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319 to 19-340: 부모는 역사의 기점이다

부모는 역사의 기점이다
1968.03.29 (금), 한국 전본부교회

19-319
부모는 역사의 기점이다
오늘은 아홉 번째 맞는 부모의 날입니다.

가정을 중심삼고 볼 때, 그 가정의 부모가 결혼한 날을 축하하는 날도 있을 것이고, 또 자식이 태어났으면 그 자식의 생일을 축하하는 날도 있을 것입니다. 또한 그 자식이 성장하여 결혼을 하게 되어 축하하는 날도 있을 것입니다. 또 국가적으로 보면, 그 국가가 타국의 압제를 받다가 독립을 하게 되면 그날을 경축일로 정하여 축하하는 경우도 있습니다. 이처럼 축하의 날은 많습니다.

19-319
섭리적인 축하의 날
그러나 그러한 모든 날들을 섭리적인 측면에서 볼 때 하나님과는 아무런 상관이 없는 날들입니다. 아무리 세계 만민이 밤을 새워 그러한 날들을 찬양하고 축하를 하더라도, 그러한 날들은 타락한 인간 세상에서 빚어진 날들이기 때문에 하나님이 복귀섭리와 뜻을 세우는 데 있어서 필요한 날들이 아닙니다. 그러기에 이런 날들은 어차피 다 지나가 버려야 하는 것입니다.

역사과정에서 한 시대를 살고 갔던 사람들이나, 지금 현세에 사는 사람들도 자기들 나름대로 축하하고 사랑했던 잊지 못할 날들을 가지고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과거나 현세를 통하여 하나님의 섭리적인 뜻을 중심삼고 볼 때, 사람들이 세상적으로 축하하는 날들은 하나님과 상관이 없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그러한 날들은 어차피 이 지구상에서 없어지고 마는 것입니다.

역사 과정에서 그렇게 살던 사람들이 영계에 가면 그들이 축하했던 기준에 따라 슬픔의 조건이 된다는 사실을 우리들은 알아야 되겠습니다.

오늘날 땅 위에서 ‘세계적으로 자랑할 수 있는 날을 가졌다’고 자랑하는 사람이 있을지 모릅니다. 그러나 그 사람은 앞으로 하나님을 중심삼고 세계적으로 축하할 수 있는 그날이 오면 자기가 축하했던 것은 도리어 부끄러운 조건밖에 되지 못한다는 사실을 여러분은 알아야 합니다.

그러면 사람들이 가장 공통적으로 바라는 축하의 날은 어떤 날이겠습니까? 그것은 두말할 것도 없이 태어난 날입니다. 그 다음에는 무슨 날이겠습니까? 결혼식을 올린 날입니다. 또 그 다음은? 돌아가는 날일까요? 내가 태어난 날이 제일 중요한 날이고, 그 다음은 내가 상대를 맞이하는 날이요, 또 그 다음은 아들딸을 낳는 날입니다.

세상에 제 아무리 축하할 날이 있다고 하더라도 이 원칙을 벗어난 축하의 날은, 상대적 관계는 될 수 있을지언정 직접적인 심정의 자리를 차지할 수 있는 축하의 날은 아닙니다.

이 세 가지 중요한 날이 뜻하는 것은 무엇이냐? 타락한 인간의 첫째 소망이 개성 완성, 곧 개인이 타락했기 때문에 부활한 하나의 개체를 중심삼고 새로이 태어나는 것입니다. 둘째 소망은 상대완성이니 태어난 그 자체가 축복을 받는 것입니다. 세째는 선의 자녀를 번식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불행한 사람이란 어떤 사람일까요? 자기 동네의 어떤 잔칫날에 참석을 못해서 불행한 것이 아니요, 그 나라의 경축일을 갖지 못해서, 또는 세계적인 경축일을 갖지 못해서 불행한 것이 아닙니다. 아무리 좋고 좋은 날이 있다 해도 자신에게 직접적으로 좋은 날과는 비할 수 없는 것입니다. 직접적으로 좋은 날은 자기가 이 땅에 태어난 날, 자기의 상대를 결정하는 날, 그리고 부부의 사이에서 새로운 자녀가 태어나는 날입니다. 그러므로 이런 날을 갖지 못한 사람이 불행한 사람입니다.

사람이 이렇다면 하나님은 어떨 것인가? 하나님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렇다면 하나님도 태어난 날이 있고, 결혼한 날이 있고, 아들딸을 낳은 날이 있을 것인가라는 의문이 생길 것입니다.

19-321
평면적인 천국, 실체적인 천국의 첫 출발
하나님께서 제일 기쁘신 날은 아담이 태어난 날입니다. 이날은 실체세계의 하나님으로서 출발하는 첫날이기 때문입니다. 즉 우주적인 하나님의 가치로서 태어날 수 있는 실체적인 첫 출발이 아담으로부터 시작되기 때문입니다.

그 아담이 없었더라면 하나님의 가치는 없는 것입니다. 내재적인 가치는 있을지 모르지만 상대적인 가치는 없는 것입니다. 즉 어떤 목적에 대해 바라는 욕망을 충당시키는 데 있어서 상대적인 입장 여하에 따라 그것의 현실적인 가치가 결정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제일 기뻐하신 날, 다시 말해서 만물을 지으신 그날 보다도 더 기뻐하신 날은 아담을 이 천지 가운데 세우신 날이었습니다. 그 다음은 아담이 결혼하는 날입니다. 아담이 결혼하는데 하나님이 왜 좋아하실 것인가? 아담의 결혼식은 천적인 뜻으로 볼 때, 하나님의 결혼식이 되기 때문입니다. 그 다음은 아들 딸을 낳는 날이라고 했지요? 마찬가지로 아담의 아들딸은 바로 하나님의 아들딸이 되는 것입니다. 여기서 비로소 전후 좌우, 즉 평면적인 천국을 건설하는 중심이 세워지는 것입니다. 평면적인 천국, 실체적인 천국을 건설하는데 첫 출발이 되는 것이 아담의 아들딸입니다.

하나님께서 제일 기뻐하시는 날은 아담이 태어난 날이니, 이날을 축하해야 되겠습니다. 그런데 누가 아담이 태어난 날을 축하해 보았습니까? 혹은 하나님이 ‘인간들아, 내 아들 아담이 태어난 날이 몇월 며칠이다 ! ‘라고 선포한 적이 있습니까? 없습니다. 아담을 낳기는 낳았는데 어느날 낳았는지 모릅니다.

그 다음으로 하나님이 좋아하실 수 있는 날은 아담이 잔치하는 날입니다. 그런데 아담이 잔치를 했습니까? 잔치를 하기는 했는데 그 잔치는 원수가 도둑질해서 한 잔치였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기쁜 날을 맞이하시지 못했습니다. 하나님은 이 광명천지에 기쁜 날을 맞이하시지 못하고 전부 잃어버리고 말았습니다. 결국 하나님은 기쁜 날을 갖지 못하셨다는 것입니다.

19-322
슬픔을 풀어야 할 하나님
기쁜 날을 갖지 못하신 하나님이 무엇에 기뻐하실 수 있겠습니까? 이런 내용도 모르는 일반 기독교인들은 ‘영광의 하나님께서 높으신 보좌에 앉아 계시니, 당신이 명령하시면 천하가 다 움직이니 그 이상 더……’ 라고 생각하고 있지만 이것은 잘못 알고 있는 것입니다. 이렇게 되어 있으니 하나님이 기쁘시겠습니까, 슬프시겠습니까? 그 하나님은 한량없이 슬프십니다. 그 슬픔을 풀어야 할 하나님이십니다. 슬픔을 못 푸신 하나님을 누가 좋아하겠습니까? 더우기 이러한 것이 세상에서라면 아무도 좋아할 사람이 없습니다. 그러나 자기 새끼라면 싫더라도 좋아하려 하고, 자기 새끼가 아니면 좋아하지 않으려 합니다. 오늘날 이런 천지가 벌어지고 있어요.

하나님이 좋아하실 수 있는 그날부터 출발한 사람이 한 사람도 없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오늘날 인류는 타락한 아담 해와의 후손이라는 말에 꼼짝할 수 없게 되어 있는 것입니다. 기쁨의 날을 갖지 못하고 태어난 사람들이 무슨 기쁜 날이 있을 수 있겠습니까? 사람들이 제아무리 꿈을 꾸고 행복을 노래하고 뭐가 어떻고 어떻다 하더라도 그것은 전적으로 슬픈 인생의 행로인 것입니다. 결국 자탄(自嘆)의 자리에 빠지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 자리에서는 하늘의 입체적인 세계, 즉 천주와 관계를 맺어서 심정의 세계가 천지와 더불어 자극을 받아 기뻐할 수 있는 실체의 세계를 절대로 가질 수 없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이 세상은 지나가라는 것입니다. 이런 날들은 걷어치우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종교 세계에서는 일단 자기 개인도, 가정도, 국가도, 세계도 부정하는 것입니다. 그리워하는 그 세계를 그대로 두고 살면서 그냥 그 자리에서 그리워 해야만 하겠습니까?

하늘을 찾아가려면 뒤로 돌아 복귀의 길을 찾아야 되는 것입니다. 그러면 하나님이 기뻐하실 한 날을 맞이할 수 있을 것이 아니겠습니까? 하나님이 좋아하실 날에 이스라엘 백성은 잠자고만 있겠습니까? ‘만민아 깨어라! 만민아 말하라! 만민아 춤춰라! ‘ 라고 하게 되어 있습니다. 만일 하나님의 아들딸과 백성이 있다면, 그 아들딸과 백성을 세워 놓고 혼자 웃으시면서 좋아할 수 있겠습니까? 좋을 때는 다같이 좋아해야 합니다.날아가는 파리새끼들까지도 박자를 같이 맞추어 줘야 좋은 것입니다.만약 그럴 수 있는 날이 한국 강산에 왔다면, 이 한국 강산만 좋아해야 할 날이겠습니까? 누구나 지구상을 하루에도 몇천 번 왔다갔다 할 수 있는 천국이 되기를 바랄 것입니다. 그런 날이 이 지구상에 한번 오기를 바라지만 아직 그럴 수 있는 날을 못 가졌습니다. 아무리 보고 싶고 갖고 싶어도 그날이 나타나지 않으면 못 갖는 것이고, 못 보는 것입니다. 그래서 인간은 평등 평화 행복을 노래할 수 있는 자유 천국의 그날이 오기를 바라는 것입니다. 그 날과 그 나라가 나타나기를 바란다는 것입니다.

19-323
역사의 실상과 섭리의 내용
인류 역사는 태어난 날을 축하하는 기쁨의 연속이나 그 기쁨에 사랑이 첨부되었어야 했습니다. 부모에게는 자식을 사랑하지 않을 수 없는 사랑의 보(褓)가 한겹 덮어 씌워져 있습니다. 또 그 자식이 자랄 때 ‘얼른 얼른 커라’ 하며 마치 자식이 하루만에라도 다 커서 그 이튿날부터 아빠 엄마를 모시고 다니기를 바라는 마음도 있습니다.

그런데 세상에는 5대 독자니 몇대 독자니 하는 사람들이 있는데, 게다가 홀어머니가 그런 아들을 길러 나온 집에 시집을 간 여자는 아무리 성품이 좋고 훌륭하더라도 귀여움을 받지 못합니다. 도리어 시어머니에게 미움을 받습니다. 자기가 사랑하는 아들에게 부부의 사랑이 덧붙는 것인데 거기에 왜 시기와 질투가 따르는지…, 그것은 사탄의 마음입니다. 하나님은 서로 사랑하는 것을 보고 싶어하십니다. 오늘날 우리의 이념을 아는 사람은 아들과 며느리가 서로 사랑하는 것을 기뻐하고 찬양해야 합니다. 자기 아들을 며느리가 좋아하면 춤을 추며 기뻐해야 할 텐데, 왜 시기 하고 질투하느냐 말입니다. 아들이 태어난 날의 기쁨 가운데에는 아들에 대한 사랑이 있지만, 그 사랑 가운데는 며느리에 대한 사랑도 있다는 것입니다. 둘이 옹기종기 사랑하고 좋아하는 것을 볼 때, 그것을 하나님의 입장에서 말하면 하나님이 아담 해와가 서로 좋아하는 것을 보시고 ‘야야, 통행에 방해된다. 비켜라!’ 하고 싫어하시겠습니까? 고속도로상이라 하더라도 ‘아무리 교통 방해를 해도 좋다!’ 하시면서, 하나님 자신이 비켜가게 되어 있지 밀치고 가게 되어 있지 않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천신만고 끝에 아담과 해와를 만드셨습니다. 그들을 만들기 위하여 우주를 만드신 것입니다. 이렇듯 하나님은 천신만고 끝에 피조 세계를 만드신 것입니다. 그렇게 아담 해와를 힘들게 지으셨으니 그들을 다 지으시고 난 후의 하나님은 말할 수 없이 좋으셨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보다 더 기뻐할 수 있는 때가 있어야 할 것이니, 그때는 바로 지으신 아들딸이 하나 되는 시간, 즉 아담이 신부를 맞이하는 때입니다. 이러한 기쁨이 천지간에 태어난 모든 것들에 연결이 되는 것이고, 인류 전체에는 사랑의 중심이 연결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거기서부터 지파가 벌어져 폭발력으로 화하면 이 세계가 다 말려 들어갈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면 여러분은 모두 하나님을 닮아서 태어나게 되고, 닮아서 나지 못한 사람들은 하나님을 닮으려고 할 것입니다.

그러면 여러분은 하나님을 닮아서 태어났습니까, 닮으려고 합니까? 어느 쪽이예요? 닮으려고라도 해야 합니다. 하나님을 닮아 나왔다면 여러분들이 기뻐해야 할 날은 무슨 날이겠습니까? 하나님이 여러분을 닮았다면 모르지만, 여러분이 하나님을 닮아 났다면 여러분은 무슨 날을 기뻐해야 되겠습니까? 태어난 날을 기뻐해야 합니다. 그 다음엔 결혼한 날을 기뻐해야 합니다. 그리고 아들딸을 낳은 날을 기뻐해야 합니다. 이것이 역사의 기원이요, 이것을 이루기 위하여 발전해 나온 것이 역사의 실상이었고 섭리의 내용이었습니다.

19-324
예수님과 그의 신부
하나님은 지금까지 바로 이러한 날들을 찾기 위하여 수고하고 계신 것입니다. 하나님은 먼저 아들을 찾아 세우려 하셨고 딸을 찾아 세우려 하셨습니다. 그러면 지금까지 구원섭리는 누구를 중심삼고 했습니까? 남자를 중심삼고 했습니다. 역사를 보면 남자들이 섭리를 위하여 싸웠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싸움에 일등한 사람이 있으면 싸움에 일등한 가정이 있어야 하고, 그 다음엔 그런 종족과 나라가 있어야 됩니다. 하나님은 일등 한 나라가 모셔야 됩니다. 그러한 터전을 만들기 위하여 선민사상이 역사과정에 나왔던 것입니다. 그 선민사상으로 선민을 지도해 나온 책임자는 바로 남자입니다.

하나님께서 천지를 창조하실 때 상대적으로 하셨습니다. 남자는 이 평면세상, 횡적인 세상에서 내적입니다. 그러므로 남자가 내적으로 서서 기뻐할 수 있는 한 날을 맞지 않고는 외적인 천지에서 그 무엇이 이루어진다 해도 다 쓸데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남자는 내적 환경에서 기뻐할 수 있는 기준을 찾아 세우려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기뻐할 수 있는 기준은 개인적인 것이 아니고, 한 국가를 중심삼고 기뻐할 수 있는 기준입니다. 그것을 만들자는 것입니다. 이와 같이 선민의 규모보다 더 큰 민족으로서 선민 국가를 만들자는 것이 이스라엘이었습니다. 다시 말하면 국가를 중심으로 기뻐할 수 있는 한 남자를 찾아 세우자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면 그 나라에서 기뻐하는 것은 누구의 기쁨이 되는가? 하나님의 기쁨이 되는 것입니다.

지금까지의 역사과정은 그 사실을 볼 때, 그것은 남자를 중심삼은 구원섭리였습니다. 그렇지요? 그런 역사과정에서 슬픔과 고통과 비참함이 사무쳐 있는 역사적인 고난이 노정을 헤치고, 현실세계의 비참한 요소들을 제거시키며 또 그 가운데서 하늘을 사랑하고 땅을 사랑하는 하나의 중심 인물이 나타났으니, 그가 바로 만민이 고대하던 ‘메시아’였던 것입니다.

하나님은 메시아, 즉 예수님이 탄생함으로 말미암아 에덴 동산에서 잃어버렸던 그 아들이 탄생하던 때의 기쁨을 다시 느끼실 수 있는 때를 맞이하였던 것입니다. 그러면 그 아들은 태어나서 무엇을 해야 되겠습니까? 싸움을 잘 해야 하는 것도, 돈을 잘 벌어야 하는 것도 아닙니다. 장가를 가야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이 장가를 갔습니까? 못 갔습니다. 왜 장가 못 갔습니까? 예수님은 신랑으로서 너무나 잘 갖추어져 있었지만, 신부로서 갖추어진 여자가 없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의 소원이 무엇이었습니까? 세계 앞에 복귀의 한을 풀 수 있는 부활의 날을 세우는 것이었습니다. 태어나신 날은 기뻐할 수 있는 날이되었지만, 하나님의 광명의 날은 어떻게 해야 올 것인가 하는 것이었습니다. 하나님을 중심삼고 축복의 한 날을 맞이하는 것이 소원이었지만 그 소원의 날이 절벽에 부딪치고 말았던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목적을 향하여 달리던 배가 돌개바람을 만나 돛대가 부러지고 방향도, 목적도 다 잃고 만 것과 같은 입장에 처하게 된 것입니다.

예수님에게는 왜 신부가 필요한가? 하나님은 이스라엘 터전을 마련하기 위하여 수고한 남성들 앞에 상대적인 내용을 지닐 수 있는 한 여자가 필요했던 것입니다. 예수님은 자기 일대가 아니고 역사를 통해서 왔습니다. 아벨에서부터 싸워 가지고 노아, 아브라함 등을 통하여 수천년을 거쳐 왔던 것입니다. 이런 역사적인 심정을 가진 사나이 앞에 역사적인 심정을 지닌 여인이 없었던 것입니다.

그런 여자가 나타나서 예수님 앞에 상대적인 존재로 설 수 있었더라면 예수님 일대에 역사적인 슬픔을 한꺼번에 탕감할 수 있었을 것입니다. 그래야 해와가 죽지 않고 역사적인 출발을 한 것이 되는 것입니다. 그래야 타락하지 않은 아담과 함께 해와가 출발한 것이 됩니다. 그러므로 그런 해와와 같은 존재가 나와 그 일대에 역사적인 모든 것을 탕감하고 새로운 출발을 해야 되는 것입니다. 그렇지 않으면 복귀 해원의 터전이 이루어지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19-326
외로왔던 예수님
남자는 수천년을 통해서 왔지만─찾아진 아담의 신부는 하루 아침에 천지의 대위업을 파탄시켰기 때문에─여자는 그 복귀에 있어서도 일대에 사탄세계를 전부 청산해야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역사적인 모든 탕감조건을 해와에게 전부 연결시켜야 합니다. 해와는 일생 동안 그것 들을 탕감해야 합니다. 뜻을 모르는 자리에서 예수님으로 말미암아 뜻을 알아 가지고 일대에 이것을 넘겨 놓아야 합니다. 이것은 해와가 당초 아무것도 모르는 자리에서 사탄의 말을 듣고 타락했던 것을, 본연의 남편의 말을 듣고 복귀했다는 뜻이 성립되는 것입니다. 이러한 역사적인 인연을 상속받아 예수님의 신부의 입장을 책임질 수 있는 여성이 그 당시에 없었다는 것입니다.

생각해 보십시오. 4천년 역사를 수습하고 그 역사의 한을 해원성사하여 만민 앞에 해방의 깃발을 세우기 위해 오셨던 예수님입니다. 그런 예수님이니 뜻을 대하는 한 순간, 한 순간이 얼마나 심각했겠습니까? 천지를 한꺼번에 움직이고 옮기겠다는 심정을 가지고 행동를 옮셨을 것입니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거기에 상대될 수 있는 이스라엘이 어디 있었습니까? 잘났다는 교법사, 제사장들은 어디로 갔습니까? 반대하기에만 급급하고 자기들이 잘났다고 법석을 떨면서 모두 예수님을 몰아냈습니다. 그리하여 소망의 닻을 내려야 할 이 땅위에 소망의 닻을 내리기는 커녕 패망의 닻을 내리고 가야 했습니다.

그러한 운명에 부딪쳤을 때 겟세마네 동산에 찾아가신 예수님은 얼마나 심각했겠습니까? ‘아버지!’ 하고 부르던 그 기도는 4천년 역사를 꿰뚫고도 남을 수 있는 심정과 피와 땀과 눈물어린 기도였습니다. 피와 땀과 눈물은 공연히 흘리는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은 쓰러진 이스라엘을 구원하기 위해 피와 땀과 눈물이 나는 기도를 하셨던 것입니다. 그런데 이러한 예수님의 심정을 모르고 베드로, 요한, 야고보는 잠을 자고 있었으니 얼마나 기막힌 일이었습니까?

예수님의 그러한 심정 앞에 태산을 뚫고 넘어갈 수 있는 신념을 갖고 상대적인 입장에서 자기를 부정하고 나선 자가 없었습니다. 기가 막힌 시대입니다. 그래도 예수님은 참으셨습니다. 그러나 당시 예수님이 교훈을 잘못했다고 봅니다. 너무 사랑만 많았습니다. 언제나 예수님은 제자들 편이었습니다. 밀밭을 지나다 밀을 비벼 먹는다고 바리새교인들이 비난을 하는데도 제자들 편을 들어 주셨습니다.

그러나 그러한 예수님은 이스라엘의 공인도 유대교단의 공인도 받지 못했습니다. 교법사나 서기관, 족장들에게도 공인받지 못했습니다. 더우기 자기 가정, 즉 다윗의 후손으로 태어난 요셉 가정에서조차도 몰렸습니다. 가정에서 몰리고 제자들에게까지 배신당하신 예수님은 갈 데라고는 십자가 밖에 없었던 것입니다. 예수님은 죽어 가면서도 나를 위해 울지 말고 이스라엘의 아들딸을 위하여 울라고 하셨습니다. 앞으로 올 이스라엘의 해방의 날을 위하여 울라고 하신 것입니다.

그렇지만 이런 십자가의 고개를 넘어 예수님을 사랑하고, 예수님을 위해 눈물 흘리며 예수님의 사정을 다시 전해 줄 수 있는 사람이 없었다는 것입니다. 그러니 2천년이 지난 지금도 기독교가 이 모양 이 꼴이 되어 있는 것입니다. 주어진 책임과 사명을 하지 못하면 망합니다. 예수님은 죽어 가면서 가정의 기준을 후대의 약속으로 남기셨습니다. 갔다와서 다시 만나자는 것이 얼마나 기막힌 일입니까?

19-328
예수님의 길과 선생님의 길
예수님의 그 길은 2천년이 걸려도 만들 수 없는 길입니다. 그 주님을 만나기 위해 얼마나 기다렸고, 또 얼마나 많은 선조들이 비참한 눈물 속에 뼛골을 녹여가며 그 길에서 죽어 갔던가? 기가 막히는 일입니다. 이 나라 이 민족 앞에, 혹은 이곳으로, 혹은 저곳으로 오실 줄 알고 아무리 기다려도 약속하신 주님은 오시지 않고 있습니다. 몰아쳐 오는 죽음의 물결만이 즉, 가정적인 죽음의 물결, 종족적, 국가적, 세계적인 죽음의 물결이 이 시대를 휩쓸고 있습니다. 여기서 전진할 수 있는 시대를 맞이하지 않고서는 주님은 이 민족 앞에 올 수 없습니다. 이것을 이 민족은 몰랐던 것입니다.

그러나 이 민족은 선생님을 중심으로 1차, 2차, 3차노정을 거쳐 가지고 세계적인 시대까지 거쳐가야 합니다. 그러기에 가정, 국가, 전부가 사상적으로 고침을 받고 새로운 국가적인 체제를 이루는 것입니다. 어떻게 하면 미국이나 그 어느 나라의 도움도 받지 않고, 공산주의를 누르고 이 민족을 세계적인 지도국가로 세울 것인가, 이상적인 모국으로 세울 것인가를 선생님은 항상 잊지 않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 민족의 정신이 흐려지니 지금까지의 전통이 흐려지고, 문화도 흐려지고, 윤리도 흐려지고…….전부다 죽음의 물결에 휩쓸리고 있습니다.

그러니 여기에서 의문점을 제기하고 올바로 파고 들어가 연구하고 깨닫고 해야지, 지금 어떻게 사느냐가 문제입니까? 자기가 탄 배의 방향과 속도만 알았지, 바람이 불어 밀려 간다는 것은 몰랐습니다. 잘못하다가는 전부다 파선되는 것입니다. 바람 부는 속도를 알아 키를 잡고 방향을 돌려야 된다는 것을 모르고 있는 것입니다.

신앙길에서는 목표를 향하여 그냥 그대로 가야 됩니다. 세계적인 종말에는 폭풍우가 몰아쳐옵니다. 그러므로 그때에는 제아무리 올바른 목적을 가졌다 하더라도 방향을 잡지 못하면 풍파에 몰려가게 됩니다. 풍속과 풍향을 알아서 키를 돌리고 그에 대비하는 행로를 가지 못하는 사람은 파선되는 것입니다.

지금까지 선생님은 가정의 사랑 문제를 중심삼고 부자의 관계라든가, 부부 관계 등 가정에 대한 실체기준을 가르쳤습니다. 그것은 6천년 역사를 거쳐 나오면서 누구도 손을 대지 못한 것입니다. 요즘에는 부자관계 부부관계 등 가정에서의 모든 관계가 깨어지고 있습니다. 사탄이 이것을 깨뜨리려고 애쓰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끝날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그런 혼란한 시대가 세계적으로 퍼져 동에서 번쩍, 서에서 번쩍하거든 주님이 이 땅 위에 오셔서 자리잡은 줄 알라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소원, 하나님의 소원이 무엇인가? 하나님이 제일 기쁘신 날은 아담이 태어난 날, 그 다음은 신부를 맞이하는 날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나는 신랑이요, 너희는 신부’ 라는 팻말을 박아 놓고 가셨던 것입니다. 그래서 과거의 기독교인들은 남자들도 신부인 줄 알았습니다. 그러나 남자는 종이며 천사장입니다. 해와를 유린했던 천사장의 꼴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남자가 외적인 것을 세우면 내적인 것은 여자가 했습니다

19-329
완성급에 올라가려면
은혜의 역사는 할머니로부터 시작되었습니다. 나이 많은 80 이상 된 사람, ‘안나’ 같은 이도 80이 넘었습니다. 옛날 은혜의 역사는 70, 80이 된 할머니를 중심삼고 했습니다. 그 다음에 70, 60, 50등으로 내려와 30대에 은혜가 머물 수 있는 때가 되거든 주님의 때가 온 줄 알라는 것입니다.

20대부터 40대를 중심삼아 은혜의 역사가 국가적인 바람을 일으키거든 주님이 오신 줄 알라는 말입니다.

그러면 그분은 이 땅에 오셔서 무엇을 해야 하느냐? 결혼을 해야 합니다. 그때 하나님이 그것을 보고 우시겠어요, 웃으시겠어요? 두고 보세요. 인간 역사노정에서는 아직 완성기준을 넘어가야 할 소망이 남아 있는 것입니다. 아담은 이 소망의 기준을 연결하여 완성권내로 넘어가야 했습니다. 그러나 아담이 못 넘었기 때문에 오시는 주님은 그 책임을 대신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오시는 주님은 아담 대신 그 책임을 지고 이 지상세계를 찾아오시는 것입니다.

그러나 장성급에 있는 자는 아무리 영통을 한다 해도 완성급으로 척 올라가지 못하는 것입니다. 구비조건도 다 갖추지 않고 올라간다는 것은 부모의 자리를 침범하는 것과 같습니다. 그러므로 완성급에 올라가기 위해서는 안팎의 모든 구비조건을 갖추어야 합니다. 즉 위로는 하늘을 대표하고, 아래로는 땅을 대표하고, 뒤로는 역사의 모든 과정을 통합하고, 현재에서는 세계 인류를 통일하여 다가올 시대를 대신해서 당당히 설 수 있어야 합니다. 그러한 자격자라야 옛날 아담 이상의 권한을 가지고 왔다는 공인을 받아 이 선을 넘을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기 전에는 이 선을 절대로 넘을 수 없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이 땅에 와서 사탄세계에서 승리한 이스라엘의 야곱을 중심삼은 야곱 가정, 야곱 종족, 야곱 민족으로 발전하여 세워진 그 승리의 터 위에서 출발하셨던 것입니다.

우리가 속죄받기 위해서는 한 사람이 모든 사람 대신 속죄할 수 있는 제물을 드릴 때, 그 중심된 한 사람과 하나 될 수 있는 마음을 가져야 됩니다. 그러면 그 한 사람으로 말미암아 하나 된 모든 사람은 탕감받게 됩니다. 무슨 말인지 알겠어요? 그래서 세계 국가의 하나인 이스라엘을 중심삼고 신랑이 오게 되는 것입니다.

아담과 해와가 타락한 기준까지 가게 되면 양자가 됩니다. 양자는 그냥 그대로 가만히 있어서는 상속받을 수 없습니다. 양자는 양부모에게 옛날의 친아들보다도 더 사랑했다는 조건을 세워야 합니다. 그래야 그 양부모가 기쁜 마음으로 자기에게 상속해 줄 수 있는 것입니다. 이것을 똑똑히 알아야 하겠습니다.

이스라엘은 양자권 국가형입니다. 그러기에 그 민족 모두는 옛날 하나님의 아들딸인 아담과 해와가 타락하기 전에 하나님을 사랑하고 하나님 앞에 충성하던 그 이상의 마음을 가져야 했습니다. 그 이상의 마음을 갖지 않으면 복귀될 수 없다는 것입니다. 그 기준에 올라가야 되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세례 요한은 이스라엘을 대표해서 하나님 앞에 그 옛날 선지자들 이상으로 하나님을 사랑한다는 조건을 세우기 위해, 메뚜기와 석청을 먹으며 30여 년 광야에서 정성을 들여 나왔던 것입니다. 그러나 그의 입장은 돌감람나무 입장이었습니다.

19-332
죄값을 받은 이스라엘 민족
그러면 그런 단계에서 완성권에는 누가 나가야 되느냐? 창조원리로 볼 때, 인류와 부모가 나가야 합니다. 아담과 해와는 인류의 부모입니다. 인류의 부모는 이 땅에 와서 타락으로 인하여 고장난 것을 바로 고쳐야 됩니다. 당초 해와를 중심삼고 아담이 끌려 들어가 타락했습니다. 창조원리를 중심삼고 보면, 에덴 동산에서 아담을 통해서 해와를 창조했습니다. 때문에 사탄세계에서 해와를 데려오는 것이 아니라, 사탄에게 빼앗긴 해와를 빼앗아 와야 되는 것입니다. 빼앗아다가 재창조해야 되는 것입니다. 이 일을 하기 위해서 예수님은 이 땅에 오셨던 것입니다. 그런데 누가 그런 사정을 알기나 했습니까?

예수님이 이 땅에 오셔서 3년 동안 무엇을 했습니까? 12사도가 뭡니까? 선생님만 보면 설설기는 그들을 선생님은 우습게 알아요. 기독교에서는 바울이 어떻고 어떻고 하는데, 바울이 훌륭한게 뭐가 있습니까? 선생님이 ‘당신 이런 것 잘못했지 ? 하면 쩔쩔매는 겁니다. 오늘날 신학사조는 예수님의 종교가 될 기독교가 바울의 종교가 되어 버렸습니다.

예수님이 오셨으면 모든 것을 탕감복귀했어야 합니다. 탕감복귀, 에덴에서 잃어버린 전부를 탕감복귀했어야 되는 것입니다. 또한 예수님은 하나의 여성을 이 땅 위에서 택하여 세워야 했습니다. 예수님이 오셔서 모두가 찬양할 수 있는 가정에서 새로운 출발을 했더라면 어떻게 되었겠습니까? 광명한 새 아침이 되어 만물이 기쁨으로 예수님을 영접할 수 있는 날을 맞이할 수 있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그러지 못하고 한낮은 어느덧 지나가 석양길에 들어서 버렸고, 많은 군중들로부터 찬양받아야 할 것인데, 반대로 사망의 외로운 길에 몰려 들어가 사탄들에게 에워싸여 죽음과 싸워야 하는 길에 있었으니, 기가 막힌 일이라는 것입니다. 이스라엘 민족은 잘못했습니다. 이스라엘 민족은 4천년, 6천년, 몇 억천만년이 걸려도 그 잘못한 것을 용서받기 어렵습니다. 천상세계는 영원하기 때문에 그 민족이 피로써 저지른 죄를 지워 버릴 사람이 없다는 것입니다. 종족이 아무리 정성들여 지우려 해도 그 종족 자체로서는 지울 수 있는 사람이 없다는 것입니다. 이렇게 이스라엘 민족이 섭리상에 씻을 수 없는 죄를 지었기 때문에 세계에 유리고객하는 민족이 되었던 것입니다. 예수님을 죽인 죄 값으로 참살을 당하고 몰림받고, 종살이까지 하면서 천대받고, 제물로 사라지는 민족이 되어 6백만이나 학살당했던 것입니다. 이런 이스라엘이 이제 독립이 되었다는 것은 주님이 이 땅위에 올 수 있는 때가 되었다는 것을 보여 주는 것입니다.

제 2이스라엘이 이 땅이 요구하는 기반을 갖지 못했기에, 영적 기반으로 세계적인 이스라엘권을 형성해 실체적인 제2, 제3이스라엘을 연결하는 입장에 있습니다. 이런 시대가 돌아옴으로 말미암아 제1이스라엘의 사명을 하지 못했던 그 민족이 다시 회생할 수 있도록 1947년에 이스라엘이 독립하게 되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지금까지 이스라엘은 원수의 국가 앞에 몰림을 당했던 것입니다. 영적인 입장에서 보면 천사장이었던 아랍권에 포위되어 있는 것은 옛날 예수님을 몰아내고 죽이던 것과 같은 입장에서, 이스라엘권을 찾기 위한 일편단심으로 하나님을 믿고 정성을 다하여 옛날 잘못을 저지른 것을 회개하면서 나오게 되면, 하나님은 새로운 천지를 향하여 출발할 수 있는 시대에로 인도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지난번 아랍권과의 싸움에서 일주일 이내에 기적적인 승리를 거두었던 것도 하나님이 도운 것입니다. 앞으로도 지금까지의 예루살렘 성지를 위한 보호의 일념을 가지고 정성을 들여야 합니다. 또 싸우던 기준 이상의 마음을 갖고, 예수님이 이스라엘을 중심삼고 세우려던 그 마음과 회개의 깊은 마음을 갖지 않으면 이스라엘 민족은 역습당하게 됩니다. 요전번 그들을 가만히 보니까. 이겨서 좋다고 춤만 추었지, 춤춘 후에 하나님을 모실 수 있는 심정적 기준을 상실했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한국 민족도 8·15해방 후에 좋다고 춤을 추었지만, 선생님은 그것을 바라보고 골방에서 눈물 흘리며 기도했습니다. 어제의 기쁨이 오늘의 슬픔으로 뒤바뀌어서는 안 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뼛속에 깊이 깊이 사무쳐 후손에게 전통적인 사상으로, 이 민족의 애국심으로 계승되어야 합니다.

19-333
이루지 못한 예수님
그런 뒷받침이 될 수 있는 사람이 누구일 것인가? 하나님을 끌어들여 민족적 현실과 결부시켜 하나님이 기뻐할 수 있는 민족적인 기준을 세울 자는 누구냐? 없다는 것입니다.

장성기 완성급까지는 옛날에 아담과 해와가 올라갔던 기준입니다. 그 아담 해와가 올라갔던 기준은 아직도 남아 있는 것입니다. 아담 해와가 거기까지 올라갔다가 타락했으니, 이것은 역사적으로 실패한 부모가 남긴 기준입니다. 거기에서 타락해 사탄세계가 이루어졌으니, 예수님은 이 사탄세계에 대해 하늘의 국가 기준을 중심삼고, 부모의 심정적인 면에서 이스라엘이 길을 닦아 놓았던 것입니다. 여기에 당시의 이스라엘 민족이 예수님을 뜻에 맞게 모셨더라면 예수님의 입장에서 완성의 기준까지 올라갈 수 있었습니다. 이 기준까지가 7년노정입니다. 3×7은 21, 21년노정은 야곱 14년 노정의 연장 노정이고, 이 야곱 가정을 중심삼고 가나안을 복귀하던 기준입니다. 그러니 이 7년간에 성사해야 된다는 것입니다. 기가 막힌 사실입니다.

예수님은 30세 때 공생애를 출발하기 전에 이미 내적인 기준의 뜻을 이루어야 했지만 그러지 못했습니다. 물론 예수님이 잘못해서 그런 것이 아니지만, 27세부터 33세까지의 7년 기간 동안 내적인 기준을 세워야 했던 것입니다. 27세부터 7년노정을 중심으로 국가적인 기준을 새우고, 그 다음 새로이 제 2차 7년노정을 세워 세계적인 기준을 만들어, 영적 노정에 있어서 이스라엘 나라가 세계국가로서 천국기준을 넘어가는 7년노정을 세워야 했던 것입니다. 34세부터 40세까지의 7년노정은 7년 대환란으로 나가게 됩니다. 그래서 40고개가 문제입니다. 선생님도 지금 40고개를 넘어가고 있습니다. 야곱의 14년 고개, 즉 14년노정을 넘어 가지고 비로소 가정적인 축복의 기준이 결정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나서야 만물의 축복이 있는 것입니다. 주먹구구식으로 되는 것이 아닙니다. 이스라엘 민족이 국가적인 기준에서 이 고비에 올라갔더라면 일단 가나안 복지로 들어갔을 것입니다. 아담 때에 아담이 상대했던 천사장 세계는 어떠했을까? 천사장보다 낮은 것이 사탄입니다. 그러므로 사탄세계는 문제도 없습니다. 지금까지 우리가 이 길을 뚫고 부모의 기준을 결정할 수 있도록 민족적, 국가적 기준을 모색했기 때문에 끝날에 세계국가를 통치할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알겠어요?

19-334
행복의 터전
예수님은 하나님의 아들로 왔습니다. 아들이 태어났으니 하나님은 기쁜 날을 맞이하실 수 있었던 것입니다. 이것이 복귀입니다. 아들로 왔으니 결혼을 해야 합니다. 아들의 상대를 정하여, 아들의 날을 세운 다음에 부모의 날을 세우는 것이었습니다. 부모가 되어야 아들이 나올 게 아닙니까? 자녀를 낳지 못하면 부모가 될 수 없습니다. 부부는 될지언정 부모는 절대로 될 수 없습니다. 아들딸을 낳아 보아야 하늘과 땅의 정을 알게 되고, 그것을 알아야 사람의 정도 아는 것입니다. 그것을 알아야 합니다.

자 ! 그래서 자녀만으로도 안 되고, 부부만으로도 안 됩니다. 꼭 부모의 자리까지 나가 보아야 합니다. 즉, 자녀의 사랑, 부부의 사랑, 부모의 사랑을 세울 수 있는 자리까지 나가야만 된다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인간 일생에서 제일 기쁜 날은 이러한 것을 찾을 수 있는 날입니다.

이보다 더 기쁜 날은 없습니다. 이러한 날을 세우지 못하면 하나님을 중심삼은 사위기대는 이루어지지 않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중심삼고 자녀, 부부, 부모, 이렇게 4위기대를 복귀하는 것이 인생 행복의 터전입니다.

오늘날 사탄세계에서도 혼자 사는 사람을 행복하다고 보지 않습니다. 그 마음에는 항상 가을바람이 몰아치는 것입니다. 그래, 가을바람이 좋습니까, 봄바람이 좋습니까? 가을바람은 사실 시원하고 기분은 좋지만 내면에는 죽음을 재촉하는 듯한 압력이 들어 있고, 봄바람은 사실 낮은 따뜻하지만 파고들면 춥습니다. 그러나 그곳에서 비로소 천지의 조화가 벌어지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혼자 사는 사람은 가을 동산에 사는 사람이요, 부부가 같이 사는 사람은 봄 동산에서 사는 사람입니다.

봄 동산에서는 벌과 나비가 날지만, 가을 동산에는 벌 나비가 얼마나 날아 다닙니까? 물론 가을 동산에도 나비가 날지만 생각해 보세요. 봄 동산에서 벌 나비가 날게 되어 있지, 가을 동산에서 벌 나비가 날게 되어 있습니까? 그런데 가을에는 굉장히 바쁩니다. 모든 곡식들을 추수해야 하고, 또 추위에 대비하기 위해서 월동준비를 해야 합니다. 그러나 봄은 풀어 헤치는 때입니다. 길을 길다가도 주변에 아지랑이가 피어오르는 잔디밭이 있으면 거기서 한잠 자고 싶어집니다. 여러분은 봄이 좋아요, 가을이 좋아요? 선생님은 봄이 좋습니다.

그러니 아무리 행복을 노래하고 뭐가 어떻다고 해도 혼자 사는 것이 행복합니까? 부부가 살다가 한 사람이 죽으면 슬프다고 엉엉 웁니다. 혼자서 자기의 갈 길을 준비할 수 있겠습니까? 왜 짝이 없으면 불쌍하다고 합니까? 천지가 기뻐할 수 있는 모든 중요한 날들 앞에 불합격자이기 때문입니다. 천지법도의 규율 앞에 틀어졌다는 것입니다. 분명히 그 법도를 통해서만 천지의 운세는 돌아가고, 행복의 요건과 그 동기가 결정되는 것입니다. 슬프다는 것도 그만큼 법도에 멀어졌기 때문이며, 그러한 슬픔의 기준에 한해서는 천지법도가 순응을 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마음이 기쁘고 좋다는 것은 무엇입니까? 그 사람을 세계에서 환영해 주는 자리가 있다는 것입니다. 슬픈 것은 쫓겨나는 자리입니다. 기쁨과 슬픔이 그렇게 갈리게 되어 있는 것입니다.

19-335
돌감람나무에서 참감람나무로
하나님을 옹위하고 하나님 앞에 가까이 오면 올수록 기쁘다는 것은 원리가 그렇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영계라는 것은 하나님을 중심삼은 이상세계로서 하나님의 사랑의 박자와 그 파동에 의해 움직이는 세계입니다. 그래서 내가 거기에 어울릴 수 있는 요소를 지상에서 닦고 가지 않으면 거기에서 화합이 안 된다는 것입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자녀의 사랑, 부부의 사랑, 부모의 사랑 이 세 사랑을 완성해야 됩니다.

그러면 인간은 어떻게 복귀해야 되느냐? 먼저 양자의 세계로 올라가서 그 후에 아들의 세계로 올라가야 합니다. 그리하여 그 아들을 맞이해 가지고 이상 상대를 맞추어 축복을 시켜서 부모의 자리까지 나가게 해 주어야 합니다. 이것이 복귀역사입니다. 역사를 분석해 보면 간단합니다. 그런데도 여기에서 자기들끼리 뭐가 어떻고 하면서 싸우고 야단입니다.

이스라엘이 양자에서 직계로 넘어가려면 접붙임을 받아야 합니다. 직계로 넘어가기 위한 접붙임을 받으려면, 옛날 아담 해와가 하나님과의 심정 관계와 사랑관계를 중심으로 그 사연이 깊지 않아서 타락했기 때문에, 그 사랑이 아담해와보다도 더 나아야 됩니다. 더 낫다는 기준을 세우지 않고는 절대로 못 따라갑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에게 접붙임을 받아야 합니다.

접붙인다는 것은 예수님의 팔이나 다리를 떼어다가 붙이는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이 하나님을 사랑하시는 그 법도, 즉 ‘인류는 이렇게 살아야 한다. 하나님은 그렇게 모셔야 한다. 이웃을 이렇게 사랑하라’는 등 하나님의 심정을 예수님으로부터 배워서 그것을 나의 생명으로 생각할 때 예수님에게 접붙임 받는 결과가 되는 것입니다. 즉 돌감람나무가 참감람나무로 변하는 것입니다. 여기서부터가 지상천국입니다. 이 지상천국을 통해서 천상천국에 들어갈 수 있습니다. 특히 여자들은 똑똑히 알아야 됩니다.

통일교인은 지상천국에 들어가려고 그럽니다. 그러면 지상천국에 들어 가려면 어떤 문을 통과해야 되겠습니까? 지상천국에 들어가려면 부모가 있어야 합니다. 본래는 천국에서 자녀의 입장에서 충성해야 되는데, 낳고 보니 피난살이 신세로 쫓겨 다니다가 낳았다는 것입니다. 다리가 하나 부러지고 머리가 비틀어지고…… 그런 사람을 치료해서 겨우 살려 가지고 업고 다니는 실정입니다. 보기 싫지요? 기분 나쁘지요? 생각해 보세요, 여러분도 자랑할 것이 하나도 없습니다.

19-336
부모의 날과 선생님
영계로 말하면 낙원권내에 해당하는 기간이 7년 기간입니다. 즉, 이것은 영계에서 고대하는 7천년 역사의 해원을 통일교회 패들이 7년 기간에 걸쳐 그 기준에 맞게 수고했다는 것입니다. 알겠어요? 그러면 이 낙원권내에 있는 패들은 누구를 따라가야 하느냐? 참부모님을 따라가야 합니다. 따라서 우리 통일교회가 일반 교회보다 나은 것이 있다면, 그것은 아버지와 어머니를 부르는 기준이 다르다는 것입니다. 낙원에 가 있는 패들은 그렇게 부르지 못합니다. 그러나 여러분은 땅을 대신해 왔고, 성신인 어머님이 왔고, 하늘 대신인 부모가 부모 이름을 가지고 왔으니 얼마나 영광인지 모릅니다. 알겠어요?

지금까지는 아무리 예수님을 잘 믿는다고 해도 열매를 맺는 무화과나무가 되지 못했습니다. 예수님이 베다니에서 예루살렘에 들어가시다가, 배가 고파서 무화과나무를 보고 열매를 찾다가 없어서 저주를 해가지고 말라 죽었지요? 그 열매가 재림주님입니다.

우리 통일교회가 하늘과 땅 앞에 공헌한 것은 부모의 날을 찾아 세운 것입니다. 이 부모의 날은 찾기가 정말 힘들었습니다. 부모의 날이 나오려면, 양자의 과정을 거치고 자녀의 과정을 거쳐 하나님의 상대기준까지 들어가야 됩니다. 이것을 세우지 못했으면 절대로 부모의 날이 나올 수 없습니다.

예수님은 이 땅 위에 오셔서 이스라엘 국가를 이 기준까지 끌고 올라가야 했습니다. 이 기간이 34세부터 40세까지의 7년 기간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이 길을 가지 못했습니다. 선생님도 대한민국을 중심하고 기도하는 데 7년이 걸렸습니다. 만일 기성교회가 선생님을 받아들였더라면, 선생님은 벌써 세계적인 선생님이 되었을 것입니다. 그러면 여러분은 위대한 선생님을 발견했을 것입니다. 그런데 여러분은 아직 위대한 선생님을 발견하지 못했습니다. 통일교회 선생님의 이름이 날개 돋친듯이 세계적으로 퍼져나가는 것을 보지 못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졸장부가 되어 버렸습니다. 기가 막히는 일입니다. 자식들을 낳았는데 전부 병신 자식뿐입니다. 곰배팔이, 다리 병신 등, 그렇다고 내버려 두고 갈 수도 없습니다. 낳아보니 이런 자식들을 낳았는데, 누가 잘못해서 이런 자식을 낳은 것이 아닙니다. 애비가 잘못해서 이런 자식을 낳은 것도 아닙니다. 종자는 좋은 데 밭이 나빴습니다. 그러니 대한민국이 나쁜 것은 아닙니다. 앞으로 몇 대만 지나가면 유전법칙에 의해서 좋아질 수 있습니다.

오늘 같은 부모의 날에 선생님이 세계 여러 나라에서 내노라 하는 사람들에게 말씀해도 시원치 않을 텐데. 여러분을 데리고 말씀을 하자니 기가 막힙니다. 기분 좋겠어요? 하나님도 좋아하시겠어요?

예수님이 만약에 국가기준의 뜻을 세웠다면 어떻게 되었겠습니까? 아들의 자리에서 출발하여 아들로서의 책임을 다한 자리에 섰으면 상대를 결정해야 합니다. 그러면 자동적으로 아들과 딸이 나옵니다. 마찬가지로 우리 통일교회도 그런 일을 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하지 못한 아들의 사명을 우리가 알아서 완수해야 합니다. 다시 말하면 예수님이 해야 할 상대적 기준을 결정지어서, 양자를 직계자녀로 복귀시키는 일을 해야 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러한 일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지금까지 60년도를 중심삼고 36가정을 축복시키고, 그 가정을 중심삼고 72가정, 124가정을 축복시켰습니다. 이러한 일은 역사상의 모든 영인들과 영계를 해방하는 일입니다.

19-338
부모의 날이 생기게 된 배경
부모의 날을 책정할 때 7년을 넘기는 기준이 필요했습니다. 그냥 아무렇게나 책정한다면 부모의 날로서 본래의 뜻에 합당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러면 사탄의 침범을 받을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기 전에 사탄세계와 싸워서 쓴맛, 단맛을 다 보고 세워야 본래의 부모의 날로써 가치가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7년 고비를 넘어서 부모의 날과 더불어 새로운 하나님의 날을 세운 것입니다. 금년을 중심삼고 하나님의 날을 세운 것이 역사적인 기적 가운데 기적이요. 그 이상 기쁜 일이 없는 것입니다. 본래 하나님을 중심삼은 아담 해와와 하나님의 사랑이 이루어지는 그날이 하나님의 날이요, 부모의 날이요, 자녀의 날이요, 만물의 날입니다. 그런데 통일교회에서는 자녀의 날을 세워 가지고 부모의 날을 세웠고, 자녀의 날과 만물의 날을 세워 가지고 7년 고비를 끌고 나온 것입니다. 이스라엘이 예수님을 추방하고 십자가의 길로 몰렸지만, 오늘날 우리는 7년노정의 역사를 거친 후, 그 기준 위에 대한민국을 중심삼고 세계를 통일시켜 나가면 섭리의 기대가 올라가면 올라갔지 절대로 내려가지 않는 것입니다.

이미 이러한 시대적인 환경을 만들어 놓았고, 게다가 세계적인 기준을 대표한 예수님이 발벗고 나서서 하나님 앞에 하나의 기준을 세워 놓았기 때문에 하나님을 모셔 들일 수 있는 시대적인 환경에 맞추어서 하나님의 날을 책정한 것입니다. 그리하여 잃어버렸던 하나님의 날과 부모의 날, 자녀의 날, 만물의 날, 이 4대 명절이 비로소 통일교회 제단을 중심삼고 결정되었습니다. 이 사실이 역사과정을 통한 복귀섭리에서 최대의 승리를 거둔 것임을 여러분은 알아야 합니다.

그러므로 부모의 날이 나오기까지의 7년노정을 따라오지 못한 사람은 자식이 될 수 없습니다. 그들은 스스로 불만을 느껴 떨어졌거나 아니면 여기서 축출을 당한 사람들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선생님이 7년노정을 넘을 때 ‘무슨 일이 있더라도 따라오라. 1967년도까지는, 눈물을 같이 흘리고, 외로와도 같이 외로와하고, 핍박을 받아도 같이 받자’하고 얘기했던 것입니다.

선생님이 가는 길을 따라오는 여러분도 외로운 사람이 아닐 수 없었습니다. 몰리고 쫓기고 눈물자국을 남기지 않을 수 없었던 것입니다. 우리가 이런 길을 걸어온 것은 그렇게 하지 않으면 이 7년의 고개를 넘을 수 없기 때문이었습니다. 이 고개를 넘어서기 전에는 천국에 들어갈 수가 없는 것입니다. 선생님은 지금까지 대한민국을 중심하고 이 길을 걸어오면서 수고를 했던 것입니다.

이제는 선생님이 없어도 됩니다. 하나님의 날이 선포되었기 때문에 민주세계나 공산세계나 내부에서 분열이 벌어질 것입니다. 지금은 전세계적으로 모든 현상이 부패하고 붕괴되어서 마지막 하나까지도 몰아내지 않으면 안 될 때입니다. 미국도 지금 월남전쟁으로 싸움판이 벌어졌습니다. 선생님이 미국의 대통령이라면 세계를 감아 쥐고 멋있게 한번 요리할 자신이 있습니다.

우리가 하는 일은 알고 보면 아니 될래야 아니될 수 없는 일입니다. 이러한 운명 앞에서 모든 것을 하나님께 맡기고 끝까지 싸워 나왔던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몰리고 쫓기더라도 하나님을 찾아 세울 수 있는 위신과 권위를 갖고 책임을 다해야 합니다. 몰리는 자리, 쫓기는 자리, 감옥에 들어간 자리에서도 책임을 다했다는 위신을 세워야 합니다. 하나님은 언제나 사탄에게 굴복하지 않기 위해서 사탄 앞에 승리의 기준을 세우셨습니다. 따라서 우리가 이 기준을 세움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위신을 세워 드릴 수 있는 것입니다. 이러한 것이 복귀역사에 있어서의 우리의 책임입니다.

19-340
통일의 무리가 가야 할 행로
우리가 부모의 날을 세웠는데, 이 부모의 날이 오늘날 통일교회만의 부모의 날이 되어서는 안 됩니다. 우리들만 맞이할 수 있는 부모의 날이 되어서는 안됩니다. 세계 만민이 맞이할 수 있는 부모의 날이 되어야 합니다.

이날에는 만세의 한 맺힌 고개를 넘기 위하여 지금도 신음하고 있는 선생님의 심정이 깃들어 있는 것을 여러분은 알아야 합니다. 그러므로 절박한 심정을 품고, 이 죄악의 세계를 파탄시켜 해방의 나팔소리와 해방의 환호성이 천지에 가득할 수 있는 그 한 날을 맞이할 수 있도록 해야 합니다. 우리는 이러한 해방군으로서의 사명을 하지 않으면 안 됩니다. 그렇게 하지 않으면 그 부모의 아들딸로서 충효의 도리를 다했다고 할 수 없는 것입니다.

이날은 통일교회 울타리 안의 소수의 무리만이 축하할 수 있는 날이 아니고, 만민이 축하할 수 있는 날입니다. 전역사에 걸쳐 길이 찬양할 수 있는 날입니다. 미래의 만민들이 이날을 자랑의 날, 기쁨의 날, 영광의 날로 길이 기념하고 찬양할 수 있는 날입니다. 이렇게 축하를 해야 할 날이 오늘날 한국 강토에서 벌어졌다는 것을 그 누가 알고나 있습니까? 지금도 때가 어떤 때인지 세월이 가는지 오는지 아무것도 모르고, 꿈도 안꾸고 있다는 것입니다.

정의와 불의가 한 점에서 교차되고 있는 오늘날, 우리는 우리의 책임을 다하기 위하여 열심히 노력해야 하겠습니다. 그래서 금년에는 결판을 내야 합니다. 60년대를 중심으로 지금까지는 우리가 공격을 받는 입장에 있었기 때문에 전면적인 진격을 취할 수 있는 한때를 갖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이제는 그 맺힌 한을 전국적으로, 세계적으로 풀 수 있는 때가 왔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날을 가졌고, 부모의 날을 가졌고, 자녀의 날, 만물의 날을 가졌습니다. 우리가 이날을 그리워하고 찬양하고 이날에 얽힌 모든 한을 해원해서 만물이 이날은 우리의 날이라고 손벌려 맞이할 수 있게 해야 합니다.

그런 날을 하나님은 고대하고 계십니다. 따라서 이제는 전면적인 진격으로 삼천리 반도를 재차 편답하고, 세계 무대를 응시하면서 최후의 결전을 노리고 나가야 할 것이 우리의 책임입니다.

언제나 그러한 사명에 사무치고 그러한 사명에 불타고, 내일의 천국 앞에 당당히 제 3이스라엘의 권한을 자랑할 수 있는 민족이 되고, 그런 아들딸들이 되어야 하겠습니다. 그래서 하나님 앞에 길이길이 찬양을 드리고 길이길이 자랑할 수 있는 내 자신이 되어야 합니다. 우리는 그날의 영광을 위하여 참여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오늘의 현실을 극복하고 넘어서서 이런 일을 해야 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통일의 무리가 가야 할 행로인 것입니다.

이번 축하의 날을 계기로 해서 덧없이 보낸 과거 7년노정을 반성하고, 이날 이후부터는 일심으로 행동하지 않으면 안 된다는 책임감을 재차 인식하면서 본격적으로 이 민족과 이 세대 앞에 책임을 다해 주기를 부탁합니다.

우리는 그럴 수 있다는 믿음을 가지고 출발을 해야 합니다. 이 일을 하지 않으면 견디지 못한다는 마음으로 여기에 참여해야 합니다. 그래야 여러분이 이날을 축하하는 의미가 있고, 또 하나님은 그런 여러분을 통하여 소망의 마음을 계속 남길 수 있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여러분은 진격해야 합니다. 선생님은 여러분이 진격하면 여러분과 같이 가겠지만 여러분이 후퇴한다면 여러분을 버리고 다른 데로 갈 것입니다. 여러분. 가겠어요 ? 후퇴하겠어요? 「가겠습니다」

선생님의 자리는 편안하고 행복한 자리가 아닙니다.

우리는 이날을 맞이함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이 바라시던 참다운 자녀, 참다운 부부, 참다운 부모로서의 가치를 가질 수 있는 자리에 설 수 있습니다. 그 자리에서는 하늘땅 앞에, 또는 사탄세계 앞에, 가인적인 아들딸앞에 당당히 나타날 수 있는 내 자체가 되어야 합니다. 그래야 천국 백성이 되고, 천국 가정을 가질 수 있는 아들딸들이 된다는 것을 확실히 알아야 되겠습니다.

선생님도 지금 이 길을 나아가고 있습니다. 여러분도 이 길을 통하여 가지 않으면 안 된다는 것을 각자가 인식해 주기를 바랍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