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96 to 20-237: 하늘편에 서자

하늘편에 서자
1968.06.09 (일), 한국 전본부교회

20-196
하늘편에 서자
마태복음 27:27-31

[기 도(Ⅰ)]

이날은 아버님이 기억하실 경축의 날이옵니다. 이 날을 만민이 아버님을 모시고 안식할 수 있는 참된 축하의 날이 되게 허락하여 주시옵소서.

4백만이 살고 있는 이 서울 도성에 당신의 심정에 가까워질 수 있는 길을 모색하기 위하여 갈구하는 수많은 영혼들이 있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그 자리 곳곳마다 당신의 거룩하심을 나타내시어 생명의 인연이 영원히 그들의 가슴가슴에 엉클어지게 하여 주시옵소서.

한 생명으로 말미암아 부활의 은혜를 입어 뭇 생명이 소생할 수 있도록, 아버지의 권한을 나타내시옵기길 간절히 바라옵고 원하옵니다.

울려 나오는 종소리에 따라 모두 무릎을 꿇고 아버지 앞에 경배하는 수많은 무리들, 아버지께서 친히 자랑할 수 있는 자녀들이 되게 하여 주시옵기를 이 시간 아버지 앞에 간절히 부탁드리옵니다.

교회도 많았고, 당신의 이름을 찬양하는 사람도 많았고, 정성어린 최후의 심정을 기울여 절규하던 무리도 많았습니다. 그러나 진정 당신의 심정을 파헤쳐 당신의 마음을 붙들고, 당신을 위로할 수 있는 참다운 아들딸이 얼마나 있었사옵니까? 그 심정을 생각하며 이 시간 아버지의 긍휼을 다시 바라는 불초의 몸들이 여기에 또 모였사옵니다. 저희와의 부자의 인연으로 인해 슬픔을 당하시던 아버지, 저희들을 다시 한번 용납하여 주시옵소서.

저희들의 소원은 당신의 깊은 심정 가운데 들어가 당신의 사무쳤던 원한의 심정을 위안해 드리는 것이옵니다. 또한 당신의 마음을 붙들고 위로해 드릴 수 있는 진정한 아들과 진정한 딸이 되는 것이옵니다.

이와 같이 아버님을 모실 수 있는 자리가 영광의 자리인 것을 저희는 알았고, 아버지께서 그런 아들딸을 찾는 자리가 사랑의 자리인 것을 저희들이 알았사옵니다. 심정의 인연으로 인해 생명의 인연이 엇갈릴 수 있는 아버지와 아들딸이 만나 기쁨의 모든 심정을 털어 놓을 수 있는 정다운 시간이 저희들은 그립나이다.

아버님, 여기에 모인 당신의 자녀들을 굽어살펴 보시옵소서. 이들은 누구를 위하여 온 사람들이 아니옵니다. 세상의 그 무엇을 바라고 온 사람들도 아니옵고, 세상의 명예와 부귀영화를 찾아 온 사람들도 아니옵니다. 아버지 앞에 나서기 위해 세상의 인연을 다 저버리고 넘어온 사람들이옵니다. 오로지 당신만이 저희들이 전부요, 오로지 당신의 심정만이 저희의 위로의 내용인 것을 확실히 알고 부복한 모습들이오니, 아버님, 굽어살펴 주시옵소서.

이제 손에 손을 붙들고 당신의 아들이라 딸이라 할 수 있는 분부가 있기를 바라는 마음 간절하게 허락하여 주옵소서.

생애를 거쳐오면서 한에 멍든 마음을 억제하고 참아 나오던 사정을 털어 놓을 수 있는 당신의 기쁨의 아들딸이 되게 하여 주옵길 간절히 바라옵니다.

지금까지 저희들의 마음에 쌓였던 한을 다 헤쳐 버리고 그 마음 가운데 아버지의 6천년의 한을 옮겨 놓을 수 있는 저희가 되게 하여 주옵시고, 그럴 수 있는 이 자리가 되게 하여 주옵기를, 아버님, 간절히 바라옵고 원하옵니다.

저희에게는 아무것도 없사오니 당신만이 전체가 되시옵소서. 저희의 중심도 아버지께서 되시옵고, 전체의 중심도 아버지께서 되시옵길 간절히 바라옵고 원하옵니다.

오늘은 거룩한 날이옵니다. 아버지께서 수많은 민족에게 복을 베풀어 주시려는 간절한 마음이 있어도 당신의 복을 주실 수 없는 슬픔의 제단들이 얼마나 많은가를 저희들이 깨달으면 깨달을수록, 거기에 비례하여 아버지의 마음을 위로해 드릴 수 있는 충효의 심정을 더하지 않으면 안 될 저희들임을 다시 한번 깨달을 수 있는 자녀들 되게 하여 주옵기를 간절히 바라옵고 원하옵니다.

남한 각지에 널려 이 시간을 흠모하면서, 이곳을 그리워하면서 무릎을 꿇고 경배하는 당신의 자녀들을 기억하여 주시옵소서. 그들이 원하는 모든 것이 당신이 원하는 것과 일치되게 하여 주시옵고, 당신의 사정과 통함으로 인해 당신의 품에 안길 수 있는 자녀들 되게 하여 주옵기를, 아버님, 간절히 바라옵고 원하옵니다. 이날을 아버지 앞에 맡기오니 친히 주관하여 주시옵소서.

해외에 널리어 외로운 길에서 싸우다 지친 몸을 이끌고 아버지를 향하여 마음을 모으는 당신의 자녀들을 기억하여 주옵길 간절히 바라옵니다. 그들이 최후의 승리를 다짐할 수 있는 세계 앞에 있어서 부족함이 없게 하여 주시옵고, 아버지의 심정에 일치될 수 있게끔, 아버지, 언제나 가꾸고 거느려 주시옵길 간절히 부탁드리옵니다.

이 시간 아버지 앞에 전체를 맡기오니 친히 주관하여 주옵길 간절히 바라옵고 원하오며, 이 시간을 중심삼고 연결되는 역사적인 서러움과 시대적인 욕구와 미래적인 사명을 책임질 수 있는 각자의 심령이 되게 하여 주시옵소서.

아버지 앞에 몽땅 드리는 이 시간이 되고, 아버지로부터 새로운 명령을 받을 수 있는 이 시간이 되게 하여 주시옵길 간절히 바라옵고 원하옵니다. 친히 찾아오시어서 저희의 심령 동산의 주인이 되시옵고, 저희 자체는 아버지의 품에 안길 수 있고 아버지 앞에 친히 주관받을 수 있는 각자의 모습들이 되게 허락하여 주시옵길 간절히 부탁드립니다.

이날 전체를 친히 영광 가운데서 주관하여 주옵길 간절히 부탁드리면서, 모든 말씀 참부모의 성호 받들어서 아뢰었사옵나이다. 아멘.

20-198
기 도(Ⅱ)
수많은 백성들 위에 아버지의 자비를 내려 주시옵소서, 수많은 교단들 위에 당신의 경륜이 임하시옵고, 뭇 생명들 가운데에 당신의 영원하신 사랑의 인연이 깃들게 하여 주시옵소서.

이 시간 보잘것없는 소수의 무리들이 아버지의 존전에 모였습니다. 저희의 몸과 마음은 세상과 화하기에 좋은 조건을 갖고 아버지와 먼 거리에 설 수밖에 없는 인연을 품은 채로 부복하였사오니, 아버님, 분리시켜 주옵소서. 상처가 심하면 그 상처에 당신의 긍휼이 미치어 주시옵고, 당신 앞에 갖춰야 할 모양을 갖추지 못한 그 모습을 보시고 저희들은 위로하여 주옵길 간절히 바라옵고 원하옵니다. 단 한 가지도 아버지 앞에 내놓을 수 없는 불비하고 면목이 없는 자신들임에 슬퍼하고 탄식할 수 있는 마음을 갖게 하여 주옵소서. 깊은 심성에 당신을 흠모하는 마음이 싹트게 허락하여 주시옵고, 본연의 에덴 동산에서 부르시던 아버지의 음성을 듣고 저희의 조상들이 느끼지 못하였던 아버지의 거룩함을 느낄 수 있게 하여 주시옵소서.

아버지의 마음 가운데 있는, 저희를 품고 싶은 사랑과 그리움의 심정을 저희들이 헤치고 거기에 안길 수 있는 천진하고 순진한 당신의 아들딸이 되게 허락하여 주시옵소서.

당신의 마음속에서 저희가 당신과의 끊을 수 없는 혈족임을 느끼시사 보고 싶은 마음을 감당할 수 없이 저희들을 품지 않을 수 없고, 찾아오지 않을 수 없게 되시옵기를 간절히 바라옵니다.

아버지, 수많은 사람들이 당신을 향해 무릎을 꿇고 경배하며 당신을 찬양하는 제단에 아버지께서 임하시기를 억천만세를 두고 고대하며 그리워해 왔다는 사실을 알고 있습니다. 그와 같은 제단들을 대표하여 보잘것없는 이 무리들이 모였사오니, 수많은 민족을 대신하고 수많은 교단을 대신하여, 아버지의 심정 가운데에 사무치는 한을 위로하기에 갈급해 하는 자녀들이 되게 하여 주옵소서.

당신의 품에 안기기에 부족함이 없다고 당신이 인정할 수 있는 모습이 되기를 얼마나 고대하고 있는가를 이 시간 느낄 줄 아는 당신의 아들딸이 되게 하여 주옵소서. 저희는 아버지라 부를 때에 뼈와 살에 사무치는, 진정한 마음에서 우러나오는 음성으로 부르지 못했사옵고, 그러한 감정과 일치된 자리에서 아버지를 붙들겠다고 달려들 수 있는 한 시간을 갖지 못했사옵니다. 이렇듯 아버지를 뚜렷이 알지 못하였사오니 아버지를 뚜렷이 인식할 수 있는 이 시간이 되게 하여 주시옵고, 아버지의 손길과 옷자락을 잡고 영원히 놓치지 않겠다고 간곡하게 사무치는 마음으로 몸부림치는 저희의 모습이 되게 하여 주시옵소서. 그러한 자리에서 아버지라 부르고 그러한 자리에서 아버지를 붙들고 통사정할 수 있는 저희가 되게 하여 주옵길, 사랑하는 아버님, 간절히 바라옵고 원하옵니다.

낙오된 인간들을 찾아오기 위해 6천년 동안 수고하신 아버지, 오늘도 부끄러운 모습으로 당신 앞에 나타나는 저희들을 용납하여 주시옵소서. 그러나 당신의 품에 안기어 당신이 가는 길을 따라가지 않고는 살 수 없는 인간이옵기에, 죽든지 살든지 이 길을 돌파하여 나가지 않으면 안 될 의무가 있는 것을 아는 저희들이기에 이 시간 다시 왔사오니, 당신의 마음에서 흘러 나오는 동정의 마음과 동정의 음성이 저희의 모든 마음을 움직이시옵고, 사랑의 손길이 저희 몸을 덮으시어서 품어 주시옵고, 권고하여 주옵기를, 아버님, 간절히 바라옵고 원하옵니다.

그런 아버지를 알지 못했고, 그런 아버지를 위로하지 못했고, 그런 아버지를 깨닫지 못했던 저희의 과거를 용납하여 주시옵소서. 이시간만이라도 아버지의 깊으신 사랑이 저희들 앞에서 멈출 수 있도록 아버지를 모셔 놓고, 아버지의 사랑을 찬양하고, 아버지의 사랑에 안기고, 아버지의 생명의 말씀에 화하여 내 자체를 잊어버리고, 아버지에 대한 생각에 잠길 수 있는 이 시간이 되게 하여 주옵길, 사랑의 아버님, 간절히 바라옵고 원하옵니다.

오늘 처해 있는 이 순간, 이 순간은 역사상의 저희 선조들이 호소하는 순간인 것을 망각하지 말게 허락하여 주시옵고, 이 시대에 봉화를 들고 나서야 할 사명이 저희에게 있음을 잊지 말게 허락하여 주옵소서. 그리하여 아버님께서 저희를 보고 믿을 수 있고, 저희들을 보고 모든 것을 맡길 수있는 그런 아들딸이 되게 하여 주옵길, 아버님, 간절히 바라옵고 원하옵니다.

이 시간 아버지 앞에 전부를 맡기었사오니 친히 주관하여 주옵고, 말씀을 전하는 당신의 심정이나 받는 저희의 심정 사이에 경계선이 없게 허락하여 주옵시고, 그것이 있다면 그 사이를 아버님께서 이으시어서 재창조할 수있는 심정의 인연을 갖추시어 아버지의 마음과 저희의 마음이 통하고, 아버지와 저희가 인연이 맺어질 수 있는 이 시간이 되게 하여 주옵길, 아버님, 간절히 바라옵고 원하옵니다.

이 시간 남한 각지에서 무릎을 꿇고 아버지를 부르면서 울부짖고 있는 당신의 자녀들을 품어 주옵소서. 아버지 앞에 생명을 다하여 충성을 바치겠다고 다짐하고, 말씀을 실천하는데 자기의 생명을 걸겠다고 맹세하는 그들의 모습 위에 아버지의 거룩하심을 나타내시옵고, 살아 계신 아버지의 모습을 증거하기에 부족함이 없는 저희의 모습으로 인도해 주시옵길 간절히 바라옵니다.

세계에 널려 있는 통일의 역군들을 굽어살펴 주시옵소서. 외로운 심정을 더듬으면서 이곳을 흠모하는 그 마음 위에 아버지의 위로와 평안이 같이하여 주시옵길 간절히 부탁드립니다.

남아진 시간 전체 위에 친히 당신의 자비와 사랑과 권고가 같이하여 주옵길 부탁드리면서, 이 모든 말씀 참부모님의 성호 받들어 간절히 기도 하였사옵나이다. 아멘.

20-201
말 씀
오늘날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세상이 하늘편이 아니라는 것을 우리들은 잘 알고 있습니다. 세상도 그렇지만 우리 개인에게 있어서도 하늘편의 것을 찾아볼 수 없는 때가 많습니다.

20-201
하늘편으로 돌아가야 할 타락 인간
양심과 몸의 싸움이 무한히 거듭되고 있다는 사실을 우리는 생애노정을 거쳐가는 생활 환경에서 많이 체험한 바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들은 아무리 어렵고 비참하고 혼란된 환경에 있을지라도 하늘편을 찾아 나가지 않으면 안 되는 것입니다. 이것은 당연한 논리입니다. 이것을 우리의 목적으로 삼고 필사적으로 성취해 내지 않으면 안 되는 것도 틀림없는 사실입니다.

현재 우리가 있는 자리에서는 아무리 생각해도 하늘편을 생각해 낼 수 없습니다. 그것은 우리에게 보이는 것이 모두가 하늘편과 반대되는 현상 뿐이요, 우리가 사는 환경이 하늘편과 관계없는 내용으로 엉클어져 있기 때문입니다. 이것을 생각하게 될 때에 하늘편을 찾아가고, 하늘편에 선다는 것이 지극히 어려운 것임을 우리들은 알게 됩니다.

우리들은 하늘과 땅, 하나님과 사탄, 선과 악의 기로에 서 있는 우리 자신을 다시 한번 회복시켜서 선을 중심삼고, 하나님을 중심삼고 나아가야 되고, 하나님편으로 돌아가야 합니다. 이러한 운명에 서 있는 것이 타락한 인생의 모습인 것을 우리들은 잘 알고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지금까지 이런 길을 모색하기 위해서 수많은 인간들은 종교라는 이름을 내세워 얼마나 하나님을 찾았고 갈구해 왔습니까? 이러한 사실을 우리들은 잘 알고있습니다.

기나긴 역사 과정에서 수많은 사람들이 그러한 일을 되풀이했습니다. 이렇듯 생활 가운데서 몸부림치면서 찾고 있는 이 일을 버릴래야 버릴 수도 없고, 그것을 또다시 거듭하지 않으면 안 될 운명에 놓여 있는 것이 타락한 후손인 우리의 인생이라는 것을 알아야 됩니다.

이와 같이 우리 인간은 지극히 불쌍하고 비참한 자리에 처해 있고, 그 누구 앞에 서서도 자기를 주장할 수 없는 입장에 처해 있다는 것을 우리들은 알아야 되겠습니다.

지금까지 땅 위의 어떤 영웅 열사가 자기의 내심으로 결심한 바를 성취하기 위해서 갖은 노력을 다해 그 목적을 완성했다 해도, 그것을 하늘편의 것이라고 하나님께 바치고 간 사람은 한 사람도 없었다는 사실을 우리는 잘 알고 있습니다. 수많은 인간들이 거듭 욕망을 품고 나왔지만 결국에는 탄식과 더불어 사라져 갔다는 역사적인 사실도 잘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이런 환경에 있어서 또다시 몸부림을 쳐 가지고 이런 환경을 기필코 타파해 버리지 않으면 안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우리의 사명이요, 우리의 책임입니다.

그러면 여기에서 문제 되는 것이 무엇이냐? 하늘편에 서기 위해서는 인간편에 서 가지고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즉 인간의 사정 가지고는 하나님의 사정과 접할 수가 없는 것이요, 인간의 인연 가지고서는 하나님의 인연과 연결지을 수 없는 것이요, 인간의 목적을 가지고는 하나님의 목적과 관계를 맺을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하늘편에 서기 위해서는, 먼저 하나님의 뜻을 생각하고 하나님의 뜻을 중심삼고 생활하고 하나님의 뜻을 이루겠다는 목표를 갖고 싸우는 입장을 취해 나가지 않으면 안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공적인 노정을 통하여 연결되는 분이시기에 사적인 것을 중심삼은 곳에는 하나님이 임하실 수 없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공적인 기준을 통하여서 더욱 큰 공적인 입장에 서게 될 때에 임재하실 수 있습니다. 또 그런 사람이 되어야 하나님 앞에 가까이 나아갈 수가 있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자고로 수많은 성인 현철들이 공적인 입장을 중심삼은 선을 강조해 가르쳤던 것입니다.

20-203
하나님이 임재하실 수 있는 자리
이런 점에서 보게 될 때에 하나님이 임하실 수 있는 공적인 자리는 어떤 자리냐? 우리 인간의 몸과 마음을 중심삼고 볼 때에 몸보다 더 공적인 입장에 있는 것이 마음입니다. 그리고 몸과 마음이 둘 다 공적인 입장에서는 내 자신이 되었다 할진대, 또다시 더 큰 공적인 입장에 서야 하는데 그것이 무엇이냐 하면 가정입니다. 그러나 가정이 내 마음과 반대된 입장에 있으면 거기에서 공적인 입장을 세운다는 것은 극히 어려운 일입니다.

그러나 공적인 기반을 세운 가정이 있다 할진대 그 가정은 민족을 중심삼은 공적인 기반 위에 서야 합니다. 민족을 중심삼은 공적 기반 위에 선 하나의 민족이 있다면 그 민족은 국가를 넘어 세계적인 공적 기반 위에 서야 된다는 것입니다. 이렇게 더 큰 기반을 세워 나가지 않으면 안 될 운명에 처해 있는 것이 타락한 인간의 생이라는 것을 우리는 알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들이 가야 할 길은 내 양심에 따라, 나 하나 중심삼아 생활하는 것으로 끝나는 것이 아닙니다. 양심을 중심삼고 몸을 주관해 가면서 생활해야 되는 것은 물론이거니와 선의 가정을 꾸미기 위하여 생활해야 되고, 선의 가정을 꾸몄다 할지라도 그 가정을 이끌어 선의 종족을 이루어야 되고, 그 선의 종족을 이끌어 선의 민족을 이루어야 되고, 더 나아가 선의 국가, 선의 세계, 선의 천주까지 끌고 나가지 않으면 안 될 내용이 우리가 가는 길 앞에 연결되어 있는 것입니다. 인간이 가야 할 길이 이렇게 어려운 길이라는 것을 오늘날 인간들은 모르고 있는 것입니다. 그저 나 하나 중심삼고 이럭저럭 사는 것이 삶의 목적이라고 생각하다가 생애를 필하는 사람이 많습니다.

이런 환경에서 우리들은 남달리 하나님권을 찾아 나가기 위한 공적 기준을 목표로 하여 생활 속에서 선의 발판을 세우기 위해 싸워 나오고 있습니다. 그 행로야말로 인간적으로 볼 때는 무한히 비참한 길이 아닐 수 없는 것입니다. 그 기준은 전체가 타협할 수 있는 기준이 아니요, 전체를 부정하고, 전체를 밟고 올라서지 않으면 안 되는 절대적인 기준입니다. 절대적인 기준이니만큼 비참함이 동반된다는 사실을 우리들은 알아야 되겠습니다.

인간들에게 이러한 공적인 행로가 연결되어 있지만, 하나님께서는 인간들에게만 이 행로를 개척하라고 요구하시는 것은 아닙니다. 물론 인간들에게 외롭고 비참한 이 자리를 맡겨 개척시키는 것도 사실이지만, 책임 전체를 인간들에게만 지우시는 것은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이 길을 앞서서 가시면서 자신의 책임을 완수하기 위하여 배후에서 많은 수고를 하고 계시다는 것입니다. 오늘날 이 땅 위에 살고 있는 많은 사람들은 이런 사실을 모르고 있습니다.

어떤 참된 사람이 있다 할 때, 사람들은 그 사람의 외적인 행동을 보고 그를 참된 사람이라고 평할 수 있을는지 모르지만, 그 사람이 참되다는 말은 듣는 자리에 나오기까지에는 수많은 투쟁의 과정이 있었고, 수많은 역경의 자리에 부딪쳤어도 거기에 굴하지 않고 결의와 맹세를 하는, 그런 고빗길이 있었다는 사실은 잘 모를 것입니다. 그러나 여러분들은 이런 사실을 잘 알아야 됩니다.

한 사람에 있어서도 그러하거늘 공적인 역사 노정을 통하여서 하늘편을 세우려 하셨던 하나님에게게 있어서는 더욱 그렇습니다. 우리가 공적인 노정을 가기를 원하시는 하나님, 그 원하시는 것이 크면 클수록 그에 비례해서 하나님은 배후에서 인간들이 알지 못하는 많은 수고를 해 오셨다는 사실을 지금까지 우리들은 모르고 살아 왔습니다.

인간들은 선을 추구해 나가는 과정에 있어서 조금이라도 낙심되든가 불안한 자리에 서게 되면 자신을 부등켜 안고 쉽게 낙망하기 일쑤였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그러한 자리에서 나를 위해 그와 같은 수고를 하고, 나를 위해 더 비참한 자리에서 나의 갈 길을 개척해 주기 위해 수고해야 한다는 사실을 확실히 안다면, 아무리 외롭고 어려운 자리, 자기 자신이 자탄할 수밖에 없는 공포의 자리라 할지라도 그럴 수 없는 것입니다. 그런 하나님과 나를 비교해 보면 하나님은 우주적인 입장에 서 계시고, 나는 개인적인 입장에 서 있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또한 하나님의 수고로움이 나와 비교되지 못할 정도로 크시다는 것을 안다면 닥쳐오는 모든 어려움을 박차고 하나님을 따라가겠다는 결심을 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것은 인간 세상의 상례를 통하여서도 알 수 있는 것입니다.

오늘날 인간들은 하나님이 계시는지 안 계시는지 모르고 있습니다. 하나님이 계신다는 것을 안다면, 하나님이 자신들의 앞길을 개척해 주기 위하여 지금도 수다한 고생을 하시고, 수다한 시련 가운데에서 외로움을 무릎 쓰고 공적인 노정을 걸어오신다는 사실을 망각해서는 안 됩니다. 믿지 않는 사람은 물론이지만 오늘날 하나님을 아버지라 부르고 하늘의 본향의 나라로 추구해 나가는 신앙의 길에 선 사람들도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이 이렇게 엄청난 공적인 역사노정을 짊어지고 오셨다는 사실을 망각해 버리고, 자기 자신이 자탄할 내용만을 가지고 하나님을 걸고 넘어가 하나님을 저주하고 하나님을 배반하였던 사실이 얼마나 많았습니까? 그런 역사적 사실이 얼마나 많이 있었는가를 우리 통일교회 교인들은 알고 있습니다.

그러면 통일교인들이 알아야 할 것이 무엇이냐? 공적인 노정에서 있어서 책임을 짊어진 하늘편을 누구보다도 먼저 알아야 된다는 것입니다.

내 사정보다도 더 어려우셨던 하나님, 우리 나라 사정보다도 더 어려우셨던 하나님, 오늘날 혼란 중인 세계의 사정보다도 더 어려운 환경에서 책임을 지고 계신 하나님이셨습니다. 그러한 하나님을 진정으로 위하는 하나님의 자녀가 있다 할진대, 하나님은 그 누구보다도 그 사람을 찾아가실 것이 틀림없습니다.

20-205
하나님의 비참함을 알아야
하나님을 아는 무리가 있다 할진대 하나님은 그 무리를 통하여 역사상의 서러움을 풀고 싶어하실 것이고, 시대의 사명을 분부하고 싶어하실 것이며, 미래의 책임을 맡기고 싶어하실 것입니다. 오늘 통일교회 식구들은 누구보다도 먼저 선두에 서서 이러한 서러움 가운데 계신 하나님, 이러한 어려움 가운데 계신 하나님, 이러한 억울하고 분한 입장에 계신 하나님이신 것을 알아야 되겠습니다.

오늘날 우리 인간에게 있어서 분하고 억울하고 원통한 사실은 어느때에 벌어지느냐? 내가 믿고 바라고 있던 일이 깨어지게 될 때이며, 혹은 나와 그와의 사이에 맺어진 혈연적 관계가 부정될 때입니다. 그 어느때보다도 그때가 가장 비참하고 비통하다는 사실을 우리는 알고 있습니다.

부모가 사랑하는 자식을 그렇게 믿고 있는데도 불구하고 그 자식이 배반하게 될 때, 그 믿음에 비례해서 부모가 받는 충격과 고충, 그리고 비참함은 이루 말할 수 없는 것입니다. 또한 생명을 걸고 서로 사랑한 사람이 배반하고 배척하며 불신할 때도 역시 말할 수 없이 비참한 것입니다. 그러한 자리에서 몸부림치는 그 고통은 그런 경험을 하지 않은 사람은 모르는 것입니다. 말만 가지고는 알 수 없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세상 일을 미루어 보아서 알 수 있습니다.

그러면 하나님이 어떻게 되어서 비참하게 되었느냐? 우리는 이것을 놓고 다시 한번 생각해 보아야 되겠습니다. 하나님은 막연한 하나님이 아닌 구체적인 하나님입니다. 또한 우리 인간과는 최고의 관계를 가진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이 기뻐하실 수 있는 것이 있다면 그것은 인간과 더불어 기쁨으로 출발해서 끝이 없는 영원을 향해 계속 나갈 수 있는 그런 출발의 기점을 보시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 출발의 기점을 인간으로 인해 잃어버린 것입니다.

하나님과 인간이 서로 기뻐할 수 있고, 행복을 노래할 수 있는 자리는 하나님을 잃어버리지 않은, 하나님을 모시는 자리입니다. 그러한 자리에서 인간은 하나님을 중심삼고 자녀의 입장으로 맺어질 인연이었는데도 불구하고, 타락함으로 말미암아 이런 모든 인연이 끊어지게 된 것입니다. 이런 점에서 볼 때에, 인간은 오늘날 하나님을 비참한 자리에 몰아낸 장본인 것입니다. 이것을 지금까지 인간들은 몰랐던 것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이 슬퍼하시되 나하고는 상관없는 자리에서 슬퍼하시고 수고하시되 제삼자의 입장에서 수고하시는 줄로 알아 왔습니다. 수고와 고통과 모든 슬픔이 인간 때문이고, 그 인간을 대표한 나 때문이었다는 사실을 우리는 확실히 몰랐습니다. 즉 하나님이 그런 입장에 선 것이 나 때문이었다는 사실을 몰랐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과거에 얼마나 비참하셨고, 오늘날에도 얼마나 비참한신지를 알고, 또한 나를 위해 그런 절망에 부딪치셨다는 사실을 확실히 알고 그런 하나님을 염려하는 사람이 있다할진대, 그 사람은 하늘편으로 안 돌아 갈래야 안 돌아 갈 수 없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그러한 하나님을 아는 `나’ 그러한 인연이 있다는 것을 확실히 깨달은 `나’ 이런 `나’가 어디에 있느냐 하는 것이 문제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온 만물을 지으시고 그 만물의 주인공으로 인간 시조를 에덴 동산에 지어 놓으셨습니다. 인간을 지으실 때는 하나님의 어떠한 희롱거리로 지으신 것이 아니었습니다. 취미로 지으신 것이 아니었습니다. 인간을 지어 만물을 대표하는 중심으로 세우게 될 때까지의 하나님의 수고와 정성은 이루 말할 수 없었다는 사실을 우리는 알아야 되겠습니다.

20-207
인간은 어떠한 존재로 지음받았는가
하나님께서는 인간을 지으실 때, 온갖 정성을 다 들이시고 또한 심혈과 당신의 생명의 핵심을 다 기울여 지으셨으며, 사랑과 애정을 몽땅 퍼부어서 지으셨습니다. 어떠한 힘 가지고도 뗄래야 뗄 수 없고, 갈라질래야 갈라질 수 없는 인연 가운데서 지으신 것입니다. 이렇게 지으신 인간이기에 그 인간을 바라보시는 하나님께서는 비로소 평화가 깃들 수 있는 것이고, 모든 정과 행복은 그 인간을 통하여서만이 깃들 수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인간의 아버지요, 인간은 하나님의 아들딸입니다. 하나님의 뼈 중의 뼈, 살 중의 살, 골수 중의 골수를 몽땅 퍼부어 지은 인간이기에 이런 인간이 하나님을 끌면 안 끌려 오실 수 없는 것이요, 또한 하나님이 인간을 끌으시면 안 끌려 갈 수 없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이러한 인연 가운데서 내용과 목적이 일치할 수 있는 인간으로 지으신 것입니다. 만일 그렇게 지어 놓은 사람을 보고 하나님이 찬양할 수 있는 어떠한 말씀이나 시가 있다면 그것은 세상의 어떤 시인이나 문인도 표현하지 못하는 최고의 작품이 될 것입니다. 그 대상은 하나님도 아니요, 만물도 아니요, 오직 만물을 대표한 인간인 것입니다.

겉보기에 아무리 흉하고 못난 사람이라도 그 사람에게는 하나님의 사랑이 흘러 넘칠 수 있고, 하나님의 생명의 말씀이 싹틀 수 있고, 하나님의 사랑의 노래가 읊어질 수 있습니다. 타락한 인간으로서는 꿈에서도 상상할 수 없을 정도로 고차적인, 하나님을 중심삼은 고귀한 가치를 지닌 인간인 것입니다. 우리는 그러한 사실을 알아야 되겠습니다. 그런 모습은 한 개인의 모습이로되 하나님은 그를 우주를 대표한 모습으로 보지 않을 수 없었다는 것입니다. 왜냐? 모든 신경을 집중해서 온갖 정성을 들여 가지고 지으셨기 때문입니다. 그러한 인류 시조의 모습이었습니다.

주위에 지어진 모든 만물은 인간에게 있어서 하나의 자극적인 상징체였습니다. 들려오는 새소리는 아담의 심정을 울려 파동시킬 수 있는 하나의 동기였습니다. 나비나 벌, 그외의 모든 만물을 아담 해와를 사랑하지 않을 수 없는 하나의 상징적인, 자극적인 상징체로 지었다는 것입니다. 불어오는 바람도 흘러가는 물도, 들에 있는 풀 한 포기도 모두가 아담 해와를 사랑한다는 그 실체의 표상체로서 지으셨습니다. 인간을 만물의 중심으로 두시고 지으셨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인간의 자리가 얼마나 복된 자리입니까? 하나님이 보시기에 자랑스러운 인간이었고, 하나님의 품에 품고는 영원히 영원히 놓지 않고 싶었던 인류 시조였습니다.

아담의 손길을 붙들고 `야! 아담아, 너와 나는 그 누구도 영원히 뗄 수 없는 인연을 가진 사이야’ 하시면서, 새로운 계획을 하고, 새로운 약속을 할 수 있는 한 시간이 있기를 고대하시던 아버지십니다.

영원 불변한 사랑의 인연 가운데 지음 받은 인간은 평화의 중심이 되고 핵심이 될 수 있는 존재입니다. 그럴 수 있다는 자신을 가지고 `천하 만상을 다 품고 사랑해야 합니다. 아버지와 아들딸이 손에 손을 맞잡고 심정이 사무친 가운데 `아담아!’ `네, 아버지!’ 하면서 천지의 모든 기업을 상속해 주고 그것을 받을 수 있는 한 시간을 하나님은 얼마나 고대하셨습니까? 이런 자리를 갖고 싶으신 것이 하나님의 소원이었습니다. 그러나 이런 소원의 한 날, 하나님께서 고대하시던 소원의 한 날을 이루지 못한 채 인간은 타락해 버렸습니다. 즉 그런 사랑의 품을 동경하던 아담 해와가 타락해서 죽어 벌렸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이요, 기쁨의 전체였던 그 아담 해와가 타락으로 인해 사망세계로 떨어진 것입니다. 죽었다는 것입니다.

지금까지 사랑하는 자녀가 죽은 것을 보시고 저주로 돌이켜야 할 입장에 섰던 하나님, 사랑하는 자식을 잃어버리고 자녀의 인연으로 지었던 인간이 일시에 저주의 조건으로 등장하는 이런 비참한 입장에 선 하나님, 아들을 아들이라 할 수 없고, 딸을 딸이라 할 수 없으며, 사랑의 인연 가운데 몽땅내 손으로 품을 수있던 인간을 영원히 품을래야 품을 수 없게된 그 인간의 모습을 바라보아야 했던 하나님, 하나님을 이렇게 비참한 지경에 떨어지게한 것이 인간시조의 타락이었음을 우리는 알아야 되겠습니다.

20-209
부모의 심정
오늘날 그 어떤 문학가가 표현하려 해도 표현할 수 없는 그런 고차적인 사랑과 고차적인 가치의 권한이 타락으로 말미암아 이렇게 변질되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인간의 타락을 목격한 분이 누구냐 하면 그 누구도 아닌 바로 아버지 입장에 계시는 하나님이십니다.

자식을 낳아 길러 본 부모들은 알 것입니다. 애지중지한 그 아들딸을 통하여 복을 받고 싶고 행복도 느끼고 싶을 것입니다. 또한 기뻐하고 복받을 수 있는 기준이 있으면 그 아들딸에게 영원히 남겨주고 싶을 것입니다. 그러한 소망의 마음을 가지고 그 아들딸이 되기를 타락한 인간도 바라고 있습니다. 밤이나 낮이나 그 아들딸이 고이 자라, 만국으로부터 높임을 받고 만세에 칭찬을 받을 수 있는 아들딸이 상처를 입을까 보호하고 애달픈 심정으로 초조해 하는 것이 부모의 마음입니다. 타락한 부모의 마음도 그렇다는 것입니다.

품 안에서 젖을 먹여 키우는 어머니의 간절한 마음, 자식이 똥 싸고 오줌을 싸서 냄새가 나더라도 사랑으로 그 환경을 잊어버릴 수 있는 것이 부모의 마음입니다. 타락한 부모가 자식을 생각하는 마음도 그러하거늘 하물며 사랑의 주체 되시는 하나님께서 본연의 심정을 통하여 아담과 해와를 사랑하고 싶었던 그 마음이 얼마나 간절했겠습니까? 여러분, 한번 생각해 보십시오.

여러분들이 애기를 품고 키울 때에 잠자리에서도 노래를 불러주고 혼잣말로 얘기도 해주며 잘되기를 바라는 그 마음은, 부모라면 누구나 가지고 있을 것입니다. 아무리 못나고 부족한 자식이라도 그 자식에게 결함이 있으면 부모의 마음은 그 가슴에 몽땅 젖도록 최고의 고통을 겪는 것이요, 이것이 풀어지면 그 고통에 비례한 만큼 기쁨이 동반되는 것입니다. 타락한 부모의 마음도 그러한데 하나님의 마음이야 어떠하시겠습니까?

여러분들이 원리를 통해서 아는 바와 같이 하나님은 인간을 사랑하시되 온 천하가 몽땅 굴복할 수 있는 사랑, 온 전체가 그를 따를 수 있는 권위를 주시되 온 전체가 완전히 고개 숙일 수 있는 권위, 그런 최고의 사랑과 최고의 권위를 생각하고 인간에게 책임을 주신 것입니다.

그러면 하나님은 어찌하여 인생 가운데 책임분담을 세우셨던고. 전지전능하신 분이니 그 전지전능한 창조성까지 부여하고, 또 영원불변한 사랑의 주체이시니 그 사랑의 주체를 대신할 수 있는 자리에 세우기 위해서 책임분담을 주시지 않을 수 없었던 것입니다. 이것은 복의 조건이 되는 것이요, 전체를 점령할 수 있는 하나의 열쇠와 같은 것이기에 이것을 안 줄 수 없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이 책임분담이 문제가 되어서 타락되었다는 것을 우리는 알아야 합니다.

20-210
하나님과 책임분담과 나
여러분은 제삼자의 입장에 서지 말라는 것입니다. 여러분들은 `하나님과 책임분담과 나’ 이런 관계에 있는 것입니다. 책임분담을 하기 위해 올라가던 과정에서 그 책임분담을 어기려 할 때 하나님의 심정이 어떠했겠습니까?

여러분은 축구경기를 많이 해 보았을 것입니다. 자기편의 볼이 센터 라인을 넘어서면 좋아서 `야!’ 하고 소리치지만 볼이 센터 라인을 넘어 자기편으로 오면 마음이 얼마나 초조합니까? 구경하는 사람도 마찬가지입니다. 올림픽같이 그 경기가 크면 클수록, 그 배후의 인연이 크고 내용이 넓으면 넓을수록 초조감은 거기에 비례해서 커지는 것입니다. 국가 끼리 대결할 때는 그 순간이 아주 심각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여기에 참가한 선수들은 공을 차더라도 정성을 다해서 차야 합니다. 한번만 잘못 차면 전체에 영향을 줍니다. 그런 경험을 해 보았어요? 공은 단번에 들어갈수 있는 것입니다. 때문에 상대방이 공을 차서 공이 들어가려는 찰나에 골키퍼는 있는 정성을 다하여 공을 향해 움직여야 합니다. 그런데 멍청하게 다른 곳을 보고 있다면 얼마나 기가 막히겠어요? 그러나 축구에서는 그까짓 한 고울 먹으면 다음에 다시 이길 수도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아담 해와 앞에 놓여진 책임분담은 한번 잘못하면, 억천만세 동안 인간에게 암이 될 수 있는 무서운 구렁텅이가 되는 것입니다. 이런 책임을 해야 할 입장에 있는 아담 해와이기에 하나님께서는 사탄의 공박이 있을 것을 예상해서 따먹지 말라고 경고했습니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선악과를 따먹었으니, 그걸 바라보시는 하나님의 마음이 어떠했겠느냐는 것입니다. `본래 태어나기를 저렇게 태어났기 때문에 그렇지. 잘한다 잘한다’ 하고 후원했겠어요? 그런 입장에서 저끄러지는 경각에도 하나님은 너만은 그러지 않으리라고 믿고 싶었을 것입니다.

그때 하나님의 염려하는 마음이 두 갈래 길에서 얼마나 뒤넘이쳤겠어요? 타락 직전에 가기까지 인간의 권위를 얼마나 주장하고 싶었겠어요? 그 권위를 세워 가지고 사탕을 굴복시키고 싶으신 마음이 얼마나 간절했겠어요? 이렇게 애 닯은 자리에서 인간은 타락한 것입니다. 이것은 천년간의 한으로 탕감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억천만세에 수많은 억조창생이 전부 죽음의 고비에 걸릴 함정이 될 것을 아시는 하나님이셨으니 얼마나 분했겠습니까? 그러한 비참한 상처를 입힌 인간입니다. 이런 것을 생각해 볼 때 인간은 할 말없는 존재입니다.

세상에서도 환갑이 넘어 낳은, 즉 만득자인 7대 독자가 죽는다고 생각 하면 절망 중에 절망일 것입니다. 젊으면 또 낳을 수 있지만, 만득자로 태어난 그 7대 독자가 잘 자라지 못하고 죽는다면 7대권을 계승하려던 조상들의 마음이 얼마나 애가 타겠어요?

조상들은 자기의 후손, 자기의 핏줄을 통해서 세계에 없는 만복을 받고 싶어 합니다. 그러니 자식이 죽는다면 그 부모는 따라 죽고 싶을 것입니다. 그런데 아담은 7대 독자가 아니 영원한 독자입니다. 하나밖에 없는 아담을 중심삼아 가정을 이루게 하여 천지의 대업을 세우려 하셨는데, 그 아담이 죽었으니 하나님의 마음이 어떠했겠습니까? 이렇게 일이 틀어졌을 때, 어떠했겠어요? 내가 결혼하고 싶은데도 결혼 못할 때의 그 안타까움에 비교되겠어요? 부모는 천년 만년 같이 살고 싶은데 7대 독자가 지금 몹쓸 병에 결려 목숨이 경각에 달려 있다고 한다면 그 부모의 심정이 어떠하겠어요? 여러분의 아들딸이 지금 숨이 넘어가고 있다고 한번 상상해 보십시오. 그렇다면 부모가 소리치겠어요, 안 치겠어요? 그 부모는 죽어가는 자식을 살릴 수 있는 방법이 있다면 체면과 위신을 다 버리고 그 방법을 쓸 것입니다. 어떤 원수가 있어 그의 영원한 종이 되는 한이 있더라도 자기의 아들딸을 살릴 수 있다면 부모는 그렇게 할 것입니다. 그것이 이해가 됩니까? 그 자식을 살리는 어떤 방법이 있다 할진대 부모는 위신과 체면을 생각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그렇게 하여 자식을 살릴 수 있다면 부모가 종이 되어도 좋다는 것입니다. 한날의 뜻을 세울 수 있는 그 한 실체인 아들을 찾기 위해서는 천만년의 한을 푸는 제물이 될 수도 있다는 것입니다. 타락한 부모도 그러하거늘 하나님이야 오죽 하시겠습니까? 그런 아들딸이 접경을 넘어 영원히 이별하게 되었을 때 하나님의 비참함이란 말로 표현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기성교회에서 말하듯 선악과를 따먹지 말라고 하기는 쉽지요. 그러나 그렇게 간단할 것 같으면 이렇게 복귀섭리역사가 6천년이나 걸리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렇게 비참한 검은 구름이 끼는 환경으로 접촉해 들어가는 자식을 바라보시는 하나님께서는 얼마나 큰 상처를 입으셨겠습니까? 이 땅 위에 수많은 인간들이 왔다 갔으나 지금까지 그러한 상처를 입어 본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의 죽음 고비를 넘어 갔지만 그 상처를 치료할 수 있는 곳까지는 도달하지 못했습니다. 그런 하나님이신 것을 우리는 다시 한번 똑똑히 알아야 되겠습니다.

20-212
하나님의 사정도 모르고 천당에 가겠다고 해서야
사람들은 교회에 갈 때 성경이나 들고 가면서 `예수만 믿으면 천당 갑니다. 예수 믿고 천당 갑시다’ 하고 있으니 기가 막힙니다. 그렇게 간단하게 갈 수 있으면 얼마나 좋겠어요? 그렇게 해서 갈 수 있다면 그렇게 믿고 나오던 기독교가 왜 점점 망해 나오고 있습니까? 그렇게 간단하지 않다는 것입니다. 천당에 가려면 하나님이 어떠하셨던가를 알아야 합니다. 그러지 않고 천당에 간 뒤에 하나님이 비참하셨다는 사실을 안다면 얼굴을 들 수 있을 것 같애요? 하나님의 사정도 모르고 천당에 간 사람들, 얼굴을 들 수 있겠느냐는 말입니다. 이렇게 비참했던 하나님을 알지 못하고 살면서 `아버지 나 천당 가게 해주소. 나에게 복 주소’ 할 수 있어요?

이러한 엄청난 슬픔과 사무친 분노가 백일하에 드러났을 때 그러한 하나님을 보고 그 앞에서 `내가 하나님의 아들이다’ 하면서, 얼굴을 들 수 있겠어요? 그럴 수 있다면 그 사람은 진짜 사탄입니다. 사탄은 이러한 사정을 유린하면서 하나님을 배반해 나왔습니다. 이런 하나님의 사정을 알고서도 얼굴을 들 수 있다면 그 사람은 사탄의 후예나 마찬가지입니다. 그 사람은 지옥에 가야 됩니다. 이렇게 비참하고 억울하신 하나님이신데 오늘날의 기성교회에서는 전지전능하시고 천지를 창조하신 하나님이 슬프긴 뭐가 슬프냐는 것입니다. 그러나 사실은 이렇게 비참한 하나님이십니다.

천국을 가려면 그 사연을 땅 위에서 알아 가지고, 내 힘이 미치지 못하여 풀어 드리지 못하면 눈물이라도 흘리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풀어 드리지 못하는 자신을 탄식하면, 내가 더 불쌍한 자리에서 탄식의 주인공이 되면 탄식하는 그 사정을 하나님이 모르시겠습니까? 이렇게 탄식하면 그것이 조건이 되어 하나님과 인연이 맺어지는 것입니다. 뻔뻔스러워 가지고는 인연이 맺어지지 않습니다.

아담과 해와가 타락할 때 천지가 어떻게 되었겠어요? 새까맣게 되었겠어요, 하얗게 되었겠어요? 세상에서도 그렇찮아요? 젊은 부부가 살다가 한 갈래가 갈라져 나가든지 죽든지 하면 얼마나 몸부림칩니까? 나는 그러지 않을 거라고 자신하지만 여기 있는 사람들 모두가 그럴 수 있는 후보자들입니다. 아무리 잘난 사람도, 대한민국에서 제일 가는 권세가도 마찬가지입니다. 그 고빗길에는 장사가 없습니다. 어디, 거기에서 장사될 수 있다는 사람 손 들어 보세요. 없지요? 아무리 잘나고, 아무리 뚱뚱하고, 아무리 말라깽이고, 아무리 죽어질 그런 순간에 있는 사람이라도 그것을 보면 눈물을 흘리게 되고, 숨이 막히게 되고, 가슴이 터지게 되고, 기가 막히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면 하나님의 마음이 어떠했겠어요? `너 그만 두어라. 또 창조하지’ 그러셨겠어요? 그랬다면 얼마나 좋겠나?

여러분은 여러분의 아들딸이 태어났다가 죽고 나면 언제나 못 잊을 것입니다. `그 자식이 살아 있을 때 뭐 먹겠다고 할 때 왜 못 사주었나? 무엇을 입고 싶다고 했을 때 그것을 왜 못 사 주었나’ 이렇게 먹겠다는 것 못 사주고 입겠다는 것 못 입혀 준 그 모든 사연이 걸려 한이 되는 거예요. 하나님에게도 그런 마음이 있기 때문에 타락한 인간을 복귀하시려는 것입니다. 그런 마음이 없으면 복귀라는 것이 없었을 것입니다.

20-214
내 위신과 권세를 자랑하지 말라
아담 해와가 자랄 때에 하고 싶고, 바라던 모든 것을 다 해주지 못한 것이 부모이신 하나님의 한입니다. 그 마음이 있기에 복귀역사를 하시는 것입니다. 그러나 인간은 자식으로서 하나님 앞에 효의 도리를 세우고 천륜의 법도를 세워 정착점을 마련해야 할 것이었는데 그것을 하지 못 했습니다. 그러한 자리에서 태어난 오늘의 인간이기 때문에 탄식과 저주와 불만의 비탄 가운데서 신음하지 않을 수 없는 것입니다.

이러한 입장에 있는 우리가 하나님의 공적인 터전을 중심삼고 하늘편에 서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되느냐? 오늘의 내 위신과 권세를 자랑해서는 안 됩니다. 뼛골 사이에서 스며 나오는 타락 전의 본연의 정, 즉 본성의 정을 불러일으켜야 합니다. 하나님 앞에서 타락했던 조상의 입장에 서서는 안 됩니다. 때문에 타락한 부모들은 울어야 되고 눈물 흘려야 됩니다. 그 후손으로 태어난 우리들도 당연히 고생해야 됩니다. 비참해져야 됩니다. 죽어 나자빠져야 됩니다. 쓰러져야 됩니다. 억울한 자리에 서야 됩니다. 그것은 당연지사입니다. 내 뼛골 깊이 숨겨져 있는 본성의 정을 중심삼고, 타락 전 즐거워하시던 아버지를 동경하면서, 타락함으로 말미암아 아담 해와가 하나님의 마음에 준 그 상처를 부여안고, 타락하지 않은 본성의 심정을 가지고 이루어 드릴 수 있는 내 자신이 되지 않고는 하나님과 인연맺을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오늘날의 종교에서는 죽을 때까지 정성을 들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성경에서도 “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라(막 12:30)”고 했습니다.

그러면 그 자리가 어떤 자리냐? 타락권내에 떨어진, 하나님의 저주권내에서 태어난 인간 그 자체로서가 아니라 뼛골 사이에 있는 본성의 심정을 유발시켜 가지고 인간을 사랑하고 싶으셨던 그 아버지의 심정이 얼마나 비참하셨겠느냐는 사실을 아는 자리, 그러한 심정을 체휼할 수 있는 자리가 바로 정성들이는 자리입니다. 그것을 느끼기 위해 몸부림 칠 때라야만이 하나님과 나와의 인연이 맺어지는 것입니다. 그것을 여러분이 확실히 알아야 됩니다. 이것이 천국에 들어갈 수 있는 동기입니다.

네 마음을 다하라 했더니 오늘은 바쁜데, 어디 가야 할 텐데 하면서 다했습니다 라고 말하면 그것이 다한 것입니까? 그리고 장가가려 했는데 그만 둬야겠다, 시집가려 했는데 시집가서는 안 된다고 하니 그만둬야겠다 하며 돌아선다 해서 그것이 다한 것입니까? 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라는 것이 무엇입니까? 그 한계점이 무엇입니까? 여러분들은 이것을 알아야 합니다. 이럭저럭 산다고 해서 그것이 다하는 것이 아닙니다. 여러분은 그 한계점을 똑똑히 알아야 됩니다. 그것은 아담 해와가 타락하던 때의 심정의 기준을 능가하는 것입니다. 그들은 하나님을 사랑하지 못하고 하나님의 뜻을 염려하지 못했습니다. 또한 하나님의 내적인 심정이 어떻다는 것을 몰랐습니다. 그리니 여러분들은 명령을 받고도 무책임한 자리에 서서는 안 되겠습니다.

성경에 있는 하나님의 말씀을 중심삼고 아담 이상의 심각한 마음으로 생명을 걸고 내 모든 전체를 투입해야 합니다. 폭발하기 위해서 날아가는 폭탄같이 목적지를 향해서 달려가려는 마음이 간절해야 합니다. 하나님은 사망선을 넘어 정성을 들이는 그 기준만이 아니라 하나님의 이상 가운데서 천하 만민이 몽땅 하나님을 중심삼은 사랑을 노래하고, 하나님의 품에 안길 수 있는 그 기준을 넘어서기를 바라고 계십니다.

하나님은 억울하고 분하신 분이십니다. 그것은 누구 때문이냐? 바로 `나’ 때문입니다. 여러분은 아니라고 생각하겠지요? 내가 몇천년 전 조상하고 무슨 관계가 있느냐고 하겠지만 그렇지 않습니다. 여러분은 다 썩어 가지고 보기 싫게 앙상한 가지만 남은 고목에 싹이 나온 것을 본 적이 있을 것입니다. 그것이 은행나무는 느티나무든 그 싹에게 나이가 몇이냐고 물었을 때, 금년 봄에 나왔으니 석달 되었다고 하면 되겠어요? 내 나이는 심으신 할아버지때부터 뿌리가 나기 시작했으니 몇이라 해야 되겠어요?

그 고목의 순과 같은 사람이 누구이겠어요? 바로 여러분입니다. 그렇다면 여러분들은 지금 몇살입니까? 열 다섯살, 스무살로 생각하지 말아요. 여러분들이 생각하고 있는 나이에 6천년을 더해야 합니다. 6천년이 걸리적거리니까 그냥 열다섯살이니, 스무살이니 하는 것입니다. 6천년은 다 같으니까요. 사실은 몇살이냐고 하면 `6천 몇살’ 그래야 됩니다. 그런 사람이 어디 있느냐고 하겠지만 심정의 세계는 그렇게 되어 있습니다.

20-216
신앙자에게는 극단적으로 비참한 자리도 필요
여러분은 살기는 살았는데 뿌리가 하나밖에 남지 않는 노송나무가 폭풍우를 맞아 홍수에 밀려 벼랑이나 언덕배기에 간들간들 거꾸로 매달려 있는 것을 본 적이 있을 것입니다. 소나무든 오리나무든 미류나무든…. 그런데 폭풍우가 계속 몰아치던 나무들이 얼마나 기가 막히겠어요? 그 나무가 비가 멎기를 바라겠어요, 안 바라겠어요? 생각해 보세요. 바라겠어요, 안 바라겠어요? 여러분들은 생명을 위해 그렇게 간절히 바란 때가 있었습니까?

그 이상 비참한 것이 어디 있어요? 뿌리만이라도 살아 있으면 소망이 나있을 텐데 이것은 뿌리가 다 썩어져 가지고 이미 물렁물렁해진 무우와 같으나…. 그런 무우 꼭지에는 잎이 붙어 있더라도 그것은 어차피 썩어지는 것입니다. 주인이 뽑아 주더라도 그것은 전부 다 외양간에 들어가는 것입니다.

여러분들이 그런 격입니다. 지금 기독교를 믿는 사람들도 마찬가지입니다. 뿌리는 언덕배기에 딱 매달려 있고 몸뚱이는 바닷가로 떨어져 있는데 여기에서 살겠다고 하니 처량해요, 안 처량해요? 이래 가지고도 좋다고 춤을 춰요? 그가 아무리 생명력을 자랑할지라도 솟구쳐 올라와 위에 있는 벽에다가라도 뿌리를 박지 않으면 살길이 없습니다. 그러니 뿌리를 찾아 올라가야 합니다. 나무를 다 뚝 잘라 버리고 뿌리에서 새로 돋아난 가지를 가져야 된다는 것입니다. 여기서 싹이 나오려면 지금까지 있던 나를 잘라야 합니다. 그런 마음이 있어야 종자라고 남길 수 있는 것입니다. 그저 `나를 잘라 버리면 큰일난다. 나는 살아야 된다’고 하다가는 전부 다 흔적도 없이 망하게 됩니다.

바다에서 풍랑을 만난 큰 배를 바라볼 때, 물결이 높아 돛대가 안 보일 적에는 배가 물속에 들어간 줄 알았다가 다시 보일 때는, 휴하고 한숨부터 나오지요? 어때요? 실감나요? 보는 것도 그런데 거기에 타고 있는 사람들은 어떠하겠습니까? 기관장은 어떨까 생각해 보았어요? `너 잘 만났다’ 그럴까요? 들어갈 때는 가슴이 철렁해 가지고 `아이구 하나님 나 죽습니다’ 하면서 하나님을 불렀겠지요? 파도 밑으로 내려갈 적마다 `하나님!’ 하고 부르고 올라올 적마다 `감사합니다’라고 했을 것입니다. 그랬겠어요, 안 그랬겠어요? 생각해 보세요.

사람에게는 그런 전력(前歷)이 필요합니다. 극단적인 비참한 자리에 있어 봐야 합니다. 십자가를 등에 지고 골고다를 향해 가며 조롱을 받던 예수님을 생각해 보십시오. 유대인들은 예수님에게 `이 자식아. 네 꼴이 뭐냐? 이 목수의 자식’ 하면서 조롱했습니다. 그때에 여러분들이 그 자리에 있었다면 예수님에게 뭐라고 했을까요? 그들과 같이 욕했을 것입니다. 지금 예수님 보고 이 자식아 한다면 야단나겠지만 그때 사람들의 입장으로서는 안 그럴 수가 없었다는 것입니다. 유대교인들이 전부 다 여러분들만 못해서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박은 줄 알아요?

수천년 동안 눈이 빠지도록 기다리고 기다리던 메시아로 왔다는 작자가 어떠했겠습니까? 사람들을 모아 가지고 이동네로 저동네로 몰려다니고 쫓겨다녔습니다. 이런 예수님을 유대교인들은 메시아로 보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하나님의 사무친 심정을 이어야 할 아들의 입장에 있었기에 핍박받는 것을 당연지사로 여겼습니다.

몰리고, 매맞고, 구박당하고, 조롱받는 그것을 삼킬 수 있는 예수님을 볼 때에 하나님은 예수님을 동정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물론 겟세마네 동산에서 할 수만 있다면 이 잔을 내게서 피하게 해달라고 기도했지만, 그것은 인류를 위한 기도였습니다. 그렇지만 일단 결정이 난 뒤에는 그것을 몽땅 받아들였습니다. 용자의 모습을 갖춘 장군이라면 이왕 죽을 바에야 소총 앞에서 넘어지지 않고 원자탄에 맞아 죽으려고 할 것입니다. 이와 마찬가지로 예수님은 민족적인 저주와 조롱이 큰 것이 아니라고 생각했습니다. 내가 가야 할 천륜의 길은 너희들이 아무리 해도 혼란시킬 수 없고 막을 수 없다는 마음으로 예수님은 아버지의 심정을 느끼며 싸워 나왔습니다. 선생님은 그렇게 알고 있어요. 누구 말을 듣고 얘기하는 것이 아닙니다. 알아보니까 그렇더라는 것입니다.

20-218
슬픈 하나님이심을 확실히 알아야
예수님은 본연의 아담과 해와가 타락함으로 말미암아 슬퍼하시던 하나님의 그 슬픔의 기준을 넘을 수 있는 내적인 심정을 갖고 자신의 명예와 영광이 일시에 수포로 돌아가는 죽음의 자리를 늠름하게 밟고 넘어 하나님을 부여안고, 죽어도 하나님을 모시고 살아도 하나님을 모시겠다는 결심을 했던 것입니다. 이 결심 때문에 하나님이 도리어 예수님을 위로할 수 있게 된 것입니다. 이것으로 인해 천국의 터전이 이 땅 위에 만들어진 것입니다. 이렇게 하나님으로부터 위로받을 수 있는 터전 없이는 천주통일이 이뤄지지 않는 것입니다. 이렇게 생각할 때 하나님이 슬프신 분이라는 사실을 여러분이 알아야 됩니다.

여러분이 극장에 가서 영화 구경을 할 때라도 심각한 자리에 서서 그것이 남의 일같지 않고 내 일같이 느껴야 합니다. 그것이 신앙길을 가는 데 방해가 되는 원수같으니 어떤 악한 무리가 나올 때 그들을 잡아 치우겠다는 마음을 갖고 극장에 가면 죄가 안 됩니다. 그런 마음을 가지고 간다면 극장 아니라 그보다 더한 곳을 가도 괜찮습니다.

악당들이 사는 소굴이라도 사기꾼 모양을 해 가지고서라도 그들을 끌어올 수 있다는 확신을 가지고 간다면, 또한 원수를 한칼에 전부 쳐 버리겠다는 결의를 갖고 나선다면 하나님의 용자로 세워집니다. 그런 사람은 천하 어디를 가든 화제의 인물이 됩니다. 그럴 것 같아요, 안 그럴 것 같아요? 「그럴 것 같습니다」 그렇다면 얼마나 그럴 것 같아요? 여러분들 생각해 보세요. 잘라 죽여버리고 싶은데 그럴 수 있어요? 생각하면 그럴 것 같은데 하겠지만 그 자리는 심각한 자리입니다. 여기서 말하는 사람도 심각합니다. 여러분들 모르겠지만 생명을 내 놓고 덤벼드는 것입니다. 생명을 뿌리지 않고는 생명의 씨를 거둘 수 없는 것입니다. 심은 대로 거둔다고 했습니다. 하나님은 그런 심정을 가지고 최상의 길로 인류를 찾아 오셨기 때문에 그런 심정을 가진 사람들이 지금까지 역사를 발전시키는 데 도움이 되어 왔던 것입니다. 그런 사람들이 하나님편입니다.

하나님은 다 잃어버리고 슬퍼하시는 분이십니다. 인간이 자연적으로 발생한 병이 나서 죽었다면 그래도 괜찮겠는데, `따먹으면 죽는다’고 경고를 했는데도 불구하고 경망스럽게 따먹었다는 것입니다. 이걸 볼 때 얼마나 얄미웠겠습니까? 그것을 따먹으면 죽는다고 했습니다. 반드시 죽는다고 했습니다. 이 말을 귀에 불어넣어 주었는데도 불구하고 그것이 좋다고 따먹었던 것입니다. 인간은 하지 말라면 더 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통일교회 나오지 말라 하면 더 나옵니다. 나와라 나와라 하면 안나오는지 모르겠지만 나오지 말라고 몸둥이로 후려 갈기면 새벽같이 들어와 앉아 있을 것입니다. 몸둥이 들고 나오시는 선생님은 몇 시에 나오시겠나 하면서 말입니다. 이런 청개구리 같은 성격 때문에 일이 저끄러진 것입니다. 그러니 하나님이 보시고 `잘했구만. 뭐 그럴 수도 있지’ 하시겠어요? 그럴 수 있으면 얼마나 좋겠어요. 멍하니 낭떠러지로 갔다가는 죽을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송장이 되는 거예요.

예수님을 믿으면 무슨 법도를 세울 수 있느냐? 사랑의 법도를 세울 수 있습니다. 만일 동네방네에서 전부 다 반대하고 부모 형제가 반대하는데도 죽자 살자 하면서 모든 반대를 물리치고 백년가약을 맺고 약혼식을 해 놓은 신랑신부가 있는데, 그 신부가 신랑되는 사람에게 `다른 남자한테 잠시만 시집갔다 올 테니 기다려 주세요’ 하면 어떻게 하겠어요? 그 말이 통하겠어요, 안 통하겠어요? 절대로 안 통합니다. 하나님이 이런 경우를 당하신 것입니다. 그런 짓을 하고 하나님을 사랑하면 하나님이 다시 만나 주시겠어요? 원수입니다. 흉물단지예요. 세상에 그보다 못한 사람이 어디 있겠어요? 천하를 둘러보아도 그보다 못한 사람은 없습니다.

그런 사람에게 하나님께서 `너희가 사랑의 법도를 몰라서 그렇게 하였으니 이제는 안 그러면 되지 않겠느냐’고 하시겠어요? 그것이 통할 수 있겠어요? 그러실 수 없다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문제가 벌어지는 것입니다. 사람 하나 죽인 것은 몇백 번 몇만 번이라도 용서하신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사랑 앞에 세워질 수 있는 단 하나밖에 없는 상대적인 중심존재가 사랑의 법도를 파탄시켰으니 그것을 어디 가서 찾을 것이냐? 이것을 찾아 세우기 위해 예수님의 사랑의 종교를 가지고 오신 것입니다.

오늘날 기독교에서 사랑을 부르짖고 있는 것은 바로 그 이유 때문입니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무슨 선악과를 따먹고 죽었다고요? 야밤중에 다니는 장님보다도 더 어둡군요. 그렇게 믿고 가면 얼마나 수월하겠습니까? 그렇다면 통일교회 문선생님이 얼마나 편하겠습니까?

20-220
아담 해와를 빼앗긴 하나님의 위신을 세워 드리려면
그러면 어떻게 해야 하나님의 위신을 세워 드리느냐? 타락할 때보다 더 사랑받을 수 있는 아들딸을 찾아 세워 드려야 합니다. 그러려면 믿음에 있어서도 그때의 아담 해와보다 높은 믿음을 가져야 합니다. 심정과 인격에 있어서도 아담 해와 이상이어야 합니다. 사탄이 `하나님이 선악과 따먹으라고 하던?’ 하면서 `그것을 따먹으면 눈이 밝아진다’고 꼬일 때 거기에 빠져 넘어가는 사람이 되어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이때도 아담 해와보다 더 나아야 되고 인격에 있어서도 사탄에게 `넌 뭐야 이 자식아. 넌 종이야’ 할 수 있는 사람이어야 합니다. 또한 심정에 있어서도 `사랑의 주인이 누구냐?’ 그럴 수 있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그러면 오늘날 통일교회에서는 무엇을 하자는 것이냐? 믿음에 있어서 그 이상의 사람을 만들자는 것입니다. 좋아요, 나빠요? 좋습니까? 얼마나 좋아요? 그런 사람이 될 수 있다면 어떤 방법으로 감사한다 해도 못다한다는 것입니다. 그것이 거짓말이라면 돌무더기에 맞아 죽어도 되지만 그것이 사실이라면 얼마나 감사해야 되느냐? 죽어 가지고 부활할 때까지 감사해야 됩니다. 그렇게 된다면 하나님이 얼마나 기뻐하시겠습니까?

여러분은 예수가 기뻐하던 부활의 아침을 맞는데 있어서 부끄러움이 없는 사람이 되어야 하겠습니다. 막달라 마리아도 부활한 예수를 만날 때 `때가 이르기 전에는 나를 만지지 말라’ 해서 가까이 못 갔습니다. 부활의 아침을 맛볼 수 있는 사람이 아니고서는 아버지 앞에 가지 못하는 것입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죽음의 고통을 느껴야 된다는 것을 여러분이 알아야 됩니다.

하나님을 믿는 데에 있어서는 절대적으로 믿어야 합니다. 믿지 못한 역사의 굴레를 가진 인류이기 때문에 죽이 되든 밥이 되든 믿어야 합니다. 그렇게 믿어야 천당 가는 것입니다. 뭐, 성경 끼고 교회에 다닌다 해서 예수 믿는 것입니까? 십자가를 등에 지고 골고다를 넘어가더라도 `나는 부활한다!’ 고 믿어야 합니다. 누구보다도 더 적극적으로 믿으라는 것입니다.

옛날 사탄은 경계선을 그냥 넘어 들어와서 아담 해와에게 이야기했습니다. 그러나 오늘날의 신앙자는 권한과 인격을 갖추어 사탄이 그 앞에 오기를 무서워하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천사장이 그 앞에 오기를 무서워 할 수 있는 그런 사람이 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기도 많이 한 사람들이 사탄권내에있겠어요? 정성의 내용을 가져서 사탄이 그 앞에 나타날 수 없는 그런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심정은 어디에서부터 출발해야 되는가? 여기에 있는 여러분들 중에는 처녀 총각이 더러 있을 것입니다. 여러분들은 심정의 주인공이 누구라고 생각해요? 시집가면 남편이고, 남편은 부인이라고 생각하겠지만 그것이 아닙니다. 심정의 뿌리, 심정의 주인공은 하나님입니다.

그래서 인류는 복중생활을 해야 합니다. 그 복중생활에 접붙여 주는 역할을 해주는 것이 종교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참된 종교는 복중생활을 가르쳐 주는 것입니다. 통일교회도 복중생활을 할까요? 그것을 원해요? 원하지 않아요?

그러면 그것을 어떻게 해야 되느냐? 인격에 있어서 아담 해와의 기준을 넘을 수 있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심정에 있어서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을 배반하여 쫓겨나고 하나님에게 불의의 결과를 가져 오게 하는 입장에 서면 하나님이 얼마나 슬퍼하시겠습니까? 지금까지 상처를 입힌 그 죄도 용서받을 수 없는 일인데 어떻게 또 다시 비참을 안겨 드리는 노정을 거듭해서 갈 수 있겠는가? 나는 죽어도 그 길을 못 가겠다는 심정을 가져야 합니다. 이런 심정의 기준을 가져야 하나님과 일치될 수 있고 하나님편에 설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면 하나님은 어떠한 분이시냐? 무슨 보좌에 앉아서 영광받는 하나님이신 것 같습니까? 그렇지 않다는 것입니다. 타락한 인류를 대하여 하나님은 지금까지 무엇을 하셨느냐? 이 인류를 구원시키시느라고 매일 통곡하시고 계십니다. 그런 입장에서 인류를 이끌어 오시는 것이 하나님의 모습입니다. 하나님은 이렇게 비참한 분입니다. 비참 가운데 떨어진 인류를 구원시키기 위해서 하나님은 잠든 인류를 깨워서 `와라! 와라!’ 하시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렇게 해 가지고 가게 되어 있지 않습니다. 여기에는 책임분담을 해야 하는데 이것을 대신해 줄 수 없는 입장에서 일을 하시려니 얼마나 힘이 들었겠습니까?

20-222
하나님은 세상의 낙오자들을 붙들고 섭리해 오셨으니
오늘날 종교의 문을 두드리며 참된 길을 추구하고 나선 사람들을 살펴보면 세상의 낙오자들이 많습니다. 통일교인들도 가만 보면 저렇게 얌전하게 앉아 있어도 세상에서 다 멍든 사람들입니다. 이 시대, 이세상에서 쓰러지고 나자빠진 무리들입니다. 집에 있어도 시원치 않고, 학교에 가도 시원치 않고, 노는 것들을 보아도 마음에 안 들고 사회를 보아도 그렇고, 세계를 보아도 그러니, 그렇다고 전부 쓸어버릴 수도 없고, 그러니 몸부림치는 것입니다. 이런 것을 보고 사느니 차라리 청춘 시대에 `나는 가노라’ 하며 깨끗이 가버리는 것이 도리어 근사해 보인다는 것입니다. 지지리 못난 자에게도 허리를 굽실거려야 하니 기가 막힐 게 아닙니까? 특히 단순한 아가씨들이 그런 짓 잘합니다. 그것이 똑똑하다는 것입니다. 그렇다고 그렇게 하라는 것이 아닙니다. 그러면 지옥 갑니다. 여기 서 있는 사람도 그런 것을 많이 느껴 보았습니다.

그런 경우도 당해봐야 됩니다. 그러나 그것이 문제가 아닙니다. 그렇게 하고 난 후의 인생길에 암초가 부딪치느냐, 평화의 광야가 전개되느냐 하는 것이 문제입니다.

통일교회에 들어온 여러분들의 마음을 들여다 보면 전부 다 멍들고 구멍 뚫어지고 인생행로에 있어서 패배자라는 낙인이 찍혀 있습니다. 한 두 개 만이 아니라 너저분하게 구멍이 뻥뻥 뚫어져 있다는 것입니다. 이것을 볼 때, 하나님이 얼마나 비참합니까? 하나님은 지금까지 이 땅의 인간을 구원하기 위하여 섭리하실 때 어떤 사람을 중심삼고 했느냐? 쓰레기 같은 인간들을 중심삼고 구원섭리하셨습니다. 얼마나 기가 막힙니까? 잘났다는 녀석들을 전부 다 도망가고, 지지리도 못나고 상처투성이고 병신이며 곰배팔이고 눈이 찌그러지고 언청이인, 팔방미인이 아닌 팔방병신만 남아 있어서 그들을 중심삼고 섭리해 오셨다는 것입니다. 그런 인간들을 수습해서 섭리해 나오신 것입니다.

이러한 사실도 모르고 여러분들은 통일교회에 들어와 가지고 아 내가 뜻을 위해서 일한다고 했는데 왜 나를 몰라 주느냐고 하겠지요? 하지만 그럴 수 있는 자기 자신인지 본인의 역사를 한 번 들추어 보십시오. 뭐 마음에 걸려 그저 쫓아내지나 않을까 하고 가슴이 두근두근해야 할 텐데 도리어 남을 쫓아내려는 사람이 있으니 그것이 문제입니다.

쓰레기를 모아 재생시키고 수리하는 곳을 재생창이라 합니다. 교회라는 것은 인간을 다시 수리할 수 있는 재생창을 의미합니다. 그러면 통일교회는 무슨 교회냐? 통일이니까 몽땅 재생시키는 교회입니다. 몽땅 재생시키는 곳입니다.

복귀하려면 무엇을 중심삼고 해야 하느냐? 사랑만 가지고는 안 됩니다. 사랑 때문에 타락했으므로 복귀하려면 타락 전의 사랑보다 더 커야 합니다. 그것이 복귀후의 사랑입니다.

그러면 그 사랑을 내가 태어나게 할 수 있습니까? 인간 스스로 나게 할 수 있느냐는 것입니다. 그럴 수 없습니다. 그러면 그것을 누가 해주느냐? 부모이십니다. 하나님이 나게 해주십니다. 그러기 위해서 여러분들은 여기에다가 접붙여야 합니다. 뿌리와 줄거리 모두다를 하나님 가지로 접붙여야 합니다. 이런 일을 하나님께서는 하고 계십니다. 이렇게 접붙이게 하시기 위해 하나님이 얼마나 비참한 노정을 걸으셨는지를 여러분은 알아야 되겠습니다.

그런 것을 생각할 때 하나님은 웃고 살았겠어요? 가슴 치고 통곡하며 살았겠어요? 여러분들이 키우던 자식이 죽어서 그 자식을 붙안고 눈물을 흘릴 때, 여러분은 `아버지가 이런 일을 당하셨을 때 얼마나 고통이 크셨습니까? 그 고통을 알게 해주셔서 감사합니다. 나를 구원하시기 위해 이런 일을 당하게 하셨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하며 감사해야 됩니다. 아버지를 잃었던 자신인 것을 생각하고 역사적인 과정을 거쳐오면서 해오신 아버지의 일 전부가 남의 일이 아닌 내 일이라는 것을 느낄 줄 알아야 합니다. 6천년 역사상에 있었던 모든 일을 남의 일이 아닌 내 일과 같이 생각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여러분이 구원받는다는 것은 6천년 역사노정이 전부 승리한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여러분이 승리하게 된다는 것은 6천년에 쌓였던 역사적인 모든 것이 부활할 수 있는 시대를 맞이한다는 것입니다. 만일 그렇게 되었다면 하나님이 얼마나 기뻐하시겠습니까?

20-224
하나님이 모든 것을 부정하고 나에게 오라 하신 뜻
아담과 해와가 타락할 때도 비참한 하나님이었지만 그 아담 해와를 다시 찾으시기 위해 섭리하실 때는 더 비참한 하나님이었습니다. 찾아간 자식에 추방당하고 배신당하신 하나님, 원수의 품에 안겨서 원수와 하나되어 죽자살자 하며 살고 있는 그 모습을 담 너머로 바라보고 계시는 신세가 되신 하나님, 그 하나님의 신세가 어떠했겠습니까?

그러면 사탄은 이것을 보고 뭐라 했겠습니까? `하나님이 왜 저렇게 되었노?’ 하면서 `당신의 아들이 이렇게 되었소. 나와 이렇게 같이 있소’ 하고 비웃는다는 것입니다. 인간이 살고 있는 환경 그 자체가 사탄이 하나님을 조롱할 수 있는 재료입니다. 하나님과 알뜰하게 잘 살면, 참다운 내정이 거기에 깃들 텐데, 사탄과 하나 되었기 때문에 하나님 앞에서 사탄과 같은 취급을 받을 수 있는 재료가 된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께서는 전부 다 끊어버리고 청산짓지 않고는 나에게 올 수 없다고 하신 것입니다. 누구보다도 나를 더 사랑하지 않고는 나에게 돌아올 수 없다는 것입니다.

이런 관점에서 볼 때 오늘날 우리가 하나님 앞에서 효와 충의 도리를 다하겠다고 몸부림쳐 봤습니까? 지금까지 우리는 그저 습관적으로 살아 왔습니다. 생활무대에 젖어 있는 우리의 내적인 심정은 사탄이 하나님 앞에서 우리를 참소할 수 있는 재료가 되었습니다. 때문에 하나님은 기쁨으로 맞기 위해서 인간을 찾아오셨지만, 또 다시 십자가를 짊어지게 되심으로 말미암아 슬픔을 가슴에 안고 눈물을 흘리게 되었던 것입니다.

6천년 전 인간 시조가 타락함으로 말미암아 슬펐던 그 하나님이 나를 만남으로 말미암아 또다시 눈물을 흘리고 계시다는 것을 생각할 때 우리는 하나님이 얼마나 비참한 분이신가를 알아야 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은 심정의 십자가를 지고 오시는 것입니다. 심정의 십자가를….

아담 가정에 있어서 타락한 아담 해와를 제쳐 놓고 가인과 아벨을 중심삼고 아벨을 통하여 아담 가정을 복귀하기 위해서 얼마나 애를 쓰셨겠습니까? 이들이 정성들인 심정을 가지고 하나님 앞에 충성할 수 있는 인연을 가지기를 얼마나 고대하셨겠습니까? 하루 이틀 바라셨겠어요? 수십년 동안 바라셨습니다.

그런 과정에 있어서 어느 한 날을 정하여 복귀하시려는 그 아버지의 마음이 얼마나 초조하셨을 것인가? 그런데 이것이 가인으로 말미암아 파탄되었을 때 아버지의 마음이 어떠하셨겠습니까? 그로부터 1,600년 후 노아 때에 이르러 그것을 수습하기 위해 120년 동안 노아를 고생시키실 때, 그 아버지의 마음은 얼마나 아팠겠습니까? 또한 120년의 세월이 지나가기를 얼마나 고대했겠습니까? 노아도 120년이 지루했겠지만 그 때를 알고 기다리시는 하나님은 또 얼마나 지루했겠습니까? 노아는 하나님을 믿을 수 있었고,명령을 따를 때 위로해 줄 하나의 대상이신 하나님이 계셨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에게는 위로해 줄 수 있는 대상이 없었습니다. 언제 어느때에 하나님을 저버려 또다시 하나님의 가슴에 뭇자국을 남길지 알 수 없는 노아를 바라보시던 하나님이었습니다. 노아에게는 120년 동안이었지만 이것을 바라보시는 하나님의 마음은 하루가 천년같았을 것입니다.

그렇게 천신만고 끝에 이루어진 수고의 터전 위에 하나님의 뜻을 세우려 했던 것이 함이 실수함으로 말미암아 전부 다 무너졌을 때, 사탄은 얼싸 좋구나 했겠지만, 하나님은 모든 환경을 다 잊고 돌아서야 했으니 그 심정이 얼마나 기가 막혔겠습니까? 그것은 또 괜찮다 하더라도 함의 실수를 수습하기 위해서 400년 후 사탄이 제일 사랑하는 데라의 아들 아브라함을 이방에서 끌어내 오기 위해 그 가정을 공략하실 때 하나님께서는 또 얼마나 수고하셨겠습니까? 그리고 만일 그가 살고 있는 갈대아우르를 떠나라고 내 모실 때 아브라함이 순응하지 않았다면 하나님께서는 그 자리마저 떠나야 했던 것입니다. 이런 기막힌 사연이 있었다는 것을 여러분은 똑똑히 알아야겠습니다. 아브라함이 하나님의 명령에 움직이지 않으면 역사의 모든 수고가 수포로 돌아간다는 것을 잘 아는 하나님이 그를 찾아 한걸음 한걸음 옮길 때, 그때의 마음이 어떠하셨겠습니까?

아담 때부터 역대의 선조들이 그때까지 배반했던 역사의 한을 회상하면서, 하나님은 그 원한을 밟고 넘어설 수 있는 한 날을 찾아가는 데 있어서 아브라함이 배반하지 말기를 마음으로 얼마나 고대했겠습니까? 여기에서 아브라함이 하나님의 마음을 알아서 모셔 드리면 다행이지만 만약에 그렇지 못하면 어쩌나 하는 마음으로 얼마나 초조하셨겠습니까?

`하늘의 별과 같이 바닷가의 모래와 같이 너희 후손이 번성하리라’고 약속해 주셨지만, 큰 포부와 희망을 갖고 당신 앞에 접근하기 위해 준비한 제물을 통하여서 판가리하려고 하셨을 때 아버지의 마음이 얼마나 초조했겠는가를, 여러분, 한번 생각해 보십시오.

20-226
복귀노정에서의 하나님의 초조함과 안타까움을 생각하라
아브라함은 온갖 정성을 다하고 천번 만번 생각하여야 할 입장이었습니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소와 양은 쪼갰으면서도 비둘기는 쪼개지 않아 여기에 사탄이 침범했으니 2천년 동안 소원하시던 모든 것이 일시에 끝난 것을 바라보시는 그 하나님의 심정이 얼마나 원통하셨겠습니까? 이러한 것들을 다시 찾아 세우기 위해서 아브라함의 만득자 이삭을 제물로 바치라고 명령하지 않을 수 없었던 하나님의 심정은 또 어떠하셨겠습니까? 이 명령에 아브라함이 열번이라도 순종하겠다는 마음이 있었다 하더라도 만일 이삭이 `이게 무슨 하나님의 지시야. 이놈의 영감이 나이가 많아서 미쳤구만’ 하고 자기 부모를 반대했더라면 어떠했겠습니까? 부모인 아브라함이 반대해도 안 되고 자식인 이삭이 반대해도 안 되는 것을 아시는 하나님의 마음은 얼마나 초조했겠습니까?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이삭을 제물로 바쳐라’ 할 때 얼마나 안타까운 마음을 가지고 그 명령을 했겠습니까? 천번 만번 생각하고 생각하셨을 것입니다. 만일에 명령을 받아들이지 않으면 2천년사에 한이 깃들게 된다는 것을 아시는 하나님이십니다. 그러기에 `아브라함아’ 하고 부르시는 그 소리에는 하나님의 깊은 사연이 깃들어 있었다는 사실을 여러분은 알아야 합니다. 아브라함이 제물을 바치러 갈 때에 사탄은 천년 역사노정에서 자기의 후손들이 패배하느냐, 아니면 지금까지의 역사를 다시 연장하느냐는 기로에 서 있었기 때문에 사탄은 갖은 노력을 다하여 이것을 파탄시키려 했습니다. 이런 결전장에 아브라함을 내세워 분부하셨던 하나님의 음성이 얼마나 애절했겠는가를 여러분은 알아야 됩니다.

또한 이러한 때에 자식을 데리고 모리아산을 향하여 3일노정을 걸어가는 아브라함을 바라보시는 하나님은 얼마나 서러우셨겠습니까? 이러한 환경에서 잘하느냐, 못하느냐에 따라 몇천년, 몇만년의 역사가 좌우된다는 것을 잘 알고 계시는 하나님의 마음은 얼마나 기막혔겠어요? 이때 만일 철모르는 이삭이 아버지에게 대항했더라면 하나님은 그것을 제물로 받을 수없었을 것입니다. 만약 내가 여러분들을 제물로 바친다면 여러분들은 가만히 있겠어요?

이삭은 자기를 칼로 찌르려 하는 그 자리에서도 아버지에게 어린양과 같이, 아무 불평없이 순종했기 때문에 사탄이 참소할 수 있는 길이 끊어진 것입니다.

아담은 개인의 영광을 위하여, 개인의 행복과 행락을 위하여, 개인의 욕망을 위하여 하나님의 말씀을 배반하고 죽음의 길로 타락했습니다. 그러나 생명을 바쳐야 하는 자리에서도 한 마디의 불평 불만 없이 제물로 드려진 이삭과 아브라함의 정성에 대해서는 사탄이 참소할 수 없는 것입니다. 여기에서 비로소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의 역사가 시작되었던 것입니다. 이런 결정적인 순간에 이르기까지 하나님께서는 얼마나 슬프셨겠습니까? 천세 만세의 인류 앞에 자랑할 수 있는 승리의 새아침이 찾아와 슬픔의 마음은 지나가고 기쁨의 마음이 싹틀 수 있는 희망의 출발이 보여졌던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슬픔은 지나가고 그 슬픔보다도 더 강한 기쁨의 한 날을 맞이했기 때문에 이때부터 이스라엘의 창건 역사가 시작되었던 것입니다.

아담의 타락으로 인하여 시작된 어둠의 세계가 아브라함이 하나님의 명령에 순종함으로 인하여 기쁨으로 맞이할 수 있는 세계로 출발되었던 것입니다. 그때서야 비로소 아브라함이 믿음의 조상이란 이름을 가지고 이 땅위에서 새로운 역사의 출발을 할 수 있었다는 사실을 여러분이 알아야 합니다.

그러나 거기에는 사탄이 참소한 흔적이 남아 있었기에 야곱과 에서를 중심삼고 재차 싸움을 해야 했습니다. 야곱이 라반의 가정에서 21년노정을 걸을 때에 라반의 멱살을 붙들고 싸움을 했다면 어떻게 되었겠습니까? 그래서는 안 되었던 것입니다. 그는 지지리 욕을 먹고, 천대를 받고, 멸시받고, 모든 것을 다 빼앗겼지만 아버지의 축복이 이루어지는 그 날을 고대해 나왔고, 또한 그 축복에 대한 소망이 세상의 무엇보다도 더 컸기 때문에 모든 어려움을 이길 수 있었습니다.

20-228
야곱의 끈기
그 가운데에서 내정적으로 깊이 느낀 것은 무엇이냐?세상에 믿을 사람이 없다는 것이었습니다. 외삼춘도 믿을 수없고 친척도 그 누구도 믿을 수가 없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모든 인연을 끊고, 반대받는 그 환경에 들어가면 들어갈수록 하나님을 몽땅 내것으로 품어들이겠다는 생각을 했던 것입니다. 그렇게 하나님을 내 소유로, 내 심정의 주인으로, 내 고향의 부모 대신으로, 내 조국의 왕 대신으로 심정의 터전 위에서 모셔 드린 기간이 21년 기간입니다.

그 내정적인 사정을 깊이 안 야곱에게는 외적인 부가 문제가 아니었습니다. 외적인 부가 파탄을 당하더라도 하나님의 내적인 부가 자기에게 쌓여진다는 것을 알았기 때문에 21년간을 몰리고 배척받았습니다. 그러나 그는 고향을 사랑하는 마음과 축복받은 아브라함의 혈족임을 존중시하는 마음은 변치 않았습니다. 축복받은 아브라함의 혈통을 이어받은 자기의 가치를 누구보다도 사랑한다는 것을 사방에 널려 있는 사탄도 공인했기 때문에 야곱에게 축복의 깃발을 넘기지 않을 수 없었고, 또한 그 누구도 야곱을 참소할 수 없었다는 것을 여러분이 알아야 되겠습니다.

이런 야곱이 환향할 때, 천사를 야곱에게 보내어 최후의 결정을 지어야 하는, 야곱을 그런 상황으로 몰아 넣어야 했던 하나님은 얼마나 기가 막혔겠습니까? 이것은 인간 조상이 천사장 누시엘로 말미암아, 즉 영계를 중심으로 제1차 타락이 벌어졌기 때문에 이것을 해결할 때도 영적인 것부터 먼저 해결짓지 않고는 실체의 싸움에서 승리할 수 없기 때문에 천사를 보내어 야곱과 싸움을 시킨 것입니다.

여기에서 야곱은 뼈가 이그러지면서도 사력을 다하여 싸웠습니다. `내가 21년 동안 수고한 것이 이 싸움으로 판결되는구나! 오늘 이 한밤의 싸움에 이기느냐 지느냐에 따라 나의 생의 운명이 좌우되고 이스라엘의 축복의 터전이 좌우되는구나!’ 하는 생각에 생명을 걸고 씨름을 했던 것입니다. 천사가 와서 농담으로 씨름하자고 했겠어요?

천사가 왔을 때 야곱은 하나님의 사자로서 온 것을 알았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나를 망치기 위한 사명을 가지고 왔느냐? 아니면 복을 주기 위한 사명을 가지고 왔느냐? 물으니 복을 주기 위해서 왔다는 그 대답에 `복을 주려면 주지 왜 못 주느냐?’고 하니 그것은 책임분담이 남아 있기 때문에 그냥 줄 수 없다는 것이었습니다. 즉 야곱이 씨름을 해서 이기지 않으면 복을 못 준다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생명을 걸고 싸우지 않으면 못 준다는 것입니다. 그런 조건을 걸고 나섰을 때에 야곱은 오냐, 좋다 `내손가락이 빠지고 내 팔이 빠져도 결코 지지 않겠다’고 결심하고, 칼로 쳐도 놓지 않고 목을 잘라도 떨어지지 않겠다는 마음을 가지고 씨름을 했던 것입니다. 얼마나 했겠어요? 밤새껏 했습니다. 네가 죽기 전에는 놓지 않겠다는 마음으로 했던 것입니다.

거기에는 하나님도 입회하고 사탄도 입회해 있었습니다. 그런데 최후의 결정을 짓는 그 마당에서 야곱은 얼마나 안타까와했겠습니까? 천사가 환도뼈를 치고 다리를 꺾어 버려도 야곱은 놓지 않았습니다. 네가 죽고 내가 죽고 둘 다 죽는다 해도 못 놓겠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렇게 몇 시간을 했을 것 같애요? 10분? 1시간? 2시간? 7시간 이상 했습니다. 그래도 야곱은 절대 양보할 수 없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런 가운데 야곱을 바라보시는 하나님의 마음은 얼마나 기가 막혔겠습니까? 하나님은 `천사가 지금 사탄을 대표해서 싸우고 있으니 굴복하지 마라’고 알려주고 싶었지만 그럴 수도 없었으니, 얼마나 초조한 마음으로 그 시간을 채웠겠나 생각해 보십시오.

시간이 지나서 최후의 결단을 짓게 되었을 때에 천사가 아무리 뿌리쳐도 놓지 않으니 거기에서 하나님도 공인하고 사탄도 공인했던 것입니다. 야곱이 그런 입장에서 서 가지고서야 천사가 공인해서 비로소 이스라엘이라는 이름을 갖게 된 것입니다.

야곱이 천사 앞에 승리하여 이스라엘이라는 이름을 받게 되었을 때 천상 세계에서는 어찌했느냐? 졸였던 마음을 풀고 환호성을 질렀습니다. 마음 가운데 쌓였던 슬픔의 깊은 한숨을 내쉬며 `아버지!’ 하고 부르는 그 음성 속에는 2천년간 쌓인 사연이 문제가 아니었습니다. 야곱이 하나님을 위해 20년 동안 눈물을 흘리며 하나님의 목을 끌어 안을 수 있는 심정의 인연이, 아담 해와가 타락하던 그 인연을 넘어설 수 있었기 때문에 이스라엘이라는 칭호를 받을 수 있게 되었다는 것을 여러분은 알아야 됩니다.

그때까지 사무친 하나님의 한이 얼마나 많았겠습니까? 거듭 눈물을 흘려도 그 마음을 위로할 수 없는 죄를 짊어진 우리 인간들입니다. 이런 역사적인 빚을 짊어졌기 때문에 천만 개의 제물을 드려도 갚을 수 없는 것입니다. 현재에 있어서도 우리가 하나님을 배반하는 순간이 얼마나 많습니까?

20-230
슬픔의 짐을 지고 계신 분이 내 아버지라고 느낀다면
이런 것을 바라볼 때 이러한 현실 전부를 구원하고 세계를 복귀하여야 할 하나님의 짐이 얼마나 크시겠습니까? 이것을 생각할 때 여러분들은 가냘픈 여자의 몸이라도, 약한 병신이라도 그 짐의 일부분이라도 책임지겠다고 몸부림치고 나서야겠습니다. 상처가 나면 그 몸을 끌고 뒤에서라도 그 자리를 책임지겠다고 하는 움직임이 이 땅 위에 일어나지 않고는, 역사적인 한을 품고 오시는 하나님을 위로할 수 있는 지상낙원의 터전을 마련할 수 없다는 사실을 여러분이 확실히 알아야 하겠습니다.

이렇듯 슬픔의 짐을 짊어지고 심정의 십자가를 짊어지고 섭리해 오시는 분이 누구냐? 옛날의 어떤 할아버지도 아니요, 의붓 아버지도 아닙니다. 억천만세 길이길이 영화를 누리시고, 사랑을 받으시고, 행복 가운데서 영원무궁토록 자녀와 동고동락하셔야 하는 아버지이십니다. 그러한 아버지가 이렇게 비참한 자리에 계시다는 것을 통일신도들은 알자는 것입니다. 이런 사명을 가지고 역사의 한울 품고 오시는 하나님 앞에 나아가 그 하나님을 부여안고, 아버지 나 이제 알았노라고, 아버지 나 이제 왔노라고, 아버지 나 이제 따르겠노라고, 아버지 나에게 명령해 달라고 몸부림치는 모습이 되겠다고 모여든 통일의 무리라는 사실을 여러분이 알아야 됩니다.

아브라함, 이삭을 거쳐 야곱이 이스라엘이라는 승리의 터전을 마련한 때로부터 예수님이 오실 때까지 2천년 동안 이스라엘 민족이 얼마나 수모를 당했습니까? 얼마나 쫓기고 몰리었습니까? 하나님은 그런 이스라엘 민족을 버릴 수 없었습니다. 역사의 인연을 중심삼고 볼 때 슬픈 과정에서도 당신을 위로하던 한 때의 시절을 잊을 수 없는 하나님이었기 때문에 이스라엘 민족이 잘못하면 그것을 번번히 수습하면서 축복의 기도를 몇십 번, 몇백 번, 몇천 번 해 왔던 것입니다. 그렇지만 예수님을 죽인 죄로 말미암아 2천년 동안 유리고객하는 민족이 되었던 것입니다.

2천년이 지난 오늘, 이스라엘 민족이 새로운 이스라엘권을 갖출 때까지 하나님은 잃어버린 민족으로 내버려 두신 것이 아닙니다. 2천년 동안 유리고객하는 이스라엘 민족을 바라보시는 하나님의 마음에는 4천년 역사의 한이 엉클어져 있었던 것입니다. 그러나 그들은 절규하고 유리고객하면서 수많은 민족과 인류 앞에 학대와 학살을 당고 몰리고 짓밟히는 와중에서도 하나님을 섬겨 왔습니다.

그 민족이 있었음으로 말미암아 복귀섭리를 개척할 수가 있었고, 또한 하나님이 보내 주겠다고 약속하신 메시아를 아직도 보내 주시지 않았다고 하면서, 옛날의 약속을 그대로 믿고 기다리고 있는 것이 불쌍하기 때문에, 하나님은 그 민족을 다시 수습하여 원수들인 아랍권 가운데에서 보호하여 나오신 것입니다. 그렇게 하기까지의 하나님의 수고가 얼마나 많으셨겠습니까? 그야말로 이리떼 가운데 있는 양과 같은 무리들을 보호하시기 위해 노심초사해 오셨다는 사실을 여러분이 알아야겠습니다.

이스라엘이 아랍권과 싸워서 6일 만에 승리를 거둔 것은 하나님의 능력과 하나님의 보호 때문이었습니다. 하나님의 능력과 보호가 아니고서는 절대 불가능한 것입니다. 이것은 20세기의 기적이라고 자타가 인정하고 있습니다. 그러면 이 기적이 어떻게 해서 일어날 수 있었느냐? 배후에 하나님이 역사하셨기 때문입니다.이스라엘 민족이 하나님을 찾는 마음과 그런 이스라엘과 관계를 맺고 싶었던 하나님의 마음이 인연맺어졌기 때문에 주위의 원수를 무찌를 수 있는 승리적인 터전이 마련될 수 있었던 것입니다. 그랬기 때문에 이스라엘이 해방의 깃발을 세계에 드높일 수 있었던 것입니다.

2천년 전 하나님 앞에 슬픔을 안겨 드린 이스라엘 민족이 다시 나라를 세우고 하나님을 추앙하는 새로운 깃발을 들고 나온 것은 하나님이 보호해 주셨다는 사실을 증거할 수 있는 좋은 재료가 되고 있습니다. 또한 하나님은 민족과 후세들을 버리시지 않는 하나님이라는 것을 증거할 수있는 좋은 재료가 된다는 것입니다.

20-232
통일신도들이 취해야 할 바른 태도
오늘날 여러분들은 통일교회에 들어왔습니다. 그러면 통일교회가 뭐냐? 아담부터 아브라함까지 2천년 동안 슬픔을 품고 나오신 하나님을 위로해 드리기 위해서 나온 것이 아닙니다. 4천년 동안 여러 민족 앞에서 유리고객하던 이스라엘 민족 앞에 메시아를 보내 주어서 해원성사할 수 있는 세계적인 터전을 마련해 주었는데 이스라엘 민족은 이것을 잃어버렸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이 2천년 역사를 다시 수습하기 위해 역사적인 전체를 책임질 수 있는 입장에서 불러 모은 것이 통일교회의 교인들입니다.

오늘날 우리가 아버지 앞에 엎드려 기도할 때에는 목이 메이고 가슴이 저리는 심정으로 아버지를 불러야 되겠습니다. 6천년 전에 잃어버렸던 아버지, 나로 인하여 수많은 곡절과 한을 품어 오신 아버지, 수많은 상처와 수많은 억울함과, 수많은 원수들 앞에 농락을 받으면서도 참고 나오신 아버지, 수많은 한, 수많은 상처, 수많은 비참한 사연이 엉크러진 아버이신 것을 생각하게 될 때 우리는 뜨거운 불덩이가 되어서라도 아버지의 가슴을 녹여 드릴 수 있어야 되겠습니다. 그러나 그럴 수도 없는 탄식과 저주의 자녀인 것을 생각할 때, 무엇으로 그 아버지를 위로해 드릴 것인가? 밤을 새워 몸부림치고 통곡하여도 원통함이 풀리지 않아야 될 우리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런 마음들은 다 어디에 갔습니까?

하나님은 숱한 역사를 거쳐오면서 통일의 깃발을 꽂을 수 있는 환경을 마련하기 위해 수많은 억울한 과정을 거치셨다는 것을 여러분이 알아야 합니다. 그 누구에게도 말하지 못한 무수한 날이 있었음을 알아야 합니다. 어느 문전에서 박대받는 사람이 있다면 그는 그 몇십 배 이상의 처량한 사정에 부딪힌 하나님이 계시다는 것을 알아야 되겠습니다. 우리 민족이 처참한 환경에 처했을 때 이스라엘 민족은 그 이상의 비참한 민족적인 환경을 거쳐 왔다는 사실을 우리는 알아야 되겠습니다. 또한 하나님은 그 이상의 애달프고 비참한 자리에서도 소망의 마음을 갖고 사람을 찾아오셨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그러한 하나님의 사정이 핏줄을 통해 오늘날 우리 자신들에게 상속됐다는 사실을 알아야겠습니다.

이런 역사적인 한의 터전을 상속받고 있는 우리 자신이기에 먹고 나서 죄의식을 느끼지 않을 수가 없고, 자고 나서 회개의 눈물을 흘리지 않을 수 없는 것입니다. 이렇게 하는 것이 통일 신도들의 생활 철학이고 생활태도입니다. 밥을 먹어도 기쁠 수 없고, 옷을 보고도 기뻐할 수 없으며 주위의 환경을 보고도 웃음으로 대할 수 없는 처지에 있습니다. 그렇듯 하나님이 얼마나 비참하게 굶주리셨고, 밟히셨고, 유린당하시고 농락을 당하셨다는 사실을 우리는 알아야 됩니다.

이런 하나님을 우리들이 맞아들여야 되겠습니다. 그런 아버지를 모셔야 되겠습니다. 6천년 동안 한 맺혔던 아버지의 가슴을 풀어 드리기 위해 하나님 앞에 충성을 다 할 수 있는 자녀가 되게 해 달라고 기도해야겠습니다. 6천년 동안 간직했던 아버지의 참된 사랑을 상속받을 수 있는 자가 되게 해 달라고 하나님 앞에 호소해야 되겠습니다.

우리는 어려운 환경을 극복하지 못했습니다. 너무나 참지 못했습니다. 7년노정도 극복하지 못했습니다. 그러고도 하나님을 이러쿵저러쿵 평하기에 급급하였던 이 저주받을 입술을 가진 무리들입니다. 이처럼 부끄러움을 모르는 우리 자신들이 되었다는 사실을 이제라도 저주할 수 있는 우리가 되어야겠습니다. 그런 무리가 되어 몸부림치고 통곡하면서 하나님의 이런 한의 흔적을 제거시킬 수 있는 방법을 강구해야 되겠습니다. 이런 방법이 있다면 천번 만번 죽어서라도 하겠다고 몸부림쳐야 할 것이 통일신도들이 가야 할 길임을 여러분이 알아야 합니다. 여러분은 그럴 수 있는 하나의 아들, 하나의 딸이 되어야 하고 그럴 수 있는 하나의 가정이 되어야 합니다.

그럴 수 있는 하나의 아들이 누가 되어야 하며, 그럴 수 있는 하나의 딸이 누가 되어야겠느냐? 여러분이 그런 자가 되지 않고는 하나님 나라에 들어갈 수 없는 것입니다. 그런 아들과 딸로 이루어진 가정, 그런 가정으로 이루어진 종족, 그런 종족으로 이루어진 국가, 그런 국가로 이루어진 세계가 되어야 하나님 나라로 갈 수 있는 것입니다.

오늘날 여러분은 하나님이 짊어져야 할 심정의 십자가를 대신 짊어져야 하겠습니다. 몸이 찢겨 걸인이 되고 독수리 밥이 된다 하더라도 그 길을 걸어가야 합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그럴 수도 없는 입장인데도 불구하고 당신의 위신과 처신을 망각해 가면서도 인류를 구하기 위해 지금까지 몸부림치고 계시는 것입니다.

20-234
참된 효도
여러분들은 하늘편에 서서 아버지를 불러 보고, 하늘편에 서서 아버지의 입장을 대변해 보고, 하늘편에 서서 아버지를 대신하여 원수와 대결할 수 있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이런 사람을 아버지께서 얼마나 찾고 계신가를 여러분이 알아야 합니다. 그런 아들이 있으면 뼈가 이스러지도록 안고 싶고, 그런 딸이 있으면 밤을 지새워 가면서 당신의 사연을 털어 놓고 싶은 아버지이십니다. 그런 아버지의 가슴에 맺힌 한을 땅에서 누가 풀어 드려야 하겠는가? 바로 여러분들입니다. 그리하여 하나님께서 `너희 가정으로 말미암아 행복의 한 날을 보았고, 너희 가정으로 말미암아 한을 풀었고, 너로 말미암아 소원의 한 날을 맞이하였노라’고 온 세상에 선포하실 수 있게 해야 합니다. 그런 날을 맞이해야 비로소 이 땅 위에 천국이 개문된다는 것을 여러분이 확실히 알아야 합니다.

그러면 오늘날 우리들이 생각해 할 것은 무엇이냐? 내편에 서서 하나님을 대해서는 안 되겠다는 것입니다. 오늘날 하나님은 우리들에게서 `저를 희생시켜서라도 민족의 죄를 용서하여 주소서’ 하는 사람을 찾고 계십니다. `저를 희생시켜서라도 세계의 죄를 용서해 주시옵소서’ 하고 호소하는 사람을 찾고 계시다는 것입니다. 자기는 희생당하여 그 이상의 아픔을 느끼면서도 민족의 죄와 세계의 죄를 용서해 달라고 호소하는 사람이 있다 할진대, 그 사람은 온 세계를 상속받을 수 있는 사람이 된다는 것입니다.

오늘날까지 사람들은 전부 다 자기를 중심삼고 일해 나왔습니다. 나 나 나 ……… 나 중심한 것이 얼마나 갈까요? 나를 중심삼았기 때문에 설 수있는 자리가 모두 깨어져 나가게 된 것입니다. 별의별 일이 다 있었습니다.

선생님은 홀로 기도하는 날이 많습니다. 여러분은 하나님께서 하나님의 사정을 통고하시며 선생님을 붙들고 사정하시던 그 사정을 모릅니다. 그것은 나만이 알 수 있는 사정입니다. 그렇게도 간곡히, 그렇게도 초조히, 그렇게도 뼈에 사무치게끔 부탁하지 않을 수 없었던 하나님, 광대 무변한 이 우주를 창조하신 능력의 주체 되시는 하나님이 어찌하여 미미한 한 사람 앞에 찾아와 당신의 처량함을 사정하는 하나님이 되었던고? 체면이야 어찌되든간에 손이 발이 되도록 사정해서라도 하나님의 아들딸을 만들기 위하여 수고하고 계시는 하나님이라는 것을 여러분들이 알아야 하겠습니다.

하나님은 하나님을 중심삼은 아들, 천년 만년 믿을 수 있는 아들, 억만년 찬양하기에 부족함이 없는 아들이 나타나기를 고대하고 계십니다. 마음을 졸여 가면서 아담이 살아나기를 고대하시는 아버지이십니다. 그런데 왜 자유의 자리에서 사랑하는 아들딸을 중심삼아 천세 만세 행복을 노래하고 영원무궁 세세토록 사랑을 중심삼은 주권을 찬양할 수 있는 아버지가 되지 못하시고 어찌하여 그리 슬퍼하시는 아버지가 되셨느냐? 그런 아버지를 모실 수 있는 사람이 지구상의 어느 곳에서든 생겨나야 되겠습니다. 만일 여러분이 그렇게 하지 못하겠거든, 그럴 수 있는 환경이 되게 해달라고 기도라도 해야 합니다. 자기가 욕을 먹고, 몰리고 쇠고랑을 차는 한이 있더라도 해야 합니다.

하나님만을 위하여 하나님의 아들딸을 지켜 줄 수 있는 사람이 어디 있습니까? 하나님을 위하여 그 가정을 지켜 줄 수 있는 사람은 어디 있으며, 하나님편에 서서 종족과 민족을 보호해 줄 수 있는 사람은 어디 있습니까? 아버지를 대신해 아들의 권위를 가지고 세계를 달릴 수 있는 아들딸이 어디 있습니까? 억천 만년 전부터 고대하던, 아버지 앞에 그럴 수 있는 한 사람이 지금까지 나오지 못하였던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그럴 수 있는 아들딸이 되어 일생 동안 천번 만번 제물이 되더라도 그 터전을 위하여 거름이 되고 받침돌이 되어 자기의 정성을 다하여야 합니다. 그러나 그것으로 인해 하나님이 서러워하시는데도 불구하고 우리가 딴전을 피우고 있으니 저주받을 노릇입니다.

20-236
하나님을 대신하여 심정의 십자가를 지고 가자
오늘 선생님은 아버지 앞에 기도하면서 통곡했습니다. 흘러가는 세월 속에 한 많은 역사를 지닌 아버지시라는 것을 알았으나 그런 아버지를 위로해 드리지 못했고, 국가 앞에 권위를 세워 드리지 못했고, 국가와 세계를 굴복시켜 아버지 앞에 바쳐 드리지 못한 한스러운 자리를 만들었기 때문입니다. 아버지의 뜻을 빨리 이루어 만민 앞에 아버지의 사랑하는 아들딸이라고 여러분들을 자랑하고 싶었는데 그것이 늦어짐으로 말미암아 수많은 사람들이 지쳐 떨어졌습니다.

선생님이 지방에 순회할 때는 옛날에 골목골목마다 혹은 길가에서 전도하면서 만나 이야기하던 사람이 생각납니다. 그러나 그 터는 남아 있지만 그 사람은 사라져 남아 있지 않음을 보고 수천년 동안 복귀의 길을 걸어오신 아버지의 사연을 생각하게 됩니다. 여러분들은 아버지 앞에서 빚을 갚으라고 졸라대는 사람처럼 품삯을 달라고 하는 자가 되고, 아버지의 눈을 피해 가며 재산을 훔쳐내는 사람이 되겠어요? 여러분들은 지금까지 책임을 다하지 못한 자기 자신의 부끄러움을 알고 하나님의 이상과 뜻을 이루는데 있어 자신을 굄돌로 삼아 최후의 승리를 위해 몸부림쳐야 되겠습니다.

여러분들은 눈을 뜰 때에 하늘편 사람이 되게 해 달라고 기도해야 되겠습니다. 하늘편에서 서서 욕을 먹고, 하늘편에 서서 몰리고, 하늘편에 서서 억울함을 당하고, 하늘편에 서서 종족의 인연을 남기겠다고 몸부림쳐야 뒤겠습니다.

지금까지 통일교회가 걸어온 길은 비참했습니다. 말할 수 없는 사연과 억제할 수 없는 사연을 가지고 나왔습니다. 그러므로 여러분은 하늘편의 사정과 하늘편의 분함과 하늘편의 내정이 어떻다는 것을 알 수 있을 것입니다. 사람은 이 땅에 태어나서 백년 천년 사는 것이 아니요, 이슬같이 반짝했다가 가야 하는 일생이니 하나님의 저주의 탑을 남겨선 안 됩니다.

여러분이 죽었을 때, 그 무덤 앞에 꽃을 안고 와서 `아버지여! 당신의 사랑하는 아들이 갑니다. 당신의 아들이 사랑하던 이 땅을 누가 사랑하고, 이 민족을 누가 살리고, 이 제단을 누가 살리옵니까?’ 하고 몸부림칠 수 있는 동지나 아들딸을 남겨야 합니다. 그러지 않고는 하나님 앞에 갈 수 없는 것입니다. 어떤 여건하에 있더라도 눈물을 흘리면서 아버지를 위로해야 할 인류인 것을 여러분은 망각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모두가 하나되어 하늘편에 서서 죽고 살자고 하면서 하나님이 기뻐할 수 있는 부모를 이 땅 위에 모시고 천년 만년 안식하실 수 있는 터전을 아버지 앞에 마련해 드리겠다고 몸부림치다가 죽어간다 해서 그것이 한이 되겠습니까?

여러분은 예수님이 십자가의 길을 향하여 나가는 그 길 앞에서도 절개를 세우겠다고 다짐하여 몸부림쳤던 사실을 알아야 되겠습니다. 그런 예수님의 가슴에 창자국이 웬말이고, 그 머리에 가시 면류관이 웬말입니까? 그러나 예수님은 자신의 몸뚱이에 입은 아픈 상처보다도 하나님의 마음에 입은 상처가 더 크심을 알았기 때문에 피를 흘림으로 말미암아 아버지의 내정을 위로하려 했고, 상처받은 가슴으로 아버지의 심정을 위로해 드리려 했습니다. 그런 마음이 있었기 때문에 부활할 수 있었다는 것을 여러분들은 알아야 되겠습니다.

그러기에 오늘날 우리 통일교회 교인들은 하나님을 대신하여 심정적인 십자가를 짊어지고 가야 하겠습니다. 하늘편을 책임지고, 하늘편에서 살고, 하늘편에서 부활할 수 있는 여러분이 모두 되기를 바라며, 이 시간을 기억해 주기를 부탁드립니다.

20-237
기 도
한 많은 역사과정에서 아버님의 날이 언제 있었으며, 부모의 날이 언제 있었으며, 자녀의 날이 언제 있었으며, 만물의 날이 언제 있었습니까? 불쌍하게 몰리고 쫓김받던 통일의 무리를 통하여 이 날들을 결정하셨다는 것을 생각할 때 역사해 주신 아버지 앞에 진실로 감사를 드리옵니다.

아버지, 이제 제1차 7년노정이 끝나고 제2차 7년노정을 향하여 출발할 시점이 저희 앞에 다가오고 있습니다. 혼란된 세계가 바야흐로 저희 앞에 다가오고 있습니다. 세상에서 반대하던 사람들이 다 꺾어나가는 것을 저희들이 바라보고 있습니다.

아버지, 자기의 위신과 체면을 다 버리고 아버지의 내정을 부여안고 몸부림치는 당신의 아들딸들에게 해방의 한 날과 자유의 천국을 바라볼 수 있는 날이 어서 속히 오게 허락하여 주시옵길 간절히 바라옵고 원하옵니다. 아버지! 오늘 여기에 있는 당신의 자녀들은 하늘편의 사정이 얼마나 딱하다는 것을 알고 있사오니 변혁되는 아들과 변혁되는 딸이 될 수 있게 하여 주옵기를 간절히 바라옵고 원하옵니다.

오늘 이 시간을 같이하여 주심을 감사드리옵니다. 남한 각지에 널려 있는 당신의 자녀들을 아버지의 품에 품어 주시옵소서. 아버지께서 저희를 불쌍히 보시옵고, 버려 두지 마옵길 간절히 바라옵니다. 세계에 널려 있는 당신의 자녀들을 기억하여 주시옵고, 그들이 가는 곳곳마다 승리의 한날만이 있도록 축복하여 주시옵소서.

아버님, 남아 있는 당신의 자녀들도 나가지 않으면 안 될 때인 것을 알고 있사옵니다. 혼란된 세계 가운데서도 아버지를 위하여 충성을 다하고, 아버지를 위하여 정성을 다 할 수 있는 당신의 자녀들 되게 하여 주시옵소서. 과거에 부족하였던 것을 회개하고 아버지 앞에 충효의 도리를 다할 수 있게 하여 주시옵고, 저희들이 들이는 정성으로 만민이 축복을 받을 수 있게 하여 주옵길, 사랑의 아버님, 간절히 바라옵고 원하옵니다.

승리의 한 날이 저희 앞에 찾아올 것을 믿사오며, 모든 말씀 참부모의 성호 받들어 아뢰었사옵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