이들의 지난날의 과오를 용납하여 주시옵소서. 선두에 섰던 어린 자녀들은 그 누구도 알지 못하는 외로운 길을 걸어왔습니다.

혹자는 몰리는 자리에서, 혹자는 추방을 당하는 자리에서, 혹자는 영어의 몸이 되는 자리에서도 이 길을 걸어 나왔사오나 그 과정에서 벌어진 가지가지의 사건들이 슬픔과 더불어 추억에 남아져서는 안 될 것을 그들이 느끼게 하여 주시옵소서. 그리고 이 민족이 그들에게 잘못한 것이 있으면 용납해 주실 것을 비옵니다. 아벨적인 사명을 감당해 온 통일의 자녀들은 가인편 형제들을 복귀해야 하고, 나아가 가인편 가정과 종족과 민족과 세계를 복귀해야 하는 것이 저희의 운명길임을 알았사옵니다.

그렇기 때문에 개인적인 비난의 화살도, 가정에서의 핍박도, 사회의 수난도 응당 받아야 할 것처럼, 저희가 죄가 있는 양 당하는 자리에서 아버지를 묵상하고, 아버지를 부르던 과거지사들…. 아버지의 슬픔과 더불어, 마음의 슬픔과 더불어 저희 통일의 식구들이 이 민족을 바라보아서는 안 된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마음을 다 풀고, 원수라 하더라도 원수로 대하지 말고 사랑으로 대하지 않으면 안 될 것을 알았사옵고, 가인편의 형제로 동정하지 않으면 안 된다는 것을 저희들은 알았사옵니다.

요셉이 애급 땅에서 열 한 형제들을 다시 만날 줄이야 그 누구가 알았겠사옵니까? 몰리고 쫓기는 서럽고 외로운 자리에 서더라도 참의 지지자가 되어 참의 편에 서서 최후까지 버티면, 몰고 핍박하던 가인적인 형제들이 틀림없이 굴복한다는 것을 역사를 통해 알았기 때문에 저희들은 장구한 세월을 참고 지내 왔사옵니다.

아버지, 이제 대한민국을 사랑하여 주시옵고, 이 나라 이 민족의 정신 세계를 지도하고 있는 수많은 종교들을 사랑하여 주시옵소서.

아버지, 지금까지 저희들에게 날아온 모든 악의 화살을 꺾어 주시옵소서. 저희들이 그들을 원수로 여기지 아니하오니 그들을 용서하여 주시옵기를 간절히 바라옵니다.

아버지의 행로는 선하시오니 선의 결과가 나타나야 할 것을 생각하게 될 때, 그렇기 위해서는 용서와 관용이 본질적으로 나타나야 된다는 것을 저희들은 알고 있사오니, 당신은 선의 본체이시기에, 무한하신 사랑과 관용으로 이 나라의 수많은 종교인들이 통일의 자녀들을 핍박했던 과거지사를 용서하여 주시옵기를 간절히 원하옵니다.

그간 통일의 문을 두드렸으나 핍박의 길, 눈물의 역로를 개척하는 도상에서, 위로받을 수 있는 한 사람을 맞지 못하였기 때문에 외로움에 지쳐 떨어져 나간 사람도 있사옵니다. 또한 이 길을 가고 있는 많은 사람들이 지쳐 있는 것도 알고 있사옵니다.

이렇게 떨어져 나가고 있고, 지쳐 있는 것은 저희들의 잘못보다도 갖추어지지 못한 환경으로 말미암아 그러한 입장에 서게 되었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그리하여 오늘도 거리거리에서, 혹은 처해 있는 자리에서 당신을 향해 머리를 숙이고 용서를 빌고 있을 그들의 모습을 생각할 때, 원한 맺힌 아버지의 심정을 풀어 드리고 싶은 참기 어려운 분한 심정도 있지만, 원수의 자식을 찾아오신 아버지의 긍휼하신 복귀의 길을 생각하면 눈물을 머금고 이들을 다시 축복할 수밖에 없다는 것을 알고 있사오니, 이들을 용서하여 주시옵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배반하고 배신한 불쌍한 무리들을, 아버지, 용서해 주시고 다시 기억해 주시옵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선하였던 본연의 자식으로서 아름다운 본성, 아버지의 놀라운 본성의 영광을 그리워하는 저희들의 마음에 오직 선만이 반영되고, 선 자체로 화합할 수 있는 진실된 모습이 저희의 몸과 마음에 나타나게 허락하여 주시옵소서. 그러한 심정으로 참된 자세를 갖추어 모든 것을 믿고 선만을 추구하는 완전한 실체가 되어 아버지를 부를 수 있는 아들이 되기를 그리워하는 이 시간이 되게 허락하여 주옵기를, 아버님, 간절히 바라옵고원하옵니다.

에덴 동산에 있던 인류의 시조, 아담과 해와의 본성의 모습이 너무나 놀라운 미의 상징이라는 것을 생각하면 생각할수록 오늘날 타락의 후예로 태어난 추하고 더럽혀진 저희 모습을 얼마나 얼마나 부정하고 싶은지 모르겠사옵니다.

영원한 심정적 인연으로 자녀인 저희와 부자의 인연을 맺고 있는 당신이지만, 머리를 저어 돌이키고 눈을 감고서라도 달리 생각하고 싶었던 사람들이 인류역사에 나타났던 선조들이었습니다. 그렇지만 그들은 당신의 핏줄을 이어받고 나와야 할 아들딸의 인연을 갖고 있기 때문에 잊을 수 없었던 것이 당신의 사정이었다는 것을 아옵니다.

영계의 탄식권내에 가 있는 수많은 영인들을 해방시켜야 할 책임도 아버지께서 하시기 전에 저희들이 해야 한다는 것을 아옵니다. 저희들이 아버지를 행해서 권고해 드리고 위로해 드리는 효성을 받으시고 한을 푸시옵고, 그들을 해방하시도록 해야 할 엄청난 과제가 저희들 앞에 남아 있다는 것을 확실히 느낄 줄 아는 당신의 아들딸이 되어야 되겠습니다.

죄에서 벗어나 자유롭게 당신을 그리워하는 마음으로 아버지라 부르며 나타날 수 있는 본연의 아름다운 모습이 저희들의 일대에, 혹은 후대에 이땅 위에 나타날 수 있게끔 노력하는 저희들이 되어야겠습니다. 그러기 위해 저희들은 지금까지 해산하는 수난의 역사를 엮어 왔사옵니다. 저희들은 역사적인 새로운 소망과 새로운 인연의 한 순간을 찾아왔사오니, 아버지, 이 시간 저희들을 긍휼히 보시옵소서.

1960년대의 서글펐던 모든 날들을 잊으시옵소서. 오늘 마지막으로 보내는 성일 가운데 불충하였던 모든 지난날들을 용납하시옵고, 찾아오신 당신의 발걸음이 서글픔으로 돌아섰던 것을 다시 돌이키시옵고, 긍휼한 마음을 크게 가지시어 새로운 해와 더불어 저희들을 다시 맞아 주시어서 앞길을 독려해 주시옵기를 간절히 바라옵고 원하옵니다.

전국에 널려 있는 당신의 자녀들을 기억하여 주시어서 이 시간, 아버지의 뜻과 사랑의 은사 안에 포근히 머물 수 있게 허락하여 주시옵소서. 남아진 복귀의 노정을 향하여 전진할 것을 다짐하는 저희들이 될 수 있도록 하여 주시기를 부탁드리옵니다.

이 해가 복되고, 다음 해가 복되게 허락하여 주시옵소서. 이 해의 남은 며칠도 아버지의 뜻과 더불어 저희들을 성별시켜 주시사 그릇된 모든 것을 청산하는 거룩한 시간으로 삼아 주시옵기를 부탁드리면서, 참부모의 성호 받들어서 아뢰었사옵나이다. 아멘.

27-303
말 씀
이 땅 위에서 발생하는 사건이다. 혹은 존재하는 존재물에는 원인이 있다면 반드시 결과가 있는 것입니다. 이렇게 말한다면 근본으로 파고들어가서 하나님도 시작이 있으면 끝이 있지 않겠느냐 하는 문제가 제기될 테니 그 문제는 일단 제외하고, 그 외에 피조된 수많은 존재들을 보면 그 존재들이 엮어져 벌어지는 수많은 사건들은 반드시 시작이 있으면 끝이 맺어지게 되어 있습니다.

인류의 시조도 하나님으로부터 창조함을 받았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 인간을 창조하실 때는 선한 목적을 중심삼아 창조했습니다. 선한 목적을 중심삼고 선한 출발을 한 그 창조의 위업은 선한 결과로 매듭지어져야 했는데 오늘날 우리 인간 세상은 선으로 결과된 세상이 아니요 타락한 세상이 되어 버렸습니다. 다시 말하면 타락함으로 말미암아 선의 목적을 이루어지지 못한 결과를 초래하였습니다.

선의 결과를 맺지 못하는 입장에 서게 됨으로 말미암아 선하게 시작한 것이라 하더라도 선의 입장으로 남아질 수 없게 된 것입니다. 그러므로 인간 세상에서의 최대의 소망은, 창조 위업이 선하게 출발한 것이므로 선한 결말을 어떻게 맺을 수 있느냐 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우리를 지으신 창조주의 소망이기도 합니다.

다시 말하면 선의 결과, 선의 목적을 이룰 수 있는 최후의 한 때와 그것을 중심삼은 하나의 존재를 어떻게 완결지을 것이냐 하는 것입니다. 지금까지 발생한 수많은 역사적인 사건들도 그것을 성취시키기 위한 사건이요, 그러한 목적을 이루기 위한 사건이었다는 것을 생각할 때, 과연 인류가 추구하는 최후의 순간이 어떠한 것이냐 하는 문제가 가장 중요한 문제가 아닐 수 없습니다.

27-304
최후의 순간을 추구해 온 인간
오늘날 인간으로 태어난 한 개체, 여기에는 남성도 있고 여성도 있을 것입니다. 하나의 남성, 하나의 여성으로 태어난 자신을 두고 볼 때, 그 한 개인은 겉으로 보기에는 미미한 존재 같지만 이 존재가 내포하고 있는 내적 가치라는 것은 무한한 것입니다.

누구나 무한한 가치를 차지하고 싶어하는 자리에 있는데, 선의 결과에 도달했다 하는 순간을 맞은 사람이 있다면 그는 인류 역사상에 있어서 승리한 사람이요, 자랑할 수 있는 개체가 되는 것입니다.

지금까지 역사를 엮어 온 수많은 인간들의 인생행로와 현재 살고 있는 인간들의 생활 가운데에서 승리의 결과, 선의 결과를 한 순간이라도 가졌던 사람이 있다면 그는 역사를 대신해서 말할 수 있고, 이 시대를 대신해서 자랑할 수 있고, 미래를 위한 전통을 세울 수 있을 것입니다.

과거에 참을 추구하고, 선을 추구해 나왔던 모든 성인 현철들은 생활에서 자기들 나름대로 노력하였는데, 그 중심은 선의 최후의 한 장면을 어떻게 장식할 것이냐 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그들은 그러한 내용도 모르면서 노력해 나왔다는 것을 우리들은 알아야만 되겠습니다.

인간들이 선을 바라는 최후의 시간을 정해서 아무리 뛰더라도 그 기준에는 도달할 수 없습니다. 인간을 창조하신 주체요, 절대자이신 하나님을 중심삼고 볼 때, 하나님이 `이런 모습이 최후의 한 존재의 모습이다’라고 자랑할 수 있어야 한다는 거예요.

아무리 인간이 스스로 노력하고 추구한다 하더라도 인간만으로는 그러한 완전한 기준에 도달할 수 없습니다. 참다운 인간의 모습이 되기 위해서는 인간만으로 안 되기 때문에 창조주이신 절대자 하나님과 하나의 기준에서 상봉하기 위하여 최후의 순간을 추구해 나오는 것입니다. 이러한 역사적인 노정을 연결시키기 위한 움직임이 지금까지 우리 인간 생활에 있어서 역사적으로 공헌하여 내려온 종교가 아니겠느냐?

그리하여 하나님과 종교를 통하려는 사람들이 서로 같은 입장에 서서 `최선의 목적은 이것이다’라고 할 수 있는 한 순간을 마련하기 위해서, 숱한 사람들이 희생의 길을 갔고, 숱한 사람들이 제물이 되는 대가를 치르며 엮어 나온 것이 종교의 역사라는 것을 알아야 되겠습니다. 그 역사를 끝맺기 위해서 오늘날 종교인들은 신앙길을 가고 있는 것입니다.

27-305
타종교에 대한 기독교의 우월성과 그 한계
지금까지의 인류역사 가운데 수많은 종교가 있었고 수많은 종교인들이 있었지만, 그럴 수 있는 자리에서 최선의 결과로 맺어진 한 순간을 맞이한 사람이 있었습니까? 누가 그런 순간을 맞이했습니까?

그러면 `천상천하 유아독존’이라는 말을 한 석가가 그런 순간을 맞이 했어요? 그렇다면 과연 석가가 천상의 본 뜻을 대신한 입장에서, 하나님의 아들의 입장에서, 하나님이 바라던 최후의 선의 자리, 즉 온 세상을 바라볼 수 있는 자리에서 이런 말을 할 수 있는 사람이었던가? 이러한 문제를 중심삼고 불교를 보게 되면 거기에는 진정한 의미의 절대적인 신의 존재성이라는 것이 애매하다는 것입니다. 더우기나 하나님이 있다면 그 하나님도 마음을 가졌을 것임에 틀림없는데 불교에는 하나님의 내정적인 심정을 통할 수 있는 내용이 없습니다.

이것을 볼 때, 석가가 한 말도 먼 자리에서, 개인적인 목적을 추구하는 자리에서 그 목적 범위를 중심삼고 한 말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을 발견하게 됩니다. 공자, 마호메트, 예수도 다 마찬가지입니다. 이러한 분들이 과연 하나님이 찾아 나오는 결과적인 입장에서 최후의 순간을 장식할 수 있는 선의 실체로 왔던 사람들이냐 할 때에 여기에도 차이가 많다는 것입니다.

그들이 주장한 내용이 선하다지만 같은 자리에서 주장한 것이 아닙니다. 지역이 다르고, 역사적 배경이 다르고, 민족적인 환경이 다른 가운데서 태어났기 때문에 그들이 제창하는 것도 민족적인 환경을 넘어설 수 없었습니다. 그러기에 그들이 처한 위치도 전부 다 같지 않고, 또한 같은 위치에서 선한 순간을 맞은 것이 아닙니다. 시대의 차이가 있고 환경의 인연을 벗어날 수가 없기 때문에 그들의 위치에 차이가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이 가운데서 누가 그나마 최선의 자리를 역사에 남기었느냐 하는 문제를 두고 볼 때에 하나님을 아버지라 부르고, 자신을 독생자라 부르고, 하나님을 중심삼고 자기는 신랑이고 인류는 신부라 하고, 하나님을 중심삼고 자기는 형이고 인류는 동생이라고 할 수 있는 내용을 가지고 내정적인 분야를 주장한 종교의 창시자는 예수 이외에는 없습니다.

이런 관점에서 볼 때 그래도 심정적인 내용을 가지고 역사과정에서 하나님께서 찾아 나오시던 본연의 인간상을 추구해 나왔고, 역사적으로 인류가 추구해 나온 최후의 순간을 장식할 수 있는 하나의 실체를 세워서, 하나님의 공인을 받고 인류를 대표할 수 있는 귀일점을 가진 종교는 기독교임을 알 수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오늘날 기독교는 하나님의 소원, 인류가 추구하는 소망의 목적을 달성시켜서 평화의 기점을 해결해야 할 것이요, 그러한 하나님의 소망이 있는 한 역사는 기독교를 중심삼고 발전하지 않을 수 없다는 것입니다.

이렇게 볼 때에 기독교가 명실공히 세계적인 종교가 된 것은, 내적인 면에 있어서 인류역사상의 최대의 선을 중심삼고, 완전한 그 기준에는 못 미쳤다 하더라도 거기에 가까운 입장에서 출발한 것이 틀림없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예수님이 전부를 귀결지어 최후의 선한 생활을 장식했느냐 하면 그렇지가 않습니다. 그래서 성경에는 `의인은 없나니 한 사람도 없다’는 말이 있습니다. 또 예수님 자신도 소원을 다 이루었다고 말하지 않았습니다. 단지 십자가에 달려 운명하는 순간에 `다 이루었다’고 한 그 말은, 예수님 자신의 수난의 노정에 있어서 끝을 예고하는 것이지 수난을 통하여 찾아야 할 이념의 세계를 다 이루었다고 한 말은 아닙니다.

그렇기 때문에 기독교는 지금까지 수난의 길을 걸어오고 있는 것입니다. 아직도 수난의 역사를 넘고 넘어 세계적으로 걸어야 할 개척의 노정이 남아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다 이루었다’고 한 말은 자기 당대의 수난의 길에서 승리를 표방하는 말이지, 그것이 세계 전체나 미래에까지 승리의 터전을 닦았다는 말은 아니라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나는 신랑이요 너희는 신부라’는 미래의 소원을 남기고 가셨기 때문에 다시 오셔야만 되는 것입니다. 따라서 그 소원이 이루어질 수 있는 기준, 그 소원이 열매 맺어야 할 그 시대가 미래의 역사과정에 남아 있다는 것은 틀림없는 사실입니다.

그러한 미래의 한 때가 인류에게 접근해 올 것입니다. 혹 현세의 우리 30억 인류에게 찾아올지도 모르는 것입니다. 또한 여러분의 운명을 중심삼고 어떤 각도를 맞추고 방향을 갖추어 여러분을 향하여 올지도 모른다는 것입니다. 여러분의 일생에 그것이 찾아와 교차되는 순간, 그 순간을 어떻게 해결짓느냐 하는 것이 가장 중요한 문제인 것입니다.

27-307
참된 효도와 참된 충성
나라를 구하려는 애국심을 갖고 죽음길을 자처하는 충신보다도 미래에 이루어질 그 나라를 위하여 천운이 찾아오는 한 순간을 붙안고 염려하는 애국자가 있다면, 다시 말해서 비상시를 맞이해 원수의 총칼이 목숨을 노리는 자리에서 생명을 걸고 달려 나가는 용자보다도 모든 것을 다 버리고 자기 정체를 드러내지 않은 은밀한 자리에서 미래의 그 나라를 위한 승리의 한 순간을 고대하는 사람이 있다면, 그는 한 시대의 애국자라기보다는 영원한 애국자로 남아질 수 있는 것입니다.

가정에서 부모에게 효도를 하기 위하여 매일매일 부모의 생각과 일치하는 생활을 하는 사람과 지금 당장에는 효도를 하지 못하지만 나라를 찾을 수 있는 길을 찾아 민족이 바라는 최선을 추구하고 세계를 위해 최선을 다하겠다고 한 순간을 고대하는 사람을 비교하여 볼 때, 지금 당장에는 부모에게 효도를 하지 못하지만 미래에 효도를 하겠다는 사람이 이 세상에서는 더 필요합니다. 이런 관점에서 볼 때 종교라는 것은 미래를 추구하는 자리에서 미래의 나라를 위해 충성하는 것이요, 미래의 효성의 터전을 공고히 하기 위해서 나왔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면 종교가 추구하는, 충효를 행할 수 있는 미래의 한 순간이란 어느 때인가? 인류가 공히 행복을 노래할 수 있고, 인류가 비로소 소망의 기점을 찬양할 수 있으며, 역사를 지배하시는 하나님의 기쁨으로 자랑할 수 있는 때입니다. 그 순간을 맞이하기 위해서, 승리를 다짐하기 위해서, 그 한순간에 자기를 온 천지의 중심으로 나타내기 위해서 종교가 나왔던 것만은 틀림없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종교는 현실의 행복의 터전을 닦아 나오는 것이 아니라, 미래의 행복의 터전을 개척해 나오는 것입니다. 그러면 미래의 어떠한 기준에서 일치될 것이냐? 종교는 최후의 선이 결실될 수 있는 그 순간을 바라고 나온 것을 우리는 알아야 되겠습니다.

그런데 오늘날 여러분의 생활의 행로를 중심삼고 볼 때, 너나할것없이 전부다 습관적으로 비슷비슷한 생활을 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외적인 면에서는 비슷비슷한 모습이지만, 내적인 모습에 있어서는 천태만상입니다. 즉, 아침에 일어나서 밥 먹고 낮에는 나가 활동하고 저녁이 되면 집으로 돌아오는 이런 외적인 일상생활은 모두가 같지만, 내적인 면에서는 천태만상으로 등급과 차이가 있다는 것을 우리는 알아야만 되겠습니다.

그러면 등급과 차이에 있어서 최고의 기준으로서 상위(上位)에 설 수 있는 생활적인 본을 보여 줄 사람들은 누구일 것이냐? 그것이 중요합니다. 외적인 대부분의 사람들은 역사에 떡잎같이 사라지지만, 그런 사람들은 종대의 가지로 남아지겠다는 마음 자세를 가지고 선의 실적을 남기기 위해 순간순간의 생활에서 노력하는 사람들입니다. 그런 사람들이 최고의 기준에 설 수 있는 사람들입니다. 이렇게 볼 때 각 개인 생활에서 세계 30억 인류의 등급이 매겨지고 차이가 벌어져 나간다는 사실을 알아야 되겠습니다.

순간순간에서 승리하여 시간으로 통하고 시간에서 승리하여 하루, 또 이 하루를 통한 한 달, 한 달을 통한 일 년, 일 년을 통한 전생애로 이끌어 갈수 있는 사람이 나왔다 할진대는 이 세상은 그로 말미암아 새로운 세상으로 변해 가는 것입니다. 새로운 선의 결실이 맺어지고 선의 목적을 이루는 시대가 인류역사상에 도래하는 것입니다.

27-309
다시 오시는 주님이 하실 일
그러면 종교인들은 어떻게 이 목적을 찾아가느냐 하는 것이 문제입니다. 여러분들에게 어떻게 최후의 순간을 맞이할 것이냐고 물어 보면 어떻게 죽느냐 하는 문제를 생각할지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어떻게 죽느냐 하는 문제에 앞서서 문제가 되는 것은 무엇이냐? 어떻게 역사적인 선의 기준을 중심삼고 그 기준에서 최후를 맞이하느냐 하는 것이 문제입니다. 즉, 선의 결실의 인연을 가지고 거기서 최후를 맞이하겠느냐 하는 것입니다. 또 그때가 언제일 것이냐 하는 문제가 중요한 것입니다.

오늘날 이 세계에는 수많은 국가들이 있습니다. 그 가운데에는 선진국도 있고, 후진국도 있습니다. 그런데 아무리 지금 선진국이라 자랑해도 영원히 선진국으로 남아질 수는 없는 것이며, 또 후진국이라 하더라도 언제까지나 후진국으로 머물지 않습니다. 역사는 수레바퀴같이 도는 것입니다.

그러면 그 수레바퀴처럼 돌아가는 역사의 두 바퀴는 무엇이어야 되느냐? 한 쪽의 바퀴를 하나님이라면, 다른 한 쪽은 사람이어야 됩니다. 만일 하나님만이 돌릴 수 있다면 문제가 됩니다. 하나님만이 돌려서 이루어진 세계가 이처럼 악한 세계라면 하나님이 없다는 결론이 나오게 됩니다. 하나님 혼자서 끌고 가는 세상이라면 악한 세상이 될 수 없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악한 세상이 된 것은 하나님과 사람이 축을 중심삼고 하나되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그 축은 하나님과 참된 사람이 맞잡아야만 되는 것입니다. 만약에 이 축이 찌그러지면 모든 것이 다 찌그러지는 것입니다.

그러면 지금까지의 역사에 있어서 선의 절대적인 기준이 나오지 않은 것은 무엇 때문이냐? 창조의 미를 갖춘 사람, 즉 선의 실적을 갖춘 사람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그런 사람이 없었기 때문에 선의 세계를 이루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오늘날 이 세상은 악한 세상으로 뒹굴어 나오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기에 이 세계 인류는 이 악한 세상을 수습하고 이 세상을 선으로써 새로이 회전시킬 지도자를 요구하고 있는 것입니다.

오늘날 세계 정세를 보면 누가 지배해야 할 것 같습니까? 미국도 아니고 소련도 아닙니다. 그러면 민주주의가 지배해야 할 것이냐, 공산주의가 지배해야 할 것이냐? 민주주의나 공산주의같이 어떤 주의를 가진 나라가 지배할 수 없습니다. 그런 시대는 지나갔습니다. 민족이 세계를 지배하는 시대도 지나갔습니다. 그렇다면 어떠한 국민이 지배할 수 있을 것이냐? 국민으로는 불가능합니다. 그러면 어떠한 가정이 나와서 지배할 것이냐? 가정으로서도 불가능합니다. 그러면 어떤 사람이 나와서 지배할 것이냐? 문제는 여기에 있는 것입니다.

오늘날 인류는 최고의 절망에 빠져 있습니다. 절망의 벼랑에서 서서 생사를 결정해야 할 시점에 와 있는 것입니다. 이 절망의 늪에서 구해 줄 수 있는 참된 지도자는 구세주이기 때문에 종교인들은 미래의 지도자를 고대하고 있습니다. 이것이 기독교로 말하면 재림사상입니다.

사람이 `오! 주여 오시옵소서’ 하며 주를 기다리는데, 그 주가 와서 무엇을 할 것이냐? 그 주는 천 사람이면 천 사람, 만 사람이면 만 사람을 때려 몰기 위하여 오시는 것이 아닙니다. 악을 종결짓는 동시에 선의 출발을 위한 하나의 기점을 마련하기 위하여 오시는 것입니다. 그 주는 선으로 왔으면 선의 결실의 순간을 이루어야 합니다. 그리고 악으로 왔던 것은 청산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렇게 악이 청산되고 선의 결실이 맺어지는 수확기가 도래해야 합니다. 그러한 시대가 와야 하기 때문에 지금 세계는 그런 방향으로 흘러가고 있는 것입니다.

27-311
통일교인이 가야 할 길
금년까지의 세계 정세를 바라보면, 이 세계는 공산주의니 민주주의니 하는 주의가 이끌어 나왔습니다. 그러나 이제는 그 주의의 사명이 끝났습니다. 비판받을 때입니다. 그러면 이제부터 세계를 이끌어 나갈 수 있는 국가와 민족은 어디에 있는가? 그것이 없다고 하면 절망뿐입니다. 이런 절망 가운데 있는 개체들이 찾는 민족과 나라와 세계는 어떤 것이냐? 그것을 모르면 망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래서 우리 통일교회가 필요한 것입니다.

절망의 장벽을 헐어 버리고 희망찬 내일의 기수가 되어, 역사과정에 있어서 선의 목적을 추구하기 위한 출발점을 제시하고 미래의 세계 앞에 당당히 나설 수 있는 무리가 나와야 합니다. 이러한 사명을 짊어질 수 있는 무리가 나와 그들이 이 지구상에서 활동을 벌여야 합니다.

그리하여 선의 결실을 맺는 개인이 되고, 선의 결실을 맺는 가정, 선의 결실을 맺는 종족과 민족이 되고, 선의 결실을 맺는 국가가 된다고 한다면 그 국가는 절대 망하지 않습니다. 그 국가의 이념은 개인의 이념이 될 수 있고, 가정의 이념이 될 수 있고, 세계 만민이 이념이 될 수 있으며, 세계 만민이 공인하는 이념이 될 수 있는 것입니다.

이렇게 될 수 있는 내용을 가진 주의면 주의, 사상이면 사상, 혹은 운동이면 운동이라는 것은 단순히 인간만을 위주로 하는 것이 아닙니다. 앞에서 말한 것과 마찬가지로 절대자의 선의 기준, 절대자의 내적인 기준을 총합할 수 있는 사연을 중심삼고 이루어진 종교를 중심삼은 이념입니다. 그런 이념이 최후의 이념이 아닐 수 없다는 것입니다. 이 점을 여러분은 알아야 됩니다.

그러면 앞으로 세계를 수습할 수 있는 주의는 어떤 주의이며, 또 그러한 사람들은 어떠한 사람들이겠습니까? 어떠한 찬란한 문화를 꽃피울 수 있는 기반을 가진 민족이 아닙니다. 물질문명의 만능을 주장하는 20세기는 저물어 가고 있습니다. 저물어 가는 거기에는 석양이 깃든다는 것입니다. 석양이 깃들게 되면 어둠이 올 것이요, 어둠이 오게 되면 다음날의 광명한 새 아침을 맞이하기 위한 준비를 해야 됩니다.

현대 문명이 저물어가는 이 시점에 있어서는 이 밤 시간을 어떻게 넘길 것이냐 하는 문제가 중요합니다. 일정한 방향도 없이 어둠 속에서 우왕좌왕하다가 쓰러지는 인류가 되어서는 안 되겠습니다. 방향을 뚜렷이 정하여 자연의 법도에 따라 정해진 궤도를 순행해야 광명한 아침을 맞을 수 있지 자기 자신이 궤도 자체가 될 수 있고, 궤도를 개척할 수 있다고 자처하는 사람은 모두다 파탄될 것입니다.

이렇게 볼 때, 우리의 방향은 오늘날 세상 사람들이 좋다고 하는 방향과는 다른 것입니다. 지금 세상에는 밤으로 내려가는 무리들이 있는가 하면, 밤을 지나서 아침을 찾아가는 무리가 있습니다. 이때 밤으로 내려가는 무리와 아침을 찾아 올라가는 무리와는 엄연히 차이점이 있습니다. 아침을 찾아가는 무리는 밤으로 가는 길을 통하지 않고는 아침으로 가는 길을 갈 수 없습니다.

대낮에 있는 무리들은 밤에 있는 무리들을 보고 조롱하지만, 역사는 조롱당하고 내몰린 그들에 의하여 발전되어 나왔다는 것을 여러분은 알아야 됩니다. 몰리고 쫓김받는 무리들이 세상을 혁명시켜 나왔고, 발전시켜 나왔다는 것입니다.

어두운 밤길을 지나고 자정을 넘어야 광명한 아침을 맞을 수 있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들을 내몰고 쫓았던 무리들은 그들의 길을 망친게 아닙니다. 오히려 밤길을 가는 데 있어서 길을 재촉하여 주고 몰아붙여 주는 공헌을 했을망정 그들이 가는 길을 막지 못했다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지금까지의 역사는 쫓김받는 무리들로 인해 새롭게 발전을 거듭해 나왔던 것입니다.

여기에 오늘날 종교라는 이름을 가지고 새로운 주의 사상을 고취해서 광명한 새 아침을 맞기 위하여 나서는 무리가 있나니 이들이 한국 땅에서 나타난 통일의 무리들입니다. 이들이 진정으로 새 역사를 펼칠 주인공들이라면 낮이라고 주장하고 아침이라고 주장하는 무리들에게 몰려야 합니다. 그리하여 최후의 광명한 아침에 달했다고 자기 스스로 자랑하는 입장에서야 합니다. 오늘의 복잡한 한국의 정세 가운데 있어서 석양길을 가고 있고, 암흑 가운데에서 몰리는 무리들이 있다면 그들이 바로 통일교회의 무리들입니다.

그러나 몰린다고 해서 산산조각으로 깨져서 흩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몰리면서도 방향을 찾아서 그 고비를 넘어가면 넘는 그 순간이 비로소 암흑과 이별하는 시간이요, 광명과 상봉하는 시간입니다. 그런 한 시간이 인류를 중심삼은 전체 역사 가운데 기필코 있어야 되겠습니다. 오늘날 대한 민국 정세와 운세를 중심삼고 볼 때, 그러한 단체가 꼭 필요한 것입니다.

밤이라 할 수 있는 최후의 순간, 악과 투쟁하여도 양보하지 않은 최후의 순간, 거기에서 그 위치를 공고화시켜 천지의 모든 심정적 요인을 규합시킬수 있는 하나의 기점, 그것을 하나님께서도 바라시고, 인류도 바라고, 영계의 수많은 영인들도 바라는 것입니다. 그 순간에 한 발자국 옮겨 놓는 과정에서 역사는 움직인다는 것입니다.

27-313
역사적인 최후의 순간
여러분, 분수령이라고 하는 게 있지요? 여러분이 그 분수령을 넘으려해도 경계선을 잘 모르는 경우가 있습니다. 여기 같기도 하고, 저기 같기도 하고…. 그와 같이 인간 사이에도 네가 나 같기도 하고, 내가 너 같기도 할 때가 있습니다. 그러나 서로간에는 천지 차이가 있습니다. 근원도 다르고 내용도 다르며 방향도 다릅니다.

그 순간을 자기 개인으로 맞는 사람은 위대한 역사적인 인물이 될 것입니다. 또 그 순간을 가정적으로 맞는 가정은 위대한 가정이 될 것이고, 종족적으로 맞는 종족은 위대한 종족이 될 것이며, 민족적으로 맞는 민족은 위대한 민족이 될 것입니다. 또한 그 순간을 어떠한 나라가 맞으면 위대한 나라가 될 것이고, 어떠한 사상이나 주의가 맞는다면 그 사상이나 주의는 위대한 사상이나 주의가 될 것입니다. 그 가치라는 것은 천년사와도 바꿀 수 없는 것이며, 그 순간은 만년 행운의 터전을 주고도 바꿀 수 없는 진정한 순간, 최후의 순간일 것입니다.

그러면 그 역사적인 최후의 순간은 언제이겠습니까? 인류가 그토록 고대하고 꿈꾸며 나오던 소망을 중심삼은 최후의 순간은 언제이겠습니까? 이것을 지지부진 끌고 나가게 된다면 인간의 행복은 격감될 것입니다. 입다가 떨어진 옷과 마찬가지로 필요가 없게 되는 것입니다.

1960년대에 들어서면서부터 세계 정세는 기울어지고 있습니다. 그러면 기울어지는 이 역사는 어디까지 기울어질 것이냐? 그리고 인공위성과 같이 기울어지는 역사를 박차고 나설 수 있는 존재가 생겨날 것이냐? 기울어져 가는 역사를 그대로 두면 무한한 무저갱에 떨어져 깨지게 될 것입니다. 그런데 여기에 하늘로 비약할 수 있는 하나의 움직임이 있으니 그것이 우리가 말하는 통일사상입니다. 여기에서 우리는 통일사상으로 기울어지는 역사를 끌어올려야 되겠습니다.

여기에 진정한 선이 있어 그 선의 초점을 잡고 그것을 펼치면 그것은 무한한 범위로 확대되어 갈 것입니다. 선이란 펼치면 무한이지만 묶으면 하나라는 것입니다.

산을 보더라도 그냥 산이 이루어진 것이 아닙니다. 흙이 쌓이고 그 위에 또 흙이 쌓이고, 돌과 바위가 쌓이고 그 위에 또 흙이 쌓여서 높은 산이 되는 것입니다. 그러면 맨 높은 꼭대기에 무엇이 남느냐? 그것도 마찬가지입니다. 흙과 돌밖에 없습니다. 최고로 높은 꼭대기는 하나의 돌이든가 모래입니다. 그와 같이 인류의 역사도 인간으로 이루어진 것입니다. 그러므로 인류가 숱한 수난을 통하여 쌓은 역사의 산꼭대기는 승리적인 결실을 맺은 개인이 되어야 하겠고, 가정이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런 승리적인 결실을 맺은 개인이 나온다면 남자가 먼저 나오겠습니까, 여자가 먼저 나오겠습니까? 여자에게 물어 보면 여자가 먼저 나올 거라고 대답할 것이고, 남자에게 물으면 남자가 먼저 나올 거라고 대답할 것입니다. 그런데 대체로 보면 지금까지의 종교에는 여자 도주(道主)가 없었습니다. 성신이 있지만 성신도 신랑되신 예수님이 오신 후에 오신분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남자가 먼저 나와야 됩니다. 지금까지 기독교 역사를 봐도 전부 다 남자를 찾아 나왔습니다. 참된 남자를 찾아 가지고 참된 여자를 찾자는 것입니다. 이것이 기독교에서 말하는 신랑 신부입니다. 그러므로 그 누구보다도 하루라도 빨리 참된 신랑 신부가 될 수 있는 순간을 가진 사람들은 귀한 것입니다.

그런 내용으로 우리가 새로운 문화세계의 창건이라는 깃발을 들고 헝클어지고 기울어 가는 역사와 시대 사조 앞에 나섰다는 사실을 볼 때, 이것은 위대한 일입니다. 통일교회의 선생으로서 위대하다고 말하면 자화자찬 한다고 할는지 모르지만 그것은 모르는 말입니다.

27-315
승리를 찬양하여야 할 70년대
우리는 이렇게 엄숙하고 지고하고 놀라운 역사적인 순간을 꾸려 나왔습니다. 여기까지 오는 길에는 원수도 많았습니다. 그러나 그 원수는 우리를 망하게 하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도리어 우리가 내려가는 밤길에 있으면 미명을 향해 빨리 올라가라고 재촉하는 몰이꾼이 되기도 했습니다. 이렇게 생각할 때 새로운 아침의 미명을 바라보는 우리는 그들을 원수시 할 수 없음을 알아야 됩니다.

여러분은 쌍수를 들어 찬란한 광명의 햇빛을 맞이할 수 있는 순수한 자기 자체가 되어야 합니다. 그런 기쁜 마음, 백 퍼센트 화합할 수 있는 본성의 마음만이 꽉차서 맞을 수 있어야 됩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원수라는 원치 않는 흔적을 남겨 가지고 그 아침을 바라보기에는 너무나 애석합니다. 무슨 말인지 알겠어요?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그 원한을 다 잊고 어떠한 원수라도 다 용서해 주어야 됩니다. 그래야 승리를 찬양할 수 있는 70년대의 찬란한 새 아침을 맞이할 수 있지 않겠습니까?

이제 우리는 역사적인 서글픔 가운데 선 것이 아니라, 이것을 완전히 초월하여 새로운 차원에서 광명한 새 아침을 순수하게 맞을 수 있는 자세를 가져야 되겠습니다. 만약 역사적인 서글픔이 조금이라도 남았거든 청산하여 새로운 희망과 선(善)만으로 가득찰 수 있는 광명의 70년대를 맞이할 수 있어야 되겠습니다. 그런 순간을 갖겠다고, 그런 순간을 장식하여야 되겠다고 몸부림치는 사람이 있다 할진대 우리는 망하는 무리가 아닙니다. 절대 망할 수 없는 무리입니다.

여기에는 희망이 있고 미래가 있습니다. 여기에서 완전한 씨로서 삼을 수 있는 새로운 출발이 벌어지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1960년대와 1970년대가 이런 특별한 차이가 있음을 알고 현실의 슬픔을 딛고 광명한 새 아침을 맞기 위해 노력해야 됩니다. 이런 우리의 생애가 얼마나 값진 것이겠습니까? 오늘날 세계에 널려 있는 모든 통일의 식구들이 이런 마음을 가지고 70년대를 맞는다 할진대 통일교회는 역사시대에 그 누구도 알지 못하였던 단체가 될 게 아니겠습니까? 하나님은 그런 사람들을 통해서 역사하지 않을 수 없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하나님께 “아바 아버지여, 아버지께서는 모든 것이 가능하오니 이 잔을 내게서 옮기시옵소서. 그러나 나의 원대로 마옵시고 아버지의 원대로 하옵소서(막 14:36)”라고 기도한 것을 볼 때, 예수님의 뜻과 아버지의 뜻이 달랐다는 것입니다. 이스라엘 민족만을 중심삼은 민족적인 감정을 초월하지 못한 예수님이었습니다.

하나님이 4천년 동안 수고하시며 준비한 이스라엘 민족의 터전 위에 하나님의 사명을 짊어지고 온 예수님이었지만, 이스라엘 민족을 중심삼은 예수님의 관념과 세계를 중심삼은 하나님의 관념은 차이가 있었습니다.

이스라엘의 광명한 중심이 되겠다고 왔던 예수님의 관념과 세계를 대신할 수 있는 중심존재로 세우려 했던 하나님의 관념과는 차이가 있었던 것입니다.

세계로 가는 길 앞에 있어서 이스라엘 민족이 원수나 마찬가지였기 때문에 예수님은 이 원수를 갚고 싶고, 처단하고 싶고, 원한을 풀고 싶었습니다. 그러나 세계를 구하기 위해 섭리하시는 하나님은 이스라엘 민족을 원수로 취급해서는 세계로 나가는 길을 트지 못하겠기에 원수를 물리치는 싸움을 하는 것보다 넘어가고자 했습니다. 하나님이 넘어가고자 하는 관용의 마음을 가졌기 때문에 예수님도 아버지의 뜻을 따라간다는 입장에서 `저들이 알지 못하기 때문이니 저들의 죄를 용서해 주시옵소서’라는 기도를 했던 것입니다.

그러면 오늘날 우리는 무엇을 부르짖어야 되느냐? 이 민족을 붙들고, 다가올 미래를 위하여 세계 인류가 가야 할 이념을 부르짖어야 합니다. 그 세계는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지는 길이요, 만민이 추구해 온 최후의 승리를 결정할 수 있는 길이기에, 그곳을 향하여 우리는 고생을 무릅쓰고 가야 됩니다.

따라서 지금까지 지나온 역사는 깨끗이 청산해야 됩니다. 그것을 청산하지 못하고는 다가오는 새로운 순간을 맞이하지 못합니다. 다시 말하면 선과 악이 섞여져 얼룩덜룩해서는 안 됩니다. 순결한 선(善)만으로 출발하고 싶은 것이 하나님의 심정이기 때문에 우리는 선 앞에 배치(背馳)되었던 모든 인연을 일체 제거해 버리고 새로운 70년대를 맞아야 되겠습니다. 참다운 선의 순간을 동경하고 추구하며, 과거 역사를 잊고 원수를 용서해 주며 복을 빌어 줄 수 있는 아량을 갖고 70년대를 맞이하길 바라는 바입니다. 아시겠어요? 「예」

27-317
기 도
아버님, 여기에 서 있는 아들은 지금까지 탕감복귀라는 수난의 길을 걸어 왔습니다. 이 길에 많은 원수가 있었습니다. 피묻은 칼을 들어 가지고 부모를 대신해 치고 싶은 마음이 있었습니다. 한 개체를 중심삼고 어이 그런 마음을 가질 수 있었겠습니까? 가질 수 없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민족을 대신해서 그럴 수 있고, 뜻을 대신해서 그럴 수 있는 마음이 있었습니다.

엄청나고 거룩한 창조 위업의 선의 그 순간을 추구하는 저희들은, 아버지께서 본래 인간을 지으실 때 그러한 마음을 갖고 지으셨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선으로만 출발하고 선한 과정을 거치어 선의 결과를 맺기만을 소원하시는 아버지의 마음을 더듬게 될 때에 저희들은 언제나 악하였고, 언제나 속되었다는 것을 발견할 수 있었습니다. 거룩하신 아버지의 그 마음 앞에 어려질 수 있는 한 순간을 가져야 되겠습니다.

저희들은 오늘날 죄지어 사망의 세계로 가는 무리를 한없이 동정하고 내 모든 선의 대가를 잊어버리더라도, 그들을 다시 살 수 있는 길로 돌아가게 하기 위해 몸부림칠 수 있는 자녀들이 되어야 되겠습니다.

이 동절(冬節)에 산지사방하여 있으면서 이 밤도 추운 방에서 잠을 자지 못하고 아버지를 향하여 부르짖는 통일의 자녀들이 있사오니, 아버지, 그들에게 같이하여 주시옵소서. 그들이 죄가 있어서 그러는 것이 아니며, 그들이 민족을 잘못 만났기 때문에 그러는 것도 아니요, 하나님과 조상을 잘못 만났기 때문에 그러는 것도 아님을 알고 있습니다.

여기에는 아버님도 책임이 있고, 우리의 인류 조상도 책임이 있지 않습니까? 하늘과 땅의 책임을 감당하기 위해서 그런 길을 가는 그들을 당신께서 위로해 주셔야 되겠습니다. 그들에게 힘을 주시옵소서. 오늘 이 현실에서만 살다가 사라질 것이 아니라 내일에 소생할 수 있는 운명길을 가고 있다는 이 장엄하고도 엄청난 이 역사적인 사실 앞에 하나의 책임자로서 가고 있다는 사실, 그리하여 역사를 창조하신 하나의 실체로서 남아진다는 사실을 마음 깊이 다짐할 수 있는 자녀들 되게 허락하여 주시옵소서.

아버지, 오늘 1960년대의 마지막 안식일을 보내고 있습니다. 이렇게 모일 수 있었던 60년대의 시간들을 회고해 보게 될 때, 여기에 참석한 자녀들이 당신을 향하여 얼마나 정성들였습니까? 운명한 독자(獨子)의 모습을 바라보고 애달파하는 아버지의 마음과 어머니의 마음을 저희들이 얼마나 느껴 보았습니까? 아버님께서 그런 때를 수없이 많이 가졌다는 것을 저희들은 잊지 말아야 되겠습니다. 원수의 손아귀에서 이슬과 같이 사라지는 운명길을 간 수많은 자녀들을 바라보시며 얼마나 참고 극복하면서 나왔습니까? 저희들은 그런 심정을 아버지 앞에서 체휼하기 위해 노력해야 되겠습니다.

그러한 역사적인 한을 품었지만 이 세상을 용서하시고 다시 품으시려는 아버지, 상처 입은 마음을 원수에게 복수의 손길로 돌리지 않으시고 넓고 크신 아량을 가지고 사랑의 손길로 원수의 자식까지도 품으시려는 당신의 마음이 있는 것을 알게 될 때에, 저희들도 그 뜻을 바라고 그 모습을 따라가겠다고 몸부림쳤으나 그것이 얼마나 어려운 것인가 하는 것을 알았습니다.

60년대의 통일교회의 원수들을 용서하여 주시옵소서. 그들과 더불어 원수의 자녀들을 축복해 주실 줄 믿습니다. `원수를 사랑하라’는 말씀은 사랑하는 자녀들에게 무한한 축복을 약속하는 말씀인 것을 생각하게 되옵니다. 저희들이 놀라고 감사하며 받아들여야 할 말씀임을 알게 허락하여 주시옵소서.

이제 아버지께서 추구해 나온 선의 순간을 맞기 위한 70년대가 앞으로 3일이 남아 있사옵니다. 그 기간 동안도 더욱 면밀하게 모든 것을 분석 비판하면서 지금까지 저희가 허영과 허심으로 나왔느냐, 참의 모습으로 나왔느냐 하는 것을 반성해야 되겠습니다. 알맹이 있는 모습을 다시 한번 희구하면서 60년대에 부족하였던 것을 조건적인 선한 기준으로 남기고 70년대에 있어서 당신을 의지하고 따라갈 수 있는 모습이라고 발견할 수 있게 허락하여 주시옵기를 간절히 바라옵고 원하옵니다.

60년대의 남아진 날들과 더불어 다가올 70년대 앞에 부끄러운 모습을 면하고, 당신이 손길을 내뻗어 가지고 이름을 불러 줄 수 있는 저희들이 되겠다고 노력하는 자녀들 되게 허락하여 주옵길 간절히 부탁드리고 원하옵니다.

오늘 이 아침, 아버지여, 자녀들을 기억하여 주시옵소서. 오늘 청주 지방을 순회하고 돌아오는 길에도 아버지 같이하여 주시옵기를 바라옵고, 모든 사연을 다 아버지께서 맡으시고 주관하여 주시옵길 간절히 부탁드립니다.

모든 말씀을 참부모의 성호 받들어 아뢰었사옵나이다. 아멘.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