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7-136 to 27-161: 수욕의 상처

수욕의 상처
1969.12.07 (일), 한국 전본부교회

27-136
수욕의 상처
[기 도]

사랑하는 아버님, 1969년의 마지막 달의 첫 주일을 맞이한 이 아침에 당신의 자비와 사랑을 같이하여 주시옵소서. 또한, 이 시간에 당신의 마음과 저희의 마음이 가일층 가까와지게 허락하여 주시옵소서.

높고 귀하고 거룩하신 은사의 주체이신 당신 앞에 낮고 천하고 비참한 모습을 가진 저희들이 이렇듯 고개 숙였사오니, 당신의 심정의 그늘 아래 품어 주시기를 바라옵니다.

너무도 고요한 가운데 당신의 생명의 맥박이 저희의 움직이는 모든 기관에 작용하는 것을 저희들이 느끼게 하여 주시옵고, 박동하는 그 고동소리 가운데에서 아버지의 살아 계심을 체휼할 수 있게 하여 주시옵소서. 그 가운데 당신의 부르심과 당신과의 인연이 약동하는 것을 느끼고, 거룩하신 아버지의 모습을 느껴 지극히 거룩하게 되기를 바라는 저희들이 되게 하여 주시옵소서.

저희들을 불러 놓고 책망하고 싶으셨던 아버지의 간절한 마음을 저희들이 느끼게 허락하여 주시옵소서. 저희들은 아버지께서 저희들을 찾으신 기쁨에 취하시어 저희에게 모든 사연을 털어놓으실 수 있는 시간을 고대하옵니다.

마음에 그리던 당신의 성상을 저희들이 뵙게 될 때에, 모셔야 할 자세와 예법을 알아 갖추고 준비하는 당신의 자녀들이 되게 하여 주시옵소서.

저희들이 이렇게 그리워하는 아버지와 상봉하는 이 시간에 어떤 모습으로 아버지를 대할 것인가, 무슨 말로 아버지를 위로해 드릴 것이며, 어떤 내용으로 아버지를 찬양할 것인가 하는 것을 늘 생각하여 준비하는 모습들이 되게 하여 주시옵소서.

새로운 길을 갈 때에는 새로운 각오를 하는 것이 인간의 보편적인 태도이옵니다. 따라서, 아버지를 새로이 모실 때에 새로운 각오를 갖는 것이 아버지 앞에 저희들이 취해야 할 태도인 것을 생각하옵니다. 저희들은 당신 앞에 부끄러운 모습이옵니까, 당신 앞에 기쁨을 드리는 모습이옵니까? 이 한계선을 오락가락하는 저희들은 하늘 앞에 어떻게 면목을 세우고 어떻게 처신할 것인지, 또한 어떠한 모습이 될 것인지 염려하지 않을 수 없사옵니다.

저희들은 아버지를 대하기에 부끄러운 자신인 것을 폭로하지 않을 수 없고, 용서의 손길을 바라지 않을 수 없는 입장에서 당신을 만나 뵈어서는 안 되겠사옵니다. 아담이 그런 역사의 기원을 마련함으로 말미암아 아버지께 숱한 짐을 지워 드렸고, 그것이 아버지로 하여금 숱한 원한의 역사의 고빗길을 걸어오시게 한 것을 안 저희들은 절대로 그러한 자리에서 아버지를 만나서는 아니 되겠사옵니다. 아버지께서 간절히 부르시는, 아버지께서 기뻐하실 수 있는, 아버지께서 품고 싶어하실 수 있는 마음과 모습을 갖추어서 아버지와 상봉해야 되겠사오니, 그럴 수 있는 저희 자신이 되게 하여 주시옵소서.

아버님이여! 당신의 거룩하신 생명력이 저희 자체에게 연결되게 하여 주시옵고, 당신의 권위 있는 모습이 저희 자신과 일체가 되게 하여 주시옵시며, 원수를 대해 참아내시는 아버지의 분한 마음이 저희의 마음 위에 옮겨지게 하여 주시옵소서. 타락의 인연으로 말미암아 잃어버린 자녀를 찾아오시면서 최후의 승리를 바라고 허덕여 나오신 아버지의 발걸음과 그 심정이 저희들의 마음에 체휼되게 허락하여 주시옵소서. 아버지께서 저희를 아들이요 딸이라 부를 수 있는 부모와 자식으로서의 인연을 넘어서, 진실로 아버지와 하나되어 저희들이 아버지의 표상으로 나타날 수 있는 그 자리를 그리워하게 하여 주시옵기를 간절히 바라옵고 원하옵나이다.

아버님, 이 아침에 남한 각지에 널려 있는 자녀들이 어떤 모습으로 아버지 앞에 부복하였나이까? 그 마음이 어디를 향하고 있사오며, 그 몸이 어디를 향하여 달리고 있는지를 당신이 살피시옵소서. 당신의 마음과 일치된 기준, 혹은 당신께서 원하시는 그 기준을 바라보고 그 기준과 일치되기 위해 그 곳을 향하는 모습들이 되어야 하겠습니다. 책임지고 있는 그곳에서 새로운 행복의 터전과 아버지께서 원하시는 새로운 심정의 동산과 자유의 동산을 그리워하면서 이 시간을 대하게 하여 주시옵소서. 그리하여 언제든지 아버지께서 찾아가셨을 때, 자유스런 환경에서 아버지의 몸처럼 아버지와 같이 움직이고 통할 수 있는 모습이 되게 하여 주옵기를 간절히 바라옵니다.

아버지와 자녀는 일체라고 하셨사오매, 당신은 마음인 고로 저희들은 몸이 되어서 저희들이 행실이 당신의 기쁨으로 연결되어야 할 것을 알고 있사오니, 이 자리가 그럴 수 있는 자리가 되게 허락하여 주옵기를 간절히 바라옵고 원하옵니다.

암흑 같은 이 땅이지만, 저희들이 당신을 향하여 아버지라고 부를 수 있는 새로운 모습이 될 때 비로소 이 땅이 아버지께서 바라시는 소원의 곳이요, 소원의 동산이 아니겠습니까? 그러한 아들딸의 모습을 바라보는 것이 아버지의 소원이 아니옵니까? 그러한 소원의 땅에서 온 몸과 마음으로 아들딸을 품고 사랑하고 싶고, 또한 세계를 그렇게 사랑하고 싶지 않으셨습니까? 그런 아버지의 사랑의 마음이 저희들 소원의 동산에 어릴 것을 아옵니다. 그 가운데에서 당신께 경배드리고, 당신의 은혜를 부르짖고, 당신의 승리를 흠모할 수 있는 모습이 나타나기를 얼마나 고대하셨사옵니까? 또한 당신께서 무한히 무한히 찬양하고 싶고, 무한히 무한히 칭찬하고 싶고, 온 세계의 모든 전체를 상속해 주고 싶은 사랑의 아들딸이 나타나기를 얼마나 고대하셨사옵니까?

그러한 모습이 되기에는 너무나 부족하다는 것을 이 시간 느끼게 되옵니다. 하오니 아버지여, 당신의 넓으신 심정과 긍휼하신 자비의 손길로 저희를 품으시어서 당신의 높고 깊은 그 오묘한 이치를 느끼게 하여 주시옵소서. 또한 그 무엇으로도 굴복시킬 수 없는 강한 힘으로써 저희를 얽어 주시옵소서. 간절히 바라옵고 원하옵나이다.

아버지, 이 시간 저희 각자를 품어 주시옵소서. 어려움 가운데에 처할때 당신의 능력으로 저희를 자각시켜 주시옵소서. 그리하여 내일의 소망의 세계 앞에 부끄럽지 않는 아들딸이 되게 하여 주시옵소서.

원수들 앞에 강하고 담대한 용자의 모습을 갖추기 위하여, 이 땅 위에 천국의 이념을 세우기 위해 이 길을 나선 저희들에게, 아버지, 같이하여 주시옵소서. 개척자로서의 사명과 아버지의 아들딸로서의 사명을 다하기 위해 갖추어야 할 모든 것을 저희들이 갖출 수 있게 하여 주시옵기를 간절히 바라옵고 원하옵니다.

이 아침 이곳을 바라보며 기도하는 자들이 있사옵니까? 그들에게 복을 베풀어 주시옵소서. 열 번 부르면 백 번 염려하시는 아버지의 사랑의 마음에 취할 수 있고, 아버지의 참되신 심정 가운데에 사로잡힐 수 있게 하여 주시옵소서. 그리하여 참된 인연 가운데에서 당신을 아버지라 부를 수 있는 그 자리까지 가는 데 있어서, 아버지, 같이하여 주시옵기를 간절히 바라옵고 원하옵나이다.

천한 몸들이 당신의 존전에 부복하여 부끄러움을 느끼오니, 이들이 당신의 고요한 심정 가운데 흘러드는 생명의 힘을 흠모하면서, 그것을 찬양하고 그것을 자극제로 삼아 생명의 인연을 맺게 하여 주시옵소서. 그리하여 `그렇다’ 할 수 있는 기쁨의 내용, 승리의 요건을 갖출 수 있는 오늘 이 시간이 되게 허락하여 주시옵기를 간절히 바라옵고 원하옵나이다.

이제 60년대의 마지막 달, 얼마 남지 않은 짧은 날들을 저희들은 최후의 정성어린 심정으로 넘겨야만 되겠사옵니다. 60년대를 맞이하여 지금까지 달려온 저희들, 이제 최후의 종착점을 향하여 달리고 있는 이 순간, 저희들이 짊어진 모든 짐과 저희들이 갖추고 있는 형상이 어떤가를 살펴야 되겠습니다. 그리하여 아버지 앞에 누추하고 부끄러울 수 있는 내용이 있다면 그것을 제거하여 아버지께서 염려해 주시고, 아버지께서 동정해 주실 수 있는 모습들이 되어야 하겠사옵니다.

하늘을 위하여 나오던 중에 당해야 했던 억울한 사연과, 하늘을 위하여 싸우다 남긴 상처와 흠을 품고 아버지의 거룩하신 모습에 화할 수 있는 참신한 아들딸의 모습이 되기를 저희들은 원하옵니다. 아버지의 품에 안기기 위해 아버지께 달려갈 줄 아는 아들딸이 될 것을 저희들은 고대하고 있사옵니다. 하오니, 저희들이 아버지 앞에 자랑할 수 있는 내용을 갖출 수 있게 하여 주시옵고, 부족한 저희들이 생명의 권한을 가지고 심판의 행사를 대행할 수 있는 아들딸로 허락하여 주옵기를 간절히 바라옵고 원하옵나이다.

아버님이시여! 세계에 널려 있는 통일의 무리들을 기억하여 주시옵소서. 또한 앞으로 세계에 보낼 당신의 사랑하는 자녀들을 더더욱 기억하여 주시옵소서. 영계에 있는 수많은 선지선열들과 땅 위에 있는 후손들을 규합하시어서, 40개 국에 택정한 120개 성지를 중심삼고 세계 인류가 아버지의 품에 품길 수 있는 그날이 어서 속히 오게 하여 주시옵기를 간절히 바라옵고 원하옵나이다.

아버지, 한국을 그리워하는 당신의 자녀들의 애절한 소리를 들어 주시옵소서. 간곡한 심정으로 이 땅을 그리워하고 있는 무리 위에 같이하여 주시옵소서. 하늘에 의지하여 이곳을 마음으로 흠모하고 눈물로 그리워하는 그들의 고충을 저희가 알게 하여 주시옵소서. 여기에 처하고 싶어하고, 여기를 와 보고 싶어하는 그들의 간절한 마음을 저희들은 알아야 되겠습니다. 이러한 자리에 참석한 저희들의 존귀한 가치를 자신들이 느끼게 하여 주시옵소서.

수많은 땅과 수많은 사람이 있었사온데 그 가운데에서 이곳을 찾아오시기 위해, 아버지, 얼마나 수고하셨습니까? 얼마나 억울하셨습니까? 또한 얼마나 딱하고 얼마나 고독하셨으며, 얼마나 비참하셨습니까? 저희들은 이자리에서 아버지의 이름을 부를 수 있는 자녀인 것을 높이 평가해야 되겠습니다.

아버지, 저희들을 믿으시고 이 자리를 찾아오셔서 여기에 머무르시고 여기에 짐을 풀고자 하신 아버지의 심정을 아오니, 이 자리를 찾아와 기뻐하시고, 또한 여기를 찾아와 눈물을 흘리는 그들 위에 만복을 베풀어 주시옵기를 바라옵니다.

천번 만번 빚을 지우고도 그것을 기억치 않고 잊어버리는 것이 하늘 아버지의 심정이며 부모의 심정인 것을 아옵니다. 그렇게 수고해 나오신 아버지시온데, 그러한 아버지의 눈물을 막아 주는 아들은 한 명도 없었으니, 아버지, 얼마나 얼마나 분통하고 억울하셨사옵니까? 그러나 아버지께서는 아들딸의 눈물을 막아 주기 위하여 아버지의 입장과 위신마저 버리셨사옵니다. 하오니, 당신의 분통하고 억울한 그 사정을 알고 위로해 드리는 아들딸이 되어야 할 저희들인 것을 확실히 알게 하여 주시옵소서.

아무리 이 땅 위에 서러움이 있다고 하여도, 아버지께서 당하신 그 이상의 서러움은 없다는 것을 저희들은 온 천지와 함께 느껴야 되겠습니다. 아무리 불쌍한 사람이 있다고 해도 아버지 이상 불쌍한 사람이 없다는 것을 알고, 저희들은 하늘땅에 사무치게 통곡해야 되겠습니다. 또한 억울하고 분하고 비참한 모습이 있다고 할진대는, 그것이 아버지의 모습이라는 것을 저희들은 알아야 되겠습니다.

슬픔의 역사 가운데 있을 수 없는 비참한 자리에 계신 아버지, 그런 자리에 계셔서는 안 될 아버지께서 그러한 자리에 계실 수밖에 없었던 것이 누구 때문인가를 생각할 때 그것은 바로 `나’ 때문이며, 내가 살고 있는 내 가정 내 종족 내 민족 내 나라 때문인 것을 느끼게 되옵니다. 하오니, 저희들로 하여금 그러한 사실을 생각하고 천년사에 쌓인 모든 한을 짊어지고 아버지 앞에 눈물로 호소하여야 될 자신들인 것을 발견하게 하여 주시옵소서. 아버님, 간절히 바라옵고 원하옵니다.

사람에게는 탄생의 한때가 있음과 동시에 기필코 최후의 운명의 한시간이 있어 그때가 점점 다가온다는 것을 알고 있사옵니다. 호흡과 맥박이 시작되어 이 땅 위에 고고지성을 울리는 그날부터 슬프고 한 맺힌 곡절의 역사를 더듬어 가야 할 인생행로에 있어, 가야 할 목적과 모셔야 할 분을 알지 못하고 사는 사람들과는 달리, 저희는 태어나기를 아버지를 위하여 태어났사오니 살기도 아버지를 위하여 살고, 가는 것도 아버지를 위하여 가야 하겠사옵니다.

이 땅 위에 거룩하신 당신의 모습을 모셔 놓고 그 존재를 거룩하다 할 수 있고, 그 사는 생활 자체를 거룩하다 할 수 있게 되는 것이 저희가 바라보는 최후의 소망이 아니겠습니까? 그럴 수 있는 아버지의 아들딸들이 될 수 있게 하여 주시옵기를 간절히 바라옵니다.

아버지는 때때로 저희에게 심정의말씀을 주십니다. 당신과의 인연은 뗄래야 뗄 수 없고, 슬픔의 역사에서 만났고, 같은 사정에 놓여 있는 것을 저희들이 알게 허락하여 주시옵고, 하나의 이념으로 인연된 저희들 각자인 것을 알게 하여 주시옵기를 간절히 바라옵고 원하옵나이다.

슬픈 아버지의 모습 앞에, 불쌍하신 아버지의 모습 앞에 통곡하면서 그 아버지를 위로해 드릴 줄 아는 자녀들이 되게 하여 주시옵소서. 어서 빨리 슬픈 자리로부터, 한의 눈물로부터 당신을 해원해 드릴 수 있는 아들딸이 되게 허락하여 주시옵소서. 그러기 위해서는 아버지께서 저희를 구원의 은사로 사로 잡으시어 저희가 생명의 은혜 가운데에서 아버지 앞에 맹세드릴수 있는 자녀들 되게 키워 주시옵시길, 아버지, 간절히 바라옵고 원하옵나이다.

남아진 이달을 아버지께 맡기옵니다. 아버지, 한 많았던 1960년대를 보내야 할 때가 되어 옵니다. 1970년대를 맞이하는 이 경계선에서 자기자신을 조명해 보고, 아버지 앞에 부끄러운 모습이 아닐 효자의 모습으로 힘차게 새해를 맞이할 준비를 하게 하여 주옵길 간절히 바라옵니다.

과거의 모든 것을 잊어버리고, 새로운 시대의 새뜻을 중심삼고 새로운 용자의 모습을 갖추어, 당신의 새로운 아들딸로서의 이름을 빛내면서 1970년대를 향할 수 있는 저희들이 되게 하여 주시옵소서. 남아진 시간을 당신께서 지켜 주시옵기를 부탁드리면서, 모든 말씀 참부모의 이름으로 아뢰었사옵나이다. 아멘.

27-142
말 씀
이 땅에 살고 있는 사람들은 행복한 생활만을 하지 못하고 있는 것을 우리는 알고 있고, 또한 직접 체험하고 있습니다. 개인이 그러하듯이 가정도 역시 그러하고, 민족도 국가도 그러하고, 오늘날 세계의 정세를 두고 봐도 역시 그러하다는 사실을 우리는 압니다. 때문에, 오늘날 전인류는 불행의 여건을 가려 나가지 않으면 안 될 생활무대에서 살아가고 있습니다. 과거의 역사도 그렇게 흘러왔고, 또 현재도 그러하고, 미래의 역사 또한 그런 환경으로 연결되어 계속될 것을 우리는 알고 있습니다.

27-142
모든 것의 중심 모체로서의 ‘나’
그런데 이런 환경 속에서 한 생명을 지니고 있는 우리들 개인이 문제가 되는 것입니다. 슬픔도 개인을 중심삼고 시작됨과 동시에, 개인을 중심삼고 끝나고 있습니다. 이것이 현시대를 살아가는 우리 인간의 운명인 것입니다.

한 국가의 슬픔을 그 국가 자체로서는 해결지을 수 없습니다. 그러한 국가의 슬픔을 해결짓기 위해서는 그 국가의 국민 한 사람 한 사람이 그 자체내에서 슬픔을 해결할 수 있는 어떤 동기와 인연을 모색해야 합니다. 그러지 않고서는 그 국가 전체가 불행이라든가, 악의 여건에서 벗어날 도리가 없는 것입니다.

우리가 전세계의 행복을 추구한다 해도 그 행복이라고 하는 것이 전체를 중심삼고 일시에 다가올 수는 없는 것입니다. 세계의 행복이 이루어지기 전에 세계에 널려 살고 있는 개개인의 행복이 먼저 이 땅 위에 싹터야 합니다. 그리하여 이 땅에서 개개인의 행복이 열매 맺지 않는 한 세계의 행복이 이루어진다는 것은 불가능한 일입니다.

이러한 점들을 중심하고 볼 때, 오늘날 우리 개체 개체가 얼마나 중요한 입장에 있는가 하는 것을 알게 됩니다. 행복의 모체도 될 수 있고, 불행의 모체도 될 수 있는 두 경계선상에 우리 개체 개체들은 서 있는 것입니다. 이러한 개개인, 즉 우리들 개체 개체는 누구나 `나’만이 존재하는 것이 아닙니다. 나를 중심삼고 위로는 부모가 있고, 아래로는 자녀가 있으며, 좌우로는 형제들이 있는 것입니다. 또한 전후에는 민족이라는 것과 인류라고 하는 것이 있습니다.

그러면 어찌하여 내 한 개체가 이 모든 전체의 중심을 이루는 모체가 되느냐 하는 것을 두고 볼 때, 역사가 아무리 깊고 어떤 인연이 아무리 크다고 하더라도 나를 벗어난 역사요, 나를 벗어난 인연일 때는 나와 하등의 관계가 없는 것입니다. 세계에 널려 있는 수많은 민족, 혹은 수많은 인간이 행복하게, 혹은 현세계에서 나타나는 수많은 사회적인 현상이 아무리 행복한 것으로 나타난다고 하더라도, 그 행복이 나와 관계를 맺기 전에는 의미가 없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나’라는 존재는 전체와 구별된 어떤 특정한 입장에 있는 것이 아니라, 전체를 대신한 입장에 있다는 것을 알아야 됩니다.

그러므로 역사를 창조해 나가는 데 있어서도 바로 이 `나’를 참신한 모습으로 세워 나갈 때에 새로운 역사는 창조될 것입니다. 또 역사적으로 행복을 추구하는 생활에 있어서도 나 자신의 참신한 모습을 찾지 않으면 이 땅 위의 행복이나 평화라는 것이 나와 상관이 없는 것입니다. 이렇듯, 모든 것이 나를 중심삼고 연결되어 있고, 모든 것이 나로 말미암아 좌우된다는 것을 알아야 됩니다.

27-144
‘나’라는 존재의 중요성
그러면, 어찌하여 인간이 그런 입장에 서 있느냐? 그것은 온 인류의 생명의 근본이며 우주 전체의 중심이 되시는 절대자 하나님 앞에, 인간이 제일 가까운 상대적 입장에 있기 때문입니다. 즉, 인간이 하나밖에 없는 절대적인 주체 앞에 하나밖에 없는 대상의 입장으로 세워졌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오늘날 모든 행 불행의 요건이 인간인 내 개체에서, 즉 타락한 개체를 중심삼고 인연되지 않으면 안 된다는 말이 성립되는 것입니다.

때문에, 절대적인 주체자 앞에 상대적인 한 개체로부터 행복이 시작될 수 있는 것이요, 참이 형성될 수 있는 것이요, 자유도 희망도 승리도 혹은 영광이면 영광도 거기서부터 싹틀 수 있는 것입니다. 또, 그것으로 끝나는 것이 아닙니다. 전체 행복의 모체가 될 수 있고, 모든 희망의 요건의 중심이 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럴 수 있는 사람을 중심삼고 온 세계에 행복과 희망의 인연을 맺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러한 인연을 통하여서만이 이 땅 위에 새로운 행복이라든가 희망의 세계가 나타날 것입니다. 그러므로 절대자 앞에 모든 희망의 요건이 될 수 있는 참다운 자신의 모습을 갖추어 이 땅 위에 나타나지 않고는 어떠한 행복도 자신과 관계가 없는 것이요, 어떠한 소원도 자신과 관계가 없는 것입니다. 그냥 지나가 버리는 거예요.

역사의 흐름 앞에, 혹은 생명의 인연을 맺어 가는 인류의 생애 앞에 남겨질 수 있는 참신한 행복이라는 것은 기필코 절대자와 일치될 수 있는 한점을 갖고 나타나는 `나’로 말미암아서만이 출발될 수 있는 것입니다. 때문에, 그러한 ‘나’가 문제인 것입니다. 세계에는 30억 인류가 역사를 따라 흘러가고 있습니다. 우리는 그러한 가운데에서 주인의 자리에 설 수 있는 `나’가 되어야 합니다. 하나님이 인류 앞에 행복을 제시한다면 제시된 그 행복은 어떠한 중심을 통해서 시작될 것이어늘, 우리가 그 중심이 되어 우리로 말미암아 행복이 시작될 수 있도록 해야 되는 것입니다. 그런 중심의 자리에서 행복을 출발시킬 수 있는 그 `나’를 그리워해야 되겠습니다.

세계가 추구해 나가는 하나의 세계, 이상의 세계, 혹은 행복이니 선이니 하는 것들은 때에 따라서 변하는 것이 아닙니다. 역사를 주관할 수 있는 중심이 되고, 천지의 운세를 움직일 수 있는 중심의 자리에 선 `나’가 되면, 우리는 그때부터 영원하신 절대자와 영원히 함께 살 수 있는 것입니다. 사는 것도 절대자와 같이, 죽는 것도 절대자와 같이 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런 자리에 설 수 있는 `나’가 되기를 만인류는 바라지 않을 수 없는 것입니다.

오늘의 선한 사람은 그러한 기준을 하나의 포인트로 해서 자기 자신의 위치를 결정짓게 됩니다. 그러한 중심점과 자기와의 거리가 어떠한지, 각도가 어떠한지, 혹은 방향이 어떠한지에 따라서 민족 앞에 애국자요, 혹은 세계 앞에 위인이요, 혹은 인류 앞에 성현현철이다 하는 것이 결정된다는 것입니다.

그 하나의 중심을 기준으로 그 중심과 방향이 다른 역사한 이념은 우리가 바라는 소망의 것이 아닙니다. 그것은 우리가 요구하는 중심 앞에 거리가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그렇듯 중심 앞에 거리를 두고 있는 자리에 있고 완전함을 갖고 있지 않다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거리를 초월하여 그 중심과 거리가 없는 자리에서, 우리가 바라는 모든 것의 출발의 기원이 될 수 있는 자리에서의 참과 행복을 찾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 곳이 기필코 있어야만 될 것입니다.

오늘날 개체의 중심이 될 수 있는 그 한 자리는 개체의 중심인 동시에 가정의 중심이 아닐 수 없는 것입니다. 그러니 그러한 개체와 인연된 가정, 그러한 개체와 인연된 가정을 중심삼은 사회, 그런 개체와 인연된 사회를 중심삼은 국가, 그런 개체와 인연된 국가를 중심삼은 세계, 그 세계가 바로 우리가 가야 할 소망의 곳이요, 희망의 세계입니다. 그러한 세계가 왈 유토피아요 지상천국이 아니겠습니까?

우리 인류가 역사노정에서 완성된 최고의 참의 경지를 추구해 나가는 입장에서 헤아려 볼 때, 하나님이 인류를 중심삼고 가고 싶은 곳, 머물고 싶은 곳이 어디일 것이냐? 그 곳은 바로 그러한 중심이 세워져 있는 곳이 아니겠습니까?

그런 곳을 찾기 위한 중요한 방편이 종교입니다. 종교는 어디까지나 그런 곳을 향해 갈 수 있는 길을 찾기 위한 방편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그러니 그런 발판 위에서 종교와 나와의 관계를 잘 모색해야 합니다.

27-146
우리의 목적지
우리가 어떤 목적지를 향해 갈 때 생각하는 것과 그 목적지의 사정은 다릅니다. 우리가 바라보는 목적지는 그곳을 향해 가면서 우리가 생각하는 것과 그 내용이 다르다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목적지를 향해 갈 때의 내용을 목적지의 내용으로 삼겠다고 하는 사람이 있다면, 그는 어리석은 사람입니다. 그러니 지나가는 과정에서는 다른 새로운 기쁨의 내용을 갖고 새로운 모습으로 나타나야 합니다. 그것이 기독교적으로 말하면 부활입니다. 여기에서 우리 인간의 본연의 자세를 중심삼은 새로운 생명이 부활되어 나올 것이 아니겠습니까? 여러분은 이러한 기준을 중심삼고 생각해야 합니다.

오늘날 대한민국의 삼천만 민족 가운데 어느 누구의 마음에 그러한 기준이 세워지기 시작했느냐 할 때, 그것의 정도에 따라 세계 30억 인류의 마음에도 그러한 움직임의 형태가 나타날 것입니다. 만일에 그런 움직임이 전혀 없다면 인류는 절망인 것입니다. 아무리 하늘이 있다 해도 어쩔 수 없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할 수 없이 하나님이 중심을 떠난 자리에 머물러야 한다면 그 하나님은 너무나도 비참한 하나님입니다. 인류의 마음 가운데 머물러야 할 하나님이라면 중심을 떠난 그러한 비참한 자리에는 머물지 않아야 됩니다. 본연의 그 중심이 세워지기 전에는 우리 가운데 나타나지도 않으실 것입니다.

그러기에 도의 세계에서는 참신한 마음의 본원을 찾아 나가는 것입니다. 그곳은 인류 전체가 스며들 수 있는 곳이요, 존재세계 전체가 인연을 맺는데 있어서 동기가 될 수 있는 곳이요, 또한 하늘이 이상적인 무대로 삼을 수 있는 곳입니다.

인류도 그 자리를 찾고 있지만, 하나님도 역시 그 자리를 찾고 있을 것입니다. 인류가 모르는 가운데에서 그곳을 암중모색하고 있는 것처럼 하나님도 모르는 가운데에서 암중모색하실 것이냐? 아닙니다. 하나님도 모르는 가운데서 암중모색하신다면 우리가 그곳을 찾는다는 것은 불가능한 것입니다. 절대자 하나님도 그 자리를 암중모색하고 있다 할진대, 우리와 같이 약하고 부족한 사람들이 그곳을 찾는다는 것은 불가능하다는 것입니다. 애당초 절대적으로 불가능하다는 거예요. 하나님께서는 아는 가운데서 그곳을 향하고 계실 것이 틀림없습니다.

그러면 중심이 될 수 있는 사람, 또 그런 사람을 중심삼은 가정, 그러한 가정을 중심삼은 나라, 그러한 나라를 중심삼은 세계는 확정지어져 있어야 할 것이 아니겠느냐? 다시 말하면, 영원히 변할 수 없고, 영원히 상처를 입어서도 안 되고, 영원히 장해와 반대됨이 없는 자유스러운 경지에서 거룩과 영광을 드러낼 수 있는 참된 모습을 하나님은 원하시고 계실 것이 아니냐는 말입니다. 그러나 그러한 모습을 하나님은 혼자 지을 수가 없습니다. 그것을 짓는 데에는 사람이 상대로 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하나님이 비참하시지 않겠느냐 말입니다.

27-147
수욕의 상처를 씻기 위해서는
여러분, 오늘 말씀 제목이 `수욕의 상처’지요. `수욕(受辱)’이라는 말이 나왔는데, 욕이 뭐냐? 수치입니다, 수치. 이 수치가 뭐냐 하면, 참인데도 불구하고 참되지 못한 입장의 대우를 받으면 거기에서 수치가 생기는 것이요, 또한 거기에서 부끄러움이 생기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부끄러움과 수치가 정말 그렇다고 공인되면 그것은 욕이 되는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참이 참된 입장을 완전히 부정당하게 될 때 거기에 수욕이라는 말이 생기는 겁니다. 그러니 그 상태에서 벗어날래야 벗어날 수 없는 입장에 서게 될 때 그것은 무한한 고통이요, 무한한 불행이 되는 것입니다.

다시 예를 들어 말한다면, 자식이 부모 앞에 둘도 없는 효자로서 `효자의 도리는 바로 이런 것이다’ 할 정도로 효성을 다하여 그로 말미암아 부모가 기쁘고, 그럼으로 말미암아 부모와 자식이 완전히 하나될 수 있는 자리에 있는 사람이 효자입니다. 그런데 그런 기준에 있는 효자인데도 불구하고 효자가 아닌 것처럼 공격을 받고 참효자의 자리를 되물려야 할 입장에 놓이게 될 때, 그것은 무엇보다도 치욕이 되는 것입니다. 부모와 하나된 효자의 가치가 천만의 가치를 지니고 있다면 욕이 된 입장에 있는 사람의 수욕의 상처 역시 그만큼 깊은 것입니다.

만약 그것을 씻으려면 어떻게 해야 할 것이냐? 그 이상의 자리로 올라서야 합니다. 그 이상의 자리로 올라서는 데는 어떤 일이 벌어지느냐? 자식의 마음에 고개가 생기고, 부모의 마음에 고개가 생깁니다. 두 고개의 경계선이 생기는 것입니다. 그것도 두 경계선의 입장이 각각 다르게 나타납니다. 그러다가 두 경계선의 위치가 점점 멀어지게 되고, 그냥 두면 결국은 영원히 분립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럼, 어떻게 해야 이 경계선을 일치화시킬 수 있을 것이냐? 일치화만 시켜 가지고도 안 됩니다. 경계선을 일치화시키고, 그 고개를 넘어갈 수 있는 길을 모색해야 합니다. 그러지 않고는 본래의 상태로 복귀될 수 없습니다. 여러분 그렇지 않습니까?

효자가 부모의 마음을 상심하게 했다면, 부모에게서 그 상심이 사라지게 하기 위해서는 옛날에 효도하던 기준 가지고는 안 됩니다. 지금까지 행동하던 것 가지고는 안 돼요. 지금까지 효의 표준으로 생각했던 것들을 새로운 눈으로 감별해야 되는 것입니다. 지금까지 효의 표준이라고 믿었던 자신을 다시 한번 비판해야 됩니다. 비판하고 감별해야 할 여건이 남아 있는 자리에서의 효의 기준 가지고는 안 되는 것입니다. 그 이상으로 효의 기준을 상회시켜야만 되는 것입니다. 그래야만 부모가 입은 수욕의 상처를 씻을 수 있을 것 아닙니까?

한 나라의 군신 관계에 있어서도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군왕과 충신이 사이에 있어서 신하가 군왕으로부터 `충신의 도리가 바로 이것이다. 너야 말로 나의 충신이다. 너는 우리의 영광이요, 너와 나의 관계는 역사에 영원히 남겨질 수 있는 관계요 인연이다’라는 칭찬을 받던 자리에서 `네가 이럴 줄 몰랐다’ 할 수 있는 변절자의 모습으로 대두되게 될 때 그 군왕이 입은 상처가 얼마나 크겠습니까? 옛날의 충신의 자리를 회복하기 위해서는 옛날보다 몇백 배 이상의 충성을 하고, 몇천 배 이상의 신의의 도리를 세워야 할 것입니다. 그래도 군왕의 마음을 돌이키기가 힘들지요. 옛날보다 천 배 이상의 충성을 다하더라도 상처입은 군왕의 마음을 돌이키기가 힘들다는 것입니다. 군왕의 마음에 생긴 상처는 어떻게 할 수가 없다는 것입니다. 군왕은 그것을 천년이 지나도 잊지 못하는 것입니다. 그 신하에 대한 믿음의 강하고 바라는 바가 컸다면 큰 만큼, 거기에 비례하여 그보다 몇천만 배의 큰 아픔을 느끼게 되는 것입니다.그 아픈 마음을 항시 간직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니 옛날보다 몇천 배 몇만 배의 충성을 하여 군왕의 그 아픈 마음을 다시 풀어 드리고, 군왕이 입은 수욕의 상처를 씻어 드리지 않고는 옛날의 충신의 자리를 회복할 도리가 없는 것입니다.

27-149
수욕의 동기와 그 회복의 동기
우리 인간적인 정을 중심삼고 볼 때, 그리고 인간세계에서 영원히 통하는 의리를 중심삼고 볼 때, 하나님과 우리 인간 사이는 어떻겠습니까? 여기에서 하나님이 바라시는 것은 최고의 중심입니다. 그것을 찾기 위해서 하나님은 지금까지 수많은 사람을 세워 지도해 나오셨습니다. 어떤 때에는 갑이라는 사람을 세워서 지도해 나오셨고 어떤 때는 을이라는 사람을 세워서 지도해 나오셨습니다.

참을 구하기 위해 수고하시는 하나님은 그들을 한갓 꼭둑각시로 대하신 것이 아닙니다. 참되지 못한 것을 참 이상의 자리에 세우려 하시는 입장이시기 때문입니다. 참의 자리를 떠나 참의 가치를 잃어버린 인간을 다시 참의 자리로 돌아오게 하는 데는 인간이 그 동기가 될 수는 없습니다. 때문에, 하나님이 그 동기를 일으켜야 하는데, 그러기 위해 당하신 하나님의 상처와 수모가 얼마이겠습니까?

그렇다고 해서 하나님이 수모를 당한 부모, 수치를 당한 군왕의 입장에서 인간에게 `이 치욕은 너희가 씻어라’ 하신다면 인간이 참의 자리로 돌아가는 것은 절대 불가능합니다. 타락한 인간이 하나님을 찾아갈 수 없다는 것입니다. 인간은 아무리 몸부림친다 해도 본연의 행복의 기준을 찾아 갈 수 없는 입장인 것입니다. 이런 인간에게 스스로 본연의 기준을 회복하기 바란다면, 그 하나님은 영원히 인류와 관계를 맺을 수 없는 입장에 떨어지는 것입니다.

이런 인간을 최고의 중심 위치까지 올려 놓아야 하는데, 그러기 위해서는 누가 그 동기가 되어야 되느냐? 수욕의 동기는 인간으로 하나님이 아니었을지 모르지만, 수욕의 상처를 회복시킬 수 있는 동기는 하나님이 아니고는 안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비참한 것입니다. 불효막심한 아들로부터 치욕을 당한 부모가 그 아들을 다시 찾아 나서야 하는 것, 이것은 부모로서 할 수 있는 일이 아닙니다. 이것은 천지(天地)가 지천(地天)이 된 놀음이요, 상하(上下)가 하상(下上)이 된 놀음입니다. 거꿀잡이 놀음이예요. 그럴 수밖에 없는 하나님의 입장이라는 것은 너무나 비참한 것입니다. 여러분도 생활하는 데 있어서 그런 일을 당할 수도 있을 것입니다. 수치니 수욕이니 하는 말은 그런 자리에서 성립되는 것입니다.

그러면 하나님이 지금까지 우리 인류를 대해 나오신 길은 어떤 길이었느냐? 수치뿐만이 아니라 수욕의 길이었습니다. 여러분은 이걸 알아야 합니다. 하나님과 인간 사이에 경계선을 만들어 그 거리를 멀게 한 것은 인간인데도 불구하고, 그 거리를 단축시키는 일은 하나님이 하셔야 되는 것입니다. 여기에서 하나님은 영원한 절대자의 자리에서 상대적인 인간을 대신하여 하나의 내적인 모습으로 나타나, 그 길을 개척하시는 개척자의 입장에 서신 것입니다. 그러한 하나님을 사탄은 조롱합니다. `그것이 당신이 할 일입니까? 당신은 선하고 충효의 도리를 다하는 본연의 인간을 바라보고 기뻐해야 할 입장이 아닙니까? 그런데 당신은 당신에게 상처를 준 인간을 위해 정성을 들이다니요? 그것은 당신의 본래의 뜻이 아니지 않습니까?’ 하면서 조롱한다는 것입니다.

타락한 자식을 찾아가는 부모는 타락한 자식이 당하는 수모 이상의 수욕을 당하는 것입니다. 자식이 당하는 부끄러움 이상의 부끄러움을 당하는 것입니다. 그러기에 그 부모를 바라보는 자식들은 타락한 인간 이하의 평을 받더라도 거기에 아무런 조건도 제시할 수 없는 것입니다. 그 이상의 비참한 일을 당하더라도 그런 자식을 찾아간 부모 앞에서는 변명할 도리가 없는 것입니다. 분하기는 하지만 거기에 반박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반박하면 할수록 더더욱 비참해질 뿐입니다.

그런 사연을 바라보게 될 때, 하나님은 지금까지 잃어버린 아들딸, 진정한 의미에서 잃어버린 아들딸을 찾아 나오시는 것이요, 인간 역시 가운데 역사의 중심이 될 수 있는 참된 사람, 우리 모두의 행복의 기원이 될 수 있고 희망의 기점이 되는 자리에 설 수 있는 아들딸의 모습을 찾아 나오시는 것입니다. 잃어버린 당신의 세계를 다시 찾아 나오시는 것입니다. 이러한 하나님을 사탄은 무한히도 괴롭히고 무한히도 조롱했던 것입니다.

27-151
인류가 가야 할 생명의 중심지
그렇다고 해서 하나님이 그런 수치의 자리를 피하려고 하셨다면 오늘날 인류는 어떻게 되었을 것이냐? 그러나 하나님은 그러한 수치스러움을 잊어버리고 또 잊어버리고, 주위에서 반박하는 원수의 아우성을 들을 적마다 `앞으로 나타날 아들딸은 옛날의 아담 해와와는 다르다. 내가 찾아나서는 아들딸은 옛날에 타락한 아들딸과 다르다. 죄악으로 출발한 그런 인간들과는 다르다. 기필코 다르다’라고 하시며 소망을 품고 그런 아들딸을 찾아오셨습니다.

그런 하나님이시기 때문에 지금까지 역사를 이끌고 섭리해 나오시는 것입니다. 원수가 조롱할 수 있는 동기와 기원을 마련한 인간이 아닌 그 이상의 인간을 찾으시며, 원수가 제시한 사랑이나 참이나 선이 아닌 그 이상의 것을 지닌 인간을 소망하시고 찾아 나오시는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께서 그러한 소망이 없었더라면 지금까지 역사노정을 거치면서 복귀섭리라고 하는 대업을 해 나오실 수가 없었을 것입니다. 하나님은 언제나 그런 마음을 가지고 나오신 것입니다. 그런 마음을 중심사상으로 삼고, 그 소망이 실현될 역사적인 시대를 바라보고 지금까지 나오신 거예요. 그래야만 그 이상의 아들딸을 찾을 수 있을 것 아닙니까? 또 그러한 아들딸을 찾지 않고는 수욕의 상처를 메울 길이 없지 않겠습니까?

그러니 오늘날 하나님을 부르는 우리들, 즉 신앙자들의 태도가 어떠해야 할 것이냐? 하나님 앞에 수욕의 상처를 남긴 아담 해와의 입장을 넘어서 가겠다고 천배 만배 다짐하는 입장에 서야 합니다. 지금까지 하나님이 인간을 믿을 수 없었던 억울한 사연을 전부 다 탕감복귀시키고도 남음이 있을 자리에 서야 합니다.

하나님이 찾으시는 한계선이 어디일 것인가? 하나님이 영원히 믿지 않을 수 없는 믿음의 아들딸, 원수가 참소할래야 참소할 수 없는 거룩한 아들딸의 모습을 찾으시는 그 한계선이 어디일 것인가? 아담 해와보다 십배 나은 자리일 것이냐? 백배 나은 자리일 것이냐? 천배쯤 나은 자리일 것이냐? 천 배든 만 배든 몇억만 배든, 어떻게든 그 기준을 넘어서 하나님의 상처를 완전히 메웠다 할 수 있는 자리까지 가야 합니다.

이런 것을 생각해 볼 때에, 오늘날 우리들의 입장이 하나님 앞에 얼마나 죄송한 입장입니까? 우리 인간의 과거지사를 생각해 보면, 생활 속에서 하늘 앞에 지은 많은 죄들을 생각하면, 현재 하나님이 나를 몰라 주고, 나를 위로해 주지 않는다고 불평할 수 있는 입장이 못 된다는 것입니다. 내 일대를 놓고 보더라도 일대에 맺힌 한을 하나님이 탕감해 주신다면 내게는 아무것도 안 남을 것입니다. 이 민족이면 민족, 세계면 세계가 한꺼번에 폭파되어 멸망을 당한다 하더라도 반박할 생각조차도 하지 못할 입장에 있는 것이 아닙니까? 그러나 하나님은 이런 가운데에서 승리한 아들딸을 찾으시는 것입니다. 그러니 그 수욕의 역사를 밟고 넘어서 역사적인 모든 존재들이 어떠한 참소의 조건도 내세울 수 없는 참의 모습, 효의 모습, 충의 모습을 갖춘 아들딸이 어디 있느냐? 그런 아들딸은 하늘만이 찾는 것이 아니라, 인류도 찾아야 됩니다. 그러한 아들딸이 있는 자리가 인류가 가야 할 생명의 중심지인 것입니다. 그러한 자리를 찾아가야만 우리에게 행복이 올 것이며, 그 자리를 찾아가야만 우리에게 희망의 세계가 올 것입니다.

27-152
너는 소망하는 아들딸이 될 수 있겠느냐
오늘날 모든 종교가 그러한 자리를 찾아 나가고 있는 것입니다. 이에 대한 사상을 기독교적으로 말하면 재림사상입니다. 그래서 우리도 그런 자리를 찾아가서 거기에 하나되고, 거기에서 화합하여 일체가 될 수 있는 자신이 되기 위해 신앙생활을 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여러분은 어떤 자리에 있습니까? 우리가 믿는 것은 무엇 때문입니까? 어떤 사람들은 예수 믿고 천당가자고 하는데, 자신도 못 믿는 사람들이 예수를 믿을 수 있습니까? 그러면 이처럼 모순되는 것은 없을 것입니다. 자신이 자신을 절대적으로 신임할 수 있는 사람이 예수를 믿겠다고 해야지, 자기 자신도 믿을 수 없는 사람이 `나 예수 믿소’ 할 수 있느냐는 것입니다. 문제는 그것입니다. 이런 입장에서 볼 때, 하나님은 불쌍합니다. 여러분은 이것을 이해해야 합니다. 과연 하나님은 불쌍하다는 것입니다.

딸이면 딸, 아들이면 아들이라는 운명을 안고 태어난 여러분은 시대가 바라는 소망 앞에 어느 한때는 등장함을 받게 되어 있는 것입니다. 너는 이런 딸이 되겠느냐, 너는 이런 아들이 될 수 있겠느냐 하는 이 역사의 소망 앞에 나타나야 한다는 것입니다. 생김생김이야 어떻든 간에 충신이 될 수 있고, 효자가 될 수 있느냐는 것이 문제입니다. 얼굴이 잘났다고 해서 충신이 되는 것이 아니요, 못난 사람이라고 해서 충신이 못 되는 것도 아닙니다. 생김생김이 문제가 아니예요. 외적인 모습이 문제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골수로부터, 그 마음에서부터 하나님의 아픈 심정을 체휼하면서 천만번 흐느껴 통곡할 수 있어야 합니다. 그런 마음을 가지고 하나님 앞에, 당신이 그래서야 되겠느냐고 부르짖고 나설 수 있는 참된 효자의 모습, 참된 충신의 모습을 하나님은 그리워하실 것입니다.

여러분은 여기서 아담 해와의 몇백 배 몇천만 배의 가치를 지니고 본연의 진실된 효의 마음을 가지고 아버지 하나님 앞에 꽃이 되고 향기가 되어 영광된 모습으로 머리 숙일 수 있는 효자로서의 도리를 다할 수 있겠습니까? 효자라고 하더라도 흠이 남아 있는 모습, 타락의 역사를 청산짓지 못하고 계속적으로 연결되어 미래에 흠을 남길 수 있는 그런 아들딸의 모습은 아닙니까? 그런 여러분을 대해서 하나님께서 아들이라 딸이라 부르시는 그 내심에는 얼마나 부족함을 느끼고, 그 내심에 얼마만큼 큰 아픔과 상처를 품고 대하시겠습니까? 이런 점들을 볼 때, 오늘날 우리는 자신의 신앙자세를 새로이 점검해 보아야 되겠습니다.

타락하기 전의 아담을 하나님이 얼마나 좋아하셨습니까? 그것이 문제가 되는 것입니다. 그 하나님을 보고 아담은 또 얼마나 반가와 했습니까? 그때의 인상이 하나님의 가슴에 남아져 잊혀지지 않을 것입니다. 또 에덴에서 아담 해와를 찾아 나설 때의 하나님의 모습이 어떠했습니까? `아담아’ 하고 자식을 부를 때의 그 마음이 얼마나 기뻤습니까? 그 자녀의 모습을 바라볼 때, 그 얼굴과 보이는 모든 부분 부분들을 바라보시는 아버지로서 마음에 느낀 자극이 얼마나 컸겠습니까? 그때의 하나님 마음에는 희망이 넘쳤고, 행복이 싹텄던 것입니다. 하나님의 모든 소원이 거기에서 시작되었던 것입니다.

그리하여 그들이 하나님의 소원을 이룰 수 있는 영원한 대상으로 섰다면, 그들을 바라보시는 아버지의 마음이 얼마나 뿌듯했겠습니까? 그런데 일시에 탕개줄이 뒤틀려 가지고 하나님의 아들딸이 파탄을 당하는, 잊을래야 잊을 수 없는 아픈 사건이 생긴 것입니다. 가뜩이나 소망 가운데 계시던 하나님이 그런 입장에 나서야 하는 억울함에 하나님은 얼마나 큰 상처를 입으셨겠습니까? 그것이 문제가 되는 것이요, 우리는 그것을 해명해야 되는 것입니다. 그 자리에 다시 들어가서 그 문제를 해결지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그 고개로 거슬러 올라가야 합니다.

27-154
하나님의 동정을 받는 제일 빠른 길
우리는 아담 이상의 자리, 해와 이상의 자리에서 아담 해와 이상의 가치를 가진 모습으로서 나타나야 합니다. 그리하여 악한 세상에 절대 더럽혀지지 않겠다고 결심할 수 있는 자리, 하나님께서 사랑하시지 않을 수 없고 안아 주시지 않을 수 없는 자리에 나아가, 그러한 자신의 높고 큰 가치를 스스로 인정할 수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아버지’ 하며 부르는 그 자리는 천태만상일 것입니다. 그러면 최고의 자리에서 아버지를 부르는 그 한마디로 하나님의 모든 문제가 해결될 수 있는 아들딸을 하나님은 언제 만날 것이냐? 하나님은 지금까지 그런 아들딸을 못 만난 것입니다. 하나님은 지금까지 그러한 아들딸, 한 개인으로서만이 아닌 세계의 중심자로서 나타날 수 있는 아들딸, 하나님께서 소망하시던 실체, 승리의 권한을 갖춘 하나님의 아들딸로 당당히 나설 수 있는 그런 아들딸을 만나기 위해 얼마나 몸부림치셨겠습니까? 여러분이 그런 것을 생각해 본다면, 앞이 얼마나 꽉막혀 있다는 것을 느낄 것입니다.

여러분 이런 자리를 넘어섭시다. 어떠한 담도 헤치고 갑시다. 그 무엇에 부딪쳐도 깨질 수 없다는 신념을 가져야 합니다. 내 몸은 깨어질망정 내 마음은 깨질 수 없다고, 내 몸은 상처를 입더라도 내가 갖추어야 할 자세와 예법을 갖추어야 되겠다고 하는 마음을 가지고 말입니다. 다시 말하면, 그러한 입장에서 참고 나오신 하나님이 동정하실 수 있는 길을 가야 되겠다는 것입니다. 그러려면 어떻게 해야 될 것이냐? 제일 동정받을 수 있는 길이 어떤 길이냐 하나님이 수욕당한 것과 마찬가지로 수욕을 당하는 길입니다.

타락한 자식, 불효의 자식이라 하더라도 아버지의 교훈, 어머니의 교훈을 따르면 아버지 어머니와 가까와지는 것입니다. 너는 죽더라도 이 일을 행하고 죽어야 된다고 하는 부모의 훈시를 받았다면, 타락은 했지만 타락한 환경을 박차고 나가서 `나는 이렇게 살겠다’고 하며, 그렇게 살기 위해 몸부림쳐야 합니다. 환경이 자신과 배치될 때는 `나는 그 환경에 영향받고 살 수 없다’고 하며 그 환경을 과감히 반대하고 나설 수도 있어야 합니다. 주위에서 너는 그렇게 살 놈이 아니라고 하며 몰아치면 몰아칠수록, 그러한 환경에 몰리면 몰릴수록 부모와는 가까와지는 것입니다. 이것이 간접적으로 하나님의 심정을 유발시키는 작전입니다. 이 작전이 하나님의 동정을 받을 수 있는 제일 훌륭한 방법입니다.

세상에서도 그렇지 않아요. 자식이 어떤 잘못을 했을 때, 동네방네 할아버지라든가 어른들이 와서 나도 어릴 적엔 그랬다고 하며 용서할 수 있는 증거를 들고 나서는 것입니다. 그러면 부모는 용서해 줄 수밖에 없지요. 자식이 타락은 했을망정 그것을 마음으로 뉘우치고 그 타락할 때의 환경보다도 더 억센 환경에서 몇번이나 다시 타락할 수밖에 없는 입장에서, 수천명의 타락한 사람들이 자기들의 입장으로 자신을 끌어 내리려 해도 나는 부모의 명령을 지키겠다고 몸부림쳐야 합니다. 그리하여 죽더라도 그 명령을 지키다가 죽겠다고 하면서 상처투성이가 되어가지고도 맞는 그 자리를 찾아가면 거기에서 비로소 하나님은 부모로서 다시 동정을 하시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한 자리에 가야 하나님의 동정을 받을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런 길이 빠른 길입니다.

다시 말하면, 하늘을 위해 맞고, 하늘을 대변해 선을 주장하고, 하늘을 대신해서 사탄과 대결하고, 사탄 앞에서 `네 마음대로 해봐라. 네가 아무리 그래도 나는 그럴 수 없다’고 하며 나설 수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 `나는 이러이러한 당신의 아들입니다’ 하고 자랑하는 것보다도 `사탄아, 네가 가진 모든 힘을 다해서 수없이 하나님께 억울한 수욕의 상처를 입혀 드리게 했던 행동을 나에게 다시 한번 해봐라’ 하면서 사탄의 소굴에 들어가 사탄이 마음대로 관장하는 그 과정을 밟고 올라서서 당당히 나설 수 있어야 합니다. 그러한 자리에 서야 비로소 하나님의 사랑을 받을 수 있는 것입니다. 그 외의 길에서는 하늘편에 서서도 하나님의 사랑을 받을 수 없습니다. 아무리 하늘을 중심삼고 노력해도 혼자만으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27-156
타락한 인간이 가야 할 공통적인 길
그렇기 때문에 도의 길을 가는 사람들이 그런 인연을 알았다고 해서 완전한 인연이 맺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그러면 그 인연을 맺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되느냐? 반드시 원수의 세계에 들어가서 수욕을 당하는 과정을 거쳐야만 합니다. 그러지 않으면 인연이 맺어지지 않습니다. 그것이 복귀섭리역사입니다. 복귀되는 자리는 죽음의 자리입니다.

내가 잘살기 위해서,내 욕심을 중심삼은 삶의 보람을 찾아 나선 것이 타락의 시발점입니다. 그러므로 자기 자신이 죽음의 자리를 찾아가겠다는 결의를 하고 나서는 데서부터 소생의 길이 트여 나가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참된 종교는 죽음의 고개를 넘어가야 하는 것입니다. 그 죽음이라는 것이 하나님의 사랑의 손길 안에서 죽는 것이 아닙니다. 부모와 동기들, 혹은 그 이웃이나 친척 혹은 그 민족 앞에 죽는 것도 아닙니다. 나와 거리가 먼, 나와 내 민족을 반대하는 무리 앞에 죽는 것을 말합니다. 그렇듯 반대하는 세계에 들어가 가지고 반대받는 자리에서 죽게 될 때, 세계앞에 상처를 입은 하나님은 그를 동정하시는 것입니다.

참된 효의 길은 하늘권내에만 머물면서 하늘을 믿고 따르는 것이 아닙니다. 반대의 세계에 들어가서 거기에서 효자라는 인정을 받아 가지고 돌아오지 않으면 안 된다는 것을 여러분은 알아야 됩니다. 제일 빠른 길은 이 길밖에 없습니다.

그래서 예수님도 최후에 겟세마네 동산에서 기도할 때 `아바 아버지여, 할 수만 있으면 이 잔을 내게서 피하게 하여 주시옵소서. 그러나 내 뜻대로 마시옵고 아버지 뜻대로 하시옵소서’라고 했던 것입니다. 여기에서 내 뜻은 사는 것이요, 아버지의 뜻은 죽는 것입니다. 거기에서 효자를 만들고 충성의 아들을 만들려면 아들의 뜻대로 해주어야 할 것인데, 하나님은 어찌하여 거기에 반대의 뜻을 세워 가지고 예수님을 내몰게 되었던가? 하나님을 배반했던 인류의 조상과 같은 입장에 들어가기 위해서는 하나님도 그를 외면하고 사탄도 그를 배반하는 자리에 들어가야 하기 때문입니다. 사탄도 배반하고 하늘도 같이 배반했기 때문에, 만일 하나님이 동정하게 되면 사탄도 동정해야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내몰게 된 것이고, 또 그것이 새로운 역사의 동기가 되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운명하기 직전까지는 사탄의 기세가 등등하였지만, 예수님이 죽고 난 후에는 머리를 숙여야 했던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은 사탄과 반대의 입장을 취하시어 이 길을 걸어 나오시는 것입니다. 그리하여 사탄세계를 거슬러서 새로운 명령의 인연, 새로운 출발의 동기가 솟구치는 역사가 벌어졌기 때문에, 그로 말미암아 오늘날 기독교는 세계적인 문화권을 형성하게 된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하나님을 슬프게 해 놓고 타락한 아들딸, 즉 사탄이 끌어 가며 좋아하던 아들딸은 죽어 버렸습니다. 사탄에게 이용당했던 그 아들딸, 하나님께 절망을 드렸던 그 아들딸은 죽어 버렸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제는 하나님의 소원이 출발됨과 동시에 사탄이 희망했던 길은 절망으로 바뀐 것입니다. 그래서 죽고자 하는 자는 살고, 살고자 하는 자는 죽는다고 한 것입니다. 이것은 천리를 통하는 말입니다. 여기서 이 길은 타락한 인간이 가야 할 공통적인 길이 아니겠느냐 하는 문제가 대두하게 됩니다.

수욕의 상처는 언제 사라질 수가 있느냐? 원수에게 짓밟힌 역사를 밟고 넘어서서 과거와 현재와 미래를 통한 전체를 동원해 반기를 들고 공격할 수 있는 아들딸이 나타나면, 하나님은 수욕의 날에서 해방될 것입니다. 그렇지않겠어요?

27-158
하나님의 수욕의 상처를 어떻게 지울 것인가
통일교인은 더더군다나 그런 길을 가야 합니다. 통일교회가 지금까지 욕을 먹지만, 내가 이 길을 계속 가는 것은 나 자신이 양심의 가책을 받았기 때문입니다. 하늘 앞에는 떳떳한 길이지만, 그 길은 또한 수욕의 길인 것입니다. 이 길을 가는 데는 민족이 동원되어 반대할 것이며, 사탄세계 또한 죽어라고 아우성치면서 반기를 들고 대항할 것입니다. 그래야만 됩니다. 그러나 거기에서 사라져 버리는 사람이 되어서는 안되겠습니다. 삶과 죽음의 교차로에서 저울질당할 때에 죽음도 밟고 넘어설 수 있는 당당한 모습이 되어야 합니다. 그리하여 하나님도 인정하고, 사탄도 인정하는 가운데 죽었다고 할 수 있어야 합니다. 죽는 데는 하늘을 위해 사탄과 싸우다가 죽었다고 할 수 있어야 합니다. 죽는 것도, 목적을 놓고 보면 둘로 갈라지는 것입니다. 세계가 바로 여기서 갈라지는 것입니다. 죽는 모양은 같지만 `하늘을 위해서 죽었다. 하늘을 위해 사탄의 공격을 받아 죽었다’고 할 수 있어야 합니다. 그렇게 되면, 결국 친 사람을 굴복시킬 수 있는 것이요, 또 억울하게 상처입은 하나님은 거기에서 새로운 희망을 가질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니 죽더라도 죽음 그 자체로 끝나고 말 것이 아니라, 죽은 다음에 하나님을 위한 인간 세상에서의 충신 효자 이상의 충효의 모습으로 나타나야 합니다. 그리하여 하나님 앞에 참신한 아들의 모습으로 설 때, 비로소 하나님은 새로운 마음으로 그 아들을 받아들이게 되는 것입니다.

이러한 관점에서 사도 바울의 서한을 본다면, 그 내용과 사정이 모두 하나님과 일치되어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우리 개체를 대표하여 죽은 그리스도의 죽음을 중심으로, 그분의 부활은 우리들 전체의 부활이라는 견지에서 피력을 했던 것입니다. 그러한 내용들을 바탕으로 오늘날 기독교는 영원한 사상을 남길 수 있게 된 것입니다.

오늘날 우리 통일교회도 통일교회 안에서의 맹신을 버려야 합니다. 통일교회 사람들은 칭찬을 받으려고 해서는 안 됩니다. 하늘길을 가는 데에 있어서 아우성치는 사탄세계의 원수들을 막고, 생명을 걸고 그들과 싸워 이기는 사람이 하늘에 가깝습니다. 이것이 하나님 앞에 효자가 되고 충신이 되는 가장 가까운 길입니다. 거기에서 죽음을 삶으로 바꿔칠 수 있는, 즉 사선을 넘어설 수 있는 승리의 모습이 될 것을 스스로 다짐하게 될 때에, 하늘이 당한 수욕의 상처를 딛고 일어설 수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기독교는 로마제국으로부터 4백년 동안 무한한 학살을 받아왔던 것입니다. 어느 시대, 어느 곳에서든지 기독교가 가는 곳에서는 피를 흘렸습니다. 피를 흘리지 않고는 기독교 앞에 문이 열리지 않았습니다. 한국을 보더라도 대원군 시대에 그러했고, 일본을 보더라도 도쿠가와 이에야스 시대의 히마하라 난에서처럼 많은 핍박을 받았습니다. 이처럼 기독교에 피를 흘리며 죽은 충신과 효자의 비석을 남기지 않고 시작된 역사가 없었던 것도 그런 연유에서입니다.

27-159
하나님이 입으신 수욕의 상처를 지우려면
그럼 어떻게 해서 하나님이 입으신 수욕의 상처를 지울 것이냐? 그것은 피의 조건을 세움으로 말미암아, 죽으면서도 충효를 부르짖고, 그 절개를 지켜 나감으로 말미암아 가능한 것입니다. 그런데 사탄세계에는 그런 것이 없습니다. 사탄세계는 단지 자기를 위해 사는 것이지, 그런 것은 없다는 것입니다. 부모 앞에 효도하는 효자도 없고, 왕 앞에 충성하는 충신도 없다는 것입니다. 주인이면 주인, 자녀면 자녀가 자기를 위하여 군왕도, 부모도 끌고 가려고만 하는 것이 사탄세계의 상황입니다. 그러니 그들을 밟고 넘어서야 합니다.

에덴에서 타락한 것이 오늘날의 사탄세계와 일치된 자리에 있으니, 이들을 복귀하기 위해서는 이들로부터 반대받는 자리에 가야 합니다. 우리는 사탄의 환영을 받던 타락된 자리를 거슬러서 사탄의 반격을 받는 길을 가지 않으면 안 될 운명에 놓여 있는 것입니다. 이 길을 가지 않고는 수욕의 상처를 메울 길이 없습니다. 이것이 하늘을 향하여 가는 효의 길이요, 충의 길이요, 참된 길인 것입니다.

이러한 내용을 중심삼고 이 세계 앞에 생명을 걸고 나갈 수 있는 하나님의 참되고 효성스런 아들딸이 이 땅에 나와야 됩니다. 세계적인 생명의 제단을 쌓아 놓고, 이 우주와 온 천주를 대신하여 자기의 한 생명을 몽땅 바칠 수 있는 아들딸, 부정적인 사회 환경에서 긍정적인 실체로서 죽음의 고개를 넘어 끝까지 남아질 수 있는 모습으로 나타나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러한 모습이 나타나면 아무리 악한 세상일지라도 거기에서 하나님의 수욕이 씻어지고, 거기에 승리의 기준이 세워지고, 거기에서부터 새로운 역사를 창건해 나가자는 것입니다. 거기서부터 새로운 역사를 창건해 나가자는 것입니다. 그런 길을 찾아가서 전통적인 유업을 상속받아야 하는 것이 하늘 앞에 충효의 도리를 다하는 사람들의 본분이요 의무가 아니겠습니까?

그러한 자리를 넘어서서 아담 해와의 몇천만 배를 주고도 바꿀 수 없는 아들딸이라고 하나님께서 칭하실 수 있고, 이런 아들딸을 만났으니 과거의 아담 해와가 차라리 타락을 잘했다 할 수 있는 하나님의 아들딸이 되어야 합니다. 아담 해와가 타락하여 하나님에게 원한의 근거요, 분함의 근거요, 원통함과 비참함의 근거가 되었지만, `그들이 타락했기에 이렇게도 충과 효가 지극한 아들딸을 찾았으니, 타락한 것도 잘한 것이다’라고 할 수 있을 정도로 하나님 앞에 칭찬받을 수 있는 사람이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런 사람이 나와서 용서를 구하게 되면 아담 해와가 타락한 것도 용서받을 길이 생겨날 것이요, 지옥까지도 용서받고 해방받을 수 있는 길이 열리지 않겠느냐는 것입니다.

역사는 그러한 고개를 향해서 뒤넘이쳐 흘러가고 있습니다. 이러한 역사의 흐름 앞에 새로운 흐름을 갖고 나서서, 이 새로운 흐름의 소용돌이 속에 휙 말아 가지고 한 곳으로 유유히 흐를 수 있게 만들어야 합니다. 그 새로운 흐름은 옛날의 흐름과는 전혀 달라야 합니다.

그런 새로운 생활을 할 수 있는 역사적인 자유의 세계, 행복의 세계를 그려 나가는 것이 오늘날의 종교입니다. 그러니 그런 세계를 찾아 나가는 우리 또한 그러한 모습과 그러한 자세를 갖추어야 합니다. 그래서 비로소 하나님의 수욕의 상처를 메울 수 있는 것입니다. 그 수욕의 상처를 메우고 나서 기뻐하시는 하나님 아버지를 모시고, 그 옷깃을 붙들고 얼싸둥둥 춤출 수 있는 그날, 자유 천지에서 만존재와 더불어 기쁨의 함성을 지를 수 있는 그날, 아버지도 아들도 고대하던 한 날을 맞이했으니 천지와 더불어 기뻐하자고 말할 수 있는 그날이 이 천지간에 이루어져야만 새로운 세계가 출발되는 것입니다.

거기서 비로소 하늘의 수욕의 상처가 지워질 것이 아니겠습니까? 그날을 위해서 우리는 투쟁해야 되겠습니다. 이러한 길을 가지 않으면 안 됩니다. 다시 말하면, 그저 믿기만 하는 것이 아버지를 위하는 길이 아니라, 사탄세계와 싸우면서 때로는 맞으면서 가는 길이 아버지를 위하여 가는 길이라는 것입니다. 옛날에 아담 해와는 자기들의 욕심으로 타락하였지만, 우리는 하나님의 욕심으로 가는 것입니다. 그래서 죽음길을 타고 나가야만 수욕의 상처를 지을 수 있다는 것을 여러분이 알아야 합니다.

1970년대에는 그러한 심정을 더듬으면서 새로운 나와, 새로운 민족을 향해서 걸어가는 새로운 통일의 역군이 될 것을 다시 한번 다짐해야 되겠습니다. 지금까지는 탕감의 시대였지만 앞으로는 해방의 시대로, 지금까지는 죽음의 시대였지만 앞으로는 부활과 영광의 시대로, 70년도를 맞이해야 되겠습니다.

지금까지는 하나님께 상처를 입혀 드리는 시대였지만, 앞으로는 하나님의 모든 수욕의 상처를 지워서 해원드려 드릴 수 있는 그런 시대를 맞이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럴 수 있는 우리 교회가 되고, 그럴 수 있는 대한민국과 세계가 되기 위해 우리들은 그런 길을 마련해야 되겠습니다. 우리는 지금 그러한 길에서 최후의 정점을 향한, 최후의 5분간을 잘 장식해야 할 시점에 있다는 것을 알고, 하나님의 수욕의 상처를 씻고 넘어가기 위해 기도하면서 준비해 주기를 바랍니다.

27-161
기 도
아버지가 이렇듯 불쌍하신 분임을 알게 되어 지난날 한없는 눈물을 흘리며 아버지를 위로해 드리지 못한 것을 다시 한번 반성하게 되옵니다. 불쌍하신 아버지의 손끝과 뼈가 으스러지도록 붙들지 못한 것이 한이 되옵고, 아버지의 품에 끌어 안겨 천년 사연의 모든 것을 잊었다고 직고하지 못한 자신을 한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아버님, 몸이 뭉크러지고, 세포가 굳어지도록 아버지를 흠모하고, 아버지를 그리워하지 못한 저희들을 용서하여 주시옵소서. 최후의 한계선을 넘어섰다고, 비참한 한계점을 넘어섰다고, 끝의 끝에 닿았다고, 이것이 마지막이라고 아버지께 주장하고 나설 정도로 충성하지 못한 것을 용납하여 주시옵소서.

통일이라는 두 글자 앞에 참소받는 아들딸이 되어서는 안 되겠습니다. 통일교회라는 이름이 저희 앞에 참소의 조건이 되고, 심판의 조건이 되어서는 안 되겠습니다. 통일교회가 나를 위해 있다고 할 수 있는 아들과 딸이 되어야 하겠습니다.

저희는 어차피 악에서 태어난 몸이기 때문에 선으로 다시 태어나야 합니다. 두번 태어나야 할 운명, 이것은 비참한 것이옵니다. 세상에서도 의붓부모의 자식으로 생활하는 것은 지극히 억울한 것이 아니옵니까? 우리는 의붓아들의 정도가 아니라, 원수의 자식으로 태어났기에 본연의 부모를 찾아가야 하는데, 그 길은 결코 평탄한 길이 아닙니다. 그러기에 저희들은 사탄의 화살과 사탄의 창검의 공격을 무수히 받고 있사옵니다.

하오나 저희들은 이렇듯 몸을 얽어매고 있는 끈들을 끊고 가야 하겠사옵니다. 입으로 끊든지, 힘으로 끊든지, 얽어매고 있는 자들과 부딪쳐야 되겠습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피를 흘리지 않을 수 없는 비참한 역사과정을 넘어야 한다는 것을 아옵니다.

이것을 바라보시면서도 권고도 할 수 없는 아버지, 저희와 같은 아들딸을 가진 한이 얼마나 크시옵니까? 아버지의 그러한 심정을 저희들이 알아야 되겠사옵니다. 죄를 지은 아들이 법관에게 끌려가서 교수대에 서게 될 때, 말할 수조차 없는 입장에서 애달픈 심정으로 아들의 죽음을 바라보며, 비통한 가슴을 조여야 하는 부모의 심정, 아버지의 사정을 체휼할 줄 아는 아들딸이 되어야 되겠습니다.

영광의 아들딸로 태어난 만유의 중심 가치로서, 그 무엇으로도 대신할 수 없는 그 모습이 원수의 손길에 끌려가서 이슬같이 사라져 가는 것을 바라보시고, 묵묵히 소망의 한 때를 고대하여 나오신 아버지의 그 비참한 심정을 저희는 느낄 줄 알아야 되겠습니다.

그렇듯 소망의 아들을 바라는 마음 앞에, 초조한 아버지의 심정 앞에 엎드려, 수천년 수억만년을 거쳐서라도 잃어버린 아들딸을 찾기 위하여 몸부림치시는 아버지의 처참한 모습을 생각하옵니다. 그 처참함이 역사노정에 사실로 전개될 때에도 그 자리에서마저 동정받지 못하신 아버지이심을 생각하면, 저희들은 두고두고 저주받아야 할 입장에 있사옵니다. 그러나 아버지께서 저희들을 저주하시면 아버지가 자식을 저주하는 입장에 서게 되기 때문에 그 모든 것을 참고 용서해 오셨던 것을 아옵니다. 하오니 저희들은 그러한 아버지의 용서함과 인내함을 본받아야 되겠사옵니다.

땅 위의 있는 그 누구보다도 불쌍한 경지에서 하늘을 찾아가는 사람이 역사 가운데 남아진 것을 아옵니다. 과연 이 길을 알고, 이 길을 가는 사람들은 불쌍한 사람들이옵니다. 이 세상에서 외로운 고아들이옵니다. 누구한테도 호소할 수 없는 사연을 가진 자들이옵니다. 나라가 있어도 그 나라를 믿을 수 없었고, 세계가 있었도 그 세계에 소망을 가질 수 없었사옵니다. 그리하여 가는 곳곳마다 원수의 창과 화살을 받는 자리에 서야 아버지를 찾을 수 있었습니다. 이렇듯 아버지와 심정적 인연을 두터이 맺을 수 있는 것은 저희만이 가질 수 있는 비참한 내용인 것을 알고 있사옵니다.

그러한 자리에서 아버지의 원통한 심정을 상속받는 아들딸로서 아버지 앞에 진실로 `아버지’라고 부를 수 있어야 되겠사옵니다. 그러니 피를 흘리지 않고는 아버지의 길을 갈 수 없다는 것을 저희들은 알고 있습니다. 그러기에 아벨이 흘린 피의 역사를 저희들이 생각하면서, 아버지를 위하여 피의 담을 쌓아 하나의 보루가 되고, 아버지의 동정을 받을 수 있는 하나의 도성, 영원한 안식의 터전을 마련해야 되겠사옵니다. 그리하여 아버지의 비참함을 위로하고, 영원히 아버지를 방위할 수 있는 하늘의 병사들이 되게 허락하여 주시옵소서.

아버지, 여기에 통일가의 자녀라고 자처하는 아들딸들이 모였사옵니다. 하지만 아버지께서 마음을 터놓고, 내 아들딸이라 할 수 있는 자가 누구냐 할 때, 면목이 없사옵니다. 그러나, 그 물음에 답할 수 있는 내용을 준비하고 있사옵니다. 아직은 수련과정에 있는 이들을 대해서도 아직 싸움의 행로에 나서지 않은 이들을 대해서도, 참으시는 아버지의 마음이 곧 소망의 마음인 것을 알고 있사옵니다.

그러나 명령을 내리시는 그 순간부터는 사랑도 끊으시고 참으심도 끊으신다는 것을 아오니, 저희들은 아버지의 명령을 잘 지키고 명령에 따라 잘 싸우다가 장렬하게 잘 죽어 아버지께서 동정하실 수 있는 내용을 남겨야 하겠습니다. 그리하여 아버지의 상처를 아물게 해 드리는 당신의 자녀들이 되게 하여 주시옵소서.

이제 은은하고 고요한 가운데 아버지의 심정적 인연을 따라 자기 스스로의 이름을 부르며, 역사적인 승리의 아들딸이 되기 위해 다시 한번 자신의 모습을 정비해야 되겠사옵니다. 그리하여 내일의 희망 앞에, 내일의 자유 세계 앞에, 내일의 평화 앞에, 내일의 천국앞에 온 만유의 존재들이 추앙하는 가운데 영광의 꽃으로 피어날 수 있게 하여 주시옵소서. 그리하여 아버지의 전체적인 뜻과 온 천주를 상속받을 수 있는 효의 모습, 충의 모습으로 나타날 수 있는 아들딸들이 되게 하여 주시옵기를 간절히 바라옵고 원하옵니다.

오늘은 안식일이옵니다. 전국에 널려 있는 당신의 자녀들을 기억하여 주시옵고, 이날을 맞이하여 이 본부를 위해 눈물짓는 자녀들의 정성 위에 천만 배 축복하여 주시옵소서.

외국에 널려 있는 당신의 자녀들은 핏줄이 다르고 민족이 다르지만, 아버지의 심정을 중심해서는 형제가 되오니, 그들을 보호하여 주시옵소서.

아버지의 소원의 세계를 이루기 위해서 저희들이 희생하게 하심을 감사하옵니다. 아버지의 수욕의 상처를 메우기 위해 싸우는 용사들이 되게 하여 주옵기를 간절히 부탁드리고 원하옵니다.

소망의 세계가 저희를 환영해 줄 그날을 고대하면서, 남아진 날들의 어려움을 극복하고 또 극복하여 당신 앞에 직행할 수 있는 당신의 아들딸들이 되게 하여 주시옵소서. 모든 말씀 참부모의 성호 받들어 아뢰었사옵니다. 아멘.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