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6-244 to 26-276: 가야 할 험한 길

가야 할 험한 길
1969.11.09 (일), 한국 전본부교회

26-244
가야 할 험한 길
[기 도]

아버지의 긍휼과 자비와 사랑을 통일의 자녀들과 이 민족과 이 세계 위에 내려 주시옵소서.

흐르는 세월은 덧없이 흘러가지만 그 가운데 기필코 이루어야 할 복귀의 뜻을 이루게 허락하여 주시옵소서.

아버지, 내일은 자녀의 날이옵니다. 이날은 아버님을 위시해서 한국에 있는 자녀들과 세계에 있는 자녀들이 수많은 민족에 대하여 수고했던 것을 기념하는 한날이옵니다. 땅 위에서 속죄함을 입을 수 없던 수많은 사람들이 해방받는 한날로 기념할 수 있는 저희에게 허락하여 주신 은사에 대해 감사를 드리옵니다.

아버지께서는 이날이 나타날 때까지 얼마나 수고하셨사옵니까? 에덴 동산에서 잃어버렸던 자녀의 모습을 찾기 위해 지금까지 역사의 고빗길에서 홀로 슬픔을 당하시면서 참아 오신 아버지의 노고에 땅 위에 있는 모든 만민들이 머리를 숙이고, 그 고마움에 몸을 굽혀 경배드릴 수 있게 허락하여 주시옵소서. 그리하여 하늘과 땅이 한마음으로써 접할 수 있는 날이 되게 허락하여 주옵기를, 아버지, 간절히 바라옵고 원하옵니다.

이곳을 향하여 마음을 모으고 아버지 앞에 정성들이는 수많은 자녀들이 있사오니, 아버지의 무한하신 사랑과 무한하신 긍휼과 자비가 그들 위에 같이하여 주시옵소서.

때가 요구하고 있는 이 시점에 있어서 아버지께서 원하시는 뜻에 일치되고자 하오니 허락하여 주시옵소서. 아버지께서 원하시는 곳은 온 만민이 안식할 수 있는 곳이기에, 그곳을 향하여 달려가는 저희들은 선각자가 되어 모든 싸움과 책임을 완수하는 데 있어서 내 일신을 아끼지 않고 정비해서 달려가게 허락하여 주옵기를, 아버지, 간절히 바라옵고 원하옵니다.

이 한날 아침에서부터 저녁까지 전체를 맡아 주관하여 주시옵고, 이날을 위하여 기도하고 이날을 위하여 아버지 앞에 찬양을 돌리는 수많은 자녀들 위에 친히 같이하여 주시옵소서. 아버지께서 직접 동참하시어 그들에게 생명의 불길을 붙이시어서 그들로 하여금 삼천리 반도 위에 역사적인 새로운 기원을 마련할 수 있게 허락하여 주옵기를 간절히 바라옵고 원하옵니다.

오늘을 지내고 내일을 맞이하는 이 한 때가 시점이 엇바뀌는 중대한 한 때가 되게 역사하여 주시옵기를 간절히 바라옵고 원하옵니다. 한국을 그리워하고 이곳을 향하여 경배하는 외국에 널려있는 수많은 당신의 자녀들 위에 아버지의 무한하신 자비와 긍휼을 내려 주옵기를 바라옵니다.

아버지께서 바라시는 모든 것들을 땅에 중심삼고 해원성사하시옵소서. 그리하여 해방의 은사를 받은 만민이 아버지 앞에 충효를 돌릴 수 있는 날이 어서 속히 오게 역사하여 주옵기를 간절히 부탁드리옵니다.

남아진 시간들을 친히 주관하여 주시옵소서. 참부모의 이름으로 아뢰었사옵나이다. 아멘.

26-245
말 씀
땅 위에 살고 있는 수많은 사람들은 자기가 원치 않는 길, 더욱이나 자기의 생명이 위협받는 문제가 개재되어 있는 길은 피하고자 합니다. 사람이라면 누구나 다 그런 길을 피하려 할 것입니다.

26-245
타락으로 인한 인생길
오늘 한때를 살아가는 우리 인생길이라는 것은 평탄한 길이 아닙니다. 그렇기 때문에 자고로 인생의 행로를 고해라고 한 데에는 일리가 있는 것입니다. 더욱이 타락의 인연을 갖고 태어난 우리 인간에게는 그 타락으로 인하여 생긴 원한의 과정을 어차피 넘어가지 않으면 안 될 운명을 타고 났기에 수천 수만 년의 역사과정을 거쳐서라도 그것을 넘지 않으면 그 한의 길을 우리 앞에 영원히 남아있게 되는 것을 우리들은 알고 있습니다.

오늘 우리가 처해 있는 이 시점에서 하루의 생활을 살펴 볼 때, 어떤 사람은 하루의 생활을 의미없이 보내는 사람도 있을 것이고 혹자는 그 하루의 생활을 일년의 생활을 좌우할 수 있는 귀중한 것으로 여기고 사는 사람도 있을 것입니다. 또 어떤 사람은 그 하루를 생사의 문제를 걸고 뒤넘이치는 심각한 자리에서 담판하고 있는 사람도 있을 것입니다. 죽느냐 사느냐 하는 기로에서 어느 하나를 선택해야 할 날을 맞고 있는 사람도 있을 것입니다.

에덴 동산에서 아담과 해와가 타락한 연고로 그 순간부터 우리 인간은 행복의 요건을 갖고 출발한 것이 아니라 불행의 요건을 갖고 출발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오늘날 인류가 행복의 세계로 돌아가기 위해서는 반드시 불행의 세계를 박차고 나아가야 합니다. 그러지 않고서는 어느누구도 행복한 세계로 돌아갈 수 없는 것입니다.

인류가 타락함으로 말미암아 인간만이 불행해진 것이 아니라 하나님까지도 함께 불행해지셨습니다. 그러므로 인류가 행복의 곳을 찾아가게 되면 하나님께서도 행복해 지시는 것입니다. 이렇게 하나님이나 인간이 같은 입장이 되어 하나의 목적을 지향하고 있기 때문에 하나님도, 인간도 역사과정을 거치며 현 시점까지 찾아온 사실을 여러분은 알아야 되겠습니다.

아담 해와를 잃어버리심으로 말미암아 하나님께서는 험한 길 중의 험한 길이요, 세상의 인간 그 누구도 원하지 않고 또 가고 싶어하지 않는 길을 걸어오셨습니다. 그런 고로 타락으로 인하여 남아진 이 길은 그 누구도 아니 갈래야 아니 갈 수 없는 운명길이 되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타락의 길을 가는 아담 해와를 버려야 마땅함에도 불구하고 버리지 못하는 입장에 계셨기에, 이 천지는 소원을 한날을 소망으로 남길 수 있는 것입니다.

이렇게 엄청나고 심각하고 그 누구도 가기를 원치 않는 험한 길이지만, 우리에게는 험한 길 자체에 밀려나는 것이 아니라 그 험한 길을 넘어가야 할 목표가 있고 하늘이 주신 사명이 있습니다. 그 목표와 사명을 이루기 위해 거기에 배치되는 모든 요건을 밟고 넘어선 자리에 하나님이 계시기 때문에 오늘의 역사과정에 복귀의 운명길이 남아 있는 것을 여러분은 알아야 되겠습니다.

26-247
아담가정과 노아가정이 넘어야 했던 험한 고개
우리 인간이 타락함으로 말미암아 하나님께서는 넘기 어려운 험한 고개를 넘어 오셨다는 것을 알아야 되겠습니다. 하나님께서 만일 그 고개를 넘지 못하셨다면 구원섭리니 복귀섭리니 하는 명사는 오늘날 우리들에게 해당되지 않는 명사가 되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우리 인간이 인연된 환경을 끊을 수 없는 자리에 있다 하더라도, 그 인연된 환경을 끊고 넘어가는 것이 험한 고개 중의 험한 고개요, 가기 어려운 길 중의 어려운 길이라 하더라도 하나님께서 이것을 단연코 넘으신 기준이 있기 때문에, 인류역사상에 하나님과 다시 상봉할 수 있는 날이 남아졌다는 것을 알아야 되겠습니다.

인간은 타락함으로 말미암아 하나님과 상관없는 자리에 떨어졌습니다. 여기에서 인류는 하나님과 격리되고 하나님을 찾아가는 길이 자꾸 멀어지게 되었습니다. 이렇게 되면 하나님께서 인도하시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책임질 입장이 아니라 하나님과의 관계를 끊어 버린 인간 자신이 책임을 져야 할 입장이 됩니다.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우리 인간에게 모든 것을 희생하는 한이 있더라도 이것을 개척하고 가라고 하면 가야 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물론 배후에서 우리 인간의 갈 길을 밀어 주셨지만, 그런 노정에 있어서 인간은 번번이 하나님께 가중된 슬픔을 남겨 드리는 역사적인 노정을 거쳐 온 것을 알고 있습니다.

아담 가정을 중심삼고 볼 때, 아담이 타락했기 때문에 이를 가인과 아벨을 통해서 복귀하려 했던 것이 하나님의 뜻이었습니다. 이를 복귀하기 위해서는 가인이 동생인 아벨을 기필코 형으로 모셔 나가야 하는 것입니다. 이 고개가 가인에게 있어서는 넘기 어려운 험한 길이었습니다. 이 길은 오늘날 인륜 도덕으로 볼 때 가장 넘기 어려운 길입니다. 그렇지만 가인의 입장에서 아벨을 모시고 넘어야 할 텐데도 불구하고 이 험한 고개를 못 넘었기 때문에 역사는 되돌아가야 할 뿐만 아니라 또다시 과거의 슬픈 길을 밟지 않으면 안 될 운명에 처해 있다는 것을 알아야 되겠습니다.

아담 가정의 가인과 아벨에 있어서 가인이 넘어야 할 험한 길을 넘지 못했기에 인류의 복귀섭리역사는 아담으로부터 10대인 노아까지 연장되어 내려왔습니다. 노아 할아버지는 인류를 대신해서 또다시 험한 고개를 넘어 가야 했는데, 그 고개는 가인이 넘어가던 고개보다 더 험한 고개입니다. 노아 가정에서는 가정 전체가 험한 고개를 넘어가야 된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그 고개를 넘어가는 데는 아버지 어머니만이 갈 것이 아니라, 가정의 일원인 자녀들도 일치단결해서 그 길이 가정적인 시련이나 고통, 가정적인 환난의 길일지라도 기필코 넘어야 할 천적인 사명, 인간적인 사명이 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 사명을 이루어야 할 노아가정이 험한 고개를 넘지 못했기 때문에 아담 가정을 중심삼고 섭리하시던 하나님의 뜻이 깨어졌던 것입니다. 그래서 아담 가정을 중심삼은 이 일을 재차 그 후손을 통하여 수습하지 않으면 안 되었기 때문에, 노아에서부터 4백년 동안 고역의 노정을 거쳐서 아브라함을 세웠던 것입니다. 따라서 하나님은 험한 길을 참고 넘으려 하던 역사적인 노정을 다시 시작하지 않을 수 없었던 사실을 우리들은 알고 있습니다.

26-248
아브라함이 넘어야 했던 험한 고개
그러면 아브라함을 중심삼고 볼 때, 아브라함이 가는 길이 평탄한 길이 아니었습니다. 하나님께서 그와 관계맺고자 할 때 하나님께서 그가 처해 있는 환경에서 모든 인연을 그냥 그대로 환영하고, 인정하는 자리에서 인연맺을 수 있었다면 얼마나 좋았겠습니까? 그러나 그런 자리에서는 그와 인연을 맺을래야 맺을 수 없는 것을 아시는 하나님은 그에게 모든 인연을 끊으라는 명령을 하지 않을 수 없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에게 친척과 아비가 살고 있는 본토인 갈대아 우르에서의 모든 것을 다 버리고 타향살이의 길을 떠나라고 명령하셨던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도 그 일이 어렵다는 것을 아셨습니다. 아브라함 자신도 하나님께서 알고 계시는 기준만큼은 못 될지라도 자신이 그러한 한때를 반드시 거쳐 가야 한다는 내심적인 믿음이 있었기에 천명을 받고 갈대아 우르를 떠나 집시의 생활을 하였던 것입니다. 이것은 아브라함에게는 말할수 없는 험한 길이었습니다.

아브라함이 험한 고개를 앞에 놓고 과거의 인연을 아쉬워하고 남겨진 자기의 인연을 중심삼고 슬퍼했더라면, 제1의 믿음의 조상인 아브라함의 이름은 오늘날 우리가 살고 있는 이 땅 위에 남을 수 없었을 것입니다. 아브라함이 뜻 앞에 나서는 길은 평탄한 길이 아니라 그 길 앞에는 험한 고개가 가로막고 있었습니다. 이것을 볼 때, 험한 고개를 넘지 않고서는 결코 하늘을 찾아갈 수 없다는 사실을 엿볼 수 있습니다.

이러한 모든 동기와 기원은 어디에서 생기느냐? 아브라함으로부터 생긴 것이 아닙니다. 아브라함 자신으로 말미암아 이런 길이 생겼기에, 그 험한 길을 가야 할 운명이었다면, 거기에서는 자기의 잘못을 자극하면 할수록 그에 비례되는 결의를 가지고 험한 길을 넘을 수 있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아브라함 자신으로 볼 때에는 그런 험한 고개를 넘어야 할 아무런 사연이 없었습니다. 자기 스스로 저지른 역사적인 죄과나 혹은 과거에 저끄린 허물이 없는 입장에서 하나님으로부터 부름받은 아브라함은 제1의 믿음의 조상이 된 것입니다.

아브라함에게 있어서는 평탄한 길을 가야 할 텐데도 불구하고 험한 고갯길을 가야 하는 입장에 서게 되었을 때, 이것은 아브라함 자신에게는 말할 수 없는 시련이 아닐 수 없었습니다. 그러나 선조의 모든 인연을 벗어날 수 없는 후손으로 태어난 아브라함이었기 때문에, 하늘로 돌아가기 위해서는 선조가 저끄린 험한 고개를 반드시 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것을 밟고 넘어서지 않고서는 하늘로 돌아갈 수 없는 고로 하나님께서는 번번이 공식과 같은 이런 내용을 가지고 이 고개를 넘어가라고 명령하시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아브라함이 하나님의 명령을 따라 이 고개를 넘어가기 위해서는 사랑하는 부모를 버려야 되고 사랑하는 형제를 버려야 되는 것입니다. 또, 지금까지 자기가 소유하고 있던 모든 재물은 물론이요, 자기가 그 땅에서 소원하여 인연으로 남기고 관념으로 남겼던 모든 사연을 일소해야 했던 것입니다. 그래서 하늘로부터 새로운 인연, 즉 새로운 부모와 새로운 형제의 인연 속에, 새로운 마음, 새로운 이념을 갖고 그런 환경을 밟고 넘어서지 않고는 새로운 출발을 볼 수 없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에게 인간으로는 갈 수 없는 어려운 고빗길을 제시했다는 사실을 우리들은 알아야 되겠습니다.

만일 아브라함이 이것을 일소하고 고향산천을 뒤로 하고 황무지와 같은 광야를 향해 떠나지 않았다면, 오늘날 우리는 복귀섭리의 한때를 맞을 수 없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아브라함은 그런 시련과 고통을 당하는 어렵고 험한 길이었지만 그 고갯길을 무난히 넘을 수 있었기 때문에, 거기서부터 역사적인 새로운 기원이 마련되었다는 것을 우리들은 알아야 되겠습니다.

26-250
험한 고개를 넘은 야곱
하나님께서 이삭을 번제로 바치라는 것도 아브라함에게는 하나의 험한 고개였습니다. 야곱을 중심삼고 볼 때, 야곱이 에서와 싸우는 것도 험한 고개였습니다. 아담 가정이 하나님께 한을 남겼기 때문에 아담 가정을 수습하여야 할 야곱에게 있어서는 아브라함, 이삭 등 선대에 저끄린 모든 전부를 탕감시키기 위해서 형인 에서를 굴복시켜야 할 운명길을 가야 되는 것입니다. 이것은 야곱에게는 지극히 어려운 일이었습니다. 또 에서도 아우인 야곱에게 굴복해야 하는 것도 지극히 어려운 일이었습니다. 즉, 야곱에게도, 에서에게도 험한 길이었습니다.

지금까지의 복귀역사를 해 나오는 데 있어서 이런 험한 고개를 어떻게 넘어가느냐 하는 문제가 걸려 있었던 것입니다. 야곱을 중심삼고 보아도 마찬가지입니다. 야곱에게 있어서 21년 세월의 광야노정은 참을 수 없는 시련의 길이요, 참을 수 없는 험한 길이었습니다. 그렇지만 야곱은 험한 길이 앞을 가로막는 입장에 있더라도 하늘을 사모하는 마음으로 그 험한 길을 밟고 넘어설 수 있는 신념을 갖고 있었고, 자기의 모든 주의를 거부하는 환경에 처했어도 그런 것을 밀고 나설 수 있는 신념을 갖고 있었기 때문에 하란광야와 이스라엘의 경계선을 넘을 수 있었던 하나의 동기가 된 것입니다.

야곱은 그와 같이 사무치는 간절한 마음이 있었기에 시련의 고빗길이 닥쳐 오고 험한 모든 사정이 밀려왔어도 그것을 무난히 넘을 수 있었고, 악한 세파나 사탄의 계교가 때와 환경을 따라 밀려왔어도 무난히 넘을 수 있었습니다. 내외적인 면에서 어떠한 지배나 침해를 받지 않고 밀고 나갈 수 있는 신념의 기반을 갖고 있었습니다. 야곱은 그런 시련의 날들이 자기 마을과 자기 고향을 찾게 하는 연단이고 더 나아가 소망하는 이스라엘을 취할 수 있게 하는 연단이라는 신념을 가졌기 때문에, 그 시련의 날들을 이기고 넘을 수 있었던 것입니다.

만약 그런 시련의 날들을 이기고 넘지 못했다면 이스라엘 선민권을 갖고 나타날 수 없었다는 것입니다. 야곱이 그 선민권을 찾기까지는 21년이란 기나긴 세월이 흘렀습니다. 21년 동안 거쳐오는 그 길은 한의 길이요 시련의 길이요 험한 길이었지만, 야곱은 그런 길을 개의치 않고 이스라엘을 추구하는 하늘을 추구했기 때문에, 거기서부터 선민의 역사가 시작되었다는 사실을 알아야 되겠습니다.

이런 관점에서 볼 때, 야곱은 약은 사람이 아니었습니다. 생활 가운데 있어서 그는 역사과정에서 그 누구도 당하지 않은 슬픔을 당했습니다. 하늘로 돌아가는 복귀도상에서 그 누구보다도 내심으로 굳게 다짐하였기에 환경에서 부딪치는 어려운 고빗길을 무난히 극복하고 돌파할 수 있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21년 동안 첩첩이 가로놓인 험한 태산준령도 넘을 수 있었다는 사실을 우리들은 알아야 되겠습니다.

이스라엘 민족은 하늘편에 서서 출발한 그날부터 야곱의 신념을 상속받고 야곱의 사상을 그대로 계승하여 아브라함의 하나님, 이삭의 하나님, 야곱의 하나님으로 섬기고, 혹은 가정적인 전통의 인연으로써 하나님만을 섬기고 하나님만을 위해서 생애노정을 거쳐가야 했습니다. 그런데 이스라엘 민족이 그러지 못했기 때문에 그 이스라엘 민족이 역사과정에서 넘어 나왔던 험한 고개, 혹은 야곱이 넘었던 험한 고개가 그 후손들 앞에 또다시 찾아오게 된 것입니다.

그래서 가정의 고개를 넘은 가정 앞에 종족의 고개가 남아 있는 것이요, 민족의 고개를 넘은 하나의 이스라엘 민족 앞에는 국가의 고개가 남아 있는 것이요, 국가의 고개를 넘은 이스라엘 나라 앞에는 세계의 고개가 남아 있는 것입니다. 이렇듯 복귀의 길에는 더 크고 험한 고갯길이 남아 있는 것을 우리는 알아야 되겠습니다.

이러한 사연의 역사를 연결시켜서 국가의 기반을 중심삼고 세계의 무대로 갈 수 있는 하나의 태산준령을 넘어가서 만민의 해방의 기치를 들고 이 땅위에 새로운 천지를 이루어야 할 사명을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민족에게 부여해 주셨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이스라엘 민족에게 메시아사상을 주어 새로운 세계를 이루어 나가게 한 것입니다. 지금까지는 그 고개를 넘기 위한 준비의 기간이었다는 것을 우리들은 알아야 되겠습니다.

26-252
기독교가 넘어야 할 험한 고개
이스라엘 민족은 예수님을 중심삼고 그와 완전히 하나되어서 세계적인 험한 고개를 넘어가야 했습니다. 그러나 4천년 동안 그 고갯길을 넘기 위해 준비해 왔음에도 불구하고 이스라엘 민족이 예수님과 하나되지 못함으로 말미암아 그 고개를 바라보지도 못하고 출발도 해보지 못한 채 일시에 후퇴하고 원점으로 돌아가 버렸습니다. 지금까지 이스라엘의 공로를 완전히 무산시키고 완전히 소비시켜 원점으로 만들어 놓은 것이 예수님의 십자가 노정이라는 것을 우리들은 알아야 되겠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지금까지 기독교가 발전하고 진전하고 승리해 나오는 데 있어서 개인적인 십자가의 고개, 가정적인 십자가의 고개, 종족, 민족, 국가, 세계적인 십자가의 고개를 넘어오고 있다는 사실을 우리들은 알아야 되겠습니다. 그렇기에 어떠한 종족, 어떠한 나라이든 기독교가 가는 곳에는 반드시 피 흘리는 싸움이 전개되었던 것입니다. 죽느냐 사느냐 하는 문제를 걸어 놓고 최후의 험한 길에서 판가리 싸움을 해왔다는 것을 우리들은 기독교사를 통해서 잘 알고 있습니다. 기독교가 아무리 몸부림쳐 나왔다 하더라도 영계와 육계를 통합한 자리에서 몸부림친 것이 아니라, 영계로써 육계를 통합시켜야 하는 크나큰 고개를 앞에 놓고 이 길을 타개하기 위해서 지금까지 발전해 나왔다는 사실을 알아야 되겠습니다.

이 고개를 넘고 난 후에 영계와 육계가 하나되어 가지고 새로운 이스라엘 종족과 새로운 이스라엘 민족, 새로운 이스라엘 국가를 형성하여 새로운 세계적인 무대로 가야 합니다. 이것이 복귀노정에 남아진 험한 길 중의 험한 길을 것을 우리들은 알아야 되겠습니다.

그러면 오늘날 이 땅 위에 나온 통일교회의 사명은 무엇인가? 영계와 육계에 남아있는 험한 고개를 타개해야 할 사명을 짊어지고 있다는 것을 여러분이 알아야 됩니다. 오늘날 우리는 영계를 중심삼고 육계를, 하늘을 중심삼고 땅을 정복하지 않으면 안 된다는 것입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정복할 수 있는 주체성을 가져야 합니다. 땅 위의 여건에 소화되는 자가 아니라 하늘의 여건을 가지고 땅의 여건을 소화할 수 있는 주체적인 자리에 서는 자가 되어야 하고, 주체적인 의식을 강화해야 할 뿐만 아니라 심령을 열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러기에 여기에는 반드시 모험이 따르게 됩니다. 우리가 가야 할 길이 이렇게 험한 길이라는 것은 역사를 비추어 볼 때 부정할 수 없는 것입니다.

26-253
영계와 육계의 험한 고개를 타개해야 할 통일교회
그래서 하나님은 지금까지 영계를 중심삼고 육계를 찾아오고 있습니다. 땅위에 찾아오는 이 길은 평탄한 길이 아니라 험한 길입니다. 그러므로 인간은 땅 위에서 험한 고개를 넘어 영계와 육계가 일치될 수 있는 하나의 승리적인 기점을 마련해야 합니다. 여기서 전체적인 기준이 아닌 개인적인 승리의 기준을 세웠다 할진대는 또다시 가정적인 험한 고개를 넘어가야 하는 것입니다. 즉, 가정에 대한 험한 길을 가야 된다는 것입니다.

가정을 찾아가는 길은 평탄한 길이 아니라 험한 길입니다. 역사과정에 맺힌 모든 곡절은 가정을 통해 시작되었기 때문에 가정을 찾아 넘어가기 위해서는 수많은 한의 고개와 엉클어진 사연을 밟고, 넘어야 할 험한 고개를 넘지 않으면 안 된다는 것을 우리들은 알아야 되겠습니다.

이러한 것은 가정만으로 끝날 것이 아닙니다. 가정을 중심삼고 새로운 종족을 향해 넘어갈 때에도 험한 고개가 남아 있는 것입니다. 이와 마찬가지로 종족을 중심삼고 민족을 향하여 넘어갈 때에도 탕감해야 할 험한 고개가 남아 있는 것입니다. 민족을 중심삼고 국가로 넘어갈 때에도 역시 마찬가지요, 국가에서 세계, 세계에서 천주로 넘어갈 때에도 우리들의 앞에는 언제나 험한 고개들이 기다리고 있는 사실을 알아야 되겠습니다.

예수님께서 사탄의 3대시험에서 승리하게 되었을 때, 사탄은 예수님에게 민족을 걸고 다시 나타날 것을 얘기하고 떠났습니다. 이것을 보게 될 때, 개인이 스스로 험한 고개를 넘어 승리했다 하더라도 민족을 중심삼고 싸워야 할 고빗길에서 승리하지 못하게 되면, 개인적으로 승리한 그도 패자의 서러움을 면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이런 사실을 여러분은 알아야 되겠습니다.

이런 관점에서 보게 될 때, 오늘 탕감노정을 가고 있는 우리들은 이런 험한 고개를 넘어야 할 운명길에 처해 있습니다. 이 고개를 누가 넘어야 할 것이냐? 이 고개는 그 누가 대신해서 넘어 줄 수 없는 것입니다. 인간은 타락한 부모의 인연을 갖고 태어났기에 그 부모가 넘었다고 해서 그 자식이 함께 따라 넘을 수 없는 것입니다. 인간은 타락하여 전부가 쇠사슬에 얽매여 있기 때문에 이 사슬을 끊고 넘어가야 됩니다. 이것은 부모가 끊고 넘었다고 해서 그것이 자기가 겪어야 할 시련과 고통이 탕감될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이 고개를 넘어가는 데는 반드시 각자가 책임지고 넘어가야 되는 것입니다.

이런 것을 보게 될 때, 인간 조상인 아담 해와 이 두 사람이 타락했기 때문에 지금까지 역사과정에 왔다 간 수많은 인류에게 남녀의 인연을 중심삼은 탕감의 조건이 제시되었고, 오늘날 30억 인류에게도 이것이 제시된다는 사실을 여러분은 알아야 되겠습니다.

그러면 패자의 서러운 잔을 마신 사람들은 어떠한 사람들이냐? 즉, 지옥에 간 사람들은 어떠한 사람들이냐? 이 험한 고개를 넘어가기를 싫어한 자기들이요, 험한 고개를 회피해 가려던 자들입니다. 그러나 험한 고개를 맞아 자기가 응당 넘어가야 할 필생의 노정으로 알고 그 고개를 넘기 위하여 들인 힘과 노력이 부족하다고 느껴 생명을 투입해서라도 넘어가야겠다고 했던 사람들은 그 고개를 넘어 서러운 역사과정을 뚫고 나아가서 하늘과 관계맺고 중간 영계인 낙원에 머물고 있다는 것을 우리들은 알아야 되겠습니다.

낙원에 가 있는 사람들의 배후를 역사과정을 통해 미루어 볼 때, 그 노정에 있어서 얼마나 험한 고개를 많이 넘었느냐가 문제입니다. 개인적인 험한 고개를 넘었느냐, 가정적인 험한 고개를 넘었느냐, 국가적인 험한 고개를 넘었느냐, 세계적인 고개를 넘었느냐 하는 차이에 따라 천적인 위치가 결정된다는 것을 알아야 되겠습니다.

예수님은 세계적인 험한 고개를 홀로 넘으려 하셨습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의 길을 간 것은 일생에 있어서 최후의 험한 고개였습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을 대하여 담판하기를 `내 아버지여, 할 수만 있으면 이 길을 나에게서 피하게 하소서’ 라고 했습니다. 가능한 한계선까지 하나님께서 양보해 주길 바라셨고 그 길을 피할 수 있으면 피하기를 바라셨지만 `그러나 내 뜻대로 마옵시고 아버지 뜻대로 하옵소서’ 라고 했습니다. `그러나…’ 하는 데는 생명을 내놓고, 즉 죽음을 각오하고 나섰던 것입니다. 이러한 신념을 갖고 나온 자리였지만 그 자리는 하나님께서 환영하시는 자리가 아니라, 하나님께서 버리시고 천지까지도 부정하는 자리였습니다. 그렇지만 예수님은 하나님의 뜻을 따라가야 할 험한 운명길이 남아 있는 것을 아셨습니다. 이렇듯 생명을 내놓고 담판지어야 할 사정이 예수님께 있었다는 것을 우리들은 알아야 되겠습니다.

26-255
세계적인 험한 고개를 홀로 넘으려 하신 예수님
예수님이 만일 겟세마네 동산에서 `내 아버지여 만일 할 수만 있으면…’ 하는 이 조건을 절대시했던들 오늘날의 기독교는 이 지상에 탄생하지 못했을 것입니다. 아무리 그분이 천년 역사를 지니고 오셨고 역사적인 사명을 종결짓기 위해 오셨다 하더라도, 이 험한 길을 넘지 못했다면 거기서부터 기독교의 역사, 새로운 복귀섭리의 역사는 이 지상에 현현할 수 없었을 것입니다. 그렇지만 예수님은 생명을 걸어 놓고 넘어가야 하는 험한 길을 갈 때 꿋꿋한 신념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예수님의 민족을 사랑하는 마음, 미래의 천국을 구상하는 마음, 하나님의 마음과 같은 마음이 있었기 때문에 험한 길을 밟고 넘어서서 돌파했던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거기서부터 그 험한 길에 비례되는 역사적인 새로운 출발이 벌어진 것입니다.

그러면 그것이 나라를 대한 투쟁 목표였던가, 세계를 대한 투쟁 목표였던가? 예수님이 험한 길을 넘기 위해 싸웠던 그 내용과 기준은 하나님을 중심삼은 새로운 역사의 출발의 동기가 되고, 또 출발한 이후에도 어떠한 과정을 거쳐 목적을 성사시킬 수 있는 것이어야 했습니다.

예수님이 험한 기점으로 맞은 기준은 세계적입니다. 혼자의 몸이지만 온 하늘땅을 구하겠다 하는 입장에 서서 세계적으로 가로놓인 험한 길을 돌파하기 위해 나섰던 것입니다. 예수님의 신념이 험한 길에 감겨 넘어간 것이 아니라 험한 절정을 죽음과 더불어 넘어갔기 때문에, 여기서부터 세계적인 복귀의 역사가 출발한 것을 알아야 됩니다.

26-256
모든 것을 무자비하게 청산짓고 나가야 할 우리
삼천만의 국민이 있는 한 나라가 난시 혹은 비상시에 처해 있다면, 그 나라를 구하는 사람은 그 삼천만 국민 전체가 아닙니다. 국민이 수억이 되더라도 그들 전체가 나라를 구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 나라를 구할 수 있는 사람은 하나의 기준을 세운 한 사람인 것입니다. 한 사람의 영향으로 나라를 구할 수 있습니다. 그는 과거로부터 지금까지 어떠한 누구보다도 이 민족이 쌓아온 역사적인 선의 실적을 중요시합니다. 그리고 그는 현시점에서 이 민족이 가야 할 모든 문제를 책임지고 미래에는 이 민족이 이러해야 된다는 신념을 가지고 단호히 나서는 애국자입니다.

그런 애국자가 제창하는 내용이 하나의 기점이 되어 이 국가를 구할 수 있는 길이 개척되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전체 국민이 나라를 구하는 것이 아니라 그 국민을 대표하는 분으로 말미암아 새로운 운세를 맞이할 수도 있는 것입니다. 그 반면에 새로운 운세를 맞이한 입장을 잃어버릴 수도 있다는 것을 우리들은 알아야 되겠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것을 제창하는 사람은 새로운 운세를 맞기 위해서 험한 길을 가야 됩니다. 그에게 밀려오는 모든 시련과 고통을 앞으로 올 소망의 세계와 비교했을 때 소망의 세계를 향하는 마음이 더 강해야 시련과 고통을 극복할 수 있는 것입니다. 험한 고개를 넘을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런 마음의 자세가 생명과 더불어 일체가 되어야 합니다. 그래서 그 기준이 몰아쳐 다가오는 환경의 험한 고개를 넘을 수 있는 그 이상의 기준이 되지 않고서는 역사시대를 넘어 새로운 시대의 기반을 세울 수 없게 된다는 것입니다.

우리 통일교회는 이 민족을 대하여 이제부터 행진해야 할 입장에 서 있습니다. 여러분이 새로운 전진을 추구하는 현시점에 있어서 나라를 향하여 가는 길이 험한 길이라고 후퇴하는 사람들은 나라 앞에 심판받는 거예요. 뿐만 아니라 세계앞에 심판의 받는 거에요. 그러기에 우리들이 이 험한 길에서 원수를 갚기 위해서는 나라를 심판할 수 있어야 합니다. 나라를 심판할 수 있어야 원수를 심판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더 나아가서 세계를 가로막고 있는 원수를 심판하기 위해서는 세계를 심판할 수 있어야 합니다. 즉, 세계를 심판할 수 있어야 원수인 사탄을 심판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이렇게 볼 때 우리들이 가야 할 행로는 험한 길임을 분명히 알아야 됩니다.

지금까지의 역사과정을 두고 볼 때, 이 길을 향하여 직행해 가느냐, 돌아가느냐 하는 문제가 천년사를 좌우하였습니다. 수천년 역사를 연장시키느냐, 수천년 역사를 반목시키느냐 하는 문제가 달려 있습니다. 이런 관점에서 볼 때, 오늘날 우리가 처해 있는 현시점이라는 것이 얼마나 엄청나고 심각합니까?

오늘날 우리들은 이 험한 길을 지나가는 데 있어서 자기의 생명이니 재산, 모든 것을 다 투입해 가지고 나아가야 되겠습니다. 아브라함이 결의하던 것과 마찬가지로 우리가 어차피 떠나가야 할 이 길이기에 떠나는 우리는 모든 것을 무자비하게 청산짓고 나아가야 되겠습니다. 우리는 민족이 반대하더라도 반대하는 그 모든 것을 돌파하고 나아가야 되겠습니다. 세계를 향하여 출발한 노정에 있어서 우리는 이 세계를 밟고 넘어가야 됩니다. 세계를 향하여 나가는 우리 앞에 험한 길이 가로놓여 있다면 그 길을 박차고 넘어가야 됩니다. 여러분은 그렇게 할 수 있겠습니까?

26-257
자기를 왜 존중시하고 절대시하느냐
자기에게 있어서 제일 가까운 것은 무엇입니까? 상대적 요건으로는 부모와 처자가 있습니다. 그 다음으로는 가정이면 가정을 중심삼은 물질의 조건이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사람은 누구나 자기의 가족과 물질을 비교해 볼 때 물질보다는 가족이 더 귀하다는 것을 알 것입니다. 가족을 버릴 것이냐 물질을 버릴 것이냐라고 할 때, 지금까지의 인륜도덕의 관념에 있어서는 어느 누구든지 가족을 위해서 물질을 버리는 것을 상례로 알고 있습니다. 그러면 자기에게 있어서 제일 가까운 것이 가족이냐, 자기 자신이냐 할 때에는 가족이 아니라 자기라는 것입니다. 자기와 가정을 두고 볼 때, 제일 귀한 것 하나만을 취해야 할 때는 어떻게 되느냐? 가정을 버리게 된다는 것입니다.

가정이라는 것은 세계를 축소시킨 횡적인 기반입니다. 여기서부터 국가와 세계가 벌어지는 것입니다. 가정이 무엇이냐? 가정은 세계의 횡적인 축소형으로 절대적인 중심 앞에 상대적인 기준입니다. 그러면 나는 무엇이냐? 절대적인 중심이 머무를 수 있는 발판입니다.

여러분이 어려운 일이 있으면 어머니를 찾는 데 누구 때문에 찾느냐? 어머니 때문에 찾는 것입니까? 어려운 상황에서 어머니를 찾고 그것을 해결해 주기를 바라는 것은 누구 때문이냐? 상대 때문이 아니라 나 때문에 하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제일 문제가 `나’입니다. 그러면 나를 왜 존중시하느냐? `나’는 중심이기 때문입니다. 중심은 둘이 있을 수 없습니다. `나’라는 존재는 중심존재를 대신할 수 있는 입장에 서 있기 때문에 그 중심존재 앞에 절대적인 상대형입니다. 그 상대는 평면도상 위에 자리잡은 입장에서의 절대가 아닙니다. 입체적인 하늘 앞에 상대적인 존재로서의 절대입니다.

그러므로 여러분은 몸과 마음이 하나되어 하나님을 모시고 살아야 됩니다. 그런데 그 몸과 마음이 언제나 하나되어야 하는데 그렇지 못했습니다. 하나되었다가는 갈라지고 하나되었다가는 갈라지고 했던 것이 우리 인간입니다. 자기 자신이 어떠하든지간에 자신을 존중시하는 것, 이것은 지금까지 인간들에게 있어서 부정할 수 없는 사실입니다. 우리는 자신을 중심삼고 모든 것을 처리할 수 있느냐 하는 문제를 두고 볼 때 아직까지 그럴 수 없습니다. 그것은 우주의 중심과 절대적인 관계를 맺지 못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절대적인 선의 기준을 갖추어 그러한 관계를 맺어야 할 입장에 있는 나이기 때문에 자신을 존중시해 나가야 되는 것입니다. 이러한 운명길에 있기에 자타를 막론하고 자신을 존중시하고 절대시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내 자신의 절대 기준을 세우기 위해서는 거기에 해당하는 상대적 요건을 갖추어야 합니다. 그것을 빨리 완전하게 갖추기 위해서는 여러분이 하늘편 중앙에 들어가지 않으면 안 됩니다. 들어가는 데 있어 반대하는 것은 전부 다 끊어야 됩니다. 물질이 반대하면 물질을 끊어야 되고 세계가 반대하면 세계를 끊어야 됩니다.

하나님께서 지금까지 펼쳐 나오신 이러한 상대적 기준을 타락으로 말미암아 남자나 여자나 할 것없이 전부다 갖추지 못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 상대적 기준을 갖추고자 하는 것이 인간의 필생의 욕구입니다. 죽을 고비에 있더라도 그 상대적 기준을 갖추어 놓고 죽어야 됩니다. 이러한 원인이 있기에 자기 자신을 절대시하는 것입니다.

26-259
하나님께서 인류에게 험한 길을 제시하시는 이유
그러면 타락권내에 있는 우리가 하늘과 일치될 수 있는 자리, 절대시할 수 있는 자리에 있느냐? 우리 자신이 타락권내에 있기 때문에 우리가 처해 있는 자리는 절대시할 수 있는 자리가 아닙니다. 타락권내에 절대세계가 있다면 그것은 망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늘을 중심삼고 그것을 부정해야 합니다. 절대시할 수 있는 하나의 중심은 둘이 될 수 없습니다. 여러분 자체를 두고 보면, 각기 성품이 다릅니다. 그렇기 때문에 여러분 나름대로의 하늘과 일치되는 세계관, 천주관이 있는 것입니다. 따라서 자기의 한 생명이 우주보다 큰 원인이 거기에 있습니다.

그러나 그 중심적인 기준을 결정하지 못했기 때문에 그것을 결정하기 위해서는 다시 태어나야 됩니다. 어머니 뱃속에서 다시 태어난다는 일이 쉬운 일입니까? 동서 사방에서 부딪치는 모든 길이 완전히 하나가 되었다 할 때에, 자기 자신이 절대적 기준을 세워 자리를 갖추었다 할 때에, 하늘과 자기 자신이 완전히 일체가 되었다 할 때에는 거기서부터 잃어버린 것은 잃어버린 것이 아닙니다. 평면적으로 잃어버리면 입체적으로 찾게 됩니다. 오늘날 평면적인 가정으로서 타락한 이 세계에서 평면적인 물질과 가정을 잃어버리는 대신 입체적인 물질과 입체적인 가정을 찾게 됩니다.

그러나 사람들은 이것을 확실히 모르고 있습니다. 이익을 얻고자 장사하는 사람들을 보면 그들은 현재의 실정을 잃어버리기 위해서 나서는 것입니다. 그것이 무슨 말이냐? 십만원 가진 사람이 백만원을 남겼을 때는 십만원에 대한 생각을 잊어버려야 된다는 것입니다.

이런 관점에서 볼 때, 하나님께서는 어찌하여 우리 인류에게 험한 길을 제시하시는 가? 하나님께서 우리를 망하게 하기 위해서 그런 길을 가게 하시는 것이 아니라, 장사로 말하면 몇배 이상의 이익을 남길 수 있게 하시기 위해서 죽음의 길이지만 가도록 사정없이 우리를 내모시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이렇게 하시는 것은 우리를 사랑하시기에 그러시는 것입니다. 온전한 가정을 이루기 위해서는 절대적 기준에 서야 합니다. 타락하였기 때문에 둘이 그냥 그대로 하나가 못 됩니다. 남자와 여자 둘 다 절대적 기준에 서지 않고는 함께 못 가게 되어 있습니다. 타락하지 않았으면 둘이 하나되어 가정을 이룰 것이었는데, 해와가 먼저 타락하여 전후관계를 만들어 놓았기 때문에 횡적인 관계, 즉 좌우관계를 가질 수 없었다는 것입니다.

평면적 기준에서 하나님과 일치되어서 비로소 횡적 기준이 일치될 수 있는 가정, 이런 가정은 세계가 깨지 못하고 하늘땅이 깨지 못합니다. 그 가정으로부터 새로운 역사가 벌어지는 것입니다.

이러한 가정을 이룰 때까지는 역사적인 모험과정을 거쳐야 합니다. 이것은 재림주님이 이 땅 위에 오셔서 해야 할 사명입니다. 그분의 역사를 보면, 그분은 인생행로에 있어서 그 누구보다도 험한 과정을 거치고 그 누구보다도 비참한 운명을 띠고 오시는 부모입니다. 그분도 그렇지만 하나님께서는 지금까지도 그 이상의 길을 거쳐 나오고 계시다는 것을 우리들은 알아야 되겠습니다.

만일에 이러한 기준을 결정짓기 못하면 어머니 뱃속에 들어갔다가 다시 나와야 합니다. 그러지 않고는 복귀가 안 됩니다. 복귀해야 되기 때문에 어머니 뱃속에 들어갔다가 다시 나와야 합니다. 그래서 니고데모가 찾아왔을 때 예수께서 중생하지 않으면 천국에 못 들어간다고 했던 것입니다. 중생하려면 지금까지의 사망의 세계를 떼어 버려야 합니다. 떼어 버려야 합니다. 세계에 대한 욕망이나 나라에 대한 욕망, 그리고 사회를 중심삼은 권위 등 이 세상의 모든 욕망을 떼어 버려야 된다는 것입니다. 이런 것을 떼어 버린다는 것이 이 세상에서는 얼마나 어려운 일인지 모릅니다. 이렇듯 `복귀’라는 관념을 생각할 때 복귀의 길은 험하다는 것을 여러분은 알아야 합니다. 이 길에는 `평탄’ 이란 말은 있을 수 없습니다. 비참한 길입니다. 여기에서 수많은 인간들이 죽어 갔습니다. 그 길에서 아버지 어머니가 갈라져 나가는 것은 하늘과 땅이 갈라지는 것이요, 인류가 갈라지는 것이요, 모든 인연이 깨져 나가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것을 일시에 탕감하기 위해서는 `내가 하나님의 뜻을 중심삼고 죽겠다’라고 할 수 있어야 합니다. 죽고자 하는 자는 살고 살고자 하는 자는 죽습니다. 그러니 `내 뜻을 하나님 뜻에 일치시키고 죽음의 길도 가야 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여러분들은 항상 `내가 지금 사는 것은 죽을 몸이 덤으로 사는 것인데 이제 죽어도 한이 없다’라고 할 수 있는 마음을 가지고 생활을 하여야 됩니다.

여러분은 이왕에 죽은 몸이니 이제 살 수 있는 길이 있다면, 그 길을 위해 언제든지 죽을 수 있는 마음을 갖지 않고는 영원히 살 수 없는 것입니다. 여러분이 이왕 죽었던 몸인데 뜻을 알고 가는 길에서 다시 살아 남게 된 것만 해도 이것은 자신으로 말미암아 살게 된 것이 아니고 하나님께서 살려 주셔서 덤으로 사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여러분은 하나님의 은공을 갚아 드려야 한다는 마음을 가지면 죽고 사는 것이 간단하다는 것입니다. 결국은 자기의 목숨이 문제라는 것입니다. 나라를 대해서 충신이 되고 역적이 되는 것도 마찬가지입니다.

26-261
시련과 고통의 의미
그러면 자기의 눈 때문에 타락한 사람도 있을 것이요, 귀 때문에 타락한 사람도 있을 것이요, 입 때문에 타락한 사람도 있을 것이요, 손 때문에 타락한 사람도 있을 것입니다. 이처럼 별의별 사람이 다 있습니다. 그렇지만 몸의 오관 전부가 뜻에 완전히 일치되어 죽게 되면 완전한 부활의 역사가 벌어집니다. 이것이 기독교의 역사입니다. 예수처럼 뜻에 완전히 일치되어 죽는다면 예수와 같은 완전한 부활의 역사가 벌어집니다. 자기 자신의 생명을 밟고 넘어서게 되면 세계를 대표하게 됩니다. 세계를 찾기 위해서는 생명을 밟고 넘어설 수 있어야 합니다. 그리고 하나님을 만나기 위해서도 생명을 밟고 넘어설 수 있는 입장에 여러분이 서지 않으면 안 됩니다.

그 길을 가기 위한 준비로 여러분은 자기의 가정을 버려야 됩니다. 아내와 자식을 버리는 것이 자기의 생명을 버리는 준비로 알아야 됩니다. 이렇게 자기 주변의 모든 것을 전부 다 버림으로써 자기 자신을 버릴 줄 아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이런 사람들만이 섭리도상에 남아질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그렇게 가셨습니다. 예수님은 부딪쳐 오는 시련과 고통을 피하려고 하시지 않았습니다. 예수님 자신은 죽음길을 가는 데 있어서 잘 희생하기 위한 준비를 하셨습니다. 이러한 생각을 갖고 나갔기 때문에 그 나가는 길 앞에 돌변한 사건이 벌어졌다 하더라도 아버지의 뜻을 놓고 이미 결심했기에 겟세마네 동산에서 한 기도가 자기 자신을 재차 다짐할 수 있는 길이 된 것입니다.

어떤 사람들을 보게 되면 자기가 져야 할 십자가, 자기가 응당 넘어야 할 고개인데도 불구하고, 조금만 힘들어도 그것이 자기 때문이 아닌 제삼자 때문이라고 합니다. 그런데 그가 그 험한 길을 넘어가는 데 있어서 빨리 넘어 가게 하기 위한 힘이 되고 다리가 되는 사람이라면, 결국 그 제삼자는 자기의 원수가 아닙니다. 그는 여러분이 고개를 넘도록 도와주는 안내자입니다. 따라서 그러한 실제의 길이 여러분 앞에 있다 할진대, 그 길을 자신에게 제시하여 준 사람으로 생각하고 그를 대해 고맙게 생각해야 됩니다.

그러기에 어떤 나라가 여러분을 반대한다 하더라도 그 나라는 원수의 나라가 아닙니다. 그 나라는 생명을 걸고 넘어가야 하는 하늘나라를 찾아가는 데 있어서 필요한 나라입니다. 그리고 여러분에게 험한 고개를 넘어가게 하는 것은 하늘나라에 들어갈 수 있는 합격자가 되게 하기 위한 것입니다. 그런 시험조건에 제시되지 않았을 때는 여러분은 하늘나라에 들어갈 수 없습니다. 여러분은 아직 그 나라에 들어갈 수 있는 권한을 차지한 사람이 되지 못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것을 차지할 수 있게 하기 위해 그 나라가 동원되었다고 생각해야 됩니다. 결국 나를 위해서 한 것이 아니라 생각해야 됩니다. 그런 사람들이 통일교인입니다. 하나님을 믿겠다는 사람들입니다.

사탄이 인간을 6천년 동안 지배해 나왔습니다. 그렇지만 하나님의 참된 아들딸에 대해서는 증거를 합니다. 사탄도 그런 아들딸은 얼마나 사랑한다는 것을 증명합니다. 사탄이 6천년 동안 지속적으로 반대해 나온 것은 결국 하나님이 인류를 지극히 사랑한다는 것을 증거한 것이 됩니다. 사탄이 세계를 걸어놓고 하나님의 참된 아들딸이 인류를 사랑하는 것을 막지 못하게 될 때, 필시 사랑하는 사람 앞에 인류를 돌려주어야 합니다. 그러므로 타락이 하나님의 사랑을 잃어버린 동기도 되고 사랑을 다시 찾을 수 있는 하나의 조건도 됩니다. 이러한 관점에서 보면 하나님께서는 사탄도 사랑하십니다.

오늘날 사람들에게도 그렇습니다. 자기는 못살더라도 자기 나라가 잘살기를 바라고 이 세계가 잘살기를 바라는 것이 바로 하나님의 마음인 것입니다. 여러분이 하나님과 더불어 하나되어 대한민국을 위하여 거름이 되고 세계를 위하여 거름이 되어야 합니다. 자기의 생명을 바치더라도 이 길은 필시 가야 할 길이고, 평생을 두고 가야 할 길임을 알고 따라가야 합니다. 그래서 국가의 국민이 추앙하는 개인이 되고 세계 인류가 추앙하는 선민이 되어야 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지금 우리가 처해 있는 시련과 고통은 빛나는 가치를 결정할 수 있는 획기적인 사실이라는 것을 여러분은 알아야 되겠습니다.

26-263
험한 길을 가게 하는 이유
지금까지 통일교회가 걸어온 길에는 험한 고개가 숱하게 많았습니다. 그 숱한 길, 험한 길이 나쁜 것이 아닙니다. 이것은 통일교회 자체를 청사에 빛낼 수 있는 가치를 지니게 해주고 승리적 조건을 세우게 하는 하나의 요건이 되었으면 되었지, 파탄시키는 요건이 된 것이 아닙니다. 이 험한 고개를 어떻게 극복해서 넘었느냐에 따라 승리의 발전을 얼마나 잘 닦을 수 있느냐 하는 것이 결정됩니다. 그런 험한 길을 가게 하는 것은 인류를 희생시키기 위해서가 아니라 인류에 복을 주기 위해서입니다.

옛날 아브라함이나 다윗은 이런 것들을 깨닫지 못했습니다. 야곱도 그런 것을 몰랐습니다. 그렇지만 이 시대에 사는 우리는 이러한 것을 완전히 알고 이 길을 가야 되겠습니다. 그러니 내일에 당할 시련과 고통을 이 기준에 맞추어 결정짓지 않고는 내 생애의 최후의 결판을 지어야 할 때 아무조건도 제시할 수 없게 된다는 것입니다. 이런 때가 다시 오지 않는다는 것을 생각할 때 얼마나 심각하겠습니까? 어느누구도 대할 수 없는 비판 받는 자리에서 그것을 양팔로 붙들어 책임지고 정면에서 부딪쳐야 합니다. 그래서 죽느냐 사느냐 하는 자리에서 우리 인생으로서 천적인 권위를 결정지을 수 있는 엄청난 조건이 이때에 결정된다는 것을 알아야 되겠습니다.

그렇다면 여러분, 험한 길이 좋은 거예요, 나쁜 거예요? 「좋은 겁니다」 한창 꽃다운 청춘시절에 자기의 둘도 없는 신랑과 신혼살림을 해야 할 여성이었는데, 통일교회를 믿고 이런 길을 걸어 나오다 보니 누더기옷만 입게 되고 나이만 먹게 되어 이제 주위를 돌아보니 남은 것이라고는 아무것도 없습니다. 나이가 50이 넘어서 `그냥 살았으면 세상의 아들딸이라도 낳고 살았을 텐데 이게 뭐야. 안착할 곳도 없이 쓸쓸하기 짝이 없고 적막강산이다. 통일교회 괜히 믿었다’ 라고 후회를 합니다. 여자들, 이것이 잘된 거예요, 못된 거예요? 잘되었으면 감사해야지, 불평하면 되겠습니까? 여러분은 잘될 수 있는 자리에서 못되었으니 그 자리를 내놓아야 한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하늘을 위해 몽땅 바친 그것을 후회하지 말아야 합니다. 꽃다운 청춘시절을 배신자를 위해 바쳤으면 다시 빼앗아 와야 합니다. 배신자는 상대방으로부터 마구 밟히고 밟혀 죽게 되었을 때에야 후회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거짓말을 한 사람이나 믿지 못하는 사람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께서 자식을 키우는데 여러분이 인재될 자격이 있습니까? 하나님의 사랑을 받을 만한 자격이라도 됩니까? 흠 투성이요, 형편없는 무리들이 자신들을 받아 달라고 하니까 하나님께서는 할 수 없이 눈을 감고 왼손으로 붙들고 계시는 것입니다. 그렇지만 될 수만 있으면 하나님께서 여러분을 돌이키게 하려고 끌고 나오시는 것입니다. 그런데 여러분은 얼마만큼 따라 나오다가 `아이고! 싫소 싫소. 살려 주시오. 다시 돌아가겠습니다’라고 합니다. 어느 정도 왔으면 반대로 그 만큼 더 가야만 되는데 여러분은 그러지를 않습니다. 그렇게 되면 지금까지 왔던 걸음이 수고한 공적에 반대되는 형벌의 조건이 된다는 것을 알아야 되겠습니다.

여러분의 마음이 그래요, 안 그래요? 효자의 한마디의 불효한 말은 부모의 가슴에 칼을 꽂는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믿었던 만큼, 가깝던 만큼, 절대시했던 만큼 그렇다는 것을 여러분은 알아야 되겠습니다.

이런 관점에서 보게 될 때, 여러분은 어디로 가고 있느냐? 돌아갈 수도 있는 자유의 길, 앞으로 전진할 수 있는 자유의 길, 옆으로 비켜갈 수 있는 자유의 길, 나그네처럼 가다가 쉴 수 있는 자유의 길, 그런 길로 가고 있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못난 사람이 되어 세상을 바라보고 있으니 모두다 못난 사람이 아니겠어요? 그런 사람들을 보면 길을 가다가 점점 깊은 골짜기가 나오게 되면 절벽강산이라고 가던 길을 포기합니다. 그런 사람들은 어디를 가거나 아무리 길이 있어 간다고 해도 전부다 염려하기 때문에 끝까지 가지 못합니다. 길을 가는 데는 가다 보면 절벽강산도 있고 큰 수렁도 있는 것입니다.

26-265
넘어야 할 고개를 넘지 못하면
여러분은 그러한 수렁이 있는 줄 알면 가겠어요, 못 가겠어요? `아이구, 내 이 길을 끝까지 가면 죽겠구나. 할아버지 할머니 아버지 어머니 자식할 것 없이 모두 가지 말라고 말리니 난 그 길을 못 가겠다’라고 합니다. 그러나 그 고개를 끝까지 못 넘게 될 때는 나중에 가서는 사망밖에 없다는 것을 여러분은 알아야 됩니다. 그것을 아는 한 지금은 아무리 절박하고 험한 길이라 해도 끝까지 간다면 역사가 알아주는 것입니다. 부모로서 자식에게 `나를 따라오라’고 명령을 해서 가르쳐 주면 생사지경을 넘어서 부모의 명령을 지켜야 할 것이 자식의 도리가 아니겠어요? 효를 다하는 자식은 가다가 지쳐 쓰러지는 한이 있더라도 부모가 가라는 대로, 부모의 명령대로 자기의 몸을 희생하며 그 길을 나서는 것입니다.

뜻을 따라가는 데 있어서는 사랑하는 처자가 있더라도 두고 가야 하고 사랑하는 남편이 있더라도 두고 가야 합니다. `가자’고 하는데 `나는 못 가겠습니다’ 하면 여러분은 큰일입니다. 여자는 천도에 따라 순응해서 여자로서 가야 할 길을 가야 합니다. 남편이 같이 죽자고 하면 죽을 수 있어야 합니다. 죽더라도 저나라에 가서 같이 살면 됩니다. 남편의 명령을 절대시하고 남편의 명령에 순종한 뒤에는 해방될 수 있는 길이 있다는 것입니다. 인륜 세계의 도덕관에 있어서 악한 타락권내에 있다 하더라도, 삼강오륜을 중심삼고 절대 순응하는 사람들은, 절대 순종이라는 기준을 세운 사람들은 다시 해방될 수 있는 길이 여전히 남아 있는 거예요.

우리 통일교회 교인들은 이제는 영계가 있다는 것을 알지요? 영계가 있는지 알아요, 몰라요? 영계가 있다는 것만은 알지요? 세상의 인류가 다 모르더라도 영계는 틀림없이 있습니다. 통일교회는 그것을 발견하고 지금까지 나온 것입니다. 영계에 가는 길은 반드시 이 길을 통해야 합니다. 이 길에는 하나님께서 같이하고 계십니다. 이것은 틀림없습니다.

26-266
여러분이 가는 길은 험한 길이나 끝이 있다
여러분에게 통일교회 문선생님 말을 들으라는 것이 아닙니다. 선생님 말은 안 들어도 좋으니 하나님 말씀만 믿으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여러분이 듣고자 하다 보니 선생님이 필요하지요? 선생님도 이제는 나를 따르는 것 기분 나쁩니다. (웃음) 하나님을 사랑하려니 통일교회가 필요하고, 통일교회 말씀이 필요하고, 이것을 책임지고 가야 할 사람이 필요하니 통일교회 선생님이 필요합니다. 이것을 모른다면 목적지가 있겠어요? 이것을 위해서 먼저 가야 할 것이 통일교회의 목적입니다. 여러분은 제자리에 있으면 망하는 것입니다. 더 나아가야 합니다.

제비는 음력 9월 9일이 되면 강남으로 갔다가 음력 3월 3일이 되면 돌아온다고 합니다. 강남에 갔던 제비가 돌아오는 것을 보면 참 용합니다. 어떻게 자기의 살길을 찾아 강남으로 갔다가 다시 살길을 찾아 돌아오느냐 하는 것입니다. 다시 제집을 찾아오는 것을 보면 신기하다는 거예요. 여러분도 생각해 보아요. 봄이 되면 제비들이 몰려와서 지지배배 울며 집집마다 처마 끝에 집을 짓고 새끼를 치고 야단입니다. 그렇게 살다가도 가을만 되면 여기서는 살기 어렵다고 전부 다 강남으로 갑니다. 산을 넘고 바다를 건너 옛날에 자기가 살던 집으로 돌아갑니다. 참 신기한 일이에요. 하루나 이틀을 지나도 기온의 변화를 느끼지 못합니다. 그러나 여름이 지나가고 가을이 되면 기후를 다 가려 가지고 자기의 살 길을 찾아간다는 것입니다. 그렇게 되어 있지요?

만물의 영장인 우리 인간도 마찬가지입니다. 라디오 방송을 통해서 겨울이 오는 것을 아는 것이 아니라, 자연히 피부로 느끼는 것입니다. 여러분이 모른척 해도 압니다.

선생님은 여러분이 어떤 사람인지 다 알고 있습니다. 자기가 잘했는지 잘못했는지 모릅니까? 알면서 안 한다면 망하는 것입니다. 몰라서 못 했다면 하나님께서 책임을 지시지만 알면서 안 했다면 그의 가는 길은 지옥입니다. 그런데 누구를 원망합니까?

그렇기 때문에 통일교회의 선생님을 찾아오라는 것입니다. 다른 것은 몰라도 하나님만을 믿는 것은 확실하다는 것입니다. 기성교회 사람들은 영계가 있는지 없는지, 하나님이 계신지 안 계신지 모릅니다. 밤인지 낮인지 전혀 모른다는 것입니다. 여러분이 의심치 않고 하나님을 믿고 간다면 통일교인이 되는 것입니다. 그렇게 되면 망하는 길을 가지 않습니다. 그러나 가지도 않고 의심한다면 망한다는 것입니다.

여러분이 가는 길은 험한 길이기는 하지만 끝이 있습니다. 여기에서 끝을 보는 날에는 세계는 나와 영원한 관계를 맺을 수 있습니다. 그러면 세계의 끝은 언제 올 것이냐? 그 끝이 오는 날이 끝날입니다. 여기에는 세계가 동원되어야 하고 온 인류가 동원되어야 합니다. 이 험한 길이 막혀 있기에 뚫고 가기 위해서는 개인 가정 종족 민족 국가 세계가 절반 이상이 동원되었다는 기준을 넘어서야 정상 코오스로 가는 것입니다.

26-267
세계를 살리기 위해 희생해야 한다
오늘날 민주세계가 하나님이 없다고, 죽었다고 할 때가 오게 되면 전부다 공산주의 사상에 흡수되어 버립니다. 그래서 과학적인 견지에서 하나님을 밝히려는 입장에 서게 됩니다. 오늘날 지식층에 있는 사람들은 거의 이런 부류의 사람들입니다. 이처럼 절반 이상이 하나님을 반대하는 권내로 넘어가게 되면 세계는 끝입니다. 그러기에 하늘편을 향하여 자동적으로 넘어가야 합니다. 그때까지는 얼마나 걸리는가? 선생님이 지난번에도 얘기했지만 오늘날 민주세계도 끝이요, 공산세계도 끝입니다. 이제 둘 다 기울어져 갑니다. 여기서 싸움이 한바탕 벌어지게 되면 전부다 무너지는 것입니다. 끝이라는 것입니다. 정상을 어느 정도 돌파하다가 후퇴하게 되면 넘어가는 것입니다.

월남에 있는 베트콩이 싸우자고 하면 싸우는 것입니다. 공산당이 싸우자면 싸우는 것입니다. 세계를 하나로 만들기 위해서는 싸우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6천년 동안 싸워 나오셨기 때문에 10년, 100년이 아니라 6천년이 걸려도 싸우는 것입니다. 그것은 자기 민족을 위해 싸우는 것이 아니라 세계 인류를 위해 싸우는 것입니다. 싸우는 목적이 다릅니다.

공산당들이 세계 곳곳에서 싸워 자기들의 기반을 구축해 나왔지만, 세계를 위해서 싸운 것이 아니라 소련을 위해 싸웠으니 망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소련만을 찾기 위한 것이 아니라 세계를 찾고자 하시는 것입니다. 미국은 민주세계의 선도적인 입장에서 전세계를 위해 싸워 나가야 합니다. 세계를 찾기 위한 민주주의이지, 미국을 찾기 위한 민주주의가 아닙니다. 세계를 세우기 위한 민주주가 못 되고 미국만을 세우기 위한 민주주의라면 이 주의는 망한다는 것입니다. 그런 민주주의는 필요없습니다. 그런 공산주의도 필요없습니다. 세계를 살릴 수 있는 민주주의, 세계를 살릴 수 있는 공산주의라면 이 세계에 남아진다는 것입니다.

오늘날 우리들이 하나님을 중심삼고 대한민국을 위해 사는 것은 대한민국만을 위한 것이 아닙니다. 대한민국을 세워 가지고 세계를 살리기 위한 것입니다. 민족주의시대는 지나간 시대입니다. 대한민국을 찾아 세워 그것을 제물삼아서 세계 앞에 바치려는 사람이 있다면 그는 세계를 지배하게 될 것입니다.

어떠한 사람이든 자기의 국가관념을 중심삼고 세계가 어떠한 문제의 정면에 부딪쳤을 때 자기의 민족 국가를 전부다 희생시켜서라도 세계를 찾겠다고 부르짖는 사람이 있다면 그는 하늘의 자식이요, 효자입니다. 자기 아들딸을 희생시켜 남의 아들딸을 찾겠다고 하고, 자기 민족을 희생시켜 남의 민족을 찾겠다고 해야 합니다. 그러기에 오늘날 기독교를 희생시켜서 사탄세계를 찾자는 것이 하늘의 법칙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선생님은 여러분을 희생시켜서라도 대한민국을 찾겠다는 것입니다. 그것이 정상 코오스예요, 아니예요? 정상적인 지도법이에요, 아니예요? 선생님이 여러분을 희생시킨다면 여러분은 선생님과 가까워지는 것입니다. 여하튼 하나님은 여러분을 희생시켜서 대한민국을 찾으려 하십니다. 그러지 않고서는 하늘의 뜻이 이루어지지 않습니다. 뜻 앞에 있어서 생명을 다하여 한을 풀어놓는 것은 여러분 손에 달려 있기 때문입니다. 이 세계적 과정을 넘기 위해서는 반드시 결단이 필요합니다. 대한민국은 세계를 위해 희생해야 합니다. 그것이 새로운 민족입니다. 대한민국은 세계를 위해 망할 수 있다는 의지가 필요하다는 것입니다.

26-269
우리가 가야 할 험한 길
우리가 가야 할 험한 길이라는 것은 세상에서 말하는 험한 길과 내용이 다릅니다. 세상에서는 험한 길을 가라면 전부다 울고불고 야단합니다. `아이고 힘들어서 못 가겠다. 이 길은 비참한 길이야. 생각도 하기 싫고 보기도 싫다. 끔찍끔찍한 길이야’라고 합니다. 그러나 우리가 가는 길은 그 끔찍끔찍한 길도, 울고불고하며 가는 길도 소망의 길이라는 것입니다. 자기에게 아무리 가까운 이를 보내야 하는 아픔이 있더라도, 승리할 수 있는 입장에 있기에 눈물을 흘리지 말아야 합니다. 그 자리에서 하나님 앞에 감사드릴 수 있어야 합니다. 그리고 자기를 희생시킬 수 있어야 합니다.

자기의 가정이 희생되는 것은 분하고 원통하고 가슴 아픈 일입니다. 그러나 자기의 가정이 희생함으로 말미암아 찾아야 할 국가의 운명이 섭리앞에 다가오는 것을 볼 때, 자기의 가정의 희생된 것을 보고 눈물 흘려서는 안 됩니다. 자기가 아무리 슬프더라도 국가가 해방이 되었거든 쌍수를 들어 만세를 불러야 합니다. 국가가 해방이 되었거든 어머니의 시체를 옆에 놓고도 만세를 부르는 것이 나라의 충신이라는 것입니다. 처자의 시체를 옆에 놓고도 아픈 가슴을 억누르며 수천년 역사 속에서 민족이 바라나온 그 소원이 이루어진 해방의 날을 맞아 쌍수를 들어 환영할 수 있는 사람, 아픈 가슴이지만 오히려 기쁨으로 나라를 찬양할 수 있는 자리에 설 수 있는 사람이라야 애국자라는 것을 여러분은 알아야 됩니다.

앞으로 통일용사들은 못 갈 데가 없어야 합니다. 삼팔선도 넘을 수 있어야 겠습니다. 반드시 여기를 넘을 수 있을 것입니다. 이 길을 가는 데는 죽는 자도 있을 것이고, 자기가 살기 위해 도망가는 자도 많을 것입니다. 그렇지만 민족통일의 해원이 자기의 죽음 앞에 가까운 것을 보게 될 때 여러분은 이것을 슬퍼할 것이 아니라, 그 죽음길에서 찬양해야 합니다. 민족의 통일을 달성하기 위해서는 죽음을 각오할 수 있는 해방의 역군들이 필요합니다. 이 민족의 해원과 더불어, 민족의 해방과 더불어 승리의 영광을 삼천만 민족 앞에 돌리는 역군들은 길이길이 이 민족을 사랑한 애국지사의 행렬에 동참하게 됩니다. 거기에 죽어간 사람들은 그 민족과 더불어 부활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예수를 내려다보시게 될 때도 마찬가지입니다. 예수는 이스라엘 민족을 위하여 왔지만 민족을 중심삼고 세계를 향해 가야 했습니다. 그러기에 예수는 민족을 대신하여 자기의 생명을 걸고 세계를 위하여 간 것입니다. 예수 자신이 죽음으로 인해 세계를 맞이할 수 있는 가까운 길에서 민족해방의 길이 세워진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민족을 위한 길이요, 더 나아가서 세계를 위한 길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사랑하는 아들을 내몰았지만, 십자가에서 운명하는 세 시간 동안 천지를 어두움에 휩싸이게 하였습니다. 하나님은 그 순간에 얼마나 억울한 사정이 있었겠는가? 하나님께서는 얼굴을 돌리는 그 순간에는 많은 것을 잃어버리셨지만 소망의 세계를 바라볼 수 있었던 것입니다. 그런 자리가 되었기 때문에 새로운 기독교의 역사, 새로운 제2이스라엘의 건국의 역사를 맞이하게 된 것입니다.

이런 관점에서 일반 사람들이 험하다는 것과 통일교회에서 험하다고 보고 있는 것과는 그 내용에 있어서 다릅니다. 선생님은 그런 차원에서 감옥에 들어갔던 것입니다. 감옥에 들어가 매를 맞고 고문을 당했습니다. 선생님과 마찬가지로 수많은 우리 통일교회 청년들, 수많은 가정들이 이 이념을 따라가다 몰릴 것입니다. 그러나 천년 전에 당한 일이 천년의 한계를 뚫을 수 있는 하나의 정이 되고 망치가 될 것입니다. 그래서 그 가치를 횡적으로 종적으로 넓히기 위한 마지막 싸움의 자리에서 하늘의 보화가 되고 열매가 될 수 있어야 합니다.

아담 해와는 타락함으로 말미암아 역사의 수많은 인간들 앞에 역사적인 심판을 받았습니다. 아담 해와는 얼마나 지탄을 받고 참소를 받았습니까? 아담 해와가 당한 그런 슬픈 운명을 우리는 피할 수 없습니다. 단연코 맞을 수 있는 길로 우리는 가야 합니다. 이 자리에서 졸장부가 되어서는 안 되겠습니다. 가는 길에 있어서 눈물을 흘려서도 안 됩니다. 하늘편에 서서 실전에 나아가 생명력을 가지고 악을 쳐야 합니다. 여러분은 아담 해와가 참소받던 그 이상의 자리에 들어가 훈련을 받아야 합니다.

때가 오게 되면 선생님이 여러분을 들이치더라도 선생님은 걸리지 않습니다. 탕감법에 의해서 선생님은 여러분들을 7배까지 칠 수 있습니다. 7배가 아니라 70배를 치더라도 선생님은 천법에 걸리지 않습니다. 선생님은 생명을 건 자리에서 차라리 죽는 것이 더 쉽다고 할 정도로 기절하여 쓰러지는 일을 수십 번 당하기도 했습니다. 이것은 결국 최고의 승리를 다짐할 수 있는 좋은 재료를 갖추게 하는 것이 시련의 길이라는 것을 말합니다. 무슨 말인지 알겠어요?

26-271
험한 길은 흥하는 길
예수가 사탄세계에서 만세의 하늘세계를 이룰 수 있는 메시아의 권한을 갖게 되는 승리적인 조건이 십자가였습니다. 십자가가 없었다면 그 조건을 제시할 아무런 내용이 없다는 것입니다. 만약 하나님께서 좋게 해주시면 누구나 쉽게 하늘길을 갈 수 있을 것이 아니겠어요? 이렇게 가는 것과 예수가 십자가를 지고 간 것과는 내용이 다르다는 것입니다. 하늘을 앞세우고 시련과 환난을 당하는 험한 길은 망하는 길이 아니고 흥하는 길입니다. 여러분, 알겠지요? 「예」 험한 길을 가는 것은 망하는 것이 아니라 흥하는 것입니다.

시련과 환난을 당하는 험한 길을 가려고 하지 않는 것은 놀부사상입니다. 반면에 시련과 환난을 당하는 험한 길을 가려고 하는 것은 흥부사상입니다. 놀부가 잘했어요, 흥부가 잘했어요? 「흥부가 잘했습니다」 그러면 누가 좋았어요? 처음에는 놀부가 좋았고, 나중에는 흥부가 좋았습니다. 처음에는 사탄편인 놀부가 좋았지만 나중에는 하늘편인 흥부가 좋았습니다. 하늘편인 흥부가 따라가는 가지가지의 사연이나 곡절은 가지가지의 축복을 받을 수 있는 내용이 됩니다. 그렇기 때문에 정의에 입각해서 살고, 정의에 입각해서 싸우고, 정의에 입각해서 죽어가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역사적으로 볼 때 이런 사람을 사탄세계의 역사에서는 밟고 넘어가는 법이 없습니다. 선한 사람은 그 시대에서 볼 때는 배반자요, 그 시대로부터 버림받은 자같이 보이지만, 역사는 그 앞에 굴복하는 것입니다.

여러분들은 우리 통일교인이 가는 길을 세상 사람들이 가는 길과는 내용이 다르다는 것을 알아야 됩니다. 알겠지요? 「예」 선생님이 가자고 하여 엄청난 책임을 짊어지고 가는 여러분은 앞으로 복받을 것입니다. 선생님이 여러분에게 가지 말라고 하는 것 이상 무서운 것이 없습니다. 통일교회에 들어와서 전도하지 말라는 것 이상 무서운 것이 없습니다. 40일 전도를 가지 말라, 7년노정을 가지 말라는 것 이상 무서운 것이 없습니다. 앞으로 여러분 중에 특정한 사람만 뽑고 문을 닫아 걸 때가 옵니다. 7년 노정을 가게 하는 것이 좋아요, 못 가게 하는 것이 좋아요? 마찬가지로 40일 전도를 가게 하는 것이 좋아요, 못 가게 하는 것이 좋아요? 「가게 하는 것이 좋습니다」 그러면 그 길이 환영받는 길이에요, 배척받는 길이에요? 그 길은 세상에서는 배척받는 길이고 하늘에서는 환영받는 길입니다. 사탄세계에서는 우리를 배척함으로 어떻게 되느냐? 사탄세계는 망하게 되는 것입니다. 사탄은 싸움에서 지게 되면 그 대가를 갚고 돌아서야 합니다. 무슨 말이냐 하면 사탄을 쳐서 승리하지 못하면 후퇴할 때 그 대가를 치러야 되는 것입니다. 그러기에 하늘의 전법은 맞고 나서 복을 몽땅 빼앗는 전법이라는 것입니다.

예수를 죽게 한 것은 사탄세계의 사망권을 몽땅 처치하는 방법이었던 것입니다. 여러분, 이해가 됩니까? 「예」 그렇기 때문에 선한 자리에 있는 자는 맞아야 합니다. 맞으면 망하는 법이 없습니다. 맞으면 빼앗아 오게 되어 있습니다. 이것이 하늘의 작전입니다. 사탄세계는 치고 망하는 것이고, 하늘의 작전은 맞고 빼앗아 오는 것입니다. 역사를 상고해 보면 확실히 알 수 있습니다. 통일교회는 치고 빼앗았어요, 맞고 빼앗았어요? 「맞고 빼앗았습니다」 이것은 하늘의 전법에 합격한 과정을 거쳐 나온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여러분이 가는 험한 길이라는 것은 희망에 벅찬 길이지, 절망과 관계맺는 길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밥을 얻어먹는 처지에 있더라도, 주먹밥을 쥐고 먹는 순간에도 희망에 넘쳐야 합니다. 그럴 수 있다면 이것이 변하여 훗날 죄악세계의 옥상(玉床)에 차려 놓은 진수 성찬을 때려부술 수 있는 날이 올 것이고, 이 손가락이 수많은 금수저를 때려부술 날이 올 것입니다. 자기가 지금은 거적대기 같은 것을 입고 있지만 왕실의 보좌를 때려부술 날이 올 것입니다. 이것은 손을 대지 않고도 싸우지 않고도 때려부술 수 있게 됩니다. 멋진 방어진지, 멋진 성을 쌓는 일에는 시련과 고통이 따른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여러분은 이 길을 갈 것이냐, 안 갈 것이냐? 박기옥! 가겠어요, 안 가겠어요? 「가겠습니다」 조금 전에 한 말 들었어? 「예」 박기옥이는 눈과 귀가 다른 모양이지? 귀는 듣고 눈을 요술했구만. 안경 낀 여자들, 아침부터 떡 버티고 앉아서 기분 나쁘게…. 그것도 하나의 험한 고개인 모양이지요? (웃음) 최용석! 가겠어 안 가겠어? 「가겠습니다」 하얗게 머리가 센 늙은 부모가 시키더라도 가겠어?

26-273
이 뜻은 누구를 위한 것이냐
여러분은 뜻을 중심삼고 나오던 과거지사를 절대 후회하지 마십시오. 자기가 기뻐서 자신이 책임지고 한 행동이라 생각하고 누구의 명령에 의해서 움직였다고 생각하지 마십시오. 선생님이 가라 했지만 여러분은 선생님 말을 듣고 갔다고 생각하지 말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자기 자신이 능동적으로 했고 또한 자기 자신이 한 것이니 스스로 책임을 진다고 해야 합니다. 그런 사람은 망하지 않습니다. 그런데 여러분들이 `아휴! 통일교회 문선생을 찾아 들어왔다가 신세 망쳤어’라고 하는데, 선생님이 그렇게 만들었습니까? 자신이 그렇게 된 것입니다. 선생님은 망하지 않았는데 자기가 망해 놓고 누가 그렇게 했다고 주장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렇지만 자기들이 가만히 생각해 보면 문선생이 옳고 자기들이 잘못했다는 것을 안다는 것입니다. 어떤 사람은 통일교회 유효원이가 보기 싫어서 통일교회 못 가겠다고 야단입니다. (웃음) 유효원이가 밥을 달라고 합니까, 뺨을 쳤습니까? 그것이 타락한 사탄법이 아니고 무엇이겠어요? 자기가 그렇게 한 것이니 유감스럽고 뭐고 할 게 없다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여러분은 뜻을 중심삼고서 `내가 한 것이요, 내가 기뻐서 한 것이요’라고 할 수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자신의 몸과 마음이 천적인 인연을 통하여 자기 자신이 움직인 것이므로 영원히 자기의 소유입니다. 자기의 소유로 철강석을 삼고 영원한 밑천을 삼을 때 하늘나라의 백성이 된다는 것입니다.

누구한테 물건을 빌려 가지고 갈 것입니까? 아버지 어머니를 빌린 몸뚱이가 누구입니까? 아버지 어머니에게 받았지만 자기의 것입니다. 자기의 것으로 상속받은 것입니다.

이 뜻은 누구의 뜻입니까? 통일교회를 위한 문선생의 뜻입니까? 여러분의 뜻인 것입니다. 여러분은 지금까지 `하나님을 위해서, 뜻을 위해서’ 라고 말은 잘 합니다. 여러분에게 무엇을 위해 죽을 것이냐? 하고 물으면 `뜻을 위해서’라고 합니다. 누구를 위해 죽을 것이냐? 하고 물으면 `하나님을 위해서’라고 합니다. 그러나 결국은 뜻을 위하고 하나님을 위한다고 하는 것은 자기 자신을 위하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전부다 빚지고 매일매일 신세지고 있는데도 불구하고 오히려 자기가 신세 지우고 있는 것처럼 생각하고 있습니다. 자기가 교회를 위해서 얼마만큼 했는데 선생님이 알아주지 않는다고 수작을 부립니다. 선생님이 몰라주면 하나님께서 알아주시는 것입니다. 어떤 사람을 보면 `아이구, 뭐 이렇고 저렇고…. 자기는 잘하는데 지구장이 잘못하고 지역장이 잘못하고 뭐 어떻고 저떻고’ 하며 편지를 보냅니다. 그런 사람은 틀렸다는 것입니다.

선생님은 그러지 않았습니다. 선생님은 감옥에 들어가 죽을 고비에서도 불평하는 말을 하지 않았어요. 죽을 길에서 원수까지 동정해 주었습니다. 죽을 자리에 내몰리더라도 동정을 해주는 입장에 서야 원수가 맺어지지 않습니다. 그렇지 않으면 그 원수가 원수를 낳게 되어 또 다른 원수가 생겨난 다는 것입니다. 여러분들이 이런 것을 알게 될 때, `아하, 험한 길을 넘는 것이 나쁜 것이 아니구나’라고 생각해 될 것입니다. 알겠어요? 「예」

26-274
험한 길 중에도 험한 길을 가라
그러면 여러분에게 삼팔선을 넘자고 하면 넘어가겠어요? 「넘어 가겠습니다」 그것을 잘 넘는 날에는 민족이 추앙할 수 있는 애국지사가 되는 것입니다. 안중근이 대학교 교수를 했습니까? 유관순이 대통령 부인이었습니까? 뭐 결혼이나 해 보았어요? 이들이 한 행동이 얼마나 미욱해 보였겠어요? 일본 관원들이 총칼을 겨누고 있는데 감히 어쩌자는 것입니까? 만세를 부르고 이등박문(伊藤博文)을 죽이고 그랬겠습니까? 누구를 위해서 그런 거예요? 그것은 전부 다 나라를 위해서 그런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이 나라가 존속하는 한 청사(靑史)에 그 이름이 빛날 것이고 그 이름이 부활할 것입니다.

세계를 위해서 죽으면 세계가 사는 날에는 부활하는 것입니다. 통일교회 문선생님이 세계를 위해서 싸우다 죽어 한 줌의 흙밖에 남기지 못한다 하더라도, 세계가 있고 하나님이 계시는 한 반드시 승리하여 부활의 한날을 맞이하게 될 것입니다. 그 날에는 영광의 꽃을 가지고 장식하여 꽂고 승리의 권한을 갖고 나타난다는 것입니다. 여기서 장식을 하고 꽃을 꽂는 것은 그 영광을 이루기까지 시련과 고통을 당하면서도 승리했다는 것을 말합니다.

그러면 시련과 고통은 좋은 것입니까, 나쁜 것입니까? 이제는 시련과 고통이 좋다는 것을 여러분은 알았을 것입니다. 선생님이 여러분을 불러 다시 쉬운 명령을 해주기를 바랍니까, 어려운 명령을 해주기를 바랍니까? 「어려운 명령을 해주기를 바랍니다」 여러분은 평탄한 길을 가겠어요, 험한 길을 가겠어요? 「험한 길을 가겠습니다」 여러분은 험한 길중에서도 험한 길을 가야 합니다. 선생님은 이 길을 가는 지도자를 찾고 있습니다. 일본 식구 중에 누구라도 평탄한 길을 가려고 하면 안 됩니다. 그래서 선생님이 일본 협회장인 구보끼에게도 옆구리에 총을 들이대더라도 뜻을 위해 가겠느냐고 물어 보았던 것입니다.

큰 뜻이 이루어지는 한때를 바라보시는 하나님께서 믿지 않는 사람을 내보내겠어요? 세상에서도 믿는 사람을 내보냅니다. 그러기에 하나님께서 지극히 사랑하는 사람을 내세워 희생시키지 않을 수 없는 일이 여기에서 벌어지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내보낸 그 사람이 원수의 세계에서 변절하는 날에는 하늘나라가 깨져 나가는 것입니다. 수천년의 역사가 눈물을 흘린다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믿는 사람, 가까운 사람을 사지(死地)에 내보내는 것이 사랑의 도리라는 것을 여러분은 깨달아야 되겠습니다.

선생님이 가기 힘든 험한 길로 내보낼 수 있는 사람은 선생님이 누구에게도 명령하지 못한 명령을 받을 만큼 하늘에 가까운 입장에 있는 사람이라는 것을 알아야 되겠습니다. 여러분들은 생명을 걸고 그런 명령을 받을 수 있는 용자들이 되어야 하겠습니다. 그래야 통일의 용사가 된다는 것을 확실히 알아야 되겠습니다.

26-276
기 도
아버님, `가야 할 험한 길’이라는 제목으로 말씀을 했습니다. 아버지께서 지금까지 역사과정을 지내시며 싸워 나오신 것은 실패한 역사 같사오나, 여기에는 반드시 승리의 경과를 가질 수 있으며 맞고도 또다시 재기할 수 있는 인연이 있는 것을 알고 있사옵니다. 아버지께서 언제나 빚을 지우는 자리에서 저희들을 다시 찾을 수 있는 인연의 자리에 세우시고, 또 도의 길을 가는 사람에게 모든 것을 다 잃어버리더라도 가게 하신 것은, 알고 보니 아버지께서 그렇게 하시지 않으면 안 될 아버지의 내정이 있었던 것을 저희들이 헤아리게 되옵니다.

저희들이 가는 험한 길은 원수의 길이 아니요, 저희들이 망하는 길이 아니라, 아버지와 끊을래야 끊을 수 없는 가까운 자리에 인연맺기 위한 절대적인 조건이 되고, 사랑의 내용을 결합시키는 절대적인 끈이 되고, 하나의 결정적인 요소가 되는 길이라는 사실을 확실히 알았사옵니다. 그러하오니 그 자리를 찾아 민족을 대신해서 세계를 향하여 달려갈 줄 아는 당신의 아들딸이 많이 나타나게 허락하여 주옵소서.

현재의 세계정세를 볼 때, 통일의 자녀들이 가야 할 최후의 길만이 저희들에게 남아 있다는 것을 아오니, 세계를 향하여 힘차게 달려갈 줄 아는 당신의 자녀들이 되게 하여 주옵소서.

세계에 널려 있는 통일의 자녀들을 통하여 수많은 민족이 세계를 향하여 달려갈 수 있게, 아버지, 각자의 마음을 재촉하시옵고, 그 사정을 가리시어서 당신이 뜻하신 승리의 한 날을 갖게 허락하여 주시옵기를 간절히 부탁드리옵니다. 모든 말씀 참부모의 이름으로 아뢰었사옵니다. 아멘.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