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100 to 15-127: 천주에 선 예수님

천주에 선 예수님
1965.10.03 (일), 일본 동경교회

15-100
천주에 선 예수님
마태복음 26:36-46

[기 도]

오늘의 성일이 당신의 뜻에 합당한 거룩한 날이 되고, 오늘의 집회가 거룩한 집회가 되기를 바랍니다. 자신의 부족한 모습을 이끌고 아버님 앞에 설 때에 스스로 해온 일에 대해서 무엇이라고 여쭐 말씀이 없습니다. 과거와 현재에 만족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아버님의 은혜를 이 집회 가운데 주시고 커다란 영광권에 저희들을 인도해 주시기를 바랍니다. 당신이 믿으실 수 있는 자녀로서, 당신이 바라시는 희망을 갖는 자녀로서, 당신이 사랑할 수 있는 자녀로서 인도해 주시기를 바랍니다. 참된 것을 당신이 원하고 계시다는 것을 생각할 때에 지금은 역사에 믿을 수 있는 아무것도 갖추어 놓지 못했습니다. 당신의 희망이 될 수 있는 아무것도 가지고 있지 않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영원불변한, 우주의 모든 것이 사모하고 있는 당신의 사랑을 저희들은 사모하는 것도, 생각하는 것도 하지 못하는 자들이옵니다. 그러나 수많은 선한 선조들을 희생하면서 오늘의 하루를 세우시고, 당신이 믿을 수 있고 소망할 수 있고 사랑할 수 있는 참된 자녀를 지금까지 사모해 왔다는 것을 생각할 때에, 마음속으로부터 무엇도 말씀드릴 수가 없고 다만 무릎을 꿇고 당신 앞에 회개하는 마음밖에 없다는 것을 절실히 느끼옵니다. 일본의 성도들은 당신이 다년간 눈물과 피와 땀을 흘리면서 모아 오셨습니다. 저희들은 지금까지 당신의 소원에 부응하도록 그 사명을 다하는 사람들이 이 지상에 없었음을 마음 아프게 생각함과 동시에 지금까지 6천년 이상의 역사를 계속하면서도 당신께 바칠 수 있는, 당신의 마음에 합당한 사람들을 이 땅에 세우지 못한 과거를 뉘우치는 바입니다. 하오니 여기에 모인 저희들, 당신의 소망을 이룰 자녀로서의 의지와 결의를 재다짐하고 최대의 맹세를 굳힐 수 있는 이 시간이 되도록 지켜 주기를 간절히 바라옵니다.

오늘의 이 시간을 지키고 겟세마네에서 예수님께서 기도하신 최고의 목적 기준을 저희들이 이어받아 최후의 승리를 성취하고 역사적 원한을 풀 수 있는 하나님의 참된 자녀가 되도록 이 시간을 지켜 주실 것을 간절히 바랍니다. 마음속으로 사모한 사람들을 모아서 함께 지내는 시간을 주신 것을 감사함과 동시에 금후 모든 식구를 지켜 주실 것을 간절히 바라면서, 주의 이름으로 모든 것을 당신 앞에 바칩니다. 아멘.

15-101
말 씀
우리는 이 우주에 절대적인 존재로 계시는 하나님을 인정하지 않으면 안 된다. 하나님이 계실진대 그분은 어떤 목적을 갖지 않으실 수 없다. 목적이 있다면 희망을 갖지 않을 수 없다. 우리가 그 희망을 목적의 경지까지 계승해 나가기 위해서는 그 목적이 크면 클수록 일상생활에서 사랑의 심정을 느끼지 않으면 어렵다고 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15-101
아담 해와의 타락과 하나님의 슬픔
하나님은 사랑의 목적을 가지고 만물을 창조하셨다. 제6일째에 이 우주의 중심으로서, 목적을 완성할 중심인물로서, 희망의 실체로서, 나날의 생활을 하나님의 뜻에 합당하게 할 생활의 개척자로서, 그 심정의 기준을 잡아 나가지 않으면 안 되는 책임자로서 세우신 것이 우리 선조인 아담 해와라고 하는 것을 잘 알고 있다.

하나님은 우리들의 선조를 창조하시고부터 나날의 생활권을 통하여 ‘나의 목적인 희망의 날은 언제인가’ 하고 생각하지 않을 수 없으셨다. 그런 하나님 앞에 서 있는 아담 해와는 하나님의 목적을 완성하지 않으면 안 되는 사명을 띠고 있었다.

그리하여 아담을 볼 때에 ‘아담을 믿고 싶다. 아담에 대해서 무한한 희망을 가지고 싶다. 무한한 애정을 쏟고 싶다’고 하는 것이 하나님의 입장이었음은 말할 것도 없다.

어린 아담이 성장함에 따라서 하나님이 믿을 수 있는 그 기준과 희망과 애정은 함께 성장해 가야 할 입장이었고, 이 천주는 하나님이 바라시는 최고의 목적을 완수하여 하나님의 사랑만을 중심으로 하고 이루어져야 했다. 하나님은 영광의 우주가 되어 하나님이 생각하시고 하나님이 느끼시는 대로 온 만물이 느낄 수 있는, 나누려고 하여도 나눌 수 없는 일치화된 세계를 실현하려고 했던 것이다.

그러나 생각지도 않은 하루를 맞이하여 아담 해와는 타락하였던 것이다. 타락의 하루를 맞이한 하나님에게는 믿을 수 있는 기대가 없어지고 희망의 기준이 없어지고 사랑할 수 있는 실체가 없어지고 말았다. 그 결과로 하나님의 창조목적은 미완성된 채로 남아지고 말았던 것이다. 타락한 결과 그 자손인, 우리 선조 이후 지금까지의 인류는 계속 날이 경과함에 따라 하나님으로부터 멀어지고 하나님이 희망하시는 목적과 반대 방향으로 나아갔다. 하나님의 희망에 거역하여, 하나님이 믿을 수 있는 기대에 거역하여, 하나님이 사랑하실 수 있는 입장으로부터 도망한 결과가 되고 말았다. 그러니 그대로 놔두면 안 된다. 이렇게 된 동기는 물론 사람에게 있지만 최대의 동기는 사람을 유혹한 사탄에게 있다. 때문에 여기에서 하나님은 원수인 사탄을 물리치고 본연의 목적을 복귀하지 않으면 안 된다는 것이다.

이 복귀 과정에 있어서 사람이 하나님으로부터 멀어지면 멀어질수록 하나님은 그 간격을 메우기 위해 거기에 비례하는 수고를 하지 않으면 안 되었다. 희생을 치르지 않으면 안 되었다. 그러한 수고를 사람 자신이 하는 입장에 서지 않았기 때문이다. 사탄이 그것을 돕는 입장에 서지 않았기 때문이다. 한다고 하는 입장에 서 있는 것은 오직 하나님 한 분이었던 것이다.

본래 아담과 해와는 하나님의 심정에 통하고 하나님의 희망에 약동하면서 그 나날의 생활 가운데에서 기쁨의 하나님 품에 안겨 만족하고 모든 것에 대해서 감사하는 주체가 되어야 할 것이었다. 그런데 그들이 그와 같은 길을 걷지 못하는 것을 보시는 하나님의 내적 심정의 아픔은 그들 자신의 내적인 처참함 이상이었다고 하는 것을 우리의 조상들은 몰랐던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의 근본 원칙을 중심으로 한 목적 관념을 버릴 수 없는 하나님으로서는 여하한 일이 있더라도 그것을 실현시키시지 않으면 안 된다. 즉 복귀하시지 않으면 안 된다는 것이다. 여기에 하나님으로서 생각지 않은 대의(大義)의 사명의 길, 구원의 길이 있게 된 것을 우리들은 잊어서는 안 된다. 그래서 하나님은 마음으로 사모해 왔던 믿을 수 있는 아들딸, 만물 창조당시의 희망이었던 아들딸, 그때까지 희망에 차서 애정을 준 그 하나하나를 역사의 과정에서 시대 시대, 시시 각각을 통하여 하루도 생각하지 않은 때가 없었다. 그러나 이러한 것을 우리의 선조들은 느낄 수가 없었던 것이다. 아담 해와로부터 이제까지의 수많은 사람이 지상을 통하여 영계에 갔지만, 그 사람들도 그 내적인 깊은 곳의 하나님의 심정을 깨달을 수는 없었던 것이다. 그 까닭에 하나님은 1,600년의 역사를 통하여 인류 가운데 세계 가운데, 자기편이 될 수 있는, 믿을 수 있는 사람을 단지 한 사람도 갖지 못했던 것이다.

15-103
노아를 중심한 복귀섭리
거기에서 사탄을 물리치고 하나님편에 쏜살같이 곧장 달려와 ‘나는 다만 하나님에게만 기여하겠다’고 하는 한 사람을 구하지 않으면 안 되는 슬픈 입장의 하나님은, 노아를 통하여 그 기준을 세우려고 하셨다. 하나님이 믿는 바대로 사람이 하나님을 믿는 다고 하는 기준의 일치를 발견하지 못하면 하나님으로서는 사탄을 굴복하고 섭리를 출발하실 수가 없다. 그러한 고민이 있으니까 노아를 통하여 120년간 하나님을 믿는 그 기준까지 끌어올리기 위한 수고의 길을 하나님은 명하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이다.

노아는 하나님의 명령과 함께 120년 후의 홍수심판의 날을 하나의 희망으로 하고, 그때까지를 하나의 신앙기대의 기간으로 하고, 그의 희망과 신앙기대를 하나님의 애정과 신앙권내에 결부시키지 않으면 안 되었던 것이 하나님의 섭리였다고 하는 것을 알지 않으면 안 된다. 일년도 아니고 십년도 아니고 120년간이라고 하는 장기간 동안 노아 할아버지는 매일 같은 일을 반복하였던 것이다.

그 가정이 환영했다고 생각하면 큰 잘못이다. 12일 후의 일도 아니고 12년도 아니다. 120년인 것이다.

그 가정의 식구들은 자기들이 죽을지 어떨지도 몰랐다. 그간에 다 들고 일어나 노아에 대해서 불평을 하기 시작했다. 그렇듯 환경으로부터 배척받는 그에게 하나님은 무엇을 원하셨는가. ‘나만을 믿어라’고 하는 것이었다. 주위의 소용돌이치는 모든 일 가운데서 하나님께 충성을 다하는 자는 한 사람도 없었던 것이다.

그러나 모두가 거역하고 일어나더라도 그 가운데서 밟고 일어나 혹은 물리쳐서 자기와 일치가 되는 신앙의 기준을 세우지 않으면 안 되었던 것이다. 그리하여 그 신앙과 희망과 더불어 하나님의 심판의 목적을 완수하지 않으면 안 되었다. 그리하여 그 연속되는 매일의 생활을 감사와 함께 하나님에게 접하는 그 기준에 있어서 애정의 연결이 시작되는 것이다. 이러한 목적으로서 노아를 세워 배를 짓게 하셨다.

그래서 하나님은 노아를 볼 때에 당연히 아담과 해와와 같이 거듭 하나님의 믿을 수 있는 기준과 희망의 기준과 목적의 기준에 거역하는 입장에 서지 않을까 하고 걱정하셨다. 노아가 또다시 그런 입장에 서면 어려운 문제가 될 것임을 하나님을 잘 알고 계셨던 것이다. 날마다 배를 만드는 노아의 생활을 보고 계시는 하나님은 노아가 만약 거기서 물러나면 하나님 자신의 탕감이 얼마나 많아질 것인가를 잘 알고 계셨던 것이다. 그런 걱정스런 마음으로 노아를 바라보시며 하루 하루를 보내시는 하나님의 그 심정은 노아 자신도 알지 못하였다.

아담 가정을 중심으로 한 복귀의 목적이 미완성이 되어 버린 고로 그것을 복귀하기 위해서는 노아의 여덟 식구가 필요하였다. 이러한 하나의 사실이 철저하지 않으면 두번째의 일을 출발하실 수가 없었던 것이다. 그러나 어버이를 중심으로 하고 세 아들이 일치되지 않으면 안 되는 절대의 기준을 함이 알지 못하고 깨버린 결과 하나님의 섭리는 400년이나 연장되고 말았던 것이다.

그리하여 하나님은 다시 아브라함을 신앙의 중심으로 세우시지 않으면 안 되었다. 희망의 기준으로 세우시지 않으면 안 되었다. 목적 완수의 사명을 다할 수 있는 책임자로서 세우시지 않으면 안 되었다. 애정을 품고 그 배후에서 뒷길을 더듬어 가시지 않으면 안 되었던 하나님의 입장이었던 것이다.

15-105
신앙의 선조들이 저지른 실수
그런데 아브라함도 이러한 하나님이 내적 심정을 알지 못하였다. 아브라함은 하나님께서 천주를 내던지더라도 희망을 가지고 자기를 믿고 계시고, 자기는 하나님의 목적을 달성하는 사명을 수행하고 있다고 하는 것, 하나님이 모든 것을 자신에게 맡기고 있다는 것, 그리고 자신의 일거수일투족 모든 면에 심판의 원칙을 세우고 원수도 심판할 수 있는 심판의 법칙을 세우지 않으면 안 되는 자신의 입장이라는 것을 알지 못하였던 것이다.

그리고 그것은 자신의 생활을 통하여 행할 하나의 기준이라고 하는 것을 아브라함 자신이 잘 느끼지 못하였다. 따라서 하나님께 3대 제물을 비칠 때에 비둘기를 쪼개지 않은 조건이 역사를 통하여 치러야 할 비참한 탕감의 조건이 되었다고 하는 것은 생각지도 못하였던 것이다. 그때가 천적 복귀노정에 있어서 천적 원칙의 조건을 세울 수 있는 최종점이라고 하는 것을 알지 못하였다.

그 때문에 이삭의 실체 제물을 바치지 않으면 안 되었고, 그 결과 이스라엘 민족은 애급에서 400년 고역의 나그네길을 가지 않으면 안 되게 되었다. 그리하여 복귀의 기준에 있어서 다해야 할 목적을 완수하지 못한 것이 이스라엘 민족의 슬픔의 원천이 되었던 것을 우리들은 잘 알고 있다.

거기서 모세라든가 수많은 예언자 등, 우리의 선조들을 보내어 이스라엘을 사모하여 온 하나님은 개인으로부터 믿을 수 있는 하나의 씨족을 세워 가지고 민족을 편성하지 않으면 안 되었다. 그리하여 민족을 중심으로 하고 세계를 하나님의 세계로 하시지 않으면 안 되었다. 이러한 것은 우리 선조들이 하나님 대신 다하지 않으면 안 되었던 책임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우리의 선조들은 그것을 수행하지도 못하고 하나님이 그것을 다해 오셨다고 하는 것조차 알지 못하였다.

이러한 입장에서 생각해 보면, 하나님의 역사적인 입장은 우리들의 현세에 있어서의 관계가 없고 아무런 문제도 되지 않느냐 하면 그렇지 않다. 과거보다도 현재가 더욱 더한 것이다. 왜냐하면, 지금 때는 세계적인 때이고 범위가 넓으면 넓을수록 거기에는 하나님께서 바라시는 개인과 가정이 없어서는 안 되고 세계 앞에 하나님의 대신자로서 탕감복귀하는 세계적인 움직임이 없으면 안 된다. 물론 하나님은 그것을 흠모하시지 않을 수 없다.

그러면 이 우주에, 이 세계에 참으로 하나님이 믿으실 수 있는 참된 자녀가 있느냐? 남자가 있느냐? 타락한 사람들의 혈통권에서는 그러한 사람을 구할 수가 없다. 태어남과 동시에 80% 이상 사탄의 감정을 계승하고 있다. 그래서 긴 역사 가운데 심정권 탕감권을 개척하여 하나님에게 접근하는 중보자로서 보내어진 한 사람의 아들, 그분이 예수님이었다.

역사는 움직인다. 시대는 부른다. 미래는 우리들에게 소원을 가진다. 그것은 모두 하나님에게서부터 시작되지 않으면 안 된다. 하나님께서 전반적인 사명을 다하는 중심으로 역사와 시대를 해방할 미래의 중심인물로서 메시아를 이 지상에 보내신 그날은 인류역사에 있어서 최고의 기쁨의 날인 것이다. 그 기쁨의 날을 누구라도 다 사모하지 않으면 안 된다. 그 기준을 통하지 않으면 안 된다.

그러한 운명에 있는 우리는 그날이 있으므로 신에 의한 신앙의 기준을 세울 수가 있다. 그날이 있으므로 하나님의 희망에 동조할 수 있다. 그날이 있으므로 하나님의 사랑을 받을 수 있는 생활권을 얻을 수 있는 것이다. 현대의 세계는 악이 점령하고 있다. 악이 점령하고 있는 위치와 환경은 사탄편으로 꽉 차 있다. 그것을 맑히고 그 환경을 밀어제치고 하나님이 4천년간 수고하신 결과로서, 희망으로서 사탄 앞에 자랑할 수 있는 것으로서 세우려 하신 하나의 아들이 우리들의 구주로서의 메시아였던 것이다. 그러한 책임을 가지고 예수님이 오셨던 것이다. 하늘과 땅, 모든 존재의 한복판에 목적완수의 중심자로서 이 지상에 오셨던 것이다.

왕의 왕 이상이었다. 선한 실체 이상이었다. 하나님은 그분을 통하여 모든 것을 보시고 생각하시고 그분을 통하여 모든 행동을 알리시고 그분을 통하여 사랑의 생활을 출발하신다. 이것이 예수님을 지상에 보내신 하나님의 내적 요구이고 심정이었던 것이다. 그러한 귀한 아들을 보내시는 데는 그 환경을 만들어 주지 않으면 안 되었다. 하나님의 바라심에 따르는 개인이 없어서는 안 되었다. 가정이 없어서는 안 되었다. 선민이 될 수 있는 민족이 없어서는 안 되었다. 선민사상이 있으면 선민으로서의 자손이 출생하게 된다.

수많은 씨족 민족이 있지만 그 가운데서 하나님이 없이는 살 수 없다고 하는 오직 하나의 씨족권 민족권을 세우기 위해, 하나님은 4천년 동안 수고하시면서 이스라엘 민족을 품고 길러 오셨다. 그리하여 연약한, 신앙도 없는 민족을 신앙 있는 민족으로 하고, 희망 없는 민족을 희망 있는 민족으로 하여, 오직 한 사람의 실체와 관계를 맺도록 메시아 사상을 예언자를 통하여 주시면서 긴 역사의 기간을 이끌어 오신 것을 우리들은 잘 알고 있다.

15-107
모든 것의 목적이었고 희망이었던 예수님
그 메시아가 오셨다. 이스라엘 민족이 승리를 결정하려고 하는 기반 위에서 있는 그 민족권 가운데 메시아는 오셨던 것이다. 하나님은 희망하던 목적을 완성하기 위해 민족의 모든 사람의 주체로서 예수님을 보내셨다. 모든 것의 목적은 그분이었다. 모든 것의 희망이 그분이었다. 하나님에 대한 신앙을 가지고 오신 중심은 그분이었다. 그리고 어버이가 자식들을 당시까지 끌고 나온 역사적 선한 규범도 그분과 관계를 갖기 위한 것이었다.

그러나 그런 내적 외적 심정을 가지고 지상에서 예수님의 편에 선 사람이 있었느냐 하면 없었다고 하는 것이다. 예수님은 그런 한복판에 서서, 역사의 부름에 응하고 시대의 요구에 응하고, 미래는 자기가 새로운 운명을 결정하지 않으면 안 되는 환경 가운데 서서, 과거 현재 미래를 통하는 중대한 사명을 자기가 가지고 있다는 것을 생각하니 자기 개인 중심한 생활을 할 수가 없었다. 공적인 생활을 하지 않으면 안 되었던 것이다. 뒤를 돌아보면 영계에 있는 수많은 조상들의 희망이 자기에게 걸려 있다고 하는 것을 알 수 있는 일이었다. 몹시 황폐한 이스라엘 민족의 그 시대의 상태를 최후로 하여 새로운 세계로 인도해 가지 않으면 안 될 사명이 있다고 하는 것을 알고 있었다. 혹시라도 이 단계를 넘기지 못하면 자손은 비참한 단계에 이른다. 그리고 사탄세계에 있어서 사탄의 참소를 통하여 역사의 제물이 되어 가지 않으면 안 된다는 것을 알았다.

그런 우주적인 사명 가운데 선 예수님의 심정이 어떠했겠는가. 그런 심정을 품고 공적 생활을 출발하기 전까지의 내적 준비기간이 얼마나 심각했던가. 이것은 성서에는 기록되어 있지 않다. 물론 그 당시의 예수님에게 그날 그날의 먹을 것을 의지하러 온 대중, 그들에게는 어떻게 할 수도 없었다. 그러나 그는 역사를 부활시키지 않으면 안 되었던 것이다. 죽은 역사를 인계해서는 산 역사를 건설할 수가 없다. 환경이 없으면 존재의 기준을 바로 세울 수 없는 것이다. 환경이 있어야 비로소 존재의 결정 기준이 생기는 것이다. 이것이 지상의 사정이다.

따라서 예수님은 이 지상에 선한 희망의 기준을 세우고 하나님이 지금까지 만들어 오신 민족의 선한 환경과 관계를 맺지 않으면 안 되었다. 그것은 일개인의 관계가 아니고 역사적 관계인 것이다. 세계적 관계인 것이다. 미래적 관계인 것이다. 그것을 맺으려고 3년 노정에 나설 때의 예수의 내적 결의는 어떠하였던가. 그것은 예수님을 사모하는 제자들도 몰랐었다. 아는 이는 하나님뿐이었다.

하나님이 희망하는 최고의 위치에 섰다고 하는 민족이 가는 방법도 몰랐다. 방법과 목적하는 기준이 일치되지 못하면 목적 완성은 불가능한 것이다. 그리하여 이스라엘 민족은 하나님쪽으로 가지 않으면 안 되는 민족이었음에도 불구하고 반대의 방향으로 가고 말았다.

역사적으로 한 사람밖에 없는 예수님을 보내실 때에 최고의 영광의 입장에 서서 수많은 사람들로부터 숭앙되는 것을 하나님을 바라셨던 것이 사실이다. 원래 구주로서 오신 것이니까 우리의 죄를 용서하시기 위해서 십자가에 달리지 않을 수 없는 운명을 가지고 왔다고 하는 것은 되지 않는 말이다. 그런 하나님은 안 계시다.

전지전능한 하나님으로서 그런 방법, 그런 방식이 아니면 구원의 길은 없었을 것이다 라고 생각하는 것은 하나님에 대한 모욕이다. 천운에 의해서 십자가에 달리셨다고 하는 것은 말이 안 된다. 그뿐이 아니다. 하나님에게 있어서는 역사적인 신앙의 기준, 희망의 기준, 심정의 기준에 일치되는 생활을 할 수 있는 환경을 만들 것을 희망하시고 세례 요한을 보내셨던 것이다.

역사를 인계받기 위해서는 역사적 제물을 바쳐서 승리를 결정해야 했던 것이다. 그러지 않으면 역사권(歷史圈)을 주실 수 없기 때문이다. 왜 그러냐 하면 지금까지 실패를 거듭했던 관계로 온갖 조건에 걸려 있어서 당하는 모욕을 하나님 혼자서는 제거할 수가 없기 때문이다. 그것이 만약 된다면 6천년간 섭리해 오신 하나님의 목적인 복귀는 문제가 아니다. 구원은 문제가 아니다. 그러나 잘못된 것은 원칙대로 바로잡지 않으면 안 된다. 고치려면 반대의 것 이상의 좋은 부분을 남기지 않으면 안 된다. 그러지 않으면 바로잡아도 사용할 방도가 없다.

15-109
세례 요한과 예수님과의 관계
그래서 예수님에게는 과거 4천년 동안 선조들이 잘못한 모든 조건을 담당하여 그 이상의 가치 기준을 세워 가지고 하나님쪽으로 출발할 수 있는 기준을 만들지 않으면 안 될 사명이 있었다. 그렇게 하지 않으면 사탄권 세계로부터 새로운 희망의 하나님의 세계권으로 출발할 수가 없는 것이었다. 그런 입장에 있던 예수님이었다. 또 그러한 입장에서 하나님을 볼 때에 하나님을 위로해 드리지 않으면 안 되었다.

그런 예수님은 지금까지 자기 한 사람을 희망으로 하고 4천년의 역사를 더듬어 오신 하나님에 대해서 면목이 없었다. 그래서 이스라엘 민족을 지휘하고 이끌고 새로운 민족으로 재건하지 않으면 안 되었다. 백성으로서 혹은 자녀로서 키워진 민족이 하나님에게 거역한다고 하는 것을 생각할 때에 하나님께 면목이 없었다. 그래서 예수님은 심정의 고민과 함께 감람산 기슭을 혼자 걸으시면서 기도하셨던 것이다. 그런 시간을 많이 가졌다고 하는 것이 성서 가운데서도 나타나고 있다. 또 내적 싸움을 해결하려고 요단강으로 세례 요한을 찾아갔던 예수님이었던 것을 알지 않으면 안 된다.

예수님은 하나님으로부터의 사랑과 하나님으로부터의 희망과 하나님으로부터의 절대적 신앙에서 하나님의 절대적 보호와 함께 승리와 영광의 생활을 출발하지 않으면 안 되었던 하나님의 독생자였다.

그러면 세례 요한은 누구였던가? 이스라엘 민족의 대표, 즉 이스라엘 민족을 대표하여 하나님으로부터 보내진 사자요, 예수님 앞에 산제물로서 역사적 이스라엘 민족을 하나님의 기대권에 끌어넣을 수 있는 중심인물, 혹은 중심제물이었다. 그런 사명을 지고 하나님으로부터 보내진 인물이 세례 요한이었던 것이다. 그러니까 백 퍼센트의 신앙의 기대에서, 백 퍼센트 희망의 기준에서 백 퍼센트 사랑의 기준을 가지고 세례 요한을 세워서 자신과 일치된 기준에서 하나님께 바쳐야 했던 것이 예수님의 사명이었다.

그렇게 함으로써 비로소 역사적 실패를 탕감복귀하고 세례 요한을 하나의 제물로 하여 심정의 기대와 희망의 기대와 사랑의 기대의 실체로 바침으로써 지금까지 하나님의 내심(內心)에 걸려 있던 원한과 고민과 고통을 제거할 수 있는 것이다. 그리고 그로부터 예수님을 맞이할 기대를 만드는 것이 하나님의 섭리이고 예수님이 세례 요한을 찾아간 목적이었다. 거기에 대해서 세례 요한에게는 신앙의 대표자로서의 실체, 희망의 대표자로서의 실체, 혹은 사랑의 대표자로서의 실체이신 예수님으로부터 희망 또는 심정 혹은 신앙의 기준을 구해 받지 않으면 안 될 사명이 있었다.

그렇게 하지 않으면 이것이 가지로 퍼지지 않기 때문이다. 거기에서 세례 요한이 예수님의 제1의 제자가 되어야 하는 것이 하나님의 섭리상으로 본 입장이었다. 제1의 제자가 되지 않으면 거역하는 존재가 되어 버리고 마는 것이다.

그런데 실제에 있어서 세례 요한은 역사를 거듭 파괴하는 중심이 되고 그 때문에 그때까지의 이스라엘 민족과 예수님과를 연결하는 사닥다리는 무너지고 말았다. 그로부터 예수님의 생애라고 하는 것은 진보하고 발전하는 생애가 아니라 쫓기고 후퇴하는 생활이 되고 말았던 것이다. 상대로부터 환영받는 생애가 아니라 쫓기는 생애가 되고 말았다는 것이다.

세례 요한이 사명을 다하지 못한 그날부터 이스라엘 민족에 대한 예수님의 소원과는 거꾸로 민족 전체가 반대하고 반역하는 입장이 되었다. 그리하여 유대교 전체가 예수님이 아니면 안 된다고 하는 중심기준을 세우지 못하고 그때까지의 역사관이 모세를 중심으로 한 기준에 머무르고 말았는데, 그것은 하나님을 인정하는 기준이 아니었다.

그 이후에 2천년의 비참한 이스라엘 역사는 하나님으로부터 예수님을 맞이하지 않는 것에 대한 후회의 역사였다. 여러분이 아는 바와 같이 제2차대전 때에 나치스에 의한 이스라엘 민족이 몇백만 명이나 죽어 갔다. 그렇게 안 될 수가 없었다. 하나님의 심판이었던 것이다. 그리하여 때가 거듭 올 때까지 이스라엘 민족은 새로운 희망을 가질 자격을 잃어버리고 말았던 것이다. 그러므로 그들은 세계 곳곳에서, 가는 곳곳마다에서 쫓기는 민족으로서 비참한 역사를 남기고 왔다고 하는 것을 잘 알고 있다. 이것은 예수를 십자가에 내 준 죄의 댓가인 것이다. 그것은 현재의 크리스찬들은 모른다. ‘혹 그것이 인정되지 않거든 기도해 보라. 하나님은 살아계신다’ 이것이 통일교회의 주장인 것이다.

15-111
예수님의 영적 구원과 재림
역사를 토대로 하여 현실을 밟고 미래를 향하여 재출발하는 것이 하나님의 예수님에 대한 최고의 목적이었다. 그런데 문제는 그 목적이 지금 어디에 있느냐인 것이다. 지금까지 그 목적이 거듭 나타날 수가 없었다. 예수님을 중심으로, 세례 요한을 중심으로 사축(死畜)의 제물을 바쳐 외적복귀의 길을 도와 가려고 한 것이었지, 생축(生蓄)의 제물을 바쳐 통하는 구원의 길을 간 것은 아니었다. 십자가의 구원의 사명, 역사상에 있어서 이 이상 비참한 길은 없었다.

하나님의 첫번째의 자녀로서 탄생하였던 아담 해와는 어디로 갔는고. 그들은 사탄편의 포로가 되고 말았다. 이것을 분쇄하고 거듭 하나님편으로 구원하기 위한 기대를 만들기 위하여 보내어진 예수님은 어디에 계신다는 말이냐. 십자가에 달리어 사탄이 예수님의 육신을 범하도록 허락치 않을 수 없는 권(圈)을 만들어 버린 것이다.

이와 같은 사정 밑에서 영적 구원의 길을 열고 간 것이 제2이스라엘로서의 기독교인 것이다. 제1이스라엘이 하나님께 거역하자 제2이스라엘을 세워서 거역하지 않는 원래의 이스라엘이 되기를 원하셨고, 제2이스라엘을 연결시켜 새로운 희망을 남기고 구주를 거듭 찾지 않으면 안 되는 기준으로 인도하여 가는 것이다. 그 기준이야말로 지금까지 기독교에서 말하는 예수의 재림 때라고 하는 것을 우리들은 배우고 있는 것이다.

제1이스라엘은 제1 아담 해와의 자손으로서 또다시 타락한 아담의 길을 가고 말았다. 그래서 제2이스라엘의 중심으로서, 제2 아담으로서의 사명을 다하려고 오셨던 예수님이 십자가에 달려 가셨으니까, 지금까지의 기독교는 십자가의 도를 배워서 가지 않으면 안 된다. 사탄 때문에 우리 선조들이 섭리상의 목적 완수에 따르지 않는 그 조건이 역사에 결려서 지금까지 흘러 왔다고 하는 것은 역사가도 모르고 종교가도 모르는 것이다.

거기에서 제2의 세계무대를 중심으로 장래의 이스라엘권을 만들고자 한 것이 예수님의 십자가 이후 제2의 섭리인 것이다. 그리하여 제2이스라엘의 세계권(世界圈)은 만들어졌다. 그런데 이것은 영적인 것이다. 사람은 원래 영적으로만 이루어진 것이 아니다. 영육 함께 이루어졌다. 때문에 이스라엘 민족을 세운 것도 영적 천국만을 목적으로 한 것이 아니다. 로마를 굴복시키고 세계를 답파(踏破)하고 하나님의 섭리를 완성한 지상천국을 이루는 것이 목적이었던 것이다. 아담 해와가 타락하지 않았다면 그 시대에 하나님의 창조목적을 완수한 지상천국을 다 이루었을 것이다.

지상천국은 무엇인가? 그 생활권내에 하나님의 신앙기준이 백 퍼센트 나타나는 세계이다. 희망 자체인 중심인물을 중심하고 움직이는 세계인 것이다. 하나님의 심정이 누구에게도 나타날 수 있는 세계인 것이다. 그러한 곳이 지상천국인 것이다.

그러니까 이러한 사명을 하지 않으면 안 되었던 예수님은 과거를 돌아볼 때에 자기가 만약 이스라엘 민족의 잘못을 용서치 않는다면, 하나님은 재연장섭리를 하실 수가 없게 되는 것을 알았던 것이다. 그것은 기대가 없기 때문이다. 예수님은 그것을 잘 알고 계셨다.

따라서 십자가상에서의 예수님의 심정은 ‘하나님이여, 나를 쳐서 새로운 역사를 향해 출발할 수 있는 인연을 남겨 주십시오. 현세의 이스라엘 선민이 망함과 동시에 전인류가 망하게 되지 않습니까. 아무쪼록 제2이스라엘권을 남기시어, 지금까지 하나님이 수고하여 쌓아오신 기대를 남기어 주시옵소서. 내가 없이는 새로운 미래의 주권이 점점 어둠 가운데 빠져 전인류는 하나님도 무엇도 알 수 없게 되어 버릴 것입니다. 그런 단계에 끌려가고 말겠지요? 그러니 미래의 세계에 하나님이 바라시는 등불로 남아질 희망을 남겨 주십시오’라고 하는 심각한 마음이었다고 하는 것을 여러분이 알아야 된다. 33년의 생애를 살고 하나님 앞에 나왔을 때는 과거에 사명을 다하지 못한 예수님 자신의 회개의 시간이었다.

‘역사상의 선조들의 잘못을 용서해 주십시오’ 하던 예수님, 그들의 잘못은 예수님이 용서하지 않으면 하나님도 용서할 수 없는 것이다. 하나님이 용서하지 않으면 이스라엘 민족의 이름을 남길 수가 없다. 그래서 예수님은 그들의 그날의 죄과를 그대로 하고 연장시켜 제3의 희망을 가질 수 있는 환경과 기대(基臺)를 바라시며 십자가의 길을 선택하지 않으면 안 되었다. 제2의 패전으로 인하여 제3의 싸움을 위한 준비기간이 된 것이 지금까지의 세계에 발전해 온 제 2 이스라엘 민족의 역사, 즉 기독교의 역사인 것이다.

그러면 뒤에 남아진 것은 무엇인가? 제3의 아담의 가치를 담당하고 천지창조 본래의 목적을 완수하기 위하여, 또 창조 당시의 하나님의 신앙 기준과 절대 희망의 기준과 절대 심정의 기준을 최후의 역사의 첨단에 다시 세워, 세번째의 책임을 다함으로써 하나님이 본래 희망하신 재출발을 하려고 하는 것이 오시는 바의 재림의 길이라고 하는 것을 확실히 알지 않으면 안 되겠다.

15-113
십자가상에서 예수님이 드린 기도의 의미
대체 그 경우에 무엇이 조건인가? 제3이스라엘 국가가 편성되지 않으면 안 된다. 지금까지는 모두 희생이었다. 예수님이 자기의 몸을 희생하여 십자가에 달리셨기 때문이다. 인도하는 사람이 가는 길은 인도되는 사람의 갈 길이다. 때문에 십자가의 길을 가신 예수님을 사모하는 사람들은 십자가의 길을 가지 않으면 안 된다. 예수님이 영적 천국을 사모하여 갔기 때문에 지상에 있는 크리스찬들은 지금까지 영적 천국을 사모해 왔다.

그러면 그것으로 완성되는가? 물론 완성되지 않는다. 하나님은 지상에서 목적을 완성할 사람을 만드셨다. 물과 흙과 공기로 사람을 만드셨다. 여러분이 생각하는 것과 같은 천국은 아닌 것이다. 지상천국인 것이다. 그와 같은 세계를 예수님은 바라신 것이다.

십자가에 달려 손에서 떨어지는 피를 볼 때, 과거에 선조들이 세우려 했던 조건을 예수님은 찾으려고 하셨다. 그것이 예수님의 심정이었다. 양손, 양발, 머리, 옆구리로부터 피를 흘리면서 하나님께 기도하셨다. ‘역사적인 선조의 죄를 용서하여 주십시오. 하나님을 사모하지 못하고 하나님께 제물을 바치지 못한 우리의 선조 대신 바치오니 받아 주십시오. 내가 33세라는 젊은 나이로 죽더라도 하나님을 위해서 죽었다고 하는 조건을 세워 주십시오’하셨습니다. 만일 자기의 소원을 다 이루지 못하여 자신의 기도에 응하시지 않으면 지금까지 4천년의 하나님의 노고가 없어지고 맙니다. 그러니까 ‘지금까지의 어버이로서의 하나님의 수고에 대한 심정적 기준을 나를 통하여 세워 주십시오’ 했던 것입니다.

모든 선조들이나 하나님의 심정, 그리고 자신의 미래의 심정기준에서 하나님을 대할 때에 오직 면목이 없었다. 그런 입장에서도 불쌍한 심정을 갖지 않으면 안 되는 하나님이라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또 ‘하나님이여, 저들의 죄를 용서해 주십시오. 나는 지금까지의 하나님의 수고해 오신 역사를 남기지 않으면 안 됩니다’라고 기도하였다. 그것은 그 기준에서 사탄의 참소조건을 깨부수고 새로운 제2의 섭리에 있어서 영적 승리의 기반만이라도 만들지 않으면 안 된다고 하는 심각한 기도였다.

미래의 사람을 구원하는 것보다도 우선 과거의 역사적 인연을 연결시켜 남기는 것이 문제였다. 역사를 구하지 않으면 안 되었다는 것이다. 그래서 죽은 후 3일 동안 지옥에 가서 노아 때에 순종치 아니함으로써 지옥에 가 있는 모든 영인(靈人)들에게 말씀을 전파하셨다(벧전 3:18-20). 예수님에게 역사적인 전통을 새로이 자기 나름으로 세우시지 않으면 안 되었던 중대한 사명이 있었다고 하는 것은 지금까지의 사람들은 몰랐었다. 역사에 승리의 기반을 만듦으로써 사탄이 물러갈 수가 있는 것이다. 아무리 현재에 있어서 승리를 얻더라도 역사적 승리의 기반을 갖추지 못해 가지고는 역사를 지배하고 하나님의 섭리기준을 계승하여 하나님의 심정과 연결될 수는 없다.

예수님은 4천년의 인류역사를 대표하여 오셨지만 지상의 30여년의 짧은 생활을 통하여 그 오랜 역사를 담당하고 번민하셨다. 그런 분은 예수님 이후에 누구도 없었다. 그래서 영계가 그분과 인연을 가질 수가 있었다. 역사를 살린 분이니까 시대를 부활시킬 수도 있었다.

여러분들은 아담 가정에 있어서의 가인과 아벨의 일을 잘 알고 있을 것이다. 가인이 섭리를 완성하였으면 그 뒤에 아벨이 출발할 수 있게 되었을 것이다. 그러니 예수님의 생애를 시대성으로 보면, 앞의 시대는 가인의 시대이고 뒤의 시대는 아벨의 시대였음을 알 수 있다. 예수님은 제2의 세계적 아벨적 주인이고 아벨의 세계를 건설하기 위한 제1의 책임자였다. 그때까지의 세계는 가인의 세계였던 것이다. 자기를 중심으로 한 세계였다는 것이다. 그러니 그 세계를 수습해서 굴복시키고 처음으로 형제가 참부모님을 맞이하여 자녀의 입장에 서야 한다고 하는 것이다. 이것은 원칙이다.

미래도 과거도 아벨의 기준에 굴복시키지 않으면 안 된다. 그 대표자로서 세례 요한이 과거와 미래를 결부시키는 사명을 다하지 않으면 안 되는 것이다.

15-115
신앙의 제일 신조
예수가 담당한 새로운 세계로의 출발은 이스라엘이 내외 함께 완수한 기준 위에 설 수 있는 곳으로부터 시작하지 않으면 안 된다. 그러나 세례 요한의 사명 회피로 인하여 예수는 그 외적 기준까지 인계받아 아벨의 위치에 서지 않으면 안 되었다. 그 싸움의 과정이 예수의 3년노정인 것이다. 처참한 일이었다. 여러분은 마태복음 11장을 잘 알고 있을 것이다. 예수님에게는 세례 요한을 심판할 수 있는 권한이 있다는 것을 보이셨다. 우리들은 그것을 두려워하면 안 된다.

모든 민족과 국가와 세계의 배후에 하나님의 섭리의 손길이 같이하여 세계는 발전하고 있다. 명실공히 그리스도교는 세계적 종교권, 곧 자유진영을 만들고 있다. 여기에 있어서 문제는 옛날 이스라엘과 같은 입장으로 돌아가는 현세가 되고 있다는 것이다. 현재 미국은 옛날 로마에 해당한다. 그런데 재림주가 오시는 나라는 선진국이 아니다. 재림주는 요셉의 사명을 가지고 오신다. 요셉이 애급에 팔려가서 총리대신이 되고 야곱과 그의 형제 등 가족을 다시 구했듯이 그런 행정(行程)으로 오신다는 것이다. 절대로 미국같은 선진국에는 안 오신다. 쫓기고 쫓기면서도 하나님을 구하는 처참한 민족에게 찾아오시어 처음부터 하나님에 의한 승리의 권한을 만들면서 출발한다. 섭리가 그렇게 되어 있다.

그러니까 현세의 역사가들은 말한다. ‘역사는 돈다’고. 역사는 나선형으로 되돌아온다. 왜 돌아오는가? 꼭 들어맞으면 돌아오지는 않는다. 맞지 않으니까 섭리가 다시 돌아오는 것이다.

가정으로부터 출발하였으면 다음은 민족을 중심으로 그 형을 연결짓지 않으면 안 된다. 하나님은 민족적으로 섭리해 오신 연한, 즉 수리라고 하는 것을 국가적 기준으로 연결한다.

왜 그러냐 하면, 개인은 가정에 포함된다. 가정이 승리하면 개인이 승리권을 얻는다. 그러니까 개인 구원의 실패를 보충하는 데는 가정 구원이 실패하면 하나님은 씨족의 승리권으로 잇는다. 그래서 씨족이 승리하면 가정과 개인의 승리를 인정하게 된다. 그것이 실패하면 민족의 승리권으로 이어진다. 민족이 승리하면 거기에 씨족이나 가정이 전부 들어간다. 그리하여 국가기준을 만들게 된다.

국가가 승리하면 거기에 민족권이 들어간다. 그리하여 세계의 승리권을 만들고 세계가 승리하면 거기에 국가권까지 포함된다. 이러한 일을 깊게 반복하여 돌이키면서 연결되는 결정기준을 만들게 하여 연장하고 나선형을 이루어 커다란 환경권을 향해서 현세의 역사를 발전하여 왔다.

그러면 선이란 무엇인가? 최고의 선이란 무엇인가? 최고의 기준에 대한 중심성을 인정하고 그 책임을 다하는 것이 최선인 것이다. 우주의 최고는 누구인가? 하나님이다. 그러니 하나님을 위해 모든 것을 다하라. 이것이 신앙의 제일 신조이다. 하나님의 승리는 전우주를 포함한다. 그러니 여러분, 하나님을 위해서라면 맹목적이라도 좋으니까 있는 힘을 다하여 수고하라. 어느 때가 오면 다 해결된다. 그 기간에는 여러분 자신을 희생하지 않으면 안 된다. 이것이 하나님의 섭리인 것이다.

인간은 하나님이 계신지 안 계신지 모르고 있다. 이것을 해명하는 것이 복귀원리다. 지금 시대에 있어서 우리들은 외치지 않으면 안 된다. 우리는 찾지 않으면 안 된다. 우리는 구하지 않으면 안 된다. 예수님이 갖춘 심정기대를 하늘로부터 거듭 받지 않으면 안 된다. 내가 그분의 희망과 관계를 갖지 않으면 안 된다. 그의 심정을 나와의 서약기준에 두지 않으면 하나님은 하나님의 희망, 하나님의 심정기대로서 나에게 역사하실 수 없다.

출발할 수 있는 그 기준이 지상에 거듭 나타나지 않으면 이 지상을 하나님의 섭리의 중심으로 수습할 수 없다. 이것이 역사의 문제이고 현재에 있어서의 세계적인 문제이고, 금후 우리 자신들이 해결해야 할 세계적인 문제로 되고 있다고 하는 것을 여러분은 모르고 있다. 예수님은 지금부터 2천년 전에 그와 같은 수많은 희망, 가르침, 목적관념을 마음에 품고 있었다. 생활의 승리권, 민족의 승리권, 국가적 승리권, 세계적 승리권이 그 심정에 걸려 있었다.

15-117
통일교회는 재창조의 도장(道場)
그러나 사탄세계에 있어서 결실하고 싶은 희망이나 목적을 일단 말로 표현했더라도 그 말의 가치적, 실체적 존재가 서지 않는 이상 그 말은 사탄의 것이 되고 만다. 말하려 해도 하지 못하고 그 이념을 다시 품고 돌아가지 않으면 안 되었던 예수님의 아픈 마음을 우리들은 알지 않으면 안 된다.

유대인들은 이런 것을 알지 못하고 예수님을 모욕했다. 그들은 맹목적이고 아무것도 알지 못했다. 그러니 우리들은 소리쳐 부르고 구하지 않으면 안 된다. 하나님이 구하시는 최고의 기준은 승리권에 있음에 틀림없다. 수많은 선조들이 실패했고 수많은 사람들이 번민의 밑창에 빠져 있는 것을 본 우리 민족은 어떻게 그 기준을 이룰 수 있을 것인가를 생각하며 하나님 앞에 눈물을 흘리며 간절히 호소해야 한다. 그런 기도의 주인공들이 필요하다.

기도만 가지고도 안 된다. 책임을 지는 사람이 아니고서는 안 된다. 재림주가 오기 전에 예수님의 심정과 희망과 목적을 완수하는 기대가 마련되지 않으면 안 된다. 거듭 세례 요한의 존재가 문제된다. 재림주는 오신다. 틀림없이 오신다. 그러나 오시더라도 기다릴 수 있는 기대가 없는 경우에는 거기에 수고가 따른다.

역사는 제1, 제2, 제3 기준을 중심으로 원형을 이루며 출발한다. 두 점을 통과하는 것은 일선이다. 일선은 되는 데 그 이상은 안 된다.

천지창조의 출발기준으로서 하나님은 세 점을 결정하셨는 데 그것이 우주만물 창조의 묘미를 갖추는 기반이 되었다. 그래서 3수가 문제인 것이다. 이상권은 3수를 수반하지 않으면 안 된다.

제1의 아담, 제2의 아담은 실패하였지만, 제3의 아담은 무엇을 계승해 오는가. 실체보다도 심정적 내용을 계승해 와야 한다.

육체를 계승해 오는 것은 아니다. 하나님에 의한 심정, 하나님의 목적에 상응한 심정을 가진 제1, 제2 아담의 목적을 계승하여 제 3 아담은 나타난다. 그가 메시아인 것이다. 구름을 타고 천사의 나팔소리와 더불어 오신다고 하는, 그런 형태로 되는 것이면 하나님의 섭리는 6천년이 아니라 6일도 걸리지 않는다. 원칙의 하나님인 것이다. 원리원칙을 중심으로 만물을 창조하신 하나님이 자신부터 원리원칙을 거역하는 일은 하실 수 없다. 그러한 정(正)은, 그러한 선은 없다. 그러므로 그 원칙은 절대적 원칙이고 하나님도 그 원칙의 보조에 일치하지 않으면 안 되는 것이다.

우리는 지금으로부터 원칙적인 환경을 만들고 원칙 자체를 다시 구하여 가지 않으면 안 된다. 예수 자신이야말로 원칙 자체의 모습, 원칙의 실체인 것이다. 그러므로 그분에게 순종하지 않을 수 없는 하늘의 원칙기준이 지상에 서지 않으면 안 된다.

그러므로 이러한 입장에 선 우리들에게는 천주의 중심에 선 예수님의 심정과 하나님이 역사적 희망과 우리의 사명이라고 하는 것이 남아 있다. 그에 대해서 여러분은 어떠한 각오를 가지고 있는가? 겟세마네 동산에서 기도하실 때의 예수님의 심정과 같은 심정의 경지에 들어가지 않으면 안 된다. 십자가상에서 하나님께 최후의 기도와 함께 만민의 죄에 대한 용서를 구한 예수님의 그 심정의 경지를 통하지 않으면 안 된다. 이것을 하려고 하는 것이 우리 통일교회인 것이다.

교회, 나는 교회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도장(道場)인 것이다. 재창조하는 일터인 것이다. 직장인 것이다. 때문에 되지 않는 것은 잘라 버린다. 자기 자신을 중심으로 한 모든 것을 다 잘라 버리고 하나님께 거역하지 않고 순종하는 요건에 맞는 그러한 것을 만들지 않으면 안 된다. 거기에서 다리가 길다면 자르지 않으면 안 된다. 눈이 두 개 있더라도 필요하다면 하나를 뽑아내지 않으면 안 된다. 인간에게는 탕감조건이라고 하는 것이 남아 있다. 영적으로 보면 다 남아 있다. 그래서 하나님의 섭리가 6천년이 걸린 것이다.

‘오, 젊은이들, 여러분의 희망은 무엇인가? ’할 때‘선생님의 말씀을 들었으니 제가 그 입장에 서서 예수님의 대사명을 완수하겠습니다. 기쁩니다. 예, 하겠습니다’ 할지 모른다.

15-119
승부의 결정권
말은 간단한 것이다. 그러나 정말로 그대의 배를 쨀 것인가? 예수님은 그 기준이 되었다. 그러나 그러한 심정기준을 가지고도 져서는 안 되고 승리한 경지에 서지 않으면 안 된다. 그러니까 우리들의 신앙생활은 죽어서 심판받는 길이 아니고 살아서 심판받으면서 가는 길이라는 것을 확실히 알지 않으면 안 되겠다. 성서에도 있다. 손이 죄를 지으면 손을 잘라 버려라. 눈이 죄를 지으면 눈을 빼어 버려라. 불구자가 되어서라도 천국에 들어가는 편이 오히려 낫다.

예수님이 일하는 것을 제자들이 보고‘우리 선생님은 세계적인 선생님이다’라고 말했을 것인가.‘하늘로부터 보내어진 주님이다’라고 말했을 것임에 틀림없다. 그러나‘기다려라!’라고 말한다. 누가? 사탄이 말하는 것이다.‘너는 예수님과 일치할 수 있는가. 예수님은 이와 같이 가셨다. 너도 그렇게 가겠는가? ’한다는 것이다. 그때‘아니요’하면‘그렇다면 아래로 가라’고 하는 것이다. 이것이 승부의 결정권이다. 우리들이 가져야 할 신앙은 관념적인 신앙이 아니다. 생활권(生活圈)에 계셔서 생활을 중심으로 하는 하나님을 필요로 하는 신앙인 것이다. 생활권을 포함하는 하나님이 아니라 생활권내에 들어와 계시는 하나님을 필요로 한다. 그러한 생활권을 중심으로 하고 움직인다. 그런 자체가 문제인 것이다. 그렇게 되면 하나님까지 안식시킬 수 있는 인물이 되지 않을 수 없다. 결론은 그런 것이다.

그렇게 되면 하나님은 6천년 동안 완수하지 못했던 구원의 목적을 모두 완수할 수 있겠는가. 하나님은 그러지 않으실 수 없다. 지금까지 선생님의 싸움은 그것을 위함이었다. 어떤 때는 이러한 기도를 하였다.‘하나님이여! 6천년의 하나님의 섭리노정에 있어서 우리의 선조들은 온갖 죄를 짓고 당신을 배역하여 왔습니다. 아무쪼록 6천년을 6일간으로 하여 탕감할 수 있게 그 모든 죄의 짐을 나에게 주십시오’라는 기도를. 또‘32억 인류와 지금까지 영계에 가 있는 모든 선조의 대신으로 모든 사탄들은 나를 향해 기관총을 쏴라!’라는 기도를 하였다. 그렇게 하여 조건을 세우는 외에 달리 길은 없었다. 지금도 그러하다.

32억의 전인류가‘아! 저 선생님이 오셨다. 저것은 세계적인 대파(大波)다. 다들 빨리오라. 그리하여 부딪쳐서 집어 삼키라. 해치우라!’ 해치울 수 없고 집어삼킬 수도 없으면, 자신이 그렇게 되어 버려라. 집어삼킬 수 없으면 역(逆)으로 집어삼켜지고 말 것이다. 이것은 선생님의 사고방식이다. 그러니까 커다란 목표를 가질 때에는 출발 전에 모두 제1 제2의 계획을 세우지 않으면 안 된다.

일년의 성공을 바라고 하면 일년의 주인밖에 되지 않는다. 천년의 성공을 바라고 하면 천년의 주인이 되고, 수억년의 성공을 원하여 수억년 분의 수고를 하면 수억년의 승리자가 될 수 있을 것이다. 하루만 일하고 거기에서 기분이 좋아 가지고 눈을 동그랗게 하고 만족해하며‘아 기분 좋다’라고 하는 것은 선생님은 아주 싫어한다. 무엇인가 항상 가지고 있어야 한다. 춤을 추고 기뻐하고 있어도 무엇인가 항상 짐을 지고 있어야 한다. 생애의 십자가를 누구보다도 많이 지고 가야 한다. 민족의 십자가가 아직은 남아 있다. 세계의 십자가가 남아 있다. 거기에 몰입하라. 십자가권에 들어가 점령하라. 빨리 점령하라. 그리하여 주인이 되면, 그 십자가권(十字架圈)을 만들고 있는 자와의 단독치기가 된다. 그가 만약 하나님의 최고 원수라면 그를 맞아 최후의 결말을 내야 한다. 이것은 참으로 재미있다. 여러분이 벌써 다소 인격을 연성(鍊成)하여 하늘의 정예부대가 되어서 일본을 움직이게 되면, 그러한 여러분을 선두에 세워 세계적 영적 전쟁을 시작할 것이다. 총이나 대포를 가지고 싸우는 것은 아니다. 싸우는 비결을 여러분들은 가지고 있다. 심정포탄을 쏘라. 희망포탄을 쏘라. 신앙포탄을 쏘라. 예수님은 확실히 그러한 일을 하셨다.

15-121
지상인간이 갖춰야 할 세 가지 증명서
현세에 있어서 우주의 중심인 예수님을 생각할 때 여러분은 무엇을 하면 좋겠는가. 모두들 흔히 말한다.‘속죄를 위하여 십자가를 지고 돌아가신 것을 생각하면 억울해서 못 견디겠습니다’라고. 무엇이 억울한가. 그 증명서를 보여 보라. 여러분은 최초로 어디에서 증명서를 받아올 것인가.

‘나는 이렇게 되었다. 이런 일을 했다. 이것이 승리의 증명서이다’라고 할 수 있는 증명서를 말이다. 그런 증명서를 자기 자신이 쓸 수는 없다. 그럼 누가 쓰느냐? 처음에는 사탄이 쓴다. 하나님은 쓸 수가 없다. 사탄으로부터 그 승리의 증명서를 써 받지 않으면 안 된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예수님은 그것을 잘 알고 계셨다. 그래서 3년 공생애노정의 출발 때에 40일간 사탄을 불러내어 증명서를 써 받는 싸움을 하셨다. 그것이 3대 시험이었던 것이다. 사탄은 말하기를‘당신은 민족적으로 승리하고 있다. 그러니 내가 증명서를 쓰지 않을 수 없다. 그렇지 않으면 나의 활동무대를 모두 하늘편으로 즉시 바쳐야 하기 때문이다’라고 했다.

그러므로 여러분은 먼저 사탄에게 증명서를 써 받고 나서 예수님의 증명서를 받아야 하는 것이다. 그 다음에 하나님의 증명서를 받아야 한다. 이 세 가지의 증명서가 필요하다는 것을 알지 않으면 안 된다.‘예수님을 믿고 일요일에 교회에 가서 찬송가를 부르고 기도를 하고 그리고 천국행 특급표를 받으니까 안심이다’하며 예배 때 졸고 있다. 천국행 손님의 기분이다. 그것을 축하할 일이라 해서는 안 되겠다.

이 예배 시간이라고 하는 것은 싸움하는 때다. 단독 결판하는 때인 것이다. 그런데 잠을 자? 그런 자가 있으면 흔들어 깨워라.‘사탄아 물러가라’하고 예수님이 베드로에게 말하셨듯이, 옆구리에 한방 때려 넣어라. 그것이 사랑인 것이다. 선생님은 예배 때 자는 자가 있으면 그냥 두지 않는 다. 과거 현재 미래는 나를 부른다. 그렇게 생각하는가? 과거 현재 미래는 나를 필요로 한다. 일본에 내가 필요하다고 생각해야 한다.

내 얼굴은 어째서 이렇게 되어 있을까. 조금 옆으로 삐뚤어져 있다. 달걀형이었으면 좋을텐데. 어째서 이렇게 동그랄까. 이런 것을 걱정하지 마라. 외적으로 나쁘더라도 내적으로는 백 퍼센트 원만한 기준을 갖출 수 있는 양심적 세계가 있다. 심적 세계인 것이다. 정적 세계가 있다고 하는 것을 잊어서는 안 되겠다. 자기의 손을 보고‘저 사람의 손은 저와 같이 아름다운데, 어째서 내 손은 송아지의 앞발과 같을까? ’하겠지만, 그러나‘이 손은 보기 싫으나 이 손으로 하나님을 울리고 하나님의 길을 개척하고 하나님을 위로할 수 있다면…’하는 마음을 가지면 그것으로 만점이다.

15-122
세계적 겟세마네
여러분, 이러한 것을 느낀 일이 있어요? 하늘 아버지의 일을 죽 생각하면, 갑작스레 눈물이 철철 흐리고 울음이 나오기 시작한다. 어떻게 해도 참을 수 없다. 심정적으로 접하면 눈물이 나오는 것이다. 아담 가정에 들어가면, 특히 여성의 경우‘나는 죄를 지은 해와 그 자체다. 하나님 앞에 무릎을 꿇어야 할 가련한 해와다. 어디에 구원의 한 길이라도 있다면 그 길을 가겠으니 내가 범한 죄를 용서해 주십시오’라고 하지 않으면 안 된다. 그리고 남자라면 자기의 주관권한을 다하지 못하고 천지창조의 원칙의 기준을 전복한 죄인 아담의 후손이라는 것을 회개하지 않으면 아니 된다. 그리고 하나님을 위로하고 승리의 결정권을 세워 하나님이 명령을 바라지 않으면 안 된다.

우리는 노아나 아브라함이나 모세가 간 길 예수의 겟세마네나 골고다의 길이와 12명의 제자가 걸어간 길을 가지 않을 수 없다. 십자가로 가신 분은 십자가를 통해서 오신다.‘이 길을 내가 가지 않으면 그분이 오시는 길이 멀 것임에 틀림없다. 한 걸음이라도 더 가서 그분을 쉬시도록 하기 위해서 나는 앞서 간다’하고 나가는 그 길에 수고가 따르는 것은 당연하다.

일본의 1억 국민을 중심으로 하고 볼 때 어차피 이 탕감길을 넘지 않으면 안 된다. 내 사랑하는 친구여! 이 길을 가지 않으면 안 된다. 장해가 많은 길이니까 그것들을 빨리 극복해 가지 않으면 안 되겠다. 거기에는 희생이 필요한 것이다.

예수님이 참된 희생심, 과거 현재 미래를 통하는 그 희생심과 희망을 가지고 가시지 않았다면 역사는 그 방향에 일치해 가지 않는다. 일치하지 않으면 이러한 세계권을 만들 수가 없다. 생각하지 않는 것은 자기와 관계를 맺을 수가 없다. 책임을 갖지 않고서는 자기 것으로 할 수 없다. 책임을 가지고 싸워서 그 결말을 짓지 않으면 자기 것이 될 수 없다. 예수님은 책임을 가졌다. 그리고 하나님이 요구하시는 일은 무엇이든지 했다. 그 지체가 채찍을 맞고 이마가 찢어졌다.

그러한 중에서도 예수님은 하나님께 말했다.‘하나님이여, 나를 보고 슬퍼하지 마십시오’라고. 이것이 예수님의 심정이었다. 여러분들이라면‘오, 하나님이여 나는 억울합니다. 나를 이토록 억울하게 하는 자를 즉석에서 심판해 주십시오’했겠지요? 예수님은 그렇지 않았다. 그러한 심정으로 가셨으니까, 우리는 그의 동생으로 서서 지금 이 신부의 시대를 통과하지 않으면 안 되겠다. 예수님의 형제가 되지 않으면 형제라고 말할 자격이 없다.

겟세마네와 골고다 산상에는 세계적인 한이 남아 있다. 예수님이‘하나님의 뜻이 아니면, 이 길, 이 잔을 지나가게 하여 주십시오. 그러나 나의 원대로 마시옵고 아버지의 뜻대로 하여 주십시오’라고 기도하신 그 심정을 여러분들도 통과하지 않으면 안 된다.

일본에 대해서 그런 책임을 지고 기도한 일이 있는가? 천사세계는 아담 해와에게 협조하지 않으면 안 된다. 그러니까 아담 해와가 천사장을 동원하여 아담을 중심으로 한 하나님의 생활권에 그 민족권을 이루지 않으면 안 되는 것과 같이, 우리들은 영계를 동원하고 천사세계에 명령해서 협조하도록 하고 ‘하나님의 기쁜 생활권에서 나는 간다. 혹은 생활한다’라고 하는 자가 되지 않으면, 이 환경에 복귀완성의 기반을 만들수 없다. 이것이 원리인 것이다. 예수님은 그 위치를 구하셨다. 그러나 자기의 가정, 자기의 씨족은 구하지 못하셨다. 원래는 세례 요한을 중심으로 해야 했는데 그러지 못한 것이다.

좀더 말하고 싶은 것은 이런 것이 성서에는 없다는 것이다. 알고 싶다면 가르쳐 주겠다. 내가 가르쳐 준 것이 마음에 들지 않으면 무릎을 꿇고 기도해 보라. 기도해 보면 해결할 수 있다. 여러분들은 그러한 관계를 알고 예수님을 찾아가 그의 동생이 되고 형님이 되어야 한다. 필요하면 신부같이도 되어야 한다. 그렇게 되는 데는 쉬려 해도 쉴 수 없는 수고의 노정을 타고 넘어가지 않으면 안 된다. 예수님이 30년 준비시대와 3년 공생애시대를 통하신 것같이 선생님도 지금 그러한 권(圈)을 통과하고 있다. 몇 년부터는 준비시대, 몇 년부터는 실천시대, 그리고 몇 년부터 몇 년까지는 성취시대 등으로 되어 있다. 그러니까 선생님이 말씀한 것은 다 맞는다. 선생님이 살짝살짝 이렇게 움직이면 전세계가 움직인다. 왜 그렇게 되는 가? 그렇게 되지 않으면 안 된다. 선생님이 지금까지 이루어 나온 공(功)이라고 하는 것은 전부다 역사적이고 시대적이고 미래적이다. 그것은 무엇을 중심으로 하였는가? 하나님을 중심으로 하였다.

15-124
기독교의 바른 도리는 부활의 도리
나는 사랑이 그리운 것은 아니다. 여러분이 그리운 것은 아니다. 내가 그리워하는 것은 여러분의 얼굴보다도 여러분이 가는 길이다. 여러분이 가는 길이 그리운 것이다. 하나님이 그리워하셨던 것은 예수님 자체보다 예수님이 가시는 길이었다. 개인이 가는 길, 가정이 가는 길, 씨족이 가는 길, 민족이 가는 길, 세계가 가는 길을 예수님이 가셨다고 하면 어떻게 되었을까?

예수님이 만약 가정기준에서 세계적 승리자가 되었다면 어떠하였을까? 예수님이 혹시 결혼하셨더라면 어떻게 되었을까? 그 아들을 하나님의 자손으로서 인정하였을까? 인정하지 아니 하였을까? 인정했겠지요. 그렇게 되었다면 예수님이 돌아가셨어도 제2의 예수가 있었을 것임에 틀림없다. 그 자손이 민족이 되고 또 그들을 중심으로 인류 전부가 하나님을 중심으로 생활하게 되었다면 어떻게 되었을까? 가인과 아벨이 탕감조건을 세웠더라면 세계는 천국이 되었을 것이다.

만약 유대 민족이 그러한 이상을 알고서 예수님의 심정과 의향을 이해하고 예수님 앞에 가서‘하나님이 바라시는 데 당신은 이렇게 하지 않으면 안 되지 않습니까’라고 말한 소녀가 혹시 있었다면 어떻게 되었을까? 선생님은 그러한 것을 생각한다. 어떻게 되었을까? 이스라엘 민족이 예수님 중심의 세계권을 만들려고 했다면 만들어졌을 것이다. 아담 해와의 기준이 창조본연의 기준이니까 절대적으로 합치하여 하나님과 삼위일체가 되었다면 그렇게 되었을 것이다. 이러한 것을 기독교회에 가서 가르치면 눈을 동그랗게 뜨고 내어쫓을 것이다. 그러나 우리들은 거기까지 심각히 생각하지 않으면 안 된다. 생각해야만 된다. 생각하지 않는 곳에서는 깨달을 수가 없다. 깨닫지 않고 가는 곳에는 하나님의 은혜의 손길이 뻗치지 않는다. 예수님은 그러한 책임을 지고 십자가의 길도 당당히 가는 기세를 가지고 사탄을 극복하여 세계를 재출발시키는 복음의 주인이 되었다.

여러분들에게 이러한 말을 하는 것은 무엇 때문이냐 하면 여러분이 그러한 목적을 거듭 세우고 상속받아 먼저 여러분의 가정에, 여러분의 씨족에, 여러분의 민족에, 여러분의 국가에 넓혀 가지 않으면 안 되기 때문이다.

하나님이 여러분을 필요로 하는 것은 세계를 위해서이고 일본을 위해서이다. 하나님은 선민을 필요로 하신다. 그것은 씨족부터 민족, 국가에로. 그러니까 제2이스라엘 선민권을 복귀하라. 복귀하는 데는 예수님의 본래의 희망을 중심삼고 복귀하지 않으면 안 된다. 왜냐? 예수님이 오셔서 그 사명을 완수하시지 못했기 때문이다. 예수님을 중심으로 한 3대 제물을 역사적 탕감으로 세울 길이 막혀 있었던 것이다.

베드로, 요한, 야고보, 세 사람 가운데 베드로는 신앙의 대표자, 야고보는 희망의 대표자, 요한은 사랑과 심정의 대표자인 것이다. 거기서 만약 요한이 죽는 다면 기독교의 역사가 끊겨 버린다. 살아 그것이 이어졌으니까 유대 민족이 역사적 심정의 기준과 예수님이 기도하신 기준을 지상에 남길 수가 있었다. 그 일은 다 모른다. 베드로는 신앙의 대표자, 야고보는 소망의 대표자, 요한은 사랑이 대표자인 것이다.

이 세 사람의 제자가 겟세마네에서 예수님과 같은 소망, 예수님과 같은 신앙, 예수님과 같은 십자가에 달리실 때도 좌우의 십자가에는 강도가 달려 있었다. 그것이 인간 역사상 가장 비참한 장면이었던 것이다. 최초로 예수님과 같이 낙원에 간 사람은 바른편에 있던 강도였다. 서글픈 이야기이다.

베드로는 예수님의 제1제자의 사명을 해야 했는데, 자기의 위치를 지키지 못했다. 그 시대에 있어서의 인류의 대표로서 하나님 앞에 3대 제물로 서야 할 세 제자가 자기들 마음대로 가 버렸던 것이다. 그래서 예수님은 죽어서 다시 그들을 인도하고 40일 부활기간을 통하여 승리권(勝利圈)을 만들었다. 기독교는 십자가를 통한 것이 아니고 부활을 통한 것이다. 십자가는 슬픔의 조건이다. 만약 부활이 없었더라면 기독교의 시작은 있을 수 없었다.

선생님은 세계를 일주할 때에 많은 십자가를 보면서 내 사명은 그 모든 십자가를 없애 버리는 것이라고 하는 것을 재확인하였다. 자식들을 통하여서라도 없애 버릴 것이다. 기독교는 십자가의 도리가 아니고 부활의 도리인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예수님은 제물을 바치지 않고 미래의 소망의 조건으로서 겟세마네를 넘고 갈보리를 넘어가셨던 것이다.

15-126
지상천국을 건설하려면
그러면 미래의 제물은 누가 세워야 하는가? 재림시기에 있어서의 제3이스라엘이 세워야 한다. 제1아담의 잘못을 바로잡고 또 그것을 책임지지 않으면 안 된다. 제3이스라엘은 제1, 제2이스라엘의 실패한 기준을, 그리고 예수님 당시에 완성했어야 할 조건을 현세에 나 자신을 중심으로 완성하여 3대 제물을 결정하고 사탄과 대결하여 승리의 기반을 만들지 않으면 선한 부모의 입장에 설 수 없다. 이것은 통일교회에서 가르치는 원리이다.

예수님은 세 사람의 제자를 잃었기 때문에 돌아가시지 않으면 안 되었다. 한편 만약 세 제자가 예수와 함께 죽었더라면 하나님은 예수님을 부활시킬 때에 세 제자까지 부활시키셨을 것이다. 그렇게 되면 기독교는 고난의 길을 가지 않아도 되었을 것이다.

이러한 역사적인 과거를 뒤돌아보면, 이제 여러분은 현세에 있어서 제3이스라엘의 사정을 인계받아 선두에 서서 대승리를 해야 되겠다. 여러분이 세계에 대해서 번민하시는 하나님의 마음을 위로하고 여러분의 주위, 여러분의 국가를 정비하여 하나님 대신 명령할 수 있는 기준을 현재에 세우면 여러분이 서 있는 환경에 지상천국을 만들 수가 있다. 그것이 예수님의 소원이고 하나님의 소원이며 선생님의 소원이다.

선생님은 그 기준에서 한 생애를 싸워 나간다. 그 싸움에서 쉬면 견디지 못한다. 매일 매일 싸움은 치열하고 맹렬하게 되어 간다. 세계적 발전에 따라 원자폭탄이 생겨났다. 일발을 쏘면 끝장이 나는 싸움을 전개하지 않으면 안 된다. 우리들은 영적인 싸움을 중심으로 사상권내(思想圈內)에 하나의 기준을 만들고 세계에 외치지 않으면 안 된다. 부디 일본 사람으로서 일본을 중심으로 세계를 움직이는 승리적 사명을 다할 수 있기를 간절히 바라는 바이다.

15-127
기 도
아버님이여, 저희들은 슬프게도 탕감의 원리를 익히고 있습니다. 괴로울 때에는 눈물을 흘릴 때도 있습니다만, 그러나 일정한 탕감의 기준을 넘지 않으면 아버님께서 만족할 수 있는 기준을 세우지 못하고 사탄을 굴복시켜 승리의 한계를 결정지을 수 없다고 하는 것을 알기 때문에 저희 선조들이 범한 죄에 대해서 면목없게 생각하고 있습니다.

수많은 선조들이 이 길을 더듬어 왔습니다만, 아버님의 원하심과 아버님의 목적을 알지 못하고 사탄의 제물이 된 것을 생각합니다. 현세에 있어서 저희들은 선조들의 전철을 밟지 않는 입장에 세워 주시기를 간절히 기도하는 바입니다.

아버님이여, 일본에 있는 형제들을 불쌍히 보시옵소서. 지금까지 동양에 있어서 이 국가를 중심으로 한 목적, 대동아공영권(大東亞共榮圈)을 목표로 움직인 일이 있는 이 민족입니다. 그것은 아버님에 의한 것이 아니고 사탄에 의한 것으로서 역사에 하나의 오점을 남기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지금 새로운 일본의 길을 열 수 있고 장래 세계에 공헌할 수 있는 천운을 저희에게 주시어 고마운 길을 받은 모든 형제들이 감사하고 있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아무쪼록 그들의 마음이 날로 성장하여 환경을 움직이고, 그 실체가 아버님에 의한 존재기준을 결정하여 모든 것을 움직일 수 있는 동기가 되는 입장에 세워 주시기를 마음속으로 간절히 바라마지 않는 바이옵니다.

지금 말씀을 전한 우주적인 예수님의 사명이 이 역사적 과정을 통과하여, 현세에 있어서는 제2, 제3이스라엘 민족을 첨단으로 하고 저희들에게 지워지고 있는 것을 생각할 때에, 저희들은 약한 자이기에 손끝이 떨리고 전신이 떨리옵니다. 죄많은 과거를 돌아 보면, 도저히 아버님 앞에 설 수가 없는 저희들임에도 불구하고, 현세에 있어서 더렵혀진 저희들을 품에 품으시고서 중대한 사명을 다시 주시지 않으면 안 되는 아버님이신 것을 생각 할 때에, 저희가 가는 길은 여하히 무겁고 여하히 서두르지 않으면 안 된다는 것을 생각하게 됩니다.

나이 많은 사람은 나날의 생활을 아깝게 여기고 아버님께 접근하기를 바라면서 노력하지 않으면 안 된다는 것을 압니다. 젊은 사람들은 세계를 구하기 위하여 열심히 싸우지 않으면 안 되겠습니다. 또 자기들에게 대사명이 있다는 것을 잊지 말고 모든 것을 아버님께 의지하고 아버님의 목적을 바라고 용기를 내어 아버님의 목적권(目的圈)에 들어가서 아버님을 모실 수 있는 승리자가 될 수 있도록, 그리고 하늘에 영접되고, 땅에 영접되는 하늘의 왕자 왕녀로서, 혹은 중심으로서 설 수 있도록 지켜 주시고, 승리의 현현을 점점 넓혀 주실 것을 간절히 바랍니다.

예수님의 사명을 인계받아 아버님께 감사하는 생활에 있어서, 아버님을 모시고 그 생활의 가치를 무한의 가치기준으로 세워 감사할 수 있는 자가 되도록 은혜 베풀어 주시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오늘의 모든 것을 인도하여 주신 것을 아버님께 감사드리고, 이 모든 것을 주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리옵니다. 아멘.