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227 to 17-253: 정성의 예물

정성의 예물
1967.01.29 (일), 한국 전본부교회

17-227
정성의 예물
사람은 누구나 소망을 갖고 있습니다. 그 소망을 이루기 위해 정성의 자리에서 자신을 갖추어 전체 앞에 보여 주고 싶어하는 것이 인간의 본심입니다. 이것은 인간만이 그런 것이 아니라 하나님도 마찬가지입니다. 인간이 이러한 마음을 가지고 있는 것은 인간을 지으신 하나님이 그렇기 때문입니다.

세상에 어떤 역사적인 결실을 남기고, 혹은 그 시대에 있어서 남다른 실적을 거두어 후대의 표본으로 남기고, 또 후손들이 본받을 수 있는 모체로 남아질 수 있는 사람이 되기 위해서는 반드시 정성들이는 과정을 거쳐야 합니다. 작거나 혹은 크거나 간에 역사적인 사건의 배후에는 일반 사람들이 상상할 수 없는 정성어린 과정이 있고, 그러한 과정을 거친 결과만이 역사적인 면에서나 시대적인 면에서 공헌하고 있다는 사실을 우리들은 역사를 통하여 잘 알 수 있습니다. 그래서 오늘은 ‘정성의 예물’이란 제목으로 말씀드리겠습니다.

17-227
참된 정성이란
오늘날 이 땅 위에 살고 있는 우리들은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눈물 어린 정성의 터전 위에서 새로운 문화 세계를 건설하기 위해 수고했는지 생각해 보지 않을 수 없습니다. 한편 인간세계를 구원하려 하시는 하나님이 계시다면, 그 하나님도 역시 그 세계를 창건하시기 위해서는, 하나님의 이념을 구현하기 위해서는 보다 더 큰 정성의 터전을 준비하셔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렇게 해놓고 구하지 않으면 세상을 구할 도리가 없다는 것입니다.

과거에 이 길을 걸어 나온 사람들은 소망의 터전, 구원의 보금자리를 인류 앞에 제시하지 못했습니다. 이러한 사실을 아셨기에 하나님은 정성의 터전을 준비하여 인류를 구원하기 위한 섭리를 해 나오셨던 것입니다.

정성들이는 것이 이루어지기 위해서는 마음이 통일되어야 합니다. 즉 일편단심을 지녀야 합니다. 두 마음이 있어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시작부터 끝까지 통일된 마음으로 정성을 들여야 합니다. 정성은 누구에게 빌려 주었다 다시 찾아올 수 있는 물건이 아닙니다. 그렇기 때문에 시작이나, 과정이나, 끝이 여러 가지 형태로 변화되어서는 정성이 될 수 없다는 것입니다.

일편단심, 통일된 마음을 중심삼고 가야 합니다. 그러나 그 마음이 자기를 위주로한 것이 되며는 정성은 이루어지지 않습니다. 정성은 나를 위주로 들여야 하는 것이 아니라 상대, 즉 가정이면 가정, 사회면 사회, 국가면 국가 등 더 큰 상대를 위해 들여야만 정성이란 명사가 성립되는 것입니다. 나를 위해서 정성들인 것은 자기 일대에 있어서는 남아질 수 있을지 모르지만, 그것은 자기 일대와 더불어 흘러가 버리고 마는 것입니다. 정성의 터전은 상대를 위한 것만이 남아질 수 있는 것입니다. 상대의 크기에 따라서 정성을 들인 실적이나 인연의 크기가 결정됩니다. 이러한 사실을 우리는 일상 생활에서 자주 체험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여러분은 자기를 위주로 하는 데서가 아니라 반드시 상대를 위하는 데서 정성의 요건이 성립되고, 정성이란 명사가 성립된다는 것을 명심해야 되겠습니다. 그러므로 자식이 부모를 위해서, 아내가 남편을 위해서, 신하가 자기의 군주를 위해서 정성들이게 될 때 거기에 효, 열, 충이란 명사가 남아지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은 당시대를 넘어서 역사와 더불어 인연맺어지기 때문에 어느누구를 막론하고 그런 기준을 존경하고, 그런 인연을 추앙하게 된다는 것은 필연적인 사실입니다.

자기를 위주로 하지 않고 상대를 위해서 하나의 마음을 가져야 하고, 그 다음에는 하나님의 심정을 갖지 않으면 안 되는 것입니다. 즉 사랑의 마음을 터전으로 하여 일편단심 변하지 않는 마음을 가지고 상대를 위해야만 정성이란 명사가 성립된다는 것입니다. 정성이란 명사가 성립되기 위해서는 사랑의 마음으로 일편단심 끊임없이 노력해야 합니다.

그리고 정성들였다, 충성했다 하는 것으로 끝나서는 안 됩니다. 끊임없이 노력해야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노력만으로는 안 됩니다. 왜냐하면, 상대 세계를 위하는 데 있어서 예기치 못한 불상사나 반대작용이 일어날 수 있고, 항상 내가 원하는 대로 되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노력과 더불어 인내도 필요하다는 것입니다. 또한 인내만 가지고도 안 됩니다. 안팎, 사방으로 용납할 수 없는 것이 나타나게 될 때는 그것을 잘라 버릴 수 있는 용기도 필요합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싸움이 필요하고 반드시 투쟁의 과정을 거쳐야 합니다.

17-229
구원역사와 정성의 기준
오늘날 객관적으로 관찰해 볼 때 인류역사는 투쟁의 역사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맹목적인 투쟁의 역사가 아니라 일관된 목적성을 지닌 투쟁의 역사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 투쟁의 역사 배후에는 정성들인 사람들이 있는 것입니다. 그 정성은 자기의 어떤 사상을 중심삼은 것입니다. 자기의 온갖 정성과 그래서 마음과 사랑을 상대 세계에 투입시켰을때, 그 노력과 인내와 투쟁의 실적으로 나타나는 것이 역사적인 사실입니다. 이로 미루어 볼 때 오늘날 현실적인 환경 혹은 사회적인 모든 제도가 우리가 필요로 해서 있는 것이라 할진대, 그 배후에는 이런 인연이 깃들어 있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먼저 내가 정성을 들여야 하고, 정성을 지닌 자신이 되어야 되겠습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일편단심, 즉 통일된 마음을 가져야 하고 상대를 지극히 사랑하는 마음을 가져야 합니다. 그 사랑의 마음과 일편단심의 마음이 있게 될 때 그 사람은 정성을 세워 목적하는 바를 이룰 수 있는 것입니다. 이와 같이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서는 노력과 인내와 투쟁이 필요하다는 것입니다. 이 과정을 거치지 않고서는, 정성어린 심정의 기준에 서고 정성의 가치를 올바르게 자기의 소유로 지닐 수 없는 것입니다. 이것은 비단 인류 역사 뿐만 아니라 하나님이 세우신 중심 인물을 보아서도 알 수 있습니다.

그러면 사망의 세계에 떨어진 타락한 인류를 구하기 위해서 하나님은 어떻게 섭리해 나오셨겠습니까? 만약에 적당히 형편에 따라서, 되면 되고 말면 만다는 식으로 섭리해 왔다면, 사회환경의 치우침을 받고 사회제도의 영향을 받으면서 섭리해 나오셨다는 결론밖에 안 되는 것입니다. 이와 같은 하나님의 역사는 없었습니다. 이 사회도 정성어린 배후의 인연을 거쳐 이루어진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이 세상을 구하기 위해서 예수님도 사회환경에 치우침을 받지 않는 입장, 배후의 정성의 터전을 중심삼지 않을 수 없었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무엇을 중심삼고 구원역사가 결정되느냐? 그것은 정성의 기준을 중심삼고 결정됩니다. 하늘의 정성이 보다 높게 될 때에 사망세계에 있는 사회도 하늘의 정성 앞에 흡수될 수 있는 것입니다. 즉 더 큰 정성은 작은 정성을 흡수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인간의 본심은 더 큰 정성을 요구합니다. 그리고 이것은 우리 양심의 표준입니다. 따라서 인간이 더 큰 정성을 바라고, 작은 정성보다는 큰 정성권내로 옮겨가려고 하는 것은 자연의 이치인 것입니다.

인간은 누구나 다 애국자가 되고, 충신이 되고, 효자, 열녀가 되겠다는 마음을 가지고 있습니다. 어떤 사회나 민족을 중심삼고 충성할 수 있는 길이 있으면 그런 사람이 되겠다고 소망합니다. 어느 누가 자기 민족, 자기 국가를 사랑하지 않겠습니까? 그 차이는 있을 망정 사랑하는 마음은 마찬가지인 것입니다. 그러나 단체, 종족, 또는 민족을 대표할 수 있는 어떠한 사람이 정성을 들일 때, 거기에는 대다수가 동참하지 못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대표로 세워진 사람들이 그 단체나 종족이나 국가의 사상적 기준을 대표해 가지고, 그것을 중심으로 환경을 정리해 나가는 방법으로 구원역사를 실현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하나님이 세상을 구하려 하신다면 그 하나님은 어떻게 하셔야 되느냐? 정성을 들여야 합니다. 두 마음이 아닌 한 마음으로 정성을 들여야 하는 것입니다. 어느누구도 침범할 수 없는, 마음 구석구석까지도 꽉 찬 일편단심으로……. 이렇게 구원섭리를 해 나오시는 하나님이 계시다는 것을 여러분은 인정해야 합니다.

인간이 타락함으로 말미암아 이 세상은 사탄세계가 되었고, 사탄은 인간을 종의 입장에도 설 수 없을 정도로 유린해 놓았습니다. 이렇듯 사탄은 우리 인간을 종의 종의 자리까지 떨어지게 했지만, 하나님은 인간을 구원하기 위해서 역사해 나오셨습니다. 하나님께 돌아갈 수 없는 원수의 피를 받고 태어난 타락의 후손들은 혈통적으로 보면 자녀의 인연을 갖고 있지만 사실상 자녀로 세움받지 못하고, 종으로도 세움받지 못하는 입장으로 떨어졌습니다.

17-231
인간을 구하기 위한 하나님의 정성과 인간이 세워야 할 조건
이런 인간들을 하나님께서는 어떻게 구원하시느냐? 적당히 해서는 안되는 것입니다. 한 나라의 주권자가 자기 백성을 사랑하는 그 이상의 기준을 세우지 않으면 안 됩니다. 또 어떤 단체에 있어서, 그 단체의 중심 인물을 하나님이 구원섭리의 담당자, 인간의 해방자로 빼올 수 있으려면 그는 그 단체에 충성하는 그 누구보다 정성어린 마음을 갖지 않으면 안됩니다.

타락하여 사탄의 종의 종이 된 인간을 하늘의 종의 종으로 구원하기 위해서는 사탄과 사탄국가 안에 정성들인 어떤 주권자나 백성들 보다도 하나님 자신의 정성이 부족하면 한 사람도 구원해 낼 수 없다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사탄이 참소하기 때문입니다. ‘천지를 창조하신 하나님, 당신은 이 인류 앞에 있어서 최고의 기준으로 서야 하며 나보다 더 높은 정성의 자리를 취해야 합니다. 그런데 나 이하의 자리에서 어떤 사람을 구원했다면 완전히 구원했다고 할 수 없습니다’ 라고 참소할 것입니다.

사탄세계의 인간들을 그냥 두어 가지고는 천지 만물을 창조하신 하나님의 종으로 세울 수 없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은 이 땅에 있는 인간들을 구원하려면 사탄이 정성들이는 것 이상의 정성을 들여야 합니다. 그리고 사탄세계의 주권국가를 위해 충성을 다하는 백성이 있다면, 그 사람이 충성하는 도수 이상의 자리에 서지 않고서는 사탄세계에 있는 인간들을 구원할 수가 없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이렇게 역사를 통하여 인간들을 종의 종에서 종으로, 양자로, 아들의 자리를 거쳐 신랑신부, 부모의 자리까지 복귀하지 않으면 안 되는 것입니다.

구원이라는 것은 잃어버린 것을 다시 되찾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여기에서 회복이나 복귀라는 말이 나오는 것입니다. 이것을 위해서 지금까지 기독교 역사와 같은 하나님의 구원섭리의 역사가 있었던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구원섭리와 배후에는 정성어린 투쟁역사, 피어린 인내와 노력의 역사, 일편단심의 눈물의 역사가 얽어져 있다는 사실을 여러분들이 인정하지 않으면 안 됩니다. 하나님은 일편단심 정성을 다 들여서, 무한한 노력을 해서, 충심을 가지고 인간을 찾아왔습니다.

그러면, 구원섭리의 혜택을 받아야 할 인간은 하나님을 위해 얼마나 정성을 들여야 하느냐? 인간도 역시 하나님을 대하려 할 때마다 사탄이 옆에서 참소하기 때문에, 하나님 앞에 설 수 있는 종이 되기 위해서는 어떠한 조건이라도 세우지 않으면 설 수가 없다는 것입니다.

섭리역사를 보더라도 그렇습니다. 120년 동안 하나님의 명령에 자기 생애를 내어 놓고 그 길을 나섰던 노아의 결심이 얼마나 컸겠습니까? 거기에 두 마음이 있었다면 10년도 못 갔을 것입니다. 그러나 자기 생애를 꿰뚫어 넘어갈 수 있고, 자기 생애가 좌우로 뒤넘이치더라도 변하지 않는 일편단심이 있었기 때문에, 그리고 순응하는 마음과 하나님의 명령을 허술히 여기지 않고 사랑하는 마음, 또한 인내하고 투쟁하는 마음이 있었기 때문에 기나긴 120년의 역로(迷路)를 참아 넘어 갈 수 있었습니다. 그럼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정성 앞에 보답될 수 있는, 상대적인 조건이 성립 되었기 때문에 역사는 거기서부터 새로운 출발을 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이러한 조건이 성립되지 않고서는 구원섭리역사를 세울 수 없고, 구원 섭리역사를 세우지 않고서는 새로운 역사의 출발을 할 수 없고, 섭리를 발전시킬 수 없는 것입니다. 이것이 섭리관의 입장에서 본 하나님의 사정이라는 것을 여러분이 알아야 되겠습니다.

지금까지 이렇게 유구한 역사를 거친 후에 이러한 구원섭리의 이론이 이 지상 위에 남아지게 된 것입니다. 인간은 종의 종의 시대인 구약 전시대를 거쳐서, 종의 시대인 구약시대를 거치고, 양자의 시대인 신약시대를 거쳤습니다. 그런 다음에 직계의 아들로 오시는 분께 접붙임을 받아서 참다운 아들딸의 자리에 나가고 부모의 사랑을 받았다는 조건을 세워야 합니다. 그런 후에 아담 해와가 에덴에서 하나님의 혈통을 받아 태어났던 창조본연의 입장까지 나아가야 하나님을 모실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모시는 것도 개인적으로 모실 것이 아니라, 가정의 전체 식구들이 하나 되어 모셔야 합니다. 이것이 인간을 지으신 하나님의 이상이었습니다. 그런 에덴의 이상이 완성되지 않는 한 하나님은 직접 인간의 생활권에 동참하여 일체감을 느낄 수 없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예수님은 이 땅에 와서 ‘나는 신랑이요, 너희는 신부이다’ 라고 말했던 것입니다.

그러면 신랑 신부는 무엇을 말하느나? 아담 해와의 타락하기 전의 기준을 회복해 놓고, 즉 축복받을 수 있는 조건을 세워서 축복받는 것이 어린양 잔치입니다. 그러므로 어린양 잔치에 참석한 사람들은 복귀된 혈통적인 자녀의 인연을 세워서 본연의 이념권내에 세워질 수 있는 가정을 이루어 가지고 하나님의 참다운 사랑을 찾아 출발해야 합니다. 이러한 첫 출발을 해야 하는 것이 오시는 주님의 사명인 것을 여러분은 깨달아야 합니다.

17-233
구원섭리의 단계와 정성의 도수(度數)
그러면 다가오는 역사노정에서 우리가 알아야 할 것은, 6천년 전부터 사탄세계에 인연맺어져 있는 사람들을 구하기 위해서는 사탄세계의 수많은 인류가 들인 정성의 도수를 능가해야만 구원섭리를 이룰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렇게 하면 사탄도 참소하지 못합니다. 그래서 예수님도 “아비나 어미를 나보다 더 사랑하는 자는 내게 합당치 아니하고, 아들이나 딸을 나보다 더 사랑하는 자도 내게 합당치 아니하다(마 10 :37)”고 했습니다. 합당치 못하다는 것은 사탄편이라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은 우리가 사탄세계를 사랑하는 이상으로 하나님을 사랑하지 않으면 하나님은 우리를 간섭해 주시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천국 가기 위해서는 누구를 더 사랑해야 하느냐? 내 부모보다 하나님을 더 사랑하고, 내 처자보다 하나님을 더 사랑해야 합니다. 이것이 천국 가는 공식인 것입니다. 과거의 모든 선조들, 즉 노아나 아브라함 그리고 그밖의 모든 선조들도 이런 과정을 거쳤습니다. 아브라함이 믿음의 조상으로 결정되는데도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보다 자기 아들에게 더 애착심을 가졌다면 믿음의 조상으로 결정될 수 없다는 것입니다. 한 나라의 충신이 되기 위해서도 어려운 과정을 거쳐야 하거든, 하물며 하늘의 충신이 되고 효자 열녀가 되기 위해서는 그보다 더한 과정을 거쳐야 된다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자기 자식보다도 하나님을 더 사랑하지 않으면 천국에 갈 수 없는 것입니다.

우리가 사탄과 혈통적 관계를 맺고 있으므로 복귀되기를 원한다면 하나님은 우리에게 기도하라고 요구하시는 것입니다. 우리에게는 소망의 개인, 소망의 가정, 소망의 종족, 민족, 국가, 세계를 찾아야 할 소원이 남아 있습니다. 이 소원은 내 소원일 뿐만 아니라 하나님의 소원이기도 합니다. 아담이 타락하지 않았다면 창조본연의 개인으로부터 가정, 종족, 민족, 국가를 완성시켜 나왔을 텐데 타락했기 때문에 거꾸로 복귀해 나온것입니다.

이래서 이스라엘 민족을 편성해 나왔는데, 이스라엘 민족은 예수님을 참다운 하나님의 아들로 모시고 그에게 접붙임을 받아 가인 아벨이 잃어버린 아담 가정의 기준을 예수님을 중심삼고 민족 형태로 복귀했다는 조건을 세워야 했습니다. 이와 같이 예수님은 참부모의 인연, 즉 아담이 타락하지 않고 이루어야 했던 그 기준을 세워 이스라엘 민족 앞에 새로운 천국이념을 소개하기 위해 오셨던 것입니다. 그러나 아벨적인 예수님 앞에 가인적인 입장에 있던 이스라엘 민족이 아담 가정에서 아벨을 죽인 가인과 같은 행동을 했기 때문에 이스라엘은 망한 것입니다.

돌아가신 예수님을 중심삼고 제2이스라엘로 재편성되어 나온 것이 기독교입니다. 이렇게 하나님은 구원역사를 이끌어 나오시지만 그것이 발전적인 입장에 있지 못하게 될 때는 망하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노아 시대의 구원섭리는 종의 종 입장에서 종의 터전을 이루기 위한 것이었습니다. 모세 시대에는 종의 입장에서 양자의 입장으로 나아갈 수 있는 길을 닦기 위해 율법을 세웠습니다. 그래서 이 터전 위에 메시아, 즉 구세주를 보낸다는 약속을 세웠던 것이었습니다.

구원섭리를 점진적으로 발전시키는 데 있어서는 시간만 지난다고 되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정성들인 것과 같이 정성의 제단을 쌓아야 합니다. 이스라엘을 넘어 세계적인 섭리를 할 수 있는 정성의 기준을 세워야만 하나님은 메시아를 이 땅에 보낼 수 있는 것입니다.

시대적인 사명을 할 수 있는 때를 정하시고 섭리하시는 하나님은 이스라엘 민족에게 예수님을 보내 주셨지만, 이스라엘 민족은 예수님 앞에 양자의 터전을 결정지을 수 있는 민족적인 정성의 기대를 조성하여 환경을 갖추어야 했음에도 불구하고, 교법사 제사장들이 반대하여 그것을 이루지 못하고 말았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십자가에 달려 운명하고, 다시 기독교를 중심삼은 역사가 재편성되어 나왔던 것입니다.

17-235
제2이스라엘의 책임
그러면 기독교를 중심한 제2이스라엘은 어떠한 책임을 해야 하느냐? 예수님이 오셨다 가셨지만 다녀가지 않으신 것과 같은 입장에서 세계적 이스라엘형을 갖추어야 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예수님은 다시 와야만 되는 것입니다. 많은 사람들은 예수님이 다시 오실 때 구름을 타고 오신다는 허무맹랑한 신앙을 하고 있습니다. 천리 원칙을 이해하지 못하고 자기의 만족을 위해서 세워진 기준을 가지고 천리를 대신했다고 자처하는 사람은 심판날에 공판정에서 판정받게 될 때 지옥밖에 갈 곳이 없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죽으러 오신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이 돌아가심으로 제1이스라엘은 망했습니다. 그래서 제2이스라엘로 연결되어 기독교를 중심한 민주세계를 창건하게 된 것입니다. 그러면 민주세계를 창건한 제2이스라엘은 무엇을 해야 할 것이냐? 새로운 세계적인 아벨을 모시고 아벨을 죽였던 가인을 복귀해야 되는 것입니다. 앞으로 오시는 주님은 참아들로서 아벨적인 세계형 승리의 주권형태를 갖추고 오십니다. 여기에서 민주 세계는 가인적인 입장에서 이스라엘 민족이 예수님을 죽이고, 아담 가정에서 가인이 아벨을 죽였던 것을 탕감복귀하는 기준을 세워야 하기 때문에, 전세계의 기독교인들은 오시는 주님을 백방으로 모셔야 되는 것입니다.

오시는 메시아를 오늘날 민주세계의 사회제도나 그 형태의 기준에 통할 수 있는 그런 메시아로 생각해서는 안 됩니다. 하나님은 종의 종시대, 종의 시대, 양자의 시대, 자녀의 시대, 부모의 시대로 넘어가는 섭리를 해 오시기 때문에 시대적인 한계선과 구원섭리의 한계선은 다르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신구약에 있는 것을 가르쳐 주기 위해서 메시아가 다시 오시는 것이 아닙니다. 만약 그러기 위해서 온다면 그런 주님은 필요없습니다. 그러한 신앙관념과 제도의 꼬리를 따라 예수님이 오시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에서 열까지 모든 것이 한결같이 되풀이되면 안 됩니다. 그것은 중간밖에 안 되기 때문에 달라져야 되는 것입니다. 기도하는 내용도 달라져야 하고, 목적도 달라져야 하고, 생각하는 전체가 다 달라져야 합니다. 섭리시대는 종의 종의 시대로부터 종의 시대, 양자의 시대, 직계 자녀의 시대를 거쳐서 신랑 신부 즉, 부모의 시대가 되는 것입니다.

오늘날 기독교인들이 어린양 잔치에 와서 제1차 부활에 동참하려면 예복을 준비해야 합니다. 예복을 준비하기 위해서는 정성과 인내가 필요합니다. 있는 정성을 다해야 합니다. 눈으로 보는 시선도 정성어린 시선으로, 코로 냄새를 맡는 것도 정성스럽게, 듣는 것도 정성스럽게, 육신으로 느끼는 모든 감각도 정성스럽게 느껴야 하는 것입니다. 이렇게 정성의 관문을 통과해서 마음이 정성어린 몸 앞에 감사하다고 할 수 있는 자신이 되지 않고는 하나님을 모실 수 없는 것이 천리 원칙입니다.

17-236
하나님이 찾아 오실 수 있는 자리
오늘날 하나님의 구원섭리를 협조한다는 패들 가운데 오히려 기독교를 욕되게 하고 망치고 팔아 먹는 류(類)가 많습니다. 이런 것을 보고 피가 끓는 젊은 가슴을 가진 사나이들이라면 참을 수 없는 의분심과 적개심을 가지고 불의를 지구상에서 추방해야 되겠습니다. 이런 의미에서 통일교회가 필요하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정성을 다한 사랑의 마음을 가지고 불의를 추방하는 일에 정성을 바쳐야 합니다. 밤이나 낮이나 어디를 가든지 인간적인 감정에 얽매이지 않고, 우리들의 주위에 어떤 어려운 환경과 원수들의 총칼이 모여든다 해도 참고 나가야 합니다. 그러나 뼈 없는 사나이로 참아서는 안 됩니다. ‘두고 보자. 어느 한 때에 내가 갖춘 모습을 가지고 나타나게 될 때는 그 어떠한 것이라도 아침 이슬처럼 사라질 것이다’라는 마음으로 나가야 합니다. 그러면 시련의 환경은 결국 종결될 것입니다.

개인에서부터 가정 종족 민족 국가 세계를 넘어설 때까지의 과정에는 싸움과 더불어 수많은 고통이 있는 것입니다. 세계 복귀가 이루어질 때까지 내 앞에 이런 것들이 침범해 온다는 것을 각오해야 합니다. 의를 위해서는 생명을 걸어 놓고 나가 싸워야 합니다. 그래서 승리한 터 위에서 아버지를 대해야지 패자의 모습을 가지게 되면 아버지께서 싫어하신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지금까지 슬픈 길을 걸어오신 것은 수많은 선조들이 실수했기 때문입니다. 그들이 실수하여 낙망하는 자리에서 하나님을 부를 때 하나님은 더욱 서러우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여러분은 분하였던 하나님의 역사적인 한을 간직하고 참음의 심정으로 싸워 승리할 수 있어야 합니다. 그런 다음에 ‘아버지! 이 승리는 내일의 싸움을 위하여 준비된 것이오니 받아 주시옵소서’ 하고 기도하기를 하나님은 바라고 계시다는 것입니다.

신앙생활에서 싸움의 노정을 거쳐가지 않는 사람은 스스로 가슴을 부여안고 자탄하는 노정을 걷게 됩니다. 그것이 천리입니다. 하나님이 땅에 대하여 부르고 있는 소망의 사람이 되려면 정성들인 눈물의 흔적이 있어야 합니다. 하나님이 아담 가정의 가인과 아벨시대로부터 노아 가정, 아브라함 가정을 중심삼고 섭리해 나오시던 시대, 즉 역사전 시대로부터 역사시대의 과정을 거치면서 일편단심 변치않는 정성의 마음으로 나오신 것과 같은 터전이 이 땅 위에 나타나지 않는 한, 하나님은 땅에 대하여 결정적인 승리의 섭리를 하실 수 없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여러분은 지금 내가 처해 있는 곳이 하나님이 찾아오실 수 있도록 정성된 예물을 갖추어 세계 운세와 더불어 동참할 수 있는 그러한 자리인가를 생각해 보아야 합니다.

그러면 그 자리는 어떠한 자리냐? 노아 아브라함 모세가 천주를 찬양할 수 있는 자리요, 지금까지 역사상의 수많은 선조들이 패자의 서러운 잔을 마시면서도 정성을 들여 나왔던 자리입니다. 한탄과 한의 역사를 청산하고 환희의 쌍수를 들어 감사하면서 하나님께 경배를 드려야 할 자리인 것입니다. 그러나 이것이 결코 쉬운 일이 아닙니다. 사탄이 사방팔방으로 참소할 수 있는 그런 조건을 넘어선 정성어린 실적을 갖고 나타나야 합니다. 그럴 때, 여기에서 새로운 역사적인 승리의 일보를 제시할수 있는 것입니다.

17-238
충효는 다하지 못해도 동참자는 되어야
하나님이 여러분을 부르고 계시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하나님은 지금까지 정성의 예물을 드리기 위해서 한 개인을 구하는 데에도 소홀히 하지 않았습니다. 오늘날 여러분 한 사람을 대하기 위해서도 아무렇게나 찾아온 것이 아닙니다. 그렇지만 여러분들은 어떻게 찾아왔습니까? 아무렇게나 찾아온 사람들이 많습니다. 정성의 실적을 가지고 모진 역경을 참고 싸워 나오신 하나님의 섭리에 얼마만큼 동참하여 하나님이 정성의 예물을 받을 수 있도록 받들었는가? 하나님 앞에 충성하고 효성을 다하는 자는 되지 못했을 망정 동참자라도 되었는가? 이런 것들을 생각해 볼 때 여러 분들은 영점입니다. 영점! 이러한 마음을 느끼게 될 때 여러분은 하나님 앞에 경배드리기 위해 사지를 펴고 들어올 수 있습니까? 차라리 아무것도 모르는 가운데 죄 지은 사람은 죄가 가볍습니다.

불충의 과거와 불충한 현재의 모습을 가지고 하나님 앞에 또다시 찾아 나오려니 얼마나 초조하겠습니까? 그렇게 마음이라도 일으켜 봤습니까? 그러지 못했기 때문에 하나님은 복귀섭리역사 과정 중 ‘종의 종시대’에 하나의 대표자를 이 땅 위에 보내셨지만 그는 완전한 승리를 하지 못했습니다. ‘종의 시대’에 있어서도 책임을 완수하여 승리의 가치를 가지고 나선 자가 없었습니다. ‘양자의 시대’인 이스라엘의 역사에 있어서도 마찬가지였으며, 예수님이 왔다 간 이후의 역사에서도 역시 마찬가지였습니다.

“아버지시여, 만일 할 수만 있으면 이 잔을 나에게서 지나가게 하옵소서. 그러나 나의 원대로 마옵시고 아버지의 원대로 하옵소서(마 26:39)” 라고 겟세마네 동산에서 기도하셨던 예수님이 책임을 다했다고 여러분은 생각합니까? 또한 예수님은 정성을 다했습니까? 예수님은 혈혈단신으로 왔다가 뭇사람의 조소와 더불어 십자가에서 피를 흘렸습니다. 처참한 모습으로 돌아오시는 예수를 본 하나님의 마음은 어떠했겠습니까? 4천년 동안 수많은 선지자들이 피흘린 터전 위에 메시아를 보내 주었지만, 그들은 예수님을 몰랐던 것입니다.

오늘날도 역사적인 섭리의 노정을 망각하고, 역사적인 충성의 제물에 대하여 오해하고 있는 기독교 신도들이 얼마나 많습니까? 예수님이 이 땅위에 죽으러 왔습니까? 단지 십자가에서 죽기 위해 온 예수라면 선생님은 그런 예수님을 믿지 않겠습니다. 그런 예수는 죽은 사람을 구할는지는 모르지만 이 세상을 구하지는 못합니다. 종의 종의 입장에서 종의 인연을 거치고, 양자의 인연을 거치고, 차자의 인연을 거쳐서 직계의 아들이 세상에 찾아왔지만, 땅 위에서는 그런 예수님을 위한 정성의 예물을 넣을 수 있는 창고가 없었습니다. 이 창고가 있어서 그것이 기독교가 되고 하나님의 제단이 되어야 했었는데 그렇게 되기는 커녕 원수들의 소굴이 되고 말았던 것입니다.

하나님이 눈물로 정성들여 쌓은 그 터전은 어디 갔는가? 여러분이 쌍수를 들고 하나님 앞에 나서게 될 때에, ‘아버지여, 당신의 피의 정성으로 된 인연입니다. 그런데 당신이 거두어 들일 수 있는 결실된 개성완성의 자리를 잃어버렸습니다. 당신의 일편단심을 저의 일편단심으로 연결되게 하옵소서! 당신의 사랑 이상의 사랑을 가지고 당신이 참고 싸운 그 이상으로 참고 싸워서 지상에서 승리의 한 날을 세워 당신의 한을 풀어드리겠습니다’라고 몸부림칠 수 있는 참다운 자녀가 될 수 있겠습니까?

은혜받아 가지고 구원받겠다고 하는 무리나, 하나님의 힘을 입어 천국 가겠다고 하는 사람을 하나님은 싫어하십니다. 천국을 창건할 사람이 필요한 것입니다. 이것을 여러분이 알아야 되겠습니다. 오늘날 우리는 ‘하나님이여! 역사적인 정성의 예물과 공적이 어디 남아 있습니까? 이 시대는 전체 탕감시대인 만큼 종적인 역사를 횡적으로 탕감해야 됩니다’라고 부르짖지 않을 수 없습니다.

역대 우리 선조들은 수많은 피의 역사를 엮어 왔고, 하나님의 참다운 정성이 어린 그 제단이 피의 인연을 통해서 기독교로 계승되어 세계적인 터전을 마련했습니다. 그런데 외적인 형태는 갖추었지만 충과 의로 남아 질수 있는 내적인 형태를 갖추지 못했기 때문에, 이 불의의 인연을 청산하기 위해서 나온 것이 통일교회라는 것입니다.

찾아들려는 사람은 세상에 많지만 천국을 향해서 나아가려는 참다운 자녀는 없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은 타락한 인간 가운데서 참다운 자녀를 구하여 타락한 역사를 고치는 것이 어렵다는 것을 아시고 다시 당신이 마련한 아들을 보내겠다고 약속하신 것입니다. 우리는 전체가 합하여 그분 앞에 상속권을 받는 적자(嫡子)가 되어야 합니다. 그 적자로 말미암아 서자(庶子)도 혜택을 받게 되는 것입니다. 그렇게 되어 있다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그렇게 되어야 할 통일교회의 교인이요, 통일의 용사입니다.

17-240
선민(選民)과 천민(天民)
그러면 정성의 예물을 어떻게 받아야 하느냐? 오늘날의 이 모임이 6천년 동안의 하나님의 섭리의 뜻을 놓고 온 세계를 대신하여 한국 민족에게 주시는, 하나님의 최고의 정성어린 역사를 총합한 예물이라 할 때 이 예물을 어떻게 받을 것인가? 정성들이지 않고 아무렇게나 받으면 수치입니다. 언제든지 자신을 가지고 자기의 예복을 갖추어서 정성어린 준비를 해 놓아야 되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오시는 주님을 찾겠다고 하지 말고 그 주님을 맞을 수 있는 준비를 해야 합니다. 정성의 터전을 주님 보다 더 크게 마련하고 세계를 위하여 눈물지을 수 있는 사람이 된다면 주님은 오시지 말라 해도 그 앞에 오시는 것입니다. 자신의 역사를 들추어 보면 사탄의 왕초인데 정성을 들이지도 않고 주님이 나를 위해 오시기를 바랍니까?

통일교인들은 정성어린 예물을 갖추어야 합니다. 여러분들은 지금까지 복귀노정에서 이 민족 앞에 제시된 모든 여건들을 여러분 자체의 실적으로 여겨 나왔는지 모르지만, 그 모든 실적을 합하고 뭉쳐서 하늘 앞에 정성어린 터전을 마련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리하여 대한민국의 어느누구 보다도 더 충성할 수 있는 통일교회로서 대한민국을 능가할 수 있는 터전을 이루어야 합니다. 이것이 지금까지 여러분들을 어려운 여건과 환난 가운데 부딪치게 한 제1차적인 이유라는 것을 알아야 됩니다.

그러면 정성은 어디서부터 그 효과가 빨리 나타나느냐? 편안하고 안락한 자리에서 피리를 불고 춤추고 노래하면서 정성을 들인다면 그것은 효과가 없습니다. 눈물이 감돌고 피비린내가 나고 피골이 상접하는 역경 가운데서 들이는 그 하루의 정성은 편안한 때의 십년, 백년을 탕감하는 것입니다. 이러한 사실을 알았기에 우리들은 스스로 편안한 자리를 저버리고 반대의 길을 가기에 몸부림쳐 나왔던 것입니다. 그것은 왜? 하늘의 정성어린 눈물 앞에 우리의 지극한 정성을 보여 주기 위해서였습니다. 자기가 비록 어떠한 실적은 가지고 있지 못하더라도 하나님에 대한 정성어린 마음과 충성하는 간곡한 심정이 필요하다는 것입니다. 여러분이 그런 아들딸이 되지 못했으면, 이 민족 중에서 그런 아들딸을 찾아내는 심부름꾼이라도 되어 그들을 아버지 앞에 인도하고 나서 자기 스스로 아버지를 한번 불러 보자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수많은 고난 속에서도 하늘에 대한 정성을 다하셨습니다. 십자가상에서 ‘아버지여 어찌하여 나를 버리시나이까’라는 말씀을 하셨지만, 마지막 운명하는 그 순간까지도 아버지는 나를 버리셨지만 나는 아버지를 버릴 수 없다고 하는 일편단심으로 아버지의 심정을 향하였기 때문에, 부활의 권능이 그에 이르게 되었던 것입니다.

우리는 한국에서 7년노정을 설정해 놓고 나오고 있습니다. 이러한 7년노정 기간에 우리 통일교회 식구들은, 6천년 동안 사탄세계를 구원하고자 섭리해 나오시는 한 많은 하나님의 선물을 전부 유린해 버리고 파탄시켰던 역사상의 인류의 모든 죄악을 탕감해야 합니다. 그래서 이것을 탕감하겠다고 몸부림치면서 종적인 역사를 횡적으로 탕감하기 위해, 하나님을 모실 수 있는 터전을 넓히기 위하여 피와 땀과 눈물로써 전도를 해 나왔습니다.

죽음의 길에서 하늘을 부여안고, 눈물의 길에서 하늘의 정성의 인연을 갖고, 외로운 자리에서 하늘의 권능을 갖고, 하늘이 상기시켜 주는 심정의 권고를 들으며 다시 재기하여 내일의 소망 앞에 나설 수 있어야 합니다. 그런 기준을 여러분에게 소개해 주기 위해 이런 일을 해 나오고 있는데도 불구하고, 여기에 대해서 감사하는 마음이 점점 작아져 가고 있습니다.

누가 정성을 기울이느냐? 주인은 결정되지 않았습니다. 보다 더 정성을 많이 들이는 사람이 있으면 하늘은 그를 택하시는 것입니다. 하늘은 아직 ‘나는 아버지이고 너는 아들’이란 결정을 하지 않았습니다. 무슨 말인지 알겠습니까?

‘이 민족이 내 민족이고, 이 종족이 내 종족이다. 내 피살과 더불어 연결되어 있는 그러한 종족이다’라고 하나님께서 아직 결정하시지 않은 때에는 언제나 정성을 기울이는 높은 곳으로 끌려가게 됩니다. 결정하기 전에는 선민이지 천민(天民)은 아닙니다. 이스라엘이 천민으로 결정되었더라면 망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선민에서 천민이 되지 못했기 때문에 이스라엘은 망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오늘날 통일교회가 주장하는 것은 선민 사상이 아니고 천민사상입니다. 무슨 말인지 알겠죠?

17-242
정성들인 것을 함부로 대하면
선생님이 지금까지 하나님의 뜻을 놓고 정한 목표에는 단 일초라도 다른 누가 침범하지 못합니다. 여기에는 절대로 용서가 없다는 것입니다.

하늘 앞에 정성을 들이는 사람은 함부로 대할 수 없습니다. 지방에서 어떤 식구가 사과 하나를 선생님께 가져 왔더라도 선생님은 함부로 손대지 않습니다. 정성들인 것을 잘못 건드리게 되면 용서받지 못합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일편단심의 심정과 하나님의 최고의 노력을 무시하게 되면 천륜 앞에 용납될 수 없는 죄인이 된다는 것입니다.

남이 정성들인 물건을 함부로 대하지 말아야 합니다. 백 만큼의 정성을 들인 물건이라면 110 만큼의 정성을 들여야 대할 자격이 있는 것입니다. 그렇지 않으면, 예를 들어 어떤 집단의 책임자가 정성들인 것을 받아서 하늘 앞에 연결시키지 못하게 되면 정성들인 사람이 많으면 많을수록 빨리 망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신령한 집단들이 자기 당대는 영화로울지 모르나 천도를 넘어서는 일이 많아 곧 망하는 것입니다.

이러한 천륜의 법도는 여러분의 생활에 있어서 공식적으로 적용된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그렇다면 여러분이 지금 걷고 있는 생의 노정과 살고 있는 생활환경 역시 불가피한 것임을 알 수 있을 것입니다.

우리가 무엇을 가지고 하늘을 대할 수 있겠습니까? 옛날 노아가 방주를 지으면서 흘렸던 그 땀을 우리가 흘리지 못하면 역사는 참소합니다. 또한 아브라함이 처했던 방랑의 신세, 즉 하나님의 소망인 축복의 땅을 향하여 나그네와 같은 집시의 길을 떠날 때의 그 정성어린 마음을 여러분이 느낄 수 있어야 합니다. 모세가 바로 궁중의 영화와 모든 행복의 요건을 돌아보지 않고 이스라엘 민족을 대표해서 비참과 슬픔과 고독의 자리를 찾아서 나갔던 것과 같이, 여러분이 그러한 기대를 가지고 민족을 사랑하고 하늘을 사랑해야 합니다. 그렇게 하지 못하면 역사적인 선조들이 자기들이 남긴 유언을 조건삼아 삼자의 입장에서 참소해 버린다는 것입니다.

그런 것을 볼 때 손이나 눈, 더 나아가 몸과 마음이 얼마나 중요한 역할을 해야 하는 지를 알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30여 평생을 그런 일을 준비해 나왔다는 것입니다.

정성을 들이는 데 있어서 예수님은 구세주로서 들여야 된 정성의 도수가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감투를 쓰고 태어났다고 해서 그냥 갈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이 땅위의 만인간 앞에 내세워질 수 있는 중심존재로 서기 위해서는 내적인 여건의 고개를 넘어 민족과 세계를 향하여 나가야 하는 것입니다. 거기에는 큰 시련이 뒤따르는 것입니다. 그래서 세계를 대표한 사탄이 하나님의 아들인 예수님을 산으로 들로 성전 꼭대기로 끌고 다니면서 제멋대로 시험한 것입니다. 이런 것을 생각해 볼 때, 이러한 일을 탕감하기 위해서는 여러분 자신이 스스로 행해야 된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17-243
정성의 목적과 가치
하늘이 내린 정성의 예물을 여러분이 갖고 있다 할진대, 예수가 이 땅위에 올 때까지 하나님께서 얼마나 정성을 들이셨겠는가를 생각할 수 있어야 합니다. 그리고 이 땅 위에 기반을 닦기까지 피흘리는 역사를 엮어 오셨다는 것을 생각해야 합니다. 그 뿐만이 아니라 우리의 선조들이 몰리고 쫓기는 눈물의 고비를 넘고, 내일의 소망을 품고 일편단심으로 최후까지 남아지는 아들딸이 되겠다고 몸부림치면서 이 민족을 대신하여 투쟁한 역사적인 과정을 생각해 보십시오. 그것은 우연이 아닙니다. 그것은 산발적인 행사가 아닙니다. 역사의 진로에는 사실을 촉구시킬 수 있는 내용이 살아 있기 때문에, 우리는 시대를 품고 넘을 수 있는 무대에서 하늘이 요구하는 대로 정의를 호소했고, 이런 싸움을 해 나온 것입니다.

싸움의 마지막 고비를 넘어야 할 때가 왔는데, 여러분이 이전에 아무리 평지에서 잘 달렸으면 무얼 하고 험산 준령을 잘 넘었으면 무엇합니까? 최후의 분수령의 한 고비를 넘어야 합니다. 설령 거기서 죽을지언정 여러분은 가야만 합니다. 그렇지 못하면, 즉 이미 때는 결실을 해야 하는 가을인데도 여름인 줄 알고 푸르러 있으면 추풍낙엽과 같이 아궁이 속에 들어가는 불쏘시개밖에 되지 못합니다. 그래서는 안 되겠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여러분은 정성의 예물을 정성껏 받아야 하며, 하나님이 부르고 재촉하고, 권고하고 계시다는 사실을 알아야 합니다.

선생님이 오늘 아침 태릉 성지에 갔었는 데 눈물이 나왔습니다. 이 성지를 누가 얼마나 지키느냐? 세계 40개국의 120개소에 설정해 놓은 성지에는 불이 꺼져서는 안 됩니다. 이것은 한 계절을 통해서 돌고 돌아야 합니다. 그리고 한국이 하나의 방송국이 되어 세계에 전파를 보내야 합니다. 한국에서 전파를 보내면 세계의 성지에서 그 전파를 수신하여 하늘 앞에 감사와 송영을 드릴 수 있는 것입니다. 성지는 이런 하나님의 지상 초소인데도 불구하고 그 초소를 지키는 사람이 없다는 것입니다.

통일교회의 선지자나 식구들은 하늘 앞에 서러움의 무리가 되어서는 안됩니다. 하나님은 성지에 대한 마음이 지극히 깊은데 자녀들이 나타나지 않으니 하나님의 마음은 얼마나 서러우시겠습니까? 성지에 대한 하나님의 서러운 마음은 여러분이 사죄할 수 있지만, 하나님 앞에 충효의 도리를 세우겠다고 약속해 놓고도 그 약속을 이행하지 못하여 하나님이 그로 인해 서러움을 느끼게 될 때는 돌이킬 수 없게 됩니다. 이렇게 되면 충신 열녀는 다시 될 수가 없습니다.

가장 두려운 것은 상하 전후 좌우에서 들인 정성을 유린하지 않았나 하는 것입니다. 그 정성을 받아서 사방에 나누어 주고, 꽃을 피워 많은 후손들이 쌍수를 들어 크게 추대할 수 있게 정성의 예물을 잘 보관하고 있느냐? 이것이 없다면 하늘의 진노가 태풍처럼 나타날 것입니다. 하늘 군대의 분풀이가 땅에 진동하는 날에는 여러분은 갈 곳이 없게 됩니다. 즉, 막다른 골목에 몰리고 만다는 것입니다. 또한 산꼭대기에 세워지는 것이 아니라 골짜기에 세워지는 것입니다. 아무리 갖춘 것이 없고 실적이 없다 하더라도 이것만은 이루어야 합니다.

자기 자신만을 위해서 그런 일을 해서는 안 됩니다. 자신보다는 나라를 위해서, 나라보다는 세계를 위해서 눈물흘려야 합니다. 대한민국, 한민족, 배달민족이라고 하는 이 민족이 없어지더라도 세계는 남아져야 합니다. 평화를 추구하고 평화를 희망하는 세계 인류로 남아져야 합니다. 국가를 위해 정성을 못 들이더라도 세계를 위해 정성들이고, 세계를 위해 정성을 못 들여도 하나님을 위해 정성들여야 합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제일 귀한 선물을 주시기 위해 최고의 기준에서 하나님을 사랑하라고 하셨습니다. “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라(마 12 :30)”고 하셨습니다.

지금까지 우리 선조들이 들인 정성은 소망의 정성이란 것을 알아야 합니다. 소망의 한 날을 찾기 위한 과정에서 몸부림친 정성이었지, 소망을 차지하여 하늘을 모시기 위한 정성은 못 들여 왔습니다. 무슨 말인지 알겠어요? 하나님으로부터 멀리 떨어진 입장에서, 탕감노정에서의 뒤넘이치는 정성은 되었을지언정 소망의 뜻을 이루어 하나님을 위로해 드리는 정성은 못들였다는 것입니다. 하늘의 영광을 찬양할 수 있는 그런 정성을 인간세계에서는 그 누구도 갖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오시는 주님으로 말미암아 원수를 전부다 굴복시키고, 탕감세계의 한에서 벗어난 아버지께 충과 효의 모든 정성을 다해야 하는 것입니다. 지금까지 아브라함, 모세, 예수를 통한 기독교 2천년의 섭리역사상에서의 모든 정성은 하나님의 가슴속에 못자국만 남겼던 슬픈 정성이 되었습니다.

17-245
우리가 들여야 할 정성은 무엇이냐
앞으로, 참다운 아들딸들이 들여야 할 정성은 무엇이냐? 현실적인 생활무대에서의 정성이 아니라 소망의 정성, 영광의 정성, 충성의 정성, 모심의 정성을 들여야 합니다. 그러한 정성을 남기고 가야만 천국이 내 천국이 되고 그 아버지가 내 아버지가 될 수 있는 것입니다. 지금까지의 정성은 탕감도상에서의 정성이었지만, 앞으로의 정성은 하늘을 모시기 위한 정성이어야 하고, 모시는 자리에 동참하기 위한 정성이어야 합니다. 여기에 동참하는 우리는 첫째 부활에 동참하는 사람들이라는 것입니다.

모심의 자리에 동참하기 위해서는 지금까지 슬퍼해 나오셨던 하나님을 위로해 드릴 수 있고, 슬픈 정성의 사연에 동참할 수 있는 내용을 갖추어야 합니다. 이것을 소개하고 그에 따르는 탕감조건을 하나님 앞에 세우기 위하여 나온 것이 복귀원리입니다.

복귀원리를 통해서 우리는 무엇을 할 것인가? 슬픈 역사과정을 종결짓기 위해서 정성을 들여 탕감조건을 세워야 합니다. 그리하여 아담 가정에서 아담을 잃어버린 하나님의 그 슬픔에 동참해야 되고, 가인이 최후의 결실을 맺어야 했는데도 불구하고 아벨을 살해함으로써 아버지께 못을 박았던 그 서러움을 잊게 하고, 노아가 120년 동안 참고 수고하여 충성해 나왔지만 일시에 파괴되었던 그 서러움을 잊게 해야 합니다. 또한 아브라함 이삭 야곱 3대에 걸쳐 수고하던 심정적인 내용을 알아야 합니다. 그리고 모세로부터 예수님까지 2천년 동안 이어져 내려온 하나님의 서러움에 동참할 수 있어야 합니다. 그렇게 하도록 하나님의 심정을 여러분에게 심어 주기 위한 것이 복귀원리인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여러분은 아담 가정에서 잃어버린 아버지를 찾아야 하고, 노아 가정에서 뜻 앞에 서지 못한 그 서러움을 대신 이루어야 합니다. 또 자신의 제물 실수로 인해 4백년 동안 그 후손들이 저주받게 되었을 때 몸부림치던 아브라함의 심정을 대신해야 되고, 모세가 하나님의 뜻을 위하여 이스라엘 민족이 비참한 자리에 처해 있을 때 불타는 민족애로 원수였던 애급 사람을 쳐 죽인 그 서러운 심정을 대신해야 합니다. 또한 그것을 대하던 하나님의 모든 마음을 알아야 합니다.

이스라엘 민족이 가나안 복귀를 위하여 몰리고 쫓기는 수난의 역사를 당할 때 그 민족을 바라보던 하나님의 서러움과, 지금까지 기독교가 거쳐온 수 많은 피의 대가에 여러분이 동참할 수 있어야 합니다. 나를 찾기 위해서 하나님이 이렇게 수고하셨다고 느낀다면 ‘하나님! 역사적인 한을 나로 말미암아 잊으시옵소서’라고 할 수 있는 자신이 되어야 합니다. 그래서 사탄을 굴복시킬 수 있는 승리의 결정권을 가지고 하나님 앞에 승자의 모습을 갖추어서 시봉(侍奉)과 영광과 찬양을 돌려드릴 수 있는 정성의 주인공이 되어야 하나님의 양자가 될 수 있다는 것을 여러분은 알아야 되겠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과거에 내가 예수님을 위해서 어떻게 어떻게 했다’라는 말은 버려야 합니다. ‘내가 통일교회에 들어와서 얼마나 일했는 데……. 내가 주인이 되면 뭘 하겠다’라는 생각도 버려야 합니다. 자기 갈 길이 아직 남아 있는데도 불구하고 뒤를 돌아보고 탄식하는 사람은 이미 모든 것을 잃어버리고 엉뚱한 조건을 바라고 있는 사람이라는 사실을 알아야 합니다. 이러한 사람들이 많습니다. 이러한 여러분에게서 오늘 당장 이러한 마음이 사라지기를 바란다면, 가로막힌 원수의 적진을 파괴해 버리고 승리 자의 영광을 갖추어야 되겠습니다.

승리자의 영광을 갖추기 위해서는 하나님의 역사적인 한을 중심삼은 공분의 심정으로 원수를 무찌르고 이것을 탕감복귀해야 합니다. 선두에 서서 돌격전으로 최후의 결정을 짓자는 것입니다. 승패의 결정을 지어 승리한 민족을 하나님 앞에 세우고, 하나님께서 영광의 한 날을 맞이하실수 있도록 민족적인 정성을 하나님 앞에 바쳐야 합니다. 하나님은 그런 날을 얼마나 그리워하시겠습니까? 여러분도 그런 그리워하는 마음을 갖고 있습니까?

17-247
주류가 먼저 대해에 들어간다
어떤 식구는 ‘지금 되어지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건 뭐건 흘러가는 물결에 휩싸여 가만히 있으면 되지 설치고 야단할 게 뭐가 있느냐’ 하고 편리한 생각을 하고 있습니다. 가만히 있어도 선생님이 끌고갈 텐데 야단스럽게 할 필요가 없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산꼭대기의 물은 가만히 있어도 태평양까지 흘러가므로 주로(主路)로 흐르든 옆에서 소용돌이 치든 약간의 거리 차이는 있으나 마찬가지라고 생각할 수도 있지요. 그러나 흐르는 물에도 주류와 지류가 있습니다. 내재적인 곡절의 전부와 정면 적으로 부딪치는 주류가 먼저 대해(大海)에 들어갑니다.

통일교회에도 주류가 있고 지류가 있습니다. 선생님은 주류의 방향을 끌고 나오기에 온갖 정성을 쏟았습니다. 태풍이 불어오는 대해에 일엽편주가 되어 끌고 나왔습니다. 불어 오는 바람이 목적지에 닿게 하는 더 강한 힘이 되게 하고, 결실을 맺게 해야 합니다. 역사가 깨어지지 않는 한, 힘이 부치지 않는 한, 이 대해의 노도도 나로 하여금 목적지를 향해 가는 데에 연단과 시련의 보탬은 될지언정 목적을 달성하는 데에 방해는 될 수 없는 것입니다.

오늘날 통일교회 청년들 중에는 선생님이 기합을 주어 동서남북으로 날아가 버리게 하고 싶은 사람들이 많습니다. 여러분은 죄수들이 가득찬 패역한 이 세계에서 날아가는 인공위성과 같은 기분을 느껴야 합니다.

신념이 얕은 사람은 앞을 개척하는 데 있어서 주체적인 기준을 세울 수 없습니다. 하나님을 믿는다는 것은 신념을 앞세우고 쉬지 않고 가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집에 돌아가 밥바리를 기억할 수 없을 만큼 열심히 달려 가야 합니다. 현재 우리가 적군에게 포위되어 있는 데 어떻게 밥바리 생각을 할 수 있겠습니까? 우리 통일교회에는 밥바리를 들고 길거리의 엿장수와 같이 자리를 잡고 앉아 있는 사람이 많습니다. 그럴 사이가 없습니다. 달려야 됩니다. 제트기보다 빠른 인공위성처럼 바쁘게 정성의 예물을 맞이해서 수많은 인류 앞에 고이 넘겨 주어야 합니다. 그 예물을 넘겨 줄때 천만인이 우리에게 고맙다고 눈물을 흘리게 될 것입니다.

내가 지금은 비록 기쁨의 한 날을 갖지 못하게 되더라도 후대가 정성의 예물로 대할 수 있는 정성의 터전을 남겨 놓겠다고 노력하지 않으면 통일의 용사가 될 수 없으며 대해(大海)에 들어갈 수 없습니다.

선생님이 오늘 태릉에 갔을 때 어떤 아주머니가 통일교회는 첩첩산중이라고 말했습니다. 첩첩 산도 넘어가면 평지입니다. 통일교회의 한 사람 한 사람은 전부다 저 높은 벼랑 꼭대기에 올라가려고 줄을 걸고 매달려 있는 것과 같은 사람들입니다. 여러분 각자가 올라가야 할 고개는 비록 험난 하기는 하지만 얼마나 멋집니까?

높은 고개를 올라가다가 ‘이만큼 왔으면 됐지’ 하고 위를 올려다 보지 않고 평지만 바라보는 사람은 그것으로 만족하는 것입니다. 만일 고개에 올라서지도 않고 있는데 홍수가 나게 되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그 순간은 편할 지 모르지만 사형선고를 받아 놓고 있는 사형수인 것입니다. 또 얼마 만큼 올라가서 ‘아이쿠! 내 다리가 부러졌네. 바른 다리가 부러졌으니 고치고 가야지. 고치는 김에 좀 쉬고 가야지’ 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그러다 보면 동무가 생겨서, 서로 ‘힘들지!’ 하면서 평지만 바라보려고 합니다.

또 남들은 한 계단씩 밟아가는 데 한꺼번에 뛰겠다고 하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이런 사람들은 맨 처음 교회에 들어오면 몹시 바쁩니다. 밤에 자면서도 다리가 움직이고 눈이 운동을 하는 그런 체험을 하게 됩니다. 여러분이 정상적인 궤도에 올라서 보면 다 알게 됩니다. 선생님도 과거에 그런 때가 있었습니다. 사지의 세포가 먼저 발동을 해서 가고 싶어할 때는 거기에 끌려가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여러분도 통일교회에 처음 들어 왔을 때는 대번에 뛰고 싶었지요?

17-249
목표에 도달할 때까지 긴장을 풀지 말아야
선생님은 하나님을 고맙게 생각합니다. 선생님의 성격을 대번에 뛰려고만 하게 해 놓았다면 죽든가 살든가 무슨 사고가 발생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우리가 일정한 고개에 오르게 되면 못 가게 막아 놓고 준비하게 하십니다. 거쳐야 할 단계가 많기 때문입니다. 이것을 알기 때문에 선생님은 그 고개를 쉽게 넘지 못하더라도 절대 낙망하지 않습니다. 자기의 지난날의 산 증거가 확실하게 역사적인 재료가 됩니다. 다 올라가서 졸라맨 허리띠를 풀어 놓으면 많은 핍박과 시련이 옵니다. 한번 넘어지면 한번 일어서는 것이 공식이기 때문에 많은 핍박과 시련을 거치고 나면 목적지에 도달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믿는 사람들은 웃는 날을 일주일 이상 가져서는 안 됩니다. 좋은 날이 있거든 ‘하나님, 요건 몇일 가게 하시렵니까? ‘ 하고 기도를 해서 하나님께 약속을 받고 웃어야 합니다. 그런 기도도 할 줄 알아야 하는 것입니다.

허파에 바람이 들어간 통일교인들은 수많은 사람들에게 사형선고를 하고 있습니다. 듣지 못하던 말을 처음 대하니 대포에 꽝 하고 맞은 것처럼 깨어져 나갑니다. 그래서 통일교회 선생님이 지금까지 욕을 먹는 것입니다. 선생님이 ‘전도할 때 어디 가든지 치밀하게 잘 해서 이런 말을 하지 말고 요런 말만 하라’고 해도 자기가 은혜받을 때 좋았던 말을 먼저 꽝꽝 합니다. 듣는 사람은 기절할 말인데 자기는 그저 좋아서 합니다. 총을 잘쏘면 카빈총이든 M1총이든 산탄공기총이든 자기 경력에 의해 총을 가져야 할 텐데도 불구하고 산탄공기총을 가지고 M1총 대신 쏘겠다면 되겠습니까? 하나님은 적재적소에 활용할 수 있는 배경과 환경에 적응할 수 있는 위치와 자기의 중심기준을 갖춘 사람을 쓰시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대개 선생님과 구면인 사람이 많은데 그런 여러분들의 얼굴을 가만히 보면 이전과 다릅니다. 계절에 비유한다면 마치 가을과 같습니다. 눈도 빛나지 않고 손도 기운이 없습니다. 이런 것을 보면 나는 그냥 두고 싶지 않아요. 아무리 처음 들어온 사람이라도 죽을 때의 태세를 잘 갖추어야 합니다. 내가 지금까지 통일교회를 지도하면서 염려한 것은 죽는 날은 가까와지는데 그날을 위해서 나는 무엇을 할 것인가 하는 것이었습니다. 선생님은 유언을 써 가지고 다닙니다. 아버지 앞에 가서 내가 요구할 수 있는 요건이 무엇인가를 기도하고, 땅에 살아 있는 한, 할 수 있는 최대의 노력을 했다는 기준에 서기 위해서입니다.

17-250
정성의 줄
선생님이 복잡한 영계에 울타리를 두르고 몸부림쳐 나왔기 때문에 하늘이 어느 한 때 떠나는 일이 없었습니다. 여러분은 이러한 터전 위에 서 있지만 수많은 영통인들과 수많은 신령한 사람들이 드나들 때 조심해야 됩니다 이 분야는 자기의 경력 가지고는 안 됩니다. 본성이 서로 다른 만큼 새로운 것이어야 합니다. 새로운 사람을 대할 때는 새로운 기준에 응할 수 있는 마음과 그에 상응하는 가치를 가지고 상대적인 위치에서 대하지 않으면 조건에 걸리게 됩니다.

그렇기 때문에 선생님은 정성들인 사람을 제일 무서워합니다. 배짱부리고 천하를 호령하는 그런 사람은 아무것도 아닙니다. 호랑이 방귀와 마찬가지입니다. 그가 명령할 때는 천지가 ‘예’ 하고 순종하게 하는 정성들인 사람을 제일 무서워합니다. 정성의 줄로 하나님을 꽁꽁 동여매면 하나님도 완전히 결박당합니다. 정성의 줄을 끊을 수 있는 천법은 없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의 본체나 본질은 정성의 줄로서 우리 통일교회와 연결되어 있는 것입니다. 정성의 무리는 맞고 빼앗아 옵니다. 이것이 복귀의 길입니다. 따라서 이런 과정에 서 있는 여러분은 정성을 들여야 합니다. 여러분이 아무리 출발을 잘 한다 하더라도 맨 처음에 정성을 들여서 출발을 해야 합니다.

하나님이 나무에 오르기 시합을 한다고 광고했다고 합시다. 그러면 욕심 많은 통일교인들은 제일 큰 나무에 서로 올라가려고 싸우다가 끝내 싸움이 끝나지 않은 채 실적 없이 시합은 끝나게 될 것입니다. 이것은 욕심만 크고 실적이 없다는 말입니다. 재치 있는 사람은 자기에게 알맞는 나무를 먼저 찾아 올라갈 것입니다. 그러나 욕심 많은 사람은 자기 분수에 넘치는 제일 높은 나무를 올라가려다가 떨어지고 맙니다. 우선 차근차근 올라가서 하나하나 기준을 세워 완성해야 하는 것입니다. 처음부터 너무 크게 출발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여러분이 착실히 실적을 세우며 자기 본질에 해당되는 충성만큼의 정성을 기울여, 하늘이 쌓아 온 정성의 예물의 기준을 지니고 천고(千古)에 남겨질 수 있는 자리에 섰다면 여러분 당대에는 그 소망하는 뜻이 이루어지지 않더라도, 여러분 후대에는 반드시 이루어질 것입니다. 이렇게 세계에 대해서 남겨질 수 있는 정성의 터전을 지니고 나가면 자신과 후손의 명성이 세계로 퍼져 나가게 되는 것입니다.

정성이 다른 곳으로 옮겨지게 될 때 어떻게 옮겨지느냐? 작은 지남철에 쇠붙이가 달랑달랑 붙어 있는데, 여기에 큰 지남철이 한번 싹 들어왔다가 나간다면 이 쇠붙이는 어떻게 되겠습니까? 모두 큰 지남철에 달라 붙게 될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이 큰 지남철이 천운이라 할 때, 천운의 정성의 터전이 여러분 앞에 왔다가 갈 때는 지금까지 역대의 선조로부터 내려 온 정성의 터전을 모두 빼앗아 가져가 버린다는 것입니다.

끝날에는 이 모든 것을 빼앗아서 가져가 버립니다. 이럴 때, 즉 도둑을 맞을 때는 가만히 앉아서 입벌리고 웃으면서 도둑을 맞게 됩니다. 왜냐하면 도둑맞은 것을 다시 도둑질해 오는 방법이 있기 때문입니다. 여러분은 하루에 수만번 지구성을 빼앗아 오는 그런 도둑질을 해야 합니다. 선생님이 지금까지 이 무지의 세계를 개척하는 데 있어서 언제나 그런 작전을 해 왔습니다. 먼저 내려가서 맞는 것입니다. 맞으면 만사가 형통하고 동정을 받게 됩니다. 또 높은 자가 낮은 자 앞에서 맞게 되면 반비례 효과가 나타납니다. 그렇기 때문에 온유겸손하라는 것입니다. 이렇게 해서 쑥 올라오게 될 때는 몽땅 빼앗아 오는 것입니다. 선생님은 이렇게 해서 은혜받은 사람들의 많은 은혜의 보따리를 빼앗아 왔습니다. 이게 죄인 가요? 선인가요? 「선입니다」

하나님은 통일을 바라시기 때문에 세계적으로 풀어 놓은 은사의 보따리를 빼앗아 한 곳에 모아 다시 나눠 주게 되면 세계는 통일되게 되는 것입니다. 그렇지만 과거에 은혜를 받았다가 빼앗긴 사람들은 그 은혜의 맛을 알기 때문에 클클해서 죽을 지경일 것입니다 이렇게 빼앗아 놓은 은혜를 쌓아 놓았다가 조금씩 아버지부터 아이까지 전부다 주는 것입니다. 선생님은 은혜를 주관할 수 있기 때문에 삼천만 민족이 ‘이단의 괴수다. 망해라’ 하여도 망하지 않습니다.

까닭 없이 맞았으면 손해배상을 받아야 합니다. 선생님은 서대문 형무소에 들어가서도 다리를 펴고 코를 골며 잠만 잤습니다. 너희들이 나를 삼키지 못할 때는 수가 난다 이것입니다. 이런 일을 하려니 때로는 남루해야 하기도 했고, 때로는 손가락질 받아야 했습니다. 이 길을 개척하면서 가지가지 고초를 다 당했습니다. 그때마다 ‘하나님께서는 이보다 더한 풍상을 겪어 나오셨는데 내 어이 이만한 풍상을 겪지 않으리오!’라고 생각했습니다.

공적인 자리에서 당한 그런 사연이 많으면 많을수록 남이 갖지 못한 보화를 창고에 가득 채울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런 은사라는 것을 알게 될 때 여러분이 전도 나가서 지칠 수 있겠습니까? 여러분이 전도하러 나갔을때 지쳐서 신경통이 생기는 것도 여러분 자신의 잘못이지 하나님 때문이 아닙니다. 여러분은 ‘아이고 내 신경통은 뜻 때문에 생겼는데 선생님은 그것도 몰라주시네!’ 하고 원망을 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선생님은 지금까지 한번도 하나님이 나를 몰라준다고 원망하지 못했습니다. 하나님께 세계를 몇 개 주고도 바꿀 수 없는 약속을 해놓고 정성을 들이고 나서야 하나님을 대할 수 있습니다.

17-253
세계 앞에 돌릴 정성의 예물을 준비하라
오늘 7년노정을 걸어가는 과정에서 여러분에게 남겨진 예물이 무엇입니까? 앞으로 세계 사람들이 통일교회 간부들을 많이 데려가려고 할 것입니다. 본부에 누가 있으면 관심을 가지고 그 사람에 대해서 반드시 경력을 물어 봅니다. 그러면 어떤 경력을 가졌다고 내가 설명합니다. 이럴때 여러분은 손에 기름기를 싹 씻어버리고 큰소리칠 수 있는 배포를 가지고 가야지, 옛날 그 켸켸묵은 그런 생각으로 가서 얘기하겠습니까?

사람은 정성의 예물을 받았으면 정성의 예물을 돌릴 줄도 알아야 합니다. 청춘을 불살라 버린 그 정성, 즉 눈물과 피와 땀을 갖고서 정성의 예물을 민족과 세계를 위해 바칠 수 있어야 합니다. 열만한 하늘의 은사에 백만한 정성을 가한 우리의 정성의 예물을 세계 만방과 하늘 앞에 바쳐야 합니다. 그래서 후손들까지 평안하게 살 수 있는 하나의 탕감복귀의 조건을 남겨야 합니다. 이렇게 네 자신의 손으로 하늘의 요건에 플러스시키겠다고 몸부림칠 수 있는 사람이어야만 천민으로서 백성이면 백성의 예물을, 종족이면 종족의 예물을, 식구면 식구로서의 예물을 드릴 수 있는 것입니다. 정성의 문을 거쳐 들어오지 않는 사람은 도둑입니다.

정성이 가는 길, 통일의 길, 정성의 예물을 소개해 주는 길이 이미 개척되어 있습니다. 그 길을 따라 본래의 전통적인 인연을 거쳐 여러분의 목적지를 향해서 쉬지 않고 생명을 바쳐 나아가야 합니다. 그럼으로 말미암아 그 모습이 비록 겉으로는 처량하지만 훗날 환희와 영광의 세계가 될때 환희에 찬 아버지께서 맞아 주실 것입니다. 그날을 위해 죽음까지 각오해야 하며 죽더라도 그날을 이 민족 앞에 소개해 주고 죽겠다고 몸부림쳐야 합니다. 만일 그런 죽음의 날이 온다 하더라도 죽음 가운데서 소망의 그 세계를 차지할 수 있는 그런 사람이 되기를 더더욱 결의하고 노력해 주기를 부탁드립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