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100 to 18-130: 본향을 찾아서

본향을 찾아서
1967.05.28 (일), 한국 전본부교회

18-100
본향을 찾아서
여러분, 고향과 본향 가운데 어떤 것이 좋습니까? 고향은 어떠한 곳입니까? 자기가 머물렀던 곳, 떠나면 그리운 곳, 가고 싶은 곳, 살고 싶은 곳이 고향입니다.

오늘날 이 땅에는 많은 사람들이 살고 있는데, 그 모든 사람들에게 진정한 고향, 진정한 본향을 가졌느냐고 물었을 때 그렇다고 대답할 수 있는 사람이 있을까요? ‘이 곳은 우리 선조로부터 소원하던 곳이요, 세계만민이 그리워하고 오고 싶어하고 살고 싶어하는 곳이요, 천추만대의 후손들이 이곳을 떠나서는 살 수 없다’고 할 수 있는 곳, 그런 본향이 어디에 있느냐는 것입니다.

옛날 예수님은 유대 나라에서 태어나셨지만, 진정한 의미에서 볼 때, 유대 나라가 예수님의 본향이 되었습니까? 그곳이 예수님이 진정한 본향이 되었다면 그곳을 영원히 그리워하고 거기서 살고 싶어했을 텐데 어찌하여 예수님은 그 땅을 뒤에 두고 산지사방으로 유리고객하지 않으면 안 되었던고?

18-100
본향을 그리워해 온 인간
그럼 본향에 가서는 무엇을 할 것이냐? 본향에 가서 싸우자는 것이 아닙니다. 본향에 가서 손님 노릇하자는 것이 아닙니다. 사랑을 중심삼고 살자는 것입니다. 사랑은 무슨 사랑? 부모의 사랑이요, 부부의 사랑이요, 자녀의 사랑이요, 형제의 사랑이요, 친척들의 사랑입니다. 그 사랑을 중심하고 살자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고향을 찾아가서, 친척들이 거기에서 태어났고 거기에서 자랐기 때문에 그 친척들이 좋아하는 자연과 더불어 사랑의 원칙을 전수시켜 주어야 할 사명을 지니고 있습니다. 사람이 강한 사랑의 힘을 가지려면 고향과 인연을 가지지 않으면 안 됩니다. 그러기에 고향은 그리운 곳입니다. 고향을 그리워할 수 있는 권내에서 살고 있는 사람은 자신에 차 있습니다.

만일 그 고향이 만민이 그리워할 수 있고 만복이 깃들 수 있는 본향이라면 우리는 다른 곳을 찾아가려고 노력하지 않고 그곳에서 가정을 중심삼고 부모의 사랑과 형제의 사랑을 즐기면서 그 사랑 속에 잠겨 사는 생활을 할 것입니다.

역사가 지금까지 흘러오는 동안 수많은 사람들이 왔다 갔습니다. 그중에는 수많은 선지자들도 있었고, 또 선지자를 대표하는 성현들도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중에 ‘만민이 영원히 깃들 수 있는 본향땅이 이곳이다’라고 선포한 사람이 있었습니까? 모든 성현들도 지나갔고 그 성현들이 태어났던 고향도 잊혀져 버리고 말았습니다.

더 거슬러 올라가서, 인간의 시조 되는 아담 해와에게 ‘그대들은 진정한 본향을 가졌는가? ‘ 하고 묻는 다면 그들은 어떻게 대답하겠습니까? 그들 역시 본향을 못 가졌다고 할 것입니다. 본향이란 행복을 노래하고 부모의 사랑과 가정의 사랑에 잠겨 천지만물을 주관하면서 천지가 기뻐하는 기운데 영원토록 살고 싶은 곳입니다.

그러한 본향의 사랑을 중심삼고 살았던 아담 해와였느냐 할 때, 그들은 그러지 못 했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그들이 그런 본향에 살지 못한 것을 누가 보았습니까? 봤어요, 못 봤어요? 대답이 확실치 않은데 보았어요, 못 보았어요? 「못 보았습니다」 직접 보지는 못했지만 그렇다는 말은 들었지요? 그러면 말로만 듣는 것하고 직접 보는 것하고 어느 것이 더 정확합니까? 물론 듣는 것만으로도 알 수는 있겠지만, 보는 것이 더 정확합니다. 그러나 말은 누구나 들을 수 있지만 보는 것은 누구나 다 볼 수 없는 것입니다.

라디오 방송국에서 방송을 하면 누구나 다 들을 수 있지요? 그런데 듣는 것이 좋아요? 보는 것이 좋아요? 「보는 것이 좋습니다」 물론 듣는 것도 좋지만 듣는 것만으로는 만족하지 못합니다. 예를 들면 어떤 음악을 듣고 감명을 받으면 그 음악을 작곡한 사람을 보고 싶은 것입니다. 그렇지요? 그 작곡가를 보면서 그와 같이 그의 음악세계에 동조하고 싶은 것입니다. 그가 느끼는 음악세계의 깊은 맛을 같이 느끼고 싶어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오늘 저녁 여기 모인 여러분들은 아담 해와가 본향에서 살았는지, 못 살았는지 보아서 알아요, 들어서 알아요? 보아서 알아야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것을 직접 본 사람이 있느냐? 직접 본 사람은 아무도 없다는 것입니다. 인간의 종지조상(終之祖上)이 본향을 보지 못했으니 그 후손들도 보지 못한 것입니다. 때문에 인간세계는 타락한 세계요, 악의 세계인 것입니다.

18-102
본향은 어떤 곳이냐?
본연의 땅은 어떤 곳이냐? 악이 깃드는 곳이 아니요, 악과 절연하고 넘쳐 흐르는 본연의 사랑을 중심삼고 영원무궁토록 행복을 노래하며 사는 영원한 통일세계입니다. 그런데 그러한 곳에서 생활한 사람이 있었느냐? 한 사람도 없었습니다. 역사상에서 수많은 사람들이 그런 세계를 추구했지만 그러한 세계는 이 땅 위에 세워지지 않았습니다. 그 세계가 어떠한 세계라고 말을 한 사람은 많이 있었지만 몸소 실천해서 그런 세계를 이룬 사람은 없었다는 것입니다.

공자도 마찬가지요, 예수님도 마찬가지입니다. 예수님도 본향을 창건하기 위해서 오셨으나 그 본향을 창건하지 못하고 가셨던 것입니다. ‘천국이 네 마음에 있다’고 말씀은 하셨지만 예수님도 천국을 직접 보지는 못했다는 것입니다. 지금까지의 역사과정에서 왔다 간, 아무리 훌륭한 선지선열 성현군자라 하더라도 그 한 곳을 보지 못했고, 그 한 날을 맞지 못했으며, 타락한 선조로부터 악의 혈통을 이어받은 모든 사람들도 본향과는 아직까지 인연이 닿지 못했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모든 사람은 이상을 찾아 나가는 것입니다. 본향을 찾기 위해 나간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그 세계는 어떠한 세계일 것이냐? 서로 반목 질시하면서, 남이 잘되면 배아파하고, 남이 좋아하면 주겠다고 하는 그런 세계가 아닙니다. 한 사람이 잘 되는 것은 전체를 대표해서 잘 되는 것이요, 한 사람이 좋아하는 것은 전체를 대신하여 좋아하는 것이므로 한 사람이 좋아하면 전체가 좋아하는 것이요, 한 사람이 기뻐하면 전체가 따라 기뻐하는 곳이 본향인 것입니다.

그러면 지금까지 그러한 세계에서 생활하면서 살다 간 사람이 있습니까? 혹, 영적으로 그것을 체험한 사람은 있었을지 모르지만 실체적으로 그러한 생활을 한 사람은 한 사람도 없었습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보다 더 좋은 곳, 보다 더 좋은 세계, 이상세계를 찾아나가는 것입니다.

도의 길을 가는 사람들, 또는 신앙생활을 하는 사람들이 환경의 어려움을 무릅쓰고, 핍박의 화살을 받으면서도 찾아가겠다고 내적으로 외적으로 결심하고 다짐해 나가는 목적이 무엇이냐고 할 때, 답은 간단합니다. 더 좋은 곳, 더 좋은 곳을 찾아 나가자는 것입니다.

그러면 그곳은 어느 정도 좋은 곳이냐? 우리가 알고 있는 기준의 곳, 우리가 소망하는 곳일 것이냐? 만인류가 소망하는 곳일 것이냐? 만인류가 바라보는 기준에서의 그곳이 진정한 본향일 것이냐? 우리가 바라보는 기준에서의 본향이 우리 인류가 가야 할 최후의 종착점인 본향이냐? 이상세계냐? 이것은 아무도 모른다는 것입니다.

18-103
왜 양심은 끊임없이 명령하는가
세계의 각 민족마다 문화의 배경이 다르고 사회의 제도가 다르고 생활습관이 다르니만큼 본향의 세계를 구상하는 방향도 모두 다릅니다. 또한 우리 교회 사람들이 구상하는 방향과 세상 사람들이 구상하는 방향도 다릅니다. 세상 사람들이 육적이면 우리는 영적이요, 세상 사람들이 외적이면 우리는 내적입니다. 이렇게 볼 때 우리 교회와 그들의 방향이 다릅니다.

동서고금의 문화권을 이루어 나온 견지에서도 같은 환경권내에 사는 사람들이 지향하는 방향이 각각 다르니 만큼 그 소원하는 본향, 목적지도 역시 다른 것입니다. 그렇지만 모든 인간이 더 좋은 곳을 찾아간다는 것만큼은 다를 게 없습니다.

여러분이 생활에서 체험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은, 하루 24시간을 지내는 가운데 개인생활이든 사회생활이든 생활에 있어서 부딪치는 모든 사연을 여러분의 마음이 일일이 간섭한다는 것입니다. 그렇게 해서는 안 된다, 그리 가서는 안 된다, 이리 가야 된다, 그 사람을 재워서는 안 된다, 그 사람을 깨워야 된다 하는 식으로 양심은 일일이 간섭을 하는 것입니다.

그 양심에게 ‘무엇을 하기 위해서 그렇게 간섭하느냐’하고 묻는 다면 그 양심의 대답은 간단할 것입니다. ‘더 좋은 나를 그리워하고 더 좋은 내가 더 좋은 환경에서 살기를 그리워하기 때문에 밤낮없이 내게 명령하는 것이다’라고 대답할 것입니다.

그러면 양심은 어느 정도로 좋은 것을 바라고 명령을 하는 것이냐? 자신이 한푼도 없는 가난한 나그네와 같은 신세에 있다고 해서 자신이 깃들 수 있는 숙소를 마련해 주는 등 의식주 문제를 해결하는 것만으로 만족할 수 있겠습니까? 설령 당장에는 만족한다고 해도 그것이 일주일 동안 지속되지 못하는 것입니다. 그 당장에는 기뻐하고 좋다고 할는지 모르지만 자신의 인생 전체를 두고 볼 때 양심은 결코 거기서 쉬라고 하지 않는 것입니다. 그것이 안팎으로 영원히 안식할 수 있는 곳이라고 하지 않고 가라, 또 가라 하고 명령한다는 것입니다.

만일에 선생님이 억천만장자여서 대한민국의 3천만 민족은 물론 현재 복중있는 어린애까지도 쓰고 남을 정도의 많은 돈을 나누어 준다면 기분이 좋겠습니까? 안 좋겠습니까? 물론 좋을 것입니다. 그런데 그러고 나서 마음에게 이제 됐느냐고 물어 보면 어떻게 대답하겠습니까? ‘예 이제는 완전히 만족입니다’라고 하겠습니까? 절대 그러지 않는 다는 것입니다. ‘아! 세계의 30억 인류에게도 모두 나누어 주시오’ 할 것입니다. 마음에는 그런 소질이 많다는 것입니다.

우주 가운데에서 욕심이 제일 많은 분이 누구냐면 하나님입니다. 선생님이 오늘 아침에 성지에 올라갔을 때 동산에 가만히 앉아서 보니 작은 벌레들이 참 많이도 있더군요. 또 새들이 종알거리고 흙 냄새가 풍기는 데, 자연에 깃들어 있는 신비가 참 멋있다는 것을 느끼며 ‘하나님은 욕심 많게 많이도 창조하셨구나’ 생각했습니다. 잔디밭 같은 데 가서 가만히 들여다보면 조그만 벌레들이 왔다갔다하는 통로가 있습니다. 또한 잔디를 가만히 헤치고 보면 납짝한 벌레, 둥그런 벌레, 뾰족한 벌레등, 별의별 벌레들이 왔다갔다합니다.

그런데 그런 것도 모르고, 우리들은 푹신해서 좋다고 하며 잔디를 깔고 앉으면 거기에서 왔다갔다하던 총각 벌레, 아가씨 벌레들이 불쌍하게도 ‘어이쿠! 죽겠구나’ 하며 살려달라고 소리지를 거예요.

18-105
욕심 많으신 하나님
벌레들도 사람과 같이 호흡기관, 소화기관 등 잘 보이지는 않지만 인간이 갖추고 있는 조화스런 모든 기관을 다 갖추고 있습니다. 얼마나 신기합니까? 여러분은 그 세계가 단순하다고 생각할지 모르지만 결코 단순하지 않습니다. 앞으로 선생님은 세계적인 탐구가를 세워서 그런 세계를 탐구하게 하려고 합니다.

하나님께 욕심이 없다면 그런 것들을 지으셨겠습니까? 이 세상을 지으신 하나님은 욕심이 무한히 많다는 것입니다. 그러한 하나님이 예수님을 이 땅에 보내셨기에 예수님도 욕심이 무한히 많았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이 세계에 무한히 주려고 했던 것입니다. 하나님은 욕심이 많은 분이기에 가슴속에 품고 있던 욕심을 다 채우는 날에는 ‘깨야 쏟아져라’하며 한바탕 재미를 보실 것입니다. 하나님이 욕심이 많기 때문에 선생님도 욕심이 많습니다.

바다를 봐도 거기에는 별의별 어류들이 다 살고 있습니다. 또 지구도 크지요? 선생님이 수많은 나라를 다녀보니 지구상에는 가지각색의 인종이 살고 있는 데 참 흥미로왔습니다. 또, 그러한 지구에 비하면 태양은 얼마나 큽니까? 태양은 지구의 130만 배나 되는 데 그 태양이 얼마나 크겠느냐는 것입니다.

많은 행성들이 모여서 태양계를 이루고 있는데, 그 행성들이 움직이는 데는 제멋대로 움직이는 것이 아닙니다. 태양을 중심하고 어떤 행성은 일년에 몇 바퀴, 또 어떤 행성은 십년에 몇 바퀴, 백년, 천년에 몇 바퀴씩 빙빙 도는데 서로 부딪치지도 않고 또 자기 자리에서 어디로 떨어져 나가지도 않습니다.

그런 것에 비하면 이 지구성에 사는 사람들의 살림살이는 어린애들의 소꿉놀이 같은 것입니다. 사실 그 정도도 안 되지요. 먼지만큼도 안 되는 지극히 작은 것입니다. 그래도 거기에 딱딱 붙어 사는 사람들이 만물의 영장이라는 데 얼마나 처량합니까? 공원에 가서 어린이들이 타는 비행기만 타도 몇 바퀴 돌고 나면 어지러워서 야! 야! 하며 소리지르는 데 24시간마다 한 바퀴씩 도는 지구에 달라붙어서 사는 사람들의 모습을 상상해 보세요. 얼마나 우스워요? 그러면서도 만물의 영장이라고 내세우며 살아가는 사람들이 얼마나 처량합니까?

18-106
큰 마음을 가진 인간은 귀한 존재
온 천하 만물에게는 그러한 소질과 욕심이 없습니다. 우주 만상 가운데에서 영원히 살고 싶어하는 인간만이 그런 욕심을 가지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한 인간의 마음을 펼쳐 놓으면 얼마나 크겠습니까? 대한민국을 천개만개 몰아넣고 온 우주까지 몰아넣어도 다 채워지지 않을 것입니다. 거기에 제일 욕심 많은 하나님까지도 살짝 모셔들여서 편안히 눕혀 드릴 수 있는 아량을 가진 것이 인간의 마음입니다. 인간에게는 이런 고귀한 마음이 있기 때문에 만물의 영장이라고 하는 구나 하고 선생님은 과거에 생각했습니다. 만일 인간에게 그러한 마음이 없다면 그 인간은 비참할 것입니다. 아버지인 하나님이 누구인지 모르기 때문에 자녀로서 비참하다는 것입니다.

인간은 이러한 마음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귀한 존재입니다. 그러면 이 마음은 무엇을 명령하느냐? 악의 자리에는 죽는 한이 있더라도 들어가지 말라고 명령합니다. 악은 기필코 망하게 되어 있으며, 선은 아무리 핍박을 받아도 망하지 않고 승리하게 되어 있습니다.

역사상에 나타났던 모든 성인 현철들은 선한 입장에서 세상적으로 볼 때는 망하는 길을 갔습니다. 그렇지만 한 시대를 이끌어가는 시대적 운세와 세계적 운세는, 한 시대를 움직이는 것은 가능하지만 천운이 가는 길을 막지는 못하기 때문에 천운의 권내에서 일을 하는 사람은 세계적인 운세나 시대적인 운세를 뛰어넘을 수 있는 것입니다. 세계를 마음대로 움직일 수 있는 세계적인 운세도 천지를 창조한 하나님의 목표권내에서 움직이는 것입니다.

18-107
인간의 욕망의 끝
여러분 오늘 날씨가 참 좋지요? 대한민국의 날씨는 이렇게 좋지만, 전 세계의 날씨를 보면 태풍이 부는 곳, 해일이 일어나서 아우성치는 곳, 비가 오는 곳, 눈이 오는 곳 등, 별의별 일들이 다 벌어지는 곳이 있을 것입니다. 하지만 그런 현상은 지구의 대기권내에서 벌어지는 현상입니다.

그런데 이러한 작은 지구성을 넘어 거대한 우주를 바라보면 우주에는 어떠한 현상이 벌어지고 있겠습니까? 우리가 상상조차 하지 못하는 일들이 절대적이고 오묘한 조화 속에서 천태만상으로 벌어지고 있을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의 마음은 보다 더 좋은 것을 원하는 것입니다. 대한민국의 삼천만 민족이 가지고 있는 돈 보따리를 모두 갖다가 소원성취를 시켜 준다고 하더라도 마음에는 또 욕심이 있는 것입니다. 마음이 원하는 것이 어느만큼이냐면 하나님을 점령했다 하더라도 부족해서 ‘또 하라 또 하라’고 할 것입니다. 하나님까지 점령해도 안식하지 않는 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마음은 무엇을 찾아야 그것을 중심삼고 비로소 영원한 안정권을 취하여 안식할 것이냐? 원수를 정복해도 안식할 수 없고, 예수님을 점령해도 안식할 수 없고, 우주를 창조하신 하나님을 점령해도 안식할 수 없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마음이 목적 없이 움직이는 것은 아닙니다.

어떠한 것이든 목적 없이 작용하는 법이 없습니다. 여러분이 화학적으로 관찰해 보면 잘 알 수 있겠지만, 어떠한 분자가 움직이는 데도 목적이 없이는 절대 움직이지 않습니다. 자기에게 손해나는 작용은 절대 하지 않는 다는 것입니다. 서로에게 플러스가 되기 위해 움직이는 것이 천지법도입니다.

우리들의 양심이 작용한다는 사실을 부정 못할진대, 그 양심은 목적 없이 작용하느냐? 그렇지 않다면 과연 양심이 작용하는 목적이 무엇이냐? 그 목적의 최종점은 하나님께 있는 것이지 결코 자신에게 있는 것이 아닙니다. 즉, 인간은 하나님 속에 있는 타락하지 않은 사랑을 점령해야 성공했다고 할 수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이것을 확실히 알아야 합니다.

한 분이신 하나님, 그 하나님의 사랑을 몽땅 점령하여 내 할 일을 제쳐 놓고 역사의 한을 풀고 나서 안식할 때에는 하나님도 춤을 출 것이요, 세상도 모두 춤을 출 것입니다. 마음은 그러한 한 날을 꿈꾸는 것입니다. 참 근사하지요?

도의 길을 가는 궁극적인 목적도 하늘나라에 가는 것이 아니요, 하나님을 아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사랑을 점령하는 것입니다.

지극히 좋고, 지극히 높은 영원한 세계로 가고자 하는 것이 인간의 본능입니다. 그 본능이 누구를 닮아서 그러느냐면, 하나님을 닮아서 그런 것입니다. 천주(天主)의 욕망이 있고, 인간은 그 천주의 아들 딸로 지음받았기 때문에 인간의 본능은 그 기준을 닮아 난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인간의 마음은 영원히 하나님과 하나 되어서 참사람의 생활 기준에 접하기를 원하고 참다운 마음으로 생활할 수 있기를 원하는 것입니다. 그리하여 참다운 마음의 중심이 서게 되면 참사랑에 영원히 접붙이고자 하는 것이 인간의 욕망입니다.

18-108
하나님과 인간은 아버지와 아들
지금까지 세계적으로 많은 종교가 있는 데 그 종교들은 무엇을 가르쳐 주어야 하느냐? 모든 종교에서는 맨 먼저 신에 대해서 가르쳐 주어야 합니다. 신에 대하여 가르쳐 주지 않는 종교는 종교가 아닙니다. 신에 대해 가르쳐 주는 데도 막연하게 가르쳐 주는 종교는 불확실한 종교입니다.

그러면 어떻게 가르쳐 주는 종교가 참된 종교냐? 하나님이 계시다면 어떠한 분으로 계시는 가, 하나님의 인격은 어떠한가, 또 하나님의 사랑은 어떠한가 등에 대해서 가르쳐 주는 종교가 참된 종교입니다. 세계적인 종교들 가운데서 이런 내적인 깊은 사연을 가지고 나온 종교가 있다면 그것은 기독교입니다.

그러면 기독교에서는 하나님을 어떻게 가르쳐 왔습니까? 아버지라고 가르쳐 왔습니다. 그래서 ‘하나님 아버지’라고 부르는 것입니다. 땅 위의 인간들은 그 아버지와 동격의 입장으로 오시는 주님을 신랑으로 모셔야 합니다. 그리고 그 신랑을 모실 신부는 하나님을 믿는 성도들입니다. 이렇게 기독교는 온 가정의 중심되는 기준을 선포해 놓았던 것입니다. 왜 그랬겠습니까?

많은 종교의 도주들이 찾아가는 곳은 마음이 영원히 깃들 수 있는 곳입니다. 만일 그들의 종교에도 진리가 있다면 그 진리는 하나님을 확실히 가르쳐 줄 수 있는 것이어야 합니다. 또 하나님과 인간과의 관계를 확실히 가르쳐 줄 수 있는 것이어야 됩니다. 또한 가르쳐 줄 때에도 사랑을 중심삼고 가르쳐 주지 않으면 그것은 유언비어에 불과합니다. 가르쳐 주는 교리들의 차이에 따라서 종교의 분열이 생겨나는 것입니다.

수많은 종교 가운데 기독교를 중심삼고 예수님이 이 땅에 오셔서 ‘나는 하나님의 독생자다, 인간 세상에 하나님의 아들로 태어난 사람은 나밖에 없다’고 선포를 했습니다. 아버지의 아들로 태어났다는 말은 아버지의 뼛골을 받고 아버지의 혈육을 받아서 태어났다는 것입니다. 그 말은 하나님 아버지의 피가 동하고, 살이 엉클어지고, 뼈가 마주쳐서 태어났다는 말입니다.

부모와 자식 사이는 자식이 슬퍼하면 부모는 더욱 슬퍼하고 자식이 좋아하면 부모는 더욱 좋아하는 사이입니다. 그런 부자의 인연은 세상의 그 어떤 공식이나 법도로도 끊을 수 없으며 어떤 권세나 명예로도 부정할 수가 없습니다. 그렇지 않겠습니까? 자기 아버지인데 어느 누가 나타나서 칼을 가슴에 들이대며 네 아버지가 아니라고 대답하라고 협박하더라도 설사 그 자리를 모면하기 위해서 말로는 아버지를 부정할는지 모르지만 속으로는 ‘내 아버지다. 나는 그의 자식이다’ 하고 더욱 다짐할 것입니다. 이런 것은 그 누구도 부정할 수가 없습니다. 우주를 혁신시킬 수 있고, 우주를 혁명할 수 있고, 우주를 파탄시킬 수 있는 두뇌를 가진 자라 하더라도 이것을 부정할 수는 없습니다. 부자의 인연을 부정할 수 있는 근거는 그 어디에도 존재하지 않는 것입니다.

이런 관점에서, 예수님께서 이 땅 위에서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부른 것은 만대(萬代)를 다스릴 수 있는 특권적인 중심 사명을 갖고 왔다는 사실을 만유 앞에 천명하는 것이었음을 알아야 합니다.

18-110
기독교의 목적
여러분이 하나님 아버지를 찾아나가는 과정에서는 신랑 신부의 입장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기독교는 신부의 종교입니다. 다른 종교가 갖지 못한 사랑의 인연을, 아버지의 뼛속 깊이깊이 알뜰하게 담겨져 있는 사랑의 인연을 인간 세상에 소개해야 될 신랑 신부의 종교입니다. 많은 종교가 진리로서 자유 또는 관념적인 이상을 논했지만, 사랑이 직접적으로 생활무대에 엉클어져서 사랑으로 뒤넘이치는 싸움의 역사를 거쳐 나가는 종교는 기독교뿐인 것입니다.

예수님이 신부를 찾아 나가는 과정에서는 신랑이지만, 혼인 잔치가 끝나고 난 후에는 형제입니다. 남자에게는 형이 되고 여자에게는 오빠가 된다는 것입니다. ‘형님’ ‘동생’ 할 때는 벌써 주종관계가 성립되는 것입니다. 횡적인 입장으로 찾아와서 주종관계를 확립하는 것입니다.

입체적인 세계만 망상하는 종교는 이상적인 종교가 아닙니다. 입체적인 세계의 내용을 갖고 횡적, 평면적인 세계의 실상을 토대로 한 종교가 아니면 이상적인 종교가 못 되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사람은 마음과 몸으로 되어 있기 때문에 마음은 입체적인 세계와 관계를 갖고 몸은 평면적인 세계와 관계를 가져서 두 세계에 이상적인 터전을 갖추어야 하기 때문입니다. 그것이 사랑의 세계인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을 만난 다음부터는 형제 관계로 서게 되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예수님이 주님이면 좋겠습니까? 형님, 오빠면 좋겠습니까? 신랑 신부의 관계라는 것은 언제나 위험한 것입니다. 부부는 언제든 이혼이 성립될 가능성이 있습니다. 그렇지만 형제나 남매관계가 갈라질 수 있습니까? 아무리 끊으려고 해도 피가 같기 때문에 끊을 수 없는 관계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형제나 남매 관계가 더 좋은 것입니다.

지금까지 기독교가 찾아 나온 것이 무엇이냐? 기독교가 그렇게 고대해 나오는 것이 무엇이냐? 그것은 하나님을 보시는 것이요, 하나님이 보내신 신랑을 모시는 것이요, 그 신랑을 맞이할 신부를 마련하는 것입니다. 또한 그 자녀들을 찾는 것이요, 그들과 같이 즐길 수 있는 종족을 마련하는 것이요, 그 종족과 더불어 세계를 복귀할 수 있는 민족을 편성해서 그들과 더불어 하나의 세계국가를 편성하는 것입니다.

수많은 종교들이 보다 더 많은 전도를 하려고 하는 목적도 거기에 있습니다. 도를 중심삼고 세계인을 규합하자는 것입니다. 그래서 세계의 모든 종교들은 전도를 통하여 선민을 만들고 그 다음에는 세계를 하나의 고향으로, 세계인을 친척으로 하나님의 백성으로 만들자는 것입니다. 거기에 우리 한국 민족은 종손입니다. 종교를 믿는 후손들이라는 것입니다. 또, 종자(宗子)들입니다. 그렇다고 해도 서양 사람들 즉 백인들, 흑인들과 하나 되어야 합니다. 하나 되는 데는 무엇으로 하나 되느냐면 사랑으로 하나 되어야 합니다. 그 사랑은 하나님의 피와 살이 같이 통하는 사랑이어야 합니다.

만민은 그 살아가는 환경이 다를 뿐이지 인간이라는 점에서는 백인이든 흑인이든 마찬가지입니다. 만일 어떤 사람이 흑인 여자와 결혼해서 살면서 흑인 아이를 낳고, 그러다가 다시 백인 여자와 결혼해서 백인 아이를 낳았다고 하면 그 사람은 백인의 아버지도 되고, 흑인의 아버지도 되는 것입니다. 즉, 그들의 아버지는 한 아버지라는 것입니다. 어떻게 해서든지 세계 인류가 한 아버지에 의해 태어난 한 형제라는 심정이 우러나게 하지 않으면 세계인의 통일은 불가능하고, 만대의 규합은 불가능합니다.

세상의 청년 남녀들을 가만히 보면, 어떤 사람을 사랑하다가도 그 사람보다도 더 좋은 사람이 나타나게 되면 마음이 변하여 그 사람을 사랑해 버립니다. 또 안팎의 모든 조건이 갖추어진, 천하가 다 존중할 수 있는 상대가 나타나게 되면 자기가 지금까지 좋아했던 사람보다도 그 사람을 좋아하고 싶어한다는 것입니다. 사람의 욕심이 그렇다는 것입니다. 아마도 세상의 남편들은 자기 부인이 예수님 믿는 것도 못마땅해할 것입니다. 왜냐하면 자기 부인이 남편보다도 예수님을 더 사랑하게 되거든요. 또 예수님과 하나님을 두고 봐도 마찬가지입니다. 예수님께서 ‘하나님을 사랑하지 말고 나를 위해서 기도하라’고 하시겠습니까? 신랑인 예수님보다도 아버지인 하나님을 더 사랑해야 되는 것입니다.

18-112
우리가 하나님의 사랑에 연결되면
신랑이 더 좋으냐 아들딸이 더 좋으냐 할 때, 신랑보다는 아들딸이 더 좋은 것입니다. 부부는 갈라질 수 있으나 아들딸과는 갈라질 수 없습니다. 족보에서 파낸다 하더라도 핏줄을 이어받았기 때문에 갈라질 수 없는 것입니다. 신랑 신부는 이혼하고 헤어지면 잊어버릴 수도 있지만 아들딸은 시간이 흐르면 흐를수록 더 그립고 보고 싶어지는 것입니다. 이러한 사실은 자녀를 가져 본 사람이면 누구나 잘 알 것입니다. 사탄세계에 사는 부모들도 그것만은 부정하지 못할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께서도 아들딸을 좋아하시는 것입니다.

그러면 우리는 예수님을 누구로 바라는 것입니까? 신랑으로 바라는 것입니다. 또한 아버지이길 바라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신랑의 사랑을 밟고 넘어서서 아버지의 사랑, 하나님의 사랑을 찾아가야 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땅 위에 오신 것은 예수님의 사랑만을 소개하기 위해서 오신 것이 아니라, 만민으로 하여금 예수님의 사랑을 통하여 하나님의 사랑을 받게 하기 위해서 오셨던 것입니다. 그러기에 로마서 8장 39절에 “높음이나 깊음이나 다른 아무 피조물이라도 우리를 우리 주 그리스도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을 누구도 끊을 수 없으리라”고 했던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을 누구도 끊을 수 없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만의 사랑에서는 하나님의 사랑을 끊을 수 없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최후의 목적은 하나님의 사랑을 받는 것입니다.

통일교회 교인들은 사랑 받기를 좋아합니까, 싫어합니까? 세상 사람들이 말하기를 통일교회는 벌거벗고 춤춘다느니, 뭐 어떻고 어떻다느니 별의별 욕들을 다 하는 데 솔직히 말해서 선생님은 춤 한번도 춰 보지 못했습니다. 그런데도 그런 소리를 들었습니다. 여러분은 사랑받기를 원하지 않습니까? 물론 통일교인들도 하나님의 사랑을 받기 원합니다. 그런데 그 하나님을 봤어요? 또 마음을 봤어요? 하나님이나 마음을 보지는 못했지만 분명히 존재합니다. 없어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없으면 큰일납니다. 만약 어떤 사람에게 ‘당신은 마음이 없는 사람이야’라고 한다면 그 사람은 기분이 좋겠습니까? 마음이 없는 것은 죽은 몸인 것입니다.

18-113
우주만상이 작용하는 목적
사람의 마음은 운동을 합니다. 여러분들도 창조원리를 들어서 잘 알겠지만, 주체와 대상이 서로 상대기준이 되어서 잘 주고 잘 받으면 힘이 생기게 됩니다. 힘이 생기게 되면 서로 하나가 되고, 하나가 되면 번식을 하게 되는 것입니다. 주체 혼자서는 절대로 작용하지 못하는 것입니다. 누구를 좋아하는 것도 마찬가지로 서로의 힘이 작용하는 것입니다. 누구를 좋아한다는 것은 그 사람과 나의 마음이 들어맞았다는 것입니다. 좋아하게 되면 까닭없이 마음이 왔다갔다하는 것입니다. 그 마음이 얼마나 강한지 몸을 끌고 다니는 데 ‘이 사람 아니면 나 죽는 다’는 식으로 죽음을 뛰어넘어 몸을 끌고 다닙니다. 그것은 세상에서 말하는 운명이라는 것이 그렇게 작용하기 때문입니다.

선한 사람은 선한 사람끼리 악한 사람은 악한 사람끼리 좋아하는 것입니다. 세상의 모든 것이 그렇다는 것입니다. 예를 들면, 운동 경기를 할 때에 잘 뛰는 사람은 잘 뛰는 사람끼리 모여서 달리기를 하고, 씨름판에서는 씨름을 잘하는 사람끼리 모여서 씨름을 하는 것입니다. 이와 마찬가지로 우리의 마음도 그냥 아무렇게나 움직이는 것이 아닙니다. 반드시 주체와 대상이 서로 어떠한 작용을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작용은 손해보기 위해서 하는 것이 아닙니다. 여러분 생각해 보세요, 어느 누가 손해보기 위해 좋아하겠어요? 장사를 하는 것도 손해 보기 위해서 하는 사람은 없는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우리의 마음도 손해 보기 위해서 움직이는 것이 아닙니다. 선생님이 지금 여러분에게 말을 하고 있는 것도 손해보기 위해서가 아니라 무엇인가 이익을 남기기 위해서 입니다. 이와 같이 모든 존재가 손해보지 않고 무엇인가 이익을 남기려고 하는 것은 전부다 하나님의 섭리적인 작용입니다.

어느 누가 어떤 일을 하더라도 손해보기 위해서 하는 일은 하나도 없습니다. 아이들의 행동도 자세히 보면 그렇습니다. 아이들이 그것을 어떻게 알고 그러겠습니까? 또 동물도 그렇습니다. 동물들도 자기의 이익을 위해서 움직이는 것입니다. 여러분들이 명동에 나가서 오고 가는 사람들을 붙들고 ‘당신 오늘 얼마나 손해보았소? ‘ 하고 물어보면 물음을 받는 그 사람은 얼마나 기분 나빠하겠습니까? 손해보지 않는 사람에게 물어봐도 기분 나빠할 텐데 실제로 손해를 본 사람에게 ‘오늘 손해를 봤으니 잘 됐구만’한다면 욕을 할 것입니다. 왜냐하면 인간은 누구나 실제로 손해를 봤다 하더라도 손해봤다고 말하기를 싫어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이렇듯 작용하는 근본 목적이 무엇이냐? 보태기 위해서입니다. 전부다 보태가 위해서 작용한다는 것입니다. 작용하는 것은 전부다 이익을 보기 위해서이지 절대로 손해보기 위해서가 아닙니다.

모든 것은 평등한 것입니다. 그래서 근본은 평화와 화목, 충(忠) 화(和)인 것입니다. 평등은 수평이라고 말할 수 있는 데 수평은 그냥 이루어지지 않습니다. 상하 관계, 고저 관계에 있던 것이 어떤 작용을 거쳐야만 수평이 되는 것입니다. 고저가 있기 때문에 반드시 높은 곳에서 받아서 낮은 곳에 보태는 작용을 거쳐야만 수평이 되는 것입니다.

그러면 인간을 두고 볼 때 수평이 되어 있느냐? 안 되어 있습니다. 인간은 낮은 곳에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높은 곳으로부터 받아야만 수평을 이룰 수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인간은 고차적인 이념을 찾아야 하는 것이고 고차적인 정신의 위안처를 가져야 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20세기를 능가할 수 있는 , 고차적인, 세계적인 종교가 나타나야 하는 것입니다.

수평은 그냥 되는 것이 아닙니다. 다른 곳으로부터 힘을 보급받아야 됩니다. 자기 자체내에서 보급을 받을 수 없기 때문에 보급을 해 주는 곳이 있어야 되는 것입니다. 그 보급을 해주는 곳은 높은 곳입니다. 높으면서도 나쁜 곳이 아니라 높으면서도 좋은 곳입니다. 그곳은 만민이 전부 가고 싶어하고 살고 싶어하는 곳, 다시 말하면 만민이 이상(理想)하는 곳입니다. 그러면 도대체 그 이상은 뭐냐? 잘 먹는 것도 아니요, 잘 자는 것도 아니요, 참사랑입니다.

18-114
인간의 이상은 사랑으로 이루어진다
여러분이 옷을 빼앗아 입어도 싫어하지 않을 정도로 가까운 친구네 집에 찾아가면 어떻습니까? 마음과 몸이 쪼그라드는 것이 아니라 세포까지도 편해질 것입니다. 부모의 품이 그리운 것도 그것 때문입니다. 그렇지만 얼마 동안만 지나게 되면 어떻습니까? 편안하던 마음이 조금씩 조금씩 쫄리기 시작하는 것입니다. 그러다가 이럴 수도 저럴 수도 없는 상태에서 할 수 없이 자기 집으로 돌아오게 됩니다. 이게 평(平)입니까? 화(和)입니까? 평이란 모든 것이 풀리는 것입니다. 안식이라는 것도 마찬가지입니다. 모든 끄나불이란 끄나불은 다 풀어 놓는 것이 안식입니다.

지금까지 인간들은 역사과정에서 본연의 마음을 중심삼고, 본연의 마음이 그리워하는 사람을 중심삼고 단 하루도 안식해 본 적이 없었습니다. 그래서 인생은 고해라고 하는 것입니다.

이런 것을 볼 때에 인간은 하나의 기준을 찾아야 합니다. 그리하여 사랑하자는 것입니다. 그러나 사랑하는 데는 두 사람만 있어서는 안됩니다. 아버지와 아들딸만 있어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사람이 서로 사랑하자면 사람도 모여야 되고 춤과 노래도 필요한 것입니다. ‘사랑한다는 말만 하면 되지 무슨 노래가 필요하겠느냐’고 할지 모르지만 감정을 넣어서 사랑을 표현하기 위해서는 노래도 필요한 것입니다. 또 ‘가만히 서서 있으면 됐지 춤은 왜 추어야 하느냐? ‘ 할지 모르지만 춤도 필요한 것입니다.

사람이 좋은 것에 도취되어 사랑하는 마음을 가지고 창(唱)이라도 한번 불러보면 그저 뼈속에서부터 흐물흐물해지고 세포들이 들썩들썩하고 눈이 어물어물해지고 눈물까지 나오는 요동이 벌어지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면 그런 것들이 왜 필요하느냐?

아버지와 자식이 둘이서 들여다보기만 해도 좋지 않느냐? 그것도 사랑은 사랑이지만 그것만으로는 안 되는 것입니다. 그 자리에서 천지의 조화가 벌어져야 하는 것입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하나님과 나, 아버지와 자식, 둘만 있어서는 안 됩니다. 부대조건이 많이 필요하다는 것입니다.

아버지가 있으면 어머니가 있어야 되고, 남자가 있으면 여자가 있어야 됩니다. 만약 여자들만 있는 세상이라면 여자들은 여자들만 자꾸 만나는 것이 싫을 것입니다. 또 남자들끼리만 살게 되면 남자들도 역시 그럴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아버지가 있으면 어머니가 있어야 되고, 부모님이 있으면 자식이 있어야 되고 그 다음에는 형제자매가 있어야 됩니다.

그러면 ‘나’는 누구를 위해서 있어야 하겠습니까? 부모님을 위해서이겠습니까? 형제를 위해서이겠습니까? 과연 누구를 위해서이겠습니까? 나는 바로 나 자신을 위해서 있는 것입니다. 아버지와 어머니도 나를 위해서 있는 것이요, 형제자매도 나를 위해서 있는 것이요, 모두가 다 나를 위해서 있는 것입니다. 이렇게 생각하면 좋아서 입이 저절로 벌어집니다.

인간에게 욕심이 얼마나 많습니까? 하나님의 사랑을 보따리째로 받아서 누구에게도 주지 않고 혼자 가지려고 하는 사람들인데 아버지를 위해서 태어났고, 선생님을 위해서 태어났다고 한다면 얼마나 기분 나빠하겠습니까? 몇천년 동안 우리 조상들이 왔다 갔지만 모두가 나 한 사람을 위해서 왔다 갔던 것입니다. 그러니 내가 얼마나 중요합니까?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사람이 만일 온 천하를 얻고도 제 목숨을 잃으면 무엇이 유익하리오(막 8:36)”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면 하나님은 누구를 위한 하나님이겠습니까? 하나님을 위한 하나님이 아니라 나를 위한 하나님이라고 하고 싶은 것이 인간의 욕심입니다.

선생님이 집에서 애기들을 돌보아줄 때, 큰아이들을 먼저 품에 안아주면 어린 동생이 그걸 보고 ‘아빠 나도 안아줘요’ 합니다. 오빠나 언니를 안고 있는 팔을 그 조그만 눈으로 뚫어지게 쳐다보면서 ‘아빠 나도 안아줘요’ 그럽니다. 이런 것을 볼 때에 본향의 땅을 그리워할 수 있는 사랑의 본질이 그렇게 되어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예수님을 믿는 것은 누구를 위해서이겠습니까? 하나님을 위해서? 아니면 예수님을 위해서? 아닙니다. 나를 위해서, 나 때문에 믿는 것입니다. 그러면 세계기독교통일신령협회를 믿는 것은 누구를 위해서 믿는 것입니까? 이것 역시 나를 위해서 믿는 것입니다. 내가 이루어야 할 세계는 본연의 세계요, 그 본연의 세계는 어차피 이루어야만 되는 데 그 세계를 나 혼자서 이루려고 한다면 얼마나 힘이 들겠습니까?

그러나 그 단체에 소속되어 있는 모든 사람들이 힘을 합하면 그 세계를 이룰 수 있는 것입니다. 그렇다고 해서 예수님이 나 때문에 세상에 나타났고, 하나님도 내 속에 들어 있고, 세계도 내 손에 달려 있으니 오직 택함받은 사람은 나밖에 없다고 생각한다면 큰 잘못입니다. 내가 주체이니만큼 주체와 대상이 잘 주고 잘 받으면 완전히 하나가 됩니다. 그래서 하나 된 자리에 서게 되면 그도 나요, 나도 그가 되는 것입니다. 이것은 사랑의 법도로 말미암아 이렇게 귀결되는 것입니다.

도의의 조건을 찾으려고 선후 관계를 논의하고 심문하는 세계는 불안한 세계인 것입니다. 사랑을 중심삼고 선후 관계가 완전히 하나 되어 주고 받을 수 있는 자리에 서서, 자신의 주위를 둘러보면 나 이외에는 아무도 없는 것같이 보이지만, 언제나 주체가 있다는 것을 명심해야 합니다.

18-117
본향 땅을 찾아가려면
그러면 온 세계에 있는 수많은 사람들은 무엇을 찾아가느냐? 본향의 땅을 찾아가는 것입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제물을 드려야 하는 것입니다. 옛날에 가인 아벨이 하나님 앞에 제물을 드렸던 것도 본향을 찾아가기 위한 것이었습니다. 노아가 120년 동안 방주를 지었던 것도 본향을 찾아가기 위한 것이었습니다. 본향을 찾아가는 길에 방주라는 조건물이 필요했던 것입니다. 본향을 찾아가는 길을 단축시키는 일이라면 무엇이라도 해야 했던 것입니다. 아브라함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인간이 가야 할 궁극의 목적지인 본향 땅을 찾아가기 위해서는 자기의 고향 산천도 자기의 조국 강토도 버려야 되는 것입니다. 본향은 둘이 될 수 없기 때문에 자기가 바라보던 이상세계도 버려야 되는 것입니다.

만민이 공히 안식할 수 있는 본향의 천지를 향하여 나가기 위해서는 자신의 모든 개성도, 자신의 일개 나라도, 내 자신의 모든 꿈도 버려야 하는 것입니다. 자신의 꿈을 중심삼고 계대를 세워 나가려고 한다면 본향을 찾아 나가는 것은 불가능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모든 것을 버리고 나서 일편단심으로 본향 땅을 찾아 나가야 됩니다. 더더욱 참다운 곳을 찾아가겠다는 , 그 일념으로 먹고, 그 일념으로 자고, 그 일념으로 희로애락을 느끼는 생활을 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러기 위해 아브라함은 자신의 고향인 갈대아 우르를 버렸고, 모세 역시 자기 민족의 본향 땅 가나안 복지를 찾기 위해서, 만민이 깃들 수 있는 본향의 기틀을 마련하기 위해서 호화찬란한 바로의 궁중과 왕자의 자리를 모두 버리고 광야 생활을 해나왔던 것입니다. 그리고 이스라엘 민족이 40년 동안 광야에서 유리고객한 것도 그들의 고향, 본향 땅을 찾아가기 위해서였으며, 지금까지 수천년 동안 나라없이 세계를 유리고객하였던 것도 역시 소망의 본향 땅을 찾기 위해서였습니다.

세계에 널려 있는 수많은 민족들이 이동하거나 혁명을 일으켜서 역사가 변천해 온 것도 역시 본향 땅을 찾기 위함이요, 본향의 세계로 가기 위함이었습니다. 이처럼 그 길은 세계 인류가 가야 할 공동운명의 길이기 때문에 너나할것없이 모두 그 운명의 길을 가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면 그 운명을 해결해 나가야 할 주인공들이 누구겠습니까? 그 길에는 하나님이 함께하시고 계시므로 그 하나님을 중심삼고 도의 길을 책임져 나가는 지도자들과 도의 길을 따라 가는 사람들이 그러한 책임을 져야 합니다. 그들에게 본향 땅을 세계적으로 마련해야 할 사명이 있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신앙자들로서 세상을 정화할 수 없는 사람들은 인간세계의 인륜적인 종교인들밖에 되지 않는 다는 것입니다.

사람은 마음과 몸이 하나 되어야만 하나의 인격을 이룰 수 있습니다. 그 인격은 몸 자체만으로는 나타날 수 없는 것입니다. 인격이 나타나기 위해서는 마음을 통해서 몸이 반응해야 합니다. 그러므로 인격은 마음과 몸을 통해 평면적인 환경에서의 인간관계를 중심삼고 사회성을 통하여 나타나게 되는 것입니다.

종교는 내적인 분야, 즉 관념의 세계에 대해 가르쳐 주고 있는 데, 그것을 실천할 수 있는 사회적인 실천장이 필요한 것입니다. 지금까지의 종교는 영적인 면, 즉 내세만을 추구해 왔지만 사람은 내세에 가기 이전에 현실에서 살고 있는 것입니다. 현실 세계를 통해서 내세로 들어가게 되어 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지금까지 종교는 내적 세계를 통해서 외적 세계, 현실을 그려 나왔던 것입니다. 왜 그랬느냐 하면 외적 세계가 잘못 되었기 때문입니다. 외적세계는 이미 사탄에 의해 점령당했기 때문에 거꾸로 내적 세계를 먼저 준비해서 외적 세계를 추구해 나온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전인류는 본향을 찾아가야 할 운명에 놓여 있다는 것을 여러분은 알아야 합니다.

역사상에 나타났던 수많은 선지선열들은 본향 땅을 찾기 위해 죽음의 길도 개의치 않았습니다. 그들은 참되게 숨져 갔습니다. 온갖 고난과 죽음의 길을 개의치 않고 본향 땅을 찾아 나가다가 순교를 당한 선지선열들이 많다는 것입니다.

18-119
믿는 사람의 책임
본향 땅을 찾아가는 데는 혼자서 갈 수 없습니다. 반드시 역사적인 인연을 거쳐가야 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 인간들은 역사적인 인연을 갖고 나가는 것입니다. 자기 조상의 공적이 있으면 조상을 자랑하고 싶고, 자기 부모의 공적이 있으면 부모를 자랑하고 싶고, 부모가 이름이 났으면 부모의 이름을 들어서 누구의 아들이라고 하고 싶은 것입니다. 이 말은 우리가 역사적인 인연을 존중시하고 있다는 말입니다.

오늘이 있는 것은 내일을 준비하기 위해서 있는 것이요, 어제를 빛내기 위해서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과거의 사실을 부정하는 자리에서는 것이 아니라 과거의 사실을 인정하는 자리에 서야 한다는 것입니다.

역사노정에서, 과거를 참되게 인정할 수 있는 것이 무엇이냐? 이것을 찾다 보니 참된 길을 찾게 되고, 참된 길을 찾다 보니 참된 종교를 찾게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참된 종교의 터전 위에서 본향을 소개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사랑을 빼놓고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이런 관점에서 보면 기독교는 아주 중요한 위치에 서 있는 것입니다.

그러면 기독교의 사명은 어디에 있겠습니까? 믿는 사람을 생명시하고 서로 사랑하며 살고, 사랑으로 말미암아 화하고, 사랑을 전해야 하는 것입니다. 또한 그 사랑은 모든 생명의 원천입니다.

그러면 기독교를 믿는 사람들은 어떤 입장에 서야 되느냐? 사랑의 본향을 찾아가는 데에 영향을 주는 입장에 서야 합니다. 그런 입장에 서서 신앙생활을 하지 않으면 안 됩니다. 이런 것을 보면 사랑에 의해서만이 화평이 이루어지고 사랑에 의해서만이 모든 사람이 평등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것은 사랑이 없어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사랑에는 어떠한 사랑이 있느냐? 내적 사랑과 외적 사랑, 즉 정신을 위한 사랑과 물질을 위한 사랑이 있습니다. 사람도 내적인 사람과 외적인 사람으로 구분할 수 있습니다. 이것은 오색 인종의 어느누구나 다 마찬가지입니다.

그러면 우리가 사랑을 하는 데는 어느 정도로 사랑해야 되느냐? 그보다 우선 우리가 사랑할 수 있는 사람이 되려면 먼저 하나님의 사랑을 차지할 수 있는 자리에 서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하나님이 사랑하시는 것과 같은 입장에서 만민을 사랑해야 됩니다. 하나님이 만민을 형제처럼 사랑하고 만민을 자녀처럼 사랑하시는 것과 같이 우리들도 그 아버지와 같은 입장에 서야 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통일교회에서는 부모의 심정을 갖자고 말하는 것입니다.

부모의 심정을 갖기 위해서는 부모의 심정이 어떤 것인지를 알아야 하고, 부모의 심정을 찾기 위해서는 본향 땅에 가야 하는 것입니다. 다른 곳에서는 찾을 수 없습니다. 오늘날 이 땅에 사는 수많은 사람들은 어차피 본향에 가서 부모의 심정을 찾아야 합니다. 아무리 도를 추구하고, 세상 일에 능숙하고 능통하다 하더라도 부모의 심정을 통하지 못하고서는 자식이 될 수 없습니다.

사람은 부모의 사랑으로 인하여 태어나는 것입니다. 우리들은 부모의 사랑을 통하여 태어나긴 태어났는데 거짓 부모의 사랑을 통하여 태어났습니다. 이 말은 본향의 원칙을 중심한 정상적인 부모의 사랑을 통하여 태어나지 못했다는 것입니다. 본향을 찾아가는 도중에 타락했습니다. 본향 땅에 들어가 안식한 후의 부모의 사랑을 중심으로 태어나야 했는데 그러지 못했다는 것입니다. 때문에 우리들은 부모의 사랑을 찾기 위해 본향으로 가야 합니다. 이처럼 부모의 사랑을 찾기 위해서 본향을 찾아가야 할 인생이라는 것을 여러분은 알아야 합니다.

18-120
부활되고 중생되어야 본향의 아들딸이 된다
그러면 타락으로 말미암아 사랑이 어디까지 떨어졌느냐? 부모의 사랑으로부터 점점 내려가서 자녀의 사랑, 형제의 사랑, 친지의 사랑, 친구의 사랑을 지나 종의 사랑, 종의 종의 사랑에까지 떨어져 내려갔다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부모의 사랑을 찾아 본향길을 가는 데는 다시 거꾸로 찾아 올라가야 합니다. 그래서 도의 생활을 통하여 하나님을 중심삼고 종의 종의 입장까지 들어가야 합니다. 종의 종의 입장까지…….

종은 주인이 있지만, 종의 종은 주인이 없습니다. 우리는 그러한 종의 종의 자리에서부터 종의 과정을 거친 후에 양자의 자리까지 찾아 올라가야 합니다. 양자라고 하니 기분이 나쁘지요? 만일 자기에게 직계 자녀가 없어서 모든 유산을 양자에게 상속해 주어야 한다면 기분 좋겠습니까? 양자와 직계 자녀는 서로 핏줄이 다를 뿐만 아니라 골육 등의 모든 생김새도 다릅니다. 그런 양자의 자리까지 올라가서 직계 자녀로부터 접붙임을 받아야 합니다.

또 사랑을 중심삼고 볼 때, 종의 종의 사랑에서부터 종의 사랑, 양자의 사랑, 직계 자녀의 사랑을 거쳐 부부의 사랑, 부모의 사랑에까지 올라가야 합니다. 그런 다음 부모의 사랑을 통해서 자식으로 부활해야 합니다. 이것이 기독교에서 말하는 중생입니다.

부모의 심정을 통하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되느냐? 사람의 생명은 반드시 부모의 사랑을 거쳐서 태어나기 때문에 부모의 사랑을 받았다는 기준이 있어야만 부모의 심정을 통할 수 있습니다. 그러면 부모의 사랑은 무엇을 중심삼은 사랑이냐? 참다운 사랑의 주인공은 하나님이기 때문에 하나님을 중심삼은 참다운 부모의 심정, 참다운 부모의 사랑의 과정을 거치지 않고서는 중생할 수도 없고 부활할 수도 없는 것입니다.

그러면 사랑을 중심삼고 볼 때 여러분들은 어떤 사람을 찾아야 하느냐? 대개 여러분들은 상대의 사랑만을 그리워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만 가지고는 안 됩니다. 그것을 넘어 부모의 심정을 중심삼고 부활되고 중생 되어야 비로소 본향 땅을 차지할 수 있는 것입니다.

단순히 부모의 사랑을 받기만 해서는 안 됩니다. 그 부모의 사랑을 중심삼고 다시 태어나야만 본향의 아들딸이 되는 것입니다. 다시 태어나지 않는 한 우리들은 본향에 갈 수 없습니다. 다시 말하면 낙원까지는 가겠지만 천국에는 들어가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다시 태어나기 위해서는 누가 있어야 되느냐? 부모가 있어야 되는 것입니다. 여러분의 생명을 구원하려면 어머니의 복중에서 10개월을 지내는 것과 같은 입장을 거쳐야 합니다. 그래서 태아가 어머니의 모든 영양소를 받아서 자라는 것과 같이 여러분도 자라야 합니다. 그런데 우리 통일교인들은 그러한 입장을 잃어 가고 있습니다.

단순히 부모를 만났다고 해서, 부모의 사랑을 받는 다고 해서 다시 태어 나는 것이 아닙니다. 여러분들은 타락한 세계로부터 찾아진 사람들이기 때문에 여러분의 부모가 타락했던 것과 마찬가지의 고비를 넘어야 합니다. 그렇게 하지 않으면 본향 땅에 영원히 들어갈 수 없습니다. 여기에서 한번 뒤넘이쳐서 다시 한번 어머니 복중에 들어갔다 나오는 중생의 과정이 벌어져야 합니다. 그래서 천진난만한 어린애와 같은 입장에서부터 자라나야 합니다. 여러분이 다시 태어나려면 어머니 복중에 들어가는 입장에 서기 전에 아버지 뼛골에 들어가는 입장에 서야 합니다. 그래서 통일교회는 1960년 전까지 그러한 일을 했습니다. 그래서 우리 통일교회 식구들을 척보면 심정적으로 다릅니다.

18-122
축복과 탕감조건
아무리 자기가 본향을 찾아가는 사람이다 하더라도 완성급에 이르러서 상대를 만나야 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여러분이 완성급까지 나가는 데는 아직 거리가 있는 것입니다. 타락했기 때문에 소생급 이하에서부터 출발되었지, 완성급에서부터 출발한 것이 아닙니다. 그러므로 아무리 잘 믿고 신앙생활을 잘 하는 사람이라 하더라도 소생급에서부터 위로 올라가야 합니다.

그러면 여기에서 어떻게 해서 완성급에까지 연결되느냐 하는 것이 문제입니다. 세상의 인생살이에서는 넘어졌다가 다시 일어서서 갈 수도 있겠지만 우리가 가는 길에서는 한번 넘어지면 다시 일어서서 갈 수 없습니다. 아무리 잘 믿고 아무리 잘 한다고 큰소리를 치는 사람도 완성의 고개를 넘어야만 하는 것입니다. 그러지 않고서는 본향 땅에서 자리를 잡고 살 수 없습니다. 그 본향 땅에 들어가려면 부모의 심정을 기반으로 하여 생명체가 부활해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부모의 심정이 중심이 되어야지 자기가 중심이 되면 안 되는 것입니다.

통일교회의 소위 축복을 놓고 볼 때, 문제는 무엇이냐? 축복을 받기 위해서 탕감조건을 세우는 것이 문제입니다. 여기에는 비장한 내용이 결부되어 있습니다. 역사적으로 보면 여러분은 타락의 혈통을 이어 받았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축복을 받기 위해서는 타락의 혈통을 치고 기본적인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천적인 조건이 필요합니다. 그래서 통일교회는 지금까지 핍박을 받아 왔고 심정적으로 십자가의 길을 걸어 왔던 것입니다. 그래서 통일교회에 들어오면 이제까지의 사적인 모든 인연을 갈라놓는 것입니다. 전부 갈라놓는 것입니다.

어차피 우리가 가야 할 곳은 본향 땅이기에 본향을 찾아가야 합니다. 진정한 본향을 찾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진정한 본향을 찾기 위해서 우리 타락한 사람들은 어떻게 해야 하느냐? 아담 해와가 타락하기 전의 입장까지 올라가야 합니다. 그러나 아직까지 인간은 타락 전의 입장으로 완전히 복귀되지 못했습니다.

본래 인간이 타락하지 않았더라면 3단계의 성장과정을 거쳐서 완성하여 그곳에서 살았을 것이지만 타락함으로 말미암아 그러지 못했습니다. 즉, 인간은 하나님이 승인할 수 있는 참다운 부모의 사랑을 통해서 참다운 부모의 혈통을 이어받고 태어나지 못했다는 것입니다.

오늘날 통일교인들은 세계적인 승리를 하여 세계적으로 인정을 받아야 합니다. 하나님의 심정을 중심삼고 세계 인류를 내 동포와 같이 사랑하여 탕감의 노정을 걸어가야 합니다. 또 국가와 민족을 위해서 혹은 지상천국을 건설하기 위해서 앞으로 전진하지 않으면 안 됩니다.

18-123
기독교의 접붙이는 진리는 참진리
끝날이 되면 기독교에서는 주님이 오신다고 말합니다. 주님이 오신다면 남자로 오시겠습니까, 여자로 오시겠습니까? 「남자로 오십니다」 주님은 남자로 오셔야 합니다. 지금까지 모든 사람들이 태어나긴 태어났는데, 허깨비로 태어났다는 것입니다. 예를 들면, 두꺼비로 태어나야 할 텐데 개구리로 태어났다는 것입니다. 공작으로 태어나야 하는 데 수탉으로 태어났다는 것입니다. 그런 격입니다. 종자가 달라졌다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자신의 모든 것을 부정하고 새롭게 접을 붙어야 합니다. 종류가 비슷하기 때문에 접은 붙일 수 있다는 것입니다. 이런 것을 볼 때 기독교의 접붙이는 진리가 참진리입니다. 접을 붙이려면 지금까지의 모든 것을 싹둑 잘라 버리고 새로운 순을 갖다 접붙여야 합니다. 그러므로 새로운 사상과 새로운 생명력과 새로운 씨족을 접붙여서 자기의 생명 전체를 유지하는 중심으로 만들어야 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지금까지 기독교는 위해 주는 종교로서 그런 역할을 해야만 했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인간 개인들은 어떻게 해야 되느냐? 신랑으로 오시는 주님은 인간의 아버지입니다. 그리고 신부는 어머니입니다. 하늘은 남자를 상징하고 땅은 여자를 상징하기 때문에 땅 위에서 여자가 나와야 합니다. 그래서 여자는 발이라고 하고 남자는 하늘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 통일교인들은 생명의 씨로 돌아가야 합니다. 생명 그 자체보다도 생명의 씨로 돌아가야 합니다.

통일교회는 1960년까지가 그런 시기였습니다. 그때는 통일교인들이 선생님을 보고 싶어서 야단하던 때였습니다. 선생님이 여러분을 위해 눈물을 흘리기 전에 여러분이 먼저 선생님을 위해 눈물을 흘려야 합니다. 그런 일이 벌어져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리하여 아버지의 뼛속에서부터 앞으로 태어날, 아직까지 선악을 번식하지 않은 아들딸의 인연을 맺어야 합니다. 그런 인연을 맺는 데는 심정을 중심삼고 사랑을 중심삼고 맺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통일교회에 들어오게 되면 내 집같이 느껴지는 것입니다. 처음 왔지만 처음 온 것같이 느껴지지 않는 다는 것입니다. 여기에 와서 한 3일 정도만 은혜받고 자기 집으로 돌아가 보면 마치 자기 집이 도깨비집같이 느껴진다는 것입니다. 자기 남편이 도둑놈같이 보이고 자기 자녀들이 도둑놈의 새끼들처럼 보인다는 것입니다. 이상하게도 실제로 그렇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교회에만 오면 제멋대로 생긴 사람도 그냥 좋게 느껴진다는 것입니다. 그것은 내 고향 사람이면 어느누구든 다 좋은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그런데 집에서는 자기의 사랑하는 아들딸인데도 대하는 마음이 옛날과 전연 달라진다는 것입니다. 그런 변화가 벌어짐으로 말미암아 뒤넘이치는 역사가 일어나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심정을 중심하고 주님 속으로 파고들어가서 생활 감정도 주님과 같고, 죽어도 주님과 같이 죽고, 살아도 주님과 같이 살며, 기뻐하는 것도 주님과 같이 기뻐할 수 있는 인연을 맺어야 합니다. 그리하여 아직 장가가지 않은 입장에 있는 아버지, 즉 주님 속에 있는 아들과 같은 입장에 서야 합니다. 그래서 신랑으로 오신 주님이 신부를 맞이하여 부부를 이루면 그 신부, 즉 어머니를 통해서 다시 태어나는 것과 같은 입장에 서야 한다는 것입니다. 어머니를 통하는 그 기간이 바로 여자를 상징하는 땅을 중심삼고 수고하는 기간입니다. 그 어머니를 통하여 그 자신의 부활과 동시에 조상들을 부활시키고 민족과 국가까지도 부활시켜야 합니다. 알겠어요?

이처럼 반드시 주님을 통해서 빚어져야만 본향 땅에서 살 수 있는 내가 되는 것입니다. 또 이러한 내가 되어야만 역사 앞에서 비로소 부모를 아버지, 어머니라 부를 수 있고, 이러한 입장에 선 개인들을 형제라 부를 수 있는 것입니다.

이런 형제가 모여 친척을 이루고, 이런 친척이 모여 종족을 이루고, 이런 종족이 합해지면 민족이 되고, 이런 민족이 합해져서 국가가 되고, 이런 국가들이 합해져서 비로소 세계가 통일되는 것입니다. 그럼으로 말미암아 세계가 하나님을 중심삼고, 하나님의 사랑을 중심삼고 그 사랑을 중심삼은 한 뿌리에서 생겨난 세계의 형태를 갖추어야 합니다. 그래야만 비로소 세계가 하나님을 위주로 한 세계가 될 것이요, 하나님을 위주로 한 땅, 즉 지상천국이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이곳이 바로 우리가 영원히 살 수 있는 본향입니다.

18-125
모든 것이 나를 위해 있다는 자각
오늘날 ‘나’라는 존재는 무엇을 하기 위해서 있느냐? 이 타락한 세계의 모든 사연을 밟고 넘어서서 개인적인 부활과 더불어 가정적인 부활, 민족적인 부활, 국가적인 부활, 세계적인 부활을 이룬 자리에서 하나님을 자유롭게 모시기 위하여 우리들은 태어난 것입니다. 우리는 그러한 사명을 짊어지고 통일교회에 들어왔으니 그런 하늘의 사명을 각자가 충실히 책임져 나가야 합니다.

그러면 그 책임을 지고 가는 것은 누구를 위해서냐? 하나님의 사랑을 중심삼고 나가는 것도 아까 누구를 위해서라도 했습니까? 나, 나 자신을 위해서라는 것입니다. 참부모가 오시는 것도 나를 위해서요, 참부모의 사랑이 이루어진 것도 나를 위해서요, 또 참부모의 사랑을 중심삼은 형제와 친척이 생긴 것도 다 나를 위해서라는 것입니다.

이런 관점에서 볼 때, 잘났든 못났든 자기와 혈연적인 관계가 맺어진 친척이요, 종족이니만큼 그들의 수치는 나의 수치요, 그들의 부끄러움은 나의 부끄러움이라고 느낄 수 있어야 본향의 사람으로서, 본연의 사람으로서 온 천지를 대신하여 설 수 있는 자격자가 되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나’라는 존재는 우주적인 자아이므로 만유의 전체는 나 한 사람의 완성을 위해서 역사와 더불어 동원되었고, 피조만물 전체도 나 한 사람의 완성을 위해서 존재하며 움직이고 있는 것입니다. 이런 관점에서 보면 여러분 각자가 세계를 바라보고 하나님을 찬양하며, 형제를 사랑하는 그 모든 것이 결국은 나를 위한 것입니다. 나는 나 때문에 태어났고, 나를 위해서 살고 있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것도 나를 위해서 사랑하는 것이기 때문에 사랑을 하면 할수록 더 크고, 하면 할수록 더 발전하고, 하면 할수록 더 깊어지는 것입니다. 이러한 사랑을 하는 데는 본향 땅을 중심삼은 사랑을 해야 된다는 것입니다.

못난 사람이 있거들랑 그 사람이 누구 때문에 왔느냐면 나 때문에 왔다고 생각하세요. 그래 여러분들, 그렇게 생각해요? 우리 통일교회 교인들에게 오는 시련은 전부 나를 위해서 오는 것입니다. 이렇게 모든 것이 나를 위해서 있다고 생각하게 되면 나에게 원수가 있겠어요? 원수가 없다는 것입니다.

그러기에 예수님은 십자가에서 돌아가실 때에 손에 못을 박고 창으로 옆구리를 찌르는 원수라 할지라도 원수로 생각하지 않고 ‘저들은 나를 완성시키기 위해서 온 사람들이다. 이 한 때에는 나를 학대하는 골짜기에서 있지만 결국은 나를 위해서 몰려온 사람들이다. 그러니 박대해서는 안 된다. 저들을 박대하게 되면 내 사명이 완결되지 않는 다’ 이런 마음으로 그들을 위하여 기도하셨던 것입니다.

하나님도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이 ‘내가 지금까지 6천년 동안 수고한 것은 너희들 때문이야!’라고 생각하신다면 하나님도 복귀노정을 가시지 못합니다. 인간들 때문에 수고했고, 인간들 때문에 6천년 역사노정에서 슬픔의 길을 걸어 왔다고 생각하신다면 하나님 자신도 본향에까지 못 간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누구 때문에……. ‘ 하면 이단입니다. 그러니까 ‘내가 주인이다’ ‘당신은 나 때문에 있고, 내가 이상을 향하여 나아가는 것도 나 때문이다’라고 해야 합니다. 나 때문에 가는 것이지 아버지 때문에 가는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우리는 그러한 자아의식을 더욱 강하게 가져야 합니다.

18-127
자기 완성의 목적-우주 완성
오늘날 우리 통일교인들은 예수님의 남은 노정을 넘어가야 합니다. 그 이유는 여러분도 잘 알 것입니다. 그것도 모른다면 통일교인이 아닙니다. 여러분은 스스로가 그러한 경각심을 높이고 일차적으로 책임을 질 수 있어야 합니다. 통일교회는 그런 사람이 필요합니다.

나 하나를 완성시키고, 나 하나를 위해 주고, 나 하나의 뜻을 위해서 모든 것이 존재하고 있다는 사실을 생각할 때에 사람의 마음자리가 얼마나 큰가 하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이 돌도, 이 산에 있는 풀도, 나무도 전부가 나를 위해서 존재하고, 수많은 민족들이 서로 관념이 다르고, 문화의 배경이 다를 지라도 모두가 나의 이상을 완성하기 위해서 움직이고 있다는 것입니다. 나 하나를 중심삼고 우주가 돌아가고 있다고 생각해 보세요. 내가 그런 우주권내에 들어간 사실을 생각하면, 하나님과 더불어 몰림의 길을 간다 해도 좋다는 것입니다. 그러한 자기 자신의 가치를 느낄 수 있는 그 자리는 얼마나 행복한 자리이겠습니까? 언제나 하나님께 감사할 수 있는 자리인 것입니다.

신앙생활을 한 사람이나 하지 않은 사람이나 겉으로 보면 그 사람이 그 사람 같아서 세상 사람과 별 차이가 없다는 것입니다. 외적으로는 아무런 표가 나타나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영계에 가 보면 다르다는 것입니다. 영계도 지상세계와 마찬가지의 세계입니다. 그 영계를 크게 보면 사람 하나의 모양과 같다는 것입니다. 영인들 가운데는 눈 같은 영인들이 있고, 귀 같은 영인들도 있고, 손 같은 영인들도 있는 것입니다.

이와 마찬가지로 천주를 완성하는 데도 하나의 세포들이 모여서 형성되어 있는 것과 같습니다. 천주 전체가 서로 연결되어 있다는 것입니다. 만약에 눈을 통하는 피가 ‘아이고 난 눈에만 가지 절대 저 발끝에는 안 갈래’ 이러겠어요? 그러지 않는 다는 것입니다. 전신을 돌아서 때가 되면 저 밑창까지도 흘러가는 것입니다. 그러기에 어느 것도 필요하지 않은 것이 없습니다. 다 필요합니다.

역사상에 왔다 갔던 영인들과 인연을 맺기 위해서는 지상에서 그들과 닮은 사람이 필요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삼천만 민족만으로도 부족하고, 30억 인류로도 부족합니다. 왜냐하면 영계에 가 있는 사람들과 닮은 입장에서만이 그들과 더불어 주고 받을 수 있는 관계가 맺어지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여러분은 ‘아이구 난 달라, 난 나 혼자면 된다’ 이러는 사람도 복귀해야 된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예수님이 태어날 때부터 모든 인류와 다른 것이 있다면 그것은 하나님으로부터 하나님의 아들로 오셨다는 것입니다. 그는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아들이 뭐냐면 하나님의 성전입니다. 예수님은 ‘만민을 위해 내가 있다’ ‘만민을 위해서 내가 있는 동시에 만민은 나를 위해 있다’ 언제나 이런 입장에 있었으므로 십자가에 돌아가실 때에도 혼자 가는 것이 아니었다는 것입니다. 이 우주세계를 중심삼은 모든 이념은 낡아 있었기 때문에 십자가와 함께 그것들을 모두 지고 가셨습니다. 그럼으로 말미암아 모든 존재는 십자가권내로 들어갔던 것이지만 예수님께서 부활함으로 말미암아 그것들도 역시 부활권내에 동참할 수 있었다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모든 존재는 ‘예수님 혼자 살다가 돌아갔지, 우리하고 무슨 관계가 있느냐’ 하는 식으로 생각해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모든 존재의 시작부터 존재의 끝까지 전부가 나 하나만을 위해서 존재 한다는 것입니다.

아까 말했던 것처럼 사랑을 중심삼고 볼 때에도 모든 것이 그렇게 연결되어 있다는 것입니다. 내가 남을 위해서 그들을 사랑하는 것이 아니라 나를 위해서 그들을 사랑하는 것입니다. 각자가 그런 마음을 가지고 하나님을 위해서 나가야만 하나님을 중심삼고 온 우주가 하나 될 수 있는 것입니다. 이런 관점에서 여러분들이 생각해야 되겠습니다. 또한, 이 기준을 넘어서서 나는 어떤 사람인가, 나는 하나님의 아들딸인데 어떻게 하는 것이 하나님의 뜻인가를 스스로에게 물어봐서 알아내야 됩니다. 내가 태어난 것은 나 하나 완성과 더불어 우주가 완성될 수 있게 하기 위해서라는 사실을 알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리하여 이와 같은 입장에서, 부모의 심정으로 형제를 사랑하고, 친척을 사랑하고, 종족을 사랑하고, 민족을 사랑하고, 세계를 사랑하겠다는 마음이 실감적으로 느껴지는 자리에서 기도를 하게 되면 그 기도는 세계를 위한 기도가 된다는 것입니다.

18-129
하나님의 왕자와 공주가 되어 사는 곳이 본향
눈물겨운 참사랑 앞에는 세계가 끌려오는 것입니다. 이러한 사랑을 중심삼고 세계가 일체되는 기준에 들어가게 할 수 있는 사람은 완전한 본향 땅을 차지할 수 있는 사람입니다. 하지만 이러한 사람이 되지 못하면 본향 땅에도 갈 수 없을 뿐더러 본향 땅에 찾아갔다 해도 본향 땅으로 넘어갈 수가 없는 것입니다. 본향 땅에 가서도 들어가지도 못하고 나오면 그 사람에게는 본향 땅이 없는 것입니다. 그곳에 가 가지고 들어갈 수도 있고 나올 수도 있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또 마음대로 나왔다가 마음대로 들어갈 수도 있어야 됩니다. 그렇게 되면 세상의 주인이 이 땅 위에 어찌 거할 수 있단 말인가!

예수님은 이 땅에 오셨다가 가는 데는 죽어서 가셨습니다. 마음대로 왔다가 죽지 않고 마음대로 가야 했었다는 것입니다. 또한 그러는 데는 핍박이 없었어야 되는 것입니다. 그러한 세상이 되어야 지상에 천국이 이루어지고, 이 땅에 하나님이 바라시는 소망의 세계가 이루어진다는 것을 여러분들은 알아야 합니다.

그렇게 되면 마음이 바라는 하나님의 사랑을 자동적으로 점령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지금까지 하나님이 찾아와서 하나될 수 있는 아들딸이 없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을 중심삼고 일체화된 사람은 그 사랑권내에서 영원무궁토록 만우주를 지배할 수 있는 능동적인 주체가 되기 때문에 하늘의 공주가 되고 하늘의 왕자가 된다는 것을 알아야 됩니다. 알겠습니까?

하나님은 복귀노정을 통하여 인간들을 찾아 나오고 계십니다. 그 하나님은 만인의 주인이요, 만유의 주체이십니다. 아울러 만국의 주체이십니다. 그러한 하나님의 아들과 딸, 즉 하늘나라의 왕자는 누구이며, 하늘나라의 공주는 누구이겠습니까? 왕자는 주님이시고 공주는 주님의 신부입니다. 우리는 그 주님과 신부를 중심삼고 다시 태어나야 하는 것입니다. 그렇게 되면 주님과 주님의 신부는 인류의 조상이 되며, 부모가 되는 것입니다. 우리가 그분들의 사랑을 통해서 다시 태어나게 되면 부모의 입장을 상속받을 수 있는 것이요, 제 2의 왕자와 공주의 입장에 설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만민은 전부 하나님의 아들딸이 되어야 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인간의 욕망은 하나님을 아버지로 모시고자 하는 것입니다. 세계를 정복하고 우주를 정복한 사람이라 할지라도 하나님의 사랑을 그리워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못난 사람이나 잘난 사람이나 모두 마찬가지입니다. 이처럼 모든 인간의 본심이 하나님의 사랑을 그리워하도록 작용하는 것은 그럴 수 있는 가능성이 백 퍼센트 있기 때문입니다.

이와 같이 인간의 마음이 하나님의 사랑을 중심삼고 본연의 자세를 갖추려는 욕망을 갖고 있는 것은 본래 그럴 수 있는 입장에 있었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사랑을 중심삼고 우리 모두가 하늘나라의 왕자와 공주의 자리를 차지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럼으로 말미암아 하늘나라의 모든 소유와 하늘나라의 모든 운명이 우리 것이 되며, 아버지의 것이 내 것이 될 수 있는 것입니다. 아버지의 사연도 내 것이요, 아버지의 모든 소유도 내 것입니다. 이렇게 되면 천하에 갖지 못할 것이 없기 때문에 거기에서 비로소 행복할 수 있는 것입니다. 거기에는 자기가 필요로하는 모든 것, 즉 사랑이 있고, 사랑 이외의 모든 부대 요건까지 전부 갖추어져 있다는 것입니다. 거기가 비로소 우리 인간이 안식할 수 있는 자리요, 우리의 본향인 것입니다. 우리 다 같이 기도합시다.

18-130
기 도
저 멀리 역사적인 종말이 우리를 부르고 있는 것을 저희들은 몰랐고, 하나님께서 저희들을 드높이 세우시고 저희들의 가야 할 길을 재촉하셨다는 것도 몰랐나이다.

아버지! 이렇게 무지한 저희들이 곁길로 갈 적마다 앞으로 인도하시어서 역사의 종말시기인 오늘날까지 이끌어 오시기에 얼마나 많은 수고를 하셨던가를 다시 한번 느끼게 되옵니다.

아버지시여! 저희의 마음이 어디에 깃들고자 하옵니까? 또 저희의 몸이 어디에 더 머물고자 하옵니까? 저희의 마음과 몸이 깃들어야 할 곳은 본연의 깊은 아버지의 사랑의 중심이라는 것을 알았사오니, 그 자리까지 가지 못한 뭇자녀들을 아버지, 격려하여 주시옵소서.

저희들이 그 자리를 그리워하는 데는 눈이 시리도록 그리워해야 되겠고 그 자리를 사모하는 데는 마음이 아프도록 사모해야 되겠사옵니다. 또한 그 자리를 찾기 위해서는 모진 투쟁을 해야 되겠사옵고, 천번 만번 망하여 쓰러져서 패자의 서러움을 당할지라도 또 다시 재기하여 싸워 나가지 않으면 안 될 것이 저희의 의무인 줄 알고 있사오니, 아버님이여, 저희의 마음과 몸을 친히 지휘하여 주시어서, 이 싸움에서 패배자가 되지 말게 하여 주시옵소서.

패한 자의 서러움을 저희들이 뼈저리게 느끼게 하여 주시옵고, 타락한 후손이라는 사실 또한 뼈저리게 느끼게 하여 주시옵소서. 선조로부터 지금까지의 역사과정에서 아버님의 복귀섭리를 담당해 나온 우리의 선조들이 얼마나 많은 실수를 하였사옵니까? 그 사실 또한 뼈아프게 느끼게 하여 주시옵소서. 오늘 이 시대를 살고 있는 저희들이 아버님의 사명을 짊어지고 나가기에는 너무나 부족한 자신들이라는 것을 뼈저리게 느껴야 되겠사옵나이다. 지난날의 자신을 보고서도 그렇게 느껴야 되겠사옵고, 현실에 처한 자아의 모습을 보고서도 그렇게 느껴야 되겠사옵니다. 그리고 미래의 자신들의 모습을 생각하면서 스스로 그리워할 줄 아는 모습들이 되게 하시옵소서.

아버님께서 원하시는 승리, 아버님께서 원하시는 기쁨을 찾아 드리기 위해 저희들이 존재한다는 것을 새롭게 인식하고 스스로를 존중해야 되겠사옵니다. 또한 모든 존재의 양상을 통하여 아버님을 찬양할 수 있는 환경을 이루어야 되겠사옵고, 그러기 위해서는 저희들이 주체적인 그 무엇을 갖지 않으면 안 되겠사오니, 아버님이여, 아버님의 사랑을 느끼는 마음 마음을 보호하여 주시옵소서.

아버님의 사랑이 없다면 저희들은 안식할 수 없사옵고, 아버님의 사랑이 없다면 저희들은 아버님의 심정을 느낄 수 없사오니, 결핍된 저희들의 마음에 아버님의 사랑의 물결을 퍼부어 주시옵고, 재생의 은사를 불러일으켜 주시옵소서.

아버지여! 통일의 역군들이 이날에 아버지 앞에 경배드리고 예배드리고 있는 줄 아오니, 그 자리 자리마다 친히 같이하여 주실 것을 저희들은 믿사옵니다. 또한 세계에 널려져서 다시 만날 수 있는 날을 그리워하고 있는 통일의 자녀들을 기억하여 주시옵소서. 저희들은 비록 혈통이 다르고 역사와 전통과 풍습은 다르지만 아버님을 중심삼고 같은 혈족과 같은 심정권에 있는 무리들이옵니다. 이들이 같은 눈물을 흘림은 심정이 서로 통함이요, 이들이 서로 사연을 나눔은 같은 인연으로서 사정이 통함인 것을 알고 있사오니, 이 모든 사연이 세계 만민과 같이 나눌 수 있는 사연이 되게 허락하여 주시옵소서. 그들의 모든 체휼적인 감정이 만민의 심정과 생활 가운데에 통할 수 있게 하여 주시옵길 간절히 바라옵고 원하옵나이다.

그러기 위해서는 저희들이 이렇게 앉아만 있어서는 안 되겠사오니, 하늘을 동원시키고, 땅을 동원시킬 수 있는 비장한 각오와 결의 아래 싸움의 행로를 향하여 전진해야만 된다는 것을 저희들 각자가 느끼게 허락하여 주시옵기를 , 아버님, 간절히 바라오고 원하옵니다.

남아진 복귀의 노정을 바라볼 때에, 이 노정을 누가 책임지겠느냐고 아버님은 이 시간도 애타게 호소하고 계시다는 것을 저희들이 느끼게 하여 주시옵소서. 그리하여 싸움터에서 어떠한 희생이 따르더라도 이 책임만은 끝까지 짊어져서 아버님 앞에 승리의 개가를 불러 드릴 수 있는 당신의 아들딸이 되게 허락하여 주시옵길 간절히 바라오고 원하옵나이다. 저희들이 복귀의 싸움터에서 승리의 영광을 갖추어서, 아버지께서 만유 앞에, 만민 앞에 내세워 자랑하실 수 있고 아버지로부터 칭찬받을 수 있는 당신의 아들딸들이 되게 하여 주시옵길 간절히 바라옵고 원하옵니다.

본향의 땅을 찾아갈 수 있게 하여 주시옵고, 본연의 형제를 찾을 수 있게 하여 주시옵소서. 그리고 본연의 부모와 본연의 자녀들을 가질 수 있는 당신의 아들딸이 되게 하여 주시옵고, 아버님께서 사랑으로 경륜하시려던 기쁨의 목적을 이루어 드릴 수 있는 당신의 아들딸이 되게 하여 주시옵기를 간절히 바라옵나이다.

아버님, 오늘을 거룩되게 받아 주시옵소서. 저희들은 이 땅 위에 아버님의 뜻을 이루기 위한 승리의 터전을 마련하기 위해 모여 움직이고 있다는 사실을 언제나 명심하고, 아버님 앞에 절대로 손해나는 행동을 하지 말게 인도하여 주시옵소서. 전체 앞에 이익되는 그 무엇을 남길 수 있는 아들딸이 되게 허락하여 주옵길 간절히 바라오고 원하옵니다. 교회에서 뿐만 아니라 집에 돌아가서도, 사회에 나가서도 마찬가지로 아버지께서 기뻐하실 수 있는 선의적인 일을 함으로써 간접적으로나마 사랑의 터전을 개척하는 , 개척자의 사명과 선각자의 사명을 다할 수 있는 아버지의 아들딸이 되게 하시옵소서.

만민의 한이 아직도 남아 있사오니 이 한을 풀기 위해 새로운 생명의 원천을 개척하여 그들에게 사랑의 은사를 나누어 줄 수 있게 해주시옵고, 아버지께서 직접 운행하실 수 있는 터전을 마련하는 데 있어서 공헌자가 되고 선각자가 될 수 있게 하여 주시옵기를 간절히 바라옵고 원하옵니다.

앞으로 남아진 날들 위에도 아버지의 사랑을 같이하여 주시옵고, 영원한 당신의 소원이 저희들을 통하여 이루어지게 허락하여 주시옵기를 간절히 부탁드리옵니다. 이 모든 말씀 참부모님의 성호 받들어서 아뢰었사옵나이다. 아멘.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