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210 to 17-212: 성탄일을 맞이할 수 있는 자격

성탄일을 맞이할 수 있는 자격
1966.12.25 (일), 한국 전본부교회

17-210
성탄일을 맞이할 수 있는 자격
누가복음 2:1

[말씀 요지]

우리 교회에서는 성탄일을 1월 3일로 지켜왔으나, 금년에는 세속에 따라 이날 성탄을 축하하려 한다.

예수님이 탄생한 그날은 하나님에게 있어서는 둘도 없는 날이다. 이날이 있음으로 해서 비로소 지상에 소망의 길이 열려진 것이다. 이날은 하나님이 역사를 두고 예정해 오신 날이며 이날을 위해 하나님은 모든 준비를 해 나오신 것이다.

17-210
환영 받지 못한 성탄일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민족에게 소망을 걸었다. 그러나 그들의 심정적인 기준은 하나님의 소망과 합일되지 못했었다. 예수님이 말구유에 눕혀 지셨다는 것은 하나님의 설움인 것이다. 만민의 환영 속에 있어야 할 이날이 이스라엘 민족의 불신으로 말미암아 그렇게 되지 않았으니 이것이 하나님의 설움인 것이다.

개인으로부터 이스라엘 나라에 이르기까지 전부가 예수님을 맞을 준비를 안했던 것이다. 어느누가 메시아를 위해 방 한 칸을 준비했던가. 마리아와 요셉 역시 하나님이 바라시는 기준을 몰랐던 것이다. 예수님을 말구유에 뉘인 사실만 봐도 요셉 가정이 책임 못 한 것을 알 수 있다.

마리아는 예수님을 잉태하여 낳기까지의 10개월간 누구에게도 말할 수 없는 고민을 했다. 마리아 자신도 외적으로 준비한 입장에 서지 못했던 것이 유감이었다.

요셉에게는 예수님이 의붓자식이었기 때문에 시간이 흘러서 예수님이 성장하면 할수록 요셉은 다른 마음을 갖게 되었다. 처음에는 천사의 말 때문에 말 못 하는 입장에 있었지만 자기의 자식이 출생한 후에는 더욱 예수님을 대해 그러했었다. 또한 동생들까지 ‘형님이 나타나기를 바란다면 어찌하여 유대로 가지 않느냐’며 예수님을 조롱했던 것이다. 그리하여 예수님은 3년 공생애 기간에 가정에서부터 사회에 이르기까지 발붙일 곳이 없었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하나님과 이스라엘 민족과 온 인류와 후대 역사를 책임진 예수님의 생애가 얼마나 괴로왔던가를 알아야 한다. 그런데 지금까지 인간들은 이 날을 예수님의 한을 풀어 드리기 위한 날로 맞지 못했다.

하나님과 이스라엘 민족이, 그리고 예수님 자신도 기뻐해야 할 것이 예수님의 탄생일이었다. 예수님의 탄생일은 이스라엘 민족과 하나님에게 기쁨의 날이 되었어야 했다. 그런데 과연 그날이 그와 같은 기쁨의 날이 되었던가?

17-211
복중에서부터 모심을 받았어야 할 예수님
하나님도 예수님도 이날을 잃어버리셨다. 그래서 이날을 다시 찾기 위해 하나님께서 제2이스라엘을 세워 수고해 오셨으니 그것이 지금까지의 2천년 섭리역사요, 찾는 그날이 바로 재림의 날이다.

예수님의 탄생일이 하나님에게는 기쁨의 날이 되지 못했기 때문에 이 뜻을 모르고 크리스마스를 맞이하는 것은 황공한 일이다. 예수님이 만일 로마의 왕자로 태어났으면 얼마만한 영광 가운데서 탄생하셨을 것인가? 하물며 하나님의 독생자로 오셨음에랴. 그런데도 불구하고 이스라엘 민족 중에는 그를 맞는 사람은 한 사람도 없었다. 오죽 딱했으면 하나님께서 동방박사를 보내서 예수님을 증거케 했었겠는가! 이방인이 찾아와 예수님께 예물을 바쳤다고 하는 것은 이스라엘 민족의 부끄러움이요, 그들에 대한 모독이었다. 왜 이스라엘에는 동방박사만한 사람이 없었던가! 예수님은 4천년의 전역사를 총탕감하기 위해 오셨다. 그런 그가 말구유에 뉘이셨다니…….

그 당시 이스라엘에는 메시아를 복중에서부터 모실 수 있는 사람이 하나도 없었다. 만일 그런 사람이 한 사람이라도 있었다면 그가 아무리 병신이라도 하나님이 사랑하지 않을 수 없었을 것이다. 그리고 기독교도 이방인의 종교가 되지 않았을 것이며, 하나님의 섭리도 로마로 옮겨지지 않았으리라는 것은 당연한 것이다.

안나는 복중에 있는 메시아를 알았기 때문에 안나는 마리아의 종이 되어 복중에 있는 메시아를 섬겨야 했었다. 그러나 그녀는 증거는 했으나 모시지는 못했다. 동방박사와 목자들도 증거만 하고는 모두 가 버린 것이다.

예수님은 목공이 되어서는 안 되는 것이다. 예수님은 이스라엘을 통해서 세계를 바라보고 계셨다. 그런데, 가정에서부터 환영받지 못했기에 가정을 떠나신 것이다. 그래서 예수님은 찾아온 어머니와 동생들을 보고 ‘누가 내 모친이며 내 동생들이냐’고 하셨던 것이다.

선생님은 하나님과 예수님의 한을 풀기 위해 지금까지 모든 것을 참아 왔다. 예수님을 불신했기 때문에 당시의 교회 책임자들은 지옥 밑으로 가야 했다. 그리고 이스라엘 민족은 재림의 그날까지 지상에서 지옥생활을 해야 했다. 오늘날 그들이 독립한 것은 용서받을 수 있는 때가 되었기 때문이다. 용서받는 과정에서 사탄편 상징자인 히틀러는 6백만 명의 이스라엘 사람을 학살했던 것이다.

이스라엘 민족은 메시아가 복중에 있을 때부터 메시아를 모실 준비를 했다가 탄생하면 모셔야 한다. 만삭이 된 마리아가 외롭게 베들레헴에 갔었다는 사실은 무엇을 말하는가? 그녀를 옹위하고 모시면서 다닌 사람이 베들레헴에 호적하러 왔던 사람보다 많았다면 동방박사가 예수님을 맞을수 있었을 것인가?

17-212
반드시 풀어야 할 예수님의 한
역사적인 기원을 밝히지 못하고는 시대적인 문제를 해결하지 못한다. 예수님을 쌌던 강보는 누가 만든 것이었을까? 누가 어떤 곳에 아기 예수를 눕히고 그의 몸을 씻었을 것인가? 이러한 역사적인 내용을 알아 그 한을 탕감복귀하는 우리들이 되지 않으면 안 된다.

나실 때 하나님께 설움을 남기신 예수, 나신 후에 하나님께 한을 남기신 예수, 그러나 천적인 사명을 갖고 오신 예수님은 아무에게도 이 사정을 말하지 못하셨다. 그래서 예수님은 자연을 바라보고 호소하며 사셨다.

예수님을 위로할 수 있는 사람이 단 한 사람이라도 있었다면 예수님은 외롭지 않았을 것이다. 그는 먹고 싶은 것도 많았다. 이러한 말씀은 성경에 없다. 없는 것이 복이다. 예수님을 믿는 자는 잘 먹지도, 잘 자지도 못해야 한다. 예수님이 그러하셨기 때문이다. 선생님은 이 말을 하려면 목이 메인다.

그러나 예수님은 이스라엘을 잊지 못하셨다. 이스라엘을 창건한 후에는 개인의 구원이 있어야 했는데, 오직 오른편 강도만이 그를 알아보았다. 그래서 이것이 하나님이 땅을 기억할 수 있는 조건이 되었으므로 그로 인하여 이스라엘 구원의 명맥이 끊기지 않았다.

난데없는 강도가 그러한 뜻하지 않은 사명을 했던 것과 같이 끝날에도 난데없는 민족이 나타나 사명을 해야 한다. 그리고 그 강토의 심정의 터전 위에 제자들도 다시 예수님과 인연이 맺어지게 되었던 것이다.

예수님의 가슴속에 맺힌 한을 풀지 못하고는 그의 뜻을 이룰 수 없는 것이다. 통일식구들이 고난의 길을 걸어야 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예수님의 죽음의 길을 대신 갈 수 있는 사람이 나와야 한다. 지금까지는 탕감기간이었으나 남은 날은 탕감기간이 아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