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229 to 19-260: 예수님의 한

예수님의 한
1968.01.15 (월), 한국 전본부교회

19-229
예수님의 한
성경을 보면 끝날에 천주적인 중심존재로 신랑 되시는 주님이 오실 것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19-229
예수님이 오신 목적
오늘날까지 이 땅 위에는 어떠한 문제에 부딪치게 될 때, 자기의 뚜렷한 양심의 기준을 갖고 몸을 지배할 수 있는 용자가 없었습니다. 지금까지 천륜이나 천정에 동하여 인간의 모든 심정을 주관할 수 있는 하나의 용자가 없었음을 우리들은 잘 알고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예수님은 천국은 네 마음에 있다고 하셨습니다. 천국을 가려면 먼저 나(예수)를 사랑하라고 하셨습니다. 그리고 십자가를 지고 따르라고 하셨으며 갖고 있는 것을 다 버리라고 하셨습니다. 또한 살고자 하는 자는 죽고, 죽고자 하는 자는 살며, 갖고자 하는 자는 잃게 되고, 잃어버리고자 하는 자는 갖게 되며. 높아지고자 하는 자는 낮아지고, 낮아지고자 하는 자는 높아진다고 하셨습니다. 예수께서는 왜 이런 역설적인 말씀을 하셨을 것인가? 이것이 문제입니다.

여러분은 마음과 몸을 지니고 있습니다. 그런데 마음이 마음된 자리에서 있지 못하고 몸이 몸된 자리에 있지 못하고 심정이 심정된 자리에 있지 못한 것이 한탄할 일입니다.

우리의 조상들은 이 땅 위에서 마음의 기준을 세워 몸을 정복하려고 부단히 노력해 왔습니다, 그러나 6천년의 기나긴 세월이 경과하였지만 아직까지 온 인류의 마음을 중심하고 몸을 완전히 정복하였다는 승리자는 없었습니다.

그러면 이 한스러운 문제를 놓고 누가 책임지고 해결할 것이냐?

천정에 사무친 심정을 가지고 마음이 몸을 지배할 수 있는 확고한 중심을 찾지 못하였으니, 이러한 인간의 마음을 어떻게 천륜의 심정을 가지신분 앞에 정복시킬 것이냐? 이것이 중요한 문제입니다. 하나님은 그 문제를 해결하시고자 이 땅에 예수를 보내셨던 것입니다.

그런 사명으로 오신 예수는 나는 신랑이요, 너희는 신부라고 하셨습니다. 그러면 신부가 가져야 할 양심기준은 어떤 것인가? 땅 위의 생활에 젖은 인습적인 양심기준이 아닙니다. 이 땅의 인륜 도덕에 화하거나 그것을 입증하는 양심기준도 아닙니다.

또, 참된 신부의 모습은 어떤 것인가? 현재 이 땅에서 생활하고 있는 그 자체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러면 인류의 신랑으로서 신부의 모습을 찾아나온 예수님은 어떠한 모습이었느냐? 하나님의 심정을 사모하고 그 심정을 체휼하여 영원한 양심 기준과 영원한 몸의 기준을 세울 수 있는 방향성을 갖춘 하나의 용자이셨습니다. 그렇지 않았다 할진대 예수님은 인류의 참다운 심정의 신랑된 자리에 설 수 없는 것입니다.

19-230
심정 문제를 해결하지 못하는 현대 문명
역사가 흘러감에 따라 모든 문화는 발전해 나오고 있습니다. 오늘날 문명은 번화한 세계를 만들어 나오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것이 우리의 몸과 마음 문제, 심정 문제를 해결하는 데는 아무런 도움이 못 되고 있습니다. 외적으로는 복잡한 환경과 복잡한 조직 형태가 나타났으나 그 모든 전체와 내 심정이 통하지 못해 모든 것과 화할 수 없는 실정입니다. 하늘땅이 같이 즐거워하고 하늘땅이 같이 외쳐 줄 수 있는 기준을 갖지 못한 이 세상이라는 것을 우리는 너무나 잘 알고 있습니다.

오늘의 이 시대는 마음이 지향하는 방향과 심정이 찾고 있는 방향과는 판이하게 흘러가고 있습니다. 이런 입장에 선 내 한 자체는 외적으로 말할 수 없이 끝에 도달하였고, 내적으로는 말할 수 없는 공허만이 남아 있으니 나를 세울 수 있는 그 중심은 어디에 있는고? 오늘날 인류는 허덕이는 입장에 있습니다.

인간은 언제나 마음과 이념을 통할 수 있는 심정을 요구하므로 그러한 심정에 대하여 외적인 생활을 통할 수 있는 몸과 실제의 인연을 조정하는 어떠한 기준이 서 있지 않으면 인류는 어느 시대고 허덕이는 입장에서 헤어나지 못할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이 계시다 할진대 하나님이 목표하는 세계는 어떠한 세계냐? 오늘 현세의 이런 문화세계와 문명세계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마음의 기준과 심정의 기준을 세워 가지고 문명을 지배할 수 있는 세계가 하나님이 원하셨던 세계요, 우리 선조들이 후대 만민 앞에 남겨 주어야 할 세계였다는 사실을 우리는 알아야 합니다.

19-231
예수님이 찾아가신 자리
그렇기 때문에 예수님은 그런 세계를 이루기 위해 환경이 복잡할 적마다 그 와중에 뛰어들어 수습하려고 하지 않고 그 환경을 피해 갔습니다. 피해서 가는 곳은 모두가 즐길 수 있는 데가 아니었습니다. 남몰래 깊은 숲속과 산골짝을 더듬어 다니는 생활을 했다는 것입니다. 지상에서의 그의 생활은 보이는 세계에서 그 무엇을 찾는 것이 아니라 보이지 않는 세계의 법도를 보이는 세계에 구현해 놓기 위한 것이었습니다. 그것을 그 시대 사람들은 몰랐읍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가 기도하고 호소하는 순간은 모든 만민이 찾지 않는 순간이요, 만민이 생각하지도 않는 순간이었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가 걸어간 노정은 온 인류가 공통적으로 걸어가야 할 노정이었습니다. 그 노정은 하나님과 사탄, 선과 악이 부딪치는 접경지대였습니다. 그런 자리를 예수님 혼자서 찾아 들어갔다는 것을 여러분들이 알아야 되겠습니다.

예수님께서 피눈물을 흘리면서 겟세마네 동산에서 기도하는 그 자리는 편안한 자리가 아니었습니다. 하나님과 사탄이 접선하는 중심점이었습니다. 중심을 찾아들어가는 자리였습니다. 혹은 인간에게 고통이 있고 슬픔과 어려움과 죽음이 있다 할지라도 예수님은 그 슬픔과 어려움과 고통, 혹은 생사의 경계선을 밟기 위하여 찾아나갔던 것을 여러분들이 알아야 되겠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 경지를 찾아가는 예수님은 하나님의 심정을 지니고 있었습니다. 천상과 지상의 어떤 것이 자기의 모든 것을 휩쓸어 갈지라도 하나님을 향한 예수님의 심정만은 불가침적이었습니다. 그 심정만은 철석같았습니다.

예수님이 섭리적인 조건을 중심삼고 사탄과 싸우는 과정에서 사탄을 쳐부술 수 있었던 것은 무엇 때문이냐? 그것은 예수가 잘나서 그런 것이 아니라 천상에 대하여 사무친 심정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사무친 심정을 걸어 놓고 싸웠기 때문에 사탄도 손을 든 것입니다. 그러한 심정을 가지고 기도해야만 인류가 흠모하는 심정의 주인공, 신랑의 자격자가 될 수 있는 것입니다.

19-232
예수님이 세워 놓으신 기준
예수님은 이 땅에 그 무엇을 찾기 위해서 오신 것이 아니었습니다. 이세상은 타락한 세상이요, 어차피 어느 한 때 해결해야 할 세상이기에 이 세상을 해결해 버리기 위해서 오신 것입니다. 그러나 해결해야 할 이 세상이 문제가 아니라 이 세상을 해결하는 세계가 문제입니다. 해결해야 할 세계가 문제가 아니라 해결하는 세계가 문제이고, 해결해야 할 심정이 문제가 아니라 해결하는 심정이 문제입니다. 예수님은 이러한 내용을 알고 구원의 세계, 구원의 길을 개척하기 위해 수고하셨습니다. 그런 용자이셨던 것을 여러분이 알아야 되겠습니다. 이 세계를 해결할 수 있는 하나의 이념을 찾기 위해 만민을 대신하여 혈혈단신 탐험의 용자로서 나타나신 분이 예수님이셨습니다.

예수님은 성경 가운데 기록되어 있지 않은, 많은 안타까움이 그 심정 깊숙히 뿌리 내려져 있었습니다. 스스로 만민의 구주라고 인정할 수 있고, 하늘과 땅을 걸어 놓고 하나님과 사탄을 걸어 놓고 싸움하는 그 노정에서 이것이라고 해명할 수 있는 그 무엇을 갖고 있지 않으면 사탄세계에 대해 하나의 승리의 중심을 세울 수 없고, 하나의 승리의 뜻을 세울 수 없다는 것을 아셨기에 그를 위해 애쓰지 않으면 안 되는 안타까움이 있었던 예수님의 사정을 우리는 알아야 되겠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예수는 모험가였고 새로운 세계를 찾아나서는 탐험가였습니다. 예수님은 세상의 어떠한 인연과 사정에 의해서가 아니라 하나님의 사랑과 인간의 사랑의 세계를 찾기 위해서 모험의 자리로 뛰어드신 분입니다.

세상에는 사람들이 마음대로 드나들 수 없는 곳이나 혹은 어떤 지역을 탐험하기 위해 뛰어드는 모험가들이 많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역사상에 있어서 누구나 할 수 있는 일입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모험의 표적으로 세워 놓은 최고의 기준은 무엇이냐? 예수께서 공인할 수 있는 최고의 기준은 무엇이냐? 순교의 고개도 넘을 수 있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그런 역사적인 배경을 갖고 있다는 것입니다. 오늘도 참된 그 무엇이 있다 할 때는 죽음을 걸어 놓고 사무친 심정을 붙들고 나설 사람들이 그래도 남아 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이러한 심정의 세계를 세우려 하는 목적이 있기 때문에 갈보리 산상에서 애통하게 죽어갔던 예수로 하여금 세계를 이끌 수 있는 입장에 세웠던 것입니다. 그러나 그 시대의 사람들은 이것을 꿈에도 생각하지 못했습니다.

우리는 오늘도 참의 세계를 찾아 헤매고 있습니다. 어떠한 어려운 일과 어떠한 모험과 함정이 있다 할지라도, 내 몸을 던져서라도 일생을 바쳐 찾아가야 할 길이었습니다.

19-233
참의 주체이신 하나님이 찾고자 하시는 것
여러분은 하나님과 사탄이 이 싸움의 역사를 연결시켜 나온다는 것을 원리를 배워서 잘 알고 있을 것입니다. 그런데 이 싸움을 이겨 놓고 ‘하나님 !’ 하고 불러야 할 본연의 아들딸은 어디에 갔습니까? 심정에 사무치고 심정에 화하여 ‘내 아버지시여 !’ 하고 부를 수 있는 그 아들과, ‘내 아들아!’ 하고 부를 수 있는 그 아버지는 어디에 있습니까? 또 그 세계는 어디에 있습니까? 인간은 지금까지 그런 세계를 보지도 못했고 찾지도 못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은 이 땅에서 말씀하시길 ‘나는 하나님의 독생자’ 라 하였습니다. 또한 ‘너희는 나를 신랑으로 모시라’고 하였으며, ‘너희를 신부로 맞이하겠다’ 고 말하였습니다.

만일 천상에 인간세상의 참의 역사만을 수도하고 섭리하시는 하나님이 계신다 할진대 그 하나님의 목적은 무엇이겠습니까? 이런 어지러운 현실이 아니었습니다. 그런 것들은 있으나 없으나, 나중에는 타락한 세상과 함께 없어질 것들입니다.

종교를 믿는 사람이 문제가 아닙니다. 6천년 동안 수고해 오신 아버지를 알고, 앞으로도 수고하셔야 할 아버지를 아는 것이 문제입니다. 아버지를 알고서 심정에 북받쳐 아버지라 부르는 하나의 아들이 그보다 귀하다는 것입니다. 하늘 땅이 그것보다 귀하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만 인류에 대하여 하나님이 기뻐하시지 못하니 기뻐할 수 있는 표적으로 예수님을 내놓으신 것입니다.

우리들은 참을 찾고 있습니다. 개인적으로나 가정적으로나 모두가 참을 찾고 있습니다. 그러면 이 우주에 있어서의 참의 주체는 과연 무엇이겠는가? 하나님입니다. 그러면 하나님이 세우고자 하시는 참의 내용은 무엇일까요? 인간이 갖지 못한 참다운 부모와 참다운 부부, 참다운 자녀와 참다운 형제, 참다운 민족과 국가, 세계, 천지를 찾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찾고 계시는 참의 내용은 인간이 찾고 있는 참의 내용과 다른 것입니다.

하나님이 이 땅에 대해 섭리하시는 목적이 무엇이겠느뇨? 하나님은 참다운 만민이 되어 주길 바라고 계십니다. 참다운 전인류, 참다운 백성, 참다운 충신이 되어 주길 바라고 계십니다. 더 나아가서는 참다운 자녀가 되어 주길 바라는 것이요, 참다운 부모가 되어 주길 바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참의 만물, 참의 자녀, 참의 부부, 참의 부모가 온 인류 앞에 나타난 후에야 하나님은 땅 위에 실체로 나타나실 수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그것을 바라시는 것입니다.

참의 실체가 하나님이라 할진대 하나님은 반드시 참의 나라를 만들 것입니다. 어떤 한때에 심정과 마음과 몸, 생활 환경, 세계가 옳다고 할 수 있는 날이 올 것입니다. 모든 존재가 머리숙여 경외하며 인류가 영원히 내 주인이 되어 달라고 몸과 마음으로 그리고 심정으로 바라는 날이 올 것입니다. 그러므로 그 실체를 상봉하는 날은 인류 역사가 선과 참을 찾아 헤매던 것이 종결되는 날로서 역사를 정리해 나오시는 하나님의 소원성취의 날인 것입니다.

하나님은 그러한 날, 그러한 곳, 그러한 때를 세우기 위해 찾아 나오고 계십니다. 죄악된 이 세상에 살고 있는 나, 가정, 사회, 국가 이 모두는 그 한 날을 찾아야 하는 것입니다.

19-235
심정의 말씀을 토로할 참제자를 갖지 못한 예수님
예수님은 하나님의 해원과 인류의 선의 목적을 해결하기 위한 중심적인 사명자로 왔지만 ‘그 심정에 속속들이 스며 있는 모든 우주적인 선의 이념을 나에게 소개해 주시옵소서’ 하며 따를 수 있는 하나의 제자가 없었습니다. 이것이 예수님의 한입니다. “내가 땅의 일을 말하여도 너희가 믿지 아니하거든 하물며 하늘 일을 말하면 어떻게 믿겠느냐?(요 3:12)” 하시며 한탄한 예수님이었습니다. 이렇게 참의 자체로 나타나 참의 결실을 위해 참의 행동을 해야 할 예수님이 참의 말씀을 하지 못했고, 참의 행동을 하지 못하고 가셨는데, 이러한 예수님의 한을 아무도 몰랐다는 것입니다.

오늘 우리가 알아야 할 것은 성경에 나타나 있는 예수가 아닙니다. 참의 개인은 이러한 사람이다. 혹은 참의 가정은 이러하고, 참의 사회, 참의 국가, 참의 하나님과 일치하는 세계는 이러한 세계이며, 그 복귀는 이렇게 해야 된다고 하면서 마음 깊이 소망해 왔던 참의 중심 기준을 회생 시키는 것이 예수가 인류를 찾아왔던, 구세주로서 해야 할 사명이었습니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그 사명의 내용을 한마디도 하지 못하고 십자가의 고개를 넘어가셨습니다.

이러한 예수님의 심정을 누가 알았습니까? 아무도 없었다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예수님은 천국에 가지 못하고 낙원에 가신 것입니다. 낙원은 천국 가는 대합실입니다, 이렇게 생각해 볼 때 참을 찾아 나가는 노정은 6천년이 걸렸어도 해결되지 못했음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러니 여러분들은 지금까지 각자가 느끼고 깨달은 심정을 통하여 내일부터는 새로운 마음가짐으로 생활해야 되겠습니다. 이번에 시작하는 7년노정에도 또 다시 끝이 날 가망성이 없거든 아버지의 뜻을 품고 하늘을 향하여 호소할 수 있는 분한 마음이라도 가져야 됩니다. 꿈도 안 꾸는 인류가 어찌 하나님의 백성으로 충의의 도리를 다할 수 있으며, 하나님의 효자 효녀 열녀가 될 수 있겠습니까?

하나님께서 세워 놓으신 선민으로서의 할 일은 복귀섭리, 즉 잃어버린 것을 다시 찾는 운동입니다. 구원섭리의 목적이 무엇이냐? 잃어버린 것을 다시 찾는 일입니다. 지음받았던 사람이 깨져 나갔으니 다시 말씀을 통하여 재창조해야 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타락한 인간이기 때문에 재창조되어야 합니다. 타락으로 말미암아 내 몸을 통할 수 있는 말씀이 떠나버렸고, 내 마음을 통할 수 있는 말씀도, 내 심정과 더불어 영원히 지닐 수 있는 말씀도 떠나가 버렸습니다. 그러므로 인간은 말씀, 즉 진리를 찾아야 합니다. 진리는 무엇이냐? 진리는 곧 말씀이라 했습니다. 또한 진리는 조직의 원칙이며 천륜의 근거입니다.

지금까지 세계는 진리를 찾아 나왔으나 이제는 참된 말씀이 나와야 됩니다. 그러나 참된 말씀이 나오지 않았으니 참된 생명의 실체가 나오지 못했습니다. 참된 생명의 실체가 나오지 않았으니 참다운 사랑의 실체가 나오지 못한 것입니다. 참다운 사랑의 실체가 나오지 않았으니 참다운 우주관이 하늘 땅과 더불어 나오지 못했다는 것입니다. 이것을 여러분이 알아야 됩니다.

하나님은 오늘도 세계를 정복하기 위해 싸워 나오고 계십니다. 개인을 정복하고, 가정을 정복하고, 민족, 국가, 세계를 정복하기 위하여 하나님은 지금도 싸워 나오고 계시다는 것입니다.

19-237
모험과 개척정신에 의해 섭리는 진전된다
노아는 자기 일신을 정복하고 자기 가정을 정복하기 위하여 120년 동안을 싸웠습니다. 그것은 쉬운 일이 아니었습니다. 120년 후에 이 땅을 심판하겠다는 하나님의 명령을 받은 노아는 ‘일년이 지났으니 이제 119년 남았구나’ 하며 기다리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큰 뜻을 품고 큰 뜻을 대하고 나오는 사람 앞에 한 번 약속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명령을 받은 후 하나님에 대해 변치 않는 충절의 심정을 가지고 가정의 핍박, 사회의 핍박, 혹은 자신의 육을 통해 들어오는 모든 욕망, 즉 정욕이나 식욕 또는 탐욕같은 이런 복잡한 모든 것을 정복하여 승리자로서의 자격을 갖추지 않으면 하나님은 택하시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역사노정에 있어서 개인 가정 사회 국가 세계를 정복해 나왔습니다. 그러면 그 정복이 무엇이냐? 말로 해서 안 되겠으면 때려서라도 시키는 것입니다. 그러니 전쟁사가 없을 수 없는 것입니다.

지금 이 시대는 6천년 역사의 종말 시기라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모든 전체를 하나님 앞에 세워 놓고 하나님 뜻 앞에 귀일시켜, 나로부터 전체를 정복할 수 있는 권한을 갖춘 승리자, 하나님은 이런 사람을 찾고 계시는 것입니다.

과거의 우리 선조들은 자기 일신을 정복하기 위하여 모험을 하였고, 어떠한 어려운 길이나, 어떠한 개척자의 길도 개의치 않고 갔습니다. 그러나 오늘날 20세기, 이 땅에 살고 있는 인류는 옛날 선조들이 걸어나왔던 그 환경과는 다른 환경에서 살고 있습니다. 그 시대는 개인 가정 민족 국가를 대해 나온 섭리시대였으나, 오늘 이 시대는 세계를 넘어서 천주를 대하여 섭리하는 시대이기 때문에 우리에게 어떠한 모험이 있다 할진대, 6천년 역사를 대신하여 ‘나 이상 모험할 사람이 없다’ 할 수 있는 각오를 가져야 될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런 때에 자신을 붙들고 우는 자는 하늘 가정을 건설하지 못할 것이고, 가정을 붙들고 우는 자는 하늘 사회를 건설하지 못할 것이고, 사회를 붙들고 우는 자는 하늘 국가를 건설하지 못할 것이고, 국가를 붙들고 우는 자는 하늘 세계를 건설하지 못할 것이고, 세계를 붙들고 우는 자는 천주를 건설하지 못할 것입니다.

그러므로 내 개인의 심정을 세계로 끌어올려 역사적인 모든 내용을 해명하고 하나의 세계적인 실체를 갖추었다고 장담하고 나설 수 있는 신념을 가져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모험이 필요한 것입니다. 여러분이 조금만 신비스런 경지에 들어가 보면 그 세계는 모험에 의해서 교체되어 간다는 것을 알게 될 것입니다. 한 단계의 범위를 넓혀 가는 데에는 반드시 모험을 해야 되는 것입니다. 목숨을 걸어 놓고 죽느냐 사느냐 하는 판가리 싸움을 하지 않으면 안 되는 것입니다.

노아는 가정의 기준을 찾기 위해 자신의 몸을 쳤습니다. 몸을 정복하기 위해 몸을 치기를 120년. 별의별 비난과 조소를 당하고 억울한 환경에 처해서도 노아는 하나님이 세워준 심적 기준, 하나님이 이끌던 그 심정에 사무친 것이 변할소냐 하며 그 기준을 중심삼고 120년 동안 몸을 쳐 나왔던 것입니다.

노아 가정이 끝까지 세상적인 욕구와 모든 조건을 치면서 민족을 흠모하고 나왔던들 하나님은 그 노아가정을 중심삼고 민족을 통하여 뜻을 이루어 나왔을 것입니다. 그러나 노아가정은 수고하는 과정에 있어서의 모든 곡절을 이겨내지 못했습니다. 노아가 세운 심적 기준을 붙들고 그의 후손들이 민족을 바라보고 나갔던들, 그 민족을 통하여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졌을 텐데 노아가정이 가정적인 뜻을 세우지 못했기 때문에 그 민족을 통하여 이루려던 하나님의 뜻이 깨져 나가게 된 것입니다.

그래도 뜻을 이루려는 하나님의 섭리는 진행되는 것입니다. 개인이 깨졌다고 개인을 붙들고만 있을 수 없는 것이 천륜의 때이며, 가정이 깨어졌다고 해서 천륜이 움직이지 않는 것이 아닙니다. 개인은 깨졌어도 천륜은 움직여 나가는 것입니다. 개인이 깨져 나가더라도 때는 가정을 세워 섭리하셔야 할 때이기에 하나님은 개인과 가정까지 복귀하는 섭리를 하시는 것입니다. 또, 그 가정이 깨졌다고 해서 거기에서 섭리를 지체하실 수 없기 때문에 하나님은 사회를 복귀하기 위한 때로 움직여 나가십니다. 이렇듯 하나님은 환경을 넓혀 가면서 섭리의 때를 맞추어 나가고 계시는 것입니다.

19-239
하나님이 살아 계신 것을 안다면
개인으로서의 노아와 그 가정을 잃어버린 하나님은 400년 후에 아브라함을 세워 역사했습니다. 그러나 아브라함 또한 뜻을 잃어버렸기 때문에 하나님은 또 다시 400년 후에 모세를 세워 역사하면서, 아브라함을 세워 역사할 때와 같이 환경적인 조건을 맞춰 나가야 했기 때문에 할례의 법도를 세워서 이방 사람까지 끌어 넣는 섭리를 하셨던 것입니다.

또한 아브라함의 실수로 인해, 민족적인 시대가 다가옴으로 말미암아 이스라엘 60만 대중을 애급에 때려 몰아넣고 연단시킨 것입니다. 때려 넣은 것은 무엇 때문에 그랬느냐? 그것은 합치기 위한 하나님의 작전이었습니다. 하나 되게 하기 위한 작전이라는 것입니다. ‘너희들이 대하고 있는 바로궁중은 원수다. 애급 사람들은 철천지 원수야’ 이렇게 연단시켰던것입니다.

하나님은 그들이 살 수 있는 한 곳이 있다 할진대 전부다 ‘옳소이다, 할 수 있는 한 때를 바라보면서 몰아 넣었습니다. 몰아 넣는 그 시기가 민족적인 섭리 시기와 맞아 떨어졌기 때문에 민족을 대표하여 모세를 모험의 선봉자로 세웠던 것입니다. 그는 미지의 가나안 땅을 향하는 정탐과정에 있어서 새로운 결의를 가진 탐험의 용자로 나타난 것입니다. 그가 바로 궁중을 반대하고 이스라엘 민족을 끌고 나가는 길은 평탄한 길이 아니었습니다. 미지의 노정이었습니다. 그는 자기 앞에 어떠한 어려움이 가로막혀 있더라도 그것을 개의치 않았습니다. 하나님이 선조로부터 약속한 가나안 땅, 그 본향을 찾아가는 그의 마음이 어찌 변할 수 있었겠습니까? 비록 바로의 땅에서 살고 있었으나 그 심정에는 가나안 땅에서 행복을 노래해야 한다는 신념으로 가득차 있었던 것입니다.

이처럼 모든 이에게까지 백절불굴의 심정을 갖게 하고 전진의 일로를 개척해 나가는 것이 모세의 사명이었습니다. 그러나 모세는 60만 대중을 거느리고 출발하였으나 광야의 40년노정에서 다 잃어버렸습니다. 만약 이스라엘 민족이 모세와 같은 심정으로 모험할 줄 알았던들 망하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약속의 땅이 어떤 곳인지 그 땅을 찾고자 하는 간절한 마음이 어떠한 생활적인 의식과 감정보다도 강했던들 이스라엘 민족은 절대로 광야에서 쓰러지지 않았을 것입니다. ‘아이구 배고파 죽겠구나, 아이고 우리는 죽는구나’ 하고 아우성쳤던 그들이었기에 광야에서 쓰러진 것입니다.

역사상의 어떤 위인, 혹은 선각자가 있다 할진대 그들은 그 시대에서 즐기고 만족을 느끼던 사람들이 아니었습니다. 더 높은 이념의 한 곳을 향하여, 약속된 한 곳을 목적지로 삼아 모든 것을 제거해 버리고 탐험적인 길을 갔던 사람들인 것입니다.

모세도 마찬가지였습니다. 가나안 땅을 향하여 달음박질하는 이스라엘 민족 앞에 홍해가 웬말이며, 또한 광야에서의 아말렉 족속의 공격이 웬말입니까? 40년 동안 유리방황하다가 바로의 속박에서 풀려 나온 장정들은 모두 지쳐 쓰러지고 말았습니다.

하나님은 무엇을 바라고 그들을 인도했느냐? 12지파를 대신한 열두 사람을 세워서 가나안 땅을 정탐시켰을 때 그들이 하는 말은 자기들 힘으로는 가나안 7족을 당하지 못한다는 보고였습니다. 그러나 열두 사람 중 여호수아와 갈렙은 달랐습니다. 여호수아와 갈렙은 그 시대에 있어서 똑똑한 사람이 아니었습니다. 여호수아 갈렙은 미욱박이이며 고집장이고, 죽을지 살지도 모르고 뛰어드는 모험 기질이 왕성한 사람들이었습니다. 이스라엘 민족 전부가 반기를 들고 있을 때, 당당코 나타나서 ‘우리를 지금까지 인도해 오신 하나님은 살아 계십니다. 바로의 목을 쳐누르던 하나님, 이스라엘 민족을 가로막고 있던 홍해를 갈라 쳐서 탄탄대로의 길을 만들어 건너게 해주신 하나님은 살아계십니다. 광야에서 굶주림에 허덕일때 메추라기와 만나를 내려 주신 하나님은 살아 계십니다. 그 하나님을 믿고 가는 길만이 우리가 살 길입니다’라고 외쳤던 여호수아와 갈렙이었습니다. 개척의 복귀노징을 찾아가야 할 이스라엘이었던 연고로 하나님은 여호수아와 갈렙을 보시고 그들에게 길을 열어 주었다는 것을 여러분이 알아야 되겠습니다.

19-241
참의 세계를 찾고 계시는 하나님
이렇게 민족시대를 거쳐 국가시대를 맞음으로써 이스라엘 민족이 가나안 땅에 들어왔지만 때는 이미 국가적인 섭리시대였기 때문에 국가를 걸어 놓고 싸워야 했습니다. 그때의 하나님은 얼마나 수고하셔야 했습니까? 국가의 형태도 갖추어야 하고, 사회의 형태도 갖추어야 하고, 가정의 형태도 갖추어야 하고, 개인의 형태까지 모두 다 갖추어야 했습니다. 그러나 국가의 위치는 갖추었으나 실질적인 내용에 있어서 하나님이 바라시는 완전 승리의 발판은 되지 못한 모습이었습니다. 이러한 곡절을 품고 역사해 나오신 하나님의 심정을 우리는 알아야 되겠습니다.

하나님은 잃어버린 한 개인을 찾기에 허덕이셨습니다. 가정을 찾아 헤맸지만 가정도 잃어버렸습니다. 민족을 이끌고 나오시던 하나님은 민족도 잃어버렸습니다. 즉, 축복하였던 이스라엘 민족도 잃어버렸다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지금까지 이스라엘 민족이 세계에서 유리방황했던 것입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세계적인 복귀의 원한을 풀어 드리기 위해 이 땅 위에 대표자로 오셨습니다. 그는 이스라엘 땅에서 태어났으나 그가 움직인 지역은 갈릴리 해변가나, 예루살렘성 근처의 몇몇 도성에 지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그 시대의 사람들은 예수님이 하나님의 뜻과 역사를 대신하고 세계를 대신한 내용을 가지고 움직이신 사실을 아무도 몰랐던 것입니다. 예수님은 그런 길에서 허덕이다 가신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오늘날 하나의 중심을 세워 이스라엘 국가를 회복하려던 그 뜻을 세계적인 기준으로 맞추기 위해 나온 것이 하나님의 2천년 역사요, 예수님을 중심한 2천년 역사였다는 것을 알아야 됩니다.

오늘날의 이 시대는 끝날입니다. 무슨 끝날이냐? 개인완성을 완결시켜야 할 끝날이요., 가정완성을 완결시켜야 할 끝날이요, 민족완성을 완결시켜야 할 끝날이요, 국가완성을 완결시켜야 할 끝날이요, 세계완성을 완결시켜야 할 끝날이요, 더 나아가서 천주완성을 완결시켜야 할 끝날이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오늘날 인류는 이 사실을 모르고 있습니다. 이러한 대과업을 이끌어 온 하나님의 심정을 모르고 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6천년 동안 허덕이며 찾아왔던 역사적인 종말시대에 있어서 하나님은 이념권내로 인류를 몰아냈으나 인류는 하나님이 원하시는 방향으로 나아가지 못했기 때문에 불행하게 된 것입니다. 오늘의 이 세계는 세계적인 형(型)은 갖추었으나 실질적이고 내용적인 면에 있어서는 하나님이 간섭할 수 없는 입장에 있습니다.

그러면 이것을 어찌할 것인고? 나는 세계를 향해 외치고 싶습니다. 하나님이 찾고 있던 역사적인 사람은 어디 있으며 애급에서 고역당했던, 하나님이 품고 사랑한 그 민족은 어디 갔느뇨? 만왕의 왕으로 이 땅에 오신 예수님의 사랑을 받고자 했던 그 백성은 어디 갔느뇨? 살아 생전 손에 손을 붙잡고 마음과 마음을 나누면서 심정에 심정을 노래할 수 있는, 하나님이 찾고 있던 하나의 기준이 없어졌으니 이 이상 한스러운 일이 어디에 있겠습니까?

하나님은 꼭 찾을 것입니다. 참의 하나님이요, 참의 내용을 가진 하나님이라 할진대 그 하나님은 무엇을 찾겠습니까? 참의 개인, 참의 가정, 참의 사회, 참의 국가, 참의 세계 그리고 참의 주권을 통하여 천상과 지상에 하나의 심정이 움직일 수 있는 그 세계를 찾으실 것입니다.

여러분은 개인이면 개인으로서, 또 가정이면 가정으로서, 민족이면 민족으로서, 국가 세계 전체가 혈통적 인연이라든가 전통적으로 내려온 모든 인연을 다 끊어버리고 청산해야 합니다. 그런 심정의 기준을 찾아 세워야 합니다.

하나님이 찾고 계시는 세계는 어떤 세계였습니까? 그 세계는 참의 세계, 참의 부모가 있는 세계였습니다. 그러나 인간이 타락함으로 말미암아 타락한 혈통의 부모는 가졌으나 하나님이 영원히 사랑할 수 있는 본연의 참부모는 잃어버렸습니다. 여러분이 아무리 잘났다 하더라도 큰소리칠 수 없는 것입니다. 아무리 큰소리쳐도 타락한 부모의 종족밖에 될 수 없는 것입니다. 자랑할 아무것이 없는 존재입니다.

하나님이 참다운 부모라고 손을 들어 축복하고 천지 만상이 영원히 노래할 수 있는 본연의 부모는 어디에 있는가? 사라지고 말았습니다. 사라진 것도 역사과정에 있어서 사라진 것이 아니라 역사의 시초에서 사라지고 말았다는 것입니다. 그 한을 누가 풀어 주어야겠느냐? 그것을 알아야 됩니다.

그렇다면 본연의 부모는 어떤 부모입니까? 영원무궁토록 계시는 하나님을 아버지로 모시고 자녀로 살 수 있는 분이 참부모입니다. 그런 참부모가 없어졌으니 인류는 그 참부모를 꼭 찾아야 되는 것입니다.

19-243
참다운 심정을 가져야 할 통일교인들
오늘날 우리가 살고 있는 이 땅은 우리의 땅이 아닙니다. 우리가 가져야 할 이념이 땅이 아닙니다. 우리와 참부모와의 인연을 연결시켜 줄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통일교회 교인들은 통일의 심정을 갖춘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간판이 문제가 아니라 그 내용이 문제입니다. 그 사실이 문제라는 것입니다. 참을 찾아 헤매는 양심의 소리가 내 마음에 안 들려 온다 할진대 그 참에 호소하는 내용을 표어로 지어 놓을 수 있어야 합니다. 이런 관점에서 볼 때 참의 부모, 참의 부부, 참의 자녀, 참의 백성, 참의 만물, 참의 주권, 참의 우주가 참의 하나님의 심정을 통하여 동하면 동하고 정하면 정할 수 있는 그한 때를 한꺼번에 맞추는 그날이 앞으로 인간 세계에 있어서 끝날이 되는 것입니다.

그러면 모든 이들이 바라고 있는 재림시대는 어떤 시대일 것인가? 천변지이(天變地異)가 일어나서 사람의 몸이 공중에 둥둥 떠 올라가는 그런 현상이 벌이지는 시대가 아닙니다. 그런 허무맹랑한 망상은 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선생님도 과거에는 그렇게 알고 있었습니다. 때문에 그 내용을 상대로 해서 싸워 나온 것입니다. 그러면 그 시대는 어떤 때이냐?

엉클어진 곡절의 비운의 역사를 탕감하여 개인으로부터 가정, 사회, 국가를 거쳐 세계를 통할 수 있는 때입니다. 전체는 개인을 세워서 종적으로 묶어진 전체의 형을 횡적으로 연결시켜서 역사적인 개체, 역사적인 가정, 역사적인 사회, 역사적인 국가, 역사적인 세계를 이루는 때입니다. 거기에서 살 수 있는 날, 그날을 찾는 것이 우리가 선을 바라고 참을 바라고 나오는 목적이라는 것입니다.

그 날은 무슨 날이냐? 하나님과 상봉하는 날이며 참부모와 상봉하는 날입니다. 참자녀, 참부부, 참백성, 참세계, 참하늘땅이 이 땅에 실현되는 날입니다. 하나님은 이러한 프로를 일시에 맞추어 종결짓고자 섭리해 나오신다는 것을 여러분이 알아야 합니다.

오늘날 이 시대는 외적인 형은 그럴 듯하게 바탕이 되어 있지만 내용에 있어서는 그렇지 않습니다. 오늘날의 주의나 사상은 그럴 듯하지만 기준이 안 서 있다는 것입니다. 오늘날 이러한 끝날에 서 있는 인류는 6천년이라는 기나긴 세월을 통하여 참을 찾아왔습니다.

이렇게 참을 찾고 찾고 또 찾아 나왔지만 참다운 개인을 찾아 세우기 위해 개인적인 입장에서 싸우던 그들은 다 지나가 버렸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참다운 가정, 참다운 민족, 참다운 국가, 참다운 세계, 참다운 우주가 다 지나가 버린 것입니다.

이제 우리는 그 한 때를 다시 맞아야 할 운명에 있습니다. 그 한 때는 어떠한 때이냐? 개인과 개인이 통하니 가정이 통하고, 가정이 통하니 사회가 통하고, 사회가 통하니 국가가 통하고, 국가가 통하니 세계가 통하고, 세계가 통하니 하늘땅이 통할 수 있는 그런 때입니다.

하나님을 자신있게 아버지라고 부를 수 있는 자, 그것이 개인이 지향하는 최고 목표의 정수라 할진대 자신있게 부를 수 있는 사람 손 한 번 들어 보세요. 정말 심각한 문제입니다. 이러한 6천년 종말시대에 있어서 잠이 웬말입니까?

오늘날 외적으로는 섭리를 대할 수 있는 모양은 갖추었지만 내용은 그렇지 못합니다. 6천년의 돌고 도는 내용이 있다는 것을 여러분이 알아야 합니다. 시일이 가면 갈수록 여러분의 가슴이 답답하고 전기관(全器官)이 답답해진다는 것입니다. 허우대가 잘나고 돈이 많고 모든 것을 갖추었다 하더라도 무엇인지 모르게 허전해진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개체에서 싸움이 벌어진다는 것입니다. 마음은 6천년 전으로 뛰어나가려고 하나 몸이 6천년 후로 얽매어 있다는 것입니다. 성경에서는 말하기를 “구하라 그러면 너희에게 주실 것이요. 찾으라 그러면 찾을 것이요. 두드리라 그러면 너희에게 열릴 것이니(마 7:7)”라고 했습니다. (녹음이 잠시 중단되어 있음)

19-245
예수님의 한을 풀어 드리려면
오늘 우리들이 소원하는 것은 하나님이 소원하시던 것과 같은 것입니다. 그러면 하나님의 소원이 무엇이냐? 창조목적입니다. 그것이 하나님의 소원입니다. 그 소원을 대신한 실체로 예수님이 오셨으나 예수님은 그 뜻을 이루지 못하고 돌아가셨습니다. 예수님은 돌아가실 때 ‘나는 너희 앞에 신랑이요, 너희는 신부다’라는 명제만을 남겨 놓고 가신 것입니다. 여러분, 이것이 무슨 뜻인지 압니까?

기독교에서 말하는 어린양 잔치는 무엇이냐? 하나님이 찾아 세워야 할 참부모의 모습을 끝날에 세워 가지고 형제의 인연과 자녀의 인연을 갖추어 인류역사를 바꾸어 놓자는 것입니다. 이것이 오늘날 우리들이 안고 있는 숨가쁜 소망이요, 2천년 동안 고생해 나오셨던 하나님의 소망인 것을 우리는 알아야 합니다. 오늘날 여러분들은 무엇을 붙들고 있습니까? 2천년 전의 이스라엘 민족은 예수님을 붙들 수 있는 자리에 있었습니다, 유대교단은 예수님을 모실 수 있는 시대적인 혜택권내에 있었습니다. 그리고 택함받은 이스라엘 백성 전부는 예수를 만민의 왕으로 모실 수 있는 시대적인 환경에 처해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하나님의 사랑을 받고 있다고 자처하면서 예수를 배반했고 배척했습니다. 그들이 그렇게 함으로 인해 예수가 소망하던 모든 것은 끊어지고 말았습니다. 유대 나라 역사가 끊어졌고, 유대 나라를 통하여 나오던 이스라엘 백성도 끊어졌고, 모든 것이 다 끊어졌다는 것입니다.

오늘날 우리들에게 있어서 한스러운 것이 무엇이냐? 예수님의 말씀을 붙들고 울고불고 하며 살아가야 할 입장에 섰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기도할 때 예수 이름으로 기도하지요? 이렇게 예수란 명사에 얽매어 사는 그 사실이 불쌍한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에게 있어서 소망은 무엇이냐면 그를 따르는 이념을 갖고 기도하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넘어서 예수님께서 실체로 구원하시는 것입니다.

우리는 목숨을 걸고 예수가 바라던 행복을 찾아내야 되고, 말씀을 붙들고 예수님이 잃은 것이 이런 것이구나 하는 것을 알아야 됩니다. 그리하여 그 잃은 것을 다시 찾아야 합니다. 원수들에 의해 십자가에 못박혀 피흘리는 처참한 환경에 처했던 예수였기 때문에, 그 심중의 모든 사연을 찾아 나가야 할 것이 우리들의 운명이라는 것입니다. 말씀만 붙들고 하늘만을 바라보고 있는 기독교는 망합니다. 심판을 피하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우리들을 위해 십자가에 못박힌 그 자취, 애달프게 말씀하던 그 심정 자체를 붙들고 나와의 인연을 종결지어 세상 것을 청산해야만 예수님의 한이 해원된다는 것입니다.

19-236
예수님의 말씀과 행동과 실체를 그리워하라
타락한 우리 인간들에게 참부모의 말씀과 하나님의 말씀이 필요하다 할진대 비유와 상징이 아닌 사실 그대로의 말씀이어야 합니다. 성경에 기록되어 있는 바와 같이 2천년 전의 예수는 타락한 인간을 구원하겠다는 말씀을 하셨습니다. 그러나 그 말씀은 자신의 해원과는 하등의 관계를 갖지 못하는 입장에서 하신 말씀이었습니다.

말씀의 목적은 행동을 하게 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이 말씀을 중심으로 하여 나왔던 기독교는 오늘날 왜 이렇게 되었느냐? 그것은 예수님의 말씀이 어떤 말씀인지 몰랐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예수님이 하신 말씀은 어떤 말씀이었느냐? 그 말씀에는 모험이 따르고 곡절이 내재해 있는 것입니다.

그러면 어떻게 해야 되겠느냐? 끝날에는 성경을 붙들고 밤새워 기도하라고 했습니다. “너희는 기도할 때 골방에 들어가 문을 닫고 은밀한 중에 계시는 네 아버지께 기도하라(마 6:6)”고 했습니다. 그런데 찾아오는 데는 말씀으로 찾아오시는 것이 아니라 실체를 갖고 찾아오시는 것입니다. 그러면 어떻게 찾아오실 것인가?

오늘날 우리 자신들이 서 있는 이 자리가 본래 예수님이 말씀에서 주장하고 바라던 목표의 자리인지를, 또한 이 자리가 십자가의 고난을 느끼면서 다시 찾아오시는 예수님의 자리인지를 세상 사람들은 모르고 있습니다.

이제 말씀을 통하여 내 심정에서 혁명이 일어나는가를 판단해야 하겠습니다. 즉, 이 말씀이 나를 격동시켜 죽음의 골짜기도 능히 넘어가게 하는가, 내적으로 충격을 주어서 행동의 주체로 설 수 있게 하는가를 스스로 판단해야 할 때가 왔습니다.

우리는 2천년 동안 말씀을 그리워했습니다. 그러면 이제 여러분들은 어떻게 해야 되겠느냐? 말씀을 그리워하는 반면 행동을 그리워해야 합니다. ‘예수가 이렇게 이렇게 갔으니 나는 이렇게 가야 되겠다’ 하는 행동을 그리워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예수는 어떤 분이냐? 인류의 참부모입니다. 그런 예수님이 말씀을 통하여 죽어갔으니 여러분은 가실 때의 그 행동을 그리워해야 합니다. 말씀을 그리워하고, 행동을 그리워하고, 그 다음에는 그 모습을 그리워해야 합니다. 사랑하는 부모 이상으로 그리워해야 합니다. 밥 먹는 것도 잊어버리고 자는 것도 잊어버리고 자기의 모든 처신도 잊어버릴 정도로 보고 싶어야 합니다. 여러분은 그러한 때가 있었습니까?

행복은 어떤 길에서 이루어지느냐? 말씀을 잘한다고 이루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행동을 잘한다고 이루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그리워해야 된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주의 얼굴이 어떤 모습이겠습니까? 그의 손발이 어떠할 것 같습니까? 그 코와 눈, 그 모습은 이러할 것이니 그 모습을 만지고 싶고, 그 모습을 더듬어 보고 싶을 정도로 그리워하는 마음이 있어야 합니다. 이것은 여러분에게 있어서 최후의 모든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중요한 문제입니다.

말씀의 중심인 예수님, 그러나 예수님이라는 이름이 여러분을 구원해 주는 것이 아닙니다 이름이라는 것은 외적인 것이기 때문에 실체의 예수를 그리워해야 됩니다. 보고 싶어도 볼 수 없는 예수님. 가실 때 다시 온다고 했던 그 예수님은 왜 안 오시는가? 부활 직후 사도들 앞에 나타났던 그 예수님은 어찌하여 온 만민 앞에 못 나타나는가? 이게 무슨 곡절인가 ?

오늘날 우리들은 간절한 마음으로 예수님을 뵙고 싶어하는데 무슨 곡절이 있길래 나타나지 못하시는 것인가? 그러나 날이 가고 해가 가는 것도 개의치 않고 변함없이 예수님의 모습이 그리워 허덕이는 자가 있다할진대 그 사람에게는 기필코 그분과 상봉할 수 있는 길이 열리는 것입니다.

19-248
하나님의 슬픔이 된 예수님의 죽음
오늘날 우리들은 고아입니다. 하나님을 잃어버린 고아입니다. 이 세상의 어느 누가 잘사는 가정환경에 있다 하더라도 하나님 입장에서 보면 한 고아에 지나지 않는 것입니다. 인류는 본래의 참부모를 잃어버렸습니다. 또한 참형제를 잃어버렸고, 참부부를 잃어버렸고, 참자녀를 잃어버렸습니다.

이처럼 고아와 같은 내 자신을 볼 때 편할 리가 있습니까? 이 몸은 재촉하고 있습니다. 무엇을 재촉하느냐? 본연의 부모와 형제, 본연의 자녀를 찾으라는 것입니다. 그러면 어디 가서 찾아야 하느냐? 본연의 부모를 찾는 데는 이 지구를 돌고 돌아도 찾을까말까 합니다. 더구나 예수님의 말씀 가운데도 찾을 수 없는 내용으로 되어 있으니 어디 가서 찾는단 말입니까?

그러니 이제 내 머리에 기름을 바르고 밀실에 들어가 아버지를 보고 싶어하는 마음에 사무쳐 울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그리하여 어떠한 죽음의 길도 어떠한 험산준령도 가겠노라고 다짐하는 자가 있다 할진대 그것을 아버지가 찾아 주신다는 것입니다. 예수는 이런 아들딸을 찾기 위하여 골고다의 길도 마다하지 앉고 갔습니다. 그러나 찾다가 안 되니 결국 죽음의 길로 갔던 것입니다.

그러면 본연의 부모와 상봉할 날을 고대하던 무리가 부모의 그 모습을 붙들고 아버지라고 부를 수 있고 ‘주여’ 하고 부를 수 있는 날이 언제이겠습니까? 전세계 기독교인들이 이 중심문제를 해결해야 할 때가 온 것입니다.

그렇게 하기 위해선 어떻게 해야 되느냐? 이 세상의 어떤 주의나 사상 보다도, 혹은 자기 아들딸보다도, 그 무엇보다도 그분이 그리워 못 살겠다고 그분의 옷자락이라도 한 번 만지고 싶어하고, 그분의 손이라도 한번 만져 보고 싶어하는 그리운 마음이 있어야 합니다. 그분이 우리 아버지로 나와 인연 맺어져 있으니, 그 품에 안겨 지난날의 모든 것을 털어 놓고 얘기할 수 있고, 그 수고로움을 친히 위로드릴 수 있는 한 때를 맞는 것이 온 인류가 찾아 나가는 최고의 소망인 것입니다.

말씀을 그리워하는 것보다도, 행동을 그리워하는 것보다도, 그 자체를 그리워해야 합니다. 그 자체를 붙들고 난 후에는 어떻게 해야 되느냐? 그 마음을 그리워해야 합니다. 그런데 잃어버린 부모를 다시 만나기 위하여 그리워하고 또 그리워하고, 보고 싶어하고 또 보고 싶어한 사람이 한 사람이라도 있었습니까? 없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만민을 위하여 독생자인 예수를 만왕의 왕으로서 이 땅에 보낸 것은 천대받게 하려고 보낸 것이 아닙니다. 역사 이래 단 하나의 중심 존재로서 만민의 아버지로 예수님을 보냈으므로 만백성은 그분을 보고 싶어하고 그리워해야 하고 만나서 기뻐했어야 했습니다. 그렇지만 그렇게 대했던 사람이 하나도 없었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분하다는 것입니다.

예수의 죽음은 하나님의 슬픔이 되었습니다. 예수님 자신도 하나님의 아들로서 하고 싶은 말을 다하지 못하고 간다는 말씀을 남기고 갔습니다. 예수님은 “내가 땅의 일을 말하여도 너희가 믿지 아니하거든 하물며 하늘 일을 말하면 어떻게 믿겠느냐(요 3:12)”,또 “내가 아직도 너희에게 이를 것이 많으나 지금은 너희가 감당치 못하리라(요 16:12)”고 말씀하셨던 것입니다.

19-249
예수님을 생각할 때 부모의 심정을 느껴야
그 사랑하는 제자들이나 혹은 사도들을 예수의 참아들딸로 세웠던들 예수님은 십자가에 못박히지 않았을 것입니다. 우리의 아버지가 되었어야 할 그분은 마음에 사무친 이 비밀을 털어놓지도 못하고, 또 한마디의 유언도 하지 못하고 가신 것입니다. 불효 중에 이런 불효가 어디에 있겠습니까? 이렇게 역사적으로 저끄러진 세상을 오늘날 여러분들이 복귀해야 합니다.

인류는 부모를 죽인 죄를 지었기에 모두 회개해야 됩니다. 어떻게 회개하느냐? 아버지를 죽인 죄를 뉘우치고 깨달아야 합니다. 목석같은 자식이라도 그분이 나의 진정한 선의 아버지라고 깨닫고 느꼈을 때에는 눈물로써 회개하지 않을 자가 어디에 있겠습니까? 모두가 회개하게 되어 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사랑하는 본연의 가정과 본연의 자녀, 본연의 형제와 본연의 식구가 그리워서 6천년 동안 뜬눈으로 일하며 수고해 오셨습니다. 그것을 여러분이 알아야 합니다.

예수가 30여 평생을 홀로 지내오면서도 외로이 겟세마네 동산에서 밤을 새워가며 기도하면서도 사모하던 하나의 기준이 있다 할진대 그것이 무엇이냐? 본연의 자식인 것입니다. 십자가의 고통 속에서 쓰러지면서도 ‘아버지여, 저들의 죄를 용서하여 주시옵소서’ 했던 예수였습니다. 여러분은 여기에서 본연의 자식을 찾고자 했던, 부모의 입장에 있었던 예수의 심정을 느낄 수 있어야 합니다. 이런 예수를 흠모하는 여러분이 되어야겠습니다.

역사상에 제일 불쌍하고 불쌍했던 예수님은 그 시대에 있어서 역사상의 괴수요, 배반자의 괴수요, 이단자의 괴수로 몰렸습니다. 오늘날 역사에서 말하는 예수는 훌륭하였으나 그 당시에 있어서는 불충했고 믿을 수 없는 예수였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그것을 알아요? 그렇기 때문에 역사상에 승리자로 나타난 예수가 아닌, 영광으로 오신 예수가 아닌 실체의 모습으로 오신 그 예수를 찾아 헤매야 할 것이 오늘날 끝날에 있어서 성도들이 해야 할 사명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여러분은 아들딸을 찾기에 수고했던 예수님의 그 심정 가운데서 부모의 심정을 느낄 수 있어야 합니다. 본연의 아들딸의 모습을 찾기에 허덕였던 그 부모와 아들딸이 상봉하는 그날이 하나님이 축복할 수 있는 날입니다.

19-250
다시 오시는 주님과 부자의 입장에서 상봉하려면
이제는 예수의 이름으로 기도하는 단계를 지나 예수의 실체로 기도해야 합니다. 그리고 말씀은 인격 뒤로 숨어야 합니다. 말씀은 신랑으로 오신예수가 신부 앞으로 보낸 편지인 것입니다. 그러나 그 말씀의 주체이신 실체가 나타나면 그 편지는 아무 소용이 없는 것입니다.

지금의 때는 말씀을 중심삼고 행동으로 실천해야 합니다. 사탄세계를 정복하여 세계를 하나님 앞에 내어줄 수 있는 자리를 완결지어야 할 때입니다. 그러므로 여러분은 하나님의 아들딸로서 예수님이 바라던 아들딸 이상의 기준을 가져야 합니다. 이러한 것을 뚫기 위해서는 십자가의 고통을 느낄 줄 아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예수님이 자기의 혈족과의 인연을 끊고 뜻을 위해 나가면서 슬픔의 눈물을 흘렸던 것과 마찬가지로 우리는 이 땅에서 육적인 인연을 끊기 위한 십자가의 고통을 받아야 합니다. 이것을 싫다 하는 자는 예수님을 못 만납니다. 절대로 만날 수 없습니다.

예수님은 십자가 상에서 돌아가실 때 다시 온다고 하셨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 십자가의 고개를 통과한 심정의 동반자는 예수 앞에 설 수 있는 자격이 있는 것입니다. 12사도를 위주로 하여 70문도는 시련의 담을 문제 없이 넘어섰습니다. 로마의 핍박 속에서도 기독교는 모험을 각오하고 나왔기 때문에 로마를 정복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오늘날 세계 기독교는 세계를 위하여 무조건 희생해 나왔기 때문에 세계를 지배할 수 있는 단계에까지 올라섰습니다. 이것은 기독교 역사를 통해서 알 수 있습니다.

이제는 사탄세계를 대하여 하늘의 주권을 세울 수 있는 때가 되었습니다. 그러기에 전세계 기독교인들은 실체의 세계를 위해 마음을 합하여서 죽음을 각오하고 총진군해야 된다는 것입니다.

말씀의 시대를 거치고 실체의 시대를 거친 후에야 상봉의 한 날이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그리고 상봉의 한 날이 이루어진 후에야 천국생활을 할 수 있는 것입니다. 상봉의 그날에는 그의 마음이 내 마음이요, 그의 심정이 내 심정이요, 그의 모습이 나의 모습이요, 그의 어려움이 내 어려움이요. 그의 상처가 나의 상처로 느껴질 수 있는 경지에까지 들어가야 됩니다. 그런 경지에 들어가서 그의 마음도 내 마음이요, 그의 심정도 내 심정으로 되어야 천국 가정이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이것이 이 땅에서 완결 되어야 천국가정이 벌어지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인류 앞에 부모의 입장으로 계시기 때문에 오늘날 많은 사람들은 자신들이 하나님의 자녀라고 자처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이론만 그렇습니다. 우리는 양자의 입장에 있는 것입니다. 그러면 여러분은 무엇할 것이냐? 말씀을 중심삼고 행동함으로써 예수를 만나야 합니다. 찾는 데에는 산중에, 밀실 가운데 혹은 죽음의 자리 가운데에서도 찾아 들어가야 합니다. 예수님도 밀실의 노정을 거쳤고 산중의 기도의 시간도 거쳤고 죽음의 고개의 노정도 거쳤습니다. 오늘날 여러분들도 그러한 노정을 걷겠다는 각오를 가지고 나가야 됩니다. 성경을 볼 때 예수님의 그런 사정을 알아야 합니다.

주님을 상봉하는 그 날이 오면 어떻게 할 것인가? 어떻게 해야겠습니까? 그분을 대해 가지고 우리가 먼저 해야 할 일이 무엇일 것인가? 참부모를 만나는 그때에는 그분을 위해 드려야 합니다. ‘아버지여 ! 나는 이러이러한 곳에서 싸워 왔고 이러이러한 예물을 가져왔나이다. 6천년 기나긴 세월 동안 나 하나를 찾기 위해 얼마나 수고해 오셨습니까?’ 라고 위로해 드려야 합니다.

19-252
주님과 상봉한 후에 해야 할 일
주님이 오심으로 말미암아 이 땅은 천국이 이루어지는데, 그렇다고 해서 전부 내 마음대로 되는 세상이 되지는 않습니다. 그러면 어찌해야 되는가? 나의 소원, 나의 기대, 나의 소망 모두를 버려야 합니다. 주님을 만나는 그날부터 그가 부르는 자리로 나설 줄 알아야 합니다. 또한 이 길을 찾아 나오시기에 얼마나 수고하셨으며, 6천년의 긴 역사노정을 거쳐 오시면서 참을 찾기에 얼마나 수고하셨느냐고 뼈와 살에 사무치는 마음을 갖고 그분을 위로해 드릴 수 있는 내용을 가져야 합니다.

6천년의 역사를 거쳐 왔던 하늘의 사정이 어떠했느냐고 하면서 위로해 드리는 것이 자식의 도리인 것입니다. 먼저 칭찬받겠다고 생각해선 안 됩니다. 예수님의 부활 직후 막달라 마리아가 예수 앞에 나타날 때 눈물 흘렸던 것같이 찾아갈 때에는 겸손한 마음으로 묵묵히 찾아가야 한다는 것입니다.

인간이 청산해야 할 내용이 있거늘 그 내용은 무엇이겠습니까? 역사적인 허물을 청산해야 합니다. ‘아담 가정에서 이러이러했고, 노아 가정에서 이러이러했고, 아브라함 가정에서 이러이러했고, 이삭 가정에서 이러 이러했고, 야곱 가정에서 이러이러했고, 모세를 거쳐 역대 선지선열들이 이러이러했고 예수까지 이러이러한 모든 것이 다 내 죄이옵니다. 용서해 주십시오’ 라고 하면서 사죄드려야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과 상봉한 자리에서 우리들은 역사적인 허물을 다시 한번 깨닫고 회개의 눈물을 흘려야 합니다. 그리고 아버지의 그 은사 앞에 감사해야 합니다. 그래야 하나님이 ‘내 아들아’ 하며 칭찬할 수 있는 것입니다. 이것이 소망의 가정을 향하여, 천국가정을 향하여 찾아 나가는 길인 것을 여러분이 알아야 합니다.

19-253
끝날은 직고의 시대
여러분은 역사적인 하늘의 슬픔과 예수의 슬픔을 철저히 드러내야 합니다. 그 6천년 동안의 힘든 그 지경에도 혈전을 치르면서 역사의 피어린 그 자리까지 더듬어 가지고 나온 것은 나 때문이요, 나의 형제 때문이요, 혹은 나의 식구 때문이요, 우리 민족 때문이오니 아버지 앞에 황공하다고 아뢸 줄 알아야 합니다.

여러분은 그런 역사적인 사실을 알아야 합니다. 하나님이 천지창조를 어떻게 하셨고, 인간의 타락은 어떻게 된 것이며, 가인과 아벨이 제물을 드렸을 때 왜 아벨의 제물만 받으시고 가인의 제물은 안 받으셨는가? 또한 아브라함 이삭 야곱의 3대 하나님은 왜 나오게 되었으며, 야곱이 왜 그런 간교한 행동으로 장자권을 빼앗았으며, 12아들을 세우고 70식구를 만들어서 왜 애급으로 보냈으며, 애급에서는 왜 60만 대중을 만들어서 모세를 그들의 중심자로 세웠으며, 가나안 땅을 복지로 택해 싸우게 했는가? 그런 선민권과 주권은 왜 세웠으며, 예수님은 왜 이땅에서 죽었으며 또 왜 다시 와야 하는가? 여러분은 이러한 모든 역사적인 사실을 알아야만 합니다.

그러면 앞으로의 여러분들은 어떻게 해야 할 것이냐? 이런 역사적인 범죄와 시대적인 범죄와 미래적인 범죄상을 낱낱이 직고해야 됩니다. 끝날은 직고의 시대입니다. 그리고 자기의 죄 하나만 직고해서는 안 됩니다. 역사적인 죄를 직고해야 되고, 시대적인 죄를 직고해야 됩니다. 또, 미래의 죄상을 모두 뽑아 버릴 수 있는 실력을 갖춘 자로서 직고해야 합니다.

과거와 현재를 청산하고 미래의 새로운 세계를 천주 앞에 내세우게 하기 위한 것이, 하나님이 개인을 찾아 나온 목적입니다. 여러분들은 자신들이 하나님이 제일이라고 할 수 있는 하나님의 가정, 혹은 ‘나는 하나님의 식구의 일원이다’ 라는 생각을 스스로 해본 적이 있어요?

내 한 개체는 완성의 자리에 나가야 합니다. 내가 대하는 아버지는 역사적인 아버지요, 시대적인 아버지요, 미래적인 아버지이기 때문에 마음에서, 심정에서, 혹은 몸에서, 말씀을 들어서 ‘옳소이다’, 그 말씀을 대하여 행동함으로써 ‘옳소이다’ 할 수 있는 내용을 가져야 합니다.

심판 날에는 무엇을 가지고 심판하느냐? 역사적인 하나님의 심정과 시대적인 하나님의 심정과, 영원한 하나님의 심정을 기반으로 한 탕감복귀의 조건으로 심판하는 것입니다.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난 막달라 마리아였지만 그것을 몰랐기 때문에 예수님을 붙들려고 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나를 만지지 말라. 내가 아직 아버지께로 올라가지 못하였노라’고 하셨습니다.

말씀을 실천하더라도 실체적인 메시아를 통하지 않고는 참감람나무의 열매를 맺을 수 없습니다. 이것을 통하지 않고는 아무리 실천해도 안 되는 것입니다. 아무리 행동하여도 실체와 관계맺지 않으면 아무 소용이 없는 것입니다.

19-254
소망의 시대를 열자
오늘날 우리들은 회개해야 됩니다. 회개하기 위해서는 청산해야 되겠습니다. 회개는 무슨 회개냐? 아담 가정으로부터 6천년 동안 우리 선조들이 하나님의 뜻을 받들어 나오면서, 그분과 일체가 되어 이루어야 할 그 뜻을 이루지 못한 모든 것을 오늘 내가 책임지겠다는 사명감을 가지고 회개를 해야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미래적인 하나님만이 아닙니다. 역사적인 하나님입니다. 때문에 하나님은 모든 역사적인 죄상을 걸어 놓고 나오셨습니다. 그러니 여러분들은 그 하나님이 나를 찾기 위해 소망해 오셨던 하나님인 줄 알고 그분과 인연맺는 대상이 되어야 합니다. 그래야 역사의 죄를 청산할 수 있는 것입니다. 역사적인 하나님, 시대적인 하나님, 또한 미래의 소망적인 하나님으로서, 과거와 현재를 지나 미래에 하나의 터전을 이루어 거기에서 새로운 아버지의 영광을 노래할 수 있는 그날이 우리가 영원 무궁토록 살수 있는 천국이 실현되는 날입니다.

그렇게 되면 어떻게 되느냐? 하나님을 중심삼고 소망의 아들딸로 하여금 하늘의 계대를 이루는 것입니다. 그리하여 하늘가정의 아들딸로서 인정받으며 거기에서 영원히 사는 것입니다. 그 사람들은 예수가 필요없습니다. 신앙이 필요없는 것입니다. 앞으로 소망의 때가 되면 하나님은 6천년 역사의 이 땅을 전부다 심판 하실 것입니다. 서글픈 역사의 페이지는 기억할 필요가 없는 것입니다.

여러분 자신이 몸과 마음을 심정적으로 해결지을 수 있는 탕감의 터전이 ‘나’라고 할 수 있는 어떤 한 시대가 오게 되면 과거에 청산한 짐누더기가 그리워지는 것입니다.

여러분, 지금 시대는 골동품 시대입니다. 왜 그런지 알아요? 우리 조상이 잃어버린 본연의 것을 찾아 들어가야 하기 때문입니다. 6천년 전 에덴 동산에서의 잃어버린 참조상의 자리를 찾고 아담 해와가 잃어버린 하나님과의 관계를 다시 맺을 수 있는, 최고의 골동품을 찾아가야 합니다. 찾은 후에는 그 골동품 시대를 뛰어넘어 새로운 이념을 갈망하며 찾아나가는 시대로 들어가야 됩니다. 지금 이 시대는 새것이 나오면 때려 잡아먹고 삼켜 버리니 망해야 될 세상입니다.

이제 소망의 시대를 열어야 합니다. 우리가 이상하는 그 세계를 세워야 합니다. 세우는 데에는 하나님을 중심으로 해서만 우주가 추앙할 수 있는 그 세계를 세워야 합니다. 오늘 우리는 이러한 사실을 마음에 깊이 새겨야 합니다. 그래서 불교의 참선이라는 것은 마음을 중요시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본연의 내가 해야 할 일은 무엇인가? 과거의 모든 잘못을 결단지어 청산받은 후에는 과거와 현재를 끊어버려야 하는 것입니다. 씨알맹이도 없이 끊어 버려야 합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목적이요, 새로운 이상세계와 소망세계를 이루기 위한 시작인 것입니다.

고대문명은 희랍문명의 재판이었습니다. 고대문명을 연구함으로써 새로운 역사를 창조하는 데 있어서 고대정신을 부합시켜 나갈 수 있기 때문에 그런 연구가 필요한 것입니다. 그러나 과거의 역사만을 연구한다는 것은 우리 인류의 소망이 못 됩니다.

우리는 과거의 잘못을 해결지어야 할 운명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옛것을 청산해 버리고 오늘의 새로운 생활모습으로 돌아가 새것을 위하여 노력할 줄 아는 사람들이 되어야 합니다. 여러분들은 이러한 모습이 되어 있습니까? 잘 생각해 보십시오. 하나님은 여러분이 옛날처럼 사탄세계에서 뒤넘이치고 누더기 보따리를 짊어지고 구석구석을 쑤시며 다니던 것을 좋아하시겠습니까? 듣기도 싫고 보기도 싫고 생각하기도 싫다는 것입니다. 그런 종족도 보기 싫고, 그런 인류도 보기 싫고, 그런 주권, 그런 역사, 전부가 보기 싫다는 것입니다.

19-256
슬픈 하나님이심을 모르면
하나님은 새로운 소망에 불타 가지고 아버님의 영광을 추앙하면서 모실 수 있는 그런 참다운 아들딸의 모습을 찾아 헤매고 계십니다. 그것을 우리는 똑똑히 알아야 되겠습니다. 우리가 과거를 붙들면 붙들수록 우리의 이상적인 모든 뜻은 파괴되고 말 것입니다. 구약성경만을 믿던 유대교인 들은 구약에만 얽매였기 때문에 예수님을 죽음의 길로 몰았던 것입니다. 이것을 여러분이 똑똑히 알아야 됩니다. 오늘날 민주주의와 공산주의가 그렇습니다. 자기들의 사상만을 붙들고 있다가는 유대교인들처럼 또 새것을 범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지나온 과거를 청산하고 그 행실을 청산하고, 이 지상의 모든 것을 청산해 가지고 미래의 나로서 과거의 보따리를 싸 가지고 있어야 됩니다. 그렇게 하지 않으면 소망하는 하나님의 가정을 절대로 이룰 수 없습니다.

또한 하나님은 여러분을 사탄편의 아들딸로 여기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요셉 가정에 독생자인 참예수를 세워 놓으셨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동생들이 ‘형님 !’ 하는 말이 듣기 싫었다는 것입니다. 그것은 왜 그랬느냐? 본래 신앙노정을 거친 후에 예수를 믿고 예수의 심정과 예수의 마음과 예수의 몸과 예수의 행동과 예수의 말을 통한 후에야 형님이라고 할 수 있는 것입니다. 마리아가 예수를 아들이라고 하는 것도 예수님은 싫어했습니다. 예수님을 아들이라고 할 수 있으려면 그 신앙노정을 다 통해야 되는 것입니다. 타락한 혈족에 있었던 그 모든 내용을 버려야 되는 것입니다.

앞으로 하나님이 지극히 사랑하는 어떤 세계의 일등신부가 하나님 앞에 부름을 받을 때는 ‘아, 저 사람은 아무개 딸, 아무개 조카, 아무개 누나, 아무개 동생이구나’ 라고 인정받게 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아들이자 하나님의 딸이라고 생각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과거를 존중시했던 유대 민족들은 이런 자리를 넘어서 가겠다는 생각을 하지 못했던 것입니다, 6천년간 피의 혈통을 계승했던 역사상의 비참상을 회고해 볼 때, 이와 인연된 민족이 하나님의 뜻을 배반하였으니 하나님은 보기도 싫었을 것입니다, 그러니 내 사랑하는 아들딸이 손을 잡고 ‘나는 아무개 아버지요, 나는 아무개 어머니’라는 말을 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나는 세상을 이렇게 산다’라는 말도 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모든 것이 죄악사와 더불어 인연된 결과이니 말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시대적인 하나님, 역사적인 하나님, 현재도 몰리고 있는 슬픈 하나님 이십니다. 그것을 알지 못하는 자는 심판받습니다. 진정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는 슬픔과 고통이 있을 때 하나님 앞에 기도할 수 있는 마음을 가진 사람입니다. 역사적인 슬픔과 고통을 맡아 가지고 죽음의 자리를 찾아 나오는 것만 해도 황공한 줄 알아야 됩니다. 오늘날 이런 하나님께 슬픔과 고통을 더해 주는 사람들은 전부다 심판받아야 됩니다.

슬픈 하나님을 찾아가는 데 있어서 혼자 울며 기도하는 사람이 있다면 하나님은 그를 알아줄 것입니다. 그러므로 여러분은 ‘말할 수 없는 어려운 나날 가운데 섭리해 나오신 하나님 아버지의 수고가 얼마나 크옵니까? 제가 죽는 한이 있더라도 그 뜻을 제가 맡겠습니다’ 할 수 있는 아들딸이 되어야 합니다. 지금 인간은 하나님께 머리 들 수 없는 존재입니다. 하나님의 사랑권내에 들어가면 들어갈수록 더욱 머리를 들 수 없는 것입니다. 선생님이 들어가보니 그렇다는 것입니다. 믿겠으면 믿고 말겠으면 마십시오.

지금까지 인류역사는 뒤넘이치면서 나왔습니다. 또한 오늘날 세계가 권력도 변하고 세력도 변하는 판국에서 자기 혼자 잘되겠다고 하면 망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러기에 어떠한 사람을 대하더라도 핍박받고 비참한 자리에서 낮아지려고 해야 됩니다. 우리 통일신도들은 핍박받고 몰리는 길에서도 이 길을 걸어야 합니다. 그렇다고 서러워 마십시오. 주께서 가신 길이 그러했고, 아버지가 걸으신 길이 그러했거늘 불효 죄인이야 당연 지사가 아니겠습니까 ?

심한 고통을 가하여서 이 민족의 고통을 제하고 미래에 서러운 고난을 통하여서 하늘의 서러움을 감하겠다는 마음이 앞서는 사람은 사탄도 마음 대로 하지 못합니다. 하나님은 언제나 인간의 배반 속에서 나오셨지만 하늘 가정을 보고 싶어하시는 것입니다.

세계는 잠들어 있습니다. 그러니 우리들은 하나님 가정의 식구가 됨을 동경하고 그 식구와 인연맺는 것을 존중하면서 나를 잃어버릴 수 있는 일원이 되어 하나님 아버지를 흠모해야겠습니다. 내가 그리워서 하나님을 붙들고 울 수 있는 심정의 소유자와 이런 마음을 통하여 나가는 무리를 하나님은 고대하고 계십니다.

19-258
모든 한을 해원하는 길
오늘 우리들은 인류의 구원을 위해 하늘땅을 붙들고 호소해야 되겠습니다. 역사적인 죄악을 놓고 통곡해야 되겠습니다. 삼천만 민중의 운명을 놓고 통곡해야 되겠습니다. 모든 어려움을 딛고 민족을 구하기 위해 수고해야 되겠습니다. 그래서 하늘이 통치할 수 있는 그날이 이 민족 앞에 찾아지지 않고는 이 민족은 망하는 것입니다.

과거의 수고는 다 지나가 버립니다. 그런데 그 과거를 연이어 갈 수 있는 종적인 친구는 어디에 있느냐? 그 식구는 어디에 있느냐? 이러한 느낌이 저마다의 심정에 뿌리 내려져 이런 길을 찾아가야 올바른 길을 가는 것입니다. 내가 못 먹어도 먹는 것을 잊어버리고 내가 억울하더라도 인류와 미래의 후손까지 염려하면서 하나님 앞에 호소할 수 있는 마음의 자리까지 나가야 합니다.

모든 사람들은 현실에서 잘 아는 바와 같이 2천년 전에 오신 예수님 때를 중요한 역사적인 한 전환점으로 보고 있습니다. 그와 마찬가지로 여러분들은 오늘의 이 때가 역사적인 전환시기이므로 생사의 기로와 절망과 탄식의 분기점이 우리의 목전에 당도하여 사탄이 우리의 생활권내로 침범해 들어오고 있다는 사실을 알아야 되겠습니다.

한국 실정을 바라볼 때, 한민족은 가망이 없는 민족입니다, 아무것도 가진 것이 없고 찾으려 해도 찾을 것이 없는 민족입니다. 그러면 이 민족을 살리려면 어떻게 해야 되느냐? 6천년 죄상을 탄식하고 시대적인 한을 탄식하며 쌍수를 들어 아버지를 부를 수 있는 하나의 움직임이 나와야 합니다. 그래야 이 민족을 살릴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면 여기에 어떤 사람들이 동원되어야 할 것인가? 오늘 현실에 있는 기독교인들은 우리 교회를 맞아들여야 합니다.

천국은 목사, 장로들이라고 해서 다 들어가는 곳이 아닙니다. 천국은 참된 아들딸들이 들어가는 곳입니다. 목사와 장로들이 뜻길을 취할 수 있는 기둥을 만들어 놓았으니 불원간 세계에 널려 있는 모든 기독교인들이 우리 앞에 전도되어 들어 올 수 있는 운동이 일어나게 될 것입니다. 뜻있는 젊은이들이여 ! 이러한 시기가 기필코 온다고 하나님은 외치실 것입니다.

처음에는 목사 바람이 불어서 다음 시대를 해방시키는 ‘아무개 목사, 아무개 목사’ 했습니다. 그 다음에는 ‘아무개 장로 !’ 하는 장로 바람이 불었고, 다음에는 집사 바람이 불었고, 이제는 평신도 바람이 부는 시대입니다.

이제는 기필코 맺힌 것을 풀어야 합니다. 세계적인 섭리역사 앞에 있어서 절대로 막혀서는 안 되겠습니다. 통일교인을 그런 사명감에 불타 가지고 이 움직임을 끝까지 이끌고 나가야 합니다. 비록 욕을 먹고 있을망정 끝까지 이끌고 나가야 한다는 것입니다.

역사는 방향을 바꿀 적마다 시대시대에서 변화의 혁명을 일으킬 수 있는 피끓는 젊은 남녀들을 필요로 하고 있습니다. 그것을 우리는 알아야겠습니다. 또한 끝날 천적인 이념시대가 찾아 들어올 때 또 다시 배반하여 천추에 한을 남기는 불쌍한 민족이 될까봐 염려할 줄 아는 여러분이 되어야 하겠습니다. 그것이 하나님의 한을 해원하는 길이요, 역사적인 예수와 성신의 한을 해원하는 길이요, 선지선열들의 한을 해원하는 길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 시대의 전체의 책임, 인류의 책임은 나로부터 책임져 하나님을 대하여 친히 아버지라 할 수 있고, 하늘 가정으로서 예수님과 영계의 많은 무리에게 존중시되는 아들딸이 되어야 하겠습니다. 이런 아들딸로서 남은 길을 대하여 늠름히 호령하며 나갈 수 있는 모습을 하나님도 찾고 계셨고, 우리도 그것을 소망의 기틀로서 고대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것을 여러분이 똑똑히 알아야 되겠습니다.

19-260
기 도
아버지! 슬프고 슬프고 또 슬펐던 아버님, 억울하고 억울하고 또 억울했던 아버님의 심정을 알지 못했던 배은망덕한 저희들의 죄상을 용납하여 주시옵소서.

찾고 싶었던 철든 아들딸들이 이 땅 위에 찾아지지 않은 사연을 통하여 아버님의 원통함을 아는 저희들이 되어야 할 것이어늘, 아버님, 이 민족을 찾아 복귀해야 했던 불쌍한 아버님이었음을 저희들이 알아야 하거늘, 오히려 환희에 처하여 있던 저희들이었음을 용납하여 주시옵소서. 간절히 바라옵고 원하옵니다.

예수님은 그 모친과 동생들이 그를 찾아왔을 때 ‘나의 모친과 나의 형제가 누구냐, 내 아버지의 뜻대로 하는 자가 내 형제요, 내 자매요, 내 모친이니라’고 하셨습니다. 그러하오니 저희들을 아버지의 뜻대로 하는 자녀들이 되게 하옵시고, 본향이 그리워 찾아가는 당신의 참된 아들딸들이 되게 하여 주시옵기를, 아버님, 간절히 빌고 원하옵니다. 본연의 부모를 그리워하고, 본연의 형제를 그리워하며 모든 것을 갈구하는 자들이 되게 허락하여 주옵기를 간절히 바라옵고 원하옵니다.

아버님, 저희에게 아니 갈래야 아니갈 수 없고, 아니 할래야 아니 할 수 없는 하나의 천적인 지혜를 허락하여 주옵고, 이 땅에 맺힌 한이 해원되고, 새 천지가 벌어지게 허락하여 주옵소서.

이 자리에 참석하지 못한 당신의 아들딸들이 많이 있으리라 생각하오니, 그들이 생의 지침으로 좋은 조건을 세워 일생의 주권을 세울 수 있는 선한 양이 되게 허락하여 주옵기를, 아버님, 간절히 부탁하고 원하옵니다. 이 모든 것을 주관하여 주셨음에 감사드리오며, 주의 이름으로 아뢰였사옵나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