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7-268 to 27-294: 가야 할 탕감길

가야 할 탕감길
1969.12.21 (일), 한국 전본부교회

27-268
가야 할 탕감길
[기 도]

아버지, 오늘은 이달 들어 세번째 맞는 안식일이옵니다. 아버님이여, 이제 1960년대도 마지막 고비를 향하고 있사옵니다. 지금까지 수고하신 아버지의 노고 앞에 저희들이 진실된 모습으로 스스로를 찾고, 스스로를 반성할 수 있는 이번 기간이 되게 허락하여 주시옵소서.

당신께서는 아담이 타락한 그날부터 지금까지 얼마나 수고하셨습니까? 6수의 노정을 탕감하고 7수의 한때를 찾아 나오신 아버지께서 오늘날까지 얼마나 수고하셨는가 하는 사실을 알고, 이제 70년대를 향해 가는 이날에 있어서 새롭게 태어나는 통일의 모습들이 되게 하여 주시옵소서. 그리하여 새로이 아버지 앞에 부름받고, 새로이 신뢰받으며, 새로이 3년 노정을 개척할 수 있는 저희가 되게 하여 주시옵소서. 그렇게 함으로 말미암아 보람있는 아들이요 딸로서 아버지께 효도할 수 있는 자신들이 되어야 되겠사옵니다.

이제 6수 노정의 슬픔을 지워 버리고 안식의 7수를 찾기 위한 아버지의 역사가 시작되어야 하겠사옵니다. 1961년부터 1969년까지의 수고로 말미암아 모든 것을 탕감시켜 주시옵고, 금후의 하늘의 복귀섭리 앞에 있어서 승리를 다짐하면서 영광의 1970년대로 접어들게 허락하여 주시옵기를, 아버지, 간절히 바라옵고 원하옵니다.

지금까지 이 땅 위의 인류를 찾아오신 아버지 얼마나 외로우십니까? 땅위에 있는 인간의 마음을 직접 대할 수 없는 아버지께서는 한 생명을 찾기 위하여 수많은 영인들을 동원하시고 천사들을 동원하시어 다리를 놓지 않으면 안 되었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그러한 아버지의 수고의 역사가 이제는 직접적으로 권유할 수 있는 평면적인 한 시점을 이 땅 위에 마련하였다는 사실을 생각할 때, 이것이 하늘의 영광이요, 하늘의 자랑이요, 하늘의 기쁨이 아닐 수 없음을 저희들이 알게 되옵니다.

그러나 이러한 사실을 생각하면 할수록 고생길에 있는 저희의 모습이 하늘의 영광이 될 수 있으며, 하늘의 기쁨이 될 수 있으며, 하늘의 자랑이 될 수 있는가를 생각하게 될 때에 저희들은 아버지의 소원 앞에 느끼게 되옵니다. 이러한 모습으로 인하여 당신의 영광을 가릴까봐, 당신의 기쁜 용안에 수심이 잠기게 할까봐 스스로 염려할 때도 많사오니 용납하여 주시옵소서.

아버지, 저희들은 어린이어야 되겠습니다. 당신의 품에 영원히 영원히 품길 수 있는 자녀가 되어야 되겠습니다. 당신의 품에 품길 수 있는 아들이 되고 딸이 되어 당신의 귓속말과 입김을 대하면서 진정한 아버지의 심정을 옮겨 받을 수 있는 아들딸의 모습이 얼마나 귀하냐 하는 것을 저희들은 아옵니다. 부디 품길 수 없는 부족한 자신을 아버지께서 품으시사, 저희들을 아버지의 영광의 자리에 세워 주시어 만민을 보살피는 아버지를 찾는 것을 무한한 영광으로 여길 줄 알고, 아버지의 아들된 것을 자랑하여 그 자체를 기뻐할 수 있는 저희 자신들이 되게 하여 주시옵소서.

아버님이여, 전국에 널려 있는 당신의 자녀들을 축복하여 주시옵소서. 당신의 자녀들은 뜻을 받들어 1960년대의 마지막 고비와 새로운 1970년대의 처음 고비를 맞는 이 때, 아버지, 거룩한 제물로서 바쳐지기 위하여 어제 지방을 향하여 모두가 흩어져 갔사옵니다.

이들이 간 길은 자기를 위하여 간 길이 아니라 당신이 남기신 복귀의 운명을 위하여 간 길이옵니다. 이 길은 자기들이 기필코 넘어야 할 길이요, 자기 종족이 개척해야 할 길입니다. 그 누구에게도 맡길 수 없는 책임을 저희들 각자가 짊어졌기 때문에 세상의 그 누가 뭐라 해도 저희들은 가야만 되겠습니다. 저희들은 넘어야만 되겠습니다. 저희들은 기필코 이 싸움에서 후퇴하여 조롱받고 비판받는 무리가 되어서는 안 되겠습니다.

지금까지의 역사노정을 두고 볼 때, 섭리의 뜻을 대표해 나오던 통일교회가 하늘의 슬픔과 더불어 수많은 후퇴의 일로를 걸어왔습니다. 면목없는 입장으로 지금까지 살아왔으며 참가치의 모습을 지니지 못하고 죽은 모습과 같이 가련한 모습으로 지내왔습니다. 지금까지는 눈물의 갈림길이 저희의 앞길을 가로 막았고, 십자가의 외로움이 저희 앞길을 몰아 세웠사옵니다.

그러나 아버지의 수고하심으로 말미암아 이 십자가와 외로움의 모든 고빗길이 낙망의 조건이 될 수 없었으며, 사탄의 모든 흉계가 슬픔의 조건이 될 수 없었사옵니다. 그러므로 저희들은 하늘이 자랑할 수 있고, 하늘이 기뻐할 수 있고, 하늘이 칭찬할 수 있는 최소한도의 자격을 갖춘 아들딸이 되지 않으면 아니 되겠사옵니다. 아버님께서는 언제나 어떤 모양으로든지 그 권한을 찾아 나오셨습니다. 아버지의 그 노고를 저희들은 찬양하지 않을 수 없사옵니다.

이제 저희들은 아버지의 아들이 되어야 되겠습니다. 딸이 되어야 되겠습니다. 진정으로 아버지의 혈통을 이어받은 아들딸이 되어야 되겠습니다. 아버지의 심정이 저희의 심정과 인연맺고 아버지의 심장의 동맥이 저희의 심장의 동맥과 인연되는 일체적인 관계를 이루어, 아버지가 가시는 길이 저희의 길이요, 아버지의 사정이 저희의 사정이요, 아버지의 뜻이 저희의 뜻이 되어야 되겠습니다.

아버지, 이제 저희를 살피시옵소서. 당신의 볼꽃같은 눈으로 저희 자신들을 감찰하시옵소서. 타락으로 말미암아 먹구름 같은 죄악의 뿌리가 아직까지 저희를 덮고 있사오니 이것을 타파하여 주시옵소서.

아버지께서는 저희가 암흑 가운데에서도 승리의 깃발을 바라보면서 광명의 빛을 향하여 달려갈 수 있는 하늘의 아들딸이 되기를 간절히 고대하고 계신다는 것을 저희들은 알고 있습니다. 저희들은 아버지가 계신 곳까지 있는 힘을 다하여 달려왔사옵니다. 하오나 지친 모습을 아버지 앞에 보이지 않을 수 없는 저희들의 부끄러움을 용납하여 주시옵소서.

이제 저희들은 아버지의 권고를 받아 또다시 눈을 들어 더 먼 곳을 바라보아야 되고 높고 높은 창공을 향하여 다시금 결의하지 않으면 안 될때가 되었사옵니다. 저희들이 가는 이 길이 험하다 하더라도, 이것은 아버지께서 분부의 말씀이며, 역사과정에 저희들을 찾기 위하여 참으시며 싸워 나오신 아버지의 소망인 것을 생각하게 될 때, 아버지의 뜻을 이루기 위하여 저희들이 어떠한 험한 곳도 개의치 않고 가는 아들딸의 모습이 되게 하여 주시옵소서. 그러기 위해서는 모든 것을 다시 한번 씻어 버리기 위한 하늘의 권고와 하늘의 권고와 하늘의 힘과 하늘의 능력이 필요한 것을 알고 있사오니, 친히 같이하여 주시옵기를 간절히 부탁드리옵나이다.

이제, 자녀들이 지켰던 이 동산을 지켜 주시옵소서. 간밤을 눈물과 더불어 새운 아들딸들이 있사옵니다. 하늘의 친구요, 외로운 하늘의 동조자의 입장에 서서 이 나라 이 민족을 넘어 세계를 위하여 울부짖는 그들의 기도소리는 아버지의 심정을 두드릴 것이요, 아버지의 사정과 일치될 것을 알고 있사오니, 그 자리에 더더욱 같이하여 주시옵기를 간절히 바라옵나이다.

가정이 선두에 서서 이끌고 가야 할 실천장의 그 준비된 기반을 고이 갖추시옵고, 축복받은 가정이 지금까지 참여하지 못한 것을 용납하시어 통일의 앞날을 자랑스럽게 빛낼 수 있게 하여 주시옵기를 간절히 부탁하고 원하옵니다.

이 시간 부족한 모습을 아버지 앞에 드러내는 것을 용납하여 주시옵고, 귀한 당신의 뜻이 저희 마음과 몸에 사무치게 하여 주시옵기를 간절히 바라옵니다.

이제 얼마 남지 않은 1960년대도 아버지께서 기쁨 가운데 보낼 수 있게 하여 주시옵고, 다가오는 70년대는 저희의 책임 못했던 과거를 청산하고 소망 가운데에서 새로운 자각을 하여 아버지의 사랑의 심정세계에 다가갈 수 있는 저희들이 되게 하여 주시옵소서. 모든 말씀 참부모의 이름으로 기도하였사옵나이다. 아멘.

27-271
말 씀
오늘은 `가야 할 탕감길’이란 제목으로 잠깐 동안 말씀 드리겠습니다.

이 땅에는 수많은 사람이 살고 있습니다. 또한 수많은 민족과 수많은 나라가 존재하고 있습니다. 우리 인간 자체는 알지 못하지만 개인이나 한나라를 볼 때에 그것들은 하나님을 중심삼고 수많은 탕감의 대가를 치루어 가지고 그 대가의 기반 위에 서 있다는 사실을 우리는 알아야만 되겠습니다.

어떤 사람은 잘사는가 하면, 어떤 사람은 못삽니다. 또 어떤 나라는 선진국이라고 세계에 자랑하고 권위의식을 갖고 있는가 하면, 그 반면에 어떤 나라는 후진국의 입장에서 허덕이고 있습니다. 이와 같이 되어진 세상의 실상을 앞에 놓고 볼 때에 거기에는 좋아 보일 수 있는 것과 나빠 보일 수 있는 것이 있습니다. 그것이 크고 작다 뿐이지 그와 같은 인연이 우리를 중심삼아 가지고 전후 좌우 상하에서 감돌고 있다는 것을 우리들은 알고 있습니다.

27-272
잘사는 나라와 못사는 나라의 배후
잘사는 민족은 반드시 그만한 대가를 치르고 난 기반 위에 서 있기 때문에 잘산다는 것을 그 나라의 역사를 중심삼고 보면 알 수 있습니다. 또한 못사는 나라는 그 나라의 배후에 못살 수 있는 동기가 깃들어 있다는 사실을 우리는 엿볼 수 있습니다.

이렇게 볼 때 잘사는 개인이면 개인, 나라면 나라가 과거로부터 지금까지 잘살아 왔느냐 하면 그렇지 않다는 것입니다. 큰 나라면 큰 나라가 잘 사는 나라가 되기까지에는 거기에 비례하여 비참한 내용을 중심삼고 생사의 기로에서 결단을 내려야 했던 내용이 있는 것입니다. 그런 역사적인 수많은 사건을 지니고 나왔다는 사실을 알아야 되겠습니다. 그리고 그 사건들이 처리된 것도 개인이 잘나서 처리된 것이 아니라 국민과 국가가 일치되어 전체의 운명을 걸어 놓고 노력했기에 처리된 것입니다. 국가의 비상사태를 해결짓고 넘어가는 데 있어서도, 상하 혹은 좌우 전체가 단결되어 가지고 난국을 타개하는 과정을 거쳐서 그 기반 위에 발전이라는 연속적인 결과를 가져옴으로 말미암아, 그 나라는 오늘날 선진국을 창건하게 되었다는 사실을 우리는 부정할 수 없는 것입니다.

반면에 낙후된 민족을 보면, 그 민족의 배후에는 희망찬 내일을 위하여 힘차게 난국을 타개한 혁신적인 내용이 없다는 것입니다. 자기들의 생명을 걸어 놓고 난국을 타개하려는 면에 등한시했고, 거기에 대한 책임을 지지 못했습니다. 국민 전체가, 전후 좌우 상하가 일치되어 가지고 그러한 난국을 타개하기 위하여 움직이지 못했던 것입니다. 이와 같이 민족 전체가 일치된 행동을 한 내용이 적은 민족일수록 후진국을 면할 수 없었다는 사실을 우리들은 알아야 됩니다. 역사가 그렇게 되어 나왔습니다.

27-273
성공을 위해 필요한 투쟁의 과정
한 나라의 역사를 두고 볼 때에 그렇다 할진대 우리 개인도 마찬가지인 것입니다. 우리가 앞으로 다가올 새로운 역사시대에 있어서 어떤 일을 남길 것이냐 하는 문제를 두고 볼 때, 그 내용을 결정하는 요인은 그 배후의 환경에 있는 것이 아니라 자기 자체에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이러한 사실은 역사상의 선진국, 혹은 후진국을 보아도 알 수 있는 것입니다.

우리 개인의 운명도 마찬가지입니다. 그 사람이 당대에 성공하느냐 못하느냐, 혹은 빛나는 영광의 시대를 맞느냐 슬프고 서러운 생애를 남기느냐 하는 문제들은 그가 생애노정을 살아가는 과정을 보면 알 수 있습니다. 그가 나면서부터 살아가는 과정에 얼마만큼 역사적인 방향과 천운의 방향에 일치될 수 있는 사연이 있느냐, 혹은 그러한 사연과 주의를 가지고 자기 생명을 넘어 미래를 추구하는 심정으로 자기에게 밀려오는 사건에 언제나 정면으로 부딪친 내용을 지녔느냐 하는 것이 그 사람의 현재의 인격과 미래에 남아질 수 있는 인격을 좌우하며, 그 사람이 추앙받을 수 있는 중심이 되느냐 안 되느냐 하는 문제를 좌우한다는 것입니다.

소원과 목적이 크면 클수록 거기에 비해 투쟁의 과정은 큰 것입니다. 그 투쟁의 과정은 없을 수가 없는 것입니다. 투쟁이라는 그 자체는 그 누구나 다 원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러나 투쟁이 없어 가지고는 그 자신이 원하는 목적이 성취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절대적인 사실이 아닐 수 없습니다.

현실 환경에 급급해 가지고는 그 환경에서 자기의 새로운 목적을 모색할 수 없는 것입니다. 현실 환경을 타고 넘어야 하는 것입니다. 새로운 생활기반을 확충하려면 무한한 주체적인 인식에 입각해 가지고 자기 자체의 환경에 대해 혁명이라는 두 글자를 세워 놓고 투쟁이라는 길을 거쳐 가지 않으면 안 된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목적을 추구해 가는 사람이 필연적으로 가야 할 길이라는 것입니다. 누구나 결과의 시점에서는 성공이라는 것을 환영할는지 모르지만 성공이 지내온 과거, 성공이 이루어지기까지의 과정이라는 것은 그 누구도 환영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성공이 거두어지기까지의 지난날은 생각하면 몸서리쳐지고 그만두고 싶은 한 많은 역사적인 날들의 연속이었을 것입니다. 자기 부모나 자기의 동기, 친구, 혹은 자녀나 부부에 이르기까지 전부 다 마찬가지인 것입니다.

과거라는 그 자체는 피비린내나는 투쟁의 일로였던 것입니다. 이러한 상극이 교차되는 과정을 타개하지 않고서는 목적을 성사할 수 없는 것입니다. 이것은 일생을 두고도 마찬가지이고 하루를 두고도 마찬가지입니다. 아침에 하루를 출발하면서 오늘은 뜻있는 날이 되었으면 하고 바라지만 그 하루가 내가 고대하는 뜻있는 날로서 결과가 맺어진다는 것은 간단하지 않다는 것입니다. 이렇게 간단하지 않은 하루를 맞이해 가지고 그 하루를 간단히 지내 버리는 사람은 간단한 사람이 된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러한 인생관을 가지고 사는 사람의 인생길과는 달라야 되는 것입니다.

개인의 일생을 두고 볼 때, 또는 오늘날 선진국이라고 자처하고 있는 국가를 두고 보면 그 배후에는 긴 투쟁의 경로가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후퇴할 수밖에 없는 환경을 박차기 위해 무한한 투쟁을 치른 그 대가에 비례해 가지고 그 개인이나 나라의 존재가치가 좌우된다는 것을 알아야만 되겠습니다.

27-274
통일교회는 어떠한 길을 걸어왔느냐?
이렇게 볼 때 우리 통일교회 자체는 어떠한 길을 걸어왔느냐? 70년대의 새로운 복귀섭리시대를 앞에 놓고 내가 묻지 않을 수 없는 것입니다. 통일교회는 어떠한 길을 걸어 왔느냐? 흘러가는 길을 걸어 왔느냐? 그렇지 않으면 발전하는 길을 걸어왔느냐? 다시 말하면 대가를 치르면서 우리가 가야 할 운명의 길을 개척해 나오고 있느냐? 이러한 문제들을 두고 볼 때 우리는 지금까지 대가를 치르며 나왔고, 지금도 치르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면 그 대가의 기준은 점점 작아져야 되느냐? 아닙니다. 그런 길을 가면 망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그 대가를 점점 크게 치를 수 있는 내용을 지니고 있느냐? 또한 여기서 쓰러지지 않고 망하지 않을 자신이 있느냐? `쓰러지지 않고 망하지 않는다. 더더욱 굳건히 설 수 있다 더 큰 대가를 치를 수 있는 자신이 있다’고 할 수 있는 자신을 가지고 나간다 할진대 여러분은 오늘날 이 시대의 비탄 가운데서 사라지는 사람들이 안 될 것입니다.

우리에게 브레이크를 걸었고 제재를 가했던 그들은 기필코 우리로 말미암아 패자의 입장에 설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그러한 환경, 우리로 하여금 대가를 치르게 하는 그 여건들을 우리의 내일의 희망을 자극해 주는 것으로 소화하고 흡수할 수 있어야 하겠습니다. 그러한 도구로 생각해야 되겠습니다. 그러한 자각과 자신을 지니고 오늘 이 현실에 처해 있다할진대 우리는 망할 수 없습니다. 내 손이 빈 손이요, 내 몸이 알몸이라도 희망의 내일이 있는 것입니다.

그러면 통일교회 교인된 내 자신을 중심삼고 볼 때 나는 교회를 위하여 어떤 대가를 치렀느냐? ` 과거에는 이런 대가를 치렀고 오늘은 이런 대가를 치르고 있고 내일은 이런 대가를 치러야 되겠다’라고 하는 내 자신이 되어야 합니다. 그 대가를 어디에서 치러야 되느냐? 가야 할 섭리의 노선, 각국의 운명이 부딪치는 최고의 노선, 다시 말하면 중심 주류가 있을 것이거늘 그 주류에서 치러야 하는 것입니다.

여기에서 정면으로 가야 할 자세를 망각해 버리고 대가를 치러야 할 책임을 못 하는 사람은, 앞으로 아무리 광명한 새로운 이상시대가 온다 하더라도 도리어 암흑의 시대로 느낄 것이고, 그 대가를 치러 가치를 지닌 사람들 앞에서는 자신의 부끄러움과 부족함을 느낄 것입니다. 불신하였던 바가 크면 클수록 거기에 찾아드는 성공은 반비례할 것입니다. 거기에는 자기 자신의 몰락과 후회와 탄식과 절망이 깃들 것입니다. 이러한 절망이 나를 향하여 물결쳐 들어오게 될 때는 그야말로 내 모든 환경 전체가 비참할 것이요, 하늘땅 앞에 내 일신을 드러낼 수 없고 부끄러움을 모면할 수 없을 것입니다. 여러분은 이것을 알아야 됩니다.

이러한 시점에서 보게 될 때에 통일교회가 짧은 역사를 가졌지만 그 역사의 배후에서 발전의 무대를 지탱시킨 그 탕감의 대가는 얼마나 컸느냐? 이것이 대한민국적이면 대한민국을 개척할 것이요, 세계적이면 세계를 개척할 것이요, 천주사적이면 천주사적인 역사를 창건할 것입니다. 또한 하나님을 대신할 수 있는 입장에서 수난의 길을 걸어왔다면 하나님이 우리의 권내에 반드시 찾아오실 것입니다.

이러한 엄청나고도 방대한 뜻이 가는 길 앞에는 험한 산과 골짜기가 남아 있을 것입니다. 이것이 우리에게는 비참할 것이지만 이러한 사탄세계의 골짜기가 탕감되는 날 이것을 대신하여 최대의 행복의 고개가 찾아온다는 사실을 생각하면 지금 부딪치는 것은 일시적인 것이요, 앞으로 다가올 것은 영원한 것입니다. 진실로 이러한 사실을 확실하게 체득한 사람이 있다 할진대, 그 가치와 자신과의 무한한 차이를 느낄 것입니다. 여기에 비하는 대가를 얼마나 자신있게, 얼마나 뜻깊고 가치있게 치를 수 있겠느냐 하는 것이 문제입니다. 이런 문제를 두고 볼 때 오늘 여기에 앉아 있는 여러분 자신들은 어떠했느냐? 반성해야 되겠습니다.

역사시대의 모든 발전의 요인이 그러했고, 영원한 역사의 운명과 동반하는 이 시대의 민족의 운명도 치른 대가의 기준에 의해서 결정된다 할진대, 오늘날 이 통일교회에서 남아진 탕감의 기간이 불행한 것이냐? 아니라는 것입니다. 이 마음으로 피해 갈 것이 아니라 내 일대뿐만 아니라 2대, 3대를 거치더라도 이를 기쁘게 넘을 수 있는 민족이 되어야 합니다. 그러한 민족 혹은 그러한 사람이 있다면 그 민족, 그 사람은 망하지 않습니다. 절대로 망하지 않습니다.

27-276
세계적인 탕감노정을 갈 수 있는 나라
오늘날 타락의 한을 지니고 태어난 우리 인간들이 타락의 세계에서 행복의 세계, 다시 말하면 하나님이 지향하시는 창조 이상세계로 나아가는 그 과정은 비참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원수의 세계에서 개인으로서의 시련의 과정을 극복하여 가정과 종족과 민족, 그리고 국가와 세계를 찾아야 하는데, 여기에는 극복하지 않으면 안 될 여러 가지 난제들이 놓여 있다는 것입니다.

우리 앞에 벌어지는 사회제도나 나타난 모든 조직적인 현상세계, 혹은 나타난 결과의 현상세계 전부가 우리를 대해서 환영의 박수를 보내는 것이 아니라 언제나 상충을 일으키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기에 우리는 여기에 대결의 인연을 지니지 않을 수 없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것을 치고, 이것을 밀어내고, 이것과 맞부딪쳐서 남아질 수 있는 자아가 되기 위하여 노력해야 합니다. 생애에 있어서 그것을 생활철학으로 삼고 싸워 나가는 개인과 민족이 있다면 그 개인, 그 민족은 금후의 이상세계를 주도할 것입니다.

여러분들은 개인 탕감복귀로부터 시작하여 가정, 종족, 국가, 세계적인 탕감복귀노정을 가야 된다는 말을 많이 들어 왔습니다. 그러면 세계를 위해 탕감노정을 갈 수 있는 나라는 어떠한 나라냐? 기필코 세계를 대표할 수 있는 한 나라가 있을 것입니다.

일본이 그런 나라로서의 권위와 위신을 가지고 있느냐? 아닙니다. 그렇다면 스스로 국위를 자랑하고 선진국가로서의 위대함을 자랑하는 국가 중에서 그런 국가가 있느냐? 세계를 대표하여 탕감의 제단에 오를 수 있는 나라가 있느냐? 없습니다. 지금 행복을 노래하는 나라는 그런 나라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역사과정에서 몸부림치며 피어린 투쟁을 했고, 세계적인 사건을 자기와 연관시켜 가지고 자기의 일로 여기며 몸부림친 민족, 그러한 국가만이 앞으로 세계를 책임질 수 있는 것입니다. 이러한 것을 여러분은 알아야 됩니다.

그러면 그러한 민족은 어떠한 민족이어야 될 것이냐? 그러한 나라를 추구하면서 그러한 것을 주류 사상으로 받들 수 있는 민족이어야 됩니다. 그 나라 전체 국민이 남녀노소를 막론하고 그 사상과 그 행동을 백 퍼센트 받아들여 소망의 상징으로 떠오를 수 있는, 그리하여 그 나라의 주류 사상이 되게 할 수 있는 사상을 국민 앞에 제시하는 운동을 지금 하고 있는 민족이어야 될 것입니다. 그런 종족, 그런 가정, 그런 개인이어야 되는 것입니다.

그러면 이 세계에서 어떤 나라가 그런 나라일 것이냐? 오늘날 세계에는 수많은 나라가 있지만 삼천리 반도, 대한민국은 보잘것없고 비참한 나라이며 반분 된 슬픔과 비운을 가지고 있는 나라입니다. 그러나 이 나라는 비운에 사라지는 나라가 아니라 오히려 그 비운을 타파해 버리고 새로운 세계의 갑옷을 입고 가겠다고 몸부림치는 나라입니다. 아무리 역사적인 한이 매달리고 길을 막는다 하더라도 이것을 응당히 책임져야 할 시련의 무대로 알고, 여기에 생명을 투입하여 1년, 10년, 40년, 혹은 반세기, 1세기, 수세기를 밀고 나갈 수 있는 민족 단결 운동, 민족 통일의 운동을 벌인다면 세계적인 탕감노정을 책임질 수 있는 하나의 국가가 될 것은 두말할 것도 없는 사실입니다.

이러한 관점에서 볼 때, 대한민국이 6천년이란 기나긴 세월 동안 수많은 민족이 망하고 수많은 민족이 일어나면서 엮어 온 굴곡의 역사에 하나의 국가 형태를 갖추어 가지고 나왔느냐고 할 때, 과연 그렇다고 할 수 있겠습니까? 대한민국의 역사는 슬픈 역사가 아니겠습니까? 그것을 인식할수 있는 내 자신이 되어야 합니다. 이제 수다한 곡절의 역사를 청산하고 승리의 권한을 가져야 하겠습니다. 내가 살고 있는 대한의 나라는 이러한 나라가 될 수 있다고 나는 주장해 왔습니다.

그러면 대한민국이 하나님 앞에 불리워질 수 있는, 세계적인 탕감을 치르는 나라가 될 수 있느냐? 그러한 탕감의 나라가 될 수 있다는 것입니다. 틀림없다고 자랑할 수 있는 권내에 올 때까지 대가를 치러야 됩니다. 그러나 작은 대가 가지고는 국가의 해원성사는 불가능합니다. 고질된 역사를 판가리하는 데 있어서 온갖 사망의 권세를 쳐부수기 위해서는 국가의 틀을 제거시킬 수 있는 무한한 투쟁을 해야 됩니다. 무한한 탕감의 대가를 치러야 합니다. 그리고 그 대가는 민족을 넘을 수 있는 대가이어야 하는 것입니다. 막연한 신념을 갖고서는 사망의 권세를 쳐부술 수가 없습니다.

27-278
원리를 통하여 탕감의 대가를 치러야
여러분은 그러한 나라라고 자랑할 수 있는 현실적 기반을 닦아야 합니다. 그 현실적 기반은 누가 닦아야 하느냐? 여러분은 여러분 자신이 닦았다고 할 수 있는 자신을 못 가졌을 것입니다. 내가 닦은 것이 아니요, 또한 우리 민족이 닦았다고 할 수 있는 자신을 못 가지고 있다 할진대 누가 닦아야 할 것이냐? 오늘날 통일교회가 그 자신을 못 가지면 누가 닦아 줄 것이냐? 혹은 선생님이 그 자신을 못 가지면 누가 닦아 줄 것이냐? 닦아진 결과가 남아지고 그것이 공의의 무대로서 전개될 것은 틀림없는 사실입니다. 이렇게 틀림없는 사실의 배후에 있는 탕감의 대가를 누가 치를 것이냐 하는 것을 생각할 줄 알아야 합니다.

대한민국이 세계를 향하여 발전할 수 있게 된 것은 어떠한 목적의식이 뒷받침되어 가지고 망할 수 있는 기회를 꺾어 버리고 흥하는 기회로 연결되었기 때문입니다. 여기에는 보이지 않는 자극적인 힘이 연속적으로 투입되고 희생의 대가를 치러서 그럴 수 있었다는 사실을 알아야 합니다. 우리의 주위 환경에서 벌어지는 실상과 느껴지는 모든 것을 통해 볼 때, 뜻앞에 있어서 이 나라가 승리할 수 있었다는 것은 무한한 희생의 대가가 치러졌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이 대가는 누가 치렀느냐? 하나님이 치렀습니다. 그 하나님은 누구냐? 우리 인류의 부모입니다. 인류의 부모로서 대가를 치렀기 때문에, 대한민국 삼천만 민족만의 부모가 아니라 인류의 부모로서, 역사시대의 인간의 부모로서 대가를 치렀기 때문에 그 대가의 보람은 대한민국에만 반영되는 것이 아닙니다. 역사시대에도 반영되었고, 현실에도 최대로 반영되고 있습니다. 뿐만 아니라 미래의 세계 앞에 하나의 유업으로 상속되기도 하는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그것은 과거 현재 미래의 인간들 앞에 치러진 대가가 아니겠느냐 하는 것입니다. 그런 점에서 통일교회의 원리가 제시하는 가치관이 드러나는 것입니다.

그러면 통일교회 원리는 무엇을 주장하느냐? 역사 앞에 인간의 위대한 가치를 재생시키자는 것입니다. 그 가치를 역사적인 인간들과 더불어 재생시키자는 것입니다. 영계에 가 있는 사람과 더불어 현세의 세계인과 더불어 미래의 우리 후손과 더불어 이것을 드러내자는 것입니다. 이것을 틀림없이 드러낼 수 있는 나 자신이요, 내 가정이요, 내 종족이 될 수 있다는 자부심을 당당히 가지게 된다면 여기서부터 역사시대의 인간을 중심삼은 최대의 승리의 기준이 결정된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사실을 생각할 때, 이 자리가 얼마나 엄청난 자리인지 모릅니다. 이 자리에서 치르는 대가는 최고의 정성을 가해야 됩니다. 오관을 통해 느껴지는 모든 것도 최고의 정성을 위해서 필요한 것이요, 내가 한번 보는 시선도 선을 추구함에 있어서 필요한 사실이라는 것을 망각해서는 안 됩니다.

새로움을 발견한, 새로운 희망을 가진 사람이라 할진대 자신이 택한 이 길을 생애에 없는 최고의 정성과 지성을 다해 가지고 가야 되겠습니다. 듣고 보고 하는 모든 감각을 중심삼아 가지고 최고의 정성을 들이는 제물이 되지 않으면 안 된다는 것입니다. 이렇게 사는 사람은 오늘 이 현실에 살고 있지만 역사와 더불어 사는 사람입니다. 역사과정에 아무리 회오리 바람이 불어오고 험한 폭풍우가 몰아친다 하더라도 그것을 초월한 경지에서 참된 인간의 모습을 지니고 사는 사람은 역사가 증거할 것이요, 시대가 증거할 것이요, 미래가 환영할 것입니다. 그럴 수 있는 사람을 하늘은 얼마나 얼마나 고대하겠습니까?

이러한 과정에서 여러분 자신들은 원리를 통해야 됩니다. 통일교회가 제시하는 그 길을 가기 위해서는 탕감의 대가를 치르고 가야 됩니다. 자기 생명에 대해서는 그 누구도 심각하게 책임지려 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책임지려는 마음을 갖고 있었으면 책임을 졌느냐 하는 문제를 중심삼고 보면 함부로 생각하고 있었던 지금까지의 우리들인 것을 재발견하게 됩니다. 우리는 생명의 가치를 귀하게 여기고 현실무대를 힘차게 밟고 나가야 됩니다. 오늘날 내가 현실무대에 있어서 얼마나 보람있는 가치를 투입하고 있고 투입된 그 가치가 얼마만한 결과를 가져오고 있는가를 눈으로 보아 확실히 알고 있듯이, 이렇게 행하는 사람은 역사는 망하더라도 망하지 않습니다. 대한민국의 3천만이 망하더라도 그는 망하지 않을 것입니다.

27-280
능동적인 자신이 되자
진실된 가치를 역사시대에 얼마나 남겨 왔느냐? 또 그 진실된 가치가 역사과정을 통해서 얼마나 남아질 것이냐를 염려하면서 거두어진 가치를 잊어버리고 지금까지 나오는 것입니다. 그 과정에서 아무리 어려운 환경의 고빗길이 있다 하더라도 그 가치를 무색하게 한 것이 아니라 도리어 그 가치의 내용을 중심삼고 가치의 기준을 높이하였습니다. 그 가치를 떨어 뜨리고 파탄시키지 않았습니다. 이러한 관점에서 볼 때 여러분 자신들이 지금까지 걸어온 역사과정에서 `이것만은 내가 틀림없이 대가를 치렀다. 삼천만 민중아, 이것만은 나를 본받아라. 내 형제야, 이것만은 본받아라. 내 부모여, 이것만은 분명하다’ 할 수 있는 여러분이 되었습니까? 반대하는 사탄도 이것만은 인정합니다. 그러므로 사탄도 `예, 그렇습니다’, 또한 부모도 `오냐’, 민족도 `옳습니다. 그렇고 말고요’라고 할 수 있게 해야 합니다.

사탄을 물리칠 수 있는 분석 비판 능력을 갖지 못하였다 할진대는 나라를 위하고 세계를 위하겠다고 부르짖는 그 자체가 허영에 지나지 않는 것입니다. 경거망동하는 것에 지나지 않고 능동적인 것이 아니라 피동적인 것입니다. 피동적인 존재는 완전한 수확을 거두지 못하는 것입니다. 수확의 결과는 볼 수 있으되 주인은 되지 못하는 것입니다. 생명이라는 것은 피동적인 인연을 거쳐서 남아지는 것이 아닙니다. 능동적인 인연을 통해서 종교의 그 핵심 주류를 통해서 연결되는 것입니다. 피동적인 생명의 인연을 가지고 있고, 피동적인 대가를 가치를 추구하고 있고, 또 피동적인 대가를 치르면서 살고 있는 서글픈 자신임을 발견할 때 그 부끄러움이 얼마나 크겠습니까? 부끄러움을 가릴 수조차 없는 부족한 자신인 것을 발견하고 통곡할 수 있는 자신이 되지 않고는 이 길을 갈 수 없습니다. 기독교에서 제시하는 회개가 그러한 과정에서는 필요하다는 것입니다.

그럴 수 있는 내 개인이 되어야겠습니다. 포기하지 않을 수 있는 내 자신이 되어야 되겠습니다. 그럴 수 있는 아내, 그럴 수 있는 남편이 되어야 되겠습니다. 그러한 남성과 여성이 만나 가지고 한 가정을 구성하는 그날, 하늘은 우리에게 더 큰 기대를 걸 것입니다.

오늘날 다른 사연을 가진 사람들이 합해 나가는 과정에서 그러한 제시된 문제를 중심삼아 가지고 얼마나 심각했느냐? 자기 자신들의 생활 문제를 생각하는 것보다 역사적인 사명과 앞으로의 천운과 승리의 박자를 맞추는데 있어서 얼마나 심각했느냐? 우리는 그럴 수 있는 부부의 인연을 존중시하면서, 그럴 수 있는 인간의 가치를 소중하게 여기면서 인연의 세계를 창건해 나가야 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내 일대에서 끝이 안 나면 후계자를 세워서라도 상속시켜야 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 엄청난 역사적인 숙명의 과업을 책임지고 준비하여 고스란히 상속시켜 주는 참된 부모의 모습으로서 어떻게 등장하느냐? 이것이 중요한 것입니다.

여러분은 자기 자신을 통하여 탕감의 대가가 치러질 것을 요구하고 있는 것을 알았습니다. 내 가정을 통하여 탕감의 대가가 치러질 것을 요구하고 있는 것은 틀림없다는 것입니다. 가정뿐만이 아니라 자기의 아들딸을 통해서 탕감의 조건을 제시해야 할 내용이 남아 있는 것이 틀림없습니다. 자녀를 통하여, 종족을 통하여, 민족을 통하여, 국가를 통하여, 세계로 가야 할 길이 남아 있는 것은 틀림없는 것입니다. 이렇게 세계로 갈 수 있는 확실한 길을 어떻게 내 일대에 닦아 후손들 앞에 남겨 줄 것이냐? 그 시간과 거리는 멀지만 시련이 부딪쳐 오는 환경에 있어서 패하지 않고 승리적인 길을 갈 수 있느냐, 부모면 부모로서, 가정이면 가정으로서 이러한 환경을 어떻게 일시에 이겨낼 수 있느냐 하는 문제가 여러분의 생사 문제를 좌우하는 심판의 길이라고 결론지을 수 있습니다.

27-282
탕감의 대가를 치르는 자리
그러면 대가를 치르는 자리는 어떠한 자리냐? 나로부터 뚝 떠나 가지고 나라의 대가를 치르는 것이냐? 그렇지 않습니다. 거기에는 거짓이 개재되기 때문에 안 되는 것입니다. 진실이라는 것은 간격을 초월한 자리에 있는 것입니다. 간격을 흡수시키고 그 간격을 소화시킬 수 있는 데에 진실이 있는 것입니다. 이것은 내 개인이 국가를 중심삼아 가지고 종의 자리에서 대가를 치러야 하는 것입니다. 내 몸과 마음, 내 자체에서 소화시킬 수 있어야 합니다. 그런 자리를 내가 비쳐 가게 되면 그 주체 앞에 대상으로서의 가치가 줄어드는 것입니다. 가정이 비쳐 갔으면 그 가정은 사회 앞에 그 가치가 줄어드는 것입니다. 하나의 종족도 세계 앞에 대가를 치러야 되는 것입니다. 초월이란 공식은 있을 수 없습니다. 초월할 수 있는 공식이 있었다면 하나님께서 6천년이라는 긴 세월을 고생하시지 않았을 것입니다.

여러분들이 이 대가를 어디에 치르려고 하느냐, 이 대가를 누구 때문에 치르느냐 할 때 나라를 위해서, 나라 때문에 치른다고 하는 것은 믿을 수가 없습니다. 스스로 대가를 치르지 못한 사람이 나라를 위해서 대가를 치른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것이요, 스스로 대가를 치르지 못한 사람이 종족과 가정을 위해서 대가를 치른다는 것도 있을 수 없는 것입니다. 도리어 개인의 대가를 치르지 못하면 개인과 가정에 대한 이중의 대가를 치러야 하는 가중된 운명의 자리를 인계받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개인의 생활이라는 것은 무시할 수 없는 것입니다. 참이 가는 길 앞에 있어서 대가를 치르지 않게 되면 참의 결과가 나올 수 없다는 것입니다.

오늘날 통일교회 사람들은 말하기를, 우리 교회를 위해서 일한다고 합니다. 또는 우리 대한민국을 위해서, 하늘을 위해서 일한다고 합니다. 하지만 천만의 말씀입니다. 대가를 치르는 데 있어서 하늘이 중심이 되고, 하늘의 동기에 부합될 수 있고 화합될 수 있는 자체를 발견하지 못하고서는 대가를 치러 보았자 사탄으로부터 출발해서 사탄으로 끝난 결과가 되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의 원리에서는 개인복귀 완성이라는 것이 첫번째로 나오는 것입니다. 국가복귀 완성이 아닙니다. 세계복귀 완성이 아닙니다. 개인복귀 완성이 첫번째라는 것입니다. 누구를 위해서 대가를 치러야 될 것이냐? 내 개인을 위해서 치러야 됩니다. 하늘은 지금까지 세계를 찾아 나온 것이 아닙니다. 세계가 있기 전에 국가가 있어야 되고, 국가가 있기 전에 종족이 있어야 되고, 종족이 있기 전에 가정이 있어야 되고, 가정이 있기 전에 개인, 남자와 여자가 있어야 됩니다. 이러한 관점에서 지금까지의 종교는 복귀된 개인으로서의 남자를 찾지 못했습니다. 남자와 여자를 중심삼아 가지고 하나의 가정으로서 대가를 치른다는 이러한 종교의 교리, 종교의 얼을 가진 종교가 없었습니다. 통일교회만이 이것을 들고 나온 것입니다.

27-283
세계적인 가치의 내용으로 탕감을 치러야 할 우리
그러면 이 대가를 치르기 위한 길이 `가야 할 탕감의 길’이라고 하였거늘, 그러한 탕감의 길을 여러분들이 지금 가고 있느냐 하는 것이 문제입니다. 여러분이 추울 때는 `아이고, 옷을 입어야 되겠다’고 합니다. 배가 고플 때에는 `먹어야 되겠다. 먹을 바에는 좋은 것을 먹어야겠다. 최고로 좋은 것을 먹어야겠다’고 합니다. 그러나 최고로 좋은 것을 먹기 위해서는 그것 이상의 대가를 치러야 하는 것입니다. 최고로 좋은 것을 먹기 위해서는 경쟁과 투쟁과 초월적인 내용을 거쳐 가지고 좋은 것을 먹어야 하는 것입니다. 영원한 존재의 근원이 되고 생명의 원천이 될 수 있고 힘의 원천이 될 수 있는 이 탕감조건들을 세우는 탕감조건이 그렇게 쉽지는 않은 것입니다.

여러분은 탕감을 어디에 치를 것이냐? 치르는 데는 자기에서부터 시작하는 것입니다. 어떠한 가치의 내용을 가지고 치르느냐? 세계적인 가치의 내용을 가지고 치러야 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랬다 할 수 있는 때가 될 때에 세계가 필요로 하는 여러분이 되는 것입니다. 이러한 의미에서 예수님은 `아바 아버지여 내 뜻대로 마옵시고 아버지의 뜻대로 하시옵소서’라고 한 것입니다. 그것이 다른 것입니다.

우리는 지금까지 개인의 현실적인 민족과 행복을 추구해 왔습니다. 행복과 만족을 얻으려면 대가를 치러야 됩니다. 반비례적인 길 앞에 있어서 자신있게 장담하고 파격적인 내용을 가지고 환경을 혁신하라는 것입니다. 극과 극의 상충된 입장에서 무한한 가치 추구를 하지 않을 수 없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들이 가는 길 앞에는 반드시 치러야 할 대가가 있는 것입니다. 교회를 위해서 치르는 것이 아닙니다. 여러분 자신을 위해서 치르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가인 아벨의 문제를 잘 알고 있습니다. 내 마음은 아벨이요, 몸은 가인입니다. 아벨이 아벨되기 위해서는 대가를 지불해야만 됩니다. 그래야 비로소 실체기대가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실체기대라는 것은 몸이 마음에 완전히 굴복하여 가지고 하나가 되어야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그러기에 인간들은 역사시대에 구라파 전쟁이라든가 혹은 대동아 전쟁, 세계대전 등을 거치면서 치른 것 이상의 큰 희생의 대가를 치렀던 것입니다. 마음 앞에 몸을 굴복시키는 전쟁, 보이지 않는 투쟁은 계속되는 것입니다.

세계대전이라는 것은 시작도 과정도 볼 수 있고, 끝도 볼 수 있지만 몸과 마음의 투쟁은 영원한 것입니다. 이 생명이 끝날 때까지 계속되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완전한 대가를 치러야 합니다.

내 가치를 주장할 수 있는 한 시간이 내 생애의 어느 순간이 될 것이냐? 20대냐, 30대냐, 50대냐? 아니면 70대냐? 내 일대에 안 되거든 2대, 3대, 10대, 수천대 후에라도 될 것이냐? 이러한 노정을 찾아오는 것이 오늘날 종교라는 탈을 쓰고 추구해 나오는 최대의 투쟁이라는 것을 여러분이 알아야 됩니다.

27-285
탕감길을 가야 할 현시점
모든 종교는 개인을 찾아 나온 것입니다. 불교는 석가모니를 숭배하고 본받으려는 종교입니다. 기독교는 예수 한분을 본받으려는 종교입니다. 그 이상을 넘지는 못했습니다. 예수는 개인으로서 세계적인 하나의 중심 교주로서 등장한 것이 아닙니다. 개인중심으로 끝나면 그는 망하는 것입니다. 독신 생활을 부르짖고 아무리 노력해 봤자 그건 망하는 것입니다. 그 배후에는 새로운 가정을 제시할 수 있는 종교적인 이념, 새로운 종족을 제시할 수 있는 종교적인 이념과 세계와 천주의 복귀라는 이 엄청난 문제를 중심삼은 종교적인 이념이 있는 것입니다. 복귀시대를 향하여 출발한 출가병이었던 것입니다. 그것은 복귀의 도상에 있어서 그 누구도 하지 못한 것입니다.

여기에 하나님은 개인을 찾을 수 있는 환경과 가정을 찾을 수 있는 환경과 종족을 찾을 수 있는 환경과 민족과 국가를 살릴 수 있는 환경을 마련하기 위해서 4천년 동안 수고해 가지고 이스라엘이라는 선민국을 만든 것입니다. 개인을 해결함과 동시에 가정과 종족과 민족과 국가를 한꺼번에 해결할 수 있는 기점을 마련한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은 그러한 아들이 가는 노정 앞에 있어서 아버지로서 할 수 있는 수고의 내용을 다해주었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이 이러한 수고의 결과로서 이스라엘이라는 나라를 탄생시켰다는 것은 탕감의 대가를 치러서 이것을 처리할 수 있는 기반을 닦아 놓은 것입니다.

여기에서 예수님을 중심으로 하여 이스라엘 민족이 하나가 될 때 그것이 제일탕감입니다. 개체탕감을 위주로 한 예수님의 승리적 기반 위에 가정탕감, 종족탕감, 민족탕감, 국가탕감이 일시에 이루어질 수 있는 환경적 기반을 갖추었던 것인데, 이스라엘 민족이 불신함으로 말미암아 개인 탕감의 결과도 미완성으로 끝나고 말았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영육을 중심삼은 승리의 탕감권을 갖지 못하고 영적인 탕감길만을 닦았다는 사실은 이 땅에 오셨던 예수님의 한도 되는 것이지만 예수님을 보냈던 하나님의 한도 된다는 것을 알아야 되겠습니다.

이러한 엄청난 탕감복귀라는 운명의 길을 우리가 상속받고 있다는 것을 생각하게 될 때 오늘의 이 현시점이 얼마나 중요한 때입니까? 여러분은 여러분 자신만을 위해서 살면 안 됩니다. 나라가 필요로 하기 때문에 나라를 위해 싸워야 하는 것입니다. 제일 중요한 점은 통일교회를 믿는 것입니다. 여기에 있어서 통일교회와 나라는 여러분을 위해서 이용당하는 것입니다. 이런 복귀섭리의 원칙, 이런 창조의 원칙을 두고 볼 때 여러분은 어떻게 하든지 여러분 자체를 책임져야 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누가 책임지느냐? 하나님이 책임지느냐? 95퍼센트의 책임은 하나님이 하는 것이요, 5퍼센트의 책임은 인간이 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합해져서 100퍼센트가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창조원리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창조주의 권한에 가담되기 위한 특권적인 권한을 부여받아야 하는 것입니다.

이렇듯 95퍼센트의 책임은 하나님이 하는 것이요 5퍼센트의 책임은 인간이 하는 것인데도 불구하고, 인간은 이러한 기준을 넘지 못하였기 때문에 역사는 시작했다가 참된 세계의 맛도 보지 못하고 시작과 더불어 저물어가 버렸습니다. 그리하여 인간들은 참된 세계의 맛을 모르는 세계에서 살게 된 것입니다.

그렇지만 내가 필요하기 때문에, 내가 역사적인 핵심이 되어 있기 때문에 세계는 나를 위해서 생겨난 것입니다. 오늘날 이 세계 정세는 누구 때문에 이렇게 되었느냐? 나 때문에 이렇게 된 것입니다. 오늘날 대한민국은 누구를 위해서 생겨났느냐? 나를 위해서 생겨난 것입니다. 내가 주인입니다. 내가 가기 전에는 대한민국은 못 갑니다. 지금까지의 대한민국이 생겨나서 걸어온 그 길을 대한민국 자체를 위해서 걸어온 것이 아닙니다. 우리를 위해서 걸어온 것입니다.

그러므로 대한민국의 운명을 내 운명으로 느끼고 각자가 나라를 책임지려는 국민이 될 때 그 국민은 절대 망하지 않습니다. 그러한 국민이 오늘날 대한민국이 갈망하는 국민입니다.

그러나 천주주의라는 엄청난 내용을 중심삼고 볼 때 대한민국이 이 사조를 넘어서 승리했다 하더라도 그 승리는 아직 과정적인 승리이기 때문에 단결해야 된다는 것입니다. 이렇게 다시 단결할 것을 제창할 수 있고 긴장감을 가지고 결의하게 할 수 있는 주의가 있다면 그 주의는 틀림없이 세계로 웅장하게 달려갈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대한민국이 필요로 하는 것은 세계를 찾는 것입니다.

세계가 필요로 하는 것은 천주주의를 회복하는 것입니다. 하늘땅, 온 피조 만물에 대하여 인간의 절대적인 가치와 자주성을 복귀하는 것입니다. 천주를 창조하신 하나님의 대표적인 왕자가 되고 왕녀와 같이 내일의 희망의 꽃을 피워내야 하는 것입니다. 이 꽃의 가시가 되고 여기에 반대되는 모든 요소를 제거해 놓고, 내가 승리를 찬양하고 전체가 찬양할 수 있는 날, 전체와 일심동체가 되어 그 환경에서 영광을 찬양할 수 있는 날이 와야 된다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이제 자신을 위해서 대가를 치러야 됩니다. 치렀습니까? 치렀다면 얼마나 가치있는 것입니까? 죽음의 칼이 천대, 만대 가중하여 가해지더라도 참된 모습을 드러내야 했던 그러한 가치 앞에는 어떻게 해야 되지요? 죽음의 교차로가 정면으로 내 앞에 닥쳐올 때는 피하려는 생각을 하는 것이 인간의 본능입니다. 그것은 자동적인 작용으로 나타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참된 세계를 추구하는 입장에서, 그런 것을 발판으로 삼을 수 있는, 자아의 주관성을 지닌, 끈기있는 자기 자체가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이러한 것을 보면 참이라고 할 수 있는 것은, 영원히 남아질 수 있는 참은 둘이 아닙니다. 하나입니다. 개인의 참된 기준은 하나인 것입니다. (테이프가 끊김으로 중략)

그 자리를 바라보고 자기 뜻에 비하여 아버지의 뜻이 큰 것을 느끼고 `내 뜻대로 마옵시고 아버지의 뜻대로 하시옵소서’ 하면서 아버지 뜻대로 대가를 치렀을 때 거기서 내가 출발하는 것입니다. 예수님도 지시게 된 십자가를 기쁨으로 소화해야만 했던 것입니다. 예수가 기뻐 따라줘야만 새로운 역사가 밟아오는 것입니다. 이렇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럴 수 있는 엄숙한 자리, 그럴 수 있는 참된 인간의 모습, 그럴 수 있는 참의 대가를 지불한 절대적인 곳으로 돌아서기 위하여 몸부림치던 예수님은 절대권내에 들어가지 못했습니다. 절대권내에는 들어가지 못했더라도 그 뜻과 그가 남긴 사상은 절대적인 것으로서 상대적인 이 환경을 수습할 수 있었기 때문에 그 사랑을 중심삼아 가지고 오늘날 기독교는 세계의 문화를 창건하였습니다. 복귀섭리의 외적인 환경을 마련한 것입니다. 그러면 그 내용의 가치는 누가 결정했느냐? 예수가 결정했습니다. 여러분도 마찬가지입니다.

여러분은 생명을 누구에게 맡기고 싶어요? 여러분의 생명을 누구한테 맡기고 대신 살아달라고 하고 싶으냐 말입니다. 그렇게는 하고 싶지 않을 것입니다. 절대로 그러고 싶지 않다는 것입니다. 여러분이 10년이면 10년동안 통일교회를 중심삼고 나왔다 할진대 자기 자신이 어떠한 사람이라는 것을 알고, 참된 자기 자신을 발견해 놓고 대가를 치러야 되는 것입니다.

여러분 중에 탕감을 치렀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있으면 손들어 보십시오. 이 대가를 치르지 않고서는 못 가는 것입니다. 길이 생기지 않습니다. 길이 없다는 것입니다. 여러분이 가야 할 탕감길, 7년노정에서의 대가를 치르고 나서야 길이 생기는 것입니다. 통일의 길은 그런 대가를 치르고 나서야 길이 생기게 되어 있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세운 기독교의 새로운 복음은 그런 대가를 치른 후에 생겨난 것입니다.

27-288
민족 구원의 자격을 갖춘 가정이 되자
그러면 대가를 누가 치렀느냐? 여러분이 치렀느냐? 아닙니다. 하늘이 치렀고 개척자들이 치른 것입니다. 그것은 못 치렀으면 생애와 더불어, 죽음과 더불어 절대적인 심복의 몸으로 보조를 맞추어서 그 고빗길을 넘어가야 됩니다. 만일 병이 나서 못 가게 되면 다른 사람에게 업혀서라도 가야 됩니다. 알겠어요? 업혀서 가려면 절대적인 위치에서 절대적으로 순종해야 되는 것입니다. 절대적으로 붙어가야 됩니다. `나는 생명이 없습니다’ 하는 마음으로 생명 없는 자의 비참한 마음을 느끼며 생명 있는, 보람있는 그 자체를 추구하는 마음으로 가야 합니다. 자기의 위신과 체면을 완전히 몰락시키고도 남을 수 있는 그러한 기준이나마 되어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럴 수 있는 기준을 갖추어 대가를 치르려고 여러분은 얼마나 몸부림쳤습니까?

그 거리가 멀어요, 가까와요? 멀다면 얼마나 되느냐는 것입니다. 이것은 하늘의 법도입니다. 타락한 인간의 후손인 우리들은 아무리 몸부림치더라도 땅끝에 있는 것입니다. 사람들은 이것을 망각하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 교회! 우리 뜻! 좋다는 것입니다. 그 뜻을 대하려면 어떻게 해야 되느냐? 이 `뜻!’ 할 때 여기에는 하늘이 맨 밑판이 되어 있고, 그 위에 스승이 몸부림치며 쌓아올린 탕감의 조건이 중심이 되어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자동적으로 우리의 뜻을 인정해야 합니다. 그러한 터전 위에 섰습니까? 그 위에 서서 뜻이라는 말을 써야 하는 거예요. 그 위에 서지 않고 `우리의 뜻!’이라는 말씀을 쓴다는 것은 위험 천만이에요. `우리 뜻’이 오히려 그들을 심판할 것입니다.

태양이 올라오면 그늘이 집니다. 그러나 오를 때에는 그늘이 없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태양이 좋다고 하는 것은 무엇 때문이냐? 안팎을 지배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태양을 맞이할 수 있는 자리는 그 누구도 들어올 수 없습니다. 싸움의 행로를 거치지 않고는 맞을 수 없는 것입니다. 먼저 맞을 수 있다면 누구나 다 원할 것입니다. 여러분이 전부다 일등하겠다고 해서 모두가 일등이 될 수 있습니까? 일등은 하나밖에 없는 것입니다. 이 하나는 사탄이 건드릴 수 있는 하나이기 때문에 사탄을 부정할 수 있는 자리에 들어가야 하는 것입니다. 하늘은 하나밖에 없는 것입니다.

치러야 할 탕감의 길! 역사가 이 탕감노정에서 비틀거렸고, 수많은 민족이 당해 왔고, 수많은 선지선열들이 잡혀갔고, 이 시대도 여기에서 쓰러지고 있는 이러한 상처를 응시하는 순간이 여러분 앞에 없어 가지고는 이 길을 갈 수 없는 것입니다. 길을 모색하지 않고는 갈 수 없습니다.

모색하는 데는 나부터 해야 되는 것입니다. 내 개인의 가치를 하늘 앞에 직접 주장하고 싶은 것입니다. 가정에서도 남자면 남자로서의 자기 자신을 당당하게 주장하고 싶은 것입니다. 그렇지요? 여자도 마찬가지입니다. 이러한 남자와 여자를 중심삼고 국가면 국가 전체 앞에서 당당하게 주장할 수 있는 가정이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따라서 이러한 판국을 승리해서 넘어야 할 우리의 가정들은 가정 자체로서 구속되어 살 것이 아니라 민족을 구원할 수 있는 그러한 자격을 갖추고 기쁨을 모색할 수 있는 가정이 되어야 되겠습니다. 세상 사람들이 하지 못하는 것을 언제 어디서든지 할 수 있는 가정이 되어야 되겠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 통일교회의 가정들은 출동합시다! 가정이 출동해야 되겠지요? 애기를 업고서라도 가겠다고 발버둥치는 모습이 진정한 통일교회인의 모습입니다. 오늘날 세계의 역사상에는 그러한 가정들이 없는 것입니다. 가정에 있어서 어려운 환경을 박차고 나갈 때에 그래도 남자는 쉬운 것입니다. 부인들이 애기를 업고 뜻의 길을 가겠다고 하는 것을 볼 때, 통일교회는 절대 망할 수 없다고 하는 것을 엿볼 수 있는 것입니다. 그렇지요? 이것이 우리 통일교회의 자랑입니다.

내가 지금까지 참된 개인으로서 치른 대가가 허술하고 부족하였다면 가정을 통해 치를 수 있는 대가 앞에는 설 수 없다는 것입니다. 만일에 가정을 통해서 대가를 치르는 데에 있어서 진실되지 못하였다면 종족이 대가를 치르는 데 있어서 진심으로 탕감의 한때를 갖게 되더라도 그 가정은 구원받지 못하는 것입니다. 개인이 탕감되지 못하면 가정이 탕감되지 못하고 종족이 탕감되지 못하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민족이 국가 앞에 드릴 수 있는 제물된 탕감의 한 때가 찾아왔을 때, 종족 전체가 가담하여서 민족 앞에 탕감의 내용을 진실하게 치른다면, 종족 전체가 구원을 받을 수 있습니다. 승리에 동참할 수 있습니다. 그렇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교회를 믿는 것입니다. 종교를 믿는 것입니다. 종교는 민족적이요 국가적인 기준을 중심삼고 탕감하기 때문에 종교를 믿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제때에 탕감하지 못한다 하더라도 역사시대에 있어서 종교가 탕감하여 닦아 놓은 기반 위에 서서 내가 완전히 믿고 일체가 되면 나는 개인 탕감의 운명을 벗어날 수 있고, 가정과 종족 탕감의 운명도 벗어날 수 있는 것입니다. 이것은 내적이면서도 외적인 것입니다. 그래서 지금까지 인간들은 종교를 믿어 왔고, 종교를 통해서 진실을 배웠던 것입니다.

어제도 길을 가던 어떤 사람이 하는 말이 종교를 밑거름으로 해서 출세한 사람은 통일교회 문 선생밖에 없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면서 통일교회를 대할 자는 없다고 합니다. 그리고 지금까지의 종교인들은 다 망했는데 통일교회 믿고 있는 사람들 보면 망할 듯이 비틀거리고 혼자 몸으로 거지처럼 떠돌더니 그래도 이제는 가정을 두고 아들딸 낳고 살고 있고, 그렇게 떠돌던 사람들이 사회적으로 볼 때 남부럽지 않게 살고 있다고 합니다. 그러니까 통일교회 사람들은 참 별난 사람들이라는 것입니다. 이러한 것을 볼 때에 우리 가는 길이 희망이 있는 길입니다.

27-291
충분한 탕감의 대가를 치르자
탕감은 누구나 싫어합니다. 그렇지요? 그래서 제물들이 나오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 제물이 역사시대를 벗어나서는 나와 하등의 관계가 없는 것입니다. 역사와 더불어 흘러가 버리는 것입니다. 내 생명과 더불어, 내재적인 자아와 실체적인 자아의 뼛골 속에, 골수에 사무치게끔 현실화될 때에 그 제물은 나와 상관이 있는 것입니다. 제물이 태어난 역사는 나에게서부터 다시 확인되는 것입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이러한 것을 제시할 수 있는 통일교회가 되어야 됩니다. 보기에는 아무것도 아닌것 같지만 역사를 대표해서 귀한 내용을 제시하고 있다는 사실을 생각할 때 우선은 여기에 감사하고 받아들이자는 것입니다. 알겠지요?

이러한 탕감의 대가를 나 자신부터 치러야 되겠습니다. 개인이면 개인에서 치러야 되겠고, 부부면 부부에서 치러야 되겠습니다. 부부가 치러야 할 탕감의 내용, 그 길은 어디냐? 종족을 위해서 희생하라는 겁니다. 김씨면 김씨 문중을 위해서 고스란히 희생하라는 겁니다. 그리고 김씨 종족은 이 대한민국을 위해서 희생하라는 것입니다.

그러나 오늘날의 세계는 반대로 되어 있습니다. 김원필이를 대통령시키려면 문제없다는 것입니다. 그렇지만 김원필이는 대통령이 되기 전에 이 국민을 전도하라는 것입니다. 그렇게 되면 대통령은 자연적으로 되는 것입니다. 그래요, 안 그래요? 「그렇습니다」 그렇게 되어 있지요? 통일교회는 이것이 다릅니다.

통일교회는 세계적인 영광의 한날을 차지하겠다고 손들고 자랑하지 말아야 합니다. 영광의 한날을 맞기 위해서는 세계의 밑창에 들어가라는 것입니다. 암을 치료할 수 있는 능력을 가진 의사가 되라는 것입니다. 그렇게 될 때 암에 걸린 그 사람은 그 의사의 무릎 앞에 모든 재산과 권위를 다 털어 놓고 굴복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이와 같이 우리는 `나’라는 생명이 거룩하고 귀한 것임을 알았습니다. 따라서 내가 요동치면 그 여파가 어디에 가서 부딪칠 것이냐 하는 것을 알아야 됩니다. 긴장된 사회가 풀어지고, 좌우의 물결이 격동하다가 자신하여 후퇴하게 되고 고요한 완충지대가 세계 앞에, 후손들 앞에 나타날 때 통일교회는 어떠한 파문을 던질 것이냐? 어떤 바위를 던질 것이냐? 어떤 모래알을 던질 것이냐? 어떠한 사람이 되어 어떠한 가정과 어떠한 종족, 어떠한 민족을 대신할 것이냐? 나는 통일교회를 지도하는 스승으로서 거기에 대해서 이러한 파문의 요인을 남겨야 되겠다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여러분들은 통일의 남아면 남아로서, 여자면 여자로서의 사는 보람을 느껴야 되는 것입니다. 남자와 여자가 합하여 가정을 이루었을 때 보람이 있는 것입니다. 이러한 자리는 역사 전 이상의 자리요, 역사 후 이상의 자리이기 때문에 우리는 지상에 살지만 지상천국에서 사는 것입니다. 천국은 역사 전에 있었던 것이요, 역사 이후에도 남아 있는 것입니다.

그럴 수 있는 자아를 찾기 위해서는 충분한 대가의 탕감을 치러야 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얼마나 심각한 문제인가를 생각해 보십시오. 여러분은 감각을 총합할 수 있는 세포와 신경이 있습니다. 때문에 세포와 신경이 일치될 수 있는 그 순간은 역사를 대신하여 내가 대가를 치를 수 있는 보람된 순간이요, 보람된 자리인 것입니다. 그러한 자리에서 대가를 치룰 수 있는 보람된 사나이요, 아낙네라는 것을 자각하게 될 때에 그 가는 길이 얼마나 엄숙하겠습니까? 숨을 죽이고 가야 하는 그런 길이요, 다칠세라 상할세라 조심스럽게 가야 할 길이며, 거룩한 그 자체로서 영원히 남아질 수 있는 그러한 길입니다. 그러한 고요하고도 엄숙한 자리에서 꽃과 같이 피어날 수 있는 모습이 되어 일시에 반응을 일으킬 수 있는, 향기를 풍길 수 있는 아름다움의 근원이 되어야 되겠습니다.

27-293
역사적인 사명과 책임에 대한 자각
하늘이 모든 존재의식을 잊어버리고 이 자리에 스며들 수 있고 가치가 결합할 수 있는 그러한 자리가 어떠한 자리일 것이냐? 여러분이 생애를 거쳐서 가야 할 자리입니다. 그러한 자리는 내 생명을 부끄럽게 여기며 내 존재의 기원을 최고의 중심으로 삼는 자리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철저히 해야 된다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그런 경지에 들어가야 합니다. 가정을 안고 그런 경지에 들어가야 하고, 종족을 안고 그런 경지에 들어가야 하는 것입니다. 이것을 대신하는 제사장직은 늘 역경을 헤치며 가야 하는 것입니다. 그러한 전통적인 사상을 엄숙한 자리에서 남기기 위해서 개인적인 제사장의 법도로부터 가정적인 제사장의 법도, 종족, 민족, 국가, 세계적인 제사장의 법도를 남기려고 하였지만 다 무너져 버렸기 때문에 이것을 다시 수습해야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오늘날 통일교인들의 사명이 얼마나 엄청난 것인가 하는 것을 우리는 알아야 됩니다.

여러분이 무엇을 주고 받을 때에도 자기의 생명을 걸고 생명을 팔고 사는 측면에서 생각하십시오. 그렇게 생각하면 심각하지요? 그런 심정을 가지고 가야 합니다. 이런 심각한 자리에서 `하나님이여, 당신이 자리잡고 있는 곳이 바로 이러한 자리가 아닙니까? 나는 그 자리를 향해서 진격 하겠습니다’ 할 수 있는 사람이 되기를 바라는 것입니다. 선생님은 그런 점에서 축복가정 부인들이 애기를 업고 전도 나가는 것을 볼 때에 그런 마음을 가지고 간다면 얼마나 좋을까 하고 생각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렇지 못할 때는 이 자리에서 그들을 위해 이런 내정적인 심정을 가지고 기도해 주겠다고 하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여러분은 불쌍한 사람이 아닙니다. 아무리 굶고 아무리 추워도 이 뜻을 두고 갈 수는 없는 것입니다. 이제는 얼어 죽고 굶어 죽더라도 그 자리에서 모든 것을 정복해야 됩니다. 만약 죽음이라는 결과가 생긴다 하더라도 여러분의 죽음은 영원히 살아 있을 것입니다. 인간이 이러한 자리에서 축복받으며 갈 수 있다면 행복 중에서도 행복이라는 것입니다. 죽는 자리에서 지켜 줄 수 있고 죽고 나서 느낄 수 있는 길이 있다면 우리는 그 길을 가야 하는 것입니다.

이러한 엄숙한 탕감의 내용을 지니고 여러분이 앞으로 남겨야 할 길이 있다는 것입니다. 남편이면 남편으로서 아내 앞에, 아내면 아내로서 남편 앞에 참된 길을 보여 주어야 되고, 부모면 부모로서 아들딸 앞에, 후손 앞에, 종족 앞에 이렇게 가는 것이 인간으로서 가야 할 참된 길이라는 것을 보여 주어야 됩니다. 그 길이 나타날 때까지는 무한한 대가를 치르지 않으면 안 됩니다. 가야 할 운명의 길에서 탕감의 내용을 제시하지 않고 대가를 치르지 않으면 남아지지 않는다는 것을 여러분이 자각해야 됩니다. 이 자각은 세계를 찾는 것보다도 더 가치있는 것입니다. 그 자각된 자체를 가지고 하늘 앞에 엄숙히 나서는 그 자리는 제사장의 직을 대표하고 세상을 대신할 수 있는 엄숙한 자리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아들이라는 칭호를 주어야 합니다.

우리는 아들된 권위와 딸된 권위로서 세계를 바라보고 탕감의 내용을 제시하기 위해 몸부림쳐야 됩니다. 그 상처가 크면 클수록 하늘이 만져줄 수 있는 상처가 되는 것이요, 그 슬픔이 크면 클수록 아버지의 슬픔에 동참할 수 있는 슬픔이 되는 것입니다. 역사를 넘어서서 굽이칠 수 있는 내용이 우리 앞에 제시되었다는 이 사실은 천주사적인 사건인 것입니다. 우리는 이 사건을 직시하면서 이것을 처리하는 책임을 짊어졌다는 거룩한 마음을 가져야 하겠습니다. 또한 선조들이 머리 숙이고 바라보는 가운데 역사적인 심정을 총결합시킨 자리에서 움직이고 있다는 사실을 자각해야 하겠습니다. 그 자리만이 우리가 탕감을 제시할 수 있는 자리라는 것을 알아야 되겠습니다. 아시겠지요?

27-294
기 도
아버님, 숱한 역사노정을 대신하여 찾아오시던 아버지의 사연을 생각하게 될 때, 그래도 말이라도 할 수 있는 이 자리가 복된 자리인 것을 알고 있사옵나이다. 당신의 자녀들을 사방에 벌여 놓은 장본인, 그것을 책임진 장본인으로서의 내 자신을 생각하게 되옵니다.

오늘날 이러한 과정을 통하여 하늘이 치러야 할 대가가 인연되어진다는 것을 생각하게 될 때 그들이 대가를 치렀다 할 수 있는 눈물의 교차로가, 죽음의 교차로가 먼 역사 위에 남아졌다고 하늘이 인정하지 않으면 하늘 앞에 남아질 수 없다는 것을 알게 되옵니다. 그러므로 저희들은 언제나 최고의 눈물의 자리를 피할 수 없사오며 언제나 긴장하고, 언제나 긴박하고, 언제나 처절하고, 언제든지 간절하고, 언제나 몸부림치는 자리에 있지 않으면 안 될 것을 생각하게 되옵니다.

이러한 벗어날래야 벗어날 수 없는 운명의 길에, 이 소용돌이의 와중에 내가 서 있는 것이 불행인 줄 알았으나 아버지가 기뻐할 수 있는 자리요, 아버지와 관계를 맺고 직시할 수 있는 자리라는 걸 생각할 때, 무한히 감사할 수 있는 저희들 되어야 하겠습니다. 가야 할 탕감의 길은 원한의 길이며 아직도 슬픔과 죽음의 대가를 요구하고 있는 길입니다. 여기에서 그 누구의 신세도 지지 않았고 자주적인 입장에서 대가를 치르며 왔노라고 몸부림치는 무리, 그러한 통일의 역군들이 되게 하여 주시옵소서.

이런 자리에서만이 이 민족 앞에 남아지게 될 것도 틀림없는 사실이옵니다. 이 세계 앞에 만민들 앞에 남아지게 될 것도 틀림없는 사실이옵나이다. 그러나 저희는 자기만이 남아지는 것을 자랑할 수 없사옵나이다. 이것은 심각한 문제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하늘을 업고 나가야 되겠고, 스승을 업고 나가야 되겠고, 역사를 업고 나가야 되겠고, 시대를 업고 나가야 되겠고, 미래를 업고 나가야 되겠사옵니다.

그러한 순간이 낙원에 갈 수 있는 결판을 짓고 운명을 다짐하는 순간인 것을 생각하게 될 때, 여기에 참된 모습, 진실된 모습으로 나타나 진실된 결과를 추구하게 해주시고, 제물된 모습 그 자체로 변화되어 자신의 실체를 아버지 앞에 돌려드릴 수 있게 되기를 그리워하는 당신의 자녀들이 되게 하여 주시옵소서.

아버님, 전국에 널려 이 뜻을 따라오고 있고, 혹은 개척자의 길에 나서서 전도하고 있는 자녀들이 처한 자리가 죽는 자리, 몰리는 자리라 하더라도 낙망하지 말게 하여 주시옵소서. 하늘이 기필코 여기에 역사하실 것을 알고 있사옵니다.

지금 이 자리에 있는 당신의 아들딸들도 자기가 처한 환경에서 탕감의 내용을 찾게 해주시고, 탕감의 모든 재료를 수습하기 위해 생명을 바쳐 싸울 수 있는 당신의 자녀들이 되게 하여 주시옵기를 간절히 바라옵니다.

또한 오늘 이 아침에 각자의 마음속 깊이 새로운 자각과 더불어 새로운 인연을 갖추어 미래상을 대신하고 나서는 아들과 딸의 모습이 되게 하여 주시옵기를 간절히 바라옵니다.

자기가 간 길을 후대 앞에 남길 수 있게 허락하여 주시옵기를 바라오며, 빚지고 신세진 그 마음을 후손 앞에 남겨 주는 선조들이 되지 말게 하여주시옵소서.

그럴 수 있는 길을 가려 가기 위해서 가정들이 헤쳐 나갔사오니, 지금까지의 잘못을 용납받을 수 있고 하늘의 동정을 받을 조건을 남길 수 있게 허락하여 주시옵기를 간절히 부탁드리옵니다.

남기신 뜻과 더불어, 형제들의 충성과 더불어 아버지께서 기뻐할 수 있는 한 길이 나타나기를 부탁드리면서, 모든 말씀 참부모의 이름으로 아뢰었사옵나이다. 아멘.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