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7-165 to 27-203: 작금의 우리의 가치

작금의 우리의 가치
1969.12.14 (일), 한국 전본부교회

27-165
작금의 우리의 가치
[기 도]

아버지, 뜻을 중심삼고 치열한 싸움을 하던 1960년대의 마지막 고비를 맞는 이 시간이옵니다. 아버지여! 당신이 넘어야 할 지루하고도 슬펐고, 억울하고도 비참하였던 역사적인 종착점을 향하여 나오시던 아버지의 사정을 이제 저희들이 가슴을 헤쳐 놓고 다시 한번 반성하면서, 저희의 자체를 정상화시켜 아버지를 향할 수 있는 본연의 마음을 그리워할 줄 아는 자신들이 되어야 하겠습니다.

아버지, 이해도 오늘까지 3주일을 남기고 있사옵니다. 아버님이여! 이날 전국에 널려 있는 당신의 자녀들을 기억하여 주시옵소서. 당신의 자녀들은 여러가지 사정을 가지고 있고, 여러가지 모양을 하고 있을 줄 알고 있습니다. 혹자는 뜻을 알고 난 이후에 뜻과 더불어 하루하루를 아버지의 마음 세계에 가까이 가기 위해 노력하는 자가 있는가 하면, 혹자는 뜻을 알고 나서 뜻길을 가야 할 책임과 사명을 절감하면서도 세상에 얽매여 이길을 넘지 못하고 허덕이고 있는 자녀들도 있을 줄 알고 있습니다. 또, 자기 스스로의 입장을 세우기 위하여 뜻을 배반하고 하나님 앞에 슬픔의 장벽을 남기고 돌아서는 사람도 있을 줄 알고 있습니다. 천태만상의 사정을 지니고 전국에 널려 있는 자녀들을, 아버지, 굽어살펴 주시옵소서.

당신이 믿고 싶었던 신의의 인연을 가질 수 있는 아들딸이 그 누구이옵니까? 1960년대에 바라시던 소원을 중심삼고 청산지어야 할 당신의 사정을 다시 한번 더듬게 될 때에 마음에 기억될 수 있는 자녀가 통일의 문안에 얼마나 있는지 염려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아버지여, 이 시간 여기에 모인 당신의 자녀들 가운데 거기에 뽑힐 수 있는 아들딸들이 몇 명이나 있사옵니까? 아버지, 저희 각자의 마음을 일깨워 주시옵소서. 당신이 분부하고 싶은 참다운 자녀, 당신과 더불어 일체가 된, 남기신 복귀의 도상에 기필코 필요한 당신의 자녀들이 여기에 많게 하여 주시옵기를, 아버지, 간절히 바라옵고 원하옵니다.

과거와 현재의 경계선을 이루는 현시점에서 생애에 숨겨져 있는 자신의 운명이 얼마나 절박한 자리에 처해 있는가를 다시 한번 느끼게 될 때 저희는 모든 자세를 갖추어 아버지를 향하여 해방의 울타리를 준비해야 되겠습니다. 생명의 인연을 간절히 고대해야 할 자신인 것을 더더욱 느끼지 않을 수 없습니다. 아버지, 이 자리에 있는 저희에게 찾아와 주시옵기를 간절히 바라옵고 원하옵니다.

생애에 있어서 잊을 수 없는 중대한 시점이 오늘 이 시간부터 남아진 시간에, 아버지, 친히 인연되게 하여 주시옵소서. 저희 자신들이 아버지의 뜻과 더불어 아버지의 심정과 더불어 일체가 되게 될 때는 삶의 보람을 찾을 수 있는 것이로되 뜻과 멀어지게 될 때는 영원한 사망과 더불어 짝하게 된다는 것을 알게 해주시고, 양자택일의 운명을 결정지어야 할 순간에 놓여 있는 저희들 자신을 다시 한번 명시하여 주시옵소서. 이와 같은 자리에서 이제 저희의 몸과 마음을 아버지 앞에 바치고 생축의 제물이 되어야 되겠사오니, 아버지의 특별하신 감찰과 특별하신 구원의 은사가 저희들에게 임하기를 바라옵니다.

과거에 부족했던 저희들의 모습을 살피게 될 때에 저희들은 아버지 앞에 얼굴을 들 수 없는 자들이요, 아버지 앞에 정체를 드러낼 수 없는 자들이오나, 무한하신 자비와 긍휼과 사랑이 충만하신 아버지요, 저희들을 찾으시기 위하여 수고하신 아버지인 것을 알았기 때문에, 저희들은 재차 부르시는 그 음성 앞에 부족한 자신의 모든 인연과 환경을 넘어서서 대답하지 않을 수 없는 저희들인 것을 이 시간 알았사옵니다.

아버지여, 저희를 완전히 붙드시옵소서. 당신의 간절한 마음이 저희의 마음속에서부터 솟구쳐오르게 하여 주시옵고, 당신의 인연을 떠나서는 영원히 살 수 없다는 것을 확실히 깨닫게 하여 주시옵소서. 그리하여 당신의 명령과 더불어 일체가 되게 하시어서, 남아진 세계를 향하여 생명을 잃는 한이 있더라도 가겠다고 다짐하고 결심할 수 있는 저희들이 되게 하여 주시옵기를, 아버님, 간절히 바라옵고 원하옵니다.

아버지, 이 아침에 여기에 모인 당신의 자녀들을 살피시옵소서. 저희들이 누구를 위하여 이 길을 가려 하고 있사옵니까? 누구를 위하여 생명의 가치와 생명의 인연을 존중시하고 있사옵니까? 나를 넘어서서 민족과 세계를 위하여, 또 천주를 위하여 내 생명을 다하여 아버지 앞에 바쳐 드려야 할 자신인 것을 깨닫고서, 아버지 앞에 자신의 몸을 다 바치고 아버지의 뜻과 더불어 자신의 생애를 다 바치기 위하여 몸부림치던 자가 얼마나 있었사옵니까? 생각하게 될 때, 부족한 자신, 하늘을 우러르기에 부끄러운 자신, 비참하고도 용납받을 수 없는 자신들인 것을 다시 한번 절감할 수 있는 이 시간이 되게 허락하여 주시옵소서.

아버지의 마음에 저희의 마음이, 아버지의 사정에 저희의 사정이, 아버지의 소원에 저희의 소원이 일치될 수 있는 모습을 그리워하는 마음이 저희의 마음 가운데에서 영원히 떠나지 말게 하여 주시옵소서. 그리하여 아버지가 남기신 복귀의 길을 저희들이 책임지고, 아버지가 가야 할 십자가의 길을 저희들이 책임지고 홀로 가겠다고 하며 나설 수 있는 저희들이 되게 해주시고, 외로운 모습을 아버지께서 보시고 붙들어 주시지 않을 수 없사옵고 후원하지 않을 수 없는 저희들이 되게 하여 주시옵고, 아버지의 모습을 대하면서 아버지의 염려 가운데서 살아갈 수 있고 아버지의 염려 가운데서 죽어갈 수 있는 당신의 자녀들 되게 하여 주시옵기를, 아버님, 간절히 바라옵고 원하옵니다.

이 시간 전국에 널려 있는 자녀들을 기억하여 주시옵소서. 완전히 아버지의 인연으로 말미암아 붙들림을 받는 자들이 되게 하여 주시옵소서. 어디로 갈래야 갈 수 없는 마음과 사정을 갖고 아버지와 더불어 동고동락할 수 있는 자녀들 되게 허락하여 주시옵기를 간절히 바라옵고 원하옵니다.

지금까지 저희들이 60년대를 중심삼고 싸워 나온 모든 역사적인 슬픔을 다시 한번 회고하면서, 아버지, 남기신 복귀 세계의 슬픔을 다시 책임지겠다고 절규할 줄 아는 당신의 자녀가 되게 하여 주시옵기를 간절히 바라옵고 원하옵니다.

저희는 아무 장비도 갖추지 않았습니다. 벌거숭이의 몸이옵니다. 아버지여, 사탄의 채찍을 맞기 전에 아버지의 채찍을 맞고 싶은 마음이 간절하게 하여 주시옵소서. 사탄에게 조롱받는 순간에도 나는 너를 사랑하지 않을 수 없노라고 통고할 수 있는 역사적인 마음을 가질 수 있게 허락하여 주시옵소서. 아버지, 하늘을 향하여 맹세하고 나선 몸이었사오니, 남기신 싸움터에서 저희들이 패하여 도망가고 후퇴하는 무리가 되지 말고 적진을 향하여 늠름한 모습으로 직행할 수 있는 하늘의 용자들이 되게 하여 주시옵기를, 아버님, 간절히 바라옵니다.

아버지여, 이제 진정 저희들을 불러 주시옵소서. 가고도 가고도 또 가기를 원하는 그 길을 아버지께서 지키시옵고, 남아진 싸움터에서도 저희와 같이 싸워 주시옵기를 간절히 바라옵고 원하옵니다.

각자가 뜻 앞에 맹세한 모든 인연을 다시 한번 수습하여 70년대에는 60년대의 미진한 책임을 재차 저희 일대에서 탕감복귀해야 할 사명이 저희들을 재촉하고 있다는 사실을 확실히 알게 하여 주시옵기를, 아버님, 간절히 바라옵고 원하옵니다.

오늘, 당신의 사랑하는 자녀들이 모인 곳곳마다 친히 같이하여 주시옵고, 이해를 보내고 새해를 맞이하는, 새로운 역사적인 시대를 넘어가는 하나의 관문에서 스스로 결의할 수 있고 맹세할 수 있는 자녀들 되게 하여 주시옵기를, 아버님, 간절히 바라옵고 원하옵니다.

해외에 널려 외로운 길을 닦아 가고 있는 당신의 자녀들을 지켜 주시옵길 간절히 바라옵고 원하옵니다. 이국 땅을 더듬으면서도 눈물짓고 있는 외로운 자녀들을 지켜 주시옵소서. 그들의 사연과 그들이 통곡하는 모든 내용과 소식을 듣게 될 때 아버지께서 같이하지 않으면 안 될 것을 느꼈습니다. 이들이 누구를 위하여 그런 자리에 섰는가 하는 것을 생각하게될 때에, 과거 당신의 뜻을 따라간 수많은 선지선열들이 그러하듯이 이들 모두도 아버지를 위한 자리에 섰사옵고 아버지를 의지하고 나선 외로운 무리들이었사오니, 아버지여, 당신의 자녀들을 지켜 주시옵소서.

아버지, 외로운 사막 가운데 광풍이 불어오는 자리에서 하늘을 향하여 최후의 운명을 걸고 절규하는 그들, 남겨진 세계 인류를 다시 품에 품으시고 싶어하시는 당신의 소원을 이루어 드리기 위하여 싸우고 있는 그들을 친히 지켜 주시옵기를 간절히 바라옵고 원하옵니다.

금년과 명년에도 세계적으로 당신이 지시해야 할 것이 저희에게 남아 있사오니, 이것을 맡아서 책임 다하기 위하여 저희들은 마음으로 고대하고 몸부림치며 밀고 나가야 할 것을 알고 있사옵니다. 그러하오니 친히 같이하여 주시옵기를, 아버님, 간절히 바라옵고 원하옵니다.

해외에 널려 있는 당신의 자녀들이 한국을 그리워하고 있습니다. 이곳을 그리워하고 있습니다. 하늘을 사모하고 있습니다. 그들이 간절한 심정으로 절규하는 그 모든 호소와 그들이 외로운 가운데 눈물지으며 싸우는 모든 인연이 아버지의 마음을 중심삼고 열매맺게 하여 주시옵소서. 당신의 마음 가운데 깊고 넓고 놓게 기억될 수 있는 자녀들 되게 허락하여 주시옵기를, 아버지, 간절히 바라옵고 원하옵니다.

이해에 지나갈 모든 탕감의 노정을 다 지내 버리고 새로운 해에 있어서는 환희와 영광을 대신하여 이 민족을 맞아 새로운 싸움터를 마련해 나가고저 하옵니다. 이런 기간 위에 당신의 거룩하심이 동참하시옵고, 이제 이 기간을 통하여 당신의 은혜와 당신의 풍성하신 모든 결실이 70년대로 향하여 뻗쳐 가게 하여 주시옵기를, 아버님, 간절히 바라옵고 원하옵니다.

이 아침, 이 민족 모두 위에 당신의 사랑의 손길을 같이하여 주시옵고, 세계 인류에게 당신의 은혜를 가하여 주시옵시고, 영계에 가 있는 선조들의 해원성사를 이 땅을 통하여, 혹은 그 후손들을 통하여 이루시옵고, 최후의 총칼을 지니고 싸움터를 지키게 하여 주시옵기를, 아버지, 간절히 바라옵고 원하옵니다.

기독교의 2천년 역사와 하나님의 복귀섭리의 6천년 역사가 최후의 승리로 꽃을 피울 수 있는 70년대가 되게 허락하여 주시옵기를, 아버님, 간절히 바라옵고 원하옵니다.

이제 남아진 기간에 저희들이 스스로 준비하고 단장하여 아버지의 부르심 앞에 거룩히 나타날 수 있는 자녀들 되겠다고 재차 천명하는 이 시간 되게 허락하여 주시옵기를 간절히 부탁드리며, 모든 말씀을 참부모의 성호 받들어서 아뢰었사옵나이다. 아멘.

27-170
말 씀
이 시간에는 `작금의 우리의 가치’라는 내용을 가지고 말씀드리겠습니다. 여러분들이 뜻을 알기 전과 뜻을 알고 난 후는 차이가 있는 것을 잘 느끼고 있을 것입니다. 뜻을 알기 전의 `나’와 뜻을 알고 난후의 `나’는 현격한 차이가 있는 것입니다. 또, 과거의 나, 현재의 나, 미래의 나는 다릅니다. 지금 우리는 1960년대를 보내고 1970년대를 맞이하는 입장에 놓여 있습니다. 이 1960년대와 1970년대도 작금의 인연을 중심삼아 가지고 문제가 되는 것입니다.

27-170
더 이상 인류를 이끌어 갈 수 없게 된 기성 종교
인간이 타락한 그날부터 지금까지의 역사는 복귀의 운명을 가리기 위해서 싸워 나온 역사라는 것을 우리는 원리를 통하여 배웠습니다. 지금까지 수많은 종교가 나와서 본연의 인간의 모습을 추구해 나왔습니다. 참된 인간이라는 것이 무엇이냐? 참된 사회 국가 세계가 있을 수 있느냐? 그 참된 모습이 자기 자체에서 빚어지기를 바라고 수많은 종교가 역사상에 나타났습니다. 수많은 종교인들은 그 종교로 말미암아 추구할 수 있는 최대의 노력을 다해 왔습니다.

그러던 종교인들이 현세에 와서 막다른 골목에 다다랐습니다. 과거의 종교가 오늘날의 종교로서 남아질 수 있고, 미래를 연결시킬 수 있는 내용을 지니지 못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런 실상을 볼 때 현실에 남아 있는 종교를 과거의 종교로서 청산짓고 새로운 현실의 종교를 연결시킬 수 있는 종교는 어떠한 종교냐 하는 문제가 등장할 수밖에 없는 순간에 놓여 있는 세계라는 것을 우리는 알고 있습니다.

지금까지 수많은 종교가 참을 추구해 왔습니다. 참의 인간, 참의 나라, 참의 세계를 추구해 왔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인간을 중심삼고 추구해 왔기 때문에 불가능한 것으로서 남아질 수밖에 없습니다.

그것은 왜 그러냐? 절대적인 신을 중심삼고 추구해 오던 종교이념이 현실에 와서는 인류가 바라는 소망의 이념이 되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을 중심삼고 참의 세계를 추구해야 하는데도 불구하고 그런 이상적인 사회 국가 세계를 추구할 수 없는 단계에 놓여 있는 현실을 생각하게 될 때에 지금까지의 신관, 지금까지의 신앙관, 지금까지의 신앙을 통한 인생관을 가지고는 인류가 바라왔고, 수많은 종교가 바라왔던 참의 세계는 찾을 수 없을 것이라는 결론을 내리지 않을 수 없습니다. 역사와 사상을 뒷받침하고 있는 종교가 이런 결론을 내릴 수밖에 없는 입장에 있다는 것을 두고 볼 때에 우리 개인은 더더욱 말할 필요가 없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우리 개체가 추구하는 참의 나라, 참의 세계는 과연 인간만을 중심삼고 가능할 것이냐? 불가능합니다. 하늘과 인간이 합동하는 이런 내용을 제청하고자 하는 것이 지금까지 종교의 교리인데도 불구하고 종교를 통해서 인간만이 희망의 세계를 모색한다는 것을 절대 불가능하다는 것입니다. 이 시점에서 지금까지 종교가 더듬어 온 길이 틀렸느냐, 아니면 종교 자체가 가야 할 목적과 일치할 수 있는 자리에 서지 못했느냐 하는 문제를 재검토하지 않으면 안 된다는 것을 우리들은 생각해야 됩니다. 지금까지 우리가 믿었던 하나님과 지금까지 우리가 믿었던 종교, 그리고 금후에 우리가 믿었던 하나님과 금후에 우리가 믿어야 할 종교가 같은 것이 되어서는 새로운 희망의 세계를 추구할 수 없는 것입니다.

이러한 역사적인 종착점에 처해 있는 현실의 자아를 중심삼고 볼 때 새로운 가르침을 어떻게 일으키느냐 하는 것이 문제가 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이 세계 전체도 이러한 기로에 서서 허덕이고 있습니다. 이런 기로에 서서 허덕이고 있는 세계를 구원하기 위한 뜻을 지니고 세계를 책임질 수 있는 개인이 되어 있으며 그런 종교가 되어 있느냐? 또, 그런 뜻을 중심삼고 제창할 수 있는 내 자신이 되어 있느냐 하는 문제를 두고 볼때 너무나 거리가 멀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문제를 앞에 놓은 현실의 이 시점에서 나라는 개인을 다시 한번 비판하지 않으면 안 될 입장에 놓여 있다는 것을 우리들은 알아야 되겠습니다.

그러면 오늘날 우리 통일교회가 제시하는 내용이 무엇이냐 하는 것이 문제가 됩니다. 또 우리는 통일교회 교인으로서 방금 이야기한 것과 같은 역사적인 책임을 짊어져야 할 이 시점에 놓여 있는데, 이 시대 앞에 어떤 모습으로 나타나야 할 것인가 하는 것이 문제입니다.

지금까지 종교가 제창한 내용을 두고 볼 때 종교는 주로 무엇을 추구해 나왔느냐? 하나님과 나와의 관계를 추구해 나왔습니다. 하나님과 나와의 관계를 공고화시켜 내 인격이 완전히 하나님의 인격과 일치된 새로운 변화의 모습을 갖출 수 있는 내 자신을 발견하기 위해서 나왔다는 것입니다. 개인이면 개인, 종교면 종교가 사회 앞에 책임을 추구하는 데 있어서 우리 인간이 바라는 최고의 이상의 뜻을 하나님의 뜻과 일치화시키는 문제를 중심삼고 이 땅 위에 나타났다가 쓰러져 갔습니다.

27-172
기성종교가 피폐하게 된 원인
그러면 지금까지 진정한 의미에서 그런 책임을 할 수 있는 종교가 있었느냐? 없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지금 종교가 피폐의 일로에서 벗어날 수 없는 것입니다.

그러면 종교가 어떠한 것을 책임하지 못했느냐? 이것을 하나님을 위해서 종교가 나왔느냐, 인간을 위해서 종교가 나왔느냐 하는 문제에 귀결시켜서 생각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지금까지 종교는 출발 당시에는 하나님을 중심삼고 출발했습니다. 그렇지만 결과에 가서는 하나님을 떠났습니다. 하나님을 중심삼아 가지고 하나님과 일치된 자리에서 하나님화한 인간이 사회를 이루어야 하는데도 불구하고 하나님을 떠나 가지고 인간을 중심한 사회가 이루어지게 될때에는 어떤 종교든지 피폐의 일로를 가지 않을 수 없다는 것입니다.

이런 점에서 볼 때, 종교를 중심삼아 가지고 진정한 의미에서 하나님의 뜻과 일치되어 가지고 그런 개인, 그런 가정, 그런 종족, 그런 민족, 그런 국가를 구상하고 그것을 생활 표준으로 세워 나가는 종교인들이 있느냐 하면 없다는 것입니다. 오늘날 종교를 믿고 있는 사람들은 그런 관이 되어 있지 않다는 것입니다. 결국 내 자신의 이익을 추구하기 위해서 종교를 믿고 있는 것이 현실의 실상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면 여기에서 문제는 나를 중심삼고 종교를 추구하는 이것을 어떻게 탈피하느냐 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오늘날 세계의 수많은 종교인들이 감당하여야 할 중대한 문제라는 것입니다. 만일에 하나님이 계신다면 하나님에게는 이런 문제의 해결점을 제시해야 할 중대한 책임이 있을 것입니다. 이러한 기로에 서 있는 것이 오늘날 우리의 입장이라는 것을 알아야 되겠습니다.

종교가 발생한 동기가 하나님이라 할진대 종교는 하나님의 뜻, 즉 하나님이 구상하는 참된 세계와 참된 나라와 참된 민족과 참된 가정과 참된 개인을 추구했을 것입니다.

참된 개인에서부터 참된 세계까지 가는 과정에서 참이 연결되지 않고는 안 될 것입니다. 어떤 사람은 하늘을 중심삼은 참된 사람이 되기 위해서 즉, 참된 개인을 찾기 위해서 죽어간 사람이 있을 것입니다. 또 어떤 사람은 참된 가정을 찾기 위해서 죽어간 사람도 있을 것입니다. 또 어떤 사람은 종족을 중심삼고 참된 종족의 이념을 성사시키기 위해서 죽어간 사람도 있을 것입니다. 또 어떤 사람은 민족을 찾기 위해서 죽어간 사람도 있을 것입니다. 또 어떤 사람은 나라를 위해 죽어간 사람도 있을 것입니다. 더 나아가서는 참된 세계를 찾기 위해서 죽어간 사람도 있을 것입니다.

그러면 역사에 남아지는 사람들은 어떤 사람이냐? 개인을 중심삼고 죽어간 사람이 그 시대의 인간들 앞에 추앙의 대상이 되고 역사과정에 남아질 수 있느냐 하면 그렇지 않다는 것입니다. 개인보다도 가정을 위하여 죽어간 사람이 수많은 개인의 추앙의 대상이 될 수 있다는 것입니다. 가정보다도 종교를 중심삼아 가지고 민족을 위하여 죽어간 사람들은 모든 가정들의 추앙의 대상이 될 것입니다. 더 나아가 종교의 이름을 가지고 세계를 위하여 죽어간 사람은 그 종교를 추구하는 민족 앞에 추앙의 대상이 될 것입니다.

이렇게 볼 때 지금까지 역사노정에 남아진 성현들은 어떠한 사람들이냐? 종교를 중심삼아 가지고 개인의 행복과 개인이 바라는 소망의 세계를 완성하고 달성하기 위해서 죽어간 사람들이 아니라 종교를 중심삼아 가지고 세계와 인연맺기 위해 자기의 생명을 바친 사람들입니다. 그런 사람일수록 그는 역사적인 인물이라는 것을 우리는 알고 있습니다. 석가가 그러했고, 공자가 그러했고, 예수님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그들이 하늘을 의지하고 죽어간 그 길은 자기 개인의 행복을 위해서 살다가 죽어간 길이 아니었습니다. 자기 개인의 행복을 포기해 버리고 하늘에 남길 수 있는 뜻을 위하여, 온 세계 만민이 추구하는 하나의 목적의 세계를 위하여 그들은 생명을 기울였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생명을 기울여 간 그들의 소원이 이 땅 위에 이루어질 수 있겠느냐? 또 그들을 추종하는 신자들이 그것을 성취시킬 수 있겠느냐 하는 것이 문제입니다. 과거역사를 두고 볼 때 종교면 종교, 또 하나님의 뜻이면 하나님의 뜻을 중심삼고 미래의 세계를 위하여 죽어간 사람들의 이념과 사상이 출발했는데도 불구하고 그것이 역사과정을 통하여 현시점까지 상속되어 내려오지 못했다는 사실을 우리들은 현실에서 발견할 수 있습니다. 그것은 무엇을 보고 알 수 있느냐? 오늘날 신앙자들이 하나님을 위주한 생활을 하는 것이 아니라 인간을 위주한 생활을 하는 것을 보고 알 수 있습니다. 오늘날 종교는 하나님에게 플러스시키기 위한 것이 아니라 인간에게 플러스시키기 위해서 남아진 종교가 되었다는 것입니다. 이런 것을 두고 볼 때 그 종교를 창시한 사람의 본뜻과 현재 종교를 따라가는 신앙자들이 바라는 그 뜻과는 상치되어 있다는 사실을 발견할 수가 있는 것입니다.

27-174
새 종교가 갖추어야 할 것
그러면 이제 역사적인 종말시대를 맞이한 현시점에 있어서 우리들이 추구해야 할 것이 무엇이냐? 이러한 현시점의 모든 내용을 타개해 버리고 옛날에 추구했던 하나님의 뜻, 옛날에 도의 길을 개척하였던 창시자의 뜻을 현시점에 재현시켜야 합니다. 역사를 초월하여 옛날의 그것을 현시대의 생활 무대에 전개시키는 싸움을 하지 않으면 안 된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종교계의 현실을 두고 본 우리의 할 일이라는 것을 우리는 알아야 되겠습니다.

오늘날 우리 개인을 두고 보면 통일교회에 들어 오기 전의 여러분이 추구하던 세계, 여러분이 바라보던 인생관, 여러분이 바라보던 우주관이 있었을 것입니다. 그것들이 무엇을 중심삼은 것이냐? 뜻 있는 사람은 나라를 중심삼아 가지고 살았을 것입니다. 여러분들이 걸어 온 길은 기껏해야 대한민국의 백성으로서 충실한 애국자가 되려고 한 길이었을 것입니다. 그 한계선을 넘지 못했을 것입니다. 세계 만민을 위하는 박애주의자가 되어야 된다는 것은 막연했을 것입니다. 최대한으로 바란 것이 자기 나라가 잘되는 것이었습니다. 그 이상을 넘을 수 없었다는 것입니다. 그렇지 못한 사람은 기껏해야 자기 민족, 자기 씨족, 자기 가정을 위하는 사람밖에 못 되었습니다. 그것도 못 된 사람은 기껏해야 자기 자신 하나를 중심삼아 가지고 모든 것을 시작하고 끝맺으며 살아 나왔다는 것입니다.

그런 내가 통일교회의 문을 두드렸습니다. 통일교회의 교리를 알고 있는 현실의 나 자신과 과거의 나를 비교해 보게 될 때 지금의 나 자신이 과거의 나 자신과 얼마나 달라졌느냐 하는 것입니다. 근본적으로 달라진 차이를 발견하지 못하면 역사과정을 거쳐 지금까지 걸어온 종교인들의 범위를 벗어날 도리가 없다는 것입니다.

과거의 나는 기껏해야 나 자신을 중심삼고 불행을 염려하여 나왔습니다. 자기의 부모 형제를 중심삼은 권내를 벗어날 수 없었다는 것입니다. 뜻을 품었다고 하는 사람들이 겨우 나라를 생각했습니다. 아무리 생각했댔자 국가 기준을 넘지 못했다는 것입니다. 최고의 생활 목표가 뭐냐 하면 가정이었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하나님이 추구하는, 혹은 종교가 추구하는 최후의 목적점이 어디냐? 나 자신을 중심삼은 자리가 아닙니다. 자기가 추구하는 가정이 아닙니다. 가정을 넘고, 민족을 넘고, 국가를 넘어 세계를 위하는 자리인 것입니다. 그런 마음을 가지고 그런 주의 주장, 그런 이념을 성취하려고 해야 하는 것이 종교라는 것입니다. 만일 개인만의 행복을 발전시키려고 하는 종교라면 그것은 인간 세상에서 사라져야 됩니다. 그것은 인간 세상에서 자기를 중심삼은 개인들을 지도하는 이념으로밖에 등장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하늘이니 하나님의 뜻이니 하는 말은 세계성을 띤 말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개인을 초월하고, 자기를 위주한 울타리를 벗어나라고 강요하지 않을 수 없다는 것입니다. 자기 민족만을 사랑하고 자기 나라만이 제일이 되어야 한다는 관념을 넘어서야 된다는 것입니다.

이런 관점에서 볼 때, 유대사상이 하나님이 세운 사상이라 할진대, 그 사상은 유대민족을 기반으로 하여 세계로 갈 수 있는 사상이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런데 2천년 전 예수님이 이 땅에 오셨을 때 하나님의 뜻을 따른다는 유대교인들은 어떤 사상을 가졌느냐? 세계로 가는 사상이 아니라 자기들의 민족만을 공고화시키는 사상으로 귀착하려 했습니다. 민족 제일주의 사상, 세계 만민을 자기 민족 앞에 예속시키고 귀속시키려는 사상을 갖고 있었습니다. 이것이 그 시대 유대교인의 신앙태도였습니다.

27-176
국가의 기준을 넘어서야 했던 이스라엘 민족
그러면 그런 신앙태도를 가진 유대 민족 앞에 예수님이 하나님을 대행하여 하려 했던 것은 무엇이었느냐? 유대교의 이념을 중심삼아 가지고 유대 민족의 기반 위에 세계를 위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런 뜻과 사상을 가지고 세계를 위하는 새로운 운동을 전개해야만 만민이 고대하는 메시아가 되는 것이요, 만인간이 고대하는 새로운 종교이념이 되는 것이요, 새로운 세계를 지배할 수 있는 사상이 되는 것입니다. 그렇지 못하고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그러한 사상과 내용을 가지고 오셨으되 예수님을 대하는 그때의 유대교인과 이스라엘 민족은 어떠했느냐? 국가의 한계를 넘어서지 못했다는 것입니다. 여기에서 폐단이 벌어졌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산을 넘으라고 하는데 유대 민족은 산을 넘지 않겠다고 하니 두 세계는 지리멸렬되고 만 것입니다. 이런 문제점 때문에 예수님은 십자가의 원통한 길을 택하지 않을 수 없었다는 사실을 우리들은 알아야 되겠습니다.

유대 민족을 중심삼고 판가리했어야 할 역사적인 해결점이 아직까지 청산되지 않았기에 이러한 역사적인 시발점은 역사과정을 통해 지금까지 내려오고 있는 것입니다.

어느 한 때에 하나님의 뜻을 중심삼고 선택되는 민족이 있으면 민족, 그러한 국가가 있으면 그 국가가 이 운명을 중심삼고 최후의 판결을 해서 이 고개를 넘어야 합니다. 그러지 않고는 하나님의 뜻을 이룰 수 없습니다. 국가라는 이 한계점을 종교인들도 넘지 못하였습니다. 이것은 비단 종교인들뿐만 아니라 나라를 구성하고 있는 수많은 민족도 그 한계점을 넘지 못하였습니다.

역사과정에서 이 땅 위에는 수많은 전쟁이 있었습니다. 수많은 사람들이 참을 주장하면서 싸움을 했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자기 나라를 위해서 한, 자기 나라의 부흥과 자기 나라의 승리를 위한 싸움이었습니다. 하나님의 뜻과 세계의 승리를 위해 싸운 싸움은 없었다는 것입니다. 좌우가 부딪치는 현시점을 두고 볼 때 그들이 진정한 의미에서 세계를 위하여 싸우고 있느냐 하면 그렇지 못하다는 것입니다. 미국도 그러하고 소련도 그러합니다. 즉, 공산주의도 그러하고 민주주의도 그러하다는 것입니다. 세계를 위하여 싸운다고 나섰지만 결국에 가서는 국가적인 한계선을 넘지 못하였다는 것입니다. 자기의 민족, 자기의 국가 기준을 넘지 못하고 그 한계선에 후퇴해 버렸다는 것입니다.

그것은 지금까지 인간들이 자기와 자기 가정과 자기 종족과 자기 민족의 기준을 넘지 못하는 역사적인 운명을 밟아왔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이것을 탈피해 넘어가지 못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그러한 운명의 한계선에서 살고 있는 인간인 것입니다.

하나님은 이 한계선을 타파하기 위한 싸움을 전개해 오셨습니다. 그래서 가정을 희생시켜서 이스라엘 민족을 구원하라고 하셨던 것입니다. 이스라엘 민족을 구원하기 위해 모세에게 가정을 버리라고 했습니다. 가정을 희생시키라고 했습니다. 가정을 희생시키지 않고는, 가정만 행복해 가지고는 이스라엘 민족을 구할 수가 없다는 것입니다. 가정이 잘되고 이스라엘 민족이 구원된다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그러나 그렇게 안 되어 있습니다. 타락한 세계에 있어서는 그것이 불가능하다는 것입니다. 절대 불가능한 것입니다. 이스라엘 나라를 창건하려면 이스라엘 민족은 희생을 감수하라는 것입니다. 수난의 길을 감수하라는 것입니다. 이스라엘 나라를 창건하려면 이스라엘 민족은 모든 수난을 감수하라는 것입니다. 이것을 기꺼이 감수할 수 있는 민족이 될 때 승리적 이스라엘 나라를 창건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이스라엘 민족이 애급을 떠나 가나안을 향하여 가는 도상에는 많은 민족적 시련이 가로막혀 있었던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 생활에 있어서 인간적인 입장에서 자기를 위주하고 살던 그 모든 감정과는 정면으로 부딪치게 된 것입니다. 그 환경에 있어서 부딪치는 괴로움을 극복하고 아버지의 뜻을 세우려 했고, 자기가 희생되는 운명을 당하더라도 하나님의 뜻을 세우겠다는 마음을 갖고 나갔더라면 이스라엘 민족에게 있어서 수난의 기간은 짧았을 것입니다. 그것을 극복하지 못하였기 때문에 그 한계선은 언제나 이스라엘 민족 앞에 하나의 장벽으로 남아져 나온 것입니다.

민족적인 장벽, 국가적인 장벽이 남아져 있기 때문에 이스라엘 나라가 추구하는 소망의 세계, 이스라엘 나라가 희망하는 메시아의 이상세계를 추구할 수 있는 때가 다가오면 다가올수록 이스라엘 민족 앞에 남겨진 장벽과 그 국가 앞에 남겨진 장벽은 재현되어야 했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이스라엘 나라의 운명이었던 것을 여러분들은 알아야 되겠습니다.

그러면 이러한 운명 가운데 서 있던 이스라엘 나라는 어떻게 해야 했던 것이냐? 자기 국가를 위주한 이념과 자기 국가를 위주한 싸움으로 지탱해 나가다간 기필코 망한다는 것입니다. 천년, 2천년 지탱해 나갈 수 없다는 것입니다. 왜 그러냐? 사람은 전부 다 자기를 중심하고 생각하기 때문에 아무리 나라를 위한다 하더라도 자기 일대의 행복의 요건을 그 나라 가운데에서 찾을 수 없게 될 때는 후퇴한다는 것입니다. 자기가 지키던 싸움터를 제삼자에게 넘겨 주고 자기는 그 자리를 지키지 않으면 한다는 것입니다. 자기를 중심삼고 생각하는 세계에서는 이러한 폐단적인 결과가 나올 수밖에 없다는 것입니다.

27-178
나라 없는 기독교가 2천년 역사를 이끌어 나온 이유
이런 점에서 볼 때 기독교가 2천년 역사를 어떻게 극복해 나왔느냐? 나라 없는 기독교, 즉 주권을 갖지 못한 기독교요, 백성을 갖지 못한 기독교요, 땅을 갖지 못한 기독교가 어떻게 해서 2천년 역사를 지탱해 나왔느냐? 그것은 기독교가 추구하는 그 나라가 앞으로 다시 와야 할 최후의 나라이기 때문입니다. 그 나라는 현실 사회에서 그냥 그대로 정주할 나라가 아니라 새로이 올 그야말로 이상적인 나라라는 것입니다. 그 나라를 중심삼은 새로운 주권, 그 나라를 중심삼은 새로운 땅, 새로운 백성을 추구해 나왔기 때문에 그 백성과 그 땅과 그 주권이 찾아질 때까지는 남아져 나온다는 것입니다.

오늘날 기독교는 명실공히 세계적인 종교가 되었습니다. 그런데 세계적인 종교가 된 기독교 앞에 세계적인 장벽이 남아 있는 것입니다. 진정한 의미에서 세계를 사랑하고 세계를 위해서 싸워 나왔느냐? 하나의 기본적인 장벽이 오늘날 전세계 기독교가 가야 할 도상에 가로막혀 있다는 것입니다. 비단 기독교뿐만 아니라 수많은 종교 앞에 그러한 장벽이 남아 있는 것입니다.

이 장벽을 어떻게 타개할 것이냐? 이것이 현시점에 놓여 있는 종교인들이 혹은 종교가 해결해야 할 중대한 문제라는 것입니다. 이 장벽을 헤치고 넘어가려면 어떻게 해야 될 것이냐? 자기 민족을 주장하는 종교가 되어서는 안 됩니다. 자기 일개 민족을 위주한 종교를 가지고 세계적인 뜻을 성취하려는 것은 도저히 불가능하다는 것입니다. 자기의 민족이나 국가를 넘어야 하고, 자기 민족의 전통적인 사회제도나 문화, 그 밖의 모든 관습을 전부 다 타파해 버리고 세계인을 중심삼은 사회, 하나님의 뜻과 일치될 수 있는 하나의 세계를 모색해야 된다는 것입니다. 거기에 모든 심정을 일체화시키고 생활 전체를 일체화시켜야 됩니다. 인생관이면 인생관을, 세계관이면 세계관을 일체화시키는 놀음을 단행하지 않고는 종교로서 남아지지 못할 것입니다.

이런 관점에서 오늘 통일교회가 이런 문제를 제시하는 중대한 책임을 짊어져야 된다는 것입니다. 민족을 위주한 종교적인 싸움을 전개하는 것이 아니라 세계를 위주한 종교적인 싸움을 전개해야 되겠습니다. 민족을 위주한 행복의 이념을 찾으려고 할 것이 아니라 세계를 위주한 행복의 이념을 찾으려고 하는 통일교회가 되어야 되겠습니다. 역사과정의 종교를 중심삼고 볼 때에 현재가 그러한 시점이라는 것을 우리들은 알아야 되겠습니다.

자기를 위주한 관념, 자기 가정을 위주한 관념, 자기 국가, 즉 대한민국이면 대한민국만을 위주한 관념을 가지고는 세계화가 안 되는 것입니다. 세계화를 가능하게 하려면 대한민국 안에서 그럴 수 있는 사람이 나와야 된다는 것입니다. 통일교회가 그렇게 되기 위해서는 하나님을 중심삼아 가지고 세계화할 수 있는 생활적인 기반이 여러분 자체 내에서 얼마나 공고화되느냐 하는 문제가 해결되어야 할 것입니다.

27-180
현실적인 난관을 하늘적으로 소화시키려면
여러분이 살아가는 하루하루의 생활을 두고 볼 때 자고 깨고 하는 모든 생활 자체가, 좋고 나쁜 사정이, 오고 가는 것이 얼마나 세계적인 뜻을 중심삼고 있느냐? 밥을 먹는 것도 나를 위해서 먹는 것이 아니고, 또 대한민국만을 위해서 먹는 것도 아니고 세계를 위해서 먹는 것이냐? 우리의 생활 감정을 어떻게 세계화시킬 수 있느냐? 추구하는 그 모든 조건들이 절박하게 세포로 직접 느낄 수 있는 경지까지 어떻게 몰아내느냐? 이런 것이 문제입니다. 이것은 여러분들이 지금까지 닦아 나오던 도의 길이나 정성들이던 자리에서는 불가능합니다. 생각으로는 그럴 수 있을는지 모르나 사실은 그렇지 못하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이것을 어떻게 사실에 적용시킬 것이냐? 지금까지 종교인들이 가던 걸음같이 세상을 피해 가서는 안 됩니다. 세상을 비판해서는 안됩니다. 세상에서 대해 무책임한 종교가 되어서도 안 됩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세상을 직접 책임져야 되겠습니다. 세상을 도피하는 것이 아니라 세상 가운데에 들어가야 되겠습니다. 악을 피할 것이 아니라 그 악과 부딪쳐야 되겠습니다.

다시 말하면 현실적인 난관을 어떻게 하늘적으로 소화시키느냐 하는 것이 중대한 문제입니다. 지금까지 과거의 종교가 생활해 온 것처럼 습관적인 노정을 거쳐서는 안 됩니다. 반대로 가야 됩니다. 거슬러 가야 됩니다. 그러려면 역사적인 사조 앞에 안겨 가는 종교의 내용을 가지고는 안되겠습니다. 이것을 타개하기 위한 브레이크를 걸어야 되겠습니다. 여기에 강타를 가해야 되겠습니다. 이런 움직임이 있어야 됩니다.

먹기를 좋아하는 인간이기 때문에 먹는 것을 참아야 되겠습니다. 편안한 것을 좋아하는 인간이기 때문에 편안한 것을 벗어나야 되겠습니다. 새로운 방향을 잡고 새로운 자체를 갖추어 자기 자체의 존재위치를 재공고화시켜야 되겠습니다. 지금까지 종교인들이 해 온 상습적인 종교생활 가지고는 안 됩니다. 여기에 하나의 새로운 파동, 새로운 파문을 제시해야 되겠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이러한 것을 책임지고 가겠다고 하는 사람들은 반드시 현사회로부터 비판을 받는 것입니다. 그 비판이 크면 클수록 그들은 내적으로는 공고화될 것입니다. 세계를 넘어가려는 그 길에 장벽이 철옹성같이 가로놓여 있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개인에게 있어서도, 가정에 있어서도, 사회에 있어서도 나라에 있어서도, 세계에 있어서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을 위주로 하여 생활하는 사람 앞에는 자아를 위주로 한 모든 것이 장벽이라는 것입니다. 여기에서 하나님을 위주한 신념을 가지고 그 장벽을 어떻게 헤쳐 나가느냐 하는 것이 문제입니다.

우리에게 부딪쳐 오고 가로놓이는 모든 시련은 우리를 망하게 하기 위한 것이 아니라 우리 자체의 가치를 결정하기 위한 것입니다. 우리의 가치는 어떻게 결정되느냐? 여러분 자신이 가만히 앉아서 가치를 인정한다고 해서 그 가치가 사회화되고 세계화될 수 없습니다. 시련 도상에서 부딪쳐 가지고 남아지느냐 없어지느냐에 따라서 새로운 가치가 결정된다는 것입니다.

사람이 크게 성공하려면 그 성공에 비례하는 시련이 따르는 것입니다. 국가적인 인물이 되기 위해서는 국가적인 운명을 책임지고 시련을 돌파해 나가야 된다는 것입니다. 생명을 걸고 국난을 책임질 수 있어야 된다는 것입니다. 자기의 생명을 바치기를 회피하는 사람은 국가의 중요한 책임을 질 수 없습니다. 그것은 역사적인 사실을 봐서도 잘 아는 사실입니다.

대한민국을 중심삼고 혁명정부가 등장했을 때를 보더라도 국가의 운명을 책임지기 위해서 생명을 내놓고 새로운 나라를 모색한 사람들의 희망에 벅찬 걸음에서부터 혁명이 개시되었음을 알 수 있었습니다.

그러면 과연 우리 앞에 다가오는 세계적인 파동을 지나갈 수 있는 신념을 지니고 있느냐 하는 것이 문제입니다.

과거의 나를 다시 한번 되돌아볼 때 나라는 존재는 나를 위주하고 살던 나였습니다. 기껏해야 내 어머니 아버지 내 형제밖에 몰랐다는 것입니다. 그 울타리를 벗어나지 못했습니다. 나라는 관념적인 한 단계를 넘어서 남아질 수 있는 무엇을 생각할 줄 몰랐다는 것입니다. 세계니 무엇이니 하는 문제는 아예 생각할 줄도 몰랐다는 것입니다. 시작도 자기 중심이요, 목적도 자기 중심이요, 끝도 자기를 중심삼아 가지고 추구해 나오던 것이 오늘날의 나 자신이라는 것을 확실히 알아야 되겠습니다.

27-182
참된 나는 어디에 있느냐
종교적인 명사로 본다면 우리는 타락한 후손들입니다. 타락이라는 명사가 붙어 다닌다는 것입니다. 타락권을 벗어나서 자신을 세운 것이 아닙니다. 타락권내에서 자신을 세웠다는 것입니다. 그러니 아무리 세계를 구하고 아무리 세계에 뜻을 이루었다 하더라도 타락권내에 있는 것입니다. 타락권내에 있는 나 가지고는 안 됩니다. 이것을 돌파해야 됩니다. 타락권을 벗어난 나를 모색해야 된다는 것입니다. 이 한계선을, 이 울타리를 넘어서야 합니다. 이 울타리만 넘어서면 참의 세계, 참의 내가 등장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울타리를 파괴하지 못하고 있는 것입니다.

참된 나는 어디에 있느냐? 이 울타리 안에 있는 것이 아니라 울타리밖에 있습니다. 그러므로 이 울타리, 이 한계선을 넘어야 됩니다. 그 울타리를 개인뿐만 아니라 가정도 넘어야 되고 종족도 넘어야 되고 국가도 넘어야 되고 세계도 넘어야 됩니다.

왜? 조상이 세계적인 타락을 했기 때문입니다. 개인이 타락했지만 그것이 가정을 이루고, 종족을 이루고, 민족을 이루고, 국가를 이루고, 세계를 이루었다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타락은 개인이 했지만 그 결과는 세계적인 권을 이루어 놓았다는 것입니다. 그로 인해 타락권내에서 나를 위주해 나오는 관념을 벗어나지 못하고 있는 것이 오늘의 나요, 과거의 인류였습니다.

그러면 이것을 어떻게 타파하느냐? 이걸 타파하기 위해서는 정면으로 부딪쳐서 깨뜨려야 됩니다. 이러한 비참한 운명을 앞에 놓고 있는 종교가 어떻게 세계를 향하여 비약하느냐 하는 것이 오늘날 이 시점의 중요한 문제가 아닐 수 없습니다.

그러면 이 권을 어떻게 벗어나느냐? 지금까지 수많은 인간들은 누구를 위해서 살았느냐? 전부 다 자기 자신을 위해서 살았습니다. 자기 자신을 위해서 살았지만 결국은 다 망했습니다. 혹자는 나라를 위해 살았지만 그도 역시 망했습니다. 그것은 나라도 타락권내에 있기 때문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이 세계를 넘어서 살겠다고 하는 사람만이 이 땅 위에 남아질 수 있는 것이요. 그런 민족만이 이 땅 위에 남아질 수 있는 것입니다.

종교라는 것은 이 타락 세계를 넘어선 나를 찾아 나온 것이요, 이 타락 세계를 넘어선 가정을 찾아나온 것이요, 이 타락 세계를 넘어선 나라를 찾아 나온 것이요, 이 타락 세계를 넘어선 세계를 찾아 나온 것입니다. 지금까지 역사과정에서 세계는 망해 나왔고, 인류도 망해 나왔고, 종교 자체도 망해 나왔지만 종교가 갖고 있는 이념만은 지금까지 남아 왔고, 세계화되어 나온 것입니다. 타락권내 내의 소원이 아니라 타락권 외의 소원을 중심삼은 세계관을 추구하는 것이 종교의 이념이기 때문에 지금까지 종교의 이념은 남아져 나왔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종교의 이념은 남아졌지만 종교의 뜻과 일치되는 개인이 없고, 가정이 없고, 종족이 없고, 민족이 없습니다.

그러면 여기에서 누가 그 이념과 일치할 수 있는 개인이 되고, 가정이 되고, 종족이 되고, 민족이 되고, 국가가 되느냐? 그런 민족과 국가는 금후의 역사시대에 있어서 세계적인 주도 국가가 될 것이요, 주도 민족이 될 것입니다.

도끼를 들고 나무를 패는 것과 마찬가지로 오늘날 세계의 난국을 우리 앞에 놓고 들이 패게 될 때, 개인을 중심삼고 패게 되면 개인이 꺾여 나가느냐? 세계가 꺾여 나가느냐? 세계가 꺾여 나간다는 것입니다. 가정을 중심삼고 패게 되면 가정이 꺾여 나가느냐, 세계가 꺾여 나가느냐? 세계가 꺾여 나간다는 것입니다. 종교를 중심삼고 패게 되면 세계가 깨지느냐, 종교가 깨지느냐? 둘 중에 무엇이 남아질 것이냐? 종교가 남아지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 종교는 세계 앞에 필요한 것입니다.

가치라는 것은 반드시 비교의 기준을 통해서 나오는 것입니다. 혼자 있는 데서 가치가 나오는 것이 아닙니다. 여러 사람이 필요로 하게 될 때 가치가 나오는 것입니다. 국가에서 필요로 하는 사람은 그 국가의 애국자가 되는 것이고, 사회에서 필요로 하는 사람은 그 사회의 책임자가 되는 것입니다. 가정에서 필요로 하는 사람은 그 가정의 가장이 되는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여러분 자체의 마음과 몸을 두고 볼 때 어느 것이 더 가치가 있을 것이냐? 몸보다 마음이 더 가치가 있는 것입니다. 왜 그러냐? 그것은 마음이 몸의 모든 악의 요소를 제거하고 이를 극복하기 위한 싸움을 책임지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제 이 한계선을 넘어야 되겠습니다. 그러면 세계는 여러분의 생활권내에 점점 스며드는 것입니다. 세계가 내 세포의 감각과 더불어 감정이 일체화될 수 있는 하루의 생활 무대에 전개되어 질 것입니다. 인류가 추구해 나온 것은 하루의 생활에 있어서 개인으로서 세계를 극복하는 것이었습니다. 생활에 있어서 세계를 극복하는 것이 소원이었기 때문에 하나님이 계신다면 반드시 그러한 세계를 만들어 놓아야 된다는 것입니다.

27-184
하나님이 가고픈 길과 인류가 가고픈 길
그럴 수 있는 때가 왔습니다. 세계적 사건이 우리의 감정과 우리의 호흡에 영향을 줄 수 있는 시대권에 들어왔다는 것입니다. 세계가 아무리 넓다 하더라도 우리의 생활권 안에 있는 것입니다. 세계는 우리 생활과 밀접한 관계가 있습니다. 미국과 한국의 정치는 물론 세계의 정치에까지 영향을 미친다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세계와 아무런 관계가 없다고 하는 나라는 망합니다. 오늘날 미국 같은 나라가 자기 나라만 중심삼고 세계 정세를 도피하게 된다면 망한다는 것입니다. 새로운 이상 세계 앞에 이미 낙선한 나라가 되는 것입니다.

앞으로 이런 혼란된 세계를 밟고 넘어서서 새로운 세계를 모색할 수 있는 위대한 사상, 그런 사상의 세계화 운동을 일으킬 수 있는 신앙단체가 나오면 그 단체로 말미암아 새로운 세계의 희망이 싹튼다는 것입니다. 지금까지의 기성종교 가지고는 안 됩니다. 한국의 장로교면 장로교, 감리교면 감리교, 불교면 불교를 위주해 가지고 우리 종교가 아니면 안 된다고 하는 종교는 망합니다. 지금까지의 종교인들은 자기 종교의 세계화운동을 전개하지 못했습니다.

그러면 우리 통일교회 교인은 어떻게 해야 할 것이냐? 여러분이 가는 길이 어디냐고 물으면 여러분은 `뭐 어디 가긴 어디가. 교회에 왔다가 집으로 가지’ 합니다. 집으로 가서는 어디로 가느냐? 여러분이 가고 싶은 데로 갑니다. 그러나 여러분이 가고픈 길과 하나님이 가고픈 길이 일치되느냐가 문제입니다. 하나님이 가고 싶은 길과 인류가 가고 싶은 길과 역사의 마음이 지향하는 길이 일치되지 않으면 망하는 것입니다. 오늘날 종교가 왜 망하느냐? 하나님과 일치가 되지 못하였기 때문입니다. 역사의 중심사명을 대신해야 할 종교의 길에서 벗어났다는 것입니다.

종교가 역사의 중심사명을 했다는 것을 무엇을 의미하느냐? 그들이 죽되 자기의 행복을 위해서 죽어간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위해서 죽어갔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위해서 죽어갔다는 것은 곧 세계를 위해서, 구원받기 위해서 죽은 사람은 무가치하다는 것입니다. 순교를 당할 때에도 `내가 이렇게 죽어야 좋은 천당에 가지’ 하는 생각을 하면 안 된다는 것입니다. 죽기는 같이 죽되 `내가 이래야 구원 받지. 내가 이래야 지옥에 안 가고 천당에 가지’ 이렇게 생각하고 죽는 사람은 좋은 곳에 못 간다는 것입니다. 죽기는 죽되 `나는 하나님의 뜻을 위해 죽는다. 나는 자그마치 세계를 위해 죽는다’고 해야 하는 것입니다.

이런 의미에서 `아바 아버지여 내 뜻대로 마옵시고 아버지의 뜻대로 하옵소서’라고 하신 예수님이 위대하다는 것입니다. 인간은 자기를 위해서 죽겠다고 합니다. 자기 자신을 위해서 죽는 길을 도피하려고 한다는 것입니다. 그렇지만 예수님은 달랐습니다. `내 뜻이 아니고 아버지의 뜻대로 하옵소서’라고 하셨습니다. 여기에서 예수님은 세계를 중심삼은 새로운 우주관을 모색할 수 있는 하나의 중차대한 분기점을 제시했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위대한 것입니다.

그렇지만 여러분에게 있어서 여러분의 뜻과 하나님의 뜻이 다르다는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지금까지 역사적 인연을 벗어나지 못한 그 혈통과 그 인연 가운데서 태어난 인간들은 기껏해야 자기 가정, 자기 나라를 위하는 한계를 넘지 못했다는 것입니다. 그것은 내 뜻입니다. 하나님의 뜻은 그것이 아닙니다. 세계를 위하는 것이 하나님의 뜻입니다.

27-185
하나님의 아들딸이 되기 위해서는
이러한 문제를 중심삼고 최후에 문제되는 것은 무엇이냐? 내가 대한민국 사람이냐, 세계 사람이냐 하는 거예요. 내가 하나님의 아들딸이 되기 위해서는 세계적인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하나님의 아들딸로서 택함받기 위한 가치적인 존재가 되려면 세계적인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대한민국의 아들딸이 아니라 세계의 아들딸이 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런 관점에서 여러분이 통일교회 교리를 알고 보면 통일교회는 세계를 중심삼은 하나의 가정화 운동을 전개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여기에는 민족을 초월해야 됩니다. 지금 가는 도상에서 민족들과 부대끼고, 수많은 종족들과 수많은 씨족들과 수많은 가정들과 부대끼고 있지만 이 부대낌의 길을 넘어가야 되는 것입니다.

그러면 지금부터 어떤 기준을 넘어가야 되느냐? 이제 우리가 가야 할 길 앞에는 핍박의 길이 많이 뭉그러졌습니다. 개인이 갈 수 있는 핍박의 길, 가정이 갈 수 있는 핍박의 길, 씨족이 갈 수 있는 핍박의 길, 민족을 대표한 종교가 갈 수 있는 핍박의 길도 우리에게서 다 사라졌습니다. 이제 대한민국에 있어서 통일교회의 자리는 공고해졌습니다.

그러니까 여러분은 `다른 사람들과 우리가 다를 게 뭐냐?’ 이렇게 생각해서는 안 됩니다. 우리가 주체적인 신념을 가져야 됩니다. 지금까지 남아진 종교는 오늘 현시점을 넘을 수 없습니다. 그들이 자기 민족이라든가 자기 종파의 관념을 넘을 수 없는 종교로서 암중모색하고 있을 때 우리는 이 길을 늠름히 넘어가야 한다는 것입니다.

내가 고생을 하더라도 이 고개를 넘은 자리에서 고생을 하자는 것입니다. 내가 이 시대에 희생을 하더라도 그 고개를 넘은 자리에서 희생을 하자는 것입니다. 그것이 다른 것입니다. 세상 사람들은 그 종교 안에서 죽어갔다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세계의 중심이 되는 천국에 못 간다는 것입니다. 현재의 종교를 중심삼아 가지고는 천국화시키지 못하기 때문에 그 종교를 믿고 간 사람들은 천국에 못 간다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생활관이 그렇게 되어야 합니다. 돈이 생기면 그것을 무엇을 위해 써야 되느냐? 그 나라를 위해, 그 세계를 위해 써야 됩니다. 돈을 버는 것도 그 나라를 위해, 그 세계를 위해서 벌어야 된다는 것입니다. 목적이 거기에 있어야 합니다. 전부다 세계의 뜻, 하나님의 뜻을 위해 생활해야 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어떤 민족을 중심삼고 이 세계를 통일하려고 하는 것이 아닙니다. 선한 사람을 중심삼고 세계를 통일하려고 하는 것입니다.

고난과 대결하는 자세를 중심삼고 그들과 우리를 보면, 그들과 우리와의 가치는 다릅니다. 그들은 이 길을 도피하려고 하지만 우리는 맞으면서 갑니다. 여기에서 주인과 종이 갈라지는 것입니다. 주인은 자기 가문을 중심삼고 부딪쳐 오는 시련을 정면으로 대하지 않을 수 없는 운명을 지고 있습니다. 이것을 피해 가려고 하는 사람들은 전부 다 종이라는 것입니다.

주인은 부딪쳐 오는 모든 것을 정면으로 받아들입니다. 대한민국이 어려우면 대한민국의 어려움을 정면으로 받아들이는 단체가 여당이 되어야 합니다. 그래 가지고 일관적으로 움직이는 하나의 조직체를 이루어야 합니다. 그리고 거기의 요원들은 전부 다 대한민국을 넘어서 세계로 갈 수 있는 국가를 추구해야 되는 것입니다. 대한민국 내에서 공화당이면 공화당이 공화당의 이념만을 추구하면 망하게 됩니다. 지금까지의 역사가 그렇게 되어 왔다는 것입니다.

27-187
통일교회가 주장하는 것
그러면 오늘날 여러분은 우리 통일교회에 가입한 일원으로서 어떻게 해야할 것이냐? 먹고 사는 것, 자고 깨는 것, 우리의 모든 감정은 대한민국을 넘어서 세계를 위해야 합니다. 세계를 위하는 것이 결국은 대한민국을 넘어서 세계를 위해야 합니다. 세계를 위하는 것이 결국은 대한민국을 위하는 것이 됩니다. 대한민국이 세계의 중심이 되도록 대한민국을 세계화시키자는 것입니다. 세계를 대한민국에 예속시키는 것이 아니라 세계 가운데 대한민국을 세워서 빛나게 하자는 것입니다. 그럴 수 있는 민족은 세계화 시대에 있어서 주체적인 민족이 될 것입니다. 통일교회는 지금 아무것도 없습니다. 맨손으로 출발했습니다. 그렇지만 아무것도 원치않습니다.

이제 대한민국이 가야 할 길 앞에는 여러가지 어려운 문제들이 있습니다. 현재 정부가 경제 부흥을 추진하고 있지만 이것만이 대한민국을 지탱시킬 수 없습니다. 이것만 가지고는 대한민국을 해방시킬 수 없다는 것입니다.

박대통령도 제2의 경제라는 말을 하고 있고, 정신적인 단합을 주장하고 있지만 물질적인 문제, 외적인 문제, 경제적인 문제를 주도할 수 있고 움직일 수 있는 정신적인 단합, 국민의 사상적인 주체성을 어디에서 찾을 것이냐? 막연하다는 것입니다. 현재의 종교 가지고는 안 됩니다. 갖다 놓아 봐야 별 수 없다는 것입니다. 자기 자체에서 이것을 모색하지 못한다면 다른 데서라도 모색할 줄 알아야 된다는 것입니다. 이런 것을 보더라도 오늘 통일교회가 얼마나 중대한 입장에 처해 있는가 하는 것을 여러분이 알아야 됩니다.

아무리 나라가 부흥한다 하더라도 부흥된 경제력을 움직일 수 있는 참다운 사람을 모색하지 않으면 붕괴합니다. 망한다는 것입니다. 자기 개인의 행복을 따라가다가는 망하는 것입니다. 가야 할 방향을 잃어버리게 되면 거기에서 방황하다가 망하는 것입니다. 대한민국이 가야 할 길 앞에 문제되는 것이 무엇이냐? 경제 문제일 것입니다. 그러나 그것보다 더 중요한 문제가 무엇이냐? 세계를 움직여 나갈 수 있는 주체적인 사상입니다.

지금 삼팔선 이북에서는 공산주의라는 것이 하나의 체제를 중심삼고 세계화 운동을 모색해 나오고 있습니다. 그 사상 앞에 일개 민족을 위주한 민주주의 사상을 가지고는 안 됩니다. 공산당이 세계화 운동을 주장하는 그 이상의 내용과 실질적인 실적을 남길 수 있는 자체가 아니고서는 그들과 대결할 수 없습니다. 공산주의가 인간을 위주한 사상 관념으로 출발했다면 그것은 기필코 망하는 것입니다. 물질주의와 유물사관을 주장하는 공산주의는 자기의 한계선을 못 넘어갑니다. 자기 나라 이상은 못 넘어간다는 것입니다.

오늘날 공산당이 공산당 이념을 중심삼아 세계화 운동을 가능하게 할 수 있는 순간에 와서 그 담벼락에 부딪쳐 가지고 후퇴해 버렸습니다. 망하는 것입니다. 공산화 운동이 소련을 위주한 공산화 운동이라면 망하는 것입니다. 세계를 위주한 공산화 운동이 아니고 소련을 위주한 공산화 운동이면 망하는 것입니다. 민주주의도 마찬가지입니다. 미국을 위주한 민주주의는 망하는 것입니다. 세계를 위주한 민주주의가 되어야 합니다. 세계를 위해 가는 길에서 후퇴하는 나라는 망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여기에서 세계 인류가 바라는 주체적인 사상, 아무리 외적으로 문명이 발달했다 하더라도 그 문명을 주관할 수 있는 주체적인 사상, 그런 세계적인 사상이 있어야 된다는 것입니다. 그것은 공산주의도 아니고 민주주의도 아닙니다. 그 주의는 무슨 주의냐? 하나님 주의입니다.

우리 통일교회가 주장하는 것은 통일교회 주의가 아닙니다. 통일교회 간판을 떼어버리고 싶어요. 한국화된 통일교회가 아니라 통일교회화된 한국이요, 세계화된 통일교회가 아니라 통일교회화된 세계라는 것입니다. 그것을 가능하게 할 수 있느냐? 여기에는 통일사상을 세계화시킬 수 있는 요원, 주체적인 구성 요원을 어떻게 양성해 내느냐 하는 것이 문제가 되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세계화 운동의 길을 가야 되겠습니다. 여러분이 가는 도상에는 모진 시련이 부딪쳐 올 것입니다. 역사시대에 등장했던 모든 시련과 미해결된 문제가 오늘날 우리가 가는 길 앞에, 세계화 운동을 하는 우리 앞에 등장할 것입니다. 그래야 참인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개인에 대한 시련이 있습니다. 내가 죽느냐 사느냐 하는 것을 판가리해야됩니다. 가느냐 안 가느냐를 밤을 새워 가며 고민해야 됩니다. 그런데 거기에서 지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통일교회는 교리도 좋고, 사람들도 좋은데 아이구 그거 고생 때문에 통일교회 못 가겠다’ 하는 사람이 있는 것입니다.

27-189
탁류를 거슬러 올라갈 수 있는 사람
개인을 중심삼아 가지고 가려면 언제나 투쟁해야 됩니다. 내적인 투쟁을 통해서 시련과 고통을 극복하고 `내 일선을 투신한다’ 하고 나서야 됩니다. 이렇게 개인적인 시련을 극복하고 나서면 가정이 반대하는 것입니다. 그렇게 되는 겁니다. 그렇지 않으면 틀린 것입니다. 가정의 반대에 부딪칠 것입니다. 지금까지 같은 운명의 길을 걸어 나오던 식구들이 `시련패’로 등장할 것입니다.

그러면 여러분은 그 시련 가운데서 어떻게 될 것이냐? 여러분의 부모가 가로막을 것입니다. 사랑하는 처자가 가로막을 것입니다. 형제가 가로 막을 것입니다. 가로막다가 안 되면 칼을 들고 나설 것입니다. 통일교회의 길을 따라오면서 칼침을 맞은 사람도 많습니다. 아버지가 아들에게, 어머니가 딸에게 별의별 반대를 다 했습니다. 아내가 남편에게 남편이 아내에게 반대를 했고, 형제간에도 별의별 반대를 했습니다. 이러한 비참한 일이 있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예수님도 “내가 세상에 화평을 주러 온 줄로 생각지 말라. 화평이 아니요 검을 주러 왔노라. 내가 온 것은 사람이 그 아비와, 딸이 어머니와, 며느리가 시아비와 불화하게 하려 함이니 사람의 원수가 자기 집안 식구리라(마 10:34-36)”고 하셨습니다. 이 말씀은 이런 의미에서 한 것입니다.

세계화 운동을 제시하던 예수님 앞에 가야 할 시련의 무대가 일시에 등장하였습니다. 나타나는 개인도 시련의 도장이요. 가정도, 종족도, 민족도, 세계도 시련의 도장이라는 것입니다. 이 시련의 도장에게 패자가 될지도 모를 입장에 놓인 예수님은 최후의 운명에 봉착하였습니다. 십자가를 앞에 놓고 망하느냐 흥하느냐 하는 문제를 두고 자기 개인을 중심삼고 생각하느냐, 하나님의 뜻을 중심삼고 생각하느냐 하는 기로에 서게 되었던 것입니다.

이것을 청산짓는 것이 겟세마네 동산의 기도였습니다. `나는 무엇을 위해 싸웠느냐? 30여 년 동안 공적인 뜻을 따라나온 그 생애는 무엇을 중심삼고 산 생애였느냐? 나는 내 일신의 행복을 위해 살았느냐? 아니다. 내 일신의 행복이 아니라 하나님의 행복을 위해 살았다. 하나님권내에 남아질 수 있는, 민족과 국가와 세계를 위한 행복을 추구하면서 살았다. 그렇기 때문에 타락권내에 있는 나를 위주로 하여 그 한계를 넘지 못할 때에는 내 뜻과 그러한 나라를 세우려는 아버지의 뜻은 별개가 된다’고 생각하셨습니다. 이렇게 생각하면서 이 뜻이 부딪치는 순간 마음의 결정을 지어 가정을 중심으로, 민족을 중심으로, 국가를 중심으로, 세계를 중심으로, 판결짓고자 했던 것이 십자가의 죽음이었습니다.

이러한 승리의 결판 과정에서 아버지의 뜻을 붙안고 죽었기 때문에 사망권이 그를 주관할 수 없었다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를 죽음에 몰아넣더라도 사망선을 넘어서 재차 태어날 수 있는 것입니다. 이것이 기독교에서 말하는 부활입니다. 이렇게 부활된 사람은 새로운 의미의 개인이 됩니다. 모든 한계권내에서 있어서 제재를 받는 개인이 아닙니다. 한계권을 초월한 개인이 됩니다. 가정의 한계권, 종족의 한계권, 민족 국가 세계의 한계권을 넘은 자리에서 부활한다는 것입니다.

그 부활을 중심삼고 따라가는 사람은 인간세계에서 느끼던 모든 행복, 인간세계에서 느끼던 결의 이상의 힘을 가지고, 흐르는 대해와 같은 탁류를 거슬러 올라갈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기독교가 명실공히 세계화된 것입니다.

예수님이 그런 길을 걸어 나왔기 때문에 이것을 상속받아야 할 기독교인들은 재차 정비해 가지고 부딪쳐야 됩니다. 이것이 오늘날 기독교인들이 가야 할 길이요, 현시점의 수많은 종교들이 해야 할 책임인 것입니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이것을 도피하려고 하는 종교들은 지상에서 사라지는 것입니다. 망하지 말라도 해도 망하는 것입니다. 종교를 빙자해 가지고 자기의 행복을 추구하는 사람은 망합니다. 자기 일신을 중심삼아 가지고 생활하면 망하는 것입니다. 망하는 거예요.

27-191
세계적인 사명을 의식하고 나타난 통일교회
우리 통일교회 신도들에게는 개척노정을 출발한 그날부터 핍박의 화살이 몰아쳐 왔습니다. 이 핍박의 화살이 몰아쳐 오기를 하나님께서 얼마나 고대하셨는가를 생각해야 됩니다. 하나님께서 이날까지 참아 나오고 이날까지 싸워 나온 목적이 무엇이냐 하면 사랑하는 자녀들을 일시에 이 고개를 넘게 하는 것입니다. 이 고개를 일시에 넘게 하기 위한 하나님의 사랑이, 하나님의 소망이, 하나님의 고대가, 하나님의 그리움이 이 한 시점에 집결되어 있다는 것입니다.

이런 입장에 설 수 있는 때에 태어난 자기 자신의 무한한 가치를 여러분은 깨달아야 됩니다. 과거의 슬픈 역사를 거슬러 올라갈 수 있는 새로운 보금자리에 태어난 자아의식을 느껴야 됩니다. `여기에서 내가 태어났으니 이제부터 나는 당당하게 갈 것이다. 세계의 그 무엇이 나를 치고 밀고 가더라도 나는 갈 것이다. 다가오는 시련이 나를 후퇴시키는 것이 아니라 전진시키는 재료가 될 것이다. 미래에 뜻을 성사시킬 수 있는 영향으로 흡수할 것이다’라고 할 수 있는 주체적인 사람이 필요합니다.

여러분이 가는 길 앞에 시련이 없을 수 없습니다. 그것이 하나님의 사랑입니다. 그런 시련의 고비를 넘을 수 있는 아들딸을 하나님은 찾아오시는 것입니다. 예수님도 그런 자리에서 죽게 했던 하나님입니다. 그것은 죽게 하기 위한 것이 아니라 승리하게 하기 위한 것이었습니다. 승리를 위해서는 불가피했던 것입니다. 승리의 결정을 지어야 할 운명이 이 구원섭리노정에 남아 있기 때문에 사랑하는 자식을 죽음의 자리에 내세운 것입니다. 그것이 승리의 결정적인 금을 긋기 위한 하나님의 사랑이요, 하나님의 작전법인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이것을 넘지 않고는 관계를 초월할 수 없습니다. 너와 나와의 관계를 해결지을 수 없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러한 역사 앞에 이것을 해결할 수 있는 종교인이 나타나서 세계적인 사명을 해야 될 것입니다.이러한 사명을 느끼고 나서는 무리가 세계상에 반드시 나타나야 합니다. 이런 무리가 안 나타난다면 하나님이 없는 것입니다. 그러한 사명을 의식하고 나타난 무리가 통일교회무리입니다.

개인이면 개인의 시련이 부딪쳐 올 것입니다. 부딪쳐 올 때 `와라! 원수여, 채찍을 들고 쳐라. 있는 힘을 다해 쳐 봐라. 너는 사탄세계를 대표해 나왔지만 나는 하늘나라를 대표해 나타났다. 너와 나의 싸움에서 나는 절대로 후퇴할 수 없다. 너는 하루의 행복을 위한 싸움에서 몇 해를 도사리고 나를 칠는지 모르지만 나는 수천년을 도시려 나온 하나님을 대신한 아들이기 때문에 십 년, 이십 년, 삼십 년, 아니 일생을 걸어서라도 이 싸움을 계속할 것이다’라고 할 수 있는 여러분이 되어야 합니다. 이런 싸움의 과정을 거쳐서 통일의 역사는 엮어져 내려온 것입니다.

인류의 역사가 그러하듯이 통일교회 역사도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단축시킨 짧은 역사과정이지만 세계를 도피하는 역사의 그림을 그려 나온 것이 아니라 세계를 직시하고 직행할 수 있는 사연을 중심삼아 가지고 그림을 그려 나온 통일교회입니다. 직시된 세계의 관문 앞에서 이것을 어떻게 맞아 가지고 어떻게 소화시킬 것이냐 하는 것이 문제지 이것을 어떻게 보느냐 하는 것은 문제가 아닙니다. 주의나 사상은 누구든지 주장할 수 있습니다. 그것을 어떻게 확신하느냐가 문제입니다.

27-193
세계를 대표해서 직행하자
이런 의미에서 1960년대는 우리 통일교회 교인들을 시련시키는 시기입니다. 내 자신을 시련시키는 때입니다. `가라’하면 가야 되는 것입니다. 타락의 운명을 벗어나는 길을 모색해야 되는 것이 인류가 가야할 길입니다. 이 고독의 행로를 타개하기 위해서는 돌아가서는 안 됩니다. 돌아가면 누가 이것을 주장하면서 맞아 가지고 그 싸움을 책임질 것이냐? 돌아가는 사람은 망할 것입니다.

여러분은 세계를 대표해서 직행해야 되겠습니다. 생명을 걸고 전진해야 되겠습니다. 이런 싸움을 우리는 지금까지 해 왔습니다. 개인이 부딪치는 모든 것을 넘어왔습니다. 반대하는 부모를 버리고 형제를 버리고 나섰던 몸들입니다. 동네가 전부 다 반대하고 비웃는 그 자리에 나섰던 몸들입니다. 그뿐만 아니라 수많은 동네를 찾아다닐 때 미친 녀석이라고 욕을 먹던 몸들입니다.

그러나 거기서 망해서는 안 됩니다. 그러한 놀음을 거쳐 가야 됩니다. 나라에서 욕먹는 것도 거쳐 가야 됩니다. 우리는 개인들로부터 욕을 먹고, 가정에서 욕을 먹고, 동네에서 욕을 먹고, 학교에서 욕을 먹고, 사회에서 욕을 먹고, 나라의 주권자들로부터 규탄받던 무리들이지만 여기서 망할 수 없습니다. 다 망해도 망할 수 없습니다. 망해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책임을 짊어지고 나오는 선생님은 역사에 없는 영도자의 생활을 해 나오고 있습니다. 내가 이 나라를 위해서 주장할 말이 많습니다.삼천만의 심정을 붙들고 통사정 할 수 있는 사연이 많지만 때를 기다리고 나온 사람입니다. 양지 중의 양지에서 살아야 할 사람인데도 불구하고 음지 중의 음지에서 살고 있는 것입니다. 그것은 행여나 민족의 갈 길에 지장을 줄까봐 그러는 것입니다. 우리는 여기에서 망할 수 없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어떻게 하든지 반대하는 자를 굴복시켜야 됩니다. 개인이 반대하면 개인을 어떻게 굴복시키고, 가정이 반대하면 가정을 어떻게 이해시키고, 종족이 반대하면 어떻게 하고, 교회가 반대하면 어떻게 하고, 나라가 반대하면 어떻게 할 것이냐? 이것이 지금까지 여러분을 지도해 나온 선생님의 고민입니다.

내 자신이 찢기고, 내 자신이 상처받고, 내 자신이 처참한 누명을 쓰는 것이 문제가 아닙니다. 이 민족 앞에 주체의식을 가지고 나설 수 있는 통일의 무리, 세계 앞에 주체의식을 가지고 나설 수 있는 통일의 무리를 어떻게 만드느냐 하는 것이 문제라는 것입니다. 체면과 위신만 생각하다가는 망하는 것입니다. 개인이 좋거든 개인을 붙들고 살아 보십시오. 가정이 좋거든 가정을 붙들고 살아 보십시오. 종족이 좋거든 종족을 붙들고 살아 보십시오. 아무것도 해결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인간의 가치는 개체적인 것이 아닙니다. 한 가정을 위해 희생의 제물이 되어야 할 존재도 아닙니다. 세계적인 것이어야 합니다. 하나님의 아들이라면 세계를 대신할 수 있는 호흡과 세계를 대신할 수 있는 생활감정을 중심삼아 가지고 전세계 앞에, 전역사 앞에 영향을 미칠 수 있는 안팎의 생활을 해야 됩니다. 그러지 않고 구덩이를 파 놓고 그 안에서 득실거리고 그 안에서 복닥거려 가지고는 안 됩니다. 그 구덩이가 아무리 크더라도 그 안에서 망하는 것입니다. 가야 합니다. 여기에 서서 말하는 사람은 부모도 버리고 나섰습니다. 처자도 버리고 나섰습니다. 이 길은 그러지 않고는 갈 수 없는 길입니다. 피가 튀는 길입니다. 심정의 힘줄이 곤두서는 길입니다. 말할 수 없는 사연이 교차되는 길입니다. 이것을 극복해야 됩니다. 이 교차로를 뚫고 가야 하는 것이 내 운명이다.

이 운명의 직선상에 선 나입니다. 내 갈 길이 이것밖에 없는 것을 알고 세계를 향하여, 인류를 향하여 내일의 희망을 품고 갈 수 있는 사나이의 모습을 어떻게 남기느냐 하는 것이 문제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시시하게 내 자신이 문제가 아닙니다. 가해진 환경이 문제가 아닙니다. 다가오는 시련이 문제가 아닙니다. 인간으로서 넘길 수 없고 체험할 수 없는 비참한 장면을 당하는 것이 문제가 아닙니다. 이것을 어떻게 돌파하느냐가 문제라는 것입니다.

이미 우리는 이런 싸움을 전개해서 개인의 담벽을 헤치고 나왔습니다. 반대하던 부모가 찾아와 여러분 앞에 무릎을 꿇고 `내가 잘못했다. 통일교회는 알고 보니 그렇지 않더라’ 하고 인정했습니다. 여기에서 그 부모에게는 자식으로 말미암아 개인적인 싸움을 거치지 않고 하나님 앞에 설 수 있는 터전이 닦여진다는 것입니다.

27-195
모진 반대를 뚫고 희망찬 저 세계로 갑시다
오늘날 대한민국에서 통일교회의 움직임이 안팎으로 점점 문제화되는 단계에 들어왔습니다. 반대하던 대한민국이 돌아서서 손을 잡고 통일교회가 가는 길을 후원하고, 통일교회가 가는 길을 따라가겠다고 할 때는 삼천만 이 민족은 국가 기준까지의 시련 고통을 거치지 않고 갈 수 있는 길이 생긴다는 것입니다.

오늘 통일교회를 지도하는 문선생이라는 사람이 외로운 사람이요 불쌍한 사람이지만 이 민족 앞에 할 말이 있는 것은, 민족 전부가 나와 같은 길을 가야 된다고 한 것이 아니라 나 하나가 시련당함으로 말미암아 수십 년동안 이 민족이 가야 할 시련의 고비를 닦겠다고 했기 때문입니다. 그렇게 될 때 이 민족은 머리 숙일 것입니다. 민족이 개개인의 시련, 가정의 시련, 종족의 시련, 민족의 시련을 거치지 않고 대한민국이 해방을 맞을 수 있는 특권적인 은사를 하늘로부터 받을 수 있는 인연을 맺게 될 때 이 민족이 지금까지 배반자의 입장, 혹은 반대하는 입장에 섰기만 하나님 앞에 안기는 인연을 가질 수 있는 이 민족이 될 것이 아닙니까? 선생님은 그때를 바라보고 나가고 있습니다.

오늘날 통일교회가 가는 길은 전세계에 소문이 나 있습니다. 통일교회가 나쁘다는 소문이 어디든지 나 있다는 것입니다. `좋다. 너희들이 반대할 테면 반대해라. 그렇지만 우리는 갈 것이다’ 하고 가는 것입니다. 지금 일본 정부가 통일교회를 문제시하고 있습니다. 미국 정부도 통일교회를 문제시하고 있습니다. 그렇지만 민족이 문제시한다고 해서 민족권내에서 사라질 통일교회가 아닙니다. 민족을 밟고 올라서서 내가 제시한 그 내용을 중심삼아 가지고 세계화하는 운동을 하는 데 있어서는 어떠한 민족보다도, 어떠한 단체보다도, 어떠한 국가보다도 강력한 실천을 한다는 것입니다. 맹세코 다가오는 시련 고통을 회피해 가는 패자가 되지는 않는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신념을 품었기 때문에 오늘날 여러분이 스승이라고 추앙하는 이 사나이의 손에는 쇠고랑을 찬 역사가 있는 거예요. 앞으로도 그런 각오를 하고 있습니다. 최후의 죽음의 한 교차로가 내 앞을 가로막게 될 때 나는 졸장부가 되지는 않을 것입니다. 그들이 칼을 뽑으면 나도 뽑을 것입니다. 일대 싸움을 전개할 것입니다. 아직까지 그때가 안 되었기 때문에 이렇게 있는 것입니다.

저 세계로 갑시다. 광명한 내일의 희망의 세계로 가야 되겠습니다. 지난날 억울했던 원한의 역사, 고통의 역사, 슬픔의 역사, 비통의 역사, 참혹의 역사를 밟고 희망찬 오늘을 맞이하여 내일을 향해서 힘차게 달려갈 수 있는 무한한 가치의 모습을 우리는 어디에서 찾을 것이냐? 대한민국이 아니라 무한한 가치의 모습을 우리는 어디에서 찾을 것이냐? 대한민국이 아니라 세계를 중심삼고 찾아야 됩니다. 이것이 우리가 가야 할 운명의 길입니다. 이 엄청난 역사를 중심삼고 망해 들어가는, 희망없는 절망의 세계 앞에 새로운 희망의 세계를 전개시키고 세계화 운동을 전개시키기 위해서는 소수의 통일교회의 무리가 세계화 기준을 어떻게 정하느냐 하는 것이 문제입니다. 이것이 선생님이 지금까지 생애를 걸고 싸워온 투쟁의 목표였습니다. 날아오는 화살을 고스란히 맞습니다. 밤잠을 자지 말고라도 맞으라는 것입니다. 화살이 박혔던 흉터에는 역사의 반응이 나타날 것입니다. 희망의 역사가 거기서 전통의 원천을 마련할 것입니다.

27-196
예수님이 걸어가신 길
이런 관점에서 볼 때 오늘날 우리들은 어디로 가야 되느냐? 세계로 가야 되겠습니다. 내가 분부하는 것은 대한민국의 대통령이나 해먹기 위해서가 아닙니다. 세계를 구하기 위해서입니다. 세계 만민을 해방시켜서 하나님의 아들딸 만들기 위해서입니다. 이것이 부모가 해야 할 일이 아니겠습니까? 이것이 하나님이 해야 할 일이 아니겠습니까? 하나님이 지금까지 당신의 출세를 위하여 일해 나온 것이 아닙니다. 자기의 아들딸을 출세시키기 위해서 일해 나왔습니다. 그러니까 여러분도 어제는 비참한 모습이었지만 오늘은 세계로 향하는 희망의 새로운 깃발을 날리며 하늘 경기의 대열에 참가한 늠름한 모습이 되어야 됩니다. 시시하게 졸장부가 되지 말라는 것입니다.

그리하여 시련의 노정을 정면으로 부딪쳐 격파해야 되겠습니다. 이것을 격파하고 나갈 때 무한한 가치가 나를 부르게 되는 것입니다. 그 가치의 사랑, 그 가치의 행복, 그 가치의 자리에서 내일을 흠모하며, 그 가치의 오늘을 찬양할 수 있는 모습, 그것이 하나님이 찾아 나오시는 승리의 아들딸이 아니겠습니까? 이것을 위해 우리는 달리고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도 그런 도상에서 죽어갔습니다.그러나 예수님은 죽었으되 죽은 것이 아니고 역사를 살려 왔다는 것입니다.

그러한 것으로 미루어 볼 때, 지금까지 참된 세계를 추구하는 데 있어서 신을 위주하고 출발하였던 역사가 자기를 중심삼고 나가게 될 때는 망하는 운명을 피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여기에서 다시 자기를 밟고 세계를 자기의 시련도장으로 삼고 역사상에 남겨진 모든 시련을 자기의 생명의 시련노정으로 흡수하여 자기의 생활권내에서 탕감하려고 나서는 무리가 있다면 그 무리는 절대 망하지 않을 것입니다.

여기에서 인생의 가치를 느끼고 세계를 위하는 데서 삶의 가치를 느끼는 사람들은 절대 망하지 않을 것입니다. 역사적인 거리는 느낄망정, 연한의 차이는 있을망정 그 사람들은 결코 망하지 않을 것입니다. 사람들이 엮어간 시련과 핍박의 도상이 앞으로의 역사과정에, 세계 어느 도처에서 나타난다 하더라도 그 시련과 고통은 극복하기에 어렵지 않은 제2의 시험만으로써 넘어갈 수 있는 재료를 여기서 만들 수 있는 것입니다.

어젯날의 부족한 자신을 위주한 것을 벗어 버리고 하나님을 위주하여 살수 있는 올바른 애착심을 가져야 되겠습니다. 그리하여 6천년 역사과정에서 하나님이 당하셨던 시련과 고통을 평면도상에서 일시에 탕감할 수 있는, 즉 종적인 역사를 횡적으로 일시에 탕감할 수 있는 무대를 전개해야 겠습니다. 그렇게 되면 아무리 어려운 시련이 나를 휩쓸더라도 내가 거기에 말려 죽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내 사상과 내 신념과 내 행복을 넘어선 자리에서 아버지의 뜻을 심고 갈 수 있는 사람은 망하지 않는 것입니다. 이것이 예수님이 남긴 전통이요, 사상입니다.

예수님께서 `아바 아버지여, 할 수만 있으면 이 잔을 내게서 지나가게 하옵소서. 그러나 내 뜻대로 마옵시고 아버지의 뜻대로 하옵소서’ 하고 간 그 길이 오늘날 세계를 창조할 수 있고 세계를 구할 수 있었다는 것을 그 누가 알았겠습니까? 갈릴리 해변가의 어부와 친구가 되었고, 당시 이스라엘 나라의 민족적 반역자로서 사라져 간 그 청년, 아무도 몰라주던 예수님의 죽음이 오늘날 세계화될 줄을 그 누가 알았겠습니까?

그 죽음은 동기가 다르다는 거예요. 역사가 다르다는 거예요. 그 동기의 내용이 하나님과 더불어 뒤넘이쳤기 때문에 하나님이 살아서 역사를 움직여 나오는 한 그와 더불어 싸우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피흘린 그 역사를 중심삼고 세계는 거기에 흡수되지 않을 수 없는 것입니다.그렇기 때문에 기독교를 중심삼은 세계화 운동은 자동적인 이치에 의해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이런 관점에서 볼 때 현시점은 예수님이 맞던 대로 맞을 수 있는 한 때라는 것은 여러분이 알아야 되겠습니다.

27-198
동양사상의 우수성과 미국 실용주의의 문제점
여기서 여러분에게 한 가지 이야기 할께요. 내가 저번에 미국에 갔을 때 미국 언론계에 종사하는 저명한 매슈 스미스라는 사람을 만났습니다. 이 사람은 현재 캐나다에 적을 두고 있는데 캐나다와 미국의 언론계의 상당한 영향력을 미치는 사람으로 널리 알려진 문필가입니다. 그 문필가에게 원리강론 번역해 놓을 것을 좀 봐 달라고 부탁하고 왔습니다. 그랬더니 이 사람이 미국에 대한 세부적인 분석을 하여 현재 미국 사람들의 사고방식에 대한 것을 쭉 써 왔습니다. 그 사람은 동양사상과 현재 미국의 사상과는 천지의 차이가 있다고 보고 있었습니다.

`행복’이라는 것은 추상적인 것입니다. 그런데 실용주의를 찾고 있는 미국 사람들 앞에는 행복이라는 말은 구체적으로 설명해 줘야 됩니다. 국민학교 다니는 어린이들이 행복이 무엇이냐고 묻게 될 때 그들에게 추상적으로 설명해 주어서는 안 됩니다. 실지로 눈에 보이는 것을 가지고 행복을 설명해야 됩니다. `행복한 사람은 저렇게 좋은 집을 링컨 같은 자가용차를 가지고 사는 사람이다’ 하는 식으로 설명해야 납득한다는 것입니다. 행복 그 자체만 가지고는 아무리 설명을 해도 모른다는 것입니다. 이들에게는 하나님이라는 관념을 집어 넣을 도리가 없습니다. 영계라는 관념을 집어 넣을 도리가 없습니다. 이런 것은 실질적인 것을 가지고 설명할 수 없는 것입니다.

그러나 동양사상을 중심삼아 가지고 보면 단어 하나에도 이념이 들어 있다는 것입니다. `사람’이라는 것도 풀이해 보면 마음은 하늘을 상징하는 것이요, 몸은 땅을 상징하는 것입니다. 전부 다 이런 식이기 때문에 이것을 서구사람들은 이해할 도리가 없다는 것입니다. 어떤 유명한 학자가 주역을 연구해 가지고 번역을 했는데 그 서문에 `내가 번역을 하긴 했지만 나 자신도 잘 모르는 이 책을 번역했다’고 했답니다. 설명의 근거를 잡을래야 잡을 수 없다는 것입니다. 이런 내용으로 볼 때 하나님은 서구 사람들 앞에 가까이 갈래야 가까이 갈 수 없다는 것입니다.

나무의 잎이 뿌리를 알 수 없는 것입니다. 잎이 뿌리를 알 수 있어요? 아무리 알려고 해도 잎밖에 모른다는 것입니다. 뿌리가 `야 잎아, 너는 누구를 닮았니? 뿌리를 닮았지?’라고 한다면 믿겠습니까? `내가 잎을 닮았지 뿌리는 왜 닮아? 생김생김이 틀린데’라고 한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동양사상은 그렇지가 않다는 것입니다. 잎보다도 뿌리를 더 중요시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극과 극이 지금 열매맺었다는 것입니다. 동양사상은 지금까지 사상을 중심삼아 가지고 나왔는데 서구사상은 물질을 중심삼고 나오다 보니까 큰 산덩이도 잃어버리고 원자니 중성자니 하다가 맨 끝에 가서 눈이 멀개져 있다는 것입니다.

이것을 어떻게 깨워서 돌이키느냐? 이것을 일깨우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할 것이냐? 채찍을 가해야 됩니다.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이 공산당을 중심삼고 채찍질하는 것도 일리가 있는 것입니다. 물질 물질하면서 물질을 중심삼고 모든 것을 들여다보니 물질주의에 공포를 느끼게 되어 아이쿠 이젠 물질이 싫다 하고 부정하는 운동이 벌어질 것입니다. 이렇게 생각할 때에 세계적으로 공산당이 한때 득세하는 것은 그런 것을 채찍질 하기 위해서라는 것입니다. 사실 그렇습니다.

미국 사람이 맨 처음에 한국에 왔을 때 한국 사람들을 사람같이 여겼는 줄 알아요? 그러나 점점 떨어져 내려가니 너희나 우리나 피장파장이라는 것입니다. 비슷비슷하다는 것입니다. 유엔이라는 기관 안에서는 아무리 큰 미국이나 아프리카의 지극히 작은 나라나 마찬가지라는 것입니다. 아무리 큰소리를 했댔자 유엔총회에서는 한 표밖에 안 된다는 것입니다. 이런 기구가 나왔기 때문에 인간의 주체성을 강조할 수 있게 된 것입니다. 민족의 주체성과 국가의 주체성의 동등권을 취할 수 있는 시대권을 만들어 놓았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미국 사람들이 `물질’하게 되면 진저리가 나게끔 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미국 사람들이 사회주의는 싫어하지만 그 사회주의에 연결된 물질주의는 싫어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사회주의를 나쁘다고 하는데 사회주의라는 것은 물질을 위주로 하는 주의입니다. 사회주의의 근본 철학인 유물사상이라는 것을 싫어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결과는 싫어하지만 그 원인은 싫어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이것을 어떻게 싫어하게 만드느냐? 선생님의 미국 작전이 그것입니다. 공산주의의 사회제도가 나쁜 것이 아니라 공산주의 이론이 나쁜 것입니다. 이런 의미에서 우리가 승공운동을 하는 것입니다. 이것을 적중시키기 위해서 이 작전을 해 나오고 있는 것입니다. 이런 것을 볼 때 사탄이 참 최대의 노력을 했구나 하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지금까지 용하게 끌고 나와 가지고 세계를 지도하는 선진국가까지도, 소위 국민의 3분의 2가 기독교 신앙을 갖고 있는 미국 사회가 실용주의라는 물질을 위주한 주의 앞에 눈이 멀개지게 만들어 놓았다는 것입니다.

27-200
신본주의시대로 돌아가자
그러면 어디로 가야 할 것이냐? 다시 돌아가야 된다는 것입니다. 살 길은 그 길밖에 없다는 거예요. 살겠다고 허위적거려 봐야 안 됩니다. 돌아가야 됩니다. 돌아가야 돼요. 그렇기 때문에 14세기 말에 나타난 문예 부흥, 인본주의 사상을 박차고 신본주의시대로 돌아가야 된다는 것입니다. 여기에서 통일교회가 동양과 서구 문화권을 연결하는 교량의 사명을 해야 됩니다. 통일교회에는 그럴 수 있는 내용이 충분히 있습니다. 그런 때가 기필코 올 것을 대비하여 우리는 주체성을 갖춰 나가야 합니다. 민족과 국가와 세계 앞에 전개될 수 있는 모체를 만들어야 되겠습니다. 우리가 활동 체제를 강화해야 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는 것입니다.

이런 관점에서 볼 때 그들의 사고방식은 우리의 사고방식과 먼 거리에 있습니다. 그러니 오늘 우리가 한국백성으로 태어난 것이, 동양의 한 국가 체제권내에 태어난 것이 불행이 아니라 지극한 행복이라는 것을 여러분은 알아야 합니다.

옛날 소크라테스와 같은 사람들을 한번 생각해 보십시오. 그들은 당시에 잘 먹고 잘살던 사람이 아닙니다. 거리의 행인들로부터 조롱을 받고 살던 사람들입니다. 그렇지만 그들은 오늘날의 세계 문화권을 창설한 조상이 되었습니다. 그들이 잘 먹고 잘 입은 것이 아닙니다. 그 모습은 초췌하고 처참했지만 그들의 사상 체계가 역사를 지배했고, 후대 사람들의 추모를 받은 것을 생각하게 될 때 우리는 현실적인 것만 보고서 낙망하지 말자는 것입니다. 다가오는 시련과 고통이 아무리 크다 하더라도 그것은 후대 역사의 영광과 더불어 빛날 수 있는 하나의 원천이 되고 힘의 맥박으로 남아진다는 것입니다.

이것을 생각할 때 이것은 엄청난 사실이라는 것입니다. 이것을 싫다고 하는 사람은 지극히 불행한 사람이요, 이것을 좋다고 하는 사람은 지극히 행복한 사람입니다. 이것을 여러분은 알아야 됩니다.

그러면 이런 관점에서 우리의 가치를 어디에 세울 것이냐? 또 가치를 세워서 어떻게 살 것이냐? 이런 문제를 놓고 볼 때, 세계적으로 극복해야할 난문제를 타개하는데 있어서 가치를 발휘할 수 있는 사람은 반드시 후대에 있어서 역사와 더불어 살고, 세계와 더불어 사는 사람이 될 것입니다. 선생님은 여러분을 그러한 인격자로 만들기 위해서 엄동설한에 맨발이라 하더라도 무정하게 내몰아야 되겠습니다. 그러한 모든 어려운 환경을 타개시키기 위해서는 무자비하게 내몰아야 되겠습니다.

선생님이 지금까지 닦아 놓은 모든 기반을 고스란히 상속받으려면 그런 탕감의 과정을 거쳐야 한다는 것입니다. 여기에서 통일교인으로서의 참된 가치의 모습이 결정된다는 것입니다.

이제 1969년도와 1970년도가 교차되는 시기에 들어왔습니다. 교차될 때에는 반드시 탕감조건을 제시하고 넘어가야 한다는 것을 알고 거국적인 무대를 중심삼아 다시 출발해야 되겠습니다. 여러분이 복귀역사를 배워서 알겠지만 제1차 아담이 실패함으로 말미암아 제2차 아담이 와서 이것을 수습하려고 했습니다. 그런데 제2차 아담도 실패했기 때문에 제3차 아담이 등장해야 하는데 이분이 재림주입니다. 이와 같이 여러분들도 1960년대에 실패한 것을 복귀해야 됩니다.

27-202
금후에 여러분이 해야 할 책임
이번에 가정들을 모아 가지고 옛날에 전도했던 그 지역으로 다시 보내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는 것을 알아야 되겠습니다. 알겠어요? 제2차적으로 다가오는 시련 무대는 옛날과 다를 것입니다. 옛날에는 핍박의 화살이 몰려왔지만 이제 그 반대의 결과가 나타날 것입니다. 옛날에 여러분을 반대했던 사람들은 여러분과 원수가 되었고, 또 하늘에 한을 맺히게 했습니다. 그러나 그들이 여러분을 환영하며 `과거에는 내가 잘못했습니다’라고 하면서 하나님 앞에 맺히게 했던 인연을 풀어 놓고 나서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렇게 되면 통일교회의 새로운 운세의 때가 올것입니다. 이것이 선생님의 관측입니다. 알겠어요? 「예」

그래서 이것을 탕감원칙에 의해서 거국적으로 풀어 줘야 되겠습니다. 그래서 원수되었던 사람을 찾아가서 `잘 사십니까? 어떻게 지냈소? 옛날에 핍박했는데 오늘 지금 핍박하시겠습니까?’ 하고 겸손한 자세로 방문해 가지고 맺힌 것을 풀어 놓고 그들 앞에 정성을 더 들여 주고, 그들에게 통일교회 사상을 소개해 주고 돌아와야 할 책임이 있습니다. 이것이 1960년대에서 1970년대로 넘어가면서 해야 할 책임이라는 것을 여러분이 알아야 되겠습니다.

여기에서 작금의 우리의 가치 문제가 등장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 시련을 피할 것이 아니라 시련을 고스란히 받아들여 제2의 가치를 재인식해야 됩니다. 다시 말하면 예수님이 과거의 시련 고통을 넘어 부활의 가치를 재인식하던 것과 마찬가지로 여러분도 새로운 제2의 가치를 재인식해 가지고 1970년대를 맞이하자는 것입니다.

이것이 여러분들에게 내리는 선생님의 명령입니다. 그렇게 알고 무한한 가치를 지닐 수 있는 책임자가 되기를 바랍니다. 아시겠지요? 「예」 시련 고통을 도피해 가지 말라는 것입니다. 고스란히 맞으면서 직행하라는 것입니다.

27-203
기 도
사람이 제아무리 발버둥친다 하더라도 아버지의 품에서 떠날 수 없는 것이요, 사탄의 품에 안긴 아들딸은 기필코 아버지의 아들이 되고 딸이 되어야 되겠습니다. 여기의 결정권은 아버지께 있는 것이 아니라 우리 자신에게 있다는 것을 원리는 잘 가르쳐 주고 있습니다.

인간이 5퍼센트의 책임을 다 하느냐 못 하느냐에 따라 오늘 섭리의 뜻을 100퍼센트 세우느냐 못 세우느냐 하는 문제가 좌우된다는 사실을 원리는 여실히, 확실히, 분명히 가르쳐 주었습니다.

오늘날 이 민족은 세계의 고아와 같은 입장에 선 것을 알고 있습니다. 북으로는 북괴가 있고 소련이 있고 중공이 있으며, 동으로는 일본이 있사옵니다. 일본은 내일의 운명을 판가리하는 길에 있어서 적화되느냐 민주주의로 돌아가느냐 하는 문제를 중심삼고 해산의 고통을 겪고 있다는 사실을 저희가 알고 있습니다.

아버님이여, 1970년대를 중심삼고 통일교회 무리들은 선두에 섰습니다. 피어린 투쟁길로 지금 가고 있습니다. 아버지여, 대한민국에서 핍박받던 통일교회가 일본 사회에서 문제가 되고 있고 그 국가가 주시하는 단체가 되었다는 사실을 기억하게 될 때, 이것이 대한민국의 자랑이라면 자랑일 것입니다. 이 민족은 지금까지 불쌍한 민족으로 아시아에서 역량을 나타내지 못하고 하늘 대신 비난을 받으며 천주의 운세를 짊어지고 나왔습니다. 이런 무리들을 아버지께서는 잊지 않으시고 대신 찾아오셔서 거슬러 올라갈 수 있는 시대적 환경을 만들어 주셨사오매 그 수고 앞에 저희들은 진심으로 감사드리옵니다.

이제 자세를 갖추어 아버지 앞에 감사드려야 할 1960년대는 저희 앞에서 사라져 가고 있습니다. 이 1960년대의 끝을 밟고 1970년대의 새로운 출발의 한 날을 맞이해야 할 과정에 있습니다. 오늘이 1969년 12월 14일이기 때문에 1960년대는 이제 17일을 남기고 있습니다. 이 기간에 저희 자신들을 다시 한번 명시해야 되겠습니다.

저희가 지금까지 아버지의 부름을 받아서 역사적인 운명을 책임지고 허덕이며 나온 과거의 10년이 오늘 이 시점과 다른 것을 알았습니다. 통일교회에 들어오기 전의 나 자신과 통일교회에 들어온 후의 나 자신을 두고 볼 때, 현실이 과거 앞에 비판을 받는다면 그것은 부끄러운 것이요, 내려가는 것이요, 그 세계와 관계없이 먼 거리에 떨어지는 것이옵니다. 저희들은 목자를 잃어버린 한 마리의 양이 아니라 아흔 아홉마리 양의 무리권내에 있는 것을 알게 하여 주시옵소서. 이런 시점에 놓인 것을 알아야만 되겠습니다.

`작금의 우리의 가치’라고 하였으니 옛날에 뜻을 대하던 모습보다 오늘 뜻을 대하는 저희 모습이 발전되어야 될 텐데 그러지 못하고 퇴화하였다면 이는 불쌍한 자리옵니다. 여기에서 다시 한번 용솟음쳐야 되겠습니다. 다시 한번 아버지의 옷깃을 붙들고 저희들이 아버지의 그 깊은 심정의 줄기를 파고들어가야 되겠습니다.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 하는 최후의 장면에서 하나님이 얼굴을 돌리시어 예수님의 죽음을 피하셨을 때, 예수님이 `아바 아버지여 내 생명을 받으시옵소서’ 했던 것과 마찬가지로 최후의 결판을 지어야 할 사명이 통일교단에 있습니다. 통일교단의 십자가의 과정이 여기에 남아 있습니다. 통일교단이 새로이 부활할 수 있는 한 시점이 저희 목전에 다가오고 있습니다.

열두 제자를 앞에 놓고 최후의 만찬을 베풀면서 떡을 나누어 주실 때 그 자리에 원수가 있는 것을 섭섭해하던 예수님의 사정을 알아야 되겠사옵고, 그 원수와 마찬가지의 입장에 서는 저희들이 되어서는 안 되겠습니다. 원수도 그 승리의 영광을 찬양하고 굴복하게 하는 자리에 서야 되겠습니다. 모든 만물도 그 모습을 보고 장하신 하나님이요, 기쁘신 하나님이요, 영광의 하나님이라고 찬양할 수 있는 승리의 내 자체, 내 입, 내 세포를 갖추어 가지고 영광의 모습으로 아버지 앞에 노래하고 춤출 수 있는 그날을 가져야 되겠습니다.

죽어서 부활을 이루는 것이 아니라 살아서 부활을 이루어야 되겠습니다. 죽어서 원수의 한을 품고 가는 것이 아니라 살아서 원한을 풀고 가는 것이 통일의 길이기 때문에 원수시 당하는 그 자리에서도 지금 이 자리까지 나왔습니다.

저희가 고개를 들고 보면 저희 앞에는 최후로 넘어가야 할 한 문턱이 남아 있습니다. 이것을 박차고 나서는 날에는 광명한 세계가 저희 앞 길에 마련되어 있는 것을 바라보고 오늘 현시점에서 부딪치는 이 시련의 장벽을 저희들이 맞이하여 힘차게 넘어가게 하여 주시옵소서. 죽음 이상의 힘을 가지고 부딪치게 될 때 그것은 무찔러진다는 사실을 확실히 알고 가야 되겠습니다. 이러한 결의를 다시 할 수 있는 이 시간이 되게 하여 주시옵소서.

이제 저희들이 오늘까지 3주일 남긴 채 안식일을 맞이하였습니다. 오늘을 기점으로 하여 남아진 기간에 새로운 결의를 하고 1970년대를 맞을 수 있는 당신의 자녀들이 되게 하여 주시옵기를 간절히 바라옵고 원하옵니다.

오늘 새로운 계획을 중심삼고 앞으로 가야 할 책임, 새로운 역사적인 일을 결심하고 단행해야 할 책임이 저희들에게 남아 있사오니, 그 길 그 사명을 달게 받고 제2차 해원성사의 노정을 향하여 나서야 되겠사옵니다. 지금까지 아버지를 섭섭하게 했던 그 마음의 먹구름을 헤쳐 버리고 제자신의 면목없던 부끄러운 자세를 떨쳐 버리고 내일의 희망을 향해 가는 모습, 아버지께서 소원하고 아버지께서 동조하고 아버지의 역사 가운데서 아버님의 환희의 환영을 받는 자리에서 민족 앞에 세계 앞에 설 수 있는 승리의 모습, 혹은 참된 가치를 추구하는 통일의 무리들이 되게 하여 주옵길 간절히 부탁드리고 원하옵니다.

전국에 널려 있는 자녀들과 세계에 널려 있는 자녀들을 기억하여 주시옵소서. 일본에서 싸우고 있는 당신의 자녀들을 기억하여 주시옵고, 아시아의 대회를 중심삼고 명년에 계획하고 있는 저희 계획 계획들이 아버지의 보호하시는 뜻 가운데서 일취월장하게 허락하여 주옵길 간절히 부탁드리고 원하옵니다. 오늘의 말씀과 더불어 극복의 신념을 가하여 내일의 승리의 모습을 갖추기 위해 힘차게 출발할 수 있는 자녀들 되게 하여 주시옵소서. 참부모의 이름 받들어 아뢰었사옵나이다. 아멘.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