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83 to 19-122: 하나님의 소원과 우리의 소원

하나님의 소원과 우리의 소원
1967.12.31 (일), 한국 전본부교회

19-83
하나님의 소원과 우리의 소원
마태복음 26:36-46

[기 도]

사랑의 아버님, 아버님께서는 창세 전에 품으셨던 이상으로 에덴을 창조하셨으나, 아버님의 본연의 상대가 되어야 할 인간 시조가 타락함으로 말미암아 이 땅의 모든 존재들은 그곳에서 살지 못하였고, 또 이 세상은 그곳과 인연을 맺지도 못할 슬픈 세상이 된 것을 생각하게 됩니다. 이것은 아버님께도 슬픈 일이요, 모든 피조만물에게도 슬픈 일이옵니다. 이와 같은 슬픈 결과를 초래케 한 장본인이 다름 아닌 창조된 인류요, 인류의 조상인 아담 해와라는 것을 저희는 알게 되었사옵니다.

아버지의 직계자녀로 태어난 아들딸들은 선해야 했으나, 그들이 자기들에게 맡겨진 책임을 다하지 못함으로 말미암아 이 인류역사에 한많은 서러움을 남기게 되었던 것을 회고하면 회고할수록, 그동안 인간들의 노심초사도 컸었지만 인간들을 구원하기 위한 아버지의 수고가 얼마나 컸겠는가 하는 것을 저희들이 알게 되옵니다. 그 아버지의 수고를 저희들이 마음으로 더듬어 헤아리면서 저희가 아버님 앞에 얼마나 민망한 자신들이라는 것을 다시 한번 깊이 절감하게 하여 주시옵길, 아버님, 간절히 바라옵고 원하옵나이다.

아담을 잃어버린 그날부터, 당신께서는 당신이 믿을 수 있는 한 사람을 찾기에 얼마나 수고하셨습니까? 또한 아버지 대신 책임지고 싸워 줄 자를 얼마나 찾았사오며, 아버지의 전권을 상속받을 수 있는 한 사람을 얼마나 고대하며 찾아 나오셨습니까? 이것을 생각하게 되올 때, 이 땅 위에 그러한 한 사람이 없었던 것이 아버님의 서러움이요. 인류역사의 한이 었다는 것을 저희들은 다시 한번 절감하지 않을 수 없사옵니다. 아버님께서는 이렇듯 슬픈 역사의 고빗길을 6천년이란 기나긴 세월 동안 걸어 나오셨습니다. 슬플 때에는 슬픔을 참으시고 모든 것을 책임지신 입장에서 오늘날까지 조금도 쉬임없이 나오셨습니다. 인간들은 어두운 밤길에서 허덕이고 있지만 아버님께서는 그보다도 더한 어둠 속에서 인류 역사를 섭리해 나오시기 위해 노심초사하고 계신다는 것을 저희들이 다시 한번 상기하게 하여 주시옵고, 저희들이 아버님 앞에 면목없고 민망한 자신들이 되어 있음을 깨닫게 하여 주시옵기를 간절히 바라옵고 원하옵나이다. 또한 아버지께서 6천년 동안 역사의 뒤안길을 헤매며 찾아오셨던 그 걸음이 얼마나 서러우셨겠는가를 깨닫게 하여 주시옵소서.

수많은 민족과 국가 앞에 몰림을 당하시면서 이 나라 저 나라, 이 도시 저 도시를 헤매며 찾아오신 아버지의 수고의 발걸음이 오늘날 이 한국 강산에 멈추게 된 사실을 저희들이 알게 될 때, 저희들 아버지 앞에 진실로 면목 없음을 다시 한번 느끼게 되옵니다.

이 삼천리 반도와 삼천만 민족을 중심삼고 아버님의 섭리의 손길이 있었다는 사실을 이 민족은 알지 못했습니다. 이 땅에 왔다 간 저희의 선한 선조들도 알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때를 맞이하고 보니 아버지의 섭리의 손길이 이 민족을 중심으로 하여 움직여 나왔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사옵니다. 이런 것을 생각하올 때, 이 민족은 과거에서부터 현재까지 아버지 앞에 면목없음을 아뢰지 않을 수 없사옵니다. 더우기 아버지의 긍휼과 사랑의 손길을 감히 대하기조차 부족한 저희들을 아버지께서 그 사랑의 은사권내에 세워 주셨사오니, 저희들 진실된 마음으로 이 민족과 이 강산과 만민을 대표한 입장에서 아버님께 겸손히 경배드리는 당신의 자녀들이 되게 허락하여 주시옵기를 간절히 바라옵고 원하옵나이다.

오늘은 1967년의 마지막 날이옵니다, 역사과정에 있어서 아버지께서 소망하셨던 한 시대가 지나가고 새로운 역사의 한 날을 맞이할 수 있는 기로에 서 있사오니, 오늘 여기에 동참한 당신의 아들딸들을 기억하여 주시옵소서.

각자의 마음 마음을 주관하여 주시옵고, 그 마음 가운데 과거에 부족했던 내용이 있거들랑 이 자리에서 종결짓게 하여 주시옵소서. 그리하여 새로운 뜻 앞에 있어서 승리의 실체를 갖추는 데 노력하지 못했던 과거를 반성하면서, 새로이 약속의 세계를 향한 새해를 맞이할 수 있는 아버지의 아들딸이 되게 허락하여 주시옵길 간절히 바라옵고 원하옵니다.

부족한 사람은 아버지 앞에 설 수 없다는 사실을 알고 있사옵니다. 그러나 아버지의 사랑의 은사로 말미암아 아버지 무릎 앞에 부복하였사오니 이 시간 저희들을 받아 주시옵소서. 간절히 바라옵고 원하옵나이다.

아버지께서 저희들을 알아주시지 않으면 저희보다 더 불쌍한 사람들이 또 어디에 있겠사옵니까? 이 세상에서 몰림을 받고 쫓김을 받는 가운데서도 참아 나왔습니다. 핍박받는 자리에서도 오직 아버지를 우러러보고 호소하며 나온 저희들이었사오니, 이 시간 저희들을 다시 한번 긍휼히 여겨 주시옵소서. 저희들은 남이 알지 못하는 7년노정을 설정하고 이 길에서 모진 투쟁을 해 나왔습니다. 아버지, 이 기간 중에는 핍박이 하도 심해 눈물지으며 이 길을 피해서 걸어간 사람도 있을 것이옵니다. 그리하여 아버지 앞에 민망함을 금치 못하는 그들의 심정적인 가책을 긍휼히 보아 주시옵소서. 마음이 떳떳하지 못해 아버지 앞에 얼굴을 들지 못하더라도, 오직 심정 하나만을 품고 아버지를 부르고 있는 그들을 기억하여 주시옵기를 간절히 바라옵고 원하옵나이다.

못나고 부족한 저희들이었사오나, 아버지께서 보호해 주신 연고로 저희들은 오늘 이 자리까지 나올 수 있었습니다. 그러하오니 아버지께서 약속하신 그 한 날까지 참고 나갈 수 있게 인도하여 주시옵고, 지금까지 이 뜻을 위해 수고해 온 당신의 자녀들 앞에 마음 모아 감사하는 이 시간이 되게 허락하여 주시옵길 간절히 바라옵고 원하옵나이다.

오늘 저희들의 모든 일체를 아버지께서 친히 주관하여 주시옵고, 새해에는 새로운 약속의 세계를 향해서 다시 출발할 것을 다짐하고 결의하는 이 시간이 되게 허락하여 주시옵기를 간절히 바라옵고 원하옵나이다.

아버님 ! 저희들의 21년노정도 긴 세월이온데, 하물며 6천년이라는 슬프고 긴 아버님의 역사노정을 생각하게 될 때, 아버님보다 더 불쌍한 분이 없었사옵고, 아버님보다 더 외로운 분이 없었다는 사실을 다시 한번 느끼게 되옵니다.

아버지 앞에 충성을 약속했으나 그 충성을 다하지 못하고, 효성을 약속 했으나 그것을 다하지 못했던 저희의 과거를 후회하며 아버지 앞에 사죄 드리오니, 금후에 있어서는 아버지 앞에 충성과 효성을 다짐한 바 대로 다 실천하는 당신의 아들딸들이 되게 허락하여 주시옵기를 간절히 바라옵고 원하옵나이다.

아버지, 이날을 기억하고 축하하면서 아버지 앞에 마음과 뜻을 다하여 기도하는 당신의 아들딸들이 전국에 있사오니, 그들을 마음 깊이 품어 주시옵소서. 당신의 사랑의 심정으로 품어 주시옵기를 간절히 바라옵니다.

이 시간 당신의 아들딸들이 여기에 모였사오니 이들을 권고하여 주시옵소서. 모이지 못한 아들딸들 위에도 아버지의 말씀으로 친히 권고하여 주시옵기를 간절히 바라옵니다. 작은 것 하나라도 아버지의 뜻 앞에 합당치 아니한 것이 없도록 전체가 아버지의 뜻과 일체가 되게 하여 주시옵고, 오직 뜻에서 시작하여 뜻에서 그 결과를 맺어 아버지의 영광만을 드러낼수 있게 하여 주시옵소서.

그리하여 이 땅 위에서 아버지께서 뜻하신 영광이 드러나 길이 길이 저희와 함께하게 하여 주시옵길 간절히 부탁드리면서, 이 모든 말씀을 참부모님의 성호 받들어 간절히 아뢰었사옵나이다. 아멘.

19-86
말 씀
여러분도 알다시피 오늘은 1967년 마지막 날이자 마지막 주일입니다. 더우기 이날은 통일교회에 있어서 7년노정이라는 길고도 지루했던 기간을 넘기는 마지막 날입니다. 또 선생님에게 있어서는 뜻을 따라 나온지 만 21년을 종결짓는 마지막 날이기도 합니다.

19-86
하나님의 창조이상과 인간의 타락
1967년의 이 마지막 날 자체는 우리 통일교회가 소원하던 승리의 날로서 맞아질 수 있고 기쁨과 찬양으로 맞아질 수 있기를 고대했을 것입니다. 또 우리 자신들도 마음을 터놓고 하나님 앞에 찬양을 드리고 승리자의 영광스러운 모습으로서 이날을 맞이할 수 있기를 고대했을 것입니다. 이날은 이렇듯 중대한 날입니다.

또 하나님의 섭리적인 뜻으로 보더라도 이날은 섭리도상에서 없어서는 안 될 중요한 날로 되어 있는 것입니다.

역사가 시작된 이래 지금까지의 수많은 날들은 기쁨의 날들이 아니라 슬픔으로 연결된 날들이었다는 사실을 우리는 알고 있습니다. 그렇지만 오늘과 같이 7년 고비를 넘는 한 날이 있기 때문에 이후의 역사적인 날들은 새로운 내용으로 전환되어 갈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오늘, 여러분과 같이 생각하고자 하는 것은 예수님의 소원과 우리의 소원, 좀더 범위를 넓힌다면 하나님의 소원, 이것을 통틀어 모든 존재물의 소원입니다. 그것에 대해서 생각해 보겠습니다.

창조주께서 우리의 시조인 아담 해와를 창조하고 그들을 중심삼고 사랑의 가정을 이루려 했던 것이 창조이상이었으나, 아담 해와가 타락함으로 말미암아 참된 가정의 출발을 보지 못했기 때문에 참된 부모가 이 땅에 나타나지 않았고, 참된 부모가 나타나지 않았기 때문에 참된 자녀와 참된 형제가 태어날 수 없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참된 종족도 있을 수 없고 참된 나라와 참된 세계도 있을 수 없는 결과가 되었던 것입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본래의 창조목적이 아니었던 것입니다.

하나님의 본래의 창조목적은 선한 부모를 중심삼아 선한 가정을 세우고, 그 가정을 중심삼고 선한 형제들을 세우고, 또 그들을 연결하여 선한 종족을 편성하고, 또 그들로 하여금 선한 민족을 창건케 하여 새로운 세계를 이루는 것이었습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창조목적이었으나 인간의 타락 이라는 서글픈 결과가 야기됨으로 말미암아 이 창조의 위업은 그 목적했던 기준에 미치지 못하고, 또 본래 하나님께서 바라셨던 천지 앞에 참된 남자, 참된 여자의 가치도 나타날 수 없게 되어 버렸습니다. 가정을 이룰 수 있는 참된 남자와 참된 여자의 한 모습, 이 천지간에 하나님이 세워서 자랑할 수 있는 한 모습을 아직까지 보지 못했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한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면 타락한 인간에 대해서 하나님은 어떻게 구원섭리를 해 나갈 것이냐? 지금 이 세계에는 신앙생활을 하는 수많은 민족과 국가가 있지만 그 가운데에 하나님이 찾고자 하시는 창조본연의 세계의 참다운 남자의 모습과 참다운 여자의 모습을 갖춘 사람이 한 사람이라도 있느냐 하면 없다는 것입니다. 에덴 동산에서 아담 해와를 잃어버린 후에 참된 남자와 참된 여자를 아직까지 만나지 못했다는 것입니다.

제아무리 훌륭한 인간이고, 제아무리 선한 인간이라 하더라도 타락한 조상의 피를 이어받아 태어났고 타락으로 인한 근원적인 슬픔에서 출발했기 때문에, 그 슬픔의 기준을 넘어설 수 없고 타락의 한(恨)을 넘어설 수 없는 것입니다. 즉 인간은 사탄의 참소권내를 벗어날 수가 없게 된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사탄주관권내에 머물러 있는 인생이 되고 말았다는 것입니다.

19-88
하나님의 구원섭리의 최고의 목적
오늘날 제아무리 독실한 신앙인이라 하더라도 언제든지 사탄은 그를 참소할 수 있고, 어떤 조건에 걸리기만 하면 ‘너는 내 것이다’하며 빼앗아 갈 수 있는 입장에 서 있는 것입니다. 아직까지 전인류가 이러한 자리에 놓여 있다는 것입니다. 이렇게 볼 때 하나님은 당신이 그렇게 고대하시고 원하셨던 참된 남자 한 사람을 아직까지 찾아 세우지 못하셨고, 또한 한사람의 참된 여성을 아직까지 찾아 세우지 못하셨다는 것을 우리는 알아야 되겠습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은 6천년 역사(歷史)를 무엇을 위해서 역사(役事)하신 것이냐? 물론 외적으로는 개인과 민족과 종족을 구하기 위하여 섭리역사를 전개해 오셨습니다. 그러나 외적으로 전개하여 나온 것은 하나님과 직접적인 관계가 있는 것이 아닙니다. 간접적인 관계에 있는 개인이요, 종족이요, 민족이요, 국가와 세계인 것이지, 하나님과 직접적인 관계에 있는 개인과 가정 종족 민족 국가 세계가 아니라는 것을 확실히 알아야 합니다.

그러면 하나님과 직접적인 관계를 맺을 수 있는 참다운 개인, 참다운 가정, 참다운 종족은 어디에 있습니까? 그것은 반드시 이 땅에서 이루어져야 하고 또 이 땅에서 찾아야 할 것입니다. 그것이 하나님의 소원인데도 불구하고 이 땅 위에는 아직까지 참다운 개인, 참다운 남자, 참다운 여자가 나타나지 않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한 참다운 개인이 나타나지 않고는 참다운 세계 인류 조상과 뿌리가 이 땅에 내려질 수 없다는 것입니다.

야곱 족속을 중심삼은 이스라엘 민족이 제아무리 성별된 민족이라고 자처한다 하더라도, 그 민족은 하나님의 직계 민족이 아닌 양자밖에 되지 못하는 민족인 것입니다.

아담의 아들 가인과 아벨은 둘 다 똑같은 아들인데도, 하나는 아들로 취급하고 다른 하나는 아들 취급을 안했던 것과 마찬가지로 오늘날도 이러한 일이 벌어지고 있습니다. 오늘날 세계에 있는 종교인들, 특히 기독교인들을 바라볼 때 이들은 양자의 자리를 넘어서지 못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도대체 양자란 어떠한 존재냐? 양자는 혈통이 다른 존재입니다. 기독교인들이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부를 수 있을지는 모르지만 이것은 양자의 입장에서 부르는 아버지인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도 눈치를 봐야 되고 그 양자도 눈치를 봐야 하는 입장이라는 것입니다. 양자는 내정적(內情的)으로 끓어올라 뼛골에서부터 우러나오는 심정을 가지고 하나님과 통할 수 있는 입장이 아니라, 어떤 외적인 사연으로 통할 수 있는 입장인 것입니다. 그러한 입장은 아버지와 친아들과의 관계와 같이 심정이 통할 수 있는 입장이 아닙니다.

그렇기 때문에 지금까지 제아무리 예수를 잘 믿어 구원을 받았다 하며 저나라에 간 사람이라 하더라도 천국에는 들어가지 못하고 낙원으로 들어 갔을 뿐입니다. 낙원이라는 곳은 양자들이 가는 곳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양자된 족속들을 직계의 족속으로 전환해야 하는데 어떻게 세우느냐? 하나님의 본래 목적은 인간을 양자의 모습으로 세우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러나 인간이 타락함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은 인간을 양자의 모습으로 접하게 되어, 하나님은 그 양자의 혈통을 끊어 버리고 다시금 직계 자식의 모습을 접하고자 하신 것입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구원섭리의 목적입니다. 그런데 이 문제가 복잡하다는 것입니다. 그렇지 않다면 하나님의 구원섭리 기간이 6천년이나 걸릴 필요가 없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지금까지 구원섭리하시는 목적은 직계로 세울 수 있는 참된 아들 하나를 만드는 것입니다. 양자가 아닌 참된 직계 아들 하나를 이 땅위에 찾아 세우는 것이 하나님의 구원섭리의 최고의 목적인 것입니다. 그 아들은 야곱도 아니요, 아브라함도, 모세도, 세례 요한도 아니었습니다. 그러면 누가 그 아들 자리에 서게 되었던고? 4천년 섭리역사에 있어서 종말적인 결실체로 나타났던 분이 누구였느냐 하면, 바로 하나님의 첫 직계 아들로서 태어난 예수님이었습니다.

19-90
메시아가 되기 위한 선행 조건
그러면 예수님이 만민의 메시아, 구주가 되기 전에 무엇을 해야 되느냐, 예수님은 하나님의 직계 아들이 되는 수속을 밟아야 되는 것입니다. 아담 해와가 하나님의 아들딸로서 먼저 지음받고 태어났지만 그 자격을 사탄에게 빼앗김으로 인해 완전히 하나님편에 설 수 있는 아들딸로서 입적을 하지 못했습니다. 다시 말해서, 그것은 태어나지를 못해서도 아니요, 하나님의 심정을 예수님만큼 이어받지 못해서도 아닙니다. 그들이 타락했기 때문입니다. 즉, 그 몸에 상처가 나고 금이 가고 조각이 났기 때문에 입적을 못한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만민의 매시아가 되기 위한 선행조건이 무엇이냐 하면, 하나님의 아들로 입적을 해야 된다는 것입니다. 아들로 입적하기 위해서는 먼저 상처난 부분을 전부 치료해야 됩니다. 그런 입장에서 예수님은 수많은 개인과 가정과 종족과 국가가 죄악에 물들어 있고, 사탄의 참소 조건에 걸려 있는 것을 해결해야 했고, 사탄에게 희생되고 악의 제물로 사라지면서 남긴 한과, 전세계 인류에게 씌워진, 사탄에게 굴복한 굴레를 완전히 벗겨 버려야 합니다. 그러지 않고는 하나님의 아들이 되는 수속을 밟을 수 없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엄청난 사명이 예수님에게 있었다는 것을 오늘날의 기독교 신도들은 모르고 있습니다. 그저 믿기만 하면 천당 가는 줄 알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얼마나 간단한 일입니까?

예수님이 내심으로 고대하는 것이 있었다면 그것은 무엇이었겠습니까? 하나님 앞에서 승리의 왕자로 하나님의 전권을 지상에서 상속받을 수 있는 자리로 나가는 것인데, 그러기 위해서는 하나님의 사랑귄내에 있는 가정의 자리, 민족의 자리, 국가의 자리, 세계의 자리에서 하나님이 인정하는 족보를 꾸밀 수 있어야 했습니다.

그것은 간단히 되는 것이 아닙니다. 그러면 어떻게 하여야 되느냐? 아담 해와가 타락하였던 모든 것과, 그 타락한 후손들이 역사과정에서 하나님 앞에 한을 남겼던 그 모든 것들을 완전히 탕감할 수 있어야만 새로운 이스라엘을 창건하는 조상의 자리에 설 수 있으며, 비로소 하나님의 사랑을 중심삼고 새로이 분발하는 참된 부모의 자리에 등장할 수 있는 것입니다.

인간은 그 부모의 자리에 섬으로써 비로소 천적인 상속을 받을 수 있는 것입니다. 그것이 예수님의 어린양 잔치입니다. 다시 말하면 오늘날 통일 교회에서 말하는 축복의 자리를 거쳐야 된다는 것입니다. 즉, 하나님으로부터 축복을 받아야 된다는 것입니다. 아담 해와 즉 하나님의 일남 일녀가 타락했기 때문에 더럽혀진 사랑과 피를 하나님의 사랑을 중심삼고 깨끗하게 청산지어 놓고, 지금까지의 역사 과정에서 참소하고 제물의 조건을 제시하던 사탄을 당당히 막아내야 합니다. 그리하여 오직 하나님만이 간섭하는 영광된 세계에 들어갈 수 있는 완전한 일남 일녀의 자리를 결정하여야 합니다. 이렇게 축복받는 자리를 거치지 않고는 천국을 향한 복귀노정을 출발할 수 없는 것입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소원이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예수님은 이 소원을 이루어 드리기 위하여 4천년 역사노정에서 나타났던 개인 가정 종족 민족 국가 세계를 걸고, 참소조건으로 제시되었던 모든 것을 걸고 사탄과의 싸움의 고빗길에서 승리함으로써, 그 승리자의 권위를 가지고 4천년 역사를 넘어섰어야 했다는 것입니다. 4천년 역사를 넘어선다는 그 말은 예수님이 이스라엘 민족을 수중에 넣고 통치해야 된다는 말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그렇게 하지 못했습니다. 그러면 예수님은 왜 그렇게 하지 못하였겠습니까?

이스라엘 민족을 택하기 전에 무엇을 택해야 되느냐고 요즘 기독교인들에게 묻는다면 그것은 사도들이다. 혹은 가룟 유다다 할 것입니다. 그러나 그들이 아닙니다. 예수님은 이스라엘 민족을 택하기 전에 요셉 가정을 택해야 하는 것입니다.

본래 하나님이 예수님을 보내실 때는 종족적인 기반 위에 보내신 것입니다. 즉 다윗의 후손, 다윗의 족속, 다윗의 종족으로서 찾아 세웠기 때문에 요셉은 다윗의 후손을 위하여 예수님에게 절대 복종해야 했습니다. 예수님은 이렇게 종족적인 기반 위에 승리한 입장에 서서 하나님 앞에 민족을 찾아 세워야 할 사명을 가지고 있었는데, 그만 그 종족적인 기반이 다 무너져 갔던 것입니다. 더우기 예수님의 이종 사촌 형인 세례 요한까지도 마찬가지였습니다. 같은 친척, 같은 종족 권내에 태어났으면서도 자기 멋대로 행동하다가 결국은 예수님을 저버렸던 것입니다. 이렇듯 요셉 가정의 실수로 말미암아 4천년을 준비해 왔던 다윗의 종족의 터전은 다 사라져 버린 것입니다. 그 종족은 예수님과는 하등의 관계가 없는 자리에 섰던 것입니다.

그래서 할 수 없이 종족의 터전을 대신해서 어부 베드로를 찾아 세운 것입니다. 이렇게 비록 어부라도 찾아 세워야만 했던 예수님의 처량한 심정을 여러분은 알아야 됩니다. 이런 사정을 모르고 ‘오,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 라고 찬양만 하면 뭣합니까?

19-92
예수님의 갈망
예수님은 이 땅 위의 만민을 구하기 위하여 하나님의 아들로 왔지만, 만민 앞에 당당히 나설 수 있는 천적인 수속 절차를 해결하지 못했기 때문에 그들에게 몰림을 당하게 되었던 것입니다. 그리하여 결국은 십자가를 지지 않으면 안될 입장이 되어 겟세마네 동산에서 기도하신 것입니다.

‘내 아버지여 만일 할만하시거든 이 잔을 내게서 지나가게 하옵소서, 그러나 나의 원대로 마옵시고 아버지의 원대로 하옵소서(마 26 :39)”라고 기도 하셨던 것입니다.

그렇지만 예수님은 이렇게 메시아로서의 입장을 완료해야만 했던 것입니다.

예수님이 이 땅에 오신 것은 만민을 대속하기 위하여 만민의 대표로 오셨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 대표의 자리에서 사탄을 완전굴복시킬 수 있는 권한을 가지고 만민을 대신하여 하나님 앞에 당당히 나서게 될 때 사탄이 참소할 수 있는 아무런 조건이 없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 앞에 사탄이 참소할 수 있는 조건이 없었던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렇기때문에 예수님은 다시 그런 천적인 수속을 밟았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러니 그러한 위치에서 가야 하는 예수님의 심정이 얼마나 심각하고 처량했겠습니까 ?

4천년 이스라엘 역사과정에서 하나님이 하신 수고와 역대 이스라엘 민족이 했던 수고도 컸지만, 그보다도 그것을 총합하여 새로운 이스라엘을 창건하고 새로운 천지, 새로운 천국을 건설해야 하는 주인공으로 오신 예수님이 새로운 출발은커녕 십자가의 길에 쓰러져야 했던 이 억울한 사실을 우리는 알아야 합니다.

하늘 앞에 특별히 선 종족, 즉 다윗 종족은 아벨적인 입장이요 이스라엘 민족은 가인적인 입장입니다. 그러므로 섭리적으로 볼 때, 이 아벨적인 다윗 종족 앞에 가인적인 이스라엘 민족이 예수를 중심삼고 이 땅에서 완전히 하나됨으로써 비로소 예수님 앞에 승리적인 기반의 민족적 기대를 세우게 되는 것입니다.

민족을 대신한 다윗 족속 일파와 예수님이 일체가 되었더라면 예수님을 중심삼고 실체기대를 이루게 된다는 것입니다. 이 실체기대가 이루어지지 않고는 메시아를 위한 기대가 조성되지 않습니다. 원리가 그렇게 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제사장, 교법사들, 유대교단 전체가 예수님에 대해서 반기를 들고 나섰기 때문에 가인적인 이스라엘 형(型)은 근본적으로 깨어지게 된 것입니다. 그래서 사탄권으로 들어가게 되어 사탄은 아벨의 입장인 종족에 대해서 직접 공격하는 것입니다.

이처럼 종족적인 터전을 잃어버린 예수는 민족의 핍박을 피할래야 피할 수 없는 운명에 놓여져 이리 몰리고 저리 몰려 결국 십자가에까지 나아가게 된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이것을 어떻게든 모면해 보려고 열 두제자들을 붙들고 애걸복걸하였고 겟세마네 동산에서까지 기도하셨던 것입니다. 그러나 열두 제자 모두를 믿을 수 없게 되었기 때문에 그 중 이 땅에서 최후까지 믿을 수 있는 세 사람만을 택해 겟세마네 동산에 데리고 가 하늘이 깨지느냐 땅이 깨지느냐 하는 최후의 담판기도를 하셨던 것입니다. 그런데 그렇듯 중대한 문제를 걸어 놓고 담판짓는 그 시간에도 그 제자들은 잠을 자고 있었던 것입니다. 잠을 자고 있었다는 거예요.

제자들은 예수님이 어떠한 자리에서 고통을 받고 계신지를 알지 못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러니 예수님은 자신과 일치될 수 있는 입장에 있는 사람을 얼마나 갈망했겠습니까?

19-94
이스라엘 민족의 죄와 그 용서
에수님은 홀로 하나님 앞에 나아가 하나님과 일치될 수 있는 입장에 있었지만, 제자들은 그처럼 사탄과 일치될 수 있는 그 자리에 있었던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인간 세상의 비극인 것입니다. 예수님은 누구입니까? 예수님은 인류의 참아버지로 오신 분입니다. 오늘날 이 땅 위에 거짓부모가 생겨났고, 그 거짓부모가 하나님의 원수가 되었기에 이것을 전부다 다시 찾아야 됩니다. 그래서 새로운 부모, 참부모가 나타나야 되는 것입니다. 즉, 타락하지 않은 아담 해와가 이 세상에 다시 와야 그 아담 해와로 하여금 이 땅의 인류들을 다시 낳았다는 조건을 세울 수 있는 것입니다. 그렇게 하지 않고는 양자의 인연도 갖지 못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기독교에서는 타락한 인간은 거듭나지 않으면, 즉 중생하지 않으면 천국에 가지 못한다고 하는 것입니다.

중생이란 두번 태어난다는 말입니다. 잘못 나왔기 때문에 다시 태어나야 된다는 말입니다. 이 엄청나고 슬프고 딱한 사실이 부활해야 할 우리 인생행로에 남아 있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이 땅에 만민의 구주인 동시에 만민의 아버지로 오셨습니다.

하나님은 사랑의 하나님입니다. 사랑의 하나님이 타락한 인류를 구해 주려면 무엇으로 구해 주겠습니까? 하나님이 구주를 보낼 때 종으로 보내 주면, 우리 인간을 종으로 밖에는 대접해 주지 않는 하나님이라는 것입니다. 그렇게 되면 우리 인간들도 종의 신분에서 종의 책임만큼만 하나님을 믿게 될 수밖에 없을 것입니다. 또 형제의 입장으로 우리 앞에 구세주를 보내 주신다고 해도 그것은 하나님의 완전한 사랑이 될 수 없습니다. 그러면, 형제의 입장보다 더 높은 입장은 어떤 것이냐? 그것은 아버지의 자격을 갖추고 이 땅에서 아들을 찾겠다는 입장이 최고의 기준인 것입니다. 그러하기에 예수님은 구세주의 이름으로 이 땅에 오셨지만, 그 내용은 인류의 참다운 아버지의 인연을 갖고 참다운 자식을 찾으러 오신 것입니다.

그런데 자식들이 아버지를 때려 죽였습니다. 지금까지의 역사에서 가인이 아벨을 죽인 것도 한스러운 일인데, 아들이 아버지를 때려 죽이는 죄까지 저질렀던 것입니다, 그래서 오늘날 수많은 인류는 아무리 선한 사람이라 하더라도 하늘 공법의 공판을 받지 않을 수 없는 것입니다.

사탄을 막론하고 너나할것없이 타락한 족속들을 섭리적인 책임을 짊어지고 구원해 주기 위해 오신 메시아, 즉 우리들을 당신의 참아들딸로 세워서 완전한 천국으로 데려가기 위하여 오신 구세주를 반갑게 모시고 대접은 못해 드릴망정 때려 죽였으니…….

그러한 혈통적인 인연을 갖고 있는 것이 바로 이 땅 위의 인간들인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아무리 목석같은 사람이라도 아버지를 죽인 사실을 알고 회개할 때는 통곡하지 않을 수 없는 것입니다. 그것은 통탄할 일이고 하나님에게는 용납될 수 없는 조건이지만, 아버지를 때려 죽인 것을 알고 그것을 진정으로 통회하고 그 죄값을 천만번 감사히 받기를 원하는 아들딸이라면, 하나님은 사랑의 하나님이시기 때문에 용서해 주신다는 것입니다.

19-95
재림주의 사명
그렇기 때문에 기독교는 눈물의 종교가 아닐 수 없습니다. 여러분들은 이것을 확실히 알아야 합니다. 그런데도 ‘믿기만 하면 천국 간다’고 하니 그런 사람들은 모두 가짜입니다. 그들을 보면 처량하기 짝이 없는 것입니다. 그러면, 예수님이 죽음을 피하려면 어떻게 하여야 됐겠습니까? 하나님이 4천년만에 이스라엘 선민을 터전으로 해서 예수님을 보내신 것은 예수님으로 하여금 이스라엘 민족을 수습하게 하여 천국이념, 즉 지상천국 이념을 실현시키는 것이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이스라엘 교법사를 비롯한 이스라엘의 왕 이스라엘 민족 전체가 예수님 앞에 나아가 하나님이 원하는 소원을 이루어 그것을 당신 앞에 바친다고 통고해야 되는 것입니다.

이렇게 하여 예수님과 종족이 하나되고, 그 종족과 민족이 하나되고 그 민족 전체가 하나되어 국가를 이루었다면 여기에는 사탄이 참소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양자의 입장에서 하나님 앞에 불충 불순종하였다면 참소의 조건에 걸리지만, 하나님의 직계 아들인 예수님을 중심삼고 완전히 하나되었으면 예수님과 접붙인 자리에 서게 되는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혈통을 중심삼고 하나된 예수님과 이스라엘 민족 전체가 하나되면 사탄이 참소할 수 없게 되는 것입니다. 이렇듯 예수는 이 땅 위의 메시아가 되기 위한 수속을 필하여 이스라엘을 하나님의 뜻 앞에 복귀 시키고, 더 나아가 세계복귀를 완수해야 하는 사명을 가지고 오셨던 것입니다. 그러나 모든 이스라엘 민족의 반대와 핍박 때문에 예수님도 더 이상 어떻게 할 도리가 없었던 것입니다.

제 1이스라엘은 할례로 말미암아 만들어졌고 제 2이스라엘은 영적 이스라엘인 기독교로 만들어졌습니다. 그래서 기독교는 나라 없는 종교가 되어 버렸습니다. 이스라엘 민족도 처음부터 나라 없는 민족은 아니었지만 예수님을 죽인 죄로 말미암아 땅 위의 기반을 완전히 잃어버린 것입니다. 그런데 기독교가 그렇게 세계를 전전하며 수많은 민족 앞에 핍박을 당하고 희생을 당해 오면서도 세계적인 환난을 극복하는 데 많은 공헌을 했습니다.

예수님은 이 땅 위에 나라를 가진 하나의 아들딸, 하나의 종족을 찾아 세우기 위한 사명을 가지고 나왔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이 이 땅에서 버림받음으로 말미암아 실체적인 기반을 세우지 못하고 영적인 기반밖에는 세울 수가 없었던 것입니다. 그리하여 영적 세계를 기반으로 하여 제 2이스라엘을 창건하기 위하여 출발한 것이 신약복음인 것입니다.

본래 인간은 영육을 통하여서만이 완전한 인간이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이 영적 부모의 자리에만 계시면 영적 구원밖에 할 수 없는, 반쪽의 구원밖에 할 수 없는 입장이 됩니다. 그렇기 때문에 나머지 반쪽의 구원, 즉 육적 구원을 해주기 위해서 재림주님이 이 땅에 오셔야 하는 것입니다. 그리하여 그 재림주님이 예수님을 믿다가 간 영인들과 전세계에 널려 있는 기독교인들을 하나로 통일시켜 하나님 앞에 바침으로써 제 3이스라엘의 출발을 볼 수 있는 것입니다. 영적인 제 2이스라엘 민족이 되기 위해서는 세례를 통해야 했지만, 앞으로 오시는 주님을 중심삼고 제 3이스라엘이 되기 위해서는 축복의 문을 통하지 않으면 안 된다는 것입니다. 아담 해와의 잘못된 사랑으로 말미암아 타락했기 때문에 이것을 탕감복귀 하기 위해서는 하나님의 사랑을 중심삼고 축복의 관문을 통하여 신랑 신부의 인연을 맺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러지 않으면 천국에 못 가는 것입니다 예수님도 이 같은 책임을 다하지 못했습니다. 이 일을 구세주가 다시 나타나 행하지 않고는, 땅 위의 모든 것들의 뿌리를 통하지 않고는 이 땅 위의 엉클어진 것을 수습할 도리가 없습니다. 그러니 그에 대한 책임을 다해야 된다는 것입니다.

19-97
사람은 이중목적의 존재
예수님은 개인적인 책임을 완수하는 것만이 아니라, 모든 개인의 승리를 대신할 수 있는 탕감조건을 세워야 하고, 가정 종족 민족 국가 세계 천주를 대신할 수 있는 탕감조건 전체를 세우기 위해서 뛰어야 했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자리는 개인 가정 종족 민족 국가 세계 천주의 핵심 중의 핵심의 자리이고 우주의 주목을 받는 자리입니다. 그러기에 역사적인 모든 조건을 끌어다 놓고 사탄을 판가리 해야 했던 것입니다. 이것이 예수님의 생애 33년 중 마지막 3년의 공생애에서 판가리하려던 최후의 싸움이었지만 예수님이 몰리고 쫓겨 죽음으로 말미암아 실패한 것입니다.

예수님은 개인적인 승리를 다짐하는 자리와 가정적인 승리, 종족적인 승리, 민족적인 승리를 다짐하는 자리에 서야 되는 것입니다. 여러분들은 이것을 알아야 됩니다. 오늘날 통일교인들을 보면 원리를 입으로는 잘 말하지만 탕감조건을 세우는 내적 생활을 못하고 있습니다. 개성완성, 즉 개인이 가정의 기반 위에 안식하려면 개인의 탕감조건만으로는 안 되는 것입니다. 가정의 탕감조건까지 세워 놓아야만 사탄이 그 가정을 침범하지 못하기 때문에 개인이 안식할 수 있는 것입니다. 곧 이중목적을 달성하여야 된다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사람은 개인으로 있으면 개인 뿐만 아니라 가정을 요구하게 되고, 가정이 있으면 종족을, 종족은 사회를, 사회는 국가를 요구하는 이중목적을 갖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내 개체 완성만을 위한 승리의 터전만을 닦아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개체가 서기 위해서는 가정이라는 울타리를 중심삼고 승리하여서 사탄이 참소할 수 없는 자리를 닦아야 합니다. 그 자리에 들어가야 안식할 수 있는 것입니다. 또한 가정이 보호받으려면 종족적인 십자가를 짊어지고 종족적인 탕감조건을 제시하여 사탄에게 승리하여야 그 기반 위에 가정이 들어갈 수 있는 것입니다. 이것도 마찬가지로 이중목적 때문입니다.

그러면 종족이 들어가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되었겠습니까? 종족이 들어가려면 민족적 탕감조건을 제시해야 했습니다. 이스라엘 종족이 예수님과 하나되어 민족적인 탕감조건을 세우지 않고는 그 종족이 안식할 수 없었던 것입니다. 이러한 싸움을 준비하는 과정에서 예수님은 몰림을 받아 십자가에 돌아가신 것입니다. 그래서 결국 개인적인 기준, 가정적인 기준, 종족적인 기준, 민족적인 기준, 국가적인 기준이 이 지상에서는 하나도 이루어지지 못한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예수님은 이 땅에 다시 오셔야 된다는 것입니다.

다시 오시는 예수님은 기독교인들이 말하는 것처럼 구름을 타고 와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사람으로 와야 됩니다. 아직까지도 다시 오시는 예수님이 구름을 타고 오신다고 믿고 있는 사람들은 우리 통일교인이 이해시켜 줘야 합니다.

인간세계에는 참이 거짓 같고 거짓이 참 같은 일이 많지만 진리는 이치에 적합치 않으면 진리가 아닌 것입니다.

참된 양심으로 치료하려면 참된 양심보다 더 참된 내용이 있어야만 됩니다. 오늘날 통일교회가 이단 취급을 받고 있지만 두고 보십시오. 전세계 기독교인들 두고 보자는 것입니다. 참과 거짓 중 어느 것이 남고 패하는가. 자고로 참은 거짓 앞에 핍박을 받고, 몰리고 쫓김을 받아 왔습니다. 그러니 역사의 종식시대(終熄時代)에 있어서 참이 세계적으로 억울함을 당하는 것은 일리가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참을 그런 자리에 놔 뒀다가 나중에 세우십니다. 이것은 사실입니다. 거짓은 어디까지나 거짓입니다.

그런데 구름 타고 와요, 예수님이 구름 타고 와서 뭘 한단 말입니까?

예수님은 인류의 참된 조상으로 오셨지만 타락한 인류를 구하지는 못하였습니다. 하나님이 공인할 수 있는 천지의 공법을 거쳐 천지창조의 이념을 그 위업으로 받아서 하나님의 사랑을 만천지에 연결시키고, 만민에게 하나님에 대한 사랑을 불러일으켜 하나님을 영광스럽게 할 수 있는, 하나님의 법도와 사랑을 중심삼은 가정의 출발을 이루지 못했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이러한 것을 이 땅 위에 이루어 놓아야 했던 것입니다.

인간은 에덴 동산에서 육신을 쓰고 타락했습니다. 그런데 기독교인들은 너무 망상적으로 이해하고 있습니다. 그래 가지고 천국에 가요? 천국에 갈 수 있어요? 지옥에도 못 갑니다. 다 죽어 보라구! 죽고 나면 압니다. 그땐 선생님이 필요할 거예요. 선생님이 뜻을 따라 나오는데 수십 성상을 이런 인간들에게 핍박받고 반대받은 것을 생각하면 분하고 원통하다는 것입니다. 그러지 않았더라면 대한민국이 이렇게까지 처참해지지 않았을 것이며, 공산당은 선생님 손아귀에서 다 망했을 텐데……. 무골충 같이 이래도 좋고 저래도 좋아서는 안 됩니다. 참과 거짓이 뭡니까? 이제는 참과 거짓을 비교해 보고 그 성능과 진가를 타진할 수 있는 때가 되었다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것이 악이라면 쳐부숴 버려야 합니다.

19-99
하나님을 해방시켜 드리자
예수님이 겟세마네 동산에서 ‘아바 아버지여, 할 수만 있으면 이 잔을 내게서……!’ 라고 기도하실 때도 그저 잠자면서 흐지부지하게 하신 것이 아니라 그야말로 심령이 곤두서는 애타는 심정으로 간절하게 기도하셨던 것입니다. 앞으로 억천만 생명을 구원해야 할 하나님의 사정을 알고 있는 예수님이었기 때문에 동정을 바라는 입장에서 심각한 기도를 하셨던 것입니다. 예수님에게는 이러한 사정이 있었던 것입니다. 기독교인들은 이런 예수님의 사정도 모르고 뭐, 예수의 신부가 되겠어요? 기가 막힙니다.

예수님 한 분이 살아 계셔야만 수많은 개인이 살아나는 것이고, 수많은 가정이 해방받는 것이고, 다윗 족속들과 유대 백성이 사는 것이고, 그 유대 백성으로 말미암아 만민이 살아나는 것입니다. 또한 세계가 살고, 하늘땅이 살고, 하나님이 해방을 받게 되는 것입니다. 선생님이 이런 말을 한다고 이단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해방받는다고 하니까 하나님이 지금까지 구속을 받고 있었느냐고 합니다만, 하나님은 지금까지 구속을 당하고 계셨던 것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부릅니다. 그 하나님 아버지가 땅 위에서 아들딸이 죽겠다고 아우성치는 처량한 역사가 수레바퀴 돌듯이 돌아가는 것을 보고, 선한 사람 악한 사람 누구나 할 것 없이 악의 세력 밑에서 춤을 추고 돌아가는 것을 보고 ‘아이구 좋구만, 잘하는구만’ 하시겠습니까?

우리와는 부자의 인연을 가진 그 아버지이시기에 천지천하의 내정적인 구속의 자리, 내정적으로 처량하고 비참한 환경을 없애기 위하여 애쓰며 싸우시지 않을 수 없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그러한 하나님의 내적인 모든 사연을 알고 하나님을 그런 자리로부터 해방시켜 드려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대한민국, 그 당시로 말하면 유대 나라만 해방되어서는 안 됩니다. 그 해방된 유대 나라를 중심삼아 세계를 해방하고 이 지옥 세계, 사탄세계를 멸망시켜야 합니다. 그리하여 땅에 있는 존재, 하늘에 있는 존재, 즉 모든 존재가 사탄의 참소권내에서 해방이 되었다고 환희에 찬 환성을 지를 수 있어야 합니다. 그러한 입장에서 만물을 대할 수 있는 하나님의 입장이 되지 못하면 하나님은 해방을 맞이하실 수 없는 것입니다.

이렇게 엄청난 사연이 예수님에게 있었다는 것을 누가 알았겠습니까? 쫓기는 몸을 재촉하여 감람산에 올라가 피어린 투쟁의 기도를 할 때도 누구 하나 그 사정을 알아 주는 사람이 없었고, 이 마을에서 저 마을로 혈혈단신 쫓겨다니며 핍박당하던 그 사정 또한 아무도 알아주는 사람이 없었습니다. 그의 부모까지도 몰랐습니다. 그런데도 마리아를 모셔요? 그런 사람들을 보면 속이 뒤집혀집니다. 요한복음에 보면 동생들까지도 예수님을 비난했습니다. “당신의 행하는 일을 제자들도 보게 여기를 떠나 유대로 가소서. 스스로 나타나기를 구하면서 묻혀서 일하는 사람이 없나니 이 일을 행하려 하거든 자신을 세상에 나타내소서(요 7:3–5)”라고 비아냥거렸다는 것입니다. 그러니 예수님이 보시기에 그들이 얼마나 딱했으면 “선지자가 자기 고향과 자기 집 외에서는 존경을 받지 않음이 없느니라(마 13:57)”라는 말을 했습니까? 이래 가지고 예수님이 뜻을 다 이루었어요? 몰리고 쫓겨 할 수 없이 십자가의 길을 맞이했던 예수님의 기막힌 그 사정을 그 누가 알았습니까? 오늘날 통일교회 문선생님이 안 나왔으면 불쌍했던 예수님의 그 사정을 밝혀 내지 못했을 것입니다.

예수님은 역사를 통해서 오셨기 때문에 세계의 역사와 더불어 살고 가셔야 되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승리하면 개인의 승리뿐만이 아니고 세계의 승리를 동반하는 것입니다. 또 예수님이 뜻을 이루었다 하면 개인의 뜻만이 아니라 세계적인 뜻이 완성되는 것입니다. 이렇듯 예수님은 세계를 저울질 할 수 있는 하나의 존재로 이 땅에 오셨지만 그 일신은 비참하게 이슬같이 사라졌던 것입니다.

19-101
예수님을 받들지 못해 비참해진 이스라엘 민족
인류의 아버지로 오신 예수님의 발걸음이 죽음길로 향할 때 한 사람도 그 손을 붙들고 같이 가겠다고 나서는 사람이 없었고, 내가 먼저 십자가에 죽겠다고 하는 사람도 하나 없었습니다. 인간 세상에 어버이로 왔다가 억울하게 몰려 죽음길을 가는 예수님을 가로막고 동정한 사람이 한 사람도 없었던 것입니다. 이렇게 비참하게 죽여 놓고 그 죽은 예수님을 중요시하면 뭐합니까? 마치 부모님 살아 계실 때는 효도하지 못하고, 돌아 가신 뒤에 무덤에 가서 뭐 어떻고 어떻고 하며 울고불고 하는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죽은 예수님을 중요시하는 것보다도 살아 있을 때의 예수님을 중요시하지 않은 민족은 망했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효는 죽고 난 후에 하는 것이 아닙니다. 충은 죽은 뒤에 하는 것이 아닙니다. 살아 있을 때 해야 하는 것입니다.

천지 온 누리에서 하나님의 통치를 받아야 할 자녀요, 하나님을 통하여 하늘나라를 창건해야 할 국민인데도 불구하고 이 자녀에 대한 소망과 국민에 대한 여망이 다 파괴되어 버리고 날아가 버릴 때 예수님의 마음이 얼마나 서글펐겠습니까 ?

4천년 동안 이스라엘 민족을 그렇게 고생시키면서 세워 놓고는 메시아를 보내기 위한 약속을 했던 것이 결국 이렇듯 비참한 민족으로 만들기 위함이었다는 말입니까? 아닙니다. 그것은 바로 이스라엘 민족이 예수님을 받들지 못했기 때문에 비참한 민족이 된 것입니다. 히틀러의 손에서 6백만명이 피살된 것도 다 예수님을 죽인 죄 때문입니다.

나라의 왕을 죽이면 역적이라고 합니다. 그런데 자기의 아버지요, 그 나라의 왕이요, 천지의 중심존재요, 하늘땅의 대왕이신 그분을 죽였으니, 이 죄는 무슨 죄라고 하며 무엇으로 그 죄를 탕감할 것이냐? 그 죄 때문에 이스라엘 민족은 수천년 동안 유리고객하며 지지리 고생을 했던 것입니다.

이제 때가 차서 이스라엘 해방운동도 벌어졌지만, 과거의 역사 속에서 너무나 큰 죄를 저질렀기 때문에 재림주님이 ‘이 땅 위에 오셔서 이 민족을 해방시켜 달라’는 기도를 해주시지 않으면 해방이 되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이스라엘이 해방될 때가 되면 주님이 이 땅에 와서 역사하신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그런데, 주님이 구름을 타고 와요? 절대로 그것이 아닙니다. 목숨을 걸고 한 40년 기도해 보십시오. 그러면 누구 말이 진리 인가 알게 될 것입니다.

개인을 수습하지 못하고 간 예수님, 가정과 종족과 민족과 세계를 수습하지 못하고 땅 위에 이러한 자국을 남긴 예수님이었습니다. 개인을 수습 하지 못한 예수님이었기 때문에 다시 개인을 수습해야 하고, 가정을 수습해야 하고, 종족과 민족을 수습해야 하고, 이스라엘을 수습해야 하고, 세계를 수습해야 하고, 천주를 수습해야 하고, 천도를 개설해야 합니다.

이 모든 것들을 완결짓기 위해서 재림주님이 오신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영으로 와서 그렇게 할 수 있겠느냐 이겁니다. 그런데도 이 멍텅구리 패들이…… 두고 보자 이겁니다.

19-102
신부를 찾지 못하고 돌아가신 예수님
선생님이 21년 고비를 넘어가면서 생각하게 될 때, 만일에 이런 고비가 없었던들 우리 통일교회가 이 엄청난 천주의 대업을 인계받아서 이 삼천리 반도 위에서 세계를 호령할 수 있는 종교적 기반을 닦았을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처량한 눈물의 골짜기에 남아진 무리가 되어 새로운 세계로의 출정을 위해 새로이 정비하고 나서야 되는 처량한 신세를 생각하면 기가 막힌다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그걸 알아야 됩니다. 우리는 원수를 갚아야 됩니다. 하늘땅에 가로막혀 있는 원수의 장벽을 깨뜨려 버려야 됩니다. 나의 살에 힘이 있고 피가 끓는 한, 이 사탄세계를 굴복시키기 위한 최후의 결전장에서 후퇴함이 없이 오직 전진 진격할 것을 이 순간 다짐해야 되겠습니다.

예수님이 아버지가 되려면 어머니가 있어야 합니다. 예수님이 무엇을 하려고 남자로 왔습니까? 예수님이 죽음에 임박해서 하신 유언 한마디가 ‘나는 신랑이요, 너희는 신부’라는 것이었습니다. 이것이 이루어지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유언은 그 가정에 있어서 제일 중요한 문제요, 아버지로서 자식 앞에 남겨 주는 최후의 중요한 문제인 것입니다. 예수님은 신부를 찾다가 찾지 못하고 죽었다는 것을 여러분은 알아야 합니다.

그러한 입장에서, 예수님이 사마리아 여인을 우물가에서 만나 이야기한 것도 하늘의 뜻을 세우기 위해, 이스라엘 창건을 인해 어머니 될 수 있는 존재를 생각하면서 말했던 것입니다. 그러한 예수님의 사연을 아무도 모를 것입니다. 그때 유대 나라의 풍습은 한국의 풍습과 같이 여자들의 세계가 없었습니다. 그런 입장에서 하나님의 뜻을 이루기 위해 어머니를 찾아야 할 사명을 짊어지고 가는 그 심정을 누가 알겠습니까? 결국 예수님이 바라시는 그 기준까지 모셔 줄 수 있는 그런 한 여인이 없었던 것입니다. 예수님이 나라와 민족과 세계를 사랑하는, 천심(天心)과 천정(天情)이 통하는 그런 자리에서 하나님의 아들과 딸로 유대를 맺을 수 있는 환경이 갖추어지지 않았던 것입니다. 예수님이 탄생할 때 찾아온 동방박사 세 사람은 종의 입장이었지 신부의 입장은 아니었습니다. 예수님은 아버지로 왔으니 어머니를 찾아 세워야 하는 것입니다.

해와가 타락했기 때문에 선조로부터 내려오는 죄의 뿌리는 여자에게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여자는 지금까지 역사적으로 비참한 길을 걸어 나온 것입니다. 이 죄의 뿌리가 뽑히기 전에는, 여자는 해방이 되지 않습니다. 2차 대전이 끝나고 여성해방운동이 벌어지고 있지만, 그리 쉽게는 안 될 것입니다. 어머니가 되어야 할 해와가 타락해서 죄를 유발시켰기 때문에, 이런 역사적인 죄를 탕감하고 어머니가 될 수 있는 존재가 되어야 합니다. 그래서 다시 해산의 수고를 거침으로써 탕감의 승리권을 마련하여 신랑을 모실 수 있는 승리적인 기준을 닦아야 합니다. 이러한 여인이 나타나지 않고는 메시아는 아버지적 메시아로 등극할 수 없는 것입니다. 따라서 여성 해방도 있을 수 없는 것입니다.

2천년 전에 그러한 사명을 다하지 못하고 십자가에서 돌아가신 예수님의 소원을 2천년이 지난 지금 이루어야 합니다. 제 1차로 유대 민족을 중심삼고 이루려 했으나 이루지 못했으니, 이제 우리가 제 2차로 기독교의 세계적인 판도를 중심삼고 아버지와 어머니의 상봉을 실현시켜 드릴수 있어야 합니다. 이러한 기점(基點)을 마련하지 않고는 하나님의 참된 직계 아들딸이 되지 못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이러한 기준을 연결시켜 맞추기 위한 것이 재림이상인 것입니다. 재림이상에 있어서도 역시 참다운 가정이 있어야 천도가 출발하는 것이요, 이것이 있어야 참된 사랑과 참된 행복의 출발이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그러면 여러분의 가정이 하나님의 공인된 사랑으로 이루어진 가정입니까? 아닙니다. 여러분의 가정은 아버지 어머니가 사탄 세계의 타락된 사랑의 인연으로 맺어진 가정입니다. 그런 가정에서 태어난 것이 바로 여러분들입니다. 그러니 핏줄이 다르다는 것입니다. 그것은 강도에게 아버지가 내쫓기고, 어머니가 겁탈당하고 그 사이에서 태어난 퇴폐물과 같은 것입니다. 결국 하나님이 계신지도 모르는 간부(姦夫), 간부의 족속, 간부의 사회가 되어 버렸습니다.

19-104
천국은 부모와 자녀가 함께 가는 곳
그러니까 지금까지 6천년이 걸린 것입니다. 그래도 하나님은 타락에 물든 인간들을 어떻게 해서든지 아들딸로 생각할 수 있는 심정으로 복귀하시고자 했던 것인데, 그것이 6천년이 걸렸다는 겁니다. 다시 말해서 하나님이 간부의 자식을 당신의 아들딸로 정해 줄 수 있는 심정을 복귀하기 위한 기준을 세우는데 6천년이 걸렸다는 것입니다. 능력이 많으신 하나님이 6천년이나 걸릴 것이 뭐가 있겠는가 라고 반문하겠지만, 하나님은 행복의 요건을 중심삼은 사랑의 주체자이시기 때문에 하나님도 여기에 서는 어찌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6천년이 걸린 것입니다. 이것을 해야 비로소 메시아로서의 예수님인 것입니다.

오늘날 기독교인들은 예수님만 믿으면 천당에 간다고 합니다. 그러나 예수님이 오른편 강도에게 너와 내가 낙원에 이르리라고 했지, 언제 천당 간다고 했습니까? 천당에 갈 뻔했지만 천당은 가지 못하고 낙원밖에 못간 것입니다.

천국이란 인간이 타락하지 않고 이 땅 위에서 하나님의 사랑의 품에서 성혼을 해서 하나님이 좋아하는 아들딸, 하나님이 기뻐할 수 있는 손자들을 맞아 하나님의 사랑을 받다가 그 가정이 모두 함께 들어가는 곳입니다. 자식이 못 들어가도 자신만 들어가면 천국입니까? 그러나 낙원은 아무리 정다운 부부나 부모 자식이라도 헤어져서 들어가는 곳입니다. 가정과는 아무런 상관이 없습니다. 그런 곳이 천당입니까? 부모를 모시고 온가족 모두가 들어가 하나님을 중심삼고 주고받을 수 있는 그 세계가 천국입니다. 아들은 지옥에서 죽겠다고 야단하고 있는데 부모는 천국에서 잘 살면 되겠어요? 그런 곳이 천국입니까?

통일교회가 제시하는 것은 그런 것이 아닙니다. 지옥을 해방시킬 수 있는 길을 제시하는 것입니다. 천지개벽이 무엇이겠습니까? 첫째부활에 동참할 수 있는 자격을 갖춘 사람들은 어떤 사람들이겠습니까? 축복의 문을 통과한 사람들입니다. 그래서, 팔십 노인들도 재봉춘해야 됩니다. 이상하게 들릴지 모르지만, 할머니 할아버지들도 다시 시집 장가 가야 된다는 말입니다. 왜냐하면 제 3이스라엘 국가를 이루기 위해서는, 또 제 3이스라엘 국가의 백성이 되기 위해서는 축복의 문을 통하지 않으면 안 되기 때문입니다.

이 과정을 거치려다가 돌아가신 예수님의 소원이 무엇인지 알겠지요? 그러면 그것이 예수님 혼자만의 소원입니까? 아닙니다. 그것은 우리 모두의 소원이기도 합니다. 더 나아가서는 하나님의 소원이기도 합니다. 그것이 어린양 잔치입니다. 하나님의 아들딸로 태어나 장성하여 천지간에 비로소 하나님의 소원을 이룬, 개성을 완성한 일남 일녀가 되면, 하나님께서 ‘내 품에서 영원무궁토록 살라’고 하시면서 결혼시켜 주는 것이 어린양 잔치입니다. 여러분은 이것을 알아야 합니다.

오늘날 통일교인들 중에도 축복을 선생님이 처녀 총각들 데려다가 기도해 주며 합동결혼식 시켜 주는 것으로 생각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축복의 중요성을 모르고 있다는 것입니다. 참으로 기가 막히는 일입니다. 축복은 그 가치를 알고 받아야 합니다. 축복을 받음으로써 제 3이스라엘 백성의 위치에 서게 된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여러분, 축복의 의의와 가치를 알고 보니 축복을 받지 않은 사람은 진정한 통일교인이라고 할 수 있어요? 결혼하지 않은 사람들을 어른 취급합니까? 인간 세상에서도 처녀가 죽으면 몽달귀신이고 총각이 죽으면 몽달귀신이라고 합니다. 그것은 누가 그렇게 만든 것이 아닙니다. 천도가 그렇게 되어 있습니다.

19-106
지금은 하나님의 소원이 이루어지는 때
사람은 나에게만 머물러 있으면 안 됩니다. 나로부터 삼단계를 거쳐 나가야 합니다. 이것이 나와 상대와 자녀인 것입니다. 하나님을 중심삼은 자와 상대와 자녀의 관계, 이것이 사위기대입니다. 그리고 이 사위기대를 완성하는 것이 하나님의 창조목적인 것입니다. 예수님은 이 사위기대를 이루지 못했기 때문에 한탄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제 예수님의 소원이 무엇이었는지 알았습니다. 그리고 우리는 6천년을 돌아서 장성기 완성급 즉, 축복의 자리까지 왔습니다.

그러면 지금이 어떤 때이겠습니까? 지금은 하나님의 소원이 이루어지는 최고의 때요, 6천년간 수고해 온 하나님의 한이 그치는 때요, 이 땅에 오시어 수고하셨던 하나님의 아들, 즉 예수님의 소원이 이루어지는 때입니다. 뿐만 아니라 그 아들의 가정을 중심삼고 사랑이 시작되는 때요, 만물의 환희와 존귀와 영광을 받을 수 있는 때입니다. 하나님께서도 이날이 얼마나 좋겠습니까? 죄악이 다 사라지고 광명의 태양이 솟아오른 명랑한 천지를 맞이하는 날, 모든 자연이 화동하고, 모든 동물이 춤을 추는 화창한 아침, 승리의 아침을 맞이하는 날입니다.

한과 슬픔으로 비참한 역사과정을 걸어 나오면서 지루하고도 지루한 고비를 넘어선 하나님에게 있어서는, 에덴 동산에서 타락하지 않고 그날을 맞이하는 것보다도 그 해방을 맞는 날이 더 즐거운 날입니다. 하나님은 이 낱을 맞이하기 위하여 지금까지 수많은 선지선열들을 죽음길로 몰아내었고, 6천년 동안 끌고 나온 제단 위에서 승리할 수 있는 아들딸을 만들기 위하여 참아 나온 그 입장을 생각할 때, 이날이 얼마나 감사한 날이며, 얼마나 좋은 날이며, 얼마나 기쁜 날이겠습니까? 만일 그러한 사람이 나타나게 되면 천지가 동하여 하늘땅 전체가 잔치를 할 것입니다. 어린양 잔치만 하겠습니까? 해방잔치도 해야 하는 것입니다. 인간이 타락한 이후부터 지금까지 느껴왔던 죽은 것에 버금가는 안타까움과 아픔과 고통에서 해방시켜 줄 수 있는 그날이 축복의 날이요, 성혼의 날입니다.

성신의 입장에 서야 할 해와가 먼저 타락했기 때문에 기독교인들은 여자들이 해산의 고통을 겪고 아기를 낳는 걸로 믿고 있지만 그게 아닙니다. 타락한 해와이기에 여자가 인류를 다시 낳아 주는 수고를 해야 되는 것입니다. 이 말의 의미를 잘 알아야 됩니다.

성신은 어머니 신입니다. 때문에 땅 위의 인류는 성신을 받음으로 말미암아 부활하는 것입니다. 성신은 어머니 신이기 때문에 아버지 신인 예수님을 신랑으로 사모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타락한 인간들은 성신을 받아 성신이 사모하는 신랑되신 예수님의 사랑의 불길을 거쳐가게 될 때에 영적인 생명의 주인으로 출발하는 것입니다.

사랑의 원천이 없어서는 새로운, 생명이 태어나지 못합니다. 하나님은 무모하게 천리원칙을 떠나서는 절대 구원섭리하시지 않습니다.

인생의 귀한 생명이 부활하는 데 있어서 누가 어떤 맹랑한 논법으로 해석하려 합니까? 천리원칙을 거쳐야 하는 것입니다,

19-107
세상의 끝날은 축복의 날
기독교인들에게 하나님이 누구냐고 물으면 아버지라고 대답합니다. 또 성신은 누구냐고 물으면 성신은 성신이라고 대답합니다. 그러나 알려면 똑똑히 알아야 합니다. 성신은 어머니 신입니다. 예수님은 체를 갖고 태어났지만. 성신은 아직까지 하나님이 공인할 수 있는 여자의 몸을 갖고 있지 못했기 때문에 체가 없습니다. 그러기에 물 같기도 하고 바람 같기도 합니다. 이 얼마나 처량합니까? 거기에는 그런 역사적인 배경이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성신은 왜 땅 위에 오겠습니까? 하늘은 남자를 상징하고 땅은 여자를 상징하기 때문입니다. 아담은 자기 욕심 때문에 하나님을 배반하였지만, 예수님은 남자로서 이 땅에 와서 죽으면서까지 뜻을 세우려는 일념이 있었기 때문에 승리의 기준을 세웠습니다. 그러나 여자는 책임을 못했습니다. 지상에서 나란히 둘이 살아서 책임을 해야 했는데, 남편인 예수님은 땅 위에서 사탄을 굴복시키고 갔지만 성신인 어머니는 이 땅 위에서 사탄을 굴복시키는 일을 못했기 때문에 온 인류 개개인에 대해 해산의 수고를 거쳐 사탄을 굴복시키는 싸움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과 성신이 2천년간 바라고 바랬던 그 소원이 얼마나 간절했겠습니까?

예수님을 따르던 12제자 전부가 거꾸로 달려 죽고 기름가마에서 죽는 처참한 형벌을 당한다면 이것을 보는 예수님의 심정은 어떠했겠습니까? 로마에서 400년 동안 핍박을 받고 별별 참사를 당하는 것을 볼 때 기분이 좋았겠습니까? 그토록 선량한 사람들을 고생시키면서도 이 길을 포기하지 못한 것입니다. 그리하여 그들을 붙들고 세계의 수많은 국가의 뒤를 따라 돌고 돌아 오늘의 기독교 이념을 중심삼고 세계적인 민주국가들을 이루어 세상의 끝날까지 끌고 온 것입니다.

그렇다면 여기까지 끌고 온 이유는 무엇이겠습니까? 그 축복의 한 날을 맞이하기 위함입니다. 그날을 찾기 위하여 어머니 피와 아버지의 피가 이어져 나온 것입니다. 그날은 개인의 피는 물론이요, 종족의 피, 국가의 피, 세계의 피가 교차되는 날이며, 수많은 희생을 감수하고서도 찾지 못했던 그 소망의 아들딸을 이 천지간에서 찾을 수 있는 날인 것입니다. 이런 기쁜 날을 우리가 맞게 되면 쌍수를 들어 환영해야 할 것이요. 만세토록 그 영광을 찬양해야 할 것입니다. 그러나 지금 믿는 사람 가운데 그럴 수 있는 사람이 얼마나 되겠습니까?

19-108
축복의 날의 의미
이 날은 예수님에게는 제일 기쁜 날입니다. 제일 슬프게 출발한 예수님이기에 그 슬픔보다 더 큰 비중의 기쁨이 와야 해방이 되는 것입니다.

이날은 예수님이 죽음을 넘어서 2천년만에 비로소 가슴에 맺혔던 한을 풀어 놓고 웃으며 춤출 수 있는 날입니다. 예수님은 할 말은 많지만 너희들이 감당치 못한다면서 얼마나 많은 사연을 품고 갔습니까? 춤을 추는 예수님, 얼마나 기뻐야 예수님이 춤을 추시겠습니까? 처녀 총각이 시집 장가 가는 만큼이나 기쁜 날인 것입니다.

여러분들의 한 생명의 가치가 우주보다도 크다고 했으니 이렇게 큰 생명의 가치를 한꺼번에 재물로 바친다고 이런 날이 구현되겠습니까? 그렇게 해서 될 수만 있다면 하나님이 벌써 다 했을 것입니다. 이것은 탕감조건을 넘어서지 않으면 안 되는 것입니다.

이날은 예수님과 성신이 해원성사하는 날입니다. 그뿐 아니라 지금까지 몰리고 쫓겼던 선한 사람들, 혹은 각 나라에서 몰리고 쫓기고 참살(慘殺) 당했던 하나님의 충신 열녀 효자들의 소원이 이루어지는 날입니다. ‘선해라. 착해라, 악한 자리에 가지 말고 선한 자리에서 죽어라, 선에 입각하여 살아라’ 하고 말하던 사람들, 또한 생명을 걸어 놓고 충·효·열의 길을 가다가 죽어간 사람들, 그들이 소원하던 것이 이 한 날로 말미암아 해원성사되는 것입니다.

이렇듯 존재세계에 인연된 모든 것이 이날을 위하여 빚을 갚기에 수고하였고, 이날로 말미암아 모든 것이 청산되기를 고대했던 것입니다. 그러면 어느 정도로 얼마나 기쁜 날이겠습니까? 손 하나를 잘라도 아픈 줄 모르고 목이 잘려도 웃으며 죽어갈 수 있는 날입니다. 천상천하에 이런 날이 시작되는데, 그 이상 기쁜 일이 어디에 있겠습니까?

이런 날이 지상에 찾아오고 있다는 것을 어느누구도 꿈에서조차 생각지 못했습니다. 자기의 슬픔과 한을 풀어 달라고 예수님과 성신을 붙들고 기도한 줄만 알았지, 하나님께 이렇게 딱하고 처량하고 비참한 사연이 맺혀 있었다는 것을 알기나 했습니까? 통일교회에 들어왔으니까 알게 된 것입니다.

자기의 배만 채우고 자기의 욕심만을 위한 삶을 살려고 하는 사람은 모두 얼굴을 들 수 없는 빚진 사람이라는 것입니다.

여러분들은 이 성혼의 날을 고대하는 아버지 앞에 어떻게 서야 할까 하는 생각을 해보았습니까? 그 아버지는 최후의 자리를 넘어선 승리의 왕자로서 아버지의 사랑의 품에 함빡 안기는 아들딸을 얼마나 그리워했겠습니까? 그 아들딸을 그리워하는 아버지, 그러한 아버지 앞에 나아가 아버지라고 불러야 하는 내 자신의 초라함과 부족함과 불충스러움을 생각하면 몸둘 바를 모르겠고 얼굴을 들 수가 없습니다. 우리는 아버지라고 부를 수 없는 처지에 있습니다. 죄의 보따리를 짊어진, 죄의 주식회사와 같은 자신이니 우리는 천상에 진 빚이 얼마나 큰 줄 알아야 합니다. 천번 만번 죽어 제물이 되더라도 또 다시 살아나서 갚아야 한다는 마음이 앞서야 정상인데도 불구하고 버젓이 하나님의 아들이요, 딸이요 할 수가 있느냐는 것입니다. 이것은 눈물 없이는 생각할 수 없습니다.

우리는 예수님께서 ‘아바 아버지여, 할 수만 있다면 이 잔을 내게서 피하게 하소서’라고 기도하시던 그 심정을 알아야만 됩니다. 온 우주가 소용돌이치는 이 마당에 있어서 전세계가 멸망 속으로 매도되려는 찰나에 놓여 있는 그때 예수님의 심정이 어떠했겠습니까? 까딱 잘못하면 모든 역사가 어긋나게 되어 있었던 것입니다. 자기 한 사람 비참하게 죽는 것은 괜찮지만 4천년간 그렇게 고대하고 수고하신 하나님을 2천년이나 더 고생시켜 드려야 할 것을 생각하면 차라리 자기가 죽는 것이 났다는 그런 아픈 가슴을 부여안고, 하나님 앞에 나아가야 했던 예수님의 심정을 누가 알았던고? 회개하는 것은 꿈도 꾸지 않던 사람들이 이제 와서 신부가 되겠다고 하니, 마치 강도 같은 심보입니다.

19-110
7년대환난
통일교회 선생님은 지금까지 이 길을 걸어 나왔습니다. 선생님의 마음 속에는 어떻게 하면 이 험난한 길을 돌파하느냐 하는 생각뿐이었습니다. 이 길에는 수많은 탕감조건이 가로놓여 있었기 때문입니다. 이처럼 아담 가정에서부터 지금까지 역대의 엉클어진 사연들을 풀어 나가야 할 사명을 짊어진 선생님을 볼 때, 배후에 계신 하나님의 심정이 얼마나 처량하고 간절했겠는가. 또한 가슴이 벅차고 목이 메어서 말을 할 수 없는 처지에 놓인 때가 몇백 번 몇천 번이 있었는지 여러분은 생각해 보았습니까? 선생님이 그러한 것은 그래도 괜찮지만 하나님은 어떠했겠습니까? 6천년을 싸워오신 아버지의 심정을 생각해 보십시오!

통일교회는 이러한 원천에서 출발한 것입니다. 헤치고 보면 눈물을 흘리지 않고는 대할 수 없는 사연이 들어 있습니다. 앞을 보면 무서워서 가슴이 덜덜 떨리고 심장이 파열되는, 극한 자리에 부딪히는 그런 무서움을 느끼는 자리에 뿌리를 두고 증거하는데, 이래도 우리가 이단이란 말입니까? 누가 승리하는가 어디 두고 봅시다.

선생님은 여러분과 같은 20대 청춘시절에 남들이 편안히 살고 있는 생활을 대했을 때 하나님 앞에 얼굴을 들지 못했는데, 그런 과거를 생각하게 됩니다. 그런데 오늘 통일의 젊은이들은 얼마나 뜻을 위했고, 얼마나 하나님을 사랑하였습니까? 선생님이 청춘시절의 마음으로 여러분을 비판 하면 용서받을 사람이 한 사람도 없다는 것을 느끼게 됩니다. 나라를 위해 하나님 앞에 간곡히 몸부림치며 기도하던 사연이라든가, 세계를 놓고 몸부림치며 기도하던 사연들을 마지막 그날을 보내면서 다 털어놓고 싶은 마음이 간절하지만, 말할래야 말할 수 없는 가슴 아픈 내용이 있다는 것입니다.

이래서 1960년대의 40고개를 어떻게 넘느냐? 원리가 가르쳐 주는 40고개를 어떻게 넘어야 하느냐? 예수님은 33세에 돌아가셨기 때문에, 그 이후 40고개가 되는 7년을 넘지 못했습니다. 그리하여 인간 세상에 7년대환란이 남게 되었던 것입니다. 그러니 이 고개를 어떻게 넘느냐 하는 것입니다. 이 고개를 넘기 위해서는 야곱이 거쳐나간 복귀노정과 역사노정에 수많은 선조들의 엉클어진 탕감의 노정을 거슬러 올라가야 됩니다. 그 길에는 친구도 없고 동료도 없습니다. ‘따르겠다’던 그런 사람들은 가는 길 앞에 짐이 되었고, 가시를 박아 놓았으며, 돌작밭을 만들어 놓았지, 거기에서 도움이 된 사람은 한 사람도 없었다는 것입니다.

그렇게 생애를 바쳐 21년을 지내고 보니 꿈같은 사연이 얽어져 있고 그것을 다시 한번 생각할 때 하나님 앞에 민망스러움을 느낍니다.

그래도 그 길 고비고비에 그러한 사연과 그런 어려운 자리에 부딪칠 때마다, 한번밖에 없는 그날이 오게 되어 있으니 그날을 생각하며 모든 것을 참아 나온 것입니다. 그날에는 하나님을 상봉할 수 있고, 예수님과 성신도 상봉할 수 있고, 천군천사들도 상봉할 수 있어야 합니다. 그런 자리가 되어야 합니다.

선생님에게는 승리의 개가를 올려 하나님 앞에 영광 돌리겠다는 마음의 기준, 그것이 있었기 때문에, 지금까지 갖은 핍박, 갖은 수고, 갖은 역경을 거쳐 나온 것입니다. 그 마음이 없었던들 선생님이 여기까지 이 길을 나오지 못했을 것입니다. 그런데 오늘날 통일교회 사람들은 축복이란 말, 성혼에 대해서 얼마나 심각하게 생각하고 있습니까? 한마디로 말한다면 난장판입니다. 그러나 그것까지는 좋다고 합시다. 통일교회에서 참부모 앞에 여러분은 아들딸이라는 것을 가르쳐 줬습니다. 만약 선생님이 그것을 안 가르쳐 주었더라면 선생님은 이렇게까지 고생하지 않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런 말을 듣고서도 달려드는 여러분이 비록 병신일지라도 선생님에게는 자식입니다. 자식은 다 자식이므로 눈도, 코도 없는 병신 같은 자식일지라도 부모는 먹여 주어야 하는 것입니다. 사지가 없어 두리뭉실 하더라도 숨만 쉬고 그 형태만 남아 있어서, 살아 있는 흔적만 있어도 자식은 자식입니다. 여러분도 이와 마찬가지입니다. 여러분은 또 무조건 입만 벌리고 부모에게 상속을 받겠다고 합니다. 이렇게 참부모라는 입장은 그런 것을 해결해 주어야 할 도리가 걸려 있는 것입니다. 이런 것을 생각하면 여러분은 참으로 행복한 입장인 것입니다. 그런데도 여러분들, 특히 축복가정들을 보면 세상인연에 대한 애착을 버리지 못하고 있는 것 같습니다.

19-112
사탄을 추방하려면
이제 소원성취의 그 한 날이 우리 앞에 다가오고 있습니다. 그날을 위해 1960년도를 중심삼고 지금까지 나오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해원성사를 해 드리고, 예수님의 해원성사를 해 드리고 또 만민의 해원성사를 해줘야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해원성사를 하려면 하나님의 사랑을 받을 수 있는 아들딸이 되어야 합니다. 하나님의 사랑을 받는 아들딸이 되려면 예수님이 세우고자 했던 탕감조건을 완성해야 합니다.

그렇다면 먼저 예수님이 이 땅에 와서 왜 그렇게 몰리고 쫓겨다녀야 했던 것인가를 알아야합니다, 그것은 세 제자가 잘못했고, 또 열두 제자가 잘못했기 때문입니다. 그들이 예수님을 중심삼고 철옹성같이 버티며 자기들이 먼저 죽겠다고 싸우는 무리가 되었더라면, 예수님은 안 돌아가셨을 것입니다. 그리고 12제자를 중심삼은 70문도와 120문도까지 전부 탕감복귀하여야 된다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1960년도를 중심으로 하여 36가정, 72가정, 124가정을 중심삼고 지금까지 나오고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번 7년노정의 마지막 고비를 중심삼아서 430쌍을 축복해 주려고 하는 것입니다. 그것은 660 이상의 축복 수(數)를 내지 않으면 안 되기 때문입니다.

6수는 사탄수이며 그 위치는 하나님 앞에서 원수의 자리입니다. 우리는 이 6수를 넘어야 합니다. 그래서 기성가정까지 모두 합해 760가정이 7년 기간내에 축복을 받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면 어찌하여 역사가들이 1960년을 새역사가 전개된 해라고 말했느냐? 누가 그렇게 만들어 놓았느냐? 통일교회가 그렇게 만들어 놓았습니다. 오늘날 공산당들이 서로 투쟁하는 이유가 어디에 있는지 아십니까? 섭리적으로 보면 우리가 3년 고개를 넘고 4년 고개를 넘어가는 중에 그런 일이 벌어지게 되어 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1966년에 중공에서 문화 혁명이 일어났다는 것이고, 그로 인해 대혼난이 벌어졌던 것입니다.

여러분 통일교회에서 축복을 시키는데, 축복을 받기 위해서는 무엇을 하라고 합니까? 먼저 세 명의 믿음의 자녀를 찾아 세워라 합니다. 그리고 열 두 사람을 전도하라고 합니다. 이것은 절대적 요건입니다. 이 믿음의 자녀 세 명이 축복을 받으면 여덟 식구가 되는 것입니다, 아담 가정의 여덟 식구, 노아 가정의 여덟 식구의 가정적인 기준을 세워야 합니다. 그 기준 위에서 승리의 기반을 닦지 않으면 사탄을 완전히 추방할 수 없습니다.

사탄은 어디서부터 침범해 왔습니까? 우리는 해와부터 침범했다고 알고 있으나 해와에게만 침범한 것이 아닙니다. 아담 해와에게 즉, 아담 가정에서부터 침범하여 왔던 것입니다. 그러면 침입한 사탄을 추방하려면 어떻게 해야 되겠습니까? 탕감복귀원칙을 놓고 볼 때 어떻게 해야 되겠습니까? 개인으로서 사탄을 추방할 수 있겠습니까? 예수님도 개인으로서는 사탄을 추방하지 못합니다. 가정을 이루어야 합니다. 그래서 신부가 필요하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원리적이지요? 더구나 사탄이 아담의 아들딸에게까지 침범해 들어왔기 때문에, 가정을 이루지 않으면 사탄을 추방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사탄을 완전 굴복시키는 기준은 무엇이겠습니까? 그것이 축복이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축복은 완성이고, 완성은 사탄과는 영별(永別)하는 것입니다. 이것을 확실히 알아야 합니다.

그러니 아무리 예수님을 잘 믿고 충성을 다한다 하더라도 천국에 갈 수 없다는 사실을 알겠습니까? 그것은 가는 도중에 사탄의 참소를 받게 되기 때문입니다. 그렇게 되기 전에 여러분은 열심히 기도해야 합니다. 예수님은 낙원에까지 가서도 기도하고 계십니다. 그래서 삼위신이 사탄세계를 추방하기 위해서 공격전을 펼치고 있습니다.

축복받은 우리들은 무엇을 해야 되느냐? 예수님이 이 땅 위에서 이루지 못한 일들을 이루어야 합니다. 그런 자리를 넘어서지 못하면 하나님의 아들이 될 수 없습니다. 예수님은 책임을 다하지 못하고 죽음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아들이 되었지만, 우리는 살아서 하나님의 아들이 될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렇게 되면 예수님보다 우리가 났다는 결론이 나옵니다. 그렇지 않아요?

예수님은 12제자를 거느렸지만 종족과 민족을 편성하지 못하였고. 12제 자를 규합하여 끌고 와야할 세 제자마저 잃어버렸기 때문에, 할 수 없이 사탄세계에서 추방당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이렇듯 예수님은 나라에서 몰리고 교회에서 몰리고 가정에서 몰리고 제자들에게 몰리고 끝내는 세제자에게까지 몰렸으니, 맨 밑창의 사탄 앞에 제물이 될 수 밖에 없었던 것입니다.

19-114
예수님의 한을 풀어 드려야 할 우리
하나님은 예수님을 이 땅에 보내는 것이 소원이었고 예수님은 하나님의 뜻을 이루어 드리는 것이 소원이었습니다. 또한 예수님의 뜻이 이루어지면 인류의 소원까지도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이와 같이 세 소원이 연결되어 있는 중심 포인트가 누구였느냐 하면 예수님이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이 뜻을 이루지 못하여 남긴 한이 천상의 한이 되었고, 또 하나님의 섭리 역사가 2천년이나 연장되었던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역사의 종말시대에 살고 있는 우리가 예수님의 한을 풀어 드리면, 먼저 하나님의 한이 풀리는 것이고 다음엔 인류의 한이 풀리는 것입니다.

그러니 통일교인들은 예수님의 한을 풀어 드리는 길을 가야 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예수님의 한이 무엇입니까? 그것은 하나님이 공인하실 수 있는 참된 아들딸이 되어서 축복을 받는 것입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예수가 잃어버린 것을 찾아야 합니다. 예수가 3년 공생애노정에서 세 제자를 잃어버렸으니, 우리는 3년 공적 노정 위에서 믿음의 세 자녀를 찾아 세워야 합니다. 다시 말해서 몰리고 쫓기고 핍박받는 자리에서 잃어버렸으니, 몰리고 쫓기고 핍박받는 자리에서 다시 찾아 세워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지금 통일교회가 가고 있는 7년노정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지금까지 공세를 받으며 이 노정을 걸어온 것입니다. 예수님은 민족 전부에게, 교회 전부에게 핍박받는 환경에서 죽어갔지만, 우리는 죽음의 그 찰나, 그 순간을 넘어서서 거기서부터 승리의 터전을 마련하여 내려가야 예수님이 찾아 세우려던 제자들과 같은 아들딸이 되어 가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죽었다가 3일만에 부활해서 40일 동안에 제자들을 다시 규합해서 재차 영적 이스라엘을 편성하였으나, 이제는 실체의 제자형, 종족형, 민족형을 펀성하지 않으면 안 됩니다. 이것이 우리 인간 각자가 가야할 노정이라는 것을 확실히 알아야 되겠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 길을 우리가 가고 있는 것입니다. 선생님은 포부가 큽니다. 6천년 역사를 대표한 세계와 민족을 걸어 놓고 모든 분야에서 탕감조건을 세우고 사탄 참소귄에서 뒤넘이쳐 나온 것입니다. 이와 같이 선생님이 제물 될 수 있는 자리에서도 죽지 않고 부활의 권을 가진 다음 세 제자를 세워 아들딸의 인연을 맺은 것이 1960년의 성혼식입니다.

19-115
부모와 처자를 사랑해 보지 못한 선생님
3년 공생애노정은 절대 필요합니다. 이 노정을 걷지 않고 축복을 받게 되면, 외상축복을 받는 것이기 때문에 영계에 들어가기도 어렵다는 것입니다. 보류 기간이 있다는 것을 알아야 됩니다. 또한 이 길을 거쳐가지 못한 사람은 아들딸을 낳아도 사랑하지 못하는 것입니다. 선생님도 그런 과정을 거쳤습니다. 선생님은 성진이를 제대로 사랑해 보지 못했습니다. 1960년의 성혼식을 맞기 전까지는 학비도 못 대주고, 책 한 권도 사주지 못했습니다. 그것은 여러분들도 보아서 잘 알 것입니다. 이 얼마나 목석같은 사람이며 무지몽매한 사람입니까? 아버지가 자식들을 대해서 그래야 됩니까? 그것은 육신의 아들딸보다 믿음의 아들딸을 더 사랑하지 않으면 복귀가 안 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하나님의 아들딸 위주로 생각하는 입장에 있었다면, 그 아들딸을 이 땅에 보내 주지 않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자기의 아들딸을 희생시켜서 만민을 구하려 하시는 분입니다. 그것이 선의 법도를 세우는 도리입니다. 지극히 사랑하는 선한 사람을 희생시켜서 지극히 악한 사람을 구해야 하는 것이 하나님의 도리가 아니겠는가? 그러한 하나님의 도리와 뜻을 따르기를 원하는 사람, 즉 공적인 책임을 짊어진 사람은 악한 세계의 사람들을 자기의 자녀보다 더 사랑했다는 기준을 세워 하나님으로부터 공인받은 후에 자기 아들딸을 사랑하여야 사탄에게 참소받지 않는 것입니다. 그리하여 사탄세계에서 승리한 후에는 사탄세계의 사람들을 사랑한 것 이상으로 자기의 자녀들을 사랑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래야 비로소 하나님의 사랑이 자리잡고 들어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을 보게 되면 사탄편 자식을 사랑하는 마음과 본연의 세계로 복귀된 아들딸을 사랑하는 마음이 다르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따라서 선생님도 마찬가지입니다. 지금까지는 외적인 관계가 없는 사람을 사랑하는 시대였기 때문에, 그 권내의 책임을 종결짓기 위하여 그 권내의 입장과 일치될 수 있는 자리를 차지하지 않으면 안 되었던 것입니다. 이것이 천리의 뜻인 것입니다. 선생님이 그런 입장에 처해 있었기에 부모와 처자를 사랑 한번 해보지 못했던 것입니다. 하늘 앞에 둘도 없는 원리요, 천상천하의 그 무엇을 주고도 바꿀 수 없는 보화의 진가를 지니고 있는 천적인 선물을 받았지만, 아버지, 어머니 앞에 무릎을 꿇고 이 말씀은 이렇고, 저 말씀은 저렇다고 말씀드리지 못했습니다. 또 형님은 영적인 세계에서 자기 동생이 최고이고 육적인 세계에서도 최고라는 것을 알고 선생님에게 충성을 다했습니다. 그것은 기도해 보아도 알 수 있었습니다. 그런 형님에게도 내가 어떤 사명과 책임을 지고 있다는 말을 하지 못했습니다. 예수님이 자기의 부모, 형제들로부터 불신을 당했던 것에 비하면 선생님은 승리했다고 할 수 있습니다. 또한 아버지 어머니도 선생님을 무척 사랑하셨습니다. 어머니 문중(門中)에서도 선생님을 지극히 사랑했습니다. 그러나 선생님은 그 외가 분들에게 원리 말씀을 한번도 전하지 못했습니다.

마리아와 예수님과 같은 자리에 선생님이 서지 않고는 그것을 탕감할 수 없었기 때문에, 부모 형제들에게도 아무 말을 하지 못했던 것입니다. 또한 일가친척들로부터도 별의별 비난의 소리를 듣게 되었지만, 그들에게도 선생님의 소신을 피력해 보지 못했습니다. 그리하여 선생님은 일가 친척들이 있는데도 불구하고 머나먼 외지의 사람들을 중심삼고 이 땅 위에 한 사람밖에 없는 그 사람을 구하기 위해 정성과 성의를 다 쏟으며 복귀의 터전을 개척해 나온 것입니다. 그러한 것이 1960년대를 중심삼고 맞추어진 것입니다. 이러한 고개를 넘고 나서야 비로소 부모, 자식, 친척들을 사랑할 수 있는 자격자가 된다는 것을 여러분은 알아야 합니다.

19-117
소생 장성 완성에 있어서 장성이 문제
그러니까 앞으로 축복받은 가정들은 믿음의 아들딸이 성혼식에 참석할 수 있도록 기반과 터전을 닦아 자기의 손을 얹어 축복을 해줄 수 있어야 합니다. 그러지 못하면 마음의 기도로서라도 축복을 해 주었다는 터전을 닦아 놓아야만 자기가 축복을 받았다는 조건의 자리에 설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한 터전 위에서 출생한 아들딸이라야 비로소 그 아들딸을 품고 젖먹이고 사랑해 줄 수 있는 것입니다. 이치가 그렇다는 거예요. 이런 내용도 모르면서 자기의 아들딸만 귀한 줄 알고 있으니……. 선생님이 가르쳐 주고 가는 원리의 길은 그렇지 않다는 것을 알아야 됩니다. 그것은 여러분이 선생님보다 더 잘 알 것입니다.

선생님도 그 길을 갔습니다. 갔어요, 안 갔어요? 그 길을 가는 데는 용서가 없습니다. 믿음의 세 아들을 택하여 그 상대를 결정한 후에 축복의 자리에 서는 것입니다. 그런 입장에 섰기 때문에 거기에 천지가 함께 돌아가는 것입니다. 탕감복귀 했으니 우주가 돌아가는 거지요.

소생 장성 완성의 3단계 성장 과정 중에서 언제나 장성이 문제입니다. 소생 장성 완성에 직선을 그으면 중앙에 위치하는 것이 장성인데, 언제든지 이것을 중심삼고 탕감합니다. 선으로 그으면 직선이지만 존재세계의 사방은 입체가 되어 있기 때문에 중앙 위치를 말하는 것입니다. 성경에서는 어찌하여 언제나 둘째 수가 문제 되느냐? 그것은 둘째가 소생 장성 완성의 천리법도에 있어서 중앙선에 위치하기 때문에, 이 중앙을 점령하면 전체를 점령하는 것이 됩니다.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은 언제나 중앙을 중심삼고 사탄과 판가리 싸움을 하는 것입니다.

아담 가정에서는 가인, 아벨, 셋의 세아들 중 둘째 아들 아벨을 중심삼고 섭리가 이어졌고, 노아 가정에서는 셈, 함, 야벳 중 함을 중심삼고 섭리가 이어져 나왔습니다. 아브라함 가정을 볼 때도 1대의 아브라함의 3제물 실수로 말미암아 독자 이삭을 중심삼고 사탄과 싸우며 번제를 드리는 과정을 거쳤습니다. 또 하나님의 아들을 중심삼고 보면 첫째 아들은 아담, 둘째 아들은 예수, 세째 아들이 재림주입니다. 그 중에서 둘째 아들인 예수님을 중심삼고 판가리 싸움을 해 나왔던 것입니다. 이처럼 항상 둘째 아들을 중심삼고 섭리가 이루어진 것입니다. 그렇지요?

그러면 가정을 중심삼고 볼 때는 무엇이 타락했느냐? 소생적인 아담 가정이 타락했으니 노아 가정 여덟 식구를 중심삼고 탕감복귀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이 사탄과 판가리 싸움을 할 수 있는 제 1차적인 기준이 노아 가정인 것입니다 또 제 2차적인 복귀의 출발기준과 심판의 출발기준 전부는 아브라함 가정입니다. 이것은 아담 노아 아브라함, 즉 소생 장성 완성의 3대이고 믿음의 조상을 찾아가는 데는 3대입니다. 아담이 믿음의 조상이 못 되었기 때문에 노아를 세웠고, 노아도 둘째 아들 함의 실수로 말미암아 깨져 나갔기 때문에 연장되어 오다가 아브라함에 이르러 믿음의 조상이 된 것입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19-118
36가정은 잃어버린 36대를 대신한 조상
아담 가정에서의 가인과 아벨의 싸움, 노아 가정에서의 셈과 함의 싸움. 아브라함 가정에서의 에서와 야곱의 싸움이 오늘날까지 연장되었습니다.

그러면 복귀 역사는 무엇을 해야 하느냐? 아담에서부터 노아, 아브라함까지의 역사가 실패했기 때문에 다시 찾아야 하는 것입니다. 종적인 인류의 역사는 36대입니다. 이 36대가 인류의 조상이 되어 있습니다. 이 36대를 횡적으로 설정하기 위해서는, 부모의 책임을 짊어지고 이 땅에 온 사람들이 역사적인 모든 것을 탕감해야 됩니다. 종적으로 쭉 내려와 가지고 탕감을 해서 다시 올라가야 됩니다. 탕감하여 복귀해야 된다는 것입니다. 복귀원리를 볼 때도 아담 가정에서부터 풀어 내려온 것입니다.

그러면 복귀해 오는데 제일 중심 문제는 무엇이냐? 처음에 노아를 중심삼고 했기 때문에 노아의 세 아들이 문제입니다. 그들이 우주를 중심삼고 제 1차로 심판할 수 있는 기준이 되었기 때문에 아담과 예수와 재림주가 만난 것입니다. 예수는 이 기준을 역사시대에서 가정을 중심삼고 탕감 했어야 합니다.

이제 우리 통일교회가 무엇을 해야 합니까? 노아의 세 아들을 만나야 되는 것입니다. 그리하여 노아의 세 아들을 찾아 세웠다는 기준이 결정되면 어떻게 되느냐? 아담 가정을 복귀했다는 조건이 성립되는 것입니다. 지금까지 6천년의 역사는 이 가정을 세우기 위한 것이기 때문에, 노아의 세 아들이 결정되면 역사적 과정으로 올라가서 그들이 조상으로 서야 되는 것입니다. 그 조상을 결정해서 심판권내에서 사탄의 참소를 받지 않는 승리권을 마련했다 할진대는 노아의 후손들까지도 사탄의 참소를 받지 않는 권내로 들어갈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리하여 전부를 복귀할 수 있는 것입니다.

이러한 관점에서 볼 때, 타락은 과거 현재 미래에서 현재를 중심삼고 과거가 잘려 나가고 미래가 잘려진 것입니다. 그것을 승리함으로 말미암아 역사적인 열매를 맺기 위한 출발을 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이렇듯 노아가정이 문제가 되어 있었기 때문에, 선생님도 성혼식을 하기 전에 노아의 세 아들을 찾아야 된다는 문제가 있었던 것입니다. 그 세 아들을 찾은 후에는 12제자를 찾아야 합니다. 세 아들을 합한 12사람을 찾아 축복해 주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럼으로 말미암아 아담에서 노아까지의 10대와 셈과 함을 합하여 12대(代)를 복귀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렇게 복귀됨으로 말미암아 과거와 현재가 갈라졌던 것이, 즉 영계와 지상이 갈라졌던 것이 연결된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여기에서 또 열둘이 찾아짐으로 말미암아 그들이 미래의 승리적 실체가 되기 때문에 재림적인 부활의 실체, 즉 복귀된 형(型)으로 등장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그 가정 중의 열두 가정은 아담 해와가 타락한 것 같이 자기들 멋대로 결혼한 사람들입니다. 그러므로 그 열두 가정 전부는 기혼가정들입니다. 기혼가정들이 축복을 받아 이 땅에 연결됨으로 말미암아 자기들 멋대로 결혼해서 살다 영계에 가 있는 영인들이 지상과 일체화되는 것입니다. 이때에는 영계에 있는 모든 선조들이 지상재림할 수 있습니다. 알겠어요? 그러니 영인들이 얼마나 좋아하겠습니까? 그래서 영통하면 춤추고 야단이지요.

그 다음에는 노아 가정에서부터 아브라함 가정까지 실수하여 잃어버린 것을 찾은 것입니다. 세 아들을 찾음으로서 노아 가정이 실수한 것을 다시 찾는 것입니다. 그런 아브라함의 대는 야곱 가정에서 끝나는데 아브라함, 이삭, 야곱의 3대가 이대로 올라서서 모든 종적인 역사를 횡적으로 탕감복귀하는 것입니다. 자기 멋대로 결혼한 기혼가정이 축복을 받음으로써 그러한 가정을 다시 찾았다는 조건이 세워졌기 때문에 그렇게 결혼해서 영계에 간 영인들이 복귀할 수 있는 기준이 세워진 것입니다. 다음에는 약혼단계에까지 와 있는 처녀 총각들을 축복해 주어야 하는데, 이것은 예수님과 성신이 약혼단계인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그러나 그들이 뜻을 바라는 내적인 심정적 기준이 깊이 있게 세워져 있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이단계에서 처녀 총각을 중심삼고 자기시대 이상의 타락한 모든 것들을 전부다 꿰어 놓고 대표로서 탕감하기 위해 36가정 축복이 있게 되었던 것입니다. 그러므로 36가정은 잃어버린 36대를 대신한 조상인 것입니다.

19-120
사탄에게 빼앗긴 아들딸을 찾기 위하여
조상들이 실수로 사탄의 참소조건에 걸린 것을 추방하는 것이 무엇입니까? 축복입니다. 축복이라는 승리적인 조건을 세워 사탄을 추방하는 것입니다. 사탄이 아담 해와 둘에게 침범했음으로 우리가 축복가정을 이룸으로 말미암아, 과거 모든 선조들의 실수를 탕감하고 지상에서 부활 승리권을 향한 출발을 볼 수 있습니다. 그래서 이제까지 영계에서 참소해 온 사탄의 문을 열 수가 있었던 것입니다.

선생님이 이러한 내용을 다 알아 가지고 실천해야 된다는 것입니다. 선생님이 아담이 되어야 하고, 노아가 되어야 하고, 아브라함이 되어 제물 드리는 자리에 나아가야 되는 것입니다. 그리하여 심정적인 기대를 상속 받아야 합니다. 그러지 않으면 그런 일이 불가능한 것입니다.

그래서 36대(代)가 실패했던 것을 복귀한 기준을 세웠다는 것입니다. 그렇게 해서 조상이 된 것인데, 조상만으로는 안 되는 것입니다. 싸움이 어디서부터 시작되었습니까? 아담 해와로부터 시작되었습니다. 아담 해와의 아들인 가인과 아벨로부터 싸움이 시작되었습니다. 그래서 이 세계를 이렇게 망쳐 놓았습니다. 그것은 무슨 말이냐 하면, 그 후손들이 전부 싸움을 하는 세계를 만들었다는 것입니다. 이것을 탕감복귀해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36대의 아들딸들이 하나님 앞에서 싸우지 않고 하나되었다는 조건을 세워야 합니다. 그래서 가인 아벨로 분립한 수, 즉 36을 2배한 수인 72가정을 세운 것입니다.

이 72가정이 세워짐으로써 가인과 아벨이 싸우지 않고 사위기대를 이룰 수 있는 역사적인 선조의 터전을 닦은 것입니다. 그래서 사탄을 방비할 수 있는 절대적인 기준이 세워졌다는 것입니다. 알겠습니까? 여러분은 72가정이 얼마나 심각한 자리에 서 있는 줄 압니까?

아담 해와가 타락할 때 천지가 깜깜했으니, 그것을 탕감복귀하기 위하여 통일교회의 축복(36가정)도 깜깜한 밤중에 해야 했기 때문에 문을 닫고 성혼식을 한 것입니다. 그때 ‘내 아들 내 놓아라, 내 남편 내 놓아라, 남의 아들딸 데려다가 무엇 하느냐’ 등 별의별 소리를 다 들었습니다 자기 자식 시집 장가 보내는 것은 부모 마음인데 통일교회의 선생님이 단독적으로 보낸다고 하니 아우성입니다. 바로 사탄세계의 아버지 어머니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아들딸을 사탄이 빼앗아 갔기 때문에 선생님이 다시 빼앗아 탕감복귀하는 것입니다. 역사적으로 잃어버린 아들딸을 다시 찾아 탕감복귀하기 위해서였습니다. 그래서 식을 빨리 마쳤던 것입니다. 탕감복귀역사이니 어쩔 수 없었습니다.

통일교회 원리를 보면 하나님이 통일교회와 함께 하시지 않을 수 없다는 것입니다.

통일교회를 반대하며 죽겠다고 애걸복걸하던 그 부모들이 요즘에 와서는 그때에 합동결혼은 잘못했지만 사위는 잘 얻었다고 말합니다. 결혼을 잘못했는데 사위를 잘 얻었다니 말이나 되는 소리입니까? 요즈음 나만 보면 그런 말을 해요.

19-122
통일교회가 가는 길은 전화위복의 길
예수님의 아버지 어머니가 예수님을 아버지로 모셔야 했습니다. 그런데 그들은 그렇게 하지 못했습니다. 예수님의 부모가 예수님을 보고 ‘야 이놈아, 너 어디에 가면 나에게 알리지도 않아? 하게 되어 있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어디를 가시나이까’ 해야 되는데 그걸 못했다는 것입니다. 그 원리를 알고 그 내용을 깊이 알아 보니 이렇게 되어 있습니다.

선생님이 누구보다 못해서 이런 일을 하고 있는 것이 아닙니다.

다음에는 가인 아벨의 문제입니다. 여기서부터 횡적으로 전개되어 나갑니다. 또 여기에 어려움도 따라옵니다. 그러나 당신의 아들딸들 합동결혼을 하는 것이 통일교회 원칙이기 때문에 승락을 하든 말든 알아서 하라고 일러주는 것입니다. 물론 탕감복귀하기 위해서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선생님이 욕을 많이 먹었지만 그 아들딸을 데려다 망하게 하지 않았고 결코 대한민국을 망하게 하지도 않았습니다. 이제는 지상에서 완전히 맺어졌기 때문에 그 터전 위에서는 사탄이 반대해도 그것 모두 전화위복으로 복귀되는 것입니다. 지금까지 그렇게 배워 알고 있지요? 통일교회의 가는 길에는 전화위복이란 명사가 붙어 다니게 되어 있습니다. 한때는 통일교회에 가면 유의해야 되느니, 뭐, 어떻다고 했습니다. 그러나 지금은 그런 의혹들이 벗겨졌어요, 안 벗겨졌어요?

예수님이 70문도를 파송하면서 세우고자 하셨던 세계적 이념을 지상에서 세울 수 있는 기준이 벌어졌습니다 예수님의 70문도와 72가정이 연결 지어졌지요? 12제자를 택한 것은 아담부터 잃어버린 36대를 살리기 위한것인데, 12제자를 잃어버리고 70문도까지 잃어버림으로 말미암아 조상도 잃고 아들딸까지 잃어버렸으니, 어디 가서 호소하겠습니까? 그래서 부활한 후에 120문도를 중심삼고 세계기대를 위해 출발한 것입니다.

그렇다면 120수는 무슨 수냐? 12수는 소생을 상징하는 수이고 70수는 장성을 상징하는 수이며 120수는 미래의 세계의 국가들을 대표하는 수입니다. 기독교 이념을 중심삼아 결성된 UN에 120개 국가가 가입하게 되면 끝날에 접어들었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지금 123개국이 가입되어 있습니다. 1967년의 고비를 중심삼고 124개국이 가입되어야 합니다. 통일교회 124가정의 수와 124개국의 수가 모두다 들어 맞아야 됩니다. 그렇게 되어 있습니다. 이것은 우연의 일치가 아닙니다. 하나님이 그렇게 만들어 놓으셨다는 것입니다. 그렇게 되지 않으면 통일교회 원리가 다 깨져 나가는 것입니다. 그러면 120문도의 120수는 무엇을 의미하느냐? 세계 각국의 군주의 수입니다. 그러므로 UN에 120개국이 가입하게 되면 끝날이 다 되어 가는 것입니다.

70여개국이 6수에서부터 해방의 출발이 시작된다는 것입니다. 왜 그러냐? 6수에서부터 사람을 창조했기 때문입니다. 모두가 그렇게 맞아 떨어지는 것입니다. 그렇게 맞추지 앉으면 안 됩니다. 그래서 124수를 맞게 되어서 우리 통일교회가 124가정 성혼식을 갖게 되었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