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291 to 15-318: 참된 식구가 되자

참된 식구가 되자
1965.12.07 (화), 한국 춘천교회

15-291
참된 식구가 되자
사람들은 대부분 자기가 태어난 고향이나 혹은 자기의 부모와 형제들이 살고 있는 곳에서 살게 됩니다. 거기에 사는 동안 일면 행복할 수도 있고 다른 한편으로는 불행할 수도 있습니다.

한 집을 중심삼고 볼 때, 그 사람이 제아무리 행복하다 해도 그 사람에게는 집만 필요한 것이 아닙니다. 자기 집이 필요한 동시에 그 집을 세워둘 수 있는 동네가 필요하고, 동네가 필요한 동시에 면이나 군, 더 나아가서는 나라가 필요합니다. 그렇지요? 또, 그 나라가 있을 수 있는 세계가 필요하고, 그 세계는 또 더 큰 하늘과 땅이 필요한 것입니다. 그렇게 되어 있습니다.

15-291
하나님이 바라는 본연의 가정
지금까지 수많은 인간들은 태어나서 생활하다 죽어 갔습니다. 한 집에서 태어나 한 가정의 부모가 되고, 자식을 낳아 하나의 가정을 이루고 살면서 나라를 위하고, 혹은 그 무엇을 위하여 살다가 영계에 갔습니다. 지금도 이 땅 위에는 많은 사람들이 그렇게 살아가고 있습니다. 이와 같이 수많은 사람들이 이 땅에 왔다 갔는데, 그 가운데 선한 입장에서 살다간 사람이 있다면 그는 무한히 행복한 사람입니다.

인간이라면 어느 누구를 막론하고 그 마음 깊은 데에서는 보다 더 행복스럽고, 보다 더 자유롭고, 보다 더 이상적이며, 보다 더 가치있는 것을 찾아 헤매고 있습니다. 이런 것을 볼 때, 오늘날 우리들이 살고 있는 국가나 사회, 가정, 부모나 형제, 그리고 내 자체 모두가 완전한 것들이냐? 어떻습니까? 완전해요? 완전치 않아요? 인간은 언제나 좀더 좋은 것, 좀더 귀한 것, 좀더 행복하고 평화스러운 것을 바라고 있습니다.

현세의 우리들은 내가 나 자신을 영원히 보장할 수 없고, 또한 내 가정이 나를 영원히 보장할 수 없으며, 내 부모가 영원히 나를 보장해 줄 수 없는 입장에서 살고 있습니다. 국가도 역시 나를 보장해 줄 수 없으며, 세계의 어떠한 주의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러기에 우리 인간은 누구든지 자신을 자기 개인으로부터 가정, 사회, 국가, 온 세계의 어디에서든지 보장해 줄 수 있는 한 분 즉, 절대적인 행복의 주체요, 영원한 이념의 주체요 절대적인 선의 주체가 되는 분이 계셨으면 하고 생각합니다. 이것이, 오늘날 수많은 인간들의 소망인 것입니다.

오늘날 우리가 살고 있는 집이 진정한 집입니까? 여러분이 태어난 고향에는 추울 때 입을 것을 주고, 배고플 때 먹을 것을 주고, 무식한 입장에 있을 때 배움의 길을 닦아 주신 부모가 있을 것이고, 주위에는 모든 것을 거들어 주는 형제가 있을 것입니다. 그러한 부모와 형제들이 살고 있는 가정의 아들이나 딸로 태어난 여러분은 과연 행복한가? 행복하지 못하다는 것입니다. 무엇인지 모르지만 마음에는 항상 좀더 완전하고 좀더 귀한 것을 찾고 있습니다. 진정으로 사랑하는 부모를 모시고 행복을 노래할 수 있는, 형제의 품에 안기어 ‘이곳이 영원무궁한 내 복지다’라고 찬양할 수 있는 자리를 찾지 못한 만민은 불행하다는 것입니다. 그러기에 오늘날 많은 청소년들이 가정을 박차고 나서는 것입니다.

부모는 자기 자식들이 효자 효녀가 되기를 바라고, 나라는 자기 나라의 국민이 충신 열녀가 되기를 바랍니다. 본래 효자 효녀의 길과 충신 열녀의 길을 가는 것이 인생의 길인데, 인간들이 그 길을 가지 못하는 것은 무엇 때문인가? 우리의 본래 마음이 우리의 생활과 사회환경에 부합되지 않고 서로 배치된 입장에 있기 때문입니다. 언제나 마음 한 면에 새로운 나라, 새로운 세계, 새로운 그 무엇을 찾고자 하는 소망이 있기 때문에, 현실을 부정하고 새로운 세계로 달려 나가고자 하는 마음의 움직임이 일어나는 것입니다. 이것을 우리는 부정할 수 없습니다.

오늘날 여러분은 여러분 자신이나 가정을 두고 볼 때, 다른 한 쪽에서 자신도 모르는 가운데 더 좋은 것을 바라고 살고 있는 것을 부정할 수 없을 것입니다. 이런 불완전한 상태가 영원히 지속된다면 불완전으로 출발한 역사가 불완전으로 귀결될 것이기 때문에, 인간은 어느누구를 막론하고 선을 지향하는 양심과 천륜과 인연맺기를 요구하는 본성을 바탕으로 악의 환경에서 벗어나 더 좋은 환경에 머물기를 원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천륜을 대하고 있는 본심이 있기 때문에 생겨나는 부정할 수 없는 사실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이러한 세상을 종교적인 명사를 빌어 말한다면 타락한 세상이라고 합니다.

어떤 사람들은 본연의 가정을 바라보며 나가고 있지만, 어떻게 해야 본연의 가정을 이룰 것이며, 어떻게 해야 본연의 형제와 본연의 부모를 가질 수 있는가를 모르고 있습니다. ‘부모 형제가 나를 사랑하는 그 사랑이 천하 어디를 가든지 환영받을 수 있는 사랑이다’ 할 수 있는 본연의 가정과 본연의 부모와 본연의 형제를 갖지 못하고 있으니, 현세의 부모와 형제 가운데서 태어나 살고 있는 나는 본연의 나가 아닌 것입니다. 그러기에 현실의 자아를 부정하고 본연의 자아로 출발하는 기로에서 뒤넘이치고 있는 것이 오늘날 우리의 인생입니다.

인류의 시조가 타락한 그날 이후 수많은 역사노정이 지나갔지만 본연의 가정과, 본연의 형제와 본연의 부모는 아직까지 이 지구상에 나타나지 않았습니다. 그러기에 하나님은 지금까지 본연의 가정과 본연의 형제와 본연의 부모를 찾아 본연의 국가와 본연의 세계까지 연결짓기 위해 수고해 오셨는데, 그것이 지금까지의 하나님의 섭리역사입니다.

오늘 우리들은 비원리적인 세계에서 살고 있는 가정말고 다른 어떤 하나의 가정을 소망하고 있습니다. 그 소망의 가정은 하나님도 바라고 계시기 때문에 하나님은 그 소망의 가정을 찾아 내려오시는 것이고, 우리 인간은 그 소망의 가정을 찾아 올라가는 것입니다. 즉, 하나님은 본연의 가정을 소개해 주기 위해 인간 세상을 찾아오시는 것이요, 인간들은 자신도 모르게 본연의 가정을 찾아가고 있다는 것입니다. 알겠지요?

그런데 이 본연의 가정이 대번에 나올 수 있느냐? 그럴 수 없습니다. 오늘날 타락한 이 땅에 참가정이 나오기 위해서는 어떠한 단계를 거쳐야 하느냐? 본연의 아들딸이 나오기 전에 본연의 종이 나와야 되고, 본연의 양자가 나와야 됩니다. 그 다음에 본연의 아들딸이 나오는 것입니다.

타락한 세계에 있어서 우리 인간들은 아무리 충성을 하고 아무리 잘났다 하더라도 천지를 창조한 하나님 앞에는 종도 될 수 없는 존재입니다. 여러분, 하나님의 종이 되어 봤습니까? 하나님이 계신지 안 계신지도 몰라 가지고 어떻게 하나님의 종이 될 수 있겠습니까? 하나님의 종이 될래야 될수도 없었던 과거의 우리였습니다. 종의 자리를 거치고 양자의 자리를 거친 다음에야 직계 자녀가 될 수 있는 것입니다. 이런 단계를 거치고 나서 비로소 부모가 되어 하나님을 만나는 것입니다. 이것을 일컬어 복귀역사라 합니다. 복귀역사.

15-294
잃어버린 본연의 가정을 건설하려면
오늘날 수많은 사람들은 하나님이 6천년 동안 수고해 오신 이때를 말세라고 합니다. 그러면 말세라고 하는 이 끝날은 어떤 때이냐? 이 세계에는 본연의 종과 같은 무리가 있고, 본연의 양자와 같은 무리가 있고, 본연의 자녀와 같은 무리가 있는데, 이 본연의 자녀와 같은 무리 위에 본연의 부모가 오는 때를 끝날이라고 합니다. 이것이 재림사상이지요. 그래서 예수님은 ‘나는 신랑이요, 너희는 신부다’라고 하셨습니다. 지상에 하나의 아버지와 어머니가 나타나야 된다는 것입니다.

어린양 잔치는 인류가 잃어버렸던 본연의 가정이 이 지구상에 건설되는 것입니다. 그러면 그 본연의 가정을 건설하려면 무엇이 있어야 하느냐? 부모가 있어야 되고, 형제가 있어야 되고, 종이 있어야 됩니다. 그런 기반 위에 자녀가 번식되어야만 본연의 종족이 이루어지고, 본연의 민족이 이루어지고, 본연의 국가, 본연의 세계가 이루어질 수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지금까지 사악한 이 세계를 전부 불살라 버리고 이러한 창조본연의 세계를 이루기 위해 섭리해 나온 것이 복귀역사라는 것을 우리는 잘 알고 있습니다.

오늘날 우리 통일교회에서는 교인들을 식구라고 말합니다. 오늘날까지의 역사도상에서 이 식구라는 명사를 깨우쳐 준 자는 없습니다. 식구라는 말은 가정을 떠나서는 성립되지 않습니다. 식구가 생겨나기 위해서는 반드시 가정이 있어야 하고, 그 가정이 있기 위해서는 형제가 있어야 하고, 형제가 있기 위해서는 부모가 있어야 합니다. 그렇지요? 「예」 기독교에서도 교인이나 신자라는 명사를 썼지만 식구라는 명사는 쓰지 못했습니다. 오늘날 이 세계가 외적인 면에서 세계 대가족주의를 부르짖고 있지만, 대가족을 이루기 위해서는 그 대가족의 아버지가 될 수 있고 어머니가 될 수 있는 부모가 있어야 합니다. 그 부모로 오시는 분이 바로 메시아입니다. 아시겠어요? 「예」

그런데 오늘날 통일교회에서 말하는 식구 가운데는 참식구가 있고, 그와 반대되는 식구가 있습니다. 또한 중간 입장에 있는 식구도 있습니다. 그러면 하나님이 세우신 천적인 가정을 중심으로 식구라는 명사를 가진 참식구는 어떤 사람인가? 이것이 문제입니다.

식구가 되기 위해서는 먼저 부모를 가져야 됩니다. 형제가 되기 위해서도 부모가 있어야 됩니다. 형제는 여럿이지만 부모는 하나인 것이 원칙입니다. 즉, 식구는 여럿이어도 주인은 하나라는 것입니다. 그렇지요?

그러면 그 부모나 주인은 누구를 중심삼은 부모요, 주인이냐? 나를 중심삼은 주인이 아니요, 나를 중심삼은 부모가 아닙니다. 형제를 중심삼은 부모요, 식구를 중심삼은 주인인 것입니다. 또한 악한 세계에서 악과 접할 수 있는 주인이요, 악과 접할 수 있는 부모일 것인가? 악과는 상관없는 주인이요, 부모여야 된다는 것입니다.

참된 선으로 계시는 부모요, 주인이라 할진대, 그 부모는 가정이나 혹은 한국 백성이면 한국 백성을 위주로 한 부모요, 주인일 것인가? 아닙니다. 온 세계의 30억 인류 전체의 부모요, 하나의 대가족을 위주로 한 중심이어야 합니다. 그러면 그 주인이요, 부모요, 중심의 자리에서 누가 서야 하느냐? 천지를 창조한 하나님이 서야 됩니다. 그다음에는 누가 서야 되느냐? 악한 세상을 세계적으로 수습할 하나님의 대신자, 즉 구세주가 서야 합니다. 그리하여 하나님과 일체된 구세주를 부모로 지상에 모실 수 있어야만 비로소 참다운 가정을 이룰 수 있으며 구세주를 참다이 모시는 자만이 참다운 자녀와 참다운 형제가 될 수 있습니다.

그러기 위해서 메시아가 이 땅에 오시거든 여러분은 메시아의 터전을 상속받기 위하여 수고해야만 합니다. 그래야만 천지의 주인이시고 지금까지 역사적으로 섭리해 오신 하나님, 또 오늘의 이 현재와 미래까지 수습하실 하나님 앞에 참된 자녀가 될 수 있고, 참된 식구가 될 수 있고, 참된 형제가 될 수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오늘날 우리들은 역사적인 하나님의 심정을 알아야 하고, 시대적인 하나님의 심정과 미래적인 하나님의 심정을 알아야 합니다. 그리하여 역사는 역사대로 시대는 시대대로 갈라 놓고 나쁜 역사와 나쁜 현세를 심판해야 합니다. 과거의 좋은 것을 끌어다가 현세에 세우고, 거기에 역사적인 교훈을 결부시켜서 내 것으로 상속받을 수 있는 실체가 되지 않고서는 미래를 향해 출발할 수 없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두고 볼 때에 예수님은 어떠한 입장으로 이 땅 위에 오셨는가? 하나님의 참다운 아들로서 하나님의 참된 형제의 자격으로서 하나님의 참된 식구의 자격으로 오셨습니다. 또한 역사적인 하나님의 슬픔과 수고와 뜻 앞에 있어서 하나님의 대신자로서 모든 것을 수습해 놓고, 하나님이 원치 않는 조건은 제거하고 하나님이 원하는 것만을 취해 가지고 새로운 천지를 건설하기 위해서 오셨던 것입니다.

15-296
참된 식구가 되려면
오늘날 우리가 참다운 자녀가 되고 참다운 형제가 되는 데 있어서는 누구를 중심으로 한 자녀, 누구를 중심으로 한 형제가 되어야 하는가? 하나님을 중심으로 한 자녀가 되어야 하고, 예수님을 중심으로 한 형제가 되어야 합니다. 하나님이 슬퍼하시면 나도 슬퍼하고 하나님이 기뻐하시면 나도 기뻐하는 그 자리에 나가야 되며, 또한 예수님이 기뻐하면 나도 기뻐하고 예수님이 슬퍼하면 나도 슬퍼하는 자리에 나가야 되는 것입니다. 한 개인만이 아니고 가정적, 종족적, 민족적, 국가적, 더 나아가서는 세계적으로 다 그와 같은 자리에 서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역사적으로 하나님과 역사적이 구세주 앞에, 혹은 역사적인 참부모 앞에 참다운 자녀로 설 수 없는 것이요, 참다운 형제의 인연을 맺을 수 없는 것입니다.

그러면 오늘날 우리가 이와 같은 입장에서 하나님 앞에 참다운 자녀요, 예수님의 참다운 형제가 되기 위해서는 어떻게 생활해야 되느냐? 예수님은 하나님 앞에 참다운 효자였습니다. 그러니 우리는 예수님을 중심으로 참다운 형제의 인연을 맺게 하시려는 것이 하나님의 구원섭리인 것을 알고 예수님의 생활 전체를 상속받아 이 땅에서 실천해야 됩니다. 그러지 않고는 참다운 식구가 될 수 없고 참다운 형제가 될 수 없으며, 참다운 자녀가 될 수 없는 것입니다.

2천년 전에 역사적인 조상으로 왔다 간 예수님은 그냥 지나가 버리고 사라져 버린 주님이 아닙니다. 그분은 오늘날 우리가 모두 하나님의 뜻을 상속받아 그 뜻을 실현해서 하나님 앞에 참다운 아들딸이 되기를 고대하고 계십니다. 그러니 우리가 하나님 앞에 참다운 아들딸이 되어야만 예수님이 참부모로서 이 땅에 등장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면 오늘날 기독교 신도들은 이 지상에서 무엇을 해야 되느냐? 예수님의 대신자로서 예수님이 다하지 못한 뜻을 이 세계의 30억 인류 가운데 이루어 놓아야 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기독교의 사명입니다. 이것을 이루어 놓지 못하면 예수님의 재림의 뜻은 이루어질 수 없습니다.

통일교회에서 말하고 있는 식구라는 명사는 어떠한 것인가? 예수님의 뜻을 상속받아 하나님 앞에 참다운 아들딸의 입장에 있는 사람을 부르는 명사입니다. 형제요, 가족이라는 명사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러면 오늘날 식구면 식구끼리, 형제면 형제끼리 어떻게 나아가야 되느냐?

예수님에게는 생활하는 가운데 있어서 부모도 있었고 형제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진정 하나님이 원하시는 부모와 형제를 가지지 못했습니다. 당시 예수님은 당신이 진정으로 사랑할 수 있는 형제와 부모를 가지지 못했던 것입니다. 그는 이념적인 부모를 생각하였고, 이념적인 형제를 생각하였습니다. 그런데 요셉과 마리아는 하나님의 사랑하는 아들 예수님을 참다운 아들로 키워 주어야 할 지상의 부모가 못 되었던 것입니다. 예수님은 하나님 앞에는 참다운 아들의 입장에 있었지만, 예수님 앞에 요셉과 마리아는 참다운 부모의 입장에 서지 못했습니다. 때문에 하나님은 이 부모의 입장을 대신하여 재림이라는 섭리적인 기준을 세우시고 그것을 위해 2천년이란 기나긴 역사 동안 섭리해 오신 것입니다.

만일 그 당시에 이스라엘 민족이 예수님의 뜻을 받아들였다면, 예수님은 참다운 아들로서의 기반을 완전히 닦는 동시에 참다운 형제의 기반을 닦고 참다운 식구의 기반을 닦아 놓았을 것입니다. 또한 살아생전 마리아와 요셉이 책임 못한 것까지 수습해 가지고 하나님의 공인을 받아 부모의 자리로 나아갔을 것입니다. 그렇게 되었더라면 재림이라는 명사는 필요없지요. 그러나 예수님이 부모의 자리를 완결짓지 못하고 가신 연고로 재림이란 명사가 나오게 되고 ‘나는 신랑이요, 너희는 신부다’라는 말이 남아지고 역사적인 종말시대가 남아지게 된 것입니다.

15-298
다시 오시는 주님의 사명
예수님은 영육을 합해서 참다운 효자의 도리와, 참다운 형제의 도리와, 참다운 식구의 도리를 세워 놓지 못했습니다. 십자가의 죽음으로 말미암아 그것을 영적으로만 세워 놓았지, 영육을 합한 입장에서는 세워 놓지 못했습니다. 때문에 하나님은 이 땅 위에 이 도리를 세우기 위해서 지금까지 2천년의 역사를 연장시키며 섭리해 오셨습니다.

그러면 이 땅 위에 다시 오시는 주님은 어떤 사명을 해야 되느냐? 먼저 영육을 합해서 참다운 효자의 도리를 세우고, 참다운 형제의 도리와 참다운 식구의 도리를 세워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예수님이 그 당시에 하나님을 대신하여 진정으로 사랑하고 싶었지만 사랑하지 못했던 한 가정의 동생이나 누나나 형님같은 사람들이, 오늘날 이 땅의 기독교 신도들 가운데에서 태어나야 됩니다. 이 끝날에 그것이 갖추어지지 않으면 다시 오시는 주님이 부모의 인연을 완결지을 수 없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오늘날 전세계에 널려 있는 기독교인들은 참다운 식구와 참다운 형제의 기반을 갖추어, 예수님 당시의 동생이 되고 형제가 되고 일가친척이 되어야 합니다. 그리하여 전세계에 널려 있는 기독교는 하나의 가족, 하나의 종족을 중심으로 한 대가족권을 이루어야 합니다. 이것이 기독교의 사명인데도 불구하고 오늘날 기독교인들은 예수님 앞에 참다운 식구가 되지 못하고, 참다운 형제가 되지 못하고 있습니다.

그런 연고로 이 땅에 다시 오시는 주님은 제일 먼저 무엇을 해야 되느냐? 참다운 형제와 식구를 찾아야 합니다. 참다운 식구가 이 땅 위에 준비되어 있지 않기 때문에, 예수님의 동생의 사명을 대신해야 되고 예수님의 부모의 사명을 대신해야 합니다. 또한 예수님이 살아생전 이 땅에서 동생과 부모를 가져 보지 못하고, 가족과 친지를 가져 보지 못하고 참다운 가정을 갖지 못한 채 한을 품고 가셨기 때문에, 다시 오시는 주님은 그와 같은 전반적인 요건들을 지상에서 먼저 만들어 놓아야 합니다. 그래야 참다운 부모의 자리로 나갈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기에 오늘날 전세계에 널려 있는 기독교인들은 참다운 형제의 인연 가운데 하나 되어, 하나의 부모를 모시지 않으면 안 되겠다는 단결과 하나의 가족 형태를 갖춰야 합니다. 그러나 이것이 갖추어지지 않은 연고로 다시 오시는 주님은 이 가족의 기반까지 당신 스스로 닦지 않으면 안 되는 것입니다.

2천년 동안 준비해 온 기독교가 사명을 다하지 못한 연고로 오시는 주님은 이것을 다시 개인적으로 닦아야 할 입장에 있습니다. 개인적으로 어떻게 닦느냐? 하나님의 종의 시대와 양자의 시대, 직계 자녀의 시대에 이르기까지 6천년 동안을 섭리해 오신 모든 종적인 역사를, 예수님이 이 시대에 다시 오셔서 수습하고 종의 복귀역사와 양자의 복귀역사와 직계자녀의 복귀역사의 모든 내용을 이 지상에서 완전히 탕감복귀하여 참다운 식구, 참다운 형제, 참다운 가정을 이루어야 합니다.

오늘날 기독교가 참다운 식구와 참다운 형제, 그리고 참다운 가정을 이루어서 예수님을 참다운 주님으로, 참다운 형님으로 모시고, 예수님의 참다운 동생이 되고 참다운 누이가 되어 하나님을 중심한 하나의 형제와 식구가 되어 있다면, 모든 문제가 이렇게 어렵지는 않을 것입니다. 그러나 기독교가 그런 입장에 서지 못하고 있으니 전체의 모든 역사를 새로이 해야 합니다. 새로이 하는 데는 대번에 할 수 없습니다. 대번에 참다운 아들딸의 자리, 참다운 형제의 자리, 참다운 식구의 자리에 세울 수 없다는 것입니다. 사탄세계에 있어서 사탄의 아들딸들을 빼앗아 종으로 훈련시키고, 양자로 훈련시키고, 직계 자녀로 훈련시킨 다음에야 그런 자리에 다시 세울 수 있는 것입니다. 이런 엄청난 사명이 오시는 주님 앞에 남아지게 된 것입니다. 이 시대의 슬픈 역사가 이 땅 위에 벌어지게 된 거예요.

그러면, 오늘날 통일교회는 무엇을 하기 위해서 모였느냐? 기독교인들이 참다운 형제 참다운 식구가 되어 있다면, 오시는 주님은 그들을 기반으로 하나님 앞에 참다운 부모로서 하나의 대가족을 이룰 수 있으나, 기독교가 그런 입장에 있지 못할 때는 오시는 주님은 또다시 그와 같은 길을 가야 합니다. 통일교회는 기독교가 그 사명을 다하지 못해도 기독교를 대신하여 오시는 주님 앞에 참다운 종이 되고, 참다운 양자가 되고, 참다운 직계 자녀가 되어 본연의 새 가정을 세우기 위해 나온 것입니다. 이 목적권내로 나아가고 있는 것이 현재의 통일교회입니다.

15-300
직계의 자녀가 되면
오늘날 통일교회 식구 가운데는 종과 같은 입장에서 시련받아야 할 사람도 있고, 양자의 입장에서 시련받아야 할 사람도 있고, 직계 자녀의 입장에서 시련받아야 할 사람도 있습니다.

그러면 통일교회를 지도하는 선생님은 어떻게 되느냐? 과거 종의 시대에는 하나님 앞에 무조건 종이었습니다. 변명이 없었습니다. 만약 하나님이 ‘죽어라’ 하시면 ‘예’ 하고 죽어야 했습니다. 종의 자리에는 하나님을 아버지라 부를 수 없는 것입니다. 아버지라 부를 수 있는 자격은 양자 이상에게 있는 것입니다. 양자가 되기 위해서는 하나님 앞에 제일 힘들고 어려운 일을 도맡아 이겨내어 영계와 육계를 정복해야 됩니다. 그리하여 하나님의 공인을 받고 참다운 충신의 칭호를 받아야 비로소 양자가 될 수 있습니다. ‘너는 충신이다 혹은 열녀다’ 하는 칭호를 받아야 비로소 양자의 자리로 나갈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양자의 자리에 나가서는 어떻게 해야 되느냐? 생각하는 것이 양부모와 같아야 합니다. 양부모의 심정과 같은 이념권내에 있어야 되는 것입니다. 양부모의 혈통을 중심삼고 볼 때 어떻게든 인연이 되어 있어야 하고, 또 무엇인가 같은 것이 있어야 합니다. 심정이 통하든가 생활 감정이 통하든가, 모든 면에 있어 상하관계가 통해야 합니다. 아버지로부터 출발하여 모든 횡적인 활동의 조건도 통해야 된다는 것입니다. 종의 관계 이상으로 통해야만 비로소 양자의 자리에 갈 수 있는 것입니다.

그다음 직계의 자리에서는 하나님 대신 모든 것을 책임질 수 있어야 합니다. 양자의 자리에서는 심부름이나 하는 것이지만, 직계의 자리에 나가서는 책임지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내가 너를 믿고 명령하니 내모든 위업을 맡아서 관리하라’고 하시는 것입니다. 양자는 자기 당대에, 즉 부모가 살아 계실 때에 부모의 것을 상속받을 수 없으나, 직계 자녀는 부모가 살아 있어도 부모가 허락한 모든 것을 상속받을 수 있습니다. 그런 권한이 있는 거예요. 양자가 하나님 대신 축복해 줄 수 없으나 직계 자녀가 되면 하나님 대신 축복해 줄 수 있다는 것입니다. 축복해 줄 수 있다는 것은 하늘과 땅 사이의 사탄세계를 주관할 수 있는 사람이 된다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오시는 주님은 종의 생활에서부터 모든 것을 하나님 대신 책임질 수 있어야 합니다. 그리고 사탄과 싸워 이겨야 되고 생활적인 무대(개인의 노정)에서 하나님과 심정적으로 일체가 되어야 합니다. 그리하여 이 땅 어디를 가든지 제재를 받지 않는 자리에서 승리의 결정권을 가져야만 비로소 참부모의 자리로 나갈 수 있는 것입니다.

이런 기반을 닦지 않고는 재림역사가 벌어질 수 없습니다. 또 재림역사가 이 지상에서 벌어지지 않는 한 우리가 찾고 있는 참다운 식구와 참다운 형제와 참다운 가정은 이루어지지 않습니다.

15-301
축복받을 수 있는 아들딸
오늘날 통일교회에서는 부모의 심정을 지니고 종의 몸을 쓰고, 눈물과 피와 땀으로써 탕감의 길로 나아가 하나님과 일체가 되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하나님과 일체가 되려면 어떤 과정을 거쳐야 되느냐? 종의 노정을 거치고 양자의 노정을 거쳐 하나님의 축복을 받을 수 있는 직계 자녀의 자리까지 나아가야 됩니다. 축복받을 수 있는 자리에 나가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되느냐? 내가 갖고 있는 모든 재산은 하나님의 것이요, 하나님이 우리의 참다운 부모이시라는 사실을 깨달아야 합니다.

오늘날, 우리 통일교회 식구들까지도 개인주의화, 자기화하는 경향으로 흘러가고 있는 것을 왕왕 봅니다. 여러분은 진정 예수님이 가족을 사랑하고 싶어했던 그 마음을 대신하여 하나님이 기뻐하실 수 있는 입장에 서서, 예수님의 형이나 동생의 입장에서 예수님을 모셔야 합니다. 예수님이 동생을 사랑하고 싶었지만 진정으로 사랑했느냐? 사랑하지 못했습니다. 형님같이, 아저씨같이 모시고 사랑하고 싶었지만 그러지 못했습니다. 그러니 오늘날 우리들이 예수님을 대신하여 사랑해야 합니다. 부모를 모시고 효도하고 싶어했던 예수님을 대신하여 효도하고, 형제를 사랑하고 싶어하던 예수님을 대신하여 사랑할 수 있어야 됩니다.

예수님을 대신한 입장에 서서 예수님의 가족이나 형제를 사랑했던 그 마음을 가져야 하고 더 나아가서는 민족과 국가와 세계를 예수님과 같은 입장에서 생각하고 사랑할 줄 아는 통일교회 식구들이 되어야 하겠습니다. 그래야 비로소 예수님이 찾으시는 참된 형제요, 참된 식구요, 참된 가정입니다. 선생님은 한때 나를 위해 충성하는 사람을 보면 한번쯤 그를 의심했습니다. 저 사람이 참되이 뜻을 위해 갈 것인가, 안 갈 것인가. 내 대신 책임을 맡길 수 있을 것인가, 없을 것인가. 내가 희생하는 한이 있더라도 그를 살려 주어야겠다는 마음을 가질 때까지 그런 생각을 했었습니다. 왜냐하면 그가 그 자리까지 나가야만 비로소 축복받을 수 있는 아들딸의 입장에 설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지 않고는 선생님과 직접적인 관계가 안 맺어집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아들로서 이 땅에 오셔서 만민을 대신하여, 충신의 입장에서 죽어 갔고 양자와 직계 자녀의 입장에서 죽어 갔습니다. 모든 사람 앞에 천부를 대신한 입장에서 죽어 갔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예수님을 믿는 신자들 중에는 종이 될 수 있는 사람이 있고, 양자가 될 수 있는 사람이 있고, 직계 자녀가 될 수 있는 사람이 있는 것입니다.

통일교인들은 뜻을 믿고 나가는 데에 있어서 종의 시대와 양자의 시대와 직계의 자녀의 시대를 거쳐야 됩니다. 그러한 세 과정을 거쳐 가지고, 자기가 전도한 사람이나 자기를 따르는 식구를 부모가 자식을 위하여 죽음을 각오하고 사랑하는 것처럼 사랑할 수 있어야 합니다. ‘내가 희생되더라도 내 모든 전체의 복을 그 사람에게 넘겨 주었으면 감사하겠다’는 마음이 여러분에게 자동적으로 일어나야만 비로소 축복받는 아들딸이 될 수 있는 것입니다.

오늘날 우리 식구들 가운데 그런 자리에 올라온 사람이 과연 얼마나 되는지 의문입니다.

이런 관점에서 진정 식구라는 명사를 부르짖는 우리가 완전한 식구가 되어 있느냐? 혹은 하늘 앞에 완전히 부합된 형제로서의 명사를 갖추었느냐? 하늘의 가정이면 가정으로서, 하늘의 식구면 식구로서 완전히 하나 되어 있느냐? 그러지 못하고 있습니다. 종적인 관계나 선생님과의 관계는 잘 맺었는지 모르지만 횡적인 관계에 있어서는 아직까지 하나 되어 있지 않습니다. 식구라는 명사 가운데는 형제의 인연이 담겨 있고, 또한 수많은 무리가 함께 동고동락한다는 뜻이 있는데, 오늘날 여러분은 아직까지 이 횡적인 관계가 완전히 하나 되지 못했다는 것입니다.

15-303
연대적인 책임, 연대적인 십자가
그렇기 때문에 여러분들은 예수님이 뜻대로 살지 못한 생활무대를 재차 전개해 놓고, 예수님이 사랑하고 싶었으나 사랑하지 못한 동생이나 형을 예수님 대신 사랑하고, 예수님을 형제처럼, 부모처럼 모실 수 있어야 합니다. 그래야만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로서 복귀과정에 있어서 만민의 형님이나 오빠의 입장에서 나왔던 것같이, 여러분도 그런 입장에 서게 됨으로써 하나님의 아들딸의 입장에 설 수 있지, 그러지 않으면 직계 자녀의 자리로 나갈 수 없습니다.

그러니 여러분은 자기 자신이 어떤 입장에 있는가 비판해 보고 빨리 깨달아야 합니다. 식구는 물론이요, 이 삼천만 민족과 전세계 인류를 과연 동생같이 사랑할 수 있고, 혹은 언니나 형님같이 사랑할 수 있는 자신이 되어 있는가? 혹은 만민이 살 수 있는 길을 위해 십자가를 지고 희생하신 예수님과 같이, 희생할 수 있는 자신이 되어 있는 가? 하나님을 위하여, 부모를 위하여, 형제를 위하여 서슴지 않고 제물이 되겠다고 결의를 갖추어야만 비로소 하나님이 공인하는 아들딸이 될 수 있는 것이요, 형제와 식구가 될 수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짊어진 십자가는 예수님 당시의 33년 동안의 십자가로 끝난 것이 아닙니다. 그 십자가는 2천년의 십자가로 연결된 것입니다. 예수님이 참다운 형의 입장과 참다운 주인의 입장에서 지금까지 역사적인 인연을 이끌고 나온 것을 볼 때, 예수님이 짊어진 십자가는 그 당대에서 끝난 것이 아니라 개인으로부터 가정, 종족, 민족, 국가, 세계로 연결되어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러니 오늘날 우리들도 이 길을 가는 데 있어서는 십자가를 짊어지고 가야 합니다.

그러면 그 십자가, 또는 가야 할 길, 그것이 우리 통일교인들에게만 한정된 책임이냐? 아닙니다. 전 30억 인류가 하나님을 위주로 하여 참다운 형제와 참다운 자녀와 참다운 가정이 되기 전까지는, 십년 혹은 백년이 가더라도 개개인 모두에게 연대적인 십자가를 져야 할 책임을 더 이상 연장시켜서는 안 됩니다. 우리 당대에 끝내야 됩니다. 우리가 힘을 합하여 이것을 단축시키면 단축시킬수록 역사적인 십자가를 제거시킬 수 있습니다. 우리가 희생하면 희생할수록 민족적인 십자가를 제거시킬 수 있고, 우주적인 십자가를 제거시킬 수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이것을 단축시키지 못할 때에는, 이 역사적인 십자가는 현실적인 십자가에서 미래적인 십자가로 이어져 남아진다는 사실을 우리는 똑똑히 알아야 되겠습니다.

여러분이 지방에 나가 전도할 때는 여러분 개체만 나가서 전도하는 것이 아닙니다. 하늘나라 전체를 대신하여 나가 싸우는 것이요, 전가정을 위해 나가 싸우는 것이요, 전형제와 전식구들을 위해 나가 싸우는 것입니다. 그러한 여러분이 한번 실수하면 하나님이 짊어져야 할 십자가는 여러분이 구원될 때까지 즉, 여러분 개인과 관련되는 가정과 종족과 민족 전체가 복귀될 때까지 남아지게 됩니다. 개인을 위주로 하여 전체로 연결지어 나오는 하나님이기 때문에, 여러분 각 개인이 이러한 전체적인 책임을 당대에 완결짓지 못하면, 그것이 역사적인 십자가의 고충으로 남아진다는 것을 알아야 됩니다.

예수님도 그 당시에 짊어져야 할 십자가를 전부 완결짓지 못하고 갔기 때문에, 하나님은 2천년의 기나긴 세월을 통해 그 시대에 해결 못한 십자가의 짐을 개인적인 십자가에서부터 가정적인 십자가, 혹은 민족적, 국가적, 세계적인 십자가를 짊어지고 지금까지 나오신 것입니다. 그러나 이 십자가의 길은 아직까지 끝나지 않았습니다. 다시 오시는 주님 앞에 이것을 상속해 주어야 하니, 그 주님이 영육을 합하여 개인적인 십자가에서부터 가정적, 민족적, 국가적, 세계적인 십자가까지 이 땅에서 완결짓지 않는 한 예수님의 십자가는 끝나지 않는 것입니다. 또한 하나님의 십자가도 끝나지 않는 것입니다. 연대 책임을 짊어지고 있는 연고로 부모가 짊어진 십자가가 여러분의 십자가요, 형님이 짊어진 십자가는 동생의 십자가요, 동생이 짊어진 십자가는 부모와 형님의 십자가입니다.

15-305
7년노정의 의의
그렇기 때문에 우리들은 서로 단합하고 협동하여 공동으로 보조를 맞춤으로써 한꺼번에 탕감할 수 있는 조건을 세워야 합니다. 이것이 통일교회 식구들의 사명입니다. 그래서 우리들은 ‘행동통일’ ‘이념통일’ ‘심정통일’을 부르짖는 것입니다. 이런 통일이념은 오늘날에 있어서 지역과 환경이 다를 지라도 행동적인 면에서는 전체를 한꺼번에 탕감할 수 있습니다. 그러기에 이 3년노정에 있어서 선생님이 수고할 때는 여러분들도 수고해야 하며, 선생님이 고생할 때는 통일교회 식구 전부가 고생해야 됩니다. 식구들이 고생하고 선생님이 고생하면, 하나님이 여기에 보조를 맞추어 주실 것이며 그러한 역사적인 수고의 대가로 지난날을 탕감할 수 있는 것입니다. 이것이 3년노정과 4년노정의 의의라는 것을 여러분은 똑똑히 알아야 합니다.

이 가운데 슬픔이 있다 할진대 그것은 개인의 슬픔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슬픔은 우리 전체의 슬픔이요, 하나님의 기쁨은 우리 전체의 기쁨입니다. 따라서 우리 개체의 기쁨도 전체의 기쁨으로 이어지는 하늘땅의 기쁨이라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전세계 통일교회 신도들의 생활은 별개의 생활이 아닙니다. 행동적으로 이념적으로 심정적으로 일치된 자리에 있기 때문에, 좋아해도 같이 좋아하고 슬퍼해도 같이 슬퍼하고, 울어도 같이 울고 십자가를 져도 같이 지는 입장에 서야 됩니다. 이러한 과정을 통해 하나님이 역사를 통해 넘어가고자 하시는 탕감적인 기간을 단축시키자는 것이 이 7년노정이라는 사실을 여러분이 알아야 합니다.

이 7년노정이란 어떠한 노정이냐? 참된 식구와 참된 형제가 되어 참된 부모와 더불어 탕감의 기간을 넘어가는 노정입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여러분이 아무리 홀로 있더라도, 하나님의 염려를 대신할 수 있어야 하고, 어떤 것을 책임진 사람이 있다 할진대 그 책임자의 염려를 대신할 수 있어야 하며, 혹은 교회면 교회 전체의 염려를 대신 책임질 수 있는 입장에 서서 전체 목적을 위해 역사적인 십자가를 지고 골고다 도상에 서셨던 예수님의 대신자가 되어야 합니다.

만일 예수님 당시에 참다운 형제가 있었다면 그 형제는 예수님과 같이 십자가를 져야 했습니다. 또한 참다운 부모가 있었다면 그 부모 역시 십자가를 같이 져야 했습니다. 예수님은 그와 같은 입장에서 십자가의 길을 가셨지만, 지상에 있는 예수님의 형제나 혹은 제자들이 예수님과 함께 십자가를 지고 가지 못했기 때문에, 지금까지 수많은 사람들이 개인적으로 가정적으로 혹은 세계적으로 전부가 갈라져 나온 것입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한입니다. 그러니 여러분들은 이것을 몽땅 종합하여서 예수님의 동생이 되어야 하고, 예수님의 가족과 친척이 되어야 합니다. 만일 그 시대에 예수님의 형제가 십자가의 길에 동참했더라면, 그때 하늘땅을 중심하고 전식구가 가정적인 십자가를 탕감하였을텐데, 그것을 못했기 때문에 오늘날까지 이스라엘 민족 모두가 개인적으로 그런 십자가를 지게 되었고 가정이 갈라지는 고난의 길을 거쳐 나온 것입니다.

그러면 끝날에 우리 통일교회는 어떻게 해야 되느냐? 영육을 합한 실체를 가지고 예수님의 제자로서 혹은 예수님의 동생으로서 십자가를 져야 하며, 더 나아가서는 민족을 대신하고 국가를 대신하여 십자가의 고개를 넘어야 합니다. 그래야만 세계적으로 하나의 국가적인 승리의 터전을 마련할 수 있고, 또 그것으로 인해 세계가 십자가를 지지 않고 넘어갈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들은 개인적, 종족적, 민족적, 국가적인 노정을 걷는 데 있어서 전체가 행동을 일치하여, 죽어도 같이 죽고 살아도 같이 살고, 기뻐도 같이 기뻐하고 슬퍼도 같이 슬퍼할 수 있어야 합니다. 그래야 예수님에게 부활의 기쁨이 주어지면 그때 동참한 사람들도 승리의 기쁨을 함께할 수 있으며, 예수님이 승리하면 그때 같은 입장에 있던 자들도 그 자리에 동참할 수 있습니다. 그런 노정을 거치지 않으면, 전체가 국가의 기준을 넘어갔더라도 앞으로 오는 사람들은 개인적인 십자가, 가정적, 종족적, 민족적, 국가적, 세계적인 십자가를 다시 지고 가야 됩니다.

오늘날 우리 통일교회에서는 식구라는 명사를 가지고 부모를 중심으로 하여 참된 식구와 참된 형제의 인연을 갖추기 위해서 같이 울고, 같이 싸우고, 같이 십자가를 지고, 같이 승리할 수 있는 길을 가자는 것입니다. 이것이 7년노정입니다.

그러면 참다운 효자 효녀와 참다운 형제는 어떤 사람이냐? ‘형님을 수고시키지 않기 위해서 내가 십자가를 지겠다. 부모를 수고시키지 않고 내가 부모 대신 십자가를 지겠다. 혹은 통일교회 식구를 고생시키지 않기 위해서 내가 나서겠다. 내가 민족의 십자가를 대신 지겠다’고 하면서 큰 책임과 큰 십자가를 먼저 지겠다고 하는 사람입니다. 그런 사람이라야 비로소 형제가 될 수 있고 하나님의 사랑을 받을 수 있는 참다운 아들딸의 승리의 기반을 닦아 나온다는 것입니다. 즉 내외적으로 모두 승리의 기반을 닦는 사람만이 참다운 아들딸이 될 수 있는 것이요, 참다운 형제가 될 수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2천년 동안 내적으로 기반을 닦아 왔고 외적으로는 재림의 이념을 남겨 놓으셨습니다. 그와 마찬가지로 다시 오시는 주님도 내적인 기반을 닦고 외적인 기반을 닦아야 하는데, 그 내적인 기반을 닦는 것이 3년노정이요, 외적인 기반을 닦아서 종결짓는 것이 4년노정입니다.

15-307
참된 식구
그러면 통일교회가 뭘 하는 곳이냐? 통일교회는 가정을 세우기 위한 곳입니다. 어떤 가정? 오늘날 우리가 갖고 있는 이 조그만 가정이 아닌 대우주적인 가정을 세우기 위한 곳입니다. 대우주적 가정을 세우기 위해서는 우주적 사탄 가정을 정복하고 굴복시켜야 합니다. 사탄을 정복하고 굴복시키려면 어떻게 해야 되느냐? 세상의 무력을 갖고 정복하는 것이 아닙니다. 피와 땀과 눈물로써 정복하는 것입니다. 생사가 교차하는 모든 고난길을 넘게 해서 탕감시켜 놓고 복귀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현재 우리 통일교회는 종족적인 기반을 중심삼고 통일민족을 형성해야 합니다. 이 민족이 통일의 국가적 기반을 닦아 넘어가야 할 입장에 있기 때문에, 통일교회 식구들은 너나할것없이 자신의 가정을 위해 싸울 것이 아니라 나라를 위하고 민족을 위해서 싸워야 합니다. 우리의 제일 큰 목적은 이 나라와 이 민족을 구하는 것입니다. 이 나라와 민족을 구하기 전에는 이 세계와 하늘땅을 구할 수 없습니다.

그렇다면 이 민족을 왜 우리가 구해야 되느냐? 이 민족에게는 아직도 가야 할 십자가의 길이 남아 있기에, 그것을 빨리 거쳐가기 위해 우리가 책임지는 것입니다. ‘나는 형제들보다 더 고생을 하고 형제들보다 십자가를 더 지겠다’ 하는 입장에 서야 하나님의 사랑을 받을 수 있는 아들딸이 되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오늘날 전세계에 널려 있는 우리 통일교회 교인들은 각자의 나라를 위해서 전도하는 것도 목적이지만, 제일 첫째 되는 목적은 한국 백성을 빨리 하나님 앞에 인도시키는 것입니다. 그것을 위해 전도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오늘날 한국적인 십자가는 누가 져야 되느냐? 바로 우리들이 져야 합니다. 한국적인 슬픔은 누가 지느냐? 통일교회가 져야 합니다. 한국적인 환난은 누가 당해야 되느냐? 통일교회가 당해야 합니다. 한국적인 어려움은 누가 당해야 되느냐? 먼저 통일교회가 당해야 합니다.

그래서 우리는 지금까지 자원해서, 자진해서 이 십자가의 길을 걸어 왔습니다. 사탄은 십자가의 길을 도피하지만, 하나님은 십자가의 길을 넘어서 찾아가십니다. 세상 사람들도 십자가의 길을 싫어하지만, 도의 길을 가는 사람들은 십자가의 길을 자청해서 갑니다.

그러면 통일교회 식구들이 한국을 위주로 한 십자가의 고개를 다 넘어간 후에는 어떻게 해야 되느냐? 세계적인 십자가의 노정을 넘기 위해서 다시 세계적인 십자가를 지고 가야 됩니다.

오늘날 통일교회의 참된 식구는 어떤 위치에 있는 식구를 말하는가? 하나님이 찾고 계시는 참된 식구는 국가권내에 있는 식구가 아닙니다. 국가권내를 넘어 세계권내로 들어선 식구가 참된 식구입니다. 아무리 개인적인 입장에서 참된 식구가 되었다 하더라도 참된 가정적인 십자가의 고개를 넘어 승리하지 못하면 개인적인 위치의 참된 식구는 깨어진다는 것입니다. 또한 복귀된 가정권내에 참된 식구는 되었다 하더라도 자기 종족권 내에 있는 식구들이 종족적인 십자가의 고개를 넘어서지 못하면 참된 가정적인 식구는 깨진다는 것입니다.

개인이 승리하기 위해서는 몸과 마음이 모두 사탄세계의 고난을 이길 수 있어야 합니다. 가정이 승리하기 위해서는 개인이 승리하기까지의 과정보다 더 어려운 과정을 거쳐야 합니다. 더 큰 종족적인 십자가가 가중되기 때문입니다. 개체에 있어서는 몸과 마음에서 선이 악을 굴복시키면 개인적으로 승리할 수 있지만, 가정적으로 승리하기 위해서는 가정적인 십자가보다 더 큰 십자가를 지고 가야 합니다. 또 종족적으로 승리하기 위해서는 종족적인 십자가보다 더 큰 십자가를 지고 가야 합니다. 한 단계 넘어갈 적마다 더 큰 십자가가 남아 있는 것입니다. 그러기에 참된 식구란 개인적인 십자가를 넘어선 사람이 아니라, 세계적인 십자가를 넘어선 사람입니다. 그런 참된 식구의 자리에 서야만 하나님의 자녀가 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면 개인은 무엇이냐? 하나님의 자녀의 인연을 갖고 자라고 있는 존재입니다.

복귀도상에서 야곱과 에서를 중심삼고 볼 때, 야곱은 사탄편인 에서와 싸워서 개인적으로 승리했고, 하란에 가서는 가정적인 싸움에서 승리하였습니다. 그러한 터 위에서 모세는 민족적으로 승리하였습니다. 이러한 터 위에서 예수님이 마지막으로 세계적인 승리를 하여 온 세계를 굴복시키고 하늘 앞에 참다운 아들로 등장했더라면, 오늘날 여러분들이 만왕의 왕이요 만우주의 주인인 그분 앞에 참다운 아들딸이 될 수 있었을 것인데, 그러지 못했기 때문에 아직까지 하나님의 아들딸이 되기 위해 기도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참된 식구는 이 세계사적인 과정을 넘어가야 됩니다. 참행복을 노래하기 위해서는 이 세계사적인 과정을 넘어가야만 되는 것입니다.

15-309
넘어가야 할 십자가의 고개
오늘날 통일교회에서는 어떠한 입장에 있는 사람을 식구라 부르는가? 앞으로는 세계사적인 모든 십자가의 노정을 탕감하고 남을 위하여 자신을 희생하겠다는 입장에 서는 사람을 식구라 불러야 합니다. 그러기 때문에 오늘날 우리들은 그러한 희생의 길을 가야 됩니다.

선생님도 역시 개인적인 십자가, 가정적인 십자가, 종족적인 십자가, 민족적인 십자가, 국가적인 십자가의 길을 가고 있습니다. 이 삼천리 반도에 슬픈 일이 있으면 그 슬픈 일이 나와 관계가 없는 것이 아닙니다. 사탄이 삼천만 민족에게 갖다 준 슬픈 여건, 곧 모든 십자가의 여건을 우리가 처리해야 합니다. 삼천만이 짊어져야 할 모든 십자가를 우리가 대신 짊어지고, ‘이제는 탕감의 조건을 세워야 할 십자가가 없다’고 할 수 있게끔 해야만 민족을 구할 수 있습니다.

그러기에 통일교회 교인들은 이 민족 가운데서 제일 불쌍한 사람들입니다. 누구보다도 배고파 울고 누구보다도 헐벗어 떨고 있습니다. 누구보다도 비참하다는 거예요. 그러나 눈물을 흘리고 거기에서 쓰러지는 자가 아닙니다. 예수님은 십자가를 짊어지고 골고다 산정을 향해 가실 때, 부활의 한 날을 위해서 백 번 쓰러지더라도 가야 되겠다는 신념을 갖고 있었습니다. 십자가에 죽을 때까지 ‘아버지여 내 영혼을 받아 주십시오’ 하면서 승리의 결의와 각오를 잃지 않고 그 죽음권을 무난히 넘어갔기 때문에, 육신은 죽었으되 개인적으로 살아난 입장에 있는 것이요, 혹은 가정적으로 종족, 민족, 국가, 세계적으로 살아난 입장에 서게 된 것입니다. 또 그것을 기반으로 하여 영적으로 개인복귀, 가정복귀, 세계복귀를 이룰 수 있는 것이며 영계 편성이 이루어질 수 있었던 것입니다.

그러니 다시 오시는 주님과 그 주님을 중심으로 한 성도들은 예수님이 골고다의 길을 영적인 승리로 닦았던 것과 같이, 실체로서 민족과 국가를 대신하여 죽지 않고 무난히 그 십자가의 길을 돌파해야 된다는 것입니다. 그러니 여기에 모인 강원도 식구들이나, 남한 각지에 흩어져 있는 식구들, 혹은 전세계에 널려 있는 통일교회 식구들은 모두 십자가의 길에 동참해야 합니다.

미국 식구들이 전도하는 것은 미국을 구하기 위해서가 아닙니다. 일본 식구들이 전도하는 것도 마찬가지입니다. 한국이 민족적인 기반을 못 세웠기 때문에 한국을 지원하기 위해서 전도하는 것입니다. 한국이 자리를 잡으면, 전세계에 널려 있는 식구들은 거기서부터 세계적인 발판을 닦고 세계적인 봉사의 길, 세계적인 희생의 길, 세계적인 십자가의 길을 감당할 수 있는 참다운 식구와 참다운 형제와 참다운 자녀가 되는 것입니다. 지금 이 권내에 참다운 자녀요, 참다운 식구요, 참다운 형제라고 말하는 것은 십자가의 길에 같이 동참해 나갈 수 있는 입장에서 말하는 것입니다. 십자가의 길을 헤쳐 나가야 행복과 평화를 노래할 수 있는 참다운 식구가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여러분은 이 길을 무난히 넘어가야 합니다.

이 민족을 대신하여 4년이라는 기간을 정해 놓고 나가는 데 있어서, 여러분이 기도하게 될 때는 선생님을 위해 기도해야 합니다. ‘아버지여! 당신이 지금까지 개인적, 가정적, 종족적, 민족적인 투쟁 역사를 거쳐오시며 피와 땀과 눈물을 흘리셨으니, 나도 당신이 흘린 피와 땀과 눈물의 길에 동참시켜 주시옵소서’ 해야 합니다. 눈물로 개척해 나왔으니 눈물로 합해야 됩니다. 피와 땀으로 개척해 나왔으니 피와 땀으로 하지 않고는 합해지지 않습니다. 접을 붙이려면 맥이 통해야 됩니다. 그렇기 때문에 통일교회 교인들은 이 뜻을 알고 이 민족이 하나님 뜻 앞에 설 때까지, 그와 같은 입장에서 고통과 슬픔과 어려움을 당해야 합니다. 그러지 않고는 개인, 가정, 종족, 민족의 단계까지 닦아 놓은 터전에 이 민족을 접붙일 수 없습니다.

여러분이 전도 나가서 고생하고 굶주리고 욕먹고 다니는 것은 여러분 개인을 위한 것이 아닙니다. ‘나는 우리 집을 대신하고 형제를 대신해서 십자가를 지고 우리 나라를 세우기 위한 터를 마련하기 위해서 간다’라는 생각을 가져야 됩니다. 이것이 기반이 되는 것입니다. 앞으로 젊은이들이 어려운 길을 개척해 나가지 않고 슬픈 길을 자처하여 책임지지 않고는 이 나라, 이 민족은 어렵습니다.

우리가 언제 하늘과 땅이 기뻐할 수 있고, 하늘 앞에 영광을 돌리고 만민을 축하해 줄 수 있는 행복한 자리에서 참다운 형제요, 참다운 자녀요, 참다운 식구라고 자랑해 보았습니까? 못해 봤습니다. 비참한 눈물로 하늘땅을 저주하고 원망하고 싶은, 그런 애달픈 입장에 있는 식구는 본연의 식구가 아닙니다. 십자가를 짊어지고 나가는 과정에서 참임을 보장받기 위한 식구이지 아직 참된 식구는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반드시 십자가의 고개를 넘어야 됩니다. 우선 최소 단위로부터 시작하여 민족적, 국가적인 십자가의 고개를 넘어서야, 이 국가를 중심한 삼천만 민족이 비로소 한 형제가 될 수 있고 한 식구가 될 수 있고 하나의 자녀가 될 수 있습니다. 우리는 그 고지를 향하여 나가야 합니다.

15-312
앞으로 남아 있는 십자가는 더 큰 것
세례 요한이 예수님을 증거할 때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양을 보라’ 했습니다. 어찌하여 예수님이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양이 됐느냐? 그것은 예수님이 개인으로부터 가정, 종족, 민족, 국가, 전인류, 그리고 하늘땅의 모든 십자가를 홀로 지셨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이 세계적인 십자가의 길을 내가 무난히 돌파하겠다’는 신념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이 십자가의 모든 고난의 길을 넘어 아버지를 만나고 싶은 간곡한 마음, 아버지를 모시고 효도하고 싶은 그 마음이 십자가의 고통보다 더 강했기 때문에 예수님은 십자가의 길을 갈 수 있었던 것입니다.

만일에 그런 간곡한 마음이 없었다면 십자가의 길을 넘어가지 못했을 것입니다. 여러분도 마찬가지입니다. 여러분도 이 세계에 참다운 승리의 터전을 마련하여 하나님을 모시고, 참부모님을 모시고, 개인의 한과 인류의 한과 지금까지 수많은 역사적인 한을 모두 탕감해야 합니다. 더 나아가서는 하나님의 한을 풀어 드려야 하고, 땅의 한을 풀어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하나님 앞에 행복을 노래하고 찬양할 수 있는 참다운 식구와 참다운 아들딸이 되겠다는 마음이 간절해야 합니다. 그 자리에서 효자 효녀가 되고 충신 열녀가 되어 아버지를 모시고 싶다는 간곡한 마음이 있어야 오늘의 무거운 십자가를 밟고 넘어갈 수 있지, 그런 강한 신념과 강한 욕망이 없이는 이 십자가를 넘기 어렵습니다.

오늘날 여러분과 선생님은 개인적인 입장을 대표한 것이 아닙니다. 민족을 대표한 선생님이요, 민족을 대표한 여러분들입니다. 그리고 이 일은 누가 해도 꼭 해야 되는 것입니다. 여러분이 안 하면 다른 민족을 세워서라도 해야 되고 만일에 선생님이 그 일을 못 하면 다른 사람이 나와서라도 해야 되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형제와 더불어 혹은 식구와 더불어 남아진 십자가의 길을 가야 합니다. 하나님을 대신하고, 자녀의 입장에서 서로가 고난의 길에 선봉자가 되고 개척자가 되겠다는 마음으로 가야 합니다. 이런 마음이 약화될 때는 여러분은 낙오자가 되고 패잔병이 될 수밖에 없습니다. 그렇게 되면 오늘날 이 사회와 세계를 박차고 나오려고 지금까지 숱한 고난과 역경을 거쳐 왔는데, 그것이 여러분에게 복을 갖다 주는 것이 되지 못하고 도리어 한을 갖다 주는 슬픔의 짐이 된다는 것입니다.

만일 민족적인 십자가의 고개를 넘은 후에 이 뜻을 알고 들어온 사람이 있다면, 도리어 늦게 들어온 사람이 복이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아직까지 복귀섭리가 끝나지 않았을 때는 여러분이 그것을 책임져야 합니다. 하나님이 가기 전에 여러분들이 먼저 하나님 앞에 충신이 되고 효자 효녀가 되어야 할 복귀의 길인 것입니다. 그것을 알았을 때 여러분은 ‘지금까지 내가 모를 때에 개인적인 십자가, 가정적인 십자가가 지나가 버린 것이 섧구나! 종족적 민족적 십자가가 내가 모를 때 지나가다니……’‘이제 내가 그것을 알았으니 민족적, 국가적인 십자가를 내가 짊어지겠다. 지금까지 먼저 나온 형님들, 누님들 내가 알지 못하는 사이에 이 길을 가느라 수고했으니, 이제는 그 바톤을 나에게 넘겨 주소’ 할 수 있어야 합니다. 나중에 들어온 사람들이 이런 신념을 가지고 형님들에게 그 바톤을 ‘나에게 주소’ 하면 또 형님들은 ‘아니다, 내가 가겠다’ 하여 싸움이 벌어질 수 있는 기준이 되어야 됩니다.

그러지 못하면 문제가 커집니다. 나중에 들어온 사람들이 그런 입장에 서지 못하면 먼저 들어왔던 사람이 가자고 하든가, 아니면 먼저 들어온 사람이 그러지 못하면 나중에 들어온 사람이 같이 가자고 하든가, 둘 중에 하나가 되어야 됩니다. ‘아이구 뭐 먼저 들어온 사람이 저런데 우리야 뭐 이렇게 하면 되겠지, 저 사람들 하는 거나 보고 따라가면 되겠지’ 하면 절대 안 된다는 것입니다.

앞으로 남아 있는 십자가는 더 큰 것입니다. 과거의 형님들이 싸우던 것보다 더 지긋지긋하고 더 큰 시련과 더 큰 무대의 십자가가 앞에 남아 있다는 것입니다. 형님들이 싸워 나온 십자가도 컸지만, 오히려 이제는 개인적인 십자가가 점점 커져 간다는 것입니다. 앞으로 나타나는 환경적인 큰 십자가가 있으니 새로 들어온 사람들은 지금까지 형님들이 수고하여 개척한 그 길을 따라가 승리하겠다는 큰 신념을 가져야 됩니다.

이스라엘 민족 60만 대군이 광야에서 40년 만에 다 쓰러졌을 때, 그 2세들이 여호수아와 갈렙과 같은 새로운 지도자 밑에서 강하고 담대한 신념을 가지고 축복받은 가나안 땅을 향하여 행군했던 것과 마찬가지로, 여러분들은 지금까지의 3년보다도 앞으로 남은 4년 기간의 십자가노정이 더 크기 때문에, 먼저 온 사람들이 더 이상 괴로와 못 가겠다고 하거든 그들을 보고 방관하지 말아야 합니다. 새로운 젊은이들은 허리띠를 졸라매고 ‘가자’ 할 수 있어야 합니다. 새로이 동원하여 ‘가자’ 하는 의분심과 결의를 가져야 됩니다.

15-314
불타는 신념을 가져야
민족적인 십자가, 민족적인 골고다는 누가 책임질 것이냐? 여러분들이 책임져야 합니다. 선생님은 개인적, 가정적, 종족적, 민족적인 십자가를 짊어지고 왔습니다. 그러나 아직도 가야 할 길이 남아 있습니다. 그러니 여러분은 이 4년노정에 있어서 참된 식구와 참된 형제, 참된 자녀가 될 날을 그리워하며 참고 나가야 합니다. 자유스럽고 평화스러운 에덴 동산의 아담 해와의 대신자로서 하나님의 축복을 받아, 온 천하를 자기의 소유로 하고 하나님을 길이길이 모시고 천사장을 종과 사환으로 부릴 수 있어야 합니다. 온 우주를 대신하여 하나님의 영광을 찬양할 수 있는 본연의 참다운 자녀의 자리를 그리워하면서 참고 또 참고 나가야 합니다.

야곱은 장자의 축복을 받고, 이 축복은 하나님이 틀림없이 이루어 주신다는 신념과 믿음을 갖고 21년 동안을 싸웠습니다. 이스라엘 민족도 애급에서 400년 동안 고역하는 핍박도상에서도, 하나님의 축복을 받은 이스라엘 민족은 반드시 젖과 꿀이 흐르는 가나안 복지로 인도될 것이라는 신념을 버리지 않았습니다.

통일교회 여러분의 마음 가운데는 복귀의 해원성사에 대한 불타는 신념이 있어야 합니다. 슬프고 슬픈 하늘과 땅에 맺혀진 원한을 해원성사해야 됩니다. 누구를 통하여 할 것이냐? 아들딸을 통하여 할 것이냐? 형제를 통하여 할 것인가? 아닙니다. 누구도 아닌 바로 자신이 해야겠다는 신념에 불타야 합니다. 이제 우리는 남겨진 십자가의 길을 향하여 총진군하지 않으면 안 될 엄숙한 시대를 맞이하고 있습니다.

오늘 우리의 국내 정세를 보나 국외의 정세를 보더라도 세계는 마지막 판국을 향하여 기울어져 가고 있습니다. 이것을 수습하기 위해서는 기울어 가는 운세를 따라가는 사람이 아니라, 그것을 박차고 나가야 됩니다. 물결이 세면 셀수록 거기에 따라 들어가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박차고 밖으로 나와야 됩니다. 더우기 한국은 세계 소용돌이의 중심이 되어 있습니다. 무엇으로 보나 중심이 되어 있습니다. 좌우로 공산진영과 민주진영이 있는 틈바구니 속에서, 복잡한 삼각지대권내에서 소용돌이치고 있습니다. 그러니 이 마당에 그냥 서 있다간 다 망하고 맙니다. 이것을 박차고 거슬러 올라갈 수 있어야 됩니다.

지금까지의 악한 운세를 반대적인 노정으로 거슬러 올라가도록 할 수 있는 무리와, 그런 힘의 움직임이 나오지 않으면 안 되는 곳입니다. 여기서부터 올바로 풀려 나가는 날에는 모든 것이 제대로 돌아간다는 것입니다. 중심이 움직이게 된다는 것입니다.

우리 통일교회 젊은이들은 이런 신념을 가져야 합니다. 여러분은 가정에 돌아가 밥을 먹어도 그 가정권내의 식구가 아닙니다. ‘삼천리 반도에 널려 있는 통일의 젊은 형님 누나들은 이 시간에도 수고하고 있구나, 비록 나는 거기에 동참하지 못할지라도 눈물과 더불어 소망과 더불어 심정과 더불어 하나 되어야겠다’고 할 수 있어야 합니다. 하나님의 뜻을 중심삼고 우리의 심정이 일체가 되어야 하고, 사정을 중심삼고는 일체를 이루어야 합니다. 사정은 생활입니다. 사정을 통하지 않고는 원칙적인 자리에 설 수 없어요. 소망이 일치되지 않고는 목적의 세계를 이룰 수 없다는 것입니다.

목적의 세계를 이루기 위해서는 잃어버린 심정과 사정이 일치되든가, 아니면 소원이 일치되든가, 둘 중의 하나는 되어야 합니다. 복귀의 노정을 걸어가는 데 있어서 사정은 통하지만 식구들과 같이 행동하지 못한다고 해서 낙망해서는 안 됩니다. 행동을 못하걸랑 ‘하나님이여! 당신이 소망은 절대로 이루어질 것입니다’ 하는 심정으로 소망을 끌어다 심정에 불붙여 가지고 ‘삼천만 민족 앞에 나가 싸우는 통일의 무리에게 생활적으로나마 발판을 만들어 주겠다. 뜻 앞에 합당하고 자유롭게 활동하지 못하는 대신 내가 마음으로 힘을 보태 주겠다’고 할 수 있어야 합니다.

혹은 식구들이 찾아오면 자신은 못 나갔지만, 그들을 위해 복을 빌어주고 눈물을 흘리며 찾아온 식구들을 격려하여 또다시 힘차게 활동할 수 있는 자극을 주든가, 그렇지 않으면 같이 행동을 하여야 합니다. 같이 행동을 못 하게 될 때는 찾아오는 식구들을 후대하고, 가지고 있는 소망의 마음이 자기로 말미암아 더 간곡해질 수 있도록 그 마음에 플러스해 줄 수 있는 입장에 서면, 그 사람은 비록 행동은 못했지만 하나님의 은사를 받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런 입장에 서지 못하고 찾아온 사람을 낙망케 하고 후회하게 하는 사람은 참된 식구가 아닙니다.

이 셋을 한꺼번에 다하는 것이 원칙이로되 못할 때는 둘이라도 할 수 있어야 됩니다. 그 대신 그 일을 하는 사람을 위해 정성을 다해 기도해 주고, 그들의 결실을 위해 눈물어린 기도를 해 주어야 합니다. 그들을 위해 간절한 마음으로 기도해 줄 때에 그들이 보람을 느끼고 힘을 얻어 ‘이제 내가 대신 싸우겠습니다’ 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런 사람이 형제 중의 형제입니다. 그런데 그러지는 않고 ‘무얼 하려고 또 왔어? ’ 하며 박대하는 사람은 식구가 아닙니다.

15-316
자녀, 형제, 식구라는 명사
그렇기 때문에 눈물짓는 것도 혼자 눈물짓는 것보다 식구들과 더불어 눈물지으면서 기도해야 합니다. 힘든 십자가의 고통이 있을 때 혼자 고통받으면서 기도하는 것보다 둘이 기도하면 그 기도가 빨리 상달됩니다. 두 세 사람이 기도하는 곳에는 하나님이 이루어 주겠다고 하였습니다. 그것이 창조원칙입니다.

주고받으면 거기에는 반드시 번식이 벌어집니다. 번식이 벌어지면 그곳에 4위기대를 조성할 수 있게 되므로 하나님이 거기에 개재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래서 신앙생활을 하는 식구들은 십자가의 길을 갈 때나, 혹은 슬픔과 외로움에 부딪칠 때, 혹은 환난에 부딪칠 때마다 반드시 상대적인 식구를 그리워하게 됩니다. 혼자 슬퍼하는 것보다 식구를 찾아가서 붙들고 자기 사정을 얘기할 때, 그 찾아온 식구에게 힘을 북돋아 주고 ‘우리의 원수를 기필코 굴복시키자’고 서로서로 격려하고 위로해 주고 서로서로 힘이 되어 주어야 합니다. 그런 입장에 서지 못하는 사람은 참된 식구가 아니요, 참된 형제가 아닙니다.

일선에 나가 싸우는 사람들은 직접적인 십자가를 당하는 사람들입니다. 그러니 후방에 있는 사람들은 그들의 십자가를 대신하지는 못할망정 불평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앞으로 오는 때는 우리를 위해 준비해 있나니 ‘동생아 내가 간다’ 혹은 ‘형님! 내가 갑니다’ 할 수 있는 격려의 뒷받침이 있으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만약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돌아가실 때 사랑하는 세 제자도 같이 십자가에 달려서 ‘주여! 당신의 억울함을 푸시옵소서. 당신의 한은 기필코 우리 후손들이 풀어 줄 것입니다’ 이랬으면 예수님에게 얼마나 힘이 되었을 것인가! 그랬더라면 예수님이 죽는 자리에서 ‘아바 아버지여, 어찌하여 나를 버리시나이까? ’ 하는 기도를 하지 않고 ‘아버지여, 우리를 세워서 이 세계의 원한을 푸시고 저들을 보시사 탕감해 주시옵소서!’ 하셨을 것입니다. 그랬던들, 오늘의 기독교 역사가 2천년까지 연장되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예수님은 하나님 앞에서 사랑하는 제자들을 대변하여 ‘이들은 만민을 대신하여 모든 십자가를 졌고 또한 나의 죽음 길에서 나에게 힘을 준 자요, 자기의 죽음을 개의치 않고 나를 위하여 봉사한 자입니다. 하나님이 찾고자 하는 사람은 바로 이런 아들딸이 아닙니까? ’ 할 수 있어야 했을 것인데, 그러지 못한 예수님은 서글펐습니다.

오늘날 우리 통일의 식구들은 어려운 길을 가고 있습니다. 우리 교회는 비로소 식구라는 이름을 부르고 있습니다. 형제요, 자녀란 명사를 쓰고 있습니다. 천지는 없어질지언정 이 거룩한 명사는 없어져서는 안 됩니다. 역사가 심판받고 이 시대가 심판받아 없어지는 한이 있더라도 이 명사와 실체들은 남아져야 된다는 것입니다. 이 세상이 청산되더라도 소망의 식구와 소망의 가정과 소망의 형제는 남아져야 합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이상입니다. 이 소망의 식구들이 완전히 남아지려면 세계사적인 십자가의 길을 넘어서야 합니다.

오늘날 우리 앞에는 개인의 십자가는 물론이요, 가정, 종족, 국가, 세계적인 십자가, 더 나아가서 천주적인 십자가가 남아 있습니다. 하나님이 4천년 만에 예수님을 메시아로 유대 나라에 보내신 것은 유대 나라와 유대 민족과 유대 교회를 수습하여 그 민족을 중심삼고 이 세계를 하늘주권국가로 복귀시키기 위해서였습니다.

오늘날 그 주권국가를 복귀하기 위한 사명을 삼천리 반도 대한민국을 중심삼고 이루어야 하는데, 대한민국은 지금 상당히 혼란되어 있습니다. 고로 이러한 길을 가는데 있어서 형님이 죽음의 길을 가면 동생도 따라가야 됩니다. 동생이 가고자 하면 형도 따라가야 합니다. 부모가 가면 자녀들도 가야 하고, 자녀들이 가면 부모도 가야 됩니다. 공통적인 책임을 지고 하나의 가정을 이끌고 하나의 종족을 이끌고 가야 되겠고, 민족, 국가, 세계를 이끌고, 더 나아가서는 천주를 이끌고 가야 합니다. 때문에 복귀도상에 있어서 시대마다 단계 단계를 넘어서 더 큰 십자가를 개척하면서 가야 할 사명이 우리에게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여러분들은 모두가 그런 입장에 서 있습니다.

15-318
통일교회 젊은이로서의 완전한 생활 방법
‘이제 내 마음은 하나님의 뜻을 알았고, 내 몸과 감정은 하나님의 심정을 체휼하기를 바라고 있으며, 내가 소원하는 것은 행복의 터전 위에 자유와 해방을 노래할 수 있는 평화의 가족, 평화의 식구, 평화의 형제를 그리워하나니, 이 그리워하는 마음을 누가 빼앗아 갈소냐? ’ 할 수 있어야만 하나의 아버지이신 하나님을 중심하고 참부모를 중심한 하나의 가족, 하나의 나라, 하나의 세계를 이룰 수 있는 것입니다. 이 중심인 하나님과 참부모가 기뻐하게 되면 거기에서부터 기쁨이 벌어져 온 천상천하에 기쁨이 넘치고 그것을 바라는 우리의 소원은 백번 천번 죽는 한이 있더라도 결코 잊어버릴 수 없습니다. 이것이 인생에 있어서 해결해야 할 의무요, 타락한 인간이 가야 할 최대의 십자가의 길이니, 조그마한 십자가의 길에 넘어지는 일이 없어야 되겠습니다.

여러분이 자는 시간에도 뜻을 품고 기도하는 형님이나 누님, 동생, 혹은 자지 않고 눈물 흘리는 식구들이 있습니다. 또한 여러분이 배부를 때 굶주린 식구가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그러니 밥을 먹어도, 잠을 자도, 눈물어린 마음으로 그들을 위하여 영적으로나마 힘을 주기 위해서 기도해야 합니다.

제단을 만들어서 항상 깨끗이 청소하고 낮이나 밤이나 ‘나로 하여금 하늘 앞에 바쳐질 수 있는 제물이 되게 해 주십시오’라고 호소해야 합니다. 행동이나 실체의 책임을 감당하지 못하거든 그러한 내적 준비라도 해서 십자가를 지고 가는 식구의 인연이라도 붙들고 늘어져야지, 그러지 않고는 여러분과 지금 나가서 싸우고 있는 사람들과는 오래지 않아 갈라지고 맙니다. 그렇게 되면 여러분들은 낙오자요, 패잔병이 되는 것입니다.

통일교회 젊은이로서의 완전한 생활 방법은 무엇이냐? 일선에 나가 모진 폭풍우가 몰아쳐도 그것을 뚫는 것이고, 또 모든 십자가 도상에서도 이를 악물고 전진하는 것입니다. 이같이 하나님이 소원하는 길을 가는 것이 정도입니다. 그런 자리에서 슬픔을 느껴 보지 않은 사람은 설명으로 통하지 않습니다. 그러한 자리에서 눈물을 흘리면서 ‘아버지!’ 하게 될 때 역사적인 십자가를 짊어진 아버지의 수고를 알게 되고, 또 아버지 앞에 참다운 효자가 되지 못한 것이 하나님의 한이라는 것을 알게 됩니다. 하나님이 ‘오냐, 이런 자리에서 참다운 효자 효녀가 될 수 있는 아들딸을 만나는 것이 나의 소원이었는데, 오! 아무개야 고맙구나’ 할 때 거기에서 비로소 효자 효녀 충신 열녀의 위치가 결정되는 것입니다.

편안한 자리에서는 절대로 안 됩니다. 그러니 우리는 농사를 짓든 무엇을 하든간에 원리적인 복귀의 길에서는 호미자루를 거머쥐고 삼천리를 파서 뒤엎고, 세계를 파서 뒤넘겨야 됩니다. 심정적으로나, 사정적으로나 소망적으로 형제가 되어 가지고 함께 십자가의 고개를 넘어가는 입장에 서지 않으면 안 된다는 것입니다.

지금까지 하나님이 그리워하고 바라셨던 참다운 자녀와 참다운 가정과 참다운 식구를 만들어야 하겠습니다. 누가? 인간이 만들어야 합니다. 하나님 혼자 하셨으면 6천년이라는 세월이 걸리지 않습니다. 언제나 인간들이 책임을 못해서 연장되는 것입니다.

오늘날 한민족은 어떠한 무엇에 대한 애착심도 없고 관심도 없습니다. 이러한 때에 우리 통일교회는 무엇을 해야 할 것이냐? 3년노정, 7년노정을 거쳐가면서 농촌에 들어가면 호미자루를 들고, 농민들과 함께 농토를 사랑하고 진정한 심정으로 눈물을 흘리면서 땅을 가꾸어야 합니다. 부모가 무식하여 못 가르친 자녀를 우리가 붙들고 가르쳐야 되겠고, 부모가 교육에 무관심했으니 그것을 일깨워 주어야겠고, 이 민족이 개인주의적 입장으로 돌아 관심이 없고 애착심이 없어졌으니 다시 관심과 애착심을 길러 주어야 합니다.

그런데 우리가 부락에 들어가면 반대받는 입장에 서게 됩니다. 일면 보기에는 원통하고 분하지만 관심을 일으키고 문제를 일으키는 데서는 제일 좋은 입장입니다. 그들이 총단결하여 반대해도 그 자리로 비집고 들어가서 말씀을 전하고 봉사해야 합니다. 그들은 옳고 그름을 판단하기 이전에 무조건 나쁘다고 생각해서 전체가 하나 되어 자기들 멋대로 욕도 하고 천대하면서 할짓 못할짓 다 해보는 것입니다. 그런데 지내 놓고 보니 ‘나는 이 땅을 위하여 눈물을 흘리지 못했는데 저들은 눈물을 흘리고 있구나, 나는 자녀들을 가르치지 못했는데 저들은 우리 자녀들을 가르치고 있구나, 나는 지방 유지로서 책임을 지고서도 이 민족과 이 나라를 위해 눈물을 흘리지 못하고 실천하지 못했는데 저들은 그 일을 하는 구나, 나는 무조건 핍박하고 반대했지만 지나고 보니 그들은 이 민족을 위하여 눈물 흘렸고, 이 강토를 위하여 땀을 흘렸으며, 우리의 자녀를 위해 핍박을 개의치 않고 고생길과 굶주림의 길을 참고 나가는구나, 그런데 나는 무엇을 했던고? ’ 하면서 반성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런 것을 생각하면 욕먹기를 잘했다는 것입니다. 반대하더라도 전체가 반대하니 관심을 갖게 되는 것이고, 또 지나고 보면 자기들이 잘못했다는 것을 느끼게 되는 것입니다. (이 이후의 말씀은 녹음이 안 되었음.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