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6-107 to 26-145: 참된 생애를 어떻게 남길 것인가

참된 생애를 어떻게 남길 것인가
1969.10.19 (일), 한국 대구교회

26-107
참된 생애를 어떻게 남길 것인가
[기 도]

아버님! 오늘은 10월 19일, 10월 들어 세 번째 맞는 안식일이옵니다. 이날을 맞이하여 전국에 널려 있는 수많은 자녀들이 각 제단 앞에 모여 머리를 조아려 경배하고 마음 모아 정성들이고 있사오니, 그 무리들 앞에 당신의 무한하신 사랑과 긍휼이 같이하여 주시옵기를 간절히 바라옵나이다.

저희들을 이 자리에 세워 놓고 저희들을 통하여 해원성사하시려는 아버님의 거룩하신 뜻이 있음을 아옵니다. 당신께서 해원성사하시려는 그 뜻 앞에 충성을 다하여 없어서는 안 될 자녀들이 되게 허락하여 주시옵기를 간절히 바라옵고 원하옵니다.

오늘 저희가 있게 된 것은 저희 자신으로 말미암은 것이 아닌 줄 알고 있사옵니다. 시작도 당신이요, 끝도 당신인 줄 알고 당신 앞에 전체를 맡겼사오니 주관하여 주시옵소서.

저희들로 말미암아 승리의 개인과, 승리의 가정과, 승리의 나라와, 승리의 세계를 복귀하시옵고, 더 나아가서는 승리의 천국을 이루시어서 아버님 홀로 영광받으시옵기를 간절히 바라옵고 원하옵니다.

희생되고 제물되신 당신의 모든 억울한 사정을 저희들이 대신 맡아 탕감하여 기필코 당신의 한을 풀어 드리고 기쁨과 영광을 돌려 드릴 수 있는 자녀들이 될 것을 이 시간 맹세하옵니다.

아버님, 저희들을 중심삼고 3시대의 인연이 맺어져 있는 것을 알고 있사옵니다. 과거에 왔다 갔던 수많은 선조들이 저희들로 말미암아 해원성사될 수 있기를 간절히 바라옵고, 세계에 널려 있는 인류들이 해방의 한날을 고대하고 있고, 미래의 후손들이 해방의 한 날을 고대하고 있사오니, 그들을 해방시켜 줄 수 있는 저희들이 되게 하시옵소서. 그리하여 하늘의 뜻을 받들고 땅의 뜻을 받들어 인륜의 도리를 찾아 세울수 있는 아들딸들이 되게 허락하여 주시옵기를 간절히 바라옵고 원하옵나이다.

이 시간에도 동서양의 수많은 당신의 자녀들이 소망의 한 날을 바라보고 한국을 그리워하며 뜻을 위하여 끊임없이 정성들이고 있사오니, 정성들이는 그들을 당신의 깊은 사랑으로 품어 주시고 보호하여 주시옵소서. 그리하여 그들로 하여금, 승리의 일로를 개척하여 천하만민이 당신의 뜻앞에 부복하게 할 수 있는 하나의 승리적인 산제물들이 되게 하여 주시옵기를, 아버님, 간절히 바라옵고 원하옵나이다.

이 아침에 경남·북을 중심삼은 당신의 사랑하는 중심인물들이 여기에 모여서 찬송 부르며 아버지 앞에 경배드릴 수 있는 시간을 갖게 하여 주심을 감사하옵나이다. 남아진 일체의 시간을 당신께서 친히 주관하여 주시옵소서.

저희들로 말미암아 경남·북의 도민들이 당신의 뜻 앞에 올바르게 복귀될 수 있도록 허락하여 주시옵소서. 3천만에 가까운 이 민족을 위해 저희의 생명의 주춧돌이 되게 하시고 영광스런 제사장이 되게 하시어서, 당신을 찬양하는 데에 선도적 역할을 하는 제물로서 부족함이 없도록 축복하여 주시옵기를 간절히 바라옵고 원하옵나이다.

여기 축복받은 가정들 위에 아버지의 사랑이 같이하여 주시옵고, 특별히 통일교단 위에 같이하여 주시옵고, 대한민국에 같이하여 주시옵소서. 한국을 위시하여 아시아, 구라파, 세계 전체를, 아버지, 사랑하여 주시옵소서.

이제 온 천주를 당신의 품에 품으시어서 모든 자녀들의 활동 무대가 되게 허락하여 주시옵소서. 그리하여 당신이 소원하시던 영광의 세계가 하나로 통일된 형태로 나타나게 허락하여 주시옵소서. 그날까지, 저희들이 제물이 될지라도 온갖 충성을 다하며 참고 갈 것을 맹세할 수 있는 이 시간이 되게 하여 주시옵기를, 아버님, 간절히 바라옵고 원하옵나이다.

뜻을 위해 나아가는 자녀들과 세계 위에 아버지의 영광과 자비와 사랑이 길이길이 같이하여 주시옵기를 간절히 바라옵고 원하오면서, 이 모든 말씀 참부모의 이름으로 축원하였사옵나이다. 아멘.

26-109
말 씀
과거로부터 현시대에 이르기까지 이 땅 위에 살아가는 수많은 사람들은 참을 추구하기 위해 온갖 노력을 다한다는 것을 우리는 알고 있습니다. 더더욱 신앙생활을 하고 있는 우리들은 참중심되시는 분을 흠모하면서 참된 자신이 되기를 바라며 나간다는 것을 우리들 자신이 잘 알고 있습니다.

26-109
참된 것을 추구하는 인간
참된 개인, 참된 가정, 참된 국가, 참된 세계, 이것은 오늘날 우리들만이 추구하는 것이 아니라 과거에도 추구해 왔고, 현재에도 추구하고 있고, 미래에도 그러할 것입니다.

그러면 과거와 현재와 미래를 통하여 추구해 나오는 참된 그 중심이 어디에 가서 귀결될 것이냐? 세계에서 귀결되는 것도 아니요, 혹은 어떠한 나라에서 귀결되는 것도 아니요, 어떠한 사회에서 귀결되는 것도 아닙니다. ‘참되다’는 그 기준은 개인에게 귀결되어서 새로운 출발을 해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참된 가정이 있을 수 없는 것이요, 참된 사회, 참된 국가, 참된 세계가 있을 수 없는 것입니다.

그러기에 참의 중심이 될 수 있는 존재가 누구냐 하면 바로 우리 각자라는 것입니다. 우리 각자가 참된 나를 추구하기 때문에 참의 중심되시는 하나님을 추앙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참의 중심이 하나님에게만 머물러 있어서는 안 됩니다. 인간이 참의 중심이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인간이 중심이 되어야 한다는 그 말은 막연하게 이 세계 인간들이 중심이 되어야 한다는 말이 아닙니다. 우리들 각자가 그 중심이 되어서 세계의 중심으로 나타날 수 있는 자리에 서야 되는 것입니다. 그렇지 않고는 참의 중심 존재가 될 수 없습니다.

아무리 참된 하나님이라 하더라도 하나님만으로는 안 되는 것입니다. 반드시 환경과 인연을 맺어야 합니다. 종적인 하나님은 횡적인 환경과 인연을 맺지 않고는 참의 인연을 갖출 수 없다는 것입니다. 사방을 갖추고 입체적인 목적을 이루기 위해서는 반드시 상대권을 갖추어 중심을 결정지어야 하는 것입니다.

26-110
참된 세계를 이루는 중심존재가 되어야 할 인간
창조원리에 의하면 이성성상을 중심삼고 모든 존재물, 천지 만물이 생존하게 되어 있습니다. 마찬가지로, 하나님이 아무리 영적인 중심이라 하더라도 인간의 마음 가운데에 하나님이 중심으로 결정되지 못하면 참으로서 완전히 존속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지금까지 하나님이 인간을 찾아 나오시는 목적이 바로 여기에 있는 것입니다.

그러기에 우리 인류 자체에게는 스스로 하나님을 중심존재로 찾아 세우지 않으면 안 될 사명이 있다는 것을 우리들은 알아야 되겠습니다. 그러므로 오늘날 보잘것없는 `나’라는 한 존재는 흘러가는 역사 가운데 그저 왔다 가는 개인이 아니라, 흘러가는 역사를 가로막는 오늘날 이 세계의 중심으로서, 미래의 새로운 개척자로서, 참된 모습으로 나타나지 않으면 안 될 엄청나고 중대한 사명을 지니고 있다는 것을 알아야 되겠습니다.

이와 같이 개인은 참된 가치의 내용을 지니고 있기 때문에 예수님도 `사람이 만일 온 천하를 얻고도 제 목숨을 잃으면 무엇이 유익하겠느냐(마 16:26)’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이것을 볼 때, 내 개체는 전체를 넘어선 가치적인 내용을 지니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러한 내 자신을 중심삼고 참된 내용을 갖추지 않고는 참된 세계를 이룰 수 없다는 사실을 알아야 합니다. 이러한 광범한 의미에서, 예수님도 개체의 인격의 가치를 그와 같이 평하지 않을 수 없었던 사실을 우리들은 알아야 되겠습니다.

성경 말씀에 `의인은 없나니 한 사람도 없다’고 했습니다. 이 말씀은 인간 자신만 가지고는 안 된다는 것을 의미하는 말입니다. 반드시 하나님을 중심삼고 하나님과 일치된 자리에서 전체의 중심으로 나타날 때, 다시 말하면 하나님의 대신 존재로 나타날 때 참된 모습, 의의 모습, 선의 모습으로 결정될 수 있다는 사실을 우리들은 알아야 되겠습니다.

남자면 남자 한 사람이 참된 모습이 되었다고 남자 하나로 끝날 것이 아니라 반드시 참된 가정으로 발전시켜 나가야 되는 것입니다. 참된 가정은 가정만으로 끝날 것이 아니라 반드시 참된 사회로 발전시켜야 되고, 참된 사회는 참된 민족, 참된 민족은 참된 국가, 참된 국가는 참된 세계로 발전시켜 나가야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세계가 중심이 아니요, 나라가 중심이 아니요, 또한 어떠한 가정이 중심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 중심은 어디까지나 우리 자신들이라는 것을 확실히 알아야 되겠습니다.

예수님도 태어날 때부터 하나님의 아들이란 인식을 갖고 있지 않았습니다. 태어날 때부터 하나님 앞에 자신 있게 설 수 있는 인식권내에 들어섰던 것이 아닙니다. 30여 년의 생애 기간을 통해서 그 자리에 들어서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그리하여 예수님은 그 인식권내에 들어간 자기 주체적 인식을 상대적인 세계에 어떻게 반영시켜 나갈 것인가 하는 문제를 놓고 싸우다가 십자가에 돌아가신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자아에 대한 깨달음을 갖는 것이 무엇보다도 중요하다는 것입니다. 자기의 중심이 동기가 되어 그것을 기준삼고, 좌하면 좌, 우하면 우, 전하면 전, 후하면 후, 정하면 정, 동하면 동할 수 있는 주체적인 인식을 해 나가야 하는 것입니다. 그리하여 어떠한 상대에 의해서 움직일 것이 아니라 주체적 입장에서 상대를 움직이지 않고서는 안 된다는 것을 우리들은 알아야 되겠습니다.

역사의 흐름 가운데 `나’라고 하는 한 사람은 한 순간에 존재하는 것에 지나지 않는 다는 것입니다. 수억만 년의 영원한 역사과정에서 7, 80년의 생애를 살아가는 우리의 일생은 그야말로 깜빡하는 순간에 불과하다는 것입니다. 우리 인간들이 살아가기 위해서는 호흡을 해야 하는데 마치 우리 일생은 수많은 호흡 중에 한번 호흡하는 것과 마찬가지의 기간에 해당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영원을 중심삼고 볼 때 극히 짧은 기간을 살고 있는 것입니다. 이 짧은 기간에 전체의 소원을 좌우할 수 있고 전체의 소원하는 바의 중심을 결정할 수 있다고 한다면 이 시기가 얼마나 귀중하고 중대한가를 알아야 되겠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자기만을 중심삼고 자기 일생을 포기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자기 일생을 자기 마음대로 결정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렇게 하게 되어 있지 않다는 것입니다. 대한민국 백성이면 대한민국의 운명과 더불어 일생을 결정해야 된다는 것입니다. 자신이 세계 인류의 일원이 되어 있으면 세계의 운명과 더불어 자기 일생을 결정해야 된다는 것입니다. 더 나아가서는 하늘의 인연을 가지고 나가는 입장에 있다 할진대 천운을 중심삼고 자기 일생을 결정해야 된다는 것입니다.

개인의 생애에 있어서, 개인을 중심삼은 어떤 운이 있다면 그 운은 반드시 국가면 국가, 세계면 세계, 하늘이면 하늘의 운과 보조를 맞추어야 합니다. 그리하여 그 개인의 운을 필요로 하는 가정의 운으로, 개인의 운을 필요로 하는 국가의 운으로, 개인의 운을 필요로 하는 세계의 운으로, 개인의 운을 필요로 하는 천운으로 연결시킬 수 있는 사람이 있다면, 이러한 사람은 개인으로서 참된 생애의 노정을 가는 사람이라고 볼 수 있는 것입니다.

생애라고 하는 것은 일생을 두고 말하는 것이며, 생활은 하루하루를 두고 말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참된 생애를 남기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되느냐? 참된 하루하루의 생활을 해야 된다는 것입니다. 만약 하루의 생활이 실패를 하게 되면 생애에 실패의 요인을 지니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살아가는 하루하루의 생활이 얼마나 긴장하는 생활이어야 하고, 얼마나 많은 판가리 싸움을 해야 하는 생활인가를 우리들은 알아야 되겠습니다.

26-112
참된 중심존재가 되려면
타락한 우리 인간이 소원하는 것이 무엇이냐 하면, 그것은 참된 개체로 복귀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참된 개체로 복귀하는 데는 자기 혼자서 복귀할 수 없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배반하고, 하나님 앞에 추방을 당한 우리 인간은 추방당한 그 자리에서 배반했던 하나님을 모시고 나가야 합니다. 그 길이 오늘날 우리가 가야 할 복귀의 길인 것입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우리 자신이 참된 본연의 자세를 갖추어야 합니다. 그러지 않고는 하나님을 모실 수 없다는 것입니다.

아담 해와가 타락할 때에 하나님을 불신하였고, 하나님 앞에 자기 중심을 가지게 되었습니다. 그 중심은 하나님을 떠난 자기 중심이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과 인간이 일치되지 않고 분립되고 격리된 자리에서 출발하였기 때문에 인간만으로는 참된 기준을 세울 수 없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중심삼고 세우지 않으면 안 된다는 것을 우리들은 알아야 되겠습니다.

이런 관점에서, 하나님 가운데 무엇을 중심삼고 하나님과 하나되어야 하느냐? 일 가지고 하나되는 것이 아닙니다. 어디까지나 하나님의 심정적, 내정적인 문제를 중심삼고 하나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 다음에 뜻을 중심삼고 하나되어야겠다는 것입니다. 그러기에 하나님의 심정과 뜻을 여기에 개재시키지 않을 수 없다는 것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우리 통일교회에서는 하나님의 심정을 찾아가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심정과 일치될 수 있는 혈연적 인연을 맺어 가지고 하나님의 뜻과 더불어 살아야 됩니다. 하나님의 심정을 중심삼은 절대적인 자리, 즉 무한한 가치의 기준을 결정지을 수 있는 자리는 어디냐? 하나님의 심정과 일치된 자리, 하나님의 사랑과 일치된 자리입니다. 참된 사랑의 상대적 기준을 내 자신이 결정짓지 않고는 아무리 뜻을 위해 충성하며 따라간다 하더라도 하나님과 영원히 같이 있을 수 없다는 것을 알아야 됩니다.

부모에게서 자녀가 태어나게 될 때 어디로부터 태어나느냐 할 때, 부모의 어떤 외적 조건에서 태어나는 것이 아닙니다. 부모의 뼈 중의 뼈요, 살중의 살을 이어받아서, 즉 내적인 모든 인연을 이어받아 태어나는 것입니다.

그와 마찬가지로 우리 인간들도 부모의 입장인 하나님의 모든 내적인 인연을 받아가지고 태어나야 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내적인 인연을 받아 가지고 태어난 그 자체는 하나님의 사랑의 표시체가 아닐 수 없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이 전체적인 가치를 대신한 기준에서 영원히 차지하고 싶어하시는 것이 바로 자녀라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일시적이 아니라 영원히 영원히 차지하고 싶어하시는 것이 자식이라는 것을 우리는 알아야 됩니다. 그 자식을 기준을 중심삼고 나가는 것이 우리들입니다. 그러므로 참된 내가 되기 위해서는 하나님을 중심삼고 완전히 하나되어야 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속 중의 속이요, 뼈 중의 뼈요, 살 중의 살인 내적인 것을 모두 계승했기 때문에 하나님이 볼 때는 인간이 전체의 중심과 마찬가지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전체적인 소원의 중심 실체로서 현현했던 것이 인류의 조상인 아담과 해와였던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아담 해와를 사랑하는 것이 전체를 사랑하는 것이 될 수 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그렇게 대할 수 있는 인연을 가진 자리에 섰다 할진대 비로소 하나님이 바라는 참되고 완전한 기준에 도달하게 된다는 것을 우리들은 알아야 되겠습니다.

오늘날 우리 통일교회에서 말하는 복귀의 기준은 무엇인가? 개인복귀 완성입니다. 그러면 개인복귀 완성은 어떻게 해야 이루어지느냐? 그것은 하나님의 내적 심정적 문제를 중심삼고 재차 태어나는 기준을 갖게 되었을 때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오늘날 우리들은 그 기준을 바라며 나가고 있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지금까지 태어난 것은 모두 거짓으로 태어난 것입니다. 사탄으로 말미암아 태어났기 때문에 이것을 부정하고 중생 부활해야 된다는 것입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절대적이고 참되신 하나님의 사랑을 중심삼고 내 한 개체가 하나되어야 합니다. 이것이 참을 세워 나가는 데 있어서 중요한 문제라는 것입니다. 이것을 확실히 알고 반드시 그 인연을 중심삼고 다시 태어나서 생애노정을 가야 되겠습니다.

26-114
사랑을 실천하며 사는 사람이 되어야
인간의 생애의 중심 원동력은 어디에 있느냐 하면 하나님의 사랑에 있습니다. 뜻을 중심삼고 나가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사랑권내에서, 하나님의 사랑을 음미하면서 하나님의 사랑을 노래하고 하나님의 사랑을 두터이하는 생애노정이 되어야 된다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인간의 삶은 사랑에서 시작하여 사랑에서 살고 사랑에서 끝을 봐야 된다는 것입니다.

그 사랑은 자기를 중심삼은 사랑이냐? 그렇지 않습니다. 그 사랑은 하나님의 사랑으로부터 시작해 가지고 세계 전체를 사랑할 수 있는 그런 사랑이어야 합니다. 이러한 사랑을 가지고 우리 인간들이 살아가야 된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뜻을 사랑하기 이전에 하나님의 사랑을 가져야 됩니다. 뜻을 위해 살기 이전에 하나님의 사랑으로 살아야 되겠습니다. 이렇게 살아야 한다는 것을 우리들은 알아야 되겠습니다.

이런 입장에서 하나님 앞에 충효의 도리를 다해야 되겠습니다. 그런데, 하나님 앞에 효자가 될 수 있는 때는 언제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여러분은 이것을 알아야 돼요. 효도할 수 있는 때가 죽은 뒤에 영계에서 만들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영원을 중심삼고 볼 때 지극히 짧은 기간, 똑딱하는 순간과 같은 이 일생 동안에 하나님을 사랑했다는 조건을 세워야 되고, 하나님 앞에 효도했다는 조건도 세워야 된다는 것입니다. 또한 우리가 살아 생전에 하나님 앞에 절대 필요한 아들이라는 결정도 지어야 됩니다. 우리가 살아 생전에 그런 것들을 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지금까지 역사과정을 거쳐오면서 수많은 인류들이 그러한 가치를 지닌 인간을 추구해 나왔지만 `나는 하나님 앞에 충성을 다하고 하나님의 심정을 중심삼고 영원 불변의 참된 효행의 도리를 세운 하나님의 아들이요’라고 할 수 있는 사람이 없었다는 것입니다. 그러한 사람이 오늘 우리 시대에 나타나야 한다는 것입니다. 전무후무한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우리가 죽어서도 있을 수 없고 우리들의 후손 중에도 있을 수 없는, 그런 사람이 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26-115
다시 맞이할 수 없는 귀중한 7년노정
여러분 자신이 이러한 무한한 가치를 지닌 중심을 따를 수 있는 하나님의 심정적 인연을 갖고 태어났다 할진대, 여러분은 이 시대에 있어서 이것을 결정지어야 된다는 것입니다. 과거에도 없었고 이 시대의 세계 가운데에도 없는 그러한 한 때를 우리만이 지녔다는 사실은 엄청나고도 무한한 은사요, 그 무엇을 주고도 바꿀 수 없는 가치를 부여받은 것임을 여러분은 알아야 되겠습니다. 이때를 놓치면 천년을 기다려도 다시 맞이할 수 없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가 일생을 살아가는 이 시대가 얼마나 귀중한지를 여러분이 알아야 되겠습니다.

우리가 뜻을 중심삼고 10년, 20년, 30년, 혹은 50년의 생을 살아간다 하게 될 때, 그 일생은 반드시 7년노정에서부터 입문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우리의 일생이 이 7년노정을 중심삼고 입문한다면 일생에 있어서 이 7년노정은 얼마나 귀한 것입니까? 만약 이 7년노정을 하나님의 뜻과 완전히 일치화시키지 못하면 하나님을 중심삼고 나가야 할 생애노정에서 하나님의 뜻과 더불어 하나님의 사랑권내에서 살아갈 수 없다는 것입니다. 이런 점에서 생각할 때, 우리 통일교회에서 말하는 이 7년노정 기간이야말로 억천만 금을 주고도 살 수 없는 가장 귀한 때인 것을 알아야 되겠습니다.

이때를 놓친 사람에게는 참된 생애의 노정이 있을 수 없다는 것입니다. 이내 사라져 버리는 아침 이슬처럼 순간적인 7년 기간이 우리 앞에 찾아오기까지 얼마나 많은 수고가 있었는지를 여러분은 알아야 되겠습니다. 이 한 때가 찾아오는 데는 편안히 잠자는 자리에서 그냥 찾아오는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 앞에 이 한 때를 맞추어 주기 위해서 지금까지 무한한 수고를 하셨다는 것입니다.

이 한 때를 갖지 못하면 참된 아들딸로서 인연을 맺을 수 없다는 것을 아시는 하나님께서는 이 한 때를 맞추기 위해서 무한한 수고를 해 오셨습니다. 또한 하나님뿐만 아니라, 도의 길을 통해서 선을 추구해 나왔던 성인 현철, 선지선열들도 이 한 때를 맞추기 위해 지금까지 희생되어 나온 것입니다. 그러나 그들은 끝내 이 한 때를 맞지못하였습니다.

그러다가 오늘날 우리가 맞게 된 것은 우연의 일치가 아니라 규정적인 일치, 필연적인 일치에 의한 것입니다. 이때가 오지 않고는 필연적인 가정, 필연적인 국가, 필연적인 세계, 필연적인 천주는 나올 수 없는 것입니다. 뜻이 바라는 가정, 국가, 세계가 우연히 생겨날 수 없다는 것입니다. 그러한 가정과 국가와 세계가 생겨나기 위해서는 필연적인 조건을 가지고 그 한 때를 맞추지 않으면 안 됩니다.

그렇기 때문에 타락한 우리 인생에 있어서 최후의 운명을 결정지을 수 있는 기준이 되는 한 때가 있어야 된다는 것입니다. 그 한 때를 그냥 보내서는 안 됩니다. 그 한 때를 기원으로 해서 일생 동안 밀고 나가야만 참된 생애가 남아질 수 있다는 것을 여러분은 알아야 되겠습니다.

26-117
변함없는 마음으로 하나님을 위해 사는 일생이 되어야
세상 사람들은 돈을 많이 가지고 있으면 행복하다고 하지만 그런 행복은 그저 흘러가 버리고 마는 것입니다. 한 때의 인연과 인륜 같은 것도 후대에는 탄식의 조건으로 남아지는 것입니다. 어떠한 세상적인 명예나 권위로 보나 아무리 세상적으로 모든 면에서 세상의 만국, 만민 앞에 자랑할 수 있는 내용을 갖추었다 하더라도 그것이 자기에게 복된 조건이 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나를 물고 낚아채는 조건이 된다는 것을 알아야 되겠습니다. 그렇게 되면 자식이 있다 하더라도 천상세계에 가서 그 자식이 한의 조건이 될 것이며, 땅 위에서 어떠한 영광의 자리에 살았더라도 그것이 오히려 자기를 물어뜯는 조건이 될 것입니다. 이 땅에서 자기 스스로 장담하고 내세우던 모든 권위의식이라는 것도 저나라에 가서나 후대에 가서는 자기를 구속하는 요인으로 남아질 것입니다.

이 땅에서 아무리 좋은 자리에서 행복을 노래했다 하더라도 그 행복의 요건들은 나를 해방시켜 줄 수 있는 조건이 되지 못한다는 것을 알아야 되겠습니다. 그것이 불행을 더해 주는 조건은 될망정 나에게 참된 희망과 행복을 가져다 주는 조건은 되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그러한 것을 아시기 때문에 도의 세계를 통하여 하나님이 바라시는 한 때를 표방하고 지금까지 인간을 몰아 나오신 것입니다. 그리하여 이 한 때를 중심삼고 온 인류가 공히 맞이할 수 있는 메시아 사상이 나타나게 된 것입니다. 오직 이 한 때라는 것입니다.

과거에 사람들이 바라던 한 때요, 현재에 사람들이 바라는 한 때요, 미래 사람들이 바라게 될 한 때, 온 인류 앞에 중심이 되는 그런 한 때를 하나님과 더불어 천운과 더불어 어떻게 맞출 것인가 하는 문제를 두고 볼 때, 역사시대의 어떠한 종교보다도 역사시대의 어떠한 인류보다도 오늘날 우리 통일교회에서 맞이한 이 한 때가 얼마나 귀중한가를 알아야 되겠습니다.

물론 우리의 생애노정도 귀중하지만 7년노정에 있어서의 하루하루는 더없이 귀중한 것입니다. 이 기간을 잘못 맞추게 될 때는 천년의 한이 여기에 깃든다는 것을 알아야 되겠습니다. 그리고 이 한 때를 중심삼고 여러분에게 주어진 생애는 한번 가면 그만입니다. 이 땅 위에서 영육을 갖추고서는 이런 때를 다시는 맞이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영은 영원이지만 육은 사라지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과 내가 일치되고, 주체와 대상이 완전히 일치되는 자리에서 선이 이루어지는 것과 마찬가지로, 인간이 이와 같은 인연을 가질 수 있는 시기는 땅 위에서 육을 쓰고 사는 기간, 즉 일생밖에 없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 일생이 얼마나 귀한 것인가를 여러분은 잘 알아야 되겠습니다.

이 기간을 잘못 사는 날에는 영원히 파멸하는 것입니다. 반면 이 기간을 잘 수습하여서 하나님과 더불어 살아갈 때에는 영원한 행복의 터전이 닦아지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여러분은 오나가나 자나깨나 슬플 때나 기쁠 때를 막론하고 이 한 때의 가치를 응시하면서 빛나는 생애로 만들겠다고 몸부림치는 사람이 되어야겠습니다. 그런 사람이 위대한 사람인 것입니다.

자기의 심적 기준의 선에서 떨어지지 않기 위해서 그 이상의 곳을 향하여 오늘도 내일도 변함없이 일년, 십년, 일생을 거쳐 나가야 합니다. 그리하여 죽음에 이를 때까지 일당백의 마음으로 하나의 선의 기준을 중심삼고 참된 모습으로 살아가기 위해 정성을 다하는 사람이 있으면 그 사람은 복되고 지혜로운 사람입니다.

이러한 때에 우리는 온갖 정성을 다 들여야 합니다. 정성을 들이는 데 있어서는 보통 흘러가는 사람같이 정성들여서는 안 됩니다. 지금까지 역사상에 왔다 갔던 모든 사람들이 총집중할 수 있는 최고의 정성을 들여야 되는 것입니다.

그것은 곧 운동경기를 할 때와 같습니다. 한국을 대표하여 올림픽에 출전한 선수가 있다 할 때, 그가 달리면 한국의 삼천만 국민이 그 선수와 더불어 달리는 것입니다. 즉, 그 선수가 씩씩하게 달리게 되면 그 민족의 장래는 씩씩하다는 것입니다.

만일 그 개인이 세계적인 승리를 거두어서 영광의 자리에 섰다 할 때, 그 영광의 자리에 그 개인만이 참여하는 것이 아니라 그 국민 전체가 참여하는 것입니다. 그러한 인연을 갖고 수많은 국민이 그 선수와 호흡을 같이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오늘날 우리는 우리 개인만이 아니라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26-119
하나님께서 찾으시는 중심존재가 되라
우리는 우리 개인만이 아닌 초국가적 존재요, 초역사적인 존재입니다. 과거 현재 미래를 대표하고, 전세계와 전역사를 대표하고, 전우주와 천주세계를 대표하는 존재입니다. 그러기에 인류역사를 대표한 초인류적이고 초역사적인 입장에서 달리고 있다는 것입니다.

오늘날 우리가 달리고 있는 이 배후에는 역사적으로 왔다 갔던 수많은 선지선열들이 후원하고 있습니다. 그들이 후원해 줄 수 있는 사람, 오늘날 인류가 후원해 줄 수 있는 사람, 미래의 후손들이 후원해 줄 수 있는 사람, 그런 사람은 자기를 중심삼고 사는 사람이 아닙니다. 자기 민족을 중심삼고 사는 사람이 아닙니다. 어디까지나 하나님을 중심삼고 살아가는 사람입니다.

역사상의 위인들이 자기편이 될 수 있고, 현시대의 모든 희망적인 인간들이 자기편이 될 수 있고, 미래의 소망스런 후손이 자기편이 될 수 있는 사람, 그러한 사람이 되기 위해서는 자기를 중심삼고 살아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이념을 초월하여 변하지 않아야 하며 하나님의 사랑을 중심삼고 일체화된 자리에 서지 않고서는 초역사적인 중심으로 세워질 수 없다는 것을 여러분은 알아야 되겠습니다.

그럴 수 있는 자리에 태어나서 그럴 수 있는 인연을 찾아가는 이때는 가장 엄숙한 때가 아닐 수 없습니다. 이 한 때를 놓치게 되면 천년 한이 깃든다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통일신도들은 온갖 정성을 다해 뜻을 위해 출동해야 하는 것입니다. 이 한 때를 의의있게 보내지 못하고, 이 한 때에 생활기준이 바꾸어지지 않으면 그 생애는 거짓 생애로 종결된다는 것을 여러분이 알아야 됩니다.

그러면 영원 무궁의 역사시대에 있어서 한번밖에 없는 이 한 때를 맞아 얼마나 정성을 들여야 되겠습니까? 여러분이 자고 싶을 때 자고, 먹고 싶을 때 먹고, 하고 싶은 것 다 하면서 하는 생활이 정성들이는 생활이라고 할수 있습니까? 그것은 누구나 다 할 수 있습니다.

얼마만큼의 정성을 들여야 되느냐? 또 다시 맞이해서 정성을 들이고 싶어도 다시 맞이할 수 없는 이 한 때에 있어서, 하나님이 소원하고 우리 인류의 조상과 천추만대의 후손과 초역사적인 인류가 고대하는 사람이 되려면 그들이 감동하고 그들이 추앙하고 그들이 마음 모아 찬양할 수 있는 그런 정성을 들여야 된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이 한 때를 맞이한 우리들이 소원해야 할 최고의 수준이 아니겠습니까? 우리들이 찾아 세우기 위해 바라야 할 것이 아니겠습니까?

그런 한 날을 찾아서 맞이할 수 있는 순간은 지극히 엄숙한 순간입니다. 그날은 흘러가는 역사의 한 날이 아닙니다. 흘러가는 역사의 한 순간이 아닙니다. 역사적인 맥박, 천주사적인 맥박 앞에서 초역사적인 정도를 세워 나가는 우주의 이상적인 존재들과 함께 동하면 동하고 정하면 정할 수 있고 같이 호흡할 수 있는 자리, 그 움직이는 모든 느낌 느낌이 그런 우주적 존재와 같이 통감할 수 있는 자리, 그러한 자리에서 충성을 하는 사람이 어디에 있겠느냐 하는 것이 문제입니다. 하나님께서 그러한 한 곳을 찾으시며 그럴 수 있는 한 사람을 찾으신다는 것을 여러분이 알아야 되겠습니다.

그러면 그것은 어느 시대에 있는 것인가? 어느 한 때 똑딱하는 순간에 여러분에게 찾아온다는 것입니다. 똑딱하는 순간과 같은 짧은 7년노정에서도 7년 기간 전부가 중심이 되는 것이 아닙니다. 7년노정 가운데에서도 최고의 정성을 들이는 중심점을 마련해야 되겠다는 것입니다. 그 7년 전체가 정성의 기점이 되면 좋겠지만, 그렇지 못할 때는 7년을 부활시킬 수 있는 탕감의 기준이라도 남겨야 된다는 것입니다. 이렇게 보게 될 때, 여러분이 정성들이는 것이 얼마나 엄청나고 그 정성의 비중이 얼마나 큰 것인가를 알 수 있을 것입니다.

자신의 때를 잘 맞춤으로써 이 한 때를 맞이할 수 있는 사람은 이 뜻을 알고 있는 우리밖에는 없습니다. 앞으로 뜻을 모르고 태어나는 인류가 아무리 많다 하더라도 그 사람들은 가외 사람들이라는 것입니다. 이 시대에 있어서 후손들 앞에 참의 모습을 세워야 할 우리 개체의 운명, 그런 생애노정을 걸어야 할 운명을 중심삼고 미래의 후손들 앞에 어떠한 모습으로 나타날 것이냐? 그때에 현현되어질 그 가치를 지금 이때에 여러분 자신들이 그려 나가야 하는 것입니다.

뜻을 중심삼고 동으로 가고 서로 가고 뜻 앞에 정성들이고 충성하는 모든 것은 어느 누구를 위한 것이 아닙니다. 나라 이전에 자기 자신을 세우기 위한 것이요, 세계 이전에 자기 자신을 세우기 위한 것입니다. 어디까지나 자신의 때를 잘 맞추기 위한 것입니다. 자신의 때를 잘 맞춤으로써 그 때가 인류의 때가 될 수 있는 것이요, 자신의 때를 잘 맞춤으로써 국가의 때를 대신할 수 있고 세계의 때를 대신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러한 자리에서 사는 사람은 국가와 더불어 사는 사람이요, 인류와 더불어 사는 사람이요, 세계와 더불어 사는 사람이요, 역사와 더불어 사는 사람입니다. 그 자리는 모든 요구의 중심이 되고 모든 희망의 기점이 되는 자리이기 때문에, 이 기준에서 살아가는 사람은 역사의 중심이 되지 않을 수 없고, 인류의 중심 존재가 되지 않을 수 없다는 것을 여러분이 알아야 되겠습니다.

26-121
천금같은 때를 허비하는 자가 되지 말라
그러므로 7년노정 기간 전체는 그런 때가 되지 못한다 하더라도 7년노정의 어느 한때에 그런 때를 남겨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런 한때마저도 남기지 못한 사람은 참된 생애를 남기기 위한 탕감조건적인 기준조차도 세울수 없다는 것입니다. 물론 일생 전체를 참되게 살아야 되겠지만 그러지 못하겠거든 참된 조건이라도 남길 수 있는 그 무엇을 가져야 하는 것입니다. 그런 것도 없다면 하나님과는 아무런 관계가 없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생각해 보세요. 우리가 하고자 하는 일은 전무후무한 것입니다. 한번밖에는 없는 것입니다. 여러분의 청춘시대도 한번밖에 없는 전무후무한 시기입니다. 청춘시대가 또 올 수 있어요? 장년시대도 마찬가지입니다. 한번 지나가면 그만입니다. 아무리 돌아가려고 해도 돌아갈 수 없습니다. 한번 맞이한 시대가 언제 다시 오겠느냐는 것입니다. 다시는 오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관점에서 뜻을 중심삼고 여러분들을 보면 무책임하다는 것입니다. 여러분이 먹고 자고 일을 하는 일상생활 속에서 기쁨과 슬픔 등 희로애락의 감정을 가지고 살아가고 있는데, 무엇을 중심삼고 살고 있습니까? 나를 중심삼고 사는 것 같지만 나와는 관계가 없는 것입니다. 그렇게 살아온 여러분의 생활이 여러분을 탄식하게 하는 요건은 될망정 살려주는 절대적인 요건은 못 된다는 것입니다.

우리 교회를 두고 볼 때, 이제는 중차대한 시점으로 들어가고 있습니다. 나라의 운명, 세계의 운명과 연결 지을 수 있는 시점이 우리 앞에 다가오고 있습니다.

그러면 여러분 자신들은 어느 때에 이러한 운명과 인연을 맺고 판가리를 지을 것인가? 어느 때에 판가리를 지을 것이냐? 정성을 들일 때는 어느 누구도 그 정성의 기준을 메울 수 없고 그것을 떼어 낼래야 떼어 낼 수 없는 정성을 들여야 됩니다. 수많은 선조들이 도의 길, 혹은 선의 길에서 정성들이던 그 기준을 능가하는, 그 이상의 정성을 들여야 되는 것입니다. 그러한 정성의 기준이 없어 가지고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 통일교회에서는 이러한 의미에서 정성의 조건을 세우기 위해 7년노정을 설정한 것입니다.

선생님의 입장에서 볼 때, 참부모라는 이름은 둘이 있을 수 없는 것입니다. 참된 자식이라는 입장에서 볼 때 그 자식도 둘이 있을 수 없는 것입니다. 하나밖에 없는 참부모, 참자식의 입장에서 세워야 할 정성의 기준을 어떻게 세우느냐 하는 것이 중대한 문제가 아닐 수 없습니다.

하나밖에 없는 참된 기준을 중심삼고 참된 생애노정을 어떻게 남길 것인가? 그것은 지나가다가 생각나면 멈추어서 처리하고 다시 지나가는 그런 자리에서가 아니라 긴장되고 심각한 자리에서 처리해 가야 할 그러한 생애노정인 것을 여러분이 알아야 되겠습니다.

그런고로, 역사상에 참부모로서 정성들여야 할 그 기준을 세워야 할 이 시대에 있어서 하나님이 요구하고 온 세계가 요구하고 역사가 요구하는 그 기준을 어떻게 세울 것이냐를 생각해 볼 때, 그것은 편안히 쉬면서 하고 싶은 것 다 하는 그런 자리에서는 세울 수 없다는 것입니다.

온 정성을 다하여도 부족할 정성을 어떻게 다 채우느냐? 이것을 생각하면 생각할수록 부족함을 느끼고, 정성을 다하고 나서도 하늘 앞에 자기 면모를 내세울 때는 부끄러운 마음을 가져야 되겠습니다. 이러한 마음으로 자기 스스로를 완전히 포용해 가지고 생애를 이끌고 나가는 그런 입장에 서지 않고는 하나님의 긍휼의 마음마저도 내 일신에 받을 수 없다는 것을 알아야 되겠습니다.

하나님께서 바라는 것을 완전히 실천하지 못하겠거든 하나님의 사정을 중심삼고 하나님의 동정이라도 받을 수 있는 생활을 해야 됩니다. 잘 해 놓고도 부끄러움으로 머리를 숙일 수 있고, 못하였을 때에는 머리를 들 수 없을 뿐만 아니라 자기 존재 의식까지도 망각해 버릴 수 있는 그러한 자리에 서야만 그런 인연을 맺을 수 있는 것입니다.

우리 통일교인들을 보면, 자기가 무슨 일을 조금만 잘했으면 자기를 인정해 주지 않느니 어쩌니 하며 불평들을 하는데, 자기가 해 놓고서도 오히려 칭찬받을까봐 부끄러워해야 됩니다. 칭찬을 받을까봐 부끄러워하고, 또 칭찬받으면 무한한 부끄러움을 느껴야 되는 것입니다. 칭찬받는 그러한 자리에서 하나님에게 더더욱 가중된 동정을 받을 수 있는 마음의 자세를 가지고, 자기의 모든 것을 투입하고 온 정성을 다 기울여야겠습니다. 이러한 마음으로 직선을 그으면 아름답게 그어낼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한 생애 노정을 엮어 가야 하는 것입니다.

앞으로 선생님에 있어서도 선생님 자신의 일생을 중심삼고 어떻게 정성들여 나가느냐 하는 문제가 남아 있습니다. 그것은 우리 통일신도들에게 있어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자기 생애의 3분의 2, 혹은 4분의 3을 지내버린 나이 많은 사람의 입장에서는 나머지 3분의 1, 또는 4분의 1의 생애를 중심삼고 이러한 거룩한 문제를 해결해야 한다고 생각하면 기가 막힌다는 것입니다. 기가 막힐 문제라는 것입니다.

흘러간 생애를 어떻게 바로잡을 것인가? 때를 거의 다 잃어버린 늙은 몸으로서 어떻게 혈기왕성한 마음으로 온갖 정성과 지성을 다하여 어느누구보다도 굳게 맹세하여 나갈 수 있는 그런 때를 맞을 것이냐 하는 것입니다.

기력이 쇠진하고 소망이 흐려진 자리에서 비로소 충성을 해야 하는 입장인 것을 원통하게 여기면서 하루를 천년으로 대신하겠다는 마음으로 남아진 생애를 헌신해야 합니다. 그렇게 하더라도 부족함을 느껴야 할 나이 많은 사람인데도 불구하고 과연 그런 마음으로 살아 왔느냐는 것입니다.

젊은 사람들은 청춘시절을 참되고 의의 있게 보내기 위해서 하나님 앞에 생애의 모든 것을 다 바쳐 일생에 해야 할 모든 정성을 투입시켜야 되겠습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온갖 시련 고통을 기쁨으로 맞이하자는 것입니다. 국가가 당하는 시련 고통, 세계가 당하는 시련 고통이 찾아와도 부딪쳐 나가라는 것입니다. 그것을 받아들이고 소화시켜야 됩니다. 그런데 그 시련 고통을 내가 참음으로써 소화시키겠다고 몸부림치며 정성들이는 청년 남녀가 얼마나 있느냐는 것입니다. 그러지 않고는 나이 많은 사람들이 한탄하는 그 길을 그들 역시 가게 된다는 것입니다.

이런 사실을 생각해 볼 때에, 오늘날 여러분의 젊은 시절의 한 때라는 것은 억천만금을 주고도 살 수 없는 귀중한 때인 것입니다. 민족을 대신할 수 있고 세계를 대신할 수 있고 자연적인 환경의 인연을 갖추고 있는, 한때밖에 없는 청춘시대를 잃어버리지 말아야 되겠습니다. 여러분은 이것을 생각해야 됩니다.

26-124
한번밖에 없는 때를 잘 맞이하는 자가 되라
그러면 김 아무개면 김 아무개, 박 아무개면 박 아무개는 어느 때부터 참된 생활을 시작할 것이냐? 생활은 곧 하루하루를 중심삼고 살아가는 것입니다. 하루하루의 생활 속에서 참된 생활을 늘 연속시키지 않고서는 참된 생애가 되지 못합니다. 참된 생활을 통해 무한한 삶의 가치를 노래하고, 무한한 승리를 다짐하지 못하는 사람은 생애의 참된 가치와 생애의 참된 승리를 다짐할 수 없습니다.

참패의 기원은 1년, 2년, 3년, 천년을 중심삼고 벌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승패의 기원은 순간에 벌어진다는 것입니다. 국가가 망하게 될 때에는 고비가 있는 것입니다. 나라가 망하는 그 고비는 똑딱하는 순간인 것입니다. 순간에 결정된다는 것입니다. 이 순간적인 기준을 잘 찾으면 승리자가 되는 것입니다. 여기서부터 소망의 역사가 벌어지는 것입니다.

그러면 여러분이 지난 세월 동안 뜻길을 따라 나오는 과정에서 천지가 동원되어 자기를 맞아 주려고 할 때 그 인연을 얼마나 맞아들이려 했던고! 자기 자신이 그 뜻의 인연을 얼마나 얼마나 박대하였던고!

한번밖에 없는 때를 하나님께서 주셨는데도 불구하고 그 때를 여지없이 박대해 버렸다는 것입니다. 이 때는 박대를 받으면 박대한 자리에서 떨어져 내려와서도 또 나타나는 것입니다. 떨어져 내려오는 데는 개인, 가정, 종족, 민족, 국가, 이렇게 복귀해 나오는 것과 반대로 떨어져 내려오는 것입니다.

높은 기준에서 박대해 버리면 그보다 조금 낮은 기준에서 다시 찾아온다는 것입니다. 그러기에 거기에서 정성을 들여 가지고 옛날의 자리로 복귀해 나가야 하는 것입니다.

이것을 또 놓치게 되면 다시 내려가는 것입니다. 그렇게 되면 옛날의 기준을 일대에 복귀하기 위해 탕감을 해야 되는 것입니다. 이 탕감이 가중되면 일생은 완전히 막혀 버리게 됩니다. 자기가 알고는 있지만 아무리 노력해도 안 된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때를 잃어버렸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되면 모든 것을 다 제쳐 두고 지나온 생애를 다시 한번 분석하여 잘못된 것을 끌어내 회개하고 잘못된 그 인연을 밟고 올라서야 합니다. 거기에서의 싸움은 치열한 싸움입니다. 자기 생애를 투입해서 싸워 나가야 된다는 것입니다. 생사를 결정하는 싸움을 하지 않고는 벗어날 수 없는 것입니다. 이렇듯 우주의 인연은 삼엄한 내용을 중심삼고 한 순간도 용서없이 생사의 결정권을 걸고 나를 찾아오고 있다는 사실을 알아야 하겠습니다.

2천년 전, 요셉은 어찌하여 예수님을 맞이할 수 있었으며 마리아는 어떻게 해서 예수님을 잉태할 수 있었느냐? 이들은 역사적인 한때를 맞아들일 수 있는 주인이 되어 있었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한때를 잘 맞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그 한때가 온다면 기쁨으로 오겠느냐, 슬픔으로 오겠느냐, 혹은 낙심으로 오겠느냐, 소망의 기준으로 오겠느냐, 아니면 행복의 기준으로 오겠느냐는 것입니다. 그 한때가 오는 데는 행복의 기준만으로 오는 것이 아닙니다. 내가 좋아하는 기준만으로 오는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내가 싫어하는 기준과 소망적인 기준, 다시 말하면 상극적인 양면의 방향을 다 갖추어 가지고 온다는 것입니다.

요컨대 행복의 요건으로 오면 좋겠지만 불행의 요건으로 나타나게 될 때는 어떻게 하겠습니까? 대다수의 사람들은 이것을 배척합니다. 그러한 한때는 행복의 내용만으로만 찾아오는 것이 아니라, 불행과 죽음의 교차로를 거쳐서 찾아오는 것입니다. 그러니 우리 인류가 이 한때를 놓쳐 버리기 쉽다는 것입니다. 기쁘고 좋은 환경으로 찾아오는 것이 아니라, 슬프고 억울하고 비참한 곳으로 찾아오는 것입니다. 그럴 수밖에 없다는 것입니다.

26-126
참된 생애를 남기려면
타락한 인류에게 있어서 불행과 행복은 한점의 교차로에서 시작되었습니다. 그런데 행복이 오기 전에 불행이 반드시 먼저 나타나는 것입니다. 불행의 자리에 떨어진 인간이 행복의 자리에 올라가기 위해서는 불행의 열매를 밟고 올라가야 됩니다. 그러지 않고서는 행복을 찾을 수 없다는 것을 여러분은 알아야 됩니다.

그렇기 때문에 종교의 길은 십자가의 길입니다. 그 중에서도 통일교회는 안팎으로 십자가의 길을 걸어가야 됩니다. 민족의 십자가를 홀로 지고, 세계의 십자가를 홀로 지고 가야 합니다. 모든 인류가 비운이 깃들어 있다고 손을 흔들면서 도망치는 그 자리에 행복의 때가 찾아오고 있다는 사실을 알아야 되겠습니다.

이런 관점에서 볼 때, 통일교회에 있어서 1960년도는 행복의 한때가 찾아온 시기였습니다. 그때야말로 세계의 역사를 결할 수 있는 한때였습니다. 그때가 우리 통일교회 신자들에게 있어서는 어느 시대보다 귀중한 행복을 인연지어 준 한때였습니다. 참다운 행복의 인연을 위해 환경을 포위해 가던 시기였다는 것을 알아야 되겠습니다.

그런데 그때를 놓쳐 버린 사람이 많다는 것입니다. 그때를 의의있게 완전히 맞이하여 하나님과 더불어, 역사의 한때와 더불어, 우주사적인 한때와 더불어 승리를 찬양하게 될 때 비로소 우주적인 가치가 결정된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여러분이 참된 생애를 남기기 위해서는 참된 하루를 결정지을 수 있는 순간 순간에 있어서 얼마나 진실했느냐 하는 것이 지극히 중요한 문제라는 것입니다.

이러한 관점에서 선생님을 볼 때, 선생님 같은 사람은 역사 이래 선생님 한 사람밖에 없다는 것입니다. 역사 가운데 전무후무한, 한번밖에 찾아올 수 없는 사람입니다. 그러한 자리에서 세상을 바라보면 선생님은 맨꼭대기에 서 있습니다. 꼭대기에서 이 한때를 어떻게 끌어올려서 꼭대기와 직선을 만들어 놓느냐 하는 것이 선생님에게 있어서 문제입니다.

그것이 한쪽으로 조금만 기울어져도 안 된다는 것입니다. 조금만 기울어져도 넘어간다는 것입니다. 이런 것을 느끼며 생애노정을 걸어가야 될 입장이라는 것입니다. 조금만 잘못하게 되면 천지가 뒤넘이치게 됩니다. 내가 결정해야 할 문제를 조금만 잘못하면 천지가 기울어진다는 것입니다.

집을 짓는 데에 중요한 것은 정초를 바로 놓는 것입니다. 이것을 바로 못 놓게 되면 아무리 화려한 문화의 제단을, 고층빌딩을 쌓아 놓았다 해도 일시에 무너지는 것입니다. 그것이 높으면 높을수록 크면 클수록 파괴되어 뿌리까지 뒤집어진다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치우치지 않는 역사적 승리의 기준을 갖추어 생활의 기반과 생애의 기반을 만들어야 합니다. 그러는 데는 역사과정에 나타났던 어떠한 전투보다도 더 치열한 전투를 벌여야 하는 것입니다. 외적인 세계의 문제를 중심삼은 싸움은 죽으면 다 해결되지만 이것은 죽어 가지고도 해결할 수 없는 문제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참된 생활의 기준을 어떻게 세우느냐 하는 문제가 가장 중요하다는 것을 알아야 됩니다.

죽음의 교차로를 앞에 놓고 그런 모든 문제를 해결할 수 있다 할 때, 그 순간은 참으로 엄숙한 순간인 것입니다. 천년사의 원한과 역사적 비운이 모두 해결되고, 역사노정에 승리의 깃발이 세워지고, 광명한 새 아침이 밝아온다는 것을 생각하면, 아무리 생명이 좌우되는 엄숙하고 심각한 순간이 다가와도 그것을 내일의 소망과 인류의 참된 생애를 대신하는 탕감조건으로 받아들일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어떤 어려움도 기쁨으로 흡수하고 소화시켜 놓지 않으면 안 된다는 것입니다. 슬픔으로 소화시켜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기쁨의 인연으로 남길 수 있는 싸움을 계속해야 된다는 것을 여러분이 알아야 됩니다. 그러한 한때를 위해 살아가는 사람의 생애는 무한한 가치가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그러한 생애를 남기고 가야 되겠습니다.

갔다가 다시 돌아볼 때 메워야 할 과거를 가지고, 미련을 가지고 과거에 살았던 땅을 흠모하게 되면 그 생애는 비참해지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이 땅에 대하여 미련을 남기지 않을 참된 기준을 어떻게 세우느냐? 온갖 정성을 다하라는 것입니다. 정성의 골짜기가 있다면 최고로 깊은 골짜기에 들어가고, 정성의 정상이 있다면 최정상에 올라가라는 것입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잠을 자고 나서도 회개할 수 있고 밥을 먹고 나서도 회개할 수 있는 마음을 가져야 합니다.

26-128
하나님이 취하실 수 있는 사람이 되라
수많은 사람들이 하나님의 뜻을 찬양하지만 우리는 하나님이 수고하신 공을 찬양해야 됩니다. 또한, 내 일체를 잊어버리고 하나님으로 말미암은 내 감정과 생활전체가 되어야 합니다. 어떻게 하면 일시적이 아닌 영원한 인연으로 남아질 수 있느냐 하는 문제를 중심삼고 자기 생애를 저울질하면서 살아가야 한다는 것을 잊어버려서는 안 됩니다.

참된 생활은 참된 하루로부터 시작되고, 참된 하루는 참된 순간에서부터 시작됩니다. 그러므로 참된 순간과 같은 하루, 참된 순간과 같은 일년, 참된 순간과 같은 일생을 어떻게 지속해 가느냐 하는 것이 여러분의 생애에 남겨진 과업입니다.

혹자는 자기 마음대로 `이렇게 사는 것이 내 일생이요’ 하면서 한때밖에 없는 청춘시절을 헛되어 흘려 보내 버립니다. 그러한 생활은 흔해빠진 생활입니다. 그런 사람은 사탄도 싫어합니다. 사탄도 싫어하는 것을 하나님이 좋아할 까닭이 있습니까? 사탄도 부러워하고 하나님도 부러워하는 생활을 해야 남아집니다.

그러면, 여러분은 이러한 순간적인 생애노정에 있어서 참된 생활을 어떻게 남길 것인가? 하나님께서는 하나님의 심정을 중심삼은 참된 가치와 이 세계를 놓고 저울질하여 보았을 때 어떤 것을 취하실 것인가? 세계를 버리고, 세계를 완전히 잊고 그 사람을 완전히 취하시게 되면 하나님은 그 사람을 찾았기 때문에 그 사람에게 세계를 주더라도 괜찮다는 것입니다. 그러니 그럴 수 있는 `나’의 가치를 결정하는 것이 중요한 것입니다.

전국의 통일교회 식구들은 지금까지 전도를 중심삼고 활동해 나왔는데 이제는 사업무대에도 나서게 될 것입니다. 오늘날 통일의 기치 아래 인류의 역사가 우리를 중심삼고 엮어지고 있습니다. 그러한 과정에서 사업이면 사업 분야에 있어서 참된 사업을 할 것이며, 전도면 전도에 있어서도 참된 전도를 어떻게 할 것이냐를 생각하면 그 문제는 간단하지 않다는 것입니다.

26-129
어떻게 선과 악이 결정되는가
한번 왔다가 가면 다시 올 수 없는 한때에 있어서 무한한 가치의 생애 노정을 어떻게 그려가고 어떻게 결산지을 것인가? 여러분이 출발하는 데는 평면상의 한 선을 중심삼고 출발합니다. 그러나 갈 때는 갈라져서 간다는 것입니다. 마음은 좋은 곳을 향해 직선으로 올라가고 싶어하지만 몸은 직선으로만 가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어떻게 가느냐? 어떤 때는 이 자리로 가고, 어떤 때는 저 자리로 가고, 또 어떤 때는 내려가고 어떤 때는 올라가는 등, 별의별 일이 다 벌어진다는 것입니다. 가다가 꺾어져서 죽는 사람도 있습니다. 그런 식으로 생을 살아간다는 것입니다.

죽을 때는 플러스냐 마이너스냐를 재보게 됩니다. 그래 가지고 플러스 얼마냐, 마이너스 얼마냐에 따라 천국행, 지옥행으로 갈라지게 됩니다. 만약에 마이너스 100이 나온다면 지옥으로 직행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어떤 때에 플러스가 되느냐? 문제는 거기에 있습니다.

여러분이 말 한마디를 하면 그 한마디 말이 천지의 수평선을 중심삼고 볼 때 위에 올라간 말이냐 내려간 말이냐에 따라 결정되는 것입니다. 웃는 그 표정까지도 전부 저울질하는 것입니다. 아무런 생각 없이 씩 웃었다 하더라도 그것이 마이너스 웃음이냐 플러스 웃음이냐로 구분됩니다. 뜻 없이 웃는 사람, 실없이 웃는 사람을 뭐라고 합니까? 정신 빠진 사람이라고 하지요? 그렇지요?

여러분의 눈도 마찬가지입니다. 보는 것을 중심삼고 플러스 눈이냐, 마이너스 눈이냐를 저울질하는 것입니다. 귀도 그렇습니다. 플러스 귀냐, 마이너스 귀냐, 그리고 마음도 마찬가지로 플러스 마음이냐, 마이너스 마음이냐를 가름한다는 것입니다. 여러분이 오관의 자극을 중심삼고 생각하고 움직이는 모든 동작을 일으킬 때 그 동작을 플러스 마이너스로 가른다는 것을 생각하면 무섭다는 것입니다. 사탄이 낚아채느냐? 하나님이 취하시느냐? 말로만 믿어 가지고는 안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사랑한다고 말로만 해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아무리 불행한 사람에게도 부모 있는 줄 아느냐고 물어보면 모른다고 하는 사람은 없다는 것입니다. 또한 부모가 너 때문에 수고를 했느냐고 물어보면 수고를 안 했다고 대답하는 사람도 속으로는 부모가 수고했다고 하는 것입니다. 다 안다는 것입니다. 부모가 자기를 위해 수고했다는 것을 모른다면 그런 불효가 또 어디 있겠습니까? 그렇지 않아요? 아무리 부모의 속을 빡빡 긁어먹는 불효자라 할지라도 그 부모가 자기를 사랑한다는 것만은 알고 있습니다. 사랑하고 있다는 것만은 잊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모르고 있지 않다는 것입니다.

여러분이 스스로 자기가 하는 일에 대해 잘하는 것인지 잘못하는 것인지 안다는 것입니다. 죄를 지을 때도 자신이 죄를 짓는다는 것을 모르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알고 있다는 것입니다. 알고서 죄를 짓기 때문에 용서를 받을 수 없다는 것입니다. 세상에서도 고의적으로 죄를 지으면 용서 받을 수 없는 것입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환경에 몰려서 어쩔 수 없이 피동적으로 죄를 짓게 된 경우와는 다른 것입니다. 범죄 수사를 할 때 주범이니, 종범이니, 연루자니 하는 것은 고의적이냐 피동적이냐를 말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불효인지 몰라서 불효하는 사람 있습니까? 나라를 팔아먹는 짓을 하는 사람이 모르고 합니까? 다 안다는 것입니다. 여러분이 나쁜 일을 할 때 나쁘다는 것을 모르고 합니까? 알고 합니까, 모르고 합니까? 모르고 하는 것은 한 가지도 없다는 것입니다.

그러니 알고 한 것을 누구한테 변명하겠습니까? 알면서도 그렇게 한 것을 누구한테 변명하겠느냐는 것입니다. 자기가 책임을 져야지 누구 원망할 것이 없다는 것입니다. 알고 한 잘못의 대가로 그 사람을 탕감시켜 나가야 되는 것입니다.

노래를 듣는 데도 선악이 있습니다. 보고 듣고, 밥을 먹으나, 자나깨나 모든 것에 선악이 있다는 것입니다. 전쟁이 일어나 격전이 벌어지고 있는 난시에 모두가 나가 싸우고 있는데 혼자 나가자빠져서 잠만 자고 있으면 되겠습니까? 평상시에는 얼마든지 잠을 자도 양심의 가책을 받지 않지만 전시에 동지들이 나가 싸우는데 자기만 뒤떨어진 채 싸우지 않는다면 양심의 가책을 받게 되는 것입니다. 스스로 다 안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자신들이 일생의 노정을 가면서 작용을 일으킨 동작의 전체로 말미암아 선악이 결정됩니다. 말 한마디도 그렇다는 것입니다. 선생님이 지금 말하는 것도 얼마나 선한 말을 하고 얼마나 악한 말을 하는지 전부 판별되는 것입니다. 그 속에 그릇된 말, 실체의 말을 가려내는 것입니다.

26-131
모두가 기뻐할 수 있는 삶이 되기 위해 노력해야
그러면 하나님은 어떤 분이신가? 마이너스 기준의 자리에 내려가지 않는 분이 하나님이십니다. 사탄은 아무리 노력해도 플러스 기준에 올라갈 수 없습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그 중간에서 끌려 올라갔다 끌려 내려갔다 하는 입장에 있다는 것입니다.

여러분의 일생을 중심삼고 볼 때, 태어날 때는 다들 좋아서 태어날 것입니다. 그러다가 여러분이 차후에 갈 때 마이너스 얼마냐, 플러스 얼마냐를 결산짓게 됩니다. 그러면 플러스가 더 많아야 할 텐데 어떻게 하면 플러스가 더 많이 남게 되느냐? 일생 동안 정말 좋았다고 할 수 있는 것을 생애의 표본으로 삼으라는 것입니다. 지긋지긋하고 나빴던 것은 꿈에도 생각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좋은 면을 중심삼고 생애를 연장시켜 나가는 것이 바로 인륜도덕 생활인 것입니다.

그러면 좋았다고 하는 그 기준이 나만 좋아 가지고 되겠느냐? 나라가 좋아하고 세계가 좋아하고 하늘땅이 좋아할 수 있는 기준이 되어야 합니다. 하늘땅이 같이 좋아할 수 있는 기준이 이 우주간에 분명히 있다는 것입니다. 그것은 하나님이 계시다면 하나님과의 관계를 맺고 있어야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공평하시기 때문에 많은 인간이 공히 그 기준을 가질 수 있게 하신다는 것입니다.

그럴 수 있는 한 때가 여러분의 생애노정 가운데 어느 때일 것인가? 그때를 중심삼고 내려가지 말고 올라가기 위해서 노력을 해야 됩니다. 그때에 열만큼 노력했으면 그 다음에는 스물, 혹은 백만큼 일을 하기 위해 열심히 노력하는 사람은 절대 망하지 않습니다. 자기가 성공을 했다고 쉬는 사람은 망하는 것입니다. 그 성공이 자기만을 중심삼은 것이어서는 안 됩니다. 대한민국이 성공하지 못했을 때는 성공할 수 있도록 노력하는 자기가 되고 자기 후손이 된다면 그 민족은 대한민국의 운과 더불어 남아진다는 것입니다.

오늘날 통일교인들은 개인이 성공했다고 거기에서 끝날 것이 아니라 대한민국의 성공을 위해서 나가야 됩니다. 그리고 거기에서 멈추지 않고 다시 세계의 성공을 위해 달려가면 달려가는 그곳까지 우리들은 발전하고 남아지는 것입니다.

오늘날 우리들은 천주주의란 사상을 중심삼고 하늘땅을 통일하기 위해서는 끊임없이 노력해야 됩니다. 이 운동이 앞으로 전세계화되는 것은 틀림없는 사실입니다. 그렇게 되어 가는 과정에서 과연 하늘땅 앞에 자랑할 수 있는 여러분이 되었느냐는 것입니다. 하늘땅, 천지에 있어서 천(天)이 먼저 생기고 그 다음에 지(地)가 생겨났으니 인연이 있으면 어느 때 그것이 맞설 것입니다. 해와 달이 맞설 수 있는 것과 마찬가지로, 아침과 밤이 맞설 수 있는 때와 마찬가지로 하늘과 땅이 90도 각도로 맞설 것입니다. 그때가 최고의 때라는 것입니다. 그때에 가서 이제까지 들인 정성을 어떻게 남기느냐가 중요한 문제입니다.

그러므로 한번밖에 없는 귀중한 일생을 중요시해야 되고, 잃어버린 여러분 자신을 찾기 위해서 하루의 생활을 가치있게 보내고, 순간의 싸움을 이겨 나가야 된다는 것을 여러분이 알아야 되겠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모두 7년노정을 가야 됩니다. 그런데 어떤 사람은 `3년 정도만 가면 축복을 해주겠지’ 하며 도둑놈 심보를 갖고 따라가는 사람이 있다는 것입니다. 3년동안 따라가는 목적이 축복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축복이 깨져 나갈 때는 어떻게 될 것이냐? 모든 것이 다 깨져 나가는 것입니다. 하늘인지 땅인지도 모르면서 그저 시집 장가가는 것만을 중심삼고 가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축복을 받기까지는 많은 사연을 거쳐야 됩니다. 3년이라는 그 기간은 여러분이 마음대로 생각할 수 없는 기간입니다. 7년을 지내고 난 뒤에 3년과정을 거쳐야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여러분은 선생님의 7년 노정에 접붙여서 가야 하는 노정인 것을 모르고 3년만 가면 된다는 생각을 갖고 있다는 것입니다.

26-133
네 몸보다 뜻을 더 사랑했느냐
여러분은 여러분의 일생을 스스로 해결해야 될 때가 한때밖에 없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그러니 여러분의 일생이라는 것이 귀합니까, 귀하지 않습니까? 여자들에게 한 캐럿에 70만원 정도 하는 다이아몬드 반지를 사 주었다고 하면, 그저 다칠세라 상할세라 낮이나 밤이나 온갖 정성을 다하여 간수할 것입니다. 그렇다면 여러분은 그 한 캐럿짜리 다이아몬드 반지를 사랑하는 것만큼 뜻을 사랑했느냐는 것입니다. 솔직히 말해 보십시오. 뜻이 귀합니까, 여러분이 귀합니까? 크게 보면 뜻이 귀하고, 작게 보면 내가 귀한 것입니다.

여러분의 손가락 하나가 귀합니까, 뜻이 귀합니까? 여러분은 자기 손가락에 피가 나면 상처에 약을 바르고 붕대를 감을 것입니다. 그런데 그 손가락같이 뜻에 상처가 났다고 하면 여러분은 그렇게 정성을 다해 치료하겠습니까? 그렇게 해 봤어요? 무슨 말을 하면 `하나님이 있을 게 뭐냐, 아무래도 난 모르겠다’고 합니다. 그리고는 `선생님이 또 7년노정을 가라고 하시는구나’하며 푸념하여 교회의 분위기를 흐트려 놓는 것입니다. 자기는 하지도 않으면서 일을 너무 많이 시킨다고 불평하는 사람이 있다는 것입니다.

가령 매일같이 열심히 청소하는 사람이 있으면 그 사람을 두고 `저 녀석은 태어날 때부터 청소 부활체로 태어났나?’ 하며 흉보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런 사람이 있는가 하면 지나가는 아주머니한테도 빗자루를 던져 주며 청소하라고 시키는 사람도 있습니다. 그 사람이 무서운 사람인 것입니다.

상을 주는 데도 계급이 많이 있습니다. 청소하는 사람에게 상을 주는데도 세계적인 청소급, 국가적인 청소급 등 여러 급이 있습니다. 청소 세계의 왕자가 될 때 하나님은 그 사람을 그 분야에서 제일급 가치의 존재로 취하시는 것입니다. 거지 중에도 세계적인 거지가 있습니다. 세계적인 대표 거지는 천국에 갈 수 있는 것입니다. 거지 세계에도 왕초가 있습니다. 그 거지 세계를 구할 수 있는 중심이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한 중심은 어느 계급에나 다 있습니다.

그런데 거지 세계에 살고 있는 그들을 천대하게 되면, 그들은 `거처도 없이 얻어먹고 사는 이 생활이 제일이다’하며 큰 소리친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자기가 잘사는 위치에 있다고 해서 그들을 제멋대로 취급해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이와 마찬가지로 여러분이 앞으로 뜻길을 갈 때에도 여러가지 모양이 있을수 있겠지만 자랑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너만 훌륭한 줄 아느냐? 역사와 환경이 이렇게 되어 내가 지금은 비록 이런 자리에 있지만, 내 세계에 있어서는 누구와 겨루더라도 지지 않는다’는 자기 나름대로의 그 무엇이 누구에게나 있다는 것입니다.

여러분이 볼 때 선생님 자리가 좋아 보이지요? 이 자리가 좋아 보일지 모르지만 선생님 자리는 위험한 자리입니다. 한 순간도 마음 놓고 살 수 없는 자리인 것입니다. 잠을 조금만 깊이 자도 일어나서는 회개해야 됩니다. 밥을 배부르게 먹고 나서도 기분 좋아하는 것이 아니라 회개해야 됩니다. 좋은 자리에 있다고 그것으로 끝내서는 안 됩니다. 지나치게 자기만이 좋아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동정해서 좋은 자리에 세워 주셨으면 아래를 내려다보고 그러한 자리에 있지 못한 백성과 세계 만민을 위해 동정을 베풀 수 있어야 합니다. 상하 전후 관계를 언제든지 이해하고서 나아가야 된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말하고 행동하는 데 있어서 원칙을 벗어나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여러분은 자기 손가락 하나 사랑한 것만큼 뜻을 사랑했습니까? 우리 뜻을 중심삼고 볼 때, 교회 하나가 문 닫는 것이 낫겠습니까, 내 손가락 하나 잘리는 것이 낫겠습니까? 어떻게 해야 되겠습니까? 만일 `어느 교회가 없어지게 되었으니 네 손가락을 하나 잘라 가지고 교회를 구하라’고 한다면 좋다고 할 수 있는 사람이 있습니까? 그럴 것처럼 했다가도 다시 주저할 것입니다. 대다수의 사람이 그렇다는 것입니다. 그러니 하나님의 섭리가 6천년 걸릴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전부 이런 사람들뿐이니 선생님이 고생할 수밖에 없다는 것입니다. 생각해 보면 심각한 문제가 아닐 수 없습니다.

26-135
죽음의 고비를 넘어서야 승리할 수 있어
어느 한날 귀에게 `귀야, 너는 어느때 네 한때를 갖고 네 한날을 가져야 한다’고 할 수 있어야 됩니다. 영계에서 세계적이고 역사적인 귀 대회가 열린다고 하면 별의별 귀들이 다 있을 것입니다. 그런데 너는 무엇을 듣기를 좋아했느냐고 물으면 `나는 육적인 것을 듣기를 좋아했다’고 이야기하는 마이너스 귀가 산처럼 몰려들게 될 것입니다. 그렇지만 거기 모인 귀 가운데서 하나님이 제일 좋아하는 귀, 즉 대왕 귀가 하나 있을 것입니다. 잘생기고 못생긴 것에 상관없이 그런 귀가 있다는 것입니다.

눈도 마찬가지입니다. 영계에서 눈 대회를 열게 된다면 하나님이 취할 수 있는 눈은 둘이 있을 수 없습니다. 하나밖에 없다는 것입니다. 전부다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의 눈과 인류의 눈, 하나님의 귀와 인류의 귀, 하나님의 코와 인류의 코, 하나님의 인격과 인류의 인격, 그 기준을 중심삼고 하나될 수 있어야 됩니다. 전부다 좋을 수 있는 인연을 중심삼고 아버지를 모시고 같이 살 수 있는 사람, 그러한 사람은 얼마나 좋겠습니까? 그러나 그 반면에 얼마나 슬펐고, 얼마나 어려웠고, 얼마나 수고하였고, 얼마나 비참했겠는가를 여러분이 알아야 되겠습니다. 가장 좋다고 할 수 있는 그 자리는 헤아릴 수 없이 많은 죽음의 고비를 넘어서 이룩한 자리라는 것입니다.

그러면 영원히 좋다고 할 수 있는 그 자리에 서기까지 얼마나 많은 희생의 대가를 치르고 그 자리에 섰겠느냐를 생각해 볼 때, 오늘 우리들의 신앙의 기준과 정성의 기준은 유치원의 기준도 못 된다는 것을 알아야 됩니다. 만약 대학 이상의 기준을 가지고도 자기는 유치원 기준밖에 못 된다고 하는 사람이 있다면 그는 제일 무서운 사람입니다. 그런 사람은 하나님을 거꾸로 타고 갈 수 있다는 것입니다.

높고자 하는 자는 낮아지고 낮고자 하는 자는 높아집니다. 천하에 공을 다 세우고도 계속해서 공을 세우려고 노력하는 사람이 있다면, 하나님은 그 사람을 세우지 않을 수 없는 것입니다. 그러한 사람은 자기가 수고해 놓고도 자기의 수고라고 할까봐 그것을 감추는 사람입니다.

26-136
뜻을 위해 살자
한 나라에 있어서 어떠한 사람이 애국자인가? 잘먹고 호령하는 자리에 있는 사람이 아닙니다. 말단의 자리에서 누더기 옷을 입고 소금국에 보리밥을 먹으며 가난하게 살면서도, 그 보리밥 상을 지나가는 외국 사람들이 볼까봐 두려워하고, 나라의 위신을 생각하며 자기 모습이 드러날까봐 몰래 숨으려고 하는 마음을 가진 사람이 애국자라는 것입니다. 자기 국가의 체면과 위신은 생각지 않고 시기 질투하고 체통 없이 행동해서는 안 됩니다. 비록 자기가 그런 모습을 하고 있지만 국가의 위신과 체면을 세우고자 우리나라에는 나 같은 사람이 없다고 할 수 있고, 자기 나라를 좀더 아름답고 가치있게 드러내려고 애쓰는 사람이 애국자입니다. 그런 사람이 죽으면 후손도 애국자가 되고 그 집안에 애국자가 태어나는 것입니다.

우리 통일교인들 가운데는 별의별 사람이 다 있습니다. 나는 지금도 어떤 아가씨를 기억하고 있습니다. 대학을 졸업한 학사인데 지방에 나가 전도활동을 했습니다. 활동을 하면서 말 못할 핍박을 받게 되었습니다. 1년, 2년, 3년, 핍박이 계속되었고 그 생활은 말할 수 없이 비참했습니다. 학창시절에는 누구보다 꿈이 높았고 천하에 부러울 것이 없었습니다. 실력도 있고 머리도 좋고 가문도 좋았습니다. 그런데 통일의 문에 들어와서 부딪치는 것은 하나에서 열까지 비참한 것뿐이었습니다. 1년, 2년, 3년시간이 흐름에 따라 부딪치는 외부의 환경과 생활의 어려움이 꼬리를 물고 자기를 몰아치게 되자 옛날에 비웃었던 세상사람들을 동경하게 되더라는 것입니다.

배고픈 사람의 처량한 사정은 배고파 보지 않으면 모르는 것입니다. 그 아가씨는 배고픈 사정을 체휼하며 눈물도 흘렸다는 것입니다. 또한 배고파서 밥을 그리워하는 모습이 되었을 때, 옛날에 배고파하던 사람들을 비웃었던 자기 자신도 비판해 보았다는 것입니다. 무가치하게 알았던 그런 자리도 경험해 보았고 과거의 자신을 비판할 줄도 알았지만, 그러한 환경을 극복하지 못하고 그 환경에 말려들기 시작했습니다. 하얀 쌀밥과 보리밥을 놓고 뜻을 위해 보리밥을 먹겠다고 이를 악물고 다짐하였지만 손은 벌써 쌀밥에 가게 되더라는 것입니다.

어려운 자리에 들어가면 들어갈수록 뜻을 중심삼고 이를 악물고 다짐해야 됩니다. 죽음이 교차되는 십자가의 자리라 할지라도 피땀을 흘리며 이를 악물고 자기의 모든 존재의식을 잊어버리고 결의를 다져야 합니다.

26-137
고생시키는 이유
예수님께서 `아바 아버지여, 할 수만 있으면 이 잔을 내게서 옮기시옵소서. 그러나 내 뜻대로 마시옵고 아버지의 뜻대로 하시옵소서’하고 최후의 3차 기도를 드릴 때 `아버지의 뜻’이라는 대목에 가서는 세상에 없는 힘과 온 정력을 다 기울여서 말씀한 것임을 여러분이 알아야 됩니다. `아버지의 뜻대로 하시옵소서´할 때는 순순히 하신 말씀이 아닙니다. 그렇기 때문에 피땀을 흘리지 않을 수 없었다는 것입니다. 세상에 없는 힘을 기울여 간구했던 것이고, 세상에 없는 결의를 했던 것입니다.

그러면 여러분들은 뜻을 위해서 3년 동안 고생하겠습니까, 10년 동안 고생하겠습니까? 참된 생애를 남기고자 한다면 어떻게 해야 됩니까? 어떤 것이 더 참된 것입니까? 「10년 동안 고생하는 것입니다」 10년 동안 고생하겠습니까, 100년 동안 고생하겠습니까? 10년과 100년 중 어떻게 고생하는 것이 더 참된 것입니까? 「100년 동안 고생하는 것입니다」그러면 여러분이 고생하는 데 있어서 여러분 일대의 고생만으로 끝내겠습니까, 아니면 수십 대 혹은 수백 대 후손까지 고생시키겠습니까? 어떻게 하는 것이 참된 것입니까? 통일교회만 고생시키겠다는 사람과 대한민국 3천만 민족 전부를 동원해서 고생시키겠다고 하는 사람이 있다면, 어떤 사람이 참된 애국자입니까? 통일교회만 고생시키겠다는 사람이 아니라 3천만을 고생시키겠다고 하는 사람이 그 나라의 애국자가 되는 것입니다. 3천만 민족뿐만 아니라 세계 만민을 동원해서 고생시키겠다는 사람이 있다면 그 사람은 세계의 성현열사가 된다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자고로 성현들의 가르침은 세상에서 잘먹고 잘살라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자기는 가난하게 살지라도 남을 도와주고 덕을 베풀며 살아야 한다고 가르칩니다. 왜 그랬겠습니까? 참을 세계적으로 접붙이기 위해서 입니다. 참을 접붙이기 위해서 그렇게 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선생님은 우리들을 일년만 고생시키면 됐지, 무슨 원수가 졌다고 또 삼년이 뭡니까?’ 라고 대다수의 사람들이 그렇게 생각할 것입니다. (웃음) 서로 원수는 아니지만 잘 되게 하려는 인연을 놓고 생각할 때는 3년이 아니라 10년을 고생하라고 해도 그것이 바로 복받는 길이라는 것을 여러분이 알아야 되겠습니다.

최주찬! 최주찬이 어디 있어요? 사업부장 어디 있어요? 「여기 있습니다」 더 고생하라고 하니까, `싫습니다. 싫습니다’ 했는데 잘했어요, 못했어요? (웃음) 여러분끼리 하는 것보다 선생님에게 하나의 직책을 받아서 일하는 것이 더 의의가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어떤 사람은 선생님이 맡겨 준 것이 자기들끼리 맡아 쓴 감투보다 더 작아지니까, 선생님이 잊어 버리고 넘어 갔으면 얼마나 좋을까 하는 마음을 갖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것이 좋은 생각입니까? 그렇게 하면 망하는 것입니다.

선생님은 지금까지 뜻을 위해서 고생해 나왔고, 지금도 자나깨나 그 길을 가고 있습니다. 선생님을 가까이서 모셔 보지 못한 사람은 선생님을 잘 알지 못합니다. 선생님은 자다가 눈만 뜨면 엎드려 기도합니다. 왜 그러한 생활을 하고 있느냐? 이 한밤에도 세계에 널려 있는 사랑하는 자녀들이 나를 의지하며 하나님을 위하여 기도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내가 정성은 들이지 못하더라도 거기에 못지 않게 박자는 맞춰 줘야 할 것이 아니겠습니까? 선생님이 잠을 잘 때는 모르니까 하나님께서도 용서해 주시는 것입니다. 그 시간에는 자식이 고단해서 잠자게 되면 아버지가 지켜보는 것과 마찬가지로 하나님이 대신 기도해 주신다는 것입니다.

선생님은 여러분에게 절대 심정적으로 빚지지 않습니다. 그러기 위해서 아무리 고단하더라도 하나님 앞에 고단한 표시를 하지 않는 것입니다. 밤 열두시에 자면 보통 세 번이나 네 번은 깹니다. 지금까지 이러한 생활을 계속해 나왔습니다. 그러니 선생님을 가까이 모시고 있는 어머님도 기도를 하지 않을 수 없다는 것입니다.

높은 곳에 올라가 살게 되면 언제나 피곤하고 신경쇠약에 걸리게 됩니다. 그러므로 깊은 구덩이 속에 들어가서 태풍이 불어와도 안심할 수 있고, 도둑이 들어와도 안심할 수 있는 그러한 자리를 거쳐 나와야 되는 것입니다. 마음 세계의 골짜기에 들어가서 그 골짜기에서부터 닦아 나와야 된다는 것입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깊은 기도가 필요합니다. 모든 사람들과 접촉을 끊고 혼자 깊은 명상에 잠길 수 있는 시간이 필요하다는 것입니다.

26-139
선생님이 믿을 수 있는 여러분이 될 수 있는가
지금 여러분이 선생님을 볼 때 고생스러웠던 얼굴로 보입니까? 선생님은 아무리 화를 벼락같이 냈더라도 일단 그때가 지나면 언제 그랬냐 싶을 정도로 내색을 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까딱 잘못하다가는 크게 걸리기 때문입니다. 나 한 사람으로 인해 뜻 앞에 큰 피해를 입혀서는 안 되기 때문에 항상 조심스런 생활을 해 온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어떠한 시련이 와도 결코 그것을 원망해 본 적이 없었습니다. 선생님은 지금까지 감옥에도 많이 끌려 다녔습니다. 아무런 죄없이 여섯 번씩이나 감옥에 들어갔다 나왔습니다. 만 4년 동안 형무소 살이를 했습니다. 사연이 많은 선생님입니다. 그렇지만 선생님은 그것을 피하려 하거나 후회해 본 적이 없습니다. 고문을 받는 자리에서도 `더 쳐라’고 마음으로 외치며 참았습니다. 수많은 성현들이 이런 자리에서 비관하며 패배의 쓴잔을 마시고 한을 남기고 갔지만 나마저 그럴 것이냐? 그럴 수는 없다는 것입니다. `쳐라! 내 몸이 매를 맞아 터질지라도 쳐라! 지금 이 순간 내가 너희들에게 교육을 잘 받고 있는 거야. 악이 선에 대항해서 채찍을 들었지만, 언젠가 선이 채찍을 들어 3배, 7배 그 이상으로 복수탕감할 수 있는 때가 올 것이다. 지금 이 순간은 서슴지 않고 받아야 할 교육의 시간이다. 그러니 쳐라’ 이렇게 결의를 다짐하며 나왔던 것입니다.

지금까지 통일교회를 믿다가 떨어져 나간 사람들이 많습니다. 선생님 앞에 인간만물상이 모였다고 할만큼 여러 유형의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나의 뇌리에서 잊혀지지 않는 사람들도 많이 있습니다. 가끔 저 평양시절에서부터 지금까지를 죽 돌이켜보면 과거에 대했던 사람들의 여러 형(型)이 오늘날 여기에도 있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수많은 인간상들이 지나갔다는 것입니다. 과거에 선생님을 따르다가 떨어졌던 사람들 중에는 현재 여러분들이 결의하고 뛰는 것보다 몇십 배 강한 결의를 했던 사람들도 많이 있었습니다.

그러면 오늘날 여러분들이 `선생님을 죽도록 따라가겠습니다’고 할 때, 선생님은 여러분들을 몇 퍼센트 믿어야 되겠습니까? 백 퍼센트를 믿어야 되겠어요, 오십 퍼센트만 믿어야 되겠어요? 「백퍼센트 믿어야 됩니다」 그것이 고통스럽다는 것입니다. 백 퍼센트 믿어 주었다가 여러분들이 돌아서게 되면 백 퍼센트만큼 십자가를 내가 져야 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을 그렇게밖에 소개를 못 했다는 것이 되기 때문에 소개한 사람이 창피를 당하게 되는 것입니다. 세상에서도 그렇지 않습니까? 그렇기 때문에 몇 퍼센트 믿어야 되는가를 놓고 많은 고충이 있습니다.

과거에 선생님을 따르던 여러 사람 중에는 이러한 사람도 있었습니다. 백두산 천지까지라도 선생님을 모시고 올라가서 그곳에 있는 반석을 갈아 밭을 만들고 감자를 심어 천년 한을 품고라도 선생님을 모시며, 세상이 다 변해도 자기는 변하지 않겠다고 한 사람이 있었습니다. 무슨 말인지 알겠습니까? 반석을 갈아 그곳에 감지를 심어 천년 한을 품고 사는 한이 있더라도 하늘 뜻을 위하고 선생님을 모시며 살겠다고 맹세한 사람이 있었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바람이 휘몰아치니까 2년도 못 가서 그만 자기만 살겠다고 선생님을 버리고 도망가 버렸습니다.

여러분, 베드로에 대한 이야기 많이 들었지요?"다 주를 버릴지라도 나는 언제든지 버리지 않겠나이다(마 26:33)"고 맹세했지만 닭 울기 전에 세 번씩 배반한 베드로였습니다.

그러면 여러분은 선생님을 위해서 죽겠습니까, 살겠습니까? 「죽겠습니다」 선생님 위해서 죽기 말고 여러분을 위해서 죽고 난 다음 선생님을 위해 죽겠다고 해야 됩니다. 알겠어요? 그러지 않고는 선생님을 위해서 죽겠다고 해도 죽지 못하는 것입니다. 먼저 여러분을 위해서 죽고, 다시 살아난 후에 선생님을 위해서 죽겠다고 해야 말이 되는 것입니다. 아직까지 자기를 위해서도 죽기 못하면서 선생님을 위해서 죽겠다고 말하는 사람은 하나님을 위해서 죽을 수 없다는 것입니다.

왜 죽어야 되느냐? 여러분을 위해서입니다. 여러분이 살아나기 위해서는 죽어야 됩니다. 여러분이 부활하기 위해서 죽어야 된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엄청난 내용이 있는 것을 여러분이 알아야 되겠습니다.

26-141
어려울 때 하나님과 인연을 맺어야
그렇기 때문에 참된 생활, 참된 생애를 남기지 않고는 따라갈 수 없습니다. 영계에 가면 자기의 일생이 그대로 밝혀지게 되어 있습니다. 내가 어렸을 때는 어떠했으며 자랄 때는 어떠했다고 하는 내용이 스위치만 누르면 전부 나타난다는 것입니다. 이런 것을 볼 때, 천상세계의 사람이나 앞으로 수많은 후손들도 부러워할 수 있고 눈물지으며 자랑하지 않을 수 없는 귀한 생애를 남기고 가는 사람은 위대한 승리자라는 것입니다. 그러한 승리자가 되기 위하여 참된 생애를 남기겠다고 각오하고 나아가는 여러분이 되어야 되겠습니다. 알겠습니까? 「예」

한 순간, 한 순간 필사의 결의를 하는 여러분이 되어야 합니다. 하나님이 지금까지 찾아 나오신 이 한때를 무의미하게 잃어버리는 사람이 되어서는 안 되겠습니다. 이것은 천년사를 두고도 바꿀 수 없고 억천만금을 주고도 바꿀 수 없는 가치를 지닌 것이니, 이것을 놓치면 큰일납니다. 이 세상을 모두 잃어버리고 찾았던 것을 다 놓치더라도 이것만은 절대 놓치지 않겠다고 다짐하는 여러분이 되어야 하겠습니다. 내 생명이 없어지더라도 이것만은 남기고 가겠노라고 다시 한번 다짐하면서 온갖 정성을 다 들이며 나아가야 되겠습니다.

여러분에게는 단 한번밖에 없는 7, 80년 생애라는 것을 알아야 됩니다. 우리의 생애에 있어서 수고의 노정이 아무리 길다 하더라도 영원에 비하면 숨 한번 쉬는 시간도 안 되는 똑딱하는 순간인 것입니다. 그렇지요? 그렇지만 영원은 얼마나 길고 깁니까? `여─ㅇ’ 해 가지고 `워─ㄴ’ 할 때까지 영원이 걸린다는 것입니다. 그렇지요? (웃음) 그럴 수 있을 만큼 길다는 것입니다.

이 세계권내에서는 내가 호흡하는 회수도 다 계산할 수 있습니다. 한시간에 몇 번 쉬고, 하루에 몇 번 쉬고, 일년에 몇 번 쉬고, 십년에 몇번 쉬고, 일생 동안 몇 번 쉰다는 것을 계산해 낼 수 있는 기간이라는 것입니다. 이 짧은 기간에 헐떡거리고 탄식하며 살지 말라는 것입니다. 모든 것은 순간입니다. 매를 맞을 때 `쳐라, 한번 쳐 보아라’ 이런 마음을 가져야 합니다. 매를 맞을 때 이를 악물고 그 고비를 넘어가는 거와 마찬가지로 이 세상에 있는 동안 뜻을 위해 이를 악물고 나아가라는 것입니다. 길다면 길겠지만 그것은 한때입니다.

자기를 스스로 무자비하게 채찍질하며 어려운 자리를 밟고 넘어가야 됩니다. 참고 나갈 수 있는 자신이 되기 위해 그런 일을 많이 하라는 것입니다. 그렇게 하여 하나님과 인연을 맺어야 합니다. 생각해 보십시오. 어려울 때 인연을 잘 맺어 놓으면 기쁠 때는 맺지 말라고 해도 맺어지는 것입니다. 보통 사람들은 기쁠 때 인연을 맺으려고 아우성입니다. 그러한 인연은 순간적인 인연으로 끝나 버리고 마는 것입니다.

서로 생사를 결해 가지고 네가 죽느냐, 내가 죽느냐 하는 지경에서도 서로 내가 죽겠다고 나설 수 있는 자리, 즉 생명을 엇바꿀 수 있는 자리에 설 수 있어야 합니다. 죽음길을 동반하여 어려움을 같이 겪은 사람들은 기쁠 때에 인연을 맺을 생각조차 할 필요가 없습니다. 어려울 때에 맺은 인연과 기쁠 때에 맺은 인연은 그 맛이 다르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우리 통일교회식은 무엇이냐? 어려울 때에 하나님 앞에 가까운 사람이 되자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내 개인 때문에 어려움 당하고, 내 가정 때문에 어려움 당하고, 우리 나라 때문에 어려움 당하고, 세계 때문에 어려움 당하고 계시니, 나 자신도 내 개인을 위해서 어려움 당하고, 가정을 위해서 어려움 당하고, 사회를 위해서, 국가를 위해서, 세계를 위해서 어려움을 당하자는 것입니다.

`하나님, 저밖에 없습니다. 제가 이 일을 하기 위해 태어났으니 저밖에 또 어디 있습니까? 하나님께서 힘든 것이 있을 때는 저를 불러 주십시오. 밤이고 낮이고 서슴지 말고 불러 주십시오. 어디든지 따라가겠습니다’ 이렇게 해야 됩니다. 아무도 나서는 사람이 없더라도 하나님께서 어느 때건 부르시기만 하면 혼자만이라도 `예 예’하며 기꺼이 나설 수 있는 그러한 사람이 되자는 것입니다. 그렇게 해서 망하는지 안 망하는지 두고 보라는 것입니다. 그 사람은 절대 망하지 않습니다.

그러면 통일교회는 누구하고 어려움을 당하자는 것인가? 하나님을 중심삼고 대한민국과 더불어 어려움을 당하자는 것입니다. 바로 그것이 선생님의 주의이자 하나님의 주의입니다. 그럴 때 여러분은 어떻게 하겠습니까? 모두가 어려움을 당하고 있는데 내가 아니래도 할 사람이 있다는 식으로 슬쩍 남에게 미루고 기회만 보려고 하는 사람은 하나님을 팔아먹겠다는 사람입니다. 한마디로 줏대가 없다는 것입니다.

26-143
고난길의 개척자가 되어 참된 생애를 남기자
이 길을 가기 위해서는 미욱해야 됩니다. 충신들은 어떻게 보면 미욱한 사람들입니다. 조금은 미련해 보입니다. 곰 같은 성격이 있다는 것입니다. 자기 팔을 잘리고도 `어이구 여기 덜 잘랐다. 더 잘라라’ (웃음) 하는, 그와 같은 미욱한 점이 있어야 합니다. 곰이나 멧돼지는 총에 맞아서 걸리적거리는 부분이 있으면 그 부분을 입으로 잘라 버리고 도망간다는 것입니다. 죽음은 나중에 생각하고 우선 걸리적거리는 것을 잘라 버립니다. 그런 미욱한 무엇이 있어야 된다는 것입니다. 충신 열사는 미욱해야 합니다. 알겠습니까? 조금은 어리석어야 된다는 것입니다.

스데반 같은 사람도 세상적으로 보면 바보가 아닙니까? 나이 30도 못된 젊은 사람이 무엇 때문에 돌팔매를 맞으면서도 하나님 앞에 `저들의 죄를 용서해 주시옵소서’ 했습니까? 예수님도 마찬가지로 얼마나 처량합니까? 가만히 계실 일이지 뭘 하려고 돌아다니면서 오병이어로 오천 명을 먹이고, 야단하다가 나중에 그렇게 죽어가느냐 말입니다. 가만히 있었으면 얼마나 좋았겠어요?

그렇기 때문에 잘난 충신이 없다는 것입니다. 잘난 충신은 기회주의 충신입니다. 맹목적인 충신은 무지하고 미욱하며 곰 사촌 같은 사람입니다. 미남자 충신은 많지 않습니다. 미인 열녀도 많지 않습니다. 잘난 충신은 기회주의 충신입니다. 맹목적인 충신은 무지하고 미욱하며 곰 사촌 같은 사람입니다. 미남자 충신은 많지 않습니다. 미인 열녀도 많지 않습니다. 열녀문의 주인공을 보게 되면 대개 중간 이하의 얼굴을 가진 사람입니다. 잘생긴 사람들은 냄새를 풍긴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통일교회 사람들은 모두 못난 사람들입니다. (웃음) 그러므로 나같이 마음대로 생긴 존재야 쓰레기로 사라진다 해도 좋다는 그런 마음을 갖고 하나님께서 골짜리를 메우는 매축공사를 하실 때 맨 첫 삽에 떠져서 부어지는 그 흙이 되게 해 달라고 할 수 있어야 합니다. 그렇게 되면 어디에 묻히겠습니까? 맨 밑창에 묻히는 것입니다. 그러면 매축하는데 쓰여진 흙 가운데 왕이라는 것입니다. 거꾸로 보면 왕이라는 것입니다. 그렇지요? (웃음)

그러면 대한민국에서 제일 고생을 많이 해야 하는 단체가 어느 단체입니까? 「통일교회입니다」 고생의 왕이 되지 않고서는 기쁨의 통일이 시작될 수 없습니다. 무슨 말인지 알겠어요? 「예」 외로운 십자가를 어디에서 질것이냐? 기쁜 자리에서 겸손하게 지려는 자가 충실한 사람인 것입니다.

이런 관점에서 볼 때, 국가의 친구가 될 수 있는 사람은 어떠한 사람이냐? 국가의 어려움을 책임지려고 하는 사람입니다. 세계의 친구가 될 수 있는 사람은 어떠한 사람이냐? 세계의 어려움을 책임지겠다고 하는 사람입니다. 하나님의 친구가 될 수 있는 사람은 어떠한 사람이냐? 하나님의 어려움을 책임지겠다는 사람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참된 길은 어디에 있느냐? 기쁨의 길에 있는 것이 아니라 수난의 길에 있는 것입니다. 참된 사람은 수난이라는 두 글자를 소화시키고 극복하는 것을 생애의 철학으로 삼고 변치 않는 마음을 가지고 살아가는 사람입니다. 세계의 고난길을 홀로 책임지고 밤이나 낮이나 누가 보나 안 보나 자기의 행복을 거기에서 찾겠다고 몸부림치는 사람이 있다면, 그 사람은 곧 세계의 충신이 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사람이 참된 생애의 노정을 남긴다는 것을 알고, 여러분도 이제부터 그런 길을 걸어가기를 부탁하는 것입니다. 알겠습니까? 「예」

반가이 맞아 주는 웃음 뒤에는 슬픔이 올 수 있지만, 서로서로가 먼저 슬픔을 이겨 낼 자세를 갖추고 손에 손을 잡고 내일의 희망의 나라와 내일의 희망의 세계를 위해 결의해 나갈 때, 비로소 기쁨의 세계로 뻗어나가는 것입니다. 기쁨의 세계가 시작된다는 것입니다. 여러분과 내가 합하여 결의를 하고 세계를 부여안고 나서게 될 때 우리의 슬픔으로 인하여 세계에 웃음꽃이 필 것입니다. 이러한 길을 펴고, 이러한 길을 책임지고 나가는 사람이야 말로 참된 생애를 남길 수 있는 사람이라는 것을 여러분이 알고, 이 길을 피하지 않고 직행해 가는 여러분이 되어 주기를 부탁드립니다. 알겠습니까? 「예」

이 원칙을 중심삼고 경제적 분야나 전도하는데 있어서나 무엇을 공부하는 데 있어서도 정성을 다할 것이며, 책을 한 페이지 읽을 때에도 하나님을 위해서 읽는다는 마음으로 정성을 다해 읽으라는 것입니다. 그것도 결코 쉬운 일이 아닙니다. 그런 관점에서 여러분들이 남기는 생애는 하늘과 가깝다는 것을 알고 그러한 생활을 해 나가야 되겠습니다. 민족을 위해 세계를 위해 하나님을 위해서 가야 되는 것입니다. 그리하면 하나님의 기쁨이 찾아올 때 여러분의 기쁨이 찾아오고, 세계의 기쁨이 올 때도 여러분의 기쁨이 찾아온다는 것입니다. 이런 것을 알고 오늘날 통일교회 지구본부에 있는 여러분들은 세계를 대표해서 수난길 앞에 개척자가 되고 선봉자가 되어 주기를 부탁합니다.

26-145
기 도
아버님! 오늘은 전국에 있는 자녀들이 이날을 기념하고 찬양드리며 아버지의 인연을 추구하는 날이오니, 이 날을 기억하여 주시옵기를 간절히 바라옵고 원하옵나이다.

아버님, 어제 이 대구에 와서 경남북에 살고 있는 자녀들을 만나 이들에게 많은 말씀을 하였사옵니다. 저희들이 이 시대에 요구하는 영적인 가치의 문제를 중심삼고 세계적인 인연을 맺는 데 필요한 많은 이야기를 하였사오니, 이 모든 내용을 아버지께서 맡아 주관하여 주시옵기를 간절히 바라옵고 원하옵나이다.

지금 말씀한 `참된 생애를 어떻게 남길 것인가’ 하는 문제를 놓고 생각해 볼 때, 육신과 교차되는 교차로 가운데에서는 참된 생애의 기원이 마련될 수 없다는 것을 알았사옵니다. 복귀의 한의 세계를 넘어가야 할 역사과정에 있어서는 육신이 원하는 길과 반대의 길을 통하지 않으면 안 된다는 것을 알게 하여 주시옵소서. 나라를 위하여 누구보다 많은 눈물을 흘리고, 누구보다 많은 괴로움을 당하고 가슴 조이는 사람은 그 나라의 참된 애국자라는 사실을 알게 하여 주시옵고, 아버지의 뜻과 세계를 위하여 그럴수 있는 사람은 아버님 앞에 남아질 수 있는 영광을 주관하고 관리할 수 있는 사람이 된다는 것을 확실히 알게 허락하여 주시옵기를 간절히 바라옵니다.

참된 생애를 남기는 아들딸들이 되게 허락하여 주시옵소서. 아버지께서 그러한 아들딸로 세워 주고 싶어하시는 모습이 되기 위해서는 아버지와 더불어 수난의 길에 동참해야 되고, 변하지 않는 모습으로 자기를 지켜 나가야 된다는 것을 확실히 알게 허락하여 주시옵기를, 아버님, 간절히 바라옵고 원하옵나이다.

오늘 이 시간 이후의 전부도 친히 같이하여 주시옵고, 남한 각지에서 수많은 자녀들이 이날을 축하하고 경배드리고 있사오니 그곳에도 같이하여 주시옵소서. 세계에 널리어서 다시 만나기를 고대하며 이 나라에 발디디기를 학수고대하고 있는 당신의 자녀들 위에 같이하여 주시옵고, 그들이 서로서로 교통하고 서로서로 화합할 수 있는 생활무대를 허락하여 주시옵기를 간절히 부탁드리옵니다. 모든 말씀을 참부모의 이름으로 간절히 아뢰었사옵나이다. 아멘.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