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44 to 15-58: 중심을 구하여서 하나가 되자

중심을 구하여서 하나가 되자
1965.02.07 (일), 일본 동경교회

15-44
중심을 구하여서 하나가 되자
로마서 11:13-24

이 현상계에 존재하는 모든 것은 중심을 세우지 않으면 영원히 존재할 수 없습니다. 우리들 개인에 있어서도 중심을 결정한 사람은 강한 사람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영원히 존재할 수 있는 터전을 결정한 다음 거기에서부터 출발하여 새로운 기준을 세워 나가야 된다는 것을 우리들은 생활을 통해서 항상 체험하고 있습니다.

15-44
영원한 중심
몸의 중심은 마음입니다. 자연은 사람을 중심으로 존재합니다. 범위를 더 넓혀서 생각하면, 세계는 만물을 창조한 그 이상(理想)을 중심으로 하여 하나 되어 가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전지전능하신 하나님이 계신다면 모든 것은 그분을 중심으로 하나 되지 않을 수 없다는 결론이 나옵니다.

오늘날 이 세계에는 수많은 국가들이 있습니다. 그 국가들은 서로 각각 다른 배경과 문화를 갖고 있으며, 걸어나온 노정도 제각기 다르고 역사 또한 다릅니다. 그런데 이와 같이 존재하고 있는 국가들 중에서 어차피 하나의 중심이 되는 국가 형태가 나타나지 않으면 안 됩니다.

중심이 되는 그것은 어느 한때에 지나가 버리는 것에 지배받아서는 안 됩니다. 또 주위의 어떠한 것에 지배받아서도 안 됩니다. 그것은 모든 현상계의 중심이 되어야 하며, 사람들이 추구하는 모든 것이 인정하지 않을 수 없는 중심이 되어야 합니다. 또 이 중심은 시대를 움직이고 역사의 대본(大本)을 기본으로 존재하고 있는, 이 현세의 어느누구도 인정하지 않을 수 없는 중심이어야 합니다. 나아가 그 중심은 미래의 어떠한 세계에서도 빼놓을 수 없는 중심이어야만 합니다. 그 중심은 역사가 지금까지 추구해 나오는 것이고, 선의 길을 찾아나가는 종교가들이 지금까지 추구해 나오는 것입니다. 그러면 그 중심이 과연 이 지상에 나타났느냐? 아직도 그 중심은 완전히 나타나지 못하고 있는 것이 사실입니다.

만일 하나님이 계셔서 이 지상에 하나의 중심을 세워야겠다는 소망을 갖고 계신다면, 이 세상에 진정한, 인간을 중심으로 한 진정한 사회와 진정한 세계가 수립되지 않으면 안 됩니다. 이것은 하늘땅이 동시에 원하는 것이요, 우리 인류 전체가 바라는 중대한 과제인 것입니다. 그런데 이 지상은 하나의 시점에서부터 변하고 또 변하여 오면서 그릇된 방향으로 흘러 나왔습니다. 그러나 최후까지 남게 되는 기준, 즉 하나의 중심을 결정해야 한다는 목적권에서 벗어날 수는 없는 것입니다.

이와 같이 모든 존재물은 절대적인 신(神)을 중심으로 하고, 나아가서는 절대적인 이상을 중심으로 하여, 그 중심을 그리워하고 또 그리워하면서 그것을 찾아 나가는 데서 기쁨을 찾고 생의 가치를 발휘할 수 있는 내적 기준을 찾지 않으면 안 됩니다. 이 지상에 하나의 이상세계가 세워졌을 때 그 세계의 중심이 될 개개인이 그 이상세계와 마음속 깊이 영원한 유대관계를 맺을 수 있는, 다시 말해서 일체화할 수 있는 중심 위에 놓여지는 데는 결코 외적인 조건을 가지고서는 안 됩니다. 이제까지의 역사관으로 말해 왔던 어떠한 것으로도 안 되고 자아 관념으로도 안 됩니다. 인간의 마음 깊숙한 밑바닥에서 영원히 불변의 형(型)을 유지하고 있는, 하나님의 창조이상 앞에 영원히 수수작용을 할 수 있는 심정으로만 가능한 것입니다.

맨 처음 천지를 창조하실 때, 하나님께서는 이 천지와 당신의 내적 기준과 영원한 인연을 맺기 원하시는 우주관과 창조이상과 창조목적이 있었습니다. 그러한 것의 중심은 바로 하나님의 심정이었던 것입니다.

이러한 관점에서 생각할 때에, 우주의 근원은 어디까지나 하나님 자체이지만 우주 창조라는 현상을 일으키게 한 최초의 근거는 하나님의 심정이었던 것이요, 그 심정을 중심으로 일체화할 수 있는 이상권이 있었다는 것을 우리들은 생각할 수 있습니다.

15-46
잃어버린 세계를 다시 찾기 위해서는
하나님은 우주를 창조하시기 전에, 그 심정으로 만물 창조의 목적을 생각하시고 모든 성상을 중심으로 모든 피조물을 창조목적과 일체화시키면서, 하나하나의 창조과정을 통과시켜 지어낸 것이 창조이상의 인간인 것입니다. 그것이 구체화되어 나타난 것이 하늘을 상징한 남자고 땅을 상징한 여자입니다. 또 개인에 있어서는 그것이 마음과 몸으로 나타났습니다.

이와 같이 이 현상계의 모든 것은 주체와 대상의 관계를 구체화해서 하나의 목적권내에서 우주의 대운에 휩쓸리면서 그들 나름대로의 생활 기준을 세우며 살아가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심정을 중심으로 하여 그 목적 세계에서 존재하고 생활해야 하는 데 그렇게 되지 못했다고 하는 것은 우주의 비극이며 인류역사의 비극입니다. 만약에 하나님의 이상 실체로서의, 목적의 중심으로서의 인간이 하나님의 심정과 일체화하였다면, 그 누구도 방해할 수 없고 침범할 수도 없는 절대적인 기준이 달성되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인간 조상이 그 심정적인 일체의 것을 상실하였기 때문에, 우리는 다시 그 이상의 세계, 목적의 세계를 복귀하지 않으면 안 됩니다. 타락의 결과로 목적관이 다른 위치로 돌아가 버렸고, 심정적인 절대기준이 반대 방향으로 향하게 되어 버린 것입니다. 바꾸어 말하자면 하나님을 중심으로 해야 될 그 중심이 사탄을 중심으로 하는 반대의 위치로 옮아가게 된 것입니다. 가서는 안 될 자리에 가서 머물게 되고 말았다는 것입니다. 그러니 이것을 원래의 자리로 바꾸어 놓아야 하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은 타락한 인류에게 시대에 따라 새로운 이상과 새로운 심정을 찾아 주시려고 지금까지 섭리를 거듭해 나오셨습니다. 외적인 기준은 물론 내적기준의 실체로서의 인간은 심정적인 절대기준에 서서 그 목적세계에서 생활해야 했는데, 타락하여 그 세계를 잃어버렸기 때문에 이제까지 인간들은 오랜 역사를 통하여 그 목적세계, 이상세계, 행복하고 평화스럽고 자유로우며 기쁨이 넘치는 세계, 심정이 평안히 쉴 수 있는 최고의 세계를 찾아 나온 것입니다.

그러나 횡적인 이 세계를 자기 것으로 한다 해도 그 마음속 깊이 스스로 기뻐할 수 있고, 모든 것을 대하여 무한히 기뻐할 수 있는 심정의 기준이 세워지지 않는다면, 잃어버린 세계를 다시 찾는다는 것은 불가능한 일입니다.

만일 심정의 기준을 세우지 않고도 그 세계를 찾았다면 그것은 어느 한때에 다시 정리하지 않으면 안 될 것입니다. 어떠한 이상이 있다 해도, 혹은 온 세계를 하나로 하여 이상적인 평화의 세계를 수립해 본다 해도, 개개인이 그 세계를 생각하고, 그 세계에 응하고, 그 세계의 움직임에 따라 그 세계와 하나 될 수 있는 심정의 기준을 갖지 못하면, 아무리 원하던 이상세계라 하더라도 그 세계는 자신과 아무런 인연이 없는 것입니다.

그러한 세계와의 관계가 멀면 멀수록 우리들은 복잡해지고 우리의 내부에서는 심한 갈등을 겪게 됩니다. 심정의 기준에 응하는 모든 것이 그 심정과 하나 되어 중심에게 강한 감동을 주어야 합니다. 그러면 그 중심은 심정 기준에 대응하여 전체를 향해 움직여 나갈 수 있는 것입니다. 이런 불변의 수수작용의 기반이 심정과 이상을 중심하고 일어나지 않는 다면, 우리들이 원하는 최고의 세계, 인류 본래의 목적의 세계, 혹은 하나님께서 창조 이전부터 염원하시던 목적의 세계는 이루어지지 않습니다.

이런 각도에서 볼 때, 하나님이 안 계시다고 할 수 있겠습니까? 하나님은 분명히 계십니다. 왜냐하면 이와 같은 세계가 필연코 이루어지지 않으면 안 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지금까지의 그러한 목적의 세계는 이루어지지 않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은 과연 이 세상을 어떻게 바로잡으실 것인가? 하나님은 결코 힘으로 하시지 않습니다. 자연의 법칙과 원리에 따라 새로운 방면에서 그 중심과 목적을 세워 나가십니다. 그러면서 여기에 타락한 인간을 묶어 가지고 목적의 세계까지 끌어 올리고자 하시는 것입니다. 이것이 이제까지의 섭리역사였습니다. 이와 같은 안목을 가지고 성경을 본다면, 하나님이 시대마다 한 중심을 세우시기 위하여 얼마나 많은 희생과 노력을 해 나오셨는 가 하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이것은 역사가 증명하는 것입니다.

15-48
중심인물로 세워졌던 선지자들
노아를 중심으로 세우실 때도, 하나님은 주위의 모든 것이 천적(天的)인 목적과 인연을 맺고 수수관계를 맺는 과정을 거치게 한 후 정해진 중심을 따라 상대권으로 들어가게 만드셨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중심적인 인간을 대하실 때, 중심을 세워 가지고 일을 시키는 것이 아니라 반대의 방향에 세워 가지고 중심으로 돌아오는 길을 걷게 하십니다. 그러니 중심적인 인간은 거기에서 사방(四方)을 결정하지 않으면 안 되고, 그 사방의 모든 것은 중심을 향하여 일체화하는 절대적인 인연권을 만들지 않으면 안 됩니다. 하나님은 노아를 그러한 자리에 세우셨습니다. 노아는 그 중심의 자리에 서서 목적을 향해 가는 데 있어서의 장애물을 모두 타파해야 했습니다.

사탄세계, 악의 세계에 있어서 천적 위치를 결정해야 하는 선한 중심인물은 언제나 반대적인 위치에 서야 하기 때문에 박해를 받지 않을 수 없습니다. 개인적으로도 그러하고 가정적, 혹은 민족적으로도 그러합니다. 그 앞에는 현상계의 모든 것이 괴로움의 조건으로 나타나게 되는 것입니다.

노아에게 있어서도 마찬가지입니다. 그 당시의 세상 사람들은 모두 그를 공격하고 조소하였습니다. 더군다나 노아는 1년도 아니고 10년도 아닌 120년 동안이나 그러한 처지에 있었습니다. 자기 자식들도 반대하고 자기의 처도 반대하였습니다. 반대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도끼를 가지고 산꼭대기에 올라가서 배를 만든다는 그 자체를 당시의 사람들은 도저히 이해할 수 없었던 것입니다. 그러니 그 기간 중에 사람들은 준비를 해야 했던 것입니다. 그런 절대적인 요건이 있었던 거예요.

어떠한 세상에 놓여진다 하더라도, 어떠한 고난 속에 놓여진다 하더라도 절대적인 목적을 생각하고, 약속한 절대적인 위치를 소망하며, 이해하기 어려운 처지에서 모든 것을 참아 낼 수 있는 사람을 하나님은 요구하시는 것입니다. 그러한 자리에 설 때 비로소 하나님의 심정이 그를 향해 움직이게 되고, 또 그는 하나님의 심정적인 중심으로 세워지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그러한 자리에 선 노아를 그 누구도 흔들 수 없는 최고의 승리자로, 우주의 중심으로 결정하려 했던 것입니다. 이것이 노아의 홍수심판이었습니다.

아브라함 때에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우리들의 조상이 목적의 중심에 서기 위한 소망을 품고 섭리상에 나타나게 될 때에는 반드시 그 환경으로부터 쫓기는 입장에 서게 되었던 것입니다. 사방 팔방으로부터 쫓기고 후퇴하게 되더라도 거기에 굴하지 않고 끝까지 그 자리에 남아 있어야 합니다. 그리하여 영원한 실체로서 남아진 입장에 서 있어야만, 비로소 하나님이 그를 통하여 섭리하실 수 있는 것입니다. 노아 때도 그러했고, 아브라함 때도 그러했고, 예수님 때에도 그러했습니다. 그러니 오늘날 이 세상에서도 역시 그렇게 되지 않으면 안 됩니다.

15-49
복귀노정의 3단계
인간이 태어날 때 창조목적에 일치되어, 즉 하나님의 목적과 심정을 이어받아 탄생한다면 하나님이 심정으로부터 떨어질 수가 없을 것입니다. 그 심정을 중심으로 목적하는 세계가 바로 기쁨의 세계요, 이상의 세계인 것입니다. 그런데 인간이 타락하였기 때문에, 응당 그 반대의 방향을 취해서 되돌아오는 과정을 거치지 않으면 안 되게 돼 있습니다. 최저에서부터 최고의 자리까지 찾아 올라가, 즉 외적인 것에서부터 내적인 심정까지 찾아들어가 중심을 결정하지 않으면 안 되는 입장에 있게 되는 것입니다.

역사적인 복귀노정을 총괄적으로 살펴보면, 하나님은 지금까지 소생, 장성, 완성의 3단계를 통하여 섭리해 나오셨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구약시대에 있어서의 종의 시대, 신약시대에 있어서의 양자의 시대, 성약시대에 있어서의 참자녀의 시대를 넘어 참부모의 시대로 들어가는 이것이 복귀노정인 것입니다.

하나님이 한 시대의 섭리적인 절대 기준을 결정하실 때 그 기준은 어디까지나 하늘편에 속해 있기 때문에, 사탄이 절대적으로 원치 않는 것이 되지 않으면 안 됩니다. 그리하여 하늘편의 절대적 기준이 세워지게 되면 그 주변에서부터 사탄은 몰리고 또 몰려 도망가지 않으면 안 됩니다. 그렇게 되면 사탄은 최대한으로 그 기준을 미워하게 되고 하늘편에서는 최고로 환영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와 같은 입장이 결정되지 않으면 안 됩니다.

구약시대에 있어서의 전인류에 대한 구원섭리는 종의 입장으로의 구원이었습니다. 그러기에 이 시대에는 시작의 시작에서부터 끝의 끝까지 남아 승리할 수 있는 중심을 세우지 않으면 종으로의 복귀기대를 세울 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노아나 아브라함 등 중심 인물을 세우시어 4천년이라는 역사를 이끌어 오시면서 수많은 희생을 치르셨습니다.

그러면서 하나님은 종 중에서도 세계적인 종, 혹은 천주적인 종을 세워 종의 위치를 절대화하고, 그 종의 심정 위에 하나님이 절대적으로 인정할 수 있는 기준을 세우고자 하셨습니다. 그렇게 한 단계씩 한 단계씩 전진해 나오는 섭리를 하셨던 것입니다.

15-50
우주의 중심
우리들은 역사상에 세움받았던 우리의 선조들이 그 목적과 그 이상과 그 사상을 지키면서, 어떠한 장애물이 가로막아도 쓰러지지 않고 끝까지 걸어 나갔던 역사적 사실을 배워야 하겠습니다. 그러한 자리에 서야만 우리는 중심으로 결정된 사람과 일체가 될 수 있는 것이요, 소망하는 것에 있어서나 생활에 있어서도 그 중심과 하나 될 수 있는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환경과 싸우는 데 있어서도 그 중심과 일체가 되어야 그 중심이 얼마나 중요한 위치에 있는 존재인가 하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이렇게 하여 모든 가정, 모든 민족, 나아가서는 온 세계가 그 중심 앞에 순종하고 일체화하는 날을 목적하시며 지금까지 섭리해 나오셨습니다.

예수님 때에도, 예수님이 이 지상에 오셨을 때 이스라엘 민족과 유대교가 하나 되어서 예수님과 일체가 되고 그에게 순종하였더라면, 그들을 중심으로 하여 하나님은 새로운 세계를 이루기 위한 섭리의 출발을 할 수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 당시 이스라엘 민족은 수많은 교파로 분열되어 예수님의 기대와는 반대되는 입장에 있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오랜 역사를 두고 세운 종의 기준이 허물어졌고, 승리할 수 있는 환경이 깨뜨려지고 말았던 것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은 이 지상에서 하나님의 실체 아들로 설 수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본래의 목적을 중심으로 움직여야 했으나 그것과는 달리 그 반대의 입장에서 행동하게 되었던 것입니다. 선조들이 세워 놓은 역사가 무너져 버렸으니, 그 기준에서 다시 승리의 조건을 세워서 본래의 목적을 이루려 하셨습니다. 그러한 걸음의 출발로 3년 공생애노정을 시작한 것입니다.

하나님은 이렇게 하여 어떠한 중심을 결정하신 다음, 또다시 거기에 보다 큰 중심을 보내어, 그 중심과 연결시켜 가지고 소생 장성 완성의 단계로 역사를 이끌어 나오셨습니다. 그리하여 최후에는 세계적 중심, 천주적 중심, 모든 현상계의 중심, 이 현세(現世)의 중심이 되어 절대적인 승리자로 설 수 있는 존재로 결정하시는 것입니다. 여기에서 수많은 종교가 구하고 있고, 하나님께서도 섭리적으로 구하시는, 즉 이상 실현의 중심적인 인물이 출현하지 않으면 안 되는 것입니다.

오늘날까지의 역사는 무엇을 구하여 나왔는가? 우리들은 현실적인 문제에 대해서만 급급해 나왔지만, 역사는 이를 넘어 절대적인 하나의 중심을 구하여 나왔습니다. 때문에, 소생 장성 완성을 구하여 나온 세계는 오늘날 그 중심과 하나 되는 원(圓)의 세계를 이루어야 합니다. 원을 꾸미는 데는 가운데서부터 꾸며 나가는 것이 아닙니다. 어디까지나 타락한 인류이기 때문에, 그 반대쪽에서부터 그 중심의 입장을 구하면서 가운데를 향해 들어가야 합니다. 세계는 지금 그런 단계에 접어들고 있습니다. 주위를 충분히 살피면서 중심을 바라보고 있는 것입니다. 민주주의에서도 내적인 것을 구하고 있습니다. 공산주의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러면 과연 민주주의나 공산주의가 이 세계를 일체화시킬 수 있을 것인가? 그들에게는 세계를 일시에 소화할 수 있는 내적인 힘이 없습니다. 참으로 이 세계를 하나로 만들고자 하는 사상이 있다면, 그 사상은 이 세계를 소화할 수 있는 내적인 조건을 갖추지 않으면 안 됩니다.

이 우주에 중심이 둘이 있을 수 없습니다. 외적인 것은 중심이 될 수 없습니다. 수속(手續)이 중심이 될 수는 없습니다. 우리들이 외적으로 볼 수 있는 그 어떠한 형태가 중심이 될 수는 없습니다. 그것을 설명할 수는 있습니다. 설명할 수 있다는 것은 그것이 논리적인 체계 위에 있다는 것입니다. 논리적인 체계 위에 있다는 것은 만들어낼 수 있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 만들어진 것에 지배당하지는 않습니다. 우주관이라든가 세계관과 같은 어떠한 관(觀)이 없는 이상, 우리는 어떠한 방향을 결정지을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러기에 새로운 사상은 관계하는 모든 방면에 적응할 수 있는 내용을 갖추지 않으면 안 됩니다. 이렇게 생각하면 우주의 중심은 창조본연의 목적과 심정이라는 결론에 도달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15-52
중심의 결정과 그 기준
그러면 심정에는 무엇이 필요한가? 그것에 대응할 수 있는 대상물이 있어야 합니다. 그것은 반발적이어서는 안 되고 융합적이어야만 합니다. 어떠한 것에 대해서 반대되는 것이 부딪쳐서 생겨나는 결과는 심정에서 나타나는 결과가 아닙니다. 만일 그것이 옳다면 그 반대라고 하는 관념으로 인해 금후의 세계가 어떻게 이루어질 것인가 하는 것이 문제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우리들은 심정을 기준으로 삼아야 하는 데 그 심정은 절대적으로 성스러운 것입니다. 우주를 포섭하고도 남을 수 있을 정도로 성스러운 것입니다.

심정에 대하여 반대되는 결과로 나타나는 것은 투쟁과 같은 반발작용으로 어떤 것을 파괴하고자 나타나는 것이지, 그 자체가 반대적인 것에 대하여 반대의 조건을 나타나 가지고 하나의 목적을 이루어 나가는 것은 아닙니다. 반대된다고 하는 것은 서로 상반되는 두 개의 개념으로서 관념이 다르고 내용이 다른 것을 말합니다. 이들은 그 자체가 항상 불안하여서 그 이론으로는 목적의 세계, 평화의 세계, 태평의 세계를 이룰 수가 없습니다.

우리에게는 몸과 마음이 있습니다. 여기에 외적인 어떤 반대의 요건이 없다면 고통이란 없을 것입니다. 그냥 존재하는 것이지요. 자연의 법칙에는 사랑이라고 하는 것이 있기 때문에, 이 자연의 현상은, 즉 천적인 법도는 이 우주의 어떠한 부분에도 응할 수 있게 되어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안심할 수 있는 거지요. 그러나 만일 이에 저항하는 부분이 있을 경우에는 파괴현상이 일어납니다. 그러한 반대의 조건이 나타날 때에는 하나님은 언제든지 거기에 백 퍼센트 반발합니다.

이것이 잘 적용해서 하나의 목적이 이루어지면 좋은 결과를 나타내게 됩니다. 만일 그렇게 되지 않는 다면, 이 우주는 성스러운 중심이 상대권을 필요로 하는 이 우주의 목적관을 부정하는 것이 됩니다. 존재하는 모든 것은 다 목적이 있는 것입니다.

과학에 있어서도 앞에서 말한 현상이 일어나는 데, 한꺼번에 전부 똑같이 일어나는 게 아닙니다. 예를 들면, 얼음이 얼 때에도 한꺼번에 전체가 얼어 붙는 것이 아니잖아요. 어느 한 점을 중심으로 하여 그것에 응하는 전체의 작용에 의해서 전체가 얼게 되는 것이지, 반대로 전개되지는 않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우주가 힘에 의해서 만들어진 것이라고 합니다. 물론 모든 존재가 힘에 의해서 구성되어 있는 것은 사실입니다. 그러나 그 힘이 존재하기 위해선 무엇이 필요한가?

어떠한 존재가 힘 자체는 아닙니다. 거기에는 반드시 상대적인 기준이 있어야 합니다. 우리는 힘을 인정하기 전에 상대기준을 인정해야 합니다. 상대기준을 인정한다면 주체와 대상을 인정하지 않으면 안 됩니다.

주체란 때에 따라서 변화되는 존재여서는 안 됩니다. 목적을 결정하고 영원한 존재권을 만들 수 있는 존재가 아니면 안 되는 것입니다. 거기에서 인정할 수 있는 상대적 관계는 주체에 대해 상응할 수 있는 합목적(合目的)인 관계여야지 상대적으로 반발하는 관계가 되어서는 안됩니다.

상대적 관계란 정(正)이라는 기준에 반(反)이라는 것이 서로 맞서서 그것이 하나로 통일된다고 하는 정반합(正反合)의 관계가 아니라(반대의 관념의 힘이 생기게 할 리가 없기 때문에 이것은 논리적 모순이 아닐 수 없다), 주체 앞에 대상이 응하는 관계입니다. 즉, 주체와 대상이 상응하여 공통의 목적을 중심으로 작용하는 것을 말합니다. 이것이 완전한 수수작용을 하여 상대권에 도달하면 힘이 나타나게 되고 그때에 비로소 중심이 결정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아무리 작용하더라도 그것이 반대로 작용하게 되면 세계는 파괴되고 맙니다.

융합하고 상응하는 상대관계를 가지고 수수작용을 하면 그것은 자연의 절대적인 중심이 되고, 그 중심의 위치는 목적의 중심이 되는 동시에 심정의 중심이 되는 것입니다. 이 중심은 심정과 목적관념의 수수작용에 의해 결정됩니다. 이렇게 결정되는 위치에 서 있는 것이 인간입니다. 이것이 생성(生成)하는 데 있어서의 절대적인 공식이라면, 그 목적을 전개하는 중심을 축으로 모든 것이 작용하고 있는 셈이 되는 것입니다. 만일 이것을 파괴하려는 그 무엇이 있다면 그것은 이것 이상의 심정기준 위에 서지 않으면 안 됩니다. 지구가 지축을 중심으로 회전하는 것과 같이 신의 심정과 목적을 중심으로 창조된 피조물도 그 목적을 중심으로 수수작용을 해야 하는 것입니다. 이러한 수수작용을 하는 데 있어서의 매개체가 인간입니다. 이리하여 3점(三點)을 이루는 것입니다. 즉, 주점(主點)과 객점(客點), 그리고 그것을 연결하는 중심 기준인 인간, 이것들이 3점을 이룬다는 것입니다.

15-54
모든 존재는 2중 목적을 지니고 있다
여기에서 일어나는 힘의 근원이 무엇이냐 하면 바로 신(神)입니다. 이 힘은 결코 무질서한 것이 아닙니다. 그냥 무의식적으로 나오는 그러한 힘도 아닙니다. 그 힘은 최고로 심정적인, 그리고 인간의 마음의 중심이 될 수 있는 것입니다.

존재하는 모든 것은 이성(二性)을 가지고 있습니다. 따라서 모든 존재물은 두개의 목적을 갖고 있다는 결론이 세워질 수 있습니다. 우리들 자신을 놓고 보더라도 두개의 목적을 가지고 있습니다. 자기를 중심으로 하는 목적이 있는 동시에 우주와 관계맺으려 하는 제2의 목적을 갖고 있는 것입니다. 자기의 완성과 함께 우주의 완성을 소망하는 이중의 목적을 갖고 있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것을 결과적인 입장에서 보면, 모든 존재물이 반발적이고 투쟁적이며 중심과 반대의 위치에 서 있는 것처럼 보이지만 사실은 그렇지 않습니다. 이것은 언제나 발전할 수 있는 조건이라는 사실을 우리는 알아야 되겠습니다.

인간에게는 몸의 목적이 있는 동시에 마음의 목적이 있습니다. 마음은 전체적인 목적을, 몸은 개인적인 목적을 갖고 있는 것입니다. 이와 같이 사람이면 사람, 그외 어떤 존재물도 내외적인 목적을 함께 가지고 연결되어 있습니다. 상하 좌우 전후의 인연 속에 있는 것입니다.

그렇지 않으면 입체원(立體圓)이 될 수 없습니다. 그리고 만일 이 입체원이 성립되지 않으면 완전한 중심은 결정되지 않습니다. 중심이 결정되어 가지고 영원한 이상과 영원한 중심의 힘이 동반하는 데에서만 영원한 운동은 시작되는 것이고, 여기서부터 영원하고 무한한 원의 운동이 시작되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존재하는 모든 생물은 그 어떠한 포물선을 그리며 운동하고 있는 것입니다. 목적으로 하는 거리와 높이와 폭과 그 위치가 다르기 때문에 그 형태를 다르게 나타나지만, 내외 작용에 있어서는 주종관계를 가지고 원운동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신(神)은 오늘날 이 지상의 중심을 구하고 있습니다. 가령 일본 사회를 고찰하여 보면, 거기에는 여러 가지 생각과 움직임이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들은 영원히 존재할 수는 없는 것입니다. 중심을 갖추는 내용 여하에 따라 그들의 생명은 결정되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 어떤 단체가 어떤 중심을 위하여 어느 한 내용을 가지고 백년, 혹은 수세기 동안 연구한다고 하면, 그 단체는 그 중심과 완전히 일체가 될 때까지는 존재합니다. 그렇지만 일단 그것과 일체화되면 흡수당하게 됩니다.

이와 같은 각도에서 지금까지의 역사를 살펴보면, 높은 문화가 낮은 문화를 흡수해 왔다는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그렇게 하여서 이것이 궁극에 가서는 하나가 되지 않으면 안 됩니다.

신(神)은 지금 중심을 구하고 있습니다. 신이 구하고 있는 이 중심이 세워진다고 하는 것은 신의 최고의 이상, 최고의 이념을 중심으로 한 세계가 나타난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러면 신이 소망하는 목적과 심정의 일치가 이루어질 곳은 어디일 것인가? 그곳에는 30억 인류를 대표한 절대적인 심정과 절대적인 목적을 가진 사람이 필요한 것입니다. 그러한 사람이야말로 전인류가 소망하는 참어버이입니다. 그러므로 그 앞에서 마음이 흐트러지는 사람이 있다면, 그는 마음을 다시 가다듬어야 합니다. 어떠한 외적 장애에도 대응할 수 있는 환경을 조성하지 않으면 안 됩니다. 하나님이 축복을 받을 수 있는 사람은 그러한 최고의 승리적 기준 위에 서 있는 사람입니다. 신의 섭리는 이러한 방법을 통하여 행하여집니다.

앞으로 지상에서는 신의 목적 세계에 들어가서 신과 대응할 수 있는 자만이 존재하게 됩니다. 오늘날 이 세계에서는 우리가 보고 있는 바와 같이 모든 집단은 집단끼리 서로 싸우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 싸움이 신의 목적 세계와 대응할 수 없는 무목적인 싸움이라면 결국에 가서는 패퇴하고 맙니다.

15-56
예수님의 진정한 강림목적
현재에 있어서 어떠한 것이 참이고 어떠한 것이 거짓인가 하는 것을 안다는 것은 참으로 중요한 일입니다. 오늘날 모든 사람들이 최고의 세계라고 생각하는 그 세계가 신 앞에 반역하는 세계일지도 모르기 때문입니다.

참된 세계란 신을 절대적인 중심으로 하는 세계입니다. 그 목적의 세계는 역사적 목적인 동시에 시대적인 목적, 미래의 절대적인 목적, 또는 신의 창조목적과도 일치되는 세계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 세계가 이루어지면 신이 기뻐하는 동시에 인간도 기뻐하고 천지도 함께 기뻐하게 됩니다. 그리고 내용적으로는 심정이 일체가 되어서 그 어느 것도 분리시킬 수가 없게 됩니다.

이러한 입장에서 하나가 된 완전한 사람을 중심으로 하여 세계는 새로운 세계로 전환되지 않으면 안 됩니다. 그 세계는 한 중심에 의한 진리를 필요로 합니다. 진리라고 하는 것은 어떤 것에도 영향을 받지 않고 또 어떠한 것에도 침범을 당하지 않는 것이라야 합니다. 그리고 몇천 몇만 가지의 이론을 가지고 논박하더라도 변하지 않고 그에 대해 해명할 수 있는 절대적인 것이라야 합니다. 이와 같은 진리를 찾아 세운 사람이 있다 할진대, 그 사람은 구인주(救人主)가 아니고 구세주(救世主)입니다. 여기에는 모든 것이 포함되어 있습니다. 국가도 들어 있고 권세도 들어 있습니다. 미래적인 모든 것이 들어 있습니다. 구세주는 이러한 것들 위에 절대적이고 완전하게 세워지지 않으면 안 됩니다. 그와 같은 입장에 서는 사람이 구세주입니다.

이러한 각도에서 생각해 볼 때, 2천년 전에 오셨던 예수님은 분명히 구세주였습니다. 하나님으로부터 구세주로 파견되었던 예수님의 본래의 목적은 기독교가 아니었습니다. 대우주관을 세워 거기에 완전히 일치하는, 중심이 되는 세계관을 지상에 세우는 것이 구세주로 오신 예수님의 본래 목적이었습니다. 그러려면 그 당시에는 로마 제국이라는 대적을 넘어서기 위한 준비를 해야 했습니다. 예수님에게는 내외 양면에 대응하여 승리할 수 있는 기준이 필요했던 것입니다.

그러한 사정 속에 있었던 예수님이 지지기반 없이 ‘오오! 나는 우주에서 하나밖에 없는 최고의 주님이다’ 할 수 있었겠습니까? 로마의 속국이었던 그 당시의 이스라엘 나라에서 만일 그와 같은 말을 한마디라도 하였더라면, 3년은 커녕 3일도 살아 있지 못했을 것이 분명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예수께서는 ‘할 말이 많으나 너희들이 감당하기 어렵다’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참 내용에 대해서는 언급도 못 하시고 ‘성령을 통해서 가르쳐주마’ 하는 약속만을 남기시고 가신 것입니다.

그런데 2천년 전 하늘로부터 오셨던 구세주가 구세주로서 세워야 했던 우주관은 지금 어디에 있습니까? 기독교를 만들어서 교회나 혹은 신앙심만을 길러내는 것이 목적이었을 것인가? 그렇지 않습니다. 인간이 양심을 가지고 있고, 또 성스러운 사랑에 넘친 인격을 가지고 있다면, 떨어질래야 떨어질 수 없는 절대적인 이상권이 세워져야 하지 않겠습니까? 그러한 세계를 세우는 것이 예수님의 목적이었습니다. 이러한 내용은 성경을 아무리 읽어도 나오지 않습니다. 다만 공공연하게 말씀하신 것은 ‘나는 심정의 중심이니라’ 뿐입니다. 이것만은 말씀하시지 않을 수 없었던 것입니다. 아무리 말해도 예수님의 이 말씀은 역사가 보호합니다. 세계가 그것을 원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미래에도 마찬가지일 것입니다. 그것은 과거 현재 미래에까지도 절대적으로 요구되는 것입니다. 또한 그것은 어떠한 적도, 동지도 화할 수 있는 최초의 중심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실제에 있어서 그 세계관은 영(靈)을 중심으로 한, 천적인 심정기준을 중심으로 한 것이기에 공중에 뜬 세계관입니다. 천주의 대운에 응할 수 있는 길, 절대적인 기준에 연결되어 있는 그 길은 가르쳐 주지 않고 지금까지 이념의 세계만을 연속시켜 나온 것입니다. 그러나 그러한 세계는 언제까지나 허용될 수 없기에 하나님은 재림의 주를 보내 주마고 약속하신 것입니다.

15-58
통일성도의 갈 길
그러면 다음으로 오시는 구세주는 무엇을 가지고 오실 것인가? 이 땅위에 살고 있는 만인들이 다 함께 소원하는, 하나의 이상세계를 만들어 낼수 있는 이상과 이념을 가지고 오실 것입니다. 그것 뿐만이 아닙니다. 심정도 가지고 오십니다. 아무리 이상세계, 지상천국을 만든다 해도 거기에 영원한 심정을 보증할 수 있는 절대적 기준이 있지 않으면 안 됩니다. 즉 하나님이 기뻐하고, 전인류가 기뻐하고, 역사가 기뻐하고, 시대가 기뻐할수 있는 심정의 기준이 있어야 합니다. 이념과 이상은 심정이 없이는 설 수 없습니다. 이 심정은 무한히 작용하시는 중심, 즉 절대적인 하나님에 의해 나타나는 기준입니다.

지상에서 통일이 세계관을 가지면, 어떠한 사상과 견해를 초월하여‘주의’문제에 부딪치게 됩니다. 오늘날 민주주의와 공산주의가 있습니다만, 그것들은 아직까지 결정적인 통일의 기준을 세우지 못하고 상대적인 위치에서 움직이고 있습니다. 원래‘주의’라고 하는 것은 실체 그 자체가 아닙니다. 그러므로 우리들은 이 주의의 세계를 초월하지 않으면 안됩니다.

이 주의는 지금까지 역사적으로 중대한 문제가 되어 왔습니다. 신이 있다면 그 신이 발전시켜 나갈 것은 당연합니다. 발전하는 데는 하나가 둘로 갈라지고, 둘은 또 셋으로 넷으로 갈라져 발전해 나간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그 어떠한 주의라 할지라도 그렇게 되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러나 참된 것은 언제 어디서나 하나가 아니 될 수 없습니다. 참된 곳으로 가려는 여러 갈래 길은 하나의 방편일 뿐 참에 합치될 수는 없습니다. 방법이나 수단은 우주의 근원이 되는 진실과 일치될 수 없는 것입니다.

어느 권내의 목적완성을 위하여‘주의’는 진리의 본체를 찾아 나가는 방향적 작용을 해야만 합니다. 따라서 그 주의 이상되는 어떤 목적 자체가 생겨난다면 그것과 합치하지 않으면 안 됩니다. 완전한 목적권내에 들어가게 되면 완전한 심정권이 나타나게 됩니다.

절대적으로 참된 것에는 온 우주가 호응하지 않으면 안 됩니다. 참된 것이 손상을 입어서는 안 됩니다. 진리가 있는 곳에는 모든 것이 그리로 몰리게 되어 있으므로 심정이 따르게 됩니다. 참된 것을 알게 되면 심정은 자연히 생기는 것입니다. 그것이 개인적인 것이든, 가정적인 것이든, 그 환경을 어떻게 승리했느냐 하는 기준에 따라 심정의 내용이 결정되는 것입니다.

우리 통일의 성도들은 지금 무엇을 원하고 있는가? 지금 미국이 세계의 모든 국가를 주관하려 하지만, 모든 국가가 미국의 주관을 원하고 있는 것은 아닙니다. 전세계를 얻는 것 이상의 이상(理想)을 품고 그 가치를 찬양할 수 있는 그 기준이 더 문제인 것입니다. 그것은 누구에게도 빼앗길수 없는 것이고, 또 자기의 생명과 몇백 번 바꾼다 하더라도 변하게 할 수 없는 것입니다. 그러한 기준이 필요한 것입니다. 그러나 아직까지 인간은 그 기준을 세우지 못하고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들은 그 세계를 향하여 전진하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 통일의 성도들은 모든 장벽을 넘어서 가야 할 하늘의 정병들입니다.

그러면 우리 정병들의 목적은 무엇인가? 선을 가지고 환경을 넓혀 나가는 것입니다. 그것은 때려 가지고 하는 것일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맞아 가면서 복귀해 나가는 것입니다. 때려서 복귀한다면 다시 맞아야 합니다. 이 말은 아직도 때리는 것이 있기 때문에 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전법입니다. 따라서 통일의 성도들은 지옥의 맨 밑창을 들어가야 합니다. 그곳을 뚫고 전진하지 않으면 안 되는 것입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