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2-181 to 22-200: 복귀와 축복

복귀와 축복
1969.02.02 (일), 일본 동경교회

22-181
복귀와 축복
역사이래 지금까지 인류역사가 복귀섭리역사라는 사실을 안 사람이 없었다. 역사의 배후관계를 복귀라는 개념으로 정의를 내렸다는 것은 우리 통일교회가 역사에 남긴 커다란 공적인 것이다. 역사의 근본이 되는 것은 하나님이고, 또 그 하나님이 책임을 지고 지금까지 역사를 계속 지배하고 발전시켜 나오셨다. 그 때문에 복귀의 사명을 짊어졌던 수많은 개인 가정 종족 민족 국가가 있었고, 그에 의해서 역사는 단계적으로 발전해 왔다.

복귀역사의 완성, 즉 복귀의 목적이 언제 성취되어지느냐 하는 이것이 역사의 문제이고, 또한 모든 역사의 문제를 해결하는 기준이다.

22-181
통일교회의 사명
복귀섭리를 완성하기 위해서는 지금까지 완성되지 못한 모든 기준, 즉 아담이 타락한 기준, 예수님이 성취하지 못한 기준 등을 모두 현세에 끌어들여 해명하고 거듭 탕감하여 복귀하지 않으면 안 된다. 이것을 해야할 것이 통일교회의 사명이고, 스스로 그것을 실행하여 선생님의 뒤를 따라오고 있는, 세계에 널린 통일교회의 식구들에게 그것을 행하게 하는 것이 선생님의 사명이다.

여러분의 사명은 명령을 받아 그것을 행하는 것이다. 그러한 입장에 선 남자는 타락전 아담 이상의, 예수님의 대신자로 부족하지 않은 기준에 서지 않으면 안 된다. 그러한 입장에 선 여자는 타락전 해와 이상의, 예수님의 신부로서 맞아짐에 부족함이 없는 기준 위에 서지 않으면 안 된다. 통일교회의 사명은 그와 같은 남녀를 탄생시키는 것이다.

그런데 예수님은 십자가에 쫓겨나는 결과가 되어, 말하자면, 지상적 기반을 완전히 잃어버린 입장이 되고 말았다. 그러므로 예수님이 이루지 못한 모든 것을 여러분 개개인이 탕감하고 예수님 이상의 기준에 서지 않으면 안 된다.

22-182
통일교회가 걸어온 탕감노정과 그 결과
수없이 얽혀진 역사적 배후관계에 따라, 그 모든 것을 탕감하기 위해서는 현세에 그 기준을 세우지 않으면 안 된다. 그러므로 모든 것으로부터 반대를 받고 그것과 싸워서 그것을 굴복시키지 않으면 탕감복귀는 되지 않는다. 지금까지의 통일교회의 길은 반대를 받는 길이었다. 다만 쫓기고 또 쫓겨도, 맞고 또 맞아도 거기에서 아무런 변명도 하지 않았다. 개인으로부터 가정으로부터 씨족 민족 국가로부터 쫓긴 끝에 가장 고독한 입장에 세워졌으나, 최후의 심정을 가지고 오히려 하나님을 위로해 온 것이 통일교회의 역사라고 하는 것을 여러분은 알아야 한다. 그것은 누구도 모른다. 선생님밖에는 모른다.

예수님은 최후에 세 제자로부터도 반대받는 결과가 되었다. 그러니까 이 길을 세계적으로 개척해 나갈 때, 세 나라로부터 반대를 받지 않으면 안 된다. 세 제자는 세계적 국가의 대표로서 상징되니까, 3주권으로부터 반대를 받는다. 하나의 민족권, 곧 장성권내에서 박해받는 것이 아니고, 전체적이며 세계적인 정세의 물결 한 가운데에서 그러한 탕감조건을 세우지 않으면 안 된다.

이러한 가운데서 승리의 기준을 쌓아 온 것이 제1차 7년노정이었다. 1968년부터는 제2차 7년노정이 시작되었다. 이러한 탕감의 길을 먼저 승리해 가지 않으면 안 되는 것은, 예수님의 실패의 기준을 돌이키고 아담 해와의 타락 기준을 돌이키고, 내외의 탕감기준을 통과하지 않으면 안 되기 때문인 것이다. 지금 여러분이 배우고 있는 원리강론은 역사노정에서 이루어진 것에 대한 결과를 기록한 것이며, 이것을 어떻게 해서 탕감할 것인가 하는 것에 대해서는 아직 쓰지 않고 있다. 그것은 선생님 자신이 싸워서 승리하여 타개해 가야 한다.

이제 한국에서는 우리 통일교회를 어떠한 힘으로도 어떻게 할 수 없게 되었다. 이 지상에서 뽑혀질 수 없는 기준을 세워 완전히 승리하였다. 만약 악편에서 통일교회를 치려고 하면 하나님 자신이 이것을 지켜주지 않으면 안 된다. 하나님이 지키더라도 사탄편에서 참소할 수 없다. 그러한 귀중한 승리권에 있는 것이다. 이것은 선생님이 21년간 성취해 온 결과인 것이다.

하나님이 예수님 이후 그를 중심으로 한 2천년간, 혹은 그 이전의 4천년간 바라 나오신 기준을, 예수님의 실체를 중심으로 하고 과거의 실패의 기준을 우리들이 오늘의 이 말세에 성취하였다고 하는 것은, 역사적, 세계적, 천주적으로 기쁜 일인 것이다. 복음 중에 이런 복음이 없다. 어떠한 사람도 종적인 참소조건을 면할 수 없는 이 지상에 있어서, 종적 참소조건 뿐만 아니고 횡적 참소조건까지도 우리들은 뛰어넘을 수가 있다는 것이다. 이러한 때를 맞이했다고 하는 것 이상의 다행한 일은 없는 것을 우리는 먼저 알아야 한다.

22-183
감옥에서 출발한 통일교회
탕감복귀는 반대로 한다. 아담 가정에 있어서는 아담의 타락을 가인과 아벨을 중심으로 해서 반대로 올라가 복귀해야 한다. 그러니까 가인과 아벨을 탕감하지 않으면 참부모이신 메시아를 맞이할 수 없다. 그러한 입장에서 생각하면 오셔야 할 재림의 예수님, 하나님의 심정과 일체화한 그분이 오시는 길은 평탄한 길이 아니다. 예수님이 최후에 지신 십자가를 지는 자리로부터 오시지 않으면 안 된다. 겟세마네나 갈보리의 최후의 고통의 한 가운데로부터 생사의 문제, 흥하느냐 망하느냐의 문제를 통과하여 승리한 산제물로서 오시지 않으면 복귀의 터전은 이룰 수 없는 것이다.

그래서 메시아로서 오시는 분의 최초의 길은 가장 가까운 곳, 가장 먼곳 모두로부터 반대받는 길인 것이다. 일본에는 그와 같은 역사는 없었다. 세계적인 섭리에 대한 하나님의 뜻은 선생님을 중심으로 한 한국에 있었기에 그렇게 된 것이다. 그러한 것을 생각해 볼 때 우리들은 밑창에서부터 부활의 길을 개척해 가지 않으면 안 된다.

그래서 최초의 통일교회는 어딘가? 감옥인 것이다. 복음으로 시작된 초대교회도 감옥에서부터 시작된 것이다. 감옥으로부터 제2의 이스라엘 역사는 시작되었다. 그것을 복귀하는 데는 자연히 되어지는 것은 아니다. 탕감이라는 문제가 걸려 있다. 그래서 통일교회도 감옥의 밑창에서 하나님의 직접적인 역사와 더불어 기반을 이루는 과정을 통과하지 않으면 안 된다. 예수님이 감옥에 잡혀 들어갔을 때에는 제자들도 다 도망쳐 버렸지만 지금은 그와 반대이다. 무섭다. 목숨을 건 입장에 있어서 모두 한 덩어리가 되어 스스로 죽음의 경지를 책임지고 선두에 설 수 있는 자가 되어야 한다.

본래 하나님의 섭리는 밑창으로부터 올라오는 데 7년으로 통과할 수 있었지만 21년이나 걸렸다. 민족이 함께 맞이했으면, 민족을 대표할 수 있는 중심종교가 맞이했더라면 7년간이면 족했으나 우리들은 그 환경을 갖지 못하고 21년간이라고 하는 노정을 통과하게 되었다. 여러분들은 그것이 1960년으로부터 제1차 7년노정인 것으로 알고 있지만 그 배후관계는 모른다. 그 배후는 이 지상에 있어서 하나님의 가정의 역사이고 하나님을 중심으로 한 씨족의 역사인 것이다. 따라서 이 역사를 알려면 축복받지 않으면 안 된다. 역사기준에 있어서의 상속권을 갖고 있지 않으면 그것을 가르칠 수가 없다. 그 노정에 대한 것을 완전히 알았을 때 `아! 복귀의 역사는 이와 같이 쓰라린 길을 더듬어서 왔구나’ 하는 것을 느낄 수가 있는 것이다. 그러니까 축복이 얼마나 귀한가 하는 것을 우리들은 다시금 생각하지 않으면 안 된다.

22-184
생사를 초월하자
그러면 그런 입장을 바라고 있는 우리들에게 있어서 먼저 가장 문제가 되는 것은 무엇인가. 뜻을 위한 생사의 문제인 것이다. 예수님의 겟세마네의 기도에 있어서 자기의 생각이 아닌 하나님의 뜻대로 했다고 하는 기준, 그 것 외에는 없다. `개인의 소원에 있어서는 십자가의 길을 원치 않는다. 그러나 이 길을 가지 않으면 하나님의 섭리는 이루어지지 않는다. 자기는 뜻을 위하여 살고 있는 이상 이 길을 가지 않으면 안 된다’ 그러한 기준에서 생사의 문제를 초월할 만큼의 확실한 자신을 갖지 않으면 복귀의 길을 맞이할 수도 없을 뿐더러 가지도 못한다.

그래서 말하지만 뜻을 위하여 목숨을 바칠 수 있는 자주성이 있는가. 그것도 자기 한 사람이 아니고 뜻을 만민에게 호소할 수 있는 입장에서, 자기의 뒤를 이을 제자들을 평안한 심정으로 위로해 줄 수 있는 여유 넘친 태도를 가지고, 그것도 목숨을 건 자주성을 가진 자로 될 수 있는가, 이것이 문제인 것이다. 그런데 `나는 이와 같은 젊은 아가씨이고, 이와 같은 아름다운 얼굴을 하고 있고, 어디를 가더라도 누구에게든 환영받기에 합당하며 특별한 결점도 없다. 그러한 내가 목숨을 건 일 따위를 한다는 것은 마음에 들지 않는다’ 혹은 `나는 남자로서 이만한 체격이고, 가문이나 기타 외적 조건으로 보더라도 천하의 어디를 가더라도 부족한 점은 없으며, 내가 원하는 일을 모두 성취할 수 있다. 이러한 훌륭한 남자인 내가 초라한 모습을 해 가지고 목숨을 건 처참한 일 따위를 할 수 있는가’ 하는 방향으로 생각해서는 안 된다. 모험의 길, 생명을 건 길을 가는 데는 괴로운 얼굴을 해서는 안 된다.

만약 예수님이 십자가를 지시고 갈보리 산상을 향할 때 `아 분하다. 이런 일을 하는 게 아니었다. 남자가 33세나 되도록 결혼도 못하고 이러한 운명이 되고 말았다. 이래서는 남자의 사명은, 남자의 가치는 어디 있는가’라고 생각했다면 탄식거리는 얼마든지 있었다. 그러나 예수님은 `그것은 문제가 아니다. 나는 간다. 공포로 다가오는 십자가의 무거운 짐도 그것은 문제가 아니다. 체력이 다하여 쓰러진다 하더라도 나는 간다’ 하며 그 내심에는 쓰러지지 않겠다는 당당한 기백을 가지고 있었다.

그리고 십자가를 지고 골고다를 향해 가는 도중 길 옆에 서 있는 자기의 모친과 제자 요한을 발견하고 오히려 그 후의 문제를 부탁하던 여유있는 예수님의 태도를 한번 생각해 보라. 세계의 역사에 위대한 인물이 많이 나타났다 할지라도 그보다 내심에 있어서 하나님과 통한 강한 결의를 가진 남자는 한 사람도 없다.

그의 은혜에 의해 역사는 새로운 생명의 방향으로 향하고, 그로 인해 지상에 있어서의 하나님의 출발점이 이루어졌던 것이다. 현재까지의 2천년의 역사가 지나갔지만, 예수님의 정신은 더럽혀지지 않고 그대로 계승되고 있는 이 시대에 사는 우리들은 얼마나 행복한 자들인가. 그 전통을 직접 계승할 수 있는 위대한 사명을 가진 우리들은 목숨 하나쯤 문제가 아닌 것이다. 그래서 죽음의 어둠 가운데에서 일어나 하나님의 심정의 빛으로 그 어둠을 제거하고, 그리고 세계에 그 빛을 비추는 내적 역사를 하는 남자가 되어 있는가, 여자가 되어 있는가 하는 것이 문제이다.

원래 타락은 죽음의 경지에 떨어진 것이니까 구원은 그 경지를 타고 넘지 않으면 안 된다. 어차피 그 과정을 통과하지 않으면 안 되는 운명이라면, 기분좋게, 남자답게 사는 젊은이들, 청년들, 장년들이 되지 않으면 안 된다. 이것이 있으면 세계는 새로운 방향으로 나아간다. 우리들은 그 모체를 이루는 심정에 타오르고 있다. 여러분들의 내심에는 그와 같은 생사의 경지를 타고 넘을 자신이 있는가?

선생님은 몇십, 몇백, 몇천, 몇만이 되는 생사의 경지를 넘나들며 사탄과 대결하여 왔다. 그와 같은 운명이 언제 다시 오더라도, 예를 들어, 발이 빠지고 눈알이 튀어 나오고, 목이 날아가더라도 한번 결정하고 출발한 노정에서는 물러서지 않는다. 거기에는 무엇 하나 조건도 없다. 그렇기 때문에 죽지 않으면 이기는 것이다.

22-186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승리
이전에 50명 가까운 일본 식구 일행이 한국에 와서 부산의 성지를 가봤지요. 거기는 공동묘지의 근처로 돌투성이의 골짜기 외에는 아무것도 없었다. 그런 한 곳에 선생님은 돼지우리와 같은 가건물을 지었다. 그러나 그 안에서 잠을 잘 때도, 이 지상의 어떠한 궁중에서 영광을 누리며 사는 사람보다도 하나님의 아들로서의 효행을 할 수 있는 제일의 길을 걷고 있었다. 그리고 아무도 따를 수 없는 깊은 내심의 기준에 도달하는 것이 소원이었다. 그 당시에 외면적으로 보기에는 아무것도 아니었다. 한푼 어치의 가치도 없는 사람 같았다. 수염이 덥수룩하고 얼굴은 검을 대로 검어 있었고 복장은 동양옷과 서양옷을 섞어 입고 있었다. 그러나 그에 대한 이야기는 오늘날 굉장한 힘을 발휘한다. 대포보다도 원자폭보다도 그 힘이 더 크다. 너무나 크기 때문에 모두 놀라서 도망쳐 버린다. 선생님은 그러한 환경을 맛보면서 왔지만 여러분들은 그런 맛을 모를 것이다. 그러한 것을 다 얘기하자면 며칠은 걸린다.

여러분은 아무리 고생을 하고 활동하여 그 환경에서 쫓기더라도 자기 자신을 하나님 앞에 영원히 남기지 않으면 안 된다. 예수님은 외적으로는 십자가에 사라져 가셨지만, 내적으로 하나님의 심정에 불타 있었던 그 기준은 하나님이 보상하지 않을 수 없다. 예수님이 그것을 바라지 않는다고 하더라도 하나님의 심정을 앞지를 수는 없는 것이다. 에수님은 4천년 역사상 하나님의 최초의 아들인 것이다. 이 자리에는 3백명 가까이 참석해 있을 것이다. 이 사람들이 모두 굳은 결심을 한다면 일본 43개 현(縣)의 문제는 바로 해결될 것이다.

승리란 과정에서 시작되는 경우도 있지만, 대부분이 출발시의 내적 기준에 의해 결정된다. 이것을 모르면 안 되겠다. 그의 승리가 생사의 경계를 수백 번이나 넘나들며 얻는 것일 경우에는, 그것을 다시 빼앗기 위해서는 그 이상의 결의가 필요한 것이다. 하나님은 영원한 승리, 사탄도 따라잡을 수 없는 승리를 원하고 있다.

일본의 현상을 볼 때, 뜻의 선두에서, 대단히 어려운 역경 속에서 자기 나름대로 고생하여 왔지만 그로써 다 되었을 것인가, 효과가 있을 것인가 하는 회의적인 생각을 하는 사람이 있을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선생님에게는 일정한 계산의 세계가 있다. 그래서 통일교회에서 가르치고 있는 모든 것이 역사를 움직이고 역사에 남아진다.

세상 사람들이 생각도 못하였던, 꿈도 꾸지 못하였던 것을 여러분들에게 가르치고 있는 것이다. 일본에서도 상당히 통일교회가 소문이 나 있을 것이다. 통일교회를 반대하는 사람들은 `젊은이들이 교회에 들어가 청춘 시대를 다 소비하고 고생의 길을 거듭하니 도대체 어떻게 하자는 것인가? 겨우 동경대학에 입학하여 친형제나 아는 사람들로부터 칭찬을 받고 있었는데, 통일교회에 들어가서 온 집안이 형편없는 결과가 되고 말았다’고 말하고 있다. 그러나 남자라면 세계를 무대로 하지 않으면 안 된다. 아무리 고생을 하더라도 일본권내에 있어서의 고생은 하나님의 이상권에 들어 갈 수 있는 고생은 아니다. 통일교회는 하나님의 이상권에 들어갈 수 있는 기준을 목적으로 하니까, 그것을 안 우리들은 보다 큰 가치를 중심으로 하지 않을 수 없다고 하는 결론에 도달하는 것이다.

예수님이 죽음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은 그를 부활시켰다. 이로부터 새로운 세계가 출발되었다. 이것을 우리는 반대로 탕감해 가지 않으면 안 된다. 3인의 제자가 믿는 입장으로부터 출발하여 12제자, 70문도, 120문도가 되었다. 그런데 그 120문도로부터 쫓기고 70문도로부터 쫓기고 12제자로부터 쫓기고 3인의 제자로부터 쫓기어 십자가까지 지시고 말았다. 우리는 이것을 탕감하지 않으면 안 된다. 그러기 위해서는 죽느냐 사느냐의 문제를 중심으로 하고 하나님의 입장에 설 수 있는가, 없는가가 문제다. 우리는 이것을 먼저 결정하지 않으면, 안타깝지만 복귀의 노정은 이룰 수 없다.

그리고 그 기준이 섰을 경우에는 박해의 기준을 지나야만 한다. 지금은 민족적인 입장에 서 있다. 이제 국가기준을 중심으로 하여 우리들은 책임을 져야 한다. 각자 자기로부터 3대권 이내에 완전히 복귀시킬 수 있는 결의를 가지지 않으면 안 된다. 어째서 3대인가 하면, 그것은 원리적인 수로 사위기대라고 하는 것은 3단계로 이루어지기 때문이다. 그러한 결의를 가지고 타고 넘어가지 않으면 안 된다.

22-188
탕감기금과 3자녀
예수님은 인류의 참아버지로, 참된 어버이로서 오셨었다. 가룟 유다가 그분을 팔아서 죽음의 골짜기에 떨어뜨린 그 행동은 결국 세계 만민이 한것과 같이 되고 말았다. 또, 그것은 섭리권내에 있는 모든 백성이 자기의 참된 어버이를 판 결과가 되고 말았다. 이것을 탕감하는 조건으로서 탕감기금이라는 것이 있다. 참어버이를 판 것을 탕감하지 않으면 안 된다.

한 사람의 그릇된 행동에 의해서 참된 어버이를 이 지상에서 쫓아버린 입장이 되어 사방 팔방으로 하나님의 섭리는 막혀 버렸다. 그 결과 사방팔방으로 사탄은 성(盛)하게 되었다. 이것을 탕감하지 않으면 안 되는 것이니, 이것을 위해 참어버이를 판 그 실체의 값으로서 4년간 3수에 해당하는 금액을 하나님편에 돌리지 않으면 안 되는 것이다. 4년간이라고 하는 것은 동서남북에 해당하고, 한국에서는 1년에 3천원씩 4년간에 걸쳐 도합 12,000원을 헌금한다. 그 돈은 자기의 땀과 눈물과 생명의 가치보다도 더한 정성이 깃들어져 있어야 하고, 하나님의 뜻을 생각하는 기준에서 벌어서 얻는 돈을 하나님 앞에 바치는 것이다. 이 문제가 탕감노정에 남아 있다.

그 다음은 3제자의 문제인 것이다. 예수님을 중심으로 하고 한 몸이 되었어야 할 제자들이 예수님을 배반하는 것과 같은 입장이 되어졌으므로 이것을 복귀하지 않으면 안 된다. 그리고 12제자, 70문도, 120문도를 복귀해야 된다. 이것이 탕감노정에 있어서 수행하지 않으면 안 되는 우리들의 과제인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들이 믿음의 자녀 셋을 세우고, 그들을 중심으로 하여 12제자, 70문도, 그리고 120인의 문도를 세우지 않으면 안 된다. 이것을 이루기 위해 선생님도 지금까지 21년간의 노정을 걸어온 것이다.

예수님이 뜻을 이 지상에서 다 이루지 못한 것은 하나님의 슬픔이고, 예수님의 슬픔인 것이다. 이것을 풀어 드리고 해결해야 할 것이 우리 통일교회의 사명이며, 그것을 위해 가야 할 길이 우리들이 가지 않으면 안되는 공식노정인 것이다. 그리고 씨족을 복귀하여 새로운 선조의 기준을 만들고 일본 민족을 복귀하여 일본 국가복귀, 아시아 복귀, 세계복귀라고 하는 기반으로 발전시켜 가자고 하는 것이 하나님의 섭리이며 우리들이 가야 할 노정인 것이다.

22-189
박해 속에서의 성혼식
1960년에 행했던 성혼식의 배후에는 아담 이후 예수님 때까지 4천년, 예수님으로부터 오늘에 이르기까지 2천년의 역사과정에서 걸렸던 모든 것을 탕감조건을 세워 해결하지 않으면 안 되는 내용이 있었다. 그 행사는 세계적이고 천주적인 의미를 지니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현실적으로는 소수의 사람들에 의해서 이루어진 것이고, 그에 대한 박해는 상상할 수 없을 정도로 컸다.

그것을 준비하기 위한 1953년부터 1960년까지의 기간은 박해의 시기였다. 그 기간에 적어도 360만명 이상의 사람으로부터 박해를 받았고 3개 이상의 교파와 국가로부터 박해를 받았다. 그런 가운데에서 그래도 탕감조건을 승리권내에 세운 것이 1960년에 있어서의 선생님의 성혼식이었다. 그날이 통일교회의 운명을 결정한 최초의 날이었다.

선생님의 성혼식은 지상에 있어서 기념할 만한 세계적 천주적 대사건이었다. 세계적 기준에 있어서 종적 탕감조건을 횡적으로 이 지상에 해결하는 실체로서 영육 아울러 승리의 기준을 세운 것이다. 성혼식을 하기 위해서는 선생님은 성혼식 전에 예수님의 3제자, 반역한 그 제자를 복귀하지 않으면 안 되는 입장에 있었다.

성혼식의 목적이 무엇인가 하면 아담 가정을 탕감하는 조건을 세우는 것이다. 우리들의 어버이인 아담과 해와는 부부관계에서 타락되었다. 타락이 부부를 통해 이루어진 것이니까 복귀는 한 사람으로는 안 된다. 남자 혼자서는 복귀되지 않는다. 여자 혼자서도 천국에 갈 수 없다. 따라서 두 사람이서 해결해 나가지 않으면 안 된다. 타락한 아담 해와 입장을 복귀하여 참부모의 기준을 지상에서 세우지 않으면 안 된다. 거기에는 세제자의 약혼이라고 하는 문제를 중심으로 해결하지 않으면 안 된다.

22-190
예수님의 세 제자
복귀는 아담 가정 복귀를 목표로 해서 하는 것이다. 아담 가정이 실수하니 그 뜻이 노아 가정으로 옮겨졌다. 하나님은 노아가정을 중심으로 하여 세계의 모든 사람들을 홍수심판으로 멸하고 사탄 침입의 조건을 넘어선 가정을 세워서 섭리의 기반을 지상에 구축해 놓으려고 하셨다. 그것이 아브라함, 이삭, 야곱, 모세에게 옮겨지고 예수님께로 이어져서 우리의 시대까지 온 것이니까 그 모든 것을 탕감하지 않으면 안 된다. 아담 가정을 기준으로 하여 탕감하지 않으면 안 된다. 아담이 잃어버린 세 자식을 복귀하지 않고서는 참부모의 입장에 설 수 없다.

예수님께서는 세 제자가 꼭 필요한 것이다. 그 세 사람은 아담 해와에게 있어서 세 천사장을 상징한다. 세 천사장이 하나가 되어 아담 해와에게 복종하지 않았다. 모시지 않았다. 그 결과로 타락세계가 되어졌으니까 완성된 부모의 경지에 서기 위해서는 세 천사장격인 세 제자가 없어서는 안된다. 없으면 사탄을 지상으로부터 추방할 수 없다.

영계의 세 천사를 상징한 타락권내의 구약시대, 신약시대, 성약시대의 3시대를 통과하면서, 가인이 아벨에게 복종하지 않았던 역사를 완전히 탕감하는 인물이 있어야 한다. 아담 가정에 있어서의 가인의 대표, 예수시대에 있어서의 그러한 대표, 재림 시대에 있어서의 그러한 대표, 이지상에 그런 종적인 역사과정을 통과할 수 있는 세 사람의 대표를 축소한 가인격인 3명이, 즉 예수님의 수제자인 것이다.

영계에 있어서는 세 천사장, 지상에 있어서는 복종하지 못했던 가인의 대표가 구약, 신약, 성약의 과정에 있어서 종적인 역사관을 만들어 왔던 재림주에 의해서 일시에 굴복된다.

아담의 대신으로는 예수님이고, 예수님의 대신으로는 재림주님이시다. 그 재림주님도 완전히 복종하는 3명의 신앙의 자녀를 갖지 않으면 참부모의 입장에 설 수 없는 것이 공식으로 되어 있다. 자기의 생사의 경지를 넘어서, 박해의 한 가운데도 따라가고 효도할 수 있는 3명의 제자를 갖지 않으면 안 된다. 선생님은 그러한 세 제자를 1960년 4월에 찾아 세웠다.

복귀노정은 거꾸로 찾아 올라가는 것이니까 축복은 자식의 입장에 서있는 자가 먼저 받는다. 가정권은 야곱의 가정이니까 12수의 기준을 기반으로 하지 않으면 안 된다. 3인의 제자, 3인의 자식을 중심으로 하고 그와 같은 기준을 통과하지 않으면 안 된다.

22-191
12제자의 축복
아담 가정의 가인, 아벨 셋 3인의 부활체로서 상대기준을 이루고, 그 기대 위에서 약혼의 입장을 넘어서서 실체적으로 부모의 입장을 결정한 것이 1960년의 성혼식이었다. 하나님의 한이 되는 아담 가정에 있어서의 세 명의 자식과 부모가 일체된 입장을 이루었다고 하는 것, 그것이 이 지상에 있어서 역사이래 처음으로 한국에서 성취되었다고 하는 것은, 세계적인 사건이고 이때부터 한국에 새로운 역사의 운세가 돌기 시작했다고 할 수 있는 것이다. 그 기대 위에서 1960년 4월에 12수를 중심으로 하고 축복하였다.

이 기준을 역사적으로 보면 예수님의 12제가 복귀의 기준에 해당한다. 성서에도 12진주문이 있고, 따라서 이스라엘 역사도 12수를 중심으로 해 이루어져 있다.

재림주는 2천년 전 예수님께서 하나님의 두 번째의 아들로서 이룩하시지 못한 그 모든 것을 탕감해 세우지 않으면 안 된다. 그것을 천지에 해결하지 않으면 영적 기독교의 이상이 영육의 땅(地)적 기준의 기반을 만들 수 없다. 하나님의 슬픔은 무엇인가 하면 지상에 있어서의 발판이 될 수 있는 개인 가정 민족 국가가 없다는 것이다. 이를 찾아 세우기 위해서는 그 발판의 기점이 되는 개인 가정의 기준을 먼저 세우지 않으면 안 된다.

그것은 아담에서 노아까지 10대, 거기에 가인 아벨을 합하고 노아의 자녀 셈과 함까지 합하여 12대를 말한다. 그리고 노아로부터 아브라함까지의 10대와 그의 아들 이삭, 야곱까지의 12대를 탕감하는 가정을 이루는 것을 말한다. 12명을 부활시킨 것은 아담 가정에서 아브라함 가정까지 잃은 선조들을 부활시켰다는 결과가 되었다. 다시 말하면 종적 탕감을 횡적으로 탕감하였다는 결과가 된다. 그러므로 아담에서 노아까지 10대이지만 섭리상 두 아들을 중심으로 한 가인과 아벨, 셈과 함을 두고 볼 경우 12대가 된다고 하는 것이다. 그 횡적 관계를 실체권에 있어서의 제자를 축복함으로 말미암아 탕감했다고 하는 것이 된다. 사탄이 항상 참소할 수 있는 제2의 위치를 승리권에 세운 결과가 된다.

노아 가정은 아담 가정의 대신인데, 여기에서 부활시킨 기반을 만들었으니 아담으로부터 노아까지의 12대를 부활시킨 것이 된다. 또한 12제자를 축복함으로써 종적인 것을 횡적으로 일시에 탕감한 것이다. 그러므로 영계에 가 있는 영인체를 지상에서 부활시킬 수 있는 창구가 열려 영계 개방의 기준이 지상에 결정될 수가 있었다는 것이다.

22-193
3가정
종적 관계인 아담 가정, 노아 가정, 아브라함 가정의 각 12수를 지상에 있어서 처음으로 횡적 관계로 탕감복귀할 수 있었던 것이 야곱 가정의 축복이고, 통일교회에 있어서는 그 아담 가정, 노아 가정, 아브라함 가정에 해당하는 가정을 각각 제1가정, 제2가정, 제3가정이라고 한다. 제1가정은 이미 자기 마음대로 결혼했던 사람 중에서 12사람을 축복한 것이고, 제2가정은 예수님의 입장에 서 있는 것과 같은 조건에 걸려 있는 사람들을 축복한 것이다. 예수님은 2천년간 무엇을 바라왔는가 하면, 결혼식을 바라 나오셨다. 축복의 그 하루를 바라 나오셨다. 그런 입장에서 사랑의 문제를 중심으로 하고 관계는 가지고 있었지만, 결혼식을 하지 못한 자들을 모아서 축복한 것이 제2가정인 것이다. 이것은 예수님이 줄곧 바라 나오신 가정이었다. 제3가정은 선남선녀를 중심으로 한 것이다. 이렇게 해서 36가정을 축복하였다.

여기에서 비로소 천주통일의 기반을 지상에 세울 수 있게 되었다는 것이다. 3시대를 통하여 선조가 목적을 이루지 못하고 실패하여 온 하나님의 통분의 역사를 현세에서 횡적으로 승리하였다고 하는 것이 통일교회의 선생님이 이룩한 역사인 것이다. 영계가 지상에 강림한 결과가 된 것으로 보아야 한다. 그래서 하나님은 임재하시는 곳이 천상이 아니고 지상권이라고 하는 기준이 이루어진 것이다. 그래서 여기로부터 하나님이 지상에 계시게 되어져 세계적 발전기준이 조성되게 되었다. 1960년부터의 7년간은 하나님의 지상강림의 기반을 완성하는 기간이었던 것이다.

22-193
72가정과 120가정
다음으로 자녀의 문제가 있다. 가인과 아벨의 싸움에 있어서 가인이 아벨에게 복종하지 않았던 잘못을 선조들이 아직까지 탕감하지 못하여 역사가 연장되어 내려왔다. 그것을 완전히 탕감하려면 조상의 한 가정, 한가정 앞에 가인과 아벨의 복종의 기준을 탕감하지 않으면 안 된다. 그것이 72가정인 것이다. 72는 36의 배수이다.

하나님편에서 과거의 선조들이 이루지 못한 사위기대를 이루고, 사탄의 참소조건이 되어 있던 것을 탕감하고 승리권을 이루니 사탄은 후퇴하지 않을 수 없다. 종적관계를 전부 지상으로 끌어내리고 말았다. 부모의 지상적, 세계적 발전의 기준을 세운 통일교회에 있어서는 72쌍의 축복에 이어 120쌍의 축복을 하였다. 120쌍은 무엇인가 하면 세계만국의 대표를 상징한 것이다.

예수님이 영적인 입장에서 세계적 출발을 하기 위해서는 120문도를 세계대표의 승리권의 입장에 세우지 않으면 안 되었다. 이것을 선생님이 영적으로가 아닌 실체적으로 이루지 않으면 안 되었던 것이 21년노정에 있어서의 과제였다. 이제 그것이 이루어졌으니 다음에는 무엇이 이루어지는가? 만물 축복, 즉 만물을 복귀해야 한다.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사람을 찾을 수 있게 되었으므로 다음에는 만물을 찾지 않으면 안 된다. 그래서 선생님이 1965년 세계 40개국을 순례하여 120개소의 성지를 택정한 것이다. 그렇게 세계적으로 성지를 택정한 것이 운세를 크게 전환시킨 포인트가 되었다.

22-194
하나님의 날이 되기까지
다음에는 놀라운 날의 하나로 `부모의 날’이 있다. 타락한 우리들 후손에게 있어서는 하나님이 기뻐하실 수 있는 부모를 가질 수 없었다. 그러나 이것을 복귀할 수 있게 되었다. 다시금 맞이할 수 있게 되었다. 이 이상의 기쁜 일은 없다. 그리고 `자녀의 날’을 맞이하였다. 타락의 결과로 잃어버린 날들을 인류가 다시 맞이할 수 없게 된 것은 복귀의 노정을 몰랐었기 때문인데, 그러한 날들을 다시 맞이할 수 있는 기준을 이루었다고 하는 것은 역사적인 복음인 것이다. 그후 1968년 1월 1일 `하나님의 날’이 결정되게 되었다. `하나님의 날’의 결정과 동시에 지상에 하나님이 임재하실 수 있는 기준을 세울 수가 있었다. 그러므로 이제 통일교회의 발전은 지상에 있어서 급속히 촉진될 것이다. 그런 기준을 이루었으므로 통일교회는 진리를 중심삼고 영계 해방과 함께 지상 해방 그리고 지옥을 해방하는 것으로 발전해 간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날’을 맞이한 그때부터 지옥이 궤멸되고 사탄도 멸망할 수밖에 없는 입장에 이르기 때문이다. 그것은 이론적으로 맞는 것이다. 그래서 `하나님의 날’의 결정과 동시에 선생님의 사명은 완성되었다.

선생님은 한국에서 쫓기고 기성교회로부터 쫓겼지만 예수님은 유대교로부터 쫓기게 되었다. 예수님은 유대교를 개혁하고 유대교의 실패를 제거하여 복음을 중심으로 한 새로운 제2의 유대교를 세우려고 했는데 그것이 3년 공생애노정이었다. 그것은 개인으로부터 가정, 가정으로부터 씨족, 그리고 새로운 민족으로……. 그리하여 영육 아울러 이스라엘권의 사탄을 굴복시켜 영원한 승리의 기준을 세우려 했으나 실패하였다.

22-195
탕감복귀의 결과
선생님은 예수님이 유대교에게 반대를 받은 것과 같이 기성교회의 반대를 받았다. 그래서 선생님은 사탄진영의 한가운데 들어가서 그들과 싸워, 원상으로 복귀하지 않으면 안 되는 입장에 서고 말았기 때문에 쫓기고 몰리는 몸이 되어 원수의 본거지인 북한의 평양으로 들어가지 않으면 안 되었다. 하나님이 축복하여 지금까지 기반을 만들어 두었던 서울을 뒤로 하고 원수의 본거지로 가지 않으면 안 되었다. 거기서 싸우고 또 싸워서 참소조건을 제거하고 넘어오지 않으면 제2의 출발을 할 수 없었다. 그것이 선생님이 공산권에서 걸은 옥중노정이다.

옥중생활에 있어서는 예수님이 쫓기고 제자들이 반대했던 입장을 탕감복귀해야 했다. 선생님은 그 감옥생활에서도 영계가 협조하여 12명의 제자를 전도하였으며, 그로 말미암아 새로운 역사가 출발할 수 있게 되었던 것이다.

그후 남쪽으로 내려오자 새롭게 기성교회가 반대했지만 물리쳤다. 선생님은 예수님을 중심으로 한 온갖 교파, 즉 분열된 모든 기독교를 홀로 결합시키려 하시는 하나님의 뜻을 이루려 하였지만 그들은 받아들이지 않았다. 그러나 선생님은 그것에 개의치 않고 그들에게 비견(比肩)할 수있는 새로운 교파권을 만들어 나왔다. 그리하여 하나님의 섭리를 받아들여 수행할 수 있는 기반을 만든 것이 한국에서의 통일교회, 즉 통일교단인 것이다.

1968년 9월에 크리스챤 아카데미 하우스에서 기성교회와 정식으로 대화하게 되었다. 그때에는 기성교회의 박사 등 통일교회의 선생님에 대해서 반대하였던 우두머리들 약 40명이 참석하였다. 모두 훌륭한 사람들이 모인 곳에 당당히 들어갈 때의 기분은 나쁘지 않았었다.

우리들은 벌써 시기적으로 보아 이러한 때를 맞이하지 않으면 안 되었다. 그 사람들은 몇년 전부터 자기들 마음대로 반대하던 그런 사람들이었다. 그 사람들이 볼 때 훅 불면 날아갈 것 같고 보잘것없이 보였던 모습이었지만 때가 바뀌고 시절이 지나고 보니까 자기들이 생각하고 있던 그런 남자가 아니었던 것이다. 이제 그들을 대해 동정의 마음을 갖고 나타나는 입장이 되고 말았다. 결국 그 사람들이 선생님을 맞이하여 통일교회의 진리를 추거(推擧)할 수 있게 된 것은, 요컨대 머리를 숙이는 것과 같은 단계에 들어와 있다는 것을 반증하는 결과를 의미한다. 그래서 우리는 한국에서 비상한 관심을 불러일으켜 왔다. `통일교회가 제일 무섭다. 문선생은 스탈린 이상 가는 사람이다. 기독교에서도 손을 댈 수가 없다. 이론적으로 도무지 당할 수 없다. 그러므로 상대하지 말라’고 하면서 지금까지 오합지졸같이 와글와글 떠들어왔다.

22-196
승리의 기반
통일교회는 그러한 박해 속에서도 복귀의 길을 개척해 나왔다.

천하 모든 것이 일어서서 반대하더라도 선생님은 바다와 같은 포용력을 가지고 그 모든 것을 맞이하겠다. 내가 죽더라도 하나님의 뜻을 수행할 수 있는 권(圈)을 이미 만들었다. 이것이 수수께끼다. 이미 하나님의 6천년 역사를 통하여 풀지 못한 모든 역사적인 문제를 선생님 일대에 풀었다. 이제 죽더라도 통일원리는 세계를 제패한다. 아무리 일본 1억이 왁자지껄 동원하여 반대하더라도 통일주의에는 못 이긴다.

일본을 하나님이 필요로 하는가. 일본 자체만을 요구하는 것이 아니다. 세계를 필요로 하기 때문이다. 영계와 지상세계, 천주를 필요로 하기 때문이다. 하나님은 환경을 먼저 만드셨다. 지금은 조금만 움직이면 세계가 바로 움직일 수 있는 시대권에 들어와 있다. 우리 통일교회 청년들은 하나님이 없다고 하는 것은 꿈에도 생각할 수 없다. 하나님은 계시나 관념적인 신이 아니고 생활권내에 실존하시는 신인 것이다. 하나님의 심정은 감상적인 심정이 아니고 실증적인 심정인 것이다. 이것이 그야말로 놀라운 것이다.

복귀의 노정을 완전히 통과하지 않으면, 다시 말해 개인 가정 종족 민족 국가 천주의 모든 권내에 들어가서 사탄에게 참소받지 않은 기준을 세우지 않으면, 축복의 조건을 세웠다고 할 수 없다.

22-197
축복의 기준
1960년은 대체 어떤 기준의 해였던가? 타락한 아담 해와의 입장, 즉 장성기 완성급의 기준에 올라선 해였다. 장성기 완성급 기준을 중심으로 하고 완성권까지 올라가는 데는 7년의 기간이 필요하다. 그것이 제1차 7년노정이었다는 것이다. 완성기준에 올라서면 하나님의 직접 주관권내에 들어간다. 직접이라고 하면 내외 공히 직접이니까 심정생활권 역시 직접 주관할 수 있는 것이다. 그 완성기준을 아직 남기고 축복한 해가 1960년이었다. 그러나 그 권은 아담의 타락으로 인해 타락권내, 즉 사탄의 주관권에 있었다. 이 주관권내에서 사탄을 때려부술 가정이 나타났기 때문에 이 가정에 대해서 사탄은 총공격해 왔다. 그러나 사탄과 싸우고 부딪쳐서 몰아내고 탕감하여 하나님의 날, 자녀의 날, 만물의 날, 부모의 날, 이 4대 명절을 이 7년간에 찾아 세웠던 것이다.

하나님으로부터 사탄이 빼앗아 갔던 것을 다시 찾은 기준이 세워졌기 때문에 거기에서 비로소 완성기준을 지상에 이룰 수가 있게 되었다. 신랑 신부가 사탄을 밀어제치고 만난 것이다. 그 한 날이 하나님의 소원이었고 2천년 기독교 역사의 목적이었다. 신랑은 예수로 하늘을 뜻하고 성신은 여성신으로 땅을 뜻하는데, 이 둘이 서로 만남으로써 공중권세를 가지고 있는 사탄을 깨부수고 천지가 하나가 된 것이다. 종교인의 최고의 목적을 우리 통일교회가 이룬 것이다.

그러니까 여기에서 선생님의 가정을 중심으로 하고 결합한 가정은 하나님의 씨족인 것이다. 그것이 날마다 번성하여 가게 되면 민족이 된다. 좀더 발전하면 국가, 세계권을 이룬다. 그러므로 새로운 민족, 제3이스라엘 민족이 되는 것이다. 일본인이라도 지금까지의 일본의 역사과정에 나타났던 선조로부터 상속된 혈통에 의한 자녀가 아니고 새로이 하나님에 의한 혈통권을 이어받은 자녀가 될 수 있도록 하는 것이 통일교회인 것이다.

우리가 설 곳은 세상 사람과는 틀리다. 사탄의 참소를 막고 승리권을 이룰 수 있는 내용을 여러분에게 가르쳐 주었다. 여러분은 어떤 기준에 있는가? 장성기 완성급 기준에도 올라오지 못했으므로 축복이 문제인 것이다. 두 사람, 즉 한 남자와 한 여자가 추방되어진 것이 타락이니까 두사람은 환영받지 못하는 경지를 넘어서지 않으면 안 된다. 그 경지를 넘어서서 받는 것이 축복이다.

22-198
제2차 7년노정
이제까지의 축복은 완성 기준에서의 축복이 아니다. 선생님을 중심으로 하나님의 날, 부모의 날, 자녀의 날, 만물의 날은 세계적, 천주적으로 결정되었다. 여러분은 그 권내에서 축복에 참여할 수 있는 입장에 서 있다고 하지만 참석은 할 수 있어도 그 길은 아직 가지 못했다. 사실은 여러분들의 부모의 날, 새로운 씨족의 선조로서 전환되는 참부모의 날이 나와야 하는 것이다. 기무라씨라면 기무라씨에게 있어서의 참부모의 날이 생겨나지 않으면 안 된다. 이 기무라씨를 중심으로 자녀의 날과 만물의 날, 하나님의 날을 결정하여 승리의 깃발을 세워서 영원히 펄럭이게 할 수 있는 그날을 우리 통일교회는 맞이해야 한다.

이 기를 게양하고 출발하는 것이 제2차 7년노정인 것이다. 그것은 장성기 완성권에 있어서 승리한 자, 타락한 후손이지만 타락하지 않은 아담 해와 이상의 입장에서 완성을 향해서 당당히 행군할 수 있는 입장에 서 있는 것이다. 사탄의 방해가 있으면 그것을 굴복시키고 물리치고 가자는 것이 우리들이 부르짖고 있는 `전면적 진격’인 것이다. 그것은 선생님에게만 한한 것은 아니다. 전세계적으로 되어 있는 것이다. 남자도 여자도 늙은이도 젊은이도 가지 않으면 안 된다. 제2차 7년노정도 전면적 진격의 노정인 것이다.

22-199
선생님의 종족
그리고 이 제2차 7년노정에 있어서 선생님의 한과 예수님의 한이 무엇인가 하면 친척관계를 중심으로 하여 진리를 말하고 전도한 일이 없다는 것이다. 자신의 사명에 대해서도 말하지 못했다. 주장한 일이 없다. 이렇게 선생님이 부모라든가 선생님의 형님에게 내가 어떠한 사명을 가지고 있는가에 대해 알리지 못하였지만, 형님은 자기의 동생이 무언가 큰사람이라고 할까, 앞으로 큰 일을 할 세계적인 동생을 가지고 있다고 생각했던 것이다. 그렇게 선생님을 알아주는 형님이나 어머님에게, 그런 사실을 한마디도 말해주지 못했다. 선생님에게 8명의 형제가 있었는데 누구보다도 나를 사랑한 육신의 형제에게는 이 귀중한 원리의 내용을 알려줄 수가 없다. 그런 비운의 사나이로 서 있는 것이다. 이것이 선생님의 한인 것이다.

혈통적으로 자신과 가까운 사랑의 관계를 가지고 있는 부모라든가 형제를 중심으로 사랑하지 못하고, 반대로 사탄쪽을 자기 혈통의 부모 이상 형제 이상 사랑하지 않으면 안 되는 입장을 더듬어 온 것이 지금까지의 통일교회의 발전 과정이었다. 자신의 적자(嫡子)보다도 그들을 더 사랑하지 않으면 안 되었다. 자연굴복시키지 않으면 아벨로서의 탕감복귀는 이루어질수 없다. 그래서 가인이 없으면 아벨은 성립되지 않는다고 하는 것이다.

자신의 혈통적 적자를 대하는 것 그 이상의 심정을 가지고 자기에게 효도를 하고 받들어 주는 사람을 만들지 않으면 탕감복귀는 되지 않는다. 그러한 입장을 세운다고 하는 것은 얼마나 큰 수고이겠는가? 먹는 것도 자는 것도 잊어버리고 가인을 사랑하지 않으면 심정적으로 굴복하지 않는다. 선생님은 그러한 환경을 줄곧 넓혀서 승리권을 만들어 왔다는 것을 여러분이 몰라서는 안 된다.

여러분들은 선생님과는 다르다. 제2차 7년노정이 시작된 이상은 통일교회의 식구들은 자신의 혈통적 부모와 형제들에 대해서 자기의 귀한 것을 직접 줄 수가 있는 권내에 들어와 있으니 결국 종족적인 메시아의 입장에 해당한다. 종족의 메시아로서 제2차 7년노정 기간에 여러분이 해야 할 일은 무엇인가? 선생님이 이루지 못하고 예수님께서 이루지 못한 것을 여러분의 부모, 형제, 종족을 중심으로 하여 새로이 이루어야 한다. 그에 의하여 하나님편의 탕감을 모두 완성시키라는 것이다. 개인으로부터 가정, 종족, 민족, 국가를 사랑했다는 기준을 세워 세계에까지 연결시켜 나가야 한다.

22-200
종족적 메시아가 되라
아담 이후 4천년의 역사 끝에 오신 예수님은 하나님의 뜻을 마리아와 요셉에 알리고 그들과 협력해서 뜻을 이루어야 했다. 그런 기준을 세우자고 하는 것에 제2차 7년노정을 출발한 우리의 사명인 것이다.

선생님도 그러하였지만 하나님도 자신에게 가까운 자를 사랑하였다면 복귀섭리는 이루어지지 않았다. 사랑하는 민족을 희생시키는 입장에 세웠고 십자가를 지게 하셨던 것이다. 사탄편의 가족, 사탄편의 종족을 구원하기 위해서 자신에게 가장 가까운 자녀, 가정, 종족을 희생시켜 온 것이 지금까지의 하나님의 섭리노정이었다.

그래서 `하나님은 사랑이다’라고 하는 것이다. 십자가에 달려서도 원수들에 대해서 축복하지 않으면 안 된다. 예수님이 `저들은 자기들의 죄를 알지 못하므로 용서해 주소서 구원해 주소서’라고 기도를 하신 것도 하나님의 심정을 아셨기 때문이다. 그런 예수님이었으므로 그러한 기도를 하셨던 것이다.

복귀노정은 주먹에 의한 힘으로 되는 것이 아니다. 심정적인 힘에 의해서 모든 것을 굴복시키는 기반을 만들지 않으면, 탕감복귀의 완성은 이루어질 수 없다는 것을 우리들은 알아야만 한다.

결국 복귀와 축복이라고 하는 문제는 예수님이 이루지 못한 축복을 우리들이 다 이룰 때, 복귀완성과 축복완성이 있다는 결론에 이르게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