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07 to 18-35: 뜻이 가는 길

뜻이 가는 길
1967.05.14 (일), 한국 전본부교회

18-07
뜻이 가는 길
이 세상에 뜻 없이 사는 사람은 없습니다. 사람들은 사회생활을 하는 데 있어서도 자기 나름대로의 뜻을 중심삼고 살아가고 있습니다. 지금 세계에 널려 살아가고 있는 인류는 자기 사업에 대한 뜻, 학문에 대한 뜻, 혹은 자기 전문분야에 대한 뜻을 세우고 그 목표를 향해 달려가고 있습니다.

18-07
선이 요구하는 것
그러면 이 뜻은 무엇을 중심삼고 이루어 나가느냐? 물론 사람을 중심삼고 이루어 나가되 그 마음을 중심삼고 이루어 나가는 것입니다. 여기에 있어서의 마음은 언제나 잘못되기를 바라지 않고 잘되기를 바라며 나가는 것입니다. 그것이 평면적이든 입체적이든 시대적이든 역사적이든 더더욱 잘되기를 바라고 나가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뜻이 지향하는 최고의 목표는 만민이 좋아하는 기준에 이르는 것입니다.

사람의 양심은 말할 것도 없이 언제나 선을 따라가는 것입니다. 이 선은 인간으로 하여금 더 큰 무엇을 성사시킬 수 있게 하는 요인이 되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인간들은 선을 따라서 뜻을 세워 나가야 됩니다. 자기의 연구분야나 사업분야, 혹은 다른 어떠한 분야를 막론하고 선에 입각하여 뜻을 세워 나가지 않으면 안 된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선 자체를 두고 볼 때에 선은 어떠한 내용을 지니고 있느냐? 선은 피동적이냐 주동적이냐를 분석해 볼 때에 선 자체는 피동적이기를 원치 않는 것입니다. 언제나 주동성(主動性)을 원하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어느 사회, 어느 단체든 그 조직이 크면 클수록 그것을 중심삼고 그 사회나 단체를 움직여 선한 기준권내에 예속화시키려 하는 것입니다.

사람들이 왜 참다운 선을 바라느냐? 선 자체가 피동적이 아니고 주동적이어서 우리의 생활에 불의와 손해를 갖다 주는 것이 아니라 언제나 이익을 갖다 주기 때문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양심을 가진 사람은 선에 입각하여 자기 주체성을 갖기를 강요하는 것입니다. 남한테 지배받기를 싫어하는 원인도 거기에 있는 것입니다. 또 양심을 터로 해서 바라는 선의 기준도 한계적인 것을 원치 않는 것입니다. 그러기에 한국 사람이라 해도 한국적인 사람만을 원치 않습니다. 자기가 한국 사람이라 해도 세계적인 사람이 되기를 원한다는 것입니다. 더 높은 무엇이 있다 할진대 그러한 존재가 되기를 선은 요구하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인간은 참다운 양심적인 생활을 하여야 합니다. 참다운 양심을 가진 사람들은 자기의 주체성이라든가, 자기 자체를 중심삼은 최고의 이념을 견지(堅持)하지 않으면 안 되는 것입니다. 양심적인 사람일수록 자기의 절대적인 주체성을 요구하는 것이요, 절대적인 최고의 것을 원하는 것입니다.

뜻이 지향해 나가는 데는 무엇이 연결되느냐? 거기에는 필연적으로 이상, 혹은 이념이 연결되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뜻은 이상의 세계를 향하여 가는 것입니다. 그러면 그 이상은 어떤 것이냐? 그것은 만민의 어떤 생각권내에서 움직이는 것이 아니요, 혹은 어떤 시대권내에서 그 목적을 세워 나가는 것이 아닙니다. 그것은 시대성과 역사성을 초월하고 지역적인 한계를 넘는 기준에서 찾아 나가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마음은 어떤 상대적인 이상권을 요구합니다. 이 기준이 무한해지면 무한한 환경권을 요구하게 되는 데, 그 무한한 상대적인 이상권을 요구하는 마음의 주체성 역시 무한한 것이며, 그러기에 무한히 지고(至高)한 것을 요구하는 것입니다. 인간이 이러한 마음을 지니고 있기 때문에 고귀하다는 결론을 얻을 수 있는 것입니다.

뜻이 가는 길은 이상을 향하여 가는 길입니다. 역사과정을 거쳐간 수많은 사람들은 자기 멋대로 살았지만 뜻은 더 높은 선을, 더 가치 있는 것을 추구해 나왔습니다. 보다 높은 이상을 추구해 나왔다는 것입니다.

역사가 흐름에 따라서, 시대가 교체됨에 따라서, 혹은 국가의 주권이 바뀜에 따라서 그 환경이 가지각색으로 변천해 나가더라도 뜻은 언제나 하나의 이상세계를 향하여 나가는 데 자극이 되고 힘이 되어 나왔다는 사실을 여러분은 알아야 되겠습니다.

그러므로 세상이 점점 이상세계에 가까와지면 가까와질수록 만인이 바라는 뜻은, 그 이상은 하나의 목표를 향하여 가지 않으면 안 된다는 결론이 나오는 것입니다. 이런 관점에서 현재 세계의 정세를 바라보면 하나의 이상세계를 향하여 나가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18-09
뜻이 가는 길
지금 세계에서는 민주세계와 공산세계가 싸우고 있습니다. 민주와 공산의 뜻이 지금 앞서거니 뒤서거니 하면서 인류역사와 더불어 뒤넘이쳐 나가고 있습니다.

그러면 이것이 어떻게 될 것이냐? 뜻은 둘이 있을 수 없습니다. 절대적인 뜻, 최고의 이상적인 뜻, 그야말로 하나님의 이념과 통할 수 있는 뜻은 둘이 있을 수 없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민주와 공산의 뜻은 어차피 하나가 되어야 됩니다. 오늘날 민주주의는 민주주의대로, 공산주의는 공산주의대로 이상이 무엇이고 이념이 무엇이라고 부르짖고 있지만 현실은 하나의 귀결점을 이룰 수 있는 뜻의 방향을 찾기에 노심초사하고 있는 것을 우리는 부정할 길이 없습니다. 지금 세계는 역사과정을 거쳐 20세기 현대문명을 맞이하여 비로소 하나의 이상권내에 귀일될 수 있는 단계에 들어와 있다는 것을 우리들은 느끼게 됩니다.

그렇다면 과거 우리 선조들의 양심은 선하지 못하였던가? 그렇지 않습니다. 현재보다 선했다. 그러면 선조들이 그리던 이념이 현세만 못했느냐? 결코 못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면 그 당시에 전부가 하나 될 수 있는 하나의 이념을 주장하고 나서야 했는데 왜 못했느냐? 뜻이 가는 데는 길이 있기 때문입니다. 뜻은 출발과 동시에 한꺼번에 이루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그 목적지까지 가는 데는 반드시 거쳐야 할 과정이 있는 것입니다.

오늘날 종교적인 입장에서 볼 때 인간시조가 타락했다는 것은 부정할 도리가 없습니다. 그러면 타락은 무엇이냐? 뜻의 본향성을 잃어버린 것, 즉 뜻이 향할 수 있는 본래의 바른 방향을 잃어버린 것입니다. 가야 할 길을 제쳐 놓고, 가지 않아야 할 길로 간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뜻과 일치되는 방향을 버리고, 뜻에 반대되는 방향으로 나간 것이 타락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인류 역사가 인간시조의 타락과 함께 출발되었다는 것을 공인할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때문에 인류는 반드시 그 방향을 돌이켜서 하나의 이념적인 세계를 항해 가야 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지금까지 역사 과정에 왔다 간 수많은 선지선열, 혹은 수많은 도주들은 무엇을 했느냐? 그들은 각각의 주장을 내세워 엉클어진 뜻의 방향을 하나의 방향으로 귀결시키려 했습니다. 엉클어진 뜻의 방향을 어떠한 사상적인 하나의 목표를 세워서 그 방향에 귀결시키려 했다는 것입니다.

또한 그들은 하나의 절대적인 이상세계를 향하여 나가는 방향에 부합될 수 있는 길을 찾아 나온 사람들입니다. 그러면 그 길을 몇 각도에서 부합 시켰느냐, 평행선상에서 부합시켰느냐? 직선상에서 부합시켰느냐? 어떤 주의, 주장이나 어떤 종교가 가는 길에는 한 단계만큼 부합시키면 남은 거리만큼 시련이 남아 있게 되는 것입니다. 어떤 각도로 출발해서 어느 정도 내려가면, 역사과정에 벌어지는 인연이 끝날 때까지는 그 사명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시련의 각도는 그만큼 줄어드는 것입니다.

이런 관점에서 양심을 중심삼고, 더 고차적인 목표점을 향해 나가기 위해 나온 것이 무엇이냐? 물론 철학도 그렇지만 철학보다는 종교가 그런 것을 더욱 깊이 취급해 나왔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지금까지의 인류역사를 개관해 볼 때, 문화는 종교적인 기반을 통하여 발전해 나온 것입니다. 즉, 문화가 발전한 것은 오랜 역사과정을 거쳐오면서 종교적인 기반을 통하여 그 시대권내의 문화권을 하나의 방향점으로 수습해 나왔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그건 왜 그랬느냐? 뜻이 지향하는 하나의 목적점에 귀결시키기 위해서 그런 것입니다.

18-11
뜻이 지향하는 목적
뜻을 지향시키는 데 있어서 중대한 사명을 한 것은 종교입니다. 그러한 종교의 역사가 깊어지면 깊어질수록 현실의 문화세계를 능가할 수 있는 깊고 새로운 내용이 생기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 종교적인 내용을 통한 뜻의 기준, 혹은 이념적인 기준은 반드시 온 인류가 지향해 나가는 뜻의 목적과 결부될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오늘날 민주주의는 무엇을 중심삼고 되어 있느냐? 기독교 사상입니다. 그러나 공산주의는 이와 반대의 사상을 가지고 있습니다.

뜻이 나오는 길을 더듬어 보면, 뜻은 본질을 벗어날 수 없는 것입니다. 뜻은 종합적인 최선의 기준을 통하여서 연결되는 것이기 때문에 뜻이 귀결점을 이루려면 단시일의 과정을 가지고는 안 됩니다. 또한 그 인연을 접합하기 위해서는 인류역사와 더불어, 그 문화역사와 더불어 관계를 가져 야만 됩니다. 이런 관점에서 오랜 역사적인 이념을 가지고 현실에서 중요한 책임과 사명을 하면서 뜻에 발전을 주었던 종교는 기독교입니다.

그런데 공산주의는 어디서 나온 것이냐? 지금부터 50년 전인 1917년에 소련을 중심삼고 난데없이 나왔습니다.

그러면 이 공산주의가 역사적인 뜻과 지금까지의 시대적인 모든 뜻을 전부다 하나로 묶을 수 있느냐? 그럴 수 없는 것입니다.

여러분의 양심이, 진정한, 양심다운 양심에 고개를 숙이는 고차적인 기준이 유물적이냐, 유심적이냐 할 때에 이것은 두말할 것 없이 유심적인 것입니다. 돈이 많은 사람이라고 해서 그를 인격자라고 부르지 않습니다. 인격자란 양심의 기반 위에 더 큰 무엇을 가지고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현실에 있어서 종교적인 역사를 중심삼고 새로운 형태를 갖추어야 합니다. 그리고 꼭지점에 앞질러 나가는 인연을 가진 사상의 체계를 갖추어야 됩니다. 또 기독사상을 중심삼고 세계인류의 방향을 결정하는 것이어야 합니다. 이런 것을 볼 때 공산주의는 뜻과 정반대의 길을 가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뜻의 목적은 이상을 찾는 것입니다. 이상은 무엇을 통하여서 이루어지느냐? 하루 세끼 밥을 먹고 배부른 것으로 이상이 이루어졌다고 할 수 없습니다. 그러면 뜻이 지향하는 목적은 무엇이냐? 밥을 먹어서 배부른 것이 아닙니다. 또한 아무리 술을 좋아하는 사람이라도 술이 목적일 수는 없는 것입니다. 그러면 그보다 더 문제되는 것이 무엇이냐? 사랑입니다. 그 사랑은 일시적인 사랑이 아니요, 싸구려로 사올 수 있는 몇푼어치의 사랑이 아닙니다. 본질적인 사랑입니다.

이 본질적인 사랑을 분석해 보면 사랑에는 혁명이 없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부모가 자식을 사랑하는 것은 참사랑에 해당됩니다. 그렇기 때문에 인간 시조때부터 사람이 자식을 사랑한 마음이나 수천년 후의 후손인 우리가 자식을 사랑하는 마음이 똑같은 것입니다. 또한 수천년 후에 우리의 후손들이 자식을 사랑하는 마음도 같을 것입니다. 사랑에는 발전도 없고 종식도 없는 것입니다. 혁명의 요건을 필요치 않는 순수한 것이 사랑입니다.

그러면 하나님의 사랑은 어떠한 것이냐? 하나님이 어떤 존재를 절대적인 기준의 자리에 세워 놓고 그의 존재성을 인정하고 그를 사랑하신다면 그 사랑은 더 이상 혁명이 필요치 않는 사랑입니다.

18-12
뜻을 이루기 위해서는
혁명은 어디서부터 출발하느냐? 욕망에서부터 출발하는 것입니다. 나쁜 것이 있으면 그것을 내버리고, 좋은 내용을 전체 앞에 적용시켜야 합니다. 그것을 사회에 적용시켜 사회에 혁명을 일으키고, 종교에 적용시켜 종교계에 혁명을 일으키고 또한 다른 모든 분야에 적용시켜 그 분야에서 혁명이 벌어지게 해야 하는 것입니다.

뜻이 지향하는 것은 이념입니다. 그러나 이념은 그 자체만으로서는 뜻을 이룰 수가 없습니다. 뜻은 사랑 문제를 통해서 해결해야 하기 때문입니다. 즉, 뜻을 이루기 위해서는 물질을 가지고는 안 되기 때문입니다.

이런 관점에서 기독교가 제일 중요시하는 것이 사랑입니다. 그러면 이 사랑을 이룰 수 있는 방법은 무엇이냐? 그것은 신랑 신부를 짝지어 놓는 것입니다. 오랜 역사과정을 거쳐오면서 사랑의 내용을 중심삼고 나온 것이 기독교입니다. 그리므로 이 기독교는 세계적인 종교가 아니 될래야 아니 될 수 없었던 것입니다.

그러면 이제 기독교가 해야 할 것이 무엇이냐? 이념을 성취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세계적인 종교가 되어야 하고, 세계적인 종교가 되기 위해서는 사랑문제를 들고 나와야 합니다. 이때의 사랑은 타당성이 있어야 됩니다. 그 사랑이 아벨에게만 해당되고 가인에게는 해당되지 않거나, 대한민국 사람에게만 해당되고 미국 사람에게는 해당되지 않는 것이어서는 안 됩니다.

지금까지 혁명을 거쳐온 역사도 여기에는 아랑곳없이 한순간에 통합될 수 있고 적응될 수 있어야 됩니다. 기독교에 그런 사랑이 있다면 기독교를 중심삼고 세계의 국가를 통합시킬 수 있으며, 이상세계를 만들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 사랑이 결여되었을 때 기독교에는 새로운 혁명이 일어나야 합니다.

지금까지의 기독교는 바라보면 바라볼수록 캄캄합니다. 현시점에서 환경을 거슬러 올라가 보면 현재의 시점까지 연결시킬 수 있는 내용이 불분명하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형태는 갖추었지만 내용으로는 내세울 것이 없다는 것입니다.

보통 나무에 올라가는 것은 내려오는 것보다 더 힘이 듭니다. 그러나 진짜 높은 나무에 올라갈 때에는 그럭저럭 올라가지만 내려올 때는 더 어려운 것입니다. 또한 어떻게 내려왔다고 해도 다시 올라가려 할 때에는 못 올라 가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러나 내려왔으면 반드시 올라가야 됩니다. 사랑도 ‘아! 내가 너를 사랑한다’ 하면서 계속 올라가기만 하느냐? 그렇지 않습니다. 사랑은 올라갔다 내려왔다, 주었다 받았다 해야 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사랑은 혼자서 할 수 없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부자간의 관계는 지구의 끝과 끝에 떨어져 있더라도 그 거리를 초월하고 찾아가서 서로 품고 사랑하는 것입니다. 무엇이 원인이 되어서 그러겠는가? 그것은 사랑인 것입니다.

하나님은 절대적인 존재요, 우리는 지극히 비천한 존재입니다. 그런데 비천한 우리가 어떻게 하나님과 사랑을 할 수 있느냐? 절대적인 존재가 비천한 자리까지 왔다갔다할 수는 없는 것입니다. 그러니 기독교가 그 기준까지 연결시키는 사명을 띠고 현시점까지 이럭저럭 내려와서 세계성을 띠고 있는 것입니다. 그럼 이것을 어떻게 할 것이냐? 이것을 보편화시켜서 만민이 참으로 인정할 수 있는 공적인 사랑의 법도에 적용시켜야 됩니다. 그러자면 현시점에서, 현시대의 역사과정을 뛰어넘을 수 있어야 됩니다.

18-14
사랑주의가 나와야 할 현시점
그러면 앞으로 기독교가 해야 할 사명은 무엇이냐? 역사과정의 종합적인 이념과 더불어 사상적인 목적을 이루기 위한 종교적 사명을 해야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지금까지 내려온 역사적 인연을 따라 올라갔다가 다시 내려와야 되는 것입니다. 내려올 때는 6천년이 걸렸지만 다시 올라갈 때는 6천년이 걸려서는 안 됩니다. 왜? 인생이 짧기 때문입니다. 인간은 제아무리 오래 잘산다고 해도 백년밖에 못 사는 것입니다. 그런데 6천년 인류역사를 전부다 더듬어 올라가려면 6천년이 걸려야 되고, 또 내려오는 데도 6천년이 걸려야 되는 것입니다.

그러니 이것을 단축해야 하는 데 그럴 수 있는 내용이 무엇이냐? 그것은 진리 자체보다도 진리를 중심한 사랑입니다. 그 사랑은 시간을 초월합니다. 십년 전에 죽은 자식도 시간을 초월하여 사랑하는 마음과 같습니다.

또, 역사성을 초월하여 왕래할 수 있는 하나의 절대적인 요인이 무엇이냐? 진리보다 사랑입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진리를 가르치셨지만 그 진리는 사랑을 가르쳐 주는 한 방편에 지나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사랑을 완전히 이룰 수 있는 활동을 못 하였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행동적인 결과를 통한 사랑의 내용을 소개해 주지 못하고 보류해 나온 것이 오늘날까지의 기독교 역사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현시점에서 새로운 뜻을 지향하는 무수한 이념들을 통합, 완결지어서 인류의 행복을 조성할 수 있는 하나의 주의가 나와야 합니다. 그 주의는 무슨 주의냐? 구체적인 역사를 통하고 시대를 통할 수 있는 사랑 주의입니다. 하나님이 그런 주의를 원하시기 때문에 사랑하는 자식, 즉 아들을 보내 신랑의 감투를 씌우고, 그의 뜻을 따르는 만민을 신부로 세우기 위해 섭리해 나오셨습니다. 그러므로 역사는 흘러가더라도 그 심정의 인연은 언제나 평면적입니다. 따라서 종적인 역사를 거쳐왔지만 하나님은 그 사회의 평면적인, 현실적인 무대를 걸어놓고 섭리하시기 때문에 기독교는 생활적인 종교가 되고, 사회적인 종교가 되어야 합니다. 이렇게 볼 때 통일교회는 무엇을 하는 교회냐?

인간 시조 아담 해와가 타락했는데 그들이 하나님의 사랑을 받고 타락했느냐, 사랑을 받지 못하고 타락했느냐? 여기서, 하나님은 인류의 아버지이시기 때문에 아담 해와를 사랑하셨을 텐데 왜 그들은 하나님의 사랑을 받지 못한 가운데 타락을 했을까 하는 의문이 생기지요. 하나님이 아담 해와를 사랑하는 데는 특별한 경로를 통해서 특별한 사랑을 하지 않을 수 없는 것입니다. 그저 얼렁뚱땅 사랑하는 것이 아닙니다. 아들이 백명이 있더라도 백명 가운데 아버지의 유업을 상속해 줄 수 있는 아들은 오직 한 명뿐입니다.

이러한 관점에서 볼 때, 이 타락한 세계에서 사랑의 체계를 갖추기 위해서는 하나님을 중심삼은 선민사상을 갖지 않으면 안 되는 것입니다. ‘너희는 방계 족속이고 우리는 직계 족속이다’할 수 있는 민족이 나와야 됩니다. 사랑도 마찬가지입니다. 선생님도 여러분을 한꺼번에 다 사랑할 수 있어야 됩니다. 그러므로 곧바로 직행할 수 있어야 하고, 그러기 위해서는 자기의 모든 재산과 생명까지도 바칠 수 있어야 합니다. 즉 이념과 사랑, 그 하나밖에 없는 사랑을 위해 생사를 넘어설 수 있는 한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그러면 타락권내의 인간 중에서 누가 사랑의 상속자가 되느냐? 우리 인류의 시조 아담의 타락 전 입장에 있는 사람입니다. 선민이니 무엇이니 하는 것은 다 사랑이 잘못됐기에 나타난 것입니다.

18-15
하나님의 사랑을 찾기 위해서는
이런 관점에서 볼 때에 사랑의 천리를 가르치기 위한 하나님의 뜻을 달성할 수 있는 사람이 타락권내에서 반드시 나온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스라엘 민족을 통해서 선민사상이 나와야 됩니다.

이스라엘이란 승리했다는 뜻입니다. 무엇에 승리했느냐? 어떤 운동경기에서 승리한 것이냐? 아니면 신부를 사랑하는 데 있어서 승리한 것이냐? 아닙니다. 하나님의 사랑을 찾는 데 있어서 첫번째로 승리한 것입니다.

그러면 하나님의 사랑을 찾기 위해서는 어떻게 나가야 되느냐? 세상 사람을 따라가면서 찾을 수 있느냐? 아닙니다. 세상 사람을 따라가서는 안 됩니다. 반드시 세상 사람들과 반대의 길을 가야 됩니다. 사탄과 반대 되는 길을 가야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노아도 아브라함도 야곱도 자기 처소를 떠나 보따리를 쌌던 것입니다.

뜻길을 가기 위해서는 하나님의 뜻을 누구보다도 더 간절히 사모해야 됩니다. 따라서 오늘날 우리들은 세상 자체를 부정해야 합니다. 세상을 쳐야 합니다. 다시 말하면, 종교는 현세를 부정하고, 철학을 극복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지극히 극성맞게 현세를 부정한 무리가 어떤 무리냐? 순교의 역사를 가진 기독교인들입니다. 이들은 하나님의 뜻을 이루기 위해서, 사회의 병폐를 제거하기 위해서 순교를 당하면서도 사회를 부정하고 외쳤던 무리입니다. 이 기독교는 현세를 완전히 부정했기 때문에 사회로부터 몰린 것입니다. 사회를 전격적으로 부정했기 때문에 사회로부터 극성맞게 핍박 받고 몰린 것입니다. 현세를 부정하게 되면 반드시 사회로부터 핍박을 받게 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기독교는 몰리고 쫓기며 핍박을 받아 나왔던 것입니다.

그런데 왜 핍박하던 사람들은 망하고 핍박받던 사람은 망하지 않느냐? 핍박을 받던 사람들에게는 뜻의 방향과 연결되어 그 뜻과 통할 수 있는 이상이 있으며, 하늘을 사랑하고 땅을 사랑하고 미래의 이념을 사랑할 수 있는 마음이 깃들어 있기 때문입니다. 즉 그들은 천운과 박자를 맞출 수 있는 인연을 마련했기 때문에 세상 사람들은 망하더라도 그들은 망하지 않고 남아진다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사랑의 하나님을 중심한 종교적인 이념에 의해 민주세계와 공산세계를 통일할 수 있는 심정의 천리가 밝혀지는 날에는 세계는 자동적으로 통일이 되는 것입니다. 군사적인 회담이나 평화적인 회담을 통해서는 통일이 될 수 없는 것입니다.

이 지구상에는 30억에 가까운 인류가 살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 가운데 20억에 가까운 인류가 종교적 문화권내에서 살고 있습니다. 그러니 세계 인류의 3분의 2가 종교문화권에 살고 있는 것입니다. 이러한 종교권에 공산주의가 다 파고들어 갈 수 있겠습니까? 그럴 수 없는 것입니다.

때문에 신종교주의가 나와야 합니다. 그러니 여기에서 통일교인은 새로운 주의와 사상을 갖고 세계적인 왕자로 나타나야 합니다. 온 인류가 종교를 갖는 다면 공산주의는 초개와 같이 깨져 나갈 것입니다. 그러면 그 다음엔 엮어진 역사와 남겨진 역사를 종합해서 해결지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어떠한 사람이 주인이 되느냐? 겉으로 보면 강도질하고 겁탈한 사람이 주인 같지만 아닙니다. 본래의 주인은 어떠한 사람이냐? 누구보다도 사람을 사랑하는 사람이 주인인 것입니다. 개도 사랑하는 사람을 따라다닙니다. 사랑의 마음이 없는 사람은 주인이 되지 못하는 것입니다.

18-17
인류역사의 총결론
공산당은 무력정치, 강압정치를 해서 인류를 죽음 가운데로 몰아넣습니다. 그들은 어떤 일을 해도 낮에 하지 않고 밤에 다 합니다. 그들의 공작은 전부다 밤중에 벌어집니다. 낮에 하는 일이 없어요. 밤은 그늘입니다. 그늘은 망해야 됩니다. 때문에 공산당은 망해야 되는 것입니다.

이런 관점에서 뜻의 목적으로 보아서 앞으로 세계가 머물 수 있는 내용의 모체는 무엇이냐? 물질이 아닙니다. 역사와 더불어 피 흘리고, 역사와 더불어 눈물짓고, 역사와 더불어 신음하면서 역사와 더불어 해원의 한날을 소망해온 역사적인 사랑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그 역사적인 사랑이 실체화된 하나의 지도자가 이 땅에 나와야 됩니다. 그 지도자가 누구냐? 기독교적으로 말하면 메시아입니다.

이러한 내용을 중심삼고 볼 때에 인류는 신부로서의 준비를 갖춘 후 신랑으로 오실 메시아를 맞아 하나님 뜻대로 살아야 되는 것입니다. 지성인이라고 자처하는 사람들은 종교가 필요없다고 하지만 그렇지 않은 것입니다.

그러면 통일교회에서는 뭘 하자는 것이냐? 이 시점에서 하나님의 사랑을 느끼자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을 느끼려면 어느 정도 느껴야 하느냐? 역사과정에 있어 온 사랑으로는 어림없습니다. 그 사랑의 힘 가지고는 안 되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주장하시던 2천년 전의 사랑같은 그런 막연한 사랑으로는 안 되는 것입니다. 더더욱 귀한 사랑, 값진 사랑, 실체적인 사랑, 실증적인 사랑이어야 됩니다. 그것은 그 무엇보다도 강한 것이므로 현실적인 생활관념을 가지고 어느 누구보다도 하나님의 사랑을 강하게 느낄 수 있는 자세를 갖추어야 합니다.

사랑을 강하게 느끼려면 어떻게 해야 되느냐? 먼저 사랑의 길이 어떻게 놓여져 왔는 가를 알아야 합니다. 부모가 자식을 사랑한다는 것을 무엇으로 알 수 있느냐? 부부가 서로 사랑한다는 것은 말 가지고는 안 되는 것입니다. 자식이 부모의 사랑을 느끼는 데도 자신을 사랑해 온 부모의 행로를 반대로 거슬러 올라가면서 비로소 ‘아! 우리 부모는 이런 분들이었구나!’ 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면 거슬러 올라가서 그 사랑을 상기해 봅시다. 하나님을 중심삼고 출발된 사랑은 얼마나 이상적이겠습니까? 인간이 타락하지 않았다면 그 사랑은 멋지고 멋진 사랑으로 출발했을 것입니다. 하나님의 심정은 이 멋진 사랑을 중심삼고 자유천지 가운데서 봄날에 취해 사는 , 꿈을 꾸는 심정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러한 하나님의 심정은 난데없는 회오리바람을 맞았고, 갑자기 얼음처럼 얼었습니다. 부풀었던 하나님의 마음, 뜨거운 불과 같은 그 사랑의 마음에 얼음덩이를 퍼부어 하나님은 폭발적인 슬픔을 느끼셨던 것입니다. 때문에 우리는 그 사랑을 다시 찾아야 합니다. 지금까지 이 사랑을 찾기 위해 회복운동을 해 나온 것이 인류역사입니다.

인류역사의 총결론이 무엇이냐? 간단합니다. 하나님을 중심한 본연의 사랑을 다시 찾기 위한 운동인 것입니다. 그것을 찾기 위해 지금까지 시대적으로 방법과 수단과 형태와 개념을 서로 달리하면서 인류역사는 흘러 내려왔지만 그 목적은 하나인 것입니다.

18-18
하나님의 사랑
오늘날 나를 중심삼고 볼 때 하나님의 사랑이 나와 무슨 관계가 있느냐? 실질적으로는 아무런 관계가 없습니다. 관계가 있으려면 얼마만큼 있어야 되느냐? 예수님과 이스라엘 민족과의 관계보다 더 깊은, 그 이상의 관계가 있다는 자극을 느껴야 합니다. 그렇지 않고는 예수님의 사랑을 못 느낍니다. 무슨 말인지 알겠어요? 다시 말하면 예수님을 따르던 제자들보다 예수님을 더 사랑할 수 있는 마음을 갖지 않으면 안 된다는 것입니다.

통일교회는 이런 일들을 역사적으로 해명해야 됩니다. 즉 어떻게 사랑이 발전해 나왔다는 것을 역사적으로 해명해야 되는 것입니다. 그리하여 역사적으로 해명한 증거적인 사실들을 통해서 오늘날 이 시점의 내 개체를 중심삼고, 역사가 이렇기 때문에 나는 이래야 되겠고, 역사가 이렇기 때문에 사회적으로 나에게 이런 가치가 있다는 기준을 생활에서 세워야 합니다. 그러한 생활 자체가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이요, 예수님을 사랑하는 입장에 섰다는 기준을 갖는 것입니다. 그런 내용을 어느 누구나 알 수 있게 된다면 세계는 자동적으로 통일되는 것입니다.

여기에는 무슨 수단과 방법이 필요없는 것입니다. 가정에서도 사랑하는 아내가 밥을 지어 주면 밥맛이 더 있다고 합니다. 또한 어머니가 밥을 지어 주어도 괜히 맛이 있다고 합니다. 자식을 가진 어머니는 그 자식이 아무리 똥을 싸고 비벼대서 몸이 더러워져도 밉지 않은 것입니다. 오히려 귀엽고 사랑스러운 것입니다. 그렇지 않아요?

하나님의 사랑은 역사과정에 잘 나타나 있습니다. 어떠한 민족을 중심삼고 볼 때, 치열한 투쟁에서 몰리고 쫓기던 무리들이 생명을 잃어버릴 수 있는 그런 입장에서도 그 나라의 주권을 다시 세워 새로운 출발을 하게 되는 것은 그 배후에 인간을 대하는 하나님의 사랑이 깃들어 있었기 때문입니다. 수많은 민족이 흥하고 망하는 그 역사의 배후에도, 시대마다 변천해 나가는 기독교의 역사과정에도, 오늘날 세계적인 문화가 교류되며 상충되는 과정에 있어서도 반드시 하나님의 사랑은 깃들어 있다는 것입니다. 대한민국의 사회가 아무리 부패되어 있다고 하더라도 거기에는 우리들이 모르는 가운데 하나님의 사랑이 깃들어 있는 것입니다.

이걸 볼 때 부패한 이 대한민국에도 세계에 공헌할 수 있는 요인이 있으니 그것이 하나님의 사랑입니다. 따라서 여러분은 부패한 세계 도상에도 하나님의 사랑이 몇천만배 더 깃들어 있다는 것을 알아야 됩니다. 그리고 그 하나님의 사랑은 이 세상을 구하기 위한 것임을 실감적으로 느낄 수 있어야 합니다.

그러므로 기독교는 악한 세계를 붙들고 사랑을 외치면서 나가야 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기독교는 그런 내용을 전개시킬 수 있는 종교가 되지 못하였고 그래서 종착점이 없는 것입니다. 이같이 사회를 구하지 못하고 사회를 지도할 수 있는 역량을 잃어버린 종교는 기울어져 가는 것입니다.

그것은 어떤 체제를 갖춘 형태나 어떤 기반으로서 이룰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뼛골에서부터 흘러나온 양심의 본연의 자세에 자기도 모르게 포위되고, 포위한 그 힘이 천운과 방향을 맞추어 그 방향이 역사성을 통할 수 있는 감정을 찾으면 거기서 인간 개조, 인간 재창조가 벌어지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사람은 희생하되 수단과 방법을 통해서 희생하면 절대로 안됩니다. 양심적인 사람일수록 절대적인 진리를 통해서 자기가 회생하기를 바라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 이상으로 마음속 깊이 바라는 것은 참다운 사랑을 통해서 희생하는 것입니다. 그건 왜 그러느냐? 사람은 죽을 때도 사랑하는 사람의 품에서 죽고 싶어하고 사랑하는 환경권내에서 죽고 싶어하는 것입니다. 금은보화를 쌓아 놓고 좋아하는 자리가 아니라 사랑하는 마음을 통하여 신뢰를 얻는 그 자리에서 천적인 인연은 맺어지는 것입니다.

18-20
사랑은 모두가 좋아하는 것
오늘날 우리들이 종교를 갖는 다는 말은 종교를 가져서 사회를 위해 혁신운동을 할 수 있어야 한다는 말입니다. 내적으로 그렇게 할 수 있는 폭발적인 심정을 갖지 못한 종교는 그 사명을 다할 수가 없습니다. 종교는 이제까지 말없이 새로운 환경을 제시해 나왔습니다. 아무리 악한 곳으로 가는 민족이 있더라도 그 민족에게 참다운 사랑의 폭탄을 던지면 그들은 반드시 거기에 녹아나는 것이고 동화되는 것입니다. 여러분의 마음도 그렇습니다.

선생님이 시골에서 자라서 아는 데, 목에 줄을 매고 있는 송아지는 코에 코뚜레를 끼우기 전에는 끌고 가기가 무척 힘이 듭니다. 그러나 송아지를 붙들고 참대꼬치를 만들어 코를 끼고 고삐를 잡아 당기면 송아지는 코에 피를 철철 흘리면서 끌려갑니다. 그때부터는 고삐를 힘들게 끌지 않고 송아지를 몰고 갈 수 있습니다. 그러나 코뚜레를 낀 송아지라고 하더라도 사랑해 주지 않는 사람이 끌고 갈 때는 잘 따라가지 않습니다. 그 송아지를 사랑해 주는 사람만이 쉽게 끌고 갈 수 있습니다.

앞으로 세계를 다 소화시킬 수 있는 것은 무엇이냐? 공산주의도 아니고 민주주의도 아닙니다. 그것은 사랑입니다. 사랑도 부모가 자기 자식을 사랑하는 사랑만으로는 안 됩니다. 남의 집 자식이 죽은 것은 가슴이 아프지 않아 하는 그런 사랑이어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또한 한 남자와 한 여자가 사랑할 때에도 자기들끼리만 좋으면 된다고 하는 사랑은 세계 사람과는 아무 관계가 없는 것입니다. 그러면 어떠한 사람이 필요한가? 절대적인 세계에서 공평과 평등으로 살 수 있는 사람이 필요한 것입니다.

세상 사람들의 소원이 무엇입니까? 돈을 많이 버는 거지요? 그래서 사람들은 돈을 벌기 위해 고향을 떠나지만 곧 ‘아이구 이젠 고향으로 다시 돌아가야 되겠다’고 생각합니다. 무엇 때문에 고향에 돌아가고자 하는 가? 고향 산천이 그립기 때문입니다. 사랑하는 부모의 품에 안기고 싶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밥을 보면 자기도 모르게 눈물이 나오는 것입니다. 또 고향 생각만 하면 괜히 가슴이 부풀고 봄동산을 본 듯 마음이 싱숭생숭해지는 것입니다. 이것은 왜 그러냐? 부모 형제가 있는 고향에 사랑의 인연을 찾아서 가고 싶기 때문입니다. 즉 부모의 사랑, 형제의 정이 그립기 때문입니다.

여러분, 가정이라는 말을 가만히 생각해 봅시다. 이 ‘가정’의 ‘정’자는 무슨 ‘정’자입니까? 뜰 정이지요. 뜰에는 가지각색의 예쁜 꽃들이 많이 피듯이 가정에도 형제가 있고 부모가 있는 것입니다. 그러면 그 꽃들이 서로가 좋아하는 뜰이 되어야겠어요, 서로 싫어하는 나쁜 뜰이 되어야겠어요? 가정은 서로가 기뻐하고 즐거워하고 노래 부르고 춤출 수 있는 곳이 되어야 됩니다. 그런데 거기에서 서로 싸움을 한다면 그 뜰이 어떻게 되겠어요? 황무지가 되는 것입니다. 전부 망하는 것입니다.

돈을 갖지 위한 욕심으로 자기 아버지의 쌈지에 든 몇푼 안 되는 돈까지도 빼앗아 자기 지갑에 넣는 자식이 있다면 그는 못난 자식입니다. 그래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이렇듯 물질은 제한되어 있습니다. 한계성을 초월하지 못합니다. 그러나 사랑의 보따리는 풀어 놓으면 무한대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사랑을 중심삼고 볼 때 부모의 사랑, 부부의 사랑, 자녀의 사랑, 종족의 사랑, 민족의 사랑, 국가의 사랑, 세계의 사랑, 천주의 사랑의 정적 기준이 모두 다릅니다. 여기서 다르다는 것은 누구나 다 좋아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식물도 좋은 음악을 들으면 잘 자라는 데, 나쁜 음악을 들으면 제대로 자라지 못합니다. 여러분이 한번 실험해 보십시오. 따라서 싸움하고 쓸데 없는 소리를 들으면 여러분도 잘 자라지 못하는 식물과 같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사랑이 깃들어 나오는 노랫가락을 듣고 자라면 멋지게 살 수 있는 것입니다. 그 멋지게 살 수 있는 무엇을 가진 마음들이 사랑입니다.

18-22
뜻이 가는 길은 사랑이 가는 길
사춘기가 왜 멋있는 지 아십니까? 멋지게 되어 있기 때문에 멋진 것입니다. 사춘기 때는 괜히 입맛이 없고 공부도 모른다고 팽개쳐 버립니다. 언제나 마음이 들떠 있고 자신이 인공위성같이 공중으로 날아가지 않을까 하는 걱정을 하기도 합니다. 그렇게 될 수만 있다면 얼마나 멋집니까?

인간의 최고의 목적은 무엇이냐? 소원이 무엇이냐? 인간은 땅을 원해 전부 땅덩이를 부둥켜안고 땅에서 살겠다고 하지만 결국은 어디로 가느냐? 무덤으로 가는 것입니다. 그러나 인간은 사랑이 깃들어 있는 어머니의 품을 그리워하는 것이요, 사랑할 수 있는 형제의 품을 그리워하는 것이요, 사랑하는 아내의 품을 그리워하는 것입니다. 그 무엇도 사랑을 막지 못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최고의 진리는 사랑을 중심삼고 나가는 것입니다. 여기에서 기독교가 세계적인 종교가 아니 될 수 없다는 것이 증명되는 것입니다. 이런 내용이 불교에는 없습니다. 유교에도 없습니다.

예수님은 신랑 신부에 대한 말씀도 하셨고 또한 형제에 대한 말씀도 하셨습니다. 즉 우주의 정점은 세계인류가 한 족속이라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인류는 사랑의 망태기 안에서 엉클어져서 자기를 위한 사랑이 아니라 자기보다 가정을 더 위하는 사랑을 찾아 나가야 합니다. 또한 가정보다도 종족을 위한 사랑을 찾아 나가야 되고 종족보다도 민족을 위한 사랑을 찾아 나가야 되고, 민족보다도 국가를 위한 사랑을 찾아 나가야 되고, 국가보다도 세계를 위한 사랑을 찾아 나가야 됩니다. 그것이 뜻이 가는 길이요, 사랑이 가는 길입니다.

충신은 나라를 위하여 자기 개인을 무시하고 자기 가정을 무시하고 자기 종족을 무시하고 나서야 합니다. 그것이 충신의 도리입니다. 또 효자는 자기 일신을 무시하고 자기에 속한 처자를 무시하고 부모의 뜻을 따라 나가야 합니다. 그것이 효자의 도리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뜻이 가는 길은 사랑이 가는 길입니다. 내 개인보다도 큰 일을 먼저 사랑하는 길이 뜻이 가는 길이요, 사랑이 가는 길입니다.

이런 관점에서 천지를 헤아려 볼 때 예수님은 만민의 메시아가 되어야 했습니다. 예수님은 십자가에서 원수들의 창에 몸을 찔리고, 조롱과 비소를 당하는 가운데서도, 그렇게 억울하고 비참하게 죽음을 당하는 최후의 자리에서도 “아버지여 저희를 사하여 주옵소서 (눅 23:34)”하고 기도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예수님의 사랑 이상의 사랑을 가져야 하고, 자기에게 인연된 사람만 사랑하는 것이 아니라, 원수까지도 사랑할 수 있어야 합니다. 또 우리는 광명만을 좋아하는 것이 아니라 칠흑같은 흑암 권세도 좋아할 수 있는 아량과 배포를 가져야 합니다. 그래야 그 배후에 악한 세력을 물리칠 수 있는 하나님의 사랑이 깃들게 되는 것입니다.

그렇게 되면 기독교를 중심삼은 세계적인 문화 세계를 창조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그런 사실은 외곽적으로 나타나지 않습니다. 이 내용을 해명하고자 하는 것이 바로 통일교회의 바람이며 신앙입니다.

그러니 여러분들은 자신보다도 가정을, 가정보다도 종족을, 종족보다도 민족을, 민족보다도 국가를 , 국가보다도 세계를 , 세계보다도 하늘땅을 더 사랑할 수 있는 마음을 가져야 합니다. 나아가 하늘땅보다도 하나님을 더 사랑할 수 있는 마음을 가져야 됩니다. 이러한 마음을 하나님은 원하고 계십니다.

하나님에게는 욕심이 많습니다. 하나님은 6천년 전에 인간 앞에 사랑의 기준을 세워 놓고 하나님만을 사랑하라고 하셨습니다. 이것은 천리이기 때문에 독재가 아닙니다. 예수님 역시 누구보다도 나를 사랑하지 않으면 내게 합당치 않으며, 내 제자가 못 된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천리가 있기 때문에 사랑의 기준도 있는 것입니다. 이러한 과정을 거쳐 나가면 천지 운세도 역사의 과정에서 역사를 움직이기 때문에 하나님은 인간에게 미리 기도를 하게 하여 고생을 시키지 않는 것입니다. 그래서 지루하지만 인간에게 몇 천년 동안이나 참아 보게 하시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은 복받기를 원하는 사람들에게 죽고 또 죽으라고 하며 이 천지의 뜻을 지켜 나오게 하시면서 키워 나오셨습니다. 잘했어요? 못했어요? 잘한 것입니다.

18-24
뜻이 가는 길은 이상의 길
통일교회 선생님은 하나님을 나의 하나님으로 만들고 싶습니다. 남의 하나님으로 두고 싶지 않습니다. 이런 욕심은 죄가 아닙니다. 선입니다. 선생님이 하나님을 나의 하나님으로 만들어서 여러분을 사랑하면 여러분도 좋아해야 됩니다. 그런데 선생님이 사랑하려고 하는 한국이 선생님을 제일 반대합니다. 기가 막힌 일입니다.

뜻이 가는 길은 이상의 길입니다. 이상은 반드시 사랑을 중심삼고 자리 잡아야 합니다. 그래야 거기에 영원한 안식의 터전이 생기는 것입니다. 그러나 아직까지 어느 환경에서도 영원히 안식할 수 있는 안정권이 조성되지 않았습니다. 그러므로 종교인은 가능성이 있는 입장에서 그곳을 향해 가야 됩니다. 그런데 가능성이 있는 입장에서 그곳을 향해 가야 됩니다. 그런데 가능성이 있는 입장에서 간다고 생각하는 종교인이 없다는 것입니다. 통일교회는 가능성이 있다고 생각하고, 가능성을 느끼면서 가야 됩니다. 여러분은 그걸 느끼면서 갑니까? 못 느낀다면 여러분은 또 보따리를 싸서 그것을 찾아가야 됩니다. 선생님 역시 그렇다면 또 다시 보따리를 싸 가지고 찾아가야 됩니다.

하나님만을 사랑하라. 주님만을 사랑하라는 말은 인간 앞에 사랑의 동기인 동시에 결실이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기독교가 2천년이라는 긴 역사과정에서 희생해 나왔지만 지금까지 남아진 것입니다.

여러분, 끝날이 가까와지고 있습니다. 마지막 최후의 결승점이 가까와지고 있습니다. 골인을 하여야 할 때라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최후의 한 발자국을 남겨 놓고 ‘내 뛸건 다 뛰었는데’하며 뒤에 오는 사람에게 ‘너희들 지금 뛰어오는 구나 난 이만큼 왔는 데’하고 구경만 하면서 서 있어서는 안 됩니다. 그 사람이 아무리 천리길을 달렸다 하더라도 남은 한 발자국 때문에 몇 만리 길을 더 갈 수 있다는 것을 알아야 됩니다.

끝날이 되어 기독교가 세계를 주관할 수 있는 , 골인할 수 있는 최후의 결승점에 도달했는 데도 불구하고 그들은 쉰다는 것입니다. 즉, 기독교는 만우주 앞에 자랑할 수 있는 승리의 권한을 가질 수 있는 데 그들은 결승점에서 쉬고 있는 것입니다. 쉬다 보니 ‘아이고 여기가 어디야! 뛸 때는 몰랐는데 여기에 무엇이 더 붙었구나’하면서 본래의 목적을 잃어버린 채 다른 일을 하고 있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통일교회는 현재의 기독교와는 달라야 합니다. 같아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그러면 현하에 뜻이 가는 길은 어떤 길이냐? 선의 길입니다. 그러면 선이라는 것은 어떤 것이냐? 욕심을 채우는 것입니까? 남의 지갑에 있는 것을 잡아채는 것이 선입니까? 아닙니다. 선은 주는 것입니다. 사랑의 마음으로 포화상태가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사랑은 이 포화선을 넘어갑니다. 포화상태에서는 그 이상은 못 올라가지만 사랑은 그 기준을, 그 포화선을 돌파하고 넘어가는 것입니다. 우리 통일교인들은 사랑으로 그 활동범위를 넘어 하나님의 가슴까지 그것을 연결시키어 인연을 맺으므로 하나님을 기쁘게 해드려야 하는 것입니다.

18-25
본연의 사랑을 찾아가야 할 인생
수십억 인류는 태어날 때도 사랑을 중심으로 나고 죽을 때도 사랑을 중심으로 죽습니다. 즉, 사랑 가운데서 태어나서 사랑을 중심삼고 살다가 사랑 가운데서 죽는 것이 사람이라는 것입니다. 이렇게 사람은 변하지 않는 사랑에 의존해 살고 변하지 않는 사랑이 머무는 곳에 안식합니다. 그러므로 그런 사랑이 머무는 곳이라면 바위틈일지라도 활개를 칠 수 있고 코를 골며 편안히 누워 낮잠을 잘 수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부모의 사랑에 의해서 태어났지요? 참다운 사랑에 의해 태어났으면 참다운 세계에서 사랑을 붙들고 살아야 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이상적인 인생입니다. 그런데 인간은 잘못된 사랑의 일치점을 통해서 태어났기 때문에 잘못된 사랑권내에서 살다가 잘못된 가운데 죽어가게 되었습니다. 그러니 인간은 본연의 사랑을 되찾아 가야 합니다.

기독교에서 말하는 부활을 해야 합니다. 본연의 사랑 안에서 못 태어났고, 본연의 사랑 안에서 못 살고, 본연의 사랑 안에서 죽을 수 없었기 때문에 다시 태어나서 다시 살다가 죽을 수 있는 길을 개척해야 됩니다. 우리의 인생은 본연의 사랑을 되찾아가는 노정이 되어야 합니다.

본래의 사랑의 길이 무엇이냐? 이상이 깃들 수 있는 길입니다. 그러면 그 이상은 무엇이냐? 하나님이 본래 인간을 창조하실 때에 창조이상입니다. 사랑은 최고로 불가사의한 것입니다.

인간은 하나님을 점령하고도 안식하지 않습니다. 남자들은 다 도적입니다. 선생님도 남자지만 이건 부인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을 점령하였다고 해서 좋아하며 만족하게 되어 있지 않습니다. 사람의 욕심은 무엇까지 점령하고 싶어하느냐? 하나님의 마음 보따리, 심장 한복판에 있는 비밀 창고 속의 사랑을 원하는 것입니다. 영원한 이 사랑을 완전히 점령하고 나면 사람의 욕심도 그때는 자빠지는 것입니다. 인간은 하나님의 사랑을 점령하기 위한 경기에 출전한 용사들입니다.

지금까지 대한민국에서 선생님은 욕을 먹고 별의별 소문을 다 들었습니다. 그러나 그 나돌고 있는 소문을 세상 사람들이 문제시한다면 그것을 점령할 수 있는 조건이 세워지기 때문에 그것은 나쁜 일이 아닙니다. 그래서 선생님은 어려운 길도 참고 견디며 통일교회를 이끌어 가고 있는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사탄을 위시한 악한 세계의 모진 핍박과 고통을 늠름하게 극복하여 없어서는 안 될 사람이 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세상적으로 보면 무가치한 아줌마가 통일교회에 들어와 가지고는 남을 위해 기도해 주고 다닙니다. 그들의 마음 가운데는 사랑으로 남을 용서해 주고 사랑을 희망하며 그 사랑 안에 영원히 깃들고자 하는 마음이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 사랑을 도적질하려고 하는 사람이 있다면 그 사람은 사랑의 도적입니다. 그러면 하나님이 그것을 싫어하시느냐? 하나님도 그것을 좋아하십니다. 사랑의 도둑 중에 대도둑이 바로 하나님이십니다. (웃음)

어떤 사람이 ‘아! 수고하시는 하나님’ 하면서 하나님을 붙들고 ‘나를 사랑해 주시오’ 한다면 그는 얼마 안 가서 사랑을 잊어버리는 것입니다. 잊어버리는 것은 영원한 자기의 것이 아닙니다. 인간은 원래 하나님의 사랑 안에서 살고 하나님의 사랑 안에서 죽어야 하는 것입니다. 지금까지 선생님이 아무리 괴롭더라도 참으며 이 길에서 싸워 나온 것은 이 길에서 죽어야 한다는 것을 알았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아무리 외적으로 깡통을 차고 밥을 얻어먹는 다 해도 망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원수를 갚기 위한 작전 때문에 며칠 밥을 얻어먹는 다고 해서 그것이 죄입니까? 그보다 더 큰 일을 하면 되는 것입니다. 이런 것을 여러분은 알아야 됩니다. 선생님이 부산에 피난가 있을 적에 부둣가에서 노동하고 사업을 해서 돈을 벌었지만 다른 사람들이 돈을 버는 것과 목적이 달랐습니다. 선생님은 못하는 것이 없습니다. 염전에서 소금 가리는 일도 참 잘합니다. 안해 본 일이 별로 없습니다. 농사도 지어 봤습니다. 여러분들도 이런 일을 다 해보아야 합니다.

선생님은 돈 한푼이 없는 사람이지만 천하의 그 누구도 부러워한 적이 없습니다. 미국의 대통령도 부러워하지 않았습니다. (중략)

선생님은 어려울 때는 절대로 하나님께 기도를 안 합니다. 아버지에게 죽을 일이 생기면 살려 달라고 하고 좋을 땐 작별하는 그런 놀음 안 한다는 것입니다.

18-27
통일교회가 세우는 사랑의 기준
여러분들이 옷을 입고 자랑하며 웃고 살고 있지만 그 전부가 임시로 빌려 입고 빌려 사는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여러분의 삶은 나그네의 걸음 같은 것이고 여러분이 살고 있는 집도 여관이나 호텔같은 것에 지나지 않는 것입니다. 우리에게는 무한대의 가치가 있습니다. 그것이 나를 부르는 소리를 듣지 못하고 알지 못하니 얼마나 불쌍한 일입니까?

사람은 사랑 가운데서 태어나고 사랑 가운데에서 살아가고 사랑 가운데에서 죽어가야 합니다. 그 사랑은 무엇이냐? 돈 주면 왔다갔다하는 사랑이 아닙니다. 존재의 기원을 발발시킨 사랑이요, 존재의 사연을 주관하는 사랑이요, 존재의 결실을 현실화시킨 사랑입니다. 이 사랑은 나면서부터 죽을 때까지의 절대적인 사랑입니다. 그래서 사람은 세계를 통일하고 싶어하는 것이며 보좌에 앉아서 만민 앞에 자랑하고 동시에 사랑하는 사람과 함께 살아가고 싶어하는 것입니다. 여기까지가 인간적인 욕망입니다.

그러나 통일교회의 욕망은 한 단계 더 올라갑니다. 통일교회의 욕망은 둘만의 사랑이 아니라, 둘의 사랑을 합하여 그 가운데에 하나님을 모시고 하나님 주의를 이루어 30억 인류를 거기에 몰아넣자는 것입니다. 그리하여 본연의 세계를 찾아 세움으로써 하나님을 중심으로 인류를 얽어매서 전부다 사랑하자는 것입니다. 통일교회가 세우려는 사랑이 그런 사랑입니다. 알겠어요?

예수님도 그러하기 때문에 기독교를 중심삼고 세계를 복귀해 나온 것입니다. 따라서 지금은 세계가 기독교권내에 있으며 예수님의 사랑을 시인하고 있습니다. 기독교는 2천년 전부터 이제 끝날에 이르기까지 인간을 부활시키어 그 가운데 하나님을 모셔 놓고 하나님에게 인간을 몽땅 얽어 매서 사랑의 동산을 이루겠다고 나왔습니다. 이것이 지상천국이며 기독교의 첫째 이상입니다.

그러면 자기의 혈통적인 종적 관계를 무시하고 횡적 관계를 더 중요시하는 사랑의 감정을 어떻게 폭발시키느냐? 지금까지 인간은 종적인 사랑의 길을 따라왔습니다. 그러나 우리들이 주도해 온 그 종적인 사랑의 길을 세계로까지 발전시키지는 못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세상이 야단법석을 하는 것입니다. 따라서 이런 종적 사랑, 자기의 혈통적 사랑을 분리시켜 놓고 그 사랑을 존중시할 수 있는 새로운 사랑의 보따리가 풀어져 나와야 되는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자기의 아내보다도, 아들딸보다도 더 세계 인류를 사랑해야 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 입장에서 볼 때 온 인류는 다 공평합니다. 내가 사랑하는 아들딸과 세계 인류가 하나님 앞에서는 다 공평하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자기가 할 수 있는 책임과 사명을 짊어지고 더 귀하고 더 가치 있는 존재를 따라가 사랑하기를 바라는 사람이 하나님편의 사람입니다. 그러므로 그런 사랑을 발전시키기 위해서는 자기의 친척, 종족, 민족을 초월하여 세계를 사랑해야 됩니다.

예수님은 민족을 넘어서 세계를 사랑한 사람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예수님은 세계의 주인이 되는 것이며 인류는 예수님을 중심삼고 이 세계를 복귀해야 됩니다.

18-29
뜻의 길은 사랑의 길이요, 선의 길
뜻이 가는 길은 이상의 길입니다. 그러나 이 뜻의 길은 고생의 길이 되었습니다. 창조주이신 하나님의 이상은 무엇이냐? 그것은 인간들이 사랑 안에서 태어나 사랑 안에서 살다가 사랑 안에서 죽어 가는 것입니다. 여기에서 그런 생명의 길을 가는 사람은 영원히 그 사랑과 더불어 그 길의 주인이 되고 그렇지 못한 사람은 전부다 흘러가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인류는 그런 사랑을 가져야 합니다.

그러면 통일교인은 어떤가? 사랑 안에서 다시 살고 사랑 안에서 죽는다는 것입니다. 내 가정의 사랑이 아니라 하늘땅의 사랑을 붙들고 살다가 죽는다는 것입니다.

본래 인간시조 아담 해와의 소망은 하늘과 땅을 하나 만드는 것이었습니다. 그들은 그것을 위해 태어났습니다. 오늘날 인류도 그런 사랑의 인연 가운데 태어나서 그 사랑을 실천하기 위해 살아야 할 것인데 인간들은 이것을 알지도 못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제2아담으로 예수를 보내시어 사랑의 인연을 상속받게 하시고 그 사랑을 실천하도록 하셨습니다. 그러기 위한 발판으로 이스라엘 민족을 세워 놓으신 것입니다. 그러나 이스라엘 민족이 예수를 불신함으로 말미암아 그 사랑의 바탕을 잃어버렸기 때문에 하나님은 활동무대를 다시 영계로 옮겼던 것입니다. 그리하여 다시 세계적으로 그 사랑을 전개시키기 위해 예수께서 오실 것이니 그날이 바로 예수 재림의 날인 것입니다. 즉, 하나님이 바라시는 사랑으로 하나의 세계를 이루기 위해 예수께서 재림하신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그 사랑이 어디로 갈 것인가? 사랑이 가는 길은 선이 가는 길이고, 뜻이 가는 길입니다. 그러므로 여러분은 자신을 희생시켜서라도 가정을 뜻 앞에 세울 수 있는 사랑을 가져야 됩니다. 큰 것을 위해 작은 것을 희생시켜야 한다는 것입니다. 자기 개인의 종적인 사랑을 희생시켜서라도 세계적인 사랑을 발전시킬 수 있는 사랑이 되어야 합니다. 그런 인간들이 지구상에 생겨나기 시작하면 그때부터 지상천국이라는 이상세계는 이루어지기 시작하는 것입니다. 아시겠지요?

여기에 처음 온 사람들은 통일교회를 잘 모르지요? 통일교회는 대한민국이 싫어하는 교회입니다. 그런데 누가 안다고 말하는 것입니까? 통일교회가 나쁘다고 하는 데 그럴만한 이유가 있습니까? 처음에 통일교회에 온 사람들은 ‘아이구 이거 대단한데, 통일교회 문선생님이 대단한데’합니다. 그러나 통일교회가 어떤 교회인지 모르면서 욕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 사람들은 지금까지 자기 가정을 위주로 나라의 녹을 먹으면서 나라를 이용해 먹고 큰 것을 깔고 앉아 있는 녀석들입니다.

효충이 아니고 충효입니다. 그렇지요? 효성을 다하여 섬겨야 할 부모를 내버리고 충신의 길을 가야 하는 것이 천리입니다. 그러므로 뜻이 가는 길에서는 더 큰 가치를 위해서 작은 가치를 흡수하고 희생시키는 것입니다. 그러면 통일이 됩니다. 통일이 좋아요? 안 좋아요? 「좋습니다」 그런데 왜 기성교인들이 통일교회를 미워합니까? 머리는 통일이고 아래는 교회이니 사촌인데….

여러분! 선전할 수 있어요? 여러분들은 선전할 줄 모르더구만요. 선전할 줄 모르지요? 그러니 반대 바람이 여기에 몰려와서 같이 엉켜붙어야 통일이 됩니다. 아시겠어요? 「예」

통일은 어떻게 해야 되느냐? 뜻을 따라가야 됩니다. 한국 사람보다도 미국 사람을 더 사랑하라고 하면 섭섭해요? 안 섭섭해요? 섭섭하겠지만 한국 사람들을 희생시켜서라도 서양 사람들을 살려줘야 됩니다. 그리고 아주머니들 머리카락을 잘라서 가발을 만들어 팔아 가지고라도 외국 사람들을 도와줘야 됩니다. 어때요. 섭섭하지요? 왜 가만히 있습니까? 여러분들은 어디까지 들어가야 하느냐? 죽을 수 있는 최고의 밑창까지 들어가야 합니다. 큰일났지요? 그러지 않으면 세계주의자가 못 됩니다.

통일교회는 세계주의자가 되는 길을 가르쳐 주고 있습니다. 조금 전에 일본 아가씨가 왔는데 그 아가씨는 한국 사람들을 믿고 돈도 본부교회에 맡겨 둡니다. 한국에 있는 자기 삼촌 집에는 안 가고 핸드백 하나 들고 한국의 통일교회를 찾아온 것입니다. 통일교회 문선생님이 무슨 능력이 있습니까? 그러나 선생님은 밥먹을 때 마치 자기 안방에 앉아서 며느리, 손자를 거느리고 환갑 잔치하는 사람처럼 근사한 배포를 가지고 듬뿍듬뿍 잘 먹습니다. 그 누가 그렇게 하라고 가르쳐 줬는지 선생님도 모르겠습니다.

여러분은 원수 중의 원수를 죽이고 싶더라도 사랑하며 원리를 자꾸 넣어 주어야 합니다. 오늘 우리가 품고 가는 것은 그런 원칙입니다. 그러므로 통일교회 사람들은 세상 사람들과는 종자가 다릅니다. 그래서 욕을 많이 얻어먹습니다. 그러나 선생님은 남들이 손가락질해도 묵묵히 눈물만 흘리며 세상에 뜻을 알리는 데 전심전력했습니다.

18-31
눈물은 인류를 위하여, 땀은 땅을 위하여, 피는 하늘을 위하여
이제 선생님은 한국을 떠나 외국에 나가려고 합니다. 외국 사람들을 살리기 위해서 통일교회 사람들의 코를 꿰어 데려갈 것입니다. 그리하여 만민이 산다면 선생님은 죽어도 좋습니다. 이것이 죄입니까? 선입니까? 「선입니다」 그러면 여러분들의 코를 꿰어서 데려가겠습니다. 선생님은 지금까지 한 번도 하나님 앞에 항의해 보지 않았습니다. 그러면서 여러분들을 이끌어 왔습니다. 도중에 감옥에도 참 많이 들락날락했습니다. 이제는 감옥에 대해서는 모르는 것이 없는 박사입니다. 감옥에서 모진 매도 많이 맞아 봤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만약 누구를 때리라고 하면 비참하게 때릴 수 있는 사람입니다. 뭐 길을 가다 한 사람쯤 처리하는 것은 문제없습니다. 소리 없이 자신 있게 할 수 있습니다.

선생님은 어떤 것이든지 한다고 결심하면 3년 이내에 할 수 있습니다. 여러분이 선생님 몰래 응어리진 것을 풀려고 한바탕했지만 선생님은 이미 그런 것을 다 해보았습니다. 이렇게 말하니 여러분, 기분이 좋아요? 나빠요? 「좋습니다」 왜 좋아요? 여러분들은 선생님을 어떤 입장에서 좋아합니까? 같은 한국 사람의 입장에서 좋아합니까? 아니면 하나님 입장에서 좋아합니까? 「양쪽 다요」 (웃음) 여러분들은 선생님이 나쁘다고 생각하지요? 은근히 하나님의 앞잡이인 척하고, 그러니 기분이 나쁠 것입니다.

세계적인 싸움을 하는 데 있어서 지금까지는 통일교회가 졌습니다. 전반전에는 통일교회가 패하게 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2차적인 후반전에 들어와서는 승리할 것입니다. 승리의 기준이 넘어온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많은 사람이 필요합니다. (중략)

선생님은 한국에서만 활동할 수 없습니다. 미국과 독일과 일본에서도 활동해야 합니다. 언젠가는 그곳에 있는 사람들을 전부 다 복귀시키겠다는 배짱을 가지고 있습니다. 날아다니던 꿀벌이 꿀맛을 한번 보면 꿀이 묻어 있는 판자에 꼭 붙어 있습니다. 아무리 떼어 내려 해도 안 떨어집니다. 꽁지를 떼어 내도 안 떨어져요. 마찬가지로 달콤한 하나님의 사랑의 맛을 한번 보기만 하면 자기 나라도 하나님의 뜻 앞에 바치겠다고 할 것입니다. 결사적으로 복귀시키겠다고 노력할 것입니다. 세계를 맡고, 인류를 맡고 국가를 맡는 데 있어서 제일 중요한 것이 무엇이냐? 그것은 하나님의 사랑입니다. 밥을 굶고 살아가더라도 사랑이 있으면 좋은 것입니다.

여러분, 코를 꿰어가도 좋다고 했지요? 정말 그래요? 예수도 그런 길을 갔습니다. 선생님 역시 그런 길을 걸어 나오면서 많은 시련을 받았습니다. 여러분은 그것을 알아야 됩니다. (중략)

여기에 있는 사람 중에는 기성 교회에 다니다가 온 사람이 있을 것입니다. 그들은 처음에는 통일교회가 실속이 있나 없나 많이 때려 보았을 것입니다. 잘 익었나 안 익었나 때려 보았을 거예요. 때려 보니 아주 잘 익었다는 것입니다. 그 사람들이 통일교회의 맛을 알게 된다면, 봄동산같은 통일교회의 맛을 보게 된다면 어린이서부터 할머니까지도 줄을 서서 손을 흔들며 들어올 것입니다. 마음세계는 그렇게 되어 있는 것입니다.

통일교회에 들어오면 누가 알아주느냐? 하나님이 알아주십니다. 선생님은 하나님의 작전법에 의해서 일을 시킵니다. 내 개인을 위해 살아서는 안됩니다. 이 민족을 살려야 됩니다. 따라서 눈물은 인류를 위하여, 땀은 땅을 위하여, 피는 하늘을 위하여 흘려야 되는 것입니다. ‘내가 지금 까지는 몰랐는데 그 맛을 알고 나니 너무 너무 좋구나, 기가 막히는구나!’할 만큼 하나님의 사랑을 느껴야 합니다.

교회의 소식에 자주 접하지 못하고 교회와 불통하다가 떨어진 사람이 많습니다. 어떤 거센 바람이 불어 와도 그것을 이겨낼 수 있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그러지 못한 사람은 통일교인이 아닙니다.

18-33
뜻이 가는 길을 향하여 정성들여야
선생님이 이제 외국으로 가야 하는 데 떠나면서 여러분들에게 복을 빌어주고 갈까요, 욕을 하고 갈까요? 아니면 정을 붙여 가지고 갈까요, 떼어 놓고 갈까요? 「정을 붙여 가지고요」 선생님은 정을 떼어 놓고 가야겠습니다. 생각해 보세요. 정을 붙여 가지고 가게 되면 미국 사람들이 좋아하겠습니까? 시집을 가는 처녀가 주위를 깨끗하게 하고 시집 가야지 누더기처럼 해 가지고 시집갈 수 있어요? 그게 좋아요? 그럴 수 있는 사람이 있겠어요? 사랑은 다 똑같습니다. 그러니까 선생님은 한국에서의 정을 떼고 가야 되는 것입니다.

붙어 있는 것을 떼어 놓으려면 어떻게 해야 되겠습니까? 따라오는 자식이 있으면 주먹으로 쳐야 됩니다. 주먹으로 안 되면 칼을 써서라도 떼야 되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떼긴 떼야 할 텐데 어떻게 떼느냐? 이것을 선생님은 항상 생각했습니다. 여러분도 그것을 생각해야 됩니다. 선생님은 한 바퀴 돌고 와서 지금까지 있었던 모든 사연을 전부 잊어버릴 것입니다. 새롭게 재출발하는 마음을 갖고 싶습니다. 알겠어요? 지금까지 선생님은 한국 사람을 사랑했습니다. 그러나 이제는 그들을 떼어 놓고 가야 됩니다. 따라서 여러분들은 정성을 들여 하나가 되어야 합니다. (중략)

여러분은 정성들인 보따리를 싸 가지고 선생님 앞에 와서 ‘이게 전부입니다. 잘 부탁합니다’해야 하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특별히 많은 정성을 들이고 기도를 해야 됩니다. 알겠지요? 「예」 그러면 정성은 어떻게 들여야 되느냐? 선은 정성을 따라가는 데, 7년노정을 허락하신 아버지가 아무 조건 없이 7년 정성을 들였으니 여러분은 그 이상의 정성을 들이겠다고 밤낮으로 줄달음쳐야 합니다. 알겠지요? 그런 정성을 들이기는 쉽지가 않습니다.

선생님은 1965년에 한국에 있는 성지의 흙을 세계 120곳에 나누어 주었습니다. 그런 과정에서 세계의 땅을 연결시키려고 일본에 갔었습니다. 그런데 일본에서 선생님을 보고는 미친 사람이 왔다고 했습니다. 사실 선생님이 미치기야 미쳤습니다. 그런데 무엇에 미쳤느냐가 문제지요. 하나님의 나라를 이루는 데 미쳤습니다.

그러면 이제는 어떻게 해야 될 것이냐? 땅을 연결시킬 수 있는 입장이 되면 그 다음에는 사람을 연결시키는 것입니다. 사람 중에는 참다운 사람, 정성들이는 사람이 있습니다. 선생님은 정성들이는 사람들의 마음과 통일교회 사람들의 마음을 서로 일치된 방향으로 연결시키자는 것입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선생님 자의로 여러분의 심부름을 해주는 것까지 주저하지 않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그들의 정성을 중심삼고 그런 기도를 해야 하는 것입니다. 선생님은 외국에 가서 그들을 축복해 주고 와야 합니다. 여러분, 축복이 무엇인지 알지요? 선생님은 축복을 해야 되는 것입니다. 실권주의자들의 향락전인 관계는 인생을 패배시키는 결정적 상태에 도달하게 합니다. 그런데 여자들이 그런 것을 모릅니다.

선생님이 일본에 갈 때는 일등 비행기가 아니면 안 타고 간다 하면 일본 사람들은 집을 팔아서라도 일등 비행기 표를 사다가 척 날라다 줄 것입니다. 그렇게 되어 있습니다. 우리 통일교회는 보통 사람이 이해할 수 없는 일을 이루고 있는 것입니다. 이제 선생님은 세계를 순회하고 돌아와서 7년 고비를 완전히 종결짓고 넘어가야 되겠습니다. 알겠지요? 「예」

그러므로 여러분들은 뜻이 가는 길을 위해서 정성을 들여야 합니다. 다시 말하면 희생을 각오하고, 눈물과 피땀을 흘릴 각오를 해야 합니다. 물심양면으로 세계를 위하여 모든 것을 바칠 수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18-34
세계를 복귀할 수 있는 비법
하나님이 미국을 축복하신 것은 누구를 위함이셨는가? 여러분은 미국을 사랑하셨던 하나님의 마음과 일치할 수 있는 마음으로 정성을 들여야 합니다. 이것이 오늘 여러분에게 부탁하는 것입니다. 알겠어요? 「예」 그렇게 하고 싶은 사람 손들어 보세요. 여러분이 그렇게 힘있게 손을 들면 선생님은 자신이 없어집니다. 무슨 말인지 알아요? 선생님이 가는 길 앞에 여러분이 정성을 들여 주면 선생님은 꼭 보답합니다. 다른 사람들은 다 이 선생님을 욕하고 있는 데 그것에 개의치 않고 몰림을 당하면서도 뜻을 위해 정성을 들인 사람한테는 꼼짝 못한다는 것입니다. 선생님은 떳떳치 않은 사람 앞에서는 위엄을 갖출 수 있지만 정성들인 사람 앞에서는 오금을 못 씁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을 꽁꽁 묶는 비법은 무엇이겠습니까? 매 맞고 쫓겨나 가지고도 돌아서서 그 매를 잊어버리고 다시 찾아가서 그럴 수 밖에 없었던 사정이 있다고 아버지께 용서를 구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오히려 그 아버지를 위로해 줄 수 있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그러한 사람이 있다 할 때는 불한당 같은 아버지라도 마음이 녹아나는 것입니다. 그런 사람이 ‘아버지 이리 오세요’하면 ‘오냐 내 아들아!’ 하는 것입니다. 그런 사람에게는 하나님도 포로가 됩니다. 그런 사람이 하나님을 꽁꽁 묶으면 하나님은 ‘꽁꽁 묶어도 좋다 더 묶어다오’하시는 것입니다. 그것이 세계를 복귀할 수 있는 비법입니다.

선생님이 여러분에게 부탁하고 싶은 것은 뜻을 따라 가는 길에 있어서 나를 위해 기도하는 것보다도 세계에 널려 있는 일본, 미국, 독일 등 외국 식구들을 위해서 기도하고 정성들이라는 것입니다. 전세계 인류를 위해 기도하고 정성들이는 여러분이 되어야 합니다. 알겠지요?

18-35
기 도
아버님! 당신 앞에 머리를 숙이고 역사시대의 쓰라린 노정을 걸어오신 당신을 다시 한번 생각해 봅니다.

아버님 앞에 효성을 다짐할 수 있는 , 당신의 마음 가운데에 머물 수 있는 아들딸의 모습이 되게 하여 주시옵소서. 뜻이 가는 길, 이념이 머무는 곳, 창조이상이 실현되는 곳을 원하시는 아버지! 아버지께서 이상하시는 그 하나의 이상세계를 천상천하에 실현하는 과정에 있어서 지금까지 통일교회는 바람과 같은 역할밖에는 못했습니다. 어찌하여 저희들은 지상에 타락한 인간으로 태어났습니까? 그 한 날의 실수가 천만세의 한이 되어 오늘날 통일교회 신도들의 몸과 마음에 말할 수 없는 화살 자국을 남겼고, 선조들로 하여금 피를 흘리며 끊임없이 투쟁하게 했다는 사실을 다시 한번 깊이 회고해 봅니다. 저희들도 비참하였지만 아버님은 얼마나 더 비참하셨겠는가를 생각할 때 다시 한번 머리 숙여 참회하지 않을 수 없사옵니다.

아버님, 아버님을 사랑하지 않고는 견딜 수 없는 그리움의 마음과 흠모의 마음이 더하여 자기의 의식을 잃고 쓰러져 죽어 가는 한이 있더라도 아버지를 그리워하는 아들딸이 되게 허락하여 주시옵소서. 아버지의 뜻을 성사할 목적을 갖고 온갖 충성과 희생을 다 드려도 부족한 자신임을 부끄러워할 줄 아는 뭇자녀들이 되기를 , 아버님이 고대하고 계시다는 것을 저희들은 몰랐사옵니다.

통일의 자녀들이, 자기 스스로의 기쁨을 아버지 앞에 보일까봐, 그 얼굴을 가리고 자기 기쁨을 억제하면서 하늘 아버지의 기쁜 모습을 보기 위해 노력할 줄 아는 당신의 자녀들이 되게 허락하여 주시옵길, 아버님, 간절히 바라옵고 원하옵나이다.

아버지, 한국 땅을 지켜 주시옵소서. 한국에 널려 있는 통일의 자녀들을 사랑하여 주시옵소서. 어려울 때는 반드시 보호하는 자가 필요한 것이요, 위로해 주는 자가 필요한 것입니다. 제가 그러할 때 당신이 그렇게 대해 주셨으니 남한 각지에 널려 있는 뭇자녀들도 그렇게 보호하여 주시옵길, 아버님, 간절히 바라옵니다.

아버님, 뜻 앞에 선 선봉용사로서 현실적 관계에서 걸리는 내용이 아무것도 없게 해주시옵소서. 온전한 아버지의 사랑을 중심삼고는 개체도 하나의 핏줄을 받고 난 귀한 형제인 것을 잘 알고 있사오니 아버지의 슬픔에 같이 동하고 정할 줄 아는 자녀들이 되게 하여 주시옵소서. 아버지의 멍에를 대신 짊어지고 그 멍에를 풀어드릴 수 있는 참효자 효녀들이 되게 하여 주시옵기를 , 아버님, 간절히 바라옵고 원하옵니다.

오늘 여기에 모인 이 자녀들이 마음속에 그 무엇인가를 품고 돌아가게 허락하여 주시옵소서. 사망이 물결치는 이 땅, 흑암 권세가 생명을 주관하는 이 세계에서 가냘픈 생명의 한 촛불이 애타게 아버님을 향하여 나아가는 데는 원수의 방해가 많고 원수의 저항이 많사오니 아버지께서 직접 주관하고 직접 품으시어 저희들이 소원하여 가는 목적지까지 무난히 돌파해 나갈 수 있게끔 힘과 건강을 허락해 주시옵길 간절히 바라옵고 원하옵나이다.

아버지여, 여기 모은 당신의 자녀들은 이미 아버지 앞에 맹세한 자녀들이옵니다. 그 몸과 맘을 당신 앞에 드린다고 천만번 맹세하였사오니 그 몸들을 아버지 앞에 깨끗이 바치게 허락하여 주옵소서. 몸을 성별하여 아버지 앞에 영원히 바쳐 드리고 아버지의 사랑을 대신 나타내는 아들딸이 되겠다고 노력하는 당신의 자녀들이 되게 하여 주시옵기를 , 아버지, 간절히 바라옵고 원하옵니다.

오늘 이곳을 향하여 경배드리는 당신의 뭇자녀들을 기억하여 주시옵고, 온 세계에 널리어서 이곳을 흠모하고 다시 만나게 될 그날을 그리며 꿈에서까지 몸 마음 졸여 가면서 기도하는 당신의 자녀들을 품어 주시옵길, 아버님, 간절히 바라옵니다.

모든 환경에서 거의가 자기 중심이었을망정 심정을 통해서는 언제나 같은 생활 감정으로 화하고 서로 통하는 생활권내에 있는 그들을 위로해 주시옵소서. 같은 소원의 목적과 같은 하나의 승리의 기점 위에 세우시어서 아버지 앞에 부족함이 없는 자녀들이 되게 인도하여 주시옵기를 , 아버님, 간절히 바라옵고 원하옵나이다.

이날 이후 되어지는 전부에 친히 같이하여 주시옵기를 간절히 부탁드리옵니다. 아버지의 영광과 사랑을 길이길이 같이하여 주시옵소서. 참부모의 성호 받들어 아뢰었사옵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