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80 to 20-110: 하늘을 위로하자

하늘을 위로하자
1968.04.28 (일), 한국 전본부교회

20-80
하늘을 위로하자
오늘날 이 땅 위에 살고 있는 모든 인간들은 위로의 중심을 찾고 있습니다. 개인적인 위로의 중심, 가정적인 위로의 중심, 그리고 국가적인 위로의 중심, 세계적인 위로의 중심을 찾고 있습니다. 더 나아가 하늘땅 전체를 대표한 천주적인 위로의 중심을 찾고 있습니다. 이것은 틀림없는 사실입니다.

20-80
위로의 중심을 필요로 하는 인간
천지가 존재하는 한, 이런 위로의 중심이 되는 분이 기필코 나타나야 합니다. 그리하여 그분이 위로의 주체가 되시어서 만민을 위로할 수 있어야 합니다. 개체를 위로하고, 가정을 위로하고, 국가와 세계를 위로하여 소망의 세계를 이루어야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그런 분을 보내기 위해서 인간들 앞에 메시아 사상을 세워 가지고 지금까지 섭리역사를 이끌어 오신 것입니다. 이런 사실로 미루어 볼 때, 여러분은 하나님이 없다고 부정할 수 없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위로의 중심으로 오시는 그분은 개인적인 위로의 존재로서 끝나는 것이 아니라, 그분을 중심하고 전체를 대신한 위로의 가정이 나와야 될 것이고, 종족이 나와야 될 것이고, 민족이 나와야 될 것이고, 국가가 생겨나야 될 것입니다. 이것이 이 땅 위의 역사과정에 나타난 선민사 상인 것입니다. 야곱이 악과 대결하여 승리한 터전 위에 비로소 이스라엘이라는 하나의 기반을 닦아 가지고 하나님을 중심삼고 위로의 싹이 트기 시작했던 것입니다. 그 가정으로부터 출발하여 위로의 종족, 위로의 민족, 위로의 국가가 세워지면, 비로소 세계적인 위로의 국가의 기준이 세워지게 됩니다. 이런 기준을 세우기 위해 그 국가적 기준 앞에 오셨던 분이 메시아라는 것을 여러분은 알아야 합니다.

이러한 전체적 책임을 위해서, 다시 말하면 비통함과 고독에 사무친 이 세상을 위로의 세계로, 평화의 세계로 옮겨 놓기 위해서 예수님은 이 땅에 오셨습니다. 그때, 준비되었던 그 나라가 예수님과 완전히 하나 되었더라면 거기서부터 비로소 인간이 마음으로 고대하던 평화의 기원을 찾을 수 있었을 것이요, 모든 인간들이 위로의 주체를 만나 행복의 출발을 볼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그분이 왔어도 맞아들이지 못하였으니, 이것이 지금까지 역사과정에 있었던 그 무엇보다도 서러운 사실이라는 것을 우리들은 알아야 됩니다.

그러기에 인간에게는 위로의 중심이 있어야 된다는 것입니다. 하나의 국가, 하나의 종족, 하나의 가정, 하나의 존재, 이것이 연결되어 가지고 국가와 세계에까지 연결시킬 수 있는 중심존재가 나와야 합니다. 그렇게 되지 않고는 이 땅 위에 위로의 천국은 도저히 이루어질 수 없다는 사실을 여러분을 알아야만 합니다.

20-81
하나님의 위로의 대상이 되지 못했던 아담 해와
하나님 편에서 볼 때 인간이 타락하지 않았더라면 아담 해와가 자라고 있는 그 자체가 하나님 앞에 위로의 대상이 되는 것이요, 지으신 천하 만물이 하나님 앞에 위로의 대상이 되는 것입니다. 그가 움직이고 생활하는 것, 그와 관련된 모든 것들이 하나님께 위로의 자극적 요소가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인간이 타락함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은 위로의 대상인 그 한 자체를 갖지 못하게 된 것을 여러분은 알아야 되겠습니다. 이것을 볼 때 인간만이 위로의 대상을 찾고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도 역시 위로의 대상을 찾고 있다는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러면 하나님을 위로해 드리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될 것인가?

하나님을 위로해 드리기 위해서는 알아야 될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인간 시조 아담 해와가 어떤 존재였던가 하는 것입니다. 아담 해와는 하나님의 모든 뜻을 대신 이루기 위해 세워 놓은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아담 해와는 하나님의 모든 기쁨과 행복의 요건을 상대할 수 있는 존재로서 온 피조세계의 중심으로 지음받은 것입니다. 그러한 아담 해와를 하나님이 보시기에 얼마나 좋았겠습니까? 동시에 하나님이 본연의 뜻을 이루기 위한 그 이상을 중심삼고 그들과 한 자리에서 얼마나 당신의 사연을 말하고 싶었고, 심정을 나누면서 살고 싶었겠는가를 여러분들은 생각해 봐야 되겠습니다.

아담 해와가 타락함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은 그들은 참다운 인류의 조상으로서, 인류의 부모로서, 당신의 아들딸로서 대할 수 없게 되었습니다. 아담 해와는 하나님 앞에 둘도 없는 아들딸인데도 불구하고 하나님께서 아들딸로 대할 수 없는 자리에 서 버렸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또 아담 해와가 장성한 후에는 부부로서 축복하여 위로의 대상을 삼으시려 했습니다. 그런데 그들은 아들딸로서의 위로의 대상이 되지 못한 것은 물론이고 신랑 신부로서도 위로의 대상이 되지 못했습니다.

하나님께서도 바라시던 소원이 크니만큼 그들에게 무한한 가치를 부여하고 바라보셨던 것인데, 그들이 타락함으로 말미암아 하나님께서는 자녀로서의 위로의 심정을 느끼지 못했고, 신랑 신부로서, 즉 부부로서의 위로의 심정을 느끼지 못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아담 해와가 미래에 소망의 조상으로서, 만인류 앞에 하나의 군왕으로서, 하나님 앞에 충효의 도리를 세우는 입장이 되기를 바라셨던 것입니다. 그렇지만 이런 하나님 앞에 그들은 위로의 대상이 되지 못하였다는 사실을 여러분은 알아야 되겠습니다.

20-82
하나님을 위로해 드리려면
그러면 이러한 하나님의 위로해 드리려면 어떻게 해야 되느냐? 타락한 아담 해와 이하의 기준으로는 하나님 앞에 위로의 대상이 될 수 없습니다.

참다운 아들딸로서 하나님 앞에 서지 못하였으니 참다운 아들딸이 되어야만 하나님을 위로할 수 있다는 것이요, 참다운 신랑 신부가 되지 못한 것이 한과 슬픔이 되었으니 참다운 신랑 신부로 서야만 위로의 대상이 될 수 있는 것입니다. 하늘땅을 모두 주관할 수 있는 하나의 주인공으로서, 만국 혹은 만민을 주관할 수 있는 하나의 군왕으로서 책임을 다해야 할 아담 해와가 책임을 다하지 못한 입장에 섰기 때문에 그 이상의 자리에 올라가지 않고는 하나님을 제아무리 위로한다 하더라도 그것은 위로가 될 수 없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이러한 위로의 책임을 짊어지고 이 땅 위에 누군가가 와야 된다는 것입니다. 만약 그 전체적인 책임을 짊어질 사람이 없다면 어떠한 개인이라도 나타나야 됩니다. 아들이 없으면 딸이라도 나와야 됩니다. 아들딸이 다 있어야 되겠지만 하나라도 있어야 된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인류가 시조가 타락하여, 재창조의 원리과정을 통과하지 않으면 복귀될 수 없기 때문에 먼저 남자가 나와야 되는 것입니다. 남자가 나오지 않고는 여자가 나올 수 없다는 것입니다. 아무리 하나님의 딸로서 하나님을 위로해 드리고 싶더라도 남자가 먼저 나오지 않으면, 여자 혼자만으로는 딸의 입장을 책임질 수 없다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지금까지의 복귀섭리역사의 책임을 짊어졌었던 사람은 여자가 아니고 남자들이었던 것입니다.

그러면 남자들이 이 땅 위에 와서 해야 할 것이 무엇이었는가? 그것은 아담이 하나님을 위로해 드리지 못하고, 참된 아들의 자리에서 효성을 하지 못했던 그 기준을 탕감복귀하고 인류를 하나님과 연결시키는 것이었습니다. 이것을 위하여 선조들이 역사적인 책임을 짊어지고 왔다 갔다는 사실을 여러분은 알아야 되겠습니다.

이 세계는 사탄이 주관하는 악한 세계이기 때문에 그러한 책임을 진 사람들이 나오면 그들을 중심삼고 이 세상을 정리하여 사탄세계를 파탄시켜야 됩니다. 그렇기 때문에 아담 가정에서부터 노아, 아브라함, 모세, 예수 이후 지금까지 6천년 동안의 기나긴 역사노정에서도 하늘 뜻을 짊어진 사람들은 여자가 아니요, 남자들이었던 것입니다. 이렇게 책임진 남자들이 들인 모든 정성을 총합해 가지고, 그 정성의 터전 위에 참된 아들이 나와야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너는 내 기뻐할 수 있는 아들이다’ 하고 칭찬할 수 있는 사람이 나와야 된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하나의 중심존재로 이 땅에 오신 분이 예수님이었습니다. 예수님이 요단강가에서 세례 요한으로부터 세례를 받고 물에서 올라올 때,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요, 내 기뻐하는 자라(마 3:17)’는 하나님의 음성이 들렸습니다. 이것은 비로소 하늘땅이 기뻐할 수 있는 하나의 존재를 찾았다는 뜻입니다. 이것이 얼마나 큰 하나님의 기쁨이었던가를 여러분은 알아야 되겠습니다.

20-84
하나님의 위로의 중심은 최고의 아들
그러면 예수님은 하나님 앞에 어떠한 위로의 대상이 되어야 하느냐? 사탄의 침범을 받은 슬픈 역사를 걷어 치우고, 이것을 넘어서서 본연의 하나님의 뜨거운 심정과 화합된 자리에서 하나님을 위로해 드릴 수 있는 아들의 사명을 하지 않으면 안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예수님을 바라보시게 될 때, 너는 타락한 후손으로서 복귀된 둘째 아들이라는 인상을 가지게 해서는 안 되는 것이며, 나를 지긋지긋하게 고생시키면서 찾아진 아들이구나 하는 인상을 남겨서도 안 되는 것입니다. 너는 내 기뻐하는 자, 내 사랑하는 자라고 할 수 있는 아들이라야 하는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이 땅 위에 최고의 아들로서 위로의 주체가 되어야 하는 것이며, 그 가치는 타락 전 아담 해와 이상의 기준을 점유하지 않으면 안 되는 것입니다.

아담을 지어 놓고 아담을 통해서 해와를 지었기 때문에, 그럴 수 있는 아들을 맞아야만 여자가 등장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이 땅에 오셔서 하나님 앞에 아들로서 대상의 자리에 섰지만, 하나님의 딸로서 대상의 자리에 설 수 있는 하나의 존재를 찾지 못했습니다. 그러므로 이런 존재를 찾아야 했던 것이니 이것이 신부이념인 것입니다.

지금까지 6천년 동안 하나님이 수고한 것은 무엇인가? 세계를 구하기 위한 승리의 외곽적인 터전은 마련했지만 세계를 구하지는 못했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은 외곽적인 터전을 닦아 나가면서 내적으로는 타락한 세상일망정 그 가운데에 에덴 동산에서 아담 해와가 타락하지 않고 이루어야 했던 기준을 세워야 했습니다. 즉 사랑의 대상, 위로의 대상의 기준을 하나님 본심 가운데 이루어야 했습니다. 이것을 이루어 놓지 않으면 이 세계는 복귀될 수 없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것을 이룰 수 있는 터전을 마련하기 위해 이스라엘 민족을 키워 나온 것이었습니다.

그리하여 하나님께서는 야곱을 세워 21년 동안 하란에서 고생시켰던 것이며 고향으로 돌아오는 도중 얍복강에서 천사와 씨름을 하게 하신 것입니다. 여기에서 천사는 사탄의 상징이었습니다. 이 싸움은 천사장으로 인해 천륜이 엇갈려졌던 것을 복귀하기 위해서, 복귀의 책임을 짊어지고 가는 야곱이 천사와 싸워서 승리할 수 있느냐 없느냐를 결정짓기 위해서 있었던 것입니다. 하나님의 내심 가운데 맺혀진 한을 제거시키기 위해 천사장을 대신한 천사와 야곱이 서로 싸웠던 것입니다. 밤새껏 싸우고 나서도 내 생명이 꺼지는 한이 있더라도 승리하겠다는 심정으로 천사에게 `나를 축복하지 않고는 못 간다고 했을 때, 안 된다는 천사의 말을 들었더라면 이스라엘이란 민족이 과연 나올 수 있었겠어요?

야곱이 고향으로 가는 데 있어서 천사와 싸워서 이기면 가게 되는 것이요, 지면 못 가는 것이니 이는 생사의 결전이었습니다. 야곱이 20여 년의 정성을 다하여 한 뜻을 세워서 이스라엘의 기원, 다시 말하면 축복받은 혈통을 남기기 위해 싸우는 그 순간은 모든 것을 걸고 죽느냐 사느냐 하는 판가리 싸움이었습니다.

야곱이 천사와 싸우던 그 순간은 21년 동안 쌓았던 모든 것을 합해서 주관하고도 남을 수 있는 신념과 심정이 부딪치는 순간이었습니다. 야곱이 당한 시련이 얼마나 지긋지긋했던가? 라반이 10여 차례나 속였고, 딸을 주마 어쩌마 하며 이리 저리 못살게 굴지 않았습니까? 그러한 환경을 박차고 나오는데 네가 내 갈 길을 막느냐, 아무리 네가 최고의 정력과 힘을 가지고 있지만 나를 당할소냐 하며 승리의 기준을 세워 나왔던 것입니다. 여러분들처럼 사정 봐 가면서 눈치 봐 가면서 그랬을까요? 그런 것은 아랑곳없었다는 것입니다. 너 죽고 나 죽자고 결전을 했으니 천사는 축복을 해줄 수밖에 없었던 것입니다. 좋아서 해 줬겠습니까? 몰리고 몰리니까 할 수 없이 해준 것입니다.

이러한 기원으로부터 사탄을 분립하게 된 것이며, 승리했다는 뜻에서 이스라엘이라는 축복을 받게 되었던 것입니다. 그리하여 야곱 개인, 야곱 가정으로부터 종족이 되었으니 그 족속은 승리한 족속이 되어야 합니다. 축복을 받은 종족이 모두 몰락해 가지고는 안 되는 것입니다. 승리한 족속은 다릅니다.

그러면 승리하게 하여 축복한 목적은 무엇입니까? 자기들 잘살기 위한 것입니까? 그것은 잘 몰라서 하는 말입니다. 하나님이 사랑하고 축복해 준 이스라엘 민족은 이방과 달리 하나님이 사랑하는 민족이기 때문에 잘살아야 된다는 것입니다.

20-86
하나님이 이스라엘 민족을 세운 목적
그러면 하나님께서 축복한 목적은 어디에 있으며, 이스라엘을 세운 목적은 무엇이었겠습니까? 하나님의 위로의 대상이 될 수 있는 아들을 보낼 때에 그 아들을 중심삼고 완전히 하나 되게 하려는 것이었습니다. 야곱이 얍복강에서 천사와 싸웠던 것과는 반대로 본향의 고국을 창건할 수 있는 주인공을 맞아 하나 되라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면 주인공이신 예수님이 산에 가면 산으로 따라가고, 바다로 가면 바다로 가고, 전부 같이 몰려 다녔더라면 어떻게 되었을까요? 생각해 보세요. 붙들고 안 놓아 주었더라면 어떻게 되었겠습니까? 예수님과 하나될 수 있는 민족이었다면 이스라엘은 망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지금의 이스라엘은 얼마나 비참하게 되었습니까? 지지리 벌을 받고 있는 것입니다.

그 족속의 종자들이 남아 있는 것도 하나님이 보호하사…. 그것도 고맙게 생각해야 할 것입니다.

하나님이 이스라엘을 세운 것은 이스라엘을 사탄권 가운데에서 위로의 대상인 아들을 찾기 위한 울타리로 삼으려 했던 것인데, 그들은 그걸 몰랐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위로의 대상으로 그 아들을 세워 놓았으면 하나님은 그 위로의 대상인 아들에게 `너는 내 아들이다’ 하면서 무엇을 선물로 주시겠습니까? 사탄세계를 줄까요? 아닙니다. 사랑의 하나님은 4천년 동안 준비했던 선물로서 이스라엘을 주려고 했던 것입니다. 기가 막힌 사실이지요.

예수님은 하나님의 위로의 대상으로서, 만인간 앞에는 천지에 승리한 하나의 위로의 중심자입니다. 이런 예수님은 하나님의 아들중의 아들이요, 뼈중의 뼈요, 하나님의 심정을 통할 수 있는 위로의 대상이니, 그 승리한 터전 위에 무엇을 선물로 주시겠습니까? 벽돌집을 지어 주시겠습니까? 뭣을 주시겠습니까? 생각해 보십시오. 세계를 주고 싶으셨던 것입니다. 세계를 어떻게 줍니까? 하늘땅을 주고 싶어도 말씀만으로는 안 됩니다. 그렇기 때문에 하나의 나라가 필요한 것입니다. 즉 이스라엘 나라가 필요했던 것입니다.

4천년 동안 준비한 나라를 중심삼고 비로소 선별한 민족 이스라엘을 예수님이 선물로 받았더라면 어떻게 되었을까? 여러분은 그걸 알아야 됩니다. 이스라엘은 이러한 책임을 해야 했는데도 불구하고 자기 나라만 잘 살 줄 알고 있었습니다. 메시아는 빼놓고 자기들만 좋으면 된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렇게 될 때는 다 망하게 되어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이는 효자 중의 효자요, 역사과정에 자랑하기에 부족함이 없노라’ 할 수 있는 하나의 존재가 땅 위에 기필코 나와야 됩니다. 그럴 수 있는 하나의 남자, 하나의 아들이 나와야 됩니다. 하나님께서 사탄에게 `야 이녀석아, 지금까지 내가 이런 아들을 세우기 위해 수천년 동안 수고해 온 것이다. 너는 반대했지만, 자 오늘 봐라’ 하셨을 때 사탄도 `예, 옳소이다’할 수 있는 아들, 그야말로 `몽땅 내 사랑이다’ 할 수 있는 그런 아들이 있어야 됩니다.

그 아들 하나를 가짐으로써 세계를 잊어버리시고 좋아하실 수 있어야 합니다. 그래야 사탄세계를 잊어버릴 수 있는 것입니다. 그 한 분을 품고, 그 한 분을 찾음으로써 느끼는 기쁨이 사탄세계에서 엮어 나오는 모든 사연을 잊어버릴 수 있을 만큼 커야 합니다. 그러한 존재가 나와야 합니다.

그러지 않으면 에덴에서 타락함으로써 저끄러진 이 고개를 넘어갈 수 없는 것입니다. 즉, 하나님의 마음에 위로의 심정적 기준을 세울 수 없다는 것입니다.

그런 한 분을 지금까지 찾아 나오고 있습니다. 그런데 그분이 왔습니까? 오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이스라엘 민족은 메시아가 오신다 하고 있고 오늘날 기독교인들은 주님이 오신다고 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그분은 어디에 오셔서 메시아의 사명을 할 것인가? 어느 땅에 태어날 것인가? 여러분은 이것을 알아야 합니다.

여러분이 알아야 할 것은 오시는 그분을 만나는 것보다도 그분을 보내시기 위해 하나님이 당해 나오신 길을 먼저 알아야 하겠습니다. 그래야 그 분에 의해 직접 중생받을 수 있는 사람이 됩니다. 다시 말하면 하나님께서는 이 땅에 메시아 한 분을 보내기 위해, 아담 가정에서부터 지금까지 복귀의 길을 찾아나오고 있는 것입니다. 먼 훗날 하나님의 절대적인 아들로서 사랑과 위로의 실체적 대상으로 찾아 세우기 위해, 아담 가정에서부터 지금까지 6천년 동안 걸어 나왔다는 것을 우리는 알아야 되는 것입니다.

여자들 가운데는 성현이 없습니다. 여자들이 들으면 기분 나쁠지 몰라도 성현이 없습니다. 그러면 여자들이 언제 위신을 찾을 수 있느냐?

그분(메시아)을 만나서 신부가 될 때입니다. 그래서 기독교는 신부종교라는 것입니다.

20-88
하나님께 말할 수 없는 슬픔이 된 예수님의 죽음
그러면 그 아들이 인간들을 다시 낳아 주기 위한 개척역사를 해야 하는데, 그 아들이 나올 때까지 누가 섭리하셨는가? 즉 예수님 오시기 전 4천년 동안은 누가 했는가? 하나님이 직접 하셨습니다. 이 아들을 찾아 내기 위해 하나님이 얼마나 서러움을 당했겠나 생각해 보세요. 원수의 나라에서의 충신, 효자, 열녀보다도 더한 하나님편의 사람을 만들어야 했습니다. 더구나 하나님께서 낳아서 기르는 것이 아니고 사탄세계에서 빼앗아 하나님편을 만들어야 하는 하나님의 고통은 얼마나 컸겠습니까? 기막힌 일입니다. 하나님은 사탄의 새끼들을 빼앗아다가 당신의 사정과 심정을 이해하게 해 가지고 그런 일을 하시기가 쉬웠겠습니까? 그것은 쉬운 일이 아닙니다. 4천년의 기간도 하나님에게는 오히려 빠른 것이었습니다. 그 아들이 올 때까지, 즉 베들레헴에서 예수님이 탄생하기 전까지는 하나님이 그 일을 해야 했던 것입니다.

그러면 하나님께서 타락한 이 땅 위에 몇천만 번 왕래하셨겠는가? 몇번이나 왕래했을 것 같아요? 야곱이 하란에 가기 전, 아브라함이 제물 드리기 전, 노아 홍수 심판 전 이렇게 자꾸 거슬러 올라가면 아담 가정의 가인 아벨이 나옵니다. 하나님께서 거기에 찾아와 `아벨아, 천륜의 법도가 거꾸로 되었으니 부디부디 가인을 자연굴복시켜서 다시 바로잡아다오’ 하면서 기도하셨겠습니까, 안 하셨겠습니까? 가인을 굴복시키길 마음으로 얼마나 기도하셨을까요? 하나님이 간절히 바랐던 그 마음은 오늘날 타락 인간들이 하나님을 사모하고 하나님의 심정을 알겠다고 기도하는 것과는 비교가 될 수 없는 것입니다. 얼마나 간절히 고대했겠습니까? 아무것도 모르는 미흡한 아벨에게 모든 것을 걸고 바라보고 계시던 하나님의 간절한 모습을 여러분, 한번 생각해 보십시오.

이처럼 간절한 소망을 갖고 왔던 그분이 사탄에게 쫓겨가야 했다니 기막히다는 것입니다. 사탄은 좋다고 하며 춤을 추게 되고, 하나님은 눈물을 머금고 왔던 길을 돌아가지 않으면 안 될 사연이 벌어졌던 것입니다. 거기서부터 하나님에게는 되돌아가야 하는 비참한 날들이 거듭됐다는 것을 여러분은 알아야 됩니다. 또한 바라셨던 터전의 중심을 갖지 못했기 때문에 하나님은 이 세계 역사와 수많은 민족을 걸어 놓고 한 중심을 찾아 내려왔던 것입니다.

여러분들은 한국이 앞으로 하나님의 뜻 앞에서 사랑하는 나라가 되고, 뜻을 이루어 드릴 수 있는 제3이스라엘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기독교는 원래 서구 종교가 아닙니다. 기독교는 중동 지역에만 머물러야 할 종교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기독교가 구라파를 돌아서 한국에 전파된 것이 2백여 년이 됩니다. 그러면 하나님께서 겨우 2백여 년 전부터 찾아 오시기 시작했겠습니까? 한국이 그런 자리에 서게 되기까지는 하나님은 서쪽에서부터 역사를 발전시켜 나오면서 동쪽에서도 남모르는 가운데 역사적 인연과 사연을 준비했던 것입니다. 그러지 않고서는 뜻을 이룰 수 없는 것입니다. 또한 수많은 민족의 배후에서 안팎을 감싸 나가면서 한 때의 초점에 맞추기 위해 시련 고통을 개의치 않고 수습해 나왔습니다. 그러한 하나님의 배후의 노고가 얼마나 크신가를 여러분이 생각해 봐야 합니다.

하나님은 1,600년 만에 아벨 대신 노아를 세웠습니다. 그 다음엔 아브라함을 세웠고, 모세를 세웠고, 세례 요한을 세웠고, 예수님을 세웠습니다. 그러나 지금까지의 결과는 번번히 실패한 입장에 선 하나님이었습니다. 사람 같으면 체면이 있기에 얼굴을 들고 나설 수 없을 것입니다. 에라 모르겠다 될대로 되라 하면서 다 내줄 것입니다. 그렇지만 그럴 수 없는 하나님이었습니다.

여러분들 가만히 생각해 보십시오. 그러한 수모와 멸시, 원수들의 조롱과 비난과 비소, 그것뿐만이 아닙니다. 피흘리고 죽기가 일쑤였으니, 매일같이 장사를 치러야 하는 하나님의 심정을 생각해 보십시오. 대원군 때, 기독교인이 얼마나 많이 학살 당했습니까? 어느 나라든지 기독교가 그 나라에 들어갈 때는 기독교인들이 순교를 당했습니다. 이처럼 하나님은 정성을 모아 길러 놓은 하나님편의 사람들이 매일같이 쓰러져 가는 참패의 서러움을 당하셨습니다. 하나님의 이런 사정을 여러분은 알아야만 합니다.

이처럼 편안한 날이 없는 하나님인데, 오늘날 기독교인들은 영광 가운데 있는 하나님라고 하니 성경 말씀에 있는 것처럼 하나님이 사람 지으신 것을 탄식하는 것이 당연합니다. 탄식 안 할 수가 없습니다. 탄식하실 수 밖에 없는 하나님…. 어찌하여 탄식하는 것이 당연한 하나님이 되었던고!

20-90
하나님의 한을 풀어 드릴 승리의 아들이 다시 와야
여기에 대한 분통과 한을 품고 원수를 갚는 책임을 짊어질 하나의 사람, 하나의 무리, 하나의 민족, 하나의 국가가 필요합니다. 그럴 수 있는 한 아들이 와서 하나님의 위로의 주체가 되는 동시에 이 원수를 갚아야 합니다. 아들과 딸이 타락했기 때문에 아들과 딸이 위로의 대상으로 회복되지 않으면 안 됩니다.

그렇기 때문에 예수님은 당신을 신랑되신 주님이라고 하며 그 신랑 앞에 신부될 수 있는, 하나님의 사랑을 받을 수 있는 참다운 대상으로서의 여성 실체를 찾기 위해 허덕이다가 뜻을 이루지 못하고 한을 품고 갔습니다.

`아바 아버지여 할 수만 있으면 이 잔을 내게서 피하게 하여 주시옵소서. 그러나 내 뜻대로 마시옵고 아버지 뜻대로 하시옵소서’ 하는 예수님의 이 기도에는 4천년 역사의 한이 깃들어 있는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예수님이 이 길을 가고 나면 금후의 역사과정에서 수많은 사람이 피의 제단을 넘어가야 한다는 사정을 알기 때문에 기가 막힌 사연을 품고 호소했던 것입니다.

그 미욱장이 베드로, 야고보, 그들이 사도는 무슨 사도입니까? 베드로와 여러분이 다른 점이 무엇입니까? 하기야 예수님이 십자가를 지고 가시는데도 보고 가만히 있었고, 도망 다녔던 그들보다 여러분은 더하지. 그래도 예수님이 돌아가셨다가 부활한 후 회개했기 때문에 다시 사도의 이름을 준 것입니다. 즉 거꾸로 한 것입니다. 그래서 베드로는 거꾸로 죽었어요. 여러분 기분 나쁘죠? 그러한 사도들로부터 전해 받은 종교가 기독교라는 것을 여러분은 알아야 합니다. 배신하였던 그들이 할 수 없이 결속하여 세운 종교를 믿어요? 선생님은 그들에게 항의합니다. 그들을 만나서 공격을 합니다. 기가 막힌 일입니다.

여러분들은 하나님에게 아무리 복을 빌고 행복의 터전을 갈구하며 기도하더라도 하나님이 찾고 있던 심정적인 위로의 대상이 찾아지지 않으면 그 기도는 이루어질 수 없는 것입니다. 이루어지게 되면 오히려 그것은 화가 됩니다. 이스라엘을 축복한 것은 메시아를 맞을 수 있는 울타리를 만들기 위함이었습니다. 이스라엘이 모든 나라들 중에 영광된 나라로서 들림받을 수 있었는데, 오히려 화가 됐다는 것입니다. 차라리 축복을 받지 않았더라면 좋았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아담을 잃어버린 하나님 앞에, 즉 하나님은 이 땅 위의 남성을 대표한 위로의 주체를 잃어버렸기 때문에 그 주체를 대신할 수 있는 심정의 대상이 이 땅 위에 다시 나와야 합니다. 아담은 순순히 하나님 품 안에 안길 수 있었지만 고통과 슬픔을 안겨드릴 장본인이기에 그는 다시 와서 하나님께서 과거에 상처받은 역사적인 모든 서글픔을 위로해 드리고 인간의 타락으로 말미암은 한을 하나님의 마음에서 빼드려야 됩니다. 그 다음에 승리한 아들로서 위로해 드릴 수 있는 자리까지 넘어가야 됩니다.

그런 아들의 입장으로 예수님이 올 때까지 하나님은 수천만 번 왕래하면서 그 길을 닦았다는 사실을 알아야 합니다. 하나님은 위로의 주체가 될 수 있는 아들을 세우기 위해 이스라엘 민족을 선민으로 택하시고, 4천년 동안 소원하던, 만민을 하나님이 계시는 곳으로 이끌어 주기를 바라면서 예수님을 보낸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이 십자가를 짊어지고 머리에 가시관을 쓰고 골고다를 향했을 때 하나님의 마음이 좋았겠습니까? 기가 막히셨던 것입니다. 예수님이 그렇게 죽기 위해서 왔다면 하나님은 무엇 때문에 4천년 동안이나 준비를 하셨겠습니까? 예수님이 십자가상에서 죽은 것은 순전히 이스라엘 백성이 책임을 못했던 탓입니다. 그것도 모르고 예수님이 만민을 구원하기 위해서 죽었다고요? 죽은 예수님이 만민을 구원한다면 죽지 않은 예수님은 만민을 못 구한단 말입니까?

20-92
하나님을 완전히 위로해 드리려면
하나님의 유형의 실체로 서 있어야 할 존재가 타락해 버렸기 때문에 그것을 회복하기 위해 섭리해 나온 것이 지금까지의 역사라는 것을 여러분은 알아야 합니다. 만일 주님이 혼자 오셔서 위로의 주체가 됐다면 그 다음은 어떻게 해야 합니까? `하나님, 저만 보고 사십시오. 저 하나면 되지 않습니까?’ 한다면 되겠습니까? 인류의 타락한 동기가 아담 때문인데 예수님이 아담을 대신하여 아들의 자리에 섰다 할지라도 아직은 사탄세계에 수많은 인류가 남아 있다는 것입니다. 수많은 인류를 다 저버리고 심판해 버립시다 할 수 있게 되어 있지 않다는 것입니다. 아담이 잘못했기 때문에 아담 대신 책임을 완결하기 위해 오시는 그 아들은 이 세계 사람들을 전부다 구원시키는 입장에 서야 합니다. 예수님 혼자서 하나님을 섬길 수 없게 되어 있다는 것입니다. 그저 겟세마네 동산에 가서 밤을 새워 기도하고…. 예수님 혼자서도 하나님을 위로할 수 있는 입장에 못 들어 갔으니 예수님이 이 땅에서 당한 서러움이 얼마나 억울한 것이었겠습니까?

당시에 예수님을 중심삼고 이스라엘 민족이 하나로 단결해야 했습니다. 어느 정도로 단결했어야 되느냐? 얍복강에서 천사와 씨름하던 것 이상으로 단결해야 됩니다. 그리하여 예수님이 바다를 건너면 같이 건너가고, 산에 오르면 같이 올라가고 이렇게 유대 나라 전체가 예수님을 따르고 몰려들었더라면 어떻게 되었겠습니까? 메뚜기떼처럼 몰려들었으면, 망했겠습니까? 거기서부터 새로운 역사적인 운동이 벌어지는 것입니다. 그럴 수 있는 때를 위해 4천년 동안을 준비했으나 준비한 터전을 전부 잃어버렸습니다.

예수님은 이 땅에 와서 무엇을 했느냐? 역사에 맺힌 한을 풀기 위해 울었습니다. 선조들이 눈물 흘리며 소원하던 것, 끝날에 메시아가 와서 분함과 원한을 풀어 달라고 천상세계에 호소하던 그 소원을 풀어 주기 위해 기도해야 했습니다. 선조들이 흘리던 눈물이 거두어지지 않았기 때문에 예수님은 `아버님이여 저들의 눈물을 거두어 주소서’라고 기도해야 했던 것입니다.

그런데 기도를 하고 나면 기쁨으로 민족이 맞이해야 할 텐데, 예수님이 개인과 민족을 대신하여 기도하고 회개했는데도 불구하고 전부 반대를 했습니다. 또다시 하나님께 체면 불구하고 `아버지, 용서해 주소서’라고 간구하여 용서받고 그들 앞에 나서면 또 반대를 했습니다. 그래서 용서할래야 용서할 길이 막혔습니다. 한 번 두 번이 아니고 수십 번을 해봐도 가능성이 없기에 그 용서의 대가로 예수님이 생명을 걸고 걸어간 것이 십자가의 길이었습니다. 예수님이 가신 길이 십자가의 길이라니 기가 막힌 사연입니다.

이것도 모르고 예수를 믿어서 천당을 가요? 가령 여자가 나이가 들면 시집을 갑니다. 시집이야 누구나 갑니다. 그런데 시집에서 쫓겨날 수도 있고, 신랑한테 천대받을 수도 있고, 과부가 되어 시집살이 할 수도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시집을 어떻게 갈 거예요? 남들이 다 부러워하고, 모든 사람이 반할 수 있는 자리에서 시집을 가고 싶지요? 그렇게 되기가 쉬워요? 마찬가지로 믿으면 천당에 간다고 해요. 그런데 천당이 무슨 자리입니까? 정성이 지극한 자리, 충성이 지극한 자리, 모든 사연이 지극한 자리입니다. 그런 자리에 뭐 믿고 간다고요?

그러면 믿고 가는데 어떻게 가야 됩니까? 피눈물이 교차되는 자리에서 가야 합니다. 아담이 타락해 가지고 쫓겨날 때 `하하 좋구나’ 하면서 쫓겨났겠습니까? 피눈물을 흘리면서 쫓겨났던 것입니다. 여러분이 쫓겨난 그 집에 돌아가려면 아담보다 더 나아야 될 게 아닙니까? 가령 동네에서 쫓겨 나온 후에 다시 들어가려면, 그전보다 못해 가지고 들어갈 수 있겠습니까? 그러므로 여러분은 아담보다 나아야 됩니다. 아담보다 못한 자리에서 돌아가게 되면 쫓겨날 것이 분명합니다. 하나님께서 `이자식아’ 하며 책망할 것입니다.

아담보다도 더 나은 자리에서 돌아오길 바라는 하나님이 계시기에 통일교회에서는 7년을 기준으로 해서 전도를 하고 있습니다. 전도 나가면 그 동네에서 핍박받고, 어떤 사람은 몰매도 맞았을 것입니다. 그리고 쫓겨나는 자리에서 `너희들 두고보자’고 하며 다시 찾아올 것을 굳게 맹세한 사람도 있을 것입니다. 그리하여 단연코 배후의 모든 면에서 그들이 꿈에도 생각하지 못할 자격과 내용을 갖추고 돌아갈 때, 여러분은 한을 풀 수 있는 자리에 서게 되는 것입니다. 거기서부터 하고 싶은 대로 하는 것입니다. 새로운 무엇이 벌어지는 것입니다. 그런데 여러분이 그것을 못한다면 천대바가지인 것입니다. 별 수 있어요? 별 수 있느냐 말입니다.

20-94
배후에서 낙오자들을 수습하여 섭리해 나오신 하나님
옛날 예수님이 돌아가셨던 자리보다 나은 자리를 만들어 놓지 않으면 또 쫓겨나게 됩니다.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은 사망권을 넘더라도 빨리 가라고 기독교를 내몰았던 것입니다. 수많은 민족을 찾기 위해 한 민족이 희생되는 것도 개의치 않고 내몰았던 것입니다. 하나님은 끝날에 돌아오는 아들의 수치를 씻고 위신을 세울 수 있는 처지와 환경을 만들어 오로지 하나님의 아들다운 자세를 가지고 나타날 수 있는 그날을 고대하면서, 배후에서 희생되는 참사에도 불구하고 내몰고 내몰아 지금의 기독교로 발전시킨 것입니다. 이러한 하나님의 섭리를 여러분은 알아야 합니다. 그래서 기독교의 역사는 순교의 역사로 점철되어 나온 것입니다. 분과 한을 풀기 위해서, 억울함과 분통한 사실을 밟고 천지간에 설 수 있는 무리를 만들기 위해서 하늘은 역사해 나온 것입니다. 믿고 가만히 있으면 우리 주님이 날 찾아와 주겠지 이렇게 생각하는 사람들이 기독교를 다 망쳐 놓았습니다. 또 이들이 입이나 가만히 다물고 있으면 좋겠는데, 뭐 자기들이 정통이라는 것입니다.

하늘을 위로하자고 하는데 어떻게 위로할 것인가? 여러분은 이 땅 위에 위로의 중심 존재가 올 때까지의 역사적 사연이 어떻게 되었는지 알아야 되겠습니다. 그를 세우기 위해 하나님은 수천만 번 인류의 배후에서 패잔병, 낙오병들을 수습해 가지고 섭리하여 나온 것입니다. 이러한 하나님의 심정을 여러분은 알아야만 되겠습니다. 잘났다는 사람들은 전부다 세상과 더불어 세상으로 휩쓸려 넘어갔지만 하나님은 여기에서 낙오되어갈 곳 없이 죽음의 길을 헤매던 사람들을 거느리고 섭리해 나온 것입니다.

그런 사람들을 하나님 마음과 통할 수 있는 같은 사정의 사람들인고로 그런 인생의 낙오자들을 수습해서 복귀섭리를 해 나온 하나님의 신세가 기가 막히다는 것입니다. 그나마 젊은 사람들은 전부 싫다고 하니 지금까지의 역사상에 하나님 앞에 불리운 사람들은 전부 50대 이상, 60대 이상이었습니다. 나이 많고 찌들어 멀지 않아 공동묘지에 갈 수밖에 없는 사람들, 장송곡을 부를 날이 가까운 패들이었다는 것입니다. 그런 배후에서 하나님은 오늘은 이렇게 찌들고 마른 노년층을 붙들고 섭리하지만 앞으로는 장년층을 붙들고 섭리해야 하는데, 그들을 붙들고 어떻게 섭리를 전개시킬 것인가 하는 염려를 하셨다는 것입니다. 그런 사연을 부여안고 역사노정을 걸어 나왔던 것입니다.

노년시대가 지나가고 장년시대로, 장년시대가 지나가고 청년시대로, 청년시대가 지나가고 소년시대로, 소년시대가 지나가고 유아시대로, 그렇게 여러분은 다시 태어나야 되는 것입니다. 그렇지 않으면 천국에 못 가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천진무구한 어린 아이처럼 귀여움을 받을 수 있어야 합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니고데모에게 네가 다시 나지 않으면 안 된다고 했습니다. 거듭나지 않으면, 즉 중생하지 않으면 안 된다고 하신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최고의 수습하는 역사로서, 어머니 복중에서부터 구원역사를 하자는 것입니다. 얼마나 기막힌 사연입니까?

20-95
젊은이들을 키워라
오늘날 우리 시대에 통일교회에 할아버지 할머니들은 후퇴해야 합니다. 기분 나빠요? 후퇴하라고 해서 천국 가는 길을 막겠다는 것은 아닙니다. 그시대를 지나가게 해야 하나님이 위로받을 게 아닙니까? 가만 보면 통일교회에는 나이 많은 사람들이 많은데, 이것 참 곤란합니다. 젊은이들처럼 씩씩거리고 돌아다녀야 탕감복귀를 할 수 있는데, 이거 탕감도 못하고 복귀도 못하니 할 수 없이 선생님만 바라보고 있습니다. 그렇게 남의 신세를 지는 사정이 얼마나 처량한가? 그것을 여러분이 알아야 합니다. 지금까지 하나님의 신세를 지고, 예수님의 신세를 지고, 수많은 기독교인의 신세를 지고서 이 시대에 살아 남았는데, 곱게 늙어 아직까지도 통일교회 젊은 사람들의 신세를 져야 되니 기막힌 일입니다. 신세 안 지게끔 노력해야 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나이 많은 사람들은 하나님을 섬기기에 눈물을 흘리면서 노력해야 합니다. 가정을 가지고 살림하는 장로님들, 아저씨, 아주머니들은 `내 가정에서 어찌하여 하나님과 메시아를 대신할 수 있는 아들딸을 못 가졌던가’라고 한탄하여야 합니다. 남들은 자기보다 잘난 아들딸이 있어 하나님께 충성하는데, 우리 집은 왜 그런 아들딸이 없는가! 산을 봐도 강을 봐도 부끄러움을 느끼고, 사방을 돌아볼 때 얼굴을 들 수 없는 부끄러움을 느껴야 합니다. 그런 아들딸이 없으니 자신만이라도 동네방네 다니면서 하나님의 한과 천년 사연을 풀어 드리겠다고 하면서 노력하여야 합니다. 그래야 할 장년층 부부들인 것을 알아야 합니다.

그런데 여러분은 먹고 싶은 대로 먹고, 입고 싶은 대로 입고, 자기 하고 싶은 대로 다 하고 있는데, 그것이 참소 조건이 되는 것입니다. `에구, 남들 남편은 돈도 잘 벌어 오는데, 요모양 요꼴이야’ 하면서 바가지 긁는 것이 자기 책임입니까? 장년 부부들은 하나님께 충성할 수 있는 젊은이들을 못 가졌으니 하나님 앞에 부끄러운 줄 알아야 됩니다. 이제라도 그런 젊은이들을 길러야 되겠습니다.

다행히 고마운 것은 우리 통일교회에 `믿음의 자녀’라는 법이 있는 것입니다. 장년 부부들을 구원할 수 있는 것이 믿음의 아들딸이라는 것입니다. 이것을 위해 뼛골이 녹아나도록 정말로 한번 뛰어보라는 것입니다. 그리하여 젊은이들 앞에 소망의 눈물을 짓게 될 때, 그 젊음의 소망의 터전 위에 메시아가 찾아오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베드로같이 나이 많은 할아버지나 쓰다 남은 찌꺼기 같은 사라믈과 일을 하겠습니까? 생각해 보세요. 하나님의 아들이 먹다 남긴 오이꼭지 같은 사람을 찾아오겠어요? 뜨물에 뜬 오이 꼭지에는 파리도 안 붙는데…. 여러분은 아들딸, 조카, 사돈의 팔촌이라도 인도해서 이 한을 풀 수 있는 인연을 만들어야 합니다.

영계에 가 있는 수많은 영인들은 땅 위의 자기 후손들이 탕감의 인연을 가지고 천륜 앞에 서기를 고대하고 있습니다. 여러분은 살아 생전에 그 뜻을 알아 가지고, 그들이 바라는 환경이 벌어질 수 있도록 책임은 다하지 못할망정 책임할 수 있는 인연을 만들어서 책임하겠다는 마음이라도 가지고 뭄부림쳐야 됩니다.

20-97
위로하는 사람이 서야 할 자리
예수님이 십자가를 향하여 나가던 그 이상의 심각한 마음으로 예수님의 심정을 체휼할 수 있는 인연을 갖지 않으면 예수님과 같이 낙원에 갈 수 없습니다. 예수님은 목숨을 걸고 십자가를 지면서도 원수들을 위하여 기도하여 비로소 낙원에 들어갔습니다. 그런데 건달 중에 상건달이요, 일주일마다 믿으면 된다 하여 그저 속여 먹고, 좋으면 훑어 먹고 걸러 먹던 패들이 `예수님 믿은 덕택으로 아이고, 하나님 아들딸이니 나도 가야지’ 하며 성큼성큼 나서 보십시오. 다리가 움직여지나. 체면이 있어야지요. 사람이 체면이 있어야 할 게 아니예요?

하나님을 위로할 수 있는 남자가 나와야 하고 여자가 나와야 하는 것입니다. 그렇지 않으면 하나님을 위로해 줄 사람이 없습니다. 여러분은 그러한 분을 필히 만나야 합니다. 아들이 죽어서 낙망한 사람에게 `우리 아들이 셋인데 아들 하나를 당신의 아들로 삼으시오’ 한다고 해서 위로가 돼요. 위로가 됩니까? 그러나 세 아들을 잃어버린 사람이 눈물을 듬뿍 흘리며 `당신의 사정을 내가 잘 알아요’라고 할 때는 눈물 한방울이라도 위로가 되는 것입니다. 안 그래요? 시퍼렇게 아들을 세 명이나 두고서 `참 안 됐어요. 대신 우리 아들을 줄께요’ 하면 아무리 그래 봤자 위로가 될 것같아요? 천만에, 위로하려면 그 사람 이상으로 서러운 심정을 가져야 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 땅에 오시는 주님은 어떠한 사림이어야 되느냐? 하나님이 사랑으로 창조해 놓은 인간이 타락하는 것을 바라보실 때 서러웠던 그 심정을 체휼하고 통곡할 수 있는 사나이가 되어야 합니다. 그렇지 않고는 하나님 앞에 위로의 대상자가 될 수 없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예수님은 그러한 사연을 품고 십자가를 짊어지고도 저들의 죄를 용서해 달라고 기도하였던 것입니다. 또 그런 예수님의 심정을 알았기 때문에 기도하는 그 마음에 하나님이 같이하실 수 있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여러분이 믿고 있는 기준이 하나님을 위로할 수 있는 기준입니까? 하나님은 불쌍하다는 것입니다. 말로서만이 아니고 사실이 그렇다는 것입니다. 여러분이 믿고 있는 마음과 몸의 사정을 두고 볼 때, 과연 하나님이 찾고 있는 아들이요 딸이라 할 수 있겠습니까?

하나님을 위로하지 않고는 천국에 들어갈 수 없는 것입니다. 그런데 어떻게 하나님을 위로할 것인가? 여러분이 먹고 싶은 것 다 먹고, 입고 싶은 것 다 입고, 하고 싶은 것 다 하고 남은 찌꺼기로 위로해요? 천만에. 그것은 사탄도 싫어하는 것입니다. 불과 너댓살밖에 안 되는 유치원 학생들 앞에 빵쪼가리를 갖다 놓고 너 어디를 가질래 하며 귀퉁이는 흙이 묻었다고 안 가지려고 합니다.

타락한 인간의 자식들도 그러하거늘, 천지를 창조한 본연의 주인인 하나님께서는 어떠하시겠습니까? 생각하면 생각할수록 부족한 자신이요, 가면 갈수록 천년 사연을 내 마음 속에서 용서할 수 있는 빛된 나를 지지러지게 한 이 환경을 어떻게 벗어날 것인가 몸부림치기에도 부족한 자신인 것을 생각할 때, 이 꼴을 가지고 뭐 가지 사정 몰라 준다고 할 수 있느냐 이거예요.

20-98
예수님은 가정 이상(家庭理想)을 완성해야 했었다
하나님의 한을 누가 위로해 드리겠습니까? 예수님을 중심하고 하나님을 위로할 수 있는 아들딸이 나와야 되고, 하나의 부부가 나와야 되고 하나의 충신이 나와야 된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누가 할 것인가? `아 우리는 우리 생활하기도 바쁘니 예수님 혼자 해야지’ 그런 사람들은 도둑놈들입니다. 예수님께 폐되는 사람들입니다. 이들이 역적이라는 것입니다.

6천년 사연이 엉클어진 하나님의 심정 세계가 그랬었기에 하나님께서 찾아 나온 아들 역시 그런 아들이어야 됩니다. 그것을 알았기에 우리는 `그런 아들은 못 될 망정 그렇게 하려고 몸부림치오니 울부짖는 이 음성을 들어 주소서. 몸부림치는 이 사정을 보소서’ 할 수 있어야 합니다. 이러한 과정을 거치지 않고는 하나님을 위로하기란 불가능합니다.

탄식의 역사, 탄식의 심정을 풀지 못한 하나님인 것을 여러분은 확실히 알아야 합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심정과 그 탄식의 사연을 위로할 수 있는 아들딸이 되어야 합니다. 그러한 아들딸을 품에 안은 아버지의 모습을 누가 감히 바라볼 수 있겠습니까? 그러나 그럴 수 있는 하나님을 바라보는 것이 인간이 바라는 최고의 소망이요, 그러한 한 때를 이루어야 할 것이 우리의 목표인 것입니다.

여러분은 그것을 자신할 수 있어야 합니다. 그리하여 그날을 맞이해야 합니다. 그럴 수 있는 분을 세워야 합니다. 즉 여러분보다 조금 낫거든 세우고, 좀더 수고하거든 세워야 됩니다. 자기보다 더한 사람을 세우겠다는 마음을 가져야 됩니다. 그런 마음을 옮겨 민족을 이루고 나라를 이루어, 오시는 메시아를 온 세계의 중심으로 모실 수 있는 터전을 마련해야 할 책임을 하지 못한 이스라엘은 망했습니다. 역사가 그렇게 되어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힘을 다해서 하나님을 부여안고 `아버님이 어찌하여 이렇게 됐습니까? 그것은 우리 선조들이 잘못했기 때문입니다. 당신이 바라던 아들딸은 이러한 아들딸이 아닙니까? 당신이 바라던 가정은 이러한 가정이 아닙니까?’ 이렇게 하나님의 사연을 풀어 주어야 할 책임이 오시는 주님의 책임임을 여러분은 알아야 됩니다. 오시는 주님은 이것을 해야 됩니다. 그 책임을 위해 오셔야 하는 것입니다. 하늘 땅 앞에 한을 남긴 위로의 실체인 아담 해와가 실수한 인류의 참다운 조상의 기준을 이루어야 했습니다. 그러나 이것을 이루지 못하여 한이 맺혔기 때문에 예수님과 성신은 아들이 되고 딸이 되고, 신랑 신부가 되어 가지고 선한 선조가 되어 한을 풀겠다고 2천년 동안 역사과정에서 피눈물나는 개척자의 사명을 짊어지고 왔던 것을 여러분들은 알아야 됩니다.

예수님은 아들딸의 사명을 다하는 동시에 부부로서의 사명도 다할 것을 소망하셨습니다. 그리고 충신의 자리를 소망하셨습니다. 예수님은 만국을 굴복시켜 가지고 만국을 전부 거느리고서 `하나님 앞에 이것을 바치오니 받아 주소서’ 하셔야 했던 것입니다. 그리하여 하나님께 효의 도리를 다하고 충신의 도리를 다해야 했습니다.

메시아가 해야 할 것은 무엇이냐? 가정적 메시아의 기준을 닦고, 세계적인 가정의 기준을 닦고, 세계적인 충신의 도리를 세워 새로운 천지에 하늘나라를 세우고 하늘나라의 법도를 세우는 것입니다. 이것이 주님의 사명인 것입니다. 그런데 뭐 천사장의 나팔 소리가 어떻고, 공중으로 들어 올러 가지고 어떻고 어떻고 하는 것은 다 혼자 좋아 가지고 하는 수작들입니다.

인간은 아직까지 이 땅에서 충효의 기준을 완결시키지 못했습니다. 참다운 부모로서 하늘 땅을 대신해서, 남자는 하늘 대신하고 여자는 땅을 대신하여 둘이 화합한 모습으로 참다운 신랑 신부의 인연을 맺음으로써 하나님 앞에 위로의 대상으로 설 수 있는 것입니다. 이것이 주님이 오심으로 말미암아 세워지는 것입니다. 그리하여 그 가정이 충신 가정이 되어 만국이 그 뒤를 따라갈 수 있는 국가적인 충신의 자리까지 닦아 놔야 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오시는 메시아가 가야 할 기준인 것을 알아야 합니다. 그러므로 주님은 영광 중에 오시는 것이 아닙니다. 주님에게는 고생 보따리가 너절하게 붙어 있다는 거예요.

세계에 30억 인류가 산다고 하더라도 하나님의 뜻으로 보면 남자 여자 둘 밖에 없어요. 그래서 예수님은 나를 본 받으라고 하신 것입니다. 그러기에 여러분은 예수님을 대신한 아들이 되고 성신을 대신한 딸이 되어, 신랑과 신부의 실체를 가져 가지고 신랑 신부의 인연을 갖추어서 하나님 앞에 `당신의 소원을 푸시옵소서’ 할 수 있어야 합니다. 다시 말해서 신랑 신부로서의 메시아 자격, 가정적인 구주의 자격을 회복하라는 것입니다.

지금까지는 예수님 혼자만 구주였습니다. 즉 여자에게는 메시아와 동참할 수 있는 자격을 지금까지 안 주었습니다.

가정으로부터 충신의 도리를 세울 수 있는 기반을 닦아, 이것이 만국의 중심으로 서게 될 때 메시아의 이상이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이처럼 메시아가 땅 위에 책임을 다하고, 이 세계를 하나님 앞에 드리게 될 때, 메시아의 사명을 종결짓게 되는 것입니다. 타락한 이 세계를 비로소 넘어갈 수 있는 것입니다.

20-101
언제 하나님을 위로하기 위해 밤새워 통곡해 봤느냐
이제 오시는 메시아는 불쌍합니다. 여러분도 물론 불쌍하지만 그까짓거야 백번 천번 불쌍하면 어때요? 불쌍하게 태어난 그 종자가 못생겼으니 고생하지. 그러나 4천년 동안 준비한 터전 위에 오셨던 예수님에게 십자가가 웬말입니까? 하나님의 아들이 십자가를 진다는 것이 하나님의 원이 아니요, 예수님의 소원이 아닌 것을 알았다면, 믿고 가는 길에 있어서 죽음의 골짜기가 있거든 내가 먼저 가서 그 골짜기를 메우겠다는 마음을 가져야 합니다. 오늘 통일교인들은 그런가요? 따라가려고 눈치들은 잘 보지요. 그렇지만 계산은 빨라서 어이쿠, 손해날 일이면 안 해야지 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지금까지 손해투성이었습니다. 손해 대왕이었습니다. 손해 왕국을 이루어 나왔습니다.

이제 하나님을 위로해 봅시다! 아들로서 위로하자는 것입니다.이 몸을 바쳐 아들로서 일해 보자는 것입니다. 언제 자기 생명, 자기의 문제를 위해서 밤을 새워 땅을 치면서 통곡해 봤어요? 자기 생명을 두고도 그러지 못한 처지에 하나님의 일을 하는데 주저할 것이 뭐 있습니까? 또 여자들은 하나님의 딸 노릇을 다 했어요? 대한민국에는 유관순 같은 여자도 있지만, 여러분은 뜻을 위해 죽으라면 전부다 도망갈 것입니다. 거센 원수의 세계가 우리 앞에 가로 놓여서 순순히 물러가지 않습니다. 어정어정해서는 물러가지 않으니 밀고 나가지 않고는 해결이 안 됩니다. 이것이 타락한 인간의 모습입니다.

그러면 타락한 인간의 3대 소원 중의 하나가 무엇이냐? 개성복귀완성, 즉 내가 완성해야 된다는 것입니다. 완성하려면 하나님에게 심정적으로 빚진 것을 청산해야 합니다. 그러므로 십자가를 짊어져야 되는 것입니다. 이스라엘이 지은 죄를 벗기 위해서 제물의 과정을 거쳐야만 용서가 되는 것이니, 반드시 피의 대가를 치르지 않으면 안 됩니다. 눈물이라든가, 피땀이라든가, 그 대가를 치르지 않고는 절대로 속죄가 되지 않습니다. 그래서 예수님도 쉬지 말고 기도하라 했던 것입니다.

그러면 기도할 때, 편안하게 네 활개를 펴고 드러누워서 기도합니까? 무릎을 꿇고 이마를 돌에다 부딪치고, 콧등이 깨지면서라도 기도해야 합니다. 편안해서 될 것 같았으면 통일교회 문선생님은 벌써 꼴찌 됐을 것입니다. 편하지 않길 잘했지. 편하지 않았기 때문에 지금까지 나온 것입니다. 여러분은 그걸 알아야 합니다. 편안한 자리에서는 절대로 안 됩니다.

그래서 지금도 가만히 지난날을 생각해 보면 제일 그리운 것이 무엇이냐? 잘 먹고 잘 놀았던 것은 선생님 기억에는 없습니다. 아무리 잘 먹더라도 먹는 것은 배가 부르고 나면 빚이 됩니다. 할 수 없이 먹긴 먹었지만 또 빚을 진다는 마음을 가지고 먹었던 것입니다. 제일 기억에 남는 것은 몰리고, 쫓기고, 잡혀 들어가 고문 당하고 피를 토하던 자리입니다. 그 자리가 제일 기억에 남습니다. 그 자리를 기억하며 `아버지!’ 하면, 하나님의 심정이 뒤집히고 복장이 뒤집어지는 것을 느낄 수 있지만, 잘 먹고 잘 지내던 기억은 아무리 했댔자 필요없다는 것입니다. 짊어서 하는 고생은 금을 주고도 못사는 것입니다. 그리고 고생 가운데서도 참을 수있어야 합니다.

선생님이 흥남 감옥에 있을 때의 얘기를 하나 하겠습니다. 그때 선생님은 흥남 비료 공장에서 비료 가마니를 묶는 일을 하였습니다. 제일 고생스러운 것이 새끼줄로 비료 가마니를 묶는 일인데, 겨울 같은 때에 새끼줄을 사용하면 면으로 된 옷은 사흘이 못 가서 떨어집니다. 그것을 하루에 정량으로 천 삼백 개를 묶어야 하는데, 요것을 열 사람이 8시간에 해내야 했습니다. 하루 책임량이 한 사람 앞에 130개라면 이건 중노동입니다. 일반 사회 사람은 75개, 80개도 못 하는데 배의 기준으로 하라니 그것은 죽으라는 것과 같은 것입니다. 공산당 패들이 그런 일을 시키고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공산당이 어떻다는 것을 알아야 됩니다. 선생님이 여당 지지자는 아니지만 요즈음 대한민국의 야당이 세상 모르고 날뛰고 있습니다. 우리가 누더기만 입고서라도 3년이면 3년, 5년이면 5년을 중심삼고 있는 재산을 다 팔아서라도 나라를 구해야 합니다. 총끝이 모가지에 들어오고 있는 것을 모르고 있습니다. 세상 모르는 사람들이 문제가 생기면 먼저 도망갈 패들입니다. 우린 그런 사람들을 믿을 수 없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그걸 알아야 됩니다.

20-103
어느 것 하나 귀하지 않은 것이 없는 감옥
선생님이 있던 감옥에서는 유산 암모니아를 만지기 때문에 옷자락에 묻게 되면 냄새도 지독하지만 냄새보다도 그 옷은 하루만에 구멍이 뚫어집니다. 옷자락이 뚫어질 정도의 모진 일인 것입니다. 구멍이 뚫어지면 기워야 하는데, 손가락으로 깁습니까?

그곳에서 제일 그리운 것이 무엇이냐? 물론 밥입니다. 거기에 누가 면회 왔다 하면 물론 사연도 그립겠지만 그 사람 얼굴보다도 손부터 보게 됩니다. 군대 생활을 해본 사람은 그 심정을 좀 알 것입니다. 누가 면회 왔다 하면, 뭘 입고 왔나 하는 것이 문제가 아니라 뭣을 갖고 왔느냐를 본다는 것입니다. 그건 당해 보지 않은 사람은 모를 것입니다. 여러분이 일주일 금식을 할 때, 7일째 되는 날 밤 12시 되기 10분 전의 기준이 어떠하던가요? 그 자리에서 죽을 보게 되면, 세상의 무엇보다 좋아할 것입니다. 얼마나 간절합니까?

먹을 것이 제일 그립지만 그 다음에는 무엇이 그리우냐 하면 바늘입니다. 옷을 꿰매려 해도 바늘이 있나, 실이 있나? 없는 것 천지이기에 감옥살이 오래 한 사람은 상거지가 된다는 말이 있습니다. 지나가다가 천조각이 있으면 쇠똥이 묻어 있든 말든 집어 드는 것입니다. 부끄러움이니 자존심이니 얘기해 봐야 소용 없어요. 부끄러움 같은 것은 진작에 작별했는데 부끄러움이 어디 있겠습니까? 도리어 자랑입니다. 여러분, 그런 기분 알겠어요? 그런 감옥살이를 5년 이상 10년 쯤 사람들의 보자기를 보면 별것이 다 있습니다. 크지는 않지만, 살림살이를 다 갖추고 있습니다.

바늘이 어디 하나 있다 하면 교섭을 합니다. 그래서 하나 구한 것도 이걸 한번 쓰려면 `와이로’를 써야 되는 판입니다. 그것도 아는 사람이 아니면 안 빌려 줍니다. 그래서 어느 감방에 바늘이 하나 생겼다 하면 이건 화제거리가 됩니다. 그것을 가까운 사람을 통해서 빌려 왔든, 새로 들어온 사람이 가져왔든 간에 소동이 일어납니다. `내가 어른이다. 고참이다’ 하면서 달려드니 빌려온 사람은 깁지도 못하고 구경만 하고 있다가 주인이 달라면 돌려 주어야 하는 판국이었습니다. 선생님도 그때 바늘을 보고 이 이상의 가치를 지닌 것이 어디 있을까 하고 생각했을 정도였습니다.

선생님은 거울을 통해 갈라진 이빨을 볼 적마다 생각나는 것이 있습니다. 가는 철사 줄로 가마니를 꿰매는데 이 철사를 끼울 수 있는 골기가 있습니다. 그것은 강철입니다. 그것으로 바늘을 만들려고 `도록꼬’가 다니는 레일 위에 놓고 톡톡 두드리면 납작해지는 것입니다. 그런데 납작해졌다 해도 구멍을 뚫을 수가 없기 때문에 구부려서 만들어야 했습니다. 이것을 구부리는 데 잘 구부려야지 잘못하여 딱 하고 부러지는 날에는 십년 공부 나무아미타불이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렇게도 해보고 저렇게도 해보고 해서 겨우 만들었습니다. 정말 어려운 것입니다. 이러한 일은 직접 당해 보지 않은 사람은 모를 것입니다. 말만 들어서는 모른다는 것입니다. 거기 공장 높은 곳에는 유리창이 있습니다. 유리가 필요할 땐 그저 유리창을 깨뜨리는 겁니다. 이건 선생님이 했다는 것이 아니고 다른 사람들이 그런 장난도 했다는 것입니다. (웃음) 간수야 있건 없건…. 간수들도 어쩔 수 있나요? 자기들이 못 해주니 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이렇게 해서 유리 조각을 하나 구해서 가마니를 타개어 놓지만 구멍을 맞추어 꿰매어 나갈 수가 있나요? 할 수 없이 비료 가마니를 펼쳐서 구멍을 다시 뚫는데 철사 줄이 중간에서 꼬부라져서 끝을 삼분의 일쯤 남겨 놓고 딱 부러지는 것이었습니다. 할 수 없이 좀 튼튼한 철사줄을 골라 가지고 떠야 하는데, 일일이 뜨자니까 자꾸 꼬여서 일을 할 수가 있나요? 그래서 와이어 줄을 이빨로 물어서 자르다가 갈라진 이빨입니다. 잊을 수 없는 기념품입니다. 선생님은 거울을 볼 적마다 그 생각이 납니다. 그런데 오늘날 바느질이 문제입니까? 바느질하는 통일교 아주머니들 이제부터는 바늘님 오셨습니까? (웃음) 참 고마운 실이구나라고 해야 되는 것입니다.

이렇게 일을 계속하고 있는데 일년 반이 지난 어느날 가마니를 꿰매어 들어가는데 이 가마니에 바늘이 하나 있었습니다. 꿰매는 가마니는 농촌에서 전부 가져 오는데, 막 모아서 가져 오는 바람에 거기에 떨어진 바늘이 휩싸여 왔었나 봅니다. 그래서 바늘 하나를 얻었습니다. 그 소문이 감옥의 8백명, 천명의 수인들에게 `야 누구에게 바늘 생겼다’ 하고 소문이 주욱 퍼졌습니다. 바늘이 생겼을 때 하나님 앞에 천명 받은 때처럼 기뻤습니다. 거기 있는 사람은 아무 것이나 다 할 줄 압니다. 선생님은 팬티도 잘 만들어요. 학교 다닐 때 책을 싸는 보자기는 좋은 팬티감이었습니다. (웃음) 선생님은 뜨개질도 할 줄 압니다. 못 하는 것 없이 다 할 줄 알아요, 여자들 신세 안 지고도 혼자 멋지게 살 수 있다 이겁니다.

20-105
하나님을 위로해 드리려면 같은 사정에 처해야
예수님을 믿는 여러분들은 예수님 대신자다 이렇게 생각해야 합니다. 그리고 예수님이 민족을 위해 눈물짓던 것을 비록 가인의 입장일 망정 흉내라도 내보세요. 흉내를 내다 보면 `흉내’가 `진내’가 되는 것입니다. 그러지 않고는 예수님의 심정을 모릅니다.

배고파 보지 않고는 배고픈 자의 심정을 모릅니다. 같은 입장을 당해 보지 않고는 모르는 것입니다. 여러분이 메시아의 사정이 어떻다는 것을 알려면 메시아와 같은 입장에 서 보아야 합니다. 성신이면 성신의 자리에서 보아야 합니다. 또 하나님이면 하나님의 입장에 서 보지 않으면 그 사정을 모르는 것입니다. 그럼 어떻게 그와 같은 입장에 설 수 있느냐? 그 방법을 가르쳐 주는 것이 통일교회 원리입니다.

여러분은 하나님을 위로해야 합니다. 하나님을 위로하지 않고, 인간들이 하나님을 배반한 빚을 청산하지 않고 어떻게 천국에 갈 수 있겠습니까? 죄를 청산하지 않고 천국을 가겠다고 한다면 그건 도적놈의 심보와 다름없습니다.

그러므로 예수가 쫓기고 몰림을 당했듯이 여러분들도 쫓기고 몰림을 당해 보라는 것입니다. 나쁜 사람한테 이용도 당해 보고, 나라를 위하여, 민족을 위하여, 세계를 위하여, 공적인 기준에서 쫓겨 보라는 것입니다. 그렇게 쫓기게 될 때에도 서러워 말라는 것입니다.

여러분들 4월이 지나가게 되면 기도하면서 지금까지의 일생을 죽 회상해 보세요. 4월은 언제나 한 고비를 넘어가는 때입니다. 여러분이 지나간 일을 죽 회상해 보면 수많은 일들이 있을 겁니다. 몰리고 쫓기며 이렇게 복귀의 길을 가는 것이구나 하고 느끼게 될 것입니다. 그렇게 핍박당할 때 하나님이 `네가 그렇게 당해도 싸다’ 하는 생활을 해 왔느냐, 아니면 내가 이런 자리에 있을 때, 하나님이 같이할 수 있으며, 내가 눈물 흘릴 때 하나님이 같이 눈물 흘리시고, 내가 슬퍼할 때 하나님이 같이 슬퍼하실 수 있는 생활을 해 왔느냐를 생각해 볼 때, 그런 생활을 못해 왔다면 회개해야 되겠습니다.

여러분이 통일교회에 들어와 원리를 배운 목적은 하나님을 위로하기 위한 것입니다. 그러면 하나님을 어떻게 위로할 것인가? 여러분들이 대한민국 삼천만 민족의 생명을 책임지기 위해 죽기를 각오하고 나갈 수 있어야 합니다. 밤이나 낮이나 대한민국 삼천만 민족을 위해 기도를 해야 합니다. 나라를 살리는 일이나 선의 길을 개척하는 데 있어서 가로막는 악당들을 몰아내기 위해서 온갖 정성을 다해야 합니다. 나아가 통일교인들은 세계를 책임져야 합니다. 예수님이 책임지지 못했으니 통일교회가 책임져 보자는 것입니다. 신을 부정하는 공산당을 때려잡자는 것입니다. 공산당과 총칼을 맞댄 일선에서 쓰러지더라도 때려잡자는 것입니다. 그래서 선생님은 4,5년 전부터 외국에 돌아 다녔지만 그들을 생각하면 기분이 나빠서 못 돌아다녀요. 국내에 있는 원수들이 문제가 아닙니다. 국외에 있는 원수가 노리고 있다는 사실을 우리는 알아야 합니다.

이러한 환경에서 통일교회가 무얼 할 것인가? 이 민족이 갖지 못한 하나님의 인연과 심정을 이 민족 가운데 세우고, 세계 인류가 생각하지 못한 하늘의 인연을 이 땅 위에 세워 놓아야 합니다. 그렇게 될 때 여러분들이 하는 일 자체가 하나님을 위로할 수 있는 것입니다.

20-106
끝날에 있을 세 가지 심판
결론을 지어 말하자면 우리는 빚을 졌습니다. 하나님 말씀으로 지음받은 인간은 그 말씀의 결실을 이루어 놓지 못했습니다. 그러므로 여러분은 원리 법도에 의해서 아담은 이러해야 되고 완성한 인간은 이래야 된다 라는 기준을 세워야 됩니다. 말씀의 결실을 이루기 위해서는 실체가 되어야 하는데, 그 실체는 사탄과 싸워서 이기고 하나님과 사랑을 관계를 맺어야만 됩니다.

그렇기 때문에 끝날에는 무얼 하느냐 하면 진리 심판, 심정 시판을 하게 됩니다. 여러분이 하나님을 위로하는 위로의 실체가 되기 위해서는 그러한 심판의 조건을 전부 다 갖추어야 합니다. 예수님이 이 땅에 오셔서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느니라(요 14:6)”고 말씀하신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바로 진리의 예수님이요, 생명의 예수님이라는 것이니, 진리는 말씀이요, 생명은 실체를 두고 말하는 것입니다. 그다음에는 사랑입니다. `나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여기에는 하나님의 사랑이란 말이 없습니다. 즉 나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요, 사랑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 앞에 못갑니다’라고 `사랑’을 첨부했으면 전부가 들어갔을 텐데….

지금까지 세계에서 20세기 문화세계를 창조하여 선진국이라고 자랑하는 국가들이 자기네들은 무슨 철학이나 사상도 본받을 것이 없다고 합니다. 그러니 그것들은 하나님의 진리로 혁명을 해야 할 권내에 있는 것입니다. 공산주의 이념도 마찬가지로 하나님이 기뻐할 수 있는 진리가 아닙니다. 오늘날의 사회를 볼 때, 하나의 진리의 말씀이 일상생활에 연결되어서 일상생활이 내가 소망하던 진리를 가지고 사는구나. 내가 소원하던 인연의 터전이 진리의 인연으로 말미암아 되었구나 할 수 있는 사회가 되었습니까?

우리 통일교회 교인들은 세상 사람과 다릅니다. 우리는 세상 사람들이 모르는 말을 많이 합니다. 영이니, 실체 대상이니, 탕감복귀니 하는 그들이 알 수 없는 말들이 많습니다. 요전에 어떤 유명한 사람에게 하나님의 뜻이 무엇이냐고 물었더니 어렵고도 쉬운 질문이라고 하면서 우물우물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여러분들에게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가, 참된 인생길은 무엇인가라고 질문할 때 `이건 이렇다’고 대답을 할 것입니다. 이 점이 그들과 다르다는 거예요. 여러분들은 반드시 목적을 두고 가지만, 오늘 인간 세상은 그렇지 않습니다. 뜬구름과 마찬가지로 동풍이 불면 서쪽으로 몰려 가는 것입니다. 우리의 말 자체도 다릅니다. 우리가 갖고 있는 세계관, 인생관, 국가관, 우주관도 다릅니다. 거기에 대해서 일반 사람들은 통일교회 사람들과 말할 상대가 못 됩니다.

여기에 처음 나온 사람들은 선생님이 하는 말을 잘 알아듣지 못할 것입니다. 한바탕 원리의 골자를 얘기하면 알 것도 같고 모를 것도 같아서 마치 무슨 비행기를 타고 둥둥 떠다니는 것처럼 어리둥절할 것입니다.

하나님이 기뻐할 수 있는 진리, 진리로 화하게 하는 생활 환경과 진리로 화하지 못하게 하는 생활 환경을 분별하 수 있어야 합니다. 하나님이 `야 아담아’ 하고 부르실 때 무화과나무 뒤에서 숨죽이며 `예’ 하고 살그머니 대답하면 안 됩니다. `아담아’ 하고 부르실 때 우렁찬 목소리로 `예, 예, 예!’ 하고 힘차게 대답할 수 있어야 했습니다. 아담이 그랬으면 얼마나 좋았겠습니까? 그러니 여러분은 `예, 예!’ 하고 힘차게 대답할 수 있어야 됩니다.

우리는 세상 천지에 자랑할 수 있는 마음, 하나님의 말씀에 화답할 수 있는 우리 말을 못 가졌습니다. 우리는 세계를 중심삼은 생활을 하지 않으면 곤란합니다. 그러므로 통일교회의 식구들은 종자가 달라야 합니다. 종자가 다르다고 해서 눈이 네 개라는 것은 아닙니다.

그 다음에는 인격 심판입니다. 인간의 타락이 무엇이며, 타락으로 인하여 무엇이 침범당했는가? 먼저 말씀이 침범당했습니다. 사탄은 에덴 동산에서 `야! 선악과를 따 먹으면 얼마나 좋은데. 그걸 따 먹으면 하나님과 같이 눈이 밝아져 가지고 하나님과 같은 자리에 설 수 있기 때문에 하나님이 시기해서 따먹지 못하게 했을 거다’라고 인간을 유혹했습니다. 그것 참 그럴 듯합니다. 선악과를 따먹고 인간의 눈이 밝아지면 걱정이 없거든. 정말 그럴싸 하구나. 그리하여 말이 침범당했습니다. 말이 침범당하면 몸뚱이도 침범당합니다. 선악과를 따먹은 것이 아니라 몸뚱이를 침범당한 것이요, 실체가 침범당한 것입니다. 선으로부터 침범당한 게 아니고 악으로부터 침범당했습니다.

악이 침범할 때 막아내야지 이게 뭡니까? 자기 몸을 가누지 못하겠으면 도망쳐야 했습니다. 그런데 사탄에게 맞아 가지고 몸이 넘어갔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여러분은 마음과 몸이 다릅니다. 본래 인간은 누구나 타락하기를 싫어하기를 것입니다. 그래서 인격을 완성하려면 마음과 몸이 하나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20-109
위로의 대상이 되려면 실적을 갖추어야
여러분의 마음이 하자는 대로 몸을 움직이면 선한 인간이 됩니다.

그리하여 악을 용납할 수 없다고 다짐하며 당당히 심판할 수 있는 권한을 가져야 됩니다. 아담도 그래야 했던 것입니다. 원래 천사장은 인간의 종이니 문제가 아닙니다. 그러므로 여러분은 종인 사탄을 지배해야 됩니다. 우리 인간은 사탄인 타락한 천사장한테 유린당했기 때문에 여러분은 유린 당한 것을 그렇지 않았던 상태로 복귀해야 됩니다. 여러분을 사탄세계의 악의 소굴에 갖다 놓도 나는 악의 침범을 안 받는다. 내가 악을 잡아 굴복시키는 것이지 악이 내 생명을 못 빼앗아간다고 말할 수 있어야 합니다.

오늘날 기성교회에서 통일교회를 반대합니다. 통일교회는 이단이니 가지 말라고 말하는데 왜 못 갑니까? 상대방을 이단이라고 비방하는 것은 같이 이단될 가망성이 있는 것입니다. 이단은 천국에 못 가는 것입니다.

호랑이한테 물려가도 정신을 차리면 산다는 말이 있듯이 여러분은 사탄에게 침범받았던 동기를 기억하고 정신을 차려야 합니다. 통일교회가 어떻고 어떻다고 세상에서 떠들고 있지만 해보라는 것입니다. 기진맥진할 때까지 해보라는 것입니다. 맨처음에는 야단하지만 일년이 가고 이념이 가면 언제 그랬냐는 듯이 다 지나가는 것입니다. 통일교회는 하나입니다. 오히려 우리는 점점 더 당당해지는 것입니다.

하나님도 치지 못하고 사탄도 치지 못하며 오히려, 인간이 가는 길을 영원히 보장할 수 밖에 없는 세계, 심판의 공법이 관계할 수 없는 심정세계, 인간이 그런 심정세계를 만들지 못하고 타락했습니다. 타락으로 말미암아 세 가지를 잃어버렸습니다. 말씀을 잃어버렸고, 실체를 잃어버렸고, 심정을 잃어버렸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의 인연으로 지음받은 아들로서의 아담이 하나님을 위로할 수 있는 대상의 자리를 잃어버렸기 때문에, 여러분들은 세계적으로 이것을 탕감하지 않으면 안 됩니다. 그런 책임을 짊어지고 오시는 분이 메시아이기 때문에 여러분은 메시아를 대신하는 입장에 서야 합니다.

포도나무 줄기와 포도나무 가지가 뭐가 다릅니까? 같은 것입니다. 뿌리가 같은 것이니, 뿌리가 고통을 받으면 잎사귀와 가지도 고통을 받지 않을 수 없습니다. 여러분이 메시아와 같은 레벨에서 같은 생활 감정, 같은 사연으로 어우러질 수 있는 사람이 되지 않고는 하나님을 위로할 수 없습니다. 그런 가지를 통해서 열매가 맺혀지는 것이요, 그러한 열매가 나와야만 하나님을 위로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열매란 실적을 말하는 것이니, 하나님을 위로해 드리려면 실적이 없어 가지고는 안 됩니다. 즉 실적이 있어야만, 하나님 앞에 위로의 대상이 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이것을 볼 때 우리는 모두 하나님 앞에 심정적으로 빚을 졌습니다. 우리가 져야 할 고통의 십자가, 우리가 맞아야 할 모든 고통의 자리를 하나님이 우리를 대신하여 맞아 나오셨습니다. 참된 말씀의 주체이신 하나님께서 지금까지 이런 일을 해 나오셨습니다. 인간이 가야할 길을 다 닦아놓고 탕감의 고개를 넘는 방법을 가르쳐 주시고 준비를 해 나오신 하나님께 여러분은 어떻게 보답할 것인가?

그러므로 우리가 최후에 남겨야 할 것은 하나님의 아들딸로서 참다운 선의 조상이 되어 이 땅 위에 하늘나라의 법도를 세울 수 있는 충신의 도리를 세워 이것을 하나님 앞에 다 갖추어 드리는 책임자가 되어야 합니다. 그리하여 그 사명을 다하고 하나님 앞에 가게 될 때, 우리 인간은 하늘을 위로하는 대상이 될 수 있다는 것을 여러분들이 확실히 알아야 되겠습니다. 알겠어요?

20-110
기 도
아버지의 소원이 출발을 보았사오나 그 소원은 아직까지 결말을 보지 못했습니다. 아버님의 그 소원과 더불어 그리움이 출발을 보았사오나 슬픔이 그리움을 전부 다 소멸시킨 것을 저희들은 알았사옵니다. 이 타락된 세상에서 아버지의 소원과 아버지의 그리움을 내 일신에 다시 환기시켜서 나로 말미암아 타락된 세계에 대하여 울타리가 되고 방파제가 되어서, 내가 품을 수 있는 가정과 내가 품을 수 있는 사회권내에서는 그러한 역사적인 한이 없게 하겠다고 몸부림칠 줄 아는 당신의 아들딸들이 되게 허락하여 주시옵기를 간절히 바라옵고 원하옵니다.

이 땅에 당신의 아들로서 오시는 분은 세계를 대신해서 이러한 책임을 짊어져야 한다는 것을 아옵니다. 당신의 아들딸이 되기를 원하는 저희들은 이런 우주사적인 중심존재와 더불어, 자기가 처해 있는 환경에서 그러한 인연의 꿈을 만들기 위해서 본성의 심정과 아버지를 중심삼아 옛날 에덴 동산을 그리워하면서, 저희 자체의 환경에서 이것을 개척하겠다고 노력할 줄 아는 당신의 자녀들 되게 허락하여 주시옵기를, 아버님, 간절히 바라옵고 원하옵나이다.

오늘은 거룩한 날이었사오니 만민을 대표해 모이는 수많은 종교인들 위에 축복하여 주시옵고, 하나님을 아버지라 부르는 그들이 진정 아버지의 내정을 알 수 있게 허락하여 주시옵소서. 아버지의 사정이 얼마나 한스러웠고, 얼마나 딱했다는 사실을 알게 허락하여 주시옵소서. 6천년 역사의 고빗길 가운데 아버지께서 눈물을 흘리지 않은 곳이 없다는 것을 알게 허락하여 주옵소서.

오늘날 한국의 삼천만 민족이 이와 같은 입장에서도 아직까지 남아 있다는 사실은 이 민족의 선조들이 잘하여서 그런 것이 아닙니다. 그 배후에는 피어린 투쟁과 끊임없는 눈물로써, 이 나라 이 민족을 염려하고 사랑하시는 아버님의 심정의 터전이 있음으로 말미암아 이 민족이 이렇게 남아 있다는 것을 알 수 있게 허락하여 주시옵기를 간절히 바라옵니다. 이러한 내용이 있다는 것을 이 민족에게 깨우쳐 주어야 하는 것이 통일교회에 있는 당신의 아들딸들의 사명인 것을 알고 있사옵니다. 이 사명을 위하여서 저희들은 어떠한 어려운 환경에 부딪치더라도 이를 극복해 나가며 최후의 실적을 세워서 아버님을 위로할 수 있는 대상이 되어야 하겠습니다. 아버님, 저희들이 전진하여 이러한 책임을 스스로 느낄 수있게 허락하여 주시옵기를 간절히 바라옵고 원하옵니다.

오늘은 아버님을 위로하지 않으면 안 될 책임을 강조했습니다. 아버님, 당신의 사연이 얼마나 처량했던가를 저희는 알겠사옵니다. 당신이 분부하시기 위하여 기도하시던 그 마음도 알겠사옵니다. 약하고 보잘것없는 저희들이 찾아와서 엄청난 사연을 알고 엄청난 사명을 짊어질 때, 당신이 마음졸이던 그 사정이 어떻다는 것을 알게 되었사옵니다. 당신의 마음을 알고 그 책임을 짊어지고 나선 저희들은 죽음길도 마다 않고 가야할 입장인 것을 알았습니다.

아버지! 이 길을 걸어 나온 수십년 역사과정에 있어서 눈물어린 장면도 있었고, 비통한 사연도 많았습니다. 당신이 없었다면 갈 수 없었던 그런 사연도 많았사옵니다. 그러나 천년, 2천년 역사의 흐름 가운데 저희가 외로운 자리에 설 때마다 이 민족을 보호하시고 지켜 주시는 아버지의 심정의 터전이 있었기 때문에 저희들은 오늘날까지 나온 것을 알고 있사옵니다. (여기에서 녹음이 끊어졌음)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