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219 to 17-223: 일편단심으로 최후의 고개를 넘어 승리적 주관자가 되자

일편단심으로 최후의 고개를 넘어 승리적 주관자가 되자
1967.01.01 (일), 한국 전본부교회

17-219
일편단심으로 최후의 고개를 넘어 승리적 주관자가 되자
[말씀 요지]

지금 우리가 걷고 있는 이 7년노정은 결코 선생님의 사사로운 구상에서 나온 것이 아니다. 그것은 원리 안에서 만민 앞에 필연적인 것으로 나왔다. 이 7년노정은 복귀섭리에 반드시 필요한 우주적인 고비이다.

17-219
7년노정 중에 해야 할 일
우리는 세상 사람들이 꿈도 안 꾸고, 아무 것도 모르는 가운데서 우리의 목표를 향해 총진군해 왔다. 많지 않은 통일교회 식구들을 거느리고 나오면서 어떻게 하면 통일교회의 점진적인 발전의 모습을 보여 주느냐 하는 것이 선생님의 걱정이었다.

우리는 결코 좋은 환경 가운데서 출발한 것이 아니다. 그러나 그런 중에서도 일편단심으로 고투를 계속하여 이제 우리는 민족적인 기준에 맞먹는 때를 맞이하게 되었다. 지금은 7년노정의 6년 고비를 넘기고 남은 일년 고비를 눈앞에 두고 있다.

사실은 선생님이 해방 직후 이 노정을 출발했을 때부터 이 민족이 이 뜻을 받아들였더라면 이 뜻이 이토록 연장되지는 않았을 것이다. 나는 1946년도에 하나님의 명령을 받고 평양을 찾아갔었다. 선생님은 7년을 걸고 이 길을 출발했으나, 환경의 불비로 인하여 계획대로 뜻이 이루어지지 않았다. 그리하여 평양을 거쳐 남한에 내려와서 부산으로, 서울로 옮기면서 뜻을 펴려고 하였으나 이 민족이 그 길을 가로막으며 하나님을 버렸다. 그렇지만 하나님은 이 민족을 버릴 수가 없었기에 지금 다시 여러분을 중심삼고 7년노정을 찾아 세우시려는 것이다.

이 길은 말할 것도 없이 어려운 길이다. 그래서 적지 않은 수의 식구들이 끝까지 견뎌 내지 못할 줄로 안다. 그렇다고 하여 싸움의 과정에서 낙오된 식구들을 일일이 동정할 수는 없는 것이다.

복귀섭리를 중심삼고 볼 때 이 기간을 고개라고 한다면 제일 높은 고개요, 골짜기라 한다면 제일 깊은 골짜기다. 선생님이 흘린 피와 땀과 눈물이 이 골짜기에 고여 있다. 이 고개나 골짜기를 그냥 두어서는 안 된다. 평지를 만들어야 한다. 만드는 데는 산을 파서 골짜기를 메우는 것이 아니고 이 고개를 몽땅 들어내야 하는 것이다.

원칙적으로 이 7년노정은 단 한번뿐이다. 복귀섭리역사에 있어서 두번은 있을 수 없는 것이다. 그러므로 일편단심으로 최후의 고개를 넘어 승리적 주관자가 되어야 한다. 이 승리적 주관자가 되지 못하면 천국에 들어갈 수 없다.

7년노정의 첫 해의 표어는 ‘생애 중 최대의 실적을 남기는 해가 되게 하자’였고 두번째 해는 ‘아버님의 대신자가 되자’였으며, 세번째 해의 표어는 ‘보여 주고 자랑할 수 있는 자가 되자’였던 것이다. 그 다음 네번째 해부터 7년노정이 끝날 때까지는 ‘승리적 주관자가 되자’는 표어로 일관 하게 된 것이다. 또 앞의 3년 기간에는 연속으로 36, 72, 124가정의 성혼식을 거행하고 남한 각지에 임지를 주어 고정 배치하였는 데, 이것은 이스라엘 민족이 가나안을 복귀한 뒤 12지파를 중심하고 새 땅을 분배한 것과 같은 뜻이 있는 것이다.

우리는 하나님과 정의를 위한 의용군으로서 하나님이 알려 주신 작전 비법을, 즉 주신 피와 땀과 눈물을 무기로 삼아 나왔다.

만물도 참부모의 주관을 받기를 원한다. 선생님은 7년노정을 출발하기 전에 남한 각지의 명승지를 찾아 다니며, 하나님의 심정을 대신하여 하늘과 인연을 맺게 하는 조건을 세웠다.

탕감복귀의 원칙은 철칙이다. 그런데 어느누구도 반겨 맞으려 하지 않는다. 그것은 온 사탄들이 일체가 되어 배반하는 환경을 만들어 싸움을 걸어오기 때문이다. 우리는 이것들을 전적으로 굴복시켜야 하는데 그러기 위해서는 사랑의 심정을 지녀야 한다. 그런 다음 우리는 그러한 환경적 조건 위에서 종적인 복귀섭리역사를 횡적으로 재현시켜야 한다.

특별히 이번 7년노정에서는 하나님의 6천년 동안 쌓여온 역사적인 서러움을 우리 일신에서 횡적으로 탕감해야 한다. 그렇기 때문에 선생님은 공석에 나서기만 하면 고생하라는 말을 자주 해왔던 것이다.

선생님의 생활 역시 6천년의 탕감조건을 걸고 무자비하게 때려 모는 것이었다. 그래서 감옥에 가서는 제일 어려운 일을 도맡아 했고 그것으로 공산당 치하의 감옥에서도 여러 차례 모범 노무자 상을 받았다. 이제는 이 고개를 넘어서는 단계가 되었기 때문에 선생님이 죽더라도 뜻은 평면적인 인연 위에 어차피 이루어지게 되어 있다.

선생님이 고생할 때면 하나님은 언제나 친구를 갖게 해주셨다. 틀림없이 하나님은 아버지이셨다. 하나님은 언제나 선생님과 함께 하셨다. 선생님 역시 죽을 뻔한 지경을 수없이 겪어 왔지만, 그 어떤 경우에서도 하나님을 향한 절개를 지켰다. 그래서 선생님은 쇠고랑을 차고 평양감옥으로 들어갈 때에도 오히려 여기에서 어떠한 동지들을 만나게 될까 하는 흥미와 함께 희망을 품고 들어갔다.

17-221
기필코 승리해야 할 마지막 일년 기간
하나님을 대신한 고생의 노정에 있어서 특히 원수를 대할 때는 사랑으로 대해 주지 않으면 복귀섭리역사는 이루어지지 않는다. 여러분도 마찬가지다. 선생님을 따르는 여러분에게 어찌 시련의 고개가 없겠는가? 그러나 여러분이 한민족 앞에 7년노정을 거치며 수고한 결과, 마침내 이 민족이 통일교회의 뜻을 따르지 않으면 안 되게 되었다. 마치 야곱이 21년 노정을 마치고 에서 앞에 모든 것을 바칠 때에 에서가 그를 환영했던 것과 같은 형의 노정이다.

이념적인 세계에서 통일교회를 빼놓는다면 그 무엇도 절대 불가능하다. 지금 우리의 입장에서는 뜻을 중심하고 어떻게 세계의 문제를 합리화시키느냐 하는 것이 문제이기 때문에, 여기에 내가 부딪쳐서 밀어내느냐 밀리느냐 하는 것이 앞으로 일년간의 싸움노정의 과제이다.

승리자가 되기 위해서는 반드시 싸움의 노정을 거쳐야 한다. 싸움에 이기려면 패자가 맛보아야 하는 서러움을 먼저 느껴 원수에 대한 적개심을 가져야 한다. 복귀섭리의 역사는 패자의 서러움을 가르쳐 주고 있다. 통일교회에서는 내일의 승리적인 기쁨을 바로 흡수할 수 있도록 승자의 권한을 가르쳐 주기 전에 패자의 서러움을 가르쳐 나왔다.

선생님은 누구보다도 패자의 서러움을 짙게 체험한 사람이다. 그러나 그런 자리에서 적개심이 솟구치더라도 내일은 기필코 승리자가 되고야 만다고 하는 것이 하늘편이 갖는 임전태세이다. 그래서 쓴 잔을 달게 받으라는 것이다. 패자의 서러움을 맛보지 않으면 승리자의 기쁨을 최대한으로 느낄 수 없다. ‘저들의 죄를 용서하시옵소서’ 하는 심정을 가지고 어느한 날 저들이 자연굴복해 들어올 것을 바라야 한다. 이것이 하늘을 대표해서 싸워 온 선생님의 기본 자세였다.

선생님은 뼈가 없는 사나이가 아니다. 훼방하는 자가 많고 핍박하는 자가 많을수록 분함의 범위를 넓혀 세계적인 원수를 갚겠다고 다짐해 왔다. 이것을 근거로 사탄에 대한 복수와 탕감을 위한 끝날의 대심판은 있게 된다.

선생님은 서대문 형무소에 있을 때 선생님을 따르던 사람들이 역사노정에서 패자가 될까봐 염려했었다. 그러나 한동안 패자의 운명 가운데 우리를 몰아넣는 것도 내일의 승리를 승리답게 하기 위한 하나님의 깊은 사랑의 배려였던 것이다. 우리는 지난 6년 동안 당했던 패자가 맛보아야하는 서러움을 마음에 새기며 기필코 승리적 주관자가 될 것을 다짐해야 한다. 그래서 개인적인 승리자가 된 다음에는 가정을 구해야 한다. 가족의 십자가를 지지않고는 가정을 구할 수 없다.

사람에게는 과거를 회상함으로써 새로운 결심을 하는 것도 필요하다. 우리는 아무리 환경이 어려워도 그 환경을 밟고 올라서서 승리를 쟁취함으로써 개척자의 사명을 완수해야 한다.

공동 목표를 향해 나아가는 과정에서 그 일의 일익을 감당한 나는 단순히 한 개인이 아니다. 그리고 아직까지 우리의 분함은 풀리지 않았다. 그러나 먼저 내 개인을 두고 마음의 고개와 몸의 고개를 넘어야 한다. 마음의 고개는 마음이 지향하는 바를 좇아 고개를 넘어야 한다. 이 고개를 넘을 때에는 쉴 수가 없다. 정성들여 넘어야 한다.

민주세계의 이념을 중심삼고 어떻게 유물론적 공산세계를 밟고 넘느냐 하는 것과 통일의 이념을 중심삼고 어떻게 민주와 공산, 이 두 세계를 밟고 넘느냐 하는 것이 문제다. 우리가 가는 길에는 넘어야 할 고개가 많다. 그 고개들을 넘으려면 먼저 개인적인 고개를 넘고 승리함으로써 주관자가 되어야 한다. 그렇기 때문에 선생님이 ‘우주 주관 바라기 전에 자아주관 완성하라’고 했던 것이다.

17-223
능동적인 사람이 되자
승리할 수 있는 상황에서도 승리하지 못하고 실수한다면 그 한은 천추 만대까지 간다. 이것이 지옥이다.

그러나 그런 생활무대에서도 패자의 서러움을 안고 거기에서 동조자를 찾기 위해 두드리고 만나기를 원하는 마음으로 나간다면 제삼자 앞에 실패의 요인을 남기지 않을 것이다.

내 스스로를 방어하는데 게을리 하지 않고 공격을 하는데 재치가 있어야 한다. 승리자가 되기 전에 내가 죽으면 어떻게 될 것인가를 생각해 보라. 여러분은 승리를 가져오기까지 일편단심으로 싸우기 바란다.

복귀는 개인에서 가정으로 가정에서 종족 민족 국가 세계 천주를 넘어 하나님까지, 그리고 하나님의 사랑까지 되어야 한다. 하나님은 지금까지 패자의 서러움을 잊으신 적이 없다. 성경에 나와 있는 인간의 모든 실수는 단지 역사의 기록으로만 끝나는 것이 아니다. 그것이 하나님께는 패자의 서러운 기록으로 남아져 있는 것이다.

선생님은 오늘 아침에도 ‘아버지, 또 가야 하겠습니다’ 하고 기도했다. 한을 품은 사나이의 가는 길이 어찌 평탄하기를 바랄소냐!

우리에게는 남북으로 갈린 국가적인 문제와 민주 공산, 두 사상으로 나누어진 세계의 문제를 타개해야 할 사명이 있다. 이것이 우리가 넘어야할 최고의 고개이다. 세상에서 결심 없이 이루어지는 일은 없다.

싸우는 데는 모름지기 정의에 입각하여 싸워야 한다. 사탄은 근성적으로 높아지기를 원하나 우리는 그와 반대로 낮아져서 내 몸과 사랑으로 싸워 나가야 된다. 두 눈은 가로 보아선 안 된다. 오직 일직선이어야 된다. 즉, 일편단심이어야 된다는 것이다. 내 자신은 포탄이기 때문에 내 귀와 눈과 손이 각각 다른 데 있으면 망한다. 이 싸움에서 승리하기 위해서는 아까운 것이 없어야 한다. 인류를 구원하기 위해서는 어떠한 희생도 각오하는 것이 하늘의 계산법이다. 여러분들은 선조들의 핏자국이 얼룩진 희생의 제단을 지켜서 하나님의 원수를 갚아야 한다.

선생님은 피동적인 사람을 원하지 않는다. 지금까지 여러분은 다분히 피동적이었다. 그러나 앞으로는 결코 피동적이어서는 안 된다. 여러분은 능동적인 사람이 되어야 한다. 이제부터 여러분은 명령을 받고 가는 사람이 되지 말고, 스스로에게 명령하면서 갈 수 있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

가정적으로 반대한 사람은 사회적으로 탕감해야 하고, 면에서 반대한 사람은 군에서, 군에서 반대한 사람은 도에서 탕감해야 한다. 이렇게 큰책임을 맡은 사람일수록 심판의 조건이 큰 것이다.

뜻을 위해 가는 노정에서 여러분이 겪는 고생은 여러분 자신들로 하여금 능동적인 생활을 하게 하기 위한 하늘의 선물인 것이다. 이것을 싫어하는 사람은 승리적 주관자가 될 수 없다. 자나깨나, 어디를 가나, 내마음은 하늘과 일치되어야 한다.

하늘로부터 무엇을 받을 때에는 이것을 하늘이 주고 싶어 주는 것인가, 아니면 주기 싫은 것을 주는 것인가 하는 것을 여러분은 생각해 봐야 된다. 하늘이 주기 싫어하는 것을 받을 때에는 받은 것의 몇십 배로 갚아 주겠다는 마음가짐으로 받아야 한다. 그리고 하늘이 주고 싶어 주는 것은 천추만대 자손들에게까지 전해 주겠다는 마음으로 받아야 한다. 자기의 욕심만을 채워서는 안 된다.

타락의 결과로 우리 인간이 알 수 있게 된 것은 본연의 인간의 가치가 얼마나 귀하고 큰 것인가를 알게 하여 본연의 인간을 그리워할 수 있게 된 것이다.

복귀의 고개에서 나 자신이 처해 있는 위치를 재차 살피고 이 한 해의 남은 길을 힘차게 달려가도록 하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