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3-251: 사랑의 십자가 길

사랑의 십자가 길
1969.06.03 (화), 한국 청평수련소

23-251
사랑의 십자가길
[말씀 요지]

제1차 7년노정은 아벨이 탕감하는 기간이었으나 제2차 7년노정은 아벨이 가인을 탕감시키는 기간이다. 그렇기 때문에 1968년 이후부터 부모되는 가정이 복귀의 기준을 넘어섰다.

작년 아카데미 하우스 행사 이후 기성교회는 갈라지고 있다. 이제부터는 우리를 반대하면 그들 자신이 탕감받아 갈라지게 된다.

축복가정은 장성기 완성급에서 출발한다. 축복가정은 부모님의 아기들처럼 새롭게 태어난 입장이다.

1968년 2월 8일을 기해 가정을 중심하고 심정적으로 장성기 완성급으로 넘어서는 식을 함으로써 에덴 동산에서 아담 해와가 타락하기 전의 입장으로 들어갔다.

아브라함이 이삭을 하나님께 제물로 바치려는 모리아 땅으로 데려갈 때 이삭이 순종하며 따랐듯이 여러분도 순종하며 선생님을 따라오기만 하면 된다.

선생님의 가정을 중심하고 정성들여야 한다. 축복가정이 사위기대를 이루어 선생님 가정과 하나되어야 한다. 금년에 4개국의 10개 민족을 중심으로 축복가정을 세움으로 한국을 위하여 축복할 수 있는 때가 되었다.

이제 기독교가 하나되어 반공운동을 해야 한다. 반공운동을 하는 데 있어서 공산당들에게 학살당한 영인들이 있으므로 그 영인들을 동원할 수 있어야 하고, 또한 철저한 사상무장을 해야 한다.

여성을 중심한 섭리는 김성도, 허호빈, 여호와의 부인이라고 주장하는 박노파로 이어졌고, 남성을 중심삼은 섭리는 이용도, 백남주, 김백문으로 이어졌다.

김인서가 신앙잡지를 통하여 이용도 목사를 매장했다. 이용도 목사는 새 예수교를 창립하여 에덴 복귀역사를 시작했는데, 그것은 모란봉에서 기도해온 것에 이은 것이었다. 이용도 목사는 33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한 노인이 있었는데 그는 심령검토를 거울같이 하고 치병을 많이 했었다. 그러던 중 그 근처에 3대 독자가 폐병을 앓고 있었는데 그 부모가 이 노인을 찾아와 자기 자식을 위해 기도해 주기를 부탁했다. 그래서 노인은 기도를 시작했는데 하늘은 그것을 말렸다. 그래도 그 노인이 계속 고집하므로 하늘은 그 노인으로부터 어떠한 대가를 치러도 좋다는 대답을 받고서야 허락하였다.

그리하여 그 노인이 물을 떠놓고 정성을 들여 백일기도를 시작했다. 백일기도가 끝난 3시간 후에는 컵의 물을 끓기 시작하며 하늘의 음성이 들렸다. 컵의 물을 들고 가서 환자에게 먹이되, 가는 도중에 누구를 만나더라도 인사도 하지 말고 말도 하지 말라는 것이었다. 그리하여 그 노인은 컵의 물을 가지고 쏜살같이 달려가서 환자에게 마시게 하니, 그 3대독자가 그 자리에서 일어나는 것이었다. 그런 후 곧 그 노인의 자식이 대신 죽었다.

이용도 목사는 죽은 후에 김백문에게 나타나 사명 인계식을 했다. 선생님은 1945년 10월 김백문을 찾아가 상봉하여 그의 축복을 받았다. 선생님은 그때 누워서 잠을 자지 못했으며, 선생님이 앉은 자리에는 눈물이 마른 적이 없었다. 그들 이상으로 정성들여야 그들을 흡수할 수 있기 때문이었다. 그 후 만 8개월 후에 평양으로 갔다.

김백문은 그때 선생님에게 솔로몬 왕과 같은 사명을 받은 분이라고 증거하고 축복을 했어야 했다. 왜냐하면 노인과 중년 부인, 혹은 20대 부인들이 선생님을 증거했기 때문이다. 김백문은 선생님을 축복한 후에는 선생님에게 굴복해야 했었다. 당시 김성도 등 정치적 환경도 되어 있었으나 불신하여 선생님은 평양으로 떠났다.

평양으로 가기 두 달 전에 성진이가 탄생하여 선생님은 김백문의 문산 집회에 참석하고 그 수도원에서 돌아오는 길에 쌀을 사 가지고 오려고 출발했는데, 그 도중에 북한으로 가라는 하나님의 명령을 받고 곧바로 평양으로 갔다.

선생님은 1946년 8월 11일, 북한 공산당에 의해 종교를 지칭해 사기했다는 죄목으로 대동보안서에 투옥됐다. 옥중에서 허호빈과 같은 방에 있게 되었는데 3일 후에는 허호빈 집단의 협회장 입장에 있는 사람을 한 감방에서 만났다.

그는 벌써 계시를 받고 나에게 좋은 자리를 내주었으며, 다음날 아침에는 내게 경배를 했다. 그는 허호빈 집단의 내정을 실토했다. 그러니까 감옥에서 춘향과 이도령이 만난 것과 같은 셈이 됐다. 그들은 경배를 7천번이나 하며 이날을 고대하였다고 하였다.

그 남자는 황원신이라는 사람이었다. 선생님은 감옥내에서 허호빈에게 생명을 걸고 연락하여 그에게 계시 받은 책임을 다하도록 당부했다. 후에 그 사실이 발각되어 공산당에게 악형을 당했다.

1946년 6월 4일, 선생님은 이북에서 하나님의 부인이라고 자칭하는 박노파를 찾아갔다. 그때 선생님은 박노파의 집에서 종살이부터 시작하여 옷을 빠는 것은 물론 변소 갈 때 수건 시중까지 했다.

그러던 중에 박노파는 선생님이 여호와라는 계시를 받았으나 자기 자신만을 높여 갔다. 만약 그때 박노파가 선생님을 축복하고 증거한 후 선생님을 섬기고 따르며 선생님에게 순응했었다면 뜻은 이루어졌을 것이다.

그때 선생님은 40일간을 싸웠다. 그 싸움에서 양보하면 복귀섭리는 실패하게 되는 것이었다. 선생님을 축복했으나 섬기지는 못한 박노파는 후에 미쳐 버리고 말았다.

선생님은 여러 명의 남자와 여자의 축복을 받아 아담의 입장을 복귀한 입장에 섰다.

선생님은 사랑의 십자가의 길을 걸어온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