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11 to 16-49:식구란 어떠한 것인가

식구란 어떠한 것인가
1965.12.26 (일), 한국 전본부교회

16-11
식구란 어떠한 것인가
마태복음 26:36-46

[기 도(Ⅰ)]

아버님! 어제는 모든 백성들이 아버지의 뜻을 찬양하고 아버지의 아들이 태어난 날을 기념하기 위하여 요란한 시간들을 보낸줄 알고 있사옵니다. 그러나 그 가운데서 진정으로 아버지를 모시고 아버지 앞에 충효의 도리를 다했다고 할 수 있는 자녀들이 얼마나 되겠사옵니까? 아버지께서 찾아오셔서 진정으로 내세워 자랑하고 싶은 자녀들이 얼마나 되겠사옵니까? 이런 것을 생각하게 될 때 저희들은 아버지의 슬픔이 더하실 것을 염려하지 않을 수 없사옵니다.

이제 그 한 날을 보내고 다시 아버지 앞에 부복하고 경배드리는 새로운 날을 맞이하였사오니, 이 외로운 날이 아버지 뜻 앞에 거룩한 날이 되게하여 주시옵소서. 새로운 역사를 창조하려는 저희들에게 아버님께서 힘과 능력을 가하여 주시옵기를 간절히 바라옵고 원하옵니다.

긍휼히 여기시는 당신의 마음과 당신의 사랑이 아니었던들, 저희들은 오늘 이와 같은 모습과 이와 같은 자세로 당신 앞에 부복할 수 없었을 것임을 잘 알고 있사옵니다. 이러한 은사를 받은 저희 자신들, 당신 앞에 갖출 바를 다 갖추지 못해 더욱 민망하오나 용납하여 주시옵기를 간절히 바라옵고 원하옵니다.

흩어진 마음들을 수습하여 아버님 존전에 충성을 다 바칠 수 있는 이 시간이 되어야 되겠사옵니다. 저희들의 마음이 어디로 향하고 있으며, 저희들의 몸이 어떠한 자세로 아버님 앞에 부복하였는가를 생각할 때 저희들은 부족한 마음뿐이옵니다. 그런 마음으로 용납하여 주시기를 기도하오니 품어 주시옵고 긍휼히 여겨 주시옵소서.

이 나라의 수많은 백성들이 아버지의 뜻이 이루어지기를 고대하고 아버지께서 찾아오실 한 날을 고대하고 있사오나, 그 날과 그 뜻을 알지 못하는 수많은 백성들도 있사옵니다. 그들에게 천적인 은사를 베푸시어 그들이 갈 길을 알게 하여 주시옵고, 그들의 몸과 마음이 스스로 아버지께서 지향하시는 방향에 맞추어 나갈 수 있도록 역사하여 주시옵기를 간절히 바라옵고 원하옵니다.

아버님! 남한 각지에 널려 있는 외로운 통일의 형제들을 긍휼히 보시옵고 품으시옵소서. 최후의 싸움을 다짐해야 할 때가 저희 앞에 다가오고있는 것을 망각지 말게 하여 주시옵고, 충성을 다하고 지성을 다하게 하여 주시옵소서. 어떠한 수고와 어떠한 희생이 있더라도 저희들에게 남겨진 이 뜻을 감당해 낼 수 있는 새로운 각오와 결의를 하게 하여 주시옵기를 , 아버님, 간절히 바라옵고 원하옵니다.

이 시간 모든 것을 당신 앞에 맡겼사오니 처음부터 끝까지 주관하여 주시옵기를 간절히 부탁드리면서, 모든 말씀 주의 이름으로 기도하였사옵나이다. 아멘.

16-12
기 도(Ⅱ)
한 많은 기나긴 역사를 더듬어 오시면서 슬픔의 날들을 안고 밟아 나오지 않으면 안 되었던 당신의 그 심정을 누가 알았사옵고, 당신의 그 사정을 누가 알았사오며, 당신의 그 소망을 누가 알았사옵니까? 홀로 아시는 그 마음, 홀로 가지신 그 사정, 홀로 품으신 그 심정과 고 뜻을 알지 못하는 인간들을 대하여, 그 소망과 사정과 심정을 가르쳐 줄 수 있는 하나의 자녀를 찾아 나오시기 위하여 수고하신 아버님이 얼마나 불쌍하신 분인지를 , 저희들 이 시간 다시 한번 느끼게 허락하여주시옵소서.

그분은 남이 아니오라 저희들과 영원히 같이 살아야 할 아버지이시옵고, 그분은 수고하셔야 할 분이 아니오라 만우주를 창조하신 주인이심을 저희들이 알게 하여 주시옵소서. 우리의 아버지요, 우리의 참다운 주인으로서 만우주 전체를 품으시고 사랑하셔야 할 그분이 그러한 역사적인 곡절을 남겼다는 사실을 통분히 여길 줄 아는 자녀들이 되어야 하겠사옵니다.

우리 선조의 한번 실수가 이처럼 억천만세를 두고도 용납받을 수 없는 죄가 되었다는 사실을 생각하게 될 때, 눈물과 피땀을 다하여도 갚을 도리가 없사옵고, 생명을 천만번 희생하더라도 갚을 도리가 없는 것을 이들이 깨닫게 하여 주시옵소서.

오늘 저희들, 1965년 마지막 주일을 맞이하여 모였사오니 긍휼히 보아 주시옵소서. 한 많은 역사의 고빗길을 더듬어 오셨던 당신께 또 다시 이 한 해를 슬픔으로 보내게 해드리는 저희를 긍휼히 보시옵소서.

아버님께서는 이 통일의 무리를 삼천만 민족 앞에 내세우셔서 뭇 백성들과 더불어 아버지 앞에 영광 돌려드리는 무리가 되기를 바라셨사오나, 저희들이 책임을 다하지 못하고 이 해를 보내게 되었사오니 눈물과 더불어 이해를 보낼 수 있게 허락해 주옵소서. 1966은 새로운 각오와 새로운 신념을 가지고 맞이하게 해 주시옵고, 지난날 아버지 앞에 탄식의 조건을 남긴 것을 회개하고, 새로운 출발을 각오하고 맹세하는 이 시간이 되게 허락하여 주시옵기를 간절히 바라옵니다.

당신을 안다고 할 자가 어디 있으며, 당신의 뜻을 세우겠다고 할 자가 어디 있으며, 당신을 위하여 생명을 각오하고 나갈 자가 어디 있사옵니까? 아무도 없다는 것을 알게 될 때, 여기에 모인 저희들, 비록 불쌍하고 보잘것없는 무리들이오나 한 때는 당신을 위하여 충성을 다짐하였고, 당신을 위하여 생명을 바치겠다고 맹세한 무리들이오니, 지친 자들이 있사오면 힘을 더하여 주시옵고, 낙망한 자들이 있사오면 붙들어 주시옵기를 간절히 바라옵고 원하옵니다.

저희들은 원수들의 농락에 많이 짓밟혔사옵고, 슬픈 과거 역사에 말할 수 없는 애달픈 사정을 가지고 있사옵니다 그 모든 한 많은 심정을 잃어버리는 자들이 되지 말게 하여 주시옵소서. 아버지의 슬픔과, 아버지의 한을 잃어버리는 저희들 되지 말게 허락해 주시옵소서. 이 죄악의 세상을 심판하실 때 기필코 아버님 앞에 영광을 돌려드릴 수 있는 승리자의 모습으로 나타날 수 있는 당신의 자녀들이 되게 하여 주시옵기를. 아버님, 간절히 바라옵고 원하옵니다.

이날 수많은 자녀들이 당신의 무릎 앞에 엎드렸사옵니다. 새해를 맞아 아버지 앞에 약속을 세워 기도하는 자녀들이 있사오면 그들 위에 각별한 은사를 베풀어 주시옵소서. 지난날의 부족한 모든 것을 청산하고 새로운 해를 맞아 스스로 아버지 앞에 설 수 있는 단장을 하고, 장비를 갖출 줄 아는 자녀들이 되게 하여 주시옵소서. 집에서는 효자의 장비를 갖추어야 하고, 밖에 나가서는 원수들과 싸울 수 있는 무장을 해야 할 저희들이오니, 저희들의 갈 길을 지켜 주시옵고 권고하여 주시옵기를 간절히 바라옵고 원하옵니다.

이 시간 보잘것없는 무리들이 모였사오니 그 마음을 하나로 묶어 주시옵소서. 지금까지 그 마음이 누구를 위하여 나왔고, 그 몸이 어떤 방향을 취하였는가를 스스로 비판하여서 이 시간 전체를 아버지 앞에 받들어 드릴 수 있게 하여 주시옵기를, 아버님, 간절히 바라옵고 원하옵니다.

지난날은 저희들이 기쁨과 슬픔의 마음을 가지고 지냈지만, 새해에는 새로운 각오로 출발할 수 있는 저희들이 되게 하여 주시옵기를 간절히 바라옵고 원하옵니다.

이 시간 부족한 모습들이 당신 앞에 부복하였사오니 당신의 긍휼의 손길을 펴시사 당신의 품에 품어 주시옵고, 새로운 명령을 하여 주시옵기를 간절히 부탁드리면서, 모든 말씀 주의 이름으로 기도하였사옵나이다. 아멘.

16-14
기 도(Ⅲ)
예수님은 이 땅에 오셔서 30여 성상의 곡절 많은 행로를 걸으셨음을 아옵니다. 저희들은 어느 한 날 아버지를 모시지 못하였고, 아버지 앞에 충성을 다하지 못하였다는 것을 생각할때 마음 아프게 생각하지 않을 수 없사옵니다.

어제는 예수께서 탄생하신 한 날을 맞이하여 모든 백성들이 축하하였사옵니다. 그러나 진정으로 환영받는 예수 그리스도의 모습을 얼마나 그리워하신 당신이시옵니까?

이 시간 저희들 참다운 그리스도의 형상과, 하늘과 땅이 바라시는 아버지의 참다운 아들딸의 모습을 그리워할 줄 알게 하여 주시옵소서. 그리하여 저희들의 부족한 자세를 시정받을 수 있는 깨끗하고 아름다운 이 시간이 되게 하여 주시옵기를, 아버님, 간절히 바라옵고 원하옵니다.

하늘을 추앙하는 사람은 많사오나 하늘을 위하여 책임지겠다는 사람은 적사옵니다. 저희들은 하늘을 위하여 책임을 져야만 되겠사옵니다. 하늘 길이 좋다는 것은 알고 있사오나 그 길에 놓여 있는 가시밭길을 피하려는 사람들이 많다는 것을 아옵니다.

아버님 ! 당신은 우리를 위하여 억천만세 수고하셨사옵니다. 그런데 오늘날 인간들은 하늘의 길, 참된 길을 가기 위해서 넘어가야 할 수고의 길을 피해 가려 하고, 저희의 슬픔과 고통도 아버지 앞에 맡기려 하고 있사오니 용납하여 주시옵기를 간절히 바라옵니다.

오늘 통일의 무리들이 아버지 앞에 모였사옵니다. 저희들은 남과 달리 아버지의 심정을 알았사오나, 아버지의 사정과는 달리, 아버지가 남기신 소망의 길을 저희 뜻대로 하고, 생명의 일체를 바치기를 거부한 저희들 자신을 이제 이 한 시간에 아버지 앞에 솔직이 드러내게 하여 주시옵소서.

어차피 가야 할 인생의 행로를 아버지의 뜻대로 가기를 기도하고 있사옵니다. 죽음의 길도 아버지와 더불어, 가시밭길도 아버지와 더불어, 버림받는 길도 아버지와 더불어 가야만 되겠사옵나이다. 아버지의 뜻도 선하시고, 나선 길도 선한 길이온데 저희는 선하지 못하옵니다. 선하지 못한 자체들을 용납해 주시고, 과거의 부족함을 용납해 주시옵소서. 아버지와 같이 살고 싶은 마음을 갖고 있사오니, 아버지, 긍휼히 보시사 품어 주시옵기를 간절히 바라옵니다.

그 누가 뭐라 해도 나는 당신의 아들이요, 딸이라는 사실을 부정할 수 없노라고 몸부림칠 줄 아는 자녀의 모습으로 세워 주시옵기를 간절히 바라옵고 원하옵니다. 아버님과 사랑의 인연이 맺어져 있고, 아버님과 떨어질래야 떨어질 수 없는 혈육의 관계가 맺어져 있는 자녀의 명분을 저희가 가지고 있다 할진대, 그 무엇도 당신과의 관계를 부정하지 못한다는 것을 알고 있사옵니다. 아버님의 진정한 아들이 되지 못하고 딸이 되지 못한 과거를 스스로 회개하고, 겸손히 아버지 앞에 나아가 용서를 비는 모습들이 되게 하여 주시옵소서.

그 아버지가 아무리 보기에는 추하고 초라할지라도 우리의 아버지임에 틀림없고, 그 아버지가 아무리 서러운 가슴을 안고 걱정을 품고 계실지라도 우리의 아버지임에 틀림없다고 하면서 그 아버지를 붙들고 위로할 줄 알고, 아버지를 위해 효성을 다하지 못한 것을 한할 줄 아는 당신의 어린자녀들이 되게 하여 주시옵기를, 아버님, 간절히 바라옵고 원하옵니다.

당신은 누구를 만나고 싶사옵니까? 그 누구와 더불어 약속을 하고 싶사옵니까? 그 누구에게 당신의 한 많은 사정을 털어 놓고 싶사옵니까? 오늘 저희들에게 그리하여 주시옵기를 바라옵니다.

당신이 분하고 원통하시면 저희들도 분하고 원통하옵니다. 하오니 강하고 담대하여 원수와 싸울 줄 아는 당신의 자녀들이 되게 하여 주시옵기를, 아버님, 간절히 바라옵고 원하옵니다.

그 누가 당신의 사정을 통고할 자가 있사오며, 그 누가 당신의 심정을 가르쳐 줄 자가 있사옵니까? 당신만이 해주실 수 있는 것을 아옵니다.

부족하고 초췌한 모습으로 아버지의 긍휼을 바라고 동정을 바라는 마음만 가지고 아버지 앞에 나타나게 될 때 아버지께서 저희들을 버리시지 못한다는 것을 저희들은 알았사옵니다. 애절한 슬픔의 자리에서 애절한 심정으로 아버지라 부르는 저희의 모습을, 아버님, 긍휼히 여겨 주시옵소서.

다시 한번 새로운 역사의 인연을 책임질 수 있는 새날을 맞이하게 하여주시옵고, 새해를 맞이하게 하여 주시옵기를, 아버님, 간절히 바라옵고 원하옵니다.

당신이 남기신 심정의 터전 위에서 효성을 다하지 못하고, 충성을 다하지 못한 한을 품고 최후의 승리의 한 날까지 참고 나갈 줄 아는 당신의 아들딸이 되게 하여 주시옵기를 간절히 부탁드리옵니다.

이 시간 아버지, 단에 섰사오니 전하는 자의 마음이나 받는 자의 마음이 둘이 되지 말게 하여 주시옵소서 당신의 심정으로 저희들의 마음의 문을 여시옵고. 저희들의 사정을 움직이시옵고, 저희들의 현재의 실체를 관찰하시사 당신이 기뻐하실 수 없는 모든 요건을 제기해 주시옵소서. 기뻐하실 수 있는 요건만 남겨 주시옵고, 저희들을 찾아오셔서 저희들의 마음의 친구가 되어 주시옵고, 저희들의 생활에 임재하시어서 저희들이 개척자의 사명을 할 수 있는 아들딸들이 되게 하여 주시옵기를 간절히 바라옵고 원하옵니다.

부족한 저희들에게 아버지를 위하는 일에 저해되는 요소가 있으면 제거해 주시옵고, 오직 아버님만을 모실 수 있고, 아버님만이 분주하실 수 있는 이 시간이 되게 허락하여 주시옵기를 간절히 부탁드리면서, 모든 말씀 주의 이름으로 기도하였사옵나이다. 아멘.

16-17
말 씀
여러분들이 처음 통일교회에 들어와 보면 통일교회 교인들이 일반 교인들과는 달리 ‘식구’ 라는 명사를 쓰는 것이 이상하게 보일 것입니다. 그런데 식구라는 말은 세상에서 제일 가까운 관계에 있는 사람끼리 쓰는 명사입니다. 그러므로 여러분들은 이 식구라는 말에 대한 의의를 확실히 알아 가지고 사용해야 됩니다.

16-17
악의 세계를 심판하고 선의 세계를 세우려 하시는 하나님
여러분들은 현재 살고 있는 이 세상이 선한 세상이 아니라는 것을 대체로 보아서도 잘 알고 있을 것입니다. 누구에게 물어 보아도 이 세상이 악한 세상이라고 말할 것입니다. 그러면 자고로 수많은 사람들이 선을 바라고 나왔음에도 불구하고, 어찌하여 이 세상이 선한 세상이 되지 못하고 악한 세상이 되었는가? 이것이 뜻을 품은 사람들에게 있어서는 가장 큰 고충의 고개가 되었던 것입니다.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 희생을 치르지 않으면 안 되었다는 것을 우리들은 잘 알고 있습니다.

지금까지 본심으로 선을 추구한 사람들은 많았지만 본심으로 악을 그리워한 사람들은 없었습니다. 그런데 사람들이 추구하지도 않고 그리워하지도 않은 악이 선 보다도 많은 것을 보게 될 때 오늘날 이 세상은 선으로루터 출발한 것이 아니라 악으로부터 출발하였다는 사실을 우리들은 미루어 짐작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이 계신다면 그 하나님은 인간들이 선으로 갈 수 있는 하나의 길을 마련해 주시지 않으면 안 되는 것입니다.

악한 개인으로부터 악한 가정이 생겨났고, 그 가정이 모여서 악한 사회, 악한 민족, 악한 국가를 이루어 오늘날 전세계가 악의 권내에 처하여 있다는 것을 우리들은 잘 알고 있습니다. 이것은 원래 인류가 바라던 소원이 아니었고 하나님이 바라시던 소원도 아니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이 계신다면 하나님은 기필코 이 세상의 악을 제거할 수 있고, 이 세상의 악을 청산지을 수 있는 새로운 섭리를 하시지 않으면 안 되는 것입니다. 악한 세상을 그냥 그대로 두어서는 안 되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뜻하신 그 세계를 세워 드리기 위한 운동이 벌어져야 되는 것입니다. 이 운동이 하나의 가정으로부터 벌어져서 사회와 국가와 세계에 확산되지 않으면 안 되는 것입니다.

역사적인 도상에서 이스라엘의 선민사상이 나왔다는 사실을 우리들은 잘 알고 있습니다. 그러면 그것은 누가 세웠던 것인가? 그것은 하나님이 역사적인 인연을 통해서 새로운 선의 기반을 넓히시기 위하여 세우셨다는 사실을 우리들은 알아야 됩니다.

이렇게 하여 개인을 세워 가지고 악한 개인에 대한 싸움을 전개시켜 이 세계의 악한 개인에 대하여 승리의 기준을 세우게 하셨고, 가정을 세워서 이 세계의 악한 가정에 대하여 승리의 기준을 세우게 하셨으며, 종족, 민족, 국가를 세워서 악한 세상을 제거시켜 버리고, 선한 종족, 선한 민족, 선한 국가를 세우고자 하셨다는 사실을 우리는 부정할 수 없습니다.

그리하여 하나님은 한 때를 마련하여 하나의 나라를 준비해 놓으시고, 그 나라 가운데 세계를 대신하여 전체의 뜻을 세울 수 있는, 즉 세계를 하늘편으로 귀결시킬 수 있는 전체적인 책임을 짊어진 한 분을 보내셨던 것입니다. 그분이 누구냐? 그분은 악한 세상에서 선을 중심삼고 악한 사람들을 구할 수 있는 분이라야만 하는데, 그분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16-18
예수 그리스도의 사명
그러면 그분은 어떠한 사명을 가지고 어떠한 입장에서 이 땅 위에 오셨을 것인가? 그분의 사명은 악한 세상을 복귀하여 선한 세상을 이루는 것이기 때문에 그분은 제일 깊은 하나님의 사랑을 받을 수 있는, 즉 하나님의 사랑의 심정을 대신할 수 있는 독생자의 명분을 가지고, 하나님을 아버지라 부를 수 있는 입장에서 이 땅에 오셔야 되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예수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독생자인 것입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뜻을 세우기 위하여 선한 왕의 왕으로 이 땅 위에 강림하셨다는 사실을 역사는 증거하고 있습니다. 따라서 이스라엘 민족은 예수님을 중심삼고 단결해야 했던 것입니다.

오늘날 이 악한 세상에서 인간들은 자기를 중심삼고 사회생활을 하고 있습니다. 그들이 가지고 있는 사회관이나 국가관, 세계관, 우주관은 어디까지나 타락권내의 악과 더불어 짝할 수 있는 것들입니다. 아직까지 이땅 위에는 하나님과 연결되어 선과 짝할 수 있는 입장에서 개인생활, 사회생활, 국가생활, 세계생활, 우주생활이 나타나지 않았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예수 그리스도가 이 땅 위에 오셔서 일생 동안 전하고자 하셨던 것은 하나님의 전체적인 뜻이었던 것입니다.

예수님은 역사적인 모든 희망의 뜻을 종결시켜야 할 사명을 갖고 오셨고, 시대적인 악과 싸워 악을 퇴치시키고, 승리의 한 날을 맞이하여 선한민족을 중심삼고 선의 국가를 편성하여 만왕의 왕이 되어야 했던 것입니다. 이것이 예수님이 이 땅 위에 오셨던 근본 책임과 목적이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이러한 터전을 마련하기 위하여 예수님은 이 땅 위에서 개인적인 승리의 터전을 마련해야 되고, 가정적인 승리의 터전을 마련해야 되고, 종족적인 승리의 터전, 민족적인 승리의 터전, 국가적인 승리의 터전을 마련해야 되는 것입니다. 그 터전 위에 예수님의 생활관과 세계관을 세워야 했던 것입니다.

하나님은 예수님의 일대가 어떻게 될지 아실 수 없기 때문에, 개인적인 싸움에서 승리할 수 있고, 가정적인 싸움에 승리할 수 있고, 종족적인 싸움에서 승리할 수 있고, 민족적인 싸움에서 승리할 수 있고, 국가적인 싸움에서 승리할 수 있는 한 날을 바라시고, 선민을 세워 키워 나오셨다는 사실을 우리들은 알아야 합니다.

16-19
예수님을 모시지 못한 이스라엘 민족
그러면 이 선민이 가져야 할 소망은 무엇이어야 했겠는가? 그들은 자기들의 생활관과 인생관과 우주관을 이 땅에 만왕의 왕으로 오신 예수 그리스도의 생활관과 인생관과 우주관으로 대치시켜야 했습니다. 그런데 그때의 이스라엘 민족은 예수님을 그러한 입장에서 모시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4천년의 역사를 종결지을 수 있는 선의 결과를 가져오지 못하고 선의 목적을 연장시켜 다시 악과 더불어 싸워야 되었던 것입니다. 이것이 예수님 이후 지금까지의 2천년 역사로 나타났었다는 사실을 우리는 알고있습니다.

이러한 입장에서 이 땅에 오신 예수님은 자기가 통치해야 할 선의 나라, 선의 민족, 선의 종족, 선의 가정, 선의 개인을 바라보고 나왔던 것입니다. 그런데 과연 예수님이 찾으시려던 그 나라와 그 민족과 그 종족과 그 가정, 그리고 예수님을 모실 수 있는 참다운 식구와 형제들이 있었던가? 여기에서 역사는 다시 새로운 문제로 접어 들어가게 되었던 것입니다.

오늘날 예수를 믿고 있는 수많은 기독교인들은 예수님이 구원섭리를 이 땅 위에서 완결짓고 간 줄로만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크나큰 오해라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민족을 선민으로 세워 가지고 4천년 동안 키워 나오실 때, 배반하는 그들을 승리의 터 위에 세우기 위해 얼마나 많은 노력을 하셨던가!

이스라엘 민족은 메시아를 맞는 그날부터 그분과 하나 되어서 국가적인 악과 세계적인 악을 물리치고 선한 하나의 세계를 이루어야만 했습니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민족을 통하여 그러한 세계가 이루어지기를 얼마나 마음속으로 원하셨겠는가? 하나님께서는 그 아들을 보내실 때 그 뜻이 이루어지기를 얼마나 바라셨을 것인가?

그런데 예수님은 이 땅 위에 오셔서 그러한 입장에 서지 못하고 십자가를 지고 가셨습니다. 이것이 과연 하나님의 소망이었겠습니까? 아닙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 돌아가심으로써 만민을 구할 수 있다면 하나님께서 무엇 때문에 선민을 세우셨겠습니까? 그렇게도 애써 길러 놓은 이스라엘민족, 4천년의 역사적인 승리의 터전 위에서 성장해 나온 이스라엘 민족 가운데 단 한 사람도 예수님을 모시지 않았다니….

누구보다도 그 나라의 주권자들, 누구보다도 그 나라의 사상적인 분야를 책임지고 있던 교법사들과 서기관들이 예수님을 모셔야 할 것이었습니다. 그것이 그들의 책임이었음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예수님을 이단자로 몰아 그의 앞길을 막기에 급급했습니다. 이런 역사적인 사실을 우리는 부인할 도리가 없는 것입니다.

16-21
예수님을 죽인 대가를 받아 온 이스라엘 민족
예수님이 오실 때까지는 그들이 고통을 당할 때 하나님께서 그들을 구해 주셨고, 그들이 외로운 자리에 있을 때 그들을 방비해 주셨습니다. 하나님께서 천만 가지의 수고를 하셨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이 왔다가신 후 2천년이 지난 지금에 이르기까지 이스라엘 민족은 세계에서 유리하는 민족이 되었고, 혁명이 일어나면 그 누명은 대부분 이스라엘 민족이 지게 되었습니다. 역사의 흐름과 더불어 배척당하는 민족이 되어 세계도처에서 희생의 제물이 되었던 것입니다. 이처럼 이스라엘 민족이 예수님을 죽인 대가를 지불하지 않으면 안 되었던 서러운 사실을 우리들은 역사를 보아서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으로 끝이 아니었습니다. 세계 제2차 대전 중에 히틀러에 의해 6백만명이 학살되는 피의 보응을 받게 되었던 것입니다.

그러한 서러운 역사는 어찌하여 생겨나게 되었던고? 그것은 만왕의 왕, 즉 하나님의 전체적인 뜻을 해결지을 수 있는 선의 주권자를 죽였기 때문입니다. 그들의 서러운 역사는 예수님을 죽인 피의 대가라는 것을 우리들은 알아야 되겠습니다.

하나님께서 그렇게도 사랑하셨던 예수님을 죽인 후에 이스라엘 민족이 그렇게도 지긋지긋하게 나라 없는 민족으로 지내 온 것은, 하나님의 탕감원칙에 의해 보면 응당 있어야 할 처분인 것입니다. 이것은 선민으로서 받아야 할 상이 아니라, 선민으로서 받아야 할 벌이요 저주라는 것을 우리들은 분명히 알아야 되겠습니다.

역사적인 배후를 짊어지고 시대적인 사명을 감당해야 했던 예수님의 마음을 그 누가 알아주었던가? 아무도 알아주는 사람이 없었다는 것입니다. 여기에서 여러분들은 식구의 인연을 잘 알아야 되겠습니다.

하나님이 요셉 가정을 통하여 예수님을 보내셨는데 요셉 가정은 이스라엘 전체의 가정 중에서 하나님이 택한 가정이었습니다. 요셉 일가를 중심삼고 하나님의 사랑이 이스라엘 전체에 연결되게 되어 있었는데, 이와 같이 하나님은 이스라엘 전체를 대표한 가정으로 요셉 가정을 세웠던 것입니다.

그러면 하나님은 어찌하여 불행한 요셉 가정을 제일 사랑하셨던고? 이는 하나님이 지극히 사랑하는 아들을 그 가정에 보내셨기 때문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요셉 가정은 그 아들을 보호하고, 그 아들의 뜻 전체를 자기들의 뜻으로 알고 받아들여야 했습니다.

이러한 입장에서 예수님은 요셉 가정에 태어났습니다. 정혼한 마리아의 몸을 통하여 성령으로 말미암아 태어났던 것입니다.

16-22
예수님의 소원과 심정을 누가 알았던고
그러면 본래의 예수님의 소망은 무엇이었던고? 제자를 택하는 것이었던가? 아니면 과거(過去)를 통하는 것이었던가? 아니면 5병 2어로 5천여 명을 먹이는 이적 기사를 행하는 것이었던가? 아닙니다. 예수님의 소망은 불쌍한 이스라엘 민족을 로마의 학정으로부터 구원하고, 그 당시에 세계를 선의 세계로 통일시키는 데 있었습니다. 그것이 메시아로 오신 예수님의 소망이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당시에 예수님을 메시아로 믿어 주고 메시아로 알았던 사람이 없었다는 것입니다.

그 당시 이스라엘 민족은 누구와 직결되어야 했느냐? 로마의 정책에 휩쓸려야 했느냐? 아니면 그 시대의 사회 풍조에 좌우되어야 했느냐? 둘 다 아니었습니다. 이스라엘 선민과 유대교가 가야 할 하나의 귀결점은 메시아와 하나 되는 것입니다. 메시아가 맡은 바의 목적을 놓고 메시아와 화합하여 일체가 되고 절대적인 입장에서 단결된 하나의 국가 형태를 갖추어 가지고 로마와 부딪쳐야만 했습니다. 그렇게 하여 로마와 전세계를 통합해서 지중해를 중심삼은 세계적인 판도를 구축해야 했습니다. 그 당시에 이스라엘 민족이 그렇게 했던들 이 세계가 오늘날과 같이 되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예수님이 바라신 사도는 세상의 악을 따르는 못난 사도들이 아니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을 따르던 사도들은 그렇지 못했으니 그 당시 예수님이 얼마나 처량했겠는가를 여러분은 한번 생각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예수님은 못난 사도들을 원하시지 않았습니다. 만약 예수님 바라신 사도들이 찾아졌다면 이스라엘은 악의 세계를 넘어설 수 있었을 것입니다. 악의 무리들을 넘어설 수 있었을 것입니다.

예수님은 선한 세계를 이루어야 하는 역사적인 책임을 안고 계셨기 때문에 악을 물리치는 것을 최대의 소원으로 삼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이 소원을 이루기 위하여 이를 물고, 혀를 깨물면서 하루 하루 살아나가셨다는 것입니다. 이것을 당시의 사람들은 아무도 몰랐다는 것입니다.

만민을 구원하는 것이 예수님의 목적이었지 십자가에 죽어서 개인을 구원하는 것이 예수님의 목적이 아니었습니다. 그러면 세계를 일시에 구원해야 했던 예수님의 목적이 왜 이루어지지 않았던고? 민족의 일시구원은 왜 하지 못했던고? 그것은 그 당시에 예수님을 따르던 사람들이 가정과 종족과 세계를 일시에 구원하는 것이 예수님의 소원이라는 것을 생각하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모두가 다 예수님을 믿고 천당 가야겠다는 생각만 했지, 예수님이 바라시던 소원을 생각하지 못했던 것입니다. 그러니 이스라엘 민족을 로마로부터 일시에 구원해야 된다는 하나님의 뜻을 마음속에 품고 있었던 예수님이 얼마나 초조하셨겠습니까? 그러나 예수님을 따르던 사도들은 그것을 모르고 있었습니다. 베드로조차도 그것을 모르고 있었습니다.

그 누가 예수님의 심정을 알아주었던고? 감람산 골짜기를 거닐 때마다 하나님을 위하여 호소하던 예수님의 내적인 심정을 누가 알았던고? 예수님은 로마의 권세를 얼마나 헐어 버리고 싶어하셨던가! 반대하고 알아주지 못하는 유대교의 무리와 이스라엘 민족이 아닌, 하나님 앞에 엄숙히 제사드릴 수 있는 참된 유대교와 참된 이스라엘을 예수님은 마음속에 얼마나 그리워하셨던가 ! 제자들도 이러한 것에 대해서는 꿈도 안 꾸었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이와 같이 믿고 천국 가겠다고 하는 제자들로 만족할 수 없었다는 것을 우리는 똑똑히 알아야 되겠습니다. 그런 무리들이 예수님의 제자가 되어서는 안 되었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이 땅 위에 오셔서 유대 나라의 집권자들과 그 나라의 사상적인 분야를 책임지고 있는 유대교단의 지도자들과 하나되어 로마를 하나님 앞에 굴복시켜야 했던 것입니다. 이렇게 이스라엘 민족과 유대교가 하나되어서 메시아를 앞에 내세워 가지고 가야 했는데도 불구하고, 오히려 예수님을 반대했으니 그들의 운명이 어떻게 되겠습니까? 선민들이 예수님을 반대했다는 것은 말이 안 되는 것입니다.

16-24
서럽게 자란 예수님
예수님이 죽기 위해서 오셨단 말입니까? 예수님의 꿈이 죽는 데 있었단 말입니까 ? 오늘날의 무지한 기독교인들은 그렇다고 할는지도 모릅니다만 사실은 그렇지 않다는 것을 우리는 똑똑히 알아야 하겠습니다. 만일 예수님이 죽기 위해서 오셨다면 하나님께서 선민은 무엇 하러 세우셨겠습니까?

그러면 단번에 그런 일을 할 수 있었던가? 아닙니다. 요셉 가정은 하나님께서 택한 가정이었습니다. 세례 요한 가정도 요셉 가정의 친척이었습니다. 요셉은 하나님이 사랑하지 않을 수 없는 다윗의 후손이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민족의 대표 가정으로 요셉 가정을 세우셨던 것입니다. 그렇게 하여 예수님 한 분을 탄생시킨 것입니다.

그러면 여러분들은 예수님이 왜 요셉 가정을 떠나 제자들을 택하기 위하여 돌아다니셔야 했느냐 하는 것을 알아야만 합니다.

예수님은 비참한 환경에서 이 땅 위에 태어나셨습니다. 그것은 마리아와 요셉이 책임을 다하지 못했기 때문이었습니다. 자세한 내용은 시간이 없어 생략하기로 하겠습니다. 예수님은 태어난 그날부터 하나님 앞에 충성의 법도를 세워서 먼저 하나님을 받들 수 있고, 하나님의 뜻을 세울 수 있는 터전을 마련해야 되었던 것입니다. 그 터전을 어디서부터 마련해야 되었느냐 하면, 요셉 가정에서부터 마련해야 했습니다. 물론 이것이 성경에는 기록되어 있지 않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요셉 가정에서부터 그것을 마련해야만 되었던 것입니다.

예수님을 낳은 마리아도 하늘의 고운 천사들의 지도를 받아서 자신이 낳은 아들이 장차 어떻게 된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예수님이 자라실 때 하나님께서 언제나 마리아에게 같이하여 주신 것은 아니었습니다. 따라서 시일이 경과함에 따라 마리아는 어찌 하다 보니 예수님이 태어난 것이라고 생각하게 되었던 것입니다. 이러한 요셉 가정에서 예수님은 자랐던 것입니다.

한편, 요셉에게는 예수님이 진실로 성령으로 잉태했는지, 아니면 누구에 의하여 잉태했는지 의심스럽다는 마음이 생겨나게 되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생각하면 생각할수록 마음이 괴로왔던 것입니다. 여러분들도 한번 생각해 보십시오! 정혼한 처녀가 애기를 배어가지고 와서 성령으로 잉태했다고 하니 요셉의 마음이 어떠했겠습니까? 하나님이 가르쳐 주신 그사실은 믿었을지 모르지만 예수를 바라볼 때마다, 마리아를 바라볼 때마다 어찌 심한 고통을 느끼지 않았겠습니까?

이렇게 되어서 예수님은 의붓 아버지의 품에서 서럽게 자라지 않을 수 없었던 것입니다. 이러한 예수님의 사정을 여러분들은 알아야 되겠습니다. 서러웠던 예수님이었습니다. 동생들의 시중은 들어 주었지만 동생들에게 시중 한번 받아보지 못했던 예수님이었습니다. 예수님은 요셉으로부터 무엇을 하라는 말을 들을 때에도 진정으로 아버지의 사랑을 받는 입장에서 듣지 못했습니다. 의붓 아버지의 의심을 받는 입장에서 들었다는 것입니다. 이처럼 예수님은 보이지 않는 학대 속에서 자라났습니다.

16-25
한 많았던 예수님
마리아 역시 요셉에게 기분 나쁜 일이 있거나 요셉이 조금만 얼굴을 찌푸리는 일이 생겨나도 예수님을 바라보며 생각에 잠기지 않을 수 없었던 것입니다. 여러분은 어떠할 것 같습니까? 그런 사람의 심정을 잘 이해할 수 있겠습니까? 의붓 자식을 데리고 시집을 간 부인이라면 남편이 조금만 얼굴을 찌푸려도 그 모든 것을 어찌 자기의 의붓 자식과 연관시켜 생각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이러한 입장에서 행복의 터전을 갖지 못했던 예수님이었다는 것을 여러분들은 알아야 하겠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예수님의 마음 속에는 한이 많았다는 것입니다. 명절날이 가까와 오면 자기 동생들은 엄마 아빠와 함께 기뻐하고 즐기며 준비할 수 있었지만, 생각이 많은 예수님은 옷 한 가지 해 달라고 할 때에도 눈치를 보지 않을 수 없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처량한 모습으로 명절을 맞이하지 않을 수 없었던 것입니다.

이러한 것이 성경에는 없습니다. 그러면 어떻게 해서 아느냐? 이것은 예수님을 만나서 물어 보면 알 수 있는 일입니다. 그렇지 않겠는가 한번 생각해 보십시오. 명절날 집에서 떡 같은 것을 해놓았다 하더라도 ‘어머니 나도 좀 주십시오!’ 하고 먼저 손을 내밀 수 없었던 예수님이었다는 것입니다. 좋은 것이 있더라도, 동생들이 입고 있는 아름다운 옷을 바라보면서도 ‘나도 좀 주십시오. 나도 좀 해주십시오’ 하고 말할 수 없었던 예수님이었다는 것을 여러분은 알아야 하겠습니다.

그 사정을 이루 다 말할 수 없었던 예수님! 나 어린 친구들과 어깨를 겨누고 환경에 보조를 맞추며 나날을 즐길 수 없었던 예수님! 이런 것들을 생각하면 가슴이 미어집니다. 이런 것을 누가 알아요? 그저 ‘오오! 만왕의 왕, 하나님의 독생자가 이 땅 위에 오셨다!’라고만 알고 있지, 명절 때 때때옷 입고 부모와 함께 기뻐하고 있는 아이들을 바라볼 때마다 하염없는 눈물을 흘린 어린 예수였다는 것을 모르고 있습니다.

세상 천지를 둘러볼 때 그리운 것은 자신을 품어줄 수 있는 부모의 정이었습니다. 동생이 있어도 동생을 동생이라고 부를 수 없었던 예수님! 그 동생들 앞에서 형이라 자처할 수 없는 사정에 놓여 있던 예수님! 참으로 비참한 생활을 하셨던 예수님이었습니다. 이러한 예수님의 사정을 여러분들은 알아야 하겠습니다.

여러분 가만히 생각해 보세요. 이 말이 문선생이 꾸며서 하는 말인가 아닌가 하는 것을. 여러분 ! 그렇겠어요, 안 그렇겠어요? 하나님이 매일같이 그들의 코를 꿰어서 ‘이녀석아, 이녀석아!’ 하고 가르쳐 주실 수 있었겠어요? 그럴 수 없는 사정이었기 때문에 예수님이 서러웠다는 것을 여러분은 알아야 되겠습니다.

“여우도 굴이 있고 공중의 새도 거처가 있으되 오직 인자는 머리 둘 곳이 없다(마 8:20)”고 하신 말씀이 무슨 뜻인 줄 알아요? 나면서부터 그랬다는 것입니다. 또 왜 예수님이 자기의 혈육을 대하여 “누가 내 모친이며 내 동생들이냐?…. 누구든지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대로 하는 자가 내 형제요 자매요 모친이니라(마 12:48-50)”고 하셨는지 알아요? 이루 다 말할 수 없는 한을 가슴에 품은 채 가신 예수님이라는 것을 여러분은 알아야 하겠습니다.

16-27
인류구원의 책임감을 느끼시고 남몰래 정성들이신 예수님
예수님은 어린 시절을 목수의 가정에서 자랐습니다. 목수인 요셉 밑에서 조수로 일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낫을 들고 나무를 깎고 대패를 들고 나무를 밀 적마다 이스라엘을 살리려는 마음으로 일을 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선민된 이스라엘 민족이 이래서는 안 되겠으니 내가 대신 깎고 다듬어서 새로운 이스라엘을 만들겠다는 엄숙한 책임감을 가지고 일했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심정으로 언제나 이스라엘을 품고 사랑하면서, 하나님과 더불어 뒤넘이칠 수 있는 마음으로 일했다는 것입니다. 그런 일념을 가지고 있었던 예수님의 소원을 아무도 아는 사람이 없었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하나님과 더불어 의논하면서 그의 생애를 단장하기에 전심 전력을 기울였던 것입니다. 깊은 밤 부모와 형제들이 아무것도 모르고 자는 고요한 밤에 밖에 나가 하늘의 별을 바라보면서 그 마음을 호소했고, 흘러가는 강물을 바라보고 혹은 바람에 흔들리는 나뭇잎을 바라보고, 그것들을 자신의 친구삼아 ‘너는 내 사정을 알고 내 뜻을 잘 알지’하면서 마음을 달래곤 했던 것입니다. 인간들은 예수님을 몰랐지만 만물과 자연은 그의 친구가 되어 주었던 것입니다.

인간을 위하여 이 땅 위에 오셨고 인간들에게 인정을 받아야 할 메시아이신 예수님이 참다운 인간을 찾지 못하고 참다운 인간이 살 수 있는 환경을 찾지 못함으로 말미암아 자연의 품을, 그리고 하나님의 품을 은근히 동경하지 않을 수 없었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예수님이었다는 것을 여러분들은 알아야 되는 것입니다.

본래 요셉과 마리아가, 예수님이 하나님이 보내신 참다운 아들이요, 하나님의 왕자요, 또한 만민의 메시아라는 것을 알았다면, 그가 태어난 그날부터 하나님의 왕자로 모셨어야만 되는 것입니다. 매일같이 예수님께 경배해야 되는 거예요. 만왕의 왕이요, 길이길이 온 천주를 지배할 수 있는 하늘의 주권자로 오신 분이기 때문에 예수님이 태어난 그날부터 요셉과 마리아는 그에게 정성을 다하고 충효의 도리를 다하여 모셔야 했다는 것입니다. 인간적으로 보면 자기 아들 앞에 충효의 도리를 다해야 된다는 법이 어디 있어요? 그러나 천법으로는 그래야만 되는 거예요.

본래 하나님께서 예수님을 요셉 가정에 보내실 때는 예수님을 서럽게 하기 위하여 보내신 것이 아니었습니다. 하나님께서 미리 가르쳐 주어 가지고 마리아의 복중을 통하여 예수님을 탄생시킨 것은, 예수님을 고생시키기 위한 것이 아닙니다. 그가 영광을 받고, 보호를 받게 하기 위함이었지 몰리고 쫓김받게 하기 위함이 아니었습니다.

그런데 요셉 가정에서부터 틀어져 나갔던 것입니다. 그래서 때를 알고 하늘의 사명이 자기 일신에 짊어져 있다는 것을 알면 알수록 예수님은 자중하면서 그 형제들과 부모를 하나님의 뜻 앞에 인도하려고 얼마나 애썼는지 모릅니다.

“암탉이 그 새끼를 날개 아래 모음같이 내가 네 자녀를 모으려 한 일이 몇 번이냐(마 23 :37)”고 하신 말씀도 이스라엘 민족을 보고 하신 것이 아니었습니다. 자기 가정을 보고 하신 것이었습니다. 예수님은 먼저 자기 가정을 위해서 힘썼던 것입니다. 천륜을 대신하여 하나님의 나라를 세워야 할 책임을 지고 오신 예수께서, 즉 무엇보다도 귀하고, 무엇보다도 가치 있는 일을 하셔야 할 예수께서는 가장 가까운 자기의 사랑하는 부모를 먼저 위해 주고 싶었다는 것입니다. 그렇지 않겠습니까, 여러분? 좋은 것이 있으면 그것을 자기의 사랑하는 부모한테 먼저 드리고 싶은 것이 자식의 도리가 아니겠느냐 말이에요. 또 누구보다도 자기의 사랑하는 동생, 자기의 사랑하는 친척에게 먼저 주고 싶지 않겠느냐 말이에요.

그렇기 때문에 예수님은 철이 들면서부터 하나님이 요셉 일가를 찾아오신 역사적인 인연을 생각하고, 요셉 일가를 중심삼고 하나님의 뜻을 세우기 위하여 몇 번이고 하늘 앞에 다짐하며 기도했던 것입니다. 그런데 요셉과 마리아가 예수님을 모셨느냐 말입니다. 원칙은 식사 때에 진지를 담을 때도 예수님 진지부터 먼저 담아 드려야 된다는 것입니다. 요셉과 마리아가 예수님의 생활 전체를 책임져야 된다는 것입니다. 그래야 될 것 아니예요? 뜻을 중심삼고 보면 그럴 것 아니예요?

그렇게 요셉이 예수님을 모셔야 했던 거예요. 요셉이 제자 중에서도 수제자가 되어야 했던 거예요. 여려분은 요셉이 예수님의 수제자가 되어야 했다는 것이 믿어져요? 만일 여러분이 그런 일을 당했으면 어떻게 했을것 같아요? 생각해 보세요. 뜻적으로 보고 그렇게 했겠나 안 했겠나를.

16-29
하나님이 준비하신 터전을 버려야 했던 예수님
예수님은 하나님으로부터 받은 사명이 크고 엄청나다는 것을 알면 알수록 그것을 요셉 가정에서부터 이루고자 하셨던 것입니다. 그것은 그래야 할 원리적인 내용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요셉이 예수님의 수제자가 되어야 했던 것입니다. 그렇게 되면 예수님의 동생들도 따라가겠어요, 안 따라 가겠어요?

성경에는 없지만 예수님을 놓고 동생들은 형님이 메시아로 나타나기를 바란다면 사람들이 많은 예루살렘에 가지 왜 안 가느냐고 비난했다는 것입니다. 동생들이 그렇게 비난해서 되겠어요? 마리아도 예수님을 괄시했다는 것입니다. 정상적으로 취급하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원칙적으로는 그 집안에서부터 이루어 나가야 하는 것입니다. 요셉 가정을 중심삼고 하나님의 뜻을 다 이루어 나갈 수 있었어야만 했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세례 요한은 누구뇨? 그는 예수님의 이종사촌입니다. 친척이에요. 친척들이 다리를 놓아 가지고 요셉 가정을 중심삼고 하나 되어야 했다는 것입니다. 요셉과 마리아가 하나 되어서 예수님의 뜻을 받들고, 형제들이 제자가 되고. 친척들이 모두 사도가 되어서, 즉 형제와 친척들이 12제자, 70문도, 120문도가 되어서 악한 세상을 물리쳐야 했다는 것입니다. 이렇게 하여 다른 종족 다른 민족과 대결하여 나갔다면 예수님은 절대 십자가에 못박히지 않았다는 것을 여러분들은 알아야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가정에서부터 형제들을 중심삼고 기틀을 잡음으로써 이루어야했던 예수님의 뜻은 이루어지지 못했던 것입니다. 이 엄청난 천도는 사실 그 부모와 형제들부터 받들어야 했는 데, 그러지 못했던 것입니다. 그럼으로써 요셉 일가는 하나님이 찾아오신 4천년의 은사를 일시에 추방하게 되었고, 하나님을 일시에 배반하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쫓아냄으로 말미암아 사정이 달라졌어요. 예수님이 괜히 베드로, 야고보 같은 어부들을 찾아 다니셨겠어요? 아닙니다. 그것이 예수님의 사명이었겠습니까 ? (중략)

가나의 혼인잔칫집에서 예수님의 어머니가 예수님에게 포도주가 떨어졌다고 말했을 때 예수님이 무어라고 하셨습니까? “여자여 나와 무슨 상관이 있나이까(요 2:4)”라고 하셨지요? 이러한 곡절과 사연이 얼마나 많이 맺혀져 있는지 모릅니다. 그러나 그 배후의 사실들이 일일이 성경에 다 기록되어 있지는 않습니다. 그 말 못할 사정은 아무도 몰랐습니다.

예수님이 가나의 혼인잔칫집에서 자기 어머니를 보고 ‘여자여 나와 무슨 상관이 있나이까’라고 하신 말씀과, 어머니와 형제들이 찾아왔는 데도”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대로 하는 자가 내 형제요, 자매요, 모친이니라(마 12 :50)”고 하신 말씀은 어머니와 동생들이 하나님의 뜻대로 하지 못했다는 말씀입니다.

여러분. 확실히 알아야 되겠습니다. 예수님이 죽으러 오신 분이에요? 아닙니다. 원통하신 분입니다 성경에는 기록되어 있지 않지만 예수님은 어머니와 아버지를 찾아다니면서 세 번씩이나 간곡히 권고하셨던 것입니다. 그러나 그들은 예수님의 뜻을 받들지 못했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천륜이 인륜 앞에 흡수될 수는 없는 것입니다. 인륜이 천륜을 따라가야 합니다. 예수님은 하나님께서 자기를 이 땅 위에 보내신 뜻이 인륜을 세우기 위함이 아니라, 이 악한 세상을 정리하고 심판할 수 있는 천륜을 세우기 위함이라는 것을 아셨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천륜의 법도를 세우기 위하여 하나님의 뜻을 놓고 얼마나 통사정을 했는지 모릅니다. 세 번씩이나 권고하였지만 그것이 어머니에게도 요셉에게도 통하지 않았던 것입니다. 그러는 동안 예수님은 30세가 되었고, 30세가 되자 결국 하나님의 뜻을 위해 집을 나가지 않을 수 없었던 것입니다.

아직까지 30세에 집을 나가지 않을 수 없었던 예수님의 사정과 억울함, 더 나아가서는 하나님의 괴롭고도 서러웠던 사정을 아는 사람이 하나도 없었습니다. 하나님이 준비한 가족과 일가, 즉 하늘이 마련해 준 4천년의 터전을 버리고 나와야 했던 예수님이 얼마나 서러우셨겠는가 하는 것을 아는 사람이 없었습니다.

16-31
2차 노정을 가실 수밖에 없었던 예수님
원래는 예수님이 광야에 나가 시험을 받지 않아도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렇게 됨으로써 예수님은 부득이 40일 동안 금식을 해 가지고, 4천년역사를 탕감복귀하여 그 터전을 다시 닦지 않으면 안 되었던 것입니다.

40일 금식기간을 통하여서 사탄이 자기 일가에 침범한 모든 원한의 조건을 빼앗아 다시 하나님 앞에 세워야 했던 것입니다. 하나님이 4천년 동안 요셉 가정을 세우기까지 수고하셨던 것을 탕감하기 위해 예수님은 하나님 앞에 담판하지 않으면 안 되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40일 금식기간이 있었던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예수님은 40일 후에 다시 제 2차 노정에 들어가셨던 것입니다. 여러분들은 어떻게 해서 시작된 제2차 노정인지 알아야 되는 것입니다.

이러한 제 2차 노정을 걷는 예수님의 심정은 또 어떠했겠습니까? 예수님은 요셉 가정으로부터 몰렸고, 자기 친척들로부터 몰렸습니다. 그러나 원래는 안팎으로 일어나서 즉. 요셉 일가를 중심삼고 친척들이 단결하고 그 시대에 명망이 높은 세례 요한을 세워 새시대의 하나님의 섭리의 발판을 닦아야 했던 것입니다. 그렇게 해서 이스라엘 민족과 유대교가 따르지 않으면 안 될 환경을 마련해야 했던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이것이 다 무너져 버린 것입니다. 다 무너졌기 때문에 정면적인 충돌이 시작되었던 것입니다. 먼저 가정적으로 뜻을 이루어 가지고 민족을 대할 것이었는데 거꾸로 민족을 대해 가지고 가정을 찾아나오게 되었던 것입니다. 무슨 말인지 알겠어요? 개인, 가정, 종족, 민족, 국가의 순서로 대해야 될 것이었는데 이것이 깨어졌기 때문에 거꾸로 다시 찾아세워야 되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민족을 찾아 나서야 했고, 교단을 찾아 나서야 했으며, 민족과 교단 가운데 종족을 편성하고, 가정을 편성하여 부모와 형제의 인연을 다시 찾아야 했던 것입니다. 이러한 것들은 여러분이 원리를 배우면 잘 알아요.

만일 예수님이 요셉 가정을 중심삼고 천륜의 뜻을 마련하고, 세례 요한과 일치가 되었더라면, 그 가정과 일가들을 중심삼고 모든 것을 다 이룰 수 있었다는 것입니다. 그렇지 않겠습니까?

그 당시와 세례 요한은 그 나라 전체가 선생으로 알고 있는 명망있는 사람이었습니다. 이 세례 요한이 국가의 주권자들과 더불어 예수님을 중심삼아 가지고 출발해야 했던 것인데, 세례 요한이 반대의 방향으로 가게됨으로써 예수님은 불쌍한 자리에 서게 되셨던 것입니다.

예수님은 가난한 자에게 복음이 전파된다고 하셨는데 이것은 정말로 처량한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예수님이 하나님의 독생자, 하나님의 왕자로 이 땅에 오셨는데 어찌하여 가난한 자에게 복음을 전해야 된다는 말입니까?

이스라엘 민족은 4천년을 두고 구주를 원해 왔습니다. 그런데 최고의 자리에서부터 출발해야 할 예수님의 제1차 소망이 요셉 가정에서 이루어지지 못했기 때문에, 할 수 없이 밑에서부터 찾아 올라가야 했던 것입니다. 그래서 자기를 따르는 베드로, 요한, 야고보와 같은 어부들을 모아가지고 부패한 교단과 이스라엘 민족을 바로잡아야 했던 것입니다. 여기에서부터 싸움이 시작되었던 것입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 죽으러 오셨다고 말하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선생님은 이런 말을 들으면 참으로 화가 납니다. 하나님이 예수를 죽여 가지고 구원을 시켜요? 4천년 역사가 무너졌는데 십자가로 구원을 받아요? 십자가로 죽었으니까 구원받지 그냥 죽었다면 절대 구원 못 받아요? 예수님이 부활하시고 40일 후에 승천을 했기 때문에 십자가의 도리가 세워진 거예요. 예수님이 40일을 세워 놓지 못했으면 부활도 안 되는 것입니다. 부활하여 40일의 승리기대를 세워 가지고 승천했기 때문에 기독교가 승리할 수 있게 된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전세계에 걸려 있는 십자가를 통일교인들의 손으로 잘라 버려야 하는 것입니다. 처음 듣는 사람들은 이상하게 생각하겠지요?

그러면 통일교회에서는 왜 식구라고 하느냐? 여러분들은 식구라는 말을 잘 사용하지요? 여러분들이 진정 식구입니까? 여러분들이 부르는 식구라는 말은 그렇게 허술한 말이 아닙니다. 그러면 어찌하여 통일교회의 선생님은 식구라는 명사를 내세웠던고? 거기에는 역사적인 곡절이 깃들어 있는 것입니다.

16-33
식구라는 명사에 깃들어 있는 곡절
예수님이 돌아가신 것은 무엇 때문이었느냐? 첫째는 요셉 가정이, 둘째는 세례 요한이, 세째는 교회가 잘못했기 때문이었습니다. 이것은 억울하고 분한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4천년 역사를 내려오면서 키워온 이스라엘 민족을 믿고 하나님께서 아들을 보내셨는데 그 아들을 죽여 놓고, 죽으러 왔다고요? 그들은 그것밖에는 모르는 것입니다.

그러면 하나님께서 무엇 하려고 4천년 동안이나 이스라엘 민족을 중심하고 섭리를 하셨겠습니까? 예수님을 죽이려고 섭리를 하셨겠습니까? 나면서 죽어도 예수님은 예수님이고, 또 하나님의 아들이 되는 것인데 무엇 때문에 30살이나 되어 다 자란 후에 시끄럽게 요란을 피우다가 몰려서 죽게 하셨겠습니까? 나면서 그냥 죽게 하지, 아기 때는 구주가 못 되나요? 이것은 얼마든지 이해할 수 있는 것인데, 그것을 이해하지 못하고 믿고 있는 사람들이 있으니 참으로 부끄러운 일입니다. 그래 가지고도 천당 가겠다고요?

여기에서 말하는 선생님은 그것을 다 들추어 봤습니다. 예수님이 죽게 되었던 제일 원인이 어디에 있었던가? 요셉 가정에 있었습니다. 예수님은 이 땅에 무엇을 찾기 위해 오신 거예요? 가정을 찾기 위해 오신 것이었습니다. 이스라엘 나라는 태평한 가운데 있더라도 요셉 가정만은 예수님을 중심하고 하늘나라를 세워 나가야 했던 것입니다. 그래야 예수님이 신랑으로서 신부를 맞을 수 있었던 것입니다.

본래 하나님은 남편은 천국에 들어가고 부인은 지옥에 들어가도륵 창조하신 것이 아니었습니다. 창조 당시의 이상의 주인공들, 즉 아버지와 어머니와 아들과 딸이 종족을 이루고 민족을 이루고 나라를 이루자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야 되지 않겠습니까? 그런데 인간이 타락했기 때문에 지옥이 생긴 것입니다.

이러한 천륜의 뜻을 대하고 오셨던 예수님은 하나님이 보내신 바의 뜻을 이룰 수 있는 참다운 가정을 이 땅에서 가져야 했던 것이지 영계에 가서 가져야 했던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돌아가시게 되면 수많은 제자들도 십자가에서 피를 흘리게 되어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천국은 그처럼 피를 흘리고 죽은 제자들을 품고 들어갈 수 있는 곳이 아닙니다 이 땅 위에서 자기를 믿고 따르는 제자들을 피흘리게 해서 구원하는 것이 본래의 구원의 목적이 아니었습니다. 본래부터 그러한 일을 해야 했던 예수님이 아니었다는 것입니다.

16-34
예수께서 신랑이요 너희는 신부라고 하신 뜻
하나님이 보내신 왕자를 모시고 하나님의 아들딸들로 공인을 받아서 본연의 사랑을 노래할 수 있고, 본연의 부모와 본연의 형제를 중심삼고 본연의 가정, 본연의 민족, 본연의 국가, 본연의 세계를 이루어서 즉, 지상천국을 이룬 다음에 들어가는 곳이 천국입니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예수님이 가신 곳은 낙원이라는 사실을 여러분들은 알아야 합니다. 낙원이란 천국에 들어가기 위한 대합실과 같은 곳입니다.

본래 하나님께서 천국을 창조하신 목적은 참다운 부모로부터 참다운 자녀가 태어나서 하나님께서 기뻐하실 수 있는 참다운 가정과 종족, 참다운 민족, 국가, 세계를 이루어 살게 하는 것입니다. 그런 후에 하늘에 가는 것입니다. 이것이 하나님께서 천국을 창조하신 본연의 목적이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이 그러한 입장에 서 보셨어요? 어째서 예수님이 낙원에 들어가시게 되었어요? 그 처량한 운명과 곡절을 여러분들은 똑똑히 알아야 하겠습니다.

예수님은 말씀하셨습니다. 내 아버지는 하나님이요, 나는 신랑이요, 너희는 신부라고. 여러분은 신부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여러분은 신랑을 찾아야 됩니다. 예수님이 신랑으로서 신부와의 인연을 거쳐서 아버지로서 아들딸을 찾아오시겠다는 것입니다. 종이라 하지 않고 친구의 이름으로 아들딸을 만들겠다는 것입니다. 온 세계에 널려 있는 신자들을 신랑되신 예수님 앞에 충성을 다하고, 하나님을 모시는 참다운 하늘 식구가 되게 하겠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본연의 부부가 되고 본연의 부모가 되어 인간들을 본연의 자식으로 품으실 수 있는 본연의 세계를 이 땅 위에 이루시겠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소망이요, 예수님이 가지고 오셨던 인연이었습니다. 이것을 그때 당시의 사람들이 몰랐기 때문에 예수님은 하나님의 아들로 오셨다가 죄인의 몸으로 죽어가는 억울한 입장에서게 되셨던 것입니다.

신랑이 신부를 찾는 목적은 무엇이겠습니까? 그것은 자녀를 번식하자는 것입니다. 신부가 없으면 어떻게 자녀를 낳을 수 있겠습니까? 그렇기 때문에 예수님께서는 나는 신랑이요, 너희는 신부라고 하신 것입니다. 예수님은 하나의 신부를 찾으셔야 했던 것입니다. 그런데 지금의 한국교계의 실상은 어떠합니까? 오호, 나는 잘 믿으니까, 나는 부흥 목사니까 예수님 앞에 신부라고 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그것은 신부가 무엇인지 잘 모르고 하는 말입니다.

이러한 한국의 모습은 참으로 불쌍합니다. 미국이나 로마 교황청 등 전세계 신자들이 불원간에 이러한 사실을 시인하지 않을 수 없게 될 것입니다. 요즈음 목사들 가운데는 서양 것이라면 무엇이든 좋아하는 목사들이 있습니다. 그러한 목사들을 욕하는 것이 아니라 사실이 그렇다는 것입니다. 결국 공부를 해야 되겠다는 것입니다. 모르는 것을 가르쳐 주겠다고 하는 데 싫다고 야단들입니다. 일주일만 통일교회에 맡기면 다 넘어가니 그것이 무섭다고 하는 것입니다. 여러분들 알겠습니까?

예수님이 왜 신랑이라고 하셨겠습니까? 그것은 인륜의 도리를 거쳐야만 천도가 나오기 때문에 그렇게 말한 것입니다. 따라서 예수님은 이 땅 위에 인륜의 도리를 거친 천도를 세우시지 않으면 안 되는 것입니다. 즉 이 땅 위의 인간들이 타락했기 때문에 이러한 인간들 앞에 참부모가 필요하게 된 것입니다.

하나님이 인간을 왜 남자와 여자로 만드셨겠습니까? 그것은, 하나님께서 사랑할 수 있는 자녀를 이 땅 위에 번식시켜 만물을 주관하도록 하기 위함입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일남 일녀를 지어 놓으신 후에 기쁨 가운데에서 그들을 보시고 이제는 너희들이 생육하였으니 축복해 주겠다고 하시고 결혼식을 해주신 일이 있었습니까? 오늘날 목사들은 결혼식을 잘해주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들이 축복해 준 사람이 저나라에 가서 하나님 앞에 역적이 될 때는 자기도 역적이 된다는 사실을 그들은 똑똑히 알아야만 합니다.

16-36
재림주의 강림에 관해 무지한 기독교인들
냉정하게 생각해 볼 때 천지를 창조하신 하나님께서 과연 아담과 해와를 결혼시켜 보셨습니까? 못 시켜 보셨습니다. 아담과 해와는 결혼을 잘못 했습니다. 아담 해와는 사탄을 중심삼고 결혼식을 했습니다. 하나님은 6천년 동안 그렇게 소원하시던 결혼식을 못해 주셨기 때문에, 거꾸로 탕감복귀의 구멍을 뚫어서 맞추어야 됩니다. 참다운 아들, 참다운 딸을 세워 가지고 신랑 신부의 이름으로 어린양 잔치를 해주어야 되는 것입니다.

이것도 모르고 예수님이 구름 타고 오신다고요? 예수님이 구름 타고 오셔서 되겠어요? 그렇게 허무맹랑하게 믿고 있으니 큰일입니다. 잃어버린 것은 잃어버린 곳에서 찾아야 합니다. 땅에서 잃어버렸으니 땅에서 찾아야지 구름 타고 오시면 어떻게 됩니까? 천사장의 나팔? 그것을 봤어요? 그것이 무엇인지도 모르고 있으니 큰일이라는 것입니다. 그것은 새로운 소식을 선포하는 것을 말합니다. 통일교회에서 말하는 것은 참나팔이라는 것입니다. 아주 큰 나팔입니다. 새로운 말씀이야말로 금으로 만든 금나팔입니다. 그러므로 찾아와서 들어야 합니다.

하늘의 왕자님이 수레를 타고 오셔서 ‘아무개 잘 있었는가. 이제야 데리러 왔네 !’ 이렇게 하는 것이 하나님의 도리예요? 그것이 하늘의 천법이에요? 이런 허무맹랑한 사람들을 만나자고 예수님이 구름 타고 오신단 말이에요? 참으로 가엾은 일입니다. 그런 사람들은 세 번만 찾아가서 물어 보아도 ‘나는 모르겠소’ 하고 돌아설 사람들입니다.

지금은 제트기를 타고 다니는 시대란 말입니다. 제트기를 마음대로 탈수 있는 데도 걸어 다니는 것은 미친 짓 아녜요? 제트기로 가면 한 시간 내외로 쫓아갈 수 있는 거리도 걸어가면 열흘 이상, 백일 이상이 걸리고 맙니다. 그렇다면 가나마나한 것 아니겠어요? 그런 것은 때려 부숴야 합니다.

한 시간이면 다 해결할 일을 구태여 열흘 이상. 백일 이상을 걸려서 해결할 필요가 있어요? 한 시간내에 처리해야 할 일거리를 맡아 가지고 자꾸만 질질 끌겠다고 하니…….

여기서 여러분들이 알아야 할 것은 식구라는 것이 무엇을 중심삼은 것이냐 하는 점입니다. 예수님을 중심삼고 식구라는 명사를 다시 한번 생각해 보겠습니다.

16-37
겟세마네 동산에서 하나님의 슬픔을 부여안고 우신 예수님
예수님은 유대 나라를 넘어 로마로 가는 길을 똑똑히 바라보셨던 것입니다. ‘만일 유대교가 이스라엘 민족과 하나 된다면 로마는 내 손으로 넘어온다’ 이렇게 생각하면서 바라보셨던 것입니다. 죽은 예수님이 400년 걸려서 로마를 정복했는데 하나님의 아들로 오신 예수님이 살아 계셨다면 로마가 문제였겠어요? 이스라엘을 기반으로 하여 로마를 정복하실 수 있었던 예수님이었던 것입니다. 이것이 우리의 원리이기에 이렇게 되지 않으면 안 되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20세에 접어들면서 이스라엘 민족은 점점 피폐해졌습니다. 로마의 압정하에 시달리고 있었습니다. 이렇게 앞날의 소망이 다 막혀 버리고 황혼길로 접어든 이스라엘 민족을 바라볼 때 예수님은 말할 수 없는 민족에 대한 사랑에 불타 올랐습니다. 이스라엘을 걸어 놓고 민족에 대한 사랑에 울면서 하나님 앞에 얼마나 호소 하셨던고? 이스라엘 민족은 이것을 몰랐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시일이 가면 갈수록 점점 조급한 마음을 느끼게 되었습니다.

이스라엘의 주권자가 이스라엘을 통치하고 움직여야 된다는 신앙을 가진 예수님은 유대교를 밟고 올라서고 더 나아가서는 로마까지도 밟고 올라서야 한다는 것을 알고 계셨습니다. 예수님은 새로운 인생관과 새로운 세계관, 그리고 새로운 이념을 중심삼아 가지고 로마를 일시에 쳐버릴 수 있었던 것입니다.

4천년 동안 하나님께서 수고하시고 준비하셨던 이스라엘이 가정과 민족과 교단이 하나 되지 못함으로써 예수님의 마음 가운데 맺힌 원한이 컸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자신이 설 수 있는 터전이 없는 것을 한탄하고 자신이 설 수 있는 언덕이 없는 것을 한탄했습니다.

유대교는 누구를 기다리고 찾아야 하느뇨? 그것은 하나님께서 보내신 사람이 아니겠습니까? 역사적으로 수많은 선조들이 희생의 제물로 죽음의 길을 가면서 닦아온 그 터전은 이스라엘을 행복의 터전으로 만들기 위한 것이 아니었겠습니까? 그러한 민족이 메시아인 자신을 몰라보니 그것을 바라보는 예수님의 심정이 얼마나 외롭고 분하셨겠는가 하는 것을 우리는 알아야 합니다.

예수님은 민족을 사랑하는 마음이 크면 클수록 초조함을 느끼는 반면 하나님이 얼마나 불쌍하신 분인가 하는 것을 아셨던 것입니다. 그런 입장에서도 하나님을 원망하지 않고, 하나님을 부여안고 효성의 도리를 다 하려했던 예수님의 간곡한 심정, 삼면사방 어느 곳에도 그를 붙들어 주는 사람은 없고 눈앞에 나타나는 모든 것은 도리어 하나님 앞에 슬픔이 되는 것들 뿐이었으니, 그 슬픔을 부여안고 하나님을 위로해 드려야 하는 예수님의 사정이 얼마나 안타까우셨겠는가 ! 또한 유대 민족 앞에 몰리는 예수를 바라보시는 하나님의 가슴은 얼마나 서러우셨겠는가 ! 예수님은 이러한 것을 생각하고 통곡하지 않을 수 없었던 것입니다.

예수님은 이 땅을 책임지고 가야 할 최후의 운명의 길이 다가온 것을 생각하고 겟세마네 동산에 올라가서 하나님 앞에 “내 아버지여 만일 할 만하시거든 이 잔을 내게서 지나가게 하옵소서. 그러나 나의 원대로 마옵시고 아버지의 원대로 하옵소서(마 26 :39)”하는 기도를 올렸습니다. 이때의 예수님은 자기 자신이 죽고 사는 것이 문제가 아니었습니다. 자기가 십자가의 이슬로 희생당하는 것이 한이 되어서 하나님 앞에 기도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4천년 동안 이스라엘 선민을 찾아 세우기 위하여 수고하셨던 것을 생각하고 기도하셨던 것입니다.

고생길, 고난의 길을 밟아오면서 오랫동안 이스라엘을 위해 울면서 피맺힌 길을 걸어 나오셨던 그 과정이 이제 자기가 죽으면 전부 산산이 깨져 나가게 될 것을 아신 예수님은 하나님이 수고하신 역사적인 서러운 사정을 부여잡고 우셨던 것을 여러분은 알아야 하겠습니다.

자기가 죽으면 이스라엘 민족은 하나님 앞에 역적이 된다는 사실을 아시는 예수님은 죽는 순간에서도 이스라엘 민족을 바라보시며 ‘아버지여 저들의 죄를 용서하여 주옵소서’ 하고 기도하셨던 것입니다.

16-39
통일 신도들의 책임
하나님께서 4천년 동안 수고하여 세우신 민족인데 저들을 버리시면 저들은 어디로 갈 것인가…. 예수님은 이스라엘 민족을 염려하셨던 것입니다. 민족을 붙들고 미래의 운명을 연결시키지 않으면 안 되는 것이 자기의 책임이라는 사실을 아셨기 때문에 이스라엘의 죄를 용서해 달라고 하셨던 것입니다.

이렇게 하여서 예수님은 이스라엘에 대한 책임을 다했다는 것입니다. 배반하는 민족을 염려하면서 그 소망의 한 날을 위해 그들의 죄를 용서해달라고 하셨던 예수님의 간곡한 심정을 우리는 알아야 하겠습니다.

십자가에 돌아가신 예수님의 마음에는 한없는 슬픔과 새로운 소망에 대한 서러움이 어리어 있었습니다. 이러한 예수님의 심정을 아시는 하나님의 서러움은 얼마나 컸을 것인가! 누가 이 땅 위에서 이러한 사정을 알아 가지고 해원해 드리며, 또 그 원한을 풀어 드릴 것인가! 이 일은 끝날의 성도들에게 달려 있는 것입니다. 이러한 것을 가르쳐 주기 위해서 통일교회가 나온 것입니다.

선생님은 한국에서 하나님이 가라고 하신 길을 지금까지 걸어나왔습니다. 그런데, 기성교회 목사들은 하늘을 위하는 길로 뛰어가는 통일교회를 몰아내려고 20년 동안이나 갖은 중상모략을 다해 왔습니다. 그러나 선생님은 6천년 동안 하나님께서 찾아 나오신 섭리의 뜻을 알기 때문에 모략하는 그들을 염려하면서 밤이면 밤마다 기도하고 있다는 것을 여러분들은 알아야 하겠습니다. 그들을 위하여 기도하는 것이 선생님의 마음이라는 것입니다.

‘통일교회, 이 사탄 대마귀야! 끝날에는 적그리스도가 많이 나타난다고 했는데 그 적그리스도가 여기에 있구나 ! 죽었으면 좋겠다’ 이렇게 생각하는 목사들이 있다는 것을 잘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 결과가 어떻게 될 것인가 하는 것은 너무나도 분명한 일입니다. 오늘의 통일교회 신도들은 뼈 없는 사람들이 되어서는 안 되겠습니다. 하나님의 서러운 마음이 우리의 마음 속에 깃들어 있고, 억천만세의 원한이 우리의 가슴 속에 깃들어 있는데 이것을 풀어 드리고 해원성사해 드려 하나님을 기쁘게 모시는 것이 통일신도들의 책임입니다. 인류의 아버지로서, 만우주의 군주로서 오셨던 메시아의 한을 풀어 드리고 승리의 한 날을 맞이할 수 있는 최후의 승리자, 최후의 방패가 되기 위하여 나선 사람들이 통일신도라는 것을 여러분들은 분명히 알아야 합니다.

하나님이 임재하실 수 있고, 하나님이 품으실 수 있고, 또한 하나님을 모실 수 있는 소망의 세계, 소망의 나라, 소망의 종족과 가정과 개인은 어디 갔던고? 이와 같은 소망의 사람이 없었기에 예수님은 할 수 없이 십자가 대속의 길에 서 가지고 최후의 여행길을 가시게 되었던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예수님은 자기의 몸을 성전에 비유했고, 하나님의 성전을 위해서 자기만은 깨지지 않겠다는 다짐을 하셨던 것입니다. 그 마음을 여러분은 알아야 합니다.

16-40
사랑이 그리우셨던 예수님의 한을 풀어드려야 할 통일식구들
그렇기 때문에 예수님은 내가 할 말이 많지만 너희들이 감당치 못하기 때문에 다 말할 수 없다고 말씀하셨던 것입니다(요16:12). 그들은 왜 그렇게도 예수의 사정을 몰랐던고 ! 그들은 배가 고프면 배가 고프다고 입을 열어 말할 수 있었지만, 예수님에게 그처럼 배고픈 것을 넘어가야 할 탕감의 조건이 있었다는 것은 몰랐습니다. 이와 같은 하나님의 억울한 사정과 심정은 그 누구도 몰랐다는 것입니다.

“내가 아직도 너희에게 이를 것이 많으나 지금은 너희가 감당치 못하리라. 그러하나 진리의 성령이 오시면 그가 너희를 모든 진리 가운데로 인도 하시리니 그가 자의로 말하지 않고 오직 듣는 것을 말하시며 장래 일을 너희에게 알리시리라(요16:12-13)”고 하신 말씀을 기억합니까? 이러한 한을 품고 가신 예수님의 사정을 여러분들은 이해할 수 있어야 합니다.

십자가에 돌아가신 예수님은 몰리고 쫓김 받으셨고 억울한 심정으로 몸부림쳐야 했던 분이었다는 것을 우리는 이해해야 합니다. 그분이 걸어가신 그 길은 아직까지 눈물의 길로 남아 있고, 그분이 걸어가신 그 피의 노정이 아직까지 역사노정에서 그치지 않고 있다는 것을 여러분들이 알아야 합니다.

통일교회 신도들은 이러한 것들을 알아야 합니다. ‘예수님이 바라시던 그 세계, 그 세계를 내가 찾게 하여 주시옵소서. 예수님이 찾으시던 그 나라, 그 나라를 내가 찾게 하여 주시옵소서. 예수님이 품고 싶었던 그 민족, 그 민족을 나로 하여금 품게 하여 주시옵소서. 예수님이 안식하고 싶었던 그 가정, 그 가정에서 살 수 있게 하여 주시옵소서’ 하면서 외로왔던 예수님의 심정을 부여안고 그분을 형님과 같이 모실 수 있어야 됩니다. 그분을 부모 앞에 나 이상 사랑받을 수 있고, 나 이상 존경받을 수 있고, 나 이상 귀여움을 받을 수 있는 자리에 모셔야 되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이 땅에 오셔서 부모를 못 가진 분이었습니다. 따라서 그 마음에는 부모의 사랑이 무한히 그리웠다는 것입니다. ‘엄마! 아빠!’ 하고 부르면 ‘오냐, 내 아들아!’ 하고 대답하면서 ‘나도 너의 뜻을 위하여 협조하겠다’고 말해 주는 부모를 갖고 싶으셨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부모의 사랑을 몹시도 그리워했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친척들로부터도 사랑을 받는 입장이 못 되었습니다. 예수님께서 예루살렘 성전에 올라갔을 때 그 가족들은 전부 그를 미치광이로 취급했던 것입니다. 이웃 동네에 아저씨가 있었지만 그 아저씨가 자신이 부모의 사랑을 받고 있는 것으로 생각하고 있었기 때문에 예수님은 그 아저씨를 대하기 싫어져 대하지 못했다는 것입니다. 사실은 그 아저씨의 사랑이 그리웠던 예수님이었습니다. 그러기에 예수님은 하나님을 바라볼 때마다 하나님도 이 땅의 사람을 얼마나 사랑하고 싶으실 것인가 하고 생각하지 않을 수 없었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중심삼은 일가, 그리고 나라를 중심삼은 예수님을 바라볼 때, 즉 이스라엘 민족을 중심삼고 요셉의 일가를 두고 볼 때 가족들과 친척들 앞에서 사랑을 받지 못했던 예수님이었다는 사실을 우리는 알아야 하겠습니다. 이스라엘 민족에게서 사랑을 받지 못한 예수님 ! 이스라엘 민족으로부터 몰림을 받고 죽어가야 했던 예수님! 그분이 이 땅에 오셔서 사랑을 받을 수 있었던 곳이 그 어디에 있었던고? 가슴이 미어지도록 사랑이 그리웠던 예수님 ! 우리는 그 한스러웠던 일들을 해원해 드리지 않으면 안 되는 것입니다.

16-42
식구라는 명사를 내세우게 된 처절한 사정
예수님은 나라없는 백성의 한 사람이었습니다. 민족이 있었어도, 주권국가가 있었어도 보호를 받지 못하는 백성의 한 사람으로 태어나셨던 예수님! 그분에게는 친척도 있었고 가정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사랑을 받지 못하였던 분이었습니다. 그분은 사랑이 그리웠던 것입니다. 부모의 사랑이 그리웠고, 6촌 형제, 아저씨, 할아버지, 동네 사람 등 주위의 모든 사람들의 사랑이 그리웠던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을 품어 주어야 할 민족은 어디 갔던고. 자기를 품어 주어야 할 아버지는 어디 갔던고? 사랑을 받을래야 받을 수 없었고, 사랑을 할래야 할 수 없었던 예수님은 참으로 불행한 분이었습니다.

하나님의 심정을 대신하여 지상에 오신 예수님이 이 땅 위의 인간들에게 몰림을 받았을 때 그 심정은 어떠하셨겠습니까? 하늘을 부여안고 인류의 생명줄만을 바라보고 나가셨던 예수님 ! 그러나 결국에는 십자가상에서 죽어 가면서 하늘을 바라보시던 예수님을 여러분은 알아야 합니다.

사랑을 받지 못한 예수님, 또한 사랑을 할 수 없었던 예수님, 이 천지간에 부모는 수없이 많은데 예수님이 사랑할 수 있는 부모는 어디에 있었던고! 이 땅 위에 수많은 형제들이 있지만 예수님이 사랑할 수 있는 가족은 어디에 있었던고! 예수님이 사랑할 수 있는 친척들은 어디에 있었던고! 예수님이 사랑할 수 있는 민족은 어디 있었으며, 국가는 어디 있었으며, 세계는 어디에 있었던고! 쫓기고 몰림을 받은 예수님 ! 그러나 하늘은 이처럼 안팎으로 몰림을 받는 예수님의 서러운 사정을 모두다 알고 계셨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관점에서 우리들이 해야 할 일은 무엇이겠느뇨?

통일교회의 식구라고 하는 명사는 여기서부터 인연지어진 것입니다. 인류를 모아 하나님께서 바라시는 식구의 인연을 갖추기 위해 천륜을 가르치는 것이 소원이었기 때문에 식구라는 명사를 내세우게 된 것입니다. 그러므로 식구 된 여러분들에게는 그렇게 비참하고, 억울하고 분했던 예수님의 한을 책임지고 해원해 드려야 할 사명이 있는 것입니다. 또한 십자가의 고빗길을 갔던 예수님의 고생길을 대신 책임지고 가야 하는 사명이 있는 것입니다. 내일을 기대하면서 한을 남기고 가신 예수님 ! 그 한을 풀어드려야 하는 것이 여러분들의 사명이라는 것입니다.

죽음을 각오하고 이 뜻길을 개척하겠다고 나선 무리가 통일교회 식구들입니다. 이 길을 개척하기 위하여 여러분들을 모아 놓고 식구라는 명사를 가르쳐 주게 된 처절한 사정을 여러분들은 알아야 됩니다. 이와 같은 내용이 깃들어 있는 식구라는 이름을 걸어 놓고 우리들은 지금까지 이 길을 걸어나온 것입니다.

이제는 1965년의 해도 기울어 가고 있습니다. 1965년을 매듭짓고 국가의 운명을 책임지고 생사를 결단해야 할 시기가 다가오고 있습니다. 이런 판국에 여러분들은 과연 식구라는 이름으로 하나님 앞에 당당히 설 수 있느냐 하는 것이 문제입니다. 우리는 이것을 다시 한번 냉철하게 생각하지 않을 수 없는 것입니다.

우리들이 아무리 힘을 다하여 노력한다 하더라도 예수님과는 비길 수가 없다는 것을 여러분들은 알아야 합니다. 그분의 제자였던 사람들은 진정한 제자들이 아니었습니다. 그분의 부모도 진정한 부모가 아니었고. 그분의 친척들도 진정한 친척들이 아니었습니다. 그분이 살았던 세계도 진정한 그분의 세계가 아니었습니다. 그는 자연스럽게 부를 수 있는 사람을 한 사람도 갖지 못했다는 사실을 우리는 알아야 하겠습니다.

마리아를 사랑할래야 사랑할 수 없었던 예수님 ! 베드로와 요한과 야고보를 데리고 다니시면서도 그들을 사랑할래야 사랑할 수 없었던 예수님이었다는 것을 여러분들은 알아야 하겠습니다. 이러한 역사적인 한이 맺혀져 있기 때문에 오늘날 하나님의 아들딸들이 이 한을 풀어 드려야만 하는 것입니다. 그렇지 않고는 하나님의 아들딸이 될 수 없습니다.

구원을 받아 가지고 천국에 간다…. 말은 참으로 좋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가슴에 못이 박혀져 있고, 예수님의 가슴에 멍이 들어 있는 그 상처를 누가 치유해 드릴 것인가! 그 마음을 위로해 드릴 수 있는 사람이 못되면 절대로 천국에 못 들어간다는 사실을 똑똑히 알아야 합니다.

16-44
통일교회가 가는 길
그러면 오늘날 통일교회의 식구들은 어떻게 해야 되겠느냐? 사랑을 받지 못하셨던 예수님을 대신하여 사랑받을 수 있는 사람이 되어야 하겠고, 사랑을 하지 못하셨던 예수님을 대신하여 사랑할 줄 아는 사람이 되어야 하겠습니다. 이 말이 무슨 말인가 하면, 우리 통일교회의 신자들은 어디를 가든지, 예를 들어 어린애들을 볼 때는 예수님을 대신하여 그들을 사랑할 수 있어야 한다는 말입니다. 그처럼 예수님에게는 사랑하시지 못했던 민족적인 한이 남아 있고 세계적인 한이 남아 있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통일교회 식구들은 어린아이들을 예수님과 같이 사랑할 수 있는 아저씨가 되고, 아주머니가 되고, 형님이 되고, 누님이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무슨 말인지 알겠습니까? 한 많은 예수님의 그 한을 풀어드려야 하는 것이 우리들의 사명이기 때문에 우리들은 예수님의 아저씨가 되고, 형님이 되고, 동생이 되고, 누님이 되지 않으면 안 된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사랑할 수 있는 어머니 아버지, 예수님을 사랑할 수 있는 할머니 할아버지, 예수님을 사랑할 수 있는 친척이 못 되었던 것이 한이었기에 여러분들이 그 한을 풀어 드리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예수님의 형님이 되려면 형님의 입장에서 예수님을 사랑하고, 누님이 되려면 누나의 입장에서 예수님을 사랑해야 합니다. 또 한편으로는 세계인류를 사랑해야 합니다. 그래야만 예수님을 예수님으로서 대접하는 한가족의 입장에 설 수 있고, 친척의 입장에 설 수 있는 것입니다. 그래야만 우리들로 말미암아서 하나님의 뜻을 중심삼은 새나라가 세워질 수 있고, 예수님을 사랑하지 못했던 그 나라를 대신하여 예수님을 사랑하는 새로운 나라를 세울 수 있는 것입니다.

통일교회가 가는 길은 이러한 길입니다. 그래야만 모든 국가들이 예수님을 사랑할 수 있고, 전세계 인류가 예수님을 사랑할 수 있는 세계, 즉 천국이 이루어질 수 있다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그렇게 이루어지기를 기도해 본 일이 있습니까?

우리들이 언제 세계 인류를 놓고 예수님과 같이 생각하고 사랑해 보았습니까? 못해 본 것이 한이라는 것입니다. 가는 길이 아무리 험하고 억세다 하더라도 그것을 싫다 하지 않고 사랑으로 채우면서 가야 하는 것이 인생길이라는 것을 여러분은 알아야 됩니다. 그렇지 않고서는 예수님의 한을 풀어 드리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만나고 싶었던 예수님! 만나서 같이 살고 싶었던 예수님! 그 사정을 받아 줄 수 있는 내가 되어야 합니다. 그 사정을 들어줄 수 있는 어머니 아버지가 되어야 합니다. 그 사정을 들어 줄 수 있는 아저씨가 되어야 합니다. 그 사정을 풀어 드릴 수 있는 나라가 되어야 합니다. 그 나라가 예수님의 사정을 몰라 주었기 때문에 나라를 사랑하시지 못했던 예수님 대신 그 나라를 사랑하고 그 세계를 사랑할 수 있어야 합니다. 그 민족과 그 종족을 사랑해 줄 수 있어야 합니다. 그래야 사랑하시지 못했던 예수님의 한을 풀어 드릴 수 있는 것입니다.

16-45
예수님의 식구가 되려면
그러기 위해서는 예수님이 사랑하시지 못했던 한을 풀어 드릴 수 있는 환경을 만들어 놓아야 합니다. 그래야만 오늘의 여러분 자신들이 예수님 앞에 충성을 다하는 동생이 될 수 있고, 누나가 될 수 있고, 한가정의 가족이 될 수 있고, 종족이 될 수 있습니다. 그래야 하나님의 사랑을 받는 무리가 될 수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들은 그렇게 사랑해 보았습니까? 예수님이 사랑하시지 못했던 그 가정을, 예수님이 사랑하시지 못했던 그 민족을, 예수님이 사랑하시지 못했던 그 세계를 사랑할 수 있어야 합니다.

이렇게 사랑하지 못해서 몸부림 칠 줄 아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그래 가지고 하나님이 같이할 수 있는 자리에 서야 하는 것입니다. 땅 위에서 그러한 자리를 넘어설 수 있어야만 땅 위에서 골고다의 고난을 피해 하나님 앞에 갈 수 있다는 사실을 여러분들이 알아야 하겠습니다. 그래야만 하나님의 아들이 될 수 있으며, 하나님과 생명의 인연을 맺을 수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들이 그래야만 식구가 될 수 있는 것입니다.

‘주여 당신은 언제 주로서의 대접을 받으셨습니까? 당신은 나그네의 길을 걸으셨지요? 옥에 갇히셨지요? ‘ 하고 예수님의 슬프셨던 사정을 풀어 드릴 수 있어야만 하나님과 부자지인연(父子之因緣)으로 오셨던 예수님과 식구의 인연을 맺을 수 있는 것입니다. 이것은 아버지와 아들의 인연을 세울 수 있는 입장에 서 있기 때문에 그런 말이 적용되는 것이지, 종과 같은 입장이라면 그런 말이 적용될 수 없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우리를 자식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에 병에 걸린 자식, 혹은 사형장으로 가는 자식을 보고 통곡하는 사람이 있을 때는 그를 위로해 주고 싶으신 것입니다. 그것이 부모의 심정인 것입니다. 이렇게 예수님은 아버지와 아들의 인연을 세워야 할 사명, 즉 천도를 세워야 할 사명을 가지고 오셨다는 사실을 여러분들이 알아야 하겠습니다.

내 몸이 아무리 어려운 자리에 있다 할지라도, 인류를 자녀의 입장에 세워 놓고 그들을 위로하고, 그들을 위해 서러워하고, 그들이 당하는 고통을 네가 당하는 것같이 생각하는 것이 부모의 심정인 것입니다. 이러한 심정을 참으로 이해할 수 있어야만 여러분이 식구가 될 수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들은 언제 그래 보았습니까?

오늘도 수많은 식구들이 남한 각지로 나가서 전도하고 있습니다. 일선에서 싸우고 있습니다. 그런데 여러분들은 몇 번이나 예수님과 같은 마음, 혹은 예수님을 사랑하는 동생과 같은 마음을 가져 보았습니까? 그러한 마음을 가져 보아야 하는 것입니다.

자기 자식이 그런 길을 가고 있다면 그 자식을 천번 만번 찾아가고 싶은 것이 부모의 마음이 아니겠어요? 자기 동생이 그런 길을 가고 있다면 대신 이 주고 싶은 것이 형제의 마음이 아니겠어요? 자기 가족 가운데 그런 식구가 있을 때는 찾아가 보는 것이 식구 된 도리가 아니겠어요?

여러분이 이 민족과 세계를 이와 같이 사랑하는 입장에 서지 않고서는 하나님의 뜻을 세울 수가 없습니다. 하나님의 뜻을 세울 수 있는 자녀가 못 됩니다.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진 나라에 갈 수 없습니다. 여러분들은 식구라는 명사가 이렇게 엄청나고 두려운 말이라는 것을 알아야 하겠습니다.

우리들에게는 싸움의 노정이 남아 있습니다. 하나님이 간곡한 마음으로 걸어오신 그 노정에 이어서 내가 달려가야 할 길이 남아 있다는 것을 우리는 알아야 하겠습니다. 여러분들은 이 남은 노정을 책임지겠다고 몸부림칠 줄 아는 사람들이 되어야만 식구라는 명사를 지닐 수 있다는 것을 깨달아야 합니다. 이 식구라는 이름을 가지고 이 땅 위에서 실천함으로써 예수님에게 맺혀 있는 한을 해원성사해 드리고, 한 맺힌 죽음길을 가신 예수님의 십자가의 한을 민족과 세계를 붙들고 우리가 해원해 드려야 되는 것입니다.

16-47
식구라는 명사를 유린하는 사람이 되지 말라
이렇게 우리가 세계를 긍휼히 굽어볼 수 있는 마음을 가져야 이 세계가 복귀의 길을 갈 수 있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사실을 알고 여러분들은 식구라는 명사를 유린하는 사람들이 되지 말아야 하겠습니다. 꼭 그래야만 합니다. 그러면 여러분들은 틀림없이 하나님의 아들딸들이 되어 천국까지 들어갈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틀림없이 그 나라에 들어갈 수 있습니다. 그러한 세계를 이루어 놓으면 하늘 땅이 공인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이러한 사실을 중심삼고 식구로서의 나의 심정이 어떠해야 되겠느냐 하는 것을 여러분들은 하루에도 몇 번씩 생각해야 되겠습니다. 여러분에게 좋은 것이 생기면 그것이 입을 것이든 먹을 것이든, 그것을 먼저 자기가 입거나, 먹으려 해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선은 무엇이고 악은 무엇이냐? 악은 나를 중심하고 끌어들이는 것이요, 선은 절대적인 주체 앞에 내가 끌려가는 것입니다. 즉 악은 전체 앞에서 내가 주체가 되고자 하는 것이요, 선은 전체 앞에 내가 대상적인 입장에서고자 하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양심은 자꾸 갚아 주라고 주장합니다. 여러분의 마음이 좋으면 또 하라고 권유합니다. 3천만 민족을 통하여서 30억 인류를 대하고 30억 인류를 통하여서 하늘 땅 앞에 보답해야 됩니다.

그러나 이것으로 만족할 수는 없습니다. 양심은 세계를 정복하고, 하늘땅 위에 하나님의 목적을 이루고, 또 하나님까지 정복한다 하더라도 만족할 수 없는 것입니다. 하나님까지 정복하고 나서도 만족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하나의 목적세계의 주관자이신 하나님을 사로잡는 다 하더라도 또 모자란다는 사실을 여러분들은 알아야 합니다. 그러면 무엇까지 정복해야 되느냐? 하나님의 심정 가운데 숨어 있는 사랑까지 정복해야 되는 것입니다. 양심은 쉬려고 하지 않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오늘날의 종교는 그것을 가르쳐 주어야 하는 것입니다.

종교가 처음에 가르쳐 주는 것이 무엇이냐? 하나님을 가르쳐 줍니다. 그 다음에는 무엇을 가르쳐 주느냐? 하나님의 목적을 가르쳐 줍니다. 또 그 다음에는 무엇을 가르쳐 주느냐? 하나님의 사랑을 가르쳐 줍니다. 종교의 가르침으로 볼 때 인간은 하나님의 목적의 실체가 되어야 합니다. 즉 하나님의 것이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러한 인연 가운데서 양심이 영원토록 안식할 수 있는 터전을 마련하여 그 자리에 영원토록 있고 싶어하는 것이 우리들의 마음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여러분들이 복귀되어 가고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이러한 사실을 알고 보면 양심이 참으로 고마운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처음으로 교회에 들어온 사람은 ‘아! 인생의 가치가 이와 같구나’ 하고 감명 깊게 느끼게 됩니다.

16-48
무지에는 완성이 없다
만우주의 주체인 하나님 앞에, 영원을 품을 수 있는 사랑의 하나님 앞에 당당히 서서 하나님과 하나 될 수 있고 하나님의 사랑을 점령하는 사람이 될 때는 만우주가 그의 것이요, 모든 만물의 주관권이 그의 것으로 귀결되지 않을 수 없는 것입니다. 이러한 입장에서 인간을 만물의 영장이라고 부르는 것입니다.

사람의 욕심에는 끝이 있습니다. 하늘보다 높고 땅보다 넓은 것이 아닙니다. 그러면 욕심은 무엇을 끝으로 삼고 있는지 여러분들은 압니까? 종교의 목적이 무엇이냐 하는 것을 알면 그것을 알 수 있습니다.

세계를 통일하는 데는 인도(人道)를 중심삼고 통원하는 것이 아닙니다. 천도(天道)를 중심삼고 통일하는 것입니다. 여러분의 욕심도 그렇지요? 못난 사람이나 잘난 사람이나 세계를 내 것으로 하고 싶지요?

그리고 하나의 목적을 중심삼은 하나님이시기에 두 목적을 두실 수 없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어떤 천적인 곡절을 거치더라도 하나의 목적을 세워야 하는 것입니다. 외적인 세계가 그렇게 되어 나오기 때문에, 내적인 종교도 통일이념을 가지고 나오지 않을 수 없습니다. 따라서 이러한 시대적인 흐름에 의해서 통일교회라는 것이 필요하게 되었다는 것을 여러분들은 알아야 되겠습니다.

그러면 무엇을 중심삼고 통일 해야 할 것이냐? 심정을 중심삼고 통일해야 합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사랑과 예수님의 사랑을 포로로 하자는 것입니다. 그래 가지고 과거의 하나님, 현재의 하나님, 미래의 하나님의 심정을 이어받아 하나님을 존경하자는 것입니다.

여기에서 여러분이 알아야 할 것은 무지에는 완성이 없다는 사실입니다. 오늘날은 인공위성시대인데 주먹구구식으로 믿는다면 되겠습니까? 무지에는 개인완성이 있을 수 없다는 사실을 여러분들이 알아야 되겠습니다.

이러한 의미에서 통일교회가 필요하다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세계적인 정세가 통일의 깃발 아래 모이지 않을래야 모이지 않을 수 없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천륜의 곡절입니다. 곡절이 이러하기 때문에 선생님은 통일교회 식구들을 총동원하는 것입니다. 처음으로 여기에 오신 분이 있으면 기도를 해보십시오. 그러면 이렇게 되어 있는 것이 사실임을 아실 것입니다.

이러한 엄청난 사실을 알고, 역사적이고 시대적인 해원을 하고 미래를 향하여 용진하는 무리가 여러분들이라는 것을 알아야 하겠습니다. 선생님은 여러분들이 어디까지나 식구라는 명예를 잊지 말아 주시기를 진심으로 바라는 바입니다.

16-49
기 도
지금까지의 복귀의 노정 위에 얼마나 많은 곡절이 있었을까를 생각하면 생각할수록 저희들이 가야 할 심정의 고빗길이 남아 있다는 것을 생각하지 않을 수 없사옵니다.

오늘 여기에 어린 자녀들을 모아 놓고 슬펐던 역사의 사실을 다시 한번 생각할 수 있는 시간을 가졌사옵니다.

어제는 크리스마스여서 이날을 축하하는 사람은 많았사오나, 이와 같은 예수님의 심정을 부여안고 눈물을 흘리면서, 한의 심정을 가지고 아버님을 대하는 사람이 몇 명이나 있었사오며, 또한 내일의 하늘길을 염려하는 자녀가 몇 명이나 있었사옵니까? 헤아릴 수 없을 만큼 수고하신 아버님이라는 사실을 몇 명이나 알고 있사옵니까? 불쌍하고 불쌍하셨던 아버님이었다는 것을 다시 한번 명심하게 하여 주시옵소서.

아버지의 노정에 이렇게 곡절이 많았던 것과 아버지의 사정이 이렇게 초라한 것이 우리 선조들의 죄로 말미암은 것인 줄 알고 있사옵니다. 아담 해와의 실수로 말미암은 이 모든 골고다의 한을 저희들도 밟고 넘어가야 할 때가 왔사옵니다.

저희들은 내일의 여명을 맞이하기 위하여 이 와중에도 흑암길을 더듬어가지 않으면 안 되겠사옵니다. 이 흑암길을 거쳐가야만 새로운 여명을 맞이할 수 있다는 것을 알고 있기 때문에, 통일의 역군들은 남들이 싫다 하는 새벽길을 더듬으며 지금까지 싸워 나왔사옵니다. 이 노정에서 저희들이 눈물 흘리는 일이 있을 때, 눈물 흘리시는 당신과 같이하기를 바라고 땀 흘림과 굶주림이 있을 때도 당신의 수고의 노정을 위로할 수 있는 한날을 세우기 위해 몸부림쳤던 것을 당신은 알고 있사옵니다.

한 많았던 과거를 추억으로 남기고 눈물과 더불어 하나님을 염려하는 자들이 되게 하여 주시옵고, 한 많은 추억과 눈물로 지내오신 한 많은 지난날을 청산하시고 내일의 선을 찾아 웃으시는 소망의 아버님의 모습이 그리워, 오늘의 자기의 초라하고 불쌍한 모습을 잊은 채 효자의 도리를 다 하겠다고 몸부림칠 줄 아는 당신의 아들딸들이 되게 하여 주시옵기를, 아버님, 간절히 바라옵고 원하옵니다.

당신이 걸어오신 길을 따라와 보니 십자가의 길이었사옵니다. 그러나 남이 알지 못하는 그 길을 개척자의 심정으로 몸부림치며 따라와 보니 그 길이 망하는 길이 아님을 알았사옵니다.

인간들은 조롱하였으나 당신은 격려하셨사옵니다. 수많은 백성들과 수많은 인간들은 반대하였으나 당신은 앞에 서서 위로해 주셨사옵니다. ‘내가 있고 영계에 있는 천천만 성도들이 네 갈 길을 옹호한다’고 하시며 몇번이고 권고하셨던 것을 저희는 알고 있사옵니다. 제가 그런 자리에 있을때 위로해 주셨듯이 외로운 저의 뒤를 따르고 있는 저들도 외로운 자들이오니, 그들에게도 아버지의 사랑이 같이 하여 주시옵기를 간절히 바라옵고 원하옵니다.

당신의 간곡한 사정과 서러운 심정을 부여안고 자신이 책임지겠다고 결의 하는 딸들이 있사옵니까? 그들을 격려하여 주시옵소서. 그러한 아들들이 있사옵니까? 그들을 붙들어 주시옵소서.

당신이 남기신 최후의 싸움터에서 승리의 영광을 쟁취하여, 아버님 앞에 개선가를 드높이 울리며 아버지의 영광을 찬양하는 자랑스러운 모습을 보여드릴 수 있는 참다운 아들딸들이 되게 하여 주시옵기를, 아버님, 간절히 바라옵고 원하옵니다.

아버지! 한민족의 미래를 긍휼히 보시옵소서. 이 민족이 가야 할 길은 단 하나밖에 없사옵니다. 정치, 경제, 문화적인 면에 있어서 이 민족이 세계에 공헌할 것이 아무것도 없사옵니다. 심정적인 면 이외에는 공헌 할 것이 없음을 아옵니다.

천륜의 도리를 따르고 있는 통일의 역군들이 이민족 앞에 지대한 공헌을 하지 않으면 안 되고 세계사적인 사명을 해야 되는 것을 알고 있사옵니다. 그러므로 저희들은 죽을래야 죽을 수 없는 몸들임을 스스로 자각하게 하여 주시옵고, 안 움직일래야 안 움직일 수 없는 책임과 사명을 짊어진 역군들임을 스스로 자각하게 하여 주시옵소서. 그리하여 내일의 승리를 쟁취하고, 오늘의 싸움에서 지치지 말게 하여 주시옵기를 간절히 바라옵고 원하옵니다.

그 누가 뭐라 하든, 그 누가 반대하든, 그 누가 모략하든 당신을 따르고, 당신이 가신 골고다의 산정에서 당신을 배반한 수많은 무리들과 같이 당신을 모른다 하고 뒤돌아서는 자들이 되지 말게 하여 주시옵소서.

넘어야 할 십자가의 고빗길을 마저 넘어가야 되겠사오니, 이제 저희들 앞에 세계적인 골고다가 찾아온다 할지라도 저희들은 새 대열을 갖추어 이 길을 향하여 직행하고, 그 고개를 넘어서 승리의 개가를 드높이 울릴 수 있는 저희들이 되게 하여 주시옵소서.

당신이 기뻐할 수 있는 가족과 형제들이 나오기를 얼마나 바라셨사오며, 그 종족과 그 민족과 그 국가를 얼마나 바라셨사옵니까? 그렇게 될진대 이 모든 골고다의 산정은 평지가 되지 않을 수 없사옵고, 사탄세력은 쓰러지지 않을 수 없사오며, 하늘은 뜻의 채찍을 들어 치지 않을 수 없다는 사실을 저희들이 알고, 남아진 이 7년노정을 순종해 갈 줄 아는 당신의 자녀들이 되게 하여 주시옵기를 간절히 바라옵니다.

저희에게는 아버지를 사랑하지 못한 한이 남아 있사오니 그 한을 풀어야 되겠사옵고, 아버지 앞에 효성의 도리를 다하지 못한 한이 남아 있사오니 그 한을 풀어야 되겠사옵고, 아버지 앞에 충신의 도리를 다하지 못한 한이 남아 있사오니 그 한을 풀어야 되겠사옵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싸움의 노정에서 효성의 도리를 다해야 되겠사옵고, 충신의 도리를 다해야 되겠사옵니다.

아버지를 모셔 놓고 효성을 다하고 충신의 도리를 다하면서 아버지를 시봉할 수 있는 평화의 천국이 어서 속히 이루어져야 되겠사옵니다. 그날을 위하여 저희들은 오늘을 자랑하고 내일을 준비해야 되겠사옵고, 기쁨가운데 가는 길에 지치지 않게 하여 주시옵고, 하늘을 배반하는 자가 되지 말게 하여 주시옵기를 간절히 부탁하고 원하옵니다.

1965년, 한 많은 한 해, 역사적인 곡절을 넘기는 한 해가 지나가게 되었사옵니다. 남은 일주일간 새해를 맞는 그날까지 새로운 자아의 모습을 갖추어, 깊은 잠 가운데 있는 이 민족을 위해 진정으로 아버지 앞에 축원할 수 있는, 대신자의 사명을 다할 줄 아는 통일의 역군, 통일교단이 되게 하여 주시옵기를 간절히 바라옵고 원하옵니다.

하늘이 저주하는 자리에 들어가지 말게 하여 주시옵소서. 저희가 흘리는 눈물은 만민의 생명의 원천이 되고, 뭇 생명이 그 눈물의 길을 가지 않을 수 없는 생명의 동기가 되게 하여 주시옵소서. 뭇 백성이 하나님 앞에 부복하여 충신의 도리를 다하고 감사할 수 있는 인연을 남기는 저희들의 행로가 되게 하여 주시옵소서. 저희의 역경의 길이 그런 길이 되게 해주시고, 저희의 슬픈 생활이 그런 생활이 되게 하여 주시옵기를, 아버님, 간절히 바라옵고 원하옵니다.

이 한해의 남은 날들에도, 아버지, 이 민족 앞에 복을 베풀어 주시옵고, 세계 만민에게 복을 베풀어 주시옵소서. 천상에서 재림의 한 날을 고대하는 수많은 영인들의 한을 해원해 주시옵고, 아버님과 예수님의 한이 해원되고, 이 땅에 평화의 왕국이 건설되고, 아버지가 통치하실 수 있는 그 세계가 어서 속히 이루어지게 하여 주시옵소서. 간절히 바라옵고 원하옵니다.

만만세의 영광과 승리가 이 땅 위에 충만하여 아버님과 더불어 기뻐하고, 아버님께 영광을 돌려드릴 수 있는 그 한 날이 어서 속히 오기를 간절히 간절히 부탁드리면서, 모든 말씀 참부모님의 이름으로 기도하였사옵나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