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72 to 17-84: 참다운 자녀가 되려면

참다운 자녀가 되려면
1966.11.12 (토), 한국 전본부교회

17-72
참다운 자녀가 되려면
세상에는 많은 날들이 있습니다. 오늘이 지나면 내일이 옵니다. 이렇게 무수한 날들이 있지만 오늘은 우리가 특별히 자녀의 날을 기념하기 위해서 모였습니다.

17-72
인간을 직접 주관하고 싶어하시는 하나님
하나님께서 천지 만물을 창조해 놓으시고 기쁨을 누리고자 하셨던 것은 두말할 필요가 없습니다. 또한 아담과 해와를 지어 놓으시고, 그들이 자라서 당신이 소원하신 기준 위에 섰을 때 그들을 부부로서 친히 축복하고자 하셨습니다. 그래서 이들을 중심한 가정을 세우고 그 가정을 통하여 종족, 민족, 국가, 세계를 세우고자 하셨습니다.

만일 아담 해와가 타락하지 않고 축복의 뜻을 이루었더라면, 그때는 아담 해와의 목적을 이루는 때인 동시에 하나님의 창조목적이 달성되는 때인 것입니다. 그래서 그때부터 새로운 세계의 생활이 시작될 것이었는데, 아담 해와가 그 뜻을 알지 못하여 하나님이 원하시는 자리에 서지 못한 연고로 새로운 세계의 생활은 시작되지 못했습니다. 즉 하나님의 창조목적과 아담 해와의 목적이 이루어지지 못하게 되었던 것입니다. 그리하여 타락한 가정으로부터 타락한 종족, 민족, 국가, 세계를 형성해 나왔습니다.

하나님은 본연의 그 뜻을 종결짓지 않으면 안 될 입장에 계시기 때문에, 즉 아담 해와로 말미암아 잃어버린 본연의 그 목적을 다시 찾으시지 않으면 안 될 입장에 계시기 때문에 구원섭리를 해 나오셨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구원섭리를 해 오신 터전은 사망권이요, 악의 주관권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직접 주관하실 수 있는 터전을 상실했던 것입니다.

하나님이 사랑으로 지으신 이 천지 만물의 사랑의 주인으로 아담 해와를 세워 놓으셨기에 아담 해와와 만물이 일체가 되면, 그 터전 위에서 하나님은 직접 주관하실 수 있었던 것입니다. 그러나 만물의 중심인 인간이 하나님의 사랑과 일체가 되지 못하고 타락하여 사탄과 일체가 되었기 때문에 하나님이 직접 주관하실 수 있는 터전이 사탄세계로 옮겨졌던 것입니다.

사탄세계의 비원리적인 사랑의 인연을 통하여 이루어진 이 세계는 하나님과의 관계가 끊어진 세계이기 때문에 하나님은 창조원리에 의해 이 세계를 수습해 나오시지 않으면 안 되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오랜 역사를 두고 섭리하심에 있어 직접적으로 사랑할 수 있는 자녀를 찾고 싶으신 것이 소망이었으나 직접적으로 사랑할 수 있는 자녀들을 찾지 못하셨습니다. 다만 간접적으로 대할 수 있는 사람들이 있었으니 바로 왔다 간 역대의 선조들이었습니다.

하나님을 직접 대할 수 있는 입장에 서지 못하고 사망권내에 머물러 있는 인간, 하나님과는 먼 거리에 있는 인간을 구원하기 위하여 하나님께서 간접적인 역사과정을 통하여 우리의 선조들을 세워 나왔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런 대표적인 인물이 노아, 아브라함, 모세, 세례 요한 등이었습니다. 이렇게 해서 하나님이 직접 주관하실 수 있는 한 때를 맞이할수 있도록 섭리를 전진시켜 나오셨다는 사실을 알아야 하겠습니다.

17-73
하나님의 복귀섭리와 지금까지의 한(恨)
인간이 타락했으나 하나님을 저버릴 수 없기에 종의 종의 자리까지 내려가야 했습니다. 그러면 ‘종의 종’이란 무엇을 말하느냐? 그것은 주인이 없다는 것을 말합니다. 타락한 인간은 ‘종의 종’의 자리에서부터 하나님께 충성해야 됩니다. 사탄은 천사장이었으며 하나님의 종이었습니다. 그 종 앞에 끌려갔던 인간이기에 인간이 하나님 앞으로 돌아오기 위해서는 ‘종의 종’의 입장에서 하나님 앞에 충성을 다했다는 기준을 세우지 않으면 안 되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은 우리를 ‘종의 종’의 자리에서부터 이끌어 나오셨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우리를 ‘종의 종’의 자리에 세우셨다 하더라도 자기의 생명과 재산을 전부 희생시키고도 감사하면서 갈 수 있는 그러한 충절의 도리를 세워야만 ‘종의 종’이라는 인연을 세울 수가 있습니다. 이렇게 해서 ‘종의 종’의 자리에서 ‘종’의 자리로 올라가고 다시 종의 자리에서 양자의 자리까지 올라왔다는 사실을 우리는 알고 있습니다.

‘이스라엘’이라는 것은 종의 기준을 넘어서 양자의 기준을 세우기 위하여 세워졌던 것입니다. 그리고 2천년의 역사를 거쳐 보내 주신 메시아를 모심으로 인해 메시아에게 접붙임을 받고 양자의 인연을 넘어 비로소 하나님 앞에 설 수 있는 직계 자녀의 자리까지 올라가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셨다가 십자가에 돌아가심으로 인하여 기독 교가 양자격인 이스라엘을 대신하여 투쟁의 역사를 엮어 나오게 된 것입니다.

그러면 투쟁역사를 거쳐온 기독교는 어떠한 입장에 서 있었느냐? 양자의 입장에 서 있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직접 주관을 받을 수가 없었습니다. 기독교가 만일 양자의 인연을 거쳐 직계 자녀의 입장에 들어갔더라면, 심정의 법도를 따라서 하나님은 직접 기독교를 주관했을 것입니다. 그랬더라면 예수님 이후 기독교는 수많은 무리가 희생당하지 않고도 개척자의 노정을 거쳤을 것입니다. 그래서 전세계는 기독교권내로 흡수되어 완전한 승리를 결정지을 수 있는 터전이 되었을 것인데 그렇게 되지 못한 것이 지금까지 하나님의 한이었습니다.

하나님은 뜻을 다 이루지 못하시고 지상에 양자의 인연만을 남겨 놓고 예수님을 데려가셨기 때문에 그를 다시 이 땅에 보내신다는 약속을 해주셨고, 기독교를 중심으로 직계의 인연을 찾을 수 있는 터전을 개척하기 위해 2천년 동안이나 섭리해 나오셨다는 것을 우리는 알고 있습니다.

그러면 오늘날 전세계에 널려 있는 기독교인들은 무엇을 해야 하느냐? 하나님께서 사랑하시는 참아들에게 직접적으로 접붙임 받기를 원해야 합니다. 기독교인들은 이것을 원하지 않으면 안 될 입장에 놓여 있습니다.

17-75
참부모로 오시는 메시아
그러면 역사적인 종말시대에 주님은 어떤 자격을 갖고 오시느냐? 부모의 자격을 갖고 오십니다. 그러나 예수님이 이 땅 위에 오셔서 부모의 자리에 나가지 못하셨기 때문에, 즉 영광 가운데서 하나님을 모시고 만민을 대표하여 하나님을 위로하는 생활적인 터전을 갖지 못하셨기 때문에 메시아는 다시 오시되 영광의 주로 오실 수 없는 것입니다. 그러기에 다시 오시는 메시아는 예수님이 이 땅에 오셔서 다 이루지 못한 뜻을 계승하여 실체를 쓰고 하나님을 위안해 드릴 수 있는 효성의 도리를 먼저 하고 나서 선택함을 받고 사탄까지 굴복시켜 하나님 앞에 영광 돌릴 수 있는 터전을 세워 놓기 전에는, 참부모의 자격을 갖출 수 없는 것입니다. 이것이 지금까지 하나님이 섭리해 오신 복귀섭리의 개관인 것입니다.

자녀의 날이 나오기 전에 부모의 날이 나와야 합니다. 오늘날 살고 있는 수많은 사람들은 부모를 가지고 있지만 천지가 공인할 수 있는 부모는 갖지 못했습니다. 하늘이 기쁘게 맞이할 수 있는 부모의 날이 없었고, 땅이 최고의 기쁜 날로 맞이할 수 있는 부모의 날을 갖지 못했습니다. 만일 이런 부모의 날을 가졌다면, 그날은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날이요, 만민이 즐거워할 수 있는 날이요, 만우주가 환호하는 날인 것입니다.

그날을 중심삼고 하나님의 사랑이 심어져야 하고, 하나님께서 그의 사랑하는 아들과 일체가 되시고, 만물과 일체가 되는 심정이 거기서 닦여져야 할 것입니다. 그런데 인간의 타락으로 인하여 이 천지간에 아직까지 그런 날이 나타나지 못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은 수고의 노정을 통해서 참부모의 날을 복귀해 나오고 있는 것입니다. 그 배후에는 6천년 역사의 고빗길이 잠겨 있고, 하나님의 슬픈 심정이 깃들어 있고, 역사적인 한이 서려 있는 것입니다. 이것들을 청산하기 전에는 부모의 날은 도저히 올 수 없습니다. 이것을 청산하는 탕감복귀역사가 있어야 하기 때문에 수많은 선지선열들이 피의 대가를 치루어 나온 것입니다.

가정을 중심삼은 심정의 법도는 부모로부터 자녀에게로 흐르는 것입니다. 그러나 심어져야 할 이 심정이 심어지지 않았기 때문에, 이것을 다시 심으려는 것이 다름 아닌 복귀역사인 것입니다. 여기에서 남성의 대표자가 메시아요, 여성의 대표자가 성신입니다.

태초에 신랑 신부가 천리원칙에 엇갈렸기 때문에 그것을 정리하여 본 궤도에 올려놓아야 합니다. 그래야 할 뜻이 엄연히 남아져 있기에 하나님은 구원섭리를 해 오신 것입니다.

아무리 국가가 크고 민족이 크다 하더라도 섭리적인 이 기준이 없으면 떠돌이별과 마찬가지입니다. 이 우주의 역사가 아무리 장구해도 중심적인 전통의 기준이 세워지지 못했기 때문에 끊임없이 역사는 변천돼 나왔습니다. 즉 전통의 인연을 존중시할 수 있는 역사가 아니었습니다.

인간이 타락함으로 말미암아 하나님께서는 이들을 분산시킨 다음 특별한 섭리의 뜻을 펴서 정성을 모두어 하나님 앞에 충성하는 무리들을 모으셨던 것입니다. 그리하여 새로운 가정 종족 민족을 편성하셨는데, 이 수많은 민족 가운데 대표적인 책임을 짊어지고 나섰던 민족이 이스라엘 민족이었습니다. 그래서 이스라엘 민족이 세계적인 주류 민족이 되었던 것입니다.

17-76
이스라엘 민족에 대한 하나님의 뜻과 그들의 불신
그러면 그 주류의 역사의 골수를 찾아가 보면 무엇이 있어야 하느냐? 역사는 인류의 시조인 아담 해와의 기준을 중심삼고 발전해 나왔어야 했는데 그렇지 못했으니 이것이 재현될 수 있는 기준, 이념을 중심삼은 어떠한 기준이 세워져 있어야 됩니다. 그 기준은 기독교가 바라는 소망의 기준이 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즉 그것은 메시아 사상이요, 신자들의 입장에서 보면 신부 사상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면 기독교의 총결실은 무엇이냐? 기독교 국가도 아니요 기독교 세계도 아닌 최고의 신앙세계입니다. 나무는 반드시 줄기가 있어야 됩니다. 아무리 사방으로 퍼진 옆가지가 많다 하더라도 종대에서 퍼져 나갑니다. 아무리 옆가지가 길다 하더라도 종대를 앞설 수는 없는 것입니다. 이와 마찬가지로 전체 인류를 하나의 나무에 비유한다면 개개의 민족은 잎사귀요, 이스라엘 민족은 줄기라고 볼 수 있어서 줄기가 왕성하면 정상적인 나무가 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은 이스라엘을 세워서 민족을 형성하고 세계를 형성하게 하시려고 했습니다. 즉 온전한 종대의 자격을 갖추어 악한 세계를 하나님의 사랑에 접붙이게 하셔야 합니다. 하나님은 그렇게 되어 새로운 역사가 이루어지게 하려 하셨던 것입니다.

한 목적을 중심삼고 하나님은 6천년 동안 섭리해 나오셨는데, 그 섭리의 종반이 지금 이 시대입니다. 참부모의 날이 바로 6천년 전에 시작하여 정상적으로 민족을 형성하고, 국가를 형성하고, 세계를 형성했으면 오늘날 이 지구성은 하나님의 주관권내로 들어갔을 것입니다. 그런데 그렇게 되지 못한 이것이 문제입니다. 많은 민족 가운데서 중심되는 한 민족이 나오려면 그 민족은 다른 수많은 민족들과 부딪치더라도 그러한 자리에서도 하나님 앞에 충성하지 않으면 안 되는 것입니다.

이스라엘 나라를 위한 사상도 철저해야 하는 동시에 세계를 위한 사상도 철저해야 됩니다. 그 사상을 기반으로 하여 아무리 어려운 환경에 부딪치더라도, 역사적인 원수의 적진 가운데 들어가더라도 새 이스라엘을 그리워하는 마음은 변치 않고 남아져야 합니다. 이런 막중한 사명을 가졌음에도 불구하고 이스라엘 민족이 그러한 전통을 이어 나오지 못했기 때문에 이스라엘은 흘러가 버리고, 제2이스라엘인 기독교가 그 사명을 계승해 나왔던 것입니다.

그러면 메시아 사상은 어떤 사상이냐? 세계를 위한 사상입니다. 세계를 통일시킬 수 있고 가정을 통일시킬 수 있는 중심은 참부모입니다.

그러면 기독교의 열매는 무엇으로 나타나느냐? 기독교는 수많은 역경의 노정을 거치며 신랑 신부의 기준을 향하여 나오고 있습니다.

이 세계가 찬란한 문화를 이루지 못한 암흑의 세계요, 혼돈의 세계요, 황폐한 세계라 할지라도 참부모와 인연만 있다면 이 세계는 평화의 왕국인 것입니다. 그러기에 유사 이래 지금까지 수많은 민족은 그분을 표준해서 사상적인 집중과 정신적인 집중과 생활적인 집중을 해 나왔습니다. 하나님은 외적으로는 하나의 세계를 지향하는 입장으로 끌고 나오셨고, 내적으로는 종교를 중심삼고 한 주인에 연결시키는 역사를 이끌어 나오셨습니다.

그러면 그 부모가 올 때까지는 어떠한 역경을 거쳐야 하느냐? 그분이 영광 가운데 구름을 타고 오셔서 호령을 하시고, 천지를 자기 마음대로 한다고 생각하면 그것은 잘못된 생각입니다. 천리 원칙을 두고 볼 때 입은 상처가 있으면 그것을 벗어야 됩니다.

17-78
통일은 어떻게 이루어지느냐
그러면 그 상처를 누가 벗겨 줄 것인가? 그것은 인간을 대표해서 참부모로 오시는 분이 벗겨 주어야 합니다. 자녀들이 보자기를 쓴 자리에 있으니 그것을 벗기지 않고는 해방이라는 명사는 있을 수가 없는 것입니다. 하늘과 땅이 통일되지 않고서는, 즉 영적인 세계와 지상 세계가 통일되지 않고는 완전한 통일을 이룰 수가 없다고 봅니다. 아무리 위대한 인물이 나와서 세계를 하나의 사상으로 통일시키려고 해도, 천륜의 법도가 남아 있고 하나님이 엄연히 존재하는 한 그것은 하나의 망상에 지나지 않는 것입니다.

오늘날 통일이 되지 못하는 원인이 어디 있느냐? 모든 것이 막혀 있기 때문입니다. 이것을 무너뜨리기 전에는 통일이 될 수가 없습니다. 심정의 터전으로부터 마음의 터전, 생활적인 터전, 존재하는 모든 세계에 가로막혀 있고 간격이 되어 있는 것을 청산지어 놓지 않으면 통일될 수가 없습니다.

청산해야 할 간격은 지상만이 아니라 천상세계에까지 무한히 연결되어 있는데 이 간격을 무엇으로 타개할 것이냐? 이것은 인간에게 책임이 있으니 인간이 해결해야 됩니다. 그러므로 주님이 이 땅 위에 오시기 위해서는 막힌 영계와 무한한 투쟁을 해야 됩니다. 오늘날 지상에 통일적인 세계관이 세워져 나가고 있는 것도 사실은 영계에서 통일적인 역사가 벌어지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런고로 영계의 역사가 지상에 반영되어 실체적인 현실로 전개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면 통일은 어떻게 이루어지느냐? 지상에 참부모의 날을 세움으로써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참부모의 날은 천지간에 승리를 결정하는 날이요, 하나님께서 소망해 오신 승리의 날로 세워질 수 있는 날이요, 인간들이 소망해 온 역사적인 결실을 맺을 수 있는 날이요, 만우주의 잃어버린 주인을 찾을 수 있는 날입니다. 이러한 부모의 날이 나오지 않고서는 자녀의 날은 상상할 수도 없습니다. 그래서 통일교회는 지상에 없는 새로운 날들을 기념하여 나왔습니다.

우리는 ‘오늘은 자녀의 날’이라고 간단히 흘러가는 말로 알지 모르지만 그 말 가운데는 역사의 고빗길에서 수고하던 선조(善祖)들의 함성과 부르짖음이 깃들어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17-79
하나님은 부모의 날을 6천년간 고대해 오셨는데
부모의 날이 세워지기를 하나님은 6천년 동안 고대해 나오셨습니다. 본래는 타락한 인간의 후손들이 고대해야 할 날인데도 불구하고, 오히려 창조주이신 하나님이 6천년 동안 그날을 고대해 오셨습니다. 저끄러진 역사가 시작된 그날부터 숱한 고빗길에서 하나님에게는 슬픈 일과 어려운 일이 많았는데, 그런 가운데서도 단 한가지 소원했던 것은 부모의 날이었습니다.

그날이 찾아짐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은 당신이 같이하실 수 있는 인류의 참된 부모를 세워 가지고 ‘너희는 인류의 참부모다’라고 명명할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그리하여 하나님께서 세워 주시는 부모의 이름을 갖고 나옴으로 말미암아 부모의 축복의 기준이 세워지는 것입니다. 여기에서 참다운 자녀가 세워짐으로 말미암아 지상에서 자녀의 날을 맞이할 수 있는 것입니다. 이런 것을 생각하게 될 때에 오늘날 우리 통일교인들이 이런 엄청난 날을 그저 세상의 하나의 기념일같이 생각하고 맞이하고 있는 것은 참으로 애석한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서로 사랑하는 사람들이 자기네들 힘으로는 도저히 인연을 맺을 수 없는 입장에 있는 데 그들에게 인연을 맺을수 있는 새로운 날이 허락된다면, 그 사람들보다 더 그날을 기다리는 사람은 없을 것입니다. 이것이 인간의 상정입니다.

매일같이 뜨고 지는 태양은 언제나 마찬가지로되, 그 가운데서도 특별히 바라시는 그 한 날을 하나님은 얼마나 그리워하셨을까요? 하나님이 모든 날들을 잊어버리시고 만천하 앞에 희열이 만연한 가운데서 당신의 모습을 나타내실 수 있는 날이 바로 이날입니다.

부모가 자식을 잃어버렸을 때 다시 찾을 수 있는 길만 있다면 죽음길도 개의치 않고 달려갈 것입니다. 하나밖에 없는 자식을 잃어버렸는데, 그 자식이 자기의 생명을 주고도 바꿀 수 없는 귀한 자식이라는 것을 느끼는 부모는 그 자식을 찾기 위해서라면 산도 바다도 개의치 않을 것입니다.

이와 같이 이날은 서로 서로가 막혔던 정을 터놓고 한 길로 갈 수 있는 기쁨의 날이요, 천하가 통일의 기반을 마련할 수 있는 날이라고 생각할 때, 하나님은 오늘을 얼마나 소망하셨겠어요? 그렇기 때문에 그러한 자식들을 찾아오시는 하나님 앞에 사탄이 가만히 있을 리가 있겠습니까? 억센 화살을 퍼붓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세상의 어려운 풍파가 여기에서 감돌게 되는 것입니다.

통일교회는 이런 날을 맞이하기 위해 제일 심한 시련을 겪었던 것입니다. 슬픔의 인연을 거치지 않고는 안 되는 것이 탕감의 법칙입니다.

타락한 아담과 해와는 부끄러움을 감추기 위해 얼굴을 숙였지만, 복귀의 노정을 걸어가는 여러분은 승리의 날을 맞아 하나님 앞에 나간다 하더라도 수고하신 아버지 앞에 머리 숙이겠다고 하는 마음이 필요한 것입니다.

이러한 인연을 찾아 우리들은 모여들었습니다. 혹은 세파에 시달리고 혹은 억센 환경에 부딪히면서 찾아왔습니다. 우리들의 몸은 상처뿐입니다. 그렇지만 우리의 상처보다 더 큰 상처를 입으신 하나님이 계시다는 것을 알기 때문에, 우리는 하나님을 위로해 드려야 할 자신임을 망각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여기에 하나님의 동정이 깃드는 것이요, 그로 인해 하나님과 인연을 맺을 수 있는 것입니다.

시련의 고비를 넘고 나면 하나의 가정으로부터 시작하여 종족 편성이 있게 됩니다. 그럼 제일 힘든 때가 어느 때냐? 7년노정을 출발하는 때가 제일 힘드는 때입니다. 그때는 싸움판이 벌어지고, 일대일로 완전한 탕감을 해야 됩니다. 그 터 위에 아담과 해와가 사랑의 인연을 맺음으로 말미암아서 이 세상은 광명한 날이 오게 되는 것입니다.

17-81
참다운 자녀가 되려면
그래서 부모의 날, 자녀의 날, 만물의 날, 이렇게 3단계의 날을 세웠습니다. 인간이 타락함으로 말미암아 부모를 잃어버렸고, 자녀를 잃어버렸고, 만물을 잃어버렸습니다. 이것을 탕감하는 기준을 세우기 위해서는 부모의 날, 자녀의 날, 만물의 날을 세워야 했는데 그 중에서도 세우기에 가장 어려운 날이 자녀의 날이었습니다. 아담과 해와가 참다운 자녀가 되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참다운 자녀가 되려면 어떻게 해야 되느냐? 한 핏줄을 타고 나야 됩니다. 참다운 자녀가 되기 위해서는 부모 앞에 효도를 다해야 합니다. 효자라는 것은 어떠한 어려운 환경도 수습해야 하고, 그 환경으로부터 공인받고, 전체로부터 공인받고, 부모로부터 공인받아야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아담과 해와에게 만물을 주관하라고 하셨는데, 아담 해와는 만물을 주관할 수 있는 공인을 받아야 합니다. 그리고 소망의 중심으로서 뜻을 책임질 수 있는 자녀라는 인정을 받아야 됩니다. 그리고 부모의 심정에 일치되어야 합니다.

과거와 현재와 미래에 차이가 있어 가지고는 효자라고 할 수 없습니다. 충신이라고 할 수도 없습니다. 효자나 충신은 변질되어서는 안 됩니다. 과거를 대표하고 현재를 대표하고 미래를 대표할 수 있어야 하고, 하나님의 심정을 중심하고 시간과 공간을 초월한 자리에서 인정을 받아야 합니다.

그러면 역사를 바라볼 때 통일교회 교인들은 누구를 바라보아야 되느냐? 하나님을 바라보아야 됩니다. 그리고 ‘당신은 이러한 아버지가 아니십니까?’ 라고 할 줄 알아야 합니다. 통일교인들은 선생님을 바라보아야 될 것입니다. 그리고 ‘당신은 과거는 이랬고, 현재는 이러하고 미래는 이럴 것입니다’라고 할 수 있는 자리에 서야 하고, 하나님의 과거, 현재, 미래를 대신할 수 있고, 심정적으로 일치될 수 있는 기준을 세워 나가지 않으면 안 됩니다.

여러분들은 한 부모의 혈육으로 태어난 형제이기 때문에 생활감정이 서로 통해야 됩니다. 부모가 슬퍼하면 같이 슬퍼하고, 부모가 기뻐하면 같이 기뻐하고, 부모가 수고하면 같이 수고하지는 못하더라도, 눈물이라도 흘리고 자기가 죄인됨을 실감해야 부모 앞에 용서를 받고 부모의 울타리 안에라도 머물 수 있는 것입니다.

당신이 수고한 그 소망의 기준 앞에 나 같은 존재는 나타날 수 없다고 하는 겸손한 마음을 가져야 하는데, 그렇지 못하면 사탄의 족속이 됩니다. 우리가 수고하여 탕감할 수 있는 환경권내, 즉 6수권내에서 ‘자녀의 날’을 맞이하는 것도 마지막입니다.

내 마음을 중심삼고 나가면, 그래서 내 마음이 통할 수 있는 환경만 갖추어지면, 내적 기준은 자동적으로 이루어집니다.

하나님이 섭리하실 수 있는 터전이 우리의 목전에 점점 현실적으로 나타나고 있는 것을 보게 됩니다. 그런데 현실로 나타나는 것은 고맙지만, 그 고마운 현실 앞에 내가 어떠한 자세로 임할 것이냐 하는 것이 문제입니다. 얼굴은 수심에 잠겨 있고, 거기에다가 주름살까지 생겼고, 그 몸에는 숱한 원수의 화살자국이 있는 그 아버지께 여러분들은 자녀의 명분을 가지고 효성의 도리를 다하는 통일신도가 되어야 하겠습니다.

17-82
축복받은 가정으로서 합당한 생활을 하고 있는가
우리는 부모의 날을 맞이할 수 있었고, 자녀의 날을 맞이할 수 있었습니다. 이런 과정 속에서 축복가정이 생겨난 것입니다. 36가정, 72가정, 124가정을 선생님이 축복해 주었습니다. 축복이란 것은 그냥 흘러가는 사람들을 모아서 해준 것이 아닙니다. 그것은 천지를 대표하는 입장에 세워 놓고 해준 것입니다.

축복을 받기 위해서는 효성의 도리를 다했다는 공인을 받아야 하고, 충신 열사를 대신할 수 있는 결실적인 가치를 지녔다고 하는 자리에 서야 합니다. 또한 땅의 권세와 하늘의 권세를 하나님 앞에 돌려 드릴 수 있는 인격적인 대표자가 되어, 하늘땅 앞에 공인받을 수 있는 한 남성과 한 여성이 되어야겠습니다.

내겐 사탄이 참소할 수 있는 어떤 조건도 없다는 자신이 있어야 하고, 내가 싫다 하더라도 하나님이 축복을 해주시겠다고 할 수 있는 자리까지 나아가야 하는 것이 축복가정입니다. 그런 기준에서 축복을 해 주었는데도 불구하고, 축복받은 가정으로서 합당한 생활을 하고 있는 사람이 얼마나 되는가 의심스럽습니다.

자기 자신이 하나님 앞에 잘못함으로 말미암아 민족이 화를 입을까 염려하고 속죄의 제단을 향하여 나아가는 제사장과 같은 마음이라도 가지고 살아야 될 텐데, 그렇지 못하고 있습니다. 선생님이 옥중에 있을 때, 하나님은 원수를 가까운 친구의 경지로까지 이끌어 주셨습니다. 그걸 볼 때에 하나님은 얼마나 인간을 사랑하고 있는 가를 알 수 있습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 못 박혀 돌아가시게 될 때에 반대하는 이스라엘 민족 전체를 한칼에 쓸어버리고 싶었지만, 멀리 보이는 언덕 아래에서 눈물 짓고 있는 아낙네들이 있었기 때문에 긍휼히 여길 수 있었습니다. 지금까지 비운의 길을 걷고 있는 이스라엘 민족을 생각하면 그들이 비록 원수들이지만 그들을 위하여 복빌지 않을 수가 없습니다.

누구든지 자기에게 복을 주고 좋게 할 때는 감사할 줄 압니다. 만민이 환영할 수 있는 영광된 자리에서는 쌍수를 들어 다 환영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외로운 자리에 처해 있을 때는 환영하지 않습니다.

흘러가는 물소리가 내게 위로의 대상이 될 때 그 자연은 비로소 나와 인연을 갖게 되고, 자연을 사랑하는 마음을 갖게 될 때에 그 자연을 지으신 하나님이 나를 사랑해 주십니다. 역사는 그렇게 해서 인연이 맺어지는 것이요, 꼬인 역사의 고빗길도 거기서부터 풀리는 것이며, 여기에서 원수가 친구로 변할 수 있는 것입니다. 이런 것을 생각할 때에, 오늘 통일의 길을 찾아가는 우리는 누구나 환영할 수 있는 값싼 통일은 싫다는 것입니다.

갈보리 산상에서 예수님께 절박한 비운이 깃드는 마지막 순간 오른편 강도의 한마디의 말은 천하를 주고도 바꿀 수 없는 위로의 말이었습니다. 그 한마디에 예수님을 의지하고 싶고, 믿고 싶고, 예수님을 세워 드리고 싶은 마음이 깃들어 있음을 찾아볼 수 있습니다.

선생님이 여러분을 전도 내보내고 순회했던 1960년이 아주 인상에 남습니다. 요즈음은 순회를 해보면 수많은 사람들이 선생님이 오신다고 행로에서 줄지어 인사합니다. 하지만 그것보다 찬바람 부는 곳에서 외롭게 서 있던 초초한 그 때의 모습, 사망세계의 보초인 양, 혹은 생명을 다짐하는 하늘의 깃발인 양, 정성을 다하여 머리 숙여 기도하는 그 마음에 하나님이 천지의 인연을 지어 주시는 것입니다.

이러한 것을 보면 어려운 자리에 있을 때 하나님과 심정적인 인연이 맺어진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엘리야도 사람들에게 몰리고 쫓기자 ‘나만 남았나이다’ 하고 호소했을 때 그 심정 앞에 하나님이 동참해 주셨던 것입니다. 이렇게 하나님이 함께 해주셨기에 엘리야에게 승리의 결정권이 새로이 주어졌다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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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모의 뜻은 천주까지 위하자는 것
뜻길을 가다가 환경에 시달리고 생활에 쪼들려서 하나님을 배반하고 자기의 갈 길로 돌아서 버리는 사람은 지나가는 나그네밖에 되지 않습니다. 아무리 검은 구름이 무서운 폭풍우를 실어다 준다 해도 최후까지 남아지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선생님이 걸어온 길 앞에 소망의 한 초점으로 나타났다가 흘러가는 구름과 같았던 무리가 많았던 것을 생각할 때에, 차라리 그들이 나타나지 않았더라면 하는 마음이 들었습니다. 더욱이 내가 마음을 다하고 정성을 다하여 하나님 앞에 호소했는데도 불구하고 그 사람들이 돌아섰을 때는, 그슬픈 다음이 뼛골에 박혀 빼낼 수가 없었습니다. 그러한 사람이 미워서가 아니라 민족 앞에 돌아가는 피해가 크기 때문입니다. 그것을 생각할 때에 민족을 사랑하는 마음에 비례하여 그들에 대한 분함이 일어나기도 합니다. 그렇지만 하늘의 명령이 없는 한 참고 나가는 것이 옳다고 생각합니다.

하나님은 한 가정만을 찾으려 하시지 않고 그 가정을 제물삼아 국가를 찾으려 하고 국가를 제물삼아 세계를 찾으려 하고 있습니다. 내가 대한민국의 백성이지만, 대한민국을 사랑하지 못할지라도 세계를 사랑하고 하늘 땅을 사랑하면, 대한민국에서 배척을 받더라도 세계적인 시대와 천주적인 시대가 오면 환영받습니다.

예수님은 이스라엘 민족을 잃어버리고 이스라엘 나라를 잃어버렸지만, 하나님이 소망하는 세계와 하나님이 소망하는 천국을 위해서 살았습니다. 자기 목숨이 다할 때까지 살았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이스라엘은 망했지만, 효의 세계가 그분을 맞이하고 충의 세계가 그분을 맞이할 것이기 때문에, 끝날에는 그분의 이름으로 말미암아 세계가 움직여 나가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교회 내에 있는 것은 깨진 유리라 할지라도 자기 가정의 금은 보화보다 더 귀하게 여길 줄 알아야 합니다. 이러한 사람이 충효의 길을 갈 수 있는 사람이요. 천국을 갈 수 있는 사람입니다. 우리가 이 뜻을 세워 나가는 데 있어서는 공적인 물건에 정성을 다 들여야 합니다.

여러분들은 심정을 가지고 형제를 사랑하고 만물을 사랑하여, 참부모가 원하는 뜻대로 움직일 수 있는 자신들이 되어야 합니다. 그러면 그 부모의 뜻은 무엇이냐? 한국만을 위하자는 것이 아니고, 세계만을 위하자는 것도 아니요, 천주까지 위하자는 것입니다. 즉 참부모의 인연으로 남자, 여자를 대신하고, 높고 낮음을 대신해야 합니다. 그렇게 되면 주고 받는 수수작용의 원칙에 입각해 존재하는 모든 것이 부모와 인연을 맺는 것입니다. 그 참부모는 하나님으로부터 나왔습니다. 그러므로 귀한 마음을 가지고 하나님 앞에 귀한 결과를 보답해 드려야 합니다. 그래서 그것이 개인 가정 사회 국가 세계로 확대되어 나가고 전체 앞에 공동의 가치로 나타날 때 비로소 하나님의 아들딸이라 할 수 있다는 것을 여러분은 알아야 됩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