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205 to 15-227: 하늘과 땅이 기필코 찾아가야 할 곳

하늘과 땅이 기필코 찾아가야 할 곳
1965.10.10 (일), 한국 전본부교회

15-205
하늘과 땅이 기필코 찾아가야 할 곳
긴 여행길 가운데 함께 하여 주신 하나님께 감사드리며, 여러분들이 많은 기도를 해주어서 무사히 돌아오게 된 데 대해 진심으로 감사합니다.

그동안 전세계를 돌아보면서 새로운 사실을 많이 보았고 새로운 일과 많이 부딪쳤습니다. 오늘 이 시간에 그 모든 것을 다 이야기할 수는 없습니다. 그래서 그러한 이야기는 차후로 미루고, 이 시간에는 그동안 세계를 돌면서 느낀 것 가운데 우리들이 앞으로 가지 않으면 안 될 분야에 대해서 말씀드리겠습니다.

하늘과 땅이 다시 수고하지 않으면 안 되겠다는 생각에서 잠깐 동안 ‘하늘과 땅이 기필코 찾아가야 할 곳’이라는 제목으로 말씀드리겠습니다. 장내가 좁기 때문에 상당히 불편하겠지만 조용한 가운데 함께 은혜의 분위기를 조성해 주기 바랍니다.

15-205
하나님이 가시는 방향과 목적
오늘날 개인이나 가정이나 우리나라나 더 나아가서 전세계를 막론하고, 현재의 생활과 환경에 머물러 있어서는 안 될 것임을 모두가 공인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무엇을 의미하겠습니까? 본래 하나님이 계셨고 그분이 경륜하신 뜻이 있어서 그분의 뜻대로 되었더라면, 오늘날과 같은 현실은 벌어지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만일 하나님이 계시는 데도 불구하고 이와 같이 되었다면, 여기에는 하나님이 아닌 어떠한 다른 존재의 개재를 인정하지 않을 수 없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오늘날 우리들은 타락한 세계에 살고 있다는 사실을 긍정하지 않을 수 없다는 것입니다. 즉 타락되었기 때문에 현실을 부정하고 내일의 새로운 희망을 향하여 개척자의 사명과 투사의 사명을 갖고, 싸움의 노정과 역경의 노정을 거쳐 나가지 않으면 안 될 세계사적인 운명과 현실적인 사정이 있음을 부정할 도리가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이러한 세계를 그냥 방치해 둘 수는 없습니다. 그래서 땅 위의 수많은 인간을 이끌고, 하늘과 땅이 가지 않으면 안 될 곳을 향하여 지금까지 더듬어 나온 걸음이 인류의 역사요, 섭리의 역사인 것을 우리들은 잘 알고 있습니다.

본래 하나님께서 경륜하셨고 하나님의 소망대로 이루어진 사회와 세계, 즉 만민이 공히 가질 수 있는 하나의 본향 땅이 있어야 했습니다. 그 본향 땅에서 심정의 터전을 세워 사랑하는 부모와 더불어 인연을 맺고, 그 부모를 중심삼은 형제의 인연을 갖추어 가지고 하나의 가족, 씨족, 종족, 민족, 국가형태를 거쳐 하나의 새로운 세계를 이루는 것이 오늘날 인류가 요구하고 소망하는 것이요, 하나님의 창조목적이었다는 것을 부정할 수 없습니다.

이러한 목적을 세계가 성취되지 못하게 된 것은 누구 때문입니까? 우리 인류 시조가 사탄 유혹으로 말미암아 실수하게 되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우리는 이 환경을 벗어나기 위해 싸워 나가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지금까지 싸워 나오신 이유도 여기에 있음을 지금까지 역사노정을 보아서 알 수 있습니다.

오늘날 이와 같은 관점에서 볼 때, 하나님께서는 지금까지 한국을 찾아 나오셨음을 알 수 있습니다. 뿐만 아니라 만방에 널려 있는 수많은 민족과 수많은 국가들도 찾아오셨다는 사실도 알 수 있습니다. 현재까지도 찾아가지 않으면 안 될 하나님의 노정이 남아 있습니다. 인류와 더불어 하나의 최종 목적점을 향하여 가야 하고, 또 그 인류를 지도하지 않으면 안 될 입장에 계신 분이 하나님임을 우리들은 잘 알고 있습니다.

하늘은 땅을 향해 찾아 나왔고 인류는 하늘이 소원하는 목적을 향하여 따라가고 있습니다. 그러나 하늘이 목적하는 것과 인류가 목적하는 것이 일치되어 그 방향이 같아야 할텐데도 불구하고, 아직까지 역사과정에서 목적의 일치점을 보지 못하였고, 방향의 일치점을 보지 못하였습니다. 그래서 역사노정에 있어서 수많은 선조가 수고하였지만, 그 수고는 목적을 위한 수고가 되지 못하였고, 뜻과 일치될 수 있는 영원불변한 하늘의 승리의 터전이 되지 못한 채 흘러가 버리고 말았던 사실을, 이번에 세계를 순방하면서 처처에서 절실히 느꼈습니다.

이스라엘 민족사를 보게 될 때, 아담 가정에 있어서 아벨과 가인을 중심삼고 하나님은 아벨을 찾아서 소망의 기점으로 삼아, 하늘 본래의 크나큰 목적을 세우려고 하였던 것이 하나님의 발걸음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러한 역사적인 노정에서 섭리를 대하게 된 아벨이 이것을 감당하지 못함으로 말미암아 찾아오시는 하나님을 받아들이지 못하였습니다. 또 찾아오시는 하나님 앞에 필요한 터전을 준비하지 못한 연고로, 가인과 아벨의 싸움이 벌어져 아벨을 중심하고 아담 가정을 찾아오셨던 하나님의 목적과 하나님의 방향은 어긋나게 되었던 것입니다.

오늘날 하나님을 중심하고 생각해 볼 때, 우리가 요구해서 하나님이 찾아오신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원하셔서 우리를 찾아오셨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입장에 있어서는 안 되는 것이 인간이요, 이러한 환경에서 벗어나야 하는 것이 타락 인간의 사명과 책임입니다. 찾아오신 그분을 모시는 것이 우리의 본연의 의무이고, 또 그분이 찾아오시는 길에 어려움이 있으면 이것을 제거해야 하는 것이 우리의 사명인데도 불구하고, 우리의 선조 가운데 그러한 분이 한 분도 없었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아벨 자신도 하나님께서 찾아오시는 길을 몰랐고, 하나님을 모실 수 있는 터전을 준비하지 못했습니다. 아벨 자신이 하나님의 목적과 하나님의 방향과 일치하지 못하였고, 더우기나 가인 아벨이 형제관계인데도 불구하고 싸움을 벌인 연고로, 하나님의 방향과 목적은 그때에 빗나가고 말았던 것입니다.

그리하여 하나님께서는 다시 노아를 찾게 되었습니다. 노아가 120년간 수고해 나왔지만, 그 수고한 배후에는 노아보다도 더 큰 수고를 하신 하나님이 계셨음을 우리는 알아야 합니다.

하루도 아닌 120년의 긴 세월을 수많은 원수들이 조롱하고 영접하는 사람도 없는 그런 환경에서, 하나님이 고대하시는 한 때와 한 목적을 바라보면서 따라 나가는 노아를 바라보시던 하나님의 심정은 얼마나 애달프셨겠는가를 알아야 하겠습니다.

15-208
역사의 배후에서 수고하시는 하나님
하나님께서 찾아오시는 그 걸음을 노아 자신도 몰랐고, 또 노아가 가야할 길을 노아의 가정이 몰랐던 것을 우리들은 알고 있습니다.

이와 같이 시대를 대신하여 하나님의 섭리를 담당하고 역사상에 나타난 모든 개인이나, 가정, 또는 인연되었던 사람들이 하나님의 뜻 앞에서 해야 할 책임을 다하지 못하고, 도리어 하나님께 슬픔을 자아내게 했던 사실을 우리들은 부정할 수가 없습니다.

노아 가정에서도 하나님의 뜻을 성취시키지 못했기 때문에, 또다시 아브라함으로 연장되어 모세를 거쳐 예수님까지 4천년이라는 기나긴 역사를 거치면서, 하나님은 개척자의 사명을 가지고 찾아오셨던 것입니다. 그리하여 4천년 동안, 그리고 지금까지 찾지 못했던 그 한 날을 바라면서, 선민 이스라엘권을 세우기 위하여 하나님께서 얼마나 수고해 나오셨던가 하는 것을 우리는 알아야 합니다.

4천년간 하나님은 끊임없이 수고하셨고, 하나님은 끊임없이 배척을 당하셨으며, 하나님은 마음편히 쉬지 못하셨습니다. 우리의 선조와 이스라엘의 선조들은 하나님께서 슬퍼하시고 고통을 당하시는 그 시간에도 하나님을 위로하기는 커녕, 하나님을 배반했다는 사실을 생각하여야 되겠습니다. 4천년간 이 배반하는 민족 가운데서 하나님을 맞이할 수 있는 한 사람의 대표자, 전역사노정을 두고 닦아온 그 터전 앞에 하나님을 환영하는 한 사람이 없었습니다. 그러한 민족을 두고 하나님의 수고에 대하여 감사할 수 있는 민족을 대표하고 이 땅을 대표하여 하나님을 모실 수 있는 세계사적인 한 분, 하나님의 고통을 위로해 드릴 수 있는 한 분의 중심존재, 하나님의 목적과 방향을 일치화시켜 그 목적을 종결짓기 위해 전체적인 사명을 짊어지고 오신 그 한 중심존재가, 하나님께서 4천년간 수고하여 보내신 예수 그리스도였음을 우리들은 알고 있습니다.

예수님은 4천년 역사를 대신하여 하나님의 슬픔을 해원하기 위한 존재요, 하나님의 목적과 방향을 일치시키기 위하여 오셨던 존재였습니다. 그러나 이스라엘 민족은 그분의 방향을 따라가고, 그분의 목적을 이어받아 자기들의 지금까지의 과오를 시정하여야 함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그분이 지향하는 그 목적과 방향에 일치되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예수님대로 가지 않으면 안 될 역사적인 서러움의 한 때를 맞이해야 했던 것입니다. 이것이 오늘날 인류에게 있어서 말할 수 없는 비통한 사실로 남아 있다는 것을 우리들은 알고 있습니다.

그러한 연고로 예수님이 왔다간 지금까지 여전히 수고의 역사노정을 책임지시고 개척자의 사명을 감당하지 않으면 안 될 입장에 서 계신 분이 하나님이신 것을 알아야 되겠습니다. 그래서 이 땅을 2차로 수습하여 오늘날 전세계적인 발전을 가져오기까지, 하나님께서는 배후에서 얼마나 많은 피눈물과 땀을 흘렸겠는가 하는 사실을 망각해서는 안 될 것입니다.

오늘날 기독교사를 중심하고 볼 때, 역사의 도상에서 모든 선지선열들이 피를 흘리며 하나님이 소망하시는 목적을 향하여 발판을 넓혀 나온 데 대해서는 감사를 해야 합니다. 그러나 그것보다도 하나님께서 이들을 대할 때마다 소망의 한 때를 바라보며, 그 뜻을 지향하는 간곡한 마음 앞에, 혹은 정성과 충성을 다하며 죽음의 길을 갔던 그들을 대하는 하나님은 말할 수 없이 슬프셨다는 사실을 알아야 되겠습니다. 또한 4천년 동안 수고하여 터를 닦아 놓은 이스라엘 민족이 깨져 버리고, 이방 민족을 내세워 다시 수습하지 않으면 안 되었던 것이 하나님의 더 큰 슬픔이었음을 알아야 되겠습니다.

15-209
하나님이 부르시는 사람
지금까지 하나님께서는 개척자의 사명도 맡아 오셨습니다. 지금까지 이 땅에서는 하나님을 환영하기 위해 길을 닦고, 하나님을 안식시키기 위한 터전을 마련한 진정한 무리, 진정한 하나의 존재가 없었던 것을 생각하게 됩니다.

우리들은 오늘날 이러한 하나님의 입장을 생각하면서, 2천년 역사 가운데 숨겨 있는 기독교의 비참한 역사는 하나님을 수고시키고 괴롭게 했던 역사인 것을 더욱 잘 알아야 하겠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기독교는 수많은 교파로 갈라져서는 안 됩니다. 하나가 되어야 합니다. 상하 좌우 전후가 일치되어 하나님께서 지향하는 섭리의 목적과 방향을 놓고 어느 시대, 어느 시기를 막론하고 일치되어야 할 것이 기독교도들의 사명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지금까지 하나님이 지향하는 방향이 어디인지, 하나님의 목적이 무엇인지를 알지 못한 채 역사와 더불어 뒤넘이치면서 현재까지 끌려 나왔던 것입니다. 만일 그들이 하나님의 목적과 일치되고 지향하시는 방향과 일치가 되었다면, 오늘날 기독교가 이렇게 무기력하게 되지 않는 다는 것입니다.

이 땅 위에서 하나님의 목적과 방향에 일치되고, 하나님께서 찾아오실 수 있는 환경을 마련하여 위로할 수 있으며, 그 앞에 효성의 도리를 세우고 충성의 법도를 세워야 할 책임자로 오셨던 분이 예수님이셨습니다. 그러나 그는 내심에 품었던 심정을 누구에게도 토로하지 못하고 그대로 가셨다는 것입니다.

하늘을 보니 하나님의 크나큰 수고의 고비가 남았고, 땅을 보니 방황의 무리가 남아 있는 것을 바라본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하나님을 위로하시기 위하여, 땅 위에 방황하는 인류를 지도하기 위하여 다시 오지 않으면 안 된다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예수께서는 재림이라는 명사를 미래의 어떤 목표점에 걸어 놓고 다시 찾아오시는 것입니다. 그러기에 하나님께 충성을 다하는 신부가 되라고 권고하셨던 것이며, 하나님께 충성을 다하는 자녀가 되라고 분부하셨던 것입니다. 하나님께 대하여 충성의 도리를 닦아 가라고 분부하셨던 것입니다.

그러나 그와 같이 하나님과 예수님으로부터 출발할 수 있는 하나의 기점이 이 땅을 중심삼고 결정지어지지 못했기 때문에 이 세계는 우리들이 원치 않는 세계가 되었고, 기독교는 하나님과 예수님이 요구하는 기독교가 되지 못한 채 굴러가고 있는데, 이러한 현실의 오늘이 끝날인 것을 우리는 잘 알고 있습니다.

이와 같은 시점에서 우리들이 다시 한번 회고해 보게 될 때, 하나님께서는 이 땅을 향하여 어떠한 사람을 부르고 있느냐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학식이 많은 사람을 부르는 것도 아니고, 세계를 호령하는 권위를 가진 사람을 부르는 것도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찾아 나오시는 그 길이 십자가의 길이라면, 십자가의 길을 평지로 만들어 놓을 수 있는 무리를 부르실 것입니다. 또 그 길이 가시밭길이라면, 그 가시밭길을 개척자의 사명을 갖고 책임질 수 있는 무리를 부르시고 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자기를 중심삼고 하나님이 찾아와 주기를 바라는 사람을 원하시는 것이 아니라, 충신의 도리와 효자 효녀의 도리를 다하여 6천년의 기나긴 세월을 두고 수고하신 하나님의 슬픔과 고통을 위로할 수 있는 사람을 원하십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심정적으로 얽어매어 떨어져 갈래야 갈 수 없는, 역사 이래 없었던 하나님의 심정적 기준의 가지에 설 수 있는 참다운 자녀의 입장을 결정지어야만 된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오늘날 인류가 최후로 가야 할 역사적인 목적지라는 것을 알아야 되겠습니다.

우리는 지금 이 시간에도 하늘을 향하여 울부짖는 심정을 토해내어도 풀리지 않는 한을 품고 있습니다. 또한 남이 모르는 개척자의 사명을 감당하기 위하여 우리는 주야로 분투해 오고 있습니다. 오늘 나의 기력이 미진하거든 내 맹세의 조건을 믿음의 조건으로 하여 자신의 모든 것을 바쳐야 할 것이며, 기필코 하나님께서 가야 할 길을 닦는 자신이 되어야 하겠습니다.

15-211
진정 하나님을 위로할 수 있는 사람
6천년 역사를 통하여 수많은 무리와 교단들은 지금까지 하나님께 자신의 구원과 안식의 길을 요구하여 나왔지만, 오늘 우리 통일가의 무리는 그럴 수 없다는 것입니다.

지금까지 찾아 나오신 하나님 앞에 자기의 면목과 체신을 세울 수 없는 부끄러움을 느끼면서, 이 나라와 세계에 남겨진 가시밭길과 골고다의 길을 개척하는 선봉자가 되어, 하나님께서 감당해야 할 수고의 터전을 자신이 대신 짊어지고 가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가실 가시밭길을 내가 대신 갈 수 있어야 합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찾아오실 때, 자기를 통하여 안식의 한 시간, 안식의 하루를 찾아 드리겠다고 하는 무리가 되지 못한다면, 하나님께서 어디로 가실 것인가 하는 문제에 봉착하게 되는 것입니다.

오늘날 역사적인 사조와 실증적이 사실로 보더라도 개인주의 사상이 창일한 이 시대에 있어서, 자기를 전체 앞에 희생의 제물로 내세우고자 하는 사람을 찾아보기가 점점 힘들게 됩니다. 이러한 현상은 사회의 모든 면에서 나타나고 있으며, 또 이와 같은 사회적인 여건에서는 하나님께서 찾아오실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단연코 자신이 하나님께서 수고하실 그길을 책임지고 개척하여 오시는 그분 앞에 길잡이가 되어야겠다고 다짐해야 합니다. 그분이 입고 오시는 옷에 더러운 흙이 묻을까봐 염려하는 우리가 되어야 합니다. 그분 앞에 걱정거리의 존재가 되어서는 안 되겠습니다.

하나님 앞에 충성을 다짐하면서 오시는 그분의 앞길을 준비하는 데 있어서 잘못이 있을 때에는 ‘아무개야 네가 그래서는 안 된다’고 하면서 함께 염려해 줄 수 있는 무리를 세계 인류 가운데서 찾아 하나님 앞에 세워야 하는 것이 지금까지의 수많은 종교인의 책임이었습니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세계를 돌아볼 때 그러한 경지로부터는 점점 멀어져 가고, 그 본위의 궤도에서 이탈하고 있는 것을 여실히 느낄 수 있습니다. (중략)

통일신도들에게는 창조이념을 표준으로 하고, 그 방향을 포착하여 지상에서 하나의 승리를 결정지어야 할 책임이 있습니다. 하나님을 위해 고생을 하려면 충성을 다짐하고, 그 충성의 맹세를 실천할 수 있는 한 사람의 사나이면 사나이, 한 사람의 아낙네면 아낙네가 되어야 합니다.

하나님은 하나의 뜻과 목적에 대한 소망이 있고, 땅에 부딪쳐야 할 사정이 있고, 우리와 부자의 인연을 맺어야 할 심정을 갖고 계십니다. 하나님의 이러한 소원과 사정과 심정이 연결된 노정을 우리가 맡으려면 지금까지 가는 길을 멈출 수 없고, 하나님께서 나에게 기꺼이 분부하실 수 있는 여건을 만들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분부하실 수 있는 여건이 이 시대 역사노정에 없어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아버지 앞에서 ‘나에게 명령을 내려 주시옵소서’ 하고 명령을 자원하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예수님은 겟세마네 동산에서 이렇게 기도했습니다. “내 아버지여 만일 할만하시거든 이 잔을 내게서 지나가게 하옵소서. 그러나 나의 원대로 마옵시고 아버지의 원대로 하옵소서(마 26:39)” 한 것을 볼 때 예수님과 하나님의 뜻은 서로 거리가 있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사정이 달랐습니다. 심정적인 기준이 달랐습니다. 때문에 내 뜻대로 마옵시고 아버지 뜻대로 하시라고 기도했던 것입니다. 아버지의 뜻은 하늘땅이 찾아가야 할, 절대적으로 이루어야 할 뜻입니다. 그것을 이루어 드려야 할 한 사람이 나타나지 않으면 안 된다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께서는 수많은 역대의 선지자를 통하여, 또한 예수를 통하여 이 땅 위에서 인류로 하여금 이념과 심정과 생활이 일치할 수 있는 자리에서 찾아 이루어야 할 본연의 한 표본으로서 하나님을 시봉하는 도리를 세우도록 하셨던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인간들은 막연한 거리를 두고, 불확실한 믿음을 가지고 지금까지 이어 나왔음을 우리들은 알고 있습니다.

15-213
예수님의 한
하나님께서는 현시점에서 우리에게 책임을 요구하고 계십니다. 그러므로 여러분이 뜻을 위해 나아갈 때 어떻게 가느냐 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아벨과 같이 죽는 자리에 서서는 안 되고, 함과 같이 노아의 전체적인 뜻을 전복시키는 자리에 서서도 안 되며, 아브라함과 같이 3제물을 실수하던 것과 같은 자리에 서면 안 될 것입니다. 또 모세가 반석을 잘못 쳐서 실수하던 자리, 예수님이 겟세마네 동산에서 ‘아버지여 만약 할만하시거든 이 잔을 내게서 지나가게 하옵소서’ 하던 그런 환경에 들어가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어느 것을 중심삼고 나가야 하느냐? 예수님과 같은 그 자리보다도 더 앞선 확고한 중심을 찾아야 합니다. 이때가 끝날입니다. (중략)

우리는 하나님을 중심삼고 예수님이 세계를 향해 개척자의 사명을 하려고 했던 것을 내가 대신 하겠다고 하면서 나설 수 있어야 합니다. 예수님은 동으로 서로 세계 만민을 구하기 위하여 가보고 싶었지만 가지 못했습니다. 이 땅을 찾아오시는 하나님 앞에 책임지고 그 길을 닦지 못했습니다. 하나님께서 가실 길을 미리 알아서 그 길을 닦고 ‘이 길로 오셔서 쉬소서’할 수 있는 자리까지 나가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한을 품고 가지 않으면 안 되었던 것입니다.

그러면 하늘이 요구하고 땅이 요구하는 최종 기점은 무엇인가? 하나님께서 나를 찾아오셔서 갈래야 갈 수 없고 어떻게 할래야 할 수 없는 기점, 즉 하나님의 갈 길과 하나님의 할 일을 내가 책임지고 하나님을 안식시킬 수 있는 하나의 터전입니다. 그것을 이 땅 위에 닦아 놓아야 합니다.

이것은 어떻게 해야 되느냐? 하나님께서 지금까지 6천년 동안 수고해 나오신 길은 영광의 길이 아니었습니다. 만민을 위하여 피와 땀을 흘리시며 사망의 고빗길에서도 그들을 구해 주려고 하셨던 하나님이셨습니다. 그러나 인간에게 항상 배척을 받으시면서도 그런 환경을 찾으시고 지긋지긋할 정도로 수고하시면서 개척자의 사명을 해 나오신 하나님을 예수님은 잘 알고 있었습니다.

예수님도 십자가를 등에 지고 골고다 산정을 향하여 가실 때에, 누차에 걸쳐 그 무거움 때문에 지쳐 쓰러지면서도 ‘내가 쓰러지는 것이 분하오나 하나님이여! 저들을 용서하옵소서’ 했던 것입니다. 하나님 앞에 효의 도리를 다하지 못한 채 열 두 차례나 쓰러지면서 그때마다, ‘내 피를 다 바쳐 아버지를 위하지 못하고 효성을 다하지 못하였기에 이 길을 가는 것이다’ 하는 마음을 품고 갔기에 사탄이 하나님 앞에 참소의 조건을 세울 수 없었습니다.

하나님을 위하여 충성을 다하고 생명을 바친 예수님 앞에서는 아무리 사탄이라 할지라도 참소할 수 없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새로운 부활의 역사가 이루어짐으로써 기독교 신앙이 시작되었다는 것을 우리는 알고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아버지가 아들을 두고 떠나갈래야 떠나갈 수 없고, 자식이 헤어질래야 헤어질 수 없는 것이 천륜입니다.

그리하여 다시금 이 땅에 이루지 못한 그 뜻을 책임지고 이룩하기 위해 오시는 분이 바로 재림 예수입니다. 그분이 이 땅에 찾아오셔서 하나님을 위로해 드릴 수 있는 도리를 가르쳐 주고, 하나님을 대신하여 책임질 수 있는 도리와 자녀의 도리를 가르쳐 주게 됩니다. 그리하여 하나님께서 요구하지 않는 모든 활동과 조건을 제거시킬 수 있는, 즉 모든 환경을 수습할 수 있는 승리적인 존재가 곧 하나님께서 요구하시는 중심존재인 것입니다.

지금까지 통일의 역군들은 선생님을 만난 것이 일면 한이 될 때가 올지도 모르겠습니다. 나는 여러분이 남모르는 역경의 길을 지금까지 걸어온 것을 알고 있습니다. 여러분 가운데는 기뻐서 따라온 사람도 있을 것이고, 환경에 몰려 마지못해 따라오는 사람도 있을 것입니다. 천태만상의 형이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각자 처해 있는 입장에서 자기에게 맡겨진 시대적 사명을 감당할 수 있느냐, 천지가 공히 요구하는 그 목적 앞에 방향을 일치시키고, 하나님 앞에 보답함과 동시에 위로의 조건을 제시할 수 있는 내가 되었느냐 하는 것이 문제입니다. 이렇게 생각하면 아직도 거리가 먼 것을 느끼게 될 것입니다 (중략)

지금까지 예수님을 믿는 사람들은 ‘오오, 하나님은 보좌에 계시니 천지 만물이 경배할지어다’라고 했습니다. 그렇게 되어 있을 것 같습니까? 자기의 아들딸이 사지경각에서 죽어가고 있어 장송곡을 불러야 할 입장이며 천지의 피조물이 신음하고 있는데, 하나님만, ‘오오, 너희들 잘 노는 구나’할 수 있겠느냐 하는 것입니다.

그러한 하나님이라면 인간과는 무관하다고 볼 수밖에 없습니다. 타락한 세계에서 부모의 심정을 그 자녀가 체휼하지 못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천지를 창조한 본연의 아버지께서 자식을 대하시는 깊은 심정이 얼마나 클 것인가 하는 것을 그들이 알 도리가 없다는 것입니다.

‘백번 천번 죽더라도 하나님께로 돌아갈지어다’ 할 수 있어야 합니다. 내 욕망과 내 소망은 하나님을 중심삼고 움직여야 할 것이며, 당신이 한 날을 편안하게 계실 때에 나는 한 시간을, 아버지께서 천년을 안식할 때에 나에게는 일년의 평화가 있기를 바라는 우리가 되어야 합니다. 그분이 억천만세토록 영광을 노래할 때, 나는 그로 말미암아 한 생의 기쁨을 누리고 즐기겠다고 생각하는 기독교인을 하나님은 요구하시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자기 교단을 위주한 신앙생활을 하는 기독교인은 원하지 않습니다. 선생님도 통일교회라는 간판을 붙이고 있지만, 이 간판을 언제나 떼어낼 수 있을까 하는 생각을 합니다.

여러분들이 통일교회 사람들이라고 주목을 받고 있겠지만, 그 주목이 삼천리 반도에서 언제 사라지겠느냐 하는 것입니다. 세계에 널려 있는 우리 식구들은 하나님의 맺힌 한을 풀고자 이를 악물고 노력하고 있고, 하나님의 고난 길을 대신하여 나서겠다고 충효의 심정으로 뛰고 있습니다. 이 일을 하다가 쓰러지는 것을 최고의 기준으로 결의하고 나가고 있는 무리가 통일교회 식구들입니다. 이렇게 가는 길이 복된 길입니다.

15-216
하나님에 대한 충효의 도리
그러나 세계를 바라볼 때 기독교인들은 재림 예수가 이스라엘 민족 앞에 다시 오겠거니, 또는 갈리리 바닷가나 감람산으로 오시겠지 하고 믿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사탄을 굴복시키고 충효의 도리를 할 수 있는 사람을 그리워하고 계십니다. 지옥이 그리워서 우시는 하나님이 아닙니다. 땅이 문제가 아닙니다. 이번에 감람산을 가 보았는데, 그 감람산이 문제가 아닙니다. 감람산을 움직여 하나님 앞에 충효의 도리를 세울 수 있는 그런 사람이 있어야 합니다.

기독교인의 수는 문제가 아닙니다. 하나님의 몸이 되어 하나님의 명령에 언제 어디든지 가겠다고 결의하는 사람, 하나님께서 기쁜 마음으로 ‘명령을 기다리라’고 분부하고 싶은 그런 사람이 요구되는 것입니다. 오늘날 몇 억의 신자를 자랑하는 기독교인들 가운데서 과연 그런 사람을 찾을 수 있겠습니까? 옆구리에 칼을 들이대고 ‘너를 하늘의 제단에 희생물로 바치고자 하니 생명을 바칠테냐’ 할 때 그 고비를 넘지 못하면 아무것도 아닙니다. 생명을 걸어 놓고 하나님을 위한 효성에 불타는 사람, 하늘을 걸고 뒤넘이칠 수 있는 그런 무리가 이 시대에 필요합니다. 이런 무리가 끝날 하늘의 혁명군이라고 나는 생각하고 있습니다.

오늘 여기에 모인 여러분들은 여기에 오는 것으로 모든 것이 끝나는 것이 아닙니다. 스승을 만나 보는 것도 중요한 일인지 모르지만, 여러분이 선생님을 만나는 것이 신앙의 목적이 되어서는 아니 됩니다. 선생님을 만나 보고 다시 가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아직도 더 가야 할 슬픔의 길이 남아 있기에 여러분은 그 길을 가야 합니다.

온 세계 인류 앞에 그러한 책임을 다할 수 있는 철두철미한 사상과 일치하는 개인, 가정, 민족, 국가가 어디에 있느냐고 하나님은 찾으실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일찌기 그러한 개인을 찾아오셨습니다. 그러한 개인은 하나님의 심정을 위로해 드리고, 하나님 앞에 충성의 도리를 다하고 효성을 다해야 합니다. 하늘땅의 모든 사정을 풀어 헤쳐야 합니다. 그리하여 하나님께서 ‘이 시대 앞에 책임을 질 수 있는 자가 너로다. 너를 바라보니 내일을 소망할 수 있고, 너를 바라보니 오늘의 싸움을 승리로 이끌어 갈 수있겠구나’ 하실 수 있는 한 개인이 되어야 합니다. 이러한 개인이 절대 필요하다는 것입니다.

그러한 개인을 하나님께서 붙드시고 ‘너는 뼈 중의 뼈요, 살 중의 살이요, 심정 중의 심정이로다’ 할 수 있어야 합니다. 아무리 역사상 선조가 많고 시대적으로 인류가 많다 할지라도 심정을 중심삼고 ‘너는 역사에 있어서 전무후무한 최고의 조상의 자리에 있다’ 할 수 있는 분이 이 지상에 나타나지 않는 한, 인류 조상의 타락으로 인한 슬픔의 역사는 청산될 수 없는 것이며, 그 속에 태어난 우리들은 또다시 어떤 부모를 모시지 않으면 안 된다는 것입니다.

15-218
참부모의 길
하나님의 심정적인 기반 위에 충효의 도리를 다해야 하는 그분은 하나님께서 부여해 주신 전부를 일치시키고, 도(道)의 심정세계에 있어서 하늘땅을 대표한 부모의 위치를 결정지을 수 있는 자리를 만들지 않으면 안 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도 그러한 기준을 바랐기 때문에 신랑 신부라는 말을 사용했습니다.

신랑은 아버지를 말합니다. 타락하지 않은 아버지의 기준을 말하는 것입니다. 또 신부는 타락하지 않은 어머니의 기준을 말하는 것입니다. 이렇듯 타락하지 않은 참부모로서 그 창조이상을 이루기 위하여 끝날에 있어서 신랑 신부의 이름을 남겨 놓았던 것입니다.

신랑 신부는 심정을 일치시켜야 합니다. 심정을 일치시키는 데 있어서는 본래 하나님의 슬픈 마음을 개입시켜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지금까지 역사적인 모든 슬픔을 제거해 버리고 역사의 소망을 성취시킬 수 있어야 합니다. 그래서 뜻 앞에 성취의 길을 갈 수 있는, 가면 갈수록 하루 하루 기쁨이 넘치는 환경 속에서 일치시킬 수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오늘날 우리들이 가야 하고, 전인류가 절대적으로 가야 할 곳, 그곳이 어디입니까? 하나님의 한을 풀어드릴 수 있는 곳을 찾아 기쁨과 소망의 날을 이루어 하나님 앞에 바쳐 드리며, 심정적인 기준에 있어서 조상의 위치에 서야 합니다. 그러한 위치를 결정짓지 않으면 이 세계에서 어떠한 심정의 안식처도 있을 수 없습니다. 그것을 결정짓지 않게 될 때는 평화와 행복의 터전은 지구상에 나타나지 않는 다는 것입니다.

그러한 견지에서 보더라도 사랑의 중심은 신랑 신부의 이름을 중심삼고 나와야 된다는 것입니다. 그래야 될 수밖에 없는 것은, 하나님을 중심삼고 볼 때 하나님이 찾아온 참된 인류의 조상, 즉 참된 인류의 부모가 나타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인간의 입장에서 볼 때는 비원리적 기준, 비원리적 핏줄로 인한 모든 비원리적 요소를 제거하고 새로운 참된 부모의 혈육으로 다시금 인연 맺어지게 되는 것입니다.

구원이란 무엇이겠습니까? 구원은 복귀입니다. 하나님의 심정을 중심삼고 천지를 유린한 사탄을 굴복시키는 것입니다. 사탄을 중심으로 빚어 내려온 역사적인 모든 내용을 청산하고 비원리적인 세상 부모의 심정 이상으로 하나님 앞에 효성을 하고, 하나님이 가시는 길 앞에 행복의 터전을 닦을 수 있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이러한 사람만이 하나님과 일치가 되어 그 자녀의 인연을 맺어 나갈 수 있습니다.

이제 인류는 참부모를 찾아가야 합니다. 그 다음에는 그 참부모 앞에 효성의 도리를 다하지 않으면 안 됩니다. 아담 해와는 하나님 앞에 효성의 도리를 다하지 못했습니다. 본래는 하나님께 효성의 도리를 다한 후에 자녀들을 번식하여, 그 자녀들로 하여금 효성의 도리를 이어 받들게 해야 했습니다. 즉 하나님을 중심한 심정적인 법도의 종족이 나타났어야 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그러한 하나의 종족을 세우기 위해서 지금까지 6천년 동안 역사해 나오셨습니다.

그래서 기독교 역사에 아들을 세우기 위해 양자의 환경이 필요했던 것입니다. 가인과 아벨의 인연이 거듭 연장되어야만 세계적인 인연을 연결시켜 복귀할 수 있는 터전이 마련되는 것이기에, 개인적인 아벨을 세우려면 개인적인 가인이 필요하고, 국가적인 아벨을 세우려면 국가적인 가인이 필요하며, 세계적인 아벨을 세우려면 세계적인 가인이 필요한 것입니다. 그래서 두 패로 갈라지게 됩니다.

여러분은 아벨적인 세계가 어떤 세계인가 하는 것을 알아야 하겠습니다. 아담에 대해서 ‘아담아! 너는 하나님의 심정을 유린하고 천륜을 어기고 하나님의 자녀된 위치를 유린했다’고 하며 심판할 자격을 가진 분이 있다면, 그분은 역사상의 만민에 대해서도 심판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한 분을 찾아서 그분으로부터 도리를 배워서 그분이 슬퍼하면 자기도 슬퍼할 수 있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그분에게 참부모의 도리를 결정짓게 한다면 참부모가 가야 할 십자가의 길, 참부모로서 책임져야 할 십자가를 우리가 책임져야, 충효의 도리를 세울 수 있고 효자 효녀가 될 수 있습니다. 그래야만 전통이 수립되는 것입니다. 태풍이 불어오고 사방이 요동하는 환경이 될지라도 상하 좌우 전후의 인연을 철석같이 붙들고, 여기에 침범받지 않는 절대적인 기준을 세워야만 하나님께서 인정하시는 것입니다. 침범받는 자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15-219
하나님의 내적인 곡절
오늘날 인류가 찾아가야 할 곳은 어디입니까? 고향을 찾아가야 합니다. 고향을 찾아가서 부모를 만나야 합니다. 지금까지 이상주의니 무슨 주의니 하는 것은 다 그 과정에서 지팡이 노릇을 한 것입니다. 그런데 부모를 만나서 무엇을 할 것입니까? 부모의 참다운 사랑의 인연을 가지고 그 부모의 사랑을 백 퍼센트 받을 수 있는 자녀가 되자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렇지 못했기 때문에 절차를 밟아야 합니다. 이 절차를 가르쳐 주기 위해서 오시는 분이 재림주이십니다.

만민은 공히 그분에게서 절차를 배우고 그분에게 접붙임으로써 그분의 뜻을 대행하자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자신을 참감람나무라고 하시며 접붙임의 비유를 말씀하셨습니다.

그리하여 참다운 부모로 말미암아 참다운 가정, 참다운 종족, 참다운 민족이 생겨나는 것입니다. 그러나 참다운 국가가 문제입니다. 예수님도 나라가 있었더라면 죽지 않았을 것입니다. 만일 이스라엘 민족이 하나가 되어 예수님 앞에 철석같은 효성의 도리를 하였더라면, 로마가 아무리 내리쳐도 망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중략)

예수가 죽은 후 400년 동안 로마는 사기 등등하여 기독교를 삼키려고 호령했지만 결국은 거꾸로 흡수당했습니다. 예수님이 살았더라면 로마를 40년 내에 정복했을 것입니다.

그러한 예수님 앞에 어찌하여 가정이 없었느냐? 예수님은 본향 땅에서 나의 아버지 어머니라 할 수 있는 부모가 없었습니다. 하늘에 있으면 땅에도 당연히 있어야 된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이 땅에 오셔서 ‘내가 너희들의 아버지’라고 결정지을 수 있는 싸움에서 승리의 터전을 남기고 가야 했습니다. 그리고 우리는 그것을 이어받아야 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그러지 못한 한을 남겨 두고 가셨기에 해원해야 할 목표를 세워 다시 오셔야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억울하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여러분을 중심삼고 역사해 가실 수가 없으며, 그런 의미에서 선생님이 하는 일을 알아주지 않을 수 없게 되어 있습니다.

예수님은 어찌하여 부모, 즉 하나님을 모실 수 있는 하늘의 법도를 친히 가르쳐 주지 못했을까요? 본래 타락하지 않았으면 하나님께서 아담의 부모가 되었을 텐데, 타락으로 말미암아 부자의 인연이 끊어졌던 것입니다. 그래서 부자의 인연으로서 충효의 도리를 하지 못한 것을 우리가 탕감복귀하기 위하여 충의 도리와 효의 도리를 대신하는 것입니다. 그러기 전에는 하나님이 부모의 자리에서 가르쳐 줄 수 없다는 것입니다.

‘아버지여 할만하시거든 이 잔을 내게서 지나가게 하시옵소서’ 하며 간구하는 예수의 기도를 하나님은 왜 들어주지 않으시고, 무슨 철천지한이 있었기에 예수님을 죽이지 않으면 구원의 도를 못 세우는 것이었던지…. ‘내가 땅의 일을 말하여도 너희가 믿지 아니하거든 하물며 하늘의 일을 말하면 어떻게 믿겠느냐’ 하신 예수님의 사연은 무엇이겠습니까? 그 무식한 자들, 시대를 모르는 것들은 그저 빵이나 생각하고….

하나님에게 얽힌 내적인 곡절을 누가 알았겠습니까? 홀로 감람산 골짜기를 찾아가던 예수님의 서글픈 심정을 여러분은 얼마나 헤아릴 수 있겠습니까? 여러분은 그분이 가는 발걸음 앞에 ‘당신의 심정이 이러하거늘, 저를 권고하셔서 당신의 심정을 위로할 수 있는 효성의 도리를 다하게 하옵소서’ 하는 마음을 갖지 않으면 안 됩니다.

오늘 우리들은 그러한 입장에서 다시 한번 생각하지 않으면 안 됩니다. 이 땅 위에서 부모를 갖지 못하게 된 타락의 대가를 청산하기 위해서는 싸우지 않으면 안 될 고비가 남게 되었습니다. 이것을 청산짓기 전에는 부모가 나올 수 없다는 것입니다. 이것을 청산짓지 못하면 하나님의 역사적인 해원은 이루어질 수 없습니다. 하나님의 해원을 성사해 놓지 못하고는 인류 조상의 허물을 지울 수 없습니다. 천리가 그렇다는 것입니다. (중략)

15-221
하나님과 예수님의 해원성사
고층 건물을 지어 놓고 콧노래를 불러가며 자기의 안일을 노래하는 사람이 있을지도 모르겠지만, 여러분들은 그래서는 안 됩니다. 아무리 재간을 피워도 끝날의 심판을 피해 나갈 도리가 없습니다. 그것은 결코 생명의 닻줄이 될 수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전부 수라장을 만들어 놔야 될 것이니, 그럴 수 있는 때가 오지 않으면 안 될 것입니다.

선생님은 이번 세계순회 기간에 역사상 가장 많은 파란곡절을 예상했습니다. 그렇지 않다면 선생님이 가는 길은 뜻이 아닙니다. 태풍이 불어오는 가운데서 길을 닦아 안식을 가져올 수 있어야 하기 때문입니다. 고요한 가운데서 길을 닦으면 그는 태풍을 모르는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몰아닥치는 태풍과 노도 속을 헤쳐나갈 수 있어야 합니다. 6천년간 그 물결이 굽이치며 인류를 휩쓸어 사망의 세계로 몰아넣는 고역이 있었거늘, 그 파도를 잠재우고 막을 수 있는 우리가 되어야 하겠습니다. 그러기에 오늘도 뼈에 사무치는 심정으로, 마음 가운데 단단한 충격을 받으면서도 나아가고 있는 것입니다. (중략)

우리는 하나님의 한을 해원해 드려야 합니다. 하나님의 한뿐만 아니라 더 나아가서는 역사적인 예수님의 한까지도 풀어 드려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아들을 땅에 보내셨다가 죽게 됨으로 말미암아 맺힌 슬픔을 풀어 드려야 합니다. 하나님의 해원성사, 예수님의 해원성사에 대한 책임이 우리에게 있습니다. 예수님의 해원성사는 예수님의 제자들이 책임 못한 것을 탕감해 드리는 것입니다. 베드로가 예수님이 가던 죽음의 자리를 피해 갔지만 여러분은 그 길을 자진해서 갈 수 있어야 합니다. (중략)

지금까지 기독교는 2천년이란 세월이 걸렸지만 세계를 정복하지 못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참다운 부모의 자리에 예수님을 세워 놓고 하나님께서 ‘만민이여, 저를 따를 지어다. 천지만물이여, 저 앞에 굴복할지어다. 4천년 역사상에 왔다간 모든 무리는 저 앞에 항서를 쓸지어다’ 할 수 있는 축복을 하지 못했습니다.

우리 인류는 본향 땅을 찾아가고 있습니다. 인류가 가기는 가지만 방향을 잘 모르고 있습니다. 세계가 하나의 길로 가야 하는 데 각기 딴 길로 돌아가고 있습니다. 본향 땅을 찾아가고 싶어하지만 그 땅이 문제가 아니라, 부모를 찾아야 합니다.

부자의 도리에는 부모로서 해야 할 도리가 있고, 자식으로서 해야 할 도리가 있습니다. 본향에 가서 부모를 만난 후에 자식의 도리와 부모의 도리를 세워야 합니다. 그러나 아직 그런 도리를 세우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통일교회 여러분들은 이 일을 해야 합니다. 우리가 찾는 부모는 욕심이 많습니다. 지지리 고생하며 발버둥을 치면서 찾아왔는 데도 ‘야! 너는 내 대신 가야 된다’ 하시며 다시 내보내신다는 것입니다.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은, 하나님의 슬픔을 품고 이 땅에 오신 예수님이 불신을 당했던 것을 탕감하기 위하여, 이 땅 위에서 그 책임과 사명을 짊어지고 모든 것을 완결지을 수 있는 대신자를 세워 놓지 않으면 하나님의 뜻은 절대 이루어질 수 없기 때문입니다.

통일교인은 누구를 사랑하느냐? 우리는 하나님과 예수님을 달리 보는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과 하나님을 모신 가운데 부모의 인연을 맺어 가지고, 그 부모가 계시는 고향 땅을 사랑하는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그렇게 할 수 있는 참다운 부모가 나타나지 않으면 고향 땅은 아직 없는 것입니다.

그러면 이 세계에서 진정한 고향 땅은 어디에 있습니까? 기독교의 수많은 무리가 모이는 대교파일 것이냐? 아닙니다. 참다운 효자는 손끝에 피가 흐르는 아픔을 참으면서도 아버지라 부를 수 있는 사람입니다. 좋은 자리에서 자기의 안일을 노래하며 깊은 잠을 자려고 하는 사람을 하나님께서는 원하지 않으십니다.

15-223
우리가 반드시 가야 할 고향 길
이 시간에도 손끝에 피를 흘리면서 ‘나의 부족함을 용납하여 주옵소서’ 하며 피의 길을 개의치 않고 몸부림치며 수고하는 자리라야 부모가 찾아올 수 있습니다.

그러면 고향 땅에 찾아가 부모를 만나서 무엇을 할 것이냐? 부모로 오시는 그분은 무엇을 할 것이냐? 그분은 타락한 조상인 아담 해와의 대역자로서 그들이 실수하여 입은 상처를 그들 대신 꿰매야 합니다. 아담이 타락함으로 인하여 세계 인류가 엉망진창이 된 것입니다. 예수님은 이것을 꿰매야 합니다. 이것은 부모가 꿰매지 않으면 안 됩니다.

그 일을 참부모가 해야 할 터인데 그 부모가 30억 인류를 다 꿰매야 하느냐? 아닙니다. 부모님께 효성을 다한 효자, 효녀, 열녀, 충신이 그 명패를 갖고 나가 대역자로서 꿰매 줘야 되는 것입니다.

내가 돌아오면서 느낀 것은 ‘아버지여! 당신이 사랑하는 한국이 정말 만민의 고향 땅이 될 수 있습니까? ’ 하는 것이었습니다. 이 나라는 만민의 고향 땅은 물론이요, 아버지의 고향 땅이 되어야 합니다. 하나님이 사랑하는 이 나라의 백성은 충효를 다하는 아들딸로서, 이 땅 한국으로 하여금 세계를 구원할 수 있는 이념과 연결될 수 있는 발판을 만들도록 하지 않으면 안 된다는 것입니다.

삼천만 민족이 시달리고 찢기면서 황폐한 산야에서 불어오는 찬바람을 맞는 것도 모진 일이지만, 거기에 사나운 맹수까지 달려드는 경지에 있는 한국을 하나님이 고향 땅으로 만들고, 만인의 조국으로 만들어야 할 것을 생각해 보아야 합니다.

우리가 나라를 위하여 싸우는 것만으로는 하나님 나라의 책임자가 될 수 없습니다. 그 나라는 세계가 갈 길을 책임질 수 있고, 하나님의 마음을 위로하고 세계를 위하여 하나님이 가시는 가시밭길을 평탄한 길로 닦을 수 있는 민족적 책임을 진 나라여야 한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가야 할 곳이 있습니다. 그 곳은 고향입니다. 고향에 가서 부모를 만나야 합니다. 그리하여 부모의 법도를 따라가야 합니다. 부모가 해야 할 책임을 내가 대신하고, 그 심정의 인연을 연결시켜 사망권에 들어 있는 만민들을 생명의 길로 인도해 가지고 하나의 종족, 민족, 국가형을 이루어 태평천국을 만들어야 합니다.

이 나라가 태평천국이 되었는가? 한국을 위주하고 만민과 만국을 만세에 행복하게 하였던가? 그러지 못했다는 것입니다. 이제부터 한국이 그러한 길을 닦아야 합니다.

이렇게 우리가 가야 할 길, 하나님께서 가시는 길은 구원섭리의 길로써 우리가 기필코 가야 할 길입니다. 우리는 부모를 찾아서 그 나라를 이루고 다시 세계를 되찾아야 됩니다. 이것이 하늘땅이 기필코 가야 할 곳입니다.

고향 땅에 가서 무엇을 할 것인가? 부모를 만나야 합니다. 아무리 고향 땅이라고 해도 부모와 관련을 맺지 않으면 안 된다는 것입니다. 설령 부모가 죽었다 하더라도 고향과 관계를 맺어야 됩니다. 그렇게 되지 않으면 종족이 나타나지 않습니다. 새로운 부모, 새로운 아들딸이 새로운 법도를 세운 가정을 중심삼고 일체화되어, 종족을 이루고 국가를 이루어야 합니다.

그러나 그 국가는 자기 국가만을 위주로 해서는 안 됩니다. 아버지를 대신하여 시궁창과 같은 곳이라도 마다 않고 갈 수 있고, 부모의 심정을 지니고 충효의 도리를 다할 수 있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그래야만 사탄이 거기서 발을 떼고 도망을 간다는 것입니다.

하늘땅이 기필코 가야 할 곳은 고향 땅을 찾아가는 것이고, 고향 땅을 찾아가서는 하나가 되어야 합니다.

한 가지 재미있는 것은, 민주주의의 말기가 되면 제국주의 군주사상으로 돌아가고, 공산주의의 말기가 되면 제국주의적 독재국가형으로 떨어지는 것입니다. 그래서 떨어져 나간 자기들끼리 싸우게 됩니다. 민주주의는 민주주의끼리 싸우고, 공산주의는 공산주의끼리 싸운다는 것입니다.

선생님은 캐시미르 문제로 인하여 반드시 인도와 파키스탄이 분쟁하게 될 것을 예언했습니다. 여기는 중공이 빠져 나가는 골목길이 되는 곳입니다. 극동에 있어서 소련에 대비한 발판을 세워야 할 현실적인 거점으로 되어 있기 때문에, 중공은 인도와 파키스탄의 싸움을 붙이는 것입니다. 싸움을 하게 되면 회회교끼리 싸우게 되어 파키스탄 수상이 중공에 협조를 요청한다는 것입니다. 이 종교전쟁을 어떻게 유도할 것인가 하는 것이 소련의 정책으로 문제거리입니다. 우리는 여기에 말려들지 않아야 됩니다.

15-225
복귀의 길을 가는 우리의 각오
중동으로 가보면, 낫세르는 이미 회회교권을 통합하여 하나의 목표점을 지향한 통일아랍의 제3세력권을 형성하는 단계에 접어들고 있는 것을 알게 됩니다. 그러나 모두 지쳤다는 사실입니다. 수에즈 운하를 이용하지 못하면 전부가 불붙은 휘발유통과 마찬가지입니다.

그러한 회회교권의 통일적인 노선을 비추어 볼 때, 기독교는 바티칸을 중심삼고 통일이념을 내걸지 않고는 나올 수 없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어떻게 할 것이냐? 그들이 아무리 애써 보아도 안 된다는 것입니다. 여기에 통일교회가 필요한 것입니다. 우리가 해야 합니다. 그러니 죽지 말아야 합니다. 우리는 가야 합니다. 복귀의 길이 우리들을 기다린다는 것입니다.

구라파 일대를 돌면서 기도하며 생각해 보았지만, 알프스를 넘는 것은 문제가 아닙니다. 히말라야를 넘는 것도 문제가 아닙니다. 그 이상의 어려운 곳, 최전선에 가서 싸울 것입니다. 이것이 선생님의 작전입니다. 이길은 복귀의 길이기 때문에 원리원칙에 맞지 않으면 풀리지 않습니다.

우리는 시급한 때를 맞고 있습니다. 이번에 아이젠하워 전 미국 대통령을 만나서, 내가 말한 것이 맞는지 안 맞는지 두고 보라고 했습니다. 지금부터 약 15년 전에 공산당들이 어찌하여 자기들의 원수가 종교라고 했던가 하는 것입니다. ‘종교의 원수는 공산당이다’ 하는 세계적인 명제 하에 우리는 싸우고 있는 것입니다. (중략)

십년 전 ‘달라이라마’가 넘어왔을 때, 세계적인 문제는 어떤 판가리를 할 수도 있었다는 것입니다. (중략)

세계적인 섭리가 움직이고 있는 이때에, 이땅을 지킬 줄 아는 사람이 있어야 합니다. 또한 이 땅을 지키려면 다시 오실 주님과 일체가 되어야 합니다. 즉 참부모와 일체가 되어 종족이 되고, 그 종족이 국가의 이념을 넘어 세계의 이념으로 하나님의 목적과 방향이 일치할 수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결정이 바로 한국에서 이뤄진다는 것을 똑똑히 알아야겠습니다.

이러한 정황을 알고 통일교회 식구들은 가야 합니다. 그러니 손을 불끈 쥐고 이를 악물어야 합니다. 우리의 때가 온 것입니다. (중략)

이 민족이 숱한 곡절을 겪어내야만 어떠한 어려운 고비도 뚫고 들어갈 수 있을 것입니다. 앞으로 큰 파도 앞에서 통일의 역군들은 어떻게 될 것이냐? 참패의 종족이 될 것이냐 승리의 종족이 될 것이냐? 몰아쳐 오는 민족적인 시련과 개인의 서러움도 많을텐데, 거기에서 자기 자체를 망각해 버리고 맹세와 절개를 포기해 버리는 역도들이 될 것이냐 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선생님은 가야 할 방향을 알고 있습니다. 여러분도 꼭 가야 합니다. 여러분에게 가르쳐서 꼭 가게 하고야 말 것입니다.

자기 입으로 대답하여 맹세해 가지고 생명을 각오하고 세계를 위하여 뛰쳐나갈 수 있어야 되겠습니다. 때로는 세계적인 사건이 국내적인 사건으로 축소되어 이것이 다시 승리적 단계에 들어가야, 죽었던 아벨이 부활하여 가인을 부활시키는 복귀 탕감이 벌어진다는 것입니다.

선생님이 40개국을 돌아서 온 것은 불원한 장래에 그 나라들에 통일식구들을 배치하기 위해서였습니다. 선생님이 못하면 하나님이 하실겁니다.

선생님은 브라질에 가서, 일본의 어느 식구가 그곳의 말도 못하면서도 하나님의 뜻을 전하기 위하여 어린 나이에 자진하여 십자가를 진 것을 보았습니다. 그 황무지에, 7만이 사는 그곳에 와 고생을 하는 것을 보니 선생님의 마음이 아팠습니다. 심정의 세계는 국경과 무력과 오늘의 어떤 사상을 가지고도 막지 못합니다. 그 사람은 이미 일본 사람이 아니었습니다. 여러분보다도 더 심정적이었습니다. 황혼의 비행장에 서서 떠나오던 선생님을 눈물로 전송하던 그 충성어린 모습을 나는 지금도 잊지못합니다.

세계를 향하여 제물로서 찾아가는 그 눈물의 터전 안에서 통일의 역군들을 만나지 못한다면, 이 뜻과 사명은 민족적인 것밖에 되지 못한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15-227
최후의 승리자가 되라
이번에 독일 식구들이 그 인근 여러 나라에 배치되어 개척전도를 나가게 되었습니다. 금년에 선교국이 14개국을 넘어야 되겠습니다. 1967년에 가서는 40개국 이상의 터전을 만들어 세계적인 작전을 세우려면, 그런 재료와 계획이 필요하기 때문에 선생님은 그 나라들을 찾아보았던 것입니다.

우리의 본향, 우리의 조국, 우리의 세계를 위함에 있어서 이것은 우리가 찾아가야 할 최후의 목적지입니다. 우리가 가는 이 길이 정녕 하나님의 뜻앞에 도움이 되는 길이고, 전통을 남길 수 있는 역사적인 터전을 쌓는 길이 된다는 것을 알고 서슴지 말고 이 길을 가야 하겠습니다. 이제 여러분도 세계적인 무대에서 피땀 흘리는 것을 소망으로 삼고 가야 하겠습니다.

그렇게 하자면, 겟세마네 동산에서 인간의 불신을 받은 예수님이 ‘아버지여 할만하시거든 나에게서 이 잔을 지나가게 하소서’ 하였던 것과 같은 기도를 하지 말고 ‘하나님과 모든 천군천사는 나를 딛고 세계를 향하여 나아가시옵소서’라는 기도를 해야 합니다. 그리하여 하나님과 영계의 협조를 세계로 분산시킬 수 있는 여러분이 되어야 세계적인 복귀가 빨라진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고향에 가서 부모를 만나야 되고, 부모의 도리에 따라서 그 법도를 세워 가지고 아담의 가정과 아담주의 국가를 이뤄야 합니다. 그 주의는 곧 하나님의 주의요 그 국가는 하나님 주의의 국가입니다.

세상에는 두 가지 씨가 뿌려져 있습니다. 그것은 가인과 아벨이라는 입장입니다. 그래서 사탄도 세계를 지배할 수 있고, 하나님도 세계를 지배할 수 있는 두 세계가 벌어졌습니다. 이것이 최후에 있어서 둘 다 꺾여 나가게 될 때, 지구가 깨어지지 않는 한 새로운 역사는 출발하는 것입니다.

아무쪼록 삼천만의 한과 세계 30억의 한을 풀고, 하나님의 한까지 풀어드릴 수 있는 최후의 승리자가 되기를 부탁드리면서 말씀을 마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