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332 to 16-337: 하나님의 심정과 우리의 책임

하나님의 심정과 우리의 책임
1966.09.18 (일), 한국 한강 백사장

16-332
하나님의 심정과 우리의 책임
마가복음 15:34

[말씀 요지]

이 땅은 하나님이 계획한 세상이라고 할 수 없습니다. 어느 것을 보더라도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진 세계라고는 볼 수 없습니다.

세계가 이렇게 되기까지 숱한 슬픔의 역사가 벌어져 왔습니다. 개인의 슬픔이나 가정의 슬픔, 어떠한 슬픔이라 할지라도 그것은 인간 끼리끼리 빚어지는 슬픔이 아니라 하나님과 사탄의 싸움으로 인하여 빚어진 슬픔임을 알아야 합니다.

16-332
더 큰 것을 구하기 위하여 자식에게 채찍을 드시는 하나님
인간의 비참한 일이 하나님의 심정에 비추어졌기 때문에 하나님은 더욱 슬프고 비참하였습니다. 하나님은 어떤 개인보다 더 비참하였고, 어떤 민족보다도, 어떤 국가보다도, 어떤 세계보다도 더 비참하였습니다. 아무리 비참한 입장에 있는 자라 할지라도 하나님보다 더 비참한 자는 없었습니다. 사랑하는 자식이 죽어가는 모습을 지켜 보는 어머니보다 더 애달픈 심정으로 하나님은 인간을 보아 오셨습니다.

오늘날의 이 비참하고 악한 세계를 청산하고, 선의 세계를 세우지 않으면 안 되는 것이 하나님의 사정입니다. 타락한 후손으로 태어난 인류는 탕감조건을 세워서 복귀의 길을 찾지 않으면 안 됩니다.

우리 선조들은 새로운 진리가 나올 때마다 그것을 반대하고 핍박하는 자들로부터 고통을 받아 왔습니다.

역사과정에서 하나님의 보내심을 받은 사람들에게는 타락한 인간들을 본연의 세계로 탕감복귀해야 되는 사명이 부여되어 있었기 때문에 하나님은 그들보다도 더 비참한 환경으로 그들을 몰아야만 했다는 것입니다. 이런 사실을 여러분들은 알아야 합니다.

하나님은 개인을 쳐서 가정을 구했습니다. 더 큰 것을 구하기 위해서 반대하는 자를 치지 않고 대신 세움받은 그 아들딸들을 치셨던 것입니다. 여러분은 더 큰 것을 구하기 위해서 자식에게 채찍을 든 하나님의 심정은 말할 수 없이 애달프셨다는 것을 기억해야 하겠습니다.

하나님을 위해 충성을 다해야 할 이스라엘 민족이 가는 길에는 말할 수 없는 고난이 동반되었고, 또 그들은 다른 민족들을 대신하여 맞아 왔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은 그 비참한 민족에게 메시아를 보내실 것을 약속한 것입니다.

예수님은 온 역사와 천주의 소망이었으므로 4천년 역사나 그 어떤 것을 주고도 바꿀 수 없는 존재였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비참한 자리, 즉 마굿간에서 태어났고, 정체도 드러내지 못하고 피난 가는 입장에 섰던 것입니다. 더우기 예수를 위하여 충성을 다 해야 할 대제사장과 교법사들은 충성하지 않았습니다. 결국 이스라엘 민족은 인류역사와 하나님의 창조목적을 대신하였던 예수님을 십자가의 길로 몰아냈던 것입니다.

하나님은 예수님의 사정을 누구보다 잘 알았지만 원리를 떠나서 개인의 사정을 보아줄 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예수님이 운명하기 직전까지도 그를 직접 보호하시지 못하고 버리는 입장에 서실 수밖에 없었습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상에서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마 27 :46)”하고 부르짖었으나 하나님이 무심한 것 같은 입장을 취하셨을 때, 예수님은 하나님을 배반하려고만 들었다면 백 퍼센트 배반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이 비참한 사정을 인정으로써 대할 수 없었던 하나님이었으니, 예수님이 비참했던 것보다 하나님은 더 비참했다는 사실을 여러분은 알아야 하겠습니다.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 할 때에 ‘오, 내 아들아 ? 하는 응답만 있었더라도 예수님은 기쁘게 죽어갈 수 있었을 것입니다.

16-334
먼저 맞는 무리
하나님께서 받으시든 안 받으시든 모든 것을 바치겠다고 나섰던 예수님의 충성은 역사의 새로운 전환점을 가져 왔던 것입니다. 이와 같은 예수님의 충성이 사탄세계를 한 바퀴 돌려 놓을 수 있었던 것입니다.

하나님은 사랑의 주체시기 때문에 타락한 후손이라 할지라도 버리지 않으시고 그들을 통찰하셨습니다.

하나님은 예수님을 희생시켜서라도 사탄의 수중에서 유린당하고 있는 인류를 용서 할 수 있는 길, 즉 구원의 길을 트려고 하셨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예수님을 버리시면서까지 타락한 인류를 구원하고자 하신 것입니다.

그런 연고로 예수님의 죽음으로 4천년 역사의 희생을 탕감할 수 있었습니다. 예수님이 부활했다는 것은 그 이후의 인간들이 부활할 수 있다는 사실을 의미하는 것이었습니다. 그 후 2천년의 역사가 흐른 지금, 세계는 기독교를 중심삼고 하나로 뭉쳐 나가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심판을 하신 것입니다. 그러나 먼저 원수를 칠 것이냐, 먼저 사랑하는 자식을 칠 것이냐를 알아야 합니다.

세계가 심판당하기 전에 먼저 세계를 대표하여 맞을 수 있는 가정이 있어야 하고, 종족 민족 국가가 있어야 합니다.

심판이란 원수를 치는 것을 말합니다. 그런데 심판을 하기 위해서는 원수의 세계를 쳐서 넘어뜨리기 전에 먼저 하늘을 대표하여 맞는 무리가 나와야 합니다. 이 무리, 이 국가는 역사적인 인연과 접하여서 나오기 때문에 비참한 역사를 엮어 나오지 않을 수 없습니다.

오늘날의 통일교회는 세계를 심판하기 위해서 나타난 것이 아니라 세계를 심판하기 전에 먼저 맞기 위해서 나타난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개인적으로 맞고, 가정에서 몰리고, 친척에게 몰리는 억울한 자리에서 채찍을 맞아 나왔던 것입니다. 그러나 그러한 자리에 처할수록 땅을 깊이 파고 굳건하게 뿌리를 박아야 합니다. 그런데 그러한 자리에서 지친 사람이 많았습니다. 가야 할 길이 멀고 험하다고 주저한 사람이 많았습니다. 그러나 아버지는 지치지 않았다는 것을 알아야 하겠습니다.

우리는 하나님 앞에 충성을 맹세했고 하나님은 우리를 사랑해 오셨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천지가 변할지라도 하나님과의 인연만은 끊을 수 없다고 할 수 있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골고다 산정에서 쓰러져 ‘아바 아버지시여,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 하는 상황하에서도 그 무엇보다도 하나님을 붙드는 마음이 더 커야 한다는 것입니다.

죽음을 무릅쓰고 충성하는 무리를 통하여 새로운 부활의 승리는 이루어집니다. 우리 통일의 무리들은 이런 관점에서 다시 한번 자기 자신을 분석해 보아야 하겠습니다. 죽는 자리에서 자기를 찾아야 할 것인데도 불구하고 그 자리를 피하고자 하는 사람은 심판을 받아야 합니다.

16-335
더 큰 배가 되고자 하는 배포
여러분들은 어떠한 자리로 가기를 원합니까? 물론 최고의 자리를 원할 것입니다. 또 여러분들은 어떠한 효자 충신이 되기를 원합니까? 어느 누구나 할 수 있는 자리에서의 충신 효자는 별것 아닙니다. 예수님은 어느누구도 할 수 없는 그런 자리에서 충효를 다하였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부활시켜 줄 수 있었던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개인적으로만 부활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예수님을 가정적으로, 민족, 국가적으로 부활시켜 드려야 합니다. 그리고 앞으로는 세계적으로 부활시켜 드려야 하는 것입니다. 그래야 비로소 골고다 산정 저너머에서 부활의 역사가 벌어진다는 사실을 여러분은 잊어서는 안 되겠습니다.

역사상 이 땅에 왔다 갔던 선지 선열들이 뜻을 대해서 충성했던 것과 우리들의 수고를 비교해 볼 때, 우리들의 수고는 너무나도 적어서 뜬구름과 같습니다. 이처럼 우리들의 수고는 적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들 앞에 벌어진 환경은 너무나도 큽니다. 그러기에 수고가 있다 할진대 하나님의 수고가 제일 크다고 하면서 자신의 부끄러움을 느끼고 몸부림치는 모습이라야만 정상적인 신앙태도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우리들의 잘못으로 인하여 민족적이고 세계적인 심판과정이 남아지게 된다는 어마어마한 사실을 기억합시다.

선생님이 생각하는 통일교회와 여러분들이 생각하는 통일교회는 너무나도 현격한 차이가 있습니다. 역사적으로 찾아 나오신 하나님의 소망의 자녀들이라는 기준을 두고 볼 때 여러분들은 너무나 먼 거리에 서 있습니다. 물론 과거를 자랑하는 것도 필요합니다. 그러나 오늘날 우리는 미래를 바라보면서 살아야 합니다.

우리들이 가는 인생행로에 어찌 골고다의 길이 없겠습니까? 태풍이 불어쳐야만 큰 배도 작다는 사실을 알게 됩니다. 우리는 더 큰 배가 되고자 하는 배포를 가져야 하겠습니다.

뜻을 대하는 선생님의 마음은 조급합니다. 이것은 내 마음이 그런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마음이 그러한 것입니다. 30억의 인류 중에서 일년에 3천만이나 되는 사람들이 지옥으로 떨어져 가고 있습니다. 누가 이 죽음 앞에 항거할 자가 있습니까? 이렇게 죽어가는 자식을 바라보는 하나님의 심정은 얼마나 조급하겠나 생각해 봅시다. 이렇게 조급한 아버지의 심정을 위로해 드릴 자가 누구입니까? 예수님도 이것을 못 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자기의 못다한 한을 풀기 위해서 재림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복귀전선에 나선 용사들입니다. 그런데 지금 우리는 우리들의 깃발을 어디에다 꽂고 있습니까?

여러분들은 사나이 대장부가 품은 뜻을 이루기 전에는 관(棺)에서 곤히 잠들 수 없다는 느낌을 가져 본 일이 있습니까? 또 민족과 세계를 구하기 위해 포탄을 안고 적진에 뛰어들겠다고 하는 용사는 없습니까? 가야할 길은 너무나 멀고 벅찬데 책임을 못 하여 눈물지으면서 살아 가고 있는 자기 자신을 발견한 일이 있습니까? 일부 통일교회 식구들은 너무나도 뻔뻔스럽다는 것을 느낄 때가 있습니다. 나는 그렇지 못합니다.

십자가의 고빗길을 어떻게 탕감시켜서 넘게 하느냐 하는 것이 책임자로서 가지는 제일 심각한 고민입니다.

16-337
몸부림치며 충성하자
하나님이 이 나라를 중심하여 섭리하신다는 것을 알았으면 몸부림치며 충성해 보겠다고 나서는 무리들이 있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조금만 어려운 것을 대하면 꽁무니를 빼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역사적인 책임자들은 기쁜 자리에서부터 출발한 자가 없습니다. 모두가 다 최악의 슬픈 자리에서 출발하였습니다. 예수님은 나면서부터 몰리셨고 먹을 것이 없어서 밀이삭을 비벼 먹을 때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천도를 통할 수 있다는 원칙하에서 그랬기 때문에 천도는 그를 중심하고 드러났던 것입니다.

선생님도 이 한 대(代)에서 영광을 보기를 바라지 않습니다. 우리들의 주변에는 아직도 ‘아바 아버지여 !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 나의 가정을, 나의 종족을, 나의 민족을 어찌하여 버리셨나이까? 할 수 있는 내용이 그대로 남아 있습니다. 이러한 사정을 알고 진실로 그렇게 부르짖을 수 있는 사람이 있다면 그는 민족의 주인공이 될 수 있을 것입니다.

십자가로 나가는 길에 부활이 있는 것이 아닙니다. 십자가를 넘고 나서야 부활이 있다는 사실을 아직까지 아무도 몰랐던 것입니다.

아무리 아름다운 세계가 찾아온다 하더라도 구체적인 기준이 없이는 나와 아무런 상관이 없습니다. 이제 역사는 원리를 중심삼고 이루어지고 있으니, 우리는 믿음의 목적을 이루어야 하겠습니다.

우리들의 외모야 어떻든 간에 피와 살을 통해서 하나님이 인정하시는 아들딸이라는 자신을 가져야 되겠습니다.

우리는 7년노정을 통해서 하나님과 인연을 맺어야 하겠습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하나님으로부터 동정을 받고 사랑을 받을 수 있는 그런 자리에 서야 하겠습니다. 남아진 기간에도 일심동체가 되어 한결같이 달려가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