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6-07 to 26-23: 여지없이 투신하는 여러분이 되라

여지없이 투신하는 여러분이 되라
1969.10.14 (화), 한국 종묘

26-07
여지없이 투신하는 여러분이 되라
지금까지의 역사를 통해서 엮어진 사연들과 현재 엮어지고 있는 사연들은 모두 우리가 소망하는 새로운 이상세계에 고스란히 남길 수 없습니다.

26-07
지금까지의 모든 것은 심판받아야 한다.
제아무리 사랑한다 하는 부부도 그 사랑을 우리 인류가 찾아나가는 이상세계의 표본으로, 누구든지 기념할 수 있는 하나의 기준으로 남겨 놓을 수는 없다는 것입니다. 부부의 사랑이 그렇다고 한다면 부모와 자식지간의 사랑도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아무리 부모가 자식을 사랑한다 하더라도 그 사랑은 영원하고 순수한 이상적인 사랑이 되지 못하기에 그냥 그대로 남겨 놓을 수 없다는 것입니다. 부모와 자식지간의 사랑이 그렇고, 부부지간의 사랑이 그렇고, 형제간의 사랑 역시 그렇습니다. 형제간에 사랑하는 그 사랑도 우리 인류가 희망하는 이상세계에 그대로 남겨 놓을 수가 없다는 것입니다.

이처럼 인간에게 가장 중요한 사랑이 우리가 바라는 이상세계에 그냥 그대로 남겨 놓을 수 없다면, 그 외의 모든 것들은 말할 것도 없습니다. 부자의 관계나 부부의 관계, 또는 형제의 관계 등 인간에게 있어서 행복과 불행을 좌우할 수 있는 동기도 되고 결과도 되는 것들을 우리가 바라는 이상세계에 그냥 그대로 남겨 놓을 수 없다고 한다면, 오늘날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사회는 더더욱 이상세계에 남겨 놓을 수 없는 것입니다. 또, 오늘날 우리가 살고 있는 국가나 세계, 어떠한 주의나 사상도 참다운 이상세계에 그냥 그대로 남겨 놓을 수 없다는 사실을 우리는 부정할 수 없습니다.

어찌하여 이렇게 되었느냐? 이것은 인간이 본래의 이상인 본연의 선을 중심삼고 출발한 것이 아니라 선과 대립되는 악의 입장에서 출발했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빚어진 가정이요, 사회요, 국가요, 세계이기 때문에, 이것들은 절대적인 선을 중심삼아 가지고 새로운 규정 아래 다시 판단을 받아서 그 정체를 드러내야 할 입장에서 있다고 하겠습니다. 따라서 이러한 세상의 인연을 우리가 바라는 이상세계에 그냥 그대로 인계할 수는 없다는 사실을 우리는 알아야 하겠습니다.

이렇게 보게 될 때에 이러한 권내에 살고 있는 부모들도 여기에 모였고, 남편들도 여기에 모였고, 형제들도 여기에 모였습니다. 여러분은 대한민국을 중심삼고 볼 때는 대한민국 국민의 일원으로서 여기에 모인 것이요, 세계의 30억 인류를 중심삼고 볼 때는 인류의 일원으로 여기에 모인 것입니다. 이런 가운데 있는 한 개체를 아무리 존중한다 하더라도 그 기준이라는 것이 부정을 받아야 할 입장에 머물러 있는 가치밖에 되지 못하는 것입니다. 이 가치가 부정당하는 것을 인정해야 할 입장에 있는 우리 자신을 다시 한번 생각해 보아야 합니다.

26-08
참의 기원을 마련하려면
그러면 이러한 것을 부정할 수 있는 참의 기원은 무엇이냐?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 지금까지 역사를 거쳐오면서 수많은 성인이나 현철들이 싸워 나왔지만, 완전히 해결을 보지 못했다는 것을 우리들은 알고 있습니다. 이런 문제를 해결짓기 위해서 공자나 예수 같은 양반들, 혹은 세계적으로 이름난 성인이나 현철들이 무척이나 애썼지만 해결짓지 못했다는 것입니다. 지금까지의 사람들은 이 문제를 해결짓는 데 있어서 좋은 면만 바라보고 해결을 지으려고 했기 때문에 실패를 했던 것입니다.

인류의 조상이 기쁜 날을 중심삼고 출발한 것이 아니라 슬픈 날을 중심삼고 출발했기 때문에, 그 기원의 슬픔 이상의 자리까지 들어가지 않고서는 슬픈 사실을 해결지을 수 없는 것입니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그 슬픔의 기원의 자리를 찾아가지 않고 이것을 떠나서 다른 데서 해결지으려고 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오늘날까지 역사적인 모든 일들이 해결을 보지 못한 채 그대로 남아 있는 것입니다. 우리가 해결짓지 못한 난문제들이 널려 있다는 거예요.

그러면 제일 문제가 되는 것이 무엇이냐? 인류의 시조가 타락으로 인하여 슬픈 자리에 떨어졌다면, 우리는 그 슬픈 자리 이상의 자리까지 올라가야 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인간 조상이 타락함으로 말미암아 슬퍼하셨다면, 그 하나님이 기쁠 수 있는 한 날을 갖기 위해서는 우리가 그 슬픔 이상의 자리까지 들어가야 된다는 것입니다. 그러지 않고서는 하나님을 위로할 수 없다는 거예요.

이런 관점에서 하나님의 마음을 헤아리고자 하는 사람이 지금까지 한 사람도 없었다는 것입니다. 이 세상의 슬픔으로 출발했기 때문에 참다운 성현이라면, 인류가 바라는 이상세계의 표본이 될 수 있는 참다운 인물이라 한다면 이 슬픔을 밟고 올라가 이 슬픔 이상의 자리에서 기쁨을 찾아 세워야만 할 것입니다. 그래야 그것이 참이 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죄악의 권내에서는 역사의 흐름을 따라가며 아무리 해결의 방안을 강구한다 하더라도, 역사의 기원을 밟고 올라설 수 있는 승리적 기쁨은 우리 인류역사상에 나타날 수 없다는 것을 우리들은 알아야 되겠습니다.

오늘날 우리 교회가, 또 나 자신이 이 길을 개척하게 된 동기가 어디에 있느냐 하면, 하나님이 인류를 사랑으로 지으셨다면 도대체 얼마나 사랑하셨는가를 깨달은 데 있습니다. 하나님이 인류의 부모라면 그 부모의 입장에서 얼마나 인류를 사랑하셨는가? 그 사랑의 기준이 무엇이냐? 이런 것이 문제인 것입니다. 그리고 그토록 사랑하신 하나님이 슬퍼하셨다면 어느 정도나 슬퍼하셨느냐 이거예요. 이것도 문제라는 거예요. 오늘날의 종교인들이 그런 문제에 대해선 손도 대지 못하고 있습니다.

인류의 조상이 타락한 후에 하나님이 슬퍼하신 것이 물론이겠지만, 인류의 조상 자체도 얼마나 슬퍼했겠느냐 하는 것입니다. 이처럼 타락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이 슬퍼하셨고, 인류의 조상이 슬퍼했습니다. 위로는 하늘이, 아래로는 땅이 슬픔의 기원을 갖고 역사가 출발되었는데 그러한 인류역사의 슬픔의 기원을 어떻게 체휼하느냐 하는 것이 중요한 문제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결론적으로 말하면, 슬픈 역사의 기원을 넘어서 슬픔을 느낄 수 있는 사나이가 이 땅에 나와야 된다는 것입니다. 수천년의 역사를 거쳐 나왔지만 역사과정에서 그 누구도 느끼지 못한 슬픔을 느낄 수 있는 사나이가 나와야 합니다. 인류 조상이 타락하여 느낀 그 이상의 슬픔을 느꼈던 하나님을 모시기 위해서는, 하나님의 사정 앞에 설 수 있고, 그 슬픈 심정을 체휼할 수 있어야 합니다. 그러지 않으면 하나님과 아들과 딸의 인연을 맺을 수 없다는 것을 분명히 알아야 되겠습니다. 이것은 우리가 일상생활에서 잘못했을 때를 미루어 보아도 알 수 있는 사실입니다.

26-10
슬픔을 뽑아 버리고 기쁨을 소개하는 장본인이 되신 예수
그러면 인류의 조상이 아담과 해와는 타락하고 나서 얼마나 슬퍼했느냐? 에덴 동산, 하나님을 모실 수 있는 자유의 세계에서 추방되어 나오게 될 때 그들은 얼마나 슬픔을 느꼈겠느냐? 그들은 어떠한 울음을 울었고, 어떠한 곡절의 심정을 가졌으며, 미래를 걸어 놓고 어떠한 낙망의 걸음을 걸었겠느냐? 또 그것을 바라보시는 하나님은 얼마나 슬퍼하셨겠느냐? 이러한 것을 체험하지 않고서는 하늘나라로 돌아갈 수 없다는 것입니다. 그 사연 이상의 자리에 올라가 아담이 통곡하던 그 이상 통곡할 수 있는 하나의 효자, 그걸 바라보며 비통해 한 하나님의 아픈 가슴 이상의 아픔을 느끼면서 하나님을 위로할 수 있는 하나의 효자가 있어야 합니다. 이런 사람이 이 지구상에 어느 때 나타날 것이뇨?

이러한 관점에서 볼 때, 예수님은 십자가 도상, 즉 자기의 운명이 경각에 달해 가지고도, 크나큰 역사적인 사명을 감당해야 할 책임을 가지고 왔음에도 불구하고 자기의 사명이 미완성으로 끝나게 되어 절망상태에 임하게 될 때, 자기나름의 역량과 수고를 다 했지만, 그것을 부정해 놓고 슬퍼하시던 하나님의 심정을 느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이시여, 저들이 알지 못하오니 저들의 죄를 용서하여 주시옵소서!’라고 했던 것입니다. 예수께서 이런 말을 할 수 있었던 것은 말로 끝난 것이 아니라 사실이 그랬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4천년이라는 기나긴 역사과정을 통하여 이스라엘 민족을 세워 가지고, 한날의 승리를 표방하며 수난의 역사를 엮어 나왔던 것입니다. 그래서 아무리 어려운 곡절이 있더라도 버릴 수 없는 이스라엘 민족, 치열한 역사의 싸움 속에서도 슬픔의 결정체로 남아져 온 이스라엘 민족, 이들이 하나님을 배반한다고 해서 하나님도 이들을 저버리게 된다면 하나님의 4천년 복귀역사의 수고가 일시에 사라져 버리게 되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이것을 아는 자리에서 이스라엘을 사랑하지 않을 수 없는 자신의 모습을 발견했고, 이스라엘 민족이 하나님을 사랑하지 않음으로써 맺혔던 하나님의 한을 풀어 드려야 할 아들의 입장에 선 자신을 발견했던 것입니다. 때문에 저들을 용서해 주시옵소서라고 기도할 수 있었던 것이에요.

하나님에게 있어서 역사과정에서 제일 슬펐던 일은 아담 해와의 타락이었습니다. 그 다음 슬펐던 일은 예수님이 십자가에 돌아가신 일이었습니다. 어떠한 나라가 망했을 때 그 나라의 운명을 비통해 하고 자기의 생명을 바치는 수천 수만의 애국자들이 있다 하더라도, 그들의 슬픔은 민족적인 한계내의 슬픔에 불과한 것입니다. 타락의 비운을 벗어나지 못한, 민족의 희망을 위해 살다가 죽어 갔을 뿐이지, 세계를 넘어 역사적인 심정의 중심되시는 하나님과 관계를 맺어 가지고 죽어 간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렇게 죽어 간 사람은 하나도 없었던 것입니다.

그런 가운데서 예수 그리스도만이 아담의 슬픔을 대신하여 그 이상의 슬픈 마음을 갖고 울 수 있었기 때문에 만민을 구할 수 있는 구주, 즉 슬픈 세계의 뿌리를 뽑아 기쁨의 세계를 소개할 수 있는 장본인이 될 수 있지 않았느냐 하는 것입니다. 이렇게 볼 때 이러한 사실은 논리적인 모순이 전혀 없다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맹목적으로 믿음으로 구원 얻는다는, 이런 입장보다 슬픈 세계를 소화할 수 있고 슬픔을 체험하는 입장에 서야 합니다. 모든 악을 처단할 수 있는 주체성을 갖기 위해서는 그 이상의 슬픈 자리에서 슬픔을 느껴야 합니다. 그러지 않고서는 이것을 판결지을 수 없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것을 판결짓지 못하는 한 선은 이 땅에 나타날 수 없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관점에서 오늘날 우리 교회는 기쁜 역사의 기원이 된다는 것을 여러분은 알아야 됩니다.

26-12
아담의 파탄장면을 바라보시는 하나님은 그 심정이 어떠했겠느냐
타락한 직후에 하나님께서 `아담아, 아담아’ 하고 불렀을 때 그 소리를 듣는 아담의 마음이 어떠했겠어요? 아담이 가슴을 쥐어짜면서 비참하게 울던 그 장면이 어떠했겠어요? 이것이 문제라는 것입니다. 천지의 주재자로서 만물의 모든 정수를 뽑아 가지고 하나의 소망의 실체로 지었던 그 아담이, 원치 않은 사탄의 세계에 사로잡혀서 단숨에 파탄되어 버린 그 실정을 바라보는 하나님의 심정은 어떠했겠습니까? 얼마나 슬프셨겠어요?

여기 있는 아주머니들은 이러한 것을 체험한 분들도 있을 것입니다. 자식을 낳아서 키우다가 그 사랑하는 아들딸이 병이 나서 목숨이 경각에 달했을 때 그 자식을 바라보는 부모의 마음이 어떻겠느냐 하는 것입니다. 타락한 세계의 부모의 심정도 그러한데 본연의 아버지의 심정은 어떻겠습니까? 최상의 미를 갖춘 하나님이 타락한 아담을 바라보시는 그 심정이 어떠했겠느냐 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문제입니다.

이러한 인류 조상의 슬픔을 밟고 올라서 가지고 하나님의 비통한 슬픔을 대신하여 위로해 드릴 수 있는 사나이가 이 땅 위에 어디 있느냐? 아직까지 그러한 문제를 중심삼고 찾아 나온 성인 현철이 없다는 겁니다.

오늘 우리 식구들은 잘 알아야 되겠습니다. 여러분이 하나님의 아들이 되기 위해서는 아담이 타락하고 나서 느끼던 슬픔 이상의 슬픔을 느껴야 하고, 그가 흘리던 눈물 이상의 눈물을 흘려야 된다는 것입니다. 가슴을 치고 오장육부가 뒤틀리는 그런 비통한 입장에 서야 됩니다. 그래서 슬픔에 가득찬 눈물을 땅에 떨어뜨리면서 하늘을 향하여 한스런 심정을 가지고 역사적인 죄를 회개하고, 당신 앞에 불효했던 심정을 용서해 달라고 호소할 수 있어야 합니다. 이런 체험을 하지 않고서는 이 흑암의 세계를 넘어 하나님이 임하시는 이상적인 기쁨의 선의 세계에 동참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오늘날 여러분이 이러한 것을 개척해 나가는 데 있어서 눈물을 흘리려면 최대의 눈물을 흘리라는 것입니다. 또한 슬픔을 당하더라도 인류 역사상의 그 누구에게도 지지 않을 내용과 긍지를 가지고 당하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 앞에 공인되고, 이 땅의 그 누구도 부정할 수 없는 그런 기준에 서게 될 때 이 슬픈 세상은 거기서부터 결판이 난다는 것입니다. 새로운 선을 제시하고 새로운 천적인 인연을 제시하는 거기서부터 역사적인 새로운 운동이 벌어지게 되는 것입니다. 지금까지는 우리 인간이 오랜 역사과정을 거쳐 왔지만, 이러한 것을 제시하지 못했습니다. 그러기에 이런 것이 제시되는 날에야 비로소 이 땅 위에 소망의 새로운 세계가 싹터 나올 것입니다.

오늘날 대한민국이면 대한민국이 반만년 역사를 거쳐 나온 그 배후에는 수많은 애국자들의 눈물이 담겨 있을 것입니다. 오늘날의 이 세계가 이만한 형태의 문화적인 배경을 갖추어 나오고, 역사성을 띠고 발전적인 문화세계를 이룬 배후에도 수많은 성인 현철들의 공적의 터전이 남아 있을 것입니다. 또한 그들이 흘린 눈물의 흔적이 남아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들이 흘린 눈물은 슬픔의 원점을 넘어서지 못했다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오늘날 우리가 말하고자 하는 것은 하나님의 심정입니다. 하나님의 심정을 논의하자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심정을 알기 위해서는 타락으로 인한 슬픔을 체험해야 됩니다. 지금까지의 복귀역사의 도상에서 뜻을 따라 나오던 수많은 선지 선열들이 출전을 했다가 실패한 그런 정경(情景)에 내 자신을 개재시켜 가지고, 역사를 초월한 자리에서 하나님을 앞에 모시고 체험하라는 것입니다.

26-13
새로운 천민사상이 출발되는 자리
스스로의 체험을 통해서 악을 제거하고 선을 옹호하겠다는 하나의 주체의식을 갖게 될 때, 여기에서부터 새로운 역사와 새로운 천민사상이 출발한다는 사실을 우리는 부정할 수 없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고생을 해도 맨 밑창에서 하라는 것입니다. 이러한 사연을 엮어 나가는 과정에는 반드시 하나님께서 같이하신다는 것입니다.

자식이 죽는 자리, 통곡하는 자리, 그 누구도 억제하지 못하고 위로할 수 없는 비참한 환경에 처하게 될 때에는 부모가 동참하는 법입니다. 알지 못해서 동참하지 못하지 알기만 한다면 어떠한 사정이 있더라도 거기에 반드시 동참하고 싶은 것이 부모의 심정이 아니겠습니까?

그러한 부모의 사랑보다도 몇배 더 큰 사랑의 하나님이 계신다면, 그분이 인류의 아버지라면 그런 비참하고 비통한 사실을 접한 사람이 있다 할 때에는 하나님은 반드시 거기에 임하신다는 것입니다. 그가 가는 길에는 언제나 하나님이 같이해야 된다는 것입니다. 그렇게 되면 어떠한 시련과 고통이 있더라도 그 시련과 고통이 그를 삼켜 버리지 못합니다. 그러나 이러한 시련과 고통이야말로 참을 완전하게 귀결지을 수 있는 하나의 조건이 되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시련과 고통, 그것은 슬픔의 상징이 아니라 도리어 나로 하여금 영원히 빛이 될 수 있는, 선의 가치를 설정지어서 새로운 출발의 인연을 맺게 하는 절대적인 요인이 된다는 것입니다. 거기에서 승리의 깃발을 갖고 나타나지 않는 한 이 악의 세계를 정복하고 타파해 버릴 수 있는 주체적인 개인, 주체적인 단계, 주체적인 세계의 사상이 벌어지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의미에서 나는 지금까지 때로는 눈물을 머금고 여러분들을 모질게 내몬 때도 있었습니다. 여러분이 탄식하는 것을 뻔히 알면서도 채찍을 가하지 않으면 안 될 때도 있었던 것입니다. 그것은 왜 그래야만 되느냐? 그것은 여러분이 원칙적인 과정을 거쳐 나가야 할 운명길에 있기 때문이요, 그것이 지금까지의 비운의 세계에 사로잡혀 있던 이 환경을 타파하기 위한 불가피한 작전법에 의한 공식이었기 때문입니다.

26-14
역사를 추구해야 하는 이유
오늘 여러분들이 이와 같은 자리에 모일 때에 지난날의 역사를 추억하는 것만이 중요한 것이 아닙니다. 그것은 도리어 오늘날 발전하고 있는 현실, 좋은 환경을 생각할 때 우리에게 좋지 못한 것 같이도 생각됩니다.

그러면 우리가 역사를 추구하는 것은 무엇 때문이냐? 그것은 지금까지의 역사의 기원을 박차고 새로운 기원을 제시한 그 앞에 내가 얼마만큼 참된 일원으로서 따라갈 수 있느냐 하는 문제를 여기에서 공고히 하기 위해서입니다.

나 자신은 지금까지 걸어나오는 데에 있어서, 어디를 가든지 죄의 세계는 싫어했습니다. 고생을 해도 참되게 살라는 것입니다. 모든 인류가 비판하는 자리에서 행복을 노래하고 영광을 누리는 것보다도, 인류가 눈을 감으면서도 죽지 말고 살아 달라고 할 수 있는 그런 자리가 귀한 자리이며, 그 자리가 지금까지 우리가 표방하고 개척하여 나오는 길이라는 것을 여러분은 알아야 합니다.

나는 여러분이 상상도 하지 못할 배후를 갖고 있다는 것입니다. 세계사적인 내용을 갖고 있다 이겁니다. 본연의 세계에 들어가 체험해 보았고, 그 어느 누가 하나님이 없고 영계가 없다고 아무리 변명한다고 해도 변명할 수 없는 실증적인 재료를 선생님은 얼마든지 갖고 있다는 것입니다.

이런 재료가 어디서부터 나왔느냐? 여러분이 지금까지 습관적으로 살아가고 있는 생활권내의 인연 가운데에서 나온 것이 아닙니다. 누구보다도 절박한 자리, 눈이 물크러지도록 눈물을 흘린 자리에서 나온 것입니다. 무릎을 꿇고 땅에 엎디어 며칠이라고 호소한 정성밑에서 나온 것입니다.

여러분이 배운 복귀원리를 중심삼고 역사를 두고 볼 때, 아담이면 아담이상의 자리까지 나아가야 합니다. 아담이 타락한 그 이상의 자리까지 나아가야 한다는 것입니다. 아브라함이 제물 드리다 실수한 자리 이상으로 올라가야 된다는 것입니다. 모세가 가나안 복귀를 목표하고 가다가 실패하여 60만 대중을 광야에서 독수리밥이 되게 한 그 실패의 원인을 넘어가야 된다는 것입니다. 세례 요한과 요셉의 가정을 중심한 모든 실수의 요인을 능가해야 된다는 것입니다.

그럴 때마다 역사적인 슬픔의 동참자로되 그 슬픔에 밀려나는 자가 아니라, 그 슬픔을 박차고 일어서서 선을 입증할 수 있는 자가 되어야 합니다. 이러한 관점에서 볼 때, 다가오는 시련과 풍파가 아무리 크다 하더라도 그 시련과 풍파를 자기의 무한한 가치를 완결시키려는 하나의 사랑으로 느끼게 된다면 그는 혹 패자의 자리로는 몰리는 일이 있을는지는 모르지만 세상 어디에 가든지 절대 망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이를 치면 오히려 친 자가 망하면 망했지 맞는 자리에 있는 사람은 망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26-16
슬픈 역사를 도려낼 수 있어야
우리는 지금까지 이런 길을 걸어 나왔습니다. 우리는 언제나 맞으면서 발전해 나왔습니다. 세계의 인류가 제시하는 환경을 뚫고서 나왔습니다. 왜 그래야 했느냐? 그것은 슬픈 역사의 기원을 넘어 가지고 공의의 법도를 따라서 살고자 했기 때문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불신의 기원이 된 아담 해와의 인연을 거쳐 가지고 승리의 기준에 서서, 철두철미한 하늘의 입장에서 하나님을 염려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슬픔 이상 슬픔의 자리에 가서 하나님을 위로하기 위해 그 이상의 눈물을 흘리고 나가지 않으면 안된다는 것입니다. 종교는 여기서부터 시작하는 것입니다.

여러분들이 이러한 모임을 가질 적마다 한 가지 알아야 할 것은 역사가 그렇게 슬픔으로 출발했기 때문에 이것을 넘어가야 하는 우리에게 있어서는 지난 역사를 도려낼 수 있어야 하겠다는 것입니다. 그 모든 것을 전부 다 슬픔으로 탕감시켜 가지고 남을 수 있는 사람이 되어야 하겠다는 것입니다. 그러한 개인, 그러한 부부, 그러한 가정, 그러한 종족, 그러한 민족, 그러한 국가, 그러한 세계가 벌어질 때 이것이 바로 오늘날 우리가 제시하는 제3이스라엘인 것입니다.

이 제3이스라엘은 슬픔에서 부활한 민족입니다. 기쁨의 자리에서 부활한 것이 아니고 슬픔의 자리에서 부활한 것입니다. 슬픔의 세계에서 사탄을 굴복시켰다는 이것이 다르다는 것입니다. 내가 일전에 용매도 사건을 이야기했지만, 그렇게 하는 것은 어려운 일입니다. 그렇지만 피난길을 가면서도 이 삼천만 민족 가운데서 최고로 어려운 피난길을 가리라고 마음 먹었습니다. 그래서 `죽기 전까지 이 길을 가리라!내 맥박이 멈출 때까지 가리라! 아직까지 호흡이 끊기지 않았으니 가야 된다’는 결심을 하고 갔던 것입니다.

이러한 철석같은 신념이 있었기 때문에, 그를 붙들고 눈물 흘리면서 이 삼천만 민족이 피난민으로서 고생하는 것을 동정하는 입장에서 이 삼천만을 내 등에 업고 간다는 신념을 가지고 간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다리가 아무리 휘청거려도 쓰러질 수 없었던 것입니다.

이런 점에서 볼 때, 오늘날 우리 식구들 가운데에는 돼먹지 못한 사람이 많습니다. 적당히 출세하려는 사람은 적당히 망하는 것입니다. 오늘날 이 대한민국에서 소위 재벌이라고 큰소리치는 사람들을 두고 보라는 것입니다. 절대로 몇 대(代) 못 갑니다. 그렇지만 우리 교회가 닦은 이 모든 기반은 앞으로 억천만년이 지나가도 그 누구도 점령하지 못할 것입니다. 이렇듯 우리 교회는 근본적으로 어긋나지 않는 원칙을 따라서 기반을 닦아 나왔습니다.

26-17
감옥에서 출발한 통일교회이나 기쁨과 희망이 있다
지금까지 선생님은 옥중에서도 옥중의 생활을 한 사람입니다. 지금까지 수차례에 걸쳐 만 4년 가량의 감옥살이를 했지만, 그 옥중생활이 나에게 슬픔을 주지 않았습니다. 그곳은 나에게 둘도 없는, 제일의 도장(道場)이었습니다. 인간을 진정으로 사랑할 수 있느냐, 원수를 진정으로 사랑할 수 있느냐, 사형수와 코를 맞댈 수 있고 입김을 나눌 수 있느냐 하는 것을 생각할 수 있는 도장이었습니다. 그리고 그런 자리에서 이 민족의 한을 느끼고, 정열을 가지고 사회의 부정을 신랄히 비판할 수 있느냐 하는 것을 생각할 수 있는 좋은 도장이었던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거기에서부터 우리 교회가 출발한 것입니다. 그런 자리에서도 어떻게 인간이 갖추어야 하는, 하나님이 제시한 인격적 기준을 상실하지 않고 아무리 어려운 환경이라도 극복할 수 있는 하나의 원천적인 실체를 수습하느냐 하는 것을 지금까지 필승의 생활철학으로 삼아 온 것입니다.

오늘날 한국을 중심삼고 볼 때, 삼천만 민족 전부가 우리를 반대했습니다. 반대하라는 것입니다. 그러나 역사의 흐름과 더불어 반대하는 자들은 흘러가는 것입니다. 그러니 얼마든지 반대하라는 거예요. 역사는 정의에 입각하나니, 역사는 원칙에 입각하나니 내가 서 있는 이상의 자리에 오르지 못하고, 그러한 원칙적인 기준을 넘어서지 못하고 우리를 치는 사람은 망합니다.

참이 악을 쳐 가지고는 남을 수 있으되 악이 참을 쳐 가지고는 남지 못하는 것입니다. 길을 가다가도 다른 사람한테 조금이라도 실례하게 되면 모른 척해서는 안 됩니다. 반드시 `실례했습니다!’ 라고 사과를 해야 됩니다. 거기에서는 연령이라든가 지위라든가 학식을 초월하는 것입니다. 마찬가지입니다. 앞으로 발전하는 우리를 수많은 국가가 반대하더라도 그 반대하는 무리들이 역사의 흐름 가운데서 반대하느냐, 아니면 이것을 거슬러 올라와서 우리가 걸어온 이상의 시련과정을 거쳐 가지고 반대하느냐…. 당당코 우주적인 입장을 대신해서, 하나님을 대신할 선조라 하는 입장에서, 또는 그러한 실적의 내용과 실권을 가지고 반대하면 모르거니와 그렇지 않으면 우리는 절대로 안 망한다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미국이 아무리 크다 해도 우리가 가는 길을 막지 못할 것입니다. 세계의 30억 인류가 아무리 사탄권내에 있다 하더라도 막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잘못 우리를 건드렸다간 오히려 그네들이 걸리는 것입니다. 이러한 길을 우리는 개척해 나오고 있는 것입니다.

오늘 여기에 처음 온 사람도 있겠지만, 우리 통일교회를 일반 교회처럼 생각하지 말라는 겁니다. 여기에는 무시무시한 투쟁이 교류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여기에는 슬픈 내용만 있는 것이 아닙니다. 슬픔을 능가할 수 있는 소망과 기쁨이 있는 것이며, 그 기쁨이 지난날의 슬픔을 압도할 수 있는 권위와 기준이 세워져 있습니다. 그래서 지금까지 이 일을 해 나오고 있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세월이 아무리 흘러가고 아무리 환경이 바뀌더라도 여기에 서서 말하는 이 사나이의 가슴에 있는 이 희망의 줄을 끊을 자가 없습니다. 누구든지 이 이상 올라오라는 것입니다.

26-18
어떻게 참된 사람이 되느냐 하는 것이 문제
참된 사람의 자리에 어떻게 올라서느냐 하는 것이 문제인데, 우리가 그런 실력을 가지고 모든 사회의 악과 불안을 극복할 수 있고, 천지를 배후삼고 행복을 모색할 수 있고, 선의 기준을 세울 수 있는 주체적인 입장에 선다면 세계적인 문제가 될 것입니다. 이것은 역사적이며 세계적인 사건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우리가 가는 길은 앞으로 21세기 후반에 들어가도 세계적인 문제가 될 것입니다. 안 되면 내가 되게 만들 것입니다.

이것이 우리의 천주주의 사상이라는 것입니다. 이런 입장에서 볼 때 한번 내가 젊은 청년들을 들이치고 내가 고문당하던 것의 배 이상의 고문을 하겠다고 쇠뭉치와 채찍을 들고 나서게 될 때, 여기에 견딜 자가 누구냐 하는 것입니다. 내가 이러한 시련의 과정을 거쳐서 험한 난국을 극복해 가지고 남겨진 천지의 보화를 상속해 주기 위해서는, 하늘의 시련에다 내 시련을 가하여 들이칠 때에도 달게 받아 이겨낼 수 있는 사람이 있어야 합니다. 그러한 시련을 극복한 기반 위에 실천을 하여 선의 기준을 찾아 세운 자기 자신이라고 자랑하며 나설 수 있는 무리가 과연 얼마나 되겠느냐 하는 것입니다.

이런 점에서 보게 될 때에 오늘날 우리들이 말하는 식구라는 기준은 고차원적인 것입니다. 여기에 이르게 되면 자기의 혈통적인 인연이 문제되는 것이 아닙니다. 종족적인 그런 혈족이 문제가 되는 것이 아닙니다. 이 자리는 혈족 아닌 혈족이 형제 이상의 인연을 가질 수 있고, 부모 아닌 부모를 부모 이상 모실 수 있으며, 가정 아닌 가정을 가정 이상으로 모실 수 있는 그러한 자리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아무리 극난(極難)한 사회악에 처해지더라도 이것을 넘어서 나갈 수 있고, 또한 지탱해 나갈 수 있는 주체성을 지녀야 되는 것입니다. 그러한 가정 그러한 종족, 그러한 민족, 그러한 국가, 그러한 세계가 될 때 이 악한 세상은 기필코 우리들의 모든 권한 앞에서 전부 다 심판받게 된다는 것입니다.

26-19
공직에 있는 사람이 가져야 할 가치관
지금까지 선생님의 눈에는 눈물이 마를 날이 없었습니다. 지금도 그렇습니다. 공직에 있는 사람은 발을 편히 뻗고 자지 못하는 것입니다. 마음 놓고 밥 한 그릇 못 먹는 것입니다. 그런 처지를 지내 오면서 내가 별의별 말을 다 들었지만 변명 안 했습니다. 하나님이 6천년 동안 변명하고 나섰다면 이 천지는 남아지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의 내정적인 심정을 더듬어 볼 때 오늘날 우리가 당하는 시련과 고통은 너무나 경(輕)하다는 것입니다. 하나님 앞에 자기를 들고 나와서 변명하기에는 너무나 부족하다는 것입니다. 도리어 우리는 하나님을 위로해 드리고 하나님 앞에 머리 숙이고 부끄러워해야 할 자신들입니다. 어려운 환경에 몰리면 몰릴수록 자기 자체를 감추려 하고, 부끄러움을 느껴야 할 그런 입장인데도 불구하고 변명하고 나서려 하고 있습니다. 그래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자기의 심정적인 배후가 폭이 넓어서 세계 역사상의 어떠한 성현들의 마음도 능가할 수 있고, 또한 현재 세계를 다스리는 어떠한 주권자의 가슴보다도 넓은 가슴을 가지고 나간다 하는 사람들이 있으면 그들은 기필코 이 세상에 남아질 것입니다. 그러한 사람들을 만들자는 겁니다.

선생님이 감옥에서 나오면서 그 동안 입고 있었던 그 누더기들을 왜 가지고 나왔느냐? 그것은 팔아 보아야 일푼도 안 되는 것입니다. 엿장수한테 주어도 엿 반가락도 안 주는 것입니다. 그러면 3년 가까운 세월을 보내면서 명주바지 저고리는 전부다 남을 주어 버리고 왜 그 수의(囚衣)만 입고 살아야 했느냐 하는 것입니다. 만지면 문적문적 솜과 같이 풀려 나가는 누더기가 무엇 때문에 필요했느냐는 것입니다. 그것은 그것이 10년, 1세기, 혹은 수십세기가 지난 후에는 억천만금을 주고도 사지 못할 보물이 될 것이기 때문이었습니다.

지금 예루살렘에 예수가 쓰던 젓가락 하나가 있다면 그것은 설사 영국을 준다고 해도 못 살 것이고 미국을 준다고 해도 못 살 것입니다. 이런 말을 오늘날 피끓는 젊은이들이 들으면 웃을지 모르지만, 천금 만금보다도 더 귀하기 때문에 어려운 환경을 극복하면서까지 그것을 갖고 나왔다는 것입니다. 그것은 아무것도 모르는 사람에겐 양단 치마 저고리 한벌의 가치보다 못한 것이고, 자기 지갑에 있는 동전 한푼의 가치보다 못한 것입니다.

천신만고 끝에 남겨 놓은 귀한 보물을 통일교회는 다 잃어버렸습니다. 하나밖에 없는 귀한 그 보물을 다 잃어버렸습니다. 그것은 억천만금을 주고도 살 수 없을 것입니다. 그러면 내 자신이 그런 것을 남기기 위해서 이러느냐? 아니예요. 이런 마음을 갖고 나간다면 하나님이 남겨 주기를 바라고, 이후에 후손들이 남겨 주기를 바랄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마음이 그렇고 미래의 후손들의 마음이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을 위하고 후손들을 위해서 이러는 것입니다.

이것이 공직에 있는 사람들이 가져야 할 생활관이요, 공직에 있는 사람이 가져야 할 가치관이라는 것을 여러분은 알아야 됩니다. 내가 고문을 당하여 피를 토하며 쓰러지더라도 `하늘이여, 이 피를 보고 나 때문에 눈물 흘리지 마시옵소서. 이것은 부끄러운 피가 될 것이고, 탄식에 젖은 원한의 눈물이 될 것이어늘 여기에 하늘이 동정하는 것을 원치 않사옵니다’ 라고 한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감옥에 가게 되더라도 기도를 안하는 것입니다. 심정세계에 있어서는 그렇게 해야 된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오늘날 세상 사람들을 두고 볼 때, 그렇게 안 되어 있다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선생님은 차원이 다르고 입장이 다르다는 것입니다.

26-21
내가 어려움을 당할 때 같이 어려움을 당하신 아버님
나는 지금까지 어느 애국자 못지 않게 대한민국을 위해 눈물을 흘렸습니다. 뼛골이 우러나는 눈물을 흘렸습니다. 어느 애국자 못지 않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선생님이 변명하지 않아도 하나님이 아실 것입니다.

종교분야에서 기독교를 중심삼고 볼 때, 기독교인들이 순교를 앞에 놓고, 이슬처럼 사라져 가는 자리에서 하나님 앞에 기도하던 그런 순간을 선생님은 다 체험했습니다. 죽는 것은 간단합니다. 그러나 죽음으로 끝날 것이 아니라 죽으면 안 될 운명을 가지고 죽음길을 가려 가는 것이 도리어 더 어렵다는 것입니다. 이렇게 지금까지 50살 가까운 생애를 헤치며 한의 역사와 슬픔의 역사를 동반해 나왔습니다.

이러한 과정에서 하나님이 배후에서 따라 나오시며 내가 슬퍼할 때에 같이 슬퍼하셨고, 내가 어려움을 당할 때 같이 어려움을 당하셨다는 이 사실! 이것은 나에게 있어서 벗을 수 없는 짐입니다. 짐이라 이거야. 언제 활짝 이 짐을 벗어버리고 거기에 대비되는 기쁨으로 아버지를 모시어 찬양할 수 있는 날이 올 것이냐? 이를 위하여 싸우는 것입니다.

슬픔의 길은 이제 흘러갈 데로 흘러가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것을 밟고 올라서서 결코 패자의 모습이 아닌 승자의 모습을 가지고, 천적인 인연을 존중시하며 나가야 합니다. 아버지의 소원은 아들딸을 찾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여러분이 승리의 원한을 갖춰 가지고 사탄의 권한을 여지없이 분쇄해야 하겠습니다. 그런 아들로 말미암아 자신의 권위를 드러냈을 때 아들의 진가를 찬양하고 만세에 내세워 자랑하고 싶은 것이 아버지의 마음이 아니겠느냐 하는 것입니다. 또한 그럴 수 있는 기쁨의 한 날을 어떻게 맞이하느냐 하는 것이 문제입니다. 나는 이것을 죽고 또 죽어서라도 하여야 할 사명으로 느끼고 나가는 것입니다. 지금까지 이러한 사명을 선생님은 지니고 나온 것입니다.

이런 관점에서 볼 때, 뜻을 모르는 사람이나 혹은 안다고 하나 잘 모르는 사람들의 입장과 하늘이 가야 할 입장과는 차원이 다르다는 것을 여러분들은 알아야 되겠습니다.

오늘 이러한 모임이 선생님의 이름을 높이고 선전이나 하기 위한 것이 아닙니다. 골수 깊은 곳에 그 누구도 접촉할 수 없는 뿌리를 박아 가지고, 절대적인 내용을 지닌 하나님만이 백 퍼센트 접근할 수 있는 그런 인연을 만들어 놓아야 하겠습니다. 거기에는 슬픈 면으로 뿐만이 아니라, 기쁜 면으로까지 만들어 놓아야 된다는 것입니다. 이것을 생각하면 지금 선생님이 50세에 가까운데…. 50세 이상 되어도 그 일을 할 수 있을 것인가 하고 생각할 때, 시간이 바쁩니다.

26-22
뜻을 바라고 내일을 향해 전진하자
자고 일어나서는 죄인과 같이 회개해야 됩니다. 밥을 먹고 나서 배가 부르면 회개해야 됩니다. 이런 생활을 해야 됩니다. 나는 요즘도 내가 땅에 사는 동안 이 싸움에 끝까지 순수하게 생애를 바치기 위해서는 어떻게 가야 되느냐를 생각하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이것을 알아야 됩니다.

그럴 수 있는 사나이, 그럴 수 있는 아낙네가 앞으로 나아질 수 있는 선민사상의 계승자가 될 것이요, 천적 인연을 고스란히 후손에게 넘겨줄 수 있는 조상이 되지 않겠느냐 하는 것입니다. 그러한 조상, 그러한 아들딸이 귀한 것입니다. 돈푼에 팔려 다니고 사정에 몰려다니는 무리는 다 망하게 됩니다.

여러분이 우리 교회의 문을 두드리게 될 때에는 습관적인 신앙생활을 하던 과거의 의식적인 탈을 벗어야 됩니다. 그런 관념적인 인식에 의한 신관을 버려야 된다는 것입니다. 사실적인 내용, 직감적이며 통솔적인 권한, 그리고 주체적인 의식을 가지고 그 어떠한 존재에게도 적용시킬 수 있는 절대적인 권한을 가진 신으로 인식해야 합니다. 슬픈 면에 있어서 영원히 남아질 수 있고, 기쁜 면에서 새로운 출발을 영원히 제시할 수 있는 아들딸이 되어야 되겠습니다. 그러한 사람이야말로 진정한 하나님의 아들이요, 딸이라는 것입니다.

이러한 관점에서 볼 때, 오늘날 우리들은 이러한 날을 맞이할 때마다 과거를 회상함과 동시에 새로운 결의를 다져 가지고 내일로 전진해야 할 것입니다. 따라서 우리의 무대 앞에 치열한 투쟁이 벌어져서 핏자국과 눈물자국이 난무한다 하더라도 여기에 여지없이 투신할 수 있는 여러분이 되기를 바랍니다. 그러한 자신을 가지고 세계의 뜻을 바라보면서 힘찬 내일을 향하여 나아갈 수 있는 여러분이 되어야 하겠습니다. 여기에 오늘 우리들이 모여서 기념하는 참다운 의의가 있지 않겠느냐 하는 것입니다. 부디 그럴 수 있는 여러분이 되기를 부탁합니다.

26-23
기 도
아버지, 그 누구를 원망하오리까? 민족의 원망도 끝이 나야 되겠고, 세계의 원망도 끝이 나야 되겠습니다. 아버님의 심정 가운데 있는 원망도 끝이 나야 될 것을 알게 될 때에, 이 원망을 홀로 책임지겠다고 자기의 생애를 바쳐 몸부림치며 통곡하는 무리가 이 땅에 나와야 된다는 것을 저희들은 알아야 되겠습니다.

10월 14일, 이날은 희비의 곡절이 뒤엉키는 신세를 거쳐 가야 했던 날로서 아버님이 얼마나 불쌍했던가를 생각하게 됩니다. 제가 아버지라 부르는 그 아버지는 불쌍해지면 안 될 아버지였건만, 그렇게 비참하였던 아버지의 사정을 생각하게 될 때, 옷깃을 여미면서 아버지라고 부르지 않으면 안 될 것을 아옵니다. 불초한 타락의 후손으로 태어난 것을 원망할 때가 얼마나 많았는지 모릅니다.

그러나 때와 더불어 사명을 수행하는 역사과정에서, 아버님이 찾아오는 심정적 분야의 깊은 인연을 여러 각도에서 체험할 수 있도록 해 주시고, 아버지와 같이하고 있다는 사실을 부정할 수 없도록 관계를 맺어준 은사 앞에 감사를 드리옵니다.

오늘날 우리 교회가 당하는 시련이 있다 하더라도 그것은 초로(草露)와 같은 것밖에는 되지 않는다는 것을 알게 허락하여 주시옵소서.

시련의 본체가 있나니 그 본체는 아버지이신 것을 알아야 되겠습니다. 또한 극복의 본체가 있나니 그분도 역시 아버지이신 것을 알아야 되겠습니다. 희망의 왕이 계시다면 그분은 아버지인 것을 알아야 되겠사옵니다. 체면과 위신을 여지없이 잃어버린 불쌍한 분이 계시다면 그분도 역시 아버지인 것을 알아야 되겠습니다.

그 아버지의 아들딸이 되겠다고 옷깃을 여미고 나선 저희들이지만, 감히 아버지를 부를 수 없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무릎을 꿇고, 머리를 숙이고, 창자가 끊어지는 듯한 비통한 심정을 느끼면서 아버지의 옷깃을 붙들어야 할 자신들인 것을 발견해야 되겠습니다.

그런 길을 가신 예수 그리스도의 생애는 비참하였습니다. 3년 공생애 노정에 있어서 그 민족에게 반동분자로 몰리는 처량한 신세였습니다. 그리하여 민족적인 원한과 더불어 십자가에 사라지셨습니다.

그러나 그러한 고난 중에도, 아버님이 살아 계시기 때문에 부활의 권능으로 소생된 것을 알고 있습니다. 이와 같이 그 모진 십자가의 고난도 예수님을 점령할 수 없었습니다. 기쁨의 터전을 소망하시던 그날의 소망이 아직도 남아 있기 때문에 오늘의 역사적인 혼란된 사회를 개척하고 있는 줄 알고 있습니다.

여기에 있어서 친히 중심의 원료가 되시고 누룩이 되시어서 역사의 방향을 틀어 가지고, 오늘의 기독교적 민주주의 세계를 창조하신 것을 저희들은 알고 있습니다.

오늘날 저희들은 이와 같은 역사적인 인연을 이어받아 가지고 우주사적인 계승을 해주어야 할 심각한 자리에 놓여 있는 자신들인 것을 알고 있습니다. 하오니 여기에 모인 당신의 자녀들이 이와 같은 6천년의 역사적인 열매의 자리에 처해 있는 것을 생각하게 될 때에, 이 자리가 얼마나 긴장되고 얼마나 심각한 자리인가 하는 것을 알게 허락하여 주시옵소서.

이 자리가 역사의 어떤 나라가 흥하고 망하는 그러한 자리보다도 더 심각한 자리인 것을 오늘 저희들이 깨닫고, 이 문제를 해결하는 데 있어서 최대의 가치와 최대의 노력과 최대의 힘을 투입하여, 전반적으로 희생을 각오하고서라도 나설 수 있는 무리가 되게 허락하여 주시옵기를 간절히 바라옵고 원하옵니다.

이날을 지난날의 슬픔과 더불어 그리워함과 동시에 아버지의 소원 앞에 흘러가는 이 슬픔의 역사를 박차고 나서서 여기에 비례되는 기쁨의 역사를 찬양할 수 있는 저희들 되게 하시옵소서. 오늘 우리들은 현실을 위하여 싸우는 것이 아니라 기쁨의 날을 맞이하기 위해 싸우는 것이오니, 영원히 남아질 수 있는 하늘의 용사들이 되게 허락하여 주시옵기를 간절히 부탁드리옵고 원하옵니다.

지금까지 한 해를 보호하여 주신 것 감사하옵니다. 다시 한 해를 맞이할 때까지 보호하여 주시옵소서. 저희들이 2차노정을 중심삼아 가지고 계획하는 모든 것이 공적인 면에서 아버지가 바라는 이상의 기준을 성취하는 것이 되게 해주시고, 아버지께서 신임할 수 있는 자리에서 맡겨진 책임을 다할 수 있는 아들딸이 되게 하시옵소서. 그리하여 아버지 앞에 있어 기쁨의 상징이 되고, 위로의 대상이 될 수 있는 실체로 남아서 영원히 당신의 품과 당신의 인연권내를 벗어날 수 없는 아들딸이 되게 허락하여 주시옵기를 간절히 부탁드리옵고 원하옵니다.

남아진 시간 위에도 당신의 자비와 사랑을 같이하여 주시옵고, 영원한 은사의 인연을 저희 생애 노정에 길이길이 같이하여 주시옵기를 간절히 부탁드립니다.

이 자리에 참석하지 못하고 이곳을 멀리서 그리워하는 수많은 당신의 자녀들과, 해외에 널려서 이곳을 그리워하며 한국 땅이 그리워 눈물짓는 자녀들이 있사오니, 그들을 기억하여 주시옵소서. 그토록 정성들이는 자녀들을 천배 만배 영적으로 보호하시옵고 그들을 위로하여 주시옵소서. 승리의 천국을 향하여 달려가게 해주시고, 오늘의 이 생활감정 모든 것을 바쳐 가지고 내일의 개척자가 될 수 있게 허락하여 주시옵기를 간절히 부탁드리고 원하면서, 모든 말씀 참부모의 이름으로 기도드리옵나이다. 아멘.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